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해당되는 글 63건

  1. 2022.12.19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문예출판사 2019(5판) 03180 1
  2. 2018.06.27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2016 03840
  3. 2016.09.22 당신의 여행에게 묻습니다 - 정지우 우연의바다 2015 03190
  4. 2016.03.17 영혼의 미술관(예술은 우리를 어떻게 치유하는가) - 알랭 드 보통, 존 암스트롱 문학동네 2013 03600 1
  5. 2016.01.18 학교의 슬픔 - 다니엘 페낙 문학동네 2014 03860
  6. 2016.01.07 탐닉 - 아니 에르노 문학동네 2004 03860
  7. 2016.01.04 집착 - 아니 에르노 문학동네 2005 03860
  8. 2015.12.03 에로스의 종말 -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2015 03100
  9. 2015.11.26 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야하고 이상한 여행기) - 김얀 달 2013 03810
  10. 2015.11.23 포옹 - 필립 빌랭 문학동네 2001 03860
  11. 2015.09.14 내 옆에 있는 사람 - 이병률 달 2015 03810
  12. 2015.07.24 원 플러스 원: 가족이라는 기적(one plus one) - 조조 모예스 살림 2014 03840 1
  13. 2015.07.21 미 비포 유(me Before you) - 조조 모예스 살림 2013 03840 1
  14. 2014.02.12 7년후(7ans apres..) - 기욤 뮈소 밝은세상 2012 03860 1
  15. 2014.02.10 구해줘(Sauve-moi) - 기욤뮈소 밝은세상 2010 03860
  16. 2014.02.08 사랑을 찾아 돌아오다 - 기욤 뮈소 밝은세상 2008 03860
  17. 2014.02.06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 기욤 뮈소 밝은세상 2007 03860
  18. 2014.02.04 사랑하기 때문에 - 기욤 뮈소 밝은세상 2007 03860
  19. 2014.01.16 그대와 걷고 싶은 길 - 진동선 예담 2010 03660
  20. 2014.01.12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Part 2) - 강신주 지승호 시대의창 2013 03100
  21. 2014.01.11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Part 1) - 강신주 지승호 시대의창 2013 03100
  22. 2014.01.03 강신주의 다상담1(사랑 몸 고독편) - 강신주 동녘 2013 04100
  23. 2013.08.09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여 배우며 - 정희재 걷는나무 2010 03810
  24. 2013.03.13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 - 변종모 달 2009 03980 1
  25. 2013.01.12 시작과 유지 .. 영화<타인의 취향> 도서<마지막 한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아도르노와 김우창의 예술문화론>
  26. 2012.12.30 (이외수의 사랑법) 사랑외전 - 이외수 해냄 2012 5
  27. 2012.12.20 인스턴트 같은 사랑으로는 알 수 없는.. <사랑후에 남겨진것들(kirschbluten)> <두근 두근 내인생>
  28. 2012.12.18 선택, 바른선택인가 편한선택인가? .. <더 스토리(The words) : 세상에 숨겨진 사랑>
  29. 2012.11.08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 파울로 코엘료 문학동네 2003 03860
  30. 2012.11.05 사랑후에 오는 것들 - 츠지 히토나리 소담출판사 2005 04830 2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모사하는 자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랑은 더욱더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 파라켈수스



1 사랑은 기술인가?


‘사랑은 기술이다’라는 견해를 전재로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물론 사랑은 즐거운 감정이라고 믿고 있다.
..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특별한 태도는 며 가지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13-14

사랑에 대해서 배울 필요가 없다는 태도의 배경이 되는 두 번째 전제는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정(假定)이다. 14

남자에게 매력있는 여자 그리고 여자에게는 매력있는 남자는 탐나는 경품이다. ‘매력’은 보통 인기 있고 퍼스낼리티(Personality) 시장에서 잘 팔리는 품질 좋고 멋진 포장을 의미한다. 15-16

사랑에 대해서는 배울 필요가 없다는 가정에 이르게 하는 세 번째 오류는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 혹은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사랑에 ‘머물러’있는 상태를 혼동하는 것이다. 17

최초의 조치는 삶이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18

우리 문화권의 사람들은 사랑의 경우 명백히 실패하고 있으면서도 왜 사랑의 기술은 도무지 배우려고 하지 않는가? 19



2 사랑의 이론


1. 사랑,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
성적 오르가슴은 황홀경에 의해 발생하는 상태 또는 마약의 효과와 비슷한 상태를 가져올 수 있다. 공동체의 성적 난행 의식은 여러 원시 의식의 일부였다. 도취 경험을 한 사람들은 얼마 동안은 분리감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다. ..
도취 상태가 부족 내의 공통된 관습으로 행해지는 한, 불안감이나 죄책감은 생기지 않는다. 28

비도취적 무노하군에 살고 있는 개인이 선택하는 형태는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이다. 사회적으로 정형화된 해결에 참여하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은 죄책감과 후회로 괴로워한다. 알코올이나 마약에 피난함으로써 분리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도취 상태가 지나가버리고 나면 그들은 더욱 심한 분리감을 느끼며, 더욱 자주, 더욱 강렬하게 알코올이나 마약에 의존하게 된다.
성적 도취를 해결책으로 삼는 경우는 이와는 약간 다르다. 성적 도취는 어느 정도 분리감을 극복하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형태이며 고립 문제에 대한 부분적 해답이 된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분리 상태를 해결하지 못하는 많은 개인의 경우, 성적 오르가슴 추구는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과 별로 다를 바없는 기능을 떠맡게 된다. 이것은 분리에 의해 생긴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절망적 노력이며, 결과적으로 분리감을 더욱 증대한다.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한순간을 제외하고는, 두 인간 사이의 간격을 좁혀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29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등의 의미는 달라졌다. 이 사회에서 평등이라는 말은 자동 인형의 평등, 개성을 상실한 인간들의 평등을 말한다. 오늘날 평등은 인체성보다는 오히려 동일성을 의미한다.
..
평등을 추구하는 이러한 경향에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해서 기만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차이를 제거하려는 경향의 일부이다. 33

현대 사회는 인간에게 대집단 속에서 마찰 없이 원활하게 일하도록 서로 동일한 원자적(原子的) 인간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몯두 동일한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각기 자신의 욕망에 따르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현대의 대량 생산이 상품의 규격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사회적 과정은 인간의 표준화를 요구하고 이러한 표준화를 ‘평등’이라고 한다.
일치에 의한 합일은 강렬하지도 않고 난폭하지도 않다. 이러한 합일은 냉정하고 관례에 따라 지시되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때로는 분리 상태에서 생기는 불안을 진정시키기에 불충분하다. 34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어떤 종류의 합일에 대해 말하는지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존의 문제에 대한 신중한 해답으로서 사랑을 말하고 있는가, 또는 ‘공서적(共棲的) 합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랑의 미숙한 형태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앞으로 나는 전자의 의미로만 사랑이라는 말을 쓰겠다. 37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는 복종, 또는 임상적 용어를 사용한다면 피학대 음란증(마조히즘, masochism)이다.
..
공서적 융합의 ‘능동적’ 형태는 지배, 혹은 피학대 음란증에 대응되는 심리학적 용어를 사용하면 가학성 음란증(사디즘, sadism)이다. 38-39

공서적 합일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
우리가 사랑을 활동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활동’이라는 말의 애매한 의미 때문에 난점에 봉착한다. 이 말의 현대적 용법에서 ‘활동’이라는 말은 에너지를 소비하여 기존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행위를 의미한다. 40

활동에 대한 또 하나의 개념은 외부적 변화가 일어났든, 일어나지 않았든 인간의 타고난 힘을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41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42

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
남성 성 기능의 절정은 준다는 데 있다. 남성은 자기 자신을, 자신의 성기를 여자에게 준다. 오르가슴은 순간에 남자는 정액을 여자에게 준다. 그는 능력이 있는 한, 정액을 주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여자의 경우, 비록 약간 더 복잡하기는 하지만, 사정은 다르지 않다. 여자는 그녀의 여성으로서의 중심을 향해 문을 열어준다. 받아들이는 행위에서 그녀는 주고 있는 것이다. 주는 행위가 불가능하다면, 받기만 한다면, 그녀는 불감증이다. 42-44

준다고 하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 영역이 아니라 이간적인 영역에 있다. 44-45

마르크스는 ..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은 사랑으로만, 신뢰는 신뢰로만 교환하게 될 것이다. 예술을 감상하려 한다면 당신은 예술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을 갖고 싶다면, 당신은 실제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발전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신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관계를 당신의 의지의 대상에 대응하는, 당신의 ‘현실적이고 개별적인’ 생명의 분명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사랑을 일깨우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곧 당신의 사랑이 사랑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만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생명의 표현’에 의해서 당신 자신을 ‘사랑받는 자’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능한 사랑이고 불행이 아닐 수 없다.” 46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 여자를 본다면, 우리는 그녀가 꽃을 ‘사랑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이다.” 이러한 적극적 관심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 47

보호와 관심에는 사랑의 또 하나의 측면, 곧 ‘책임’이라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49

만일 사랑의 세 번째 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할 것이다.
존경은 이 말의 어원(repicere=바라보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49-50

어떤 사람을 존경하려면 그를 잘 ‘알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50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침투하는 것이고, 이러한 침투를 통해 알려고 하는 나의 욕망은 합일에 의해 만족을 얻는다. 융합하는 행위를 통해 나는 당신을 알고 나 자신을 알고 모든 사람을 안다. .. 우리의 사고(思考)가 제시하는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합일의 경험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을.
..
사랑은 지식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며, 사랑은 합일의 행위를 통해 나의 물음에 대답한다. 사랑하는, 곧 나 자신을 주는 행위에서, 다른 사람에게 침투하는 행위에서 나는 나 자신을 찾아내고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는 우리 두 사람을 발견하고 인간을 발견한다. 53-54

나는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아야 한다. 인간을 객관적으로 알게 될 때에만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인간의 궁극적 본질을 알 수 있다. 54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성숙한 인간, 곧 자신의 힘을 생산적으로 발휘하고 스스로 일한 결과만을 차지하려고 하고, 전지전능이라는 자아 도취적 꿈을 포기하고, 오직 순수한 생산적 활동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내적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이다.
지금까지 나는 인간의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 사랑, 합일에의 열망을 실현하는 사랑에 대해 말했다. 55-56


2.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무조건적이다. 67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이 있는 사랑이다. 69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성숙한 사람은 외부에 잇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으로부터 해방되어 내면에 그 모습을 간직한 사람이다. 71

정신적 건강과 성숙의 기반은 어머니 중심의 애착에서 아버지 중심의 애착으로의 발달, 그리고 이러한 애착의 궁극적 종합에 있다. 72


3. 사랑의 대상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포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다. 74

사랑은 활동이며 영혼의 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단지 올바른 대상을 찾아내는 것만이 필요하며, 그렇게 되면 그 밖의 일은 모두 저절로 될 것이라고 믿는다. 74-75

- 형제애
형제애는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의 특색은 배타성이 없다는 것이다. 76

형제애는 동등한 자 사이의 사랑이다. 77

무력한 인간에 대한 사랑, 가난한 자와 이방인에 대한 사랑은 형제애의 시작이다. 77

- 모성애
모성애는 어린아이에게 살려고 하는 소망뿐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을 천천히 길러준다. 이러한 사상은 성서의 다른 이야기에서도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약속된 땅(땅은 언제나 어머니의 상징이다)은 ‘젖과 꿀이 넘쳐흐른다’고 묘사되고 있다. 젖은 사랑의 첫 번째 측면, 곧 보호와 긍정적 측면의 상징이다. 꿀은 삶의 달콤함, 삶에 대한 사랑, 살아 있다는 행복감을 상징한다. ..
꿀을 줄 수 있으려면 어머니는 ‘좋은 어머니’일 뿐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어야 한다. .. 이 두 태도는 어린아이의 퍼스낼리티 전체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실제로 어린 아이-그리고 어른- 사이에서 ‘젖’만 먹은 자와 ‘젖’과 ‘꿀’을 먹은 자를 가려낼 수 있다. 78-79

- 성애
성애는 완전한 융하브 곧 다른 한 사람과 결합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성애는 본질적으로 배타적이며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성애는 아마도 현존하는 사랑의 형태 중 가장 기만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83

- 자기애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은 양자택일적인 것이 아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될 것이다. 91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고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원하며, 주는 데서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받는 데서만 기쁨을 느낀다. 그는 거기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만 외부 세계를 본다. 그는 다른 사람의 욕구에는 흥미가 없고 다른 사람의 존엄성과 통합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유용성을 기준으르 모든 사람과 사물을 판단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랑할 줄 모른다. 92-93

자기애에 대한 이러한 사상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다음과 같은 말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며,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96

- 신에 대한 사랑
신이 아버지인 한, 나는 어린아이다. 나는 전지전능에 대한 자폐적 욕마응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나는 아직도 인간으로서의 나의 한계, 무지, 무력함을 깨닫는 객관성을 획득하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나를 구해주고 지켜주고 나에게 벌을 주는 아버지, 내가 복종할 때 나를 좋아하고, 내가 찬미하면 기뻐하고, 내가 복종하지 않으면 화를 내는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인적 발달에서 이러한 유아적 단계를극복하지 못한 것은 매우 분명한 이라며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신에 대한 신앙은 도움을 주는 아버지에 대한 신앙-유치한 환상-이다. 몇몇ㅊ 위대한 인류의 스승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종교의 개념을 극복했어도 이것은 아직도 종교의 지배적 형태이다. 105-106

인류 역사에서 우리는 동일한 발달을 보고 또 예상할 수 있다. 곧 어머니인 여신(女神)에 대한 무력한 애착으로서의 신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여, 아버지인 남신(男神)에 대한 순종적인 애착을 거쳐, 신이 이미 외부적 힘이 아니고 인간이 사랑과 정의의 원리를 자기 자신 속에 흡수하여 인간과 신이 일체가 되는 성숙한 단계에 이르고, 마침내 시적, 상징적 의미로서만 신에 대해 말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찰에서 신에 대한 사랑과 어버이에 대한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떤 사람이 어머니나 집단이나 민족에 대한 근친애적 애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또는 상을 주고 벌을 주는 아버지, 또는 어떤 다른 권위에 대한 유치한 의존 상태를 유지한다면, 그는 신에 대한, 더욱 성숙한 사랑을 발달시킬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종교는 신을 모든 일로부터 보호해주는 어머니 또는 상벌을 주는 아버지로서 경험하는 초기 단계의 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 종교에서 우리는 초기이 가장 원시적인 발달 단계에서 최고의 발달 단계에 이르리까지 모든 단계가 현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18-119



3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


서양 생활에 대한 객관적 관찰자들은 누구든지 사랑-형제애, 모성애, 성애(性愛)-이 비교적 희귀한 현상이며 여러 가지 형태의 사이비 사랑-이것은 사랑의 붕괴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형태다-이 사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123

자본은 노동력을 지배한다. 생명이 없는 축적된 물품이 살아 있는 인간의 힘, 곧 노동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시작된 아래로 자본주의의 기본 구조다. .. 자본주의가 발달한 결과, 우리는 자본이 점점 더 중앙집권화하고 직중화하는 가정을 목격하고 있다. 1244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은 노동의 조직화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방법에 있다. 노도잉 철저하게 분업화되고 광범하게 집중화된 기업에서 노동은 조직화되고, 개인은 개성을 잃고 소모적인 기계의 톱니바퀴가 된다. 125

근대 자본주의는 원활하게 집단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 더욱 많이 소비하는 사람들, 그 취미가 표주노하되고 쉽게 영향받고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근대 자본주의는 권위나 원리, 또는 양심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즐거이 명령에 따르고 그들에게 기대되는 일을 하고 마찰 없이 사회 기구에 순응하는 사람들, 폭력 없이 관리되고 지도자 없이 인도 되고 목적 없이 - 좋은 것을 만들어내고 계속 움직이고 기능을 다하고 곧바로 나간다는 목적 이외에는 -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현대인은 자기 자신, 동료,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는 상품으로 변하고, 현재의 시잘 조건 아래서 최대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투자로서 자신의 생명력을 경험한다. 인간 관계는 근본적으로 소외된 자동 기계 같은 관계가 되고, 각자는 군중과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따라서 사상이나 감동이나 행동에서 각자의 차이가 없다.
모든 사람이 되도록이면 타인들과 함께 있으려고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아주 고독하며, 분리 상태가 극복되지 못했을 때 필연적 결과로 생기는 깊은 불확실성과 불안, 죄책감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 문화는 사람들이 이러한 고독을 의식하고 깨닫지 않게끔 도와주는 여러 가지 완화제를 제공한다. 우선 제도화된 기계적 작업의 엄밀한 규격화,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 곧 초월과 합일에 대한 갈망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노동의 규격화만으로는 이러한 일에 성공하지 못하므로, 인간은 오락의 규격화에 의해, 곧 오락산업에 의해 제공되는 음향이나 구경거리를 수동적으로 소비함으로써, 더 나아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사고 이것을 곧 다른 것과 교환하는 데 만족함으로서 자신의 의식되지 않는 정말을 극복한다. 현대인은 사실상 올더스 레너드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그려놓은 상(像)에 가깝다. 곧 잘 먹고 잘 입고 성적으로도 만족하지만 자아가 없고 가장 피상적인 접촉을 제외하고는 동료들과 어떠한 접촉도 없는, 그들은 헉슬리가 다음과 같은 말로 간결하게 표현한 슬로건에 의해 지도되고 있다. “개인이 감정을 가질 때, 공동체는 비틀거린다.” 또는 “오늘 즐길 수 있는 일을 내일로 연기한지 말라.” 또는 절정에 달한 선언이지만 “오늘날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
오늘날 인간의 행복은 ‘즐기는 데’ 있다. 즐긴다는 것은 ‘만족스러운 소비’를 말하고 상품, 구경거리, 음식, 술, 담배, 사람들, 강의, 책, 영화 등을 ‘입수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이 소비되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것이다. 세계는 우리의 식욕에 대한 하나의 커다란 대상으로서 커다란 사과, 커다란 병, 커다란 유방이 된다. 우리는 젖을 빠는 자이고, 영원히 기대하는 자이고, 희망에 가득 찬 자이다. 그리고 영원히 실망하는 자이다. 우리의 성격은 교환하고 받아들이고 싸게 팔아버리고 소비하는 데 적합하다. 모든 것은, 물질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대상도, 교환과 소비의 대상이 된다.
사랑에 관한 한 상황은, 당연한 일이지만, 현대인의 이러한 사회적 성격과 대응된다. 126-128

사랑은 성적 만족의 결과가 아니며, 성적 행복은 오히려-심지어 이른바 성의 기교에 대한 지식조차도-사랑의 결과다. 130

자본주의 정신은 절약을 강조하는 데서 낭비의 강조로, 경제적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자기 억제로부터 끊임없이 확대되는 시장을 바탕으로, 그리고 불안해하고 자동 기계화한 개인을 위한 주된 만족으로서의 소비로 변했다. 어떠한 욕망이든 충족을 지연하지 말라는 것이 모든 물질적 소비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적 분야에서도 주류가 되었다. 134

두 사람이 서로 그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위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 147

현대인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동료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현대인의 주요 목표는 자신의 기술, 지식 그리고 자기 자신 곧 ‘인격의 패키지 상품’을 다른 사람-역시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과 공정하고 유익하게 교환하는 것이다. 150




4 사랑의 실천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든지 자기 혼자서 몸소 겪어야 하는 개인의 경험이다. 155

기술의 실용에는 ‘훈련’이 요구된다. 훈련된 방식으로 이 기술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 기술에 숙달되지 못할 것이다. 156

사실 현대인은 일을 떠나서는 자기훈련의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하고 있다. 156-157

‘정신 집중’이 어떤 기술을 습득하는 데 필수조건이라는 것은 거의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자기훈련 이상으로, 정신 집중도 우리 문화에는 드물다. 157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자기 홀로 있기 어렵다는 점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세 번째 요소는 ‘인내’이다. .. 빠른 결과만을 바란다면, 우리는 결코 기술을 배우지 못한다. 158

끝으로, 어떤 기술을 배우는 조건은 기술 습득에 대한 ‘최고의 관심’이다. ..
이술을 배우는 일반적 조건에 대해서 한 가지를 더 보충해야겠다. 우리는 말하자면 기술을 직접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기 전에 다른 많은 일들 - 때로는 일견 관계없는 듯한 일들-을 배워야 한다.
목공 기술을 배우는 자는 나무를 깎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피아노 연주를 배우는 자는 음계 연습부터 시작해야 한다. .. 우리가 어떤 기술에 숙달하려면 삶 전체를 이 기술에 바치거나 적어도 이 기술과 관련시켜야 한다. 자기 자신이 기술 훈련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159-160

정신 집중을 배우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독서를 하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않고 홀로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사실상 정신을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사랑의 능력의 불가결한 조건이다. 161

정신 집중이 되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일이나 중요하지 않은 일이나, 우리의 충분한 주목을 받게 되기 때문에 새로운 차원의 현실성을 갖게 된다. 162-163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신을 집중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한다는 뜻이다. ..
정신을 집중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현재에,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 따라서 지금 무엇인가 하고 있으면서 다음에 해야 할일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할 것도 없이 정신 집중은 서로 사랑하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실행해야 한다. 164-165

모든 일에는 (이루어지는) 때가 있다.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하고) 억지로 할 필요가 있다. 165

우리는 ‘자기 자신에 민감하지’ 못하면 정신 집중도 배우지 못한다. 165

우리는 피곤하다는 느낌, 또는 우울하다는 느낌을 알고 피로감에 젖거나 언제나 신변에 따르기 마련인 우울한 생각으로 우울감을 부채질하는 대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왜 나는 우울한가?’라고 묻는다.
조바심이 난다거나 화가 난다거나 백일몽에 잠긴다거나, 그밖의 도피적 행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 자기 자신의 내면으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는-흔히 오히려 직접적으로-왜 내가 불안하고 우울하고 조바심내는가를 말해줄 것이다. 166-167

내가 앞에서 말한 사랑의 본성에 따르면, 사랑을 성취하는 중요한 조건은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아도취적 방향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만을 현실로서 경험하는 방향이다. .. 자아도취의 반대 극은 객관성이다. 이것은 사람들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이고, 이러한 객관적 대상을 자신의 욕망과 공포에 의해 형성된 상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이다. 169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이다. 이성의 배후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겸손한 태도이다. 객관적이라는 것, 곧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한 태도를 갖게 되었을 때, 어린아이로서 꿈꾸고 있던 전지전능의 꿈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사랑은 자아도취의 상대적 결여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사랑은 겸손, 객관성, 이서으이 발달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에 전 생애를 바쳐야 한다. ..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고 한다면, 나는 모든 상황에 객과적이기 위해 노력해야하고 내가 객관성을 잃고 잇는 상황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172

탈피, 탄생, 각성의 이러한 과정은 필수적 조건으로서 한 가지 성질, 곧 ‘신앙’을 요구한다. 사랑의 기술의 실용은 신앙의 실천을 요구한다. ..
합리적 신앙은 근본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확신이 갖고 있는 확실성과 견고성이다. 신앙은 특벼란 믿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퍼스낼리티 전체에 고루 퍼져 있는 성격상의 특징이다. 173

비합리적 신앙은 오직 어떤 귄위자나 대다수의 사람이 그와 같이 말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합리적 사고는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생산적 관찰과 사고에 기초를 둔 독립된 확신에 뿌리박고 있다. 175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성실할 수 있다. ..
사람에 대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의 또 한 가지 의미는 다른 사람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관계된다. 176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교육과 조작이 갈라진다. 교육은 아동이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도와준다.
교육과 빤대되는 것이 조작이며, 조작은 이러한 가능성의 성장에 대한 믿음의 결여, 그리고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억압해야만 비로소 어린아이가 올바르게 되리라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177

합리적 신앙은 우리 자신의 관찰과 사고의 소산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상을 믿고 있다. ..
합리적 신앙의 기반은 ‘생산성’이다. 곧 신앙에 의거해서 산다는 것은 생산적으로 산다는 뜻이다. 178

신앙을 가지려면, ‘용기’, 곧 위험을 무릅쓰는 능력, 고통과 실망조차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필요하다. 179

여론이나 예측하지 못한 몇 가지 사실이 자신의 판단을 무효화하더라도 타인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고수하는 것, 자신의 확신이 인기가 없더라도 자신의 확신을 고수하는 것, 이러한 모든 일에는 신앙과 용기가 필요하다. 180

사랑은 활동이다.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나는 그나 그녀만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적극적 관심을 갖는 상태에 놓여 있다. .. 잠자는 것만이 비활동에 적합한 상태이다. 각성 상태는 게으름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상태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놓여 있는 역설적 상태는 깨어 있을 때도 반쯤 잘들어 있고, 잠잘 때 또는 잠들고 싶어할 때도 반쯤 깨어 있다는 것이다. 182

모든 활동은 경제적 목적에 종속하고, 수단은 목적이 되었다. 인간은 잘 먹고 잘 입고 있지만 각별히 인간적인 자신의 자질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조금도 궁극적 관심을 갖지 못한 자동 인형이다. 187

인간이 경제적 기구에 이바지하지 않고 경제적 기구가 인간에게 이바지해야 한다. 인간은 기껏해야 이익을 나누어 갖는 데 그치지 말고 경험을 나누고, 일을 나누어 가질 수 있어야 한다. 188




옮긴이의 말

우리는 사랑의 고갈 현상을 야기한 외부적 원인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에 앞서 우리의 내면에서 사라져버린 것,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226

프롬이 지적하고 있듯이 현대 사회가 시장의 교환 원칙에 지배받고 있고, 따라서 인간의 가치도 결국 경제적 교환 가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평가받지 못하고 그 사람의 이용 가치에 따라 평가되는 현실은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지혜도 ‘돈’으로 사고팔 수 있고, 더구나 ‘사랑’ 따위는 이제 감각적 쾌락 내지는 매음(賣淫])으로 전락해버린 현실은 개탄의 영역을 넘어서 있지 않은가.
단적으로 이것이 인간의 사랑을 고갈시킨 외부적 원인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사랑의 알리바이는 되지 못한다. 227

우리가 사랑하려고 애쓰면서도, 참으로 나를 주는 사랑을 하고 싶으면서도 이러한 사랑에 실패하는 원인은 기술의 미숙성에 있다.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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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낭만주의


결혼의 시작은 청혼이 아니고, 심지어 첫 만남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 사랑에 대한 생각이 움틀 때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맨 처음 영혼의 짝을 꿈꿀 때다. 12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심산할 만큼 감동적인 최초의 순간들에 잠식당하고 기만당해왔다. 우리는 러브스토리들에 너무 이른 결말을 허용해왔다.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시작하는지에 대해서는 과하게 많이 알고, 사랑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모하리만치 아는 게 없는 듯하다. 27


그(라비 칸)와 커스틴은 결혼을 하고, 난관을 겪고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28


사랑이란 우리의 약점과 불균형을 바로잡아줄 것 같은 연인의 자질들에 대한 감탄을 의미한다 사랑은 완벽을 추구한다. 30


사랑은 우리의 혼란스럽고 창피하고 당황스러운 부분을 우리의 연인이 다른 누구보다, 어쩌면 우리 자신보다 훨씬 잘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 드러난 순간 최고조에 달한다. 이들은 우리를 간파해내고, 신뢰하고 나눌 줄 아는 우리의 능력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알아보고 공감해주고 용서해준다. 당황스럽고 난처한 영혼에 대한 연인의 통찰력에 바치는 감사의 배당금이다. 35-36


성욕은 처음에는 단지 생리적 현상, 호르몬을 깨우고 신경 말단 을 자극한 결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실은 감각적이라기보다 관념적이다. 무엇보다 받아들여졌다는 생각, 외로움과 부끄러움이 끝날 거라는 기대와 관련이 있다. 41


성 해방에 관한 온갖 담론에도 불구하고, 성을 둘러싼 비밀과 어정도의 부끄러움은 사실 늘 그래왔듯이 지금도 존재한다. 우리는 여전히 누구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한다. 부끄러움과 충동 억제는 단지 우리의 조상들과 절제의 종교들이 ㅇ매하고 불필요한 이유로 붙들고 있었던 것들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상수로 존재한다. 바로 그 때문에, 낯선이가 우리의 방어를 풀고, 한때 몰래 죄를 짓는 마음으로 갈망했던 것과 거의 동일한것을 바랄 수 있게끔 허하는 (일생에 몇 번뿐일지 모를)그 진기한 순간들이 그렇게 큰 힘을 갖게 된다. 44


우리는 흥분이라 부르지만, 사실 그 말이 암시하는 바는 드디어 우리의 내밀한 자아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 연인이 나의 본모습에 드려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격려하고 인정하는 족을 선택했다는 발견의 기쁨이다. 45


역사가 시작된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람들은 논리적 이유로결혼을 했다. .. 합리적 결혼은 어떤 진실한 관점엣도 전혀 합리적이지 않았으며, 자주 편의주의적이고, 편협하고, 속물적이고, 착취적이고, 모욕적이었다. 이를 대체한 것 - 감정에 의거한 결혼 - 이 그 존재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면제받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57


결혼이 실용적인 면에서 '불필요하다'는 것은 오히려 결혼에 더욱 감정적인 설득력을 부여한다. 결혼했다는 것은 조심성, 보수적 경향, 소심함과 연관 지을 수 있지만, 결혼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더 무모하고 그래서 호소력이 더 큰 낭만적 제안이다. 58


우리는 사랑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우리가 추구하는 건 친밀함이다. 우리는 유년기에 아주 익숙했던 감정들 그대로를 성년의 관계 안에서 재현하길 바라고, 그 감정은 다만 애정과 보살핌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렸을 때 맛본 사랑이란 보다 파괴적인 다른 역학들과도 얽혀 있다. 예를 들어, 통제 불능의 어른을 도와주고 싶은 느낌, 아빠나 엄마가 다정하지 않다거나 그들의 분노가 두렵다는 느낌 또는 철없는 소원을 자유롭게 표현할 만큼 집안 분위기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느낌과도 뒤얽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인이 된 우리가 어떤 후보군을 그들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조금은 너무 옳기 때문에 - 왠지 지나치게 안정적이고 성숙하고 분별 있고 믿음직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 거부하게 되는 것도 얼마나 필연적인가. 심정적으로 이러한 올바름은 이질적이고 누군가에게만 특별히 주어진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보다 자극적인 사람을 쫓는다. 그들과 함께하는 삶이 더 조화로울 것이라는 믿음에서가 아니라, 그 삶에서 겪을 좌절의 양식이 안심하리만치 친밀할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기 때문이다. 63-64


결혼 :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 무한히 친절한 도박. 65




2부 그 후로 오래오래


낭만주의는 직관의 합의를 중시하는 철학이다. 진실한 사랑에서는 말로 설명하거나 글로 쓰느라 수고할 필요가 없으며, 두 사람이 하나가 되면 (마침내) 둘 다 세계를 완전히 같은 눈으로 보는 경이로운 상호 감정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72


우리는 삶의 중요한 영역들(국제무역, 이민, 종양학 등)에서는 복잡성을 감안하고, 이견을 수용하고 참을성 있게 해결해나간다. 그러나 가정생활에서만큼은 치명적일 정도로 안이한 가정을 세우곤 하며, 이 때문에 협상이 오래 걸리는 데 대해 날카로운 반감이 생긴다. 76


작은 쟁점들은 사실 단지 필요한 관심을 받지 못한 큰 쟁점들이다.

그가 자신이 몰두하고 실망하는 바를 더 예리하게 파악하는 살마이었다면, 이불 밑에서 (실내 온도와 관련하여)이렇게 설명했을지 모른다. "당신이 한겨울에 창문을 열어놓고 싶다고 말할 때면 난 두렵고 속이 상해. 신체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인 이유에서 말이야. 앞으로 소중한 것들이 짓밟힐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든. 그럴 때면 당신에겐 내가 벗어나고 싶어 하는 가학적인 금욕주의와 너무 왕성한 용기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어떤 잠재의식의 차원에서 당신이 진짜로 원하는 건 상쾌한 공기가 아니라, 당신 특유의 매력적이지만 무뚝뚝하고 합리적이고 사람을 위축시키는 방법으로 나를 창밖으로 밀어내는 것일까 두려워."

이와 마찬가지로 커스틴도 시간을 엄수하려는 자신의 태도를 면밀히 들여다봤다면,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에 라비에게(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운전기사에게) 가슴 뭉클한 연설을 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일찍 출발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 건 결국 공포 증상이야. 그게 내가 무질서하고 놀라운 일이 가득한 세계에서 불안과 정체불명의 지독한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 개발해낸 기술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권력을 갈망하는 거나 내가 시간을 지키고 싶어 하는 거나 매한가지야. 안전의 욕구와 다르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걸 고려하면, 비록 조금이지만 그 조금이라도 이해되지 않아? 온전한 정신을 지키려고 하는 나만의 미친 방법인 거야."

이렇게 각자 욕구의 맥락을 살피고 서로가 상대방의 믿음에 깔린 원인을 이해했다면 새로운 융통성이 뒤따랐을지 모른다. 78-79

협상을 위한 인내심이 없으면 비통해진다. 원인도 잊은 채 화가 나는 것이다. 잔소리를 하는 쪽은 굳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이야기를 끝내려고만 하고, 잔소리를 듣는 쪽은 자신의 반발이 합리적 반론이나 그도 아니면 가엾고 용서받을 만한 성격상의 결함에서 나온 것임을 더는 설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양 당사자는 그들에게 똑가팅 지루하기만 한 이 문제가 그냥 지나가기만을 바란다. 79


우리는 다른 커플들에 비해 우리 커플이 훨씬 나쁜 일들을 겪는다고 상상한다. 불행할 뿐 아니라 우리의 불행이 대단히 드물고 기형적인 것이라 착각한다. 더 나아가 종국에는 우리의 싸움들이 기본적으로 전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결혼 생활의 증거라기보다는, 우리가 뭔가 드물고 근본적인 실수를 범한 징표라고 믿게 된다. 81-82


이 둘은 두 개의 믿을 만한 치유책 덕에 지속적인 비통함에서 벗어난다. 첫째는 나쁜 기억력이다. 목요일 오후 4시쯤 되니 전날 저녁에 택시에서 무엇 때문에 격노했는지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별 이유 없이 일찍 퇴근해야겠느냐는 그의 말에 커스틴이 경솔하고 달갑지 않게 반응한 것과 그녀의 설핏 경멸하는 듯한 말투와 관련이 있다는 건 알지만 불쾌함의 정확한 윤곽은 이미 초점이 흐려졌다. 이는 아침 6시에 커튼을 뚫고 들어온 햇살, 라디오에서 재잘거리는 스키 리조트에 관한 정보, 가득 찬 이메일 수신함, 점심을 먹으며 주고받은 농담, 회의 준비와 웹사이트 디자인에 관한 두 시간짜리 미팅 덕분이다. 이것들이 합쳐져 성숙하고 솔직한 대화를 한 것 못지않게 둘 사이를 거의 바로잡는 효과를 낸다.

두번째 치유책은 보다 추상적이다.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를 생각하면 너무 오랫동안 분노를 안고 가기가 어렵다. 이케아 사거 ㄴ이후 몇 시간이 흐른 오후 나절에 라비와 커스틴은 에든버러 남동쪽에 있는 레머뮤어 구릉으로 오래전에 계획한 산책을 나선다. 출발할 때는 둘 다 말이 없고 시큰둥하지만, 자연이 동정심이 아니라 숭고한 무관심을 통해 그들을 서로에 대한 적개심에서 서서히 해방시킨다. 82-83


토라짐의 핵심에는 강렬한 분노와 분노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려는 똑같이 강렬한 욕구가 혼재해 있다. 토라진 사람은 상대방의 이해를 강하게 원하면서도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설명을 해야 할 필요 자체가 모욕의 핵심이다. 만일 파트너가 설명을 요구하면, 그는 설명을 들을 자격이 없다. 덧붙이자면, 토라짐의 대상자는 일종의 특권을 가진다. 다시 말해, 토라진 사람은 우리가 그들이 입 밖에 내지 않은 상처를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를 존중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토라짐은 사랑의 기묘한 선물 중 하나다. 86-87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토라진 사람의 분노를 감당해야 하는 특별한 표적이 되었을 때에도 온화하게 웃는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진짜 메시지는 지극히 퇴행적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느 ㄴ아직 젖을 먹는 아기이니, 지금 당장 나의 부모가 되어줘야 해. 당신은 무엇이 나를 아프게 하는지를 정확히 헤아려주어야 해. 내가 아기였을 때, 사랑에 대한 관념들이 처음 형성되었을 때, 사람들이 그래주었듯이 말이야."

토라진 연인게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호의는 그들이 불만을 아기의 떼쓰기로 봐주는 것이다. 상대방을 어리게 취급하면 거만하게 윗사람 행세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만연한 탓에 우리는 성숙한 자아 너머의 것을 바라보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내면의 아이를 만나는 - 그리고 용서해주는 - 것이 가끔은 가장 큰 특권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는다. 89-90


사랑이 있을 때에만 섹스가 바람직할 수 있다는 견해는 기독교가 서양 세계에 남긴 가르침이다. 이 종교는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몸을, 눈길을 아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낯선 사람을 성적으로 생각하면 사랑의 참된 정신을 저버리고 신과 자신의 인간성을 배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감동적이기도 하고 무시무시하기도 한 그런 가르침들은 한때 그 토대를 이웠던 믿음이 쇠한 지금에도 완전히 증발하지 ㅇ낳았다. 확고했던 유신론적 근거는 사라졌지만 낭만주의 이데올로기가 그 가르침들을 흡수해, 사랑에는 정절이 내포되어 있다는 개념에 여전히 고귀한 지위를 부여했다. 세속의 세계 역시 일부일처제를 헌신적인 감정과 고결함을 표하는 필요하도고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선언해왔다. 우리 시대는 지나간 종교의 중요한 경향, 즉 참된 사랑에는 완전한 정절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고스란히 유지해온 것이다. 93-94


우리 시대의 분위기는 자유분방하지만, '기이함'과 '정상'의 차이가 사라졌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순진한 생각이다. 그 차이는 언제너처럼 확고하며, 사랑과 섹스의 규범적 한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즉시 을러서 경계선 안으로 밀어 넣는다. 요즘은 짧은 반바지를 입거나 배꼼을 노출하거나 동성과 결혼하거나 재미로 포르노를 좀 보는 것도 '정상'으로 간주하지만, 진실한 사랑은 단혼제에 있고 욕망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믿는것 역시 여전히 확고부동한 '정상'이다. 이 근본 원칙에 반기를 들려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가장 혹독하고 수치스러운 낙인이찍힐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변태라고 말이다. 99


의사 전달을 잘하는 기본 요건은 자신의 성격 중 더 문제가 되거나 더 특이한 면이 있더라도 그 때문에 당황하지 않는 능력이다. 의사 전달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분노나 성적 취향 또는 일반적이지 ㅇ낳고 거북할 수 있는 자기 의견에 대해 자신감을 잃거나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고 숙고할 줄 안다. 그들이 명료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대체로 원만한 사람이라는 대단히 가치있는 인식을 길러낸 덕분이다. 그들은 적정한 수준의 인내심과 상상력을 발휘하며 자신을 표현할 수단만 갖추고 있다면 다른 살마의 호의를 받을 만하고 또한 받을 수 있다고 능히 믿을 만큼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의사 전달을 잘하는 이런 사람은 어릴 적, 모든 면에서 적절하고 완벽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도 아이를 사랑할 줄 아는 보호자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축복을 누렸음이 ㅣ분명하다. 그런 부모는 자식이 - 적어도 한동안은 - 가끔 이상하거나, 난폭하거나, 화를 잘 내거나, 심술궂거나, 기이하거나, 슬퍼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수용할 줄 알고 그래도 가족의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 자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줄 안다. 그렇게 하여 자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도 솔직히 고백하고 대화할 수 있는 용기의 원천을 심어준다. 100-101


잘 들어주는 사람은 잘 말하는 사람 못지않게 드물거나 중요하다.잘 들어주는 사람 역시 특별한 자신감이 그의 비결이다. 이는 어떤 확고한 가정에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는 정보로 인해 경로를 이탈하거나 그 무게에 무너져 내리지 않을 수 있는 수용력을 말한다. 잘 들어주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라면 마음속에 얼마간 담아둘 혼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미 경험을 통해 모든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03


우리는 의식에서 거의 지워져버린 위기들이 오래전에 만들어놓은 대본에 따라 행동할 때가 너무나 많다. 지금은 기억에서 사라져 폐물이 된 논리에 따르고, 우리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밝히지 못할 ㅢ미를 좇는다. 우리는 우리가 진정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있고, 정확히 어떤 사람을 상대하고 있으며, 앞에 있는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른다. 곁에 두기에 약간 고달픈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112-113


마음이 전이에 말려들면 우리는 사람이나 상황을 믿어주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불안에 빠져 즉시 과거가 지정해놓은 최악의 결론으로 나아간다. 애석하게도 우리가 과거의 혼란에 의거하여 지금 벌어지는 일을 해석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은 초라하고 꽤 굴욕적인 일이 느껴진다. 우리의 파트너와 실망스러운 부모, 남편이 잠시 지체하는 것과 아버지의 영원한 유기, 더러운 빨랫감 몇 개와 내전의 차이를 설마 모르겠는가 하는 것이다.

감정을 그 출발점으로 송환하는 일은 사랑의 가장 섬세하고도 필요한 과제다. 전이의 위험성을 인정하면 짜즈오가 비난보다 공감과 이해에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 두 사람은 갑자기 폭발하는 불안이아 적대감이 항상 그들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그러니 그런 폭발에 매번 분노나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대응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격분과 비난이 동정심에게 자리를 내준다. 114-115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116


사랑의 모든 가정들 중 아주 얄팍하리만치 불합리하고 미숙하고 개탄스럽지만 그럼에도 가장 흔히 볼 수있는 것은 우리가 사랑을 서약한 사람이 우리의 감정적 실존의 중심일 뿐 아니라 - 그 로가로서, 또한 대단히 이상하고 객관적으로 비상식적이고 아주 부당한 방식으로 -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다 그에게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듯 사랑에는 기이하고 병적인 특권이 있다. 122


우리가 불만 목록을 노출할 수 있는 사람, 인생의 불의와 결함에 대해 누적된 모든 분노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 사람 탓을 하는 건 당연히 부조리 중에서도 부조리다. 하지만 이렇게만 본다면 사랑의 작동 법칙을 잘못 이해한 셈이다. 우리는 정말로 책임이 있는 권력자에게 소리를 내지를 수가 없기에 우리가 비난을 해도 가장 너그럽게 보아주리라 확신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 주변에 있는 가장 다정하고, 가장 동정 어리고,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 즉 우리를 해칠 가능성이 가장 적으면서도 우리가 마구 소리를 치는 동안에도 우리 곁에 머물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에게 불만을 쏟아놓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퍼붓는 비난들은 딱히 이치에 닿지 않는다. 세상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그런 부당한 말들을 발설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난폭한 비난은 친밀함과 신뢰의 독특한 증거이자 사랑 그 자체의 한 증상이고, 제 나름대로 헌신을 표현하는 비꾸러진 징표다. 분별 있고 예의 바른 말은 모르는 사람에게 할 수 있지만, 밑도 끝도 없이 무분별하고 터무니없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믿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뿐이다. 123-124


혹독한 수업은 학생들에게 그들의 교사가 단지 미쳤거나 성질이 나쁜 것이고 그래서 그 자신들은 논리상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는 안일한 생각에 기댈 여지를 준다. 터무니없이 극단적인 판정을 들으면, 우리는 파트너가 악랄하지만 한편으로는 약간이나마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깨끗이 지워버리고 위안을 얻는다.

감정에 치우쳐 우리는 배우자의 부정적인 평가와-조금이라도 비교할 만한 요구가 지워져 있지 않은-친구 및 가족들의 격려하는 어조를 대비시킨다. 사랑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사랑과 가르침의 관계를 바라보는 유용하고도 시류와 다른 관점을 제안한다. 그들이 보기에 사랑은 무엇보다 먼저 타인의 훌륭한 점을 찬탄하는 감정, 고결한 특질과 대면했을 때 느껴지는 흥분이었다.

그 결과 사랑의 깊어짐은 항상 보다 고결해지는 방법-화를 잘 참거나 관대해지는 법, 탐구심을 키우거나 더 용감해지는 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욕구를 수반하게 됐다. 성실한 연인이라면 상대방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런 수용은 관계의 목적을 나태하고 비겁하게 통째로 배신하는 행위였다. 그런고로 우리 자신을 향상하고 다른 이들에게 가르쳐줄 것들은 항상 존재할 터였다.

이 고대 그리스의 렌즈를 통해 본다면 연인이 상대방의 성격으로 인해 불행하서나 불편한 점을 지적해도 그가 사랑의 정신을 포기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파트너의 자아를 더 발전시키려는, 사랑의 본질에 아주 충실한 일을 하려 했다고 축하받아야 한다. 현재보다 더 진보한 세계, 그리스식 사랑의 이상에 조금 더 깨어 있는 세계에서는 우리가 어떤 것을 알려주고자 할 때에 어색함과 두려움과 공격성이 약간 줄어들고 피드백을 받을 때에도 다소 덜 호전적이고 덜 예민해질 것이다. 관계 안에서 교육이란 개념이 불필요하게 섬뜩하고 부정적이었던 함의를 벗게 될 것이다. 신뢰하고 협력하는 분위기에서는 두 프로젝트-가르치기와 배우기, 상대방의 결점을 환기하고 상대방의 비판을 허용하기-가 결국 사랑의 참된 목적에 충실하다는 점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137-138




3부 아이들


아이들은 결국 나이가 몇 배나 많은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선생이 되어-그들의 철저한 의존서으 자기중심주의, 연약함을 통해-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랑에 대한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한다. 이 사랑은 상호 호혜를 강렬히 원하지도 성급하게 후회하지도 않고, 타인을 위해 자아를 초월하는 것만을 진정한 목표로 한다.  146


아이들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은 봉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사랑이란 말은 갈수록 부정적 의미들을 내포하게 되었다. 개인주의와 자기충족에 빠진 문화는 만족과 타인의 부름에 응하는 행동을 쉽게 등치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타인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매혹하고 위로해주는 능력에 대한 보답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데에 익숙하다. 그러나 아기는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없다. 더 자란 아이들이 가끔 큰 불안을 느끼며 판단을 내리듯이, 아이들은 아무 '요점'이 없고, 이것이 아이들의 요점이다. 아이들은 그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도와줄 위치에 있기 때문에-어떤 보받도 기대하지 않고 베푸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우리는 장점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약점에 대한 동정, 즉 인류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으로 존재하고 한때 나 자신의 것이었고 결국 나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오는 그 취약성을 동정하는 사랑으로 인도되낟. 자율과 독립성을 늘 지나치게 강조하고 싶어 하는 와중에 이 무기력한 피조물은 아무도 결국은 '자력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인생은-문자 그대로-사랑하는 능력에 의지한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남의 종이 되는 것이 굴욕이 아니라 정반대라는 것을 배운다. 나 자신의 왜곡되고 만족을 모르는 본성에 끊임없이 응해야 하는 피곤한 의무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 자신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목표를 부여받았다는 위안과 특권을 알게 된다.  147-148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는 어려운 관례다. 본질상 부모의 사랑은 그 사랑을 베풀기 위해 쏟은 노력을 감추는 작용을 한다. 부모의 사랑은 받는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의 복잡한 사정과 슬픔을 감추고, 부모가 사랑의 이름으로 다른 이익, 친구, 관심사를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를 드러내지 않느다. 부모의 사랑은 무한한 너그러움으로 이 작은 존재를 한동안 우주의 중심에 놓는다. 부모의 사랑이 그토록 강한 것은 아이가 괴롭고 두려운 심정으로 어른 세계의 진짜 척도와 불편한 고독을 이해해야 할 그날을 위해서다.  155


사랑을 위한 노력이 그들을 녹초로 만든다.  156


라비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이렇게 까탈을 부린 적이 없었지만, 동시에 아버지에게서 진심으로 사랑을 받는다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166


좋은 부모의 역할에는 중요하면서도 무척 까다로운 요건이 딸려 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소식을 끊임없이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부모는 필히 아이의 장기적 이익을 폭넓게 지켜줘야 하는데, 아이들로서는 부모의 생각이 유익하다고 흔쾌히 동의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것이 있다는 것도 예상하지 못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는 양치질, 숙제, 방 정돈, 취침 시간, 마음 넓게 쓰기, 컴퓨터 사용 제한에 대해 말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는 재미가 정말 시작되려는데 삶의 달갑지 않은 면들을 들이미는 싫고 짜증 나고 따분한 배역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렇듯 사랑을 드러나지 않게 실행한 결과로, 좋은 부모는 그 실행이 잘된 경우에 강렬한 분노와 적개심의 표적이 되고 만다.  167-168


성적 흥분은 결국 옷을 벗은 상태와 거의 무관한 듯하다. 그 동력은 열렬히 열망하고, 전에는 금지되었으나 이제는 기적적으로 접근 가능해진 상대를 소유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가능성에서 나온다. 성적 흥분은 고립과 단절이 만연한 세계에서 그 손목, 허벅지, 귓불과 목덜미가 마침내 우리 눈앞에 당도했다는 데 대한 거의 불신에 가까운 경탄의 표현이다. 다시 한 번 기쁨에 차 만지고, 채우고, 드러내고, 벗기며 우리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우리의 연인은 얼마나 멀고 독립적으로 느껴졌는지 계속 몇 시간마다 확인하고 싶다는 특수한 개념이다. 성적 욕구는 확고히 친밀해지고자 하는 염원에서 나오며, 그렇기에 사전의 거리감을 전제로 하고, 그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이 매우 독특한 기쁨과 안도감을 선사한다.  184


자위의 판타지에서 무작위로 만난 낯선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낳은 순위의 모티프가 된다는 사실은 낭만주의의 이데올로기에서는 논리를 획득 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친밀함이 만든 무거운 짐들을 바로잡고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랑과 섹스의 냉정한 분리, 바로 그것이다. 모르는 사람을 이용하면 분노, 감정적 취약성, 상대방의 욕구를 신경 써야 할 의무를 우회할 수 있다. 우리는 비난이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원하는 선까지 특이하고 이기적으로 굴 수 있다. 모든 감정이 완벽하게 차단되어, 이해되기를 바라는 일말의 소망도 없고 따라서 잘못 이해될 위험도 없으며 그 결과 괴로워하거나 실망하게 될 위험도 전혀 없다. 마침내 삶의 소모적이고 거치적거리는 나머지 부분을 침대로 가져갈 필요 없이 욕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87-188


어떤 관점에서는, 공상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삶을 추구하는 대신에 판타지를 지어내야 하는 신세가 처량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판타지는 대개 다수의 모순된 소망으로부터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결과물이다. 판타지가 존재하는 덕분에 하나의 현실을 파괴하지 않고 다른 현실에 거주할 수 있다. 판타지는 완전히 무책임하고 무섭도록 기이한 우리의 충동으로부터 우리가 아끼는 사람들을 지켜준다. 판타지는 나름대로 인류의 성취이자 문명의 결실이며, 친절한 행동이다.  189


현대사회는 부부가 모든 면에서 평등하기를 기대한다지만, 실제로 기대하는 것은 고통의 평등이다. 그러나 괴로움의 복용량을 정확히 똑같게 계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불행은 주관적인 경험으로, 각 당사자가 실제로는 자신의 삶이 더 저주받았으며 파트너는 이를 인정하거나 속죄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언제라도 진지한 경쟁에 돌입할 수 있다. 자신이 더 힘들게 살고 있다는 자기 위안식의 결론을 피하려면 초인적인 지혜가 필요하다.  194


오늘날 부모들이 겪는 어려움은 부분적으로 위신을 분배하는 방식 탓에 발생한다. 부부는 매시간 실용적인 요구에 시달릴 뿐 아니라, 그런 일이 굴욕적이고 시시하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단지 요구를 견뎌냈다는 이유마능로 누군가를 동정하거나 칭찬해주는걸 꺼린다. '위신'이란 말은 등하교시키기와 세탁물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들린다. 그런 특성은 수준이 높은 정치나 과학 연구, 영화나 패션 같은 다른 세상에 속해 있다고 가르친 해로운 훈련 때문이다. 그러나 거품을 제거하고 핵심을 보면 위신은 단지 인생에서 가장 고결하고 중요한 무언가를 가리킨다.

우리는 인류의 영광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회사를 설립하고, 경이로울 정도로 얇은 반도체를 생산하는 데에 있을 뿐 아니라, (설령 수십억 인구 사이에 널리 분포된 능력이라 하더라도) 생후 몇 달 된 아기에게 요구르트를 떠먹이고, 사라진 양말을 찾고, 변기를 청소하고, 떼쓰는 아이를 달래고, 식탁에 굳어 있는 기름때를 닦아내는 능력에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듯하다.  195


라비와 커스틴이 고통받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접한 예술이 그런 싸움을 공감하며 반영하는 걸 좀처럼 보지 못하는 데에도 있다. 예술은 오히려 이들이 마주하 ㄴ문제를 얕잡아 보고 유치하게 놀리는 경향이 있다. 예술은 참을성 없이 짜증을 부리며 몸을 꿈틀거리는 아이에게 외국어를 가르치려고 애쓰는 그들의 용기에 감탄하지 않는다. 코트의 단추를 늘 잘 채우고 모자를 잃어버리지 않을 때, 집 안을 정갈하게 유지할 때, 그리고 매일매일 가장 작지만 까다로운 이 사업을 협력해 이끌 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결코 바깥에서 저명해지거나 큰돈을 벌지 못할 테고, 무명 인사로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월계관을 써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그럼에도 문명의 질서정연함과 연속성은 그들이 보이지 않는곳에서 말없이 수행하는 노동에 작지만 필수적으로 의존한다.  196




4부 외도


중년의 유혹자가 솔직한 것은 자신감이나 오만함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처량한 인식에서 나오는 일종의 조급한 절망감 때문이다.  204


배우자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에 불륜에 뛰어드는 경우는 드물다. 파트너를 배신하는 수고를 감내하려면 대개 파트너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207


다른 종류의 행동들은 거의 다 쉽게 묵인하는 사람들에게도 간통은 하늘이 노할 위반이자, 사랑의 가장 신성한 전제들을 깨뜨리는 섬뜩한 행위다. 

첫 번째 전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든 함께하는 삶이 소중하다고 주장하면서-길을 벗어나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런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면 애초부터 사랑은 없었다.  212-213


두 번째 전제 : 간통은 우리가 익히 아는 불성실과는 종류가 다르다. 세상은 벌거벗음을 수반한 계율 위반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이고, 지각변동에 버금가는 엄청난 종류의 배신이라고 말한다. 바람피우는 짓은 그냥 나쁜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한다고 공언하는 상대에게 할 수 있는 극악 행위다.  214


세 번째 전제 : 일부일처제에 충실하다는 것은 상대방을 깊이 배려하고 그의 번영과 안녕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이다. 이를 고수하는 것은 상대방의 최선의 이익을 진심으로 염려한다는 확실한 징표다.  215


네 번째 전제 : 일부일처는 자연스러운 사랑의 모습이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항상 한 사람과 사랑하기를 원한다. 일부일처는 정신 건강의 기준점이다.  216


다른 사람에게 가끔 욕망을 느끼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있을까? ... 우리 모두의 삶이 얼마나 짧은지, 그래서 어떤 절박한 호기심으로 단 한 명의 동시대인보다 더 많은 독특한 관능적 개성을 탐험해야 할지 깨닫지 못하고 유혹을 느끼는 데 실패한 것, 사실은 '잘못된 것' 아닐까? ... 간통의 발생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은 곧 인생의 풍요로움을 부정하는 셈 아닌가? 반대로, 어떤 특정 상황엣 부정한 행위에 정말로 일말의 호기심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신뢰하는 게 합리적인 것일까?  217


성숙해지면 소유욕을 초월하게 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질투는 아기들에게나 어울린다. 성숙한 사람은 어떠 ㄴ사람도 다른 사람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걸 안다. 이는 어렸을 때부터 현명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온 교훈이다. 잭이 네 소방차를 갖고 놀게 해주렴, 그 아이가 한 번 갖고 논다고 해서 남의 것이 되는 건 아니다, 화가 난다고 바닥을 뒹굴면서 네 작은 주먹으로 카펫을 내리치지 마라, 네 여동생이 아빠에게 소중한 사람이듯 너도 아빠에게 소중한 사람이다, 사랑은 케이크가 아니다, 한 사람에게 사랑을 준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줄 사랑이 줄어들진 않는다. 사랑은 집안에 아기가 새로 태어날 때마다 계속 커진다. 

나중에 이 주장은 섹스를 둘러싸고 훨씬 더 합당해진다. 파트너가 한 시간 동안 당신을 떠나 신체의 특정 부위를 낯선 사람의 제한된 부위에 비볐다고 왜 파트너를 나쁘게 생각하겠는가? 어쨌든 그들이 모르는 사람과 체스를 두거나 명상 그룹에서 촛불을 켜놓고 친밀한 얘기를 주고받는다고 분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229-230


질투는 그 우둔함 때문에 우리가 설교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 군침 도는 표적이 된다. 하지만 말을 아끼는 게 좋다. 대단히 볼썽사납고 어리석긴 해도 순간의 질투는 우리를 빗겨 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술을 만지거나 손이라도 스쳤다는 말을 듣는 순간 누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우리가 과거에 어쩌다 바람을 피웠을 때 가졌을 매우 진지하고 충실한 생각과는 상반되고 논리에 어긋난다. 하지만 지금은 이성의 명령이 들리지 않는다. 현명하다는 것은 도저히 현명해질 수 없는 순간을 아는 것이다.  230-231


상대방의 충실함이 무의식을 가득 채워주는 한 외도라는 문제에도 태연자약 할 수 있다. 한 번도 배신당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신의를 계속 유지하기에 좋으 전제조건이 못 된다. 보다 진실하고 충실한 사람이 되려면 적절한 예방 접종을 겪어봐야 한다. 한동안 극한의 공황과 모욕을 겪고 붕괴 일보 직전까지 가봐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배우자를 배신하지 말라는 명령이 틀에 박힌 말이 아니라 영구히 뚜렷하게 빛을 발하는 도덕적 의무로 변모한다.  232


사랑의 열병은 망상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목을 가누는 방식은 실제로 그 사람이 자신 있고, 심술궂고, 예민하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 누군가는 그의 눈이 암시하는 유머와 지성, 그의 입이 넌지시 말하는 상냥함을 실제로 지니고 있을 수 있다. 열병의 오류는 좀 더 교묘한 문제다. 우리가 다양한 단점을 꿰뚫고 있는 현재의 파트너뿐 아니라 사람은 누구에게나 우리가 더 많은 시간으 함게 보낼 때 드러날 상당히 심각한 결점, 황홀했던 처음의 감정을 비웃음거리로 만들 만한 결점도 있다는 인간 본성의 중요한 진리를 잊게 하는 것이다. 우리 눈에 정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우리가 아직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뿐이다. 사랑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  236

결혼 :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  237


아무것도 희생되지 않는 깔끔한 해결 방안은 어디에도 없다. 모험과 안전은 양립할 수 없다는 걸 그는 알았다. 사랑이 넘치는 결혼 생활과 아이들은 자연스러운 성욕을 죽이고, 외도는 결혼 생활을 죽인다. 두 패러다임이 아무리 매력적이라 해도 자유사상가인 동시에 결혼한 낭만주의자가 될 순 없다.  238


우울감은 치료를 요하는 병이 아니다. 우울은 처음부터 이 각본에는 실망이 적혀 있었다는 확신과 마주할 때 밀려오는 일종의 지적 슬픔이다.  239


어떤 관계도 온 마음을 다해 친밀하고자 하는 헌신 없이는 첫걸음을 떼지 못한다. 그러나 사랑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파트너가 여전히 수많은 생각들을 혼자 간직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정직성에 너무 감명하는 탓에 정중함의 미덕들을 망각한다. 아끼는 사람이 우리의 본성에서 상처를 줄 수 있는 면과 항상 전명적으로 마주치지는 않게 하려는 욕구 말이다. 

어느 정도 자제하고 자기 편집에 조금 열성을 보이는 억제 능력은 솔직한 고백 능력 못지않게 당연히 사랑에 포함된다. 스스로 비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정직함'을 내세워 상대방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상처가 되는 정보까지 털어놓는 사람은 절대 사랑의 편이 아니다. 또한 파트너가(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한 일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간밤에 어디에 있었는지 등등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는 의심이 들어도(우리의 관계가 훌륭하다면 주기적으로 그럴것이다), 날카롭고 무자비한 심문자처럼 굴지 않는 편이 좋다. 그저 눈치채지못한 척하는 편이 더 친절하고 더 현명하고 사랑의 참된 정신에 더 가까울 수 있다.  241-242


역사의 거의 전 기간 동안 사람들이 결혼 생활을 유지한 것은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고, 약간의 재산을 지키고, 가문의 통합이 유지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뒤 아주 다른 기준이 서서히 세상을 장악했다. 그에 따르면 부부는 둘 사이에 진실한 열정, 욕망, 충족감 같은 몇몇 감정들이 통용되는 한에서만 함께 있어야 했다. 이 새로운 낭만주의의규칙에서 배우자들은 부부의 일상이 지루해졌거나, 아이들이 그들의 신경을 건드리거나, 섹스가 더 이상 마음을 끌지 못하거나, 어느 쪽이든 최근 들어 약간 불행하다고 느껴왔다면 당연히 각자의 길을 갈 수 있었다.  243




5부 낭만주의를 넘어서


1950년대에 영국의 존 볼비와 그의 동료들이 전개한 애착 이론은 우리가 맨 처음 경험하는 부모의 보살핌에서부터 관계의 긴장과 갈등을 추적한다. 조사 결과 서유럽과 북미 인구 3분의 1이 생애 초기에 부모에 대한 실망을 경험하고(C. B. 바실리, 2013), 그 결과- 견딜 수 없는 불안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원초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신뢰와 친밀함의 능력은 결여되어 있다. 위대한 저직인 <분리 불안>(1959)에서 볼비는 최초의 가정환경에서 실망을 겪은 사람은 성인이 되어 관계의 어려움이나 모호함에 직면 할 때 두 종류의 반응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볼비가 '불안정 애착'이라 명명한, 두려워하고 집착하고 지배하는 행동 양식이고, 둘째는 '회피 애착'이라 명명한, 방어 및 후퇴 작전이다. 불안정한 사람은 파트너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질투심을 분출하고, 그들의 관계가 '더 가깝지' 않은 것을 슬퍼하며 일생의 많은 시간을 보내기 쉽다. 한편 회피적인 사람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식의 말을 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고, 때때로 성적 친밀함에 대한 요구를 힘겹게 느낄 수 있다. - 조애나 페어베언 박사, <부부 관계에서의 안정 애착과 불안정 애착 : 대상관계 이론의 관점>  251-252


불안정 애착의 징후는 침묵, 지연, 막연함 같은 애매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은 즉시 모욕이나 악의적인 공격과 같이 부정적으로 해석된다. 불안정 애착을 가진 사람들은 사소한 모욕, 경솔한 말, 부주의를 파탄의 전조라도 되는 양 불길하고 강력한 위협으로 느낀다. 좀 더 객관적인 설명은 와 닿지 않는다. 이들은 내심 그들이 삶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경험한다. 그들은 보통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유약함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래서 심술궂다거나 성마르다거나 잔인하다는 꼬리표가 붙는다. 253-254


회피 애착 유형은 정서적 피룡가 충족되지 않으면 갈등을 피하고 상대방에게 노출을 줄이려는 강한 욕구를 느낀다는 특징이 있다. 회피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열심히 공격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설득은 전혀 먹히지 않는다고 쉽게 가정한다. 자리를 피해 도개교를 올리고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유감스럽게도 회피적인 사람은 두려움에 찬 방어적인 행동 양식을 파트너에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 결과 그들의 소원하고 무덤덤한 행동들 뒤에 숨어 있는 이유들은 안개 속에 싸인 채 진실과는 정반대로 무정하고 무심하다는 오해를 쉽게 불러일으킨다. 회피적인 사람은 사랑을 주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느끼게 되었을 뿐, 마음속으로는 상대방을 깊이 염려한다. 257-258


하잔과 셰이버가 최초로 고안한 이 설문 조사(1987)는 애착 유형을 평가하는 데에 널리 이용된다. 자신이 어떤 유형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응답자는 아래의 세 진술 중 자신과 가장 가까운 것을 고르게 된다

'나는 정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원하지만, 상대방이 종종 뚜렷한 이유도없이 실망스럽거나 이기적으로 나온다. 나는 스스로 타인과 너무 가까워지는 걸 용인하면 상처를 입게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나는 혼자 지내도 괜찮다.'(회피 애착)

'나는 타인과 정서적으로 친밀해지기를 원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가 바라는 만큼 가까워지는 것을 꺼려 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소중히 생각하는 만큼 그들도 나를 소중히 여길까 하고 걱정한다. 그 때문에 아주 속이 상하고 화가 날 때가 있다.'(불안정 애착)

'나는 비교적 쉽게 다른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친밀해진다. 타인에게 의지하고 그들이 나에게 의지하는 데 편안함을 느낀다. 나는 혼자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안정 애착) 260


한 사람이 파멸에 이르기까지 많은 걸 요하지도 않는다. 그저 몇 번의 실수로 갑자기 그렇게 된다. 상황이 몇 번만 꼬이거나 외부 압박을 어느 정도 받으면 그 역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그가 자신을 제정신이라 여길 수 있게 하는 화학적 행운이란 부서지기 쉬우며, 인생이 제대로 시험해보기로 한다면 그 자신이 비극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다. 267-268


옛날에는 사람이 재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떤 이정표에 도달하면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의 이름이 붙은 집, 리넨으로 가득 채운 혼수, 벽난로 위에 진열된 자격증, 또는 소 몇 마리와 얼마만큼의 땅을 소유하는 것이 그런 이정표였다.

그런 뒤 낭만주의 사사의 영향으로 이런 실질적인 측면이 지나치게 금전을 따지고 계산을 하는 행위가 되었고, 초점이 감정적 특질로 이동했다. 올바른 감정들, 그 중에서도 특히 영혼의 짝을 만났다는 믿음, 상대방이 나를 완벽히 이해한다는 느낌, 다시는 상대 말고는 다른 누구와도 잠자리를 하고 싶지 않다는 확신이 중요하다고 여겨진 것이다. 278


이제 라비는 낭만주의 개념들이 재난을 낳는다는 것을 안다. 그의 준비된 마음을 완전히 다른 기준들에 기초한 결과다. 그가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무엇보다 완벽함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278


연인이 '완벽하다'는 선언은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징표에 불과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상당히 실망시켰을 때 그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알기 시작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연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은 근본에 있어서는 불완전할 것이다. 기차에서 만난 낯선 사람, 옛 동창생, 인터넷에서 사귄 새로운 친구 등도 우리를 실망시킬 소지가 다분하다. 삶의 현실은 우리의 모든 본성을 변형시킨다. 상처 없이 살아온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이상에 못 미치는 양육을 받았다. 우리는 설명하기보다 싸우고, 알려주기보다 들볶고, 고민거리를 분석하기보다 초조해하고, 거짓말을 하고 엉뚱한 데로 화살을 돌린다.

이렇게 우험 요소들이 중첩되어 있는 와중에 완벽한 인간이 나올 가능성은 전무하다. 낯선 이들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알기 전에 그들을 깊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화를 내는지 즉시 나타나지 않을지라도(몇 해가 걸릴 수도 잇다). 이론상 그 존재는 처음부터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결혼할 사람을 선택하기란 감정의 존재 법칙을 우회할 방법을 찾아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고통을 흔쾌히 견딜지 결정하는 일이다. 아니면 우리는 모두 당연히 악몽의 전형인 '엉뚱한 사람'을 곁에 두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재앙일 이유는 없다. 진보한 낭만적 비관주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모든 것일 수는 없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또 다른 타락한 생명체와 함께 사는 현실에 나 자신을 적응시킬 최대한 부드럽고 친절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결혼은 '어지간히 좋은' 결혼만 있을 수 있다.

정착을 하기 전에 몇 명의 애인을 사귀어보는 것도 이 깨달음을 깊이 새기는 데 도움이 된다. '제짝'을 만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은 없으며, 가까이서 보면 사실은 모든 사람이 조금씩 잘못되었다는 진실을 직접 그리고 다양한 상황에서 발견할 기회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278-280


사랑은 아주 든든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이 이해되고 있다는 경험에서 시작된다. 상대방은 나의 외로운 내면을 이해하고, 나는 왜 하필 그 농담이 그렇게 재미있는지를 그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공동의 적을 미워하고, 상당히 특화된 성적 시나리오를 함께 시도해보고 싶어 한다.

이 상황이 영원히 계속되진 않는다. 연인의 이해 능력에는 적정 한계가 잇고, 우리는 언젠가 그 한계에 부딪힌다 하더라도 직무유기라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애석하도록 무능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충분히 헤아릴 수 없으며,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게 정상이다. 어떤 사람도 다른 누군가를 정확히 이해하고 충분히 공감하지 못한다. 280


만일 수시로 자신이란 사람이 당황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자기 이해를 향한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은 것이다. 281


결혼이라는 새장 안에서 집안 살림, 친인척, 청소 분담, 파티, 식료품 같은 사소한 일로 화를 내면 당연히 '까다롭게' 보인다. 하지만 그건 상대방의 허물이 아니며,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려는 삶의 속성일 뿐이다. 애개 난감한 것은 결혼이란 제도이지, 관련된 개인들이 아니다. 281


우리는 마치 '사랑'을 단일하고 분화되지 않은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은 매우 상이한 두 가지 양식인 사랑받기와 사랑하기로 이루어져 있다. 후자를 실행할 준비가 된 동시에 전자에 대한 우리의 비정상적이고 위험한 집착을 인식할 때 결혼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

처음에는 '사랑받기'에 대해서만 알고 인생을 시작하낟. 아주 그릇되게도 사랑받는 일이 표준처럼 보인다. 아이들은 마치 부모가 항상 온정 어린 마음으로 흔쾌히 그들을 위로해주고 인도해주고 즐겁게 해주고 먹여주고 씻겨주는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개념을 성년기까지 갖고 간다. 성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보살핌을 받고 다 받아들여지던 그 느낌을 되살리고 싶어 한다. 우리는 마음속 은밀한 구석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예측하고, 우리의 심정을 읽어내고, 이타적으로 행동하고 모든 면엣 더 나아지게 해줄 연인을 그린다. 이건 '낭만적'인 것 같지만, 재난의 예고이다. 281-282


중요한 여러 분야에서 파트너가 우리보다 더 현명하고 합리적이고 성숙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우기를 바라야 하고, 그들에게 지적당하는 것을 인내해야 한다. 또한 다른 순간에는 최고의 교사로서 모범을 보이고, 소리를 지르거나 상대방도 알리라 지레짐작하지 않고 우리의 제안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미 완벽한 사람만이, 서로 가르친다는 생각은 사랑이 아니라고 일축할 수 있다. 283


낭만주의 결혼관은 '제짝'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우리의 허다한 관심사와 가치관에 공감하는 사람을 찾는 것으로 인식된다. 장기적으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너무 다양하고 특이하다. 영구적인 조화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제짝'의 진정한 표지는 완벽한 상보성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는 차이를 수용하는 능력이다. 조화는 사랑의 성과물이지 전제 조건이 아니다. 283-284


완벽한 행복은 아마 한 번에 5분이 채 넘지 않을, 작고 점진적인 단위들로만 찾아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이 순간은 두 손으로 붙잡아 소중히 간직해야 할 행복이다.

싸움과 갈등은 금세 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 291-292


완전히 평범한 인생을 사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을 유지하고, 거의 정상인이라는지위를 계속 확보하고,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결혼 생활을 지속하면서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 이 계획들이 어느 영웅담 못지않게 영웅적인 면모를 보일 기회를 제공한다. 조국에 봉사하거나 적과 싸우라고 부름을 받을 리는 없지만, 그의 제한된 영역 안에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불안에 굴복하지 않을 용기, 좌절하여 남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 용기, 세상이 부주의하게 입힌 상처를 감지하더라도 너무 분노하지 않을 용기, 미치지 않고 어떻게든 적당히 인내하며 결혼 생활의 어려움들을 극복할 용기, 이것은 진정한 용기이고, 그 무엇보다 더욱 영웅적인 행위이다. 293




옮긴이의 말 - 진짜 러브스토리


결혼이 사랑의 결실인 건 알겠는데, 그렇다면 결혼 생활의 진정한 동력은 무엇일까? 295


일상의 비끗거림은 맹독으로 작용하기 쉽지만 성찰에 담그면 묘약으로 연금된다.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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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가 인생 최고의 쾌락으로 인정받는 가운데, 여행은 그중에서 가장 값비싸면서도 가치 잇는 소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4


현대인이 소비를 통해 유토피아로 초대된다면, 그 유토피아의 최정상에는 여행의 장소가 있다.  5


아마 현대사회에서 여행 정도의 지위를 부여받고 있는 것은 돈과 사랑 외에는 없을 것이다.  6


이전까지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적 탈출구는 '섹스'라 말해져 왔다. 자유주의, 여권 신장, 자본의 확장은 정확히 섹스 산업의 번성과 맞물렸다. 이제 이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여행이 되어가고 있다.  7

 

사랑이나 여행은 모두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 그것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기 시작하면, 즉 모든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처럼 권유되고 심지어 '강요'되기까지 할 때는 반드시 왜곡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제대로 사랑하고 제대로 여행하려면, 먼저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사랑과 여행을 분명히 보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맹목적으로 요구되는 것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어느덧 자기도 모르게 '욕망'하게 된 것들에 대해 의심해야 한다.  8



나는 여행을 다녀왔다거나 여행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꼭 질문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여행에서 무엇을 얻으셨나요? 여행이 왜 가치 있다고 생각하세요? 여행이 왜 좋으세요? 여행을 다니며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19



현대인에게 권태는 일상이 되었다. 그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쾌락도 일상이 되었다. 도시는 권태를 조장하고, 그것을 잊게 만드는 일시적 향락을 제공한다. 

어느 시점이 되면 우리는 깨닫는다. 내가 이 회색의 도시 한가운데에서 탈색되고 있다는 것을, 색채 없는 무미건조한 도시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21



도시는 우리에게 삶의 형식과 안전망을 제공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삶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완벽함 때문에 우리는 도시에서, 그 도시 속에 붙박인 우리의 현시에서 떠나고 싶어진다. 그 이유는 저 태곳적의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모순적이게도, 변덕스럽게도, 용납하고 싶지 않게도 자유와 안락이라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을 모두 원한다.  22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이러한 '이미지를 향한 갈망'을 인간의 중요한 특성으로 지적한다. 라캉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상상계와 상징계로 뒤덮여 있다. 여기에서 상상계란 이미지의 세계이며, 상징계는 언어적 질서의 세계이다. 우리 머릿속은 늘 이미지와 언어로 뒤얽혀 있으며, 영원히 그 두 가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이미지나 언어가 우리를 '완벽하게 만족시켜 주리라' 믿으며 욕망하고 나아가지만, 실제로는 무한한 욕망의 연쇄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면, 뒤이어 다른 이미지를 욕망한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언어(의미)를 획득하더라도, 곧 욕망해야 할 다른 언어(의미)가 생긴다.

여행에 대한 갈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특정한 여행지에, 정확히 말해 그 '여행지의 이미지'에 완벽한 만족이 있을 거라는 환상을 가진다. 그 이미지에는 자유, 낭만, 쾌락, 꿈, 희망, 관능, 행복, 열정, 성장, 드라마, 성공, 여유, 휴식, 모험과 같은 온갖 언어가 덧씌워진다. 이렇게 이미지와 언어가 결합한 '그곳'은 우리에게 뜨거운 갈마의 대상이 되지만, 정작 그곳에 도착하더라도 우리가 꿈꾸던 완벽한 향락은 존재하지 않느다. 우리는 다시 다른 여행을, 여행의 이미지를, 여행이 줄 어떤 언어(의미)를 꿈꾼다.  26



'여행은 단순히 여해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에 대한 열망들이 집약되어 있다.  27



우리는 자신의 삶에 좀 더 엄밀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욕망, 우리가 선택한 삶의 방식, 결국 우리를 규정하게 되는 존재 방식에 대해 더 엄격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삶은 짧고,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은 지나가고 나서야 후회로 되돌아오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넘쳐나는 가짜 여행들 속에서, 혹은 온갖 욕망으로 점철된 환영들 속에서 '진짜 여행'을 가려내야 한다.  28



'자유'는 모든 조건과 억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어떤 '순수한 상태'라고 오해되곤 한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한계 속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런 자유를 누리는 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자유는 자기가 어떤 현실에 속해 있는지를 아는 것이며, 그러한 현실적 조건들을 어떻게 수정할 수 있는지에 관여하는 것이다. ..

여행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자유는 나를 조건 지어 왔던 수많은 요소들과 의무들에 대해 다시 생각할 최선의 기회를 제공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뭐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재정립하고 새롭게 장악하며 수정할 수 있는 기회와 힘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31



여행에는 우리가 살아온 현실, 앞으로도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의 논리가 아니라 다른 논리로 살아 보고자 하는 욕망이 들어 있다. 특히 배낭여행객의 마음은 이 한 번뿐인 인생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방식의 삶을 체험해 보고자 하는 욕망으로 움직인다. 그 이후에는 다시 이 현실로 돌아올지라도, 조금은 다른 마음으로, 조금은 다른 형태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미한 희망을 가지고 저 '다른 삶'으로 떠나 보는 것이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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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의 만남은 항상 기대한 바대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명성이 자자한 미술관이나 전시회에 찾아갔을 때 우리는 왜 예상했던 변화의 경험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의아해하면서 실망하고, 더 나아가 어리둥절함과 무능하다는 느낌을 품은 채 문을 나서기도 한다. 그럴 땐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탓하고, 문제의 뿌리는 분명 이해 부족이나 감성적 수용 능력의 부족에 있다고 자책하게 된다.

이 책은 문제의 뿌리가 일차적으로 개인에게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주류 예술계가 예술을 가르치고, 팔고, 보여주는 방식에 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은 예술이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위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명확히 거부하고, 그럼으로써 예술의 높은 지위를 신비한 영역에 남겨두고 그와 동시에 공격에 취약하게 만든다. ... 

우리는 예술이 어떤 유의 도구인지 .. 명확히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4


예술에도 자연이 원래 우리에게 부여한 한계 너머로 우리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힘이 있다. 

이 책은 (디자인, 건축, 공예를 포함한) 예술이 관람자를 인도하고, 독려하고, 위로하여 보다 나은 존재 형태가 되도록 이끌 수 있는 치유 매개라고 제언한다.  5






방법론 


예술은 왜 우리에게 중요한가? 

예술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을 성취할 수 있다. 즉, 사랑하는 대상이 떠난 후에도 계속 그 대상을 붙잡아둘 수 있다.  8


르노의 그림에서 여자가 마음에 담고 싶어하는 것은 단지 곧 떠날 연인의 전체적인 형상이 아니다. 그녀는 더 복잡하고 파악하기 어려운 어떤 것, 즉 그의 개성과 본질을 원한다.  8-10


만일 세상이 좀더 따뜻한 곳이라면, 우리는 예쁜 예술작품에 이렇게까지 감동하지 않을 테고, 그런 작품이 그리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16


어른과 놀고 있는 아이와, 아이와 놀고 있는 어른의 차이를 생각해보라. 아이의 기쁨은 천진난만하며, 그런 기쁨은 사랑스럽다. 그러나 어른의 기쁨은 삶의 고난을 회상하는 선에 머물고, 그래서 가슴이 아프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때로는 울게 한다... 만일 인생이 고되지 ㅇ낳다고 느낀다면, 아름다움은 현재와 같은 호소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20


우리는 이상적 이미지를 일반적인 현실의 잘못된 묘사로 간주하지 않고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삶이 우리의 욕망에 얼마나 박한지 잘 알기 때문에, 부분적이지만 아름다운 광경은 우리에게 한층 소중할 수 있다.  22


많은 경우, 슬픈 일들이 더 슬퍼지는 건 우리가 혼자 슬픔을 견디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26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예바르게 행동하길 바라지만, 압력을 받으면 옆길로 샌다. 우리는 더 훌륭해지길 바라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동기를 잃어버린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 자신의 인격을 가장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라고 격려하는 예술작품을 통해 우리는 막대한 혜택을 누릴 수 있다.  37


예술은 이미 충분하다고 섣불리 추정해서는 안 되는 균형과 선함을 시의적절하게, 본능적으로 깨닫게 해줌으로써 우리의 시간을, 삶을 구원한다.  42


어떤 것이 이것일 수도 저것일 수도 있는 순간에 붙잡혀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곧 이해할 듯하면서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알쏭달쏭한 순간이 중요한 까닭은 성찰이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찰의 과정을 포기한다. 우리는 사랑, 정의 또는 성공의 개인적 의미를 대부분 결정하지 못한 채 다른 것으로 넘어간다. ..

예술은 자기 인식을 누적시켜, 타인에게 그 결실을 전달하는 훌륭한 수단이다. 자신의 경험을 타인과 공유하는 일은 어렵기로 악명이 높다. 그럴 때 말은 서툴게만 느껴진다.  47


예술에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그런 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타인과 소통하게 해주는 이 능력이 있기 때문에, 대체로 우리는 주변에 어떤 예술작품을 둘 것인가에 신경을 많이 쓴다... 우리는 마냥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중요한 뭔가를 드러내보이길 원한다. 즉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성격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48


예술에 대한 방어적 태도를 극복하는 중요한 첫 단계는 특정한 상황에서 느끼는 이상한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53


방어적 태도를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그렇지 못한 현실에 날카롭게 주목하고, 어떤 것들에 강한 부정적 견해를 품게 되는 것이 매우 정상적이라는 것을 너그럽게 깨닫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예술작품들을 창조한 사람들의 외견상 이질적인 사고방식을 보다 편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다...

방어적인 태도를 해소하는 세번째 단계는, 처음에는 아무리 미약하고 보잘것없더라도 예술가와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연결점을 찾는 것이다. 그들의 작품은 아주 괴상해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의 야망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충분히 탐색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측면이 있을 수 있다.  54-56


적절한 자극이 있다면 우리는 작품을 창조한 사람의 사고방식과 우리 자신의 가치관 및 경험이 아주 잠깐이라도 설핏 겹치는 지점을 찾아낼 수 있다.  56


우리의 주된 결점,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는 원인 중 하나는 우리 주위에 늘 있는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 있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의 가치를 보지 못해 고생하고, 매혹적인 것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종종 엉뚱한 갈망을 품는다.

문제의 한 원인은 상화에 익숙해지는 우리의 능력, 즉 우리가 습관화라는 기술의 달인이라는 데 있다. 습관이란 인간적 기능의 전 분야에 걸쳐 행동을 기계적으로 만다는 메커니즘이다. 습관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준다...

그러나 습관은 꼭 그만큼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쉽다.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덜 중요한 것들을 삭제하는게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안겨줄 수 있는 요소들을 삭제하고 만다.

예술은 습관에 반대하고, 우리가 경탄하거나 사랑하는 것에 갖다 대는 누금을 재 조정하도록 유도해 그 소중한 것을 더 정확히 평가할 수 있게 우리를 되돌려놓는다.  59


이미 그것들을 물리도록 확실히 봤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예술은 우리가 놓치기 쉬운 모든 것을 전면에 내놓음으로써 바로 그 선입견에 당당히 맞선다.  60


이미지는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큰 원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에게 해독제를 건네주어 면목을 세우기도 한다. 이는 우리 삶의 조건인 따분함과 무미건조함을 메스껍게 만드는 동시에 그 조건과 지적인 화해를 이끌어내는 예술의 힘 덕분이다.  62


예술이 심리적 취약점을 폭놃게 보완할 수 있는 도구. 그 취약점들을 요약해보자.

1. 우리는 중요한 무언가를 잊어버린다. 중요하지만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경험을 좀처럼 붙들고 있지 못한다. 

2. 우리는 희망을 쉽게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삶의 나쁜 면들에 과민하게 반응한다. 어떤 것을 향해 계속 나아갈 합리적 이유를 깨닫지 못해 정당한 성공 기회를 놓쳐버린다.

3.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평범한 일인지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이 없기 때문에 고립감과 피해의식에 쉽사리 이끌린다. 우리는 곤경의 의미를 잘못 판단하는 탓에 너무 쉽게 당황한다. 우리는 외롭다. 하지만 이것은 얘기 나눌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나의 고통을 충분히 깊이 있게, 정직하게, 인내심 있게 이해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꾸준하지 못한 인간관계, 질투, 이루지 못한 꿈으로 인해 겪는 고통을 보여주려 해도 그 방식때문에 자칫 상대방이 경멸감과 모욕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고통을 겪고, 이 고통에는 존엄이 결여되어 있다고 느낀다.

4. 우리는 균형감이 없는데다 자신의 가장 좋은 면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단 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다수의 자아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보다 나은 자아가 있음을 안다. 우리는 우리의 보다 나은 자아를, 대개는 우연히 그리고 너무 늦은 때에 만난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큰 꿈과 관련해 의지의 박약에 시달린다. 행동하는 법을 모르진 않는다. 다만, 충분히 설득력 있는 형태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최고의 통찰에 따라 행동하지 못할 뿐이다.

5. 우리는 어렵게 깨닫는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수수께끼이며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타인에게 설명하거나, 내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로 사랑받는 일에 대단해 서툴다. 

6.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줄 수 있는 많은 경험, 사람, 장소, 시기를 거부한다. 이는 그런 것들이 잘못된 포장에 싸인 채 다가오고 그래서 그것과 연결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상적이고 편파적인 판단의 먹이가 된다. 우리는 너무나도 수동적으로, 모든 것이 '낯설다'고 생각한다.

7. 우리는 친숙함 때문에 둔감해져 있으며, 화려함을 부각시키는 상업 지배 세계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사는 게 단조롭다며 불만족에 빠진다. 삶은 다른 곳에 있다는 고민이 우리를 끊임없이 갉아먹는다.  64


(위의) 일곱 가지 심리적 취약점과 예술을 연관시킬 때 예술은 도구로서의 목적과 가치를 지니게 되고, 우리에게 일곱 개의 보조수단을 제공한다.

1. 나쁜 기억의 교정책 : 예술은 경험의 결실을 기억하고 재생할 수 있게 해준다. 예술은 소중한 것과 우리가 찾은 최고의 통찰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메커니즘이며, 그것들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예술에 우리의 집단적 성취를 안전하게 예치한다.

2. 희망의 조달자 : 예술은 즐겁고 유쾌한 것들을 시야게 붙잡아둔다. 예술은 우리가 너무 수비게 절망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3. 슬픔을 존엄화하는 원천 : 예술은 삶에서 슬픔이 차지하는 정당한 위치를 깨우쳐주고, 우리는 그로 인해 곤경 앞엣 덜 당황한다. 곤견을 고귀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4. 균형추 : 예술은 우리가 가진 좋은 자질들의 핵심을 특히 명료하게 암호화해 다양한 형태의 매개로 우리 앞에 내놓고, 그럼으로써 우리 본성의 균형을 회복시켜 준다. 예술은 우리에게 허락된 최고의 가능성으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5. 자기 이해로 이끄는 길잡이 : 예술은 나 자신에게 매우 중요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인간의 많은 부분은 언어로 쉽게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아트 오브제를 집어들고 혼란스럽지만 강한 어조로 말할 수 있다. "이게 나야."

6. 경험을 확장시키는 길잡이 : 예술작품에는 타인의 경험이 대단히 정교하게 축적되어 있으며, 잘 다듬어지고 훌륭하게 조직된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예술은 우리에게 다른 문화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가장 웅변적인 예들을 제공하고, 그에 따라 예술작품과의 교유는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대한 이해력을 넓혀준다. 많은 예술이 처음에는 단지 '남의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순간 우리 자신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생각과 태도가 그 안에 잠겨 있음을 발견한다. 보다 나은 존재로 발돋움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이미 손닿는 거리에 와 있는 것은 아니다.

7. 감각을 깨우는 도구 : 예술은 우리의 껍질을 벗겨내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버릇없이, 습관적으로 경시하는 태도를 바로잡아준다. 우리는 감수성을 회복하고, 옛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본다. 예술은 색다르고 화려한 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가정하는 오류를 막아준다.  65





사랑


유명한 격률에서, 17세기 프랑스의 도덕주의자 라 로슈푸코는 "사랑 같은 게 있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들은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 강조한 바 있다. 이 격률은 사람들의 노예근성과 남을 모방하는 경향을 비웃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이 아닌 맥락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 한 실제적 현상에 우리의 관심을 돌린다. 우리는 우리의 광범한 감정들 중 어떤 것을 진지하게 여기고 어떤 것을 무시해야 하는지 결정할 때 개별적이 아니라 사회적이 된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단서에 이끌려 어떤 감정은 특히 중요하게 간주하고, 또 어떤 감정은 억누르거나 경시하는 것이다. ..

만일 인간의 감성을 인도하는 것이 문명사회를 창조하는 과정의 중요한 부분임을 인정한다면, 문화는 정치와 더불어 그 주요한 메커니즘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실제로 우리가 듣는 음악, 우리가 보는 영화, 우리가 거주하는 건물, 그리고 벽에 걸린 그림, 조각, 사진은 섬세한 길잡이이자 교육자 역할을 한다.

거의 2세기가 지난 후 오스카 와일드는 당대의 가장 인기 있는 화가를 언급하며, 라 로슈푸코의 사랑에 대한 통찰을 미술에 적용해 명언을 만들어냈다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까지 런던엔 안개가 없었다." 와일드의 말은 사람들이 영국의 수도를 관통하며 흐르는 물 위에 떠다니는 짙은 수증기를 보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의 정확한 요점은 화가가 풍부한 재능을 통해 안개의 지위를 끌어올리기 전까지 사람들은 안개를 봐도 흥미나 짜릿함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에는 우리의 감각을 일깨우는 힘이 있다.  100-102  


예술의 사명을 정의하자면 그 임무들 중 하나는 우리에게 좋은 연인이 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강의 연인이자 하늘의 연인, 고속도로의 연인이자 돌의 연인이 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사람의 연인이 된다.  102-103


사랑할 줄 아는 건 감탄하는 것과 다르다. 감탄에는 왕성한 상상력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능력이 필요치 않다. 문제는 두 사람이 삶을 공유하려 할 때 고개를 든다. 집, 자녀, 사업 및 가계 운영을, 처음에 멀리서 봤을 땐 감탄스러웠던 사람과 공유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저절 툭 튀어나오는 법이 거의 없고, 연습을 안하면 좀처럼 도움이 안 되는 자질이 필요하다. 상대방 말에 예바르게 귀기울이는 능력, 인내심, 호기심, 회복력, 관능, 이성 같은 것 말이다.

예술은 그런 자질들로 인돟는 유능한 길잡이다.  107


인내는 스릴과 거리가 멀다. 사실 인내는 흥분하지 않고 지내고, 욕구 충족을 미루고, 지루함과 무덤덤함을 견디는 능력이다...

명백하지만 소홀히 다뤄지는 진리를.. 좋은 것들도 평범한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진리를, 우리는 이 진리를 온전히 내면화할 수 없다. 습관처럼 완전히 몸에 밸 때까지, 매일매일 이 따분한 사실을 재인식해야 한다.  110


레오나르도는 호기심이 충만한 위인이었다.

호기심은 모름을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다. ..

발견을 향한 그의 의지는 체계적이다. 그는 이해하길 원한다. 여기저기 흩어진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그에게 의미가 업삳. 그는 중요한 것을 알기 원했고, 단 한 장의 명료한 지면에 자신의 통찰을 담아냈다.


모든 연인 관계에는 상대방이 나를 올바르게 탐사하기보다는 오해하고 마음대로 상상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숨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겪는 어려움과 문제점을 아는 척하면서 엉뚱한 곳을 짚을 때 우리는 심란해진다. 상대방은 진실을 알려 하지 않고, 내가 겪는 상황의 정확한 본질을 세심히, 애정을 기울여 알려 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당신의 문제는..." 또는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이라 말할 때, 우리는 허탈감을 느낀다. 그 견해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단지 내 상황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겐 아주 잘 맞을 수 있다(그의 전 애인, 그의 까다로운 형제, 그의 아버지 등, 현재를 깊이 조사하지 않을 때 우리는 곧잘 과거의 이론을 현재에 투사한다). 레오나르도는 경험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 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바라보고, 세계의 진정한 다양성과 개체성을 존중하는 태도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가르쳐준다.  112


불운하고도 아주 이상한 일들이 발생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끝나진 않는다. 문제에 맞는 해결책은 어딘가에 있고, 예상치 못한 일은 적응하면 된다.  114


관능은 촉감과 움직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즐기는 것이다.  115


합리적이라는 건 정확한 설명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따라서 합리적인 사람은 쉽게 화내지 않고, 속단하지 않는다.  117


연인 관계에서 나타나는 대단히 우울한 양산은, 처음 알았을 땐 더없이 감사하다고 느꼈던 사람에게 너무나 빨리 익숙해진다는 사실이다...

예술가들이 익숙한 것을 다시 보는 방법을 관찰하면 본받을 점을 얻을 수 있다...

그는 단지 이미 존재했지만 사람들이 무시하던 매력을 드러냈다. ..

오래된 연인 관계에서 현재에 안주하는 습관을 깨고자 할 때 우리는 마네가 그의 채소에서 발휘했던 변형의 상상력을 우리의 연인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겹겹이 쌓인 습관과 타성 밑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면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124


여행은 장대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따르는 위험을 알아야 하고, 위험에 대처하는 능력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

어색한 질문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잘못 할고 있었는가? 당신은 그 문제를 어느 정도까지 예상했어야 하는가? 당신은 그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무엇을 했어야 하며, 다음범에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 사랑을 위한 준비가 거친 바다로 나가기 위한 항행 준비보다 조금이라도 덜 가혹하리라고 예상해선 안 된다. ..

우리의 문화는 빙하의 바다를 항해할 때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대단히 솔직하면서도, 사랑에 관해서라면 더없이 감상적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너무 편향적이다.  126


가치 있는 여행이 쉬우리라고는 기대하지 말라.  127





자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경계에 위치한 이구아수 폭포 사진이나, 푸른 알프스 계곡에서 바라본 융프라우가 담긴 엽서를 생각해보라. 이런 이미지들은 보는 즉시 우리를 매혹시킨다. 그러나 왜 그것들이 우리에게 중요한지,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보라고 하면, 적당한 대답을 떠올리기가 의외로 어려울 수 있다. 그리고 자연과의 만남은 폐부를 찌르듯 아플 수 있다. 자연은 마음같아선 항상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싶지만 실제로는 거의 주목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130





 


자본주의를 개혁할 필요가 있다는 말에 많은 사람이 동의한다. 이 개혁의 본질을 가리키는 생생한 단서들을 미술의 영역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162


진짜 문제는 자신의 관심사를 모른다고 겸손하게 인정하지 않는 태도, 약점을 가리기 위해 뒤집어쓴 오만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술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믿을 만한 경험에 기초해 평가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생각하고 느끼기 위해 수고해 본 적이 없고, 다소 공황 상태에서 단지 현재 이럴 것이라고 상상하는 유행을 모방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169


어떤 것이 "굉장하다" "멋있다" "놀랍다"고 말할 때 우리는 자신의 긍정적인 반응을 드러내는 중이지, 설명을 하는 건 아니다. 비평은 눈에 보이는 장면 뒤로 들어가 진정한 이유를 찾는 과정이다.  170





정치


올바른 정치 미술은 사회의 맥박을 감지하고, 집단생활의 문제점을 이해하고, 그 문제들을 날카로운 지성으로 분석하고, 선택한 예술 매체에 최상의 기술과 혼을 담아 관람자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만일 이것이 목표라면, 우리는 정치 미술의 범주를 기꺼애 확장시켜야 한다. 우선 경제적 불평등에만 폐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을 타락시키는 개인 간의 수많은 사소한 행동에도 폐해는 존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유한 사회의 주된 문제 중 하나는 그 시민이 점점 더 공격적이고 조급해지는 것이라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 정치 미술의 한 임무는 평온함과 용서를 독려하는 데 있을지 모른다.  199-200


세련된 문화는 국가적 자부심을 엄중히 적대시했다. 그렇다고 해서 자부심이 사그라지진 않았고, 다만 길을 잃고 미성숙한 채로 남았다. 자신의 공동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픈 욕망은 본래 자연스럽고 좋은 충동이다. 예술가들은 이 욕망에 주목할 가치가 이싿. 예술의 임무가 반드시 또는 오로지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들을 비난하는 데 맞춰질 필요는 없다. 자부심을 느낄 줄 아는 우리의 능력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도 예술의 임무다. 물론 무가치하거나 어리석은 대상에 자부심을 느낄 때는('우리에겐 철광산이 많기 때문에 우린 위대하다' 또는 '우린 피부가 하얗기 때문에 위대하다') 위험하고 역겨워진다. 우리는 이 자연스러운 충동을 가장 지적이고 가치 있는 방향으로 흐르게 할 필요가 있다. 집단적 자부심이 중요한 것은 한 개인으로서는 자부심을 느낄 기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우리의 심리적 약점은, 본성적으로 다소 불가피하게 집단적인 어떤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무엇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는지 모른다는 데 있다.  204-205


자부심은 정체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 자부심을 느끼려면, 먼저 우리가 실제로 누구인지 보여주는 긍정적이고 현대적인 자아상을 지닐 필요가 있다. 항상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정체성은 국가의 현재적 실체보다 몇 세대쯤 뒤처지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208


예술은 목적지를 보여주는 그림이며,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가르쳐준다. 그러나 그곳에 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단서를 주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예술작품을 마법의 물체로 취급하고, 그것이 가슴속에 박힌 소외, 질병, 혼란, 어려움을 저절로 치유해줄 거라 믿는다.  231


예술의 혜택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예술을 언제 밀쳐두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 이 책 전체에서 우리는 예술의 혜택에 주목해왔다. 예술이 인간관계와 관련된 우리의 능력들을 어떻게 증진시키고, 돈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개선하고, 우리의 본래적 자아에 대처하며 우리의 꿈을 정치적으로 구현하는 노력에 어떻게 일조하는지 살폈다. 이것만으로도 기존 예술계가 지금까지 권유해온 예술에 대한 사고방식에서 성큼 벗어나는 첫걸음을 땐 셈이다.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 예술의 진정한 목적은 예술이 덜 필요하고 덜 예외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다. 그 세계에서는 오늘날 사람들이 미술관의 격리된 전시실에서 발견하고, 찬양하고,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가치들이 온 세상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을 것이다. 예술을 사랑한다면서도 사회가 언젠가는 예술때문에 야단법석 떨지 않게 될 거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예술에 대한 진정한 열망은 그 필요성을 줄이는 데 있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술이 다루는 가치, 즉 아름다움, 의미의 깊이, 좋은 관계, 자연의 감상, 덧없는 인생에 대한 인식, 공감, 자비 등에 냉담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예술이 나타나는 이상들을 흡수한 뒤, 아무리 우아하고 의도적이어도 단지 상징적으로밖에 드러내지 못하는 가치들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궁극적 목표는 예술작품이 조금 덜 피룡해지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어야 한다.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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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부티의 쓰레기통


나의 미래는 아주 일찍부터 너무 위태로웠던지라 엄마는 나의 현재에 대해 결코 마음을 놓지 못했다.  13


그러니까 나는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었다. 어렸을 때, 나는 날마나 학교에서 들볶이다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왔다. 내 공책에는 선생님들의 꾸지람이 적혀 있었다. 반에서 꼴찌가 아닐 때는 꼴찌 바로 앞이었다. (축배를 들어야 할 일이었다!) 처음엔 계산, 그다음엔 수학에서 꽉 막혔고, 심각한 철자 습득 장애에다, 역사의 연대 암기와 지리의 장소 파악에도 먹통이었고, 외국어 습득 불능에다 (수업은 듣지 않고 숙제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라는 명성이 자자했으며, 음악이나 체육 혹은 그 외의 어떤 과목으로도 벌충하지 못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성적표를 집으로 가져오곤 했다.  16


"그러니까 학교에 관한 책이 또하나 나오는 거네? 그런 책은 꽤 많지 않아?"

"학교에 관한 책이 아냐! 모두들 하굑를 다루고 있고, 신구 논쟁은 끝없이 계속되고 있어. 학교의 프로그램, 학교의 사회적인 역할, 그 궁극적인 목표, 과거의 학교와 오늘의 학교... 그런데 열등생에 관한 책은 없거든!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에 대해 그리고 그로부터 겪게 되는 정신적인 충격을 다루는 책..."

"그게 그렇게 힘들었어?"  22-23


"요컨대 넌 핑계를 만들어냈던 거야,"

그렇다. 그게 바로 열등생의 속성이다. 그들은 자신의 열등함에 대해 굽이굽이 반복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난 한심해, 난 정대 할 수 없어, 그러니 노력해볼 필요도 없어. 이미 다 망했어. 내가 그랬잖아요, 학교는 나한테 맞지 않는다고... 열등생에게 학교는 출입이 금지된 몹시 폐쇄적인 집단으로 보인다.  25


두려움은 분명 학창 시절 내내 나의 가장 큰 문제였고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교사가 된 뒤, 나의 급선무는 공부 못하는 학생들의 두려움을 치료하고 방해물을 치워버려 앎이 스며들 기회를 갖게 해주는 일이었다.  30





2. 되다


어머니들 모두가 조금은 창피해하고, 모두가 자기 아들의 미래를 걱정한다. "대체 이애가 뭐가 될까요?" 대부분의 어머니는 미래라는 강박적인 화폭에 현재를 투영해 그려놓은 것을 아이의 미래로 생각한다. 희망 없는 현재의 이미지가 터무니없이 비대하게 투영된 벽을 미래라고 생각하는 것, 바로 여기에 모든 어머니의 거대한 공포가 있다.  61


나는 우스운 이야기를 시도해본다.

"신을 웃기는 유일한 방법을 아세요?"

전화 저편의 머뭇거림.

"신에게 당신의 계획을 맗는 겁니다."

다시 말해 놀랄 것 없다는 것, 그 어떤 일도 예상대로 이렁나지 않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 미래가 과거가 되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유일한 사실이다.

물론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 쉽게 아물지 않을 상처에 반창고나 붙여주는 격일 테니까. 하지만 나는 전화로는 그렇게 하고 있다.  62-63


어떤 미래도 없다. 

뭔가 되지 못할 아이들.

절망적인 아이들.

초등학생, 다음에는 중학생, 그다음에는 고등학생이 된 나 역시 그렇게 앞날이 없는 삶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것은 바로 공부 못하는 학생이 스스로를 설득하는 최초의 사실이다. 

"이런 성적으로 뭘 기대해?"

"중1이나 마칠 수 있을 것 같니?(중2, 중3, 중4, 고1, 고2는...?)"

"대학에 들어갈 가능성이 얼마나 될 거 같아? 퍼센트로 따져 얼마나 될지 계산 좀 해볼래?"

혹은 정말로 즐거운 비명까지 질러가며 호언장담하던 중학교때 교장 선생님 같은 사람도 있다.

"페나키오니, 네가 중학교를 졸업하겠다고? 절대 그럴 수 없을 거다. 알겠니? 절대로!"

그 여자는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69-70


나는 학교생활을 따라가지 못했고 언제나 그런 모습뿐이었다. 물론 시간은 지나갈 것이었고, 물론 성장할 것이었고, 물론 사건들도 일어날 것이었고, 물론 삶도 계속될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결과에도 결코 이르지 못할 그런 실존을 횡단할 것이었다. 그것은 확신보다 더한 것이었고, 그게 나였다.

어떤 아이들은 이러한 사실에 재빨리 설득당한다. 그리하여 자신을 각성시켜줄 누군가를 찾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실패에 열정을 쏟게 된다. 열정 없이는 살 수 없으므로.  72


겨울 저녁. 나탈리가 흐느껴 울며 학교 계단을 급히 내려간다. 누군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슬픔...

선생은 생각한다. 이런, 학교의 슬픔이로군.. 

"선생님 ... 흑흑... 흑흑... 선생님... 저는 ... 저는 이해를... 이해를 못하겠어요."

"뭘 이해해? 뭘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야?"

"양... 양보..."

그리고 갑자기 병마개가 쑥 뽑히듯 단번에 답이 나온다.

"양보와 대립의 종속 접속절요."

침묵.

웃어선 안 된다.

절대 웃으면 안 된다.

"양보와 대립의 종속 접속절? 그것 때문에 그렇게 울고 있는거야?"

안도감. 선생은 재빨리. 아주 진지하게 문제의 그 접속절을 생각한다. 이 아이에게 그건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 잘 몰라도 그 절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생각한다...

".. 이건 아주 쉬운 거야. 자, 봐. 됐지, 알겠니? 그래, 예문을 하나 만들어봐. 아이는 정확한 문장을 만들어낸다. 이해한 것이다. 자, 이제 좀 괜찮니? 어! 그런데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다. 아이는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다시금 눈물을 흘리고 크게 울먹이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선생님은 아무것도 몰라요. 제 나이 열두 살하고도 반년이 지났는데, 암것도 한 일이 없어요." ...

다음날 저녁이 되어서야 나는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나탈리의 아버지는 어느 회사 간부였는데 십 년간의 성실한 직장생활 끝에 얼마 전 해고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간부직 해고 사태의 첫 사례였다. 때는 80년대 중반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실직이란 말하자면 노동직 문화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회사에서의 자기 역학을 의심하지 않았던 모범적이고 세심한(작년에 나는 나탈리의 아버지를 자주 보았다. 그는 소심하고 자신감이 너무 부족한 딸 때문에 근심이 많았다) 젊은 간부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는 결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고는 가족들이 모인 식탁에서 끊임없이 되뇌었다. "내 나이 서른다섯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  73-76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자살하는 일이 일어날 정도로 말이다. 이것이, 적어도 모든 면에서 나타나는 우리 교육의 균열이다.  86


들통난 거짓말, 선생님들의 분노, 부모의 슬픔, 비난, 처벌, 아마도 퇴학, 자아로의 복귀, 무기력한 죄의식, 모욕, 우울한 희열, 그들 말이 옳아, 나는 한심해, 한심해, 한심해.

난 한신한 놈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자신이 한심하다는 확신에 빠져 잇는 청소년은-이게 바로 체험이 우리에게 가르쳐줄 최소한의 사실인데-하나의 멋잇감이다.  94-95


아이의 거짓말에 동조한 어른들에 관한 이야기 중에 가장 기억할 만한 것은 내 친구 B의 동생에게 일어난 일이다. 당시 B의 동생은 열두세 살쯤이었을 것이다. 그애는 수학 시험이 겁나서 단짝 친구에게 맹장의 정확한 위치를 짚어달라고 했다. 그러더니 끔찍한 발작이 일어난 시늉을 하며 쓰러졌다. 학교 지도부는 그애의 말을 믿는 척하며 집으로 돌려보냈는지데. 어쩌면 그애를 치워버리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부모는-그애는 부모에게 다른 거짓말도 했다-별생각 없이 아이를 인근 병원으로 데려갔는데, 병원에서는 깜짝 놀라며 당장 수술을 했다! 수술 후, 핏빛의 기다란 뭔가가 담긴 병을 들고 나타난 외과의사는 순진하고 환한 얼굴로 이렇게 외쳤다. "수술하기를 잘했습니다. 하마터면 복막염이 될 뻔했어요!"

사회란 공유하는 거짓말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100


가장 좋은 기숙학교는 선생님들도 함께 기숙하는 학교다.  102


열등생이 선생님으로 변신한 것은 무엇에서 기인한 걸까?

덧붙여, 알파벳도 깨치지 못하던 애가 소설가로 변신한 것은?

나는 어떻게 해서 뭔가가 되었을까?  108


아이에게 장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한을 센티미터로 재라고 요구하는 꼴이다. '되다'라는 동사가 아이를 주눅들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어른들의 걱정이나 질책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게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조금도 생각해내지 못했고, 그냥 순진하게 영원히, 언제나 바보일 거라는 그들의 말을 믿었다. '영원히'와 '언제나'는 상처받은 자존심이 열등생에게 시간을 헤아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단위였다.  111


최고 권력자들이 이미 파산선고를 내렸는데 죽어라 공부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보다시피 나는 궤변론자의 태도 같은 걸 키워가고 있었다. 이것은 선생이 된 내가 열등생 제자들에게서 한눈에 구별해내는 기질이다.

그 뒤에 나의 첫번째 구원자가 나타났다.

국어 선생님. 

중4 때.

당시의 나를 있는 그대로 알아보았던 분. 즉 명랑하게 자멸해가는 진지한 망상가로 말이다.

틀림없이 그 선생님은 가르쳐준 것은 배우지 않고, 숙제 못한 핑계를 어떻게 둘러댈까 늘 잔머리를 굴리는 나의 적성에 대경 실색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 소설 한 편을 쓰라고 명령하고 대신 논술을 면제해주기로 작정한 것이다. 일주일에 한 장(章 글장)씩 써서, 한 학기에 소설 한 편을 끝내야 했다. 주제는 자유지만, 틀린 글자 하나 없는 소설을 내야 했다. 선생님은 "비평의 수준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소설 자체는 까맣게 잊어버렸는데도 그 표현만큼은 기억난다.) 그분은 교직 말년을 우리에게 바친 노교사였다. 더이상 궁핍할 수 없는 파리 북쪽 변두리 중학교에서 당신의 은퇴를 연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 낡아빠진 기품을 지닌 노선생이 내 안의 이야기꾼 기질을 알아본 것이다. 그는 내게 철자 습득 장애가 있든 말든 학교 공부를 따라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면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주 열정적으로 소설을 썼다. 사전(그날 이후 사전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의 도움을 받아가며 조심스레 단어 하나하나를 고치고, 신문에 연재하는 전업 작가처럼 날짜를 지켜가며 매주의 분량을 갖다 냈다. 지금 떠올려보면, 아주 슬픈 이야기였고, 당시 내가 큰 영향을 받았던 토머스 하디풍의 글이었다. 토머스 하디의 소설들은 오해에서 재난으로, 재난에서 어찌할 수 없는 비극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운명에 대한 나의 취향을 매혹 했다. 출발선부터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 내 생각이 바로 그거였다.

그해 내가 뭔가에서 중요한 발전을 이루어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학창 시절 처음으로 어떤 선생님이 나에게 하나의 지위를 부여했고, 나는 계속 따라가야 할 노선이 있는 개인으로, 지속적으로 견뎌내고 있는 한 사람으로, 누군가의 눈에 학생으로 존재했다. 물론 나의 후원자인 노선생님이 미치도록 고마워쏘, 그가 꽤 거리를 두고 있었음에도 내 비밀스러운 독서를 털어놓을 만큼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래, 페나키오니, 요즘은 뭘 읽고 있니?"

나에겐 독서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게 나를 구원해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때의 독서는 요즘처럼 터무니없는 자랑거리가 아니었다. 시간 낭비이자 학업을 망치는 일로 평판이 난 소설 읽기는 수업 시간에 금지되었다. 책을 몰래 숨어서 읽는 내 취향은 거기서 비롯했다. 소설책을 교과서로 씌워 읽고, 되도록 모든 곳에 책을 숨겨두고 읽고, 야밤에 손전등을 켜고 읽고, 체육 시간을 면제받아 읽고, 혼자서 책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이든 좋았다. 이런 취미를 길러준 곳이 바로 기숙사다. 나만의 세계가 필요했는데, 그게 책들의 세계였다. 집에 있을 때는 무엇보다 식구들이 책을 읽는 모습을 관찰했다. 아버지는 파이프를 물고 안락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무릎에 책을 올려놓고 둥근 램프 아래, 나무랄 데 없는 가르마를 약지로 무심히 쓰다듬으며 읽었다. 베르나르 형은 방에서 다리를 구부린 채 옆으로 길게 누워 오른손으로 머리를 괴고 읽었다... 이런 태도들에는 행복 같은 게 있었다. 따져보면 나를 독서로 밀어붙였던 것은 책 읽는 사람의 이런 자태였다. 처음에는 오로지 그런 자세들을 따라해보려고, 그리고 다른 자세를 개발해보려고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언제나 지속되는 행복 속에 신체적으로 정착했다. 무엇을 읽었나? <미운 오리 새끼>를 나로 여겨 안데르센의 동화책들을 읽었다. 하지만 검과 말 그리고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동경으로 알렉상드르 뒤마도 읽었다. 그리고 셀마 라겔뢰프의 멋진 <예스타 베를링>, 주교에게 추방당한 그 훌륭한 술주정뱅이 사제는 에세뷔의 다른 기사들과 더불어 내 모험의 지치지 않는 동반자였다. 중3으로 올라갈 때 베르나르 형이 준 <전쟁과 평화>는 맨처음 나타냐와 안드레이 공작의 사랑 이야기로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사랑 이야기에만 집중하면 소설은 100페이지쯤으로 줄어든다. 중4 때 두번째로 그 책을 읽었을 때는 나폴레옹식의 서시시로 읽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보로디노 전투, 모스크바의 화재, 러시아군의 퇴각(나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거대한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수업 시간에 몰래 그렸던 그 작은 인간들을 학살당하게 했다). 이것은 기껏해야 200~300페이지로 압축된다. 고1 때 다시 읽었을 때는 피에르 베주호프의 우정이 눈에 들어왔다(이자는 또다른 미운 오리 새끼이긴 해도 생각보단 많은 걸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3 때 소설의 전체가, 그러니까 러시아와 쿠투조프, 클라우제비츠 같은 인물이, 토지개혁이 그리고 톨스토이가 눈에 들어왔다. 물론 디킨스-올리버 트위스트는 나를 필요로 했다-도 읽고 에밀리 브론테도 읽었다. 브론테의 모럴은 내게 구조를 요청했다. 또한 스티븐슨, 잭 런던, 오스카 와일드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을 처음으로 읽었다. 당연히 <노름꾼>이 있었다(왜 그런지는 알아봐야 하는데, 도스토옙스키는 항상 이 <노름꾼>으로 시작된다). 나의 독서는 이런 식으로 우리집 서재에서 찾아낸 책들로 이루어졌고, 물론 <탱탱> <스피루> 그리고 당시를 휩쓸었던 <흔적의 표시들> 혹은 <봅 모란> 같은 만화도 읽었다. 내가 학교로 가져가는 책들이 첫째 조건은 학교 독서 프로그램에 없는 것이어야 했다. 아무도 내게 묻지 않았다. 누구도 내 어깨 너머로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책의 저자와 나는 우리끼리 오롯이 머물렀다. 책들을 읽으면서 내가 교양을 쌓아가고 있었다는 것, 그 책들이 내 안에 어떤 욕구를 일깨웠소 그 욕구는 책들이 잊히더라도 살아남을 거라는 걸 나는 몰랐다. 청소년기이 이러한 독서는 세상의 기호들을 향해 사방의 문을 열어놓으며 완수되었고, 그중에서도 네 권의 책이 서로 구별되지 않은 채,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이유로 내 안에서 밀접한 친족관계를 직조해냈다.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 위스망스의 <거꾸로>, 롤랑 바르트의 <신화지> 그리고 페렉의 <사물들>이 바로 그 책들이다.

난 고급 독자는 아니었다. 플로베르에게는 실례가 되겠지만, 열다섯 살에 에마 보바리처럼 오로지 감각의 만족을 위해 책을 읽었고, 다행히 그 감각은 지칠 줄 모르고 나타났다. 나는 이러한 독서로부터 학교생활에 도움이 될 어떤 이득도 끌어내지 못했다. 모든 선입관과는 반대로 이처럼 삼키듯 읽은-그리고 아주 빨리 잊힌-수천 페이지의 글은 나의 철자법을 개선해주지 않았고, 철자법은 요즘도 내게 불분명한 채로 남아 언제 어디서든 사전을 찾아봐야 한다. 아니다. 내 철자법의 실수들이 일시적으로나마(하지만 이 일시적인 것이 결정적으로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극복되었던 것은 노선생님이 주문한 소설에서였다. 철자법에 신경쓰느라 독서 수준을 낮추고 싶지 않다는 선생님의 요구에 나는 틀린 글자 없는 원고를 갖다드려야만 했다. 요컨대 대단히 천재적인 교수법이었다. 아마도 오로지 나에게만 통했을, 그리고 오로지 그런 상황에서만 통했을 방법이지만, 어쨌든 천재적이다!

나는 이렇게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선생님을 중4와 고3 사이에 세 분 더 만났다.

한 분은 수학 자체였던 수학 선생님이고, 또 한 분은 역사 구현력이 누구보다 뛰어난 놀라운 재능의 역사 선생님, 그리고 나머지 한 분은 철학 선생님이다...

네 분의 선생님은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구원했다.  112-118


요컨대 우리는 뭔가가 된다.

하지만 사람은 그리 많이 변하지 않는다. 생긴 대로 된다.  123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뭔가가 된다.

예상대로 되는 일은 드물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뭔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때로 계획이 이루어지고 적성이 실현되고 밀래가 약속을 지키기도 한다.  130


우리는 뭔가가 되어간다. 살아가는 한 모두 뭔가가 되고, 때로는 뭔가를 이루어낸 사람들이 되어 서로 마주친다.  131





3. 거기 혹은 '구현의 현재'


자기불만에 휩싸인 선생은 누구보다 재빨리 학생을 야단친다.  158


수업에 완전하게 몰두하는 선생님의 현존은 단번에 감지된다. 아이들은 학기 첫 순간부터 그것을 느끼며, 우리 모두가 그것을 경험했다. 선생님이 막 들어선다. 그는 절대적으로 여기 있다. 그것은 그가 바라보는 방식, 학생들에게 인사하는 방식, 자리에 앉아 자기 책상을 차지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그는 아이들의 반응을 걱정하며 두리번거리지 않으며,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지도 않는다. 그는 처음부터 바로 자기 일에 빨려들어가 그 자리에 현존하고, 아이들 각자의 얼굴을 구별해내며, 학급은 즉시 그의 눈앞에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현존감을 얼마 전 블랑메닐의 어느 학교 교실에서 새롭게 체험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토록 생기 넘치는 아이들의 에어니를 제어하기 위해 어떻게 처신하는지 물었다.

"절대 아이들보다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아요. 그게 요령이죠." ...

"아이들과 함께 있거나 숙제를 검토할 때 나는 딴 데 가 있지 않아요."

"내가 다른 곳에 있으면 절대로 아이들과 함께할 수 없죠." ...

"아이들 각자는 자기 악기로 소리를 내고 있는 건데, 그걸 거스를 필요가 없어요. 까다로운 일은 우리의 음악가들을 잘 꿰뚫어 보고 조화를 찾아내는 거죠. 좋은 학급이란 발맞춰 행진하는 군대가 아니라 모두 함께 같은 교향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예요. 만일 그들이 땡땡거리기만 하는 작은 트라이앵글이나 브롱브롱 소리만 나는 갱바르드(말굽자석처럼 생긴 조그만 악기로, 하모니카처럼 입으로 물고 손가락을 튕겨서 소리를 낸다)를 물려받았다면, 적절한 순간에 최선을 다해 내는 그 모든 소리, 그들이 훌륭한 트라이앵글과 나무랄 데 없는 갱바르드가 되는 일, 그래서 각자의 기여가 전체에 부여한 음악의 질에 자랑스러워하는 일이죠. 조화에 대한 감각은 그들 모두를 발전시키고, 조그만 트라이앵글은 마침내 음악을 알게 되는 겁니다. 아마도 제1바이올린만큼 화려하지는 않겠지만 그 역시 똑같은 음악을 체험하는 거지요." ...

문제는 사람들이 그 아이들에게 제1바이올린 주자만 중시하는 세상을 믿게 한다는 거예요." ...

"어떤 동료들은 자신이 카라얀인 줄 알고 시골의 마을 합창단 지휘를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그들은 모두 베를린 필을 꿈꾸죠. 이해가 가는 일이에요..."  159-162


받아쓰기 - 우리의 받아쓰기가 맞춤법에 치중하여 초등 저학년에 한정된 것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철자와 문법 그리고 구문의 이해력까지 포함하며 성인들의 여가에까지 널리 활용되는 문학적 훈련을 의미한다.  170


나는 언제나 받아쓰기를 언어와의 완전한 만남으로 생각해왔다. 소리나는 대로의 언어, 이야기하는 대로의 언어, 사유하는 대로의 언어, 글로 쓰고 만드는 대로의 언어, 세심한 교정 훈련을 통해 분명해지는 의미. 왜냐하면 받아쓰기의 교정에는 텍스트의 정확한 의미에, 문법 정신에, 말들의 풍부함에 다가가고자 하는 목표 말고 다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172


아이들이 스스로를 형편없다고 고백한 것에 대한 즉각적인 반향으로, 즉석에서 생각해낸 돌발 받아쓰기였다.

니콜라는 철자법에서 항상 빵점일 거라고 주장하는데, 그 유일한 이유는 한 번도 다른 점수를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ㅍ레데리크, 사미, 베로니크도 같은 생각입니다. 맨 처음 받아쓰기 때부터 그들은 쫓아다니던 빵점이 그들을 뒤따라와 삼켜버린 것입니다. 그애들 말로는 저마다 빵점 속에 살고 있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자기들 주머니에 열쇠가 들었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문장을 만들어내는 도안, 아이들의 호기심을 흥겹게 일깨우려는 생각으로 각자에게 역할을 나눠주면서 문법적으로 설명할 것들을 고려했다. 동사 변화와 목적어의 위치, 보어의 위치, 보어 인칭댐ㅇ사의 위치, 주격 관계대명사 등등을.

받아쓰기가 끝나자 우리는 즉각 교정을 시작했다.

"좋아, 니콜라. 맨 첫 문장을 읽어봐라."

"'니콜라는 철자법에서 항상 빵점일 거라고 주장하는데.'"

"그게 첫 문장이야? 거기서 끝나? 확실해?"

"....."

"주의해서 읽어봐."

"아! 아니에요. '그 유일한 이유는 한 번도 다른 점수를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맨 처음 나오는 활용 동사는 뭐지?"

"'주장하는데'?"

"그래. 원형은?"

"'주장하다'요."

"몇 군 동사지?"

"어..."

"3군 동사지. 그건 좀 있다가 설명해주마. 시제는 뭐지?"

"형재형이요."

"주어는?"

"저요. 그러니까 '니콜라'요."

"인칭은?"

"3인칭 단수요."

"그래. '주장하다' 동사의 현재형 3인칭 단수지. 동사의 어미를 주의해라. 자, 이제 베로니크 차례다. 이 문장의 두번째 동사는 뭐지?"

"'못하다'요!"

"'못하다'? 확실해? 다시 읽어봐!"

"..."

"..."

"아, 아니에요, 선생님. 죄송합니다. '받아보지'예요. 그러니까 '받다' 동사요."

"어떤 시제지?"

교정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174-176


체계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은 암기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런 정신의 소유자는 작품의 진수를 이용할 줄 안다는 것이다.  187


"저는 앵무새가 아니에요!"

그들은 마지막까지 항의했고, 그건 정당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건 그런 말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부모들, 아! 그들은 어찌나 변했는지 부모들 스스로 때로 이렇게 말한다. "페나키오니 선생님, 아이들에게 텍스트를 외우게 한다면서요? 세사에, 제 아들은 이제 어린애가 아니랍니다!" 어머님, 언어에 잇어서 만큼은 아드님은 영원히 어린애일 것이고, 어머님 자신도 아주 어린 아기이며, 저는 우스꽝스러운 어린애입니다. 우리 모두가 문학의 구어적이 ㄴ원천이 넘쳐흐르는 거대한 강에 실려가는 잔챙이 물고 기인 한은 말입니다. 아드님은 언어 안에서 헤엄치는 걸 좋아하게 될 테고, 언어에 실려 목을 축이고 젖을 취하며,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자랑스럽게 말입니다. 아이를 믿으세요. 아이는 자기 입속의 말맛, 머릿속 생각의 빛나는 불꽃을 아주 좋아하게 될 것이고, 자신의 대단한 기억력, 그 무한한 유연성, 그 울림통,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노래하게 하고 가장 분명한 생각을 울려퍼지게 하는 놀라운 음량을 발견하게 도리 것입니다. 언젠가 기억 속의 그 끝없는 동굴을 발견할 때는 언어 속에 잠겨 헤엄치며 깊숙이 잠수해 텍스트들을 건져올리는 일을 좋아할 것입니다. 평생 그것들이 그곳에서 자기 존재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즉흥적으로 그것들을 외울 수도 있고, 말들의 묘미를 위해 입 밖으로 소리내볼 수도 있다는 걸 좋아하게 될 겁니다. 그 덕분에 아이는 다시 입말이 된 문학의 전통을 아마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게 될 것입니다. 공유하기 위해서든 유혹의 유희를 위해서든 잘난 척하기 위해서든 그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는문자 이전의 시간, 생각의 존속이 오직 우리의 목소리에만 의존하던 그 시간과 다시 연결될 겁니다. 어머님은 그것을 퇴행이라고 말씀하기지만, 저는 재회라고 말하겟습니다! 앎이란 무엇보다 육체적인 것입니다. 앎을 포착하는 것은 우리의 귀와 눈이고, 그것을 옮기는 것은 우리의 입입니다. 물론 앎은 책으로부터 우리에게 오지만, 책은 우리를 벗어납니다. 생각이란 소란스러우며, 읽고자 하는 의욕은 말하려는 욕구의 유산입니다.  189-190


나는 아이들을 텍스트 속에 방치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들과 함께 그 속에 빠져든다.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들의 텍스트 분석을 따라가면서, 가장 어려운 글을 함께 배우기도 했다... 아이들은 읽은 내용을 이해하게 되자 기억의 능력을 찾아냈고, ...아이들은 나열된 단어를 암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단지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라 언어의 지성, 즉 타자의 언어, 타자의 사유 안에서 소리를 낸 것이다. 단순히 <에밀>을 암기한 것이 아니라 루소의 추론을 복원한 것이다.  196


지식을 가지고 유희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유희란 노력의 숨고르기이고, 심장의 또다른 박동이며, 학습에 심각한 해를 끼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리고 교과를 가지고 노는 일은 그것을 제어하는 훈련이 됩니다.  200


1969년부터 1995년까지, 엄선해서 정원을 뽑은 한 학교에서 보낸 이 년을 제외하면, 내가 맡은 학생들 대둡분이 옛날의 나처럼 학교생활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었다. 가장 심한 상태에 이른 아이들은 그맘때의 나와 거의 같은 증상을 보였다. 자신감 상실, 모든 노력의 포기, 집중 불가, 산만, 과대망상, 불량배 패거리 조직. 가끔은 술도 마시고 마약도 했는데, 자기들 말로는 약한 거라고 했지만 아침에 보면 눈에 축축이 젖어 있곤 했다.  205


노력이라는 말의 개념을 다시 가르쳐주고, 결과적으로 고독과 침묵의 맛을 되찾아주고, 무엇보다 시간을, 즉 권태를 제어하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때로는 아이들을 지속되는 시간 속에 앉혀 놓기 위해 권태를 연습하라고 충고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놀리도 말고, 먹지도 말고, 대화도 하지 말고, 공부도 하지 말고, 요컨대 진짜로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 저녁 이십 분간 권태 연습을 하는 거다. 공부 시작 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

"음악 듣는 것도 안 돼요."

"그거야말로 안 돼."

"이십 분이요?"

"그래, 이십 분. 시계를 손에 쥐고. 오후 5시 20분부터 5시 40분까지. 곧장 집으로 돌아가 아무에게도 말을 건네지 말고, 도중에 딴 데로 새지도 말고, 게임기도 무시하고, 친구들도 못 본 체하고, 너희들 방으로 곧장 들어가 침대 옆 구석에 앉아 책가방도 열지 말고, 워크맨도 끼지 말고 게임기도 들여다보지 말고, 허공에 눈을 박고 이십 분을 기다려봐."

"뭐하러 그래요?"

"어떻게 되나 보게. 흘러가는 시간에 집중하고, 일 분도 놓치지 말고 어땠는지 내일 얘기하는 거야."

"우리가 했는지 어떻게 검사하실 거죠?"

"나야 할 수 없지."

"그리고 이십 분이 지난 다음에는요?"

"허기진 사람처럼 각자의 일에 달려드는 거야."  206-207


세상 누구도 무능함의 사과를 영원히 깨물고 있진 않는다!

가르친다는 일은 아마도 그런 것일 게다.  208


가르치든 교사가 질문을 던질 때마다 학생들이 내놓을 수 있는 답변은 세 가지다. 정답과 오답과 터무니없는 답.  213


터무니없는 대답이 오답과 다른 점은 어떤 추론의 시도도 거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흔히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터무니없는 대답은 반사적인 행위일 뿐이다.

던져진 질문에 대답한 게 아니라 자기한테 질문이 던져졌다는 사실에 대답한 것이다.  215


선생님이 던진 질문을 겨우 이해만 할 뿐이다. 그걸 고백할 수 있나? 침묵을 선택할까? 아니다. 차라리 아무 대답이나 하는 게 낫다. 가능하면 천진난만하게. 제가 엉뚱하게 빗나갔나요, 선생님? 후회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저 운을 한번 걸어봤고, 그게 실패한 것뿐이다. 저한테 빵점을 주시고 사이좋게 지냅시다. 터무니없는 대답은 무지에 대한 외교적인 고백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어떤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물론 전형적인 반항 행위를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선생님이 나를 귀찮게 굴고 나를 꼼짝 못하게 해. 선생님한테 왜 그러느냐고 물어볼까?

이 모든 경우 이런 대답에 점수를 주는 것-일테면 답안지를 교정하면서-은 아무 대답에나 점수를 주기로 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 자체가 터무니없는 교육 행위를 저지르는 일이 된다.  215-216





4.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사실 가족과 선생님들이 공부 못하는 학생에게 가장 흔히 하는 비난 중 하나가 바로 그 불가피한 지적인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다. 직접적인 비난이든("핑계 대지 마.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수많은 설명에 뒤이은 분노든("세상에, 이럴 수는 없어.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제삼자에게 건네진 정보, 즉 혐의자가 부모의 방문 앞에서 듣고 놀라게 될 말이든("분명 그 녀석이 일부러 그러는 거야!") 간에 말이다.  233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어쨌거나 이 문장의 주인공은 일부러라는 부사다. 문법을 무시하고 그 부사를 대명사 너에 직접 연결하면, '너 일부러!'가 된다. 거야는 부차적이고 그러는은 완전히 무색무취다. 중요한 것, 즉 비난받는 사람의 귀에 울려대는 말은 누가 뭐래도 너 일부러라는 말이고, 이것은 꼿꼿이 세워진 검지를 떠오르게 한다.

죄인은 바로 너야.

유일한 죄인,

그것은 고의로 그런 죄인이지!

이것이 메시지다. 

어른들의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라는 말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 아이의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라는 말과 쌍을 이룬다.

격렬하지만 별 기대 없이 맞받아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는 거의 자동적으로 다음과 같은 대꾸를 끌어들인다.

"그러길 바란다!"

"그나마 다행이네!"

"설상가상이군!"

이 반사적인 대화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며 세상의 모든 어른은 적어도 처음에는 자신들의 반격이 정신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거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에서 일부러는 그 위력을 조금 잃고, 그런은 어떤 힘도 얻어내지 못한 채 일종의 보조 역할로 남고, 그거는 여전히 벼로 중요하지 않다. 죄지은 자가 여기서 우리 귀에 울려주려고 애쓰는 말은 아니에요라는 부정어에 연결된 대명사 나다.

너 일부러라는 어른의 말에 아이의 나 아니에요가 대응하는 것이다. 

부사도, 목적어도 없이 나만 있고, 그 안에서 아니다에 들러붙은 이 나는, 이 경우, 나는 나에게 속해 있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다. 

"아니, 분명코 넌 일부러 그랬어!"

"아니, 난 일부러 그러지 않았어요!"

"너 일부러!"

"나 아니에요!"

귀머거리들의 대화, 문제를 회피하고 파국을 연장할 필요. 우리는 해결책도 환상도 없이, 한쪽은 복종하지 않는다고, 다른 쪽은 이해받지 못했다고 확신하고는 헤어져버린다.

여기서는 문법이 여전히 유용해 보일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이 불화의 영역에 버려진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말, 즉 우리 대화의 모든 끈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던 그거라는 말에 관심을 갖기로 동의한다면 말이다.

자, 예전의 문법 연습을 조금 해보자. 내가 '개량'반 아이들과 했던 것처럼, 그냥 한번 보자는 거다.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원어는 Tu le fais expres)'라는 표현에서 그거(le)가 어떤 품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

"저요, 저요! 관사예요. 선생님!"

"관사? 어째서 관사지?"

"그거를 표현하는 le, la, les가 관사잖아요! 정관사요!"

의기양양한 어조. 뭔가 안다는 것을 선생에게 보여주었다는 표정... un, une, des는 부정관사이고, le, la, les는 정관사, 자, 봐요, 맞잖아요!

"그래? 정관사라고? 그러면 그 관사가 한정하는 명사는 도대체 어디 있지?"

"......"

찾아보지만, 명사는 없다. 난처함.

관사가 아니다. 

그럼 이 그거(le)는 뭔가?

"......"

"......"

"그건 대명사예요, 선생님!"

"브라보! 어떤 종류의 대명사지?"

"인칭대명사요!"

"그래?"

"보어대명사요!"

"그래. 아주 잘했다! 바로 그거다."

이제 교실을 떠나 우리 얘기로 다시 돌아와 어른들 사이에서 이 보어대명사를 분석해보자. 신중하게, 이 보어대명사들은 위험한 말이고, 분명한 의미 아래 깊이 숨어 있는 반(反 되돌릴반)인칭적인 폭약이라 뇌관을 잘 제거하지 않으면 여러분 얼굴로 폭발해버린다. 예를 들어 이 그거(le)..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라는 비난의 말을 하면서 그때의 그거라는 말이 그 상황에서 무엇을 표현하는지 우리는 몇 번이나 자문해보았던가? 일부러 뭘 그런다는 것일까? 가장 최근의 바보짓? 아니다. 이 비난을 던졌을 때의 우리 어조(어조 또한 있기 때문이다!)는 그 죄인이 언제나 일부러 그런다는 사실과, 매번 일부러 그러는데 최근의 바보짓은 그런 고집의 확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암시한다. 그렇다면 일부러 뭘 그런다는 것일까?

복종하지 않는다?

공부하지 않는다?

집중하지 않는다?

이해하지 않는다?

이해하려고 노력조차 않는다?

반항한다?

몹시 화가 나게 한다?

선생들을 화나게 한다?

부모들을 절망시킨다?

최악의 결점에 굴복한다?

현재를 망쳐 미래를 침몰시킨다?

세상을 조롱한다?

어, 그런 거야? 세상을 조롱하는 거야? 우리를 선동하는 거야?

그래, 말하자면 이 모든 거라고 하자.

그러면 부사의 문제가 떠오른다. 왜 일부러인가? 무슨 목적으로? 무슨 이유로? 그가 일부러 그런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목표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뭐하러 일부러 그러는가?

순간을 즐기려고? 단지 그 순간을 즐기기 위해? 하지만 불가피한 다음 순간, 즉 그가 나와 함께 보내는 다음의 십오 분은 내가 야단을 치기 때문에 아주 고약한 시간이다! 그는 야단맞는 일에 무심한 채로 게으름의 상태를 평온히 살고 싶은 걸까? 쾌락주의 같은 것? 하지만 그는 무위도식의 행복이 경멸적인 시선의 대가, 자기혐오를 낳는 결정적인 지탄의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그러는가?

다른 열등생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열중하는 게 배신이라서? 젊은이가 노인에게 반항하듯, 일부러 선한 것에 대항하며 악을 즐기는 걸까? 자기 나름의 사회화 방식일까?

아무려나. 어쨌든 그것은 모더니티에 관한 가장 인기 있는 명제다. 무능한 이들의 소집단화 현상.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너나없이 불량배가 우글거리는 거대한 저지대로 도피하는 것. 이런 설명은 사회학적인 진실에 어느 정도 근거한다는 편리한 점이 있으며, 그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어떤 의구심도 없다. 하지만 이 설명은 무리의 현상이건 아니건 간에 언제나 독자적인 그 아이라는 개인을 몰아낸다. 아이는 이러저러한 순간 혼자 있게 되며, 자신의 실패를 홀로 마주하고, 자신의 미래를 홀로 마주하고, 밤에 잠들기 전에도 자기 자신과 홀로 마주한다. 이제 아이를 살펴보자. 잘 바라보자. 그 아이가 행복할 거라는 데 단돈 한푼이라도 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 아이가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사실을 말하자면 이러한 설명 중 어느 것도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모든 설명이 다시간 그럴듯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문법 규칙 같은 것은 접어두고, 그 대명사가 문장 외부의 어떤 대상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을까? 예컨대 우리 자신으... 우리 자신의 눈에 비친 우리 이미지의 하강. 우리의 이미지 또한 바람직한 거울을 많이 필요로 한다.

무능하고 초조한 어른, 이해할 수 없는 거절의 희생자인 어른의 이미지를 타인-여기서는 한심한 학생-이 나에게 되돌려 준다고 비난하는 듯한 그것. 그렇지만 내가 그 아이에게 주입시키려는 원칙들이 건전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흩뿌려준 앎이 정당하다는 것도! 

그 아이의 고독에 어른인 나 자신의 고독이 대답한다.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리고 그것이 반 전체의 문제가 될 때, 서른 명의 학생이 일부러 그러기 시작할 때, 교사인 나는 문화적 린치의 대사이 되고 있음을 확실히 체감한다. 그리고 그 대명사가 한 세대 전체-"우리 때는 그런 건 상상할 수도 없었어!"-에 영향을 미친다면, 연이은 세대들이 일부러 그런다면, 그때 우리는 멸종 위기에 처한 종족의 마지막 대표들로, 젊은이들(그 시절의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던 전(前 앞전) 시대의 생존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노년의 삶에서 외로움을 절감한다. 물론 여전히 명석하고, 아주 세심하고, 얼마나 유능한데! 요컨대 우리들 사이에서는 말이다. 젊었을 때는 문명화된 세대의 얼마 안 되는 증인이었던 우리가 생각은 여전히 제대로 하고 있는데도 현실로부터 어쩔 수 없이 소외된 것처럼.

소외된...

소외감은 단지 순환하는 수많은 원 밖으로 내던져진 사람들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들, 즉 힘 있는 다수인 우리 역시 위협한다. 우리를 둘러싼 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엉뚱한 분위기가 시류를 타는 순간, 소외감은 우리 역시 위협한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당혹스러운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들을 지목하도록 밀어붙인다.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고작 대명사 하나가 그토록 엄청난 고독을 말하다니!  234-241





6. 사랑한다는 말이 뜻하는 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해내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모두 잊게 하는 데는 한 분-단 한반!-의 선생님이면 충분하다. 

어쨌든 그것이 내가발 선생님네 대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다. 

그분은 내가 고2였을 때의 수학 선생님이다. 몸짓의 관점에서 보자면 키팅 선생과 정반대였다. 영화적인 구석이라곤 거의 없는 선생님이었으니까. 타원형 얼굴에 날카로운 목소리, 그리고 시선을 잡아끄는 특징이 전혀 없었다. 당신 책상에 앉아 우리를 기다렸고 다정하게 인사하고는 첫마디부터 우리를 수학에 들어서게 했다. 그렇게 우리를 잡아둔 시간을 무엇으로 메웠느냐고? 무엇보다 발 선생님이 가르치는 과목이자 그분이 자로잡혀 있는 듯 보였던 수학으로 메워졌다. 수학은 묘하게도 그분을 활기차고 차분하고 선량하게 만들었다. 지식 자체에서 탄생한 그 이상한 선량함, 자신의 정신을 매혹했던 '과목'을 우리와 고유하고 싶다는 그 자연스러운 욕망. 그분은 그 과목이 우리에게 혐오스러울 수 있다거나 단지 낯설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발 선생님은 자신의 과목과 제자들로 빚어진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수학의 요람에 사로잡힌 듯한 무언가가, 믿을 수 없는 순수함 같은 게 있었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한번도 스치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 또한 그분을 놀려대고 싶은 마음이 한 번도 들지 않았다. 그만큼 가르침에 대한 그의 행복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온순한 청중이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이 지부티의 쓰레기통 출신이었던 우리는 전혀 흥미로운 학생들이 아니었다. 나만 해도 야밤의 싸움질, 애정과는 거리가 먼 내면의 원한 청산에 몰두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발 선생님의 문턱을 넘어서면 우리는 마치 수학에 몰입하여 성스러워진 듯했고,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테마티코스('수학'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어느 날, 우리 중 가장 형편없는 아이드이 자기들 낙제 점수를 자랑삼아 떠벌리고 있을 때 선생님이 미소 띤 얼굴로 자신은 '공(空)집합'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공집합에 대해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던졌고 그에 대한 우리의 단순한 대답을 아주 귀한 원석처럼 여겼는데, 이런 일이 우리를 아주 즐겁게 했다. 그러더니 칠판에 12라는 숫자를 쓰고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었다.

영악한 아이들이 대답을 시도했다.

"손가락 열두 개요!"

"모세의 12계요!"

하지만 순진무구한 그의 미소는 정말이지 우리의 기를 꺾었다. 

"너희가 바칼로레아에서 받아야 하는 최소 점수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너희가 겁을 먹지 않는다면."

그러고는

"이런 얘기는 다시 하지 않으마. 우리가 여기서 몰두해야 할것은 바칼로레아가 아니라 수학이니까.

정말로 그분은 다시는 바칼로레아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한 해동안 우리를 무지의 심연에서 조금씩 끌어올리는 일에 주력했고, 그런 우리를 매우 박식한 사람으로 여기면서 즐거워했다. 우리 자신이 아무리 부정해도, 그분은 우리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늘 경이로워했다.

"너희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엄청나게 많이 알고 있거든! 봐라, 페나키오니, 너는 네가 그걸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니?"

물론 이러한 산파술만으로 우리 모두가 수학의 귀재가 되지는 못했지만, 발 선생님은 우리를 너무도 깊던 우물에서 그 우룸의 가장자리까지, 즉 바칼로레아의 평균 점수까지 끌어올려주었다. 

다른 많은 선생님들 말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다는 우리의 그 비참한 앞날에 대해서는 털끝만한 암시도 하지 않고서 말이다.  318-321


그분은 위대한 수학자였을까? 그리고 이듬해에 만난 지(Gi) 선생님은 대단한 역사가였을까? 재수 때 나를 가르친 S선생님은 유례없는 철학자였나? 그러리라 추측하지만 솔직히 나는 모른다. 단지 이 세 선생님이 자기 과목을 전해주려는 열정에 빠져 있었다는 것만 알 뿐이다. 선생님들은 그런 열정으로 무장하고서 낙담의 구렁텅이에 있는 나를 찾아왔고, 일단 내 두 발을 자신들의 수업에 굳건히 딛게 하고서야 나를 놓아주었다. 그들의 수업은 내 인생의 전(前)단계가 되었다. 그분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나에게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분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나 못하는 아이들이나 공평하게 대했고, 단지 공부 못하는 아이들에게 이해하려는 욕망을 되살려줄줄 알았던 것뿐이다. 그분들은 내 노력을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해주었고, 우리의 진전을 기뻐했으며, 우리의 느림에 조바심내지 않았고, 우리의 실패를 결코 개인적인 모욕으로 치부하지 않았으며, 가르치는 일의 특성과 일관성과 관대함에 근거한 더없이 엄격한 까다로움을 우리와 함께하는 가운데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점을 제외하면 달라도 너무 다른 선생님들이었다. 발 선생님은 굉장히 차분하고 잘 웃는 상이라 수학 부처님 같았고, 지 선생님은 반대로 회오리바람처럼, 태풍처럼 게으름의 외피로부터 우리를 떼어내 자신과 함께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이끌어갔다. 회의적이고 날카로운(뾰족 코, 뾰족 모자, 뽈롭 배) 철학자인 S 선생님은 잔잔한 얼굴의 통찰력으로 저녁마다 나를소란스러운 질문 속에 남겨두었고,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고 싶어 안달했다. 나는 장황한 논술문을 제출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선생님은 교정자의 편의를 위해 좀더 간결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넌지시 덧붙였다. 

모든 점을 잘 따져보면 이 세 분의 선생님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은 모른다고 하는 우리의 고백에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철자법의 결함을 이유로 내세우며 지 선생님은 내게 얼마나 여러 번 논술문을 다시 쓰게 했던가? 발 선생님은 내가 복도에 멍하니 있거나 자습실에서 몽상에 잠겨 있었다는 이유로 얼마나 여러 번 보충수업을 시켰던가? "시간이 있으니까 우리 한 십오 분만 더 수학을 해보면 어떨까, 페나키오니? 자, 십오 분만 해보자...) 익사 위기에서 구해내려는 그 몸짓의 이미지, 자살하려는 몸짓을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저 위로 나를 끌어올리려는 그 손목, 내 옷자락을 단단히 움켜쥔 살아 있는 손의 생생한 이미지, 이런 것들이 바로 그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맨  처음 떠오르는 모습이다. 그들의 현존 안에서-그들의 과목 안에서-나는 나 자신의 모습에 눈을 떴다. 수학자인 나, 역사가인 나, 철학자인 나로. 그러한 나는 이 스승들을 만날 때까지 진정으로 여기 있다는 느낌을 방해했던 나를 한 시간 동안 잠시 잊고, 나를 괄호 속에 집어넣고, 나로부터 나를 치워버렸다.

또하나, 그분들에게는 하나의 스타일이 있었던 듯하다. 자신의 과목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예술가였다. 수업은 물론 소통 행위였지만, 그것은 거의 자발적인 창조로 통할 만큼 숙달된 지식의 소통이었다. 어찌나 편안하게 수업을 했던지 우리는 매시간의 수업 자체를 하나의 사건처럼 기억할 수 있었다. 지 선생님은 역사를 부활시켰고, 발 선생님은 수학을 재발견했으며, 소크라테스는 S선생님의 입을 통해 표현되었다! 수학공식, 평화조약, 철학개념 같은 것들이 마치 바로 그날 만들어진 것처럼 기념비적인 수업을 해주었다. 그분들은 가르치면서 사건을 창조했던 것이다.

그분들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력은 거기서 멈추었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영향력은 그랬다. 교과목을 벗어나서는 우리에게 어떤 인상을 주려 하지 않았다. 부성(父性) 이미지의 부재로 고심하는 청소년에게 유효한 영향력을 끼치는 걸 영광으로 삼는 그런 선생님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구조하는 스승이라는 의식만 가졌던 걸까? 우리는 그저 수학과 역사와 철학 과목에서 그들의 제자였고, 그게 다였다. 물론 우리는 폐쇄적인 클럽의 회원들처럼 그들의 제자라는 사실에서 약간은 속물적인 자만심을 끌어내긴 했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사십오 년 뒤, 그들 덕에 선생이 된 제자 하나가 동상을 세워줄 정도로 후계자를 자처하려 든다는 사실을 알면 누구보다 먼저 놀라워할 것이다! 그분들은 블랑메닐의 첼로 연주자처럼, 일단 집으로 돌아가면 답안지를 교정하거나 수업 준비를 하는 것 말고는 우리에 대해서는 더이상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들에게는 확실히 다른 관심사, 열린 호기심 같은 게 있었고, 그것이 그들의 힘을 키워냈을 것이고, 이것은 무엇보다 교실 안에서의 그분들의 밀도 있는 존재감을 설명해주었다.(특히 지 선생님은 내가 보기에 세상사와 도서관들을 탐식한 것 같았다.) 이 선생님들이 우리와 공유했던 것은 단지 앎만이 아니라, 앎에 대한 욕망 자체였다! 그리고 나에게 나누어준 것은 그 앎을 전달하고픈 의욕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뱃속의 허기를 느끼며 그들의 수업에 들어가곤 했다. 우리가 그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분명 관심(요즘 젊은이들 말로 하자면 존중)을 받았고, 그 관심은 우리의 숙제에 써놓은 교정 문구들, 우리들 각자에게 일일이 건네주었던 그 코멘트에도 나타나 있었다. 그 분야의 본보기는 고등사범학교 준비반에서 역사를 담당하던 봄 선생님이었는데, 그분은 우리가 제출하는 논술문의 마지막 페이지를 백지로 내게 해 각자의 글에 대한 자세한 교정 내용을-붉은색으로 빽빽하게-타이핑해 돌려주었다.

학창 시절 막바지에 만났던 이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일관성없는 공공의 군집으로 축소시키고 '그런 학급'을 극히 열등하다고 말하던 모든 선생님들에 대한 내 생각을 크게 변화시켰다.  322-326


오늘날 지구상에는 다섯 종류의 아이들이 존재한다. 제 나라안에서 고객이 된 아이, 다른 하늘 아래서 생산자가 된 아이, 다른 곳에서 군인이 된 아이, 매춘부가 된 아이, 그리고 지하철 관고판의 죽어가는 아이. 굶주리고 체념한 그 아이의 모습이 정기적으로 우리의 권태로운 시선에 걸려든다.

다섯 모두 아이들이다.

다섯 모두 도구화된 아이들.  348

고객이 된 아이들 중에는 부모의 수단을 이용하는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있다. 부모에게 돈을 받아 물건을 사거나 어떻게든 돈을 마련햇 사거나. 이 두 경우에 쓰이는 돈이 개인적인 노동의 산물인 경우는 드물 테니 어린 구매자는 대가 없이 소유권을 얻는 것이다. 아이 고객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수많은 소비에서 부모나 선생과 동일한 영역(의복, 음식, 통신기. 음악, 전자기기, 교통수단, 여가...)을 가진 아이는 아무 어려움 없이 사적인 소유권을 얻는다. 그럼으로써 아이는 자신의 교양과 교육을 담당한 어른들과 똑같은 경제적 역할을 하게 된다. 어른들처럼 시장의 거대한 한 부분을 구성하고, 어른들처럼 외화를 유통시킨다(그 외화가 아이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아이의 욕망은 부모의 욕망처럼 기계를 계속 돌리기 위해 늘 자극받고 새러워져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이는 완전한 권리를 가진 중요한 인물이다. 어른들처럼. 

자율적인 소비자.

아이의 최초 욕망에서부터.

그 만족감은 아이가 받는 사랑의 측정치로 간주된다. 

어른들이 막아보려 한들 별수없다. 시장경제사회라는 게 그렇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자기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너무도 바라던 아이였기 때문에 아이의 탄생은 부모에게 끝없는 사랑의 빚 구덩이를 파게 한다)은 아이의 욕망을 사랑하는 일이며, 그 욕망은 대단히 중대한 욕구로 재빨리 표현된다. 사랑의 욕구와 물건에 대한 욕망이 거의 마찬가지인 까닭은 사랑의 징표가 물건의 구매로 통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욕망이란...  349-350


각각의 시대는 가족간의 사랑에 자신의 언어를 강요한다. 우리 시대의 언어는 사물들의 언어를 규정한다.  352


"너희 선생들은 하나같이 똑같아! 너희에게 결핍된 건 무지한 상태에 대한 강의야! 모든 시험을 통화하고 온갖 지식의 경연대회를 통과했을 때, 그때 너희가 갖춰야 할 최초의 자질은 너희는 알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파악해내는 능력이어야 해!.."  361


요컨대 가르치겠다고 나선 자들은 자신의 학창 시절에 대해 분명한 시각을 가져야만 해. 우리를 무지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최소한의 기회라도 얻으려면 무지의 상태를 조금이라도 느껴야 하거든!"  362-363


"감정이입 하지 마! 당신들의 감정이입 따위 관심 없거든! 당신들의 그 감정이입이 우리를 침몰시켜! 누구도 당신들에게 우리 입장이 되어달라고 요구하지 않거든. 도움조차 요청할 수 없는 아이들을 구해달라는 것뿐이야, 이해할 수 있겠어? 당신들의 모든 지식에다 무지에 대한 직관을 보태달라고, 그리고 열등생을 건져내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그게 당신들 일이야! 스스로 헤쳐나가는 법을 가르쳐주면 공부 못하는 학생도 스스로 헤쳐나갈거라고! 당신들한테 요구하는 건 그게 다야!"  364


"감정이입을 치워버리면, '그것'은 어떻게 치유하지?"

여기서 그는 엄청 주저한다.

다그쳐야 한다.

"말해봐,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어도 모든 걸 다 안다며? '그것'에 대해 준비되어 있지 않고서도 가르치는 수간이 뭐야? 방법이 잇기는 한 거야?"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있는 건 방법들뿐이지! 당신들은 언제나 방법들 속으로 숨느라 시간을 보내잖아. 그 방법들만으론 충분하지 않다는 걸 마음속 깊이 잘 알면서 말이야. 뭔가가 빠져 있어."

"뭐가 빠져 있지?"

"말 못해."

"왜?"

"엄청난 말이거든."

"'감정 이입'보다 더해?"

"비교도 안 되지. 네가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아니 대학이나 그 비슷한 곳에서는 절대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이야."

"뭔데? 해봐."

"아니, 정말이지 못하겠어..."

"자, 어서!"

"난 못한다니까! 교육을 말하면서 이 말을 내뱉었다간 넌 린치당할 거야."

"......"

"......"

"......"

"사랑."  366-367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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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화처럼 살고 싶다(voglio vivere una favola) -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성당 계단에서 본 익명의 낙서에서



서문


1989년 11월 16일.. 나는 한 해 전에 모스크바, 트빌리시, 레닌그라드를 여행하는 작가들의 모임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우리 여행의 수행역을 맡고 있었다. 우리는 레닌그라드에서의 마지막 밤을 함께 보냈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 우리는 관계를 지속했다. 우리의 행위는 의식처럼 일정했다.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 그날 오후나 저녁, 드물게는 그 다음날이나 이틀 후에 만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는 와서 단 몇 시간 동안만 머물렀다. 우리는 그 시간에 섹스를 했다. 그가 떠난 후, 나의 일과는 다음번 전화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9-10


(그는) 고르바초프와 페레스트로이카의 지지자라고는 했지만 술에 취하면 브레주네프(구소련의 정치가, 스탈린 이후 최장기인 18년 동안 소련을 통치함) 시대에 대한 향수와 스탈린에 대한 흠모를 감추지 않았다.  10


이 기간 동안, 나는 잡지사에서 청탁해오 ㄴ원고 외에는 아무 글도 쓰지 않았다. 사춘기 때부터 불규칙적으로 적어오던 일기가 나의 유일한 글쓰기의 장이 되었다. 그것은 다음 만남을 기다리며 견디는 방법이었고 동시에 에로틱한 몸짓과 말들을 기록함으로써 쾌락을 배가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 

그가 프랑스를 떠난 후, 나는 내 온 존재를 기배했고 그때까지도 계속 내 안에 살아 있던 그 열정에 관해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간헐적으로 집필되었고 1991년에 쓰기를 마쳐 1992년 '단순한 열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11


2000년 1월인가 2월, 나는 5년 전부터 들춰보지 않았던, S에 대한 나의 열정의 시간에 해당되는 일기장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

나는 컴퓨터에 텍스트를 입력하면서 수정하거나 삭제하지 않았다. 생각이나 느낌들을 포착하기 위해 순간순간 종이 위에 나열해놓은 단어들은 나에게 시간만큼이나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다. 한마디로 그 단어들은 시간 그 자체다.  12




1988년


9월 


27일 화요일

S ... 이 모든 아름다움. 지난 1958년, 1963년, 그리고 P때와 똑같은 욕망, 똑같은 행위, 몽롱함과 무력감마저 똑같다.  17


나는 옛날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단지 아름다움, 열정, 욕망일 뿐.  19



10월 


3일 월요일

그는 나의 가장 '유치한' 부분, 그리고 가장 사춘기적인 부분을 대변한다. 별로 지적이지 않고, 큰 자동차를 좋아하고, 운전하면서 음악을 틀어놓고,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그는 '내 젊은 시절의 남자'이며, 금발이 약간 촌스럽다(손과 네모난 손톱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사랑은 나의 머리와 육체 속에서 한 가지일 뿐이다.  24


4일 화요일

그가 관계를 지속하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기다렸던가! '예쁘게' 치장하고, 준비하고, 그러나 아무것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다.  25


5일 수요일

아직도 내 안에 그가 남아 있다. 나의 모든 비극이 바로 거기 있다. 그를 잊을 수도, 홀로 설 수도 없다. 나는 그의 말, 몸짓을 빨아들인다. 나의 육체는 그의 육체를 흡수한다. 이런 밤을 보낸 후에는 일하는 것이 쉽지 않다.  26


6일 목요일

그는 여자를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여성 정치가들에 대해 비웃음을 금치 못한다. 그 여자들은 제대로 하는 게 없어, 등등. 그리고 나는 그런 것들을 재미있어 한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이해할 수 없는 즐거움. 그는 점점 <빈 장롱>에서 내가 묘사했던 이상형, '내 젊은 날의 남자'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로제르 골목에 세워놓은 자동차 안에서 그가 절정에 이를 때까지 입으로 그를 애무했다. 그런 후, 우리는 끝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 눈을 뜨며 나느 ㄴ어제의 장면들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했다.  27


8일 토요일

"다음주에 전화할게." 이것은 '이번 주말에 당신을 만날 수 없어'라는 뜻이다. 나는 미소지었다. "알았어." 만남의 간격을 좀 두는 게 낫다는 것을 알면서도 질투로 고통스럽다. 육체의 향연 후에 나는 다시 혼란 속에 빠진다. 내가 너무 달라붙는 것처럼 보일까봐, 너무 늙어 보일까봐(늙었기 때문에 다라붙는 것이다) 겁난다.  29


12일 수요일

나는 단순한 생물로서 이것이 언제나 마지막인 것처럼-게다가 그렇지 않다는 법이 또 어디 있나- 사랑을 나눈다.  30


18일 화요일, 19일 수요일

그(아니 우리)는 점점 더 강렬하고 격렬한 욕망으로 사랑을 한다. 말하고 보드카를 마시고 또 사랑을 하고... 네 시간 동안 세 번. ..

간간이 사랑의 순간들을 다시 생각한다(그는 나에게 돌아누우라고 요구한다. 누워서 오럴 섹스로 절정에 오른 순간, 그는 신음 소리를 낸다. 그리고 내게 말한다. "당신 정말 기가 막히게 해." 그는 부드럽게 나를 자기 배 쪽으로 끌어당겨 사랑의 행위를 시작한다). 기억, 마비 상태, 이런 것들이 사라지면 나는 다시 그가 필요하다. 하지만 혼자다. 다시 기다리기 시작한다.  33-34


25일 화요일

요즘처럼 내가 아름다웠던 적이 없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어제 오샹(대형 슈퍼마켓 상호)에서도 그랬듯이 나를 유혹하려는 남자들은 수도 없이 많다. 스무 살, 서른 살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37


27일 목요일

한밤에 불리는 내 이름, 쾌락의 신음 소리, 그의 성기에 대한 숭배. 그를 열렬히 애무하는 나를 보려고 그가 몸을 반쯤 일으켰을 때(우리가 처음 관계 맺기 시작했을 때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십자가에서 떼어낸 나신의 예수 그림을 생각했다. 너무나 나른하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에 관해서 쓰는 것, 너무나 신비롭고 짜릿한 '그것'에 관해 쓰는 것 말고는.

이제 나는 사랑 속에서 진실을 찾지 않는다. 관계의 완벽성, 아름다움, 쾌락을 찾을 뿐이다. 상처주는 것을 피할 것, 즉 그에게 기분좋은 말만 할 것.  40



11월


15일 화요일 

눈을 뜨면서 기다림이 시작된다. '그후에'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그가 벨을 누르고 들어오는 순간에 정지한다는 말이다. 그가 오직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끊이없이 나를 괴롭힌다. 끝없는 불안감 때문에 이 이야기는 아름답다.  52


25일 금요일

호우헤 프랭탕 백화점의 '섹스 코너'에 가서 책들을 들춰보았다... 나는 를뢰 박사의 <애무에 관하여>, 그리고 75개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고 80만 권이 팔렸다는 <부부와 사랑> <육체적 사랑의 테크닉>을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내 뒤에 여자들이 서 있다. 나는 태연하다. 점원이 책을 포장했다. 나는 사람들이 내 이름을 알지 못하도록 은행 카드로 지불하지 않는다. 전철 안에서는 이 책들을 읽지 말아야지. 나는 완벽한 육욕과 승화를 위해 이 책들을 구입했다.  60



12월


6일 화요일

내게 세상에서 견딜 수 있는 두 가지는 오로지 사랑과 글쓰기다. 나머지는 암흑이다. 오늘 저녁에는 둘 중 아무것도 없다.  66


9일 금요일

내가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봐, 특히 그에게 충분한 즐거움을 주지 못할가봐 두렵다. 하지만 이런 모든 두려움이 없다면 그것은 내가 무관심하다는 것을 의미하리라.  67


15일 목요일

너무 견디기가 힘들어 지금과 비슷했던 때를 떠올려본다. 어쩔 수 없이 1958년과 1963년이 떠오른다. 삶에 대한 흥미를 되찾기 위해서는 전화벨 하나면 충분하다. 언젠가 이 일기장을 읽게 된다면, "아니 에르노 작품에 나타난 상실감"이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작품 속에서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로, 나는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예외 없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a) 초기에는 무관심, 더 나아가 혐오감까지도.

b) 주로 외모에 대한 '놀라운 발견'.

c) 잘 절제된 즐거운 관계. 가끔 싫증을 느끼는 시기도 있지만.

d) 고통, 중독으로 인한 끝없는 결핍감. 그러고는 극심한 고통(나의 현재 상태). 행복한 순간들은 미래의 고통일 뿐. 고통을 가중시키기만 함. 

e) 끝으로 이별. 가장 완벽한 단계인 무관심에 도달.  71-72


그를 생각하면, 내 방에 있었던 그의 나신이 보인다. 나는 그의 옷을 벗긴다. 그의 발기한 성기와 욕정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73


20일 화요일

혼외관계라는 틀 속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형화'되지는 않은 것 같다. 성적 집착도 있고, 약간 미친 듯도 하다. 그에게 내가 어떤 존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것-P와 사귀었을 때보다 어렵다-은 매우 도발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75


24일 토요일

나는 어머니가 노인병원에 있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끊임없이 이 노트에 기록하고 있다.  77


27일 화요일 

물론(나는 기다렸지만...) 예상대로 그는 '내일이나 모레'에 전화히자 않았다. 울고 싶고 구토가 난다. .. 오늘밤, 그의 부재와 혐오감이 엄청난 무게로 나를 누른다. 잠을 자야지, 자야지.  79


28일 수요일

한숨도 못 잤다. 끔찍한 상태다...

나는 굶주린 여인이다. 이것이 나에 관해 거의 유일하게 정확한 표현이다.  79-81


30일 금요일

이런 생각들로 꽉 찬 "나는 안나 카레니나다". 브론스키에게 미친 안나. 두려움.  82-83




1989년


1월 


1일 일요일

가끔 그랬듯이, S에게 편지를 쓸지도 모르겠다. 그가 오면 그 편지를 줄 것이다. 전화와 마찬가지로 편지도 보낼 수 없다! 좋은 소설감이다.  88


4일 수요일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연애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왜 사랑을 바라는가? 그는 내게 아무것도 약속한 적이 없고 나 자신도 아름다움밖에 바라는 것이 없는데, 그러나 더이상 아름다움은 없다. 이제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90


6일 금요일

소유권을 나타내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 공세를 하는 심리를 이해할 수 있다(프루스트 <갇힌 여인>).  92


8일 일요일

S에 대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점 중에서 확실히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 첫째, 지적으로 더 우월하고 약간의 질투심을 가진 여자와 함께 있는, 젊고 잘생긴 바람둥이(내 남편과 나의 경우). 둘째, 약간 내성적이고, 자기 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별로 바람을 피우지 않는 남자. 섹스할 때의 그의 태도나 경험 부족으로 봐서는 둘재 경우가 맞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아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기 전에 나 혼자서는 결코 정확히 알 수 없으리라.  


9일 월요일

간절한 기다림. 내가 이런 세세한 것까지 기록하는 이유는 기억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93


12일 목요일 

서로 못 본 지 벌써 1주일이 넘었다. 나에겐 다음 약속 날짜말고는 다른 미래가 업삳. 그리고 다음 약속이 정해지지 않는 한, 미래도 없다.  97


28일 토요일

독일에서 돌아옴. 그곳에서는 고통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파리가 가까워올수록, 기다림과 욕망이 되살아난다.  104


31일 화요일

그가 결별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징조들을 모두 모으려는 순간, 전화가 왔다. 5시에 온단다...

21시. 그가 막 떠났다. 기진맥진한 육체. 이보다 피곤할 수 없다. 다른 애인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의 웃음. 어린애 같은 웃음.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언제나 소파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그가 그것을 좋아하는 것을 안다. 그는 반쯤 옷을 벗고 눕는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의 머리서부터 성기까지 천천히 애무하고 나서 입을 맞춘다.  107



2월


1일 수요일

상대방의 몸을 배우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109


5일 일요일 

나는 전화로 그에게 "당신을 원해"라고 말했다. 그는 거북한 어투로 "아!"라고만 대답했다. 말해선 안 되는 것을 그가 드덱 하는 이상한 대화. "당신에게 말하는 게 나아, 안 그래?" "그래." 그가 대답한다. "말하는 게 나아, 아니면 말하지 않는 게 나아?" "말하는 거." 하지만 그가 전화로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처음인 게 확실하다. 어쩌면 그는 내가 에로틱한 대화를 주도하기를 무의식적으로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110


10일 금요일

글은 욕망을 유지하게 한다.  112


24일 금요일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읽는다.  120


27일 월요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S와의 오늘 저녁은 너무나 열정적이어서, 마치 내가 용서받은 것 같았다. 다섯 달이 지난 후 또 새로운 쾌락을 발견했다(발견하는 사람은 언제나 나다...). 부드러운 애무와 육체에 취한 나머지 아무 생각이 없다. 우리는 텔레비전 앞에서 함께 얕은 잠이 들었다. 그는 남성다움과 나르시시즘을 부각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좋아한다.(나는 그의 뒤에서 손으로 그의 성기를 잡고 자위행위를 대신해준다. 그는 내 손만 볼 뿐, 나는 보지 못한다.) 에로티시즘과 많은 가능성을 발견해가면서...  122


28일 화요일

오후 내내 그를 용두질시키는 내 손을 보기 위해 몸을 숙이고 있던 장면이 계속해서 떠올랐다(나는 그의 뒤에 있었다). 그는 사춘기였을 때의 행동을 되새기거나, 어쩌면 좀더 어렸을 때의 환상을 반추하는 듯하다. 그의 추억을 되살리고 그와 함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갔음에 행복감을 느낀다.  123



3월


10일 금요일

지나가는 푀조 405 또는 505 자동차를 볼 때면, S가 이런 유의 남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대형 승용차를 선호하고 출세에 몰두하는 나르시시스트, 그리고 내가 작가라는 사실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으로 섹스 생각이 날 때마다 만날 수 있는, 그의 물건을 불끈 달아오르게 해서 사정하게 해주는 예쁘장한 여자라고만 생각하는 남자.  127


18일 토요일

오직 나만의 내적 결핍, 나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내가 필요로 했기 때문에 시작된 필립과의 결혼생활... S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나를 결코 사랑한 적이 없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의 젊음이며, 언제나 나를 매혹시키는 사람이며, 현 세계의 가장 큰 수수께끼인 소련이라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는 점이다.  132


21일 화요일

내 의사와 관계없이 3주 동안 그를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를 냉정하고 무관심하게 한다.  133


27일 월요일

노트 한 권에 다섯 달분의 일기밖에 적지 못했다... 이것은 내가 분석을 많이 할수록 글을 더 많이 쓰는 습관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하지만 집착의 괴력, 그 자체에 관해서는 어떤 분석도 할 수 없다.  135-136


28일 화요일

내가 이 노트에 일기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 필연적으로 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욕망의 종말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거역할 수 없는 순서를 따라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아직도 이 열정으로부터 빠져나올 힘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현재 매달리고 있는 것보다 좀더 확실하고 명확한 신호들이 있어야 한다. 모험을 하듯 결별의 편지를 써야 한나? 현재 상태는 필립 때와 비슷한 S의 무관심, 우유부단한 태도인 것 같다. 나를 버리려고? 그래.

편지를 쓰면 끝날 것이다. 그래서 쓸 용기가 나지 않는다.  137


30일 목요일

이 일기 속에서 그는 나에게 무엇인가? 나는 S에 대해 '계속' 쓰고 싶다. 가능할까? 나의 꿈은 휴가를 모스크바에서 보내는 것. 그곳은 S와 휴가를 보내기에 가장 '이상적인 곳'이다.  138



4월


4일 화요일

그가 방에서 옷을 다시 챙겨입는 끔찍한 침묵의 순간. 옷가지들 하나하나-내가 네 시간 전에 벗겼던 옷들-를 천천히 다시 입는다. 처음에 팬티, 메리야스, 그 다음은 바지, 혁대, 셔츠, 넥타이, 구두(양말은 절대 벗지 않는다). 이 의식을 보는 내 가슴은 찢어진다. 이별, 무한히 느릿한 슬로 모션...

그의 기둥서방 성향. 시바스리갈 위스키 반 병을 마시고, 뜯은 말보로 담배를 보루째 가져간다. 나는 어머니와 창녀를 겸한다. 나는 언제나 모든 역할을 다 맡는 걸 좋아했다.  141


13일 목요이

코펜하겐 넵튠 호텔의 방(1985년과 같은 호텔), 침대 옆 탁자 위에는 신약성서가 있고 텔레비전 위에는 포르노 영화 비디오테이프가 놓여 있다. 호기심에서 '언제' 볼까 망성인다(계산서에 포함되어 드러날 테니까!).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도 배우기 위해서.  143-144


28일 금요일

그는 어제 11시쯤 왔다. 욕정. 그는 무릎을 꿇고 내 성기에 입맞추었다. 크리스마스 이후 처음이다. 다정한 사랑의 표현.  151



5월


3일 수요일

결심 : 내가 저지(Jersey)로 떠나기 전에 그가 세르지에 오지 않는다면, 한 번만 더 만나고 결별을 한다. 아니면 전화로 끝낸다.  153


6일 토요일

오직 S만이 나의 관심사다. 나를 그에게 밀착시키는 이 힘은 아마도 그의 비밀스런 성격, 예측 불가능함, '기이함' 속에 있는 것 같다.

그가 침묵하는 원인에 대한 검토 :

1) 대사관 영화 시사회-나는 참석했고 그녀는 불참했던-와 관련해서 자기 부인과 다툼. 만약 내가 온 사실을 그가 감췄다면.

2) 내가 차로 데려다 주겠다고 제의한 알렝N에 대한 질투심.

3) 권태(내 꿈에서처럼), 그리고 만나는 간격을 늘여가면서 나를 버린다.

4) 업무, 내가 알지 못하는 일들(KGB가 아닐까?).  155


8일 월요일

저녁. 전화가 왔다. 아주 '평상시처럼'. 내 상상의 날개가 한꺼번에 꺾인다. 잠이 온다. 그와 결별하고 싶지 않다. 다음번까지..  157


12일 금요일

11시 445분. 그가 와서 다섯 시간쯤 머물렀다. 오래 전부터 이렇게 완벽한 시간, 이처럼 조화로운 시간이 없었다. 매번 다른 바업ㅂ으로 네 번의 정사를 나누다. (침실, 애널 섹스, 아주 부드럽고 오랜 애무 후에 아래층 소파에서 다정하게 남성 상위 체위로, 침실에서는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내 정액을 당신 배 위에 쏟을 거야." 소파에서, 완벽한 일체를 이루었던 애널 섹스.) 우리 둘의 육체, 존재에 대한 끝없는 갈망.  158-159


13일 토요일

그가 8월에 떠나는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오늘 아침 시내에서 운전하는 동안 끝없이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떴을 때처럼. 그리고 낙태 후 루앙 거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 삶에서 비밀스런 의미를 지닌 굵직한 선들. 아직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한 동일한 상실, 오직 글을 통해서만 그것을 진정으로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159-160


16일 화요일

지금에야 나는 사랑을 사랑하고, 섹스를 사랑한다. 더이상 슬프고 고독한 것이 아닌 사랑을 사랑한다.  161


20일 토요일

나는 결코 사랑이라는 감정의 힘을 믿은 적이 없다. 보통 사회적인 여러 요인들이 다분히 작용하기 때문이다.  163


21일 일요일

도서박람회. 그를 보지 못했다. 저녁에도 무소식. 그가 목요일대사관 영화 시사회에도 가지 않는다면? 혹 다른 여자라도 생겼다면? 이 고통스런 기다림은 그가 또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 수많은 여자들과.  164


27일 토요일

2년 전부터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다. 더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 남자와 글 사이를 오가는 지옥 같은 순환.  170



6월


3일 토요일

지금 내 가슴을 뭉크랗게 만드는, 정액을 연상시키는 어떤 것-그전에는 혐오하던 냄새-들이 있다. 5월 12일에 그가 내게 한 말. "당신 배 위에 사정해도 돼?" 그후로 엄청난 세월이 흐른 것 같다. 이런 추억들은 매번 생각할 때마다 나를 전율케 한다. 그는 이제 오지도 않고, 이런 말들을 다시 하지도 않을 것이다. 러시아 식으로 짤막하게 발음하는 말들. 정액에 대한 혐오감이 그리움으로 변한 것으로 그에 대한 내 애착의 강도를 가늠할 수 있다..

밤에 르 루아레에서 온 S의 전화로 행복이 절정에 이른다.  173


11일 일요일

불면의 밤. 또 한 번 레닌그라드를 떠올린다. 그때의 기쁨, 그때의 감각들을 되살려본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는 내게 별로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다. 그저 하룻밤 상대였을 뿐. 내가 레닌그라드의 밤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가 그후 섹스를 한 수십번의 밤과 오후 때문이다... 요즘 나는 반쯤 마취 상태에 있다. 글을 쓸 의욕도 책을 읽을 의욕도 없고, 이제는 습관 같은 그의 무소식에도 걱정조차 되지 않는다.


15일 목요일

반쯤 의식이 들면서 깨어나는 순간에 끼어드는 진실들. S에게 나는 그저 섹스를 잘해서 가끔씩 만나볼 만한 여자일 뿐이다.  178 


17일 토요일

육체는 숨결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무성(無性 없을무 성품성)의 생명이자 욕망이다.  180


19일 월요일

전화가 없는 날들에 점점 더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날짜를 꼽는다. 하지만 그는 아마도 시간에 대하여 나와는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181


29일 목요일

두 가지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 하나는 약속 없는 고통의 시간, 다른 하나는 오늘처럼 아무 생각 없이 곧 실현될,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실현될, 망연자실한 욕망의 시간이다.  188



7월


15일 토요일

그는 15시 25분, 30분경에 왔다가 20시 15분에 떠났다. 다섯 시간. 지난 겨울(11월)보다 약간 덜해진 그에 대한 욕정. 하지만 언제나 거듭되는 우리의 애무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어제 그에게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이럴 땐 대화가 더 많아진다. 비극은 가눌 수 없는 피로감이었다. 어젯밤, 나는 침대에서 움직일 수 없는 돌같이 누워 있었다. 그가 스며든 내 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특히 글쓰기 작업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보름 만에 만났다. 이제 이게 평균적인 간격이다. 1주일 정도면 좋겠다. 부인이 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나... 아니면 다른 여자인가? "여자들은 힘들어"라는 그의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가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애썼다는 말인가, 아니면 힘들게 다른 여자와 성공했다는 말인가? 일반적으로 그가 여자를 쉽게 유혹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199-200


27일 목요일

나는 그에게 말한다. "Ta tebya lioubliou.(러시아어로 '당신을 사랑해'라는 뜻.)" 그가 내게 러시아 마로 대답했다. 나는 이해하지 못해서 그에게 다시 한번 말해보라고 한다. "단지 마샤만 사랑해?" "응". 내가 대답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떠날 거야. 하지만 당신은 슬퍼하지 않겠지. 강한 남자니까." 그가 대답한다. "그래 맞아." 그가 떠날 시간이었다. 어떤 말로도 덮을 수 없는 그 말이 내 가슴을 찢어놓았다. "다음주에 당신에게 전화할게. 집에 있을 거야?" 라는 말뿐. 일순간에 정신이 번쩍 든다. 그를 거칠고(그리 심하지는 않지만), 즐기기만 하는(나쁠 것도 없지) 플레이보이 또를 고르비보이로 봐야 한다. 떠나며 탁자 위에 있는 말보로 담배 보루를 가져가도 되겠냐고 묻는 그 남자를위해 내가 1년이란 시간과 돈을 잃었음을 확인했다. 스무 살에나 마흔여덟 살에나, 언제나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남자 없이, 삶 없이 무엇을 하겠는가?  205-206



8월 


3일 목요일

이런 일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3일인 오늘 오후 16시 15분에 왔다(그리고 밤 10시에 떠났다). 육체적, 심리적으로 완전히 지쳐 있다. 광적인 섹스로 얼이 빠져 있다. 예외적으로 그가 만난 지 1주일 만에 왔다.(과거보다는 미래, 즉 내가 전혀 확신할 수 없는 것과 비교해보기 위해 이런 것들을 기록한다.) 처음으로 내 베개 밑에 그의 것으로 젖은 팬티를 하나 간직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예전과 달리 내 젖가슴을 삼킬 듯이 온 입으로 애무하고, 부끄러움 없이 벗은 채로 돌아다녔고, 지난번 내가 준 편지에 대해 얘기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아직도 불투명하고, 사랑을 증명하지 못한다. 물론 사랑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209


11일 금요일

우리는 사랑하고, 먹고, 애무했다. 땀이 범벅이 되어도 떨어지지 않는 입술. 그래,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긴가. 나는 어제 쾌락에 꽌한 나의 한계들을 또 한 번 넘었다. 그에게는 아마 퍼포먼스 같기도 했으리라.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오직 욕망만이 중요할 뿐...

흐린 날씨다. 머릿속도, 가슴도 나는 언제나 스물두 살이다.  212-213


18일 금요일

카날 플뤼스(유료 텔레비전 채널. 시청하기 위해서는 디코더가 필요한데, 이 장치 없이 보면 화면이 흐릿하고 음향이 없다)에서 디코더 없이 포르노 영화를 봤다. 처음엔 클로즈업된 성기들을 보고 놀랐다(특히 카메라를 가까이 접근시켰을 때가 매우 좋았다). 하지만 너무 기계적이라 별로 흥분되지 않았다. 그리고 음향이 없어서 책보다 덜 에로틱했다. 끝까지 다 보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아침 그 영상들은 나를 쫓아다닌다. 그것들은 명백한 '사용법'을 보여준다. 행위를 보는 것은 언어를 통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수행적(遂行的 드디어수 다닐행 과녁적)이다. 가장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장면은 남자가 여자 배 위에 사정하는 장면이다. "나는 그녀 위에 평화와 정액을 강물처럼 흐르게 하리라."(성경)  216-217



9월


1일 금요일

생일이 온다. 마흔아홉 살. 곧 끔찍한 '50대'가 된다.  223


5일 화요일

그에게 그가 태어난 날에 발행된 신문을 선물했다.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는 것이 그를 얼마나 행복하고 다정하게 만드는지. 이제 순조롭게 되어가는 건가?... "당신은 멋져"라고 그가 말했다. 그때처럼 우리는 서로 입술로 애무했다. 우리는 깊은 합일을 이뤘다. 나는 그가 나를 완전히 정복하여 내가 순종의 자세를 취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나를 등쪽에서 보고, 나는 그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 오럴 섹스. 아직도 그의 얼굴에 대한 기억들을 모으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고도 금방 잊어버린다...

곧 1년이 된다. 새로운 키스 방법과 욕망을 해소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끝없이 고안해야겠다.  224-225


7일 목요일

피렌체. .. 열정의 추억들을 남겨놓고 이제 곧 프랑스를 떠나려는 한 남자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오늘밤에도 나는 기차 안에서 끊임없이 지난 월요일의 장면들을, 그리고 내가 앞으로 준비하고 있는 장면들을 떠올렸다.  226


16일 토요일

돌아온 후로 계속되는 이틀간의 침묵. 그가 목요일에 전화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죽음이고 암흑이다. 지금 이 순간 그가 떠났다는 확신이 미친 듯이 나를 휘감으며, 그를 다시 볼 거라고 생각했던 피렌체에서 품었던 나의 기대가 혐오스러워진다.  240-241


28일 목요일

그를 보기 위해 이렇게 기다리는 것은 하나의 소유이고 재산이며, 그 나머지 시간들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이다.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게 너무 어렵지만. 지금 나는 평소에 나를 사로잡고 있던 것들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 다른 여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번이 마지막은 아닐까? 등등.  247


29일 금요일

어제, 그와 함께 TF 1(프랑스 최대의 민영 방송국)의 멍청한 오락 프로그램들, 예를 들면 <정확한 가격 알아맞히기> 따위를 보면서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절망감을 느꼈다. 그가 얼마나 지적인 것과 거리가 있는지를 발견했다. 저녁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본 영화는 끝까지 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찌나 지루해하는지, 끊임없이 몸을 뒤틀며 보기 드물게 신경질적으로 굴었다.  249



10월


1일 일요일

이달이 가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침묵. 다시는 러시아 악센트의 '아-니'도, 자동차 소리를 기다리는 것도, 오후의 발소리도 들을 수 없겠지.  250


10일 화요일

"현재란 무엇인가?" 현재는 이곳에 존재한다. 그것은 버거운 미래와 두려움이다. 그를 볼 것이라는 행복감과 서너 시간의 만남이 흐른 후에 그를 더이상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감. 멍청한 노래 한 곡이 머릿속을 맴돈다.  253


12일 목요일

약간의 시간이 더 나아 있다... 그는 러시아 혁명 기념식 후에 떠난다. 사도마조히즘적 체험을 했다. 하지만 거칠지 않고 부드러웠다(애널 섹스와 '정상 체위'의 혼합으로. 완전히 녹초가 됨. 한순간, 그 부분이 찡어지는 줄 알았다). 그가 말했다. "아니(Annie), 사랑해."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자히 않는다. 섹스를 할 때 한 말이니까. 그러나 어쩌면 유일한 진실은 거기에 있는 것일지도.  254


19일 목요일

아직 샴페인 병은 가득 차 있고 위스키도 지난번보다 덜 마셨다. 사랑의 몸짓과 체위에 대한 끝없는 발명. 그의 성기 위에 샴페인을 부었다. 그런 것은 그가 해보지 않았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면서. 애널 섹스. "언제 어디서건, 당신이 무엇을 요구하건, 나는 당신을 위해 그걸 할 거야. 당신을 위해서 그걸 할 거야" 라는 나의 말에 당환항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싶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인 듯했다. 그가 먹고 있던 음식 조각을 내 입 안에 넣었을 때 그는 감동했다.

어쩌면 한 번 더, 단 한 번이라도 더... 모든 것, 애무, 희ㅣ한 말들, 또는 애정을 표현하는 구체적인 각각의 신호를 다 기억할 수가 없다. 가죽 의자 위에서 머리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하는, 놀라운 서커스 같은 체위. 나에게는 완벽주의적이고 창의적인 면이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내가 골몰하는 대상은 사랑이다.  258



11월


1일 수요일

5년 전부터 즐거움과 자신감(섹스, 질투심, 사회적 출신 성분 역시)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더는 수치심을 갖고 살지 않기로 했다. 수치심은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앞으로 더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또한 내게 글 쓰는 작업은 도덕적 기능을 지닌다는 생각을 했다. 때문에 예전에는 글쓰기에 대한 집념을 잃지 않기 위해서 사랑의 모험을 원치 않았다. 오랫동안-아직도 그렇지만-글을 써왔기 때문에 쾌락적인 삶은 내게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내 남편이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그가 글을 쓰지 않기 때문에 용서했다. 글을 쓰지 않는 인생이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먹고, 마시고, 섹스하는 걸 빼고는.  266-267


3일 금요일

내가 한 남자를 위해 러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268


7일 화요일

"다시 돌아올 거야." "나는 늙어빠졌을 거야." "내게 당신은 결코 늙지 않는 사람이야." "늙지 않도록 노력할게."

나는 왜 내가 작가이기 때문에 더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나는 작가가 아니다. 나는 글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일 뿐.)  273


9일 목요일

"언제부터 언제까지 나는 열정적인 사랑을 했다"로 시작하는 책을 쓰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사랑을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할 경우 S를 다시 볼 수 없을 것이고, 어쩌면 그에게 누를 끼칠지도 모른다. 어쨌든 다분히 한계가 있는 저술 계획뿐.  274


14일 화요일

아직 하루가 남았다. 나는 그의 좁은 미간과, 약간은 잔인해 보이는 치아로 거의 확실히 예견할 수 있었던 사실을 부정해보려고 애쓴다. 내가 그저 쾌락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는 사실. 그렇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잊으려고 애썼다. 남편과 보낸 18년보다 1년을 지우는 것이 더 힘들까? 증오는 그 세월을 지우는 걸 쉽게 하지만 사랑은 그것을 복잡하게 만든다.  277-278


15일 수요일

확실히 최악이다. 예전에 "아냐, 더이상 만나지 않을래, 더는 만나지 말자"라고 말하지 못했던 나의 나약함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내가 그에게 준 모든 것을 따져본다. 아주 치사하게. 뒤퐁 라이터, 파리에 관한 책, 고판화, 그가 태어난 날 발행된 신문, 말보로 담배 보루들, 수많은 위스키... 아마도 스무 병쯤, 최근에는 훈제 연어와 샴페인. 그는 세르지에 서른네 번, 스튜디오에 다섯 번 왔다. 아무 소용 없는 계산이다. 마흔 번이고 백 번이고 지금에 와서 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끝났다는 것,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맑은 의식이 주는 고통만이 남았을 뿐이다.  279-280


16일 목요일

한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거기 있는 것, 그리고 섹스하고, 꿈을 꾸고, 그가 또 오고, 섹스하고, 모든 것이 기다림일 뿐이다...

오샹 슈퍼마켓 정면 모퉁이에 있는 속옥 가게에서 보라색 브래지어와 가터벨트를 본다. 은행. 여자들이 내 앞에서 기다린다. 이 여자들은 한 남자를 잃는다는 것, 광적인 사랑을 잃는다는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을까. "아니(Annie), 당신을 사랑해." "당신 정말 멋져." "아니(Annie), 나 사정할 거야." 그녀들은 느긋하게 기다리지 못한다. 나도 그냥 습관적으로 시계를 들여다본다. 하지만 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어떻게도 할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내겐 미래가 없다...

니콜에게 전화를 했다. 나 : "그놈은 나쁜 자식이야!" 그녀 : "아냐, 그는 불행한 거야. 그래서 일부러 전화 안 한 거야." 내가 화조차 낼 수 없게 하고 가당치 않은 미미한 희망을 갖도록 해석하는 그녀가 원망스럽다. 이건 더욱더 가당치 않은 해석이다.  281-283


18일 토요일

살아남는다는 것은 참혹하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잘못 걸려온 전화다. 이상한 말투를 쓰는 여자였다. 사는 동안은 희망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황당한 순간에라도. 니콜과 한 소녀에 관한 꿈을 꾸다. 아버지도 꿈에 보인다. 우리가 읽는 에로틱하고 노골적인 책들에 반발하는 아직 젊은 아버지의 모습. 아마도 오이디푸스 콜플렉스일 것이다.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상태가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이다. 유일하게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리라. 나를 구한 것은 그녀에 대한 책이었다. 지금 나는 그에 관해 쓸 '권리'가 없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1982년 10~11월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쓰게 될 책과 상실의 결합...

내가 그를 사랑했던 것만큼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를 위해 나는 멋진 책을 쓰고 싶다.  285-286


24일 금요일

마지막으로 그를 본 지 18일이 지났다. 4월과 9월 가운데 24일간을 보지 않은 최고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기다리는 대상이 없다. 날짜를 꼽는 것이 이젠 아무 의미가 없다. 언젠가는 그를 본지 두 달, 석 달, 여섯 달이 되겠지. 우리가 마지막 만난 날 서재의 이중 커튼을 직접 치고 싶어한 그의 모습을 요즘 매일 저녁 커튼을 칠 때마다 생각하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나 : "커튼 치는 게 어려워..." 그 : "내가 할 수 있어!"  290


28일 화요일 

오늘도 아무 희망 없이 보낸 하루. 옛날 에는 내게 아무 감흥도 주지 않았던 노래를 듣는다. "그래, 나야 제롬이야. 아냐, 난 변하지 않았어/나는 너를 사랑했던 그때 그 사람이야..."(누가 불렀지? 클로드 프랑수아?) 아침식사를 하다가 운다. 그 노래가 돌아온 사람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이제 나는 언제나 S의 모습을 생각한다. 키가 크고, 부드럽고, 발가벗은, 말하자면 우리가 만나는 동안 내게 고정된 그 이미지 그대로, 그가 모든 것을, 눈부시게 에로틱했던 날들을 모두 잊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부재, 추억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긍정적인 점은, 내가S가 떠날 때처럼 차리고 있으면-내가 그를 언제나 입으려고 했던 이 검은 정장-아직도 남자들을 흥분시킬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때다.  292-293



12월


1일 금요일

잊기 위해서 재미있는 관계를 갖고 살고 싶은 욕망, 그냥 재미있는 관계(콘돔을 사는 것이 그 증상).  293


14일 목요일

문득문득, 끊임없이 떠오르는 S 생각, 솟구치는 눈물. 한 달이 지났는데, 아직 너무 힘들다. 물론 아무 희망도 없다. 그러나 이것을 쓴다는 것은 내가 희망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이성적 판단과 마지막 몇 달을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가 떠난 시점이 우리 관계의 확실한 종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98


15일 금요일

거의 한 달이 되어가는 지금, '내가 그에게 어떤 존재였나'라는 의문을 점점 더 냉정한 시선으로 볼 수 있다. 언제나 똑같은 이야기, 근본적으로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그 이야기를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난 1년 동안 내 관심을 끌었던 짧은 장면들이 생각난다. 로시아 호텔에서의 첫날 그의 얼굴과 미소, 그가 나를 포옹하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까진 나를 모르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그는 바람둥이 기질이 있는 것... 1988년 11월, '프랑스-소련 친선의 밤'에서 그가 대사관 여직원 일행과 떠나면서 의도적으로 짓던 표정.  299





1990년


1월


19일 금요일 

한 남자를 잃는다는 것은 한꺼번에 몇 해를 늙는다는것, 그가 있었을 때는 흐르지 않았던 그 모든 시간을 한꺼번에 늙는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상상속의 시간들을 한꺼번에 늙는 것이다. 이 욕망은 내가 어쩌면 다른 누군가와 똑같은 동화 같은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315


31일 수요일

내일이면 2월이다. 월 초마다, 매달 15일마다-은행에서 잊를 챙기듯-S가 서유럽으로 다시 와서 내게 전화하길 막연히 기다린다. 이제 곧 석 달이 된다. 어쩌면 이렇게 회복이 더딜까, 모든 것이 느리고 무가치하다.  317



2월


2일 금요일

글 쓰기 행위는 나에게 언제나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 S에게 품은 것과 같은 그 열정과 글쓰기가 절대적 가치라는 것에 대하여 나는 강한 확신을 품고 있다. 그것들이 순수함과 아름다움에 결부되어 있다는 생각과 함께.  319


29일 목요일

예전에는 '안정된 생활'을 위해, 그리고 '형제애'를 위해 남자를 찾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지금은 오로지 사랑만을 위해 남자를 원한다. 즉, 글쓰기와 가장 가까운, 나 자신의 상실을 위해, 빈 곳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기 위해 남자를 찾는다.  341





옮긴이의 말 - 고통과 열정의 외침

당시 35세, 아니 에르노는 48세였다.  346


자신의 애인이 작가라는 사실이 제일 중요한, 속물 같은 남자와의 육체의 향연에 에르노는 혼신의 정열을 기울인다.  346-347


그에게서 전화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거리의 거지에게 적선을 베풀기도 하고, 애인과의 완벽한 육체적 합일을 위해 포르노 영화나 사랑의 기교에 관한 책을 보고 연구하여 창조적이고 서커스 같은 체위를 직접 연출하기도 한다. 매번의 만남이 '쾌락의 한계를 넓혀가는' 시간이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그녀는 욕망과 에로티시즘에 '굶주린 여인'이다.  347


그런에도 점점 식어갈 수밖에 없는 열정에 대한 안타까움, 결별에 대한 두려움, 젊은 애인이 하눈팔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그의 아내에게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질투심... 그녀의 일기에는 사랑에 빠진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껴봤을 고통과 열정의 외마디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347-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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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내가 쓴 글이 출간될 때쯤이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어했다. 나는 죽고, 더이상 심판할 사람이 없기라도 할 것처럼 글쓰기, 진실이란 죽음과 연관되어서만 생겨난다고 믿는 것이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9



육 년간의 관계를 끝내고 몇 달 전 W를 떠난 사람은 바로 나였다. 열여덟 해 동안의 결혼생활 뒤 다시 얻게 된 자유를 그가 처음부터 애타게 원했던 동거생활과 맞바꿀 수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싫증이 나서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후로도 계속 전화 연락을 주고 받았고, 가끔씩 만나기도 했다. 어느 저녁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나와서 한 여자와 함께 살 거라는 소식을 알려왔다. 그의 휴대전화로만 해야 하고, 만나는 것도 저녁이나 주말에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듯한 감각 속에서도 나는 새로운 무언가가 솟아올랐음을 깨달았다. 그순간부터 이 다른 여자의 존재가 나를 온통 사로잡았다. 그녀를 통해서가 아니면 더이상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11-12


어떻게 해서든 그 여자의 성과 이름, 나이, 직업을 알아내야만 했다. 개인을 정의하기 위하여 사회가 파악하는 이런 요소들은, 한 사람을 진정으로 알고자 할 경우 별 흥미로운 요소가 아니라고 흔히들 경솔하게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었다.  13


내가 만나는 여성들의 육체가 그 여자의 육체로 탈바꿈하는 현상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내 눈에는 '가는 곳마다 그 여자가 보였다.'  16


질투를 할 때 가장 이상야릇한 것은, 한 도시가, 온 세상이 결코 마주쳤을 일이 없는 하나의 존재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이다.  17


나는 그와의 헤어짐으로 인해 고통받기 시작했다.

그 여자에게 사로잡힌 상태가 아닐 때면, 나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의미를 띠게 된, 우리가 함께 보낸 과거를 악착같이 상기시키는 외부세계의 공격 표적이 되었다.  19


난 무엇보다도 우리 관꼐가 막 시작되던 무렵을, 내 일기에 적혀 있듯이 그의 페니스가 벌이는 '굉장한' 기교를 추억하곤 했다. 결국 내가 내 자기에 세워놓는 사람은 다른 여자가 아니라, 다시는 그렇게 될 수 없을 나, 사랑에 빠져서 그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으며 아직 우리 사이의 그 모든 일이 일어나기 직전의 나였다.

나는 그를 다시 소유하고 싶었다.  22


시나리오가 어떻든 간에 여주인공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면, 여배우의 육체를 빌려서 끔찍스럽게 배가되어 표현되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고통이었다.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영화가 끝나면 안심이 될 정도였다. 어느날 저녁에는 일본 흑백 영화를 보다가, 내 고뇌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고 느꼈다. 전후를 배경으로 한 그 영화에서는 끝도 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고통이 펼쳐지는 것을 봐도 충분한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육 개월 전이었다면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싿. 사실, 열정의 폐해를 겪어보지 못한 살마들만이 카타르시스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23-24


우리는 변함없이 카페나 내 집에서 만나곤 했다.  25


만약 사회가 내 안에 잠재해 있는 충동에 재갈을 물리지 않았다면 내가 저지를 수도 있었을 행위들, 예를 들면 단순히 인터넷에서 그 여자의 이름을 찾아보는 대신 "갈보 같은 년! 더러운 년! 잡년!"이라고 울부짖으며 권총으로 그녀를 마구 쏘아대는 등의 행위들이 언뜻언뜻 떠올랐다. 게다가 권총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나는 커다란 목소리로 종종 그런 짓을 저질렀지 않은가. 결국 내가 겪는 고통, 그것은 그 여자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31


다시 자유로워지는 것, 내 안에 자리잡으 ㄴ이 무게를 바깥으로 던져버리는 것이 문제였기에, 내가 하는 모든 일은 그 목적에 맞추어 이루어졌다.

W가 나를 사귀게 되면서 버렸던 여자가, "바늘을 꽂아서 방자(남에게 재앙이 내리도록 귀신에게 비는 행위) 하겠어"라고 분노에 떨며 말했다던 그 여자가 생각났다. 빵의 말랑말랑한 부분으로 사람 형상을 만들어서 핀을 꽂을 수도 있다는 것이 더이상 천치 같은 생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동시에, 두 손으로 빵을 주무르고 머리나 심장 자리에 정성들여 핀을 꽂고 있는 내 모습을 떠올려보니,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가엾고 순진한 한 여자를 보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 내려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내려가보고 싶은 유혹에는, 우물 안으로 몸을 수그려 저 깊숙한 곳에서 떨고 있는 자신의 영상을 바라볼 때처럼, 사람을 끌어당기면서도 무시무시한 그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여기에 글을 쓰고 있는 행위도, 어쩌면 바늘을 꽂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32-33


그 여자와 W가 살고 있는 건무의 모든 입주장게 전화를 걸어보는 것-미니텔에서 이름과 전화번호를 찾아 명단을 만들어두었다-은 내가 가장 해보고 싶은 일이었고, 또한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36 51(발신자 제한번호)을 누른 다음 꼼꼼하게 모든 전화번호를 눌러보았다.  35


전화를 걸어본 이름들 중에 자동응답기에 자신의 휴대전화번호를 남겨놓은 도미니크 L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36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알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리던 내게, 제쳐놓았던 단서들이 갑작스럽게 다시 의미심장한 것이 될 때가 있었다. 잡다하기 짝이 없는 사실들을 끼워맞춰 인과관계를 부여하는 나의 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가 다음날로 예정되어 있던 우리의 약속을 미루자고 한 날 저녁에 일기예보를 듣다가, 진행자가 "내일은 성 도미니크 축일입니다"라는 말로 일기예보를 마치는 순간, 그 여자의 이름이 도미니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내 집으로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일은 그녀의 축일이니 함께 레스토랑에 갈 것이고, 촛불을 밝히고 저녁 식사를 한다든가 뭐 그런 일들을 해야 할 테니까. 이 추론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도미니크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갑작스럽게 차가워진 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은 나의 추론이 옳다는 확신을 주었다.

이러한 탐색과 광적으로 여러 단서들을 짜맞추는 행위를 보며 지능의 탈선적 사용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차라리 지능의 시적 기능, 문학과 종교 및 편집증엣 작동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그 기능이라고 하고 싶다.  38


나는 일기에다가 "다시는 그를 보지 않기로 결심했다"라고 적었다. 이 말을 적는 순간에는 더이상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글쓰기로 인해 고통이 가벼워진 것을 상실감과 질투가 끝난 것으로 혼동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기장을 덮자마자, 그 여자의 이름을 알고 싶으며, 그 여자에 관한 정보들을, 여전히 고통을 낳게 될 모든 것을 알아내고 싶다는 욕구에 다시금 시달렸다.  41


글쓰기를 통해 나의 강박증과 고통을 여기에 노출하고 있는 행위와, 랍 대로에 가면 그들 눈에 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노출을 두려워하던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글스기, 그것은 무엇보다도 타인의 시선엣 벗어나서 행하는 것이다. 나의 얼굴, 나의 육체, 나의 목소리, 나라는 인간의 특징을 형성하는 이 모든 것을 나와 마찬가지로 집어삼킬 듯 바라보고는 내팽개쳐버릴 누군가의 눈앞에 드러내는 것은 더없이 잔인한 짓이라고 생각했던 만큼이나, 지금은 내 강박증을 드러내고 헤집어보는 일이 전혀 거북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반항심도 전혀 없다. 진실을 말하자면, 난 정말이지 아무 느낌도 없다. 나는 나를 본거지로 삼았던 그 질투가 꾸며내는 온갖 상상과 행동들을 묘사하려고만 애쓰며, 개인적이며 내밀한 것을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는 실체로 변모시키려고만 애쓰고 있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 형체 없는 익명의 사람들이 아마도 그것들을 제 것으로 삼을 것이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더이상 나의 욕망, 나의 질투가 아니라 그저 욕망, 질투에 속하는 것이고, 나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곳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43-44


유일하게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그가 아직도 나를 만나고 있으며, 가령 얼마 전에 내 생일선물로 브래지어와 T팬티를 선물했다는 사실을 그 여자가 알게 되는 상상을 할 때였다. 그러면 온몸의 긴장이 풀어졌고, 진실이 드러났다는 지극한 행복감 속에 잠겨들었다. 마침내 고통이 육체를 바꿔 탄 것이다. 난 그녀가 느낄 고통을 상상하면서 내 고통을 일시적으로나마 덜 수 있었다.  49


가장 커다란 행복처럼 가장 커다란 고통도 타자로부터 오는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움 때문에 그 고통을 피하려고 앴는 사람들을 이해한다. 그들은 그 고통을 두려워하여 적당히 사랑하거나, 음악이나 정치참여, 정원이 있는 집과 같은 관심사의 일치를 더 중시하거나, 혹은 삶과 유리된 쾌락의 대상으로 여러 명의 섹스 파트너를 둠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이 육체적 사회적 고통에 비하면 비이성적이며 심지어 물의를 일으킬 만한 것일지라도, 하나의 사치일지라도, 나는 생의 평온하고 유익했던 몇몇 순간보다도 그 고통을 더 사랑할 것이다.  50


욕망이란 필요한 모든 것을 논거로 끌어다 사용하는 놀랄 만한 능력을 갖고 있어서, 나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잡지 속에나 굴러다니는 상투적이며 진부한 생각들을 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 여자의 딸이 엄마보다도 훨씬 어린 엄마의 연인을 참아내지 못해서, 혹은 딸아이가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되어서 그들이 더이상 함께 살 수 없게 될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52


유일하게 진실한 것, 결코 말하지 않을 진실은 "난 당신과 섹스하고 싶고, 그 여자를 잊게 만들고 싶어"라는 말이었다. 그밖의 것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모두 허구였다.  53


어느 일요일 오후, 프랑스에 잠깐 들른 L과 극장에 갔다. 그를 다시 보는 것은 친 년 만이었다. 그날, 우리는 서로에게 저절로 이끌려 그의 부모 집 거실에 놓여 있는 소파 위에서 섹스를 했다. 그는 내가 아름다우며, 기가 막히게 잘 빨더라고 말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종종 성행위를 통해 얻고자 했던 '정념의 정화'-"아! 네 물건을 어서 넣어줘/ 그리고 끝장내버려/ 아!/ 그 이야기는 이젠 그만"과 같은 외설적 유행가가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성적 쾌락엣 모든 것을, 쾌락 이상의 것을 기대했다. 사랑, 융합, 무한, 글쓰기의 욕망, 이제껏 내가 그에게서 얻어냈다고 여기는 최상의 것, 그것은 냉철함으로, 감상주의에서 탈피해 갑자기 단순하게 세계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56-57


이제 나는 "당신, 페니스 좋아하지, 그렇지? 아무 페니스나 말고, 당신 거" 따위의, 예전엔 거리낌없이 서로 속삭이던 대화를 전화로 나누고 싶어져도 참게 되었다. 그런 말들이 지금의 그의 페니스를 부풀게 하기는 커녕 흥분을 싹 가시게 하는 외설스러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62


(학교에서 문학 텍스트의 구절들에 제목을 붙이듯이, 자기 삶의 순간들에 제목을 붙이는 것은 아마도 삶을 통제하는 수단이 아닐까?)


우리는 가끔씩, 순전히 의례적으로 전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것 역시 끝났다.

그의 페니스가 생각날 때면, 첫날 밤에 본 모습이 그대로 떠오른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내 눈앞에, 거대하고 강력하며 끝이 버섯 갓 모양으로 부푼 채 불끈 솟아 있던 그의 페니스,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낯선 사람의 페니스를 보는 것 같다.  67


에이즈 검사를 받았다. 그것은 청소년기에 고해하러가던 것과 유사한 습관으로, 일종의 정화의식이 되었다.

이젠 그 여자에 관해서 이름은 물론 그 어떤 것도 알아내고 싶은 욕망이 조금도 없다(혹시라도 친절하게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사람들이 생길지도 모르니, 미리 정중히 거절한다는 의사를 밝히는 것이다). 마주치는 모든 여자들이 그 여자처럼 보이는 일도 없어졌다. 파리의 거리를 걸을 때도 이제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는다. [해피 웨딩]이 흘러 나와도 라디오 채널을 돌리지 않는다. 가끔씩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들지만, 더이상 담배나 약물에 의존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는 사람과 흡사한 정도다. 


글쓰기는 더이상 내 현실이 아닌 것, 즉 길거리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엄습하던 감각을 간직하는 방식, 그러나 이제는 '사로잡힘'이자, 제한되고 종결된 시간으로 변해버린 그것을 간직하는 방식이었다.  67-69





옮긴이의 말 - 질투의 심연에서 만난 치열한 글쓰기


'그'가 떠나갔다.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홀몸의 자유를 포기할 정도로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미적지근한 연인관계를 유지해오던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한들, 그것이 '나'의 삶에 무에 그리 영향을 미치겠는가? 하지만 '그'가 '나'를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서라면? 갑자기 '그'에 대한 '나'의 빛바래가던 감정은 애초의 생생한 색깔을 되찾는다. '나'와 '그'의 관계를 규정짓던 타성과 습관은 어느새 그 힘을 상실하고, '그'를 되찾고자 하는 '나'의 무시무시한 눈먼 욕망만이 길길이 날뛴다. 

아니 에르노의 <집착>은 이렇듯 '나-작가'가 겪은 질투에 관한 이야기이다.  73-74


에르노의 <집착>은 '자전적 허구'를 작가들의 노출 욕구나 배출 통로쯤으로 치부하던 독자들에게는 하나의 예외로 다가온다. 우선, 에르노의 글은 치열하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가장 내밀한 부분가지 올올이 드러낸다...

'글쓰기, 그것은 무엇보다도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서 행하는 것이다'라고 못박는 에르노에게 글쓰기란 타인의 시선에서 놓여난 시공간엣 행해야 할 작업이다.  75


에르노는 지극히 이성적이며 계산할 줄 아는 작가이다. 끊임없이 군더더기를 떨어내고, 치밀하게 자르고 다듬어 완벽하게 아귀를 맞추어놓은 문장들 사이에는 세워놓은 바늘을 바라보는 듯한 아슬아슬한 균형이 자리잡는다.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주어와 동사를 품지 않은 문장들은 이 벼리기 작업의 가시적 결과이다. 에르노의 글은 푸근하지 않고, 정련된 문장들이 안져주는 정신의 긴장을 즐기는 독자들로부터 그래서 더욱 인정을 받는다.  77


작가는 '주요 관심사'나 '점령'을 의미하는 'L'occupation'이란 제목을 고름으로써, '질투'의 두 가지 양상을 겨눈다. 하나는 질투의 메커니즘이 작동한 뒤로 어떤 다른 일에도 정신을 쏟지 못하고 '그 여자'를 찾아내는 일이 '나'의 '주요 활동'이 되어버린 것이며, 다른 하나는 마치 무엇엔가 들리기라도 한듯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여자'의 존재에 완전히 사로잡혀버린 '나'의 상태이다.  7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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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사랑의 재발명(알랭 바디우)


진정한 사랑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있는 적은 대체 누구인가? 물론, 현대 사회의 개인주의, 모든 것을 시장 가격으로 환산하려는 태도, 오늘날 개인의 행동을 조종하는 이해관계의 차원 등등이다.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사실상 현대 세계, 세속화된 자본주의 세계의 이 모든 규범에 반항한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결코 그저 두 개인 사이의 기분 좋은 동거를 목적으로 하는 계약이 아니라, 타자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인 경험이며, 아마도 현 시점에서 사랑 외에는 그런 경험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5-6


이 책은 진정한 사랑의 최소 조건, 즉 사랑을 위해서는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데 대한 철두철미한 논증인 동시에, 전적으로 안락하모가 나르시시즘적 만족 외에는 관심이 없는 오늘의 세계에서 에로스의 싹을 짓누르고 있는 온갖 함정과 위협 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6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사랑의 경험은 불능에 의해 만들어지며, 불능은 타자의 완전한 현형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인 것이다.  8





멜랑콜리아


타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사실 극적인 변화이지만, 치명적이게도 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이 진행중이라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18


우리는 끊임없이 모든 것을 모든 것과 비교하며 이로써 모든 것을 동일자로 평준화한다. 타자의 부정성은 소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비사회는 아토포스(atopos : 장소가 없는 무소(無所 없을무 바소)적인)적인 타자성을 제거하고 이를 소비 가능한, 헤테로토피아적 차이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애가 아니다. 자기애를 지닌 주체는 자기 자신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는 부정적 경계선을 긋는다. 반면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명확한 자신의 경계를 확정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르시시즘적 주체와 타자 사이의 경계는 흐릿해진다. 그에게 세계는 그저 자기 자신의 그림자로 나타날 뿐이다. 그는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인정할 줄 모른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경우에만 의미가 존재한다고 느낀다...

우울증은 나르시시즘적 질병이다.  19-20





할 수 있을 수 없음


성과사회는 금지 명령을 발하고 당위('해야 한다')를 동원하는 규율사회와 반대로 전적으로 '할 수있다'라는 조동사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착취를 위해서는 동기 부여, 자발성,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를 부르짖는 것이 채찍이나 명령보다 더 효과적이다.  29


푸코(Michel Foucault) 역시 신자유주의적인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규율사회에 살고 있지 않으며 자기 자신이 경영자로서 더 이상 복종적 주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정말로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것, 자기 자신을 찾취하면서 자유롭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신자유주의적 자유의 구호를 자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자유로 해석한다. "나는 당신에게 자유의 가능성을 마련해주겠다. 나는 당신이 자유로울 자유가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겠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자유의 구호는 실제로는 "자유로워져라"라는 역설적 명령문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명령은 성과주체를 우울증과 소진 상태속에 빠뜨린다. 푸코가 말하는 "자아의 윤리"는 억압적 정치 권력, 즉 타자 착취에 대항하기는 하지만 가지 착취의 바탕에 놓여 있는 자유의 폭력에 대해서는 맹목적이다.  30-31


'넌 할 수 있어'는 심지어 '넌 해야 해'보다 더 큰 강제력을 행사 한다. 자기 강제는 타자 강제보다 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좌절하는 자는 결국 자기 잘못이며 장차 이러한 죄를 계속 짊어지고 다니게 된다.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물을 만한 사람은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31


자본주의에는 속죄의 가능성, 채무자를 채무에서 해방시켜줄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채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속죄할 수 없다는 것은 성과주체를 우울증에 빠뜨리는 원인이기도 하다. 우울증은 소진증후군과 더불어 할 수 있음이 초래하는 구제할 수 없는 좌절이며, 다시 말해 심리적 파산 상태를 드러내는 질병이다. 

에로스는 성과와 할 수 있음의 피안에서 성립하는 타자와의 관계다.  32


할 수 있음의 절대화는 바로 타자를 파괴한다. 타자와의 성공적인 관계는 일종의 실패로 여겨진다.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자를 소유하고 붙잡고 알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닐 것이다.  41


부버에 따르면 근원거리는 "인간의 원리"로 기능하며 타자성이 성립할 수 있는 초월적 전제를 이룬다. "근원거리 두기"는 타자가 하나의 대상, '그것'으로 전락하고 사물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성적 대상으로서의 타자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 그러한 타자와는 어떤 관계도 맺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성적 대상을 부를수는 있겠지만 그것에게 말을 건넬 수는 없다. 성적 대상에는 "얼굴"도 없다. 42


'가까움'은 그 속에 '멂'이 기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부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가까움은 부정성이기에 속에 긴장을 품고 있다. 반면 거리의 부재는 긍정성이다. 부정적인 것은 그 대립자에 의해 활력을 얻는다. 바로 여기에 부정성의 힘이 있다. 오직 긍정적이기만 한 것에는 이처럼 생동하게 하는 힘이 없다.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어 향락의 공식으로 여겨진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안락한 감정을 생성해야 한다. 사랑은 더 이상 행위도, 이야기도, 드라마도 아니며, 흔적을 남기지 ㅇ낳는 기분이요 흥분이다. 이제 사랑은 상처와 급습과 추락의 부정성을 알지 못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조차 너무 부정적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부정성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을 이룬다. "사랑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다. 사랑은 우리의 주도권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밑도 끝도 없이, 우리를 급습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다." 하룻 있음이 지배하는 성과사회,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 주도권과 프로젝트가 전부인 사회는 상처와 고뇌로서의 사랑에 접근하지 못한다.  43-44


에로스가 깨어나는 것은 "타자를 주면서 동시에 빼앗는" "얼굴들"에 직면할 때이다. "얼굴"은 비밀이 업슨 페이스의 대척점에 있다.  48





벌거벗은 삶


에바 일루즈는 연구서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에서 오늘날 사랑이 "여성화"되고 있다고 확언한다. "상냥한" "친밀한" "조용한" "편안한" "달콤한" "부드러운"처럼 낭만적 사랑 장면의 묘사에서 사용되는 형용사들은 전부 다 "여성적"이다. 남자든 여자든 여성적 감정의 영역으로 몰아놓는 낭만주의의 이미지가 세상에 가득하다. 그러나 그녀의 진단과 달리 오늘날 사랑이 단순히 "여성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삶의 여역이 긍정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사랑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소비의 공식에 따라 길들여진다. 모든 부정성, 모든 부정의 감정은 회피된다. 고통과 열정은 안락한 감정과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흥분에 자리를 내준다. 속성 섹스의 시대, 즉흥적 섹스, 긴장 해소를 위한 섹스가 가능한 시대에는 성애 역시 모든 부정성을 상실한다. 부정성의 완전한 부재로 인해 오늘날 사랑은 소비와 쾌락주의적 전략의 대상으로 쪼그라든다. 타자를 향한 갈망은 동일자의 안락함으로 대체된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동일자의 편안한 내재성, 편하게 늘어져 있는 내재성이다. 오늘날의 사랑에는 어떤 초월성도, 어떤 위반도 없다.  51-52


죽음을 햔한 자유를 알지 못하는 자는 자신의 삶을 걸지 못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데리고 죽음에까지 가는" 대신에 "죽음의 내부에서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노예가 되고 일을 한다.

노동과 벌거벗은 삶은 죽음의 부정성에 댛산 반응이라는 점에서 서로 긴밀하게 열결되어 있다.  52-53


벌거벗은 삶에 매달려 노동하는 노예는 에로틱한 경험을 하지도 못하고, 에로틱한 갈망을 품을 줄도 모른다. 오늘날의 성과주체는 헤겔의 노예와 유사하다. 다만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53-54


자본주의는 벌거벗은 삶을 절대화한다. 좋은 삶은 자본주의의 목표가 아니다. 축적과 성장을 향한 자본주의의강박은 바로 죽음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자본주의에서 죽음은 절대적 손실일 뿐이기 때문이다.  54-55


부지런히 삶을 돌보려는 노력이지만, 그것은 좋은 삶을 위한 노력은 아니다. 자본과 생산의 운동은 좋은 삶을 목표로 하는 이념을 떨쳐버림으로써 무한한 가속화 과정에 빠진다. 방향을 상실한 운동은 극단적으로 가속화된다. 이로써 자본주의는 노골적이고 파렴치해진다.  55


우울한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는 어떤 결론도 맺지 못한다. 하지만 결론이 맺어지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흘러가고 떠내려가버릴 것이다. 우울증의 주체가 안정된 자아상을 갖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유부단함, 결단력의 결핍이 우울증의 전형적 증상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울증은 과도한 개방과 탈경계이 와중에서 끝맺음을 하고 완결지을 수 있는 능력이 실종되어버린 이 시대의 특징적 현상이다. 사람들은 삶을 완결지을 줄 모르기 때문에 죽는 법도 잊어버렸다.  58


마르실리오 피치노에게도 사랑이란 타자 속에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하면서, 나는 당신 속에서 나를 다시 발견한다. 당신이 나를 생각하기에. 그리고 당신 속에서 나를 버린 뒤에 나는 나를 되찾는다. 당신이 나를 살아 있게 하므로." 피치노는 사랑하는 자가 다른 자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망각하지만 이러한 소멸과 망각 속에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되찾고" 심지어 "소유"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소유는 곧 타자의 선물일 것이다... 에로스의 힘은 무력함을 함축한다. 무력해진 나는 스스로를 내세우고 관철하는 대신, 타자 속에서 혹은 타자를 위해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타자는 그런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다. "지배자는 자기 자신을 통해 타자를 장악하지만, 사랑하는 자는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각각 자기 자신에게서 걸어나와 상대방에게로 건너간다. 그들은 각자 자기 안에서 사멸하지만 타자 속에서 다시 소생한다."  59-60


모두가 자기 자신의 경영자인 사회에서는 생존의 경제가 지배한다. 그것은 에로스, 혹은 죽음의 비경제와 정반대된다. 자아의 충동과 성과의 충동이 전혀 억제되지 않는 신자유주의의 사회 질서 속에서 에로스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죽음의 부정성을 밀어내버린 긍정사회는 오직 "불연속성 속에서 생존을 확보"해야 한다는 일념만이 지배하는 벌거벗은 삶의 사회다. 그러한 삶이란 노예의 삶일 뿐이다. 벌거벗은 삶에 대한 염려, 생존에 대한 염려는 삶에서 모든 생동성을 빼앗아간다. 오직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생동성이 없다. 부정적인 것은 생동성의 본질적 계기를 이룬다. "그러니까 오직 모순을 자기안에 내포하고 있는 것, 모순을 자기 안에 품고 견질 수 있는 힘을 지닌 것만이 살아 있을 수 있다.  61-62





포르노 


포느로가 음란한 것은 과다한 섹스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섹스가 없다는 사실이 포르노를 음란하게 만든다. 오늘날 성애를 위협하는 것은 쾌락을 적대시하면서 섹스를 뭔가 "더러운 것"처럼 피하는 "깨끗한 이성"이 아니다. 성애는 바로 프로노그래피에 의해 위기에 빠진다. 가상공간에서의 섹스만이 포르노인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는 실제 섹스 역시 포르노로 변질된다.  65-66





에로스의 정치


우리는 에로스를 결코 충동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에로스는 충동뿐만 아니라 용기까지도 관장한다.  83


신자유주의의 토대는 충동이다.  84


사랑은 "둘의 무대"다. 사랑은 개별자의 시점을 벗어나게 하고, 타자의 관점에서 또는 차이의 관점에서 세계를 새롭게 생성시킨다. 이로 인해 일어나는 근원적 전복의 부정성은 경험과 만남으로서의 사랑이 지니는 특징에 속한다.  85


포르노그래피는 이질성을 완벽하게 소거함으로써 습관화의 경향을 더욱 강화한다. 포르노그래피의 소비자에게는 성애의 상대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개별자의 무대 위에 거주한다. 포르노적 이미지에서는 어떤 타자의 저항도, 어떤 실재의 저항도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떤 예의도, 어떤 거리도 없다. 포르노적이라는 것은 바로 타자와의 접촉, 타자와의 만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를 낯선 것의 접촉과 감정적 격동에서 지켜주는 자기성애적인 자기 접촉, 자기 애착은 포르노적이다. 포르노그래피는 자아의 나르시시즘적 성향을 강화한다. 반면 사건으로서의 사랑, "둘의 무대"로서의 사랑은 탈습관화, 탈나르시시즘화의 방향으로 작용한다. 사랑은 습관적인 것과 동일한 것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고 구멍을 뚫는다.  86-87





이론의 종말


얼마 전 <와이어드(Wired)>지의 편집장 크리스 앤더슨이 "이론의 종말"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글을 발표한 바 있다. 여기서 그는 이제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양의 데어커가 활용 가능해짐에 따라 이론적 모델은 완전히 불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구글처럼 엄청난 데이터 풍요의 시대에 성장한 회사들은 틀린 모델에 의지할 이유가 없다. 아니 도대체 모델이라는 것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데이터를 분석하고 귀속 및 종속 관계를 바탕으로 거기에서 패턴을 찾아낸다. 가설적인 이론적 모델은 데이터의 직접 비교에 자리를 내준다. 인과 관계는 상관관계로 대체된다. "언어학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 행동에 관한 모든 이론을 버려라. 분류법도, 존재론도, 심리학도 모두 잊어라.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누가 안단 말인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다는 사실이고, 우리는 사상 유례없는 정확하게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추적하고 측정할 수 있다.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앤서슨의 테제의 근저에는 허약하고 단순화된 이론 개념이 깔려 있다. 이론은 실험으로 검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가설이나 모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같이 강한 이론들은 데이터의 분석으로 대체할 수 있는 모델이 아니다. 이러한 이론들은 강한 의미의 사유를 바탕으로 한다.  90-91


오늘날 학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데이터와 정보의 더미에 휩쓸려, 이론과 사유에서 아주 멀리 떠나가고 잇다. 정보는 그 자체 긍정적이다. 데이터에 바탕을 둔 실증과학, 데이터를 비교하고 평균을 내는 게 전부인 실증과학은 강한 의미에서의 이론에 종언을 고한다. ..

정보와 데이터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오늘날 오히려 이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하다.  92


사유는 고요함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고요함 속으로의 탐험이다.  93


정신이란 본래 불안을 의미한다. 정신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정성이다.

정보는 그저 알아두기의 대상일 뿐이다...

정보는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한다. 반면 인식은 부정성이다. 인식의 본질은 배제하고, 엄선하고, 결단하는 데 있다. 인식은 기존의 것 전체를 뒤흔들고 뭔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작하게 한다. 과다한 알아두기에서는 아무런 인식도 산출되지 않는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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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외국의 낯선 도시를 홀로 걸어본 적 있나요?

종종 모든 것에서 벗어나 

낯선 도시 안에 갇히길 소망합니다. 

나에게 낯선 도시는 만남인 동시에 헤어짐이고, 

피난처인 동시에 탈출구입니다.

때로는 캄캄한 밀실이었다가 눈부신 광장이고, 

눈물인 동시에 환희입니다. 

낯선 언어를 듣고 낯선 공기를 마시며

홀로 걸을 때 가만히 당신들을 생각합니다.

결국,

돌이켜보면 그 낯선 도시에서

나는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식당 주인과 이야기를 하던 남자가 어느새 나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거야? 아님 타투가 하고 싶은 거야?"

남자가 나에게 반말로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우리 만난 적 있나요?'라고 물을 뻔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어깨에 있는 레터링 말이에요."

"데스 쉘 해브 노 도미니언. 무슨 뜻인지 알아?"

"죽음은 우릴 지배하지 못하지. 아니에요?"

"맞아. 스무 살에 처음으로 했던 타투야."

"멋있네요. 근데 왜 자꾸 나한테 반말해요?"

...

And death shall have no dominion. 죽음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이 문장은 진저색 헤어 애인이 가장 사랑하던 딜런 토머스의 시구였다.  21


정말 우리의 이 인생에 정답이 있기나 할까요?

뫼비우스의 띠처럼 모든 생각은 끝없이 또다른 생각으로 이어지고, 다시 처음의 생각으로 돌아와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해지고 말지요.  38


글을 쓰기 위해 여행을 한다는 건 사실 핑계였다. 나는 이제껏 많은 나라와 도시를 떠돌았지만, 한 줄도 쓰지 못했다.  45


낯선 나라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건 자신도 모르게 평생 각인되어 버리는 일이라 신중해야만 한다.  55


너는 나의 자유가 부럽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뭔가를 쓴다는 핑계로 온종일 좁은 방 천장을 보고 누워 너를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네가 말한 '나의 자유'는 정말 나에게도 자유였을까. 나는, 그저 너의 그 바쁜 하루가 부러웠다.  64


누르는 순간 그것은 흘러가는 과거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친절한 카메라의 셔터음.  67


생각 없이 살다가 참외 껍질처럼 영야가 없는 남자를 만나고 염소똥 같은 얘기를 하다가 오슬오슬 추워져 서로를 껴안는 일 따위 역시 나쁘지 않다.  100


사랑은 텅 빈 상자와 같았다. 조심조심 공을 들여 포장을 뜯어보면 그 속은 늘 텅 비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에 또 한번 속느니, 차라리 내가 사랑을 글로 지어내는 게 확실하겠다.  113


몇 시간째 강물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결국 강물이 내게 답을 주었다. 강물을 깊이 들여다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 자신을 너무 들여다보지 말 것. 그러니까 나는 그 동안 나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봤던 것이다.  115


남들과 다르지 않게 살 거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은 편안해졌다. 생각은 생각을 낳는다. 이제 나는 거두기 힘들 정도로 많은 생각을 낳지는 않을 거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들은 지금처럼 끈질기게 내 발목 아래에서 질척일 테니.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메인 로드로 향했다. 그래, 바람에 몸을 맡기고 말없이 흐르는 저 강물처럼 살자.  116


흘러가는 대로 흐르지 말아야겠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밤새 뒤척였다. 그렇게 다시 무서운 밤이 찾아왔다.  117



모아놓은 돈도 없는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글만 쓰는 일이 가능할까?  124



처음 만난 우리는 모든 얘기를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아무런 얘기도 할 수 없는 사이였다. 

함께 있을 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135-136


그날.. 푸근하디 푸근한 일상을 닮은 여행을 했다.  157


눈으로만 익혔던 서로의 입술  158


활주로를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는 비행기처럼 남자가 부드럽게 몸을 움직였다. 그러다 점점 빠르게 움직였고 나도 자연스레 남자의 움직임에 조금씩 몸을 맞췄다. 껴안은 남자의 등이 땀으로 조금씩 젖어왔고 움직임은 더욱 강해지고 빨라졌다. 나 역시 거친 숨소리를 뱉다가 형체 없는 언어를 쏟아냈다. 나와 남자의 알 수 없는 언어가 뒤섞이다가 모든 움직임이 끝났을때, 나는 그 느낌이 정말 비행기가 이륙할 때의 느낌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사랑이, 여행이 '시작돼버렸음을 아는 기분'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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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별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 이야기를 글로 옮겨야만 할 것 같다.  8


아버지는 일도 안 하고 잠도 안 자고 가끔 씻고 조금 먹고 하루 종일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현관만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이별의 장면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거나 아니면 어머니가 돌아오길 하염없이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그 시절, 나는 아버지가 어떤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는데 아버지는 도무지 제목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깊은 상처를 다시 들쑤실까 두려워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우리 두 사람 사이의 묵계였다. 아버지는 그 책을 구입한 뒤 외출할 때에는 윗도리 주머니에 넣고 나가고 소파에 앉아 있을 때에도 마치 알을 품고 있는 사람처럼 책을 깔고 앉았다. 그 책은 아버지의 슬픔을 자극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위로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숨을 붙이고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오후, 아버지가 책을 부엌 탁자에 놓고 나가서(일부러 내게 보여주려고 그랬을지 모른다) 나는 아버지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었다. <단순한 열정>이란 제목의 책이었다. 동구권 국가의 외교관이자 자기보다 연하인 A라는 유뷰남을 사랑한 여자가 자신의 열정을 토로하는 내용이었다. 작가는 자서전 형식을 빌려 하루하루 남자를 기다리는 심정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10-11


우리는 곧바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외딴 장소를 찾았다. 한번은 소르본 대학 맨 꼭대기 층의 코쉬 대형 강의실 앞에서 누군가에게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위험 속에서 선 채로, 또 한번은 생 쉴피스 성당 안의 들라크루아의 그림 <천사와 야곱의 싸움> 아래에서, 그런 후에는 서로 앞 뒤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걸었다...

영화관이나 극장에 가면 그녀는 내 쪽은 보지 않은 채 무릎 위에 올려놓은 내 코트 밑으로 손을 집어넣고 바지 단추를 끌렀다...

그런 날 저녁에 우리가 자주 가던 극장에서 그녀가 느낀 것은 나에 대한 특별한 욕망이 아니라 상황이 만든 욕망이었다고 짐작된다.  34


나는 '성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그녀의 작품에 대한 논문을 시작했다. 

<단순한 열정>에 관련된 인터뷰 내용을 찾기 위해 그녀의 책을 출간한 출판사에서 나온 홍보자료를 검토했다. 

또한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진실을 그녀의 말 속에서 찾아내길 기대하며 <단순한 열정>을 수사관의 독법으로 꼼꼼하게 읽어내려갔다. 너무 여러 번 읽다 보니 결국 전체 문장을 외우게 되었다. 나는 대화를 하다가 그녀의 반응을 실험해 보려고 그중 몇 문장을 인용해보았다. 그녀는 마치 내가 자기 기억의 한 부분에 폭행을 가했다는 듯 돌연 입을 다물더니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데"라는 표정을 짓고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혹시 내가 쓴 거 아니야? 그 책이 지독한 강박관념이 되었구나 그 책에 대해선 나보다 네가 더 잘아니 말이야." 지금까지 내가 쓴 것을 다시 읽어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혹은 의식적으로 내가 그녀의 문체와 표현을 되풀이하면서 그것에 물들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를 소유하지 못했는데 그녀의 모든 글쓰기가 내 안에서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나는 우리의 글쓰기가 이렇듯 얽혀서 서로 만나길 원했다.  87


우리 이야기는 책이 끝났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라, 그녀의 단어가 내 몸을 떠나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 될 때 끝날 것이다.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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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겉돌지 않겠다는 다짐은 눈빛을 살아 있게 한다

무구한 눈빛은 사람을 사로잡는다. 그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살고 싶어서 일순간 발바닥에 힘이 들어가기도 한다. 그 눈빛이 내가 잃은 지 오래된 것이기도 하고 그 눈빛으로 내가 씻겨지는 기분마저 들기도 해서 마치 좋은 바람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것이다.

커피를 맛있게 내리는 사람은 커피콩을 갈고 뜨거운 물로 커피를 내리는 동안 그 옆을 떠나지 않는다. 좋은 눈빛으로 주시하고 집중한다. 그런 사람이 내주는 커피는 이미 마시기도 전에 맛있다는 생각을 머릿속 가득 채워준다. 어떻게 보면 그 좋은 눈빛이 커피에 닿아서일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음식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좋은 눈빛을 가진 사람은 잘되게 되어 있다. 잘하겟다는 그 마음이 눈빛으로 옮겨가면서 마침내 좋을 수밖에 없는 결과에 힘이 실리는 것이다. 눈빛은 그 사람을 가장 절묘하게 드러내주는 설명서이자 안내서 같다...

좋은 눈빛에 흔들렸으면 한다. 그것이 살아가는 것이다. 쉬지 않는 눈빛과 마주쳤으면 한다. 그것이 다행한 일이다.  




다시는 이런 시간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우리가 한 편의 시를, 한 명의 좋아하는 시인을 가슴 안에 키울 때 얼마나 '사람 냄새 나는 사람'일 수 있는지 절감하게 되기를 바랐다.  




사랑이 여행이랑 닮은 것은

사랑이 여행이랑 닮은 것은 꼭 이십대에 첫 단추를 끼워야 한다는 점이다. 이십대에 사랑을 해보지 않으면 골조가 약한 상태에서 집을 짓는 것처럼 불안한 그 이후를 보내게 될 것이며 살면서 안개를 맞닥뜨리는 일이 잦게 된다. 여행도 마찬가지. 이십대에 혼자 여행을 해보지 않는다면 삼십대에는 자주 허물어질 것이다.

그리고 또 닮은 것은, 사랑도 여행도 하고 나면 서투르게나마 내가 누구인지 보인다는 것이다.

한번 빠지게 되면 중독처럼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도 닮았다.

또 사랑을 하거나 여행을 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많은 사진을 찍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소중한 것을 남기고 간직하고 싶어하는 자연스런 욕구가 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듯 사랑의 대상과 사랑의 순간을 찍는 일이나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순간순간들을 담는 일, 그 둘은 차곡차곡 쌓여간다.

행복에 대한 기준이 높아지며 그 욕구 또한 강렬해지는 것, 그 또한 사랑이 여행이랑 닮은 점이다. 그리고 왜 물질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풍요로워져야 하는지를 절실히 느끼게 해준다.

사랑과 여행이 닮은 또하나는 사랑이 끝나고 나면 여행이 끝나고 나면 다음번엔 장말 제대로 잘하고 싶어진다는 것, 그것이다.  




이 말들은 누구의 가슴에서 시작됐을까

단풍이 말이다, 계속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물들어가는 속도가 사람이 걷는 속도하고 똑같단다. 낮밤으로 사람이 걸어 도착하는 속도와 단풍이 남쪽으로 물들어 내려가는 속도가 일치한단다. 어떻고 어떤 계산법으로 헤어리는 수도 있다는데 도대체 이런 말은 누가 낳아가지고 이 가을, 집 바깥으로 나올 때마다 문득문득 나뭇가지들을 올려보게 한단 말인가. 말과 말 사이에 호흡이 배어 있는 것 같은 이 말은, 이 근거는 누구의 가슴에서 시작됐을까.

또하나의 믿을 수 없는 것은 식물의 이름에 관련되어 있다. 백리향이라는 풀의 이름에도 그만한 쉼표와 호흡이 장치되어 있다. 백리향은 낮게 자라는 나무의 일종으로 주로 높은 산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식물의 향은 가을 풀 향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단지 식물의 냄새만이 아닌 동물적인 냄새까지도 포함하고 있는데다 진하고 또 강렬하여 늦은 밤 책상에 앉은 사람, 마음이 허전한 사람, 종일초록 기력이 없는 사람, 사는 것이 지옥 같아서 자꾸 먼 데만 보는 사람을 자극하는 데 직방이다. 백리향도 발끝에 붙은 향기가 백 리를 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세상에나, 다른 데 넣어둔 향기도 아니고 그저 발끝에 붙은 향기라니, 표현 참 아찔하다. 이름에 과감히 비과학을 이어붙인 것은 또 누구일까, 잘 모르긴 해도 감정의 물결이 꾸미고 벌이는 일일 터.




지금으로부터 우리는 더 멀어져야

불을 켜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거나, 불을 켜지 않은 채 가만히 사위가 어슬해지는 바깥에 눈길을 주고 있으면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다. 알지 못할 것이기도 하려니와 알 것만 같은 그 무언가이기도 한 것이 한순간 몰려온다. 그것으로 인해 그 시간이 채워지기도 하며 비워지기도 하는 그 무언가는 맛이 있지 않은, 퉁퉁 부은 눈가 같은, 처방을 허락하지 않는 시간이면서도 어떤 구체적인 덩어리가 아니어서 달리 설명할 길은 없다. 그럼에도 탁 하고 불을 켜면 이내 사라지고 마는 그것의 정체는 느리고 아주 묽은 것임에는 분명하다. 굳이 덧붙이자면 세상의 가치와 속도와는 전혀 다른 화학물질을 닮았다는 정도밖에는 설명할 능력도 없다.




만약 누군가는 사랑하게 되거든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거든.

많이 먹지 말고 속을 조금 비워두라.

잠깐의 창백한 시간을 두라.

혼자 있고 싶었던 때가 있었음을 분명히 기억하라.

어쩌면 그 사람이 누군가를 마음에 둘 수도 있음을,

그리고 둘 가운데 한 사람이

사랑의 이사를 떠나갈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라.

다 말하지 말고 비밀 하나쯤은 남겨 간직하라.

그가 없는 빈집 앞을 서성거려보라.

우리의 만남을 생의 몇 번 안 되는 짧은 면회라고 생각하라.

그 사람으로 채워진 행복을 

다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함으로써 되갚으라.

외로움은 무게지만 사랑은 부피라는 진실 앞에서 실험을 완성하라.

이 사람이 아니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과 함께 맡아지는 

운명의 냄새를 모른 체하지 마라.

함게 마시는 커피와 함께 먹는 케이크가 

이 사람과 함께가 아니라면 이런 맛이 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만날 때마다 선물 상자를 열 듯 그 사람을 만나라.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거든.




명장면 하나쯤 간직하기 위해 여행을 떠납니다

두 사람은 기차에서 만났습니다. 

여자는 몸이 조금 불편했고 남자는 무심했습니다.

모르는 사이니 괜찮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여자와 남자는 

기차에서 조각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 않았고 기차에서 내릴 때

남자가 여자를 조금 도와준 것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헤어졌습니다.

흐르는 시간도 흐르는 풍경도 여행자라서 괜찮았습니다.


여자와 남자는 숙소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우연이었습니다.

다시 만난 것은 처음과는 달랐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눈 입자만큼 각진 인생 이야기를 들었고

남자는 여자가 만든 뜨거운 감자 수프를 나란히 나눠 먻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들게 했던 시간의 냄새도 떠올렸습니다.


주관적인 모든 것들은 사이를 두고 객관화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기류 속에 있어서 같았고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을 고스란히 담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이 또 달랐습니다.

두 사람은 다시 헤어져야 합니다.

여행자이기에 그쯤이야 괜찮을 것이었습니다.


여자가 가방을 끌고 길을 나섭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남자가 2층 창문을 열고 발코니에 나와 서서 손을 흔듭니다.

여자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남자의 손 흔드는 모습을 찍었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잠깐만 기다리라 햇습니다.

이번에는 남자가 자기 카메라를 가져와

오래 손 흔드는 여자의 모습을 찍었습니다.


우산처럼 기억될 것입니다.

멀어지지만 괜찮을 것이었습니다.




매일 기적을 가르쳐주는 사람에게

사람은 그 자체로 기적이에요.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마음 안에 그 한 사람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더 기적이지요.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 또한 황홀합니다. 혼자서는 결코 그 어떤 꽃도 피울 수 없다는 것도 황홀입니다.

우리가 기대는 것은 왜 사람이어야 할까요. 왜 사람을 거쳐서 성장하고 우리는 완성되어야 할까요. 혼자여서 불안한 것은 마땅히 이해되는 불안이지만 옆에 아무도 없어서 불안한 것은 왜 그토록 무서운가요.

나는 세상 모든 관계를 사랑으로 풀려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밑에 깔려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고, 얼굴 붉힐 일도 마음이 뭉치는 일도 없어지거든요. 일도 사람도 사랑한다고 주문을 걸고 사랑을 앞세우면 일도 사람 관계도 나아지는 것을 수도 없이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지금 당신에게 전달하고픈 마음은 그렇고 그런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 인생에 몇 번 올까 말까 한 감정임을 알아주세요.


가능하면 사람 안에서, 사람 틈에서 살려고 합니다. 사람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아서지요. 선뜻 사랑까지는 바라지 않지요. 사랑은 사람보다 훨씬 불오나전하니까요. 아, 불완전한 것으로도 모자라 안전하지 않기까지 하네요, 사랑은.

사람만 보고 살려고 하는데 그것도 어렵지요. 사람 냄새 참 좋은데, 사람 냄새 때문에 사람답게 살고 있는데 결국은 사람 냄새 때문에 골병이 들지요. 결국 우리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으려 하지만 사람이 없는 곳에서의 삶, 그게 어디 가능하기나 한가요. 우리는 사람이 그리워 사람 없는 그곳을 탈출하고 맙니다.

나는 대중적으로 압도하는 풍경 앞에 서서 사진 찍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한 번 본 것으로 강렬했다면 그것은 사진보다 오래 남는 법이지요. 차라리 그게 영원할 수도 있지요. 마찬가지로 좋은 사람과도 함께 사진 찍고 싶지가 않아요.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불안을 포함하고 있고 나중에라도 그 좋은 사람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는 순간 감정이 그전 같지 않으면 어떡하나 무서워서 그래요. 하지만 이 모든 불안과 실망들이 당신 앞에서는 아무 일도 아닌 게  되었어요. 당신으로 잘 살 수 있고 당신으로 잘 일어날 수 있어요.


사람으로 우리는 집을 지어요. 강렬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가져다 뼈대를 짓고, 품이 넓은 사람에 대한 기억을 가져다 지붕을 올리고, 마음이 따뜻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을 데려다 실내를 데웁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인생의 중심을 받칠 만한 사건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것으로 지은 집은 바람에도 약할뿐더러 곧 녹아내리지요. 

그러니 눈을 감지는 말지요. 그건 세상과 친해지지 않겠다는 이야기니까. 세상은 그런 당신에게 아무것도 보여줄 게 없어요.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고 눈을 감은 당신에게. 세상은 사람한테로 나 있는 계단을 내 줄 수 없어요.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시간은 있습니다.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새에게도 나무에게도. 모두에게 아름다운 시간은 있는 법입니다. 아무리 별것 아닌 풍경이고 시간이라 해도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기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사람이 그래요.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고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그것만으로 아름다운 사람.

나에게 그만큼인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물이 닿은 글씨처럼 번져버릴까. 혹여 인연이 아닐까 나는 목이 마르고 안절부절입니다. 부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되어주세요. 이 간절함으로 그래도 된다면 당신을 세상에 고소할 것이고, 나는 세상이 당신을 가둬놓은 아름다운 감옥으로 이사할 겁니다. 

그러니 내가 밑줄 친 사람이 되어주세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감히 당신에게 그어놓은 그 밑줄을 길게길게 이어갈 것입니다.  




이토록 서서히 퍼지는 광채

처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켜켜이 낱장으로 들어내 펼쳐 놓아보면 일대의 사건이라 할 만한 일들은 모두 처음 일어난 일들이었다.

처음 마셨던 것치고는 잘 마셨다는 생각이다. 처음 저지른 것치고는 그나마 잘한 일이었던 것 같다. 그토록 처음이어서 강렬한 것이, 그만큼 강력한 것이 내 생에서 나를 몇 번 더 뒤흔들 것인지를 너무 이른 그때여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여행은 인생에있어 분명한 태도를 가지게하지

여행을 하지 않아도 살아지는 너와, 여행을 다녀야 살아지는 나 같은 사람의 간극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래, 너는 여행의 조각이 아닌 다른 것들을 맞추면서 살아온 것일 거야.  

알고 있겠지만, 여행은 사람을 혼자이게 해. 모든 관계로부터, 모든 끈으로부터 떨어져 분리되는 순간, 마치 아주 미량의 전류가 몸에 흐르는 것처럼 사람을 흥분시키지. 그러면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겠다는 풍성한 상태로 흡수를 기다리는 마른 종이가 돼.

그렇다면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먼 곳에서, 그 낯선 곳에서. 

무작정 쉬러 떠나는 사람도, 지금이 불안해서 떠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결국 사람이 먼길을 떠나는 건 '도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겠다는 작은 의지와 연결되어 있어. 일상에서는 절대로 만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저기 어느 한켠에 있을 거라고 믿거든.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다보니 내가 최근에 본 어떤 아름다운 풍경 하나가 떠올라. 혼자라서 밋밋하기만 한 밤을 겨우 보내고 아침을 맞았는데 숙소 앞에 누군가 여러 개의 눈사람을 만들어놓은 거야. 나도 모르는 사이 밤 동안 눈이 내린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누군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존재가 아침 일찍 일어나 눈을 굴려 눈사람들을 만들었다는 건, '그냥'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사람의 아름다움이 관여한 '기적'인 거지. 과연 그 사람은 혼자 보려고 눈사람을 만들었을까. 아니지. 단지 그냥 차가운 눈을 굴린 게 아니라 기쁨이며 온기 따위를 굴린 거야. 어쩌면  사람다운 것에 더 가까워지는 연습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 사람은 자기 인생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가진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자기 인생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갖는것, 그건 여행이 사람을 자라게 하기 때문이야.

사람은 원래 약하고 여리고 결핍되게 만들어졌어. 그건 왜 그런가 하면 그 상태로부터 뭐든 하라고, 뭐든 느끼라고 신은 인간을 적당히 만들어놓은 거야. 그러니까 스스로 약한 게 싫거나 힘에 부치는 게 싫은 사람들은 자신을 그렇게 방치하면 안 되는 몇몇 순간을 만나는 거지. 그래서 불완전한 자신을 데리고 먼길을 떠나. 그걸 순례라고 치자구.

나에게 순례는, 내가 나를 데리고 간 그 길에서 나에게 말을 걸고, 나와 화해하며, 나에게 잘해주는 일이야. 

높은 산으로 해 지는 풍경을 보러 올라가 넋을 놓고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알 수 없이 차오르는 마음 안쪽의 부드러움을 대면하는 순간, 맨발로 돌길을 걷고 걷다가 문득 푸른 잔디를 만나 발이 고마워하게 되는 순간, 낯선 방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이 방은 어떤 사람들의 어떤 이야기들이 거쳐갔을까 하고 낭만을 상상해보는 순간, 그 자잘한 순간들은 모이고 모여 한 장의 그림이 돼. 그 그림이 중요한 것을 우리가 안절부절하고 아옹다옹하는 일상하고는 전혀 다른 재료로 그려진 것이라는 것. 

이런 작은 느낌들은 한꺼번에 광채로 다가오지. 아무렇게나 살다가 그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사실까지도 알게 해주지. 그래, 그로 인해 사람이든 풍경이든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사랑이 쓰다듬는 세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해주는 것. 그것이 여행인 거야.

걷지 않고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야. 보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 그러니까 여행을 떠나더라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상태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획득할 수 없게 돼. 여행은 신이 대충 만들어놓은 나 같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야 하는 진실이야. 그 진실이 우리 삶을 뒤엉켜 놓고 말지라도, 그래서 그것이 말짱 소용없는 일이라 대접받을지라도, 그것은 그만큼의 진실인 거야.  




그나저나 당신은 무엇을 좋아했습니까

그나저나 당신은 무엇을 좋아했습니까. 무엇으로 얼굴이 붉어졌습니까. 그런데도 그 좋아했던 것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당신은 얼마나 떳떳할 수 있을지요.

이토록 둔탁하고 뻔뻔해지는 것은 그만큼 대체되는 것들이 많아서겠지요. 이토록 꿈을, 방향을 방해하는 것들의 정체는 무엇일는지요. 이기고자 한다면 좋아하는 것을 늘려야 합니다. 좋아하는 것들과 춤춰야 합니다. 좋아하는 것은 포기해야 하는 것과 밀당하지 않습니다.

잘 사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면 작은 수첩 하나를 구해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채워나가면 됩니다. 수첩에는 <작고 허름한 가게 장부>라는 제목을 달아놓고 말이지요.




사랑은 어디로부터 왔을까

점선처럼 만나 실선처럼 하루를 보냈습니다.




잊지 못한다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방식이란 건 자신이 살아온 범위 안에서지. 자신이 고개 끄덕이고 싶은 방향대로일 걸세. 내가 한 사랑이 어떠했노라고 누구에게 말하려는 순간 나 스스로도 쏟아지는 것들을 다 받아내지 못할까봐 말하지 못한 것도 있지 않겠는가.




겨울나라

겨울만 있는 시간을, 겨울만 있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찬 온도에서 뜨겁게 사는 것, 그것은 두 배로 사는 삶일 거라는 환상이 내겐 있다...

나는 '이 사람은 왜 이토록 나를 도와주고 있지?' '이 사람은 그저 내가 무사히 이 골목을 빠져나가기만을 바라는 사람일까?' 하는 의문의 힘으로 핸들을 돌려야 했다. '이런 일에 이렇게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아무리 내가 이 지경이라도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는 마음으로 후진해 나오던 끝에 삼거리를 만났고 그곳에서 나는 사내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남기고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보탬이 되려고 그랬던 건 아닌데

하는 일이 잘되지 않을 때나 되는 일이 없을 때, 할 일이 없을 때도 마찬가지. 그때 시인이 하는 일은 영감을 부르는 일이다. 영감이라는 것이 불러서 오는 것도 아니고 기다려서 제때 맞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시인이 하는 일이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거나 왜 그래야 하는 지 모르지만 마땅히 그래야겠어서' 영감은 이런저런 일들을 지시하고 시킨다. 

영감이라고 해서 늘 굉장한 확신으로 도착하지는 않는다. 명중은 커녕 꽂히지 못할 때도 많으려니와 뭐라도 잡을 듯이 전속력으로 달려오다가 속도를 잃고 그만 숨이 죽어버리는 경우, 또 매혹적으로 다가오더라도 그걸 제대로 받아낼 수 없는 상태인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도 가만히 기다리는 일이 커다란 일이기도 한 것이 예술하는 사람의 일이다. 무슨 일 하세요, 라고 물으면 절박하게 군색하게 영감의 무엇과 직감의 무엇과 육감의 무엇을 기다리는 일을 합니다, 라고 말해야겠는데 제정신으로는 그 대답을 못하겠으니 직업적 고충이 참 말이 아니다.

그래서 오던 길을 문득 멈춰 서서 한참 뒤를 돌아다보기도 하고, 불쑥 먹던 밥을 중단하고 신발을 신기도 하며, 사람을 앞에 두고 앉아 한없이 아무 말 하지 않기도 하고,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사람처럼 탁자에 얼굴을 묻고 앉아 있기도 하는 것이다.

한 예술가가 이상히도 그러고 있는 것은 급히 바꿔놓거나 정돈해야 할 세계가 있어서 잠시 파도를 맞고 있는 중이라 생각해주시길. 그렇다고 '잠시 파도를 맞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있을 수는 없어서.




오늘 비행기는 전면 결항입니다

제주.. <내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 씌어 있는 카페..




사람이 꽃

"카페 하실 거면 어떤 카페 하실 건데요?"

상인이 나에게 물었다. 두번째 만나던 어느 날 밤, 서로 나눈 이야기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음, 사람이 많이 오지 않는 카페요."

삐딱하게 말했지만 상인에게 삐딱한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네, 이해합니다."

"뭘요?"

"자기 공간을 가졌단느 게 중요한 것이지 수입 올리는 건 부차적이란 말씀이잖아요? 책도 읽으시고 음악도 듣고 싶은 거죠? 혼자사서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죠? 사람 마음을?"

"누구나 그런 커페를 갖고 싶어하죠. 누구나요."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말에 슬쩍 귀가 열렸다. 저렇게 일방적인 말을 하면서도 어쩌면 그렇게 예의를 갖출 수 있는지. 상인은 처음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다. 이번엔 내가 물었다.

"사람을 좋아하나봐요."

"조금 관심만 있어요. 왜 제가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셨어요?"

"사람을 좋아하니 사람을 잘 읽는 거겠다 싶어서요."

"사람을 좋아한 적은 있었어요. 한때는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어쩌면 나는 수도사나 스님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너무 좋아하면 안 되니까, 사람은..."

사람이 아니면 무엇을 좋아해야 할까....


아름다웠던 낮과 밤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 사랑하지 ㅇ낳는 사랑이라면 다른 세계로 옮겨가야 한다. 더이상 감정을 위조할 수 없다면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사람으로부터 새로운 충격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사랑을 사려드는 이는 있지만 이별은 값이 엄청나서 감히 살 수도 없다. 그래서 이별은 사랑보다 한 발자국 더 경이에 가깝다...


땅만 바라보고 살았던 살마에게 어느 밤의 별들은 그 사람을 다른 세계로 이끌어준다. 이 세계가 아니면 다른 세계는 절대 존재하지 않을거라고 믿게 하는 사랑. 그 사랑은 몇 번의 세계를 거치고 훈련하면서 먼 우주로 나아갈 수 있다. 작은 물이 모여 바다로 간다는 그 말처럼 사랑은 고통을 치른 만큼만 사랑이 된다.  




내 옆에 있는 사람

이 사실을 알기까지 오래 걸렸습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절대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요.


내가 사람으로 행복한 적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왜 그 사람이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얼만큼의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라는 것을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나 나는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조만간 다시 보자는 말은 했지만 같이 여행을 가자고 말하기엔 이르다...


정신적인 건강도가 비슷한 사람끼리 서로 강한 호감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 있다.(이 말은 지금의 감정과 그 감정에 따라붙는 불안에 대해 잘 설명해 준다.) 내 정신적인 건강도가 만약 B라면 그 사람 또한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닮은 점이 있다는 것은 좋아하기에 충분하지만 그렇다면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 'B'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완벽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불온에 가깝다는 말을 하려는 것인데 쓸쓸히 여기까지 왔다.

사랑은 0 이다. 사랑은 감정으로 숫자를 늘리는 일이지만 결국엔 0 이 된다. 0 하고는 상관없는 듯 우리는 100처럼 사랑하지만 결국엔 시간에 의해 바람에 의해 요지부동의 0 에 도착하고 만다. 아무 감정이 없는, 아주 무심한 진공의 상태.

지금 그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먼 훗날의 0 에 대해 생각한다. 아픈 0 에 대해 생각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허무에 이르고 마는 그 0 에 대고 얼굴을 부빈다...


사랑은 0 의 그림자다. 사랑 자체로는 그림자를 만들 수 없는데다가 사랑이 0 의 뿌리에 단단히 붙어 있으니 그렇다. 우리가 사랑을 하면서도 끝없이 외로운 것은 0의 그림자를 껴안고 있어서다. 무인도에 같이 가자 해놓고 무인도에 그 사람을 남겨두고 오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랑을 하면서 0 의 그림자를 데리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사랑을 조금만 멀리 두려 한다. 너무 멀리는 두지 말고 가까이 있고 싶을 때, 냄새 맡고 싶을 때 달려가려 한다. 느슨한 감정에 숨겨놓은 긴장이 가져다주는 멀리를 당분간 즐기려 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하지만 나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좋아한다 말하지 못한다. 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랑은 0 이라느니 사랑은 0 의 그림자라느니 또 무엇이라느니 이렇게 멀미를 참지 못하고 허튼소리만 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무엇으로도 침묵하지 않는다

사랑을 통해 성장하는 사람, 사랑을 통해 인간적인 완성을 이루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명백히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랑은 사람의 색깔을 더욱 선명하고 강렬하게 만들어 사람의 결을 더욱 사람답게 한다. 사랑은 인간을 퇴보시킨 적이 없다. 사랑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우리는 사랑에게 엄청난 많은 것을 배웠으므로 그만큼의 빚을 지고 산다. 그것도 갚을 수 없는 아주아주 큰 빚을.




지금 어느 계절을 살고 있습니까

'당신은 지금 어떤 계절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지금 어떤 계절을 어떻게 살고 있다고 술술 답하는 상태에 있으면 좋게싿. 적어도 계절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어디를 살고 있는지를 조금 많이 알게 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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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당신과 함게 있으면서 잘못을 저지르는 게, 모든 것이 제대로 된 듯 느끼면서 당신이 없는 것보다 좋아요."  546


".. 난 시도해보고 싶어요. 당신과 나요. 엄청난 실수였다고 생각하면서 끝맺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할 거예요."  547



대수의 법칙과 결합한 확률 법칙에 따르면, 불리함을 극복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어떤 일을 점점 더 많이 반복해야 한다고 한다.  

더 많이 할수록 성공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아니면 내가 엄마에게 설명한것처럼, 때로는 그냥 계속해서 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노먼을 정원으로 데리고 나가서 이번 주에만 86번째로 공을 던졌다. 노먼은 여전히 그 공을 물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언젠가는 해낼 거라고, 나는 믿는다.  55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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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 살의 나는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확신이 없다. 사실 일자리를 잃을 때까지는 그런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27


사랑한다면 끝까지 곁에 있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뭐 그런 거?  77



"그쪽은 그쪽이 더 잘 안다고 생각했겠죠. 다들 나한테 뭐가 필요한지 자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해..."  81



투석기로 발사된 돌덩이처럼 완전히 다른 삶 속에 처박히게 되면, 아니 적어도 얼굴이 유리창에 닿아 짜부라질 정도로 심하게 등 떠밀려 남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84



세상에는 훨체어를 탄 사람과 같이 다니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이 잇다. 하나는 포장도로 상태가 얼마나 거지 같은가 하는 실감이다. 여기저기 푹푹 파인 데를 엉망진창으로 땜질해 놓았거나 아예 울퉁불퉁하다..

또 하나는 사려 깊은 운전자가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보도 진출입로를 아예 막고 주차를 하거나 너무 빽빽하게 차를 붙여 놓아서 실제로 훨체어가 도로를 건널 길이 아예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98



보통 사람의 시간이 있고 병자의 시간이 따로 있다. 시간은 정체되거나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고 삶은, 진짜 삶은, 한 발짝 떨어져 멀찌감치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114



"당신은 지나치게 똑똑해. 지나치게 흥미 진진하고." 그는 나를 보던 눈길을 돌렸다. "인생은 한 번밖에 못 사는 거요. 한 번의 삶을 최대한 충만하게 보내는 건 사람으로서 당연한 도리요."  277


"행복할 수 있는 일이 뭔지를 찾아서 내가 원하는 일이 뭔지를 알아내고, 그 두 가지 일이 가능한 직업의 훈련을 받은 겁니다."

"당신 말만 들으면 참 간단해 보이네요."

"간단해요. 문제는, 굉장히 힘이 든다는 겁니다. 글너데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노력을 하고 싶지 않은 거죠."  291



"사람들은 대체로 나처럼 사는 게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라고 생각한다는 걸 알아요. 그렇지만 더 나빠질 수도 있어요. 혼자 숨을 쉴 수도 없는 지경이 될 수도 있고, 말도 못 하게 될지도 몰라요. 순환계에 문제가 생기면, 팔다리를 잘라내야 한다는 뜻이죠. 무한정 입원하게 될 수도 있어요. 지금도 사실 산다고 하기엔 형편없는 삶이지만, 클라크. 얼마나 더 나빠질 수 있는지 생각하면... 어떤 날 밤에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진짜로 숨이 안 쉬어지기도 해요."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이런 거 알아요? 아무도 그런 얘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거. 아무도 두렵다든가, 아프다든가, 무슨 멍청하고 뜬금없는 감염으로 죽게 될까봐 무섭다는 얘기는 원치 않아요. 다시는 섹스를 할 수 없고 자기 손으로 만든 요리를 다시는 먹을 수 없고 절대 자기 자식을 안아볼 수 없게 되면 기분이 어떨지, 그런 걸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 휠체어에 이렇게 앉아 있다보면 가끔 죽도록 답답해져서, 이렇게 또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고 싶어진다는 걸,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실낱 같은 희망에 매달려 살고 있는데 아직도 우리 아버지를 사랑하는 내가 용서가 안 돼요. 동생은 이번에도 또 나 때문에 자기가 뒷전이 됐다는 사실 때문에 날 원망하고 있지만... 내가 불구가 됐다는 얘기는, 어렸을 때부터 죽 그래왔던 것처럼 나를 제대로 미워할 수도 없다는 뜻이죠. 우리 아버지는 그냥 싹 다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고, 궁극적으로, 그 사람들은 다 밝은 면만 보고 싶어 하는 거죠. 그래서 내가 긍정적으로 생각해줘야 하는 거고."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정말로 재앙에도 밝은 면이라는 게 있다는 믿음이 꼭 필요한 거죠."  358-359



".. 그 친구가 행복하기를 세상 그 무엇보다 바라지만 나는... 나는 도저히 그가 하려는 일을 감히 내 잣대로 판단할 수가 없어요. 그건 그 친구가 선택할 일이에요. 그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444


"아니요. 그 친구가 살면 좋겠어요." 

"하지만.."

"하지만 그 친구가 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억지로 살라고 하는 건, 당신도, 나도, 아무리 우리가 그 친구를 사랑해도, 우리는 그에게서 선택권을 박탈하는 거지 같은 인간 군상의 일원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445-446



"어떻게든 되겠죠." 내가 말했다. "우리 둘이서,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거예요."

내가뭘 원하는지 깨달은 흐로, 그 말이 내 캐치프레이즈였다.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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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나가는 여자들을 쳐다보는 법이 없다. 맨해튼에는 여신처럼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지만 내 눈은 그녀들의 얼굴에 가닿지 않는다. 난 '첫눈에 반한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그런 내가 이번에는 좀 이상하다. 살아가면서 적어도 한 번쯤은 체험하는 기이한 순간이다. 마침내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났다는 느낌, 그 낯설면서도 분명한 인식...

나에게 기회를 잡을 시간은 단 3초만이 주어진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순간이다. 난 무턱대로 입을 연다.  129


인생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순간은 우리가 기억하는 순간들이다. - 장 르누아르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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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위험에 노출된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그런 상황에 저절로 면역이 되는 건 아니었다.  57


그들을 만나게 한 우연..

샘은 평상시 퇴근할 때 절대로 타임스퀘어 쪽으로 가지 않았다. 줄리에트 역시 갑자기 외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상황이 맞물리며 결국 그들은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타임스퀘어 쪽으로 가게 만든 순간적인 변덕에 감사하면서 인생이란 정말로 신비롭고 오묘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우연이 아니었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런 상황을 감쪽같이 연출해낼 수 있단 말인가? 일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존재를 뒤흔드는 건 바로 작은 모래 알갱이일지도 모른다.  98


무엇 때문에 우리는 삶에 집착할까? 무엇 때문에 우리는 행운을 바라는 걸까? 수없이 벌어지는 일들 속에서 우리의 자유의지는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걸까? 삶의 게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일까?  226


사람들은 왜 겉모습이 아름다우면 마음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왜 모두가 젊고 날씬해지고 싶어 안달하는 시대에 살고 있을까? 어느 시기가 지나면 모두 부질없이 사라지고 말 가치인데도.  227


인생에서 내가 배운것, 

그걸 몇 마디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네.

누군가가 날 사랑해주는 날, 그 날은 날씨가 아주 좋아!

나는 미보다 더 멋진 표현을 모른다네. 날씨가 정말 좋아! - 장 가뱅이 부른 노래 <난 이제 알아> 중에서  239



우리의 역사는 바로 그 1초에서 비롯되었죠.  243


내가 이 삶을 축복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있기 때문이다. - 크리스티앙 보뱅  282



마약 앞에서는 누구나 똑같다. 처음에는 허세를 부리며 자존심을 내세우지만 결코 금단 증세를 이겨내지 못했다. 서서히 약에 중독되고 나면 하나같이 자존심과 수치심을 내팽개쳐버리고 요구하는 대로 따를 준비를 갖춘 채 그의 아파트 문을 두드리게 되어 있었다.  302


과연 인간의 삶은 하나의 합목적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삶이란 단지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불과한 것일까? 그리고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죽음이란 단지 또 다른 삶, 우리 모두가 가게 될 저 세계를 향한 통로를 열어주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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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한다. 그 대상을 가졌든, 못 가졌든 간에 영원히! - 앙드레 브르통 <미친 사랑>  65


"어째서 나를 떠났지?"

에단은 즉답을 회피했지만 사실은 그 자신도 그녀와 헤어지게 된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셀린을 가까이할수록 그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출처불명의 불안감이 그를 지배했다.  101


바이러스성 소통의 시대(제시의 자살사건이 뉴스 채널마다 방영..)  103


당연히 나는 당신을 아프게 하겠지.

당연히 당신도 나를 아프게할 테고 - 생텍쥐페리 <나탈리 펠레에게 보낸 편지>  200



사랑은 불법 침입자처럼 갑자기 찾아온다.  200


사랑이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바보들만이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  202


"네가 잊지 말아야 할 건, 산다는 건 곧 위험을 무릅쓰는 것과 같다는 사실이란다."

"위험을 무릅쓴다고요?"

...

"실패와 고통, 손실을 무릅쓰는 위험 말이다."

...

"행복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통을 경험해봐야 하는 거란다. 인간은 불행에 저항하는 노력을 통해 행복을 쟁취할 수 있으니까."  218


'사는 법을 배운다는 건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자유로워진다는 건 바로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234


'인간의 유일한 존엄성은 조건에 맞서 부단하게 반항하는 데 있다'고 한 알베르 카뮈의 말을 떠올렸다.  293


사람은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자기 자신이 가진 확고한 힘을 찾아낼 수 있어요.  312


알다시피 네가 인생에서 무엇을 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단다. 중요한 건 네 자신을 속이지 않는 거야.  358


우리가 처음이라고 부르는 것. 사실은 그것이 종종 끝인 경우가 많다. 끝이란 사실 출발하는 지점인 것이다. - T.S. 엘리엇  371



네 일부가 내 안으로 영원히 들어와 독처럼 나를 감염시켰다.  374



둘이 함께 걸으며 속도는 늦을지 몰라도 더 멀리 갈 수 있는 법이니까.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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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보았으리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인생을 어떻게 발꿀 것인지에 대해.

인생을 다시 쓸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실수를 바로잡고 싶어질까?

우리 인생에서 어떤 고통을, 어떤 회한을, 어떤 후회를 지워버리고 싶을까?

진정 무엇으로 우리 존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되기 위함인가?

어디로 가기 위함인가?

그리고 누구와 동행하기 위함인가?



"자네는 알고 싶지 않은거야, 그렇지 않은가?"

"뭘 알고 싶지 않다는 거죠?"

"진실"  66


"매력적인 여자라면 적어도 대화상대로 모자람이 없는 지식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지."

매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대화가 필요하면 자네한테 전화를 걸면 되잖아. 골치 아프게 노벨상 수상자하고 데이트할 이유는 없어."  88-89


"내 사랑은 그렇게 날아가 버릴 만큼 가볍지 않아."

"그래도 너무 믿지는 마. 사랑은 절대로 거저 얻어지지 않는 거니까."  150


우리는 누구나 인생의 부족한 짐을 채워줄 수 있는 단 하나뿐인 사람을 찾고 있다.

우리가 그를 찾지 못하면 그가 우리를 발견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방법밖에 없다. - 위기의 주부들  171



우리는 두 눈에 붕대를 감고 현재를 통과한다. 시간이 흘러, 붕대가 벗겨지고 과거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될 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비로소 살아온 날들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깨닫는다. - 밀란 쿤데라  185


"자네는 인생이 한탐이나 남은 것처럼 일리나를 대했지. 하지만 사랑은 그런 식으로 하는게 아니라네."  188


당신이 아무리 피하려고 애써도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당신이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 라마나 미하르쉬  194



어떤 경험으로 최악의 상황을 겪었다고 생각하기 일쑤지만 사실 최악은 미래형일 뿐이다.  198


사방이 막힌 수족관에 갇힌 채 화학약품을 처리한 물속에서 철퍼덕거리며 비타미노가 항생제를 달고 살아야 하는 고래의 삶은 관광객들이 무심코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이상적이지 않았다.  203


수족관 생활이 결국 고래의 머리를 돌게 만든 게 분명했다.  205


사람들은 이제 무엇을 알아가는 데 쓸 시간이 엇다. 그들은 가게에서 완성품을 산다. 하지만 친구를 파는 가게가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이제 친구가 없다. - 생텍쥐페리  218



마음이 차분할 때는 항상 그것을 무력화시켰다고 믿는다.

끝내 그것들을 없애버리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을 완전히 떼어버렸다고. 아주, 영원히.

하지만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우리의 악마들은 어둠 속 어딘가에서 항상 웅크리고 있다. 

우리가 경계를 늦추는 순간을 끈덕지게 엿보며, 

그러다 사랑이 떠나는 순간이 오면...  220-221


우리는 책만 읽어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시련을 통해서만 배운다. - 스와미 프라난파드  226



당신의 은신처는 당신 자신이다.

다른 곳은 없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당신 자신만 구원할 수 있을 뿐이다. - 싯다르타  235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는데, 운명은 오히려 그를 혹독하게 짓밟았다. 자유롭게 운명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 운명에 영향을 미칠 힘이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는 환상이엇는지 명백히 인정해야만 했다. 실제로 인간의 운명은 미리 프로그래밍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인생에서 아무리 싸워도 불가항력인 일들이 있는 것이다. 죽음의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미래란 점진적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미 나있는 길을 따라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과거, 현재, 미래는 숙명이라는 끔찍한 이름앞에 처절하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미 운명이 다 쓰여 있다면 그 펜은 대체 누가 쥐고 있을까? 어떤 절대적인 힘이, 신이? 그렇다면 절대자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 하는가?'  254-255


스무 살에, 우리는 세상의 중심에서 춤춘다.

서른 살에, 우리는 원 안을 떠돈다.

쉰 살에, 우리는 안쪽으로든 바깥쪽으로든 쳐다보지 않고

원 주위를 걸어 다닌다. 이후에는, 중요하지도 않다.

아이들과 노인들의 특권, 우리는 투명 인간이다. - 크리스티앙 보뱅  269



우리에게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하기 때문이다. - 세네카  298



당신 앞에 여러 갈래 길이 펼쳐지는데, 어떤 길을 선택할지 모를 때, 무턱대로 아무 길이나 택하지 마라.

차분히 앉아라. 그리고 기다려라.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꼼짝하지 마라. 입을 다물고 가슴의 소리를 들어라. 그러다가 가슴이 당신에게 말할 때, 그때 일어나 가슴이 이끄는 길로 가라. - 수잔나 타미로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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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딱 한 가지만 설명해줘. 그렇게 산다고 달라지는 게 뭐야?"  29


보이지 않는 부분을 상상하고, 외양의 뒷면을 보는 것..

그의 직업에서 핵심은 바로 그것이었다.  34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건 상처가 남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야.  91


그린우드에 사는 사람치고 부모나 친구, 배우자 중에 마약 딜러나 마약중독자가 없는 경우는 드물었다. 마약 거래를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은 폭력과 공포ㅡ 질병과 죽음이엇다. 심지어 경찰도 압수한 마약을 개인 용도로 사용하거나 되파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린우드에서 잘 나가는 마약 딜러라면 일주일에 대략 수천 달러를 벌어들였다. 마크과 커너의 동급생 중에도 갱단에 들어가거나 마약 거래를 위해 학교를 그만두는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두 사람 역시 남드로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라고 못할 건 없잖아."

마크가 말을 꺼냈다.

"뭘?"

커너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몰라서 물어? 우린 머리도 좋고 눈치도 빨라. 그린우드의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얘기야. 자고가 자기 밑에서 일하지 않겠냐고 묻더라. 그놈이 일주일에 얼마를 버는지 알아?"

커너가 벌컥 화를 냈다.

"난 마약에 손대고 싶지 않아."

"마약중독자가 되자는 게 아니라 딜러를 해보자는 거야. 잘만 하면 이 년 안에 학비 정도는 벌 수 있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야."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가 금주법 시대에 뭘 했는지 알아? 술을 불법적으로 수입하고 몰래 팔아 넘겨 엄청난 돈을 벌었어. 그 덕분에 아이들을 대통령으로 만든 거야. 그 덕분에 우리에게도 시민권이 생긴 거고."

"특수한 경우이고 옳지 않은 일이었어. 일반화시키는 건 문제가 있어."

이번에는 마크가 성을 냈다.

"그럼 여길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뭔지 말해봐. 우리가 무슨 재주로 돈을 벌어 대학게 진학할 수 있는지 말해보라니까. 한시바찌 이 동네를 빠져 나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마 십 년 뒤쯤 무덤 안에 누워있거나 감옥에 가있게 될 거야. 그건 내가 장담하지."

"물론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어. 하지만 손쉬운 해결책을 바라서는 안 돼. 만약 우리가..."

커너의 목소리가 쑥스러운지 가볍게 떨려나왔다.

"만약, 뭐?"

커너가 침을 꼴깍 삼키더니 친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맺었다. 

"만약 돈을 마련하기 위해 마약 딜러를 한다면 우린 모든 걸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아무리 절박해도 우리가 가진 이상과 가치만큼은 절대로 포기해선 안 돼."

마크는 주먹을 불끈 쥐고 돌아서 철책을 힘껏 때렸다. 잠시나마 마약을 팔아서라도 학비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럽고 원망스러웠기 때문이다.

커너가 자책하는 마크의 어깨에 손을 얹어놓았다.

"걱정할 것 없어. 마크. 두고 봐. 언젠가 반드시 기회가 올 테니까. 우린 틀림없이 여기서 벗어나게 될 거야. 내가 약속하지."

커너의 말에는 강한 확신이 실려 있었다.  171-173


우리는 마치 호두 같아서, 깨뜨려야 속을 볼 수 있다. - 칼릴 지브란  195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 다음에는 '이미 너무 늦었어'라고 말하다 보면 인생 최고의 시간이 다 지나간다 -구스타프 클로베르  215



"만약 우리 엄마 대신 죽은 사람이 아저씨 딸이라면 용서할 수 있겠어요?"

"솔직히 나도 자신하지는 못해."

마크가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다만 용서를 위해 노력하리라는 점은 자신할 수 있어."

마크가 아이스크림에 장식용으로 얹혀 있던 작은 종이우산을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는 라일라를 쳐다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게 용서이고, 가장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걸 알아."

마크가 차분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용서하라는 건 너 자신을 위해서야, 에비.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에비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이미 끝났어요. 저한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요. 가족도, 돈도, 미래도..."

"아니야, 앞으로 네 앞에는 창창한 삶이 남아있어. 결코 미래를 포기해서는 안 돼. 미래를 회피하기 위해 변명을 늘어놓지는 마."

"그놈은 살인자예요! 반드시 응징해야 해요."

에비가 목 메인 듯한 소리를 질렀다.

그때서야 마크는 처음부터 에비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내 말 잘 들어봐, 에비. 나 네가 그레이그 데이비스라는 사람 말고 정말로 벌주고 싶은 사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에비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네가 정말로 죽이고 싶은 사람은 바로 너 자신일거야. 그렇지 않니?"

"아니에요!"

에비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펑펑 쏟을 것 같은 눈으로 소리쳣다. 그녀가 미처 충격을 흡수할 틈도 주지 않고 마크의 공세가 이어졌다.

"넌 엄마의 말을 믿지 못했던 네 자신이 미웠어. 엄마가 숨진 것에 대해 얼마간의 책임이 너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 거지. 넌 무엇보다 그 사실을 견디기 어려웠을 거야."

"아니에요. 아저씨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시죠?"

입으로는 강하게 부정했지만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이미 진실에 대한 고백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진 마. 처음부터 네 잘못은 없었으니까. 아무것도."

마크는 에비를 합리적으로 설득하려고 애썼다.

에비의 목소리는 이제 흐느낌으로 변해 있었다.

"제가 왜 그랬을까요? 왜 엄마를 믿지 못했을까요?

"그건 네 잘못이 아니었어.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테니까."

마크가 소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엄마는 늘 저한테 거짓말만 햇어요. 하지만 그때는 거짓말이 아니었는데, 그때는."

"다 잘 될 테니까 이젠 잊어버려."

에비는 감정이 북받쳐 마크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껴 울었다. 마크가 가슴 깊이 감추어둔 응어리를 터뜨려버린 것이다.  244-246


"대단히 비극적인 사건을 겪었어요. 평소와 다른 점은 제가 바로 그 비극적인 사건의 주인공이었다는 겁니다. 막상 저에게 비극이 닥쳤을 때 평소 많은 사람들에게 해준 조언이 정작 제 자신의 고통을 치유하는 데는 그리 유용하지 않더군요."  249


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거든 어디서 오는지를 기억하라 - 아프리카 속담



"아마 살아오는 동안 아무도 너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도움을 준 적이 없었을 거야. 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감각해질 필요가 있었고, 불신이라는 방어벽을 높게 쌓아올려야 했겠지."

"그래, 네가 옳았어. 이 냉혹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한데 나를 가둔 채 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어."  281


눈을 감고 살면 정말 쉽다 - 존 레논



두려움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사람은 사랑, 믿음, 증오, 심지어 회의까지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없애버릴 수 있다. 하지만 삶에 집착하는 한 결코 두려움을 없앨 수는 없다 - 조셉 콘래드  284



행복해지려면 불행을 감수해야 한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어떻게든 불행을 피하기 위해 애써서는 안 된다. 그 보다는 어떻게, 누구로 인해 불행을 극복할 수 있을지 찾아봐야 한다 - 보리스 시룰리크  295



때로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대단치 않은 변화에 의해 좌우된다. 한 번의 만남, 한 번의 결정, 한 번의 기회, 한 가닥의 가느다란 선...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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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산다는 것은 

자국을 남기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흔적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다.  26



[사랑해야 길이다]

길은 마음으로 걸어줄 때 살아난다.

온몸으로 속삭일 때 살아난다.

진정 사랑으로 보즘을 때 행복하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지나가도 돌아보지 못했다면

걸었다 할 수 없다.

사랑해야 길이다.  32



[잊어버림]

나를 잊고, 

너를 잊고,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길.

오늘,

이런 길을 달리고 싶다.  42



[여행중독]

여행이 중독이듯 길도 중독이다.

빠지면 헤어날 수 없다.

여행은 나를 찾아가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지독하게 묻고 답하는

나에게로 떠나는 것이 여행이고 길이다.  54



[욕심 없는 길]

마키아벨리가 편지를 쓰고 싶은 이유는

미친 사랑도 아니고 그저 안개 때문이었다.

안개 때문에 젖어들었던 상념이고, 

그 상념의 불꽃과 향기를 보듬었을 뿐이다.

안개의 길은 전부가 아닌 조금만 보개 한다.

눈보다는 마음이 먼저 보게 하는 길이다.

조금씩 천천히 밟아가야 하는 욕심 없는 길이다.  87



둘이 걷는 길은 혼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외로움을 떨쳐낼 수 있고 혼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물리적인 난관들이 극복될 수 있는 길이다. .. 그러나 둘이 걷는 길은 장점과 강점만큼이나 단점도 많고 약점도 많다. 시간이 갈수록 의견 충돌은 피할 수 없고 여독이 쌓일수록 감정의 골은 심연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둘이 걷는 길은 문제와 난관을 전제로 하거나 이미 어느 쪽이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양보와 희생을 대전제로 하고 떠나는 길이다.  99



삶은 여행이다. 스쳐가는 여행이기에 한 번쯤 색다르게 살아보는 삶도 가능하다. 단 한 번뿐이었지만 정말 그때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추억할만큼.  101



[당신 때문에 빛난다]

당신의 눈이 되어 당신의 마음이 되어

당신의 자리를 따라 간다.

당신이 흐르는 대로 나도 따라 흐르고,

당신이 버리는 대로 나도 따라 버린다.

아직 남은 빛처럼 아직 남은 사랑에 행복하고 

아직 남은 온기처럼 아직 남은 시간에 고맙다.

행복은 내일 또다시 떠오른 태양 때문에 빛나고 

내일 또다시 찾아오는 당신 때문에 빛난다.  109



[그립다]

길을 떠나도 길이 그립고 

길을 잊어도 길이 그립다.

혼자 걸어도 길이 그립고

둘이 걸어도 길이 그립다.  119



[길은 이어진다]

생각은 생각으로 이어지고,

마음은 마음으로 이어지고,

고독은 고독으로 이어지고,

사람은 사람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길은 길로 이어진다.  120



[오래 사랑하려면]

오래 사랑하려면

오래 같이 있어야 한다.

오래 사랑하려면

오래 붙어 있어야 한다.

길은 단 한 번도 떨어져 있은 적이 없다.  123



[세상에서 가장..]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사랑을 얻는 일.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사랑을 지키는 일.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

사랑이 식는일(내가 보기에는 '사랑이 식기 직전')  133



[친구]

삶의 친구란

사이좋은 사람이 아니라

어디든 함께 떠날 수 있는 

거울 같은 사람이다.

만날 때마다 항상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먼 길까지 오래

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134



모든 인생도 여행도 공짜는 없다.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무언가를 버렸기에 떠날 수 있고, 무엇 하나를 감내하기에 떠날 수 있다. 인생이나 여행에서 누구나 길을 나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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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길은 내가 만들어야 한다


제자백가 시대의 종합적 텍스트가 세 권 있는데 <관자> <순자> <여씨춘추>라는 책이에요...

<여씨춘추>도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한 편, 한 편씩 논문을 써서 모은 거예요. 편집만 여불위가 한 거고요. <브리태니커>같은 완벽한 백과사전이죠. <순자>는 유학이 입장에서 정리한 제자백가 백과사전이고, <관자>는 관중의 입장에서 정리한 춘추전국시대의 백과사전이에요.  324


춘추전국시대를 이해하려면 <논어>니 <장자<니 이런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자> <순자> <여씨춘추>, 거기다 <한비자>까지 추가해서 네 권 정도를 먼저 읽어야 해요.  325


<순자>에는 성악설만 있는 게 아니에요. 성악설과 성선설의 대조를 만든 것은 후대의 유학자들이에요. 순자에게서 성악(性惡)이라 함은 자연성, 생물성이에요. 어린아이 같은 터프함. 성악에서 악(惡)이라는 말은 윤리적 합의르 띠는 게 아니라 거칠다는 뜻이에요. 도자기가 안 된 진흙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어야 한다. 즉 학습해야 한다는 거죠. 예법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거예요. 순자가 생각하는 악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거예요. 우린 거칠다는 거죠. 극기복례, 즉 우리의 성은 악 하지만 인위적 노력으로 선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에 비해 맹자는 많이 협소해요. 그래서 우리의 허영에 불과한데도 선이라는 말은 더럽게 좋아해요. 악하면서.(웃음) 나는 바꿀 데가 많다고 자각하는 것이 맞는데, 다 선하대요, 선하기는. 성선설과 성악설은 정치철학 테마예요. 성악설대로라면 우리 인간은 거칠잖아요. 진흙이 제 혼자 그릇이 되진 않는다고요. 선생이나 사회의 규범이 필요하죠. 그래서 정치권력을 정당화해요. 반면 성선설대로라면 인간은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스스로 수양할 수 있어요. 그래서 기득권 세력이 등장하면서 맹자를 복원시키는 거예요. 국가권력이 제후를 간섭하지 마라. 군주가 신하를 간섭하지 말라는 거죠.  328-329


<맹자>는 지식인 자율의 담론이에요. 군주권 중심이 아니라. 유학의 비극은 순자가 죽고 맹자가 뜬 데 있어요. 여기에는 주자(朱子)의 공이 크죠. <순자>를 빼버리고 <논어> <맹자> <대학> <중용>으로 사서를 묶어 '공맹(孔孟)'을 만들어버렸으니. 순자로서는 안타깝죠. 당시 최강이었는데. 그래서 사상가는 뒤에 가봐야 알아요. 뒤에 빛을 내주는 사람이 없으면 사상가는 죽어요.  330


춘추전국시대를 겪은 동양 담론들은 '지금 흥한다고 계속 흔하냐, 지금은 흥해서 사람이 많지만 곧 훅 갈 수도 있다. 그러니 마음을 얻어놔야 한다'고 논리를 전개하는 거예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만든 담론이죠. 애초에 전쟁에서부터 사유를 시작한 것이 동양 담론의 비극이에요.  354


노자의 이름이 노담(老聃)인데요. <장자> 내편에서 노담을 비판해요. 노담이 완성된 인간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다는 구절이 나와요. <장자> 맨 뒤에 <천하(天下)>편이 나오는데, 장자의 후학들이 제자백가 역사를 쓴 거예요. 그걸 보면 노자와 장자는 학풍이 달라요. 장자 후학들도 장자가 노자를 이었다고 보지 않아요. 장자는 국가주의에 반대한다니까요.  357


유가와 묵가 말고는 학파적 자의식이 없었어요. 나머지는 다 개별 사상가들이라고 보면 돼요. 후대에 도서관 분류했다너 사람, 한나라 때 사마천 같은 사람들이 그들을 학파로 묶어서 분류한 거죠.  358


<장자> 내편이 장자 본인이 쓴 쪽에 가깝고, 외편은 후학들이 썼다고 해요.  359


우리한테 시급한 과제는 자유로운 개인이에요... 

가끔 그런 경우도 많이 봐요. 민족주의가 가진 조폭성, 페미니즘이 가진 조폭성, 피해받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가진 조폭성. 용서될 수 있는 조폭성이지만 그 조폭성이 또 다른 공격성을 낳으니까 문제죠. 용서는 돼요. 이해는 되지만 더 약한 사람을 공격할 때는 큰 문제죠. 우리 민족주의가 제3세계 노동자들을 수탈하는 것 보세요. 엄청나다고요. 일본 놈들한테 그렇게 당해놓고서.  367




chapter 7 철학, 한국 사회를 보다


공동체 생활의 원리는 사랑이에요. 아껴주고 도와주는 거예요.  373


우리 사회에 치명적인 텍스트가 <고타 강령 비판>이에요. 저는 인문사회 쪽 사람들이 이걸 제대로 안 읽는 게 참 웃겨요. 왜 안 읽는 줄 아세요? 마르크스가 자기들 입장을 바로 공격하니까요. 좌우지간 분배 얘기하는 놈들은 다 개소리를 하는 거라는 내용이거든요. <고타 강령 비판>은 엥겔스가 'xx' 처릴르 많이 해요. 마르크스가 욕을 너무 많이 써서.(웃음) 엄청 흥분해서 썼거든요. 자본을 극복할 수 있는 '코뮤니즘'의 이념을 기껏 만들어놨더니 어정쩡하게 타협하는 수정주의자들이 자기 이름 팔면서 나오니까 화가 난 거죠.  376


인단 남의 일엔 간섭하면 안 돼요. 어떤 사람이 해를 당하거나 그럴 때에나 간섭할 수 있는 거예요. 나에게만 간섭 안 하면 되다느 게 아니에요. 타인에게 근본적인 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면 우리 이웃이 뭘 하든 건드리면 안 돼요. 반면 누가 나나 우리 이웃을 건드렸을 때는 개입해야 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선이 있어요. 그 선을 지킬 수 있는 여지, 우리 사회엔 그런 게 없는 것 같아요. 

최인훈이 <광장>에서 광장과 밀실 얘기를 하잖아요. 사람에겐 밀실도 있고 광장도 있어야 해요. 광장이 없으면 사람은 파괴되고, 밀실이 없어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면 분열돼서 죽어요. 신상 털기의 핵심은 너무 밀실로 들어간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까지 공적 영역이냐 아니냐, 광장의 일이냐 밀실의 일이냐 하는 균형 감각에 대한 문제거든요. 한 사람의 밀실까지 너무 육박해 들어가는 건 곧 그사람을 파괴하는 거라는 의식을 가져야 해요.  387


제3자들에 대한 애정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391


벤야민은 진보가 없다고 해요.. 피라미드는 파라오가 만든 게 아니라 노예들이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피라미드 안에 노예가 잠들어 있지는 않잖아요. 마찬가지로 타워팰리스를 만든 노동자도 거기서 잠자지 않고요. 거대한 건축물이 있는 곳에 억압이 있어요. 노예도, 노동자도 자기가 원하는 건물을 짓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문제는 이 양상이 좀 달라 보이게 하는 착시 효과가 있다는 거예요. 사실은 진보한 게 아닌데 진보한 것처럼 보이는 거죠. 이런 차이예요. 옛날에는 채찍으로 때려서 일을 시켰어요. 노예의 지상 목표는 도망가는 거예요. 그런데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자발적 노예로 만들어요. 사람들이 제 발로 와서 이을 하겠다고 해요. 자본이 없으면 못 살게끔 조건을 만든 거예요.  400


벤야민의 지적은 인문학 하는 사람뿐 아니라 모두가 명심해야 해요. 채찍으로 안 때린다고 좋아진 게 아니라고요. 더 비참해진 거예요. 옛날에는 탈출했잖아요. 노예들은 자살 안 해요. 탈출의 기회가 있잖아요. 그런데 자발적 복종은 자살과 한 끗 차이라고요.

자발적 복종은 이미 형식적으로는 자살과 마찬가지예요. 자기 부정의 형태죠. '자발'이라고 하면 자기가 주인이어야 하는데, 그 귀결이 '복종'이에요. 그게 자살이잖아요. 이 사회에 살면서 사람들이 조직 탓도 안하고 자본주의 탓도 안 해요. 자기가 버려졌다고 자살해요. 자기는 노예이고 싶은데 버려졌다고. 그래서 면접장에서 노예로 간택받잖아요. 제눈에는 그렇게 보이는데, 이런 얘기 하면 사람들이 싫어해요.(웃음) 

어느 정도 소유가 늘어났다고 해서 진보했다고 믿는 거죠.(지승호)

그렇게 착각한다고요. 사람들은 허영이 있어서 '자발'에만 방점을 찍고 우리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라고 해요. 하지만 귀결은 '복종'이거든요. 사람들에게 이걸 이해시키기가 힘들어요. 자기의 불행을 덮고 안 보려고 해요. 안타깝죠.  401-402


사회민주주의는 분배를 하겠다는 건데, 분배를 하려면 자기가 소유를 하고 있어야 하잖아요. 결국 소유 형식이 유지되는 거예요. 사회민주주의에서는 분배자와 피분배자의 위계가 생겨요. 분배하는 사람이 필요해지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마르크스를 들먹이지만 정작 마르크스는 좌우지간 소유 관계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분배 얘기하는 놈들은 다 사기끈들이라고 하거든요. 마르크스는 일체의 소유 관계를 없애자는 거예요. 마르크스가 원한 건 코뮤니즘,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 개인들의 자유로운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예요. 일체의 소유 형식을 없애자고 얘기했을 때는 국유까지도 포함한 거예요. 마르크스는 사회민주주의가 지배를 영속화하는 제도라고 봐요. 그러니까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말은 '내가 박근혜나 이명박보다 윤리적으로 분배를 잘한다'라는 거예요.  402


지금은 긴 안목으로 봐야 하는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406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느낌이 주는 강한 현재성이 있어야 해요. 현재를 잡아야 해요. 현재를 잡아야 인간을 잡아요. 미래를 염려하면 사랑하기 힘들어요. 내 아이 하나 사랑하기도 힘들어요. 미래를 염려해서 생명보험, 상조보험에 가입하는 것보다 지금 아이랑 낚시를 가는 게 나아요. 살아 있을 때 재밌게 살아야죠. 권력은 그걸 못 하게 만드는 거예요. 

결혼이 왜 문제냐면, 두 사람이 미래만 보는 거예요. 내 집 마련, 육아, 자녀 교육 등등. 둘아서 연애할 때는 그런 게 없잖아요. 미래를 걱정하게 되면 커플 관계는 붕괴되는 거예요. 사랑의 공식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인데, 결혼의 공식은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예요.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사람은 내일 가도 또 내일이 있고, 또 내일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사람은 오늘만 있고, 내일 가도 또 오늘만 있어요. 그러니까 매번 관계를 맺을 수 있어요. 극단적인 원리지만, 사랑의 원리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거예요. 결혼이나 소유, 경쟁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 체제에 포획된 사람들은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고 하죠.  408


<철학vs철학>에필로그에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고 한다. 그리하여 도더고가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라며 신채호 선생의 <낭객의 신년만필>을 인용하셨는데요.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의 대한민국 이런 식으로.(지승호)

애정 결핍이에요. 원리주의자는 애정 결핍에서 나오는 거예요.  411-412


"인문정신을 회족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스피노자와 동학의 가르침을 다시 음미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성찰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비록 실패의 가능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인문정신의 핵심이다"라고 하셨는데요.(지승호)

둘 다 기독교 비판이에요.

그 뿌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건가요?(지승호)

내재주의거든요. 스피노자는 범신론자인데, 범신론의 범(汎 넘칠 범)이 '모든'이란 뜻이에요. 모두가 신이라는 주의가 범신론인데, 그러면 나도 신이란 말이에요. 동학도 죽은 사람들한테 제사 지내지 말고 나를 향해서 제사를 지내자고 하잖아요. 향아설위(向我設位)라는 게 '나를 향해서 위패를 만들어라'라는 말이거든요. 동학 자체가 서학, 즉 기독교를 비판하려고 만든 것이기도 하고요.

제가 스피노자랑 동학을 얘기한 것은 조금만 힘들면 절하고, 자기가 해결해야 하는데 조금만 힘들면 엄마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하는 것을 하지말자는 거예요. 이게 미성숙이거든요. 미성숙을 극복하려면 엄마라는 존재, 신이라는 존재가 없어져야 하는 거고요. 그런 면에서 동학이랑 스피노자는 비슷해요.

동양은 내재주의 전통이 있어요. 기독교인들은 내가 예수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유학에서는 내가 성인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성인이 되는 것을 배우잔항요. 불교는 다 부처가 되자는 거고요. 그 전통이 있기 때문에 동양 사유 전통만 잘 짜깁기하면 동학 경전이 만들어지는 거죠. 동학은 독창적이라기보다 기독교에 대립해 내재주의 전통을 강화한 거예요. 동학, 동아시아의 학문이다. 우린 이걸로 갈테니 서학은 나가라. 이런 게 동학이에요. 이처럼 동학에는 나에 대한 주인의식이 있으니까 일제에 대항한 거예요. 동학농민전쟁이 그래서 일어난 거죠. 굽실거리는 정신이거나 어디 가대는 정신이었다면 그런 게 안 일어났을 거예요. 동학의 혁명성은 거기서 나오는 거죠.  416-417


"매춘부가 사랑을 통해서 맨춘부로서 수명을 다한다는 사실, 벤야민은 왜 이사실에 주목했을까요? 그것은 자본주의가 사랑을 아무리 자본의 논리로 포섭하려고 할지라도, 사랑은 자본의 한계를 돌파할 어떤 힘이 있음을 알아본 것입니다"라고도 쓰셨는데요.(지승호)

벤야민은 파리에서 축제 때 벌어지는 여학생들의 매매춘을 본거예요. 그리고 직업적인 매춘부들이 생겼을 때 매춘부가 사랑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본 거에요. 어떻게 되냐면, 돈을 안 받아요. '돈 주면 안돼'그러면서 울어요. 그러면 매춘을 못 하는 거죠. 그럴 때 매춘부로서 수명을 다한다는 거에요. 벤야민은 그런 것들의 흔적을 찾아요. 마르크스의 테마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거예요. 진정으로 좋은 사회는 사랑은 사랑으로만 바뀌고, 신뢰는 신뢰노만 바뀌고, 우정은 우정으로만 바뀌는 거예요. 그런데 자본주의가 들어오면 돈이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친구도 돈 좀 있으면 만나고 실직하면 안 만나요.

마르크스는 그게 인간관계를 왜곡시킨다고 얘기해요. <경제학-철학수고>에 나와요. 젊은 마르크스의 그 정신을 알아야 해요.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게, 신뢰하지 못하게, 우정을 나누지 못하게 하는 제도이기 때문이에요. 마르크스도 쉬워요.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 그거예요.(웃음) 자본이 어쩌고, 잉여가치가 어쩌고 하면서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것도 결국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인 거예요. 목적을 알아야 해요. 그걸 모르니까 혁명을 한 다음에도 관료주의 체제가 나오고 독재가 나오는 거예요. 자본은 없앴는데 공산당이 너무 강해서 사랑을 못 하게 해요.(웃음)  421-423


지금은 사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하기가 더 어려워진 상황이 된 것 같은데요.(지승호)

애들을 약하게 만들어서 그래요. 사랑하는 법을 어렸을 때부터 길러주지도 않았고요. 미숙하면 사랑 못해요. 그러면 자본에 포섭이 돼요. 자본을 이길 정도로 강해져야 해요. 인간이 더 중요하잖아요. 돈이 있어서 뭐해요? 그렇게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초등학생 때문버 남녀가 막 사랑해야 해요. 그래서 강해져야 돼요. 그런데 경쟁하잖아요. 게임만 하고, 그래서 약해지는 거예요. 애들이 사랑을 많이 해야 해요. 실연도 당하고, 그래야 강해지는 거예요.  424


사랑을 제대로 받아봐야 사랑할 줄도 알 텐데요.(지승호)

부모가 어린애라서 그래요. 우리 아이를 죽이는 것은 상태 안 좋은 미숙한 어머니와 정권과 자본의 결탁이라고 보면 돼요.(웃음) 카이스트 학생들도 부모나 교수는 무시하고 연애에 몰두하면 자살 안 할 수 있어요. 성적이 떨어졌어도 애인이 '난 오빠가 카이스트 다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요' 그러면 그거 하나만으로도 안 죽는 거예요.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어요. 개를 키워도 돼요.(웃음) 사랑하면 안 죽어요. 갈 데가 없을 때 죽는 거예요. 

애들이 사랑할 줄을 모르니까 성적이 떨어지면 여자도 자기를 싫어할 거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해요. 공부도 하고, 음악도 듣고, 산도 가고, 영화도 보고 그러면서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엄마가 성적으로만 사랑받게 만들어놓았으니 성적 떨어지니까 존재감이 없어지는 거에요. 저는 고등학교 2학년짜리들이 카이스트 들어가는 것도 반대에요. 애들을 경쟁시키고 전문화시켜 천재로 만들어서 죽여버려요. 기형적으로 자라게 하는 거라고요.  424-425


지금 우리 사회에는 진보가 없어요. 진보는 사랑이에요. 자기 기득권을 보는 게 아니에요.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까지 봐야 하는 거예요. 한 번 더 고민해야 해요. 이 법이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 고민을 담아내야 진보가 되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는 진보가 없는 거죠. 자기 기득권이 먼저면 진보가 아니라니까요.

자기 것만 챙기는 진보가 어디 있어요? 타인을 사랑하는 쪽으로 얼마만큼 나가느냐에 따라서 진보를 얘기할 수 있어요. 자기 이녀모가 자기 방법과 자기 생각 쪽으로 보수화되는 거예요.  431


억압된 것의 회귀가 정신 분석학의 테마잖아요.  434

정신분석학의 근본 테마는 사회나 가족이 억압적이지 않으면 히스테리 같은 게 안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프로이트의 제자인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는 가정의 억압은 국가의 억압이 축소된 형태라고 얘기해요. 부모가 사회적 가치로 아이를 교육시키니까요. 라이히는 러시아 혁명을 쫓아다녀요. 프로이트가 아끼는 제자 중에 우파적인 사람이 융(Carl Jung)인데, 저는 융을 싫어하거든요. 원형 무의식이라고 해서 우리가 이미 원형적으로 억압돼 있어서 총알이 장전된 상태라고 보는 사람인데요. 이건 완전히 성악설이죠. 사회의 억압 체제는 항상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거라고요. 라이히는 사회혁명이 일어나야 억압이 없어진다고 봐요. 독재자를 제거해야 하고, 자본주의가 문제 있다고 생각하니까 러시아혁명 같은 걸 막 쫓아다니는 거예요.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하리히의 책은 정신분석학의 진짜 중요한 책이에요. 그 책은 좀 많이 읽어봐야 해요.   435




chapter 8 자본주의에 맞서라


일단 철학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소유의 논리인데, 진리라는 것도 소유의 관념이에요. 내가 진리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죠.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것만 봐도 권력은 소유에서 오는 거예요. 아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권력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소유의 논리고, 학점이나 스펙이라는 것도 사실상 소유의 등기부등본이죠. 

행복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요. 하나는 소유하면 할수록 얻는 행복이에요. 다른 하나는 거꾸로 내 것이 줄어드는데도 느끼는 행복이고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돈을 준다든가 음식을 사준다든가, 아니면 밤새도록 병구완을 하면서 내가 가진 에너지를 주는 거죠. 이렇게 내가 소유한 것을 버림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요. 이것이 우리가 고민해봐야 할 공동체 원리거든요. 논리적으로 따져도 후자의 행복이 덧없지 않은 거예요.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서도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를 인용했잖아요. '사랑은 사랑으로만 바뀌어야 하고, 우정은 우정으로만 바뀌어야 한다' 그게 마르크스가 꿈꾸는 사회거든요. 그런데 거기 돈이 개입되면 관계가 왜곡되는 거예요. 가난한 친구는 뭔가 훔칠 것만 같아 개입되면 관계가 왜곡되는 거예요. 가난한 친구는 뭔가 훔칠 것만 같아 보이고, 부유한 친구는 신뢰와 우정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거죠. 마르크스가 젊었을 때 그런 세태를 본 거예요. 사랑은 사랑으로만 바뀌어야 하는데 중간에 돈이라는 것이 매개가 되는 거죠.

소유물이 아니라 타인을 사랑해야 공동체의 기초를 다질 수 있어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 중의 하나가 사랑의 흔적이에요. 그런 사랑의 흔적이 아주 사적인 연애로 응축해 있다는 것을 고민해봐야 해요. 옛날에는 사랑이 굉장히 넓었거든요. 내 가족이나 내 애인의 경계를 넘어갔다고요. <다중(Multitude)>이라는 책에서 네그리는 '왜 우정과 사랑이라는 것이 이렇게 협소하게 부르주아 남녀 관계 속에 국한됐을까?'라고 물어요. 네그리가 꿈꾸는 '다중'은 곧 사랑의 공동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가진 소유물을 더 아끼기 때문에 사랑을 못 해요. 집요한 이기주의죠. 그래서 공동체가 와해돼요. 사적 소유가 강화된 사회에서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는 어찌 보면 다 헛소리예요. 사적 소유가 있으면 공동체는 와해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은 자살률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면 아이가 자살하지 는 않아요. 우리는 노숙자도 많고, 하루에 마흔 명도 넘게 자살하잖아요. 우리 사회가 공동체가 아니라는 거죠. 공동체라는 관념은 있지만 그게 '상상의 공동체' 같은 거라서 실질적으로는 공동체가 아닌 거예요. 오늘의 자살자 43명에서는 빠졌지만 내일의 43명에는 들어갈 수도 있어요. 그렇다 보니 그 안에 안 들어가려고 더 소유를 해야 돼요. 이게 악순환인 거예요. 그래서 갈 데까지 계속 가보는 거예요. 갈 데까지 가보다가 뼈저리게 느껴야 알 수 있는 거죠. 아니, 역사를 보면 뼈저리게 느껴도 모르는 것 같아요. 공황이 일어나도 자본주의가 붕괴되지 않잖아요. 현실을 리얼하고 속직하게 느끼기에는 관념이 너무 비대해요. 각인된 소유의 관념으로 강하게 무장돼 있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소유의 논리는 공동체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거예요.  448-450


제가 농담 삼아 얘기하곤 하는데, 냉장고가 악의 축이에요. 냉장고가 없으면 자본주의 거의 붕괴될걸요? 옛날에는 원주민들이 고기를 잡으면 나눠줬어요. 안 먹고 가지고 있어봤자 어차피 썩으니까요. 대한민국 모든 가정의 냉장고에 있는 음식만으로도 단언컨대 아프리카 나라 열 개를 살려요.(웃음) 그런데 냉장고에 넣어놓고 썩힌다고요. 저장에 대한 욕구죠. 냉장고가 확장된 것이 은행 잔고예요. 썩지 않게 하는 것. 화폐는 안 썩잖아요. 안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거죠.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여러 체제와 전산 시스템이 우리의 소유를 저장해준다고요. 소유 형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자본주의 문명의 특징이죠. 우리에겐 소유욕이 있어요. 배고픈 데도 자기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비범한 거예요. 성숙한 거죠. 자본주의는 미성숙한 야만적 상태 내에 인간을 국한시키는 거예요. 자본주의는 따로 안 배워도 돼요. 그냥 적응이 돼요. 인류가 만든 체제 중에서 자본주의가 인간이 가진 동물적 본성, 사랑과 무관한 소우의 본성에 가장 근접한 체제예요. 어떻게 보면 인류에게 아주 치명적인 거죠.

소유라는 것은 사랑의 형식이 아니에요. 소유의 형식의 제일 반대편에 있는 것이 사랑의 형식이에요. 저 여자를 내가 갖겠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내가 저 여자한테 뭘 주겠다. 저 남자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것이 사랑이에요.  450-451


인류학 책을 왜 많이 봐야 하냐면,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 오래 살다 보니까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몰라요. '소유 형식이 문제야'라고 하면 '안 그런 게 어디 있어?'라고 반문해요. 그런데 인류학 책을 보면 지금 우리 문명의 흐름과는 다른 사회들을 발견할 수 있어요. 지금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소유 형식이 필연적이거나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거죠.  452


"우리는 순진무구함과 폭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숙명이다"라는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휴머니즘과 폭력>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셨잖아요.(지승호)

최소 폭력을 얘기하는 거죠. 우리는 유한자니까 뭔가를 먹어야 하고 뭔가를 해쳐야 하잖아요. 빵도 먹고 배추도 먹어야 하잖아요. 단지 어떻게 하면 그걸 최소화할 수 있으냐 하는 문제일 따름인 거죠. 그러니까 오만하지 말자는 거예요. 인간은 순진무구함을 선택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과대한 폭력을 선택하면 안 돼요. 최소한의 폭력, 이게 중요해요. 균형 감각이 중요한 거고요. 적정하게, 최소 폭력의 지혜가 필요한 거죠.  458-459


괴물과 싸우다 보면 괴물이 된다고,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폭력의 선을 잡기가 어렵잖아요.(지승호)

그게 니체가 한 말이잖아요. '괴물과 싸울 때 조심해라. 너도 괴물이 된다.'  459


요즘 흉악 범죄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매스컴은 근본적인 해결책에는 관심이 없고 선정적인 보도만 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지승호)

한 개인의 범죄로 구조의 문제를 덮어버리는 거죠. 아이를 경쟁시키고, 성을 상품화하고 소비하는 이런 문제들을 덮는 희생양 하나를 만든 것이거든요. 몸에 암이 있어서 겉으로 고름이 조금 나온 건데, 그걸 짜면서 더 가보자는 거죠.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에요. 한 명 또 죽이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편하니까. '우리 사회는 문제없다. 한 놈이 미친 거였어' 이렇게 보자는 거죠. '우리 구조는 깨끗해, 살 만해' 그러면서 또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런 문제가 일어나면 우리 사회를 까뒤집어봐야 하는데, 막상 구조적인 것을 드러내는 글을 쓰면 곧바로 십자포화를 맞아요. '그러면 연쇄살인범이 죄가 없다는 거냐?' 이렇게 나와요. 우리 사회는 그런 담론을 쓸 수 없는 만큼 남루하다고요. 제 말은 두 가지 차원을 같이 보자는 거예요. 일회적인 사건에서 누가 잘못했는지도 봐야 하지만, 그런 희생양을 낳는 구조도 함께 봐야죠.

그런데 이렇게 쓰면 여성 단체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여성 단체도 희생양을 찾으니까 '미친놈들이다' 이러면 편하죠. '미친놈들이 자꾸 여성을 성적으로 희롱한다'라고 하면 편한 거죠. 그러니 끝내 이 자본이란 체제와 맞짱을 못 뜨지. 그게 여성 단체의 보수성이에요.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남성 우월성을 알아야 한다고요. 여성이 상품화되는 건데.  462-463


"발달한 대중매체는 대중매체 속의 이미지들을 현실 세계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서 일종의 찾기 효과가 생긴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나 자연재난이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우리가 전쟁이나 재난을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만든 전쟁 영화나 재난 영화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는데요. 무인폭격기 이런 것이 현실을 게임같이 만들어버리는 거잖아요.(지승호)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가상현실, 전쟁 영화가 너무 리얼한 거예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진짜 실감 나잖아요. 그건 가상이고 과장된 건데, 그걸 현실로 받아들이고 현실의 전쟁을 보면 사람들이 피해를 못 느껴요. 굉장히 심각한 거죠.  463


하이퍼리얼리티, 과다한 현실성, 이게 언론 매체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힘이자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만드는 기제예요. 하이퍼리얼리티가 우리를 지배하면 사랑에도 문제가 생겨요. 왜 쟤랑 키스할 때는 그 영화에서 봤던 느낌이 안 나고 입 냄새만 나느냐는 거죠. 장미도 안 쏟아지고, 종소리도 안 들리고.(웃음)  465


무언가에 몰입하느라 서로를 못 보게 하는 것,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가 그걸 얘기하는 거죠...

드보르의 얘기는 무언가를 멍하니 쳐다보느라 서로를 보지 않는 것, 지도자를 보느라 서로를 보지 않는 것이 나쁘다는 거예요. 또 드보르가 중요한 얘기를 하는데, 자본의 구조와 정치의 구조와 권력의 구조가 같다는 거예요.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은 사람은 이 책이 자본주의 비판이라고 하는데, 사실 하이라이트는 러시아 공산주의 비판이에요. '프롤레타리아 당은 프롤레타리아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스펙터클일 뿐이다'라는 거예요. 

케네디(Jhon F. Kennedy)도 공격하죠. 미국에서 최초로 스펙터클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 케네디거든요. 정책은 허접했지만, 잘생기고 멋있는 대통령은 케네디가 처음이었죠. TV가 등장하면서 케네디가 이긴 거거든요. 상대편은 연설을 못 했지만 정책은 좋았어요.  468-469


<스펙타클의 사회>를 경제 비판, 자본주의 비판으로만 읽으면 협소해져요. 오히려 이 책의 매력은 프랑스 68혁명 때, 소련을 진리라고 생각했던 그때, 소련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한 최초의 책이었다는 데 있어요.

드보르는 영화감독이었어요. 자유로운 예술가, 아방가르드 예술가였죠. 나중에 권총으로 자살하는데, 자기가 스펙터클이 되어버려서 자기를 죽여버린 거예요. ..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어보면 뒤에 나오는 들뢰즈나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같은 사람들이 모두 드보르의 통찰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걸 알 수 있거든요. 실제로 68혁명 때는 중고등학생, 대학생들이 보드리야르도 들뢰즈도 데리다(Jacques Derrida)도 아니고 드보르와 그의 친구 바네겜(Raoul Vaneigem)의 글을 벽면에다 옮겨 썼다고요. 드보르는 공산당의 실체를 폭로한 거예요. 당이 지금 스펙터클, 구경거리로 전락했다고 사람들을 구경꾼으로 만들고 지배권은 자기들이 갖는다고.  471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책을 꼽는다면 현 시점에서는 <스펙타클의 사회>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책은 200개가 넘는 테제로 구성돼 있는데, 툭툭 던지는 식이라 독해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번역했던 분도 드보르를 감당 못 한거 같아요. 다행히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사이트에 불어 원본이나 영역본이 있으니까 그걸 참조해가며 보면 돼요.  472


자본주의와 정치를 붕괴시키는 것은 사실 쉬워요.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처럼 사람들 눈을 멀게 하면 돼요. 그러면 투표도 하기 힘들고, 서로 더듬으면서 살아야 해요. 프라다도 의미가 없고 TV도 못 봐요. 그러면 자본주의는 붕괴돼요. 알량한 시각 문화만 없으면 자본주의는 무너진다고요.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있을 때 눈 감고 있잖아요. 애인 품에 안겼을 때 눈 감고 있고, 키스할 때 눈 감고 있어요. 이런 것이 사실 소중한 세계예요. 촉각의 세계죠. 시각이 아닌 세계에 대한 갈망이 20세기 이후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문학 작품 속에 많이 나와요. 소설가들은 본능적으로 아는 거예요. 시각이 거리 둠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초콜릿 복근을 만든다든가 가슴 수술을 한다든가 지랄을 하지만, 그런 건 옆에 앉는 순간 아무 의미도 없어요. 안타까워요. 사람들이 시각에 집중하느라 다른 감각을 죽이고 있어요.  474


시각의 세계가 곧 자본의 세계이기도 한 거죠.

시각의 세계는 정치의 세계예요. 왜냐하면 보는 자는 우월하고 보이는 자는 열등하거든요.  475


모든 걸 한 방에 해결하는 것이 사랑의 방법이에요. 사랑의 방법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이냐가 모든 진보적인 사람들. 인문학자가 고민해야 할 문제인 거고요. 네그리가 얘기하는 '다중'이 기쁨의 연대인데, 스피노자저 ㄱ의미에서 대상을 가진 기쁨의 감정이 사랑이거든요. 그러니까 다중은 곧 사랑의 공동체예요.  476


자본주의는 우리를 콩가루처럼 쪼개려 해요. 단결해서 같이 쓰지 못하게 해요. 자본주의는 공동체를 싫어한다고요. 개성, 개성 하는데, 소비의 자유를 개성이라고 하는 것일 뿐이죠. 지금 광고에서 떠드는 개성이란 건 다양하게 고를 자유에 불과한 거예요. 사지선다형 식의 자유일 뿐이죠.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고르는 게 무슨 자유예요? 자본은 이렇게 인간을 파편화시키고, 개인과 개인을 덜어뜨려놓을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내면을 산산이 쪼개놓을 수 있어요.  478


이 시대에 필요한 인문정신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지승호)

자본주의에 대해서 많이 숙고해야 돼요. 자본주의를 우회하면 안 돼요. 그게 우리 삶에 고통과 고민을 안겨주는 근본적인 원인이니까요. 산 사태가 나는 것에 대한 직감 능력을 가져야 하는데, 우리는 도토리에 정신이 팔려서 산사태가 나는지도 모르잖아요. 체제가 너무 기만적이에요. 장밋빛 꿈을 계속 미래로 연결시키죠. 자꾸 저축하고 보험 들고 미래를 꿈꾸게 함으로써 현재의 세계를 영위하지 못하게 해요. 미래를 염려하게 하는 사회죠.

권력이든 뭐든 누가 잘해줄 때는 날 잡아먹으려고 그러는 거라는 걸.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걸 잘 알아야 해요. 국가는 수탈과 재분재 기관이에요. 세금은 자발적으로 내는 게 아니라 수탈하는 거지만, 수탈하고 나서 여러 가지 사업에 쓰잖아요. 재분배를 하는 것도 다시 수탈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국가기구의 핵심이에요. 사람들이 재분배를 은총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지도자 만나서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자기가 세금 낸 건 잊어버려요. 그런 것들에 대해 잘 모르니까, 깨알같이 도토리만 보고 있으니까 인문학자나 사회학자 같은 사람들이 지적을 해줘야 해요. '산사태가 일어납니다. 산이 무너질 것 같아요. 다람쥐 여러분.'(웃음)

우선 사람들이 위축되지 말고 당당해져야 해요. 인문학 저자들이나 시인처럼 당당함을 갖춘 사람들이 모일 때 구조의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누가 구조를 바꿔서 우리한테 준다는 것은 그 사람이 다른 식으로 바꿔서 줄 수도 있다는 거예요. 굉장히 위험한 거죠. 

현명한 군주는 좋아하고 나쁜 군주는 싫어하는데,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군주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거든요. 그런 이해에까지 이르러야 해요. 한비자도 국가권력 얘기하면서 이런 얘기를 한다고요. '거리의 필부라면 한 사람이라도 죽일 수가 있겠느냐? 군주의 자리에 있으니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런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가 없어야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좋은 군주, 성군에 빠지지 말고 군주라는 형식 자체의 위험성을 읽어야 해요. 노빠니 뭐니, 특정인을 지지하고 그 사람을 메시아로 추앙하는 분위기가 지속되면 민주주의는 요원해져요.

요새 티체 얘기를 많이 하는데,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런 얘길 하거든요. '너희가 알 수 있는 것, 알아야만 되는 것을 감당할 만한 용기가 너희에게 있는가?' 사실 제대로만 보면 구조적인 문제가 보이거든요. 그런데 구조적인 문제를 보면 엄두가 안 나는 거예요. 비겁하니까. 어떻게 못 할 것 같으니까. 그래서 시각을 협소하게 가지려 해요. 민주주의 덕목 중 하나가 자유인데 자유가 가능하려면 용기가 있어야만 해요. 자기 삶에 굉장히 당당해야 해요. 자본가한테 쫄아 있고 권력자한테 쫄아 있으니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거예요. 데모하지 말라고 하면 데모 안 하고, 진짜 데모크라시(Democracy)는 데모의 정치예요. 직접민주주의가 별건가요? 민주주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이에요. 그런데 지금의 정치는 과두정치예요. 민주주의가 아니에요. 다들 알 텐데도 그걸 안 보려고 해요. 협소한 시각으로만 봐요. 투표할 때만 보고. 그리고 정치인들이 표 달라고 구걸할 때만 보고는 '내가 주인인가 보다'하죠.

쫄지 말고 당당해져야 해요. 그래야 자기 상처라든가 비겁함, 남루함에도 직면할 수 있어요.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굽실거리다가 죽지 말고 고개 뻣뻣하게 들고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책에 사인해줄 때도 이렇게 써요. "항상 당당하세요!"  480-482


우리 인간이 잊지 말아야 할 기본 덕목은 나에게 애정을 준 사람에게 나도 애정을 워야 한다는 거예요. 반대로 나한테 칼을 찌른 사람은 20년이 지나도 공소시효가 없어야 해요... 약자가 어떻게 강자를 용서해요? 받아들이는 거거든요. 용서는 강자들만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강했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착한 척해요. 그러니까 매번 당하지, 사람들이 독해지면 독재도 함부로 못해요. 도갲했다가는 삼대가 힘들다. 애들이 복수한다. 이러면 감히 어떻게 독재를 하겠어요?...

그런데 너무들 착해. 양 떼들 같아요. 그래서 니체가 민주주의가 되면 사람들이 양 떼가 된다고 비판한 거예요. 그렇다고 영웅주의로 가자는게 아니라 개개인이 굉장히 강해야 한다.  482


미워해야 할 사람을 제대로 미워하지 못하면 사랑해야 할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요. 동전의 양면이거든요. 혼자 생각해서 다 용서하고 그러면 안 돼요. 자기는 의식적으로, 순간적으로 용서했다고 생각하는데 화병이 남아요. 그러면 사람이 위축되고 활력이 없어지고 피해 의식이 생겨요. 나중에 그런 상황이 되면 미리 피하고, 겁이 많아지고 소심해지고. 김어준의 표현을 빌리자면 '쪼는'게 되는 거죠.

용서는 '죽일 가치가 없다. 복수할 가치조차 없네' 이럴 때 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 화해하고 잘 지내자' 이런 건 아니고요.  483


자살의 종류도 다양해요. 대개 살아 있는 것이 힘들어서 죽느데, 그건 문제가 있어요. 자의식이 너무 강한 거예요.

자살은 스스로에 대한 폭력이에요. 왜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느냐면 내가 패배자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스스로 패배자인 나를 단죄하는 거예요. 자신에 대한 처형 행위죠. 내가 어떤 사람을 때리거나 죽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부정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패배자고 못난 모습이기 때문에 나를 제거하는 거예요. 

경쟁 사회에서는 경쟁을 내면화해요. 나 스스로가 이 경쟁에, 게임에 뛰어든 거예요. 그런데 내가 졌으니까 끝나 거예요. 누구 탓이 아닌 거죠. 이런 논리로 자살을 하는 거거든요. 애초에 경쟁 판에 안 뛰어들고 '왜 너희가 경쟁 판을 만들어?' 하는 사람은 안 죽어요. 경쟁 판에 뛰어든 아이들, 1등 하는 아이들이 죽는 거예요. 경쟁 판에 뛰어든 것을 긍정한 아이들이거든요. 그런데 뒤에서 10ㄷㅇ 하는 아이들은 꼴찌 했다고 안 죽어요. 그 아이들은 대개 경쟁을 안 받아들여요. 심지어 자기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했다는 등 오만 가지 핑계를 만들어놓죠.(웃음)

애초부터 가난했는데 자살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부자이거나 권력자였다가 몰락했을 경우 내가 진짜 패배자가 된 거예요. 그 경쟁의 게임을 받아들인 거고, 내가 1등 한 모습을 내 자의식으로 받아들인 거예요. '난 1등이야' 그런데 꼴찌가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더 이상 나는 존재하지 않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경쟁을 내면화한 사람들만 자살한다니까요. 자살하는 사람들을 분석해보면 나올 거예요. 아마도 좋은 대학 나왔을 거예요.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카이스트 아이들의 자살이 이해가 안 되는거죠. 잡초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경쟁을 안 받아들인다고요. 사회불만 세력들은 안 죽어요. 그런데 체제의 수혜자였던 아이들, 경쟁을 받아들였던 아이들이 많이 죽죠. 사실은 체제가 살인을 하는 거예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들뢰즈의 자살은 좀 다른 면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들뢰즈가 자살했다니까 생성의 철학자와 삶의 철학자가 자살했다고 의아해해요. 경험의 부재죠. 식물인간처럼 누워서 죽은 상태로 있는데 뭘 할 수 있겠어요? 그걸 이해 못 하는 거죠. 심지어 들뢰즈 연구자란 사람들도 그래요.  485-486


모든 인생론은 가짜예요.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느냐의 문제로 화두를 던지잖아요. 세계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화두가 아니라. 자기계발서의 핵심은 나만 바뀌면 된다는 거예요. 세계는 한 번도 안 바뀌어요. 인생론과 자기계발서를 믿는 사람들은 나중에 자살을 해요.  488


자기 계발은 자기를 서서히 죽여가는 거네요.(지승호)

서서히 죽이다가 자기계발에 실패하면 죽어요.(웃음) 그런 것들이 우리 사회의 특징인데 오래됐죠.  489




chapter 9 음악이 필요한 시간


항상 편집자들에게 강조하는 게 이런 거예요. 책이 많이 안 나가도 된다. 최소 10년 이상 나가는 책을 쓰는 게 중요한 거다.  494


인문학 책은 자기계발서나 스티브 잡스 책과는 달라요. 사람들이 읽었을 때 표면적이고 너무 쉬운 것. 그게 대중적 글이 아니에요. 

중요한 건 독자가 자기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게끔 글을 쓸 수 있느냐예요. 그게 인문학에서의 대중성이죠. 독자들과 우리 이웃이 어떤 심리 상태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요.  496


대중적 글쓰기를 하려면 동시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계속 업데이트해야 해요.  497


얻어걸려서 한두 마디 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유기적 연결이 되는지가 문제예요.  507


자기 스스로 당당하게 살고자 해서 생긴 고통의 폭이 큰 사람이 선생이에요.  513


인문학 하는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지승호)

요즘엔 사람들이 너무 조바심쳐요. 흥행하려고 하고. 그러지 말아야죠. 길게 가야지. 인문학은 농사짓는 것과 같아요. 천천히, 천천히 가야해요. 사람들이 안 듣는다고 폐강하면 안 된다고요. 한 명이었던 수강자가 두 명이 되도록 늘려 나가야죠. 상상마당 아카데미 처음 시작할 때에는 6, 7명이 강의를 들었어요. 다른 선생들은 사람 수 적어서 쪽팔리다고 초기에 다 그만뒀는데 저는 계속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친구들을 데려와서 나중에는 수강생을 제한했어요. 30명밖에 못 들어오니까. 그 당시에 수강생 수가 적다고 투덜거리던 사람들은 아직도 수강행 수가 적어요. 애정의 문제예요.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사람들이 강신주를 모르니 막 들이대는 거예요. 그 사람들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아주 많이 배웠어요. 무엇을 쓰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배운 거예요. 사람들이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알게 된 거죠. 전에도 얘기했지만, 제가 상상마당을 그만둔 건 제 얘기가 메아리 되어 돌어온다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사랑한다면 흉내 내선 안 되거든요. 자기 얘길 해줘야죠. 저는 다른 사람 경험을 느낄 준비와 연습이 되어 있는데, 그걸 잘 안 해줘요.  518


철학이든 음악이든 결국 자기 것을 만들어내야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 거네요.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존중받을 수 있다는 거고요.(지승호)

'나는 나다' 이것에서 뿜어져 나와야 해요.

그러면 인문학적 기초가 있어야 한다는 건데요.(지승호)

인문학적 기초에다 살아 있는 경험이 더해져야죠.  526


중요한 건 정신성이에요. 누군가를 진짜 사랑하면 방법을 찾아내죠. 방법을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에요. 방법 가지고 사랑하는 것을 우리는 바람둥이라고 하잖아요. 저 사람을 진짜 사랑하면 아껴주는 방법을 찾아요. 그래서 정신성이 중요한 거거든요. 흉내 낸다는 것과 표현하는 것은 다른 거니까요...

표현할 정신성이 있다면 기술적인 것, 기법은 다 찾아서 하게 돼 있어요. 기법부터 배운다고 해서 없던 정신성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나니까 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것들, 나의 시선, 이것을 얼마나 긍정하고 표현해낼 수 있는가는 사활을 건 문제예요.

이건 예술가나 저자뿐 아니라 각 개인도 마찬가지예요. 그럴 때 자기를 사랑하게 되고 건강해지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흉내 내면 자신을 부정하게 되잖아요.  527


겁 많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면 안 해본 것은 무서운 것이고, 무서운 것은 나쁘고 저주스러운 것이라고 여긴다는 거예요. 제가 "번지점프 무섭죠?" 하고 물어보면 무섭대요. 해봤냐고 물어보면 안 해봤대요. 갇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그냥 하라고, 하면 된다고, 번지점프를 연속으로 다섯 번 하라고, 다섯 번 했는데 무서우면 그때는 진짜로 무서운 거라고 얘기해줘요. 고소공포증이라는 건 다 뻥이거든요. 산에 올라가면 고소공포증이 있대요. 그냥 무섭다고 하면 되지, 고소공포증은 무슨 고소공포증이에요? 그냥 무서운 거예요. 나 무섭다. 비겁하다. 용기 없다. 그러면 되잖아요. 고소공포증 하면 뭔가 본질적인 게 있는 것 같잖아요.  528


초고 작업을 어떻게 하느냐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쭉 정리해두셨다가 집중적으로 쓰신다고 하셨는데요. 시놉시스 같은 것을 만들어두고 작업하시나요?(지승호)

큰 틀이 있죠. 제가 단행본을 열입곱 권 썼잖아요. 이제는 어떤 걸 강의해도 이게 책이 될지 안 될지를 알아요. 이건 분량이 어느 정도 나올지도 가늠이 되고요. 발악을 하고 중언부언해도 책이 안 나오는 것이 있고, 이건 양이 넘쳐서 세 권은 되겠다는 것도 있고. 그래서 강의안을 쓸때도 이건 일회성인지, 아니면 다른 강의와 연결이 되는 건지 그런 감이 있죠.

저는 강연과 집필을 분리하면 안 돼요. 강연과 집필이 같이 가야 되는 사람이에요. 강연 따로, 집필 따로 그렇게 분리 못 해요. 저는 한 가지 일을 하는 거예요. 겉으로 볼 때는 두 가지 일을 하는 것 같으니까 '언제 강연을 하고 언제 책을 쓰세요?'하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어떤 상황에서든 발언하거나 생각하는 것들을 전체 구조 속에서 연결지어야 해요. 그래야 나중에 그것들이 쌓여서 책이라든가 하나의 정리된 결과물로 나올 수 있어요. 그러니 막 던지지 말고, 뭔 하는지 알고 해야 돼요. 이 발언이 책의 어느 꼭지에 들어갈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서 해야죠. 만약 제게 그런 감각이 없었으면 그렇게 많이 강연 다니면서 책으로 먹고 살 수 없었을 거예요. 지금의 책이 좀 팔려서 강연을 안 해도 어껴서 살면 살 수 있거든요. 가끔 들어오는 인세로. 옛날에는 그게 힘들었죠. 그래서 제가 원하는 작업이 아니라, 예컨대 학술진흥재단 같은 데서 선정해서 국가가 돈 주는 일들, 그런 일들을 의무적으로 해야 했거든요.

벤야민이 그렇게 글을 쓰고 살았어요. 그래서 벤야민을 보면 동질감이 느껴져요. 글들이 짧고 어떤 글들은 왜 이걸 가지고 썼을까 싶기도 한데, 잡지에서 써달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죠. 하지만 거기에도 벤야민의 정신이 담겨 있어요. 벤야민은 그걸 쓸 때도 전체 구조 속에서 어떻게 엮일까를 고려하면서 썼거든요. 단행본 말고 벤야민이 여러 잡지에 기고한 것들을 모아 전집을 ㅁㄴ들어도 일관적이에요. 점묘와 같지만 전체적으로 벤야민다운 그림이 그려지는.

저도 그러고 있지 않나 싶어요. 단행본 뿐 아니라 잡지에 쓴 칼럼, 신문에 쓴 칼럼, 짧은 글들이 하나의 전체를 그려 나가는 거예요. 그런 활동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이걸 정리해서 하나의 작은 우주로 만들어야겠다 싶을 때 집필을 하는 거고요.

머릿속에 있는 것을 조합해서 끄집어내시는 거네요.(지승호)

처음에는 힘들어요. 자료를 모으는 데 집을 지어본 적이 없으니 재료가 모자라기도 하고 남기도 해요. 예컨대 목차를 구성해보니까 경제 문제만 너무 많아요. 그러면 책 균형이 안 맞잔하요. 그런 것처럼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모아야 될 것과나중에 책으로 묶일 것이 최적화되죠. 열일곱 권째 쓰니까 지금은 최적화가 된 거예요. 천재적이어서 그런 게 절대 아니고 열일곱 권의 시행착오가 있었던 거예요. 이제는 대충 길다가 보면 눈에 띄는 거죠. '이건 문으로 쓰면 되겠네'(웃음)

그런 감각은 누구한테 배우는 게 아니에요. 해봐야 해요. 이것저것 모아서 만들다가 너무 ㅁ낳이 모았다. 이건 모자라네. 그러면 돌아다녀야겠죠. 힘드맂만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해요. 적어도 단행본 세 권은 써봐야 그 감이 생겨요. 한 권 쓰고는 '나 안 돼' 이러지 말고 열심히 하면 한 권 정도는 다 쓸 수 있어요. 그러고는 그때 다 절망하죠. 잔뜩 지쳐서, 거기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돼요. 그래서 첫 책 내는 사람들을 항상 격려해줘요. 다섯 권 정도 내고 나면 여섯 번째 책에서는 좋아진다고. 구성도 좋아지고 책 자체가 아름다워진다고 마치 자신이 좋아하는 인문학 책이나 고전을 봤을 때 누껴지던 품격이 생겨요. 균형미도 잡히고.  540-542


실존적인 자기 자신의 세계가 있느냐, 무언가에 대해서 울리모가동요가 있느냐. 이게 중요해요. 저자에게서 그게 사라지면 그 저자는 끝나는 거예요. 시인이 시를 못 쓰는 이유는 그 울림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시 나부랭이는 쓸 수 있지만 이미 시가 아니죠. 감정을 담아서 표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날조하는 거죠. 영화를 보고 울면서 평론을 쓰면 글이 좋잖아요. 그보다 더 센것은 자기가 직접 사랑해보고 힘들어서 쓴 글이고...

울림이 없으면 글을 못 써요.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없고, 사람들이 잘 못됐는데도 안타깝지도 않고, 어떤 현상에 대한 분노도 없고, 노을을 봐도 아무 느낌이 없고.. 이렇게 일체의 감정이 고갈되면 글을 못 써요.  543


책 읽는 것은 다 우연이에요. 서점에서 대충 얻어걸려서 읽거나 누가 선물해줘서 읽거나, 그게 묘미죠. 결정돼 있지 않아요.  547


인생은 만나고 마주치며 지내는 시간이 반, 그리고 그것을 추억하는 시간이 반이에요. 그래서 만나고 마주치고 기쁘고 슬프고 하는 시간들이 나중에 그럴 기력도 없을 때 추억의 대상이 되고 힘이 돼요. 그래서 1년 이든 2년이든 사랑은 진하게 해야 하는 거예요. 나머지 시간 동안 그것만 기억할 수 있어도 살아갈 힘이 된다고요. 기생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젊었을 때 3년을 연애했대요. 그런데 기생은 결혼을 못 하잖아요. 그 후 50년이 넘도록 그 남자랑 사랑했던 추억을 가지고 산 거예요. 벚꽃이 열흘 반짝 피어도, 나머지 기간은 볼품없는 시커먼 나무로 있어도 그 기억 때문에 나머지 시간을 견디는 거잖아요. 겨우 열흘 남짓한 그 시간 때문에 벚나무라고 불리는 거예요.  549




chapter 10 인간을 위하여


"라캉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당신이 소망하는 것인가?' 지금 내가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과거 타자가 욕망했던 것, 혹은 금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불일치를 극복했을 때, 우리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사랑이 아니었으며, 혹은 우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사랑이었다는 때늦은 후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셨는데요. 진실로 내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지승호)

해야 할 까 말아야 할까 망설이게 되는 지점들이 있어요. 검열이 들어오는 거거든요. 그러면 해야 돼요. 기준은 그거예요. 그래야 검열을 넘어설 수 있어요. 일종의 모험이죠. 일종의 모험 같은 것들이 자기를 깨어나게 하는 거니까.  565


인간은 독립을 빨리 못해요. 기지도 못하고 이도 늦게 나니까. 부모 곁에서 부모 말을 들어야 하니까 부모의 문화가 전다로디는 거예요. 인간한테 역사와 문화가 가능한 것은 우리가 과거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인데, 과거에 의존한다는 건 곧 부모한테 의존한다는 얘기예요. 결과적으로 기존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하는 거예요. 어머니가 좋아하는 게 김치면 김치를 먹어야 하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이 1등이면 1등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 가치를 받아들이면 내가 욕망하는 거지만 사실은 어머니가 욕망하는 거죠. 내가 김치찌개를 먹고 싶어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가 김치찌개를 먹기를 원했던 어머니의 바람이 실현되는 거예요.

사람이 재미있는 게, 나를 사랑해줬으면 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자기의 욕망이 달라져요. 내가 좋아하는 남자 친구가 클래식을 좋아하면 클래식을 듣게 된다고요.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내가 안 맞춰주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클래식을 정말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세계에 다가가기 위해서 클래식 티켓도 선물해주고 같이 공연장도 가는 거예요. 그런데 공연장 가서 내가 아무것도 못 느끼면 꼬받 두 시간을 견뎌야 해요. 거기 가서 졸면 돈 내고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거든요. 그러니까 미리 브람스를 계속 들으면서 연습하고 공연장에 간다고요. 그러면 훨씬 좋으니까. 그러면서 클래식이 들리기 시작하는 거고, 그 남자랑 헤어지더라도 나는 브람스를 좋아할 수 있는거죠.

그런데 성숙해진 다음에 사랑할 때, 이성이든 존경하는 사람이든 내가 독립되어 있는 상태에서 사랑할 때는 달라요. 내 욕망을 내가 선택하는거니까.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선택한 거니까요. 스피노자가 얘기했듯이 사랑의 기준은 나한테 기쁨을 주는 것인데, 여기서 기쁨이란 그 사람을 만나서 내 삶의 의지가 확장되는 거예요. 가능성이 더욱 열리는 거예요. 저 인간을 만났더니 좁아져. 그러면 사랑 안 해요. 그 사람을 만나서 삶을 더 누릴 수 있다는 느낌, 확장된다는 느낌이 중요하거든요. 

라캉의 핵심 테마가 우리가 욕망하는 것의 타자성인데, 문제는 그 타자가 내가 선택한 타자냐, 아니면 부모처럼 내가 절대적으로 그 타자에게 던져져서 적응하는 것이냐 하는 거예요. 인생에 있어서 딱 한 번의 혁명이 필요한데, 그게 어른이 되는 거예요. 부모의 가치관을 철저하게 버리는 이 과정은 굉장히 힘들어요. 한번 어른이 되면 어른인 거예요. 자기 욕망을 갖추는 것이 어른이 되기 위한 기본이에요. 핵심은 내가 타자를 선택한다는 거죠. 생존하기 위해서라는 동물적 의미에서 어머니의 욕망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있어야 내 삶이 더 확장된다는 의미에서 적극적으로 타자의 욕망을 선택하는 거죠. 그럴 때 어른이 되는 거예요.

기존의 내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부모나 사회의 욕망을 극복하는 방법은 이런 거예요. 할까 말까 주저하게 되는 행동들이 있어요. 그렇다면 그건 하고 싶다는 거거든요. 그럴 때 해야 돼요.(웃음) 100%예요. 사실 그게 만만치가 않아요. 사실 조금만 잘못돼도 '하지 말걸'이렇게 돈다고요. 그래도 그걸 한 번 내질러보고 직접 겪어보는 거죠. 그게 나쁠 수도 있어요. 그때는 그걸 자기 탓으로 돌리면 되는 거예요. 대개 번지점프 싫어하고 고소공포증 얘기하는 친구들 보면 한 번도 번지점프를안 해본 애들이에요. 하지만 번지점프를 열 번은 해봐야 자기가 그것을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열 번을 했다가 번지점프에 환장하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면 나중에는 패러글라이딩도 하고 헬기에서 뛰어내리기도 한다고요.

예전에 위악(爲惡)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잇어요.(<위악이란 비범한 의지>, <채널 예스>)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억지로 해보라는 건데, 그건 제 얘기가 아니라 이상이 한 얘기예요. <날개>의 앞부분을 보면 이상이 위악의 의지를 가져보라고 해요. 19세기 문학이 도스토옙스키에 갇혔잖아요. 도스토옙스키를 벗어나려면 위악을 저지르는 우아함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貪食)하는 아이러니를 실철해"봐야 한다는 이상의 표현, 그게 핵심적인 거예요. 자기로 서겠다는 것, 도스토옙스키를 벗어나보겠다는 것, <날개>를 위악적으로 쓰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선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기존 가치관에 따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악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행해보는 거예요. 바로 그 악이라는 요소 속에 나에게 맞는 욕망이 있어요. 그런 애들 있잖아요. 무모하게 모험하고, 젊었을 때 도서관에 갇혀 있지 않고 막 들이대는, 일단 해보는 거예요. 해보고 결정하는 거죠. 해보고 나서 '이거 더럽게 나쁘다, 하지 말자'라고 판단하는 건 온전히 내 판단인 거예요. 하지만 하지 말라고 머릿속에서 검열해서 영원히 하지 않는 것은 내 판단이 아닌 거죠. 그걸 겪어내야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악 중에서 '이건 악이 아니라 선이구나'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의 고유성을 찾게 되고 어른이 되는 거거든요. 힘들어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고, 니체 얘기가 맞아요. '너희가 알 수 있는 것. 알아야만 되는 것을 감당할 용기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위악이 우리의 탈출구예요. 악이라고 금지하는 걸 행해보려는 우아함, 사람들이 진짜로 못 먹겠다고 하는 것을 몇 번 반복해서 먹어보는 거예요. 예를 들면 삼합. 전라도 음식이잖아요. 그거 처음 먹을 때 진짜 힘들었거든요. 선배가 먹기 진짜 힘들 거라고, 속이 터질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딱 열 점마 ㄴ먹어보래요. 그래서 꾸역꾸역 다 먹었는데도 싫더라고요. 그런데 일주일 정도 후에 다시 삼합을 먹었는데 그때는 입에서 그냥 굴러다녀요.(웃음) 전에는 몰랐던 거죠. 그런 혐오감 같은 것들을 한 번 넘어가 보는 것, 그게 위악이에요.

이상의 제스처를 좀 배워야 해요.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먹어보고, 무서운 번지점프지만 웃으면서 뛰어내려보고, 불쾌하고 싫은 건데 한 번 해보기도 하고. 위악으로 시도했던 것들이 다 좋아진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걸 자기화한다는 차원인 거예요. 반반이에요. '야, 이거 너무 좋다.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할 수도 있고요. '역시 어머니 말씀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는다더니' 이럴 수도 있어요. 그래도 어쨋거나 내가 검증해본 거잖아요.  566-569


여행 많이 다니고, 만힝 부딪치고, 우리가 봤을 때 '왜 저런 걸 하지'싶은 사람들이 가진 건강함이 있어요. 왜냐하면 그만큼 자기를 찾은 거니까요. 거기에서 오는 여유들이 느껴지죠...

내 삶은 하나인데 너무 많은 가치관이 혼재해 있으니까 복잡하다고요. 복잡한 사람은 행동을 못 해요. 단순해야죠. 어쩌면 행동이 빨리 나오는 편이 나아요. 생각은 항상 뒤에 가도록 해야 해요.  570


위대한 문인들 보면 기인이 많잖아요. 기이한 행동을 많이 하는데. 그게 다 발악이에요. 위악의 행동을 하니 기인으로 보이는 거예요. 겁 안 내고 위악적인 행동, 기괴한 행동을 해요. 문인이라고 하면 사라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니까 회사원이면 엄두도 못 낼 짓들을 하는 거죠. 세종대왕 동상에 올라가서 소변을 본다거나. 경찰에 잡혀가서는 자기가 세종보다 높다고 우기고 나중에 보니 시인이야. 그러면 풀어줘요.(웃음) 인문학은 고유명사라고 했잖아요. 나 자신을 찾으려는 사람들. 

발악을 하는 거예요. 악이라는 것들을 다 해보는 거고요. 자기를 찾으려는 모험이라고 할 수 있죠.

내가 판단했을 때 이건 해서는 안 돼, 이런 느낌이 드는 것들을 많이 해 봐야 해요. 누굴 사랑하면 안 될 것 같아, 이 판단 속에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악인 것 같다 싶으면 확 질러버리는 거예요.(웃음) 진짜 악일 수도 있어요. 그러면 나중에 처절하게 배우는 거죠. 그렇게 인격적인 동일성을 갖춰야 돼요.  571


맨 얼굴로 사는 게 가장 이상적인 사회예요. 그런데 우리는 권력자 앞에서 자기 감정을 토로하지 못하잖아요. 억압 사회예요. 감정을 토로하지 못하는 게 억압의 척도예요.

페르소나를 써야 할 때, 광대 얼굴을 해야 할 때와 내 감정을 토로해야 할 때가에 있는데, 이걸 구분할 수 있으면 그나마 건강하게 사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꿈꾸는 사회는 감정을 토로하는 사회예요. '에이, 저게 뭔데' 하고 대통령한테 지랄해도 사람들이 웃을 수 있는 것, 이게 건강한 사회거든요. 가면을 벗어야 하는데 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가면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커플들, 부부들 보면 알아요. 저 인간들은 둘 다 평생 무장하고 사는구나. 

중요한 것은 페르소나를 약자가 쓴다는 거예요. 가부장제 사회면 여자가 더 많이 써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쓰는 건데. 그런 게 너무 강해지면 보호가 아니라 페르소나에 갇혀버려요.

사랑의 위대함은 페르소나를 벗게 해요. 정직함을 요구하니까요. 그래서 사랑하면 벗게 돼요. 벗었다가 상처도 많이 받게 되죠.  574-575


인문, 사회 과학을 읽은 남자애들이 여자를 잘 유혹해요. 말로 잘 구워삶아요. 조심해야 돼요.  577


'사랑의 경험이 중요한 것은 사랑을 하면 감정에 정직해지기 때문이에요. 제가 아는 사람은 친해지고 사랑하면 진짜 냉정하게 얘기하는데요. 눈에 약간 무당기가 있어요. 친한 사람한테 그 눈빛이 나와요. 진짜 투사 하듯이 얘기를 하고, 눈으로 압박해 들어오면 정직할 수밖에 없어요. 매력적인 사람이죠. 저도 강한 사람이고 정직한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랑 눈에 부딪치면 정말 재밌어요. 대개는 농담 삼아 얘기하는데 가끔 삶에 대해 얘기할 때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제가 맨얼굴을 던지면 그 사람도 맨얼굴이 되고, 농담 따먹기를 하면 그렇게 해줘요. 편하죠. 거꾸로 되면 안 되죠. 내가 맨얼굴 하고 있는데 상대는 가면 쓰고 있고, 내가 가면 썼는데 상대는 맨얼굴 하고 있고, 그러면 안 되죠.

서로 맨얼굴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세밀한 얘기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좋은 거죠. 행복하고.  581-582


현실에 대한 집중도가 중요해요. 그런 사람만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집중할 테니까. 한곳에 신경을 써서 에너지를 너무 많이 낭비하면 다른 쪽에다 에너지를 못 쓰잖아요.  582


사랑은 내려놓는 거예요.  583


"무릇 동심(童心)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만약 동심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진실한 마음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린아이는 사람의 처음 모습이고, 동심은 사람의 처음 마음이다. 처음 마음이 어찌 없어질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렇지만 동심은 왜 갑자기 없어지는 것일까? 처음에는 견문(見聞)이 귀와 눈으로부터 들어와 우리 내면의 주인이 되면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자라나서는 도리(道理)가 견문으로부터 들어와 우리 내면의 주인이 되면서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이러기를 지속하다 보면, 도리와 견문이 나날이 많아지고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이 나날이 넓어진다. 이에 아름다운 명성이 좋은 줄 알고 명성을 드날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또 좋지 않은 평판이 추한 줄 알고 그것을 가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분서(焚書)>의 <동심설(童心說)>에 나오는 구절을 책에 인용하셨는데요. 도심이란 어떤 건가요?(지승호)

동심은 가면 벗은 얼굴이에요. 맨얼굴이에요.

동심을 간직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웃음) (지승호)

그게 아니라 저는 인문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파괴력이 있는지 보여주는 거예요. 저도 옛날에는 비겁했거든요. 진짜 비겁했어요.

"좋지 않은 평판이 추한 줄 알고 그것을 가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라고 했는데, 보통 사람들이 뭐 하나 발각되면 그걸 가리려고 또 거짓말을 하고, 그러다가 망가지잖아요.(지승호)

저 같은 경우는, 예컨대 누가 제가 모르는 시집을 가지고 와서 저한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봐요. 시에 대해서 책을 썼으니까 안다고 생각하고 얘기하는 거죠. 그러면 저는 '안 읽어봤는데요' 혹은 '몰라요. 저는 읽고 싶은 시만 읽어요. 그 시집은 재밌어요?' 이런 식으로 얘기해요. 처음에 바로바로 다 정리해요. 쓸데없이 가리려고 하면 안 돼요.

인문학자가 되면서 제가 배운 건 사람 만날 때 가급적이면 그렇게 정직하게 만나야 한다는 거예요. 인문학은 화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정직하려는 데 도움이 되는 거예요. 김수영도 사상보다 백배나 중요한 것이 정직함이라고 햇어요. 정직한 사람만이 뭐든지 배우니까. 정직하다는 것은 맨얼굴이고, 동심이고, 감정을 드러내는 거니까 그만큼 상처도 많이 받아요. 내 맨얼굴을 저 인간이 못 받아들이네. 이런 것도 빨리 알고요. 그러면 그 인간이랑 안 만나면 돼요. 계속 나보고 가면을 쓰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어요. 그런 인간들은 안 만나야죠.

가면을 벗어야 상대방을 알아요. 가면을 한 번만 벗으면 돼요. 세상이 홍해처럼 가라져요. 내 맨얼굴을 인정해주는 사람과 아닌 사람들. 그런데 가면을 써도 이 가면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나뉘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가면을 벗으면 가면 쓴 모습이나마 좋아해주던 사람마저 없어질 것 같다고 두려워해요. 그런데 안 그래요. 새롭게 재편되는 것일 따름이에요. 그러니까 맨얼굴을 인정하는 사람과 부정하는 사람으로 양분하는 편이 나아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게 살아야 해요. 가면을 썼을 때도 내 가면을 싫어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가면을 벗으면 내 가면을 싫어하던 사람이 나를 좋아해줄 수도 있다는 것은 모르고, 좋아했던 사라밍 없어지리라는 생각만 해요. 그래서 무서워하는 거예요. 패를 다 까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랑 있는 편이 낫죠. 그게 더 건강한 거니까.

가면의 역할은 일대일의 관계를 못 하게 하는 거예요. 가면은 대개 사회적 가치가 있는 거잖아요. 이런 얼굴을 해줘야 상대방이 좋아한다든가. 이렇게 흉내를 내줘야 상대방이 좋아한다든가 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고 연기니까 배역이 정해져 있고 시나리오가 정해져 있잖아요. 그러니까 가면은 일대일의 관계를 막는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가면을 쓰게 되면 일대일 관계가 안 되는 거예요. 가면이라는 존재 자체에 사회적 가치가 들어와 있는 거니까요. 돈 있는 척, 유식한 척, 허점이 없는 척, 지금까지 만난 남자만 해도 열 명인데도 '남자가 뭐예요?' 이러는 거.(웃음)

누구를 사랑하려거나 누구한테 사랑받으려면 가면을 벗어야 해요.  584-587


일단 제가 기본적으로 할 말이 많아요. 글을 쓴다는 것은 가지치기예요.  588


바라건대 정직하게, 더럽게 힘들었으면 좋겠어요. 힘든 게 사랑이라고요. 편한 것은 사랑이 아니고.  589


사랑에 대해 강의할 때 사람들이 물어요. '선생님은 행복해요?' 그럼 저는 이렇게 대답하죠. '불행에서 온 통찰이다. 그게 더 리얼하지 않냐? 행복하면 사랑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다. 행복을 성찰한다는 것은 행복에서 멀어져 있다는 거다. 김수영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자유를 깨달았듯이 우리는 그런 식으로 알게 되는 거다.'

보통 자기들이 압받당하면 비겁하게 '선생님은 행복해요?'라고 물어보거든요. 제가 화날 때는 이렇게 얘기해요. '그러면 내가 불행하다면 너희들은 내가 한 얘기를 안 지킬 거냐? 옳은 것은 옳은 거다. 선생이 못 했다고 해서 옳은 것이 그런 게 되지는 않는다. 철학이 필요한 것은 옳은 것은 옳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옳은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판단은 각자가 해라. 그런 얘기면 지키지 말고, 옳은 얘기라면 그렇게 살면 된다.' 그리고 '옳게 사는 것은 상당히 힘든 것'이라고 덧붙이죠.

그런데 옳은 것을 관철시키려고 살 때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아요. 

연어가 언제 제일 행복하냐면 더 이상 헤엄칠 힘이 없어서 마지막에 손을 놓을 때예요. '아, 이제는 버티지 않아도 된다' 제대로 산 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안식으로 여겨요. 제대로 못 산 인간들이 생명 연장을 꿈꾸죠. 왜냐하면 옳게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인문학은 사랑과 자유예요. 그래서 반체제적이고, 김수영이 얘기했던 것처럼 불온한 거죠.

자유로운 사람나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어요.  590-591




에필로그 -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다웠다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력의 상태를 말한다.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이란 지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지성을 사용할 결단력과 용기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미성숙에 머무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과감히 알려고 하라! 그대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 칸트  593


위대한 잡품을 남겼던 작가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다른 누구도 흉내내지 않고 자기만의 목소리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남겼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루라도 빨리 회복해야 할 인문정신입니다. 이렇게 인문정신을 회복하는 순간, 우리는 정치가나 자본가, 혹은 멘토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인문정신을 제대로 갖춘 사람은 우리에게 항상 물어봅니다. 스스로 주인으로 사유하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은 용기가 있는가? 당신은 주인으로서의 삶을 감당할 힘이 있는가?  595


강연 말미에 저는 항상 반복해서 이야기하곤 합니다. "여러분! 저를 선생이나 멘토로 기억하지 말고, 강신주라는 평범한 한 사람으로 기억해주세요.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하는 어떤 남자가 있었다고 기억해주세요." 저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을 저는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선생님과 학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강신주와 여러분 각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선생님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가라고 가르치지 않으니, 저는 선생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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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세상에 맨얼굴로 당당히 맞서기 위해(지승호)

'인문정신은 자신만의 제스처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강신주는 '지금까지 나온 인문학책들이 가진 전반적인 느낌이 그런 식으로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고 회피하는 것들이었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진정한 인문학의 길은 굉장히 아파요 사실은'이라고 강조한다.  8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다고 자책을 한다. 그래서 자신의 남은 생은 타인을 보듬는 데 쓰겠다고 다짐한다. 잘못을 갚아가며 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설픈 위로는 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에게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하라고 진심을 다해 외치고 있다.  9


부모가 자식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선생이 학생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기다려주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서럽기 때문에 기다림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기다림을 포기하면 행복도 함께 없어집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진한 슬픔이 배어 있다.  10



chapter 1 인문정신은 당당하다


상대방을 자기가 배웠던 담론 지평으로 자꾸 끌어당기면 안 되고, 그 사람과 대화와 소통이 가능하도록 경제학도 정치학도 윤리학도 담론 지평으로 깔 수 있어야 해요. 그런 사람을 철학자라고 하는데, 우리 시대에는 철학자가 별로 없어요.  24


<인문정신을 다시 생각하며>(<기획회의> 313호, 2012. 2. 5)라는 글에서 "인문정신은 자신만의 제스처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곤철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셨는데요. 지금의 인문정신의 핵심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자본주의라는 것이 왜 나쁘냐 하면 자본이란 힘으로 모든 사람을 다 똑같이 돌게 하거든요. 그러면 사람들이 자기 제스처로 못 살죠. 자기 스타일대로 살아가려면 싸우기도 해야 하고 고통도 많이 생길 텐데, 그걸 감당해야겠죠.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돌면 독재자가 안 생겨요. 민주주의라는 것은 제도의 문제 이전에 개개인이 어떻게 주인으로 서느냐의 문제예요. 나 스스로가 주인이 안 되면 노예가 되어 주인을 찾게 된다고요. 그래서 제가 '멘토'를 비판하는 거예요. 좌우지간 스스로 돌아야 해요.(지승호)  27


언어의 궁극적인 목적은 항상 침묵이고, 침묵은 실천이거든요.  28


인문정신이라는 것은 고유명사예요. 사람마다 자기 이름에 걸맞은 스스로의 스타일이 있다는 거죠.  28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당당한 애정, 하나밖에 없다는 소중함을 가지면 자본이든 권력이든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아요. 자긍심이 있어야 해요. 누가 나를 죽인다 해도 '땡큐'인 거죠. '내가 무서운가 보다. 내가 당당하게 사는데 내가 죽는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야'이런 정신이죠.

석가모니가 죽어가면서 부처는 각자 얼굴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니까 자기 스스로 서라고 했는데요. 이 말은 곧 개개인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란 거예요.  29


니체도 "너희들이 차라투스트라를 따르지 않고 너희들 힘으로 섰을 때 차라투스트라는 너희에게 돌아가리라"이렇게 말하잖아요.  30


인문정신을 갖는다고 해서 행복하고 그런게 아니에요. 당당한 거예요. 진짜 인문정신을 가져야 누굴 미워하고 사랑할 수도 있다고요. 눈치 보면서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인문학, 철학의 특징은 주어가 '나'나 '너' 까지라는 거예요. '우리'라고 쓰면 사회과학이 돼요. 정치적 담론이 되고 '우리'와 '나'는 달라요.  33


"아파도 당당하다"라는 카피가 그래서 나온 거예요. 대충 관념적으로 장난치지 말고 맞서라고, 그래야 문제의 핵심에 이르게 돼요.  34


삶이 그렇게 아프고 힘든 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고 자꾸 연어처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에요. 

자신이 가려는 방향으로 관철해가려고 해야 해요.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려면 더럽게 힘들죠. 사회에서 가만히 있겠어요? 그런 사회적 저항에 부딪힐 때 항상 고맙게 여기고 '내가 살아 있나 보다' 이렇게 생각해야죠.  35


들뢰즈는 책을 읽었을 때 감응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거라고 했어요. 두 가지 독서법이 있는데, 하나는 정보를 입수할 때처럼 서류 상자에서 뭘 빼내듯 독서하는 거예요. 논문 쓰려고 어쩔 수 없이 읽는 식이죠. 다른 하나는 감응의 독서법이에요. 감응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하다. 감응 안 하면 던져버려라. 이런 거죠. 내가 지금 좋아하는 것이 중요해요. 내가 지금 안 읽는 책도 내가 성숙해지면 읽을 수 있거든요.

책 읽기는 실천 행위거든요.  40


인문학적 독서법은 감응의 독서법이에요. 내가 감응하는지 안 하는지가 중요한 거에요.

여러분은 왜 독서 토론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대개가 자기가 읽었던 내용의 요지를 합의 보러 온대요.(웃음) 그게 아니죠.  41


토론하는 사람들은 서로 사랑해야 해요. 책이라는 계기로 저 사람을 알아가겠다고 해야 하는데 서로 지적인 경쟁이나 하려고 하니까  딱하죠.  42


자기 소리를 체계적으로 만든게 자기 철학이에요.

자기 스스로 자기 스타일로 생각하고, 자기 것을 만들어야 해요.  43


신자유주의가 무서운 게 자본이란 논리로 획일화시키잖아요.  44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잖아요. '한 사람이 죽을 때 하나의 세계가 없어지는 거다. 한 사람이 탄생할 때 하나의 세계가 탄생한다.' 그게 인문정신이라고요. 상대주의를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 입각점을 얘기하는 거죠.

<철학vs철학>이 왜 야심작이냐면, 묶어놓은 철학자 둘 중 하나는 권력적이고 다른 하나는 인문적이에요.

모두가 똑같이 보면 그게 무슨 사회에요? 하나의 기계고 전체주의죠.  47


<철학vs철학>의 에필로그에 단채 신채로 얘기 썼잖아요. '조선에 불교가 들어오면 조선의 불교가 되어야 하는데 왜 불교의 조선이 되느냐.'  48


재미있는 책은 무조건 읽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쌓인 건데 20여 년 쌓인 다음에 쓴 책이 <철학vs철학>이에요.  49


철학은 쉬워요. 수학 같다고 하잖아요. 몇몇 규칙과 공식만 정확하게 이해하면 편해요. 처음에 벽이 좀 높아서 그렇지 한 단계만 넘으면 참 편해요. 판단력도 빨라지고. 그런데 시는 안 그렇잖아요. 시는 컨디션이 좋으면 읽히고 나쁘면 안 읽히고 그렇거든요. 음악도 그래요. 기분이 괜찮고 바쁜 일도 없으면 브람스가 잘 들리는데, 어떤 날은 소음으로 들려요. 철학은 안 그래요. 초기에 기초적인 학습을 중시해요 하면 돼요.

철학사 공부하고 철학 개념어 익힌 다음에는 철학자 한 명을 완전히 익숙해지도록 파야 해요.  53


인문학 고전을 읽는다는 건 나의 삶이 어떤 철학자나 인문학자에 육박해 들어가는 건데, 내가 시를 못 읽어내고 영화를 제대로 못 보고 철학 책을 제대로 못 읽는다는 건 그만큼 내 삶이 심화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책을 못 읽는 것은 비겁하게 자신의 삶을 심화하지 않고 검열하며 조심조심 살아서 그래요.  55


<철학vs철학>은 앞의 것은 나쁜 철학, 뒤의 것이 좋은 철학이에요. 저는 객관주의를 표방하지 않아요. 철저하게 주관적이에요.  58


이 시대에 철학이라는 학문의 의미는 무엇일까요?(지승호)

분업화에 저항하고, 전문화에 저항하는 것. 철학이 원래 그래요.

철학자는 힘들어요. 닥치는 대로 다 봐야 해요. 과학책도 보고, 음악도 듣고 다 해야 해요.

요즘 말하는 '통섭'이라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지승호)

통섭은 창의적인 것으로 대충 돈 좀 벌어보겠다는 거예요. 자기편과 유사한 것만 끌어당기는 진영 논리가 될 수도 있고요. 

주로 자연과학 ㅉ고에서 자기와 유사한 인문학을 모으는 식인데, 도킨스 라든가 통섭 얘기하는 사람들 보면 자리랑 맞는 것만 골라서 통섭하고 마르크스주의 같은 것과는 통섭을 안 해요. 비겁한 거죠. 실제로는 이것이 더 위험할 수 있어요.... 통섭은 수정주의 라고 보면 돼요.  61-62


단순한 공식인데 경쟁, 분리가 인간 사회에 일어나면 체제가 이기는 거고 반(反)경쟁, 사랑, 공존 쪽으로 가면 체제가 붕괴돼요. 이건 그냥 공식이에요.(웃음) 서로 사랑하지 않게 하고, 서로 경쟁하게 하는 것이 체제고요. 우리가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것은 사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데서 나오는 거죠. 체제를 극복한다고 해서 신뢰가 찾아오지는 않아요. 이미 불신하고 있잖아요. 우리가 사랑하면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어요. 이것은 하나의 인문학적 공식이에요. 우리의 사랑을 막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 비판적 지식인이 돼요.  63


공동체의 와해는 누구를 죽인다는 거거든요. 

경쟁은 공동체 교육을 와해시키는 건데요. 그런 것을 대오 각성해야죠.

인문학자는 텍스트를 두 개 읽어야 해요. 고전 텍스트와 '현재'라는 텍스트, 현재라는 텍스트를 읽어야 그 빛으로 고전이 보이고, 고전 텍스트를 읽어야 현재가 보이거든요.  69


제 글이 쉬워지고 편해진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대중성의 차원이 아니라 사람들과 얘기를 굉장히 많이 해서 어떻게 써야 사람들이 편하게 읽는지를 알아요. 지금 사람들 문제의 보편적이 구조도 알고요. 그러니까 글이 편하죠.

중요한 건 핵심이에요. 핵심을 찌르고 진짜 그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에 들어가는 것이 대중성이고 애정이죠.  71


음악이든 영화든 무용이든 한 인간이 자기를 표현했다면 그 사람은 왜 이렇게 표현했는지 그 느낌 속에서 그 사람의 정신성에까지 육박해 들어가는 연습을 많이 해요. 철학자니까 철학을 가지고 음악을 듣는다. 이런건 아니에요. 영화 볼 때 평론할 것을 먼저 생각하면 어떡해요? 일단 느껴야죠. 영화를 보고 감동했다면 어디가 좋았는지, 그게 왜 좋았는지를 살펴보고 그걸 알아듣기 좋게 잘 풀어서 설명해주는 것이 평론이잖아요.  73


해석하지 말고 먼저 이해하려고 해야 해요.  74


표절은 정말 창피한 거예요. 모름지기 인문학자라든가 사상가라면 다른 사람이 쓸 수 없는 것을 써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썼던 것을 쓰지 말아야죠. 그리고 다른 사람과 비슷한 것을 썼을 때는 쪽팔려 해야죠. 예컨대 김수영에 대해서 쓴다면 저는 김수영에 관한 책을 다 봐요. 그중에 저랑 비슷한 시각이 있으면 안 써요. 뭐하러 써요? 다른 것을 써야죠. 어떤 책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할 때에는 그 책을 딱 한 번만 보고 써요. 그다음에는 안 봐요. 그 책을 흉내 낼 수 있거든요. 책을 탈고하고 나서야 그 책을 다시 봐요. 혹여 영향을 받았나, 내가 그 책에서 얼마만큼 벗어났나. 나는 그 작가에게 얼마만큼 육박했나. 이런 걸 확인하기 위해서요. 이 과정을 마치고 나면 그제야 출판사에 전화하는 거죠. 강신주의 책인데 강신주다워야죠. 모름지기 인문학자라면 그래야 해요. 그런 식으로 벽에 부딪혀 고통도 직접 느껴보면서 리얼리티를 얻어야 해요.  75


남들 모르는 세련된 담론만 떠들어서 팔아먹으려는 게 아니라 전부 제가 소화시켜서 한 얘기예요. 글은 두 종류가 있는데요. 먹다가 게워낸 글이 있고 따끈따끈한 똥처럼 나온 글이 있어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글이 게워낸 글이에요. 제가 고생해서 글을 써보니까 지금은 그게 딱 보여요.  77


'우리'로 들어가면 이미 사회과학으로 들어간 거예요. 인문학이 아니에요. 인문학은 '나'예요. 각자 각자의 나, 그리고 각자 각자의 '나'들이 공명하는 것이고요. 그래서 인문학의 궁극적인 그림이 민주주의죠. 절대적인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내 생각은 있어요. 절대적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이 100% 같지는 않지만, 디테일은 다르지만, 공명할 수 있다는 보편성, 그것이 인문학의 가능성이고 민주주의의 기초죠.  81




chapter 2 사랑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사람은 혼자 잘 놀아야 해요. 혼자 잘 노는 사람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어요. 사랑 찾어서 안달복달하는 사람은 어린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은 안 돼요. 나중에 자기가 지쳐버려요. 혼자 있는 사람들,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어요. 오버하고 징징거리며넛 '우리 만나, 만나'하는 애들도 얼마 못 가요. 사람이 바위 같고 산 같고 그래야죠. 애정 결핍은 다 있어요. 그걸 응시해야 해요. 자꾸 채우려고 하면 안 돼요.  87


사랑에는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요. 예전에는 연애할 때 핸드폰도 없고 삐삐도 없으니까 다섯 시간 기다리는 것도 가능했는데 요즘은 한 시간 기다리는 사람도 많이 않은 것 같아요.(지승호)

기다리는 법을 잘 몰라요. 언제든 버튼만 누르면 바로 되는 것처럼 생각해요. 그런 게 병폐죠. 그래서 기다리는 것에 노심초사할 때가 많잖아요. '왜 전화가 안 돼? 왜 전화기기 꺼져 있어?' 이 정도면 사랑이 아니에요. 기다린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동의어예요.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은 그 존재가 음식 같은 거라는 거예요. 배고파 죽겠는데 짜장면은 왜 안 와. 이런 거예요. 와서 먹고 나면 그다음에는 찾지도 않아요.  89


아이와 절절하게 대화를 해야 한다고요. "엄마는 이걸 원해", "전 싫어요" 이게 관계예요. 사랑의 관걔고 기다리는 관계인 거죠. "엄마는 이게 좋은 것 같아"라고 던져놓고 기다리는 거예요. 이건 굉장히 힘든 거라고요.  91


기본적으로 나쁘다는 것은 자신감이죠. 돈이 없는데도 그러면 뭔가가 있는 거예요. 어떤 자신감이.  93


행복의 높이가 어느 정도 되는 사람들은 그 이상이 되어야 결혼을 하는데요. 불행한 사람들은 조금만 잘해줘도 돼요. 콧물 날 때 손수건 하나만줘도 사랑한다며 바로 호텔에 갈 수 있어요. 거기서 행복을 느끼는 거죠. 그 문턱이 너무 낮은 거예요. 그런 여자들 보면 불행하죠.  95


글의 힘은 애정에 있어요. 관심받으려고 글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특히 젊은 친구들, 그래서 글 쓰겠다고 하면 "사랑받으려고 그러는 거야? 누굴 사랑해서 글을 써야지. 글이 제일 잘 나올 때가 연애편지를 쓸 때야. 그 사람을 사랑해서 절절하게 나를 표현하는 거지. 글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거야"라고 얘기해줘요. 철학 한다는 애들이 산이나 무인도에 가서 <순수이성비판>을 읽는다고 해요. 저는 지랄을 한다고 하죠. 모든 문제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고, 고독은 그 다음에 있는 건데 혼자 있을 때는 그냥 자라고 하죠. 음악을 듣든가.  102-103


안에 쓰레기가 많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흐려져요.  104


서로 배워야 해요. 배우려면 비워야 하고요...

세상은 이분법적이에요. 그걸 초월하는 순간 고상한 책이 나오고 보수적인 책이 나오는 거예요. 저는 죽을 때까지 이분법적이었으면 좋겠어요. 나쁜 놈은 나쁜 놈이라고 하고, 50, 60대에 썼는데 30대에 쓴 것처럼 읽히는, 날카로움을 가진, 칼이 무뎌지지 않은 인문학자가 돼야죠...

살아 있으면 싸워야 해요.

저는 '나이 든' 사람들을 싫어해요. 그군 원숙함이 아니에요. 지침의 표현이죠.  105


인문학자로서 꼭 해요 할 것이 종교 비판서를 쓰는 거예요. 

인간끼리 결정을 보자는 것이 인문정신인데, 비겁하게 수틀리면 신한테 가는 것은 권력이나 자본한테 가는 거랑 똑같아요...

인문학의 적은 자본이 아니에요. 제일 많이 팔리는 책이 종교책이에요...

네가 노력해서 바꿀 수 있고, 너의 남루함을 자각해야 하고, 자꾸 저승에 있는 천사를 볼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여기서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걸 인문학자가 이야기해야만 해요.  106


"라캉에 따르면 불행히도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과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은 일치하지 않는다. 전자가 페르소나(persona)라면, 후자는 맨얼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페르소나를 찢어버리고 맨얼굴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연기가 아니라 삶으로서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지승호)

인간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해요. 그런데 자본의 논리도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 종교의 논리도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거예요. 항상 오늘은 수단이에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사람은 내일돼도 또 오늘이잖아요. 그날 잘 살면 돼요. 우리에게 내일은 잇다는 사람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데, 내일이 되면 또 내일이에요. 신자유주의도 그걸 요구하는 거잖아요. '지금 빡세게 고생하면 나중에 편하다.' 그러다가 죽는 거예요. 이게 사람들을 지배하는 논리거든요.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와 기독교는 상당히 유사한 데가 있어요. 돈이 안식과 구원을 준다는 점에서도 그렇고요. 벤야민도 그랬어요. 자본주의를 종교성으로 다뤄야 한다고, 자본주의의 핵심은 종교성에 있다고, 사람들이 돈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믿는다고. 종교 비판은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 비판, 대표자를 추종하는 황당무계한 것에 대한 비판 등을 총괄하는 것이에요.

원리주의에서는 선과 나와의 관계만 중요하고 인간들이 안 보여요. 원리주의가 생기면 가족은 안 보이고 신한테 올인해요. 그리고 원리주의가 생기면 목사가 얘기한 대로 정치적 행동을 다 결정하고 이웃을 안 봐요. 그 모습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으로 나오는 거죠. 돈에 올인해서 가족을 돌보지 않는 부유한 아버지처럼 신에 올인해서 가족을 안 돌봐요. 가지들은 믿어요. 내가 신에게 구원을 청하니 가족들에게 은총이 있을 것이고, 내가 돈을 버니 가족들이 행복할 거라고, 중요한 것은 신에 올인하거나 돈에 올인하면 인간관계가 붕괴된다는 거예요. 사랑이 무너지는 거죠. 그래서 종교를 비판하는 거예요.

원리주의가 생기는 것을 진짜 조심해야 해요. 원리주의라는 것은 원리를 믿고 따르고, 그 원리를 장악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헤게모니를 독점하는 거잖아요.  108-110


기독교인들은 제가 '사랑해야 한다'고 하면 '아, 예수님의 말씀이야'이래요.(웃음) 그런데 제 말은 사랑을 하려면 신을 죽여야 한다는 거거든요.  111


'너는 그 남자를 사랑하는데 그걸 부정하고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라고 한다. 네 감정을 부정하는데 네가 네 삶의 주인이니? 네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그랬던니 얘가 전화하면서 울더라고요.  115


"초월자에 대한 지나친 몰입은 자신의 삶을 돌보지 못하도록 만든다"라고 하셨는데요. 그게 종교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사랑할 때도 상대방을 초월자처럼 받아들이게 되면 어렵잖아요. 동거를 해보라는 것도 동거가 그 환상을 깨는 과정일 수 있다는 것일 텐데요.(지승호)

사실은 환상을 깨라는 거죠. 환상이 깨지지 않으면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난 거고요. 서로한테 그런 사람인지 항상 응시를 해야 해요.  116


성적인 관계는 두 사람이 맺을 수 있는 수만 가지 관계 중 하나일 뿐인데 그걸 금기시하니까 그것에만 집중해요.  117


다른 것은 다 용서되는데, 성적인 것만 용서가 안돼요. 그래서 음란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진짜 무서운 것은 내 부인이 독서 모임에서 카프카를 읽고 다른 남자와 영혼이 통하는 거거든요. 그게 진짜 음란인데, 우리는 손만 안 잡으면 되는 거예요.(웃음)  118


제도를 생각한다는 것은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인데, 그러면 두 사람의 사랑에 금이 가기 시작해요.  119


결혼은 사회제도예요. 연애할 때는 오늘 맛있는 것 먹자. 영화 보자고 하는데, 결혼하면 아끼자고 하잖아요.  122


사랑은 '아까징끼' 같은 거예요... 만병통치약.  123


한 인간에게 단 한 번의 혁명이 있는데,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거예요. 정신적이든 정서적이든 경제적이든 완전히 독립했을 때 어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별로 없어요...

빛과 그림자가 다 보여야 되는 거예요. 나에게 각별한 아버지면 아직 독립을 못 한 거예요. 좋은 것만 보는 거겠죠. 어머니의 추한 모습, 다른 사람보다 못난 모습까지 보여야 해요. 그런 빛과 그림자가 보일 때 독립하는 거라고요. 어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안 해요. 그래서 부모가 죽는 것이 더 나빠요. 판타지를 자극해서 아버지를 날조한다고요.  125


결혼과 동거 중에서 결혼이 안정적으로 보이죠? 그게 남루한 거예요. 두 사람이 사랑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틀인데, 기존의 어떤 틀에 들어가야만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사랑은 두 사람이 감당하는 거예요. 감당 못 하면 끝나는 거죠. 사랑하려면 미래를, 영원을 꿈꾸지 말아햐 해요.

지금 내가 저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해주고 있나. 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게 나한테 행복이다. 이런 것에만 최선을 다해 집중하면 된다고요.  127


가진 사람만이 버릴 수 있으니까요. 못 가진 사람들은 채우려고 해요.  129


실천적인 단계를 보자면, 일단 생계의 위협을 없애야 해요. 생계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에게 인간적 행위를 요구하는 건 무리예요. 

우선 그 조건을 갖추고 나서 사랑하는 방법으로 쓸 수 있는 정신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해요...

옛날에는 농민 봉기가 있었잖아요. 농민 봉기는 6개월 안에 결판을 봐야 해요. 벼를 심어놓고 농민 봉기가 일어나면 수확할 때쯤 다 흩어지거든요. 동학농민운동이 붕괴된 것도 벼 수확기가 돼서 그래요. 혁명이 성공하려면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요. 지주나 호족이 '괜찮다, 썩더도 된다. 우리가 식량 준다'이러면 성공해요.순수한 농민전쟁은 힘들어요. 그리고 또 하나, 시골에는 농한기가 있어서 혁명이 가능해요. 도시에서는 혁명이 일어난 적이 없어요. 다들 직장 다니느라 바빠서, 쿠바혁명도 시골에서 시작했다고요. 러시아혁명도 그렇고 심지어 나치(Nazi)도 바이에른이라는 농촌에서부터 세를 키워갔잖아요.  131




chapter 3 철학적 시읽기와 김수영


우리는 해방이 안 됐거든요...우리가 이념 때문에 갈라진 게 아니라는 것을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몰라요. 이념 때문에 분단됐으면 차라리 멋이나 있죠. 우리는 외세 때문에 분단됐거든요. 남북에 들어온 외세에 이념이 있었고, 남북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이념에 맞춰 살았을 뿐이에요. 이념에는 경직성이 있거든요. '걔네들이 얘기했던 대로 이렇게 살아야 해'하는 제스처나 흉내 내니까 양쪽 다 경직돼 있기는 마찬가지죠. 김수영은 양쪽 체제가 가지고 있는 이념이라는 것이 덧없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135-136


정치철학자인 카를 슈미트(Schmitt)가 '정치의 본질은 적과 동지의 구별에 있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정치는 억압이라고 봐야 해요. 억압의 근본 문제는 적과 동지예요. 체제 내부에서 갈등이 벌어지고 헤게모니가 흔들릴 때 독재자나 권력은 외부와 전쟁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내부 단합을 모색해요. 제가 농담 삼아 하는 얘기가 있어요. 딸이 어머니를 부정하는 콩가루 집안이 있는데, 그 어머니가 가족을 단합시키려면 옆집 아줌마와 머리채 붙잡고 싸우면 돼요. 딸한테 '너 누구 편들래?'하고 던지는 거죠. 그러면 딸이 자기 어머니 편을 들고, 그렇게 대동단결해서 며칠 가요. 그러다가 옆집 아줌마랑 갈등이 없는 상태에서 보면 다시 어머니가 미워 보이는 거죠. 그러면 어머니가 또다시 옆집 아줌마랑 싸워요. 이게 우리 사회예요.  141


<연꽃>이라는 시와 <김일성만세>를 같이 읽어야 해요. 연꽃은 사회주의자를 비판하는 시거든요. 인간을 못 보고, 인간의 자유를 못 본다고 이념이 강조돼도 인간의 자유는 억압되는 거예요. 자본이 강조돼도 인간의 자유는 억압되는 거고요. 인간을 제외한 일체의 외적이고 초월적인 힘, 권능, 다른 근본, 근거를 제기하면 억압이 오는 거예요.  142


어쨌든 김수영은 동베를린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부산에서 문인들을 상대로 강연할 때 '정치적 자유가 없는 곳에서 그나마 예술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 마라. 표현의 자유가 없는 곳은 예술의 자유가 없는 곳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해요.  148


지성인들은 좋은 사람 콤플렉스를 버려야 해요. 자기 얘기를 뚜렷하게 하면 그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과는 친해지고, 싫어하는 사람이랑은 틀어지는 거예요. 어쩔 수 없는 거죠.  149


다 좋다고 한다면 이건 무지렁이예요. 보잘것 없는 엷은 인간이에요. 제대로 살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홍해 갈라지듯이 갈라지거든요. 내가 분명하게 그 선을 그거워야 해요.  150


시인들이 시집 제목을 정할 때 가장 중요한 시를 고르거든요. 자신의 모든 시를 이 느낌으로 읽으라고 시집 제목으로 말해주는 거예요.  151


억압이 있는 권위적인 가정에서 아버지가 잘못했다고 저항하면 한 대 맞잖아요. 그런데 말을 했는데도 안 맞았다면, 내가 아버지의 권위를 수용해서 안 맞을 만한 말을 했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이걸 알아야 해요. 억압이 상존하는 곳에서 자유에 고통이 없으면 허용된 자유고 길들여진 자유예요. 그런데 다 자유롭대요. 자본의 억압부터 오만 억압이 다 있는데, 알아서 다 피하는 거예요... 지금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는 다 허용된 자유, 기만일 뿐이에요.  154


우리는 자유를 몰라요...

김수영은 그걸 잊지 않아요. '너희에겐 언어의 고통 이전의 고통이 없다.'.. 자신이 자유롭고 당당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부딪칠 때 , 그때 느껴지는 고통이에요.  155


억압이 있는 사회에서 고통이 없다면 동물원 울타리 안에 풀어져 있는 동물과 비슷한 거죠.  156


간짜장을 제일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러면 제사상에 뭘 올려야 돼요? 간짜장 올려야 하잖아요. 홍동백서만 따질 게 아니라, 절차를 생각한다는 건 인간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인간을 포획하는 하나의 방식이에요. 보수적인 방식이죠.

'절차적 민주주의'라고 하는데 민주주의가 어떻게 절처예요? 각자가 주인인데 왜 절차를 미리 정해요. 사람들이 절차를 정해야죠...

절차적 민주주의에 초점을 두면 절차와 민주주의를 같이 놓음으로써 민주주의를 희석시켜요. 형식만 따르면 민주주의를 같이 놓음으로써 민주주의를 희석시켜요. 형식만 따르면 민주주의가 되리라고 생각해요. 굉장히 잘못된 생각이에요.  157


절차를 근본으로 생각하면 민주주의에 저해가 될 수도 있고 억압이 될 수도 있다고요. 그리고 절차라는 규정을 정확하게 아는 전문가들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포획해버려요...

다수를 지배하는 사람들이 절차를 강조하는 법이에요. 까먹지 말아야 해요. 절차의 최종 심급에는 다수결, '쪽수'로 가자는 얘기가 있어요. 정치적 야욕이 있는 거예요. 인간이 가진 역동적인 힘, 사랑이 가진 참여의 힘이 있는데, 절차가 강조되면 그게 억눌리고 소멸돼버려요. 그러니까 절차만 주장하는 건 위험한 거죠.  158


관념의 자유, 언어 유희만 있고 삶에서 아무것도 안 봐요. 김수영은 총알이 날아오는데 안 피해요. 오히려 총알이 날아오는 쪽으로 가는 거예요. 가서 총알 하나 맞고 비명이 나오면 그게 시 한 편이에요. 서정주라든가 나머지 시인들은 총알이 날아오면 앉아서 피해요. 그랬더니 꽃이 보이는 거죠. 꽃은 해석할 수 있잖아요. 그게 시를 보면 보여요. 요새를 꽃이 아니라 카페예요. 거기서 지겁함이 보이고, 그들의 비겁한 제스터에서 뭘 피했는지가 읽혀요.  163


모더니즘의 정신은 세련되게 글 쓰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쓰는 거예요. 새로움의 근거는 나라는 사람은 천년 전에도 없었고, 천년 후에도 없다는 고유성에 있는 거고요. 자기 자신이라서 쓸 수 있는 글이니까 새로운 거예요. 이게 모더니즘의 정신이에요.  166


저는 자유로운 사람만이 인간의 억압 구조를 발견한다는 것을 알거든요... 

자유로운 사람만이 고통을 느낀단 말이에요.  173


언어의 고통 이전에 삶의 고통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삶의 고통은 자유로운 사람만 느껴요. 굴종하고 복종하는 사람은 못 느낀단 말이에요.  174


위대한 인문학자와 사상가가 나오는 조건은 그 사라므이 당당함이에요. 포로수용소에서 김수영만이 그랫다는 거예요. 포로수용소도 하나의 사회예요. 혀용된 것만 하면 돼요. 억압이 잇다고 저항이 일어날 것 같아요? 안 그래요. 저항은 자유로운 사람만 일으켜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덕목이에요.  175


'기존 담론들 다 배우고 양자역학 다 배우면 뭐해요? 기존 담론의 틀 속에서 논물을 쓰면 새로운 발견을 못 하니까 자유로워야죠.  175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자신의 철학이 정리된 다음에 오스트리아 오지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앙들을 진짜 많이 때렸어요. 얘네는 초등학교만 다니고 농사지어야 하는 애들인데, 비트겐슈타인은 인격자로 키우려는 거죠. 부모들은 애들을 왜 때리느냐고 난리인데 정작 아이들은 한 명도 문제 삼지 않았던 거예요. 왜냐면 비트겐슈타인은 아이들을 사랑했거든요. 아이들은 맞을 때 알아요. 그런데 부모들은 그걸 빌미로 공격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이 자꾸 애들 보고 너희는 성숙해져야 하고 촌구석을 떠나야 한다고 하니까. 농부들에게 지식은 경운기예요. 아들을 선호하는 이유도 가마니를 나를 수 있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너희는 경운기가 아니다. 너희는 인간이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아이가 '나는 경운기예요' 이러면 한 대 때리는 거예요. 아이들은 자기를 사랑해서 그러는 줄 다 알죠. 아이들은 날 사랑해서 때리는 건지 아니면 부인이랑 싸워서 날 때리는 건지 다 알아요. 그러니까 사실은 이 문제예요. 어떤 사람이 잔인하고 폭력적인데 나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감당해야죠.  179


사랑하면 연인의 가슴에 고개 처박고 심장 소리만 듣고 있는 것이 제일 좋잖아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이나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찾을 때 사랑은 붕괴되는 거예요. 이유가 없어요. 이유는 제3자가 심판하려고 할 때나 대는 거예요.  182


"시인이 물속으로 직접 들어가 온갖 물고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존재라면, 철학자는 그물로 끌어올린 물고기를 다시 확인하고 만져보는 사람입니다"라고 표현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지승호)

흔히들 시는 주관적이고 철학은 객관적이라고 생각해요. 시가 주관적인 것은 맞지만 보편적이기도 하거든요. 철학이 오히려 주ㅗ간적일 수도 있어요. 시는 주관적이지만 보편적인 데가 있고, 결국에는 같다는 거죠. 그걸 강조하려 했던 거예요. 제가 시와 철학을 왜 같이 엮었는지 보여주려는 거고요. 

핵심은 경험을 우회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책을 보는 것도 간접 경험이에요 간접 경험이라도 해야 해요. 경험을 했느냐 안 했느냐의 잣대는 마음이 움직였느냐예요. 경험을 하기 이전의 마음 상태와 한 후의 마음 상태가 달라야 해요. 책을 읽어도 간접 경험이 안되는 건 책을 읽으면서 밑줄 치고 중요한 것 외우고 해서 그래요. 그건 책 읽는 게 아니에요. 읽었을 때 작가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것이 간접 경험이거든요. 제가 만난 소설가들은 다 자기 유년 시절을 가지고 초기작을 써요. 그다음서부터는 취재예요. 자기를 퉐하게 봤던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 얘기를 들으면 금방 공감해요. 그 리얼이티를 확보하지 못하면 작품을 못 써요. 위대한 소설가가 되려면 자기를 투명하게 정리하고 자기 삶에 대해 얘기하다가 다른 사람의 삶을 공감할 수 있는 지점에까지 가야 하거든요. 

제일 중요한 것은 직접 경험이에요. 직접 경험은 진짜 중요한 거예요. 감정이 일어나는 것, 이게 인문학의 핵심 정신이죠. 분노의 감정이 안 일어나는데 분노에 대한 글을 쓰면 안 돼요. 인문학책은 사람들에게 그 감정을 일으켜야 해요. 그 감정이 분노든 뭐든, 사회과학이 인문학은 아니지만, 좋은 사회과학 서적은 분노도 일으켜야 해요. 요즘 사회과학 서적들은 너무 건조해요. 사람은 감정이 움직여야 움직이거든요. 철학은 머리로 들어와서 마음까지 흔들어야 좋은 철학이에요. 시는 마음으로 들어와서 머리를 흔들어야 하고요.

좋은 철학책은 지적인 이해와 분석을 요구하는데, 책이 딱 끝나고 나면 마음속에 확들와요. 후배들이랑 원전 강독할 때 '책이 네 마음을 울려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 사람에 대한 논문을 써야 한다. 그걸 써나가는 과정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과정이고 그 사람에게서 독립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논문을 써야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나중에 독립된 저자로서 살 수 있다'라고 조언해줘요. 하지만 대개 안 지키고 중요하다는 텍스트가 있으면 인용하고 요약해서 논문을 쓰죠. 안타까워요. 강의할 때도 항상 제자들에게 '감정을 못 지키면 끝장이다. 오늘 너희들 감정이 들었니?'하고 얘기해요. 

왜 감정이 들어야 하냐면요. 원래 사람은 다 감정이 들기 마련인데 감정을 억압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있어요. 드러내면 안 되는 거예요. 다쳐요. 예컨대 영국 왕실 근위병처럼 감정 없이 굳어 있는 사람들, 이게 최악의 모습이에요. 걔들이 왜 감정이 없겠어요. 여행 가서 그런 애들 보면 앞에서 막 웃겨준다니까요. 제가 인문학자잖아요. 가서 웃겨요.(웃음) 감정을 만힝 죽이면 나중에 진짜 죽어요. 감정이 없을 때 인간은 기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의 본질은 감정이에요. 감정대로만 하면 세상이 안 돌아가니까 이 감정을 어떤 통로로 뚫어놓을 것인가 고민하기 위해 이성이 필요한 거죠. 딱 그정도로만 이성은 의미가 있어요. 이성은 절대 감정에 저항하면 안 돼요. 감정을 흐르게 하는 소통 창구를 찾는 역할을 해야 돼요. 그런데 이게 반대로 돼 있는 인간은 이성이 너무 강하죠. 감정을 억압해요. 그러면 인문학이 이상하게 읽힐 수도 있어요.  185-187


'김수영에 대한 나의 해석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 건 김수영에 대한 나의 사랑이 당신들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해석이 강한거다'라고요. 모든 해석의 강도는 사랑의 강도에서 측정되어야 해요...

그래서 얘기하는 거죠. 당신들은 나보다 김수영을 더 사랑하느냐고 사랑을 해야죠. 집중하고 관찰하고, 그래야 디테일이 보여요.

저는 우리 문학평론가들의 글이 마음에 안 들어요. 첫 번째 연을 분석하고, 두 번째 연, 세 번째 연이 어쩌고 저쩌고. 한데 어떤 사상가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으려면 그 사람이 지금 살았더라면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라는 데에까지 육박해 들어갈 수 있어야 해요. 사람들은 제 책이, 제 해석이 평론가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 거냐고 자꾸 물어보는데, 평론가들이 김수영을 제대로 사랑한 적이 있나요? 김수영을 4.19의 시인이라고 하질 않나. 자유의 시인이라고 하면서 그 자유의 의미를 제대로 숙고하지도 않잖아요.  189


체제가 우리를 길들이려고 하는 이미지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요. 하나는 CF등을 통해서 보여주는, 예쁜 여자가 멋진 옷을 입고 있거나 행복해 보이는 여자가 가전제품을 들고 있는 것 같은 유혹의 이미지예요. 또 하나는 우리를 쫄게 만드는 이미지예요. 대표적인 게 CCTV 같은 것, 그리고  MRI나 CT 촬영 같은 진단 영상들이에요. '나중에 용의자가 될 수도 있다', '나중에 병들어 죽을 수도 있다'라는 공포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죠.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게 만들어요. 미래를 보게 되고 미래를 생각하고 잇으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랑 얘기를 못 해요. 내일 시험 걱정하면 이 사람이랑 못 있거든요. 그러니까 체제가 노리는 것은 인간의 관걔를 깨알같이 만들어서 분리시키는 거예요. 미래에 대한 공포의 이미지가 그런 작용을 하는 거죠.  197


인문학은 나의 발견이거든요... 모든 글은 고통이든 기쁨이든 감정을 느낀 다음에 써야 하는 거예요... 감정이 안 들었는데 있는 것처럼 하면 사기 치는 거고, 그런 글은 사람을 못 울려요.  209


항상 강조하는 게 스스로 가지 감정을 못 지키면 아무도 안 지켜준다는 거예요. 저는 제가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기 감정을 내색 안 할때 너무 힘들어요....사랑받으려면 항상 자기 감정을 드러내야 하고, 싫은 건 싫다고 해야 해요. 그러지 않고서 자기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기적을 바라는 거죠.  210


원문을 기계적으로 짜집기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에 감응을 했느냐, 이 관점에서 쓰는 거죠. 

철학(Philosophia)에서는 소피아(Sophia)가 아니라 필로스(Philos)가 먼저예요. 사랑을 하면 지혜로워지는 거지, 거꾸로는 아니에요. 지혜에 대한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하면 알게 된다는 거죠. 별을 사랑해야 별에 대해 많이 알게 되고, 여자를 사랑해야 여자에 대해 많이 알게 되는 거죠. 여자에 대해 많이 안다고 사랑을 제대로 하나요? 그건 아니죠.  219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려면 남을 따라가지 말고 홀로 나아가야 해요. 비유를 하자면, 위대한 사람들이 걸어갔던 발자국이 눈길에 남아 있는데 그게 그들의 스타일인 거예요. 그런데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면 내 것이 안 남잖아요. 그쪽 길이 아니라 눈 덮인 길로 걸어가야 자기 발자국, 즉 자기 스타일이 생기는 거죠. 누구를 흉내 내면 안 돼요. 내 감정으로 밀어붙여야 해요.  223




chapter 4 제자백가를 통하라


동양 고대 텍스트, 제자백가 텍스트에서 우화가 많은 것은 왕한테 얘기한 거고, 노골적인 건 제자한테 얘기한 거예요.  241


인문학 책을 읽을 때 핵심적인 것은 시선이에요. 잘못 공부하는 인간들은 시선이 아니라 디테일한 묘사들만 외우는데, 중요한 건 시선이에요. 그 시선을 가지고 그 안경을 가지고 우리 삶을 봐야죠. 

그 안경으로 바라본 상(像)에만 집착하면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는데요. 젊은 친구들은 철학자의 시선을 익히기보다 철학자가 그 시선으로 봤던것을 보려고 해요. 왜냐하면 그게 디테일해 보이고 구체적으로 보이니까 안심이 되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상을 보여준 철학자의 그 시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좀 성숙해질 텐데. 철학자가 그 시선을 봤던 것, 개념을 외우고 그걸 가지고 떠드는 거죠. 철학자든 시인이든 그 삶이 지금 살아 있다면 이 문제에 이렇게 대응했을 것이다 하는 것까지 알아야 정말로 그 사람을 아는 거예요. 그래서 시선을 배워야 하는 거죠. 인문학적 독해는 그렇게 해야 돼요.  253




chapter 5 유가를 넘어서


공자와 진시황, 화(和)와 동(同), 이들이 정치철학의 두 전통, 국가주의의 두 전통이에요.  270


후기 묵가들은 진나라로 들어가요. 천하를 돌아다녔던 묵가들이 국가를 통일하자고 결정한 거예요. 그리고 걔네들이 진나라 법률의 기초를 닦아요.  274


자본가 마인드에 두 가지 모델을 적용할 수 있어요. 법가적 자본과 유학적 자본. 계열사 사장들의 자율권을 인정하면 유학적인 것이고, 총수가 철저하게 총괄하고 사장 갈아버리면 법가적인 것이죠.  284


춘추전국시대나 제자백가는 일직선적인 발전이거든요. 앞 사상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상이 등장하는 거라 일정한 흐름이 있어요. 공자가 나오고, 공자를 비판하면서 묵가가 나오고, 묵가를 비판하면서 양주가 나오고, 이런 식의 패턴이 있어요. 철학사가 있는 거죠.  288


인문학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문맥 파악이에요. 잘 파악해야 해요.  298


형식과 예법은 최선의 관계가 아니라 최악의 관계를 막는 데 필요한 정도예요. 그런데 그걸 최선의 관계라고 생각했을 때 억압이 생기는 거고, 반드시 이렇게 하라고 하면 문제가 되는 거죠.  307


예전에 제자들한테 항상 얘기해주던 강독 요령이 뭐냐면, 열 구절 중에서 아홉 구절은 쉽게 독해가 되는데 한 구절이 독해가 안 된다면 아홉 구절이 다 틀렸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해석 안 되는 구절을 버리죠. 또 하나 기억해야 될 것이, 어떤 것이 기록으로 남겨졌다면 그것이 그 당시에 비범하고 특이한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비행기가 허구한 날 추락한다면 뉴스에도 안 나와요. 일상적인 것이 아니어야 기록되고 남겨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꾸로 보면 <논어>의 구절들이 그 당시에는 너무 이상한 얘기였다는 말이기도 해요. 항상 조심해야 할 게, 그 당시의 삶의 문맥이나 역사적 상황을 통해서 해석하는 것도 좋지만 역사적인 것으로 환원해서도 안 된다는 거예요. 역사라는 것은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흐름을 다루기 때문에 <논어>의 그 구절 하나가 가지고 있느 고유성은 못 잡을 수도 있어요. 우리가 일기를 쓸 때도 특이한 일을 기록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제자들도 특이한 가르침을 기록했다고 본다면 조심해야죠. 그런 가짓수를 다 염두에 두고 제자백가서를 읽어야 해요. 그러니까 선택을 진짜 잘해야 해요.

그런 것도 염두에 둬야죠. 공자를 위해서 내버린 구절들은 무슨 내용이었을까? 공자가 이혼했던 얘기도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공자가 이혼당하거든요. 천하를 주유하다 보니까 공자 부인이 열 받아서 친정으로 가요. 친정에 가니까 장인어른이 다른 데 시집을 보내요. 그 당시는 아직 모계사회이 풍습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 그래도 됐거든요. 공자가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겠어요? 그 얘기는 다 빼는 거예요. 사실은 '공자가 남자를 만났다' 그 구절 하나가 논어 담론의 경계선일 수도 있어요. 공자의 실제 삶에서는 중간 정도의 위치일 수도 있는데, 여자관계라든가 그런 부분들은 다른 텍스트를 참고해야죠. <예기>라는 책을 안 봤으면 공자가 이혼당했다는 것을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혼당한 다음에 여자와 소인은 가까이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한 것일 수도 있잖아요.  309-311


저는 짧은 구절을 하나 보고서도 전체 문맥을 빨리 파악해서 해석 가능성을 몇 가지 열어두고 가만히 기다려요. 어떤 것이 맞는지, 칸트나 다른 텍스트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텍스트 읽는 방법이 같아요. 전체를 보고 줄거리가 뭐냐가 아니예요. 매번 해석에 들어가요. 내가 봤던 페이지 이후는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보는 거예요. 그 강도로 읽는 겁니다. 여기서 해석이 끝났는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면서 좌초되기도 해요. 에이, 이후의 페이지들이 다 불탔으면 내 해석이 맞는 건데, 이런 게 나오다니.(웃음) 텍스트를 읽어낼 때 독창적 해석이 나오는 근거는 그거예요. 전체 요지가 뭐라고 어떤 해석가가 얘기했다고 해서 색안경 끼고 안 봤거든요.  312


아까 공자가 남자를 만났다는 부분도 저는 안 놓쳐요. 그러면 물어보게 되잖아요. '남자를 왜 만났지? 자로가 불쾌해하는 건 왜지?' 가능한 상황을 다 생각해보는 거예요. 그런 다음 하나씩 하나씩 그 해석을 맞춰가는 거죠. 그렇게 맞춰가다 보면 다른 사람의 해석을 넘어서게 돼요. 열 가지 구절로 이루어진 조목이면 대개 한 가지 구절에 주목해서 나머지 구절들을 읽거든요. 그런데 저는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 네 가지, 디테일한 구절을 가지고 해석 체계를 쌓으면서 하나의 해석을 밀어 붙여요. 그게 독해하는 요령이에요.

제 글이 다른 사람들이랑 다른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매번 한 문장 한 문장과 싸워서 이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가설을 세우고, 그 다음 구절에서 또 검증에 검증을 하다 보니 쉽게 한 구절 한 구절 넘어가는 게 아니거든요. 그렇게 읽으면 진짜 재미있어요.  313


내가 진짜 제대로 사랑을 하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읽히는데, 내가 베르테르였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고 베르테르가 나였으면 나처럼 사랑했을 거라는 경지에 오를 때 느껴지는 공감과 울림이 있어요. 이게 인문학적 독법의 핵심이에요. 역사책을 읽든 고전을 읽든, 이게 왜 중요하냐면 우리의 의사소통 가능성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제가 여자라면 어떤 여자처럼 하겠다는 것하고, 어떤 여자가 '내가 남자라면 강신주처럼 하겠다'는 게 공명이라고요. 제가 여자가 되는 게 아니라니까요. 남자와 여자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공명하는 거예요. 그게 공명의 조건이에요. 고전도 마찬가지예요. 인문학적 독법을 연습한 사람만이 공명할 수 있는 거죠. 권력은 우리를 깨알처럼 쪼개잖아요. 그에 대항하려면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공명할 수 있는 구조를 잡을 수 있어야 해요.  315-316


80년대 학번 아줌마들이 대안 교육을 한다는데, 이게 문제예요. 사회는 대안이 없는데, 사회를 바꿔놓고 대안 교육을 시켜야 하는 거잖아요. 대안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사회에 나오면 힘들어해요. 자기가 대안 학교에서 배웠던 걸로는 사회에서 못 살아요. 그래서 그 아이들이 상상마당 강의에 다 들어와요. 제가 대안적인가 봐요.(웃음) 대안 교육이란 게 아이를 가지고 또 하나의 실험을 하는 거예요. 그 아이들 인터뷰하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대안 교육 싫다고 하는 애가 반이에요. 좋아할 것 같지만 싫어해요. 좋아한다는 얘기만 들은 사람들은 침묵하는 애들을 안 봐서 그래요. 저라도 그럴 것 같아요. 어머니의 숭고한 이념을 못 따라가는 것도 있을 테고, 애들이랑 게임하고 놀고 싶은데 산에 들어가서 자연하고만 놀고, 너무 고상한 것만 하잖아요. TV도 보고 싶을 텐데, 대안 교육이 실패한 이유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기 이념을 사랑했다는 데 있어요. 형식과 절차, 이념이 다 정해진 엄마들이 무슨 교육을 시켜요?  318


우리가 시작했다가 멈출 수 있는 경쟁은 예뻐요. 딱지치기 같은 것처럼요. 문제는 경쟁을 외부에서 만들어서 멈출 수 없게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경쟁이 싫다고 온갖 경쟁을 다 없애버린 거예요. 제가 봤을 때 핵심은 그거예요. 인간은 때로는 경쟁이 즐겁기도 하거든요. '나보다 빨리 달릴 수 있어? 저거 딸 수 있어?' 꼬맹이 때 그렇게 놀았잖아요. 경쟁이라는 것이 내가 시작해서, 우리가 시작해서 우리가 멈출 수 있다면 괜찮은 거예요. 그런데 경쟁이 필수가 되어버리는 것. 내가 스톱 못 하는 게임이라면 문제가 있는 거죠. 

아이들 대안 교육 시키고 고민하는 어머니들을 만나서 너무 오버들 하셨다고 그랬어요. 경쟁하고 싶어하는 애들도 있거든요. 그런데 대안 학교에서는 신선놀음하듯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요. 예들이 재미가 없어요. 누가 그림 잘 그리나. 이런 것도 하고 싶은데, 미묘한 차이예요. 그래서 햇갈리는 건데, 80년대 학번이나 90년대 초 학번 아줌마들이 아이들을 통해 지금 처절하게 배우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이 얘기를 하면 그 아줌마들은 금방 알아요. 어디서 잘못됐는지.

제가 이걸 어떻게 아느냐면, 대안 교육 받아서 망가진 아이들이 저한테 오거든요. 그러면 야단도 쳐요. '지랄들 한다. 적응 못 해서 이쪽으로 왔니? 대안을 연장해보려고?' 상상마당 강의 같은 데 와서 터프한 얘기 듣고 철학 얘기 들으니까 대안 교육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저 생명 연장을 하는 것일 뿐이에요. 모르핀을 한 번 더 맞겠다는 거죠. 애들이 건강하지 않더라고요. 더 약해져 있어요. 그런 아이들 만나면 이 얘기를 해줘요. 

'부모들은 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실험한다. 그건 부모의 몫이다. 하지만 이제 스무 살이 됐다면 드디어 네가 너 스스로를 만들 기회를 잡은 거다. 지금까지는 부모가 뭘 가르치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건 경쟁 교육을 받는 아이든 아니든 똑같다. 문제는 스무 살 때 네가 너를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 너는 너 자신을 만들고 있니?' 이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해요.  319-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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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여러분 때문에 철학, 즉 필로소피(Philosophy)라는 학문이 앎(Sophos)을 사랑하는(Philo)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사랑해야 그것에 대해 아는 학문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5


사랑편


조르주 캉길렘이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있습니다. 미셸 푸코의 논문 지도 선생이기도 한데, 이 사람이 쓴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이라는 책이 있어요....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정상을 정의하는 것은 비정상을 정의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26


10년 동안 김수영이 계속 김현경을 때리다가 마지막 때린 날 <죄와 벌>이라는 시를 씁니다.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 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진짜 미워하려면, 내가 죽어도 미워하는 거예요.

감옥에 가거나 사형 당할 각오를 한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고요. 진짜 미우니까요. 나 하나의 이익을 생각하면 누구를 미워하지 못해요.  30-31


타인과 관련된 감정 중에 가장 극단적인 감정이면서 가장 강도가 센 게 미움과 사랑이잖아요.

제대로 미워하면 타인의 시선, 돈, 우산이 눈에 들어오면 안 돼요. 사랑도 미움과 똑같은 거예요. 사랑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요.

남에게 충분히 희생을 당하고 돌을 맞아도 할 수 있는 게 사랑이거든요. 스스로 돌아보세요. 이렇게 죽이고 싶도록 누군가를 미워한 적 없었죠? 그러니 사랑도 못 하는 거예요. 사랑과 미움은 같은 감정이니까요.  33


알랭 바디우라는 철학자는 '사랑은 둘의 경험이다.'  33


다른 게 개입이 되면 안 돼요.

둘의 경험을 한다는 건, 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정치적 상황, 경제적 조건, 오만 가지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야 해요.  35


둘의 경험을 유지하는 건 전투고 투쟁이에요. 스스로와도 싸워야 되죠.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인간관계와 다 싸워야 돼요.  39


누군가를 좋아할 때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겁을 집어먹으면 죽었다 깨나도 사랑 못해요.

내가 사랑할 수 있다는 건 고통을 감당한다는 거예요.  47


성적으로 궁합이 안 맞는다고, 나중에 헤어지는 부부들 있죠? 섹스만, 성만 달랑 보고 간 거예요. 오히려 관계에서 성적인 영역이 작아져야 돼요. 이건 다시 말하면 성적으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거예요.  51


일단 사랑이라는 느낌이 들면, 그냥 던져요. 최선을 다해요.  52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우는 요령은 자기감정에 충실한 거예요.  53


우리가 어떤 사람을 갖는다는 건 성적인 소유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모든 면에서 주인공으로 만든다는 거예요. 거기에 성도 포함돼요.  76


우리가 진짜 둘로 섰다는 경험을 하는 순간, 그때 우리는 꽃필 거예요.  78


우리는 헌신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내가 널 주인공으로 만들면 너도 나를 주인공으로 만드니까, 상대방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거예요. 상대방에게 헌신을 해서 나에게 그게 돌아도게 하는 거지요. 잊지 마세요. 행복해 집시다.  79



사랑에는 놀라운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타자를 알아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면서 타자를 알아 가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알아 가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83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규칙이 공유되는 공동체 내부에서는 나와 타자가 대칭적인 관계에 잇고 '교환=커뮤니케이션'은 자기대화(monologue)일 뿐이다. 한편 비대칭적인 관계에서의 '교환=커뮤니케이션'은 끊임없이 '목숨을 건 도약'이 수반된다. 나는 또한 이러한 비대칭적 관계 속의 교통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를 '사회'라 부르고 공통의 규칙을 가진, 따라서 대칭적 관계 속에 있는 세계를 '공동체'라고 불러왔다.' <탐구II>  85


가라타니 고진은 타자와의 대칭적 관계에 있을 때 우리가 공동체에 속해 있고, 반면 타자와 비대칭적 관계에 있을 때 우리가 공동체에 속해 있고, 반면 타자와 비대칭적 관계에 있을 때 우리가 사회에 속해 있다고 말합니다.  86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게 도는 당혹감입니다. '아! 저사람에대해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는 것이 별로 없구나!' 이제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 가야 하는 비대칭적인 관계, 즉 사회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87


타자가 나를 사랑하기로 한 것도, 그리고 나를 버리기로 한 것도 모두 그가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인 것이지요.  88


타자가 자유롭게 나를 사랑하기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는 자유롭게 나를 떠나기로 결정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어느 경우든 그것은 타자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실현한 것이니까요.  89


나를 떠날 수도 있는 자유를 가자고 있음에도 타자가 나의 곁에 머물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불행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타자와의 사랑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법입니다.  91




몸편


몸과 정신은 함께 갑니다. 정신 상태가 상당히 안 좋다면, 몸 상태도 상당히 안 좋은 거예요. 정신적 문제를 몸과 나누어서 생각하면 안 되는 거예요. 사람의 모모가 정신은 하나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거나 무언가를 의심하거나 우울한 증세가 있다면, 일차적으로는 운동을 하면서 해결을 할 수 있어요. 강건하게 운동을 하면 100펴센트 해결이 되죠. 어렵지 않아요. 정신에 문제가 생기면 몸에, 몸에 문제가 생기면 정신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의 실천적인 조언을 드릴게요.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면, 집에 처박혀 잇지 말고 몸을 움직이고 써야 합니다. 그리고 몸에 문제가 있을 때는 몸에 연연하기보다 정신적인 문제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고요.  99


'몸'이라는 건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남자의 몸, 여자의 몸만 존재해요.  100


남자의 몸은 여자의 몸으로, 여자의 몸은 남자의 몸으로 열려 이싿고 해야 할까요? 철학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관계에 열려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이라는 걸, 몸 일반으로 보지 말자고요. 그냥 여자의 몸, 남자의 몸인 거예요. 그리고 지구상에 이게 존재하고, 생명체에게 이게 존재한다는 건 소중한 거계요. 여자 혼자서는 여자의 몸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고, 마찬가지로 남자 혼자서는 남자의 몸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수박에 없는 구조가 바로 우리의 몸이라는 거죠. 흥미로운 일이지요.  101


우리 몸은 기억을 합니다.  108


(제자중에)오케스트라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는 친구인데, 이 친구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악기는 손을 타기 때문에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주고 만져 주지 않으면 마치 남남인 것처럼 초기화되어 버린다"라고요.  110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키스를 나누고 나를 만져 주길 바라죠. 나에게서 날 수 있는 전혀 다른 소리들을 기대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을 하지 않게 되면, 어떤 사람의 몸과 부딪히는 관계를 맺지 않게 되면 여러분들은 끝난 거예요. 살아 있어도 끝난 거예요. 썩어 가는 거예요. 리셋이 되고 있는 거예요...

사람 몸은 다 악기예요. 애완견도 악기고, 심지어 돌도 악기예요.  111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 몸은 악기와 같으니 악기를 어덯게 유지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112


집중력입니다. 최대한 집중해서 확신이 드는 사람과 관계를 지속하려고 할 때, 거기서 환멸을 느끼든 좌절을 느끼든 경험이라는 것이 되는 거예요. 집중을 했을 때 경험이 되는 거죠. 장비를 갖추고 여행을 가서 고생을 하면 경험이 되지만, 그냥 길 가다 폭풍우 쏟아진다고 폭풍우를 경험했다고 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냥 당한 거죠. 그건 경험이 아니에요. 아무것도 못 배워요. 경험은 수동적인 게 아닙니다. 경험에서 배운다는 건, 진지하게 직면하는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말이에요. 진지(眞摯), '참될 진(眞)'자에 '잡을 지(摯)'자예요. 특히 여릭서 중요한 것은 '지'라는 글자입니다. 솔개 같은 맹금류가 토끼 같은 동물을 꽉, 혹은 제대로 잡아챈다는 뉘앙스가 있으니까요.

꽉 잡을 때 그게 뜨거운지 시원한지 알아요. 그때 배우는 거예요. 뜨거운 척 하는 게 아니라 꽉 잡아 봐야 돼요. 이 경험이 쌓여야 된다고요.  142


타인을 위해 자기감정을 억누르는 사람은 대개 노예들이에요...

타인이 정한 행복과 불행이란 기준이 아니라 나만의 행복과 불행이란 기준으로, 일체 검열하지도 않고 쫄지도 말고 당당하게 자신의 감정에 따라 판단하라는 겁니다.  145


오로지 나의 느낌에, 내 감정에 유일하게 집중하고 사랑을 할때만이 우리는 주인이 되는 경험을 해요.  154


직접 대면했을 때 아름다운 풍경은 살아 있는 것 같은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진에 담긴 아름다운 풍경은 그런 생생함이 사라지고, 무엇인가 죽은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사진의 풍경은 '시각'만이 추상화되어 박제된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자신이 직접 본 풍경은 다섯 가지 감각이 모두 살아 움직였던 구체적인 경험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진이 보여 주는 시각적 풍경은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풍경을 추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당시 경험했던 바람의 산들거리던 촉감이나 호수의 달콤하고 씁쓸했던 물비린내 등등은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되겠지요.  164-165




고독편


우리가 제일 슬픈 건, 나를 항상 의식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이렇게 생각해 보면 돼요. 나를 만난 남자가 자꾸 시계를 봐요. 여러분을 만난 어떤 사람이 시계를 자꾸 본다면, 그건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고 객관적 위치가 어디인지를 파악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불쾌하지 않나요? 백화점도 그걸 알아요. 시계 안 갖다 놓죠. 상품에 몰입하라고요. 백화점은 절대로 창문을 만들지 않아요. 비가 쏟아지면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집으로 가니까요. 불문율이죠. 백화점은 그렇게 몰입을 위한 환경을 만들어 놓은 겁니다.  176


몰입은 시간 가는지 모른다는 느낌인 거예요. 시간을 챙긴다는 건 일정을 관리한다는 거잖아요. 

어른이란 게 뭔가요? 내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어른은 몰입을 잘 못해요. 아이들은 좋아하거나 꽂히는 게 있으면 거기에 목숨을 걸잖아요. 고독이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지 아시겠죠? 몰입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176-177


세계와 관련되어 있으면, 내 바깥에 있는 사람, 사물, 사건에 몰입을 하면 고독은 안 느껴져요. 번지점프를 하면서 고독을 느끼지 않잖아요. 절대 안 느껴요. 아주 재밌는 영화를 볼때도 우리는 고독을 느끼지 않죠. 어떤 매력적인 남자를 만나서 그 남자에게 몰입하는 순간 우리에게 고독은 없어요. 내가 몰입할 대상이 존재하면 고독은 없어요. 우리가 느끼는 고독의 정체는 바로 그거예요. 몰입할 게 없는 겁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죠. 사랑하는 게 없다고요. 밤새도록 함께 잇어도 시간이 가는지 모르는, 그런 존재가 없다는 거예요....

세계가 풍겨으로 보일때 우리는 고독한 거예요. 내가 있고, 나머진 다 그림인 거죠.  178


고독을 해소하는 방법, 그러니까 세상을 풍겨으로 보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풍경으로 보이지만 그것들 중 만지고 싶은 것이 있는지, 다시 말해 더 몰입하고 싶고 더 들어가고 싶은 것이 잇는지 살펴보는 거예요. 반드시 있을 겁니다.  179


고독이라는 건 자의식이 강한 상태입니다... 긴장되어 있어 거예요. 이 세계를 풍경으로 보는 겁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해 몰입하지 못해요. 나에게만 몰입해요. 나에 대해서만 몰입하는 겁니다. 그런데 몰입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분열증에 빠져요. 우리의 문제가 그거죠.  180


고독은 일회용 반창고일 때에만 의미가 있다는 사실. 상처가 날까 봐 계속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요.

고독은 병에 비유하자면 자폐증과 같은 겁니다. 자폐 증상이 있는 아이들은 세계가 너무 큰 충격을 줬을 때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요.  182


자본은 우리의 낭만적 삶을 부정할 겁니다. 낭만적인 사람은 세상에 대한 몰입도가 높은 사람이니까요. 그러니 자본의 입장에서는 하나씩 하나씩 몰입도를 줄이려고 할 거예요. 그러니 낭만을 위한 싸움을 시작하려면 우리가 먼저 되새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죠? 고독을, 멋이라고 자랑하지 말자고요. 일차적으로 우리는 상처받았어요. 고독하도록 내밀린 겁니다. 이걸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삶의 행복을 찾으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게 몰입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거예요. 몰입을 못하면 죽은 거니까요.  186


사람은 죽을 때 근육이 이완되죠. 죽고 나서 경직이 됐다가 이틀 정도 염을 하고 경직이 풀리면 사람 몸이 처음으로 다 열려요. 잡아뒀던 게 이완되니까 오만 구멍에서 다 쏟아져 나와요. 산다는 건, 사는 것의 정의는 항문을 조이는 거예요. 몰입과 무어의 육체적인 경험은, 드러나는 건 다 열리는 겁니다. 이 경험이 매력적인 게, 완전히 어떤 것에 몰입한다는 거예요. 나를 떠나는 거죠.

생각을 해 봐야 돼요. 나를 놓을 수 있는 기술이 우리에게 필요한데, 그 방법들은 여러분이 찾아내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어떻게 증진시킬까?'가 다움 문제인 거죠. 이거 굉장히 소중한 거예요.  190


고독을 벗어나는 기술은 '고독의 상태니 여기서 건너뛰자'는 발버둥보다 일단은 '몰입도를 어떻게 높여야 되는데 이 몰입의 방법이 나에게는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해보는 거예요.  191


여러분에게 세계가 힘든가요? 육체적이든 장소적이든 시간적이든 관념적으로라도 거리를 두세요. 세계를 풍경으로 보는 연습을 하세요. 진짜 편해요. 세계에 그냥 노출되서 마구 상처받는 것보다 고독으로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고 세계를 풍경으로 보는 게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어요. 슬픈 전략이죠. 하지만 우리의 보호막은 또한 우리의 감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독은 이중적이에요.  192


행운은 아무에게나 오지는 않지요. 스스로 고독을 깨기 위한 적극적인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춤도 춰 보고 노력은 해 볼 수 있어요. 해보는 데까진 해 봐야 되겠죠. 어쨌든 방법은 알았으니까요. 그렇게 하다 보면 나를 가두고 있는 그 감옥의 두께가 좀 얇아질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런 어머니 같은 존재가 필요하지 않을까'그런 생각이 들어요. 따뜻한 사람이요. 어쨌든 따뜻한 사람이 여러분을 나올 수 있게 괜찮다고, 여기는 괜찮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193


눈치를 보는 건 괜찮아요. 압도적인 힘 앞에서 생존하려면 눈치를 보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197


삶을 잘 살려면 어떤 것을 결정하든 부모님에게 '이기적이다'는 말을 들어야 해요. 부모님이 여러분에게 이기적이라고 말씀하시면 무조건 자신감을 가지면 돼요. '드디어 내 삶을 사는구나'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199


예쁜 사람 콤플렉스가 그거예요. 한 번의 선택으로 완벽한 스토리로 살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 주저하는 겁니다. 지금 선택이 완벽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니까요. 결국 어떤 선택도 할 수 없게 되지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선택하고 행동하세요. 

확신이 아니라 감각만 믿으셔야 해요. 헷갈릴 때 여러분들이 하셔야 될게 감각을 믿는 거예요. 확신이라는 것을, 미래로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감각을 믿으세요  203


독일 관념론이 우리에게 했던 이야기는 타자가 매개되지 않는 자기의식은 없다는 겁니다. 모든 자기의식, 나에 대한 의식은 타자가 매개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쁜 타자를 만나는 게 비극인 거예요. 누군가 나에게 쓰레기라고 비난하면, 스스로를 돌아보게 돼요. 그리고 쓰레기를 찾게 되죠. 좋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이유는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나의 모습을 발견해 주기 때문이에요.  205


자신의 감정을 지켜야만 해요. 그만큼 여러분은 삶의 주인이 될 테니까요. 그게 주인 아닌가요? 내가 행복하면 행복한 거예요. 내가 즐거우면 즐거운 거고요. 내가 불쾌한 건 피해야 되죠. 불쾌한데도 억지로 하고 잇다면, 문제가 있죠. 행복한데도 버려야 된다면,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요? 사실 돌아보면 우리는 너무 비겁하잖아요. 내 감정을 지키면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아서 자신의 감정쯤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자신의 감정이 소중하다고 이야기는 하죠. 이렇게 비겁한 의식들 때문에 우리는 계속 힘들어지는 거예요. 아주 쉬워요. 아주 단순하죠. 제가 왜 단순하게 얘기하는 거 같아요? 별로 타협을 안 보잖아요. 옳은 거는 옳은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더라도 옳은 거는 진짜 똥구먼이 빠져도 옳은 거예요.

사실 저도 그렇게 잘 살지 못하죠. 그런데 제가 철학자니까, 옳은 거는 옳은 거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못 살아도 옳은 것은 옳은 거니까요.  231-232


'왜 사나?'라고 질문하지 말아요... 다 개소리예요.

그 막연한 질문들이 대개는 지금 내가 좋은지 내 느낌이 어떤지를 은폐하기 위해서 던져지는 질문이에요. 그리고 그 막연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내앞에 있는 사람,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무시할 때 써요.  237


자신의 삶을 하나의 축복으로 생각하려면, 여러분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은 고독과 싸우는 것입니다. 고독해지는 내 모습과의 싸움입니다. 세계를 풍경으로 볼 게 아니라 세계에 몰입할 걸 찾아야 해요. 그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건 맞아요.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커다란 행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처를 받았다고 떨어져 나오면 아무것도 못 만지는 세상만 남아요. 그 순간 우리는 제대로 몰입할 대상을 만날 가능성마저도 잃게 되겠지요. 그러니 용기를 내야죠. 제대로 살려면, 행복하게 살려면, 우리에게는 몰입할 대상이 반드시 있어야 하니까요.

고독에는 병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고독은 자기에 대해서 몰입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고독은 타인에 대해서 몰입하지 않기로 작정했을 때 쓰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결국 타인을 사랑할 수 없으니 나만을 사랑하기로 작정하는 것이 고독의 숨겨진 메커니즘입니다.  238




에필로그 - 사랑, 손이 데어도 꽉 잡아야만 하는 것

차이의 긍정, 이것은 바로 상대방을 소유하지 않겠다는, 다시 말해 자유롭게 해 주겠다는 의지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252


니체도 <도덕의 계보학>에서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저지 장치가 파손되거나 기능이 멈춘 인간은 소화 불량 환자에 비교될 수 있다... 이런 망각이 필요한 동물에게 망각이란 하나의 힘, 강건한 건강의 한 형식을 나타낸다."  258


스피노자는 "슬픔은 인간 활동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방해한다. 즉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머물고자 하는 코나투스를 감소시키거나 방해한다. 그러므로 슬픔은 이런 노력에 반대된다. 그리고 슬픔을 느끼는 모든 인간이 노력하느 ㄴ것은 슬픔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러나 슬픔이 크면 클수록 그것은 인간의 활동 능력이 그만큼 큰 부분에 대립한다. 그러므로 스픔이 더 크면 인간은 반대로 그만큼 활동 능력으로써 슬픔을 제거하려고 할 것이다." <에티카>  258-259


스피노자의 말대로 의식적인 노력으로 치유의 시간은 그만큼 단축될 수도 있습니다.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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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도시가 아니었다. 결국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였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행복할 수 없다면 세상 그 어느 곳을 가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과정은 고독하고 피로했다.

헛헛함

행복의 반대말

낯설게 보기

탈도시적

라디오를 들으며 연필을 깎을 때면 참 행복했다.

온기




인생이란 어느 한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다림이며, 가장 나다운 나와 만나는 먼 여정임을 이해했다.  37


자제의 윤리가 깊숙이 내면화된 남자..

"상대의 호의를 잘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봐. 잘 받는 사람이 잘 줄 수도 있는거야."

상대를 위한 배려라고 새악했으나 그건 표면적인 명분일 뿐, 실상은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나 자신에 대한 배려가 더 우선은 아니었을까. 자립심을 바루히해 내 일을 스스로 처리하고 싶어 했으나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타인의 힘을 빌리는 달콤함을 맛본 뒤 의존적이 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그것은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고질병 가운데 하나였다. 아니,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해야 했던 운명의 소유자가 가지게 마련인 방어 심리였을지도.

이 도시에는 그런 믿음을 강화시키기에 충분한 잔혹한 사례들이 얼마나 일상적으로 일어나는가, 안심하고 감사히 호의를 받아들였더니 결국 자신을 이용하기 위한 의도였음을 아게 된다거나, 진심에서 우라넌 도움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그 일로 뒷말을 듣게 된다거나..  42-45


"그거 알아요? 정말 뭔가에 정신을 쏟으면 눈물이 나는 거? 슬퍼서도 아니고 서러워서도 아니고 그냥 눈물이 나요."

나는 다만 한 사람이 뭔가에 몰두한 끝에 흘리는 눈물에 대해서, 그 맑고 투명한 힘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초라한 시작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물 나도록 힘이 솟게 하는 뭔가를 찾는 사람드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었을 뿐이다.  52-54


스승의 죽비가 계속 어깨를 내리친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의식(생각)과 감정(마음)의 모순 때문입니다."

"생각과 마음이 싸우면 대부분 마음이 이깁니다. 승률 90% 이상이죠. 백만 대군과 싸우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바로 자신의 마음과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절에 가면 대웅전이 있죠. 그건 자신의 마음과 싸워 이긴 큰 영웅을 모신 곳이란 뜻입니다. 좋고 싫음에 따라 움직이면서 우린 거기에 온갖 핑계를 다 갖다 붙입니다. 일생이 '핑계 찾아 삼만리'입니다. 해탈이란 좋고 싫음의 놀음에서 벗어나 좋아도 안 할 수 있고, 싫어도 가볍게 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57-60


우리에겐 누구나 사랑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 자체는 탓할 일도, 억지로 가라앉힐 일도 아니고 그저 자연스러운 욕망일 뿐이다. 다만 사랑 받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 '아, 내 마음이 이렇구나'하고 알아채는 일이 중요할 뿐이다. 알아채는 순간, 욕망은 더 이상 강렬하게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나의 스승은 말씀하셨다. 

"사랑 받는 것을 내 삶의 중심으로 두면 힘들어집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사랑 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사랑 받고자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연인 사이에 흔히 '넌 내 거야' 하고 말하죠. 그러면 그 사람이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그 사람 것이 됩니다. 내 행복이 그 사람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죠. 그 사람의 한 마디, 몸짓 하나에 내 행과 불행이 좌우되기에 내가 내 인새으이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널 이렇게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너도 날 사랑해야 돼.' 이건 거래고 흥정이지 진정한 사랑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 받으려 하면 괴로움이 생겨날 뿐입니다. 반면 사랑하려 하면 충만이 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바로 서기 때문이죠."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설레며 사랑에 빠졌던 날들은 진정 천국의 시간일 것이다. 그 사랑이 좌절과 환면, 허망함을 안겨 주었다 하더라도 천국의 시간이 주는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자신을 투명하게 들여다보게 만드는 그 아찔하고 뼈아픈 각성의 순간조차 사랑이 아니라면 체험하기 힘든 소중한 기회이니까.

오직 사랑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힘센 카르마와 에고를 녹일 수 있다. 사랑은 정성이며, 절로 춤추게 하는 리듬, 영혼의 타악기를 울리는 손가락 끝마디이다. 

종교를 가지거나 명상을 하고, 온 세계를 헤매고 다녀도 내려놓기 힘든 것이 인간의 에고이다. 그런데 사랑에 빠진 순간 우린 광복보다 빠른 속도로 자신을 내려놓는다. 누군가를 자신보다 더 아끼고 사랑할 수 있게 되며, 세상을 향해 마음의 빗장을 모두 열어 젖힌다. 사랑이 아니라면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다. 기적이 일어났던 순간, 우린 미이 천국을 맛본 것이다.  68-70


크리스토퍼 듀드니가 쓴 <밤으로의 여행>에 쥐를 세 집단으로 나눠 실험한 얘기가 나와요. 쥐들을 24시간 불을 켜 둔 집단, 낮에만 불을 켜고 밤에는 깜깜한 곳에 둔 집단, 낮에는 불을 켜 두고 밤에는 아주 적은 양의 불빛만 새어 들어오게 한 집단으로 나눠 살게 했대요. 결과가 어땠을까요. 밤 동안 극소량의 빛에 노출된 쥐들과 밤새 환히 켜진 불에 노출된 쥐들의 몸 안에서 똑같은 수준으로 종양이 자랐다고 해요. 요약하자면 어스름한 빛마저 몸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거예요.  83


애초부터 옳고 그름은 없었다. 

'지불책우(智不責愚)' -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꾸짖지 않는다.  101


자발적 빈곤은 한없이 아름다운 말이지만 해가 갈수록 '자발적'이 맞는지 자신이 없어진다. 

도시가 추구하는 욕망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자발적'이라는 청렴한 수식어는 곧바로 무능으로 대치된다.

스승이 답했다.

"청빈과 극빈의 차이가 무엇인지 압니까? 스스로 그 길을 택해 검소하게 살면 청빈입니다. 극빈은 내 욕망은 그렇지 않은데 할 수 없어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조급함에 사로잡히면 반드시 실수를 하게 됩니다. 당장 다음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난하거나 큰 병에 걸렸거나 문맹이 아니라면, 그 이상은 더 잘 먹고, 더 건강하고,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욕심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남과 비교해 얻는 고통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약이 없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악한 생각입니다."  110-111


누가 그랬던가. 여행과 생활은 연애와 결혼의 차이 같다고, 막상 그 나라에 터를 잡고 산다면 다르겠지만 여행이었기에, 여행자였기에 우리는 얻뜻 새로운 세상을 보았거나 봐싿고 생각한다. 그것은 분명 다른 세계였다고 여긴다.  116


엄마가 말했다.

"해가 지면 그날 하루는 무사히 보낸 거다. 엄마, 아버지도 사는 게 무섭던 때가 있었단다. 그래도 서산으로 해만 꼴딱 넘어가면 안심을 했느니라. 아, 오늘도 무사히 넘겼구나 하고. 그러니 해 넘어갈 때까지만 잘 버텨라. 그러면 다 괜찮다."

그 밤에 엄마가 속으로만 삭인 뒷말이 있었다.

'그러다 새벽이 오면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게 몸서리쳐지게 무서웠단다.' 

그 말까지 더해야 진실이 완성되지만 엄마는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새벽이 되면 절로 느낄 것이므로, 당장 그 순간 자식에게 필요한 것은 기운을 북돋아 주는 말이란 걸 알기에.  123


"야야, 눈이 게으른 거란다."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벽에 부딪쳐 그만 포기하고 싶어질 때면 엄마의 어록을 떠올린다.

게으른 눈에 속으면 안 된다는 것을, 사람의 눈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서 해야 할 일 전부를, 인생 전체를 돌아보며 겁먹기 쉽다는 것을, 엄마는 말했다. 오직 지금 내딛는 한걸음, 손에 집히는 잡초 하나부터 시작하면 어느새 넓은 콩밭은 말끔해 진다고 반드시 끝이 있다고.  124


명상이란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일에서 시작된다.

알아 차리는 순간 화는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143


사랑이 무슨 죄니. 사랑이 약한 게 아니라 사람 마음이 약한 거지. 사랑은 있어."

그러니까 애당초 잘못은 우리가 사랑해 대해 품는 수많은 환상과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다. 사랑은 있는데, 사람이 변한다는 거다. 그 동안 애꿎은 '사랑'만 쥐 잡듯 자아 온 셈이다.  155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귀는 아무리 낮은 소리라도 다 알아듣는다. - 셰익스피어

어떻게 딴 생각을 하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상대의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어떻게 모든 것을 내보일수 있었을까?

바로 '처음'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이와 나 사이에는 과거에 쌓아 둔 '인과'가 없었다. 사소한 오해를 빚었던 일도, 기쁨을 나눴던 기억도 없는 백지 상태의 인연. 마음의 열림과 기적 같은 소통이 가능했던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순조로운 의사소통을 막는 첫걸음은 과거의 기억에 있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에서 오랜 시간 동안 봐 온 가족과 오히려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 내가 만나는 모든 인연을 지상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대하기란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과 소통하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마음속에 '내가 옳다'는 생각이 가득 차 있기에 자연스럽게 상대의 말은 내 마음속에 닿기도 전에 부정되고 만다.

스승은 말했다.

"혹시 마음속에 상대를 바꾸고 싶다는 욕심이 있는 건 아닌가요? 자기 자신 이외에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삶은 치유가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내가 문제를 해결해 줘야겠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저 조용히 들어주세요. 그리고 본인이 직접 도움을 요청하면 그때 도와주세요."

내 잣대로 미리 재단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옳다는 생각도 소통을 막지만, 내가 틀렸다는 생각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아니다. 미안해 하는 마음은 오히려 상대르 원망하는 깊은 속내를 감추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나의 옳음을 내려놓으면 가벼워지기에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사라진다. 미안한 마음은 지금 그대로의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이 미처 채우지 못한 욕심일 수 있다.

지혜로운 스승들은 상대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들 때는 진참회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진참회란 '내가 문제였어'라고 건성으로 결론 맺는것이 아니라 세상에 옳고 그른 일이란 없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170-176


누구나 평생에 걸쳐 자기 부모를 넘어서기 위해 애쓰며 살게 마련이다.  193


진정한 부란 죽음이 빼앗아갈 수 없는 것들을 이르는 말이다. 타인에게 베푼 친절, 관대함, 나눔, 용서, 배려... 내가 티베트를 그처럼 좋아하고 그드르이 운명에 아파했던 것도 진정한 성공과 부가 무엇인지 아는 문화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구제프의 수도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불편한 관계가 남아 있다면 돌아가라."  201


살아 보니 행복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것이었다.

행복에 관한 한, 우리는 일용직 신세였다. 비정규직이었다.

내일 몫까지 미리 쌓아 두기 힘든 것, 그게 행복이었다.  203


중독과 몰입의 차이는 무엇일까. 

중독인지 몰입인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안다. 둘 다 엄청난 시간과 사랑을 요구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게 없으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설명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드는 점도 닮았다. 그러나 중독과 몰입의 차이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에 있지 않을까. 어떤 일에 지독하게 빠져 있는 자신이 밉고 죄책감이 든다면 중독이다. 그 일을 함으로써 자신을 더욱 사랑하게 되며 내면의 자부심이 커진다면 몰입니다. 왜냐하면 중독은 결국 자신의 실체를 잊기 위한 몸부림이며, 올바로 사랑을 쏟아야 할 대상에게서 거부당하고 상처 받은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중독이 치명적인 것은 물리적인 파괴의 속성 때문이다. 몸 어디 한 군데가 손상된 뒤에야 간신히 벗어날 수 있는 것, 그게 중독이다.

정말 미스테리하고 약 오르는 진실 하나는 좋은 습관은 쉽게 중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64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심장에서 울리는 소리를 따라 길을 떠난다. 그러나 진정 성숙한 여행자는 돌아와서 자기 발밑의 장미 한 송이를 더욱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보다 멋진 사람은 굳이 떠나지 않고도 일상의 소중함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내면의 여행자이다. 혹여 장미가 아니라 패랭이꽃이나 작은 들풀인들 어떤가.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발밑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이다.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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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심장을 빨리 뛰게 하고

고통을 진정시키고 

죽음을 떼어놓고

사랑과 관련되지 않은 관계들을 해체하고 

낮을 증가시키고

밤을 단축시키며

영혼을 대담하게 만들고

태양을 빛나게 한다.  - 파스칼 키냐르



여행은, 

맨발을 빨리 뛰게 하고

가쁜 숨을 진정시키고

얽매임을 떼어놓고

내 삶에 그어진 선들을 해체하고

모험과 미소를 증가시키고

불행을 단축시키며

행동을 대담하게 만들고

내 영혼을 빛나게 한다.  - 변종모



어차피 떠나는 자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여행에 선진국이 어디 잇고 후진국이 어디 있으랴, 어디를 사느냐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되는 것인데 말이다.  21



잘못된 과거란 없다. 다만 잘못되어 가고 있는 현재가 있을 뿐. 아픈 것도 내 추억이며 슬픈 일도 내 추억인데 왜 말하지 못하고 왜울지 못했던가?  27



생각해보면 나는 늘 이런 식의 여행을 꿈꾸어왔다.

계획 없이 목적 없이 나를 올려놓는 것이 나에게 어울리는 여행이라 스스로 위로하며 나는 매범 계획없이, 준비 없이 떠나온 여행에 더이상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다만 조금 불편할 뿐이며 그 불편함의 여행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가져다부리라 믿는다. 적어도 나에게는 오직 길 위에서 느끼는 행복. 나는 이 행복을 길게 말끽하리라. 쫓겨 가지 않으리라. 쫓아가지 않으리라. 계획 밖에서 계획을 세우고 목적 없는 목적으로 조금 더 느긋하게 걸어가는 연습을 할 것이다. 지나온 시간은 모든 것이 빠르다. 아니 빨랐다.

감정도 생활도 이별도 상처도 쉽게 가지려 하고 빨리 이루려 하고 빨리 회복하려 했다. 마치 느린 것은 쓸모없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빠른 속도보다 느린 속도에 더 불안한 속도감을 느끼며 살았다. 세월이 빠른 것이 아니라 생각이 빠르고 행동이 빨라서 마음이 따라갈 수 없는 것임을 나는 잊고 살았는지 모른다.  45-46



모든 상황이나 현상은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고 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시간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 과거에는 행복이었다가 현재에는 독약이 되는 것들이다.  53



낯선 곳에서 길을 잃게 된다면 자신이 잃어버린 정보에 집착하기 보다는 그곳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것들에 대하여 여유로운 마음으로 침착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는 일,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어차피 자신이 준비한 정보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일 테니까.  55



축제의 반대편에 자리한 그곳은 노인들의 시간이다. 축제가 젊은이드르이 시간에 파묻혀 환호하는 동안 노인의 시간은 조용히 오래도록 그것을 바라보며 미동이 없다. 아무도 찾지 않을 그 어두컴컴한 가게 안에서 무슨 생각으로 그 긴 시간들을 지켜내고 계실까?

한때 저 멀리서 들려오는 축제의 대열에서 화려하게 옷을 입고 환해했던 날이 분명 있었을 텐데 지금 할머니의 귀에는 그 환호성마저 들리지 않는 듯핟. 세월은 ㄸ러어지는 꽃가루보다 빠르게 진행되어 이렇게 어두컴컴하게 남는다. 누구의 시간인들 그 떨어지는 꽃가루들을 피할 길 있겠는가? 모두가 떨어지고 나면 흔적 없이 쓸려나갈 시간 앞에 무기력한 마음이 무겁다.

화무십일홍 인불백일호(花無十日紅 人不白日好). 꽃은 열흘 붉은 것이 없고, 사람은 100일을 한결같이 좋을 수 없다 했으니 영원하지 못할것들 앞에 함부로 애틋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나는 오늘 이 축제의 뒷골목에서 쉽게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애특한 마음으로 지는 해를 바라본다.

나는 왜, 저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면서도 영원하리라 믿으며 사는 것일까? 그리 살아도 되는 것일까?



인연이란 아무런 예상도 못한 곳에서도 불현듯 시작이 될 수도 있고 한쪽의 노력만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억이 증명해주겠지만 좋은 추억이 확인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다.


내 인생에서 사라졌던 사소한 기억 하나를 소중한 추억으로 바꿔준 사람.


이 길 위에서 만나게 될 많은 인연들아! 당신들은 어쩌면 내 인생의 순간순간을 연결하는 우연 아닌 필연인 것이다. 부디 만나서 좋은 것으로 기억되게 해다오. 먼 훗날, 당신의 추억 속에서 기억되는 내가 있을지 모르니 나는 그속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고 싶다. 


* 에스페란토(Esperanto) :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인공어. "에스페란토"라는 이름은 1887년 발표한 국제어 문법 제1서에 쓰였던 라자로 루드비코 자멘호프의 필명인 "에스페란토(희망하는)박사"에서 유래하였다. 국제적 의사소통을 위해, 배우기 쉽고 중립적인 언어를 목표로 하여 만들어져싿. 현재 에스페란토응 여행, 의사교환, 문화 교류, 편지, 언어교육등 많은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 전 세계 200만 명의 사람들이 에스페란토로 대화할 수 있다. 그중에서 약 2,000명은 에스페란토를 말할 줄 아는 부모 사이에서 에스페란토를 모국어로 습득했다.



"네 마음에 진심이 없으니 타인에게도 극진할 수 없는 것이야."

스스로에게 진실하기. 그것이 내게 혁명이다.



출발지와 목적지의 중간에서 자신을 생각해보는 시간, 그 시간들은 여행보다 간절하고 여행보다 현명한 시간이 아닌가 한다.



매번 새로운 것을 보려는 피곤한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모든 것을 잊어 보는 일. 지금은 세상과 격리된 시간이다. 내가 처음 세상에게 피곤함을 느꼈을 때 제일 하고 싶었던 일, 그것은 오롯이 혼자 되는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고 여행을 떠났는지 모른다.


불특정 다수와 소통해야 하는 것 또한 여행이다.



어디서나 외롭기는 마찬가지인데 유독 여행만 떠나면 더 외로워지는 건 무슨 조화인지 자꾸만 다녀봐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급하고 모든 것이 빠른 세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무게와는 관계없이 속도만 낼 수 있다면 어떠한 종류의 신발이라도 신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는지.

빨리 만나고 빨리 이별하고 질감 없이 사랑하고 상처 없이 이별하는 세상. 답답하면 갈아 신으려 하고 싫증나면 교체하려고만 하는 세상. 온몸을 다해 부딪쳐 본 적 있었나 자신도 아프면서 상대방에게 다가간 적 있는가?

이제 맨발처럼 살아보리라.

거친 길에서 아파도 하고 부드러운 길에서 수굿하기도 하면서 그래서 피가 나게 다시 사랑도 해보고 굳은살이 박이듯 호들갑스럽지 않게 지난날도 잊어보리라.



따지고 보면 세상에 미치지 않고 돌지 않고 살 수 있는 날이 며칠이나 되던가. 제 기준을 벗어나면 미친놈이 되는 세상이고 그 기준 또한 미치지 않고서야 당해낼 수 없는 것들이라 우리는 매일 서로를 미치게 하고 스스로 미쳐야 살 수 있다. 당신은 미치지 않았는데 나만 미쳐 날뛰다보면 어느 순간 이별이고 어느 순간 혼자다.

당신은 왜 나에게 미치지 못하고 나만 당신에게 미쳤던가. 그래, 무엇에든 미쳐야 산다. 일에 미쳐서 살고 사라에 미쳐서 살고 외로움에 미쳐서 살고, 그 무엇도 아닌 것에 미쳐서도 산다. 

이제 이 미친 곳에서 제대로 미치고 싶다. 제대로 미쳐 산다면 당신과는 상관없이, 결과와는 상관없이 최소한 후회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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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과 동일시 되기 전에는 배척하려는 마음이 있다. 꼭 그런것은 아니겠지만 자신과 틀린것에 특히 배척하려는 의지를 무의식적으로 가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익숙하지 않기에 때론 너무 어색하기에 일단 한걸음 물러서게 된다. 그것이 물리적이든 심적이든 말이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는 사람은 자신의 스타일과 대조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가지지 않는것에 대한 호기심이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게 한다. 

앞서 말한 두 가지의 경우가 혼재하는 경우도 있다. 



영화<타인의 취향>에서 인물들의 애정도가 그렇게 그려지고 있다. 생각보다 애정을 쉽게 형성하기도, 참 어렵게 형성하기도, 결국 형성되지 않기도 한다. 

정진홍씨는 자신을 위해 산티아고 길을 걷고 쓴 책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에서 사랑은 평등하지 않다고 표현한다. '본래 사랑은 평등하지 않다. 꼭 균형이 맞지도 않다. 왠지 기우뚱한 것처럼 보이기 일쑤인 것이 사랑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도 밑질 것 없어 보이는 사이는 사랑이 아니다. 그건 자칙 거래다. 둘 사이가 어느 쪽으론가 기울어야 사랑이다. 기우는 쪽으로 사랑은 흐른다.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사랑하는 쪽에서 사랑받는 쪽으로, 한쪽에서 또다른 한쪽으로 그렇게 기울며 흐르는 게 사랑이다. 하지만 항상 한쪽으로만 기울지 않는다. 살다보면 기우는 방향이 정반대로 바뀌기도 한다. 마치 바람이 이리저리 불듯이 말이다! 그러면서 '기우뚱한 균형'을 잡아가는 것! 그것이 사랑 아닐까 싶다.'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평등하지 않다. 기울어짐 점점 균형점에 이르다가 때때로 시소처럼 이쪽으로 저쪽으로 기울어져 가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지속되어 갈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논리적이지 않다. 감성적이고 감정적이다. 그렇기에 이해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문화론>에서는 '참된 합리성이란 것은 대상의 보이는 면 뿐아니라 보이지 않는 면도, 드러난 것뿐만 아니라 숨겨진 것도 포용하고자 할때 마련된다. 이것이 변증법의 의미다'라고 한다.

변증법적으로 볼때 애정관계는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 된다. 사람과의 애정은 보이는것 보이지 않는것을 아우를 수 있어야 지속적인 관계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는 상대의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보이지 않는것에 더 빠져들고, 그 이후 실망으로 이루어진다. 그 속에서 드러난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을 모두 포용할 때 지속적인 애정은 이어질것이다.


다시 <타인의 취향>으로 돌아가 보면, 주인공 카스텔라(장-피에르 바크리)는 영어과외선생으로 왔었던 클라라(안느 알바로)의 연극하는 모습을 보며 클라라에게 반해 결국은 부인인 안젤리크(크리스티안 밀레)를 떠나게 된다. 

영화에서 카스텔라는 늘 부인의 기호를 존중하는 듯했으나 결국은 그것이 싫다고 화를 내게 된다. 안젤리크는 자신을 배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누가 잘못이었나를 떠나 두 사람은 부부로서 서로의 생각과 감정에 대한 솔직한 소통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었을 것이다. 

다시말해 애정의 시작은 다름과 차이의 호기심일 수 있으나 지속은 솔직한 소통을 통해 드러나지 않은 것 마저도 드러내 서로가 교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것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지 않을까...

시작과 유지는 그 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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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오늘 사랑을 굶지는 않으셨나요



다른 건 몰라도 사랑만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입니다.

진심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아프지도 않게 하고 슬프지도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로부터 비롯되는 생로병사, 희로애락 모두를 아무 불평 없이 굳게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대가 아침 잠에서 깨었을 때, 그대를 버리고 멀리 떠나간 사람이 다시 돌아와 그윽한 눈길로 그대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무슨 말을 하실 건가요.  14


진실로 사랑을 아는 자가 되고 싶다면 버림받은 것들에게 간직되어 있는 아름다움부터 눈여겨볼 줄 알아야 합니다.  17


그대 가슴에 꽃이 피지 않았다면 온 세상에 꽃이 핀다고 해도 아직 진정한 봄은 아닙니다.  25


비록 입에 풀칠을 못 하는 한이 있더라고, 남에게 웃음을 주는 인생이 되어야지, 남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인생이 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오래 머물러 있어야 할 것들은 일직 우리 곁을 떠나버리고, 일찍 우리 곁을 떠나버려야 할 것들은 오래 우리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 싫다고 다 버릴 수도 없고 좋다고 다 가질 수도 없겠지요. 그저 존버정신 하나로 이 겨울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겠습니다.  27


오솔길이 굽었다고 길옆에서 자라는 전나무까지 굽었던가요. 세상이 썩어 문드러졌다고 그대까지 썩어 문드러질 수는 없지요. 흐린 세상도 한순간이요 쓰린 인생도 한순간, 결국 언젠가는 평온하고 맑은 세상이 오고야 말겠지요. 그때까지 우리 함께 굳세게 존버.  30


집중력은 체내에 축적된 지방질을 분해하는 효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일에 몰두해 있는 인간의 모습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길쌈이나 가사에 몰두해 있는 여자의 모습, 노동이나 사무에 몰두해 있는 남자의 모습이 사랑을 촉발시킵니다.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가족과의 약속을 잘 지키고 가족과의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세상과의 약속도 잘 지킵니다. 사정이 어떠하더라도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상대편에게는 결례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가급적이면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

먼지는 날개가 없어도 어디든 자유롭게 날아다닙니다. 어쩌면 한 점의 먼지가 수십억 년 전에는 태산보다 큰 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먼지는 일체를 버리고 오직 한 점 먼지로만 남아 있습니다. 살다 보면 가벼움이 거룩함이 될 때도 있습니다.  37-38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랫말을 믿지 말라. 그대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사랑 주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랫말에 수없이 배신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41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놀고 싶을 때 놉니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들이지요. 잊고 싶을 때 잊고 보고 죽고 싶을 때 죽지는 못합니다. 혼자서도 할 수 없는 일들이지요.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여, 사랑하며 삽시다.  49


물속에서 피는 수련은, 한자로 물 수 자를 써서 수련(水蓮)이라고 쓰지 않고 졸음 수 자를 써서 수련(睡蓮)이라고 씁니다. 의외지요. 동틀 무렵에 피어서 해질 무렵에 잠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미녀는 잠꾸러기라는 말은 수련을 보고 지어낸 말이 아닐까요. 영어로는 물백합(water lily). 꽃말은 청순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울적해질 때마다 거울을 보세요. 그리고 거울 속에 있는 자기에게 다정한 목소리를 속삭여주세요. 아직 절망할때는 아니다. 존버.  53


미혼남녀의 사랑을 위한 힌트-여자는 자기를 예뻐해 주는 남자에게 목숨을 바치고 남자는 자기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여자에게 목숨을 바친다.

그대가 남자라면, 여자와 사진을 찍을 때, 한 족장 정도 카메라 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찍는 센스를 발휘합시다. 혹시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는 남자분 계신가요.

그대가 여자일 경우에는 명심하십시오. 사랑은 반드시 백마 탄 왕자와 함께 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말을 끄는 마부와 함께 오기도 합니다. 오, 알흠다운 사랑!  59-60


남자들이 어망에 들어 있는 물고기에게는 떡밥을 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여자들에게 묻겠습니다. 남편 집에 놔둔 채 요란하게 치장한 모습으로 외출하는 건 어망에 들어 있는 물고기에게 떡밥 안 주는 심리와 어떻게 다른가요.

사랑은 김태희하고 나하고 누가 더 예쁘냐고 물어보지 않는 것. 하지만 열 번을 물어도 그때마다, 니가 더 예뻐, 라고 대답해 주는 것.

꿈속에서 당신의 애인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잠을 깨니, 당신의 애인이 머리맡에 앉아 근심어린 표정으로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사랑해"라는 말을 제외하고 제일 먼저 해주고 싶은 말은?

권장 답안 - 이 개새퀴.  63


흙 한 사발과 금 한 사발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가치가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흙 한 줌이 더 가치가 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을 가지겠느냐고 물으신다면 당연히 금 한 사발을 가지겠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64


진실로 위장이 허기진 사람은 먹이를 대상으로 초근목피를 가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진실로 영혼이 허기진 사람은 사랑을 대상으로 우수마발을 가리지 않습니다.  66


2교시 수업 끝나자마자 도시락을 까먹는 녀석을, 참을성 없는 놈이라고 욕하지 마십시오. 녀석이 아침을 거르고 등교를 했다면 욕한 그대가 나쁜 놈이 되고 맙니다. 언제나 속단은 금물입니다. 급히 먹는 밥이 대개 소화불량을 초래해서 복통을 일으키는 법입니다.  73


그대 안에 천사가 거하지 않는데 어디 가서 천사를 찾겠습니까.  74


일어서십시오. 태어나자마자 헤엄치는 물고기를 있어도 태어나자마나 걷는 인간은 없습니다. 걷기를 배울 때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이 넘어져야 했던가요. 실패의 아픔을 모르는 자 성공의 기쁨도 모르나니, 오늘의 실패를 디딤돌로 내일 기필코 성공에 이르도록 힘쓰십시오.

비관론자들은 또 하루가 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또 하루가 가는 것이 아니라 또 하루가 오는 것입니다. 모든 하루는 그대를 위해 부여되는 하루라는 이름의 희망이요 기회입니다. 제가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만 부디 아름답고 요긴하게 쓰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아무리 썩어 문드러져도, 양심을 더럽히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가시는 당신을 끝까지 응원하겠습니다.  80


불행을 예약한 여자-자기를 죽도록 좋아하는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가 죽도록 좋아하는 남자에게만 목을 매는 여자.

가문, 학벌, 직업, 외모, 연봉-그런 것들 때문에 결혼을 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랑을 느끼는 사람들은 드물다.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짝퉁이다.  84


예술을 모른다고 크게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모르면서 비난하는 것은 분명 꼴불견에 해당합니다. 물론 예술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라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요.  89


당신이 투명인간으로 변했습니다.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이외수의 지극히 현실적인 답안-거울 보기.  94


가슴에도 씨앗을 뿌립시다. 꿈이 될 수 있는 씨앗, 꽃이 될 수 있는 씨앗, 열매가 될 수 있는 씨앗, 그런 씨앗들을 뿌립시다. 하지만 가슴이 척박하면 어떤 씨앗도 발아하지 않습니다. 가슴을 적시기에는 사랑이 제일, 받기만 하지 말고 주기도 합시다.  96


지갑에 돈 마르는 것 걱정하는 사람은 많아도 가슴에 정 마르는 것 걱정하는 사람은 드물지요. 그럴수록 인생은 삭막해집니다. 가슴에 꽃밭이 있어도 수시로 물을 주지 않으면 꽃들이 말라 죽고 말지요. 작고 하찮은 것들에게도 사랑의 눈길을 보내면서 삽시다.  99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속에 자리하지 머릿속에 자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떤 대상을 소유하고 싶을 때 머리가 앞서지요. 하지만 내가 대상을 소유하고 싶도록 만들지 말고 대상이 나를 소유하고 싶도록 만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세상만사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육체적인 사랑이 아니라 정신적인 사랑이라면 편애를 제외한 모든 사랑은 무죄입니다.  100


제도적 교육을 통해서 가르치는 정답들은 대부분 남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험과 연구를 거쳐 얻어낸 성과들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당신 소유의 진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경험과 연구를 거쳐 체득 산출한 당신 소유의 진리를 제시하는 일이다.  105


나태는 무능을 부르고 무능은 빈곤을 부릅니다. 무능과 나태와 빈곤을 모두 겸비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기와 불평과 욕설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는 거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사코 남의 결점만 물고 늘어집니다.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가족이 나를 적으로 대할 때, 또는 내가 가족의 적이 되어 있음을 자각할 때, 인생이 외롭고 슬퍼집니다.  107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얻기 위해 살아갑니다. 하지만 행복의 주체인 마음은 등한시하고 행복의 걸림돌인 물질에만 천착하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인 의식주만 해결되면 그다음부터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지요.  108


저는 곱하기, 더하기, 나누기, 빼기만 아는 정도로도 평생을 불편 없이 살았습니다. 심지어는 그것들조차 계산이 틀릴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가끔 계산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계산하고 사는 사람보다 편하고 행복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른다는 사실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죄를 불러오는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제게 너무 많은 재능을 주셨다고 부러워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재능은 가난과 열등, 두 가지뿐입니다. 저는 그 두 가지를 극복하기 위해 날마다 진저리처지는 노력을 거듭했지만, 그분들 눈에는 결과만 보였겠지요.  110


날개를 움직이지 않고 멀리까지 날아갈 수 있는 새가 어디 있으며 지느러미를 움직이지 않고 멀리까지 헤엄칠 수 있는 물고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수로하지 않고 얻으려는 자 도둑의 심보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 끼니를 거르고 살더라도 불로소득을 꿈꾸지는 않겠습니다.  111


당신도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축복으로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재앙으로 생각하시나요. 축복으로 생각하신다면 그 대표적인 이유는 무엇이며 재앙으로 생각하신다면 그 대표적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114


작가가 되려면 먼저 잠부터 극복하라. 하다못해 좀도둑도 투철한 직업정신 하나로 날밤을 하얗게 세우는데 명색이 작가지망생이라는 작자가 초저녁부터 꾸벅꾸벅 졸고 잇다니, 좀도둑 보기가 부끄럽지 않은가.  115


일부 작가지망생들은 괜찮은 소재 하나를 붙잡게 되면 처음에는 열정과 의욕이 넘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무력감에 빠져버린다. 예술이 뛰어난 재능의 소산이 아니라 뛰어난 정신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겪게 되는 현상이다.  

철저하게 미쳐라. 내가 쓰면서 감동받지 못한 부분은 독자들은 읽으면서 감동받지 못한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친놈 소리를 들을 때까지 미쳐라.  116


감성마을 밤하늘에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별이 총총합니다. 바람이 심하게 불면 마당 가득 떨어지기도 합니다. 가끔 주워서 목걸이를 만들어 아내에게 걸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이아를 좋아하는 아내의 눈에는 안 보인답니다. 뭐, 어쩔 수가 없지요.

아내가 하늘의 별을 따달라고 하면, 닥쳐, 니가 따, 이 따위 소리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 지금 사다리를 구해 보고 있는 중이야, 정도의 성의라도 보여야 합니다. 가정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전적으로 남편에게 있습니다. 물론 아내들의 주장에 의하면.  117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마이 있지요. 하지만 남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존재들은 대개 남다른 열정과 노력을 쏟아붓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러우면 지는 게 아니라 따라 하지 못하면 지는 게 아닐까요.  121


육신의 양식인 밥은 먹으면서 정신의 양식인 책은 안 읽는 분들이 많습니다. 밥은 안 먹으면 죽습니다. 그러나 책을 안 읽는다고 죽지는 않습니다. 살기는 삽니다. 다만 영혼이 죽은 채로 살아갈 뿐이지요.  122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규칙과 어떤 경우에도 주인의 명령을 어기면 안 된다는 규칙을 프로그램으로 간직하고 있는 로봇에게 주인이 한 사람을 지목해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로봇의 예상행동은?  125


음식의 차이는 문화의 차이로 보아야 합니다. 어떤 나라 사람에게는 구토감을 불러일으키는 음식이 어떤 나라에서는 귀한 손님께 대접하는 특별음식이 되기도 합니다. 그 나라의 역사와 전통과 자연을 모르면서 음식을 비난하는 것은 몰지각한 소치입니다. 

음식에 정성이 들어가지 않으면 맛이 나지 않습니다.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성이 들어가지 않으면 아무런 감동이나 의미를 맛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정성은 잘 만들겠다거나 잘 쓰겠다는 욕심이 아닙니다. 바로 먹는 이와 읽는 이에 대한 사랑입니다.  128


향기 있는 미끼 아래 반드시 죽는 고기가 있다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얻어지는 재물이나 영달은 모두 향기 있는 미끼일 가능성이 큽니다. 덥석 물었다가는 어망 속으로 직행할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그대의 행복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  133


익명으로 글을 쓸 때,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마음은 보입니다. 얼굴이 못생긴 건 성격으로 얼마든지 가릴 수 있지만, 마음 비뚤어진 건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습니다. 마음이 더러운데 인생인들 깨끗하겠습니까. 그래서 공부 중에 가장 큰 공부가 마음공부지요.

뛰면 벼룩이요 날면 파리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호감이 안 가는 사람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뛰면 우사인 볼트요 날면 이신바예바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뛰면 벼룩이요 날면 파리는 되지 않도록 마음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135


공처럼 둥근 물체가 아니면 보는 각도에 따라 형태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며 물체가 아닌 이념이라면 더욱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저도 다양성은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곧 다양성이 정당성은 아니라는 견해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137


대부분의 기계는 쇳덩어리입니다. 하지만 인도 출신의 과학자 찬드라 보스에 의하면 쇳덩어리도 기억과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다정다감하게 대해 주세요. 그러면 말썽을 잘 일으키지 않습니다. 하물며 사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143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자신의 비굴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는 사람은 정의를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불의에 대한 침묵에 불의에 대한 동조에 가깝습니다. 반성치 않는 불의에 용서나 자비를 남용하는 것은 불의를 부채질하는 소치가 다름이 없습니다.  145


아는 것이 힘이라는 속담이 있는가 하면,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도 있다. 어느 한쪽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느 한쪽도 영원불변하는 진리는 아니다. 한세상 살다 보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으니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써먹으라는 조상들의 배려.  149


경험이 모두 지혜가 되지는 않습니다. 잘못에 대한 반성과 개선에 대한 의지가 지혜를 숙성시킵니다. 자기 점검이 없는 경험은 두뇌 속에 그저 단순한 기억으로 축적될 뿐이지요.  151


사람의 가치를 잴 수 있는 계측기는 아직 발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서푼어치도 못 되는 안목으로 뻑하면 남을 재단하고 비난을 일삼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자기들이 저급하고 무가치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려서 어떤 이득을 얻어내겠다는 뜻일까요.  155


세속적인 잣대와 안목을 버리지 못하는 살마들은 흔히 진짜에게는 경계심을 보내고 가짜에게는 신뢰감을 보내는 오류를 범합니다. 당신이 만약 진짜라면 이런 경우 어떤 태도를 보이시겠습니까.  157


글에 담긴 메시지나 행간에 담긴 상징적 의미, 함축선 따위는 등한시하고 말꼬리나 잡고 늘어지는 마구간 출신 논객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의 논조는 언제나 조소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조소에 어설픈 애국심까지 처발라져 있으면 주접이 솜털까지 오그라들게 만들지요.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면서 쾌감을 얻는 행위를 영웅심리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분들이 계시지요. 하지만 그건 영웅심리가 아니라 졸개 심리입니다. 약자를 괴롭히는 영웅은 없습니다. 진정한 영웅은 약자를 구하는 일에 자신의 힘을 씁니다.  158-159


야외에서 가마솥 걸어놓고 돼지고기에 시래기국 끓여 먹던 맛과 운치를, 어찌 휴대용 가스버너와 코펠 따위로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에 이르러 편리함은 얻었으되 정겨움을 잃었으니, 세상이 마냥 좋아졌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서양은 철학이든 예술이든 옛 사조의 반동에 의해 새 사조가 탄생합니다. 하지만 동양은 온고이지신에 의해서 새 사조가 태어납니다. 별다른 숙고 없이 서양의 풍조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미풍양속까지를 사라져버리게 만드는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161


진정한 종교는 사랑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실천할 수 없는 사랑은 때로 방관보다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종교든 사랑을 실천한답시고 전쟁을 불사하기도 합니다. 나의 희생은 꺼리면서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종교는 지구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165


세상을 다 버린다 해도 너를 버릴 수는 없어. 막장 드라마에나 등장할 법한 대사이지요. 하지만 내가 말하는 쪽이라면 닭살이 돋아도, 내가 듣는 쪽이라면 새살이 돋을 것 같은 대사입니다. 그래서 특히 아줌마들이 채녈을 못 바꾸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진심으로 사랑을 하는데 유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까.  169


물질적으로는 풍족한데 정신적으로는 빈곤하다면 그것은 불행입니다. 단지 그대의 가치관을 수정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인생에도 온실형과 잡초형이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밑바닥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온실형보다는 잡초형에 가깝습니다. 물론 빛깔도 향기도 잡초형이 강하지요. 벌나비가 많이 날아오는 것은 당연지사. 플라스틱 가화(假花)와는 비교치 마시기를.

지금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미래가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와 똑같이 살지만 않는다면, 내일은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대의 내일이 아름답기를 빕니다. 그대의 내일이 행복하기를 빕니다.  172


내게 만약 딸이 있었다면, 금고를 못 가진 남자에게는 시집을 가더라도, 서재를 못 가진 남자에게는 시집을 가지 말라고 조언했을 것이다.

사랑에 조건이 붙는 순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다.

인생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인생은 밥을 굶는 인생과 사랑을 굶는 인생이다.  175


젊은이들은 대개 자기가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삽니다. 그들은 때로 자신의 천금 겉은 시간들을 허영이나 쾌락으로 낭비해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젊어서 실력 연마를 게을리하면 늙어서 행인 1, 2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때는 역전도 없습니다.  187-188


집필실에 습도계를 비치하지 않았을때는, 건조하면 건조한 대로, 눅눅하면 눅눅한 대로 불평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습도계를 비치한 뒤로 목구멍이 칼칼하다. 콧구멍이 당긴다. 유난을 떨어대는 상황들이 발생합니다. 하나의 물건에는 하나의 근심도 따라옵니다.  201


돈보다 중요한 것이 앎이고 앎보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입니다.  216


시간이 달콤합니다.  220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대 기도하겠습니다. 노력도 하지 않고 모든 일상을 '해주십시오'로 일관한다면, 인생을 통째로 거저 먹겠다는 심보 같아서 왠지 저 자신이 한심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하기 전에 피눈물 나게 노력하는 모습부터 보여드리겠습니다.  228


아주 가끔은 제 공식 홈페이지 대문에 큼지막한 글씨로 '애인구함'이라는 팻말을 내걸고 싶습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습니다. 그냥 지독하게 외롭다는 뜻입니다. 

무심코 차를 마셨는데 써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맛대가리 없다는 생각보다 울컥 외로움이 먼저 사무쳤습니다. 혀로부터 느끼는 외로움이라니, 참 지랄 같지 않습니까.  235


예전에 나는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랭이가 찢어진다'라는 속담의 모순에 대해 지적한 적이 있다. 가랭이가 찢어진다니 웃기지 마라. 뱁새도 명색이 새다. 날개가 있다. 왜 걸어서 황새를 따라가냐. 푸헐, 뱁새 너무 깔보기 어어없기.

인생은 창조다. 그래서 매뉴얼이 존재하지 않는다.  239


정신적 빈곤도 우울증을 부르는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정신적 빈곤을 물질적 풍요로 해소하려는 분들이 계십니다. 명품 핸드백을 걸친다고 텅빈 영혼의 허기가 충족될까요. 자연과 예술과 사랑을 강추합니다. 가끔은 이외수의 책들도 읽어주소서.  252


무가치한 일에 목숨을 걸고 부모와 가족까지 곤궁에 몰아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책을 많이 읽지 않았거나 읽었더라도 건성으로 읽은 사람들입니다. 이 말에 발끈하시는 분들도 역시 마찬가지.

나쁜 짓을 하고 자기 혼자 욕먹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대개 주변 사람들 역시 도매금으로 욕을 먹게 됩니다. 세상을 망치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배려를 모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니 사랑인들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을 해본 적인 없는 사람은 시간의 실체를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누군가에게 가위나 칼 따위를 건넬 때 자루가 자기 쪽을 향하게 하고 날이 상대편을 향하게 하는 사람이라면 배려 따위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 정도는 굳이 교육을 받거나 수행을 거치지 않아도 터득되는 소양이 아니겠습니까.

나 때문에 남이 수고하면 미안해지는 것이 당연지사입니다. 그런데 전혀 미안해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른바 '나뿐인 사람들'이지요.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남을 사랑할 줄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설마 당신의 애인이 그렇지는 않겠지요.  259


평생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에게는 늙어 죽을 때까지 만족이 오지 않습니다. 평생 타인을 위해 헌신하며 사는 사람은 늙어 죽을 때까지 크게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나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260

 

글쓰기에 필요한 그대의 감정지수와 문장력, 그리고 집중력을 높이고 싶다면 날마다 연애편지를 쓰세요. 반드시 이성에게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 은백양나무나 며느리밥풀꽃, 모두 괜찮습니다. 사랑은 글을 숙성시키는 특급 발효제입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다. 일흔 즈음에 들어도 가슴이 아릴 것 같은 노래입니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끝 소절을 '매일 사랑하며 살고 있구나'로 개사해 부를 수 있는 인생이기를 빌어봅니다.  265-266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열받았을 때는 웃지 말아야 합니다. 열받았을 때 웃으면 비웃음으로 보일 가능성이 짙기 때문입니다. 교훈도 때와 장소에 따라 이용가치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살면서 수시로 자각하게 됩니다. 나는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주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구나. 저만 그건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 사실을 망각하고 삽니다. 그래서 불평불만, 근심걱정이 끊이지 않는 거지요.

어릴 때는 아무도 사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불혹의 나이로 접어들면서 더러 세상에는 무시해야 할 살마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순을 넘긴 지금은 비로소 통감합니다. 무시하는 놈도 무시당하는 놈도 결국은 외로울 뿐이라는 사실을.  269


그대가 미신처럼 신봉했던 사랑이 한낱 발정에 근거한 육체적 목마름이 아님을 명확하게 증명할 방법이 있는가. 없다. 그것은 인생을 처참하게 말아먹은 다음에야 명확하게 증명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271


저는 나이 들수록 시름시름 기력이 떨어지는데 고독은 아무리 나이 들어도 독야청청합니다.  277


당신은 나이만큼의 글자수로 자신의 심경을 토로할 수가 있습니다.  279


수험생들은 대개 시험 보는 날 아침 죽을 먹지 않습니다. 죽을 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 차남은 수능 보는 날 죽을 먹고 시험장으로 갔습니다. 식은 죽 먹듯이 쉽게 치르겠다는 의도였습니다. 물론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매사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282


누나가 의상실을 차렸습니다. 상호는 '희망 의상실'. 그런데 장난기가 발동해서 간판의 글자들을 그대로 두고 띄어쓰기만 바꾸어보았습니다. '희망의 상실.' 띄어쓰기가 왜 중요한지 이제 아셨지요. 눈치 못 채셨으면 난독증입니다.  283


어떤 분이 제게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여러 책에서 같은 소리를 반복하시나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반복합니다. 그가 다시 반문했습니다. 당신이 술 마시고 같은 소리 하시는 것도 중요해서인가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그건 제가 실성했다는 뜻입니다.  295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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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디 같은 사람과 살아간다면 너무 좋겠다'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주연이지만 영화의 절반도 되기전에 죽는다.

'루디도 참 행복하게 죽는구나' 영화를 다보고나서 들었던 생각이다.

이 영화는 위의 두 가지 외에도 현대인들이 꼭 생각해야할 꺼리들을 담아내고 있다.

영화는 애절함을, 뭉클함을, 행복감을 들게도 하였고, 비통함을, 안타까움을 들게도 하였다.

앞의 감정들은 루디와 부인 트루디를 보면서 들게되고, 뒤의 감정은 자녀들을 보면서 들었다.


세 자녀들은 살아가는데 바쁘다. 시간의 여유가 아니라 부모에게 시간을 줄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부모에 대한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에 그리고 편한 것에 더 익숙한 나머지 부모에게 시간을 투자하기위해 자신의 시간을 비워내지 못한다. 돌아가신 후에도..

그들의 대화는 부끄러워지게하여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마음은 가지고 있으나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 모습이 나를 비추는건 아닌가해서..

자녀들은 부모의 방문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첫째아들은 싫어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회사생활을 하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가 어렵다. 부모에게 자신의 시간을 쓰는 것이 투자라고 하는게 맞을까.. 부모는 그리 오래 자식들과 함께할 수 없다. 그렇기에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시간이라면 투자라 할 수 있을것이고 투자해야만 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딸은 동성애자로 나오는데 그 역시 부모에게 시간을 할애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애인이 부모에게 더 잘하는모습이다. 뭔지 모를 부모에게 불만을 가진것처럼 보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반나절쯔음 부모님과 함께 있다가 언성을 높이게 된다.

지극히 일반적이라 할 수도 있을만한 일이긴 한데, 그 모습이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막내 아들 칼은 일본에서 생활한다. 엄마가 좋아하는 일본, 동경하는 일본 하지만 일본을 보기전에 엄마는 세상에 없다. 아버지만 그것도 엄마의 흔적을 함께하여 대신온 아버지만 일본을 방문한다. 루디는 아내의 원을 대신 이루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고 그녀와 함께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하지만 아들의 눈에는 그것이 아니라 이상한 행동을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뿐이다.

아버지가 아침식사로 엄마표 롤을 만들어 주었을때, 엄마의 생각으로 자리에서 울기도 하지만 아버지와의 거리감은 전혀 좁혀지지 않는다. 함께 술을 마시고는 결국은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말을 뱉는다. 직장때문에 가족을 버린 아버지로 생각한다.

퇴근해서 아버지가 계시지 않을 줄 알고 집에서 누나와 통화를 하면서 '아버지가 이상하다. 엄마 옷을 들고 뭐하는지 모르겠다. 혼자 종일 다닌다.'

결국 아버지의 장례식에 모였을때와 엄마의 장례식에서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전혀 연결되는 내용은 아니지만 김애란의 <두근 두근 내인생>에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데인 것처럼...' 맞아. '늙음'에 데인 것처럼 놀랐다고 했어요.

"저는 잘 이해가 안돼요."

"뭐가?"

"나이 든 사람 피부에 탄력이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잖아요."

"그렇지."

"머리가 세는 것도, 이가 빠지고, 눈이 나빠지고, 주름이 느는것도,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잖아요."

"그래."

"그런데 그렇게 좋아했다면서, 그 짧은 접촉 한번에, 마치 늙음이 자기에게 옮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정색하고 돌아설 정도면, 그 여자가 상상한 늙음이란 대체 어떤 거였을까요?"  134-135

책의 내용은 노교수와 젊은 제자의 사이에서 잠시 스친 촉감때문에 일어난 사건의 표현이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그런마음을 가진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행동은 책의 내용에서의 행동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내 경우에서 말이다


소통이란건 마음이 서로에게 닿아야 한다. 소통은 생각이 아니라 생각의 행동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자녀들이 아버지와의 소통자체가 없다. 생각부터 없어보인다. 부모에게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것처럼 소통을 위한 시간을 먼저 만들어 가야 하는것이 아닐까.

대체로 우리는 있을때는 잘 모르다가 없어야 소중함을 느끼게 되듯이, 부모의 존재유무는 매우 큰 자리를 차지한다. 

부모에대해 자신의 마음은 그리고 자신의 행동은 어떠한지 생각해 보게 되는 영화이다.


트루디는 정년을 1년쯤 남겨둔 남편의 암선고를 받게되고, 사실을 숨긴채 남편 루디와 여행을 떠난다. 저녀들이 있는 곳으로 그리고 보고 싶은 바다가 있는 곳으로.. 그리고 트루디는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그녀는 원하던 일본을 가지는 못하였지만, 베를린에서 부토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그림자의 춤 부토. 그녀는 마지막에 부토를 떠올리며 자신이 분장하였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잠결에 숨을 거둔다.

트루디가 남편 루디를 바라보는 눈빛과 표정을 각인하였다. 그 온화하며 잔잔하지만 깊은 사랑을 간직한 표정. 손주의 방에서 침대와 바닥에서 따로 잠을 청하지만 서로 손을 잡으며 짓는 표정은 삶에서 사랑에 의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평온함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두에서 언급한 생각이 든 지점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였지만 그런 마음보다 더 큰 애정을 간진한 사람의 사랑.

남편을 떠나보내야하는 무너지는 가슴에도 애정은 더 커짐이 표정에 담겨있다.

인스턴트 식품에 묻혀 인스턴트 사랑의 시대에 더욱 염원하게 되는 장면이 아닐까. 


트루디를 급작스럽게 떠나보낸 루디는 상실감을 그러면서 그제서야 떠난 부인의 모든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부인이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되고 그녀를 위한 여행을 한다. 막내가 살고 있는 일본으로. 

서먹한 아들의 비수를 찌르는 행동과 말고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을만큼 오직 아내 트루디만 생각한다. 

그녀의 옷가지들을 들고 여행하고 낮시간 다닐때는 코트 속에 부인의 옷을 입고 함께 여행한다. 

한적한 공원에서 부토춤은 추는 유(아야 이리즈키)를 알게되고 그제서야 부토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녀를 통해 아내와 더 교감할 수 있게 되고, 유를 통해 심신의 안정을 조금씩 찾아가게 된다. 결국 함께 후지산으로 향한다. 아내가 보고싶어하는 후지산으로.

그는 후지산이 선명하게 보이는 날 새벽 조용히 부토 화장을 하고 후지산 근처 후지산을 띄운 호수앞에서 부토 춤을 춘다. 영화는 부토 춤을 추는 루디에게 어느새 트루디와 함께 추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루디는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루디는 행복하지 않았을까. 

잊지못하는 상실감을 부인의 마음을 알게되면서 그녀와 공감하며 죽게되는 루디. 나는 행복한 죽음이라 생각하게 된다.






아래는 영화에서 트루디역을 맡은 하넬로레 엘스너의 인터뷰이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찾다가 보았는데 그녀의 설명이 다시금 영화를 생각나게 하여 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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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속에 이야기, 그 속에 다시 이야기가 있는 영화이다.(액자식구성이라고도 하더라.)

1944년 전쟁의 끝에 첫눈에 반한 젊은 군인과 여인은 사랑을 하게 되고 전쟁후 귀국했던 군인은 여인에게로 다시 돌아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에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생활한다.  아이가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죽게 되면서 부부는 상처를 서로 안아주지 못해 별거하게 된다. 그 사이 남자는 무언가에 끌려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 

이후 부인을 찾아가 자신의 글을 건네고 돌아오라하고, 부인은 글을 읽고 감동하여 돌아오지만, 돌아오는 기차에 원고를 두고 내린다. 뒤늦게 원고를 잃어버린걸 알게 된 두 사람은 결국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현대로와서 작가를 꿈꾸는 로리(브래들리 쿠퍼)는 도라(조 샐다나)와의 프랑스로의 신혼 여행에서 골동품점에 들러 가죽가방을 구입한후 돌아온다. 로리 역시 작가가 꿈이며 책을써 출판사들에 돌려도 계속 퇴짜를 맞는 중에 생계를 위해 출판사에서 일을 한다. 출근준비를 하던중 가방에서 우연히 원고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모두 읽고 종일 그 글을 생각한다. 결국 새벽에도 잠이 깨 원고를 철자 하나 틀리지 않게 타이핑 한다. 우연히 도라는 그 들을 읽고 감동하여 출판을 권유하게 되고 결국 로리는 출간하게 되고, 올해의 문학상을 받게 된다.

그러던 중 원고의 원래 저자인 올드맨(제레미 아이언스, 1940년대 젊은 군인)이 방문하여 이야기는 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 내용을 쓰면 왠지 안될것 같아서..ㅎ)





결국 이 내용 전체는 클레이(데니스 퀘이드)의 책 내용이다.

이러한 이야기속에 이야기 또 그속에 이야기를 가진 영화이다. 참고로 영화의 진행순서와는 상관없이 내용을 적은 것이다.


로리는 올드맨을 만난후 자책감에 부인 도라에게 말하고 편집장에게도 밝힌다. 올드맨은 밝히지 말라고 한다. 도라도, 편집장도 밝히지 말것을 종용한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답이야 달라질 질문이지만, 어떻게 하는것이 좋을까?


영화의 내용중에 몇 개의 대사로 생각해 보려한다.

우선 로리가 결혼전 도라와의 동거중에 온전히 글 쓰는데 집중하느라 생활이 어려워지자 아버지를 찾아가 도와줄것을 요구하는 장면에서 아버지는 잔소리를 늘어놓은 후 결국은 도와준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남자란 건 아무리 버틸 수 없는 고통이 있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그것의 한계까지 버텨낼 수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로리가 올드맨에게 찾아가 자신의 생각은 사실을 밝히는 것이라 했을 때 올드맨은 그럴 필요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선택을 해야 하지. 그리고 그걸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곳을 벗어난 로리는 벤치에 앉아서 독백으로 "우리 모두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어려운 부분이다."


영화의 후반에 클레이는 다니엘(올리비아 와일드)에게 "어떤 면에서는 당신은 삶과 픽션에서 선택을 해야해."라 한다.


로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클레이는 어떤 결말을 선택해야 할까?


세 작가의 이야기, 사랑이야기지만 영화를 보면서 선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충분히 우리 삶에서 일어날 수 있을 부류이기에 인생은 하나의 연극이라 부르기도 한다.

자신의 배역과 성격을 선택하여 연기하는 것이란다.

그만큼 선택이란 것의 연속이기에 선택에서 올바른것보다는 편한 선택이 더 유혹적이기에.. 

영화에서 라면 로리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맞을까

답이 없는 질문이기도, 너무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으면 우린 편한 선택을 해버리기 쉽기에, 편한 선택이 무조건 틀린건 아니지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마음에 늘 무거운 돌덩이를 올려놓는 결정을 할 수 있기에, 때론 맹목적을 따라만 가기에.. 


나는 아직 답이 없다. 나였어도 출판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 올드맨을 만나고 그가 밝히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밝히지 않을지 모르겠다. 올드맨이 밝히라고 한다면, 어떨게든 막으려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지점에서 어떤 악행이 추가될지 모른다. 

그래서 고민해봐야 했다. 

나는 답이 언능 떠올리기 힘들어 시간을 두면서 계속 고민할 것같다.

고민하는 중에 그러한 일이 발생되더라도 좀더 바른 결정을 하기 위한 기회를 가질 수 있을거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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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어느 섬을 방문한 한 스페인 선교사가 세 명의 아스텍 사제들과 마주쳤다. 

"당신들은 어떻게 기도합니까?" 선교사가 물었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기도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우린 이렇게 기도하지요. 신이시여, 당신은 셋이고 우리도 셋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스텍 사제들 중 한 명이 대답했다.

선교사는 말했다.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그러나 신께서 귀 기울이시는 바로 그 기도는 아닙니다. 제가 당신들께 훨씬 더 좋은 기도를 가르쳐 드리지요."

선교사는 그들에게 가톨릭의 기도문을 가르쳐주고, 복음 전도를 위한 항해를 계속했다. 수년 후, 그가 탄 배가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섬에 들렀다. 갑판 위에 서 있던 선교사는 해변에서 배를 향해 손을 흔드는 세 명의 아스텍 사제들을 보았다. 그들 세 사람은 물 위를 걸어 그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신부님, 신부님!"

배를 향해 가까이 걸어오던 세 사람 중 하나가 소리쳤다.

"신께서 귀 기울이신다는 그 기도를 다시 가르쳐주십시오. 그게 어떻게 시작되는지 잊어버렸습니다."

기적적인 장면을 목도한 선교사가 대답했다. "그게 뭐든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는 신에게 용서를 구했다. 신은 모든 언어를 두루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잘못에 대해.


이 일화는 내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담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진정한 경이에 둘러싸여 산다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기적은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다. 신이 보내는 신호는 우리에게 주변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다. 신이 보내는 신호는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고, 천사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신에게 이르고자 한다면 일정한 형식과 규칙들을 따라야만 한다고 가르침 받아온 탓이다. 우리는 신이 도처에 편재한다는 사실을, 신은 우리가 그/그녀를 허락하는 곳이면 어디든 임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전통적인 종교의식들은 중요하다. 그 의식들을 통해, 우리는 경배와 기도의 체험을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있다. 그러나 영적 체험이 구체적인 사랑의 체험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그리고 사랑에는 어떤 규칙도 없다는 것을, 대인관계를 다룬 책을 읽거나, 감정을 조절하고 행동을 위한 전략들을 개발하려 애쓸 수도 있지만, 그런 행동들은 부질없을 뿐이다. 결정은 우리 마음이 하는 것이며,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이 마음의 결정이다. 

누구에게나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말한다.

"난 지금 그럴 만한 가치도 없는 사랑 때문에 너무도 괴로워하고 있어."

받는 것보다 더 많이 주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고통스러운 건 아닌가. 우리가 만든 규칙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괴로운 건 아닌가. 본질적으로는 아무런 이유 없이 괴로워하고 있는게 아닌가.

사랑에는 성장의 씨앗이 깃들여 있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우리는 영적 체험에 보다 가까워진다. 참으로 깨달은 자, 사랑으로 뜨겁게 데워진 영혼은 모든 편견을 넘어설 수 있다.  11-14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온전히 내주는 행위이다.

이 책은 자신을 내주는 행위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작중인물인 필라와 그녀의 친구는, 우리가 우리의 반쪽을 찾아나설 때 만나게 되는 수많은 갈등들을 상징한다.

우리는 우리 내부의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한다.  14


수도사 토머스 머튼은 말했다. "사람들은 타인을 보호하거나 도와주거나 선행을 베풀기 위해 사랑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그렇게 대한다면, 그건 그를 단순한 대상으로만 여기고 자기 자신을 대단히 현명하고 관대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사랑과는 전혀 무관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타인과 일치하는 것이고, 상대방 속에서 신의 불꽃을 발견하는 일이다."  14


모든 사랑 이야기는 닮아 있다.  21


길은 걸으면서 만드는 것이었다.  22


우리는 우리 내면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한때 우리 자신이었던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53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어린아이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아이를 성가셔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아이를 혼자 내버려두고 그 아이의 말을 거의 듣지 않음으로써, 그 아이가 겁을 집어 먹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아이가 사랑받고 있음을 다시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 아이를 즐겁게 해야 합니다. 

타인의 눈에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54


현실에서의 사랑은 가능성이 있어야 합니다. 설사 내가 주는 사랑에 대해 당장 대답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언젠가는 원하는 사람을 가질 수 잇으리라는 희망이 있어야 존재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지 않은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사랑을 위하여!"

"때론 사랑이 유치한 짓에 지나지 않음을 이해하는 현명한 사람들을 위하여!"

"현명한 사람은 오직 그가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현명한 것!"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랑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  61


사랑은 덫으로 가득하다. 사랑이 그 모습을 드러낼 때, 사랑은 오직 밝은 면만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 그 빛이 만든 그림자는 볼 수 없게 한다.  69


"삶에는, 얻기 이해 끝까지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있어."


새 신발을 신으면 발이 좀 아픈 법이다. 삶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원치 않을 때, 그리고 필요치 않을 때도, 삶은 우리를 의외의 무언가로 사로잡아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도록 한다.  83


"좌절도 있지요. 누구도 그걸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위한 싸움에서 뭔가를 잃는 편이, 자신이 뭘 위해 싸우는지도 모르는 채 좌절하는 것보단 훨씬 낫겠지요."  93


"너,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연습을 했구나?"

"응, 어떻게 알았니?"

"너도 변했으니까. 사람들은 항상 가장 적잘한 시기에 그 연습을 하게 되거든."  129


'사랑은 결코 조금씩 오지 않아.'  133


"삶의 신비가 나를 사로잡았어. 난 그걸 더 잘 이해하고 싶었어. 누군가. 대답을 알고 있다고 말해줄 그곳을 찾아 헤맸지. 인도도 가보고 이집트도 가봤어. 마법과 명상의 달인들도 만나봤어. 연금술사와 사제들의 곁에서도 머물렀지. 그리고 결국 나는 내가 찾고 있던 것을 발견했어. 그것은 믿음이 있는 곳에 진실이 있다는 사실이다."  134


"너 추워서 떨고 있구나. 억지로 의식에 참가할 필요는 없어."

"넌 여기 계속 있을 거지?"

"그래. 이게 내 생활인걸."

"그렇다면 나도 같이 있을 거야."

하지만 내심 그곳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게 너의 세계라면 나도 그 일부가 되는 법을 배우고 싶어."  159


사랑은 사랑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을 뿐이었다.  171


"<주역>에서 말하길, 도시는 바꿀 수 있어도 샘이 있던 자리는 바꿀 수 없대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발견하는 곳은 바로 샘 근처죠. 사람들은 그곳에서 갈증을 씻어내고 집을 짓고 아이들을 기르지요. 하지만 그들 중 한 사람이 떠나길 원한다 해도, 샘을 옮겨갈 수는 없어요. 그러니 사랑은 그 자리에 남게 되죠. 버려진 채로 말이죠. 샘에는 여전히 맑은 물이 가득 차 있겠지만요."  182


"하느님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나는 사람은 시간 낭비만 하고 있는 거요. 물론 수천 갈래의 길을 걸을 수 있고, 다양한 종교와 종파를 만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결코 하느님과 만날 수 없어요. 하느님은 여기 있소. 바로 이 자리에, 우리 곁에. 우리는 이 안개 속에서도 그를 볼 수 있고, 우리가 걷고 있는 이 땅에서도 볼 수 있소. 심지어 내 신발에서도 볼 수 있지요. 하느님의 천사들은 우리가 잠자는 동안 밤새워 우릴 지켜주고, 우리가 일 할 때면 곁에서 도와줍니다. 하느님을 만나려면 주위를 둘러보기만 하면 돼요. 하지만 이 만남은 쉽지 않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신비에 동참하도록 더 많이 요구하실 수록 우리는 더욱더 혼란스러워지니까요. 신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우리의 꿈과 마음을 따르도록 요구하시기 때문이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다른 방식으로 사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걸 따르는 일이 쉽지가 않소. 그러나 결국 우리는 신께서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놀라움과 함께 발견하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니까요."  191-192


"잔이 떨어질 것 같아." 그가 말했다.

"그래, 난 네가 이걸 테이블 아래로 밀어버렸으면 해."

"잔을 깨라고?"

그래. 잔을 깨는 거야. 겉보기엔 간단한 동작이지만, 컵을 깬다는 것은 그 정체를 알지도 못하면서 가지게 되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값싼 유리잔 하나를 깨버리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일상 다반사인 것을. 

"잔을 깬다구? 왜?" 그가 다시 물었다.

"이유야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 하지만 사실은 그냥 깨기 위해서 깨는 거지."  232-233


난 잔을 깼다고 영수증에 깨진 잔 값이 청구됐다는 사람의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어. 깨진 잔은 삶의 일부일 뿐, 우리에게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아. 식당 주인에게든, 우리 이웃에게든.'  233


'잔을 깨, 제발... 어리석은 편견들로부터 자유롭게 해줘.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다른 모든 살마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게 해달란 말야.' 

"잔을 깨."  234


"사실 전 가진 게 없어요."

"아가씨에겐 아가씨의 삶이 있어요. 기나긴 삶이. 그걸 좀더 잘 간직하도록 해요."  272


"사랑은 그 자리에 있어요. 변하는 것은 사람들이죠!"  276





옮기고나서


답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지만 길이 끝나는 곳에 답은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는 말한다. "모든 사랑 이야기는 닮아 있다."  288


길을 떠나는 사람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지 말아야겠다. 그건 그의 노정에 대한 예의가 아니므로. 대신 그와 더불어 떠날 용기를 내야겠다. 머물러 바라보지 말고, 함께 걸어주어야 겠다.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말하기.  292-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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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같은 하늘 아래에서 그녀와 같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비행기를 탔다.  6


어째서 홍이의 외로움을 좀 더 이해해주지 못했을까. 어째서 그녀 입장에 서서 생각할 수 없었을까.  8


첫눈에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이라고 느꼈다.  12


언제나 첫인상만큼 믿지 못할 것도 없다.  13


마음의 문을 닫고 고집스럽게 칸나를 원망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홍이의 존재는 정말이지 내게 성모 그 자체였다.  30


한마디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그러나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던 탓에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자라고 말았다.  36


시집을 발견한 나는 엎드려 별 생각 없이 책장을 펼쳤다. 읽기 위해서라기보다 거기서 홍이의 흔적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47


둘 사이에는 한 장의 천도, 둘 사이의 가르는 문도, 세상을 차단하는 높은 벽도, 끝없는 국경선도 없었다.  67


바다가 보고 싶다고 떼를 쓰는 저녁이면 대개 혼자서 몰래 울었다. 

"같이 있는데 뭐가 쓸쓸해?"

나는 그녀가 몰래 울 때마다 그렇게 물었다. 홍이는 눈물을 감추며 쓸쓸해서 그런 거 아니야. 하고 말했지만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77


"글쎄, 엄마가 일본 사람하고는 결혼 못한다잖아."

그래도 그때가 우리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132


사소한 한마디, 별 뜻 없이 한 말이 그 틈에 커다란 균열을 만들어 버리는 일이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아무도 그것이 심각한 줄을 모른다. 병을 앓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161


"일본도 마찬가지야! 나도 케이크만 시킬 때가 있다고!"

"누가 준고 생각을 물었어? 난 일반적으로 말해서 한국과 일본은 문화가 다르다고 한 것뿐이야."

"그렇지만 네가 문제를 비약시키잖아. 케이크와 음료가..."

우리는 녹초가 될 때까지 그런 바보스런 논쟁을 되풀이하다 결국엔 등을 돌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홍이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준고, 부탁이야. 내게 다정하게 대해 줘. 부탁이니 무조건 날 지켜 줘. 준고, 부탁이야. 무슨 일이든 내 편만 들어 줘'

그런데도 나는 홍이의 고독한 마음을 받아 주기는 커녕 내치려 했다. 왜 홍이가 조바심을 내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하려 했다면, 홍이가 마리코와 싸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빵집 마리코 탓이 아니었다. 그건 전부 내 탓이었다.  173


"잘못했다고 하면 되잖아. 사과하면 누가 벌이라도 줘? 너희 일본 사람들은 어째서 그런 말 한마디를 못하는 거야?"  178


"엄마가 왜 일본 사람하고 결혼 못하게 하는지 겨우 알 것 같아.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내가 말했었지. 기억 나? 나는 외국 사람하고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그런데 어째서 무책임하게 결혼하자는 말을 했어? 나를 외톨이로 내버려 둘 거면서. 제대로 사과도 안할 거면서."  179


나는 칸나 덕분에 확실히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  203


만약 내가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하고 레코드 가게를 나오며 생각한다. 나는 일본을 미워했을까, 아니면 일본인과 사이좋게 지내려 했을까.  224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과 같은 입장에 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죠. 상대방의 마음을 제멋대로 거짓으로 꾸미는 게 보통이에요.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240


"난 그때 너와 함께 달렸어야 했다. 난 너에 대해 뭐든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알지 못했던 거야. 내가 생각이 모자랐어."  249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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