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더스 헉슬리에 대한 내용이 있어서 간단히 읽었고, 일부를 발췌해 놓는다.





올더스 헉슬리만큼 20세기 영미문학에서 문학과 철학, 과학 그리고 심리학의 문제를 포괄적이고 깊이 있게 다룬 작가는 드물다. 그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끊임없는 구도자적 자세로 어마어마한 지식을 동원, 삶의 의미를 본질적으로 규명하려는 작가적 임무에 평생 동안 충실하였다. 현대문명이 지나친 과학기술의 발달로 균형을 잃어버릴 때 어떤 비인간적 세계가 벌어지는지 천재적 예언가의 눈을 가지고 진단하였고 서양의 사상과 기계 문명 중심 사상은 결국 인류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는 엄중한 경고를 하면서 동양의 사상과 전통적 지혜에서 대칭적 치유책을 찾아야 한다고 그는 역설한다. 시대정신을 올바르게 읽어 대안을 제공하는 그의 예언자적 혜안과 통찰력은 학문과 인간사에 대한 절차탁마의 탐구정신과 실험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충격을 이겨내면서 성숙하는 올더스 헉슬리는 인간성의 부정적 측면을 긍정적으로 변모시키고 동물의 차원에서 신의 차원으로의 승화 속에서 참다운 인간모습을 찾는다. 인간이 원숭이 같은 동물의 차원에서 서로 살육하며 세계를 황폐화시키느냐 아니면 인간이 인간다운 제 위치를 잘 지키며 조상이 남긴 아름다운 유산을 잘 보존하고 이율배반적 요소를 어떻게 조화, 절충, 통합하여 상생원리를 실천하느냐 하는 것을 그의 문학적 과제로 여긴 올더스 헉슬리는 풍자와 철학적 사유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융합하여 그의 모든 작품을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의 수단으로 삼고 위기의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생애
 저명한 영국의 과학자 가문과 문학가 가문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토마스 헨리 헉슬리는 다윈의 진화론을 발전시킨 저명한 과학자였고, 형 줄리안 헉슬리는 생물학자로서 과학적 인문주의를 신봉하였고 초대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복동생 앤드류 헉슬리는 노벨상을 수상한 유명한 생리학자였다. 19세기 시인 중 하나인 그의 어머니는 옥스퍼드 대학의 시학교수인 매슈 아놀드의 질녀로서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재원이었다. 이렇듯 헉슬리의 친가와 외가 쪽 모두 인간과 세계의 커다란 근원적인 문제를 고민하고, 그것을 풀고자 애쓴 가문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는 원래 의학을 공부하려고 옥스퍼드 의대에 진학했으나, 눈이 나빠(점상 망막염을 앓고 3년간 사실상 맹인으로 지낸 후에) 도중에 영문학과로 전과해서 공부하고 오랫동안 신문 언론계에서 문예비평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그의 출생배경은 과학뿐 아니라 예술, 문학, 종교등의 문학세계를 한층 심하시키고 다양하게 만들었다. 그는 평소 예술, 문학, 과학은 모두가 하나라는 통합주의적 일원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1825년 태어난 올더스의 할아버지 토마스 헉슬리는 매우 탐험심이 많아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아 지역에서 수중탐험을 하면서 생물학을 연구하였고 외과 조수로도 일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세계를 여행하며 겪은 경험을 일기와 전기에 기록하는 문학적 기질을 보여주었다. 그의 과학자적 정신과 문학적 성향이 그의 후손 특히 손자들에게 영향을 끼쳐 더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였다. 그는 단테를 원어로 읽기 위해 이태리어를 배울 정도의 학구열이 있었으며 독일 시와 춤에도 흥미를 가졌고 호주 원주민들에게 인류학적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의 동생 제임스 헉슬리는 의사이자 정신병리학자로 성공하였다. 원기 왕성하고 학문과 매사에 적극적이고 열성적이었던 토마스 헉슬리는 자연사 교수가 된다. 병약해진 아내 때문에 호주에서 영국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는 잠이 오지 않아 칸트와 헤겔을 독파하였고, 바닷가에서 생물표본을 수집, 해부하여 그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다윈의 혁명적 진화론을 지지하는 과학자와 철학자들의 지도자적 위치에 오른다. 
 올더스 헉슬리에게서도 이런 그의 할아버지의 열성적인 기질, 일과 사교활동을 조화롭고 강렬하게 병행시키는 성향을 엿볼 수 있다. 헉슬리 가문의 가훈은 올바르면서 알기 쉽게 였다. 토마스는 대학에서 일반 자연사 과목을 맡아 비교해부학과 고생물학을 강의하면서 과학계의 거두들과 격렬한 논쟁을 통해 자신이 연구한 바를 논리적으로 이해시키고자 했으며 강연과 저작활동에서 열심이었다.
 1859년에 출간된 다윈의 <종의 기원>은 20세기의 핵에너지 개발과 유사한 충격적인 이론이었는데, 비등하는 논란의 가운데에서 토마스 헉슬리는 다윈의 진화론을 적극적으로 옹호, 지지하면서 그것을 대중화하는 데 앞정섰으며 점점 설득력을 얻어 승기를 잡아간다. 인간의 조상이 동물에까지 서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해부학생리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증명한 그의 대표작이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이다. 후세의 헉슬리 가문을 관통하는 중요 연구 관심사가 된 이 문제는 정신과 물체의 연관성에 대한 탐구로 그 영역이 확대되면서 올더스 헉슬리의 세계관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토마스 헉슬리는 다윈 학설을 뒷받침하는 저술과 강연을 이곳저곳에서 계속하며 단순한 과학자 이상의 사상가, 교육자로서 활약했다. 창조론을 주장하는 교회와의 논쟁을 조직화시키는 데 앞장섰고 형제자매의 가정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일곱명의 자식들을 화목한 가정환경에서 양육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등산과 여행, 격한 운동을 즐겼고 인생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교육과 윤리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그는 영국 학술원의 서기 겸 회장직과 오웬 대학교, 이튼 학교의 교장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대영 박물관의 이사추밀원의 고문관직과 선출직인 런던 교육위원, 국립 과학대학의 학장을 역임했고 <기초생물학>을 저술하였으며 1870년에는 새로운 교육제도 수립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교양교육과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장소>라는 글은 그의 교육철학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그는 여러 다른 견해를 중재하고 조정하는 능력이 매우 탁월했고 여러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원융(圓融)통합하는 기술 또한 뛰어났다. 그는 <타임머신>등의 과학 미래 상상소설을 쓴 H.G.웰즈 같은 저명한 인사를 가르쳤다. 건강이 나빠지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는 가운데서도 다윈의 친구들로부터 도움을 받아가면서 1873년 <척추 없는 동물 해부학 편람>을 써내기도 했다.
 애버딘 대학의 총장으로 선출되었고 러스킨, 틴덜, 매수 아놀드, 칼라일 같은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1876년 미국에서 초청장을 받고 아내와 힘께 미국을 방문했던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직을 제안받지만 아내의 건강과 자녀들을 이유로 거절한다. 헉슬리 가문의 전통은 진리와 선의 궁극적 가치를 최고로 인식하여, 고차원적인 사유 속에서 검소하지만 정열을 가지고 살면서 넓은 지적 관심, 끊임없는 절차탁마, 격물치지의 정신으로 지적인 업적을 쌓고 솔직하면서 도덕적 용기를 가지고 살자는 것이었다.
 올더스의 아버지 레오나드 헉슬리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대학 재학 중 부인 줄리아 아놀드를 만난다. 줄리아의 아버지는 목사 출신의 토마스 아놀드로 올더스 헉슬리는 외할아버지가 되는 그를 닮게 된다. 종교적, 지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올더스의 어머니 줄리아는 영국 국교 교리를 초월하여 인간의 서로 통합할 수있는 더 넓은 세계관을 추구하였다. 옥스퍼드대학 영문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855년에 레오나드 헉슬리와 결혼, 1913년에 시집을 출간하여 시인이자 옥스퍼드 대학교수인 삼촌, 매슈 아놀드로부터 찬사를 듣는다. 레오나드는 학교 교감으로 시골에 가서 가정을 꾸미고 토마스 헉슬리는 60세가 되어 은퇴 후 연금생활을 하게 되지만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공방에는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과학과 종교의 근본적 차이점을 거론하면서 종교적 교리를 대체할 새로운 윤리체계의 수립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런 그의 인생관, 세계관이 그의 손자들에게도 전수되어 줄리언은 인본주의적 과학을 탐구하게 되고 올더스는 과학과 문학의 융합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많은 자녀를 두었던 토마스 헉슬리는 손자, 외손자, 외손녀들을 거느리는 대가문의 중추로서, 은퇴하고 시골로 내려간 후 건강을 보살피다가죽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담대하고 낙관적이며 긍정적인 인생에 대한 태도를 유지했던 그는 35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첫째 아들 노엘의 무덤 옆에 묻힌다. 사후 5년 뒤인 1900년, 과학과 인문학, 또 과학과 종교 사이의 갈등과 지적 도전을 지혜롭게 극복, 화합과 균형의 미를 실천한 그를 기념해 구립 역사박물관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1894년 유명한 과학자적 전통의 아버지 집안과 문학적 전통의 어머니 집안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 올더스는 어려서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큰 형 줄리언은 옥스퍼드에, 둘재 형 트레브는 이튼 학교에 다녔으며 올더스는 유명한 공립학교 힐 사이드 부설 유아원, 유치원을 다닌다. 그의 아버지 레오나드는 5년간의 교직 생활을 그만두고 그의 부친 토마스 헉슬리에 관한 두 권짜리 전기 집필에 착수한다. 어머니 줄리아는 여학교를 설립하여 학구적 태도와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관심을 가지고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을 교육하다가 1908년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난다. 그때 올더스는 14세였고 그의 아버지는 53세였다.
 세 아들은 어머니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평생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운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첫째 줄리안은 옥스퍼드를 졸업하고 생물학을 가르치기 시작하고 장학금을 받고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다. 둘째 트레브는 과학과 형이상학적 사고의 접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셋째 올더스는 옥스퍼드에 들어갔으나 거의 실명위기에 빠지고, 외동딸 마가렛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홉 살에 불과했다. 
 어머니와 외가 쪽을 닮은 올더스에게 그의 어머니의 죽음은 아주 큰 충격을 주었고 감수성이 예민한 그는 언어와 문학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1911년 각막염 수술을 받고 거의 장님이 된 그는 이튼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형 줄리안은 미국 라이스 연구소에서 초청을 받아 휴스턴에 도착, 첫 번째 저서로 <동물왕국에서의 개성>을 출판하고 신경쇠약증과 약혼 파기 등 고통스런 위기상황을 극복한다.  올더스는 1913년 옥스퍼드에서 다시 학업을 계속하고 둘째 트레브는 우울증으로 요양소 신세를 지다가 결국 목매어 자살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레오나드는 로자린느 부르스와 1912년 재혼하고, 눈이 좋지 않은 올더스는 밀튼처럼 외부세계보다 인간의 내면세계를 더 파고든다. 대학 시절부터 신비주의에 관심을 갖고 본질적 존재의 총제적 성격을 규명코자 했던 그는 대학 졸업 후 공무원으로 잠시 근무하다가 영국 최고 명문 중고교인 이튼 학교에 교사로 취직한다. 과학의 효율성과 미학적 쾌락 양면세계의 결합을 추구하는 줄리언은 <어느 인물주의자의 수필>을 써서 과학자적 인문주의의 가치관을 피력한다.
 토마스 헉슬리의 과학주의적 세계관과 아놀드 매슈의 문학주의적 세계관이 줄리언과 올더스 두 형제에게서 대위법적으로 더 발전되는 양상을 띤다. 아버지 레오나드는 콘힐 이라는 잡지의 편집장이 되고 자기 부친에 대한 전기를 쓴 뒤에 19세기 영국 과학계의 삼총사 헉슬리 후커, 틴달 중 후커와 틴달의 전기를 집필하는 등 왕성한 작품 활동을 전개한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둘째 형의 자살 그리고 시력상실의 충격을 극복, 다시 일어서는 올더스는 이율배반적 삶의 모습을 상상력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길로 들어선다. 벨기에 출신의 마리아 니스와 결혼하고 과학문명의 횡포에 공포감과 혼돈감을 느끼면서 연극, 예술 비평가로 성장한다. 1930년대에 <옵저버>지에 실린 글에서 그는 “내가 글을 쓰는 주요동기는 하나의 어떤 관점을 표현코자 하는 욕망이었다. 아니, 차라리 분명하게 하고 싶은 욕망이었다. 나는 나의 독자를 위해 쓰지 않는다. 사실 나는 나의 독자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나는 글 자체를 위해 글을 '쓰기를 좋아한다. 나는 내가 어떤 재능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내 스스로에게 단지 문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것을 행사하기를 원한다. (중략) 나는 인생에 대한 어떤 안목을 분명히 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작가로 서의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그는 자신의 작품 활동의 근거를 어떤 하나의 관점을 표현하는 데서 찾았다. 독자를 의식해서 쓰는 게 아니라 자신이 제기하는 인생이나 문학에 대한 문제의 해답을 찾아 하나의 관점을 명백하게 하기 위해 글을 쓴다는 약간 유아독존적인 제임스 조이스의 예술관을 보인다.
 사물의 궁극적인 실체를 이해하려는 올더스 헉슬러의 격물치지의 인생관은 어려서부터 난해한 주제에 대한 엄청난 백과 사전적 지식을 습득하게 했고, 다양하고 복잡한 인생에 대한 태도와 본질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진보는 <대위법>이라든가 <목적과 수단> <크롬 엘로우> 같은 작품 속에서 여러 주인공들의 토론과 반론을 통해 잘 대변된다. 문명 비판적인 내용들이 많기 때문에 때로는 인간 혐오자 혹은 비관주의자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올더스 헉슬리는 과학이 사회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집요하게 파헤치려고 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수많은 예술가, 과학자, 작가, 사상가 등의 지식층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들은 모두 다양한 그의 사상을 대변하는 역할 분담자로 여겨진다. 그는 동양의 신비주의에도 관심을 가지고 인도를 여행하였고, 여행을 통해 인간 세상의 다양성과 또 공포성을 본다. 1920년대는 아내와 함께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생활했던 그는 문명비판적 자연주의자였던 D.H.로렌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기도 했다. 프랑스 방스에서 로렌스가 임종할 때는 가까운 호텔에서 머무르며 그를 보살피면서 두 작가의 어떤 강력한 동기감응의 극적인 순간을 체험했다.
 세계와 그 속의 문제들에 대한 포괄적이며 객관적인 접근방식을 희극적인 시각과 비극적인 시각의 양면적 시각을 취하고 있는데, 그것은 과학과 문학에 대한 그의 이중적인관점과 통한다. 인생 후반기에는 첫째 부인 마리의 죽음, 자신의 구강암, 문명비판의 동조자로서 그에게 영향을 준 D.H.로렌스의 죽음이 준 정신적 충격이 전반기의 고난과 겹쳐 그로 하여금 인생에 대한 허무주의적 관점으로 그의 작품 속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고, 인생 혐오자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의 양면적 모습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서로가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로서의 예술과 과학의 상호연관성, 또 물질과 정신 사이의 애매모호하면서 신비스러운 관계에 대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탐색이 역설과 예언의 문학적 업적을 이루어 20세기 지성의 양심을 대변케 하고 있다.
 1929년에 H.G.웰즈, 아놀드 베네트 그리고 줄리언 헉슬리와 함께 올더스는 문학잡지 <리얼리스트>를 창간하였다. 그는 인간의 역경,인간 상황의 변화, 과학이 제기하는 위험성과 가능성, 환경에 대한 인간의 통제, 모든 문제는 인간의 정신적 직관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는 투철한 믿음 그리고 그런 직관은 한 세기 전 그의 할아버지가 관심을 가졌던 정신과 물질의 경계지대에서 발생한다는 생각을 정리하면서 주지주의적 태도에서 신비주의 태도로 전환한다.
 1936년에 나온 <조이스 예술가적 장인>이라는 글을 쓰기까지 올더스는 1927년부터 9년에 걸쳐 18권의 책을 써내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그는 인도인들의 인과업보에 대한 불교적 힌두교적 관점에 공감하면서 이성과 논리가 아니라 어떤 초월적이고 환상적인 것이 있어 그것에 의해 인각사가 벌어진다는 견해를 밝혔다. 또한 반유토피아적 소설인 <멋진 신세계>를 발표하여 과학의 오용과 남용으로 비인간화된 세계의 참혹상을 제시하였던 그는 30년이 흐른 후 죽기 몇 달 전 자신의 예언이 오늘날 현실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올더스 헉슬리의 문학작품에는 희극적인 시각과 비극적인 시각이 공존하고 있는데, 특히 이념에 대한 비판이 주조를 이루고 있고 히틀러 집권체제에 대해서도 비판적 태토를 견지하였다. 정치와 현실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으나 철학자 러셀 등과 같이 평화 운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다가 1937년 거의 실명상태에서 미국으로 떠나간다.
 조부에게서 이어받은 학문과 진리에 대한 헌신적 탐구, 세계의 문제점들에 대한 포괄적이며 객관적인 안목을 가문의 전통으로 이어나간 올더스는 인간의 각 영역, 육체와 정신세계의 특징, 기의 움직임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그의 이복동생 앤드류는 생리학자로 노벨상을 타고 그의 두 고모와 결혼한 에케슬리 가문은 점차 번창하여 토마스 헉슬리의 퇴조와 함께 사교의 중심지가 되어갔다. 뿐만 아니라 토마스 헉슬리의 외손자인 토마스 에커슬리는 그의 형제들과 라디오 개발에 심혈을 기울여 영국 BBC방송의 최고 기술자가 된다.
 열정적인 탐구와 지속적인 거경궁리의 학문적 자세는 자손들에게 유전되어 다방면의 인재들을 배출해냈다. 줄리언 헉슬리는 동물학회의 비서직을 맡게 되고 그의 아을 앤소니 헉슬리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활동하였다. 교회의 과학에 대한 폐쇄적 관점에 반기를 들고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새로운 진리를 전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라디오 대담 및 토론 사회자로 적극적인 과학 홍보활동에 나섰고 1942년부터 꾸준히 저술활동을 병행해서 <필연의 자유> <인간의 독특성> <혁명 속의 삶> 그리고 방대한 <진보 현대적 통합>등을 발표하여 할아버지 토마스 헉슬리의 초인적인 지적 정력을 과시하였다.
 그들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인간의 이 우주 속에서의 위치는 무엇이며 그것에 대해 인간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줄리언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문명은 자유방임주의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여 자유와 책임의 균형을 이루게 해야 한다면서 원자폭탄을 유엔 감시하에 둘 것을 제안하였다. 그의 과학 철학적 안목에 영향을 받아 학자들이 인간과 환경의 연구자로 배출되기 시작했다.
 전쟁을 피해서 미국으로 도망쳤다는 영국인들의 오해와 비난 속에서 1937년 올더스 헉슬리는 아내 마리, 열일곱 살 된 아들 매슈와 함께 노르만디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 D.H. 로렌스와 같이 차를 타고 서부로 출발, 뉴 멕시코주 인디언 원주민들이 사는 타오스 지역을 방문한다. 동양의 신비주의에 심취하기 시작하면서 국내 및 국제 정치, 전쟁과 경제, 교육, 종교, 윤리 등의 문제를 궁극적인 실재의 본성론에 융합시키고자 시도하고 자신의 윤리적 원칙을 천명하는 <목적과 수단>을 완성한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보여주는 어떤 희망에 애착을 느껴1938년 로스엔젤레스에 정착하여 처음으로 선과 악, 환상과 실재,그리고 회춘의 문제를 다룬 소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간 뒤 백조는 죽다>를 써낸다. 나빠졌던 시력도 바스트 방법과 훈련을 통해 조금이나마 회복한 그는 신비주의자들의 삶을 분석하기 시작한다. 가톨릭 신비주의와 불교, 힌두교의 종교적 체험에 몰두하면서 1944년 현재 이승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비리에 대한 불교적 해결을 모색한 <시간은 멈추어야 한다>를 발표한다. LA근교에 목장을 사서 평화와 침묵의 분위기 속에서 신비주의에 더욱 몰두하며 친구 제랄드 허드와 같이 트라버코 대학을 설립하기도 한다. 그는 자기가 쓴 책 중에서 어떤 것을 제일 잘 된 것으로 여기냐는 질문에 <시간은 멈추어야한다>라고 답하면서 “그 책은 나의 가장 많은 감정을 이입시켰다. 때문에 내가 성취하지 못한 어떤힘이 작품속에 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만년 철학>은 요가 또는 다른 신비주의 예를 들면 세례 요한, 중국 도가 사상가들, 불교와 힌두교의 경전 저자들, 모하메드 신봉자 등 세계의 성인이나 예언자들의 명언들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면서 형성되었다.그의 <만년 철학> 개념은 신성한 실재를 인정하는 형이상학으로서 영혼 속에서 신성한 실재와 비슷한 어떤 것을 찾는 심리학이며 인간의 마지막 목표를 모든 존재의 내재적이고 초월적 근거에 대한 깨달음 속에서 찾는 윤리의식이다. 
 과학의 대중화에 힘쓴 형 줄리언에 반해 동생 올더스는 정신적,문화적 현상에 집중한다. 전쟁 후 우울한 침체상황 속에있는 유럽의 모습을 아내와 같이 이탈리아를 방문해 목격한 뒤, 캘리포니아 산림지대인 라이트우드에서 은거생활에 들어가 타고난 그의 기질 중의 하나인 비관론적 관점으로 과학과 전쟁에 의해 황폐해진 인간세계를 동물세계에 빗대며 풍자적인 글을 쓴다. 그것이 <원숭이와 본질>이다.
 좋지 않은 시력 때문에 날카로워진 청력의 힘으로 기억에 의해 산을 오르내리는 일과 속에서 그는 하루에 500단어씩 글을 쓰는 데 몰두하여 요셉 신부의 생애를 다룬 예전의 글 막후의 실력자를 확대해 <루던의 악마들>을 써낸다. 이후 올더스는 인류학 분야에도 관심을 가져 멕시코 경계 지대의 원주민들의 생활상을 알아보게 된다. 그는 원주민들이 선인장으로 만든 메스칼린주를 마시면서 환각상태에 빠져드는 심리적 과정을 아주 면밀하게 분석하고 신비주의자들이 겪는 육체이탈과 같은 것에 대해 체험한다. 감각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미학적 탐색을 계속하고 마약도 실험삼아 복용하며 요가도 실천하여 핏속의 이산화탄소가 어떻게 화학적 변화를 통해 분해 되는지를 과학자적 명증성과 정밀성으로 조사 분석하여 그것을 <감각의 문>과 <하늘과 지옥>이라는 책속에서 밝혀낸다. 그는 메스칼린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우주를 확대시키는 신비의 약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올더스가 그의 일생에서 겪은 세 가지 충격이 있다면 그것은 어려서의 어머니의 죽음, 시력상실, 그리고 형의 자살이었다. 그리고 존경했던 D.H.로렌스의 죽음 및 아내의 암 등으로 계속된 정신적 황폐함 속에서 1953년에는 죽은 로렌스의 동반자 프리다와 죽음의 예술에 대하여 토론하였고, 대승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는 아내가 죽자 1956년 이태리의 바이올린 연주자, 로라 아처와 교제하고 아들 매슈는 의학 공부를 시작하다가 1961년부터 인류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페루의 아마존 원주민들을 연구하여 <에덴이여 안녕>이라는 책을 펴낸다.
 올더스는 1960년 캔사스주 토페카에 있는 메닌저 재단에서 방문 교수로 6주간의 강의를 하는데 그 주제는 ‘우리는 누구인가?’ ‘심령적 혹은 환상적 체험’ ‘역사 속의 개인’ ‘인간의 가능성’ 등이었다. 그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에 인문학 방문 교수로 있으면서 <섬>이라는 작품을 쓰는데, 이 작품은 동양과 서양의 조화로운 화합을 통해 개인의 잠재능력이 실현되는 이상사회를 그린 소설이다. 1961년 5월12일에는 살던 집에 화재가 일어나 할아버지가 물려준 볼테르의 <깡디드> 원판을 위시해 책 3천권과 원고와 편지들을 거의 잃어버리고 자신의 삶 중 1/4이 사라져 버렸다며 한탄해 마지않았다. 이후 그는 혀에 종양이 생긴 구강암 진단을 받았지만 기적적으로 침술에 의해 치료되고 1961년 유럽을 여행하면서 심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국제회의에 참석한다.
 올더스는 암울한 인간 미래상을 그린 <멋진 신세계>나 <원숭이와 본질>과는 다르게 그가 동경해 마지않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회를 <섬>속에 투영시켜낸다. 그 작품에 대해서 올더스 스스로는 “위대한 역사, 폴리네시아 인류학, 산스크리트어와 중국어로 된 서적, 그리고 불교 경전, 약리학, 신경생리학, 심리학, 교육에 관한 논문들, 더불어 소설, 시, 비평, 기행문, 정치 논평, 철학자에서부터 배우, 정신병원의 환자로부터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니는 재벌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람들과의 대화, 이 모든 것이 나의 유토피아적 방앗간의 깔때기 속으로 곡물이 되어 들어가 이 작품이 되었다.”고 논평하였는데, 이것에서 알 수 있듯 <섬>은 그의 인생 말기에 집필한 야심찬 작품이었다. 구강암이 재발되면서 육체의 저항력과 어느 것이 승리하느냐 하는 소통 속에서도 예술과 문학과 과학은 하나다 라는 할아버지 토마스 헉슬리에게서 배운 위대한 진리를 <문학과 과학> 속에 총정리 하였다. 또한 올더스의 부인이 된 로라 헉슬리는 심리치료사가 되어 <당신은 표적이 아니다>라는 책을 써서 성공을 거둔다.
 이후 그는 <멋진 신세계>에서 천진무구한 야만인, 존의 고향으로 묘사되었던 뉴멕시코주의 고원지대로 아내와 여행하고 로스앨라머스 과학실험소에서 1,100명의 청중 앞에서 강연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환상적 체험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상황의 정치적 양상에 대해 생물학적 양상으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생태학의 정치학 - 생존의 문제> 라는 논문 속에서는 형 줄리언과 비슷한 견해를 피력하였는데 인종 전체의 생존과 가능한 한 많은 개개인의 남자와 여자의 선의, 지성 그리고 창의력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좋은 현실적인 정치로서 생태정치학을 제창하였다.
 1963년 마지막으로 유럽을 방문하고 마지막 글로 <셰익스피어와 수필>을 썼다. 육체와 영혼의 경계상에서 특이한 체험으로 불교의 선(禪)에 관심을 갖고 멕시코의 버섯에서 채취하여 합성한 환각제의 일종인 사이러시빈과 영매로서의 무당, 사후의 세계와 텔레파시 등의 초월심리학에 마지막 열정을 기울이다가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던 날인 1963년11월 22일, 케네디보다 몇 시간 후에 숨을 거둔다.
 인간의 우주만물, 자연 속에서의 위치에 대한 토마스 헉슬리의 질문은, ‘과학과 예술은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이라는 입장 속에서 정신 그리고 꿈에 대한 부단한 천착으로 20세기 거대한 문학의 금자탑을 세운 그의 손자, 올더스 헉슬리에서 명백한 대답을 얻지 못했지만 그 애매모호한 정신과 물질의 상관관계에 대해 적지 않은 빛을 던져 주었다.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가 예견하고 있는 미래는 과학기술의 지나친 남용으로 인해 인간성이 파괴되는 끔찍스러운 세계이다. 그것은 결코 멋진 세계도 아니고 용기 있는 세계도 아니다. 한 난자에서 180가지의 인간을 생산해내는 공장과 그 아이들을 타율과 강제에 의해 주어진 조건 속에서 교육, 훈련시키는 장면으로 <멋진 신세계>는 시작된다.
실험용 병 속에서 태아가 자라나고 267일 만에 기계적으로 대량생산되는 태아들은 햇볕이 드는 방으로 옮겨져 병마개가 따진 후 유아실로 들어간다. 그 인간 생산 공장의 모든 작업자들은 소장의 명령에 복종하는 개성 없는 간호원들로서 8개월된 아이를 꽃과 책으로 향하게 하는 조건부여 작업을 시행한다. 저능의 아이들이 책과 꽃을 미워하게 함으로써 능률과 효과를 극대화시키겠다는 것이 포드라는 절대적인 인물의 철학이다.
총 관리인인 머스타파 몬드는 독재자 포드의 하수인이고, 그 밑에 공장장 헨리 포스터라는 자가 있다. 몬드는 전 세계를 총괄하는 관리인들 중 하나로서 유럽을 담당하고 있다. 이 시대는 포드가 절대자로 취급되어 연도의 지칭도 ‘포드 탄생 후 몇 년’으로 명명된다. 이런 전체주의적 계급사회에서 가정생활이라는 것은 위험시된다. 또한 인간감정을 최소화시키고 안정적 세계질서를 최고 가치로 여기는 사회윤리 속에서 진정한 사랑은 싹트지 못하고 왜곡되고 금기시된다. 두뇌가 우수한 최면교육 전문가로 등장하는 인물인 버나드 맑스는 이러한 병적인 인간관계를 보여준다.
올더스 헉슬리는 이 작품 속에서 ‘비인간적 기계문명의 횡포에 맞설 수 있는 셰익스피어로 대변되는 인문학정신’이라는 점을 나타내고자 했다. 비록 인간성의 유지와 회복이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적 상황을 맞고 있지만, 문학으로 이 끔찍한 기계문명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작가적 소명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몇 십 년 후에 닥쳐올지 모르는 이 사회의 주요 지배 원리는 ‘공공성’ ‘단일성’ 그리고 ‘안정성’이다. 이런 통치이념에 반하는 것은 모두 금지되고 과거의 인간사회의 흔적도 소멸되며 과거의 모든 책들은 금기시된다.
등장인물 중 하나인 레니나의 애정행각은 여러 남자와 번갈아가며 벌어진다. 그녀는 태아였을 당시 병에 알코올이 실수로 떨어져 생김새가 찌그러지고 우울하며 감성이 없고 소심한 성격인 버나드 맑스, 낙천적이고 쾌활하지만 지성만 발달된 오만한 성품의 베니토 후버 ,인간 생산 공장의 공장장 헨리 포스터, 그리고 감정공학 대학의 감성교육 엔지니어이자 글쓰기를 가르치는 알파 프러스의 엘리트인 헬름홀즈 왓슨 등과 수시로 접촉한다.
인간 생산 공장에서는 인간의 계급이 알파, 베타, 감마, 델타 등으로 정해져 필요한 인간유형이 결정, 생산되는데, 이 신세계의 통치체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반감과 혐오를 가지는 자들은 알파의 계층, 맑스와 왓슨과 같은 두뇌작업자들이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과잉상태에 있으며 개성의식이 있고 신세대의 온갖 기상천외한 오락에 취미를 느끼지 못하여 통치체계의 구호와 선전을 만들어 내면서도 그것에 스스로 동화되지 못하는 소외된 유형의 인물들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문학은 풍자와 역설의 문학이다. 이런 현대 문명의 첨단과 종착이 비인간적으로 병적인 도착상태임을 천명하면서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서 어떠한 집착과 강박관념으로부터도 자유롭고 해탈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불교적 동양사상을 제시하는 넓은 세계관을 보이는 데서 그의 문학세계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레니나는 내성적이며 사교성이 없는 버나드 맑스를 꺼려한다. 그 이유는 전체주의적 사회에서는 체제에 순응하는 것이 행복인데 그러지 못하고 자신의 자유를 추구하는 버나드의 자기모순에 대해 그녀는 부자연스러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버나드 맑스는 런던 신생아 부화조절 센터의 소장인 포스터에게 도전하고 저항하며 지적 우월감과 육체에 대한 열등의식의 이중적 갈등 속에서 벽지 아이슬란드로 전출을 당할 위기에 봉착한다. 포스터는 25년 전 뉴멕시코로 여행을 갔을 때 그곳에서 애인을 잃어버린 일이 있었음이 드러나는데 그 사건이 작품 뒷부분에 나오는 린다라는 여인과 그녀의 아들 존에 관한 이야기로 전환되면서 작가가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밝혀진다.

버나드 맑스는 레니나를 데리고 뉴멕시코의 인디언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여행을 간다. 그곳에서 기괴한 장면에 혐오감을 느끼는 레니나에게 버나드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이에게 젖을 주는 모습, 소년을 채찍으로 때려 피를 흘리게 해서 뱀에게 뿌리는 노인, 풍년을 위해 기우제를 올리는 원시 신앙의 축제행사 등을 목격하는 중에 그들은 아주 늙어 흉한 모습을 하고 있는, 25년 전에 포스터의 애인이었던 린다과 그녀의 아들 존을 만난다. 이 부분에서 비안간화된 기계문명적 전체주의적 세계에 대한 대칭으로 인디언 원시인들의 가치윤리관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베타계급의 여인이었던 린다로부터 과거 지나온 인생의 역경과 고난을 듣고, 존으로부터 원주민인 포페가 자기 어머니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어머니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타당하고 고생하는 것에서 애증의 갈등을 체험한 이야기를 듣는다. 어머니가 자기의 고향의 아름답고 행복한 문명세계에 대해 말할 때마다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존은 어머니가 글을 가르쳐주어 서구 문명세계의 책과 셰익스피어 전집을 읽는다.
인디언들의 생식능력과 불임이 문명으로 여겨지는 서구 문명사회의 갈등구조가 대비되어 존을 혼란시키기도 한다. 어머니에게서 들은 ‘멋진 신세계’의 서구 기계문명에 대한 동경과 인디언들의 종교, 신화가 가지는 자연적 은밀한 가치의 두 세계관 속에서 존은 성장한다. 그는 셰익스피어 전집을 읽으면서 말이 가지는 어떤 마력을 느끼며 어머니와 성관계를 가지고 있는 포페를 살해하려고도 하고 어느 노파에게 질그릇을 만드는 법도 배우면서 행복을 느낀다. 인디언들의 성인 의식에 참여했다가 백인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며 벼랑 끝에서 피를 흘리며 서 있다가 달빛 속에서 시간, 죽음 그리고 신에 대한 어떤 커다란 깨달음에 도달한다.
어려서부터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셰익스피어 작품은 과학기술의 비정상적 과잉발달로 인한 인간성 상실의 비극적 상황을 치유할 수 있는 대칭적 처방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올더스 헉슬리의 인간의 상상력과 예술적 직관에 대한 철저한 믿음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차단되고 따돌림 받으면서 살아온 존은 버나드 맑스와 비슷한 소외의식의 인물로 그려지기도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 빗대어지기도 하는데 런던으로 가겠느냐는 질문에 "오, 멋진 신세계!"라며 경탄하고 레니나에게 어떤 연정을 느끼기도 한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작품 속에서 나오는 남녀간의 욕정과 본능을 연상하면서 누워 잠들어 있는 레니나에게 성적 흥분을 느끼기도 한다. 린다와 존을 런던으로 데리고 온 버나드 맑스는 소장 포스터의 과거 비밀을 폭로하여 자기를 벽지로 전출시키려는 소장에게 복수 하고자 한다.
포스터는 존이 아버지라고 부르자 당황해하며 어쩔 줄을 모르고 사실관계를 부인하다 다른 사람들의 조소를 받으며 소장직을 사퇴한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린다와 포스터의 자연스런 성관계에 의해 태어난 존재라는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는 인조인간들에게 유명한 존재가 되지만 린다는 오히려 처량한 신세가 되어 소마를 과잉복용하면서 환각상태에 빠진다. 존을 데리고 와 그를 이용하여 기세를 얻는 버나드 맑스는 존이 문명세계에 대해 경외감이나 존경심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영혼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고 지역 총 지배자인 머스타파 몬드에게 보고한다.
학교를 방문하는 존은 셰익스피어 대신 감정공학이나 죽음 예비교육, 혹은 후각, 시각, 촉각을 살린 음악 교육이 시행되는 것을 본다. 야만인으로 취급되는 존은 레니나에게 연정을 느끼지만 그녀가 육체적으로 접근하면 오히려 피하고 셰익스피어 작품 속에서 위안을 느낀다. 버나드 맑스가 제멋대로 사람들을 초대하여 자기를 구경시키려고 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존에게 레니나는 후각, 촉각, 시각의 효과가 생생하게 연출되는 영상물과 감성공학의 연회장에서 사랑을 고백하려고 하지만, 대중들에게 막강한 호소력을 지닌 인기가수에게 레니나가 끌려 나가자 버나드 맑스는 낙심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고 자기가 로미오이고 레니나가 줄리엣이라고 여기면서 자기 위안을 얻는 존은 왓슨과 친해진다. 왓슨도 <로미오와 줄리엣>이야말로 탁월한 감성공학의 산물이라고 공감을 표시하는데, 이는 셰익스피어로 대변되는 문학의 본연적 가치와 힘이 첨단생명공학에 비해 얼마나 더 큰 것인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레니나는 또 소장 포스터와 대화를 가지면서 존을 생각하다가 어느 병 속에 태아에게 주사약을 주는 것을 잊어버려 결국 그 아이가 22년 8개월 4일 후 어떤 질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게 한다.
여러 남자들과 관계를 갖지만 만족을 얻지 못하고 원시인인 존만을 애타게 원하는 레니나는 결국 그를 찾아가 구애하고, 존은 남자가 결혼하려면 사자나 늑대의 가죽을 여자에게 주고 관계를 갖는다는 인디언 관습을 말하면서 그녀의 육체적 접근은 거부하면서 셰익스피어의 싯귀절을 읊어대며 자신을 잔인하게 때려 상처를 입히는 광란적인 심리상태를 보인다. 이는 자기 어머니의 성관계를 목격한 뒤 생긴 성혐오증에 따른 심리적 자학증세인지도 모른다. 그는 44세의 나이로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는 어머니 린다를 찾아가 옛날 일을 회상한다.
그의 뇌리에는 어머니가 들려주던 문명화된 저 다른 세계의 아름다운 공상의 이미지가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었지만 어느새 포페와의 추악한 장면들이 대신 자리를 차지하는 모순적 애증의 심리상태에 빠진다. 포페에 대한 질투심에 린다를 마구 흔들어 숨을 못 쉬어 죽게 만든 후 존의 울부짖는 통곡이 병원에서 평안한 죽음의 현장 교육을 받으러 온 아이들과 간호원들을 놀라게 만든다.
어머니가 죽은 뒤 일과를 끝마치고 소마를 배급받기 위해 병원 현관에 모여 웅성대는 똑같은 모습의 인조인간 162명에게 존은 소마는 행복을 주는 약이 아니라 독약이라고 외쳐댄다. 그는 자기가 그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기 위해 왔다며 노예가 되기 싫으면 인간성을 회복하고 진정으로 멋진 신세계를 건설해야 한다고 부르짖다가 대중의 분노를 사 공격을 받고 폭동진압 경찰에 체포되어 맑스, 왓슨과 함께 서유럽 통치자몬드에게 끌려간다.
몬드와의 대화에서 존은 문명이 좋은 점도 있고 아름다운 점도 있지만 자신은 그것이 싫다면서 셰익스피어의 시가 감정공학의 어느 첨단 예술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한다. 그에 대해 몬드는 행복은 안정 속에서 찾을 수 있다면서 하층 계급일수록 만족해하고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자기가 시행한 두 실험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하나는 사이프러스 섬에서 22,000명의 최고급 부류의 알파형들을 정착시켜 농업과 기타 산업에 종사시켰으나 결과는 실패였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아일랜드에서 150년 전에 행한 실험으로 노동시간이 짧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에게는 너무 많은 여가는 소요와 불안을 야기시켜 해롭고 과학이나 예술은 행복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됐다며 독재자적인 가치관을 표명한다.
그의 논리에 의할 것 같으면 행복이란 진리보다 더 다루기 어려운 것이고, 지식과 진리가 최고의 선으로 여겨졌던 과거와 달리 새로운 세계의 통치철학은 진리나 미로부터 안락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는 행복이 우선하는 통치질서의 기본이념은 무한한 과학탐구의 자유가 통제되어 유토피아의 세계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탄저병 폭탄이 나왔던9년 전쟁 후 행복을 위해 예술, 과학, 종교가 희생되었으며 이제 모든 것은 쾌락을 주는 인기가수의 위력에 달려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존은 사람이 늙어갈수록 종교적 감정이 더해지고 종교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항상 젊음의 욕망이 좌절되지 않고 오락의 대체물이 있으며 소마에 의한 쾌락이 보장된 현대의 사회질서 속에서 신이 있겠느냐는 몬드의 질문에 아마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존은 인디언 원주민의 마을에서 공동 사회로부터 차단되는 고독한 생활을 했지만 런던에 와서부터는 공동생활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고독해질 수 없는 역전된 상황에서 이중의 고통을 겪는다. 그는 <리어왕>을 인용하면서 “문명인은 불쾌한 것을 참을 필요가 있으며 자기 부정과 순결을 중요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존은 불편한 삶을 원하고 신과 시를 원하며 자유와 선과 죄 그리고 위험을 원한다면서 문명사회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한다.
맑스와 왓슨, 그리고 존은 개인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말하며 이 문명세계를 떠나게 해달라고 몬드에게 청원한다. 더이상 뭇사람들의 노리개나 실험대상이 되지 않고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존은 언덕 위의 등대 옆에 숨어, 잠도 자지 않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인디언 원주민의 수호신들과 예수에게 기도하면서 자기수련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고독한 상태에서 행복을 느끼면서 문명생활에 오염되지 않고 숲 속에서 자급자족 생활을 하면서 그는 기쁨을 얻는다. 불쌍했던 어머니도 생각하고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뉘우치면서 자신을 마구 채찍질하면서 참회의 시간을 갖는다.
사흘째 되는 날, 어떻게 알았는지 기자들이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한다. 어머니의 모습과 겹쳐 그의 머릿속에는 그가 매춘부라고 욕을 했던 레니나의 모습이 떠오르고, 그것에 고통을 느낀 그는 가시덤불에 넘어져 허우적대면서 실성한 것처럼 자신을 마구 때린다. 망원렌즈로 촬영된 이 광경이 ‘서레이의 야만인’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흥행에 성공을 거두자, 사람들은 떼를 지어 그에게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들로부터 온갖 야유와 조롱을 받으면서 존이 원숭이 취급을 받는 중에, 레니나가 헬리콥터를 타고 와서 애원하듯 그에게 접근하지만 그는 채찍을 휘두르며 거절하고 자신을 마구 후려친다. 그러자 그곳에 있는 모든 군중들이 그를 따라 서로를 때리면서 야단법석의 노래와 난장판을 치른다. 자정이 넘어 모두가 떠나간 뒤 소마를 먹고 관능의 발작상태에 지쳐 잠들어 있던 존은 깨어나 “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을 외치다가 그날 저녁 천장에 목매어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멋진 신세계>에는 문학과 과학의 화합적 절충과 조화를 작가 정신으로 하고 있는 올더스 헉슬리의 문학관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몬드가 작가의 한 측면을 대변하고 있다면 존도 다른 대칭적 측면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인디언의 자연 환경 속에서 셰익스피어의 정신을 교육받은 존은 예술의 순수성을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상상력의 자의적 파괴를 상징하는 자살을 기도하는데, 그의 자살은 기계문명과 인간성 보존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점을 나타낸다. 이 작품의 내용은 작가가 600년 뒤를 예견하고 쓴 것이지만 실은 100년 뒤에도 가능한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는 자신의 외증조부인 매슈 아놀드의 주장, 즉 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상상력, 그의 본연성과 가능성을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문학적으로 실현시킨 것이다. 이것은 과학이 모든 것의 만병통치약이라 주장했던, 올더스 헉슬리의 할아버지인 토마스 헉슬리의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철학자는 통치자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플라톤이 주장한 것에 대해 올더스 헉슬리는 예술가, 특히 문학가가 새로운 세계 질서의 주동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작가정신을 이 작품 속에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는 1963년 69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소설, 시, 단편집, 심리학, 철학, 과학, 사회비평, 문명비평 등 무려 30권의 책을 내면서 백과사전적 박학다식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독설가적인 매서운 비판의 날을 세우는가 하면 장난기 있는 위트와 유머의 대가이기도 하였으며, 진리는 시궁창 바닥에 있다는 아주 서민의식적인 인생관과 문학관, 용기 있는 실험정신을 가지고 인간을 탐구한 인간학의 거두었다. 때로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간의 오만함 때문에 미래인류의 파멸을 예고하는 어두운 예언자적 작품을 많이 남겼지만 그는 그 대안을 인간성의 회복, 동양정신, 그리고 이율배반적 상대요소를 아우르는 포용적 만년철학의 개념으로 완성하여 제시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풍자, 이념과 사상의 매체로서 문학을 구사하여 기술발달과 과학의 지나친 남용으로 인한 서구문명의 몰락과 파괴상을 적나라하게 그려 우리에게 깊은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는 중용의 가치를 통해 모든 모순적 대칭 관계를 지양하여 조화 있는 질서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했다. 극단적 행태를 벌이고 있는 팽창주의적 세력에 의한 오만과 압력 앞에 깜빡거리는 오늘날 서구문명의 위기적 상황을 생각할 때 올더스 헉슬리가 던지는 예언자적 메시지는 우리가 21세기를 살며 커다란 지표와 귀감으로 삼아야 될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가 서구문명의 몰락에 대한 치유책을 찾고자 했던 동양적 가치관과 신비주의적 정신세계의 오묘함에 대한 우리 자신의 새로운 일깨움과 본연의 자세로 되돌아오는 원시반본(原始返本)의 필연적 사유가 여기에 있다.
과학기술 중심의 오만한 문명은 결국 인간파멸의 재앙을 불러온다는 그의 문명사적 시각은, 서구문명과 사상에 대한 비판에 있어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의 견해와 상통하고 있다. 프롬은 그의 <사랑의 예술>이라는 저서에서, 서구 현대 문명은 시장경제의 원리와 소비지향의 대량생산으로 인해 인간이 규격화된 상품처럼 취급되어 소외감, 불안, 노이로제등의 병적 상태를 야기시켜 놓았고, 그 단절감의 병적 상태가 극복될 수 없을 때 기계 같은 자동인형의 존재로 전락한다고 주장한다. 정서적, 감정적으로 미성숙되어 사랑할 줄 모르는 현대인이 생성되고 신뿐만 아니라 인간 스스로에 대한 사랑의 해체는 지나친 자기도취적 성향을 유발하여 사물의 실체에 대해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합리성이 결여되어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여 본절을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의 실천으로 프롬이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자발적인 자아의식 개발, 참선과 단전호흡 등의 명상법을 통한 정신집중 훈련, 교육제도의 개선 등은 헉슬리의 주장과 흡사하다. 프롬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 세계와 인류에 대한 믿음을 개발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생산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라고 강조한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이 기반을 둔 합리적 신뢰로서 <사랑의 예술>에서 현대문명의 위기에 대한 처방을 찾고 있는 프롬은 또 한편으로 셰익스피어 같은 예술가들의 상징언어가 현대인에 의해 잊혀진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 점에 있어서도 헉슬리와 유사하다. 꿈, 신화, 동화에서 사용되는 상징언어는 영혼과 정신의 내적 경험을 감각체험처럼 외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시간과 문화의 벽을 초월하는 인간의 심오한 보편적 공통어라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축적된 난해하고 신비스러운 주제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이용, 사물의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인생과 우주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 올더스 헉슬리의 문학적 목표였다. 현대 문명을 비판한 그의 작품 <멋진 신세계>에서 몬드와 존으로 각각 대변되고 있는 과학 기계주의에 입각한 물질문명과 인간의 예술적 직관과 상상력에 입각한 인간성 회복이 조화로운 화합과 중용을 이루어야 한다는 철학이 깔려있다. 과학이 잘못된 방향으로 남용될 때 발생하는 부작용에 대한 과학이 잘못된 방향으로 남용될 때 발생하는 부작용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멋진 신세계>는 기술 발달에 의한 이상국가 건설은 하나의 허구이며 정반대의 파국적 결과를 몰고 온다는 역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발전에 대한 몇 가지 논고>에서 헉슬리는 자연을 정복하려는 노력의 결과가 저능아와 기형아의 출산으로 나타남을 지적하면서 그것은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천벌이며 유린당한 자연이 가져다주는 복수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 개개인의 품성과 타고난 소질이 희생되는 생물학적 진보는 인간이하의 저차원으로의 후퇴이며 과학기술의 발전이 바로 인간 발전은 아니며 오히려 원시적 인간이 더 행복하고 덕이 있으며 창조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특유의 백과사전적 지식 가운데 과학지식을 동원하여 기계 문명이 가져올 끔직한 미래상을 그려 서구문명의 인간성 말살을 예언한 헉슬리는 차츰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인간존재의 본질과 인간의 본연성에 대한 철학적 탐색을 시도하면서 동양의 심오한 정신문화로 방향을 돌렸다. 헉슬리는 <지식과 깨달음>이라는 글에서 지식보다 깨달음을 더 우선적으로 치면서, 깨달음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개념체계인 지식의 축적에서 오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경험에 대한 자발적이며 직접적인 통찰력이라고 말함으로써 서양철학보다도 동양철학에 더 근접하는 사상의 면모를 보인다. 인간의 커다란 유산이면서도 한편으로 치명적인 해가 될 수 있는 말에 의존한 지식교육은 인간의 자아실현을 방해한다면서 언어의 횡포와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해방될 때에만 직관적인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노장사상이나 우파니샤드 같은 힌두교 사상, 불립문자의 선불교사상, 에크하르트 같은 신비주의자들의 역설의 논리를 자주 예로 들면서 스스로를 안다는 것은 총체적 인식이며 진리는 가르쳐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쾌락적 주지주의 입장에서 신비주의 입장으로 바꾸면서 정신세계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 헉슬리는 인도를 방문하여 불교나 힌두교의 교리들을 섭렵하고 가톨릭교의 신비주의자들에게도 심취한다. 동서양의 역사적 성인, 예언가들의 명언을 수집하고, 그들의 다양한 관점을 총망라, 절충하여 그의 만년철학의 개념을 창조하여, 인간의 신에로의 보편적 접근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그의 이론 탐구는 모든 주요 종교의 공통적인 원리, 즉 진리는 보편적이며 신은 하나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초심령 과학에까지 미치고 있다. 특히 인도의 요가사상과 중국의 대승불교, 선사상에 몰입하여 그들의 본질적 자연관과 우주관을 여러 논문 속에서 해명했고 소설 속에서 구체화시켜 묘사했다. 이런 그의 신비주의 사상 속에는 존재와 부재, 말과 침묵, 빈 것과 가득 찬 것 등의 모순 사이에서 역설적 진리를 깨닫는 불교적 인식론이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잭크린 브리쥐먼이 편집한 헉슬리의 신에 대한 수필 모음집인 <헉슬리와 신>이라는 책은 헉슬리의 여러 종교에 대한 비교 연구, 특히 동양철학과 신비주의 그리고 종교와 다른 여러 제반 문제와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깊이 있는가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달마의 선사상을 이은 육조선사 혜능에 대한 일화라든가 선에 대한 글들은 서구인으로서 동양사상에 깊은 이해를 가진 그의 철학적 경지를 잘 드러낸다. 올더스 헉슬리의 문학정신은 후기에 신비주의적 경향으로 기울지만 전반적으로는 과학적 인도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이율배반적 모순적인 인간 존재에 대한 아주 노골적인 분석으로 인간이 신의 경지와 동물의 차원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부각시킨다. 헉슬리는 인간 존재의 본질은 사랑에 있음을 그의 모든 작품 도처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 사랑은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의 양분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육체적 관능적 사랑에 대한 주인공들의 집요한 추구는 때때로 비정상적이기까지 하다. 지나친 관능의 포로가 되어 애욕에 집착할 경우 나타나는 비인간성을 폭로하기도 하고 그 유혹에 넘어가는 인간의 연약함도 부각시켜 인간 조건의 부조리성을 주제로 삼는 것이다.
60세인 억만장자 스토이트가 22세의 버지니아에게 느끼는 육체적 집착, 버지니아를 둘러싼 오비스포와 그의 조수피트의 경쟁의식, 유스타스의 관능적 애정행각과 세바스천의 젊었을 때 가정부와의 정산, 수녀 같은 금욕주의적 아내에게 만족을 못 느끼는 월이 성욕의 노예자가 되어버린 바브스와 벌리는 외도 등은 부정적으로 다루어지지만 존과 릴리안, 풀과 룰라의 관계는 긍정적으로 묘사되어 그것과 대조를 이룬다. 특히 38세인 대학교수 풀은 어머니의 과잉보호 때문에 여성에 대한 복합심리를 보여오다가 죽음의 위기에 몰리를 룰라를 만나 신성한 사랑의 감정을 느껴 새로운 인간으로 변신, 용감히 감시망을 뚫고 자유를 찾아 도피함으로써 사랑의 위대한 힘을 실증한다.
헉슬리는 D.H. 로렌스의 성 해방과 인간 본연성 회복에 깊이 공명하여 그와 가까이 교류했고 로렌스의 모든 편지들을 모아 편집했으며 로렌스가 죽을 때에는 임종을 지켜보고 로렌스의 여인, 프리다와 많은 대화를 가졌다. 시간이라든가 욕망, 증오, 개인의 제한된 성품으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하는 그의 초월주의적 사상은 로렌스의 문학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면을 가지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문학정신은 양면적 시각의 견지 속에서 반대적 두 요소를 중용으로 화합시켜, 인간이 동물과 신의 간극 속에서, 그 본연성을 지키면서 자멸하지 않고 인간의 유산인 언어를 통하여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동양의 신비주의가, 서양의 과학이 적절히 사용되게 보장하고 동양의 삶의 예술이 서양의 에너지를 순화시키고, 서양의 개인주의가 동양의 전체주의를 완화시키는 것을 작가인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여겼다. 올더스 헉슬리는 동양과 서양의 상호보완적 화합에 의해 현대문명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야 한다는 자연친화적 인본주의 사상을 시종일관 실천한 작가였다.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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