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해당되는 글 61건

  1. 2022.06.13 베다 - 인류 최초의 거룩한 가르침 - 이명권 한길사 2013 04100
  2. 2021.12.06 존엄하게 산다는 것 - 게랄트 휘터 e-book
  3. 2021.11.22 어떻게 살 것인가 - 유시민 e-book
  4. 2019.01.16 자기 결정(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 - 페터 비에리 은행나무 2015 03100
  5. 2018.08.29 동화 넘어 인문학 - 조정현 을유문화사 2017 03100
  6. 2018.08.24 일의 발견(PART THREE) - 조안 B. 시울라 다우출판사 2005 03900
  7. 2018.08.22 일의 발견(PART TWO) - 조안 B. 시울라 다우출판사 2005 03900
  8. 2018.08.20 일의 발견(Part One) - 조안 B. 시울라 다우출판사 2005 03900
  9. 2018.05.16 ​ 여행의 문장들(여행자의 독서, 세번째 이야기) - 이희인 2016 북노마드 03810
  10. 2016.03.28 한 장의 사진미학 - 진동선 위즈덤하우스 2008 03660
  11. 2015.09.21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2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문학동네 2009 04870
  12. 2015.09.09 오베라는 남자 - 프레드릭 베크만 다산책방 2015 03850 11
  13. 2015.08.07 빅 퀘스천(대답을 기대할 수 없는 큰 질문들) - 더글라스 케네디 2015 03840
  14. 2015.02.09 인류학자처럼 여행하기 - 로버트 고든 펜타그램 2014 13980
  15. 2015.01.01 엄마랑 아이랑 제주에서 한 달 - 이연희 미디어 윌 2014 13980
  16. 2014.12.17 삶을 위한 철학수업(자유를 위한 작은 용기) - 이진경 문학동네 2013 04100
  17. 2014.12.08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 임승수 한빛비즈 2014 13800
  18. 2014.02.10 구해줘(Sauve-moi) - 기욤뮈소 밝은세상 2010 03860
  19. 2014.01.18 인생사용설명서 - 김홍신 해냄출판사 2009 03810
  20. 2014.01.16 그대와 걷고 싶은 길 - 진동선 예담 2010 03660
  21. 2014.01.14 사람을 살리는 집 - 노은주 임형남 예담 2013 03610
  22. 2014.01.07 인생 - 최인호 여백 2013 03810
  23. 2013.08.09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여 배우며 - 정희재 걷는나무 2010 03810
  24. 2012.12.18 선택, 바른선택인가 편한선택인가? .. <더 스토리(The words) : 세상에 숨겨진 사랑>
  25. 2012.12.02 여행, 혹은 여행처럼 - 정혜윤 난다 2011 03810
  26. 2012.11.09 생활여행자 - 유성용 갤리온 2008 03810
  27. 2012.11.08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 파울로 코엘료 문학동네 2003 03860
  28. 2012.10.29 다르게 시작하고픈 욕망 서른 여행 - 한지은 청어람 2010 03810 4
  29. 2012.10.24 사바이 인도차이나 - 정숙영 부키 2011 03810
  30. 2012.10.23 행복이 오지 않으면 만나러 가야지 - 최갑수 예담 2009 03810 2





고대 인도인의 삶과 정신세계 : 베다시대
아리아인이 인도로 유입해 오기 전에 이미 인더스 강을 중심으로 상부에 자리한 하라파(Harappa)와 그보다 남쪽으로 약 64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모헨조다로(mohenjo-daro : 죽음의 언덕)라는 도시의 유적은, 인도 서부에 이미 거대한 국가 형태의 도시가 존재했음을 보여주었다.
하라파는 1856년 영국인 브룬튼 형제가 물탄(Multan)과 라호르(Lahore) 사이에 철도 부설 공사를 하던 중에 우연히 발견했다. 1921년이 되어서야 인도 고고학 탐사단의 영국인 총감독 존 마셜경이 하라파를 본격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했고, 그 후 2년 뒤에 다시 모헨조라도를 발굴하기에 이르렀다. 두 도시의 고고학적 발굴성과는 인도의 고대 문명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되었지만, 아직도 그 당시의 문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관계로 인더스 문명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27

도시의 발전은 기원전 2500년에서 도시가 멸망하던 기원전 1500년경까지로 추측되고 있다. ..
두 유적지(하라파 모헨조다로)가 지하에 깊이 묻히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대홍수로 인한 인더스 강물의 범람과 같은 재난으로 땅속에 묻힌 경우다. 다른 하나는 이민족의 침입이나 다른 전쟁으로 인해 멸망되었던 것이 오랜 세월 속에 폐허로 묻혀 있었을 것이라는 두 가지 추측이다.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아리안 족의 침입으로 인한 파괴의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아리안 족의 유입 시기도 기원전 1500년이고 보면, 고대 도시가 멸망하던 시기에 아리안 족이 침입하여 완전히 폐허로 만들고, 새로운 아리안 문명을 건설하지 않았을까하고 추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후 오랜 세월을 거치는 과정에서 사막화가 진행되어 도시 문명 전체가 지하 속으로 묻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9

생산력을 중시하고 과시하는 남성 성기 숭배는 인더스 유적지의 여러 곳에서 발굴되는 ‘링가(lingas:생식력의 상징으로서의 남근상, 후대 힌두교에서 시바 신의 상징으로 등장한다)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35

‘베다’의 의미는 ‘지식의 책’인 동시에 계시되었다는 점에서 ‘거룩한 가르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신들에 대한 찬가를 모은 문헌집 역시 베다라고 부른다. ‘지식’을 뜻하는 ‘베다’(veda)는 원래 고대의 현자(賢者)들에게 ‘계시’된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초기 아리아인의 신은 ‘데바’(devas)라는 명칭 하나로 통칭되었으나, 그 신들의 수는 대략 33개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신들의 이름은 후기로 갈수록 분화되어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해졌다. 신들의 숫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들의 힘과 기능으로서, 어떻게 자연현상과 조우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신들의 역할과 기능에 따라 신의 정체성도 각각 다르다.
신들의 역할과 기능은 대개 세 그룹으로 구분된다. 천상(天上)의 신, 대기(大氣)의 신, 지상(地上)의 신으로, 이 세 영역이 신들의 거주지와 활동 무대가 되며 이런 구분은 자연의 힘과도 결부된다.  36


1 신을 부르는 노래, 베다 - 네 개의 베다

정통 힌두인은 초인적이고 신적인 권위에 베다의 기원을 두고 있다. 베다는 시대가 경과하면서 네 종류로 형성되었다. 가장 초기의 베다가 기원전 1500년경에 이루어진 <리그베다>(Rigveda : 시 모음집)이고, 그 후에 <사마베다>(samaveda : 노래집)와 <야주르베다>(Yajurveda : 제의문서), 그리고 훨씬 후기에 <아타르바베다>(atharvaveda : 불의 사제 아타르반의 베다)가 형성되었다.
이 네 권의 베다 가운데 <사마베다>와 <야주르베다>는 대부분의 내용이 <리그베다>의 내용을 용도에 맞게 재구성한 것이다. 이들 베다는 너무나 거룩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에 기원전 600년경까지는 브라만 계층의 사제들의 입을 통해 구전되어 왔다. 그리하여 베다가 완전한 책의 형태로 편집이 된 것은 기원전 300년경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 각각의 베다는 제의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기원에 따라 다시 세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찬가의 모음집인 <상히타>(Samhita : 본집)와 그 해석서인 <브라흐마나>(Brahmana : 범서梵書), 그리고 제의의 지침서로서 <수트라>(Sutra :  안내서)가 있다.
이들 가운데 본집의 해석서인 <브라흐마나>에는 <아라냐카>(Aranyaka : 숲의 책)와 <우파니샤드>(Upanishad : 철학서)가 포함된다. 우파니샤드는 베다 사상을 철학적으로 심화시킨 최종적인 문헌이다. 각각의 베다는 지식을 다루는 부분(jnana kanda)과 실천 내용을 기술한 부분(Karma Kanda)으로 구분된다.  43-44

완전한 제사를 위해서 각각의 베다에 따른 제사장의 역할과 호칭이 달랐다.
<리그베다>를 사용하여 제의에 신을 초대하기 위해 시를 낭송하는 사람인 호트리(hotri : 신을 부르는 사람), <사마베다>의 노래를 부르면서 제사의 술인 소마를 바치는 우드가트리(udgatri : 노래를 부르는 사람), 제의문서인 <야주르베다>의 시와 찬미의 공식문구(yajus)를 사용하여 제의를 수행하는 일반 사제들인 아드바르유(adhvaryu), 그리고 <아타르바베다>를 노래하는 대사제인 브라흐민(brahmin : 바라문)이 각각 그에 해당하는 제의를 주관했다. 특히 대사제로서의 브라흐민은 <아타르바베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제의 전체를 주관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했다. 44-46

‘리그-베다’라는 말은 ‘찬양의 베다’라는 뜻이다. ‘리그’(rig)라는 말은 원래 산스크리트어로 ‘축제’를 의미하는 뜻에서 비롯되었는데, 일반적으로는 ‘노래 형태의 시’를 뜻한다. 축제에서 부르는 찬양의 노래(mantra)가 베다의 본문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역을 하자면 ‘찬양의 지식’이 된다.  47

전10권으로 된 <리그베다>는 제1권부터 제7권까지는 매번 첫장마다 아그니에 대한 찬가로 시작된다. 그만큼 제사와 그들의 신앙생활에서 아그니의 위상이 높다는 뜻이다. 제8권은 인드라에 대한 찬가로 시작되고, 방대한 분량의 제9권 전체는 소마에 대한 찬가다. 제10권에서는 아그니에 대한 찬가로 다시 시작되지만 우주의 창조주에 대한 기사와 원형적 인간의 차조 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47

33신들에 대한 찬미의 노래가 1,028개나 되지만 대부분이 인드라, 아그니, 소마 신에 대한 노래다. . 인드라는 아리아인의 적인 다스유스를 진멸한 권능의 신이며, 아그니는 불의 신이고, 소마는 식물의 음료의 신이다.  48

<사마베다>는 사제들이 제의를 올릴 때 부르던 찬가집이다. ..
<사마베다>의 사마(Sama)는 샤만(Saman : 멜로디)을 나타내는 말로, ‘달콤한 노래’ 또는 ‘거룩한 노래’라는 뜻을 지닌다. <사마베다>는 이 ‘노래(chants)의 모음집으로서, <리그베다>의 제8권과 제9권에서 주로 뽑아낸 작품들이다.  51

일정한 순서가 없는 찬가의 모음집이었으나,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서 종교적 제의에 맞게 재구성되었다.  52

아리아인이 처음 인도에 왔을 때는 제의를 위한 안내책이 필요 없었을지라도, 정복과 정착 이후에는 점차 종교적 의례를 위해 정교하게 편집된 지침서가 필요했기에 사제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53

<사마베다>의 본문은 1,875개의 만트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 650개의 만트라 구절과 후반부 1,225개의 만트라로 구분된다. ..
신들에 대한 찬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베다에 언급되고 있는 신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는 <사마베다>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베다의 신들은 베다 후기에 나타나는 각종 경전(聖典 : puranas)이나 서사시들에서 볼 수 있는 신들과는 그 성격이 각기 다르다.  53-54

불의 신 아그니(Agni), 폭풍의 신 인드라(Indra) 또는 바람의 신 바유(Vayu), 그리고 태양신 수리아 등이 주요 신으로 등장한다. 이들 중 아그니는 지상(prithivi) 통치하고, 인드라나 바유는 공중의 대기(antariksha)를 통치하며, 수리아는 하늘(dyuloka)을 통치한다. 기원전 800년경에 살았던 베다의 주석가 야스카(Yaska)는 베다의 다른 수많은 신들도 결국 이 세 신의 현현(顯現)에 불과하다고까지 말했다.  54

베다에 나타나는 신들은 주로 지상, 대기, 하늘의 세 영역으로 구분하여 활동하는데, 규정된 신의 수는 베다마다 차이가 있다. 베다의 어떤 본문에서는, 11개의 신들이 각각의 영역(loka)에서 활동한다고 보고 33개의 신들로 규정하기도 하고, 어떤 본문에는 3,339개의 신들로 말하는가 하면, 후대의 푸라나(聖典)에는 신들의 수가 3억 3,000으로 늘어나기도 한다.
반면 모든 다양한 신들이 결국은 동일한 하나의 지고한 신성(supreme godhead)의 현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단일신론(單一神論)적 주장은 특히 후대의 우파니샤드 사상에서 발견된다.  54-55

<야주르베다>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드바르유’(adhvaryu : 일반적인 사제) 사제들이 제의 때에 사용하던 문서로서 ‘제의의 지혜서’라고도 불린다. <야주르베다>는 신앙적 고백의 글이라는 뜻의 ‘야주스’(yajus)라는 말과 ‘베다’의 합성어다. 따라서 사제들이 제의를 드릴 때 불렀던 고백문으로서의 찬가집을 뜻한다. …
제사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상술하고 있다는 것이 <야주르베다>의 특징이다.
<야주르베다>의 편집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기원전 1000년경에 편집된 <흑(黑) 야주르베다>(Black Yajurveda)가 그것이다.
<흑 야주르베다>는 ‘무질서한’ 혹은 ‘뒤섞인’ 본문이라고도 부른다. 이유는 찬가인 만트라 외에도 제의를 위한 신학적 해설서인 산문체의 <브라흐마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백 야주르베다>는 찬가인 만트라만을 수록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다양한 학파를 지니게 된 <야주르베다>는 <리그베다>보다 그 분량이 훨씬 방대하다.  60

<아타르바베다>는 바라문 가문의 이름인 ‘아타르바’(Atharva)에서 취한 이름이다. 네 개의 베다 중에 가장 나중에 편집된 것이기 때문에 ‘제4의 베다’라고도 한다. 전승에 따르면, <아타르바베다>는 주로 브리구(Bhrigus)와 앙기라스((Angirasas)라는 두 현자의 집단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전한다.  67

<리그베다>와 같이 전체가 찬가로 구성되어 있지만, 베다시대의 제의 전통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그것은 <아타르바베다>가 초기 베다와 구분되는 훨씬 후대에 편집된 것이기 때문이다. ..
베다의 내용은 사랑의 성공에서부터 지상에서의 열망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하는 문제 등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
<아타르바베다>가 질병의 퇴치 등에 관한 주술과 같은 독립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일부 찬가인 쿤타파수크티(Kuntapasuktini, 찬가 127~136)를 제외하고는 본집의 제20권 대부분이 <리그베다>의 문구를 그대로 인용할 정도로 똑같은 내용도 있다.  68

제17권은 사소한 관심사들에 대한 일상을 독립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제15~16권은 대부분이 사제들인 바라문의 산문이고, 제14권과 제18권은 각각 아타르반 사제가 주도하는 결혼과 장례에 대한 시로 되어 있다. 이 시는 대부분 <리그베다> 제10권의 만트라와 일치한다.
그런가 하면 제19권은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원문을 개악(改惡)하여 심하게 훼손된 것도 있다. <아타르바베다>의 제12권에는 우주 진화론적이며 신지학적인 노래가 실려 있는데, 땅의 여신에 대한 노래 가운데 “진리와 위대함, 우주적 질서, 힘, 정화, 창조적 열정, 영적 승화, 제의가 지구를 떠받치고 있다”는 것이다.
나머지 제1장부터 젱13장까지의 내용에서는 약물을 사용하는 치유가나 주술사가 등장하여 대부분 주문 형식의 기도를 올린다. 이는 다른 베다가 시인이나 사제들이 노래하는 찬가의 형식인 것과 대조적이다.
특히 질병의 치유를 비는 기도 주문에서는 열병, 두통, 감기, 수종(水腫), 심장병, 만성병, 중풍, 유전병, 문둥병, 정신병 등에 대한 수많은 종류의 질병이 열거되고, 거기에 대한 처방으로서 갖가지 신들이 초대되기도 한다.  68-69

네 가지 베다의 총 분량은 그리스도교 <성서>의 여섯 배나 된다. 이 방대한 베다의 주된 구성은 이와 같이 신드에 대한 찬가아 제의의 방법을 다루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점차 베다 후기로 이어지면서 신화적인 내용이 우주적이 ㄴ차원에서 철학적으로 변해간다.  71



2 우주와 인간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 베다의 창조와 진화

<리그베다>에서는 우주와 인간의 창조, 그리고 발전과정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각도의 관점으로 설명한다. 하나는 어떤 거대한 원리가 만들어낸다는 관점이고, 또 하나는 진화적 관점에서 발생해간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이 상호 배타적인 것만은 아니며, 오히려 두 가지 견해가 서로 결합되는 느낌도 있다.
하나는 어떤 원리가 우주와 인간을 만들어낸다는 견해로, 훌륭한 솜씨를 가진 장인(匠人)인 신이 목수처럼 신과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타파스’와 같은 열기가 발생하여 스스로 진화해가는 과정으로 우주의 창조를 설명한다.
시대와 계층을 달리하던 <리그베다>의 여러 시인들은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을 기초로 다양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여러 신들이 제각각의 기능을 하며 수많은 세계의 요소들을 하나둘씩 만들어가는 것으로 설명한다.  73

한편으로는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탄생된 것도 아닌 스스로 우주의 제물이 되어서 우주를 발생시키는 제물로서의 창조자 푸루샤도 있다. 이 푸루샤의 몸에서 천지 사방과 인간이 탄생되었다는 신화다.
그런가 하면 신화 창조 개념보다는 다소 철학 개념으로 우주창조를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움직이고 정지하는 모든 것의 정신, 곧 아트마(atma)를 창조의 원리로 보는 것이다.  75

<리그베다>에서 창조에 관한 가장 유명한 기사는 우주 찬가 속에 나타난다. 일종의 진화적 측면에서 우주의 탄생을 말하는 것으로, 이른바 비존재(asat)에서 존재(sat)가 드러나는 창조적 진화의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창조의 노래라고 불리는 유명한 나사디아(Nasadiya) 찬가다.
또 다른 각도에서 창조적 진화의 과정을 서술하고 있는 찬가도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타파스’라는 열기에 의해서 모든 것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76

초기 베다에서는 자연현상과 그 세계를 다스리는 자연적 요소, 즉 태양, 불, 천둥, 물 등이 신격의 지위로 격상되어 숭배를 받았다면, 이제는 관심의 초점이 이동되어 그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누가’이 현상을 만들어내거나 조종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졌다.  83

타파스에 관한 한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연역해낼 수 있다. 하나는 자연과 우주 차원의 열기이며, 또 하나는 인간에 관한, 특히 제사와 관련된 고행이나 금욕으로서의 열기하는 측면이다. 이 모두가 창조와 관련이 있다.  86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우주의 근원은 열기, 곧 불(火)이라 했던 것과도 상통한다. 그는 열기가 강해지면 태양처럼 뜨거워지고 식으면 물이 되거나 얼음처럼 변화되는 것이 우주 변화의 원리로 보았던 것이다.
자연의 관점에서 볼 때, 태양의 열기는 땅에서 물을 끌어올리고 비를 생산한다. 반면에 제사에 사용되는 불은 바쳐진 음식물을 끓여서 증기를 유발한다. 사제들이 열정적으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의 몸에서 땀이 솟는다. 태양의 열기든지 사제의 땀이든지 모두 타파스와 관련된다. 자연적 열기로서의 타파스는 태양이 과일을 익히듯이 불이 되어 제사의 음식을 익힌다. 과일이 태양의 열기에 먹기 좋게 익듯이, 제사음식도 먹기 좋게 익는다(pakva).
여기서 다시 ‘먹힘’의 미학을 보게 된다. 제사는 먹음과 먹힘의 사슬관계다. 먹힘이 없는 먹음은 없다. 먹고 먹힘의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타파스다. 다시 말해서 일체의 희생제의는 타파스의 열기로 가능하다. 우주적 희생제의는 바로 타파스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6-87

베다의 창조와 관련된 일자나 타파스에 이어, 좀더 구체적으로 우주창조의 신화를 보여주는 또 다른 본문이 있다. 그것이 이른바 ‘황금의 모태’(the Golden Embryo) 신화다.
<리그베다> 제10권 제 121장에 따르면 태초에 ‘황금의 모태’로 표현되는 히란야가르바(hiranyagarbha)가 있었다고 한다.  88

히란야가르바는 ‘히란야’(hiranya)와 ‘가르바’(garbha)의 합성어로서, 황금과 태(胎)의 복합어다. 황금빛 나는 모태는 후기에 가서 ‘황금계란’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우주의 난생신화(卵生神話)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89

또 다른 이름의 창조주 비슈바카르만을 살펴보자. <리그베다> 제10권 제 81~82장에 따르면 우주를 창조한 신(deva), 곧 전능자로서의 ‘조물주’(造物主)인 비슈카르만(Visvakarman)이 언급되고 있다. 그 조물주는 자신을 위한 우주적 제의 속에서 여러 신성한 제의와 창조력을 지니게 된다. 그는 ‘거룩한 언어의 주’였던 바짜스파티(Vacaspati)와 동일시되기도 하면서, 용광로 같은 불속에서 천지를 창조해낸다. 천지가 부르이 제사를 통해 탄생했다는 이야기다.  93-94

현대 과학에서 우주형성의 기원을 말하는 빅뱅이론도 핵융합 반응의 결과라고 하니, 창조와 불의 신화적 상상력과 그 관련성이 허무한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94

“제사의 직무(Hotar)를 관장하면서 이 모든 세계를 제물로 바치는 현자, 우리의 아버지 그분께서는 풍요로움을 꿈꾸면서 지상에 사람들 가운데 오셨도다.
그가 거처로 삼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무엇이 그를 지탱해주었던가? 도대체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말인가? 비슈바카르만이 권능의 힘으로 만물을 바라보자 영광 속에 땅이 만들어지고 하늘이 드러났도다.
사방으로 눈, 입, 팔, 발을 가진 그가, 일자인 창조주 그가 그의 팔로 날갯짓을 하면서 천지를 만들었도다.
무슨 나무로, 무슨 목재로 그들이 천지를 만들었겠는가? 그대 생각이 깊은 자들이여, 스스로의 마음속에 자문해보라. 그가 만물을 창조할 때 어디에 서 있었겠는가?
가장 높은 곳이든지, 가장 낮은 곳이든지, 또 그 가운데 어떤 곳일지라도, 오, 비슈바카르만이여, 제사 속에서 그대의 친구들을 깨닫게 해주소서. 그대 자신의 법에 따라 사는 자여, 그대 자신의 몸을 희생시켜 그대를 위대하게 만들었도다.
공물을 통하여 위대해진 오, 비슈바카르만이, 자신의 몸인 천지(天地)를 희생시볐도다. 우리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이 어리석음에 빠져서 살지라도 우리는 너그럽고 풍요로운 후원자를 지니자.
사고(思考)만큼 빠른 거룩한 언어의 주(主), 비슈바카르만을 찬미하자. 오늘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돕도록. 의로운 일을 행하시고, 만인에게 자비르 베푸시는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청원을 기꺼이 도우시도록 하자.”(<리그베다> X 81. 1~7)  94-96

‘제사’야말로 우주의 시작이고 끝이다. 아니 그 끝없는 흐름의 연속이요. 우주생성과 생존의 비밀이다. 제사를 현대적 용어로 말하자면, 밥이 되어 ‘먹힘’이다. 먹힘으로써 다음 생이 이어진다. 먼저 창조된 제물의 존재는 후속으로 이어지는 다른 제물의 존재들에게 영광의 자리를 물려주고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우주생성의 비밀이다.
문제는 창조주 자신이 바로 이 세계를 위한 희생제물이 된다는 또 하나의 기막힌 역설이다. 본문에서 조물주 비슈바카르만은 언어의 신 바크(Vac)와 동일시되면서 유일하게 “신들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자”이며 “하늘과 땅을 초월해 있는 자”다. 그리고 그는 ‘황금의 모태’로서 물속에서 우주를 잉태한 히란야가르바아 같은 창조주로서의 명성을 떨친다.
이처럼 비슈바카르만은 언어의 신 바크와 동일시되어, 모두가 물, 불, 사고 그리고 언어라는 각자의 요소가 지닌 창조력이 혼융된 형태로 드러난 ‘제일자’(第一者) 혹은 ‘제일원인(第一原因)이 되고 있다. 결국 만무르이 창조주인 비슈바카르만은 언어의 주(主)이자 동시에 제사를 집행하는 브라흐만(brahman)의 주이며, 불의 신 아그니와 제사를 만들어낸 물에서 진화한 최초의 모태가 된다. 제사의 형식을 통해 우주를 창조해가는 베다의 창조 관념은 베다가 얼마나 제사르 중시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실제로 창조주 삐슈바카르만은 제사의 주(主)이기도 하지만 제사행위 그 자체를 통해 우주를 창조한 것이기도 하다.  98-99

다자, 즉 우주의 생성이 이러한 변증법적 자기발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은 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는 과정의 이야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예컨대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은 ’언어’(말씀)로 ‘빛’과 천지를 창조하면서 자기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한다. .. 그리스도교에서도 베다의 바크처럼 언어로 창조할 뿐 아니라, 자기 형상을 인간을 만드는 것도 일자에서 다자로의 우주적 전개라는 신적 의지가 ‘자기희생’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99

베다가 말하는 우주적 거인, 푸루샤(Purusa)에 대한 묘사는 ‘푸루샤 찬가’(the Purusa Sukta)에서 잘 나타난다. 이 찬가에 따르면 우주가 제사와 관련하여 창조되듯이 우주적 인간도 제사와 관련하여 창조되고 있다. 이 찬가는 두 가지 기본적인 구조로 묘사되는데, 첫 번째 부분은 우주적 인간, 곧 원초적 인간 푸루샤의 기원과 그 위대성에 대한 것이다. 두 번째 부분은 푸루샤의 희생제사다. <리그베다>의 제 10권 제 90장에 등장하는 이 유명한 찬가는, 신들이 우주적 거인인 푸루샤의 몸을 분할함으로써 세계의 일부가 탄생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101

“푸루샤는 천 개의 머리, 천 개의 눈, 천 개의 발을 가졌다. 사방 온 세계에 편만해 있는 그는 열 개의 손가락을 그 너머로 뻗치고 있다.
푸루샤는 정녕 이 모든 세계 그 자체이며, 세계로서 존재해왔고 또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제사)음식을 통하여 탄생시킨 불멸(신들)의 세계를 통치한다.
이것이 푸루샤의 위대성이며, 동시에 푸루샤의 능력은 이것도 넘어선다. 모든 피조물은 푸루샤의 4분의 1에 불과하며 나머지 4분의 3은 하늘에 있는 불멸의 것들이다.
푸루샤의 4분의 3은 위로 올라가고 4분의 1은 여전히 지상에 남는다. 이 지상에서 다시 온 사방으로 뻗쳐 생물(먹는 것)과 무생물(먹지 않는 것)에게 침투한다.
푸루샤로부터 비라즈(Viraj)가 탄생되었고, 비라즈로부터 다시 푸루샤가 나왔다. 푸루샤가 탄생될 때, 그는 지구 너머 그 이면까지 뻗쳤다.” (<리그베다> X 90.1~5)..
대승불교사상 가운데 천수천안(千手千眼)의 보살(菩薩)이 등장하는데, 이것도 푸루샤의 전지전능성과 상징적 측면에서 유사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러한 불교의 상징적 수사(修辭) 또한 베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102-104

신들이 푸루샤를 분할했을 때, 몇 부분으로 나누었던가? 그들은 그의 입을, 그의 두 팔을, 넓적다리와 발을 무엇이라고 불렀던가?
그의 입은 브라만(Brahman) 이 되고, 그의 팔은 전사(戰士, Rajanya), 넓적다리는 평민(Vaisya), 발은 종(Sudra)이 되었다.
달은 그위 마음에서 생겨났고, 태양은 그의 눈에서 생겨났다. 인드라와 아그니는 그의 입에서 나왔으며, 바람은 그의 생명의 숨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배꼽에서는 중간 지대의 공간이 생겨났고, 그의 머리로부터는 하늘이 전개되었고, 그의 두 발로부터는 땅이, 그의 귀에서는 하늘의 사방이 펼쳐졌다. 이와 같이 신들은 세계를 질서 있게 창조했다.
푸루샤를 위해 일곱 개의 봉인된 막대기와 훌륭한 일곱 개의 땔나무가 준비되어 있었다. 신들은 희생제사를 차리면서 푸루샤를 제사용 짐승으로 결박했다.
제사를 통하여 신들은 제물에게 제사를 바쳤다. 이것이 첫번째 제의의 법칙들이다. 이러한 제의의 법칙으로서의힘은 고대의 신들인 사드야(Sadhyas)가 머무는 하느르의 둥근 꼭대기에 도달한다. (<리그베다> X 90.6~16)  106

푸루샤가 크게 네 부분으로 갈라질 때, 입은 브라만이 되고 팔은 전사가 되며, 넓적다리는 평민, 그리고 발은 종과 같은 하인이 된다. 이것이 이른바 인도의 고대 전통사회를 형성하는 4성제도(四姓制度), 곧 카스트(ccaste)의 기초가ㅏ 된다.
푸루샤의 몸통 분할은 사회적 역할의 분할 또는 물리적 우주의 공간 배치라는 의의를 가진다. 예컨대 몸통의 최하위인 발에서 나온 섬기는 자 수드라는 사회의 기본을 이루는 층이 된다. 마치 땅이 우주의 기초가 되는 것과 같다.
넓적다리에서 나온 평민인 바이샤 계급은 왕성한 근육처럼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는 부류다. 팔에서 생긴 크샤트리아는 무기를 다루고 사람을 지휘하는 전사와 지도자의 역할을 한다. 입에서 나온 브라만은 각종 시와 노래로 만트라를 암송하며 제사를 집행하는 사제의 역할을 담당한다.  107



3 모든 것은 제의의 불을 통해 - 베다의 제사

기원전 10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는 아리아인의 세계관에 변화가 시작되었는데, 그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제사에서 숭배되는 신들의 권력이동이다. 예컨대 인드라 신이 초기 베다에는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점차 그 원위를 불의 신 아그니에게 물려주게 된다. 그리하여 부르이 신 아그니는 인드라와 동일시되기도 하고, 모든 신들의 왕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이는 생활 속에서 차지하는 불의 역할이 그만큼 더 중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13

천상(天上)의 신 바루나를 포함한 여러 신들에게서 다양한 권능을 넘겨받은 것은 인드라였다. 인드라는 바루나(Varuna) 신과 다른 열등한 신들(devas)의 권위를 모두 흡수하고 초기 베다시대 이후 오랫동안 신들 가운데서 최상의 권위를 차지해왔다.  
인드라는 신 중의 신으로서 유일신에 가까운 권위를 자랑하는 자리에까지 오르지만 결국 인드라의 권위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무너진다. 대신 그 권력을 지상의 신들, 특히 희생제의를 주관하는 불의 신 아그니에게로 이양된다. 아그니가 제의의 중심이 되면서 최고 권위의 인드라와 대등한 위치 혹은 우위에 서게 된 것이다.
이는 점차 제사에 관한 관심과 중요성이 제사 그 자체의 행위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 불의 제의적 기능을 토앟여 인간은 그들이 요구하는 다양한 신들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114

언어를 떠나 과연 인간이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인류는 분명 저급한 사고 수준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인간은 언어로 수천 년의 문명사를 기록하고 발전시켜왔다. 오늘도 우리는 하루하루 언어로 집을 짓고 산다. 그러나 모호하고 불의(不義)한 소통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바벨탑’이 되어, 엄청난 역사의 퇴보를 가져온 일면도 있다.
소리의 신 바크가 죽음의 신 야마의 역할을 겸하는 이유도, 소리속에 정의가 담겨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크는 ‘정의의 신’이기도 하다. 이제 그 정의의 신은 제단에서 거룩한 소리가 되어 만트라 속에서 울려 퍼진다. 그리하여 소리는 내면의 소리이자 ‘일자의 소리’가 된다. 일자의 소리는 다시 지식의 근원이 된다. 그리스도교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라고 하는 말과도 통한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신앙은 지식의 출발이며, 참 지식은 정의로운 삶 속으로 참 신앙을 불러일으킨다.  124-125

베다에서 의례와 만트라는 고유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적절히 사용되면 원하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반면에, 그것이 부적절하게 사용될 때는 커다란 재앙을 초래한다고 믿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브라만 사제들이 제사의 행위를 적절히 감독하는 직분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126

작은 제사 하나도 우주적 제사행위와 관련되는 것이므로 제사행위를 위한 전문화 교육은 필수였고, 오직 정화되어 순수한 영혼의 사제에게만 창조적 실재인 ‘브라만’의 힘이 부여된다고 믿었다. 그러기에 이들 사제는 늘 순수성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
제사를 수행하는 자는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의 순수성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늘 자신의 몸을 정화시킨다. 목욕을 하거나 머리를 깎고 신선한 버터를 바름으로서 신선한 ‘배아(胚芽)의 상태’를 유지한다. 이때 사제는 <아이트레야 브랄흐마나>가 진술하고 있는 것처럼, ‘봉헌의 오두막(배아)집’을 마련하게 되는 셈이다. ..
사제는 정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심지어 자신의 몸이 가려워도 맨손으로 자신의 몸을 긁어서는 안 되며, 준비된 흑염소의 뿔을 이용해야만 한다.  1127

사제가 오두막에 감금되고 불 가까이에서 염소 가죽 같은 거적을 둘러쓰고 있는 이러한 행위는 제사를 드리는 봉헌자의 ‘열’(熱)을 발산하기 위함이다. 의례를 진행하는 동안에는 땀이 흘러도 물을 마셔서는 안 되고 목욕을 할 수도 없다. 물은 오염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오직 열, 곧 타파스를 발산해야 한다. 파타스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열기이기도 하지만 ‘고행’을 뜻하기도 한다. 수고와 고통 없이는 해산(解産)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다의 제식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바른 수행을 통해 ‘브라만’의 힘을 얻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행방법으로서 사제의 정화노력, 곧 타파스를 발산하는 일 등이 아주 중요한 제의의 요소가 된다.
이러한 고행의 단계를 거친 사제는 신들의 위치로 가는 힘 또는 신들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는 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결국 희생제의를 통해서 얻어진 이러한 ‘힘’으로, 인간이 마침내 우주 그자체를 통제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28

<사타파타 브라흐마나> 문서는 소바(Soma, 酒) 제의, 이를 테면 제단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등의 여러 가지 무넺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128

프라자파티는 열기인 타파스를 이용하여 만물을 창조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타파스는 모든 창조의 원리다.  131

오늘날 인도의 힌두 사원에서 불의 제사가 계속 행해지는 것이나 죽은 자를 화장(火葬)하는 제도 역시 이러한 관념에서 멀지 않다.  131

타파스가 이중적 의미, 곧 ‘열기’이자 ‘고행’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다시 생각해본다면, 창조의 과정은 단순한 열기만이 아니라 고행이 기초가 되고 있음도 읽어내야 할 것이다. 고행은 현대 용어로 ‘수행’(修行) 또는 ’수양’(修養)이라 번역해도 좋을 것이다.  131-132

말은 인도유럽계열에서 전쟁의 영웅으로 숭배되는 지고한 상징이다. <리그베다>에서 말(馬)은 광범위하게 걸쳐 칭송을 받는다. ..
말은 <리그베다>에서 3중의 기능을 한다. 우선 실제로 길들여진 말(馬)로서 인도 아리아인이 인도 유렵 세계를 정복할 때 사용된 군마와, 성(聖)과 속(俗) 사이를 달리는 경주용 말, 그리고 제사에 희생되는 제의의 말이 있다.  132



4 죽은 자가 가는 운명의 길 - 죽음과 환생의 노래

<리그베다>에서 죽음은 주요한 주제다.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만큼 인간의 죽음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베다에는 제의에 대한 찬가가 주로 수록된 만큼 장례의 문제를 다루는 노래가 다양하게 나온다. 장례의 방식에 따라서 화장(火葬)식에서 부르는 노래, 매장(埋葬)식에서 부르는 노래 등이 서로 다르다.
베다에는 죽은 자가 가는 운명의 길이 몇 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하늘나라로 가는 자,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는 자, 혹은 부활하는 자, 화신(化身)이 되는 길 등이 표현되고 있다.
베다의 기록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죽음 후에 각기 저마다 운명의 길을 가되, 하늘나라 혹은 조상들의 세계 등으로 편입되어 가기를 원한다.  145

베다에서 죽음을 관장하는 신은 야마(Yama)다. 야마는 사자(死者)의 왕으로서 죽음의 세계를 지배한다. 야마가 죽음이 신이 된것은 그가 처음으로 죽음을 맛보고 저승으로 간 자이기 때문이다.  145

“험준한 난관을 헤치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길을 찾아낸 비바스반(Vivasvan : 태양)의 아들,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자, 야마 왕에게 공물을 바치면서 그를 공경하라.
야마는 우리를 위해 처음으로 길을 발견한자니, 그곳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곳은 우리의 조상들이 건너간 곳이며, 앞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도 각자의 길을 따라가게 되리라.” (<리그베다> X 14.1~2)  146

장례식의 화장터에서 사자의 주변을 떠돌며 사자를 먹으려고 달려드는 귀신들을 향해 명령하듯 사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버리는 형태의 노래도 있다.  “물러가거라. 쏙 물러갈지어다. 여기서 꺼져버려라. 조상들이 사자를 위해 이곳을 마련한 것이다. 야마가 그에게 낮과 물과 밤으로 장식한 안식처를 주었다.” (<리그베다> X 14.9)
고대의 인도인은 귀신들이 화장터에 살면서 사자의 타는 육체를 먹는다는 생각을 했던 듯하다. 귀신들이 불에 타는 사자를 먹기 위해 달려드는 이유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귀신이 불에 타면서 새로운 형태의 몸을 입고 하늘나라에 가게 되는데, 이때 귀신이 그 몸을 빌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적으로 달려든다는 생각이다. 또 하나는 후대의 힌두교에서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듯이 귀신들이 단지 사자의 시체를 먹기 위해 달려든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두 가지 생각은 점차 후대로 가면서 후자의 생각이 일반화되게 되었다.  149-150

불의 신 아그니는 베다 전체에서 인드라와 더불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신으로, 특히 제사에 관해서는 단연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만큼 제의와 관련항 아그니가 하는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죽음의 제의인 장례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아그니는 죽은 자를 조상에게 보내는 역할뿐만 아니라, 제사에 바쳐진 공물을 신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한다.  153

[죽은 자에 대하여]
”그대의 눈동자는 태양으로, 그대 영혼의 숨결은 바람으로 떠나시오. 그대의 업(業)에 따라 하늘로 가거나 땅으로 가시오. 아니면 그대의 운명이라면 물로 가시오. 가서, 그대의 손발은 식물의 뿌리가 되어 터를 잡으시오.” (<리그베다> X 16.3)
한 인간의 죽음을 두고, 죽음 그 이후에 우주로 환원되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 비유는 실제적인 환생의 모습을 기원하고 있는 것이리라. 불꽃 속에서 한 줌 재로 사라져갈 인간이지만, 그 인간이 생전에 지니고 있던 신체의 모든 부분이 다시 우주속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
위의 베다 본무에서 우리는 인도 사상의 ‘업’(業) 개념을 발견하게 되는데, 인간이 살아생전의 활동에 따른 결과를 후과(後果)로서 죽음 이후에도 받게 된다는 ‘인연업보’ 개념이 형성되는 초기의 사상적 맹아(萌芽)를 볼 수 있다.  155-156

[아그니에 대하여]
“염소는 그대의 몫입니다. 그대의 열기로 염소제물을 태우소서. 그대의 눈부신 빛과 화염으로 제물을 태우소서. 오, 피조물을 아시는 이 자타베다여! 그대의 상서로운 친절한 모습으로 선한 행위를 한 이들이 살고 있는 경건한 나라로 이 사자(死者)를 인도하여 주소서.
아그니여, 우리가 바치는 제의의 소마즙과 함께 죽은 자가 그대에게 제물로 바쳐질 때 그를 다시 자유롭게 하여 조상들에게 보내소서. 그리하여 그가 새로운 생명의 몸을 입고 극의 자손이 번성케 하소서, 피조물을 아시는 이, 자타베다여!” (<리그베다> X 16.4~5)
죽은 자를 위한 장례식에서 염솟가 희생제물로 등장하고 있다. 죽은 자를 위해 소마즙과 함께 바쳐지는 희생물을 통핳여, 죽은 자는 아그니의 도움으로 조상들에게 보내지고 새 생명의 몸으로 자손을 번성케 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죽은 자에 대한 기원의 노래가 이어진다.
[죽은 자에 대하여]
“까마귀가 와서 그대를 쪼아 먹든지, 개미나 뱀이 달려들든지, 아니면 그 어떤 짐승(자칼)의 먹이가 될지라도,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아그니가 그리고 사제들과 함께하는 소마가 그 상처를 온전히 지켜줄 것이오.
암소의 네발로 그대 몸을 감싸고 아그니의 화염 속에서 그대를 보호하시오. 두터운 지방질로 그대 몸을 덮으시오. 그리하여 그대를 완전히 불살라버리려고 하는 아그니의 맹령한 열기로부터 그대를 지키도록 하시오.”(<리그베다> X 16.6~7)
인도에는 유달리 커다란 까마귀가 많은 편이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새가 와서 죽은 자의 시체를 뜯어 먹도록 하지만, 베다의 전통에서는 불로 화장을 함으로써 장례가 진행된다. 화장을 하되 시체가 가급적 온전히 유지된 상태에서 다음 생으로의 신생(新生)을 기약한다.  156-158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매장식(埋葬式)에서, 사제는 죽음에 대하여, 또는 유족에 대하여 충고나 권면의 노래를 부른다. <리그베다> 제10권 제18장 제1~14절 전체에 걸친 매장식의 노래에 담긴 이야기를 중심으로 본문을 분석해보자.
[죽음에 대하여]
“죽음이여 떠나가거라. 신들의 길과는 다른 너의 길로 떠나거라. 눈을 가지고 귀를 가진 너에게 말하노니, 우리의 자녀와 인간(용사)을 해치지 말라.” (<리그베다> X 18.1)  161

“이 광활한 땅, 친절하고 온화한 어머니 - 땅(地母) 속으로 살며시 들어가시오. 어머니 대지는 젊은 여인이오. 공물을 바치는 누구에게나 양털처럼 부드러운 분이오. 어머니 - 땅으로 하여금 날름거리는 ‘파멸’의 혓바닥으로부터 그대를 지키게 하시오.
땅이여, 가슴을 열고 죽은 자를 받아 덮고 무겁게 짓누르지 마시오. 가슴을 열고 죽은 자를 받아 덮고 무겁게 짓누르지 마시오. 편안하게 굴 속에 들어가 그곳에 거하게 하소서. 땅이여 어머니가 아들을 치맛자락으로 감싸듯이 죽은 자를 감싸고 보호하소서.” (<리그베다> X 18.10~11)
<성서>의 표현대로 육신은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지만, <리그베다>처럼 죽은 자에 대하여 어머니 같은 포근하고 온화한 대지로 돌아갈 것을 축원하는 모습은 참으로 이색적잉고 따뜻한 느낌을 갖게 한다. ..
망자를 위로하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산 자에게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게 하고 살아생전 대지에 대한 고마움을 잃지 말고 살라는 교훈으로 들리기도 한다. 어머니 대지를 사랑하는 자는 땅속에서 ‘파멸’이라는 두 번의 죽음을 겪지 않고, 보호받는다는 뜻이다.  168

“나는 그대 주위를 흙으로 돋우고, 이 흙덩이를 내리면서 그대를 상하지 않게 할 것이오. 조상들이 그대를 위해 이 기둥을 굳게 붙잡아줄 것이오. 야마가 그대를 위해 이곳에 집을 지어줄 것이오.” (10.18.13)  169



5 최상의 권위를 자랑하는 위대한 권력자 - 천상(天上)의 신들

<리그베다> 제6권 제50장은 전체 1~15절로 ‘여러 신들’에 대한 찬가가 함께 섞여 있다. .. 불과 1, 2절에서만 해도 아디티, 미트라, 바루나, 아리아만, 사비트리, 브하가, 수리아, 다크샤, 아그니라는 아홉 신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이 모두 ‘아디티야’(Adityas)로서 ‘태양신들의 집단’이 되는 ‘빛’ 또는 ‘태양’과 관련이 있는 신이다.  181

9명의 아디티야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신이 바루나다. 바루나는 1,000개의 눈을 가지고 멀리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빛나는 황금 외투를 입고 있다. 바루나와 미트라를 태양빛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팔로 천상에서 마차를 운전한다. 천상은 1,000개의 기둥과 1,000개의 문이 달려 있는 곳이다.  183

모든 우주적 통치의 역하 ㄹ가운데서도 특별히 바루나는 비를 가져다주는 존재로 자주 언급되며, <리그베다>에서는 바다의 물과 관련해 종종 언급되기도 한다. ..
왕이자 도덕적 통치자이던 태양신은 후기 문헌인 <아타르바베다>에 가서는 성격이 다르게 변화된다. 예컨대 미트라와 바루나는 각각 낮과 밤의 대명사가 되는 것이다. 미트라는 낮의 해가 되고, 바루나는 밤의 달이 되는 것이다.  184-186

낮과 밤의 역할을 떠맡은 미트라와 바루나는 점차 후기로 가면서 다시 그 역할이나 기능이 축소되어간다. 바루나는 천사의 빛의 왕좌에서 다시 물을 통제하는 자로 바뀌어가고, 그의 황금의 집도 이제는 물속에 있게 된다. 바루나가 빗물을 내리면서 바루나와 미트라는 ‘물의 주(主)’가 된다. 바루나의 천상통치는 비를 내리는 행위처럼 점점 물과 관계가 깊어지고 있다. 바루나가 달과 관계가 깊어지는 것도 역시 물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186

바루나의 역할과 기능데 비해 미트라는 상재적으로 베다에서 적게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미트라와 바루나가 동시에 찬양을 받고 있는데, <리그베다>에서 미트라의 역할을 독자적으로 소개한 곳은 유일하게 제3권 제59장뿐이다.  186

아디티야는 다소 한계가 분명하지 않은 신들의 집단이다. <리그베다>의 몇몇 곳에서 태양신 아디티야의 이름은 경우에 따라서 일곱 개 혹은 여덟 개로도 묘사된다. 그러나 대체로 일곱 개인 것이 지배적이다. 이들은 미트라, 아리아만, 브하가 , 바루나, 다크샤, 수리아, 사비트리다. 이밖에도 ‘빛’의 그룹에 속하는 신 푸산 등이 있는데 이들은 뒤에서 별도로 살펴보겠다.
아디티야라는 명칭은 인드라에게도 적용되고 있을 만큼 의미영역이 광범위하다. 물론 인드라 신의 위대성이 점점 터져갈 때 아디티야의 이름에 흡수된 것이지만 말이다.
이와 같이 다양하게 표현되는 태양신 아디티야의 여러 가지 위상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신은 역시 바루나다. 그 다음이 미트라이고 세 번째가 아리아만이다.
이들은 모두 천상의 빛의 신으로서 각 이름의 의미처럼 밝고, 빛나면서 졸지도 않고, 흠 없고 순수하고 거룩한 황금빛의 신이다. 이 태양신들은 적을 가두고 신봉자를 보호해주며, 죄인은 형벌하지만 나약함을 용서해주기도 한다. 동시에 질병르 퇴치하고 장수와 자손의 번성을 도와준다.  187-188

바루나와 미트라에 대한 묘사와 마찬가지로 수리아는 ‘하늘의 눈’으로 표현되는데, 멀리 내다볼 수 있어서 인간들의 행위를 감시하는 자가 된다. 수리아는 아디티야의 하나이지만 동시에 아디티야와 구별되는 독특한 성질을 지닌다.
..
무엇보다 태양신 수리아의 진가는 힘의 세력을 신과 인간을 위해 세계를 비추는 빛에 있다. 그의 빛으로 어둠을 물리치고 어둠과 사악한 힘의 세력을 정복하는 것이다. 수리아는 신들의 사제 역할을 하기도 하고 미트라와 바루나 앞에서 인간들의 무죄를 선언하도록 요청을 받기도 한다. .. 천둥과 폭ㅍ풍수의 신 인드라가 태양을 가리게 하는 힘을 가지고 저마 위력이 커지면서 수리아는 차선으로 밀려나기도 한다.  189

사비트리는 눈, 손,혀, 팔이 모두 황금으로 된 황금의 신이다 사비트리는 황금의 손을 펼쳐서 인간들에게 생명을 선사한다. .. 사비트리는 노란 머리칼을 하고 황갈색의 겉옷을 입고서 황금 마차를 타고 있다. ..
사비트리는 맑은 길을 따라 하늘을 날면서 영혼을 의로운 곳으로 안내하며, 신과 인간에게 불멸을 제공한다.  194

사비트리의 역할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역시 인간들이 각각 자신의 몫을 감당할 수 있도록 고무시키고 격려하는 일과 사제들이 제의를 집행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었다.  195

풍요로움을 주는 푸산은 인색한 자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역할뿐만 아니라, 승리의 길을 만드는 자, 야비한 자의 심장을 찌르는 자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된다. 다른 찬가에서 푸산은 일반적으로 힘과 영광, 지혜, 관용성 등으로 상징된다.  196

<리그베다>에서 비슈누는 다른 신에 비해 극히 제한적으로 찬미되고 있다. 특히 수백 편이 넘는 찬가만을 지니고 있다. 인기 있는 다른 신들이 수천 번 넘게 호명되는 데 비해 비슈누는 100번도 언급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비슈누는 폭풍의 신 루드라와 같이 크게 존경을 받고 있고 후기로 갈수록 인기는 더해간다  
비슈누는 젊은 신으로 거대한 몸집을 하고 있고, 보폭이 넓어 세 번의 큰 걸음으로 악마로부터 세계를 구출해낸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비슈누의 세 걸음은 지상과 공중, 그리고 천상의 가장 높은 곳으로 구분해 설명되는데, 이 걸음은 새로운 우주 공간을 창조해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첫 번째 걸음은 땅의 영역을, 두 번째 걸음은 상층부 하늘, 세 번째 걸음은 가장 높은 천상의 세계로 비슈누가 거주하는 곳이다. 이 세걸음은 새벽과 정오와 석양이라는 태양의 세 가지 현상에 대한 상징적 은유다. 이는 새벽의 여신 우사와 길의 태양신 푸산, 그리고 석양의 태양신 사비트리를 연상하게 한다. 비슈누의 걸음을 ‘비카르마’(vikarma) 또는 ‘파다’(pada)라고 하는데, 특히 후자에는 많은 은유적 해석이 따른다.
첫 번째 해석으로는 ‘발’(foot)이라는 의미로 라틴어의 ‘페스’(pes)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어떤 장소에 머물러 있는 동작을 포함하여 발의 동작에 따른 ‘발걸음’(step)이나 ‘족적’(footprint)으로 해석한다. 셋째는 ‘파다’가 인간과 신이 함께 거주하는 실제적인 장소를 뜻하거나, 소의 바랒국이 찍힌 자국에 무링 고이듯 그곳에서 꿀샘이 솟아나는 장소를 만드는 발걸음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비슈누의 발걸음은 그 보폭으로 인하여 유명할 뿐 아니라, 걸음마저 다양하게 해석된다. ..
<리그베다> 제 1권 제155장에서는 비슈누-인드라 신을 나란히 영웅적인 신으로 찬양하기도 한다.  197-198

비슈누는 처음에는 빛의 신으로 출발하여 후기 베다시대에 갈수록 점점 인기가 높아져 힌두교의 최대신인 창조자 브라흐마, 파괴와 재새으이 신 시바, 그리고 유지의 신 비슈누라는 삼위일체의 최고신 자리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높은 지위와 인기를 누리게 된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비슈누 신이 인간과 동무르이 종족 번식에서 가장 중요한 태아(胎兒)를 보호해주는 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은 다른 어떤 태양신에게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가축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삶의 질이 향상되면서 번영을 기원하는 인간과 사제들에게 더욱 인기 있는 신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더구나 비슈누는 그의 큰 세 걸음으로 후기에 가서는 악마의 대부로 여겨지는 아수라(Asura)로부터 세계를 보호하는 등, 땅과 공중, 천상이라는 세 개의 세계를 모두 정복한다. 때문에 여러 신에게 제사를 드리지만 대부분은 비슈누에게 바쳐진다. 바로 이 점이 점차 비슈누가 가장 위대한 신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특히 베다 후기 문서에서 자주 발견되듯이 비슈누가 에무사(Emusa)로 불리는 수퇘지로 화신(化身])하여 지구를 물에서 건져올리는 모습이라든가, 인도 고대 설화집인 <푸라나>(Purana)에서 거북이가 비슈누의 화신잉 된다는 표현 등은, 모두 희생 행위 또는 제물로서의 비슈누를 위대하게 평가한 것이다.
비슈누의 인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인도 신화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바가바드 기타>의 주인공 크리슈나(Krishna)로 화신하여 인류의 평화를 가져오는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결국 ‘희생제의’의 존재로서 비슈누가 인류와 우주를 건지고 보호하는 가장 위대한 신으로 숭배받게 되었던 것이다. 맟치 그리스도교에서 예수가 십자가의 희생제의를 통해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위치로 승격되었듯이 말이다.  201-202

<푸라나>에 따르면, 마누는 14대의 긴 기간에 걸쳐서 공중에 거처하면서 인간의 의식을 각성시키는데, 그 일곱 번째 시기에 해당하는 마누의 이름이 비바스바트라고도 한다. 이 때문에 인간은 비바스반 아디티야(Vivasvan Aditya)의 후손이 된다. 이간은 태양의 아들인 셈이다.
<리그베다>에서는 비바스바트를 신들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의 아내는 장인(匠人)의 신 트바스트리의 딸 사라뉴(saranyu)다. 사라뉴와의 사이에서 야마와 마차를 이끄는 천상의 신 아쉬빈을 낳는다.  204

아쉬빈은 <리그베다>에서 인드라, 아그니, 소마 다음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찬양을 받는 신이다. 아쉬빈(asvin)이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의미는 ‘마차꾼’이라는 뜻이다. ..
아쉬빈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두 개의 눈, 두 개의 손, 두 개의 발, 두 날개, 그리고 쌍으로 같이 있는 동물들과 비교된다는 점이다. 이들 쌍은 빛나고 기민하며 젊고 아름답다. 또한 붉은색을 띠면서 강한 힘을 자랑하고 법칙을 강화하기도 하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자(全知者)라 불리기도 한다.  205-206



6 공중의 세력을 관장하는 대기의 힘 - 대기(大氣)의 신들

<리그베다>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려긍ㄹ 행사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인드라가 바로 이 대기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신이다. 천둥번개를 일으키며 공중의 세력을 관장하는 인드라와 바람의 신 바유, 폭풍의 신 마루트와 루드라도 대표적인 대기의 신들이다. ..
인드라(Indra)는 ‘대기’(大氣)의 현상을 인격화한 공중의 신이다. <리그베다>에서 가장 위대한 신으로서 ‘신들의 왕’으로 군림한다. ..
인드라는 날씨를 관장하는 주(主)로서 천둥 번개를 일으키며 비를 내려준다. 비를 내려줌으로써 다산(多産)의 신으로 존견을 받지만, 동시에 폭풍을 일으키는 신으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한다.  213

<리그베다>에서 인드라에 대한 찬가는 250개나 된다. 이것은 <리그베다> 전체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214

그가(인드라) 즐기는 음식은 소마인데, 태어나던 날도 소마를 마셨다고 한다. .. 바람의 신 바유나 창조자 브리하스파티, 또는 아그니도 소마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지만, 단연 최고의 애주가(Soma-drinker)로는 역시 인드라가 꼽힌다.  216

사회, 정치적 배경에서 탄생한 인드라 신은 천둥번개를 가진 공포의 대상인 동시에 그를 숭배하는 자들에게 비와 불로 은총을 가져다 주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후기 베다시대로 가면서 인드라는 최고신의 지위에서 비교적 낮은 신으로 떨어진다. 비록 작은 신들의 왕으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긴 하지만, 이른바 인도의 주요한 3신, 즉 브라흐마(Brahma), 비슈누, 시바보다는 열등한 2인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후기에 가서 인드라는 신들이 살고 있는 하늘(Swarga)의 통치자로 묘사되면서, 이 단계에서 인간의 여러 가지 나약함을 보살펴주는 자가 되기도 한다.  235

폭풍의 신 루드라(Rudra)는 인드라나 아그니처럼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리그베다>에서는 루드라에 대한 찬가가 독립적으로 편집된 곳이 단 세군데뿐이다. .. 그러나 루드라는 후대에가서 힌두교에서 가장 위대한 세 신 가운데 하나인 시바(Siva)로 불리며 역할이 승격된다.  236-237

루드라가 자주 불리지는 않지만 칭송을 받을 때는 다른 여러 신들에 비해 독립적으로 높이 찬양받으며 최고신의 대접을 받는다. 이는 인도 베다신화의 대표적인 특징이기도 한데, 예배를 드리는 자가 필요에 따라 그때마다 정한 신에게 최고의 칭호와 찬사를 부여하는 것이다.  241

마루트는 루드라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루드리야(Rudriyas)라 불리기도 한다. 마루트는 폭풍의 아들이자 바람의 신으로서 인드라의 위대함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루드라보다 더욱 많이 칭송되었다.  241

바유는 이름 자체가 ‘불다’라는 뜻의 어근 ‘바’(va)에서 생긴 단어로, 바람의 신으로서 공중의 최고 신인 인드라와 깊은 관계가 있다.  248

친구 인드라와 같이 바유도 순수한 형태의 소마를 즐긴다. 바유는 신들 가운데서도 가장 빠르기 때문에 소바를 처음 마신 자가 되었다. ..
이에 비해 바타는 바람의 힘을 과시하고 거대한 먼지 구름을 일으킨다. 형태는 보이지 않으나 소리는 우렁차며, 신들의 호흡이자 신성한 생령(生靈-살아있는 일반 국민)으로서 공물로 섬김을 받는다. 또한 번개와 태양의 출현을 알리는 전령사이기도 하다. 불그스름한 빛을 만들고 새벽을 빛나게 한다. ..
후기로 갈수록 바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248




7 생명을 살리는 제의의 불과 음료 - 지상의 가장 위대한 신

지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최고 신으로 찬양받고 있는 대표적인 신들로는 단연 아그니와 소마를 들 수 있다. 불의 신 아그니와 술(음료)의 신 소마는 불과 물로 상징되는 만큼이나 서로 관계가 긴밀하다. ..
불과 물은 성질상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인도-유럽적 개념에서 물과 불은 ‘뜨거운 연금술의 액체’와 같이 하나로 융합되어 설명되기도 한다. ..
아그니와 소마는 베다의 시인들에게 제사와 인생의 의미를 찾고 이해하게 하는 주요한 영감을 준다. 아그니가 제의의 생산적 측면과 관련한 ‘아폴론적 영감’을 준다면, 소마는 제의의 파괴적인 요소와 관련해 인생의 비전을 설명한다는 측면에서 ‘디오니소스적인 영감’을 준다고 설명되기도 한다.  251

아그니는 제사행위에서 가장 먼저 초대되는 신이다.  252

또 다른 <리그베다> 본문에서는 아그니의 찬생이 물과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그니는 물의 아들로 탄생되는데, 이는 마치 구름에서 번개가 치는 이치와 같다. 조로아스터교의 성전 <아베스타>(Avesta)에 나오는 깊은 물속의 정령처럼, 아그니는 물에서 탄생한다. 그리하여 아그니는 물의 아들(Apam Napat)이 된다.  265

<리그베다>의 시인 사제들은 아그니 못지 않게 소마에 대하여 많은 부분에서 길고도 장황하게 다루고 있다. 소마는 제의에서 가장 중요한 음료로서 신들이 즐기는 술이기 때문이다. ..
<리그베다> 제9권은 114편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시 전체가 오직 소마에 대한 찬가, ‘소마 파바마나’(Soma Pavamana : 정화시키는 자)로 편집되어 있다. ..
제의에 바쳐지는 음료 소마는 일종의 약초인 소마나무의 즙을 내어 만든다.  267

소마의 다양한 변형은 모두 물과 관련이 깊다. 구름, 암소의 우유, 꿀, 음료, 그리고 식물의 수액이나 동물(황소)의 정액(분비물, 씨앗), 술 등이 모두 물의 이미지와 관계가 깊고, 그 물은 언제나 제의의 한복판에서 신의 음료나 음식으로서 기쁨을 얻게 한다.  271

소마는 신들의 연회에 없어서는 안 될 제의의 기본요소인 술의 신이지만, 인간들에게 힘과 명성을 부여하는 신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불의 신 아그니와 함께, 술의 신 소마는 인두라는 칭호를 부여받으며, 물의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물의 아들이 되기도 한다.
인두는 ‘빛나는 물방울’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인더스(Indus) 강도 바로 이러한 명칭의 뜻을 지닌 ‘빛나는 물줄기’를 반영한 것이다. 소마는 다른 <리그베다>의 본문에서도 종종 인두라는 별칭으로 불리는데, 이두는 이때, 천지간에 보물과 부요함과 물을 가져다 주는 자다.  274



8 천지자연의 신성을 노래하라 - 천지와 자연의 신

<리그베다>에서 천지(天地)의 신은 각각 하늘의 신과 땅의 신으로 숭배를 받기도 하지만, 짝을 이루어 하나의 명사처럼 ‘천지의 신’으로 숭배받기도 한다. 하늘의 신 디야우스(Dyaus)나, 땅의 신 프리티비(Prthivi)는 각각 아버지(pitara)와 어머니(mataa)의 형태로 숭배를 받는데, 둘이 하나로 합쳐진 자웅동체(雌雄同體)의 디야우스프리티비(천지)라는 이름의 신으로도 <리그베다> 여섯 곳에서 독립적으로 찬미되고 있다.  285

천지가 디야우스프리티비라는 한 쌍으로 숭배를 받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서 땅만이 독립적으로 찬양을 받는 시편도 있다. 이른바 땅의 신, 프리티비에 대한 찬가다. 이는 그리스의 지모신(地母神) 가이아(Gaia)에 비교될 수도 있다.  290

“오, 피리티비, 언덕을 나누는 연장을 지닌 지니리의 그대여! 땅을 활기 있게 하는 풍부한 급류를 지닌 전능자여. 오, 자유로운 방랑자여, 밝은 낯빛으로 그대에게 소리 높여 찬미하나이다. 부풀어 오르는 구름같이, 우는 말처럼 달리는 오, 빛나는 색조의 말달리는 자여. 위대한 힘으로 강한 나무륻을 땅위에 붙들며, 구름으로 번개르 일으켜 하늘에서 비의 홍수를 내리는 그대를 찬미하나이다.” (<리그베다> V 84.1~3)  291

흥미로운 것은, <리그베다>에서 아수라가 하늘의 힘 있는 신으로 평가를 받았지만, 벌써 후기 문서에 속하는 <아타르바베다>에 이르러서는 아수라의 위상이 다른 신에게 정복당하는 위치로 전락한다. 땅의 여신마저 아수라가 설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신들의 권력이동과 선악구별의 기준이 후대에 갈수록 점차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 시대에 와서 아수라가 악마적 요소로 변형되는 것도 이 시기를 거치면서다.  293

<리그베다> 본문에는 리부스(Rbhus)의 이름이 100여 곳이 넘게 불리는데, 그중 11편의 찬가에서 독립적으로 등장한다. ..
리부스의 성격을 특징짓기는 어렵지만 인드라를 돕는 신의 역할을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신들을 장식하는 목수로서 장인(匠人) 역할을 하고 있다. ..
리부스가 자랑하는 훌륭한 기술의 특징은 다섯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아쉬빈을 위해 말도 없고 고삐도 없이 세 개의 바퀴로 공간을 여행하는 수레를 만드는 일. 둘째, 인드라를 위해 두 마리 적갈색 군마를 장식하는 일. 셋째, 브리하스파티를 위한 신비의 암소를 제작하는 일. 넷째, 그들의 늙어가는 부모인 천지(天地)를 회춘시키는 일. 다섯째, 트바스트리가 만든 신들의 컵 한개를 흔들어 네 개로 만드는 일이다.  294-295

베다에서 동물은 다른 신들에 비하면 극히 제한적으로 숭배받는다. 그것도 동물에 대한 직접적인 숭배라기보다는, 여러 신들이 동물의 몸을 입고 나타나는 상징적인 비유의 형태다. 그러나 점차 후기로 갈수록 동물에 대한 숭배가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306

동물 가운데서는 무엇보다 말과 소가 가장 많이 등징하여 칭송을 받고, 염소, 멧돼지, 원숭이, 거북이가 비슈누의 화신이 된다. 뱀 또한 숭배의 대상이 되는데, 이는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뜻에서 달래는 차원의 숭배다. 이밖에도 독수리와 같은 새가 인드라나 태양에 비유되면서 신적 존재로 찬미를 받는다.
동물 가운데서 다디크라(Dadhikra) 또는 다디크라반(Dadhikravan)이라고 하는 말(馬)은 <리그베다>에서 가장 유명한 말인데, 네 번에 걸쳐서 독립적으로 찬미를 받는다. 여러 가지의 말 가운데서 다디크라는 그 빠르기로 인해 독수리와 동일시되면서 칭송받고 있다.  307

원숭이는 힌두 신화에서 원숭이 신 하누만(Hanuman)과 연결되는데, 원숭이의 왕인 하누만은 주인에게 충성하는 종(dasya)의 상징이다.  310

동물들 가운데서 들짐승이나 물짐승 외에 하늘을 나는 새는 종종 태양에 비유된다. 태양 새 가루다(Garuda)는 새들의 왕으로서 절반은 인간이고 절반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가루다는 비슈누의 수레가 되고 뱀과 대적한다. 머리와 꼬리, 날개는 독수리의 것이고, 몸통과 다리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  311



9 남성 우월 신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여신 - 베다의 여신들

<리그베다>에서 여성이 대부분 종속적 위치인 것은 사실이지만, 가끔씩은 주체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여신은 천상의 위대한 신 가운데 하나인 새벽의 여신 우사(Usas)다. 우사는 천상의 위대한 신들에 비하면 낮은 서열에 불과하여, 다른 신들처럼 소마의 제의를 함께 나누지는 못한다. 하지만 여신 가운데는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
우사(Usas)는 산스크리트어로 새벽을 뜻한다.  313

새벽의 여신 우사는 그녀의 어머니가 해준 화려한 차림을 하고 인간에게 살짝 가슴을 보여주는 가냘픈 처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사는 거듭거듭 태어나면서 영원히 늙지 않는 젊음을 유지하여 어제와 같이 지금도 빛나지만 미래도 계속해서 빛날 것이다.   313-314

연인이 사랑하는 여인을 뒤따르듯이 태양은 새벽을 따른다. 새벽의 신 우사는 태양신 수리아의 아내다. 그러나 몇몇 다른 자료에서는 우사가 수리아의 어머니로 표현되거나, 우사가 수리아에게서 탄생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곳도 있다.  314

<리그베다>의 다른 본문에 따르면, 사라스바티가 쏟아낸 거대한 눈물이 파도가 산에서 홍수처럼 흘러내려 산과 들을 적신다. 사라스바티의 강둑에는 왕과 백성들이 살고 있고, 시인과 사제들은 이런 축복을 주는 사라스바티가 멀리 타국으로 떠나지 말고 늘 가까이에서 축복을 더해달라고 기원한다. 사라스바티는 천상의 태양신 푸산이나 대기의 신 인드라, 그리고 특히 인드라를 돕는 전사 그룹 마루트와 더불어 많은 찬미를 받는다.
새벽의 여신 우사나 강의 여신 사라스바티의 강력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여신이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322-323

밤의 여신 라트리(Ratri) 또한 자매인 새벽의 여신 우사와 같이 하늘의 딸로 불린다. 밤이지만 어두운 것만이 아니라, 무수한 별빛이 밝게 흐르는 별이 빛나는 밤이다.  323

밤의 여신은 새벽의 여신과 자매로서 빛으로 어둠을 정복하고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자들에게 안내자가 되어준다. 밤의 여신은 우르미야라는 또 다른 명칭으로 존경받는다.  325

<리그베다>에서 아파(apah : 물)에 대한 신격화는 소마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물은 특히 인간의 생명을 유지해주고 새로이 깨끗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여신으로 불린다.  326

베다의 시인은 물을 자애로운 어머니에 비유하여, 아기에게 젖을 주듯이 생명력과 치유력이 풍부한 물의 활력을 얻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327

잠들 줄 모르는 아파는 우주 하늘의 바다가 그 기원이고, 인드라가 개척한 수로를 따라 끊임없이 흐르며 인간들을 이롭게 한다. 이 물은 하늘에서 내려와 산과 들로 흘러 강을 이룬다. 물의 여신 아파는 거대한 강줄기(sindhu, 또는 Indus)를 따라 바다로 향한다. 그 바다는 하늘의 바다이기도 하고, 지상의 바다이기도 하다.
흐르는 물을 따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살아나고 오염된 인간은 물의 여신을 통해 죄악을 씻는다. 이런 사상 아래 오늘날도 힌두인은 갠지스나 인더스 강에서 목욕을 통해 죄를 정화하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기를 비는 것이다.  328-329



10 민중을 위한 주술에서 베단타 철학으로 - <아타르바베다>와 <브라흐마나>

베다의 네 종류 중에서 가장 후기에 속하는 <아타르바베다>(Atharvaveda)는 주술(呪術, magic)적 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 무려 731개가 <리그베다>에서 인용해온 것이다. 그밖의 많은 본문 내용도 출처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민간의 주술적 내용들을 혼합하고 있어서 한때는 위경(僞經, apocryphal) 취급을 받기도 했다. ..
제사를 집행하는 아타르반(Atharvan)이 속죄를 비는 제의나 저주(詛呪)에 관한 문헌, 또는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에서 사용하는 의례적 문구 등이 많다. 아타르반은 고대 인도의 초기 사제들을 지칭하는 말로, 후대의 브라만 사제들의 선조가 되는 셈이다. ‘아타르바베다’라는 말도 여기서 따온 것이다.  345

비록 <아타르바베다>는 <리그베다>에 비해 그 중요성이 뒤지기는 하지만 대부분 <리그베다>에서 뽑아낸 찬가들로 구성된 노래집(saman)인 <사마베다>나 ‘제의의 기도문(yajna)으로 구성된 <야주르베다>에 비하면 그 비중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아타르바베다>가 이렇게 인기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인도 고대의 원시적인 대중 신앙과 미신들을 여과 없이 생생하게 다루어 주는데다가 초기 인도-아리아인의 하층민 생활상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
<리그베다>가 비교적 고대인도-아리아인 상류층의 종교적 신념과 행위들을 봉여주고 있던 데 비해, <아타르바베다>는 고대인도의 주술적 경향과 하층민들의 생활상을 보여줌으로써 <리그베다>를 보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345-346

<아타르바베다>에는 특히 저주를 위한 주문이 많다. 이 때문에 <아타르바베다>는 ‘저주의 베다’(Cursing-Veda)라고도 불린다.  349

<아타르바베다>는 네 개의 베다 가운데 가장 후대에 기록된 문서로, 민중의 생활과 가장 가깝다.  351

재미있는 기도문들을 조금 더 언급해 보자면, 집을 건축할 때 비는 기도문, 씨앗을 뿌릴 때 축복하는 기도문, 곡식의 성장을 촉진하는 주문, 들판의 곡식에 몰려드는 해충 떼를 몰아내기 위한 주문, 곡식이 번개 맞는 것을 막기 위한 주문 같은 것이 있다.
가축의 보호와 번식을 위한 주문, 불의 위험을 막는 주문, 새로운 수로로 강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주문도 있다. 그밖에 상인의 기도, 도박이나 주사위 놀이에서 성공을 비는 기도, 잃어버린 재산을 찾기 위한 주문, 죄와 신성모독의 속죄를 위한 주문 등 그 종류는 무궁무진하다.  351

이밖에도 <아타르바베다>에는 사제들인 바라문의 억압에 대해 저항하는 저주의 기도문이 상당수 있어 흥미롭다. 권력으로 민중을 억압하는 바라문을 이렇게 저주한다.
“바라문을 온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죽여라. 신들을 욕되게 하고 생각 없이 재물만 탐하는 자, 그의 심장에 인드라가 불을 지피리라. 그가 살아 있는 한 천지가 그를 증오하리라. …… 바라문의 혀는 활이 될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화살촉에 걸리는 줄이 되리라. 그리하여 그의 숨통과 이빨이 거룩한 불로 태워져 패대기쳐지리라. 이들 바라문과 같이 신들을 욕되기 하는 자들도 그러하리라. 심장을 꿰뚫는 강한 화살로 신들이 이들을 벌하리라.” (<아타르바베다> V 18.5,8)
제사풍속이 만연한 고대사회에서 사제의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아지면서 자세가 본연의 자세를 잃고 종교적 권력으로 민중을 압제하자, 점차 이에 저항하는 저주의 목소리가 높아갔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352

통제해야할 대상이 더 클수록 정보와 지식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이러한 희생제의의 주술적 개념은 점차 우주적 관념으로 확대되었으며, 그 겨로가 ‘제의의 철학’인 베다의 마지막 철학, 즉 초기 형태의 우파니샤드(베단타 철학)로 나타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베단타 철학은 <리그베다>의 말기 사상으로서, 우주의 최고원리를 일신교(一神敎) 또는 일원론으로 설명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경향은 베다의 가장 후기 저술인 <아타르바베다>의 후반부에서부터 드러난다.  353

후기에는 브라만을 우주의 최고 원리로 내세우는 사상이 더욱 환영받게 되면서 우파니샤드의 원리로 발전한다. 우주적 최고 원리인 브라만을 인간 내면 속의 자아, 곧 아트만(atman, 自我)과 동일시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실로 푸루샤(아트만)를 아는 자는 ‘이것이 브라만이다’라고 생각한다. 그 속에 모든 신격(神格)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암소가 외양간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이.” (<아타르바베다> V 11.8.32)
우주 최고의 원리인 브라만이 인체의 내부에 도사리고 앉아 있다는 이 사상은 인간이 바로 브라만이라는 사실을 통찰하게 하는 우파니샤드 최고의 진술의 사상적 맹아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미 <아타르바베다>의 시인은 인간 내부에서 우주적 통찰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55

<브라흐마나>는 베다의 본집을 해석한 주석서로서, <리그베다>를 포함한 4개의 베다 본문에 대한 각각의 해설서다. 특히 제사의 구체적인 방식과 절차는 물론, 그 의미를 자세히 서술한 사제들의 기본적인 지침서가 주를 이룬다.  356

<브라흐마나>를 다시 내용적으로 구분해보면, 제사의 방식과 규범을 다룬 지침서인 ‘비디’(Vidhi, 儀軌)로 이루어져 있다. 제사의 기원과 전설을 설명해준 아르타바다에서 베단타 철학이 출발하는데, 이것이 우파니샤드 철학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아르타바다의 논의는 베다의 주석서인 <브라흐마나>의 끝부분으로서, 제사에 관한 최종적인 철학적 논의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베다의 끝’(end of the Veda)을 의미하는 ‘베단타’(Vedanta = Veda + anta)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베다의 마지막 문헌 <브라흐마마>, 그리고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아르타바다를 더욱 깊이 숙고하여 철학화한 작품이 바로 <아라냐카>(Aranyakas, 密林書)로서, 베다와 우파니샤드의 사상체계의 과도깅에 해당한다.  357

<브라흐마나>의 주된 사상은 무엇보다 ‘제사 만능주의’다. 베다의 본집이 주로 시인의. 노래와 찬가 형식의 만트라로 구성된 데 비해, <브라흐마나>는 주로 사제들의 편집물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제사가 주축이 되고 제사가 모든 사상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학식이 있으며 베다에 정통한 바라문(브라만)은 인간이라는 신이다.” (<사타파타 브라흐마나> II 2.2, 6)
사제 즉, 바라문(婆羅門, Brahman)은 신들을 대신하여 제식(祭式)을 주관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권위는 점점 더 높아만 갔다. 당시의 세계관에서는 제식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고, 제식이야말로 신들을 강제하거나 우주의 현상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베다의 세계관에서는 신들마저 제식을 수행해야만 비로소 불멸성을 획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이유로 제사를 집행하는 바라문의 권위는 단순히 신에게 봉사하는 경건한 봉사자의 차원을 넘어서 독자적이고 전문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따라서 제식의 힘으로 신들을 지배하는 자인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신, 곧 신인(神人)의 위치로 격상되었다.  358

예컨대 제의 전 과정을 주관하며 총감독의 위치에 있는 리트비즈(Ritvij), <리그베다>의 찬가를 낭송하는 호트리(Hotri), <사마베다>의 노래를 부르는 우드가트리(Udgatri), <야주르베다>의 노래를 부르는 아드바르유(Adhvaryu), 그리고 <아타르바베다>의 사제인 브라민(Brahmin, Brahman)이다.  360

브라만은 사제 계급을 의미하고, 동시에 사제 그 자체를 뜻하는 브라만으로도 혼용하고 있다. 이러한 혼동을 피하고자 사제로서의 브라만을 구분지어 설명하는 용어가 브라민이다.  360

오늘날 힌두교에서 제의를 수행하는 사제에 대한 일반적인 명칭은 브라민(브라만) 외에도 가정에서 가족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 프로히타(Purohita), 브라만 외의 다른 계급에서 자신들의 제사를 드리는 사제인 잔가마(Jangama), 성지순례를 오는 자들을 위해 힌두 사원에서 제의를 안내하고 집행하는 판디야(Pandya), 사원이나 성소에서 주로 의례의 절차와 푸자(puja ; 봉헌 또는 예배)를 담당하는 푸자리(Pujari) 등 다양한 명칭이 있다. 이는 제사의식의 전문화와 사제계급의 분화를 설명해주는 다양한 본보기다.
제사가 점차 중시되면서,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신들이 아니라, 올바른 제사를 드리는 행위 자체로 변해갔으며, 그 제사행위를 제대로 수행하는 사제들의 권위도 높아져갔다. 따라서 제사는 우주적 힘을 지닌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는 후대에 인도의 정통 철학파의 하나로 제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푸르바 미맘사(Purva mimamsa) 학파에서 계승되었다. 제의 속에서 신(神)의 존재 가치는 점점 퇴색하고 있다.  361

프라자파티는 자신을 제물로 삼고자 했다. 그리하여 손을 비비자 희생제물로 버터가 나왔다. 처음 나온 버터는 머리카락이 빠져 있어서 제물로 바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첫 버터를 불에 쏟아버리며, “태워서 마시자”(osa dhaya)라고 했다. 이 “오사드야”라는 ‘말’ 속에서 ‘식물’(osadhayas)이라는 말이 나왔다
온전한 제물을 위하여 두 번째 손을 비비자, 깨끗한 버터와 우유가 나왔다. 이것을 제물로 바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생각하자 “그것을 제물로 바쳐라”라는 심중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프라자파티는 깨달았다. 자신에게서 나온 말, 그 언명의 위대성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sva)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위대한 명령의 언어(aha), 그 소리를 깨닫고 프라자파티는 “스바하!(Svaha)라고 외친다. 스바하는 직역하면, ‘그 자신의 소리’지만, 의역하자면 “그렇게 되라”(So be it!)는 의미다. 이것이 불교에서 ‘사바하’라는 염불(念佛)의 끝을 장식하는 종식언어로 번역됐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아멘’에 해당한다.
프라자파티가 “스바하”를 외치자 태양이 일어나 뜨거워졌고 바람이 크게 불었으며, 아그니는 돌아가버렸다. 프라자파티는 계속 제의를 수행하여 자손을 번식시켰으며, 자신을 삼키려고 달려드는 아그니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불의 제사(Agnihorta)를 드리는 자는 누구든지 프라자파티처럼 자손을 번식하게 된다고 알게 되었다. 누구든지 죽어 불에 던져 화장(火葬)하면, 부모에게서 태어나듯이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불은 오직 그 몸만을 불태울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
창조의 원동력은 고행, 즉 타파스가 기초이고, 그 고행을 통해 불의 신 아그니와 내면의 힘, 언어가 탄생되며,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칠 때 비로소 만물이 번식하면서 ‘존재’의 지속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369-370

<브라흐마나>의 또 다른 특징은 제사의식을 올바로 행해서 얻게 된다는 필연적 결과에 대한 믿음이다. 제사행위의 인과적 보상법칙을 믿는다는 것이다. <리그베다>에서 ‘자연의 법칙’을 의미하던 개념 ‘리타’는 이제 ‘행위의 법칙’을 의미하게 되었다.
후기 인도철학 전반에 가장 큰 특징으로 드러나는 카르마, 즉 행위의 결과에 대한 보응으로서의 업(業)에 대한 개념은 바로 이러한 제사주의 성격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밖에도 <브라흐마나>에서는 인간의 본질도 정신과 육체로 구분하여, 정신을 각각 아트만, 마나스(manas, 意根(온갖 마음의 현상을 이끌어 내는 근원)), 프라나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372



맺음말 - 영원히 열린 계시의 책, 베다

베다는 한국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베다의 위대한 신인 인드라는 불교에서 제석천(帝釋天, Sakra devanam Indra)으로 해석되었고, 이는 단군신화에서 환인(桓因)의 개념으로 전용된다.  373

베다는 각각 본집과 그 본집에서 채택한 의례를 위한 해설서인 <브라흐마나>와 함께, 이를 더욱 심층적으로 토론하고 철학적으로 해명한 ‘숲의 책’, <아라냐카>로 구성되는데, 이것이 곧 베다에 대한 최종적인 철학적 해설서인 우파니샤드로 정립되게 되었다.  374

베다에서 말하는 우주창조론은 <성서>의 창조 기사와 마찬가지로, 다소 후기에 기록된 것일 가능성이 많다. 아리아인의 인도 정복시기에 가장 숭배를 받았던 인드라와 같은 전쟁영웅 신이 점차 기능을 상실해갈 즈음에, 고대 인도인은 우주의 발생에 관해 더 깊고 철학적인 사색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추측이다.
베다의 우주발생의 기원설은 여러 가지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한 현자들이 각각 다양한 시각에서 우주 발생에 대한 상상력을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기원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어떤 원리의 신이 목수처럼 우주라는 건축물을 만들어내면서 여러 기능을 지닌 신들이 창조의 과정에 협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타파스’와 같은 열기가 발생하여 스스로 진화해가는 과정을 말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견해들이 상호배타적 관점인 것은 아니고, 두 가지 견해가 서로 결합되기도 한다.  377-378

베다의 또 하나의 관점은 제사의 기능이었다. 제사의 주된 기능은 인간의 생로병사에 관한 모든 분야를 관장하면서, 축복과 장수를 신에게 비는 것이었고, 그 제사를 담당하는 역할을 떠맡은 자가 사제였다. ..
처음에는 모두 순수한 예언 기능과 시인으로서의 통찰력을 지닌 현자들이었으니, 제사사의 기능이 점차 세속화되어가면서 제사를 권력의 도구로 사용하고 부를 착취하는 수단으로 전락시키기도 했다. ..
점차 후대로 갈수록 제사의 기능은 약화되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궁극적인 물음부터 시작하여, 인간과 우주의 근원에 대한 탐색이 깊어지면서, 베다의 끝인 우파니샤드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379-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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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말- 이진우(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저자는... 복잡한 세계를 살아갈 수 있는 나침반으로 ‘존엄’을 제시한다.

한 개인이 살아가면서 다양한 외부의 유혹에 맞서 자신의 삶을 지킬 수 있는 내면의 나침반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존엄이다. 사회와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살기를 거부하고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자기성찰이 존엄한 삶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수 많은 사람이 저마다 고안해낸 해결책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해왔다. 누군가는 양심에 호소했고, 가치와 규범을 외쳤으며, 압력을 행사하기도, 법을 만들고 규칙을 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소용이 없었다. 물론 달라진 것도 없다. 인류는 그저 위기에서 또 다른 위기에 직면했을 뿐, 계속해서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지구의 한정된 자원을 남용하고 있다. 인류 스스로가 만들어낸 이 무질서 속에서 허우적대면서,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이주할 준비나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뇌 구조의 특성상 필연적으로 길을 잃게 되어 있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의 뇌는 생각과 감정, 행동을 이끌어내는 뉴런의 연결 패턴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한 개인으로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각종 유혹과 약속, 인생을 살면서 꼭 있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에 용기를 내어 저항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위해 가용할 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깨어 있게 하며, 세상이 말하는 그 모든 유혹과 약속, 상품들보다 더 강인하고 확고하게 뿌리를 내릴 내면의 힘.

일관된 방향을 제시하여 우리 뇌를 무질서의 상태로부터 지켜주고, 그것을 통해 장기적으로 에너지 소비량을 줄여주는 표상. 바로 그 표상을 일컫는 단어가 바로 존엄이다.


1장 잃어버린 존엄을 생각하다

끊임없이 발전을 거듭하며 ‘최적화’하는 알고리즘 앞에 인간들은 무익한 존재가 되고 만다.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하지만 정작 학교에서 우리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지식을 얻는다. 몸을 움직일 시간이 있기는 하지만, 나가봐야 좁은 운동장이 전부다. 그것도 종소리가 울려야 움직일 수 있다. 과거에 우리가 끝도 없이 넓은 자연 환경에서 학습하고, 그만큼이나 제한이 없는 시간 속에서 배움을 즐겼다면, 이제는 45분 단위로 시간을 자르고 나누어 공부를 한다. 한 과목이 끝나면 다른 과목이 이어진다.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다음 수업이 진행되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은 조용히 앉아 선생님의 설명과 질문에 집중해야 한다. 학생들에게는 이 설명과 질문이 별로 흥미롭지 않다. 무엇을, 누가, 언제 배우고 알아야 하는지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사는 동안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인간은 이렇게 순식간에 특정 시스템에 속한 대상, 지배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자기 존엄성을 스스로 깨우칠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2장 존엄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민주주의 이전에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 우리 삶의 모습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3장 지극히 인간다운 뇌

개인의 신념이 가진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 번째 방법은 바로 ‘실패’다. 지금까지의 인생관과 그에 따른 자아상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깊은 고통을 겪고 나면, 지금까지 보지 못한 다른 것을 볼 수있는 눈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옳고 타당하다고 여겼던 이상과 신념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고, 나아가 더 포괄적이고 생산적인 새로운 방향을 찾아나설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실패는 그 고통의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다. 그래서 그 고통을 허용하지 않거나, 모른 척 해버리고 만다. 물론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신념이 하루아침에 모조리 충격적으로 무너지는 경우도 드물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앞으로도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한, 대부분의 사람은 오히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신념을 보다 효율적이고 보다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려고 더욱 노력할 것이다.
실패보다 더 효과적이고, 한 개인이 형성한 이상과 세계관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다. 그 만남을 통해 자신의 신념과는 다른 낯선 신념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완전한 타인을 만나면서 자아상과 세계관을 확장하고, 비로소 자신의 신념을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
자신의 세상과 선택이 틀렸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실패의 고통, 그리고 타자와의 만남에서 낯선 신념으로 마주함으로써 자신의 사고방식과 이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 이는 인류 역사를 관통해온 인간의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4장 사회적 뇌, 존엄을 배우다

우리가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우리의 뇌는 스스로 에너지 소비를 최소한으로 유지하기 위한 작업을 한다. 뇌의 내부 질서가 혼란스러워지면 뇌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해결책을 찾으면 즉시 뇌의 혼란 상태는 안정화되며 비로소 에너지 소비를 낮출 수 있게 된다. 그 해결책 중에서도 가장 흥미롭고, 효과가 있는 방법은 뇌 기능의 원리이기도 한 ‘단순화’ 작업이다. 이는 우리 몸의 다양한 단일 행동과 반응을 조화롭게 조정하기 위해 상위의 패턴을 형성하고, 자동화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어려운 말 같지만, 이는 사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개념이다.

우리의 뇌는 수많은 단일 움직임들을 조정할 목적으로 상위의 행동 패턴을 만들어내고, 에너지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우리의 행동을 조정한다. 우리가 ‘사고방식’, ‘태도’라고 일컫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태도도 자동으로 나타나는 뇌의 반응 중 하나다. 탐험을 좋아하는 것, 개방적인 것, 창의적 활동을 좋아하는 것도 뇌가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만든 행동 패턴이다.


5장 본능에 새겨진 존엄성을 찾아서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줄 장치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태어난 이상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그 인간다움을 찾아가야 한다.


6장 타인의 존엄을 지켜야 하는 까닭

7장 강인한 삶을 향한 여정의 시작

‘우리는 과연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을 바로, ‘인간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버린다.


8장 어떤 세상을 가르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 ... 부모 스스로가 자신들의 존엄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말이다.

자아상은 공동체 안에서의 소속감을 기반으로 형성되어, 일종의 내면의 나침반으로서 타인의 존엄을 해치지 않는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자아상이 형성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유익한 경험을 통해 모든 아이들이 스스로 형성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갖게 되는 자아 성찰과 자아 형성의 과정에 급행은 없다. 아이가 보호받는 가운데 필요로 하는 만큼의 여유가 반드시 주어져야만 한다.

한 인간의 존엄함에 대한 인식은, 행동으로서만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스스로의 존엄함을 드러내고 있는 부모와 동료, 선배들을 통해 학습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존엄한 존재로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다른이의 마음을 이끄는 무언가를 가진 사람들. 그들이 스스로를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는 일단 만나보면 모두가 알아차릴 수 있다. 이들에게는 삶을 이끌어가는 내면의 나침반이 있기에 늘 평안하고 유혹당하지 않으며,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타인을 자신의 의도나 기대, 평가의 대상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바로 이들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존엄함을 인식할 수 있도록 권유하고 격려하며 자극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9장 더 이상 수단으로 살지 않기 위하여

최소한 당연하게 보이는, 변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되돌아볼 수 있는 어떤 철학과 신념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매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갈 것을 결정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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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나 답게 살기
나는 비행기에서 책을 읽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으로서 이 책을 썼다.

제1장 어떻게 살 것인가

사람이 즐기는 놀이에는 한계가 없다.

문제는 무슨 일을 했느냐가 아니다. 왜, 어떤 생각으로 그 일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크라잉넛 멤버들은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스스로 설계했고 그 삶을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았다.

크라잉넛 멤버들은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을 물질이나 지위, 사회 통념이나 타인의 시선, 어떤 이념이나 명분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두었다. 마음이 내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면서 행복한 삶을 스스로 설계했다. 그리고 그 삶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밀고 나갔다. 주눅 들지 않고 세상과 부딪쳤다 인생이 성공했으며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계속 그렇게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고 싶다고 한다.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 그러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대로 계속해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이미 훌륭한 인생이다. 그대로 가면 된다. 그러나 계속해서 지금처럼 살 수는 없다고 느끼거나 다르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아직 충분히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 더 훌륭한 삶을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  

세상은 제 갈 길을가고, 사람들은 또 저마다 자기 삶을 살 뿐이다. 세상이, 다른 사람이 내 생각과 소망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해준다면 고맙겠지만, 그렇지 않다고해서 세상을 비난하고 남을 원망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소극적 선택도 선택인 만큼, 성공이든 실패든 내 인생은 내 책임이다. 그 책임을 타인과 세상에 떠넘겨서는 안 된다. 삶의 존엄과 인생의 품격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죄악과 비천함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훌륭한 삶을 살 수 없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자기 결정권’이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이며 권리이다.

재능의 본질은 즐기면서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왜 자살하지 않느냐고 카뮈가 물었다. 그냥 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사는 이유를 찾으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삶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삶의 의미는 사회나 국가가 찾아주지 않는다. 찾아줄 수도 없고, 찾아주어서도 안 된다. 각자 알아서 찾아야 한다. 찾지 못할 경우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가방끈’이 길지 않아도 된다. 재산이 적어도 상관없다. 나이도 관계없다.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에게 타인의 위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도 개선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단지 삶의 환경을 조금 덜 냉혹하게 만들 뿐, 그 자체가 내 삶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한다.

자기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은 문제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책임이든 사회의 책임이든, 닥쳐온 고통은 일단 내가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 세상을 원망해본들 달라질 것은 없다. 누구도 그 짐을 대신 져주지 않는다. .. 각자 이겨내야 한다.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제2장 어떻게 죽을 것인가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철학자 밀의 주장.

원하는 인생을 스스로 설계하고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훌륭한 삶, 품격 있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 나름의 견해를 세워야 한다. 그러려면 삶과 함께 죽음도 알아야 한다. 죽음을 모르거나 오해하면 삶을 망칠 수 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문명이 억압이라는 말에는 분명 일리가 있다.

욕망을 억압하면서 규범을 따르는 일이 참기 어려울 만큼 어색하고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진다면 욕망을 표출할 수 있는 문을 더 넓게 열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규범은 자기 자신이 기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따르면 된다.

칸트(Immanuel Kant)에 따르면 존엄한 것은 ‘가치(value)’를 따질 수 없다. 어떤 것의 ‘가치’는 사람들이 가치를 인정하는지, 인정한다면 얼마만큼 높게 평가하는지에 좌우된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가치를 따질 수 없다.

자유의지를 발현할 때 지켜야 할 규칙 또는 도덕법이 있다. 칸트는 이 규칙을 이성이 내리는 ‘정언명령(Kategorische Imperativ)’이라 했다. 그는 경험의 도움이 없어도 사람은 이 규칙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칸트의 도덕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준칙이라야 한다.” “둘째,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 존엄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옳게 발현하려면 이 두 가지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사지가 마비된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삶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죽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굶어서 죽는 방법은 택하고 싶지 않았다. 굶는 것이 특별히 나쁜 방법이라서가 아니라, 사지가 마비된 사람이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죽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자살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 가운데 오로지 그것만이 허용된다면 강제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강제에 굴복하는 죽음은 존엄하지 않다. 그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가 원하는 벙법은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잠들어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누군가 자기에게 수면제를 제공할 경우 형법의 자살방조죄로 처벌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남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가상 상황이 아니다. 그런 남자가 정말 있었다. 그의 주장은 단순했다. ‘사지가 마비된 삶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자유의지에 따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끝내고 싶다. 이것은 국가와 사회가 억압하거나 침해할 수 없는 정당한 권리이다. 내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행위 역시 정당하다. 그렇게 하는 사람을 처벌하지 마라.’ 이 남자는 정부와 의회에 ‘안락사(安樂死)’를 허용하라는 입법청원을 냈다.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수많은 종교지도자, 의사 , 지식인들과 길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된 여인이 몰래 가져다준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는데 마침내 성공했다. 그의 이름은 라몬 삼페드로(Lamon Sampedro), 스페인 남자였다. 그는 <죽음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였다>라는 책을 남겼다.
스물다섯 살에 물이 빠진 해변에 떨어져 일곱 번째 경추가 부러지는 사고가 없었다면 라몬 삼페드로는 열정적이고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스물 두 살때부터 노르웨이상선을 타고 세계 마흔아홉 군데 항구를 누볐던 이 청년은 여자 친구와 약혼을 할 것인지 여부를 고민하다가 해변가 바위에서 발을 헛디뎠다. 그리고 정밀검사와 재활치료를 받은 끝에, 죽을 수도 없고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라몬 삼페드로는 이때부터 30년 동안 똑같은 하루를 살았다.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침대에서 책과 신문을 읽고, 침대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침대에 누운 채 찾아온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침대에 누워 창문으로 하늘과 바다를 내다보았다. 라몬은 휠체어 타기를 거부했다. 전신이 마비된 삶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로지 죽기만을 원했지만 물과 음식을 끓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것이 강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라몬의 투쟁은 사람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만들었다. 위로하고 격려하는 편지가 쇄도했다. 교황을 비롯한 세계 종교지도자들이 자살은 잘못된 선택이라고 설득하는 편지를 보냈다.  저명한 지식인들이 라몬의 생각을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 스페인 정부와 의회, 법원, 인권재판소는 심리를 회피하면서 대책 없이 시간만 끌거나 다른 기관에 책임을 떠넘겼다. 라몬은 펜을 입에 물고 편지를 쓰고 언론에 기고하였다. 방송에 출연해 자기의 견해를 이야기했다. 1995년 그는 이렇게 쓴 편지와 시, 산문을 한데 묶어 책을 냈다. 여기서 라몬 삼페드로는 자신이 생각하는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면 휠체어를 타든 목발을 짚든 지팡이를 짚든 간에 그 삶은 언제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사라지면, 그래서 그것을 이성으로 깨닫게 되면 그때가 죽을때인 거지요. 전 지금처럼 살아가는 시간이 과연 저에게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많이, 아주 많이 생각했습니다. 결론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고통은 아무 가치가 없고 제 고통의 원인 역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제때 죽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면 그 아픔은 인간적인 수준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죽는다는 건 단지 그런 거예요. 태양이 제 기억 속에 가장 아름다운 작별 인사를 새겨두는 것처럼 각자 가지고 있는 좋은 추억을 이 세상과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에 남겨두는 것, 잠드는 것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슬픔도 원망도 없이 그저 피곤에 지쳐 고요하고 평온하게 눕는 겁니다. 그러나 죽음을 그렇게 느끼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인간적이길 바란다고 할 만큼 굉장히 자유롭고 선해야 하겠지요. 안락사, 또는 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인정하려면 진정으로 인간과 삶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고 선의 심오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쟁은 전쟁이 아니다. 져도 죽지는 않는다. 이겨서 꼭 행복한 것도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 가진 것으로 인생을 산다. ... 끝없는 경쟁 속에 살아야 하지만, 즐기면서 경쟁에 임하면 이겨도 이기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식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두 가지를 가지도록 도와줄 수 있다. 첫째는 행복을 느끼는 능력, 둘째는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다.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가지려면 삶을 설계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자녀가 스스로 이것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시행착오를 경험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아이를 잘 키우려면 도를 닦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두 가지만 이야기하자. 따지고 드는 아이를 존중해야 한다. 공정성(fairness)에 대한 인식이 일찍 발달하는 아이일수록 지적 재능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사회성은 가장 높이 발달한 생물학적 재능이다.  끝없이 “왜?”를 쏟아내는 아이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더 창의적인 아이들은 덜 창의적인 아이들보다 부모를 더 힘들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기존의 규범으로 길들이면 아이는 호기심을 버리고 창의적이기를 그만둔다. 어떤 부모도 자기에게 없는 것을 자식에게 줄 수는 없다. 자녀에 대한 사랑과 훌륭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부모만이 그것을 자녀에게 줄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언어로 대화하는 것이다. 사람은 언어로만 소통하는 존재가 아니지만 소통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언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말을 하기 전에 아이들은 먼저 말을 알아듣는다. 뱃속에 들어 있을 때부터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완전한 문장으로 아이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아이의 뇌 속에 음성 정보를 처리하는 뉴런과 신경세포가 제대로 자리 잡게 하려면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갓난아이 때부터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집중해서 듣는 아이가 있고 그렇지 않은 아이도 있지만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아이를 씻길 때도 지금 목욕을 할 것인지, 아니면 조금 더 놀다가 할 것인지를 물어보는 게 좋다. 어느 쪽이든 큰 문제가 없는 경우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말과 더불어 진행된다. 인간은 언어로 사유한다. 부모가 반쪽짜리 ‘아기 말’을 쓰면 아기의 생각도 반쪽짜리가 된다.
원하는 것을 성취하려면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 아이큐가 높고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경쟁력이 있는게 아니다. 사람의 경쟁력은 인지적, 정신적, 정서적, 신체적 능력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삶에는 인과관계를 찾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그냥 일어나는 일이고, 일단 일어나고 나면 되돌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칸트의 충고를 기억하자.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하라.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도척이 개 범 물어갔다”는 속담이 있다. 나쁜 사람에게 좋지 않은 일을 당하는 것을 볼 때 우리 어머니가 쓰던 속담이다. 그 이름이 수천 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은 도척은 누구인가? 도척은 중국 춘추 시대 혼란기를 주름잡았던 살인강도단 두목이다. 부하 9천 명을 거느리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힘이 약한 제후의 성을 공격해 재물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강간했다. 사람을 죽여 간을 날로 먹었다고도 전해진다. 그런데 도척도 나름 도(道)를 깨달은 자였다고 한다. <장자> [외편]에 따르면, 부하가 도둑질을 하는 데도 도가 있는지 물었다. 도척은 어디에 간들 도가 없겠느냐면서, 다섯 가지 도를 갖추지 못하면 큰 도적이 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남의 집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마음대로 알아맞히는 것이 성인이다.
남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은 용기이다.
남보다 뒤에 나오는 것이 의로움이다.
도둑질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를 아는것이 지혜이다.
고르게 나누어 가짐이 어짊이다.

夫妄意室中之藏 聖也 (부망의실중지장 성야)
入先 勇也 (입선 용야)
出後 義也 (출후 의야)
知可否 知也 (지가부 지야)
分均 仁也 (분균 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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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강의 - 자기 결정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내가 내 삶을 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9


스스로 결정짓는 삶은 이 규범의 틀 안에서 외부로부터의 강제가 없는 삶, 그리고 어떤 규범을 통용할 것인지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10


독립성은 타인에 관한 것이 아닌, 스스로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되지요.  11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 '부동의 동력(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타자를 움직이는 힘)'이 아닙니다. 컴컴한 어둠 속에 숨죽이고 앉아서 내적 드라마를 이리저리 조종하는 감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생각과 감정과 소망을 결정할 때에도 우리는 선행조건 없이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아무렇게나 하지는 않습니다. 이 두 번째의 의미로서의 자기 결정이라는 것은 소리 없이 일하는 난쟁이(큰 인격 안의 작은 인격)로 인한 인격의 중첩도 아니고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상상하는 일도 아닙니다. 어떻게 살 것인지 자문하게 되기까지 이미 그 이전에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일을 겪었고 수만 가지 것들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각인은 또 다른 것들을 향한 접점이 되는데, 우리는 이 접점들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고 해도 별 상관이 없는 이유는, 그 반대 또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점에 서 있는 사람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으니까요. 아무런 소망도 없고 아무런 경험의 발자취도 없다면 기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의지와 경험이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삶의 역사라는 바탕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삶의 역사가 주는 조건에 의해 제약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기 결정권이 있다고 할 때, 자기 결정권은 그러한 선제 조건들로 이루어진 인과관계적 삶이 흘러온 틀 안에서의 영향력으로만 존재합니다.  11-12


내가 매 순간마다 자신의 과거가 드리우는 그림자와 외부의 영향이 미치는 자기장 안에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자기 결정권 운운할 수 있단 말입니까?  13


나의 내면 세계가 외부와 아무리 밀접하게 얽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세계와 또 다른 하나의 세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과 소망을 주관하여 말 그대로 삶의 작가요. 그의 주체가 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사건을 단순히 맞닥뜨리거나 당하여  그 일로인한 경험에 그저 속수무책으로 압도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주체가 되는 대신에 단순히 경험이 펼쳐지는 무대가 될 수밖에 없는 삶을 가리킵니다. 자기 결정을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런 차이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13-14


우리 스스로를 테마로 삼아서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특징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이것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자신의 경험과 내적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이러한 거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인식과 이해의 거리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는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 생각과 느낌과 소망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14


자기 결정은 가능성에 대한 인지력, 즉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15


내적 거리의 두 번째 종류를 보면 자신의 경험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항상 견지해 오던 나의 사고방식에 만족하는가, 아니면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나의 두려움, 시기심, 증오가 마땅한 것으로 생각되는가? 정녕  나는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이 증오심을 다시 물려주는 사람이 될 것인가? 부모님이 갖고 있던 두려움을 계속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화해와 마음의 여유를 누릴줄 아는 사람이 될 것인가? 같은 질문을 내 소망과 의지에도 똑같이 던져봅니다. 좀 더 많은 돈, 좀 더 높은 지위를 추구하는 나의 의지가 정말로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가? 낵 진정으로 화려한 삶과 요란한 성공을 좇는 사람인가? 혹시 수도원 같은 고요 속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는 유형은 아닌가?  15


자기 결정이 성공하는 경험을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그 무엇이 탄생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아상입니다. 자아상은 우리가 어떤 모습이고 싶은가에 대한 생각입니다. 지그 ㅁ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우리의 자아상과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을 때, 그리고 우리가 행위와 사고와 감정과 소망에 있어서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의 사람이 되었을 때, 그것을 자기 결정적 삶이라고 하 수있다는 것이지요. 바꿔 말하면 자기 결정이 한계에 부딪히거나 실패하는 것은 자아상과 현실 사이에 큰 간극이 존재할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


자아상의 기준이라는 것도 손댈 수 없는 신성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자아상에 허리를 굽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구속하고 노예처럼 옭아매는 생각을 과감히 던져버리는 일이 오히려 더 중요할 때도 있지요. 그리고 영향력에 대해서도 그것을 잘못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내적 구조 변경은 어느 날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하여 영혼의 연금술로 뚝딱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환경을 바꾼다든가 새로운 경험을 해본다든가 낯선 인간관계를 개척한다든가 필요할 경우 치료나 훈련을 받는다든가 등등 외적인 우회로가 많이 필요하지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인식에 있습니다. 원하는 나의 모습과 현재의 내가 너무 달라 계속해서 마음의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면 자아상뿐만 아니라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그 욕구들의 근원지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자기 결정은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과 굉장히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자기 인식은 사치품이나 뜬구름 같은 철학적 이상이 아니라 자기 결정적 삶, 더 나아가 존엄성과 행복의 구체적 조건입니다.  17-18


확실하다고 믿어오던 것들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증거를 찾아가는 동안 나는 그 확신들이 변화할 수 있는 내적 과정의 문을 열게 됩니다. 이 과정이 충분히 반복되면 내 의견의 총합이 완전히 탈바꿈하여 결과적으로 생각의 정체성이 변화하게 됩니다.... 비판적 물음을 통해서 익숙하던 생각의 패턴에서 한 발짝 거리를 두고 검증 가정을 통해 생각의 주인 자리를 찾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이 지녀온 언어적 습관과 거리를 두는 것과도 큰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또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많은 것들이 모국어를 그대로따라 함으로써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19


경각심을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정확한 의미를 따져보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이 그 의미를 가졌다는 것을 과연 무엇을 통해 알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 자신에 대해 결정한다는 것은 사고를 조망하는 능력과 사물의 명학함을 추구하는 일 모두에 언제나 굽힘 없는 열정을 가진다는 것과 통합니다.  20


인식된 경험을 세분화하고 구체화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되지 못한 것을 의식화하는 것, 이 두 가지 방법은 우리가 언어적 발현을 통해 우리의 감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기 결정이 적용 범위를 내면으로 확장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23


경험된 과거로 말로 표현하는 우리의 능력은 그러므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집니다. 첫 번째 얼굴은 자아상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허락하는 측면입니다. 이때 자아상은 과거를 특정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나서 결국 미래를 향한 설계도를 가지 ㄴ현재에 도달한 한 사람의 초상화지요. .. 또 하나의 얼굴은 모든 자아상이 그 진위가 모호하고, 착각과 자기기만과 자기 설득으로 가득 찬 구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아상은 진실이 밝혀져 어쩔 수 없을 때나 도덕적으로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을 때 등등 때에 따라 고쳐지곤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새롭게 짜이고 앞뒤가 맞는 또 다른 정황이 생겨나며 맞지 않는 부분은 억지로 잊히고 익히 알고 있던 것이라도 새로이 윤색된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25


기억이 강력하게 압도적인 그 힘으로 어떤 의지를 자꾸만 방해하거나 무시당하고 분열된 과거가 되어 우리의 경험과 행위를 비열한 어둠 속에 꼼짝 못하게 옭아맬 때, 정신의 지하 감옥이 되고 맙니다. 오직 그들을 언어로 불러내야만 그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기억은 이야기될 때 이해 가능한 것이 되고 우리는 기억의 힘없는 희생양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기억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잊고 싶다고 해서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이러 ㄴ의미에서 볼 때 기억하는 존재로서의 우리는 자기 결정적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 결정적 존재가 되려면 일단 이해하는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즉 기억이 휘두르는 힘과 끈질김을 우리의 정신적 정체성의 표현으로 보는 법을 배우고 나면 기억은 더 이상 외부 이물질이 아니게 되어 적군으로서의 공격을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26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의 울림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건이지요. 즉 우리 안에서 잘못된 울림을 내느 ㄴ것을 추방하고 새로운 말과 새로운 리듬을 시도해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의 소설을 끝내고 난 작가는 전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장면 중 하나는 책을 들고 말없이 소파에 앉아 아주 가끔씩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30



이제 타인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31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이유가 만일 외부 권위와 그것이 주는 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우리는 자기 결정의 상실을  경험할 것입니다. 마치 머슴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그 두려움이 내부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스스로 삼은 자기 자신의 종이 됩니다. 도덕의식과 자기 결정이 서로 공존하려면 두려움이 원인이 되어서도 안 되며 열정 없는 의무감에 의한 것이어서도 안 됩니다. 자기 결정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야 하지요.

한 가지 방법은 이성적이고 공익적인 의미를 두어서 자기 저신의 이익으로도 해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모두 도덕적 규범을 지킨다면 서로를 적대시하는 혼란 속에서보다 자기 결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이 커지므로 결국 각자에게 모두 이득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 중에는 특히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도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도덕적 친밀감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종류의 만남 안에서는 복합적이고 깊은 도덕적 감수성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서로를 이용하기만 하려는 적수들 사이에서는 불가능한 관계입니다. 도덕적 친밀감이 있는 만남에서는 분노와 원망, 도덕적 수치심, 후회 같은 감정도 일어나긴 하지만 또한 의리나 상대방의 도덕적 숭고함에 대한 감탄 같은 감정도 일어납니다. 이러한 감정들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 단순히 사회적 게임을 같이하는 냉정한 동반자였다면 절대 될 수 없는 중요한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에게 중요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중요한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도덕적 감정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적으로 던지기 때문이지요. 이 질문은 자기 결정에 관한 문제가 나왔을 때 우리를 읶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도덕적 친밀감은 비판적인 내적 거리를 자기 자신에게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유지하는 인간관계입니다.  32-34


프랑스의 모럴리스트인 라브뤼예르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외부에서 행복을 찾는 데에 그치지 않고 굴종적이고 올바르지 않으며 정의와는 동떨어진, 미움과 정횡과 편견으로 가득찬 인간들의 판단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대체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그가 이 글을 쓴 것은 아카데미 프랑세즈로부터 세번째로 입회를 거부당했을 때였습니다. 그가 말한 것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으 ㄹ하는지에 대해 타인의 칭찬과 확인을 받고 싶어 하는 소망이었죠. 이것은 매력적이고도 위험한 욕구입니다. 인생에서 너무 일찍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어느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자기 자신을 크게 놓쳐버린 느낌을 받는 그런 삶을 살게 되지요.  35


타인이 휘두르는 그러한 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35


자기 결정적으로 발전해나가는 일은 타인의 시선을 맞닥뜨리고 그에 맞설 때만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가장 쉬운 방법은, 외부러부터의 모든 시선을 독립적인 정신적 정체성으로 되받아치는 것입니다. .. 타인의 시서노가의 대결이 자기 결정적인 성질을 띠려면 자기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묻고 또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

내가 가진 것 중 나는 보지 못하지만 타인은 볼 수 있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타인의 시선은 나의 자기기만을 발견하는가? .. 이러한 자아 확인에도 우리가 거리를 둬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바로 라브뤼예르가 꼬집었던 것으로, 타인은 어디까지나 타인에 불과하며 그들이 우리를 평가할 때 우리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오직 그들만의 문제인 수만 가지 요인에 의해 그 평가가 왜곡되고 부정적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결정적 삶은 이러한 낯섦도 견뎌낸다는 것을 뜻합니다.  36-37


자기 생을 스스로 이끌어나가고자 하는 욕구는 타인에게 조종당하지 않으려는 욕구와도 일치합니다. ..

조종은 계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여기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몇 가지 예가 있습니다. 최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주입되는 광고, 속임수, 정보의 차단, 사람의 감정을 비열하게 이용하는 행위, 그 어떤 생각의 형성도 못 하게 만드는 세뇌 작업등입니다.

조종이 악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자아상에 의해 걸러지지 못하는 영향력이며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가진 자아상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내적 상처를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독립적인 인격체로서의 우리는 무시당합니다. 제대로 된 독ㄹ비적인 인격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것은 존엄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가혹한 행위입니다. 

가장 비열한 것은 겉으로 바서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세간에서 통용되거나 심지어는 높이 평가받는 장면이나 은유, 미사여구의 공식 등을 통한 은밀한 조종입니다. 세계와 우리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 중에느 ㄴ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자아상과 자기 결정적 삶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방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텔레비전, 신문, 정치적 연설 같은 것들이 이런 방식의 이야기들로 넘쳐나 수없이 많은 생각의 들러리들을 양산하지요.

그것에 대항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깨어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물을 서술하는 데에 이 방식이 정말로 옳은 방식인가? 내가 생각하며 느끼는 방식과 정확히 일치하는가? 막강한 권위에 의해 제정된 요란한 공식이 띠는 당위성이 지극히 당연하게 다가올수록 우리는 더욱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하고 잇는 자신만의 목소리이며 참됨과 독창성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37-38


제가 원하는 문화는 조금 더 잔잔한 소리가 지배하는 문화,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도움을 받는 고요함의 문화입니다. 오직 그것이 최우선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그런 문화 말이에요.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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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를 팔아야 하는 아버지와 아들을 손가락질하게 만든 것도 이런 조작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수의 말을 두려워하고 도 그 말에 휘둘리기도 합니다. 때론 실수를 하고 그러면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기도 하죠. 그런데 우리는 처음부터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한 비웃음을 받고 싶지 않아서겠죠 우유부단하면 안 된다거나 주변 살마들의 말에 휘둘리면 안 된다또는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입니다.

두렵지만 무언가를 시도하고, 여러 번 실패를 겪지만 그 속에서 다시 일어나 성취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성공을 권하는 우리 사회는 실패의 시간을 허락해 주지 않죠. ‘효율성이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패하고 고민하는 시간은 비효율적일 뿐입니다. 당나귀를 팔려고 나갔으면, 빠른 시간 안에 시장에 도착해서 좋은 값을 받고 팔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최대한 빨리 돌아온다면, 그만큼 시간을 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간만큼 밭에라도 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리고 무언가 시도하는 것 자체가 성공의 이데올리기 안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늘 효율적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남들이 말하는 성공을 거둔 이들이 성공을 만끽했다는 이야기도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맛을 안다는 말처럼 무언가를 누리는 것도 겪어봐야 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까 우리에게 강요된 성공의 이미지만 좇다 보면 성공은 할지 몰라도 그것을 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돈은 많지만 돈 쓰는 법을 모르고, 집은 좋지만 과시와 투자 외에는 집의 효용성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이룬 성공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죠.

이솝은 우리에게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라고 전합니다. 여전히 유효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적당히 무시할 줄도 알아야 우리 자아가 온전할 테니까요. 하지만 역사를 보면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성공(?)한 사람만큼 무서운 사람도 없습니다. 고대로부터 폭군, 독재자, 살인자는 모두 단호하고 신속하게 목적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자신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다른 사람의 말에는 귀를 닫았습니다. 그들이 당나귀를 파는 아버지와 아들처럼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고 다른 방법을 고안했다면, 역사 속의 비극적인 사건도 많이 주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30-31

 

규율 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 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 - <피로사회> 한병철 34

 

우리는 학창 시절 내내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우리 교육은 규율에 맞춰 살며 질서를 지키는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무조건 복종하는 인간을 만들어 내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얼마전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보았습니다. 서울대에서 4.0이상의 학점을 받은 학생들의 공부 비법을 알아 본 결과, 대부분이 교수의 말을 토씨 하나까지 틀리지 않게 필기한다고요. 충격이었습니다. 우리의 교육 과정은 마치 단거리 달리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입 시험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질주하게 만들죠. 그래서 질문이 많고 궁금한 것이 많은 학생들이 고득점을 얻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34-35

 

모든 것을 긍정하고, 모든 것에 정력적이어야 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차 무기력한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무기력해진 인간은 분노하는 법도 잊습니다. 저자는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인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 간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자는 사색을 제안합니다. 사색적 삶이란 생각하는 삶을 말합니다. 36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 부정적 힘 없이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처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어떤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무언가를 생각할 힘밖에 없다면 사유는 일련의 무한한 대상들 속으로 흩어질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Nachdenken)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 <피로사회> 한병철 36-37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어른들 중에는 아이들이 규칙을 어기거나 어떤 일에 혼란스러워할 때도 아이의 의견만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사회에서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육은 무엇이 되고 안 되는지를 배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또한 아이들은 절망에 대한 것도 배웁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에 속수무책일 째, 위로받고 힘내는 법도 배웁니다. 어른이, 선생이 옆에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두 가지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격렬하게 우는 아이를 잠시 내버려 둘 줄 알며, 기꺼이 소년의 짝이 되려는 사람이 바로 좋은 선생입니다. 49

 

우리들의 경제 구조는 조직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대립없이 함께 일하며 점점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 기호가 획일화하고, 쉽게 동화하고, 수요를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대중들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제도는 인간이 자유롭고 독립적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남들이 바라는 모든 것들을 다 하는 사람들과, 사회라는 기계에 아무런 마찰도 없이 조립되고 강제나 통솔자가 없어도 통솔되고, 맹목적으로 휘둘려지는 인간들을 필요로 한다. 이런 제도는 사람을 순하게만드는 제도이다.’ - <서머힐> 알렉산더 닐 51-52

 

독일의 철학자 훔볼트(Karl Wilhelm Von Humboldt)모든 인간의 목표는 개인의 능력을 가장 고귀하고 조화롭게 발전시켜 모순이 없고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표면적으로 학교가 내세우는 정신과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개인의 능력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지점에서 말이죠. 훔볼트는 개인은 잠재력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전제하에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가 경험한 학교들을 돌이켜 보면, 대부분 개인의 능력을 무시한 교육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교의 커리큘럼은 아이들의 능력을 발견하는 데 무관심하고, 수많은 시험은 잠재력을 들여다볼 만한 시간을 빼앗죠. 개인의 잠재력과는 상관없이 학교, 혹은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 학교의 목표인 것입니다. 53

 

금기(禁忌 금할금 꺼릴기)’란 어기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호기심은 그 어떤 두려움도 이겨 내기 때문이죠. 59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은 항상 환기가 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음식과 공기와 물이 몸 안과 바깥을 드나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말도 내 몸의 안과 밖으로 들고 나야 합니다. ..

우리가 그토록 친구를 필요로 하고, 어릴 적 친구를 가장 편하게 대하는 이유도 자신의 치부까지 다 본 사이라서 어떤 이야기를 하든, 어떤 상황에 빠져 있든 그대로 봐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존심이 필요 없는 사이가 가장 이상적인 대나무 숲인 것입니다. 64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우리가 우리 안에서 무서운 임금님 노릇을 하는 자존심을 꺾고 자신의 구질구질한 개인사를 남에게 털어놓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화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누군가의 대나무 숲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이유입니다. 65

 

세상을 살다 보면, 너무 아픈 데도 침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대나무 숲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친구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좋은 친구가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가슴에 담아 두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말하면 그도 속상할 테니, 아예 말하지 않아요.” 66

 

인디언의 어느 부족은 친구를 내 짐을 어깨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우리가 내 인생의 짐을 상대의 어깨에 부려 주기도 하고, 내가 견딜 만할 때는 상대의 아픔을 지는 그런 사람이 되면 어떨까요? 지나친 도시화로 대나무 숲을 보기 힘든 이 시대에 말입니다. 66-67

 

위대한 도가 없어지자 인()과 의()가 생겨났고,

(교묘한) 지혜가 나타나자 큰 거짓이 생겨났다.

육친[六親, 아버지 자식 형 동생 남편 아내, 곧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자 효성과 자애가 생겨났고,

국가가 혼란해지자 충신이 나왔다.’ - <노자> 노자 69

 

노자는 자연스러움이 사라진 상태에서 도덕과 윤리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진실을 덮기 위해서 거짓이 거짓을 낳는 것과 비슷한 상태라고도 할 수 있지요. 70

 

어린이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는 것은 반대로 그만큼 모르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어린이만큼 사람 그 자체, 세계 그 자체에 빠져드는 존재도 드물 것입니다. 90

 

아무리 설명한다 해도 진심이 아니면 머리에 남지 않고, 겪지 않으면 가슴에 담기지 않습니다. 97

 

인어 공주는 바다 마녀를 찾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인간 다리와 교환합니다. 어릴 적에는 인어 공주의 용기만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안타깝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인어 공주가 이루려는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고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 교환은 매우 불공정해 보입니다. 이제까지 이 교환에 대해 반발을 느꼈다는 독자가 없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요. 동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어 공주를 살리려는 언니들의 교환 조건을 보죠. 인어 공주를 다시 바다로 데려오기 위해, 죽음의 위기에 빠진 막내의 목숨 값으로 언니들이 마녀에게 준 것은 머리카락뿐입니다. 공주의 머리카락이 제아무리 탐스럽다 해도 목소리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마녀가 내준 약과 칼은 성격이 다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녀의 약과 칼, 둘다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하게 해 주죠.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자가 막내 인어 공주라는 것 또한 같습니다. 인어 공주는 육지로 가기 위해 마지막 순간 모래사장에서 스스로 약을 먹고, 인어 공주로서의 삶을 끊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다로 가기 위해 왕자를 칼로 찔러 왕자를 사랑했던 시절을 끊어야 했죠. 그러므로 마녀가 내준 것은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녀는 같은 성질의 것에 다른 값을 받았습니다. 108-109

 

흔한 사랑의 경구 중에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말이 있죠. 하지만 프롬의 말대로 사랑도 기술처럼 갈고 닦아야 하는 능력이라면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수동적인 자세에서 배울 수 있는 기술은 없으니까요. , 내가 하지 않는 사랑이란 불가능합니다. 127

 

사랑의 근본적인 모순은 하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서로 다른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사랑만큼 어려운 문제도 없습니다. 128

 

고독한 존재로서 우리는 누구나 사랑을 갈망합니다. 하지만 교환 가치가 당연해진 세상에서 사랑 또한 본질이 훼손되었습니다. 물질적이고 획일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랑 또한 교환 가치가 있는 보시 대상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교환 가치를 넘어선 사랑을 꿈꿉니다.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상대가 나를 예쁘고 잘생겼을 때만 사랑한다고 느낄때, 나의 돈과 능력 때문에 나를 소중히 여긴다는 생각이 들때 쓸쓸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아이를 낳고 키우기 때문에, 매월 일정액을 벌어 오기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는 부부 사이에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요? 조건을 넘어 선 사랑, 주고받음의 대차대조표가 없는 사랑이 이상적이라면, 우리의 본능 자체를 이상적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본주의의 편리성에 길들여진 우리는 사랑 또한 교환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릴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을 버리면 사랑을 위해 우리는 진정한 우리 자신과 대면해야 할 테니까요. 에리히 프롬은 자본주의 사회가 사랑에 대한 높은 이상을 훼손시키며 우리를 하찮은 존재로, 사랑을 모르는 존재로 만든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단언합니다. 그러한 세상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요.

현존하는 체계 아래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예외다.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사랑은 필연적으로 주변적인 현상이다. 많은 직업들이 사랑하는 태도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생산 지향적이며, 상품에 탐욕스러운 사회의 정신은 오직 순응하지 않는 자만이 그에 맞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 해결책으로서 사랑에 진지하게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사랑이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주변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 되려면 우리의 사회 구조 내에 중요하도고 급진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129-131

 

엄마란 어떤 사람 일까요...?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하나 없다는데, 엄마에 대해서는 고정된 이미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여자가 100명이라면 엄마의 이미지도 100개여야 할 텐데, 우리는 엄마라는 단어에 헌신적인, 자애로운, 희생적인등의 단어를 갖다 붙입니다. 세상 모든 자식이 똑같은 덕목을 가지지 못했듯, 엄마의 이미지도 획일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엄마와 자식이 사회에서 만든 이상적인 엄마 상이라는 그림에 갇혀 불화를 겪고 상처를 받죠. 140

 

어른의 마음속에는 이상적인 어른의 모습이 있죠. 143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도 부모님께서 어떻게 성공할 거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서, 아무 말 못하고 있어요.”

어느 날, 열일곱 살 친구에게 이런 고민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쓴 청소년 소설의 독자로 만났던 그 친구는 저보다 훨씬 어른스러웠습니다. 모든 면에서 주체적으로 고민하는 모습이 제 열일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죠. 과연 그 친구보다 제가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지 늘 헤살렸지만, 그래도 저를 필요로 하면 그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곤 했습니다.

?”

제가 되물었습니다.

고민했는데, 솔직히 모르겠어요. 어른들은 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고 하잔항요. 학교는 아닌 것 같은데, 다른 방법이 뭐냐고 물으면 말이 막히는 거예요.”

저도 낯설지 않은 화두였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방법을 벗어날 때, 누구나 같은 고민을 하게 되겠죠. 저는 그동안 저를 괴롭히고 헤매게 만든 질문, 그러나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을 그 친구에게 던졌습니다.

왜 성공을 해야 하는데?”

성공해야 행복하잖아요.”

친구는 제가 생각했던 과정을 그대로 밟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게 했듯이 다음 과정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행복이 뭔데?”

?”

구체적으로 말이야. 네가 생각하는 행복의 풍경은 어떤 거야? 괜찮은 차? 서울에 있는 고급 아파트?”

“..... 비슷한 거 아니에요?”

가진 것의 합이 행복일까? 네 행복은 그런 거니?”

열일곱 살 친구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마치 저의 옛 모습을 보는 듯했죠. ‘행복을입에 달고 사는 현대인이지만, 사실 행복의 구체적인 풍경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저는 행복의 풍경을 그리려 몇 번을 고민한 끝에 우리가 세뇌된 행복에 길들여져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서부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에 이르기까지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이 곧 행복이라고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유토피아가 우리의 행복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물질적 풍요가 곧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다고 해서 바로 자신만의 행복을 그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는 행복의 풍경이 우리 자신이 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64-166

 

어른 보다 아이가 바이러스에 치명적인 것처럼, 이 사회의 병든 이데올로기에 가장 취약한 것도 어린아이입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물질적인 것밖에 꿈꾸지 못하는 아이들, 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이기도 합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행복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자가 되면 행복해질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 그 이미지를 만든 것은 우리 자신일까요? 혹시 누군가에 이해 감염된 것을 행복이라 믿는 것은 아닐까요?

세라는 행복해졌다고 작가는 썼습니다. 금광을 소유한 아버지 친구가 세라의 법적 후견인이 되었습니다. 세라는 아버지의 몫 외에도 미혼인 아버지 친구의 재산까지 상속받게 도리 것입니다.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렸던 세라는 친구들과 함게 행복한 생활을 할 뿐 아니라,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며 봉사 활동에도 앞장섭니다. 부유하고 윤택해진 세라, 하지만 세라는 분명히 행복해졌을까요?

세라의 환경에서 변한 것은 경제 상황 뿐입니다. 세라는 여전히 고아이고, 후견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일이 세라 앞에 벌어질 것입니다. 작가는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자마자 세라의 행복을 단언했지만, 세라는 왠지 동의할 것 같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만이 그녀의 행복을 결정한다면, 그녀는 앞으로 돈만 아는 숙녀로 성장하겠죠. 하지만 기품 잇는 그녀는 진지하게 스스로의 미래를, 행복의 풍경을 그려냈을 것만 같습니다. 결코행복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긴 시간 동안 말이죠.(<소공녀> 프랜시스 버넷) 167-168

 

우리는 늘 예쁜 것이 최고의 가치라는 말을 농담(?)처럼 듣고 삽닌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외모 지상 이데올로기에 허우적거리고 있죠. 모델처럼 늘씬하지 않아서, 복근이 없어서, 키가 작아서 ...... 수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외모의 조건에 자신이 세운 기준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외모지상주의의 포로가 되었을까요? 새 왕비에게 거울이 있었다면, 도대체 우리에게는 무엇이 있길래 그럴까요? 우리에게도 마법의 거울이 있습니다. 바로 질문 대신 리모컨으로 작동되는 거울, 피로의 푼다며, 심심하다고 보는 텔레비전. 그것이 바로 오늘날 마법의 거울입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떼려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는 텔레비전은 자본주의에서 선호하는 이미지, 즉 팔리기 좋은 이미지를 강조합니다. 그 이미지들은 또 텔레비전에 예쁘게 나오죠. 소비자인 남성, 혹은 여성이 좋아하는 이미지입니다. 자신의 만족에 의해 설정된 외모 기준이 아니라 텔레비전, 즉 자본주의 사회가 선호하는 외모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메시지를 담은 텔레비전을 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틀어 봅니다. 그리고 내 것이 아닌, 내것이어도 나의 행복은 될 수 없는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마법의 거울은 백설 공주와 새 왕비에게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텔레비전을 꺼야 하는 이유입니다. 거울의 목소리는 신뢰를 가장한 억압이므로, 텔레비전을 끄면 우리는 좀 더 자신의 진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내가 진짜 원하는 삶, 내게 잘 어울리는 이미지를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182-183

 

스펙터클(spectacle)이란 간단히 구경거리라 번역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눈을 뗄 수 없고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의 현란한 구경거리에 스펙터클이란 말이 붙죠.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는 <뽀로로>나 어른들의 저녁 시간을 잡아먹는 드라마는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현대 사회의 스펙터클입니다. 하지만 텔레비전만이 스펙터클은 아닙니다. 1년을 분기별로 나누게 하는 스포츠, 이제는 텔레비전 뉴스에도 나오는 한류 스타들의 공연, 떠들썩한 세몰이로 정치 바람을 일으키려 앴는 전당 대회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엄청나게 역동적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쇼들을 모두 스펙터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펙터클의 세꼐는 역동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현대 사회를 사는 모든 사람은 스펙터클의 세계에서 능동적으로 뛰어들어 사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즐기는 우리도 과연능동적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능동적인 인간은 보는인간이 아니라 행동하는인간입니다. 184-185

 

능동적으로 사는 인간은 스스로 그것에 뛰어들어 활동하는 인간입니다. 자신의 삶에 완벽히 뛰어들면 자신의 삶이 가장 흥미진진한 쇼가 되죠. 굳이 스펙터클한 볼거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185

 

일반적인 역사적 삶이 지니고 있는 결함의 다른 측면은 개인적 삶이 아직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스펙타클적 극화(劇化 심할극 될화) 속에 밀려드는 가장된 사건들은 이 사건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는 사건들이 아니다. (...) 분리된 일상생활에서의 개인적 경험은 언어나 개념이 부재한 채로, 이를 테면 어느 곳에서도 기록되지 않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비판적 접근도 없는 채로 존속한다. 개인적 경험은 고통되지 않는다. 개인적 경험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없는 스펙타클적인 가장된 기억을 위해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망각된다.’ - <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

흔히 셀레브리티(celebity)라 말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학자, 예술인, 정치인만이 아니라 대중 매체가 일자리인 셀레브리티 상당수가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186

 

셀레브리티는 대부분 상류층입니다. 그들 자신과 자녀는 텔레비전을 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즐길 거리도 많습니다. 186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인간은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드라마속 재벌남자와 평범한 여자의 꿈 같은 로맨스가 끝나면, 울는 현실 속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텔레비전의 세계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역동적이면 역동적일수록 우리네 삶이 더욱 남루해보이죠. 187

 

존엄성을 지킨다는 말은 거창해 보이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지킨다는 말입니다 육체는 '자기 자신'의 첫 번째이자 가장 기초적인 요소죠. 자신의 몸을 존중하고, 키우고, 단련하는 법이야말로 가장 어린 시절에 배워야 하는 기초가 아닐까요? 한 끼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그 시간을 충실히 누리는 법을 배우는 것도 기나긴 인생을 위한 수업이 아닐까요?

우리 사회는 어릴 적부터 남의 기준에 맞춰 살도록 강요합니다. 공부라는 타인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라면 나 자신 '따위'는 무시해도 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주입합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누구나 알게 됩니다. 정말 중요한 결정 앞에서 타인의 기준이나 사례는 아무 쓸모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지요.

자신을 가벼이 여기는 삶은 자신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삶입니다. 그 시간이 오래될수록 우리는 인생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헤매게 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깊어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니 어떤 부분이 약한지 모릅니다. 작은 펀치 하나에 온 존재가 휘청이고 나면 이미 때는 늦었죠. 이렇게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닥쳐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때일수록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릴적에 배워야 했던 끼니의 중요함, 체력 키우기 등을 이제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의 손과 발을, 눈과 코와 입술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머리에 새기며 자신과 사귀어야 합니다. 그렇기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신을 인정해 가며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하나하나 받아들여야 합니다. 돌아가는 길이라 더디고 어렵지만, 한 가지 위로할 만한 것은 인간은 생각보다 견고하다는 점입니다. 스스로 빗장을 열러 주지 않는 한, 우리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29-230

 

시스템은 다수의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신이나 왕권 같은 불가침한 영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시스템에 대하여 늘 고민하는데, 현대 철학자 중에 이를 깊이 고민한 학자가 바로 존 롤즈(john Rawls. 1921~2002, 미국의 철학자로, '정의'라는 한 주제에 대해 깊이 연구한 학자로 정평이 나 있다)입니다.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정연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면 개선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 (...) 정의는 타인들이 갖게 될 보다 큰 선을 위하여 소수의 자유를 뺏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본다. 다수가 누릴 보다 큰 이득을 위해서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해도 좋다는 것을 정의는 용납할 수 없다.' - <정의론> 존 롤즈

우리나라에서는 '국가를 위하여', '경제 발전을 위하여'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 많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침묵을 강요한 정부가 그랬고, 노동자에게 희생을 요구한 재계(財界)가 그랬죠. 242


정의로운 사회가 행복한 사회라는 말에 동의를 한다면, .. 한 가지 실험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인을 찾기 위한 실험이 아니라 우리의 시스템을 정의롭게 만들기 위한 실험을 말이죠.

존 롤즈는 이를 위한 사고 실험을 제안했습니다. 통칭 '무지의 베일'이라 불리는 실험이죠. 내가 남한에 태어날지 북한에 태어날지 모르는 상태, 나의 집이 부자일지 가난할지 모르는 상태, 내가 이성애자가 될지 동성애자가 될지 모르는 상태, 내가 건강할지 아닐지 모르는 상태........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의 베일 속의 인간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최대한 공정한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것뿐입니다. ..

내가 생각하는 평등을 다른 사람이 불평등이라 말할 때, 다른 사람의 평등이 내게는 너무나 불평등하게 느껴질 때, 잠시 무지의 베일을 꺼내 보는 것은 어떨까요? 243-244

 

가만히 돌이켜 보니 우리는 소시민에게 감정이입을 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 적 읽은 동화나 어른이 되어 즐기는 영화의 주인공들 대부분은 특별한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즐기기 위한 것입니다. 독서나 영화 관람이 끝난후에 일상생활에서 씁쓸함을 느낀다면, 우리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겠죠. 저는 그것이 일상적 감정이입의 문제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즐길 때나 진행되어야 할 감정이입이 우리의 일상생활까지 지배하고 있다고 말이죠.

평범한 우리가 특별한 사람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특별한 사람의 성취를 목표로 삼다 보니, 작은 성취 같은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커다란 목표를 바라보니 자신은 늘 제자리, 실패자인 것만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내면은 스스로 관객이 되어 평범한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 합니다.

이 사회는 늘 성공하라고 세뇌를 하죠. 성공해야 행복해진다는 이데올로기가 내면 깊이까지 침투해 있습니다. 백인백색(百人百色)이라고 하는데, 이 사회에서는 성공의 모습까지도 기성품처럼 정해져 있습니다. 도심의 평수 넓은 아파트, 멋진 자동차, 명품 옷과 액세서리 등등. 이런 것들을 갖춘다고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성공으로 가는 궤도에서 이탈하는 것은 불안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을 위하여 맹목적으로 달려갑니다. 성공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말을 되뇌이면서요. 하지만 성고이란 자기 충족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기 충족할 수 있을 것 같거나 충족해야만 할 수준의 무언가를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입니다. 임금에게 가장 멋진 옷이 성공의 척도였듯이 우리도 결코 도달하지 못할 목표를 위해 미친듯 달려갑니다. 자기계발이란 말이 고전적 단어가 되고, 이미지 메이킹이란 말도 시들해지니 이제 셀프 브랜딩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충족하는 삶은 임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성공한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퇴화죠.

"나는 이 정도 디자인과 옷감이면 만족해" 혹은 "나는 여기까지만 성공할래"라고 말하는 순간, 비웃음을 당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사회에서 멈추는 순간 허물어질 것이라는 불안도 만연하죠. 사실 우리 사회에서 소시민의 충족한 삶은 살짝 밀기만해도 무너질 만큼 허약합니다. 모두가 그것을 알기에 마족하고 싶어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소시민이면서도, 평생 소시민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서도, 마치 임금이라도 된 양 임금과 같은 각오와 부담감을 안고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어른으로 성장하는 도안 소시민으로 살아도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는 사회, 임금이 되어 본 적도 없는데 벌거벗었다고 손가락질하는 사회, 지금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것을 지키기 위해 더 무엇을 노력해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249-251

 

조선의 세자들은 지독한 조기 영재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보통 예닐곱 살 정도에 시작된 교육은 그 양과 질에서 조선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공부에 야간 자율학습과 월말 평가는 물론이고, 수업 시작 전에는 여러 명의 스승들 앞에서 전날 배운 것을 암송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왕이 그 자리에 직접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스무 명이 넘는 학자들이 어린 세자 한 명을 가르치기 위해 24시간 준비 상태였는데, 그들 모두 내노라하는 공부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매서운 눈으로 감시하며 공부를 시켰으니, 조선의 세자도 웬만해선 버티기 힘든 자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힘든 공부를 사도 세자는 네 살에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넘치는 사랑 덕분에 생후 48개월 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쉴 시간도 없이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어린 사도 세자는 꽤 똘똘한 아이여서 시키는 대로 공부를 곧잘 했다고 합니다. 그렇잖아도 귀여운 아들이 조선 최고 지식인들에게 뛰어나다는 평까지 들으니, 영조의 기대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공부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수업 시간도 늘어났습니다. 한창 뛰어놀아야 할 나이의 건강한 사내아이가 재미있어 할 리가 없겠죠. 그러나 영조는 놀고 싶어 하는 세자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커녕 조금이라도 꾀를 부릴라치면 버럭 화를 냈습니다. 사도 세자의 아내인 혜경궁 홍 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 세자는 영조에 대한 공황장애를 겪었던 것 같습니다. 266-267

 

어른이 아이에게 요구하는 '착함'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조용히 하라고 하면 조용히 하고, 단정하게 입으라고 하면 그리 하고, 자야할 시간에 자는 아이, 한마디로 어른 손을 덜 타는 아이입니다.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도 그럴까요? 갓난 아이는 수동적입니다. 자라나는 아이만이 자신의 생각과 그것을 관철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어른들의 위협으로 그 의지가 꺾이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면, 아이는 개성은 커녕 자신에 대한 주체적 인식조차 성장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합니다. 아이의 말에 윽박지르는 일은 비교육적이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죠. 그래서 되레 식당 같은 공공 장소에서 아이의 제멋대로 행동을 제지하지 않아 사회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286

 

우리 사회의 부모들은 성가시게 하는 질문이나 고집은 수긍해도,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겠다는 말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공부는 이 사회의 인력으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요. ..

어른이 되어 사회가 속삭인 약속이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에는 이미 레일 밖으로 나오기엔 늦었습니다. 부모의 손을 타지 않는 아이, 어른의 말에 순종적인 학생, 사회 질서에 반기를 들 줄 모르는 국민...... 사회가 깔아놓은 레일 위에서 만들어지는 인간 군상입니다. 286-287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우리는 어떠한 외적 권위에도 종속되지 않고, 우리의 사상이나 감정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자유야말로 거의 자동적으로 우리의 개체성을 보장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는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가질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또한 외적 권위로부터의 자유는 내부의 심리적 상황이 우리가 자기의 개체성을 확립할 수 있게 될 때에야 비로소 항구적인 성과가 된다.' 289

 

이 책은 자유롭다는 사회에서 우리가 왜 이렇게 부자유스럽게 살아가는지, 답답하고 절망적인 우리의 병증을 시원하게 아려 줍니다. 프롬은 말합니다. 우리는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자유란 그것을 향유할 우리가 건강해야만, '자신의 생각과 개체성'이 확고 해야만 누릴 수 있다고요.

에리히 프롬은 우리가 왕이나 교회의 권위로부터 자유를 쟁취했다고 믿지만, 실은 경제적으로 자본의 노예가 됨으로써 고독이나 불안을 경험하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도피를 시도한다고 말합니다. 아니, 처음에는 시도였을지 모르지만 자본의 지배가 가속되자 '자유롭다고 믿는 자동인형'을 만드는 시스템은 공고화되었지요. 290

 

'...... 개인이 자기 자신이 됨을 그치고 변화하는 것이다. , 그는 일종의 문화적인 양식에 의해 부여되는 성격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전적으로 동일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자신에게 기대하는 그런 상태로 변화된다. 그와 함께 ''와 외부 세계와의 갈등은 사라지고, 고독과 무력함을 두려워하는 의식도 사라진다. (...) 개인적인 자아를 버리고 자동 인형이 되어 주위 수백만의 다른 자동인형과 동일해진 인간은 이미 고독이나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대신 그가 지불한 대가는 혹독하게 비싼 것으로, 그것은 바로 자아의 상실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회가 자동인형이 된 인간으로 가득해진다고 합니다. 자아를 상실한 인간은 인간적인 무력감과 절망에 휩싸입니다. 자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지고 인생이 무의미해질 때, 인간은 자신을 찾기 위해 싸우는 대신 인생의 의미를 대신 찾아줄 무언가를 갈망하게 됩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사회가 바로 파시즘의 온상이라고 지적합니다.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서서 개인의 개성을 증오하는 그 이데올로기 말입니다.

민주주의라면 인간에 대하여 모든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인생을 스스로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백인백색, 모든 주체적인 인간은 각각의 개성을 뽐내겠지요. 그것은 또한 각 개인의 권리이며 수많은 피를 흘리며 되찾아 온 권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든 권력이 그러하듯 그것을 빼앗으려는 시도는 집요하기만 합니다. 착한 아이, 양순한 시민으로만 살아가서는, 절대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없죠. 가만히 있으라는 기득권의 지시에 반항하지 않고서는 지킬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평생 투쟁심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동인형이 되어 파시즘의 깃발에 열광하여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면 말이지요. 긴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제야 겨우 조금, 풀꽃들 사이에서 춤을 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춤추기 위하여 우리는 언제든 싸울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피곤하게 느끼겠지만, 노예로 사는 것보다 그것이 나은 삶 아닐까요? 당신이 출 춤에 미리 박수를 보냅니다. 291-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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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THREE 일과 삶

 

10 우리는 시간과 투쟁한다.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전보다 더 오래 살고 있으면서도,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졌기 때문에 시간은 더 없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247

 

아이들에게 기다림을 가르치는 것은 양육에서 중요한 부분인 동시에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은 조직 시간이 자주 자기 시간이나 상호작용 시간보다 우선시되는 세계에서 꼭 필요한 기술이다. 25

 

우리 문화에서 시간은 돈이다... 일을 더 빨리 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시간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비행기, 자동차 컴퓨터는 빠르지만, 우리는 그것들과 더불어 점점 더 많은 곳을 가고 더 많은 일을 한다. 우리가 더 빨리 일할수록 우리의 시간은 더 빨리 새로운 일로 채워진다. 우리가 더 빨리 움직일수록 우리는 더 적은 시간을 갖게 된다. 사람들이 속도에 집중할수록 서로에 대한 인내심은 점점 줄어든다. 또한 빠르게 돌아가는 삶은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사람들은 자유시간이 전혀 없다고 불평한다. 253-254

 

앨빈 토플러가 <미래 충격>에서 지적했듯이, 사회 변화가 빠른 시기에는 문화 전체가 일시적인 공황을 경험할 수 있다. 254

 

시간의 속도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의 수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더 많은 시간 동안 일할 뿐만 아니라 더 많이 이동해야 하고, 가야 할 곳도 더 많다. , 더 많은 것을 사야 하고,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즐겁게 해줄 오락활동들도 더 많이 있다. 우리가 정해진 시간에 더 많은 활동들을 끼워 맞추려고 노력할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가는 듯하다. 오늘날 우리는 시간이 더 없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에 더 시간이 없는 것처럼 느끼는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255

 

사람들이 시간에 맞춰 일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뤄진 현상이 아니다. 과거 고용주들은 사람들을 시간에 맞춰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분투했다... 숙련된 장인들은 늦게 일어나 더 늦게 일을 시작했다. .. 17세기 초까지 영국의 노동자 계급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산업화 이전의 삶은 대학생들의 생활과 약간 유사했다. 불규칙적인 식사와 수면이 과음과 파티, 그리고 잠샘 작업과 어우러져 있었다. ..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산업화 이전 사람들의 시간에 대한 태도는 우스꽝스럽고 유치해 보인다. 우리는 이미 조직 시간의 요구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 산업화 이전의 노동자는 게으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시간을 돈으로 여기지 않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돈보다 여가가 더 가치있는 것이었다. 255-256

 

17세기와 18세기 유럽의 남성 및 여성 근로자들은 매주의 첫날에는 일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스스로 정한 그 휴일을 () 월요일이라고 불렀다. 남성들은 술을 마시고, 길모퉁이를 서성거리고, 싸우고, 투견이나 투계 선술집에서 내기 게임을 하며 월요일은 보냈다. 일요일은 가족을 위한 날이고, 월요일은 친구를 위한 날이었던 것이다. 여성들도 술을 마셨지만 대개는 집안일을 하면서 월요일을 보냈다. 성 월요일의 흔적은 1970년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서 헤일리는 베스트셀러 소설 <자동차>에서,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월요일에 만들어진 차를 결코 사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주말이 끝난 후, 근로자들은 병가를 내서나 피곤한 상태로 출근하기 때문에 월요일에 만들어진 차들은 다른 날 만들어진 차들보다 덜 믿음직한 성능 기록을 가지고 있는 편이라는 것이다. 256

 

고용주들은 사람들에게 규칙적으로 일을 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낮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일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1900년대 초, 헨리 포드는 전혀 다른 방식을 택했다. 노동규율을 강화하기 위해 낮은 임금을 이용하는 대신 오히려 보수를 높여주고 주당 근무 시간도 줄여주었다. 그는 사람들을 착실한 근로자로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탐욕스런 소비자로 만드는 것, 즉 충분한 임금과 쇼핑하기에 충분한 시감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가지 모두 기업에 이득이 되었다. 257

 

테일러화(과학적 관리법의 창시자인 테일러의 이론에 따라 모든 업무를 단편화하고, 개별 작업자의 동작을 규정, 감시함으로써 시간과 동작의 낭비를 줄여 일의 생산성을 높이려는 것.). 260

 

아마도 현대의 일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점은 자신이 생산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시간에 대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점일 것이다. 263

 

시간에 맞춰 일하는 것에 저항했던 산업화 이전의 우리 조상들과, 시간과 과업에 의해 구조화된 일을 하는 현재 사람들의 상태는 일과 시간에 대해 세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첫째 아마도 과업 지향적인 일이 시간 지향적인 일보다 더 자연스럽고 만족스러운 듯하다. 둘째, 아마도 우리들 대다수는 짧은 시간 동안 열심히 일하고 긴 자유시간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셋째, 그러나 우리 문화에 존재하는 시간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고려한다면, 일정한 노동 시간이 정해지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다. 264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고용인들에게 자신의 노동시간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264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어떤 면에서 20세기의 가장 급진적인 경영 혁신이다. .. 지난 백년 동안, 대부분의 경영 혁신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일에 끼워맞추도록 돕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바닷속의 좁쌀 한 알(滄海一粟, 창해일속)’에 불과하지만, 개인이 자기 삶을 중심으로 일을 조절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황에 맞게 일을 조정하도록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시간제 근무이다. 시간제 근무는 최근 나쁜 평판을 얻어왔으며,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많은 고용주들은 전일제 고용인들을 해고한 다음 그들의 자리를 더 값싸고 쉽게 내보낼 수 있는 시간제 고용인들로 메우고 있다. 둘째, 시간제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회보장 혜택을 받고 있지 않으며, 임금 수준도 낮고 승진 가능성도 없는 직업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제 근무를 선호한다. 265

 

우리들 대부분은 업무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266

 

일이 우리 삶에서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할수록 모든 활동은 점점 더 일처럼 느껴진다. 시계와 일정표는 우리의 사회생활로부터 자연스러움을 빼앗아간다. 이제 사람들이 친구의 집을 예고 없이 방문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 되고 있다. .. 현재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거나,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하고 있지 않은 일은 아마도 잠자는 일일 것이다. 신경 생리학자인 스탠리 코랜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첨단 기술인 시계가 지배하는 생활방식 덕분에우리는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보다 연간 500시간의 수면을 덜 취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269

 

최근에는 컴퓨터, 이메일, 팩스, 휴대전화, 호출기 등이 우리를 일터의 벽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제 일부 사람들은 침대에서 잠옷을 입고 일하거나 해변에서 수영복을 입고 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

근로자들이 직장 내의 책상에서 떠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술은 일하는 시간의 범위를 넓히거나 그 시간의 양을 증가시키는 데도 이용된다. 270

 

장소에서의 융통성은 근무시간에도 융통성을 부여한다. ..

신기술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지만, 그것은 잠재적으로 우리를 하루 24시간, 1365일 내내 고용인으로 만든다. 271

 

시간은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것을 팔고, 사용하고, 사고, 투자하고, 아끼고, 죽인다. 274

 

샘 킨은 자신의 책 <열망>에서 .. 일이 사람들을 지배하면 사람들은 무력해지고, 성적 구별이 사라지며, 시장 원칙만이 추종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일직이 알베르 카뮈가 말했듯이, 일이 없으면 삶 전체가 타락한다.”그러나 자유시간이 없어도 삶은 타락할 수 있다. 275

 

 

11 여가와 소비주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가가 인간의 행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믿었다. ..

그리스어로 여가라는 단어는 스콜레(skole)’이며, 라틴어로는 오티움(otium)’이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모두, 일을 뜻하는 단어는 여가를 뜻하는 단어의 부정형이다. ‘이라는 뜻의 아스콜리아(ascholia)’네고티움(negotium)’은 둘다 여가가 아닌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스페인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뜻하는 스페인어네고시오(negosio)’여가각 아닌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어, 라틴어, 스페인어 모두 여가가 마치 생활의 중심인 것처럼 일을 여가와 관련시켜 비유한다. 영어단어 레저(lisure)는 라틴어의 리케레(licere)로부터 파생되었는데, 그것은 허락되다라는 의미이다. 영어에서는 마치 일이 생활의 기준인 듯 여가를 일에 빗대서 표현하고 있다. , 우리가 일을 멈추도록 허락되었을때가 여가라는 것이다. 276-277

 

사업가들은 일요일을 우울하고 지루한 날로 만들려는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그렇게 하면 일을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여가가 너무나 보람차고 즐겁다면 사람들은 일터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279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고용주들은 토요일 휴가를 주는 것에 반대했다. 그들은 고용인들이 말썽만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280

 

TV를 더 보고 싶다는 이유로 일하러 가기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 사람들은 나뭇조각으로 카누를 만들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가한 시간을 원하지만, 단지 TV를 더 많이 보기 위해 여가시간을 원하지는 않는다(비록 한가한 시간에 그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TV를 보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282

 

마르크스는 인간에게 본성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다. 283-284

 

한때 여가는 아마추어를 위한 시간으로 여겨졌다. 아마추어라는 단어는 라틴어 아마토르(amator)’, 애호가라는 단어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아마추어를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애호하는 사람또는 어떤 것에 대해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아마추어는 돈이나 명성 같은 외적인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재미있고 본질적으로 보람을 주기 때문에 취미를 개발한다. 285

 

1970, 경제학자 스테판 린다는 <곤경에 처한 유한계급>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부유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자유시간더 많은 소비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대부분 더 많은 소비를 선택한다고 주장했다. 286

 

돈을 쓰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돈을 벌기 위한 시간, 쇼핑할 시간, 그리고 유람용 모터보트나 패키지 투어 등 돈으로 구매한 물건들을 사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

소비는 일하고자 하는 욕구가 약할 때조차 일을 해야 할 필요를 창출한다.. 287

 

십대(teenager)들조차 자신의 여가를 소비와 교환한다. 과거의 십대들은 가족을 돕거나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 자신이 원하는 사치품을 사기 위해 일하는 중산층 십대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인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젊은이들에게 을 장려했다. 그들은 젊은이들이 일을 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규율을 발전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287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는 것은 십대의 학업을 방해할 뿐 아니라 호기심 많고, 상상력 풍부하고, 호전적이어야 할 시기에 적응된 온화함(adjusted blandness)”을 심어줄 수 있다는 그린버거와 스타인버그의 주장이다. 288

 

여가와 소비재를 교환하는 십대들은 그들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일과 소비의 패턴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을 잃는다. 만약 그들이 물건을 사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자유시간을 포기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여가를 가질 수 없다. 그들은 어떤 활동들이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좋은지 발견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은 (부모를 비롯하여 다른 권위 있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일이다. 말썽을 일으킬 위험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시장이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닌, 자기 방식대로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289

 

우리는 미국인들이 점차 타인 지향적으로 변해가고 있다1950년대 데이비드 리스먼의 주장을 논의한 바 있다. 타인 지향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원할 뿐 아니라 시장의 물질적 동기와 고용주가 제공하는 심리적 유인에 의해 움직인다. 리스먼의 말은 옳았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택권을 제공하는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지만, 아마도 그로 인해 우리의 행동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안에 불어넣은 욕구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쇼어는 소비가 대개 지위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290

 

주디스 윌리엄슨은 <열정의 소비>에서, 시장이 우리의 열정을 소비하고, 그것이 더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무장해제시킨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

돈은 당신이 돈을 번 방법을 포함하여 많은 것을 숨겨준다... 우리는 고객으로서 권력을 가지고 있다. 시장에서는 현금이나 수표, 혹은 신용카드를 갖고 있기만 하면, 당신이 누구든 상관하지 않는다. 292

 

'여가'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본질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가행위를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단지 그 행위 자체를 즐긴다. 293

 

만약 당신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주변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지 않다면, 일과 소비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여가를 즐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 여가는 돈이 들지 않는다. 친구나 가족과 어울리는 것, 소설책을 읽거나 단지 공상에 잠기는 것만으로도 여가를 즐길 수 있다. 여가는 우리에게 소중하고 할 만한 가치가 있는 활동을 하는 시간이다. 여가는 자유로운 시간 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장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릴 것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삶을 이해하는 것이 한층 더 어려울지 모른다. 295

 

 

12 의미 있는 일, 그리고 행복한 삶

 

"의미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어떤 이들에게 의미 있는 일은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일을 뜻한다. 다른 이들은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원한다. 의미 있는 일의 본지로가 그에 대한 욕구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철학적 질문의 모태가 되는 질문에 직면해야만 한다. ,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296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한다. 300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 자체가 정신 질환의 징후라고 생각했다. 마리 보나파르트에게 보낸 편지엣 그는 이렇게 썼다. "누군가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묻는 순간, 그는 이미 병에 걸린 것이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 왜 나는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가?"처럼 부정적인 방식으로 제기되면 우울한것이 사실이다. ..

심리치료자이자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인 빅터 E.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중심으로 치료 방법을 개발했다. '의미치료(logotherapy : 이 이름은 '의미'리는 뜻의 그리스어인 '로고스'로부터 파생되었다)'는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 원동력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 프랭클은 삶의 의미는 변화하는 것이고 사람마다 다른 것이지만, 사람들은 선행을 하고, 가치를 경험하고, 마지막으로 고난을 통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300-301

 

<나의 고백>이라는 글에서 레오 톨스토이는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 시작한다. 톨스토이는 모든 인류가 삶의 의미를 알고 있지만, 자기 자신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303

 

놀랍게도,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관심을 기울인 현대 철학자는 거의 없다. 또한 관심을 기울였더라도, 그들의 대답은 어쩔 수 없이 신학자나 심리학자들의 대답만큼 구체적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질문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곤 한다. E. D. 클림케는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영역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눈다. 첫 번째 질문은 우주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존재 이유와 그 목적에 관한 것이다. 가장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세 번째 질문이다. 나는 왜, 어떤 목적으로 존재하는가? 만약 목적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그것을 발견할 것인가? 목적이 없다면 내 삶은 어떤 의미나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일부 철학자들은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 자체가 하나의 대답만을 암시한다는 이유로 그 질문을 해체시킨다. 다른 이들은 그러한 질문에는 대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무의미한 질문으로 여긴다. 305-306

 

철학자 L.J. 러셀이 지적하듯이, 만약 삶의 의미가 오직 그 결과에 의거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결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내일 잼을 만들어라, 어제 잼을 만들어라. 그러나 오늘은 잼을 만들지 말아라.", "당신은 자녀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당신의 자녀들도 그들의 자녀를 위해 마찬가지로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잼을 먹지는 못한다." 의미 있는 삶이란 현재를 위한 삶과 미래를 위한 삶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러셀을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들은 삶의 의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이라고 좋아한다. 그러나 러셀은 삶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오늘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307

 

도덕성이 반드시 당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다른 모든 이들의 가치 있는 삶을 살 권리를 존중한다면, 이론상으로 우리는 모두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 행복으로 가득한 삶은 의미 있는 삶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행복한 삶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행복하기'위해 해복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 즉 삶의 목표이다. 어리스토텔레스는 실용적인 지혜, 탁월함, 즐거움이라는 세 가지가 행복한 삶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세상에 대해 배우는 것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학구적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수준에서의 학습, 재능이나 기술을 발전시키는 일이 삶의 보람된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세스는 탁월함에 대해서도 도덕적이고 지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우리는 두 가지 설명을 모두 종합하여,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다. 309-310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 또한 행복의 중요한 요소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무 즐거움이나 행복의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오직 고귀하고 도덕적인 즐거움만이 참다운 행복으로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행복은 오직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행복은 활동적인 사람에게만 온다. 이러한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가생활은 게으른 생활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활동적인 삶이다. 인간은 어떤 일을 '' 때 가장 행복하다. 누군가를 감옥의 텅 빈 독방에 가두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최악의 고문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죄수에게서 자유뿐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행위와 상호작용까지 박탈하는 것이다. 포로 수용소의 생존자들은 종종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활동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미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삶 전체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삶의 행복한 부분의 총합 이상이다. 당신이 항상 행복할 필요는 없다. 행복한 삶은 고통과 슬픔까지도 포함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급자족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결핍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는 행복이란 게 반드시 살아가면서 원하는 걸 얻는 데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때때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원하는 것을 얻어도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과 의미는 모두 도덕성과 관련되어 있다. 행복하고 싶다면 당신은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며, 도덕적으로 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원해야 한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행복에 대한 보편적인 요구와 우리 문화에 널리 퍼져있는 불행은 일을 지향하는 문화의 산물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는 오직 일을 통해서만 행복을 얻는다. 그것은 극도의 피로와 회복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310-311

 

심리학자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행복 연구는, '일이 행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만들어낸다'는 아렌트의 견해를 지지하는 듯하다...

칙센트미하이는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 동안에는 약 절반 가량의 시간 동안 몰입을 경험하고, 여가시간에는 18% 정도만 몰입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일에 몰입할 때 창조적이고, 강하고, 활동적이며, 집중적이고, 동기화된 느낌을 더 많이 갖는다는 의미였다. 311

 

칙센트미하이의 연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통찰은, 현재 우리의 문화에서 사람들은 일터가 아닌 곳엣 이러한 행복한 순간을 제공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312-313

 

자본주의는 삶의 수단을 제공할 뿐 삶의 목적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315

 

20세기 내내 고용주들이 조직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이것을 손에 넣어 이용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중 맨 처음에 등장한' 과학적 관리법'은 육체를 손에 넣으려고 시도했고, 다음으로 출연한 '인간관계론'은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으며, 이제 몇몇 컨설턴트들은 '영혼'을 건드리려 하고 있다. 317

 

'직장에서의 영성'은 대중 심리학과, 일시적으로 유행했던 경영학 이론이 항상 해왔던 일을 반복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 그것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듦으로써, 애초에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던 권력과 갈등, 자율성에 관한 심각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대신 그거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이다. 318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제공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의미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320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처럼, 의미 있는 일은 주관적인 특성과 객관적인 특성을 모두 지닌다. .. 일의 사회적 의미와 도덕적 가치는 문화와 개인에 따라, 그리고 시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세상을 '인식'할 뿐 아니라,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창조'해주지 않는다. 320

 

개인이나 조직이 의미를 창출하려고 시도할 수는 있지만, 만약 그러한 의미가 교묘한 속임수로 만들어낸 환상이라면 그것은 냉소주의만을 가져올 뿐이다. 앞서 우리는 따로따로 일하는 사람들을 ""이라고 불렀던 회사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어떤 것의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그 의미까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한 상황 혹은 실재를 파악해야만 한다. .. 모든 고용인들은 존엄과 존중을 가지고 처우받아야 한다(너무나 많은 근로자들이 수년간 자신들이 '성인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해왔다)...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이라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삶에 참여하는 방식에 대해 약간 다른 주장을 했다. 그는 결정하고 생각하는 능력이 결여된 노예라도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워지면 이러한 능력을 되찾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일부 사람들은 노예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대신해서 생각하고 결정해주는 것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한다. 321

 

의미 있는 일은 우리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정의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그것을 보면 알게 된다. 종교직과 같은 일부 직업들은 본질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직업들보차도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이 의미를 발견할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의미 있는 일이 항상 편안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고통이나 고된 일 혹은 스트레스를 수반한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여전히 좌절하거나 지쳐서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은 대체로 개인의 삶에 활기를 북돋워준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경험과 우리가 논의한 숭고한 여가의 개념은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322-323

 

모든 사람이 의미 있는 일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존중받기'를 워하며, 어느 정도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고 싶어할 뿐이다. 결국 선의는 심리적으로 계획되기보다는 존중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번성하는 경향이 있다. 323

 

 

 

에필로그 - '''삶의 질'을 향상시켰는가?

 

이 책은 저주로부터 소명으로, 그리고 그 이상의 것으로 변화한 일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다...

일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첫째, 일은 더 나아졌는가? 그리고 "더 낫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분명 임금 노동자는 노예보다는 낫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을 노예와 농노, 계약제 하인, 그리고 초기 산업 노동자들보다는 육체적으로 덜 고되고 덜 지저분하고 덜 위험하다. 그러나 "더 낫다"는 것은 또한 고용주와 고용인들 간의 도덕적 관계를 포함해야만 한다. 직장 내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공정성이 존재하는가? 개인들은 '더 나은' 처우를 받고 있는가? 혹은 일이 우리의 삶을 향상시켰는가? 이 역시 "더 낫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달려 있다. 일이 삶의 물질적 조건들을 향상시켰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삶의 질'을 향상시켰는가? 우리의 직업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324-325

 

나는 현대의 경영자들이 올바른 직장을 '만들기'보다는 개인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느끼도록'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을 비판해왔다. .. 현대의 경영 기법이 낳은 또 다른 결과는 일이 점차 우리 삶의 보다 큰 부분을 차지하도록 일의 사회적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

오늘날의 고용주들은 자신들이 많은 것을 고용인들에게 약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특히 주주들에게 그토록 많은 것을 약속해야 할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들은 교묘한 속임수로는 신뢰와 헌신을 얻어낼 수 없음을 알고 있다. 325

 

고용주들은 자기 책임을 회피하고 고용인들에 대한 의무 없이 그저 권한만 유지하려 든다. 글나 근로자들은 자신의 실수뿐 아니라 경영자 및 경제의 실수와 "불운"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더욱 나쁜 것은 그들이 그것을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질책한다는 것이다. 326

 

고용불안정은 실업률이 낮을 때보다 새로운 삶의 방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326

 

정직한 직장은, '약속을 지키는 최상의 방법은 자신이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하는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328

 

과거의 사회계약이 사라졌다면 새로운 사회계약은 어떤 것일까? 조직은 직업 안정성을 약속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정보의 공유를 약속할 수는 있다. .. 경영자들은 조직의 모든 정보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용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될 정보는 가능한 한 많이 고용인들과 공유해야 한다. .. '정직한 직장'이란 고통스러운 진실을 이야기해줌으로써 그들이 그것에 대비할 수 있게 해주는 조직을 의미한다. 결국 그것이 "근로자들을 성인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329

 

상호존중은 단기적인 헌신관계를 만들어내는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서로에게 존중을 표하고 존중을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진실이 항상 듣기 좋은 것만은 아니며, 우리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항상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을 '신뢰'한다...

존중, 신뢰, 정직은 양 방향으로 작동한다...

'진실'은 그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울 것이다. 분명 대부분의 고용인들과 학생들은 평균 이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향상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준다면 그들은 진짜로 평균 이상이 될 기회를 얻는 것이다. 330

 

전통적인 노동윤리 아래서 개인의 고결함은 그가 어디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일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일하는지에 달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경영이론가와 고용주 들은 '일을 잘하는 고용인일수록 자기 삶을 희생한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한다. 331

 

 

내가 현대인의 일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한 가지 이유는 단지 직장 내의 불의, 경영 술수, 혹은 경제적 불안정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적인 큰 그림을 살펴보았을 때, 나는 삶 자체가 더 편해져야 할 시대에 이르러서도 유급고용이 살을 지배하는 것을 보고 당혹감을 느꼈다. 우리들 대다수는 어디서 어떻게 살지, 어느 곳에서 일하고 어떤 물건을 구입할지에 대해 전례 없이 많은 선택권을 가진 놀라운 시대, 후기 산업사회에 살고 있다. 기계들은 우리의 노예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기본적인 필수품을 상대적으로 쉽게 얻을 수 있다. 지금은 삶이 온갖 종류의 보람 있는 활동들로 가득 차야 할 시기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오랜 근무시간뿐 아니라 채무에 시달리고 있으며, 스트레스와 외로움, 그리고 가정해체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왜 그런가?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항상 더 많은 것을 워하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331-332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우리는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 , 생활 속에서 선택의 방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학예(liberal arts)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332

 

보다 광범위한 질문은 "우리는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삶을 원하는지 알고 있고, 그것을 위해 무언가를 기꺼이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그것을 위해 현재 포기하고 있는 것만큼의 가치를 갖는가?"이다. ..

일이 지배하는 삶 역시, 그것이 의식적인 선택이고 개인을 행복하게 만든다면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삶을 일에 꿰어맞추는 대신 일을 삶에 통합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333

 

 

 

 

역자 후기 - '일과 삶', 그 본질에 대한 고찰

 

일 혹은 일의 부재는 우리 삶에 너무나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정작 지금껏 우리가 하는 ''에 대해, 그리고 '일과 삶의 관계'에 대해 통찰해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335

 

현대사회에서 일은 자아실현의 수단이자, 개인의 존재를 의미 있게 만드는 도구로 그럴듯하게 포장된다. 일은 우리의 모든 것이며, 우리는 일을 잃음으로써 그에 수반되는 모든 것을 - 심지어 가정까지도 - 잃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올바르고 바람직한 현상인가? 일은 본래부터 모든 희생을 감내하면서 지켜야 하는 무엇이었나? 일은 종류에 상관없이 무조건 개인에게 성취감과 만족을 주는가?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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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TWO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5 일과 자유

 

독립, 자유, 평등과 같은 미국의 문화적 가치들에 비춰볼 때 타인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은 ()미국적인것에 가깝다. 이것은 미국인들이 서로 돕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그들은 자기 방식대로 무언가를 하고 싶어할 뿐이다. 115

 

노예제도는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는 방법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방법이다.

노예제도는 일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 가치의 타락, 최악의 상태로서의 일을 의미한다. 오늘날까지도 노동자들은 그는 나를 노예 취급해라든지 나는 그녀의 노예가 아니야혹은 그 사람은 정말이지 노예 감독관이야라는 말을 종종 한다. 불쾌하지만, 노예제도는 매혹적인 관리법의 전형이다. 그것은 일꾼들에 대한 완전한 소유와 통제를 의미한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위해 일한다. 그러나 노예는 살아 있기위해 일한다. 117-118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도를 찬성했지만, 노예제도가 사람들로 하여금 짐승과 분되는 인간의 측성, 즉 선택하고 숙고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 등을 발휘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인간 이하로 만든다고 저술했다. 그의 글에 따르면, 노예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해 아무런 통제권을 갖지 못하므로 어떠한 행복도 갖지 못했다. 그들의 랆은 대부분 일과벌, 음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노예들을 동기 부여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에게 언젠가는 자유를 주겠다는 상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들은 다시 인간이 되는 셈이다. 118


가장 가혹한 근로조건 아래서 일하는 현대의 고용인들조차도 노예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 노예들과 달리 그들은 항상 일을 그만둘 수 있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유를 되찾을 때까지 보통 여덟 시간만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항상그만둘 수 있을까? . 일터를 떠난다고 해서 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118-119

 

불행히도, 노예제도는 완전히 과거의 것은 아니다. 영국의 노예폐지협회(Anti Slavery Society), 노예제도에 관한 국제연합 실무위원회(UN Working Group on Slavery), 그리고 인도의 노예해방전선(Bonded Liberation Front) 같은 단체는 노예제도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 여전히 존재한다고 보고한다. 이들 집단은 자신의 노동으 자발적으로 그만둘 수 없는 사람은 누구나 노예로 간주한다. 여기에는 대금업자에게 돈을 갚기 위해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하는 강제 노역자들, 자신이 일하는 경작지를 떠날 수 없는 농노들,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착취당하거나 가족에 의해 팔려 무보수로 일하는 아동들이 포함된다. 119

 

계약제 하인들에게 사회계약은 실질적으로 고용주가 대부분의 힘과 권리를 갖는 법적 계약이었다. 뉴잉글랜드 바깥 지역의 초기 백인 이주자들은 절반 이상이 계약제 하인이나 무임도항(無賃渡航) 이주자들(도착한 후 일정 기간 동안 노동을 해주기로 약속하고 무임으로 도항한 이들)로 미국에 왔다. 그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일해야만 했다. 결국 고용이란 자유와 기회로 이어지게 될 일시적인 노예 상태를 의미하였다. 122

 

영국 정부는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한 수단으로 계약노예제도를 인가했다. 앞서 말했듯이, 민간 해운 업체들은 다른 어떤 상품보다도 노동력을 팔아 더 많은 돈을 벌곤 했다. 존 반 더지는 새뮤얼 애덤스, 존 애덤스, 제임스 오티스,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작가들이 폭정(tyranny)’굴종(slavery)’ 같은 단어를 자주 사용한 이유가 계약노예제도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계약노예제도는 과거의 유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연구자들은 불과 몇 년 전에 로스앤젤레스의 노동착취 사업장(sweat shop)에서 계약노예제도를 사용하는 태국인 고용주를 발견했다. 그들은 하루 열일곱 시간씩 재봉틀로 옷을 박는 일흔 네 명의 태국인 여성들을 발견했다. 고용주는 한 아파트에 여성들을 가두고는, 만약 도망치려고 시도하면 그들과 가족들을 해치겠다고 위협했다. 미국의 초기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오는 뱃삯을 갚는 데 수년이 걸렸던 것처럼 태국 여성들도 고용주에게 항공료를 지불하기 위해 칠 년간 일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여성들 중 일부는 자신들에 대한 처우 방식에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오로지 집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부치는 것뿐이었다. 또한 미국에서는 오페어(au pairs)들의 처우에 관련된 추문도 있었다. ‘오페어란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외국 여자로, 숙식을 무료로 제공받는 대신 한 가조고가 살면서 가사를 돕고 아이를 보살피는 일을 한다. 당시 미국에 온 젊은 오페어들은 학대와 과로, 저임금에 시달리곤 했다. 그들은 미국에 가게 된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싼값에도 기꺼이 일하러 온다. 그리고 땔 그들은 자신들이 계약제 하인보다 나을게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24-125

 

노예제도와 계약노예제도에서는 타인의 노동을 빌리기보다는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드러난다. 백인 계약제 하인들은 1650년경에 시작되어 1800년대에 확대된 흑인노예들의 대규모 유입 이전에 미국에 왔다. .. 남부의 농장주들은 백인인 하인들보다 흑인노예들을 훨씬 좋아했는데, 이는 흑인노예들이 기후에 더 잘 적응하고 더 온순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주인이 그들을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5

 

노예제도를 옹호했던 노예 소유자들은, 남부의 노예들이 북부의 임금노예들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오히려 남부의 노예들이 더 나은 상태에 있다고도 주장했다. 주인들이 노예들을 부양하고 있고, 어둡고 더러운 공장에서 일하는 산업 고용인들과는 달리 위생적인 야외에서 더 짧은 시간 동안 일한다는 것이었다. 북부 사람들은, 임금 노동자들이 자신의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자신의 일에 대해 현금으로 보수를 받는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이에 대해 반박했다. 그러나 자물쇠를 채운 상태로 장시간 공장 노동을 시키는 것, 아동의 노동, 위험한 기계, 유해한 공기 등을 포함한 끔찍한 노동조건은 북부인들의 이러한 도덕적 주장을 약화시켰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영국의 산업 노동자들을 미국의 노예들과 비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그들은 미국의 흑인들보다도 못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철저히 감시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처럼 살아가도록,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도록 요구되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그들도 비인간적인 생산양식으로 인해 마찬가지로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북부 생산업자들에 대한 반론은 임금노동자들의 자유가 비인간적인 노동 현실을 보상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126

 

문제는 그들이 과연 북부의 생산업자들보다 더 적은 이윤을 원했거나 필요로 했을까하는 점이다. 127

 

한 개인이 자신의 일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사실이 고용주의 학대를 반드시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문제는 한 개인이 얼마나 많은 선택권을 실제로갖고 있는가이다. 127

 

굶주리고 겁에 질린 사람이 자신에게 음식과 안전을 제공할 만한 사람과의 계약관계를 자유롭게맺기로 선택할 수 있는가? 128

 

철학자 존 로크는 빈곤한 자의 복종은 주인의 동의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굶어죽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하인이 되는 것을 택한 가난한 자의 동의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노예가 되도록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가난한 사람이 당신의 노예나 계약제 하인이 되기로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란 얘기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것일까? 128-129

 

우리는, 착취당하는 가난한 자들이 만약 착취당하지않았다면 훨씬 더 못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라는 착취의 논리에 쉽게 빠져든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이러한 논리를 보여주는, 일하는 원숭이들에 대한 풍자적인 보고서를 실은 적이 있다. 채국 남부에서는 매년 150만 톤의 코코넛 열매를 따기 위해 수천 마리의 원숭이들이 고용된다. 마을의 가족들은 원숭이를 훈련시켜, 농장주들에게 빌려준다. 원숭이들은 농장주로부터 달걀과 쌀, 과일 등 원숭이 임금으로 매달 약 12달러 정도를 벌어들인. 일하는 원숭이들에게는 이름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목욕시키고, 돌보고, 하루 세 번 음식을 준다. 때로 그들의 주인은 자신의 모터스쿠터 뒤에 그들을 싣고 일하는 곳가지 태워다주기도 한다. 아픈 원숭이는 하루 동안 일을 쉰다. 너무 늙어서 일을 할 수 없는 원숭이는 은퇴해서야생으로 돌아가거나 가족의 애완 동물로 남는다. 일하는 원숭이의 불리한 점은 항상 사슬에 묶여 있고 원하는 대로 번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사는 이러한 형태의 고용이 인간에 의해 서식지가 파괴되고 있는 게잡이원숭이 같은 몇몇 종들의 멸종을 막아준다고 지적한다. ...

농부가 원숭이의 자유를 빼앗기는 하지만, 원숭이들은 특히 서식지 대부분을 농부들에게 빼앗긴 이후 그들끼리 야생의 생태계에 남겨지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지내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원숭이의 생각이 어떤지 알 수없다. ... 제도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간단하다. 농부들은 원숭이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생각하기에원숭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원숭이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괜찮다고 한다...

농부는 원숭이가 하루 세 번의 식사를 필요로 한다고 결정하고 원숭이가 이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때로 고용주들은 고용인들이 갖고 있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 욕구를 충족시킨다. 130-131

 

우리 모두 정도는 다르지만 생계를 꾸리기 위해 우리의 노동과 시간을 팔아야 한다. 131

 

일반적으로 우리는 취직을 할때,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고용주들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는 것에 동의한다. ..

임금이 상실된 자유에 대한 보상이라는 견해는 또한 몇몇 터무니없는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은 한 살마이 직업에서 더 적은 자유를 누릴수록, 더 많은 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현실은 정반대이다. 표면적으로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직업일수록 더 높은 지위를 나타내고, 더 많은 돈을 받는 경향이 있다. 폴 퍼셀은 자신의 책 <계급>에서, 한 사람이 직업에서 누리는 자유의 양이야말로 임금보다 나은 계급의 지표하고 주장한다. 132

 

사람들은 직업에서 더 많은 통제권을 갖도록 해주는 전문 지식을 얻기 위해 기꺼이 시간과 돈을 희생한다. 예를 들면, 과거 젊은이들은 장인의 도제로 수년을 보냈는데 이것은 사실상 계약고용었다. 미국의 도제들은 장인과 일하기 위해 노동계약서에 서명했다. 영국의 도제제도는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그 제도를 운용했던 조합은 건너오지 않았다. 그 결과, 자격 기준이나 인증서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133

 

장인의 가치와 힘은 무언가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버지들은 기술의 비밀을 아들들에게 물려주었고 스승들은 도제들에게 물려주었다. .. 비밀은 장인들에게 힘과 자율성을 주었다. 그러나 미국에는 비밀성을 강화해줄 만한 강한 조합제도가 없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장인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책과 간행물을 통한 정보의 보급이 광범위해지면서 몇몇 장인들은 자신의 비밀을 인쇄하여 대중들에게 팔기도 했다. <유용한 천 가지 비밀(1795)>과 같은 실용서(how-to book)들은 조각, 철물상, 니스칠, 시멘트 바르기, 밀랍으로 봉하기, 유리, 페인트, 도금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 135

 

오늘날에도 여전히 번성하고 있는 실용서의 전통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실용서가 아닌 산업화가 장인들의 힘과 권위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일이 갖는 의미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 기계화는 일을 보다 효율적으로 실행시켰을 뿐 아니라 몇몇 업무를 단순 작업화함으로써 사람들은 기계의 일부처럼 쉬비게 대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136

 

 

6 일꾼 길들이기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의 생산업자들은 미국인 숙련 노동자의 태도 문제(attitude problem)”와 싸워야 했다. 숙련된 미국 태생의 일꾼들은 자신의방식으로, ‘자신의 속도에 맞춰 일하고 싶어했다. ..고용주들은 생산에 대한 통제권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미국의 자유와 평등 원칙에 공공연히 위배되지 않으면서도 노동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해야만 했다. 137

 

테일러는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를 중퇴하고, 산업 현장에서 일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할 기회를 거절했다. 140

 

노동자들을 장악하고 생산 속도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열쇠는, 누구나 최대한 효율적으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도록 일을 설계하는것이었다. 141

 

1878년 미드베일 제강에 입사한 테일러는 빠른 속도로 십장과 주임기사 자리에 올랐다. 미드베일에 있는 동안, 그는 산업 생산성을 증진시키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 테일러가 창안한 가장 유명한 과적적 관리법의 실례는 펜실베이니아로 이민 온 네덜란드인 헨리 놀의 사례이다. 테일러는 자신의 연구에서 그를 슈미트라고 이름붙였다. 141

 

테일러는 슈미트가 제대로만 한다면 하루에 47톤의 무쇠를 실어나를 수 있다고 계산했다. 현재 속도는 하루 12.5톤이었다. 테일러는 슈미트와 나눈 대화를 <과학적 경영의 원리>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그는 당신은 몸값이 높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값싼 노동자들 가운데 한 명입니까?” 하고 슈미트에게 묻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그러고는 하루 1.15달러를 벌고 싶은지, 아니면 1.85달러를 벌고 싶은지 물어본다. 슈미트는 후자를 택하고, 테일러는 이 냉정하고 짧은 대화에서 값비싼 일꾼(혹은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한다.

이제 당신은, 몸값이 비싼 사람은 아침부터 밤까지 지시받은 대로 정확히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값비싼 일꾼이라면 당신은 이 남자가 내일 당신에게 지시하는 대로 아침부터 밤까지 정확히 실행해야 합니다. 만약 그가 당신에게 무쇠를 들고 걸으라고 말하면 .. 당신은 무쇠를 들고 걷습니다... 그가 앉아서 쉬라고 하면 당신은 앉습니다. 이제 값비싼 일꾼은 지시받는 대로만 행하고 말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슈미트는 지시에 따랐고 하루에 47.5톤의 무쇠를 운반했다. 60% 더 많은 보수를 받는 대가로 400%나 더 많은 일을 한 것이다. 그러자 다른 노동자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든 돈을 위해서든 혹은 두 가지 모두 때문이든, 그들 여기시 슈미트와 똑같이 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테일러가 <과학적 경영의 원리>를 출판한 덕분에 슈미트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노동자가 되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곧 에스페란토를 포함한 12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테일러의 방식은 세계 도처에서 위대한 발전으로 인정받았다. 비평가들은 슈미트의 경험과 그에 대한 테일러의 묘사에 숱한 경멸감을 나타냈다. 이 책이 노동과 생산에 대한 엄격한 통제에 관한 것임을 고려한다면, 러시아 판에 주를 단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나 아돌프 히틀러, 그리고 한 때 테일러의 미망인을 만나 그의 사진을 요청한 적이 있는 베니토 무솔리니 등이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142-143

 

과학적 관리법의 네 가지 기본 요소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첫째, 과학적 관리법은 중앙집권화된 계획과 일의 순차적 단계들을 정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과거에사람이 먼저였다면, 미래에는 체계가 먼저일 것이다.” 둘째, 과학적 관리법은 각각의 작업을 가장 단순한 부분들로 쪼갰다. 셋째, 과학적 관리법은 경영진에게 고용인들을 훈련시키도록 요구했고, 각각의 노동자들은 업무 수행을 면밀히 감시받게 되었다. 테일러는 일의 구조뿐 아니라 고용인들의 가치관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용인들은 서로를 통해 일뿐만 아니라 할당량을 유지하고”, “남자답게 처신하는도덕적 자세를 배웠기 때문에 회사로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일하도록 고용인들을 훈련시키는 편이 더 나았다. 속도를 중시했던 테일러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할당량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과학적 관리법의 넷째 요소는 고용인이 지시받은 대로 일하도록 하기 위한, 주의 깊게 고안된 임금 체계에 기초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자신의 논문 <왜 생산자들은 대학생을 싫어하는가?>에서 협력이란 노동자들이 지시를 받았을 때 의문을 제기하거나 제안하는 일 없이 신속히 지시받은 대로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저술했다. 테일러는 순종을 얻어내고 할당량을 깨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용인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의 사리사욕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20년대 중반, 과학적 관리법의 논리는 거의 모든 산업에서 호응을 얻는다. 143-144

 

미국노동총연맹에서는 테일러의 체계를 생산성 증가 체계(speedup system)”라고 불렀다. 144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에서는 노동쟁의가 밣생했다. 145

 

대부분의 고용주들은 평온한 노사관계를 원했기 때문에 고용인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기로 했다. 1차 세계대전이 할창일 때, 애국심이 사람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을 보고 감명받은 몇몇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조직에서 그러한 종류의 정신과 헌신을 끌어내는 것을 보고 감명받은 몇몇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조직에서 그러한 종류의 정신과 헌신을 끌어낼 수는 없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복지 자본주의에 대한 영감은 노동 불안에 대한 두려움, 높은 이직률로 인한 비용, 자선 단체들, 그리고 대외관계 등을 포함한 여러 원천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또한 진심으로 고용인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고 싶어하는 사업주들도 있었다. 복지 자본주의의 이면에 자리잡은 일반적인 생각은 고용인들을 행복하게 하거나 그들의 이익이 그들 자신의 계급적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닌, 고용주의 이익과 결합된는 공동체에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146

 

초기 복지제도의 일부는 침대차 제조업자인 조지 모티머 풀먼이 고용인들을 위해 1880년 시카고 외곽에 지은 시범 마을처럼 근로자들의 삶을 통제하기 위해 고안된 온정주의적 기획이었다. 풀먼은 그들의 고용주였을 뿐 아니라 집주인이자 지역 상점의 소유자였다. 146-147

 

또 다른 복지제도들은 근로자들에게 회사의 주식과 더 높은 안정성을 제공하기도 했다. .. 1923P&GIBM같은 회사들은 연간 48주의 전일 고용을 보증하기 시작했다. P&G는 또한 1886년 이익분배제도를 시작했으며, 시어스 로벅 사도 1886년에 그것을 시작했다. 1927년까지 80만 명의 근로자들이 이러한 이익분배제도나 소위 근로자주식소유제도(ESOPs; employee stock ownership plans)10억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 인터내셔널 하비스터 사는 1911년에 연금제도를 실시한 수많은 기업들 중 하나였다. 당시의 또 다른 혁신에는 건강보험, 안전기준의 개선, 회사 구내식당 같은 시설이 포함되었다. 147

 

고용주들은 미국식 제도 아래서 복지 자본주의의 많은 교의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고용인들의 충성과 협력을 얻어낼 수 있기를 바랐다. 148

 

1935, 전국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은 고용인들이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할 권리나 결정에 관한 진정한 발언권을 갖고 있지 않다면 품질관리 서클을 비롯한 모든 유사한 참여 조직들도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법안은 허위조합(sham unions)”, 또는 실제 조합을 막으려는 시도로 고용주가 만든 사내 조합을 금지했다. 오늘날 고용주들은 이 법안이 작업장에서 참여 조직의 활동을 금지한다고 불평하곤 한다. 148

 

복지 자본주의와 미국식 제도는 192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고, 1930년대 대공황이 오자 재빨리 자취를 감추었다. 당시의 한 비평가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분명한 것은 임금노동자들의 복지를 고용주들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많은 회사들은 실제로 고용인들엑 대해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대공황기에 미국식 제도가 소멸되자 곧바로 고용주와 고용인 간의 신뢰와 충성을 방해하는 주요한 장애물 가운데 한 가지가 부각되었다. ..

1935년의 한 경영자 회의에서, 뉴저지 벨 사의 회장인 체스터 버나드는 복지 자본주의가 근로자의 발전이나 협력 증진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49

 

1920년대는 산업 혁신과 실험 그리고 노조 억압의 시대였다. 경영에서의 인간관계 접근은 고용인들의 태도와 감정이 어떻게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 경영진은 고용인들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고용인드로과 대화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방법을 알 필요가 있었다. 150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조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노조라고 하면 어떤 이들은 게으르고 돈만 많이 받는 부패한 특수 이익집단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어떤 이들은 노조가 지나친 욕심과 낮은 생산성으로 세계시장에서 미국의 경쟁력을 파괴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 노동조합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많은 부패와 난폭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의 탄생은 여전히 역사상 가장 중요한 노사관계 혁신이다. 이는 노동조합이 양자간에 존재하는 힘의 불균형을 조절해주기 때문이다. 157

 

 

7 노동의 두 얼굴

 

1950년대에 C.라이트 밀스 같은 사회 비평가들은 대기업이 고용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우려했다. 그는 거대한 관료 조직에서의 사무직 노동의 우울한 모습을 그렸다. 밀스에게 일의 황금기는 가족 농장과 소규모 독립 상인들의 시대인 1850년대였다. 그는 1850년대에는 일이 삶과 잘 통합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다고 기술했다. 자신이 사는 집에서 일했던 장인이나 상인에게는 이것이 사실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밀스는 또한 일을 살에 통합시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고, 소외는 나쁜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는 산업 노동자들과 사무직 노동자들에게는 일의 의미가 너무나 축소된 탓에, 일이 더는 내적인 방향성과 사회와의 연결성을 제공하지 모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믿었다.

밀스가 보기에, 사무직 노동은 어떤 면에서 비숙련 노동보다도 못했다. 그는 계약노예들(paroles)”은 육체적으로는 고생스럽더라도, 적어도 집에 가면 자유인 반면 사무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뿐 아니라 개성까지도 팔아치워야 한다고 말했다. 밀스는 사무직 노동자를 새로운 작은 사람(new little man)””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고, 뿌리가 얕아 충성심이라고는 없으며, 항상 서두르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밀스에 따르면, ‘새로운 작은 사람은 반영웅적이고, 자신의 역사를 알지 못하며, 어려운 시기에 회상할 만한 황금기를 겪어보지 못했다. 162

 

새로운 작은 사람에 대응하는 인물을, 밀스는 미국 조직의 새로운 권력자(new men of power)””라고 불렀다. ...

밀스에 따르면, 일의 상당수가 파편화되고 무의미해져서 계급 이동성과 향상의 여지가 거의 없는 대규모 복합 조직에서는, 열심히 일한 개인이 자기 발전(혹은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가 실행될 수 없다. .. 밀스는 인사 부서의 목적이 쾌활하고 협조적인 부하들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용인들의 감정마저도 조직이 바라는 대로, 조직의 손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직장 내의 정서를 통제함으로써, 고용주들은 근로자들을 소외시키지 않고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정당화할 수 있게 되었다.

밀스는 사무직 근로자가 조직의 목적에 적합한 사람이 되도록 조직에 의해 심리적으로 강요당하며, 자신의 개성을 팔아버렸기 때문에 이후 일 외의 부분에서는 천박하고 보잘것없는 삶을 살도록 운명 지워진다고 주장했다. .. 밀스가 설명하듯이, 일은 가정생활과 공동체 내애서의 생활을 향상시키기보다는 파괴한다. .. 밀스와 같은 비평가들이 실제로 우려하는 것은, 근로자들이 이로 인해 시간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 미치는 조직의 영향력으로 인한, 일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개인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163-164

 

데이비드 리스먼이 1950년에 출간한 책 <고독한 군중>

이 책 속의 타인 지향의 생활: 보이지 않는 손에서 악수하는 손까지라는 장에서, 리스먼은 타인 지향적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공예 기술보다는 사람 다루는 기술을 더 강조하고, 은행계좌의 잔고보다는 교제비를 더 중시한다고 주장했다. 일은 재미있는 것으로 가정되고, 관리자들은 비서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사장과 고객들을 기쁘게 하는 악수하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리스먼에 따르면, 타인 지향적 사람은 회사에 우선적으로 속하고, 가정과 교회, 공동체에는 더 얕게 뿌리내리는 경향이 있다.

1950년대 후반의 직장은 오늘날의 직장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 “사회윤리이러한 윤리는 조직의 충성 요구를 합리화하고, 진심으로 스스로를 희생하는 고용인들에게 헌신하고 있다는 느낌만족을 준다. 이러한 윤리에는, 집단은 창조성의 원천이며 개인은 궁극적으로 소속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리고 경영학 분야에서 일하는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들이 그러한 소속감을 창출하는 방법을 고안할 수 있다는 믿음이 포함된다. 165

 

1950년대의 사회 비평가들은 사람들이 조직에 순응하는 것, 그리고 새로 등장한 교외생활의 가치에 대해 걱정했다. 오늘날 우리는 합의된 가치의 부재와 도시 및 교외 공동체의 파괴를 우려한다. 직장에서는 여전히 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이 증가하고 있고, 집단의 가치가 강조된다. 누구도 창조성의 상실이나, 개인의 정체성이 집단의 정체성에 종속되는 문제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듯하다. 경영자들은 팀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의 문제에 보다 큰 관심을 갖는다. 너무나 많은 그들의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오늘날 경영 이론가들은 집단과 팀이 모든 바람직하고 생산적인 것의 토대라고 믿는다.

와이트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릇된 집단화에서 가장 잘못된 시도는 집단을 창조적 도구로 보려는 시도이다.” 오늘날 인기 있는 경영 개념과는 반대로, 와이트는 사람들이 집단 내에서 제대로 사고하거나 창조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집단은 단지 일의 시행을 지시할 뿐이다. 166

 

와이트의 책 이후로, ‘팀의 영광(glories of teams)’에 대한 끝없는 저작과, ‘집단에 대한 엄청난 양의 연구가 쏟아졌다. 오늘날 조직의 수사학(rhetoric of organizations)은 팀, 파트너, 가족, 동료와 같은 단어를 포함한다. 그러나 단결된 조직과 팀이 일을 하거나 의사결정을 하는 데 늘 최상의 방법인 것은 아니다. 어빙 제니스 같은 연구자들은 우리에게 집단적 사고의 불이익을 경계하라고 충고했다. 집단적 사고 강태에서 한 집단의 구성원들은 비슷하게 사고하기 시작하고,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보지 못하게 된다. ...

조직은 더 이상 와이트가 자신의 책에서 논의했던 인성 검사를 실시하지는 않지만, 대신 마이어스브리그스 유형지표(MBTI ; Myers-Briggs Type Indicator) 같은 다른 유형의 검사들을 실시한다. 이것은 개인의 성격 유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지표이다. 167

 

일부 조직들은 순응적인 고용인을 선택하기 위해 아직도 검사를 이용하고 있다. 168

 

와이트가 보기에 인성 검사는 개인의 자율성과 사생활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러나 많은 고용인들은 그러한 검사를 자기 인식 및 발전을 위한 도구로 여긴다. 별자리 운세나 성적 매력에 대한 잡지 퀴즈들처럼, 심리 검사는 내적인 자아를 명확히 보여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문제는 우리가 직장에서 그러한 검사를 받게 되면, ‘자기 인식을 얻은 대가로 자기 노출과 어쩌면 부당한 분류깢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

책의 결론 부분에서 와이트는 독자들에게 조직과 싸울 것”, 그리고 회사의 순응 요구에 말려들지 말 것을 권고한다. 168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욕구 단계” ...

욕구야말로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전부라고 가정하는 것은 인간의 열정, 이상, 가치가 갖는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자신의 가치나 자신에게 중요한 것에 기반한 선택을 한다. .. 우리는 우리가 가치있게 여기는 것을 선택한다. .. 피라미드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우선순위를 갖고 있는 고용인들은 경영진에게 악몽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조직이 줄 수 있는 것, 즉 소속감과 명성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172

 

일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다양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다른 사람들과 일할 때, 우리들 대부분은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은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우리가 걸치는 페르소나와 허용되는 감정의 범위는 직업에 띠라 달라진다. 181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하는 동안 자기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서비스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특정한 감정 상태를 지녀야 한다. 과거의 서비스 분야 종사자들은 정중해야 했다면, 오늘날에는 친절하기까지 해야 한다. 알리 러셀 혹실드는 그녀의 도발적인 책 <감정의 통제>에서 ...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제품을 생산하는 데 지적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서비스를 제공할 때 자신의 실제 감정을 항상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서비스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은 자신의 존재와 아무 상관도 없는 무언가를 마지못해 생산하고 있다고 느낀다. 182-183

 

유리는 매일 상업화된 개별화와 쾌활함, 친절함에 노출되어 있다(비록 어떤 경우, 이러한 감정은 상당히 진실된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서비스의 즐거운 얼굴(happy face)” 관점은 정중함과 공손함 이상의 것이다. 183

 

 

8 유망한 직장

 

1980년대에는 수많은 최신 경영 방법들이 엄청나게 유행했다. .. 직장 민주주의 실험이 쇠퇴했음에도, 많은 회사들은 고용인들에게 권한을 주거나일에 대한 더 많은 발언권을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학자들은 점점 더 많은 근로자들이 일에서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지식노동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해싿. 1980년대가 되자, 일은 매력적이고 재미있으며 흥미로운 것처럼 보였으며 직장은 마치 행복한 대가족인 듯했다. 187

 

하버드나 와튼 같은 주요 경영대학원들은 그러한 주제에 대한 강의를 들으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6년까지, <포춘>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의 75%사명선언문이나 윤리강령을 갖고 있었다.

윤리강령에 대한 관심이 1980년대에 높아진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일부 회사들은 부정적인 보도 추무느 소소으 불법 활동들에 대해 염려했다. 또 다른 회사들은 고용인들이 다양한 배경과 가치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통된 윤리적 가치를 진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대중 및 고객과 즇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바람을 가진 일부 기업들은 윤리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말뿐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체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사는 윤리강령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막연하게 느끼는 기업 지도자들도 있었다. 188

 

노예제도와 계약노예제도, 그리고 과학적 관리법을 거친 1980년대 중반의 기업들은 과연 이상적인 직장이 되었을까? 189

 

1980년대의 잘 팔리는 경영학 서적들에서 자주 몸델로 제시되었던 회사들은 휴렛팩커드, 존슨 앤 존슨, 리바이 스트라우스, AT&T와 같은 존경받는 성공한 기업들이었다. 또한 경영학 연구에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기업드로과 잘 팔리는 경영학 서적을 쓴 컨설턴트의 고용주들이 이런 책에 자주 등장했다. 이들 회사는 경영 혁신의 성공을 증명한다. 한편 이러한 상황은 대기업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자금 지원을 받은 경영학 연구가 과연 객관성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질손의 견해가 여전히 타당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또한 조직 내의 힘, 권력, 갈등에 관한 질문들이 왜 경영학 교과서나 대중 문학에서 논의되는 일은 드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수 있다. 190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 그리고 주로 일본과의 세계경쟁에 의해 많은 기업들이 황폐화되었던 1980년대에 경영자들은 좋은 충고를 갈망했다. 시장에는 경영자들의 사기를 향상시키고 근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쓰여진 경영학 서적들이 일시적으로 넘쳐났다. 191

 

<초우량 기업의 조건>은 분명 1980년대의 가장 중요한 경영서였다. ..

피터스와 워터만은 조직 속에서의 경영자 역할이 기업문화를 형성하고, 고용인들에게 의미를 창출해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피터스와 워터만은 가치, 상징, 이데올로기, 언어, 신념, 의식([儀式 거동의 법식), 그리고 조직의 신화를 의미하는 말로 기업문화를 사용했다. .. 피터스와 워터만은 직장 민주주의를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통제되고 잘 조직화된 체계 내에서 자신의 일을 잘할 수 있는 자유를 강조했다. 그들은 무엇이 고용인들을 흥분시키는 지 알아내고 조직내에서 호손 효과를 의도적으로 지속시키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고용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2-193

 

1982년에 출판된 텔렌스 E. 딜과 앨련 A. 케네디의 <기업문화>.. “강한 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하는 일을 더 기분 좋게 느끼도록 만든다. 따라서 그들은 더 열심히 일하는 경향이 있다.” ... 딜과 케네디는 강한 기업문화가 고용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 즉 구조와 가치 체계, 그들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회사에 소속되었다는 자부심 등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삶에서 불확실성을 제거해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위 고용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문제점들 중 일부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았다. 과연 고용인드르의 개인적인 취미는 무엇이며, 그들이 거기에 시간을 쓰는 것이 왜 잘못되었는가? 우리는 우리 삶의 가치를 확신하고있어야 하는가? 193-194

 

강한 기업문화의 커다란 이점은 그것이 포괄적이고 자동 조절되는 사회 체제라는 점이다. 불리한 점은 그것이 억압적인 동시에 변화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부정적인 면은 고용인들이 충분히 일 바깥에서 충족시킬 수 있는 욕구, 예를 들면 우정의 욕구 같은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점점 더 일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당신이 실직하게 되면 당신은 이로가 소득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195

 

로버트 하워드는 <놀라운 새 일터>에서 새로운 조직은 일터를 보다 인간적으로 만듦으로써 다시 마술에 걸리도록 시도하는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

하워드의 놀라운 새 직장에서는 도넛 타임이나 맥주 파티 같은 사교 모임들이 의사소통을 증진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임에 참석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일종의 억압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장치들은 팀 정신과 조직에 대한 헌신을 끌어내기 위해 적절히 이용되었다. .. 기업문화가 다양한 노동자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더라도 여전히 모든 살마들은 함께 도넛을 먹어주어야 한다. 마법에 걸린 회사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종류의 일을 하도록 요구한다. 본래의 업무와 이러한 사교생활에 참석하는 일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두 가지 일 모두에 대해 평가를 받는다. 에티켓 전문 작가인 주디스 마틴(“미스 매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업무상 사교(business entertaining)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줌으로써, 직무관계(business dealing)에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충성같은 사회적 기준을 적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업무상 사교는 모순 어법이다. 196-197

 

프레더릭 윈슬로 테일러가 말한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조직에서 일터는 ... 힘과 통제의 관계가 명확했다. 주어진 기능을 수행하면 될 뿐 자아를 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 단순하고 눈에 보이는 세계이다. 하지만 이제 더욱 고달파지고 둔감해진 일의 세계에서는 직업을 계속 유지하는 것 자체가 유인(誘引)이 된다. 197

 

존 미클스웨이트와 애드리언 울드리지는 자신들의 책 <주술사들>에서, 오늘날에는 너무나 많은 경영 이론들이 있으며, 그들이 서로 모순되곤 한다는 점을 지적햇다. 예컨대 어떤 이론은 독특한 기업문화일수록 좋은 것이라 말하고, 다른 이론은 다문화적인 기업일수록 좋은 기업이라고 말한다. 한 이론은 (quality)’’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다른 이론에서는 중요한 것은 속도라고 말한다. .. 경영학 이론의 유행 주기는 10년에서 1년으로 짧아졌다. 컨설팅 회사 베인 앤 컴퍼니25개의 인기 있는 경영학 이론들을 골라, 기업들이 얼마나 많은 이론들을 자신들의 업무에 적용하는지에 대한 조사를 전세계에 걸쳐 실시했다. 조사 결과, 1993년에는 평균 11.8, 1994년에는 12.7개의 이론이 사용되었으며, 1995년에는 그 수가 14.1개로 증가할 것이라고 베인앤 컴퍼니는 추정했다. 제너럴 일렉트릭 사의 CEO인 잭 웰치는 기업이 서로 다른 경영 아이디어들을 시도해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고용인들에게도 유익할까? 201

 

1980년대, 그들은 조직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회사의 사교 모임에 참여했다. 1990년대, 이제 훈련은 팀 만들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202

 

경영학에서의 일시적 유행과 관련된 문제점은 그들이 종종 무비판적이고 역사적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경영 이론가들은 일에 대한 동일한 사실을 반복해서 발견하고, 그것을 발견할 때마다 매번 또다시 기뻐한다. ‘팀워크1980년대와 1990년대 경영자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던 커다란 ()개념들 가운데 하나이다. 203

 

미클스웨이트와 울드리지는 오늘날 스포츠팀은 점점 더 사업가처럼 활동하는 반면, 회사 조직들은 고용인들로 하여금 보다 더 스포츠팀처럼 행동하도록 장려한다며, 이런 상황이 얼마나 반어적인지에 주목한다. ..

팀은 문화보다 훨씬 더 강력한 형태의 사회적 통제를 가능하게 만든다. 204

 

고용인들이 협력을 얻어내는 것은 항상 도전이었다. 많은 회사들이 팀을 만들어 이끌거나 코치하는 법을 배우는 데 투자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205

 

팀 지도자들은 팀과 한몸이 되어야 하는 반면, 팀 구성원들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205-206

 

딜버트 만화는 이러한 태도를 가장 잘 요약한다. 딜버트의 상사가 고용인들에게, 그들을 빠르게 움직이는 팀으로 재편성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자, 고용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좋은 계획이네요 우리가 스스로를 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그 다음엔 우리가 무기력하고 세밀하게 조종되는 노예라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할 테니까요.” 206

 

1980년대의 경영 이론들 중에서 종합적 품질경영(TQM; Total Quality Management)만큼 열렬히 신봉된 것은 없었다.. ..이것은 품질관리가 전 과정에 걸쳐 이루어져야 하지, 과정의 마지막에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208

 

만약 제품의 질을 향상시키면 생산성도 향상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완제품에 대한 품질관리를 하는 대신 전 과정에 걸쳐 품질관리를 하라는 것이다. 209

 

미국 정부는 TQM을 채택하고 장려했다. ...

리처드 J. 피어스는 TQM과 리더십에 관한 자신의 책에서 현장 관리자들이 지도자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 피어스는 계속해서, 근로자들 또한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분야에서 품질 성과를 개선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기는 해도, 아무런 부가적 보상을 가져오지 않을 것(“내게 무슨 득이 돌아오나요?”)이다. 그렇지만 생산성 및 품질의 개선은 장기적으로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 필요가 있다. .. 당근을 대신하는 채찍(혹은 숨겨진 위협)인가? TQM의 이면에는 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제대로 행한 일은 본질적으로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을 포함한 장인윤리의 회복이라는 고귀한 정신이 존재한다. 210-211

 

데밍이 원래 제시했던 품질경영의 열네 가지 본질적 요소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이 회사를 위해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직장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직장에서의 두려움에 관해 연구한 캐슬린 D. 라이언과 대니얼 K. 오스트리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복과 앙갚음, 그리고 징계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두려움을 낳는 또 다른 원인들은 조직 내에서 사람들이 논의하기 두려워하는 것, 논의 불가능한 것들에서 발견된다. 22개 조직의 260인을 대상으로 한 라이언과 오스트리치의 조사에서 가장 논의 불가능한 것으로는 사장의 경영 방식이 꼽혔다. 그 다음으로는 동료의 서오가와 보상 및 급여가 차지했다. .. 생산성 증가는 팀워크코칭과는 전혀 상관없는, 두려움 같은 요인들의 결과일 수 있다. .. TQM을 비롯한 경영 혁신들은 사람들에게 일을 더 나은것으로 만들어주었는가? 다시 말해 일은 보다 즐겁고, 의미 있고, 유익한 것이 되었는가? 이러한 새로운 제도들은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해주었는가? 그것들은 약속했던 모든 것-권한위임, 훈련, 팀 구성원이 되는 기쁨-을 주었는가? 213-214

 

리엔지니어링(Reengineering)20세기의 마지막 주요 경영 이론으로서 과학적 관리법과 적절한 대조를 이룬다... 리엔지니어링은 일련의 과업들이 한 사람에 의해 행해질 수 있도록 조정하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했다. 과학적 관리법은 근로자들을 전문가로 변화시키고, 일을 지루한 것으로 만들었다. 리엔지니어링은 고용인들을 만능일꾼으로 만듦으로써 일을 보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것으로 만든다. ...

리엔지니어링은 마이클 해머와 제임스 챔피의 공동 작품이다. ..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모든 경영 혁신들 주에서, 리엔지니어링은 한 개인이 하는 일을 보다 흥미롭게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214-215

 

한때 지시받은 대로 일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다... 경영자들은 이제 감독관처럼 행동하지 않고 코치처럼 행동한다. 근로자들은 상사에게 덜 신경 쓰는 대신 소비자의 욕구에 더 신경을 쓴다.’ ..

해머는 리엔지니어링은 더 적은 인원으로 더 적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구조조정이나 조직개편과는 다르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리엔지니어링은 더 적은 인워능로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다. 216-217

 

 

9 배신하는 직장

 

1990년대 중반의 많은 미국인들... 회사에서 해고당한다. .. 그들은 회사가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해치우고 싶어했기때문에 직정을 잃은 것이다. 그들은 세계경제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여성들과 소수민족의 사람들도 해고를 당했으며...직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 소득, 연금, 친구, 평판, 심지어 가족까지 잃는 일도 있다, 그들이 일한 세월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조직이 약속했던 것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일만 잘하면 은퇴할 때까지 직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묵언의 사회적 꼐약을 고용주들과 맺었던 것이다. ...

해고의 아픔을 극복하고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기술을 배워 더 나은 직장으 얻은 사람들에 대한 좀더 유쾌한 이야기도 있다. .. 그러나 이들 성공 스토리에 등장하는 사람들조차도 이전 직장에서 누렸던 것과 같은 생활 수준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1995년 노동부는 실직 노동자의 35%만이 동일하거나 더 나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 직장을 얻게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221-222

 

어떤 이들은 구조조정이 올바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잘못될 것이 없다고 좋아한다. ..

1990년대의 커다란 아이러니 중 하나는 실제 경영에 있어서는 구조조정을 강조했던 반면, 당시의 경영서들과 경영학적 수사법들은 헌신”, “충성”, “신뢰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

헌신은 노동력을 줄이고, 근로자들의 작업량을 두 배로 늘린 회사들이 특히 필요로 하는 덕목이었다. 222-223

 

구조조정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존재했으며 강한 노동조합에 의해 강화되어온 노동의 암묵적인 사회계약을 변화시켰다. ..

사회적으로 구조조정은 근로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있었거나 의심해온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 고용주들과 경제는 변덕스러우며, 당신은 조직에 너무 많은 것을 투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말이다. .. 산업화와 더불어 근로자는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취급받았다. 225

 

근로자에 대한 배신에 있어, 구조조정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 지난 20년간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기업들은 고용인들과 이윤을 공유하기는 커녕, 시장과 주식시장에서 거둔 성공을 치하한다며 임원들에게만 막대한 상여금과 스톡옵션을 주고 있다. 226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고든은 저서 <살찌고 비열한>에서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갖고 있는 경제적 문제들의 주요 원천은 대부분의 미국 기업들이 고용인들을 다루는 방식과 비대한 관료주의를 유지해온 방식에 있다고 주장했다. .. 대중은기업의 이윤과 중역들의 보수는 증가하지만 자신들의 임금은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체되거나 하락한 임금을 설명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끌어들이는 혐의는 세계 노동시장에서의 경쟁이다. ..

경제학자 제임스 K. 갤브레이스는 정부가 부자들의 편에 서 있는 탓에 중산층과 빈자들을 위한 정책에 실패하여 임금 및 소득의 불평등이 증가했다고 비난한다. 227

 

1974CEO들은 평균적인 근로자보다 40배나 많은 돈을 벌었다. .. 1999년 노동조합 단체인 페이워치(Paywatch)CEO의 평균 급여가 공장 근로자 평균 임금의 326배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급여 전문가인 그래프 S. 크리스탈은 이렇게 말한다. “CEO의 급여는 너무 빨리 오르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더는 놀라지 않는다.” 228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기분 좋게느끼게 만듦으로써 고용주들은 근로자들의 내게 무슨 득이 돌아오느냐?”고 묻지 않도록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현혹시킨다. .. 오늘날에도 불성실한 경영자들은 갈등과 사기 문제를 피하기 위해 근로자들에 대한 평가를 부풀린다(이것은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영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임금 인상은 억제되었고, 노동조합 참여는 감소했으며, 남아 있는 노조들의 힘도 약해졌다. 힘의 균형은 압도적으로 고용주에게 유리한 상태가 되었다. 229

 

엘튼 메이오의 시대 이후 경영진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돈을 덜 주면서 더 많은 일을 시킬 수 있을까?”였다. 연구 결과는 월급 인상이 반드시 사람들을 더 열심히 일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니며, 근로자들은 자신의 성과에 대해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어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직장에서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주되니 이유가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한다는 느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TQM이 너무나 효과적으로 실행되어서 근로자들이 실제로 내게 득이 되는 게 뭐죠?”라고 묻지 않는 일이 이제 가능해진 것인가? 그들은 정말로 업무 품질에 대한 인정만을 바랄 뿐 보수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가? 231

 

일을 보다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본래 그 자체로는 훌륭한 의도이다. 그러나 근로자들이 부당한 임금을 받고도 열심히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일을 더 그럴듯해 보이게 하는 것은 착취이다. 232

 

미래의 불확실성에 근거한 미묘한 두려움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일에 매달리도록 만든다. 우리들 대다수는 어떤 막연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더 오랫동안 일한다....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와 달리 두려움의 노동윤리는 구원의 희망을 약속하지 않는다. 단지 좀더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시장은 변덕스러워서 개별 고용주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 고용주는 사람들을 해고할 때 미안 하네, 경기가 안 좋아서...”라든지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지 않으면 경쟁할 수가 없네라고 이야기한다. 좌절한 실직자들은 누구를 비난하고, 누구에게 소리쳐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경영자들이나 정치가들을 비난할 수 없다. 그들 역시 세계경제를 통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직한 근로자들은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초점 잃은 분노를 품는다. 확정되지 않은 미래의 언젠가, 그들의 회사를 보다 경쟁력 있게 만들기 위해 그들의 삶은 혼란에 빠진다. 235

 

만약 카를 마르크스가 오늘날에도 살아 있었다면 그는 혁명을 요구했을 것이다. - “전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너희들이 잃을 것은 구속뿐이다.” 그러나 칸막이나 팀 안에서 일하는 오늘날의 근로자들은 단결할 수도 없고, 단결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잃을 것이 있다. 바로 그들의 직장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파업이나 저항 운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

냉소주의자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고, 단결하여 조합을 형성하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기 때문에, 혁명론자들보다도 함께 일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대신에 그들은 봉급을 받을 때 수동적인 저항과 비웃음으로 침묵의 파업을 행한다.

복지 혜책의 과감한 삭감, 더 긴 노동시간, 증가된 노동량, 구조조저으 그리고 급등하는 중역들이 보수에 대한 근로자들의 공공연한 침묵은 우리의 귀를 멀게 한다. 238



PART ONE 일의 의미와 역사 바로가기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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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일의 의미, 삶의 의미를 찾아서

 

우리가 가진 모든 연장들이 우리의 명령에 의해서든, 스스로 필요성을 인식해서든, 알아서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라... 베틀의 북이 혼자서 앞뒤로 움직이고, 연주자가 저절로 움직이는 리라를 연주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면 공장주들은 더 이상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노예의 주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쉬지 않고 일하는 로봇들에 의해 자동화된 공장을 보며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 이 시대를 기쁨으로 맞이하는 대신, 우리는 전보다 더 필사적으로 일(work)에 매달린다. 우리 사회는 일을 지향하는 사회이다. .. 우리는 일을 축복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일을 없애려고 하는 모순적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8

 

이 책은 우리 삶에서 일과 직장이 갖는 의미에 관한 책이다. 8

 

일은 우리의 지위뿐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까지도 결정한다.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시장이나 고용주의 손에 맡겨두는 결과를 가져온다. 괜찮은 삶을 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something more)’을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용주들은 자기개발이나 자아실현 같은 다양하고도 추상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방법을 찾는다. 9-10

 

오늘날의 일은 대부분 우리 사생활의 일부를 포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과거의 노동자들이 단지 과로했을 뿐이라면, 오늘날의 많은 노동자들은 과로할 뿐 아니라 과도한 통제를 받고 있다. 14

 

 

 

PART ONE 일의 의미와 역사

 

1 왜 일하는가?

 

잠시 동안 일하지 않는 생활을 상상하기는 쉽지만, 평생을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어떤 사람들에게 왜 일하는가?”라는 질문은 우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한 선택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합니다.” 이것이 대다수 사람들이 유급노동을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종류의 일을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19

 

윌리엄 줄리어스 윌슨은 그의 저서 <일이 사라졌을 때>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일자리가 부족하면 사람들은 단지 빈곤으로 고통을 겪을 뿐 아니라 공식적인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소소감을 상실한다. 더는 일이 그들의 생활을 규제하는 규칙적인 힘으로 작동하기를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윌슨에 따르면,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일은 규율, 소속감, 규칙성, 자기 효능감 같은 다양한 심리적 사회적 욕구를 만족시킨다. 그러나 과연 일이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가? 왜 실직자들은 여가를 통해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가? 20-21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직자들이 여가를 갖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또 다른 통찰을 제시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평화나 적당한 미덕, 교육이 없이는 여가도 가질 수가 없다. “비즈니스에는 용기와 인내가 요구되며, 여가를 위해서는 철학이 요구된다. 절제와 정의는 두 가지 모두에 필요하지마 특히 평화와 여가의 시기에 더욱 요구된다. 절제와 정의는 두 가지 모두에 필요하지만, 특히 평화와 여가의 시기에 더욱 요구된다. 왜냐하면 전쟁은 사람들을 공정하고 절제하도록 만드는 반면, 평화와 함께 찾아오는 상당한 재산과 여가는 사람들을 오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2

 

두려움, 물질적 필요, 책임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여가를 통해 스스로를 계발하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여가를 위한 교육을 통해 스스로에게 유익한 학습과 활동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활동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들이 읽기, 쓰기, 미술, 신체적 훈련, 음악 같은 과목들을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교양인 학계(liberal arts)’의 기초가 된다. 로마의 키케로도 학예가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교육에서, 삶의 필수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진리와 그 자체로 추구할 가치가 있는 지식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론적으로 볼때 교양은 일하는 방법이 아닌, 여가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

여가는 단순한 자유시간이상이다. 그것은 일에 대한 욕구와 필요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이며, 특정한 일으르 하기 위한 기회이다. 직업을 이맇었거나 직업을 가질 수없는 사람들은 결코 일에서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일할자유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선택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3

 

인간의 가장 흥미롭고 독특한 점은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난 에도 스스로 일하기를 선택한다는 점이다. 24

 

일을 통해 소득을 얻는다는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직업을 갖는 것이 우리 문화에서 그토록 바람직한 이유는 명백하다. 일은 우리에게 유용하기 때문이다. 일은 규율과 정체성, 가치를 제공한다. 일은 우리의 시간을 조직하고 우리의 삶에 리듬을 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이 우리에게 매일매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준다는 점이다. 교육과 소득, 평화와 안전이 주어진다 해도, 유급노동이 일의 중심이 되는 문화에서 자발적으로 일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매일매일을 만족감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활동으로 채울 수 있을까? 우리들 대다수는 그것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일을 통해 만족과 행복을 얻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일은 우리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준다. 그러나 인간이 일 자체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많은 학자들을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장 자크 루소는 게으름이야말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생산활동의 필요성은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부지런한 습관은 일이 가져다주는 산물이며, 우리가 일을 통해 얻는 실용적인 교육이 무언가를 해야 할 필요성과 바쁜 습관을 만들어낸다고 저술하고 있다. 요컨대 우리는 타고난 기질 때문이 아니라, 훈련과 도덕적 조건화로 인해 일할 필요성을 느낀다는 것이다. 25-26

 

일의 의미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일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27

 

개미와 같은 이런 유형의 사람은 은퇴를 위해 저축하며, 남은 20년 동안 이전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바라면서, 삶의 45년 내지 50년 동안 어느 정도의 즐거움을 저당잡힌다. 32

 

개미는 미래를 위해 살지만, 막상 미래가 왔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항상 아는 것은 아니다. 33

 

개미와 달리 베짱이는 현재를 위해 살고 미래를 희생한다. 그의 놀이는 아무데에도 이르지 못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노는 삶에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 있는 삶인가? 꿀벌은 개미처럼 일하면서도 베짱이처럼 자신이 우추구하는 것을 즐긴다. 꿀벌은 다른 사람들이 고맙게 여기는, 훌륭하고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데서 기쁨을 얻고 의미를 찾는다. 꿀벌은 유용하고 보상을 주는 일을 상징한다(물론 실제 꿀벌의 삶은 이야기 속의 꿀벌의 삶과는 전혀 다르다). 개미는 일하는 삶, 안전한 삶의 표본인 반면, 베짱이는 놀이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경솔한 삶을 대표한다. 그렇다고 해서, 베짱이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34-35

 

버나드 수츠 <베짱이의 놀이, , 유토피아>.. 수츠의 주장에 따르면, 당신은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일하면서 놀 수가 있다. 첫째, 당신은 일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둘째, 당신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

이솝 우화의 꿀벌은 개미처럼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개미와 달리 꿀벌은 꿀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즐기거나, 꿀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즐기거나, 여전히 꿀 만들기를 즐긴다. .. 몇몇 생산적인 활동은 필요성은 없으나 만족을 준다. 36

 

매미의 노래처럼, 놀이를 하는 유일한 목적은 즐거움이다. 이솝 우화 속의 베짱이는 무책임해서 굶어 죽지만, 매미는 배고픈 예술가로 그려진다. 매미는 음악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굶어 죽는 것이다. 두 개의 우화는 서로 다른 메시지를 전달한다. 예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반면 일보다 노래를 더 좋아해서 죽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들 대다수에게 더욱 적절한 질문은 만약 당신이 개미처럼 산다면, 즉 나이 들어 쇠약해질 때까지 일해서 돈을 저축한다며, 그것은 의미 있는 인생인가?”이다.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주어진 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37

 

일은 일 이외의 삶을 잠식한다. 일 이외의 삶은 일하는 삶보다 더 많은 것을 제공한다. 44

 

 

2 일이란 무엇인가?

 

일의 의미를 탐색하기 위한 좋은 출발점은 일(work), 노동(labor), 수고(toil), 업무(job)와 같은 단어들의 뜻을 살펴는 것이다. 우리가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정의하는 방식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어휘 사용이 시간이 지남따라 그 단어의 집합적인 이용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46-47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거나, 어떤 것의 이름을 바꾸는 행위는 잠재적으로 강력한 행위이다. 당신이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은 그것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48

 

일에 붙는 직함이나 사람들이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용어들은 직장에 대한 개념도를 형성한다. 고용주가 조직문화를 바꾸고자 할 때, 그들은 자주 재명명 방법을 사용한다. 49

 

필요성’.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 그것을 반드시 해야 하거나,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51

 

모든 문화에서 일에 대한 태도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태국어에서는 을 뜻하는 단어와 파티를 뜻하는 단어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

태국 사람들은 일이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며, ‘일 자체는 좋은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도 태국인들은 결코 게으르지 않다. 그들의 문화는 재미를 뜻하는 사눅(sanuk)’에 큰 가치를 둔다. 모든 활동은 사눅(재미있는)’마이 사눅(mai sanuk:재미없는)’로 구분된다. 사눅은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근심없는 즐거움을 뜻한다. 일이건 놀이이건 상관없이 어떤 활동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속성이 바로 사눅이다. 가령 태국의 어느 마을주민에게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단조로운 업무가 주어진다면, 그는 그 업무를 팽개치고 가버릴 것이다. 그것은 사눅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그 사람은 여러 날 동안 쉬지 않고 마을이 사원을 짓는 일을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일에서는 사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태국에 처음 공장을 지었을 때, 그들은 사눅의 중요성을 발견했다. 사실 초기에는 태국인들이 그다지 열심히 일하지 않았으며, 특히 아침마다 차려 자세로 서서 사가(社歌)를 부르는 의식을 싫어했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관습을 버리고 공장에서 음악을 틀어주기 시작했드며, 더 많은 휴식시간을 주고 작업중에 할 수 있는 놀이도 가르쳐주었다. 태국인들의 의식 속에서 일이 사눅이 되자 생산성이 증가 했다. 일과 놀이에 대한 태국인들의 태도는 같다. , 작업 파티는 생일 파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53

 

(work)은 너무나 다양한 것을 의미한다. 정말이지 대단한 단어이다. 우리는 일(work)하고일터(work)간다.’일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하는것이며, 우리가 만들어내는것이다. 미술 건축 음악 문학 작품(work)’도 있다. 우리는 의사, 회계사, 자동차 수리공이나 카펫 판매원의 솜씨(work)에 감탄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공간이나 나뭇조각, 빵 반죽, 고장난 자물쇠 등을 가지고도 일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의 해답을 내거나(work someone over), 운동을 하거나(work out), 좋은 일을 하거나(do good works), 누군가를 때려주거나(work someone over), 흥분하거나(get worked up), 자칫하면, 심지어 일벌레(workaholics)까지 될 수 있다.

이라는 단어는 동사이자 명사이며, 활동이자 활동의 산물이기도 하다. 55

 

노동(labour)’이라는 단어는 14세기 영어에서 최초로 등장했다. ..

동사노서의 노동(labor)은 행위만을 나타낼 뿐 행위의 대상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지만, 우리는 그가 딸기를 만들었다:고 말하지 안흔다. 비록 그의 행위가 딸기를 따는 이주 노동자보다는 훨씬 더 딸기를 만든 것에 가깝더라도 말이다. 화가가 그림 그리는 행위를 통해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노동하는 사람들은 대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는 육체적인 일을 하지만 직접 그것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56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노동,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필요한 물건을 다루는 일을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하는 하인의 일과 같다고 생각했다. 노동과 일은 두 가지 요인에 의해 구분된다. 첫째, 노동은 일에 비해 육체적 노려고과 더 크게 관련된다. 둘째, 노동자와 노동 대상의 관계는 일하는 사람과 그 대상과의 관계와 다르다. ..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노동자의 첫번째 정의는 봉사행위로서, 혹은 생계를 위해 육체적인 노동을 행하는 살마인 반면 일하는 사람의 첫 번째 정의는 만들거나 창조하거나 생산하거나 고안해내는 사람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노동이라는 단어가 로 격하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이 한 개인에 의해, 그리고 개인을 위해 행해지는 것인 반면 노동이라는 단어는 무언가를 만들거나 행하는 데 대한 개인의 기여를 암시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용어라고 말했다. ‘은 노동의 산물을 나타내는 명사이지만 노동은 일하는 사람들을 나타내는 명사이다. ‘노동은 육체적인 일을 하는 살마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반면, ‘은 다양한 행위나 그러한 행위의 대상을 가리킨다. 우리는 일조합이 아닌, ‘노동조합을 결성한다. 대부분의 조직에서 일은 협동적이며 상호 의존적인 사람들의 집단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터라는 말 대신 일터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집합적이고 육체적인 일보다는 개인적이고 비육체적인 일을 강조하는 것이다. 57

 

노동이나 수고같은 단어어비해 업무(job)’라는 단어는 상당히 유쾌하게 들린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명사 ‘job’덩어리(gob)’라는 단어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려준다. .. 17세기까지.. ‘업무란 영구적인 고용이 아니라, 일시적인 일을 의뢰받거나 잠시 고용되는 것을 가리켰다. 60

 

업무라는 단어는 대개 명사로 사용되는 반면 일하다라는 동사의 형태와 그들의 일에서와 같은 명사의 형태가 거의 비슷하게 사용된다. .. ‘업무의 또 다른 차이는 일은 보수를 받는 것과, 받지 않고 행하는 활동까지 가리키는 반면, ‘업무는 보수나 소득을 얻는 일에만 구체적으로 관련된다는 것이다. 61

 

업무라는 단어는 보수를 받기 위해 하는 도구적인 활동을 나타낸다. 그것은 일, 노동, 수고, 고역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업무의 정의는 일하는 살마과 그 산출물 간의 연관성을 암시하지 않는다. .. 일의 양에 대해서 ..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이 보수를 받기 위해 하는 한정된 양의 활동이라는 점이다. 62

 

 

3 일의 역사

 

살기 위해 일한다는 우리의 인식은 어떻게 해서 일하기 위해 산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을까? 64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일은 저주였다. ... 기원전 4세기의 역사가인 크세노폰은 사람들이 생의 좋은 것들을 누리는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 일이라고 기록했다. 만약 일이 신들의 저주라면, 그것은 정복당한 적이거나 포로가 된 외국인, 혹은 노예의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저주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편이 가장 낫다. 노예는 부유한 고대 그리스인들을 일에서 해방시켰다. 그리스인들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활동을 노예의 일로 여겼다. 노예제도는 인간의 지위를 강등시켰을 뿐 아니라 일의 사회적 도덕적 가치까지도 격하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이란 가능하면 노예들에게 떠맡겨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이득을 얻기 위해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저주가 되리 수 있다고 믿었다. 재산(땅과 노예들)을 소유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야말로 그가 생각한 인간적인 삶의 기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집 안에서 사용할 물건을 만드는 일과 상업적 이득을 위한 일을 구분했다. 그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기 위해 집에서 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인간의 필요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도 유한하다고 말했다. ..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소매업이나 금전적인 이득을 위한 일은 인간의 욕망(want)을 위해 실행되는 것이므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욕망은 인간의 필요(need)와 달리 무한한것이다. .. 돈을 벌거나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는 것 자체에만 열중할 뿐 잘 사는데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 어떤 것을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여가 활동의 정의이다. 게다가 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는데, 그들이 원하는 것과 그것을 얻기 위한 일은 결코 중단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65-66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개인의 생각과 견해가 그의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 평범한 거리의 그리스인은 유용한 상품을 개발하는 것에 대해 이러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을 것 같지 않다. 물론 우리는 그들이 정말로 그랬을지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평범한 살맘들은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하기 전에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원전 여러 동양 문화에서도 물질적인 세계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세계보다 덧없고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들이 을 경멸한 것은 아니다. 67

 

정신적 수양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이었다. 일의 과정은 결과보다 더 중요했다. 부처에게는 바닥을 쓸고 닦고 연료를 모으는 것 같은 가장 비천한 일조차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었다. 68

 

종교나 문화에 따라 일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혹은 중립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문화 내에서도, 서로 다른 종류의 일은 상이한 영적 도덕적 사회적 가치를 지닐 것이다. 모든 사회에는특정 유형의 일에 대한 고유한 편견이 존재한다. 68

 

고대 그리스인들은 다른 살맘들에 대한 봉사와 일반적인 육체노동에 대해 강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봉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시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치학>에서 그는 장인과 노동자들은 공동체의 하인들, “꼭 필요한사람들이기 때문에 시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장인이 시민이 될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로는 그들 대다수가 노예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조각의 황금기에 이 책을 저술했지만 조각가들이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조각은 격렬한 육체노동을 포함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조각을 노예 예술(servile art)’로 여겼다. 고대 그리스에서 육체노동자들은 시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몇몇 훌륭한 조각가들은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반면 그림을 그리는 일은 육체적인 노력을 덜 필요로 했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람이 행하는 학예(學藝)로 간주되었다. 학예는 깨끗하고 지적인 일일 뿐 아니라, 자유로운 사람의 일을 암시했다. ..

육체노동에 대한 편견은 르네상스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그림이 학예와 노예 예술의 중간쯤에 위치한다고 생각한 반면 조각은 여전히 노예 예술이었다. 69

 

생업이 목수였던 그리스도는 직업이란 무의미한 것이라고 설교했다. ...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질서와 정당한 보상, 수양을 위한 일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규칙적으로 살라고 충고한다. “여러분 가운데는 무절제하게 살면서 일을 하지는 않고 만들기만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하는데, 다른 이들의 빵을 먹음으로써 그들에게 짐이 되지 말라.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 여기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있다. 첫째, 일은 생활 리듬의 일부이며 사람들을 시끄러운 문제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둘째, 개미에 관하 이솝 우화에서처럼 일하지 않는 자가 먹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71

 

교회는 을 세 가지 정도로 구분했다. 그것은 삶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 다른 이들을 위한 일, 개인적인 이득이나 물질적 이득을 얻기 위한 일이다. 72

 

우리가 태만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기력이라는 뜻의 아시디아(acedia)’를 대략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태만을 게으름이나 일하기 싫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시디어의 본뜻이 아니다. 태만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게으름에 대한 비난이 아니며, 일의 가치에 대한 긍정도 아니다. 태만은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73

 

단순한 노동에 불과했던 이 두러지게 긍정되기 시작한 것은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이다. .. 529년 성 베네딕트는 몬테 카시노의 꼭대기에 수도원을 지었다. ...

성 베네딕트 이전의 수도사들은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힘들고 고통슬운 노동을 해야 했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육체적인 일에 보다 긍정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규정집의 주제는 오라 에 라보라(ora et labora)’,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이다. 베네딕트는 수도사들에게 신에 대한 헌신의 한 방버브으로서 무슨 일을 하든 착월함을 추구하라고 장려했다. “무엇보다, 어떤 일을 시작하든지 그것을 완전하게 해주십사 하고 신에게 진심으로 기도하라.” 74

 

성 베네딕트에게 일은 직업이나 소명(calling)이 아니라, 일종의 눈에 보이는기도였다. .. 베네딕트 교단은 유럽 전역에 걸쳐 퍼져나갔으며, 중세의 마으로과 도시를 발전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베네딕트회 수도사들은 중세 초기의 가장 능숙한 농부이자, 장인이자 기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노동을 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수도사들 중 가장 낮은 지위로 간주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일 자체를 가치 있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일과 신앙심 사이에 일련의 관계가 있음을 발견햇다 베네딕트 수도회의 전통에서 비롯된 노동윤리는 기독교인의 영적 미덕을 수공업을 비롯한 다른 직업에 까지 확대시켰다. 75

 

12세기에 이르러, 그 사람의 직업과 동일시한 성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베이커(빵 굽는 사람), 카펜터(목수), 대처(이엉장이), 스미스(대장장이), 위버(베 짜는 사람), 골드스미스(금 세공인), (요리사). 77

 

개인 및 집단의 정체성이 직업에 따라 새로이 형성되자 교회의 정책도 자신들의 일에 대해 보다 존중해 달라는, 조합과 중산층의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교회는 기꺼이 실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한 예로, 교회는 이 무렵 증가하는 중산층을 위한 중간 단계의 집으로서 연옥을 만들어냈다. 연옥은 중산층에게 천국과 지옥, 힘 있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존재하는 그들만의 진정한 영적 지위를 부여하였다. 연옥의 개념은 15세기 이전까지는 별로 유행하지 않았다. 15세기에 이르자 비록 비참하기는 해도 훌륭한 자금조달 장치(gimmick)인 연옥이 소곡(小曲)을 통해 찬미되었다. “금고에 동전 소리가 울리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솟아오른다.” 78

 

일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가장 애용하는 묘사, 창조로서의 일은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했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으며 인간은 음악과 미술을 비롯한 아름다운 거슬의 창조자이다. .. “예견하다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프로메테우스.. 고대인들에게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를 고된 노동으로 몰아넣은 사기꾼이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 인류가 운명을 붙잡을 수 있도록 허락한 영웅이 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신의 섭리를 막연히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기 시작하면서, 일이 지니는 가치도 커졌다. 14세기의 피렌체는 우리에게 세계를 만들어내고 자연의 형태를 바꾸는 창조자로서의 인간, 즉 호모 파베르(homo faber)의 이미지를 선사했다. .. 만약 종교가 중세의 아편이었다면 창조성과 미는 르네상스 시대의 각성제였다.

르네상스 시대는 고유한 노동윤리를 가지고 있었다. .. 자신의 돈으로 무엇인가를 도모하되 구두쇠처럼 돈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부자가 되어도 상관이 없었다. ..

육체와 정신을 룬련시켜야 한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믿음에, 르네상스는 손을 훈련시키는 것을 더했다. 81-82

 

15세기 인문주의자 로렌조 발라는 중세의 전통과 교황이 누리는 현세의 권력을 공격했다. 진정한 선의 본질에 대한 그의 저서 <쾌락에 대하여>에서 발라는 쾌락과 덕을 재정의함으로써 쾌락과 아름다움을 가득 찬 삶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소박함과 자기 절제를 명하는 스토아 학파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다. .. 그는 덕()쾌락으로 환원될 수 있는 요소(calculus pleasure)”라고 주장했다. 쾌락은 짐승 같은 충동이 아니라 이성과 통찰의 원리이며, 덕은 재능이자 인내하는 능력이었다. 82-83

 

1516년에 저술된 모어의 <유토피아>는 공리주의 원칙에 입각한 공산주의 사회를 이상향으로 그리고 있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는 청소나 도살, 사냥과 같이 시민들이 비천하고 창피스럽게 여기는 일은 모두 범죄자와 노예들이 도맡아 했다. 따라서 시민들은 보다 흥미로운 일에 종사할 수 있으며, 하루에 여섯 시간만 일해도 된다. ..

1602년에 쓰여진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는 공동체 생활과 과학적인 사회 질서를 강조했다. 캄파넬라의 이상향에서는 모든 사회 계층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그곳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캄판넬라는 가장 고귀한 사람들은 한 가지 이상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

일이 인간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일을 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르네상스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고 성취를 이룬 사람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고 자신의 일을 조절할 수 있는 사라이다. 따라서 전형적이 르네상스인은 오늘날의 인간관과는 급격한 대조를 이룬다. 83

 

16세기부터 18세기 사이에는 노동자의 자살을 금지하는 법이 확산되었다. 이는 당시 사회가 더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했고 그만큼 노동자 가치가 증가한 반면 노동자들의 절망 역시 더 커지고 있음으로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지표이다. 84


루터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게으른 거지와 부랑자들을 꾸짖었다. 그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집이 없는 이유는 그들이 일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었다.(바로 이 시점부터 오늘날까지, 몇몇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러한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다른 주요 종교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 관점에서 크게 이탈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코란에서는 거지들을 세상의 자연스런 질서의 일부라고 생각했으며 자선은 도덕적 영적 의무라고 생각했다. 85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 자체를 위한 일이라는 개념과 휴식과 쾌락에 대한 혐오는 칼뱅과 루터로부터 비롯된 거이다. 이것은 노동윤리라고 불리는 것의 수많은 형태 중 하나에 불과하다. 85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일과 모든 노동자들을 똑같이 존중하도록 가르쳤다는 점이다. .. 루터와 칼뱅의 노동윤리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람들을 구속해온 믿음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선하고, 일하지 않거나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이다. 86

 

종교 개혁가들은 모든 일을 베루프(Beruf, 시간을 차지하는 이르 직업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소명으로 정의했다. 소명은 일의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에 대한 태도를 일컫는다. ... 모든 일이 신의 명령이라는 생각은, 일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불쾌하며 보수가 적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보증해주었다. .. 프로테스탄트의 소명 개념은 일에 영적인 차원을 부여했다. 그것은 결코 일이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 ‘소명이라는 개념은 이제 우리의 일상 언어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현재는 종교적인 직업을 일컫는 데 주로 사용되고 있다. 대신에 소명이라는 말은 천직(vocation)’이라는 말로 세속화되었다. 우리는 때로 소명천직을 번갈아 사용하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창가 있다. 당신의 소명은 신이 결정하지만 천직은 당신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 87

 

우리는 지금까지 종교가 일의 도덕적 가치를 형성해온 과정을 살펴보앗다. 고대인들은 일을 강제적인 것이자 저주로 보았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일에 단순한 위엄(simple dignity)’을 부여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일에 매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신교도들은 일을 의미와 정체성, 구원의 징표를 찾는 과정으로 만들었다. 단순한 노동을 넘어선 일, 즉 소명으로서의 일 개념은 일의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특징을 강조했다. 일은 일종의 기도가 되었다. 일은 삶의 수단을 넘어 삶의 목저이 되어싸다. 일은 저주에서 소명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이르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수많은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88

 

 

4 일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

 

우리가 물려받은 노동윤리는 단일한 개념이 아니라 세 가지 개념이 융합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첫 번째 개념은 공정함과 사회적 책임의 원칙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부양할 의무를 갖는다. .. 두 번째 요소는 우리의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한다는 것. 세 번째는, 루터와 칼뱅의 독특한 견해로 일 자체가 도덕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지니며, 모든 사람은 살면서 어떤 종류의 일을 하도록 신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일은 그것이 아무리 비천해도, 또한 보수가 얼마든 간에 좋은것이다. .. 공정함, 개인의 탁월성, 개인의 선함이라는 이 세 가지 기본 개념으로부터 일은 고역아니라 의미 있는 것이라는, 일에 대한 낭만적 개념이 생겨났다. 그리고 우리는 일을 통해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89-90

 

18세기, 벤자민 프랭클린은 프로테스탄트의 관점과 계몽주의의 이상을 조합하여 새로운 노동윤리를 만들어냈다. 그는 사람들이 인도적인 방법으로 부를 사용하여 사회를 돕기 위해서는 우선은 부를 얻으려고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는 종교적 의무가 아닌,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일을 강조했다. 92

 

막스 베버는 프랭클린이 노동윤리로부터 윤리학을 이끄르어냈다고 생각했다. 프랭클린의 노동윤리가 낳은 윤리학은 두 가지 도덕적 개념에 기반하였다. 첫 번째는 공리주의이다. .. 두 번째 도덕적 개념은, ‘유용성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것이다. 92-93

 

프랭클린은 자서전에서 성공을 위해 필요한 열한 가지 미덕을 열거하는데 절제 침묵, 규율, 결단, 성실, 중용, 청결, 평정, 순결, 겸손이 그것이다. 그는 현세에서의 금욕주의를 설교했지만 또한 돈이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그 목적은 바로 생을 즐길 수 있는 자유였다. 93

 

1836년부터 1900년 사이에 모든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맥거피가 엮은 <간추린 어린이 독본> 시리즈를 읽었다. 이 시리즈는 칼뱅의 신학을 강조했으며 고된 노동과 근면, 검약의 윤리를 찬양했다. 94

 

메인 주 출신의 목사이자 교육자인 자콥 애벗은 1832롤로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 내에 자리잡은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윤리를 명확히 표명했다. 예를 들어 <일하는 롤로>에서 롤로의 아버지는 그에게 한 시간 동안 못을 분류하라고 했다. 롤로는 그 일이 매우 지루하다고 불평했고,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한 가지 일에 꾸준히, 끈이 있게 몰두하는 능력을 가져야 해. 어린 소년들은 일이 놀이처럼 재미있을 거라는 잘못된 기대를 하더구나.” 롤로의 아버지에 따르면, 진정한 남자는 일이 노력과 자제력을 요구하며, 고되고 지루한 것임을 안다.

1950년대 중반, 산업화가 시작될 무렵부터 아이들의 동화는 바뀌기 시작했다. ..

1800년대 중반에 등장한 싸구려 소설은 올리버 옵틱을 비롯한 수많은 아동문학가들로 하여금 이야기의 색채를 바꾸게 만들었다. 지나치게 교훈적인 이야기들은 본격적인 모험소설만큼 잘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옵틱은 범죄나 잃어버린 친척, 인디언 전쟁 등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 이들의 모험은 단지 주인고으이 도덕적 개선이라는 진짜 이야기이 배경이 뿐이라며 독자들을 설득한 것이다. 옵틱의 새로운 영웅들을 여전히 도덕적 모범이 되었지만, 그들의 규범은 부지런히 일하는 것에서 용감한 행동으로, ‘개인적인 절제에서 추진력으로 변화했다. 95

 

일에 대한 교훈이 가득한 아동용 동화들은 미국 남부에서는 제대로 뿌리내린 적이 없었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땅과 노예를 소유하고 싶어했고, 그들은 돈보다 혈통을 더 중시했다. 97

 

경제 전문 기자(business jounalists)의 수가 증가하면서 많은 이들이 사업가들을 추켜세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스코틀랜드 이민자인 버티 찰스 포브스는 덕 잇는 사업가에 대한 찬양을 영구적인 예술의 형태로 표현했는데, 그것은 일과 미덕, 부는 행복과 사회적 이이긍로 이어진다는 프랭클린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1916<포브스>지를 창간하면서 그는 이 간행물이 사업과 인생 전반에 더 많은 인간애, 기쁨, 만족을 줄것이라고 설명했다. 98

 

위대한 사업가의 신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기가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저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99

 

예일 대학교 출신의 콘웰은 1888년 필라델피아에 템플 대학교를 설립한 침례교 전도사였다. 그는 오늘날 사람들이 동기부여자(motivational speaker)”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 콘웰 목사는 도덕적 충고와 사업상의 건전한 충고를 혼합했다. 그는, 돈을 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내어 그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

18세기와 19세기의 노동윤리 옹호자들은 강한 도덕성이야말로 부에 이르는 열쇠라고 설교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데일 카네기가 1936년에 쓴 <카네기 인간 관계론>에 나타나듯이 개인의 성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도덕성이 아니라 심리학이 성공에 이르는 열쇠가 된 것이다. 99-100

 

성공에 대해 이야기하는 19세기의 많은 작가들과 설교자들, 심지어 몇몇 정치가들은 상업을 칭송하고 정치를 비방했다. 제임스 A. 가필드는 대통령이 되기 전인 1869, 워싱턴 전문대학의 졸업반 학생들에게 고전 학문을 가르치는 대학은 젊은이들의 직업 생활 준비에 완전히실패했다고 이야기했다. 100

 

19세기 미국을 방문한 유럽인들은 미국인의 에너지와 근면성에 아연실색했다. 특히 그들은 유한계급이 없다는 것에 대해 놀아워했다. 빈의 이민자인 프란시스 그룬트는 미국에서 상업이 주된 쾌락과 즐거움의 원천이라는 데 주목했다.

활동적인 직업은 그들 행복의 주요 원천이자 그들 국가를 위대하게 만드는 근원이다. .. 그들은 돌체 파르 니엔테(dilce far niente : 게으름의 달콤함)’대신, ‘게으름의 공포만을 알고 있다. 상업이야말로 미국인의 정수이다. .. 모든 인간 행복의 원천으로서 그것을 추구한다. .. ’. 101

 

과거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과 스스로를 동일시했고, 심지어 자기 이름까지 일에 맞추어 지었다. 반면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는 일과 정체성에 대한 두 가지 새로운 견해를 내세웟다. 일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를 발견하거나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1

 

산업화 이후부터는 이리에 대한 두 가지 유형의 견해가 존재했다. 첫 번째 견해는 계몽주의적인 것, 즉 과학과 지식이 진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산업화 이전에 일은 거칠고도 육체적으로 고된 노역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 두 번째 견해는 장 자크 루소와 같은 비평가들이 말한 것으로, 일이 일종의 은총받은 상태로부터 타락했다는 것이다. ‘은총으로서의 일이란, 자율적인 장인이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여 유용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어내고,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농부가 자신의 풍성한 녹색 들판에 씨를 뿌리고 수확하면서 조용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18세기의 저작에서, 루소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임금을 받기 위해 일하는 산업 사회의 몇몇 문제점을 예견했다. 루소는 인류가 타인의 노동으로부터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 일의 황금기는 끝났다고 믿었다. ..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일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창조성과 일하고자 하는 욕구를 잃었다. .. <에밀>에서 루소는 최상의 삶의 방식으로서 장인의 기능을 강조했다. 그의 낭만적 이상은 농부처럼 일하고 철학자처럼 사고하는 인간으로, 말에 편지를 박는 동안 진리와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는 목가적인 르네상스인이었다. 102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유재산과 자본주의 생산체제는 일로부터 얻는 창조적이고 사회적인 보상과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을 사용하는 기쁨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켰다.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일과 동일시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여겼는데, 특히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한 선택권을 거의 갖지 못하고 매우 세부노화된 일을 할 때 그러했다. .. 마르크스는 루소를 흉내내어 이러한 세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가 오른 한 가지 일을 하고 내일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 세상, 사냥꾼이다. 어부, 소 치는 사람이나 비평가가 되지 않고도, 마음먹은 대로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고기를 잡으며 저녁에는 소를 사육하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비평을 할수 있는 세상이다.’ 103

 

중요한 점은 이러한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한 가지 직업의 정체성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일과 정체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를 극단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림 그리는 사람만 있을 뿐 화가는 없을 것이다. 103

 

마르크스의 이상적인 세계에는 단 한 사람의 전문가도 없는 것일까? 병을 고치는 사람만 있을 뿐 의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마르크스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만약 당신이 청소부로 고용되어 있는 동시에 교회 집단의 우두머리이자 조각가라면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을 그저 청소부로만 여기기를 원하겠는가?... 마르크스는 사람들의 살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일이 유급고용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04

 

윌리엄 모리스는 당대의 르네상스인이자, 도이시대인들의 묘사에 따르면 일벌레였다. 그는 설계자, 장인, 시인, 번역가로서 탁월성을 발휘했다. 1884년 모리스는 사회주의 연맹을 창설하고 자본주의 노동체제와 생산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모르스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을 공유했지만, 동시에 일 자체의 심미적 가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한 편지에서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나는 왜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살 수 없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네.... 정말이지 나는 행복하게 일한다네. 그런 나의 시간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운명지워진 것, 칭찬받거나 보상받지 못하는 단조로운 고역일 뿐인 것과 비교하면, 부끄러움을 느낀다네.’

산업화된 영국의 짙은 매연과 보기 흉한 건물을 보며 경악한 모리스는 작업장에 아름다운 정원을 꾸밀 것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대량생산된 상품들의 흉한 모습을 조롱했다. 그는 기계가 노동을 절약해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생각하는 손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 자체가 주는 심미적 가치는 유용성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데서 오는 만족감에서도 비롯된다고 믿었다. 104-105

 

일의 의미에 대한 모리스의 흥미로운 통찰 가운데 하나는 가치 있는 일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모리스는 일이 삶의 빛이 될 수도, 혹은 삶의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첫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있는 반면 두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모리스에 따르면, 사람들로 하여금 일을 원하도록 하고 그 일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희망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가치 있는 일은 휴식의 즐거움에 대한 희망, 일을 통해 만든 것을 사용함으로써 느끼게 되리 즐거움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일상적인 창조의 기능에서 느끼는 즐거움에 대한 희망을 수반한다.” 105

 

가치 있는 일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희망이 잠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일뿐 그 실현 가능성 여부는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주관적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만든 물건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리스의 논점은 만약 그들이 그럴 수 있다면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거나 소유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낄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사람들은 다양한 창조적 기술을 이용하여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할지에 대해 제각기 다른 희망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분한 여가와 고품질의 유용한 산물, 기술을 연마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직업을 갖고 싶어하리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일은 객관적이다. 106

 

인간이 실제로 하는 에는 두 가지 이상적인 유형이 있다. ‘장인의 일혹은 손을 이용해서 하는 일과, ‘전문가의 일혹은 정신을 가지고 하는 일이 그것이다. 106

 

전문가( professional)’ 라는 단어는 원래 성직에 들어가는 사람이 공식적인 선서를 하는데 사용된 공언하다(profess)’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107

 

중세의 유일한 전문직은 대개 학자이자 법률가이자 의사였던 성직자들이었다. 전문직의 근저에는 세 가지 기준이 존재했다(이러한 기준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첫 번째, 모든 전문직은 공식적인 기술교육과 그러한 훈련을 확인시켜주는 일정한 제도적 인증 과정을 요구했다. .. 두 번째 기준은 전문직에서 사용하기 위한 기술을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 세 번째로, 전문가는 그 전문직이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게 이용되도록 보장하는 일종의 제도적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윤리적 행위를 보증할 수 있는 조직화가 이뤄져야 한다. 미국의 변호사협회나 의사협회의 목적이 그러한 것이다. ..

사회학자 탈콧 파슨스는 “”기업인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 상관없이 사리사욕만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반며느 전문가는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이타적으로 봉사한다.” 이것은 그가 50년 전에 쓴 글이다. ...

이상적으로 생각하자면 전문가들은 일에 대한 보수를 받지 않아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문가는 업무를 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비용을 보조받는것이기 때문이다. 108

 

대중이 전문가들의 비윤리적 행위에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여전히 전문가들이 사회에 대해 공식적 서약을 맺는다고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109

 

일에 대한 우리의 열정은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가 되고 싶은 것, 혹은 얻고 싶은 것에 달려 있다. 일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모리스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일을 원하려면 먼저 미래에 대한 어느 정도의 희망 혹은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노예와 농노들, 그리고 지독하게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힘 없는 사람들에게 노동윤리는 결코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111

 

 




PART TWO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바로가기



PART THREE 일과 삶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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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 세상에 책이 아닌 것 어디 있으랴

독서술을 체득하고 있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만물이 변하여 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 책과 역사는 풍경이다. - 런위탕 <생활의 발견>중에서


세상의 길이 어떻게 만나는가를 더듬어 알고 발견하는 일이 여행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4


책장에 연필로 밑줄을 긋듯, 땅 위에 밑줄을 긋는 데에는 낡은 카메라 한 대와 작은 수첩 한 권이면 충분했습니다. .. 가난하면서도 높은 여햊아. 5


여행과 독서는 달려들수록 욕망이 줄기는 커녕 더 많은 갈증이 생긴다는 점에서도 비슷합니다. 7


"걸을 때마다 나 자신과 내가 배워온 세계의 허위가 보였다." - 후지와라 신야 <인도방랑>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 없는 법이야."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미혹함 없이 스스로, 진리의 등불 삼으라.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스스로자 등잔등 밝을명 법법 등잔등 밝을명)' 25


스님은 지나칠 정도로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구도 해위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중략) 누군가 구도를 할 경우에는 그 사람의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ㅕ 자기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은 오로지 항상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까닭이며, 그 사라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까닭이지요.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29


김현의 유고 <행복한 책읽기>에서 "좋은 소설이 때로 지루한 대목을 간직하고 있듯이, 좋은 시는 때로 깜짝 놀랄 만큼 신선한 대목을 간직하고 있다" 86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다. -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128


'모든 것이 스스로 요란한 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확인받으려는'(최승자) 소음의 시대에 침묵을 벗하는 일은 행복하다. 128


바로 보려면 우리는 우리가 보는 사물의 명칭을 잊어야 한다. - 모네


나는 에로틱한 단어도 싫어한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써서 하찮고 진부한 것으로 만들었다. - 사진가 헬무트 뉴튼 135


맑은 책을 읽고 싶다. .. 조금은 느리지만, 슬로 미디어인 책을 통해서도 살아가는 지혜나 힘은 충분히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앉은 자리에서 손가락과 눈으로 하는 여행보다 두 다리로 직접 만나고 가슴으로 느낀느 경험히야말로 여전히 가장 의미 있는 배움과 깨달음이 아닐까. 136-137


여행을 하며 머리로 배운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다. 배운 것을 비워버리는 그러한 작업은 느리고도 어려웠다. .. 진실로 교육의 시작이었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책읽기란, 아무튼 숙제가 아닌 쾌락이어야 마땅할 터. ..

여행은 배움의 공간이지만 비움의 시간이기도 한것.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텅 비우는 것 ㄱ역시 우리가 진정 배워야 할 소양이 아닐까. 212


책의 맛을 충분히 알고 이해하기 위해 고토록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216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면 야만적인 힘을 사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함이다. -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삶이란 무엇일까? 던져진 존재로서 그저 살아지는 것일까?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무엇일까? 일상에서 답을 구할 수 없어 여행을 떠나지만 여행을 떠난다고 답을 얻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여행은 무의미한 일상의 연장일 뿐일까? 246


기억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려봐야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루이스 부뉴엘의 말,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251


일본인들이 쓴 불교 입문서인 <불교가 좋다>. 책을 우연히 뒤적이다가 '불교 경전에는 행복(幸福 다행행 복복)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문장을 읽고 무릎을 친 적이 있다. 뭔가 대단한 통찰력을 얻은 느낌이었다. 영어나 불어, 독어, 라틴어로 된 서양의 사상과 문물을 한자어로 번역하던 일본 메이지시대에 새롭게 만들어진 단어인 '행복'의 어원을 쫓으며, 동양인에게는 없던 '행복'의 개념이 그간 어떻게 작용해왔는지를 추적하는 내용이었다. '애 행복이라는 한자에는 서양의 단어에 들어 있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일본인(동양인)들이 '자신의 독특한 생각을 서양인처럼 '행복'이라는 단어로 대신함으로써,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고를 계속해 왔'다는 것이 책의 설명이다. 255


뉴스를 접하면 언론을 호도하고 본즐을 흐려 진실을 가리려는 파렴치한 시도는 사회 상류층으로부터 난무하고 있다. 262


겨울은 달리 보면 '따뜻한' 계절이다. '따뜻한'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계절은 오로지 겨울밖에 없다. '시원한'이 여흠의 형용사이듯 말이다. 하지만 겨울이 딷스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가 절실하다. 온기가 없는 겨울, 따뜻하게 내민 소노가 마음을 나누지 않는 사람들의 계절은 혹한의 겨울보다 더 춥고 매서울 것이다. 285


모든 길과 길 위의 여행은 어디론가 손을 뻗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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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미학>은 사진 저편의 숨은 이야기를 말하는 책이다.  4


찍는 것과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 찍기는 쉬지만 표현하기는 어렵다.  5




한 장의 사진을 보다


전면을 통해서 초상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초상사진의 전면성(前面性 앞전 낱면 성품성). 이것을 우리는 파사드(facade)라고 부른다.

파사드는 건축에서 쓰이는 말로 건축의 중심, 퍼스펙티브의 중심을 의미한다.  13


사진에서 파사드라는 말은 전면을 통해서 대상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특별한 초상사진일 경우에만 쓴다... 

정면은 물리적인 방향을, 전면은 심리적인 형상을 의미한다. 또 정면이 모델과 카메라 앵그로가의 관계라면, 전면은 모델과 관객의 시선과의 관계이다.  14


사진가가 단순히 카메라를 향해 정면으로 설 것을 요구했다면 정면성의 사진이 되기 쉽다. 그러나 사진가가 인물의 전면에서 무언가를 읽고 찍었다면 전면성의 사진이 된다. 기념사진의 경우도 단순히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정면성의 사진이 되지만 인물들 개개의 특징이 드러나도록 찍었다면 전면성의 사진이 되는 것이다.  15-16


"자신을 찍어 보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찍을 수 있지?"  21


사진의 주요 형식에는 구성과 조형이 이싿. 이 두가지 요소는 비슷하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먼저 구성(composition)은 화면 안 즉, 프레임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각적 형식이다. 이에 비해 조형(modeling)은 화면 밖, 즉 카메라 밖에서 이루어지는 시각적 형식이다. 그러므로 구성과 조형의 가장 큰 차이는 촬영 이전이냐 이후이냐이다.  25


조형의 기초가 되고, 해체의 근간이 되는 해석이란 무엇일까? .. 페르낭 레제는 "스스로의 조형적 아름다움 속에서 피사체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레제가 '스스로'를 강조하는 개인적이고 자율적인 조형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사진에 대입하면 진정한 사진의 형식은 주어진 구성에서 벗어나는 것, "자신에게 적합한 시점을 획득하는 것"이 된다. 고정불변의 규칙들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형식이라는 말이다.  27-28


영화감독 마야 데렌은 구축의 형식과 해체의 형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구축의 형식은 사물을 조망하는 도구(카메라의 프레임)에서 파생되고, 해체의 형식은 조망된 이미지가 개인적인 경험과 관계된 철학과 정서 속에서 일체화된다."  28


에로티시즘은 정신적 관능이 육체를 통해서 발현될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34


* 예술누드 - 미학은 안으로 정신과 영혼을, 그리고 밖으로 미의 형식과 표현을 다루는 철학이다... 미학이 예술누드에 부여한 품격과 숭고함은 무엇보다 정신의 관능이다.  35


사진의 깊이는 보는 자의 호흡에 의해 결정된다. 깊은 화면은 긴 호흡에서 나오고, 얕은 화면은 짧은 호흡에서 만들어진다.  49


세상이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고, 기계적인 눈이 인간의 눈을 침범하지 않았을 때, 그리고 고층빌딩이 인간의 시선을 가로막지 않았을 때 우리는 언제나 롱 테이크, 롱 디스턴스의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지평선 저 너머로 사라져 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었고, 저 멀리로 점점 작아져 가는 인간의 형상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망원렌즈와 줌렌즈, 그리고 하늘로 치솟는 고층건물에게 그것들을 빼앗겨버렸다. 주변보다는 중심이 강조되고, 상황보다는 대상이 강조되는 사진들이 우리 주변에 확산되면서 우리는 깊은 숨쉬기, 길은 거리감을 박탈당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얕은 숨쉬기, 얕은 거리감에 그저 질식당했던 것이다.  52


사진의 형상은 결국 초덤을 어디에 두느냐 혹은 어떻게 선책하느냐에 달려 있다. 눈과 달리 중요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지 않을 수도 있으며, 부분을 의도적으로 흐리게 할 수도 있고, 또 전체를 선명히 할 수도 있다.  56


초점이 맞았기에 형상이 존재하고, 형상이 있기에 시선을 받는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물을 본다는 것은 거리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거리가 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초점이 존재한다는 말이며, 또 초점이 있어야 형상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형상은 곧 시선을 유도하는 '보는' 행위이자 사물이 드러나는 '보이는' 양태이다. 형상과 시선에 의해 사물은 존재성을 가지게 되며, 결국 인간의 감정을 이끌게 된다.  57


초점 안에 있으면 인포커스(in focus)라고 하고, 초점 밖에 있으면 아웃포커스(out of focus)라고 한다.  62


보인다고 해서 모두 읽히는 것이 아니듯이, 보아야 할 것이 적어질수록 때론 말해지는 것도 있는 법이다.  64


사진은 참의 리얼리티를 잃지 않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디지털은 새로운 표현을 확장해야 한다.  76


사진은 기억의 이미지가 아니라 존재의 이미지이다. 이미지의 기억은 잔상이고 파편이다.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변할 수 있지만 존재의 이미지는 변하지 않는다. 또한 일시적 기억을 위한 이미지는 늘 밖으로 시간을 토하고 지우지만, 존재의 이미지는 언제나 시간을 삼키면서 시간 속에 산다. 사진은 영속적인 시간의 이미지이다. ..

사진과 디지털의 만남은 서로 약한 부분, 강한 부분을 보태고 나누는 데 의의가 있다. 사진은 바로 그것, 사물 그 자체를 지시하는 존재의 이미지이다. 디지털 프로세싱은 보다 쉽고 편리하게, 또 효과적으로 삶의 리얼리티를 발현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77





한 장의 사진을 읽다


우리는 순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고 말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으며, 한순간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고도 한다. 결국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다는 것일까. 정지된 역사 속에서 실존했다는 증거인가. 과거에 있었던 무언가를 확증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부재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 대한 경의인가. 아마도 이 모든 것이리라.  91-92


'가까이 더 가까이 감동되어 셔터를 누르면 어둠이 가득한 자궁 속에서 정자와 난자가 만나 한 생명을 잉태하듯이 한순간의 빛과 만나 필름에 그 피사체의 감동이 잉태되는 것이다. 잉태된 생명이 10개월의 임신 기간을 거쳐 태어나듯이, 한 장의 사진도 필름에 잠상이 맺혀 현상되기까지의 현상 시간을 거쳐 마침내 태어난다.' - 최광호 <나는 사진이다> 중에서  95


안도현 시인의 <사진첩>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추억이란 존재의 뿌리이다..."  100


타인의 사진을 본다는 것은 사진을 찍은 작가의 본래 의도를 분석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이다.  110


* 가다머 해석학 - 가다머는 사진의 수준, 내용, 의미, 가치는 사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알려고 노력하는 그림자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했다.  113


정치적 풍경(political landscape)이란 .. 언뜻 보았을 때 자연풍경, 현실풍경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강한 정치적 동기, 정치적 의도를 내재한 인공적 혹은 가공적인 풍경이라는 것이다.  122


정치적 풍경의 특징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주 아름답거나 어떤 면에서는 달콤한 풍경사진일 경우가 많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사진 속의 '기둥' 자체는 정치를 상징하지 않기 때문에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은 정치적인 것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사진이 정치적인 풍경사진이라고 알아차리기 어렵다. 즉 정치적 업적을 상징하는 흰 기둥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가둬짐으로써 상징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대한민국 곳곳이 공사 중이고 건설 중이다. 다리, 건물, 도로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오늘날 대부분의 공공 건축물, 건축 구조물은 정치적 상징성을 띠는 정치적 풍경이다. 마찬가지로 사진 속에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는 기둥이지만 정치적 동기에 의해 세워지고, 또 드러나지 않지만 정치적 목적으로 건설되고 있다는 사실을 장대한 구조물, 어둠 속엣 명명하는 교각이 말하고 있다.  123-124


* 사진의 정치성 - 사진의 권력은 대중들의 절대적 믿음에서 생겨났다. 발명 순간부터 사람들은 '사진은 거짓말하지 않느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말보다 사진을 믿었기에 이를 역이용한 정치적 사진들이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기생해 왔다. 독재정권을 위한 조작된 홍보용 사진,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날조된 사진, 실재 이상으로 과장되게 연출한 선전용 사진. 지금도 정치 집단 혹은 행정 집단이 실적주의, 성과주의, 여론 고취를 위해 이런 사진들을 부단히 활용한다. 이와는 반대로 다른 맥락의 정치적 사진이 있다. 완전히 다른 입장에서 정치적 소재들을 활용하여 사회를 비판, 고발, 폭로하는 사진이다.  125


* 프레임 - 프레임에는 물리적인 프레임과 심리적인 프레임이 있다. 물리적인 프레임은 구성, 구도를 위한 파인더, 이미지 틀, 액자의 특이다. 대개 표현을 위한 물리적인 틀이다. 가장 오래된 프레임은 바늘구멍(pinhole, 원형)이다. 암상자(camera obscura) 소에서 세사을 보면 동그랗다. 이런 구형의 프레임이 점차 정사각형, 직사각형 모습으로 변해 갔다. 반면에 심리적인 프레임은 의미의 프레임이다. 보이지 않는 인식의 그릇과 같다. 물리적 프레임 못지 않게 중요한 프레임이다. 콘셉트와 의도는 심리적 프레임이다. 사진의 힘은 프레임에서 나온다.  131


들뢰즈는 추상에 대한 새로운 사유 방식을 요구하면서, 추상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진정한 추상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고, 또 그래야만 추상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으며, 진정한 추상을 창조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추상이 "구상적이지 않다, 서술적이지 않다, 자연적이지 않다, 문학적이지 않다"라는 말에 반대하며, 추상은 구상의 반대도, 구상과의 단절도 아닌, 구상의 혼성과 중첩일 뿐이라는 논리를 편다. 실제로 카메라를 통해서 추상을 표현할 때는 들뢰즈의 말처럼 추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요구된다. 추상을 구체적인 형상을 지운 것, 혹은 구체적인 내용을 걷어낸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진정한 추상을 만나기도, 형상화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진정한 추상사진은 추상회화처럼 조형의 기교가 아니다. 형상이 부재하거나 결여된 것은 더욱 아니다. 추상사진은 들뢰즈가 추상론에서 말했듯이 구체적인 형상에 대한 '아니오'가 아니라. 구체적인 형상에 끊임없이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를 반복해 가는 것이다.  133-134


들뢰즈는 "에너지가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사물)는 근본적으로 추상이다. 그들은 무(無 없을무) 구속적이고, 탈(脫 벗을탈) 중심적이다. 그것은 개연성 없이 우연히, 형식 없이 작동하는 순수한 자율성이다."  134-135


* 들뢰즈의 추상론 - 한마디로 형태의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관념적, 인식론적 추상이다.  137





한 장의 사진을 느끼다


사진을 알게 되면 처음엔 누구나 사지능로 세상을 보게 된다. 그것은 일찍이 보지 못한 세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다...

사진을 알기 전에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감상할 수 있었는데, 사진을 알고부터는 오로지 사진적으로만 세상을 보려고 한다. 

이미지의 노예, 사진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153


피사체가 스스로 말하는 사진이다. 이런 사진은 이미지의 노예에서, 사진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진정 사무로가 순수한 대화가 이루어졌을 때 가능하다.  155


사물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그것을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운 것이다. 이런 것이 사진의 참 의미가 아닌가 한다. 무언의 사물과 말한다는 것, 그러니까 말없는 사물들에 다가서고, 귀 기울이고, 그리고 사진을 통해 인식의 통로를 여는 것, 이것이 사진의 또 다른 아름다움이자 매력이다. 물론 아무나 할 수 없다. 오로지순수한 눈과 마음을 지닌 작가만이 할 수 있다.  156


* 기억회로 - 사진은 기억을 재생시킬 뿐, 사건 그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기록보다 우선하는 것이 '알아봄'이다.  


풍경이 사진가에게 한 장만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만큼 긴 호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풍겨을 여러 장 똑같이 찍었다는 말은 풍경과 호흡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186


풍경은 아무나 다가가서 찍을 수 있는 대상이지만 풍경과 함께 호흡하지 못하거나 그 속으로 풍덩 빠져들지 못하면 그 풍경 사진은 단순 복제에 불과하다.  187


* 힐링 포토 - 치유에 활용되는 사진은 대개 고요한 풍경사진, 그 가운데서도 흑백사진이다... 흑백사진이 좋다는 것은 현실의 색을 제거해서 요란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189


소쉬르라는 언어학자가 평생을 두고 고민했던 것은 언어의 자의성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언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언어의 진정성을 규정짓기가 매우 어려웠다는 말이다. 각기 다른 삶을 경험하고, 처해 있는 상황도 다르기 때문에 같은 말도 저마다 다르게 표기하고 해석해 버림으로써 의미의 혼란, 해석의 실종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판단이 사람들의 인식의 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각각이 경험한 삶의 리얼리티가 다르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람드이 현실을 인식하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삶의 차이가 현실을 인식하는 차이로 나타나고, 현실을 인식하는 차이가 세상을 해석하는 차이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맨 먼저 알게 된다. 그 점에서 우리가 쓰는 언어란 삶의 리얼리티라고 말할 수 있고 그 리얼리티의 차이가 곧바로 사진의 차이, 감상의 차이, 해석의 차이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진을 보는 관객이 저마다의 리얼리티에 따라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 과정에서 다행히 작가와 관객이 같은 리얼리티를 공유하고 있으면 좋은 느낌, 좋은 사진이 되고, 다른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으면 느낌 없는 사진, 별 감흥이 없는 사진이 된다. 시각언어인 사진이 우리 앞에 놓였을 때 모든 사진이 다 좋을 수 없고, 또 반대로 다 나쁠 수는 없다. 그 모든 좋고 나쁨의 선택은 관객의 리얼리티에 따라 자의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교육은 다양한 리얼리티를 경험하게 하는 매개체이다. 학습을 통해서 작품과 관객 간에 존재하는 리얼리티의 차이를 극복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리얼리티의 중재는 우리의 일상에서 상당히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다. 때론 음악이, 때론 설명이, 때론 주변 상황이 리얼리티의 차이를 극복하게 만든다. 처음 보았을 때 느낌이 없었던 사진이 오래 보면 좋아지는 것은 반복해서 보는 동안 그 사진과 친숙해지기 때문이다. 또 어느 순간 급작스럽게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사진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주변 환경이 리얼리티를 중재해 주었기 때문이다.  191-192


"사람들 속에 같은 사람으로 살면서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도 나를 모른다."(강상훈) 작가가 카탈로그에 썼듯이 우리는 서로 몰랐던 것이다. 서로의 리얼리티가 달라 그의 사진이 내게 감동을 주지 못했던 것이고, 감흥이 없었기에 사진보다는 글이나 한번 읽어 보자고 한쪽으로 치워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리얼리티를 공유하는 순간 이 사진은 내 마음에 와 닿았고, 새삼스레 진정한 리얼리티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193


진광불휘(眞光不輝 참진 빛광 아닐불 빛날휘), 참된 빛은 빛나지 아니한다. 통도사 주지이셨던 성파 큰스님은 순수의 뜻을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197


사진의 모드는 삶의 모드가 만들어 낸 형상이다.  210


작가는 자기 삶의 모드에 반하는 사진의 모드를 가져서는 안 된다.  211


* 치열함 - 작가(作家 지을작 집가)란 자기 집을 지슨 사람, 자기 집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213


* 뒷모습 - 삶에서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진실일 경우가 있다. '뒷모습이 진실이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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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발길을 돌리는 순간 나는 레밍턴 타자기를 다시-꾸준히 자신 있게, 충동적으로, 끝없이-쳐대는 소리를 들었다. 버스를 타고 미라플로레스로 돌아오면서 나는 페드로 카마초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어떤 사회적 환경이, 상황과 사람과 인연과 문제와 사건과 뜻하지 않은 일들 간의 어떤 연쇄 작용이 그처럼 열매를 맺고 하나의 작품으로 표현되어 청취자들을 끄는 이 문학적(문학적이라? 만일 그게 아니라면 대체 뭐라고 불러야할까?) 재질을 산출해냈을까? 어떻게 그는 작가의 전형인 동시에, 자신의 재능에 바치는 시간과 생산해내는 작품 덕분으로, 페루에서 작가라 불릴 만한 단 하나뿐인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시인이니 소설가니 극작가니 하는 이름으로 통하는 그 숱한 정치가, 법조인, 교수... 문학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활동에 허비되는 삶에서 짧은 막간을 이용해 얄팍한 시집이나 빈약한 단편집을 한 권 냈다고 해서, 그들이 과연 진정한 작가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어째서 문학을 일종의 치장이나 구실로 삼는 사람들이 오직 글을 쓰기 위해 살고 있는 페드로 카마초보다도 더 진정한 작가로 대우받을 권리가 있는 것일까? 그들이 프루스트, 포크너, 조이스의 책을 읽었던(아니면 적어도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반면 페드로 카마초는 거의 문맹이나 다름없기 때문일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서 나는 슬프로 속이 상했다. 날이 갈수록 이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유일한 일은 작가가 되는 것이란 생각이 점점 더 분명해졌고,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과 정신을 오로지 문학에만 쏟아야 한다는 생각 또한 점점 더 굳어져갔다.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절대로 시시한 삼류 작가나 아르바이트 작가가 아니라 진정한 작가였다. 누구처럼? 그때껏 내가 만났던 사람 중에서 자기 직업에 몰두하고 전념하여 진정한 작가가 되는 데 가장 접근한 사람은 라디어 연속극을 쓰는 볼리비아인 작가였으며, 그것이 바로 그가 나를 그처럼 매혹시킨 이유였다.  13-14



"괴로움은 훌륭한 스승이니까."  100




옮긴이의 말 - 이런 소설 보셨나요?


이 소설은 작가의 실제 결혼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개성있는 주인공들과 유머러스한 상황을 적절히 배합해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 일종의 자전 소설이다. 작가는 자신을 모델로 한 주인공이 마침내 집안 아주머니뻘 되는 연상의 여성과 결혼하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금지된 사랑의 유혹을 다루는 동시에, 한 젊은이가 세상과 자신의 집안에서 설 자리를 찾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해시켜가는 성장 소설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훌리아 아주머니와의 사랑 이야기와 더불어 저명한 방송작가 페드로 카마초의 연속극 이야기를 병렬식으로 전개함으로써 현실과 허구를 교묘히 짜맞추고 있다.  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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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는 뭐든 간에 발길질을 하면서 물건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남자였다.  15


그는 줄줄이 늘어선, 자기 집과 똑같이 생긴 집들을 따라 차를 몰았다. 그들이 처음 여기 왔을 때 이 동네에 있던 집은 겨우 여섯 채였다. 이제는 수백 체가 있다. 한때 여기에서는 숲이 있었지만 이제는 집들뿐이다. 물론 다 융자를 낀 집들, 그게 오늘날 일을 하는 방식이었다. 신용카드로 쇼핑을 하고 전기차를 몰고 다니며 전구 하나 바꾸려고 수리공을 고용했다. 딸각딸각 맞추는 조립식 마루를 깔고 전기 벽난로를 설치한 뒤 그럭저럭 살아간다. 급박한 상화에도 벽에 못 하나 박지 못하는 사회. 이게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45


오베는 자기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들만 이해했다.  57


아마 그녀(소냐)에게 운명이란 '무언가'였을 텐데, 그건 오베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베에게 운명이란 '누군가'였다.  103


"자기 원칙을 걸고 싸울 준비가 된 사람들이 더 이상 세상에 없는 걸까?" 루네가 물었다.

"하나도 없지." 오베가 대답했다.  117


이 세상은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나기도 전에 그 사람이 구식이 되어버리는 곳이었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무언가를 제대로 해낼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 나라 전체가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범속함을 거리낌 없이 찬양해댔다.

아무도 타이어를 갈아 끼우지 못했다. 전등 스위치 하나 설치 못했다. 바닥에 타일도 못 깔았다. 벽에 회반죽도 못 발랐다. 자기 세금 장부 하나 못 챙겼다. 왜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타당성을 잃어버린 형태의 지식들만 넘쳐났다.  119


오베는 첫 번째 불꽃이 자기 집을 기어오르는 광경을 봤다. 그는 잔디를 가로질러 뛰어갔지만 이내 소방관들에게 제지당했다. 별안간 그들이 사방을 둘러쌌다. 

그리고 오베를 집에 못 들어가게 막았다.

하얀 셔츠를 입은, 오베가 이해한 바로는 일종의 소방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그의 앞에 다리를 쩍 벌리고 서서 오베가 자기 집의 불을 끄도록 놔둘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너무 위험해서라고 그랬다. 그런 뒤 안타깝게도 소방관들 역시 관계당구겡서 적법한 허가가 내려올 때까지는 불을 끌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오베의 집이 정확히 시 경계선 위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지휘 센터에서 무전기로 승인을 해주어야만 그들이 진화 작업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었다. 허가가 나고 서류에 도장이 찍혀야 한다고 했다.

"규칙은 규칙이니까요." 오베가 항의하자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오베는 몸부림을 치며 거기서 벗어난 뒤 분노에 차 호스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헛된 일이었다. 소방관들이 이제 다 끝났다는 신호를 보냈다. 불길이 이미 집을 삼켜버렸다. 

오베는 정원에 서서 무력함과 슬픔에 휩싸인 채 집이 불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134-135


사람들은 오베와 오베의 아내가 밤과 낮 같다고 늘 말했다. 오베는 당연하게도 자기가 밤 쪽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게 그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반면 누군가 그런 말을 할 때 오베의 아내는 항상 재미있어했는데, 왜냐하면 그럴 때마다 낄낄 웃으면서 사람들이 오베를 밤이라고 생각하는 건 그가 태양 쪽으로 가기에는 너무 못돼먹어서라고 지절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가 왜 자기를 택했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음악이나 책이나 이상한 단어 같은 추상적인 것들을 사랑했다. 오베는 손에 쥘 수 있는 것들로만 채워진 남자였다. 그는 드라이버와 기름 여과기를 좋아했다. 그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인생을 살아갔다. 그녀는 춤을 췄다.

"모든 어둠을 쫓아버리는 데는 빛줄기 하나면 돼요." 언젠가 그가 어째서 늘 그렇게 명랑하게 살아가려 하느냐고 그녀에게 물었을 때,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읽는 책 중 하나에 프란체스코인가 하는 수도사가 그렇게 써놓은 게 분명했다.

"날 속이면 안 돼요. 여보." 그녀가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커다란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무도 안 볼 때 당신의 내면은 춤을 추고 있어요, 오베. 그리고 저는 그 점 때문에 언제까지고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당신이 그걸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간에."

오베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결코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그는 춤을 춰본 역사가 없었다. 춤이란 너무 무계획적이고 어지러워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직선과 명료한 결정을 좋아했다. 그게 그가 늘 수학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수학에는 정답 아니면 오답만 있었다. 수업 중에 '네 입장을 토론해보자'며 사기를 치려 드는 히피 같은 과목들과는 달랐다. 마치 누가 긴 단어를 더 많이 아는지 점검하는 게 결론을 내리는 방법이기라도 한 것인양. 오베는 옳은 건 옳은 것이고 틀린 건 틀린 것이길 원했다. 

그는 몇몇 사람들이 자기를 인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심술궂은 영감탱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건 그들이 오베에게 사람을 다른 식으로 볼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살다보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될지 결정을 내릴 때가 오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이 기어오르게 놔두는 사람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때가.  152-154


모든 남자들에게는 자기가 어떤 남자가 되고 싶은지를 선택할 때가 온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없다면, 남자에 대해 모르는 것이다.  159


오베는 그녀를 만나기 전 어떻게 살아왔느냐는 질문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물어봤다면, 그는 살아도 산게 아니었다고 대답했으리라.  182


"당신이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는건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오베가 소냐에게 솔직히 고백하고나서 일어나면서.)  186


그녀는 그저 "다 괜찮을 거예요, 여보"라고 속삭이며 그의 팔에 자기 팔을 기댈 뿐이었다. 그녀는 집게손가락으로 그의 손바닥을 부드럽게 눌렀다. 그리고 눈을 감은 뒤 죽었다.

오베는 그녀의 손을 몇 시간 동안 그대로 잡고 있었다...

누군가 묻는다면, 그는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자기는 결코 살아 있던 게 아니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녀가 죽은 뒤에도.  189


'사람은 자기가 뭘 위해 싸우는지 알아야 한다.'  273


오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고 분노에 찬 엘크처럼 턱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하얀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아니타와 루네의 집으로 들어갔다.  364


오베의 몸에서 모든 힘이 다 빠져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아니타의 기진맥진한 얼굴을 봐서였을 것이다. 더 큰 견지에서 보면 이 단순한 전투에서 이겼다느 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깨달음 때문이었을 것이다.스코다가 갇혀 있건 말건 아무 차이도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돌아온다. 그들이 소냐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조항드로가 서류들을 들고. 하얀 셔츠의 남자들이 언제나 이긴다. 오베 같은 남자는 언제나 소냐 같은 사람을 잃는다. 아무도 그에게 그녀를 되돌려주지 못한다. 

결국 부엌 조리대에 기름칠을 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곤 하지도 않는 하루하루가 길게 이어지는 것 외에 아무것도 남는 게 없었다. 오베는 더는 극복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어느때보다 지금 이 순간 확실히 느꼈다. 그는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다. 더 이상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모든 게 다 멈추기만을 바랐다.

파르바네는 계속 그에게 반박하려 했지만 그는 그냥 문을 닫았다. 그녀가 문을 쾅쾅 두드렸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현관의 의자에 주저앉아 자기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심장이 정말로 세게 뛰는 바람에 귀가 폭발할 것 같았다. 마치 거대한 어둠이 숨틍을 걷어차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의 압박이 20분 넘도록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베는 울기 시작했다.  368-369


"사람들은 모두 품위 있는 삶을 원해요. 품위란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무언가를 뜻하는 거고요." 소냐는 그렇게 말했다. 오베와 루네 같은 남자들에게 품위란, 다 큰 사람은 스스로 자기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뜻했다. 따라서 품위라는 건 어른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는 권리라고 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통제한다는 자부심, 올바르게 산다는 자부심, 어떤 길을 택하고 버려야 하는지 아는 것. 나사를 어떻게 돌리고 돌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안다는 자부심. 오베와 루네 같은 남자들은 인간이 말로 떠드는 게 아니라 행동하는 존재였던 세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물론 소냐는 오베가 자기의 이름 없는 분노를 어떻게 끌어안고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370-371


어떤 남자들이 갑자기 어떤 일을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기란 때로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때가 올 때까지는 늘 낙관적이다. 다른 사람과 무언가를 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대화를 나눌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민원을 제기할 시간도.  387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어렵다. 특히나 무척 오랫동안 틀린 채로 살아왔을 때는.  410


사람들은 늘 오베가 '까칠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빌어먹을 까칠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내내 웃으며 돌아다니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게 누군가가 거친 사람으로 취급당해 싸다는 얘긴가? 오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 남자를 이해했던 유일한 사람을 땅에 묻어야 할 때, 그의 내면에 있던 무언가는 산산조각이 난다. 그런 부상은 치료할 수 없었다.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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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동안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에 대한 생각과 의견들

여행은 움직이는 고해소다.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은 다시 볼 사이가 아니기에 삶에 깃든 어두운 비밀이나 상처, 슬픔 등을 주저하지 않고 털어 놓을 때가 많이 있다.

인생이라는 여정에서도 우리는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할 때가 많이 있다. 삶의 복잡한 문제를 드러내고 구체화하려면 그 문제를 말로 표현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소설가에게 가장 중요한 재료는 '다른 사람의 삶'이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나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내가 인생에서 직면했던 어려운 문제들을 되짚어보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 더글라스 케네디




1 행복은 순간순간 나타나는 것일까?


키르케고르는 '인생은 앞으로만 나아간다. 지나간 뒤에야 인생을 이해할 수 있다'라고 했다.  

철학자 니체 '시련으로 죽지 않는 한, 사람은 그 시련으로부터 더욱 단단해진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13


당시 내 나이 45세

그 무렵 나는 인생에서 배우게 되는 여러 가지 교훈들 중 비로소 한 가지를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절만, 낙심, 비극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절망, 낙심, 비극은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통과의례라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커다란 시련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넓고 깊게 트인다. 사람은 상실, 재난, 아픔, 슬픔 따위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삶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3-14


인간 조건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읽기 쉬운 이야기와 문장으로 결합하는 능력, 마치 슬픈 코미디처럼 인간관계가 변모해가는 모습,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불공평에 대해 차가운 일침을 가하는 절규 등이 나의 소설 세계와 일치하는 부분이었다.  15


조르주 심농이 1946년에 쓴 소설 <뉴욕의 매그레>를 읽으며 내 상황을 소설에 대입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다음 구절은 특히 내 처지를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통 형태 그대로 눌려 있는 배게, 잠 못 들고 몸을 심하게 뒤척이다 구겨진 시트, 파자마, 슬리퍼, 의자에 널브러진 옷가지, 탁자 위에 펼쳐진 책 옆에는 먹고 남은 저녁음식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외로운 남자의 끔찍한 음식... 불현듯 그는 자신이 도망쳐 온 모든 것들을 떠올렸다. 그는 입구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기 두려워 얼어 붙어 있었다.'

사람은 왜 책을 읽을까? 혹시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이 혼돈의 세상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추락하는 감정, 내가 처해 있는 불행과 산적한 문제들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 같았다.  16-17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빼고 나면 내 삶은 점점 더 지리멸렬해지고 있었고, 생에 대한 의구심만 커져갔다.  22


어른이 되어 '즐거워할 수는 있지만 행복할 수는 없어.' 라고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시점이 있다. 그 시점을 지나고 나서부터는 갑자기 행복과 마주친다는 생각만으로도 당황하게 된다. 행복, 그 심오하고 모순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를 입 밖으로 끄집어내어 말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의미를 전하고 싶어 한 것일까?  23


행복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인간의 모든 딜레마가 포함되어 있는 거대한 구조물에서 행복은 왜 큰 초석으로 여겨지는가? 

행복은 사랑과 비슷한 개념이다. 우리는 사랑과 행복을 간절히 소망하지만 스스로 장애물을 만들어가며 앞을 가로막기도 한다.

우리는 과연 행복해지길 원할까? 우리는 혹시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근원적인 결핍을 끌어안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건 아닐까? 오히려 우리에게 불편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자초하며 사는 건 아닐까? 우리는 삶에 만족을 주는 조건들을 스스로 밀어내는 행위를 하며 사는 건 아닐까?  23-24


내가 소설가로서 여러 가지 곤경에 현명하게 대처해 왔다고 해도, 아들의 자폐증을 치료하기 위해 지혜롭게 대처해 왔다고 해도, 직업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내가 책임져야 할 의무들을 훌륭하게 잘 수행해 왔다고 해도, 여전히 삶에 대한 식지 않은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나는 언제나 위기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누구나 가슴속에 '언젠가 내 모든 게 드러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품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의 인생에 깃든 가장 큰 두려움이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 얼마나 한심하고 비겁한지 잘 알고 있다. 언젠가 자신의 실망스럽고 부족한 모습을 들키지 않을까 늘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 인간은 자기의심에 빠질 확률이 높다. 자기혐오에 빠질 확률도 높다. 아니, 자기 자신의 모습을 불편하게 여길 확률도 높다.

나는 그런 증상드렝 대해 잘 알고 있고, 마침내 한 가지 결론에 도달 했다.

'행복은 동화 속에나 있다. 행복이란 손에 넣은 사람이 극히 드문 꿈이며, 나의 감정이나 심리로는 도저히 취할 수 없는 개념이다.'  25-26


삶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양성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다양성이란 단순한 인정이나 타협을 뜻하는 게 아니다. 삶이란 정답 없는 심오한 의문과 끊임없이 조우하는 일이다. 삶에 대한 정답을 찾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애써야 하는 건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이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인생은 왜 끊임없이 불공평한가? 인생을 이루는 근원적이며넛도 영원한 요소인 괴로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인류가 지구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인간과 함께해 왔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 온 질문이 한 가지 더 있다.

'생명의 불이 꺼지고 내가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ㅇ낳게 될 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인류는 죽음의 공포를 달래기 위해 갖가지 조직과 구조를 만들어 왔다. 가장 핵심적인 것이 종교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도 죽음과 함께 인생의 경이가 모두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물론 용기 있게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침착하게 수용할 수는 있다. 삶에 지친 나머지 죽음의 안식을 워할 수도 있다.  29


행복이란 특정한 순간에만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나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잠 못들게 하는 것들을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언제라도 경이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31


사람이 과연 줄곧 행복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프랭크 시내트라의 노래 가사처럼 '편하고 쉽게'만 나아가기에는 우리의 삶은 지나치게 복잡하고 신비롭다...

괴롭고 불안한 일이 아무리 많더라도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끊임없이 유지한다면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희망이란 바로 '흥미로운 삶'을 이루는 것이다.

'흥미로운 삶'이란 무엇일까? 끝없는 질문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과연 그 '흥미로운 삶'의 뿌리를 잃지 않고 지켜갈 수 있을까?  32




2 인생의 덫은 모두 우리 스스로 놓은 것일까?


나는 <컬리지트>에 다녔다는 것을 대단한 행운이라 여기고 있다. 그 학교를 다니는 동안 비판적 사고 능력, 독서의 필요성, 명확하고 창의적인 글쓰기 등을 배웠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소양이 사람의 지성과 감성을 고양시키는 필수적인 요소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컬리지트>의 단점이라면 성적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문화, 엘리트주의, 실패는 죄악이라는 생각 등이었다.  42


사람들은 누구나 내적 갈등을 겪으며 살아간다. 스스로 만들어낸 내적 갈등이야말로 그 사람의 삶을 좌우한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직업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도 한 겹 벗기고 바라보면 후회와 미련으로 점철된 생을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니까.

삶이란 결코 원하거나 꿈꾸는 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후회를 줄이고 있는 그대로의 생을 끌어안을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암울한 현실을 결코 벗어던질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암울한 현실을 만들어낸 사람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절망감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56


'사람은 누구나 내적 갈등을 안고 살아간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기본적으로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내 정신과 의사가 들려준 말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적 갈등과 끊임없이 싸워야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 깨달음이란 바로 '어느 누구도 타인의 행복을 모두 책임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58


자녀의 삶을 부모의 뜻대로 이끌어갈 수는 없다. 결국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개척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과제를 풀 책임은 당사자들에게 있다.

부모가 자녀의 행복을 대신 만들어줄 수 있을까? 

사람은 각자 지문이 다르듯 행복을 느끼는 의미와 조건 역시 다르다. 우리는 배우자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  58-59


독서광들이 대개 그러하듯 나 역시 내가 읽어낼 수 있는 양보다 훨씬 많은 책을 충동적으로 구입한다. 책을 사는 것도 중독이다. 책을 사는 게 코카인이나 포르셰를 사는 것보다 돈이 덜 들고, 책을 집필하느라 노고가 많았던 작가를 돕는 일이긴 하지만 중독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내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 중에서 아직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책이 부지기수다.  64


스스로 덫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더욱 두려운 질문들이 기다리고 있다. 

과연 덫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를 가두고 있는 불행한 삶 너머로 탈출할 수 있을까?

아니면 불행한 삶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버텨내야 할까?

그런 질문들에는 골치 아픈 개념이 숨어 있다. 바로 '변화'라는 개념이다. '변화'는 미국의 낙관주의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68


'변화'는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상륙할 당시부터 미국의 기본 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청교도정신의 중심에는 '죄악'의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섹스에 있어서는 특히 심하다. 그런 점들은 미국과 프랑스를 비교해 보면 훨씬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프랑스에서는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바람을 피우는 것에 대해 가정과 분리해 사회적으로 묵인한다. 미국에서도 장기간 결혼생활에서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권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부가 서로 합의 아래 외도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다만 미국사회에서의 외도는 어디까지나개인적인 문제로 국한된다. 프랑스에서의 외도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과 명백한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69


간통 행위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보상받는 기분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몰래 간직한 기분, 은밀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에 짜릿한 쾌감을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반면 자기혐오에 빠질 수도 있고, 차분하게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도 있다.  70


우리는 수많은 의무들에 갇혀 있다. 모기지론, 자동차 할부금을 갚아나가야 할 의무와 함께 자녀양육의 기나긴 의무가 있다. 평생을 따라다니는 부모라는 꼬리표를 무시할 수 없고, 자신이 선택한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그런 문제들은 미국사회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권태는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문제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권태로운 결혼생활이나 직업을 그대로 유지해 간다는 건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는 그런 삶을 유지해가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덫에 갇혔다는 생각이 들때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가장 불편한 진실은 그 덫을 만든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72


우리는 나이를 먹고 나서야 세상에서 살다간 모든 사람들이 맞닥뜨렸을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인생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던 사람들은 나이가 지긋해지고 나서야 자기 자신에게 잔인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삶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때서야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 덫에 갇혀 더없이 소중한 인생을 불행에 빠뜨리고도 바꿀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진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삶의 덫에 갇혀 더없이 소중한 인생을 불행하게 보내기로 결정한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76


우리는 누구나 떠나는 꿈을 꾼다. 자유를 얻는 대신 외로움을 덤으로 얻게 될 미지의 땅으로 모험을 떠나는 것은 어려운 결정이다. 가정이나 직업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로워지기로 결심한다는 건 어른이 되어 내릴 수 있는 결정 중에서 가장 힘들다. 그런 까닭에 나는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키케로는 듣기에는 불편하지만 일리 있는 말을 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건 대단히 위험하다. 하지만 그런 위험은 세상의 도처에서 너무 쉽게 일어난다.'  77




3 우리는 왜 자기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야기를 재구성하는가?


절망에 몰린 사람은 비이성적인 시나리오를 유일한 해결책으로 착각하게 된다고 하잖아.  88


'실증적 사실'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이견이 없는 진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복잡한 상황들을 설명할 때 단 하나의 실증적 사실만 적용할 수는 없다.  89


왜 상대의 '진실'은 나의 진실과 다른가? 더욱 간단히 말해 우리는 왜 자기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야기를 재구성하는가?

하나의 사건을 재구성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건 인간의 행동 유형에서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다.  93


내 경험상 어떤 진실을 부정하고 이야기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94


마음은 그 자체로 장소이며, 지옥을 천국으로,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 말 뒤에는 또 다른 질문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어떨게든 하루하루를 견디기 위해 현실을 재구성한다.'

거리의 철학자로 통하는 에릭 호퍼는 말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할 때 가장 크게 거짓말한다.'  95


우리는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에 갇혀 사는 경우가 많다. 그 이야기는 우리의 관점이 만들어낸 허구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얼마든지 관점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이야기를 바꿀 수 있다.  112


(고모할머니) 벨은 "그동안 인생을 비극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어. 아무리 힘들어도 인새을 비극이라 여기면 안 돼. 난 늘 우울한 생각에 빠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왔어. 내가 그 아이를 잃고도 살아갈 수 있었던 건 바로 그런 결심 덕분이었지. 비극적 인생 이야기에 나를 포함시키지 않겠다고 결심했지....

'이제 부터 나는 더 이상 절망에 허덕이지 않는 길을 선택하겠어.' 라고.. 그렇게 마음먹는다고 해서 그 일이 당장 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는 않아. 그렇지만 나는 더 이상 그 일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어. 물론 한순간도 그 아이의 모습이 머릿소에서 사라지지 않았지만 나는 가능한 한 유쾌해지려고 애썼지."  114-115


비극을 갈무리하고 지나갈 길을 찾아낼 수는 있다. 하지만 인생사의 수많은 비극을 완벽하게 극복할 수 있는 해답은 없다. 인생사의 비극적인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극복해낸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그 그늘까지 완벽하게 해소할 수는 없다. 사람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괴로움을 끝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살아 있는 동안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쓸 필요가 있다.  116




4 비극은 우리가 살아 있는 대가인가?


작가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 한 가지 조언을 하겠다. 누구나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에는 엄청난 비방이 쏟아진다는 점을 명심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설령 냉소적인 비방들을 무사히 극복하게 되더라도 작가가 되려는 사람의 앞길에는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다. 출판사의 거절을 충격 없이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의 혹독한 평을 아무렇지 않게 견디는 것이 작가가 되려는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자세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작가가 되려는 사람은 끈기와 노력을 통해 끊임없이 창작에 필요한 기교를 연마하고, 작품에 대해 애정 없는 비판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웃는 얼굴로 마주볼 수 있어야 한다.  122-123


1970년대에만 해도 우울증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치료할 약도 변변히 준비돼 있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우울증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자살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해 심각한 벌을 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절망과 공허로 뒤덮인 어둠의 질곡을 헤매게된다. 누구나 암담한 순간에 처하는 경험을 한다. 우리는 누구나 영원히 세사오가 작별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기도 한다. 

단 한 번도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거짓말쟁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한 시나리오를 머릿속 한편에 감춰두고 '아주 몹쓸 생각'이라고 표시한 다음 하루하루를 버텨가고 있을 뿐이다.  127


죽음은 앞으로 전개되는 '삶'의 이야기를 앗아간다.  130


"표절행위가 발각되기를 바랐나요?"

내 질문에 하워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대답했다.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나요? 아버지가 말하곤 했죠.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 사실이 남들에게 발각되기를 바란다고요. 내 경우에는 일이 모두 엉망으로 끝난 다음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어요."

"대개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결과를 봐야만 그 의미를 알게 되죠."

"의미를 깨닫게 되더라도 너무 늦은 경우가 많기도 하죠."  155


하워드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말했다. 

"우리는 누구나 예기치 못한 비극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비극은 어떻게든 우리를 덮치죠. 그렇지 않나요?"

"사실 인생의 아주 많은 부분이 우리 손이 미치지 않는 영역에 있긴 하죠."

하워드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자기 파괴적인 일탈 행위로 비극을 자초한 게 얼마나 한심하고 비참한 짓이었는지 뒤늦게야 깨달았아요. 내 자신이 자초한 비극이었죠.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비극을 피하려면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어야만 하죠. 우리는 매일 아침 거울 속에 들어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며 살아가죠. 그렇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 그 사실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큰 비극입니다."  156




5 영혼은 신의 손에 있을까, 길거리에 있을까?


작가라면 대부분 그렇듯이 나도 어떤 사람들이 당면한 문제를 여러 가지 가정에 대입해 생각해보곤 한다.  167


나는 '만물을 관장하는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개념을 깊이 숙고해 본 적이 있는데 결국 그 말에 수긍할 수 없었다. 전지전능한 신보다 세상일에 덜 끼어드는 초월적 존재도 내 머리로는 수긍이 되지 않는다. 

신이 세상을 만들었지만 세상은 신의 간섭 없이 돌아간다고 주장하는 이신론은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이신론을 주장하는 사상가는 많지만 볼테르가 대표적이다. 내가 보기에 이신론은 불가지론의 지류로 생각된다. 이신론으 우주의 기원은 있지만 생명체들은 각각의 상황을 따르지 신의 명령을 따르지는 않는다는 세계관이다.  169


종교란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베들레힘으로 몸을 숨기는 게 아니면 무엇일까? 파란만장한 인생에서 조금이나마 기대 쉴 수 있는 안식처를 찾는 게 아니라면 무엇일까? 우리에게 일어나는 온갖 문제들에 대해 끝없이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한 탐구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173


몇 년 전 이스라엘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때 만난 70대 노인이 나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유대교는 모계로는 분명하게 이어지지만 부계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어머니가 유대인일 경우 그 자식은 유대인으로 친다. 아버지가 유대인인 경우에는 자식을 유대인으로 치지 않는다. 그 아들이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174




6 왜 '용서'만이 유일한 선택인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상대로부터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한다. 갖가지 난제가 콘크리트 벽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는게 뻔히 보이는데도 못 본 척하고 넘어간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기 때문이다.  216


자기애가 지나치게 강한 사람은 남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은 사랑을 주지 않으면서도 사랑을 바라는 사람을 기꺼이 묶어두려 한다.  236


용서는 인간 조건의 중요한 요소다. 세계의 주요 종교들은 모두 용서를 가르친다. 탈무드에 나오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완고하면 안 된다. 마음을 누그러뜨릴 줄 모르면 안 된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건 쉽게, 화를 내는 건 어렵게 살아야 한다. 상대가 진심으로 잘못을 빌 경우 기꺼운 마음으로 용서해야 한다.'

신약에도 용서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와 비유가 많이 나온다. 

그 유명한 산상수훈도 사실은 용서에 대한 글로 볼 수 있다. 자주 인용되는 다음 문장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불교에서도 미움과 증오를 마음의 독이 되는 병으로 간주한다. 불교에서는 용서하지 않으면 업이 쌓이고,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오히려 더욱 불행한 사람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사람이 나를 이용했어, 그 사람이 나를 괴롭혔어, 그 사람이 나를 짓눌렀어, 그 사람이 내가 가진 모든 걸 빼앗았어.'라는 생각을 품고 있으면 마음속에서 번뇌가 끊이지 않는다.

용서에 대해 가장 공감할 수 있는 말을 남긴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일 것이다. 몇 세기 뒤에 살았던 몽테뉴와 함께 아우구스티누스는 현대적인 실존주의의 토대다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용서는 죄를 사하는 것이다. 용서함으로 한 번 길을 잃었던 마음이 다시는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현대 의학과 정신분석학에서는 '용서 모델'로 불리는 연구가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용서하고 미움을 넘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받은 피해의 부스러기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을 훨씬 더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의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

큰 상처를 준 사람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건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게 남아 있는 분노를 줄여나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분노를 줄이는 건 정신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용서는 정신건강에 좋다. 다만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용서하기란 정말이지 몹시 힘든 일이다.  239-240


분노의 대상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가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결국 후회할 일을 한 가지 더 만들게 될 뿐이죠.  250


분노가 당신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죠. 우리는 분노를 너무 많이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큰 피해를 당할 경우 특히 극심한 분노의 감정이 일게 되죠.  251


용서는 자기 안에 있는 온갖 나쁜 기운을 밖으로 점차 내보내는 일이다. 

내가 '점차 내보내는 일'이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하기 바란다.  257


용쇼는 먼저 자기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미움과 원망을 버리는 일이다. 용서를 상대에 대한 수동적 공격의 도구로 사용하면 안 된다. 타인의 잘못을 용서했으니 자기 자신의 도덕적 우위가 증명된 셈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용서는 존재론적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 각자가 세상에 홀로 서서 모든 행도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면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타인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도 자신의 책임이다. 사는 동안 만나게 될 수밖에 없는 어려움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해야 할 책임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았을 때 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것도 자기 자신의 몫이다. 

용서는 '잊기'와 다르다. 요즘 '잊기'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다. '잊기'는 살아가면서 힘겨운 일을 겪에 돼 괴로움에 처했을 때 그 상처를 상자에 담아 마음 깊은 곳에 꼭꼭 묻어두고 다시는 열어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258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우리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용서는 우리가 모든 상처를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과도 같다...

용서의 과정은 전적으로 혼자 이루어가야 하기에 더욱 두렵고 힘든 일이다.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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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며 - 인류학적 관점이 어떻게 해외여행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이 책은 짧은 체류 기간 동안 "문화적 이해"라는 분야를 더 깊이 파고들려는 사람들이나, 해외에서 비교적 장기간 살면서 현지인의 관습과 문화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런 여행자들은 스스로를 청년 배낭여행자 또는 요새 늘어나고 있는 플래시패커(flash-packers)로 정의한다. 플래시패커란 연령대가 조금 높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30대 배낭여행객을 가리킨다. 7


최근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가 "읽은"것의 10%, "들은"것의 20%, "본"것의 30%, "보고 들은"것의 50%, "말한"것의 70%, "하면서 말한"것의 90%를 기억한다고 한다. 다른 연구자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듣고, 보고, 행하고, 냄새 맡고, 느끼고, 맛보고, 들이마시고, 집어넣고, 신용 카드로 산"것의 100%를 생각해 낸다고 한다. 13


현재 대부분의 학습은 수동적으로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에 불과하다. 즉 참여와 활동이라고 오인하곤 하는 정보 접근과 정보 검색인 것이다. 13


기억과 지식을 내면화하지 못하면 보통 너무 피상적이 되고 지적인 허세로 이어지고만다. 14


여행은 관계망을 만들어 내고, 비금융적 자산을 계발해서 귀중한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을 창출할 수 있게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유명한 말처럼 "진정한 발견에 이르는 여정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볼 때 이루어진다."

여행하는 동안 경험과 지식을 축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고 행동하는 방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각"이 더욱 중요하다. 16-17


미국인들은 흔히 다른 사람들의 행동은 천성 탓이라고 보면서, 자신들의 행도은 외부 조건에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여긴다. 17


자기가 내린 판단이 자민족중심주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도, 적어도 현지에 있는 동안만큼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행동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능력을 익혀야 한다. 어쩌면 영원히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말이 쉽지 실천하기 아주 어려운 일이긴하다. 19


이론이나 철학은 실천 속에서 구체화된다. 20


심층 지식을 얻기 위한 최고의 방법 중 하나는 배운 것을 끊임없이 기록하는 것이며, 해외에서 배움을 얻는 비결은 겸손함을 보여 주고 자기 약점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 그러려면 용기를 내서 스스로를 낯선 타인의 친절에 좀 더 맡겨야 할 뿐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해야 한다 운이 좋으면 그렇게 해서 겸손함을 배우게 될 것이다. 21-22



1. 인류학적 관점이라 불리는 괴물

- "우리는 바로 우리라는 적을 만났다." - 포고(Pogo, 미국 만화가 월트 켈리가 그린 만화 주인공)


"문화적 상대주의"는 자기 문화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다른 문화의 행동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자민족 중심주의"와 반대 개념이다. 43


현장에서 중요한 정보는 우연히 등장할 때가 많다. 45



2. 우리는 왜 해외로 나가는가

-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면 절대 살아가지 못하리라."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최근 연구에 따르면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마약 같은 효과를 낳는다고 한다. 중변연계에서 관장하는 보상 체계에서 만족감에 해당하는 신경의 레버를 눌러 화학적 전달 물질인 도파민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57


사람들이 해외에 나가는 이유라고 말하는 것 중 다수는 물론이고, 심지어 실제 해외에서 하는 경험조차 "키치"할 수도 있다. 키치(kitsch)는 진부하고 뻔하고 흔해 빠졌고 보통 싸루려이면서 대체로 악취미적인 무언가를 묘사하는 데 쓰는 용어다. 사실 이런 키치함은 주로 처음에는 물건을, 그러다가 현재는 경험을 대량 생산한 결과고 생겨났다. 도처에 존재하는 키치성은 현대 소비 자본주의 문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다. 키치는 행복이나 지식조차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믿음 아래 번성한다. 키치에는 지적인 수고가 거의 들어가지 않으며, 키치는 지식과 이해를 추구하는 풍토보다는 안락한 소비 지상주의에서 번창한다. 아마 키치가 가진 가장 위험한 측면이라면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보편적 정서와 이해가 존재한다는 착각을 광범위하게 퍼뜨린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키치의 일부가 생활 방식의 정치화다. 62-63


대학들이 여행을 장려하고 있는 상황에서, 해외 유학 프로그램의 ㅅ어장은 단과대학과 종합대학교에서 외국어 프로그램에 등록하는 학생 수가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현상과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이는 어떻게 여행 키치가 조장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한 가지 지표이다. 해외여행이 키치화하고 있다는 또 다른 지표는, 적어도 내가 있는 미국 대학교에서는, 유학 중인 일부 외국인 학생들이 하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미국인 학생들과 때로는 대학 당국까지도 피상적 수준 외에는 그들 조국에 대해 아는 데 그다지 관심이 없다고 불평한다.

사실 정확한 여행 동기는 스스로도 확실하지 않을 게 분명하며, 확실해지는 날도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자아 발견과 다른 요인들이 섞여 있다는 게 다일 것이다. 처음에 나는 키치화한 여행이 가지는 위험성에 대해 불안해하는 게 내 개인적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그런 피상적 동기에 맞서는 게 우리가 "당연시하는" 가정들을 무너뜨리는 방법으로 가치 있는 행위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더 철저하게 파고들수록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 그런 가정들이 더 큰 구조적 문제의 일부라는 것, 또 인류학자들은 학생들이 해외로 나가는 게 지적으로 정말 도움이 되는지, 그리고 해외여행이 학생들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게 사실인지에 때때로 의문을 제기해 왔다는 것이다. 63-64


초보 여행자들이 편향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실용적인 조언. 

데이터 수집에 다각적인 접근법을 이용하고, 큰길을 벗어나 걸어서 다녀 보고, 틈틈이 여기저기 들러 보고, 소탈해지려 노력하고, 비수기에 가 보고, 관광객들이 흔히 찾는 구역을 벗어나서 시간을 보내 보라.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질문을 하고, 귀 기울여 들으로, 늘 똑같은 사람들과 판에 박힌 교류를 하는 데서 벗어나라. 다양한 집단 특히 보통은 의견을 묻지 않는 종류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라. 67


고치에 싸인 채로 여행을 하려는 게 아니라면, 여행 방식을 만들어 내고 결정짓는 광범위한 구조적 요인들을 고려해서 그런 요인들 간에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엄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67-68


플래시패킹(flash-packing, 노트북, 아이팟, 디지털카메라 등 전자 기기를 들고 여행을 다니면서 와이파이 등의 기술을 이용해 여행 경험을 블로그 등의 SNS나 실시간 방송 등으로 공유한다.) 70


관광에는 많은 유형이 있어서 학자들이 명실상부한 유형 분류 체계를 만들어 내기도했다. 에릭 코언(Erik Cohen)이 개발한 첫 번째 유형 분류 체계는 관광이 가진 다양성을 보여주는 데 지금까지도 편리하게 쓰인다. 코언은 참신한 경험을 선호하느냐 아니면 친숙한 경험을 선호하느냐에 따라 네 가지 유형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단체 대중 관광객"이다. 친숙한 것을 선호하고, 투명한 거품 속에 있는 것처럼 "특별 구역" 안을 돌아다니는 유형으로, 기본적으로 최고급 호텔에서 최고급 호텔로 옮겨 다닌다.  

두 번 째 유형은 "독자적인 대중 관광객"으로, 역시나 친숙한것을 고수해서 프랜차이즈 호텔에 묵고 평범한 관광 코스를 다니지만 행동을 독자적으로 한다. 

그 다음은 "탐험가" 유형이다. 참신함과 친숙함을 버무린 여행 방식을 택하고, 현지문화 탐구에 과감히 나서지만 언제든 "특별 구역"으로 돌아올 출구 전략을 갖고 있다.

마지막 유형은 단체 대중 관광객과 정반대 부류로, 일반적인 관광 코스를 피해 가능한 한 현지인과 섞이는 걸 선호한다. 방랑자는 현재 배낭여행객과 플래시패커로 자연스럽게 맥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여행조차도 거의 도처에 손길을 뻗은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과 러프 가이드(Rough Guide) 덕에 제도화되어 있다. 이런 제도화는 현지인과 현지 음식과 관습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하고, 인지된 위험(perceived risk, 구매가 가져오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불안감)을 희석하는 역할을 한다. 어떤 면에서 배낭여행객과 플래시패커는 탐험가와 방랑자를 결합한 형태이다. 이들은 인류학자처럼 해외여행에 도전하고 싶어 하는 종류의 여행자다.  74-75



3. 스스로를 본다는 것

   -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보라" 로버트번스


여행자들은 출신 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무력한 존재일지라도 해외에서는 현지인들보다 부유하지만 하면 그이유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힘 있는 사람으로 봐 줄 때가 많다. 결국 이들은 인기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건 매력적 성격보다는 이런 부유함이다.  87


여행자들은 기동성과 부를 가졌기 때문에 출국이라는 선택권을 발휘해서 마음에 안 드는 곳은 떠나 버린다. 이런 출국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여행자와 현지인 간에 존재하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이다. 이 말을 여행자는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그로 인한 결과 또는 다소 부담스러운 상황들을 반드시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88


배낭여행자들은 현지어를 하나도 못 하면서도 자기가 어떤 환대를 받았는지에 대한 이야기 하나쯤은 누구든 갖고 있었다. 이들에게 "진정한 교류"란 현지에서 베푸는 환대를 받고도 숙박료를 내지 않는 걸 의미했다.  97


여행을 하다 보면 여행자가 피해자가 되는 경우도 흔히 있게 마련이다. 비록 교훈이 뒤따르기는 하지만, 보통 이런 일은 일종의 탁월한 재밋거리로 여길 수도 있다. 여행자가 피해자가 되는 경우는 생명에 위협이 될 만큼 심각한 수준부터 단순히 창피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102


여행자들은 이야기를 할 때 부인하기 일쑤이지만, 봉이 되는 느낌은 뼈저리게 아프다.

사기당하는 것에 대한 공포는 상당히 가지각색이다. 그런 공포를 참고 넘길 만한 여행자들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여행자들은 그러지 못해서 이런 공포가 지나친 경계심으로 바뀐다.사건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돌이켜 보면서 "좀 더 분별 있게 행동했어야 했다"고 반성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교육적이다. 이런 경험들이 새로운 행동, 새로운 자기 탐구, 자기 수양을 하게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위기에 대한 모의실험 같은 것으로, 우리는 천하무적의 존재가 아니라 매우 인간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점을 되새기게 한다.  103



4. 여행 의례와 개인적 변화

   - "사람들은 이런 저런 누구는 아직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할 때가 많다. 그러나 자아는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토머스 사저


배낭여행자들은 사롱을 입거나 머리를 땋는 등 "현지인처럼 살려고"하는 시도는 통하지 않는다.


모험은 비일상적 장소에서 일어나는 게 일반적이다.  118

위험 감수는 모험의 본질이다.  119


알베를 카뮈(Albert Camus)는 "여행을 가치 있게 하는 건 두려움이다. 여행은 일종의 내면 체계를 붕괴시킨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모든 걸 빼앗고, 가면을 벗겨 버린다... 우리는 완전히 껍데기만 남는다."  121


지멜에게 모험은 경험 체계이다. "모험은 특유의 성격과 매력 면에서 볼 때 경험의 한 가지 형태라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경험하는 내용 때문에 모험이 되는 게 아니다."  122


중요한 것은 여행자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그 행동을 현지인들이 어떻게 해석하는가이다. 그렇다면 여행자는 반드시 유연성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일반화도 피할 필요가 있다.  134


여행에 계몽적 영향력이 있다고 덮어놓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겠지만, 여행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외국에 있는 동안 모은 여행 사진, 옷, 공예품을 진열하는 것은 자기 정체성과 여행 경험 간에 확실한 연결 고리를 만든다.  135-136




5. 여행안내 책자를 해석하는 법

   - "진정한 발견에 이르는 여정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볼 때 이루어진다." 마르셀 프루스트


계획에는 상상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장소가 어떤 곳일지 상상해 볼 때 인지적 도식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상상한 목적지와 실제로 체험하는 목적지는 당연히 천양지차다.

여행자는 목적지에 대해 가진 지식이 제한적이다.  142


전해 들어 알게 된 이야기(story)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여행을 한다...

서구 사회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보는 것을 우선시한다...

사진은 암암리로든 노골적으로든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 여겨진다.  144


소비 중심 사회가 시각적 이미지에 지나치게 지배당하면서 때로는 렌즈가 시선을 대체하기도 한다.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여행안내서, 지도와 더불어 문서로된 가장 흔한 정보원 중 하나가 여행안내 소책자(brochures)이다. 여행안내 소책자는 드러내 놓고 특정 여행지로 여행을 떠나도록 유도 하거나 설득한다...

안내 지도는 대체로 현지에서 구해서 여행지를 보다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게 한다.  145


많은 학자들이 주장한 대로, 시각 자료가 얼마나 압도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감안할 때 여행안내 소책자는 분명 행선지에 대한 이미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런 이미지들은 극히 단순화되어 있으며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진다.  146


여행안내 소책자는 평범한 일상을 담은 이미지는 거의 보여 주지 않는다. 대신에 화려한 볼거리와 즐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중점을 둔다. 이때 묵살해 버린 것, 즉 드러내지 않은 것이 중요하다.  147


아래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유학 광고 소책자를 살펴보자.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토 윤곽 안의 합성 사진 사용법에 주목해 보라. 중심에서 약간 비껴나 위치해 있는, 아기에게 뽀뽀하고 있는 젊은 여성 사진이 어떻게 사랑스러운 아프리카를 암시하고 있고 얼마나 눈에 확 들어오는지 눈여겨보자. 야생 동물들과 학생들이 화기애애하게 모여 있는 모습을 강조하고 있는 것에도 주목하자. 아기를 빼면 현지인들과 교류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즉 어린아아와 같은 아프리카는 절대 위협적이지 않다는 메시지다.  151


역사적으로 폭풍우 곶(Cape of Storm)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지만 여기서는 안전한 항구로서, 소비재를 구입하는 주용 관광 명소로 표현하고 있다. 이곳은 폭력도 가난도 없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다. 실업률이 40%에 육박하고, 살인 발생률과 HIV/에이즈 발생률도 세계에서 수위를 다투는 곳 중 하나라는 것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처한 현실인데도 말이다.  152


켈리 케이턴(Kellee Caton)과 칼라 산토스(Carla Santos)는 해상학기 프로그램(a Semeser at Sea program, 1963년에 처음 시작된 해외 유학 프로그램. 학부생들이 전용 유람선을 타고 일정 기간 해외 여러 지역을 방문한다.)동안 학생들이 찍은 사진.

케이턴과 산토스는 유람선에서 열린 학기 말 사진전 출품 사진들이 "식민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인 탐험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관계들"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동의하든 아니든 이러한 이들의 언급은 성찰적인 여행자라면 진지학 고려해 볼 만하다.  155-157




6. 여행을 준비할 때 고려할 문제들

   - "한 나라에 대해서 당신이 그곳에 있는 첫 두 주일 동안 알게 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은 결코 알 수 없다." 아이티 미국 국제개발처 사무소의 간판문구


여행자에게 큰 걱정거리라면 보통 전쟁과 테러로 대표되는 정세 불안, 건강, 범죄다. 세 가지 모두 관련 정보를 얻어 그에 따라 조치를 취하면 상당히 잘 대처할 수 있다.  165


자기가 모은 정보와 자료를 부모와 배우자 또는 연인과 공유하자. 분명히 걱정할 수밖에 없는 그들은 안심시킬 수 있고, 이렇게 정보를 함께 나누면 그들도 여행 과정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166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에 대해 상당히 미신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왠지 모르지만 항공 보험에 들면 비행기 추락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고 믿기라도 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보통 운명을 믿지 않으면서도 운명은 감히 시험하려 들지 않는 게 좋다는 믿음도 갖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 보험을 들면 아플 일이 없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확신으로 스스로를 기만한다. 보험에 마법과 같은 힘이 있다는 이런 믿음은, 재난이 너무 강한 인상을 남겨서 그런 일이 굉장히 자주 일어나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 때문에 생긴다. 보험으로 신들을 달래겠다는 태도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성관계를 피하거나 염소를 제물로 바쳐서 효험을 보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나만 해도 그렇다.  167


의사소통이 얼마나 용이한지가 여행지 결정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지만 보통 여행자들의 현지 언어 구사력은 창피할 정도로 수준이 낮다...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목적을 정하면 좋다. 지역 사회에 잘 녹아들기 위해서라든가, 연구를 위해서라든가 하는 식으로 계획을 세우면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된다. 현지 문화 이해에 대한 순수한 관심도 현지어를 알아듣고 말하려는 시도에 도움이 되고 동기 부여가 된다.  169


마라톤이 그렇듯이 언어를 배우는 데도 많은 훈력과 연습이 필요하다.  171


현지어를 더 쉽게 배우려면 확실히 동행이 있는 것보다 혼자 여행하는 편이 더 유리하다.  173


혼자 들 수 없는 건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 게 원칙이다.  173


프랑스 작가 콜레트(Colette)는 이렇게 썼다. "진정한 여행자는 걸어 다니는 사람이다." 걸을 때 느끼는 행복감과 만족감은 대개 단순함에서 온다.  176


혼자서 여행해야 할까, 아니면 동행이 있는 게 좋을까  178


혼자 여행하면 주변 환경에 대한 인지 능력을 기를 수 있다. 모든 감각이 환기되어 지역 사회와 더 친밀한 교감이 가능ㅎ다.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어떻게든 친구를 만들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 보면 친구 관계를 끊는 것보다 친구를 만드는 것이 더 쉽다는 걸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 혼자라는 조건은 최선을 다해 현지어를 배우려고 노력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된다. 또 혼자 하는 여행은 가장 자유로운 여행 방식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도 맞춰서 움직일 필요가 없고, 그때그때 벌어지는 상황을 형편에 맞게 이용하 수도 있다. 혼자 여행을 다니면 믿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있으므로 계획 수립, 건강과 안전 문제에서 자립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 타인의 호의에 더 많이 기대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친화력은 물론이요, 스트레스를 많이 주는 온갖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자연히 유머 감각도 기를 수밖에 없다.  179


고독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민감해지게 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사무쳐 오는 강렬한 감각은 기억 속에 경험을 아로새기는 역할을 한다. 또 사물과 자기 자신과 관계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된다. 고독은 너무 지나칠 때를 제외하면 소중한 것이다.  179


동행이 있으면 경험의 질이 높아질 수 있다. 친구를 데려가면 일을 분담해서 책임질 수 있고, 좀 더 효율적으로 경비를 절약할 수 있다. 자신감이 커지는 데다, 함께 무언가 독특한 경험을 하면서정과 유대감이 돈독해지는 보상도 뒤따른다. 그러나 여행에는 고생과 스트레스가 반드시 수반되다 보니 우정과 관계도 가혹한 시험을 받게 마련이다. 서로 좋아하는것, 싫어하는것, 공포의 대상, (비)융통성, 낯선 것에 대한 (불)관용, 유머 감각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여행을 같이 하면 친구들끼리 결속력이 강화되든지, 친구 사이가 끊어지거나 멀어지든지 둘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180-181


기대를 안고 해외여행을 준비하는 기간은 아주 신나는 단계이므로 이때 여행 일지를 쓰기 시작하는 게 좋다. 평범하고 세세한 준비 과정과 더불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이 여행에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지도 적어야 한다. 기대감을 묘사하고,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지 밝히고, 나가야 하는 이유를 기록하라. 예상되는 환경, 걱정, 공포를 상상해 보자. 이런 여행 일지에는 외국인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에 대한 느낌과 기대를 기록해도 좋다.  183


해외에서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려면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유머 감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184


적응력이 지나치면 여행이 결코 끝나지 않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 말은 결국 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84



7. 짐을 가볍게 하고 여행하기

   - "행복하게 여행하려면 짐이 가벼워야 한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특별히 혜책 받은 최첨단 세상에서는 경험을 전달하기는 쉽지만 경험을 하기는 어렵다. 현재 온갖 통신 장치 덕분에 사람들은 직접적인 경험은 거의 하지 않지만 세사엥 대한 경험을 경험한다. 실시간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면서 해외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경험보다는 전달로 바뀌고 있다. 즉 전달이 여행의 목적이 되었다.  194


여행은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전자 기기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기회다.  197


지루함은 혼자 힘으로, 자주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자극제가 된다.  197


사진은 기록 장치로서, 비망록으로서, 해외에서 보낸 경험의 산물인 상품이나 에세이나 책의 일부분으로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사진 촬영은 보이는 세계를 보여 주는 중요한 방법으로 여겨진다. 사진은 이야기만으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효과적인 증거가 되며, 말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기록의 진실성을 입증한다.

늘 그렇듯이 사진 기술을 이용하는 것에도 장단점이 있다. 무엇보다 사진이 여행의 주가 되어서는 안 되고, 첫째로 고려하는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되며, 윤리적인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카메라는 여행을 보강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202


가장 중요한 건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이다. 해외에서 자기가 한 경험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경험을 실제로 보여 주기 위해서는 어떤 사진을 써야 할까? 카메라를 이용해서 피사체를 전체적으로 조망한 모습뿐 아니라, 더 중요한 피사체의 세부도 보여 줘야 한다.  204


사진에 이름을 붙이고 목록을 만드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날짜와 장소를 기록한 일지를 작성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사람을 찍은 사진에는 가능하면 그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첨부하는 것이 좋다.  205


사진을 찍을 때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윤리적 문제도 있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다(taking picture)"는 표현을 쓴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수전 손태그(Susan Sontag)는 이런 의견을 제시했다. '사진을 찍는 다는 행위는 어딘지 약탈과 같은 면이 있다. 사람들을 찍는다는 건 그들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행위다. 찍히는 사람들 자신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방식으로 그들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절대 갖지 못한 그들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면서 사람들은 상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대사으로 바뀐다.'  206-207


에드워드 브루너(Edward Bruner)가 말했듯이 카메라는 관광객이 쓰는 가면이다.  207



8. 현지인과 수다 떨기

   -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일단 알지 못하는 것을 대면하고 나면 공포는 아는 것이 된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해외여행은 모르는 사람들이 베푸는 친절을 경험할 수 있는 값진 기회가 된다. 민감한 여행자라면, 해외여행이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잘하면 인생관 및 인생철학까지 바꿔 놓을 수도 있다. 

단체 여행이 아니라면, 여행자는 한 가지 중요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바로 어슬렁거릴 자유이다.  215


해외에서 성공적으로 지낸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들을 많이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들의 선의를 믿고 일단 좋은 ㅉ고으로 해석해야 한다. 히피 방랑객이었던 에드 번(Ed Buryn)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을 갈라놓는 중요한 요소는 두려움이다. 해를 입을까 봐 두려워하고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창피를 당할까 돠 두려워하고 두려워질까봐 두려워한다. 따라서 사람들을 만날 때 지켜야 할 첫 번째 원칙은 그들을 덜 두려워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때로는 퇴짜를 맞을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자. 다만 그런 일이 일어나도 심각하게 우울해 해서는 안 된다.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리면 그뿐이다.'  

두려움은 상상력과 여행의 숨통을 죈다. 사람들은 걱정이 되면 불쾌한 새악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분노가 일면 풍경을 봐도 음미하지 못한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뢰와 친밀감을 쌓아 가는 것이 좋다.  215-216


경계는 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마음을 열라. 두려움에 반드시 굴복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대비책은 항상 세워야 한다.  217


사람들이 해외로 나가는 이유 중에는 낯선 음식을 즐기고 싶다는 것도 있다. 

외국에 가 본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나 자기가 먹은 음식이 얼마나 별나거나 역겨웠는지를 가지고 서로를 이기려 들곤 한다. 일반적으로 요리가 "역겨운" 것이었을수록 우위에 설 수 있다. 음식으로 모험을 해야 하는 경우는 보통 두 가지다. 하나는 여행자가 레스토랑이나 시장에서 그 요리를 우연히 발견한 경우로, 어디까지나 돈을 주고 사 먹는 상황이다 보니 여행자가 그 별미를 먹거나 거부할 선택권을 갖고 있는 경우다. 더 심각하고 중요한 것은 두 번째인데, 여행자가 묵는 곳 주인이 손님을 예우하는 의미에서 특별 대접을 하거나 잔치를 벌이기로 한 경우다. 그런 대접에는 딱정버레 애벌레나 메뚜기에서부터 모파니 애벌레나 쥐나 동물 내장이나 황소 음경 등에 이르는 어떤 진귀한 지역 별미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225-226


사회의 기원은 음식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동반자(companion)"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빵과 함께"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콤 파넴(com panem)"에서 왔다. 먹는다는 것은 굉장히 사회적인 행동이다.  226


만나는 모든 사람이, 겉으로는 따분해 보일지 몰라도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따라서 언제나 귀 기울여 듣고 새로운 뭔가를 알아내려고 노력하자.  245


경청은 아주 중요하다.  249



9. 건강과 안전문제

   - "죽을 가능성이 없다면 모험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라인홀트 메스너


청결에 대한 개념은 문화마다 다르며, 심지어는 한 문화 안에서도 차이가 있다.  259


샤워는 반드시 매일 해야 한다는 개념도 최근에 아서야 생긴 것이다...

세계 많은 곳에서 매일 하는 샤워는 터무니없는 사치다. 

완벽한 청결은 보통 실현 불가능한 목표다. 반면 신체 특정 부분들, 즉 구멍들과 무엇보다 손은 가능하면 깨끗하게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260


소변과 대변에 대한 태도는 세월이 흐르며 변한다. 고대 로마 여성들은 얼굴에 대변을 발랐다. 젊은 피부를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이란 믿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회에서 대변, 구체적으로는 왕과 그 밖의 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의 대변은 약효가 있다고 여겨 다친 상처나 염증 부위에 바른다. 로마 여성들은 소변으로 목욕을 하고 입을 헹구기도 했다. 중세 유렵에서 태피스트리가 인기를 끈 이유는 궁정에서 귀족 남자들이 튀지 않게 소변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변은 커튼과 옷을 빠는 데 사용하는 다목적 액체였다. 지금도 미군 생존 수업에서는 소변을 응급 살균제로 쓰라고 한다. 사실 인도 일부 지역에서는 자기가 눈 소변을 마시는 게 장수 비결로 통하기도 했다.  261


이미 마개를 연 음료수를 받는다면 주인과 바꾼 후에 이게 "우리나라 풍습"이라고 말하라.  275



10. 좋은 여행 이야기 쓰는 능력을 높이는 방법

   - "진정한 여행자는 걸어 다니는 사람이다." 콜레트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를 해외여행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으로 여긴다. 그러나 가치 있는 통찰을 많이 얻을 수 있는 게 바로 글을 쓸 때다...

글을 쓴다는 행위가 더 깊은 성찰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여행 경험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행동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겪은 것을 글로 써서 되돌아보는 것이다.  281


자기 취향과 선호에 상관없이 일지나 기록 작성을 꼬박꼬박 규칙적으로 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좋다.  282


몇 가지 증거에 따르면 단시간씩 몇 번에 나눠서 쓰는 게 오랜 시간 동안 몰아서 쓰는 것보다 더 생산적일 수 있는 것 같다...

경험을 기록하고 작성하는 데 올바르거나 일반적으로 용인된 방식은 없다...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의 인생만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러 가지 단서들을 이용해서, 보통은 이야기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미루어 짐작한다.  283


글 쓰는 재주를 가지려면 대개 연습이 필요하다. 좋은 이야기와 통찰은 빈틈없는 기록에 달려 있다. 기록을 상세히 하면 분석과 분류가 가능하다...

기록이 뛰어나고 철저할수록 더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284


일지는 개인적으로 이용하려고 쓰는 것이다. 보는 사람이 나 혼자뿐이라 맞춤법과 문법에 구애되거나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것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나중의 일로, 명확한 대상을 상정하고 이야기를 쓰거나 말을 할 때다.  287


자기가 한 기록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거나 논문을 쓸 사람에게는 필수적인 작업이다...  288


성찰 과정은 현장 노트를 정서하는 동안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대체 성찰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과연 무엇일까? 사전에서는 보통 성찰을 세심한 고찰의 결과로 나온 이미지나 생각이나 아이디어라 정의한다. 그러나 성찰이 가진 또 다른 의미도 흥미를 자아낸다. 즉 반사면이 되비추는 이미지라는 정의다.  288-289


성찰 대상은 자기 자신부터 타인까지 모든 영역을 아우른다. 개인적으로 어떤 상황을 어떻게 다루는지부터 자기가 방문한 곳과 그곳 사람들에 대해 알아낸 것까지 다양하다. 성찰은 또한 양측이 어떻게 서로 쌍방향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지도 보여 줘야만 한다. 그러려면 이전에 가졌던 기대치와 목표를 검토해서, 그게 얼마나 만족되었는지 또는 아닌지, 그리고 왜 그랬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289


자기가 쓴 기록을 훑어볼 때는 나타나는 패턴과 법칙, 즉 주제에따라 관찰 내용과 데이터를 분류해서 기록을 재구성한다. 그렇게 해서 전후 순서뿐 아니라, 패턴이나 주제와 관찰 내용들 간의 연관성도 반영하도록 노력하라.  290


성찰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궁금하다면 단순한 비교나 대조에서 출발하자. 이런 환경을 고국에서의 환경과 비교하면 어떤가? 이 상황은 아침과 오후, 낮과 밤에 따라 어떻게 달라질까? 관찰자의 성별이 이 상황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291


스토리텔링은 매우 성찰적이고 직관적인 경험이 될 수 있다.  292


스토리텔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저 남을 즐겁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대화를 자극하는 것이기도 하다. 독일 희곡 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잘 표현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 머릿속에서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진정한 사고란 바로 이런 것이다."  293


내 생각엔 글쓰기를 미루는 버릇이 생기는 제일 큰 이유 중 하나는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하면 어떤 게 나올지 알 수가 없어서 막막해지기 때문이다. 많은 작가들이 글쓰기를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의식에 공을 들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글을 쓰기 전에 더블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거나 조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머릿속에 있는 단 하나의 초안을 키보드로 바로 옮긴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보통 이야기나 논문이나 책은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손봐야만 하는 여러 초안이 필요하다. 294




여행을 끝내며 - 인간은 우주 속 티끌 같은 존재

인류학자처럼 여행하면 비판적인 자의식을 갖게 된다.  305


성공적인 해외여행을 위한 중요한 열쇠는 여행자가 자기 자신의 교육과 경험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떠먹여 주기만 바라는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해외로 나간다는 것은 자기가 이미 갖고 있던 것과 곧잘 상반되는 새로운 생각과 감정에 스스로를 노출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때 열쇠는 겸손함이다.

해외여행에 성공하려면 실수를 하고 길을 잃고 헤매는 게 끔찍한 실패가 아니라, 성장을 위한 필수적 단계인 동시에 사실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을 줄 아는 능력이 꼭 필요하다...

여행에는 새로운 생각과 함께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307



역자후기 - 인류학자처럼 여행하라! 여행과 삶에 대한 새로운 눈을 갖게 될 것이다!

현재 한국은 해외여행객 연간 1400만 명 시대다.

전통적인 여행안내서는 여전히 정형화된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데 치중하고 있으며, 책을 통해 전하는 여행지의 문화와 현지인들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피상적이거나 우월주의에 젖어 있다. 아마추어들이 디지털 장비로 올리는 여행기나 에세이식 여행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적 감상 위주로 피상적이고 개인화되어 있거나 전통적인 여행안내서처럼 기존의 정형화된 이미지나 관념을 계속 답습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324-325


인류학자처럼 여행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또 한 가지 뛰어난 장점은 인류학에 기반을 둔 여러 가지 주체적인 여행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로운 여행이라고 착각하고 무턱대고 아무 계획 없이 떠돌이처럼 돌아다니며 뭐든 얻어걸리기만 바라는 또 다른 의미의 수동적인 여행을 경계하고 있다. 저자는 엄밀한 인류학적 방법론에 기초헤서 진정한 자기와 타인에 대한 이해, 의미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꼼꼼한 계획부터 세우라고 강조한다.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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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엄마들 중에도 가끔 아무런 정보 없이 무작정 오는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의 특징은 계획이 없는 만큼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여행을 한다는 것이다. 19 올레길을 걷다가 아이가 바닷가 모래사장을 만나니 주저 앉아 놀기 시작한다. 갈 길이 멀다고 아이를 재촉하는 대신 엄마도 털썩 주저앉아 바다를 본다... 어떤 마음으로 제주도에 오는가에 달렸다. 20 지금까지의 여행 패턴은 일명 '꼭 가봐야 할 곳'으로 분류된 관광지나 맛집을 정복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하다. 가봐야 할 곳 리스트에 맞춰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제주에 사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소소한 삶의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하는 게 참 안타깝다. 21 대부분의 엄마들은 말로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푹 쉬자." 해놓고 꼭 한 두 가지씩의 예외사항을 둔다. '다른 건 몰라도 일기는 쓰자' '공부는 습관이니까 학습지 두 장씩만 풀자' '영어 단어 다섯 개씩만 외우자'하고 말이다. 31 창의력 향상 놀이, 자기주도학습 같은 것을 잘하는 아이로 만들려면 아이들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스스로 책을 펴서 들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한다. 심심해 몸을 뒤틀고, 방바닥을 파며 구르더라도 스스로 놀 거리를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자. 32 전문가들은 아이가 어른이 되길 원한다면 어른으로 대접하라고 한다. 특히 아이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려면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해서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35 툭하면 약을 먹이는 아이들에 비해 살짝 방치한 아이들의 면역력이 훨씬 좋듯, 괴로움과 실패를 경험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반복한 아이들이 결국 자기주도적인 인생을 살아나가는 성인으로 성장할 확률이 높다. ... 우리 나라에는 아이를 전학시키지 않고도 다른 지역의 학교에 한 달씩 보낼 수 있는 '위탁교육제도'라는 것이 있다. 36 당연한 얘기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살게 돼 있다. 51 규칙을 세우면 예외를 두지 않아야 아이들이 따라준다. 55 딱히 혼날 짓을 한 건 아니지만 내 맘에 들지 않았을때, 특히 다른 여러가지 이유로 내 감정 상태가 예민한데 아이마저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라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이다. '빨리 해'라는 재촉도, '그만해'라는 금지도 결국은 나의 속도와 행동방식을 기준에 놓고 아이를 재단하려 들 때 나오는 말들이다. 59 잔소리도 습관이다. 좀 더 느긋한 엄마가 되겟다는 다짐이 다짐에서 그치지 않으려면 아이들과 약속을 하고 규칙을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61 '불평없는 세상 프로젝트'. 미국 캔자스시티의 한 목사가 시작한 이 캠페인은 '모든 불행은 불평을 말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도서 <불평 없이 살아가기>) 62 제주도에서 같은 곳을 함께 여행했더라도 아이가 본 풍경과 엄마가 본 풍경은 다를 것이다. 78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상관 없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몇 번이고 반복해서 대상이 되는 풍경을 보고 관찰햇다는 것이 중요하다. 80 아이가 무언가를 요구하기도 전에 미리 알아서 갖다 바치는 그 정성과 관심만큼, 엄마들이 스스로에 대해 정성을 쏟는지는 의문이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왜 이리도 사는 게 헛헛한지 불쑥불쑥 짜증이 솟구치고 불안한 마음이 되는 이유는 뭔지.. 조용히 귀 기울이기.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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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비루해지기 쉬우며, 자칫하면 찌그러지고 찌질해지기 쉬운 일상적인 삶이야말로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한 곳이고, 그곳이 '지혜에 대한 사랑'을 자처하는 철학이 달려들어야 세계라고 저는 믿습니다.  8


독재나 억압이 더욱 나쁜 것은 마치 그것이 사라지면 사람들이 자유로워질 것 같은 환상을 유포하기 때문이다. 동성애에 대한 금기가 더욱 나쁜 것은 마치 그것이 사라지면 동성애자들이 자유로워지리라는 안이한 발상을 배양하기 때문이다. 그믹와 거리가 먼 이성애자는 모두 자유롭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자유를 위해 모든 구소고가 억압이 사라져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이 때문이다.  13


제약이나 구속 대신 필연성과 대립되는 상태가 자유라고 믿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필연성이란 피할 수 없는 구속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필연성과 대비하여 '가능성'이,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자유의 폭으 ㄹ결정한다고들 한다.  13


돈이 많아 노동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 사람은 자유로울까?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니 자유로울 거라고?

자유를 부러워하는 게 아니라 돈 쓰는 걸 부러워하는 것이다. 자유란 돈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것이지 돈을 실컷 쓰는 게 아니다.  13-15


자유란 이런저런 조건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발행되는 자판기 티켓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든 나 자신이 만들어가야 할 세공품이다.

자유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갈 수 있는 '능력'과 결부된 것이다. 삶이나 행동의 방향과결부된 어떤 힘이나 능력이다. 

억압이나 구속은 그 자체로 자유와 반대되는 상태가 아니라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이 가동되는 출발선에 불과하다.  15


자유를 위해선 자신의 '자유의지'만이 아니라 자신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자신의 생각만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는 게 필요하다.  16


한 줌의 용기가 없다면 사실 자유로운 살밍란 말해봐야 공허한 것이고, 들어봐야 '남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용기는 고통을, 자유를 위해 넘어서야 할 저항으로 바꾼다. 

용기는 모든 것을 거는 어떤 도박적인 내기가 아니라 단지 '한 줌'의 용기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17


단 한 번의 거대한 결단보다 더 어려운 것은 매 순간의 삶에서 자유로운 걸음을 걷는 것이다. 매 순간을 갈 만한 길로 가는 것이고, 매일매일 살 만한 삶을 사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매 순간 진행되는 삶 자체를, 매번 내딛는 발걸음을 자유로운 삶으로 스스로 믿고 가는 법. 그것이 철학을 통해 배워야 할 삶의 지혜다.  19


이런 의미에서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필로-소피아(philo-sophia)는 '삶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필로-비오스(philo-bios)의 다른 이름이라고 나는 믿는다.

옳다고 주어지는 것이 정말 옳은지 다시 생각하고, 자신이 정말 긍정할 수 있는 좋은 삶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하는 것은 이 한 줌의 용기로 시작한다.  20



사건과 자유 -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진" 사건에 대하여


가령 교통사고는 물리학이나 생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노래 한 곡 들은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신체적 변화를 야기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얼른 치료하여 이전의 삶으로 되돌리려 한다. 그것 이전의 삶으로 최대한 되돌아가려 한다. 반면 그로 인한 신체적 변화를 받아들이고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사고 아닌 사건이 될 것이다. 

따라서 '사고'란, 그것이 실제로 나를 애초에 바라던 거소가 다른 곳으로 밀고 가더라도, "없었으면 좋았을" 어떤 것이다. 그로 인해 발생한 두 지점 간 간극의 폭은 그가 느끼는 불행의 크기를 뜻한다. 사고란말에 부정적인 색채가 담겨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그게 '사건'이 되는 것은 그로 인한 변화를 나의 새로운 삶으로 받아들이고 긍정함으로써다. 그것을 받아들인다 함은, 피할 수 없이 이미 내게 밀고 들어온 그것이 내 삶 안에 자리잡았음을 받아들임이며, 그것을 긍정한다 함은 그것으로 인한 변화를 새로운 삶의 기회로, 또다른 삶의 가능성으로 긍정함이다.

사건이란 어떤 일로 인해 발생한 곡절, 애초의 궤적에서 벗어난 이탈에 대한 긍정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에 사고가 많은 인생은 그 사고의 수와 크기만큼 안타깝고 불행하지만 , 사건이 많은 삶은 그 사건의 수와 크기만큼 풍요롭고 행복하다.  27



긍정과 자유 - 기적 같은 삶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다큐 영화 <서칭 포 슈가맨>

처음에 음반 제작자가 찾아왔을 때, 얼마나 기뻤을 것인가. 시를 쓰고 노래를 만들며 사는 멋진 삶이 다가왔다고 생각했을 게다. 대중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도, 혹은 그 이상도 가능할 것 같은 성공이 손을 내미는 것이리라 생각했을 게다. 그만큼 그것이 제작자도 놀랄 만한 실패로 끝났을 때 그가 느꼈을 실망은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참담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패 이후 로드리게스는 잠시 꿈꾸었던 무대 위의 화려함을 얼른 포기하고 어쩌면 남들보다 훨씬 어둡게 느껴졌을 무명의 일상 속으로 돌아간다. 좋아하던 음악을 접고 공장에서 노동을 하는 극히 평범한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공장에서 동료드로가 좀더 나은 삶을 위해 운동을 한다. 목소리를 내기 위해 반복해서 떨어지는 선거에 출마하고, 자식들을 책이 있는 삶으로 인도하는 그런 삶을 산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 다가올 머나먼 타국에서의 기적 같은 부활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은 바로 그 삶을, 큰 기대를 안고 시작했던 노래가 어떤 인기나 성공도 주지 못할 때, 그런 행운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희소한 일인지를 안다면, 정말 이것이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기적이고 아무도 모르는 기적이다. '비밀의 기적'이다.  33-34


각자에겐 각자의 자유가 있다. 좋든 싫든 자신이 안고 살아가야 할 각자의 몸이 있고, 그 각각의 몸에 깃든 능력이 있고, 각자의 몸이 펼칠 각자의 삶이 있다. 그 삶마다 가능한 각자의 자유와 행복이 있다. 각자가 서 있는 곳마다 다를 게 분명한 자유와 행복의 길이 있다. 모든 자유와 행복은 자신의 현재, 지금의 모모가 지금의 조건을 출발점으로 한다. 그 몸과 조건을 자기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자유와 행복의 가능성은 시작된다.  39



고통과 자유 - 피할 수 없는 고토으 그 '운명적인' 만남에 대하여


고통이란 '유기체'의 부적절한 삶의 방식에 대한 기관이나 세포들의 호소와 항의의 목소리고, 질병이란 그 부적절한 삶의 방식에 잠식된 신체의 비명소리다. 이 비명이나 항의의 몫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의식으로 신체 전반의 움직임을 장악한 '유기체'가 자신의 세포나 기관에 대해 무대포의 일방적인 독재를 시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독재의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모든 억압된 것은 되돌아온다는 ㅍ로이트의 말처럼, 억압된 세포와 기관의 고통 역시 되돌아온다. 유기체의 생명과 분리된 채 오직 자기만의 생존을 전면에 내세우며 증식하는 세포들로, 그런 세포를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세상에선 '암세포'라고 명명한다.  43-44


삶이란 어떤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있는게 아니라, 과정 그 자체가 목적이기에, 삶 전체를 걸고 어떤 것을 할 수 있다 함은 삶 자체와 대면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47


고통이 삶을 심오하게 하는 것은 단지 고통에 익숙해지는 훈련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배우려 하지 않는 자에겐 위대한 스승이나 책이 아무것ㅅ도 가르쳐줄 수 없듯이, 고통을 직시하고 고통에서 배우려 하지 안흔 한, 고통은 삶의 깊이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 고통은 고통을 긍정할 수 있는 자에게만, 삶의 심오함을 가르쳐주는 스승으로 온다. 고통을 통해 삶에 물음을 던지며, 고통을 스승으로 삼아 다른 방식으로 살기 위한 길을 찾고자 할 때, 그때 비로소 고통은 지혜로운 삶의 안내자가 된다. 

삶에 던지는 그 물음과 더불어, 그때마다의 답을 들고 현재 속으로 반복하여 되돌아올 때마다, 나는 다른 나로 되돌아온다. 이전의 나와 다른 새로운 내가 탄생한다.  48


강자와 약자..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과 만나고 대면하는 방식의 차이가 그 둘을 갈라놓는다. 약자는 가지보다 강한 자들에게서도 약점이나 단점을 찾지만, 강자는 자기보다 약한 자들에게서도 강점이나 장점을 찾는다.  50


논평이나 비판을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약자들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자신의 약함을 알기에 항상 방어하려는 '본능'이 작동하기 때문이고, 또한 자신의 약함이 드러날까 두려워 날을 세워 듣기 때문이다. 반면 강자는 비판이나 비난에도 동요하지 않으며 칭찬 또한 가볍게 넘긴다.  51


세상에 오직 두 가지 길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필경 거짓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번에는 어떤 방식으로 대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53



기쁨과 자유 - 기쁨의 윤리학과 웃음의 비행술


스피노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양태(mode)'라고 부른다. 사람도 양태, 개도 양태, 컴퓨터도 양태, 물도 양태다. 세상사란 모두 양태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56


신체와 영혼에 발생하는 변화는 어떤 경우든 이 두 가지 방향뿐이다. 수많은 감정들은 강도나 양산을 달리하며 나타나는 이 기쁨과 슬픔의 다른 표현들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감정이나 정서를 크게 둘로 나눈 것이다.  57



꿈과 자유 - 꿈꾸는 영혼의 감옥


돈을 잘 벌면서도 돈 버는 것 말고는 꿈꿀 줄 모른다면 우리의 영혼은 돈에 갇혀 있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만나도 가족밖에는 꿈꿀 줄 모른다면, 우리의 영혼은 가족에 갇혀 있는 것이다.  77



매혹과 자유 - 술병 속의 연인이 내미는 매혹의 손


사물을 인간의 이 목적성 안에서 본다는 것은, 사물이 갖고 있는 힘과 생명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사물이 내미는 손을 감지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 사물과 만나는 어떤 사건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뜻대로 쓰다가 맘에 안 들면 주저 없이 내버리는 이들에게서 사물의 '주인'으로서 행사하는 능력이 아니라, 다가오 ㄴ이의 매력으 ㄹ알아보지 못하는 안목 없는 이의 무능력을 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89



선물과 자유 - 아, 존재 자체만으로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 있다면...


의무가 된 선물, 답례의 의무를 통해 '교환'되는 선물은 과연 선물일까? 데리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답례가 의무가 되는 순간, 선물은 되갚아야 할 채무가 되기 때문이다.  124


  

돈과 자유 - 헝그리 정신과 궁상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려면, 돈을 적게 벌어야 하고, 그러러면 돈을 적게 써야 한다.  133


자본주의와 부에 대해 속속들이 연구했던 맑스는 이런 '경제적 부' 개념과 대비하여, '실질적인 부'란 필요노동시간(먹고사는 데 필요한 비용을 버는 데 사용되는 시간) 이외의 가처분시간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정치경제학 비판요강2>). 쉽게 말하면, 돈을 버는 데 투여되는 시간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부'라는 것이고, 그런 시간이 많은 이들이 '부유한 자'라는 것이다.  135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선 시간만 필요한 게 아니라 돈도 필요하고 그걸 할 수 있는 조건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136


부유함에 대한 이런 관념은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가처분시간을 대개 뻔한 방식으로 패턴화된 소비를 위해 사용하게 한다. 밀리는 자동차 안에서 시간을 보낼 게 뻔함에도 주말이면 자동차를 끌고 나서는 것은, 다른 돈 있는 이들처럼 여가나 레저를 즐기고 있다는 관념을 향유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잘 알려진 관광지를 돌며,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 거기 있음을 확인하고, 이미 익숙한 방식의 소비와 향유 바익을 반복하는 그 패턴화된 소비는 이제 일종의 의무가 된 것 같다. 모두가 하고 있기에 나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핍감과 불안함을 느끼게 되어 어떻게든 동참해야 할 것 같은, 또다른 '일'이 된 듯하다.

나는 실질적 부를 돈을 비롯한 '가처분자원'이나 맑스가 말한 가처분시간보다는 오히려 그런 것을 자신의 삶을 위해 '처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가처분능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간이 있고 돈이 있어도, 능력이 없다면 그것들은 자유를 위한 자원이 아니라 단순한 소비와 소모의 대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139


헝그리 정신은 돈을 쓰지 않는 법이 아니라 돈을 쓰는 법이다. 돈을 잘 쓰기 위한 삶의 원칙이고 이념 내지 철학이다.  142


헝그리 정신은 무엇보다 돈에 대해 '능동적'임을 뜻한다. 돈에 대해 능동적이라 함은 돈을 자기 뜻대로 부리며 산다는 뜻이다...

궁상을 떠는 것은 '대타적으로는' 남들 앞에서 없는 티를 내는 것이고, '대자적으로는' 궁핍 앞에서 사고나 행동이 위축되거나 빈약해지는 것이다...

반면 헝그리 정신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의 삶을 위해 능동적으로 가난을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가난 앞에서 당당하다.  143


항상 검소하게 살고자 하고 엔간하면 돈 쓸 일을 안 만들지만, 써야 할 일이 있을 때 머뭇거리면 안 된다.  145



감각의 자유 - 감각의 자유, 혹은 피 냄새가 나지 않는 비상의 방법에 대하여


감각의 갑옷만큼 우리의 일상적 삶을 구속하고 자유로움을 제한하는 것도 찾기 힘들다. 감각의 구속은 종종 너무 자연스러워서 때로 우리는 구속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기 어렵다. 그 구속은 우리에게 편안함을 준다.  150


철학자 들뢰즈는 진정한 '넘어섬의 경험', '초월의 경험'이란 지각 불가능한 것과의 피할 수 없는 만남엣 온다고 말한 적이 있다(<차이와 반복>). 감각적으로 피할 수 없게 닥쳐왔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없는 어떤 것과의 만남, 그것이 지각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지금의 나의 감각이나 지각능력을 벗어나 있어서일 것이다. 그 지각될 수 없는 것을 향해, 그 알 수 없는 것의 지각을 향해 나의 감각을 밀고 나아갈 때, 나는 나의 감각능력을, 나의 경험능력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을 경험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예컨대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예술작품이나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알기 어려운 책들은, 그것을 피하고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감각능력이나 사고능력을 확장해준다. "문제는 감각의 착란을 통해서 미지의 것에 도달하는 것이다."(랭보)  155-156


자유란 비장한 결단을 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혀용된 영웅들의 문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이들 각자에게 주어진 각자의 문이다. 그런데도 그리 들어가는 이가 적은 것은, 카프카의 유명한 우화 [법 앞에서]의 농부처럼, 그게 자신을 위한 문임에도 평생 그 앞에서 들어갈 수 있을지 찔러보고 그게 정말 나를 위한 문인지 물어볼 뿐, 밀치고 들어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농부처럼 다들 그 앞에서 늙어죽기 때문이다. 

감각의 자유란 익숙하지 않은 것, 새롭고 이질적인 것들 안에 깃들어 있는 어떤 것을 감지하는 능력이다. 처음에는 불편하기에 피하고 싶은 어떤 것을 향해 귀를 여는 작은 용기면 누구나 올라가기 시작하 수 있는 평번한 계단이다. 따라서 어떤 것 앞에서 그저 편안하다면 그것은 혹시 구속의 징표는 아닌지 한번쯤 의심해야 한다.   156-157



감정과 자유 - 이 은밀한 복수의 드라마를 어떻게 정지시킬 것인가?


'능동적인 것'은 먼저 자극하느냐 나중에 반응하느냐의 문제만은 아니다.

능동적 감정은 반동적 감정의 자극에 다르게 '반응'하는 방식으로 시작하기도 한다.   166


'능동적인' 의미의 사랑이란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고, 능동적인 우정이란 친구의 행동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믿고 좋아하는 것 아닐까? 결코 쉬운인은 아니겠지만.  168



지성과 자유 - 누구에게나 주어진, 누구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선물에 대하여 


'유식한' 스승은 자신이 아는 것을 학생들에게 알려주는 데 그치지만, 무지한 스승은 학생 스스로 자신이 모르는 것을 배우게 한다.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가르친다.  173



욕망과 자유 - 언제까지 우리는 '그들의 삶'을 살 것인가?


나는 10년 이상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거의 모든 강의엣 학생들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 첫째 질문에 '저는 이러저러한 것을 잘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답한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었다. 둘째 질문에서는 약간의 단서를 단다. 지금 밥 먹고 싶다, 요즘 연애하고 싶다, 장래에 돈을 많이 벌고 싶다 식의 대답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데, 그걸 물으려는 게 아니라고. 무언가를 진정 하고 싶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걸고 하고 싶은 게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지, 최소한 10년이나 20년 정도는 '아, 이거 하고 살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게 있을 때 그렇다고 답해야 한다고, 이 질문은 앞의 것보다 좀더 쉬운 편인지, 지금까지 다섯 명 정도가 답을 했다. 하지만 10년 넘게 수많은 학생들 가운데 다섯 명 정도라니, 정말 놀라운 숫자 아닌가! 

이 질문을 받으면, 많은 경우 대답 이전에 자신이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없다는 사실에 놀란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이고, 자신의 능력과 욕망에 대한 질문인데, 그것조차 자신이 알고 있지 못하고 있는 셈이니까.  207


어떤 것을 해보지 않고선 내가 그걸 좋아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해본다는 것도 그렇다. 잠시 맛이나 보듯, 혹은 며칠짜리 캠프에 들어가보듯, 찔러보듯이 잠시 해보는 것으로는 그걸 정말 좋아할 수 있을지 아닌지 알기 어렵다. 처음엔 재미있어 보여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어떤 것도 때론 단조로울 수도 있고 때론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힘겨운 터널을 필경 하나는 지나가야 한다. 즉 어떤 일을 정말 잘할 수 있을지, 좋아할 수 있을지 알기 위해선, 특별한 재능이나 인연이 있는 게 아니면, 필경 고통이나 지루함을 수반하는 어려움의 문턱과 대면하고 그것을 넘어선 깊이까지 들어가보아야 한다.  211


프란츠 카프카는 아버지로 대변되는 '그들'의 욕망에 의해, 또한 스스로 먹고살기 위해 보험회사 직원이 되어 일을 했지만, 자신이 정말 하고자 했던 것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했다. 밤, '그들'의 욕망이 잠드는 시간에, 그는 자신이 하고 싶던 것을 했다. <아동의 탄생>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역사가 필리프 아리에스는 '일요 역사가'를 자칭했다. 돈을 벌어야 했기에 대학원에 가지못하고 출판사에서 일을 해야 했지만, '일요일'로 표현된느, 노동이 중단되는 시간에 자신이 정작 하고 싶었던 역사 연구를 계속했다. 카프카도 아리에스도, '그들'이 말하는 삶을 피할 순 없었지만, 그 사이에서, 그들의 욕망 사이에 있는 빈틈에서 자신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216


나의 삶을 시작하기에 '이미 늦었어'의 시제란 없는 것이라고, 아무리 늦었다고 해도 시작하지 않고 끝낼 순 없는 거 아니냐고.  219



인정욕망과 자유 - 날 선 자존심과 '그저 웃는' 자긍심의 차이에 대하여


'나의 욕망'이라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은 사실상 엄마, 아버지, 사회 등 '타자'의 욕망이란 것이다. 인정욕망이 ㅡㄱ 타자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삼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무의식이라는 심층의 깊이에까지 침투한 타자의 욕망이다. 라캉이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224


인간의 본질로까지 소급해서 보면, 칭찬이나 직접적인 인정을 구하는 경우는 물론, 그렇지 않은 욕망까지 모두 인정욕망이 된다. 사실일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우리는 필경 남의 인정을 구하는 삶을 사는 존재가 되고 만다. 이는 그들의 삶, 그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아닐까?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과, 남의 시선을 의식해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하는 행동을, 둘 다 어차피 그게 그거라고 말해도 좋을까? 실은 그걸 구별하는 것이야말로 단지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결정적인 것 아닐까?  225


자긍심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긍지의 표현이다. 그것은 남이 아닌 자신의 시선, 자신의 척도에 스스로를 비추어 본다. 남의 인정을 구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확신하는 것,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에 비추어 자신이 잘했는지, 잘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기 삶에 자긍심을 가진 이라면, 가난을 감추고자 하지도 않을 것이며, 가난이 드러난다고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자신이 선택한 것의 일부고, 자신이 긍정하려는 것이니까. 왜 그런 식으로 사느냐고 누가 물으면, 굳이 해명할 필요도 느끼지 못할 것이고, 누가 오해할까 걱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잘 알려진 김상용의 시에서처럼 "왜 사냐건 웃지요" 식으로 여유 있는 웃음 한 번이면 충분할 것이다. 오직 자기가 세운 기준만이 자기를 흔들 것이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자 그럼 다시 한번'하며 자신이 긍정할 수 있는 곳을 향해 스스로를 일으켜세우고 새로 시작하도록 촉발할 것이다.

자존심은 약한 자들이 자신의 약함을 가리기 위한 방어기제고, 자긍심은 강한 자들이 스스로 갖고 있는 힘에 대한 긍정이다. 전자는 남을 향한 것이라면, 후자는 자기를 향한 것이다.  232


긍정의 긍정.

첫번째 긍정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 잘할 수 있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라면, 두번째 긍정은 그렇게 자신이 긍정하여 선택한 삶으로인해 야기되는 어떤 결과도 긍정하는 것이다.  233


자유로운 삶, 그것은 두 번의 긍정에서 온다.  234



속도와 자유 - 속도의 강박증과 춤추는 신체의 시간


함께 산다는 것은 속도를 맞추어 사는 것이다. 걸음걸이의 속도를 맞추지 않고선 함께 걸을 수 없는 것처럼, 속도를 맞추지 않고선 함께 행동할 수 없고, 함께 대화할 수 없으며, 함께 생활할 수 없다. 물론 속도를 맞춘단느 것은 숫자로 표시되는 어떤 크기를 같은 값이 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신체와 영혼마다 각기 다른 속도가 있기에, 그것을 어느 하나에 일치시키려 한다면 '일치'는 자기 속도에 대한 억압이 된다. 속도를 맞춘다는 것은, 가령 걸음이 빠른 이가 같이 가는 느린 이의 속도에 자기 속도를 '맞추려고'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완급을 조절하는 것이며, 앞서 갔다면 기다려주는 것이다. 느린이도 평소보다는 빨리 걸으며 속도를 '맞추려고'할 것이다.  240



공부와 자유 - 공부와 학인, 혹은 학생부군손오공신위


학습은 머리로 하는 것이라면, 공부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몸에 붙지 않은 것, 몸으로 실철한 수 없는 것은, 절대적 진리라도 '죽은 문구(死句)'에 지나지 않는다.  254


공부는 학습보다 훨씬 어렵다. 알아도 아는 게 아니니 말이다. 항상 자신의 물음을 던지고, 자신의 감각과 생각으로 따져보고 몸에 붙여야 그 일부라도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는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하기 어렵다'는 걸 이유로 배우고 알려는 노력을 냉소해선 안 도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그대로 실행하며 사느냐고 누가 물었을 때, "그렇진 못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애쓰며 산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공부하는 학인의 삶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앴는 마음을 흔히 향상심(向上心 향하다 향, 윗 상, 마음 심)이라 한다. 그 향상심이, 옳다고 아는 것을 조금식 몸에 붙여가는 힘일 것이다.  255


공부를 몸으로 하는 것이지만, '뜻한 대로' 몸을 움직여 원하는 것을 이루는 능력이나 기술에 머문다면, 그것은 아직 공부를 시작한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몸을 움직이는 자신의 '뜻'을 주시하면서 그것을 다스리고 연마하지 못한다면, 몸에 붙은 기예는 재앙의 원천이 될 것이다...

공부는 몸의 연마, 기술의 연마에서 마음의 연마로 넘어갈 때, 밖을 향하던 시선이 자신을 향할 때 시작된다.  257


밖을 향해 있던 선이 안을 향한다 함은 대상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향해 돌리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몸은 관성적이고 습관적인 지금까지의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향하게 된다. 장인적인 기술이나 술법의 숙련은 필요한 동작을 아무생각 없이 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습관적인 움직임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익숙해진 순간, 습관적으로 행하게 한다. 습관이 되고 나면 생각 없이 행하게 하고, 관성의 선을 따라가게 한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것은 그 습관적 관성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이런 것을 '행(行)을 닦는다(修)'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부는 '수(修)-행(行)'이다. 그것은 삶에 던진 시선을 통해 길어올린 다른 삶의 가능성, 아직 살아보지 않은 삶의 가능성을 향해 가는 것이다. 공부란 그런 식으로 다른 삶을, 도래할 삶을 만들어 낸다.  259


도래할 삶을 만드는 것은 이전의 삶에 기대어 그것을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은 난감한 딜레마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습관이나 기억에 기대면서 동시에 그것에 의해 유지되는 동일성을 벗어나야 한다.  261



무아와 자유 - 나 없는 자유의 유쾌한 웃음을 위하여


차이의 철학이란 차이의 긍정을 주장하는 철학이다. 이것의 가장 단순하고 통속적인 버전은 나와 다른 차이를 인정하자는 주장이다. 자기가 옳다는 믿음이 강하면 나와 다른 차이를 인정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269


좀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차이의 긍정이란, 나와 다른 어떤 것과의 만남을 긍정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차이를, 나를 바꿀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이다. 

나를 내려놓을 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척도로서의 나를, 아상(我相 나 아, 서로 상)을 내려놓을 때, 차이의 철학은 비로소 가능하게 될 것이다.  270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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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저자와 독자의 두뇌를 이어주는 끈이다. 책을 통해 저자의 두뇌 속 경험이 독자의 두뇌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래서 잘 쓴 책은 독자의 두뇌를 크게 뒤흔든다.  40


사실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먼저 말씀드리자면 너무 많은 책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글 쓰는 것 자체가 업인 작가분들은 경우가 다르겠지만, 그냥 자기의 경험을 남기고 싶은 살마이 내 얘기를 반드시 책이라는 형태로 써야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자기의 추억을 남기고 싶으면 블로그를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책이 될 만한 내용이 명확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과시욕이나, 이런 것도 해봤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생각으로는 책이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굳이 말씀드리자면 저희 아버지께서 저에게 해주신 조언을 그대로 전해 드리고 싶어요. 솔직하고 진정성 있게 쓰는 것.(<3650일, 하드코어 세계일주>저자 고은초 인터뷰)  45


아르바이트로 보습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칠 때, 같은 학원의 나이 지긋한 문학 선생님께 상담을 받았다. 

"제가 머릿속에 생각은 많은데 막상 글을 쓰면 분량이 너무 적습니다. 솔직히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멋진 아이디어가 넘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솟아오르는 거 같은데 왜 글은 다섯 줄을 못 넘을까요?"

"승수 씨, 머릿속에 쓸 거리가 많은데 글이 안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승수 씨가 글로 쓸 수 있는 딱 그만큼만 머릿속에 들어 있는겁니다."  47


글의 재료는 '경험'이다. 고로 글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경험의 부재에 있다.  49


'당신은 책이 나올 만한 삶을 살고 있는가?'

글은 '살아지는' 삶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삶에서 나온다는 것을 명심하라.  53


상상 가능한, 아니 상상을 초월하는 거의 모든 소재가 책이 된다.

글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것들.

첫째, 자기만의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인문사회 편집자로서 최고의 실력자로 꼽히는 한 편집자와 만나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유행에 상관없이 누가 뭐라 하든 자기 관심사를 가지고 얘기하는 사람은 결국 주위에 사람이 모입니다."

둘째, 자기만의 관점과 시각이 있어야 한다.  55-58


독자가 왜 돈을 내고 내 책을 사야 하는가? 이 질문에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당신이 쓰는 원고가 책이 될 수 있다. 책의 콘셉트가 좋다는 말은 독자가 그 책을 살 이유가 확실하다는 뜻이다.  62-63



인터뷰 - 은수연 <눈물도 짗을 만나면 반짝인다> 저자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이런 얘기가 나와요.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69

"저는 책을 쓰라고 하고 싶지는 않아요. 글을 쓰라고 하고 싶어요...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나의 삶을 정리하고 그냥 계속 글을 쓰다 보면 그 글이 묶여 책이 되더라고요.  73



글을 쓴다는 것을 그저 자신의 생각을 문자로 표현하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런 사람들 대부분이 글을 쓰면서 똥을 싼다. 글을 써야지 왜 배설을 하는가.  78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 필요한 것, 그것은 바로 '존중과 겸손'이다. 독자를 대하는 저자의 태도가 바로 그래야 한다.  92


책 작업할 때마다 출판사는 대체적으로 20자 원고지 1,000매 분량의 원고를 요구한다.  118


보통 A4 용지 1장에 원고지 8장 분량이 들어가니 원고지 1,000장은 A4 용지로 치자면 125장 내외가 된다.  119


원고지 1,000장이라는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설계도가 필요하다. 그게 바로 목차다.  120


대부분의 경우 책을 쓰기 전에 목차부터 짜는 것이 좋다. 목차를 제대로 짜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글을 쓰다 보면 책의 균형이 개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특히 용두사미가 되는 경우가 흔하다.  121


A4 용지 4장 쓰는 비법.

첫째, 글의 재료를 늘어놓아라.

주제와 관련해 당신이 쓸 수있는 가능한 모든 재료를 늘어놓으시라. 

둘째, 글을 꼭 도입부부터 써야 한다는 강박을 버려라.

카레라이스를 하는데 꼭 당근 먼저 깍아놓을 필요가 있는가?  122-124


'30초 안에 소설을 잘 쓰는 법을 가르쳐 드리죠. '봄'에 대해 쓰고 싶다면 이번 봄에 무엇을 느꼈는지 말하지 말고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하세요. '사랑'에 대해 쓰지 말고 사랑할 때 연인과 함게 걸었던 길, 먹었던 음식, 봤던 영화에 대해 쓰세요. 감정은 절대로 직접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세요. 전달되는 건 오직 우리가 형식적이라고 부를 만한 것뿐이에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한다면 앞으로는 봄에 시간을 내 특정한 꽅을 보러 다니고 애인과 함께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그 맛이 어땠는지, 그날의 날씨는 어땠는지를 기억하려 애쓰세요. 강의끝.' - 김연수 <우리가 보낸 순간> 중에서  158


슬픔을 표현하려면 슬펐던 경험을 '디테일'을 살려 자세히 써야 한다..

사람이란 존재는 오감을 통해 세상의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통해 감정의 변화를 겪는다. 그렇다면 내 글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내 글로 내가 본 것을 생생하게 보여줘야 한다. 내가 냄새 맡은 것을 냄새 맡게 해줘야 한다. 내가 느낀 촉감을 최대한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테크닉이 아니다. 글쓰기란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다.  159


올바른 사회질서란 뭐고, 알맞은 사회적 성장은 뭐냐? 1906년에, 훗날 스탠퍼드에서 교육대 학장이 도니 엘우드 커벌리가 대답을 내놓았다. 학교는 공장이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 공장에서는 원료인 학생들을 주무르고 틀에 부어 최종 생산물로 빚어내게 될 것이다.(중략) (학생들) 백 명 가운데 아흔아홉 명은 자동인형이고, 정해준 길로 주의를 기울여 걸어들어 가고, 정해준 관행을 주의해서 따른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효과적인 교육의 결과이다 그 교육이란, 전문용어로 정의하면, 개체의 포섭이다."  172


과연 '개성'이란 무엇인가? 그저 남과 다른 것 정도를 개성이라고 짐작하는 경우가 많다.. 

진정한 개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점의 전환'에서 나온다.  174


개성이란 '사회화'와 '교육'을 통해 사건과 사물 및 현상을 한쪽 방향에서만 보도록 길들여진 상태, 바로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다.  175



인터뷰 - 김상태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저자

인생에서 자신의 책을 쓰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우선 완성해보는 게 중요합니다. 완성해보면 다릅니다. 달라요. 그리고 냉정하게 출판사 열 군데 백 군데에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출판사한테 모욕받는 겁니다. 기꺼이요. 그리고 또 쓰는 거죠. 하하하.

이게 자신감이죠. 솔직히 모욕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모욕받는 것은 대중들이 일상을 살아나가는 방법이에요. 바람이 불면 풀이 눕듯 대중은 눕는 거죠. 성숙한 대중은 모욕받는 것에 능란합니다. 회사 가면 모욕당하잖아요. 그러면서도 일 잘하거든요. 스트레스는 좀 받겠지만요. 자신감이란 건 뭐냐면 '모욕할 테면 해보라'는 자세예요. 이런 태도가 생기는 것을 지배자들은 제일 무서워해요. 모욕하는데 기가 안 죽거든요. 황석영 같은 대가가 원고를 쓰면 다들 빌면서 원고를 달라고 하겠죠. 대중이 원고를 쓰면 누가 예뻐하겠어요?

목표를 정확하게 설정하고, 자신의 역량을 명확하게 판단하고, 완성시키고, 그 다음에 책으로 안 나오면 그냥 원고를 베개로 베고 자는 겁니다. 기꺼이 모욕당하고 모욕당하는 것을 즐겨야죠. 출판사에 보낼 때 이메일로 보내는데 돈도 안 들잖아요? 막 보내요. 그래도 끝까지 연락이 안 오면, 뭐 딴 거 쓰는 거죠. 하하하. 자신감이 있어야 돼요. 깡다구 말이에요. 뭐 안 되면 그만이잖아요."  200-201

"제트가기 하늘을 지나가면 뒤에 연기가 남잖아요? 활동가는 지나가면 알 수 없는 흔적이 남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에리히 프롬이 그런 얘기를 했어요. 감정적 지식이 아닌 것은 지식이 아니라고요. 단순히 알기만 했다고 사람이 변하지는 않잖아요... 사람은 논리로 설득되지 않아요. 지나갔을 때 흔적이 남는 사람, 그런 사람이 변화를 일으키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데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모든 살마들이 활동가라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들은 지나가면 흔적이 있어요. 영향을 주겠다. 어쩌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끊임없이 사는 거예요. 계속해서, 자기가 생각하기에 의미 있고 재미있는 것을 흥미롭게 열심히 생산하는 겁니다. 책을 쓰는 일 역시 흔적을 남기는 것이죠. 그리고 책이라는 흔적은 동시대에만 남는 것도 아닙니다." 203-204


글솜씨를 키우는 8가지 요령

글 솜씨는 단시일에 비약적으로 늘지 않는다. 꾸준히 쓰는 것 외에 다른 왕도는 없다. 

- 짧은 문장이 바람직하다.

- 주어와 서술어는 호응해야 한다.

'내 목표는 우리 회사에서 가장 높은 실적을 올리려고 한다.'

'내 목표'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나'를 제치고 가장 높은 실적을 올리려 한단 말인가.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한다.

'내 목표는 우리 회사에서 가장 높은 실적을 올리는 것이다.'

주어-서술어뿐만 아니라 목적어-서술어도 맞춰야 한다. 이런 문장은 어떤가? 

'겨울철에는 가습기나 빨래를 널어 실내 습도를 조절해야 한다.' 

빨래만 널면 됐지, 가습기까지 너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은가. 이렇게 수정해야 한다.

'겨울철에는 가습기를 틀거나 빨래를 널어 실내 습도를 조절해야 한다.'

- 수동태보다 능동태가 좋다. 

'맥주는 보리로 만들어진다' 

많은 사람이 이 문장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문장은 '맥주는 보리로 만든다'로 바꾸는 것이 훨씬 더 매끄럽고 자연스럽다. 

'대학 전공을 결정할 때는 신중한 선택이 요구된다.'

번잡스럽게 '신중한 선택이 요구될'것까지도 없다. 다음과 같이 바꾸자. '대학 전공을 결정할 때는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이런 경우는 어떨까?

'무상의료, 무상교육 같은 복지정택이 수립되어야 한다.'

언제까지 수동태로 쓸 것인가? 이렇게 바꾸자.

'무상의료, 무상교육 같은 복지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 지시어를 남용하지 마라.

'그는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말했다.'

동생은 형이 자기 아내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형수에게 알렸다는 뜻인가? 이런 '막장' 문장은 의외로 흔하다. 지시어 남용은 뻥 뚫린 고속도로를 놔두고 일부러 좁고 구불구불한 길로 돌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바꿔야 한다.

'이몽룡은 변학도가 춘향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월매에게 말했다.'

- 단락은 글의 호흡이다.

- 접속사는 글의 윤활유

- 궁극의 비법, 소리 내서 읽기

인간의 문명 진화 과정을 보면 문자 언어보다 음성 언어가 먼저 등장했다. 

문자 언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음성 언어를 시각화한 것이다. 때문에 소리 내어 읽었을 때 자연스러운 글이 좋은 글이다.   205-225



인터뷰 - 권미경 편집자 

"비슷비슷한 원고를 주시는 분들의 가장 큰 공통점이 있어요. 별로 자기 점검을 안 한다는 거예요."  243

수많은 투고자들이 다들 자기 이야기 하는 데만 바쁠 뿐, 정작 책을 내줄 출판사가 어떤 원고를 요구하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얘기다.  244



인터뷰 - 이원석 <거대한 사기극> 저자

"대중은 일반적으로 현재 주어진 사회 속, 그러니까 현실 속에서만 살아갑니다. 마르쿠제가 얘기했던 1차원적 사회인 거죠. 그 속에서 남들을 기준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남들이 좋아하는 대학, 남들이 좋아하는 직정을 추구하게 되죠. 우리 집이 강남에 있으면 자랑스럽고 평수가 50평이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요. 저는 한국 사회에서 대중들의 '욕망'이 바뀌기를 바랍니다. 입맛이 달라져서 맵지 않고 짜지 않고 달지 않은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욕망이 달라져서 큰 평수, 많은 배기량, 좋은 학벌 같은 것에 휘둘리지 ㅇ낳을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어요. 시간이라는 테스트를 거쳐 살아남은 고전은 현 사회를 넘어서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 스스로를 점검해졸 수 있게 만듭니다. 

인문고전을 열심히 읽으면 우리의 입맛과 욕망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어요. 그것이 사회를 바꾸는 첫 발걸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 다음은 사람들끼리 연대를 해야 합니다. 혼자만 인문고전 읽고만다면 의미가 없어요."  284-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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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위험에 노출된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그런 상황에 저절로 면역이 되는 건 아니었다.  57


그들을 만나게 한 우연..

샘은 평상시 퇴근할 때 절대로 타임스퀘어 쪽으로 가지 않았다. 줄리에트 역시 갑자기 외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상황이 맞물리며 결국 그들은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타임스퀘어 쪽으로 가게 만든 순간적인 변덕에 감사하면서 인생이란 정말로 신비롭고 오묘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우연이 아니었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런 상황을 감쪽같이 연출해낼 수 있단 말인가? 일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존재를 뒤흔드는 건 바로 작은 모래 알갱이일지도 모른다.  98


무엇 때문에 우리는 삶에 집착할까? 무엇 때문에 우리는 행운을 바라는 걸까? 수없이 벌어지는 일들 속에서 우리의 자유의지는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걸까? 삶의 게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일까?  226


사람들은 왜 겉모습이 아름다우면 마음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왜 모두가 젊고 날씬해지고 싶어 안달하는 시대에 살고 있을까? 어느 시기가 지나면 모두 부질없이 사라지고 말 가치인데도.  227


인생에서 내가 배운것, 

그걸 몇 마디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네.

누군가가 날 사랑해주는 날, 그 날은 날씨가 아주 좋아!

나는 미보다 더 멋진 표현을 모른다네. 날씨가 정말 좋아! - 장 가뱅이 부른 노래 <난 이제 알아> 중에서  239



우리의 역사는 바로 그 1초에서 비롯되었죠.  243


내가 이 삶을 축복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있기 때문이다. - 크리스티앙 보뱅  282



마약 앞에서는 누구나 똑같다. 처음에는 허세를 부리며 자존심을 내세우지만 결코 금단 증세를 이겨내지 못했다. 서서히 약에 중독되고 나면 하나같이 자존심과 수치심을 내팽개쳐버리고 요구하는 대로 따를 준비를 갖춘 채 그의 아파트 문을 두드리게 되어 있었다.  302


과연 인간의 삶은 하나의 합목적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삶이란 단지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불과한 것일까? 그리고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죽음이란 단지 또 다른 삶, 우리 모두가 가게 될 저 세계를 향한 통로를 열어주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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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가격. 사람들은 흔히 사회적 가격 때문에 열등감에 빠져 주눅이 들거나 자신감을 잃거나 갈등에 시달리곤 합니다. 

열등감이란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들 때문에 스스로 고통을 짊어지고 괴로워하는 갈등입니다.  17


만약 모기가 잠자리만큼 크다면 언제든지 때려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기에게 화를 내는 까닭은 바로 눈에 잘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답답하게 여기는 것은 아마도 우리 안에 모기 같은 존재가 도사리고 있어서 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보달것없어 보이는 우리 마음입니다.  22


스승께서 던지신 말씀

"쥐는 쥐약인 줄 알면 먹지 않는데, 사람은 쥐약인 줄 알면서도 먹는다."

"아주 뜨거운 물잔은 얼른 내려놓으면 되는데, 붙잡고 어쩔 줄 모르니 델 수밖에 없다."  33


세상은 뱃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끌려다니며 산다는것은 바보짓입니다.  35


왜 사십니까?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얹고 차분히 생각해 보십시오.  40


저도 중세 철학자들의 흉내를 내면서 우리 사회의 명망가들을 찾아다니며 인생에 대해 물은 적이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인생을 진지하게 산 어른들은 대부분 '호방하게 살라'고 했습니다. 정말 소문이 날 만큼 인생을 호방하게 산 어른들은 대체로 '진지하게 살라'고 충고했습니다.

저는 진지하게 사는 것과 호방하게 사는 문제를 가지고 다시 한 번 묻고 다녔습니다. 결국 얻어낸 결론은 진지함과 호방함을 함께 선택함이 현명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인생을 진지하고 호방하게 사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지혜입니다.  49-50


자존심은 스스로 존엄하다는 걸 인정하고, 자신이 존귀하듯 나 아닌 다른 모든 것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빈다. 자신만을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은 자만심입니다.  61


내 몸에서 악취가 나면 다른 향을 느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혼을 깨끗이 하지 않으면 다른 영혼의 향기를 맡을 수 없습니다.  102


김수환 추기경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 포용, 자기 낮춤이 성행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  108


덕은 자기 영혼의 생김새를 예측할 수 있는 거울이자 개량기 입니다. 베풂은 자비심뿐 아니라 자신을 어여쁘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나이 들수록 품격이 생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덕을 푼푼히 베풀며 살아왔을 겁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잘 가꾼 표시가 나는 것입니다.  109


세상에 널리 아려진 큰 스승을 만나려면 베움의 자세가 확고하고 모진 가르침을 따를 각오가 남달라야 합니다. 그러나 참 스승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참스승은 도처에 있을 수 있습니다.  121


어느 목사님이 주례사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기에 결혼하지 말고 사랑하기 위해 결혼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134


사랑에 굶주리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넘치는 법이 없습니다. 주는 쪽에서 아무리 지극해도 받는 쪽에선 부족하고 아쉽고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137


화병은 불안, 불신, 공포, 분노, 증오, 답답, 우울 등으로 인해 생기는 병입니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보면 화병은 핑계 때문에 생긴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고 생각하며 분노하고 답답해하기 때문에 울화를 삭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십시오, 아픈 것도, 화난 것도, 분노한 것도, 짜증난 것도 모두 내 탓입니다. 상대방 때문에 화병이 생겼다고 주장하겠지만, 자신의 영혼이 허약하기에 생긴 핑계이기 쉽습니다.  159


성철 대 선사의 말씀은 이랬습니다. "대나무처럼 살라!"

대나무가 가늘고 길면서도 모진 바람에 꺾이지 않는 것은 속이 비었고 마디가 있기 때문입니다. 속이 빈 것은 욕심을 덜어내어 가슴을 비우라는 뜻이었습니다. 또한 사람마다 좌절, 갈등, 실수, 실패, 절망, 아픔, 병고, 이별 같은 마디가 없으면 우뚝 설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166


비워야 채울 수 있고 틈이 잇어야 비집고 들어갈 수 있으며 빈자리가 있어야 누군가 앉을 수 있는 것입니다.  167


어느 대기업 사장이 말했습니다.

"바람을 마주 보고 맞으면 역풍(逆風)이지만 뒤로 돌아서서 맞으면 순풍(順風)이 된다."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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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산다는 것은 

자국을 남기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흔적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다.  26



[사랑해야 길이다]

길은 마음으로 걸어줄 때 살아난다.

온몸으로 속삭일 때 살아난다.

진정 사랑으로 보즘을 때 행복하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지나가도 돌아보지 못했다면

걸었다 할 수 없다.

사랑해야 길이다.  32



[잊어버림]

나를 잊고, 

너를 잊고,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길.

오늘,

이런 길을 달리고 싶다.  42



[여행중독]

여행이 중독이듯 길도 중독이다.

빠지면 헤어날 수 없다.

여행은 나를 찾아가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지독하게 묻고 답하는

나에게로 떠나는 것이 여행이고 길이다.  54



[욕심 없는 길]

마키아벨리가 편지를 쓰고 싶은 이유는

미친 사랑도 아니고 그저 안개 때문이었다.

안개 때문에 젖어들었던 상념이고, 

그 상념의 불꽃과 향기를 보듬었을 뿐이다.

안개의 길은 전부가 아닌 조금만 보개 한다.

눈보다는 마음이 먼저 보게 하는 길이다.

조금씩 천천히 밟아가야 하는 욕심 없는 길이다.  87



둘이 걷는 길은 혼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외로움을 떨쳐낼 수 있고 혼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물리적인 난관들이 극복될 수 있는 길이다. .. 그러나 둘이 걷는 길은 장점과 강점만큼이나 단점도 많고 약점도 많다. 시간이 갈수록 의견 충돌은 피할 수 없고 여독이 쌓일수록 감정의 골은 심연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둘이 걷는 길은 문제와 난관을 전제로 하거나 이미 어느 쪽이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양보와 희생을 대전제로 하고 떠나는 길이다.  99



삶은 여행이다. 스쳐가는 여행이기에 한 번쯤 색다르게 살아보는 삶도 가능하다. 단 한 번뿐이었지만 정말 그때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추억할만큼.  101



[당신 때문에 빛난다]

당신의 눈이 되어 당신의 마음이 되어

당신의 자리를 따라 간다.

당신이 흐르는 대로 나도 따라 흐르고,

당신이 버리는 대로 나도 따라 버린다.

아직 남은 빛처럼 아직 남은 사랑에 행복하고 

아직 남은 온기처럼 아직 남은 시간에 고맙다.

행복은 내일 또다시 떠오른 태양 때문에 빛나고 

내일 또다시 찾아오는 당신 때문에 빛난다.  109



[그립다]

길을 떠나도 길이 그립고 

길을 잊어도 길이 그립다.

혼자 걸어도 길이 그립고

둘이 걸어도 길이 그립다.  119



[길은 이어진다]

생각은 생각으로 이어지고,

마음은 마음으로 이어지고,

고독은 고독으로 이어지고,

사람은 사람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길은 길로 이어진다.  120



[오래 사랑하려면]

오래 사랑하려면

오래 같이 있어야 한다.

오래 사랑하려면

오래 붙어 있어야 한다.

길은 단 한 번도 떨어져 있은 적이 없다.  123



[세상에서 가장..]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사랑을 얻는 일.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사랑을 지키는 일.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

사랑이 식는일(내가 보기에는 '사랑이 식기 직전')  133



[친구]

삶의 친구란

사이좋은 사람이 아니라

어디든 함께 떠날 수 있는 

거울 같은 사람이다.

만날 때마다 항상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먼 길까지 오래

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134



모든 인생도 여행도 공짜는 없다.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무언가를 버렸기에 떠날 수 있고, 무엇 하나를 감내하기에 떠날 수 있다. 인생이나 여행에서 누구나 길을 나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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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풍상을 견뎌내고 몇 백년간 잘 살아남은 주택은 대부분 각자의 개성과 집안의 내력과 희망을 건축에 불어넣은 집들이었습니다.  6



'살다'라는 말은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고, 어느 곳에 거주하거나 거처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람과 삶과 살림은 모두 비슷한 뿌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살림'은 한 집안을 이루며 살아가는 모양을 뜻합니다. 죽지 않고 살게 만드는 것도 '살림'이고, 집안의 세간조차도 '살림'이라고 합니다. 결국 살림은 삶이고, 삶을 영위하는 구체적이고 기본적인 공간은 살림집이 되며, 흔히 집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집이라고 하면, 사람이 전제가 되고 살아있음이 전제가 되는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12


누구에게든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라면, 세상의 사람 수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나올 것이빈다. 그러나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보편적인 가치는 아마 '행복'이라는 단어로 모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7


과연 미래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혹은 우리가 쌓아놓은 여러가지 유형과 무형의 재산만큼 행복을 줄까요.

우리는 얼마나 갖추면 행복해질까요.  18


행복이란 때와 시간을 정해놓고 찾아오는 계획된 미래가 아니라, 은행 이자처럼 순차적으로 쌓였다가 우리에게 돌아오는 약속이 아니라, 우리가 만족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는 예기치 못했던 순간순간마다 찾아오는 것 아닐까요. 가령 피곤한 하루를 마감하고 집의 현관을 여는 순간 코끝에 훅 다가오는 따뜻한 집의 냄새와 온기와 익숙한 목소리로 안기는 가족의 살갗과 웃음, 그런 것들이 우리가 미워두었던 행복의 모습이 아닐까요. 나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지금', 그리고 '여기서' 행복한가?  19


학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몇 달 만에 그림 실력을 확 늘려줄 입시 마술에서의 요령 같은 가르침이 아니라 자신의 그림에 대한 믿음, 자신의 생각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집을 설계하면서 처음의 생각과 머릿속에 떠올렸던 그림이 하나하나 실현되는 과정에서 행복해했던 건축주들이, 막상 집 공사에 들어가자 주변의 참견과 간섭과 조언들로 인해 흔들리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내가 지어봤더니..." 혹은 "살아봤더니..."하는 사공들로 인해 갑자기 선택했던 자재에 의심이 생기고 창의 크기가 늘었다 줄었다 하고 난방 방식이 바뀌기도 하면서, 점점 집은 산으로 올라갑니다. 끝나고 보면 나의 생각으로 지은 집도 아니고, 남의 생각으로 지은 집도 아닌 어정쩡한 집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남이 재단해준 옷에 자신의 몸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나를 살리는 일'은 다른 사람의 취향과 판단에 좌우되지 않고 내 마음 속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부터 시작됩니다. 나를 믿고 나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나를 위한 삶의 출발점입니다.  27


고독은 사색을 불러오고 사색은 필연코 스스로에 대한 자각을 불러옵니다. 철학적인 은유라기보다는 누구나 겪는, 환경에 따른 인간적인 반응일 뿐입니다.  78


집에는 다양한 기능을 가진 '구멍'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들락거리는 구멍이 있고, 바람이 들락거리는 구멍이 있고, 시선과 풍경이 들락거리는 구멍이 있습니다. 그런 구멍을 '개구부'라고 하기도 하고 문이라고 하기도 하고 창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 기능들이 불리되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뭉뚱그려 모여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85


사실 건축의 가장 좋은 재료는 빛입니다. 빛은 세상 어디에나 있는 것이지만, 또 세상 어디에나 있는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빛이란 존재를 의미하기도 하고, 깨어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관심을 의미하기도 하고, 사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빛이란 집의 자세에 따라 다양한 느낌과 정서를 부여합니다. 동쪽 창으로 온 방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아침 햇살은 사람을 건강하고 부지런하게 하고 희망을 줍니다. 남쪽 창으로 종일 비추는 겨울나절의 빛은 따스함과 노곤함과 생애 대한 신뢰를 주고 긍정을 줍니다. 서쪽으로 기울어가며 황금빛으로 울컥하게 하는 석양은 사람을 생각에 잠기게 합니다. 

혹은 밤에 불을 끄고 잠에 들려는데, 어둠이 눈에 익고 서걱서걱 이불 쓸리는 소릴 듣고 있다가 문득 창을 통해 들어오는 예상치도 못했던 달빛은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빛은 빛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빛은 그 빛을 받아비추이는 것이 있어야 존재의 의미가 생겨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빛이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8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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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이 순간 행복하게 웃고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의 눈물 때문이다. 우리들이 건강한 것은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 덕분이다. 우리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은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굶주리는 사람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울부짖고 있는 사람과 주리고 목마른 사람과 아픈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된다.  22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쓴 <완덕의 길> '정말 필요한 것이면 보아줄 사람이 얼마든지 있으니,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스스로 걱정하지 마십시오.'  30


어때서 일어나지도 않은 현상을 미리 가불해서 앞당여 근심하고 있단 말인가.

성녀 데레사는 이렇게 말했다. '매 순간 단순하게 살지 않는다면 인내심을 갖기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과거를 잊고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합니다. 우리가 실망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곰곰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5


선승 황벽(黃檗)은 이렇게 말했다. '과거는 감이 없고, 현재는 머무름이 없고, 미래는 옴이 없다.'

주님도 이에 대해 분명하게 못 박고 계시지 않는가.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36


프랑스 시인 아폴리네르.

그가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대답했다.

우린 두렵습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왔다.

그는 그들을 밀어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날았다.  38


일찍이 당나라의 선승 동산(洞山)에게 한 스님이 찾아와 물었다. 

"추위와 더위가 찾아오면 이를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동산이 대답했다.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가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입니까?"

그러자 동산이 소리쳤다.

"이놈아! 추울 때는 그대를 더 춥게 하고, 더울 땐 그대를 더 덥게 하는 곳이다."

우리는 추우면 본능적으로 더운 곳으로 피하려 한다. 더운 곳으로 피하면 추위는 일시 가실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추위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고통이나 근심이 있을 때 술을 마시거나 다른 방법으로통해 고통을 피하려 한다. 피하고 잊는다고 해서 고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고통은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추위를 피하려면 애써 더 추운 곳으로 찾아가라는 동산 스님의 말은 고통이 오면 더욱 그 고통을 직시하라는 뜻이다. 


중국의 도가서(道家書)인 <열자(列子)>에는 전설적인 신궁 비위(飛衛)의 이야기가 나온다. 제자 기창(紀昌)이 찾아와 활쏘기를 배우려 하자 비위가 말한다. 

"활쏘기보다, 먼저 눈을 깜빡거리지 않고 끝까지 보는 공부부터 하게."  58


이순신 장군도 말씀하셨다.

"살려 하면 죽을 것이요, 죽으려 하면 곧 살 것이다."


주님도 이렇게 못 박고 계시지 않는가.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59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인간은 고통을 느끼지만 고통이 없다는 것은 못 느낀다. 두려움을 느기지만 평화는 못 느끼며, 갈증이나 욕망은 느끼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면 금세 잊어버린다. 마치 심한 갈증으로 허겁지겁 물을 마신 후에는 남은 물을 버리는 것처럼."  77


<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

소화 데레사 성녀는 널리 알려진 대로 15세에 가르맬수도회에 들어가 24세에 선종함으로써 10년도 못 되는 짧은 수도원 생활을 한 새내기 성녀다... 봉쇄수도원에서 기도를 하고, 마룻바닥을 닦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것과 같은 평범한 일상생활에 전념했던 수도자였다.  97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아주 소소하고, 그러니까 마룻바닥에 떨어져 있는 바늘 하나를 주울 때에도 주님에 대한 사라응로 주우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영혼 하나를 구원한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당신의 사랑을 증거하는 데 조그만 희생 하나, 눈길 한 가닥,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아주 작은 것도 이용하고 그것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성인의 길'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녀 소화 데레사가 발견한 '겨자씨'의 비밀이었다.  98


주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은 우리들의 수도우너인 가정 속에서부터 타올라야 한다.  100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음식을 만들때도 데레사처럼 사랑으로 하고, 자식들을 아기 예수처럼 대하고, 아내를 성모님처럼 공경하고, 남편을 주님을 대하듯 사랑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면, 우리의 가정은 성가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01


[두메꽃]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미나 내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 숨어서 피고 싶어라.  117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죄는 반드시 이 단계를 거치게 되어 있다. 우선 유혹에 넘어가 그 죄를 응시하는 첫 발견 단계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고 나서 생각한다. 먹음직스럽다. 화려하다. 향기롭다. 감미롭다. 죄는 본능적인 감각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후에는 맹렬한 상상이 일어나고 쾌락에 대한 기대감이 용솟음친다. 이 과정을 <준주성범>은 '처음에는 마음에 단순한 생각만 하고, 그 다음에는 상상이 일어나고, 쾌락이 생기고, 잇따라 악한 중동이 발하고, 마침내는 승낙을 하게 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와가 느낀 '사람을 영리하게 해줄 것 같다'는 느낌은 악의 논리다. 결정적인 악의 정당화가 생기기 전까지는 그나마 유혹과 맞서 싸우려는 의지가 있지만, '딱 이번 한 번뿐인데', '이생은 원래 즐기는 거야', '사랑은 불나비야'라는 식의 악의 논리는 여지없이 충동적인 만용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열매를 따 먹고 남편에게도 따 줌으로써 악은 습관화(중독)되고 전염되어 온 세상에 만연하게 되는 것이다.  127


미국의 CIA는 거짓말을 백색, 회색 그리고 흑색으로 분류하고 있다. 남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행하는 흑색 거짓말과 완전한 거짓은 아닌, 상대방을 위한 선의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백색 거짓말, 그리고 그 경계가 애매한 회색 거짓말.  139


남전이 주석하고 있는 선당은 동서에 선방을 두어 동쪽의 선방에 사는 수자를 동당(東堂), 서쪽의 수자를 서당(西堂)이라고 불렀다. 

어느날 모든 납자들이 들에 나가 일을 하고 있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서로 자기네 고양이라고 주장하며 동당 고양이, 서당 고양이 하고 싸움이 벌어졌다.

다툼이 시끄러워지자 스승 남전은 무슨 일인가 나와 지켜보다가 싸움의 원인이 고양이 한 마리 때문임을 알고는 고양이의 목을 한손으로 쥐어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칼을 들어 모가지에 들이대고는 말했다.

"너희들이 뭔가 한 마디 할 수 있다면 이 고양이를 죽이지 않겠지만 말할 수 없다면 목을 베어 죽일 것이다."

서슬이 퍼런 스승의 선기에 압도되어버린 대중들은 입조차 달싹 못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남전은 그 자리에서 고양이의 목을 베어 죽였다.

그날 밤 외출에서 돌아온 제자 조주(趙州)가 스승에게 인사하러 왔을 때 남전은 낮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네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어떻게 했겠느냐?"하고 물었다. 그러자 조주는 말없이 자신이 신던 짚신 한 짝을 머리 위에 얹고 걸어 나갔다. 이에 스승 남전이 혀를 차며 말하였다.

"네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고양이는 살 수 있었을 터인데."

그 이후부터 '불살생'의 계율을 파계하여 고양이의 목을 벤 남전의 칼은 애욕을 끊기 위한 '사람을 죽이는 칼'이며, 그것이 분쟁의 원인인 고양이라 할지라도 하찮은 짚신조차 머리 위에 떠받으는 것처럼 섬기겟다는 조즈의 칼은 '사람을 살리는 칼'로 불리게 되었다.  148-149


근세의 선승 혜월(彗月)은 1937년 죽기 전 선암사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천하의 명검'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이 말을 들은 헌병대장이 명검을 보고 싶은 욕망에 절을 찾아왔다. "그 칼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라는 간청에 "물론입니다."하고 앞장서 걷던 혜월은 느닷없이 뺨을 후려쳐 헌병대장을 섬돌 아래로 떨어뜨렸다. 졸지에 수모를 당한 헌병대장이 허리에 찬 칼을 빼려 하자 혜월이 먼저 다가가 그를 부축하여 일으키면서 말했다.

"이것이 내가 갖고 있는 천하의 명검이오. 내가 때려 섬돌 아래로 떨어뜨린 손은 사람을 죽이는 칼이며, 부축하여 일으켜 세운 손은 사람을 살리는 칼입니다."  150


혀와 손과 생각은 모두 양면의 날을 가진 불칼임을.  155


불교에는 '불재가중(佛在家中)'이란 말이 전해져온다. 당나라 때 양보(楊補)라는 사람이 사천에 유명한 무제(無際)보살이 있다 해서 먼 길을 떠났다. 한참을 가던 양보는 "어디를 가오?"하고 묻는 노인에게 "무제보살을 스승 삼고자 길을 떠났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노인은 "보살을 찾아가느니 부처를 찾으러 가지 그래."하고 말했다. "부처가 어디에 있는데요?" 하고 양보가 묻자 노인은 대답했다.

"집에 가면 이불을 두르고 신발도 거꾸로 신은 채 나와서 맞아주는 분을 만나게 될 텐데, 그분이 바로 부처시네."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오바 이불을 두른 채 신발을 거꾸로 신고 뛰어 나오는 어머니 모습에서 비로소 양보는 '집 안에 있는 부처'를 견성(見性)할 수 있었던 것이다.  162


예수께서 저를 붙드신 목적은 제가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향해 달음질치게 하려는 것에 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 안에 있는 하느님으로서의 '말씀'능력과 예수로서의 '행동'능력과 성령으로서의 '생각'능력, 즉 '지언행(知言行)'을 일치시키려 노력하는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170



스님, 정말로 죽음이 무섭지 않습니까? _최인호

죽음을 받아들이면 사람의 삶의 폭이 훨씬 커집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한다면 지금까지의 삶이 소홀했던 것입니다. _법정



내가 좋아하는 선가(仙家)의 말 중에 '살아도 온몸으로 살고 죽어도 온몸으로 죽어라' 라는 말이 있다.  180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였던 A. 모루아는 "병은 정신적 행복의 한 형식이다. 병은 우리들의 욕망, 우리들의 불안에 확실한 한꼐를 설정해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위대한 사상가였던 C. 힐티는 <행복론>에서 "강의 범람이 흙을 파서 밭을 갈듯이 병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파서 갈아준다. 병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견디는 사람은 보다 깊게 보다 강하게 보다 크게 된다."

강이 범람하여 홍수가 나지 않으면 대지는 황폐해진다. 기름지고 비옥한 땅이 되기 위해서는 홍수로 땅이 뒤집혀야 하는 것이다. 태풍이 바닷물을 엎어버리지 앟으면 플랑크톤은 사라지고 물고기들의 먹이사슬은 끊어진다. 바다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태풍이 몰아쳐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병의 홍수와 태풍을 견디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182-183


당나라 때 향엄(香嚴)이란 선사가 있었다. 등주(鄧) 사람으로 법명은 지한(智閑)이었다. 키는 7척이나 되고, 학문에 조예가 깊어 아는 것이 많고, 말재주가 능하여 당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날 스승 위산영우(僞山靈祐)를 찾아가 불법에 대해 묻자 위산은 이렇게 답하였다.

"그대가 터득한 지식은 전부 남에게서 보고 들었거나 부처께서 말씀하신 삼장십이부경(三藏十二部經)의 뜻을 의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묻지 않겠다. 나는 그대에게 묻겠다. 아직 어머니의 배 안에서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에 대해서 한 마디 일러 보아라. 그것으로 그대의 공부를 가늠하겠노라."

향엄은 여러 가지로 대답했으나 위산은 인정해주지 않았다 위산에게 가르침을 간청하자 스승은 "나의 말은 나의 견해일 뿐 그대 스스로의 안목으로 일러야 그대의 안목이 아니겠느냐." 하고 거절한다. 이에 향엄은 자기가 읽던 모든 책을 불살라버린 후 "이번 생에는 불법을 깨닫지 못했다. 오늘까지 나를 당할 사람이 없다고 느꼈는데, 스승에게 한 방망이 맞고 보니 그 생각이 깨끗이 없어졌다. 이제부터 나는 그저 밥이나 먹고 살아가는 중이 되겠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스승과 작별하고 암자에 들어가 수행을 하였다. 

하루는 마당의 풀을 베면서 무심코 던진 기왓장 한 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치며 난 '딱'소리를 듣고 순간 크게 깨달았다. 이 장면을 선가에서는 향엄격죽(香嚴擊竹)리라고 부른다. 향엄은 스승에게 돌아가 깨달음을 인정받고 오도송을 읊었다.

작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去年貧 未是貧

금년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로다. 今年貧 始是貧

작년에는 송곳꽂을 땅이 없더니 去年 無卓錐之地

금년에는 송곳조차 없더라. 今年 錐也無

이 선화에서 나온 것이 그 유명한 화두, 즉 '그대가 아직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나기 전의 본래 얼굴'이란 공안인 것이다.  200-201


향엄 스님은 "이번 생애는 불버븡ㄹ 깨닫지 못하겠다."고 절망 했지만 용맹정진 끝에 무심코 던진 기왓장 한 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딱' 소리에 크게 때닫고 부모가 태어나기 전의 참나, 즉 '본래면목'을 견성하엿다.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첫 일성으로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언하셨다면 하늘나라는 이미 와 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면 어느 날 문득 어린이가 되어 하느님이 '빚어 만드신 최초의 참사람'으로 돌아가 원죄 없는 원형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철학자 스피노자는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을 영원의 눈에서 바라보십시오."

심학규는 공양미 삽백 석이 있어야만 눈을 뜨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한 것은 바로 눈앞에 있는 자신을 위해 죽었던 심청이를 보고 싶다는 참사랑의 열망 때문이었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지금 이 순간을 시작도 끝도 없는 '이제와 항상 영원한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치마를 뒤집어쓰고 임당수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심청이의 본래면목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나의 참모습을 견성할 수 있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눈을 뜨는 데는 공양미 삼백 석과 같은 수천 년 세월이 걸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는 것은 <심청가>에 나오듯 '휘번쩍'눈을 뜨는 한 순간이다.  209-210


운동처방학을 전공하는 윤기운 교수는 운동선수들에게 세 가지 종류의 혼잣말 훈련을 실험하고 그 결과를 지켜본 후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혼잣말의 종류에는 '지도적 혼잣말'과 '동기적 혼잣말', '긍정적 혼잣말'등이 있는데 지도적 혼잣말은 '천천히' 혹은 '침착하게' 같은 교훈적인 것이며, 동기적 혼잣말은 '이번이야말로 최고의 기회야', '드디어 때가 왔어'같은 심리적인 동기부여를 가리키며, 긍정적 혼잣말은 '좋아, 할 수 있어', '난 내 자신을 믿어'와 같은 말인데 마음속으로 외우기보다는 실제로 입 밖으로 드러내어 혼잣말을 하는 실험대상이 그렇지 않은 상대보다 월등히 실제 행동과 학습효과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215-216


중국의 당나라 때 절강성의 서암사라는 절에는 사언이라는 선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화두로 유명한 암두의 제자였다. 사언은 스승으로부터도 인정 받지 못했던 치둔인이었다. 

그가 그렇게 불린 데는 어느 날 공양 초대를 받아 신도 집에 갔을 때 주인이 유리와 구슬로 된 염주알을 바구니에 잠아 각자 골라 가지라고 햇던 데서 비롯되었다. 사언은 다른 스님들이 다 고른 후 마지막에 남은 가장 볼품없는 것을 집어 들고 "이것이 가장 내 마음에 든다."라고 흡족해하여 '바보선사'라 불리게 된 것이다. 

사언은 아침에 일어나면 판도방(큰방) 앞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주인공아."

그러고 나서 사언은 대답했다

"네."

"정신차려라."

"네."

"앞으로도 속지 말아라."

"네."

사언의 자문자답은 자기 속의 자기야말로 만유의 근원적인 한 물건이자 본질 이전의 진아(眞我)임을 깨닫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경책하는 벽력임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216-217


웰만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벗은 나 자신이며, 세상에서 가장 나쁜 벗도 나 자신이다. 나를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힘도 나 자신 속에 있으며 나를 해치는 무서운 칼날도 나 자신 속에 있다. 이 두 개의 나 자신 중의 어느 나를 좇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  217


프랑스의 모럴리스트였던 라로슈푸코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귀중한 사람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다고 말하면서 신제로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추기경님은 그날 대담(2003년이엇던가. 새해를 맏아 동아일보에서 기획한 새해 특집으로 김수환 추기경과의 대담)에서 내개 한 가지 수수께끼 같은 화두를 던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가장 긴 여행이 뭔지 안세요?"

"모르겠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추기경님은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셨다.

"바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지요. 나 역시 평생이 짧은 것처럼 보이는 여행을 떠났지만 아직 도착하기엔 멀었소이다. 기독교인들은 항상 반성과 회개를 통해 조금씩 우리 마음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하느님께 나아가고 예수를 닮아가야 합니다."  246-247


성경의 한 구절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까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거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러가.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사람의 정을 물리치지 말아라."  255


세속과 청산을 따져 무엇 하겠는가. 길상사건 대원각이건 굳이 어느 쪽이 옳은가 따져 무엇하겠는가. 봄볕이 비추면 꽃피지 않는 곳이 없지 않는가. 꽃피는 곳마다 부처 역시 살아나고 있는 것. 봄볕이 비추는 곳을 찾아갈 일이지 굳이 세속과 청산을 구분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258


신문에는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성철 스님이 내린 법어가 실려 있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며 하늘과 땅이 무너진다 해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유형무형 할 것 없이 모든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들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함으로 종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종말을 걱정하여 두여워하며 헤매고 있습니다.

...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원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주러 온 것입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행복합니다.'  268


내가 "스님, 어느 책에선가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하셨는데, 정말 무섭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법정 스님이 이렇게 대답했다.

"실제로 죽음이 닥치면 어떨진 모르지만 지금 새악으로는 무섭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죽음은 인생의 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확고해지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어요. 죽음을 받아들이면 사람의 삶의 폭이 훨씬 커집니다. 사물을 보는 눈도 훨씬 깊어집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한다면 지금까지의 삶이 소홀했던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나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277


법정 스님은 근대 불교계의 큰 어르신이셨던 효봉(1888~1966)의 애제자였다.

효봉은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알려졌던 법기로, 우리나라 최초로 법관이 되었다. 36세가 되던 어느 날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조선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후 삶에 대해 큰 회의와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나와 엿장수를 하며 3년간 방랑생활을 하다가 비교적 늦은 나이인 38세에 불문에 귀의하셨던 늦깍이셨다. 법정 스님이 출가를 결정하고 여부를 묻자 효봉 스님은 생년월일을 묻고 간지를 짚어본 후에야 이를 허락하였으며, 훗날 새로 출가한 법정 사미만을 데리고 지리산 쌍계사 탑전(塔殿)에 가서 수행에 몰입할 만큼 법정을 각별히 아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때의 일화 중에 한 토막.

어느 날 아침 공양 후 우물가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오자 효봉 스님이 법정 사미를 부르며 빈 그릇하고 젓가락을 가져오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법정 사미가 그릇과 젓가락을 가지고 우물가로 가자 효봉 스님은 설거지를 하며 버린 밥알과 시래기 줄기를 주워 담은 후 법정 사미가 보는 앞에서 밥알과 시래기를 물로 씻은 후 훌쩍 한 입에 들이마셨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출가해서 수도하는 사람이 무슨 일이든 아끼고 절약해서 시주한 사람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부자 살림이고 되도록 몸에 지니지 않는 무소유야말로 참으로 전부를 갖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법정 스님의 철저한 무소유는 바로 스승이셨던 효봉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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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도시가 아니었다. 결국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였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행복할 수 없다면 세상 그 어느 곳을 가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과정은 고독하고 피로했다.

헛헛함

행복의 반대말

낯설게 보기

탈도시적

라디오를 들으며 연필을 깎을 때면 참 행복했다.

온기




인생이란 어느 한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다림이며, 가장 나다운 나와 만나는 먼 여정임을 이해했다.  37


자제의 윤리가 깊숙이 내면화된 남자..

"상대의 호의를 잘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봐. 잘 받는 사람이 잘 줄 수도 있는거야."

상대를 위한 배려라고 새악했으나 그건 표면적인 명분일 뿐, 실상은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나 자신에 대한 배려가 더 우선은 아니었을까. 자립심을 바루히해 내 일을 스스로 처리하고 싶어 했으나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타인의 힘을 빌리는 달콤함을 맛본 뒤 의존적이 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그것은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고질병 가운데 하나였다. 아니,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해야 했던 운명의 소유자가 가지게 마련인 방어 심리였을지도.

이 도시에는 그런 믿음을 강화시키기에 충분한 잔혹한 사례들이 얼마나 일상적으로 일어나는가, 안심하고 감사히 호의를 받아들였더니 결국 자신을 이용하기 위한 의도였음을 아게 된다거나, 진심에서 우라넌 도움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그 일로 뒷말을 듣게 된다거나..  42-45


"그거 알아요? 정말 뭔가에 정신을 쏟으면 눈물이 나는 거? 슬퍼서도 아니고 서러워서도 아니고 그냥 눈물이 나요."

나는 다만 한 사람이 뭔가에 몰두한 끝에 흘리는 눈물에 대해서, 그 맑고 투명한 힘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초라한 시작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물 나도록 힘이 솟게 하는 뭔가를 찾는 사람드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었을 뿐이다.  52-54


스승의 죽비가 계속 어깨를 내리친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의식(생각)과 감정(마음)의 모순 때문입니다."

"생각과 마음이 싸우면 대부분 마음이 이깁니다. 승률 90% 이상이죠. 백만 대군과 싸우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바로 자신의 마음과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절에 가면 대웅전이 있죠. 그건 자신의 마음과 싸워 이긴 큰 영웅을 모신 곳이란 뜻입니다. 좋고 싫음에 따라 움직이면서 우린 거기에 온갖 핑계를 다 갖다 붙입니다. 일생이 '핑계 찾아 삼만리'입니다. 해탈이란 좋고 싫음의 놀음에서 벗어나 좋아도 안 할 수 있고, 싫어도 가볍게 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57-60


우리에겐 누구나 사랑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 자체는 탓할 일도, 억지로 가라앉힐 일도 아니고 그저 자연스러운 욕망일 뿐이다. 다만 사랑 받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 '아, 내 마음이 이렇구나'하고 알아채는 일이 중요할 뿐이다. 알아채는 순간, 욕망은 더 이상 강렬하게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나의 스승은 말씀하셨다. 

"사랑 받는 것을 내 삶의 중심으로 두면 힘들어집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사랑 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사랑 받고자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연인 사이에 흔히 '넌 내 거야' 하고 말하죠. 그러면 그 사람이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그 사람 것이 됩니다. 내 행복이 그 사람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죠. 그 사람의 한 마디, 몸짓 하나에 내 행과 불행이 좌우되기에 내가 내 인새으이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널 이렇게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너도 날 사랑해야 돼.' 이건 거래고 흥정이지 진정한 사랑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 받으려 하면 괴로움이 생겨날 뿐입니다. 반면 사랑하려 하면 충만이 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바로 서기 때문이죠."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설레며 사랑에 빠졌던 날들은 진정 천국의 시간일 것이다. 그 사랑이 좌절과 환면, 허망함을 안겨 주었다 하더라도 천국의 시간이 주는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자신을 투명하게 들여다보게 만드는 그 아찔하고 뼈아픈 각성의 순간조차 사랑이 아니라면 체험하기 힘든 소중한 기회이니까.

오직 사랑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힘센 카르마와 에고를 녹일 수 있다. 사랑은 정성이며, 절로 춤추게 하는 리듬, 영혼의 타악기를 울리는 손가락 끝마디이다. 

종교를 가지거나 명상을 하고, 온 세계를 헤매고 다녀도 내려놓기 힘든 것이 인간의 에고이다. 그런데 사랑에 빠진 순간 우린 광복보다 빠른 속도로 자신을 내려놓는다. 누군가를 자신보다 더 아끼고 사랑할 수 있게 되며, 세상을 향해 마음의 빗장을 모두 열어 젖힌다. 사랑이 아니라면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다. 기적이 일어났던 순간, 우린 미이 천국을 맛본 것이다.  68-70


크리스토퍼 듀드니가 쓴 <밤으로의 여행>에 쥐를 세 집단으로 나눠 실험한 얘기가 나와요. 쥐들을 24시간 불을 켜 둔 집단, 낮에만 불을 켜고 밤에는 깜깜한 곳에 둔 집단, 낮에는 불을 켜 두고 밤에는 아주 적은 양의 불빛만 새어 들어오게 한 집단으로 나눠 살게 했대요. 결과가 어땠을까요. 밤 동안 극소량의 빛에 노출된 쥐들과 밤새 환히 켜진 불에 노출된 쥐들의 몸 안에서 똑같은 수준으로 종양이 자랐다고 해요. 요약하자면 어스름한 빛마저 몸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거예요.  83


애초부터 옳고 그름은 없었다. 

'지불책우(智不責愚)' -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꾸짖지 않는다.  101


자발적 빈곤은 한없이 아름다운 말이지만 해가 갈수록 '자발적'이 맞는지 자신이 없어진다. 

도시가 추구하는 욕망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자발적'이라는 청렴한 수식어는 곧바로 무능으로 대치된다.

스승이 답했다.

"청빈과 극빈의 차이가 무엇인지 압니까? 스스로 그 길을 택해 검소하게 살면 청빈입니다. 극빈은 내 욕망은 그렇지 않은데 할 수 없어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조급함에 사로잡히면 반드시 실수를 하게 됩니다. 당장 다음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난하거나 큰 병에 걸렸거나 문맹이 아니라면, 그 이상은 더 잘 먹고, 더 건강하고,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욕심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남과 비교해 얻는 고통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약이 없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악한 생각입니다."  110-111


누가 그랬던가. 여행과 생활은 연애와 결혼의 차이 같다고, 막상 그 나라에 터를 잡고 산다면 다르겠지만 여행이었기에, 여행자였기에 우리는 얻뜻 새로운 세상을 보았거나 봐싿고 생각한다. 그것은 분명 다른 세계였다고 여긴다.  116


엄마가 말했다.

"해가 지면 그날 하루는 무사히 보낸 거다. 엄마, 아버지도 사는 게 무섭던 때가 있었단다. 그래도 서산으로 해만 꼴딱 넘어가면 안심을 했느니라. 아, 오늘도 무사히 넘겼구나 하고. 그러니 해 넘어갈 때까지만 잘 버텨라. 그러면 다 괜찮다."

그 밤에 엄마가 속으로만 삭인 뒷말이 있었다.

'그러다 새벽이 오면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게 몸서리쳐지게 무서웠단다.' 

그 말까지 더해야 진실이 완성되지만 엄마는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새벽이 되면 절로 느낄 것이므로, 당장 그 순간 자식에게 필요한 것은 기운을 북돋아 주는 말이란 걸 알기에.  123


"야야, 눈이 게으른 거란다."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벽에 부딪쳐 그만 포기하고 싶어질 때면 엄마의 어록을 떠올린다.

게으른 눈에 속으면 안 된다는 것을, 사람의 눈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서 해야 할 일 전부를, 인생 전체를 돌아보며 겁먹기 쉽다는 것을, 엄마는 말했다. 오직 지금 내딛는 한걸음, 손에 집히는 잡초 하나부터 시작하면 어느새 넓은 콩밭은 말끔해 진다고 반드시 끝이 있다고.  124


명상이란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일에서 시작된다.

알아 차리는 순간 화는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143


사랑이 무슨 죄니. 사랑이 약한 게 아니라 사람 마음이 약한 거지. 사랑은 있어."

그러니까 애당초 잘못은 우리가 사랑해 대해 품는 수많은 환상과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다. 사랑은 있는데, 사람이 변한다는 거다. 그 동안 애꿎은 '사랑'만 쥐 잡듯 자아 온 셈이다.  155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귀는 아무리 낮은 소리라도 다 알아듣는다. - 셰익스피어

어떻게 딴 생각을 하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상대의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어떻게 모든 것을 내보일수 있었을까?

바로 '처음'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이와 나 사이에는 과거에 쌓아 둔 '인과'가 없었다. 사소한 오해를 빚었던 일도, 기쁨을 나눴던 기억도 없는 백지 상태의 인연. 마음의 열림과 기적 같은 소통이 가능했던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순조로운 의사소통을 막는 첫걸음은 과거의 기억에 있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에서 오랜 시간 동안 봐 온 가족과 오히려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 내가 만나는 모든 인연을 지상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대하기란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과 소통하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마음속에 '내가 옳다'는 생각이 가득 차 있기에 자연스럽게 상대의 말은 내 마음속에 닿기도 전에 부정되고 만다.

스승은 말했다.

"혹시 마음속에 상대를 바꾸고 싶다는 욕심이 있는 건 아닌가요? 자기 자신 이외에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삶은 치유가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내가 문제를 해결해 줘야겠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저 조용히 들어주세요. 그리고 본인이 직접 도움을 요청하면 그때 도와주세요."

내 잣대로 미리 재단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옳다는 생각도 소통을 막지만, 내가 틀렸다는 생각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아니다. 미안해 하는 마음은 오히려 상대르 원망하는 깊은 속내를 감추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나의 옳음을 내려놓으면 가벼워지기에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사라진다. 미안한 마음은 지금 그대로의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이 미처 채우지 못한 욕심일 수 있다.

지혜로운 스승들은 상대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들 때는 진참회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진참회란 '내가 문제였어'라고 건성으로 결론 맺는것이 아니라 세상에 옳고 그른 일이란 없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170-176


누구나 평생에 걸쳐 자기 부모를 넘어서기 위해 애쓰며 살게 마련이다.  193


진정한 부란 죽음이 빼앗아갈 수 없는 것들을 이르는 말이다. 타인에게 베푼 친절, 관대함, 나눔, 용서, 배려... 내가 티베트를 그처럼 좋아하고 그드르이 운명에 아파했던 것도 진정한 성공과 부가 무엇인지 아는 문화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구제프의 수도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불편한 관계가 남아 있다면 돌아가라."  201


살아 보니 행복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것이었다.

행복에 관한 한, 우리는 일용직 신세였다. 비정규직이었다.

내일 몫까지 미리 쌓아 두기 힘든 것, 그게 행복이었다.  203


중독과 몰입의 차이는 무엇일까. 

중독인지 몰입인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안다. 둘 다 엄청난 시간과 사랑을 요구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게 없으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설명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드는 점도 닮았다. 그러나 중독과 몰입의 차이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에 있지 않을까. 어떤 일에 지독하게 빠져 있는 자신이 밉고 죄책감이 든다면 중독이다. 그 일을 함으로써 자신을 더욱 사랑하게 되며 내면의 자부심이 커진다면 몰입니다. 왜냐하면 중독은 결국 자신의 실체를 잊기 위한 몸부림이며, 올바로 사랑을 쏟아야 할 대상에게서 거부당하고 상처 받은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중독이 치명적인 것은 물리적인 파괴의 속성 때문이다. 몸 어디 한 군데가 손상된 뒤에야 간신히 벗어날 수 있는 것, 그게 중독이다.

정말 미스테리하고 약 오르는 진실 하나는 좋은 습관은 쉽게 중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64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심장에서 울리는 소리를 따라 길을 떠난다. 그러나 진정 성숙한 여행자는 돌아와서 자기 발밑의 장미 한 송이를 더욱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보다 멋진 사람은 굳이 떠나지 않고도 일상의 소중함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내면의 여행자이다. 혹여 장미가 아니라 패랭이꽃이나 작은 들풀인들 어떤가.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발밑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이다.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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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속에 이야기, 그 속에 다시 이야기가 있는 영화이다.(액자식구성이라고도 하더라.)

1944년 전쟁의 끝에 첫눈에 반한 젊은 군인과 여인은 사랑을 하게 되고 전쟁후 귀국했던 군인은 여인에게로 다시 돌아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에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생활한다.  아이가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죽게 되면서 부부는 상처를 서로 안아주지 못해 별거하게 된다. 그 사이 남자는 무언가에 끌려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 

이후 부인을 찾아가 자신의 글을 건네고 돌아오라하고, 부인은 글을 읽고 감동하여 돌아오지만, 돌아오는 기차에 원고를 두고 내린다. 뒤늦게 원고를 잃어버린걸 알게 된 두 사람은 결국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현대로와서 작가를 꿈꾸는 로리(브래들리 쿠퍼)는 도라(조 샐다나)와의 프랑스로의 신혼 여행에서 골동품점에 들러 가죽가방을 구입한후 돌아온다. 로리 역시 작가가 꿈이며 책을써 출판사들에 돌려도 계속 퇴짜를 맞는 중에 생계를 위해 출판사에서 일을 한다. 출근준비를 하던중 가방에서 우연히 원고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모두 읽고 종일 그 글을 생각한다. 결국 새벽에도 잠이 깨 원고를 철자 하나 틀리지 않게 타이핑 한다. 우연히 도라는 그 들을 읽고 감동하여 출판을 권유하게 되고 결국 로리는 출간하게 되고, 올해의 문학상을 받게 된다.

그러던 중 원고의 원래 저자인 올드맨(제레미 아이언스, 1940년대 젊은 군인)이 방문하여 이야기는 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 내용을 쓰면 왠지 안될것 같아서..ㅎ)





결국 이 내용 전체는 클레이(데니스 퀘이드)의 책 내용이다.

이러한 이야기속에 이야기 또 그속에 이야기를 가진 영화이다. 참고로 영화의 진행순서와는 상관없이 내용을 적은 것이다.


로리는 올드맨을 만난후 자책감에 부인 도라에게 말하고 편집장에게도 밝힌다. 올드맨은 밝히지 말라고 한다. 도라도, 편집장도 밝히지 말것을 종용한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답이야 달라질 질문이지만, 어떻게 하는것이 좋을까?


영화의 내용중에 몇 개의 대사로 생각해 보려한다.

우선 로리가 결혼전 도라와의 동거중에 온전히 글 쓰는데 집중하느라 생활이 어려워지자 아버지를 찾아가 도와줄것을 요구하는 장면에서 아버지는 잔소리를 늘어놓은 후 결국은 도와준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남자란 건 아무리 버틸 수 없는 고통이 있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그것의 한계까지 버텨낼 수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로리가 올드맨에게 찾아가 자신의 생각은 사실을 밝히는 것이라 했을 때 올드맨은 그럴 필요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선택을 해야 하지. 그리고 그걸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곳을 벗어난 로리는 벤치에 앉아서 독백으로 "우리 모두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어려운 부분이다."


영화의 후반에 클레이는 다니엘(올리비아 와일드)에게 "어떤 면에서는 당신은 삶과 픽션에서 선택을 해야해."라 한다.


로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클레이는 어떤 결말을 선택해야 할까?


세 작가의 이야기, 사랑이야기지만 영화를 보면서 선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충분히 우리 삶에서 일어날 수 있을 부류이기에 인생은 하나의 연극이라 부르기도 한다.

자신의 배역과 성격을 선택하여 연기하는 것이란다.

그만큼 선택이란 것의 연속이기에 선택에서 올바른것보다는 편한 선택이 더 유혹적이기에.. 

영화에서 라면 로리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맞을까

답이 없는 질문이기도, 너무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으면 우린 편한 선택을 해버리기 쉽기에, 편한 선택이 무조건 틀린건 아니지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마음에 늘 무거운 돌덩이를 올려놓는 결정을 할 수 있기에, 때론 맹목적을 따라만 가기에.. 


나는 아직 답이 없다. 나였어도 출판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 올드맨을 만나고 그가 밝히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밝히지 않을지 모르겠다. 올드맨이 밝히라고 한다면, 어떨게든 막으려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지점에서 어떤 악행이 추가될지 모른다. 

그래서 고민해봐야 했다. 

나는 답이 언능 떠올리기 힘들어 시간을 두면서 계속 고민할 것같다.

고민하는 중에 그러한 일이 발생되더라도 좀더 바른 결정을 하기 위한 기회를 가질 수 있을거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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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장소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모든 목소리와 기억과 영혼들은 그 자신이 머무를 육체를 동경하는 것처럼 모든 이야기는 그 자신이 머무를 장소를 동경한다고, 우리가 사로잡힌 어떤 여행지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 그 시절 우리의 정신 상태와 우리가 빠져 있던 고미노가 관심사에 대해 말해주는 우회로일 거라고, 그래서 세상천지 어디를 가더라도 결국은 장소가 아니라 그 자신이 세상에 유일한 여행지인 순간이 우리에겐 있을 거라고.

해바라기 한 송이를 들고 갈 여행지가 내겐 있는가? 나의 여행은 내 인생의 어떤 점을 닮았는가? 그리고 우리 인간들은 왜 모두 여행자라 불리는가? 인생은 왜 여행이라 불리는가? 인생은 왜 '관광'이라고 불리지 않고 '여행'이라 불리는가?

나의 여행과 나의 인생은, 나의 삶은 어떤 관계일까? 나는 여행을 일상의 탈출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니, 여행을 일상의 탈출로 보는 의견에 반대한다. 그보단 차라리 매 순간 여행자의 태도로 살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여행지에서 기꺼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삶 속에서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3


'나는 군가가 나 대신 여행을 하는 것을 상상도 못 한다. 그런데 삶 속에선 누군가 나 대신 뭐라도 해주길 꿈꾼다.

여행지에서 나는 누군가 나 대신 내 짐을 드는 것을 상상도 못 한다. 그런데 삶 속에선 누군가 나 대신 내 짐을 들어주길 원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길을 잃어도 당황하지 않는다. 그런데 삶 속에선 길을 잃으면 낙담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세상 만물을, 차창 밖을 지나가는 여인의 뒷모습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삶 속에선 많은 것에 애써 눈감으려 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곧 다시 만나요, 손을 흔들고 헤어질 때 슬픔을 느낀다. 그런데 삶 속에선 작별 인사를 나눌 때 내가 예의에 어긋나 보이지 않았나를 생각한다.

여행지에선 내가 누구인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삶 속에선 제발 나 좀 알아봐달라고 부질없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여행지에서 나는 그 고장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찾아낼 줄 안다. 그런데 삶 속에선 내 고장에서 가장 좋은 것을 눈앞에 두고도 몰라본다.

여행지에서 나는 나 자신이 이방인임을 당연시한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행여라도 이방인이 될까봐 두려워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낯선 사람에게 포기하지 않고 친절을 베푼다. 여행지에서 나는 거리의 악사들과 가장 자유로운 이들과 가장 슬퍼보이는 이들과 이제 막 도시에 도착한 여행객들과 같은 소망을 갖는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친절함을 기대하는 손길을 뿌리치고 타인과 소망을 나누지 않는다.

여행지에서 나는 내가 걷고 있는 길을 오래전 누군가 걸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앉았던 식당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커피를 마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나의 존재와 남의 존재가 연결됨을 느낀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연결이 아니라 나와 남의 분리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목표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더 알고  더 느끼는 데서 단순한 기쁨을 느낀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수많은 것들을 오로지 수단으로 삼는다. 

여행지에서 나는 확실한 길만 찾아가지는 않는다. 불확실함이 많은 데 불평하지 않는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확실한 것만 찾는다. 

여행지에서 나는 가장 용기 있는 자들과 가장 말이 잘 통하는 자들과 가장 정이 많은 자들과 가장 고통 받는 자들과 친구가 된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가장 득이 되는 자들과 친구가 된다.

여행지에서 나는 외로울 때 해나 달이나 한 점 불빛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외로울 까봐 자주 타협을 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쉼 없이 많은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곧잘 지루한 답변만 늘어놓는다. 

여행지에서 나는 얼마나 자주 설레고 얼마나 자주 탄성을 지르던가?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기쁜에도 슬픔에도 고통에도 얼마나 자주 무감각하던가?

여행지에서 나는 해의 뜨고 짐 같은 가장 단순한 풍경에서도 위대한 지구의 운동 법칙을 느낀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눈앞의  일에 급급하느라 어떤 법칙에도 진리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14-16


그러니 나는 이제 여행에서 삶을 배우고 싶다. 여행자의 태도로 살아보고 싶다.  17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두려움을 갖지 않고 이미 일어난 일을 절망이나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근본적인 불행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하나의 '조건'정도로만 받아들인다. 그들은 영감으로 가득 찬 신묘한 말을 하는 현인이 아니라 자신의 손과 발과 눈과 머리를,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18


여행이 끝이 있듯이 인생도 끝이 있다. 끝이 있기 때문에 한 번뿐인 이 인생 여행은 너무나 소중하다.  20


"쓸데 없는 짓이란 없다."  72


"자유인은 결코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지혜로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을 연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스피노자  73


질문하는 자리. 새로 알게 된 것들의 자리에서 나는 그만큼 예전의 나에게서 멀어지고 새러워진다. 나는 새로운 나로 대체된다.  74


어떤 일이 내게 기쁨이 될지 알 수 없으니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수밖에,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말이야.  76



임종진(전 한겨레신문 사진기자였다. 이후 국내외 곳곳을 오가며 사람을 만났고 그들을 찍었다. 2008년 한 구호기관의 자원활동가로 캄보디아에서 1년 반 정도를 머물렀다 돌아와 개인전 <캄보디아-흙, 물, 바람>(2010)을 열기도 했다. 책으로<천만 개의 사람꽅>, <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등이 있다.) - 사진을 찍거든 이미지를 찍지 마십시오. 이야기를 찍으십시오. 그 사람이 되어 봅시다. 우리는 누구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낮추어보는 것을 원치 않을 겁니다. 그러니 사진을 찍기 전에 그 사람이 되어봅시다.  112-113


우리가 만약 '무엇'에만 집착한다면 우리는 앙코르와트를 신기한 돌무더기로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앙코르와트에 와서 소원을 비는 캄보디아 사람들을 궁금해하며 본다며 앙코르와트의 의미는 달라질 것이다. 인생이 여행에게 만약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를 배울 수만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덜 과시적이고 덜 속물적이고 덜 불행할 것이다.  114



소모뚜(버마에서 온 이주노동자다. 1995년 여행 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그는 미등록 이주 노동자로 지내다가 지난 2004년 난민 신청을 했고, 패소와 항소를 거즙한 끝에 2010년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 인권은 나도 당신보다 못나지 않다. 그렇다고 잘 나지도 않았다. 다만 나도 당신과 같은 인간이다.  135

그는 말했다. 가장 곤궁한 자들의 외침에 귀를 막는다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또다른 의미로 친구 만들기에 열정을 쏟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혹 배신할까봐 마음을 놓을 수 없고,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더 넓은 친구와 동지관계의 네트워크 형성에 급급해한다. 저마다 휴대폰의 주소록에 갈수록 더 많은 네트워크를 구축해나가려 하기에, 새 휴대폰 모델이 나올 때마다 전보다 커진 주소록 공간을 갖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저마다 배신에 대비해 '양다리를 걸치는 수법'으로 리스크를 줄이려 하는데, 그것은 결국 리스크를 더욱 키우며 배신을 평범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 지그문트 바우만, <유동하는 공포>  139


우리가 접속하려고 애를 쓰면 그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와 왜 친구가 되려고 하는가? 우리는 엄밀히 말하면 불안 때문에 더 많은 친구를 가지려 한다. 바우만은 유동하는 공포, 현대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통제 불가능의 불안과 무력감 때문에 사람들이 더 많은 친구를 필요로 한다고 본다.  140


우리가 출발점으로 절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는 딱 한 경우뿐이다. 우리가 지금 있는 이 자리를 결코 떠나려 하지 않는 경우, 안주할 경우.

우리도 여행지에서 수많은 선택과 포기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해볼 수도 없고 다 가질 수도 없다. 여행지에서 선택을 한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 선택과 포기 '뒤'에, 선택과 포기를 '통해'서만 우리는 모두 출발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나는 그의 고유한 여행에서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누구도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다. 누구나 선택과 포기를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지나온 길이다. 모든 것을 다 갖지 못한다고 슬퍼하면 안 된다.  141


인도의 용감한 여성들은 대규모 벌목에 반대해 나무 위에 올라가 시위를 벌이는 칩코운동.  150



강판권(계명대 사학과 교수다. 오랫동안 나무 공부에 몰두해왔으며 나무로 역사를 해석하는 데 필요한 건축, 조경, 미술, 사진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로 <세상을 바꾼 나무> <미술관에 사는 나무들> <은행나무> <역사와 문화로 읽는 나무사전> <중국을 낳은 뽕나무> <어느 인문학자의 나무세기> <청대 강남의 농업경제> <공자가 사랑한 나무 장자가 사랑한 나무> <차 한잔에 담은 중국의 역사> <최치원, 젓나무로 다시 태어나다>가 있다.) - 10년 동안 도시락 두 개 싸가지고 하루 열두 시간씩 공부했습니다. 아침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요.  157

<대학>에는 격물치지란 말이 나옵니다. 삼라만상이 다 공부의 대상이란 말입니다. 위기지학과 위인지학의 뜻이 크게 와닿았습니다. 위기(爲己) 학문은 자기를 찾고 자기를 이루어가는 공부로 자기와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반면에, 위인(爲人) 공부는 남ㅇ게 보이기 위한 공부로 공부를 출세수단으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느티나무 뿌리가 땅 위로 노출되어 있는 것을 보셨어요? 그건 그 느티나무가 비탈에 서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런데 그 노출된 뿌리가 뽑혀나가지 않게 보호하려고 느티나무가 그 위에 잔뿌리를 얹어서 동여매고 있는 것도 보셨는지요? 곧 봄이 와서 나무에 새순이 올러오려고 하면 그때 모과나무 한번 만져보세요. 몸통부터 촉촉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나무는 치열합니다. 나는 나무처럼 나 자신부터 온전해지고 치열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59-160

또 하나 나무에게 배운것은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철저한 이기주의자에게 이기와 이타는 아예 분리가 안 됩니다. 어떤 경우든 자신을 완성해야 남에게 어떤 역할인가를 할 수 있습니다. 나뭇가지가 우리보고 와서 쉬라고 그늘을 만들었을까요? 우리보고 와서 감탄하라고 단풍이 들까요? 자기를 위해서 충분히 애써야 합니다. 그것이 나무의 이기주의입니다. 그렇게 치열할 때만 존재는 다른 존재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섣불리 내가 널 위해서 그랬다. 이렇게 말할 것도 없고 치열하게 살지도 않으면서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품어선 안 됩니다.  162

우리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 무지무지 끝까지 애써보지도 않고 대체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164



김효중(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에서 한국의 진딧물을 분류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우리가 도전이란 걸 할 때 뭘 이미 많이 알아서 도전하는 게 아니고 에러를 경험하며 에러를 줄여가면서 도전한다는 거죠.'  179

우리는 여행지에서 가끔 이런 절박함을 갖는다. 내가 언제 또 이 도시를 찾을 것인가? 그 여행은 단 한번 주어진 기회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내가 언제 또 이 모습으로 이 삶을 살아볼 것인가? 그 질문 속에서 우리 인생은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다.  192

여행중에 우린 수많은 여행자들에게 질문을 하곤 한다. "당신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요?"  193



송경동(2001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꿀잠> <사소한 물음에 답함>이 있다.) - 나는 내가 감정이 약하다고 느낄 때마다 내가 감상적이기만 한 것은 아닌지, 내 감정의 결과에 대한 성찰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우리의 감정 이입에는 뭔가 기형적인 요소가 있다. 우리는 너무나 속속들이 알아서 오히려 감정을 배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감정 이입은 '...척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이 상처 입는 게 싫어서, 좋은 사람이란 말을 듣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서, 다춤과 분쟁이 싫어서, 어떤 정체성을 원해서, 안주하고 싶어서, 행동보다는 말을 선호해서,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감정 이입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것은 내용 없는 감정 이입이고 감정 없는 감정 이입이고 감정이 있다고 해도 오히려 자기 자신의 감정에 이입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감정 이입은 동정심과 달라야 하고 둘 사이의 평등한 감정이어야 한다.  203

'감정 이입에 대해서 물었죠. 기억들, 기억들이 다 남아 있어요.'  213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은 내 가슴을 치는 것, 나를 울게 하는 것, 내 가슴에 너무나 깊숙이 남아 있는 것, 낭게 시와 삶은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215

돌아가면 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가? 버려야 할 것들과 이루고 싶은 것을 나누고 일치시키는 기준점은 사랑이었다. 사랑 때문에 우리는 이룰 수 없어도 버리지 않고, 버리라 하는 것을 이루고 싶어한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가 싸우는 것이 무슨 소용이랴.  219



송규봉(미국 펜실베니아대 환경학 석사과정에서 GIS(지리정보시스템)를 전공했다. 필라델피아 소재 GIS 연구소에서 CML 연구원으로, 하버드대에서 GIS 컨설턴트로, 와튼경영대학 부설 Wharton GIS Lab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현재 연세대에서 GIS 분석에 기초한 건축기획과 디자인정보분석을 강의하고 있으며 (주)GIS 유나이티드의 대표를 맡아 GIS 분석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비즈니스 GIS> <미국 인터넷산업의 지도> <지도, 세상을 읽는 생각의 프레임> 등이 있다.) - '지도는 혼자 힘으로 결과를 낼 수 없는 것을 위해 주변의 도움을 얻어 만들어서 공동으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저에게 대동여지도는 그 정확도 때문이 아니라 그 마음 때문에 더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235

'세상이 어떤 보통 명사도 사람과 결부되면 고유명사가 됩니다.'  236

우리는 여행지에거 자기만의 지도를 그리고 그것을 소중한 자랑거리로 여기지만 정작 삶에선 내가 그리는 지도란 없다는 듯이 군다

저마다의 지도가 인간성의 지도, 내면의 지도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지도는 내가 살아온 날에 살아갈 날을 덧붙이면서, 살아갈 날이 지나온 날의 의미를 끝없이 수정하면서 완성되어갈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선의 끝부분은 아직 미지의 고장에 있다.  241



안재원(서울대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대학원에서 서양고전학을 전공했다. 이후 독일 괴팅겐대로 유학, 서양고전문헌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서로 <수사학> 등이 있다. 현재 서울대 인문학 연구소 HK연구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라틴어의 '카르페 디엠', 그날 그날 즐겁게 살라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카르페 디엠의 철학적 의미는 매 순간 매 순간이 축적되어 역사가 된단 것입니다. 그 순간들이 모여 나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을 크게 보면 하나의 순간에 모든 것을 걸 수도 있더는 말입니다.  263


Amor vincet omnia 사랑이 모든 것을 극복하리라.  264



여행을 기억함이란 무엇일까? 그건 사진을 들여다보기, 지나간 일정을 회고하기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건 그 여행이 이미 내 영혼의 일부가 되었단 뜻이다.  271


여행자가 마주하는 필연성은 무엇인가? 세상 모든 곳을 돌아다녀도, 그곳이 어디라도, 사람들은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미소를 짓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새로운 날을 맞이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 아닐까? 그 와중에 나는 세상이 아무리 참혹하고 불친절해도 눈물 흘리는 자가 있고 올바른 행동을 하려는 자가 있음에 번번이 놀란ㄷ. 아무리 어려운 곳에서도 이렇게 외치는 자들이 있음에 놀란다. "우리는 이렇게 살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이쯤에 머물며 포기하려고 여기까지 살아온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친구여!"

인간 영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고 그 아름다움을 본 자들은 지혜로워진다. 그렇지만 반대로 여행자에서 돌아와서는 인간 영혼을 까맣게 잊고 있음에 또 번번이 놀란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행자의 태도로 사는 동안 우리는 마치 여행지에서와 같은 필연성을 마주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렇게 사는 동안 우리 또한 다른 여행자의 눈에 들어온 하나의 풍경, 하나의 낯선 여행자가 아닐까?  280-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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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장! 이놈의 피리가 또 막혔어요. 여름밤은 너무 짧은데 말이에요.

- 넌 집에 안 가니?

- 아저씨는 여기서 뭐 해요?

- 기다려.

- 누굴요?

- 나도 몰라. 오지 않을 사람 같아.

- 한가한 사람이군요.

- 아니, 나는 바빠, 열심히 기다리고 있거든.

- 열심히 기다리는 건 좋은 기다림이 아니에요.

- 왜?

- 기다림은 의지와 결심으로 하는 일이 아니거든요. 기다릴 것들은 당신의 바깥에 있어요. 당신에게 누군가 필요하다면 부디 아무도 기다리지 말아요.

- 저런, 네 말대로라면 공연히 무덤가의 꽃들만 시들었구나.

- 저 시든 꽃들요? 그건 다만 이 여름의 마지막 장미일 뿐이에요. 누굴 위해 피어난건 아니죠. 여기 있는 것들은 더 이상 자신을 말하지 않아요. 그래서 홀로라는 말을 모른답니다. 이제 그만 이야기 할래요. 난 다시 피리를 불 거예요.  59-60



그래도 떠난 애인에게서 배운 말을 그대가 내게 하고, 나도 나의 떠난 애인에게서 배운 말을 그대에게 하지. 내가 그대를 떠나면 그대가 나에게 배운 사랑의 말을 나의 새 애인에게 건네고, 지구의 사랑은 아무래도 그렇게 현명해지고 있는 거지. 오랜 세월 세상의 광물과 다 접톡해서 현명해진 지하수처럼.

그래서 말이지, 나는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기보다는 그대에게 배울, 내 새 사랑의 말을 생각해 보는 밤이고 싶어.

사랑이 밀려오면 평온의 휴식은 끝나고, 나는 이내 가난해져 다시 또 길을 잃고.  102



순정이란 것은 자고로 연약한 마음이 아니라, 들끓는 닫힌 욕망의 체계이다. 순정은 사랑하는 그 사람에 대한 극진함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은 제 속의 이유로 그 사람을 독점하려는 욕망이다. 심지어는 그 욕망이 저지당하고 명백하게 그 끝을 보았을 때조차, 남자는 저 홀로 상처를 끌어안고 사랑의 끝을 모른 척하며, 여전히 제 속에 갇혀 사랑을 고수한다. 상대도 없고, 자신의 무너짐도 없이 오직 거울 속에 갇혀 홀로 사랑하는 일.

남자들아, 함부로 제 속에서 순정을 길어올리지 마라. 순정은, 이토록 사랑과 상처 사이에 기생하며 꿈틀대는 그대의 증상에 다름 아니니, 증상으로나마 제 욕망을 누리려는 마음은 더없이 쓸쓸한 것이다.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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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어느 섬을 방문한 한 스페인 선교사가 세 명의 아스텍 사제들과 마주쳤다. 

"당신들은 어떻게 기도합니까?" 선교사가 물었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기도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우린 이렇게 기도하지요. 신이시여, 당신은 셋이고 우리도 셋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스텍 사제들 중 한 명이 대답했다.

선교사는 말했다.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그러나 신께서 귀 기울이시는 바로 그 기도는 아닙니다. 제가 당신들께 훨씬 더 좋은 기도를 가르쳐 드리지요."

선교사는 그들에게 가톨릭의 기도문을 가르쳐주고, 복음 전도를 위한 항해를 계속했다. 수년 후, 그가 탄 배가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섬에 들렀다. 갑판 위에 서 있던 선교사는 해변에서 배를 향해 손을 흔드는 세 명의 아스텍 사제들을 보았다. 그들 세 사람은 물 위를 걸어 그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신부님, 신부님!"

배를 향해 가까이 걸어오던 세 사람 중 하나가 소리쳤다.

"신께서 귀 기울이신다는 그 기도를 다시 가르쳐주십시오. 그게 어떻게 시작되는지 잊어버렸습니다."

기적적인 장면을 목도한 선교사가 대답했다. "그게 뭐든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는 신에게 용서를 구했다. 신은 모든 언어를 두루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잘못에 대해.


이 일화는 내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담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진정한 경이에 둘러싸여 산다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기적은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다. 신이 보내는 신호는 우리에게 주변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다. 신이 보내는 신호는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고, 천사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신에게 이르고자 한다면 일정한 형식과 규칙들을 따라야만 한다고 가르침 받아온 탓이다. 우리는 신이 도처에 편재한다는 사실을, 신은 우리가 그/그녀를 허락하는 곳이면 어디든 임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전통적인 종교의식들은 중요하다. 그 의식들을 통해, 우리는 경배와 기도의 체험을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있다. 그러나 영적 체험이 구체적인 사랑의 체험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그리고 사랑에는 어떤 규칙도 없다는 것을, 대인관계를 다룬 책을 읽거나, 감정을 조절하고 행동을 위한 전략들을 개발하려 애쓸 수도 있지만, 그런 행동들은 부질없을 뿐이다. 결정은 우리 마음이 하는 것이며,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이 마음의 결정이다. 

누구에게나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말한다.

"난 지금 그럴 만한 가치도 없는 사랑 때문에 너무도 괴로워하고 있어."

받는 것보다 더 많이 주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고통스러운 건 아닌가. 우리가 만든 규칙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괴로운 건 아닌가. 본질적으로는 아무런 이유 없이 괴로워하고 있는게 아닌가.

사랑에는 성장의 씨앗이 깃들여 있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우리는 영적 체험에 보다 가까워진다. 참으로 깨달은 자, 사랑으로 뜨겁게 데워진 영혼은 모든 편견을 넘어설 수 있다.  11-14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온전히 내주는 행위이다.

이 책은 자신을 내주는 행위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작중인물인 필라와 그녀의 친구는, 우리가 우리의 반쪽을 찾아나설 때 만나게 되는 수많은 갈등들을 상징한다.

우리는 우리 내부의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한다.  14


수도사 토머스 머튼은 말했다. "사람들은 타인을 보호하거나 도와주거나 선행을 베풀기 위해 사랑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그렇게 대한다면, 그건 그를 단순한 대상으로만 여기고 자기 자신을 대단히 현명하고 관대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사랑과는 전혀 무관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타인과 일치하는 것이고, 상대방 속에서 신의 불꽃을 발견하는 일이다."  14


모든 사랑 이야기는 닮아 있다.  21


길은 걸으면서 만드는 것이었다.  22


우리는 우리 내면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한때 우리 자신이었던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53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어린아이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아이를 성가셔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아이를 혼자 내버려두고 그 아이의 말을 거의 듣지 않음으로써, 그 아이가 겁을 집어 먹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아이가 사랑받고 있음을 다시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 아이를 즐겁게 해야 합니다. 

타인의 눈에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54


현실에서의 사랑은 가능성이 있어야 합니다. 설사 내가 주는 사랑에 대해 당장 대답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언젠가는 원하는 사람을 가질 수 잇으리라는 희망이 있어야 존재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지 않은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사랑을 위하여!"

"때론 사랑이 유치한 짓에 지나지 않음을 이해하는 현명한 사람들을 위하여!"

"현명한 사람은 오직 그가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현명한 것!"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랑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  61


사랑은 덫으로 가득하다. 사랑이 그 모습을 드러낼 때, 사랑은 오직 밝은 면만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 그 빛이 만든 그림자는 볼 수 없게 한다.  69


"삶에는, 얻기 이해 끝까지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있어."


새 신발을 신으면 발이 좀 아픈 법이다. 삶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원치 않을 때, 그리고 필요치 않을 때도, 삶은 우리를 의외의 무언가로 사로잡아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도록 한다.  83


"좌절도 있지요. 누구도 그걸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위한 싸움에서 뭔가를 잃는 편이, 자신이 뭘 위해 싸우는지도 모르는 채 좌절하는 것보단 훨씬 낫겠지요."  93


"너,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연습을 했구나?"

"응, 어떻게 알았니?"

"너도 변했으니까. 사람들은 항상 가장 적잘한 시기에 그 연습을 하게 되거든."  129


'사랑은 결코 조금씩 오지 않아.'  133


"삶의 신비가 나를 사로잡았어. 난 그걸 더 잘 이해하고 싶었어. 누군가. 대답을 알고 있다고 말해줄 그곳을 찾아 헤맸지. 인도도 가보고 이집트도 가봤어. 마법과 명상의 달인들도 만나봤어. 연금술사와 사제들의 곁에서도 머물렀지. 그리고 결국 나는 내가 찾고 있던 것을 발견했어. 그것은 믿음이 있는 곳에 진실이 있다는 사실이다."  134


"너 추워서 떨고 있구나. 억지로 의식에 참가할 필요는 없어."

"넌 여기 계속 있을 거지?"

"그래. 이게 내 생활인걸."

"그렇다면 나도 같이 있을 거야."

하지만 내심 그곳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게 너의 세계라면 나도 그 일부가 되는 법을 배우고 싶어."  159


사랑은 사랑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을 뿐이었다.  171


"<주역>에서 말하길, 도시는 바꿀 수 있어도 샘이 있던 자리는 바꿀 수 없대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발견하는 곳은 바로 샘 근처죠. 사람들은 그곳에서 갈증을 씻어내고 집을 짓고 아이들을 기르지요. 하지만 그들 중 한 사람이 떠나길 원한다 해도, 샘을 옮겨갈 수는 없어요. 그러니 사랑은 그 자리에 남게 되죠. 버려진 채로 말이죠. 샘에는 여전히 맑은 물이 가득 차 있겠지만요."  182


"하느님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나는 사람은 시간 낭비만 하고 있는 거요. 물론 수천 갈래의 길을 걸을 수 있고, 다양한 종교와 종파를 만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결코 하느님과 만날 수 없어요. 하느님은 여기 있소. 바로 이 자리에, 우리 곁에. 우리는 이 안개 속에서도 그를 볼 수 있고, 우리가 걷고 있는 이 땅에서도 볼 수 있소. 심지어 내 신발에서도 볼 수 있지요. 하느님의 천사들은 우리가 잠자는 동안 밤새워 우릴 지켜주고, 우리가 일 할 때면 곁에서 도와줍니다. 하느님을 만나려면 주위를 둘러보기만 하면 돼요. 하지만 이 만남은 쉽지 않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신비에 동참하도록 더 많이 요구하실 수록 우리는 더욱더 혼란스러워지니까요. 신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우리의 꿈과 마음을 따르도록 요구하시기 때문이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다른 방식으로 사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걸 따르는 일이 쉽지가 않소. 그러나 결국 우리는 신께서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놀라움과 함께 발견하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니까요."  191-192


"잔이 떨어질 것 같아." 그가 말했다.

"그래, 난 네가 이걸 테이블 아래로 밀어버렸으면 해."

"잔을 깨라고?"

그래. 잔을 깨는 거야. 겉보기엔 간단한 동작이지만, 컵을 깬다는 것은 그 정체를 알지도 못하면서 가지게 되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값싼 유리잔 하나를 깨버리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일상 다반사인 것을. 

"잔을 깬다구? 왜?" 그가 다시 물었다.

"이유야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 하지만 사실은 그냥 깨기 위해서 깨는 거지."  232-233


난 잔을 깼다고 영수증에 깨진 잔 값이 청구됐다는 사람의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어. 깨진 잔은 삶의 일부일 뿐, 우리에게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아. 식당 주인에게든, 우리 이웃에게든.'  233


'잔을 깨, 제발... 어리석은 편견들로부터 자유롭게 해줘.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다른 모든 살마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게 해달란 말야.' 

"잔을 깨."  234


"사실 전 가진 게 없어요."

"아가씨에겐 아가씨의 삶이 있어요. 기나긴 삶이. 그걸 좀더 잘 간직하도록 해요."  272


"사랑은 그 자리에 있어요. 변하는 것은 사람들이죠!"  276





옮기고나서


답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지만 길이 끝나는 곳에 답은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는 말한다. "모든 사랑 이야기는 닮아 있다."  288


길을 떠나는 사람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지 말아야겠다. 그건 그의 노정에 대한 예의가 아니므로. 대신 그와 더불어 떠날 용기를 내야겠다. 머물러 바라보지 말고, 함께 걸어주어야 겠다.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말하기.  292-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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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길은 내게 잃은 만큼 얻고 버린 만큼 채워진다는 것을, 늘 선택을 강요받고 올바른 선택인지 아닌지 조바심 냈던 삶에 '정답'이란 없음을 가르쳐 주었다. 


작은 배낭 하나로 충분했던 그나르이 여행은 내게 사는 데 필요한 것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제일 먼저 일깨워주었다. 여행을 하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앟았던 생각은 '너무 많이 가졌다'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살아가는지, 그리고 집과 방을 채우고 있는 대다수의 물건들이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를 말이다. 내 몸의 일부마냥 끌어안고 다녔던 배낭도, 그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수많은 물건들도 사실은 전혀 쓸모없는, 지금 당장 버려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물건이었음을 깨달으며 적지 않은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다. 없으면 큰 일 날 줄 알았던 전기, 물 같은 것들도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졌다.

그런 생활이 익숙해지니 자연적으로 행복의 기준도 바뀌었다. 여행 전에는지는 대개 갖고 싶었던 물건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 행복했었다. 행복의 유효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사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은 넘쳐났으므로 돈만 있으면 언제든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러니 행복은 자연스럽게 돈과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는 것은 돈이 많았으면 좋게싿는 얘기였고,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행복해지고 싶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여행을 마치고 난 후의 나는 더 이상 돈과 물질에 얽매이지 않았다. 나 스스로에게서 행복을 찾는 법, 무언가를 굳이 소유하지 앟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고 돌아오니 그런 것들이 얼마나 하찮고 쓸데없는 시간 낭비엿는지 수도 없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31-32


여행은 내게.. 비워내지 못하면 새로운 것을 채워 넣을 수 없다는 것, 나는 비우고 버리는 연습이 많이 필요한 어리석고 나약한 인간이었다는 것도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법, 어딘가로 떠나지 않아도 여행할 수 있는 법, 삶에 대한 의지, 좋은 친구들, 가족의 소중함, 사랑, 삶의 가치 등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아직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이 시간이 흘러 어떤 형태로 내게 가르침을 줄는지도 기대된다. 

여행 중엔 많은 것을 잃고 또 많은 것을 얻는다. 잃는 것 중에 절반 이상이 살면서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지만 얻는 것 중에 거의 대부분은 살면서 힘이 될 만한 것들이다.  33


Q. 하던 일을 접고 훌쩍 떠났을 때 두려움은 없었나요? 돌아온 뒤의 불안함 같은 거?

A. 있었죠. 그러나 그때는 떠나고 싶다는 목마름이 더 커서 두려움이나 불안함이 그리 크게 느껴지진 않앗어요.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긍정의 자기합리화였을 수도 있겠지요.

Q. 후회하지 않아요? 그때 떠나지 않으면 포기하지 않아도 될 것들에 대해.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똑같은 결정을 할 수 있을까요?

A. 그다지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포기하로 할 만한 게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포기했다고 한다면,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왔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아요.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저는 똑같은 결정을 할 것 같아요.

Q. 스물아홉은 긴 여행을 떠나기엔 너무 늦은 나이 아닐까요?

A. 하고 싶은 때가 할 수 있는 때라고 생각해요. 떠나지 못하는 건 아마 떠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요? 이것 때문에 안 되고 저것 때문에 안 되는 건 순전히 자기가 만든 룰이잖아요.  39


이제 여행을 시작한 지 겨우 3일이 지났다. '어디서 잘지, 무엇을 먹을지, 어디로 갈지'만을 생각하며 정신없이 돌아다니니 정작 내가 왜 이곳으로 떠나왔는지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떠남의 갈증이 해소되고 나니 또 다른 허무함이 찾아왔다. 그저 '떠나라'는 마음속의 외침에 충실하고 싶었지만 여행으로 인해 많은 것들을 놓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은 항상 나를 괴롭혔다. 게다가 이곳 인도는 자꾸만 나를 지치고 힘들게 만들어싿. 맘 편하자고 여행을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상식조차 통하지 않는 답답한 생활을 도저히 즐길 수가 없었다.  63


바쉬쉿(vashisht)은 마날리에서 4km정도 떨어진 유황 온천으로 유명한 작은 마을이다.

인도 여인들은 탕 안에서 머리를 감고 때를 밀고 세수를 하고 이를 닦았다. 탕속의 물로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탕 속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몸을 꿈쩍할 수가 없었다.

'겨우 며칠 안 씻는다고 죽지는 않는다.'고 위로하며...

탕속의 풍경은 며친 전과 다르지 않았다. 달라져 잇는건 오로지 나 자신뿐이었다.

옷을 벗고 탕 속에 들어갔다.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던 이 낯선 풍경이 몸에 찬기가 덜어질수록 서서히 익숙해져갔다.

이제는 물에 뭐가 섞여 있는지, 깨끗한지 아닌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저 따뜻한 물이 끊임없이 나온다는 사실이 고맙고 또 고마웠다.  68-73


'아, 드디어 서른이다.'

뭔가 달라진 공기를 느껴보려 폐 깊숙이 숨을 들이켜 봤지만 별다를 게 없었다. 어제도 그제도 똑같앗던 공기였고 일상적인 아침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다자고짜 서른이 주는 의미에만 매달려 있던 내가 아무런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왜 그렇게 그 나이에 집착했던 걸까. 무작정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걸까, 특별한 서른을 맞이하겠다며 떠나온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서른이 되면 무언가가, 정말 막연히 그 무언가가 달라져 있을 거란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졌다.

스스로가 변하거나 노력하지 않으면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85


평범한 일상들이 길 위에선 조금 더 특별해지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여행을 좋아하는 걸까? 지티고 힘들기만 했던 일상을 떠나 그것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일이였는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일, 그것 또한 여행의 몫이리라.  90


푸쉬카르에서 머문 3일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걷고, 카트에 앉아 책을 읽고, 공연을 보고 일몰을 본 게 전부다. 무언가에 쫓기듯 이동했던 인도에서 처음 맛보는 휴식다운 휴식이었다. 급할 게 뭐가 있다고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그렇게 떠돌았던 걸까. 인도가 싫고 인도사람이 싫다며 투덜거리기만 했던 내게 '생각했던 것처럼 행복한 여행이 아니어서 싫고, 좋은 것만 기대했던 네가 싫었던 것은 아니었나?' 되물었다.  97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나의 일상에서 다른 사람들의 일상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굳이 남의 일상에 들어와서 무언가를 느끼고 감동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 테다. 다시 내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그들과 함께 했던 또 다른 일상을 추억하며 행복에 젖는 것, 여행자의 몫은 여기까지가 아닐까.  125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매한가지다. 단지 생김새가 다르고 풍습과 문화가 다르다며 신기하게만 생각하고, 특이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 막연하게 기대했던 내 바보 같은 생각이 문제였다.  186


햇살이 눈부셔 눈을 감고 있던 그때, 바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곧이어 발끝을 간질이는 바다 소리가 들리고 자갈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멀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이파리 소리와 풀벌레 소리도 들려왔다.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소리들에 놀라 눈을 번쩍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소음에 익숙했던 내 귀가 처음으로 자연의 소리를 감지했던 것이다.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었다. 여전히 작은 해변에 누워 있는 내가 전부였다. 이렇게 큰 소리를 지금껏 왜 듣지 못했던 것일까. 

나는 다시 누워 눈을 감앗다. 그리고 자연이 내는 경이로운 소리들을 마음으로 끌어당겼다. 파도를 생각하면 그 소리만 크게 들렸고, 바람을 생각하면 파도 소리가 페이드아웃 되고 바람 소리만 다가왔다. 신기하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내가 무언가를 듣고자 하면 들렸고 듣길 원하지 않으면 또 들리지 않게 됐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텅 빈 상태가 됐다. 무중력 공간을 자유롭게 떠다니는 기분, 이런 게 자유가 아닐까 싶은 편안함을 느꼈다.  200-203


자연이 주는 넉넉한 풍요로움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다음 세대도 이 축복을 공유할 수 있도록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 어쩌면 그것은 여행자로서 제일 먼저 깨닫고 실천해야 할 일일는지 모른다.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여행자는 물론, 인생이라는 여행길을 걸으며 지구에 잠시 머물다 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212


인도에서도 네팔에서도 태국에서도 보았고 우리의 시골에서도 본 풍경들이지만 캄보디아의 풍경은 유독 슬퍼 보였다. 유난히 붉은 길, 그 길 위에 맥없이 떨어지던 붉은 태양. 마른 먼저를 피워내며 달리는 차에서 바라 본 불투명한 풍경들이 마치 오래된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아주 슬프고 가슴 아픈 영화의 한 장면. 가끔씩 울컥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아 내느라 여러 번 거친 호흡을 걸러 냈지만 주책없게 한두 방울이 흘러 나왔다.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는 부쩍 눈물이 잦아졌다. 절대로 남들 앞에선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내가 인도사람들과 싸웠다고, 파도소리가 너무 아름답다고, 붉은 흙길이 슬프다고 사람들이 보거나 멀거나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으니 나도 내가 어색해 죽을 지경이었다. 약해 보이면 안된다고 그래서 남의 입에 오르내리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옭아매던 동아줄이 여행을 하는 동안 어느샌가 느슨하게 풀어져버린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참고 견디고 다지며 살아왔던가. 힘들고 냉정한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하나씩 쌓아올린 벽, 그것이 나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보호가 아니라 고립, 스스로를 가둬놓은 꼴이 되어버렸다.  222-22


세상 어디에도 슬픔만 존재하는 곳은 없다. 행복만 존재하는 곳도, 눈물만 존재하는 곳도 없다. 이렇게 적당히 고통과 상처가 눈물과 환희로 얼기설기 어우러지며 둥글게 굴러가는 것이다. 사람 사는 건 어디건 닮아 있다. 다시 한 번 그 모습을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놓여진다.  241-242


집에 도착해 내 방에 들어섰을 때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와 깨끗한 이불을 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매일 같이 잠자리를 구하느라 힘들게 걸었던 시간들과 더러운 시트에 우비를 깔고 자던 기억, 벼룩이 옮아 고생했던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이제 더 이상 고생스럽게 잠자리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이번엔 단정하게 접힌 깨끗한 수건들과 커다란 통으로 가득 채워 잇는 샴푸와 린스를 보고 또 가슴이 먹먹해져 버렸다. 매일 빨아 써야 하고 가끔 물이 안 나와 그냥 냄새나는 채로 말려서 써야했던 한 개의 수건, 불량식품처럼 줄줄이 매달려 있어 하나씩 잘라 썼던 일회용 샴푸, 돈 아끼느라 8개월 동안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린스, 이 모든 것이 너무 감격스러우면서 한편으로는 사치인 듯 느껴져 불편한 마음마저 들었다. 

물론 편리하기는 했다. 전기는 항상 연결되어 잇었고 언제든지 수도꼭지를 틀면 시원한 물이 쏟아져 내렸다. 수건은 넉넉했고 샴푸와 린스도 항상 가득차 있었다. 그런 일차원적인 문제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마냥 고맙기는 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당장 없어진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나는 엄마에게 그리고 가족들, 친구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엄마, 우린 너무 많은 것을 가졌어. 우리가 살면서 필요한 건 이렇게 많지가 않다고!" "동생아, 양치할 땐 물을 잠가라. 지구 반대편에선 물이 부족해 죽어가는 어린이들도 있다." "친구야, 또 뭘 산거야? 너 죽을 때 그거 다 짊어지고 갈래?"

그러나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물을 틀어놓고 양치를 하고 린스를 듬뿍 짜서 머리를 헹궜다. 다 먹지도 않은 찌개를 지겹다며 다른 것을 끊여 달라 잔소리를 하고 옷을 사야 된다고, 상한 머리칼을 다듬어야 된다고 엄마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편리한 생활은 그렇지 않은 생활보다 적응하기가 더 쉽고 빨랐다.  301-302


물질과의 여행이 아니었다. 마음과의 여행에 필요한 물건은 그리 많지가 않다. 나는 여행을 떠나고서야 그것들을 느낀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꽤 많은 곳을 여행했고 가볍게 짐 꾸리는 데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장기 여행을 준비하며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잊고 있었다.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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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는 실감이 나질 않아."  9


여행할 때, 배낭을 메고 길 위에 섰을 때, 낯선 것들과 조우할 때, 그 설렘. 아무래도 그것이 내게는 '살아 있는 실감'에 가장 가까운 감각이었다.  10


'생활인'인 나에게 충실하기 위해서는 내 방식의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많이 온다. 그리고 나이를 먹을 수록, 현실에 대한 내 책임이 더 늘어날수록 그 순간은 더 자주 찾아올 터였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현실과 꿈이 공존하는 방법을, 핏줄에 부는 바람을 안고 생활인으로 사는 방법을, 먹고사니즘과 '내 방식의 행복'이 함께 손잡고 이인삼각으로 비틀거리며 걷는 방법을.  14


여행과 일상의 중간.  21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마흔이 되고 싶다.  37


"평범하게 사는 게 어떤 건데? 먹을 것, 잠잘 곳, 놀 곳, 섹스 상대. 이거 말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뭐가 더 필요한데?"  111


"한국 사람들 늘 그러잖아. 뭐하지? 뭐해야 되지? 안절부절."

왜 시비냐고 버럭 하려다가 참았다. 저날 밤 톰과의 대화에서도 느꼈듯, '인생'이라는 마라톤 경기에 대한 한국 사람들과 빠이 사람들의 태도 차이가 너무도 극명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구간 내내 전력 질주를 한다. 빠이 사람들은 경주에 아예 관심이 없어 보인다. 트랙 근처 나무에 해먹 매달아놓고 낮잠 자는 모습이다.

과연 삶이라는 마라톤은 어떻게 달려야 할까. 가장 좋은 건 적당히 속도안배를 하면서 달리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건 반드시 사회 시스템이 받쳐줘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구간마다 물컵이 달리는 사람 수만큼 놓여 있어야 할 거고, 어떤 출발점이나 환경에서 시작하더라도 불이익을 겪지 않도록 규칙과 트랙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아예 중간에 트랙에서 내리는 방법도 있을 거다. 조기 은퇴나 조기 퇴직 같은 것. 그러나 그러려면, 달리는 동안은 얼마나 치열하게 달려야 하는 것일까.  113-114


"속 터져요, 한국 같으면 벌써 다 지었어. 진짜 태국 애들 일 못하는 거 상상 초월이야."

"학비는 받나요?"

"아니, 기숙사까지 전액무료."

"학교 다 지으시면 교장선생님 되시는 거예요?"

"아니, 애들이랑 선생님한테 줄 거야. 나는 다시 딴 거 해야지. 여행 가든가. 내가 건물만 올려 주ㄴ면 그담엔 자기들이 지지고 볶고 만들어 나가야지. 밥도 해먹고, 농사도 지으면서."

"그럼 이 건물을 짓는 특별한 이유라도..."

"놀이."  128


난 그냥 내 고산족 친구들한테 해줄 게 없을까 하다 한번 만들어 보는 거예요. 아, 재미있잖아. 일 잘 안 풀리면 홧술도 한잔씩 마셔가며."

"살아 있다는 실감은 제대로 느끼고 사시겠네요."

도인 아저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129


차가 읍내로 들어서자 기분이 복잡해졌다. 온천이나 폭포 같은 곳은 갈 생각 없다. 그것은 내게 그저 빠이라는 동네의 장식에 불과 했다. 나는 그냥 좁은 타운 안에서도 충분히 행복했고, 만족했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몸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좁은 타운 안에서 한 발짝 나각자, 내가 몸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왼쪽 겨드랑이나 허릿살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보였다. 빠이에 좀더 머무르고 싶어졌다. 좀 더 머무르며, 속속들이 이곳을 느끼고 싶어졌다.

"저 며칠 있다가 방비엥 가는 표 끊었거든요. 이거 찢을까요?"

아저씨는 느릿느릿 대답했다. "빠이, 블랙홀이야. 한번 빠지면 나가기 힘들어. 그래서 바람 불었을 때 얼른 떠야 돼요. 여기가 바람이 잘 부는 데가 아니거든."  130


나이가 먹을수록 설레는 일이 줄어간다. '그런 거 예전에도 봤어.' , '다 아는 거야.' 같은 허세와 교만은 조금씩 느는 것 같은데 새로운 것에 대한 발견과 깨달음의 설렘은 나날이 줄어간다. 나는 돈 뎃의 노을 앞에서 너무도 설레었다. 노을 겉은 거 보고 설렐 줄은 나도 몰랐다. 다시 한 번 그 처음 본 붉은 빛을 보고 싶었다. 한 번쯤 더 설레 보고 싶었다.  216


라오스에서 필요한 것은 '비움'이다.  231


누군가 '라오스에서 뭘 하셨어요?'라고 물으면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다. '기다렸어요.' 내가 기억하는 라오스 여행의 절반 이상은 기다림이다. 그것도 확실치 않은 기다림.  237


지금까지 나 자신을, 특히 여행할 때의 나 자신을 돌이켜 보고 얻은 결론인데, 나는 고생을 싫어하지 않는다. 내 몸과 내 예금계좌와 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히지 않는 한도 내어ㅔ서의 고생이나 소동은 오히려 좋아한다. 무탈하고, 평온하고, 고요한 나날이 계속되면, 재미없다. 나이를 먹고 많은 상황에 익숙해져 갈수록 실수할 일도 잘못될 일도 줄지만, 그만큼 흥분하고 떨리고 가슴 졸일 일도 줄어든다. 그러고 보니 마흔은 '불혹'이했지, 흔들리지 않는 나이. 그 나이에 대해, 하나만 소박하게 바란다. 나는 흔들리지 말고, 내 주위의 공기를 조금씩 흔들려주기를,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을 때는 나 스스로 흔들 수 있는 자유를 잃지 않기를.  264


지금까지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사실 그것들이 알고 보니 내게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었던 거다. 적어도 '행복'을 위해서는 말이다. 그렇다면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언제 어디서나 나다운 행복을 느끼기 위한 최소공약수는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그렇다. 세상을 삼십 년도 넘게 살아왔건만, 나는 단 한 번도 '행복해지는 법'에 대해 배워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모두들 주변에서 '잘살아야 한다'라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잘산다'는 것은 경제적인 안정과 풍요, 그리고 남들 보기에 번듯한 외적 조건을 갖추는 것. 잘 사는 거, 좋지. 그렇게 살면 참 편할 거다. 거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을 거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했을 때 기억과 마음에 남는 건 잘살았던 것보다는 행복했던 것들 쪽인 거 같다.  275


호수를 빙 둘러싸고 울창한 열대 밀림이 우거져 있었다. 날이 흐린데도 물에서는 불쾌한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지독하게 맑은 공기 위로 축축한 밀림의 향기가 가득했다. 아이들은 외국인인 나를 보고 쑥스럽게 웃음을 지어 주었다. 

자, 이제 돌아가자. 어차피 호수에서 굳이 뭘 하겠다고 온 것은 아니니까. 그저 남아도는 한나절과 매너리즘을 쓰임새 있게 버릴 곳이 호수였을 뿐이다.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시간은 자주 버리잖아. 만화책으로, 게임으로, 트위터로, 메신저 수다로. 다만 이번 땡땡이에는 동그란 물, 붉은 진창, 울창한 밀림과 낯선 풀 냄새, 그리고 애물단지 같은 자전거가 하나 있는 거다. 라따나끼리에서 땡땡이는 이런 식으로 치는 거다.  287-288


내가 사는 나라, 얼마 전까지 변두리였다가 신도시가 된 우리 동네에서는 로스(스위스인)의 동네가 꽤나 행복해 보인다고 말한다. 더이상 바랄 것이 없어 보이는 그 부티와 안정감, 우리는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오늘도 그토록 치열하고 시끄럽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막상 그런 '행복'을 손에 넣은 것처럼 보이는 동네 주민은 정작 자기들이 행복을 잃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 땅, 인도차이나의 사람들은 정작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정말 그렇게 마냥 행복할까? 저 부유한 나라에서 온 친구의 말뜻은 결국 이건데, 행복과 소유는 그다지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까 결국 행복은 마음의 문제라는 것, 적어도 인도차이나 사람들은 그 '행복'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것 같다. 낙천적이고, 여유롭다. 정확성이니 효율성 따위에 집착하지 않고 좋은 게 좋은 대로 살아간다. 불교라는 사상적 배경 때문에 현세의 괴로움에 너그럽다. 게다가 최소한의 의식주도 해결하지 쉽다. 밖에서 자도 얼어 죽을 일 없고, 바나나며 망고스틴 같은 과일이 지천이니 굶어 죽을 일도 없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땅의 곳곳에서 욕망의 냄새를 맡는다. 생존과 생리에 대한 기본적인 욕망이 아닌, '소유'를 향한 자본주의적 욕망 말이다. 이런 욕망은 아주 쉽게 부도덕 및 몰양심과 결합한다. 나는 그것을 내 나라에서 징그럽게 많이도 보아왔다. 그리고 불행히도, 나는 이 땅에서 그런 '징후'를 몇 차례나 보고 말았다.  297-298


욕망을 가진 자에게는 그 욕망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와 장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좀더 노동과 대가의 의미를 제대로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착취당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저 얻는 것도 아닌 제대로 된 대가.  298


솔직히, 도시는 편하다. 나는 도시의 그 컵라면 같은 편리함이 그리웠던 거다. 오지에서 그렇게 행복하다고 느꼈으면서도 말이다.  318


미인이란 상대적 희소성에 대한 동경의 산물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거 참 허무한 건데.  364


만일 한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아마 물이 넘칠 기미가 보이는즉시 동네 사람들과 애꿏은 군인들이 총동원되어 물을 퍼내고 둑을 쌓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달랐다. 세계적인 유산 앙코르와트 해자의 물이 불자, 씨엠립 주민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곳에서 뜰채와 어망과 낚싯대를 들고 고기를 잡고 계셨다. 

같은 지구, 같은 아시아인데도 이드로가 우리는 삶의 속도와 리듬이 달라도 많이 다르다. 우리는 내일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둑을 쌓는데, 이들은 오늘의 만복과 행복을 위해 고기를 잡는다. 왜냐고? 우리는 내일의 행복을 대비하지 않으면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수 있다. 이들은 그냥 살아가도 먹을 것, 잘 자리는 생긴다. 우리는 죽어라 쉴 새 없이 손을 놀려야 겨우 1년에 한 번 추수하는 쌀, 이들은 두 번도 거두고 세 번도 거둔다. 당연히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는것 아닐까. '저러고 사니까 이렇게 못살지'도, '아, 왜 우리는 이렇게 찌들고 각박하게 살아야 하나'도 아닌 거다. 그녕, 다른 거다. 틀린게 아니라, 다른 거. 게다가 이들은 윤회를 믿는다. 이들에게 진짜 미래란 10년 뒤, 20년 뒤 따위가 아니라 다음 세상일지도 모른다. 하루하루를 착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어쩌면 이들에게 진자 미래를 대비하는 방식일 수도 있는 거다. 

그러나 이 '다름'에 조금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정말 그것으로 족하냐고, 그래도 되는 거냐고. 아이들을 보았을 때였다. 현실의 언저리만을 맴돌며 '썸말로이'를 외치는 씨엠립의 아이들을 말이다.  403-405


이 영악하기 짝이 없는 꼬마 사업가들은 과연 어떤 배경으로 탄생하게 되었을까? 이런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킬링필드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어요. 그 당시에 가장 먼저 숙청당한 사람들이 바로 지식인이랑 자산가였거든요. 캄보디아 사람들 아직 은행 잘 안 믿어요. 은행에 저축하는 대신 금을 사서 집에다가 묻어두죠. 그러니까 아이들 학교 보낼 필요성도 못 느끼는 거죠. 가르쳐 봐야 잡혀가서 죽기나 할 테니까요. 그냥 돈이나 버는 게 훨씬 낫다는 거예요. 게다가 애들이 좀 잘 버나요. 그래서 애들 내보내서 돈 벌어오라고 시킨 다음에 부모들이 도박이나 술로 탕진하는 경우도 많아요."  411


장기 여행자들을 보면 두 종류다.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나온 사람들, 아예 처음부터 안정된 생활 같은 게 없는 사람들, 카오산에서도 두 종류로 보인다. 처음부터 안정된 생활 같은 게 없는 사람, 또는 카오산에서만큼은 안정이고 나발이고 버리고 싶어 보이는 사람.  425


시간은 유한한데 지구는 너무 넓다. 그리고 갈 데가 너무 많다.  429


서른다섯,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 치열한 나이의 한여름, 그해의 여름, 나는 행복해지겠다며 조금은 억지를 섞어 이렇게 뛰쳐나왔고, 그렇게 긴 여름을 보내며 많이 행복했으며, 몰랐던 것 한 가지를 배웠다. 자잘한 불편과 결핍은 사실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 세상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최소 공약수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을 찾아내고 실천할 수 있는 한,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이 최소 공약수들이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것이 덧없고 시시해지고, 무언가에 구속당하고 싶고, 낯익고 좁은 것들 사이에 있고 싶어질 때가, 언젠가는 올지도 모른다. 그날이 올 때를 나는 꿈꾸려 한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성숙한 내가, 세상의 한 구석에 정착하여 그곳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모습을. 씨엠립에서 꿈꾸었던 모습일 수도 있고, 다른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냥 아줌마가 되어 가정에서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 사람 앞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어쨌든, 내 인생의 가을은 그런 모습으로 찾아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나는 열심히 행복하려 한다.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더 많은 여행을 다니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책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욕망을 '성취'라는 이름으로 풀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행복하게, 내 인생의 남은 여름을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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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같은 건 애초부터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어.
우리가 사랑하는 것만큼 우리는 사랑받지 못했고 별자리는 내가 손 닿을 수 없는 곳에서만 아름다웠으니까.
우리는 생활 앞에서 언제나 난처했고 우리가 잘 살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뜨겁던 청춘은 지나가버렸고 버스는 손을 흔들어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
더 슬픈 건 청춘에 대해 미련이 없다는 것.
떠나간 버스를 아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
하지만 어떡해? 다시 길을 나서는 수밖에.
마치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는 듯 배낭을 꾸리고 신발끈을 동여맸지.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는 거야.
당신은 언젠가 나를 살랑하게 될 것이고 별빛은 나의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고 생할은 언젠가 나를 안아줄 것이고
청춘.....
그래, 청춘은 지나갔기 때문에 식어버려 재만 남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지.
그리고 지금, 나는 다시 버스를 기다리고 있잖아?
행복이 오지 않을 땐 우리가 그것을 만나러 가야지.  14-15

 

그러고 보니 우리에겐 수천만 원이 든 통장도 자동차도 그다지 쓸모가 없구나.
우리를 위로해 줄 음악과 책, 우리 몸을 감싸줄 티셔츠 몇 장.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구나.  23

 

짙은 라오 커피 한 잔과 바삭하게 구운 바게뜨가 당신의 식탁 위에 차려져 있다....
책장을 펼쳐 어젯밤 밑줄을 그어놓은 부분을 다시 한 번 천천히 읽는다.
메모를 하며 '내 삶의 제목을 정한다면 무엇일까?'하고 잠시 생각해 본다.
책을 내려놓고 당신은 나이프를 들고 바게뜨에 치즈를 바른다.
바게뜨는 이제 알맞게 식었다...
이제 막 도착한 여행자들이 커다른 배낭을 짊어지고 지나간다.
그들은 당신을 향해 미소를 건네고 당신 역시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짓는다....
당신은 이런 아침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28-29

 

루앙프라방에 석 달째 머물고 있는 중년의 캐나다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왜 사람들은 루앙프라방을 떠나기 아쉬워할까요?"
내가 묻자 그가 대답했다.
"아마도 이곳에서 시간의 실페와 마주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언제 시간과 진지하게 마주한 적이 있었을까. 우리는 시간 앞에서 옹졸했고, 급했고, 주저했고, 불안했고, 고독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은 루앙프라방에 와서 비로소 시간이 어떻게 느리게 흘러가는 지를 알게 된 거야. 시간을 소비하는 진정한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거지."
시간을 소비하는 진정한 라이프스타일.
나는 그 멋진 말을 곧 실감할 수 있었다.  33

 

아무도 'see you again'이라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만 스쳐가는 사이였으니까...
우리의 우연은 거기까지였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41

 

우리에겐 생을 감상하고, 즐길 권리가 있어요.
내가 이곳으로 여행을 떠나온 건 그 권리를 찾기 위해서랍니다.  43

 

"제 이름은 틱 웃입니다. 열아홉 살입니다. 내년이면 정식 승려가 됩니다"
틱 웃이 빈 그릇을 치우고 돌아와 앉으며 말했다.
"당신에겐 길을 잃을 권리가 있어요. 당신은 여행자니까요."
"많이 두려웠죠? 누구나 낯선 장소에 홀로 있으면 외롭고 두려워지게 마련이죠."
"길을 잃었을 때 중요한 것은 절대로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당황해서 여기저기 헤매다 보면 점점 더 미궁속으로 빠지게 되죠. 여유를 가지고 내가 왔던 길을 천천히 더듬다 보면 분명 가야 할 길이 보일 거예요."
"또 한 가지. 길에서 헤매는 시간을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제 갈 길을 찾기 위해, 더 많은 것들을 보고 경험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헤매는 것인지도 몰라요. 그러니 조바심 내지 마세요. 느긋하게 길을 가면 되요. 어쩌면 길을 잃는다는 것도 행운일 수 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당신은 여행을 많이 했나요? 먼 곳으로 순례를 떠난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저는 한 번도 여행을 떠난 적이 없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행도 삶과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이죠."
틱 웃은 내게 잠자리를 만들어주고 조용히 일어섰다.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의 일생은 길을 잃고 다시 찾는 과정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아니, 길을 잃고 싶어, 그리고 길을 잃으리란 걸 알면서도 길을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잃은 길 위에서 어딘가에 있을 차가운 불빛 하나를 기대하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게 인생이 아닐런지. 그러기이ㅔ 모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아둔하기만 한 것이 아닌지.
다음 날 아침, 떠나는 나를 향해 틱 웃이 말했다.
"모든 건 명확하지 않아요. 지도 역시. 자동차도, 컴퓨터도, 모든 것은 오류를 가지고 있죠. 우리는 언제나 길을 잘못 들까봐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길은 그렇게 만들어진다는 걸 잊지 마세요. 낯선 길을 헤매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랍니다. 용기 있는 자들에게만 주어지죠." ...
내가 심호흡을 하며 힘껏 페달을 밟앗던 그 지점에 도착했다. 커다란 트라웃 나무가 무성한 잎사귀를 흔들며 나를 반겨주었다. 어때, 여행은 즐거웠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나는 트라웃 나무에 등을 기대고 지도를 살폈다. 우습게도 내가 틱 웃을 만났던 사원은 그곳에서 고작 6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걷는다고 해도 2시간 정도면 충분히 돌아올 수 있었던 거리였다. 나는 지도를 바라보며 틱 웃의 말을 떠올렸다."낯선 길 위에서 오히려 행운을 만날 확률이 높죠. 우리가 길 위에서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47-49

 

우리는 골목을 걸으며 골목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골목에 깃든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속삭인다. 누구는 이 골목에서 태어나 도시로 떠났고, 어떤 이는 이 골목에서 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또 다른 이는 이 골목을 평생 동안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다. 골목은 여행자들이 자신의 비밀스런 이야기들을 세상 여기저기에 퍼뜨려줄 것을 알고 있다. 노인이 그가 목격한 생의 이야기들을 아이에게 들려주며 세월을 견디듯, 골목은 여행자의 발걸음을 유혹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견뎌가는 것이다.
감동 어린 여행기를 쓰고 싶은 여행자들이 골목을 찾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행자들은 마치 자신이 모든 일을 겪은 듯 글을 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가 골목에서 만났던 운전수와 아이들, 빵장수, 호객꾼, 여인, 걸인, 승려, 소매치기가 전해준 것들이다. 여행자는 골목에 얽힌 위트 넘치는 추억담, 골목이 들려주는 생생한 증언들을 인용하고 전달할 뿐이다.
골목에 관한 뛰어난 명상가인 어느 여행자는 세상이 어쩔 수 없이 신비로운 이유는 뜨거운 화산 때문도 아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때문도 아니며 바로 수많은 골목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수많은 골목이 있는 이유는 하나의 골목마능로는 이 세상의 신비를 다 담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도 말했다. 그는 지금 세상의 모든 골목이 그려진 지도를 만들고 잇다. 그건 어쩌면 우리 생의 비밀이 담긴 가장 은밀한 지도일지도 모른다.
가끔 생각한다. 아름다운 골목과 만났을 때 하염없이 걸어서 모퉁이를 돌아 골목 끝으로 사라지는 순간을!  72-73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다고 느낀다면, 그래서 돌아가기 싫다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면, 당신은 여행을 잘 하고 있는 것이다.  84

 

싸이(Ssay)는 스물 여덟 살. 툭툭을 운전한다....
싸이와 차를 마시다가 그에게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글쎄,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때땔로 들기는 하지만 특별히 가난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
"뭐가 부족하지?"
싸이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음, 아이들을 위한 병원과 학교, 세탁기.... 뭐, 이런 것들 아닐까? 그런데 초이, 부족한 것과 가난한 것은 뭐가 다르지?"
"부족한 건 단지 단지 불편한 것이고 가난한 건 그것보다 좀 더 슬픈 일이겠지."
싸이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난 조금 부족할 뿐이야. 슬프지는 않으니까. 내가 세탁기를 가지고 싶은 건 아내가 빨래를 좀더 편하게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뿐이니까. 세탁기가 없다는 건 약간 불편할 뿐이지 슬픈 일이 아니잖아?"  98-99

 

세상은 살 만한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지점에서 별이 뜨는 것 같아요.
우리는 그 별을 나침반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요.
그래요. 우리 인생의 복선과 암시는 어딘가에 분명 숨어 있어요.
해피엔딩이든, 쓸쓸한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자기 인생의 정면을 관토할 사랑과 의지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걸 찾으려는 노력이 중요한 거죠.
난 삶 자체가 바뀌기를 원하고 있었고 그건 아주 절실했죠.
새롭게 시작할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한 것 같아요.  131

 

"이봐, 초이. 여기 벽이 있어. 어떤 사람은 벽을 넘어. 어떤 사람은 그냥 뒤돌아서 가지. 어떤 사람은 벽을 부수고. 어떤 사람은 벽에 낙서를 해. 그리고 어떤 사람은 벽을 더 높이 쌓지. 넌 어떡할래?"
"글쎄..."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 먼저 벽이라는 걸 인식하는 거야. 벽을 외면해서는 안 돼. 그건 가장 못난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지. 그런 다음 일단 부딪혀 보자구. 벽을 넘건, 뒤돌아서 가건, 낙서를 하건, 부셔버리건, 그건 그 다음 일이니까. 언더스탠드?"  154

 

내겐 저축도 거의 없어. 보험도 없고 연금도 나오지 않아. 나는 더 이상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종족이 아닌 거야.
누군가 내게 무섭지 않느냐고 물어보더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야. 하지만 살다 보면 자신이 이뤄놓은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시기가 찾아오지. 그때 힘껏 내질러야 해. 발등에 축구공이 정확하게 맞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고. 앞 뒤 잴 필요도, 골대 따위를 가늠할 필요도 없어. 그냥 힘껏 내지르는 거야. 그 다음은... 어떻게든 되겠지. 어제 서른여덟 살이 됐어. 남자에게 서른여덟은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기에 늦은 아니는 아니야. 어쩌면 이전까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들을 할 수도 있는 나이지.
운명은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 우리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 그것을 경험하고 나면 누구도 이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어.  167

 

우세요. 실컷 우세요.
우는 게 부질없으면 인생도 부질없어요.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인간답게 사는 순간은 눈물을 흘리는 그 순간이거든요.
울다 보면 당신 안의 짐승이 달아날 거예요.  169

 

"여기서 행복해?"
"행복해."
"어떤 점에서?"
"걱저이 없어. 그러니까 행복하지. 여기 와서 깨달은 건 행복이란 걱정이 없는 상태라는 거야."
더 좋은 것에 대한 욕심이 없으니까, 더 많은 돈이 필요없다고.  183

 

"네가 알고 있는 루앙프라방 사람들에 대해 말해 줘."
"이렇게 말해도 될런지 모르겠지만, 음, 그들은 계획이 없어. 아니, 계획을 세우는 것데 대해 무관심해. 내가 그들에게 '자, 우리 이렇게 계획을 세워서 이렇게 이렇게 해봅시다'하고 말하면 그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왜 굳이 그렇게 해야 하냐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지."
"왜일까?"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이들은 자신보다 많이 가진 자들을 부러워하지 않아. 그저 많이 가지고 있구나 하고 생각해 버리지."
"그런 걸 낙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 분명한 건 이젠 내가 그들에게 익숙해져 버렸다는 거야. 나 역시 가끔 이런 걸 왜 해야 하는 걸까 하고 생각할 때가 많으니까."
마이커는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네가 이곳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 지금은 한 사람의 노력이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시대가 아니잖아. 그게 가능했던 때가 있었지만 그건 노스탤지어일 뿐이야. 그리고 난 그냥 하찮은 사람이야. 부조리하고 이기적이며 무책임한 수많은 사람 중에 한 명이지.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이곳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난 지금 나를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사람들이 그걸 봉사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라지 뭐."  184-185

 

겨울 시린 꽃봉오리에서 뜨거운 꽃이 열리듯 살아내는 것 자체가 가장 다행한 일이다.
우리는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많고 사랑하지 못한 일들이 많다.
세상의 모든 길은 끝난 그곳에서 다시 시작한다.
당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일이 이토록 소중한 일일 줄이야.
그리고 그것이 삶일 줄이야.  193

 

손이 가장 아름답게 보일 때가 언제인 줄 아세요?
손이 진정으로 필요할 때가 언제인 줄 아세요?
그건 바로 누군가를 쓰다듬고 어루만질 때랍니다.
당신의 손이 내 뺨을 어루만질 때 나는 진정되곤 합답니다.
공포와 슬픔과 불안과 아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답니다.  226-227

 

"여행을 하면서 고양이만 찍었어."
"대단하군, 그런데 왜 하필 고양이지?"
"그놈들은 여행자를 닮았어. 그들의 구부러진 등을 봐.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 적당한 긴장감으로 휘어져 있지. 눈빛도 여행자와 비슷해. 저멀리 어딘가를 응시하는 것처럼 망연하다가도 곧 낯선 자를 경계하는 듯 날카롭게 바뀌지. 친해지는걸 두려워한다는 것 역시 여행자와 닮았어. 누군가와 지나치게 친해지면 떠나기가 힘드니까."  230

 

당신은 나를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오해에 불과해. 저 비행기를 봐. 당신은 비행기가 만들어내는 이륙의 유쾌한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착륙의 우울한 자세일 뿐이야. 나는 당신을 이해하려 애쓰지만 언제나 오해하고 있지. 별이 영원히 밝을 것이라는 생각은, 별에 대한 우리의 영원한 오해일 뿐이야. 그렇지만 우리에겐 오해가 필요해. 진심을 말하는 것도 이제는 지쳤어. 완벽한 균형 따윈 없어. 솔직히 말하자구 . 우리가 얘기하고 싶은 건 생활이잖아. 우리는 언제쯤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될까. 우리는 언제쯤 서로를 '완벽하게'오해할 수 있을까.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나의 오해를 오늘 밤만이라도, 제발, 이해해 줘. 부탁이야.  237

 

당신은 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지?
당신은 여행자니까요.
내일이면 떠나버릴 테니까요.
나만 혼자 남을 테니까요.  253

 

우리가 우너하는 것은 가까이에 있지 않다.
그것들은 멀리 있어서 반짝인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떠나온 것이다.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최소한의 절망으로부터의 도피이기를.
내 삶에 대한 방황의 성실한 흔적이기를.
당신은 언젠가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별빛은 나의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고 생활은 언젠가 나를 안아줄 것이기 때문에...  263

 

당신이 처음 발을 디딘 이곳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면
언젠가 이 강바람의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다고 느낀다면
마음에 드는 창문 아래에서 하루 종일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면
하루쯤 늦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차라리 마음이 편해진다면
옥상에 앉아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며 달빛이 비치는 산을 올려다보는 그 시간이 좋아진다면
상대방을 향해 먼저 웃음 짓는 순간이 많아졌다면
지금 당신 곁을 스쳐간 그 사람이 3년 전 기차 칸에서 당신에게 어깨를 빌려주었던 그 사람일 것 같다면
그 사람을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면
구름의 무게가 몇 그램이나 되는지 궁금해진다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고마워진다면
막혀버린 길보다 여러 갈래의 길 앞에서 더 난감해진다면
정들었던 게스트하우스를 떠나며 마음이 물끄럼 해진다면
버스 안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골똘히 생각헤 잠긴 중년 남자가 멋있게 느껴진다면
그와 함께 차를 마시며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진다면
망고를 사고 동전 하나를 더 거슬러 받았는데 이 세상을 얻은 것보다 더 기뻤다면
나중에 동전 하나를 덜 거슬러 받은 걸 알게 됐는데 이 세상을 잃은 것보다 더 슬펐다면
우리 모두 무언가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
갑자기 내 삶이 대책 없어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면
당신은 서서히 여행에 중독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267

 

노비스가 내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초이, 여기에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의 목록을 적어보세요."
나는 그가 건네준 종이 위에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의 목록을 적었다.
집, 차, 컴퓨터, 카메라, 책상, 청바지, 텔레비전, 티셔츠, 음반, 책, 냄비, 신발, 화분, 어항, 탁자, 의자, 옷장, 자전거, 오디오....
적다 보니 종이 한 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적기에 이 종이는 너무 작아요."
그는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더니 종이 한 장을 다시 내밀었다. 손바닥만한 작은 종이였다.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의 목록입니다."
그 종이에는 옷 두 벌과 책 네 권, 신발 한 켤레, 수저 한 벌이 달랑 적혀 있을 뿐이었다.
그가 말했다.
"종이가 너무 작은 것이 아니라 당신이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요?"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 때문에 당신은 행복했던 적이 있나요?
노비스가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내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 적은 없었다. 그것들을 사는 순간 잠깐 행복했을 뿐이었다. 물건을 사는 순간을 즐긴 것이지 물건 자체가 즐겼던 건 아니었다. 곧 싫증을 냈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갖고 싶었다. 
노비스는 내게 종이 한 장을 더 내밀었다.
"이제부터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들의 목록으로 이 종이를 가득채워보세요. 나무 그늘의 위로, 당신에게 쉴 자리를 내어주는 배려, 아직 여행할 곳이 남았다는 기대감, 내일에 대한 희망, 작고 가난한 것들에 대한 존중, 갈증을 적셔주는 물, 나무의 씨앗을 키우는 햇빛, 당신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새소리.... 그것들을 하나씩 적어가다 보면 이 종이 한 장으로는 모자를 거예요. 그때 제게 다시 오세요. 종이는 얼마든지 더 드릴 수 있으니까요."  283-286

 

"우린 허들 선수야. 결승점에 닿기 위해서는 허들을 넘어야 해. 하지만 친구, 허들을 방해물이라 생각해서는 안돼. 허들은 너를 결승점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이기도 하지. 허들을 열심히 넘다 보면 어느새 결슬점이 네 앞에 있을 거야. 삶도 마찬가지야. 힘내라고!"  289

 

푸 타이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혹시 미래에 대한 걱정 같은 거 있어?
푸 타이가 말했다.
초이, 신이 내일을 만든 건 걱정하라고 만든 게 아니야.
준비하라고 만든 거지.
오늘은 내일을 준비하는 날이야.
내일 봐, 안녕.  297

 

노련한 여행자들은 삶에 대한 해답이 세상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이 멈추지 않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막을 건너는 일도 첫걸음부터 시작한다.
수천만 번의 걸으을 반복해 마침 내 사막을 횡단하는 것이다. 단숨에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를 지혜롭게 만드는 것은 모험보다는 경험이다. 진리는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관광객이 되지 마라. 여행자가 되어라. 관광객은 장소에 머무는 자다. 하지만 여행자는 장소에 묻힌 시간의 비밀을 발굴한다.
실패를 즐겨라. 신은 삶을 설계할 때 실패를 예정해 놓았다. 우리가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가까이에 있지 않다. 그것들은 멀리 있어서 반짝인다. 우리는 그것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나온 것이다.  303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반지금의 길이만으로 원의 둘레를 구하는 방법을 배웠고, 맛있는 커피를 내리는 방법도 배웠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법도 배웠다. 시치미를 떼는 법, 모른 척하는 법도 배웠다. 난처해지지 않는 법도 배웠고 고마워하는 법도 배웠다. 말이 통하지 않을 때는 그냥 웃으면 된다는 것도 배웠다. 하지만 내가 배운 가장 소중한 진리는 우리는 모두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존재이며, 그리고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이다.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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