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독일어: Karl Heinrich Marx1818년 5월 5일~1883년 3월 14일)는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라인란트 출신의공산주의 혁명가역사학자경제학자철학자사회학자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이다. 1847년 공산주의자동맹을 창설했다. 1847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공동집필해 이듬해 2월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과 1867년 초판이 출간된 《자본론》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았다. 맑스, 막스, 칼 마르크스 등으로 표기하기도 하나, 외래어 표기법에 준하는 표기는 “카를 마르크스”이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라인란트의 유서 깊은 로마 가톨릭 도시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수대에 걸친 유대교 랍비의 후예였다. 그 가문의 성은 원래는 모르데카이(Mordechai)였으나 마르쿠스(Markus)로 고쳤고 다시 마르크스(Marx)로 바꾸었다. 아버지 하인리히(Heinrich)는 유대인이 관직을 갖는 것을 금하는 차별 법령을 피하기 위해 1817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기독교인이었다. 아버지가 기독교로 개종한 또다른 이유는 그 자신이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마르크스는 개방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카를 마르크스의 저서 중 집필의 궤적을 알 수 있는 최초의 글은 고등학교 시절 쓴 세 편의 소논문이다. 그 중 세 번째 것인 《어느 젊은이의 직업 선택에 관한 고찰》은 그의 인생이 어떤 방향을 취하게 될 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마르크스는 직업 선택을 앞둔 젊은이라면 의무, 자기희생, 인류의 안녕, 완성에 대한 숙고에 입각해야 하며, 이런 종류의 관심이 서로 상반된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류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자신의 미래와 관련된 일련의 불안들과 연결시켰다. 마르크스는 열 일곱 살 때부터 이상적인 결정과 인간 생활의 실제적인 결정들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한다고 보았다.[1]

트리어의 고등학교를 나온 뒤 1835년 10월 본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였다. 아들이 자신처럼 변호사가 되기를 바란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고, 점점 법학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아들의 변화를 보면서 아버지는 아들이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그에 맞는 ‘사회적 지위’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을 걱정했으며, 결국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본 대학교에서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전학했다.[2] 그러나 베를린에서도 그는 역사와 철학에 몰두하였다.

베를린에서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에게서 미학적, 철학적 혁명의 방안을 찾고자 하는 브루노 바우어 등의 헤겔좌파, 혹은 청년헤겔학파와 교제하였는데 당시 그의 동료들은 박학다식함과 논리로 토론을 주도하는 청년 마르크스의 똑똑함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당시 독일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철학은 단연 헤겔의 것이었다. 헤겔은 역사와 사회의 발전은 절대정신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며 그 과정은 변증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절대정신의 대변자이자, 실현도구라고 보았으며, 그 보편국가가 프로이센이라고 얘기함으로써 프로이센에 철학적 존재 이유를 제공했다.

이러한 헤겔에 대해 청년헤겔학파로부터 비판이 가해졌다. 그들은 헤겔 사상의 기본적인 틀을 수용하면서도 절대정신을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라고 파악했다. 아울러 프로이센을 보편국가라고 주장한 헤겔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의 사상을 좌파적으로 해석했다. 이것이 반체제적 혁명의 씨앗이 된다고 여긴 프로이센 정부에 인해 청년헤겔주의자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 가해진다. 마르크스의 활동도 이에 영향을 받아 계속 제약되었다.

결국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1841년에 청년 마르크스는 예나 대학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점〉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청년헤겔학파,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1836년 《기독교의 본질》을 비롯한 기독교 비판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되었다. 후에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전도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정리, 헤겔철학에 과학적 요소를 부여하고자 했다.


박사학위 과정을 마친 후 고향으로 돌아온 마르크스는 청년좌파들과 반체제적 언론인 라인신문을 창간하고 편집장을 맡아 언론활동에 투신했다. 이 시기에 사고의 전환점, 특히 철학에서 변화를 맞이한다. 당시 독일 철학은 대단히 관념적이며 추상적이었는데, 철학적 이슈에서 사회경제적, 좀 더 나아가자면 '정치경제적인' 이슈로 방향을 전환한다. 라인 지방 농부들을 취재하던 도중 경제와 관련된 주제의 기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1843년에 《라인신문》은 폐간되었는데, 당시 마르크스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프로이센에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편집장직을 사임합니다.'라는 광고문구와 프로메테우스(마르크스)가 독수리(프로이센)에게 괴롭힘당하는 그림으로 저항했다.

1843년에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을 발표하는데 청년헤겔학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나, 거기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 생존에서 물질적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유물론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


독일에서 급진좌파운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마르크스는 프랑스 파리 시로 이주한다. 본격적으로 프랑스 사회주의자의 혁명적 집단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는데, 마르크스의 정치사상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의인동맹(義人同盟, 독일어: Bund der Gerechten)이라는 비밀결사단체에 가입하는데, 행동주의적, 급진적, 혁명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비밀결사체였다. 이 단체를 공산주의자 연맹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쓴 것이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이다. 마르크스 사상의 특징적 일부가 이 당시 저술에 나타난다. 독일의 관념철학에서 벗어나 역사유물론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844년에 쓴 《유태인 문제에 관해서》에서 그는 유태인들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사적으로 해방된 것이지 인간으로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 사적 소유와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하다, 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해서》는 독일의 신흥 부르주아들의 취약성을 지적하면서 프롤레타리아만이 역사적 과업을 지탱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파리수고(유고)'로 알려진 《경제학과 철학에 관한 수고》에서는 역사유물론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역할과 생산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소외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의 소외론은 인간 해방을 갈구하는 휴머니스트로서의 마르크스를 강조하는 학자들의 주장 근거가 되고 있다. 실제 마르크스는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에서 소외된다고 《소외론》초판에서 주장했다. 이 해에 그는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난다. 파리 시절의 마르크스는 정열적으로 활동했으나, 급진적 인물이 체류하는 것을 기피한 프랑스 정부에 의해 추방되었고,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죽을 때까지 영국에서 지내게 된다.


1846년에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발표한다. 600여 페이지의 방대한 저작인 이 책은 엥겔스와 공저로 되어 있으나, 사실상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가득 차있다. 이 저작에서 마르크스는 청년헤겔주의자와 결별을 선언하고 있으며 그들과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저작은 마르크스의 사상 발전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역사유물론에 대하여 최초로 체계적으로 서술했으며,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자본주의 자체가 잉태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1848년 2월,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의인동맹의 선언문으로서 발표된 것이다. 당시 이 조직은 블랑키와의 차별을 선언하면서 비밀결사에서 공개조직으로 탈바꿈하려하고 있었다. 혁명적 이들에 의한 소수의 급진적 음모와 비밀결사를 선호하던 블랑키파와 그 주도권 장악을 놓고 치열한 논쟁과 암투가 있었고, 결국 마르크스파가 다수가 되어 공산주의자동맹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들이 이런 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1848년 2월 혁명 덕분이었다. 혁명적 낙관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공개적인 단체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공산당 선언 속에는 새로운 이론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과거 마르크스가 그의 저작물에서 이야기한 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과 프롤레타리아 승리의 확언을 선언문에 맞게 단순명료하게 재구성한 것이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마르크스의 초기 사상에서 보이는 휴머니즘적 철학적 고뇌는 상당히 감소하고 정치경제학적 내용의 비중이 커지게 된다. 이에 대해 알튀세르는 인식론적 단절을 보여준다고 언급했다.

1850년에는 《프랑스에서 계급투쟁》, 1852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를 차례로 발표하는데, 계급 투쟁이 정치적 차원에서 어떻게 복잡하게 전개될 수 있는가에 대해 서술한 것이었다. 이 저작들은 경제적 시각이 아닌 정치적 시각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1850년대는 혁명을 즉,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시련의 시기였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 시대의 흐름이 거꾸로 흐르는 수구반동적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1840년대 경제 공황을 겪고 있던 유럽 경제는 1850년대에 들어와 호황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여기에서 채굴된 이 유럽으로 들어왔고, 교통수단의 속도가 사람이나 의 힘을 이용할 때보다 빠른 증기 엔진이 운송수단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 현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급진파들의 분열이 생겨나게 되었다. 즉각적 혁명을 주장하는 이들과 혁명의 절정기는 이미 지나갔다는 분파로 분열된 것이다. 후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이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대영박물관에서 영국의 정치경제학을 완전히 습득하여 마르크스 자신의 정치경제학이 성숙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자본론》 집필을 구상해나가는 속에서 초고(Grundrisse)가 발견되었다.

이 초고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지적 발전과정과 사적 유물론의 기본적 원칙을 정리해 놓고 있다. 마르크스의 초기사상에서는 비판적인 철학적(critical philosophy) 경향성이 나타나고 있다. 변증법을 통해 현실을 부정하며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1846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운동과 메커니즘, 구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에 나온 《자본론》에 그러한 연구가 결집되어 나타난다. 이것이 역사까지 확대되어 형성된 사상이 역사유물론이다. 역사유물론은 마르크스 사상의 독특한 핵심이다.


마르크스는 명석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이 있으나 자기 주장이 강하고 독선적인 면이 있었다고 한다. 과 사교생활을 좋아해 모든 친구들과 불화를 일으켜가며 논쟁을 벌이기 일쑤였고, 술집이 운집된 골목에서 술집을 모두 돌아다니다가 밤을 새우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3] 그랬기에 마르크스를 존경하는 사람은 많았어도 친우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엥겔스가 “그의 반대자는 많았어도 개인적인 적은 없었다”고 했듯이 그렇게 냉정하지는 않았고, 맑스가 논쟁에서 고집이 센 모습을 보였던 것도 모난 성격을 가져서가 아니라, 당시 유럽 지식인들사이에서 난립하던 이상적 사회주의들을 비판함으로써 과학적 사회주의로 귀결하기 위함이었다는 평가가 있다.[4] 그 근거로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그가 살던 시대에 난립하던 사회주의 조류들인 보수적 사회주의, 부르주아 사회주의, 추상적인 사회주의등을 풍자와 논박으로 비판한다.

맑스는 성격이 따뜻해서 자신도 어렵게 살았지만 손님을 박대하는 법이 없었고, 어린이들을 좋아해서 딸 엘레노어에게 부자들이 목수의 아들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해 주면서도, “예수가 어린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5]

외적으로는 부르주아지를 비난하면서도 사적으로는 부인과 아이들이 부르주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안간힘을 썼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세상에 알려진 ‘그의 가난’은 절대적 가난이 아니라, 부유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상대적 가난’이라는 얘기다. [3]

그가 호색한으로 애인이 많았을 뿐 아니라, 아내 예니 베스트팔렌이 데리고 온 하녀 헬렌 다무스와의 관계로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은 유명하다. 이에 대해 평생의 동지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보호하기 위해 “마르크스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다.”라고까지 선언하지만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프레데릭’이라는 이름이 붙은 아이는 후에 외과의가 되지만 프레데릭이 ‘위대한 예언자’의 아들이라는 별칭은 떨어지지 않았다. [6]

또한 마르크스는 주말이면 가족들과 산책을 하고 부인의 임종을 지킬만큼 처자식에게는 자상한 가장이었지만 부모와 형제자매에게는 경원시했다 한다. 실제로 가난에 시달릴 때 유산을 염두에 두고 아픈 어머니와 갈등을 빚기도 했었다. 그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어차피 병도 들고 살만큼 산 우리 어머니가 죽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맑스는 아버지 하인리히의 사진을 관에 묻히는 순간까지 소지하고 있었고, 맑스가 부모와 형제자매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다기보다는 맑스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이 맑스를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는 평가가 있다. 그 근거로 맑스의 모친은 자본론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 자본이나 만들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릴 때 죽은 아이들이 많고, 오직 일리노어와 로라, 제니 막스 세 딸만 성년으로 자랐다. 하지만, 일리노어는 1898년에 43살의 나이로자살하고 로라는 1911년에 66세의 나이로 자살한다. 제니는 1883년 심장병으로 39세에 목숨을 잃었다.

그 외에도 프레데릭의 증손녀인 힐다 마르크스와 인터뷰한 러시아 기사에 따르면 사생아인 프레데릭의 손자는 나치 게슈타포로 활동하다가 러시아 전선에서 전사했다.


흔히 맑스하면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서의 방황과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 때문에 보수적인 종교인들로부터 반(反)종교적 인물로 잘못 인식되고 있지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은 종교가 현실의 사회경제적 모순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현실도피적 경향을 나타내도록 기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종교는 민중들이 내세에만 관심을 갖게 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자본의 억압과 착취를 사회비판과 계급투쟁으로 극복하지 못하게 하는 '인민의 아편'이었던 것이다. 또한 맑스는 종교를 가리켜 민중의 환상적 행복이라고 했는데, 이 또한 종교를 반대하는 말이 아니라 종교의 현실도피적 경향을 비판한 말이다. 실제로 민중들은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회적 억압과 착취를 계급투쟁으로 극복할 방법이 없을때는 하늘나라극락메시아미륵 같은 종교적 환상을 만들어낸다. 즉, 마르크스는 종교의 현실도피적 경향을 비판한 것이지 종교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인본주의 존중

실제로 맑스는 딸 엘리노어가 교회에서 두려움의 감정을 갖자 "부자들이 목수의 아들을 죽인 것"을 말해주면서도 "목수의 아들이 어린이들을 사랑하였으므로 기독교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야."라고 말했다.기독교가 가진 자들, 권력있는 자들과 결탁하여 예수를 죽이는 것에 대해 비판했지만, 기독교의 인본주의적 가치를 존중했다는 뜻이다. 현대 맑스주의도 기독교를 인본주의라는 공동가치를 화두로 대화해오고 있다. [5]


사회혁명

마르크스주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논쟁을 통과했다. 러시아혁명을 성공시킴으로써 비로소 마르크스주의는 정통으로 확립된다. 그러나 스탈린 집권 후 마르크스주의는 왜곡되고 이에 반발해 본래의 마르크스로 회귀하려는 새로운 세력이 유럽에서 부상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과 아도르노 등이 주도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이 두각을 나타냈다. 이는 68혁명의 사상적 좌표가 되기도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시련은 사상의 종주국 소련에서 발생했다. 고르바초프가 등장하여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면서 자본주의 진영과 대결이 아닌 타협을 모색하던 중, 걷잡을 수 없는 수렁으로 추락한 것이다. 끝내 소련은 해체되고 마르크스주의도 매우 극적인 종언을 고하는 듯했다. 어느날 갑자기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정치이념이 형체도 없이 현실 정치에서 사라졌다.

마르크스주의의 재평가

그러나 애초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극단의 모순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탄생한 이상, 자본주의와 운명을 달리 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주의 영향력은 특히 학문적으로, 여전히 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치밀한 분석력과 통찰력은 현대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대 사회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는 필수다.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해명과 자본주의 세계화와 계층화에 대한 정확한 비판은 탁월하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전 지구로 확장되면서 부자와 빈자,부국과 빈국의 차이는 더욱 커지고 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인간소외, 물신숭배, 생산과 소비의 과잉, 공황의 문제 등도 지금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려면 싫든 좋든 마르크스를 탐구하고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사회과학자라면 마르크스에 신세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듯, 마르크스에게는 독보적인 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2005년BBC방송은 전문가들에게 설문조사를 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있는 사상가를 뽑았다. 단연 1위는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주의가 비록 현실에서 다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자본주의를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비판했고 여러 대안을 세울 수있게 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유주의 정치철학자인 이사야 벌린은 "일부 결론상의 오류가 있었지만 마르크스 사상이 갖는 중요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면서 "그의 사상은 역사,사회를 바라볼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인간의 인식을 높여주며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고 강조했다.




마르크스주의(Marxism)

마르크스주의(Marxism)은 독일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칼 마르크스(Karl Marx)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공동으로 작업하여 완성되어진 학문이다. 이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이론 및 정치이론이다. 당시 만연했던 사회주의 이론인 '프랑스 사회주의'와 프루동의 사회주의 이론같은 이상적인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을 처음으로 시작하고 탄생된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와 저술한 '자본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에서도 사회주의 체제를 실현시킬 수 있는 자신감을 여러 사회주의자들에게 주므로써 '현실 사회주의' 즉, 현대의 공산주의인 의미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초적인 학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의 기초적인 철학개념은 변증법, 유물론, 잉여가치론, 노동가치설이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으로 인해 나타나는 모순, 불의를 자본을 부정하므로써 없애겠다는 철학적 의미가 담긴 현실적인 사회주의이며 여태껏 있어왔던 이상적 사회주의이자 무정부주의적인 사회주의와 반대로 노동자로 이루어진 정부를 두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기독교-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체계중 하나인 '유물론'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동작업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완벽한 사회주의적 유물론으로 재탄생하였다. 이렇게 유물론을 기본 철학개념으로 가지고 있던 마르크스주의는 본래 유물론의 모든 물질은 '생각'을 가지고있고 그러한 물질들은 다른 물질들에 의한 정신으로 인해 또 다르게 탄생되었다는 철학개념에 의해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뜻을 부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자체에서는 이러한 창조신에 대한 것을 부정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되어져 왔고 만약에 양립되어져 나온 학문이 있어도 그것은 사회주의에 속하지않은 종파사상에 불과하다고 판단되어졌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인간성의 완전한 해방을 목표로 했다. 이러한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의 겉뿌리였던 사회주의와 그 사회주의안에 포함되었던 공산주의에서도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계급해방은 당시 고위직에 속한 종교인에 대한 반감이었으므로 역시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와 연계해서 볼 때 종교는 이 학문적 사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사라져야할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를 필두로하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현재 보수적인 종교인들에 의해 배제되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 즉, 모순이 드러나게 되자 진보적인 종교인들은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의 양립을 주장하기도하며 마르크스주의에서 나타나는 변증법에 의한 사회구조적 모순과 불의를 없앤다는 의미는 성서의 구원과 같은 개념으로 보아 한층 발전된 진보적인 개신교를 만들겠다는 목사들도 이러한 양립을 주장한다. 물론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부족한 면이있다.

 

 - 경제개념 -

 사실 마르크스주의를 절대적인 정치사상으로 내건 국가들은 경제체제에 관해서 혼합경제체제도 아니고 시장경제체제도 아닌 계획경제체제만을 선호하게 되어있으며 그것은 곧 사회주의체제를 말하며 쉽게말해 공산주의의 경제개념이다. 하지만 오늘날 여러 학문들이 오고가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적 개념은 자본주의의 경제적 개념의 모순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으며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는 절대적인 정치사상으로는 쓰지않는다. 오로지 이 마르크스주의는 보조적인 위치에 놓여져있다.

 

 하지만 역시 자본주의식 경제체제로만 가게되면 역시 모순이 생기고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문제점이 나타나므로 선진국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좌파계열 쉽게 말해 사회적 진보계열들의 아이콘과 같은 학문으로 여기고있다.

 

 - 정치, 사회개념 -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노동자가 없으면 국가가 있을 수도 없으며 자본가도 없으며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노동자를 거느리고 있고 그들을 사용하고 있으므로써 모든게 돌아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노동자가 없으면 역시 돌아갈 수 없는 물레방아와 같다고 주장하며 자본가들을 취약한 인간체의 개념으로 여기고있다. 이러한 개념이 있는 마르크스주의는 후에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이 만든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또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제를 주장하며 그 정치적인 방법을 뒷받침해준 학문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정치, 사회계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자본가들에 의해 미움을 받아도 충분한 사상이기는 하다.

 

 -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

 위에 설명했듯이 마르크스주의를 절대적 정치사상으로 내걸고 국가를 이끌게 된다면 경제체제는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의 경제체제가 된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공산주의식 경제체제를 지향한다. 하지만 이러한 틀을 없앤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의 등소평은 사회주의 체제이면서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식인 시장경제체제를 최초로 구현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중국은 결국 주된 사상이었던 마르크스주의 즉 사회주의 체제를 하므로써 생기는 장점의 주된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상태가 되버렸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다시말해 주된 정치사상보다는 일부를 자본주의의 모순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되어져야 하거나 보조적인 정치사상이 되어야 적당할 것이다.

 

 - 마르크스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 -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다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목표와는 다르게 '절대적인 사회주의체제의 공산주의 정권'을 목표로 하며 더 나아가 그것을 실현시키는 수단까지 서술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의하면 계급해방, 사회주의 실현은 모두 '폭력적 혁명'으로 실현해야하며 이것을 부정하는 자칭 사회주의의 사상들은 사회주의계열이 아닌 종파사상에 불과하다는 것임을 주장하고있다. 또한 '민주주의'라는 표현보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중요시하며 어떠한 사상이든 그에 관한 폭력을 부정하는 민주주의에서와는 상반되게 사상을 위해서라면 폭력의 허용을 주장하고있다. 따라서 학술적인 면만 서술한 '마르크스주의'와는 달리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이러한 사회주의 정권을 구축하는 모든 수단방법을 일러주고있다.

 

 - 대한민국에서의 마르크스주의 -

 대한민국에서는 마르크스주의는 공산주의와 같은 뜻으로 여긴다. 사실 틀린말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의 정치, 사회, 철학, 경제를 모두 모아놓은 학문이자 사상이고 공산주의는 그중에 경제와 정치의 혼합을 빼온 사상이다. 그렇지만 현재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경제체제인 '계획경제체제'를 주된 경제체제로 사용하게 된다면 역시 국가의 경제상태가 위태롭게 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실패성이 짙은 공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뜻으로 여기기 보다는 사회주의적 정치, 사회, 철학, 경제를 모두 혼합한 마르크스주의와 별개로 두는게 좋다. 또한 공산주의에서 주장하는 계획경제체제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증시거품이 많아지고 시장의 자유가 심하여 규제가 필요할 때에는 계획경제체제에 속하는 경제이념을 실행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경제체제를 100%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사회주의 체제이자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되었던 북한 즉,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DPROK)에 의해 침략을 받았던 나라이고 그들과 벌인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고 수차례 그들의 도발이 이어졌으므로 역시 대한민국에서는 공산주의 즉 포괄적인 개념으로 말해 '마르크스주의'는 적대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필자는 이글을 쓰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 북한은 정치, 사회적 또 철학적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라고 보기 어려우며 계급해방을 주장하는 이러한 마르크스주의가 집필된 서적들은 향후 북한에서 반정부 단체를 낳게 할 우려가 있어 분서(焚書)된지 오래이다. 또한 북한의 헌법에 존재하는 공식이념은 '주체사상'이며 "주체사상의 행동강령으로 지목한다."는 '김일성주의'가 되며 곧 북한의 체제는 '김일성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서로 상호작용하며 공생해야한다. 자본주의는 현재 공산권 국가를 제외한 주된 정치, 경제적 체제로 채택되었지만 그로인해 생기는 자본으로 인한 사회모순, 불의는 마르크스주의로 보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자본주의 계열 사상들의 공통점은 자본가가 없으면 국고는 빈다는 것이고 모든 사회주의 계열 사상들의 공통점은 노동자가 없으면 자본가들도 없다는 것이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서로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공생할 수 있다면 그 때 비로소 건전한 정치,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복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일단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이라는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탐욕스러운 부르주아들에게 핍박받는 프롤레타리아들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며, 프롤레타리아들을 위한 나라, 프롤레타리아들을 위한 새로운 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자본주의에서처럼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윤이 불공평하게 돌아가지 않도록, "함께 일하고 공평하게 나누자!" 하는 사상이 담겨 있다는 얘깁니다. 쉽게 말해서 자본주의에서 8:2로 나눈다면, 5:5로 나누어 서로에게 이득이 되도록 하는 나라를 만들자는 얘기죠.

 하지만, 공산주의 국가에서 누군가가 복지의 혜택을 받는다면?
얘기는 달라지는 것이죠. 누군가는 열심히 일을 해야만 하는데, 누군가는 복지의 혜택을 받는다? 이렇게 되면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공산주의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마르크스는 복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회민주주의는 복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를 민주적 의회 정치로 정착시키려는 사상입니다.

 즉... 사회주의 계열 내에서 보수적인 사회주의는 사회민주주의, 진보적인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폭력과 혁명으로서 진정한 사회주의를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사회민주주의는 자유주의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의원 제도를 통하여 사회주의를 온건적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상에서 볼 수 있는 단어인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자유와 평등을 중요시합니다.
즉, 공산주의가 결과의 평등을 중요시한다면 사회민주주의는 기회의 평등을 중요시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자본주의와 비슷한 점이 없지않아 있습니다.)

 사회민주주의가 기회의 평등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에서는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복지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신 마르크스 주의


마르크스주의는 경제관계(생산자-노동자)인 하부구조에 권력관계(지배자-피지배자)인 상부구조가 
귀속되어 있어서 하부구조에 따라 상부구조가 바뀐다는 경제(하부구조)결정론의 입장이구요. 
이에 반해 신마르크스주의는 경제결정론이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대응하는, 
즉 경제에만 관련되어 결정된다는 점을 비판하는 겁니다. 경제관계에 100%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하부구조에 상부구조가 종속되는 것을 모순된 사회구조로 보고 상부구조에 상대적인 자율성이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상부구조들(국가, 교육, 언론, 군대, 경찰 등)이 자율성을 지니고 
이데올로기 주입으로 기존 질서를 정당화한다는 것입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마르크스주의(Neo-Marxism)는 이탈리아의 그람시헝가리의 루카치 등이 1920년대에 주장한 마르크스주의의 분파 사상이다. 1960년대의 신좌익 사상에 영향을 주었으며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 등 막스 호르크하이머를 중심으로 한 아도르노·마르쿠제에 의해 1930년대에 계승된 신좌익 사상이다.

초기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20세기 초반까지 최초의 논리적 사회주의 사상이란 이유로 그 명성을 얻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사회의 하부 구조인 경제 부분만을 언급하는 것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에 확실한 사회·정치 이론이 없다는 한계에 봉착했다. 이에, 상부 구조인 사회·정치 이론을 정립화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인 안토니오 그람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비인간적인 문화와 인간 소외를 중점으로 문제를 다뤄 신마르크스주의 사상의 토대를 마련했다. 신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비판하면서 인간 소외에 대해 주된 문제 제기를 하고, 휴머니즘을 중시하는 특징이 있다.


교육학용어사전

신마르크스주의

[ 新 — 主義 , neo-Marxism ]

모든 사회적 현상을 생산양식과 생산관계로 설명하려는 경제결정론적인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사고에 한정하지 않고인간의 주체적 인식과 해방적 의식을 강조하는 경향의 마르크스주의적 노선.

흔히 정통 마르크스주의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소련 공산주의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항하여 싸운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였다.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한편으로는 계급투쟁이론을 특징적으로 부각시키고 교조적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워 독재체제를 이끌어 온 소련 공산주의의 왜곡된 이론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적 자본주의의 체제에서 경험하는 인간소외를 극복하고 해방적 의식을 실현하려는 데 주된 관심을 바쳐 왔다.

그러나 「신마르크스주의」는 하나의 독특한 사상적 노선이라기보다는 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다원적 노선의 공통된 경향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신마르크스주의자들로는 루카치(G. Lucacs), 샤프(A. Shaff) 등과 같이 동구권의 학자들도 다소 있지만 대개가 공산국가가 아닌 지역의 학자들이다. 알뛰세(L. Althusser), 보울즈(S. Bowles), 진티스(H. Gintis) 등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블로흐(E. Bloch) 등의 신비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번스타인(E. Bernstein) 등의 경험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싸르뜨르(J. Sartre) 등의 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메를로-뽕띠(M. Merleau-Ponty), 프레이리(P. Freire) 등의 현상학적 마르크스주의,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 아도르노(T. W. Adorno), 마르쿠제(H. Marcuse), 프롬(E. Fromm), 하버마스(J. Habermas) 등의 비판이론적 마르크스주의, 그 외에인본주의로 일컬어지는 여러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있다.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은 주로 인본주의, 소외이론, 관료주의 비판, 자본주의적 산업사회의 비판, 혁명에 있어서의 지식인의 역할 등에 이론적 관심을 두고 있다. 교육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주로 자본주의적 사회체제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기능, 억압적 문화의 구조, 소외의 개념, 실증주의의 도구적 합리성 등의 분석, 그리고 해방적 이성의 실현을 위한 문제 등에 관심이 주어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마르크스주의 [新 — 主義, neo-Marxism] (교육학용어사전, 1995.6.29, 하우동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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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를 정벌하고, 코린토스에 머물 때의 일입니다. 당시 코린토스에는 유명한 어느 괴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정치가나 학자들이 대왕에게 인사를 하러 왔지만 그는 오지 않았고,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코린토스 교외의 크라네이온으로 이 괴짜 철학자를 몸소 찾아 나서기에 이릅니다. 그는 양지 바른 곳에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디오게네스입니다.

자신이 몸소 찾아왔지만 기척도 안하는 디오게네스를 보고, 알렉산드로스는 기분이 상했습니다. 
“나는 대왕 알렉산드로스다.”
“나는 개 같은 디오게네스요.”
“내가 무섭지도 않은가?”
“그대는 선한 자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선한 자를 뭣 때문에 두려워 하겠는가?”
“그대가 바라는 것을 말해 보라.”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 주었으면 하노라.”

이 말을 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종 무관들은 무례한 디오게네스를 벌하기를 청합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태연한 그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죠. '만약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면, 나는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걸세' 라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하네요. 이 철학자는 권력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행복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리나 영혼의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세상을 떠나고 몇 년 뒤,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 안티스테네스(Antistehnes)가 아테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남루한 옷차림의 젊은 거지 하나가 교실로 들어와 안티스테네스에게 자신을 제자로 삼아달라고 요구합니다. 학생들은 모두 그를 비웃었고, 안티스테네스 역시 단호하게 그 젊은 거지에게 나가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거지는 막무가내였고 결국 거지의 고집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거지가 바로 디오게네스입니다.  그는 스스로 개와 같은 삶을 살면서 자신을 'Doggish Diogenes' 라고 불렀으며, 세상의 모든 관습과 편견을 조롱하며 고집스럽게 물고 늘어지곤 했습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사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그를 '개 같은 철학자', '빈정거리는 사람'(Cynic)이라 불렀습니다.

자신의 집과 재산을 버리고 일생을 작은 통속에서 살면서 인생의 진리를 명상했다는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견유학파 犬儒學派 '의 원조로 불립니다. '견유학파'란 말그대로 개가 유유히 산책을 하는 것과 같은 학파라는 말이죠. 개가 산책을 할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자연의 모든 것을 즐기고 느끼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동양으로 치자면 노자나 장자의 사상과 비슷할테지요. 무위자연, 즉 인위적인 것을 버리고 자연과 하나되는 삶을 사는 거지요.


디오게네스는 흑해 연안의 시노페라는 도시 출신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환전상이었는데요, 디오게네스와 그의 아버지는 돈을 위조하다 걸려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고향에서 쫓겨 난 디오게네스는 아테네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테네에 오자마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안티스테네스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제자가 되었죠.

안티스테네스는 인간이 덕성을 갖추면 행복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돈과 향락 등 외형적인 가치판단을 배척하는 윤리적인 금욕을 제자들에게 요구했습니다. 디오게네스는 스승의 사상에 한발짝 아니 열발짝 더 나아가 결국 세상의 모든 재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냉소적인 철학자가 됩니다. 그는 행복이란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가장 쉬운 방법으로 만족시키는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은 부끄러울 것도 없고, 보기 흉하지도 않으므로 감출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가난하지만 부끄러움 없는 자족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독설, 말놀이를 즐기며 반사회적 행동을 일삼았고, 자신을 개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속에서 외톨이로 지냈습니다. 그는 방랑하며 거지와 같은 삶을 살았는데요, 사실 대낮에 램프를 들고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진정한 인간을 찾기도 했다는 그의 일화들은 종종 해학적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제자 그룹 중 주류라면, 디오게네스는 비주류에 속할 것입니다. 이 둘은 앙숙이었다고 전해지는데요, 플라톤이 인간을 두 발로 걷는 깃털 없는 짐승이라고 정의하자, 그 소리를 들은 디오게네스는 플라톤에게 털 뽑은 닭을 보내 그것이 플라톤이 말하는 인간이라고 비판했다고 합니다. 디오게네스는 플라톤이 욕망을 버릴 것을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화려한 집에 사는 것에 대해 매우 못마땅해 했고, 비오는 날 플라톤의 화려한 침대위를 진흙 투성이의 발로 더럽혀 놓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플라톤은 디오게네스를 '미친 소크라테스'라고 욕을 했죠. 하지만 플라톤이 디오게네스를 그렇게 부름으로써 그를 소크라테스의 반열에 오르게 하기도 합니다.

디오게네스는 90세 가까이 되어 스스로 숨을 멈추어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자신의 유해를 땅에 묻지 말고 맹수들의 먹이감으로 던져주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한 말 이외에는 단 한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고, 죽을때는 단 한벌의 옷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지상의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보여준 디오게네스는 진정한 '무소유 철학자' 였습니다.


한 번은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지금 운동 경기를 구경하러 가는 길입니까?"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지금 경기를 하러 가는 중입니다."

물은 사람이 비웃으며 다시 물었다.

"도대체 누구와 경기를 하십니까?"

"바로 나의 기쁨 그리고 고통과 경기를 하지요. 수시로 덤벼 드는 욕망과 한 바탕 붙어 레슬링을 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아십니까?

그 녀석을 붙잡아 땅으로 팽개쳐 버릴 때의 그 상쾌함이란!"

 

한 번은 누군가가 그에게 적을 이기는 방법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적을 친구로 대접하시오. 우정이란 전염성이 무척 강한 놈이라서,

그 적도 얼마 안가 당신을 친구로 대접하게 될 것이오."

디오게네스의 낡은 누더기야말로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따뜻한 정신을 감싸고 있는 옷이었다.

디오게네스는 어리석음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는 탁월한 지혜를 통해서만이 인간이 보다 큰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가 생각한 탁월한 지혜의 결과는 다름 아니라, 마음이 편안하고, 자유로우며, 단순한 삶이었다.

 

그는 말했다.

"미리 준비하는 자만이 날카롭게 몰아치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을 가볍게 지나갈 수 있다."

이 말로 그가 뜻하고자 한 것은, 삶에서 적게 기대할수록 실망도 적어진다는 당연한 법칙이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다.

진정한 마음의 평안은 많이 소유하는 것에서 얻어지지 않는다.

적게 가진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데에서 얻어진다.

적게 구하라, 그러면 너는 얻을 것이요 만족할 것이다.

많이 구하라, 그러면 너의 갈망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희대의 달변가이자 괴짜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는 “행복이란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가장 쉬운 방법으로 만족시키는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은 부끄러울 것도 없고 보기 흉하지도 않으므로 감출 필요가 없으며, 이 원리에 어긋나는 관습은 반(反)자연적이며 또한 그것을 따라서도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 가난하지만 늘 부끄러움이 없는 자족자제(自足自制)의 생활을 몸소 실천하였다고 한다. 그는 평생을 남루한 옷차림으로 백주 대낮에도 항상 램프를 들고 다녔다고 하는데 그에게 있어 그 램프는 정직한 사람을 찾는 하나의 도구였던 것이다. 

가짜 돈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자신의 고향인 시노페에서 쫓겨나 아테네로 가서 세계4대 성인중의 하나라고 일컫는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이자 퀴닉학파(견유학파)의 창시자인 안티스테네스의 문하생이 되었다. 디오게네스는 스승인 안티스테네스에게 인간은 덕(德)을 위해서 살아야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선한 마음만 필요할 뿐 재산과 명성과 외모 따위는 아무것도 필요 없음을 배웠다. 

디오게네스는 스승에게 배웠던 철학적인 지식에 만족하지 않고 가능한 한 작은 욕망을 가지도록 훈련하며,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며, 스스로 만족하는 것들을 실천하며 살게 된다. 아무런 부족도 없고,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신(神)의 특징으로,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그만큼 신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반(反)문명의 사상을 실지실행(實智實行)하며 그는 평생을 단 한 벌의 옷과 한 개의 지팡이와 자루를 메고, 집 대신 커다란 통 속에서 생활했다. 

정복 왕 대제 알렉산더와 괴짜 철학자 디오게네스. 이 두 거인들의 운명적인 첫 대면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한데, 

『 기원전334년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도시국가)의 대표들이 코린트에서 회합을 갖고 알렉산드로스를 아시아 출정군의 최고사령관으로 선출했다. 이에 명망이 높은 정치가, 유명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알렉산드로스를 알현(謁見)하고자 줄을 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예전부터 꼭 한 번 보고 싶었던 디오게네스를 불렀으나 오지를 않자 몸소 그를 찾아간다. 

나무통에 기대어 일광욕을 즐기고 있던 디오게네스에게 대제 알렉산드로스가 다가가 “내가 바로 대왕 알렉산드로스요.”라고 하자 디오게네스는 “나는 개(犬)인 디오게네스요.”라고 답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왜 개로 불리느냐?”며 묻자, “내게 무언가를 주는 사람들에게는 꼬리를 흔들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짖어대며, 악한 자들은 물어뜯기 때문이요.”라고 답했다. 알렉산드로스가 “무엇이건 원하는 것이 있으면 한 번 말해보라.”고 하자 디오게네스는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좀 비켜 주시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무안해하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의 그런 태도에 화가 날 법도 했건만 알렉산드로스는 오히려 그때부터 디오게네스를 존경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내가 만일 알렉산더대왕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 

훗날 많은 사상가들은 이날의 두 사람의 만남을 일컬어 “얻으려는 자와 버리려는 자,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절묘한 만남”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 이윽고 이 두 사람은 같은 날 죽어 저승으로 가는 길에서 또다시 만나게 되는데,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허망한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구나.” 알렉산드로스는 그 말을 듣고는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저승이란 곳은 정말로 불공평한 곳이로군. 대체 어찌 황제와 거지가 이토록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지?”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웃으며 말했다. “착각하지 마시오. 억울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요. 당신은 평생을 세계를 구걸하며 떠돌았던 거지였지만 나는 내 고향에서 황제처럼 편히 살았다오.” 』 

어느 날, 광장에서 쉬고 있는 디오게네스에게 한 상인이 고기를 던져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그 고기위에다 한쪽 다리를 들고 개처럼 오줌을 쌌다고 한다. 참으로 디오게네스다운 행동이었다. 또 그는 시민들의 환심을 사려는 선동정치가들에 대해서는 ‘천민의 시중꾼’이라고 놀렸고, 축제 때 벌어지는 경연을 보고는 ‘바보와 말장난꾼들을 위한 잔치’라며 비아냥거렸다. 

디오게네스는 평소 사람들은 좋아 보이는 것만 바라고 기원하지, 진실 된 것을 바라고 기원하지 않는 것을 나무랐다. 

그는 독설과 말놀이를 즐기며 반(反)사회적 행동을 일삼는 냉소주의자였다. 자신의 관점에서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을 싫어해 그런 사람들을 늘 비판하였으며 또한 자신은 타인으로부터 개라고 비판받으면서 외톨이로 살았다. 부(富)를 싫어해 평생을 통나무 속에서, 평생을 방랑하며, 거지처럼 아무데서나 침식했지만 89세까지 건강하게 살았다. 

이러하듯 디오게네스는 늘 인간허무주의에 빠진 것처럼 묘사되지만 그는 단지 독설로써 인간을 일깨우고 그의 이해받지 못할 행위로써 자신의 철학을 말하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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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7세(기원전 69년 - 기원전 30년)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성 파라오이다.

생애

기원전 69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부왕이 죽은 뒤(기원전 51년) 18살에 15세 된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재위: 기원전 51~47년)와 결혼,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하지만 또 다른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재위: 기원전 47~44년)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권력 기반인 그리스계의 외면으로 자리에서 일시 물러났다.

기원전 48년 10월, 클레오파트라 7세는 폼페이우스와 권력투쟁을 벌이다가 이집트에 온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협상하였다. 다시 파라오 자리에 복귀한 클레오파트라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물리친 후 정치에 몰두하였다.

기원전 47년 3월 27일 승리를 거둔 카이사르는 이후 2주일 동안 클레오파트라와 지낸 뒤 이집트를 떠났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카이사리온이 실제로 카이사르의 아들이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기원전 44년에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에는 기원전 42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협동하였으며 3년 후 결혼하였다. 결혼 후 그녀는 남편 안토니우스의 권력투쟁을 경제적으로 도운 대가로 페니키아유다등의 쓸모 있는 영토를 할양받아 확장하였다.

권력구조의 변화로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레피두스와의 삼두정치가 깨지자 클레오파트라 7세는 BC 31년 9월 2일 명분상 자신에게 선전포고한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하여 안토니우스와 함께 악티움 해전을 결행했다.

하지만 전쟁은 실패하였고 자신을 일개 이집트 여인으로 취급하는 옥타비아누스와 연합할 수 없음을 직감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살했다. 에 물려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독가스를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자살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옥타비아누스가 죽여놓고 뱀에 물려 자살했다고 발표해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려고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뱀에 의한 자살, 독가스에 의한 자살, 타살, 에이즈(AIDS) 감염에 의한 병사(病死)등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평가

클레오파트라는 지식인인 블레즈 파스칼조차도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역사가 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남성들에게 성적인 관점에서 평가받았다. 그리고 살아 있을 때에도 옥타비아누스로부터 로마를 짓밟는 이집트 여인 취급을 받은 일이 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가 강대국 로마 제국을 이용하여 나라를 보전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그녀의 진짜 모습은 미모로 남성들을 유혹하는 요녀가 아니라, 궁전 밖의 세계를 다스리고자 한 여걸(女傑)이었다는 관점이 있다. 



클레오파트라



기원 전 50 년경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는 역사상 그 어떤 여인보다 극적인 삶을 살았다.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그녀의 흥미진진한 생애와 러브스토리는 지금껏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창작의 원천이 되었다.
파라오 율법에 따라남동생들과 두 번씩이나 결혼해 왕좌에 올랐고 왕권을 쟁취하기 위해 남편이며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리했다.
마케도니아의 마지막 여왕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생애는 소설보다 더 흥미롭다.
클레오파트라의 생애 중에서 일반인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부분은 그녀가 로마의 지배자인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유혹한 과정이다. 당대 최정상에 오른 두 남자를 어떻게 그처럼 완벽하게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기원 전 48년 클레오파트라는 남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후 강제로 폐위되어 유배된 상태였다. 막다른 골목에 처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침공한 카이 사르의 막강한 힘을 빌어 왕권을 되찾는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로마의 최고 실력자인 카이사르와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가졌다. 위 그림에서 보면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를 정복한 카이사르가 이집트 왕궁에 묵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몰래 그에게 접근하려던 그녀는 기막힌 계락을 떠올렸다. 스스로 양탄자 위에 드러누운 뒤 충복에게 자신의 몸을 양탄자로둘둘 말 것을 명령했다. 충복은 어깨에 맨 양탄자를 호위 병사들에게 보인 후 집정관에게 줄 값진 선물을 가져왔다고 둘러댔다. 큼직한 양탄자는 카이사르의 눈길을 끌었고 호기심이 발동한 카이사르는 서둘러 양탄자를 풀게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양탄자를 펼치기가 무섭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반라의 여왕이 비너스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완전히 반한 카이사르는 연인이 되었음은 말한 나위가 없고 여왕의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 그녀를 왕좌에 앉혔다. 여왕은 카이사르의 권력을 이용해 왕권을 되찾고 피맺힌
복수를 감행할 수 있었다..  
 
그의 연인이 되어 아들 카이사리온까지 낳고야망을 키우던 클레오파트라에게 
찬 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원 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의 무한한 권력에 
위협을 느낀 정적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음 상대로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로마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한 안토니우스를 점 찍었다. 
삼두 정치인 중 한 사람인 안토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 사령관 에 오른 후 
동방 원정길에 나섰다는 정보를 입수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안토니우스를 유혹하기 위해 묘안을 짜냈다. 위의 그림에서 앨마 테디마는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크가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만남을
묘사한 글을 토대로 이 그림을 그렸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첫 만남을 
가진 장소는 타르수스다. 오늘날에는 터키의 한 지방 도시에 불과하지만 고대의 
타르수스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시가지는 강으로 이어져 있었는데클레오파트라는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안토니우스를 만났다. 
선체는 황금빛이요, 바람을 받아 크게 부풀어 오른 돛은 가장 값비싼 색깔인 
자주색이었으며 갑판 중앙에는 금실로 수놓은 장막이 좌우로 열려 있고 그 아래 
옥좌에 사랑의 여신 비너스로 분장한 
클레오파트라가 앉았다. 노예들은 은으로 만든 노를 저으며 피리와 하프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고 배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바람을 타고 진동했다. 
이 화려한 첫 만남에 안토니우스는 
그만 혼을 뺏기고 말았다. 정신이 나간 안토니우스가 벌떡 일어서서
두려움과 경이로움이 가득 찬 눈길로
클레오파트라를 바라본다. 클레오파트라는 금으로 장식된 이동 닫집 아래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앉아요염한 눈초리로 안토니우스를 탐색한다. 
안토니우스와 극적인 첫 만남을 가진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행여 안토니우스가 권태를 
느낄새라 늘 새로운 쾌락을 개발했고 날마다 산해진미에악사와 무희를 동원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이런 생활이 10년이 넘도록 이어지자 클레오파트라는 
연인을 아예 자신 곁에 못 박아두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려  
안토니우스의 사랑이순간적인 열정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끝내 신분과 국적 동양과 서양이라는 인종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이국의 여왕과 혼인식을 올릴만큼 안토니우스는 철저하게 여왕의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결혼 선물로 여왕에게 엄청난 
이권이 걸린 오리엔트 지방의 통치권을 주었다. 로마의 권력자를 
애인으로 둔 덕분에 그녀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재물과 권력을 
소유한 여왕이 되었다. 

Cleopatra 사랑에 눈이 먼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아내 옥타비아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를 쓰고 또 다른 권력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의 지배권을 동서로 양분할 것을 요구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자 
로마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국사를 돌보기는 커녕 
힘들게 정복한 식민지에서 나온 귀한 수입을 이집트 여인에게 몸땅 
안겨주는 사령관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특히 로마의 상속자요,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여왕의 노예로 전락한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수치로 생각했다. 그는 두 남녀를 국가의 명예를 더럽힌 탕아와 
국제적인 창녀의 야합으로 매도한 후 안토니우스를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에 벌어진 악티움 해전의 
승자가 되었고 패전 사령관이 되어 벼랑 끝에 몰린 안토니우스는 자결하였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갑작스럽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안토니우스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온 그녀는
 곧바로 최후를 맞았고 역사가들은 그녀가 독사에 물려 죽은 것으로 추정했다. 
클레오파트라를 그릴 때는 독사가 벌거벗은 여왕의 젖가슴을 무는 자극적인 
장면을 선택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에로티시즘이 
강하게 풍겨 나오는 것은 죽음과 성을 한 쌍으로 묶어 표현했기 때문이다. 
The Death of Cleopatra 클레오파트라가 팜므 파탈의 원형이 된 것은 정치적인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의 최정상에 앉은 남자들을 차례로 유혹해 희생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을 이용해 왕권을 
차지했고 애인들의 막강한 힘을 빌어 정적을 제거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플루타르크는 클레오파트라의 신비로운 죽음에 대해 여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탐스런 무화과 바구니를 든 농부가 여왕을 방문한 직후에 일어났다. 무화과 
바구니에 맹독성이 강한 독사가 들어 있었던 것일까? 라고 강한 의문을 던졌다. 
들라크루아는 클레오파트라를 방문한 농부의 바구니 속에 숨겨져 있는 뱀을 
그려 넣어 극적인 죽음을 예견하고 있다. 우리가 클레오파트라 라고 부르는 
여왕은 클레오파트라 3세 이다 
이집트 왕조에서는 여왕이 제법 있었는데 고대 이집트 역사 연대기 문헌을 보면 
클레오파트라의 시대가 제법 있었다 
몇 명의 클레오파트라 라는 이름을 가진 여왕들 중 가장 활약상이 두드러졌던 여왕이 
클레오파트라 3세 였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 파스칼의 유명한 말처럼 
 
클레오파트라는 세계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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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틴어: Gaius Iulius Caesar영어: Gaius Julius Caesar 가이어스 줄리어스 시저[*]기원전 100년 또는 102년 7월 13일 ~ 44년 3월 15일)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 장군, 작가이다. 그는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치적으로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노선에 섰다. 기원전 60년대 말에서 5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는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소위 제1차 삼두 정치라는 초법적 정치 연대를 이루어 수년간 로마 정계를 장악하였다. 이들 파벌은 자신들끼리 권력을 분점하고자 하여, 원로원 내에서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小 카토),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등벌족파의 반대를 받았으며,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이에 가세하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기원전 59~55년)하여 로마 제국의 영토를 북해까지 넓혔으며, 기원전 55년에는 로마인 처음으로 브리타니아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공훈 덕분에 카이사르는 강력한 세력가로 입지를 굳혀 폼페이우스를 위협하게 되었으며, 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의 두 정치가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이렇듯 로마 정계가 재편되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서로 대치하게 되었으며,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대의를 내세웠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으로 하여금 루비콘 강을 건너게 하는 결단을 내려 기원전 49년에 내전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카이사르는 로마 세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등극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뒤 그는 로마의 사회와 정치에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는 공화정의 귀족 정치를 고도로 중앙집권화하였으며, 급기야 종신 독재관으로 선언하였다. 기원전 44년 3월의 열닷새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일군의 원로원 의원들이 공화정을 복고하고자 카이사르를 살해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내전이 일어났으며, 결국 카이사르의 양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영속적인 전제정을 성립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은 지 기원전 42년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공식적으로 로마의 신으로 축성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후 그의 공식명칭은 신격 카이사르가 되었다(Divus Caesar). 또한 그 이후부터 로마 황제가 죽었을 경우 후임자가 그를 신격화시키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카이사르의 삶은 본인이 쓴 전쟁 기록(갈리아 전쟁기내전기)을 통해 상당 부분 알려져 있으며, 정적임과 동시에 오랜 친구였던 키케로와의 서신과 그의 연설, 살루스티우스의 기록, 카툴루스의 시 등 당대의 다른 사료도 남아 있다. 또 아피아노스수에토니우스플루타르코스카시우스 디오스트라본 등 여러 후대 역사가들의 기록도 그의 삶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생애


유년기

카이사르는 귀족인 율리우스 씨족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율리우스 씨족은 베누스 여신의 아들이라는 전설상의 트로이아 왕자 아이네아스의 아들 율루스의 후손을 자칭하는 집안이었다.[1] 소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그의 코그노멘(cognomen, 가문 이름) "카이사르(Caesar)"는 조상 가운데 제왕절개 수술(라틴어로 '자르다'라는 뜻의 caederecaes-)로 태어난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2] 황제 역사(Historia Augusta)에는 다른 설명이 나오는데, 카이사르의 굵은 머리카락(caesaries)이나 밝은 회색 눈(oculis caesiis) 때문이라거나 혹은 그의 선조가 2차 포에니 전쟁에서의 전투 중 코끼리(무어말caesai)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한다.[3] 카이사르는 코끼리를 새긴 동전을 주조하였는데, 그가 자신의 이름에 대한 해석 가운데 코끼리와 관련된 해석을 좋아했다는 점을 암시한다.[4]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은 유서깊은 계보를 지녔으나, 정치적으로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으며, 가문에서 배출한 집정관 수도 세 명에 불과하였다. 카이사르의 아버지인 동명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공화정에서 두 번째로 높은 법무관직까지 올랐으며, 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냈는데, 아마도 매형이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영향력 덕분이었을 것이다.[5]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는 여러 집정관을 배출한 영향력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또 카이사르의 가정 교사는 갈리아 출신의 웅변가이자 문법가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니포였다.[6] 카이사르는 누이가 둘 있었는데 모두 이름이 율리아였다. 카이사르의 유년 기에 대해서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수에토니우스나 플루타르코스의 카이사르 전기에 보면, 내용이 10대 때부터 시작하며, 두 책의 시작부는 모두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7]

카이사르의 유년기는 혼란한 시절이었다. 기원전 91년에서 88년 사이에 로마와 이탈리아 동맹국들이 로마 시민권 문제를 놓고 동맹국 전쟁을 벌였으며, 그러는 사이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의 동부 속주를 위협하였다. 로마 정계는 벌족파(optimates)와 민중파(populares)로 갈라져 있었는데, 엄밀히 말해 두 파벌은 각자 공통적인 대의가 없어서 정당이나 정파와는 다르다. 벌족파는 원로원의 전통적이고 헌정상의 경로를 통해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 정치가들이었으며, 민중파는 전통적인 과정 대신 유권자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정치가들이었다. 카이사르의 숙부인 마리우스는 민중파 정치인이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벌족파였는데, 카이사르의 유년기 때 두 정치가의 대립으로 내전이 일어났다.

마리우스와 술라 모두 동맹국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두 사람 모두 미트리다테스 정벌 전쟁에 지휘권을 원하였으나, 당초 술라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술라가 로마 도성을 떠나자 어느 호민관이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기는 법안을 통과시켜버렸다. 이에 술라는 로마로 진군하여 자신의 지휘권을 주장하며 마리우스에게 망명을 강요하였으나, 술라가 원정을 떠난 사이에 마리우스가 임시로 모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와 그의 정치적 동맹자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도시를 장악하고, 술라를 공적(公適)으로 선언하였으며, 마리우스 군대는 술라 지지자들을 잔혹하게 복수하였다. 기원전 86년 초에 마리우스가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지지자들이 계속 정권을 잡았다.[8]

기원전 85년 어느날 아침에 카이사르의 아버지는 신발을 신는 중에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갑자기 죽자[9] 카이사르는 16살의 나이에 가장이 되었다. 이듬해 그는 유피테르의 고위 사제인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로 지명되었는데, 전임자인 메룰라가 마리우스의 숙청 당시 죽었기 때문이었다.[10]이 사제직에 오르는 사람은 귀족일 뿐 아니라 귀족과 결혼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는 기사 출신 가문의 평민 여자인 코수티아(Cossutia)와 어릴 때 맺은 약혼을 파기하고, 당시 민중파의 영수였던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였다.[11]

이때 미트라다테스와 협정을 맺었던 술라가 돌아와 돌아와 마리우스 지지자들에 대항한 내전을 종결하였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작전을 수행한 뒤 그는 기원전 82년 11월에 콜리나 대문의 전투로 로마를 장악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독재관에 임명하였는데, 전통적으로 6개월 동안 단 한 번 재직하는 독재관직과 달리 술라의 독재관직에는 임기 제한이 없었다. 마리우스의 상은 모두 파괴되었으며, 마리우스의 시신은 무덤에서 파내어 티베리스 강에 던져졌다. 당시 킨나는 항명을 일으킨 자신의 병사들에게 이미 살해된 상황이었다.[12] 술라의 처벌자 명단 공개로 그의 정적 수 백명이 죽거나 추방되었다. 마리우스의 처조카이자 킨나의 사위였던 카이사르 역시 명단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유산과 사제직, 아내의 지참금 덕분에 처형을 면하였으나, 아내 코르넬리아와 이혼하기를 거부하여 잠적하는 수밖에 없었다. 술라파가 있던 모계쪽 집안과 베스타 여사제의 관여 덕분에 그에 대한 위협은 취소되었다. 술라는 망설이며 결국 사면에 승낙하였는데, 카이사르 속에 수많은 마리우스가 있음을 보았노라고 말한 바 있다.


청년 시절

도주했던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오는 대신 군 입대를 택하여, 아시아 속주에서는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 휘하에서, 킬리키아에서는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밑에서 복무하였다. 역설적으로 카이사르가 군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연유는 사제직을 잃은 덕분이었는데, 플라멘 디알리스 사제는 말을 만지거나 자신의 침대가 아닌 곳에서 사흘 밤을 자거나 로마 바깥에서 하룻밤을 자거나 군대를 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13] 그는 미틸레네 공성전에서 공을 세워 시민관을 수여받았다. 비튀니아 임금 니코메데스 4세의 함대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던 중 카이사르는 궁정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어 왕과 동성애 염문이 돌았으며, 이후에도 이 소문은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14]

기원전 80년, 독재관에 오른 지 2년 만에 술라는 사임하고, 다시 집정관제를 복원하였으며, 집정관을 재직한 뒤 정계에서 은퇴하여 사인(私人)으로 물러났다.[15]나중에 카이사르는 술라가 독재관직을 포기한 일을 두고 "술라는 정치의 가나다도 모른다"고 비웃었다.[16]2년 뒤인 기원전 78년에 술라는 세상을 떠났으며, 국장이 열렸다.[17] 술라의 사망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로마에 돌아와도 안전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유산을 몰수당한 터라 재산이 없던 카이사르는 로마 시에서 하층민들이 사는 수부라에 평범한 집을 얻었다.[18] 그가 로마로 돌아올 때 반술라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반란을 시도하였으나, 레피두스의 지도력을 신뢰하지 않은 카이사르는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19] 대신에 그는 변호사로 나섰다. 그는 빼어난 웅변에다가 인상적인 제스처와 높은 목소리로 갖추었으며 금품 강요와 부패로 악명 높던 전직 총독들을 가차없이 고발하여 유명해졌다. 키케로도 그를 칭찬하며 "이제 나와보라, 어느 웅변가가 그대를 능가하겠는가?"라고 말한 바 있다.[20] 수사학을 완성하기 위해 기원전 75년에 그는 로도스 섬으로 유학하여 일전에 키케로를 가르친 바 있는 아폴로니우스 몰론 밑에서 공부하였다.[21]

에게 해를 지나던 중,[22] 카이사르는 킬리키아 해적에 잡혀, 도데카니사 제도의 파르마쿠사 섬에 갇히게 되었다.[23] 잡혀있는 동안 카이사르는 거만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카이사르는 포로로 잡혀있을 때 해적들을 십자가형에 처하겠다고 공언하였는데,[24] 해적들은 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해적들이 그의 몸값을 은 20 탈란톤으로 잡자, 카이사르는 50 탈란톤을 요구하라고 고집하였다.[25][26] 몸값이 지불되자 카이사르는 배를 모아 해적들을 추적해 잡았으며, 이들을 페르가몬에 투옥시켰다. 아시아 총독 마르쿠스 융크투스는 카이사르의 요구대로 이들을 처형하길 거부하고 해적들을 노예로 팔고 싶어하였다.[27] 그러나 카이사르는 해안으로 돌아가 자신의 권리에 따라 이들을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그런 다음 로도스로 갔으나, 곧 아시아에서 군사 작전에 불려갔으며, 폰토스의 침략을 막고자 보조군을 모병하였다.

로마로 돌아오는 중에 그는 쿠르수스 호노룸의 첫 단계인 군사 참모(military tribune)으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 스파르타쿠스 전쟁이 일어났는데(기원전 73~71년), 카이사르가 이때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에 관여했다. 기원전 69년에 그는 재무관에 선출되었으며,[28] 그 해에 마리우스의 미망인이었던 고모 율리아의 장례식 연설을 하였는데, 장례 중에 (술라 집권 이후로 볼 수 없었던) 마리우스의 상을 전시하였다. 그의 아내 코르넬리아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29] 기원전 69년 봄 혹은 초여름에 장례가 끝나고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의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휘하에서 재무관직을 수행하였다.[30] 이곳에서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상을 보고는 알렉산드로스가 세계를 제패할 때와 같은 나이에 자신은 이룬 것도 없다는데 불만을 느끼며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재무관직 조기 해임을 요청하여 승인받고 로마 정계로 돌아왔다. 기원전 67년에 돌아와서,[31] 그는 술라의 손녀인폼페이아와 결혼하였다.[32] 그는 조영관으로 선출되어 마리우스의 승전 기념비를 복구하였는데, 이는 술라파가 아직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물의를 빚었다. 그는 또 술라의 재산 몰수로 이익을 봤던 사람들을 기소하였으며, 공공 사업과 경기에 막대한 돈을 빌려 써서 동료 조영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보다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두 차례 반란 모의에 연루 혐의를 받기도 하였다.[33] 

 

정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다
 
기원전 63년은 카이사르에게 파란 많은 해였다. 그는 호민관 티투스 라비에누스를 설득하여 벌족파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라비리우스에게 37년 전에 원로원 비상 결의로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하고 자신을 이 사건을 심리할 두 재판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하게 하였다. 키케로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가 라비리우스의 변호를 맡았으나, 그는 대역죄(perduellio)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인민에게 청원할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였으나 법무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가 야니쿨룸 언덕에 군기를 내려 민회를 산회시켰다. 라비에누스는 다음 회기에 기소를 재청할 수 있었으나, 카이사르의 지시로 재청하지 않아 이 문제는 중지될 수 있었다.[34] 카이사르의 목적은 라비리우스 개인이 아니라, 집정관들이 민회에 대한 상소권도 무시한 채 이른바 국가의 적들을 처형할 때 휘둘러온 원로원 비상 결의의 정당성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35] 덕분에 그는 원로원을 장악하고 있던 주류 세력들이 카이사르와 같은 민중파 정적들에 대하여 궁극적인 방호책으로 삼았던 비상 결의에 반대 여론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35] 라비에누스는 이후 십년간 카이사르의 중요한 친구가 되었다.

술라가 임명했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가 그 해에 죽자 카이사르는 로마 국가 종교의 수장인 대신관직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에게는 강력한 벌족파 경쟁 후보 두 사람이 있었는데, 집정관을 지낸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였다. 후보들은 서로에게 뇌물 수수 혐의로 고발하였다. 선거일 아침에 카이사르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면 대신관에 당선되어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선거 운동으로 막대한 빚을 져서 추방되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경쟁 후보들은 뛰어난 겨험과 지위를 가졌지만 카이사르가 무난히 당선되었는데, 아마도 두 경쟁 후보가 서로 표를 잠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36] 대신관은 신성로(Via Sacra)에 관저가 있었다.[18]

그 해 집정관이었던 키케로는 공화국을 장악하려는 카틸리나의 음모를 알렸으며, 카툴루스 등은 카이사르가 이 음모와 연관이 있다고 고발하였다.[37]다음 해 법무관으로 선출되었던 카이사르는 이 음모 연루 문제 처리를 놓고 벌어진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였다. 회의 중에 카이사르는 쪽지를 받았다. 그러자 카이사르의 정적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는 카이사르가 음모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며 그 쪽지를 크게 읽도록 요구하였다. 카이사르는 카토에게 쪽지를 넘겨주었는데, 당황스럽게도 그 쪽지는 카토의 의붓누이인 세르빌리아에게서 온 연애 편지였다. 반역 음모자를 사형에 처하자는 의견에 대해 카이사르는 설득력 있게 반박하면서 종신 징역에 처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카토의 연설로 결국 음모자들은 처형되었다.[38] 다음 해 이 반란 음모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카이사르는 다시 공범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러나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이 음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 보고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여 문제가 풀렸으며, 고발자 가운데 한 사람과 또 위원회 위원 한 사람이 구금되었다.[39]

기원전 62년에 법무관이었던 카이사르는 당시 호민관이었던 메텔루스 켈레르가 논쟁적인 입법 제안에 지지하였으며, 두 사람은 매우 완고하여 원로원에서 이들을 직무 정지에 처하였다. 카이사르는 계속 법무관직을 수행하고자 하였는데, 폭력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가 자신을 지지하는 대중 시위를 진정시키자 원로원은 그를 복직시키기로 하였다.[40]

그 해에 보나 데아(Bona Dea, "선한 여신") 제사가 카이사르의 관저에서 열렸다. 이 제사에는 남성이 출입할 수 없었으나,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라는 젊은 귀족 청년이 여자로 변장하고 몰래 입회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카이사르의 아내인 폼페이아를 유혹할 목적이 분명하였다. 그는 잡혀서 신성 모독죄로 기소되었다. 재판에서 카이사르는 로마의 유력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거스르지 않고자 클로디우스에게 불리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으며, 클로디우스는 막대한 뇌물과 협박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내 아내는 어떤 의심도 받아서는 안된다"면서 폼페이아와 이혼하였다.[41]

법무관직을 수행한 뒤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이베리아 바깥)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아직도 상당한 빚을 지고 있던 터라 로마를 떠나기 전에 빚쟁이들을 설득해야 하였다. 그는 로마의 갑부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도움을 받았다. 폼페이우스에 반대하는 자신을 지지하는 대가로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의 빚 일부를 지불하고, 나머지 빚에는 보증을 서 주었다. 그렇게 하고도 카이사르의 법무관 임기가 끝나 일반 시민 지위가 되면 빚 때무에 기소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속주로 떠났다. 히스파니아에서 그는 칼라이키족과 루시타니족을 정복하여 그의 군대에게서 임페라토르(최고 군사령관)로 환호받았으며, 채무 관련 법을 개혁하고, 매우 존경을 받으며 총독직을 마쳤다.[42]

'임페라토르'로 경례를 받으면서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공화정 최고위직인 집정관직에 출마하길 원하였다. 만일 그가 개선식을 열려면, 행사 전까지 군인 신분으로서 도시 바깥에서 대기해야 하는데, 선거에 입후보하려면 사령관직에서 이임하고 일반 시민 신분으로 로마에 들어와야 했다. 결국 그는 개선식과 선거 출마를 동시에 할 수 없었다. 그는 원로원에 부재중 출마 허가를 요청하였으나, 카토가 이를 막았다. 두가지 사이에서 카이사르는 집정관직을 선택하였다.[43]


첫 집정관 재직과 삼두 정치

 이 부분의 본문은 제1차 삼두 정치입니다.

집정관 선거에 카이사르,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몇 년 전에 카이사르와 함께 조영관직을 맡은 바 있다), 루키우스 루케이우스 세 후보가 출마하였다. 선거는 깨끗하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키케로에게 지지를 청하였으며 부유한 루케이우스와 제휴하였으나, 체제의 주류 세력은 보수파인 비불루스를 밀어주었으며, 청렴하기로 유명했던 카토조차도 그를 지지하여 뇌물을 썼다고 한다. 카이사르와 비불루스는 기원전 59년에 임직하는 집정관으로 당선되었다.[44]

카이사르는 이미 크라수스에게 정치적인 빚을 지고 있긴 하였으나, 폼페이우스에게도 손을 내밀었는데, 그는 자신의 퇴역병에게 준 동방의 정착지와 농지를 원로원에서 비준받기 위해 싸우고 있었으나 성과를 얻지 못한 상황이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기원전 70년에 함께 집정관직을 역임한 이래 적대 관계였으며, 카이사르는 만약 자신이 한쪽과 손을 잡으면 다른 한쪽의 지지를 잃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을 화해하고자 하였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세 사람은 충분한 자금과 더불어 공공 사업을 장악할 정치적 영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의 비공식적 정치 제휴를 제1차 삼두 정치라고 하는데,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와 폼페이우스가 결혼하면서 공고해졌다.[45] 카이사르는 재혼하였는데, 이번 배우자는 다음 해 집정관으로 당선된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의 딸인 칼푸르니아였다.[46]

카이사르는 빈민에게 공유지를 재분배하는 법을 제안하였는데, 폼페이우스는 필요할 경우 무력도 불사하며 지지했으며, 크라수스도 마찬가지로 지지하여 삼두 정치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폼페이우스가 불러들인 그의 병사들이 도시에 운집하였으며, 삼두정의 반대자들을 위협을 받았다. 비불루스는 불길한 전조(前兆)가 있었다고 선언하여 법을 무효화하려 시도하였으나, 카이사르의 무장 지지자들이 그를 포룸에서 쫓아내 버렸다. 비불루스의 릭토르(lictor)들이 들고 다니는 속간은 부러졌으며, 그와 함께 있던 호민관 두 사람이 다쳤고 비불루스 자신도 똥 한 바가지를 뒤집어썼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그는 집으로 물러나 그 해 내내 틀어박혀 지내다가 이따금 나쁜 전조를 선언하였다. 이렇듯 카이사르의 입법을 방해하려는 시도는 별 소용이 없었다. 로마의 풍자가들은 이때부터 그 해를 "율리우스와 카이사르가 집정관이었던 해"라고 불렀다.[47]

카이사르와 비불루스가 처음 선출되었을 때, 귀족들은 카이사르가 집정관 임기를 마친 다음 해에 맡을 전임 집정관 자리로 속주 총독직 대신 이탈리아의 목초지와 숲을 맡겨서 장래에 그의 권력에 제약을 두고자 하였다.[48] 그러나 피소와 폼페이우스의 도움으로 나중에 이 조치는 취소되고 카이사르는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이탈리아 북부)와 일리리쿰(발칸 반도 서부)의 총독으로 임명하였으며, 나중에는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도 맡겼고 그에게 4개 군단을 주었다. 집정관 임기를 마치고 그가 맡을 전임 집정관 임기는 단 1년이 아니라 5년으로 정해졌으며, 이 기간 동안 그는 법정 기소가 면제되었다.[49] 집정관 임기가 끝나자 카이사르는 변칙적으로 정한 직무 때문에 기소되는 것을 가까스로 피하고 서둘러 임지로 떠났다.[50]


갈리아 정복

 이 부분의 본문은 갈리아 전쟁입니다.

카이사르는 여전히 많은 빚을 지고 있었는데, 속주 총독은 착취[51]나 위험한 군사 원정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휘하에 4개 군단이 있었으며, 임지 중 두 곳 일리리쿰과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는 북방의 미정복지와 접경하고 있는데, 이곳의 독자적인 갈리아인들은 불안정한 상태로 알려져 있었다. 로마의 동맹인 갈리아의 아이두이족(Aedui)은 전에 아이두이의 땅을 정복하고 정착한 아리오비투스가 이끄는 게르마니아의 수에비족(Suebi) 분견대의 도움을 받은 다른 갈리아 부족에게 패하였으며, 헬베티족이 이주를 위해 대규모로 이동하면서 로마인들이 우려하던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새로이 두 군단을 조직하고, 처음에는 헬베티족을 다음으로 아리오비투스를 무찔렀으며, 겨울에는 세콰니족 영토로 군대를 물렸는데 이는 즉 카이사르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바깥 영토에 관심을 둔 것이 일시적이지 않다는 뜻이었다.[52]

겨울 동안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신규로 2개 군단을 또 편성하여, 임기 2년째에 카이사르는 처음보다 배가된 군사력을 갖추었다. 이런 자의적인 군 편성은 적법성이 의심스러웠는데, 키살피나 갈리아인은 로마 시민이 아니었기 대문이었다. 작년 카이사르의 군사 활동에 대응하여 갈리아 북동부의 벨가이부족들이 무장을 시작하였다. 카이사르는 이를 공격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였으며, 통합된 벨가이 동맹군과 한 차례 전투를 벌이다 결판을 짓지 못한 뒤에 차차 각 부족을 하나씩 정복하였다. 그러는 사이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가 지휘하는 1개 군단이 아르모리카 반도(Armorica)의 부족들을 정복하는 작전을 개시하였다.[53]

기원전 56년 봄에 삼두 정치 인사들은 갈리아 키살피나의 루카에서 회합을 열어 만났다. 로마는 혼란에 빠져 있었으며, 클로디우스의 민중 선동으로 크라수스의 폼페이우스의 사이가 나빠진 상황이었다. 회의에서 삼두 정치를 갱신하고, 카이사르의 전임 집정관(총독) 임기를 5년 더 늘렸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다시 집정관에 오르기로 하고 이후에는 카이사르처럼 장기 전임 집정관직을 맡기로 하여, 크라수스는 시리아를,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 속주를 맡는 것으로 정하였다.[54] 아르모리카 정복은 카이사르가 베네티족을 해전에서 무찔르면서 완수하였으며, 젊은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갈리아 남서부의 아퀴타니족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56년에 군사 작전을 종결하면서, 해안 저지의 모리니족(Morini)과 메나피이족(Menapii)만 저항하였다.[55]

기원전 55년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침략한 게르마니아의 우시페테스족(Usipetes)과 텡크테리족(Tencteri)을 몰아냈으며, 이들을 추격하여 라인강에 가교를 건설하고, 게르마니아 영토에 진입하여 무력 시위를 하였으며 돌아올 때 다리를 해체하였다. 그 해 늦여름에 모리니족과 메나피이족을 정복하면서브리타니아 섬(오늘날의 브리튼)에 건너가서 지난 해에 브리타니아 사람들이 베네티족을 도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섬에 대해 잘 몰랐으며, 켄트에 상륙 거점을 얻긴 하였으나 더 나아갈 수 없어서 겨울에 갈리아로 돌아갔다.[56] 이듬해 그는 더욱 준비하고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브리타니아에 돌아왔으며 더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내륙으로 진격하였으며, 트리노반테스족(Trinovantes)의 만두브라키우스 왕과 동맹을 맺고, 그의 적인 카시벨라우누스를 항복시켰다. 그러나 갈리아에서 에부로네스족(Eburones)의 암비오릭스가 이끄는 반란이 퍼져 작황이 나빠지자 카이사르는 겨울 동안 군사 작전에 나서야 했으며, 전쟁은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암비오릭스를 무찌르면서 카이사르는 이제 갈리아를 평정하였다고 생각하였다.[57]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에 있을 때,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카이사르는 조카의 딸인 옥타비아를 남편 가이우스 마르켈루스와 이혼시키고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켜 그의 지지를 확보하려 하였으나, 폼페이우스는 거절하였다. 기원전 53년 크라수스는 파르티아를 침공하다카라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로마는 폭력 사태로 치닫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비상 수단으로 1인 집정관에 임명되었으며, 카이사르의 정적인 퀸투스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고,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동료 집정관으로 삼아 일단 질서를 회복하였다. 이로써 삼두 정치는 결렬되었다.[58]

기원전 52년, 갈리아 아르베르니족(Arverni)의 웨르킨게토릭스가 일으킨 반란이 또 한번 크게 번졌다. 웨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부족들을 통합하고자 하였으며, 게르고비아 전투 등 여러 차례 전투에서 카이사르를 무찔러 자신이 기민한 지휘관임을 입증하였으나, 알레시아 전투에서 카이사르가 공들여 준비한 공성 작전으로 마침내 로마에 항복하였다.[59] 이듬해에 산발적인 교전이 일어났으나,[60] 이로써 갈리아는 사실상 정복되었다.

전임 법무관 지위의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전쟁 동안 가장 고참인 군단장이었다.[61] 그 밖에 두각을 드러낸 카이사르의 다른 부관으로는 친척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62]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63]와 형제인 마르쿠스,[64]키케로의 동생인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65] 데키무스 브루투스,[66] 마르쿠스 안토니우스[67]가 있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갈리아 전쟁 기간 동안 로마군이 3백만 명의 적과 싸웠으며, 그 가운데 1백만은 죽고, 나머지는 노예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300개 부족이 복속되었으며, 800개 도시가 파괴되었다.[68] 아바리쿰(부르주) 시의 전체 주민 총 40,000명이 살육당하였다.[69]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헬베티인368,000명이 고향을 떠났으며, 이 가운데 92,000명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는데, 군 작전 이후 총 110,000명만이 돌아왔다고 보고하였다.[70] 그러나 일단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카이사르의 보고는 선전의 목적을 띄고 있었으며, 고대 문헌에서는 보통 숫자를 과장해서 쓰기 때문에 적 전투원의 총 수효는 특히 너무 많은 것으로 보인다. 푸르거-군티(Furger-Gunti)는 헬베티 군대의 병사 수가 60,000명이 넘는 것은 기록된 전술을 고려했을 때 전혀 있을법하지 않다고 보았으며, 실제 수효는 총 이주민 수가 160,000명에 전투원 수는 40,000명 정도로 추산하였다.[71] 델브뤽(Delbrück)은 전체 주민 수가 100,000 이하일 것이며, 그 가운데 전투원은 16,000명에 불과할 것으로 보았는데, 이렇게 보면 켈트인 군대의 병력은 당시 30,000명 정도였던 로마군의 절반 수준이 된다.[72]


 
내전
 
기원전 50년, 폼페이우스가 주도하는 원로원에서는 카이사르에게 전임 집정관 임기가 만료되었으므로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하도록 명령하였다.[73] 또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두 번째로 출마하려는 집정관 선거에 부재중 입후보를 금지하였다.[73] 카이사르는 집정관의 면책권이 없거나 군사력이 없는 상태로 로마에 들어간다면 기소되고 정계에서 밀려나리라고 생각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불복종과 대역죄 혐의로 고발하였다. 기원전 49년 1월 10일, 카이사르는 단 일개 군단만 이끌고 루비콘 강(이탈리아의 북방 경계선)을 넘어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아테나이의 극작가 메난드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구절인 "주사위를 던져라!(ἀνερρίφθω κύβος)"를 그리스어로 인용하였다고 썼다.[74] 수에토니우스는 이 문장을 라틴어로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라고 썼다.[75]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소 카토를 비롯한 벌족파는 도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하였는데, 이들은 특히 이탈리아 북부의 수많은 도시들이 카이사르에 항복하면서 새로이 징집한 군대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사마리움(Samarium)에 있던 한 집정관 소속 군단으로 저항을 시도해보기도 하였으나, 집정관이 방어군에 인계되고 그 군단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해버렸다. 폼페이우스의 군세는 제13군단밖에 없던 카이사르보다 훨씬 우세하였으나, 그는 싸울 뜻이 없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대동하던 원로원과 군단이 도주하기 전에 그를 생포하길 바라며 브린디시움까지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였다.[76]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추격을 피해 빠져 나오려고 카이사르가 브린디시움 항구 장벽을 뚫고 들어오기 전에 배를 타고 항구를 떠났다.

폼페이우스가 군대를 철수시키려고 해안의 모든 배를 이미 쓸어가버린 터라 카이사르는 해군력이 없었으므로 히스파니아로 진로를 돌리기로 하였다.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로마의 장관으로 남겨놓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호민관으로 이탈리아 나머지 지역을 맡겨놓고,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2개 군단과 합류하여 놀랍게도 27일만에 히스파니아로 진군하여 폼페이우스의 부하를 무찔렀다. 그런 다음 그리스에 있는 폼페이우스를 상대하고자 동방으로 향했는데, 기원전 48년 7월 10일 디라키움에서 카이사르는 포위망이 무너지면서 겨우 대패를 면하다시피하였다. 같은 해 파르살루스에서 카이사르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보병 수는 거의 두 배 이상, 기병은 더욱 차이가 났다) 매우 짧은 전투 끝에 그를 무찔렀다.[77]

로마에서 카이사르는 독재관으로 임명되었으며[78]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기병 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카이사르는 스스로 집정관 선거를 열어 두 번째로 집정관에 올랐으며(동료 집정관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였다), 그런 다음 11일 뒤 독재관직에서 사임하였다.[78][79]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레이아로 도주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였으며, 이곳에서 폼페이우스는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임금의 궁정에서 복무하던 어느 전직 로마군 장교에게 살해당하였다.[80] 이때 카이사르는 당시 알렉산드레이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그의 누이이자 부인이며 공동 국왕인 클레오파트라 7세 사이의 권력 투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아마 프톨레마이오스가 폼페이우스를 죽이는 데 관여한 탓에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편에 선 것 같은데, 프톨레마이오스의 내시 포티누스가 선물로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바치자 카이사르는 이를 보고 울었다고 한다.[81]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에 나일 강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군대를 무찌르고,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지배자로 삼았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그 해 봄에 나일 강에서 개선 행진을 열어 알렉산드레이아의 내전에서 승리한 데 축하하였다. 파라오의 배는 400 척의 다른 배를 대동하였으며, 카이사르에게 이집트 파라오의 화려한 생활을 보여주었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결혼하지 않았는데, 로마법에서는 오로지 로마 시민 사이의 결혼만 인정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마지막으로 결혼할 때까지 무려 14년동안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이어나갔으며(로마인의 시각에서 이는 간통이 아니었다) 카이사리온의 아버지도 카이사르였던 것 같다. 클레오파트라는 한 차례 이상 로마를 방문하였는데, 로마 바깥의 티베리스 강을 건너면 있는 카이사르의 별장에서 지냈다.

기원전 48년 말, 카이사르는 다시 독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임기는 1년이었다.[79] 기원전 47년 초 몇 달간 이집트에서 지낸 카이사르는 중동 지역으로 가서 젤라 전투에서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 2세를 절멸시켰는데, 너무나 빨리 승리를 거두어 그는 과거 폼페이우스가 이런 형편없는 적들과 오랫동안 싸워 거둔 승리를 조롱하였다.[82] 그 다음으로 카이사르는 아프리카에 남아있는 폼페이우스의 원로원파 잔당을 처리하고자 떠났다. 기원전 46년에 그는탑수스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전사)와 소 카토(자살)의 군대를 상대하여 신속히 대승을 거두었다.[83] 탑수스 전투에서 이긴 뒤 카이사르는 10년 임기의 독재관으로 임명되었다.[84]

그렇지만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로 도주하였는데, 카이사르의 옛 부관이자 갈리아 전쟁에서 부사령관을 지낸 티투스 라비에누스도 이들과 함께 있었다. 이들을 추격한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 3월에 문다 전투에서 마지막 저항 세력을 격파하였다.[85] 이런 가운데 카이사르는 세 번째와 네 번째로 기원전 46년의 집정관(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동료 집정관)과 기원전 45년 집정관(동료 집정관이 없었다)에 선출되었다.


내전 이후
 
카이사르는 아직 히스파니아에서 싸우고 있었으나, 원로원은 그가 부재중인 가운데 영예를 내리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적들을 처벌하지 않고 거의 모두 용서해 주었으며, 그에 대한 대중의 반대도 거의 없었다.

카이사르가 문다에서 승전한 데 기념하며 4월 21에는 대규모 경기와 축하 행사가 열렸다. 플루타르코스는 내전에서 무찌른 적들이 외국인이 아닌 동료 로마인들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로마인들이 카이사르 승리 이후 열린 개선식이 빈약했음을 알았다고 썼다.[86]

기원전 45년 9월에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로 돌아오면서 유언장을 썼는데, 자신의 조카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에게 자신의 이름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상속한다고 썼다. 카이사르는 또 자신이 죽기 전에 옥타비우스가 죽는다면,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다음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적었다.

카이사르는 곡물 수매에 국가 보조금을 대도록 엄하게 제도화하였으며, 곡물 수령자의 수를 고정하여 줄였는데 모든 수령자는 특별 명부에 기록되었다.[87] 47년에서 44년까지 카이사르는 그의 전역병 약 15,000명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계획을 세웠다.[88]

카이사르는 대신관으로서 달력을 정비하는 일도 했다. 구 로마력을 철저히 검사한 그의 업적은 매우 오랜 세월동안 영향력을 이어갔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1년을 365일로 정하고, 4년마다 윤년을 두었다.[89] (율리우스력은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수정하여 오늘날의 그레고리오력이 되었다) 역법 개정으로 로마인에게 어떤 한 해가(아마 현대 역법으로 기원전 46년에 해당할 것이다)이 445일로 길어졌다.[89] 7월의 여러 유럽어 명칭(가령 영어의 'July' 등)은 그를 기념하여 율리우스에서 기원한 것이다.[90] 그 외 여러 공공 사업 가운데는 베누스 게네트릭스 신전이 있는 카이사르 포룸도 있다.
 



암살

기원전 44년, 3월의 열닷새(Idus Martias)에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전날 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라는 어느 "해방자"에게서 음모에 대해 어렴풋이 전해 들었으며, 최악의 상황을 우려하여 포룸 계단에서 약간 떨어져서 카이사르 앞으로 갔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마르스 광장에 있는 폼페이우스 극장을 지날 때 원로원 의원 무리가 그를 가로막더니 동쪽 주랑 현관에 붙은 방으로 그를 이끌었다.[91]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다다랐을 때, 원로원 의원인 루키우스 틸리우스 킴베르가 추방당한 자신의 형제를 귀환시켜달라며 청원을 하였다고 한다.[92] 다른 음모자들이 킴베르를 지지하면서 카이사르를 둘러쌌다. 플루타르코스와 수에토니우스 모두 카이사르가 킴베르의 청을 거절하였다고 했는데, 그러나 킴베르는 그의 어깨를 잡더니 카이사르의 투니카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킴베르에게 "웬 무례한 짓인가!(Ista quidem vis est)"라고 소리쳤다.[93] 이때 카스카가 단검을 빼내들어 단번에 독재관의 목을 내리찔렀다. 카이사르는 재빨리 뒤돌아보며 팔로 카스카를 잡았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라틴어로 "카스카, 이 천한 자야, 무슨 짓이냐?"라고 말했다고 썼다.[94] 겁을 먹은 카스카는 그리스어로 "동지들, 도와주시오!"(ἀδελφέ, βοήθει)라고 외쳤다. 순식간에 브루투스를 비롯한 모든 음모자들이 독재관을 공격하였다. 카이사르는 도망치려 하였으나, 피 때문에 분별을 잃고 발을 헛디뎌 넘어졌으며 주랑 현관 아랫 계단에 무방비로 쓰러지자, 암살자들은 그를 계속 찔러댔다.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를 살해하는 데 60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가담하였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23번 칼에 찔렸다.[95]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나중에 의사가 부검하기를, 그의 가슴에 두 번째로 찔린 상처 그 하나가 치명적인 일격이었다고 한다.[96]

독재관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는 학자들과 역사가들의 논쟁거리이다. 수에토니우스는 다른 사람들은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이 그리스어로 "녀석, 너도냐?"(καὶ σύ, τέκνον)였다고 말했노라고 썼다.[97] 그러나 수에토니우스 자신은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썼다.[93] 플루타르코스도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가 암살자 사이에서 브루투스를 보자 자신의 토가를 끌어올려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고 한다.[98] 영어권 지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그의 마지막 말은 라틴어로 "브루투스, 너도냐?"(Et tu, Brute?)인데,[99][100] 이 말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 나오는 대사에서 나온 말로, 실제로는 라틴어와 영어가 혼용된 문장 "Et tu, Brute? Then fall, Caesar."의 앞부분 구절이다. 이 말은 역사적 사실로서 근거가 없으며, 셰익스피어가 대사에 라틴어를 쓴 것은 당시 카이사르가 수에토니우스가 기록한 것처럼 그리스어가 아닌, 라틴어를 썼다는 주장과도 무관하며, 단지 이 희곡을 쓴 당시 이미 대중적인 구절이었기 때문이다.[101]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살해당한 뒤에 브루투스는 동료 의원들에게 무언가 말할 듯이 앞으로 걸어 나왔으나, 그들이 건물에서 도망쳤다고 한다.[102] 브루투스와 그의 패거리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나아가 사랑하는 도시를 향해 "로마 사람들이여, 우리는 다시 자유로워졌다!"고 외쳤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소문이 퍼지면서 로마 시민들은 각자 자기 집에 문을 걸어잠그고 틀어박혀 그들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암살 이후

암살자들은 카이사르의 죽음이 결국 로마 공화정의 종말로 이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다.[103] 갈리아 정복 전부터 카이사르를 열렬히 지지했던 로마의 중류층과 하류층 사람들은 소수의 잘난 귀족 무리가 자신들의 우상을 죽인 데 분노하였다. 카이사르와 떨어져 있었던 안토니우스는 로마 민중의 슬픔을 이용하여 이들의 분노를 벌족파들에게 쏟아버리겠다고 위협하였는데, 아마도 자신이 로마의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서는 놀랍고도 분하게도, 카이사르는 조카의 아들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를 이미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로 정해두었으며, 유증을 통해 그를 로마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게 해준데다 '카이사르'라는 막대한 권위를 지닌 이름을 물려주었다.[104]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는 위대한 카이사르의 아들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로마 대중 상당수의 충성도 얻게 되었다. 며칠 뒤 로마 포룸에서 카이사르의 장례식이 열렸는데, 안토니우스는 1600여 년 뒤 셰익스피어가 쓴 것처럼("친구들이여, 로마인들이여, 동포여, 들어보시오...") 연설을 하지는 않았으나, 로마의 일반 민중들에게 호소력 있게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여론을 반영한 극적인 찬사를 바쳤다. 게다가 장례 연설 중에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따라 티베리스 강변에 있는 그의 개인 정원은 로마 시민에게 바치며, 모든 로마 시민 등록자에게 300 세스테르티우스씩 선물하기로 발표가 났다.(300 세스테르티우스는 매우 큰 액수는 아니었으나, 로마 노동자들의 평균 석달치 급료에 해당하는 돈으로 상당히 좋은 선물이었다) 안토니우스의 장례 연설과 더불어 카이사르의 유증이 알려지면서 대중 사이에서 카이사르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으며, 죽음에 대한 애도와 암살자에 대한 분노도 높아졌다. 장례식장에서 들끓어오른 군중은 카이사르의 유해를 놓은 장례용 장작에 마른 가지와 가구, 심지어 옷가지까지 던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포룸이 심각하게 피해를 입었다. 그러자 군중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집을 공격하였는데, 이들은 간신히 피해 쫓겨났으며 결국 해방자들의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된다.[105]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다가올 내전의 궁극적인 결과를 예견하지 못하였는데, 특히 카이사르의 후계자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을 당시 겨우 19세의 나이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상당한 정치 감각을 입증하였으며, 안토니우스가 새로운 내전의 첫 단계에서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상대하는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당초 빈약했던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그리스에 막대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와 싸우기 위하여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전쟁 자금과 병사가 필요하였으며, 카이사르의 이름이 지닌 명분과 정당성도 있어야 했다. 기원전 43년 11월 27일 티티우스 법(lex Titia)이 통과되어[106]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카이사르에 충성하던 기병 지휘관 레피두스 세 사람의 제2차 삼두 정치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107]삼두 정치는 기원전 42년에 공식적으로 카이사르를 '율리우스 신'(Divus Iulius)으로 신격화하였으며, 그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신의 아들'(Divi filius)이 되었다.[108] 카이사르가 자신의 관대함 때문에 살해당한 것을 아는 제2차 삼두 정치의 세력자들은 술라 이후에 쓰인 적이 없는 숙청의 공포를 다시 일으켰다.[109] 이들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 대항하여 두 번째 내전에서 45개 군단을 유지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많은 반대자들을 합법적으로 살해하였다.[110]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필리피에서 공화정파를 격퇴하였다.[111]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정부였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였는데, 로마를 지배할 발판으로 이집트의 어마어마한 부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에 맞서 세 번째 내전을 벌인다. 이 마지막 내전에서 악티움 해전을 기점으로 옥타비아누스가 승세를 잡게 되고, 결국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신적인 이름을 달고 로마 제국의 첫 황제가 되었다.[112]

당초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와 캅카스스키타이를 침공하고, 동유럽을 가로질러 게르마니아에 다시 진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암살되면서 이러한 계획은 좌절되었다.[113] 그의 후계자들은 파르티아와 게르마니아를 정복하고자 하였으나, 영속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건강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근거하여,[114] 간혹 카이사르가 간질을 앓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으며, 또 특히 기원전 80년대에 술라가 처벌자 명단을 공개하던 당시 그가 말라리아에 걸린 것은 이보다는 더욱 확실하다.[115]

카이사르는 부분적으로 발작 증세를 보였던 것 같은 기록이 네 가지가 있다. 또 그는 아마도 어린 시절에 소발작(absence seizure)을 증세가 있었던 것 같다. 이렇듯 그의 발작에 대한 가장 최초의 기록은 카이사르 사후에 태어난 사람인 수에토니우스의 글이다. 그가 간질 환자였다는 주장에 대해 일부 의학 역사가들은 그의 병이 간질성 발작을 유발하는 저혈당증이라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116][117][118]


저서

카이사르는 생전에 로마에서 훌륭한 웅변가이자 산문 작가로 인정받았으며, 키케로도 카이사르의 수사와 문체를 높이 평가하였다.[119] 그의 유명한 작품 가운데는 마리우스의 아내인 아주머니 율리아의 장례 연설과, 키케로의 소 카토 회고에 대응하여 카토를 비난한 글인 안티카토네스(反카토)가 있다. 불행히도 그의 글과 연설문 상당수는 유실되었다.가장 큰 원인은 그의 사후에 그가 신격화 됨에 따라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등 몇몇 문서들을 제외한 그와 관련된 글과 연설문들의 폐기를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가 쓴 회고록으로는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가 있는데, 전자는 갈리아 전쟁 당시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 벌인 군사 작전을 기록하였으며, 후자에서는 이집트에서 폼페이우스가 죽은 직후에 일어난 내전을 다루었다. 또 각각 알렉산드레이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에서 수행한 전투에 대해 쓴 알렉산드레이아 전쟁에 대하여(De Bello Alexandrino), 아프리카 전쟁에 대하여(De Bello Africo), 히스파니아 전쟁에 대하여(De Bello Hispaniensi) 이 세 저작도 역사적으로 카이사르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저자 여부는 불투명하다.

이러한 저서의 줄거리는 당시 전쟁 중이나 직후에 "전선에서 급송한 공문서"로서, 1년 단위로 써서 출간되었다. 카이사르의 저서는 문체면에서 분명하게 단순하고 직설적이나, 사실은 대단히 복잡하고 그의 정치적 주장을 선전하는 방향으로 미묘하게 편향되어 있고 특히 로마나, 이탈리아, 속주의 평범한 소귀족 독자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


위키백과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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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원더우먼' !!! - 장애는 그녀를 막지 못한다!!  

다리가 없는 장애를 극복하고 패션모델, 영화배우, 육상 선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여성이 해외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라고 하는데요.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분야에서 활약을 펼치고 있는 
그녀가 궁금해지는데요~~"" 심지어 육상선수?!! 

197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생인 에이미 멀린스
종아리뼈가 없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녀는 미국 워싱턴에 조지타운 대학에 입학한 후 
장애인 올림픽에 '미국 대표 선수'로 출전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고 하는데요.

100m 등 단거리 및 멀리뛰기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그녀는
이후 패션모델로 일했고, 책을 저술하며 강연 활동을 펼치는 동시에 
영화배우로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합니다.

 
'1백 미터 최고 기록' -> 15.77,  '멀리뛰기 기록' -> 3.5미터.

제자리에서 머물지 않고, 항상 자기 발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그녀의 모습.. 진정한 '원더우먼' 인 것 같습니다~""


멀린스는 피플지 선정 아름다운 여성 5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는데,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변화시키는 것은 물론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하네요.






에이미 달리다

(Aimee Mullins On Running, 1998)

 

 

 

 

에이미와 12쌍의 다리

(Aimee Mullins And Her 12 Pairs Of Legs, 2009)

 

 

 

 

역경의 기회

(Aimee Mullins: The Opportunity Of Adversity, 2009)

 

 

유의어 사전에서는 "장애"의 유의어로 "쓸모없는"이나 "불구" 를 들고 있지만,

신기원을 이룬 육상선수 에이미 멀린스는 장애의 정의를 다시 쓰고 있다.

정강이뼈 없이 태어난 역경을 딛고, 장애와 관련된 수식어를 극복하고 있는

그녀는 역경이 개개인의 잠재력을 어떻게 끌어내는지를 직접 보여주고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얼굴을 지닌 외국의 한 모델 에이미 멀린스(1976년생)

어쩜 이렇게 이쁜지.... 참~~

반듯한 이목구비에.... 예쁜 웃음까지....

그러나 그녀가 진정 아름다운 건 바로 이것!

197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생인 에이미 멀린스는 종아리뼈가 없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녀는 미국 워싱턴에 조지타운 대학에 입학한 후 장애인 올림픽에 미국 대표 선수로 출전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100m터 : 15.77초

멀리뛰기 :  3.5m

그녀는 모델 활동도 하며

철저한 건강관리를 위해 매일 조깅을 하고,

의족을 신고 표지모델을 장식하기도 하며,


의족개발의 필요성에 대해 강의를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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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자
  생애: 1473년 2월 19일 (폴란드 토루인) - 1543년 5월 24일
  학력: 파도바대학교 의학과
  경력: 1520년 프라우엔부르크 대교구장
           1516년 알렌슈타인교회 평의원
           1516년 엘름란드교구 회계감사역
           1512년 프라우엔부르크성당 신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 Mikołaj Kopernik 미코와이 코페르니크/ Nikolaus Kopernikus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4일)는, 지동설을 주장하여 근대 자연과학의 획기적인 전환,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을 가져온 폴란드 혹은 프로이센 태생의 천문학자이다. 여러 가지 이름표기는 그가 태어난 곳(폴란드)과 그의 모국어(독일어) 그리고 그가 즐겨 쓴 라틴어를 감안하여 세 가지 언어로 표기한다. 인공원소 코페르니슘의 이름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그는 라틴어, 폴란드어, 독일어, 그리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를 모두 말할 수 있었다.

흔히 대담하고 획기적인 생각을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태양과 별이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겉보기 운동과는 달리, 사실은 지구가 돌고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체계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고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변혁으로 불리는  '과학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1543년에 출간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에서 그는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천명했는데, 이것은 당시 누구도 의심하지 않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도전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은 그 위에 사는 존엄한 존재이며 달 위의 천상계는 영원한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중세의 우주관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만물의 중심에는 태양이 있다.
전체를 동시에 밝혀주는 휘황찬란한 신전이 자리 잡기에 그보다 더 좋은 자리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혹자는 그것을 빛이라 불렀고, 혹자는 영혼이라 불렀고, 또 어떤 이는 세상의 길잡이라 불렀으니 그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태양은 왕좌에서 자기 주위를 선회하는 별들의 무리를 내려다본다.”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체계는  전통적인 교회의 입장과  다른 것이었지만,  적어도  당대에는 탄압받지 않았다. 오히려 교황청의 일부 인사들은 그의 이론을 옹호하기까지 했다. 물론 비판이 없지는 않았다. 예컨대 그와 동시대인인 종교개혁가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나  하늘의 덮개,  해와 달이 아니라  지구가 회전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발버둥치는 오만불손한 주장이 나왔다. 그 바보는 천문학 전체가 뒷걸음치는 걸 바라고 있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점이라는 엄청난 특권을 포기해야 했다.
이제 인간은 엄청난 위기에 봉착했다. 낙원으로의 복귀, 종교적 믿음에 대한 확신, 거룩함, 죄 없는 세상, 이런 것들이 모두 일장춘몽으로 끝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새로운 우주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사고의 자유과 감성의 위대함을 일깨워야 하는 일이다.” (지동설의 부각에 대한 괴테의 언급 중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체계가 우주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세계관을 바꾸어놓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요컨대 그것은 ‘점진적 혁명’이었다.

종교개혁이 많은 신자들로 하여금 교황청에 등 돌리게 만들었다면,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은 신으로부터 등 돌리게 만들 수 있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것이었다.

그것은 지구와 그곳에 사는 인간의 우주적 의미를 보잘것없는 차원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인간은  정말로 신의 사랑을 독자치하는 존재인가?  무한한 우주를 창조한 신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왜 굳이 지구로 보냈단 말인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서양 중세의 우주관, 인간관, 세계관의 뿌리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관측 결과와 완전히 부합한 것은 아니어서, 이후 많은 과학자들 특히 케플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뉴턴 등에 의해 수정되고 보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 문명세계에 사는 우리들 중 지구가 돌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생애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현재의 폴란드 중북부에 있는  당시의  한자동맹 도시인 토룬(폴란드어 Toruń, 독일어 Thorn)에서 관리이자 주철업을 하는 아버지 니콜라스 코페르니크와  당시의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지방 출신인  어머니 바르바라 바첸로데 사이에서  네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열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토룬에서 초등 및 중고등학교를 다닌 후 코페르니쿠스는 1491년 당시 독일의 작센에 속했던 폴란드 남부지방의 대도시 크라카우(현 크라쿠프)로 가 대학에 입학하여 1494년까지 수학 및 천문학을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1495년 이탈리아의 볼로냐로 가 삼촌의 권유로 신학과에 입학한다. 이탈리아에 머무르면서 코페르니쿠스는 또한 로마 및 파도바 대학에 등록하여 강의를 들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 유해 발견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숨을 거둔 이후  고고학자들은  수 세기에 걸쳐  그의 유해를 찾으려 노력해 왔다. 1807년 나폴레옹은 그의 무덤을 찾다가 실패하였고, 폴란드 공산 정권는 정부와 교회의 관계가 껄끄러워 유해 찾기 작업이 순조롭지 않았다.
2005년 8월  14세기에 건축된  플라우엔부르크 대성당 제단 아래를 파고 들어가자  여러 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그중에  코페르니쿠스의 것으로 보이는  아래턱이 없는  두개골과 다리뼈 등이 나왔다. 유골은 사망 당시 연령이 60 ~ 70세로 추정되었다. 부러진 코, 왼쪽 눈 위 흉터 등 두개골의 특징이 현존하는 코페르니쿠스 초상화에 나타난 모습과 일치하였다.
2008년 11월 20일 스웨덴 웁살라 대학교의 유전학 전문가 마리 알렌은 기자회견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책에서 나온 두 가닥 머리카락의 DNA가, 그의 유해로 추정되는 뼈의 DNA와 일치한다'라고 밝혔다. 유해의 보존 상태는 좋지 않아 아래턱 부분은 소실된 상태였다. 뼈의 상태를 조사한 결과 약 70세 가량 노인의 것으로 확인되었고 이는 코페르니쿠스가 죽었을 때의 나이와 일치한다.

2010년 그의 장례식은 500년만에 폴란드에서 다시 치려졌다.
폴란드 국민과 고위성직자들은 그를 국민적 영웅르로 기리며, 최고의 예우를 하였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칸트가 자신의 인식론상의 입장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 말입니다.
일단  단어의 뜻부터  면밀히 보게 되면  코페르니쿠스는  몇 천년동안 천동설을 믿던 전 세계 사람들에게 지동설을 주장하며 잘못된 관념에 대해 경종을 울렸던 사람이죠.

그와 같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여지껏 인식해오고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보편적 관념에 일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칸트에게 있어서 그것은 바로 인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가 있다고 합시다. 다이아몬드 자체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 눈에는 다이아몬드가 보입니다. 다이아몬드 그 자체에 대해 우리는 인지하는 것이죠.

그러나 칸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주관적으로 다이아몬드를 인지한다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빨간색 안경을 쓰고 태어난 아기는 평생 빨간색으로 세상을 바라보겠죠?
그와 같이 인간의 인지능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눈의 인식이라고 해도 이것은 인간의 눈이 인식한 것이고 다이아몬드를 완전히 인식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눈이 몇 만 화소를 보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그보다 더 높은 화소나 우리가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꿀벌의  눈의 시각과  우리 눈의 시각이 다르듯이 말이죠.

이러한 혁명적 사고는 근대 인간중심주의에도 큰 영향을 끼쳤죠.
과거 천년 이상 지배해온 유럽 크리스트교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사상이었죠.

그 당시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것이고 우리가 밥을 먹듯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무신론적 사고도 가능하며 (칸트는 유신론자지만) 인간중심사회인 르네상스를 이끄는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과거에 대상을 객관적으로만 바라본 철학에 인간은 주관적으로 인식한다는 큰 사고의 전환을 일으켰습니다.


짧은 논문을 통해 지동설에 관한 구상 세워

코페르니쿠스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1496년 이탈리아로 가서 볼로냐 대학에서 신학, 법학, 고전학을 공부했지만 주된 관심은 천문학이었다. 파도바 대학, 페라라 대학 등에서도 공부한 그는 1500년 로마에 머무르며 수학과 천문학을 강의했다. 페라라 대학에서 교회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의학도 공부한 뒤 귀국한 그는 1505년경부터 플라우엔부르크 성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법학 지식으로 교구 행정에 참여했으며, 수학 지식으로 통화(通貨)와 경제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성당 참사회 입장에서 그는 매 우 쓸모가 많은 ‘준비된 인재’였다.

 

1513년 코페르니쿠스는 성당 참사회의 상회에서 800개의 돌과 석회를 구입했다. 천문 관측을 위한 지붕 없는 탑을 쌓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천문 관측기술의 한계 탓에, 그의 관측이 새로운 천문이론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1514년에는 교황의 비서관으로부터 교회력 개정을 위한 회의 참석을 요청 받았지만 거절했고, 다만 달력 개정을 위해서는 태양과 달의 관계를 정확히 밝혀야 한다는 의견만 제출했다.

 

1510~1514년 사이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중심 천문체계에 관한 개략적인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짧은 논문으로 작성했다. ‘천체 운동에 관해 구성한 가설에 대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소론(小論)’, 줄여서 [소론]이라 일컫는 논문이다. 논문 제목은 코페르니쿠스 자신이 아니라 그것을 필사하여 유포시킨 이들이 붙인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논문을 소수의 지인들에게만 배포했다(정식 인쇄본 출간은 1878년). 이 논문에서 그는 본격적인 수학적 설명을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천문학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지구가 움직이는 태양 중심 체계를 가설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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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생애

   1] 폴란드의 부유한 상인 아들로 태어남

   2]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가톨릭교회 신부인 외삼촌 루카스 바첼로드 밑에서 자랐다.

   3] 외삼촌의 도움으로 1495년에서 1505년까지 약 10년간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이탈이아의 볼로냐 대학과 파도바 대학 등지에서 법학, 의학, 재정학, 수학 및 천문학 등을 배웠다.

   4] 당시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각 대학은 그리스 고전 번역에 활발하게 참여하였고

   5] 코페르니쿠스는 그리스 시대의 문헌을 번역하거나 당시의 번역 서적을 읽으면서 고대 천문학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

   6] 1500년경에 처음으로 천문학자들과 월식의 광경을 관찰하면서 월식의 진행 방향 등 천문학적 현상을 자세히 그려 주변 사람의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2.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가 갖는 모순을 발견하였다.

   1] 1512년 고국으로 돌아온 코페르니쿠스는 교회 일을 도우면서 교회의 옥상에 관측시설을 설치하고 천문학 연구에 심취하였다.

   2] 천체를 관측하면서 당시 행성 운행표가 갖는 오류를 발견하여 그 원인을 찾는데 골몰하였다.

   3] 또 프톨레마이오스의 라틴어 번역서인 알마게스트를 접한 후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체계가 실제 관측 사실과 다른 모순점을 발견하였다.

3. 코페르니쿠스가 보기에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는 행성의 정지와 역행을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했다.

   1] 우주가 수적 조화에 따라 운행된다는 피타고라스적 신념이

      1) 플라톤에게 영향을 미쳤고

      2) 코페르니쿠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2]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는 우주의 단순하고 아름다운 체계를 보여주지 못했다.

   3]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토대로 만들어진 달력은 수정과 보완에도 불구하고 오차가 쌓였다.

      - 간접적이긴 하지만 천문학 체계의 변화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4. 고대 그리스 천문학 문헌 가운데 태양중심의 우주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함

   1]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의 태양중심설

      1) 관측을 토대로 한 천문학적 연구소산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

      2) 불 숭배라는 종교적 성향과도 관련이 있다고 추측되는 직관의 산물

   2] 코페르니쿠스로서는 하나의 발판을 마련한 셈

   3] 이후 무려 30 년이 넘도록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를 대신할 하나의 대안을 완성해 간다.

5.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1]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중심의 우주 체계 대신 태양 중심의 새로운 우주 체계를 고안하였다.

   2] 코페르니쿠스는 1510~1514년 사이에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코멘타리올루스(Commentariolus)라는 짧은 논평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3] 코페르니쿠스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자신의 논문의 출판을 보류한 채 가까운 친구들에게 돌렸다.

   4]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우주 체계를 발전 시켜 1530년에 책으로 완성하였다.

   5] 그 책은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채 코페르니쿠스가 사망하던 1543년에 뉘른베르크에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revolutionnibus orbium coelestium』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6] 그 책의 출판을 주도한 루터파 목사 오지안더(Andreas Osiander)는 책의 서문에서 지동설은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적어 종교와 마찰을 피하고자 했다.

      1) 코페르니쿠스의 천동설은 사실을 기록 한 것이 아니라 천문학자들이 더 정확한 계산을 할 수 있도록 돕는 편리한 수학적 도구라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2) 오지안더의 서문 덕분에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은 신학적 반발을 피할 수 있었고 교회의 금서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6. 책의 발간과 관련하여

   1]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조심스럽게 출판한 이유는 그의 성격과 사회적 지위와 관련이 있다.

   2] 기독교 사회에서 평생 신부로 재직하면서 천문학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지구중심설 대신 태양중심설을 주장하는 것을 기독교 사회에 대한 모욕이라고 여겼다.

   3] 기독교 사회에서 평생동안 사회적 안위를 누리며 산 사람으로서 천문학을 연구하도록 하고 또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정당화시켜준 지구 중심설을 깨뜨린다는 것은 신중하면서 겁이 많았던 코페르니쿠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4] 모든 사람이 당연하다고 믿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는 혁명가 스타일은 아니었다.

7.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

      - 천년이 넘도록 진리로 군림해온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 맞서 새로운 체계를 세운 발상의 전환에 대해서 경의를 표함

8.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 나타난 지동설

   1] 지구가 자전을 하면서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을 하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처럼 주전원을 도입할 필요가 없다.

   2] 행성의 순행이나 역행도 지구가 움직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함

9. 코페르니쿠스 우주체계의 한계

   1] 행성의 원운동을 고수하는 제한된 개혁이다. -> 주전원을 다시 도입

   2] 우주가 천체에 붙어있는 투명한 수정구로 둘러싸여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3] 지구가 빠른 속도로 자전하면서 공전하는데도 사람들이 지구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10. 코페르니쿠스 평가

   1] 최초의 근대적 천문학자

      1)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을 포함하고 있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을 깨뜨렸다는 점과

      2) 태양중심설을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2] 최후의 고대 천문학자

      1) 일정한 원운동에 의해서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후계자였다.

   3] 토마스 쿤의 평가

      1) 프톨레마이오스적 천문학자인 동시에 최초의 근대적 천문학자이며

      2) 혁명을 주도한 인물이라기보다는 혁명의 기반을 다진 천문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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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언어학자로서 변형생성문법 이론으로 언어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1960년대부터 활발히 사회운동에 참여하여 미국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별칭언어학 혁신의 아버지
국적미국
활동분야어학
출생지미국 펜실베이니아주(州) 필라델피아
주요저서《언어 이론의 논리적 구조》(1955) 《통어론적 구조 Syntactic Structures》(1957) 《통어 이론의 제상 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1965) 주요작품


1928년 12월 7일 미국의 펜실베니아주(필라델피아에서 유대계 러시아 이민자 가정의 2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William Chomsky)는 저명한 히브리어 연구자였으며 촘스키가 언어학자가 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언어학수학, 철학을 공부했으며, 1955년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에 언어학자인 캐롤 슈워츠 촘스키(Carol Schatz Chomsky)와 결혼했으며, 1950년대에는 아내와 함께 이스라엘의 집단농장인 키부츠(qibbutz)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1956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교수가 되었고, 1966년 석좌교수, 1976년부터는 연구교수가 되었다.  

그는 1951년부터 1955년까지 하버드대학교의 특별 연구원으로 선임되었는데, 이 기간에 《변형 분석 Transformational Analysis》이라는 제목의 박사 논문을 완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변형생성문법 transformational generative grammar》이론의 기본 틀을 정립하였다. 그는 1955년 논문의 내용을 발전시켜 《언어학 이론의 논리적 구조 The Logical Structure of Linguistic Theory》라는 책을 집필하였고,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이 책은 등사판으로 유포되었다가 1975년에 정식 출간되었다). 그리고 《통사 구조 Syntactic Structures》(1957), 《통사론의 여러 측면 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1965), 《생성문법 이론의 여러 문제 Topics in the Theory of Generative Grammar》(1966), 《영어의 음성양식 Sound Pattern of English》(1968, Morris Hall과 공저), 《언어와 정신 Language and Mind》(1968), 《언어지식 Knowledge of Language》(2000), 《최소주의 언어이론 The minimalist program》(2001) 등의 저작으로 변형생성문법 이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며 언어학의 혁명을 주도하였다. 

촘스키는 현대 언어학의 발달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언어학자이다.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 이론은 개개의 언어수행(performance)에 앞서 존재하며 그것을 생성시키는 인간의 보편적인 언어능력(competence)과 언어규칙에 대한 탐구로 언어학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이는 ‘촘스키 혁명’, ‘언어학 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현대 언어학에 획기적 전환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그의 언어 이론은 인지과학, 철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들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촘스키는 언어학자로서만이 아니라 현실 비판과 사회 참여에 앞장서는 실천적인 지식인으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1960년대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을 기점으로 다양한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1967년에는 국방성과 국무성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저작과 강연, 대담, 영상물 등으로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대외 정책과 정치·경제·매체를 장악한 권력을 비판해 왔으며, 직접 실천 행동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는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의 야만성에 대한 비판에도 앞장섰다. 이러한 활발한 사회 참여 때문에 그는 ‘미국의 양심’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인간이면 누구나 자기가 속한 사회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행동에 옮길 수 있어야 하며, 인간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문제에 대한 진실을 그 문제에 대해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대중에게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 Writers and Intellectual Responsibility》(1995)라고 주장했다. 

한편 그는 언어학 이외에도 정치학, 철학, 심리학 등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 80여 권의 저서와 1천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특히 강대국의 패권적인 대외 정책과 언론, 지식인의 유착 등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활동에 앞장서, 《숙명의 트라이앵글 - 미국,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Fateful triangle : the United States, Israel and the Palestinians》(1983), 《여론조작―매스미디어의 정치경제학 Manufacturing Consent: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Mass Media》(1988, 에드워드 허먼과의 공저),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What Uncle Sam Really Wants》(1996),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Profit over people : neoliberalism and global order》(1999),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Year 501, The Conquest Continues》(2000), 《불량 국가 Rogue states》(2001) 등의 저작을 남겼다. 이러한 저작들과 강연, 대담 등을 통해 그는 다국적기업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문제와 강대국의 대외 정책에서 나타난 폭력성, 이에 융합된 사회 내의 권력 등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활동을 펼쳤으며, 그의 글들은 세계 각국에서 번역되어 널리 읽히며 큰 영향을 끼쳤다. 


변형생성문법 [變形生成文法, transformational generative grammar]

미국의 구조주의 언어학이 가지고 있던 난점을 타파하고, 언어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서 언어구조를 기술해야 한다는 N.촘스키에 의하여 제안, 발달된 문법.

변형문법·생성문법이라고도 한다. 종래의 미국 구조언어학에서는 분석 대상의 언어가 실제 회화에서 사용된 언어, 즉 언어체(corpus)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 능력은, 화자가 전에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문장을 포함하여 무한히 많은 수의 문장을 생성,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실제 회화에서 사용된 언어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있을 수 있는 문장도 연구 대상으로 한다. 그리하여 문법적으로 옳은 모든 문장, 그리고 바로 그것만을 생성해 낼 수 있는 언어규칙을 명시적으로, 또 엄밀히 수학적으로 형식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렇게 형식화된 언어규칙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언어능력, 또는 언어습득 기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 문법은 언어보편성()을 그 주장의 근저에 두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선천적으로 언어습득 기제를 가지고 태어난다면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론을 체계화하여 변형생성문법의 기본 틀을 이루고 있는 이론이 발표된 것은 그의 《통사이론의 제양상: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1965)에서였다. 이것은 나중에 표준이론으로 불리게 되는데, 문법의 구성요소는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① 통사부문():이것은 크게 보아 기저()와 변형규칙()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저는 다시 범주규칙인 구절구조규칙() 부문과 어휘부()로 구성된다. 

구절구조규칙에는 순환규칙()이 포함되어 있어서, 종래의 단문 외에도 여러 복합문과 무한히 긴 문장이 생성되어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구절구조규칙은 시발부호인 S(문장)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단계에는 복합부호()로 불리는 여러 가지 문법적 정보를 가진 자질()의 복합체를 이루게 된다. 

한편 어휘부에는 단어들이 각각의 문법적 정보를 담은 자질의 복합체와 함께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어휘가, 자질들이 서로 상치됨이 없이 구절구조규칙에 의해 생성된 구조에 삽입되고 여기에 필수변형규칙이 적용되어 하나의 심층구조가 생겨난다. 

한편 변형부분은 필수변형규칙과 수의변형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심층구조는 이러한 변형규칙의 적용을 한 번 혹은 그 이상 받아서 표면구조로 도출된다. 그러나 변형규칙은 의미를 바꾸지 않는 제약을 가지고 있으며 기본변형규칙으로는, 첨가·삭제·대치() 등이 있다. 

② 의미부문():통사부문이 생성적 부문인 데 비해, 의미부문은 해석적인 부문이다. 즉 통사부문에 비해 생성된 심층구조의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는 부문으로 각 어휘에 대한 의미를 나타내는 부문과, 작은 단위에서 큰 단위에로 의미를 조합해 가는 투사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다. 

③ 음운부문():이 부문도 의미부문과 마찬가지로 해석부문이다. 변형규칙의 적용을 받고 도출된 표면구조를 실제 언어와 같이 음성적 요소를 부여하는 부문이며, 일련의 음운규칙이 존재하며, 각각의 음운자질의 다발로 되어 있다. 이에 의하여 표면적으로 같은 문장일지라도, 심층구조에 차이를 두어 두 가지 이상의 해석을 가능케 함으로써 종래의 구조주의 문법이 해결하지 못한 부분을 쉽게 해결하게 되었다.

그후 이 이론은 크게 보아 두 갈래로 발전하게 된다. 변형규칙이 과연 의미를 변화시키지 않는가, 또 심층구조라는 것이 촘스키식의 통사구조가 아니고 의미구조가 아닐까 하는 등의 의문이 제기되면서, 확대표준이론으로 불리는 촘스키와 그의 제자 L.자켄도프의 이론은 의미해석을 심층구조와 표면구조에서 각각 해줌으로써 난점을 해결하려 하는 해석의미론()의 입장을 취하였고, 

그의 또 다른 제자들인 J.D.매콜리, E.J.바크, G.레이코프, T.로스, C.필모어 등은 변형규칙이 의미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한편 심층구조가 곧 의미구조라는 주장의 생성의미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다시 다른 관점에서 보아 전자를 어휘론자(), 후자를 변형론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후 변형문법은 주로 촘스키 계열의 제자들에 의하여 계속 수정·보완되어 왔으며, 근래에는 표면구조를 더욱 심화하여 모든 의미해석을 표면구조에서 하는 이른바 수정된 확대표준이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의하면 표면구조는 표준이론의 표면보다 훨씬 추상적인 구조이며, 이것은 이동변형이 일어나고 남긴 흔적을 보유하고 있어서, 그러한 의미해석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표면구조를 보강된 표면구조라고 부른다. 

최근의 변형문법은 이러한 체계를 더욱 발전시켜서, 문장구조 내의 지배와 묶음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하위의 몇몇 규칙들(지배이론·묶음이론·주제이론·추상적 격이론·통제이론 등)의 상호작용으로 보편문법과 개별문법을 기술하려고 한다. 

이러한 이론을 근거로 한 보편문법은 다음의 네 부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① 어휘부(lexicon), ② 통사부:범주부문·변형부문, ③ 음운형태부문(PF-component), ④ 논리형태부문(LF-component). 

이 가운데 특히 변형부문에는 단 한 개의 변형규칙, 즉 명사구이동 변형규칙(Move NP)만 존재한다.



미국 정부에 대한 비판

촘스키는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대한 비판을 시작으로 동티모르와 코소보사태 등 약소국에 내정에 개입하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유명해졌다. 그리고 미국의 대중 매체 역시 국가 이데올로기를 위해 모든 뉴스를 철저하게 왜곡하고 있다며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그의 저서

정치
  • 《지식인의 책무》(2005) The Responsibility of Intellectuals (1967)
  • · American Power and the New Mandarins (1969) ·
  • 《세계를 해석하는 것에 대하여 /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하여》(2003) Problems of Knowledge and Freedom: The Russell Lectures.(1972)
  • 《숙명의 트라이앵글》(2001) The Fateful Triangle: The United States, Israel, and the Palestinians. (1983, 1999)
  • 《해적과 제왕》(2004) Pirates and Emperors: International Terrorism and the Real World. (1986)
  • The Soviet Union Versus Socialism (1986) ·
  • 《여론조작》(2006) Manufacturing Consent: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Mass Media * (1988)
  • 《테러리즘의 문화》The Culture of Terrorism. (1988)
  • 《환상을 만드는 언론》(2004) Necessary Illusions (1989)
  •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2000년) Year 501: The Conquest Continues. (1993)
  • 《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2004) The Prosperous Few and the Restless Many.(1993, 2003)
  • Deterring Democracy (1992) ·
  •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1996년) What Uncle Sam Really Wants(1992)
  • 《노암 촘스키의 미디어컨트롤》(2003) Media Control: The Spectacular Achievements of Propaganda. (1997, 2002).
  • 《냉전과 대학》 (2001년)The Cold War and the University.(1997)
  •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1999년) Profit over People: Neoliberalism and Global Order.(1999)
  • 《불량국가》(2001) Rogue States: The Rule of Force in World Affairs (2000)
  •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2001) Chomsky on Mis-Education (2000)
  • 《촘스키 9-11》(2001) 9-11 (2001)
  • 《촘스키 사상의 향연》 Chomsky on Democracy and Education(2002)
  • 《패권인가 생존인가》(2004) Hegemony or Survival: America's Quest for Global Dominance (2003)
  • Objectivity and Liberal Scholarship (2003) ·
  • 《권력과 테러》Power and Terror: Post-9/11 Talks and Interviews.(2003)
  • 《중동의 평화에 중동은 없다》Middle East Illusions: Including Peace in the Middle East? Reflections on Justice and Nationhood. (2003)
  • 《촘스키, 미래의 정부를 말하다》(2006) Government in the Future.(2005)
  • 《촘스키의 아나키즘》(2007) Chomsky on Anarchism (2005)
  • 《촘스키, 우리의 미래를 말하다》(2006) Imperial Ambitions: Conversations on the Post-9/11 World.(2005)
  • 《촘스키 실패한 국가 미국을 말하다》(2006) Failed States: The Abuse of Power and the Assault on Democracy (2006)
  •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2005)
  • 《촘스키와 아슈카르 중동을 이야기하다》(2009) Perilous Power. The Middle East and US Foreign Policy. Dialogues on Terror, Democracy, War, and Justice (2006)
  • 《촘스키, 우리가 모르는 미국 그리고 세계》(2008) Interventions.(2007)
  • 《촘스키 변화의 길목에서 미국을 말하다》 What We Say Goes: Conversations on US Power in a Changing World.(2007)
  • 미국의 이라크 전쟁 Iraq under siege
  •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 Penser le XXI siecle par le monde diplomatique 2000 par le monde diplomatique
  • 전쟁과 평화
  • 노엄 촘스키와의 대담 (한국과 국제정세)
  •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Deux heures de lucidite : entretiens avec Noam Chomsky
  • 야만의 주식회사 G8을 말하다 Arguments against G8
  • 시대의 양심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 Louder than bombs : the progressive interview


언어학 

  • 《생성문법론》Syntactic Structures (1957)
  • Current issues in linguistic theory (1964)
  • 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 (1965)
  • Cartesian Linguistics: A Chapter in the History of Rationalist Thought (1966)
  • 영어의 음성체계》(모리스 할레와 공저) (1968년) The Sound Pattern of English (1968)
  • Conditions on Transformations (1973)
  • The Logical Structure of Linguistic Theory (1975)
  • 《지배.결속이론:피사강좌》Lectures on Government and Binding: The Pisa Lectures (1981)
  • 《언어지식》 (2000년) Knowledge of language: its nature, origin, and use (1986)
  • 《장벽이후의 생성문법》 (1993년)
  • 《언어와 지식의 문제》 (1994년)
  • 《최소주의 언어이론》 (2001년) The Minimalist Program (1995)
  • New Horizons in the Study of Language and Mind (2000)
  • 《촘스키 자연과 언어에 관하여》 On Nature and Language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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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때부터 두 다리의 종아리 뼈가 없어 생후 11개월 때 무릎 아래를 절단한 오스카 피스토리우스..


장애인과 비 장애인의 차이는 없다며 작년 베이징 올림픽 출전을 염원했던 그였지만 결국 일반 올림픽 출전은 무산 되었습니다.

그 뒤 피스토리우스는 장애인 올림픽인 페럴림픽 100m에 출전하여 11초 17의 기록으로 우승하였습니다.

베이징 올림픽 세계 신기록을 달성한 우사인 볼트(9초 69) 보다 불과 1초 48 뒤진 멋진 기록이었습니다.

불굴의 의지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피스토리우스는 그 모습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수 있겠지만, 더 아름다운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있었습니다.

 

 

기자 : "혹시 다리가 정상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없으신가요?

        라는 질문에 그는


오스카 : "그런 질문은 비장애인들에게 의족을 끼고 달리는 건 어떨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한 마디 더 붙였습니다.

           "나는 그냥 나입니다."

 

세상은 그에게 남들과 다른 신체를 주었지만, 그래도 그에게 주어진 세상은 남들과 똑같은 것 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주인은 자기 자신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보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저 현재에 만족하고 지금에 감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wn1 -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고, 어떤 성향을 가지고있고, 어떤 환경을 가지고 있는지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가질 수 있는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현재 가지고 있는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다는걸 알면서도 믿으려 하지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면서 부러워하거나 싫어합니다.


자신이 앞으로 가질 것에 희망을 두고 그것을 가지고 나가면서 현재를 맞추어 살게 된다면 주인공처럼 세상을 달리 볼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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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1 - 개인적으로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으면 가능하면 가서 듣는다.
또한 같은 강사의 강의를 반복해서 듣는다.. 사실 공부란것은 반복이 아닌가.
내가 학생들에게 공부법을 알려주고 강조하면서 스스로는 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더욱 같은 분의 강의를 찾아서 여러번 듣는다.
그렇게 들어보면 처음 들을때는 많은 것을 가슴에 품으나 몇 번을 더 들으면 점점 줄어드는 강의가 있고..
사실 처음부터 그리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없는 강의들도 있다...그래도 몇 번 들으려 한다.
그럼데 처음들을 때의 뭉클함을 여러번 반복해도 그대로 아니 더욱 커지는 것을 느끼는 강의가 있다.
서진규 박사님의 강의는 그러한 강의 이다...
들을 때 마다 가슴이 시리기도 하고 즐겁기도 뭉클하기도 하다..
그건 아마도 자신의 삶을 그대로 뭍어 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며
인간적인 면과 강렬한 카리스마를 공존 시키는 강의 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앞으로 강의가 더 있으면 들으려 노력할 것이다..^^

<맨 아래에는 서진규 박사님의 카페 링크와 도서내용 링크가 있습니다>


강의 내용 요약

한국에서만도 600여회에 달하는 강연중
2006년 6월 8일 하버드 박사학위 취득
2017년 1월 21일 미국 국무장관에 취임(그의 꿈)
c형 간염의 악화로 한국에 들어오기로 결심 - 인터페론 주사는 우울증을 동반하기에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함(지역전문가 파견시절 폭음과 공부하면서 스트레스로 인한것이라 말하심)

서진규는 초등학교시절 3년동안은 반에서 꼴찌만 하였다.
하지만 어머님의 영향으로 어려운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꿈'을 가지기 시작함.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 성공하려면 박사가 되는것이다.
이때부터 박사를 꿈꾸기 시작했다. - 물론 그 전까지의 꿈은 암행어사 였다. 아는것이 그것밖에 없어서...
초6학년때부터 공부에 대한 눈이 떠지고 방법을 찾아가게 되었다.
"나의 성공비결은 내가 가진것을 최대한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불평 불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게 도움을 베풀어 스스로 바뀌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돕기위해 필요한것 첫째는 인성
                                           둘째는 실력
                                           셋째는 성과
니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명확하다면 '어떻게'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알려줄 것이다.

아버지께 바치는 노래 '한 오백년'
지역전문가를 위해 일어공부를 하는 중에 아버지 폐암말기 알게되었으나, 그때는 사명감에 아버지께 일생의 불효를 저지름.. 한국으로 돌아가는 부모님께 딸만 동행시킴...일반석으로...
평생의 후회가 되는것... '당신들도 살아계신 부모님께 사랑을 전하고 나처럼 바보같은 짓은 하지말라.'
(노래를 부르시는데 온몸에서 닭살이 돋았다... 배와 목으로 노래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가슴 저 밑의 서러움과 죄송함과 자신에 대한 채찍으로 부르기에 전율이 돌았다.. 찍어놓은 동영상을 올릴 수가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무슨 일을 할때 자신에게 하는 질문
1. 꼭 필요한것은 무엇인가?
2. 어떤 것을 가지고 있나?
3.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서진규 박사님의 강의는 여러번 들었다... 짧게도 길게도...
늘 느낌은 하나다...열정...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것이 맞다...이분을 보고 있으면 그럴수 밖에 없다.
강의 영상을 올리지 못해서 아쉬울 뿐이다...ㅡ.ㅡ


딸 조성아와 함께



백과사전에서의 서진규
서진규(1948년 ~ )는 미군 예비역 영관급 장교이자 작가이다

한국에서의 삶

1948년 경상남도 동래군의 어촌마을 월내에서 장수 딸로 태어났으며 형제로는 언니,오빠와 2명의 남동생이 있다. 남동생중 한 사람은 미군 복무중 사고로 요절하였으며, 한 사람은 지능의 발달이 비장애인에 비해 늦은 정신지체 장애인이다. 제천시로 이사, 동명초등학교제천여자중학교를 졸업했다. 풍문여자고등학교 수학을 위해 한국군 장교인 큰아버지댁에서 살았는데, 여학생 잡지를 친구들에게 파는 아르바이트와 아버지가 보내주시는 로 생활하였다. 고등학교 졸업후인 1967년 종로구에 있는 가발공장에서 사촌 언니와 같이 일했지만, 서진규 그 자신이 자서전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북하우스)에서 '딴 생각에 사로잡힌 소녀'라고 회상할 정도로 공장생활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미국에서의 삶

 미국이민

21세때인 1971년 친하게 지내던 미국 개신교 선교사가 식모를 구한다는 말을 들은 서진규는 도미를 생각했다. 주위에서는 온갖 말로 미국에 가겠다는 그의 결심을 꺾으려고 했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었고, 아버지가 겨우 구해준 비행기삯 100달러만 가지고 미국에 갔다. 미국에서 그는 한식당 아리랑의 웨이트리스(여성 웨이터)로 일하며 영문학을 공부했으며, 1975년 한국인 태권도 사범과 결혼하였다.

 입대

 사병시절

하지만 결혼생활은 남편의 폭력으로 얼룩졌으며, 결국 서진규는 미 육군사병으로 입대하였다. 그는 '탈영군인의 마음을 이해할 만큼' 훈련병 생활은 힘들었지만, 살아남겠다는 일념으로 어려움을 참아내어 3개월간의 훈련을 마쳤을 때는 200명중에 일등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다. 일등병이 된 그는 대한민국 용산구주한 미군 부대에서 군수업무를 맡았다.

 장교시절

상등병 시절 주위의 권유로 간부사관을 지원하여 고된 훈련끝에 임관하였다. 장교근무시절 그는 독일일본에서 해외근무를 하였으며, 1987년에 어렵게 메릴랜드 대학교 경영학과 학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하버드대학교 진학

마흔두살때인 1990년 하버드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미군 대위 신분으로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992년에는 하버드대학교 국제외교사와 동아시아 언어학 박사과정에 합격하였다. 당시 서진규는 대학교공부에 필요한 일본말실력을 갖추기 위해 개인교사와 일본말을 잘 하는 아버지에게 일본말을 배웠다. 하지만 공부를 더 많이 하려면 군인의 길을 접어야했기 때문에 1996년 11월 소령으로 전역하여, 20년이나 꾸준히 해온 군생활을 마감하였다.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국제외교사와 동아시아 언어학과에서 박사 학위(수료는 1999년, 박사논문통과는 2006년)를 취득했다.

 가족

가족으로는 딸 조성아 씨,어머니,언니,오빠 내외(《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에 의하면, 서진규 씨의 시누이 그러니까 서진규씨 오빠의 부인은 정신지체 장애인인 서진규의 동생을 정성껏 돌보는 착한 분이라고 한다.)가 있다. 현재 조성아씨는 하버드대학교 졸업후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에서 교육 장교로 복무하고 있으며, 서진규씨는 한국에서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

  •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북하우스,랜덤하우스중앙)
  •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푸른숲)
  • 오디오북《목표에서 눈을 떼지 마라》(아름다운 사회)

서진규의 희망 키워드 ..

아래는 서진규 박사의 강의 마지막에 부르시는 일본에서 발매한 자신의 노래

전체를 듣게 되시길... 


내가 터득한 다섯 가지 인생철학

서 진 규 박사( 희망연구소 소장)

나에게는 반세기의 삶을 통해 얻은 신념과도 같은 인생철학이 있다.

이러한 신념은 내 딸 성아와의 대화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었고,

그 아이의 성격과 태도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

다. 그리고 요즈음 성아와의 대화 속에서 이러한 나의 철학에 물들

어 있는 딸을 발견하는 희열을 느끼곤 한다. 그 희열을 이번 캠프에

참여한 나의 또 다른 분신들에게 주고 싶다.

 

첫째, 인간이 태어나는 데는 아무런 선택이 없다.

 

여자로 남자로, 부잣집에서 가난한 집에서, 권력이 있는 집에서 권력이 없는 집에서 등 자신이 선택해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또한 백인으로 흑인으로 혹은 동양인으로 태어나고자 해서 태어나는 사람도 없다. 어디서 태어나는가에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닌 건만 이 사회는 인간이 태어난 배경이 마치 그들의 공이나 죄인 양 서슴없이 차별을 가한다.

나는 감히 이러한 제도가 턱없이 부당하도고 선언한다. 태어난 배경에 의해서 그 사람의 활동 범위를 정해버리면, 그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기회를 잃고 만다. 그것은 그 사람만의 손실이 아니다.

세계의 위대한 영웅들과 발명가들이 태어난 배경에 의해 한정된 기회를 부여받았더라면 인류 역사에서 오늘과 같은 발전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차별은 차별을 행사하는 사람 자신에게도 큰 손실이 된다.

 

둘째,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에도 아무런 선택이 없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죽는다. 권력을 가진 자도, 돈이 많은 자도 결코 영원히 살지는 못한다. 죽음이 두려워서 항상 겁에 질려 살거나, 올 때 오더라도 겁내지 않고 태연히 알찬 삶을 살거나 죽을 때가 되면 다 죽게 마련이다. 어차피 맞이해야 할 죽음이라면, 이것 역시 자연의 법칙이란 믿고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몸은 죽으면 어차피 썩어서 없어질 자연의 일부다. 아무리 아끼고 귀하게 여겨도 죽은 다음에는 다른 사람의 뜻에 의해 처리된다. 이왕에 내 것이 안 될 봐 에야 차라리 인류를 우해 값진 보탬이 되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일 것이다.

여기서, 잠깐, 내가 1991년 3월 2일 날 써둔 편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성아는 이 편지를 본적이 없다. 언젠가 내가 이러한 뜻을 얘기해 두려 했지만 성아가 듣기를 거부했다. 남에게는 아주 강해 보이는 아이도 엄마의 죽음을 덤덤하게 들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더구나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친구 이상의 사이이고 보면 듣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딸 성아에게

지금 이 편지를 써두고자 함은 내가 심신의 불능으로 삶과 죽음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할 수 없게 되어 누군가가 대신 결정을 해주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 대비해서다.

만약 내가 회복 불가능한 식물인간처럼 되어 더 이상 혼자서 살아갈 수도 또는 정신의 마비 등으로 의사에게 내 생명을 임의로 연장하고 있는 보조선을 끊어달라는 뜻을 전할 수도 없게 될 경우, 나는 네가 이 세상에서의 내 존재를 끝내주기를 간곡히 부탁하며, 네게 그러 수 있는 결정권을 맡긴다.

이런 부탁에 네가 얼마나 가슴아파할지 엄마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단다. 그런데도 하지 않을 수없는 내가 원망스럽구나.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위의 경우 내 삶을 끝내주는 것이 바로 자신을 위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함이 나를 더 많은 고통으로부터 구해주는 일이고, 나를 더욱 해복하게 하는 길이

기에…….

만일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혹은 과학 연구를 위해 내 몸의 일부 또는 전체가 필요하다면, 그런 고귀한 뜻을 위해 무엇이든 기꺼이 주기 바란다. 그리고 나머지 필요 없는 부분들을 태워서 너에게 가장 편리한 곳에 묻어주기 바란다.

언제나 성아를 사랑하는 엄마가.

 

셋째, 인간에게는 이승에서 살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혹자는 우리에게 전생이 있다고 하고, 또 다른 이는 우리는 죽은 후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전생에 무엇을 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후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지금 삶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보면 전생과 후생은 다른 사람의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생과 이승 그리고 후생이 본인의 뜻대로 서로 연결되지 못하니, 결국 인간에게는 이승에서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겠다.

 

넷째, 그러나 이 한번 의 기회를 어떻게 살다 가는가는 바로 내가 결정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축을 때까지 사회 제도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어떤 처지에 닥치더라도 마지막 선택은 자신이 한다. 이 세상에서 주어진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보며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하든가, 아니면 부정적으로 보며 어쩌지 못해 살든가 마지막 선택은 각자의 손에 주어져 있다.

나는 물 반잔의 비유를 자주 든다. 물이 반 남은 것을 보고 " 아, 이제는 반밖에 안 남았구나! 어떡하지?" 하며 안절부절 못하거나 "아, 아직도 반잔은 남았으니 난 얼마나 행운아인가!" ㅎ며 다행스럽게 생각하거나 물이 반잔이라는 현실에는 변함이 없다. 다시 말해서 같은 현실도 마음먹기에 따라 자신이 행복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바로 자신이 하는 것이다.

 

다섯째, 이왕 태어난 삶이다. 한번 힘차고 보람 있게 살다감도 멋있지 않은가.

 

우리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우리는 이미 태어났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깨닫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마는 사람들도 부지시구다. 그들은 자기 소신껏 살아볼 기회마저도 뺴앗겨버린 셈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알 기회가 주어진다. 그리고 죽음이 그들을 데리고 가기 전까지는 자신이 삶을 요리해볼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살이에 질질 끌려 다니며 죽지 못해 살거나, 아니면 자신이 주인이 되어 원하는 삶을 개척하며 힘차게 살거나 마지막 숨이 거두어질 때까지 우리는 '살아 있다'

이왕이면 이승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단 한 번의 기회를 내 뜻대로 멋있게 살다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 것도 매력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16년만에 하버드대 박사학위 따는 서진규 씨

 


 

하버드대 석사 과정에 입학한 지 16년 만에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되는 서진규 씨.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뚝 선 서 씨는 “과거에는 오기와 분노 때문에 힘든 생활을 버텨 왔지만 이제는 ‘꿈’ 때문에 힘든 도전을 계속 한다”고 말했다. 보스턴=공종식 특파원

《가난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나 집안에서 ‘가시나’로 천대받았던 그였다. 고교 졸업 후 가발공장 등을 전전하다 23세 때 100달러짜리 지폐 한 장 들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식모 이민’을 떠났던 그였다. 그가 드디어 하버드대 박사가 된다.

 

6월 8일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박사학위를 손에 쥐게 되는 서진규(58) 씨. 1999년 자전 에세이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로 한국 사회에 ‘희망’이라는 화두를 던져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하버드대 석사 과정 입학 16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는 그를 최근 보스턴 하버드대 교정에서 만났다.》

 

“정말 꿈만 같아요. 제가 속한 하버드대 문리대에서는 석사 과정 입학 10년 안에 박사학위를 따도록 돼 있어요. 제가 1990년에 석사 과정에 입학했으니깐 2000년부터는 매년 대학본부에서 ‘올해까지 박사학위를 따지 못하면 학교를 떠나야 한다’는 ‘협박성 편지’를 보내 왔어요. 그때마다 학과에서 제 사정을 이야기해서 양해를 구하기는 했지만….”

 

서 씨는 “계산을 해보니 제가 학생증을 갖고 있던 기간이 통틀어 31년이다”며 “어렸을 때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어 한이 맺혔는데 그 때문인지 공부를 실컷 하는 게 제 운명인가 봐요”라고 말했다.

 

그의 이력은 평범하지 않다. 가발공장 여공, 골프장 식당 종업원, 가정부로 일하기 위한 미국행, 뉴욕의 레스토랑 웨이트리스, 두 차례의 결혼과 이혼, 미군 입대, 14년간 5개 대학을 옮겨 다닌 끝에 학사학위 취득, 마흔둘의 나이에 소령 예편 후 하버드대 석사 과정 입학….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것도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하버드대 국제외교사 및 동아시아언어학과에서 받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한국에서 미군정에 미친 일본의 영향’.

 

“교수님들은 나이가 든 학생이라고 절대 봐주는 법이 없어요. 몇 차례나 논문이 퇴짜 맞을 때는 내가 과연 박사학위를 딸 수 있을까 하는 회의까지 들었어요.”

 

그는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C형 간염이 악화돼 어려움을 겪은 사실도 털어놓았다.

 

“도저히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돼 병원에 갔는데 수치가 위험한 수준으로 나왔어요. 공부하느라 무리하면서 더 악화됐나 봐요. 이러다 내가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의사는 1년 정도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치료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공부와 병행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해 결국 치료 시기를 미뤘어요. 이제 박사학위를 땄으니깐 한국에 가서 1년 정도 쉬면서 치료를 받을 생각이에요.”

 

50대의 나이에 딸 또래의 학생들과 함께한 하버드대 생활은 어땠을까(서 씨의 딸인 성아 씨도 하버드대 출신이다. 성아 씨는 학생군사교육단에 지원해 현재 미 육군 대위로 하와이에서 근무 중이다).

 

“하버드대 학생들은 무서울 만큼 똑똑해요. 저처럼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사람은 상대가 안돼요. 열등의식이나 자격지심도 많이 느꼈어요. 그러나 저는 경험이 많잖아요. 그래서 강의실에서 토론할 때 주로 경험을 무기로 활용했는데, 항상 아슬아슬했지요. 그래도 함께 맥주도 마시고 친구처럼 지냈어요.”


그는 하버드대에서는 ‘독종’으로 통한다.

 

논문 준비를 위해 읽은 책이 500권을 넘는다. 뒤늦게 시작한 일본어 실력도 이제 일본인을 대상으로 큰 불편 없이 강연할 정도로 수준급이다.

 

그에게 그동안의 수많은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

 

“젊은 시절에는 분노와 오기였어요. ‘왜 나는 무시 받아야 하나’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해야 돼’라는 오기 때문에 살아왔지요. 그러나 제가 어느 정도 성취한 뒤에는 그 같은 오기와 분노는 사라졌어요.

 

이제는 ‘꿈’ 때문에 살아가요. 제가 이 나이에 힘들게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노력했던 것도 이 때문이에요. 그리고 요즘에는 제 책을 읽고 희망을 갖게 돼 새로운 것에 도전하게 됐다는 독자들의 편지도 큰 힘이 됐어요.”

 

그는 앞으로 책을 추가로 쓴다는 계획도 세워 놓고 있다. 일제 치하에서 힘든 시절을 살아온 아버지를 소재로 한 영문 소설도 어느 정도 초고를 잡아 놓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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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          


서진규의 희망                                  



서진규 박사님의 카페 http://cafe.daum.net/ilove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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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로마 제국의 제16대 황제(121년 4월 26일 - 180년 3월 17일)이다. ‘철인황제(哲人皇帝)’로 불리며, 5현제 중 한 사람이다. 중국의 역사서 《후한서》에 기술된 ‘대진국왕(大秦國王) 안돈(安敦)’이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끝으로 로마 제국의 전성기는 끝났으며,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하였다.

생애

121년 4월 26일, 로마에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도미티아 루킬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3살 때 아버지가 죽자 3번이 집정관을 연임한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베루스에게 입양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질이 특출하였던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눈에 띄었다. 136년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후계자로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를 공표하였고, 같은 해 마르쿠스는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의 딸 케이오니아 아파비아와 약혼하여 일약 로마 정계 전면에 부상하였다.

그러나 138년 콤모두스가 죽자 하드리아누스는 마르쿠스의 고모부인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를 양아들로 맞아들여 새로운 후계자로 삼았는데, 나중에 그는 제위에 올라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마르쿠스를 자신의 양아들로 입적하였다. 이때 마르쿠스의 이름은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로 바뀌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나중에 마르쿠스의 약혼을 파기시켜 자신의 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와 약혼시켜 결혼시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와의 공동 통치를 한 뒤에 단독 황제가 되었다. 게르만족의 침입이나 시리아 속주에 있어서의 파르티아의 침공 등 수많은 전쟁에 슬기롭게 대처하였다. 지금까지의 5현제의 관습을 타파하고 친아들인 콤모두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하여 5현제 시대는 끝나게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서기 180년 3월에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다뉴브 강의 진중인 시르미움 근처에서 병에 걸려 급사하였다. 그의 시신은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되었으며,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하였다.

한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사색과 철학에 관한 내용을 토대로 쓴 《명상록》이라 불리는 에세이를 남겼다. 그는 정신적 스승이었던 에픽테토스세네카와 함께 스토아 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금욕과 절제를 주장하였으며 수많은 명언을 남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였다. 전쟁터에서 틈틈이 쓴 그의 <자성록> 12편은 로마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인 책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언제나 인정이 많고 자비로워 백성을 널리 사랑하였으나 정책상 크리스트 교도를 억눌렀다. 그의 유명한 저서인 <명상록>에는 철학인으로서의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로마 제국 16대 황제
재위 기간 공동 황제:161년 3월 7일 - 169년
단독 황제:169년 - 180년 3월 17일
타고난 이름 136년 이전-카틸리우스 세베루스
136년 이후-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황제 이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전임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
공동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
후임 황제 콤모두스


















로마 제국 16대 황제/161년 3월 7일 - 169년/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로마 제국 16대 황제/161년 3월 7일 - 169년/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이 기마상은 고대 세계에서 살아 남은 몇 안 되는 조각 작품 중 하나다. 기독교도들은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대부분의 로마 기마상을 파괴했지만, 이 작품은 최초의 기독교도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의 조각상으로 오인하고 내버려두었다. 이 조각상은 2세기부터 로마 시내에 세워져 있었으나 1980년 공해를 피해 실내로 옮겨졌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로마 제국의 제16대 황제(121년 4월 26일 -180년 3월 17일)이다. ‘철인황제(哲人皇帝)’로 불리며, 5현제 중 한 사람이다. 중국의 역사서 《후한서》에 기술된 ‘대진국왕(大秦國王) 안돈(安敦)’이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끝으로 로마 제국의 전성기는 끝났으며,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하였다.

생애 

121년 4월 26일, 로마에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도미티아 루킬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3살 때 아버지가 죽자 3번이 집정관을 연임한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베루스에게 입양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질이 특출하였던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눈에 띄었다. 136년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후계자로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를 공표하였고, 같은 해 마르쿠스는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의 딸 케이오니아 아파비아와 약혼하여 일약 로마 정계 전면에 부상하였다.

그러나 138년 콤모두스가 죽자 하드리아누스는 마르쿠스의 고모부인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를 양아들로 맞아들여 새로운 후계자로 삼았는데, 나중에 그는 제위에 올라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마르쿠스를 자신의 양아들로 입적하였다. 이때 마르쿠스의 이름은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로 바뀌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나중에 마르쿠스의 약혼을 파기시켜 자신의 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와 약혼시켜 결혼시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와의 공동 통치를 한 뒤에 단독 황제가 되었다.게르만족의 침입이나 시리아 속주에 있어서의 파르티아의 침공 등 수많은 전쟁에 슬기롭게 대처하였다. 지금까지의 5현제의 관습을 타파하고 친아들인 콤모두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하여 5현제 시대는 끝나게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서기 180년 3월에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다뉴브 강의 진중인 시르미움 근처에서 병에 걸려 급사하였다. 그의 시신은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되었으며,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하였다.

한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사색과 철학에 관한 내용을 토대로 쓴 《명상록》이라 불리는 에세이를 남겼다. 그는 정신적 스승이었던 에픽테토스세네카와 함께 스토아 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금욕과 절제를 주장하였으며 수많은 명언을 남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였다. 전쟁터에서 틈틈이 쓴 그의 <자성록> 12편은 로마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인 책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언제나 인정이 많고 자비로워 백성을 널리 사랑하였으나 정책상 크리스트 교도를 억눌렀다. 그의 유명한 저서인 <명상록>에는 철학인으로서의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2001년 아카데미 5개 부문 수상작인 영화 ‘글래디에이터’ 끝부분에는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의 망나니 아들 콤모두스가 반란에 실패한 막시무스(러셀 크로)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쇠사슬에 묶인 막시무스는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콤모두스에게 말한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죽음이 우리에게 미소 짓고 다가오면 미소로 답하라’고 말했지.” 그러자 콤모두스는 “그 친구도 죽을 때 웃었는지 궁금하군”이라며 ‘그 친구’와 막시무스를 비웃는다.

그러자 막시무스는 ‘그 친구’가 바로 콤모두스의 아버지라고 알려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막시무스는 미소로써 죽음을 맞는다. 막시무스야말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철학을 실천한 ‘진정한 아들’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물론 영화 속 막시무스는 가공의 인물이고 두 사람의 대화도 지어낸 이야기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음이 우리에게 미소 짓고 다가오면 미소로 답하라’는 취지의 말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180년 3월 17일 사망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자였다. 그는 죽음을 기뻐하라고 당부한다. 죽음을 자연의 한 과정으로 기다리는 것이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 맞는 태도라는 것이다.

“지나온 날을 헤아리지 말며, 그 짧음을 한탄하지 말라. 너를 여기 데려 온 것은 자연이다. 그러니 가라. 배우가 연출가의 명에 따라 무대를 떠나듯이. 아직 연극의 5막을 다 끝내지 못했다고 말하는가? 그러나 인생에서는 3막으로 극이 끝나는 수가 있다. 그것은 작가의 소관이지 네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 요컨대 인생의 종말이 언제 오건 평정을 잃지 말고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하라는 당부다.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는 다 같이 행복을 추구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 학파가 ‘쾌락’에서 행복을 기대한 것과 달리 스토아 학파는 ‘지혜’를 통해 행복을 추구했다. 그들은 감정을 억제하고 용기 있게 죽음을 맞이한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귀감으로 삼았다.

노예를 ‘살아 있는 도구’로 간주하던 고대 세계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평생 노예 출신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55~135)를 스승으로 흠모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에픽테토스에게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형제라는 만민평등사상을 배웠다. 스토아 철학이 로마법, 특히 만민법의 기초가 된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로마법은 그 후 유럽 각국에 영향을 미쳤고, 우리 법체계에도 그 영향이 지속되고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지혜’와 ‘만민평등의 휴머니즘’은 우리 시대에도 빛을 발한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A bust of Faustina the Younger, Marcus' wife (Lou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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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usoleum of Hadrian, where the children of Marcus and Faustina were bur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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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in of Vologases IV, king of Parthia, from 152/53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 

이른 아침,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는 오늘도 공연히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 은혜를 모르는 사람, 거만한 사람, 남을 속이거나 중상하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이러한 악덕(惡德)은 선악에 대한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의 본질은 아름답고 악의 본질은 추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잘못 범하는 사람도 나와 같은 인간, 혈통을 같이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성(理性)과 신성(神性)의 일부를 나누어 갖는다는 뜻에서 동류지(同類者)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해를 입는 일은 거의 없다. 그것은 내 스스로 원하지 않는 한 아무도 나를 추악한 일에 빠져들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동류자들에게 화를 내거나 그들을 기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치 손발이나 눈시울이나 아래윗니처럼 서로 협력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적대시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는 일이다. 

우주 만물은 줄곧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다. 우연히 발생하는 일도 자연의 원리에 따라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며, 모든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해 다스려지며 모두 이 섭리와 관련이 있다. 만물은 그 섭리에서 흘러나오고 우주 전체의 이익도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당신도 이 우주의 일부분이다. 그밖의 모든 것도 자연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본성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그 본성을 계속 간직하는 것은 선(善)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 신의 섭리인 자연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변화는 자연의 한 속성(屬性)이다. 따라서 우주의 모든 것은 부분적으로 변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도 변한다. 그런 원리를 이해하고 또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그에 따라 행동하라. 자연의 변화에서 만족을 찾으라. 그리하여 고뇌없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신들에게 감사하며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하라. 

당신은 지금까지 이 우주의 작은 부분으로서 존재하여 왔다. 그리고 언젠가는 당신을 태어나게 한 자연의 품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아니, 오히려 당신은 변화에 의해 생성(生成)의 원리 속으로 되돌아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천년이나 만년이라도 살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 지금도 죽음은 다가오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 아직 능력이 있을 때 선한 일을 하라. 

이웃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오직 자신이 해야 할 일에만 관심을 쏟고 그 일이 정당하고 신의 뜻에 합당한가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많은 시간과 수고를 절약할 수 있다. 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타락한 모습을 돌아봄이 없이 곧장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날아갈 뿐이다. 

사후에 명성을 남기려고 연연해하는 사람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역시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어떠한 명성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을 통해 전해지다가 결국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설사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죽지 않고 그들의 기억 역시 영원하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당신이 이미 죽은 후에 그들의 찬양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살아 있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뜻이 있겠는가? 고작해야 어떤 편의(便宜)가 제공될 뿐이다. 아무튼 당신이 후세 사람들의 평판에 신경을 소모하고 있다면 당신은 자연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현재를 잘못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든 아름다운 것은 결국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다. 그 자체에 본성이 있는 것이지 어떤 외부적 요소 때문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찬양이 아름다움이란 본질의 일부분이 될 수는 없다. 찬양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지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말하는 자연물, 예술 작품, 자연 현상 등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진정 아름다운 것은 그런 찬사가 필요하지 않다. 법칙이나 진리, 자비심, 겸손 등이 찬양을 받았다고 해서 더 미화되고 비난을 받았다고 해서 손상되는가? 또 금이나 상아, 자수정, 하프, 단도, 관목 등도 그러하단 말인가? 

만약, 죽은 후에도 영혼이 소멸되지 않고 남는다면 대기는 어떻게 태고적부터 이 수만은 영혼들을 수용해 왔을까? 그리고 육체가 썩지 않는다면 대지는 어떻게 아득한 옛날부터 그 속에 매장된 시체들을 처리할 수 있었을까?

수많은 시체들은 한동안 땅속에 머물러 있다가 이윽고 분해되어 다른 시체에 장소를 비워 주는데, 이처럼 영혼도 얼마 동안 대기 속에 머물러 있다가 변화하고 분해되어 우주의 창조적 원리에 따라 불과 같은 성질이 되었다가 이윽고 새로운 영혼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다. 아마도 영혼불멸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서 매장되는 시체의 숫자만큼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매일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어 그들의 육체에 묻히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된 동물들은 그들을 잡아먹은 동물들의 피와 공기와 물과 같은 성분으로 변하여 사라진다. 이처럼 자연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이용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과 형상 및 형상적인 것의 원인을 구분짓는 분석법으로써 알 수 있다.

철학자 테모크리토스는 '마음의 평정을 얻고 싶다면 많은 일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필요한 일만 하라. 사회적 동물로서의 이성이 요구하는 일만을 이성에 따라 행하라.' 이렇게 함으로써 반드시 해야 할 일만 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평정을 얻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휼륭하게 수행함으로써 오는 마음의 평정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거의가 불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것들을 제거한다면 우리는 더욱 많은 시간을 즐기게 되고 반면에 근심이나 불안이 줄어들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이 일은 꼭 필요한 것인가?' 라고 물어 보라. 또 우리는 불필요한 행동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사상까지도 깨끗이 버려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불필요한 행동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만류(萬有)로부터 주어진 자기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는 사람, 올바르게 행동하고 자신의 인자한 성품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런 선인의 생활이 당신에게도 적합한지 한번 시험해 보라.

당신은 저 여러 가지 일들을 본적이 있는가? 보았다면 이제는 사물의 다른쪽 면을 보라. 마음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도록 단순한 마음을 가져라. 누가 당신에게 피해를 주는가?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결과밖에 안 되니 상관하지 말라.

 

아우렐리우스/명상록Marcus Aurelius ; Ta eis heautond에서

이해와 감상

'명상록'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로마 황제의 입장을 떠나 한 사색하는 생활인, 그리고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 철학자로서 자신의 사상과 체험을 토대로 쓴 에세이로서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스스로 인생을 올바로 살기 위하여 경계한 것, 행한 일을 반성하고 스토아적 입장에서 스스로에게 충고한 것, 귀감이 될 만한 다른 사람의 글을 발췌한 것 등으로 그 내용이 구성되어있다.

 이 글은 그때그때 체험에서 우러나온 단상(斷想)들을 바쁜 틈틈이, 즉 전시(戰時)의 진중이나 청사를 돌보는 사이에 쓴 것이며, 어릴 때부터 익혀 온 수사학의 재능을 십분 발휘한 아름다운 문장이라 평가된다.

 편의상 전체를 12권으로 나누고 있지만 일정한 기간에 어떤 주제를 놓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그 논리적인 체계가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우렐리우스의 스토아 철학의 사상적 기반은 이 책에 일관된 흐름을 부여함으로 내용상으로는 하나의 체제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체계화된 사상일수록 그 사상의 내용에 우주론, 인간론, 그리고 정치 사회론 을 모두 담고 있어야 하며, 이 게 가지는 상호 모순됨이 없이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명상록'은 단편적인 철학적 수상(隨想)들을 모아놓은 것임에도 위의 세 가지 요소를 다 갖추고 있으며, 글을 읽어 내려감에 따라 각 구절마다 이에 그의 사상적 깊이를 새삼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사상은 그가 평생을 두고 연구하고 고민했던 스토아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간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그것을 지배하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신,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갖가지 삶의 국면을 굳건한 사상적 바탕 위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흔히 '명상록'은 스토아 철학의 진수를 설명한 것으로도 평가되고 있다. 에픽테토스의 '어록(語錄)과 함께 고대의 양서로 손꼽히고 있다.

 '명상록'은 어떤 초기 편집자에 의해 12권으로 분류되었는데, 첫째 권을 제외하고는 내용이 뒤 섞여 있어서 각 권의 내용을 만족할 만하게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그 대략의 요점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제1권은 자신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로 배우게 된 교훈이 겸손하게 언급되어 있다. 제2권은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제3권은 진정한 자유인 신에 대한 복종에 대해, 제4권은 기회의 부재에 대해, 제5권은 운명과 역할에 대해, 제6권은 내면적 삶의 절대적인 중요성에 대해, 제7권은 충동의 억제와 자기 만족의 추구에 대해, 제8권은 마음의 평정에 대해, 제9권은 자발적인 의지와 인간을 지배하는 운명에 대해, 제10권은 기인의 주변 환경과 그에 관한 성찰에 대해, 제11권은 이타주의(利他主義)에 대해, 제12권은 죽음에의 초월에 대해 씌어 있다.

 제1권에서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터득한 것이 아니고 조상, 부모, 스승, 신들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여기서 그의 겸손함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리고 자기가 처한 위기, 상황, 환경에 대해 만족하고 감사하는 생활자세를 엿볼 수 있다.

 제2권부터는 '명상록'의 본론이라 할 수 있는데,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않은 단편적인 글들이라 내용도 다소 중복되고, 또 축약된 말들이 있어서 어려운 곳도 있으나 앞에서 스토아 철학에 대한 개괄적인 해설을 읽었다면 아마 별 무리 없이 읽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먼저 자연, 즉 우주에 대한 견해부터 보기로 하자. 자연의 법칙인 운명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스토아 철학의 입장이듯이 아우렐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주 만물은 줄곧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다. 우연히 발생하는 일도 자연의 원리에 따라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며, 모든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해 다스려지고 사물과 관련이 있음을 명심하라. 당신도 이 우주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본성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그 본성을 계속 간직하는 것은 선(善)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명상록> 제2권 2장)    

  그리고 그는 인간이란 영원한 시간 속에서 순간적으로 살다 가는 덧 없는 존재라 하여, 각 권에서 명성이나 부(富) 등을 하찮은 것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죽은 후에 명성을 남기려고 연연해하는 사람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역시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어떠한 명성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을 통해 전해지다가 결국은 사라져버리고 만다…당신이 이미 죽은 후에 그들의 찬양은 무의미한 것이다.(<명상록> 제4권 19장)

  그는 또 죽음이란 것을 다른 사물로의 분해, 변화로 보았으며, 자연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해악이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명상록 의 전반적인 특징을 한마디로 지적한다면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어떠한 외부의 자극이나 압력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으며 평정을 누릴 수 있는 능력있는 존재라 하였다.

  지금 당신이 외부적인 어떤 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면 당신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당신의 판단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명상록> 제8권 47장)

 참고 자료

 아우렐리우스와 스토아 철학

  스토아 철학에서는 자연(Dbysis)이라는 말이 잘 쓰인다. 보통 자연이라고 하면 산과 강과 대지와 짐승과 초목 등을 포함시켜서 생각하지만 소크라테스 이전의 헤라클레이토스(BC 전 535∼475)의 계통을 잇는 스토아 학파에서는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오고 나서 거리로 돌아가는 근원적인 것, 또는 능산적 자연 (能産的 自然)을 의미한다. 또한 좁은 의미에서는 인간의 자연이라든가 포도의 자연이라고 하는 경우처럼 사물의  

본성(本性)을 의미하기도 한다. 광의의 자연은 종교적으로 말하는 신과 같은 것으로 그것은 우주, 로고스, 운명과 동일한 개념이다.

  스토아 학파는-그리고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에서도-자연에 따는다는 마을 자주 하는데 이것은 신, 또는 우주의 질서에 따르고 또는 그것에 합치하는 것을 말한다. 자연에 따른다는 것은 협의로는 각각의 본성에 따르고 그것을 발휘하고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을 예로 든다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것, 곧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이성(理性)을 따르고 발휘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우주의 이성, 곧 광의의 자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므로 인간의 이성에 따르는 것은 우주의 이성에 따르고 자연의 본성에 따르는것이다. 자연이 대우주라면 인간은 그 일부분인 소우주이다. 이러한 스토아 사상이 코즈모폴리터니즘「세계주의」의 사상적 모태임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런데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다. 육체라는 점에서는 동물과 공통되고 영혼이라고 점에서는 동물과 공통되고 영혼이라는 점에서는 신과 공통된다. 스토아에는 영혼은 혈액에서 증발된 것이라고 하는 견해도 없지 않으나 대체로 우주의 로고스의 한 조각이 인간에게 깃든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이성이 깃들어 있는 이상 인간은 다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별, 계급, 피부색깔, 국적을 넘어선 동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스토아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이 성립된다.

  그런데 이성이라고 한 마디로 말하지만 그 작용에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다. 칸트에 따르면 인식론적으로 이론이성(理論理性), 도덕적으로 실천이성으로 가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가끔 이성을 헤게모니콘(지도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종교적 윤리적 색채가 농후한 후기 스토아세서 본심 또는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온갖 욕망을 통제하고 지도하는 능력으로 스토아 철학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외계(外界)는 모두 결정되어 있어서 불변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숙명적인 필연이다. 따라서 스토아 학파에서는 필연을 필연으로 인정하고 운명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뿐 외계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외계는 우리의 의지 밖에 있어서 우리가 좌우할 수 없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 우리들의 생각뿐이다. 그러나 일단 철저하게 마음과 생각을 바꾸면 외계가 변한 것과 동일한 대전환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마음의 전환은 행복을 위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죽음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라고 생각한다. 혹은 원소에의 해체라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나 결국은 원래의 것으로 복귀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죽음은 조금도 무서운 것이 아니다. 곧 '무섭다고 하는 사념 자체가 두려운 것이다' '공상을 제거한다면 죽음은 자연의 작용이다' '해체를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죽음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을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이 무서운 것이다. 따라서 죽음을 자연의 필연적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전환이 필요하고 이러한 전환을 이루면 죽음은 고통스럽거나 무서운 갓이 아니라 평범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스토아 철학은 영혼의 불멸을 말하지 않는다. 영혼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원래의 원소로 해체된다고 한다.

 한편 스토아에서는 자살을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죽음을 자연의 필연적 과정으로 보는 스토아 철학으로서는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사는 것이 신의 명령이라면 죽는 것도 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완수하고 육체적으로 남의 폐를 끼칠 만큼 노쇠했거나 병에 걸리면 이 세상에서 떠나가라는 신의 신호로 알고 자살해야 한다. 이 경우 제멋대로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닌 자살이야말로 우주의 질서, 신에 뜻에 합치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또한 아타테이아 또는 아타락시아라는 말을 스토아 철학에서는 쓰고 있는데, 전자는 부동심(不動心), 무정념(無情念)이라는 뜻이고 후자는 평정(平靜)이라는 뜻이다. 외계의 사물은 본래 우주의 질서에 따라 변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외물을 뒤쫓고 있는 한 대해의 조각배처럼 번롱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마음에 아무런 욕망도 갖지 않고 어떠한 일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마음에 평화는 교란되지 않는다. 이 마음의 평화가 바로 인간의 행복인 것이다.

 

참고 자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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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121∼180)는 121년 로마에서 집정관 아니우스베루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안토니우스 황제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정치가로서의 삶이 열리기 시작했는데, 세 차례나 집정관을 지내면서 정치에 관한 식견을 넓혀 양부 안토니우스 황제를 도왔다.

 그는 스토아 철학에 심취하여 나중에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 사상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명저인 명상록을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161년 안토니우스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그는 일찍이 플라톤이 이상국가의 정치 형태로 제시했던 철인왕(哲人王)의 면모를 보여 왔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싸우거나, 아니면 전염병 퇴치와 타락된 도덕의 회복을 위해 애쓰면서 지냈다.

 그는 175년 반란을 일으켰던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가 자신의 부하에 의해 피살되었을 때, 오히려 자비로서 용서해줄 기회를 잃은 것을 슬퍼할 정도로 적군까지도 사랑하려는 박애주의적 일면도 지니고 있었다. 그간 재위 기간은 로마제국의 전성 시대로 일컬여지는 이른바 '5현제(賢帝) 시대'에 속하는데 96년부터 180년 사이인 이 무렵에는 정치적 안정, 경제적 번영, 영토의 확장이 어느 시대보다 월등하였으며 아우렐리우스 역시 이전 황제들의 선정(善政)을 유지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사색 혹은 명상의 황제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그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끊임없는 독서와 사색에 몰두하였기 때문이다. 그 사색의 기록이 바로 '명상록' 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살펴 보면 로마제국의 제16대 황제(재위 161~180)로 한자명으로는  안돈(安敦). 로마 출생. 5현제(賢帝)의 마지막 황제로, 후기 스토아파(派)의 철학자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가 된 후 140년 로마의 콘술(집정관)이 되었고, 145년 안토니누스의 딸(사촌누이)과 결혼, 161년 안토니누스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로 즉위하였다. 당시의 로마제국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여서 변방에는 외적의 침입이 잦았으며, 특히 도나우강(江) 쪽에서는 마르코만니족 및 쿠아디족이 자주 침입하여 그 방비에 힘썼다. 그 동안 페스트가 유행하여 제국은 피폐하고, 게르만족과의 전쟁에 시달리면서 발칸 북방의 시리아 및 이집트 등의 진영(陣營)에서 병을 얻어 도나우 강변의 진중에서 죽었다.

 유명한 《명상록(冥想錄)》은 이 진중에서 쓴 것으로 스토아적 철인의 정관(靜觀)과 황제의 격무라는 모순에 고민하는 인간의 애조(哀調)가 담겨 있다. 여기에서 그의 철학은 본질적으로는 반 세기 전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한층 내면적으로 침잠해 들어오는 철학을 이루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것은 불이며, 신적(神的)인 세계 영혼으로 관통되고 살려지게 되고 지배받고 있으며, 인간의 영혼도 세계 영혼의 한 유출물에 불과하여 죽으면 자연히 세계 영혼에 귀일하게 된다.

 물질적 ·육체적인 세계의 모든 것은 이 신적인 이성에 의하여 운명적 ·자연필연적으로, 그러면서도 신적 ·합법칙적으로 끊임없이 생멸변화(生滅變化)하고 있다. 따라서 개물(個物)·개인(個人)은 그 이름도 기억도 이 필연의 운동 속에서 소멸되고, 망각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자연필연의 이법(理法)을 확인하여 이를 신의 섭리라 믿고, 외적인 어느 것에도 마음을 괴롭히는 일이 없이 주어진 운명을 감수하며, 내적으로 자유롭고 명랑하고 조용하고 경건하게 그의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있어서는 철학자와 황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그가 죽은 후 로마제국은 쇠퇴하였다. 로마시에는 ‘마르코만니전쟁’을 부조(浮彫)한 기념주(記念柱)와 그의 기마상(騎馬像)이 있다.

스토아학파

키프로스의 제논이 스토아 포이킬레에 창설한 철학의 한 유파.

 BC 3세기부터 로마 제정(帝政) 말에 이르는 후기 고대(古代)를 대표한다. 키프로스섬 태생의 개조(開祖) 제논과 그 제자로서 적빈(赤貧)과 노동으로 이름 높던 소아시아의 아소스인(人) 클레안테스, 그 제자로서 스토아파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킬리키아의 항구 도시 솔로이(솔리)의 크리시포스, 스토아 학설을 로마 사람에게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만든 로도스섬의 파나이티오스, 종교적 경향이 강한 오론테스강 하반(河畔)의 아파메아인 포세이도니오스, 로마황제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 파의 주요 인물들이다.

 제논이 아테네의 광장에 있던 공회당 ‘채색주랑(彩色柱廊)’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 제자들을 ‘스토아파’(柱廊의 사람들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스토아파 철학은 이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고전기(古典期) 그리스를 대표하는 여러 나라의 좋은 가문 출신 사람들의 철학이 아니라, 변경(邊境) 사람이나 이국인의 철학이었으며, 그리스 문물이 좁은 도시국가의 틀을 넘어서 널리 지중해(地中海) 연안의 여러 지방에 미친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이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철학의 여러 파와 스토아파 사이의 대립은 격렬하였다.

 고전기까지의 철학의 여러 학설을 수용하여 일반화 ·통속화한 점에서 절충주의라는 비난을 받지만, 그 기반에는 고전 철학과는 아주 이질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 단지 로마시대 사람들의 저작을 제외하고는 스토아파의 저작은 오늘날 거의 전해지지 않아서 연구상 어려움이 있다.

 애지(愛知:철학)는 논리 부문과 윤리 부문, 자연 부문으로 나뉘나, 이들은 각각 독립된 분파가 아니라 서로 나누기 어렵게 결합되어 있어 하나의 지혜를 사랑하고 구하는 애지를 구성하는 3요소가 된다.

 지혜는 ‘신의 일과 사람의 일에 관한 지식’이라고 정의되지만, 이것은 사물에 관한 관조적(觀照的) 지식이 아니라, 인간생활에서의 모든 것을 올바르게 처리하기 위한 실천적 지식이다. 지혜의 이러한 실천적 성격에 스토아파의 특징이 있으며, 이 원리에 바탕을 두어 스토아철학은 고대철학원리의 주체적인 반성철학이 되었다.

 애지(愛知)는 이러한 지혜를 습득하기 위한 ‘삶의 기술(ars vivendi)’의 연습이며, 이러한 재주를 갖는 사람이 현자(賢者)인 것이다. 그리고 현자의 지혜란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인간은 자연에 의하여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자연의 충동’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칠 때 병으로서의 정념(情念)이 있다. 이 정념에 흔들리지 않고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데에 ‘활달한 삶의 흐름’이 있다. 스토아파의 현자의 이상은 바로 거기에 있다. 스토익이라고 불리는 비정한 금욕주의적 심정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자의 유덕한 삶이란 이성을 갖춘 유한한 개개의 자연물(인간)이 자연에 의하여 부여된 그대로의 자기의 ‘운명’을 알고, 운명대로 살아감으로써 본원(本源)인 자연과 일치하는 ‘동의(同意)’의 삶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 그 자체가 이성적 존재자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자기귀환(自己歸還)에의 활동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현자는 모든 자연물의 근원인 자연 그 자체로서의 신과 일치한 자이며 신과 같은 자, 바로 신 그것인 것이다.

 스토아 철학의 특징은, 이와 같은 자연존재에서의 개별성(個別性)과 전체성(全體性)의 두 계기의 강조와 양자의 긴장 관계에 있으며, 이것에 의하여 스토아 철학은 고대철학 원리의 집성인 동시에 다음 시대의 철학원리를 준비하는 것이 되었다. 언어연구 ·논리학 ·인식론에서도 구체성과 개별성을 중요시하는 스토아 철학은 전통철학에 없었던 새로운 요소를 많이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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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서의 기사 - 아우렐리우스


로마 5현제의 마지막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거대한 석상이 터키 남부의 고대 로마 유적지 사갈라소스에서 발굴됐다고 한다.

   

기나긴 로마역사를 통해 수많은 황제들이 있었고 또한 모두 이름들이 복잡한 관계로 웬만하면 다들 낯설게 느껴지는 존재들이지만 아우렐리우스 만은 웬지 우리에게 친근하게 느껴졌던 것은 바로 영화 '글라디에이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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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주인공 막시무스에게 황제자리를 물려주려다 아들 코모두스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그는 자애로운 황제였지만 졸지에 망나니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운의 인물로 기억된다.

 

실제로는 아우렐리우스는 전쟁을 지휘하다 도나우강 근처에서 병으로 객사했다고 한다. 아들이 있기는 있었지만 지 아비를 죽이고 황제자리를 차지할 만큼 패륜아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당시의 로마사회가 못난 아들에게 로마황제 자리가 계승되는 것을 용납치 않았었다.

 

5 명의 뛰어난 황제가 연속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대물림으로는 불가능하다. 전임황제가 뛰어난 후계자를 지정하여 그가 피붙이던 아니던 간에 황위를 계승하는 시스템이었던 것으로 안다. 물론 아우렐리우스 사후에는 그것도 깨지고 완전 난장판으로 접어들지만 말이다. (만약 진짜로 황제자리에 눈이 멀어 아우렐리우스를 살해하려 했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들 코모두스가 아니라 당시 가장 잘나가는 총독이었다는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였을 것이다.)

 

영화 글라디에이터의 주인공 '막시무스' 도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다만 검의 달인에 카리스마 넘치는 장수가 아니라 스토아학파 철학자였을 뿐,

 

글라디에이터 버젼 아우렐리우스의 죽음에 관해서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시오노의 주장에 따르면 설령 아우렐리우스가 영화에 나오는 대로 장수 막시무스를 총애했다고 하더라도 막시무스의 '국가관' 때문에 황위자리 승계를 권유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영화를 보면 황제가 되라는 아우렐리우스의 권유에 막시무스는 자신은 이번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다며 제의를 거부한다.

 

당시 로마인들은 지도자가 되기 위한 자질로 가족보다 국가를 우선에 놓는 공복의식을 가장 중요히 여겼다고 한다. 더군다나 아우렐리우스 같이 공과 사를 분명히 하는 황제였다면 막시무스의 이 대답을 듣는 순간 자질부족으로 판단 '대권?후보리스트'에서 제외시켰을 거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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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rcus Aurelius

 

우리에게 아우렐리우스를 친근하게 만든 또 하나의 인물은 바로 이회창 씨다. 92년 대선에 김대중 후보에 맞서 출마했던 이씨는 TV토론에서 감명깊게 읽은 책이 뭐냐는 질문에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이라고 답한다. 김대중 씨가 김구선생의 백범일지 라고 답해 지극히 평범하고 서민적인 이미지를 연출한 것에 비해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당시 이회창 씨 보좌진들은 이씨의 그 답변 때문에 몹시 당황해 했다고 한다. 유권자 중 도대체 몇명이나 생전에 아우렐리우스 라는 이름이나 들어 보았을 것이며 설령 그의 명상록을 읽어보았다고 해도 이회창 씨의 지적인 면을 높이사기 보다는 그저 잘난척 하는 것으로 간주 거부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 명상록 답변 때문에 대략 백만표는 날아갔을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실제로 이씨는 선거에 졌다.

 

이회창 씨가 안읽은 책을 읽었다고 거짓말 하지는 않았겠지만 요즘 보여주고 있는 그의 작태를 볼 때 명상록을 제대로 읽은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지하에 있는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의 책을 감명깊게 읽었다는 사람이 저런 행동이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정말 어이없어 할 것이다.  

 

기독교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에서 고대 로마인들과 그들의 역사는 은근히 소외받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고대 로마제국의 유산은 현재 서구문명의 뿌리이자 주춧돌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석상 발굴소식을 계기로 로마사를 한번 관심있게 읽어본다면 유럽과 미국문명을 보다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을 뿐더러 덤으로 그들의 공세에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도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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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영혼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121∼180) 


노예에서 황제까지: 스토아 철학의 힘 
뒷골목 건달과 영웅의 차이는 힘에 있지 않다. 힘세고 싸움 잘하는 것으로 친다면 뒷골목 건달이 영웅호걸보다 더 뛰어날 수 있다. 그러나 건달은 건달 이상이 되지 못한다. 늙고 병들거나 더 주먹 센 사람이 나타나면 사정없이 비난받고 짓밟히는 불쌍한 존재가 되고 만다. 그러나 영웅은 힘을 잃어도 여전히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권위와 명예를 잃지 않는다. 
건달과 영웅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바로 명분과 도덕심에 있다. 건달은 결국 자신과 똘마니들만을 위해 살지만 영웅은 진정 "정의를 위해" 산다. 따라서 영웅이 힘없이 무너진다해도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하며 따르는 것이다. 로마는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帝國)의 역사만도 1,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나라였다. 로마가 단순히 힘만 센 국가였다면 이렇게 오랜 기간 이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치 힘만 센 뒷골목 건달처럼 말이다. 로마는 사람으로 친다면 '영웅호걸'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국가였다. 그렇다면 로마제국을 '영웅호걸'로 특징 지웠던 명분과 도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스토아(Stoa) 철학이다. 역사상 스토아 철학만큼 한 시대의 모든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던 이념은 드물다.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중에는 에픽테투스(Epictetus)같은 노예출신도 있고 세네카(Seneca)같은 정치인도 있으며 이 달에 살펴볼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21∼180)같은 황제도 있었다. 노예부터 황제까지 제국의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던 스토아 철학은 로마를 진정한 강자(强者)로 만든 숨은 힘이었던 것이다. 

"황금시대"에 태어난 꼬마 철학자 
이제 이야기를 이 달의 주인공 아우렐리우스에게로 돌려보자. 아우렐리우스는 121년,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태어났다. 당시 로마는 하드리아누스(Hadrianus) 황제 아래 최고의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구석구석 살피는 꼼꼼한 어머니 밑에서는 가정이 번창할 수밖에 없는 법, 하드리아누스는 제국 이곳저곳을 세심히 챙기느라 일평생을 '출장' 다녔던 황제로 유명하다. 황제가 출장을 마치고 오랜만에 로마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황제 로마 귀환 기념 주화"라는 희한한 화폐를 찍어냈을 정도로 말이다. 수도에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겠지만 치밀한 하드리아누스의 눈에 황제가 될 '재목'이 눈에 안 띄었을 리 없다. 그 재목은 바로 아우렐리우스였다. 
아우렐리우스의 집안은 할아버지가 최고 관직인 집정관을 3 번이나 지냈을 정도의 명문이었다. 다만, 할아버지만큼이나 유명했던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그는 외가에서 자라고 있었다. 전해오는 기록에 따르면 확실히 아우렐리우스는 황제가 사랑할 만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그는 밤늦게까지 공부에 몰두했고 타고난 건강체질은 아니었지만 달리기, 레슬링, 매사냥 등으로 신체를 단련하는 데도 열심이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는 어린이를 기특하게 여기지 않을 어른이 얼마나 있겠는가? 게다가 아우렐리우스는 철학적이기까지 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지나친 욕심과 쾌락추구는 결국 고통으로 연결된다고 보고, 어떠한 유혹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Apatheia)을 강조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스토아의 가르침에 따라 엄격하고 절제된 생활을 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이미 십대 무렵부터 깨달은 바 있어 따뜻한 침대를 버리고 항상 차가운 바닥에서 잠을 잤고, 최고의 오락거리였던 검투사 경기와 마차경기도 멀리했다고 한다. 
이런 '꼬마철학자' 아우렐리우스의 '금욕적인' 태도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마음에 꼭 드는 것이었다. 황제는 그를 무척이나 귀여워하여 '베르시무스(Versimus)'라는 별명으로 부르곤 했는데, 이 말을 우리 식으로 표현한다면 "정말 진국인 아이" 정도가 될 듯 싶다. 

황제가 될 때까지 
황제는 아우렐리우스를 교육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이 '꼬마 철학자'가 최고 수준의 교사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 그 결과 아우렐리우스를 가르쳤던 스승만도 열 일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어느 사회에나 사회 지도층이 되기 위한 "엘리트 코스"가 있는 법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이 엘리트 코스를 충실하게 밟아 나간다. 여덟 살 때 이미 제사장이 되었고 이후 재무관, 집정관, 호민관, 원로원 의원 등의 출세가도를 순조롭게 밟아 나간다. 실로 황제의 배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출세 속도였다. 
확실히 황제는 그를 후계자 감으로 생각했던 같다. 이 점은 젊어서 죽은 하드리아누스의 양아들이 남긴 딸과 그를 약혼시킨 점에 있어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 '꼬마 철학자'가 하드리아누스의 다음 황제가 되기에는 너무 나이가 어렸다. 꼭 이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이 현명한 황제는 후계자로 52세의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를 지명하고 그를 자신의 양아들로 받아들인다. 단, 안토니우스가 아우렐리우스를 다시 양자로 받아드리는 조건으로 말이다. 이로써 지금으로 보아서는 조금은 해괴한 '가족'이 생겨나게 되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나이차이는 열 살밖에 나지 않았고, 아버지는 새롭게 얻은 '아들'이 마음에 들어 할아버지가 맺어준 약혼을 깨버리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나 가족 구성은 '해외 토픽감'이었을지 몰라도, 이 가족을 구성한 할아버지의 선택은 '정치적으로' 정확하고 올바른 것이었다.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는 정말 훌륭하고 뛰어난 황제였다. 그가 다스리던 시대의 역사적 사실은 알려진 것이 많지 않은데, 그 이유는 이 시기의 로마가 너무도 안정되고 평화로워서 도무지 '기사화' 될 만한 사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를 사람들은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라고 불렀다. 이는 '경건한 안토니누스'라는 뜻이다. 그는 '경건'이 별명이 될 정도로 도덕적인 사람이었고 또한 이성적인 삶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스토아의 가르침에도 충실한 사람이었다. 이런 성품은 '아들'을 가르치는 데도 그대로 나타났다. 
한 번은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을 가르쳤던 가정 교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울고 있었다. 이를 본 안토니누스는 다음과 같이 아들을 위로한다. 

"...현명한 이의 철학도 황제의 권력도 감정을 절제하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때가 있단다. 그럴 때에는 네가 사나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참을 수밖에 없지..."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세상일은 모두 우주적 이성(Logos)에 따라 결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해도 슬퍼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그렇게 되도록 결정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어난 어떤 일 때문에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것은 마음의 평온을 깨는 어리석은 일일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logos)을 발휘하여 우주적 이성(Logos)의 깊은 뜻을 깨달아 기쁨도 슬픔도 없는 마음의 평화, 즉 부동심(不動心:Apatheia)을 찾아야 한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가르침대로 평생을 살았다. 후에 자식을 잃은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자기자신을 타일렀다고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렇게 묻는다. 내 아이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지만 그대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이겨낼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참으로 강하고 건전한 삶의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위기와 시련에 처해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로마인의 강인함은 바로 이러한 스토아의 이념에 있었다. 

흔들리는 팍스 로마나 
161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숨을 거둔다. 이로써 이제 마흔 살의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그가 물려받은 제국은 겉으로 보기에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그 자체였다. 전쟁도 없었고 경제도 번창했다. 그러나 겉모습만 그랬을 뿐 로마는 이미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빈부의 차이가 심하게 벌어졌고, 세금과 착취를 견디다 못한 중소 농민들이 토지를 버리고 수도 로마로 몰려드는 바람에 수많은 사회 문제를 낳고 있었다. 제국은 가진 자들의 횡포를 막지도 못하고 못 가진 자들의 생계를 안정시키지도 못한 채 속주에서 들어오는 수입을 이용한 '빵과 서커스'로 사회 불만을 겨우 잠재우고 있는 형편이었다. 아우렐리우스는 뛰어난 행정능력으로 위기의 로마를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이는 무너지려는 둑을 주먹으로 막는 것만큼이나 위태로운 것이었다. 
162년, 로마의 '전통적인 라이벌' 파르티아가 침략해 온다. 그러나 철학자 황제는 전쟁에도 능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쉽사리 파르티아를 격파했을 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확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승리와 정복은 예상치 못한 재앙을 가져왔다. 이 지방에서 유행하던 페스트가 제국으로까지 흘러 들어온 것이었다. 곳곳에서 역병이 돌았고 수많은 시민이 죽어갔다. 또 큰 홍수가 거듭하여 일어나기도 했다. 나아가 166년에는 게르만족이 제국의 방위선인 다뉴브 강을 돌파했고, 168년에는 사르마텐 족이, 169년에는 무어인이 국경을 넘보았다. 아우렐리우스는 이 모든 사태를 수습하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명상록}, 그리고.... 
그러나 아우렐리우스는 그 가운데서도 철학자였다. 그의 명작 {명상록}은 반란과 침략을 막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시절에 군대 막사나 전쟁터에서 쓰여진 것이다. 이 책에는 원래 "내 자신을 훈계함"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 책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보내는 훈계였던 셈이다. 인간의 잔인성이 판을 치는 황량한 전쟁터에서도 아우렐리우스는 끊임없이 이성을 일깨우고 마음의 고요를 찾는 철학자의 면모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명상록} 곳곳에는 그의 인간적인 번민과 철학적 사색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세계는 우주에 비하면 미세한 점에 불과하고, 인간의 삶도 찰나일 뿐이다....인생은 투쟁이고 세계는 낯선 이를 위한 임시 수용소일 뿐이며, 죽음 뒤에 얻은 명성은 허무하다. 그런 우리에게 유일한 버팀목은 철학뿐이다. 철학은 우리 자신 속에 거룩한 정신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고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은 악이 아니라 우리의 운명일 뿐이라고 말해 준다....우주적 이성에 따라 일어나는 일은 결코 나쁜 일일 리 없다..." 

"인간은 서로를 위해서 존재한다." 
계속되는 전쟁과 자연재해로 로마의 재정상태는 점점 어려워져만 갔다. 아우렐리우스는 부족한 재원을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거나 침략을 통해 약탈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으로 한다면 '자선 바자회'라 할만한 것을 실시한다. 황제가 가지고 있던 보석부터 일상 생활에 쓰이는 가구까지 모두 거리에 내놓고 팔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는 위기에 부딪혔을 때 국가 지도자가 제일 먼저 앞장선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상징적인 행위였겠지만 로마시민을 감동시키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데는 크게 효과가 있었던 듯싶다. 이제 로마의 원로원은 그에게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선사한다. 
또한 아우렐리우스는 매우 관대한 사람이었다. 175년, 반란을 일으켰던 시리아의 총독 카시우스(A.Cassius)를 부하장교들이 죽였을 때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베어진 목을 직접 보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카시우스와 다른 이들 사이에 오간 반란에 관한 수많은 편지들을 읽어보지도 않고 모두 불태워 버렸다. 
사실 그의 관대함은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이성(logos)'를 가지고 있다. 이 이성은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우주적 이성(Logos)'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은 피부가 하얗건 거멓건, 라틴어를 쓰건 게르만어를 쓰건 간에 모두 존중해 주어야 할 소중한 존재이다. 내가 이성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으로서 존엄하다면 이성을 가지고 있는 상대방도 존엄하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로마가 내세우던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는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인간의 이성이 모두 '우주적 로고스'에 따른다면 다른 민족의 이성적 인간들이 만든 법도 로마법과 마찬가지로 존엄한 것이다. 그렇다면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본래 있는 것이 민족과 문화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이는 우리가 말하는 자연법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다른 민족의 합리적인 문화나 풍습도 우주적 로고스에 따르는 것으로 당연히 존중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정복이란 곧 약탈과 파괴를 의미했던 고대 문화 속에서도 로마만큼은 오히려 정복당한 민족을 나와 같은 이성을 가진 '동포'로 보고 보호하고 존중했다. 로마의 대 제국은 이러한 스토아 철학의 포옹과 관용 위에서 가능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제국의 이념에 너무도 충실한 사람이었다. 

아우렐리우스의 죽음, 그리고 제국의 몰락 
이제 아우렐리우스에게도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다. 항상 전쟁과 재앙에 시달리던 이 고단한 황제에게 180년, 다시금 도나우 강변이 시끄러워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는 게르만의 침략이 단순히 약탈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북쪽에서 접근하는 또 다른 민족의 공격에 밀려 제국으로까지 넘어오는 것임을 간파했다. 그래서 이들을 로마 국경 안에 정착시키고 질병으로 인구가 줄어든 제국의 새로운 노동력으로 삼으려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나아가 아우렐리우스는 도나우 방어선을 넘어서까지 새롭게 영토를 넓힘으로써 아예 제국이 다시는 게르만 문제로 골머리를 썩히지 않도록 하는 '최후의 전쟁'을 벌이려고 했다. 그러나 우주적 이성은 이러한 황제의 뜻을 받아드려 주지 않았다. 게르만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페스트로 쓰러지고 만다. 
죽음의 순간에도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자다운 담대함을 잃지 않았다. {명상록}에 나오는 한 구절은 그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이제 헤어지는 마당에 남은 사람들을 고약하게 대하지 말라...그대의 가족과도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지 말고 부드럽게 이별하라. 자연(우주적 이성)이 그들을 그대와 결합시켰듯이 이제 자연이 다시 그대를 그들과 떼어놓고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죽음 후, 황제 자리는 철학자 아버지와는 다르게 야비하고 잔인한 성격의 아들 코모도스(Comodos)에게 넘어가게 된다.(큰 성공을 거두었던 영화 "글레디에이터(Gradiator)"는 이런 시대 배경을 소재로 한 것이다) 아우렐리우스에게는 원래 많은 자식들이 있었으나 모두 병으로 죽고 코모두스 만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현명한 아우렐리우스였다고 해도 이러한 '최악의 경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듯 싶다. 아들은 파탄에 이른 로마를 아버지만큼 기술적으로 통치하고 조절할 만한 능력이 없었고, 이후 로마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자연을 따르라." 
스토아철학은 원래 기원전 4세기 말, 그리스 철학자 제논(Zenon)에 의해 출발한 철학이다. 원래 스토아철학은 혼란한 사회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고 한 은자(隱者)의 철학이었다. 그러나 명상과 깨달음을 강조한 불교가 역사상 많은 국가에 있어서 통치이념이 되고 반성과 봉사를 강조한 기독교가 서양 중세를 지배한 이념이 되듯이 스토아철학도 개인의 깨달음을 넘어선 대제국의 통치이념으로 발전해 나갔다. 개인을 훌륭하게 만드는 철학은 사회도 훌륭하게 만들 수 있음을 역사가 증명해준 셈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삶은 우리에게 철학적 반성을 통해 성숙한 개인은 또한 훌륭한 사회 지도자도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항상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자신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라. 이것이 수학 한 문제 더 풀고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는 것보다 더 여러분들을 훌륭한 사회 지도자로 만들어주는 길일 것이다. 아우렐리우스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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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집문당 교양선 12, 김병호 옮김, p 205
 이번 책 소개는 지금 거의 상영이 끝나려는 영화 "글래디에이터 Gladiator"로 시작하려 한다. 30 년 전 거의 동일한 내용의 영화가 "로마제국의 멸망"이라는 제목으로 제작되었었다. 물론 두 영화 모두 세 번째 소개한 책인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기본 줄거리로 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이 영화의 감동이나 가치, 그리고 웅장한 기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 편의 영화나 그림, 음악, 책에서 받는 감동은 개인적인 것이어서 남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단지 여기서는 다른 기록과 비교하여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창조력[?]을 발휘하였는지를 검토해 볼 뿐이다. 또한 영화의 스토리와 역사적인 사실을 혼동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시작되는 기원후 180 년 기번이 아래와 같이 말한 시대이다.
 "만일 세계사에서 인류가 가장 행복하고 또 번영했던 시기는 어느 시기였는가를 질문받는다면, 사람들은 아무런 주저 없이 아마 도미티아누수 황제의 사망(96 년)부터 코모두스 황제 즉위(180 년)까지의 시기를 들 것이다(네르바 황제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이르는 이른바 5 현제(賢帝) 시대이다). 이때는 광대한 로마제국의 전 영토가 덕과 지혜로써 지도된 절대권력 밑에 통치되고 있었다."[로마제국의 쇠망, 1 권, p 123]
 처음으로, 영화와 역사가의 견해가 다른 점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주제 중의 하나인 아우렐리우스 황제(121 - 180; 참고로 삼국지의 유비는 161 - 223 이다)와 코모두스의 관계이다. 기번은 코모두스를 망친 것은 아루렐리우스의 편애, 과중한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영화에서는 코모두스가 폭군이 되는 이유가 아버지 아우렐리우스의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이제 겨우 14 - 15 살밖에 되지 않은 그(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을 황제 권력의 거의 모든 분야에 관여시켰던 것이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가장 사랑을 받았던 아들이 원로원과 군의 환호속에서 즉위하였다. 그가 행복한 젊은이를 왕위에 오르게 했을 때 그 주위에는 단 한 사람의 배제해야 할 경쟁자도 없었거니와 벌줄 적대자도 없었다."[P 131]
 이 아들 코모두스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었다.
 또한 백과사전 브리태니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77년 마르쿠스는 16세의 아들 코모두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했다. 그들은 협력하여 도나우 강 전쟁을 다시 시작했다. 마르쿠스는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제국의 북쪽 국경선을 확장·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180년 마르쿠스가 아들 코모두스를 국정의 최고 조언자로 임명하고 난 직후 군대 사령부에서 숨을 거두었을 무렵 거의 결실을 맺고 있었다."
 영화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코모두스는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계속 전쟁을 하고 있었으며, 그를 완전한 후임자로 임명한 후에 아우렐리우스가 죽은 것이다.
 기번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황인 마르쿠스의 사후까지 코모두스는 대병단의 지휘와 콰디족 및 마르코반족을 상대로 어려운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P 132]
 또한 기번은 영화의 주인공의 하나인 황제의 딸 루실라(Lucilla)에 대해서 영화와 전혀 다른 진술을 하고 있다.
 "183 년 어느날 밤, 코모두스가 자기의 숙소인 내전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어둠에 잠긴 콜로세움의 좁은 주랑(柱廊)을 막 벗어나고 있을 때, 잠복하고 있던 한 자객이 검을 빼어 들고 습격하였다. ...
 코모두스 황제의 누님이며 루키우스 벨루스의 미망인인 루실라가 제국의 서열 3 위의 지위에 있는 것이 미흡하여 참지 못한데다가 황후인 파우스티나에 대한 질투심까지 결부되어 이처럼 자객을 무장시켜 동생 [코모두스]의 생명을 노리게 했던 것이다. 아무리 그녀라 해도 이 무서운 음모에 대하여 현재의 남편이며, 유능한 원로원 의원이자 충성스러운 인물이기도 한 클로리우스 폼페이아누스[이 사람은 영화에 나오지 않으나 여기 언급되는 모든 인물 중 가장 오래 살아 남은 사람이다]에게 이 행동을 상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 그녀의 정부들 중에는 무모하기 그지없는 야심가들도 있었는데 이런 자들은 그녀의 바람기뿐만 아니라 보다 광기어린 집념에까지 기꺼이 봉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런 음모자들은 물론 엄벌을 받았다. 그리고 파렴치한 루실라도 처음에는 유형에 처해졌으나 뒤이어 사형을 받았다."[p 133]
 즉 루실라가 먼저 코모두스를 암살하려 하였으며, 영화와 달리 코모두스보다 먼저 죽었다.
 물론 코모두스가 좋은 황제였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 중 막시무스[Maximus]가 있다. 이 사람과 영화의 막시무스는 동일 인물이 아닐 수 있다.
 "이와 같은 폭정에 쓰러진 무고한 희생자 중에서도 가장 애처롭게 여겨지는 것은 퀸틸리아누스가의 형제들인 막시무스와 콘디아누스 두 사람이다. 이 두사람의 형제애는 그 이름이 오랫동안 망각되었다가 빛을 보게 되어, 후세에까지 향기로운 회상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 막대한 재산을 이어 받았는데도 두 사람에게는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생각 따위는 털끝만큼도 없었고, 이 형제가 협력해서 쓴 한 논문('농업론'이라 하는 것)이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지만, 일생동안 무엇을 해도 두 사람은 완전히 일심동체였다. 이들의 덕행을 존중하고 그들의 화목한 우애심을 기뻐한 두 안토니우스 황제[임주(任註); 아우렐리우스의 전임황제와 아우렐리우스]들은 한날 한시에 두 사람을 모두 집정관으로 임명하였었다. 그후 마르쿠스 황제는 다시 그리스 속주의 민정과 군사권을 이들 두 사람의 공동관리로 위임했는데, 여기서도 이들은 게르만인과의 전쟁에서 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동정심이 많았던' 코모두스 황제의 잔인성은 마지막 죽음에 있어서까지 이 두 사람을 '일심동체'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p 134]
 막시무스가 게르만과의 전쟁에서 대 승리를 거둔 것이 이 영화의 몇 안되는 진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는 코모두스에 의해 사형당했다.
 영화에서 막시무스의 자식과 부인이 십자가에서 화형을 당했다는 것은 사실이기 어렵다. 로마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것은 노예나 로마 시민이 아닌 경우에 한하였다. 그러므로 로마의 체제에서 아무리 폭군 코모두스라 하여도 장군의 아내와 어린 아들을 재판 없이 십자가형에 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지 친위대를 시켜 원로원 의원에게 자살을 명한 것은 역사책에 나온다. 로마인이 법 체계를 존중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 시민이라는 이유로 십자가형을 받지 않았다.
 코모두스가 결정적으로 로마 시민들의 인심을 잃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이다.
 "투기장의 우리에서 100 마리의 사자가 단번에 내몰려 나온 일도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손에서 던져진 100 자루의 투창은 그 사자 무리가 투기장 안을 날뛰며 돌아 다니는 사이에 단 한 자루의 빗나감도 없이 모두를 맞혀서 한 마리 남김없이 사체로 만들고 말았다. 거대한 덩치의 코끼리 몸뚱이도, 코뿔소의 가죽도 그가 던지는 창끝을 막아낼 수 없었다. ...
 그러나 하층계급의 일반민중들조차 이것을 너무 지나친 행위라하여 분노와 치욕감을 느낀 것은, 자기 황제가 하필이면 일개 검투사로 분장하고 등장해서 국법이나 습관도 천한 직업으로 낙인찍어 놓은 그런 직업인의 흉내를 마치 자랑스러운 듯이 연출했을 때였다.
 ... 황제는 투기사 역을 담당하여 실로 735 회나 싸웠다."[p 142]
 실제로 코모두스는 상당히 훌륭한 검투사였다. 영화의 막시무스가 앞에서 설명한 그 막시무스라면 코모두스에게 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30 년 전의 영화에서는 위의 사실을 위해 마지막의 황제의 싸움을 투창으로 하는 것으로 꾸몄다. 물론 그 영화에서도 코모두스가 죽지만 비겁한 승부는 아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악인을 더 비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세상에 날이 갈수록 비겁한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일까?
 코모두스는 여러 사람들을 죽이더니 드디어는 자기 측근에게 죄를 씌워 죽이기 시작하였다. 코모두스의 죽음에 대해서 기번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윽고 그의 가족들조차 공포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운명도 끝장이 났다. 동료나 선임자의 죽음을 보고 깜짝 놀란 애첩(愛妾) 마르키아, 시종무관장 에클렉투스, 근위대 장관 레투스, 이 세 사람이 포악한 군주의 바보같은 변덕으로 혹은 갑작스런 국민의 분노로 언제 [자기들의] 머리위에 떨어질 지 모를 죽음의 운명을 저지하기로 결의하였다."[p 144]
 시종무관장과 근위대장과 더욱이 애첩까지 황제의 반대편에 가담했다는 것은 실제로 황제 주위 사람들이 모두 이반(離叛)한 것이다.
 "때는 마침 황제가 동물사냥으로 기진맥진하였을 때였다. 포도주 한 잔 권하는 기회를 마르키아가 이용하였다. [독약을 먹였다] 황제는 침실로 물러났으나 점차 독과 취기가 온몸에 퍼져서 신음하고 있을 때 갑자기 역기(力技)를 직업으로 하는 건장한 젊은이 한 사람이 침실로 들어와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않고 황제를 목졸라 죽이고 말았다. 시내는 물론 궁중에서도 황제가 죽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는 사이에 사체가 비밀리에 황궁으로부터 밖으로 운반되어 나왔다. 바로 이것이 현명한 군주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외아들 코모두스 황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온갖 권력을 휘둘렀고, 재위 13 년간에 몇 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의 생활을 폭력으로 억눌러 온 대상이던 이 폭군을 쓰러뜨리는 일은 이처럼 매우 간단했던 것이다.(디오-카시우스, '로마사' 제 73 권 22 절, 헤로디아누스, '로마사' 제 1 권, '황제열전' 제 7 권 제 17 절)[p 144]
 적어도 코모두스는 경기장에서 죽지 않았다.
 여하튼 코모두스는 자기 아버지에 비해 논의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들을 영화 제작자는 매우 좋아하는 것 같다.
 
 이제 명상록으로 돌아가자. 나는 여러분이 이 사람을 황제가 아니라 홀로 선 한 사람의, 고독한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이 고백록을 읽어주기를 바란다.
 기원 후 백년 경에는 두 사람의 대(大) 스토아 철학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노예로 에픽테토스이고, 또 한 사람은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다.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은 로마인의 위엄을 간직하고 견실한 생활을 이끌어 나가는 데 크게 힘이 되었다.
 백과사전 브리태니커에는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가 있다. "철인왕(哲人王)의 사상이 담겨 있는 〈명상록〉은 오랜 세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왔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에 관한 백과사전의 내용이 매우 많아 본문 다음에서 소개하였고, 여기서는 스토아 철학에 대한 간단한 내용만을 소개한다.
스토아 철학   Stoicism  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철학.
 모든 탐구의 목표는 평온한 마음과 확실한 도덕을 낳는 행동양식을 인간에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토아 철학의 특성과 영역
 초기 스토아 철학은 이전 철학과 달리 지식의 추구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헬레니즘 철학을 대표한 스토아 철학은 보편적이고 평온하며, 질서있는 존재와는 거리가 먼 생활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삶의 방편(ars vitae)을 내놓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보기에 영원한 우주질서와 불변적인 가치의 근원을 드러내는 일은 이성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은 곧 인간 존재가 따라야 할 모범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이성의 빛이란 세계 전체에 경이로운 질서를 부여하며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하여 질서있게 살아가는 기준이다. 스토아 도덕철학도 세계가 통일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도시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은 이 도시의 충성스런 시민으로서 덕과 올바른 행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 일에 적극적이어야 할 의무가 있다. 스토아 도덕철학은 도덕 가치, 의무, 정의, 굳센 정신 등과 같은 덕목에 중심을 두고 보편적인 우애와 신처럼 넓은 자비심을 강조함으로써 가장 호소력 있는 학설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스토아 학파는 처음 형성된 후 2세기까지 그 영향력이 가장 컸으며, 이후 사상의 발전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후기 로마 시대와 중세에 이르는 동안 스토아 도덕철학의 일부는 그리스도교·유대교·이슬람교 등이 인간과 자연, 국가와 사회, 법과 제재에 관한 이론을 형성하는 데 적용되었다. 현대에 와서도 스토아 철학의 개인중시 사상 및 갈등과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설은 실존주의와 비정통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다시 주목받았다.

책 내용
<1>
1. 나는 조부 베루스에게서 선량한 행실과 격정의 절제를 배웠다.
2. 아버지의 명성과 회상에서 겸손과 남성적인 기질을 배웠다.
3. 어머니에게서는 경건과 인덕(人德), 그리고 나쁜 행위뿐만 아니라 나쁜 생각도 버려야 할 것을 배웠으며, 부자들의 습성에서 멀리 떠나 소박하게 사는 방법을 배웠다.
[임성삼의 주(註); 이 것 이상의 배움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위의 배움은 우리 모두가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4. 증조부로부터는 공립 학교에서 공부하지 않고, 가정에서 훌륭한 스승을 모셔 배우되, 이런 일에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함을 배웠다.
[임성삼의 주(註); 동양에서는 훌륭한 스승을 찾아가 배웠으나 서양에서는 집에 모셔서 배웠다. 결국 현재 문화가 깊은 나라들에서 말썽인 과외공부가 그 시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5. 나의 스승에게서는 경기장의 경주에서 청(靑), 백(白)의 어느 편을 들어서도 안되며, 또 검투사(劍鬪士)의 격투에서는 둥근 방패를 든 편을 들어서도 안 되고 모난 방패를 든 편을 들어서도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노역(勞役)을 견디고, 욕망을 줄이며, 자기 손으로 일을 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며 남의 비방에 귀를 귀울여서는 안된다는 것도 가르쳐 주셨다.
[임성삼의 주(註); 스승에게서는 불편부당(不偏不黨)하며, 참된 인간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6. '디오그네투스'에게서는 번거로운 일에 열중하지 말 것,
[임성삼의 주(註); 번거로운 일에 열중하면 더 중요한 일을 할 수 없다.]
주문(呪文)인 악귀를 쫓는 마술사나 요술가의 말을 믿지 말 것,
[임성삼의 주(註); 이것을 믿게 되면 자신의 이성을 믿지 않게 된다. 자기의 판단력이 없어지는 것이다.]

싸움을 시키기 위한 [독]수리 등속을 기르거나 이러한 일에 열중하지 말 것,
[임성삼의 주(註); 지금으로 말하면 사냥, 낚시 등의 취미생활을 말한다.]
언론의 자유를 용인하고 철학을 숭상할 것, 특히 우선 '바키우스'를 비롯하여 점차로 [여러 좋은 선생의 가르침을 받을 것] 등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결과 어릴 적부터 대화하는 것을 배우고, 널판 침대와 가죽 옷, 그 밖의 그리스식 단련에 속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7. 루스티쿠스에게서는
[임성삼의 주(註); 앞으로 계속 이렇게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물론 그 당시에는 중요한 사람들이었겠으나 우리에게는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말한 내용이 더 중요하다.]
나 자신의 성격을 바로잡고 또한 수양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배운 것은 궤변의 시합이나 공리공론(空理空論)의 붓을 들거나, 번거로운 권고의 변설을 휘두르거나, 또는 많은 수양을 쌓은 것처럼 자기를 과시하거나, 허식적인 자선(慈善)행위를 하는 이러한 그릇된 길에 빠지지 말고, 또한 수사학이나 시와 노래나 화려한 문자를 배격하는 것 등이었다.
[임성삼의 주(註); 친구에게서 좋은 것을 배웠다.]
 또한 외출복의 정장을 한 채로 방안을 걸어다니거나 이와 유사한 일을 하지 말며,
[임성삼의 주(註); 예절은 집에서도 지켜야 한다. 집에서는 집의 옷을 입는 것도 중요한 예절이다.]
편지를 쓰되 "시누에사"라는 곳에서 어머니에게 써 보낸 것처럼 소박하게 쓸 것,
나를 모욕하고 또 무례한 짓을 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들이 화해의 뜻을 표하면 곧 마음을 풀고 융화할 수 있는 기풍을 기를 것,
[임성삼의 주(註); 단지 무례한 자가 화해의 뜻을 표하기 전에 그들에게 내가 아첨으로 화해의 뜻을 전해서는 안된다.]
무릇 책은 정독하여 표면적인 이해에 만족하지 말 것,
[임성삼의 주(註); 이를 위해 나는 현재 거의 모든 책의 중요한 구절을 적어 여러분에게 보내고, 이런 주석을 붙이는 것이다.]
말이 많은 사람들에 대하여는 경솔하게 맞장구를 치지 말 것 등등을 가르쳐 주었다.  .....
8. 아폴로니우스에게서는
의지의 자유와
끝까지 목적을 관철하는 것을 배우고
또한 한동안이라도 이성(理性)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의지하지 말며,
심한 고난을 당하거나 ...
오랫동안 질병으로 고생하더라도 언제나 태연자약(泰然自若)한 태도를 취할 것,
[임성삼의 주(註); 참 어려운 것을 배우셨다.]
그리고 용감무쌍한 동시에 매우 유순하며
자제(子弟)를 가르칠 때는 성급해서는 안 된다는 산 실례(實例)를 분명히 찾아볼 수 있었다.
또한 철학상의 여러 가지 큰 원리를 해설하는 것과 같은 자기의 경험 또는 숙련 등은 조그만 재능에 불과하다고 분명히 자각하고 있는 것을 그에게서 발견하였다.
 뿐더러 친구의 신세를 지면서도 결코 비굴해지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무관심하게 관과하지 않는 태도를 역시 그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9. 세크스투스[플루타르크의 손자, 혹은 조카]에게서는
인자스러운 성격과 자부(慈父)의 미덕에 의해 가꾸어진 가정의 본보기와,
자연에 순응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또 허식이 없는 엄숙한 태도며,
친구들의 이득을 자상하게 고려하고,
무지한 사람들이나 분별없는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는 것 등을 배웠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나, 유쾌한 얼굴로 대하여, 자기를 융화시키는 재능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와의 교제는 어떠한 아부보다도 즐거웠으며,
그 때문에 그는 교제하는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실생활에 필요한 처세의 강령을 발견하는 동시에,
그것을 총명하고 조직적인 형식으로 질서를 세우는 재능도 갖고 있었다.
그는 분노는 물론이고 어떠한 감정도 절대로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모든 감정에 벗어나 있으면서도, 애정이 매우 깊었었다.
그는 떠들썩하게 과시하지 않고서도 칭찬의 의사를 표시할 수가 있었으며, 허식없는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10. 문법학자 알렉산더에게서는
남의 흠을 잡기를 삼가며,
천한 말이나 그릇된 문법이나, 이상한 발음으로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방하지 않고, 오히려 그 경우에 사용해야 할 올바른 표현을 교묘히 가르쳐 주되 직접 그 말로써가 아니라 다만 이에 대한 답변이나, 찬동의 표명이나 또는 질문과 같은 형식을 빌어서 시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11. 프론토우에게서는,
폭군이나 군주에게 어떤 질투와 위선이 존재하는가를 간파할 것과,
[임성삼의 주(註); 폭군과 군주를 동일하게 취급한 것을 인정하자.
어떤 기관이든지 기관장의 성격에는 동일한 면이 있다.]
우리 사이에서 귀족이라고 부르고 있는 자들에게는 대체로 자부(慈父)의 성격이 결핍되어 었음을 간파할 것을 배웠다.
[임성삼의 주(註); 프론토우는 나와 비슷한 성격의 사람이었을지 모르겠다.]
12. 플라톤학파의 알렉산더에게는
자기에게 여가가 없음을 남들에게 때때로, 그리고 부질없이 말하거나, 또는 그것을 편지로 써 보내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급한 일에 몰린 것을 구실로 삼고, 친한 사람들과의 교제에 필요한 의무를 게을리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도 배웠다.
13. 카테울스에게서는
어떤 친구가 자기의 결함을 발견한 경우에, 비록 그것이 무리한 억지라고 하더라도, 이를 모른 체 방임하지 말고, 그 사람을 본래의 성품으로 돌아가게 하도록 힘써야 함을 배웠다.
그리고 스승들에 대하여는 도미티우스와 아케노도투스의 고사(故事)를 본받아 언제나 옳은 말을 하고,
또 자기의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할 것을 배웠다.
14. 사랑하는 형제[역주(譯註); 저자는 형제가 없었으므로 사촌 정도였을 것이다] 세베루스에게서는
자기의 친족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며, 정의를 사랑할 것을 배우고, 또한 그에게서 트라세야, 헬베디우스, 카토, 디온, 브루터스 등에 대하여 배웠다.
[임성삼의 주(註); 자기의 친족을 사랑하는 것은 '중용'에서도 나오는 중요한 덕목이다.
나중에 나오는 여러사람은 과거 공화정의 인물들이다. 과거의 사람에 대해 배우는 것도 큰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만인을 위해 동일한 법칙이 존재한다는 정치적인 주장, 즉 평등의 권리와 언론상의 평등한 자유를 인정하고 통치하는 사상과 ,피치자(被治者)의 거의 모든 자유를 존중하는 왕자다운 통치의 관념을 배우게 되었다.
[임성삼의 주(註); 그 시대의 이 황제가 지금 민주사회의 대부분의 정치가보다 더 진보적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철학에 대한 자기의 입장은 종시 일관하여 변함이 없어야 하며, 선한 일을 행하고,
기꺼이 남에게 베풀며, 선량한 희망을 품고, 친구들에게서 스스로 사랑을 받고 있음을 믿을 것을 그에게서 배우게 되었다.
그는 자기를 배척하는 사람들에게도 자기의 진의를 감추지 않고 말한다.
그러므로 친구들은, 그의 의향을 억측할 필요가 없이 분면하게 알게 됨을, 나는 그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다.
15. 막시무스에게서는
[임성삼의 주(註); 그 당시 흔한 이름이었으나, 내가 앞에서 소개한 그 막시무스일 가능성이 있다.]
자제를 배우고,
또한 다른 일에 미혹되지 않으며 병들었거나 그밖에 모든 경우에 쾌활하고 상냥하며 무뚝뚝한 어느 덕성이나 적당히 조절하여, 불평을 하지 않고, 자기 일을 처리하는 것을 배웠다
 그는 언행이 일치하고, 그가 하는 일은 모두가 한결같이 악의에서 우러나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아무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놀라는 얼굴을 하지 않았으며, 서두는 법이 없었다.
 그런가하면 무슨 일에나 방치하지 않았으며, 당황하지도 않았다.
 실망하거나 자기의 곤경을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일이 없었다.
[임성삼의 주(註); 사회생활에서 자기의 잘못을 웃음으로 얼버무리면 안된다. 그저 묵묵히 인정하는 것이 가장 나은 길이다.]
언제나 인자스러운 행동을 하였고, 남을 용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모든 허위에서 떠나 있었다.
 그는 연단(鍊鍛)을 받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정의에서 떠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아무도 그에게서 멸시를 당했다고 생각하거나, 자기를 그에 비해 뛰어난 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즐겁게 유머를 곧잘 하는 재능도 갖고 있었다.
[임성삼의 주(註); 적어도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나오는 주인공 막시무스와는 전혀 다른 성격이다.]
16. 나의 아버지[전왕(前王); 양부, 안토니우스 피우스]에게서는 온유한 기질과 사물에 대하여 충분히 생각하고 나서 굳은 결의를 한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었다.
[임성삼의 주(註); 바로 전(前) 로마 황제에 대한 언급이 이렇게 16 번째로 나중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이 분도 또한 로마의 5 현제(賢帝)의 한 분이었다. 아래의 사항을 보면 최고의 인간이었던 것 같다.]
 남들이 명예롭게 생각하는 일에 허영을 구하지 않고, 노고와 정진을 사랑하고, 대중의 이익을 위해 건의하는 사람들의 말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고, 각자의 공과 과에 따라 상과 벌을 주어 일을 불공평하게 처리하지 않는 그 견실(堅實)성, 민활한 행동과 사면(赦免)에 있어서 경험이 풍부한 임기응변(臨機應變)의 지려(智慮) - 그러한 것들을 나는 아버지에게서 보고 배웠다. ...
당신을 일반 시민과 조금도 다름없는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당신의 신하에 대해서도 함께 식사를 나누거나 출타할 때에 필요한 시종 등 모든 의무를 면제시켰다. ...
 아버지는 모든 중요한 일에 대하여 용의주도하고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어, 첫눈에 보이는 외관만으로 만족하여 탐구를 그만두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성격상 친구를 오래 사귀며, 곧 싫증을 내거나 또 애정을 마구 표시하는 일이 없고, 언제나 만족하고 쾌활한 얼굴을 하였다.
 또한 모든 사물을 훨씬 이전부터 내다보고, 사소한 일도 허실없이 미리 준비해 두고, 세속의 갈채나 아부를 재빨리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라의 통치에 필요한 일에 대하여는 언제나 주의를 기울이고, 국고금의 훌륭한 관리인이 되고자 애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당신에게 돌아오는 비난을 참을성 있게 견디곤 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왕으로 오랜 기간을 견딘 사람이 전 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유럽에서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5 황제 시대의 다섯 번째 황제가 네 번째 황제에 대하여. 그러나 그 훌륭한 황제들의 행동이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행동과 다른 점이 별로 없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아버지께서는 제신(諸神)에 대하여 결코 미신적인 일이 없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번 책 소개를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강조한 사항이다. 시오노나나미의 말대로 지도자는 어느 시대든 미신에서 자유롭다.]
 또한 선심을 써서 남의 환심을 사거나, 백성들에게 아부하여 민심을 우롱하는 일도 없었다. 모든 일에 근엄하고 견실하며, 결코 비열한 생각을 하거나 행위를 하는 일이 없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런 능력있는 사람들이 이렇게하여 "로마의 평화"를 마련한 것이다.]
 또한 신기한 기호(嗜好)에 빠지지도 않았다.
[임성삼의 주(註); 언제나 그 시대의 기호에 빠지는 사람이 국가의 수장(首長)이 되면 문제가 생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인 다음 황제 코모두스는 그 당시의 기호인 검투(劍鬪)에 빠져 매일 아침 곰이나 사자를 한 마리씩 죽였다. ]
 그리고 어느 모로나 생활을 즐겁게 하고 행운을 윤택하게 공급하는 것이라면, 자랑하지도 않고 천시하는 일도 없이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
 그를 가리켜 궤변가 또는 교양이 없는 경솔한 사람이나, 현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누구나 그를 보고 원만하고 완벽하며, 특히 아부를 떠나 모든 공사(公私)의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였다.
 또 아버지께서는 진실한 철학자들을 존경하는 한편, 단지 철학자인 체하는 인간에 대하여도 결코 비난하지 않고, 이들에게 쉽사리 속지도 않았다.
 좌담에도 뛰어나, 남에게 불쾌한 태도를 취하는 법이 없고, 좌석의 분위기를 즐겁게 조정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건강에 대하여 상당히 주의하였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삶에 집착하지도 않고, 육신의 외모에 마음을 쓰지도 않았으며, 또 전혀 무관심한 것도 아니었다. 이와 같이 조심하는 까닭에 내과의사의 진찰을 받고 약을 쓰거나, 외과의사의 필요를 별로 느끼지 않았다. ...
 그는 일부러 꾸미는 일이 없이, 국가의 제도와 법률을 지켜 나갔다. 또한 변화와 혼란을 좋아하지 않고, 같은 지위에 머물러 동일한 일을 보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두통이 일어난 후에도 곧 기분을 새롭게 하고, 원기 왕성하여 평소의 사무를 보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비밀이 적었다. 그것은 매우 드문 일이고, 단지 공적인 일에 관한 것뿐이었다.
[임성삼의 주(註);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다음 황제의 진술이니 믿을 수 있다.]
 그는 민중의 구경거리, 관공서의 건축, 국민에 대한 자신의 시여(施輿)물 등에 대하여는 신중하고 경제적이었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할 뿐, 굳이 개인의 행위로 손에 넣을 수 있는 허명(虛名)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정에 없는 시간에 목욕을 하는 법이 없었다. 호화로운 거실을 지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의 음식물과 옷감이나 색깔 또는 비복(婢僕)의 미모에 관심이 없었다. ...
 그에게서는 잔인성, 앙심, 난폭 또는 이른바 식은땀을 흘리게 하는 점은 전혀 없었다. 뿐더러 무슨 일이나 조사에 착수할 때에는 시간 여유가 많은 것처럼, 침착하고 순서를 따라 재빨리 계속적으로 진상을 캐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에 관한 기록, 즉, "많이 소유하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고, 소유하면 남용하게 마련인 재화를, 그는 소유하지 않고서도 견디고 소유하고도 적절히 즐길 수 있었다."는 말을 아버지에게 적용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17. 나는 선량한 조부, 선량한 양친, 선량한 자매, 선량한 교사, 선량한 교우(交友) 및 선량한 친족과 친구 등등, 거의 모든 선량한 것을 소유할 수 있는 데 대하여, 신들(諸神)에게 감사하고 있다.
[임성삼의 주(註); 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있지 않다.]
  또 하나 내가 신들에게 감사하고 싶은 것은, 이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에게나 내가 해를 입히는 과오를 저지르지 않은 점이다.
[임성삼의 주(註); 그러나 황제의 능력이 없는 아들에게 권력을 주고 곧 죽음으로써 로마에 막대한 피해를 미쳤다. 그의 능력 범위 밖이었을까?]
 
 나는 본래 기회만 있었더라면, 이러한 과오를 범할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들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시험에 빠지는 우연의 기회는 한 번도 없었다.
...
 내가 통치자로서 혹은 아버지로서 모신 사람은, 내게서 모든 자만심을 제거해 주고, 적어도 남자로서 호위병이라든가, 호화로운 정장이라든가, 혹은 횃불, 석상(石像) 같은 허식을 필요로 하지 않고 궁정에서 생활하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와 같이 생활할 수 있어야만, 자기를 한 사인(私人)이나 다름이 없는 풍습에 젖게 하면서도, 천한 사상을 갖지 않고, 또 행동을 조심하면서 통치자로서의 알맞은 태도로 공익(公益)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임성삼의 주(註); 로마가 가장 융성한 이 때의 황제의 소박한 생활 모습을 증언해주고 있다.]
 또 다시 신들에 감사할 것은 나에게 준 한 사람의 형제[역주(譯註); 의형제 루키루스 베루스]가 그의 도의적인 성격상 언제나 나를 깨우쳐 주고, 그의 존경과 우애가 나를 기쁘게 하여 주며,
또한 내 자식들은 어리석지 않고, 육신적으로 불구자가 아니며,
[임성삼의 주(註); 하지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 아들 코모두스는 뛰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내가 수사학과 시, 그밖에 다른 학문과 예술에 능통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만일 내가 이런 일에 정진할 수 있었던들, 아마도 나는 거기에 철저히 얽매이게 되었을 것이다. .....
[임성삼의 주(註);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능통하지 못한 것도 복이다.]
 나는 아마도 이상적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터이지만, 앞으로는 자연에 순응하여 사는 것을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육신은 오랫동안 그러한 생활을 영위해 왔었다.
 내가 매우 유순하고, 애정이 깊고, 그리고 단순한 아내를 갖고 있는 것도,
[임성삼의 주(註); 역사적으로 이 황제의 아내이며 전 황제의 딸에 대하여는 여러 말이 있다. 위의 표현에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통설(通說)이다. 뒤에 백과사전에서는 위와 같은 개념이지만...]
내 자식들을 위해 많은 훌륭한 선생들을 초빙한 것도,
[임성삼의 주(註);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1 권의 130 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황제의] 도움을 요청 받고 모여든 학덕 높고 유식한 교육고문들은 소년 '코모두스'의 편협한 마음을 열어주어 점차 심화되어가는 악덕을 교정하여 곧 인수받을 제위에 합당한 인물이 되게 하고자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원래 교육의 힘이란, 처음부터 그런 교육이 거의 불필요할 정도로 본바탕 자체가 훌륭한 인간이라면 또 몰라도, 그렇지가 못한 사람이라면 대체로 거의 효과가 없는 것이 보통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 말이 옳은가? 잘 생각해보자. 역사에는 훌륭한 교육을 받은 인간성이 덜 된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우리 주위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자주 눈에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건실한 체하는 철학자의, 전혀 재미도 없는 강의 따위는 놀기 좋아하는 간신배의 한마다 속삭임에 의해 순식간에 잊혀져 버릴 것은 뻔한 일이었다."
 지성적인 황제와 유능한 학자들이 모든 힘을 다해 교육을 시켜도 인간적으로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경우가 이 코모두스만은 아니다.]
 또 내가 철학에 취미를 갖게 되었을 때 궤변학파(詭辯學派)의 손에 떨어지지 않고 역사가와 삼단논법(三段論法)과 추리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혹은 천체 현상의 관측에 몰두하지 않게 된 것도, 신들의 도움을 받은 덕분이다.
 이러한 모든 일에는 신들과 운명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임성삼의 이야기; 명상록의 1 장을 거의 모두 옮겼다.
 이 장의 첫 부분은 이 황제가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배운 내용이다. 사람은 책에서 보다 주위의 다른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우리도 우리 주위의 분들에게 어떤 좋은 점을 배웠는가를 명상(冥想)해 보는 것이 어떨까?
 상당히 많은 부분을 16 절의 전의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의 성격을 묘사하는 데 사용했다. 이상적인 사람이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하는가를 잘 알 수 있다.
 17 절 이후는 자기가 가진 것들에 대한 감사이다. 살면서 감사할 줄 모르면 좋은 사람일 수 없다.]
<2>
1. 아침에는 우선 이렇게 생각할 일이다. 즉 자기는 남의 일에 참견하는 자, 은혜를 모르는 자, 교만한 자, 사기꾼, 질투하는 자, 비사교적인 자와 만나게 될 것이라고.
[임성삼의 주(註); 이런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 로마 황제였다.]
 이 모든 일은 사물의 선악에 대한 무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한 것이 아름답고, 악한 것이 추한 데 대하여, 그 본성을 통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의 성질도 나와 같은 인간으로, 비단 같은 혈통이나 종족에 속할뿐더러 동일한 신의 예지를 동등하게 나눠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나는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 손상되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추악한 것을 나에게 떠맡길 수 없고, 나는 자기의 동포들에게 화를 내거나 증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2. 내가 어떠한 존재이건 간에, 단지 한 고깃덩이와 호흡과 지배적인 부분[정신]에 불과한 것이다.
 그대의 책을 버리라. 이제 그대 자신을 현혹시키지 말라. 그것은 허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한 사람의 늙은이다. 더 이상 [스스로를] 노예로 삼지 말라. 꼭두각시처럼 비사회적인 행동의 끄나풀에 조정되어서는 안된다.
 현재의 처지에 불만을 품어도 안 되고, 미래에서 물러나서도 안된다.
3. ... 우주는 많은 원소(元素)의 여러 가지 변화에 의해 유지되는 동시에 많은 원소가 복합된 여러 가지 사물의 변화에 의하여 유지된다. 그대는 이 원리로 만족하고, 이 원리를 언제나 그대의 견해로 삼으라.
[임성삼의 주(註); 현재의 화학과 별로 다른 개념이 아니다. 단지 화학의 원리를 정신에 끌어들여 철학으로 만들었다.]
 책에 대한 갈망을 버리라. 그것은 고민하는 일이 없이, 쾌활하게 성실하게, 그리고 충심으로 신들에게 감사하면서 죽기 위해서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 말 또한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5. 어떤 순간에도 한 로마인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원만하고 순박한 위엄을 지니는 동시에 사랑과 자유와 정의감을 갖고, 당면한 일을 처리하고, 다른 여러 가지 잡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도록 충실히 사고해야 한다.
[임성삼의 주(註); 정말 좋은 말이다.]
 만일 온갖 부주의와 이성의 명령에 대한 감정적인 반항과 모든 위선, 이기심,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불만을 버리고, 오직 이것이 마지막 일인 것처럼 실생활에서 하나하나 실천해 간다면, 그대는 스스로 안정을 얻게 될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실 생활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는 좋은 방법이다.]
 그대가 아는 바와 같이, 조용한 생활, 신들의 생활과 같은 삶을 보내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실로 근소한 것이다. 신들은 이러한 것을 행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그 밖의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임성삼의 주(註); 기독교의 개념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6. ... 각자의 생명은 충족되어 있다. 그런데 그대의 영혼이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행복을 남들의 영혼에 맡기고 있는 동안에 그대의 생명은 고갈된다.
8. 인간은 남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살피지 않기 때문에 불행하게 되는 경우는 좀처럼 없지만,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주목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에 빠진다.
10. ... 참으로 철학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도록 그[테오프라스토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즉 쾌락을 위하여 저지르는 비행은 고통으로 말미암아 저지른 비행보다 더욱 비난을 받아야 한다. ...
12. 만물은 얼마나 신속히 소멸하는 것인가. 육신은 우주 속으로 사라지고, 그 기억은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모든 현상은 무엇인가? 특히 쾌락으로 인간을 유혹하고, 또한 고통으로 인간을 두렵게 하며, 물거품 같은 명성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것들은 얼마나 무가치하고, 얼마나 비열하며, 얼마나 사멸하기 쉽고, 또 얼마나 말라 죽기 쉬운가 하는 것에 대하여는 예리한 지능만이 깨닫기 마련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 명상록에서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한 논리는 대단히 간단하다. 덧없다는 것이다. 허무의 관념으로 실 생활의 건전함을 내세우자는 논리가 '스토아' 철학의 원리인 것 같다.]
14. 인간은 설령 삼천 년을 살든, 또는 일만 년의 몇 배를 살든, 그래도 역시 모든 인간이 잃는 생활은, 현재 그들이 영위하고 있는 생활일 터이며, 또한 그 생활은 현재 그가 시시각각으로 잃고 있는 생명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리하여 가장 긴 생애나 가장 짧은 생애가 동일하게 된다. ...
[임성삼의 주(註); 이런 개념이 이 책의 끝까지 반복하여 나온다. 앞으로는 생략할 것이다.]
17. 인간의 생애는 하나의 점(點)으로, 물질은 유전(流轉) 속에 있고, 지각(知覺)은 우둔하고, 육체의 됨됨은 썩을 운명에 있으며 그리고 영혼은 선풍(旋風) 같고, 행운은 예측할 수 없으며, 명성은 비판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요컨대 육체에 속하는 것은 하나의 흐름이고, 심령에 속하는 것은 꿈결 같은 운무(雲霧)이며, 생활은 하나의 투쟁이고, 또한 나그네의 행로이며, 그리고 사후의 명예는 망각이다.
[임성삼의 주(註); 황제부터 온 로마 사람이 이러한 허무 속에 있을 때, 기독교가 그들에게 희망과 빛을 주었다. 이 시대에 로마에서는 맹렬하게 기독교가 전파되고 있었다.
  즉 스토아 철학은 로마 사람들의 마음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메마르고 허무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 메마른 마음에 기독교의 복음이 비와 같이 스며 들어갔다.]
 그렇다면 인간을 인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하나 철학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 능욕하거나 가해(加害)하지 말고, 쾌락을 초월하여, 목적이 없는 행동을 하지 말며, 또한 허위나 위선에 찬 행위를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행동 여하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모든 일과 모든 운명을 자기 자신이 태어난 원천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고 감수하며, 끝으로 죽음에 대하여는 모든 생물이 그 구성 분자로 환원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유쾌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
[임성삼의 주(註); 그러나 철학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은 유쾌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것 보다는 기독교의 영생(永生)을 택하게 된다. 그 길이 현세에서는 아주 힘든 순교의 길이라도...]
                           이상은 칼눈툼[다뉴브강 남쪽에 있는 판노니아의 한 고을, 야만족과의 싸움으로 이곳에서 3 년 동안 머물렀다고 함]에서 적었다.
<3>
1. 우리는 자기의 생명이 나날이 소모되고 감퇴되어 간다는 것을 염두에 둘 뿐만 아니라, 또 하나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즉 가령 어떤 사람이 장수를 한다고 해도 과연 그 분별력이 존속되어 사물을 충분히 분간할 수 있으며, 신과 인간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능력을 보유할 수 있을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
 
 우리는 서둘러야 한다. 그것은 비단 우리가 날로 죽음에 접근해 가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물의 개념에 대한 능력과 이해력이 먼저 쇠퇴되기 때문이다.
2. 만일 사람들이 우주에 생성된 사물에 동정과 깊은 통찰력을 갖는다면, 어느 의미에서나 쾌감을 주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맹수의 벌린 턱에서도 화가나 조각가의 작품에 못지않는 쾌감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또한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서도 일종의 원숙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며, 또 젊은 남녀의 매력 있는 사랑스러움도 맑은 안목으로 바라볼 수가 있을 것이다.
3. 히포크라테스(BC 460 - 377 경)는 많은 병을 치료하고 나서, 자기가 병에 걸려 죽었다. 칼데이의 박사들은 많은 사람의 죽음을 예언하였으나, 이윽고 운명은 그들도 앗아갔다. 알렉산더, 폼페우스, 카이우스, 시저 등은 그렇게 번번이 대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전장에서는 몇 십만의 기병대나 보병대를 닥치는 대로 살육하였지만, 이윽고 그들 자신도 죽음을 당하였다.
4. ... 우리는 만일 어떤 사람이 갑자기 "지금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하고 물으면, 공명정대하게 곧 "이러저러한 일"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일만을 언제나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
[임성삼의 주(註); 동양에서는 "혼자 있을 때의 마음을 조심하라."는 말이 여러 책에 있다. 또한 율곡 선생님의 "격몽요결"에 이와 거의 완전히 같은 말이 있다.]
5. 무슨 일이든지 마지못해 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또한 깊이 생각한 연후에 행하되, 마음에 혹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인위적인 허식으로 자기 사상을 장식하여서도 안 되며, 말이 많은 사람이 되거나 많은 일에 매여 너무 분주하여서도 안 된다.
 그리고 자기 자신 속에 깃들어 있는 신성(神聖)으로 하여금 자기의 수호신이 되게 하고, 남아답게 생각이 깊으며, 정치에 관여하고, 로마인으로서, 지배자로서, 자기의 직분을 지켜나갈 때에는 언제나 생명을 내던질 각오를 한 사람처럼 진퇴(進退)를 결정하고, 아무런 서약도, 어떤 사람의 증언도 필요없이 묵묵히 행동해야 한다.
[임성삼의 주(註); 로마인들은 이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또한 쾌활해야 한다. 외부에 원조를 구하지 말며 타인이 주는 평화를 바라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남아는 남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서야 한다.
[임성삼의 주(註); 그 당시 세계의 주인으로 자부하고 있던 로마인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6. 인간 생활에 있어서 그대가 만일 정의, 진리, 절제, 견인(堅忍)보다 더 선한 것을 발견한다면 ... 그대는 거기에 전심전력을 위탁하라. 그리고 그대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향락하도록 하라.
 나는 말하고자 한다. 그대는 다만 단순히, 그리고 자유롭게 최선의 것을 선택하라. 그리고 그것을 고수하라.
8. 세련되고 정화된 인간의 정신 속에는 썩은 것, 부정한 것, 꿰매어 붙인 상처 같은 것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또 언제 죽음의 손에 잡히더라도, 마치 연기를 끝마치기 전에 무대를 떠나는 배우에 대한 비난처럼 미완성의 생활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는 조금도 비굴한 데가 없고, 또한 허식도 없으며, 큰 집착도 느끼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사물을 등지는 일도 없고, 탓할 만한 일도 없으며, 피난처를 찾는 일도 없다.
[임성삼의 주(註); 이 황제가 이런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황제를 힘없고 병든 노인으로 묘사한 영화는 진실이 아니다. 그는 죽을 때 59 세밖에 안되었었다.]
10. ... 그리고 가장 길다는 사후의 명성도 역시 짧은 것으로 대대손손(代代孫孫) 그것을 전하는 것은 다만 가엾은 인간들이며, 그들 자신이 매우 신속히 죽어가고,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자들이므로 먼 옛날에 죽은 사람들에 대하여 알 리가 없다.
[임성삼의 주(註); 죽은 후의 명성에 대하여까지 정확히 분석하였다.
나의 집 사람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 중 이 줄 친 부분만은 틀렸다고 하였다. 지금 우리들은 그의 글을 읽으며 그의 마음을 알고 그와 함께 느끼고 있으니까.]
16. ... 자기의 가슴에 심어 놓은 신성(神聖)을 모독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인상에 의해 그것을 훼방하지 않으며,
신에 순종하고,
진리에 어긋나는 일은 일체 입밖에 내지 않으며,
[임성삼의 주(註); 논어에 나오는 비례물언(非禮勿言; 예절이 아닌 것은 말하지 않는다)]
또한 정의에 위배되는 것은 일체 행하지 않는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역시 논어의 비례물동(非禮勿動)]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이 단순하고 겸손하며, 분수에 어울리는 생활을 하고 있음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어느 누구에 대하여도 불평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자기가 한 평생 도달하려는 목적에 이르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4>
2. 어떤 행위를 하든지 거기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한다.
또한 기술상의 완전한 원리에 따라야 한다.
......
 명성에 대한 욕망이 아마도 그대를 괴롭힐 것이다. 보라, 모든 사물이 얼마나 신속히 망각되는가를.
10. 모든 사물은 정당한 이유에서 생긴다는 것을 명심하라. 만일 깊이 관찰하면, 그대는 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무엇을 하든지 선인(善人)이 될 것을, 다시 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선인이 될 것을 목표로 하고 행동해야 한다.
[임성삼의 주(註); '엄밀한 의미에서 선인'이 될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 착한 사람 비슷하게도 될 수 없다.
율곡 선생님의 "격몽요결"의 첫 귀절은 다음과 같다.
初學 先須立志 必以聖人自期              須(모름지기 수)    期(기약할 기)
처음 학문을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먼저 뜻을 정하기를
반드시 완전한 사람(성인 聖人)이 되기로 스스로를 기약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성인을 선인과 거의 같이 해석한다.]
12. 우리는 언제나 다음 두 가지 규칙을 활용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 하나는 지배와 입법을 맡은 자는 인류의 이득을 위해서만 명령을 내릴 것.
 또 하나는 만일 근처의 어느 사람이 그대의 미망을 제거해 주고 그대의 그릇된 견해를 씻어 준다면 아낌없이 의견을 변경할 것. 그러나 이 의견의 변경은 정의나 혹은 공공의 이익과 같은 어떤 확실한 이유에서 행해야 하며, 그것이 기분 좋게 보인다든가, 또는 명예를 가져온다는 이유에서 변경해서는 안된다.
17. 스스로 만 년 동안이나 살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죽음은 그대 위에 걸려 있다. 그대가 사는 기간은 그대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는 선량하라.
[임성삼의 주(註); 이것이 이 책의 기본 법칙이다. 이 논리에 대해 잘 생각해보자.]
18. 나의 이웃 사람이 말하고, 또 행하며, 혹은 생각하는 것을 알려고 애쓰지 말고, 오직 자기 자신이 하는 일을 올바르고 순결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참으로 많은 괴로움을 모면하게 될 것이다.
 아가톤(그리스의 비극작가. BC 447 - 400)이 말한 바와 같이, 남의 타락된 도덕에 눈을 돌리는 일 없이, 다만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20. 어느 의미에서나 아름다운 것은 모두 그 자체에 있어서 아름답다. ...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진리, 인애(仁愛), 겸손이 칭찬을 받아서 아름다운 것이 되었으며, 비난을 받으면 더러운 것이 된다는 말인가? 비취, 황금, 상아, 자수정 등이 칭찬을 받지 않으면 밉게 보이는가?
[임성삼의 주(註); 칭찬을 바라는 데에 대한 경고]
24.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은 언제나 "이것은 불필요한 일이 아닌가?"하고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인간은 불필요한 행위 뿐 아니라 불필요한 생각까지도 버려야 한다. 이렇게 하면 부질없는 행위를 하지 않게 된다.
28. 간악한 성격, 비겁한 성격, 완고한 성격, 짐승 같은 놈, 어린애 같은 사람, 동물적인 인간, 우둔한 자, 거짓이 많고 비천하고 기만적이고 포악한 자
[임성삼의 주(註); 이러한 온화한 분도 이런 사람들에 의해 수난을 받고 나면 이런 글을 남기게 된다.]
31. 그대가 배운 기술은, 비록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이를 존중하고 만족하라. 그리고 그대 자신을 폭군이나 노예로 삼지 말고, 온 몸과 정신으로 가진 것 일체를 신에게 맡긴 사람과 같이 여생을 보내도록 하라.
33. 전에 귀에 익었던 말도 지금은 낡아 버렸다. 마찬가지로 옛날에 유명했던 사람들의 이름도, 오늘날에 와서는 낡아 버렸다.
34. 자기 자신을 기꺼이 운명의 여신 크로토우에게 맡겨, 그녀가 그대의 실을 마음대로 짜도록 하라.
[임성삼의 주(註); 운명의 여신은 각 개인의 운명을 계속 실로 짜서 그 사람의 삶을 만들어 간다고 그리스 신화에 나와있다.]
35. 기억하는 것도, 기억되는 것도, 다 함께 단 하루뿐인 것이다.
48. 다음과 같은 것을 언제나 마음속에 새겨 두라. 얼마나 많은 의사들이 병자에게 자주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이윽고 자기 자신도 죽어갔는가를. 얼마나 많은 점쟁이들이 남의 죽음을 떠들썩하게 예언하면서, 자기도 덧없이 죽어갔으며, 또 얼마나 많은 철학자들이 죽음과 불멸에 대하여 끊임없이 해명하고 스스로 죽어갔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영웅들이 무수한 사람들을 살육한 연후에 자기도 죽어갔으며, 또 얼마나 많은 폭군들이 자기는 불멸의 화신이나 되는 것처럼 몸서리치는 횡포를 감행하여 생사의 권한을 한 손에 휘두른 연후에 죽어갔던가. 또 얼마나 많은 도시가 멸망했던가. ... 인생이 얼마나 덧없고 얼마나 무상한가. ... 자연에 순응하여 지나가고 ...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그대의 나그네 길을 끝맺도록 하라.
[임성삼의 주(註); 이 시기에 사람들이 착한 행동을 하게 하려면, 이런 빈약한 논리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로마에서 광범위하게 기독교가 퍼져나간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철학의 한계를 보는 것으로 여겨진다.]
49. 언제나 사나운 물결에 부딪치면서도 굳굳하게 서 있으며, 주위의 사나운 물결을 다스리는 곶(岬; 산허리 갑)처럼 있으라.
<5>
1. 아침에 일어나기 싫거든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좋다. - 즉 나는 한 인간으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내가 존재하고, 또 그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파송된 일을 지금 하려고 한다면, 내가 어찌 그것에 불만을 느낄 수 있겠는가?
2. 성가시고 귀찮은 모든 잡념을 깨끗이 버리고, 마음을 안정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7. 아테네 사람들의 기도 - 비를, 비를, 오 제우스여, 아테네 사람들의 경작지와 들에 비를 내리소서
 우리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기도를 한다면, 이와 같이 단순하고 기품이 높은 양식으로 해야 할 것이다.
9. 정당한 원리에 따라서 모든 일을 하였는데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그대는 혐오하지 말고, 낙담하지 말며, 또한 불평을 하지 말라. 그 경우에는 다시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서 자기가 한 일이 거의가 인간의 본성과 일치하면 스스로 만족을 느끼고 그대에게로 돌아오는 것(철학)을 사랑하라. ...
11. 나는 지금 나의 영혼을 무엇에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자문(自問)하여야 한다. 그리고 다시 다음과 같이 자문하여야 한다.
 즉 지금 나의 지배성능이라고 말하는 영혼은 무엇을 파악하고 있는가?
[임성삼의 주(註); 앞으로 지배성능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게 된다.]
그리고 나는 누구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가? 어린이의 영혼인가? 허약한 여자의 영혼인가? 가축의 영혼인가? 폭군의 영혼인가? 혹은 들짐승의 영혼인가?
17. 불가능한 것을 구하는 것은 광기(狂氣)이다. 그리고 악한 자가 악을 저지르는 것은 당연하다.
20. 자기는 인류에게 선을 행하고, 그들의 결점을 참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인간은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이다.
30. 신들에 대하여, 부모에 대하여, 자녀에 대하여, 스승에 대하여, 그리고 그대의 유년과 소년 시절을 돌보아 준 사람들 - 친구, 친척, 노비들에게 대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대는 어떻게 행동해 왔는가? 그대의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소행에 대하여 다음의 말이 합당한가를 생각해 보라.
 언행 중에서 그 어느것도 아직 사람을 해친 적이 없다.
<6>
1. 우주의 실체는 순종이며, 또한 유화(宥和; 용서할 유, 화할 화)이다.
3. 정밀하게 고찰하라. 어떤 사물에 대하여도 그 특수성과 가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임성삼의 주(註); 이런 지성을 가진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6. 복수를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해자와) 같은 무리가 되지 않는 것이다.
18. 사람들은 실로 이상한 행동을 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동일한 시대에 살면서, 자기들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좀처럼 칭찬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도리어 자기가 아직 보지도 못하였으며, 또한 결코 볼 수도 없는 후세의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는 것에 커다란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다.
24.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마부(馬夫)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동등하게 되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 말이 황제의 입에서 나온 것이 신기하다. 이 황제가 죽은 1800 년 후인 현대에도 상당한 수의 전 세계 관리들의 의식 수준은 이 황제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29. 육체가 아직 쇠퇴하지 않는 동안에 심령이 먼저 쇠퇴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임성삼의 주(註); 육체가 왕성한 20 대에 심령부터 쇠퇴하는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
30. 지나치게 황제의 세도를 부리거나, 그런 버릇이 붙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므로,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대는 자기 자신을 단순하게, 선량하게, 진실하게 꾸밈새가 없이, 정의의 벗, 신들의 숭배자가 되어 친절하고 애정이 깊고 모든 일에 정당하게 행동하도록 힘쓰라.
 그대는 철학이 그대의 인격을 완성시키려고 원한 그 상태에 언제나 있으라. 신들을 공경하고 사람들을 도와주어라. 인생은 짧다.
 이 지상의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열매는 경건한 마음씨와 사회적인 행위뿐이다. 모든 일을 안토니우스[먼저 황제]의 제자로서 행하라. 이성에 적합한 행위로 일관한 그의 절제, 모든 사물에 대한 그의 경건, 그의 침착, 그의 우아함, 허명(虛名)의 멸시, 사물을 이해하려는 노력... 등등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는 부당한 비난을 하는 사람들을 공박하지 않고, 어떻게 참았던가.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얼마나 태연자약하였던가. .....
47. 매우 가치있는 가르침의 하나는 그대의 생활을 진리와 정의 속에서 보내고, 거짓말쟁이나 의롭지 못한 자들에게도 너그럽게 대하라는 것이다.
48. 그대 자신을 즐겁게 하려면, 그대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미덕을 생각해 볼 일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의 눈부신 활동이나, 두 번째 사람의 겸손이나, 세 번째 사람의 관용이나, 또는 네 번째 사람의 그 밖의 미덕을 생각할 일이다. 미덕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 속에 나타나고, 그것이 될 수 있는 한 풍부하게 나타날 때만큼 우리를 즐겁게 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러한 실례를 우리 눈으로 언제나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49. 그대는 자기의 체중이 150 kg에 달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만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명에 있어서도 정한 연령 이상을 살지 못한다고 해서 불만스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51.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의 견해를 자기의 행복처럼 생각한다.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감각에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분별력을 지닌 사람은 자기 자신의 행위를 자기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53. 다른 사람이 말하는 일에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되도록 말하는 상대방의 마음속으로 파고 들도록 그대 자신을 길들게 하라.
[임성삼의 주(註); 황제의 가장 큰 자격이다.]
54. 벌집 전체에 이득이 되지 않는 것은, 개개의 벌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
[임성삼의 주(註); 로마제국의 황제로서의 좋은 말이다.]
<7>
1. 사악(邪惡)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그대가 자주 보아 온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할 가치 조차 없다.]
3. 쓸데없는 일거리, 무대 위의 광언, 양의 무리, 소와 말의 무리, 창술(槍術)의 연습, 강아지에게 던진 뼈다귀, 연못의 물고기에 던진 빵, 무거운 짐을 나르는 개미의 노동, 혼이 난 생쥐의 줄도망, 실에 조종되는 인형 ---
이러한 것들 속에서 즐거운 얼굴을 하고, 거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이 그대의 의무일 것이다.
6.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명성에 의해 칭찬을 받은 연후에 망각 속에 묻혀 버렸던가. 그리고 다른 사람의 명성을 찬양해 마지 않던 많은 사람들도 벌써 옛날에 죽은 것이다.
8. 미래의 일에 대하여 걱정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러한 일에 직면할 필요가 생긴다면, 현재 그대가 사용하고 있는 이성이 그대를 도와줄 터이므로.
12. 그대는 똑바로 서라, 그렇지 않으면 똑바로 세워지지 못할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 황제의 아들 코모두스는 결코 똑바로 섰다고 할 수 없다.]
15. 누가 무엇을 하든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하든지, 나는 선량해야 한다. 마치 금이나 에머럴드, 또는 자색 옷은 언제나 "누가 무엇을 하거나, 또 무슨 말을 하거나, 나는 에머럴드이며, 내 본래의 빛을 지녀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24. 얼굴을 찌푸리는 것은 부자연한 일이다. 그것을 자주 되풀이하면 모든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나중에는 다시 명랑성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절멸되어 버린다.
27. 그대가 소유하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그대가 소유하고 있는 것 만큼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대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하여는 최선의 것을 선택할 일이다.
29. 어떤 사람이 저지른 비행(非行)은, 그것이 행해진 곳에 그대로 내버려 두라.
[임성삼의 주(註); 여기 저기에 가서 말하지 말라.]
31. 인류를 사랑하라. 신에게 순종하라.
[임성삼의 주(註); 이런 개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지 모른다. 기독교의 중심 사상을 이미 가지고 있다.]
34. 모래의 더미가 그 전 모래의 더미 위에 덮이는 것처럼, 인생에 있어서도 전에 행한 일은 나중에 행한 일에 덮쳐진다는 사실을 잘 생각해 보라.
36. 안티스테네스에서 --- 선을 행하고 비난을 받는 것은 고귀한 일이다.
[임성삼의 주(註); 현대 사회의 장점은 많이 있다. 그러나 "고귀(高貴)"에 대한 개념을 잃은 것은 슬픈 일이다.]
37. 마음이 명하는 대로 여러 가지 얼굴 표정을 짓는다는 것은 천한 일이다.
그리고 뜻대로 자기를 통제하고 이끌지 못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39. 불멸의 신들과 우리 자신에게 기쁨을 줄지어다.
49. 사십 년동안 인생을 관조(觀照)한 것은 만 년 동안 인생을 관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대는 현재 이상의 것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57. 오직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 그리고 그대의 운명의 실에 짜여지고 있는 일만을 사랑하라. 그 이상 적합한 일이 있는가?
58. 오직 그대 자신을 섬기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선인이 되고자 다짐하라. 언제나 이를 염두에 두라.
62. 그대는 어떤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원하는가. 그들은 어떤 이해력을 갖고 있는가를 언제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대는 실수로 비행을 저지른 사람을 책망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들의 의견이나 정욕의 원천을 주시하면, 그들의 칭찬을 원치 않을 것이다.
64. 고통을 당할 적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즉 이것은 불명예가 아니다. 또 나의 지배적인 영지(靈智)를 나쁘게 하지도 않는다고.
[임성삼의 주(註); 이 황제도 고통을 받은 적이 많은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말이 나올 수 없다.]
65.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갖고 있던 심정이 어떠하였는가를 연구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그가 사람들에 대하여 언제나 올바른 태도를 취했으며,
신들에 대하여 경건하였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인간의 사악함을 헛되니 고민하지 않고,
어떠한 사람의 무지에도 휘말려 들어가는 일이 없었으며,
우주에서 보내온 몫으로서 자기에게 닥친 일은 무엇이건 지체 없이 받아들여, 그것을 잘 견디어 나갔을 뿐만 아니라,
가엾은 육체의 여러 가지 정욕에 대하여는 동정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자기 이해력을 어둡게 하지 않았다는 것 등등,
이러한 일이 과연 어떠했던가를 탐구해야 한다.
67. 설령 세계가 그대를 마구 욕하고 꾸짖을지라도, 또한 야수가 그대의 수족을 물어서 갈갈이 찢더라도, 모든 강제에서 벗어나 극히 안정된 마음을 갖는 것은, 그대의 권한에 속한다.
 이러한 소동 속에서도 정신을 안정하게 하고, 주위의 모든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며, 또한 모든 대상을 자기의 의사대로 사용하는 것을 아무도 훼방할 수 없다.
72. 그대가 어떤 선한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이 이를 인정할 경우에, 여전히 바보와 같이, 어찌하여 이 두 가지 사실 이외에 제 삼의 것, 즉 선행을 하였다는 명성을 얻거나, 칭찬을 받기를 원하는가.
<8>
1. 그대가 그 여생을 그대의 본성이 원하는 대로 보내게 되면 그것에 만족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그대의 본성에 따라서 행하되 다른 어떠한 것에도 휩쓸려서는 안 된다. 삼단논법(三段論法)에도, 재물 속에도, 명성에도, 향락에도 ...
5. 그대는 자기 업무에 시선을 돌리고, 동시에 선인(善人)이 되는 것이 자기의 의무임을 기억하여,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것을 외면하지 말고 이를 행하며, 또 그대에게 가장 옳다고 생각되는 말을 하되 선의(善意)와 겸손과 성실로써 해야 한다.
8. 그대는 책을 읽을 여가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대는 오만을 억제할 여유는 갖고 있다. 그대는 쾌락과 고통을 초월할 여유를 갖고 있으며, 명예욕을 초월하고, 어리석은 배은망덕(背恩忘德)자를 괘씸하게 여기지 않을뿐더러, 그들에게 무관심할 수 있는 여유도 갖고 있다.
10. 쾌락은 선도 아니고, 유용한 것도 아니다.
22. 그대가 그토록 고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 그대가 오늘보다 내일은 더욱 선량해지려고 하므로.
30. 원로원에서도 누구에게나 아는 체 말고 온당하게 이야기하라. 순박한 말을 하라.
33. 부귀나 영화는 교만에 흐르지 말고 받아들이라. 그리고 언제나 그것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36. 미래도 과거도 그대를 괴롭히지 않으며, 다만 현재만이 그대를 괴롭힌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50. 어떤 오이는 쓰다. 이것은 버리는 것이 좋다.
길 한복판에 나무더미가 놓여있다. - 이것은 피하여 지나가면 된다.
이것으로 족하다.
세상에 어찌하여 이런 것이 만들어졌는가? 하고 부질없는 생각을 첨부하지 말라
.
[임성삼의 주(註); 이것이 삶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51. 어떤 사람이 맑은 샘물가에 서서 샘물을 저주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샘물은 계속해서 맑게 치솟을 것이다.
 만일 그가 그 속에 흙덩이나 오물을 던져 넣더라도, 샘물은 곧 그것을 순화시켜 금방 깨끗해질 것이다.
61. 각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마음속으로 돌아가게 하라.
<9>
4. 악을 저지른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고약하게 만들므로, 자기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이다.
12. 그대는 비참한 노예처럼 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동정을 받거나 칭찬을 받는 것 때문에 일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대의 정신을 오직 한 가지 일에 집중시켜, 사회적인 이성이 요구하는 대로 그대 자신을 움직이고, 또한 그대 자신을 억제하라.
17. 위로 던져 올린 돌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악이 아니다. 또한 던져 올린 것이 선이 아님은 물론이다.
20. 다른 사람이 저지른 악행을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은 그대의 의무이다.
42. 어떤 사람의 뻔뻔스러운 행위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할 때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이런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쓸어버릴 수 없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일을 원해서는 안된다."
[임성삼의 주(註); 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황제도 이 문제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던 모양이다.]
<10>
5. 그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영원한 태초부터 그대를 위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여러 가지 원인의 얽힘은, 영원한 태초부터 그대의 존재가 이에 부수되는 사건을 일으키는 그물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라플라스의 악마" 즉 기계론적 인과(因果)론이 이 시대부터 있었다.]
8. 무화과 구실을 하는 것이 무화과이며,
개의 구실을 하는 것이 개이고, 꿀벌 구실을 하는 것이 꿀벌이고,
인간의 구실을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
12. 만일 그대가 사물을 분명히 볼 수 있다면 뒤를 바라보지 말고 이 길을 줄곧 가도록 하라.
37. 누가 무엇을 하고 있건, 그것을 볼 적마다 되도록 "이 사람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는가?"하고 생각해 보는 버릇을 가지라. 그러나 그대는 그대 자신이 그것을 실행하여 우선 체험해 보라.
<11>
18. 그대가 생존하고 있는 동안에 곧 인간다운 인간이 되도록 하라.
22. 시골 쥐와 도시의 쥐에 대하여, 그리고 도시의 쥐의 전전긍긍함과 두려움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
[임성삼의 주(註); 이 분도 이솝이야기의 참된 독자였다.]
24. 스파르타 사람들은 그들의 공개 구경거리를 보일 경우에, 외국 사람들에게는 천막의 그늘진 자리를 제공하고, 그들 자신은 아무 곳에나 앉았다.
25. 소크라테스는 페르디카스 궁정의 초대를 사절할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가장 나쁜 부덕(不德)으로 멸망되고 싶지 않습니다.
즉 나는 내가 갚을 길이 없는 은혜는 받고 싶지 않습니다."
30. 그대는 노예이다. ----- 언론의 자유가 그대에게 허용되어 있지 않으므로
[임성삼의 주(註); 황제에게는 언론의 자유가 없다. 거의 같은 이야기가 당태종의 "정관정요"에 나온다.]
36. 어떤 사람도 우리에게서 자유의지(自由意志)를 빼앗을 수는 없다.
[임성삼의 주(註); 논어에도 나온다. 큰 군대의 지휘자는 포로로 할 수 있으나, 필부에게서 뜻[의지]을 빼앗을 수는 없다.]
<12>
10. 인간에게는 큰 능력이 부여되어 있다.
즉, 인간은 신이 허용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으며, 신이 부여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
14. 등불은 꺼질 때까지 한결같이 빛나는가?
그리고 그대 속에 있는 진리, 정의, 근엄(謹嚴)은 그대가 죽기 전에 소멸하는 것일까?
20. 무엇보다 생각이 따르지 않는 일이나 목적이 없는 일을 하지 말라.

임성삼의 이야기;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주인공 막시무스의 "자식과 아내와 함께 농사짓고 살고 싶어하는 소망"이다. 앞에서 내가 이 영화의 여러 오류를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 막시무스의 소망은 실제로 위대한 로마를 만든 원동력이었다. 이 영화보다 280 년 전[기원 전 100 년]까지는 로마의 군대는 모두 자영(自營)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자기 농토를 지키고, 가족과 함께 농사짓기 위한 소망을 가진 병졸들은 침입자들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 결과 한니발, 피로스 등의 그 당시 능력있는 외국 장군들이 이탈리아 반도에 침입한 것을 물리쳤으며, 그 여세를 몰아 카르타고와 그리스를 점령하였다. 방어만으로는 계속되는 침입을 근절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는 전형적으로 용병을 사용하는 국가였다.
 그러나 일단 강해진 로마는 점령지에서 들어오는 값싼 농산물로 인해 자영 농민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그락쿠스 형제의 개혁]. 또한 광대한 국토를 지키기 위해 먼 곳까지 농민이 파병될 수 없었다. 그 결과 임금을 받는 직업군인이 군대의 주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 군인들도 일정기간 근무하면 변방에 자기의 땅을 분배받아 지주가 될 수 있었다.
 평화로운 삶에 대한 소망은 모든 사람의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정식 이름은 Caesar 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 본명은 Marcus Annius Verus(~161).
121. 4. 26 로마~180. 3. 17 판노니아 빈도보나(지금의 빈) 또는 시르미움.
로마의 황제(161~180 재위).
 스토아 철학이 담긴 〈명상록〉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서양에서 로마 제국의 황금시대를 상징해온 인물이다.
초기생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는 이미 로마의 콘술(집정관)을 연임하는 중이었고 프라이펙투스(장관)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것은 원로원에 들 수 있는 특권을 뜻하는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고모는 황제에 즉위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과 결혼했고 언젠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제위를 계승하기로 정해져 있었다. 그의 외할머니는 로마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집안의 상속녀였다. 이처럼 마르쿠스는 플라비아누스 황제(69~96)를 구심점으로 하여 사회·정치 권력이 집결되어 있던 새로운 로마 체제에서 가장 이름난 몇몇 집안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이 체제의 기풍은 그의 태도와 행동에 배어들었다. 로마 제국을 처음으로 지배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공화국 말기의 지배계급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지방사람을 경멸하고 거만하며 냉소적이고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도회지 로마인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로마 체제는 도시와 지방출신의 황제들이 고루 다스렸으며, 진지함과 훌륭한 일을 개발하고 경건과 신앙심을 더욱 진작시켰다.
 어린 마르쿠스가 장차 특출한 정치적 인물이 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황제에 즉위하게 되었는가는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다. 136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이때부터 L.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라 불림; 임성삼의 주 - 이 사람은 마르쿠스의 아들이 아니다.)가 제위를 계승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같은 해 어린 마르쿠스는 콤모두스의 딸 케이오니아 파비아와 약혼했다. 그러나 138년초 콤모두스가 죽고 그후 하드리아누스 황제마저 세상을 떠나자 파혼했다. 콤모두스가 죽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마르쿠스의 고모부였던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맞아들여 나중에 자신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도록 하고(나중에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됨; 마르쿠스의 전 황제), 대신에 안토니누스에게 콤모두스의 아들과 마르쿠스 두 젊은이를 양자로 삼으라고 명령했다. 이때 마르쿠스의 이름은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로 바뀌었다.
 이리하여 마르쿠스는 17세 이전에 공동 황제에 즉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40세가 되어서야 황제에 즉위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속으로 콤모두스와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장차 황제가 될 한 젊은이 또는 두 젊은이 모두를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안토니누스 황제 아래에서 마르쿠스가 쌓은 오랜 기간의 예비황제 교육은 스승이었던 프론토와 주고받은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는 프론토가 당시 사회의 주요문인이었지만 수사(修辭)가 몸에 밴 음울한 현학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프론토가 편지에 나타난 것만큼 생기없는 인물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두 젊은이와 주고받은 편지 속에는 천재적인 감수성과 진솔한 교류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꾸준하고 진지하며 지적인 마르쿠스는 스승의 한결같은 고급 그리스어와 라틴어 낭독방식에 점차 싫증을 느꼈으며, 대신 한때 노예였으나 스토아 학파의 주요 도덕철학자인 신앙심 깊은 에픽테투스의 〈담론 Diatribai〉을 탐독했다. 이때부터 마르쿠스는 주로 철학에서 지적 흥미와 정신의 영양분을 구했다.
 한편 마르쿠스는 정력적인 황제 안토니누스 곁에서 통치술을 배웠으며 공직을 맡기도 했다. 마르쿠스는 140, 145, 161년에 콘술이 되었다. 145년 사촌이었던 황제의 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와 결혼했으며, 147년에는 공식상 황제직의 주요권력형태였던 '임페리움'(황제권)과 '트리부니카 포테스타스'(호민관의 권한)를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마르쿠스는 일종의 연하의 공동 황제가 되어 안토니누스와 긴밀한 협의를 통해 주요국정을 결정했다(그보다 10세 가량 어렸던 양동생도 적당한 시기에 주요공직을 맡았음). 161년 3월 7일 안토니누스가 사망하던 날 두 형제는 함께 콘술이 되었다.
로마 황제 시기
 마르쿠스가 황제에 즉위하는 과정은 순탄했다. 그는 이미 합법적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완전한 황제자리에 올랐다(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됨). 양동생도 마르쿠스의 강한 요청으로 공동 황제가 되었다(이때부터 그는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받음). 루키우스 베루스가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다는 증거는 없다. 이렇게 하여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는 동등한 법률상 지위와 권력을 갖는 공동 황제가 탄생했다. 그러나 루키우스 베루스의 업적은 뛰어난 황제 마르쿠스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대부분의 재위 기간 동안 변방지역에서 전쟁을 치르고 큰 전염병, 도덕의 타락에 맞서 싸우는 등 중요한 국정은 철저히 마르쿠스가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마르쿠스는 국내정치에서 건설적으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고 독창적인 기풍을 세우느라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틈이 없었다. 그가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분야는 법률분야였던 듯하다. 수많은 법령을 공포하고 사법판결을 확정했으며 민사법의 비정상적이고 가혹한 조항을 제거하고 노예·과부·소수민족같이 국가의 혜택을 적게 받는 계층의 비율을 줄였으며 상속 분야에서 혈연을 인정한 것 등을 업적으로 들 수 있다. 그러나 마르쿠스의 개인적 공헌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법령 개선의 유형은 혁신적이기보다는 전통에 따른 것이었고, 법령은 단지 사회와 법구조를 세련되게 만들었을 뿐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아니었다.
 마르쿠스는 위대한 입법가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를 보호한 헌신적인 실천가였다. 더욱이 이러한 법률적 활동에는 특별히 스토아적인 요소는 없었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 보면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의 시대는 법과 사회의 관계가 이전보다 오히려 퇴보하기 시작한 때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통치기에는 형법에 따른 처벌에서 차별 적용을 받는 '호네스티오레'(honestiore:상류층)와 '휴밀리오레'(humiliore:하류층)라는 두 계급이 서로 구분되기 시작했거나 더욱 뚜렷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휴밀리오레는 형법에서도 언제나 가혹하게 처벌받았다.
 정치가로서 마르쿠스의 자격을 문제 삼는 논란은 아주 다양하게 제기되어왔다. 그중 한 예가 그리스도교도의 박해와 관련된 문제이다. 마르쿠스는 그리스도교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재위하는 동안 어떠한 조직적인 박해도 가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도의 법률상 지위는 트라야누스 황제나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도는 얼마든지 처벌될 수 있었지만 실제로 수배당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불안정한 그리스도교도의 지위는 제국의 안정기와 번성기에는 아무런 해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위기 시에 지역 주민은 그리스도교도를 고발하고 행정관은 중앙권력의 명령에 따라 법대로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 177년에 리옹에서 일어난 순교도 바로 이런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도가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의 재위기간 동안 그전보다 많은 피를 뿌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신은 결코 박해를 주도하지 않았다.
 161년 동방의 중심세력 파르티아가 시리아 지역을 침략했다. 162~166년의 전쟁은 명목상으로는 베루스가 지휘하여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함으로써 승리했지만 실은 황제 휘하의 유명한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이 결정적인 공을 세운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돌아온 군대가 퍼뜨린 전염병은 수년 동안 로마 제국 전역을 휩쓸었으며, 게르만족의 침입과 함께 제국의 안정기에 익숙했던 시민들의 도덕의식을 약화시켰다.
 167년 혹은 168년에 마르쿠스와 베루스는 도나우 강을 건너 게르만족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의 등 뒤에서 게르만 유목민족이 엄청난 기세로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아드리아 해의 요충지였던 아퀼레이아를 점령했다. 위급한 사태에 직면하자 제국의 군사적 취약함과 재정구조의 경직성이 드러났다. 군대를 재편성하기 위한 절망적인 조치들이 취해졌으며,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제국의 재산이 경매되었다. 마르쿠스와 베루스는 게르만족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169년 베루스는 질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도나우 강 국경선을 되찾기 위해 마르쿠스는 온 힘을 기울여 3년간 더 싸워야 했으며, 또다시 3년간 보헤미아 지방에서 싸운 끝에 잠시나마 도나우 강 건너 부족들을 평정할 수 있었다.
〈명상록〉
 마르쿠스가 골치 아픈 국정 수행기간 동안 추구한 사상과 비록 역사적으로 매우 값진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일상 정치사상을 좀더 자세히 알려면 〈명상록〉을 읽으면 된다. 그가 이 책을 쓰면서 어느 정도로 타인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명상록〉은 전쟁을 수행하고 통치하는 동안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단편적으로 기록한 책으로, 논증적인 글과 경구가 번갈아 나타난다. 어떤 면에서 이 글은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쓴 것으로 보인다. 〈
 <명상록〉은 로마인의 가장 내밀한 사상을 다 모아놓은 것이지만 놀랍게도 그리스어로 쓰여졌는데, 이는 당시에 여러 문화들이 통합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마르쿠스의 사상을 찬탄해왔지만,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지나친 까다로움과 히스테리가 뒤섞인 마르쿠스 사상의 병리학적 측면이 더 눈에 띈다. 마르쿠스는 항상 이룰 수 없는 행동목표를 추구하고 있었으며, 사색 속에서 그 자신을 포함한 인간 일반과 물질 세계가 덧없고 야만스럽고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세상을 믿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는 어떤 희망도, 심지어 영원한 명성에 대한 희망도 없이 의무와 직책에 얽매여 있었다. 평생 동안 병고에 시달렸으며 만성 위경련으로 고통받으면서 매일 많은 약을 복용했던 것 같다. 〈명상록〉의 책갈피 속에서 풍기는 종말론적 분위기는 약물중독자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더 확실하고 중요한 점은 마르쿠스의 불안이 다소 과장된 형태이긴 해도 그 시대의 풍조를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철인왕(哲人王)의 사상이 담겨 있는 〈명상록〉은 오랜 세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왔다. 그 사상은 마르쿠스 자신의 것이긴 하지만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스토아주의의 도덕철학이고, 에픽테투스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우주는 지성이 지배하는 하나의 통일체이며, 인간의 영혼은 신이 가진 지성의 일부이기 때문에 혼돈과 변화의 한가운데 홀로 내던져진다 하더라도 더럽혀지지 않고 순수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정확한 이해의 부족 탓이겠지만 마르쿠스 사상의 한두 측면은 스토아 철학을 벗어나 플라톤주의에 가까웠다. 플라톤주의는 당시 에피쿠로스주의를 제외한 모든 이단 철학을 다 끌어안아 신플라톤주의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종류의 영혼불멸의 위안을 받아들일 정도로 스토아주의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마르쿠스가 도나우 강을 가로지르는 국경지역을 평정하고 있는 바로 그때 이집트·스페인·영국 등은 반란과 침공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전에 베루스 아래에서 일했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은 175년에 이르러 로마 제국의 동방지역과 이집트까지 사실상 통치하게 되었다. 그해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은 마르쿠스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을 우연히 듣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마르쿠스는 북부 지역의 미정복 부족들과 평화조약을 맺고 아비디우스의 반란군을 진압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반란 장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부하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마르쿠스는 그 기회에 동방지역을 평정하고 시찰할 목적으로 로마를 떠났다. 그는 안티오크·알렉산드리아·아테네를 방문했으며, 아테네에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엘레우시스 제전을 참관했다. 그러나 이 비의적(秘儀的) 제전은 그의 철학관점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것 같다. 도나우 강 지역 원정에도 동반했던 황비 파우스티나는 이 여행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도 전 로마 시민은 극진한 경의를 표했으며, 마르쿠스도 〈명상록〉에서 사랑과 존경의 글을 그녀에게 바치고 있다. 어떤 고대 사료는 그녀가 정직하지 못하고 충성심이 없었다(즉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와 함께 모반을 꾀했다고)고 쓰고 있지만, 이러한 비난은 아무 설득력이 없다.
 177년 마르쿠스는 16세의 아들 콤모두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했다. 그들은 협력하여 도나우 강 전쟁을 다시 시작했다. 마르쿠스는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제국의 북쪽 국경선을 확장·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180년 마르쿠스가 아들 콤모두스를 국정의 최고 조언자로 임명하고 난 직후 군대 사령부에서 숨을 거두었을 무렵 거의 결실을 맺고 있었다.
평가
 마르쿠스가 단 하나 살아남은 아들을 후계자로 선택한 것은 비극적 역설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콤모두스는 뛰어나지 못한 황제임이 나중에 드러났다. 그러나 다음의 2가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첫째, 고대 사료를 보면 황제란 원로원의 지배계급을 만족시켰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에 따라 훌륭한 황제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황제가 되기도 한다.
둘째, 콤모두스가 북부지역의 전쟁을 서둘러 마무리한 것은 아버지처럼 고집스럽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팽창주의를 추구한 일보다 현명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들이 대를 이어 황제가 되도록 결정한 점을 들어 마르쿠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개 마르쿠스가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유능한 '철학자'의 길을 걸은 뒤 다시 노골적으로 세습왕조를 고수하는 쪽으로 돌아섰다고 잘못 생각한다. 이것은 역사학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는 주장이다. 사실상 마르쿠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마르쿠스가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삼지 않았다면 이것은 그에게 죽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는 정치가였다고 할 수도 있지만 도량이 아주 넓은 정치가는 결코 아니었으며 현자(賢者)도 물론 아니었다. 한마디로 그는 역사적으로 과대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이미 몰락의 징조가 숱하게 드러난 제국의 금빛 휘장 아래서 혼란스런 방식으로 대제국을 통치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 어떤 혹독한 평가일지라도 그의 고귀한 품성과 헌신성을 가리지는 못한다. 말하자면 그는 매우 꼼꼼하게 비용을 따지면서도 또한 서슴지 않고 그 비용을 치른 인물이었다.
부동심 : M. 아우렐리우스, 이영조 역, 풍림출판사, 1985
명상록 : M. 아우렐리우스, 강연호 역, 삼연사, 1981
자성록 : M. 아우렐리우스, 김병익 역, 범조사, 1979
Marcus Aurelius : Anthony Birley, Eyre & Spottiswoode, 1966
Roman Society from Nero to Marcus Aurelius : Sir Samuel Dill, Meridian Books, 1956
Marcus Aurelius:His Life and His World : Authur S. L. Farquharson, D. A. Rees(ed.), Basil Blackwell, 1951
Kaiser Marcus : Ulrich von Wilamowitz-Moellendorf, Weidmann, 1931
Der historische Wert der Vita Marci bei den Scriptores Historiae Augustae : J. Schwedemann, 1923
Marcus Aurelius, a Biography : Henry D. Sedgwick, Yale Univ. Press, 1921
Marc-Aurele et la fin du monde antique : Ernest Renan, Calmann-Levy, 1885
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오현제  五賢帝      Five Good Emperors
로마 제국의 최고 융성기를 주재했던 다섯 황제.
 네르바(96~98 재위), 트라야누스(98~117 재위), 하드리아누스(117~138 재위),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가 그들이다. 이들의 재위 계승은 혈통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네르바는 도미티아누스의 암살자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입양된 후계자들인데 선임자들과 아무 관계가 없거나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먼 친척관계 정도에 불과했다. 마지막의 두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흔히 안토니누스 일가라고 부르며 이 호칭은 때로 두 사람뿐만 아니라 공동황제 루키우스 베루스(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입양된 후계자)와 콤모두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까지 포함하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오현제 시대의 로마 제국은 북부 브리타니아에서 다키아까지, 아라비아와 메소포타미아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영토확장을 이룩했다. 제국은 굳건해졌고 방어태세가 완벽했으며 상당한 통일성을 지닌 속주 행정제도가 제국 전역을 포괄했다. 속국들이 하나하나 속주로 재편되었고 이탈리아의 행정제도도 많은 면에서 속주와 동일하게 편성되어갔다. 이 모든 과정과 더불어 제국의 백성들도 언어와 문화면에서 로마화했다. 오현제 시대는 내정이 안정되고 선정이 베풀어진 것으로 유명하지만 취약점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권력이 완전하게 황제의 수중에 집중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해 놓은 '이원집정제'는 1세기에 이미 비현실적인 것이 되었고 그 당시 형식은 남아 있었지만 실제로는 고의적으로 무시되었다. 그리하여 원로원은 더이상 통치도구가 아니라 황제 휘하의 귀족집단으로 전락했고 주로 선거에 의해 콰이스토르(재무관) 자격을 얻은 사람들이 아니라 황제에 의해 곧바로 귀족지위를 얻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행정관들의 몫으로 남겨둔 제한된 행정분야는 더욱 협소해졌고 그들의 관할권은 점차 황제가 임명한 그리스 관리들의 수중에 넘어가는 추세를 보였다. 황제 휘하에 행정부서가 완전하게 조직되어 국가관료기구로 인정받게 된 것은 주로 하드리아누스의 작품이었다. 그는 장관직책을 자유민들 수중에서 빼앗아 에퀴테스(기사계급) 출신의 행정관들에게 맡겼다.
 이 모든 변화는 불가피할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이로운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친 권력집중으로 인한 폐해를 가져왔다. 이같은 폐해는 강력한 군주들이 중앙권력을 행사하는 동안 잘 드러나지 않기는 했지만 심지어는 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안토니누스 치세 때에도 제국 전체의 힘이 약해졌고 그에 상응해 제국정부 자체에 대한 압력이 갈수록 가중되는 조짐이 나타났다. 초기적인 몰락의 징후를 보인 현상들로는 특히 제국 중심지구의 갈수록 심해지는 인구감소, 끊임없는 재정난, 속주 지방행정의 부패성, 모든 계층이 이제는 갈수록 짐만 되어 가고 있는 지방행정관직을 맡기 꺼리는 것 등이 있었다. 180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고 난 이후 로마 제국은 급속하게 내전의 혼란에 빠져들어갔으며 193년 콤모두스가 암살되고 결국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승리를 거둘 때까지 내전이 계속되었다.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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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3. 19 독일 졸링겐~1962. 5. 31 이스라엘 텔아비브.
제1차 세계대전 때 가족과 함께 독일에서 오스트리아 린츠로 이주했다. 1932년 4월 린츠에서 비밀 나치당에 입당했고 11월 하인리히 히믈러가 조직한 나치 친위대(SS) 정예부대에 들어갔다. 1933년 린츠를 떠나 바이에른 레히펠트의 '오스트리아 군단'이라는 테러리스트 양성학교에 들어갔다. 1934년 1~10월 다하우에 있는 SS부대에서 일한 뒤, 베를린의 보안국(Sicherheitsdienst/SD) 중앙본부의 유대인 담당부서에서 일했다. SS 내에서 꾸준히 승진했으며 오스트리아 합병(1938. 3) 뒤에는 유대인을 추방하는 임무를 띠고 빈으로 파견되었다. 1년 뒤 같은 사명을 안고 프라하로 갔다.
1939년 히믈러가 국가안전국(Reichssicherheitshauptamt/RSHA)을 창설했을 때 베를린에 있는 유대인 담당부서로 전보되었다. 1942년 1월 베를린 근처 반제에서 나치 고위관리들이 모여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에 필요한 계획과 병참업무 준비에 관한 회의를 열었다. 아이히만은 이 문제의 책임을 맡음으로써 사실상 대량학살을 뜻하는 이 '마지막 해결책'의 집행자가 되었다. 그는 유대인을 식별하고 집결시켜 그들을 집단수용소로 보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홀로코스트).
전쟁 뒤 아이히만은 미군에 붙잡혔으나 1946년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중동지역을 전전하다가 1958년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나치 전범 추적자 지몬 비젠탈과 이스라엘 '자원봉사' 단체에 의해 정체가 드러나 1960년 5월 11일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에서 체포되어 9일 뒤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이송되었다. 이러한 조치가 아르헨티나 법을 위반했다는 여론이 진정된 뒤,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의 특별 3심 법정에서 재판을 열었다. 1961년 4월 11일에서 12월 15일까지 계속된 이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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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의 비극-아무 생각 없는 삶의 비극]


아이히만은 독일 나치스 친위대 장교 출신입니다. 그에 의해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된 유대인 수는 약 600 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는 독일 패망 후 아르헨티나에 가족과 함께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숨어 지내다, 1960년 5월 이스라엘 비밀경찰에게 발각, 강제 연행되어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 받아 결국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런 아이히만이 재판에 섰을 때 세계 언론은 '인간의 얼굴을 한 악마'를 보기 위해 취재 열풍이 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열풍은 단 2 주만에 식어 버립니다. 그것은 아이히만이, '너무나 평범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이히만이 성 격파탄자나 정신 이상자일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을 학살한 친위대 장교이면서도, 그는 유대인 여자를 정부(情婦)로 두었습니다. 그는 나치의 정강(政綱)도 몰랐고, 히틀러의 '나의 투쟁'도 읽어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친위대도 그저 친구의 권유에 등 떠밀려 들어간 것이라 합니다. 그를 추적, 관찰한 현대의 유명 철학자 하이데거의 제자 아렌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지극히 가정적인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 그래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일상 생활에서 아주 근면했고 무능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다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가 엄청난 범죄자가 된 것은 순전히 성찰의 부재(thoughtlessness)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비극을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에서 찾았고, 그런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악'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기에 아무 생각 없이 명령을 따랐고, 아무 생각 없이 살기에 함부로 그렇게 엄청난 비극을 초래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분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떠들고 아무 생각 없이 말하고 아무 생각 없이 함부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요즘 흔히 일어나는 성폭행, 사기 등의 온갖 비극이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사 는 우리들에 의해 일어납니다.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결코 할 수 없을 그런 일들을, 아무 생각이 없기에, 그저 내 욕심, 내 삶만 바라보기에 아무 생각 없이 범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히 보는 무심코 버리는 담배 꽁초, 무심코 빼무는 담배 연기, 전철 간에서 흔히 보는 주위를 생각하지 않는 요즘 젊은이들의 짙은 애정 표현도 그런 아무 생각 없는 삶의 한 단면입니다.


더구나 인터넷이나 언론이 특정 목적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부추기고 세뇌시키면 사람들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아무 생각' 없어집니다. 옳다고 하는 일에 옳음에, 그르다고 하는  일엔 그름에 취해, 그리하여 쉽게 분노하고 흥분하여 앞뒤 좌우를 가리지 않고 마녀 사냥을 하며 온 세상을 흔들어 놓습니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도 모르고, 부추기고 세뇌하는 세력들에 의해 마치 스탈린의 '쓸모 있는 바보들'처럼,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이 짜 놓은 각본대로 흘러갑니다.

 

아무리 이성을 찾아라, 편견을 갖지 말고 세상을 똑바로 보라, 한 면만 보지 말고 사물의 양면(中道)을 모두 보라, 제대로 알고 말하라 고 일러 드려도, 그렇게 시작된 아무 생각 없는 아우성, 행동은 도무지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비극은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만 갑니다.


당신들은 아무 생각 없는 것이 아니노라 강변하시겠지만, 그래서 당신도 이성이 있고 나름대로 당신의 길을 간다고 하시겠지만, 죄송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정말 '아무 생각 없는 분들'입니다. 다만 교묘한 방법으로 세뇌되어 세뇌 되신지도 모 른 채 '남 따라 장에 간다'는 속담처럼, 분노에 사로 잡혀 머리끝까지 원통함과 증오로 차 올라 아무 생각 없이 남이 짜 놓은 각본대로 가실 뿐인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 중의 하나가, 그렇게 광란의 분노를 내뱉은 분들이 나중에 사물의 진실을 알고 말씀하는 한 마디가 단지 '그 때는 그게 사실인 줄 알았다!'며 자신에겐 아무 책임도 없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일입니다. 고작해야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더할 뿐, 그 분들에게 더 이상의 잘못은 자신에겐 없습니다.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다른 분을 비통에 빠뜨렸는지,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다른 분들의 삶을 방해했는지에 대한 일말의 반성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보는 우리나라는, 이렇게 온통 아무 생각 없는 분들의 생각 없는 삶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 삶의 성찰보다 그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일색의 삶이 있을 뿐입니다. 비정상적일 정도의 성형 중독, 비쌀수록 잘 팔리는 상품들, 그저 즐기고 자극적인 내용의 TV 드라마들, 난무하는 악플들... 이런 어처구니 없는 모습도 그런 아무 생각 없는 우리 모습의 반영이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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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한국에서는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사상가다. 그의 지적 계보를 잇는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의사소통행위 이론'으로 1980년대에 널리 알려진 데 반해, 아렌트는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그의 저작이 번역되기 시작했다. 아렌트의 사상에 알게 모르게 기대고 있는 '시민의 정치참여'가 이 땅에서 대중적 슬로건이 된 것을 감안하면, 그를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걸렸다고 해야 할 정도다. 그 뒤늦음을 만회하려는 듯 그의 주요 저작이 속속 우리말로 옮겨지고 있고, 탄생 100돌을 맞아 지난 달에는 아렌트 학술 심포지엄이 열리기도 했다.

그의 저작 가운데 가장 최근에 번역된 것이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 (김선욱 옮김, 한길사 펴냄)이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은 난이도 높은 그의 사상서 중에서 유일하게 대중적 저작이다. 1961~1962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시대 유대인 학살 실무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의 재판 과정을 이야기체로 풀어 쓴 것이 이 책이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은 아렌트에게 대중적 명성을 안겨 주었고 동시에 그를 엄청난 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 저작은 책의 대중적 성격과는 상관없이 아렌트 정치철학의 핵심 주제를 포괄하고 있어 그의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용이한 통로를 제공한다.

감정 앞세우지 않은 이야기체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의 원고는 애초에 잡지 < 뉴요커 > 에 연재한 기사였다. 1960년 5월 아르헨티나에 숨어 지내던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체포돼 예루살렘으로 압송되자 아렌트는 대학 강의를 중단하고 < 뉴요커 > 특파원 자격으로 그의 재판을 취재했다. < 뉴요커 > 는 지식인들, 특히 교육 받은 뉴욕 사람들을 주요 독자층으로 삼은 대중 잡지였다. 독일 출신으로 나치 박해를 피해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이라는 아렌트의 '신분'이 유대인 학살자 아이히만 재판의 현장 취재 기자라는 '신분'과 만나는 것만으로도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렌트의 글은 연재되자마자 유대계 사회의 거친 분노에 휩싸였다. 아렌트가 홀로코스트라는 참극의 희생자인 유대인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고 있으며, 마치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라는 듯 국외자처럼 사건을 대하고 있다는 것이 분노의 이유였다. 실제로 글 안에서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에 유대인 사회가 어떻게 협력했는지 밝혔을 뿐만 아니라, 그 야만의 집행자 아이히만을 묘사할 때도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그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홀로코스트 범죄의 책임자라기보다는 희생자에 가까운 사람으로 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히만은 '유대인 절멸'을 기획하고 교사한 사람들, 곧 히틀러를 정점으로 한 나치 지도부의 명령을 받은 처지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나치당의 강령도 알지 못했고 히틀러의 < 나의 투쟁 > 도 읽지 않았다. 그의 직급은 나치 친위대의 중간관리자(중령급)에 지나지 않았다. 히틀러는 그를 대면할 기회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며, 설령 대면했다 해도 아이히만의 이름은커녕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법을 준수하는 '건실한 시민'이었던 아이히만은 명령받은 일을 이행하는 것을 의무라고 느꼈고, 유대인 전문가로서 그들을 수용소에 배분하는 일을 착실히 수행했다.

'양심'의 문제가 여기서 불거졌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범죄를 저지른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며, 그의 양심은 상부의 명령을 정확히 행동에 옮기라고 요구했다. 그는 피고석에서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아렌트는 양심이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여건에 제약되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상주의적 열정도 한몫

이상주의적 열정도 아이히만의 정신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는 유대인 독립국가 건설 운동인 시온주의에 열렬히 공감했으며, 그들이 이상주의자라는 점에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의 이상주의는 관념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였고, 그것도 과격한 실천이라는 점에서 독특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이상주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아버지마저도 죽음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경찰 심문에서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나 이상주의자로서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려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이히만은 난데없이 나타난 악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규칙과 명령과 '주어진 이상'에 맞추려고 노력한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이히만이라는 인간형이 이렇게 분석되고 난 뒤, 이 책으로 하여 결정적인 의미를 띄게 된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이히만은 스스로 악인이 되려고 한 적도 없었고, 반듯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하기까지 했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다."

아렌트는 이 '순전한 무사유', 곧 사유하지 않음이야말로 아이히만의 진정한 특성이라고 말한다. 그의 '생각 없음'은 바꿔 말하면,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음'을 뜻한다. 사회적 환경에 제약된 양심을 품고 이상주의로 무장하고서 이 '무사유'를 실천할 때 얼마나 가공할 일이 벌어지는지를 아이히만은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아렌트는 다른 글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의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그의 유일한 특징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이었다."

아렌트는 정치의 영역을 시민들이 저마다 인격을 걸고 의견을 표출하여 경쟁하는 장으로 여겼다. 그 정치 공간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판단하는 훈련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상적인 공론장이다. 그런 정치의 장이 마련되고 강화할 때 아이히만과 같은 사례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아이히만이 평범한 것은 우리가 언제든 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말한다. "우리 안에 아이히만이 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차이와 평등의 정치철학' 한나 아렌트 따라읽기 붐

한나 아렌트 저작의 한국어판은 10년 전인 1996년 처음 얼굴을 내밀었다. 그의 대표작인 < 인간의 조건 > (이진우·태정호 옮김)이 '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의 하나로 출간된 것이다. 1958년에 미국에서 나온 < 인간의 조건 > 은 아렌트를 정치철학자로서 우뚝 세운 저작이다. 아렌트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사상가로 평가받는 데 이 책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그의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실존주의를 재해석해 자신의 정치철학의 밑돌로 삼았다. 그는 인간에게 부여된 실존적 조건을 '복수성' 혹은 '다양성'에서 찾았다. 인간은 서로 다른 차이의 존재이며 따라서 인간들의 삶은 전체로 볼 때 언제나 복수일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차이는 인간이라는 보편성의 지평 위에 놓여 있다. 그것을 아렌트는 평등이라고 불렀다. 다름이 없다면 인간은 교류하고 소통할 이유가 없으며, 평등하지 않다면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할 것이다.

< 인간의 조건 > 출간 뒤 2000년대에 들어 '아렌트 르네상스'라 할 만한 현상이 벌어졌다. < 혁명론 > (홍원표 옮김, 한길사 펴냄) < 과거와 미래 사이 > (서유경 옮김, 푸른숲 펴냄)이 잇따라 나왔고, 1971년 저작 < 정신의 삶1-사유 > (홍원표 옮김, 푸른숲 펴냄)과 < 칸트 정치철학 강의 > (김선욱 옮김, 푸른숲 펴냄)도 출간됐다. 아렌트는 애초에 < 정신의 삶 > 을 '사유' '의지' '판단'이라는 칸트의 세 기획에 맞추어 3부작으로 내려고 했는데, 그 중 '정신'편만 완성했다. 유고를 갈무리한 < 칸트 정치철학 강의 > 는 이 기획의 '판단' 편에 해당한다.

'의지'편은 현재 번역중이며 또 아렌트에게 학자로서 첫 명성을 안겨준 1951년 저작 < 전체주의의 기원 > 도 한국어판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이밖에 < 정치의 약속 > < 공화국의 위기 > 등이 푸른숲에서 나올 예정이다. 이들이 빛을 보면 한나 아렌트 르네상스의 명실상부한 실체를 갖추게 되는 셈이다. 김선욱 숭실대 교수가 쓴 < 정치와 진리 > (책세상 펴냄) < 한나 아렌트 정치판단이론 > (푸른숲 펴냄)은 국내 아렌트 전공자가 쓴 아렌트 해설서로서 아렌트 사상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 노릇을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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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학살범 아이히만, 아르헨티나에서 덜미 잡히다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이 예루살렘의 법정 피고석에 앉아 있다. 아데나워 총리 시절(1949~63)의 독일인은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었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았고, 교사들은 그 주제를 피했다. 그들은 아이히만 재판을 계기로 잊으려 애썼던 과거와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

 

[그때 오늘]

 

1960년 5월 11일 저녁 6시30분, 아돌프 아이히만은 늘 하던 대로 버스를 타고 일터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세 사람이 나타나 그를 승용차에 싣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의 한 주택으로 데려갔다. 아이히만은 이스라엘에서 온 ‘전문가들’임을 즉각 알아챘다. 어떠한 폭력도 사용되지 않았다.

1942년 1월 나치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을 수립했고, 아이히만은 그 책임자로서 유대인 집단 학살을 주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군에 체포됐다 1946년 탈출한 그는 이후 몇 년 동안 중동지역을 전전하다 1958년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나치 전범 추적 단체에 의해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에서 체포돼 9일 뒤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이송됐다.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열었다. 1961년 4월부터 12월까지 계속된 이 재판에서 그는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946년 11월의 여론조사에서 독일인 중 33%는 유대인이 아리아인과 동일한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12년간 나치 지배를 받고 난 직후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생각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6년 뒤인 1952년의 조사 결과다. 수치가 더 늘어나 37%가 독일 영토에 유대인이 없는 것이 독일에 더 낫다고 밝혔다. 그들은 세계가 자신들을 어떻게 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피점령국 사람들의 고통보다는, 자신들이 겪었던 전후의 식량·주택 부족 등에 주목하면서 스스로를 ‘희생자’로 간주했다. 1951년 바이에른주 판·검사의 94%, 재무부 직원의 77%가 나치 전력자였다.

전범 아이히만 재판은 독일이 ‘과거’에 관심을 갖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재판과정에서 홀로코스트(대학살)의 실상이 낱낱이 조사되었기에 학살의 참상을 수백만 명에게 교육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 결과 히틀러를 위대한 정치가라고 믿는 서독인의 비율은 1955년 48%에서 1967년 32%로 하락했다. 갈 길은 아직도 남았다. 진정한 변화는 그 후 10여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1970년 브란트 총리는 바르샤바의 나치 희생자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었고,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이 살해되었다.

1979년 독일 텔레비전은 메릴 스트리프 주연의 4부작 미니시리즈 ‘홀로코스트’를 방영했다. 그제야 비로소 유대인의 고통은 독일 국민의 공공 의제가 되었다.

하지만 ‘집단적 기억상실’ 덕분에 나치 잔당에 의해 전후 독일의 놀라운 ‘경제 회복’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정의’와 ‘경제’는 양립할 수 없는 걸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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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아이히만은 칸트 철학을 어떻게 독해했나?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제8장 법을 준수하는 시민의 의무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몬 살인마, 아돌프 아이히만이, 재판과정에서 칸트 철학과 그의 정언명령에 대해 읽은 적이 있고, 그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는 점이다.

 

학살자의 심리와 독일이성철학이 결합되는 방식과, 독자와 철학자의 책이 오독되는 방식 그리고 그의 오독이 그를 흔들리지 않는 학살자로, 그리고 결국 그를 사형대 위에서 사라지게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의 난독증 에 대한 이야기… ^ ^

 

아렌트의 기록에 따르면, 재판과정에서 아이히만은 칸트의 정언명령에 대한 거의 완벽한 정의를 내렸다고 한다.

 

아이히만 ,“칸트에 대해 언급하면서 제가 말하려 한 것은, 나의 의지의 원칙이 항상 일반적 법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계속되는 질의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읽었노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가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을 추진하라는 명령을 받은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칸트의 원리를 따르지 않았으며, 자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아렌트는 그의 고백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 아이히만은 그가 살던 나치 제3제국치하에서, 즉 국가가 범죄를 합법화한 시대에서, 칸트의 정언명령이 더 이상 적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이고, 이 같은 판단은 칸트철학에 대한 오독이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가령 나치의 법률가 한스 프랑크가 제3제국의 정언명령에 대해, “만일 총통이 당신의 행위를 알았을 때, 총통께서 승인할만한 방식으로 행위하라고 정의한 바 있다.

 

하지만, 아렌트에 따르면, 칸트는 이런 식으로 주장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 칸트적 정신이란, 인간은 법에 대한 복종 이상을 행해야 한다는 것, 단순한 복종을 넘어, 법의 배후에 있는 원리와 자신의 의지를 일치시켜야 한다는 요구에 다름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 철학에서 그 원천은 바로 실천이성이었다. 결국 칸트에게는 모든 사람이 행위를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입법자이며, 인간이 자신의 실천이성을 사용하여, 법의 원칙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 원칙들을 발견해야만 하는 것이며, 결국, 인간에게는 법에 대한 복종이상의 것이 요구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유대인 문제를 최종해결을 수행하면서, 아이히만을 사로잡은 것은 실천이성이 아닌, 총통의 이성이었다.

 

아이히만의 내면에서는, 유대인 문제를 최종해결하라는 히틀러의 이성을 실천하기 위한 철저함이 보인다. 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문제에 관한 불편한 진실이 있다면, 아이히만이, 종전 무렵 하인리히 힘러를 위시한 다수 친위대들이 유대인 문제에 대한 타협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그가 끝까지 철저하게 견지한 비타협성이고,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 그의 광신이 아니라, 그의 양심이라는 점이다.

 

종전이 가까워오고, 나치의 패배가 명약관화해 지면서, 친위대 내부에서는 그 수장 힘러를 위시해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온건파들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연합군 과 유대인들과의 모종의 협상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힘러와 그 부하 온건파들의 타협시도에 대해, 아이히만은 완강히 저항했다. , 총통 히틀러의 의지와 힘러의 의지가 충돌한 경우, 아이히만의 선택은 항상 히틀러의 유대인문제 최종해결 명령이라는 의지였음은 한치의 의심도 없었던 것이고, 협상을 모색한 친위대 온건파들의 관점을 그는 부패라 간주했다. 이 과정에서 만약 아이히만이 어떤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면, 그것은 유대인 대학살을 명령한 그의 최고 상관인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라는 것이 바로 아이히만의 양심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치시대의 양심은 다음과 같은 역설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문명화된 나라에서 살인과 관계된 양심이란, “살인하지 말라라면, 히틀러의 독일 제3제국 시절의 법이란, 비록 살인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상적인 욕구와 성향에 반한다는 것을 유대인 대학살의 조직가들이 아주 잘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히틀러식 양심의 소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너는 살인할 지어다라고 속삭였던 것이다.

 

아이히만의 칸트 읽기와 그 오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은, 인간은 법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상의 판단,실천을 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치의 전범재판 중 하나였던, <뉘른베르크 재판>의 판례에 따르면, 비록 상관 혹은 국가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인륜범죄라면, 명령을 단순히 수행한 자에게도 법적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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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chmann in Jerusalem - Hannah Arendt


이 책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유대인을 학살한 죄인에 대한 재판을 다룬 책임에도 불구하고 시온주의(유대인 민족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는 점만 해도 이 책의 흥미진진함을 느낄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히만 재판은 그가 나치독일치하에서 유대인 관련업무만을 맡았던 공무원이기에 나치독일의 여러 민족에 대한 범죄로 기소된 뉘른베르크 재판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재판이 열리게 된 과정부터 독특했는데, 이스라엘은 아이히만이 살고있는 아르헨티나에서 국제법을 어기며 납치해왔으며 국제재판소를 여는게 더 적절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 열렸다는 점입니다. 이것에 대해 아이히만 당사자에 대한 재판이 아닌 반유대주의에 대한 재판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로인해 예루살렘 재판은 여러 문제점을 야기했다고 지적하는데, 피고를 위한 증인을 허용하지 않은 점 뿐만 아니라 잘못을 행하려는 의도가 범죄를 구성하는데 필수적이라는 가정을 했다는 점입니다.

이 책은 아이히만의 성장과정을 따라갑니다. 평범한 학생이 성장해 결혼을 하고, 감압정유회사에 취직하고 나치당에 가입했고 친위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당의 정강도 알지 못했고 '나의 투쟁' 도 읽지 않았습니다. 젊은 변호사 칼텐브루너의 "친위대 가입해보면 어때?" 라는 질문에 "그렇게 하지 뭐" 정도의 신념으로 가입했던 것입니다. 그가 유대인 문제 전문가로 성장하며 맡았던 것은 나치당의 유대인 해결책과 동일했습니다. 추방, 수용, 학살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정책이 변화할때마다 그는 맡은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아이히만이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를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마치 본디오 빌라도가 된 심정이였다고 말합니다. 유대인은 예수를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몰아 빌라도에게 고발했고,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했지만 유대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십자가형에 처한뒤 손을 물로 씻으면서 자신의 죄가 없다고 말한 바로 그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추방 및 수용은 몰라도 최종해결책, 즉 학살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결국 자신의 양심을 무마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 방법이란 학살에 반대한 사람을 단 한명도 볼수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입니다.

나치가 유대인을 그토록 많이 학살하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들 중 하나는 바로 유대인 지도자들입니다. 유대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독일은 그 짧은 시기에 유대인을 그렇게 대량으로 학살할수 없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나치는 유대인을 추방,이송하는데 있어서 유대인 공동체를 이용했는데, 명단을 작성하고 돈을 인수하고 기차에 태울수 있게 경찰력을 제공하는 등 유대인 중앙위원회는 유대인처리에 있어서 절대적 권리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비밀을 맹세했고, 자기 민족을 파멸로 이끄는 새로운 권력에 취해 홀로코스트를 이룩함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합니다. 간혹 유대인을 구한 경우도 있었는데 헝가리에서 카스트너 박사는 47만 6000명의 희생자를 내고 1684명을 구출했습니다. 이러한 저명한 유대인은 전쟁중에도 학살당하지 않았고 그들을 위해 덜 저명한 유대인은 항상 희생되었습니다. 히틀러는 340명의 일등급 유대인에게 독일인의 지위를 부여했고 수천명의 반쪽 유대인은 모든 제약을 면제받았습니다. 심지어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을 학살한 의사들은 유대인 부대도 있었습니다.

유대인 위원회가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큰 영향력을 끼친 증거로 나치독일 점령국에서의 유대인 학살과정을 들수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간의 문제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반응에 따라 유대인학살수치에 큰 영향을 가져옴을 알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무국적 유대인을 희생시키는데 있어서 오히려 프랑스 비시정부가 자발적으로 앞장섰으나 프랑스계 유대인을 포함시키려 하자 격렬하게 저항한 결과 25만명의 유대인이 살아남을수 있게 되었습니다. 벨기에의 경우 더 비협조적이였지만 나라가 작다보니 숨기가 어려워 피해가 좀 있었습니다. 덴마크의 경우 독일의 반유대정책에 대해 대놓고 반대했고 무국적자마저 덴마크 정부가 보호해줬을뿐만 아니라 돈없는 유대인을 위해 덴마크시민들이 탈출비를 제공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완강한 저항을 보게 되자 정작 덴마크에 파견된 독일당국마저 베를린의 명령에 대해 거부심을 표하게 됩니다. 불가리아의 경우 더욱 완강한 정책으로 불가리아 유대인은 이송되거나 자연사가 아닌 죽임을 당한 사람은 한명도 없게 됩니다. 그런 반면 루마니아의 경우 독일보다 더 극렬한 반유대정책으로 유대인학살의 원조격인 친위대마저 루마니아인들의 학살에 공포심을 느꼈으며 유대인을 구하기위해 개입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독일의 도움 없이도 독일 친위대가 도착하기 전에 벌써 30만명을 학살했습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였습니다. 그의 친척중에도 유대인의 피를 잇는 사람이 있었고, 교양있는 유대인 지도자들과 친분을 나눴으며 자신이 맡은 유대인학살소(테레지엔슈타트)의 학살과정을 보고 경악했으며 그의 희망은 유대인의 발아래 확고한 땅을 두려는 것이였습니다. 그것은 그의 니스코 모험이나 마다가스카르 계획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최종 해결책이 다가옴에 따라 취소되었고 그는 변경된 정책을 따랐습니다.

이스라엘 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판결문에서 그는 15개의 기소 항목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그것은 유대인의 대량학살 및 폴란드인, 슬로베니아인 추방죄와 집시추방죄를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집시의 학살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판결문에서 살상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대통령은 아이히만의 사면 청원서와 미국랍비중앙회, 미국개혁주의 유대교대표단 등에서 보내온 호소편지문을 모두 물리쳤고 몇시간뒤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쳐해졌습니다.

아이히만은 사악한 동기에서 행동하지 않았고, 누구를 죽일 어떤 의도도 없었으며, 유대인을 증오하지도 않았지만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으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그를 통해 그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사고의 무능력함을 지적했고, 그가 행한 모든 일은 그가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서 인식한 만큼 행동한 것이었다. 그는 경찰과 법정에서 계속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의무를 준수했지만 그 법과 조국, 숭고한 명령에 대해 사고하지 못했음을 지적했고, 설령 대량학살의 조직체에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을 지지했고 인류 구성원 중 어느 누구도 아이히만과 이 지구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할수 없기 때문에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아주 평범하게도, 밀그램의 실험에서 버튼을 누른 대다수의 사람에 불과했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평범한 아버지였고, 평범한 공무원이였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누구라도 그처럼 될수 있는 평범한 악 이였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책이 예루살렘 재판의 성공여부(헌법재판소로서 정의를 부여하는 행위)만을 다루고 있다고 글을 마무리하지만, 역사속에서 유대인학살을 최소화할수있었던 좋은 예들(덴마크나 불가리아의 유대인정책 등)을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알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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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아이히만에 면죄부 준 용산 판결 / 조영관 한겨레

지난달 28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에서 열린 용산참사 재판에서 형사합의27부는 특수공무방해치사상 등의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 9명에게 최고 징역 6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용산참사의 모든 책임은 농성했던 철거민에게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에 책임이 있는 나치의 고위 장교들 중 한 사람으로, 자신은 승진을 위해 특별히 근면했던 것을 제외하고 아무런 악의적 동기가 없었고, 스스로를 ‘오류의 희생자’라 주장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통해 ‘악’이라는 것이 ‘일상적’으로 저질러질 수 있는 ‘단순한’ 것이며, 그러한 행위의 본질은 악을 행하는 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하게 하는 ‘무사유성’이라고 보았다.

이번 사법부의 판결은 한국판 아이히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정치적 판결이다. 용산참사는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세입자들이 생존권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자, 정부가 공권력으로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행위가 ‘정상’이라고 믿으며 작전을 수행했고, 결국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경찰이 목숨을 잃었다. 용산참사에 책임을 지고 있는 수많은 한국판 아이히만들은 이번 판결을 통해 자신의 행위의 결과반성기회거부당했다. 합리적 해결을 바라는 수많은 시민들은 또다시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좌절감을 느끼며, 복종을 강요당했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자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던 구청 공무원, 경찰, 소방관, 용역업체 직원들은 사회 상층부의 행위양식에 또다시 적응해야 했다. 권력에 대한 ‘복종’이 만들어낸 행위의 무사유성은 더 거대한 폭력을 불러올 수 있다.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다는 ‘악의 평범성’은 용산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너무 쉽게 마주할 수 있는 비극이다.

조영관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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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만

생각/인물 2010. 9. 3. 03:39



유영만 대학 교수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 1963년 충북 음성 출생. 한양대 교육공학과 졸업.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에서 교육공학 박사학위 취득. 삼성인력개발원과 안동대를 거침. 60권에 가까운 책을 쓰거나 번역하면서 지식생태학자·교육공학자·자기개발 전문가로 이름을 알려왔다. 농담처럼 ‘들이대학교 저질러학과 뒷수습전공’이라는 말을 하지만, 삶을 꾸준히 개척해 온 학자다. 그 개척의 과정에는 공고 졸업 후 용접공으로 일할 때 처음 참모습을 알게 된 책이 함께했다. 



유영만 교수의 블로그




‘청춘(靑春)’을 생각하면 ‘푸름’과 ‘봄’이 떠오른다. 나뭇잎이 가장 싱그러운 때를 뜻하는 것이 푸름이요, 사계절에서 가장 먼저 오는 계절은 봄이다. 그만큼 활력도, 의욕도 넘치는 시기이다. 하지만 요즘 한국의 청춘들은 그렇지 못하다. 무언가에 억눌려 있고, 고민에 짓눌려 활력이 사라진 상태이다.

그런 청춘들에게 활력과 의욕을 넣어주고자, 한 지식생태학자가 나섰다. 한양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유영만 교수. 그는 지식생태학자로 자신의 책 <
청춘 경영>을 통해 주눅이 들어 있는 학생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이 이야기하는 ‘청춘 경영’은 과연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청춘 시절을 활력 있고 의욕적으로 보낼 수 있을까?






유영만 작가는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 교수로 ‘지식생태학자’로 불리고 있다. 생소한 학문인 ‘지식생태학’은 과연 무엇일까? 

지식생태학은 현재 기업에서 하는 ‘지식경영’에 대해 ‘과연 지식이라는 것이 경영의 대상일까?’라는 의문에서 시작한다. ’지식경영’은 지식관리 시스템을 만들어 사람들의 지식을 저장한 후, 사람들이 없어도 언제나 지식을 꺼내어 쓸 수 있도록 지식을 데이터베이스화 한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에 대해 저자는 ‘지식을 사람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라는 입장이다. 

“사람이 없어도 그 사람의 지식을 남겨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사람이 회사에서 퇴근하면 (그 사람의)노하우나 지식도 함께 퇴근합니다. 예를 들어 김치를 잘 담그는 사람이 그 노하우를 매뉴얼로 제작하여 배포해도 그 원래의 맛이 살아나지 못합니다. 매뉴얼이 아니고 그 사람을 만나 직접 배워야 그 솜씨를 배우죠. 지식생태학은 지식을 나눔에 있어 시스템이나 기술에 신경 쓰는 것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만남 속에 어떤 조건과 문화를 만들면 지식을 서로 나누는 역동적인 현상이 만들 수 있는지, 인위적인 것이 아닌, 재미있고 즐거운 일터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이 지식생태학이죠.”




지금은 지식생태학자로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작가이지만, 그가 과거에 용접을 전공한 공업고등학교 출신이라는 것은 쉽사리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난 저자는 공업고등학교에서 용접을 전공하여 졸업 후에는 한국전력에 입사하여 사회인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았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왠지 모를 허전함에 방황을 했다고 한다. 

“하루 하루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뭐랄까 피 끓는 젊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할까요. 목적 없는 방황 탓에 술로서 마음을 달래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방황을 하며 보내던 어느 날, 작가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책! 

여느 때와 같이 술집에 가려던 작가가 우연히 서점에서 보았던 고시체험수기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공업고등학교 출신으로 사법고시를 합격한 이의 수기를 보고 난 작가는, 이를 계기로 방황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한다. 이후 술을 끊고 사법고시를 합격하겠다는 마음으로 대학입시 공부를 시작했고, 마침내 대학에 합격하게 되었다.

대학을 다니며 작가가 가진 책에 대한 애정은 더욱 커졌다고 한다. 사법고시 합격의 목적과 장학금을 위해 했던 공부는, 작가의 지적 욕구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공 서적 이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책을 찾아가며 읽었으며, 나중에는 책을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고 한다. 이에 글을 잘 쓰기 위해 책을 더욱 많이 읽었고, 하루에 A4 1장씩 글을 쓰자는 철칙도 정했다고 한다.

“필요에 의해서 했던 공부가 이제는 지적 욕구를 자극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한 것이 내가 책을 통해 영향을 받은 것처럼, 내 책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주고 싶었습니다. 평소에 글을 쓰지 않아 펜이 잘 잡히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더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A4 한 장씩 글을 쓰는 연습도 했죠.”

이렇듯 열심히 노력한 작가는 비록 사법고시를 보진 못했지만, 한국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친 후 해외유학까지 다녀와 교육공학자가 되었다. 해외유학 후 유명 대기업에서 잠깐 일하기도 했지만 그는 몇 년이 지나고 과감히 퇴사를 감행, 대학강단에 서게 된다. 스승에게 한 약속, 강단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는 약속을 잊지 않고 지킨 것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걱정이 생겼다고 한다. 수업이나 혹은 상담하면서 만난 학생들을 보면 방황하는 청춘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것이다.

“눈에 초점을 읽은 학생을 많습니다. 몇 년 동안 입시에 치여 살다가 대학에 와서 갑자기 자유를 얻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죠.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할 지도 모르고, 목적의식도 없는 학생들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게다가 현실적인 걱정도 많죠. 너무 일찍부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듯 방황하는 청춘들에게 작가는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경험을 바탕으로 한 내용으로 책을 써서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었다. 온실 속에서 자라 약한 그들에게 거칠고 강하게 자란 잡초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이야기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젊은 시절에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지금 청춘들이 겪는 시련이 당연하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요즘 청춘들은 빠르고 쉬운 길만 찾는 것 같습니다. 역경 속에 경력이 생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빛나는 경력은 부딪치는 역경 속에서 생겨나는 법이죠. 큰 비행기가 높이 오래 날아가려면 긴 활주로가 필요하듯 청춘 시절에 겪는 시련은 높이 날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그리고 작가는 청춘들이 많은 고민보다 몸으로 부딪히고 실행에 옮겼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요즘 학생들은 무언가 실행에 옮기기 전에 고민을 너무 많이 해서, 오히려 고민이 고민을 만들어 아무것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에 작가는 몸으로 부딪히며 여러 가지 실패를 경험해보라 충고한다. 수많은 도전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생각에 근거한 행동이 바꾸는 겁니다. 너무 생각만 많이 하지 말고 도전하고 행동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청춘이란 시기는 자신이 잘할 수 있고, 신나게 할 수 있는 것을 탐색하고 찾는 시기입니다. 그 탐색과 실험 속에서 방황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또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돼지는 45도 이상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매일 땅만 보며 살죠. 그런 돼지가 하늘을 보려면 뒤로 넘어져야 합니다. 사람도 실패하고 넘어지다 보면 또 다른 세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실패는 넘어져서 일어나길 거부하고 포기했을 때죠. 여러 가지 도전과 실패가 반복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인생의 지혜를 만들어 나가는 배움의 과정입니다.”

유영만 작가는 꿈에 대한 이야기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그는 ‘꿈은 꿔오는(빌려오는) 것’이란 신영복 교수의 말을 빌려 자신의 꿈이 어디 있는지, 그래서 어디서 어떻게 꿔올 것인지 알아보라 했다. 그리고 그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낮에도 꿈을 꾸고, 함께 그 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사람을 찾으라고 했다.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식을 공유하고 발전해야 한다’고 말하는 작가에게 딱 맞는 말이었다. 




지금까지의 그의 저서는
  • 등.. 여러저서가 있다.. 그리고 '청춘경영'도 있다




    공부선수보다 전문인으로 키우자!


    이러한 시대변화에 부응하여 점차 우리 사회도 학력(學歷)보다는 학력(學力)과 실력(實力)이 중요한 경쟁력의 원천으로 등장할 것이다. 따라서 부모들은 자녀가 할 수 있는 분야, 하고 싶은 분야에 힘과 노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개성을 찾아주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전과목을 다 잘하는 공부선수를 기르기보다,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인접분야에 대한 폭 넓은 안목을 지닌 사람들을 길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전문가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인성을 겸비하고 있는 사람이다. 특정 분야의 지식과 기술만 알고 남과 함께 더불어서 살아가는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다면 극단적 이기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내 자식을 공부 잘 하는 공부선수로 양성하는 데 급급하지 말고, 왜 이런 공부를 해야 되며, 그런 공부가 나의 미래 삶에 어떤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어려서부터 일상생활과 관련지어 가르쳐 줄 필요가 있다. 이러한 가르침의 과정에서 ‘인간(人間)’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사회는 어떤 형태로든 변할 것이다. 그리고 첨단 테크놀로지가 사회변화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면서 자라나는 세대들의 가치관과 인생관도 많은 부분 바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거시적인 사회변화의 물결이 밀려오고 많은 것이 변화해도, 여전히 소중하게 간직해야 가치가 있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인간적 접촉을 더욱 중시해야 할 것이며, 그러한 인간적 만남을 통해서 서로 나누고 함께 가는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의 작은 것도 나름대로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자연과 벗삼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 자녀들에게 부여해야 한다.


    각박해지는 삶, 경쟁이 치열해지는 삶일수록 학부모들은 자녀들과 함께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적 삶을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인지를 생각해 보고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첨단의 유행도 좋지만, 그러한 첨단의 유행을 가능케 했던 역사의 뒤안길을 탐색해 보면서 과거의 유산이 어떻게 오늘날의 사회발전과 미래의 디딤돌이 되는지 탐구하는 기회도 가져보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녀들이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분야를 선택해서 그 분야의 전문성을 쌓아 나가면서 소박한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가르치고, 또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학부모들이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부모의 생각과 교육관이 변할 때 비로소 우리 교육이 바로 서게 되지 않을까?



    부모들이여 변화에 주목하라!


    이제 학부모들은 사회변화의 움직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날로그 사회가 디지털 사회로 탈바꿈하면서 폐쇄적 연줄 공동체가 개방적 관심 공동체로 바뀌고 있음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아날로그 세대는 주로 정(情)과 연(緣)에 근거한 폐쇄적 가족집단주의를 근간으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각종 연대망을 구축했다. 여기에는 인간적인 정과 혈연, 지연, 학연이 얽혀 있다.


    그러나 디지털 네트워크상의 개방공간에서는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연줄망에 입각해 있는 기존 제도권에 대한 다양한 도전이 이루어진다. 명령과 통제에 대한 순종과 복종, 타협과 아부를 뛰어넘어 기존의 권위와 지위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것이다.


    아날로그 세대는 철지난 정보까지 자기와 폐쇄적 연줄을 맺고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공유했다. 하지만 개방적 네트워크 공간에서는 정보의 수평적 무한복제가 가능하고 시공을 초월하여 누구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개방성이 보장되어 있다. 그래서 인식과 관심을 같이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무런 연줄 없이도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무한대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아날로그 시대가 정보를 소유하는 것에서 가치를 찾았다면, 디지털 시대에는 정보를 공유하고 남과 다르게 활용하고 가공하는 것에서 그 가치를 찾기 때문이다.


    또한 아날로그시대가 줄 잘 서면 출세하는 ‘앞으로 나란히’의 시대였다면, 21세기 디지털 시대는 ‘옆으로 나란히’의 시대다. 그래서 자기와 수평적 관계망을 무한대로 확산하면서, 자신이 보유하지 못한 전문성은 수평적 관계망을 통해 타인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차력(借力)이 뛰어난 사람을 필요로 한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농업적 근면성을 발휘하여 열심히 일하면 출세하는 소위 ‘개미’형 인간이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 지식정보화 시대는 혈연, 지연, 학연 등의 폐쇄적 공동체를 벗어나, 시공을 초월하여 자신과 관심을 같이하는 사람과 언제, 어디서든지 관계의 줄을 이어가는 ‘거미’형 인간이 출세하는 시대다. 디지털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다양한 전문 영역간의 의사소통과 사귐, 그리고 지속적인 연결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식 정보화 시대에는 또한 개미와 같이 열심히 일하는 농업적 근면성보다는 남들이 보기에는 쉬운 것 같지만, 쉬면서도 끊임없이 머리를 써서 부가가치 있는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지식노동이 필요한 시대다. 산업화, 아날로그 시대의 노동의 개념으로 보면 베짱이가 그늘에서 노래를 부르고 노는 것은 노동이 아니지만, 이를 지식 정보화 시대의 노동개념으로 새롭게 해석하면 엄청난 창조행위, 두뇌노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 민사고 천재들은 하버드가 꿈이 아니다(유영만/한언) 중에서 -


    유영만의 <용기>중에서

     

    용기의 첫 번째 적은 망설임입니다.

    삶에서 가장 파괴적인 말은 '내일'이라고 하지요.

    '내일부터 운동을 시작하겠다.'

    '내일부터 책을 읽겠다.'

    하지만 한 번 미룬 사람은 내일이 오늘이 되면 또 '내일 하겠다.'고 말합니다.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방법은 그냥 실천하는 것입니다


    [박종현 기자의 대중과 소통하는 학자들] <47>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한양대 교수
    학습자를 즐겁게 해 ‘지식의 자연분만’을 이끌어내다

    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부 교수를 만나기 위해 캠퍼스를 찾았다. 3월의 대학가만큼 생기가 넘치는 곳도 많지 않다. 취업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3월의 신입생은 좀체 주눅 들지 않는다. 지식생태학자로 인정받는 유 교수를 만난다는 기대감이 넘쳐서인지, 인터뷰 약속 시간에 비해 한 시간 앞서 대학 정문에 들어섰다.


    ◇교육공학을 전공한 유영만 교수는 학생과 젊은이에게 관심이 많다. 그는 ‘남들보다 잘하는 것’보다는 ‘어제의 나보다 잘하는 게’ 낫다고 여긴다. 그는 “방황과 역경을 거치면 남과는 다른 무늬를 지니게 돼 삶이 훨씬 풍성해진다”며 “보호에서 벗어나 독립성을 확보할 때 주체적인 삶이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이제원 기자
    대학 구내 서점에 들렀다. “모교와 수많은 책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는 유 교수의 육성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독한 가난 때문에 남들보다 중학교를 1년 늦게 입학하고, 장학금이 보장된 공고에 다니고, 대학도 뒤늦게 들어간 그를 키운 게 책이었다고 고백해 왔다. 서점 직원은 학기 초여서 교재가 많이 팔린다고 했다. 딱딱하고 읽기 거북스러운 책들이 좁은 서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토익책을 비롯한 어학용 교재도 다수 눈에 띄었다. 교양서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수업용 대학 교재는 10년 전이나 20년 전과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독서를 강조하지만, 정작 대학 구내에는 읽을 만한 책이 없는 현실을 다시 목격하니 씁쓸했다.

    서점을 둘러 본 뒤에 약속 시간에 연구실을 찾았다. 대학 업무 때문에 총장실을 방문한 그는 아직 부재중이다. 연구실 앞의 복도를 오가며 그와 인터뷰를 준비했다. 그의 저서를 꺼내들고, 질문용으로 적어둔 문장을 살펴봤다. 마침 사진기자가 캠퍼스에 도착했다. 보통 인터뷰 중간에 사진 기자가 합류하는 관행을 고려할 때, 취재 준비 시간이 꽤 길어진 셈이다.

    유 교수와 약속을 잡던 과정이 떠오른다. 일정을 서로 확인하니 인터뷰할 수 있는 날짜가 별로 없었다. 유 교수가 바빠서였다. 여기에다가 신문제작 여건을 고려해 월·화·수요일 오후에만 인터뷰가 가능하다고 조건을 내건 상황이었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관심이 많고, 지독하게도 바쁘게 산다. 그런데 바쁘다는 표시는 크게 하지 않는다. 다른 학자보다도 더 많은 일정을 소화하지만, 각종 저작물 등 내놓는 결과물은 탁월하다. 개인 홈페이지(www.010000.pe.kr)와 블로그를 둘러보면서 이런 평가에 수긍하게 됐다. 그의 인터넷 공간에는 각종 이야기와 사색이 담겨 있다. 그것도 풍부하고 깊게. 깊어야 넓어질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이 글마다 묻어났다. 읽는 글마다 잘 읽혔다. 노련한 글솜씨와 경험을 들려주는 과정이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생각을 할 즈음 6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함께 연구실 문을 열자 조그마한 ‘식물과 책의 정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책과 식물에 대한 예의일까. 연구실에서는 신발을 벗어야 했다. 신발을 벗는 곳 옆에 그가 쓴 책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그간의 역서와 저서가 57종이라고 한다. 삼성인력개발원과 안동대에 재직할 때도 몇 권의 책을 썼지만, 대부분은 2001년 한양대로 옮긴 뒤부터 본격적으로 저술한 책이다.

    바쁜 와중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글을 쓸 수 있었을까. 학교의 보직도 학과장·교수학습개발센터장 등 공식적으로 세 개다. 잘 알려진 학자이다 보니, 각종 모임과 기관의 강연도 빈번한 편이다. “사색하고 기록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밤에 술 약속을 끝내고 힘들 때에도 글을 씁니다. 읽는 것도 마찬가지이고요.”

    세상에 대한 애정과 관심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는 조어인 ‘피치(PITCH)’로 이를 설명한다. ‘피치’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그 무엇’이기도 하지만 영어의 다섯 단어에서 어두 음을 따서 만든 단어이기에 여러 뜻이 담겨 있다. 열정(Passion)·혁신(Innovation)·신뢰(Trust)·도전(Challenge)·행복(Happiness)의 창을 통해서 그는 세상을 바라본다.

    “즐거운 학습·건강한 지식·보람찬 성과·행복한 일터는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요. 이 과정이 제대로 되면 ‘지식 임신’이 가능하고 ‘지식의 자연 분만’이 저절로 이뤄지게 돼요.”

    설명을 듣다 보면, 그가 개념 정리와 구조화, 관계도 창출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것을 알게 된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 많은 그에게 정보를 받아들이는 창은 곳곳에 열려 있다. 그에게 글의 소재와 원료가 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다. 독서와 미디어는 기본이고 동영상과 영화도 수시로 본다. 일련의 활동은 자신의 글을 보다 쉽게 풀이하는 과정에 요긴하다.

    “대학의 개론서는 ‘개소리하는 책’이다”고 과감히 말하는 그에게 책은 독자친화적이어야 한다. 이런 인식은 그의 전공의 성격과도 맥락이 닿아 있다. “교육공학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교육과 기술학이 결합한 학문”이라고 설명한다. 유 교수는 “학습자를 즐겁게 해서 교육 대상에게 필요한 지식을 만들어 내는 데에 핵심을 두고 있다”며 “학습자들이 바로 고객인 셈”이라고 강조한다.

    지식은 자연친화적으로 생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생명체와 생태계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현존하는 생명체는 대부분 수만년의 경쟁을 뚫고 존재하고 있다. 생태계는 이들의 축제의 공간이다. 지식의 생산·유통·소비 흐름에 생태계의 원리를 접목해 온 이유이기도 하다.

    학문은 세상에 도움이 안 돼도 연구해야 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작위적인 학문이 보호돼야 할 이유는 없다는 시각도 있다.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가 학자들이 하는 농담을 풀어놓는다. 파리의 앞다리 연구를 석사·박사·교수·학파 수준에서 설명한다. 이야기를 듣고 한참 웃었다.

    “석사는 파리의 앞다리가 몸통에 미치는 영향을, 박사는 앞다리 발톱의 성분이 몸통에 미치는 영향을, 교수는 앞다리 발톱의 때가 파리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고 하지요. 교수들이 앞다리의 때를 1년 된 것, 까만 것 등으로 나누며 분석할 때 학파가 형성된다고 하며 웃습니다. 하하. 부언하자면, 박사들은 ‘나만 모르는 게 아니고 다 모른다’고 하고, 교수들은 ‘어차피 모르는 것 끝까지 우겨야 한다’고 하지요. 농담이지만 농담만은 아닌 게 우리 현실이어서 안타까울 뿐이지요. …”

    파편적 지식의 발견에 목말라하는 학자군을 에둘러 비판한 말이기도 하지만, 대중에 책임을 지지 않는 문화를 희화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학자나 지식인이 자신들만의 성(城)에서 나와야 한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유 교수의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됐다. 지식인은 물론 지성인이라면 말하기와 글쓰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고민하는 힘과 노력을 바탕으로 표현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이런 인식이 10년 남짓한 기간에 57종의 책을 내놓은 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처럼 그가 생각하는 학자의 사명은 일반 학자의 인식과는 다르다. 이는 그가 이어령·윤석철·정민 교수 등의 저서를 자주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읽는 학자의 글에서는 고민하는 노력과 표현하는 힘이 동시에 느껴진다. “동문이기도 한 정민 교수의 책은 독자로서도 감동을 받는다”는 고백에 진정성이 묻어난다. 정 교수를 설명하는 표현이 뇌리에 남는다. “고전에서 건져 올린 상상력을 풀어놓는 학자. 펄럭이는 물고기처럼 싱싱해서 좋다.”

    “책이 만들어낸 사람”으로 스스로를 평가하는 유 교수. 그에게는 공고를 졸업하고 용접공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서점에서 책을 읽고 있는 이들을 보게 됐다. 행복한 모습을 보고, 주경야독했다. 가난 때문에 ‘까무러칠 정도’로 공부했고, 외국 유학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은사인 김종량 총장을 비롯한 이들의 도움 덕택이었다.

    어려운 과정을 거친 그에게는 꿈이 있다. 장학재단 설립이다. 이를 통해 적어도 한양대의 교육공학을 선택한 모든 학생이 장학금으로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마무리하도록 하고 싶다. 이는 아주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고등학생 때 어머니를 떠나 보낸 후 사회에 진 빚을 갚는 빠른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쑥스럽게 말하는 그를 쳐다보면서 취재기자로서 바람이 생겼다. 그가 꿈을 이뤄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앞으로도 수차례 더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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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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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태어날 당시 동네 사람들은 악마를 쫓는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용모는 대머리처럼 벗겨진 큰 이마에 크고 둥근 얼굴에는. 불거진 듯이 툭 튀어나온 두 눈과 사자코 같이
뭉퉁한 코가 두툼한 입술 위에 자리하고 있었고, 땅딸막한 키에 수박처럼 불룩한 올챙이배는 뒤뚱거리는 오리걸음을 그에게 걷게
하였다. 텁수룩하게 털이 나 있는 가슴과 팔 다리는 튼튼한 체격과 강인한 의지력을 소유하였다는 것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소년 시절에 부친의 직업을 이어받아 조각을 하기도 했으며, 당시 아테네 중류 시민의 자제들처럼 문학과 음악, 체육
등 일반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18세에서 24세까지는 당시의 청년들처럼 군대에 입대하여 복무했으며, 나중에도 여러
차례 종군하여 군 생활을 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인생의 참다운 지혜를 얻기 위해 알카라오스와 아나가고라스에게서 항상 배웠으며
진리 탐구열에 감화를 받았다. 또한 소피스트들에게도 배웠지만, 참다운 지혜를 얻을 수가 없어서 배움을 중단하고는 스스로 궁리하고
탐구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가 얼마나 사색과 탐구를 중시하며 진지한 사색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내용으로 알 수 있다. 종군 중이던 그는 어느
무더운 여름날, 아침부터 한 곳에 넋을 잃고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막사에서 이를 지켜보던 병사들은 밤이 깊어지자 하나둘
잠이 들었는데, 그는 이튿날 아침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꼬박 밤을 새웠다. 그리고는 아침해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그
자리를 떠나 평소처럼 일과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 "음미함이 없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가 40세가 될 무렵에 그의 정열적인 친구이자 제자였던 카이레폰이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으로 가서 아폴로신에게 여쭈어 보았다.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자, 신은 신전의 미녀를 통해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소포클레스는 현명하다. 유리피데스는 더욱 현명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만민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
  그러나, 대단히 기뻐하던 친구에게 이 신탁을 전해들은 소크라테스는 크게 놀랐다. 그것은 그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자 자타가 현명하다고 공인하는 정치가들, 예술가들, 기술자들을 차례로
찾아가서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지혜를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것처럼 자만에 빠져 있었다. 그때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였다.



  "그들은 모른다는 사실을 진짜로 모르고 있다"
  그래서 아폴로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라는
금언을 좌우명으로 삼고 시민들의 부패하고 마비되고 타락한 양심을 일깨우고자 했다. 그 후 그는 70세 때까지 신탁을 통해
자신에게 부과된 사명인 아테네의 쇠파리 노릇을 하며 살았다.


 


  소크라테스는 50대에 결혼을 했고 세 아들이 있었다. 그가 70세로 사형될 당시 큰 아들은 18세였다. 결혼 후에도
그는 시민들을 깨우치는 사명을 위해 무료로 가르치는 일만 했을 뿐 전혀 가사를 돌보지 않고 외면했다. 그래서 더욱 가난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고, 그의 아내 크산티페로부터 심한 푸대접을 받았다.


 


  어떤 이가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사모님의 잔소리를 어떻게 견디어 내십니까?"
  그러자, 그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도 귀에 익으면 괴로울 것이 없지"


  하루는 소크라테스가 부자 손님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예상대로 그의 아내인 크산티페가 투덜거렸다.
  "대접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사람들에게 부끄럽기 짝이 없어요"
  그러자,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염려 말아요. 그들이 이치를 아는 사나이들이라면 그걸 참아 줄 것이고, 만일 시시한 친구들이라면 그런 녀석들에게는 그렇게 신경 쓸 필요조차도 없으니까"


 


  하루는 소크라테스가 집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때 그의 아내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강론을 계속하자, 그녀는 큰소리로 욕을 해대며 그에게 구정물 세례를 퍼부었다. 그런데도 그는 태연스레 말했다.
  "천둥이 친 다음에 소나기가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알키비아데스가 참다 못해 말했다.
  "부인의 잔소리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달래듯이 제자에게 말했다.
  "나는 이젠 완전히 단련이 되어 있지. 우물에서 도르레가 언제나 가랑가랑 소리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야. 자네도 거위가 꽥꽥 우는 건 참아 낼 수 있을 거야"



  그러자, 제자도 지지 않고 말대꾸를 했다.
  "허지만 거위는 알을 낳아 주고 새끼를 까 길러주고..."
  이에 스승도 한마디 했다.
  "크산티페도 아이를 낳아 준다네"


 


  하루는 크산티페가 시장 바닥에서 소크라테스의 옷을 잡아 벗기려 하자, 친구들이 손으로 막아 말리면서
  "왜 그럽니까?" 하고 그녀에게 충고조로 말했다.
  이때 소크라테스가 크산티페를 대신해서 말했다.
  "결단코 그래야만 하겠지! 여러분이 우리가. 싸우는 걸 보고, '소크라테스, 힘을 내라!', '야아, 잘한다, 크산티페!' 하고 응원하기 때문에..."


  어느 날 소크라테스는 한 사람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잔소리쟁이와 함께 사시는 이유가 이유가 뭡니까?"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내가 잔소리쟁이와 함께 사는 건, 기수가 준마를 좋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기수는 그 녀석을 잘 길들이고 나면 그 다음은 누워서 떡먹기거든. 내가 내가 크산티페를 잘 길들이게 되면 내가 제어하지 못할
사람도 없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하고 잘해 나갈 수 있을 거니까".


 


  한 제자가 소크라테스에게 질문했다.
  "선생님!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까,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까?"
  그러자, 그가 답변했다.
  "결혼하게나! 온순한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사나운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테니까!"


  소크라테스의 아들 람프인클레스는 어머니 크산티페를 향해 소리쳤다.
  "어머니의 잔소리는 어느 누구도 참을 수 없을 거예요"
  훗날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디오게네스의 스승)도 그 여인에 대해 한마디 언급한 바 있다.
  "그녀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여자들 가운데서 가장 시끄러운 여자일 것이다"


 


  부자요 명문 출신인 알키비아데스는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 집을 지으라고 넓은 땅을 제공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는 신발이 필요하나 만일 자네가 이것으로 신발을 만드십시오 하고 가죽을 준다고 하여 내가 그걸 받았다면 참으로 이상할 거야"


 


  한번은 그의 제자 카르미데스가 스승의 가난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몇 명의 노예를 헌납하면서 간청했다.
  "제발, 이 노예들을 부려 수입을 올리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제의를 굳이 물리쳤다.


  제자인 아이스키네스가 스승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 가난해서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으니까 이 몸을 바칩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다정히 말했다.
  "아니, 어째서? 너는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있는데 그걸 모르느냐?"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들으면서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눈물이 쏟아지며 노예 상태와도 같은 경험을 했던 알키비아데스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페리클레스의 웅변을 들어도 감동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지만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듣는 사람이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에우크레이데스는 메가라인으로 일찍이 철학 공부를 했으며,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듣고는 열렬한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런데
아테네와 메가라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그리하여 메가라인이 아테네에 들어오면 종신형에 처한다는 법령이 만들어졌다. 그런데도 그는
여자로 변장하고 몰래 들어와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열심히 들었다.


 


  안티스테네스는 고르기아스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다가 소크라테스의 명성을 듣고는 자기 제자들과 함께 소크라테스의 문하로 들어가 겸허히 가르침을 받았다.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은 '건강한 힘'이라는 뜻이다. 그는 철학 이외에도 신체 건강을 위해 체력 단련을 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강조했다. 그는 몸소 아침 산책, 체조, 무도를 즐기면서, 절제 있는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러나, 제자들이 초대하여
대접하면 사양하지 않고 참석하여 즐겼다.


 


  소크라테스와 함께 전쟁에 참전했다가 그에게 구조되었던 알키아비아데스가 훗날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실제로
전쟁에서 흔히 있듯이 어딘가에서 차단을 당해 굶기를 강요당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인내심이 없는 다른 병사들과는 달랐다. 그러나
잘 먹게 되었을 때에는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 특히 그는 주량이 컸다. 자진해서 마시는 일은 없었지만 강요당했을 때는
누구보다도 많이 마셨다. 그럼에도 그는 한번도 술에 취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겨울의 추위에 대한 인내심도 대단하였다. 언젠가
그는 혹독한 추위가 닥쳐왔을 때, 모든 병사들이 진영 안에 있는 옷을 모두 껴 입고 구두를 신고 발을 담요와 양가죽으로 감싼 채
꼼짝도 않고 있었는데, 오직 그만이 평상시처럼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서 외출을 하는 것이었다. 구두를 신지 않고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쉽게 얼음 위를 걸었다. 병사들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데리온 전투, 암피폴리스 전투, 데리온 전투에 출정해서 침착하고도 용감하게 싸운 소크라테스에 대해 용장 라케스는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그때 다른 사람들도 소크라테스처럼만 행동 했었더라면 결코 패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국의 명성을 드날렸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추첨 결과 본의 아니게 500인 평의원에 뽑혔을 때였다. 그 무렵 아르기누사이 섬 앞바다의 해전에서 패전한
장군들을 모두 국회에서 재판하자는 안이 평의원회에서 의결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협박을 받으면서도 최후까지 이에 반대하였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다른 생물에 비해 인간이 다른 점은 무엇인지요?"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다음과 같이 인간에 대해서 찬미하였다.
  "신은 인간을 바로 서게 하고,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손을 주었으며, 다른 생물에게는 일정한 시기에만 한정 시킨 쾌락을 인간에게는 아무 때나 즐기도록 허용하였으며, 거기다가 또 영혼을 심어 주었다"


 


  소크라테스는 평소에 '인간의 참된 삶이란 잘 사는 것이요, 잘 사는 것이란 아름답게 사는 것이요, 올바르게 사는 것이다'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하였다. 어느 날 한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인간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에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
  "그건 사람의 마음을 잘 보살피는 것, 즉 행복한 기분이 되게 해주는 것이야.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또 만나고 싶고, 만나면 몸을 만지고 싶고, 만지면 이번에는 소유하고 싶어지는 것이지"
  그러자, 다른 제자가 곁에 있다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하고나 잠자리를 같이 하는 아테네 제일의 미녀 모델이 지금 어느 화가의 화실에서 지금 나체가 되어 있습니다"



  제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승이 대꾸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진실한 아름다움은 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지. 가보자! 그러나, 미인의 포로가 되어 인간다움을 잃어버릴 자는 따라오지 말라"


  어느날 소크라테스는 한 청년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청년의 덕은 무엇인지요?"
  그러자, 그는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그건 지나치지 않는 것이지"
  그러면서 그는 청년 앞에 시종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며 말을 이었다.
  "장래가 넉넉해서 미지수인 자여!"


 


  소크라테스는 어느날 꿈을 꾸었다. 자기 무릎 위에 앉아 있던 백조 새끼 한 마리가 금방 날개가 돋더니 예쁜 소리를 내어
울고는 순식간에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는 꿈이었다. 그 다음날 플라톤이 그의 제자로 입문해 왔다 소크라테스는 그를 보고 말했다.
  "자네는 어젯밤 내가 꿈에 본 그 백조가 틀림없어"(당시 백조는 아폴론 신전에 바쳐졌던 '싱싱한 새'였다. 그것은 마치 아테네 여신의 사자인 올빼미를 아테네 신전에 바치는 것과 같았다)


  소크라테스는 노년에 리라 악기의 연주를 배우려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그래서 어린이들과 함께 늙은 소크라테스를 제자로 삼고 가르친 음악 교사인 콘노스는 '할아버지 교육자'라는 별명을 하나 얻게 되었다.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아테네는 패배하였다. 그래서 아테네는 친 스팔르타 인사와 반민주주의자 30인으로 구성된 과두
체제를 수립하여 공포정치(참주정치)를 시작하였다. 이 공포 정치의 수령인 크리티아스는 어느 날 소크라테스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관청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레온이라는 사나이를 사형에 처하기 위해 구인해 올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를
위법이라고 여겨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의 강연은 자연히 제재를 받게 되었다.


 


  정적을 사정없이 탄압하던 과두 체제인 참주정치가 8개월만에 무너져 버렸다. 그래서 아테네는 다시 민주체제로 환원되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이번에는 민주파 인사들로부터 오해를 받게 되었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 "구름" 때문에 더욱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구름"의 개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선량한 시민인 스토렙시아제스는 승마에 미친 아들 때문에 많은 빚을 지게 된다. 그 빚을 갚아야 하는 날이 점점
다가오자 안절부절 못한 그는 소크라테스를 찾아가서 '빚을 갚지 않아도 되는 방법'에 대한 자문을 구하면서 만약 가르쳐 주면
은혜를 꼭 갚겠다고 신의 이름을 빌어 맹세한다. 그때 소크라테스는 '신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것을 기르고 또 여러 가지 모습을
하는 구름일 수밖에 없다'고 해석을 해준다. 그 후 그와 그의 아들은 소크라테스에게 변론술을 배워와 빚쟁이를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아들과 말다툼을 벌이게 되고 폭행을 당한다. 그러나, 아들은 배운 변론술로 그 폭행을 정당화한다. 이런
지경에 이른 그는 이 모든 책임을 '신을 믿지 않는 소크라테스'에게로 돌린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집에 불을 질러 버린다.
소크라테스와 제자들이 연기 속을 헤치고 뛰어나온다. 막이 내린다"


 


  이 극이 초연되던 날, 소크라테스는 무대 위에 서서 싱글벙글거리면서 자기 배역을 맡은 배우가 자기와 닮았는지 어떤지를 관람객들에게 비교하게 했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소크라테스에게 큰 피해를 줄 줄이야!


 


  소크라테스가 고소를 당하게 된 때는 그의 나이 70세 되던 봄이었다. 고소인은 젊은 시인 메레토스였고, 유력한 민주정치가이자 실업가인 아뉴토스와 변론가인 리콘은 고소인의 변호인이었다. 그 고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핏토스 구의 메레토스의 아들 메레토스는 아로페케구의 소프로니스코스의 아들 소크라테스를 상대로 다음의 고소장을
제출하고 그 사실에 상위가 없다는 선서를 했다. 곧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인정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 괴이한 신(Dimonion,
신적인 것, 즉 양심)을 끌어들여 청소년들을 부패 타락케 하였다. 그 죄는 모름지기 사형에 해당된다"


 


  고소를 당한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 앞에서 조금도 굽힘 없이 자신의 소신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아테네 시민들이여! 만일 나에게 지금까지의 진리 탐구의 생활을 그만둔다면 석방해 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느
때처럼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복종하기보다는
오히려 신에게 복종하겠습니다. 그리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힘이 미치는 한, 지혜를 사랑하라고 여러분에게 권하겠습니다"


 


  당시는 30세 이상으로서 국가 채무가 깨끗한 아테네 시민이면 누구나 배심원에 지망 할 수가 있었다. 단, 그 지망자가
많을 경우에는 당일 추첨하여 500명을 뽑았는데, 소크라테스의 변론 후 치뤄진 투표 결과 60표 차이로 유죄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때 자신의 형량에 대한 발언권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이 사람에게는 영빈관에서 평생 무료 식사를 하는 대접을 받게 해주십시오 여러분은 올림픽
경기의 우승자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만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경기에 이기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러분을
즐겁게 할 뿐이지만 나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다가 나는 가난하므로 부양을 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잘못하면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재판관들 앞에서 조금도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소신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이번 사건은 나에게 매우 유익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죽는 것을 옳지 않다고 봅니다. 죽음이란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이 완전한 허무로서 모든 감각이 없어진다면 꿈도 꾸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잠든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죽음이란 벌이 아니라 굉장한 소득일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죽음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서 저승으로 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즐거운 여행을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우리는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기 위하여 이곳을 떠납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 누가 더 행복할 것인가 하는 것은 오직 신만이 알
것입니다"


 


  재판이 진행되고 있을 때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변호할 양으로 단상으로 뛰어 올라 가서 소리쳤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일찍이 이 단상에 올라온 자 중에서 가장 젊지만..."
  여기까지 말했을 때 재판관들로부터 꾸짖음을 당했다.
  "내려와! 내려와!"
  할 수 없이 단상을 내려와야 했던 플라톤의 당시 나이는 29세였다.


  유죄 판결 후, 소크라테스는 고소인이 요구한 사형 형벌에 대해 의의를 제시했다.
  "본인은 아테네를 위해 신이 제시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고 믿는다. 따라서 본인에게 알맞은 형벌은, 국가의 다른 공로자들처럼 앞으로 국비로 향응해 줄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그러나, 최후로 친구들의 간절한 권유에 따라 30므나의 벌금을 제시했다(이때 플라톤이 보증인들 중 한 사람이
되어 주었다) 그런 다음, 투표를 실시한 결과, 360표 대 140표가 나와 220표 차이로 그에게 사형이 결정되었다. 당시
법률에 의하면 사형 선고를 받게 되면 24시간 이내에 처형을 받게 되는데, 그때 마침 델로스 섬으로 아폴로 신과 아르테미스
신(아폴론의 쌍동이인 여동생)에게 생일의 감사 재물을 바치러 배가 떠나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배가 돌아올 때까지 그
집행이 연기되었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생일은 소크라테스의 생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찬가를 지어 읊었다.


  어서 오소서, 델로스의 주인 아폴론이여!
  어서 오소서, 아르테미스여! 품격 높은 아들들이여!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가장 열렬한 숭배자인 아폴로도로스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선생님! 당신께서 아무 죄도 없이 사형에 처해지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제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면서 미소를 짓는 얼굴로 말했다.
  "사랑하는 아폴로도로스여! 너는 내가 죄없이 사형에 처해지는 것보다도 오히려 죄가 있어서 사형에 처해지는 것을 보기를 희망하고 있었던가?"


  사형 선고가 구형된 지 한 달 후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그에게 면회를 가서 탈출을 권유하면서 말했다.



  "당신은 부당하게 사형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러면 당신은 내가 정당하게 사형되기를 원하오?"


  소크라테스가 옥중에 있을 동안 그의 친구들은 비밀리에 탈옥 준비를 갖추어서 그에게 몇 번이나 권면해 보았다. 제선이
항구로 들어오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는 그의 친구 클리톤이 밤중에 그를 몰래 찾아가 다시 한번 탈옥을 간곡히 권했다.
  "이 재판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자네의 죽음은 자신은 물론 친지와 제자들 모두의 불행이야! 돈은 얼마나 들더라도 관리들을 매수 할 테니 제발 탈출하게나"



  그러나, 그는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며 말했다.
  "내가 재판을 받을 때에는 그 결과가 내게 이롭건
해롭건 그 재판의 결과에 복종할 것을 서약한 것이네. 이제 나에게 사형이라는 불리한 판결이 내렸다고 해서 이에 응하지 않고 탈옥
도주한다는 것은 부정이요, 배신이야. 우리는 국법의 보호를 받고 살아가고 있네. 국가의 법률이 지금 나를 향해서 죽으라고
명령하였다면, 설사 국법이 옳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를 배반할 수는 없는 것이네.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일세. 우리는 절제할 줄 알아야 하네. 절제는 무절제 보다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일세. 우리는
중용을 지켜야 하네. 과장은 자기를 손상시키고 또 자기의 치욕이기 때문일세. 우리는 공사를 버려서는 안 되네. 사회의 안녕이
동시에 개인의 안녕이기 때문일세. 우리는 국법에 복종해야 하네. 준법은 우리 자신과 국가에 대해서 최대의 이익을 낳기 때문일세.
우리는 유덕한 생활을 해야 하네. 덕은 신과 인간으로부터 최대의 보수를 받기 때문일세"


 


  최후 날, 그 전날 밤부터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베는 자식들과 함께 남편 곁에서 보냈다. 아침 일찍 찾아온 그의 친구들을 보자마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여보, 드디어 이것이 마지막이로군요! 친구들이 당신에게, 당신이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제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울먹이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고는, 그는 친구들과 오랜 시간에 걸쳐 '영혼의 불멸'에 관해서 변함없이 문답을 주고 받았다.


 


  드디어 해가 서산으로 기울 무렵 간수들이 독인삼을 담은 그릇을 가지고 들어왔다. 사형 집행 시간이 일몰로 정해져
있는데, 대개의 사형수들은 음식을 원대로 먹거나 여자를 불러 욕정을 채우기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들어오는
간수를 보자마자 이야기를 마치고는 목욕을 하고 독배를 들이킬 준비를 하였다. 이때 아폴로도로스가 훌륭한 죽음의 나들이 옷을
선물하면서 마지막 부탁을 드렸다.



  "선생님 부디 이걸 입고 돌아가십시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나무랐다.
  "뭐야? 내가 입은 옷이 입고 살기에는 지장이 없었는데, 입고 죽기에는 너무 허름하다는 말인가?"
 
그러고 나서, 그는 간수가 건네준 독인삼 잔을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자, 이를 지켜 보고 있던 친구들과
제자들은 눈물만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소리내어 우는 자도 있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꾸짖었다.
  "이 무슨 망측한 꼴인고? 그러길래, 내가 부인들은 돌려보낸 게 아닌가?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말일세. 사람은 조용히 죽어야 한다고 나는 들어왔네. 그러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참게나!"


 


  독배를 마신 후, 소크라테스는 옥리의 지시로 잠시 동안 감옥 안을 거닐다가 다리가 점점 무거워지자 침대에 가서
드러눕더니 덮개로 얼굴을 가렸다. 독 기운은 발끝에서부터 위로위로 서서히 기어올라왔다. 그러다가 배 부분까지 차가워졌을 때였다.
그는 잠깐 얼굴 덮개를 벗기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친구에게 말했다.
  "클라톤! 내가 아스클레피오스(의약의 신)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갚아 주겠나?"
  그러자, 크리톤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반듯이 갚아 주겠네! 다른 부탁은 없는가?"
  그러나, 침대에서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결국 운명한 것이다. 이 날이 기원전 399년 4월 27일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한 편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저술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의 제자였던 크세노픈이 쓴 "소크라테스의 추억"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그는 언제나 신의 명령에 따라서 행동할 만큼 경건하였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을 정도로 극기심이 강하였고, 선악의 결정에
있어서 한번도 그릇됨이 없을 정도로 현명하였고, 또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선량하고 가장 행복한 인간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죽자, 한 비극 시인은 아테네인들을 책망하며 이렇게 탄식했다.
  "너희들은 뮤즈(시의 신)의 매우 현명한 휘파람새(봄이 옴을 알리는 새)를 죽여 버렸어, 죽여 버렸다고"


 


  소크라테스를 사형시킨 아테네 시민들은 곧 이를 후회하여, 소크라테스가 생전에 곧 잘 젊은이나 소피스트들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곤 하던 씨름판이나 체육관을 폐쇄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 고소인 메레토스는 사형에 처해졌고, 그밖의
고소인들도 추방당했다. 추방당한 아뉴토스는 헬라클레이아로 도망쳤으나 그곳에서도 추방당하고 말았다. 또한 아테네 시민들은 조각가인
리시포스로 하여금 소크라테스의 동상을 만들게 하고 이를 폼페이언(보물상자)에 장식하여 그 공을 길이 기렸다.


 


  소크라테스의 사후에 그의 가르침을 밑바탕으로 한 여러 학파가 생겨났는데, 플라톤 학파, 키니코스 학파, 키니크 학파, 메가라 학파, 엘리스 학파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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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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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생각/인물 2010. 8. 26. 18:40



 백과사전에서 말하는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Σωκράτης, 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는 고대 그리스철학자이다.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일생을 철학의 제 문제에 관한 토론으로 일관한 서양 철학의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흔히 4대성인으로 불린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기원전 399년에 고소되어 사형을 당했다.


생애

[편집] 소크라테스 문제

역사상의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적 관점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상당한 논쟁거리이다. 이 문제를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적인 글을 쓴 적이 없다. 소크라테스 자신과 생애, 철학에 대한 지식은 그의 제자들과 당대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플라톤의 기록이며, 그 밖에도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파네스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런 저작들은 정확한 사실이 아닌 철학 또는 극적인 글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 소크라테스를 알기는 어렵다. 당대 고대 그리스에서 투퀴디데스(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나 철학자들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다)를 제외하고는, 소크라테스 시대를 사실에 입각해서 서술하는 사례가 없다. 이런 결과,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언급한 사료들은 역사적으로 정확성을 내세울 까닭이 없었으며, 때론 당파적이기까지도 하였다.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처형한 사람들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업적에 대하여 정확하고 일관성있는 역사를 쓰기 위해 당대 인물들이 쓴 여러 사료들을 일치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반드시 사실적이지는 않으며 다만 일관성을 갖추었을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에 대해 가장 믿을 만하고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일부 저작에서 플라톤은 자신이 저작속에서 구현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실제 소크라테스의 언행보다 더욱 미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저작이나 유물을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단지 플라톤이 날조한 인물은 아님이 드러난다.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은 플라톤의 저작에 나오는 일반적인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 유용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조각가인 소프로니코스를 아버지로, 해산술을 업으로 하던 파이나레테를 어머니로 하여 아테네의 서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따라 조각을 하면서 다른 청년들처럼 기하학·철학·천문학 등을 배웠고, 중장보병에 편입되어 세 번이나 전투에 참가하였다. 기원전 406년, 500명 공회의 일원이 되어 1년간 정치에 참여한 일이 있고, 40세 이후에는 교육자로 청년들의 교화에 힘썼다.

그는 자연 철학을 배웠으나, 그 기계론적 세계관에 불만을 품었다. 그때는 아테네의 몰락기였으므로 보수적·귀족적인 정신과 진보적·개인주의적·비판적 정신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였다. 그도 이러한 경향을 지니게 되었으나 당시의 소피스트들처럼 궤변으로 진리를 상대적·주관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찾아서 이상주의적, 목적론적인 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다.[1]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의·절제·용기·경건 등을 가르쳐 많은 청년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으나, 공포정치 시대의 참주였던 크리티아스 등의 출현이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청년을 부패시키고 국가의 여러 신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고소되고, 배심원들의 투표 결과 40표로 이 애국자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는 도주할 수도 있었으나 그의 투철한 준법 정신에 의해서 "악법도 법이다"라고 하며, 태연히 독배를 들어 마시면서 자신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을 빚졌다며 자신 대신 갚아 달라고 친구에게 당부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 그의 신전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닭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고 한다.)

[편집] 사상

아무런 저서도 남긴 바 없는 소크라테스의 확실한 사상을 알기는 어려우나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 라이르티우스, 크세노폰, 특히 플라톤의 저서 등에 언급된 것을 보면 그는 델피의 신탁인 "만인 중에 소크라테스가 제일 현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스스로의 무지를 자처하던 소크라테스는 신의 신탁이 사실인가 확인 하기 위해 의아심을 품고 여러 현명한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말을 확실히 알고 언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방법으로 제논의 변증법을 활용하여 논변을 진행시키는 사이에 잘못된 판단의 모순을 깨우치고 다시금 옳은 판단으로 유도시켰는데, 이것이 유명한 산파술이다. 그는 합리주의자였으나, 때로는 초경험적인 내심의 소리, 즉 다이몬의 소리를 경청하고, 때로는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였다.

그가 다룬 문제는 종래의 철학이 대상으로 한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었으며 '정신의 배려'를 사명으로 삼았다. 덕은 인간에 내재한다고 믿고 사람들에게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갖 계층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고 용기나 정의 등에 관한 윤리상의 개념을 설교하고 다녔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사약을 마시게 되었다. 그의 탁월한 지적·도덕적 성격에 의해 비단 철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인류 최대의 교사'로 불리고 있다.

[편집] 변론과 크리톤

'악법도 법이다'(라틴어: Dura lex, sed lex)라는 말이 회자되지만, 소크라테스가 직접 이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변론'에서 법정이 철학을 포기한다면 석방해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도 자신이 철학을 하는 이유는 하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법 이상의 철학적 원칙과 신념에 기초하여 의사결정을 했던 몇가지 사례들이 있다. 반면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독배를 내린 법률에 대해 자신이 국외 추방을 제의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으로 동의한 절차적 정당성을 뒤늦게 훼손할 수 없다고 친구인 크리톤에게 밝힌다. 그러나 '크리톤'은 소크라테스가 평소의 냉정한 변증법적·이성적 논법을 구사하지 않고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모습으로 크리톤을 설득하고 있어서 전적으로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변론'과 '크리톤'의 이런 모순적인 모습 중 '크리톤'에 실린 모습이 과장되어 '변론'에 담긴 법령 불복종자로서의 모습을 누르고 지금까지 이어져왔으며 소크라테스의 일관된 삶과 철학에 비추어불 때 이런 말 자체가 결코 성립할 수없는 것이다. 진정한 철학자는 진리조차도 회의하고 가짜로 드러나는 순간 바로 폐기시키는 엄중함이 있는데, 기껏해야 인위적인 실정법을 무조건 옹호할 수없는 것이다.철학과 법의 기본 성격조차 모르는 무지의 소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어이없게도 독재치하에서 정치에 악용되는 방편으로 원전에 대한 확인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 말을 계속 악용하여 왔다. [2]

[편집] 미(美)

소크라테스는 미학적인 범주를 최소한 셋으로 나누었다. 그 세 범주는 부분의 조립을 통해 자연을 표현하는 '이상적인 미', 시선을 통해 영혼을 표현하는 '정신적인 미', 그리고 '유용한(혹은 기능적인) 미'이다.[3]

[편집] 영향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 전해져 메가라 학파, 퀴니코스 학파, 키레네 학파 등을 이루고, 특히 수제자인 플라톤의 관념주의로서 피어나, 그 후의 서양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4]

그는 일생을 통해 자신이 직접 책을 쓴 일이 없고 또한 문학적 흥미도 지닌 바 없으나 그가 철학의 방법으로 취한 대화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걸작 대화집을 낳게 했고, 그의 독창적 개성과 비극적인 죽음은 전기문학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소크라테스만큼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철학자도 없습니다. 그는 무척 뭇생긴 사람이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천하의 악처러 알려진 그의 아내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 만큼이나 유명한데 실제로 그녀가 그토록 지독한 악처였는지는 불확실합니다. 그는 많은 질문을 통해 스승들을 곤라하게 만들었고 마침내는 아테네 청년들의 스승이 되어 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는어떠한 저서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플라톤을 비롯한 제자들의 글에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그에 대해 알수 있을뿐입니다.그는 아테네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하엿는데 그가 태어날당시의 아테네는 에게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는 소피스트의 시대를 살았고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전하여 국력이 기울며 몰락하기 시작하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소피스트들에 반대하여 인간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었습니다. 소피스트들은 분명 철학의 관심을 인간으로 돌려 놓는 공헌을 했습니다.그러나 그들은 지나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설파함으로써 사회의 가치관을 무너 뜨렸고 정신적인 혼란을 던져 주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정신적 혼란기에 나타난 아테네의 스승입니다.

소크라테스는 텔포이 신탁을 계기로 자신이 길을 찾습니다. 어느날 카에로폰이라는 사람이 델포이 신에게 아테네에서 제일 현명한 사람은 소크라텟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신이 거짓말을 할리는 없다고 생각하고자신이 현명한 사람인 이유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한가지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무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소크라테스 자신은 스스로 아는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 때만 무엇을 알수있습니다.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스스로 아는것이 무지를 전제한 후 대화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잘못된 주장에 맞닥뜨렸을대 그 잘못된 주장을 직접 비판하는것이 아니라 상대방이동의할 많안 다른 의견을 제시하며 대화를 이끌어 갑니다.대화 상대자는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동의해 나가는 와중에 스스로 자신의 원래 주장을 부정하게 되거나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대화 상대자의 입장에서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것입니다. 그의질문은 집요합니다.그는 피상적인지식이나 독단적인 관념을거부하기 때문에 항상 정확한 대답을 요구합니다.

예를 들어 경건한것과불경한 것에 대해 에우티프론과 토론할때 소크라테스는 경건한 행동몇 가지가 아닌 모든 경건한 행동을 경건하게 하는 경건성 그자체가 무엇인지 말할것을 요구합니다. 마침내 에우티프론이 모든 신이 사랑하는것이 경건이고 싫어하는것이 불경이라고 대답하자 소크라테스는 '신들이 어떤 행동이 경건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들이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경건한 행동이되는 것인지'를 그에게 되묻습니다. 에우티프론은 피상적인 대답만을 반복하고 소크라테스는그 말을 듣고 더욱 구체적으로 되묻습니다. 에우티프론은 결국 그 자리를 떠나고맙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대화 방법은 그 자체로 인간 이성에 대한 믿으믈 표현합니다.그는 보편적인 진리의 존재를 부인할 수없으며 계속되는 대화를 통하여 진리의 길로 접어들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진리에 대한, 나아가 인간의 능력에 대한 회의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인간은 대화를 통하여 자신으 무지를 깨닫고 모든 사람이 공유할수있는 진리를 발견할수있다고 소크라테스는 믿었던 것입니다.



★ 악처가 철학자 남편을 만든다?


세계 4대 성인중의 한 사람인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행패가 대단히 심해서 악처라고 세상에 이름이 높았었다.

어느 날 그녀는 책을 읽고 있는 소크라테스에게 심한 욕설을
한참 동안이나 퍼붓다가 물이 가득 찬 물통을 들고 들어와
"이 못난 영감쟁이야...물벼락이나 한번 맞아봐라.." 하면서
소크라테스의 머리 위에다 물을 쏟아 부었다.


그제야 소크라테스는 책에서 눈을 떼며 털털한 웃음으로
심술궂은 아내와 맞싸우지 않고 유머로써 웃어 넘겼다. 이때 제자들이
몰려와서 남자는 꼭 결혼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결혼은 반드시 해야지.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나쁜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테니까... 훌륭한 수부는 바다에서
사나운 파도와 싸워보아야 하는 것이고, 또 훌륭한 기수는 성질이 사나운 말을
택하는 법이니,   사나운 말을 잘 달래가며 탈수 있는 기수라면  다른 어떤
말 이라도 다 잘 탈수 있듯이 나 역시 성질 나쁜 아내를 잘 달랠 수 있다면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 훌륭하게 상대할 수가 있을 것 아니겠나 ? "



그는 왜 토론을 하는가?

서양철학자 중에서 아마도 일반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은 소크라테스일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전문가에게 가장 적게 알려진 서양철학자가 바로 소크라테스이다! 심지어 버트런드 러셀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지, 조금 알고 있는지 조차도 확실하지 않다고 말한다.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기원전 469년에 아테네에서 출생하여 기원전 399년에 죽은 소크라테스는 생전에 어떤 글도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대해서 주로 그의 제자 플라톤과 크세노폰, 그리고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남긴 글을 통해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 모습과 생각은 서로 다를 뿐더러, 플라톤의 여러 대화편에서도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연구자들은 무엇이 진짜 소크라테스의 모습인지에 대하여 지금도 논란을 벌이고 있다. 이것을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의 문제(Socrates Problem)’라고 부른다. 플라톤은 상상력이 뛰어난 문학가였으며, 크세노폰은 군인,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는 패러디 전문가였다. 이들 모두가 ‘정품’이 아닌 ‘짝퉁’ 소크라테스를 만들 소질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문제’로 인해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다는 식의 과민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확실하게 알려진 그의 삶에 이미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소크라테스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여러 주제에 대한 그의 생각, 한 마디로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이다. 그러나 이런 논란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 철학자가 자신의 글을 남겨도 일어나는 문제다. 그가 남긴 글의 해석이냐, 아니면 그 글의 해석의 해석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삶을 통해 철학사에 남긴, 아니 인류를 위해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은 무엇일까?


고대 그리스의 도자기에 그려진 토론하는 그리스인들의 모습.
소크라테스는 광장에 나가 격의없는 토론을 즐겼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하기’ 정확히 말해 독백이 아닌 대화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철학자의 이미지는 골방에서 혼자 사색에 잠기거나,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우주의 진리를 글에 담는 모습이기 쉽다. 누가 칸트나 헤겔의 철학이 ‘100분 토론의 결과’라고 주장하겠는가? 놀랍게도 서양철학의 아버지 격으로 숭상되는 소크라테스는 이런 고독한 철학자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가 가장 좋아했고 죽기 직전까지 했던 것은 토론, 즉 어떤 주제에 대하여 논쟁적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테네 토론의 광장 아고라에 나가서 어느 누구와도 격의 없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즐겼다. 플라톤의 대화편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의 나이 불문, 재산 불문하며 대화를 즐겼다고 말한다. 나아가 아테네의 법이 이 즐거움을 금지시키면 자신은 법을 지키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그는 ‘스스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독배를 마시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옥리에게 뇌물을 주고 도망가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도 토론을 했다. 이것이 플라톤의 대화편 [크리톤]의 내용이다. 소크라테스와 동년배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크리톤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는 아테네의 법을 어기고 도망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아무도 토론 마니아 소크라테스를 말릴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소크라테스와 크리톤과의 대화내용을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로 줄여 표현했지만, 이것은 매우 잘못된 해석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말을 했다는 증거도 없고, 아테네의 법을 그는 악법이라고 부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이를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언도를 받아 죽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아테네 시민과 토론을 벌여 많은 적을 만든 것이 화근이 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고, 재판 중에도 자극적 토론을 벌여 사형언도를 받았고, 재판이 끝난 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토론을 벌인 후 “죽는 것이 옳다”는 결론에 따라 행동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토론은 공기와 물 같은 것이었다.

 

 

 

 

영국 경찰이 발견하고 미법무부가 번역하여 공개한 [알 카에다 훈련교범]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가 대결하고자 하는 신앙심 없는 정권은 소크라테스적 토론도, 플라톤적 이상도 아리스토텔레스적 외교도 모른다. 이들은 총알의 대화, 암살, 폭격, 파괴라는 이상, 그리고 대포와 기관총의 외교만을 알 뿐이다.” 알 카에다가 ‘소크라테스적 토론’이 무엇인지 이해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소크라테스로부터 토론을 분리시킬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왜 토론을 하고자 했을까? 물론 그가 남과 이야기하기를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히 옳은 대답이다. 그러나 대답의 전부는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다른 철학자들이 갖고 있지 않는, 설사 갖고 있다 하더라도 남에게 공개하기 꺼리는 경험을 자랑스럽게 공개하였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받은 ‘델피의 신탁’이다. ‘신탁(神託)’이란 신이 사람을 통해 신의 뜻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질문에 답하는 것, 즉 계시 혹은 점과 같은 것이다. 언젠가 소크라테스는 친구와 함께 신탁을 받은 적이 있다. 이때 신탁의 내용은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는 없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적인 토론은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게 하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신탁을 믿어 왔던 소크라테스도 이번 경우에는 신탁의 내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고 일컬어지는 아테네의 정치가, 문학가, 장인들을 찾아다녔다. 과연 이들은 현명한가? 놀랍게도 이들 모두 스스로 현명하다고 자부하였지만, 대화의 결과는 정반대였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어느 누구도 현명하지 않았다. 아테네의 젊은이들은 이런 대화를 재미있게 구경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따라했다. 왜냐하면 ‘현명하다는 사람의 무식이 폭로되는 토론’은 실로 재미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토론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민 중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고, 이것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이처럼 토론을 즐긴 이유는 단순히 상대방의 무식이나 현명하지 못함을 폭로하는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에게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즉 철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덕(virtue)을 밝히고 실행하는 것이었다. 덕의 실행은 재산이나 직위 그리고 명예보다도 중요하며 심지어 죽음도 방해할 수 없는 인간 영혼의 본질이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를 경멸한 이유는 무엇보다 영혼을 계발하는 철학을 돈과 결부시켰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단 한 번도 돈을 받고 대화를 한 적이 없음을 그의 가난이 증명한다고 [변명]에서 말하고 있다. 다른 한편 소크라테스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선이 무엇이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파하였다. 선이 무엇인지 안다면 결코 악행을 저지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지행합일이란 단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현자 찾기 프로젝트’가 실패하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많은 믿음들은 그 옳고 그름이 확인되지 않은 것이 태반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역설적으로 델피의 신탁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소크라테스에게 대화는 재미만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름을 밝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물론 그에게는 이처럼 옳고 그름을 밝히는 토론이 가장 재미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스스로 글을 쓰지 않은 이유도 짐작이 간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토론을 ‘산파술’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산파는 직접 아이를 낳지 않지만 낳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다. 다른 한편 아이를 낳지 않아본 여인은 낳는 것을 도와줄 수 없기에 산파가 될 수도 없다.

 

그리스 자연철학으로부터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관심을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라는 인간사회의 규범으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정의, 덕, 선과 같은 규범적 개념은 사회의 복잡한 관계망에서 쉽게 파악되기 어렵다. 어떤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부정적일 수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에 부합하는 사물의 측면만을 보기 일쑤다. 이때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으로 알려진 부정적 논증(elenchus)이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상대방의 주장이 일단 옳다고 가정하고, 상대방도 동의하는 다른 지식이나 명제들을 원래의 주장과 결합하여 모순을 끌어내는 귀류법(reductio ad absurdum)을 의미한다. 즉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기본적으로 ‘부정의 논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정의 논법을 통해서도 논파되지 않는 주장, 그것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적 토론은 논쟁 기술보다는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 모두에게 훨씬 더 중요한 태도를 요구한다. 그것은 ‘권력이 옳고 그름을 정한다’는 믿음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이런 믿음을 옳다고 말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믿음에 순종하고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아테네 시민에게 신이 보낸 등애(gadfly)라고 표현했다. 등애가 쏘면 황소도 펄쩍 뛴다. 바꿔 말해 소크라테스는 당시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있던 아테네의 큰 문제, 즉 집단적 오류를 등애처럼 날카롭게 쏘아댔다. 그 결과가 소크라테스의 재판이었다. 이처럼 권력과 잘못된 믿음과의 결합은 민주주의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정치체제에서도 있을 수 있으며, 소크라테스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현대는 정보의 공유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쉽고 빠르다. 이를 통해 옳건 그르건 집단화된 믿음이 순식간에 형성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적 토론이 더욱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소크라테스적 토론을 현대 사회에 도입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누명을 쓰고 독배를 마시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까지도 토론을 벌였다.




진리와 이데아의 빛

쪽빛 바다가 한 눈에 가득 들어온다. 지중해 세계에서 빛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빛은 모든 은폐된 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스 사람들은 은폐된 것이 드러나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빛이 있어야 사물을 볼 수 있다. 플라톤 철학의 핵심 개념인 이데아도 그 어원은 본다는 것이다. 이데아의 빛이 비칠 때 세계는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다고 그는 믿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었을 때 그는 스물 여덟의 청년이었다. 그때 그는 심한 혼돈과 현기증을 느꼈다고 한 편지에서 기록했다. 그리고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인식의 근원은 철학”이며, “참된 철학을 열심히 연구하기까지에는 인류는 고민에서 풀려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플라톤 철학의 시작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서 출발한 셈이다. 그래서 플라톤 철학을 이야기할 때는 보통 소크라테스 철학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시작부터 우리는 난감한 사실에 봉착한다.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의 철학은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제자가 그대로 반복했다는 뜻이 아니다.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 철학이 동일한 소스에 담겨있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소크라테스 철학을 플라톤이 쓴 기록을 통해서 읽는다. 플라톤의 [대화편]이라고 부르는 35편의 책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철학에서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역사적 인물로서의 소크라테스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인가 하는 점이 항상 문제가 된다. 그것을 철학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따져보면 이러한 사례는 어찌 소크라테스뿐일까? 공자의 가르침을 기록한 [논어]도 그렇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기록한 불교 경전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공자와 석가모니 역시 자신들이 직접 책을 쓰지 않았다.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옮겨 적었을 따름이다.


소크라테스의 조각상 앞에서 불멸에 대한 사색에 잠긴 플라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동일체를 이룬다.

 

시대를 더 내려오면 신약성경과 코란도 그렇다. 예수도, 무함마드도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기독교와 이슬람 경전을 직접 기록하지는 않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 국한해서 보더라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도 대부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고대 철인들의 말씀을 기록한 많은 책에서는 그것이 진짜냐 가짜냐를 따지는 위서 논란이 심심하면 터져 나온다. 그들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해석학적 문제도 뜨거운 감자가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대 철인의 말씀을 기록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 크게 부각되는 법은 거의 없다. 예외가 있다. 바로 플라톤이다. 그는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모아서 집대성한 단순 기록자로 취급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대화편은 플라톤이 30대에서 70대까지 쓴 책들이다. 스타일은 거의 비슷하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변호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제외하면 모두 대화체 형식이다. 플라톤이 쓴 일련의 책들을 대화편이라고 통칭해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통점이 또 있다. 한 편을 제외하면 모든 대화편에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거의 대부분이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주도하는 주인공이다. 이렇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대화편을 통해서 하나의 철학적 동일체가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 철학을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잠깐! 플라톤의 대화편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초기 대화편에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와 후기 대화편에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에 미묘한 차이가 드러난다. 그래서 고대 철학사를 연구하는 사가들은 플라톤이 젊었을 때 쓴 초기 대화편에서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철학을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반면, 원숙한 나이에 쓴 플라톤의 후기 대화편에서는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서 플라톤 자신의 철학을 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처음에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철학의 손 노릇을 했지만, 나중에는 소크라테스가 플라톤 철학의 입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다. 서두가 좀 길어졌지만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가지치기 작업이기도 하다. 앞에서 우리는 ‘역사적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를 구분하는 난제를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불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대화체 형식의 책을 썼는가 하는 점을 ‘플라톤의 퍼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거리의 철학자였다. 그는 아테네 거리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대화를 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조용한 사색의 장에서 토론과 대화의 장으로 옮긴 인물이다. 그는 대화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때로는 아테네 시민들이 즐겨 찾는 아고라 광장에서, 때로는 푸른 지중해가 한 눈에 보이는 아테네 근처의 바닷가에서, 때로는 지인들과 밤늦게 술잔을 기울이면서 토론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식 철학을 문자로 생중계한 플라톤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토론 철학이 가진 강점과 약점이 동시에 드러난다. 대화편은 마치 한 편의 희곡을 보는 듯한 재미가 있다. 대화의 내용뿐만 아니라 토론을 하는 그때 그곳의 분위기까지 그대로 잡힌다. 마치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일어나는 일이 마치 우리 눈 앞에서 펼쳐지는 듯하다. 그러나 때로는 대화편이 철학 책으로서는 체계적이지 못하고, 때로는 아무런 결론 없이 대화를 마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당연하다. 대화편은 어떤 특정한 주제를 체계적으로 전개하는 논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철학의 역사에서 대화편과 같이 고전적 지위에 우뚝 오른 다른 철학서적,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35권의 대화편은 과제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지도 않고, 다양한 여러 주제들이 하나의 책에 뒤섞여 함께 논의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왜 이렇게 거리에서 철학을 했을까? 그리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아테네 거리 철학을 왜 문자로 생중계했을까? 그 단서는 대화편 중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나온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참된 지식은 글이나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대화를 통해서만 전달된다고 역설한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그림으로 기록할 때 그 그림은 죽어있듯이, 살아 있는 말을 문자로 쓸 때 문자로 기록된 말은 죽어있다고 말한다. 문자로 된 말은 질문을 던지지도 질문을 받지도 못한다. 그렇다. 플라톤이 대화 형식으로 글을 쓴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봐야 한다.

 

아테네 아카데미에 있는 플라톤 조각상.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라는 말처럼 플라톤은 서양철학의 기본을 완성했다.


서양 철학의 역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라는 말이 있다. 20세기 전반에 영국 캠브리지대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철학을 가르친 화이트헤드가 만년에 한 강연에서 한 이야기다. 많은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지만, 플라톤 철학의 요체를 이처럼 적절하게 설명한 말도 드물다. 나는 화이트헤드의 이 말을 플라톤 철학의 체계가 뛰어나다는 칭송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뛰어난 것은 그의 답안에 있지 않고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서 끝없이 던지는 질문 방식에 있다. 서양 철학이 플라톤 철학의 각주가 된 이유는 그의 철학 체계보다는 그가 쓴 철학적 발제에 있다.  지금까지 이 글을 세심하게 읽은 독자라면 이런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좋은 질문을 던진 사람은 플라톤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아닌가?

 

맞다. 굳이 저작권 개념으로 따진다면, 문자 중계한 플라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 발언자인 소크라테스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왜 플라톤이 서양 철학의 전통을 기본 포맷한 철학자로 인정받는가? 이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소크라테스로 돌아가야 한다. 좀 지겹겠지만 할 수 없다. 철학적 동일체를 이룬 스승과 제자의 몸통을 분리하는 수술이 아닌가?

 

 

 

 

소크라테스 철학의 요체는 대화법 또는 산파술로 요약되는 질문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답을 내놓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아는 게 없다. 그래서 그는 대화 상대자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가실 정도로 끝없는 질문을 던진다. 주로 상대방 이야기의 논리의 허점을 파고 든다. 상대방은 자신의 주장이 모순에 빠졌음을 깨닫고 우물쭈물한다. 큰 당혹감과 혼돈에 빠져든다. 상대방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주시한다. 옳은 답을 듣기 위해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답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대화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종료된다. 해결되지 못하고 끝난 문제 – 이것을 철학 용어로는 아포리아(aporia)라고 부른다. 그 어원은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다는 뜻이다. 출구가 막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길도 진리의 길이 아니고, 저 길도 우리를 진리로 이끌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우리와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주의 원리를 규명하는 작업은 잠시 숨을 고른다고 하더라도 매일매일 우리가 숨 가쁘게 살아야 하는 인간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도대체 어떤 기준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가?

 

소크라테스 시대의 아테네로 돌아가자. 고대 그리스 문명의 중심이었던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에서는 이미 철학의 관심이 피시스(자연세계)에서 노모스(인간세계)로 옮겨가고 있었다. 노모스의 세계에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철학의 화두로 떠올랐다. 소피스트라고 불리는 일군의 철학자들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관심도 다르지 않았다. 그 점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재판 법정에서 한 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지하의 일이나 천상의 일을 탐구했다고 고소장에 씌어있지만 자신은 자연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자연에 대해서 간단하게라도 언급한 사실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말해달라고도 주문한다. 그렇다고 자연철학자를 경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도 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는 도대체 어떤 점에서 다른가? 철학사에서는 그 양자의 차이를 보편주의와 상대주의의 격돌로 정리한다. 소피스트는 인간사회의 규범은 상대적이라고 이야기한 반면,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인 규범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보편적 진리를 수호한 순교자로 소크라테스를 자리 매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가? 나는 소크라테스를 보편 철학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답안을 내놓기보다는 상대 답안의 논리적 허점을 등에처럼 성가시게 물고 늘어져 철학적 대화를 아포리아 상태로 몰고 간 소크라테스 철학이 어떻게 보편주의로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논리적 연결고리만큼은 분명히 설명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가르친 철학의 정신이 아닌가? 만약 그 연결고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소크라테스 대화법(엘렌쿠스)은 보편적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보편주의가 아니라 그러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회의주의, 또는 진리는 때와 장소 그리고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상대주의와 더 가깝게 된다.

 

바로 이 대목에서 플라톤 철학의 핵심인 이데아 이론이 빛을 발한다. 플라톤 철학이 스승의 몸통에서 분리되는 대목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포리아가 출구가 막힌 종착점이 아니라 새 탐구의 출발점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집요하게 질문을 던져서 대화를 막장에까지 다다르게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노린 것이 아닐까?

 

스승이 즐겨 사용한 엘렌쿠스로서의 철학은 제자의 이데아 철학의 뒷받침을 얻어 출구에서 탈출한다. 아니, 이 말이 소크라테스에게 큰 모욕이 된다면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을 통해서야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제대로 독해할 수 있다. 앞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제관계에서 처음에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손 노릇을 했지만, 점차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입 노릇을 한다고 지적했다. 그 분기점이 바로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 개념이 등장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또 그 때를 기점으로 토론이 아포리아에서 벗어난다. 아포리아가 해결불능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탐구의 시작이 되는 셈이다. 이 점을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철학은 아포리아의 놀라움에서 시작한다.” 철학적 사유는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철학은 항상 상식적인 사고를 요청하지만 아무도 그 상식에 이의를 달지 않을 때 철학적 사유는 멈춘다.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의 막다른 길에서 이데아의 빛을 향한 플라톤의 사상이 시작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지금으로부터 2400여 년 전에 죽은 소크라테스는 그의 삶과 죽음, 용모에서 언행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우리에게 던져 주었다.  

  기원전 469년.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태어났다. 그리고 70년 후, 시민 500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들 중 280명의 유죄 결정에 의해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 500명의 배심원들은 나이가 예순셋 이상인 노인과,  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견디기 싫증난 사람들에게는 꽤 잡잘한 액수인 배심원 수당 3오블 -당시 그리스 화폐단위-을 받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소크라테스는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 철학자이다. 심하게 못 생긴 얼굴에, 오래 된 누더기옷. 악처로 이름 높은 아내 크산티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인용과,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언 아닌 유언.

  아내 크산티페를 두고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그런 여자와 결혼한 이유를 물으면 " 말[마]을 훈련시키는 사람은 거친 말을 다룰 줄 알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식으로 대답하였다.

  그의 죽음에 관한 그림은 쟈크루이 다비드, 샤를 알퐁스 뒤프레누아, 푸셍, 켕틴, 페이론 등 많은 화가들이 앞다투어 그려냈다고 한다. 동양에 공자가 있다면, 서양엔 소크라테스를 말한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직접 쓴 저서는 없다.  

  그런 그가 떠난지 2400여 년. 왜 그의 죽음을 생각하는가. 그는 이땅에 필로(philo,사랑 )과 소피아(sophia,지혜)를 전파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였기에 이땅의 최소한의 규칙을 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악법도 법이다" 라며 독미나리 잔을 받아들였다. 법은 이 사회, 이 세상 사람들을 잘 살게 하려고 만든 가장 작은 규칙이므로.

  소크라테스가 인용하였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곰곰 되씹어 본다. 이 말은 현대에 와서 다른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에 의해 "우리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부정하여야 한다"라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우리는 이 두 철인의 말을 모두 되새겨야 할 것이다. 부단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부족한 우리 자신을 더욱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도 작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10%의 희망을 가지고 90%의 불가능을 이겨낸 사람들도 있고, 90%의 사람들을 위한답시고 소외된 10% 의 가녀린 외침을 무시했다가 낭패를 당한 자도 있었다. 이에 대하여 일찌기 성경에서는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위하여---"라는 말을 하였다.

  시대의 투철한 시인정신을 지닌 김수영 시인은 "모래야 나는 얼마나 작으냐"라고 반어법적으로 노래하였다.

  소수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 주는 사회를 기대하며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을 다시 중얼거려본다.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백발의 노인. 무리의 중앙에 사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군중에게 설파하고있다.

" 모든 것은 자신이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 " 자! 예를 들어볼까요?

여기에 큰돌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돌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요? 이돌에 대한 사람들의 느낌이 모두 다를 것입니다. " 어떤이는 석상을 만들려할 것이고, 어떤이는 주춧돌을, 또 어떤이는 징검다리로, 마당의 의자로 ... 이처럼 사람들은 같은 사물일지라도 자신의 입장과 느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드립니다. 하지만 각 개인의 느낌이 바로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지배합니다. 이러한 느낌은 진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제 각기 진리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견해대로 행동방향을 결정합니다. 이말은 곧 모두에게 한결같이 적용되는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 진리는 개인의 잣대를 통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연설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고, 그사람은 자신이 가르칠 제자들을 모집중에 있었다.

- 그때 군중을 비집고 들어와 맨 앞쪽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노인이 일어서서 나옴.

군중이 외친다, " 소크라테스 잖아! " 제자(학생)들을 모집하는 강사는 그를 천적으로

인식하는데, 강사는 적지아니 당황한 기색이다.

" 존경하는 강사 선생, 이 무지한 늙은이가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소? " 강사는 마지못해 " 좋습니다. " 라고 말한다. " 선생, 저것이 무엇입니까? " 강사가 답한다. " 돌입니다." 소크라테스 "여러분 중에 저것이 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은 나오십시요.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 선생, 저것으로 만약 제우스 신상을 만들어 놓는다면 선생은 그것을 신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돌이라고 하겠습니까? "

강사 " 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돌이라고,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 소크라테스 " 그래요? 그러면 하나 더 물어봅시다."  " 저 돌로 만든 제우스 신상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저돌은 더 이상 돌이 아닙니까? "

 

강사, 얼굴이 더 붉어지며 머뭇거린다.  " 강사선생, 저것으로 무엇을 만들든 저것은 언제까지나 돌입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저돌을 신으로 생각한다해도 저돌은 여전히 돌일 뿐입니다. " " 따라서 사람의 생각에 따라 사물이 달라진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 사물은 사람의 생각과 관계없이 사물자체의 고유한 성질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만약 저들이 사람의 생각에 따라, 개, 말도 되고 - 사람의 느낌에 따라 변할 수 있다면 개나 말도 사람의 느낌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

강사는 뒷걸음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더 이상 강사를 몰아칠 생각이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군중들을 향해 몸을 돌리는 사이, 강사는 군중들 속을 빠져나간다. 

 

소크라테스, " 돌로 무엇을 만들든 여전히 그것이 돌이듯, 진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느낌에 관계없이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 " 이 변하지 않는 진리에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군중속의 한 젊은이, 묻는다. " 선생님, 그러면 도대체 그 변하지 않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 소크라테스 " 진리를 묻는 그대는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청년, " 저 말입니까? " " 저는 귀족이고, 남자이며 젊고, 영리합니다. 진리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사실 지금 생각해 보니, 저는 제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아는게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린다. " 웃지 마십시요!" " 이 청년은 지금 아주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 "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는게 있는데 " " 그것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 " 진리를 알기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닳아야 합니다."

" 인간은 모든 동물중 유일하게 자기속에 들어있는 진리를 알아 낼 수 있는 힘을 가졌습니다., 그 일의 시작이 바로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함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자기 뿐 아니라 모든 사람 속에 똑같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보편적인 진리에 따라 행동하면 여러분은 가치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곤 소크라테스는 "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을 남기곤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러면 " 나는 누구인가? "  네델란드의 시인, 극작가, 철학가 - 존 쉘라(1759 - 1801)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합니다.

" 누구나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자신이 매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요구하는 가격은 타인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서 위대하고도 또 미약하게도 된다. "

즉, 우리 모두는 환경이나 운명의 꼭두각시로 창조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고 친구를 선택하고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고 우리의 할 일을 결정하는 힘과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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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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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지 버나드 쇼

생각/인물 2010. 8. 20. 22:10



쇼는 1856년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옥수수 상인이었던 부친 조지 카 쇼와 루신다 엘리자베스 걸리 쇼 사이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더블린에서 학교를 다니다 부동산 사무소에서 일하던 그는 스무살이 되던 1876년 런던으로 이사갔다. 대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던 그는 대영박물관에서 책을 읽거나 당시 런던사회 중류계급 지식인들의 논쟁을 접하며 스스로 지식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19세기 말 유럽사회에서 널리 퍼지기 시작한 사회주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다. 페이비언 협회 활동과 함께 서평, 미술평론, 음악평론, 연극평론 등 왕성한 글을 쓰기 시작하며 문필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내가 죽을 때는 철저하게 소모된 다음 죽기를 원한다. 더 열심히 일할수록 더 오래 살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삶 자체를 즐긴다. 나에게 인생은 더이상 '곧 꺼질 촛불'이 아니다. 인생은 잠시들고 있는 영롱한 횃불같은 것이다. 다음 세대에게 그것을 넘겨주기 전에 가능하면 밝게 타오르게 하고 싶다. 삶 속에서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것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병들고, 피로하고 , 두렵다고 말하려 할때 잠깐 멈추자. 뭐든지 다 할수 있다고 미리 떠들어 대지도 말자. 대신 조용히 침묵하자 . 끊임없이 불평을 해대며 억지로 부담을 주려는 사람들과는 되도록 거리를 두자. 새로운 것에 흥미를 갖거나, 새로운 계획에 착수해 활기 있게 살자. 또는 일상적 삶을 즐기려 노력하자. 초라한 자아 이미지는 버리자. 자기를 훼손하는 꼬리표를 붙이거나 혹은 그런 언급을 하지 말자. 당신에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이상 그런식으로 인식되기를 윈치 않는다고 알리자..."


"결혼이란? 두 사람은 죽음이 자기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계속 그렇게 사람의 진을 빼놓는 비정상적인 흥분 상태를 유지하겠다고 맹세해야 한다."


“희망을 갖고 성공하는 사람들이란 자기가 바라는 환경을 찾아내는 사람들이다. 발견하지 못하면 자기가 만들면 된다.”


"재물을 스스로 만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쓸 권리가 없듯이 행복도 스스로
만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누릴 권리가 없다."


“민주주의는 부패한 소수가 정하던 것을 무능한 다수가 대체했다”




쇼는 평생 25만 통의 편지를 남겼는데 그 중에는 ‘맨발의 무용수’ 이사도라 덩컨과의 편지도 있다. 덩컨이 “당신의 머리와 내 몸을 가진 아이가 태어난다면 굉장하지 않을까요?”라고 편지를 보냈더니 쇼는 “거꾸로 내 육체와 당신의 머리를 가진 아이가 태어난다면 얼마나 끔찍할지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답장을 쓴다.

쇼는 노벨상과 아카데미상을 받은 유일한 작가이다. 그는 노벨상을 받으면서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문학상을 생각해낸 것은 참 말이 안 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열렬히 원하면 원하는 대로 된다’는 ‘피그말리온 효과’와 관련이 있는 ‘피그말리온’이란 연극의 극본을 썼고, 이것을 영화화한 오드리 헵번 주연의 ‘MY Fair Lady’로 오스카상을 받았다.

한 신문 기자가 버나드 쇼에게 '금요일에 결혼하면 불행하다는데 그 말을 믿으시나요? "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쇼는 "물론 믿지, 금요일이라고 예외일수는 없으니..."


"법률적으로나 실용적으로 가장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사회주의란, 사유재산을 공공재산으로 전환시키고 이로써 얻게 되는 공공 수입을 모든 주민에게 차별 없이 평등하게 분배함으로써 사유재산제를 완전히 철폐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유재산 즉 '물적' 재산은 최대한 축적하되 수입의 분배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 자본주의를 뒤엎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완전한 도덕적 전환을 수반한다."

"나는 젊었을 때 10번 시도하면 9번 실패했다. 그래서 10번씩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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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 사전에서 말하는 버나드 쇼

조지 버나드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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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년 7월 26일 ~ 1950년 11월 2일)는 아일랜드의 극작가 겸 소설가이자 비평가이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1925년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생애

모친으로부터의 영향으로 음악에 흥미를 가져서 받은 성악 레슨은 후에 연설자가 되었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인 학교교육을 받았으나 성적은 거의 최하위, 다만 작문은 뛰어났으며 쇼의 흥미는 문학, 음악, 그래픽 아트 등에 있었다. 가난하여 초등학교만 나왔을 뿐이나, 사환으로 일하면서 음악과 그림을 배웠으며 소설도 썼다.

1871년에는 더블린의 토지 중개사무소에 근무, 여러 신문잡지에 투고하였으며, 경제적 이유로 모친이 두 딸을 데리고 런던으로 나와 음악교사가 되자 쇼도 그들 뒤를 따라 1876년에 런던으로 나왔다. 이후 단기간의 에디슨 전화사 근무를 제외하고는 직업을 가진 일이 없었다. 런던의 예술가들과 사귀어 각 신문에 원고를 썼으나 수입이 적어 양친의 도움으로 생활했다. 1879년부터 83년에 걸쳐 5편의 소설을 썼으나 모두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하고 그 가운데 4편은 친구의 잡지에 게재되었다.

1882년 9월, 헨리 조지의 연설을 듣고서 쇼는 사회주의로 나아갔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크게 감동받아 마르크스 연구를 비롯, 1884년 창설 직후였던 온건 좌파 단체 페이비언 협회를 협회에 참가하여 많은 사회사상가와 사귄다. 그 가운데에는 카를 마르크스의 딸 에레아놀 마르크스도 있었다.

비평가로서의 쇼

1885년부터 1898년까지 13년 동안 쇼는 신문 잡지의 비평란을 담당하여 주로 음악·미술·연극·문학의 시평(時評)을 했다. 모두가 영국 비평계의 최고 수준을 과시하는 것이며, 특히 1895년에 시작되는 <새터데이 레뷔>에서의 연극비평은 오늘날 모범이 될 만한 관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입센 옹호, 셰익스피어 비판, 당시의 인기작가 피네로(Sir Arthur Pinero) 비판은 다대한 반향을 일으켰다. 쇼의 평론으로는 <입세니즘의 진수(眞髓)>(1891, 1913), <예술의 정기(正氣)>(1895), <완전한 바그너파(派)>(1898) 등이 중요한 것으로 손꼽힌다.

극작가로서의 쇼

그는 스스로도 많은 극을 써서 연극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풍자와 기지로 가득 찬 신랄한 작품을 쓰기로 유명하다.

쇼가 극작에 전념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늦다. 1885년부터 쓰기 시작했던 최초의 희곡 <홀아비의 집>은 92년까지 완성되었으며 런던의 로열티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이어 입센 스타일의 새로운 여성을 다룬 <사랑을 섭렵하는 사람>(1893), 근대 매춘기업을 폭로한 <워렌 부인의 직업>(1893)은 모두 극장측에서 상연이 거부되었으나 1894년에 상연된 <무기와 사람>으로 쇼는 극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 뒤 <캔디다>(1894), <운명의 사람>(1895), <악마의 제자>(1897), <시저와 클레오파트라>(1898), <인간과 초인>(1903) 등으로 쇼는 세계적인 유행작가가 된다. 그러나 예술적으로는 이러한 전기의 작품보다 후기의 <하트브레이크 하우스>(1913-16)나 <성녀 존(Saint Joan)>(1923)이 훨씬 우수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쇼의 인물은 거의가 작가의 대변자이며 그 작품은 자기 사상을 진술하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비난, 혹은 그와 반대로 쇼는 단순한 감상적인 오락작가에 불과하다는 비난이 적지 않다. 그러나 표면적 사상선전극 및 오락극 내부에 깃들인 참된 아이러니스트로서의 쇼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바버러 소령>(1905)이나 <하트브레이크 하우스>가 지니는 독자적인 희극성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확실히 그가 말했듯이 우선 그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져야 할는지 모른다.

"(나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나의 전작품을 적어도 2회 이상은 읽고 그것을 10년 동안 계속해달라"
 
— 조지 버나드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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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묘비명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버나드 쇼 묘비명-



<버나드쇼의 명언>

◎ 남자는 많이 알수록, 여행을 할수록 시골소녀와 결혼하길 원한다.-버나드 쇼

◎ 가능한 한 일찍 결혼하는 것은 여자의 비지니스이고, 가능한 한 늦게까지 결혼하지 않
   고 지내는 것은 남자의 비즈니스이다. -버나드 쇼

◎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있다 는 것은 미련은 말이다. 건전한 육체는 건전한 정신
  의 소산이기 때문이다.-버나드 쇼

◎ 결혼은 그것이 최대 유혹과 최대 기회의 결합이기 때문에 인기가 있다.-버나드 쇼

◎ 그대가 할일은 그대가 찾아서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해야 할일은 끝까지 그대를   찾아 다닐것이다.-버나드 쇼

◎ 남자가 여자의 교양의 시금석은 싸울때 어떻게 행동하는가이다. -버나드 쇼

◎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버나드 쇼

◎ '로마에가면 로마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하라는 것'이 성공의 가장 확실한 길이다.-버나드 쇼

◎ 모든 행로는 무덤에서 끝난다. 무덤은 無의 입구이다.-버나드 쇼

◎ 인간이 호랑이를 죽이때는 그것을 스포츠라고 한다. 호랑이가 인간을 죽일때는 사람들
   은 그것을 재난이라고 한다.범죄와 정의와의 차이도 이것과 비슷한것이다. -버나드 쇼

◎ 미인이란 처음으로 볼때는 매우 좋다. 그러나 사흘만 계속 집안에서 상대해 보면 더보
  고 싶지가 않게된다.-버나드 쇼

◎ 비겁자가 되지 않고는 영웅이 될수 없다. -버나드 쇼

◎ 살아 있는 실패작이 죽은 걸작보다 낫다. -버나드 쇼

◎ 선행이란 악행을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악행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버나드 쇼

◎ 애국심이란 자기의 조국이 다른 모든 나라보다 고귀하고 우월하다고 믿는 신앙을 말한
   다. -버나드 쇼

◎ 어버이라는 것은 하나의 중요한 직업이다. 그러나 여지껏 일찍이 아이들을 위해, 이 직
  업의 적성검사를 한적이 없다. -버나드 쇼

◎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표피 3cm에속는 사람이다. -버나드 쇼

◎ 수치스러운 집안의 비밀에서 벗어 날수 없다면 차라리 그것을 활용하는 편이 낫다.
   -버나드 쇼

◎ 사리를 아는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적응시키고, 사리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에서 세상
   을 적응시켜려고 한다.-버나드 쇼

◎ 어리석은 자는 수치스러운 일을 할때에도 그것이 언제나 그의 의무라고 선포한다.
   -버나드 쇼

◎ 나는 상황이나 환경을 믿지 않는다. 이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들이 원하는 상황이나 환경을 찾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상황이나 환경을 찾지 못할경우에는, 그들이 원하는 상황이나 환경을 만든다.-버나드쇼

◎ 꿈꾸지 않는 자에게는 절망은 없다.-버나드 쇼

<버나드쇼의 일화들>

1. 어느날 직업을 불문하고 영국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세 전보를 보냈다고한다.
   "다들통 났음,. 빨리 도망쳐라." 때문에 영국이 한동안 마비 되었던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그들의 불륜을 알고 있다는 사기꾼들의 협박전화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2. 그는 누군가가 가장 유명한 소설가 10명을 적어 달라는 요청에 자기 이름을 열번 적
    으며."남들이 오만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정도의 자신감은 쓸모 없다" 라고 말했다.

3. 밤새 집필 작업을 마치고 새벽녘에 잠이 든 버나드 쇼의 방에 그의 부인이 들어 왔다.
    부인이 그의 원고를 읽고 나서,
   "당신의 글은 쓰레기 감이에요!" 하고 소리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맞아. 하지만 , 일곱번째 교정을 마친 후에는 완전히 달라져 있을거라고"

4. 한 신문사 기자가 "금요일에 결혼하면 불행해진다는 속설을 믿으시나요?" 란 질문에
    그는 " 물론이지. 금요일이라고 예외일수는 없지" 라고 대답했다

5. 버나드쇼(1856-1950)가에 반한 희대의 무용수 이사도러 던칸(1856-1927)이 쇼에
  게 작업을 걸었다.
   "우리 두사람이 결혼하면 쇼 선생님의 명석한 두뇌와 소년의 미모를 합한 2세가 태어
   날터인데 좋은일 아닙니까?" 하면서 적극적으로 대시한다.
    쇼가 말하길
    "그것 참 좋은 생각이요. 다만 한가지가 걱정되는 구료"
    던칸이 생각하기로 쇼 선생도 별것 아니야 내미모에 안넘어 갈리 없지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그런데 쇼가 한말,
    "내 이 못생긴 얼굴에 당신의 그머리 합해서 애가 태어나면 가관일 것이요."
     얼굴이 벌게진 던칸은 말없이 물러갔다.

<버나드쇼의 어록>

내가 죽을 때는 철저하게 소모된 다음 죽기를 원한다.

더열심히 일할수록 더 오래 살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삶 자체를 즐긴다.

나에게 인생은 더이상 '곧 꺼질 촛불'이 아니다.
인생은 잠시들고 있는 영롱한 횃불이같은 것이다.
다음세대에게 그것을 넘겨주기 전에 가능하면
밝게 타오르게 하고 싶다.

삶속에서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것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병들고, 피로하고 , 두렵다고 말하려 할때 잠깐 멈추자.
뭐 든지 다 할수 있다고 미리 떠들어 대지도 말자.
대신 조용히 침묵하자
끊임없이 불평을 해대며 억지로 부담을 주려는 사람들과는 되도록 거리를 두자.
새로운 것에 흥미를 갖거나, 새로운 계획에 착수해 활기 있게 살자.
또는 일상적 삶을 즐기려 노력하자.
초라한 자아 이미지는 버리자.
자기를 훼손하는 꼬리표를 붙이거나 혹은 그런 언급을 하지 말자.
당신에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이상 그런식으로 인식되기를 윈치 않는다고 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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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카슨

생각/인물 2010. 8. 20. 21:44



'신의 손'을 만든 말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에는 '신의 손'이란 별명을 가진 소아신경외과 벤 카슨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오늘날 의학계에서 '신의 손'이라는 별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세계 최고의 의술을 
인정받고 있는 의사입니다. 

그가 저명한 의사가 된 데에는 특별한 이력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많은 의사들이 수술을 포기했을 정도로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고 있던 4살짜리 
악성 뇌암 환자와 만성 뇌염으로 하루 120번씩 발작을 일으키던 아이를 수술하여 완치시킨 일입니다. 

두 번째는 1987년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머리와 몸이 붙은 채 태어난 샴쌍둥이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샹쌍둥이로 태어나 불행한 앞날이 예고되었던 파트리크 빈더와 벤저민 빈더가 카슨 박사의 수술로 인해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이 수술을 통해 벤 카슨은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손을 가진 벤 카슨도 아주 어두운 성장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그를 보고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의사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벤 카슨은 디트로이트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8세 때 부모의 이혼으로 편모슬하에서 자라면서 
불량소년들과 어울려 싸움질을 일삼는 흑인 불량소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백인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했고, 초등학교 때에는 항상 꼴찌를 
도맡아하는 지진아였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구구단을 암기하지 못했고 산수시험을 한 문제도 맞추지 못하여 급우들의 
놀림감이 되곤 했습니다. 
이런 불량소년이 어떻게 오늘날 세계 의학계에서 신의 손이라는 칭송을 얻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어느날 그에게 기자가 찾아와서, "오늘의 당신을 만들어 준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나의 어머니, 쇼냐 카슨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늘 꼴찌를 하면서 흑인이라고 따돌림을 당할 때도, 
'벤, 넌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노력만 하면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려주면서 내게 격려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벤 카슨은 그의 어머니가 끊임없이 불어 넣어준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는 말에 
사로잡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성적이 오르기 시작해 우등생이 될 수 있었고, 사우스웨스턴 고교를 3등으로 졸업했으며, 
명문 미시간 대학 의대에 입학하여 '신의 손'을 가진 의사가 되었습니다. 

빈민가의 불량소년, 꼴찌 소년, 놀림과 따돌림을 받던 흑인 소년을 오늘의 벤 카슨으로 변화시킨 것은 
바로 그의 어머니가 해준 말 한 마디였습니다. 
"벤, 넌 할 수 있어. 무엇이든지 노력만 하면 할 수 있어!" 

말은 보이지 않지만 무한한 창조력과 힘을 가진 인생 최대의 에너지입니다. 

사람은 말의 열매를 먹고 삽니다. 말 속엔 크고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wn1 - 벤카슨의 책 '크게 생각하라(Think Big)' 상권 하권 두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뿐 아니라 벤 카슨을 업적을 다룬 영화도 있습니다.. 
2009년에 나왔는데요..제목은 '기프티드 핸즈:벤카슨 스토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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