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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8.29 동화 넘어 인문학 - 조정현 을유문화사 2017 03100
  2. 2014.01.24 인문 내공 - 박민영 웅진지식하우스 2012 03000
  3. 2014.01.12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Part 2) - 강신주 지승호 시대의창 2013 03100
  4. 2014.01.11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Part 1) - 강신주 지승호 시대의창 2013 03100
  5. 2014.01.05 강신주의 다상담2 (일, 정치, 쫄지마) - 강신주 동녘 2013 04100
  6. 2014.01.02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여덟 단어 - 박웅현 북하우스 2013 03810
  7. 2012.04.30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 파울로 코엘료 문학동네 2001(1998) 03890
  8. 2012.04.29 인문학 콘서트1 - 김경동 외
  9. 2012.04.28 언어의 달인, 호모 로퀜스 - 윤세진
  10. 2012.04.26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11. 2012.04.19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 고미숙
  12. 2012.04.18 놀이의 달인 호모 루덴스 - 한경애
  13. 2012.04.18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고미숙
  14. 2012.04.15 인문학 두드림 콘서트 - 유재원
  15. 2012.04.08 지식의 단련법 - 다치바나 다카시
  16. 2012.04.06 대통령의 독서법 - 최진
  17. 2012.03.23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1 - 정진홍
  18. 2012.03.22 책 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 - 이권우
  19. 2012.03.15 몰입, Flow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 - 미하이 칙센트 미하이
  20. 2012.03.10 생산적 책읽기 두번째 이야기 - 안상헌
  21. 2012.03.09 생산적 책읽기 50 - 안상헌
  22. 2011.11.10 철학, 삶을 만나다 - 강신주 이학사 2006 03100
  23. 2011.10.19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 배병삼풀어씀 사계절 2005 43150
  24. 2011.09.21 리딩으로 리드하라 - 이지성 문학동네 2010 03320 1
  25. 2011.05.26 희망, 인문학에게 묻다 - 신동기 엘도라도 2009 03000
  26. 2011.04.19 길 위의 인문학 - 구효서외 경향미디어 2011 13840
  27. 2011.01.19 여행의 숲을 여행하다 - 김재기 향연 2010 03980
  28. 2010.12.30 인문학 콘서트 - 김경동외 이숲 2010 03040
  29. 2010.12.15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 고미숙 그린비 2008 04800
  30. 2010.12.14 놀이의 달인, 호모루덴스 - 한경애 그린비 2007 44300

당나귀를 팔아야 하는 아버지와 아들을 손가락질하게 만든 것도 이런 조작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수의 말을 두려워하고 도 그 말에 휘둘리기도 합니다. 때론 실수를 하고 그러면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기도 하죠. 그런데 우리는 처음부터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한 비웃음을 받고 싶지 않아서겠죠 우유부단하면 안 된다거나 주변 살마들의 말에 휘둘리면 안 된다또는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입니다.

두렵지만 무언가를 시도하고, 여러 번 실패를 겪지만 그 속에서 다시 일어나 성취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성공을 권하는 우리 사회는 실패의 시간을 허락해 주지 않죠. ‘효율성이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패하고 고민하는 시간은 비효율적일 뿐입니다. 당나귀를 팔려고 나갔으면, 빠른 시간 안에 시장에 도착해서 좋은 값을 받고 팔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최대한 빨리 돌아온다면, 그만큼 시간을 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간만큼 밭에라도 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리고 무언가 시도하는 것 자체가 성공의 이데올리기 안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늘 효율적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남들이 말하는 성공을 거둔 이들이 성공을 만끽했다는 이야기도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맛을 안다는 말처럼 무언가를 누리는 것도 겪어봐야 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까 우리에게 강요된 성공의 이미지만 좇다 보면 성공은 할지 몰라도 그것을 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돈은 많지만 돈 쓰는 법을 모르고, 집은 좋지만 과시와 투자 외에는 집의 효용성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이룬 성공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죠.

이솝은 우리에게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라고 전합니다. 여전히 유효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적당히 무시할 줄도 알아야 우리 자아가 온전할 테니까요. 하지만 역사를 보면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성공(?)한 사람만큼 무서운 사람도 없습니다. 고대로부터 폭군, 독재자, 살인자는 모두 단호하고 신속하게 목적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자신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다른 사람의 말에는 귀를 닫았습니다. 그들이 당나귀를 파는 아버지와 아들처럼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고 다른 방법을 고안했다면, 역사 속의 비극적인 사건도 많이 주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30-31

 

규율 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 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 - <피로사회> 한병철 34

 

우리는 학창 시절 내내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우리 교육은 규율에 맞춰 살며 질서를 지키는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무조건 복종하는 인간을 만들어 내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얼마전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보았습니다. 서울대에서 4.0이상의 학점을 받은 학생들의 공부 비법을 알아 본 결과, 대부분이 교수의 말을 토씨 하나까지 틀리지 않게 필기한다고요. 충격이었습니다. 우리의 교육 과정은 마치 단거리 달리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입 시험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질주하게 만들죠. 그래서 질문이 많고 궁금한 것이 많은 학생들이 고득점을 얻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34-35

 

모든 것을 긍정하고, 모든 것에 정력적이어야 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차 무기력한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무기력해진 인간은 분노하는 법도 잊습니다. 저자는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인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 간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자는 사색을 제안합니다. 사색적 삶이란 생각하는 삶을 말합니다. 36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 부정적 힘 없이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처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어떤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무언가를 생각할 힘밖에 없다면 사유는 일련의 무한한 대상들 속으로 흩어질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Nachdenken)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 <피로사회> 한병철 36-37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어른들 중에는 아이들이 규칙을 어기거나 어떤 일에 혼란스러워할 때도 아이의 의견만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사회에서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육은 무엇이 되고 안 되는지를 배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또한 아이들은 절망에 대한 것도 배웁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에 속수무책일 째, 위로받고 힘내는 법도 배웁니다. 어른이, 선생이 옆에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두 가지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격렬하게 우는 아이를 잠시 내버려 둘 줄 알며, 기꺼이 소년의 짝이 되려는 사람이 바로 좋은 선생입니다. 49

 

우리들의 경제 구조는 조직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대립없이 함께 일하며 점점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 기호가 획일화하고, 쉽게 동화하고, 수요를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대중들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제도는 인간이 자유롭고 독립적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남들이 바라는 모든 것들을 다 하는 사람들과, 사회라는 기계에 아무런 마찰도 없이 조립되고 강제나 통솔자가 없어도 통솔되고, 맹목적으로 휘둘려지는 인간들을 필요로 한다. 이런 제도는 사람을 순하게만드는 제도이다.’ - <서머힐> 알렉산더 닐 51-52

 

독일의 철학자 훔볼트(Karl Wilhelm Von Humboldt)모든 인간의 목표는 개인의 능력을 가장 고귀하고 조화롭게 발전시켜 모순이 없고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표면적으로 학교가 내세우는 정신과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개인의 능력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지점에서 말이죠. 훔볼트는 개인은 잠재력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전제하에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가 경험한 학교들을 돌이켜 보면, 대부분 개인의 능력을 무시한 교육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교의 커리큘럼은 아이들의 능력을 발견하는 데 무관심하고, 수많은 시험은 잠재력을 들여다볼 만한 시간을 빼앗죠. 개인의 잠재력과는 상관없이 학교, 혹은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 학교의 목표인 것입니다. 53

 

금기(禁忌 금할금 꺼릴기)’란 어기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호기심은 그 어떤 두려움도 이겨 내기 때문이죠. 59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은 항상 환기가 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음식과 공기와 물이 몸 안과 바깥을 드나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말도 내 몸의 안과 밖으로 들고 나야 합니다. ..

우리가 그토록 친구를 필요로 하고, 어릴 적 친구를 가장 편하게 대하는 이유도 자신의 치부까지 다 본 사이라서 어떤 이야기를 하든, 어떤 상황에 빠져 있든 그대로 봐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존심이 필요 없는 사이가 가장 이상적인 대나무 숲인 것입니다. 64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우리가 우리 안에서 무서운 임금님 노릇을 하는 자존심을 꺾고 자신의 구질구질한 개인사를 남에게 털어놓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화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누군가의 대나무 숲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이유입니다. 65

 

세상을 살다 보면, 너무 아픈 데도 침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대나무 숲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친구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좋은 친구가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가슴에 담아 두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말하면 그도 속상할 테니, 아예 말하지 않아요.” 66

 

인디언의 어느 부족은 친구를 내 짐을 어깨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우리가 내 인생의 짐을 상대의 어깨에 부려 주기도 하고, 내가 견딜 만할 때는 상대의 아픔을 지는 그런 사람이 되면 어떨까요? 지나친 도시화로 대나무 숲을 보기 힘든 이 시대에 말입니다. 66-67

 

위대한 도가 없어지자 인()과 의()가 생겨났고,

(교묘한) 지혜가 나타나자 큰 거짓이 생겨났다.

육친[六親, 아버지 자식 형 동생 남편 아내, 곧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자 효성과 자애가 생겨났고,

국가가 혼란해지자 충신이 나왔다.’ - <노자> 노자 69

 

노자는 자연스러움이 사라진 상태에서 도덕과 윤리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진실을 덮기 위해서 거짓이 거짓을 낳는 것과 비슷한 상태라고도 할 수 있지요. 70

 

어린이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는 것은 반대로 그만큼 모르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어린이만큼 사람 그 자체, 세계 그 자체에 빠져드는 존재도 드물 것입니다. 90

 

아무리 설명한다 해도 진심이 아니면 머리에 남지 않고, 겪지 않으면 가슴에 담기지 않습니다. 97

 

인어 공주는 바다 마녀를 찾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인간 다리와 교환합니다. 어릴 적에는 인어 공주의 용기만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안타깝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인어 공주가 이루려는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고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 교환은 매우 불공정해 보입니다. 이제까지 이 교환에 대해 반발을 느꼈다는 독자가 없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요. 동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어 공주를 살리려는 언니들의 교환 조건을 보죠. 인어 공주를 다시 바다로 데려오기 위해, 죽음의 위기에 빠진 막내의 목숨 값으로 언니들이 마녀에게 준 것은 머리카락뿐입니다. 공주의 머리카락이 제아무리 탐스럽다 해도 목소리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마녀가 내준 약과 칼은 성격이 다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녀의 약과 칼, 둘다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하게 해 주죠.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자가 막내 인어 공주라는 것 또한 같습니다. 인어 공주는 육지로 가기 위해 마지막 순간 모래사장에서 스스로 약을 먹고, 인어 공주로서의 삶을 끊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다로 가기 위해 왕자를 칼로 찔러 왕자를 사랑했던 시절을 끊어야 했죠. 그러므로 마녀가 내준 것은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녀는 같은 성질의 것에 다른 값을 받았습니다. 108-109

 

흔한 사랑의 경구 중에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말이 있죠. 하지만 프롬의 말대로 사랑도 기술처럼 갈고 닦아야 하는 능력이라면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수동적인 자세에서 배울 수 있는 기술은 없으니까요. , 내가 하지 않는 사랑이란 불가능합니다. 127

 

사랑의 근본적인 모순은 하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서로 다른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사랑만큼 어려운 문제도 없습니다. 128

 

고독한 존재로서 우리는 누구나 사랑을 갈망합니다. 하지만 교환 가치가 당연해진 세상에서 사랑 또한 본질이 훼손되었습니다. 물질적이고 획일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랑 또한 교환 가치가 있는 보시 대상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교환 가치를 넘어선 사랑을 꿈꿉니다.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상대가 나를 예쁘고 잘생겼을 때만 사랑한다고 느낄때, 나의 돈과 능력 때문에 나를 소중히 여긴다는 생각이 들때 쓸쓸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아이를 낳고 키우기 때문에, 매월 일정액을 벌어 오기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는 부부 사이에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요? 조건을 넘어 선 사랑, 주고받음의 대차대조표가 없는 사랑이 이상적이라면, 우리의 본능 자체를 이상적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본주의의 편리성에 길들여진 우리는 사랑 또한 교환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릴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을 버리면 사랑을 위해 우리는 진정한 우리 자신과 대면해야 할 테니까요. 에리히 프롬은 자본주의 사회가 사랑에 대한 높은 이상을 훼손시키며 우리를 하찮은 존재로, 사랑을 모르는 존재로 만든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단언합니다. 그러한 세상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요.

현존하는 체계 아래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예외다.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사랑은 필연적으로 주변적인 현상이다. 많은 직업들이 사랑하는 태도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생산 지향적이며, 상품에 탐욕스러운 사회의 정신은 오직 순응하지 않는 자만이 그에 맞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 해결책으로서 사랑에 진지하게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사랑이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주변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 되려면 우리의 사회 구조 내에 중요하도고 급진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129-131

 

엄마란 어떤 사람 일까요...?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하나 없다는데, 엄마에 대해서는 고정된 이미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여자가 100명이라면 엄마의 이미지도 100개여야 할 텐데, 우리는 엄마라는 단어에 헌신적인, 자애로운, 희생적인등의 단어를 갖다 붙입니다. 세상 모든 자식이 똑같은 덕목을 가지지 못했듯, 엄마의 이미지도 획일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엄마와 자식이 사회에서 만든 이상적인 엄마 상이라는 그림에 갇혀 불화를 겪고 상처를 받죠. 140

 

어른의 마음속에는 이상적인 어른의 모습이 있죠. 143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도 부모님께서 어떻게 성공할 거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서, 아무 말 못하고 있어요.”

어느 날, 열일곱 살 친구에게 이런 고민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쓴 청소년 소설의 독자로 만났던 그 친구는 저보다 훨씬 어른스러웠습니다. 모든 면에서 주체적으로 고민하는 모습이 제 열일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죠. 과연 그 친구보다 제가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지 늘 헤살렸지만, 그래도 저를 필요로 하면 그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곤 했습니다.

?”

제가 되물었습니다.

고민했는데, 솔직히 모르겠어요. 어른들은 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고 하잔항요. 학교는 아닌 것 같은데, 다른 방법이 뭐냐고 물으면 말이 막히는 거예요.”

저도 낯설지 않은 화두였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방법을 벗어날 때, 누구나 같은 고민을 하게 되겠죠. 저는 그동안 저를 괴롭히고 헤매게 만든 질문, 그러나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을 그 친구에게 던졌습니다.

왜 성공을 해야 하는데?”

성공해야 행복하잖아요.”

친구는 제가 생각했던 과정을 그대로 밟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게 했듯이 다음 과정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행복이 뭔데?”

?”

구체적으로 말이야. 네가 생각하는 행복의 풍경은 어떤 거야? 괜찮은 차? 서울에 있는 고급 아파트?”

“..... 비슷한 거 아니에요?”

가진 것의 합이 행복일까? 네 행복은 그런 거니?”

열일곱 살 친구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마치 저의 옛 모습을 보는 듯했죠. ‘행복을입에 달고 사는 현대인이지만, 사실 행복의 구체적인 풍경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저는 행복의 풍경을 그리려 몇 번을 고민한 끝에 우리가 세뇌된 행복에 길들여져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서부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에 이르기까지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이 곧 행복이라고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유토피아가 우리의 행복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물질적 풍요가 곧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다고 해서 바로 자신만의 행복을 그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는 행복의 풍경이 우리 자신이 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64-166

 

어른 보다 아이가 바이러스에 치명적인 것처럼, 이 사회의 병든 이데올로기에 가장 취약한 것도 어린아이입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물질적인 것밖에 꿈꾸지 못하는 아이들, 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이기도 합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행복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자가 되면 행복해질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 그 이미지를 만든 것은 우리 자신일까요? 혹시 누군가에 이해 감염된 것을 행복이라 믿는 것은 아닐까요?

세라는 행복해졌다고 작가는 썼습니다. 금광을 소유한 아버지 친구가 세라의 법적 후견인이 되었습니다. 세라는 아버지의 몫 외에도 미혼인 아버지 친구의 재산까지 상속받게 도리 것입니다.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렸던 세라는 친구들과 함게 행복한 생활을 할 뿐 아니라,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며 봉사 활동에도 앞장섭니다. 부유하고 윤택해진 세라, 하지만 세라는 분명히 행복해졌을까요?

세라의 환경에서 변한 것은 경제 상황 뿐입니다. 세라는 여전히 고아이고, 후견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일이 세라 앞에 벌어질 것입니다. 작가는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자마자 세라의 행복을 단언했지만, 세라는 왠지 동의할 것 같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만이 그녀의 행복을 결정한다면, 그녀는 앞으로 돈만 아는 숙녀로 성장하겠죠. 하지만 기품 잇는 그녀는 진지하게 스스로의 미래를, 행복의 풍경을 그려냈을 것만 같습니다. 결코행복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긴 시간 동안 말이죠.(<소공녀> 프랜시스 버넷) 167-168

 

우리는 늘 예쁜 것이 최고의 가치라는 말을 농담(?)처럼 듣고 삽닌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외모 지상 이데올로기에 허우적거리고 있죠. 모델처럼 늘씬하지 않아서, 복근이 없어서, 키가 작아서 ...... 수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외모의 조건에 자신이 세운 기준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외모지상주의의 포로가 되었을까요? 새 왕비에게 거울이 있었다면, 도대체 우리에게는 무엇이 있길래 그럴까요? 우리에게도 마법의 거울이 있습니다. 바로 질문 대신 리모컨으로 작동되는 거울, 피로의 푼다며, 심심하다고 보는 텔레비전. 그것이 바로 오늘날 마법의 거울입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떼려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는 텔레비전은 자본주의에서 선호하는 이미지, 즉 팔리기 좋은 이미지를 강조합니다. 그 이미지들은 또 텔레비전에 예쁘게 나오죠. 소비자인 남성, 혹은 여성이 좋아하는 이미지입니다. 자신의 만족에 의해 설정된 외모 기준이 아니라 텔레비전, 즉 자본주의 사회가 선호하는 외모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메시지를 담은 텔레비전을 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틀어 봅니다. 그리고 내 것이 아닌, 내것이어도 나의 행복은 될 수 없는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마법의 거울은 백설 공주와 새 왕비에게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텔레비전을 꺼야 하는 이유입니다. 거울의 목소리는 신뢰를 가장한 억압이므로, 텔레비전을 끄면 우리는 좀 더 자신의 진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내가 진짜 원하는 삶, 내게 잘 어울리는 이미지를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182-183

 

스펙터클(spectacle)이란 간단히 구경거리라 번역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눈을 뗄 수 없고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의 현란한 구경거리에 스펙터클이란 말이 붙죠.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는 <뽀로로>나 어른들의 저녁 시간을 잡아먹는 드라마는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현대 사회의 스펙터클입니다. 하지만 텔레비전만이 스펙터클은 아닙니다. 1년을 분기별로 나누게 하는 스포츠, 이제는 텔레비전 뉴스에도 나오는 한류 스타들의 공연, 떠들썩한 세몰이로 정치 바람을 일으키려 앴는 전당 대회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엄청나게 역동적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쇼들을 모두 스펙터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펙터클의 세꼐는 역동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현대 사회를 사는 모든 사람은 스펙터클의 세계에서 능동적으로 뛰어들어 사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즐기는 우리도 과연능동적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능동적인 인간은 보는인간이 아니라 행동하는인간입니다. 184-185

 

능동적으로 사는 인간은 스스로 그것에 뛰어들어 활동하는 인간입니다. 자신의 삶에 완벽히 뛰어들면 자신의 삶이 가장 흥미진진한 쇼가 되죠. 굳이 스펙터클한 볼거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185

 

일반적인 역사적 삶이 지니고 있는 결함의 다른 측면은 개인적 삶이 아직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스펙타클적 극화(劇化 심할극 될화) 속에 밀려드는 가장된 사건들은 이 사건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는 사건들이 아니다. (...) 분리된 일상생활에서의 개인적 경험은 언어나 개념이 부재한 채로, 이를 테면 어느 곳에서도 기록되지 않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비판적 접근도 없는 채로 존속한다. 개인적 경험은 고통되지 않는다. 개인적 경험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없는 스펙타클적인 가장된 기억을 위해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망각된다.’ - <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

흔히 셀레브리티(celebity)라 말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학자, 예술인, 정치인만이 아니라 대중 매체가 일자리인 셀레브리티 상당수가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186

 

셀레브리티는 대부분 상류층입니다. 그들 자신과 자녀는 텔레비전을 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즐길 거리도 많습니다. 186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인간은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드라마속 재벌남자와 평범한 여자의 꿈 같은 로맨스가 끝나면, 울는 현실 속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텔레비전의 세계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역동적이면 역동적일수록 우리네 삶이 더욱 남루해보이죠. 187

 

존엄성을 지킨다는 말은 거창해 보이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지킨다는 말입니다 육체는 '자기 자신'의 첫 번째이자 가장 기초적인 요소죠. 자신의 몸을 존중하고, 키우고, 단련하는 법이야말로 가장 어린 시절에 배워야 하는 기초가 아닐까요? 한 끼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그 시간을 충실히 누리는 법을 배우는 것도 기나긴 인생을 위한 수업이 아닐까요?

우리 사회는 어릴 적부터 남의 기준에 맞춰 살도록 강요합니다. 공부라는 타인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라면 나 자신 '따위'는 무시해도 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주입합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누구나 알게 됩니다. 정말 중요한 결정 앞에서 타인의 기준이나 사례는 아무 쓸모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지요.

자신을 가벼이 여기는 삶은 자신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삶입니다. 그 시간이 오래될수록 우리는 인생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헤매게 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깊어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니 어떤 부분이 약한지 모릅니다. 작은 펀치 하나에 온 존재가 휘청이고 나면 이미 때는 늦었죠. 이렇게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닥쳐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때일수록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릴적에 배워야 했던 끼니의 중요함, 체력 키우기 등을 이제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의 손과 발을, 눈과 코와 입술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머리에 새기며 자신과 사귀어야 합니다. 그렇기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신을 인정해 가며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하나하나 받아들여야 합니다. 돌아가는 길이라 더디고 어렵지만, 한 가지 위로할 만한 것은 인간은 생각보다 견고하다는 점입니다. 스스로 빗장을 열러 주지 않는 한, 우리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29-230

 

시스템은 다수의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신이나 왕권 같은 불가침한 영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시스템에 대하여 늘 고민하는데, 현대 철학자 중에 이를 깊이 고민한 학자가 바로 존 롤즈(john Rawls. 1921~2002, 미국의 철학자로, '정의'라는 한 주제에 대해 깊이 연구한 학자로 정평이 나 있다)입니다.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정연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면 개선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 (...) 정의는 타인들이 갖게 될 보다 큰 선을 위하여 소수의 자유를 뺏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본다. 다수가 누릴 보다 큰 이득을 위해서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해도 좋다는 것을 정의는 용납할 수 없다.' - <정의론> 존 롤즈

우리나라에서는 '국가를 위하여', '경제 발전을 위하여'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 많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침묵을 강요한 정부가 그랬고, 노동자에게 희생을 요구한 재계(財界)가 그랬죠. 242


정의로운 사회가 행복한 사회라는 말에 동의를 한다면, .. 한 가지 실험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인을 찾기 위한 실험이 아니라 우리의 시스템을 정의롭게 만들기 위한 실험을 말이죠.

존 롤즈는 이를 위한 사고 실험을 제안했습니다. 통칭 '무지의 베일'이라 불리는 실험이죠. 내가 남한에 태어날지 북한에 태어날지 모르는 상태, 나의 집이 부자일지 가난할지 모르는 상태, 내가 이성애자가 될지 동성애자가 될지 모르는 상태, 내가 건강할지 아닐지 모르는 상태........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의 베일 속의 인간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최대한 공정한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것뿐입니다. ..

내가 생각하는 평등을 다른 사람이 불평등이라 말할 때, 다른 사람의 평등이 내게는 너무나 불평등하게 느껴질 때, 잠시 무지의 베일을 꺼내 보는 것은 어떨까요? 243-244

 

가만히 돌이켜 보니 우리는 소시민에게 감정이입을 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 적 읽은 동화나 어른이 되어 즐기는 영화의 주인공들 대부분은 특별한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즐기기 위한 것입니다. 독서나 영화 관람이 끝난후에 일상생활에서 씁쓸함을 느낀다면, 우리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겠죠. 저는 그것이 일상적 감정이입의 문제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즐길 때나 진행되어야 할 감정이입이 우리의 일상생활까지 지배하고 있다고 말이죠.

평범한 우리가 특별한 사람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특별한 사람의 성취를 목표로 삼다 보니, 작은 성취 같은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커다란 목표를 바라보니 자신은 늘 제자리, 실패자인 것만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내면은 스스로 관객이 되어 평범한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 합니다.

이 사회는 늘 성공하라고 세뇌를 하죠. 성공해야 행복해진다는 이데올로기가 내면 깊이까지 침투해 있습니다. 백인백색(百人百色)이라고 하는데, 이 사회에서는 성공의 모습까지도 기성품처럼 정해져 있습니다. 도심의 평수 넓은 아파트, 멋진 자동차, 명품 옷과 액세서리 등등. 이런 것들을 갖춘다고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성공으로 가는 궤도에서 이탈하는 것은 불안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을 위하여 맹목적으로 달려갑니다. 성공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말을 되뇌이면서요. 하지만 성고이란 자기 충족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기 충족할 수 있을 것 같거나 충족해야만 할 수준의 무언가를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입니다. 임금에게 가장 멋진 옷이 성공의 척도였듯이 우리도 결코 도달하지 못할 목표를 위해 미친듯 달려갑니다. 자기계발이란 말이 고전적 단어가 되고, 이미지 메이킹이란 말도 시들해지니 이제 셀프 브랜딩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충족하는 삶은 임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성공한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퇴화죠.

"나는 이 정도 디자인과 옷감이면 만족해" 혹은 "나는 여기까지만 성공할래"라고 말하는 순간, 비웃음을 당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사회에서 멈추는 순간 허물어질 것이라는 불안도 만연하죠. 사실 우리 사회에서 소시민의 충족한 삶은 살짝 밀기만해도 무너질 만큼 허약합니다. 모두가 그것을 알기에 마족하고 싶어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소시민이면서도, 평생 소시민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서도, 마치 임금이라도 된 양 임금과 같은 각오와 부담감을 안고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어른으로 성장하는 도안 소시민으로 살아도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는 사회, 임금이 되어 본 적도 없는데 벌거벗었다고 손가락질하는 사회, 지금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것을 지키기 위해 더 무엇을 노력해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249-251

 

조선의 세자들은 지독한 조기 영재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보통 예닐곱 살 정도에 시작된 교육은 그 양과 질에서 조선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공부에 야간 자율학습과 월말 평가는 물론이고, 수업 시작 전에는 여러 명의 스승들 앞에서 전날 배운 것을 암송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왕이 그 자리에 직접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스무 명이 넘는 학자들이 어린 세자 한 명을 가르치기 위해 24시간 준비 상태였는데, 그들 모두 내노라하는 공부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매서운 눈으로 감시하며 공부를 시켰으니, 조선의 세자도 웬만해선 버티기 힘든 자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힘든 공부를 사도 세자는 네 살에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넘치는 사랑 덕분에 생후 48개월 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쉴 시간도 없이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어린 사도 세자는 꽤 똘똘한 아이여서 시키는 대로 공부를 곧잘 했다고 합니다. 그렇잖아도 귀여운 아들이 조선 최고 지식인들에게 뛰어나다는 평까지 들으니, 영조의 기대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공부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수업 시간도 늘어났습니다. 한창 뛰어놀아야 할 나이의 건강한 사내아이가 재미있어 할 리가 없겠죠. 그러나 영조는 놀고 싶어 하는 세자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커녕 조금이라도 꾀를 부릴라치면 버럭 화를 냈습니다. 사도 세자의 아내인 혜경궁 홍 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 세자는 영조에 대한 공황장애를 겪었던 것 같습니다. 266-267

 

어른이 아이에게 요구하는 '착함'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조용히 하라고 하면 조용히 하고, 단정하게 입으라고 하면 그리 하고, 자야할 시간에 자는 아이, 한마디로 어른 손을 덜 타는 아이입니다.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도 그럴까요? 갓난 아이는 수동적입니다. 자라나는 아이만이 자신의 생각과 그것을 관철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어른들의 위협으로 그 의지가 꺾이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면, 아이는 개성은 커녕 자신에 대한 주체적 인식조차 성장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합니다. 아이의 말에 윽박지르는 일은 비교육적이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죠. 그래서 되레 식당 같은 공공 장소에서 아이의 제멋대로 행동을 제지하지 않아 사회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286

 

우리 사회의 부모들은 성가시게 하는 질문이나 고집은 수긍해도,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겠다는 말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공부는 이 사회의 인력으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요. ..

어른이 되어 사회가 속삭인 약속이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에는 이미 레일 밖으로 나오기엔 늦었습니다. 부모의 손을 타지 않는 아이, 어른의 말에 순종적인 학생, 사회 질서에 반기를 들 줄 모르는 국민...... 사회가 깔아놓은 레일 위에서 만들어지는 인간 군상입니다. 286-287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우리는 어떠한 외적 권위에도 종속되지 않고, 우리의 사상이나 감정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자유야말로 거의 자동적으로 우리의 개체성을 보장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는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가질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또한 외적 권위로부터의 자유는 내부의 심리적 상황이 우리가 자기의 개체성을 확립할 수 있게 될 때에야 비로소 항구적인 성과가 된다.' 289

 

이 책은 자유롭다는 사회에서 우리가 왜 이렇게 부자유스럽게 살아가는지, 답답하고 절망적인 우리의 병증을 시원하게 아려 줍니다. 프롬은 말합니다. 우리는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자유란 그것을 향유할 우리가 건강해야만, '자신의 생각과 개체성'이 확고 해야만 누릴 수 있다고요.

에리히 프롬은 우리가 왕이나 교회의 권위로부터 자유를 쟁취했다고 믿지만, 실은 경제적으로 자본의 노예가 됨으로써 고독이나 불안을 경험하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도피를 시도한다고 말합니다. 아니, 처음에는 시도였을지 모르지만 자본의 지배가 가속되자 '자유롭다고 믿는 자동인형'을 만드는 시스템은 공고화되었지요. 290

 

'...... 개인이 자기 자신이 됨을 그치고 변화하는 것이다. , 그는 일종의 문화적인 양식에 의해 부여되는 성격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전적으로 동일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자신에게 기대하는 그런 상태로 변화된다. 그와 함께 ''와 외부 세계와의 갈등은 사라지고, 고독과 무력함을 두려워하는 의식도 사라진다. (...) 개인적인 자아를 버리고 자동 인형이 되어 주위 수백만의 다른 자동인형과 동일해진 인간은 이미 고독이나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대신 그가 지불한 대가는 혹독하게 비싼 것으로, 그것은 바로 자아의 상실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회가 자동인형이 된 인간으로 가득해진다고 합니다. 자아를 상실한 인간은 인간적인 무력감과 절망에 휩싸입니다. 자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지고 인생이 무의미해질 때, 인간은 자신을 찾기 위해 싸우는 대신 인생의 의미를 대신 찾아줄 무언가를 갈망하게 됩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사회가 바로 파시즘의 온상이라고 지적합니다.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서서 개인의 개성을 증오하는 그 이데올로기 말입니다.

민주주의라면 인간에 대하여 모든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인생을 스스로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백인백색, 모든 주체적인 인간은 각각의 개성을 뽐내겠지요. 그것은 또한 각 개인의 권리이며 수많은 피를 흘리며 되찾아 온 권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든 권력이 그러하듯 그것을 빼앗으려는 시도는 집요하기만 합니다. 착한 아이, 양순한 시민으로만 살아가서는, 절대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없죠. 가만히 있으라는 기득권의 지시에 반항하지 않고서는 지킬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평생 투쟁심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동인형이 되어 파시즘의 깃발에 열광하여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면 말이지요. 긴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제야 겨우 조금, 풀꽃들 사이에서 춤을 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춤추기 위하여 우리는 언제든 싸울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피곤하게 느끼겠지만, 노예로 사는 것보다 그것이 나은 삶 아닐까요? 당신이 출 춤에 미리 박수를 보냅니다. 291-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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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가벼움이 횡행하는 시대, 인문 내공을 권하다


인문적 마인드를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건이기 때문이다. 인문적 사유 능력은 어떤 문제의 핵심을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인문적 사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주체적이고 지혜롭게 자기 인생을 꾸려갈 수 있다.  8


정직하고 성실하게 노력해서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은 대개 인문적이라는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고, 부단한 노력은 대개 '깊이 있는 탐구'를 동반하게 되는데, 그 탐구가 인문적 사유를 유도하기 때문이다. '깊이 있는 탐구'는 자연스럽게 다양하고도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낳고 그로 인해 사람을 인문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9


지식인들이 제시한 아이디어들 중 무엇이 올바르고 나은 것인가를 검토하고 판단하는 것은 시민들의 몫이어야 한다.

인간의 지력은 읽고, 쓰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 그 중에서도 '인문적으로' 읽고, 쓰고, 생각하는 것은 지력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 책은 그 세 과정에 대한 이해와 그 원칙과 방법, 나아가 태도의 문제까지를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10


일반적으로 지력을 발전시켜나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11




서장 - 삶을 돌파하는 힘, 인문 내공


인문적 가치의 핵심. 인문 정신의 요체 중 하나는 내 삶이 존엄하다는 것, 타자 역시 나만큼 존엄하고 동등한 가치를 가졌다는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17


자기 이익에 반해 보이는 일들을 태연히 일어나게 내버려둔다.  23


나의 어머니는 .. 젊은 시절부터 근 40년 동안 남의 옷을 만들고 수선해주면서 세 남매를 키웠다... 어머니가 하루는 '바느질도 다 같은 것이 아니며, 하는 사람에 따라 격(格)이 다르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다.  23


인문적 사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그는 자기 내부에 일종의 자가발전 시스템을 갖춘 것과 같다. 그는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날마다 조금씩 발전한다.  24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자기 신념을 좇아 사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좋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의 자기 신념대로 사는 것뿐 아니라, 지속적인 노력으로 그것을 갱신해 나갈 필요가 있다.  25


생명이 탄생하기 이전의 무(無), 생명이 소멸한 이후의 무에 대한 호기심이다.

'무'에 대한 관심, 그것은 철학의 시초이고 종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33


인간은 밖으로는 하느르이 별을 보며 우주를 상상한다. 외부 세계에 대해 일정한 형태를 상상한다. 그 일정한 형태를 '범형(凡形)'이라 한다. 또한 인간은 안으로는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그것을 '성찰'이라고 한다.  35


서양에서는 인문을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studia humanitatis)'라고 했다. '인간성에 대한 연구'를 의미한다.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간다운 것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답하는 것이 '인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인류 문화에 대한 '정신과학'이었다. 

동양에서는 인문을 한자로 '人文'이라고 쓴다. '文'을 우리는 '글월 문'이라 읽는다. 그것은 본래 '무늬'를 의미했다. 동양에서 '글'이라 하면 주로 한문을 말한다. 동양에서 라틴어와 같은 지위를 갖고 있는 한문은 잘 알다시피 상형문자다. 상형문자는 사물의 모양을 본떠 만든 글자다. 그것은 말하자면 사물의 실루엣을 그린 것이다. 그렇게 '文'은 '무늬'와 '글자'를 동시에 의미하게 되었다.

'人文'은 직역하면 '사람의 무늬'라는 뜻이다.  37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스스로 생각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내 생각인가?' 하고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그 중 많은 것은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본 것이다. 많은 사람드은 그것을 자기 생각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44


'혼돈의 내면을 가진 현대인들이 아무 맥락 없는 혼돈과 부딪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 [우리 안의 히틀러] 막스 피카르트  48


현대인은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저 단편적인 지식과 정보들이 맥락 없이 머릿속을 부유(浮游)할 뿐이다.  49


인문서를 읽으면 인문적 사유 능력이 생긴다. 인문적 사유 능력이 있으면 대중의 행동, 사회현상, 자연의 변화, 지식과 정보, 예술 작품, 과학기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고,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에 기반해 삶의 지혜가 생긴다. 그로 인해 인문적 사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 현명하게 인생을 살아 나갈 수 있다.  52





1부 공력(功力) - 지성인으로 거듭나는 생각의 내공


"모두가 비슷하게 생각할 때, 아무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 월터 리프먼  54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망연해지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 배우기만 하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그물(罔)'에 걸린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암담해지고, 혼자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자기 생각에 갇혀 편협해지거나 오만해지기 쉽다는 뜻이다.

오늘날에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는 것' 중 무엇이 더 큰 문제인가? 당연히 전자다. 요즘에는 '학력 인플레'라는 말이 나돌 만큼 고학력자가 많다. 유치원에서부터 따지면 많은 사람들이 20~30년 동안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고학력자들이 투자한 시간과 비용, 노력한 만큼 지적 성취나 사고력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른바 '티처 보이(teacher boy)'라는 말이 있다. '맘마 보이(momma boy)'가 엄마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다면, '티처 보이'는 선생이 없으면 공부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왜 그런가? 유치원 시절부터 한 번도 선생 없이 공부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선생이 가르쳐준 것을 그대로 외우는 데는 도사다. 그러나 스스로의 머리로 의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유추해보라고 하면 어려워한다. 그렇게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오늘날의 문제는 너무 적게 배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이 배워서 문제다. 사고 능력에서 중요한 것은 분석과 종합이다. 분석과 종합은 독학(獨學), 즉 혼자서 책을 읽고 이렇게 저럭헤 생각해 볼 때 배양된다.

학력만큼 지력이 발전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평가 중심의 교육제도에 있다. 우리는 국어, 영어, 수학을 배웠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국어, 영어, 수학의 '시험 보는 법'을 배운 것이다. 학생들은 교육 받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있다.  57-58


역사적으로 국가 조도의 근대적 교육의 기원은 19세기 초반 프로이센에서 시작되었다. 프로이센의 교육 목적은 군대에 충성하는 군인, 사용자에 순종하는 노동자,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진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의무교육은 공립학교, 개인 학교, 홈스쿨링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던 교육 형태를 강제로 소멸시켰으며, 국가가 교육을 독점하게 되었다. 의 무교육의 목표는 가정으로부터 아이들을 떼어내어 '부모 없는 사회(학교)'를 구성해 기업이 필요로 하는 훈련된 노동자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그낻 교육 자체가 애초부터 지성인의 양성 같은 고매한 목표와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제도 교육이 목표하는 것은 여러 지식을 하나의 의미 있는 질서로 통합하는 지적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사회가 처방하는 특정 기호와 정보를 얼마나 받아들였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제도 교육은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없애고, 기득권을 향한 개인의 노력을 끊임없이 생산해낸다. 그것은 제도 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비판적 사유 능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도 교육은 교과서나 참고서 같은 교재를 통해 가르친다. 문제는 이 교재들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는 커녕, 오히려 지적 탐구에 대한 열정을 불식시킨다는 점이다. 교재에는 많은 지식들이 무미건조하게 '교양의 차원'에서 개괄되어 있을 뿐이다. 교재에는 여러 지식인들이 애초에 가졌던 문제의식의 심각서오가 진지함, 철받함이 소거되어 있다. 학생들은 지식의 뿌리인 '현실적 문제의식'과 '윤리적 호소'를 실감할 수 없게 된다. 학문에 대한 열정은 학위나 학점에 대한 열정으로 대체될 뿐이다.  59


지성인이 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혼자 탐구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그들은 그냥 많이 배워서 지성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를 바탕으로 '독학 능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지성인이 된 것이다. 지성인의 핵심적 능력은 독학 능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학은 독립적인 사고를 가능케 하고, 다양한 사고를 낳는다.  61


대중매체는 여론을 전달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묘한 현상이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알려줄 때, 대중매체는 대중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거울처럼 비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대중매체는 어떤 방식으로, 어떤 단어를 써서 질문하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통계나 답변에 대한 해석의 권한도 대중매체에게 있다. 그를 통해 대중매체가 자신이 원하는 여론을 형성해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중매체가 여론을 전달하는 것은 단순한 사실 전달 이상이다. 여론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당신도 이렇게 생각하라'는 암묵적인 압력이 존재한다. 특별한 자기 입장이나 자기 확신이 없는 한, 사람들은 이 압력의 영향을 받게 된다.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잘못 판단할 리 없다'고 믿는 것이다. 대중매체도 이런 영향을 알고 있다. 그래서 대중의 생각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여론을 가시화하기도 한다. 그럴 때 여론은 '대중의 생각을 담은 결과들'이 아니라, 반댈 대중의 생각을 낳는 씨앗이다. 대중매체는 단순한 여론의 전달자가 아니다. 여론의 창조자이자 여론 형성의 주체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언론 매체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일은 세상에 없는 일이다. 그만큼 언론의 사회적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언론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활동하는 범위는 좁고 잘 아는 사람도 몇몇에 불과하다. 언론사는 주로 경찰서, 시청, 법원, 청와대, 국회 등 국민과 당국이 접촉을 일으키는 곳에 -주로 권력기관에- 기자들을 배치할 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주로 기사화한다. 언론은 자신들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알고 개괄해줄 수 있음을 암묵적으로 전제하지만, 그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오늘날에는 언론 플레이가 중요하고, 그에 따라 기업이나 관료 집단, 정치 집단은 대개 언론 홍보팀을 운영한다. 언론 홍보팀은 어떤 사안에 대한 보다 자료를 각 언론사에 보낸다. 기자는 보도 자료를 토대로 기사를 작성하게 되는데, 단지 참고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대로 베끼는 경우가 많다. 그런 보다 자료의 재뇽은 객관적이 수 없다. 그것은 해당 기관들이 독자들에게 보이고 싶은 내용과 관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언론사들이 보도 자료를 베낌으로써 독자들은 기억이나 관료 집단, 정치 집단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64-66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절대 진리가 아니다. 근대 학교 교육의 주체는 국가이고, 그런 만큼 거기에는 국가 이데올로기, 국가 이익의 논리가 반영되어 있다. 근대 교육 시스템은 기업이 요구하는 노동자를 길러내는 목적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학교 교육에는 국가의 논리와 더불어 기업의 논리가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66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적 성찰>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상당수의 그릇된 의견들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 그리고 확실하지 않은 원리에 기초를 두고 받아들인 것들은 의심스럽고 불확실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받아들였던 모든 의견을 회의에 부치고 근원적인 것에서 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추론 방식이 바로 '방법적 회의'였다. 그 과정을 통해 마지막으로 남은 명제가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였다.  67


불교 경전 <앙굿타라 니카야(ANgutara Nikaya)>에도 리런 글이 있다. "어느 것이든 계시나 전통이나 보고 같은 것에 근거해서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말고, 또 그것이 단순히 사변의 산물이라거나, 어느 한 입장에서 볼 때 진실되다거나, 사물의 피상적 관찰에 의한 것이거나, 선입견에 맞아덜어진다거나, 권위가 있다거나, 스스의 위신 때문이라거나 하는 등의 이유만으로 받아들이지 말지어다." 지성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상식과 권위에 쉽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 상식과 권위로 무장된 모든 관념을 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안으로는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밖으로는 타인의 의식을 일깨울 수 있다.  68


고대인들은 관계 속에서 만물이 생겨나고, 살아가고, 소멸한다는 것을 이미 알았던 것 같다. 예를들어, 한자 '목숨 명(命)'을 파자(破字)해 보면 '모두 합(合)'과 '나눌 분(分)'으로 나누어진다. 이 한자에는 '합쳐지고 분리되는 과정이 반복됨'을 통해 모든 생명 혹은 생태계가 유지된다는 고대인들의 통찰이 깃들어 있다. 내가 어제 돼지고기와 배추 김치를 먹었다면, 그것은 지금 내 몸의 일부를 이루고 잇다. 남이 나의 일부로 합쳐진 것이다. 화장실에서 우리가 큰일을 보면 그것은 나누어지는 과정이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합쳐진 결과이고, 죽는 것은 그것이 다시 불리되는 과정이다. 사람이 죽어 해체된 원소들은 다시 다른 생명체의 일부가 된다. 이 모든 과정이 합쳐지고 나누어지는 과정의 반복이다.  70-71


관계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불교 철학이다. 불교의 <상응부경전>에는 붓다의 가르침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이것을 '연기(緣起)'라고 한다. 연기란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탄생하고 소멸한다. 나는 타자의 존재 조건이고, 타자는 나의 존재 조건이라는 말이다.  71


흔히 인간은 '지적 존재'로 인식되지만,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 지적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보고 듣는 것이 있어야 지력이 발전한다.

지식이 체감되기 위해서는 현실과의 연관성이 풍부해야 한다.  76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현실적 문제 해결'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잊고 지식 자체에 집착하곤 한다. 심지어 특정 지식을 만고불변의 절대 진리로 믿기도 한다. 그것을 '교조주의(敎條主義)'라고 한다. 교조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 지식과 사상이 현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늘 자문해야 한다.  77


문화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사고는 나의 직업"이라고 했다. 지성인이 되려면 생각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치열하게 사고해야 한다. 그 치열함에는 현실적 맥락 속에서 사고하는 것, 사고 내용을 현실적 맥락 속에서 해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을 도외시하는 것은 지적으로 안이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78


깨어 있는 의식은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계기로 생겨난다.  79


쾌락과 고통의 관계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반대가 아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인간의 대표적인 쾌락인 식욕과 성욕을 보자. 어떤 사람이 배가 몹시 고플 때 산해진미로 가득 찬 식사를 한다면 만족도는 극에 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매 끼니 계속된다면? 만족도는 점차 떨어지다가 나중에는 별 맛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도 계속 먹어댄다면? 과도한 영양 섭취로 각종 질병이 생기고, 그로 인해 오히려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성적 쾌락도 마찬가지다. 성적 쾌락을 과도하게 추구하면 그것은 더 이상 쾌락이 아니다. 만약 극단적으로 추구한다면, 그는 죽음에 이를 것이다.

쾌락은 한계효용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쾌락은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금세 저만치 달아난다. 아무리 좋은 쾌락도 시간이 지나면 일상성이 감각을 무뎌지게 만든다. 그 때문에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계속 강도를 높여가고, 한 욕망으로부터 다른 욕망으로 계속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 쾌락의 극단적인 추구는 불행과 고통을 낳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지속적인 쾌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고통은 지속적이다. 배고픔, 질병, 고문 등으로 인한 고통은 시간이 지난다고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82-83


여행은 현대인들이 대표적인 즐거움으로 꼽는 것이다. 사실 '집 나가면 고생'이다. 그런데도 여행이 즐거움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이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여행은 낯선 곳으로의 탐험이다. 그 과정에서 여행자는 여러 당혹스럽고 불편한 일들과 조우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여행자가 길을 헤매다 더위와 배고픔에 하루 종일 시달렸다 하자. 그러다 어두컴컴한 저역에 겨우 민박을 구해 지친 몸을 쉬게 되었다. 거기서 샤워를 하고, 먹을 것을 구했다. 그럴 때 여행자는 집에서는 쳐다보지도 않을, 보잘것 없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아, 정말 행복하다. 이것이 바로 여행이 주는 기쁨이지!' 하고 여길 수 있다.

그것은 평소보다 무엇이 더 채워지는 데서 오는 행복감이 아니다. 더러워진 몸과 배고픔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결핍감이 사라지는 것에서 오는 행복감이다. 말하자면 무엇이 플러스됨으로 인해 행복한 것이 아니라, 마이너스의 상태가 사라지는 것에서 오는 행복감인 것이다. 그 마이너스는 여행하지 않으면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늘날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인위적으로 결핍의 상황을 만들고, 그 결핍이 제거되는 것에서 쾌감을 맛본다. 이런 여행의 즐거움 역시 고통과 쾌락이 동전의 양면임을 잘 보여준다.  83


인간은 범형의 구성 능력과 성찰 능력을 가진, 그리고 생각한 것을 세계에 구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인간은 분명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는 존재다. 그러나 가능성이 오만함으로 변질될 때 인류는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90


칸트 "인간은 인식된 현상세계만을 알 수 있으며, 인식되기 이전의 세계인 '물자체'는 알 수 없다.  91


세계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감각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그 감각 방식이 달라지면 그에 따른 인식도 달라진다. 그것을 철학적 용어로 '움벨트(Umwelt)'라고 한다. 그것은 감각기관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 세계를 일컫는다. 모든 동물은 '움벨트'가 다르다. 무엇이 우월한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모든 생물은 상이한 움벨트 속에서 살고 있다.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는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우리는 인간 인식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인류는 자신의 지적 능력에 대해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94


모든 대상은 거리르 두고 볼 때 전체가 파악된다. 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거리를 두고 봐야 어디에 어떤 무넺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98


사물을 거리를 두고 봐야 하는 것은 넓게 볼 수 있어서만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래야만 대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거시적으로 보는 것은 시야의 문제를 넘어 사유의 문제다. 거시적으로 봐야 대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철한 판단이 가능해진다. 내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질곡에 빠졌을 때, 내 문제를 남의 문제처럼 거리를 두고 보면 훨씬 지혜로운 판단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조언이 도움이 되는 것도, 그들이 내 문제를 나보다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99


인문적으로 사유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시간적 거리를 두는 것이다.  100


시간적 거리가 가져다주는 지혜를 잘 표현한 유명한 말이 있다. 헤겔이 좋아했던 말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가 그것이다. 미네르바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그리스 신화의 '아테나'와 같은 여신)이고, 올빼미는 철학의 상징이다. 지혜의 여신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올빼미가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비상(飛上)하기 위해, 서서히 날개를 편다는 말이다. 지혜의 여신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철학의 상징인 올빼미, 얼마나 현명하겠는가? 그야말로 '지혜의 정수'다. 그런 올빼미가 왜 다른 때가 아닌 '황혼녘'에 날개를 펴겠는가?

황혼녘이 성찰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하루를 준비하는 아침이나 한창 일하는 낮에는 하루를 돌아볼 수 없다. 사람이 상념에 빠지기 가장 좋은 시간은 저녁이다. 일을 마치고 난 후, 해가 지는 시간, 세상의 온도가 가라앉는 시간이 되어서야 인간은 비로소 하루를 돌아보고 생각할 만한 여유를 갖게 된다. '황혼녘'이란 결국 하루를 돌아볼 만한 시간적 거리가 확보된 때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황혼녘인 노년에 이르러서야 인간은 '나의 삶은 어땠나?'하고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지혜를 얻는다.  101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사는 것은 심리적 정신적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인간은 혼자서는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때에만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를 느낄 수 없다. 아무리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도 어떤 집단에도 속해 있지 않다면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인간이 실존적 의미를 획득하는 것도 사회 속에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번우주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의 존재적 의미는 오로지 사회적으로만 획득될 수 있다. 인간이 실존적 충만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존재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 집단은 그냥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집단의 논리'를 개발한다. 집단의 논리는 집단에게 이익이 되는 노리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집단 전체에게 골고루 이익을 주지 않는다. 집단 논리의 가장 큰 수혜자는 대개 지도칭이다. 그들의 이익이 집단 전체의 이익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집단의 논리는 보다 고차원적인 도덕적 규범으로 포장된다. 예를 들어, 국가의 이익은 애국의 이름으로, 종교 집단의 이익은 순교의 이름으로, 사회의 이익은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된다.

집단의 논리는 공적 이익의 논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사적 이익의 논리보다는 도덕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그러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논리는 범인류적 차원에서 보면 비도덕적으로 보인다. 집단을 위한 헌신과 희생도 범인류적 차원에서 보면 우스워 보이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익의 논리'는 그것이 개인을 위한 것이건 집단을 위한 것이건 아무리 그럴싸히게 포장되어도 그 본질은 유치한 것이다. 남과 우리를 가르고, 그에 따른 차별과 배제의 원리를 기본으로 삼기 때문이다.  104


애개 개인의 가치관은 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이 생산해내는 집단 이익 논리들이 내재적으로 수용된 결과이기 십상이다. 그것은 개인의 자율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특별한 지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많은 파괴와 억압, 폭력적 현상 배후에는 집단의 논리에 기반을 둔 '집단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 개념 중에 (被投)'라는 것이 있다. '내던져짐'이라는 뜻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들이다. 자기 의지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날 국가, 가문,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그 선택은 운명적이다. 그리고 인간은 태어나면서 속하게 된 집단이 생산한 논리를 지속적으로 학습하며 성장한다. 학습된 집단의 논리는 어릴 때부터 익숙하다. 그런 까닭에 그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는 쉽지 않다. 그것을 대상화하고 낯설게 바라보는 것이 훨씬 지성적인 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사회에는 집단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각종 제도적 장치들이 있다. 이 또한 집단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어렵게 만든다. 예를 들어, 국가는 각종 작위와 지위, 메달, 휘장, 훈장 등의 서훈 체계를 통해 청성 경쟁을 유발시킨다. 또한 국기, 국립묘지, 국가 유공자, 국민의례, 기념일, 기념행사, 어용 예술 작품, 동상, 기념관, 박물관, 정부가 발행하는 출판물 등 다양한 명예 상징을 통해 압도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들은 자연스럽게 개인들을 국가 중심의 사고와 감정에 젖게 한다.  105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지적 탁월성의 본래적 의미는 비판 정신이며 지적 독립성이다"라고 말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권력과 지성인>에서 "권력에 흡수되거나 고용디지 않고 언제나 주변에 머물러야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지성인이 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모두 지성인의 독립성을 강조한 말들이다.  106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 의해 생산되는 논리를 자신의 신념으로 알고 산다. 그러나 그것은 난센스다. 왜냐하면 신념이란 자신이 이성적 판단으로 '선택'한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이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해 이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고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릴 때부터 학습된 자기 집단의 논리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 그러니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는 학습된 집단의 논리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보거나 판단해보지 않았다. 결국 그것은 신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107


'깊이 파려면 넓게 파야 한다'

깊이와 넓이는 상반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둘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넓게 파야 깊이 팔 수 있고, 깊이 파기 위해서는 넓게 파야 한다.  108


의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인간의 몸을 공부하면서 인간의 몸 역시 여러 생물의 진화와 그들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파생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다 보면 생물학에 대한 관심이 생길 수 있다. 생물학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의 탄생과 진화는 지구 환경의 변화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 생태학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인간의 몸의 변화가 심리 변화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 심리학으로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심리학에 대한 관심은 인간 심리의 한 양태로서의 종교로 확대될 수 있고, 종교의 탄생과 변화가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한 것으로 건너갈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공부해 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다방면에 걸쳐 많이 아는 사람)가 된다.

인문적 사유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내부에서 생겨나는 지적 호기심을 억제하지 말아야 한다. 궁금증과 지식은 상호 촉진 관계에 있다. 흔히 사람들은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더 이상 궁금한 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반대다. 대개는 아는 것이 많을수록 궁금한 것이 더 많아진다. 인간에게는 '지적 공백을 메우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알기 힘들다. 그래서 궁금증도 잘 생기지 않는다. 반면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아, 내가 이것을 미처 모르고 있었구나!'하고 느끼게 되고, 그 '지적 공백'을 마저 채워 넣으려 한다.  110-111


인간은 제너럴리스트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분업화된 시스템은 인간이 가진 제너럴리스트적 역량을 발휘하기 힘들게 한다. 분업화된 시스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의 기능인으로 존재한다.

많은 현대인들은 자신이 맡은 한 가지 일만 한다. 그러면서 돈만 번다.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나머지 일들은 돈으로 물건을 삼으로써, 혹은 돈을 지불하고 다른 전문가들에게 맡김으로서 해결하려 한다. (심지어 돈만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문제들, 예를 들어 정서적 유대가 핵심인 가정 문제나 양육 문제까지도 그러하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다양한 능력을 이용해 직접 무엇을 하지 않는다. 대신 남에게 맡긴다. 그결과 노동의 기쁨도 상실되고, 주체적 책임도 상실되며, 의존성은 강화된다. 또한 자기 소외가 증대되며, 실존적 무력감도 증대되고, 육체와 정신의 균형 파괴에 따른 건강도 상실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113


틀에 박힌 사고를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는 활력을 잃을 뿐 아니라, 더욱 진보하지 못한다.

진부한 표현이나 사고를 이른바 '클리셰(cliche)'라고 한다. 클리셰가 문제가 되는 것은 식상함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클리셰는 진실을 은폐한다. 그래서 우리는 클리셰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사고를 하는 데는 나름대로 노하우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비단 노하우의 문제만은 아니다. 새로운 사고에는 세상을 바라고는 그 나름의 고유한 시각이 투영되어 있다. 그것은 가치관의 문제다...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갖는 기본적인 특징이 있다. 바로 스스로 '실감'하기 전에는 함부로 믿지 않는 지적 태도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이가 '이 말은 옳다'고 떠들어도 '과연 그럴까?', '왜 그렇게 되었을까?'하고 자문해본다. '과연 그럴까?'는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명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따져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철학적 태도를 갖는 일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는 명제가 옳은 것으로 여겨지는 '현실적인 이유'를 따져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말을 처음 한 사람이 누구이며, 그는 어떤 경로를 통해 지적 권위를 획득했으며, 그 지적 권위가 어떻게 그것을 정당화시켰으며, 어떤 정치 경제적 여건이 그 말을 옳은 것으로 만들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사회과학적 태도다. 창의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태도와 사회과학적 태도가 필요하다.  114-115


브레인스토밍(Brainstoming)기법도 규칙적인 사고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 기법은 '스캠퍼(SCAMPER)'라고 불린다.

대체하기(Substitute), 조합하기(Combine), 적용시키기(Adapt), 변형하기(Modify), 다른 용도로 써보기(Put to order use), 삭제하기(Eliminate), 역발상 해보기(Reverse)의 일곱 가지 단어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115


몸이 아픈 어떤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몸의 병을 알아내기 위해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의사들은 몸에 물리적인 이상이 없어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소견을 보였다. 고통은 있는데 그 원인을 알 수 없다니! 여인은 속을 끓이며 마지막으로 어떤 의사를 찾아갔다. 그 의사 역시 물리적인 원인을 찾아낼 수는 없었지만 대화를 통해 여인에게서 특이한 사항을 발견했다. 여인은 어떠한 삶의 의욕도, 생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의사는 그것을 병의 원인으로 보고 '우울증'이라 이름 붙였다. '우울증'이 탄생하는 순간이엇다. 병명이 생긴 뒤, 의료계는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음을 발견했고, 치료약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던 많은 사람들은 그제야 '가짜 환자'라는 오명을 벗고 비로소 치료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말과 인식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무엇이 실존하더라도 그것을 일컫는 이름이 없으면 우리에게 잘 인식되지 않는다.

말이 우리 인식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말이 있어야 우리는 그것을 인식한다. 말이 갖는 이미지와 상징, 뉘앙스는 대상을 인식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말을 사유의 수단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말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언어 전체 혹은 특정 낱말에 대해 철학적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 말은 우리의 인식을 대상에 이르게 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대상을 인식하게 해주는 매개인 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121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으면, 보이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사과는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햇볕, 바람, 이슬, 안개, 비, 흙의 작용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인식하기는 어렵다. 인문적 사유가 어려운 것도 눈에 보이는 것(현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본질)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사물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영어로 '메타피직스(Metaphysics, 형이상학)'라고 한다. 여기에도 같은 논리가 포함되어 있다. 그 어원은 '메타피지카(Metaphysica)'로서 '뒤, 다음, 배후'라는 뜻을 가진 '메타(meta)'와 '자연'이라는 뜻의 '피지카(physica)'의 합성어다. '피지카'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즉 형체가 있는 것을 말한다. '메타피지카'는 '자연의 배후'라는 뜻이다. '메타피직스'는 자연을 잘 관찰해야 그 뒤에 숨어 있는 본질-형체가 없는-에 대한 이해가 따라온다는 논리를 내포한다.

이러한 논리는 동양에도 있다.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가 그것이다. '격물치지'에서 '격(格)'은 '잣대로 잰다'는 뜻이다. 직역하면 '사물을 잣대로 재면 앎에 이른다'가 된다. '사물을 잣대로잰다'는 말은 '사물을 잘 살펴서 꼼꼼히 따져보고 분석한다'는 의미다. '메타피직스'와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사물을 잘 관찰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지식(앎)으로 나아간다는 논리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서양의 논리가 같은 것이다.  126


문제의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그 과정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127


"물에 대해 가장 잘 모르는 것은 물속에 사는 물고기"라는 말이 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조건을 인식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이다.  131


나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적응'의 문제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매우 뛰어난 동물이다. 그런데 이 '적응'이 묘한 문제를 일으킨다. 의식적인 존재인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합리성을 부여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회 환경에 적응하면 그 환경을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사회나 집단에 '적응'한다는 것은, 그 질서, 논리, 체제, 문화 등을 내면화한다는 것을 말한다. 환경이 불합리하더라도 그것을 내면화하는 데 성공하면 비판적 의식이 줄어든다.

보통, 뛰어난 적응력은 생존에 유리한 장점이라고만 생각된다. 자연 환경에 대한 적응력은 분명 그런 측면이 크다. 그러나 사회 환경에 대한 뛰어난 적응력은 보다 신중하게 생각될 필요가 있다. 자칫 잘못하면 자승자박(自繩自縛)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의 경제 시스템은 전무후무한 규모로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는데, 모든 사람이 이 시스템에 성실히 적응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른 생물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물론 인류의 자멸을 초래할 것이다.

환경은 인간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해 그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환경과 조건 자체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심지어 혁명기에도 마찬가지다. 혁명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폭동이나 봉기에 가담하지만, '환경과 조건 자체를 변화시키겠다'는 명확한 목표 의식을 갖고 행동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현실적 고통, 특히 경제적 고통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혁명에 일조하게 된다.  132


인간은 적응력이 높은 동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는 사회 환경의 진화를 못 따라가고 있다. 생물학적 진화는 점진적이지만 사회 환경의 진화는 급진적이기 때문이다. 그 격차는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134


우리는 누군가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할 때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전에 그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그 환경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그것은 인문적 사유에서 매우 중요하다. 환경과 조건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자기 자신, 인간, 사회의 본질을 비로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과 조건은 현상의 배후이자 토대다. 현상의 본질을 꿰뚫기 위해서는 반드시 환경과 조건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  136




2부 공감(共感) - 남의 글에서 내 생각을 발견하는 독서 내공


'생기'란 '살아 있다는 느낌'이다. 모든 인간은 살아 있는 한 '생기'를 추구한다. 만약 살아 있어도 생기를 하나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생기'는 삶의 필수요소이며 쾌락의 원천이다. 생기를 충족시키는 방식에는 '극단적인 방식'과 '중용적인 방식'이 있다. 극단적인 방식에는 폭식, 과도한 성행위, 음란물 중독, 게임 중독,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도박 중독, 쇼핑 중독, 일중독, 폭력, 살인, 권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 같은 것이 있다. 중용적인 방식에는 적당한 운동과 노동, 음식과 섹스의 절제, 문학 예술을 감상하거나 창조하는 것 등이 있다.

극단적인 방식은 일시적으로 삶에 큰 생기를 부여하지만, 그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사람을 불행과 죽음으로 몰아가곤 한다. 그러나 중용적인 방식은 반대다. 쾌감의 크기는 작지만, 육체와 정신을 풍요롭게 만들고, 삶을 건강하게 유지시켜준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우선 책을 읽어야 하는 개인적 이유를 보자. 개인적인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독서는 경험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다. 중국의 비평가 린위탕은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 독서하지 않는 사람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자기 하나만의 세계에 감금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이라도 손에 책을 들면 별천지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세계에 대한 시야가 넓게 트이지 않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전부인 줄 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무엇을 경험했기 때문에 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험했다고 해서 아는 것은 아니다.  141-142


경험이 곧 앎이 되지 않는 것은, 경험이 해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험이 글이 되기 위해서는, '그 경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것을 어떤 형식으로 써야 메시지가 잘 전달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내 경험을 남의 경험처럼 냉정하게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경험에서 사회적 의미가 생겨나고, 비로소 글이 된다. 경험 자체가 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해석된 경험만이 글이 된다.  144


책을 읽어야 하는 개인적인 이유 두번째는, 독서가 개인을 심미적 존재(아름다운 존재), 철학적 존재(사유하는 존재), 도덕적 존재(양심적인 존재)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145


독서는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실존적 요구를 충족시킨다. 독서는 기본적으로 이 요구에 부합해야 하고, 그래야 열정적인 독서가 지속된다.  146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고요하게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혼자 집에 있을 때에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틀어놓는다. 젊은이들은 컴퓨터나 모바일로 게임에 열중한다. 소음도 중독된다. 그렇게 시끄럽게 있다가 전자제품들을 끄고 책을 읽으려 하면 뭔가 허전하고 막막한 기분이 들면서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람이 고요하게 있는것은 중요하다. 그럴 때 사람은 자신과 대면하고, 타인과 세상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남들이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럴 때 뇌는 활발하게 움직인다.  156


독서를 하기는 쉽지만, 열정적인 독서를 지속하기란 쉽지 않다. 열정적인 독서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지적인 자극을 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책과 연관된 문화생활을 할 필요가 있다.  157


자신의 내적 욕구에 충실한 독서란 우선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책을 보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호기심이 왕성한 동물이다. 자신의 호기심에 맞는 책을 읽으면 누구나 즐겁게 독서할 수 있다. 그래야 열정적인 독서도 가능해진다. 또 하나는 자기 삶의 문제와 연관된 독서를 하는 것이다.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다. 인생은 그 문제들을 해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럴 때 독서를 통해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라. 그러면 자연스럽게 열정적인 독서가 된다. 자기 문제와 관련된 문제를 다룬 책을 읽을 때와 달리 책의 내용들이 머릿속으로 쏙쏙 잘 들어올 것이다. 여기에 열정적인 독서의 열쇠가 있다.  161-162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나'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나는 세상이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다. 내 안에는 나 자신에 대한 이미지와 세상에 대한 이미지가 함께 들어 있다. 그러므로 세상이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인 나 자신에 대한 관심과 성찰은 매우 중요하다.  163


독서는 단지 저자의 생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독서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발견하는 것이다. 진정한 독서가에게 모든 책은 참고 문헌일 뿐이다. 독서의 궁극적인 목적은 책에 있는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자기 내부의 텍스트를 발견하는 데 있다.

우리는 흔히 "몰입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몰입을 '매몰'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진정한 몰입에는 주체의의지가 살아 있다. 그래서 책의 내용에 빠져 들었다가도 자신이 원할 때는 언제든지 그로부터 빠져나와 "이 말이 맞나?"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거나, 내용과 관련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것을 말한다.  164


'매몰의 독서'는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기에만 급급해 아무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165


무릇 책은 평가하고 질문하며 읽어야 한다.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가? 첫째, 저자의 주장이 타당한지를 물으며 읽어야 한다. 그 타당성은 저자의 논리와 근거가 적절한지를 살펴봄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 둘째, 그 반대의 주장은 말이 안 되는지, 혹은 예외는 없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반대의 주장과 예외는 책에 기술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이것은 책에 없는 내용을 생각하고 검토하는 것이 된다. 셋째, 저자의 주장이 우리 사회의 현실, 혹은 나의 현실에 맞는가를 물어봐야 한다. 이 역시 책에 기술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아무리 저자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에 적용될 수 없으면 곤란하다.  165-166


거칠게 구분하자면, 지적 도약은 세 단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첫 번째 단계는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신의 내적 욕구를 잘 들여다보고 그에 맞는 책을 읽을 때다. 이때, 사람들은 독서가 주는 지적 희열을 맛보게 되고, 그에 따라 열정적으로 책을 읽게 됨으로써 최초의 지적 도약을 이루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꾸준한 독서를 통해 주요 고전의 내용을 이해하게 될 때다. 이를 기점으로 지식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논의를 모두 이해하는 지적 도약을 이루게 된다. 세 번째 단계는 독립적인 연구와 조사, 분석과 종합을 통해 여러 지적 논의에 대해 가치판단을 내리 수 있게 될 때다. 이것이 지성인으로 진입하는 단계다.  171-172


좋아하는 작가의 전작을 읽는 것, 좋아하는 작가가 자주 참고하는 저자의 책을 읽는 것, 같은 주제의 책을 잇달아 읽는 것, 이 세 가지 방법이 '네트워크 독서법'이다. 한마디로 '네트워크 독서법'이란 서로 관련 이쓴 책을 잇달아 읽는 것을 말한다.  185




3부 공명(共鳴) - 세상과 나 사이에 울림을 만드는 글쓰기 내공


신중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을 표현해도 좋은가, 어떻게 표현하면 좋은가'하고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글쓰기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오히려 글을 씀으로써 모호하던 생각들이 뚜렷해지고 섬세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글을 쓰는 과정 자체가 치밀한 생각들을 만들어낸다는 말이다.  194


글쓰기와 사유 능력의 발전은 상호 촉진 관계에 잇다. 글쓰기를 하면 사유 능력이 발달하고, 사유 능력이 발달하면 글쓰기를 더 잘할 수 있다.  195


유시민이 한 말로 기억한다. "마당발 치고 지적인 사람이 드물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지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많이 생각하고 읽고 써봐야 하는데. 이 세 가지는 모두 혼자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성인은 늘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저런 사람(집단)들과 친교 맺기를 좋아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을 마음껏 비판할 수 없게 된다.

글쓰기도 어느 정도 고립을 요구한다.  197


지적으로 살려는 사람은 기꺼이 홀로 있을 수 있어야 하고, 홀로 있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지성인이란 스스로를 고립시킴으로써 소통하는 사람이고, 소통하면서도 세상의 모든 것과 거리를 두는 사람이다.  198


롤랑 바르트는 "글쓰기란 하얀 종이 위에 저자의 순수한 의도가 지나가는 길이 아니며, 저자와 독자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정치, 경제적 사건이다.

C. W. 밀즈는 이런 말을 했다. "학자들이 글을 쉽고 명료하게 쓰지 않는 것은 주제의 복잡성이나 사고의 심오함과는 무관하며 자신의 지위를 걱정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학자들이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은 , 그것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높이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물론 주제 중에는 쉽게 쓰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특히 철학적인 주제들이 그렇다. 그러나 학자들이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폼'나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은 정직한 고백에 가까우며, 글쓰기에 대한 신비적 색채를 거두어준다.  199


실제로 자신의 생활 관리에 성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작가의 성공 여부에 결정적인 요소다. 시간 관리에 실패하면 무절제하고 방탕하게 생활하게 된다.

작가로 성공하고 싶다면 시간 관리에 철저해야 하며, 금욕적으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책 읽고, 생각하고, 글 쓰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지적 도약이 이루어지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다. 지적 도약은 흔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거기에도 감수해야 할 것은 있다. 바로 세속적인 즐거움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전에는 재미있고 즐겁게만 생각되던 대화나 오락 거리들이 유치하고 시답잖게 느껴질 수 있다. 지적 발전이 이루어질수록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는 깊어진다. 그러나 그만큼 더 인간과 사회를 거리를 두고 보게 된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보통 사람드로가 더 멀리 떨어진다는 것, 심리적으로는 더 고독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204-205


글이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글이 창의적인 시각을 담고 있는 경우다. 창의적인 시각이란 지배적인 시각, 전통적인 시각과 다른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글을 읽을 때 독자는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의 뿌리, 생각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둘째, 이전의 글들보다 새롭거나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다. 외국의 최신 동향이나 최근의 연구 결과를 빨리 소개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혹은 오래된 정보라도 잘 알렺지 않았던 것이면 가치가 있다.

셋째,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들을 대비시켜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경우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과 오늘날의 사건과 인물을 대비시킴으로써, 외국과 우리 사회를 비교함으로써 일정한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것이다. 혹은 오래된 역사적 사건과 오늘날의 사건을 비교해 이해시키는 것도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이런 방식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일들을 낯설게 보게 하고, 우리 사회의 특징을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시킨다.

넷째, 결과만 알려진 것의 '과정'을 면밀하게 폭로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이미 알려진 사건이 나중에 소설화되고 영화화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새삼스럽게 그 사건에 대해 다른 생각과 느낌을 갖게 된다. 대개 사건의 본질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그러므로 글을 통해서 사건의 과정을 잘 검토하는 것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돕는다.

다섯째,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이나 인물, 주제에 관해 깊이 있게 설명해주는 경우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월터 리프먼은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비슷하게 생각할 때, 아무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만큼 습득한 지식의 양은 적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다 알고 있는 것이라도 '그것이 이런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 독자들은 흥미를 느낀다.

여섯째, 기존의 메시지를 감각적인 글쓰기를 통해 정서적 설득력을 갖게 하는 경우다. 트깋 기존의 글이 이성적 설득을 하는 데 그쳤다면 이러한 전략은 유효할 수 있다. 어렵게 쓰인 인문적 메시지를 수필이나 소설 같은 문학적 글쓰기로 변용시켜 전달한다면 많은 독자들이 재미있고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08-209


처흠은 쉽게 시작해서 나중은 어렵게 끝나야 한다. 이 원칙을 구현하는 전술은 다음과 같다.

첫째, 흥미로운 것에서 따분한 것으로 써 나간다. 글을 흥미로운 것으로 시작하면 독자의 주의를 끌 수 있어 선택 받기 쉽다. 여기서 '따분한 것'이란 식상하거나 고리타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애매모호한 것,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설명하기 까다로운 것을 의미한다.

둘째, 개인적인 것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써 나간다. 개인적인 양상은 사회적인 양상의 일부이며 실례다. 그러나 개인적인 양상은 이야기로 되어 있어서 사회적인 양상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 개인적인 예로 글을 시작하면 독자들의 정서적 공감을 얻기도 쉽다.

셋째,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써 나간다. 구체적인 사회적 사건이나 역사적 사건 혹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 그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철학적 담론 같은 추상적인 내용을 나중에 쓴다. 그러면 역시 독자들이 부담 없이 글을 읽기 시작할 것이다.  210-211


어디서 좋은 글감을 발견할 수 있을까?

첫째, 남에게 받은 질문이나 대화에서 글감을 발견한다. 우리는 늘 타인과 대화하며 산다. 그리고 그러한 대화에는 심리적 사회적 철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말을 하는가?', '나는 왜 이런 주장을 하는가?', '그 말은 어떤 논리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가?', '그 논리는 어떤 권력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가?' 같은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타인들과 대화, 그리고 타인과 나의 대화를 잘 곱씹어보면 많은 글감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 지배적인 견해에 의문을 제기해 본다. 인류의 정신사는 지배적인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 의해 풍부해져왔다. 지배적인 견해는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견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견해를 받아들이게 된 과정의 중심에는 대개 권력의 작용이 있다. 또한 그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렇게 보면 지배적인 견해라는 것도 별것 아니다. 그런 새악을 갖고 늘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셋째, 자신이 갖고 잇는 불만과 바람,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불만과 바람에 귀 기울인다. 예를 들어,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초기 자본주의에 대한 불만과 바람이 글이 된 경우다. 초기 자본주의사회에서 나타난 농민과 노동자의 고통, 그것을 바라보는 모어의 불만, 그리고 그것이 극복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 그 바람은 이상적인 사회상을 통해 제시된다 - 글의 모티프였다. 인문적 글쓰기는 비판적 글쓰기이고, 그것은 사회적 불만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가 갖고 있는 사회적 불만은 인문적 글쓰기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넷째, 자신의 경험에서 글감을 찾을 수 있다. 경험은 가장 기본적인 글감의 원천이다. 자신의 경험 중에서 사회적인 의미를 지닌 것을 찾으면 좋은 글감이 될 수 있다. 경험 중에는 사회적 의미가 본래 강한 것이 있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사회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경험들이 많다.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섬세한 사유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경험을 잘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다섯째, 동서고금의 유명한 일화나 에피소드에서 글감을 찾을 수 있다. 이야기는 대중적 글쓰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쉽고 재미있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은유로 쓰기 쉽다. 그러므로 하나의 이야기로도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이용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나중에 쓰일 법한 이야기를 접하면 평소에 잘 수집해둘 필요가 있다.

여섯째, 시사적인 사건에서 글감을 발견한다. 시사적인 사건들은 사회의 여러 구조적인 문제들이 집약되고 중첩되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그것을 잘 관찰하면 사회의 본질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시사적인 사건은 두 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에피소드와 마찬가지로 대개 스토리를 갖고 있다는 점. 사회적 이슈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일곱째, 개념에서 글감을 찾는다. 항상 말이 중요하다. 개념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다. 하나의 개념은 그 자체로 일정한 관점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경제 분야에서 흔히 쓰이는 '노동의 유연화'를 보자. '노동의 유연화'는 친자본적 친 기업적 관점을 담은 말이다. 실업자, 비정규직, 인턴, 파트타임을 양산하는 '노동의 유연화'는 노동자에게 결코 '부드럽지 않다' 그것은 팍팍한 삶을 의미할 뿐이다.

이렇듯 조금만 신경을 써서 주변을 살펴보면 생각하고 쓸 것들이 널려 있다.

자세히 관찰해야 포착된다.  211-213


글도 자기 취향이나 기질에 맞게 써야 한다. 그래야 글이 잘 써지고 좋은 글도 쓸 수 있다.  215


비평가는 자기 말을 하되, 작품을 매개로 말하는 형식을 취할 뿐이다.  218


비평가는 객관적인 작품 해설이 아니라 독자들이 자신과 같은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 글을 쓴다. 그렇게 비평가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끼어들어 독자의 시선을 조작한다. 한 마디로 '관찰의 조작'이다.  219


서평 쓰기는 습작기에 있는 사람드에게 분명 용이한 측면이 있다.  221


독후감이 개인적인 '감상'을 쓰는 것이라면, 서평은 논리와 근거를 동원한 이성적 글쓰기다.

독후감이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글쓰기라면, 서평은 좀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글쓰기다.  222


서평은 독서하다가 떠오른 문제의식이 있다면 모두 글감이 될 수 있다. 텍스트를 읽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그중에 문제의식이 있으면 그것을 주제로 논리와 근거를 동원해 글을 써내면 좋은 서평이 된다.

서평도 창작이다. 자기 생각을 쓰는 것이다. 책을 매개로 한 자신의 생각과 통찰을 적는 것이다.  223


칼럼을 쓰는 것 외에 시사적 글쓰기를 하는 방법 중 하나는 독립적인 인터뷰어(interviewer, 인터뷰를 하는 사람)가 되는 것이다.  229


'인문적이면서 문학적인 글'인 인포멀 에세이는 작가의 철학과 인격, 정서가 잘 조화된 글이라 할 수 있다.  231


인포멀 에세이를 쓸 때, 중요한 것은 하나의 소재를 붙들고 파고드는 집요함이다.  233


철학적인 글쓰기에서는 암시와 비유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암시나 비유는 메시지를 명료하게 하기보다는 그것을 뭉개면서 의미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235


링컹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게 장작을 패기 위한 여덟 시간이 주어진다면 도끼를 가는 데 여섯 시간을 사용하겠다." <장자>의 [소요유]편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백 리 길으 ㄹ가려는 사람은 하룻밤 양식을 찧으면 되지만, 천 리 길을 가려는 사람은 석 달의 식량을 모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준비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을 잘 쑤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그 준비란 평소 읽은 책을 자료 삼아 정리하는 것이다.  242


자료 정리를 하면 첫째, 백지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다. 습작기에 있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어떻게 쓸까'가 아니라 '무엇을 쓸까'이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절실한데 무엇을 써야 할지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글감이 없다면 무작정 책상에 앉아 글을 쓸 일이 아니라, 자신이 인상적으로 읽은 책들을 자료 삼아 정리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책 내용 중 마음에 드는 글을 베끼고, 그 내용과 관련해 떠오른 자기 생각을 컴퓨터에 옮겨 적어야 한다.

자료 정리하는 시간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이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더 좋은 글을 쓰게 된다.  243-244


둘째, 자료 정리를 하면 자기 세계관이 치밀해진다. 글쓰기가 힘든 것은 단지 표현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거기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거이다. 이 문제 역시 자료 정리를 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어떤 책에서 마음에 드는 글을 컴퓨터에 옮겨 적을 때, 그 글의 내용은 대개 자신이 적극 동의하는 내용인 경우가 많다. (비판하기 위해 베끼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얼마 안 된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정리된 자료는 '자신이 동의하는 내용들'이 거대한 집적물이다. 그 자료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주로 무엇에 관심이 있고, 어떤 주장에 동의하는지가 명확해진다. 내가 내 생각을 명확히 알 수 있다는 말이다.  244-245


셋째, 자료를 정리하면 문장력이 좋아진다. 자료 정리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만 '베껴 쓰는' 과정이다. 베껴 쓴 이후에도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주 그 자료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좋은 문장들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입력된다. 자료 정리를 하다보면 사용하는 단어의 양이 늘고, 어휘의 개녀모가 지시성에 대한 감각이 섬세해지며, 문장과 표현이 정밀해지고, 논리적 사고 및 언어 사용 능력이 생겨난다. 심지어 문장의 리듬감까지 익힐 수 있다. 문장이 좋아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좋은 방법을 놔두고 문장력을 강화하기 위해 문법, 맞춤법을 공부하거나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책을 통째로 베끼는 사람들이 있다. 혹은 '자신의 부족한 어휘량'을 채우기 위해 사전을 외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시간 대비 효과가 낮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자료 정리'만 한 것은 없다.  245


글을 간결하게 쓰라.

첫째, 불필요한 부사를 줄여야 한다. (사실, 일반적으로, 더 이상...)

둘째, 불필요한 '형용사'를 줄여야 한다. (유명한, 오래된, 비참한...)

셋째, 불필요한 지시어를 지워야 한다. (이처럼, 그러한...)

'빼도 말이 되는지'를 본다. '빼도 말이 된다' 싶으면 되도록 빼는 것이 좋다.

넷째, 불필요한 접속사를 최대한 빼야 한다. (즉, 그리고...)  275-277


인생에는 별자리를 보는 것과 눈앞의 파도를 보는 것 둘 다 필요하다. 배가 목적지에 잘 도착하려면 그 두 과제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사회가 자본에 의해 지배 받고, 과학기술이 첨단화될수록 인문적 사유 능력은 더욱 절실해진다. 왜냐하면 자본과 과학기술은 그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방향을 정하는 것은 인문적 사유다.  315


비판적 이성이란 '왜(why)'를 묻고 답하는 이성이다. 

비판적 이성을 사용하지 않으니, 삶에 대한 확신이 없고, 정체성이나 진로 문제 같은 것을 서른 가까운 나이에도 고민하는 일종의 정신 지체 현상이 발생한다.

도구적 이성이란 '어떻게(how)'를 묻고 답하는 이성이다. '어떻게 하면 집값을 더 올릴까?', '어떻게 하면 좋은 직장에 취직할까?', '어떻게 하면 컴퓨터나 영어를 잘할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이 도구적 이성에 속한다. 비교해보면 도구적 이성보다 비판적 이성이 훨씬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비판적 이성을 사용해야 가치 지향적인 삶, 후회 없는 삶, 보람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도구적 이성에 훨씬 경도되어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보다 현대 사회의 성격 자체가 도구적이기 때문이다.  317


경제 발전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느냐'를, 가학기술의 발달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편리함을 누리느냐'를 문제 삼는다. 두 가지 모두 '어떻게'를 문제 삼는다. 거기에는 '왜 더 많은 부를 축적해야 하느냐?' 혹은 '왜 더 많은 편리함이 필요한가?'에 대한 고뇌가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도구적 이성'이다. 경제 발전과 과학기술의 발전의 맹목적 추구는 현대사회에서 압도적인 분위기와 생활 방식, 사고 방식을 만들어낸다. 그런 사회 속에서 사는 개인들 역시 도구적 이성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성의 도구화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지지 않고 곧바로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  318


여기 한 젊은이가 있다. 글에게 환경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오염되어 있었다. 그는 여러 경로를 통해 지금도 환경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는 환경 문제에 대해 별다른 감각이 없다.그는 애초부터 좋은 환경 속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평생 환경의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오염된 환경은 가장 익숙한 환경이다. 그런 그가 환경의 위기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경계하며 살기란 쉽지 않다.

마르크스는 "그들은 자신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환경 문제에 관한 한, 독일의 이론가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말이 더 옳아 보인다. 그는 마르크스의 말을 이렇게 바꾸었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잘 알지만, 여전히 그렇게 행동한다."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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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길은 내가 만들어야 한다


제자백가 시대의 종합적 텍스트가 세 권 있는데 <관자> <순자> <여씨춘추>라는 책이에요...

<여씨춘추>도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한 편, 한 편씩 논문을 써서 모은 거예요. 편집만 여불위가 한 거고요. <브리태니커>같은 완벽한 백과사전이죠. <순자>는 유학이 입장에서 정리한 제자백가 백과사전이고, <관자>는 관중의 입장에서 정리한 춘추전국시대의 백과사전이에요.  324


춘추전국시대를 이해하려면 <논어>니 <장자<니 이런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자> <순자> <여씨춘추>, 거기다 <한비자>까지 추가해서 네 권 정도를 먼저 읽어야 해요.  325


<순자>에는 성악설만 있는 게 아니에요. 성악설과 성선설의 대조를 만든 것은 후대의 유학자들이에요. 순자에게서 성악(性惡)이라 함은 자연성, 생물성이에요. 어린아이 같은 터프함. 성악에서 악(惡)이라는 말은 윤리적 합의르 띠는 게 아니라 거칠다는 뜻이에요. 도자기가 안 된 진흙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어야 한다. 즉 학습해야 한다는 거죠. 예법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거예요. 순자가 생각하는 악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거예요. 우린 거칠다는 거죠. 극기복례, 즉 우리의 성은 악 하지만 인위적 노력으로 선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에 비해 맹자는 많이 협소해요. 그래서 우리의 허영에 불과한데도 선이라는 말은 더럽게 좋아해요. 악하면서.(웃음) 나는 바꿀 데가 많다고 자각하는 것이 맞는데, 다 선하대요, 선하기는. 성선설과 성악설은 정치철학 테마예요. 성악설대로라면 우리 인간은 거칠잖아요. 진흙이 제 혼자 그릇이 되진 않는다고요. 선생이나 사회의 규범이 필요하죠. 그래서 정치권력을 정당화해요. 반면 성선설대로라면 인간은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스스로 수양할 수 있어요. 그래서 기득권 세력이 등장하면서 맹자를 복원시키는 거예요. 국가권력이 제후를 간섭하지 마라. 군주가 신하를 간섭하지 말라는 거죠.  328-329


<맹자>는 지식인 자율의 담론이에요. 군주권 중심이 아니라. 유학의 비극은 순자가 죽고 맹자가 뜬 데 있어요. 여기에는 주자(朱子)의 공이 크죠. <순자>를 빼버리고 <논어> <맹자> <대학> <중용>으로 사서를 묶어 '공맹(孔孟)'을 만들어버렸으니. 순자로서는 안타깝죠. 당시 최강이었는데. 그래서 사상가는 뒤에 가봐야 알아요. 뒤에 빛을 내주는 사람이 없으면 사상가는 죽어요.  330


춘추전국시대를 겪은 동양 담론들은 '지금 흥한다고 계속 흔하냐, 지금은 흥해서 사람이 많지만 곧 훅 갈 수도 있다. 그러니 마음을 얻어놔야 한다'고 논리를 전개하는 거예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만든 담론이죠. 애초에 전쟁에서부터 사유를 시작한 것이 동양 담론의 비극이에요.  354


노자의 이름이 노담(老聃)인데요. <장자> 내편에서 노담을 비판해요. 노담이 완성된 인간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다는 구절이 나와요. <장자> 맨 뒤에 <천하(天下)>편이 나오는데, 장자의 후학들이 제자백가 역사를 쓴 거예요. 그걸 보면 노자와 장자는 학풍이 달라요. 장자 후학들도 장자가 노자를 이었다고 보지 않아요. 장자는 국가주의에 반대한다니까요.  357


유가와 묵가 말고는 학파적 자의식이 없었어요. 나머지는 다 개별 사상가들이라고 보면 돼요. 후대에 도서관 분류했다너 사람, 한나라 때 사마천 같은 사람들이 그들을 학파로 묶어서 분류한 거죠.  358


<장자> 내편이 장자 본인이 쓴 쪽에 가깝고, 외편은 후학들이 썼다고 해요.  359


우리한테 시급한 과제는 자유로운 개인이에요... 

가끔 그런 경우도 많이 봐요. 민족주의가 가진 조폭성, 페미니즘이 가진 조폭성, 피해받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가진 조폭성. 용서될 수 있는 조폭성이지만 그 조폭성이 또 다른 공격성을 낳으니까 문제죠. 용서는 돼요. 이해는 되지만 더 약한 사람을 공격할 때는 큰 문제죠. 우리 민족주의가 제3세계 노동자들을 수탈하는 것 보세요. 엄청나다고요. 일본 놈들한테 그렇게 당해놓고서.  367




chapter 7 철학, 한국 사회를 보다


공동체 생활의 원리는 사랑이에요. 아껴주고 도와주는 거예요.  373


우리 사회에 치명적인 텍스트가 <고타 강령 비판>이에요. 저는 인문사회 쪽 사람들이 이걸 제대로 안 읽는 게 참 웃겨요. 왜 안 읽는 줄 아세요? 마르크스가 자기들 입장을 바로 공격하니까요. 좌우지간 분배 얘기하는 놈들은 다 개소리를 하는 거라는 내용이거든요. <고타 강령 비판>은 엥겔스가 'xx' 처릴르 많이 해요. 마르크스가 욕을 너무 많이 써서.(웃음) 엄청 흥분해서 썼거든요. 자본을 극복할 수 있는 '코뮤니즘'의 이념을 기껏 만들어놨더니 어정쩡하게 타협하는 수정주의자들이 자기 이름 팔면서 나오니까 화가 난 거죠.  376


인단 남의 일엔 간섭하면 안 돼요. 어떤 사람이 해를 당하거나 그럴 때에나 간섭할 수 있는 거예요. 나에게만 간섭 안 하면 되다느 게 아니에요. 타인에게 근본적인 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면 우리 이웃이 뭘 하든 건드리면 안 돼요. 반면 누가 나나 우리 이웃을 건드렸을 때는 개입해야 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선이 있어요. 그 선을 지킬 수 있는 여지, 우리 사회엔 그런 게 없는 것 같아요. 

최인훈이 <광장>에서 광장과 밀실 얘기를 하잖아요. 사람에겐 밀실도 있고 광장도 있어야 해요. 광장이 없으면 사람은 파괴되고, 밀실이 없어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면 분열돼서 죽어요. 신상 털기의 핵심은 너무 밀실로 들어간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까지 공적 영역이냐 아니냐, 광장의 일이냐 밀실의 일이냐 하는 균형 감각에 대한 문제거든요. 한 사람의 밀실까지 너무 육박해 들어가는 건 곧 그사람을 파괴하는 거라는 의식을 가져야 해요.  387


제3자들에 대한 애정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391


벤야민은 진보가 없다고 해요.. 피라미드는 파라오가 만든 게 아니라 노예들이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피라미드 안에 노예가 잠들어 있지는 않잖아요. 마찬가지로 타워팰리스를 만든 노동자도 거기서 잠자지 않고요. 거대한 건축물이 있는 곳에 억압이 있어요. 노예도, 노동자도 자기가 원하는 건물을 짓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문제는 이 양상이 좀 달라 보이게 하는 착시 효과가 있다는 거예요. 사실은 진보한 게 아닌데 진보한 것처럼 보이는 거죠. 이런 차이예요. 옛날에는 채찍으로 때려서 일을 시켰어요. 노예의 지상 목표는 도망가는 거예요. 그런데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자발적 노예로 만들어요. 사람들이 제 발로 와서 이을 하겠다고 해요. 자본이 없으면 못 살게끔 조건을 만든 거예요.  400


벤야민의 지적은 인문학 하는 사람뿐 아니라 모두가 명심해야 해요. 채찍으로 안 때린다고 좋아진 게 아니라고요. 더 비참해진 거예요. 옛날에는 탈출했잖아요. 노예들은 자살 안 해요. 탈출의 기회가 있잖아요. 그런데 자발적 복종은 자살과 한 끗 차이라고요.

자발적 복종은 이미 형식적으로는 자살과 마찬가지예요. 자기 부정의 형태죠. '자발'이라고 하면 자기가 주인이어야 하는데, 그 귀결이 '복종'이에요. 그게 자살이잖아요. 이 사회에 살면서 사람들이 조직 탓도 안하고 자본주의 탓도 안 해요. 자기가 버려졌다고 자살해요. 자기는 노예이고 싶은데 버려졌다고. 그래서 면접장에서 노예로 간택받잖아요. 제눈에는 그렇게 보이는데, 이런 얘기 하면 사람들이 싫어해요.(웃음) 

어느 정도 소유가 늘어났다고 해서 진보했다고 믿는 거죠.(지승호)

그렇게 착각한다고요. 사람들은 허영이 있어서 '자발'에만 방점을 찍고 우리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라고 해요. 하지만 귀결은 '복종'이거든요. 사람들에게 이걸 이해시키기가 힘들어요. 자기의 불행을 덮고 안 보려고 해요. 안타깝죠.  401-402


사회민주주의는 분배를 하겠다는 건데, 분배를 하려면 자기가 소유를 하고 있어야 하잖아요. 결국 소유 형식이 유지되는 거예요. 사회민주주의에서는 분배자와 피분배자의 위계가 생겨요. 분배하는 사람이 필요해지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마르크스를 들먹이지만 정작 마르크스는 좌우지간 소유 관계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분배 얘기하는 놈들은 다 사기끈들이라고 하거든요. 마르크스는 일체의 소유 관계를 없애자는 거예요. 마르크스가 원한 건 코뮤니즘,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 개인들의 자유로운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예요. 일체의 소유 형식을 없애자고 얘기했을 때는 국유까지도 포함한 거예요. 마르크스는 사회민주주의가 지배를 영속화하는 제도라고 봐요. 그러니까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말은 '내가 박근혜나 이명박보다 윤리적으로 분배를 잘한다'라는 거예요.  402


지금은 긴 안목으로 봐야 하는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406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느낌이 주는 강한 현재성이 있어야 해요. 현재를 잡아야 해요. 현재를 잡아야 인간을 잡아요. 미래를 염려하면 사랑하기 힘들어요. 내 아이 하나 사랑하기도 힘들어요. 미래를 염려해서 생명보험, 상조보험에 가입하는 것보다 지금 아이랑 낚시를 가는 게 나아요. 살아 있을 때 재밌게 살아야죠. 권력은 그걸 못 하게 만드는 거예요. 

결혼이 왜 문제냐면, 두 사람이 미래만 보는 거예요. 내 집 마련, 육아, 자녀 교육 등등. 둘아서 연애할 때는 그런 게 없잖아요. 미래를 걱정하게 되면 커플 관계는 붕괴되는 거예요. 사랑의 공식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인데, 결혼의 공식은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예요.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사람은 내일 가도 또 내일이 있고, 또 내일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사람은 오늘만 있고, 내일 가도 또 오늘만 있어요. 그러니까 매번 관계를 맺을 수 있어요. 극단적인 원리지만, 사랑의 원리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거예요. 결혼이나 소유, 경쟁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 체제에 포획된 사람들은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고 하죠.  408


<철학vs철학>에필로그에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고 한다. 그리하여 도더고가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라며 신채호 선생의 <낭객의 신년만필>을 인용하셨는데요.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의 대한민국 이런 식으로.(지승호)

애정 결핍이에요. 원리주의자는 애정 결핍에서 나오는 거예요.  411-412


"인문정신을 회족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스피노자와 동학의 가르침을 다시 음미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성찰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비록 실패의 가능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인문정신의 핵심이다"라고 하셨는데요.(지승호)

둘 다 기독교 비판이에요.

그 뿌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건가요?(지승호)

내재주의거든요. 스피노자는 범신론자인데, 범신론의 범(汎 넘칠 범)이 '모든'이란 뜻이에요. 모두가 신이라는 주의가 범신론인데, 그러면 나도 신이란 말이에요. 동학도 죽은 사람들한테 제사 지내지 말고 나를 향해서 제사를 지내자고 하잖아요. 향아설위(向我設位)라는 게 '나를 향해서 위패를 만들어라'라는 말이거든요. 동학 자체가 서학, 즉 기독교를 비판하려고 만든 것이기도 하고요.

제가 스피노자랑 동학을 얘기한 것은 조금만 힘들면 절하고, 자기가 해결해야 하는데 조금만 힘들면 엄마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하는 것을 하지말자는 거예요. 이게 미성숙이거든요. 미성숙을 극복하려면 엄마라는 존재, 신이라는 존재가 없어져야 하는 거고요. 그런 면에서 동학이랑 스피노자는 비슷해요.

동양은 내재주의 전통이 있어요. 기독교인들은 내가 예수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유학에서는 내가 성인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성인이 되는 것을 배우잔항요. 불교는 다 부처가 되자는 거고요. 그 전통이 있기 때문에 동양 사유 전통만 잘 짜깁기하면 동학 경전이 만들어지는 거죠. 동학은 독창적이라기보다 기독교에 대립해 내재주의 전통을 강화한 거예요. 동학, 동아시아의 학문이다. 우린 이걸로 갈테니 서학은 나가라. 이런 게 동학이에요. 이처럼 동학에는 나에 대한 주인의식이 있으니까 일제에 대항한 거예요. 동학농민전쟁이 그래서 일어난 거죠. 굽실거리는 정신이거나 어디 가대는 정신이었다면 그런 게 안 일어났을 거예요. 동학의 혁명성은 거기서 나오는 거죠.  416-417


"매춘부가 사랑을 통해서 맨춘부로서 수명을 다한다는 사실, 벤야민은 왜 이사실에 주목했을까요? 그것은 자본주의가 사랑을 아무리 자본의 논리로 포섭하려고 할지라도, 사랑은 자본의 한계를 돌파할 어떤 힘이 있음을 알아본 것입니다"라고도 쓰셨는데요.(지승호)

벤야민은 파리에서 축제 때 벌어지는 여학생들의 매매춘을 본거예요. 그리고 직업적인 매춘부들이 생겼을 때 매춘부가 사랑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본 거에요. 어떻게 되냐면, 돈을 안 받아요. '돈 주면 안돼'그러면서 울어요. 그러면 매춘을 못 하는 거죠. 그럴 때 매춘부로서 수명을 다한다는 거에요. 벤야민은 그런 것들의 흔적을 찾아요. 마르크스의 테마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거예요. 진정으로 좋은 사회는 사랑은 사랑으로만 바뀌고, 신뢰는 신뢰노만 바뀌고, 우정은 우정으로만 바뀌는 거예요. 그런데 자본주의가 들어오면 돈이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친구도 돈 좀 있으면 만나고 실직하면 안 만나요.

마르크스는 그게 인간관계를 왜곡시킨다고 얘기해요. <경제학-철학수고>에 나와요. 젊은 마르크스의 그 정신을 알아야 해요.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게, 신뢰하지 못하게, 우정을 나누지 못하게 하는 제도이기 때문이에요. 마르크스도 쉬워요.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 그거예요.(웃음) 자본이 어쩌고, 잉여가치가 어쩌고 하면서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것도 결국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인 거예요. 목적을 알아야 해요. 그걸 모르니까 혁명을 한 다음에도 관료주의 체제가 나오고 독재가 나오는 거예요. 자본은 없앴는데 공산당이 너무 강해서 사랑을 못 하게 해요.(웃음)  421-423


지금은 사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하기가 더 어려워진 상황이 된 것 같은데요.(지승호)

애들을 약하게 만들어서 그래요. 사랑하는 법을 어렸을 때부터 길러주지도 않았고요. 미숙하면 사랑 못해요. 그러면 자본에 포섭이 돼요. 자본을 이길 정도로 강해져야 해요. 인간이 더 중요하잖아요. 돈이 있어서 뭐해요? 그렇게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초등학생 때문버 남녀가 막 사랑해야 해요. 그래서 강해져야 돼요. 그런데 경쟁하잖아요. 게임만 하고, 그래서 약해지는 거예요. 애들이 사랑을 많이 해야 해요. 실연도 당하고, 그래야 강해지는 거예요.  424


사랑을 제대로 받아봐야 사랑할 줄도 알 텐데요.(지승호)

부모가 어린애라서 그래요. 우리 아이를 죽이는 것은 상태 안 좋은 미숙한 어머니와 정권과 자본의 결탁이라고 보면 돼요.(웃음) 카이스트 학생들도 부모나 교수는 무시하고 연애에 몰두하면 자살 안 할 수 있어요. 성적이 떨어졌어도 애인이 '난 오빠가 카이스트 다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요' 그러면 그거 하나만으로도 안 죽는 거예요.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어요. 개를 키워도 돼요.(웃음) 사랑하면 안 죽어요. 갈 데가 없을 때 죽는 거예요. 

애들이 사랑할 줄을 모르니까 성적이 떨어지면 여자도 자기를 싫어할 거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해요. 공부도 하고, 음악도 듣고, 산도 가고, 영화도 보고 그러면서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엄마가 성적으로만 사랑받게 만들어놓았으니 성적 떨어지니까 존재감이 없어지는 거에요. 저는 고등학교 2학년짜리들이 카이스트 들어가는 것도 반대에요. 애들을 경쟁시키고 전문화시켜 천재로 만들어서 죽여버려요. 기형적으로 자라게 하는 거라고요.  424-425


지금 우리 사회에는 진보가 없어요. 진보는 사랑이에요. 자기 기득권을 보는 게 아니에요.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까지 봐야 하는 거예요. 한 번 더 고민해야 해요. 이 법이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 고민을 담아내야 진보가 되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는 진보가 없는 거죠. 자기 기득권이 먼저면 진보가 아니라니까요.

자기 것만 챙기는 진보가 어디 있어요? 타인을 사랑하는 쪽으로 얼마만큼 나가느냐에 따라서 진보를 얘기할 수 있어요. 자기 이녀모가 자기 방법과 자기 생각 쪽으로 보수화되는 거예요.  431


억압된 것의 회귀가 정신 분석학의 테마잖아요.  434

정신분석학의 근본 테마는 사회나 가족이 억압적이지 않으면 히스테리 같은 게 안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프로이트의 제자인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는 가정의 억압은 국가의 억압이 축소된 형태라고 얘기해요. 부모가 사회적 가치로 아이를 교육시키니까요. 라이히는 러시아 혁명을 쫓아다녀요. 프로이트가 아끼는 제자 중에 우파적인 사람이 융(Carl Jung)인데, 저는 융을 싫어하거든요. 원형 무의식이라고 해서 우리가 이미 원형적으로 억압돼 있어서 총알이 장전된 상태라고 보는 사람인데요. 이건 완전히 성악설이죠. 사회의 억압 체제는 항상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거라고요. 라이히는 사회혁명이 일어나야 억압이 없어진다고 봐요. 독재자를 제거해야 하고, 자본주의가 문제 있다고 생각하니까 러시아혁명 같은 걸 막 쫓아다니는 거예요.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하리히의 책은 정신분석학의 진짜 중요한 책이에요. 그 책은 좀 많이 읽어봐야 해요.   435




chapter 8 자본주의에 맞서라


일단 철학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소유의 논리인데, 진리라는 것도 소유의 관념이에요. 내가 진리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죠.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것만 봐도 권력은 소유에서 오는 거예요. 아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권력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소유의 논리고, 학점이나 스펙이라는 것도 사실상 소유의 등기부등본이죠. 

행복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요. 하나는 소유하면 할수록 얻는 행복이에요. 다른 하나는 거꾸로 내 것이 줄어드는데도 느끼는 행복이고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돈을 준다든가 음식을 사준다든가, 아니면 밤새도록 병구완을 하면서 내가 가진 에너지를 주는 거죠. 이렇게 내가 소유한 것을 버림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요. 이것이 우리가 고민해봐야 할 공동체 원리거든요. 논리적으로 따져도 후자의 행복이 덧없지 않은 거예요.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서도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를 인용했잖아요. '사랑은 사랑으로만 바뀌어야 하고, 우정은 우정으로만 바뀌어야 한다' 그게 마르크스가 꿈꾸는 사회거든요. 그런데 거기 돈이 개입되면 관계가 왜곡되는 거예요. 가난한 친구는 뭔가 훔칠 것만 같아 개입되면 관계가 왜곡되는 거예요. 가난한 친구는 뭔가 훔칠 것만 같아 보이고, 부유한 친구는 신뢰와 우정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거죠. 마르크스가 젊었을 때 그런 세태를 본 거예요. 사랑은 사랑으로만 바뀌어야 하는데 중간에 돈이라는 것이 매개가 되는 거죠.

소유물이 아니라 타인을 사랑해야 공동체의 기초를 다질 수 있어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 중의 하나가 사랑의 흔적이에요. 그런 사랑의 흔적이 아주 사적인 연애로 응축해 있다는 것을 고민해봐야 해요. 옛날에는 사랑이 굉장히 넓었거든요. 내 가족이나 내 애인의 경계를 넘어갔다고요. <다중(Multitude)>이라는 책에서 네그리는 '왜 우정과 사랑이라는 것이 이렇게 협소하게 부르주아 남녀 관계 속에 국한됐을까?'라고 물어요. 네그리가 꿈꾸는 '다중'은 곧 사랑의 공동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가진 소유물을 더 아끼기 때문에 사랑을 못 해요. 집요한 이기주의죠. 그래서 공동체가 와해돼요. 사적 소유가 강화된 사회에서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는 어찌 보면 다 헛소리예요. 사적 소유가 있으면 공동체는 와해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은 자살률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면 아이가 자살하지 는 않아요. 우리는 노숙자도 많고, 하루에 마흔 명도 넘게 자살하잖아요. 우리 사회가 공동체가 아니라는 거죠. 공동체라는 관념은 있지만 그게 '상상의 공동체' 같은 거라서 실질적으로는 공동체가 아닌 거예요. 오늘의 자살자 43명에서는 빠졌지만 내일의 43명에는 들어갈 수도 있어요. 그렇다 보니 그 안에 안 들어가려고 더 소유를 해야 돼요. 이게 악순환인 거예요. 그래서 갈 데까지 계속 가보는 거예요. 갈 데까지 가보다가 뼈저리게 느껴야 알 수 있는 거죠. 아니, 역사를 보면 뼈저리게 느껴도 모르는 것 같아요. 공황이 일어나도 자본주의가 붕괴되지 않잖아요. 현실을 리얼하고 속직하게 느끼기에는 관념이 너무 비대해요. 각인된 소유의 관념으로 강하게 무장돼 있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소유의 논리는 공동체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거예요.  448-450


제가 농담 삼아 얘기하곤 하는데, 냉장고가 악의 축이에요. 냉장고가 없으면 자본주의 거의 붕괴될걸요? 옛날에는 원주민들이 고기를 잡으면 나눠줬어요. 안 먹고 가지고 있어봤자 어차피 썩으니까요. 대한민국 모든 가정의 냉장고에 있는 음식만으로도 단언컨대 아프리카 나라 열 개를 살려요.(웃음) 그런데 냉장고에 넣어놓고 썩힌다고요. 저장에 대한 욕구죠. 냉장고가 확장된 것이 은행 잔고예요. 썩지 않게 하는 것. 화폐는 안 썩잖아요. 안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거죠.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여러 체제와 전산 시스템이 우리의 소유를 저장해준다고요. 소유 형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자본주의 문명의 특징이죠. 우리에겐 소유욕이 있어요. 배고픈 데도 자기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비범한 거예요. 성숙한 거죠. 자본주의는 미성숙한 야만적 상태 내에 인간을 국한시키는 거예요. 자본주의는 따로 안 배워도 돼요. 그냥 적응이 돼요. 인류가 만든 체제 중에서 자본주의가 인간이 가진 동물적 본성, 사랑과 무관한 소우의 본성에 가장 근접한 체제예요. 어떻게 보면 인류에게 아주 치명적인 거죠.

소유라는 것은 사랑의 형식이 아니에요. 소유의 형식의 제일 반대편에 있는 것이 사랑의 형식이에요. 저 여자를 내가 갖겠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내가 저 여자한테 뭘 주겠다. 저 남자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것이 사랑이에요.  450-451


인류학 책을 왜 많이 봐야 하냐면,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 오래 살다 보니까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몰라요. '소유 형식이 문제야'라고 하면 '안 그런 게 어디 있어?'라고 반문해요. 그런데 인류학 책을 보면 지금 우리 문명의 흐름과는 다른 사회들을 발견할 수 있어요. 지금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소유 형식이 필연적이거나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거죠.  452


"우리는 순진무구함과 폭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숙명이다"라는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휴머니즘과 폭력>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셨잖아요.(지승호)

최소 폭력을 얘기하는 거죠. 우리는 유한자니까 뭔가를 먹어야 하고 뭔가를 해쳐야 하잖아요. 빵도 먹고 배추도 먹어야 하잖아요. 단지 어떻게 하면 그걸 최소화할 수 있으냐 하는 문제일 따름인 거죠. 그러니까 오만하지 말자는 거예요. 인간은 순진무구함을 선택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과대한 폭력을 선택하면 안 돼요. 최소한의 폭력, 이게 중요해요. 균형 감각이 중요한 거고요. 적정하게, 최소 폭력의 지혜가 필요한 거죠.  458-459


괴물과 싸우다 보면 괴물이 된다고,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폭력의 선을 잡기가 어렵잖아요.(지승호)

그게 니체가 한 말이잖아요. '괴물과 싸울 때 조심해라. 너도 괴물이 된다.'  459


요즘 흉악 범죄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매스컴은 근본적인 해결책에는 관심이 없고 선정적인 보도만 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지승호)

한 개인의 범죄로 구조의 문제를 덮어버리는 거죠. 아이를 경쟁시키고, 성을 상품화하고 소비하는 이런 문제들을 덮는 희생양 하나를 만든 것이거든요. 몸에 암이 있어서 겉으로 고름이 조금 나온 건데, 그걸 짜면서 더 가보자는 거죠.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에요. 한 명 또 죽이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편하니까. '우리 사회는 문제없다. 한 놈이 미친 거였어' 이렇게 보자는 거죠. '우리 구조는 깨끗해, 살 만해' 그러면서 또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런 문제가 일어나면 우리 사회를 까뒤집어봐야 하는데, 막상 구조적인 것을 드러내는 글을 쓰면 곧바로 십자포화를 맞아요. '그러면 연쇄살인범이 죄가 없다는 거냐?' 이렇게 나와요. 우리 사회는 그런 담론을 쓸 수 없는 만큼 남루하다고요. 제 말은 두 가지 차원을 같이 보자는 거예요. 일회적인 사건에서 누가 잘못했는지도 봐야 하지만, 그런 희생양을 낳는 구조도 함께 봐야죠.

그런데 이렇게 쓰면 여성 단체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여성 단체도 희생양을 찾으니까 '미친놈들이다' 이러면 편하죠. '미친놈들이 자꾸 여성을 성적으로 희롱한다'라고 하면 편한 거죠. 그러니 끝내 이 자본이란 체제와 맞짱을 못 뜨지. 그게 여성 단체의 보수성이에요.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남성 우월성을 알아야 한다고요. 여성이 상품화되는 건데.  462-463


"발달한 대중매체는 대중매체 속의 이미지들을 현실 세계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서 일종의 찾기 효과가 생긴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나 자연재난이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우리가 전쟁이나 재난을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만든 전쟁 영화나 재난 영화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는데요. 무인폭격기 이런 것이 현실을 게임같이 만들어버리는 거잖아요.(지승호)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가상현실, 전쟁 영화가 너무 리얼한 거예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진짜 실감 나잖아요. 그건 가상이고 과장된 건데, 그걸 현실로 받아들이고 현실의 전쟁을 보면 사람들이 피해를 못 느껴요. 굉장히 심각한 거죠.  463


하이퍼리얼리티, 과다한 현실성, 이게 언론 매체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힘이자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만드는 기제예요. 하이퍼리얼리티가 우리를 지배하면 사랑에도 문제가 생겨요. 왜 쟤랑 키스할 때는 그 영화에서 봤던 느낌이 안 나고 입 냄새만 나느냐는 거죠. 장미도 안 쏟아지고, 종소리도 안 들리고.(웃음)  465


무언가에 몰입하느라 서로를 못 보게 하는 것,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가 그걸 얘기하는 거죠...

드보르의 얘기는 무언가를 멍하니 쳐다보느라 서로를 보지 않는 것, 지도자를 보느라 서로를 보지 않는 것이 나쁘다는 거예요. 또 드보르가 중요한 얘기를 하는데, 자본의 구조와 정치의 구조와 권력의 구조가 같다는 거예요.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은 사람은 이 책이 자본주의 비판이라고 하는데, 사실 하이라이트는 러시아 공산주의 비판이에요. '프롤레타리아 당은 프롤레타리아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스펙터클일 뿐이다'라는 거예요. 

케네디(Jhon F. Kennedy)도 공격하죠. 미국에서 최초로 스펙터클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 케네디거든요. 정책은 허접했지만, 잘생기고 멋있는 대통령은 케네디가 처음이었죠. TV가 등장하면서 케네디가 이긴 거거든요. 상대편은 연설을 못 했지만 정책은 좋았어요.  468-469


<스펙타클의 사회>를 경제 비판, 자본주의 비판으로만 읽으면 협소해져요. 오히려 이 책의 매력은 프랑스 68혁명 때, 소련을 진리라고 생각했던 그때, 소련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한 최초의 책이었다는 데 있어요.

드보르는 영화감독이었어요. 자유로운 예술가, 아방가르드 예술가였죠. 나중에 권총으로 자살하는데, 자기가 스펙터클이 되어버려서 자기를 죽여버린 거예요. ..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어보면 뒤에 나오는 들뢰즈나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같은 사람들이 모두 드보르의 통찰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걸 알 수 있거든요. 실제로 68혁명 때는 중고등학생, 대학생들이 보드리야르도 들뢰즈도 데리다(Jacques Derrida)도 아니고 드보르와 그의 친구 바네겜(Raoul Vaneigem)의 글을 벽면에다 옮겨 썼다고요. 드보르는 공산당의 실체를 폭로한 거예요. 당이 지금 스펙터클, 구경거리로 전락했다고 사람들을 구경꾼으로 만들고 지배권은 자기들이 갖는다고.  471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책을 꼽는다면 현 시점에서는 <스펙타클의 사회>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책은 200개가 넘는 테제로 구성돼 있는데, 툭툭 던지는 식이라 독해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번역했던 분도 드보르를 감당 못 한거 같아요. 다행히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사이트에 불어 원본이나 영역본이 있으니까 그걸 참조해가며 보면 돼요.  472


자본주의와 정치를 붕괴시키는 것은 사실 쉬워요.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처럼 사람들 눈을 멀게 하면 돼요. 그러면 투표도 하기 힘들고, 서로 더듬으면서 살아야 해요. 프라다도 의미가 없고 TV도 못 봐요. 그러면 자본주의는 붕괴돼요. 알량한 시각 문화만 없으면 자본주의는 무너진다고요.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있을 때 눈 감고 있잖아요. 애인 품에 안겼을 때 눈 감고 있고, 키스할 때 눈 감고 있어요. 이런 것이 사실 소중한 세계예요. 촉각의 세계죠. 시각이 아닌 세계에 대한 갈망이 20세기 이후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문학 작품 속에 많이 나와요. 소설가들은 본능적으로 아는 거예요. 시각이 거리 둠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초콜릿 복근을 만든다든가 가슴 수술을 한다든가 지랄을 하지만, 그런 건 옆에 앉는 순간 아무 의미도 없어요. 안타까워요. 사람들이 시각에 집중하느라 다른 감각을 죽이고 있어요.  474


시각의 세계가 곧 자본의 세계이기도 한 거죠.

시각의 세계는 정치의 세계예요. 왜냐하면 보는 자는 우월하고 보이는 자는 열등하거든요.  475


모든 걸 한 방에 해결하는 것이 사랑의 방법이에요. 사랑의 방법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이냐가 모든 진보적인 사람들. 인문학자가 고민해야 할 문제인 거고요. 네그리가 얘기하는 '다중'이 기쁨의 연대인데, 스피노자저 ㄱ의미에서 대상을 가진 기쁨의 감정이 사랑이거든요. 그러니까 다중은 곧 사랑의 공동체예요.  476


자본주의는 우리를 콩가루처럼 쪼개려 해요. 단결해서 같이 쓰지 못하게 해요. 자본주의는 공동체를 싫어한다고요. 개성, 개성 하는데, 소비의 자유를 개성이라고 하는 것일 뿐이죠. 지금 광고에서 떠드는 개성이란 건 다양하게 고를 자유에 불과한 거예요. 사지선다형 식의 자유일 뿐이죠.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고르는 게 무슨 자유예요? 자본은 이렇게 인간을 파편화시키고, 개인과 개인을 덜어뜨려놓을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내면을 산산이 쪼개놓을 수 있어요.  478


이 시대에 필요한 인문정신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지승호)

자본주의에 대해서 많이 숙고해야 돼요. 자본주의를 우회하면 안 돼요. 그게 우리 삶에 고통과 고민을 안겨주는 근본적인 원인이니까요. 산 사태가 나는 것에 대한 직감 능력을 가져야 하는데, 우리는 도토리에 정신이 팔려서 산사태가 나는지도 모르잖아요. 체제가 너무 기만적이에요. 장밋빛 꿈을 계속 미래로 연결시키죠. 자꾸 저축하고 보험 들고 미래를 꿈꾸게 함으로써 현재의 세계를 영위하지 못하게 해요. 미래를 염려하게 하는 사회죠.

권력이든 뭐든 누가 잘해줄 때는 날 잡아먹으려고 그러는 거라는 걸.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걸 잘 알아야 해요. 국가는 수탈과 재분재 기관이에요. 세금은 자발적으로 내는 게 아니라 수탈하는 거지만, 수탈하고 나서 여러 가지 사업에 쓰잖아요. 재분배를 하는 것도 다시 수탈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국가기구의 핵심이에요. 사람들이 재분배를 은총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지도자 만나서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자기가 세금 낸 건 잊어버려요. 그런 것들에 대해 잘 모르니까, 깨알같이 도토리만 보고 있으니까 인문학자나 사회학자 같은 사람들이 지적을 해줘야 해요. '산사태가 일어납니다. 산이 무너질 것 같아요. 다람쥐 여러분.'(웃음)

우선 사람들이 위축되지 말고 당당해져야 해요. 인문학 저자들이나 시인처럼 당당함을 갖춘 사람들이 모일 때 구조의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누가 구조를 바꿔서 우리한테 준다는 것은 그 사람이 다른 식으로 바꿔서 줄 수도 있다는 거예요. 굉장히 위험한 거죠. 

현명한 군주는 좋아하고 나쁜 군주는 싫어하는데,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군주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거든요. 그런 이해에까지 이르러야 해요. 한비자도 국가권력 얘기하면서 이런 얘기를 한다고요. '거리의 필부라면 한 사람이라도 죽일 수가 있겠느냐? 군주의 자리에 있으니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런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가 없어야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좋은 군주, 성군에 빠지지 말고 군주라는 형식 자체의 위험성을 읽어야 해요. 노빠니 뭐니, 특정인을 지지하고 그 사람을 메시아로 추앙하는 분위기가 지속되면 민주주의는 요원해져요.

요새 티체 얘기를 많이 하는데,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런 얘길 하거든요. '너희가 알 수 있는 것, 알아야만 되는 것을 감당할 만한 용기가 너희에게 있는가?' 사실 제대로만 보면 구조적인 문제가 보이거든요. 그런데 구조적인 문제를 보면 엄두가 안 나는 거예요. 비겁하니까. 어떻게 못 할 것 같으니까. 그래서 시각을 협소하게 가지려 해요. 민주주의 덕목 중 하나가 자유인데 자유가 가능하려면 용기가 있어야만 해요. 자기 삶에 굉장히 당당해야 해요. 자본가한테 쫄아 있고 권력자한테 쫄아 있으니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거예요. 데모하지 말라고 하면 데모 안 하고, 진짜 데모크라시(Democracy)는 데모의 정치예요. 직접민주주의가 별건가요? 민주주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이에요. 그런데 지금의 정치는 과두정치예요. 민주주의가 아니에요. 다들 알 텐데도 그걸 안 보려고 해요. 협소한 시각으로만 봐요. 투표할 때만 보고. 그리고 정치인들이 표 달라고 구걸할 때만 보고는 '내가 주인인가 보다'하죠.

쫄지 말고 당당해져야 해요. 그래야 자기 상처라든가 비겁함, 남루함에도 직면할 수 있어요.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굽실거리다가 죽지 말고 고개 뻣뻣하게 들고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책에 사인해줄 때도 이렇게 써요. "항상 당당하세요!"  480-482


우리 인간이 잊지 말아야 할 기본 덕목은 나에게 애정을 준 사람에게 나도 애정을 워야 한다는 거예요. 반대로 나한테 칼을 찌른 사람은 20년이 지나도 공소시효가 없어야 해요... 약자가 어떻게 강자를 용서해요? 받아들이는 거거든요. 용서는 강자들만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강했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착한 척해요. 그러니까 매번 당하지, 사람들이 독해지면 독재도 함부로 못해요. 도갲했다가는 삼대가 힘들다. 애들이 복수한다. 이러면 감히 어떻게 독재를 하겠어요?...

그런데 너무들 착해. 양 떼들 같아요. 그래서 니체가 민주주의가 되면 사람들이 양 떼가 된다고 비판한 거예요. 그렇다고 영웅주의로 가자는게 아니라 개개인이 굉장히 강해야 한다.  482


미워해야 할 사람을 제대로 미워하지 못하면 사랑해야 할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요. 동전의 양면이거든요. 혼자 생각해서 다 용서하고 그러면 안 돼요. 자기는 의식적으로, 순간적으로 용서했다고 생각하는데 화병이 남아요. 그러면 사람이 위축되고 활력이 없어지고 피해 의식이 생겨요. 나중에 그런 상황이 되면 미리 피하고, 겁이 많아지고 소심해지고. 김어준의 표현을 빌리자면 '쪼는'게 되는 거죠.

용서는 '죽일 가치가 없다. 복수할 가치조차 없네' 이럴 때 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 화해하고 잘 지내자' 이런 건 아니고요.  483


자살의 종류도 다양해요. 대개 살아 있는 것이 힘들어서 죽느데, 그건 문제가 있어요. 자의식이 너무 강한 거예요.

자살은 스스로에 대한 폭력이에요. 왜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느냐면 내가 패배자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스스로 패배자인 나를 단죄하는 거예요. 자신에 대한 처형 행위죠. 내가 어떤 사람을 때리거나 죽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부정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패배자고 못난 모습이기 때문에 나를 제거하는 거예요. 

경쟁 사회에서는 경쟁을 내면화해요. 나 스스로가 이 경쟁에, 게임에 뛰어든 거예요. 그런데 내가 졌으니까 끝나 거예요. 누구 탓이 아닌 거죠. 이런 논리로 자살을 하는 거거든요. 애초에 경쟁 판에 안 뛰어들고 '왜 너희가 경쟁 판을 만들어?' 하는 사람은 안 죽어요. 경쟁 판에 뛰어든 아이들, 1등 하는 아이들이 죽는 거예요. 경쟁 판에 뛰어든 것을 긍정한 아이들이거든요. 그런데 뒤에서 10ㄷㅇ 하는 아이들은 꼴찌 했다고 안 죽어요. 그 아이들은 대개 경쟁을 안 받아들여요. 심지어 자기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했다는 등 오만 가지 핑계를 만들어놓죠.(웃음)

애초부터 가난했는데 자살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부자이거나 권력자였다가 몰락했을 경우 내가 진짜 패배자가 된 거예요. 그 경쟁의 게임을 받아들인 거고, 내가 1등 한 모습을 내 자의식으로 받아들인 거예요. '난 1등이야' 그런데 꼴찌가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더 이상 나는 존재하지 않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경쟁을 내면화한 사람들만 자살한다니까요. 자살하는 사람들을 분석해보면 나올 거예요. 아마도 좋은 대학 나왔을 거예요.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카이스트 아이들의 자살이 이해가 안 되는거죠. 잡초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경쟁을 안 받아들인다고요. 사회불만 세력들은 안 죽어요. 그런데 체제의 수혜자였던 아이들, 경쟁을 받아들였던 아이들이 많이 죽죠. 사실은 체제가 살인을 하는 거예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들뢰즈의 자살은 좀 다른 면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들뢰즈가 자살했다니까 생성의 철학자와 삶의 철학자가 자살했다고 의아해해요. 경험의 부재죠. 식물인간처럼 누워서 죽은 상태로 있는데 뭘 할 수 있겠어요? 그걸 이해 못 하는 거죠. 심지어 들뢰즈 연구자란 사람들도 그래요.  485-486


모든 인생론은 가짜예요.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느냐의 문제로 화두를 던지잖아요. 세계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화두가 아니라. 자기계발서의 핵심은 나만 바뀌면 된다는 거예요. 세계는 한 번도 안 바뀌어요. 인생론과 자기계발서를 믿는 사람들은 나중에 자살을 해요.  488


자기 계발은 자기를 서서히 죽여가는 거네요.(지승호)

서서히 죽이다가 자기계발에 실패하면 죽어요.(웃음) 그런 것들이 우리 사회의 특징인데 오래됐죠.  489




chapter 9 음악이 필요한 시간


항상 편집자들에게 강조하는 게 이런 거예요. 책이 많이 안 나가도 된다. 최소 10년 이상 나가는 책을 쓰는 게 중요한 거다.  494


인문학 책은 자기계발서나 스티브 잡스 책과는 달라요. 사람들이 읽었을 때 표면적이고 너무 쉬운 것. 그게 대중적 글이 아니에요. 

중요한 건 독자가 자기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게끔 글을 쓸 수 있느냐예요. 그게 인문학에서의 대중성이죠. 독자들과 우리 이웃이 어떤 심리 상태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요.  496


대중적 글쓰기를 하려면 동시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계속 업데이트해야 해요.  497


얻어걸려서 한두 마디 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유기적 연결이 되는지가 문제예요.  507


자기 스스로 당당하게 살고자 해서 생긴 고통의 폭이 큰 사람이 선생이에요.  513


인문학 하는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지승호)

요즘엔 사람들이 너무 조바심쳐요. 흥행하려고 하고. 그러지 말아야죠. 길게 가야지. 인문학은 농사짓는 것과 같아요. 천천히, 천천히 가야해요. 사람들이 안 듣는다고 폐강하면 안 된다고요. 한 명이었던 수강자가 두 명이 되도록 늘려 나가야죠. 상상마당 아카데미 처음 시작할 때에는 6, 7명이 강의를 들었어요. 다른 선생들은 사람 수 적어서 쪽팔리다고 초기에 다 그만뒀는데 저는 계속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친구들을 데려와서 나중에는 수강생을 제한했어요. 30명밖에 못 들어오니까. 그 당시에 수강생 수가 적다고 투덜거리던 사람들은 아직도 수강행 수가 적어요. 애정의 문제예요.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사람들이 강신주를 모르니 막 들이대는 거예요. 그 사람들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아주 많이 배웠어요. 무엇을 쓰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배운 거예요. 사람들이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알게 된 거죠. 전에도 얘기했지만, 제가 상상마당을 그만둔 건 제 얘기가 메아리 되어 돌어온다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사랑한다면 흉내 내선 안 되거든요. 자기 얘길 해줘야죠. 저는 다른 사람 경험을 느낄 준비와 연습이 되어 있는데, 그걸 잘 안 해줘요.  518


철학이든 음악이든 결국 자기 것을 만들어내야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 거네요.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존중받을 수 있다는 거고요.(지승호)

'나는 나다' 이것에서 뿜어져 나와야 해요.

그러면 인문학적 기초가 있어야 한다는 건데요.(지승호)

인문학적 기초에다 살아 있는 경험이 더해져야죠.  526


중요한 건 정신성이에요. 누군가를 진짜 사랑하면 방법을 찾아내죠. 방법을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에요. 방법 가지고 사랑하는 것을 우리는 바람둥이라고 하잖아요. 저 사람을 진짜 사랑하면 아껴주는 방법을 찾아요. 그래서 정신성이 중요한 거거든요. 흉내 낸다는 것과 표현하는 것은 다른 거니까요...

표현할 정신성이 있다면 기술적인 것, 기법은 다 찾아서 하게 돼 있어요. 기법부터 배운다고 해서 없던 정신성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나니까 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것들, 나의 시선, 이것을 얼마나 긍정하고 표현해낼 수 있는가는 사활을 건 문제예요.

이건 예술가나 저자뿐 아니라 각 개인도 마찬가지예요. 그럴 때 자기를 사랑하게 되고 건강해지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흉내 내면 자신을 부정하게 되잖아요.  527


겁 많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면 안 해본 것은 무서운 것이고, 무서운 것은 나쁘고 저주스러운 것이라고 여긴다는 거예요. 제가 "번지점프 무섭죠?" 하고 물어보면 무섭대요. 해봤냐고 물어보면 안 해봤대요. 갇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그냥 하라고, 하면 된다고, 번지점프를 연속으로 다섯 번 하라고, 다섯 번 했는데 무서우면 그때는 진짜로 무서운 거라고 얘기해줘요. 고소공포증이라는 건 다 뻥이거든요. 산에 올라가면 고소공포증이 있대요. 그냥 무섭다고 하면 되지, 고소공포증은 무슨 고소공포증이에요? 그냥 무서운 거예요. 나 무섭다. 비겁하다. 용기 없다. 그러면 되잖아요. 고소공포증 하면 뭔가 본질적인 게 있는 것 같잖아요.  528


초고 작업을 어떻게 하느냐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쭉 정리해두셨다가 집중적으로 쓰신다고 하셨는데요. 시놉시스 같은 것을 만들어두고 작업하시나요?(지승호)

큰 틀이 있죠. 제가 단행본을 열입곱 권 썼잖아요. 이제는 어떤 걸 강의해도 이게 책이 될지 안 될지를 알아요. 이건 분량이 어느 정도 나올지도 가늠이 되고요. 발악을 하고 중언부언해도 책이 안 나오는 것이 있고, 이건 양이 넘쳐서 세 권은 되겠다는 것도 있고. 그래서 강의안을 쓸때도 이건 일회성인지, 아니면 다른 강의와 연결이 되는 건지 그런 감이 있죠.

저는 강연과 집필을 분리하면 안 돼요. 강연과 집필이 같이 가야 되는 사람이에요. 강연 따로, 집필 따로 그렇게 분리 못 해요. 저는 한 가지 일을 하는 거예요. 겉으로 볼 때는 두 가지 일을 하는 것 같으니까 '언제 강연을 하고 언제 책을 쓰세요?'하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어떤 상황에서든 발언하거나 생각하는 것들을 전체 구조 속에서 연결지어야 해요. 그래야 나중에 그것들이 쌓여서 책이라든가 하나의 정리된 결과물로 나올 수 있어요. 그러니 막 던지지 말고, 뭔 하는지 알고 해야 돼요. 이 발언이 책의 어느 꼭지에 들어갈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서 해야죠. 만약 제게 그런 감각이 없었으면 그렇게 많이 강연 다니면서 책으로 먹고 살 수 없었을 거예요. 지금의 책이 좀 팔려서 강연을 안 해도 어껴서 살면 살 수 있거든요. 가끔 들어오는 인세로. 옛날에는 그게 힘들었죠. 그래서 제가 원하는 작업이 아니라, 예컨대 학술진흥재단 같은 데서 선정해서 국가가 돈 주는 일들, 그런 일들을 의무적으로 해야 했거든요.

벤야민이 그렇게 글을 쓰고 살았어요. 그래서 벤야민을 보면 동질감이 느껴져요. 글들이 짧고 어떤 글들은 왜 이걸 가지고 썼을까 싶기도 한데, 잡지에서 써달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죠. 하지만 거기에도 벤야민의 정신이 담겨 있어요. 벤야민은 그걸 쓸 때도 전체 구조 속에서 어떻게 엮일까를 고려하면서 썼거든요. 단행본 말고 벤야민이 여러 잡지에 기고한 것들을 모아 전집을 ㅁㄴ들어도 일관적이에요. 점묘와 같지만 전체적으로 벤야민다운 그림이 그려지는.

저도 그러고 있지 않나 싶어요. 단행본 뿐 아니라 잡지에 쓴 칼럼, 신문에 쓴 칼럼, 짧은 글들이 하나의 전체를 그려 나가는 거예요. 그런 활동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이걸 정리해서 하나의 작은 우주로 만들어야겠다 싶을 때 집필을 하는 거고요.

머릿속에 있는 것을 조합해서 끄집어내시는 거네요.(지승호)

처음에는 힘들어요. 자료를 모으는 데 집을 지어본 적이 없으니 재료가 모자라기도 하고 남기도 해요. 예컨대 목차를 구성해보니까 경제 문제만 너무 많아요. 그러면 책 균형이 안 맞잔하요. 그런 것처럼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모아야 될 것과나중에 책으로 묶일 것이 최적화되죠. 열일곱 권째 쓰니까 지금은 최적화가 된 거예요. 천재적이어서 그런 게 절대 아니고 열일곱 권의 시행착오가 있었던 거예요. 이제는 대충 길다가 보면 눈에 띄는 거죠. '이건 문으로 쓰면 되겠네'(웃음)

그런 감각은 누구한테 배우는 게 아니에요. 해봐야 해요. 이것저것 모아서 만들다가 너무 ㅁ낳이 모았다. 이건 모자라네. 그러면 돌아다녀야겠죠. 힘드맂만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해요. 적어도 단행본 세 권은 써봐야 그 감이 생겨요. 한 권 쓰고는 '나 안 돼' 이러지 말고 열심히 하면 한 권 정도는 다 쓸 수 있어요. 그러고는 그때 다 절망하죠. 잔뜩 지쳐서, 거기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돼요. 그래서 첫 책 내는 사람들을 항상 격려해줘요. 다섯 권 정도 내고 나면 여섯 번째 책에서는 좋아진다고. 구성도 좋아지고 책 자체가 아름다워진다고 마치 자신이 좋아하는 인문학 책이나 고전을 봤을 때 누껴지던 품격이 생겨요. 균형미도 잡히고.  540-542


실존적인 자기 자신의 세계가 있느냐, 무언가에 대해서 울리모가동요가 있느냐. 이게 중요해요. 저자에게서 그게 사라지면 그 저자는 끝나는 거예요. 시인이 시를 못 쓰는 이유는 그 울림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시 나부랭이는 쓸 수 있지만 이미 시가 아니죠. 감정을 담아서 표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날조하는 거죠. 영화를 보고 울면서 평론을 쓰면 글이 좋잖아요. 그보다 더 센것은 자기가 직접 사랑해보고 힘들어서 쓴 글이고...

울림이 없으면 글을 못 써요.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없고, 사람들이 잘 못됐는데도 안타깝지도 않고, 어떤 현상에 대한 분노도 없고, 노을을 봐도 아무 느낌이 없고.. 이렇게 일체의 감정이 고갈되면 글을 못 써요.  543


책 읽는 것은 다 우연이에요. 서점에서 대충 얻어걸려서 읽거나 누가 선물해줘서 읽거나, 그게 묘미죠. 결정돼 있지 않아요.  547


인생은 만나고 마주치며 지내는 시간이 반, 그리고 그것을 추억하는 시간이 반이에요. 그래서 만나고 마주치고 기쁘고 슬프고 하는 시간들이 나중에 그럴 기력도 없을 때 추억의 대상이 되고 힘이 돼요. 그래서 1년 이든 2년이든 사랑은 진하게 해야 하는 거예요. 나머지 시간 동안 그것만 기억할 수 있어도 살아갈 힘이 된다고요. 기생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젊었을 때 3년을 연애했대요. 그런데 기생은 결혼을 못 하잖아요. 그 후 50년이 넘도록 그 남자랑 사랑했던 추억을 가지고 산 거예요. 벚꽃이 열흘 반짝 피어도, 나머지 기간은 볼품없는 시커먼 나무로 있어도 그 기억 때문에 나머지 시간을 견디는 거잖아요. 겨우 열흘 남짓한 그 시간 때문에 벚나무라고 불리는 거예요.  549




chapter 10 인간을 위하여


"라캉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당신이 소망하는 것인가?' 지금 내가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과거 타자가 욕망했던 것, 혹은 금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불일치를 극복했을 때, 우리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사랑이 아니었으며, 혹은 우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사랑이었다는 때늦은 후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셨는데요. 진실로 내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지승호)

해야 할 까 말아야 할까 망설이게 되는 지점들이 있어요. 검열이 들어오는 거거든요. 그러면 해야 돼요. 기준은 그거예요. 그래야 검열을 넘어설 수 있어요. 일종의 모험이죠. 일종의 모험 같은 것들이 자기를 깨어나게 하는 거니까.  565


인간은 독립을 빨리 못해요. 기지도 못하고 이도 늦게 나니까. 부모 곁에서 부모 말을 들어야 하니까 부모의 문화가 전다로디는 거예요. 인간한테 역사와 문화가 가능한 것은 우리가 과거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인데, 과거에 의존한다는 건 곧 부모한테 의존한다는 얘기예요. 결과적으로 기존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하는 거예요. 어머니가 좋아하는 게 김치면 김치를 먹어야 하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이 1등이면 1등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 가치를 받아들이면 내가 욕망하는 거지만 사실은 어머니가 욕망하는 거죠. 내가 김치찌개를 먹고 싶어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가 김치찌개를 먹기를 원했던 어머니의 바람이 실현되는 거예요.

사람이 재미있는 게, 나를 사랑해줬으면 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자기의 욕망이 달라져요. 내가 좋아하는 남자 친구가 클래식을 좋아하면 클래식을 듣게 된다고요.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내가 안 맞춰주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클래식을 정말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세계에 다가가기 위해서 클래식 티켓도 선물해주고 같이 공연장도 가는 거예요. 그런데 공연장 가서 내가 아무것도 못 느끼면 꼬받 두 시간을 견뎌야 해요. 거기 가서 졸면 돈 내고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거든요. 그러니까 미리 브람스를 계속 들으면서 연습하고 공연장에 간다고요. 그러면 훨씬 좋으니까. 그러면서 클래식이 들리기 시작하는 거고, 그 남자랑 헤어지더라도 나는 브람스를 좋아할 수 있는거죠.

그런데 성숙해진 다음에 사랑할 때, 이성이든 존경하는 사람이든 내가 독립되어 있는 상태에서 사랑할 때는 달라요. 내 욕망을 내가 선택하는거니까.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선택한 거니까요. 스피노자가 얘기했듯이 사랑의 기준은 나한테 기쁨을 주는 것인데, 여기서 기쁨이란 그 사람을 만나서 내 삶의 의지가 확장되는 거예요. 가능성이 더욱 열리는 거예요. 저 인간을 만났더니 좁아져. 그러면 사랑 안 해요. 그 사람을 만나서 삶을 더 누릴 수 있다는 느낌, 확장된다는 느낌이 중요하거든요. 

라캉의 핵심 테마가 우리가 욕망하는 것의 타자성인데, 문제는 그 타자가 내가 선택한 타자냐, 아니면 부모처럼 내가 절대적으로 그 타자에게 던져져서 적응하는 것이냐 하는 거예요. 인생에 있어서 딱 한 번의 혁명이 필요한데, 그게 어른이 되는 거예요. 부모의 가치관을 철저하게 버리는 이 과정은 굉장히 힘들어요. 한번 어른이 되면 어른인 거예요. 자기 욕망을 갖추는 것이 어른이 되기 위한 기본이에요. 핵심은 내가 타자를 선택한다는 거죠. 생존하기 위해서라는 동물적 의미에서 어머니의 욕망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있어야 내 삶이 더 확장된다는 의미에서 적극적으로 타자의 욕망을 선택하는 거죠. 그럴 때 어른이 되는 거예요.

기존의 내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부모나 사회의 욕망을 극복하는 방법은 이런 거예요. 할까 말까 주저하게 되는 행동들이 있어요. 그렇다면 그건 하고 싶다는 거거든요. 그럴 때 해야 돼요.(웃음) 100%예요. 사실 그게 만만치가 않아요. 사실 조금만 잘못돼도 '하지 말걸'이렇게 돈다고요. 그래도 그걸 한 번 내질러보고 직접 겪어보는 거죠. 그게 나쁠 수도 있어요. 그때는 그걸 자기 탓으로 돌리면 되는 거예요. 대개 번지점프 싫어하고 고소공포증 얘기하는 친구들 보면 한 번도 번지점프를안 해본 애들이에요. 하지만 번지점프를 열 번은 해봐야 자기가 그것을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열 번을 했다가 번지점프에 환장하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면 나중에는 패러글라이딩도 하고 헬기에서 뛰어내리기도 한다고요.

예전에 위악(爲惡)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잇어요.(<위악이란 비범한 의지>, <채널 예스>)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억지로 해보라는 건데, 그건 제 얘기가 아니라 이상이 한 얘기예요. <날개>의 앞부분을 보면 이상이 위악의 의지를 가져보라고 해요. 19세기 문학이 도스토옙스키에 갇혔잖아요. 도스토옙스키를 벗어나려면 위악을 저지르는 우아함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貪食)하는 아이러니를 실철해"봐야 한다는 이상의 표현, 그게 핵심적인 거예요. 자기로 서겠다는 것, 도스토옙스키를 벗어나보겠다는 것, <날개>를 위악적으로 쓰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선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기존 가치관에 따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악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행해보는 거예요. 바로 그 악이라는 요소 속에 나에게 맞는 욕망이 있어요. 그런 애들 있잖아요. 무모하게 모험하고, 젊었을 때 도서관에 갇혀 있지 않고 막 들이대는, 일단 해보는 거예요. 해보고 결정하는 거죠. 해보고 나서 '이거 더럽게 나쁘다, 하지 말자'라고 판단하는 건 온전히 내 판단인 거예요. 하지만 하지 말라고 머릿속에서 검열해서 영원히 하지 않는 것은 내 판단이 아닌 거죠. 그걸 겪어내야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악 중에서 '이건 악이 아니라 선이구나'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의 고유성을 찾게 되고 어른이 되는 거거든요. 힘들어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고, 니체 얘기가 맞아요. '너희가 알 수 있는 것. 알아야만 되는 것을 감당할 용기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위악이 우리의 탈출구예요. 악이라고 금지하는 걸 행해보려는 우아함, 사람들이 진짜로 못 먹겠다고 하는 것을 몇 번 반복해서 먹어보는 거예요. 예를 들면 삼합. 전라도 음식이잖아요. 그거 처음 먹을 때 진짜 힘들었거든요. 선배가 먹기 진짜 힘들 거라고, 속이 터질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딱 열 점마 ㄴ먹어보래요. 그래서 꾸역꾸역 다 먹었는데도 싫더라고요. 그런데 일주일 정도 후에 다시 삼합을 먹었는데 그때는 입에서 그냥 굴러다녀요.(웃음) 전에는 몰랐던 거죠. 그런 혐오감 같은 것들을 한 번 넘어가 보는 것, 그게 위악이에요.

이상의 제스처를 좀 배워야 해요.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먹어보고, 무서운 번지점프지만 웃으면서 뛰어내려보고, 불쾌하고 싫은 건데 한 번 해보기도 하고. 위악으로 시도했던 것들이 다 좋아진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걸 자기화한다는 차원인 거예요. 반반이에요. '야, 이거 너무 좋다.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할 수도 있고요. '역시 어머니 말씀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는다더니' 이럴 수도 있어요. 그래도 어쨋거나 내가 검증해본 거잖아요.  566-569


여행 많이 다니고, 만힝 부딪치고, 우리가 봤을 때 '왜 저런 걸 하지'싶은 사람들이 가진 건강함이 있어요. 왜냐하면 그만큼 자기를 찾은 거니까요. 거기에서 오는 여유들이 느껴지죠...

내 삶은 하나인데 너무 많은 가치관이 혼재해 있으니까 복잡하다고요. 복잡한 사람은 행동을 못 해요. 단순해야죠. 어쩌면 행동이 빨리 나오는 편이 나아요. 생각은 항상 뒤에 가도록 해야 해요.  570


위대한 문인들 보면 기인이 많잖아요. 기이한 행동을 많이 하는데. 그게 다 발악이에요. 위악의 행동을 하니 기인으로 보이는 거예요. 겁 안 내고 위악적인 행동, 기괴한 행동을 해요. 문인이라고 하면 사라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니까 회사원이면 엄두도 못 낼 짓들을 하는 거죠. 세종대왕 동상에 올라가서 소변을 본다거나. 경찰에 잡혀가서는 자기가 세종보다 높다고 우기고 나중에 보니 시인이야. 그러면 풀어줘요.(웃음) 인문학은 고유명사라고 했잖아요. 나 자신을 찾으려는 사람들. 

발악을 하는 거예요. 악이라는 것들을 다 해보는 거고요. 자기를 찾으려는 모험이라고 할 수 있죠.

내가 판단했을 때 이건 해서는 안 돼, 이런 느낌이 드는 것들을 많이 해 봐야 해요. 누굴 사랑하면 안 될 것 같아, 이 판단 속에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악인 것 같다 싶으면 확 질러버리는 거예요.(웃음) 진짜 악일 수도 있어요. 그러면 나중에 처절하게 배우는 거죠. 그렇게 인격적인 동일성을 갖춰야 돼요.  571


맨 얼굴로 사는 게 가장 이상적인 사회예요. 그런데 우리는 권력자 앞에서 자기 감정을 토로하지 못하잖아요. 억압 사회예요. 감정을 토로하지 못하는 게 억압의 척도예요.

페르소나를 써야 할 때, 광대 얼굴을 해야 할 때와 내 감정을 토로해야 할 때가에 있는데, 이걸 구분할 수 있으면 그나마 건강하게 사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꿈꾸는 사회는 감정을 토로하는 사회예요. '에이, 저게 뭔데' 하고 대통령한테 지랄해도 사람들이 웃을 수 있는 것, 이게 건강한 사회거든요. 가면을 벗어야 하는데 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가면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커플들, 부부들 보면 알아요. 저 인간들은 둘 다 평생 무장하고 사는구나. 

중요한 것은 페르소나를 약자가 쓴다는 거예요. 가부장제 사회면 여자가 더 많이 써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쓰는 건데. 그런 게 너무 강해지면 보호가 아니라 페르소나에 갇혀버려요.

사랑의 위대함은 페르소나를 벗게 해요. 정직함을 요구하니까요. 그래서 사랑하면 벗게 돼요. 벗었다가 상처도 많이 받게 되죠.  574-575


인문, 사회 과학을 읽은 남자애들이 여자를 잘 유혹해요. 말로 잘 구워삶아요. 조심해야 돼요.  577


'사랑의 경험이 중요한 것은 사랑을 하면 감정에 정직해지기 때문이에요. 제가 아는 사람은 친해지고 사랑하면 진짜 냉정하게 얘기하는데요. 눈에 약간 무당기가 있어요. 친한 사람한테 그 눈빛이 나와요. 진짜 투사 하듯이 얘기를 하고, 눈으로 압박해 들어오면 정직할 수밖에 없어요. 매력적인 사람이죠. 저도 강한 사람이고 정직한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랑 눈에 부딪치면 정말 재밌어요. 대개는 농담 삼아 얘기하는데 가끔 삶에 대해 얘기할 때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제가 맨얼굴을 던지면 그 사람도 맨얼굴이 되고, 농담 따먹기를 하면 그렇게 해줘요. 편하죠. 거꾸로 되면 안 되죠. 내가 맨얼굴 하고 있는데 상대는 가면 쓰고 있고, 내가 가면 썼는데 상대는 맨얼굴 하고 있고, 그러면 안 되죠.

서로 맨얼굴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세밀한 얘기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좋은 거죠. 행복하고.  581-582


현실에 대한 집중도가 중요해요. 그런 사람만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집중할 테니까. 한곳에 신경을 써서 에너지를 너무 많이 낭비하면 다른 쪽에다 에너지를 못 쓰잖아요.  582


사랑은 내려놓는 거예요.  583


"무릇 동심(童心)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만약 동심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진실한 마음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린아이는 사람의 처음 모습이고, 동심은 사람의 처음 마음이다. 처음 마음이 어찌 없어질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렇지만 동심은 왜 갑자기 없어지는 것일까? 처음에는 견문(見聞)이 귀와 눈으로부터 들어와 우리 내면의 주인이 되면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자라나서는 도리(道理)가 견문으로부터 들어와 우리 내면의 주인이 되면서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이러기를 지속하다 보면, 도리와 견문이 나날이 많아지고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이 나날이 넓어진다. 이에 아름다운 명성이 좋은 줄 알고 명성을 드날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또 좋지 않은 평판이 추한 줄 알고 그것을 가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분서(焚書)>의 <동심설(童心說)>에 나오는 구절을 책에 인용하셨는데요. 도심이란 어떤 건가요?(지승호)

동심은 가면 벗은 얼굴이에요. 맨얼굴이에요.

동심을 간직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웃음) (지승호)

그게 아니라 저는 인문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파괴력이 있는지 보여주는 거예요. 저도 옛날에는 비겁했거든요. 진짜 비겁했어요.

"좋지 않은 평판이 추한 줄 알고 그것을 가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라고 했는데, 보통 사람들이 뭐 하나 발각되면 그걸 가리려고 또 거짓말을 하고, 그러다가 망가지잖아요.(지승호)

저 같은 경우는, 예컨대 누가 제가 모르는 시집을 가지고 와서 저한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봐요. 시에 대해서 책을 썼으니까 안다고 생각하고 얘기하는 거죠. 그러면 저는 '안 읽어봤는데요' 혹은 '몰라요. 저는 읽고 싶은 시만 읽어요. 그 시집은 재밌어요?' 이런 식으로 얘기해요. 처음에 바로바로 다 정리해요. 쓸데없이 가리려고 하면 안 돼요.

인문학자가 되면서 제가 배운 건 사람 만날 때 가급적이면 그렇게 정직하게 만나야 한다는 거예요. 인문학은 화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정직하려는 데 도움이 되는 거예요. 김수영도 사상보다 백배나 중요한 것이 정직함이라고 햇어요. 정직한 사람만이 뭐든지 배우니까. 정직하다는 것은 맨얼굴이고, 동심이고, 감정을 드러내는 거니까 그만큼 상처도 많이 받아요. 내 맨얼굴을 저 인간이 못 받아들이네. 이런 것도 빨리 알고요. 그러면 그 인간이랑 안 만나면 돼요. 계속 나보고 가면을 쓰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어요. 그런 인간들은 안 만나야죠.

가면을 벗어야 상대방을 알아요. 가면을 한 번만 벗으면 돼요. 세상이 홍해처럼 가라져요. 내 맨얼굴을 인정해주는 사람과 아닌 사람들. 그런데 가면을 써도 이 가면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나뉘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가면을 벗으면 가면 쓴 모습이나마 좋아해주던 사람마저 없어질 것 같다고 두려워해요. 그런데 안 그래요. 새롭게 재편되는 것일 따름이에요. 그러니까 맨얼굴을 인정하는 사람과 부정하는 사람으로 양분하는 편이 나아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게 살아야 해요. 가면을 썼을 때도 내 가면을 싫어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가면을 벗으면 내 가면을 싫어하던 사람이 나를 좋아해줄 수도 있다는 것은 모르고, 좋아했던 사라밍 없어지리라는 생각만 해요. 그래서 무서워하는 거예요. 패를 다 까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랑 있는 편이 낫죠. 그게 더 건강한 거니까.

가면의 역할은 일대일의 관계를 못 하게 하는 거예요. 가면은 대개 사회적 가치가 있는 거잖아요. 이런 얼굴을 해줘야 상대방이 좋아한다든가. 이렇게 흉내를 내줘야 상대방이 좋아한다든가 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고 연기니까 배역이 정해져 있고 시나리오가 정해져 있잖아요. 그러니까 가면은 일대일의 관계를 막는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가면을 쓰게 되면 일대일 관계가 안 되는 거예요. 가면이라는 존재 자체에 사회적 가치가 들어와 있는 거니까요. 돈 있는 척, 유식한 척, 허점이 없는 척, 지금까지 만난 남자만 해도 열 명인데도 '남자가 뭐예요?' 이러는 거.(웃음)

누구를 사랑하려거나 누구한테 사랑받으려면 가면을 벗어야 해요.  584-587


일단 제가 기본적으로 할 말이 많아요. 글을 쓴다는 것은 가지치기예요.  588


바라건대 정직하게, 더럽게 힘들었으면 좋겠어요. 힘든 게 사랑이라고요. 편한 것은 사랑이 아니고.  589


사랑에 대해 강의할 때 사람들이 물어요. '선생님은 행복해요?' 그럼 저는 이렇게 대답하죠. '불행에서 온 통찰이다. 그게 더 리얼하지 않냐? 행복하면 사랑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다. 행복을 성찰한다는 것은 행복에서 멀어져 있다는 거다. 김수영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자유를 깨달았듯이 우리는 그런 식으로 알게 되는 거다.'

보통 자기들이 압받당하면 비겁하게 '선생님은 행복해요?'라고 물어보거든요. 제가 화날 때는 이렇게 얘기해요. '그러면 내가 불행하다면 너희들은 내가 한 얘기를 안 지킬 거냐? 옳은 것은 옳은 거다. 선생이 못 했다고 해서 옳은 것이 그런 게 되지는 않는다. 철학이 필요한 것은 옳은 것은 옳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옳은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판단은 각자가 해라. 그런 얘기면 지키지 말고, 옳은 얘기라면 그렇게 살면 된다.' 그리고 '옳게 사는 것은 상당히 힘든 것'이라고 덧붙이죠.

그런데 옳은 것을 관철시키려고 살 때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아요. 

연어가 언제 제일 행복하냐면 더 이상 헤엄칠 힘이 없어서 마지막에 손을 놓을 때예요. '아, 이제는 버티지 않아도 된다' 제대로 산 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안식으로 여겨요. 제대로 못 산 인간들이 생명 연장을 꿈꾸죠. 왜냐하면 옳게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인문학은 사랑과 자유예요. 그래서 반체제적이고, 김수영이 얘기했던 것처럼 불온한 거죠.

자유로운 사람나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어요.  590-591




에필로그 -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다웠다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력의 상태를 말한다.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이란 지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지성을 사용할 결단력과 용기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미성숙에 머무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과감히 알려고 하라! 그대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 칸트  593


위대한 잡품을 남겼던 작가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다른 누구도 흉내내지 않고 자기만의 목소리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남겼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루라도 빨리 회복해야 할 인문정신입니다. 이렇게 인문정신을 회복하는 순간, 우리는 정치가나 자본가, 혹은 멘토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인문정신을 제대로 갖춘 사람은 우리에게 항상 물어봅니다. 스스로 주인으로 사유하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은 용기가 있는가? 당신은 주인으로서의 삶을 감당할 힘이 있는가?  595


강연 말미에 저는 항상 반복해서 이야기하곤 합니다. "여러분! 저를 선생이나 멘토로 기억하지 말고, 강신주라는 평범한 한 사람으로 기억해주세요.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하는 어떤 남자가 있었다고 기억해주세요." 저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을 저는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선생님과 학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강신주와 여러분 각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선생님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가라고 가르치지 않으니, 저는 선생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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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세상에 맨얼굴로 당당히 맞서기 위해(지승호)

'인문정신은 자신만의 제스처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강신주는 '지금까지 나온 인문학책들이 가진 전반적인 느낌이 그런 식으로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고 회피하는 것들이었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진정한 인문학의 길은 굉장히 아파요 사실은'이라고 강조한다.  8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다고 자책을 한다. 그래서 자신의 남은 생은 타인을 보듬는 데 쓰겠다고 다짐한다. 잘못을 갚아가며 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설픈 위로는 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에게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하라고 진심을 다해 외치고 있다.  9


부모가 자식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선생이 학생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기다려주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서럽기 때문에 기다림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기다림을 포기하면 행복도 함께 없어집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진한 슬픔이 배어 있다.  10



chapter 1 인문정신은 당당하다


상대방을 자기가 배웠던 담론 지평으로 자꾸 끌어당기면 안 되고, 그 사람과 대화와 소통이 가능하도록 경제학도 정치학도 윤리학도 담론 지평으로 깔 수 있어야 해요. 그런 사람을 철학자라고 하는데, 우리 시대에는 철학자가 별로 없어요.  24


<인문정신을 다시 생각하며>(<기획회의> 313호, 2012. 2. 5)라는 글에서 "인문정신은 자신만의 제스처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곤철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셨는데요. 지금의 인문정신의 핵심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자본주의라는 것이 왜 나쁘냐 하면 자본이란 힘으로 모든 사람을 다 똑같이 돌게 하거든요. 그러면 사람들이 자기 제스처로 못 살죠. 자기 스타일대로 살아가려면 싸우기도 해야 하고 고통도 많이 생길 텐데, 그걸 감당해야겠죠.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돌면 독재자가 안 생겨요. 민주주의라는 것은 제도의 문제 이전에 개개인이 어떻게 주인으로 서느냐의 문제예요. 나 스스로가 주인이 안 되면 노예가 되어 주인을 찾게 된다고요. 그래서 제가 '멘토'를 비판하는 거예요. 좌우지간 스스로 돌아야 해요.(지승호)  27


언어의 궁극적인 목적은 항상 침묵이고, 침묵은 실천이거든요.  28


인문정신이라는 것은 고유명사예요. 사람마다 자기 이름에 걸맞은 스스로의 스타일이 있다는 거죠.  28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당당한 애정, 하나밖에 없다는 소중함을 가지면 자본이든 권력이든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아요. 자긍심이 있어야 해요. 누가 나를 죽인다 해도 '땡큐'인 거죠. '내가 무서운가 보다. 내가 당당하게 사는데 내가 죽는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야'이런 정신이죠.

석가모니가 죽어가면서 부처는 각자 얼굴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니까 자기 스스로 서라고 했는데요. 이 말은 곧 개개인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란 거예요.  29


니체도 "너희들이 차라투스트라를 따르지 않고 너희들 힘으로 섰을 때 차라투스트라는 너희에게 돌아가리라"이렇게 말하잖아요.  30


인문정신을 갖는다고 해서 행복하고 그런게 아니에요. 당당한 거예요. 진짜 인문정신을 가져야 누굴 미워하고 사랑할 수도 있다고요. 눈치 보면서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인문학, 철학의 특징은 주어가 '나'나 '너' 까지라는 거예요. '우리'라고 쓰면 사회과학이 돼요. 정치적 담론이 되고 '우리'와 '나'는 달라요.  33


"아파도 당당하다"라는 카피가 그래서 나온 거예요. 대충 관념적으로 장난치지 말고 맞서라고, 그래야 문제의 핵심에 이르게 돼요.  34


삶이 그렇게 아프고 힘든 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고 자꾸 연어처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에요. 

자신이 가려는 방향으로 관철해가려고 해야 해요.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려면 더럽게 힘들죠. 사회에서 가만히 있겠어요? 그런 사회적 저항에 부딪힐 때 항상 고맙게 여기고 '내가 살아 있나 보다' 이렇게 생각해야죠.  35


들뢰즈는 책을 읽었을 때 감응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거라고 했어요. 두 가지 독서법이 있는데, 하나는 정보를 입수할 때처럼 서류 상자에서 뭘 빼내듯 독서하는 거예요. 논문 쓰려고 어쩔 수 없이 읽는 식이죠. 다른 하나는 감응의 독서법이에요. 감응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하다. 감응 안 하면 던져버려라. 이런 거죠. 내가 지금 좋아하는 것이 중요해요. 내가 지금 안 읽는 책도 내가 성숙해지면 읽을 수 있거든요.

책 읽기는 실천 행위거든요.  40


인문학적 독서법은 감응의 독서법이에요. 내가 감응하는지 안 하는지가 중요한 거에요.

여러분은 왜 독서 토론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대개가 자기가 읽었던 내용의 요지를 합의 보러 온대요.(웃음) 그게 아니죠.  41


토론하는 사람들은 서로 사랑해야 해요. 책이라는 계기로 저 사람을 알아가겠다고 해야 하는데 서로 지적인 경쟁이나 하려고 하니까  딱하죠.  42


자기 소리를 체계적으로 만든게 자기 철학이에요.

자기 스스로 자기 스타일로 생각하고, 자기 것을 만들어야 해요.  43


신자유주의가 무서운 게 자본이란 논리로 획일화시키잖아요.  44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잖아요. '한 사람이 죽을 때 하나의 세계가 없어지는 거다. 한 사람이 탄생할 때 하나의 세계가 탄생한다.' 그게 인문정신이라고요. 상대주의를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 입각점을 얘기하는 거죠.

<철학vs철학>이 왜 야심작이냐면, 묶어놓은 철학자 둘 중 하나는 권력적이고 다른 하나는 인문적이에요.

모두가 똑같이 보면 그게 무슨 사회에요? 하나의 기계고 전체주의죠.  47


<철학vs철학>의 에필로그에 단채 신채로 얘기 썼잖아요. '조선에 불교가 들어오면 조선의 불교가 되어야 하는데 왜 불교의 조선이 되느냐.'  48


재미있는 책은 무조건 읽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쌓인 건데 20여 년 쌓인 다음에 쓴 책이 <철학vs철학>이에요.  49


철학은 쉬워요. 수학 같다고 하잖아요. 몇몇 규칙과 공식만 정확하게 이해하면 편해요. 처음에 벽이 좀 높아서 그렇지 한 단계만 넘으면 참 편해요. 판단력도 빨라지고. 그런데 시는 안 그렇잖아요. 시는 컨디션이 좋으면 읽히고 나쁘면 안 읽히고 그렇거든요. 음악도 그래요. 기분이 괜찮고 바쁜 일도 없으면 브람스가 잘 들리는데, 어떤 날은 소음으로 들려요. 철학은 안 그래요. 초기에 기초적인 학습을 중시해요 하면 돼요.

철학사 공부하고 철학 개념어 익힌 다음에는 철학자 한 명을 완전히 익숙해지도록 파야 해요.  53


인문학 고전을 읽는다는 건 나의 삶이 어떤 철학자나 인문학자에 육박해 들어가는 건데, 내가 시를 못 읽어내고 영화를 제대로 못 보고 철학 책을 제대로 못 읽는다는 건 그만큼 내 삶이 심화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책을 못 읽는 것은 비겁하게 자신의 삶을 심화하지 않고 검열하며 조심조심 살아서 그래요.  55


<철학vs철학>은 앞의 것은 나쁜 철학, 뒤의 것이 좋은 철학이에요. 저는 객관주의를 표방하지 않아요. 철저하게 주관적이에요.  58


이 시대에 철학이라는 학문의 의미는 무엇일까요?(지승호)

분업화에 저항하고, 전문화에 저항하는 것. 철학이 원래 그래요.

철학자는 힘들어요. 닥치는 대로 다 봐야 해요. 과학책도 보고, 음악도 듣고 다 해야 해요.

요즘 말하는 '통섭'이라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지승호)

통섭은 창의적인 것으로 대충 돈 좀 벌어보겠다는 거예요. 자기편과 유사한 것만 끌어당기는 진영 논리가 될 수도 있고요. 

주로 자연과학 ㅉ고에서 자기와 유사한 인문학을 모으는 식인데, 도킨스 라든가 통섭 얘기하는 사람들 보면 자리랑 맞는 것만 골라서 통섭하고 마르크스주의 같은 것과는 통섭을 안 해요. 비겁한 거죠. 실제로는 이것이 더 위험할 수 있어요.... 통섭은 수정주의 라고 보면 돼요.  61-62


단순한 공식인데 경쟁, 분리가 인간 사회에 일어나면 체제가 이기는 거고 반(反)경쟁, 사랑, 공존 쪽으로 가면 체제가 붕괴돼요. 이건 그냥 공식이에요.(웃음) 서로 사랑하지 않게 하고, 서로 경쟁하게 하는 것이 체제고요. 우리가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것은 사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데서 나오는 거죠. 체제를 극복한다고 해서 신뢰가 찾아오지는 않아요. 이미 불신하고 있잖아요. 우리가 사랑하면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어요. 이것은 하나의 인문학적 공식이에요. 우리의 사랑을 막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 비판적 지식인이 돼요.  63


공동체의 와해는 누구를 죽인다는 거거든요. 

경쟁은 공동체 교육을 와해시키는 건데요. 그런 것을 대오 각성해야죠.

인문학자는 텍스트를 두 개 읽어야 해요. 고전 텍스트와 '현재'라는 텍스트, 현재라는 텍스트를 읽어야 그 빛으로 고전이 보이고, 고전 텍스트를 읽어야 현재가 보이거든요.  69


제 글이 쉬워지고 편해진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대중성의 차원이 아니라 사람들과 얘기를 굉장히 많이 해서 어떻게 써야 사람들이 편하게 읽는지를 알아요. 지금 사람들 문제의 보편적이 구조도 알고요. 그러니까 글이 편하죠.

중요한 건 핵심이에요. 핵심을 찌르고 진짜 그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에 들어가는 것이 대중성이고 애정이죠.  71


음악이든 영화든 무용이든 한 인간이 자기를 표현했다면 그 사람은 왜 이렇게 표현했는지 그 느낌 속에서 그 사람의 정신성에까지 육박해 들어가는 연습을 많이 해요. 철학자니까 철학을 가지고 음악을 듣는다. 이런건 아니에요. 영화 볼 때 평론할 것을 먼저 생각하면 어떡해요? 일단 느껴야죠. 영화를 보고 감동했다면 어디가 좋았는지, 그게 왜 좋았는지를 살펴보고 그걸 알아듣기 좋게 잘 풀어서 설명해주는 것이 평론이잖아요.  73


해석하지 말고 먼저 이해하려고 해야 해요.  74


표절은 정말 창피한 거예요. 모름지기 인문학자라든가 사상가라면 다른 사람이 쓸 수 없는 것을 써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썼던 것을 쓰지 말아야죠. 그리고 다른 사람과 비슷한 것을 썼을 때는 쪽팔려 해야죠. 예컨대 김수영에 대해서 쓴다면 저는 김수영에 관한 책을 다 봐요. 그중에 저랑 비슷한 시각이 있으면 안 써요. 뭐하러 써요? 다른 것을 써야죠. 어떤 책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할 때에는 그 책을 딱 한 번만 보고 써요. 그다음에는 안 봐요. 그 책을 흉내 낼 수 있거든요. 책을 탈고하고 나서야 그 책을 다시 봐요. 혹여 영향을 받았나, 내가 그 책에서 얼마만큼 벗어났나. 나는 그 작가에게 얼마만큼 육박했나. 이런 걸 확인하기 위해서요. 이 과정을 마치고 나면 그제야 출판사에 전화하는 거죠. 강신주의 책인데 강신주다워야죠. 모름지기 인문학자라면 그래야 해요. 그런 식으로 벽에 부딪혀 고통도 직접 느껴보면서 리얼리티를 얻어야 해요.  75


남들 모르는 세련된 담론만 떠들어서 팔아먹으려는 게 아니라 전부 제가 소화시켜서 한 얘기예요. 글은 두 종류가 있는데요. 먹다가 게워낸 글이 있고 따끈따끈한 똥처럼 나온 글이 있어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글이 게워낸 글이에요. 제가 고생해서 글을 써보니까 지금은 그게 딱 보여요.  77


'우리'로 들어가면 이미 사회과학으로 들어간 거예요. 인문학이 아니에요. 인문학은 '나'예요. 각자 각자의 나, 그리고 각자 각자의 '나'들이 공명하는 것이고요. 그래서 인문학의 궁극적인 그림이 민주주의죠. 절대적인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내 생각은 있어요. 절대적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이 100% 같지는 않지만, 디테일은 다르지만, 공명할 수 있다는 보편성, 그것이 인문학의 가능성이고 민주주의의 기초죠.  81




chapter 2 사랑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사람은 혼자 잘 놀아야 해요. 혼자 잘 노는 사람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어요. 사랑 찾어서 안달복달하는 사람은 어린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은 안 돼요. 나중에 자기가 지쳐버려요. 혼자 있는 사람들,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어요. 오버하고 징징거리며넛 '우리 만나, 만나'하는 애들도 얼마 못 가요. 사람이 바위 같고 산 같고 그래야죠. 애정 결핍은 다 있어요. 그걸 응시해야 해요. 자꾸 채우려고 하면 안 돼요.  87


사랑에는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요. 예전에는 연애할 때 핸드폰도 없고 삐삐도 없으니까 다섯 시간 기다리는 것도 가능했는데 요즘은 한 시간 기다리는 사람도 많이 않은 것 같아요.(지승호)

기다리는 법을 잘 몰라요. 언제든 버튼만 누르면 바로 되는 것처럼 생각해요. 그런 게 병폐죠. 그래서 기다리는 것에 노심초사할 때가 많잖아요. '왜 전화가 안 돼? 왜 전화기기 꺼져 있어?' 이 정도면 사랑이 아니에요. 기다린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동의어예요.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은 그 존재가 음식 같은 거라는 거예요. 배고파 죽겠는데 짜장면은 왜 안 와. 이런 거예요. 와서 먹고 나면 그다음에는 찾지도 않아요.  89


아이와 절절하게 대화를 해야 한다고요. "엄마는 이걸 원해", "전 싫어요" 이게 관계예요. 사랑의 관걔고 기다리는 관계인 거죠. "엄마는 이게 좋은 것 같아"라고 던져놓고 기다리는 거예요. 이건 굉장히 힘든 거라고요.  91


기본적으로 나쁘다는 것은 자신감이죠. 돈이 없는데도 그러면 뭔가가 있는 거예요. 어떤 자신감이.  93


행복의 높이가 어느 정도 되는 사람들은 그 이상이 되어야 결혼을 하는데요. 불행한 사람들은 조금만 잘해줘도 돼요. 콧물 날 때 손수건 하나만줘도 사랑한다며 바로 호텔에 갈 수 있어요. 거기서 행복을 느끼는 거죠. 그 문턱이 너무 낮은 거예요. 그런 여자들 보면 불행하죠.  95


글의 힘은 애정에 있어요. 관심받으려고 글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특히 젊은 친구들, 그래서 글 쓰겠다고 하면 "사랑받으려고 그러는 거야? 누굴 사랑해서 글을 써야지. 글이 제일 잘 나올 때가 연애편지를 쓸 때야. 그 사람을 사랑해서 절절하게 나를 표현하는 거지. 글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거야"라고 얘기해줘요. 철학 한다는 애들이 산이나 무인도에 가서 <순수이성비판>을 읽는다고 해요. 저는 지랄을 한다고 하죠. 모든 문제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고, 고독은 그 다음에 있는 건데 혼자 있을 때는 그냥 자라고 하죠. 음악을 듣든가.  102-103


안에 쓰레기가 많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흐려져요.  104


서로 배워야 해요. 배우려면 비워야 하고요...

세상은 이분법적이에요. 그걸 초월하는 순간 고상한 책이 나오고 보수적인 책이 나오는 거예요. 저는 죽을 때까지 이분법적이었으면 좋겠어요. 나쁜 놈은 나쁜 놈이라고 하고, 50, 60대에 썼는데 30대에 쓴 것처럼 읽히는, 날카로움을 가진, 칼이 무뎌지지 않은 인문학자가 돼야죠...

살아 있으면 싸워야 해요.

저는 '나이 든' 사람들을 싫어해요. 그군 원숙함이 아니에요. 지침의 표현이죠.  105


인문학자로서 꼭 해요 할 것이 종교 비판서를 쓰는 거예요. 

인간끼리 결정을 보자는 것이 인문정신인데, 비겁하게 수틀리면 신한테 가는 것은 권력이나 자본한테 가는 거랑 똑같아요...

인문학의 적은 자본이 아니에요. 제일 많이 팔리는 책이 종교책이에요...

네가 노력해서 바꿀 수 있고, 너의 남루함을 자각해야 하고, 자꾸 저승에 있는 천사를 볼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여기서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걸 인문학자가 이야기해야만 해요.  106


"라캉에 따르면 불행히도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과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은 일치하지 않는다. 전자가 페르소나(persona)라면, 후자는 맨얼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페르소나를 찢어버리고 맨얼굴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연기가 아니라 삶으로서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지승호)

인간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해요. 그런데 자본의 논리도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 종교의 논리도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거예요. 항상 오늘은 수단이에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사람은 내일돼도 또 오늘이잖아요. 그날 잘 살면 돼요. 우리에게 내일은 잇다는 사람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데, 내일이 되면 또 내일이에요. 신자유주의도 그걸 요구하는 거잖아요. '지금 빡세게 고생하면 나중에 편하다.' 그러다가 죽는 거예요. 이게 사람들을 지배하는 논리거든요.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와 기독교는 상당히 유사한 데가 있어요. 돈이 안식과 구원을 준다는 점에서도 그렇고요. 벤야민도 그랬어요. 자본주의를 종교성으로 다뤄야 한다고, 자본주의의 핵심은 종교성에 있다고, 사람들이 돈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믿는다고. 종교 비판은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 비판, 대표자를 추종하는 황당무계한 것에 대한 비판 등을 총괄하는 것이에요.

원리주의에서는 선과 나와의 관계만 중요하고 인간들이 안 보여요. 원리주의가 생기면 가족은 안 보이고 신한테 올인해요. 그리고 원리주의가 생기면 목사가 얘기한 대로 정치적 행동을 다 결정하고 이웃을 안 봐요. 그 모습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으로 나오는 거죠. 돈에 올인해서 가족을 돌보지 않는 부유한 아버지처럼 신에 올인해서 가족을 안 돌봐요. 가지들은 믿어요. 내가 신에게 구원을 청하니 가족들에게 은총이 있을 것이고, 내가 돈을 버니 가족들이 행복할 거라고, 중요한 것은 신에 올인하거나 돈에 올인하면 인간관계가 붕괴된다는 거예요. 사랑이 무너지는 거죠. 그래서 종교를 비판하는 거예요.

원리주의가 생기는 것을 진짜 조심해야 해요. 원리주의라는 것은 원리를 믿고 따르고, 그 원리를 장악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헤게모니를 독점하는 거잖아요.  108-110


기독교인들은 제가 '사랑해야 한다'고 하면 '아, 예수님의 말씀이야'이래요.(웃음) 그런데 제 말은 사랑을 하려면 신을 죽여야 한다는 거거든요.  111


'너는 그 남자를 사랑하는데 그걸 부정하고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라고 한다. 네 감정을 부정하는데 네가 네 삶의 주인이니? 네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그랬던니 얘가 전화하면서 울더라고요.  115


"초월자에 대한 지나친 몰입은 자신의 삶을 돌보지 못하도록 만든다"라고 하셨는데요. 그게 종교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사랑할 때도 상대방을 초월자처럼 받아들이게 되면 어렵잖아요. 동거를 해보라는 것도 동거가 그 환상을 깨는 과정일 수 있다는 것일 텐데요.(지승호)

사실은 환상을 깨라는 거죠. 환상이 깨지지 않으면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난 거고요. 서로한테 그런 사람인지 항상 응시를 해야 해요.  116


성적인 관계는 두 사람이 맺을 수 있는 수만 가지 관계 중 하나일 뿐인데 그걸 금기시하니까 그것에만 집중해요.  117


다른 것은 다 용서되는데, 성적인 것만 용서가 안돼요. 그래서 음란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진짜 무서운 것은 내 부인이 독서 모임에서 카프카를 읽고 다른 남자와 영혼이 통하는 거거든요. 그게 진짜 음란인데, 우리는 손만 안 잡으면 되는 거예요.(웃음)  118


제도를 생각한다는 것은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인데, 그러면 두 사람의 사랑에 금이 가기 시작해요.  119


결혼은 사회제도예요. 연애할 때는 오늘 맛있는 것 먹자. 영화 보자고 하는데, 결혼하면 아끼자고 하잖아요.  122


사랑은 '아까징끼' 같은 거예요... 만병통치약.  123


한 인간에게 단 한 번의 혁명이 있는데,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거예요. 정신적이든 정서적이든 경제적이든 완전히 독립했을 때 어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별로 없어요...

빛과 그림자가 다 보여야 되는 거예요. 나에게 각별한 아버지면 아직 독립을 못 한 거예요. 좋은 것만 보는 거겠죠. 어머니의 추한 모습, 다른 사람보다 못난 모습까지 보여야 해요. 그런 빛과 그림자가 보일 때 독립하는 거라고요. 어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안 해요. 그래서 부모가 죽는 것이 더 나빠요. 판타지를 자극해서 아버지를 날조한다고요.  125


결혼과 동거 중에서 결혼이 안정적으로 보이죠? 그게 남루한 거예요. 두 사람이 사랑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틀인데, 기존의 어떤 틀에 들어가야만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사랑은 두 사람이 감당하는 거예요. 감당 못 하면 끝나는 거죠. 사랑하려면 미래를, 영원을 꿈꾸지 말아햐 해요.

지금 내가 저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해주고 있나. 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게 나한테 행복이다. 이런 것에만 최선을 다해 집중하면 된다고요.  127


가진 사람만이 버릴 수 있으니까요. 못 가진 사람들은 채우려고 해요.  129


실천적인 단계를 보자면, 일단 생계의 위협을 없애야 해요. 생계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에게 인간적 행위를 요구하는 건 무리예요. 

우선 그 조건을 갖추고 나서 사랑하는 방법으로 쓸 수 있는 정신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해요...

옛날에는 농민 봉기가 있었잖아요. 농민 봉기는 6개월 안에 결판을 봐야 해요. 벼를 심어놓고 농민 봉기가 일어나면 수확할 때쯤 다 흩어지거든요. 동학농민운동이 붕괴된 것도 벼 수확기가 돼서 그래요. 혁명이 성공하려면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요. 지주나 호족이 '괜찮다, 썩더도 된다. 우리가 식량 준다'이러면 성공해요.순수한 농민전쟁은 힘들어요. 그리고 또 하나, 시골에는 농한기가 있어서 혁명이 가능해요. 도시에서는 혁명이 일어난 적이 없어요. 다들 직장 다니느라 바빠서, 쿠바혁명도 시골에서 시작했다고요. 러시아혁명도 그렇고 심지어 나치(Nazi)도 바이에른이라는 농촌에서부터 세를 키워갔잖아요.  131




chapter 3 철학적 시읽기와 김수영


우리는 해방이 안 됐거든요...우리가 이념 때문에 갈라진 게 아니라는 것을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몰라요. 이념 때문에 분단됐으면 차라리 멋이나 있죠. 우리는 외세 때문에 분단됐거든요. 남북에 들어온 외세에 이념이 있었고, 남북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이념에 맞춰 살았을 뿐이에요. 이념에는 경직성이 있거든요. '걔네들이 얘기했던 대로 이렇게 살아야 해'하는 제스처나 흉내 내니까 양쪽 다 경직돼 있기는 마찬가지죠. 김수영은 양쪽 체제가 가지고 있는 이념이라는 것이 덧없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135-136


정치철학자인 카를 슈미트(Schmitt)가 '정치의 본질은 적과 동지의 구별에 있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정치는 억압이라고 봐야 해요. 억압의 근본 문제는 적과 동지예요. 체제 내부에서 갈등이 벌어지고 헤게모니가 흔들릴 때 독재자나 권력은 외부와 전쟁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내부 단합을 모색해요. 제가 농담 삼아 하는 얘기가 있어요. 딸이 어머니를 부정하는 콩가루 집안이 있는데, 그 어머니가 가족을 단합시키려면 옆집 아줌마와 머리채 붙잡고 싸우면 돼요. 딸한테 '너 누구 편들래?'하고 던지는 거죠. 그러면 딸이 자기 어머니 편을 들고, 그렇게 대동단결해서 며칠 가요. 그러다가 옆집 아줌마랑 갈등이 없는 상태에서 보면 다시 어머니가 미워 보이는 거죠. 그러면 어머니가 또다시 옆집 아줌마랑 싸워요. 이게 우리 사회예요.  141


<연꽃>이라는 시와 <김일성만세>를 같이 읽어야 해요. 연꽃은 사회주의자를 비판하는 시거든요. 인간을 못 보고, 인간의 자유를 못 본다고 이념이 강조돼도 인간의 자유는 억압되는 거예요. 자본이 강조돼도 인간의 자유는 억압되는 거고요. 인간을 제외한 일체의 외적이고 초월적인 힘, 권능, 다른 근본, 근거를 제기하면 억압이 오는 거예요.  142


어쨌든 김수영은 동베를린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부산에서 문인들을 상대로 강연할 때 '정치적 자유가 없는 곳에서 그나마 예술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 마라. 표현의 자유가 없는 곳은 예술의 자유가 없는 곳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해요.  148


지성인들은 좋은 사람 콤플렉스를 버려야 해요. 자기 얘기를 뚜렷하게 하면 그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과는 친해지고, 싫어하는 사람이랑은 틀어지는 거예요. 어쩔 수 없는 거죠.  149


다 좋다고 한다면 이건 무지렁이예요. 보잘것 없는 엷은 인간이에요. 제대로 살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홍해 갈라지듯이 갈라지거든요. 내가 분명하게 그 선을 그거워야 해요.  150


시인들이 시집 제목을 정할 때 가장 중요한 시를 고르거든요. 자신의 모든 시를 이 느낌으로 읽으라고 시집 제목으로 말해주는 거예요.  151


억압이 있는 권위적인 가정에서 아버지가 잘못했다고 저항하면 한 대 맞잖아요. 그런데 말을 했는데도 안 맞았다면, 내가 아버지의 권위를 수용해서 안 맞을 만한 말을 했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이걸 알아야 해요. 억압이 상존하는 곳에서 자유에 고통이 없으면 허용된 자유고 길들여진 자유예요. 그런데 다 자유롭대요. 자본의 억압부터 오만 억압이 다 있는데, 알아서 다 피하는 거예요... 지금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는 다 허용된 자유, 기만일 뿐이에요.  154


우리는 자유를 몰라요...

김수영은 그걸 잊지 않아요. '너희에겐 언어의 고통 이전의 고통이 없다.'.. 자신이 자유롭고 당당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부딪칠 때 , 그때 느껴지는 고통이에요.  155


억압이 있는 사회에서 고통이 없다면 동물원 울타리 안에 풀어져 있는 동물과 비슷한 거죠.  156


간짜장을 제일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러면 제사상에 뭘 올려야 돼요? 간짜장 올려야 하잖아요. 홍동백서만 따질 게 아니라, 절차를 생각한다는 건 인간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인간을 포획하는 하나의 방식이에요. 보수적인 방식이죠.

'절차적 민주주의'라고 하는데 민주주의가 어떻게 절처예요? 각자가 주인인데 왜 절차를 미리 정해요. 사람들이 절차를 정해야죠...

절차적 민주주의에 초점을 두면 절차와 민주주의를 같이 놓음으로써 민주주의를 희석시켜요. 형식만 따르면 민주주의를 같이 놓음으로써 민주주의를 희석시켜요. 형식만 따르면 민주주의가 되리라고 생각해요. 굉장히 잘못된 생각이에요.  157


절차를 근본으로 생각하면 민주주의에 저해가 될 수도 있고 억압이 될 수도 있다고요. 그리고 절차라는 규정을 정확하게 아는 전문가들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포획해버려요...

다수를 지배하는 사람들이 절차를 강조하는 법이에요. 까먹지 말아야 해요. 절차의 최종 심급에는 다수결, '쪽수'로 가자는 얘기가 있어요. 정치적 야욕이 있는 거예요. 인간이 가진 역동적인 힘, 사랑이 가진 참여의 힘이 있는데, 절차가 강조되면 그게 억눌리고 소멸돼버려요. 그러니까 절차만 주장하는 건 위험한 거죠.  158


관념의 자유, 언어 유희만 있고 삶에서 아무것도 안 봐요. 김수영은 총알이 날아오는데 안 피해요. 오히려 총알이 날아오는 쪽으로 가는 거예요. 가서 총알 하나 맞고 비명이 나오면 그게 시 한 편이에요. 서정주라든가 나머지 시인들은 총알이 날아오면 앉아서 피해요. 그랬더니 꽃이 보이는 거죠. 꽃은 해석할 수 있잖아요. 그게 시를 보면 보여요. 요새를 꽃이 아니라 카페예요. 거기서 지겁함이 보이고, 그들의 비겁한 제스터에서 뭘 피했는지가 읽혀요.  163


모더니즘의 정신은 세련되게 글 쓰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쓰는 거예요. 새로움의 근거는 나라는 사람은 천년 전에도 없었고, 천년 후에도 없다는 고유성에 있는 거고요. 자기 자신이라서 쓸 수 있는 글이니까 새로운 거예요. 이게 모더니즘의 정신이에요.  166


저는 자유로운 사람만이 인간의 억압 구조를 발견한다는 것을 알거든요... 

자유로운 사람만이 고통을 느낀단 말이에요.  173


언어의 고통 이전에 삶의 고통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삶의 고통은 자유로운 사람만 느껴요. 굴종하고 복종하는 사람은 못 느낀단 말이에요.  174


위대한 인문학자와 사상가가 나오는 조건은 그 사라므이 당당함이에요. 포로수용소에서 김수영만이 그랫다는 거예요. 포로수용소도 하나의 사회예요. 혀용된 것만 하면 돼요. 억압이 잇다고 저항이 일어날 것 같아요? 안 그래요. 저항은 자유로운 사람만 일으켜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덕목이에요.  175


'기존 담론들 다 배우고 양자역학 다 배우면 뭐해요? 기존 담론의 틀 속에서 논물을 쓰면 새로운 발견을 못 하니까 자유로워야죠.  175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자신의 철학이 정리된 다음에 오스트리아 오지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앙들을 진짜 많이 때렸어요. 얘네는 초등학교만 다니고 농사지어야 하는 애들인데, 비트겐슈타인은 인격자로 키우려는 거죠. 부모들은 애들을 왜 때리느냐고 난리인데 정작 아이들은 한 명도 문제 삼지 않았던 거예요. 왜냐면 비트겐슈타인은 아이들을 사랑했거든요. 아이들은 맞을 때 알아요. 그런데 부모들은 그걸 빌미로 공격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이 자꾸 애들 보고 너희는 성숙해져야 하고 촌구석을 떠나야 한다고 하니까. 농부들에게 지식은 경운기예요. 아들을 선호하는 이유도 가마니를 나를 수 있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너희는 경운기가 아니다. 너희는 인간이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아이가 '나는 경운기예요' 이러면 한 대 때리는 거예요. 아이들은 자기를 사랑해서 그러는 줄 다 알죠. 아이들은 날 사랑해서 때리는 건지 아니면 부인이랑 싸워서 날 때리는 건지 다 알아요. 그러니까 사실은 이 문제예요. 어떤 사람이 잔인하고 폭력적인데 나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감당해야죠.  179


사랑하면 연인의 가슴에 고개 처박고 심장 소리만 듣고 있는 것이 제일 좋잖아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이나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찾을 때 사랑은 붕괴되는 거예요. 이유가 없어요. 이유는 제3자가 심판하려고 할 때나 대는 거예요.  182


"시인이 물속으로 직접 들어가 온갖 물고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존재라면, 철학자는 그물로 끌어올린 물고기를 다시 확인하고 만져보는 사람입니다"라고 표현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지승호)

흔히들 시는 주관적이고 철학은 객관적이라고 생각해요. 시가 주관적인 것은 맞지만 보편적이기도 하거든요. 철학이 오히려 주ㅗ간적일 수도 있어요. 시는 주관적이지만 보편적인 데가 있고, 결국에는 같다는 거죠. 그걸 강조하려 했던 거예요. 제가 시와 철학을 왜 같이 엮었는지 보여주려는 거고요. 

핵심은 경험을 우회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책을 보는 것도 간접 경험이에요 간접 경험이라도 해야 해요. 경험을 했느냐 안 했느냐의 잣대는 마음이 움직였느냐예요. 경험을 하기 이전의 마음 상태와 한 후의 마음 상태가 달라야 해요. 책을 읽어도 간접 경험이 안되는 건 책을 읽으면서 밑줄 치고 중요한 것 외우고 해서 그래요. 그건 책 읽는 게 아니에요. 읽었을 때 작가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것이 간접 경험이거든요. 제가 만난 소설가들은 다 자기 유년 시절을 가지고 초기작을 써요. 그다음서부터는 취재예요. 자기를 퉐하게 봤던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 얘기를 들으면 금방 공감해요. 그 리얼이티를 확보하지 못하면 작품을 못 써요. 위대한 소설가가 되려면 자기를 투명하게 정리하고 자기 삶에 대해 얘기하다가 다른 사람의 삶을 공감할 수 있는 지점에까지 가야 하거든요. 

제일 중요한 것은 직접 경험이에요. 직접 경험은 진짜 중요한 거예요. 감정이 일어나는 것, 이게 인문학의 핵심 정신이죠. 분노의 감정이 안 일어나는데 분노에 대한 글을 쓰면 안 돼요. 인문학책은 사람들에게 그 감정을 일으켜야 해요. 그 감정이 분노든 뭐든, 사회과학이 인문학은 아니지만, 좋은 사회과학 서적은 분노도 일으켜야 해요. 요즘 사회과학 서적들은 너무 건조해요. 사람은 감정이 움직여야 움직이거든요. 철학은 머리로 들어와서 마음까지 흔들어야 좋은 철학이에요. 시는 마음으로 들어와서 머리를 흔들어야 하고요.

좋은 철학책은 지적인 이해와 분석을 요구하는데, 책이 딱 끝나고 나면 마음속에 확들와요. 후배들이랑 원전 강독할 때 '책이 네 마음을 울려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 사람에 대한 논문을 써야 한다. 그걸 써나가는 과정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과정이고 그 사람에게서 독립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논문을 써야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나중에 독립된 저자로서 살 수 있다'라고 조언해줘요. 하지만 대개 안 지키고 중요하다는 텍스트가 있으면 인용하고 요약해서 논문을 쓰죠. 안타까워요. 강의할 때도 항상 제자들에게 '감정을 못 지키면 끝장이다. 오늘 너희들 감정이 들었니?'하고 얘기해요. 

왜 감정이 들어야 하냐면요. 원래 사람은 다 감정이 들기 마련인데 감정을 억압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있어요. 드러내면 안 되는 거예요. 다쳐요. 예컨대 영국 왕실 근위병처럼 감정 없이 굳어 있는 사람들, 이게 최악의 모습이에요. 걔들이 왜 감정이 없겠어요. 여행 가서 그런 애들 보면 앞에서 막 웃겨준다니까요. 제가 인문학자잖아요. 가서 웃겨요.(웃음) 감정을 만힝 죽이면 나중에 진짜 죽어요. 감정이 없을 때 인간은 기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의 본질은 감정이에요. 감정대로만 하면 세상이 안 돌아가니까 이 감정을 어떤 통로로 뚫어놓을 것인가 고민하기 위해 이성이 필요한 거죠. 딱 그정도로만 이성은 의미가 있어요. 이성은 절대 감정에 저항하면 안 돼요. 감정을 흐르게 하는 소통 창구를 찾는 역할을 해야 돼요. 그런데 이게 반대로 돼 있는 인간은 이성이 너무 강하죠. 감정을 억압해요. 그러면 인문학이 이상하게 읽힐 수도 있어요.  185-187


'김수영에 대한 나의 해석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 건 김수영에 대한 나의 사랑이 당신들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해석이 강한거다'라고요. 모든 해석의 강도는 사랑의 강도에서 측정되어야 해요...

그래서 얘기하는 거죠. 당신들은 나보다 김수영을 더 사랑하느냐고 사랑을 해야죠. 집중하고 관찰하고, 그래야 디테일이 보여요.

저는 우리 문학평론가들의 글이 마음에 안 들어요. 첫 번째 연을 분석하고, 두 번째 연, 세 번째 연이 어쩌고 저쩌고. 한데 어떤 사상가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으려면 그 사람이 지금 살았더라면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라는 데에까지 육박해 들어갈 수 있어야 해요. 사람들은 제 책이, 제 해석이 평론가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 거냐고 자꾸 물어보는데, 평론가들이 김수영을 제대로 사랑한 적이 있나요? 김수영을 4.19의 시인이라고 하질 않나. 자유의 시인이라고 하면서 그 자유의 의미를 제대로 숙고하지도 않잖아요.  189


체제가 우리를 길들이려고 하는 이미지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요. 하나는 CF등을 통해서 보여주는, 예쁜 여자가 멋진 옷을 입고 있거나 행복해 보이는 여자가 가전제품을 들고 있는 것 같은 유혹의 이미지예요. 또 하나는 우리를 쫄게 만드는 이미지예요. 대표적인 게 CCTV 같은 것, 그리고  MRI나 CT 촬영 같은 진단 영상들이에요. '나중에 용의자가 될 수도 있다', '나중에 병들어 죽을 수도 있다'라는 공포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죠.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게 만들어요. 미래를 보게 되고 미래를 생각하고 잇으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랑 얘기를 못 해요. 내일 시험 걱정하면 이 사람이랑 못 있거든요. 그러니까 체제가 노리는 것은 인간의 관걔를 깨알같이 만들어서 분리시키는 거예요. 미래에 대한 공포의 이미지가 그런 작용을 하는 거죠.  197


인문학은 나의 발견이거든요... 모든 글은 고통이든 기쁨이든 감정을 느낀 다음에 써야 하는 거예요... 감정이 안 들었는데 있는 것처럼 하면 사기 치는 거고, 그런 글은 사람을 못 울려요.  209


항상 강조하는 게 스스로 가지 감정을 못 지키면 아무도 안 지켜준다는 거예요. 저는 제가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기 감정을 내색 안 할때 너무 힘들어요....사랑받으려면 항상 자기 감정을 드러내야 하고, 싫은 건 싫다고 해야 해요. 그러지 않고서 자기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기적을 바라는 거죠.  210


원문을 기계적으로 짜집기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에 감응을 했느냐, 이 관점에서 쓰는 거죠. 

철학(Philosophia)에서는 소피아(Sophia)가 아니라 필로스(Philos)가 먼저예요. 사랑을 하면 지혜로워지는 거지, 거꾸로는 아니에요. 지혜에 대한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하면 알게 된다는 거죠. 별을 사랑해야 별에 대해 많이 알게 되고, 여자를 사랑해야 여자에 대해 많이 알게 되는 거죠. 여자에 대해 많이 안다고 사랑을 제대로 하나요? 그건 아니죠.  219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려면 남을 따라가지 말고 홀로 나아가야 해요. 비유를 하자면, 위대한 사람들이 걸어갔던 발자국이 눈길에 남아 있는데 그게 그들의 스타일인 거예요. 그런데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면 내 것이 안 남잖아요. 그쪽 길이 아니라 눈 덮인 길로 걸어가야 자기 발자국, 즉 자기 스타일이 생기는 거죠. 누구를 흉내 내면 안 돼요. 내 감정으로 밀어붙여야 해요.  223




chapter 4 제자백가를 통하라


동양 고대 텍스트, 제자백가 텍스트에서 우화가 많은 것은 왕한테 얘기한 거고, 노골적인 건 제자한테 얘기한 거예요.  241


인문학 책을 읽을 때 핵심적인 것은 시선이에요. 잘못 공부하는 인간들은 시선이 아니라 디테일한 묘사들만 외우는데, 중요한 건 시선이에요. 그 시선을 가지고 그 안경을 가지고 우리 삶을 봐야죠. 

그 안경으로 바라본 상(像)에만 집착하면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는데요. 젊은 친구들은 철학자의 시선을 익히기보다 철학자가 그 시선으로 봤던것을 보려고 해요. 왜냐하면 그게 디테일해 보이고 구체적으로 보이니까 안심이 되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상을 보여준 철학자의 그 시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좀 성숙해질 텐데. 철학자가 그 시선을 봤던 것, 개념을 외우고 그걸 가지고 떠드는 거죠. 철학자든 시인이든 그 삶이 지금 살아 있다면 이 문제에 이렇게 대응했을 것이다 하는 것까지 알아야 정말로 그 사람을 아는 거예요. 그래서 시선을 배워야 하는 거죠. 인문학적 독해는 그렇게 해야 돼요.  253




chapter 5 유가를 넘어서


공자와 진시황, 화(和)와 동(同), 이들이 정치철학의 두 전통, 국가주의의 두 전통이에요.  270


후기 묵가들은 진나라로 들어가요. 천하를 돌아다녔던 묵가들이 국가를 통일하자고 결정한 거예요. 그리고 걔네들이 진나라 법률의 기초를 닦아요.  274


자본가 마인드에 두 가지 모델을 적용할 수 있어요. 법가적 자본과 유학적 자본. 계열사 사장들의 자율권을 인정하면 유학적인 것이고, 총수가 철저하게 총괄하고 사장 갈아버리면 법가적인 것이죠.  284


춘추전국시대나 제자백가는 일직선적인 발전이거든요. 앞 사상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상이 등장하는 거라 일정한 흐름이 있어요. 공자가 나오고, 공자를 비판하면서 묵가가 나오고, 묵가를 비판하면서 양주가 나오고, 이런 식의 패턴이 있어요. 철학사가 있는 거죠.  288


인문학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문맥 파악이에요. 잘 파악해야 해요.  298


형식과 예법은 최선의 관계가 아니라 최악의 관계를 막는 데 필요한 정도예요. 그런데 그걸 최선의 관계라고 생각했을 때 억압이 생기는 거고, 반드시 이렇게 하라고 하면 문제가 되는 거죠.  307


예전에 제자들한테 항상 얘기해주던 강독 요령이 뭐냐면, 열 구절 중에서 아홉 구절은 쉽게 독해가 되는데 한 구절이 독해가 안 된다면 아홉 구절이 다 틀렸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해석 안 되는 구절을 버리죠. 또 하나 기억해야 될 것이, 어떤 것이 기록으로 남겨졌다면 그것이 그 당시에 비범하고 특이한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비행기가 허구한 날 추락한다면 뉴스에도 안 나와요. 일상적인 것이 아니어야 기록되고 남겨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꾸로 보면 <논어>의 구절들이 그 당시에는 너무 이상한 얘기였다는 말이기도 해요. 항상 조심해야 할 게, 그 당시의 삶의 문맥이나 역사적 상황을 통해서 해석하는 것도 좋지만 역사적인 것으로 환원해서도 안 된다는 거예요. 역사라는 것은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흐름을 다루기 때문에 <논어>의 그 구절 하나가 가지고 있느 고유성은 못 잡을 수도 있어요. 우리가 일기를 쓸 때도 특이한 일을 기록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제자들도 특이한 가르침을 기록했다고 본다면 조심해야죠. 그런 가짓수를 다 염두에 두고 제자백가서를 읽어야 해요. 그러니까 선택을 진짜 잘해야 해요.

그런 것도 염두에 둬야죠. 공자를 위해서 내버린 구절들은 무슨 내용이었을까? 공자가 이혼했던 얘기도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공자가 이혼당하거든요. 천하를 주유하다 보니까 공자 부인이 열 받아서 친정으로 가요. 친정에 가니까 장인어른이 다른 데 시집을 보내요. 그 당시는 아직 모계사회이 풍습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 그래도 됐거든요. 공자가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겠어요? 그 얘기는 다 빼는 거예요. 사실은 '공자가 남자를 만났다' 그 구절 하나가 논어 담론의 경계선일 수도 있어요. 공자의 실제 삶에서는 중간 정도의 위치일 수도 있는데, 여자관계라든가 그런 부분들은 다른 텍스트를 참고해야죠. <예기>라는 책을 안 봤으면 공자가 이혼당했다는 것을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혼당한 다음에 여자와 소인은 가까이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한 것일 수도 있잖아요.  309-311


저는 짧은 구절을 하나 보고서도 전체 문맥을 빨리 파악해서 해석 가능성을 몇 가지 열어두고 가만히 기다려요. 어떤 것이 맞는지, 칸트나 다른 텍스트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텍스트 읽는 방법이 같아요. 전체를 보고 줄거리가 뭐냐가 아니예요. 매번 해석에 들어가요. 내가 봤던 페이지 이후는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보는 거예요. 그 강도로 읽는 겁니다. 여기서 해석이 끝났는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면서 좌초되기도 해요. 에이, 이후의 페이지들이 다 불탔으면 내 해석이 맞는 건데, 이런 게 나오다니.(웃음) 텍스트를 읽어낼 때 독창적 해석이 나오는 근거는 그거예요. 전체 요지가 뭐라고 어떤 해석가가 얘기했다고 해서 색안경 끼고 안 봤거든요.  312


아까 공자가 남자를 만났다는 부분도 저는 안 놓쳐요. 그러면 물어보게 되잖아요. '남자를 왜 만났지? 자로가 불쾌해하는 건 왜지?' 가능한 상황을 다 생각해보는 거예요. 그런 다음 하나씩 하나씩 그 해석을 맞춰가는 거죠. 그렇게 맞춰가다 보면 다른 사람의 해석을 넘어서게 돼요. 열 가지 구절로 이루어진 조목이면 대개 한 가지 구절에 주목해서 나머지 구절들을 읽거든요. 그런데 저는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 네 가지, 디테일한 구절을 가지고 해석 체계를 쌓으면서 하나의 해석을 밀어 붙여요. 그게 독해하는 요령이에요.

제 글이 다른 사람들이랑 다른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매번 한 문장 한 문장과 싸워서 이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가설을 세우고, 그 다음 구절에서 또 검증에 검증을 하다 보니 쉽게 한 구절 한 구절 넘어가는 게 아니거든요. 그렇게 읽으면 진짜 재미있어요.  313


내가 진짜 제대로 사랑을 하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읽히는데, 내가 베르테르였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고 베르테르가 나였으면 나처럼 사랑했을 거라는 경지에 오를 때 느껴지는 공감과 울림이 있어요. 이게 인문학적 독법의 핵심이에요. 역사책을 읽든 고전을 읽든, 이게 왜 중요하냐면 우리의 의사소통 가능성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제가 여자라면 어떤 여자처럼 하겠다는 것하고, 어떤 여자가 '내가 남자라면 강신주처럼 하겠다'는 게 공명이라고요. 제가 여자가 되는 게 아니라니까요. 남자와 여자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공명하는 거예요. 그게 공명의 조건이에요. 고전도 마찬가지예요. 인문학적 독법을 연습한 사람만이 공명할 수 있는 거죠. 권력은 우리를 깨알처럼 쪼개잖아요. 그에 대항하려면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공명할 수 있는 구조를 잡을 수 있어야 해요.  315-316


80년대 학번 아줌마들이 대안 교육을 한다는데, 이게 문제예요. 사회는 대안이 없는데, 사회를 바꿔놓고 대안 교육을 시켜야 하는 거잖아요. 대안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사회에 나오면 힘들어해요. 자기가 대안 학교에서 배웠던 걸로는 사회에서 못 살아요. 그래서 그 아이들이 상상마당 강의에 다 들어와요. 제가 대안적인가 봐요.(웃음) 대안 교육이란 게 아이를 가지고 또 하나의 실험을 하는 거예요. 그 아이들 인터뷰하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대안 교육 싫다고 하는 애가 반이에요. 좋아할 것 같지만 싫어해요. 좋아한다는 얘기만 들은 사람들은 침묵하는 애들을 안 봐서 그래요. 저라도 그럴 것 같아요. 어머니의 숭고한 이념을 못 따라가는 것도 있을 테고, 애들이랑 게임하고 놀고 싶은데 산에 들어가서 자연하고만 놀고, 너무 고상한 것만 하잖아요. TV도 보고 싶을 텐데, 대안 교육이 실패한 이유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기 이념을 사랑했다는 데 있어요. 형식과 절차, 이념이 다 정해진 엄마들이 무슨 교육을 시켜요?  318


우리가 시작했다가 멈출 수 있는 경쟁은 예뻐요. 딱지치기 같은 것처럼요. 문제는 경쟁을 외부에서 만들어서 멈출 수 없게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경쟁이 싫다고 온갖 경쟁을 다 없애버린 거예요. 제가 봤을 때 핵심은 그거예요. 인간은 때로는 경쟁이 즐겁기도 하거든요. '나보다 빨리 달릴 수 있어? 저거 딸 수 있어?' 꼬맹이 때 그렇게 놀았잖아요. 경쟁이라는 것이 내가 시작해서, 우리가 시작해서 우리가 멈출 수 있다면 괜찮은 거예요. 그런데 경쟁이 필수가 되어버리는 것. 내가 스톱 못 하는 게임이라면 문제가 있는 거죠. 

아이들 대안 교육 시키고 고민하는 어머니들을 만나서 너무 오버들 하셨다고 그랬어요. 경쟁하고 싶어하는 애들도 있거든요. 그런데 대안 학교에서는 신선놀음하듯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요. 예들이 재미가 없어요. 누가 그림 잘 그리나. 이런 것도 하고 싶은데, 미묘한 차이예요. 그래서 햇갈리는 건데, 80년대 학번이나 90년대 초 학번 아줌마들이 아이들을 통해 지금 처절하게 배우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이 얘기를 하면 그 아줌마들은 금방 알아요. 어디서 잘못됐는지.

제가 이걸 어떻게 아느냐면, 대안 교육 받아서 망가진 아이들이 저한테 오거든요. 그러면 야단도 쳐요. '지랄들 한다. 적응 못 해서 이쪽으로 왔니? 대안을 연장해보려고?' 상상마당 강의 같은 데 와서 터프한 얘기 듣고 철학 얘기 들으니까 대안 교육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저 생명 연장을 하는 것일 뿐이에요. 모르핀을 한 번 더 맞겠다는 거죠. 애들이 건강하지 않더라고요. 더 약해져 있어요. 그런 아이들 만나면 이 얘기를 해줘요. 

'부모들은 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실험한다. 그건 부모의 몫이다. 하지만 이제 스무 살이 됐다면 드디어 네가 너 스스로를 만들 기회를 잡은 거다. 지금까지는 부모가 뭘 가르치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건 경쟁 교육을 받는 아이든 아니든 똑같다. 문제는 스무 살 때 네가 너를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 너는 너 자신을 만들고 있니?' 이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해요.  319-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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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편


왜 속으로는 '노'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예스'라고 할까요? 용기가 없어서 그랬던 겁니다.

용기가 먼저 있어서 '노'라고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노'라고 할 때, 우리에게는 없던 용기가 생기는 겁니다.  18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이 말은 당나라 때의 백장(百丈)이라는 스님의 말입니다.  27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이건 일을 하지 않으면, 혹은 일을 못하면 죽겠다는 이야기예요. 혹은 그만큼 목숨처럼 생명처럼 일이 중요하다는 거지요.

복잡하게 읽을 수도 잇지만 이 이야기는 우선 언제 우리가 눈감아야 할지 가르쳐 주는 이야기예요.

아기 기저귀라도 하나 갈고 마당이라도 빗자루로 쓰는 거예요. 그렇게 움직이면 먹어도 된다는 겁니다.  28


일을 안 하고 먹는다는 건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 먹는 거예요.  29


백장 스님 머리에 '이 일을 해서 돈을 받아야 된다'라는 건 없어요. 일을 하는 게 소중한 거예요.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죠.  32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일을 부정하게 됩니다. 일을 폄하하죠. 이건 어느 순간부터 우리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을 노예로 자처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일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죠.  35


'내가 원하는 일들을 어떻게 찾을까?', 이게 지금 문제인 거예요. 주인으로서의 삶은 여기서 결정되는 거예요. 여러분들 고민의 대부분은 노예의 투정이에요. 대개 노예는 노예인데 일은 안 하고 밥만 먹고 싶다는 내용이에요. 밥을 먹을 수만 있으면 된다는 노예적 절박함이라고 해야 할까요?  37


타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노예라고 부르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주인이라고 부릅니다.

기껏 대학 나와서 됐다는 게 최고급 노예인데, 이제 돈 좀 들어오니까 찝찝한 거예요.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타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 걸 노예라고 부른다고요. 일하는 걸 싫어하는 게 노예의 근성이에요.  38


제 집필실이 광화문에 있는데, 가끔 광화문에서 사람들을 생태학적으로 관찰하면 패턴이 보여요. 광화문에는 직장이 많죠. 오전 8시에서 9시 사이에 사람들이 막 모여들고 우르르 각자 사무실로 들어가요. 그런데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서 11시 30분이 넘으면 사람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해요. 밥을 먹으려고. 그러면 밥을 먹다가 12시 30에서 40분쯤 되면 커피 가게로 막 들어가요. 그리고 1시 좀 넘으면 직장에 들어가서 5시가 넘어가가 시작하면 우르르 나와요. 해맑은 모습으로요. 제가 그래서 어떤 분한테 직장인들은 오후만 일하니 오전에 쉬게 하지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분 이야기가 오전에 불러서 그렇게 뭉그적거리게 해야 오후에 일을 하지. 사람들을 1시에 나오게 하면 일한다고 워밍업하고 인터넷 보고 커피 마시고 어제 포털에 나왔던 거 다 이야기하고 일 시작하면 일하는 시간 달랑 30분밖에 안 된다고요.

우리는 노예로 살죠.  39

영어를 좋아해서 영어 공부하신 분 있어요? 대부분 우리는 영어가 좋아서 공부하는 게 아니죠. 영어 능력을 원하는 자본에 팔려고 영어를 공부하는 거죠. 손님에게 팔리기 이해 화장을 하는 매춘부처럼 말예요. 그래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시대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고 이야기했던 거예요.

재미있지 않아요? 옛날에 노예를 부릴 때는 때리면서 강제로 노예한테 기술을 가르쳤어요. 자본주의 사회는 묘하게 자유롭습니다. 자본주의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가 '자발적 복종'이에요. 한 단계를 건너뛴 거죠. 누가 시키지를 않아요. 옛날엔 노예가 잡혀 와서 일을 제대로 하나 안 하나 감시당했죠. 그리고 능력 있는 노예가 있으면 가령 그 노예가 배를 만드는 게 좋겠다면서 억지로 배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요. 지금은 거꾸고 됐어요. 이게 참 묘하다니까요.  40


옛날의 노예는 탈출을 하려고 했는데, 우리는 나를 써 다라고 해요. 이게 자본주의의 비법이에요.  41


여러분들이 직장 생활을 하더라도 머릿속에 넣어 두셔야 합니다. '난 노예다' 주인 입장에서 생각하지 마세요. '월급을 받으니 이만큼은 일을 해야지'. 절대 이런 이야기는 하시면 안돼요. 버티면 월급은 나와요. 그렇지만 갑자기 해고되면 막막하니까. 일하는 척 잘 버텨야죠. 게으르지만 잘리지 않게! 마르크스의 사위가 하나 있어요. 라파르그라는 사람이 입니다. 기억해 두세요. 이 사람이 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라는 책이 있어요. 두께도 얇야요. 책의 서두에 있는 얇은 논문이 있는데, 읽어보세요. 이 글이 바로 노예의 지침서예요. 월급은 받되, 잘릴 정도로는 게으르지 않기! 역시 마르크스의 사위다운 글입니다.(라파르그는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몸을 잘 움직일 수 없을 때 자살합니다. 백장 스님의 기개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주인 입장에서는 묘한 거예요. 이 노예가 하자는 없는데 일은 진척이 안 되는 거죠. 누구 좋으라고 일을 해요?

때때로 이런 느낌도 들어요. 전시에 포로를 잡아서 포로들에게 땅을 깊게 파라고 해요. 그리고 땅이 다 파지면 포로들을 거기 들어가게 해서 총으로 쏘고 덮어요. 그게 정리해고예요. 일이 다 끝나면 여러분이 회사에서 나가는 논리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요? 삽질하는 척 하기. 너무 노골적이며 죽여요. 그러니까 삽질하는 척은 하는데 땅은 안 파지는 그 묘한 형국을 만드는 거죠. 거기서 살아 있어야지 탈출이라도 하죠. 회사에서 여러분의 에너지를 다 쓰지 마세요. 주인의 일에 에너지를 모두 쓰지 말아요. 회사에서 에너지를 쓰면 여러분이 원하는 일을 찾을 시간과 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직장 다니시는 분들, 반드시 해야 될 일이 뭔지 아시겠죠? 회사에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겁니다. 일이 끝나고 나서 그 모든 에너지를 가족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거예요. 보고 싶은 연극을 보세요. 연극 봐서 피곤하니까 그 다음날 오전에 출근해서 또 잘 쉬어요. 하지만 완전히 들키지는 않게. 할 수 있어요? 그러면 고용도 촉진돼요. 사람을 몇 명 뽑았는데 효율이 안 오르면, 또 사람을 뽑아요.  44-45


여러분의 일을 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부지런해져요.

남이 원하는 일을 할 때는 게을러야 돼요. 게으르되 잘리지 않을 그 미묘한 경계가 있어요.  45


페이비언 소사이어티(Fabian Society). 파비우스 막시무스라는 한니발을 이긴 로마의 장군이 있어요. 파비우스는 한ㄴ발이 워낙 강력하니까 지구전을 사용해요. 그런데 이걸 원로원에서 가만히 두겠어요? 장수로 보내 놨더니 진영은 차지하고 밥만 먹는 것 같잖아요. 로마 대군 5만 명이 매일 밥만 먹어요. 다섯 명도 아니고 5만 명이거든요. 이러니 쇼부를 빨리 쳐야 되잖아요. 그래서 원로원에서 파비우스를 자르고 다른 사람을 장수로 보냈는데, 이 사람은 한니발을 공격하다 박살이 나요. 그래서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또 부르죠. 그랬더니 또 다시 밥만 먹어요. 그리고 나중에 이겨요. 그래서 페이비언이라는 말이 나와요. 

페이비언 소사이어티는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방법으로 사회를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가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자라는 사회로 갈때까지 느리게 천천히 사회를 바꾸자는 것입니다. 급진적인 혁명을 이끌던 지도자가 나중에 일하지 않고 먹으려고만 할 수 있다는 것을 안 거죠.  47


여러분이 즐거워하는 일을 했었을 때 그게 돈벌이가 되면 여러분들은 진짜 제대로 자리를 잡은 거예요.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자신이 하는 일이라는 것, 그게 중요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해서 돈을 벌면 '땡큐'고 아니면 좀 힘들게 사는 겁니다.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것이 바로 주인의 삶이다' 이걸 명심해야죠.  48


여러분들 각자의 삶의 시간은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 이 둘로 할당이 될 거예요. 노동하는 시간은 대부분 그 자체로 목적은 아닙니다.(물론 그 자체가 목적인 사람들이 있어요. 저 같은 사람이요.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거죠. 저는 글을 안 써도 됩니다. 누가 시키는 건 아니에요. 제가 쓰고 싶은 때 쓰는 거예요.) 대개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이 따로 있어요.  54 


여러분께 지혜를 하나 알려 드릴게요. 보통 사람들은 최저임금을 이야기하거나 가급적 많은 임금을 생각합니다. 이제 '최적임금'을 생각할 때입니다. 최저임금이 아니라 최적임금입니다. 나의 최적임금은 얼마인지, 이 정도 벌면 됐다는 걸 정할 수 있어야 해요. 그걸 아는 사람은 내가 돈을 버는 목적이 향유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55


한 사회가 얼마나 나쁜지의 척도는 노동시간의 길이입니다. 노동 시간이 늘어나는 사회는 나쁜 사회예요.  55


모두 먹고사는 고민만 있어요. 생존만 있고, 향유는 없어요. 거기에는 의무만 있어요. 

여기에 무슨 살 이유가 있어요? 즐거운 것이 있어야 된다고요. 노동은 힘들어요. 유사 이래로 인간이면 다 그래요.  56


다음 공식을 머릿속에 넣어 놓으세요. '삶의 행복은 노동하는 시간보다 향유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커진다'라는 공식 말이에요. 여러분이 일하는 시간을 줄여야 행복해져요. 물론 이 시간을 절대적으로 제로로는 만들 수 없어요.  57


가장 행복한 삶은 스스로 하는일, 지금 땀을 흘리고 하는 일이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면서도 즐거운 일이면 됩니다.  59


우리의 가장 큰 착각은 우리가 자본가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84


여러분이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본이 원하지 않아도 내가 행복하다면 기꺼이 그 일을 하고, 내가 행복한 일을 하는 데 돈이 필요하다면 또 사냥을 떠나면 됩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이 향유이자 동시에 노동이기도 한 사람이겠죠. 제작하고 창조하고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이죠. 홀로 하는 직업일 때만 가능해요.  85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가져야 할 지혜는 시간에 대한 것입니다. 삶의 시간은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 둘로 양분됩니다. 우리의 행복은 가급적 노동하는 시간을 줄이는 데 있는 것이죠.(하지만 노동하는 시간을 아예 없애고 향유하는 시간만 있다고 하면, 그건 누군가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다는 걸 의미합니다. 어쨌든 우리의 삶에서 일과 노동은 뺄 수 없어요.)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하면, 우리는 제대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사회철학자나 정치가들도 모두 이 삶의 시간을 기준으로 주어진 사회를 부넉하고 도래할 사회를 꿈꾸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봤을 때 사람들이 노동하느 시간이 너무 많아서 향유하는 시간이 없다고 하면 그 사회는 나쁜 사회인 거예요. 이런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불행이자 남루함이지요.  85-86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인지, 그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다는 것, 아니 생각하지 말아야 했었다는 것. 그것이 박정희 지배가 독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생각은 오직 최고 통치자만 하면 됩니다.  90


분명 우리는 양적으로 원시인들보다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문명의 혜택을 다 누리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불행하기만 합니다. 지금 우리는 향유하는 시간을 위해 일한다는을 까먹고 잇기 때문이지요. 일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것에 젬병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하나에 능숙하다는 것은 다른 것에는 서툴다는 것을 함축하니까요. 그러니 아이들과 노는 것, 아내와 산책을 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 심지어 가족과 함께 공연장에서 연주에 몸을 맡기는 것, 어느 것 하나 피곤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없ㅅ브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한다는 것은 항상 가도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일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다시 일에 몰입하게 됩니다. 잘할 수 있는 것이 일밖에 없고, 그래서 일할 때 편안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식으로 마침내 우리는 구제할 수도 없는 워커홀릭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98


이제 깊게 생각할 때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그리고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는 어떤 덕목이 필요한지. 이제 눈에 들어오시나요?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진정한 덕목이 바로 용기라는 것이. 사랑하고 창조하는 시간, 즉 향유하는 시간을 위해 일하는 시간을 줄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닐 테니 말입니다.  99




정치 편


이론상 차이가 없다고 하더라도 삶에서 50보와 100보는 다릅니다.

중요한 건 정확한 기준을 가지고 잇어야 한다는 거죠. 가령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을 때, 그냥 누구는 좋고 누구는 싫다. 소녀시대가 좋냐 2NE1이 좋냐가 아니라 민주주의 본령과 원칙을 정확히 알고 그 기준을 통해 투표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기준을 두고 누가 50보를 갔고 누가 100보를 갔는지를 보자는 거예요.  122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죠? 그리고 그게 맞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고요. 하지만 실제의 삶은 어떤가요? 국민이 전쟁을 원하지 않아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즉 대표자에게는 교전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잇어요.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전쟁을 원하지 않더라도, 대표자들은 전쟁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어떤 인간은 대통령이 되어서 전쟁을 하려 할 거고, 어떤 인간은 끝내 안 하려고 할 겁니다. 50보와 100보의 차이는 있는 것이죠.  123


유럽 국가 중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가 프랑스죠. 프랑스 사회는 왜 민주적일까요? 왕을 죽였거든요. 왕을 죽인 국민한테는 축복이 있어요. 왕을 죽였으니 내가 왕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이게 프랑스 전통이에요. 우리의 가장 큰 슬픔은 고종을 못 죽인 데 있어요. 우리가 죽였어야 했는데, 일본이 해결을 한 거죠. 그러면 총독이라도 죽였어야 햇는데 그것도 못 했죠. 그 다음에 보니 이승만이나 박정희와 같은 독재자도 죽이지 못했어요. 한 사람은 죽이기 전에 하와이로 도망가서 죽었고, 한 사람은 죽이기 전에 측근에게 먼저 살해당했으니까요. 단 한 번도 독재자를 죽인 경험이 없는 겁니다. 한 명만 죽이면 되거든요. 딱 한 명만, 그 다음부터는 웬만하면 대통령 안 하려고 할 걸요? 잘못하면 훅 가는데 누가 하려고 하겠어요.  130-131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도 말하잖아요. "어떤 인간이 왕이라는 것은 다만 다른 인간이 신하로서 그를 상대해 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신하가 아니면 안 된다고까지 믿고 있다." 완전한 심리적 전도이자 착각이지요. 임제(臨濟)라는 스님이 있어요. 이 스님이 남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야 자유인이 된다는 거죠. 멘토를 만나면 멘토를 죽여야 돼요. 멘토는 무슨 멘토예요? 자신이 어리석고 멍청하다고 생각하니, 자꾸 멘토를 찾아서 지침을 들으려고 해요. 하지만 멘토의 지침을 계속 찾으면 우리는 계속 멍청해지는 거예요. 스스로 당당한 주체가 되기를 비겁하게 회피하는 순간, 우리는 점점 더 우유부단한 사람으로 전락하는 거라고요.  132


좋은 군주, 나뿐 군주를 가르는 건 착각입니다. 중요한 건 군주라는 형식 그 자체니까요. 이 형식을 어떻게 없앨지, 과연 이 형식은 없어진 것인지 이걸 고민해 보시길 바랍니다.  133


한 개인의 독자성 같은 것들은 사람 수가 많아질수록 희생됩니다.  141


보수는 자신을 사랑하고, 진보는 타인을 사랑한다고 정리될 수 있습니다.  147


'인간이 먼저고 이념은 나중'이라는 사람이 진보라면, '이념이 먼저고 사람은 나중'이라는 사람은 보수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보수적인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올라 자신의 이념을 관철하려고 하는 겁니다. 물론 이웃과 후손들을 사랑한다고 이야기는 하겠죠.  148


용서요?

아버지 한테 매 맞는 아이가 아버지를 용서하게 돼요. 심지어 자기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이해한다고요. 어머니가 나갔으니까 나한테 화풀이 한다고 생각하죠. 그게 용서인가요? 용서는요. 그 사람이 완전히 자립하고 당당해졌을 때 힘이 세졌을 때 하는 거예요. 약한 자가 용서를 할 수 밖에 없는 조건에서, 용서한 것을 용서라고 하진 않아요.

강해서 용서했다고 하지 마세요. 예수의 정신, 이런것도 아니에요. 자비, 이런 것도 아니에요. 어떻게 못하니까 그런 거에요. 슬픈 거죠. 그래서 용서하면 안 돼요. 용서하지 맙시다 약한 자는 용서하는 거 아니에요. 자격 없어요. '더럽게 약하다'를 각인하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쟤를 때리지도 못하는구나' 이렇게요. 중간에 용서하고 모든 걸 퉁치려고 그러죠. 그냥 그렇게 살려고요. 그럼 안 되는 거 같아요.

누간가 한 명이 '전두환을 죽이자'고 할 수 있어요. 누가 죽일래요? 우리는 그 회의를 합시다. 누군가 죽일 수 있어요. 누가 광주에서 죽었던 사람들 대신 그 복수를 해 줄 수 있을까요? 민주주의를 외쳤던 사람들을 공수부대로 잔혹하게 도륙했던 그 인간을 그들 대신 누가 죽일까요? 죽일 수 있어요? 역사에 길이 남는데 죽이실래요? 우리는 불행히도, 역사보다 자신을 더 아껴요. 우리는 감옥에 가는 것도 싫고, 그렇게 약하고 비겁하다고요. 내가 당할 불이익들이 있는 거죠. 이것부터 우리가 아프게 자각해야 돼요. 용서하면 죽이러 갈 필요도 없고 편하잖아요. 이것도 가슴 속에 아프게 넣어 놓으셔야 됩니다.  164-165 




쫄지마 편


'쫀다'라는 표현은 무언가 두렵다는 것을 말하죠. 두려움이라는 건 안해 본 것들을 무서워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는 판타지를 가질 수 있거든요.  188


무서운 것이 있어서 쪼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지 못해서 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걸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은 그냥 하는 거예요. 모든 판타지의 특징은 우리가 그곳에 걸음을 훅 내딛었을 때 신기루처럼 없어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혼 무섭죠? 이혼을 한 번 해 보면 더 이상 무섭지 않아요. 해보고 나면 별것 아니란 걸 알게 되죠. 그런데 참 힘든 말이죠? 무서운데 그냥 하라고 하니까요. 사실 하기가 힘들거든요. 그렇지만 뭐든지 한 번의 경험은 필요합니다. 어떤 경험이든 상관없어요. 인생에서 너무나 무서운 것들을 한 번은 눈 질끈 감고, 과감하게 해 보는 경험이 필요해요. 그 경험이 한 번만 잇으면 돼요. 내가 무섭다고 생각하는 걸 한 번 해 보는 거죠. 조금 상처를 받더라도 후유증이 적은 것들을 통해 그런 경험을 조금씩 쌓을 필요가 있스빈다. 쪼는 것이 상당히 줄어들 테니까요.  189-190


너무 많이 안다는게 때로는 축복이기보다는 저주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이 알게 되면 힘들다고요.  191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높은 정상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정상이 어딘지 모르고 무식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다 보면, 정상에 오를 희망이라도 생기는 법이죠. 반면 정상까지 얼마나 힘든 여정인지 정확히 안다면, 우리는 한 걸음을 내딛는 용기마저ㅓ도 포기할지 몰라요. 냉소적으로 변하는 거죠. 그래서일까요? 과거 사회에도 못 배운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지 지식인 계층에서 혁명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사회에 대해 투덜거리지만 바꾸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겁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죠? 이 말은 우리가 "유식해서 비겁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요?  194


쪼는 사람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은 뻔뻔한 사람이에요. 쪼는 것의 반대말은 당당함이 아니에요. 뻔뻔한 사람이 현실적인 힘까지 얻을 때, 오직 그때만 당당해질 수 있어요. 

다음 순서는 성장해야만 해요. '쪼는 나' -> '뻔뻔한 나' -> '당당한 나'. 그러니까 우리는 당당해질 때까지 뻔뻔해지도록 노력해야 해요. 무모함이나 순박함이 아니라 뻔뻔함이라고요.  195


뻔뻔해지기 실천강령(1):우아하게 거짓말하기

미리 말씀을 드리지만 강한 사람만이 거짓말을 해요. 약자는 정직하게 진실만을 얘기하죠.  197


거짓말이 정당화될 때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도 사랑하는 사람은 나보다 강자인 것처럼 느껴질 겁니다. 애인이 만남을 지속할 수도 있고 끊을 수도 있는 역량이 있는 것처럼 다가오는 경험이 사랑이니까요. 자기와 놀아 달라는 애인에게 '친구와 게임을 하기로 했어'라고 하면, 애인은 내게 크게 실망하고 나를 떠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쿨하게 거짓말을 해야죠. '삼촌이 위독해! 미안해. 삼촌만 아니었다면, 너와 놀 수 있을 텐데.'

그리고 사회에서 여러분보다 더 강한 놈이 정직을 강요하고 압력을 가해 올 때, 여러분들은 거짓말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 돼요. 거짓말이 정당화되는 두 번째 경우죠. 강자 앞에서 약자가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쿨하게 거짓말하는 겁니다. 이때 진실을 이야기하면 강자는 우리를 자기 식대로 통제하려고 할 테니까요. 애인이랑 데이트 약속이 정해졌다면, 직장 상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부장님,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 못합니다. 힘 있는 사람이 '너 이거 했지?' 이러면 찔려요. '들킨 거 아니야?' 이런다고요. 그러니 뻔뻔함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연습을 통해서만 경지에 오를 수 있는 덕목입니다.

여러분을 쫄게 만드는 대상들은 대개 뻔뻔해요. 거꾸로 얘기해 보면 여러분들이 '밥'이라는 거예요. 이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보다 더 뻔뻔해지는 겁니다. 싸우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당당해하지 마세요.  200-201


세상은 우리를 다 쫄게 한다고요. 우리가 쪼는 건, 어린애 같고 정직해서 그래요. 일기장 쓰는 사람처럼 산단 말이에요. 이 태도를 가지면 안 돼요. 일기를 쓰는데, 첫 번째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순 거짓말인 일기를 써 보세요. 그리고 그 일기장을 애인한테 주는 거예요. '나의 마음을 받아 줘' 하실 수 있어요? 못하죠? 이게 교육의 병폐에요. 사회화의 목적은 국가나 권력이 힘 있는 사람한테 복종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교육의 목적이 뭐예요? 기성세대가 편한 거예요. 아이가 대소변을 가리면 누가 편해요? 부모가 편하죠. 어머니는 그런다고요. '얘야, 이제 품위 있게 기저귀에 똥을 누니 얼마나 좋니?' 사실은 이런 거죠. '얼마나 좋니? 나한테 안 맞고' 교육의 목적이 뭐라고요? 기성세대들이 편한 거예요. 

여러분들은 교육을 너무 잘 받은 겁니다. 정직학 까놓고 고발하는 사람들, 자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약해요. 자기의 속내를 이야기했다가 부당한 대우를 받지요. 여러분드르이 가장 큰 문제는 너무 정상적으로 중고등학교를 나왔다는 거예요. 중학교 때 본드도 마시고 고등학교 때 애인과 모텔도 가고, 할 거 다 해 본 다음에 개과천선했으면 여기 상당하러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202-203


그러면 이 뻔뻔함을 어떻게 얻어야 돼요? 바깥에 나와 봐야 돼요. 바깥에 나와서 독립적인 생활도 하고 스스로 선택도 해 봐요. 돈이 많이 들죠. 지비에서 나갈 수도 있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뻔뻔스럽게 집에 들어와 사는 사람의 비범함을 아셔야 됩니다. 부모한테도 쫄고 바깥에서도 쫄아서 오갈 데 없이 집에 있는 사람과는 다른 사람인 거예요. 뻔뻔한 사람은 부모님이 더 이상 밥도 안 주고 잠자리도 내주지 않고 구박을 하면, 그때가 되어서야 '음, 이제 떠날 때가 왔네. 지금까지 편했는데. 쩝, 어쩔 수 없지'라고 하면서 자신의 짐과 모아 둔 돈을 챙겨서 집을 나가죠. 

거짓말을 하세요. 거짓말은 뻔뻔하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뻔뻔하기는 해도 쪼는 사람은 아니에요. 편안하게 거짓말을 하세요. 이 능력을 기르면 여러분들은 사회에 물의를 많이 불러일으킬 거예요. 대신 쫄진 않아요. '아, 이 세 치 혀로 인생이 거의 다 해결되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될 거예요. '하루에 세 번씩 거짓말을 안 하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각오로 거짓말을 하면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하나도 쪼는 게 없을 거예요. 거짓말 잘하시는 분? 나는 거의 문학적 수준에 이르렀다? 이런 분 계신가요? 모든 문학은 거짓말이죠. 그들은 당당해요. 문학자들처럼 뻔뻔스러운 사람이 없고 당당한 사람도 없어요. 한국사회에서 민주화운동을 문인들이 끌고 갑니다. 왜죠? 그들은 거짓말쟁이거든요. 거짓말을 한다는 건 우월한 거예요. 이런 세계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뻥을 뻥뻥치면 사람들이 그거에 속아서 또 사회를 만들어요. 미래의 꿈이라는 게 뭐예요? 지금 사회는 우리를 이렇게 착추한다고, 그래서 이렇게 하면 자신이 뻥치고 있는 사회가 가능하다고, 누군가 막 뻥을 치는 거죠. 그 뻥이 긴가민가하다가 사회가 그걸 받아들이면 그 사회는 변화하는 거예요. 거짓말 속에서 새로운 역사가 열리는 겁니다.  204-205


중국 철학자 송견(宋?)의 테마는 견모불욕(見侮不辱). '모욕을 당해도 치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게 또 핵심적이죠. 모욕을 당해도 치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예쁜 사람이고 싶고, 고상하고 싶고, 순수하고 싶고요. 우리는 이런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칭찬해 주면 훅 넘어갈 사람들인 거죠. 그게 거짓된 칭찬이어도요. 이게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문제예요. 그래서 누군가 칭찬해 주면 좋고, 누군가 칭찬 안 할 거 같으면 쫄죠. 인정받고 싶으신 거예요. 

모든 인간관계의 문제는 인정을 받으려고 해서 생겨납니다.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아요. 왜 인정받으려고 그래요? 진짜 위대한 인격은 뻔뻔스러운 거라니까요? 인정받으려는 사람은 항상 정직하려고 한다고요. 많은 우화는 사람들이 거짓말을해서 우울해지고 외로워진다고 그러죠. 사실이에요. 하지만 인정을 받으려는 사람만이 아기처럼 진실을 얘기해요. 그러니까 절대 남한테 인정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이라는 멘트를 하던 개그 프로그램의 코너가 있었는데 기억 나세요? 진짜 좋은 멘트죠. 그 사람이 쫄 거 같아요? 세상에 대해서? 누가 무슨 욕을 하든지 간에 그걸 의식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누군가 욕을 했는데 그걸로 화가 나고 속상하다는 것은 인정받겠다는 걸 드러내는 거거든요. 누가 여러분에게 '야, 이 개새끼야!'라고 욕을 하면, '그래요. 난 개새끼예요. 만세!' 이러면 되는 거예요. 남이 인정하든 안 하든 내가 무슨 상관이에요?  205-206


누군가한테 인정받으려고 그럴 때 또 쫄아요.  207


'거짓말하라' 이후의 두 번째 행동 강령은 '기꺼이 욕을 들으라'는 겁니다. 스스로 내가 어느 정도의 인간인지 시험해 보려면 욕을 들어 봐야 돼요. 남의 험담, 음해를 들어야 돼요. 무슨 소리인지 알죠? 자꾸 남에게 인정받는 이 메커니즘이 우리를 세상에 쫄게 만들어요. 검열하게 만들고요. 예쁜 사람 콤플렉스를 버려야 돼요. 남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 말 것. 어머니의 칭찬 들으려고 하지 말 것. 어머니의 칭찬 들으려면 남자 친구, 여자 친구랑 모텔도 못 가요. 그 칭찬이란 게 나한테 뭔 상관이예요. 여러분들의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오만 가지 욕이 달려도 이렇게 생각하세요. '반응이 좋은걸?' 욕 좀 달렸다고 트위터 끊고 페이스북 끊고 뭣들 하는 거예요? 그게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친구를 만나시면, 서로 계속 욕을 하세요. 칭찬하지 말고 욕을 해요. '오늘 네 옷은 거의 걸레인 걸?' 이렇게요. 무슨 말인지 알죠? 그걸 견디는 거예요. 좋은 친구 사이에서는 서로 칭찬을 하지 않아요. 병신같고 나약하고 여린 애들끼리만 둘이 모여서 서로 '너는 예쁘네, 고상하네, 지적이네' 그러는 거죠. 그렇게 살다 보니까 바깥에 나갔을 때 욕 한 번 듣고서는 상처받고  또 그 친구한테 가요. 이게 뭐예요? 친구들끼리 서로를 강하게 만들어야 되잖아요. 서로를 욕해 줘요. 만나자마자 허점을 찾아야 돼요. 처음엔 힘들지만 그걸 경디면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심지어 그 다음부터는 화장도 안 할 거예요.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친구들끽 만나서 칭찬하고 서로 위로하지 말아요. 아부하는 사람이랑 아첨하는 사람은 군주를 붕괴시켜요. 회사에 갔을 때도 너무 열심히 일해서 인정받지 말아요.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한 달 동안은 사고를 치세요. 복사기에다 커피 쏟고 복사기를 망가트리는 거예요. 온갖 욕을 다 듣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회사에서 안 쫄아요. 자기가 정말 잘못을 할 때도 있을 겁니다. 이 경우 보통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지'라며 자책하죠. 그러면 또 실수할까 봐 쫄게 되어 있어요. 잘못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스스로 검열하지 않는 방법은 누가 나한테 욕을 하거나 뭐라고 할때 그것에 쿨해지는 것입니다. 쿨해지면, 여러분은 세상에 쫄지 않아요. 아시겠죠?  208-209


뻔뻔함의 두 가지 강령, 첫 번째, 거짓말 잘하기. 들키지 않고 부드럽고 우아하게.

두 번째, 기꺼이 욕을 먹기, '하루에 욕을 세 번 안 먹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생각으로 욕듣기. 욕이 부족하면 반드시 나서서 욕먹을 짓을 하기.

뻔뻔스럽고 당당한 사람들, 쫄지 않는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게 아니라 실전무공으로 단련된 거예요.  212


철학자들이나 지식인들 대개는 자기도 경험하지 못했던 얘기를 뻐꾸기처럼 계속 날리는 거예요. 거기에 취어잡히면 안 돼요. 쫄아서는 안 돼요. 지적으로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되죠. 그래서 거기 말리는 거예요. '음,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어요. 선생님' 이렇게 뻔뻔스럽게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해요.  220


진짜 위대한 사람은, 혼자 있는 사람이에요.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누군가를 만나서 주체적으로 사랑할 수도 있어요. 누구든 외로워서 사랑하면 안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도도하게 혼자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성숙한지를 알 수 있죠. 힘들거나 외로울 때 친구한테 전화하지 말아요. 아셨죠? 절대 외롭다고 놀아달라고 하지 말기. 강하게 꿋꿋하게 슈베르트 음악을 들으면서 견디는 거예요. 우아하게.

잊지 마세요. 뻔뻔스럽게 대하고 세계와 단절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계에 쫄지 않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이 뻔뻔스러움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진정한 친구와 애인을 가질 수 있어요. 잊지 마세요. 그때가 되어서야 진짜 만날 수 있는 거예요. 제가 가르쳐 준 대로 하면 왕따 당하고 패가 망신하고 집에서는 쫓겨날 것 같죠? 여러분 주변의 쓰레기 같은 사람들, 내가 결정하지 않은 인간관계들이 다 정리가 되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새로운 관계가 열립니다.  229-230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하나 해 드릴게요. 어느 보살 할머니가 자신이 성불은 안 되니 스님을 한 명 키우기로 하고 10년 동안을 봉양해요. 그러다가 이 할머니가 스님이 깨우침으로 가고 있는지 밥만 처먹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어요. 시험을 해 봐야 되잖아요. 그래서 마을에서 가장 섹시한 기생을 데려다가 안겨 줬어요. 그러고 나서 스님의 반응을 보는 거죠. 스님이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안아 주면서 기생에게 말해요. "나의 마음은 얼음과도 같다." 그 말을 듣고, 그 보살 할머니가 스님이 있는 암자를 불태워 버려요. 왜요? 억지로 하잖아요. '여자를 탐해선 안 된다. 품어선 안 된다 흔들리면 안 된다.' 그 흔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흔들린 거예요. 흔들리지 않는다면, '얼음'이라는 생각조차 안 들었겠죠. 쫄고 잇는 사람만이 '쫄지 말아야지. 쫄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생각해요. '쫀다'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없어져야 되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죠? 그러니 당당해지지 말고, 뻔뻔해지세요. 그게 안 쪼는 거예요.

그리고 비겁한 걸 받아들이세요. 자신이 어디까지 비겁한지만 알면 돼요. 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가 '모 아니면 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중국 한나라에 한신이라는 장수가 있었어요. 한고조 유방을 도와서 한나라를 구축했던 유명한 장수예요. 이 한신이 저잣거리에서 깡패들을 만나요. 칼을 든 깡패 열댓 명을 만난 거예요. 깡패들이 한신에게 자기들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라고 해요. 딱 보니까 게임이 안 돼요. 한신이 어떻게 했게요? 쏘 쿨! 기면 돼요. 뻔뻔하게! 그렇다고 그들에게 굴복하는 건 아니에요. 그게 바로 한신이라는 사람이 가진 능력이라고요. 그리고 나중에 히을 가졌을 때, 나라를 건립한다고요. '완전히 당당해지지 않으면 난 비겁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게 문제거든요. 

여러분 자신을 오버해서 보지 마세요. 여러분이 역사를 바꿀 것 같아요? 집을 바꿀 것 같아요? 어머니를 바꿀 것 같아요? 바꾸지 못해요.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일은 내가 얼마나 무능력한지, 얼마나 비겁한지를 아는 겁니다. 이 말은,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안다는 얘기예요.  255-257


자본에게 쫄지 않는 방법은 뭘까요? 자본이나 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겁니다. 전셋집도 갖지 마세요. 가지고 잇으면 낚이는 거예요. '최적생계비'만 갖고 있어야 해요. 최저생계비가 아니라 최적생계비예요. 그래야 뻔뻔해져요. 그래야 사장한테 뻔뻔해진다고요. 사장이 밤에 일하자 그래도 이래요. '됐어요. 월급 됐어요.' 최적생계비를 계산하는 거예요. 최대생계비는 끝이 없어요.  265


자본주의는 순수한 게임의 세계입니다. 세상이 모조리 다 투자고 '돈 넣고'로 좌지우지도는 리얼리티 없는 세계. 게임가가되면 그 안으로 들어가게 돼요. 도박사, 도박군들이 도박에 빠지는 이유를 야셔야 돼요. 그게 순수한 자본가의 세계예요....

우리가 돈에 쫄지 않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나의 최적 생계비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거예요. 최적생계비만 벌면 되니까 나머비 시간에는 뻔뻔해질 수 있죠.  266


디오게네스가 왜 당당해요? 옷 한 벌, 지팡이 하나, 자루 하나 들고 통에서 살았잖아요. 통! 통 하나밖에 없잔하요. 집을 갖고 있으면 쫓겨나지만, 처음부터 쫓겨날 데가 없는데 쫄 이유가 없죠.  267


'뻔뻔하다'는 말의 긍정성을 아셔야 된다는 거예요. 이건 소중한 거예요. 

죽을 때까지 인정을 받지 않겠다는 각오로 사시면 돼요. 그러다 진실을 얘기해야 될 때가 올 수도 있어요. 어쩌면 그때는 '모 아니면 도'일 거예요. 진실에 대해서 쉽게 얘기하진 말고요. 그 뻔뻔함으로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냈을 때 여러분들은 쫄지 않는 자아. 뻔뻔한 자아로 만들어져요.

앞서 얘기했지만 쫀다는 것과 당당함을 대척되는 것으로 두면 안 돼요. 쫄다가 뻔뻔스러워 졌다가 그 다음에 마지막에 오는 것들이 당당함이에요. 당당함은 그렇게 쉽게 얻을 순 없어요.  267


라캉도 말했던 겁니다. 주체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275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임제어록>에 나오는 말입니다. 물론 진짜 살인을 하라는 것은 아닐겁니다. 위악은 위악일 뿐, 진정한 악을 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빈다. 단지 우리 스스로 주인으로 서는 데 방해되는 일체의 권위를 마음속에서 제거하자는 겁니다.  277




에필로그 - 존 레논의 '이매진'을 읊조리며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 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Imagine no posse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타인이 자신의 삶을 억압할 때는 저항이라도 가능하지만, 자발적으로 타인에게 복종하는 경우에는 답조차 없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깊게 가슴에 아로새겨야만 합니다. 타인의 삶을 흉내 내지 말라는, 그리고 타인에게 내 삶을 흉내 내도록 강요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말입니다. 하긴 다른 팽이의 회전이 멋있다고 해서 그것을 흉내 내는 순간 자신만의 스타일로 돌고 잇는 팽이는 더 이상 돌 수 없을 겁니다. 그 역도 비극으로 끝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억압뿐만 아니라 모방이나 자발적 복종도 철저하게 거부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모방이나 자발적 복종도 철저하게 거부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문정신이 가진 소명입니다. 인문학은 다른 학문과는 달리 '고유명사'를 지향하는 학문입니다.  288-289


"공통된 그 무엇"을 거부해야, 우리는 "스스로 도는 힘"을 지킬 수가 잇습니다. 아니 그 역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스스로 도는 힘"을 강화할 때에만 우리는 "공통된 그 무엇"을 극복할 수 있을 테니까요. '공통된 그 무엇'의 자리에는 그 어떤 것이라도 올 수 있습니다. 자본, 종교, 민족, 인종, 정치권력, 스승, 멘토 등등. 우리만의 스타일로 삶을 살아 내는 힘을 빼앗는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통된 그 무엇"이 들판의 야생화들처럼 단독적인 개인들을 '우리'로 만드는 근본적인 계기로 기능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말장난을 조금하자면, 공통된 그 무엇이 만드는 것이 바로 '울(타리)'. 그러니 '우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공통된 그 무엇이 만든 '우리'에 갇히는 순간, 개인들은 '우리'로 변한다는 겁니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겁니다. '울타리'를 의미하는 '우리'라는 말이 개인들의 단독성을 부정하고서 출현하는 집단적인 '우리'라는 말과 같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공통된 그 무엇의 '우리'에 갇혀 '우리'가 되는 순간, 더 심각한 위기가 먹구름처럼 몰아닥치게 됩니다. 우리와 공통된 것이 없는 타자들을 '적'으로 여기는 후속 사태가 벌어질 테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 순간 개인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슈미트의 말처럼 '정치적인 것'의 범주, 그러니까 '적과 동지'라는 치명적인 범주에 포획되고 맙니다.  290-291


"공통된 그 무엇"을 극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개개인들을 '우리'로 가두는 우리를 부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힘을 내서 스스로 다시 돌아가야만 합니다. "스스로 돌아가는 힘"을 유지하는 단독적인 개인들로 우리가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야만적인 적대와 대립, 그리고 끝내 모두를 절멸시키는 전쟁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존 레논은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모든 종교, 모든 국가, 모든 소유를 철폐하는 꿈을 꾸었던 적이 있습니다. 종교, 국가, 그리고 소유를 통해 적과 동지로 갈라서서 싸우는 인간의 모습이 참담했던 겁니다.  292-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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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좀 더 올바른 시각으로 삶을 대하는 것.  7


頓悟漸修(돈오점수) - 돈오, 갑작스럽게 깨닫고 그 깨달은바를 점수, 점차적으로 수행해가다.  8

(돈오돈수, 점오점수, 점오돈수, ..)


1강 자존(自尊) - 당신 안의 별을 찾으셨나요?

'아모르 파티(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

'모멘토 모리(Mo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와 아모르 파티. '죽음을 기억하라'와 '운명을 사랑하라'는 죽음과 삶이라는 상반된 의미의 조합이지만 결국 같은 방향을 바라봅니다. 내가 언젠가 죽을 것이니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하라는 것이고, 그러니 지금 네가 처한 너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죠.  17-20


(한국 교육은) 기준점을 바깥에 찍죠... 이렇게 교육받은 우리는 '다름'을 두려워해요. 기준점이 되는 누군가와 다른 내 모습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20

남과 다르면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드는 환경에서 자존감을 가지고 살려면 스스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21

기준점을 바깥에 두고 남을 따라가느냐, 아니면 안에 두고 나를 존중하느냐일 겁니다.  22


[어느 대학 교수는 미국 사람과 한국 사람의 차이를 이질 문화와 동질 문화라는 말로 해석한다. 미국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너와 나는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객관적인 정보를 준다. 반면, 우리는 '너와 내가 생각하는 바가 비슷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내가 "저어~기"라고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도 "음, 저기를 이야기하는구나!"라고 알아들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한다는 이야기. 미국이 인종 전시장이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세계에서 흔치 않은 단일 민족 국가라는 점을 고려할 때 공감이 가는 설명이다. 

이질 문화를 가장 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역시 거리 풍경이다.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피부색이 다르고 입는 옷이 다르고 하는 말이 다르다. 그것뿐만 아니다. 너와 내가 다른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을 쓸 일이 별로 없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사는 방식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뿐.  ...

가끔은 틀을 벗어나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3-25


우리는 아직도 각자의 상자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십 대가 살아야 할 상자, 삼십 대가 살아야 할 상자, 사십 대가 살아야 할 상자. 그 상자의 바깥으로 벗어나면 매년 명절마다 고문을 당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측은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실패한 인생이라고 손가락질 받죠.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자존을 싹 틔우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25


칭찬은 자존감을 키워주는데, 가진 것에 대한 칭찬이 아닌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질타는 눈치를 자라게 합니다.  27


정신과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모든 사람은 완벽하게 불완전하다"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28


제가 좋아하는 부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존중해야 하는 것이죠. 단점을 인정하되 그것이 나를 지배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 못났다고 외로워하지도 마세요. 모든 인간은 다 못났고 완벽하게 불완전하니까.  29


자기의 길을 무시하지 않는 것. 바로 이게 인생입니다. 

각기 다른 자신의 인생이 있어요. 그러니 기회다 다르겠죠. 그러니까 아모르 파티, 자기 인생을 사랑해야 하는 겁니다. 

우리에겐 오직 각자의 점과 각자의 별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인생은 전인미답(前人未踏)이에요. 인생에 공짜는 없어요.

준비해야 하죠. 내가 뭘 봐야 하는지, 다른 사람과 어떻게 다른지.  33-34


Be yourself. 너 자신이 되어라. 34


'다르다'와 '틀리다'는 다릅니다.  37


You should take me as I am.  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야 해.(브리트니 스피어스의 What you see)

Take me as I am.(나를 그대로 받아들여)!  38




2강 본질(本質) -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


<생각의 탄생>에서 리처드 파인먼은 '현상은 복잡하다. 법칙은 단순하다... 버릴게 무엇인지 알아내라.'  43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 모든 것은 변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브랜드 에르메스(HERMES)의 지면 광고)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요.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47


저는 게으른 사람입니다. 그럼 제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변하지 않는 것, 본질을 보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본질일까요? 바로 콘텐츠입니다. 콘텐츠는 '사람을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한 메커니즘입니다. 이것만 확실하면 페이스북에서, 트위터에서 퍼갑니다.  52


급변하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게 있고, 그걸 잡는 게 나의 유일한 돌파구입니다.  55


본질은 결국 자기 판단입니다. 나한테 진짜 무엇이 도움이 될 것인가를 중심에 놓고 봐야 합니다.  60


시간의 세월을 잘 견뎌낸 것들은 본질적인 것들이에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국 기행>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소속 칼리지들의 주요 목표는 학식이나 지식을 두뇌에 채워 넣는 것만이 아니다. 이곳 졸업생은 의사나 변호사, 신학자, 물리학자, 운동선수 같은 전문가가 되어 나가지 않는다. 여기에는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어느 한 방면의 전문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는다. 그레이트브리튼 최고의 젊은이들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와서 2,3년 머무르며 <조화>를 배운다. 육체, 정신, 심리가 고루 단련된 완벽한 인간이 유일한 목표이다. 이 기간이 지난 후에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종합 대학이나 법학 대학원, 종합 기술 전문대학, 병원 등 어디서나 전문적인 공부를 계속한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서는 전공 분야에 대한 증서를 받지 않는다. 그들이 받는 것은 <인간의 증서>이다.'  

본질은 탄탄하게 만들어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거죠. 

미국의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컬럼비아 대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학교는 전공을 2년 동안 정하지 않아요. 2년 동안 교양만 가르치는데, 학생들은 총 8개의 교양을 배웁니다. 고대와 현대 그리고 비영미권의 문학, 사학, 철학 그리고 이과 과목 두 가지, 쓰기, 음악, 미술. 1905년도에 컬럼비아는 이 제도를 만들었고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교육의 본질은 교양과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전인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62-63


지식은 본질은 익힌 후에 있어야 합니다.

본질이 아닌 것 같다면 놓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63


그리고 자기를 믿는 고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카소의 연작. 이 작품을 그리면서 피카소가 했던 일은 아이디어를 더하는 게 아니라 빼는 것이었습니다. 빼고 또 빼서 본질만 남기는 것이었죠.  64



복잡한 사물의 색심이 무엇인지 보려는 노력, 어떤 것을 보고 달려가느냐가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커다란 무기입니다.  68




3강 고전(古典) - Classic, 그 견고한 영혼의 성(城)


김용택 시인의 <첫사랑>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해 같은 처녀의 얼굴도 

새봄에 피어나는 산중의 진달래꽃도 

설날 입은 새 옷도


아, 꿈같던 그때

이 세상 전부 같던 사랑도 

다 낡아간다네

나무가 하늘을 향해 커가는 것처럼

새로 피는 깊은 산중의 진달래처럼

아, 그렇게 놀라운 세상이 

내게 새로 열렸으면

그러나 자주 찾지 않는

시골의 낡은 찻집처럼

사랑은 낡아가고 시들어만 가네


이보게, 잊지는 말게나 

산중의 진달래꽃은 

해마다 새로 핀다네

거기 가보게나 

삶에 지친 다리를 이끌고

그 꽃을 보러 깊은 산중 거기 가보게나

놀랄걸세

첫사랑 그 여자 옷 빛깔 같은

그 꽃 빛에 놀랄 걸세

그렇다네

인생은, 사랑은 시든게 아니라네

다만 우린 놀라움을 잊었네

우린 사랑을 잃었을 뿐이네.  71-72


얼마 전에 경기 지역의 교사 4백 분에게 강연을 했습니다. 선생님들이 어떻게 하면 창의력이 있는 아이들로 기를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저는 느끼게 해달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82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가리고 있다는 말을 자주합니다.

진짜 알려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궁금해질 겁니다. 그 대상의 본질에 대해서, 그리고 그걸 알기 전에는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위험합니다. 모르면 모른다로 해야 합니다.

정보는 인터넷으로 조금만 찾아보면 다 나옵니다. 알려고 하기 전에 우선 느끼세요. 고전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느껴야 해요. 그러다 보면 문이 열려요. 그 다음에는 막힘 없이 모모가 영혼을 타고 흐를 겁니다.  86


처음 그림을 볼 때는 감동을 짜내려고 미간에 힘을 주기도 했었는데, 아무리 해도 감동이 안 와요. 그래서 책을 몇 권 살펴 읽었고, 조금 알고 나니까 이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감동을 받을 수 있게 됐죠. 조금 더 덧붙이자면 그날의 감동은 제일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보다 컸어요. 죽음의 냄새를 맡고 그림 한 장이 주는 스토리를 읽고 화가의 천재성을 발견할 때 짜릿하죠.(뭉크의 The Death Bed 와 The Three Stages of Woman)  89




4강 견(見) - 이 단어의 대단함에 대하여


기술이나 이론은 만들 수 있어요. 법도 판례를 남겨 참고가 되도록 하죠. 그런데 창의력은 지난 번 것이 참고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상자안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더 이상 창의력이 아니겠죠. 그러니 창의력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죠. 창의력을 기를 수 있는 단 하나의 교실이 있다면 바로 현장입니다.  103


심부재언 시이불견 청이불문 식이부지기미(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그 맛을 모른다는 뜻으로 유교 경전 중 <대학>에 나오는 말.

흘려 보고 듣느냐, 깊이 보고 듣느냐의 차이.  110


존 러스킨이라는 영국의 시인은 "네가 창의적이 되고 싶다면 말로 그림을 그려라"라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뭘 봤니?"라고 물었을 때 그저 "풀"이라고 대답하지 말고, 풀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고, 잎이 몇 개 있었는데 길이는 어느 정도였고, 햇살은 어떻게 받고 있었으며 앞과 뒤의 색깔은 어땠고, 줄기와 잎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 등 자세하고 소상히 그림 그리듯 말하라는 것이었죠. 이것은 즉, 들여다보라는 겁니다. 

앙드레 지드도 <지상의 양식>에서 "시인의 재능은 자두를 보고도 감동할 줄 아는 재능이다"라고 했습니다. 시인의 재능은 자두를 보고도 감동하고, 간장게장을 보고도 감동하는 겁니다.  113


영화<시>에서 김용택 시인이 김용탁 시인으로 출연을 하는데요. 그 김용탁 시인이 할머니들에게 시에 대해 수업을 합니다.

'여러분, 사과를 몇 번이나 봤어요? 백 번? 천 번? 백만 번? 여러분들은 사과를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사과라는 것을 정말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보는 것이 진짜로 보는 거예요. 오래오래 바라보면서, 사과의 그림자도 관찰하고, 이리저리 만져도 보고 뒤집어도 보고, 한 입 베어 물어도 보고, 사과의 스민 햇볕도 상상해보고, 그렇게 보는 게 진짜로 보는 거예요.'  116


<생각의 탄생>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발견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것을 보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가 보는 것을 보는 것, 시청.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 견문(見聞)이죠.  117


아이디어는 깔려 있습니다. 어디에나 있어요. 없는 것은 그것을 볼 줄 아는 내 눈이에요. Beauty is in the beholder.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들의 눈 속에 있는 법입니다. 


보기 위해서는 투자를 좀 해야 합니다. 시간과 애정을 아낌없이 쏟아야 해요.

우리가 못 보는 이유는 우리가 늘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핍이 결핍된 세상이니까요.  118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 

외면한 채 한 곳을 바라보며

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 

목이 멜 것이다.              - 조은 <언젠가는>중에서  119


떠나서 보는 건 정말 중요합니다. 제대로 볼 수 있는 게 곧 풍요니까요.  123


순간을 온전히 살려면 촉수를 예민하게 만드세요

見. 본다는 것은 사실 시간을 들여야 하고 낯설게 봐야 합니다.

익숙함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Surprise me(나를 놀라게 해!)

놀라는 것이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의 능력은 놀라는 거예요. 놀란다는 건 감정이입이 됐다는 거고요.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그 현상을 뇌리에 박으면서 경험하는 거죠.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받는 것입니다.  124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너무 많은 것을 보려 하지 않는 겁니다. 

호학심사(好學深思), 즐거이 배우고 깊이 생각하라. 이 말에서 더욱 깊이 새겨야 할 것은 심사(深思)입니다. 너무 많이 보려 하지 말고, 본것들을 천천히 먹고, 천천히 걷고, 천천히 말하는 삶. 어느 책에서 '참된 지혜는 모든 것들을 다 해보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끝까지 탐구하면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읽었습니다. 이게 지금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 같습니다.  126




5강 현재(現在) - 개처럼 살자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선택을 하고 나면 답은 그 자리에 있습니다. 아니면 없습니다.  131


박경철씨와의 TV인터뷰에서 마지막 질문이 "박CD님은 계획이 뭡니까?"였습니다. 저는 "없습니다. 개처럼 삽니다"라고 대답했어요. 부연 설명을 부탁해서 "개는 밥을 먹으면서 어제의 공놀이를 후회하지 않고 잠을 자면서 내일의 꼬리치기를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였죠.

저도 개를 길러봐서 아주 잘 압니다. 오랫동안 데리고 있다가 묻어준, 이제는 딸아이가 그린 초상화 한 장으로 기억하는 개가 있는데요. 그 개를 키울 때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가방을 내려놓고, 안경과 모자를 멋고 침대에 눕는 거였습니다. 제가 집에 돌아오면 그 개는 반갑다고 5분 동안은 제 얼굴을 핥고 나서야 짖기를 멈췄기 때문이었는에요. 그때 보면 핥는 일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요. 그리고 밥을 주면, 이 세상에서 밥을 처음 먹어보는 것처럼 먹죠. 잠 잘 때도 보면, '아, 아까 주인이 왔을 때 꼬리 쳤던 게 좀 아쉬운데 어쩌지?' 그런 고민은 추호도 없어요. 그냥 잡니다. 공놀이 할 때는 그 공이 우주예요. 하나하나를 온전하게 즐기면서 집중하죠.

밀란 쿤데라도 똑같은 걸 느꼈는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카레닌이라는 개를 이야기하면서 '개들은 원형의 시간을 살고 있다. 행복은 원형의 시간 속에 있다'라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 직선의 시간 속에서는 행복을 알 수 없습니다. 길을 지나다가 평생 동안 찾던 그 사람을 만날지 모르는 일입니다. 어떻게 알겠습니까? 안다면 행복을 준비하겠죠. 이렇듯 직선의 시간은 행복을 정확히 알 수 없어요.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개들은 원형의 시간을 살아요. 그래서 늘 행복합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이런 문장이 나와요.

'카레닌은 집에서 깨어나는 시간은 순수한 행복이었다. 그는 천진난만하게도 아직도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진심으로 이에 즐거워했다.'

개들은 잘 때 죽은 듯 잡니다. 눈을 뜨면 해가 떠 있는 사실에 놀라요. 밥을 먹을 때에는 '세상에나! 나에게 밥이 있다니!'하고 먹습니다. 산책을 나가면 온 세상을 가진 듯 뛰어다녀요.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다시자요. 그리고 다시 눈을 뜨죠. '우와, 해가 떠 있어!' 다시 놀라는 겁니다 그 원형의 시간 속에서 행복을 보는 겁니다 순간에 집중하면서 사는 개 처럼 살자. 'Seiza the Moment, Carpe diem(순간을 잡아라, 현재를 즐겨라)'의 박웅현식 표현이자, 제 삶의 목표입니다.

Seiza the Moment, Carpe diem. 이 말은 '현재를 살아라, 순간의 쾌락을 즐겨라'가 아니라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132-134


한형조의 <붓다의 치명적 농담>을 보면 어느 선사에게 누가 묻습니다. 

"스님도 도를 닦고 있습니까?"

"닦고 있지."

"어떻게 하시는 데요?"

"베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에이, 그거야 아무나 하는것 아닙니까? 도 닦는 게 그런 거라면, 아무나 도를 닦고 있다고 하겠군요."

"그렇지 않아. 그들은 밥 먹을 때 밥은 안 먹고 이런저런 잡 생각을 하고 있고, 잠 잘 때 잠은 안 자고 이런 걱정에 시달리고 있지."

현재에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135


나이 마흔이면 이 정도는 살아야 하지 않아? 뭘 그렇게까지 하고 살아? 여기저기서 제 인생을 흔들었습니다.  139

저의 마흔은 그렇게 흔들림으로 가득 찼어요.  140


다른 답은 내 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의 인정, 현재에 집중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결국 이것은 자존과 연결됩니다.  140


완벽한 선택이란 없습니다. 옳은 선택은 없는 겁니다. 선택을 하고 옳게 만드는 과정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고민하지 말고 선택을 해봤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을 옳게 만드는 겁니다.  141


우린 순간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어떤 순간이 보배로운 순간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그 순간을 우리가 보배롭게 보면 됩니다.  143


<생각의 탄생>에 나온 말을 빌리자면 '세속적인 것들의 장엄함'을 깨달은 겁니다. '우리는 아이를 위해 빵에 버터를 바르고 이부자리를 펴는 것이 경이로운 일임을 잊어버린다'고 알랭 드 보통이 이야기 했던, 이불개는 것처럼 평범한 일이 소중해지기 시작한 겁니다. 장자의 '하늘 아래 가을의 작은 나뭇잎 이상 위대한 것은 없다'는 지혜의 말을 이해한 거예요. 이 세상에 아무리 위대한 것들이 많다고 해도 지금 내 눈앞에 나타난 이 가을 나뭇잎만 못 하다는 지혜를 얻은 겁니다.  144-145


Verweilee doch, du bist so schon! (머물러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145




6강 권위(權威) - 동의되지 않는 권위에 굴복하지 말고 불합리한 권위에 복종하지 말자


문턱증후군, 즉 그 문턱만 들어서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믿음에서 시작되는 잘못된 증상이죠.  153


동의되지 않은 권위에 대한 굴복.  156


한 기자가 비틀스 멤버들 중 폴 매카트니에게 질문했어요. "당신에게는 엄청난 유산이 있다. 그 유산에 주눅들지 않느냐?"라고요. 이 물음에 폴 매카트니의 답은 "무슨 이야기인지 잘 압니다. 나는 그래서 안정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매카트니라는 스타 입장에서도 그리고 '나'라는 입장에서도 매카트니는 자기 이름을 딴 별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대중적인 스타와 나를 분리시킬 필요가 있어요. 사람들은 그걸 잘 못하는데, 나는 나를 그렇게 놔두지 않습니다. 스타로서의 업적에 대해서는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때로는 감격합니다. 하지만 집으로 가면서 '난 내 이름을 딴 행성도 있지'라고 하지는 않죠. 난 여전히 리버풀에서 버스를 타고 다니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빅 이슈> 6월호 폴매카트니 인터뷰 중에서  158-159


먼저 검증을 하세요. 박웅현의 말이 얼마나 옳은지 보고, 옳은 부분은 좋아하되 그렇지 않은 부분은 반면교사로 삼으세요. 박웅현만이 아니라, 선배, 교수, 부모님 모두를 상대로 그렇게 하세요. 이게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160


광고회사 TBWA의 월드 와이드 CEO가 '장 마리드루'라는 사람이에요. 업계 사람들 모두가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전사 팀장 회의에서 잠깐 스피치를 했어요. 

"다른 문화를 접할 때 우리에겐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호기심과 존중, 그리고 윗사람이 될수록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재능을 사는 일입니다. 프랑스 속담에 '재능은 다른 사람들의 재능을 발견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죠."  162


사회는, 기득권 세력은 고분고분한 사람을 원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도발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될 테니까요. 때문에 권위를 보이면서 복종하고 따라오라고 무언의 협박을 하죠. 우리는 그런 가짜 권위들을 검증하는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를 무서워하게 해야 해요.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들을 무서워하진 않아요. 회장님에게도 건의할 수 있는 거예요.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요. 상대 눈치를 보는 가장 큰 이유는 돈을 주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일 텐데, 우리는 공짜로 일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쪽의 시혜를 받는 게 아니란 말이죠. 정당하게 일을 하고,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 것이니 할 말은 해야 하는 겁니다.  163-164


권위는 우러나와야 하는 거예요. 내가 이야기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인격적으로 감화가 돼서 알아줘야 하는 거예요. 그게 권위입니다.  166




7강 소통(疎通) - 마음을 움직이는 말의 힘


개와 남자의 공통점

 - 털이 많다.

 - 먹이를 일일이 챙겨줘야 한다.

 - 시간 내서 놀아줘야 한다.

 - 복잡한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 버릇을 잘못 들이면 평생 고생한다.

남자가 개보다 편한 점

 - 돈을 번다.

 -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출입제한을 받지 않는다.

 - 약간의 난이도가 있는 심부름을 시킬 수 있다.

 - 혼자 두고 놀러 다녀도 상관 없다.

 - 생리적 욕구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가 남자보다 좋은 이유

 - 두 마리를 함께 키워도 뒤탈이 없다.

 - 강아지의 부모가 간섭하지 않는다.

 - 이유 없이 외박하고 돌아오와도 꼬리 치면서 반겨준다.


고양이와 여자의 공통점

 - 세수를 잘한다.

 - 배고프면 혼자 챙겨 먹는다.

 - 낮보다 밤을 더 좋아한다.

 - 열 받으면 할퀸다.

 - 하루에 열두 번 삐친다.

 - 변덕이 팥죽 끓듯 한다.

여자가 고양이보다 편한점

 - 밥을 할 줄 안다.

 - 데리고 다니면 재채기 하는 사람 없다.

 - 나의 분신을 만들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양이가 여자보다 좋은 이유

 - 목만 ㅆ다듬어 주면 행복해 한다.

 - 무섭고 징그러운 쥐를 잡아준다. 

 - 꼬리만 밟지 않으면 조용하다.

 - 여자는 종일 잔소리를 하지만 고양이는 종종 애교를 부려 심심하지 않다.

 - 처갓집 개도 날 무시하는데 고양이의 어미는 나를 무시하지 않는다.


다르다는 걸 인정하면 소통이 조금 쉬워집니다.  182-184


{인정(역지사지)하고 배려(문맥파악, 본질파악)하며, 이해할 수 있게 전달(생각의디자인, 표현의 디자인, 아름다움)하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바탕으로 한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은 이겁니다.

Sender -> Message -> Receiver

즉, 커뮤니케이션이란 전하는 사람이 던지고 싶은 메시지를 받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에요. 그러니 그냥 주는 게 아니라 리시버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거죠. 그러니까 소통을 위해서는 화살표 방향이 바뀌어야 하는 거예요.

Sender <- Message <- Receiver  196


이것을 아주 극적으로 실천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예요. 프루스트는 대인공포증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한테 따돌림을 당할 지 모른다는 공포가 있어서, 본인이 대화할 때 집중했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머릿속에 있는 걸 끌어내라고 했대요.

그런데 이것은 소통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더 강하죠.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까 소통이 어려워집니다.

요즘 영화는 뭐가 재미있니? 어제 드라마는 어땠어? 그래? 그렇구나. 하고 맞장구쳐주는 노력이 필요해요.  197


말을 디자인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언어의 집을 지어줘야 해요.

아카데미 시상식을 볼 때 가장 큰 즐거움은 그들의 수상소감을 듣는 겁니다. 2012년 시상식에서는 작품상, 남우주연상, 감독상 등 다섯 개의 상을 탄 영화 <아티스트>가 단연 화제였죠. 1920년대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한 흑백 무성영화인 <아티스트>는 그 시절을 대표하는 감독 빌리 와일더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감독 미셸 하자나비시우스는 수상소감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세 사람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네요. 빌리 와일더, 빌리 와일더, 그리고 빌리 와일더에게요. 감사합니다."라고.

같은 자리에서 <철의 여인>으로 여우주연상을 탄 메릴 스트립도 "마지막에 이야기하면 음악에 묻힐 수 있으니 먼저 남편에게 감사하고 싶어요"라고 유머를 던졌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아직은 좀 뻔하죠? 꿈만 같고, 영광이고, 감사하고 말이죠.

오래 전에 영화 <타이타닉>이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었을 때, 함께 노미네이트 됐던 영화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였습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이 잭 니콜슨이었는데 마지막에 남우주연상으로 호명됐어요. 그때 잭 니콜슨이 수상을 위해 무대에 오르자마자 "조금 전까지 나는 침몰하는 줄 알았다"고 말해서 모두들 웃음을 터뜨리고 환호했던 기억이 납니다. 숀 펜이 <밀크>라는 영화로 상을 받았을 때도, 그 영화가 동성애자인 상원의원 이야기인데 로버트 드니로가 시상을 하면서 "<밀크>봤나요? 나는 그 영화를 보기 전까지 숀 펜이 이성애자인 줄 알았어요"라며 아주 위트 있게 이야기하죠. 객석의 모든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고요. 디자인된 말들은 이렇게 여러 사람을 즐겁게 해주기도 합니다.  203-204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먼저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해 말함과 동시에 어떤 문맥으로 해야 하는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는 거예요. 여기에 힘을 싣기 위해서 지혜롭게, 생각을 디자인을 해서 말하는 것이 필요하고요.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소통을 잘하고 싶으면 몇 가지 노력이 필요합니다. 역지사지, 문맥파악,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는 습관, 스케치를 할 때 형태를 잡는 데생이 필요하듯 자기 생각을 데생해야 해요. 연습하고 말을 만들어보는 거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리해보고, 어떻게 하면 내 말이 설득력이 있을까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206-207


할리우드에는 '7 Words Rule'이라는 게 있습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시나리오를 가져오니까, 투자를 받고 싶으면 시나리오를 단 일곱 단어로 설명해보라는 건데, '결혼을 했는데 마누라가 조폭이네? 조폭 마누라' 이런 식으로 그림이 확 그려지도록 설명하라는 이야깁니다.

이 훈련을 한번 해보세요.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미국에서 대학원에 다닐 때 논문을 쓰기 전에 우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딱 한 줄로 정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걸 세 개의 패러그래프로 써보고, 그걸 다시 챕터 별로 나눠서 논문을 만들죠. 예외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됩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일곱 단어로 정리되지 않는 건 아직 내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207


'맥킨지 룰'도 7 Words Rule과 비슷한데요. 만약에 내가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에 CEO가 탔는데 엘리베이터는 15초 후에 문이 열린다고 가정하고, 거기서 내 생각을 어떻게 말해서 CEO의 마음을 끌 것인지 생각해보라는 거죠. 예를 들어 "왜 지역별로 마케팅을 하십니까? 타깃별로 하십시오. 자세한 건 나중에 보고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 누가 궁금해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냥 둥글게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정리하는 습관을 기르고, 그걸 더 정리해서 증류해보세요. 거기에서 나오는 엑기스가 나의 진짜 생각이 되어줄 겁니다.  208




8강 인생(人生) - 급한 물에 떠내려가다 닿은 곳에 싹 틔우는 땅버들 씨앗처럼


인생은 자존, 본질, 고전, 견(見), 현재, 권위, 소통이라는 싱싱한 재료를 담아낼 아름다운 그릇입니다.  213


전인미답(前人未踏)-어떤 일 또는 수준에 아무도 손대거나 다다라 본 적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 위험한 나이 20대. 그리고 30대, 40대, 50대, 아마도 아니생은 젊음이건 아니건 누구에게나 전인미답이 아닐까요? 그래서 늘 위험하지만 또 한편으로 매 순간이 흥미진진한 것이 바로 인생일 겁니다.  214


전인미답의 길을 즐기기 위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들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실수에 휘둘리지 않는 겁니다. 실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실수를 못 견디고 좌절하지 마세요. 나만 그런게 아닙니다.{공원의 잔디는 내 자리만 듬성듬성해 보인다}  215


중국 명나라 때 묘협이라는 스님이 불자들에게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할 지에 대해 쓴 글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몸에 병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몸은 유기체인데, 바이러스가 들어오고 나가고 나이 먹으면서 노화가 오는데 어떻게 병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 병이 없는 상태를 자기의 기본값으로 잡아놔요. 병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자기가 정한대로 설정해놓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생은 마음대로 만질 수 있는 게 아니죠. 점잖은 어른들이 들으면 쓸데없이 젊은 사람들 패기 꺾는 이야기한다고 노여워할지 모르겠지만 먼저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으로 고백하는데 인생은 절대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습니다.  218


모든 인생은 의도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남들의 영웅담은 내 이야기가 될 수 없죠.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영웅담을 들어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영웅이 되고 싶어지죠. 그런데 그 영웅이 쓴 무기는 이미 없거나,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에요. 이순신은 물살을 보고 그것을 이용해 한산대첩에서 승리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이순신의 물살이 나타날까요? 인생은 똑같이 반복되지 않습니다. 모든 인생은 전인미답이에요. 인생에 공짜는 없어요. 하지만 어떤 인생이든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르지만 반드시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러니 이들처럼 내가 가진 것을 들여다보고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준비해야 하죠. 나만 가질 수 있는 무기 하나쯤 마련해놓는 것, 거기서 인생의 승부가 갈리는 겁니다.  224-225


"기필(期必)을 버려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살면서 늘 기필코 이루어내라는 말만 들어본 제게 기필을 버리라는 말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요. 인생은 기필코 되는 게 아닙니다. 뭔가를 이루려 하지 말고 흘러가세요.

영화평론가 이동진 씨는 자신의 책 <밤은 책이다>에서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살고 싶고,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살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건 말 그대로 지혜입니다.  226


중간중간 말씀드렸듯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지, 고전이 왜 중요한지, 발견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를 생각하며 지혜롭게 하루하루를 쌓아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꽉 채워 살다가 돌아보면 펼쳐져 있는게 인생이지, 단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를 허술하게 보내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227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세 가지 팁

첫째, 인생에 공짜 없습니다.

불환인지불기지 환기무능야(不患人之不己知 患其無能也) <논어>에 나오는 말입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 내가 능력이 없음을 걱정하라는 뜻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기회는 분명히 옵니다. 믿으세요. 그러니까 한탄하지 말고 준비해놓으세요. 그러면 빛을 발할 때가 옵니다.

내가 준비만 잘하고 있다면 남들이 알아줍니다.  

둘째,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셋째, 인생에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정답으로 만들어가는 과정만 있을 뿐입니다.  228-234


선택하지 않은 답은 이미 내 답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맞다 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답은 여기 있다. 아니면 없다'가 아니라 '답은 여기 없다. 어떠면 저기에 있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235


여러분, 우리 되는 대로 삽시다. 되는 대로 살되, 인생에는 공짜가 없으니 본질적으로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살피고, 질 때 지더라도 언제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답이 정답이니 아무거나 선택하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 현명한 판단을 내리면서, 그것을 옳게 만들면서 삽시다.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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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무슨 짓을 해서건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세상에서, 죽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 각자가 자기 몫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며, 자기 삶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이다.  27


그녀는 겁이 나기 시작햇다. 약을 먹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숨이 끊어지는 것과,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본 뒤 죽음을 기다리며 닷새나 한 주를 보내야 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48


"여긴 감옥인가요?"

"아뇨, 정신병원이에요."

"난 미치지 않았어요."

간호사가 웃었다.

"여기선 다들 그렇게 말해요."

"좋아요. 그럼 난 미쳤어요. 그런데 미쳤다는 게 도대체 뭐죠?"  50


미쳤다는 게 뭐지? 사람들이 그 단어에 각자 다른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51


"미친 사람이란 자기 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이야. 정신분열증 환자, 성격이상자, 편집광처럼 말이야. 다시 말해 뭇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지."(제드카의 말)

"당신처럼요?"

"하지만, 시간도 공간도 없고 그 둘의 결합만 있다고 믿었던 아인슈타인, 또는 대양 저 너머에 절벽이 아니라 다른 대륙이 있다고 확신햇던 콜럼버스, 또는 인간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장담햇던 에드먼트 힐러리, 또는 독창적인 음악을 창조해냈고 다른 시대 사람들처럼 옷을 입고 다녔던 비틀스, 아마 너도 이미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을 거야. 이 모든 사람들, 그리고 다른 수많은 사람들 역시 자신의 세계 속에서 살았어."  53


".. 난 미친 여자로 남고 싶거든. 다른 사람들이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라, 내가 꿈꾸는 대로 내 삶을 살고 싶거든. 바깥에, 빌레트의 담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아?"

"같은 우물물을 마신 사람들이요."

"그래, 바로 그거야.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짓거리를 하는 자신을 정상이라고 믿지. 나도 이제 그 우물물을 마신 척할 거야.  55


사춘기 시절, 그녀는 뭔가를 선택하기에는 아직 때가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었을 때는, 뭔가를 바꾸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다고 체념했다. 지금까지 무엇 하느라 내 모든 에너지를 소비한 거지? 그것도 내 삶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게 하느라고.  67


이제 이 삼 일만 지나면 그녀는 이빨을 닦을 필요도, 머리를 빗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그녀는 가끔씩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내 하루하루가 지겹도록 똑같았던 건 바로 내가 원했기 때문이라는 걸 좀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아마도..."  71


최근에 발견된 세로토닌이라는 물질은 인간의 정신 상태에 영향을 미치는 한 요인이었다.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집중하고, 자고, 먹고, 삶의 행복한 순간들을 즐기는 능력에 이상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 물질이 아예 없으면, 인간은 절망, 비관주의, 자신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느낌, 과도한 피로, 불안, 결단력 결여에 시달리다 결국에는 완전한 무기력 상태, 나아가 자살에 이르는 만성적인 우울에 빠져들었다.  82-83


"미쳤다는 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해. 마치 네가 낯선 나라에 와 있는 것처럼 말이지. 너는 모든 것을 보고, 네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인식하지만 너 자신을 설명할 수도 도움을 구할 수도 없어. 그 나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그건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느껴본 거예요."

"우린 모두 미친 사람들이야. 이런 식으로든 저런 식으로든."  92


"도대체 뭐가 자신을 혐오하게 만들지?"

"아마 비겁함이겠죠. 아니면 잘못하는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영원한 두려움이거나. 몇 분 전만 해도 난 행복했어요. 죽음을 선고받았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었죠. 그런데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다시 깨닫게 되자. 더럭 겁이 났어요."  97


그랬다. 살아오는 동안, 그녀는 많은 일을 최종 결과가 나올 때까지 밀고 나갔다. 하지만 모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사과만 하면 간단히 끝날 불화를 계속 끈다거나, 관계가 밋밋하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남자에게 끝내 먼저 전화를 걸지 않는다거나 하는, 그녀는 가장 쉬운 일에서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강하며 무심하다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허약했고, 학업이나 운동시합에서 결코 두드러진 성적을 거둔 적이 없으며, 가정을 화목하게 가꾸지도 못했다.

그녀는 자잘한 결점들과 싸우느라 지쳐 정작 중요한 문제에서는 쉽게 무너졌다, 독립심 강한 여자처럼 행동했지만, 내심으로는 같이 지낼 사람을 열렬히 갈구했다. 그녀가 나타나면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지만, 그녀는 대개 홀로 밤을 보냈다. 수도원에서,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그녀는 모든 친구들에게 자신이 선망의 모델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스스로 만들어낸 자신의 이미지에 부합하려 애쓰는라 모든 에너지를 소비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녀에게는 자기 자신-누구나 그렇듯. 행복해지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는 데 써야 할 힘이 더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타인들, 그들을 이해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지! 그들은 예측할 수 없는 반응을 보였고, 그들 자신이 만든 방어막 속에 같혀 그녀처럼 모든 것에 무관심했다. 좀더 삶에 개방적인 누군가를 만나면, 그들은 그 사람을 즉각 거부하거나, 열등하고 '순진한' 사람으로 매도하여 상처를 입혔다.  98-99


교육은 우리에게 오로지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갈등을 피하라고 가르친다. 베로니카는 모든 것을, 특히 자기 속의 수없이 많은 베로니카들. 매력적이고, 끼로 넘치고, 호기심 많고, 용기있고, 언제든 위험을 무릎쓸 준비가 되어 있는 그 베로니카들을 발견하지 못한 채 살아온 삶의 방식을 증오했다.  100

 

교도소가 죄수를 훈화하기는커녕 더 많은 범죄를 저지르도록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병원도 입원한 환자들이 모든 것이 허락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전혀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전적으로 비현실적인 세계를 점점 더 익숙해지게 만들었다.  108


이고르 박사는 캐나다-최근 미국의 한 신문이 전세계에서 삶의 질이 가장 높은 나라라고 인정한-에서 온 한 연구 논문을 집어들고 읽어내려갔다.

'캐나다 통계청에 따르면, 

15세에서 34세 사이 인구의 40%, 

35세에서 54세 사이 인구의 33%,

55세에서 64세 사이 인구의 20%가 

이미 어떤 종류의 정신질환에 시달린 경험이 있다.

캐나다인 다섯 명 중 한 명은 현재 어떤 종류의 정신적 혼란에 시달리고 있고, 여덟 명 중 한 명은 일생 동안 적어도 한 번은 정신장애로 변워에 입원하게 된다고 평가할 수 있다.'

"훌륭한 시장일세. 여기보단 백 번 나아! 인간들은 행복해질 가능성이 크면 클수록 불행해지는구먼." 그가 중얼거렸다.  111-112


"넌 미친 사람들의 단순한 장난에도 주눅이 들고 말았지. 왜 더 멀리까지 가보지 않았어? 네가 잃을 게 뭐가 있는데?"

"내 자존심이요. 날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고 느꼈어요."

"자존심이란 게 뭔데? 모든 시림들이 널 착하고 예의 바르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넘치는 사람으로 여기길 바라는 게 자존심이야? 자연을 봐. 동물 다큐멘터리를 더 자주 보라구. 짐승들이 자기 영토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싸우는지 관찰해봐. 우리는 모두 네가 그 사람의 뺨을 때리는 걸 보고 통쾌해했어."  142


"우리 모임(형제클럽)은 금지된 모든 것들을 체험해보기로 결정했어.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 줄곧 정부는 우리에게 정신적 탐구는 인간을 현실적인 문제들로부터 이탈시킨다고 가르쳐왔지. 하지만 대답해봐.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게 바로 현실적인 문제 아냐?"  143


"젊음이란 그런거야. 젊음은 몸이 얼마나 버텨낼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지. 하지만 몸은 언제나 버텨내."  149


그는 빌레트에서 달아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겉보기에는 아주 엄격해 보여도, 빌레트의 보안에는 많은 틈들이 있었다. 하지만 일단 내부로 들어오면 더이상 바깥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틈들은 틈이면서도 틈이 아니었다.(에뒤아르)  211


사실, 일생을 사는 동안 우리에게 생기는 모든 일은 오로지 우리 잘못에서 비롯되는 거야.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똑같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그것에 대응했어.  216


"난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 에뒤아르. 항상 저질러버기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없어 포기했던 실수들을 저질러가며 공포가 다시 엄습해올 수도 있겠지만, 그걸로는 죽지도 기절하지도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 기껏해야 날 지치게 하는 게 고작일 그 공포와 맞서 싸워가며. 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현자가 되기 위해 미치광이가 되는 법을 가르쳐줄 수도 있을 거야. 난 그들에게 모범적인 삶의 교본들을 따르지 말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모험을 발견하라고, 살라고 충고할 거야!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구약성서를, 회교도들에게는 코란을, 유대인들에게는 토라(모세 오경, 모세의 율법)를, 무신론자들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들을 인용해줄 거야... 그들이 남긴 글들은 모두 '살아라!'이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어. 네가 산다면, 신께서도 너와 함께 살리라. 네가 위험을 무릅쓰길 거부한다면, 신께서도 하늘로 물러나 철학적 공론(空論)의 한 주제로 남으리라..."  217


네 몫의 삶  219


지금 당장 죽어야 한다면,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죽어.  232


"제가 나았나요?"

"아니요. 부인은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다른' 사람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닮기를 원하죠. 그건 내 관점에서 볼 때 심각한 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르다는 게 심각한 병인가요?"

"모든 사람과 닮기를 자신에게 강요하는 게 심각한 거죠. 그건 신경증, 정신장애, 편집증을 유발시켜요. 자연을 왜곡하고 하느님의 법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각한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숲에 똑같은 잎은 단 하나도 창조하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부인은, 부인이 다르다는 걸 미친 걸로 생각하죠. 그래서 빌레트에서 지내기로 작정하신 겁니다. 여기서는 모두가 다 다르기 때문에, 부인은 모두와 닮아 있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어요?"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과 다른 존재가 될 용기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의 순리에 역행합니다."  241


남자와 여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미친 짓은 바로 사랑이야.  275


한 영국 시인이 쓴 시. "언제나 똑같은 물을 품고 있는 연못이 아니라, 넘쳐 흐르는 샘처럼 되라.  282



옮긴이의 말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과 자신의 죽음을 실감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언젠가 자신도 죽으리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막연한 미래의 일일 뿐 우리는 죽음을, 달리 말하면 삶의 진가를 잊고 산다.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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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콘서트

저자
김경동 지음
출판사
이숲 | 2010-01-1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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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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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대표 학자들, 인문학을 말하다!한국정책방송 KTV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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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대한민국은 인문학 바람을 일으켰다. 
시간이 흐를 수록 사람들은 시류에 흘러 가면서 자신의 생각을 잃어가고 있기에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어느 학자의 말처럼 '인문학은 늘 있어 왔던 것인데.. 지금 이것이 하나의 유행으로 번져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노파심이 든다.
인문학은 우리에게 지식의 깊이와 지혜와 창의성을 길러 준다.
현상이 아니라 이면의 진실을 볼 수 있는 힘을 준다. 
자신의 확고하지만 융통성 있는 확신을 준다. 
이 책에서도 그러한 내용들이 가득했다.
개인적으론 과학 분야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편인데, 출연진들에 의해 재밌는 내용들을 알게 되었고,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으로 인해 더큰 시너지가 발생하게 되며, 핵심은 일맥상통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KTV 한국정책방송에서 '인문학열전'이란 프로그램으로 사회의 저명인들과 함께 인터뷰를 한 내용을 정리해 놓은 책이다.
나는 책을 먼저 보았다.. 
그리고 읽으면서 TV내용을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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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달인 호모 로?스

저자
윤세진 지음
출판사
그린비 | 2007-05-15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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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만난 언어, 호모 로퀜스 언어의 달인, 호모 로퀜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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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인생 역전 프로젝트 시리즈로.. 앞서 읽었던 호모 코뮤니타스, 호모 에로스호모 쿵푸스호모 루덴스에 이어 읽었다.

고미숙씨의 책에 맛을 느껴 전체를 읽게 되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 아~!! 하는 감탄사를 자아냈다.
또한 고미숙씨의 글에 늘 나오는 수유너머에 대한 설명도 없이 글을 우직하게 전개해 나간다...
물론 당연한 말이기도 하겠지만, 이 책은 고미숙씨의 책보다 더 맛을 느끼게 해주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읽어보면 안다..!!

언어가 춤을 춘다..언어의 달인...이러한 표현보다는 독서는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대해 설명하는데.. 그의 글에 매료되었다..

'왜?' 와 '어떻게?' 의 해답을 적절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설파해 놓은 내용이 나는 좋았다..
이 시리즈 중 읽은 책중에는 가장 많은 줄을 친것 같다.. 
저자의 글이 좋아.. 저자가 펴낸 또다른 책 예술의 달인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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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저자
고미숙 지음
출판사
그린비 | 2010-09-2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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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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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삶이 함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을까?'앎과 삶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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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저자의 책은 그린비 인문학 프로젝트에서 이미 2권(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을 통해 만나보았다. 
2권 모두 흥미롭게 읽었다.
그래서 이 책 역시 고민하지 않고 읽었다.
개인적인결론을 먼저 말하면 앞의 2권을 통한 기대치가 있어서 였는지는 몰라도 좀 미흡하였다고 생각한다.

호모 코뮤니타스는 경제학 서적이 아니다 그렇기에 방법론을 따질 수는 없다. 
그런면에서 좋았다.
하지만 카오스 경제학의 표현을 사용하며 증여에 대해서 강조를 한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명확한 설명이 있었으면 했다.
돈의 시대에서 돈의 달인이 되는 방법에 대해 논한다는것이 참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좀더 명확하게 다양한 측면에서의 제시가 있었으면 했다.(물론 내생각..^^)

저자는 분명 돈의 가치에 대해서 우리가 빠지지 않아야 할 함정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해 준다.
도한 돈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논한다.
개인적으론 위에서 말한것처럼 앞선 2권에비해서는 미흡한 감이 있긴하지만 또다른 생각들을 자극하는 면에서는 좋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젊은이 들에게 돈보다 더 중요한것, 그리고 돈에 대한 가치를 어떻게 두어야 하는지에대해서 적절한 지적을 해주는 면에서 좋았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한방주의, 많을 수록 좋다는 신 자유주의에 대한 정확한 지적을 통해 우리에게 생각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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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저자
고미숙 지음
출판사
그린비 | 2008-11-15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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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 연애불능시대,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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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리고 연애.. 우리는 늘 이것을 바라고 기다리고 어쩔땐 직접 찾아나서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이것을 상상하기도 한다.

과연 사랑은 무엇이고 연애는 어떻게 하는것일까?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게 되면 우리는 대체로 비슷한 코스에 비슷한 생각들을 하고 있다..

사랑은 영원한 것일까?
사랑은 언제나 변하는 것일까?
사랑은 무엇일까..

나는 이 책을 알게 되었을때 ...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유는 사랑과 연애의 비법을 그리고 기술들을 나열한 책이려니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뒤 우연히도 이 책의 표지를 다시금 보게 되었을때.. '인문학'이란 표현을 보게 되고 이것을 인문학적으로 풀어놓았다면 어떠한 내용들을 싫었을까 궁금했다. 

목차에서 '에로스는 쿵푸다'란 표현은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의 표현이다. 
쿵푸스는 실제로 스스로가 경험하고 겪으면서 체득하는 부분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에로스도 그러한 맥락이란건지 궁금했다. 
결국 이 책을 보았다. 위의 호모 쿵푸스의 저자가 이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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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의 달인 호모 루덴스

저자
한경애 지음
출판사
그린비 | 2007-05-15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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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만난 놀이, 호모 루덴스 놀이의 달인, 호모 루덴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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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것에 대해서..
우리는 노는것을 좋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는 것을 싫어 하지 않는다.
일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고, 해야할 것 하지 않고.. 놀라고 하면 너무 좋다.
싫어하는 사람이 이상하다고 여김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노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어떻게 노는 것이 진짜 노는것인지 어떻게 놀아야 하는것인지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다.
마냥 노는것이 좋다.
현재에 사는 우리는 노는 것이 별다른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노래방 pc방 놀이공원 영화 때론 스포츠.. 운동경기 관람.. 
그런데 이러한 것을 노는 것이라 표현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어떻게 노는 것이 진정 노는 것일까?
우리가 생각하는것 말고 다른 것은 없는 것일까?
노는 것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라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을 해 나가다보면 ...우리는 노는 것에 대한 정의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음을 알게 되기도 한다.

저자는 노는 것에 대해 다시금 고려해 볼 것을 강조한다.
진정 노는것은 무엇인지, 노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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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저자
고미숙 지음
출판사
그린비 | 2007-05-15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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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만난 공부, 호모 쿵푸스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는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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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비 출판사의 인문학 프로젝트 초창기에 나온 책이다.
일전에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를 재밌고 의미있게 읽었었다.
당시 꼭 인문학 프로젝트 시리즈를 모두 봐야겠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속으로 이핑계 저핑계를 대면서 다른책들에 밀려 있었다.
모처럼 마음먹고 시리즈 몇 권을 들고와서 읽었다.
그중에 한 권인 호모 쿵푸스
저자는 공부에 관한 인문학적인 개념과 자신의 사유에 의한 글들을 적어 놓았는데..
길지 않는 내용이지만 좋은 내용들로 만족스러운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존 공교육의 문제와 사교육의 문제에 대한 지적을 하고 있으며, 미래를 위한 공부는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적혀있다.
그 내용들에 꽤나 동조하기도 하고 있다.
저자는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라고 표현한다. 
과연 그 의미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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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두드림 콘서트

저자
유재원 지음
출판사
한국경제신문사 | 2010-06-1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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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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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다! 인문학과 문화, 예술의 영역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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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고 쉽게 읽히는 인문학 책이다.
사람과 음악과 미술과 문학과 소통이라는 다섯가지 화두를 두고 총 15가지 내용의 글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기에 한 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이라기보다는 인문에 대한 여러가지 분야를 즐겁게 접할 수 있게 한 책이라 평하고 싶다.

하나의 분야에 깊은 내용은 아니지만 대충알고 있던 내용이나 전혀 몰랐던 지식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해 주었고 거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들에 대해 다시금 정리해 줌으로 인문학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접근하게 해준다.
그러기에 제목에서 '두드림'이라는 표현은 꽤나 잘 표현된 주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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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단련법

저자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출판사
청어람미디어 | 2009-02-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지의 거장 다치바나 다카시를 형성한 지적 생산의 방법론!『지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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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식의 거장이라 불리는 저자의 30여년 전 쯤의 책이다.

제목자체가 눈길을 끈다. 단련이란 단어와 지식이란 단어를 붙여 놓으니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책의 서두에서 '어떤 주제든 최적의 일반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제목에서 풍기는 호기심을 무참히 짓밟는다. 뒤이어 쓸데없는 시행착오를 피하는 방법으로 타인의 경험을 배우는것에 초점을 맞추고 읽기를 원하고 있다.

책의 부제는 '다치바나 식 지적 생산의 기술'이다. 표현처럼 저자의 입력방법과 그에 따른 분류방법 그리고 출력을 위한 방법 그리고 그 사이 즉 입력된 정보가 무의식중에 어떻게 생산될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우선 30여년 쯤 전의 책이기에 전자산업이 발전하기 전의 내용들이 꽤 들어있다. 그 부분은 참고만 해도 될 만한 부면들이었다.

신문과 잡지 스크랩과 같은 방법들은 지금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지금은 각 신문사들에 접속하여 기사를 검색, 스크랩등을 해서 분류해 놓을 수 있다.

그 외의 부면들은 충분히 참고할 만한 내용들이 있고, 직접 적용해 보고 싶은 점들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인터뷰에 관한 내용들이나 재료 메모에 관한 부면들은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면들이라 더 집중하여 읽었다.


개인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글을 쓰거나 강의를 위한 글을 작성할 때 거의 매번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재료 메모와 근접한데. 

개인적으로는 그것은 '단서'라고 부른다. 자료와 정보들을 수집하면서 매번 핵심 단어들을 정리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단서'라 부르며 그것으로 맵을 만들어가면서 내용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해 나간다.

그리고 어느정도 맵이 형성되면 그 중에 포인트로 두어야 할 것들을 정한 뒤 단서들을 합치거나 지우기 그리고 순서를 잡는다. 

언제나 늘 느끼는 것이지만 글에서 핵심 단서가 많으면 많을 수록 읽으면 내용이 만족스럽지 않게 된다.

그렇기에 단서들을 합치시키는 작업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그것을 뼈대로 살을 붙이는 서술을 한다.


저자는 어떤 식으로 하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나오지 않아서 모르겠으나 어느정도는 비슷하리라 생각을 한다.


우리는 누구나 지적 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지(知)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을 부추기는 세상에서는 지의 성장이 없으면 안될것으로 강조받고 있다. 그것이 옳든 아니든, 어쩌면 인간은 앎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책은 그 앎에 대해 자신만의 기술이 필요한데, 저자는 기술 이전에 기본적인 바탕은 있어야 함을 간접적으로 속독에 비유하여 표현한다.

'속독에 필요한 것은 오로지 정신의 집중뿐이다. 그 이외에 어떤 훈련도 필요치 않다' 라고 함으로 그점을 기술적인 면에 앞서 우리의 자세와 욕구의 필요성을 지적한다.

기술이 필요하긴 하지만 바탕적인 요소가 있을때 기술도 먹혀든다. 이런 기본적인 진실은 어떠한 것에든 당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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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독서법

저자
최진 지음
출판사
지식의숲 | 2010-07-0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대한민국의 지도자로 만든 그들의 독서 습관!이승만 전 대통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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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 기록 보기


성공으로 이끄는 책읽기의 즐거움 대통령의 독서법 


이 책은 저자가 초대 대통령부터 현재의 대통령까지 그들의 독서방법을 조사하고 분석하여 책을 읽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환경에 의해서 읽은 대통령도 있었고,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읽은 대통령도 있었고, 독서 자체에 즐거움을 가진 대통령도 있었고, 살아남기 위해 읽은 대통령도 있었다.

물론 책의 내용중에는 독서법에 대해 잘 알려지지않은 대통령도 있었다.
이럴땐 저자가 가능한대로 추측하여 기록해 두기도 하였다.

다독 정독 숙독 낭독 속독 통독 묵독 난독 발췌독 음독 ... 독서의 방법도 다양하다.
대통령들 역시 다양한 독서방법을 사용한 것을 보면서 그들의 독서방법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독서법마다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며, 책을 깊이 많이 읽은 역대 대통령들의 내용에서 많은 자극도 받게 되었다.

저자의 표현처럼 대통령의 독서법은 정상에 오른 사람의 독서법이기도 하다. 
그들의 독서방법들을 알게 되고 그들의 고독이나 아픔을 통해서 아직도 나는 너무 편하게 지내고 있음을 새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그의 환경과 경험과 생각과 읽은 책으로 인해 운명은 늘 바뀌어 간다. 우리는 읽은대로 만들어진다는 말처럼 자신의 환경이나 상태에 맞는 책들을 읽어나가며 스스로를 가꾸어 나갈 필요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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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의숲에서경영을만나다.1정진홍의인문경영
카테고리 경제/경영 > 경영관리
지은이 정진홍 (21세기북스,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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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정진홍씨는 SERICEO 에서 <정진홍의 감성리더십>코너를 최장기간 진행하며 변화와 혁신 그리고 창조의 감성리더십 분야를 개척하였다.
이 책은 그의 내용을 정리해서 만들어 졌는데, 오래전부터 눈에 끄는 제목이었고 좀 늦은감은 있으나 읽기 시작하였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방대한 내용에 매료되어 책을 읽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하나의 주제를 따로 정리해 보는것도 매우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였다.

지금 서문을 시작으로 주제들을 다룰것이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일들을 경험하고 겪어야만 한다. 
종종 사람들을보고 있노라면 참 우리네가 생각없이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연시 치부하는 일이기에 생각할 여지가 없이 보일 수 있으나,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측면에서는 이처럼 바보같은 행동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변화를 꽤하는 것은 아닐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큰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소한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EBS 에서 '인간의 두 얼굴'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다.
사람은 군중심리에 의해, 다수에 의해 생각없이 끌려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것으로 인해 매우 큰 해를 입게됨에도 불구하고 따라가기도 한다.

우리가 그런 행동을 했더라도 그때그때 반성하는 시간을 갖거나 깊은 생각을 한 번만이라도 한다면 비슷한 잘못은 저지르지 않게 될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반복된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늘 불편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그것마저도 불쌍한 인간을 보이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의 글처럼 인간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동시에 놀고 만들고 말하고 교감하며 행동을 한다. 변화무쌍한 감정과 그러한 무리들에서 예상치 못한 행동이나 결과들이 나오게 된다.
그럴때 우리가 한번쯤은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것이 얼마나 자신에게 필요한지를 기억해야 할것이다.

인문학은 우리가 사고의 통찰력을 가지도록 도움을 주는 분야이다.
사고의 힘!! 그것은 그냥 오는것이 아니다.
스스로 노력한 결과에 의해 나오는 것이며, 인과관계가 없는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공통점이나 관련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서문 첫 줄에서 말한 것처럼 통찰의 힘을 키워나가자.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나 하나의 단어들을 통해 힘을 키워나가 보도록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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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의달인호모부커스
카테고리 인문 > 독서/글쓰기
지은이 이권우 (그린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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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꽤나 오래 전부터 읽어보고자 생각을 하였으나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읽고싶은 이유는 책 표지에 '인문학'이라는 표현을 보았기에 그러하였다.
허나 두껍지 않은 책인데도 쉽게 손이 가지가 않았다. 인문학이라해서 왠지 어렵지 않을까하는 생각 이었는지, 아니면 두껍지 않아서 그리 많은 내용이 없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에 손이 가지 않았는지 다른 이유가 있는건지.. 아무튼 읽어보려는 마음은 있으나 손이 잘 가지를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 이권우교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되어 강의 듣기전에 읽어봐야겠다는 마음에 읽게 되었다.

표지 날개의 설명부터 인문학적이다.
'책에 눈멀어 책만 읽으며 살아가려는 한심한 영혼.'으로 시작하여 저자의 설명을 간략히 다루는데, 이것도 여느 책과는 좀더 다른 표현과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교양도서로 선정되었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차례가 마음에 든다.
지극히 개인적이긴한데, 내 생각과 비슷하게 주제들이 정해져 있기에 그러하다. 그렇다고 내가 인문학을 파고 드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 책은 2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는 '왜' 읽어야 하는가? 이고 
                                        2부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이다.
개인적으로 늘 염두에 두는 것 중의 하나인데, 무엇을 하든지 '왜'해야 하는지를 먼저 알면 동기부여가 되고, 그 다음에 '어떻게'는 방법들을 제시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 책은 그에 맞게 차례가 구성되어 있다.

첫장부터 인문학적으로 시작한다.. 책읽기와 공자되기..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로 분류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인문학과 고전을 섭렵한 사람의 책과, 왠지 아닌것 같은 사람의 책이다.
확실히 인문학 책을 섭렵하고 있는 저자들의 책은 내용의 무게와 생각의 자극이 다름을 느낀다.
물론 예전부터 그래왔겠지만, 개인적으로 그나마 최근들어 인문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려 하다보니 그렇게 보이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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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FLOW미치도록행복한나를만난다
카테고리 인문 > 심리학
지은이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한울림,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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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 기록 보기


칙센트 미하이 박사의 '몰입' 그는 제목으로 Flow 라 하였다..
즉 물흐르듯이 흐르다... 흐름... 
진정한 몰입은 말 그대로 흐름을 가지고 유지하는 것이라는 말과 일맥 상통한 듯 하다.
그의 표현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책을 읽으며 정리해 놓은 내용(아래내용)을 프린트하여 다이어리에 끼워 한 번씩 내용을 읽고자 노력한다. 
스스로 마음을 잡아가는 것이 어렵거나 할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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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적책읽기두번째이야기
카테고리 인문 > 독서/글쓰기
지은이 안상헌 (북포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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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보다 두번째 이야기를 읽으면서 생각하던 여러가지들과의 연결을 시켜 볼 수 있었던 것이 많았다..
책을 읽는것이 자신에게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로 남게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더깊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기도 하다..
좋은 기운을 얻을 수 있었으며 저자의 삶 자체에서 나만의 방식을 생성시키는 계기고 되었다.
기술서 같지만 기술서가 이닌 인문학적인 면과 기술적인 면과 문학적인 면까지도 다루면서 자신의 지식의 발전의 길을 알리기도 하였다.
충분히 사람을 매료시키는 책이었다.
보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기술서로 읽어보자 했던 책이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며 여러가지의 길을 알게도 하였다..


저자가 말하고자 한것 무엇일까?
한가지만 말하라면 무엇을 말해야 할까?
나는 개인적으로 ... 책은 책으로서의 존재 가치와 그것을 보는 개인의 존재가치가 뒤섞여 무언가를 탄생시키는 것에서 의미를 찾아가자 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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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적책읽기50미래를위한자기발전독서법
카테고리 인문 > 독서/글쓰기
지은이 안상헌 (북포스,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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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에 관한책... 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꽤나 읽은 것 같다... 시간을 내어 세어보니 합쳐서 130여권 정도 되었다.. 
그 중에서 인상깊은 책 중의 하나 이다..이 책을 읽고 저자의 책들을 찾아 읽었다.
언제부턴가 책을 읽으면서도 뭔가가 빠진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면서 내가 너무 편식된 책읽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인문학에 대한 내용들에 손을 대기를 꺼려 하고 있었다...
생각만으로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고 있었던 것은 찾던 책만을 계속 찾게되는 습관이 문제라는 말도 안되는 변명만으로 시간을 끌고 있었던듯 하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무엇때문에 부족함을 느끼는 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결국은 조금이나마 찾아 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두번째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더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두번째 이야기 내용을 타이핑해보면서 ... 오래전이라 없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 내용도 타이핑을 해 두었던 것을 찾았다..
이 내용을 찾아내고..스스로 한숨을 쉬었다...정리만하고는 더이상 보지 않았구나.. 그러니까 내가 하고도 있는지 조차 기억을 못하고 있구나...역시 책을 읽고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며 다시금 읽어보게되었다... 



책을 읽어도 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책을 대하는 자기 자신의 태도를 바꾸어야만 한다. 첫 번째 방법은 '외우는 것'이다.

wn1 - 나는 한동안 책을 읽는것에만 바빴다.. 그래서 인상깊은 내용을 외우는 과정..다시말해 습득하는 과정을 가지지 않음으로 읽을때만 좋았고 감동받았으나 뒤로는 기억을하지 못해 읽기에서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한 권의 독서가 끝나고, 처음으로 돌아와 줄이 그어진 곳을 다시 읽어 내려가다 보면 내 것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다.

wn1 - 이 부분의 내용은 '두번째 이야기'에서 더 상세한 저자만의 방법을 기술하였다.. 그래서 두번째이야기에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

나 역시도 읽은것들에 관해 표시를 하고 기록도 하지만 그것들을 찾을 수 있는 색인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나 저자는 두번째 이야기에서 괜찮은 방법을 제안하고 있었다. 

질문과 비판이 사고의 확장을 준다는 것은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다..그렇지만 그렇게 읽는 사람이 많지는 않아 보인다.. 
개인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내용의 질뿐아니라 읽는 사람의 질도 중요할 것이라 생각을 한다. 사람의 질이란 그 사람이 어떻게 책을 받아들이고 활용할 방법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정말 좋은 질의 책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과물은 두려움을 없애주고 좀 더 우리를 목적에 가깝게 다가서도록 돕는다.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고 자신을 재창조하도록 한다.

wn1 - 나는 아직도 생각을 많이 하고 있지는 않는다고 본다.. 스스로 깊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여러방면의 접근이 필요한데..그러기에 아직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할 것은 많다고 생각을 하니 그 중요한 시간에 투자를 못하고 있는듯하다.
그러다 보니 아직도 읽고나면 부족함을 느끼는 지도 모른다.

시간을 가지고 생각하는 시간을 투자한다면 어느새 짧은 시간에도 몰입을하여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책읽기에도 균형 잡힌 시각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wn1 - 과연 열심히 사는 것과 의미있게 사는것에 차이가 있을까?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다시금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열심히 살고있다.. 그렇지만 의미있게 살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다.. 이것은 노소를 막론한다.. 학생들을 생각해 보자..
한국에서의 학생들은(초~고등학교) 점수에 의해 구분을 짓게 된다..
수치화된 결과를 위해 더욱 노력을 해야만 하게 되어 있다... 
이 중에서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결과가 투자한 만큼 나오지 않는 아이들이 꽤나 많다.. 그들의 수고 우리가 생각하는 수보다 더욱 많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이런 학생들을 살펴보면 정말 열심히 하는것이 보인다...하지만 그저 열심히만 한다..
핵심 단어는 '그저'이다.. 의미가 없다. 뚜렷한 이유도 없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도 생각이 없다...그저 열심히 하고만 있다..
좋은 방법이라면 좋은 결과는 나온다...다시말하면 좋지 않은 방법으로 하고 있기때문에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고 있음에도 그것을 생각하지는 않고 ..그들은 ...그저 열심히 한다...실제로 따져보면 열심히 하는것도 아닌데 열심히 한다고 자부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은 먼저 자신의 방법자체를 수정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결과를 바라기 어렵다.

시간에 대해서도 두 가지로 분류해보면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로 나눌 수 있다.
크로노스는 물리적인 24시간을 말하는 것이며... 
카이로스는 스스로의 의미가 부여된 시간을 말한다..
              이것은 길게도 느껴질 수 있고, 짧게도 느껴질수도 있다..
넌센스 문제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이란 질문의 답을 보면 카이로스를 절실하게 공감하게 된다.
그 질문의 답은 ...어떤 물리적인 수단이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가는것'이다.
그렇다 그런 사람과 있다면 거리가 멀어도 너무 짧게 느껴진다.

무작정 열심히가 아니라 의미를 부여한 순간순간이 많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멈추지 않는 독서를 통해 자기의 자산을 쌓아온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발전시켜 왔고 미래의 주인공들 또한 독서를 통해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갈 것을 확신한다.

wn1 - 자신을 자극할 수 있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어떤 사람들은 많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다..또한 자신을 자극해야 한다는 생가가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떻든.. 자신을 적절히 자극한다면 보다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고... 깊은 생각을 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자극한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책들을 통해 스스로 자극을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이 된다..
이제 생산적 책읽기 두번째 이야기를 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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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단어는 참 어려워 보인다. 실제로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사람은 철학적인 생각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한다. 물론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야기가 틀려 지겠지만...

누구나 공감을 하면서도 쉽게 접근하지는 못하는, 뭔가 벽이 있는 느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지 않을까.
성찰하는 삶.. 대체 성찰하는 삶은 어떠한 삶인가... 막연하게 느낌은 오지만 뚜렷하게 무엇이라 표현하기 힘든..
사유.. 깊은 생각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 가야하는지..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막막함.

절대 철학은 우리에게서 가깝지 않다.
허나 철학은 우리에게서 매우 가깝게 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하나하나의 모습에서 무언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부터가 철학이 아닐까... 우리는 선택의 결정의 순간에 고민을 하게 된다.
특히나 자신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선택이라면 고민을 깊이 하게 된다.
고민... 고민이 생각이고 인생을 위한 고민이라면 지나온 과거와 가까운 미래에서 먼 미래까지의 고민을 한다는 것..이것은 성찰이기도 하고 사유이기도 한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 생활에 밀접히 가까이 있는것이 철학인 것이다.
물론 그런면에서의 철학은 자주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에 문제가 될지는 몰라도..

저자는 철학적 사유에 대해 자신의 지식과 사유를 통해 설명해 나간다. 그리고 우리가 주변에서 친숙하기에 별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들 몇가지를 통해 철학적인 생각을 해볼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있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만나보는 시간을 마련해 주고 있다.
여러 철학자들의 말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챕터의 말미에는 독자가 더 읽어봄직한 책들까지 소개해 주고 있다.

철학 .. 이것에 조금은 더 다가서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책을 시작하며
제 이야기가 농담이 되느냐 진담이 되느냐는 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입니다.  5
철학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으려면, 한대 그랫던 것처럼 그것은 삼에 대한 성찰이자 기록이어야만 합니다.
이 책이 무엇보다도 만남에 대한, 그리고 만남을 위한 것이라고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이 책을 통해 저는 철학과 삶이 만나는 오작교를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6

프롤로그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음미하고 싶을 뿐입니다.  12
철학적 사유란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삶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자명한 것들을 낯설게 만드는 것.  13
음미되지 않은 삶은 맹목적인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14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후 회한에 가득 차서 사랑에 대해 반문해보는 것은 너무 때늦은 일이 아닐까요? 우리는 사랑의 가치와 그 의미에 대해 한번쯤 반문해보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점이 바로 우리에게 철학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15
철학은 우리에게 '내가 나중에 알게 될 것을 지금 알 수 있게' 해주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철학적 사유가 우리에게 불편함과 당혹감을 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불편함을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16
칸트(I. Kant 1724~1804)의 용어를 빌려서 말해봅시다. 
철학이 없는 삶이 맹목이라면 삶이 없는 철학은 공허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17

제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
1. 사유를 발생시키는 조건들
사실 우리는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22
생각은 오직 기대하지 앟았던 사건(event)과 조우할 때에만 발생하는 것입니다.  23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낯섦이 찾아오는 바로 그 순간이 우리의 생각이 깨어나 활동하기 시작하는 시점.  25
'인간이란, 설령 순수하다고 가정된 정신이라 할지라도, 참된 것에 대한 욕망, 진실에 대한 의지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진실을 찾지 않을 수 없을 때에만, 그리고 우리를 이 진실 찾기로 몰고 가는 어떤 폭력을 겪을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진실을 찾아 나선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들뢰즈(G. Deleuze 1925~1995)  28
생각이 어떻게 우리 자신에게 찾아오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예외적인 '사건'의 발생, 그 사건과의 우연한 '마주침' 그리고 그 사건의 기호에 대한 '해석'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진정한 생각..  29
들뢰즈는 이런 낯섦의 의미를 찾는 것을 '생각'이라고 여겼습니다.
불편함을 해소하려는 어쩔 수 없는 의지... '생각'이란 것은 낯섦과 불편함을 친숙함과 편안함으로 바꾸려는 자기 배려라는 것이죠.  30
죽음은 크게 세 종류로 우리게게 경험됩니다. 첫째는 '1인칭적 죽음'으로서, 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2인칭적 죽음'으로서, 너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3인칭적 죽음'으로서, 익명적인 그들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 죽음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불편하고 낯설게 느껴집니까? 즉 어느 죽음이 가장 여러분에게 고통을 줍니까?  32
왜 아내의 밤늦은 귀가는 하나의 사건이 되어 나의 뇌리를 지배하는데, 옆집 아주머니의 행실은 그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까요? 다시 질문해본다면, 왜 어떤 경우에 나는 사건의 의미를 찾는 사람, 즉 기호의 해석자가 되지만 다른 경우에는 그렇지 않고 단순히 무관심한 방관자가 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타자를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6
'특수성(particularity)' 과 '단독성(singularity)'.
어떤 책 한 권이 눈앞에 있다고 합시다. 그것은 인쇄소에서 찍은 많은 책 중의 하나입니다. 만약 이 책을 보다가 인쇄가 정확히 되어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우리는 당장 책을 구입한 서점에 가서 '동일하지만 다른' 책과 바꿀 것입니다. 이 경우 우리는 이 한 권의 책을 '특수한'것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특수한(particular)'이라는 표현은 바로 '동일하지만 다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책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첫 선물로 받은 것이라면 어떨까요? 책의 첫 번째 면에는 그 사람이 자신의 사랑을 표현한 글이 적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절대적으로 다른'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책을 보다가 앞서와 마찬가지로 책이 파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면, 우리는 서점에 가서 이 책을 다른 것으로 바꾸려고 할까요? 아마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바로 이 책을 '단독적singular)'인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39
타인을 사랑하는 데도 바로 이 두가지 태도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타인을 단독적인 존재로 사랑할 수도 있고, 아니면 특수한 대상으로 사랑할 수도 있으니까요.
어떤 것을 단독적인 것으로 만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사건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호'를 감지라혀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40

사건이 분출하는 기호는 분명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기호가 어느 한 방향의 의미만을 강제하지 앟고, 오히려 모순되어 보이는 여러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모순율(law of contradiction)  43
우리가 기호를 해독하려고 하는 것은, 그 기호가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내용을 동시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45
만약 어떤 기호에 하나의 의미만이 있다면 그것은 습관적으로 이해되는 것이지, 결코 우리의 생각을 강제하지는 못합니다. 사실 하나의 의미로 확정된 것은 더 이상 '기호'라고 부를 수도 없겠지요.  46
무의미는 바로 우리의 생각을 끌어당기는, 사건이 분출하는 기호가 가진 힘.
무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의미를 채우도록 강제하는 힘, 즉 생각하도록 만드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47

2. 철학적 사유와 인문학적 경험
삼단논법(Syllogism)
대전제 : 모든 인간은 죽는다.
소전제 :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결   론 :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51
삼단논법은 '철학이 무엇인지?' 혹은 '철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삼단논법의 순서대로 대전제가 먼저 떠오르고, 그 다음에 소전제가 떠로르고, 마지막으로 결론이 머릿속에 떠오르나요?  52
'질문자(puestioner)'의 마음속에서 삼단논법을 발견하려는 사유의 방향은, 전제와 결론이라는 순서와는 사실 대립되는 것이다.....다시 말해 질문자는 자신의 사유를 전제로부터 결론에 이르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결론으로부터 전제에 이르는 방향으로 진행시키기 때문이다.' <전통적 논리학의 그리스적 기초> 에른스트 갑(Ernst Kapp 1808~1896)  
캅의 주장에 따르면 삼단논법의 순서는 우리의 사유 순서와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54
삼단논법에서 중요한 것은 논증이 구성되는 순서, 즉 대전제→소전제→결론이라는 순서가 우리가 생각하는 순서와는 반대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55

철학적 사유란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선 어떤 것에 대해 의미 있는 주장을 내세웁니다. 만약 이것으로 그친다면, 우리는 철학적 사유를 했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주장을 지지해줄 수 있는 어떤 근거를 찾는 것이니까요.  56
'참된 철학자는 시대에 내재하는 불만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고, 사유와 생활에서 단순하고 정직하며, 따라서 이 말의 가장 깊은 의미로서 이해된 '반시대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다시금 가르쳐줄 수 있는 자이다.' <반시대적 고찰> 니체(F. W. Nietzsche 1844~1900)  62
철학은 '우리'라는 특정한 공동체에서는 수용되지 않더라도 앞으로 도래할 세계의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새로운 주장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철학은 진정한 철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참된 철학자'를 '반시대적'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65
철학이 지향하는 새로움은 한때의 일회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대에 내재하는 불만'을 예민하게 포착하여, 이 불만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향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65-66
'철학은 반시대적이며, 언제나 그리고 오로지 반시대적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바라는 것은 이 시대에 반하는, 도래할 시대를 위한' 철학이다.' <차이와 반복> 들뢰즈  67
반시대적인 철학은 끝없는 운동과 생성을 긍정하는 철학입니다. 생성이란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생성되기 이전의 상태나 생성된 뒤의 상태가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70
철학은 '지금-여기'를 비판적으로 다루지만, 또한 동시에 '아직은 없는' 세계를 꿈꾸는 학문입니다.  71
플라톤을 아리스토텔레스로 설명하거나, 데카르트를 스피노자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한 작업입니다. 이런 시도는 단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반복하거나 스피노자 철학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철학자를 고유명에 입각해서 사유하는 것,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철학 책을 읽어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73
참된 철학은 'now-here' 와 'no-where'의 사이에 있으려고 하는 의지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no-where'가 의미 있는 이유는, 그것이 'now-here' 를 반성하고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거리감, 혹은 낯섦을 우리에게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이 주는 조망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철학자들을 온전히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이 올랐던 봉우리에 직접 올라가 보아야만 합니다. 그들이 만들어준 조망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의 삶과 사유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주위에서 칭송이 자자한 철학자도 분명 있습니다. 이 철학자를 제대로 알면 우리의 삶을 잘 조망할 수 있는 시선을 얻게 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가 그 성장에 오를 수 있도록 그를 직접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철학자가 보았던 것을 직접 한번 살펴보기 바랍니다. 만약 그의 조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서둘러 내려오면 됩니다. 이런 과정을 몇 번 거치면 여러분 앞의 선배 철학자들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두 종류로 구분될 것입니다. 자주 올라가고 싶은 봉우리 같은 철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다시는 올라가고 싶지 않은 전망을 가진 철학자들도 있겠지요.  75-76
이런 훈련도 결국 여러분만의 산봉우리를 찾기 위한 연습에 불과하다는 점을 말입니다.  76

3. 철학의 은밀한 두 가지 흐름
'우발성(contingency)' 과 '필연성(necessity)'
일체의 다른 목적이나 필연성 없이 두 가지 사건이 만났을 때, 우리는 이런 사태를 '우발적이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필연성'은 이렇게 두 가지 사건이 만났을 때, 비록 겉으로는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어떤 모종의 질서나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80
서양철학사에 면면히 흐르는 상반되는 두 가지 사유 경향이 필연성의 철학과 우발성의 철학.  96
앞으로 과거의 철학자들을 읽어나갈 때, 혹은 여러분의 삶을 철작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할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할 사항입니다.  106
우리의 존재한 확고 불변한 필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여러분, 그리고 저 자신은 무한한 우발적인 만남의 결과, '....와.....와....'로 설명될 수 잇는 우연한 만남의효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결코 불안해하지는 말기 바랍니다. 이것은 괴로운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지금과는 또 다른 사람, 혹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생성될 수 있다는 축복 말입니다.  109


제2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4. 사랑 그리고 가족 이데올로기

"도대체 '사랑'이나 '가족'은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을까?" 이렇게 묻고 숙고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사랑과 가족을 우리에게서 낯선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어려운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가족'을 낯설게 만드는 작업이 우리의 일상적인 의지에 반한다는 사실입니다.  117
헤겔은 말합니다. 사랑은 두 사람의 통일이자, 그것에 대한 의식이라고 말입니다. 사랑 속에서 나는 타자와 '하나'라는 전체를 이룹니다. 그리고 나는 그 전체 속의 한 부분으로서의 나 자신을 의식하게 됩니다. 결국 헤겔의 말에 따르면 사랑은 기본적으로 '하나'에 대한 경험이자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9
'부부 사이에서의 사랑의 관계는 아직 객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사라의 감정(Empfindung)이 실체적 통일을 이룬다고는 하지만 이 통일은 아직 아무런 객관성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법철학 강요> 헤겔
헤겔의 말처럼 내가 하나라는 감정을 느낀다고 해서, 이것이 상대반으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이 점에서 헤겔은 결국 사랑이 유아론적일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잇다는 것을 은연중에 시인하고 있는 셈입니다.  120
결국 그의 사랑, 즉 '하나'로의 열망과 열정은 쉽게 성공할 수 없는 시도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122
'그는 감동과 애정을 갖고 집안 식구의 일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아마도 누이동생보다 그 자신에게 훨씬 더 강했을 것이다. 이처럼 공허하고 편안한 명상 상태에 있는 그의 귀에 새벽 세 시를 치는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그의 머리가 저절로 밑으로 푹 수그러졌다. 그리고 콧구멍으로부터 마지막 숨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변신> 카프카  125
카프카에게 가족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며, 오히려 가족이란 유기체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랑을 생산해낸다는 것입니다. 
카프카의 말대로 가족이 사랑을 만드는 걸까요? 아니면 헤겔의 말대로 사랑이 가족을 만드는 걸까요?  127
현대 프랑스 철학자 바디우(Alain Badiou 1937~ )는 '하나'라는 헤겔적 이념을 거부하면서, 사랑을 '둘'로 사유하려고 했던 중요한 철학자이다.
'사랑이란, 그 자체가 비-관계, 탈-결합의 요소 속에 존재하는 이 역설적 둘의 실재성이다. 사랑이란 그런 둘에의 '접근'이다... 사랑이란 것은 만남의 사건에 대한 충실성 속에서, 둘에 대한 진리의 생산이다.' <철학을 위한 선언>
바디우에 따르면 '둘'일 수밖에 없는 사랑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가족 논리에 포획되었거나 아니면 상대반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유아론적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따라서 바디우가 강조한 '둘'이란 진정한 사랑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종의 공리와도 같은 것입니다.  130
우리는 계속 그(녀)의 심연을, 그 무한성을 더듬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둘'이 아닌 '하나'라는 착각에 일순간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오만이지요. '아! 그(녀)는 키스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133
방법론적 고독이란 우리가 나의 '바깥'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침묵 속에서 나의 외부에 있다는 사실, 그래서 만약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자 은총이라는 사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진리이자 '둘'의 진리인 것입니다.  
바디우의 지적이 옳다면 우리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에서도,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사랑에서도, 그리고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사랑에서도 여전히 '둘'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남편과 아내는 자식을 독립된 개체로, 즉 '둘'의 요소로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단지 그들은 자식으로부터 자신들 혹은 자신들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봅니다. 이것은 결국 나르시시즘(narcissism), 즉 전형적인 유아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라는 나르시시즘에 빠지면 우리는 남편으로서 아내를, 아내로서 남편을, 어머니로서 자식을, 아버지로서 자식을 진정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둘'이라는 사랑의 진리를 반드시 배우고 몸에 익혀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느 ㄴ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또 그들로부터 사랑받기는 원한다면 말이죠.  136

5. 국가라는 가장 오래된 신화
'스톡홀름 증후군'의 메커니즘은 세 단계로 진행됩니다. 우선 인질들은 자신들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인질범들이 자신들을 해치지 않는 것을 고마워하며, 결국 그들에게 온정을 느끼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인질들은 자신들을 구출하려고 하는 경찰들에게 오히려 반감을 느끼게 됩니다. 경찰들이 자신들과 인질범들 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파괴함으로써 오히려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마지막으로 인질범들도 인질드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역류시킨 인질들이 자신들이 아니라 오히려 경찰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인질들과 인질범들 사이에 '우리'라는 기묘한 믿음의 공간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139
현재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인질들처럼 박정희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자행했던 억압과 탄압의 요소들을 대부분 잊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를 보릿고개를 없애준 사람,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우리 민족을 고질적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사람으로 기억하려고만 합니다.  141
박정희가 우리에게 각인시킨 국가주의라는 망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혹은 국가에 대한 스톡홀름 증후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국가를 사유할 때 발생하는 불쾌함을 견딜 필요가 있습니다.  143
'국가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며, 개인에 선행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국가는 전체이며 개인은 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국가만이 자족적인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144
'교환하기보다는 강탈하는 편이 빠른 길이다. 지속적으로 강탈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다른 적으로부터 보호한다거나 산업을 육성해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국가의 원형이다. 국가는 더 많이 그리고 계속해서 수탈하기 위해 재분배해줌으로써 토지나 노동력의 재생산을 보장하고 관개 등 공공사업을 통해 농업생산력을 높이려고 한다...그러므로 강탈과 재분배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교환'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일본정신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1941~ )  146
가라타니 고진의 분석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국가를 하나의 신적인 실체가 아니라 교환관계로 숙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47
'주종 관계란 사람들의 상호 의존과 그들을 결합시키는 서로의 욕구가 있기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은, 미리 그를 다른 사람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두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 루소  148
통치자가 이미 피통치자가 자신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우월한 힘을 가진 통치자와 그렇지 못한 피통치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부등가교환이 됩니다. 다만 '국가는 더 많이 그리고 계속해서 수탈하기 위해 재분배하는 것일 뿐입니다.'  148
피톤치자는 국가가 자신을 위해 여러가지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국가를 위해 세금을 내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바로 여기에 피통치자가 부등가교환을 등가교환으로 착각하게 되는 이유가 있지요. 
고진의 분석이 옳다면, 박정희는 자신의 독재 통치를 영구히 하기 위해 경제개발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49
국각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위해 존재할 뿐이라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국가와 국민 간의 관계는 마치 출산업자와 소 사이의 관계와도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49
'오므라들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퍼주어야만 한다.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주어야만 한다. 제거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높여주어야만 한다. 빼앗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만 한다. 이것을 '은미한 밝음'이라고 말한다. 유연하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법이다.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되고, 국가의 이로운 도구는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도덕경>  151
국가는 기본적으로 약탈의 역사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약탈만으로는 효과적으로 이윤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곧 자각하게 됩니다.  이제 피약탈자는 국민으로 변하게 된 것이지요.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이전에는 국가가 보호하는 일차적인 대상이 농민이었습니다. 국가의 힘과 부는 무엇보다도 농민의 농업생산력과 농민이 구성하는 무력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156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와 이제 국가의 논리는 자본의 논리와 결합됩니다. 국가가 수탈과 재분재의 대상을 농민이 아닌 자본가와 노동자로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57
다국적기억(multi-national enterprise)이 많은 미국의 경우 이들의 세계화로의 충동을 막을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권장해야만 합니다. 그들로부터 미국은 막대한 세금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지요.  161
세계화의 시대에 국가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자신의 모습을 더 효율적으로 바꾸고 있을 뿐이지요.  162

국가는 수탈과 재분재라는 역동적 교환관계로 유지되는 기구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핵심은 재분배라기보다 압도적 폭력을 바탕으로 하는 수탈이라고 말해야겠지요. 문제는 이렇게 수탈되고 있는 대다수 국민이 스스로 국가 없는 사회를 꿈꾸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나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162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스스로 강해져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자유를 양도해버리고 국가권력에 복종하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그런 메커니즘에 완전히 적응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자유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될 겁니다.  163
약육강식의 논리는 동물의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인간이 다른 동물과 차이가 나는 이유는 그럼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강한 사람에게 복종하지도 않고 약한 사람을 지배하려고도 하지 않는 자유인의 의지일 것입니다. 자신을 죽일 수는 있어도 자신의 자유를 빼앗지는 못할 것이라는 용기와 확고한 자유정신 말입니다.  166
약자 앞에서는 한없이 강해지고,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아직 많은 사람이 이런 야만의 상태를 문명의 상태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익숙한 것이라고 해서 항상 올바른 것은 결코 아니겠지요.  167

6. 살아 있는 형이상학으로서의 자본주의
화폐는 우리에게 교환의 수단인 것처럼 보이지만, 또한 교환의 목적이기도 하다. 돈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사려는 사람에게 화폐는 교환의 수단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품을 가지고 돈을 벌려는 사람에게는 분명 화폐가 교환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화폐는 단순한 교환 수단 그 이상의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화폐가 나의 손을 떠나는 순간 나는 무한한 가능성을 상실하고 이제 상품이라는 유한한 가능성만을 소유한 사람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제 화폐를 가진 사람이 주인 행세를 하게 되고, 상품을 가지게 된 사람은 상대적으로 노예의 자리에 위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아니라 자본이 주인 노릇을 하는 자본주의사회의 실제 모습입니다.  171
'화폐는 무엇이 자신으로 바뀌었는지를 노출하지 않기 때문에, 상품이든 상품이 아니든 간에 모든 것이 다 화폐로 전환 가능하게 된다.' <자본론> 맑스  172
화폐가 신성한 왕좌에 오르게 되자, 역으로 화폐가 아닌 모든 것은 이제 상품의 자리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맑스는 '인간의 상거래에서 제외되고 있는 성스러운 물건들' 마저도 이제 화폐에 의해 상품으로 전락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 성스러운 물건들에는 인간 자신도 예외 없이 포함됩니다.  173
자본주의 경제학 책을 본 분은 알겠지만, 여러분은 질적으로 차이 나는 독립적인 인격체, 즉 고유한 삶의 가치를 갖는 자유로운 주체로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구매자가 요구하는 상품으로 팔려야만 하는 '노동력'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애석하게도 여러분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대로 규격화되고 만들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하에서 여러분은 자신이 잘 팔릴 수 있도록 가꿔야만 합니다.
자본가의 구미에 맞도록 여러분의 상품 가치를 높이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174
그래서 맑스는 자본주의 시대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고 정의 했던 것입니다.  175

한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화폐를 편집증적으로 소유하려고 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굶어 죽어도 화폐를 쓰지 않고 오로지 화폐를 소유하려고만 하는 구두쇠, 즉 맑스가 이야기한 '화폐퇴장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176
'...자본의 운동에는 한계가 없다... 사용가치는 결코 자본가의 진정한 목적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이며, 어떤 하나의 거래에서의 이윤 역시 그러한 목적이 될 수 없고, 다만 이윤을 추구하는 끊임없는 운동 자체만이 자본가의 진정한 목적이 될 수 있다. 이 절대적인 치부에의 충동, 이 정열적인 가치 추구는 자본가와 화폐퇴장자(구두쇠)에게 공통된 현상이지만, 화폐퇴장자는 얼빠진 자본가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자본가는 합리적인 화폐퇴장자이다. 화폐퇴장자는 화폐를 유통에서 끌어내버림으로써 가치의 쉴 새없는 증식을 추구하지만, 보다 영리한 자본가는 화폐를 끊임없이 유통에 재투입함으로써 가치 증식을 달성하기 때문이다.' <자본론> 맑스  176-177 
왜 구두쇠는 얼빠진 자본가에 지나지 않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두 번째 비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본의 증식이 단지 유통 과정을 통해서만 유지된다는 사실입니다.  177
결국 자신이 가진 우월한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화폐를 가진 사람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암초를 오디세우스처럼 지혜롭게 잘 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 암초는 화폐를 유통 과정에서 빼내어 금고에 담아두려고 하는 '얼빠진' 생각이겠지요. 반면 두 번째 암초는 유통 과정에서 볼 수도 있는 손해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 암초를 현명하게 잘 피했다면, 여러분은 '영리한 자본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79

더 이상 잉여가치가 생기지 않는다면 산업자본은 마치 게걸스런 괴물처럼 다른 곳으로 먹이감을 찾아 이동해야만 합니다. 
저렴한 원료가 있고 값싼 노동력을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곳, 그리고 자신들의 제품에 대한 수요가 높은 곳이 있다면 산업자본은 그곳이 어디든 주저 없이 찾아갈 겁니다. 그래야 잉여가치가 발생할 수 있고, 따라서 생존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윌리엄 탭은 이런 게걸스러운 산업자본의 운동을 '부도덕한 코끼리'라고 비유했던 것입니다.  188
윌리엄 탭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이념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다음과 같이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계 상류층의 20%가 세계 GDP의 86%를 얻고 있고, 하위 20%는 고작 1%를 얻으며, 중간의 60%는 겨우 13%만을 얻는다. 전 세계 200대 부자들의 수입은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수조 달러나 늘어 두 배가 되었다. 세계 3대 부자의 자산은 가난한 48개국의 모든 소득을 합한 것보다도 더 많아 졌다.' <부도덕한 코끼리>  191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상품으로 그리고 화폐를 신으로 만드는 체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돈을 벌기 위해서 고단하게 보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언제 올지 모를 먼 훗날의 행복을 기대하면서 말이죠. 
우리 대부분은 돈을 벌기 위해서 더 힘든 일에 종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행복은 우리로부터 더 멀어지겠지요. 그러나 사실 자본주의 속에는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애초에 없었습니다. 단지 소비의 행복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애초에 없었습니다. 단지 소비의 행복, 소비의 자유만이 존재했을 뿐이니까요. 우리는 자신만의 삶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못합니다. 아니 그런 방법마저도 완전히 잊었다고 말해야 옳을 겁니다.  197
가난한 자를 보호하면 가난을 지속시킬 뿐이라는 궤변으로 그들은 자유주의 원칙을 고수하려고 합니다.  198
'새로운 봉건주의를 만들어내려는 자본의 뻔뻔함이 극도에 달한 이 시대에 세계적 금융기관, 초국적 기업 그리고 정부가 우리로부터 무엇을 약탈해가려고 하는지 잊지 않기 위해서 세계인권선언의 내용을 명심해야만 한다. 자본의 권리보다 인권이 더 중요한 것이다.' <부도덕한 코끼리>  199
자본주의에 맞선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맞서는 것과 같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용기 이전에 우리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지켜내야 하는 우리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우리의 후손까지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00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7.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
부처라는 말은 인도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의 '붓다(Buddha)'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영어로 '부디즘(Buddhism)'이라 불린다.
'붓다'라느 말은 '깨달은 자'를 의미한다.
"성불(成佛)하십시오!"라며 합장할때, 성불은 '부처(佛)가 된다(成)'는 뜻.  206-207
싯다르타가 깨달은 것은 유명한 사성제(四聖諦)입니다. '사성제'는 글자 그대로 '네 가지(四) 성스러운(聖) 진리(諦)'를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것은 '고통' , '집착' , '소멸' , '방법' 즉 '고집멸도(苦集滅道)'로 정리될 수 있는 네 가르침입니다.
네 가지는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불가치하게 '고통'이 찾아오는데, 그 고통의 원인은 바로 '집착'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의 고통은 결과이고, 집착이 그 원인이라는 것이죠. 마음의 집착만 제거하면 고통이 사라지는 것 바로 '소멸'입니다.
집착을 어떻게 제가해야 할까요? 바로 '방법'이란 것이 집착을 제거하는 가정을 말해주는데, 싯다르타는 집착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여덟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을 팔정도(
八正道)라고 하는데,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동(正業), 올바른 생활(正命),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집중(正念), 올바른 참선(正定)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209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된 대상의 관념 속에는, 같은 대상이 '존재한다'고 생각되었을 때의 관념보다 더 적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대상의 관념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의 관념에 더하여, 다른 것에 의해 그 대상이 없어졌다는 표상까지 합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적 진화> 베르그손  215
베르그손은 '집착'이란 현상이 인간에게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을 가지고 있고, 또 그 기억에 따라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15
'나의 기억이나 기대에 따르면 그 친구는 지금 카페에 있어야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이곳에 없네.'
'친구가 없네'라는 생각은 결국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지금 없네'라는 생각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니까요. 베르그손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마음속에 있다'는 사태와 '마음 바깥에 있다'는 사태 사이의 차이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친구가 없네'라는 생각은 결국 내 마음속에서는 그가 있어야 하지만, 내 마음 바깥에서는 그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16
불교는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항상 불교는 마음이 왜 고통에 사로잡히는지 진지하게 숙고합니다.  217
집착을 제거하려면 우리는 초인적인 의지를 가져야만 합니다.  218
'원효법사는 '나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단지 나의 마음이고, 모든 대상이 단지 나의 의식이다라고 하셨던 것을 들었다. 그러기에 아름다움과 추함은 나에게 있지, 실제로 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겠구나.' <종경록> 연수(延壽 904~975)  219

큰 스님이 몽둥이를 들고 제자의 머리 위로 흔들며 말했다. "이 몽둥이가 잇다고 해도 너는 맞을 것이고, 이 몽둥이가 없다고 해도 너는 맞을 것이다. 만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너는 맞을 것이다. 이 몽둥이가 있느냐, 없느냐?"
'몽둥이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있다는 것은 없는 것이고, 없다는 것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에 등장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
이런 대답을 한다면 여섯 대나 맏을 것이다. 몽둥이에 대해 '있다'는 말을 3번, '없다'는 말을 이미 3번이나 말했기 때문이다.  230
위의 화두의 대답은 하나가 아니다.
'바람이 시원합니다' , '새가 울고 있습니다' , '하늘이 푸릅니다' , '개울 소리가 맑습니다'...
핵심은 우리가 몽둥이에 집착하느냐, 집착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겠죠.
몽둥이에 집착했기 때문에, 우리는 몽둥이가 아닌 너무나 많은 소중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231
원효 스님의 말처럼 집착이란 결국 여러분이 자신의 마음속에 갇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집착은 여러분의 삶을 유아론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232

8.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어떤 구체적인 외적 강요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미 과거에 이루어진 간섭과 강요의 흔적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주체가 되려고 할 때, 외적인 간섭을 단순히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체란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 즉 초자아를 거부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50
니체 만의 고유한 사유 방식, 즉 '계보학적인(genealogical)'사유.
계보학적인 사유는 어떤 주어진 것을 정당화하기보다 그것의 기원이나 발생 과정을 추적하는 사유 방식입니다.
'도덕의 계보학'이란 인간이 도덕적 존재라는 현실을 정당화하는 작업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이 어떤 발생 과정을 거쳐서 생기게 되었는지를 해명하는 작업입니다.  252
길에 떨어진 지갑을 주웠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 우리의 내면에서는 두 가디 욕구가 꿈틀거립니다. "어차피 다른 사람이 주웠다고 해도 지갑을 돌려주지는 않을 거야. 애초에 잃어버린 사람의 잘못이지 뭐"라고 속삭이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으로는 "만약 누군가가 너의 지갑을 땅에서 주워서 너에게 돌려 주지 않는다면, 너는 그 사람을 원망하지 않겠니?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이나 너나 모두 지갑을 돌려받기를 원하지 않을까? 그러니 너는 주운 지갑을 주인에게 돌려줘야 해"라고 말하는 욕구도 있습니다. 바로 이 후자가 보편적 입법자의 목소리입니다.
칸트도 이런 양심의 명령을 실천이성의 자율적인 목소리라고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니체는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정당화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이런 양심의 목소리는 훈육의 결과로 인간에게 내면화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253
흥미로운 것은 칸트의 도덕법칙, 즉 양심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하나의 숭고한 '목적'으로 드러나자마자, 우리의 구체적인 삶은 그 목적에 종사해야만 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된다는 점입니다.  255
'도덕이 본래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을 갖추게 되는가'이다. 우리는 자신이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며, 미래의 어느 순간에는 어느 정도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희망하지만, 이런 희망은 오직 도덕에 종교가 첨가되는 경우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순수이성비판> 칸트  
카늩는 자신의 윤리학이 결국 행복의 윤리학이 아니라고 자백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윤리학을 흔히 의무의 윤리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56
그에게 있어서는 우리의 구체적 삶이 '수단'아라면, 내면에 있는 보편적 입법자가 곧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행복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보편적 입법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합니다. 그의 욕구야 말로 나의 숭고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편적 입법자의 욕구를 총족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나의 삶 전체를 '수단'으로 삼아야만 하는 것 아닐까요?  257
칸트의 말대로 자신의 행위를 자유롭게 숙고해서 결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자유로운 주체는 반드시 행복해지려는 주체 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259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 고등학교 생활 자체를 수단으로 만드는 고등학생들이 있습니다. 또 취업이란 숭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대학 생활 자체를 수단으로 만드는 대학생들이 있습니다. 또 월급을 받기 위해서 한 달의 삶을 수단으로 만들고 마는 직장인들이 있습니다. 물고기 한 마리를 얻기 위해 물 위로 솟구치는 놀이 공원의 돌고래처럼 살아간다면 과연 우리의 삶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목적이 달성되는 아주 짧은 순간에는 일말의 행복과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지속적인 즐거움과 행복의 상태에 있으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방법은 바로 수단과 목적의 일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60 
'놀이는 임무가 전혀 아니다.' <호모 루덴스> 호이징하(Huizing 1872~1945)
'수단'과 '목적'이 분리된 행동을 '노동'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는 행동을 '놀이'라고 부릅니다.  261
니체가 제안하는 참된 주체, 즉 즐거운 주체가 되는 방법을 엿볼 필요가 있습니다.
'법칙에 대한 증오와 운명애, 공격성과 동의는 차라투스트라의 두 얼굴이다. 성서에 호의적이고 다시 성서를 적대시하는 차라투스트라, 그는 여전히 특정한 방식으로 칸트와 싸우고 있다. 도덕법칙 안에 있는 반복의 시험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외귀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무엇을 의지하든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지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하라." 이것은 칸트류의 형식주의이지만, 칸트를 그의 고유한 영토에서 존복해버리는 형식주의이다. 여기에 (칸트의 명령법이 함축하는 시험보다) 더 멀리에까지 이르는 시험이 있다. 이는 미리 가정된 더떤 도덕법칙에 반복을 결부시키는 대신, 도덕을 넘어서는 어떤 법칙에 반복을 결부시키기 때문이다.' <차이와 반복> 니체  263
니체는 '법칙에 대한 증오'를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운명애'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264
영원회귀라는 말은 말 그대로 영원히 반복되는 세계와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만약 영원회귀가 옳다면 여러분은 과연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우울하고 불행한 일들, 어쩔 수 없이 의무적으로해야만 하는 행동을 하겠습니까?
1000년 뒤에도, 2000년 뒤에도 똑같이 반복될 것인데도요? 아마 여러분은 가장 자유로운 행동, 가장 즐거운 행동, 가장 행복한 행동을 하려고 애쓸 겁니다. 그런 행동은 앞으로 영원히, 다른 삶에서도 반복될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네가 무엇을 의지하든 그것의 영워회귀를 의지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하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265

9.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고독하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 나선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사랑이 찾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고독에 빠지게 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분명 어떤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로 하여금 내가 하듯이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사랑의 고독을 안겨다줍니다.  268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잔 하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 <장자> [지략(至樂)]편  271
우리가 자신과 타자와의 차이를 긍정하지 못한다면, 혹은 사랑이 언제나 '하나'가 아니라 '둘'의 진리라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우리의 사랑 역시 이런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73
타자의 외모를 보고서 우리는 그가 어떤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와 만나서 부딪히는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 사람이 나와 다르구나'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타자성을 다 알수 있게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 이 점에서 그 사람은 나와 같지 않구나.'라고 부정적인 방식으로 상대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니까요.  274
내가 타자의 삶의 규칙을 받아들였거나 아니면 타자가 나의 삶의 규칙을 받아들인 경우에만, 우리에게는 낯선 타자란 것이 소멸하게 됩니다.  275
협소한 유아론은 우리를 고독한 주체로 만들어 타자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하도록 만들지만, 타자에게 극심한 폭력을 가하지는 않습니다. 반면 확장된 유아론은 자신이 믿고 있는 삶의 규칙을 타자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함으로써 결국 폭력과 억압을 낳을 수 있습니다.  278
자신의 문명이 지닌 의미 체계를 일방적으로 다른 문명에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내가 가진 의미 체계를 다른 사람도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식의 유아론은 표면적으로는 유아론인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고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바로 이런 착각 때문에 확장된 유아론이 타자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279

타자는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친숙하고 편안한 세게에 낯섦과 불편함을 가지고 오는 무엇입니다. 타자가 규칙적이고 편안한 나의 삶을 불규칙적이고 불편한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이유는, 그 타자가 나와는 다른 삼의 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의 삶을 가장 낯설게 만드는 사건은 바로 타자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도대체 그가 어떤 삶의 규칙을 따르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니까요.  279

'선물이 존재하려면, 어떤 상호 관계, 반환, 교환, 대응선물, 부채의식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만약 타인이 내가 그에게 주었던 것을 내게 다시 돌려주거나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거나, 또 반드시 돌려주어야만 한다면, 나와 타인사이에는 어떤 선물도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이런 반환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든 아니면 상당히 긴 유예 조건들을 계산하여 이루어지든 간에 관계없이 말이다. 특히 타인이 내게 동일한 것을 직접 되돌려주는 경우에 이점은 훨씬 더 분명해진다.' <주어진시간1> 데리다  286
'반드시 돌려 주어야만 한다면' 그것 역시 선물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지는군요. 과연 여러분은 데리다가 말한 의미의 선물을 건넨 적이 있습니까?  287
역으로 말해 우리가 교환관계에 빠져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타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89
대가를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사실 타자와의 사랑르 회복하겟다는 의지와 동일한 것입니다.
결혼한 신혼부부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침에 아내가 차려주는 정성스런 식사를 남편은 하나의 선물로 받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위해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식사를 차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남편이 갖는 행복의 비밀이 있습니다. 이제 월급날 남편이 가져다준 월급봉투를 아내는 선물로 받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해준 식사의 대가로 남편이 월급을 건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의 궐급봉투를 받고서 행복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도 이 부부느 여전히 서로에게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부부는 그렇게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월급날이 가까워지면 아내의 식단이 좀 더 나아집니다. 월급을 받고 아내는 남편의 수고를 떠올리기보다는 오히려 그 돈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기에 바쁩니다. 그녀는 남편이 남편으로서 당연히 돈을 벌어와야 한닥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쩌다 아내가 저녁에 늦게 들어와 저녁식사라도 차려주지 않으면, 남편은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 집에서 밥도 하지 않는다고 구박합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식사를 차리는 것이 아내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선물의 관계가 뇌물의 관계로 변질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292-293
우리는 선물의 논리 이면에 타자와의 사랑이란 심오한 진리가 있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해야만, 우리는 아무런 대가 없이 선물을 건넬 수 있습니다.  294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반드시 망각해야만 하는 것이 기도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물으 주는 지혜와 방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295

에필로그
연꽃은 깨끗하고 맑은 물에서는 향내를 풍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직 썩어가는 시궁창 같은 물에서 피어날 때에만 그윽한 향기를 낸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낯설게 보아야만 하는 이유는, 자신이 지금 넘어져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자신이 넘어져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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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삼 교수의 강의를 몇 번 들을 기회가 있었다.
강의가 일단은 재미있게 진행된다. 강의에서 청중을 재밌게 하는것이 일단은 성공의 시작이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강의는 즐거움을 주었다. 또한 강의 내용에서 많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열의가 있었다. 그래서 듣는이로 하여금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하였다.

이 책은 그런 저자의 성향을 반영하고 있기라도 하듯 내용이 재밌게 풀어 쓰여 있다.
출판사의 주니러 클래식 시리즈로 나온것을 보면 청소년들에게 풀어쓴 논어를 보며 한 걸음 다가올 수 있게 하는 취지지만, 성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주는 책이란 생각이 든다.
저자의 풀어씀 즉, 가능하면 객관적으로 풀어쓰려 하지만 주관적인 해석을 담고 있기에 자칫 주견이 없다면 따라 가야만 할지라도 주견을 세우기 위한 학습적인 측면에서 충분한 논어의 즐거움을 준다는 생각을 한다.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저자는 비뚤어진 유교 사상에 반대하며 논어야 말로 깨어있는 내용이고 융통성 있는 글이라고 말한다.
물론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을 한다. 우리의 역사속에서 조선의 멸망은 당시 유교의 비뚤어진 해석으로 오만하고 편협한 사회였기에 그러하였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잘 읽지 않는 책' 이라 표현하였다. 논하고 말한다는 뜻을 가진 논어에 대한 고리타분함을 가진 사람에게도 좋을 듯 싶다. 재밌게 읽히고 시대에 비출 수 있게 하고 있기에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논어(論語)>란 '논하고 말하다.'라는 뜻이다. 
'진리를 논하시고 말씀하신 책, 즉 <논어>가 된 것이다.
노자가 잘 지적했듯, 원래 '진리는 이름을 갖는다면 참된 진리가 아닌 것이요, 이름 붙일 수 있다면, 그건 영원한 이름이 아닌 법'이다.(<도덕경>)  17

공자는 현대적으로 말하면 '운전기사'로 부터 '공장 기술자', 그리고 '목장 관리인' 같은 육체 노동을 두루 경험했던 것 같다. 그러면 서 철저한 자기 점검의 미덕을 갖추었던 그였기에 점차 주변의 인정을 받아 더 큰 임무를 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23

1. 학이(學而)편 - 배워야 사람이다.
배움과 익힘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보통 여섯 가지 기술, 곧 육예(六藝). 즉 예(예절)와 악(노래와 춤), 홨기, 마차몰기, 글쓰기, 셈하기등이 그것이다. 예와 악은 사람과의 관계 맺기에 요구되는것이고, 활쏘기와 마차몰기는 국토 방위에 필요한 기술이며, 글쓰기와 셈하기는 관리나 지식인으로서 업무를 처리하는 데 쓰이는 것이니, 모두 고대에 지식인이자 무예를 겸비한 성인 남자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 기예들이다. 
한편 텍스트 중심으로 육예를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첫째 중국 고대의 시집인 <시경(詩經)>, 둘째 중국 고대의 정치와 역사를 서술한 <서경(書經)>, 셋째 국가와 계급 간에 지켜야 할 예의범절을 규정한 <예기(禮記)>, 넷째 음악에 대한 이론서인 <악기(樂記)>, 다섯째 점치는 책인 <역경(易經)>, 그리고 공자의 조국인 노나라 역사책인 <춘추(春秋)>를 꼽는 경우도 있다.  32

공자 말씀하시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며,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느니라."(6:18)
... 우리는 배움의 성취가 단지 '알고/모르고'사이의 이분법이 아니라 좀더 깊은 차우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34

벗이란 배움과 익힘을 함께 하는 사람이다.  35
단 한 번 만나도 속을 드러내어 함께 흐느낄 수 있는 살마, 그 사람이 벗이다.  36

제대로 사는 삶이란, 배우고 익히는 길을 가는 도중에 속에서 터져 나오는 희열에 몸을 떨기도 하고, 또 어느 순간 나의 길을 이해하고 옹호하는 참된 벗을 만나 흔쾌한 즐거움을 나누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배우고 익히며 '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인생에서 얻는 기쁨이요 즐거움이다.  
그대가 확고하게 '나의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걸을 적에야 참된 친구, 진정한 벗이 생겨남을 잊지 말하는 것이 공자가 내리는 가름침이다.  37

세속적 욕망의 성취에 인생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과 남의 비평(인정, 비난, 칭찬)조차 말갛게 벗어나 내 속에 깃들인 진리를 확인하고 또 즐기며 사는 담담하고 고요한 상태, 이것이 인생의 목표 즉 '배우고 익히는 삶'의 궁극처라는 것이다.  38

나의 길은 남의 칭찬이나 비평에도 상관하지 않고, 또 배움의 기쁨으로부터도 벗어난 탈아(脫我)의 세계로 난 길을 걷는 것이다.  39

주변의 시비와 관계없이, 또 물질적 곤궁과도 관계없이 자신 앞에 놓인 그 길을 확고하고 확신에 찬 걸음으로 내딛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 길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길이 아니라, 내가 걷지 않을 수 없는 길이 된다. 그럴진대 남이 알아주든 않든 성낼 까닭이 없는 것이니, 그제야 군자(君子)라는 이름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41

2. 위정(爲政)편 - 나는 이렇게 살았노라
육예(六藝)라고 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법학, 의학, 정치학, 경영학, 공학 등등이 두루 다 배움의 대상에 속할 것이다.  44

공자 말씀하시다. "힘이 부족하다는 건, 힘껏 달리다가 지쳐 쓰러지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지. 한데 지금 자넨 옳게 한 번 달려 보지도 않은 채, 못한다고 지레 선을 긋는구먼."(6:10)
'하지 않는 것'과 '못하는 것'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47

공자 말씀하시다. "지위가 없다고 근심할 것이 아니요, 전문가가 되지 못함을 근심할 일이다. 요컨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근심할 까닭이 없고, 오로지 내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찾을 일이다."(4:14)
내가 세운 '나의 길'에 매진하여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되면 그에 합당한 자리가 자연히 생겨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전문가가 되지 위해 필요한 지식과 정보가 무엇인지를 찾아 가는 주체적인 인간, 내 인생을 내가 주도하는 인간이 되기를 권하는 것이다.  47

'귀가 순해졌다.' - 보통 우리는 '남의 말을 듣는다'고 하지만 실은 '내 식'대로 이해하는 데 불과하다. 문제는 '나'에게 있다. 내 속엔 내 과거와 미래, 욕심과 계획들이 엉켜 있어서 남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고, 왜곡되거나 퉁겨 나가 버린다. 남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 식대로 '오해'한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인간이란 '오해 하는 동물'일지 모를 정도이다. 게다가 오해를 바탕으로 '말하기'에 나서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분란과 다툼이 발생한다.  53

이렇게 귀가 순해진다는 것은 '말하는 나' 또는 '보는 것을 진리로 삼는' 에고(ego)가 사라진 상태를 뜻한다... 달리 말하자면 사회와 자연에 대해 평가하던 내가 사라지고, 그 평가하는 '나'조차 남을 대하듯 지긋이 살펴보는 그런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한다.  54

3. 팔일(八佾)편 - 문명은 숨을 쉰다.
공자는 예의 참된 의미는 예식 순서에 따라 절하고 분향하고 하는 형식이 아니라, 도리어 그 형식 속에 깃든 '공경하는 마음'을 실천하는 데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64

공자 말씀하시다. "사람으로서 사람답지 못하다면 예는 어디다 쓸것이며, 악(樂)은 또 무슨 소용이 있으랴."(3:3)
어떤 젊은이가 '예의 근본'을 여쭙자, 공자는 '위대한 질문'이라고 무릎을 치면서 참다운 예는 형식이 아니라, 그 형식 속에 깃든 '예의 정신'에 있노라고 천명한다.
임방이라는 젊은이가 예의 근본을 여쭈었다. 
공자, 무릎을 치며 외쳤다. "기막히구나. 이 질문! 예는 사치하기 쉬운 경향이 있는데 실은 검소한 것이 예의 근본이요. 장례식은 남의 눈을 의식해 호화롭게 하기 쉬운데 실은 슬픔에 겨워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 장례의 본다 정신에 합당하니라."(3:4)  66

인간은 악(樂)을 통해 사회적 관계 속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자유 의지를 발휘한다. 인간은 피치 못해 더불어 사는 존재이긴 하지만, 개미처럼 사는 동물은 아니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고 자기 세계를 만들고 표현함으로써 인간다움을 획득한다. 아니 더불어 살아가는 이유가 어쩌면 자기 세계를 창조하고 표현하는 악(樂), 예술의 건설을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본다면 공자느 ㄴ예술의 가능성을 누구보다도 긍정하고 또 중시했던 사람이다. 
공자 말씀하시다. "시에서 흥취를 얻어, 예의 뜻을 알고, 악에서 성취하리라."(8:8)  67

"사람에게 먼 계책이 없으면 언제나 가까운 데서 근심걱정이 생긴다."(15:11)
유자가 말했다. "예(禮)의 용도는 화목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옛 임금님들이 하신 정치는 다 화목을 아름답게 여겼으니, 작고 큰 정책들이 화목을 성취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리너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화목함이 좋다고 하여 여기에 빠지는 경우가 그렇다. 그러니 엄정한 예로써 뼈대를 세워 주지 않으면 화목함은 오래 유지되지 못하는 법이다."(1:12)  70

공자는 두 방면에서 덮치는 야만의 사태를 두려워하였다. 사회를 버리고 자기 몸의 안전만 취하는 이기주의가 그 하나요, 또 하나는 국가(또는 집단)가 개인을 위협하는 폭력을 발휘(전체주의)였다.  
이 두 방향 사이에서공자는 전통문화를 지키고자 하였다. 자칫 이 전통문화가 사라지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으리라고 몹시 절박해 하였다. 이에 그는 예와 악을 통해 '전체에 기울지도 않으면서, 개인에 머물지도 않는' 중용의 길을 보존하려고 내내 애를 썼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와 악의 내부조차도 염려하였다. 예도 고이면 썩고(형식주의), 악도 넘치면 줄줄 흘러내린다(매너리즘). 예와 악은 서로 긴장하면서 보존되어야 했던 것인데, 인간의 문명을 안팎으로 유지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공자는 깊이깊이 깨달았던 것이다. 공자는 바람 앞에 등불처럼 흔들리는 인간다운 삶을 지켜 내려고 예와 악의 변주를 내내 주장하고 또 연주한 것이었다. 그 척박하고 어려운 시대에!  71

4. 이인(里人)편 - 사랑의 길.
공자 말씀하시다. "... 군자란.. 황당하고 당혹한 때에도 인을 실천하느니."(4:5)  79
물질적 욕망과 명예에 대한 집착, 곧 부귀나 빈천에서 벗어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그가 군자다.

공자 말씀하시다. "군자란 어느 곳에서든 무슨 일을 하든, 꼭 해야만 하는 일도 없고, 꼭 하지 말아야 하는 일도 없어서 다만 적잘함에 따를 뿐."(4:10)

공자 말씀하시다. "군자란 남에게 베풀 것(德)을 생각하고 소인은 이익을 생각하며, 군자는 제 잘못을 생각하고 소인은 남을 탓하니라."(4:11)

공자 말씀하시다. " 옛사람들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자칫 몸이 그 말을 따르지 못할까 염려해서였다."(4:22)

공자 말씀하시다. " 아껴서 실수할 일이 적은 법."(4:23)

"군자란 말은 더듬거려도 실천은 민첩하게 해 내려는 존재."(4:24)
이렇게 보면 은을 체득한 군자의 몸짓은 우선 과묵하게 실천하는 사람이며, 둘째 자기 책임을 앞세우는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며, 셋째 물욕과 명예욕 같은 세속적 가치를 벗어나 남을 배려하고 사양하는 살마이니 '세속 속의 성인'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겠다.  80-81

공자 말씀하시다. "인이 어디 먼 고셍 있으랴. 내가 인을 실천하고자 하면 곧 인이 이르는 것을."(7:29)
인은 멀리 있지 않다. 도리어 내 주변, 내 곁에 있을 따름이다. "자기 주변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 바로 이것이 인을 찾는 방법"(6:28)이다.  82

번지가 인을 여쭈었다. 공자 말씀하시다. "사람을 아낌이지!"(12:22)
상대가 아까워서 손을 갖다 대기조차 어려운 마음, 이것이 '사람을 아낌(愛人)'이요. 곧 인이다. 상대방을 내 몸보다 귀하게 여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부족한 것은 메줘 주고 넘치는 것은 걷어 내어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인(仁)인 것이다.
그러니 집안에서 효를 통해 익힌 상대(부모)에 대한 사랑을 사회로, 국가로, 천하로 점차 베풀어 나가는 것이 인의 길이다. 그 상대방은 이제 친구, 동료, 연인, 회사, 국가가 될 참이다. 아니 시인 윤동주가 <서시(序詩)>에서 읊었듯,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함. 이 것이 인이다. 애틋하지 않은가, 사랑하는 마음이. 또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인의 실천이란.

5. 공야장(公冶長)편 - '자공'이라는 제자
스스로를 철저하게 객관적을 성찰할 수 있는 눈.
자기 성찰의 눈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사소한 것 같지만 그 끝은 하늘과 땅의 차이를 가르게 되는 법이다. 소인배는 이런 성찰의 자세가 없기 때문에 남의 잘된 것을 보면 꼭 나븐 점을 찾아 비난하고, 자기가 한 일은 훌륭하다고 잘못 자부하는 것이다.  89-90

"가난한데도 즐길 줄 하는 삶"
가난을 즐겨하는 미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가난을 가난으로 여길 겨를이 없음, 또는 물질적 조건이 나의 일상 생활을 침해하지 못하는 그런 '경지'를 이른다. 이미 가난은 내 마음속에 찌꺼기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가난의 콤플렉스를 벗어던진 말간 평화의 자리다. 그러므로 공자가 제시한 새로운 삶, "가난한데도 즐기고, 넉넉한데도 예를 좋아하는 삶"은 '가난/부유함'과 같은 물질적 조건, 또는 욕망에서 벗어나 ㄴ곳이다. 이제야 하치 한여름의 태풍이 지나간 해맑은 하늘처럼, 티 없고 왜곡 없이 사물을 바로 볼 수있는 세계가 열린다.  92

물질에 대한 욕망 또는 결핍의 그늘을 벗어 버린 자리에 참된 인간의 삶(일상)이 존재하며, 그 일상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궁극적 가치를 뜻한다는 깨우침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자면 문제의 핵심은 물질적 욕망이지, 물질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  94

6. 옹야(擁也)편 - 멋진 녀석들
공자가 맹지반을 칭찬한 것은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지 않음'. 즉 겸손함 때문이다. 용기는 육신의 힘 자랑이 아니라 그 힘으로 얻은 공을 뻐기지 아니할 때에야 얻어지는 것이다. 쉽게 오해하듯 용기는 센 주먹이나 날랜 발길질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낮추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용기의 집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 그러므로 용기는 정의, 덕성 같은 말과 깊이 관련된다. "정의를 보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용기 없는 짓이다."(2:24)라는 지적은 이 대목에서 유용하다.  103

용기란 힘을 발휘하는 것, 즉 '몸의 윤리'가 아니다. 용기는 벌써 겸손과 겸양이라는 '마음의 윤리'인 것이다. 이렇게 용기는 덕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공자가 전쟁터에서 얻는 요익 가운데, 공로를 뻐기지 않고 사양하며, 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특별히 중시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발전하면 유교에서 숭상하는 덕으로 승화된다는 점도 짐작할 수 있다. 공자가 맹지반을 크게 칭찬한 까닭이 이 지점에 있으며, 또 수천 년을 흐른 오늘날 우리들 눈에조차 그가 멋있게 보이는 것도 그의 '용기-덕-사양하는 마음'이 가진 보편적 호감 때문일 것이다.  105-106

공자가 제자 칠조개에게 벼슬자리를 알선해 주었다.
그는 "저는 아직 그 자리를 맡을 만한 깜냥이 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자가 이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5:5)  106

차가운 자기 성찰과 더불어 가난과 부유함이라는 물질적 조건 너머에 인간다움이 있다는 가르침의 핵심을 파악한 제자에게서 큰 기쁨을 느낀 것이다.   107

<논어>에는 "민자건이 스승을 모실 때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였다"(11:12)는 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평소에 무척 과묵한 살마이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집에서는 효도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니, 공자가 그리워하던 군자의 상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공자가 "군자란 말은 어눌하면서 행동은 민첩한 사람"(4:24)이라 고 정의한 대목이나 "사람됨이 강직하고 굳세고 소박하고 말은 어눌할 때 인(仁)한 경우가 많더구나."(13:27)라는 경험론을 편 것도 민자건의 경우에 들어 맞는다.  111

7. 술이(述而)편 - 공자의 학교
"배우고 싶은 자는 누구든 와라!" 이것이 공자 학교가 갖춘 가장 큰 특징이었다.  116

배우려는 이에게는 다 열려 있는 문, 그러나 옳게 배우려 들지 않는 이는 남겨 두지 않는 엄격함. 이것이 공자 학교의 모습이었다.  118

'묻지 않으면 답하지 않는다'는 원칙.  119
요컨대 질문할 줄 아는 자가 제자이며, 그 질문에 정답을 내릴 수 있는 자가 스승이다.  120

8. 태백(泰伯)편 - 성왕의 계보

9. 자한(子罕)편 - 공자의 사생활
위대함이란 저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어떤 신비가 아닌 일상생활 주변에서 빚어지는 중용적 삶에서 드러나는 것임을 알아채야 한다.  142

중용이란 한 사안이 가진 둘 이상의 의미를 이해하면서 그 당시에 합당한 이치를 찾는 것이지. 결코 '이것도 흥, 저것도 흥'하는 식의 포용주의가 아니다.  145

매일매일 삶을 산책하듯, 관찰하고 느끼면서 살아가는 삶. 이것이 공자의 일상생활이었던 것이다.  150

내로라고 뻐기지도 않고, 남을 시기하지도 않으면서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모습, 이것이 공자의 진면목일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느 눈 밝은 제자는 공자를 모순된 단어로 묘사하였으니, 나는 이 역설적인 표현 속에 공자의 참된 모습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공자께서는 따뜻하면서도 엄격하였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무섭지는 않았고, 공손하시면서도 태연자약하셨다.(7:37)  151

10. 향당(鄕黨)편 - 공자의 웰빙
함부로 먹지 않고 함부로 입지 않음, 처한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행동하고 선택하는 섬세한 대응, 이것이 유교에서 꿈꾸는 인간다움의 틀, 곧 문명성이다.  160

웰빙이란 비싼 음식과 신선한 공기가 아니라 섬세한 미적 감각을 일상생활 속에서 관철할 때 빚어지는 아름다움이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에서부터, 그리고 주변의 사소한 사물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에서 웰빙이 이뤄지는 것이다.  165

11. 선진(先進)편 - 사제 : 안연과 스승

12. 안연(顔淵)편 - 진리 또는 '매트릭스'
안연이 여쭈었다. "인(仁)이란 무엇입니까?"
공자 말씀하시다. "'내'가 실체라는 생각을 넘어 관계라는 각성에 이르면 '인'이 되지. 단 하루라도 '내'가 실체가 아니라 관계라는 진리를 깨닫기만 한다면, 온 세상이 본래부터 사랑으로 충만한 것임을 환히알게 되리라. 무론 이런 진리는 스스로 깨닫는 거지 결코 남이 해 줄 수는 없는 거야."
안연이 그 길을 물었다. 공자 말씀하시다. "눈에 보이는 게 독립된 개체라는 생각을 버려. 둘째, 세상이 관계가 아닌 개체로 이뤄졌다는 말은 믿지 마. 셋째, '나를 알아 달라'는 소릴 하지 마. 넷째, 이기적인 행동은 하지 마(나를 남에게 접속해!)."
안연이 흐느끼며 말했다. "제가 비록 명민한 녀석은 아닙니다만 죽는 날까지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잡겟나이다."(12:1)  179-181

인간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은 잠잘 때나 의식이 없을 때도 스스로 움직이는 심장 박동을 갖고 있다. 이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제 스스로 그렇게(自然)' 변화하는 자연의 리듬과 동질적이다. 인간과 자연은 본래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또 사람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간다. 사람은 '본래적으로 사회적 동물'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관계적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관계 맺는 존재다. 복례란 이런 인간의 본래적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질리고 환원되기의 뜻이다.  183
요컨대 극기복례란 나를 개체로 인식하려는 눈(시각)과 귀(청각)의 편견에서 해방되어 내가 원래 남(바깥)과 '관계'를 맺을 때에야 참된 나를 이룰 수 있다는 진실을 제대로 알고 또 올바르게 회복해가는 실천을 의미한다.  184

눈에 보이는, 거울에 비치는 개체도 이뤄진 세계는 진실이 아니라 도리어 환상(매트릭스)이다.  185

요컨대 개체로서의 내가 환상(매트릭스)임을 깨닫는 순간 세계는 하나의 꽃으로 피어남을 알게 되리라는 전망이다. 이것이 진리요 인이다.  187

진리로 가는 네 가지 길을 정리하자면 '제반 행동, 즉 듣고, 보고, 말하고, 행동하는 데서 두루 에고를 벗어라'는 것이다. 관게 맺기, 곧 예(禮) 속에 진리가 깃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러므로 관계를 순조롭게 만드는, 남과의 접속을 원활하게 하는 접대와 응대의 기술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소학(小學)>에서 교육을 바로 관계 맺지 훈련, 이른바 "응대하고. 대접하며, 빗질하고, 청소하느 ㄴ방법", 곧 응대소쇄(應對掃灑)로부터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윤리란 실은 사람 사이의 관꼐를 적절하게 이해하고, 접속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189

공자 말씀하시다. "... 인이란 내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 주고, 내가 갖고 싶으면 남도 갖게 해 주는 실천이지. 우리 일상의 주변에서 사랑의 길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게 인을 실천하는 법이지."(6:28)
인을 실천하기 위해 유엔 사무총장이 될 필요가 없고 대통령이 될 필요가 없다. 살아가는 "일상의 주변에서" 그저 내가 갖고 싶은 것은 남들도 갖고 싶겠거니"하면서 '미루어 헤아리는 마음가짐', 바로 여기서 피러나는 것이 인이라고 가르친다.  191

13. 자로(子路)편 - 정치란 무엇인가
공자는 인(仁)을 설명하면서 '정치란 곧 소통'임을 강조한 바 있다.  193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면 곧 나와 남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지고 그렇지 못할 경우 원망이 생긴다. 여기 원망이란 요즘 말로 하자면 커뮤니케이션 부재로 인해 쌓인 화병, 그것이 곪아 터져 나온 정쟁이 될 것이다.  194

즉 공자에겐 '말이 서로 통하는 상태'가 정치의 원형이다. 공자가 꿈꾼 좋은 정치는 '말이 통하는 문명 사회'라는 점을, 말의 소통은 한마디로 '신뢰'로 개념화된다.  
공자가 꿈꾼 문명 세계란 마의 소통, 곧 약속과 실천이 살아 있는 곳임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195

공자는 관계의 직분, 즉 명분(名分)을 어김은 곧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까지 경고하는 것이다.(3:13, 9:11)
따라서 야만 상태에는 정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가 언어와 약소긍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정치학은 정명론(正名論)으로 귀결되는데,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명분에 합당한 '정당성'에 따라 정치적 힘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196

공자의 위대한 점은 폭력을 정치의 전모로 이해하는 당시 정치가들에게, '좋은 정치란 폭력이 아니라 언어로 형성되는 신뢰의 힘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데 있다. 이 점은 동양의 정치사상 발전사에서 분수령에 해당하는 것이다. 공자는 그 이전까지 샤먼의 힘(신화)과 폭력의 힘(무력)에 의해 주도되었던 정치 세계를, 말과 약속이 실천되는 인간 세계로 전환시킨 최초의 사상가였다.  197

유능한 경영인은 직원들의 나쁜 점을 들추면서 이것 고쳐라 저것 고쳐라 하지 않는다고 한다. 회사의 큰 목표를 제시하고 그쪽으로 분위기를 잡아나가면 장점들은 모이고 단점은 묻히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을 옳게 알아서 제자리에 맞게 쓰는 것은 인정(仁政)의 승패가 달려 있는 것이다.  208

14. 헌문(憲問)편 - 선비가 걸어온 길
요컨대 수기치인이란 선비가 공직에 취임하여 남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도덕적 훈련이 심화되어 자립하게 됨에 따라, 거기서 번져 나오는 에너지(aura)에 주변이 끌려드는 것이다.  215

공자는 선비를 두 유형으로 나눠보고 있다. 
하나는 달사(達士)요, 또 하나는 문사(聞士)다.
달사의 요건으로서 그는, "정직한 인격성과 정의를 좋아하며 남의 말을 잘 들을 것, 또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이에 반해 사이비 선비, 즉 문사란 겉으로는 도덕적인 선비 같지만 실제로는 업무 처리에나 능한 '기술적 지식인'에 불과하다고 평한다.  218

15. 위령공(衛靈公)편 - 평천하의 길 : 공자대 자로
공자는 힘이 아니라 덕으로 정치를 행하는 것만이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유일한, 그리고 올바른 길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225

군자란 "가난한데도 (자기 길을) 즐길 줄 아는"(1:15) 존재여야 했다. 그러니 군자를 '짐짓 곤공할 줄 아는 존재'로 본 것은 내력 있는 방응인 것이다.  228

공자가 가르치고자 한 미덕은 무턱대고 힘을 발휘하는 거이 아니라 '무엇이 정의인가'를 판단하고, 또 '올바른 시대정신'을 찾는, 즉 '정의를 찾는 노력'이었다.  231

공자는 지금 당장은 비현실적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문명을 옳게 되살리려면, 군자란 '문화 시대의 지도자'로 새롭게 개념 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그 새 시대를 준비하는 군자의 키워드가 '수기이경(修己以敬)'이라는 언어였다. 이를 통해 자기 책임성, 성찰성 그리고 내향성을 갖춘 존재가 군자이며, 또 그가 발휘하는 힘이 폭력이 아닌 '매력'으로 전환될 때에야 인간다운 사회, 문명적 질서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235

둘러 가는 것 같지만 '덕성을 통해 주변이 끌려드는' 매력의 힘, 이것만이 천하를 평화롭게 이끌 동력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235

16. 계씨(季氏)편 - 공자의 정치경제학 : 분배냐 성장이냐
계씨는 주나라 재상보다 더 부유하였다. 그런더ㅔ도 염유가 그를 위해 세금을 수탈하여 더욱 부유하게 만들었다.
공자 말씀하시다. "저 놈은 우리 학생이 아니다. 얘들아! 북을 울려서 성토하여도 좋으니라."(11:16)
아무리 탁월한 기예와 지식을 갖고 있어도, 도덕적 판단이 배제된 기술 만능의 사고 방식은 재난을 부르게 된다는 공자의 도덕주의적, 또는 성찰적 가치관을 여실히 볼 수 있는 대목. 
이거을 오늘날로 끌로와 해석하자면, (정치) 기술의 사회적 의미, 수단이나 방법의 도덕성에 주의해야 한다는 공자의 경고로 볼 수 있다. 공자 가르침의 핵심은 용맹이나 지혜에 있다기보다는 이러한 재능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도덕적 성찰에 있음을 이 대목에서 다시금 느낄 수 있다.  246-247

도덕적 가치 판단...

공자의 정치 경제학은 빵을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재화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정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자에게 정치란 부의 축적을 꾀하는 경제에 종속된 기술적 행위가 아니라, 부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하는 사회 정의의 수립에 핵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균등한 분배, 서로 다름에 대한 인정, 그리고 안정된 생활, 이 세 가지가 국가를 경영하는 요체라는 것이다.(즉 "대개 고르면 가난하지 않고, 화목하면 모자라지 않고, 평안하면 기울지 않기 때문이다.")  250

17. 양화(陽貨)편 - 공자가 미워한 것들
양화 편은 특별히 인간 공자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253

이 편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부분은 쿠데타 세력의 초청에 마음 흔들려 하는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공자 모습이 현실감 있게 그려진다.
그리고 뒷부분에는 공자의 분노와 증오를 많이 기록해 놓았다. 제자인 안연조차 "화난 마음을 다른 데서 풀지 않고, 두 번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6:2)의 경지를 얻었다고 한 점을 염두에 두면, 분노해야 할 대상에게는 뜨겁게 분노하는 것이 곧 성인의 풍모임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 역시 유고의 한 특징이다. 
분노해야 할때 분노하지 못하는 것은 참된 용기가 아니다. 이 편의 후반부 핵심은 "정의를 보고도 실천하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다."(2:24) 라는 구절로 대변할 수 있으리라.  254

공자 말씀하시다. "천한 놈드로가 국가 대사를 함께 할 수 있겠더냐? 그 놈들은 자리를 얻지 못하면 얻으려고 전전긍긍하다가, 일단 얻고 나면 잃을까 전전긍긍한다. 정녕코 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들 땐, 못하는 일이 없는 놈들이다."(17:15)
자리나 지위란, 스스로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면 얻게 되는 것이다(4:14)  257

사람이 참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미덕을 필요로 할까. <대학(大學)>의 가르침을 받들자면, "멈춰야 하는 곳에선 멈출줄 아는 것(知止)"이 그것이리라. 
처한 곳이 추운 데라면 추위에 멈추고, 더운 곳이라면 더위와 더불어 버티는 것. 추위에 떨면서도 따뜻함을 구걸하지 않고, 더위 속에서는 또 뜨거움을 버텨나가는 것, 이것이 사이비가 아닌 '참'으로 가는 길이다.  262

자공이 말하였다. "선생님도 미워하는 것이 있는지요?"
공자 말씀하시다. "미워하는 게 있지. 남의 잘못을 떠벌리는 것을 미워하고, 낮은 데 있으면서 윗사람 헐뜨든 것을 미워하고, 용맹스럽기만하고 예가 없는 것을 미워하며, 과감하기만 하고 꽉 막힌 것을 미워한다네."
공자가 물었다. "자네도 미워하는 것이 있는가?"
"주워들은 걸로 자기 지식인 양 여기는 짓, 불손함을 용기로 아는 짓, 그리고 고자질을 정직으로 여기는 것으 미워합니다."(17:24)  263

18. 미자(微子)편 - 나의 길을 가련다
공자가 위나라에서 경쇠라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삼태기를 짊어진 사람이 지나다 듣고는 말했다. "쓸쓸한 마음이 소리에 들어 있군."
다 듣고 나서 또 말했다. "흠! 천박한데, 그 소리가. 세상이 날 알아주지 않으면 또 그뿐. '물이 깊으면 옷을 입고 건너고, 물이 얕으면 걷고 건너라'했거늘."
공자가 그 말을 듣고 말했다. "깔끔하구먼. 하나 그게 어려운 건 아니지!"(14:42)  268
은둔자의 비판은 '시대에 맞춰 그에 걸맞게 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이렇게 물이 깊은 때(곧 암흑 시대)에는 은둔하는 것이 옳은데, 뭐 그렇게 미련이 남아 사회에 개입하려 하는 것이요!"라는 질타가 된다.
이에 대해 공자는 "깔끔하구먼. 하나 그게 어려운 건 아니지!"라는 날렵한 뒷발차기로 응대한다. 곤자는 은둔자드르이 뜻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한 몸 보전하려고 세상사에 깨끗이 미련 버리는 일, 그깟 것이야 나도 하려 들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어려운 것은, 더럽고 추악하지만 '그럼에도', 아니 더럽고 추악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더욱 세상사 속으로 참여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길"에 있다는 것이다.  269-270

공자는 은둔자들이 사회적 예의(손님을 접대하고, 자식들을 소개하는 행동)는 실천하면서도 막상 정치적 재난을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행위는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즉 '벼슬 살지 않는 것', 다른 말로 하자면 '정치적 무관심'은 지식인으로서는 옳지 않은 행동이다.  272

그는 시대의 혼란과 소통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라고 보았던 것이다.  273

19. 자장(子張)편 - 우정이란 무엇인가
공자 말씀하시다. "도움이 되는 벗이 세 종류요, 손해를 끼치는 벗도 세 종류가 있다. 정직한 벗이 도움이 되는 첫 번째요, 약속을 꼭 지키는 벗이 두 번째요, 견문이 넓은 벗이 세 번째다. 손해를 끼치는 벗으로는 꽉 막혀 세상 넓은 줄 모르는 녀석이 첫 번째요, 알랑방귀 뀌는 녀석이 두 번째요, 간사한 녀석이 세 번째다."(16:4)

친구는 친구요, 형제는 형제다.(형제는 한 핏줄로 태어난 동기同氣이니 하늘이 맺어준 자연적 관계, 즉 천륜天倫이요, 친구는 의義, 즉 뜻이 맞아서 맺어진 사회적 관계, 즉 인륜人倫이니 차이가 있다.)
친구를 사귀는 데는 나름대로 '거리'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서로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래 사귄 친구 사이에도 공경하는 자세를 잃지 않은 안평중에게 공자는 '친구를 참 잘 사귀는 사람'이라고 평한 것"(5:16)이리라.
그러니 친구가 잘못한다고 지나치게 끌어안고서 안달복달할 것은 없다. 몇 번 충고해 보다가 고치지 않으면 그냥 '이제부터 나와는 길을 달리 하니 친구가 아니다'라고 절교하면 그만이다. 구태여 친구의 소맷자락을 부여잡고 '의리가 어쩌고, 우정이 어쩌고' 해가면서 나서다간, 괜한 봉변을 당하는 수가 있다. 그렇게 봉변을 당한 다음에야 '넌 내 친구가 아니다'고 절교해 본들 맞은 뺨만 더 아플 뿐이다.  284

자유가 말했다. "임금을 섬긴답시고 자주 '아니 되옵니다'라고 간하다간 공욕을 치르는 경우가 생기고, 친구 사이라고 지나치게 조언하다가는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4:26)

자공이 우정을 여쭈었다.
공자 말씀하시다. "충고를 해서 좋은 방향으로 이끌되, '아니다'싶으면 그만두어야 한다. 스스로 욕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12:23)  285

진정한 벗은 나와 같은 존재거나 '또 다른 나'이다.  286

20. 요왈(堯曰)편 - 진리의 계보학
중용이란 무엇인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지나치지 않고 모자라지도 않음을 뜻하는 최적의 상태, 곧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용의 관건이다. 이것은 건강의 의미와도 직통한다. 말하자면 비만도 아니요 영양실조도 아닌 한 중간, 이것이 건강이요 또 그것이 '몸의 중용 상태'다. 따라서 중용이 지향하는 좋은 정치는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290

"좋고 나쁜 것의 두 끝을 잡아서 그 가운데 가장 적절한 것을 백성에게 베풀었다"는 말은, 중용 정치학이 최적의 상태를 찾는 과정이지 이것과 저것을 섞은 회색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잘 말해 준다. 중용은 차라리 극단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291


<논어>의 인생이란 '내내 배우고 또 익히며 살다가 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298


에필로그

인간을 인간답게 대접하기, 이것이 <논어>의 중요한 주제다.
나아가 배움과 가르침이 <논어>의 중요한 주제인 바, 그 요체는 '짐승 같은 인간을 어떻게 하면 사람다운 인간으로 만들 것인가', 또는 '야만의 세계를 어떻게 문명의 세계로 전환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그 과제의 초점에 효(孝)가 존재한다.  303

맹자는 인간을 둘러싼 관계망이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고 본다
오륜(五倫)이다.
(1)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2) 남편과 아내의 관계
(3) 국가와 국민으로서의 관계
(4) 형과 아우의 관계
(5) 동료 또는 친구 관계

유교의 학문이란, 이 다섯 가지 네트워크의 의미를 배우고 실천하는 학문인 것이다. 유교에서 최고 대학이 성균관이요, 그 성균관의 본관이 명륜당(明倫堂)이다. 명륜당이란 곧 '네트워크(倫)를 환하게 익히는(明) 교실(堂)'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유교 학문이란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다섯 가지 관계(네트워크)를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는 것일 따름이다.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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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경험한 인문 고전 독서와 저자가 조사한 인문고전에 관한 방대한 자료들을 토대로 하나의 인문고전 독서방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인문고전 독서를 통해 가지는 지적 수준의 힘은 인문고전 독서에 목을 맨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를 통해 드러나있다.
철학자들이야 당연히 그렇다 치고 경제인 교육인 학자 군인 일반인들이 인문고전을 통해 리더가 될 수 있었던 점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교육 현실이 언제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인상적으로 적고 있다.
우리가 경험한 교육현실 그리고 지금 학생들이 되풀이하고 있는 교육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서술하면서 지금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또한 금융, 경제, 기업인들 중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인문고전을 탐독하는 사람들이라는것, 음악, 미술계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은 인문고전을 읽어왔다는 사실은 우리에 절실하게 인문고전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한다.
지금의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은 철학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본질을 이해하고 거인의 어깨위에 있기 위해서는 인문고전이 체계적으로 우리 내면에 스며들어 동화될 때 새로운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 인문고전 독서 방법에 관한 7가지가 나온다.
이것은 다만 읽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보다는 정말 왜 필요한지에 대해 자각하고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어 내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나온 한국사회에서 선비들이 하던 공부이다. 그것이 세계를 만들어낸 위인들이 하던 공부이다.



인문고전 독서는 두뇌에 특별한 기쁨을 가져다준다. 물론 처음에는 고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고 어렵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이해하지 못해 진도가 일주일 또는 한 달씩 늦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어느 지점을 넘기면 고통은 기쁨으로 변한다.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온 천재들이 쓴 문장 뒤에 숨은 이치를 깨닫는 순간 두뇌는 지적 쾌감의 정점을 경험하고, 그 맛에 중독된다. 그리고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뻔한 꿈밖에 꿀 줄 모르고 평범한 생각밖에 할 줄 모르던 두뇌가 인문고전 저자들처럼 혁명적으로 꿈꾸고 천재적으로 사고하는 두뇌로 바뀌기 시작한다.  20
세상에는 두 종류의 책이 있다. 고전(古典)과 비고전(非古典). 고전은 짧게는 100~200년 이상, 길게는 1,000~2,000년 이상 살아남은 책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천재들의 저작이다.
생각해보라. 만일 앞으로 10년 동안 노벨상 수상자들에게 매일 두 시간 이상 개인지도를 받는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22

미국 '그레이트 북스 재단'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인문고전 독서 프로그램 및 독서 토론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28
세인트 존스 대학은 4년 내내 인문고전 100권을 읽고 토론하고 에세이를 쓰는 게 교육과정의 전부다. 
조지 와이드 대학의 주 교육과정은 멘토와 함께 인문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다. 
예일 대학은 '디렉티드 스터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교수가 강의를 하고 두번은 학생들끼리 세미나를 하는 프로그램.  30
어느 날 갑자기 우리나라 대학가에서 인문고전 독서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인문고전을 원서로 일그라는 숙제를 내주던 교수도, 신입생에게 플라톤과 공자를 권하던 선배도, 뭐가 뭔지 모르면서도 죽어라 인문고전을 읽던 학생도 다 사라져 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 베스트셀러를 읽으라는 숙제를 내주는 교수, 신입생에게 재테크 서적을 권하는 선배, 무협판타지 소설을 애독하는 학생들이 들어섰다.  33
두뇌의 수준은 그가 읽는 책의 수준과 같다고 할 수 있다.  35

스파르타는 왜 강한 육체만 추구한 국가로 알려졌던 걸까? 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 그들이 뛰어난 이유가 상세히 밝혀지면 모든 사람이 지혜를 갖추려 애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9

일제는 프러시아 즉 독일에서 시작된,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학교제도를 그대로 수입해서 당시 식민통치하에 있던 우리나라에 이식했다. 일제를 패망시킨 미국은 영국의 공립학교 교육제도를 기반으로 한 자국의 공립학교 교육제도를 우리나라에 도입했다. 쉽게 말해서 당신이 받은 학교 교육과 지금 우리나라 십대들이 받고 있는 학교 교육은 직업 군인과 공장 노동자를 생산하는게 목적이었던 교육 시스템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혹시라도 이 말을 인정하기 어렵다면 다음 사실을 한 번 생각해보라.
  - 군대의 상관은 부하들에게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고 부하들은 그 명령을 기계처럼 수행한다.
  - 공장의 장은 휘하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작업지시를 내리고 노동자들은 그 지시를 기계처럼 수행한다.
  - 우리나라 교사는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고 학생들은 그 지식을 기계처럼 암기한다.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생들은 초중고 합쳐서 무려 12녀이나 교육을 받고도 지적이고 창의력 넘치는 인재가 되기는 커녕 좀 심하게 말하면 바보가 되어 사회에 나온다. 대학에 입학해서 다시 4년을 배우고 대학원까지 졸업해도 마찬가지다. 당당히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지식인이 되기는 커녕 제 앞길 하나도 헤쳐나가지 못하는 무능력한 존재로 전락하기 일쑤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왜 우리나라 학생들은 배우면 배울수록 무능력한 사람이 되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나라의 공교육이 시키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바보를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 시스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65-66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문고전 저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실시한 교육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가 깊은 대화를 통해 지혜와 진리를 터득하고 발견해가는 교육이다.  67

아무리 많은 지식을 축적한다 한들 백과사전은 될 수 있을지언정 천재는 될 수 없다. 천재는 지혜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71
인문고전을 읽고서 변화하기를 바란다면.. 전쟁을 치러야 한다. 다름 아닌 자기 자신과 말이다. 
과거의 자신을 죽이는 처절한 자기 투쟁이 뒤따르지 않는 인문고전 독서는 지식의 축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지식은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삶의 근본적인 변화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지혜가 있을 때 생겨난다.  77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투자자들의 삶을 조사해보면 1) 독서광이다., 2) 최고 수준의 인문고전 독서가다. 라는 공통점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134

베스트셀러는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책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이 베스트셀러 또한 감동과 지식은 줄 수 있으되 지혜는 줄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137
그렇다면 인문고전을 열심히 읽기만 하면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아니다. 지혜는 책 속에 있지 않다. 지혜는 인간의 내면에 존재 한다.
치열한 철학고전 독서를 통해 두뇌 속에 '철학하는 세포'를 만든 뒤, 본질을 꿰뚫는 사람.  138

돈 없고, 능력 없고, 배경 없는 사람일수록 인문고전을 치열하게 읽어야 한다.  185

인문고전 앞에서 나 자신을 내려놓고 눈과 귀와 마음을 오직 천재들의 목소리에 맞추자, 즉 인문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천재의 두뇌에 직접 접속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이를 실천하자 돌덩이 같던 두뇌가 정말로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194
나는 인문고전을 읽으면서 내가 '바보'라는 사실을 알았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일 수 있다. 책을 많이 읽는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것이니 말이다. 나 역시 그런 함정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독파하는 인문고전이 늘어나면서 저절로 사라졌다.  195
인문고전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두 가지 있다. 간절함과 사랑이다. 
인문고전을 읽을 때 글자만 읽어서는 안 된다. 그 내용만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단면적인 책 읽기에 불과하다. 그 단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입체적인 독서로 넘어가야 한다. 진정한 독서는 인문고전 저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문장 뒤에 숨어 있는 천재의 정신을 만나는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이해해야 한다. 깨달음이 있는 책 읽기를 해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그런 독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온 마음을 다해 발버둥 치다보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천재의 정신에 근접한 독서는 할 수 있다. 
사랑이 간절함보다 훨씬 중요하다. 사랑은 곧 인문고전 독서의 목적과 관계된다. "나는 왜 인문고전을 읽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천재가 되기 위해서, 창조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서, 업무능력을 높이기 위해서, 회사를 잘 경영하기 위해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 등등. 그렇다면 왜 천재가 되어야 하고, 왜 창조적인 사고를 해야 하고, 왜 업무능력을 높여야 하고, 왜 회사를 잘 경영해야 하고, 왜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유일무이한 답은 '사랑'이어야 한다.
내 경우를 예로들면, 인문고전을 읽다가 좌절감을 느낄 때마다 인문고전을 읽는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 자주 묵상했다.  199-200

가슴으로 하는 독서의 세계  204

해설서는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시기는 인문고전 독서를 시작하고 최소 3년, 최고 10년이 흐른 뒤가 적당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207
철학고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필사했고, 문학고전은 가슴에 와닿는 부분만 필사했다. 역사고전은 한 권도 필사하지 않았다. 철학고전 중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따로 출력해서 주머니나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꺼내 소리내어 읽었다. 이해가 될 때까지 그렇게 했다. 물론 내 수준의 이해였지만 말이다.  210


리딩으로 리드하라 1. 온 마음으로 사랑하라.
세종대왕의 인문고전 독서법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치열함으로 요약된다. 그의 독서법은 백독백습(百讀百習) 즉 100번 읽고 100번 필사하는 것이었다.  237
세종은 무엇보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최고가 되지 못하면 백성들에게 최고의 정치를 베풀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최고가 되지 못하면 신하들을 제대로 이끌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그래서 세종은 먼저 자신을, 다음으로 신하들을 그토록 뜨거운 독서의 장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238
세종은 당시 사대부들을 비판하면서 "오늘날 선비들은 말로만 경학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치를 궁극하게 밝히고 마음을 바르게 한 선비가 있다는 것은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다. 너희 선비들은 매일 경학을 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왜 진짜 선비가 없는 것이냐!" 라고 했다.  239
내가 생각하는 인문고전 독서법의 핵심은 천재들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리딩으로 리드하라 2. 맹수처럼 덤벼들어라.
진짜공부(인문고전 독서).
'읽었다' 라기보다는 '먹어치웠다'.  243

리딩으로 리드하라 3.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인식하라.

리딩으로 리드하라 4. 위편삼절(韋編三絶), 책이 닳도록 읽고 또 읽어라.

리딩으로 리드하라 5. 연애편지를 쓰듯 필사하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표시를 하거나 밑줄을 그으면서 책 한 권을 다 읽은 뒤 옮겨 적는 것, 중요한 부분을 발견하는 즉시 옮겨 적는 것 그리고 초서(抄書)[초록(抄錄)이라고도 한다] 세 가지가 있다.
초서란 인문고전에서 중요한 부분을 뽑아서 옮겨 적은 뒤 이를 주제별로 분류, 편집해서 책으로 만드는 것인데, 조선의 천재들이 취한 기본적인 인문고전 독서법이었다.  253
진정한 필사는 종이 위에 베껴 쓰는 것이 아니라 영혼 속에 새겨넣는 것이리라.  255
암송은 천재들이 즐겨 사용한 독서법이다.  256

리딩으로 리드하라 6. 통(通)할 때까지 사색하라.
낮은 수준의 인문고전 독서에는 사색이 없다. 오히려 사색을 억압하고 소멸하려고 한다.  260
서애 류성룡은 "다섯 수레의 책을 술술 암송하면서도 그 의미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가. 사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양의 천재들은 하나같이 진정한 인문고전 독서는 사색에 있고, 사색이 빠진 인문고전 독서는 헛것이요 가짜라고 강조했다.  261
프랜시스 베이컨은 "독서는 오로지 사색하고 연구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사색을 기록하는 방법은 
  1) 책을 읽다가 떠오르는 생각을 따로 준비한 종이나 노트에 즉시 적는다.
  2) 책을 읽다가 떠오르는 생각을 책의 여백에 즉시 적는다.
  3) 책 한 장(章) 또는 책 전체를 읽고 사색한 뒤 그것을 독후감식으로 적는다. 
이 세 가지가 대표적이다.  270

리딩으로 리드하라 7.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라.
인간의 뇌는 무엇인가를 읽고 쓰고 암송할 때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다. 읽고 쓰고 암송하는 뇌의 사진을 그렇지 않은 뇌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전자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신피질의 활동이 급격하게 증가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인간이 깊은 사색에 잠길 때 뇌에서는 전혀 다른 뇌파가 나온다. 아인슈타인이 사고실험에 몰두하고 있을 때, 동양 최고 수준의 바둑 명인이 바둑을 두고 있을 때, 전설적인 명상가가 깊은 명상에 빠져들었을 때 나오는 바로 그 뇌파가 나온다. 인문고전을 읽고 필사하고 암송하고 사색할 때만 그러는 게 아니다. 베스트셀러는 물론이고 신문 사설을 읽고 필사하고 암송하고 사색할 때도 뇌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특별한 뇌파가 나온다. 그런데 인문고전을 읽고 사색하느 수준을 넘어서 인문고전의 저자와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어 그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두루 깨닫는 경지에 도달하면 그 사람의 뇌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뇌의 모든 신경세포와 신경회로가 일순 눈부신 빛에 감싸여 전혀 다른 형태로 재탄생하고 재배열되지 않을까? 그리하여 그 사람의 두뇌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고를 하는 위인의 뇌로 기적처럼 변화하는 게 아닐까?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를 연구하면서 그런 생각을 종종하곤 했다.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는 그 정도로 신비롭고 경이로운 면이 있다.  279-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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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위한 학문인 인문학을 알아가는 것은 어쩌면 인간으로 태어나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인간과 인간이 어울려 살아가고 소통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인간이 인간은 이해하고 살아간다는것은 매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엄청난 발전의 속도 속에 그것에 허덕이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어쩌면 별 생각없이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이라고 하면 누구나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인문에서의 생각은 생활에서 무의식속에 이루어지는 단순한 선택에 의한 생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좀더 깊이있는 생각 공감하고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는 생각, 그것은 쉽게 이루어 지지 않으며, 그것이 가능해 지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인문학이 필요할 것이다.
흔히 말하는 '문사철' 문학과 역사와 철학..
인문의 틀이다. 세 가지에 대한 고루한 지식이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는 한 분야라도 고려해 보는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그 점에 대해 이 책은 잘 정리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인문학의 어려움을 기본적인 지식의 부족에서 시작하는데, 저자는 15개 테마의 기본지식을 고려하고 있다. 표현대로 하자만 '바탕지식'이다.
기본적인 틀을 알고 깊이 있게 가자는 주제로 15개의 바탕지식을 설명하고 있다.
인문학에 대한 전체적인 흐름을 보지 않은 나로서는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었다.
물론 체계적인 강의나 토론회가 아니라면 모든 테마를 두루 살피기는 그것도 개인적으로 살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바탕지식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관심있는 테마들을 하나씩 선정하여 알아가면서도 이웃테마들을 함께 생각해 보게 하는 면에서 도움이 많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이 세상 어느 지식 하나 인문학이 아닌 것이 없다. 어느 분야 하나 인간을 위하지 않은 지식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5

서양인을 만난다면 그들 문화를 형성해온 두 기둥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즉, 그리스 로마 신화, 그리스 철학과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14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는 <새로운 미래가 온다>에서 21세기에 요구되는 중요한 능력으로 'High Concept'(창의성)과 'High Touch'(좋은 인간관계를 설정하는 능력)을 들고 있다. 
로버트 라이시는 <부유한 노예>에서 다니엘 핑크의 두 인간형을 'Geek'(엉뚱한 사람, 기발한 사람)와 'Shrinks'(사람들의 마음속을 꿰뚫는 사람, 인간을 잘 이해하는 사람)로 표현한다.  15
수학여행의 기원은 18세기 영국 귀족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 영국의 귀족들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가정교사를 붙여 교육에 힘썼고, 소년기를 벗어나면 유럽 대륙으로 수학여행을 보냈다. 기간은 3년으로 프랑스, 독일과 같은 국가들을 돌며 여러 가지 경험과 함께 문물을 배웠다. 이때 꼭 빠지지 않는 것이 지성인들과의 만남이었다.  18

모든 게임의 시초는 전쟁의 역사로부터 비롯된다.  33
사마천은 '대게 서민들은 상대방의 부가 자기 것의 10배가 되면 이를 헐뜯고, 100배가 되면 이를 모서워하여 꺼리며, 1,000배가 되면 그의 심부름을 기꺼이 하고, 10,000배가 되면 그의 노복이 된다. 이것이 만물의 이치다.'라고 말한다.  52

신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한다.  59
동양삼국에 고사성어가 있다면(표의문자), 서양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있다.(표음문자)  65
동양의 고사성어가 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면, 서양의 신화는 인간과 신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69

성경에서는 조직경영의 중요 원칙 중 하나인 'Span of Control(통제범위의 원칙)' 즉 한 사람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사람 수에는 한계가 있다는 원칙이다.  79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 중 가장 중요한 개념은 다름 아닌 연기(緣起)다. 연기의 의미는 나와 다른 이들이 모두 연결되어 우리 모두는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의미이고, 나아가서는 나와 우주가 하나라는 의미다. 하나는 같은 입장을 의미한다.  158

1997년 영국은 18년 만에 노동당 정권으로 토니 즐레어 총리는 정치 스승인 앤서니 기든스의 주장을 반영해 18년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던 제 2의 길인 신자유주의에 부분적인 수정을 가한다.
규제를 없애 사회 구석구석까지 경쟁체계를 도입해 생산성을 높이고 경제 활력을 높이는 것도 좋지만, 빈곤계층에 대한 안전판을 마련하는 것 역시 사회의 안정과 안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한 것이다. 
신 자유주의에서 약간 방향을 튼 새로운 정책은, 자기 상승의 기회를 확보할 수 있는 교육과 인간적 삶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의료과 같은 부문은 시장에 맡기지 않고 정부가 직접 복지정책으로 관여하는 것이었다.
제1의 길인 복지개념, 제2의 길인 신자유주의에 이어, 제3의 길로 부르는 이 길은 신자유주의와 같은 명확한 개념이 없다.  225
현실적으로 힘을 가진 미국과 같은 나라가 생각을 바꿈으로써 신 자유주의는 방향을 틀 수도 있다. 아니면 신자유주의의 문제점들이 극단적으로 노출되어 호되게 당하고 난 뒤 할 수 없이 방향을 틀 수도 있다.  226
IMF는 2차 대전 직후에 설립된 국제기구인 만큼 당시 국제사회의 패권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국가에 대한 긴급금융과 같은 주요 사안은 85% 이상의 의결을 필요로 하는데, 미국이 바로 절묘하게도 17%의 결정권을 쥐고 있다.  234

16세기 태어나 처음으로 사회계약을 주장한 홉스(1588~1679년)가 개인의 생명보호를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내세웠다면, 로크(1632~1704년)는 한 걸음 더 나가 사회계약의 중심을 재산권보호에 두었다.  243
사회계약이 장자크 루소(1712~1778년)로 넘어가면서 한 단계 더 발전하여 이제부터는 '자유'가 중심 사상을 이룬다.  244

일본의 역사는 나라를 다스리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국가 형태이전(BC1만년~ AD3세기)
2 천황통치시대(4세기~1192년)
3 막부시대(1192~1868년)
4 메이지 유신 이후(1868~현재)    259
전쟁은 기본적으로는 전력 싸움이다. 그리고 그 전력의 바탕은 다름 아닌 지식욕과 학습이다.  273

우리나라 역사는 크게 7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삼국시대 이전( ~BC18년)
2. 삼국시대(BC18~676년)
3. 남북조시대(676~936년)
4. 고려시대(936~1392년)
5. 조선시대(1382~1910년)
6. 국권피탈기(1910~1945년)
7. 대한민국(1945~현재)

중국의 역사는 삼황5제의 전설시대와 하 은 주 진 네 왕조시대를 거쳐 
1. 한(BC207~AD220년)
2. 위진남북조(220~581년)
3. 수(581~618년)
4. 당(618~907년)
5. 오대십국시대(907~960년)
6. 북 남송시대(960~1279년)
7. 원(1279~1368년)
8. 명(1368~1644년)
9. 청(1644~1911년)
10. 중화민주 및 중화인민공화국(1911~현재)

일본의 역사는 청황통치시대를 지나 막부시대를 맞이하는데, 막부는 
1. 가라쿠마 막부(1192~1333년)
2. 무로마치 막부(1338~1467년)
3. 전국시대(1467~1573년)
4. 아즈치,모모야마시대(1573~1603년)
5. 에도시대(1603~1868년)     306

성업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항상 3대 또는 최소 2대가 걸린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장수왕 두 왕의 재위기간 100년(391~491년)
백제는 동성왕, 무령왕, 성왕 3대 재위기간 75년(479~554년)
신라는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3대 76년(500~576년)에 걸쳐.  320
재주복주(載舟覆舟)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어엎기도 한다'  324


의미를 따지고 전례를 찾고 논리를 동원하고 큰 방향을 모색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일에는 인문학이 적격이다.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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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실이나 소식 따위를 알아내기 위하여 사람이나 장소를 찾아감', '명승고적 따위를 구경하기 위하여 찾아감'으로 해석된다.
첫 번째 의미에서 나오는 '알아내다'라는 동사는 '방법이나 수단을 써서 모르던 것을 알 수 있게 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번에 읽은 <길 위의 인문학>은 2010년 대한민국에 인문학 부흥을 위해 이루어진 탐방으로 이루어진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작년 한해 많은 도서관들에서 인문학을 위한 문화 탐방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을 보고 몇번 가보기도 하였다.
우리가 앉아서 글로 보거나 때로는 직접 다녀온 사람들의 자료를 인터넷을 통해 사진으로나마 보는 것과 직접 탐방을 다녀오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몸소 참관하며 느낄 수 있었다.

우선 글이나 사진은 여운을 주는데 한계가 있었다.
문화를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는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또한 표현한다고 해도 그것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마다의 관점이 틀리기에 본인만이 느끼는 감정과 본인만이 사물을 바라보는 초점이 틀리기에 나와 다른이들의 관심 대상은 조금씩은 차이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전체적인 영상은 자신이 직접 눈으로 주위 환경을 같이 둘러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꽤 크다고 생각된다.
여러가지가 많이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현장의 생생함이 아닐까 한다.
직접 눈으로 하나하나 관찰하고 당시의 감정을 전달 받아보고 구석구석을 눈으로 살핀다는 즐거움과 감동은 체험에 의해서 나온다고 생각을 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 ?'는 질문을 받으면 늘 답하는 말이 '여행입니다'라고 하는데, 그래서 블로그 이름에도 여행이라는 표현을 넣고 있다.
여행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을 할 정도로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다.
참 많이도 다녔다. 한국의 구석구석을 다니고 해외 배낭여행도 다니면서 많은 만남들을 가지면서 나는 성장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만남이라는 표현은 대게 사람들과의 만남만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만남이 꼭 사람만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만남은 꼭 살아있는 생명체에게만 국한하기에는 그 단어가 아깝다는 생각도 한다.
그래서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중에 내가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면 모두 만남이지 않을까...
때로는 사람이기도 하고, 동물이기도 하고, 건물이기도 하고, 제품이기도 하고, 자연이기도 한... 그러한 만남들... 
나의 생각을 자극해 주기도 하고 깨달음을 주기도 하는 만남들은 나의 스승이 되어 왔다.

각설하고 책을 읽으며 나는 지나온 탐방을 되새기기도 했으며, 참 많이 돌아다녔다고 생각을 했지만 아직도 모르는 곳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탐방들도 있었다.
이 책은 2부로 나뉘는데, 1부는 사람의 자취를 따라 떠나는 탐방이고, 2부는 역사의 흔적을 따라 떠나는 탐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 12개의 탐방이 나오는 데, 내가 이전에 탐방이든 그냥 여행이든 가본 곳들은 6군데 였다. (퇴계의 도산서원, 강진의 다산초당과 백련사, 허균과 허난설헌이 있던곳, 강화도, 강릉, 서울성곽)
되새기며 그 당시를 떠올려 보는 즐거움 내 머리속에 남아 있던 영상을 떠올리는 즐거움, 그리고 새로운 곳을 탐방하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가보지 못한 곳을 읽을때는 뭔가 아쉬운 생각들이 드는것이 이것을 글로만 읽게 되니 감흥이 떨어지는 느낌을 가졌다고나 할까..
그래서 올해 2군데 정도는 가 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프롤로그에서 인문학 부흥의 목적이 나와 있었는데, 그 표현들이 진정 오늘에 더욱 절실함을 느끼게 한다.
'노인(路人)'이라는 옛말이 있다. 그야말로 나와 관계없이 무심코 길 위를 스쳐지나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노인'은 옛말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말이다. '노인'은 지금 더 많이 존재할지 모른다. 바쁘고 쪼들린 일상생활, 그 속에서 일상화된 무관심과 무감동은 현대판 '노인'을 양산하고 있다.  4
'길 위의 인문학'은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 과거와 현재와의 교감을 활성화해, '노인(路人)'을 해방시키고 그들 사이를 소통시켜주는 신선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길 위의 인문학'은 내부로부터의 위기를 해소하려는 시도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5

이 표현들처럼 우리는 변화되는 현실의 속도에 맞춰가려다 보니 참 바쁘다. 
빌게이츠는 '생각의 속도'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속도를 강조하기도 하고, 앨빈토플러 역시도 '부의 미래'에서 속도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지난 몇 백년동안의 변화의 양보다, 최근 10년의 변화의 양이 훨씬 크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해보지 않기에 마냥 변화의 속도에 따라가느라 똥줄이 타고 있는게 지금의 현실이다.
사람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없다는 표현처럼 우리가 흐름에 따라만 가다보니 실제 중요한 사유의 과정은 자신의 삶에서 빠져 버리고 있는 현실이다.
좋은 소식을 대중매체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좋은 소식이라고 하면 스포츠 선수들의 활약상이나 될까...
우리는 너무 외부의 것들에 치우쳐 따라만 가는 어찌보면 노예가 되어 가는 지도 모른다.
자신의 내면의 소리는 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외부의 환경때문에 그것을 듣지 못할 때가 많다. 내면의 소리를 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한가지 방법은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우리는 여유가 너무 없는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의 '나'도 여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고...
그래서 2010년은 인문학의 부흥을 가지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정진홍씨는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의 서두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는데, 참 오래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다.
'인문학은 언제나 있어 왔다. 근래 인문학이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는데, 이것이 단순히 유행만을 가지고 사라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걱정을 한다.'는 내용이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이런 의미를 가지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우리에게 인문학은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고 교감하기에 가장 필요한 부분이다. 이것이 한때의 유행으로 간다면 우리는 정말 속도에 미쳐가는 삶을,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

이처럼 인문학은 계속 우리의 삶에서 지표가 되어 주는 역할을 할 것인다.
인문학을 바라보는 시선을, 인문학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책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책중의 하나가 아닐까..!!


답사한 사람들은 '잘 몰랐던 선인들의 인간적 면모를 알게 되어 더욱 재미있고 유일하다'거나, '한 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돌아온 느낌', '살아 숨 쉬는 교육', '드라마보다 더 생생한 우리 조상의 문화유산 현장을 확인하는 자리'라고 했다. 
인문학을 통해 대중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삶의 '재미와 유익'으로 요약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감동과 느낌이 있을 때만이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성찰로 나아간다. '감동과 느낌'의 인문학은 일방적이고 교화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향적이며, 가르치고 배우는 자가 서로 소통하는 친화적인 인문학이 되어야 가능하다.
인문학은 문학·역사·철학을 중심으로 인간의 감성과 이성의 본질을 탐구하거나, 그로부터 이뤄진 인간세계를 분석해 미래의 보다 나은로운 삶을 추구함으로써 현재의 인간과 세계에 정신적인 풍요와 여유로움을 제공하는 학문 분야이다.  7
대중들은 좀 더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피부에 와 닿는 인문학을 요구한다.  8

인문학은 인간을 탐구대상으로 한다. 그러기에 도덕적이고 철학적이며 종교적이고, 미학적이며 역사적인 자기 성찰의 경험으로 표출된다.  17
<자성록>은 퇴계 선생의 덕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저술이다. 많은 편지 가운데 자신의 사상적 원숙기라고 할 수 있는 58세 때 22통을 직접 엮은 <자성록>은 ... 내용상으로는 유교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담고 있으면서, 유교의 공부론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24
퇴계의 학문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기본으로 한다. '자신을 위한 공부'를 중심 내용으로 인격함양을 위한 수양과 더불어 사회생활을 위한 올바른 도리와 질서를 탐구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강조한다. 자기의 재능과 본분을 알고 그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자기 공부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함께 나누는 공부이다. 이것은 유교의 전통인 수기치인의 학문이다.  25
'사람은 사람답기 위해서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
'어떻게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가?' 등 공부를 향한 반성과 열정이 오롯이 담겨 있다.  26
학문(學問)은 결국 '배우고 묻는 행위' 자체라고 할 수 있다.  27
편지가 사무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녹아 있는 진솔한 것이라면, 그 실천까지도 담보해야 한다는 것이 퇴계의 생각이다.  29
책을 읽되 마음을 괴롭힐 정도로는 하지 마세요. 많이 읽는 것은 아주 좋지 않습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그 맛을 즐기고, 이치를 탐구하는 것도 일상생활의 평이하고 명백한 곳에서 간파해 숙달해야 합니다. 이미 아는것을 바탕으로 마음껏 음미하게요. 그리하여 염두에 두는 것도 아니요, 염두에 두지 않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꾸준히 계속하면 저절로 자세히 이해하게 되어 얻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너무 집착하거나 마음이 거기에 얽매여 빠른 효과를 거우려고 해서는 더욱 안 됩니다.  34
퇴계는 일상생활에서 마음의 병통이 일어나는 것은 억지로 서둘러서 무엇인가를 빨리 이루려고 하는 행위 때문에 병통이 일어난다는 
것이라 했다.  36
<맹자>에 나오는 '알묘조장(揠苗助長)' - 식물은 적절한 환경 조건에 따라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 그에 맞게 자란다. 싹이 자라서 알곡으로 익을 때까지 자라나는 데는 점진적인 시간이 요구된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이 얼마나 지혜롭지 못하고 어리석은지, 어쩌면 우리의삶은 어리석음의 바다와도 같다.
21세기 현재에도 이런 일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속성교육, 조기교육, 모든 게 빨리빨리 공부이다. 게다가 선행학습에 이르기까지두가 알묘조장이다. 인간을 마주하고 있는 건, 다양한 스펙트럼의 스트레스성 질병이다. 무엇이 그리 급한가? 물론 빨리해야 할 일도 있다. 그것은 그 상황에 따라 적절히 하면 도니다. 그런데 천천히 해야 할 일을 빨리하면 남는 것은 생명력의 상실일 뿐이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빨리 자라지 않는다고 사지를 당겨서 늘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 현대인은 바쁘다는 핑계로 상당수가 알묘조장의삶을 살고 있다.  38
공부에서 마음의 변, 즉 일상생황에서 스트레스를 없애는 방법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휴식과 여가를 즐기며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함양은 쉽게 얘기하면 '마음으로 무젖게 해 기르는 일'이고  체찰은 '몸으로 살피는 일'이다.  39

지리산은 두류산, 방장산, 방호산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다. 
'두류산(頭流山)'은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에서 뻗어 내려 웅거한 산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방장산(方丈山)'은 신선이 사는 산으로, 중국 전설 속 삼신산의 하나이다. 방장산은 방호산(方壺山)이라고도 한다.  51
남명은 덕산에 들어가 새집을 짖고 '산천재(山天齋)'라 했다. '산천'이라는 말은 <주역>에서 대축괘(大畜卦)에서 따온 것이다. 대축괘는 산(山)과 천(天)이 합한 괘로, 괘사(卦辭)에 "강건하고 독실하고 휘광(輝光)해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고 했다.
남명이 덕산으로 들어간 궁극적인 이유는 자신을 더 강건하고 독실하고 빛나게 갈고닦아 날마나 그 덕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 였던 것이다.  62
덕천서원은 남명이 별세한 뒤에 후인들이 그 학덕을 기리기 위해세운 학교이다.
남명을 모신 서원의 이름을 경의당이라고 한 것은 후인들이 남명 학문의 핵심을 경의로 드러내기 위해 붙인 것이다.
남명학은 한마디로 경의(敬義)로 일컬어 졌다.
경(敬)이란, 공경(恭敬) 또는 외경(畏敬)이다. 몸과 마음가짐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엄숙하게 하는 것, 마음이 다른데로 흩어지지 않게 한결같이 유지해 나가는 것, 마음을 거두어들여 달아나지 않게 하는 것, 마음을 항상 깨어 있게 하는 것이다.  71
경(敬)은 공경의 차원을 넘어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의(義)는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그 일을 처리하는 기준이다. 경은 내면의 마음을 긴장상태로 유지하는 것이고, 의는 밖으로 일을 처리 할 때의 척도이다. 
의는 박으로 일을 조처하는 것이기 때문에 늘 실천적인 것과 연계된다. 
개인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에 모두 행위의 준거가 될 수 있는 것이 의이다.  72

추사는 "내가 '오만한 천재'였다는 그 시각은 하나만 알고 열을 모르는 유치한 시각일세. 천재라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미안하지만 나는 천재가 아닐세. 흔히 추사를 명필이라 말하고, 추사의 글씨를 천재의 글씨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은 실없고 허랑한 소리네. 이 세상에는 하늘에서 타고난 천재는 없네. 내 평생, 붓글씨를 쓰기 위해 먹을 갈고 또 간 까닭으로 닳아져서 밑구멍이 뚫어진 벼루가 몇 번째인 줄 아는가. 추사라는 한 남자가 평생 글씨를 써오면서, 닳아져 못 쓰게 되어 버린 몽당붓이 몇 백 자루나 되는 줄 아는가? 천재는 없고 신을 향한 도전이 있을 뿐이네. 사람은 남자이건 여자이건 내 손으로 세사을 바꾸어놓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가져야 하는 법일세.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물의 흐름, 바람의 흐름을 바꾼다는 것이고, 세상르 비추는 햇살의 색깔을 바꾼하는 것이네. 검게 보이던 세상을 밝고 희게 보이게 한다는 것이고, 무지갯살을 일어나게 하여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는 것이네. 그 짓을 나는 경전 읽기와 글씨 쓰기로 해온 것이네."  86
"사람들의 광기를 아는가. 사람들의 작은 광기는 사냥을 하고, 큰 광기는 전쟁을 일으키네... 모든 스포츠는 광기 어린 경기들일세. 그것의 역사는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벌어진 죄수들의 검투, 노예 출신 장사와 황소와의 경기에서부터 시작되었네... 내가 살았던 조선조 후기의 그 정국은 광기 어린 탄핵 열풍으로 들끓고 있었네..."  92
"...'추사체'라는 것은 일부러 남과 달리 독특하게, 기괴하고 고졸하게 쓴 글씨라는 것입니까?"  96
"오천 권 이상의 책을 읽음으로써 내 머릿속에 형성된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 하늘과 땅으로부터 얻은 영삼을 가지고, 벼루 열개를 구멍내고 천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드는 미치광이같이 꾸준하게 연습을 한 사람만이 먹물 속에 숨어 있는 글씨를 꺼내놓을 수 있는 법이네. 말하자면, 머리에 들어간 수많은 책 기운이 글씨로 나타난 것이야."  97
"요즘 사람들이 자식 교육시키는 데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십니까?"
"내가 쓴 '인재설(人才說)'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쓴 바 있네. '모든 사람이 아이였을 적에는 대개 총명한데, 이름을 기록할 줄 알만 하면 아비와 스승이 '경전의 주석'과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들을 위해 모아놓은 어려운 어구풀이'들만을 읽힘으로써 그 아이를 미혹시키는 바람에, 종횡무진하고 끝없이 광대한 고인들의 글을 읽지 못하고 혼탁한 흙먼지를 퍼먹음으로써 다시는 그 머리가 맑아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넓디 넓은 세상 속에서, 우리 후세들의 영혼이 너무 가볍게 단세포화 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네."  103
"왜 추사에 집착하는가."
"추사와 그의 시대를 읽어 보면, 아주 슬프고 절망적인 현실과 광기 어린 삶을 만나게 됩니다. 청나라로부터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개혁하려는 북학파인 추사를, 지긋지긋하게 탄핵하고 공격해 죽이려 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이 땅의 어떤 거대한 보수집단하고 같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저는 '추사와 그의 시대 이야기'를 통해 그 반복되는 슬픈 일을 나 스스로 각성하고 경계하고 싶었습니다."  104

다산이 말하는 4가지 의로움이란 담백한 생각, 장중한 외모, 과묵한 말, 무거운 몸가짐을 가리킨다.
'생각은 담백해야 한다. 담백하지 않음이 있거든 서둘러 이를 맑게 해야 한다. 외모는 장중해야 한다. 장중하지 않음이 있거든 빨리 단속해야 한다. 말은 과묵해야 한다. 과묵하지 않음이 있어면 거둘러 멈춰야 한다. 동작은 무거워야 한다. 무겁지 않음이 있으면 재빨리 더디게 해야 한다. 이에 그 방에 이름을 붙여 사의재라 했다. 마땅하다(宜)는 것은 의롭다(義)는 뜻이다. 의로움으로 통제한다는 의미다. .. 스스로 방성하기를 바란 것이다.' -사의재기(四宜齎記)  108
내가 산석(황상의 아명)에게 문사 공부할 것을 권했다. 산석은 머뭇머뭇 하더니 부끄러운 빛으로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둔한 것이요, 둘째는 막힌것이며, 셋째는 답답한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배우는 사람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 있는데,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하면 그 폐단이 소홀한 데 있다. 둘째로 글짓기에 날래면 그 폐단은 들뜨는 데 있지.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그 폐단은 거친 데 있다. 대저 둔한데도 천착하는 사람은 그 구멍이 넓어지고, 막혔다가 뚫리게 되면 그 흐름이 성대해지며, 답답한데도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이게 도니다. 천착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뚫는 것은? 부지런히 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네가 어떻게 부지런히 해야 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109

허난설헌의 <곡자(哭子)> 
지난해에 귀여운 딸을 잃었더니 
이번 해엔 사랑하는 아들마저 잃었네.
가슴 메어지도다, 광릉의 흙이여
작은 무덤을 나란히 마주 세웠네.
......
응당 언니 아우의 혼들이 알아
밤마다 서로 손잡고 놀아라.  158
허난설헌은 '삼한(三恨)', 곧 '세 가지 한탄'을 노래했다.
첫째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남편과 금실이 좋지 못한 것이라 한다. 첫째는 바로 그녀가 시재를 널리 뽐낼 수 없는 좁은 풍토를 안타까워한 것이고, 둘째는 남성으로 태어나 마음껏 삶을 노래하지 못한 것을 뜻하는 것이다. 셋째는 그녀의 남편이 나이가 들어가는데 더욱 방탕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음을 말한다.  159
그녀는 많은 한과 원망을 가슴 가득히 안고, 스물 일곱의 나이에 죽었다.  160

1636년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병자호란은 17세기 초, 동아시아의 역사적 전환기에 우리의 대응이 적절치 못했기 때문에 초래된 국난이었다. 사람들은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을 떠올린다.  212
국난(國難)의 실상과 고통의 전모,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인물들의 행적을 살펴봄으로써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는 거울로 삼고자 한다.  213
병자호란은 불과 2개월여의 짧은 전쟁이었지만 그것이 남긴 정신적 충격은 임진왜란보다 더 컸다.
조선은 과연 이 전쟁을 피할 수 없었는가?
조선의 관인들이 보여준 태도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척화 - 주화의 논쟁만 뜨거웠지 중앙에서 지방으로 이어지는 통신 체계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224
청군의 침략이 시작되었을 때 고의 지휘관들이 보여주었던 태도 역시 심각했다.
도원수 김자점은 청군의 침입 상황을 회피하고 도주했다. 때문에 인조와 도성 백성들은 피난할 시간적 여유조차 가질 수 없었다.
검찰사 김경징의 직우 유기는 '천혜의 요새'라는 것만 믿고 청군의 상륙 작전에 대비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조선 조정은 병자호란에서 별다른 교훈을 얻지 못한 듯하다.
수많은 생령(生靈)을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은 별다른 처벌조차 받지 않고 인조 말년에 영의정까지 올랐다. 척화 - 주화 논쟁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란만 가열되었을 뿐 전쟁을 초래한 원인에 대한 냉철한 반추는 이뤄지지 않았다. 국가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고, 고위 공직자들이 책임을 방기했음에도 그에 대한 교정과 반성이 제대로 이워지지 않았다. 그에 따른 피해는 온전히 하층 백성들에게 전가되었던 것은 병자호란에서 무엇보다 되새겨 봐야 할 교훈이 아닐 수 없다.  225
변자호란을 통해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정보 파악의 태만과 실패', '공직자들의 책임 방기와 단죄 결여'를 우선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보다 근본적으로 돌아봐야 할 교훈은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한반도의 약체성'을 극복하는 것이다. 일정한 수준의 힘과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 '외교'란 결국 허망한 것이다.  227

초당순두부
                              이홍섭

순두부 같은 밤이 온다.
모질게 마음 먹어도
나는 늘 초당 바닷가에 서 있다.

친구들은 모두 서울로 떠나고
바다 소나무에 기대어
꾸역꾸역 토하던 청춘의 여름밤

푸른 혀로도
끝내 닿을 수 없었던 그 많은 눈보라

모두부 같은 마음도, 모두부를 자르는 마음도
다 부질없다 부질없다고 되뇌는
서울의 밤

멀리서, 새벽길을 더듬으며
순두부 끓는 냄새가 온다.      238



길을 길이라 말하면 늘 그러한, 꼭 같은 길이 아니요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늘 그러한, 꼭 같은 이름이 아니로다.

이름이 없는 것, 그것은 하늘과 딸이 처음 열리는 상황이요

이름이 있는 것, 그것은 모든 것의 바탕이라네.

늘 하고자 함이 없으며, 그 묘함을 보고

늘 하고자 함이 있으면, 그 한계를 보네.

이 둘은 근원적으로 같은 것

나와서 이름을 달리했을 뿐이라네.

같은 것을 일러 가물거린다고 하고

가물거리고 또 가물거리는것, 

그건, 모든 묘함이 나오는 문이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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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저자인 김재기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가 여행서적을 썼다는 것도 알았다.
읽어야지 하다가 이제서야 읽었다.
철학과 교수인 그는 여러 철학서들을 썼었고... 오랜기간 여러나라를 다니며 그가 보고 느끼고 깨달은 것들에서 여행관련 내용을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책이었다.

재미있게 즐겁게 생각도 해가며 읽었다.
좋은 시간이었다.

여행..그것은 자신에게 자유를 그러면서도  인생을, 그리고 경험과 가치를, 본질을 깨닫게 해준다.
내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봤을때 그랬다..때론 설레게도 하였고, 즐겁게, 그리고 함께라는 단어도 접하게도 하였다.
또한 행복하게 가슴아프게 미어지는, 그러면서도 감탄을하고 동질감을 느낄 수 있게도 하였다.
난 그래서 여행을 좋아한다. 
저자는 내가 느낀 그리고 내가 단편적인 생각만을 하던것들에 대해 기술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당신도 여행의 숲을 여행해 보기를 바란다.


머리글 여행의 숲을 여행하는 나침반
사람은 누구나 어떤 원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정당화해야 하고,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히면 삶을 되돌아봐야 하며, 어떤 식으로든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9
여행길에서 느끼고 얻었던 것들, 한마디로 나의 사유를 통해 재발견된 '여행' 그 자체를 여행 좋아하는 익명의 동호인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다.  
이 책이 '여행'이라는 더 큰 숲 전체를 내려다 보게 해주는 헬리콥터가 되었으면 좋겠다.
필로소피(Philosophy), 즉 '철학'이라는 말이 그리스어의 '사랑(Philos) + 지혜(Sophia)'에서 왔다는 건 고등학교 윤리교과서에도 나오는 얘기다. 
그러니까 철학이란 '지혜사랑'인 셈인데, 어찌 보면 여행 또한 '길사랑'이 아닌가?
그래서 난 '필로소피'라는 말에 빗대어 그리스어로 '사랑(Philos) + 길(Hodos)' 즉 '필로도스(Philodos)' 라는 말도 만들어 보았다.  10


1부 꿈꾸는 자 여행에 매혹되다.

사람들은 왜 여행을 꿈꾸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현실의 모든 것을 뛰어넘고 자기 존재를 던져가면서까지 길고 힘든 여행을 하려는 것일까? 시험점수와 학벌, 각종 스펙과 연봉, 재테크와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배기량이 삶의 모든 가치를 결정하는 현실 속에서, 여행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어쩌면 진정한 여행자란 다른 무엇보다도 꿈을 꾸는 사람일지 모르겠다.
꿈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순응하는 꿈과 일탈하는 꿈.  18
여행이란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지도 못하고 삶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 주지도 못하지만, 제대로만 한다면 우린 여행하는 동안 새로운 영감과 따뜻한 위안과 예리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19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꿈을 이룸과 동시에 꿈에서 깨어난다. 27
환상만 가지고 좋은 여행을 하기는 힘들지만, 환상 엇는 여행은 이미 우리를 설레고 달뜨게 하는 마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30

여행지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첫 번째 요소가 '사람'이라는 건 동서고금의 진실이요.  32
누구나 자기 주관에 따랄 아무 얘기든 자유롭게 할 수 가 있으나, 여행을 진정 좋아하고 여행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여행지에 대해 얘기할 때 적어도 신중해야 한다.  33
우리는 실체를 알기 어려운 다른 삶의 진실을 손끝으로 일부분이라도 만져보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게 아닐가?
여행자의 숙명적인 한계는 현지의 삶과 완전히 동화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래서 여행자는 언제나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떠도는 불안한 나그네다.  35


2부 나는 준비한다, 고로 나는 떠난다.

좋은 여행과 여행준비
어떤 준비를 얼마만큼 하고 가는게 좋으냐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나 답은 있을 수 없다.  43

호모 프레파란스
인간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을 의식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무네 미래를 향해 자신의 현재를 내던질 수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실존에는 시간성이 침투해 있다.
미래란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즉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을 지금 존재하는 현실 속에 끌어들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52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본래 '호모 프레파란스(Homo praeparans(준비하는 인간)' 이기도 하다.  53
여행은 세 번 다녀온다는 말이 있다. 떠나기 전에 준비하면서 한 번, 실제로 여행 가서 다시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돌아온 뒤에 지난 여행을 추억하면서 다시 한 번.  55
여행가 프레야 스타크는 '자신을 해방시키고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을 자신에게 친숙한 양식으로 바꾸려 하지 말고 이쓴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때야 비로소 진짜ㅏ 여행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 여행과 관광의 차이다.'  58
계획과 준비가 인간 정신에 내재한 본성이기도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여행지와 그곳의 사람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자세가 되어 있어야함 여행의 진정한 가치와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준비를 하는 것이다. 
여행자로서 좋은 여행은 우리 자신을 성장시키고 삶의 태도를 변화시킨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60

여행(Travel)에 꼭 필요한 물리적 자원은 시간(time), 돈(money) 그리고 체력(stamina)인데, 여행이란 이 세가지 변수에 따라 복합적으로 결정되는 함수라는 뜻이다.(여행의 하드웨어)  61
'최소자원의 결정 법칙' - 세 가지 자원 중에서 여행자가 가장 적게 갖고 있는 자원, 즉 최소자원이 전체 여행의 틀을 결정한다는 법칙이다.  64

여행의 소프트웨어 1 : 정보
여행의 질과 품격을 결정하는 소프트웨어도 있다. 
정보(information), 언어(Language) 그리고 태도(attitude)다.  65

색칠된 부분이 '좋은 여행'이 되지 않을까..  66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소프트웨어는 단연 정보다.  71
여행자들이 정보에 기대고 정보를 필요로 하는 것은 거의 숙명적이다. 다만 우리는 정보의 늪에 빠져 익사하거나 정작 중요한 걸 놓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77

여행의 소프트웨어 2 : 언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오늘날 영어는 세계인의 가장 기본적인 공통의 의사소통수단이다.
우리가 영어를 배우는 건 미국이나 영국 사람처럼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인과 가장 손쉽게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이다.
이미 알고 있는 영어 표현들을 의사소통에 적절히 이용할 수 있도록 지속적 훈련을 받지 못하는 게 더 큰 문제이다.  84
우리는 여행자다. 여행하면서 생존에 필요한 만큼, 또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과 원활하게 교류하고 친분을 맺을 만큼, 또 현지의 사정이나 문화를 조금이라도 배우고 이해할 만큼만 영어를 하면 되는 것이다.  86
여행을 사랑한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들을 좀 더 이해하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도전해 볼 일이다.  87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 그건 여행자에게 꼭 필요한 소프트웨어이며, 제2의 여권이고 제2의 지갑이다.  89
다시금 강조하고 싶지만, '외국어를 못해도 여행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여행만 하면 되니까 '외국어 같은 건 신경 안 써도 된다'는 돈리가 성립하는 건 아니다.  90

여행의 소프트웨어 3 : 태도
진정으로 좋은 여행을 하고 싶다면, 먼저 너 스스로 좋은 여행자가 되어라.  91
모든 외적 조건들은 여행의 질과 품격을 결정하는데 결국 부차적인 변수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변수는? 바로 자신이다.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명언 '바다를 건너간다 해도, 기후는 바뀌지만 영혼이 바뀌는 건 아니다.'  93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이론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삶의 목표는 행복인데, 그 행복을 얻으려면 무엇보다도 인간의 본성인 지혜를 잘 발휘할 수 있도록 훈련을 쌓아야 하고, 또 그러한 지혜가 반복도니 실천을 통해 인격, 즉 덕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94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했던 것은 인간 존재 자체, 즉 삶 자체의 객관적으로 좋은 상태였다.)  여행정보를 얻는 데에는 몇 주면 충분하고, 경비를 마련하는 데에는 몇 달이나 몇 년이면 충분하다. 또 외국어를 배우는 데에도 비슷한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여행에 필요한 자세, 태도와 품성을 갖추는 데에는 평새을 투자해도 부족할지 모른다. 단지 여행을 좋아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여행의 의미와 가치를 곰곰이 되새겨보고 자신의 여행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고 싶은 사람이라면, 우선 자기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려는 노력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101-102
엘리자베스 드루(Elizabeth Drew)는 '마음을 넓히지 않고 여행만 너무 많이 해봐야 수다만 늘어날 뿐이다.'  102


3부 여행 프로젝트
여행을 맛있는 요리에 비유해 본다면, 풀코스 여행 메뉴는 일단 그 외형만 놓고 볼 때, '어디로(where), 언제(when), 누구와(with whom), 왜(why), 어떻게(how), 얼마(how much)'라는 여섯 가지 코스로 구성된다.  105

어디로(where)
세계는 넓고 갈 곳은 많다. 어차피 한 번의 여행으로 그 모든 곳을 다 가볼 수 없는 바에야, 차근차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한두 군데씩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108
멋진, 아름다운, 웅장한 풍경을 보면서 얻게 되는 억스터시와 정신적 카타르시스는 다른 그 무엇으로도 대체하기 힘든 소중한 감동이다.  
일반적인 여행이 공간의 이동이라면, 역사에 대한 탐색은 시간의 이동이다.  110
여행지에서 우리는 때론 우리 자신의 과거를, 때론 미래를 보게 되며, 따라서 굳이 유적지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여행 그 자체가 어던 면에서는 역사 탐방이기도 하다.
여행이라는게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을 떠나 자신의 삶을 한 발짝 떨어져 돌아보는 것일진대, 우리가 여행지에서 겪게 되는 역사와의 조우를 애써 멀리할 필요는 없다.  111
배움도 그 형식과 내용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 그러나 모든 배움의 가장 중요한 바탕은 학습자 자신의 태도 변화와 인격적 성장이며, 이게 가능하려면 모범정답을 보여주는 식의 교육이 아니라 더 다양한 시련과 도전의 무대가 필요하다.  117
우리가 여행에서 배워야 할 진짜 알맹이는 낯설고 이질적인 세계를 체험하면서 인간과 삶과 세계에 대해 다시 한 번 깊게 성찰할 기회를 갖는 것.  118
여행지 선택에 순서 따위는 없다! 마음이 끌리는 곳, 필이 꽂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최우선의 목적지가 될 수 있다. 무심코 펼쳐든 한 권의 책 때문에 우연히 마주친 한 장의 사진 때문에, 먼저 여행을 다녀온 친구의 자랑 석인 조언 때문에, 우리는 어떤 곳을 용감하게 선택할 수 있다. 
다만 그 전에 눈을 크게 뜨고 지구촌을 좀 둘러보는게 좋을 것 같다.  120

언제(when)
거의 모든 여행고수들이 입을 모아 충고하는 불문율 중 하나가 '많이 보는 게 중요하지 않다.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여행하라.'이다.  122
많은 것을 희생하고 엄청난 결단을 내려야만, 또 상당히 전문적인 식견을 갖추고 훈련을 받아야만, 심지어는 무슨 도인(道人)의 풍모를 지녀야만 여행을 즐길 수 있다면, 그런 여행은 또 하나의 특권적 전문영역일 뿐이다.  130
하나의 '좋은 여행(the Good Travel)'이 있는게 아니고, '여러 종류의 더 나은 여행들(many kinds of better travels)'이 있을 뿐이다.  131

누구와(with whom)
우리네 삶에 부침과 굴곡이 있고 좋은 시절과 어려운 때가 있듯이, 여행도 마찬가지다.  133
동행(同行) - companion 은 라틴어 'con(함께) + pan(빵)'에서 나온 말이다.
한마디로 '빵을 함께 먹는 사람', 우리식으로 말하면 식구에 가까운 개념인 것이다.
여행은 그야말로 한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테스트해 볼 수 있는 종합검진센터다.  140

왜(why)
여행엔 미리 정해진 목적이라는 게 잘 어울리지 않는다. 목적이 정해진 여행이 있다면, 그건 여행이라기보다 일종의 변형된 비즈니스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  143
'여행을 위한 여행'은 21세기 개인여행자들의 꿈이다.
목적이 없는게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이며,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끊임엇이 변화하고 움직이고 자랄 뿐이다.  144
대화의 철학자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모든 여행은 여행자 자신도 모르는 비밀의 목적지를 갖고 있다.'  150

어떻게(how)
여행 스타일.
우리가 삶의 과정을 단축하고 건너뛰며 지혜로워질 수 없듯이, 여행자 또한 겪어보기도 전에 진정한 고수의 경지에 오를 수는 없는 것이다.  162
여행한다는 것은 길을 떠난다는 것이다. - 길사랑(Philodos)  164
여행은 '적은 투입(input)으로 많은 산출(output)을 얻는 게 목표'인 경제활동이 아니다.  
여행을 가도 우리의 삶은 지속되며, 살기 위해서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

얼마(how much)
우리의 삶은 '습관의 산물(product of habits)'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스타일이 생기고 패턴이 굳어지며, 여행지에서 반복되는 행동과 생각들이 어느샌가 자신의 여행을 지배하고 규정해 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무섭다. 
처음에는 합리적 계산에 다라 불가피하게 선택했던 것들이 나중에는 그냥, 절대적인 틀이 되어 자신을 가두게 되는 것이다.
돈 때문에 다른 중요한 것들은 늘 뒷전으로 밀리고, 결국 돈이 모든 걸 지배하는 여행이 되고 마는 것이다.  171
여행을 좋아하여 자주하는 살마들에게도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분명 흔하게 스쳐가는 일상의 시간이 아니다. 기회는 늘 오는 게 아니며, 흘러가는 시간 또한 모두 다 균질적이지는 않다는 말이다.  173
여행경비는 결국 여행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므로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팍팍 쓸 수도 있다.  177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게 있다면, 돈 때문에 너무 주눅 들거나 망설이지는 말자.
무조건 돈만 많이 쓴다고 좋은 여행을 할 수 없듯이, 무턱대고 돈만 아낀다고 해서 여행을 잘하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평범한 진실을 다시금 가슴에 새겨둘 필요가 있다.
'여행? 그거 얼마면 되겠니?'라 묻는다면...'그건 당신 꿈이 얼마짜리냐에 따라 다르죠.'  178


4부 여행, 일곱 빛깔 무지개
여행이란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무엇이 머릿속에 떠오르는가? 모든 계획과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여행이라는 강물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우리가 마주치는 것은 무엇인가? 여행을 하는 동안, 또 여행에서 돌아와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여행이 단순한 휴식이나 오락, 관광을 넘어서서 삶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자극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정으로 여행을 값지게 만들어 주고, 여행을 여행답게 만드는 '여행의 혼'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오랫동안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난문이었다.
답을 다 알고 있는 듯하면서도, 막상 깔끔하게 정리하려 들면 오히려 더욱 아리송하고 알쏭달쏭해지는 난제 말이다.
남들은 여행 몇 번만 하고 나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여행 전반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잘도 이야기하는데, 난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일수록 점점 확신도 없어지고 두려워졌다.  181
세상에 새로운 미지의 것들은 많지만, 사람들은 유난히 여행이갸기가 제공하는 '공간의 새로움'에 열광한다. 역사책은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역사에 열광하지 않는 것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현상이다.  183
여행은 뭔가를 얻기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뭔가를 버리기 위해서 하는 거라는 고상한 말슴도 있지만, 난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여행을 계속 할수록 갈증은 커지고 욕심만 늘어날 뿐. 그렇다고 매번 뭔가 대단한 걸 얻고 깨달아서 돌아오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185
나는 이제부터 '여행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물음에 도전해 볼까 한다.
여행의 일곱 가지 빛깔 '여행의 혼'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Adventure(모험)
굳이 틀별한 체험이나 도전이 아니더라도 여행은 이미 그 자체가 충분히 모험적이다. 
국어사전에서 모험을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하는 것, 또는 그 일'  188
위험은 대개 불확실성이나 새로움과 비례하고, 반대로 확실성이나 친숙함과는 반비례하게 마련이다.  189
여행에서 진자 필요한 모험정신은, 새로운 세상을 향해 자신을 활짝 여는 것이 아닐까 싶다.  191
여행 초기에는 바짝 긴장해서 교과서대로 행동하다가도 현지에서의 생활에 조금 익숙해지거나 시간이 지나 해이해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방심하여 '뭐 별일 없구만, 괜스레 호들갑을 떨고 난리들이야' 하고 기본안준수칙을 어기는 일이 종종 일어나는데, 사고는 바로 이럴 때 터지는 것이다.  194
매슬로의 유명한 '욕구5단계설(생리적욕구, 안전욕구, 사회적욕구, 존중욕구, 자아실현욕구로 나누고 아래 단계가 충족되어야 위 단계의 욕구가 생겨난다는 주장)'이 아니더라도 안전이 모든 인간, 모든 생명체의 기본욕구라는건 주지의 사실이다. 우린 그 어느 누구도 위험을 좋아하지 않으며, 위험 그 자체가 우리 행위의 목표가 될 수도 없다.  195
모릇 모든 새로움은 위험한 법이다. 새롭고 낯선 곳일수록, 즉 위험도가 증가할수록 여행이 가져다주는 짜릿함과 흥분 또한 커지기도 하며, 또 어떤 여행자들은 맛보기 힘든 금단의 열매를 따기 위해 위험한 걸 알면서도 무리를 하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고 우리가 그렇게 어렵사리 얻은 안정 속에 파묻힘에 따라, 친숙하고 편안한 주변의 모든 것들은 우리의영혼을 부패시키고 우리의 육신을 습관과 관행이라는 강철족쇄에 묶어버린다. 우리는 새로운 것이 두려운, 혁명과 변화가 두려운, 모험과 불확실성이 두려운 좀팽이들이 되어버리는데, 세상은 그걸 '성숙'이라고도 하고 '철들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늙어가고 그렇게 침몰하고 그렇게 소멸해 가는 게 아닐가?  196-197
변화가 없다는 건 발전과 성장이 없다는것이고,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에게 그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  197
헬렌 켈러는 '안전이란 일종의 미신이다. 안전 같은 건 본래 없으며, 삶이란 과감한 모험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200

Battle(전투)
여행을 즐기기에 앞서 우선 여행지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싸워야 하는것이다. 여행지에 가면 사소한 것 하나까지 우리를 가로막는 장해물이 되곤한다.  201
<여행자의 로망 백서> 에서는 '여행은 고향 땅에서는 거의 만날 수 없는 위기상황을 시시때때로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으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 몸과 마음을 짜낸다. 내가 가진 가이드북, 기차패스, 얼마간의 현금, 외국어실력, 남아 있는 체력과 같은 것이 그 게임을 수행할 카드가 된다. 아무도 맞설 수 없는 막강한 카드를 가지고 편안하게 게임을 이길 수도 잇다. 그러나 진짜 재미는 최소한의 카드를 가지고 간발의 차이로 문제를 해결하는 그 짜릿함에 있지 않을까?'  203
여행을 전투라고 부른 일차적 이유는 언제든 위기에 처할 수 있는 여행자들의 생존투쟁을 지적하기 위해서이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니다. 여행자들은 온갖 위험과 어려움에 맞서 싸우는 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여행자로 성장해 가는 동시에, 여행길에서 만나는 현지인들의 삶을 거울삼아 자신의 삶 또한 되돌아보게 된다.  205
여행이 전투라는게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제로섬게임'이라는 뜻은 아니다.  208
잊기 쉬운 게 있다. 여행자는 여행자일 뿐이라는 평범한 진실 말이다!! 여행자는 아무리 많은 지식과 정보와 경험과 배짱으로 무장하고 현지에 적응해도 결국 여행자일 뿐이다.  209
가능하면 바가지를 적게 쓰려고 애쓰는 것이 여행자들의 전투라면, 그런 여행자들로부터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 애쓰는 것 또한 장사꾼들의 전투이다.  210
싸움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싸우더라도 머릿속에서는 지나친 흥분을 자제시킬 수 있는 이성이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 
적절한 선엣 싸움을 마무리해야 한다. 싸움의 목표는 압도적 완승이 아니라 재발방지를 위한 적절한 수준의 경고와 약간의 손실보상에 있기 때문이다.  214

Communication(소통)
인류가 이룩한 문명의 모든 성과들은 치열한 경쟁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지속적인 협동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진정으로 고독을 즐기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신이거나 악마'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우리는 누군가에게 의존하거나 누군가와 교류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의조노가 상호교류의 출발점이 소통과 이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일방적 비판이나 찬양은 그 어느 쪽이든 소통과는 거리가 멀다. 소통하려면 내가 그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내 안으로 들어와야 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소통이 배제된 단순한 물리적 만남이 오해와 속임수, 차별과 증오, 심지어 살육과 약탈로 귀결된 사례는 무수하다.  216
가장 먼저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소통의 기술이나 방식이 아니라 소통해 보려는 마음과 자세다.  217
소통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인류애다. 모든 인류를 동등하게 존중하고 배려하는 인류애.
낯선 타자들과의 사심 없는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인류애.
우리느 왜 여행 중에 현지인들이나 다른 여행자들과 소통하려고 해를 써야 하는가?
첫째, 소통은 문자 그대로 감동(感動)을 준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감동 중의 감동은 역시 사람에게서 오는 것.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무어인(북아프리카에 사는 아랍계 이슬람교도들을 가리킨다.)의 속담.
둘째, 소통은 모든 만남의 완성이다.   218-219
여행지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교류를 하게 될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건 그야말로 우연과 가변성의 영역이며, 바로 거기서 여행의 진정한 경이로움이 나오는게 아닐까?  227

Discovery(발견)
꿈과 호기심이 여행을 낳는 산파라면, 새로운 '발견'과 체험을 통해 얻은 지식은 여행이 낳은 아이들이다.  228
공부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가 학습의욕과 동기라는 건 웬만한 학부모들도 다 아는 교육학의 상식이지만, 세계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의욕이 생길 리 없다.  229
우리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배우는 것은 단순한 실용적 목적 때문만이 아니다. 모드 ㄴ지식을 현찰로 환산하고 현금가치가 없는 지식은 다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발견이 가져다주는 소박한 즐거움을 외면하기 쉽지만, 우리가 여행을 통해서 발견하느 것들의 가치는 그런 식의 자잘한 계산을 훨씬 넘어서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발견의 성과는 우리의 지갑을 두툼하ㅔ 만들어주지는 못할지언정, 세상을 보고 듣는 우리의 눈과 귀를 더 날카롭게 벼려준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여행지를 돌아다니면서,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얻게 된 갖가지 지식의 단편들은 발로 뛰고 모으로 부딪치는 체험과 어우러져 삶의 씨줄과 날줄이 되며, 책상머리에서 주운 지식과는 달리 육화된 앎, 살아 숨쉬는 앎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앎이야말로 인류가 오랫동안 추구해 온 인문적 교양, 즉 휴머니티의 살아 있는 표본인지도 모른다.  231
어쩌면 단순히 지식만을 쌓는게 목적이라면 여행보다 도서고나을 찾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행은 오감의직접적 체험을 통해서 평소 모르던 것들에 대한 관심을 일깨울 뿐만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  244


Enlightenment(깨달음)
마크 트웨인은 '선입견, 편협함, 움루 안 개구리 근성을 없애는 데는 여행이 최고다. 그리고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점에서 여행이 꼭 필요하다. 평생을 지구상의 좁은 구석에 처박혀 살면서 인간과 사물에 대한 폭넓고 건전하며 관대한 견해를 가질 수는 없다.'  244
길을 가리키느 한자 '도(道)' 또한 본래는 '천천히 걸으며 생각한다'는 뜻이다. 
길 '도(道)'라는 글자는 머리를 나타내는 '수(首)'와 천천히 걷는 모양을 그린 '착(辵 = 辶)'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245
파울루 코엘류의 말처럼 '여행을 하게 되면 아주 실제적으로 다시 태어나느 것을 경험하게'되는 것이다.
마이클 크라이튼(쥐라기 공원등 많은 SF소설과 의학소설을 쓴 작가)은 '나는 종종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상기하기 위해 머나먼 세상으로 떠난다. 일상적인 환경, 친구들, 매일매일의 판에 박힌 생활, 음식이 가득한 냉장고, 옷으로 가득 찬 옷장을 벗어나면 생생한 경험의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 생생한 경험을 하고 나면 당신은 그런 경험을 하는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을 수밖에 없다.'  246
반복되는 훈련은 나의 무지를 조금씩 깨우쳤고, 결국 나느 간단하게 짐을 싸는 요령, 뭔가를 채우는 게 아니라 뭔가를 버리는 요령을 터득했다.  253
<그래도 나에겐 로맨틱>을 쓴 하정아는 여행은 '언젠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지금 바로 행복하게 사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  255

Freedom(자유)
자유의 본질이 무엇이든 간에,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건 인간성 안에 내재된 불멸의 경향이며, 모든 행복의 필수조건이다.  256
진정한 놀이는 자유를 요구한다.  
자유란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어느 것도 될 수 있는 일종의 무한가능성인 셈이다. 사물들의 본질은 미리 정해져 있다. 돌멩이의 본질, 나무의 본질, 물의 본질 등등.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정해져 있지 않다.  
텅 빈 무(無)의 상태,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게 바로 자유다. 그리고 이 텅 빈 상태는 무한한 가능성으로서 우리를 설레게 하지만, 동시에 끝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함과 모호함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기도 한다.  264-265
자유는 양날의 칼처럼 위험하다. 우린 누구나 자유롭고 싶지만, 자유를 위해서는 위험과 불확실성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하며 자유를 제대로 누리려면 그에 어울리는 자격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266
안정만을 추구하는 삶에 진정한 자유는 없다. 자유란 본래 '아직 결정되지 않은 불확실성'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안정을 원하면서도 자유를 잊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를 갈구하면서도 안정을 버리지 못하는 딜레마! 이게 바로 인간 삶의 최대 아이러니이지 모순이다.  267
난 여행이 무한한 자유를 가져다준다거나 여행만 가면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지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동화는 믿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 만큼의 자유를 실제로 누릴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그가 어떤 자유를 꿈꿀 수 있는가?'일지도 모른다. 여행은 실제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준다기보다는 평소 까맣게 잊고 지내던 자유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재고하게 만들어 준다.  269
많은 여행자들이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을 여행의 가장 큰 매력으로 손꼽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270

Grace(은총)
'세계여행'이라는 말을 중립적으로 놓고 보면 '전 세계 사람들이 전 세계로 여행 다닌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몇몇 잘사는 나라 사람들이 전 세계로 여행을 다닐 뿐 그 반대는 아니다.  285
여행윤리 - 나와 직접적으로는 아무 상관도 없고 내가 어떤 의무를 지고 있느 상대가 아니라 해도, 여행지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적인 배려의 마음을 가질 때, 그 여행은 '공정여행(Fair Travel)' 또는 '책임여행(Responsible Travel)'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여행을 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세는 우리가 혜택받은 소수의 사람들이라는 자각에서 온다.  286


5부 기록, 기억, 그리고 추억
인간이란 기억의 동물이며, 삶 또한 어차피 기억의 집적일 뿐이다. 나의 존재는 나의 기억이다.  295
기억이란 보존된 과거이므로, 기억이 있는 한 과거는 사라진 게 아니다.  297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가므로, 매 순간순간은 곧 과거가 되어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진다. 그렇다고 과거가 단순히 없어져서 무가 되는 건 아니다. 기억이 과거를 보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이 과거를 자동으로 보존해 주는 것도 아니고, 보존된 과거가 자동으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여행의 소중한 순간들, 그 값지고 멋진 시간을 보존하고 저장하려면, 또 그렇게 보존되고 저장된 기억들을 언제고 재생하여 향유하려면, 일정한 노력과 장치가 필요하다.  298
그건 바로 기록이다. 여행 중의 기록은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을 한다.
하나는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을 물질적인 그 무엇으로 바꿔서 좀더 선명하게 보존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시간이 지난 뒤에 우리의 기억을 불러내는 초인종의 역할이다.  299-300
잘 쓴 일기는 훗날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멋진 여행기로 재탄생하기도 하지만, 그럴 일이 없다 하더라도 내 일기는 이 세상에 단 한 권 밖에 없는 책이며 나는 그 책의 둘도 없는 독자가 되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303
여행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내가 쓴 일기를 다시 읽어보는 것 또한 특별한 경험이다. 빛바랜 일기장을 펼쳐들고 과거의 기록을 마주하느 순간 무의식 속에 묻혀 그 존재마저 상실되었던 기억들을 끄집어내게 된다.  304
어차피 삶이란 기억이다 기억이 사라지면 시간의 지층도 유실되고 우리의 삶 전체가 무(無)로 돌아가는 법. 그것이 두려워서 우리는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기념품을 사고 잡동사니들을 모으는 지도 모른다.  305

'더 나은 여행'을 위한 열 가지 팁
하나. 왜 떠나는지 생각하고 떠나라!
둘. 열심히 준비하되, 준비한 것에 얽매이지 마라!
셋. 조금만 더 투자하라!
넷. 가감하게 새로운 것을 시도하라!
다섯. 집은 잊어버리고 현지에 동화되도록 애써라!
여섯. 위험에 대비하고 늘 안전에 신경 써라!
일곱. 누구나 다니는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보라!
여덟. 눈과 귀와 마음을 열고 겸손해져라!
아홉. 늘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
열. 기록하고 정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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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 다시 인문학을 논하며
자신의 생각을 그려내고 기록하면서 삼의 고민들을 공유 - 인간의 고뇌는 지식과 지혜로 발전하였고, 긴 세월이 흐르면서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어 왔다.  유인촌   5

책을 열며 - 인문학 열전? 인문학 열정!
인문학이란 한가한 고담준론(高談峻論)이 아니라 내일의 삶을 개척하는 에너지원이자 상상력의 원천이라고, 인문학자들은 강조합니다.  10
인문학의 이해는 '성찰'과 '지식습득'이라는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다시말해 개인적 경험의 집적이 모두 인문적 내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삼아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전문성이 왜 일반인의 관심사여야 하는지를 알리고, 그 필연성과 필요성을 전달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표입니다.  13

우리 인문학의 길 - 김경동  김기현
바로 높은 층위에 있는 이념과 삶의 의미와 관련된 사고, 이것이 인문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굴곡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자기 삶의 의미를 알고, 삶을 포과적으로 이해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23
독서에 관해서도 우리 사회가 조금 더 깊이 성찰해야 할 측면이 있는것 같습니다.  27
오늘날은 학문의 통섭이 이루어지는 시대인 만큼, 사회과학자나 자연과학자도 인문학자드로가 함게 토론하고 담론을 생산하는 데에도 참여합니다만, 이런 움직임이 좀더 활발해지기를 바랍니다.  28
세계철학자대회는 5년마다 열리는 국제적인 행사로 100년의 전통이 있스니다.  31
(2008년 서울에서 세계철학자대회를 치름)
인문학은 그저 '있으면 좋은 것'이 아니라 생존의 필요조건인 공통의 가치관이자 문화이고, 품격 있는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랬을 때 대중에게 인문학은 하나의 바람이 아니라 저변으로서, 우리 사회 전체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리라 봅니다.  34
가정에서 책을 많이 읽자, 교양이 살아 있는 교육.  35
철학자들은 지식의 추구는 상황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도구적 효용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 자체가 숭고한 가치로서 인간을 규정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인식론>에서  36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상황에 반사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거쳐서 대응한다는 점이다.  37


새롭고 낯선 유혹, 통섭 - 최재천
통섭(通涉) - 통할 통(通) 자에, 건널 섭(涉) 
통합은 물리적으로 이질적인 것들을 그냥 한데 묶어놓은 것입니다.
융합은 하나 이상의 물질이 함께 녹아서 화학적으로 서로 합쳐지는 것을 말합니다.  47
통섭은 그냥 거기 섞여 있는 상태로, 녹아 있는 상태로 멈춘게 아니라 거기서부터 뭔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게 만들어지는, 번식하는, 생물학적인 어떤 합침을 의미한다는 거지요.
통섭은 그저 합쳐지는 데서 그치면 안 되고, 거기서 뭔가 새로운 것이 태어나야 합니다.  48
통섭이 일반인들에게도 필요한 이유는? - 온갖 사회문제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 인간 사회가 앞으로 풀어야 할 문제들은 어느 한 분야가 답을 낼 수 없다. 그래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문제를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50
생태학 강의실에 철학과 학생이 있으면, 그 학생이 도서관에서 미분 방정식을 한 달 공부하면 수업을 따라올 수 있나? 어림도 없다!!
국문과 학생을 물리학과 교실에 앉혀 놓고 양자역학 원서를 주면 한 쪽도 못 읽습니다.
이게 우리 교육의 현실입니다. 
실제로 미국 대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복잡한 수학 문제를 내주면, 그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고, 자기에게 부족한 부분이 뭐고, 그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채워서 따라가야 하는지를 알아요. 왜냐하면, 고등학교 때 공부하는 방법에 대한 기본기를 갖우고 대학에 들어왔기 때문이죠.  58
윌리엄 휴얼은 그냥 작은 지류들이 모여서 큰 강을 이룬다는 비유를 하면서 작은 분야의 이론들이 언젠가 한데 모여서 뭔가 큰 것을 만든다고 설명하였다.  60
'현재 산업국가들과 세계 경제를 한데 묶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연과학의 통합이다.' <통섭, 지식의 대통합>에서  65


미래의 대학, 학문의 미래 - 김광웅
행정학자는 행정 문제를 풀지 못하고, 교육학자는 교육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여러 학문이 서로 교류하면 문제의 정곡에 다가갈 수 있는데 담을 너무 높이 쌓아서 그게 안 된다는 거지요.  71
1945~2000년까지 미국의 GDP는 세 배나 늘었지만, GPI(Genuine Progress Index, 국민총생산(GNP)이나 국내총생산(GDP)의 개념에 시장가치로 나타낼 수 없는 경제 활동을 덧붙여 만든 경제지표. 시장가치로 나타낼 수 없는 가사노동, 육아등의 경제활동가치와 범죄, 환경오염, 자원 고갈 등의 비용등 모두 26개 요소의 비용과 평익을 포괄하는 개념이다.)는 그대로 였다는 겁니다. 더 잘살려고 경쟁한 결과가 그렇다면, 이제 어떡해야 하느냐. 자아실현이나 삶의 질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만큼 남의 삶의 질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만큼 남의 살이나 생각도 존중해야지요.  78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자 달랑베르는 학문을 분류하면서 인간의 이해에는 기억의 축, 상상의 축, 이성의 축이라는 세 가지 축이 있다고 함.
기억의 축을 대표하는 학문이 역사이고, 이성의 축을 대표하는 학문이 철학이라면, 상상의 축을 대표하는 학문이 바로 시학(詩學)이라고 했어요. 다시말해 창조적인 상상력을 말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시, 소설, 디자인, 음악과 같은 것들입니다.
제가 과학자들에게 IT(Information Technology), BT(Biology Technology), NT(Nano Technology)는 잘 아시지만, RT가 뭔지 아시느냐고 물어보면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RT는 관계기술입니다. Relations Technology. 디지그노는 분산된 것을 융합해서 더큰 부가가치, 더 역동적인 힘을 끌어내어 아름답게 구미는 지혜와 심미안을 말합니다.  82
흥어시 입어예 성어락(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 사람은 시로써 흥하고, 예로 서고, 락으로 이룬다. 즉, 사람은 시로써 일어나고, 논리와 실증적인 지식을 전수받고 공부함으로써 시작하고, 예로써 서면 도덕적 인간으로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사회에 참여하며, 락으로써 논리 너머의 미학적 감수성을 통해 완성되는 존재이다.  83
미래 리더십은 '너와 내가 함께하는' 리더십이지, 내가 앞서가고 너는 무조건 따라오라는 식의 리더 - 팔로워(Leader-follower)의 리더십 개념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태평성대에는 태상부지유지, 임금은 있는 듯 없는듯 아랫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지일 좋은 거거든요. 
물론 리더는 열심히 노력하고, 융합의 관점에서 많은 것을 알고, 측히 비전을 제시해야 하기에 과학기술이 얼마나 발달하고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94
뭐든 사랑할 줄 알아야 지도자지, 내것만 챙기는 사람은 리더가 될 수 없어요.  95
어떤 변화가 시미사회에 요구되는 걸까요?
우선, 자신을 안다는게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남에게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남을 이해하고 설득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 쌓인다고 해서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소 실천해서 남의 경험을 얻어서 깨우치면 내가 얼마든지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분법적인 사고를 넘어서고, 합리적(reasonable) 사고만이 아니라, 서로 통용될 수 있고, 관용하고,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reasonable) 자세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98

넘치는 교육 열정, 아이의 행복은? - 문용린

우리 나라 말에 아주 좋은 표현이 있는데,

삶과 앏의 복합어 였습니다. 이것이 진짜교육의 의미였단 말이죠.  105

삶의 지혜가 담긴 가르침을 통해 앎과 삶이 결합한 교육. 그래서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하면 사람이 제대로 되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잖아요.  106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학덕을 쌓은 것이 훗날 출세와 성공으로 이어져서 바람직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이 그 사람 개인의 행복도 되고, 그 사람이 사는 사회에도 공헌 할 수 있는 능력(competency)이 되어야 합니다.  107

동양에서는 교육이 하느님의 사업이 아니라 패밀리 비즈니스였지만, 서양에서는 일직부터 교욱이 퍼블릭 비즈니스였던 겁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유일신이 있기에 학교 교육에는 인성교육이나 도덕교육 같은 것이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에서 하니까요.

그러나 동양의 유교적 사고로는 부모가 자기 자식을 교육해야 하거든요. 국가는 평가제도만 운용해서 시럼을 보게 하고 똑똑한 인재를 뽑아서 관리로 임용만 하면 된다는 식이죠. 우리나라 전통적인 과거제도가 바로 그런 개념입니다.  

그러나 교육의 서양화가 되면서 유교적인 관습도 남아있다보니 헷갈리게 되는것.  110

우리나라에서는 교육이 너무 '중요하다'는 겁니다. 왜 중요하냐하면, 우리나라에서는 교육으로 당대에 신분 변환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11

한국, 대만, 일본의 부모는 자식 교육에 대해 '공부는 누구나 하면 된다'는 생각이 철저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미국 부모는 '공부는 아무나 해서 되는게 아니라 소질과 적성이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113

'다중지능이론' - 한마디로 요약하면 교육은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끄집어 내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학교라는 집중적인 과정에서는 학생의 내면에 숨이 있는 그 학생만의 소질, 적성, 능력을 끄집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116

(사진은 클릭하면 원본크기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말에 너무 흔들리지 말고 내 아이에 대해서는 나만의 철학을 갖자는 것입니다.  121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모두 그 자체로 공부입니다.' <부모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쓴소리>중에서  123


인문학적 상상을 통한 종교문화 읽기 - 정진홍
자기 종교만 절대화하기보다는 인간은 왜 종교를 가지고 있는가, 종교적인 삶이란 무엇인가를 조금 거리를 두고 이해햐려는 자세가 필요한 거죠.  129
종교를 객관화해서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문화라면 우선 다양성을 전제할 수 있겠죠. 시간과 공간에 따라 고유한 특성을 가지는 현상이라는 점, 인간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검도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종교에는 초월적인 차원이라든가, 인간의 지성이 도달할 수 없는 신비와 같은 전제가  있게 때문에 그 전제에 공감하지 않으면 종교 현상을 이해할 도리가 없습니다.  129
해답은 끊임없이 열려 있는 해답이어야 합니다. 왜냐면 삶 자체가 정태적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에 무딪힙니다.  132
사유나 의지나 믿음이나 모두 함께 움직이는데, 믿음에는 조금 다른 특성이 있는것 같습니다. 주어진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넘어서는 힘, 추동력이라고 할까요?
지성적인 판단, 이성적인 길이 끝나는 데서 믿음이 시작된다.  134
우물 속의 개구리가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늘이 동전만 하다고 말한다면, 개구리로서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실만을 말한 겁니다. 그런데 하늘은 동전보다 큽니다. 문제는 그 개구리의 정직성이나 성실성이 개구리가 범한 이른바 '지적 과오'를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과오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능력이 있지요. 게다가 모든 종교는 인간이 스스로 성찰하도록 유도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138
기본적으로 종교 언어는 설명의 언어가 아닙니다. 내가 느끼고 의미를 부여한 경험을 고백하는 언어입니다. 또 그런 고백을 일상화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설법도 하고 설교도 하고, 그런 것을 효과적으로 시니게 하려고 주문(呪文)도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138
새로운 종교적 몸짓
첫째, 종교가 몸을 폄하하는 경향. 부처님은 몸을 학대하는 금욕적 태도에서 벗어나서, 깨달음의 경지는 몸을 학대해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주셨죠. 그 전통이 2500년을 지속했는데 금욕적인 몸의 학대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요.
둘째, 우리는 정신을 드러내는 도구로서 몸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인간의 삶에는 사고나 사상으로 충족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있고, 그것은 몸짓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를 이해하려면 사상적인 면도 봐야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제식적 몸짓을 연희하는 지도 봐야 합니다.  139-141
종교인이든 비 종교인이든 상상력의 공간을 확보했으면 좋겠어요.
변화도 수용하는 열린 상상력이 필요하겠죠.  146
'자신의 정직성을 스스로 신뢰하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온갖 것을 자기 나름대로 물을 수 있고, 또 다듬을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그러한 사람만이 학문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보곤 합니다.' <열림과 닫힘>중에서   147
앎과 믿음은 서로 갈등관계에 있지 않다. 앎은 우리에게 정직한 자세를 갖추게 해주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에게 삶을 감사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둘은 늘 함께 있어야 한다.  148


새로운 시대의 윤리 -황경식
철학이 다른 분야에 비해서 매우 유용한 몇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가 바로 개념의 분석입니다. 언어의 의미를 분석하는 거죠.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개념을 사용하는데, 그 개념의 의미가 모호할 때 불필요한 소모가 발생합니다. 철학은 개념을 분석해서 의미를 명료하게 규정하여 담론이 원활하게 소통될 수 있게 하지요. 논변이란 어떤 주장이 있을 때 그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고 논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근거있는 주장이 바로 논변인데 우리가 상대를 합리적으로 설득하려면 반드시 논변을 통해야 합니다. 
둘째는 철학은 논변(論辯)을 중요시합니다. 철학의 역사를 '논변의 역사'라고도 하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철학의 기능은 삶의 가장 근본적인 가치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처럼 우리가 일상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근본을 바라보고,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는 궁극적인 관심을 다시 일깨워주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152-153
우리가 사회를 형성하고 살아가려면 핵심적인 도덕은 반드시 공유해야지요. 그러나 그 나머지 사안에 대해서는 각 개인의 생각에 관용을 베풀어야 할 여지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원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지혜이고, 또 그것이 새로운 윤리가 아닌가 합니다.  156
의무 윤리도 중요하지만, 전통적인 덕(德)의 윤리가 되살아나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의무만 가지고 윤리적인 실천을 다 설명하기는 어렵기에 윤리의 영역을 조금 더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행위, 즉 두잉(doing)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품과 성푸므 존재 자체가 달라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비잉(being)도 중요하다는 겁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의무가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덕의윤리는 바로 그 실천을 특히 강조하는 새로운 추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1
공자와 맹자에게도 가장 중요한 과제가 바로 수양(修養)입니다. 유혹이 와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나의 소신대로 당당하게 옳은 길을 갈 수 있는 도덕적인 용기와 의지력으로 무장하는 것이 도덕적 실천에서 아주 중요한데, 그 점을 요즘 덕 윤리학자들이 강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163
윤리적 실천에는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지(知), 정(情), 의(意)  163
덕 윤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164
한국에서는 태권도, 유도, 검도 등 무술에 '도(道)'자를 붙이지 않습니까?  이 도라는 게 바로 덕을 닦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 덕(道 德)'이라고 이야기하죠. 도를 닦는 것은 덕을 함양하는 겁니다.  165
문제상황을 두고 두루두루 궁리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가장 현명한 선택이 무엇인지 미리 따져두면 실제 상황에 부딪혀도 당황하지 않고 슬리롭게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다.  166
미국에서는 30년 전부터 교육개혁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바로 어린이 철학 교육인데, 특히 논리 교욱을 많이 강화하고 있습니다. 논리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아주 윤리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167
성의 문제는 인생에 대한 자세와 밀접하게 간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을 가볍게 여기면 삶 자체가 진지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성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성데 대해 가장 많이 논의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성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172
누구나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것 같지만, 정작 논의를 시작하면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172
정해진 틀을 가지고 교조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을 조금 부정적인 뜻으로 '도덕론자, 모럴리스트(moralist)'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철학적인 윤리학은 모럴리즘이 아니라, 상당히 개방적인 학문입니다.  174
인문학이 언뜻 보기에는 무용지물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삶에서 겪는 어려움에 돌파구가 될 수 있는, 무용지대용(無用之大用), 즉 무용한 듯이 보이지만 큰 쓰임이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의 겉모습보다 근본적인 뿌리를 선명하게 볼 수 있다면, 현실적인 문제에 거리를 두는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176


내가 누군가를 영원히 사랑하기는 원치 않으면서도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사랑해 주기를 바라거든요. 거기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기적인 욕망이 개입하기 때문이죠.
그런 이중잣대로 재단해서 그 카오스적인 힘을 그냥 소모하고 마는게 아닌가 싶어요.  180
청춘을 이렇게 황폐한 사랑으로 보내고 나면, 인생의 가을과 겨울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가장 소중한 자신의 삶을 대가로 치르면서 그런 걸 쿨하다, 연애 선수다, 작업의 달인이다, 이런 식으로 포장하는게 역겹고 안쓰럽습니다. 자기 존재가 이렇게 메말라 버리는데, 그 대가로 도대체 무엇을 얻을까요?  182
신체가 온전하게 흔들리는 순간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어떤 타자(他者)를 강렬하게 욕망하게 되었을 때거든요. 그럴 때 우리는 전율을 느끼고 심장이 뛰고 잠을 못 이루는 경험을 합니다. 이런 현상은 일상의 감정과는 분명히 다른 것인데, 바로 이때 우리가 새로운 삶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거죠.
이런 폭풍이 한 번 지나간 다음에는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어요. 
일반적으로는 그런 광기나 흥분이 휩쓸고 지나간 다음에 다시 원래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식으로 사유하는 것 같아요. 한바탕 이제 홍역을 치르고 나면 달라진 게 아니라 그냥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고, 또다시 그런 폭풍을 기다리는게 아니라, 내가 폭풍을 경험할 때마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면,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몇 번의 삶을 체험하게 하는 아주 대단한 기회가 되겠죠.  191
사랑과 성이 맺는 관계는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는데, 그것이 자기 존재, 자기 삶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문제는 분명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192
삶이 통째로 소통되고 서로 교감하는 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195
제게는 공부가 에로스적 힘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닌가 해요. 저는 앎이 주는 기쁨이 에로스적인 것보다 더 강렬하다고 믿고, 또 배움은 원초적으로 즐겁고, 인간의 본능은 기본적으로 즐거움이고, 즐거움이 없으면 배움이 아니라고 믿어요.  199
양명학의 대가 왕심재(王心齎, 1483~1540)는 <낙학가(樂學歌)>에서 이렇게 말했다.
'즐겁지 않으면 배움이 아니고, 배우지 않으면 즐거움도 없다. 즐거운 연후에야 배운 것이고, 배운 연후에야 즐겁다. 고로 즐거움이 배움이고, 배움이 곧 즐거움이다. 아아! 세상의 즐거움 중에 이 배움 만한 것이 또 있을 것인가.'  199
두려움 없이 사랑하라는 말은 그 사랑을 통해서 자기 삶을 온전히 긍정할 힘을 얻기 바라는 제 마음의 표현입니다. 두려움과 외로움에 자신을 가두고 살기보다는 그 사랑이 거절당하든, 배신당하든, 또는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되든 간에 한 걸음 내디뎌서 자기 존재를 온전히 긍정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승리가 아닐까요?  203


뇌는 과연 윤리적인가? - 김효은
신경윤리에서는 항상 맥락을 중요시하죠. 일괄적으로 안락사는 된다, 안 된다는 단정적인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211
우리에게는 모두 장기기억(long term memory)과 단기기억(short term memory) 그리고 작업기억(working memory)이 있습니다.
작업기억은 기억이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는 능력을 말하는데, 단기기억이 정보를 잠시 유지하는 수동적 개념이라면 작업기억은 그곳에서 여러 작업이 일어나고 있음에 초점을 둔 능동적 개념입니다. 의식으로 들어오면 그와 연관된 장기기억의 정보가 떠오르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이미 기억하는 정보를 떠올려 새로 습득한 정보와 연관시키기도 합니다. 그 의식의 역동성에 초점을 둔 개념이 작업기억입니다.  221
윤리적인 판단을 내릴 때 우리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이 그동안의 통념이었고, 이성과 감정은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생각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인지작요엥는 감정의 영향이 매우 크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인간을 이성적, 합리적 존재라기보다는 감정이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225


온생명으로 태어나다 - 장회익
사르트르는 '시대적 삶에 동참하고 동시대인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사고를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지식인'이라고 말했다.  234
원래 물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자연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기본 원리를 찾는 거거든요.  236문명이 급격히 발전하고, 인간 삶의 편의는 놀랍게 증가 했는데, 생명의 위기는 훨씬 더 고조되었죠. 발저노가 위기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길항하는 역할을 해온 것 같습니다. 237
우리가 살아 있는 것 하나하나가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죠. 다시 말하면 살아 있는 것의 '살아 있음'이라는 어떤 특징을 나타내는 성격을, 우리는 흔히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든 토끼든 박테리아든 그 안에 생명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안에 들어 있다는 생명이 도대체 뭐냐? 어떤 상황에서 그것이 생명이 되느냐?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이유가 뭔가 봤더니 생명이란 것의 개념 자체가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제가 깨달은 사실은 기존의 관념으로 이해할 수 없고, 훨씬 더 큰 체계로 파악해야 한다, 생명이 이루어지려면 각각의 개체를 뛰어넘는 더 큰 모습의 전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온생명이라고 부른 거죠.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 모여야 비로소 생명이 되느냐는겁니다. 생명이라는 것도 결국 그 어떤 물질적 요소들이 모여 일정한 체계를 구성할 때 나타나는 것인데, 무엇이 어떻게 모였을 때 생명이란 현상이 나타나고, 그렇지 못할 때 생명이 되지 못하는 그 경계가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이것이 곧 생명 현상이 성립되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최소 조건이 무엇인가를 알자는 거지요. 그것을 봐야 생명의전체 모습이 보이거든요.  238-239
생명체 내부를 구성하는것과 생명체 외부 곧 환경을 구성하는 것이 서로 별개가 아니라는 거죠. 이들이 함께 관련을 맺을 때 비로소 생명 현상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239
기술로 자연을 변형하다 보니까, 온생명의생리를 거스르는 결과를 낳는 겁니다.  240
누군가 자기 팔을 움직이면, 흔히 자기 힘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이것은 태양에너지로 움직이는 거거든요. 태양 에너지가 녹색식물에 흡수되고 그 에너지가 음식을 통해 내 몸으로 들어와서 그 팔을 움직여 주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그런 전체 과정을 한 묶음으로 봐야 합니다.  245
온생명을 사람에 비유한다면 두뇌를 구성하고 의식을 담당하는 존재는 다른 생물종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라는 겁니다.  246
지금까지 낱생명을 그냥 '생명'이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생명이 될 수 없기에 반드시 뭔가가 함께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보생명입니다. 보생명과 낱생명이 합쳐진 전체가 온생명이라는 거죠.  248
우리의 몸이 사시은 온생명인데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떨게 살아가는 존재인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거죠.  250
앎이란 개인적인 목적이나 수단으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는 방편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전문적인 지식에만 매달리지 말고 폭넓게 전체를 연결하는 지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삶이 즐겁고 공부가 즐거워야 앎을 얻을 수 있어요.  256


숨의 생면, 생명의 숲 - 차윤정


인간은 매 순간을 늘 깨어 있는 상태로 살아가잖아요. 그러나 나무는 상황이 좋지 않으면 사는걸 멈춥니다. 살아 있는 기간과 정지한 기간을 합치면 그들에게 1년은 10년 단위일 수도 있어요. 그렇게 5000년을 산다는 거죠.  275

나무는 전 조직이 수백 년을 살지 않지요. 살아 있는 조직과 죽은 조직이 공존하지요. 죽은 조직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이미 다른 생물들에게 이용됩니다. 그래서 나무를 그 자체로서 서식지가 되는 생물이라고 합니다.  276






왜 '책' 이어야 하는가? - 도정일
책 읽는 사회의 설립취지는 '생각하는 사회를 만들자'라는 데 있습니다.  293
인문학은 쓸모가 많은, 쓸모가 많은 정도가 아니라 그 쓸모의 중요성을 따질 때 아주 위대한 정신습관, 태도, 학문입니다.  294
인문학적인 관심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관심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295
겉보다는 안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인문학적 태도입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는 인문학 전공자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라 모든 이의 관심사니까요.  296
우리 사회를 어떤 사회로 만들 것인지 고민하기보다는 우선 나부터 성공하고 보자는 추세가 지배적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젊은 세대가 스스로 경계해야 할 정신의 함정 아닌가 합니다.  299
고전을 ... 강제로라도 읽게 해야 합니다.  309
고전 교육이 왜 강제되어야 하느냐. 교욱은 절대로 민주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신세대든, 구세대든 간에 반드시 알아야 할 어휘나 개념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만나게 하는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310
환경이 완전히 달라진 지금 시점엣 왜 옛날 책을 읽어야 하는가 - 아무리 사회가 달라져도, 인간에게는 바뀌지 않는 경험의 조건들이 있습니다.  311
양심의 경험이라는 게 있습니다. 양심의 경험을 하게 하는 삶의 조건도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습니다.  314
어떤 책을 고전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첫째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역사의 책임을 느끼게 하는 책, 인간 경험의 근본적 조건을 생각하게 하는 책입니다. 
둘째는 역사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책임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책입니다.  314
매학기 대학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수업을 시작합니다.
첫째, "나는 어떤 사회에 살고 싶어 하는가?"
둘째,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가?"
셋째, "내가 할 수 잇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는 사회적 사유를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317


판옵티콘, 그 안의 권력 - 박정자
판옵티콘 - 한 눈에 모든 것이 다 보이는, 그런 구조물을 말합니다.  327

판옵티콘의 측징이 시선의 비대칭성이라 하는데, 오늘날 사회도 같은 맥락에 있는게 아닌가 합니다. 
판옵티콘이 규율 권력에 아주 효율적인 이유를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학생이건 노동자건 수감자건 간에 통제받는 주체를 철저히 대상화한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피감시자를 조건화할 수 있습니다.
감시자가 있든 없든 늘 있다고 믿게 마련입니다.
셋째는 자동성입니다. 장치를 한번 만들어 놓으면, 누가 작동하든지 자동으로 움직입니다.  333
왕조시대에는 온 백성이 왕 한 사람을 마치 태양처럼 우러러봤습니다. 다수가 소수를 바라보는 시대였던 거죠. 그런데 근대 이후 현대까지는 시선의 관계가 역전되어서 판옵티콘의 간수가 여러 죄수를 감시하듯이 소수가 다수를 바라보는 시대였습니다.  
오늘날에는 그 관계가 다시 역전된 듯합니다.  342






유토피아를 꿈꾸다 - 김영한
어떤 학자는 유토피아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모든 것을 기획하고, 설계하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359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라는 작품을 통해서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즉, 정의로운 사회, 행복한 사회가 그가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임을 분명히 밝혔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베이컨은 토머스 모어의 작품을 노골적으로 비판하진 않았지만, 그 실효성에 대한 회의를 품었던 것 같습니다. '토머스 모어는 단지 바람직한 사회의 유형을 제시했을 뿐, 구체적으로 그런 사회를 어떻게 실현하겠다는 것인지 방법론이 전혀 개진되지 않았다. 그러니 공허하다.'  370
토머스 모어가 지향하는 평등의 이념과 프랜시스 베이컨이 지향하는 자유나 풍요의 가치관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바람직한 사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후발국이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지상과제는 두 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를, 경제적으로 산업화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과제가 서양처럼 조화를 이루며 명행되었다면 문제가 없는데 우리 한국 사회는 짧은 기간 내에 시간과 경쟁하면서 이 두가지를 실현하다 보니까, 결국 어느 한 쪽이 희생당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안정이냐 자유냐, 성장이냐 평등이냐, 순수냐 참여냐, 이런 문제로 늘 갈등해 왔던 거죠.
정권도 지난번엔 진보 정권이 집권했다가 이번엔 다시 보수 정권이 들어섰는데, 우리 사회도 이처럼 정당정치에 의해서 노선이 바뀌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인 것 같습니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갈등은 어히려 깊어졌지요. 결국, 자유와 평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느냐, 순수와 참여가 어떻게 공존할 수가 있느냐, 이런 문제인데 지금 유럽도 같은 문제로 고심하면서 제3의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저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대립하는 두 가치를 넘어서는 이념이 있다면, 그것은 박애(博愛)가 아닐까 합니다. 375-376
모든 인간 행동의 발상을 크게 보면 자애(自愛)와 타애(他愛)의 요소로 나눌 수 있겠지요.
모든 행동이 대체로 자애, 즉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는데, 다른 한 편으로는 공동체를 생각하는 마음도 있어요.  377
인문적 상상력이 없다면 문명이 나아갈 목표와 방향을 잃게 될 것이고, 과학의 힘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꿈과 상상력은 백일몽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아무리 과학만능의 시대가 도래한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 과학을 이끌어가는 인문적 상상력임을 새롭게 각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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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공동체가 추구하는 사랑과 성의 윤리적 배치란 과연 어떤 것일까? 탈주와 전복이라는 코뮌의 비전과 그것은 대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이 책은 위의 질문들에 대한 최초의 응답이다.  6

프롤로그
복수혈전이 펼쳐진다는 건, 나는 별로 원하지 않았는데 상대의 유혹에 의해 엮인 것이라고 하는. 그리고 역시 상대한테 속아서 억지로 희생과 헌신을 강요당했다고 하는. 요컨대, 원인이 모조리 상대에게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을 언제나 대상의 문제로 환원한다.  14
사랑 따로 대상 따로 나 따로가 아니라, 나와 사랑과 대상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사랑이라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랑과 대상과 나 사이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 사랑하는 대상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  15
사랑은 무상하다.  16
실연은 행운이다! 나로 하여금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미리미리 길을 '비켜 준' 존재들한테 축복 있기를!!  17
'사랑도 공부를 해야 하나?'가 아니라, 사랑이야말로 공부가 필요하다.
앎의 크기가 내 존재의 크기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앎의 열정이 없는 존재가 운명적 사랑을 한다는 건 우주적 이치상 불가능하다.
주류적 척도로부터 멋어나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열정, 자본과 권력의 외부를 향해 과감하게 발을 내디딜 수 있는 내공, 공부는 무엇보다 이 열정과 내공을 쌓아 가는 과정이다.  18
"오직 배우는 마음만이 열정이 넘칩니다."  19


1부 오만과 편견, 사랑과 성(性,sex)에 대한
홀로 갈 수 없다면, 정대 타자를 사랑할 수 없다. 혼자 갈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가벼워야 한다. 망상은 무겁다. 갖가지 오만과 편견으로 존재를 한없이 무겁게 얽어 맨다.  23
사랑이 다양한 관계를 망라하는 보편적인 명칭이라면, 연애는 1920년대에 수입된 신조어다. 'Love'의 일본식 번역어다. 
사랑이 수많은 의미의 생산이 가능한 용어라면 연애는 남녀 사이의 이성적 관계라는 의미로 압축된다. 
그럼 작업은? IMF 이후 등장한 신조어이다. 연애보다 더 의미가 축소되어 아주 특정한 방식의 연애행태를 지칭한다.  27
아름다운 순간들을 추억하는 일, 그리고 또 다시 그와 같은 순간이 오기를 몽상하는 일. 추억하거나 몽상하거나. 이들 순정파들은 한마디로 이런 유의 낭만적 궤도 안에 갇힌 '고매한 족속들'이다. 그들의 연애 또한 늘 실패한다.  31
야동은 말할 것도 없고, 야식(특히 폭식)은 외로움의 신체적 표상이다. 정신적 공허를 채우기 위한 몸적 반응이 바로 허기이기 때문이다.  35
우리의 마음은 사랑과 연애, 섹스에 대한 무수한 망상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고유의 것'이라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 이상을, 그 외부를 사유하려 하지 않는다.  37
'사시사철 두리번 두리번 살금살금하면서,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잠시도 안심할 수 없는 게 현대인이 안고 있는 마음의 병이야. 문명의 저주인 거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541-542쪽  42
이 자의식은 문명의 저주다. 타자와의 소통을 가로 막는 장벽이기 때문이다.  42
머리를 굴려 대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자의식을 침범당하는 게 두려워서다.  43
충동과 열정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충동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그래서 늘 중독적 상태로 치닫는 힘이다. 나에게 엄청난 쾌락을 주지만, 그 원인은 늘 외부에 있다. 그러므로 강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나는 노예적으로 끄달리게 된다.
열정은 아무리 뜨겁게 솟구친다 해도 삶의 의지와 연동되어 있다. 그러므로 절대 중독되지 않는다. 열정은 '유래 없는 평온'을 선사한다.  45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성욕을 느끼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47
여성들은 여전히 다수의 남성들로부터 프러포즈를 받는 걸 '인생의 큰 의미'라고 여기는 게 분명하다. 이러니 사랑의 성공과 실패는 결국 찼는가 차였는가로 귀결될 밖에. 허나, 따지고 보면 이런 논법만큼 무지한 것도 드물다.  52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점쟁이들이 무려 45만이라고 한다.
청춘남녀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사항은 운명적 파트너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과 딱 맞는 반쪽이 있다면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 거라는 맹목적 믿음에 근거한다. 
결론 부터 말하면, 반쪽이는 없다!  59
중요한건 반쪽이를 향한 무한도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함께 걸어갈 수 있는 짝을 찾는 일이다.  60
정말로 사랑에 목숨을 거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솔직히 현실적으론 사랑을 위해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다만 망상 속에서 그렇게 동경할 따름이다.  64
참고 견딘다는 건 속에다 꾹꾹 눌러 담는 것이지 상대와 진심으로 소통하는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67
희생이라는 포장 속에 어설픈 평화를 누리기보다 솔직하게 서로의 욕망을 드러내면서 화끈하게 전투를 벌이느 것이 사랑의 본래 면목에 더 가깝지 않을까. 고로, 희생과 헌신이라는 미덕만큼 사랑과 거리가 먼 항목도 없다.  68
감정적 간극이 벌어지게 되면 자주 투닥거리게 되고, 어느새 결별의 상황에 이르고, 그러면 또 다시 새로운 짝을 찾아 헤맨다.  69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라는 말은, 곰곰이 따져 보면, 사랑은 늘 처음의 그 격정적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변한 것, 아니 변절에 해당한다.  70
이런 망상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사랑이란 추억 아니면 몽상으로만 존재한다.
추억은 지나간 것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고, 몽상은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다.
말로는 아름답다, 순수하다, 아직도 그리워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뿐이다. 막상 만날 기회가 오면 거의 대부분 달아나 버린다. 왜? 아름다운 추억이 망가질까봐.  71
지금, 이 순간을 살지 못한다. 단 한순간도 '지금, 여기'의 사랑을 누리지 못한다.  72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사랑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랑의기술>13쪽  73
남자들은 오직 권력과 돈, 여성들은 성적 매력과 몸치장에 몰두한다. 마치 그것만 갖춰지면 사랑은 절로 굴러온다는 듯이 말이다.  73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은 절대 배움의 대상이 아니라고 간주한다. 공부는 근본적으로 몸과 우주에 대한 탐구이다.  73
우리 주변엔 실전연애 노하우에 대한 숱한 책들이 널려 있다.... 참, 어처구니가 없다. 정말 이런 식으로 감정을 교류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걸까?기교라고 쳐도 참으로 유치한 수준 아닌가. 그만큼 연애가 힘들다는 뜻일터. 
순정파건 냉소파건 다들 나름대로 테크닉에 골몰하는 건 틀림없다.  75
요즘 커플들이 100일을 넘기기 어려운 것도 내적 충만감보다는 인정욕망에 휘둘리는 이런 식의 문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일터. 타인의 시선에 집착하면 할수록 나의 내부는 비어 간다.  77
사람은 평생 단 하나의 병만을 앓는다는 말이 있다. 신체적으로 볼때, 하나의 약한 고리를 중시으로 다양한 병들이 변주된다는 뜻이다. 마찬가지 이치로 사람은 평생 단 한 종류의 연애만 한다고 할 수 있다.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위안이나 동정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의 사랑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럴 때라야 진정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법이다. 헌데, 문제는 다들 상담을 받거나 점쟁이를 찾아가려 하지 스스로 깨우치려고 하질 않는다는 데 있다.
이런 식이니, 사랑에 관한 한 성숙해진다는 관념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79
솔직히 성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유치하기 짝이 없다면 그건 일종의 발달장애에 해당한다. 헌데, 그것이 졸지에 순수함으로, 그리고 다시 사랑의 미덕으로 치환되어 버린다.  80
 

2부 청춘의 '덫'. 국가와 가족, 학교 그리고 쇼핑몰
20세기 초 서구문명이 이 땅에 도래할 즈음, 당대를 주름잡던 계몽가들은 가종 신문매체를 통해 엄숙하게 경고했다. 조선이 망한 건 열대여섯 살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들을 억지로 혼인시켰기 때문이라고.  93
그럼 지금은? 만약 스물두 살쯤 된 청년이 결혼이나 동거를 하겠다고 나선다면? 택도 없는 소리다!
지금의 경제조건에선 최소한 서른은 되어야 사회적으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견적이 나오기 때문이다.  94
좀 이상하지 않은가? 선진문명을 이룰수록 청춘들의 원초적 욕망은 계속 지체되어야 하다니 말이다.  96
지난 100년간 우리가 엄청난 속도로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었던 건 '성에너지의 국가적 몰수'라는 대가를 치렀기에 가능했던 셈이다.  98
세상에는 사랑을 나눌 수 없을 만큼 나약한 존재도 없고, 사랑이 필요없을 만큼 강한 존재 또한 없다!  103
'엄마의 늪' 우리으 청춘들은 아직 엄마의 품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105
온실과 정글. 엄마의 관리와 보호가 미치는 곳은 온실, 그래서 혼자 힘으로 맨몸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 곳은 정글.  105
요즘 청년들에게서 열정이나 패기를 찾아보기란 참으로 어렵다. 외모나 체격은 눈부시게 개량(?)되었지만, 청춘이 내뿜는 특유의 포스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아주 일찌감치 '삭아서' 자신이 뭘 원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모르는 경우도 많다.  
정글에서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두 발로 당당하게 설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부모의 전방위적 마크하에서 그런 신체적 능력을 터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111
"젊음이란 20대 청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연령에 걸맞는 청춘을 매번 새롭게 '창조하는'것이다." - 들뢰즈
마음이 성욕과 야망과 투쟁과 적대감과 온갖 욕망의 전쟁을 치르고나서, 자신 속으로 돌아가 자시노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리고 마음이 연구와 학문에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다면, 노년보다 더 즐거운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네.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126
어떤 종류의 관계든, 어떤 활동영역이든 존재의 자유와 충만감이 분출될 수 있다면, 그것은 모두 에로스다!  142


3부 청춘이여, 욕망하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사랑이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다. 즉, 내가 어떻게 관계를 구성하느냐가 사랑의 내용과 형식 모두를 결정한다.  146
사랑의 기술을 터득하기 위한 가장 일차적인 행동지침은 자신의 몸과 능동적인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다.  147
질의 차이가 없다면, 사랑은 불가능하다.  150
니체는 말했다. "네 안에 너를 멸망시킬 태풍이 있는가?" 나를 멸망시킨다는 건 바로 지금까지의 나, 자아 혹은 자의식의 성채를 무너뜨리는 힘의 도래를 의미한다.  152
이것은 미쳐 날뛰는 광기나 변덕스런 충동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광기나 충동은 절대 폭풍을 일으키지 못한다.  153
상상하는 연애에서 관찰하는 연애로!
"연애를 하는데 남자친구 때문에 너무 괴로워해요. 근데, 왜 해어지지 않느냐구 했더니 대답이 아주 재밌어요. 몇 년이나 사귀었지만, 이 남자가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최소한 이해를 한 다음에 헤어질 작정이다. 그래야 인생에 대해 뭔가 알게 되지 않겠냐 이거죠."
 이 정도의 뚝심은 있어야 한다. 이게 바로 관찰하는 연애다.  157
나를 관찰하고 상대를 관찰하고 몸과 마음의 간극을 줄이는 것! 연인은 사랑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나와 같은 시공간 속에 있는 '친구'이다. 그 친구를 공부하는 것이 곧 그를 향한 최고의 '사랑법'이 아닐까?  158
성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그것을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욕망의 구조가 있을 뿐이다.  162
중요한 건 자유다. 쾌락을 즐기건 금욕을 하건 누구든 자기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몸과 우주가 소통하는 그만큼 자유의 곤강이 열릴 것이다.  170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왜 부끄러운 일인가? 그거야말로 내 몸이 특별한 리듬과 강도를 갖게 된 것인데, 그게 왜 창피한 일인가? 그렇게 느끼는 건 전적으로 사랑과 성을 권력관계로 보게끔하는 망상구조 탓이다.  182
우리시대의 연애가 썰렁해진 건 무엇보다 '차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수준은 물론 학벌, 가족관계, 거기다 외모까지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 어떻게 열정이 폭발하겠는가.  194
사랑이 탈주선이 되려면, 무엇보다 이 쇼 망상의 그물을 가차없이 해체해야 한다.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기념일 챙기는 것부터 걷어 치워라. 세상에 그런 멍청한 짓거리가 어디 있는가. 대체 사랑의 시작점을 잡는다는 게 말이 되나? 그리고 시작점을 헤아리는 건 끝날 때를 미리 대비하는 거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뭣 때문에 카운트다운을 하는가 말이다.  195
진짜 소중한 선물에는 '삶의 서사'가 묻어 있어야 한다. 즉, 나의 일상의 리듬과 무관한 선물이란 그야말로 쇼에 지나지 않는다.  197
쇼! 하지마라! 쇼! 
그럼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는가? 그래서 창의성이 필요하다. 나의 사랑이 지닌바 특이성이 유감없이 발휘될 수 있는 사랑법을 창안하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유한 사랑법을.  198
걷고 자전거 타고 산에 오르고 삶의 서사 혹은 일상의 활발한 기운을 서로 선물하고, 이것이 기본기라면, 그 위에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필수코스가 있다. 책읽기 혹은 공부하기.  203
지성과 에로스는 절대 따로 놀지 않는다.  204
대장금  205
연애 중독증의 가장 큰 특징은 절대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  209
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를 전혀 다른 세계로 이끌어 주는 전령사다. 마주치는 순간, 전혀 다른 매트릭스, 아주 이질적인 우주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 그것이 곧 책이다.  211
질문의 크기가 곧 내 존재의 크기다.  212
가장 좋은 건 늘 누군가와 세미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공부란 본래적으로 네트워킹이다. 홀로 서재에서 끙끙거리며 남을 지배하기 위해 하는 건 경쟁을 위한 도구지, 절대 공부가 아니다. 즉, 공부를 한다는 건 무조건 친구들과 함께 세미나를 한다는 뜻이다.  213
연인 사이가 끝난다고 그와의 모든 인연이 종결된다면, 더구나 함게 공유했던 배경까지 몽땅 잃어버려야 한다면, 그거야말로 자연의 흐름에 반하는 것이 아닐까.  215


4부 에로스와 '운명애'
에로스와 지적 능력의 함수관계 - 지성에서 비롯된 매력은 위이 사라지지 않는다. 장금이가 그랫고, 루쉰이 그랬고, 사르트르가 그러했다. 우리는 흔히 '매력'을 멋지고 세련된 외모와 일치시키지만, 사실 네루다와 조르바가 그렇게 많은 여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게 그들이 '잘생겼'기 때문이던가? 이 '사랑의 달인'들이 가진 공통점은, 지성과 서사가 흘러넘쳤다는 사실이다. 고로, 공부하라, 그러면 사랑은 절로 따라올 테니!  222
사랑을 원한다면 혹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다면, 무엇보다 서사의 능력을 키우도록 하라. 서사는 화술이 아니라, 나의 삶과 외부가 맺는 관계성의 문제다. 따라서 서사능력을 키우려면 두 가지 전략이 필요하다. 하나는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삶의 영역을 개척하는 것, 또 하나는 자신의 평범한 일상에 생생한 힘과 활력을 불어넣는 것.  225
건강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사람들과, 사건들과 맞닥뜨리고 관계하는 방식입니다. 관계의 건강성, 바로 그것이 나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이렇다. 사랑은 나의 기쁨이 흘러넘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라의 원인이 되는 나의 존재를 긍정하는 힘이기도 하다.  234
사랑의 창조, 그 궁극적 지점은 다름 아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235
유머의 힘은 실로 막강하다. 그러므로 어떤 대상과도 접속할 수 있고, 끊임없이 자기로부터 떠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유머러스한 신체'가 되어야 한다.  240
그 사랑은 미련도, 회한도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다. 한편으론 자나간 것, 곧 추억에 매달리고, 다른 한편으론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과 몽상 속에서 정작 '지금, 여기'에 온전히 기투하지를 못한다. 대개는 자신으 ㅣ과거 또는 상대방의 과거의 그림자에 사로잡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한다.  249


에필로그
"모든 인간은 자신으 능력만큼 신을 만난다." 스피노자의 말이다. 사랑도 똑같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 되는 사항이 하나 있다. 이 능력의 차이를 위계화하지 말것. 각기 다른 방식의 사랑법이 있을 뿐이다.  260
중독된다는 건 삶과 분리되어 오직 쾌감의 증대를 향해 치닫는 것이다.  261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386쪽 "책이란 숱한 사람들의 손길에 닳고 닳아 너덜너덜해져야 한다. ...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 인간의 가슴을 만나고, 여인의 눈을 만나고, 길거리의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또 노을을 쳐다보거나 한밤중에 별을 바라보며 시 한 구절을 읊조리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 우리 시인들은 낯선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낯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낙엽 속에서 문득 시를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262-263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느 에로스, 이것이야말로 혁명의 원동력이다.  263
혁명이 광장에서, 바리케이트 위에서 표현되는 것이라면, 코뮌은 그 혁명의 일상적 형식이다. 일상 속에서 자본과 권력의 코드를 벗어난 새로운 삶의 형식을 만들어 가는 . 그럼. 코뮌과 에로스는 어떻게 연동되는가?  264
사랑의 독점적 지배하에선 우정도 절대 싹을 틔우지 못한다. 
사랑과 우정이 왜 적대적인가? 사랑하는 연인이란 가장 좋은 친구라는 의미도 들어 있지 않은가. 이탁오의 말 가운데 이런 게 있다. "스승이면서 친구가 아니면 스승이라고 할 수 없다. 친구이면서 스승처럼 배울 게 없다면 역시 친구라 할 수 없다."
변주하면.. "연인이면서 우정을 나눌 수 없다면, 연인이 될 수 없다. 친구이면서 사랑보다 뜨거운 열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역시 친구라 할 수 없다."
사랑이 원숙해지면 누구나 친구 같다고 하고, 사랑에 멍든 이들이 하는 말 가운데 친구 같은 연인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결코 헛소리가 아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평소 우정의 지혜를 많이 터득해 두어야 한다.  266
우저에도 많은 학습이 필요하다. 좋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선 자신이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아주 다른 삶, 낯설고 창발적인 사유와 생활을 선물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고 ㅏ우정 사이의 매끄러운 흐름, 그것이 바로 코뮌주의자의 사랑법이다.  267
흔히 도(道)와 에로스느 적대적이라고 간주한다. 에로스적 충동을 억눌러야만, 다시 말해 가능한 한 탈성화되어야만 도를 터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진정 원초적 본능의 한가운데를 통과하지 않고서 어찌 생사를 넘는 해탈이 가능할 것인가? 사랑이 생명의 원초적인 뿌리이자 원동력이라면, 마땅히 인간의 우주적 경지인 도와 이어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름하여, 사랑의 절대적 탈영토화!!!  269
행복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자유와 해방이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낡은 것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우리는 이미 배를 불태워 버리고 말았다. 용감해지는 수밖에 없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랑에 관한 오만과 편견, 자의식을 둘어쌍 망상의 그물망을 벗어나 한걸음, 단 한결음만 내디딜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백척간두진일보다. 
그러므로 사랑하라! 두려움 없이!!!!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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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우리가 즐겁게 놀기 시작할 때, 비로소 세상은 변하기 시작한다.  7
놀이는 하나으 가치관으로 우리를 줄 세우는 지루한 세계를 바꾸는 것, 단조로운 일상에서 다른 시간을 만드는 것, 그렇게 나와 친구와 세계를 변신시키는 힘이라고 나는 믿는다.  8
정말로 잘 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9

프롤로그
'논다'는 말은 종종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 우울한 무능력이나 게으름을 가리킨다.  15
우리가 무엇엔가 가장 열중하는 순간은 그것이 정말로 즐거울 때이다. 게대가 아무리 재밌는 일이라도 좀더 잘 하기 위해선 고통의 순간이 필요하다.  17


1부 '노동하는 인간'의 세계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33
'끝없는 이윤 추구'라는 자본주의의 정신이 우리 모두를 확실하게 사로잡는 과정.  43
1분 1초까지 아껴 쓰기 위한 이 대대적인 모모가 마음 바꾸기 프로젝트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신경생리학자 스탠리 코렌은 '첨단 기술인 시계가 지배하는 생활방식 덕분에' 우리는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보다 연간 500시간이나 적게 잔다고 한다.
우리는 어느새 시간은 금이라는 명령을 몸과 마음에 새기며 우리의 모든 활동을 노동으로 바꾸기 위해 필샂거으로 노력하고 잇다. 
시간은 금이 아니다. 시간은 내가 살아 있는 매 순간이며 삶 그 자체이다.  45
wn1 - '시간을 관리한다'는 것은 맹복적으로 많이 사용하거나 '알차다'는 표현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다. 즐길 수 있기 위한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최근 20년 동안 1인당 소비는 45% 증가했지만, 사회건강지수에 나타난 삶의 질은 51% 나 감소했다고 한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태껏 해오던 대로 하고 있다.  53
플레이어 라이센스-신용카드 : 어느샌가 노는 것이 소비와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축제에서부터 여행까지 모든 것이 상품인 이 세계에서 우리는 돈 없이 시간을 보내는 법을 알지 못한다. (소비 자본주의의 당당함.)  58
노동은 어차피 해야만 하는 것이니 불만 따위는 접어두고, 대신 자유 시간을 잘 활용하라.  60
돈 없이는 놀지도 못하는 이 비참한 현실이 말해주는 것은 무얼까? '골라 먹는 재미'에 익숙해지면서, 정말로 노는 능력, 재미를 발견하고 만들어내는 능력, 자신으 ㅣ삶을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만 것은 아닐까?  66


2부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의 세계
고대인들에게 지식이란 언제나 우주의 신비에 대한 경이로움이었다. 그들은 지혜를 놀이하고, 철학을 놀이했다. 서로의 지혜를 겨루는 수수께끼 놀이, 존재의 기원을 묻는 수많은 노래, 운(韻)을 던지고 받는 시 짓기 놀이에 관한 동서양의 무수한 기록들, 공놀이가 고문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지식으로 놀 수도 있다!  73
무엇이든 그 자체로 즐기는 태도는 인간의 가장 탁월한 능력이며, 인간은 이를 통해 생각하고 느끼고 반성하고 창조하고 배울 수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무언가를 진심으로 질글 수 있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수적이다. 
사실 무언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즐기는 것은 그 자체로 학습일 수밖에 없다.  75
순수한 즐거움으로 하는 활동, 무엇이건 그 자체를 즐기는 것, 그것이 바로 놀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놀이는 가장 지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이다. 
'만약 필요한 물건을 얻기위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베장이의 놀이, 삶, 유토피아>를 쓴 버나드 슈츠는 만약 우리가 노동이 없는 유토피아에 산다면 노동과 유사한 놀이를 발명했을 거라고 말한다. 
오직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손수 집을 짓고, 향기롭고 신선한 야채를 키우며, 직접 빵을 구워 먹을 것이라고. 그것은 결코 힘든 노동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가즉 찬 창조적인 활동일 것이라고. 
그러나 어떤 목적을 위해 억지로 노동할 때 창조의 즐거움은 사라진다.  76
놀이에 대해 니체는 놀이야말로 '어떤 세계에서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라고 했다.  79
즐거움만이 우리를 놀게 한다. 그러므로 즐거움은 자유의 다른 이름이며 욕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81
입맛을 자극하는 패스트푸드와 콜라,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은 컴퓨터게임처럼, 외부의 자극이 고스란히 몸에 새겨진 욕망과 그 욕망이 원하는 '즐거움'들이 잇다. 
우리들은 그러한 즐거움에 너무나 익숙하다. 그런 즐거움들은 금세 소진되기 마련이지만, 체마파크는 부지런히 새로운 자극들을 제공해준다.  82
중독된 상태를 즐거움이라고 착각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다. 그러나 잊지 말자.
즐거움은 소비되고 소진되는 게 아니라 더 큰 즐거움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놀이는 언제나 더 큰즐거움으로 향하고. 노는 동안 나는 더 건강해지며 더 잘 놀 수 있게 된다.  83
주사위를 공중으로 던지고, 떨어지는 수를 기다리는 주사위 놀이를 생각해보라. 어떤 수가 나올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주사위를 던진 아이들은 하늘을 바라본다. 무엇으로 되돌아올지 예측할 수 없는 주사위으 우연에 흥미진진하게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놀고 있는 아이들을 매혹시키는 건 아무도 알 수 없는 미래와 그 안에 숨은 우연뿐. 그러니 세계의 무한한 변신 가능성을 마음껏 즐기며 놀아라!  
순수한 즐거움, 자발성, 자유만이 놀이를 계속하게 한다.  85
즐거움 만이 우리를 놀게 한다. 그러나 계속해서 놀기 위해선 아주 중요한 능력이 필요하다. 기차에서 무작정 내리기 위해서 창 밖에 펼쳐진 풍경이 아름답다는 걸 발견해야 하듯이, 세상과 놀기 위해서 우리는 견고해 보이는 이 세계에서 무수한 차이들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87
삶을 노는 것은 삶의 규칙을 바꿔내는 것, 규칙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고정된 규칙이 있다고 믿는 순간 놀이는 불가능해진다. 
놀이는 무엇보다도 규칙을 넘나들고 변신시키는 '규칙의 놀이'다.
다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고정되는 순간 다른 틈새를 만들어 돌파하라. 삶의 규칙들을 놀이하는 것은 우리 삶에서 그 어떤 명령도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97
놀이는 리듬을 뒤섞어 파괴하는 게 아니라, 리듬을 변주하고 호흡을 불어넣는 경쾌한 스텝이다.  103
'함께' 논다는 것이 중요하다. 놀이는 언제나 '관계 만들기'이기 때문이다.  107
원주민 마을 - 노동의 필요를 몰랐던 원주민들이 공장에 취직하지 않자. 유럽으 제국주의 자들은 원주민들의 식략인 빵나무를 전부 불태워 버렸다. 공통적인 삶의 기반을 파괴함으로써, 사람들을 노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경제사학자 칼 폴라니가 전하는 무시무시한 일화.  116
혁며이란 일상적이 아닌 것을 일상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 쿠바의 한 건물의 낙서  117
노동의 사회는 베짱이(개미와 베짱이의 그 베짱이)를 추방했다. 베짱이가 게을렀기 때문이라지만, 사실 추방된 것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함께 살던 삶이 아닐까?
미래를 위해서라면 현재를 저당 잡히고, 모두가 똑같은 것을 욕망한다.  117


3부 움츠린 놀이의 날개를 펴라!
wn1 - 리처드 스톨만, 그래피티, 힙합, 랩, 브레이크 댄스, 우드스탁 페스티벌, 광대반란군.. 등이 언급되면서 그들의 새로운 놀리 문화에 대해 말한다.
 
2002년 월드컵이 관정으로 몰려나온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축제였다면, 2006년 월드컵 땐 대기업들이 미리 광정을 점유한 채 축제를 상품으로 만들려 하지 않았던가. 모든 것을 노동으로, 혹은 돈 되는 상품으로 바꿔버리는 소비자본주의의 엄청난 힘.  164
우리는 소비하기 위해 노동한다.  169
빛나느 긴장으로 가득했던 놀이가 일종의 유행, 하나의 상품이 되어 버릴 때, 강렬했던 새로움은 소멸됙 놀이의 재미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173
우리가 사용하는 종잇조각에 신용을 불어넣는 것은 그 조잇조각을 사용하는 우리 자신이다. 모두가 그 종잇조각의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훨씬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를 지배하지 않는 새로운 규칙의 화폐를 사용해보자.  178
학문들 사이에 서열이 생기고, 한편으로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추려져서 목록이 작성된다. 이정의 아이들이 골목에서 놀고 형제들과 다투면서 몸으로 익히던 사회적인 감각이 '도덕'이나 '국민윤리'라는 이름의 교과서로 만들어지고, 부엌과 일터에서 시행착오를 거치며 배웠을 다채로운 삶으 기술들은 '가정'이나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일괄정리되었다. 
달달 외워야만 하는 것들의 목록은 점점 길게 추가된다. 몸 전체로 호흡하며 익혀야 할 인생의 지혜들이 책상에 앉은 채 멍하니 들어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게다가 공부는 시험이라는 확실한 목적을 향한다. 이러니 공부가 지겨운 건 지극히 당연한 일.  공부는 노동이 되어버린 것이다.  188
내가 아무것에도 관심 없고 모든 게 귀찮을 뿐이라면 어디로 간들 뭐가 그리 다를까. 대안은 나의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깨어나는 순간, 친구들의 수많은 개성을 발견하기 시작하는 순간, 언제 제 어디서든 규칙을 바꾸고 놀 수 있는 바로 그 순간 열린다.  194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내는 '문화 생산자' - 단지 보고, 따라하고, 소비하는 대신 직접 만들어내고 뛰어들고 참여하는 거다.  197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놀이이다.  198
제작 메뉴얼대로 반복되는 노동이 아니라 무수한 가능성을 창조해내는 놀이. 지루하게 참고 견디는 현재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즐거움으로 가장 충만한 현재만이 나를, 세상을, 친구를 바꿀 수 있다. 우리의 매일매일은 어느 하루도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는 말라구. 우리는 단지 놀고 있을 뿐인걸.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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