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러명의 모험가들을 알고 있다. 콜롬보스나, 제임스 쿡, 암 스트롱, 마르코 폴로...
그러나 저자는 생소한 이름이긴 하지만 남극 탐험사에 관한 거론에서는 절대 빠지지 않는, 어니스트 섀클턴 경(Sir, Ernest Shackleton)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는 무려 3차례에 걸쳐 남극을 탐험했다. 1901년에 로버트 스콧대령 휘하에서, 1907년 독자적으로 탐험대를 이끌고, 1914년에 세번째 남극 탐험을 떠났다.
우리는 세 번째 남극 탐험을 고려할 것이다. 무려 635일간의 사투가 진정 어떤 의미를 주는지에 대해서..

1913년 섀클턴은 "대단히 위험한 탐험에 동참할 사람을 구함. 급여는 쥐꼬리만함. 혹독한 추위와 암흑과 같은 세계에서 여러 달을 보내야 함. 탐험 기간 동안 위험은 끊임없이 계속될것이며, 무사히 귀환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음. 그러나 성공할 경우 명예와 만인의 사랑과 인정을 받게 될 것임."이란 문구의 탐험대 모집 광고를 냈고, 3명의 여자를 포함한 5000여 명의 지원자 중에 각계각층의 28명 탐험대원으로 출발 하였다. 선원의 비율이 많긴 하였지만, 생물학, 지질학, 물리학, 생화학드을 전공하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강사들, 어부,의사, 사진사, 조각가등 언뜻 오합지졸처럼 보이는 이들이 남극에서 극적으로 630여일을 버텨내었다.


예상 경로는 사우스조지아 섬을 출발, 웨들 해를 거쳐 남극 대륙에 상륙한 후 2400킬로미터를 걸어서 이동한 다음, 남극점을 거쳐 반대편 해안인 로스해로 빠져 나오는 것이다. 예정대로면 하루에 최소한 24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했다. 

이들은 2년 넘게 걸려 버려져 있던 폴라이스 호를 인수하여 '인듀어런스(Endurance)라 부르고, 1914년 8월 1일에 출정의 돛을 올렸다. 불행하게도 출항일과 거의 동시에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총동원령이 내렸지만, 해군성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 경이 계속 항해를 하게 해 주었다.
2달 간의 항해 끝에 11월 5일, 남극 탐험의 전초 기지인 사우스조지아 섬의 그리트비켄 포경 기지에 도착했다. 다시 한 달 후인 1914년 12월 5일에 출발하여 1915년 1월 전에 웨들 해를 건너 남극 대륙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부빙들과 마주쳐 1915년 1월 18일 부빙속에 꼼짝없이 갇히게 되었다. 2월 24일 결국은 풀려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갇힌 채 겨울을 나기로 결심한다.
드디어 5월초, 해가 마지막으로 수평선 위로 떠오랐다가 천천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극의 밤이 시작되어 79일간 암흑의 시간을 이겨 내야만했다. 사람은 해를 보지 못하면 우울증에 걸리는데,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만났기에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다.

8월 1일 드디어 부빙이 갈라졌지만, 더 큰 위기가 온다. 배를 둘러싸고 있던 부빙들이 배를 들이박기 시작한 것이다. 10월 27일 드디어 배를 포기하고 탈출하게 된다.
이들은 폴렛 섬을 향해 행군을 하기로 결심한다. 북서쪽으로 약 557킬로미터 떨어진 그곳에 1902년 스웨덴 탐험대가 만든 오두막과 비상 물품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짐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10월 30일 드디어 행군을 시작한다. 하지만 하루에 1킬로미터도 전진하지 못했다. 얼음위를 걷기에 보트를 들고 가야했지 때문이다.
결국 11월 1일 걸음을 멈춘 섀클턴은 일명 '오션 캠프(Ocean Camp)'를 치고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그곳에서 버티자고 제안한다. 이들은 이제 살아남는것이 문제였다. 오직 음식으로만 체온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고래 기름까지도 먹을 태세였다.
부징 군집은 하루 3킬로미터로 전전히 이동하엿지만 그들은 부빙위에서 북쪽으로 130킬로미터를 이동하였다. 
12월 23일 더 이상안되겠다는 판단하에 이동을 개시했지만 2킬로미터의 전진에 그쳤다. 결국 다시금 행군을 멈추고 '페이션스 캠프(Patience Camp)'를 쳤다. 1916년 4월 9일 그들은 인듀어런스 호의 목재를 이용해 선체를 보강한 3척의 보트, 제임스 커드호, 더들리 더커 호, 스탠콤 윌스 호를 바라에 띄웠다. 교대로 노를 저어가면서 힘겨운 여정을 이어가는 동안 섀클턴은 거의 잠을 자지 못하였다. 언제 어디서 부빙이나 빙산이 덮칠지 몰랐기 때문이다.
1916년 4월 15일 드디어 뭍에 발을 내려 놓았다. 출항을 시작한 날로 497일 만의 일이었다.
비록 폭 30미터 길이 15미터에 불과한 엘리펀트 섬의 귀퉁이였음에도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쓰러지고  쉬려고만 하였으나 섀클턴은 안주하면 죽는다고 생각하여 1916년 4월 24일 5명의 대원만을 대리고 바다에 배를 띄웠다. 그는 사우스조지아 섬에 닿을 확률이 거의 희박한 것을 알았지만 모험을 시작하였다.
기다리는 이들도 언제 올지모를 사람들을 기다리며 체념할 수도 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들을 언급하며 구조선이 오리라는 기대를 결코 놓지 않았다.

1916년 5월 10일 섀클턴과 5명의 대원들은 기어코 기적적으로 사우스조지아 섬에 도착하였다.
부서지기 직전의 보트로 섬 맞은편의 포경 기지까지 돌아가는 것은 무리였다. 대원들은 고개를 저엇던 해발 3000미터가 넘는 산을 넘자고 섀클턴은 말하였다. 
뜻을 같이 하기로 한 대원 2명과 산을 올랐다. 방전될 대로 방전된 상태에서 산을 오랐고 그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미끄럼 타듯 산을 내려갔다. 
 
드디어 5월 20일 3명은 스트롬니스 포경 기지에 도착하였다.

다음 날인 5월 21일 나머지 3명의 대원이 먼저 구조되고, 3일째 되는날 나머지 대원을 구조할 배가 떠났지만 불과 60여 킬로미터 앞두고 부빙 군을 만나 회항하고 말앗다. 
아직 세계대전 중이라 더 큰 배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4개월이 지난 8월 25일, 칠레 정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얼음 없는 바다에서만 항해하라는 조건을 달고 옐코 호를 내주었다. 
1916년 8월 30일 마침내 엘리펀트 섬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섬에서는 기적처럼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쌍안경을 든 섀클턴은 서둘러 대원들의 숫자를 세어 보았다.
정확히 22명, 한 사람도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아 있었다. 
얼마나 눈시울이 뜨거워 졌겠는가.. 이글을 치고 있는 나도 가슴이 뭉클해지는데...

비록 남극 횡단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그보다 값진 것을 얻었다. 다름 아닌 27명의 생명.
그들은 1914년 8월 1일 영국을 떠난지 760여 일만에, 1914년 12월 5일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출발한지 635일 만에 문명 세계로 쉬환할 수 있었다.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절망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환은 결국 위대함은 절망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라는 진리를 전 세계에 공표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어떻게 모두 돌아 올 수 있었을까? 섀클턴의 어떤 리더십이 발휘된 것일까?
첫째, 대원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주인으로 느끼게 하였다. 
'당신들이 바로 탐험의 주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그들이 스스로 운면의 주인이 되었다.
둘째, 그는 불필요한 것은 가차 없이 버렸다.
배가 난파된 후 비상식량이 저장되어 있는 폴렛 검까지 약 557킬로미터를 행군할 계획이었고, 살아남기 위해 짐을 최소화했다. 생존을 위한 희망만 빼고 쓸데없는 것은 모두 버렸다.
셋째, 그는 오기를 부리지 않았다.
폴렛 섬까지의 행군은 무리라는 사실이 얼마 안가 드러나자 즉시 행군 계획을 중단했다. 그는 포기해야 할 것을 빨리 포기할 줄 알았으며, 자신의 자존심보다는 27명의 생명을 존중했다.
넷째, 그는 어떠한 위기상황에서도 미래를 준비했다.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엿보았다. 결국 그들을 살린 것은 절망적인 위기 속에서도 끊임없이 손질했던 3척의 보트였다.
다섯째, 그는 최종 목표를 잊지 않았다.
497일만에 흔들리지 않는 엘리펀트 섬 해안에 닿았을때, 안주하고 싶은 유혹이 충분히 들 만했다. 하지만 거기는 그들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결국 섀클턴은 대원들에게 이섬에 안착하는 것이 목표가 아님을 확실히 주지시켰다.
여섯째, 그는 과감하게 도전했다.
사우스조지아 섬에 가기위해 탈 수 있는 보트는 1척이었고, 항해마저도 해류와 바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배를 다시 얼음 바다 위에 띄웠다. 삶의 기회는 과감히 도전하는 자에게 미소를 짓는 법이다.
일곱째, 그는 끝까지 책임졌다.
기적처럼 사우스조지아 섬의 서쪽 해안에 닿았고, 다시금 선의 산 정상을 넘어 동쪽의 포경 기지에 닿았다. 그렇게 생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섀클턴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엘리펀트 섬으로 되돌아갔다. 어쩌면 영영 돌아 올 수 없을지 모르는 그 악몽 같은 바닷길을다시 거슬러간 것이다.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서.결국 남은 22명의 대원 모두를 살려냈다. 인간이란 책임지는 만큼 존재한다. 

섀클턴과 27명의 대원은 애초 계획인 남극 횡단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실패는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 그 어떤 성공보다도 위대한 것을 이워냈기 때문이다.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를 펼쳐 보임으로써 도전와 모험의 위대함을 일깨워 주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21년 9월 17일, 섀클턴은 또 다시 남극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남극 대륙에 다시 발을 딛기 직전에 삶을 마감했다. 시신은 사우스조지아 섬에 묻혔다. 하지만 그의 도전과 모험을 향한 열망은 지금도 살아 남아 현실에 안주하려는 우리를 깨우고 있다. 그는 지금도 말하고 있다. 
"모험하라.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모험하라."




부끄럽다.. 이글을 읽을때도 그랬고.. 이글을 다시 올리면서도 그랬다.
악조건이 아님에도 더 이상 악조건은 없을거라 합리화하면서 진행을 멈추었던 것들이 생각난다.
솔직히 그것들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지만, 그러면서 다시금 그런 시간이 되면 그러하지 않고 어떠한 것이 와도 부딪힐수 있을 거라는 생각만하였지. 
스스로 만들어 내고 부딪히고 헤쳐나가려 뛰어들지 않고 안주하고 있는 모습에 나 자신이 부끄럽다.

글을 읽으때는 막연한 생각이 들고 가슴도 뭉클해서 여러가지 생각들을 못했는데, 글을 올리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진정한 모험가 섀클턴이 나에게 말하고 있는듯하다.
도전하라. 무엇이든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도전하라. 그리고 역경에 부딪히라. 또한 동료를 생각하면서 오기를 부리지 말라. 현실을 직시하고 제대로 파악해서 빠른 판단으로 역경을 역경대로만 받지, 그것을 부풀리지 말라.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목표를 잊지말라.

모험.. 모험.. 
언제부턴가 쉬운것들만 찾고 계산만 해보고 있는 나 자신에게 일침을 준다.
예전 첫 배낭여행을 마치고 다시금 떠나는 두번째 여행은 나에게 잊지못할 감동과 추억을 주었다. 특히 그 여행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힘든일들을 주었고, 그렇지만 즐거움을 배가 시켜 주었다.
부딪혔다. 고생을 자처했다. 그렇지만 그것들에서 제대로 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다른 문화를 가진 그들의 진정한 모습들을 관찰할 수 있었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도 있었다. 

도전하고 모험하는 그 순간 패배를 이겨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사진을 몇 장 올려 본다.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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