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 해당되는 글 542건

  1. 2022.08.15 기나긴 이별 - 레이먼드 챈들 열린책들 2020 04840
  2. 2022.08.08 철학vs실천- 19세기 찬란했던 승리와 마르크스의 테제 3 - 강신주 오월의봄 2020 04100
  3. 2022.08.04 철학vs실천- 19세기 찬란했던 승리와 마르크스의 테제 2 - 강신주 오월의봄 2020 04100
  4. 2022.08.01 철학vs실천- 19세기 찬란했던 승리와 마르크스의 테제 1 - 강신주 오월의봄 2020 04100
  5. 2022.07.18 바가바드 기타 : 함석헌 주석 - 한길사 1996 94270
  6. 2022.07.11 생활 속의 바가바드 기타 - 한혜정 체온365 2016 03270
  7. 2022.07.04 긴호흡 - 메리 올리버 마음산책 2019 03840
  8. 2022.06.27 완벽한 날들 - 메리 올리버 마음산책 2013 03840
  9. 2022.06.20 우파니샤드 : 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길 - 이명권 한길사 2011 04100
  10. 2022.06.13 베다 - 인류 최초의 거룩한 가르침 - 이명권 한길사 2013 04100
  11. 2022.06.06 숫타니파타 - 법정옮김 이레 1999 03800
  12. 2022.05.30 여행 없는 여행 - 마고캐런 가지 2020 03810
  13. 2022.05.23 착한 소비는 없다 - 최원형 자연과생태 2020 03330
  14. 2022.05.16 은둔기계 - 김홍중 문학동네 2020 03810
  15. 2022.05.09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 - 프리드리히 니체 책세상
  16. 2022.05.02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 프리드리히 니체 책세상 04160
  17. 2022.04.25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 김누리 해냄 2020 03330
  18. 2022.04.18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 류시화 더숲 2019 03810
  19. 2022.04.11 사소한 부탁 - 황현산 난다 2018 03810
  20. 2022.04.04 선량한 차별주의자 - 김지혜 2019 창비 03300
  21. 2022.03.21 혼자가 혼자에게 - 이병률 달 2019 e-book
  22. 2022.03.14 누리보듬 홈스쿨 - 한진희 비전팩토리 2019 15590 e-book
  23. 2022.03.07 홈스쿨대디 - 김용성 소나무 2019 03810
  24. 2022.02.28 홈스쿨링, 하루 5시간이면 충분하다 - 김재민 파람북 2019 03370
  25. 2022.02.14 학교는 하루도 다니지 않았지만 - 임하영 천년의상상 2017 03810
  26. 2022.02.07 사진의 용도 - 아니 에르노 마크 마리 1984books 2018 e-book
  27. 2022.01.31 내 하루도 에세이가 될까요 - 이하루 상상출판 e-book
  28. 2022.01.24 여행의 이유 - 김영하 문학동네 e-book
  29. 2022.01.24 아이 마음에 상처 주지 않는 습관 - 이다랑(그로잉맘) 길벗 e-book
  30. 2022.01.17 폭력과 정의 - 안경환 김성곤 김영사 2019 04810




나는 그가 주정뱅이였을 때, 밑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굶주리고 지쳤으면서도 자존심만은 잃지 않았을 때가 더 좋았다. 아니, 정말 그럴까? 어쩌면 내가 좀 더 나은 처지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36

[나는 나약한 놈이야. 배짱도 없고 야망도 없지. 황동반지를 골라놓고 금반지가 아니라서 놀라는 놈이야. 나 같은 놈은 삼녀서 딱 한 번 절호의 기회를 만나는데, 높이 매달린 그네를 타고 완벽하게 묘기를 선보이는 순간이랄까. 그러고 나면 길가에서 시궁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여생을 보내지.]  39

커피메이커의 물이 막 끓는 참이었다. 나는 불을 줄이고 물이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유리 대롱 하단에 물이 조금 남아 있었다. 나는 불을 조금 키웠다가 남은 물이 마저 올라가자 재빨리 도로 줄였다. 커피를 저어 주고 뚜껑을 덮었다. 타이머를 3분에 맞췄다. 말로는 대단히 꼼꼼한 놈이니까. 커피 끓이는 솜씨를 발휘할 때만은 아무것도 방해할 수 없으니까. 절망에 빠진 사내가 지니고 있는 권총조차도.
나는 술을 한 잔 더 따라 주었다. [그대로 앉아 있어. 한마디도 하지 말고. 그냥 앉아 있으라고.]
그는 둘째 잔은 한 손으로 들고 마셨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재빨리 세수를 했다. 부엌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타이머벨이 울렸다. 불을 끄고 커피메이커를 식탁 위의 밀짚 받침에 옮겨 놓았다. 이렇게 자질구레한 일까지 시시콜콜 늘어놓는 이유가 뭐냐고? 분위기가 너무 긴장돼서 사소한 일 하나하나가 연극의 한 장면처럼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모든 움직임이 선명하고 대단히 중요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에서는 무의식적인 행동조차도 -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습관적으로 되풀이했건 상관없이 - 하나하나 의식적으로 치르게 마련이다. 마치 소아마비를 앓고 나서 걷기 연습을 하는 사람과 같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당연시할 수 없다.
커피가 다 내려오자 여느 때처럼 소란스럽게 공기가 쉭쉭밀려들고 커피가 부글거리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나는 커피메이커의 상부 유리병을 떼어 내고 뚜껑 구멍에 꽂아 건조대에 놓았다.
커피 두 잔을 따르고 그의 잔에는 술을 섞었다. [테리 자네는 블랙으로 마셔.] 내 잔에는 각설탕 두 개를 넣고 크림도 넣었다. 이제야 긴장이 좀 풀리는 듯했다. 언제 냉장고를 열고 크림을 꺼냈는지 의식하지도 못했으니까.  44-45

몇몇 사실이 그의 참모습을 다 말해 주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145

[나는 글쟁이요.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를 마땅히 이해해야 하는 사람이지. 그런데 아무도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베린저박사에게서 구출되어 나올때, 웨이드가 했던말.)  223

[말로? 왠지 당신이 좋아질 것 같소. 당신도 조금은 개자식이니까. 나처럼.]  225

[.. 범죄와 사업의 차이가 바로 그거야. 사업을 하려면 자본이 필요하거든. 가끔은 그게 유일한 차이가 아닐까 싶어.](할릴 포터 회장의 말)  283

‘달은 보름날에서 나흘이 지난 형상이고, 벽면에 비친 네모난 달빛이 크고 희부연 맹인의 눈처럼 나를 바라본다. 벽눈(사팔눈, 말의 푸른 눈, 눈이 큰 물고기 등의 의미)이다. 이건 농담. 젠장, 시시껄렁한 직유법이다. 작가라는 놈들은 참. 뭐든지 다른 것과 빅해야 직성이 풀린다. 내 머리는 생크림처럼 흐물흐물하지만 그리 달콤하지 않다. 또 직유법을 써버렸다.(웨이드가 말로에게 부인몰래 버려달라고 했던 종이 내용중에서)  306

[.. 우리가 사는 이 나라는 이른바 민주주의 사회요. 다수가 지배하는 세상이란 말이오. 제대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이상적인 제도라고 해야겠지. 하지만 투표는 대중이 하더라도 공천은 정당이 하는데, 정당이 성장하려면 돈을 많이 써야 되거든. 누군가는 돈을 내놓아야 하는데, 개인이든 기업이든 노동조합이든 뭐든 간에 모종의 대가를 기대하기 마련이오. ..](할릴 포터 회장의 말 중에서)  351

[돈에는 야릇한 특징이 있소.] 그가 말을 이었다. [많이 모이면 자기만의 생명력을 얻고, 심지어 자기만의 판단력까지 갖는다는 사실이고. 그렇게 되면 돈의 힘을 관리하기가 몹시 어려워지지. 인간은 옛날부터 돈을 섬기는 동물이었소. 불어난 인구, 막대한 전쟁 비용, 가혹한 세금의 끝없는 압박, 그런 것들 때문에 더욱더 돈을 섬기게 되지, 보통 사람은 누구나 지치고 두려워하기 마련인데, 그런 사람은 이상을 품을 여유가 없소.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니까. 이 시대에 우리는 사회 윤리와 개인 윤리가 무시무시하게 추락하는 과정을 목격했소. 삶의 질이 떨어져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질적 향상을 기대할 수는 없소. 대량 생산된 제품에서 품질을 기대할 수도 없고. 품질이 좋으면 너무 오래 써서 곤란하지. 그래서 겉모양만 자꾸 바꿔 주는데, 일부러 물건을 모두 구닥다리로 만들어 버리는 상업적 속임수요. 대량 생산 체제에서는 오랳 생산한 제품이 내년쯤에는 벌써 낡아 보이도록 만들지 못하면 새 제품을 팔아 먹지 못하니까. 우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새하얀 부엌과 가장 반짝거리는 화장실을 갖추고 살지. 하지만 그렇게 새하얓고 근사한 부엌에서 일반적인 미국 주부들은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들지 못하고, 반짝거리는 근사한 화장실은 탈취제, 설사약, 수면제, 그리고 사기꾼 집단이나 다름없는 화장품업계의 온갖 제품을 보관하는 창고에 지나지 않소. 제품 포장 하나는 우리가 세계 최고요, 말로씨. 내용물은 대부분 허접쓰레기지만.]  353

[.. 내 책은 다 길지. 독자들이 긴 책을 좋아하거든. 멍청한 독자들은 장수가 많으면 거기에 황금이 잔뜩 묻혔다고 믿는단 말이야. ..]  366

[.. 나는 늙은 경찰이고 늙은 경찰은 애물단지야. 웨이드 사망 사건에서 몇 가지가 마음에 걸려.]
..
[.. 그 사람이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려.]
..
[웨이드 책상을 뒤져 봤어. 자기 앞으로 편지를 썼더군. 쓰고 또 쓰고 또 썼더라고. 취했거나 말거나 마냥 타자기만 두드렸나 봐. 더러는 터무니없고 더러는 좀 우습고 또 더러는 슬프더라. 그 사람 마음속에 분명히 뭔가 있었지. 그런데 계속 변죽만 울리고 끝내 말하지 않더라니까. 그런 친구라면 자살할 때 적어도 두 장짜리 유서는 남겼을 거야.]
내가 다시 말했다. [그때는 취해 있었다니까.]]
[아무리 취해도 뭔가 끼적거리던 사람이잖아.] 올즈가 피곤하다는 듯이 말했다. [또 마음에 걸리는 문제는 하필 그 방에서 일을 저질러 부인이 발견하게 했다는 거야. 그래, 취하긴 했지. 그래도 마음에 걸려. 또 마음에 걸리는 문제는 하필 쾌속정 소음 때문에 총소리가 묻혀 버릴 만한 순간에 방아쇠를 당겼다는 거야. 그런다고 본인한테 달라질 게 있나? 그것도 우연일까? 그렇다면 부인이 하필 하인들이 쉬는 날 열쇠를 두고 나갔다가 집에 못 들어와서 초인종을 눌러야 했던 일도 우연이겠군.]
..
[.. 증인석에서 부인은 자네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했어. 웨이드가 살아 있었더라도 서재에서 방음 시설을 해놨으니까. 하인들은 외출했어. 목요일이니까. 그런데도 다 잊었대. 열쇠를 잊어버렸듯이.]  419-420

[.. 반론 있나?]
[범행 동기는?]
[그래, 그게 문제야.] 그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421

[나는 낭만주의자요, 버니 선배. 한밤중에 비명 소리가 들리면 나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거든. 그래봤자 한 푼도 못 벌어. 똑똑한 사람은 그럴 때 창문을 닫고 텔레비전 소리를 키우지. 가속 페달을 냅다 밟으며 멀리 내빼든지. 남의 일에 끼어들기 싫으니까. 그래 봤자 나만 손해니까. 테리 레녹스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내 집에 마주 앉아내 손으로 끓인 커피를 함께 마시고 담배도 함께 피웠소. 그래서 그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부엌에 가서 커피를 끓였는데, 그 친구 영전에 커피 한 잔 따라 주고, 담배한 개비에 불붙이고, 커피가 식어 버리고 그 담배가 타버렸을 때 작별 인사를 했소. 그래 봤자 한 푼도 못 벌어. 선배라면 그렇게는 안 하겠지. 그래서 선배는 좋은 경찰이고 나는 사설탐정 노릇이나 하는 거라고, 아일린 웨이드가 하도 남편걱정을 하기에 내가 찾아 집으로 데려다줬소. 한번은 로저가 연락해서 문제가 생겼다기에 부리나케 달려갔고, 잔디밭에 쓰러진 그 친구를 낑낑거리며 침대로 데려다 눕혔지만 역시 한 푼도 못 벌었소. 수고비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지. 오히려 걸핏하면 면상이나 얻어터지고 깜빵에 처박히고 멘디 메넨데스 같은 깡패한테 협박이나 당하기 일쑤라니까. 그래도 돈은 한 푼도 못 벌었어. 금고 속에 5천 달러짜리 지폐가 있지만 그 돈은 반 푼도 못 쓰겠지. 내 손에 들어온 과정이 좀 꺼림칙해서. 처음에는 그 돈을 가지고 놀기도 했고 요즘도 가끔 꺼내서 들여다봐. 하지만 그뿐이야. 한 푼도 못 쓰겠더라고.]  422-433

[이거 알아? 똑똑하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자네는 그냥 멍청한 거야. 벽에 비친 그림자처럼 빤하다고. 나는 20년 동안 경찰 노릇을 하면서 오점을 남긴 적이 없어. 누가 날 속일 때마다 알아차리고 누가 뭘 감출 때마다 알아차리거든. 똑똑한 체하는 놈은 남이 아니라 자신을 속일 뿐이야. 내 말 명심하라고. 겪어 봐서 잘 아니까.]  424

고함만큼이나 크게 들리는 적막도 있는 법이다.  458

[.. 범죄는 질병이 아니라 증상이야. ..]  532

[결혼을 싫어하는 이유라도 있어요?]
[1백 명 중 두 명한테는 결혼 생활이 행복할 수도 있겠죠. 나머지는 그저 행복해지려고 노력할 뿐이에요. 그렇게 20년쯤 지났을 때 남자한테 남는 거라고는 차고 안에 들여놓은 작업대 하나가 고작이거든. 미국 아가씨들이야 끝내주지. 그런데 미국 유부녀들은 너무 많은 걸 요구해서 탈이에요.]  548

아침에 내가 일어나 커피를 끓일 때도 그녀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하고 옷을 입었다. 그때 비로소 그녀가 깨어났다. 우리는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나는 택시를 부르고 그녀의 여행 가방을 계단 밑으로 옮겼다.
우리는 작별 인사를 했다. 나는 택시가 안 보일 때까지 지켜보았다. 다시 계단을 올라갔고 침실에 들어가 침구를 걷어내고 새것으로 갈았다. 베개 밑에 긴 갈색 머리카락 한 올이 남아 있었다. 가슴속에 납덩이가 쿵 떨어지는 듯했다.
프랑스인들이 그런 느낌을 잘 표현했다. 젠장, 그 인간들은 모든 상황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언제나 정곡을 찌른다.
이별을 할 때마다 조금씩 죽어가네.  551



작품해설 - 지친 탐정에게 보내는 연서(김용언, <미스테리아>편집장)

미국에서 발달한 하드보일드라는 장르 자체가 백인-노동자-남성을 주요 독자로 설정했고, 온갖 펄프 잡지에 미친 듯이 글을 발표하면서 원고료로 먹고사는 작가들은 독자들에게 <나도 당신들과 같은 노동자>라는 점을 대놓고 어필했다. 작가와 탐정, 독자의 삼위일체가 자아내는 동질감이야말로 하드보일드의 폭발적인 성장의 중요한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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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과학



역사철학 3장 - 우금치의 하늘 같은 님들

다행스럽게도 1940년 간행된 오지영(1868~1950)의 <동학사(東學史)>가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
<동학사>는 열두 개 조로 구성된 개혁 강령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해치는 자는 목을 벤다.
둘째, 탐관오리는 제거한다
셋째, 포악스런 지주들은 엄징한다.
넷째, 유림과 양반들의 소굴을 공격해서 파괴한다.
다섯째, 가난한 백성들의 병역 문서를 불태운다.
여섯째, 종 문서를 불태운다.
일곱째, 백정의 머리에서 패랭이를 벗기고 갓을 쓰게 한다.
여덟째, 규정되지 않는 세금은 일절 걷지 않는다.
아홉째, 공사체는 물론하고 과거의 모든 부채는 무효로 한다.
열째, 외적과 연락하는 자는 목을 벤다.
열한째, 토지는 균등하게 나누어 경작한다.
열두째, 농민군의 두레법을 장려한다.  - <동학사> (초고본)  389-391

이 열두 개 강령이 중요한 이유는 집강소가 과거 억압적인 정부처럼 권위적인 정치기구가 아니라 오직 이 강령을 집행하려는 기구기 때문입니다. ‘집강소(執綱所)’란 글자를 보세요. ‘강령(綱)을 집행하는(執) 곳(所)’이라는 뜻입니다.  392

<프랑스내전>에서 마르크스가 파리코뮌을 분석하면서 말했던 “자유롭고 연합적인 노동”이 바로 집강소를 통해서 구체화된 겁니다.  393


정치철학 3장 - 유물론과 관념론을 넘어서

첫 번째 테제의 모든 문장은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들처럼 하나의 개념을 바라보고 있다. “대상적 활동(Genebstandliche Tatigkeit)!”  424

활동(Tatigkeit)이란 말은 사물이 아니라 생명체에만 적용되는 개념이다. 활동하는 고양이라는 말은 써도 활동하는 바위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활동은 모든 생명체가 가진 능동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라고 하겠다. 결국 핵심은 ‘대상적’이라는 형용사에 들어 있는 ‘대상(Genebstand)’이라는 말이다. 이 독일어는 ‘거스르다’, ‘반대하다’, ‘저항하다’는 뜻의 ‘게겐(Gegen)’이란 어근과 ‘서 있다’라는 뜻의 ‘슈탄트(stand)’라는 어근이 결합된 말이다. 게겐슈탄트는 “우리에게 맞서서 서 있는 타자”나 “우리의 뜻에 거스르는 외부의 무언가”를 의미하는 말이다.  424

우리의 뜻을 좌절시키고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 만들고 나아가 우리의 힘을 시험하는 그 무엇! 삶에서 만나는 회피할 수 없는 어떤 저항과도 같은 그 무엇! 삶에서 만나는 회피할 수 없는 어떤 저항과도 같은 그 무엇! “우리에게 맞서서 우리뜻에 거스르며 당당히 서 있는 것”, 바로 그것이 게겐슈탄트다. 결국 마르크스가 ‘대상적 활동’ 개념으로 포착하고자 했던 것은 이런 게겐슈탄트에 맞서 우리는 활동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425

우리는 우리에게 “나처럼 하라(fais comme mou)”고 말하는 사람에게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우리의 유일한 스승들은 우리에게 “나와 같이하자(fais avec moi)”라고 말하는 사람들, 우리에게 재생해야 할 몸짓들을 제시하는 대신 다질성안에 펼쳐질 기호들을 발산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차이와 반복>(1968)  430-431

들뢰즈는 수영 교사에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한 사람은 “나처럼 하라”고 말하는 수영 교사이고, 다른 유형은 “나와 같이하자”고 말하는 수영 교사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자가 “동일성의 반복”을 강조하는 수영 교사라면, 후자는 “차이의 반복”을 강조하는 수영 교사라고 하겠다. 동일성의 교사와 차이의 교사! 두 종류의 수영 교사는 모두 자기 “신체가 자신의 특이점들을 물결의 특이점들과 결합하는” 데 성공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동일성의 교사는 자기 신체와 학생들의 신체가 ‘차이’가 난다는 것, 그리고 자기가 헤엄쳤던 물결과 학생들이 헤엄칠 물결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니 이 교사는 “나처럼 하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 교사는 수영 교본을 출판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 교본은 수영을 배우려는 사람에게 수영을 잘하리라는 헛된 희망만을 줄 뿐 실제로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차이의 교사는 자기 신체와 학생들의 신체 사이에, 그리고 자신의 물결과 착생들의 물결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안다. 그러니 차이의 교사는 “나와 같이하자”라고 학생들에게 말했던 것이다. 학생들의 신체와 자기 신체의 차이를 알려면, 혹은 그 차이를 학생들에게 알려주려면,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말이다. 물론 차이의 교사는 수용 교본을 집필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433-434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중 첫 번째 테제 첫 문잘을 보라. 마르크스는 “대상을 ...... 객관이란 형식으로만 생각하는” 사유의 맹점을 이야기한다. 마르크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상(Gegenstand)과 객관(Objekts)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객관이란 관조된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435

“비대상적 존재(ungegenstandliches Wesen)는 비존재(Unwesen)다!” 대상적 존재만이 존재한다는 마르크스의 선언이다. 여기서 핵심은 ‘비대상적’이나 ‘대상적’이라는 수식어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대상’ 개념이다. ... 우리 앞에 우리의 의지에 저항하는 무언가가 버티고 서 있다. 바로 이것이 게겐슈탄트, 즉 대상이다. 그 대상이 내 앞을 가로막는 급류일 수도 있고, 비바람일 수도 있고, 산길에거 만난 뱀일 수도 있고, 권위적인 직장 상사일 수도 있고, 달려오는 자동차일 수도 있고, 건물 위에서 떨어지는 물건일 수도 있다. 이렇게 대상과 마주칠 때, 우리는 ‘대상적 존재’가 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마르크스에게 대상과 객관은 완전히 다르다. 삶의 차원에서 마주치는 타자가 대상이고, 의식 차원에서 관조되는 대상이 바로 객관이니까. 달리 말해 대상은 우리 삶에 무언가 저항의 힘을 발휘한다면, 객관은 그저 관조하는 풍경일 뿐 우리에게 저항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440

마르크스의 입장은 분명하다. 대상과의 마주침이 먼저이고 주관과 객관은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대상과 마주치는 대상적 존재는 당연히 감성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보통 시각, 청각, 후각, 미각, 그리고 촉각을 다섯 가지 감각이라고 한다. 대상적 존재의 감성에는 이 오감이 마치 교향곡의 악기들처럼 함께 어울린다.  442

“감성적 존재는 겪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443


마르크스의 대상적 활동 개념이 출현한다. “인간은 자기외화를 통해 자신의 현실적이고 대상적인 존재의 힘들을 낮선 대상들로 정립한다.”
‘자기외화’란 육지에 익숙해진 자신을 포기하고 낯선 물에 들어가는 행위를 가리킨다. 물결의 신체와 인간의 신체가 결합되기를 반복하면서, 점점 그는 수영 달인이 되어간다. 그에게 “대상적 존재의 힘”, 즉 대상적 활동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449

수영 동영상을 아무리 반복해서 본다고 해도 수영하는 신체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영 교본을 달달 외우고 교본 안의 사진을 숙지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혹은 강가에 앉아 물의 유속과 깊이, 그리고 부력을 과학적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 수영의 경우처럼 나뭄와 마주쳐 근사한 나무 인형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대상적인 존재의 힘을 가진 주체”, 즉 생각과 육체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인간 주체일 뿐이다.  450

마르크스는 자기 철학을 “자연주의(Naturalismus)”나 “인간주의(Humanismus)”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대상적 활동을 긍정하는 이념을 자연주의나 인간주의라고 부르자는 것이다. ... 자연주의의 반대에는 초자연적인 신이나 세계를 초월하는 원리를 긍정하는 초월주의(Transzendentalismus)가 놓여 있다.  ... 인간주의의 반대편에는 인간의 육체성을 부정하는 정신주의(Spiritismus) 전통이 놓여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마르크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자연주의나 인간주의는 “관념론 및 유물론과 구별되며 동시에 이 양자를 통합하는 진리”라고 말이다.  453

인간의 육체성, 수동성, 조건성, 비 자발성을 부저할 때 출현하는 것이 관념론이고, 반대로 인간의 정신성, 능동성, 자유, 혹은 자발성을 무시할 때 출현하는 것이 유물론이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철학은 우리에게 섬세한 사유를 요구한다.  454

마르크스는 인간의 자발성과 자유만을 강조하는 관념론자도 아니었고, 인간이 외적 환경이나 경제적 조건, 혹은 물질적 상황에 규정된다는 유물론자도 아니었다. 그는 철학사의 해묵은 대립, 즉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갈등을 ‘대상적 활동’ 개념으로 해소하는 데 성공하니까.  455

“지금까지 모든 유물론-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포함하여-의 주된 결함은 대상, 현실, 감성을 객관이란 형식이나 직관이란 형식으로만 생각했을 뿐 감성적인 인간 활동이나 실천으로,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활동의 측면은 유물론과 대비되어 관념론에 의해 발전되었지만, 관념론은 현실적이고 감성적인 활동 자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발전은 단지 추상적일 뿐이었다.”
... 마르크스의 입장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유물론은 ‘대상적 활동’에서 ‘대상’만 보았을 뿐 ‘활동’을 부정했고 관념론은 ‘대상적 활동’에서 ‘활동’만 보았을 뿐 ‘대상’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456

마트료시카(Matryoshka)라고 불리는 러시아 전통 인형이 있다. 똑같은 모양이지만 크기가 작은 인형들이 인형 안에 중첩해 들어 있다. 제일 겉 인형이 포이어바흐였고, 이 인형을 열어 만나는 두 번째 인형이 헤겔이었다. 헤겔 인형을 열면 그 안에는 유물론 인형이, 유물론 인형을 열면 그 안에는 관념론 인형이, 관념론 인형을 열면 서양철학 인형이 놓여 있었다. 모두 세계를 변화시키기보다는 세계를 관조하고 해석하는 사유 전통이다. 마르크스는 차곡차곡 작은 인형들을 포이어바흐 인형에 넣어 하나로 만든 다음, 이 인형을 발로 차버린 것이다. 그 빈자리에는 ‘대상적 활동’ 개념이 마르크스의 강건한 발과 함께 남아 있다.  458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중 여섯 번째 테제의 핵심이다. 이것은 사회적 관계가 변하면 인간의 본질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마르크스의 관계주의다. 한마디로 불변하는 본질 같은 것은 없다는 이야기다.  459

본질 혹은 본성의 계보학은 단순하다. 먼저 첫 번째, 자발적이든 타율적이든 관계가 지속된다. 두 번째, 그 관계는 관계에 들어간 개체들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게 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바로 이 사후적 흔적, 지속적으로 관찰되는 이 흔적을 우리는 본성이라고 혹은 본질이라고 부른다.  460

자신에게 어찌할 수 없는 본질이 있다고 믿는 순간 개개인은 주어진 사회적 관계를 극복할 수 없다. 나는 약한 여자니까 어쩔 수 없어, 나는 노예니까 어쩔 수 없어, 나는 노동자니까 어쩔 수 없어 등등. 본질은 없고 관계만이 있다는 관계주의 입장이 해방적 효과가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내가 여자의 본성이 있어서 공손한 여자가 된 것이 아니다. 억압구조가 나를 옴짝달싹 못ㅎ하게 규방에 감금하고 내가 순종적인 여자의 본성을 믿도록 훈육했을 뿐이다. 내가 노예의 본성이 있어서 노예가 된 것이 아니다. 억압구조가 나를 노예로 포획하고 내가 순종적인 노예의 본성을 믿도록 훈육했을 뿐이다. 내가 노동자의 본성이 있어 회사에 출근하는 것은 아니다. 억압구조가 나를 임금노동자로 만들었고 내가 노동을 파는 노동자의 본성을 믿도록 훈육했을 뿐이다. 본질이나 본성이 존재한다는 일체의 입장에 속지 말자! 본질이나 본성에 사로잡히는 순간, 그것을 강요했던 억압구조, 즉 특정한 사회적 관계가 우리 눈에 들어올 리 없으니 말이다.  460-461

고대사회든 중세사회든 아니면 부르주아사회든 다수 민중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소수 지배계급은 항상 자기 체제가 불변하기를 원했다. 노예가 있어야 귀족도 존재하고 농노가 있어야 영주도 존재하고 노동자가 있어야 자본가도 존재하는 법이다. 그러니 귀족은 노예를 계속 소유하려고 하고, 영주는 자기 영지를 지키려고 하고, 자본가는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을 독점하려고 한다. 한마디로 지배계급은 자신을 지배계급으로 만드는 ‘생산력’,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등 물질적 조건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문제는 억압되고 수탈당하는 다수 민중들의 저항이었다. 그들은 언제든지 억압적 관계를 문제 삼을 수 있으니 말이다. 지배계급이 본질주의를 유포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노예는 노예의 본질이 있어서 노예이고 귀족은 귀족의 본질이 있어 귀족이라는 식의 본질주의는 이렇게 탄생한다.  463

지금까지 모든 혁명은 ‘활동양식’을 변화시키지 않은 채, 단지 그 활동의 새로운 분배만을, 즉 다른 사람들에게 노동을 새롭게 분배하는 것만을 문제 삼았다. 이에 반해 ‘코뮌주의혁명’은 지금까지 존재하는 ‘활동양식’에 반대하며 ‘노동’을 없애버리고, 온갖 계급의 지배와 더불어 그 계급들 자체를 없애버린다. - <독일 이데올로기>

마르크스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은 일어난 적이 없다. 노예가 농노가 된 것, 혹은 농노가 노동자가 된 것이 무슨 혁명이란 말인가? 주인집에 감금된 노예가 사라지고 출퇴근하는 노동자가 등장했다고 해서 진보를 이야기할 수 있는가? ... 혁명이랑 아무런 상관이 없고, 단지 지배양식과 수탈양식의 세련화에 지나지 않는다.  465-466

고대사회의 노예도, 중세사회의 농노도, 그 리고 부르주아사회의 노동자도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원하는 걸 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 노동을 분배하는”, 혹은 “노동을 강요하는” 것이 가능한 사회는 본질적으로 노예제사회일 뿐이다.  466

“지금까지 존재하는 활동양식에. 반대하고 ‘노동’을 없애”버려야 한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혁명이다. 정신노동을 담당하는 소수가 지배계급이 되고, 육체노동을 담당하는 다수가 피지배계급이 되는 활동양식을 극복해야 한다. 그래야 더 이상 ‘노동’, 즉 육체노동이 피지배계급을 상징하는 저주가 되기를 그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긍정하는 대상적 활동이라는 자기 자리를 찾게 된다.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고뮌주의혁명이다.  467

어떤 자가 폭력으로 지배하면, 다른 사람들은 다만 그 주먹에 굴복하여 한탄하면서 시달림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야생인들(des homme sauvages) 사잉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에게 복종(servitude)과 지배(domination)가 무엇인지 이해시키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남이 따온 과일이나 잡아온 먹이 또는 은신처인 동굴을 빼앗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어떻게 나들을 복종시킬 수 있겠는가? 게다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어떤 의존적 사슬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한 나무에서 쫓겨났다면 그때는 다른 나무로 옮겨가면 그만이다. 또 만일 어떤 장소에서 고초를 당할 경우 내가 다른 장소로 옮겨가는 것을 그 누가 방해한다는 말인가? ...... 복종관계란 사람들의 상호의존과 그들을 결합시키는 상호욕구가 있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은, 미리 그를 다른 사람이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상황(situation)에 두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황은 자연상태에서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거기에서는 누구나 구속을 벗어나 자유의 몸이며 강자의 법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1754  469-470

동물농장의 동물 가축들을 고삐로 통제했다면, 인간농장의 인간 가축들을 통제하는 데에는 고삐 외에 언어가 필요하다. 바로 이것을 간파했던 것이 루소의 후배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1908~2009)였다. 선배 루소가 다양한 책들을 접하면서 ‘자연상태’와 ‘인간농장’을 구분했지만, 후배 레비스트로스는 프랑스라는 인간농장을 떠나 몸소 자연상태를 해매고 다녔다. 그 결과 그는 선배가 주목하지 않았던 놀라운 사실, 인간농장을 유지하는 비밀을 발견한다. 그것은 문자와 관련된 교육의 문제였다. 그가 최초의 인간농장을 상징하는 기념물 피라미드에서 보았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문자의 출현과 문명의 어떤 다른 특징들을 관련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른 곳에서 그 관련성을 찾아야만 한다. 여기서 항상 수반되는 한 가지 현상은 도시와 제국의 형성이다. 이것은 상당수 개인들을 하나의 정치체제 속으로 병합하는 것이자 이 개인들을 카스트와 계급으로 위계화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현상이 문자가 처음으로 등장했을 순간에 이집트에서 중국에까지 발견되는 발달이다. 이 현상은 인간의 계몽(illumination)보다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수탈(exploitation)을 조장하는 듯하다. 이 수탈은 노동자를 수천 명씩이나 모아서 그들의 체력이 닿는 데까지 강제로 일을 시킬 수 있었다. 이 점과 관련해 우리가 알고 있는 건축의 탄생은 이런 수탈에 의존해 있었음을 알아야만 한다. 만약 나의 가설이 옳다면 의사소통의 한 수단으로서 문자의 일차적 기능은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한) 노예화를 촉진하는 데 있다. 공정한 목적을 위한 문자의 사용, 그리고 지적이거나 미적인 만족을 위한 문자의 사용은 문자 발명의 이차적 결과물에 지나지 않으며, 심지어 문자의 일차적 기능을 강화하고 정당화하거나(justifier) 혹은 은폐하는(dissimuler) 방식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 문자는 인간의 인식(connaissances)을 공고하게 만들지는 않았고, 지배(les dominations)를 영속화하기 위해 불가결한 존재가 되어왔던 것 같다. 우리와 더 가까운 상황을 고려해보자. 19세기 의무교육을 지향했던 유럽 국가들의 체계적 조치는 군복무의 확장과 (민중들의) 프롤레타리아와와 그 맥을 같이한다. 문맹과의 투쟁은 때때로 권력에 의한 시민 통제 강화와 구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을 때에만, “누구도 법을 모른다고 여길 수 없다”고 선포할 수 있으니까. - <슬픈 열대> (1955)
BC 8000년의 농업혁명은 막대한 잉여 생산물을 남기게 되는데, 이것이 무위도식하는 지배자와 지배계급을 탄생시킬 물질적 조건이 된다. 마침내 BC 3000년쯤 ㅇ이집트에 파라오(Pharaoh)라는 최고 지배자가 군림했던 최초의 제국이 세워진다. 정확히는 BC 3150년경 이집트 제1왕조가 탄생한 것이다. 90%의 피지배계급이 육체노동으로 10%의 지배계급을 먹여 살렸던 억압사회다. BC 2613년에서 BC 2494년까지 지속되었던 이집트 제4왕조는 매우 상징적이다. 제4왕조는 피라미드(pyramid)의 왕조였기 때문이다. 피라미드는 왕조의 최고 지배자 파라오의 무덤이지만, 동시에 이집트왕조의 복잡한 위계질서를 그대로 구현한 상징이기도 했다. 피라미드의 제일 하단은 이집트왕조의 피지배계급을 상징한다면 피라미드 상단은 파라오를 정점으로 하는 지배계급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피라미드가 위계구조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제4왕조는 어느 전투에서 1만 1000명의 포로와 13만 100마리의 양을 전리품으로 얻었다고 하니, 당시 이집트 제4왕조의 인구는 못해도 500만 명 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통제하고 수탈하려면 문자와 숫자 체계가 완비되어야 하며, 동시에 피지배계급도 이런 문자와 숫자 체계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포고문만으로 혹은 통지서만으로 지배와 복종 관계가 원활해질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노예 등 최하 지배계급은 문자와 숫자를 배울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노예는 반드시 주인의 음성언어는 이해할 수 있도록 훈육되어야 한다. 그래야 주인이 노예를 부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문자체계의 발달이 억압체제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면, 제4왕조 시절 기자(giza)에 건설된 피라미드를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듯하다. 이 피라미드는 높이 146.5미터와 밑변 230.4미터의 규모로 전체 5900만 톤에 달하는 약 230만 개의 석회암과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 피라미드는 약 10만 명의 인력이 매일 일해 20년 정도 걸려서 완공되었다고 추정된다. 10만 명이다. 일사불란한 언어체계가 없으면 공사장은 그저 난장판이 되기 십상이다. 한 두 명의 노예를 부리는 것이라면 말로도 충분하겠지만, 10만 명의 인력을 부리려면 문자와 숫자에 대한 명료한 체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가장 하급 관리자는 상부에서 받은 명령문을 이해할 수 있어야하고, 직접 돌을 운반하는 노예들도 최소한 하급 관리자의 구두 명령 정도는 알아들어야 한다. <구약>의 첫 장인 <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 이야기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오만하게도 인간이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고 하자 신은 인간의 그 공사를 좌절시키려고 한다. 그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통일되어 있던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해 그들이 상대방의 말을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드는” 방법이었다.
통일되고 체계적인 문자가 없다면, 거대한 피라미드도 만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왕조도 유지될 수 없었다. 그러니 문자와 숫자, 나아가 음성언어에 대한 교육은 억압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조치였다. 레비스트로스가 “문자”, “수탈”, “위계화”, “건축”, “노예화”를 인간논ㅇ장의 최초 징후라고 독해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인간을 가축으로 부릴 때 언어는 가장 효과적이고 결정적인 고삐가 된다. ..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 때, 가장 먼저 한 조치가 일본어 교육이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457-478

인간을 가축화할 때 재갈과 고삐보다 말과 문자가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지배계급은 알았던 것이다.  478

레비스트로스는 노예화와 관련된 일차적 기능 이외에 언어에 다른 기능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표면적으로 문자가 노예화와 무관하게 사용된 사례로 그는 세 가지를 든다. 하나는 “공정한 목적”을 위한 문자 사용, 두 번째는 “지적인 만족”을 위한 문자 사용, 그리고 세 번째는 “미적인 만족”을 위한 문자 사용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란 근본적 위계구조가 전제된 이상, 언어 사용의 이차적 기능은 언어의 노예화 기능을 강화하고 정당화하거나 아니면 은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레비스트로스의 냉정한 판단이다. 479-480


고대문명은 인간 가축화의 서막에 지나지 않고, 그 가축화에는 문자가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이것이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이다. 거대 건축물이 인류 문명의 보고라는 편견에 대한 조롱이기도 하다. BC 3000년 전후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세계 4대 문명은 문명이라기보다 문명의 탈을 쓴 야만의 시작을, 혹은 인간이 동료 인간을 가축화하는 비극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482

피라미드의 인부들 중 그 누구도 피라미드에 묻힐 수 없었던 것처럼, 안전띠를 매고 아찔한 철골 구조에 몸을 맡긴 노동자들 중 그 누구도 피라미드에 묻힐 수 없었던 것처럼, 안전띠를 매고 아찔한 철골 구조에 몸을 맡긴 노동자들 중 그 누구도 이 거대한 건물에 입주할 수 없다. 폭력수단을 독점해 노예와 민중을 지배했던 파라오나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을 독점해 노동자들을 지배했던 자본가들은 여전히 정신노동이란 미명하에 육체노동자들을 착취했던 것이다.  483

파라오 시대와 자본계급 시대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폭발적인 인구 증가에서도 찾을 수 있다.  483

이제는 정말 음성만으로 노동계급을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이 된 것이다. 바로 여기서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의무교육의 필요성이 대두한다. 물론 의무교육의 핵심은 문자 해독 능력, 다시 말해 문자로 쓰인 주인의 명령을 정확히 이해하고 시행할 수 있는 능력의 함양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말한다. “19세기 의무교육을 지향했던 유럽 국가들의 체계적 조치는 군복무의 확장과 (민중들의) 프롤레타리아화와 그 맥을 같이한다”고.
19세기 이후 본격화한 유럽의 국민국가들을 상징하는 것은 식민지 쟁탈 경쟁이었다. 패권주의로 무장한 국가들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우월한 군사력과 압도적인 생산력을 먼저 확보해야 했다. 군사력과 생산력의 기원은 결국 국민들, 혹은 민중들의 노동력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럽 국가들은 전체 국민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고 조직하고 운용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고, 그 결과물이 당시 유럽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시행했던 의무교육이었다. 이제 피지배계급은 구두 명령이든 문서 명령이든 지배계급의 명령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능력을 기르도록 강제된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노예화가 제도화된 셈이다. 당연히 의무교육에서 복종의식을 함양하는 작업은 필수적이다. 아무리 명려을 이해하는 문자 해독 능력을 갖추어도 이해된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자유인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굴욕이지만 의무교육이란 미명으로 이 복종 교육은 별다른 무리 없이 진행된다. 의무교육의 대상은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 때도 일제 시절에도 체제에 대한 충성 맹세가 어린아이들의 입에서 울려 퍼졌다. 1892년 국기 페티시즘을 처음으로 드러냈던 미국은 1953년 생전체제 때 국기에 대해 맹세를 읊도록 했고, 그 맹세는 21세기 지금도 다양한 피부색의 미국 아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우리의 경우 박정희(1917~1979) 군사독재정권이 지배하던 1972년부터 아이들은 조회 때마다 국기를 보며 충성을 맹세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외위고 있는 충성 맹세문은 2007년 참여정부를 자처하며 진정한 민주주의를 표방했던 노무현(1946~2009) 정권 때 개정된 것이다. 1972년 <국기에 대한 맹세>가 일본제국이 우리 아이들을 훈육했던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의 정신과 미국의 국기 페티시즘이 결합된 형태였다면, 2007년부터 우리 아이들이 동요라도 되는 듯 외우고 있는 버전은 그냥 노골적으로 1953년부터 지금까지 미국 아이들이 외우는 <충성의 맹세(Pledge of Allegiance)>의 짝퉁 버전이다. 19세기 이후 지금까지 국민들을 노예화하려는 부르주아국가들의 속내를, 그들이 만들어 강요했던 낯부끄러운 충성 맹세문의 파노라마를 통해 확인해보자.
나는 성스러운 맹세를 신에게 바칩니다.
나는 독일제국과 민중의 지도자이자 군대 최고사령관 아돌프 히틀러에게 무조건 충성을 바칠 겁니다.
나는 용감한 병사로서 항상 이 맹세에 나의 생명을 바칠 준비를 할 겁니다. - <아돌프 히틀러에게 바치는 충성 서약> (1934)
1.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는 인고 단련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황국신민서사>(1937)
나는 미합중국의 국기에 대해, 그리고 이것이 표상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자유와 정의가 함께하고 (기독교의) 신 아래에서 갈라질 수 없는 하나의 국가, 공화국에 대해 충성을 맹세합니다. - <충성의 맹세> (1953)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자유롭게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 <국기에 대한 맹세> (1972)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구그이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 <국기에 대한 맹세> (2007)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 미사여구인지 분명해진다. 국기도, 국가도, 관료도 국민의 위에 있는 것이 아닐 때에만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말이 의미를 가진다. 국가가 내용에나 형식에서 국민들, 즉 사회의 하부에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니까, 그렇지만 나치 때도, 일본제국주의 시절에도, 독재 시절에도 심지어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 당연히 이것은 국가의 최고 실권자에 대한 충성일 수밖에 없다. 2007년 개정된 <국기에 대한 맹세>를 읽어보라. 부르주아체제에서 자유는 사유재산을 가질 수 있는 자유와 그것을 처분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부르주아체제에서 정의는 토지를 가진 사람, 돈을 가진 사람, 그리고 노동력만을 가진 사람 사이에 생산물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정의를 의미한다. 결국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은 우리 국가가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라 부르주아극가라는 것을 명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484-487

<국기에 대한 맹세>가 울려 퍼지는 국가에서 의무교육의 일차적 목적은 너무나 자명하지 않은가. 지배계급의 명령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문자 교육과 그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제2의 천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체제의 유지와 발전에 도움이 되는 실무교육도 아울러 병행된다. .. 물론 부르주아체제는 기회 균등을 이야기하면서 자기 속내를 효과적으로 은폐한다. 다시 말해 교육은 민중들 자신을 위한 것이지 국가나 지배계급을 위해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생각해 보라. 정말로 민중들을 위하는 것이라면 교육을 ‘의무’의 형태로 강요하는 일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487

1987년 10월 29일 마지막으로 개정된 우리 헌법을 보라.
제31조 (교육을 받을 권리 의무, 평생교육 진흥)
1항.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2항. 모든 국민은 그 보호하는 자녀에게 적어도 초등교육과 법률이 정하는 교육을 받게 할 의무를 진다.
…..
제32조 (근로의 권리 의무, 최저임금제, 여자 연소자 보호, 국가유공자에 대한 기회 우선)
1항.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지닌다. 국가는 사회적 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 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
2항. 모든 국민은 근로의 의무를 지닌다. 국가는 근로의 의무의 내용과 조건을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법률로 정한다.  - 대한민국 헌법
권리는 힘이다. 개인에게 어떤 것에 대해 권리가 있다는 것은 그걸 할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교육이 권리라면, 그것은 교육을 받지 않을 권리도 함축해야 한다. .. 그렇지만 우리 헌법은 얼마나 모순되는가? 교육이든 노동이든 권리라고 말하자마자, 입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바로 교육과 노동을 의무로 규정하니까. 구조도 똑같다. 31조나 32조 모두 1항은 권리를 이야기하고, 2항은 의무를 이야기한다. 바보가 아닌 이상 1항은 2항에 의해 강제된다는 사실, 나아가 1항은 2항을 은폐하는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일이다. 결국 교육은 강제되고 노동도 강제된다. 물론 그 주체는 국가이고 그 객체는 민중들이다.  488-489

바로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의무교육이 민중들을 프롤레타리아로 만드는 과정과 같이한다는 레비스트로스의 지적이다. 프롤레타리아화! 이것은 민중들에게서 노동력을 제외하고 모든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을 박탈하는 과정이다.  4899

이렇게 시간이 갈수록 노동자들에게 교육은 타율적 강요가 아니라 점점 자발적 복종의 중요한 매커니즘으로 변질된다.
일본제국주의 시절을 생각해보라. 일본어를 하는 우리 노동자는 그렇지 않은 동료를 지도하는 십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 더 많이 배울수록 직접적이고 힘든 육체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식민지 시대 불행한 우리 선조들은 일본제국주의가 원하는 걸 더 많이 습득하려고 애썼다. 489–490

내가 원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자본이 원하는 것을 배운다! 국가나 자본의 간택을 받아야 생계를 도모할 수 있고 나아가 풍요로운 삶도 누릴 수 있다!  490-491

중요한 것은 의무교육이 타율적 훈육이 아니라 자발적 학습, 즉 타율적 복종이 아니라 자발적 복종으로 타들어가는 도화선의 불꽃이었다는 사실이다.  491

“자발적인 학습은 교육이란 제도 발명의 이차적 결과물에 지나지 않으며, 심지어 교육의 일차적 기능을 강화하고 정당화하거나 은폐한다.” 레비스트로스  492

만약 모든 사람이 문자를 모른다면, 강자는 몸소 벽을 감시하거나 꿀병을 지키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문맹을 없애는 순간, 이제 강자 대신 경고문이 사람들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  492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관계, 즉 억압구조의 핵심은 생산수단 독점의 문제로 귀결된다. 생산수단을 탈취한 자는 생산수단을 빼앗긴 자를 지배하는 법이다. .. 지주와 농민 사이의 사회적 관계, 혹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사회적 관계는 이렇게 출현한 것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엣 마르크스는 이것을 “다른 인간과의 관계”나 “사회적 교류형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간단히 “환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 마르크스가 말한 환경은 자연환경이 아니라 억압적 사회구조, 즉 인위적 환경을 의미했던 것이다. 바로 이 환경을, 사회의 억압적 교류양식을 원활하게 기능하도록 하는 목적으로 만든 것이 19세기부터 발달했던 교육제도다. 표면적으로 체제는 교육이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기에 민중들에게 유리한 제도라고 역설한다. 기회 균등의 논리는 단순하다. 교육의 기회는 모두에게 주어지니, 성적으로 교육을 잘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만약 증명에 성공한다면 노동자에게는 부르주아에 가까운 삶이 제공될 것이고, 실패한다면 고단한 육체노동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부와 가난, 혹은 성공과 실패는 주어진 교육의 기회를 잡지 못한 개개인들의 탓이지 사회구조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19세기 이후 의무교육이란 이름으로 강조되었던 교육은 부르주아사회의 새로운 노예, 즉 노동자들을 상호 경쟁으로 내모는 미끼였을 뿐이다. 치려한 경쟁은 억압적 환경 전체를 구조적으로 성찰할 여유를 노동자들에게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본 계급이 아니라 동료 노동자들을 적대시하는 잘못된 감성을 노동자들의 내면에 각인한다. “입사 경쟁률이 왜 이리 높아. 저들이 원서만 내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자, 이제 우리에게 심각한 결단의 순간이 찾아왔다. 노예화를 강요하는 억압적 구조에 맞서 싸우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 아니면 주어진 환경에 순응해 그나마 안정된 삶을 확보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  495-496

마르크스에게는 .. 주인과 노예라는 억압적 환경, 그리고 이 환경을 강요하는 노예화 교육! 그에게 이것은 적응과 순응의 대상이 아니라 파괴와 극복의 대상일 뿐이다.  497

노예제를 극복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햇던 스파르타쿠스 자유군단, 농노제에 도전에 농노 신분을 털어내려고 했던 뭔스터코뮌, 노동자제를 무너뜨리고 임금노동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파리코뮌을 생각해보라. 길들여진 개는 주인을 물지 않고, 길들여진 소는 뿔로 주인을 들이받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간은 완전히 가축화할 수 없는 존재다. .. 인간은 대상적 활동의 힘을 가지고 있다. .. 인간은 주어진 조건에 지배를 받는 수동적인 존재지만 동시에 그걸 넘어서려는 주체적 의지를 가진 능동적 존재이기도 하다. 수동적인 능동자!  498-499

20세기 내내 억압받는 자들은 자신들을 억압이 없는 미래로 이끌어나갈 정당이나 정권의 인도나 지도를 받는다. 사이비 사회주의나 사이비 코뮌주의가 마침내 탄생한 것이다. 소수 지배계급이 다수 인간들에게서 대상적 활동을 박탈할 때, 억압사회는 등장하는 법이다. 그래서 억압사회에서는 소수 지배계급만이 대상적 활동의 힘을 향유한다. 당연히 억압받는 다수는 지배자의 명령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대상, 혹은 사물과도 같은 상태에 처하게 된다. 아무리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다고 해도 정치적 엘리트주의로 무장한 사이비 사회주의나 사이비 코뮌주의가 새로운 억압체제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억압받는 자들에게 대상적 활동이 허락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501

“환경이 인간에 의해 변화되고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 환경이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맞지만, 바로 이 인간이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근본 입장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그가 “인간이 환경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환경도 인간을 만든다”고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도. 억압을 받는 것도 인간이지만 억압을 극복하는 것도 바로 그 동일한 인간이니까. 여기에는 포이어바흐도, 엥겔스도, 스탈린도, 마오쩌둥도, 김일성도 필요가 없다. 그래서 마르크스에게 사회는 두 부분으로 나뉠 필요가 없다. 아니 나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속내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할, 혹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분할 자체가 바로 억압의 가장 분명한 힘을 절단하는 데서 찾아온다. 대상의 측면만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피지배계급이라면, 활동의 측면을 독점하는 사람들이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지배계급이니 말이다. 502-503

경제적 조건들은 우선 그 나라의 민중들을 노동자들로 변형시킨다. 자본의 지배는 이 민중들에게 공통된 상황, 공통된 이해를 만들어 준다. 따라서 이 대중은 이미 자본에 반하는 하나의 계급이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이미 몇몇 구절로 지적했던 투쟁속에서 이 민중은 결합하고 스스로를 대자적 계급으로 구성한다. 이에 따라 민중들이 옹호하는 이해는 계급이해가 된다. 계급에 대한 계급의 투쟁이 바로 정치투쟁이다. - <철학의 빈곤> (1847)
.. 헤겔<정신현상학>의 핵심 개념 ‘즉자(卽自)’와 ‘대자(對自)’를 사용하면서 마르크스는 억압받는 자들이 대상적 활동의 주체로 변하는 과정, 다시 말해 억압에 순응했던 자들이 억압에 저항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주체로 변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글자 그대로 즉자는 자신에게 매몰되어 있는 상태, 그리고 대자는 자신을 반성하거나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자신을 반성하거나 타인을 의식할 수 없는 상태가 즉자이고, 자신을 반성하고 타인을 의식하는 상태가 대자라고 정리해두면 좋다. 문제는 사람도 사물처럼 즉자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503-503

완벽한 노예는 사물화된 노예, 다시 말해 즉자적 노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사물처럼 박제가 되었다고 해도 인간은 인간일 수밖에 없다. 어느 순간 수치심과 모욕감이 찾아올 때, 완벽한 모예는 사라지고 만다. 자신의 신세를 돌아보고 한숨을 쉬거나 분노하고 자신의 삶을 굴욕적으로 생각하는 노예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대자적 노예의 탄생이다. ..
대자적 노예는 노예라는 신분을 넘어서려고 할 것이다. 이제 귀족과의 목숨을 건 투쟁, 혹은 노예제사회에 대한 전면적 투쟁만이 남는다. .. 환경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바꾸려는 대상적 활동의 주체는 바로 이렇게 탄생한다. 모세가 나타나 노예를 귀족의 수중에서, 농노를 영주의 수중에서, 노동자를 자본가의 수중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노예가, 농노가,  노동자가 새로운 주인으로 모세를 섬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스스로 모세가, 혹은 메시아가 되어야 한다. 대상적 활동의 힘을 회복해야만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말했던 것이다. “환경의 변화 그리고 인간의 활동 혹은 자기변화 사이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505

인간이 환경과 교육의 산물이라는 말은, 즉 인간이 즉자적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인간은 자신의 삶을 당연시하는 것이 아니라 회으하게 된다. 대자적 삶이 찾아온 것이다. 마르크스는 바로 이것을 ‘자기변화’라고 개념화한다. .. 불행히도 역사를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것처럼 대자적 줓체로 변형된 억압받는 사람들이 억압적 환경 자체를 바꾸는 데 성공한 적은 없다. “인간의 활동”, 즉 “자기 변화”가 “환경의 변화”를 낳는 데 역부족이었던 탓이다. 즉자적 인간이 대자적 주체가 되었지만, 다시 말해 억압받는 자들이 대상적 활동의 주체가 되었지만, 불행히도 그들의 저항은 환경을 바꾸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506

교육은 선생이 원하는 것을 학생들도 원하도록 훈육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찾아내도록 하는 데 있다. 마르크스는 말했다. “선생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만큼이나 학생들에게 배워야 한다”고.  선생은 학생들의 잠재적 차이를 아직 모르고, 동시에 학생들도 자기의 차이를 모르기에,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다양한 경험을 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학생들에게 제공한 다양한 경험의 기회들은 선생 입장에서 아이들이 꽃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선생은 자신의 확신을 항상 접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선생이 학생들에게 배워야 한다”는 말의 의미다.  509

아이들의 차이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선생은 체제의 명령을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동일성의 교사가 될 수밖에 없다.  510


‘대상적 활동’이란 개념이 마르크스 철학의 심장이라면, ‘인간 사회’라는 이념은 마르크스 철학의 머리라고 할 수 있다.  513


1852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는 말했던 적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자신이 바라는 꼭 그대로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는 못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 스스로 선택한 환경 아래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곧바로 맞닥뜨리게 되거나 그로부터 조건지어지고 넘겨받은 환경하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거”이라고.
마르크스는 억압체제 전체 차원에서 꿋꿋하게 진행되는 인간의 대상적 활동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사소한 개인들의 일상에서도 그래도 관찰될 수 있다. 직장생활에 투여되는 에어지를 줄여 가족과 애인에게 정성을 기울이는 직장인, 오른손에 가짜 붕대를 감고 원치 않은 모임에 참여하는 여성, 돈이 떨어져도 히치하이킨을 해서 여정을 계속하는 젊은이, 예비군 훈련장에서 만화책을 가져와 들키지 않고 보는 젊은이, 지도교수가 건넨 술잔을 교묘히 딴 그릇에 버리는 대학원생, 혹은 추울 때 따뜻한 물을 담은 물병을 껴안고 잠을 청하는 사람, 이런 모든 사람이 대상적 활동의 작은 촛불들이다. 그렇지만 이런 작은 불꽃들이 모이지 않으면 어떻게 전체 억압사회를 불태울 수 있는 거대한 산불이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
어떤 경우든 인간은 주어진 대상적 조건에 순응하지 않고 그것에 능동적으로 개입해 자기만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고 인간의 삶이다. .. 유물론적 사유 전통이 인간의 삶에 강하게 영향을 끼치는 대상적 조건만을 강조한다면, 반대로 관념론적 사유 전통은 인간의 자발성과 능동성만을 중시해왔다. 이런 해묵은 철학사적 대립은 마르크스의 ‘대상적 활동’ 개념으로 해소되고 만다. 대상적 활동 개념은 인간의 삶이 비자발적 자발성, 수동적인 능동성, 혹은 조건적인 자유라는 걸 해명했기 때문이다.  516-517

개체의 삶이 대상적 활동이라면,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도 대상적 활동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정신적인 차원에서도 수동성과 능동성이 동시에 있고, 육체적인 차원에서도 수동성과 능동성이 동시에 있다는 것이다.  519

정신적인 것이 전면에 부각되었다고 해도 육체적인 것이 자기 기능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신적인 것이 나가도록 버팀목이 될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 어느 정도 나가야 할지 그 한계도 정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육체적인 것이 전면에 부각될 때도 마찬가지다. 변증법, 그것 벌거 아니다. 정신과 육체, 이론과 실천, 그리고 인식과 경험을 각각 두 다리로 생각하고 대범하게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가는 것, 바로 그것이 변증법이니까.
마르크스가 “의식을 살아 있는 개인으로 간주하는 접근 방식”, 즉 헤겔식 사유를 비판했던 이유는 이제 분명해진다. 이것은 마치 육체라는 오른발을 간과한 채 의식이란 왼발만을 움직이겠다는 생각과 같기 때문이다. 헤겔은 절름발이의 인간만을 봤을 뿐, 살아가는 개인 혹은 삶을 살아내야 하는 개인을 보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잘해야 헤겔식 인간은 세상을 관조하는 인간일 뿐이다.  521-522

마르크스의 인간은 의식이 움직이면 몸이 움직이고 몸이 움직이면 의식도 이어서 움직이는 인간이다.  522

마르크스는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생성 과정에 있는 인간”을 강조한다. 특정한 대상과 마주치고 관계해야 하나의 특정한 조건이 만들어진다. 결국 ‘특정한 조건’이란 대상과 관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처한 조건이나 상황을 가리킨다. 대상적 조건이 어떤 것이든 간에 인간은 여기에 전적으로 함몰되지 않고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존재다. 그 결과는 과거와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생성이다.  522-523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중 두 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말한다. “대상의 진리가 인간 사유로 귀속될 수 있는지의 문제는 이론의 묹2ㅔ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라고.. 대상의 진리가 .. 인간이 마주친 대상에 대한 진리, 혹은 인간과 관계하는 대상에 대한 진리다. 결국 대상의 진리에는 대상과 마주친 인간의 모든 역사와 경험, 그리고 힘을 전제한다. 그러니 정확히 말해 마르크스가 말한 대상의 진리는 대상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의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525

명심해야 한다. 대상적 활동을 영위하는 모든 주체는 자기 사유의 진리를 증명해야만 한다. 마르크스에게 육체적인 것도 대상에 대한 육체적인 것이고, 정신적인 것도 대상에 대한 정신적인 것이다. 당연히 사유도 대상에 대한 사유이고, 실천도 대상에 대한 실천일 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말한다.  “실천으로부터 유리된 사유가 현실적인 가 비현실적인가를 논하는 것은 순전히 스콜라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실천으로부터 유리된 사유는 관저적인 사유일 수밖에 없으니까.  ..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당신은 대상적 활동의 주체인가? 그렇다면 당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다시 말해 당신의 생각이 현실적이라는 것을, 당신의 생각이 힘이 있다는 사실을, 당신의 생각이 공회전하는 사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천을 통해 증명하라!  527

어떤 시대에서도 지배적 사상(herrschenden Gedanken)은 곧 지배계급의 사상(Die Gedanken der herrschenden Klasse)이다. 즉 사회의 물질적 힘을 지배하는 계급은 동시에 사회의 정신적인 힘도 지배한다. …… 따라서 그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지배하고 한 역사 시대의 범위와 한계를 결정하는 한, 당연히 그들은 모든 영역에 걸쳐 그 지배를 행할 것이며, 따라서 무엇보다도 사고하는 자로서, 사상의 생산자로서 지배하고, 그래서 그 시대의 사상의 생산과 분배를 규제할 것이다. …… 만약 우리가 역사 과정을 파악할 때 지배계급의 사상을 지배계급 그 자체에서 분리시켜 독자적인 존재라고 간주한다면, 혹은 그 어떤 시대에는 이러저러한 사상이 지배했다고 말하기만 하고 그 사상들이 만들어지게 되는 조건 및 그 생산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면, 혹은 그 사상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각 개인들과 세계상태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예를 들어 귀족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명예’, ‘충성’ 등의 개념이 찌배적이었고, 부르주아가 지배하던 시대에는 ‘자유’, ‘평등’ 등의 개념이 지배적이었다고만 말해도 될 것이다. - <독일 이데올로기>
… 정확히 말해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거나 같은 말이지만 피지배계급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피하기 위해 지배계급이 만든 것이 바로 특정 시대의 지배적 사상이라는 것이다.  529-530

여성을 모성의 화신으로 찬양하는 인문학자들, 신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종교인들, 인간 사유의 고유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는 철학자들, 배려와 공존 등 공동체적 윤리를 역설하는 설교자들, 모두 좋은 사회를 꿈꾸고 있지만 그들은 자신이 억압사회를 지속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걸 모른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란 구분법이 통용되는 억압적 구조를 정면으로 응시해서 돌파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534

어떻게 하면 이데올로기적 거울상이나 메아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인간이 누구도 지배하지 않고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 사회,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중 열 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가 말한 ‘인간사회’다. .. 귀족이나 영주나 자본가를 위한 물질적 생산과 물질적 교류가 아니다. 노동하는 사람들 자신의 물질적 생산과 물질적 교류다. 주인들의 생산이자 주인들의 교류다.  538-539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포이어하브에 관한 테제들> 11  539

포이어바흐의 생각은 기독교가 지배적이었던 독일사회에 단순한 지적 센세이션을 넘어 충격을 안겨준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성 일반, 혹은 인간 본질을 투사해서 만든 것이 신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퐆이어바흐가 말한 인간 일반이란 지배계급으로부터 추상된 것이라는 데 있다. .. 결국 신은 최상의 지배자나 초치선의 지배자로 상상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왜 가난한 민중들이 신의 궁전에 찾아가 그에게 무릎을 꿇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현실의 군주에게 억압받고 수탈당하자, 그들은 천상의 군주에게 사랑받는 노예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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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 2장 - 포이어바흐를 넘어서 도달한 곳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은 각 개인에게 내재된 추상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은 본질이란 말뜻처럼 불변하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관계가 만들어내는 앙상블과도 같다는 것이다.  ... 개별 연주자들이 최상급 연주 실력을 뽐내도 다른 연주자들의 연주에 녹아들지 못하면, 연주는 불협화으믕로 끝나고 만다. 앙상블 연주로는 완전히 실패한 셈이다.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인간을 솔로 연주자로 보지 말고 앙상블에 참여한 개별 연주자로 보자는 것이다. ... 마르크스는 ‘본질주의(Essentialism)’, 즉 개인이나 사물 안에는 본질이 내재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해체하고자 한다. 겉보기에 아ㅜ리 달라 보여도 서양철학 전통 일반은 모두 이 본질주의에 발을 걸치고 있다.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중요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본질주의 대신 마르크스는 ‘관계주의(Relationalism)’라고 부를 만한 입장을 표방하기 때문이다. 관계주의는 개인이나 사물 등 우리 눈에 식별되는 대상들이 아니라 직접 눈에 띄지 않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223-224

식사를 하던 아이가 귀가 가려웠는지 젓가락으로 귓속을 긁는다. 식탁에 있던 어머니는 기겁을 하며 아이를 나무란다. “젓가락은 음식을 집어먹는 거야. 귀를 파고 싶으면 귀이개를 써야지.” 익숙한 밥상 풍경이지만, 여기에도 보질주의와 관계주의가 작동하고 있다. 젓가락의 본질은 무엇인가?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음식을 집어먹는 것’리다.  ... 본질주의가 삶에서나 정치엣 항상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본질주의는 본질이란 이름으로 기존 질서를 맹목적으로 따를 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224-225

자유란 별게 아니다. 어떤 사물과 하나의 관계만 가능한 사람보다 서너 가지의 관계가 가능한 사람이 더 자유로운 법이다. 아이는 의자가 없어도 근사한 바위에 앉아서 쉴 수 있고, 사용하지 않는 냄비에 흙을 담아 꽃씨를 묻을 수도 있다. 물론 급하게 소변을 보고 싶으면, 아이는 신속하게 인기척이 없는 곳에서 시원하게 소변을 볼 수도 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어머니나 선생임의 훈육으로 사회적 규범에 동화되고 만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사회구조가 지정한 관계로만 세상과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가 말한 초자아가 제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초자아라는 내적 검열지구가 작동하자마자, 모든 사물은 하나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이제 사물은 본질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  225-226

남편이 있는 아내나 아이의 엄마만을 강조하는 순간, 이 사람의 본질은 여성이 되고 만다. 혹은 이 삶이 편의점에서 일하는 것만 강조되는 순간, 이 사람의 본질은 프롤레타리아, 그것도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최악의 프롤레타리아가 된다.  227

마르크스에게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대부분은 일조으이 본질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방적기, 목화솜, 공장, 그리고 노동자등 개별적인 대상들만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본과 노동이란 관계, 원초적으로 불평등한 관계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자본가는 돈으로 공장을, 방적기를, 목화솜을, 그리고 노동자를 산다. 면직물을 만들어 투자한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다. 반면 노동자는 일체의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을 박탈당해 노동력만 가지고 잇다. 생계를 위해 돈이 필요한 노동자는 면직공장에 취업해야만 한다.  228

억압과 수탈 관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생각해 보자.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을 누군가 독점하는 순간, ‘3P의 삼각형(the triangle of 3P)’으로 작동하는 지배관계는 탄생한다. 먼저 소수가 부유해지면서 다수는 가난해진다. 첫 번째 P는 재산(property)이고 두 번째 P는 가난(poverty)이다 부유한 소수는 가난한 다수를 지배하게 된다. 세 번째 P는 권력(power)이다. 권력은 재산과 가난 사이의 관계를 영속화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이자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이 원초적 관계를 지키려는 힘이다. ‘재산-가난-권력’으로 이루어지는 ‘3P의 삼각형’은 대부분의 인간을 자기 안에 감금해 피지배계급으로 포획한다. 3P의 삼각형이 만들어지면, 지배관계는 공고화된다. 그러니 권력을 해명하고 싶다면, 우리는 재산과 가난의 문제를 우회해서는 안 된다. 재산을 비판하고 싶다면, 우리는 권력과 가난의 문제를 숙고해야만 한다. 그리고 가난을 해결하고 싶다면, 우리는 권력과 재산의 문제를 극복해야만 한다. 재산과 가난이 분열되면서 권력을 낳고, 재산과 권력이 결합하면서 가난을 지속시키고, 마지막으로 권력이 가난을 적대시하면서 재산은 안정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대상이 아니라 관계를 사유해야 한다! 이것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이다. 지배계급 이데올로그들은 소수의 재산과 다수의 가난이 서로 무관하다고, 소수의 재산과 소수의 권력이 서로 무관하다고, 나아가 소수의 권력과 다수의 가난이 서로 무관하다고 역설한다. 이 궤변을 다수의 가난한 자들이 받아들이는 순간, 억압과 착취의 체제는 승리를 구가하게 된다.  245-246

억압과 착취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소작농이 지주가 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새로운 소작농을 양산하는 길일 뿐, 불평등한 관계 자체를 소멸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자본가가 생산과 생계의 절대적 수단, 즉 돈을 독점했기에, 노동자들에게는 팔 수 있는 노동력만 남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자본가-노동자’ 관계를 인식하지 못한 노동자는 자신의 처지를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이제 그에게 남은 꿈은 단순하다 많은 임금을 받기를 꿈꾸거나 아니면 언젠가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자본가가 되는 걸 꿈꾸게 된다. 자본가가 있기에 자기 삶이 비참해졌다는 것을 알았다면 노동자가 이런 헛된 꿈에 매진할 리 없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가 자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노동자’ 관계가 소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억압받는 자들은 폐부에 새겨 잊지 말아야 한다. 대상이 아니라 관계를 사유하라! 불평등한 관계가 다수를 “눈물의 골짜기”에 던져 넣었다면, 그 억압적 관계를 우리는 돌파해야만 한다. 넘어진 곳이 바로 우리가 일어나야 할 곳이다.  247
마르크스는 ‘인간의 감성’ 이외에 ‘실천적 활동’이란 의미를 강조했던 것이다. “실천적인 인간적-감성적 활동”으로서 감성은 우리의 몸적 인식이자 실천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무언가 했더니 사람이로구나”라는 인식이나 “사람인 줄 알았는데, 바위구나”라는 인식도 이미 이런 몸적 인식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니 지성의 판단이나 개념의 자발성도 결코 몸과 무관한 정신만의 고유한 기능이 아니라, 엄격히 말하면 몸적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피지렌’이란 독일어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비가 얼굴에 떨어지면 우리는 그걸 느낀다. 비가 우리를 촉발한 것이다. 태양이 작열하면 우리는 그걸 느낀다. 태양이 우리를 촉발한 것이다. 매혹저긴 향내가 나면 우리는 그걸 느낀다. 향기가 우리를 촉발한 것이다. “직관이 감성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즉 우리가 대상에 의해서 촉발되는 방식만을 포함한다는 것은 우리 본서으이 필연적 결과다.” 여기까지 칸트의 말은 옳을 뿐만 아니라 정확하다. 그렇지만 우리 몸이 비오는 날 집 밖에 있었다는 사실, 우리 몸이 여름날 바닷가에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 몸이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다는 사실도 그만큼 중요하다. 온몸으로 물을 느끼려면 대홍수가 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그저 계곡물이나 바닷물, 아니면 욕조물에 몸만 담그면 된다. ‘아피지렌!’ 그것은 무엉ㅅ보다도 특정 시공간을 점유하는 몸들 사이의 마주침이 전제된 것이다. 일단 마주쳐야 타자든 나든 상대방을 촉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253

산길을 걷다가 “무언가 했더니 사람이구나”라는 인식에 이르렀다. 이 인식을 바꾸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 “마음의 수용성을 감성”이라고 정의하면서 감성의 의미를 축소했던 칸트의 입장을 밀어붙이면 된다. 다시 말해 일체의 미동도 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있으면 된다. 다시 말해 일체의 미동도 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있으면 된다. 칸트가 감성의 능력을 ‘직관’이나 ‘관조’라고 표현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직관’이나 ‘관조’를 뜻하는 독일어 ‘안샤우웅(Anschauung)’은 원래 동사 ‘안샤우엔(Anschauen)’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말은 ‘거리를 두고 관찰하거나 바라본다’는 의미이기에 보통 ‘관조한다’는 말로도 번역된다. 결국 대상을 직관하거나 관조하는 칸트식 감성이 작동하려면, 우리 몸은 결코 움직여서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X를 관조하면 “무언가 했더니 사람이구나”라는 인식은 수정될 여지가 없다. 바로 이것이 핵심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감성을 ‘직관’이나 ‘관조’의 기능에 국한하지 않고 “실천적인 인간적-감성적 활동”이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칸트의 감성이 수동적 감각에 지나지 않는다면, 마르크스의 감성은 수동성과 능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몸적 인식, 혹은 실천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강조했던 감성의 원래 모습을 복원하지 않으면, ‘바위구나’라는 새로운 인식이 만들어질 여지가 없다.  254-255

역사적 인식은 무언가 사라지고 무언가 새롭게 생기는 과정에 대한 앎이다. 무엇이 사라졌을까? 무엇이 새롭게 생겼을까? 왜 사라졌을까? 이런 의문은, 오직 무언가 없어지고 무언가 새로 생기는 일은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260

잊지 말자. 피지배계급의 무기력을 조장하거나 증폭시키는 주범은 항상 지배계급이라는 사실을, 과거부터 지금까지 지배계급은 항상 원한다. 자기 의지가 관철된 모든 것을 피지배계급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관조하고 순응하기를, 이런 식으로 소수의 지배계급은 다수를 배제한 채 역사의 주체로 등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포이어바흐적 관조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수 피지배계급이 소수 지배계급에 필적할 만큼 분명한 역사의식을 갖는 것이다.  266

역사의식이 중요한 이유는 이를 토대로 우리가 실천의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 하나의 공식처럼 기억해두자. 역사의식이 사라지면 우리는 세상을 관조하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전락하게 된다는 사실.  266-267

“우리는 단지 유일한 과학, 역사의 과학만을 알 뿐이다.” 마르크스가 남긴 유명한 명언 중 하나다. 이 문장이 담긴 전체 단락이 없어질 뻔했다니 섬뜩한 일 아닌가? 역사의 과학이다! 이것을 흔히 역사학이라고 불리는 과목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가 말한 역사의 과학이란 정확히 말해 관조의 과학이 아니라는 뜻이니까 말이다. 역사의 과학이란 말은 인간의 모든 학문과 인식이 역사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반면 역사학은 과거의 역사를 불변하는 팩트로 고정시킨다. 결국 역사의 과학이 가변성과 실천성을 강조한다면, 역사학은 불변성과 관조성에 기반을 둔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학마저 시대에 따라 부팀을 거듭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의 역사학과 지금 시대의 역사학이 동일한 과거를 다뤄도 그 함의가 다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68-269

지금 배운 진리가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자각한 학생들이 있을 수 있다. 마르크스적인 과학도들인 셈이다. 이들은 자연의 법칙을 새롭게 해명해 언젠가 교재에 자신의 이름이 붙은 법칙을 남길 가능성이 크다. 이제 물리학은 ‘물리에 대한 역사 과학’, 화학은 ‘물질 변화에 관한 역사 과학’, 그리고 생물학은 ‘생물에 관한 역사 과학’의 줄임말이라고 생각하자. 진정한 물리학자는 물리를 관조하지 않고 실천적으로 개입하고, 진정한 화학자는 변화를 관조하지 않고 변화에 참여하며, 진정한 생물학자는 생물을 관조하지 않고 생명체의 거동에 관여한다. 과학자들의 이런 실천적 참여로 해당 과학의 내용은 급변한다. 그래서 자연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과학사라고 할 수 있다.  269-270

‘인류가 지구 환경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시대’라는 뜻의 인류세는 1990년대 네덜란드 대기화학자 크뤼천(Paul Jozef Crutzen, 1933~)이 사용해 유명해진 개념이다. ... 1900년에 16억 명이었던 인구는 2000년에 돌입하면서 60억 명을 돌파한 뒤 지금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당연히 다른 종들은 멸종의 길을 걷거나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인간은 엄청난 규모의 숲도 없애고 거대한 댐도 만들고 대도시도 확장하고, 심지어는 기차와 자동차로 대지를, 비행기로는 대기를, 대현 선박으로는 대양을 가로지르고 있다. 환경오염 외에도 다른 종들이 살 수 있는 공간 자체가 협소해진 것이다. 현재 기린은 약 8만 마리, 늑대는 20만 마리, 침팬지는 25만 마리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한정된 땅덩어리에 인류의 개체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생태 환경이 파괴됨에 따라 다른 생물들은 멸종으로 떠밀리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나무늘보를 포함한 동물원의 동물 대부분은 멸종 위기 상태에 있다. 바로 이것이 인류세의 풍경이다. 인류가 멸종한 뒤, 다른 지적인 생명체가 지구의 역사, 혹은 자연의 역사를 탐구한다고 해보자. 아마 그들은 인류세를 방사능 물질, 이상화탄소, 그리고 플라스틱의 시대였다고 말할 것이다. 혹은 그들은 인류세를 보여주는 지층에서 엄청난 닭 뼈를 발견하고 경악할지도 모른다. 인류는 한 해 평균 600억 마리의 닭을 먹어치우니, 수백 년 동안 지층에 쌓인 닭뼈의 양은 무시무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274-275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인류세라는 용어가 낳을 수 있는 오해와 관련된 것이다. 마치 인류가 환경 파괴의 주범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나올 수 있으니까. 사실 중요한 것은 소수의 지배계급이 존재하는 억압사회다. 대다수 인류를 생태 파괴의 현장으로 몰아넣고 동시에 그들을 자연 재앙에 제일 먼저 노출시킨 장본인이 누구인가? 바로 소수의 지배계급이다. BC3000년 전후 인간이 문자로 자기 역사를 기록한 이후 인류의 힘은 비약적으로 커졌고 문명은 발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억압체제는 외양만 바뀌었을 뿐 구조적으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농업혁며으이 시대냐 산업혁명의 시대냐의 구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농업경제 기반의 억압사회가 산업경제 기반의 억압사회로 바뀌었을 뿐이니까.
토지가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이란 절대적인 지위를 돈에 양보하고, 지주는 지배계급의 권좌를 자본가에게 물려주고, 그와 동시에 농민, 천민, 혹은 여성 등은 노동력을 제외한 모든 것이 박탈된 새로운 인간형, 즉 노동자라는 새로운 피지배계급이 되었을 뿐이다. 여전히 지배계급은 두 종류의 착취를 지속적으로 자행하고 있다. 하나는 동료 인간을 착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지배계급을 매개로 자연을 착취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세라는 표현은 수정이 필요하다. ‘지주-농민’이란 사회적 관계를 대신해 등장한 ‘자본가-노동자’란 사회적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토양과 하천, 나아가 바다까지 오염시키는 방사능 물질. 대기를 치명적으로 교란하는 이산화탄소. 깊은 바닷속 어패류의 소회기관에까지 침투한 플라스틱 조각들. 농업경제 시절 짐작도 못할 정도로 인류는 지구를 망가뜨리고 있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진정한 원인은 인류 전체가 자본주의체제에 포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류세라는 용어를 ‘자본세(capitolocene)’로 바꾸자는 논의가 나온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 용어는 스웨덴의 생태학자 안드레아스 마름(Andreas Samuel Magnus Malm, 1977~)이2009년 처음 사용했지만, 그와 무관하게 해러웨이(Donna J. Haraway, 1944~)가 2012년 대중강연에서 독립적으로 사용해 유명해진 개념이다.
인류세라는 용어는 환경 파괴의 원인을 막연히 인간 전체로 돌릴 위험이 있다. 이 용어는 지구라는 별에서 인간이 사라져야 생태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잘못된 생각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원인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인류세라는 용어보다 자본세가 더 좋다는 것이다. 생태계 교란과 파괴의 책임은 자본주의체제를 주도하면서 잉여가치에 대한 맹목적 충동에 사로잡힌 자본계급에게 있기 때문이다. 소수의 자본계급이 다수의 인간과 지구 환경을 수탈하고 착취하고 있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 아닌가? 이에 비해 자본계급에게 착취당하는 노동 계급, 나아가 자본주의체제와 다르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환경 파괴의 피해자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어떻게 자본주의체제를 극복할 것인가?” 2015년 해러웨이가 자본세라는 용어에 만족하지 못하고, ‘커스루센(Chthulucene)’이란 용어를 다시 만들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인간이 부분으로 속해 있는 힘들(forxe)과 역능들(powers),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지구와 함께하는 이런 힘과 역능들에는 하나의 이름이 필요하다고 나는 주장했다. 물론 지금 이 지속성이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아마도, 정말 아마도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종들이 풍요로운 앙상블을 이루는 시대가 가능할 것이다. 나는 과거든, 현재든, 그리고 미래든 이런 시대를 커스루센이라고 부르고 있다. 커스루센은...... 지구 도처에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촉수적인(tentacular) 역능들과 힘들, 그리고 서로 모여 사는 사물들(collected things)을 본떠 만든 말이다. ...... 커스루센은 적어도 하나의 (물론 하나 이상의 함의를 갖는) 슬로건을 요구한다. ...... “아이를 만들지 말고 친족을 만들어라(Make kin not Babies)!” ...... 지구를 함께 공유하면서 (sym-chthonically), 그리고 함께 만들어가면서(sym-poetically) 우리는 친족을 만들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를 지구에 속한 것들과 함께 만들고 생성하고 구성해야만 한다. 나는 친족의 확장과 재구성이 모든 지상의 것들이 가장 깊은 의미에서 친족이라는 사실로 긍정된다고 생각한다. ...... 모든 생명체는 수평적으로, 기호학적으로, 그리고 계보학적으로 공통된 ‘살(flesh)’을 공유하고 있다. 조상들은 매우 흥미로운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지만, 친족은 (우리가 가족이나 부족이라고 생각하는 것 바깥에 있기에) 익숙하지 않고, 기묘하고, 매력적이고, 능동적인 것이다. 작은 슬로건에 너무 많은 것을 부여했다는 사실, 나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노력해야만 한다. 지금으로부터 200년이 지나면 아마도 이 혹성의 인간종은 다시 20억이나 30억으로 줄어들고, 동시에 지금까지 목적만이 아닌 수단으로 간주되었던 다양한 인간 존재들과 다른 생명체들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아이들이 아니라, 친족을 만들자!’ - <인류세, 자본세, 플렌테이션세, 대지세 : 친족 만들기(Anthropocene, Capitalocene, Plantationocene, Chthulucene : Making Kin)>
<환경 인문학(Environmental Humanities)>(2015, 6번째 권)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자연의 역사, 즉 지구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산업 자본주의체제와 거기에 포획된 인류의 힘을 우회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시대를 규정하려는 다양한 용어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인류세란 용어가 막연히 인류의 힘을 강조했다면, 자본세는 자본주의체제의 무한한 탐욕을 강조한다. 나아가 2014년 덴마크 오르후스대학에서 열린 학술대회에는 플래ㅐㄴ테이션세라는 용어가 제안된 적이 있다. 이 용어는 제3세계 국가에 다국적 자본들이 만든 수많은 플랜테이션들이 생태 파괴의 주범이라는 걸 강조한다. 플랜테이션이라고 불리는 기업화된 농장들은 생태 문제뿐만 아니라 심각한 인권 문제를 야기한 것으로 유명하다. 거의 노예제에 가까운 노동조건으로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을 착취했으니까. 플랜테이션세라는 용어는 전체 인간 세계가 하나의 자본주의체제로 묶이면서 선진국과 제3세계 국가 사이의 관계에도 ‘자본가-노동자’라는 관계가 관철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은 자신들의 공장을 제3세계 국가들로 이식하면서, 유럽에만 국환된 생태 문제를 전 지구적 문제로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인류세든 자본세든, 아니면 플래네이션세든 모두 지구 환경 파괴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견을 같이하는 용어다. 인류세가 인류의 반성을 촉구하고, 자본세가 자본주의체제의 폐단을 강조하고, 플랜테이션세가 자본의 세계화가 낳은 재앙을 경고한다. 이런 용어들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자본주의체제를 극복해 생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막연하기만 하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커스루센’이란 근사한 용어를 고안한 것이다.
2016년 저서 <곤경과 함께하기(Staying with the Trouble)>에서 그녀는 커스루센이란 용어가 ‘지상의’, 혹은 ‘대지의’라는 뜻의 희랍어 ‘크토니오스(khthonios)’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굳이 번역하자면 ‘대지세’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대지세는 하나뿐인 지구에 모든 생명체가 서로 공존하며 사는 시대,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종들이 풍요로운 앙상블을 이루는 시대”를 가리킨다. 여기서 대지세라는 용어가 인류세나 자본세, 혹은 플랜테이션세와는 다른 이유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산업자본주의 체제가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라 그걸 극복한 싣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인류세, 자본세, 그리고 플랜테이션세가 ‘구성적인(konstitutiv)’ 용어였다면 대지세는 ‘규제적인(regulativ)’ 용어였던 셈이다. 대지세는 산업자본주의시대를 해명하려는 용어가 아니라 산업자본주의체제를 극복하고 이루어야 하는 시대를 뜻하니까 말이다. 해러웨이가 대지세를 위한 실천적 강령을 제안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아이를 만들지 말고 친족을 만들어라!” 해러웨이의 요구를 친족이 아닌데 친족을 억지로 만들라는 이야기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녀에 따르면 “모든 지상의 것들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친족이고, ...... 모든 생명체를 수평적으로, 기호학적으로, 그리고 계보학적으로 공통된 ‘살’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는 공통된 살! 그건 지속적으로 살아 있는 지구를 가리킨다. 죽은 몸이나 혹은 무생물에게는 살이라는 용어를 쓰지는 않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들과 무관하게 지구가 살아 있다는 의미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생명체들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하고 있기에 지구는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친족을 확장하고 재구성하라고 요구한다. 인간은 이미 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지구라는 거대한 생태계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확인되는 인간중심적인 사유, 인간은 자연 바깥에 존재하며 자연을 지배하고 소유하는 존재라는 사유에서 벗어나라는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다른 종의 생명체뿐만 아니라 동료 인간을 지배하거나 소유하려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생며체는 수평적으로, 기호학적으로, 그리고 계보학적으로 공통된 ‘살’을 공유하는” 대등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녀가 왜 아이를 만들기보다는 친족을 만들라고 요구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내 아이’, 혹은 ‘우리 아이’라는 소유의식이 문제였던 것이다. 농업경제 시절 생겼단 오래된 인간중심주의다. 아이들, 특히 남자 아이를 선호한 이유는 그만큼 농사일을 감당할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문맥에서 부모와 자식은 양유고가 부양이란 교환관계에 묶이고, 이로부터 가족이란 배타적인 공동체가 형성된다. 이런 배타성이 어떻게 “공통된 살”을 공유하는 삶과 공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아이를 낳더라도 그 아이와 ‘친족’관계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내가 낳은 아이든, 남이 낳은 아이든, 아니면 나무늘보든 가시연꽃이든,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공통된 살을 공유하는 친족관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니까. 이렇게 친족이 많아지면 인간이 구태여 많은 아이를 낳을 이유가 있을까? 자기편을 많이 만들려고 노력할 이유가 있을까? 해러웨이가 꿈꾸는 대지세에서 인간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친족관계를 이루는 것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삶은 충만함에 둘러싸일 테니까. 그래서 그녀는 대지세에 돌입한 지구의 미래를 조심스레 다음처럼 묘사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0년이 지나면 아마도 이 혹성의 인간종은 다시 20억이나 30억으로 줄어들고, 동시에 지금까지 목적만이 아닌 수단으로 간주되었던 다양한 인간 존재들과 다른 생명체들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275-281

친족이 된다는 것! 해러웨이의 칸트식 표현을 빌리자면 자연을 “단지 목적만이 아니라 수단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말 그것들과 친족이 되면, 어떻게 우리가 자본주의체제에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잉여가치 확보라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다수의 인간뿐 아니라 자연 전체를 수단으로 치부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체제니까.  282-283


거리를 두고 사람을 관조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삶에 뛰어드는 것!
후자는 전자가 줄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가르쳐준다. 그중 중요한 것 두 가지만 언급해보자. 첫째, 타인들의 삶에 뛰어들면 누구나 자신의 과거 관계를 자각하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 그 누구도 백지 상태에서 새로운 관계에 돌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자신처럼 타인들도 자신만의 고유한 관계와 역사를 전제한다는 걸 알게 된다. 타인을 이해하려면, 첫인상이나 직업 등 그에 관한 표면적인 정보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그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리고 과거에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그 역사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외국에 가야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걸, 나아가 자신이 특정 삶의 형식에 따라 살았다는 걸 자각하는 법이다. 결국 타인들의 삶이 낯설어 보였던 이유는 우리 자신이 특정 사회관계에 적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낯선 도시를 관광하는 것보다 그곳에 사는 것이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낯선 사람들이 내면화한 관계와 우리 자신이 내면화한 관계가 우리 자신이 내면화한 관계가 모두 드러나니 말이다.  290-291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영위되는지에 관한 진실 말이다. 이렇게 되물어보자. 지금 우리의 일상적 삶은 관광객이 아니면서도 관광객처럼 영위되고나 있지 않은지.  292-293

이제 생각해보자. 직장에서 우리는 관광객이지 않은가? 자신이 다니는 회사가 어떻게 작동하며 무엇을 생산하는지, 그리고 그 상품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고민하지 않으니까. 심지어 우리는 직장 동료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잇는지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업무상 관계로만 연결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관광객의 달러나 신용카드처럼 월급은 직장관계의 유일한 혈액이 된다. 가족들과 함께할 때도 우리는 관광객이지 않은가? 시부모가 친정부모도 심지어는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식들을 고립된 개인들로 식별하고 관조하고 있으니까. 돈과 선물이 가족관계를 유지하는 가느다란 끈이 되고 만다. 편의점이나 카페, 극장 등에 들를 때도 우리는 관광객이지 않은가? 계산을 해주는 젊은 이들이나 안내를 해주는 젊은이들의 내면과 그들의 역사를 읽으려고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돈을 받은 만큼 그에 어울리는 서비스를 행해야만 하는 사람들로 보일 뿐이니까. 여기서는 돈과 신용카드가 유일한 연결 줄이 된다.
여기에 스마트폰까지 가세하면 우리의 관광객 모드는 그야말로 정점을 찍게 된다. 파리의 시위 현장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는 것처럼, 이제 액정화면은 마치 영화를 보듯 세상을 관조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댓글을 달면서 사회에 참여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들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에 공감하고 악당을 욕하는 행위와 어떻게 다른가? ‘사변적 관조’가 아니라 ‘감성적 활동’이다. 관광객적 인식이 아니라 주체적 인식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모두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규정되어 있다는 걸 자각할 수 있다. 소망스럽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모색하려면, 우리는 먼저 자신이 어떤 관계에 포획되어 있는지 봐야 하는 것 아닐까?  293-294

관계의 변화가 바로 역사의 동력이다. 아니 더 단호하게 말한다면 관계의 변화 자체가 역사라고 할 수 있다.   294

그렇다고 관계와 역사를 파악하는 일이 만만하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둘 사이의 관계를 포착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처음에는 순간적으로 고립된 두 개체만 보일 것이다. 한 사람은 안경을 착용한 30대의 젊은 여성으로 청바지를 입고 있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리듬을 타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편안한 차림의 캐주얼 복장을 한 40대 초반의 남성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다. 여기까지가 포이어바흐의 직관적 유물론이 적용되는 지점이다. 그렇지만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나아가 두 사람이 각각 과거에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를 아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아주 천천히 두 사람을 관찰해야만 한다. 다행스럽게도 남성이 손을 들어 여성의 어깨를 감싼다면, 우리는 쉽게 두 사람이 연인관계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둘은 언제 어디서 만났을까? 둘은 왜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연인일까, 아니면 부부일까? 그것도 아니면 불륜관계일까? 벤치의 관찰마으로 해명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다. 그들을 계속 따라다니며 관찰해야 하고, 나아가 그들이 남긴 과거 흔적들을 찾아 헤매야만 한다.  294-295

‘3P의 삼각형’을 기억해보라. 권력(power)은 재산(property)과 가난(poverty)을 통해서 형성되고 재산과 가난 사이, 즉 부유한 소수와 가난한 다수 사이의 위계를 지키는 기능을 한다.  297

1863년 1월 1일 당시 미국 북구 비역의 지지를 받던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은 <노예해방 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발표한다. 1861년 4월 12일 시작된 미국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이 북부 지역이 승리로 끝나리라는 확신을 링컨이 피력한 셈이다. 흔히 남북 전쟁은 인권과 자유의 전쟁이고, 링컨은 민주 투사로 기억된다. 그렇지만 남북전쟁의 이면은 인궈느 자유, 혹은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남북전쟁은 산업자본주의체제에 맞게 값싼 노동자가 필요했던 미국 북부 지역과 목화농장을 위해 400만의 흑인 노예가 필요했던 미국 남부 지역 사이의 충돌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고대사회와 부르주아사회가 기이하게 병존했던 신대륙 국가 미국은 1965년 4월 9일 북부 지역의 최종 승리로 400만 흑인 노예를 흑인 노동자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해방된 흑인 노예뜰은 이미 노예로 태어난 노예 1세대의 까마득한 후예들에 지나지 않는다. 1619년 처음으로 흑인 노예 19명이 영국 식민지였던 북미대륙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에 들어온 이후로 수많은 노예선이 엄청난 흑인 노예를 실어 날랐다. 조상들의 땅 아프리카는 상사도 할 수 없는 그저 까마득한 전설의 땅에 지나지 않았기에, 해방된 흑인들 대부분은 그곳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가진 것이 몸뚱어리밖에 없었던 그들로서는 노동계급으로, 그것도 쵷ㅎ하의 노동계급으로 편입되었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선택지였던 것이다.
관계의 변화가 역사의 핵심이다! 문제는 그 관계가 억압적 관계라는 데 있다. BC 3000년부터 지금까지 지배계급은 억압의 양상을 변화시키면서 억압적 관계라는 본질은 그대로 유지해왔다. 역사의 발전을 외치는 모든 지식인이 기본적으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그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들은 과거보다 지금이 낫고, 지금보다 미래가 낫다는 진보의 이념을 표방하기 때문이다. 노예제를 극복하고 농노제가 들어온 것도 진보이고, 농노제가 사라지고 자본주의체제가 들어온 것도 진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소수 지배계급과 다수 피지배계급으로 구성된 근본적 억압구조는 조금도 변한 적이 없지 않은가. 단지 지배계급이 노예주에서 영주로, 그리고 자본계급으로 그 스타일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 노예는 목줄에서 벗어났지만 땅에 묶인 농노가 될 수밖에 없었고, 땅에 묶인 농노는 돈에 목을 매는 노동자가 되었을 뿐이다.  300-301

3P의 삼각형이 노예 재의 얼굴로 나타나자, 그 자유정신은 노예제와 맞서 싸웠다. 로마제국의 노예제에 도전했던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Spartacus, BC 111?~71)와 6만의 해방된 노예들이 바로 그들이다. 3P의 삼각형이 농노제로 변형되자, 이번에 그 자유정신은 농노제와 맞서 싸웠다. 1534년 에서 1535년까지 제빵사 얀 마티스(Jan Matthys, 1500?~1534)와 재단사 얀 반 레이덴(Jan van Leiden, 1509~1536) 등이 이끄는 재세례파가 독이 ㄹ뮌스터에 억압이 없는 공동체, 즉 코뮌을 구성해 봉건체제와 맞서 싸웠던 것이다. 3P의 삼각형이 이번에는 자본주의체제로 변신하자, 다시 자유정신은 이 자본주의체제와의 싸움에 목숨을 걸었다. 1871년 3월 18일에서 5월 28일까지 블랑키(Louis Auguste Blanqui, 1805~1881)의 정신으로 무장한 파리 시민들이 파리 코뮌으로 부르주아 정권과 맞섰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여기서 조금의 오해도 있어서는 안 된다. 스파르타쿠스 군단은 노예제 대신 농노제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얀 마티스와 얀 반 레이덴이 농노제 대신 자본주의체제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파리코뮌 전사들 역시 자본주의체제 대신 스탈린의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모두 원했던 것은 코뮌, 즉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였을 뿐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스파르타쿠스가 1871년 파리에 있었다면 자본주의체제와 맞서 싸웠을 것이고, 얀 마티스와 얀 반 레이덴이 BC 72년 로마에 있었다면 자유군단에 속했을 것이고, 블랑키가 1535년 독일 뮌스터에 있었다면 봉건체제의 포위를 뚫으려고 분투했을 것이다.  301-303

노예제는 노예가 스스로 자유인이 되었을 때 소멸되는 것이지, 누군가가 자유를 부여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니까. 남이 허락한 자유는 언제든 바로 그 사람에 의해 취소될 수 있다. ... 자유인은 스스로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그래야 누군가 자유를 뺏으려 할 때 그에 맞서 싸울 수 있으니까.  308

포이어바흐! 그는 관계도, 그리고 역사도 인식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저 자신 앞에 있는 것을 관조했던 순진한 철학자였다. 그가 로마시대에 살았다면 그는 노예는 노예로, 귀족은 귀족으로 보았을 것이다. 노예는 귀족의 발을 씻겨주고, 귀족은 역사와 삶을 논하는 풍경을 그저 당연한 이치로 여겼을 것이다. 주인뿐만 아니라 로마제국과 맞섰던 스파르타쿠스를 보았다면, 그는 이걸 일회적 사건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사실 노예가 주인에게 반기를 드는 사건은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 권력이 귀족들의 노예 소유권을 공권력으로 확실히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순종하는 노예와 자애로운 귀족 사이의 조화와 평화, 그리고 질서는 이렇게 억압적으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는 화려한 외양을 자랑하는 로마 제국의 피 묻은 뼈대, 즉 고대사회의 사회적 관계와 그 역사를 백일하에 폭로한 사건이다. 포이어바흐는 스파르타쿠스를 통해 고대사회 전체를 지탱했던 억압구조를 간파했어야 했지만, 불행히도 그는 그것을 일시적 일탈로만 보았으리라.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가 “유물론자인 한 포이어바흐는 역사를 다룰 수가 없고, 역사를 고찰하는 한 그는 결코 유물론자가 아니다.  ... 마르크스의 이야기처럼 포이어바흐의 직관적 유물론은 “역사와는 완전히 결별되어”있는 절름발이 유물론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309-310

불행한 것은 봉건사회에 태어났어도 직관적 유물론자로서 포이어바흐의 길은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귀족의 거대한 농장에서 농노들이 올리브를 수확하는 장면이나 아니면 귀족의 저택에서 주인의 발을 씻겨주는 농노의 부인의 모습이 그의 눈에 조화롭고 평화로운 풍경화처럼 보였을 것이고, 여우 사냥을 즐기러 나온 영주를 보고 잠시 농사일을 멈추고, 경의를 표하는 농노의 모습이 아름다운 풍경화로 들어왔을 테니 말이다. 물론 간혹 소작료에 저항하는 농노도 나오겠지만, 포이어바흐는 이것도 일시적 일탈로 치부했을 것이다. 영주와 농노를 관조하는 그에게 땅을 미리 독점해 무위도식할 수 있는 영주의 계급성이 보일리 없으니까. 직관적 유물론의 맹점은 부르주아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미 부르주아사회로 돌입한 19세기 부르주아국가 독일에서 태어났기에 포이어바흐의 눈에는 도자기공장, 자기 장인과 아내와 같은 자본계급, 그리고 노동자들이 평화로운 풍경화처럼 들어온다. 아내와 자신은 가까운 냇가에서 돗자리를 깔고 일몰을 응시하고 도자기공장에서 노동자들은 휴식시간에 해맑게 대화를 나눈다. 혹은 그가 공장에 들르기라도 하면 그곳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밝은 모습으로 자신에게 인사는 건넨다. 물론 그 자신도 노동자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는 걸 잊지 않는다. 자본가는 자본가이고 노동자는 노동자일 뿐이고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수탈관계를 볼 수 없기에 그의 마음은 편하기만 하다. 파업이라는 이례적인 사건이 벌어져도, 포이어바흐에게 있것은 노동자들의 일시적 일탈로 보일 뿐이다. 그는 노동자의 파업이 부르주아사회의 억압적 구조가 드러나는 징후라는 걸 알 수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으니까. 세계를 관조했던 대가는 이렇게 치명적이다. 자신도 모르게 포이어바흐는 부르주아사회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310-311

실천이 아니라면 삶에서 남는 것은 과조일 뿐이다.  312

‘낡은 유물론의 입장(Standpunkt)은 ‘부르주아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장은 ‘인간사회(menschliche Gesellschft)’ 또는 ‘사회적 인간(gesellschaftliche Menschheit)’이다. -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10
...
마르크스의 “사회적 인간”이란 개념. .. 인간 사회에서 모든 인간은 사회에 참여하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고, 모든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운명을 타인에게 맡기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결국 “인간사회”는 “사회적 인간들”의 공동체라는 생각이다.  312-313

스파르타쿠스 군단이, 뮌스터코뮌이, 파리코뮌이 원했던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 혹은 마르크스의 새로운 유물론이 서고자 했던 인간사회는 단호하게 분업체계와 배타적 활동을 거부하는 공동체다.  318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가 지향하는 두 가지 원칙만 확인하면 되니까. 첫째, 사회가 생산 전반을 통제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자본가 한 사람이 생산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 전체가 생산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는 그 일을 언제든지 멈출 수 있는 자유를 전제한다는 점이다. 생산의 사회성과 노동의 자유! 인간사회, 혹은 사회적 인간의 두 다리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가 “참된 현실적 공동체(der wirklichen Gemeinschaft) 속에서, 각 사람들은 그들의 연합(Assoziation) 속에서, 그 연합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자유(Freiheit)를 획득하게 된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319


BRIDGE - 다시 불러보는 인터내셔널의 노래

<인터내셔널 찬가>
일어서라!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이여!
일어서라! 기근의 죄수들이여!
이성은 화산처럼 요동친다.
이것은 종말의 분출이다.
과거를 백지로 만들자.
노예가 된 대중들이여! 일어서라! 일어서라!
세계의 토대가 바뀌고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다.

<코러스 ; 마지막 싸움이다.
함께 모이자, 그리고 내일
인터내셔널은
인류가 되리라.>

최상의 구원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도 아니고, 케사르도 아니고, 호민관도 아니다.
생산자들이여! 스스로를 구하라.
공동의 구원을 포고하라!
도둑이 자기가 먹은 것을 토해내고
정신이 자기 감옥에서 풀려나올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풀무질을 하고,
뜨거울 때 쇠를 두드려라.

<코러스>

국가는 억압하고, 법은 기만하고
세금은 피 흘리게 한다, 불운한 자들을.
어떤 의무도 부유한 자에게 부과되지 않고
가난한 자의 권리는 공허한 말일 뿐.
감시는 충분히 힘들 만큼 견뎠다.
평등은 다른 법을 원한다.
의무 없이는 권리도 없다고 새로운 법은 말한다.
평등하게 권리 없이는 의무도 없다고.

<코러스>

찬양에 몸을 숨긴
광산의 왕들과 철도의 왕들!
그들은 지금까지 노동을 훔치는 일 외에
무슨 일을 했었나!
도둑들의 견고한 금고 안에는
노동이 창조했던 것들이 들어가 있다.
그 도둑들에게 그걸 되돌려주라고 명형하자.
민중들은 단지 자기 몫만 원할 뿐.

<코러스>

왕들은 우리를 연기에 취하게 했다.
우리 안의 평화, 폭군에 대한 전쟁!
군대들이 파업해,
진압을 포기하고 서열을 해체하도록 만들자!
만일 그들이 완강히 버틴다면, 이 카니발들은
우리를 영웅으로 만들 것이고,
그들은 곧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총탄이
우리 장군들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코러스>

일꾼들이여! 농민들이여! 우리는
노동자들의 가장 큰 부분이다.
대지가 인간들에 속할 때만.
게으른 자는 다른 곳에 머물 것이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살을 그들은 소진시켰는가?
그러나 성직자들, 고리대금업자들이
어느 날 사라진다면,
태양은 언제나 항상 빛나리라.

<코러스>

- <인터내셔널 찬가> (1871)  323-325



역사철학 2강 - 파리코뮌을 보아버렸던 시인 랭보

70여 일 짧은 시간 동안 유지된 파리코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찬란했던 순간에 랭보는 코뮌의 핑크빛 후광을 받은 파리와 파리 시민들을 가장 자연적으로 그리고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했던 겁니다. 그러나 70여 일이 지나 파리코뮌이 괴멸되고 과거의 위계 질서가 복원된 뒤 돌아보면, 1881년 3월 18일에서부터 5월 28일까지 존속했던 그 찬란했던 시간은 마치 꿈인 것처럼, 마치 상징인 것처럼, 마치 초현실적인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냥 간단히 이렇게 정리해보죠. 파리코뮌 시기에 랭보의 시는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자연적인 것이었다고, 그렇지만 그 찬란했던 시기가 지나고 나자 이제 그의 시는 상징적이고 초현실적인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입니다. 이런 착시효과는 현재 우리의 의식에도 그대로 적용되죠. 파리코뮌의 인문주의나 민주주의에 온몸으로 공명하는 독자라면 랭보의 시는 심장을 바로 뛰게 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감동을 바로 전달할 겁니다. 반대로 권위적인 정치질서나 신자유주의로 노골화된 자본주의체제에 적응한 독자라면 래보의 시는 상징적이고 초현실적인 것으로, 그만큼 난해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간신히 머리로만 이해될 수 있을 겁니다.  343

지배계급의 눈치를 보면서 피지배계급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는 순간, 문학은 그리고 시는 억압체제에 대한 찬가가 됨.  352

‘주관적 시’는 객관에 대한 투철한 인식 없이, 그냥 주관이 백일몽을 꾸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강철 덩어리가 물에 둥둥 뜨는 몽상에 빠지고 희희낙락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죠. 반면 ‘객관적 시’는 실현 불가능한 백일몽이 아니라, 세상을 변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객관적 시’는 강철의 속성들을 정확히 알고, 그 속성을 어기기는커녕 그걸 이용해 물에 뜰 수 있는 강철 배를 설계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죠.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객관적 시’가 가능하려면, ‘객관(=대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만일 이런 인식이 없다면 아무리 ‘객관적 시’를 썼다고 해도 그것을 바로 ‘주관적 시’로 전락할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객관(=대상)’을 정확히 인식한 사람이 없다면, ‘객관적 시’는 불가능한 법입니다. 바로 이것이 랭보가 “저는 시인이 되고 싶고, 스스로 견자(見者, voyant)가 되려고 분투하고 있다”(<1871년 5월 13일 이장바르에게>)고 말했던 이유입니다. 견자는 글자 그대로 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내 의지나 바람에 따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나 바람을 좌절시키면서 내 앞에 주어진 것을 봐야 합니다. 만일 내 의지나 바람, 혹은 감정에 따라 본다면, 그것은 객관적으로 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주관적으로 본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대상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지 않더라도 대상이 보라고 강요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 바로 그가 견자입니다. 결국 견자가 되려면, 우리는 이미 훈육되어 익숙한 사유나 감정들, 혹은 우리 내면에 이미 각인되어 작동하는 견해나 감정, 그리고 의지를 해체해야만 합니다. 랭보가 견자가 되는 방법으로 “모든 감각들의 착란”을 이야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354

이것만 보고 저것은 보지 말라고 하는 체계는 우리를 훈육하고, 그 결과 우리는 정말 눈에 보이는 것마저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니 보지 말라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에게는 불안감과 불쾌감이 엄습할 겁니다. 보이는 대로 보려면, 아니 정확히 말해 이렇게 보라고 강요하는 대상을 제대로 보려면, 우리는 감각의 질서를 규정하는 지배적인 사유체계와 가치체계를 전복해야만 합니다. 결국 견자가 된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주체로 태어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스스로를 노예로 자처했던 노동자들이 당당히 주인이라고 선언했던 것이 파리코뮌이라면, 체제가 강요하는 감각들의 질서를 뒤죽박죽 만드는 것이 바로 랭보의 견자였던 셈입니다. 감각들의 착란을 통해 견자가 되었을 때, 그가 보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가 보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바로 이것이 랭보가 말한 ‘미지(l’inconnu)’입니다 한국어로 ‘미지의 것’으로 번역된 프랑스어 ‘랭코뉘(l’inconnu)’는 이외에도 ‘보잘것없는 것’이나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사실 무언가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 ‘미지’라는 뜻보다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이란 의미가 훨씬 더 랭보가 말한 ‘랭코뉘’의 뜻에 가까울 듯합니다.  355

랭보가 제안했던 ‘견자의 미학’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자유로운 주체, 즉 견자가 되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을 보게 된다고 말입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을 보게 된 견자가 그것을 언어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시인이 될 수 있습니다. 랭보가 말한 ‘객관적 시’는 바로 이렇게 탄생하게 되지요.  356

그(랭보)에게 “시인은 진실로 불의 도둑”. 제우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불을 건네준 프로메테우스! 시인은 바로 프로메테우스 같아야 한다는 겁니다. 권력자나 지배계급의 불이 힘이 있는 이유는 다수 피지배계급에게 불이 없어서 입니다. 어둠 속에서 공포와 탄식의 삶을 피지배계급이 영위하는 것도 지배계급이 불을 독점했기 때문이죠. 프로메테우스처럼 그 불을 훔쳐 피지배계급에게 가져와 암흑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들이 갈 길을 명료히 보도록 도와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소임이자 자부심의 원천이죠. “인류, 심지어는 동물까지도 모두 짊어지는 것!”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가 그리고 1871년 랭보가 감당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357-358

랭보는 관료들과 글쟁이들을 작가, 창작자, 시인과 구별합니다. 그에 따르면 기존의 규칙, 기존의 이성, 혹은 기존의 사유에 따라글을 쓰는 사람들이 바로 관료들이나 글쟁이들입니다. 그러나 감각들을 착란시켜 기존의 규칙, 이성, 사유를 전복시켜서 감각들의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글들이 출현할 수 없는 법이지요. 바로 이래야 진정한 시인, 혹은 진짜 시인이 탄생하는 것 아닌가요. 반대로 가짜 시인도 존재하죠. 그것은 관료처럼 글을 쓰는 시인들, 과거 위대한 시들에서 규칙과 테크닉을 축출해 그에 따라 시처러 ㅁ보이는 시들을 쓰는 시인일 겁니다. 진정한 시인은 이런 식으로 탄생할 수 없습니다.  358-359

기존 사유에서 해방된 감각, 혹은 착란된 감각으로 세계를 느끼는 사람이 견자라면, 이렇게 느낀 세계에 새로운 언어를 부여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작가이자 창작자, 그리고 랭보의 경우에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각들의 착란으로 기존 사유가 붕괴됩니다. 자유와 해방은 바로 여기서 가능해지는 셈이지요. 바로 이 해방된 감각들의 힘으로 견자는 세계를 보게 됩니다.  359

관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주관적 시’를 쓰는 시인들에게 견자의 삶이나 시는 무언가’비규범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고, 당연히 저주받고 모욕당하기 쉽지요.  359-360

파리코뮌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나 지금 새로운 코뮌을 꿈꾼느 사람들의 눈에는 랭보의 작품은 너무나 규버적이고 쉬워 보일 겁니다. 반대로 파리코뮌을 부정하거나 애써 회피하면서 자본, 국가, 종교에 포획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면 랭보의 시는 비규범적이고 난해해 보일 테죠.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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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종교적인 것과 관조적인 것을 넘어서


역사철학 1장 - 붉은 피로 지켜낸 파리코뮌

블랑키.
1885년 출간된 <사회적 비판 (Critique Sociale)> 두 번째 권에 “자본가의 기생이 대중들의 빈곤을 낳는 원인이다.” ... 항상 생산수단 독점은 폭력수단 독점과 함께하는 법입니다. 결국 피억압자가 억압자의 힘을 압도할 수 있는 ‘힘(force)’을 가지지 않는다면, 정의와 평등은 그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생산수단 독점에 맞서 싸우면서 폭력수단 독점과는 싸우지 않겠다는 투쟁, 즉 간디식 비폭력 투쟁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승리야 가능하겠지만, 이런 투쟁이 현실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을 테니 말입니다. 47

파리코뮌 시기 혁명가 트리동(Gustave Tridon, 1841~1871)의 책 <에베르주의자: 역사의 재난에 맞서는 탄식(Les Hebertister: plainte contre une calomnie de I’Histoire)>에 블랑키가 쓴 서문입니다.
‘승리는 옳은 자(le droit)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승리가 없다면 옳은 자는 더 이상 옳을 수 없게 되고, 대천사의 발톱 아래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탄처럼 될 테니 말이다.’ - <서문> (1864) 49

19세기의 파리는 단순히 프랑스의 수도만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의 수도였죠. 이 도시를 ‘악의 꽃(Les Fleurs)’이라고 느꼈던 시인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보들레르(Charles Pierre HBaudelaire, 1821~1867)입니다. ‘악의 꽃’은 매춘부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돈이 있어야 품을 수 있는 존재가 매춘부인 것처럼, 자본주의의 수도 파리도 돈이 없다면 향유할 수 없는 ‘악의 꽃’이었던 겁니다. 51

어떤 것을 정의하려면 그것에 대립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법입니다. 73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생산수단을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자를 지배한다는 정치경제학적 진리를 말입니다. 81

생산수단, 특히 토지나 자본을 공동 소유하는 것이 원칙인 사회, 바로 그것이 코뮌입니다. 83

자유를 되찾은 사람에게 항복은 죽음보다 끔찍한 일이죠. 85



정치철학 1장 - 종교적인 것에 맞서는 인문정신

자기소외((Selbstentfremdung), 혹은 소외(entfremdung)라는 개념. 이는 자신이 만든 것이 자신에게 낯선 것으로 다가오는 현상을 가리킨다. 103

무언가를 긍정한다는 것은 그것을 다른 걸로 바꿀 수 없다는 의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긍정이 항상 단독성의 긍정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
니체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개체, 그리고 세상을 “존재하는 유일한” 것, 즉 단독적인 것으로 긍정하려고 한다. 119

모든 지배와 억압의 논리 이면에는 단독성을 특수성으로 치환하는 작업이 수행된다는 걸 잊지 말자. 120

불멸하는 영혼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몸을 경멸하게 된다. 돈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상품으로 팔리는 굴욕을 겪는 것처럼, 혹은 인간, 노동자, 학생, 여자, 남자, 유대인, 한국인, 일본인 등등 일반 개념이 등장하면서 단독적인 개체들은 특수한 개체들로 분류되어 지배되는 것처럼. 121

신으로부터 창조행위를 빼앗은 인간, 억압된 창조력을 폭발시키는 인간을 니체는 위버멘쉬라고 부른다. ... 위버멘쉬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을 뜻하는 ‘멘쉬(mensch)’가 아니라 ‘넘어선다’는 의미의 ‘위버(Uber)’다. 124


고고학에 따르면 농업혁명이 일어나기 전 인류에게는 전쟁도 없었고, 종교도 없었다. ... 종교나 정신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수렵채집 시기에는 ‘우월(superiority)과 열등(inferiority)’이라는 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들소 사냥에 성공했다고 해도 인간은 자신이 들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지 않았고, 반대로 사냥 중에 들소의 뿔에 받혀 죽어가면서도 인간은 들소보다 자신이 열등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야생 사과를 딸때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자신이 우월하고 그 사과가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한마디로 말해 자연에 대해 인간은 우월이나 열등에 대한 의식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애니미즘으로 상징되는 이런 자연관은 그대로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한 인간은 다른 인간보다 약할 수는 있지만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반대로 다른 인간보다 강할 수는 있지만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26-127

BC 8000년 즈음 농업혁명이 발생하면서 모든 것이 변한다. 분명 농업혁명이 수렵채집 시기보다 더 큰 풍요와 안정을 가져다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 잉여 생산물의 증가는 인구 증가와 인구 밀집을 낳았고, 이것이 인간을 기아와 질병에 노출시켰다. 127

농업시대에 들어서면서 생산수단을 가진 자가 그렇지 않은 자를 지배하고 수탈하는 억압과 착취 형식이 발생한 것이다. 129

농경생활에 들어오면서 인간에게는 ‘우월’과 ‘열등’이란 의식이 발생한다. 129

농경생활이 진행되면서 전체 우주는 우월과 열등의 질서로 재편되고 만다. 마침내 ‘신-인간-자연’, 조금 구체화하면 ‘신-지배자-피지배자-자연’이란 위계질서가 탄생한 것이다. 130-131

마르크스는 국가나 사회가 ‘전도된 세계’라고 단언. 전도된 세계라는 것은 제대로 서 있는 세계가 아니라 뒤집혀 있는 세계라는 의미다. 생부지의 사람 10명이 식사를 하려고 한다. 9명이 짜장면을, 나머지 1명은 김치찌개를 먹고 싶었다. 9명은 중국집에 가고 나머지 1명은 한식집에 가면 된다. 이것이 정상적인 세계, 혹은 제대로 서 있는 세계다. 그런데 이들 10명은 모두 한식집에 가서 김치찌개를 먹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9명은 1명의 압도적 힘에 굴복하고, 그 결과 원하지 않은 음식을 먹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도된 세계다. 154-155

‘약하다’는 의식과 ‘열등하다’는 의식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자신이 약하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은 차근차근 강해질 준비를 하거나 혹은 자신을 지배하는 사람이 약해질 때를 호시탐탐 노릴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이 열등하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은 그저 우월한 사람이 자신을 더 아껴주기를 기대할 뿐이다. 열등한 사람들이 언제든지 최고로 근사한 지배자를 상상하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의 고난을 속속들이 아는 지배자, 자신의 고난을 덜어주려는 의지를 가진 지배자, 그래서 하염없이 자신을 사랑하는 지배자를 꿈꾸게 된다. 바로 이때 신은 탄생한다. 마르크스가 “이 국가, 이 사회는 전도된 세계이므로 종교, 즉 전도된 세계의식을 생산한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계보학적으로 생각해보자.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한다. 그 지배를 영속화하기 위해, 혹은 약한 자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지배자는 피지배자의 내면에 열등의식을 각인시킨다. 155-156

‘종교에 대한 투쟁은 간접적으로 정신적 향료로 종교가 가지고 있는 저 세계, 즉 피안(jene Welt)에 대한 투쟁이다. 종교적 고통은 현실적 고통의 표현인 동시에 현실적 고통에 대한 저항이다. 종교는 억압된 자들의 한숨이자, 심장 없는 세계에서의 심장이고, 영혼 없는 상황에서의 영혼이다. 한마디로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민중에게 환각적 행복을 낳는 종교를 폐기하라는 이유는 민중으로 하여금 현실적 행복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민중에게 자기 삶의 조건에 대한 환각을 포기하라고 요청 한다는 것은 환각을 필요로 하는 조건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 비판은 태생적으로 종교가 후광이 되는 눈무르이 골짜기에 대한 비판일 수밖에 없다.’ - <서문> <헤겔 법철학 비판> (1843). 158

마음껏 사유하고 마음껏 의지하고 마음껏 사랑하는 격조 높은 삶, 인간 일반의 본질을 실현하는 근사한 삶을 살지 못해서 인간이 종교를 만들고 그것을 믿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차안에서 사는 삶이 너무나 불행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가 파는 아편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해 피안에서의 작은 행복이나마 꿈꾸었던 것이다. ... 마르크스가 “민중에게 환각적 행복을 낳는 종교를 폐기하라는 이유는 민중으로 하여금 현실적 행복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 이유다. 환각적 행복에 취해 있다면, 민중은 현실적 행복을 얻으려는 투쟁에 나설 수 없으니까. 1559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종교는 단지 인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환상적인 태양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피안(Jenseits der Wahrheit)이 사라진 뒤에, 차안의 진리(Wahrheit des Siesseits)를 확립하는 것은 역사의 임무다.’ -<서문> <헤겔 법철학 비판> 162


‘열등’과 ‘우월’과 관련된 감정이 종교적 감정이라면, 가장 최고의 종교적 감정은 바로 자본주의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168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불교든 세게 종교는 하늘, 고독, 여행, 그리고 무역과 함께하는 종교일 수밖애 없다. 결국 숙명적으로 세계 종교는 자본주의와 같은 혈족이었던 셈이다. 즉 화폐경제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수많은 지역 종교들은 자의 반 타의 반 고사와 괴멸의 길을 걸어갔다. 185

18세기와 19세기 영국 도처에서 일어났던 ‘인클로저(enclosure)’, 즉 ‘울타리 치기’와 ‘고지대 청소’라고 번역할 수 있는 ‘하이랜드 클리어런시스(highland Clearances)’에 주목해야 한다. ‘울타리 치기’는 소수의 자산가들이 과거 공유지엿던 곳에 울타리를 쳐서 그곳을 사유지로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 엄청난 양의 공유지가 사라지자, 수많은 빈농들은 이제 더 이상 땔감을 얻거나 사냥을 하거나 소나 양을 키울 수 없게 된다. 당시 ‘울타리 치기’를 시행했던 소수의 기득권층들은 국가로부터 법률적 보호를 받았지만, 생계의 위험에 노출된 다수의 농민들은 공장이 있는 대도시로 몰려가 저임금노동자로 전락하고 만다. 인클로저 법인이 영국 국회를 처음으로 통과했던 때는 1773년이었다. 농민을 임금노동자로 만들 필요가 더 많아지자, 1845년부터 1882년까지 국회를 장악하고 있던 기득권층들은 인클로저 법안을 자그마치 15번이나 개정하게 된다. 그만큼 당시 지배계급들은 농민들을 프롤레타리아로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고지대 청소’는 영국 북부 고지대에서 농사를 짓던 소작농들을 깨끗이 청소하는 과정을 말한다. <자본론>에 등장하는 서덜랜드 공작부인(the Duchess of Sutherland, 1765~1839)이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녀는 영국군을 고용해 1만 5000명의 소작농을 내몰고 80만 에이크의 땅에 양 13만 1000마리를 방목한다. 1마 ㄴ5000명의 고지대 농민들도 ‘울타리 치기’로 대도시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던 농민들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고, 아울러 고지대에서 키운 양털들은 맨체스터나 글래스고 등에서 번성했던 직물산업의 원료로 공급된다. 191

체제의 대변인들은 18세기에도, 19세기에도, 20세기에도, 그리고 지금 21세기에도 동일한 이야기를 반복한다. 자본주의 이후 인간의 삶은 생각하지 못할 만큼 좋아졌다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데 이로운 자료들을 알아볼 만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기에, 예나 지금이나 그들은 이런 자료들을 토대로 자본주의를 옹호하기에 여념이 없다. 첫째, 노예제도나 농노제도가 사라지면서 인격을 긍정하는 사회가 열렸다. 둘째, 사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았던 폐쇄적인 공동체가 사라지면서 개방성이 확산되었다. 셋째, 장인이 되려는 사람들에게 도제 생활을 강요했던 장인공동체가 소멸되고 평등하고 보편적인 교육제도가 정착되었다. 넷째, 여성들의 삶을 옥죄던 가부정적 가족 질서도 힘을 잃게 되면서 여성이 해방되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자기 찬양도 이 정도면 거의 정신분열 수준이다. 이 안에는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피로 얼룩지고 불길에 타오르는 문자”로 기록될 수밖에 없는 강압과 수탈의 역사가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 농민에게 지대를 받는 것보다 그들을 노동자로 만들어 착취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걸 지배계급이 자각했을 뿐이다. 192-193

산업자본주의체제가 정착될 때마다 ‘울타리 치기’나 ‘고지대 청소’와 같은 정책이 항상 수반되었다는 사실이다. ... ‘울타리 치기’와 ‘고지대 청소’ 정책은 스탈린체제의 경우 ‘집단농장’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으로, 그리고 중국이나 인도, 브라질의 경우 지역공동체 해체 정책으로 반복되었던 것이다. 195

‘자유로운 노동자(Freie Arbeiter),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자, 그러므로 노동을 파는 자가 있다.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뜻이다. 즉 노예와 농노처럼 그들 자신이 직접 생산수단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자유롭다는 의미이고, 또 자영농민의 경우처럼 그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즉 생산수단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다는 의미다.’ - <자본론> 1권 (1867) 197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에게 자유란 아주 제약된 것임을 폭로한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어느 자본가에게 팔 것인지를 결정할 자유만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이것은 전혀 자유가 아니다. 자기 노동력을 판매할 수도 있고 판매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는 노동자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을 자유는 노동자들에게 단지 자살할 자유만을 의미할 뿐이다. 200

자본주의가 단순한 억압체제를 넘어서는 지점은 그것이 종교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노동력을 팔아야만 생활할 수 있는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를 양산한 주범이면서도, 자본주의체제는 노동계급마저 자본을 숭배하도록 유혹할 수 있다. 돈은 피안의 막연한 행복보다 차안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악마의 속삭임이다. 201

농업경제가 지배하던 시절 제정신을 가진 농민들은 땅을 독점하는 억압체제에 저항했고, 산업경제가 지배하던 시절 정상적인 노동자들은 돈을 독점한 체제와 맞서 싸웠던 것이다. 이와 달리 자본교도로 거듭난 노동자의 안중에는 억압이 없는 사회, 즉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의 속내에는 지배자가 되려는 욕망만이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교도는 자본가로부터 착취당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자본가가 되려는 뒤틀린 욕망을 가지고 있다. 맞는 사람이 되기보다 때리는 사람이 되겠다는 말초적 생각이니, 이것보다 왜곡된 욕망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본교가 교세를 확장할수록, 자본주의의 억압구조는 그만큼 어떤 저항이나 도전도 받지 않는다. ...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가 “종교 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라고 말했던 이유다. 202

마르크스나 짐멜이 기독교와의 유사성을 통해서 자본교를 해명하려고 했다면, ... 벤야민은 기독교와 자본교 사이의 유사성뿐만 아니라 그 차이점도 분명히. 203

벤야민에 따르면 자본교의 첫 번째 특징은 “숭배의 구체화”다. 자본교도는 감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대상, 즉 구체적인 상품을 숭배한다는 것이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며 감각을 초월한 신성에 몰두하는 기독교의 숭배와는 완전히 반대 방향이다. 두 번째 특징으로 벤야민은 “숭배의 영속화”를 이야기한다. 매일매일 휴일도 없이 자본교도는 강박증적으로 상품숭배에 몰두한다는 의미다. 반면 기독교도는 보통 주일을 기다려 예수와 신을 숭배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자본교가 기독교와 달라지는 지점은 자본교의 세번째 특징에서 분명해진다. 벤야민은 자본교의 “숭배는 ‘죄를 만드는(verschuldend)’ 것”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숭배가 속죄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자본교는 그야말로 기독교와 완전한 대척점에 있는 종교였던 것이다. 벤야민의 주장은 명확하다. 상품에 대한 숭배, 즉 “구체적인” 상품을 “영속적으로” 구매하는 행위는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신적인 돈을 상품의 성전에 제물로 바치니, 이것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벤야민은 부연한다. “자본주의는 아마도 속죄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만드는 숭배의 첫 번째 사례일” 것이라고, 여기서 벤야민이 사용하는 단어 ‘슐트(schuld)’에 주목하자. 독일어 ‘슐트’는 ‘죄’만이 아니라 동시에 ‘부채’를 의미한다. 그러니 자본교의 숭배는 죄를 만드는 숭배이자 동시에 부채감을 만드는 숭배였던 셈이다. 208-209

자본주의가 종교로 기능하는 이유는 이 체제가 인간에게 우월과 열등에 대한 신앙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 신분사회만이 인간에게 열등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만큼 집요하게 열등의식을 우리 뇌리에 각인하는 체제도 없으니까. 억압체제가 항상 승승장구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지배계급의 주문에 걸려 자신이 열등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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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자의 노래 - 함석헌 선생 주석의 <바가바드 기타> - 이거룡

<바가바드 기타>는 언제나 서민 대중의 삶 속에서 호흡해온, 대중들의 경전이다.  21

<바가바드 기타>는 쿠루스셰트라 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무대로 한다. 하스티나푸라(Hastinapura)에 자리잡은 쿠루족의 두 형제 가문 즉 카우라바(Kaurava) 형제들과 판다바(Pandava) 형제들이 쿠루크셰트라 들판 양편에 군대를 대치시키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살육전을 벌이려는 극적인 상황에서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이 시작된다. 원래 바라타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였던 유디슈티라(Yudhisthira)가 카우라바 형제들 가운데 맏형 두료다나(Duryodhana)와 도박을 하여 그 결과로 그는 왕국을 잃고 네 형제들과 함께 13년 동안 숲속에 유배되었다. 약속한 기한이 되어 유디슈티라가 두료다나에게 자신의 왕국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거절되고 결국 두 가문 간에 전쟁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바로 이 전쟁이 벌어지려고 하는 찰나에 판다바 가문의 다섯 형제 중 셋째인 아르주나(Arjuna)와 크리슈나(Krsna) 사이에 오간 대화를 적은 것이다.
아르주나는 이 전쟁에 대한 확실한 대의 명분을 가지고 전쟁터로 나갔다. 그러나 그는 상대편 군대에서 자기 사촌들, 아저씨, 할아버지 등 혈족들을 바라보고는 고뇌에 빠진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혈족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혈족을 죽이고 왕국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숲ㅍ으로 은거하여 궁극자에 대한 명상에 몰두하는 고행자의 삶을 택하려 한다. 그때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싸우라’(ii, 18)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곧 크리슈나가 전쟁 그 자체를 옹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크리슈나는 결코 전쟁을 열망하지 않았으며, 그는 오히려 두 가문 간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항 노력하는 평화의 사절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런데 그의 역할은 카우라바 지도자들의 억지 때문에 실패했다. 싸우지 않겠다는 아르주나의 주장을 논박하는 과정에서, 크리슈나는 판다바족에 관한한 그 전쟁이 정당하다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 아르주나의 의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세속적인 관점에서 가장 설득력있는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윌는 여기서 클리슈나의 가르침이 지니는 요체가 정작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옹호가 아니라, 아르주나의 결심, 즉 싸우지 않겠다는 것이 왜 옳지 ㅇ낳은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르주나가 싸우지 않겠다는 것은 단지 그 대상이 자기의 혈족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의 사랑하는 혈족들을 죽이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겠다는 말은 일면 매우 사리에 맞는 것 같지만, 그것은 영원한 자아의 본질을 망각한 결과이며 냉철한 판단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는 무지와 이에 수반되는 격정 때문에 고뇌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가 그의 마음이 어두운 먹구름으로 가려졌으며,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없다고 고백했을 때, 크리슈나는 그에게 바른 지식을 내려 무지를 제거하려고 한다. 그 가르침은 아르주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의 고뇌를 다루는 가운데, 크리슈나는 모든 인류의 선을 위하여 <바가바드기타>를 설한다.
‘싸우라’는 표현에 대하여 샹카라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전쟁을 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슬픔과 미혹으로 생겨난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촉구일 뿐이다. 자아란 육체적 생사를 초월한다는 것과 누구난 자기 신분에 주어진 사회적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설정된 상황이 바로 전쟁이다.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은 슬픔과 미혹과 같은 상사라의 원인을 제거하자는 것이지 결코 전쟁을 명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바가바드기타>의 쿠루크셰트라 전쟁은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모순을 나타내는 인간 내면의 전쟁이다.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이 전쟁이라는 극한 상항에 놓인 아르주나의 고뇌로 시작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쟁은 죽거나 죽여야 하는, 생명이 무참히 살해되는 인간의 극한 상황이다.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은 먼저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고뇌하는 아르주나의 내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아르주나는 내면의 싸움에서 미혹에 눈 멀고 두려움에 떠는 모든 사람을 대변한다.
이어서 설해지는 가르침이 더욱 매혹적인 것은, 그것이 아르주나의 내면의 큰 위기를 나타내는 전쟁이라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 설정되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상황 속엣 여실하게 드러나는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철저한 고뇌가 있기 때문에 참다운 철학이 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위기 상황에서 정확히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 삶 가운데 문득 찾아오는 중대한 위기 상황은 우리위 마음속에 궁극적인 가치에 대한 생각을 자극한다. 오직 그때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감각의 장애를 깨부수고 내적인 실재에 닿는 데 필수적인 긴장을 얻게 된다.
아르주나의 낙심은 단지 실망한 사람의 일시적인 기분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비실재성을 일깨우는 공허감, 가슴속에 느껴지는 일종의 죽음 상태이다. 아르주나는 만일 필요하다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작오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옳은지 모른다. 그는 전율스런 시험에 직면하였으며, 감당하기 어려운 고뇌가 그를 뒤흔든다. 아르주나가 마주치는 절망감은 문득 깨달음의 길에 꼭 지나야 할 영혼의 어두운 밤이다.
이처럼 <바가바드기타>는 전쟁 그 자체보다는 이를 통하여 내면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순과 갈등을 다루고 있다. 영혼의 삶은 쿠루크셰트라의 전쟁터로 상징되며, 카우라바족은 영혼의 진전을 방해하는 적이다. 아르주나는 시험을 물리치고 감정을 제어하ㅏ여 인간의 왕국을 되찾으려고 시도한다. 전진의 길은 고통과 자기 극기를 통해서 가능하다. 내면의 삶에 대한 추구는 “사지가 주저않고, 입은 바싹타며, 전율이 내 몸을 휩싸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아르주나의 고뇌를 요한다. 이어지는 크리슈나의 가르침 - 참된 자아에 대한 - 이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아르주나의 철저한 고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가바드기타>의 시작은 갈등과 모순, 이기심, 악마의 부드러운 속삭임이 교차하는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크리슈나와 아르주나의 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우리가 듣는 것은 전쟁의 아비규환이 아닌 신과 인간 간의 진지한 교감을 보게 된다. 전차는 고요한 명상의 자리가 되고, 가식의 목소리가 잠잠해진 전쟁터는 오히려 참된 진리에 대한 사색을 위한 적합한 장소가 되는 것을 느낀다.  29-32

<바가바드기타>에 따르면, <베다>의 제의식은 욕망에 사로잡힌 무지한 자들의 생각이며(vii, 20), 단지 덧없는 결과를 가져올 뿐(xi, 21), 이를 토애서는 신의 참된 본질이 알려지지 않는다.(xi, 48) 이에 대하여 <바가바드기타>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를 거듭 강조한다.  34

<바가바드기타>는 범신론(汎神, pantheism)이라기보다는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적인 성격이 강하다. 다시 말하여, <바가바드기타>는 모든 것이 신이라는 주장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모든 것이 신 속에 있다고 말한다.  36

<바가바드기타>에서 현저해지는 권화(勸化, avatara)의 이론은 인간에 대한 신의 자비를 웅변적으로 말한다. 만일 신이 인간의 구제자라면, 그는 악의 힘이 인간의 가치를 말살하려 할 때면 언제나 스스로를 현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의가 쇠하고 불의가 성할 때마다, 오, 바라타의 자손이여, 나는 자신을 나타낸다.”(iv, 7) 권화는 인간속에 신의 하강인 동시에 인간의 영적인 본성과 잠재된 신성의 증명이다. 궁극적인 의미로 볼 때, 모든 의식적인 존재는 비록 그것이 가려지고 부분적이라 해도 신의 하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바가바드기타>가 모든 인간 속에 신의 내재를 바다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은 모든 존재의 가슴속에 살고 있으며, 무지의 장막이 걷힐 때 우리는 신의 음성을 듣고 신의 빛을 맞이하며, 신의 권능으로 행한다. 체화된 인간 의식은 불생 불멸의 영원자 속으로 들리워진다. “구다케샤여, 나는 모든 존재들의 중심에 자리잡은 자아이며, 나는 모든 존재들의 시초요 중간이요 또 종말이다.”(x, 20)  38

<바가바드기타>의 사상은 여러 가지 점에서 불교와 공통점을 지닌다. <기타> ii. 55~72에서 언급되는 아힝사(ahimsa)와 고해은 그것이 바라문교보다는 불교 혹은 자이나교와 유사한 정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바가바드기타> xvii.5~6에서 극단적인 자기 고행을 비난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 강도의 차이는 있다 할지라도 <바가바드기타>와 불교는 공히 베다의 절대적인 권위를 부정하며, 경직된 카스트제도를 완화시키려는 시도를 보인다. <바가바드기타>에서 강조하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niskamakarma)도 궁극적으로는 불교의 무소유와 통한다. <바가바드기타>의 이상적인 인간 스티타프라갸(sthitaprajna)는 불교의 아라한이나 보살을 연상하게 한다.
..
우파디야야는 <바가바드기타>에 붓다 혹은 불교에 대한 어떤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불교에 대한 간접적인 시사가 있다고 믿는다. 그는 <우파니샤드>에는 없지만 불교에는 있는 용어들이 <바가바드기타>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40

<바가바드기타>와 불교 간의 차이점 또한 적지 않다. 불교는 출가 수행을 이상적인 것으로 보지만, <바가바드기타>는 바라문교의 아슈라마(asrama) 전통을 받아들여 인생을 학생기(學生期, brahmacarya), 가주기(家住期, grhasta), 임서기(林棲期, vanaprastha), 유행기(遊行期, sannyasa)의 네 과정을 따르는 것을 이상적인 삶으로 여긴다. ..
불교가 인간의 해탈에 있어서 자력을 위주로 한다면, <기타>는 타력에 의한 구원 가능성을 믿는다. 흔히 <바가바드기타> 7백 구절의 요약으로 일컬어지는 xviii. 66은 극단적인 형태의 귀의 신앙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모든 의무를 다 버리고 오직 나에게 귀의하라. 내가 그대를 모든 악에서 건져주리니 슬퍼하지 말라.” 이런 이유로 로린서는 <바가바드기타>의 주요 개념들이 기독교의 신약 성경에서 차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41

<바가바드기타> 각 장의 말미에는 이 경전이 브라흐만, 즉 궁극적 실재에 대한 가르침(brahmavidya)일 뿐 아니라, 요가를 설하는 경전(yoga-sastra)이라고 말한다. 궁극적 실재를 가르칠 뿐 아니라, 여기에 이르는 길(marga), 즉 요가를 설한다는 것이다.  42

<바가바드기타>에서 요가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새겨지지만, 그것은 시종일관 실천적인 측면과 관련을 지닌다.  42

<바가바드기타>에서 설해지는 요가는 크게 세 가지, 즉 지식의 길(jnana yoga), 행위의 길(karma yoga), 그리고 믿음의 길(bhakti yoga)로 나누어진다.
지식의 길이라는 말은 이 길이 참된 지식을 요구한다는 것을 가리키며, 참된 지식은 영원한 것과 덧없는 것에 대한 분별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지식의 길은 이 지식이 인간 본성의 복귀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이 일단 자기의 육체나 마음, 혹은 지성조차도 참다운 자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정확히 말하여 그것을 직관적으로 꿰뚫어보면, 그는 아만(我慢, 자신을 뽐내며 남을 업신여기는 교만한 마음)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는 자기가 행위자이며 인식의 주관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버린다. 왜냐하면, 그의 참된 자아는 육체, 감각, 마음, 지성의 행위를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구도자에 의하여 이해되어야 할 요체이다.
참다운 지식은 우리가 일상적인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며, 결과에 집착함이 없이 행위하게 한다. 지식의 길의 목표는 자아 실현 혹은 범아일여(梵我一如)이다.  43

“그의 모든 일이 욕망과 이기적인 목적을 떠난 사람, 그의 행위가 지혜의 불로 타버린 사람, 지혜로운 자들은 그를 현자라 부른다.”4. 19) 그와 같은 사람은 비록 행위한다 할지라도 실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44

<바가바드기타>는 지식의 길 못지 않게 행위의 길을 강조한다. 실재에 대한 통찰이 역동적인 삶의 필요를 폐지하지 않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행위를 포기함으로써, 혹은 의무를 져버림으로써 무위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것은 미혹에 사로잡힌 것이며, 참된 길이라 할 수 없다.  44

<바가바드기타>는 행위 그 자체의 포기가 아니라,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를 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을 니스카라카르마 요가라고 한다. .. 카르마 요가는 ‘행위의 포기’(renunciation of action)가 아니라, ‘행위 속에서의 포기’(renunciation in action)를 의미한다.  44-45

니스카ㅏ카르마는 .. 단지 행위의 성패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동기에 집착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 목적을 잊어버리라는 것이지 목적을 잃어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45

믿음의 길 혹은 박티 마르가(bhakti marga)는 인격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다. ..”모든 의무를 다 버리고 오직 나에게 귀의하라. 내가 그대를 악에서 건져주리니 슬퍼하지 말라.”(xviii. 66) 인도의 여러 종교 전통 중에 비인격적인 원리에 대한 숭배의 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사람에게 있어서 이것은 쉽지 않다. 이에 비하여 인격신에 대한 숭배는 사회적 계급이나 지식 수준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따를 수 있는 대중적인 구원의 길이다. .. 현생에서는 해탈 가능성이 배제되었던 불촉천민과 여자에 대한 구원의 희망이 제시된 것도 여기이다.
지식의 길이나 행위의 길에 비하여 믿음의 길이 지니는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의 해탈에 있어서 신의 은총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46

지, 정, 의는 인간 본성의 근본이며, 지식의 길, 헌신의 길, 행위의 길은 각각 이에 상으앟는 실천행이라는 것을 알때, 이 세가지 요가가 상호보완적이며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행위릐 길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믿음의 길은 신에 대한 사심없는 봉사이다. 따라서 그것은 행위의 일종이다. 또한 앞에서 본 것처럼 사심없는 행위는 지식없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박티는 오직 참된 지식을 지닌 자에 의해서 완전히 행해질 수 있다고 해야 한다.  46-47




<바가바드기타>를 읽는 독자들에게

진리는 귀족적일 수 없습니다.  56





책을 읽기 전에

<바가바드기타>는 글자대로 하면 신의 노래라는 뜻인데 힌두교에서는 <스루티(Sruti)> 곧 신이 직접 인간에게 계시해 준 경전으로는 알지 않고, <스므리티(Smriti)> 곧 화신이나 성자, 예언자가 경전에 대해 주를 달아서 한 가르침으로 안다.  62

인도의 사상과 지도자의 정신적 취사(趣舍 달릴 취 집 사)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것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63

<기타>안의 대화에는 네 사람이 말을 하고 있다. 드리타라슈트라 왕, 산자야(sanjaya), 아르주나, 크리슈나다.
드리타라슈트라는 소경이었다. 전설로 전해 오는 말에 <기타>의 저자라고 하는 서자 브야사(Vyasa)가 왕에게 쿠루크셰트라의 싸움을 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해주마 하는 것을 왕은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친족의 죽음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브야사는 드리타라슈트라의 신하요 마부인 산자야에게 뚫어봄 뚫어들음의 능력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궁중에 앉아 있으면서 산자야가 저 멀리 전장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듣는 대로 왕에게 알려주었다. 그의 입을 통해 크리슈나와 아르주나의 말은 영매적(靈媒的)으로 보도가 됐고 이따금씩 끊고 자기 자신의 설명을 첨부하기도 한다.  63

브라만을 이 우주와의 관계에서 생각할 때는 하나의 인격적인 신, 곧 이슈바라(Ishvara)라고 한다. 이슈바라는 속성을 가진 신이다.  65

이슈바라의 세 기능 혹 세 모습을 인격화하여, 브라마(Brahma)와 비슈누와 시바(Shiva)라 부른다.  66

브라만의 능력은 모든 마음과 물질의 근본이다. 그것을 프라크리티(prakriti) 혹은 마야(maya)라고 한다.  67

힌두교는 크리슈나, 부처, 예수를 포함해서  많은 화신을 믿는 것을 용납하고 또 앞으로도 많이 있을 것을 예상한다.  67

프라크리티는 구나(gunas)라는 세 가지의 힘(性)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사트바(sattva, 善性)와 라자스(rajas, 動性)와 타마스(tamas, 暗性)다. ‘브라마의 밤’, 곧 가능성의 시대 동안은 이들 ‘성’들은 온전히 균형을 이루어 있으므로 프라크리티는 아무 요동이 없이 가만있다. 창조는 이 균형이 깨지는 데서 나온다. ..
물질계에서는 선성은 모든 순수하고 고운 것을 나타내고, 동성은 날쌘 것을, 암성은 굳고 맞서는 것을 나타낸다. 어떤 것 속에나 세 상은 다 들어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중 하나가 지배적이다. ..
성은 또 어떤 물건이 진화의 어느 단계에 있는가를 표시하기도 한다. 선성은 실현될 형태의 본질이고, 암성은 그 실현에 대해 속에 들어 있는 장애고, 동성은 그 장애를 물리치고 그 본질을 드러나게 하는 힘이다.
사람의 마음에서는 선성은 심리적으로 침착, 정결, 평온을 드러내고, 동성은 열정, 불안정, 도전적 활동을 나타내고, 암성은 우둔, 게으름, 타성적임을 나타낸다. .. 사람은 그 행동, 사상, 생활 양식에 따라 그중 어떤 성도 배양해 낼 수가 있다.  68-69

프라크리티에서 나와서 천차만별의 만물에 이르는 진화의 과정을 더듬으려면 우리는 개인 지성의 근본이 되는 마하트(mahat)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 다음은 물체를 식별 분류하는 힘인 부디(buddhi), 그 다음은 아함카라(ahamkara) 곧 자기 감각이요, 아함카라는 세 가지 기능으로 갈린다.
마나스(manas), 이것은 감각에서 오는 인상을 받아 그것을 부디로 보낸다.
감각의 5관(五官)인 눈, 귀, 코, 혀, 몸과 행동의 5기(五器)인 손, 발, 혀, 생식기, 배설기
다섯 탄마트라(tanmatras) 즉 빛, 소리, 냄새, 맛, 촉각의 본질이 되는 것, 이 기묘한 탄마트라들이 서로 얽히고 다시 얽혀서 소위 5대(五大)라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을 낳는데 이것으로 이 영원한 우주는 이루어져 있다.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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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의 전체 메시지
세상의 온갖 충격적이고 절망적인 사건들은 왔다가 지나가는 것이며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슬퍼하고 절망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지어내는 ‘허상’에 우리가 속박되는 것일 뿐임을 강조하고 있다.  29

<기타>는 세계의 진상, 실재, 참 세상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는 눈을 어둡게 만드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기적인 욕망이며 그것은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즉 육체라는 물질적 본성에 의존하여 사는 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기타>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물질적 본성을 프라크리티(prakriti)로 부르며,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내적 작용 예컨대 감각능력, 자의식, 인지능력 등은 이러한 프라크리티로부터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기타>에서 인간은 이러한 물질적 본성의 작용에 종속되지 않고 그 작용을 확실히 알고 제어할 수 있을 때 참세상, 참자아를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인식 및 감각의 작용이 프라크리티의 작용임을 깨다다게 되면 푸루샤(purusha)라는 정신적 본성이 드러나게 되는데, 푸루샤는 물질적 본성인 프라크리티와 대조되는 개념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프라크리티만 있는 것이 아니라 푸루샤도 있는데 인간이 푸루샤를 모르고 오로지 프라크리티만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에 의해 일어나는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에 좌지우지되며 살아가는 것은 이기적인 욕망이 푸루샤의 환한 빛을 가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푸루샤는 인간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인식 및 감각의 작용이 프라크리티의 작용임을 깨다다게 될 때 드러난다.  31-32

구나(guna)는 프라크리티로부터 인간의 내적 작용이 시작되도록 하는 동인(動因)으로서 삿트바(sattva) : 밝고 순수하며 평화로운 기운, 라자스(rajas) : 욕망과 집착에서 생기는 격정적인 기운, 타마스(tamas) : 무지에서 비롯되는 어두운 기운이라는 세 가지 속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 삿트바는 라자스나 타마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은 기운으로 보이지만 정신을 육체에 속박당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같다. 즉, 이 세 가지 기운 모두 프라크리티의 작용이 시작되도록 만듦으로서 푸루샤의 환한 빛을 가려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 안에 있는 참자아를 깨닫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33-34

<기타>에서 크리슈나는 허상인 삶 속에서 허상과 싸워 진상에 도달하는 실천 방법을 카르마요가(karma Yoga), 즈나나요가(jnana Yoga), 박티요가(Bhakti Yoga)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설명한다. 흔히 이 세 가지는 행위의 요가, 지혜의 요가, 헌신의 요가로 각각 번역된다.  37

행위를 하되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행하라는 것인데 이것이 곧 카르마 요가(행위의 요가)의 의미이다.  37

‘지혜의 길이 목표로 하는 것과
행위의 길이 목표로 하는 것은 같다.
이 둘은 하나로 보는 자가 참으로 보는 자이다.
행위의 길을 따르지 않고
완전한 포기를 성취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지혜로운 사람은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행위의 길을 통해 빠른 시간 안에 브라흐만에 도달한다. (5:4-6)  39

즈나나 요가(지혜의 요가)는 초월적인 실재에 정신적으로 직접 도달하고자 하는 방법으로서 일상생활 속에서는 자신의 마음이나 인식에 홀연히 일어나는 모든 상념, 구별, 차별 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믿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 이면에 내재한 실재를 보고자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41

박티 요가(헌신의 요가)는 .. 시시각각으로 펼쳐지는 삶의 장면들은 허상이며 진상이 아니라는 것을 굳게 믿으면서 그러한 믿음에 헌신하며 사는 것이다.  41

카르마 요가, 즈나나 요가, 박티 요가를 통해 <기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재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특별한 시기,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시작도 끝도 없이 삶 그 자체가 그것을 깨달아가는 수행의 과정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일상적 삶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되, 결과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홀연히 일어나는 모든 상념, 구별, 차별 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지어낸 허상에 불과하므로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더불어 내가 사는 삶의 장면들은 허상이며 진상이 아니라는 것을 굳게 믿으면서 그러한 믿음에 헌신하며 살아야 한다.  43


<바가바드 기타>의 내용 구성
<기타>는 총 18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장은 전체적인 배경에 대한 설명이, 2장에는 <기타> 전체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3장부터는 2장에 압축적으로 제시된 메시지의 세부 내용 하나하나에 대하여, 아르주나가 질문하면 크리슈나가 대답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르주나는 <기타>를 읽는 독자들이 의문을 가질 만한 부분에 대하여 계속 질문을 하고, 크리슈나는 그것에 대하여 대답을 하므로 독자들은 이러한 아르주나와 크리슈나의 대화를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기타>의 전체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한번 읽는 것만으로 <기타>의 전체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반복하여 읽으면서 읽을 때마다 이해되는 부분들을 퍼즐 맞추듯 끊임없이 맞춰가는 과정을 통해야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
3장에서부터 7장까지는 2장의 내용이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크리슈나의 설명에 대하여 아르주나가 중간중간 질문을 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크리슈나에 의한 일방적인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브라흐만, 아트만, 프라크리티, 구나, 즈나나, 요가, 카르마 요가 등 다양한 개념들에 대하여 간단한 설명이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실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곳곳에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크리슈나의 설명에 대하여 아르주나의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되는 것은 8장부터다. 3장부터 7장까지는 2장에 제시된 전체적인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설명한다면, 8장부터는 이러한 설명에 대한 아르주나의 질문을 통해 2장에 제시된 내용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9장에 제시되는 내용은 앞의 2장에서 8장까지 제시된 내용과 폭과 깊이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지만, 어조가 고양되어 있으며, 이러한 경향이 10장까지 지속되다가 11장에 이르러서는 아르주나의 깨달음에 대한 고백이 시작된다.
12장에서는 박티 요가(헌신의 요가)의 중요성에 대하여 설명한다. 아르주나가 어느 정도 깨달음의 경지에 올랐지만, 한 번 깨달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지속적인 헌신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13장과 14장은 프라크리티와 푸루샤, 구나 등 형이상학적 개념에 대한 쉬운 설명이 제시되며, 15장부터 18장에 걸쳐서는 그 이전까지 이루어졌던 모든 설명이 다양한 예시를 통하여 반복적이고 율동적으로 제시된다.  49-51




즐거움과 괴로움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2:15)  75

무지한 사람들은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말을 최고로 여기고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그것을 떠벌린다.(2:42)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이기적인 욕마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은 쾌락과 초능력을 얻기 위해
갖가지 특별한 의식을 거행한다.
하지만 그들은 욕망에 따른 행위로 인하여
끊임없이 태어나고 죽는 윤회의 바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2:43)  81

그대의 의무는 그대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행위의 결과는 그대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다.
행위의 결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행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고 행위를 피해서도 안 된다.(2:47)  82

경전의 현란한 말과 가르침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깊은 삼매네 안주할 수 있을 때
그대는 완전한 요가를 성취하게 될 것이다. (2:53)  83

감각의 힘은 아주 강하다. (2:60)  84

감각의 대상을 생각하면 그것에 대한 집착이 생기고
집착이 생기면 욕망이 생기고
그 욕망으로부터 분노가 생긴다. (2:62)

분노로부터 어리석음이 생기고
어리석음으로부터 기억의 혼란이 기억의 혼란으로부터 지성의 파멸이 생긴다.
지성이 파멸되면 삶은 황폐해진다. (2:63)  85

감각기관을 제어하지 못하면
지혜와 멀어지고 집중하여 명상하지 못한다.
집중하여 명상하지 못하면 평안을 얻을 수 없고
평안이 없다면 어찌 즐거움이 있을 수 있겠는가?(2:66)  86


깨달은 사람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모든 일을 행함으로써
무지한 사람들이 스스로 따라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3:26)

모든 행위는
타고난 본성적인 기운의 흐름에 의해 저절로 일어난다.
그러나 자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은
‘내가 행위자’라고 생각한다. (3:27)

모든 행위가 세 가지 기운의 상호작용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행위의 결과에 집착한다.
깨달은 사람은 그러한 무지한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면 안 된다. (3:29)  97-98


지혜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어떤 물질을 제물로 바치는 것보다 낫다.
모든 행위는 지혜에 의해 완성된다. (4:33)  108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의 길과 행위의 길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이 둘을 동일한 것으로 본다.
어느 한 길을 통해서든 목표에 도달한 사람은 다른 길을 통해도 똑같은 경지에 이르기 때문이다. (5:4)

지혜의 길이 목표로 하는 것과
행위의 길이 목표로 하는 것은 같다.
이 둘을 하나로 보는 자가 참으로 보는 자이다. (5:5)

행위를 하면서 행위의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감각과 욕망을 정복하여 깨끗하게 정화시킨다.
그들은 만물 속에서 아트만을 보며
그들과 자신이 하나임을 안다.
그들은 무엇을 하든
자신이 행한 행위로 인하여 영향을 받지 않는다. (5:7)

이런 진리를 깨닫고 의식이 참아아와 하나된 사람은 무엇을 하든 자신이 행위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5:8)  111

보고, 듣고, 먹고, 마시고, 만지고, 냄새 맡고 움직이면서도
또 잠자고, 숨쉬고,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감각기관이 그 대상에 작용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5:9)  112

지혜로운 자는
지식과 실천을 겸비한 종교지도자이든
천민이든 코끼리, 소, 개이든 만물을 평등하게 본다. (5:18)

이렇게 만물을 평등하게 보는 자는
이생에서 더 이룰 것이 없다.
그의 마음은 이미 평등한 브라흐만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5:19)  113


자신을 정복하고 완전한 고요함에 이른 자는
춥거나 덥거나 즐겁거나 고통스럽거나
남이 칭찬하거나 욕하거나 언제나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다. (6:7)  117

그렇다.
마음을 제어하는 것은 바람을 재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아르주나여,
규칙적이고 지속적인 수행과
욕망을 버림으로써 마음을 붙잡을 수 있다. (6:35)  122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지고의 본성을 브라흐만이라고 한다.
만물 속에 깃들여 있는 나의 본질을 아트만이라고 하며
만물을 지어내는 그 창조력을 카르마라고 한다. (8:3)  137-138

아르주나여,
브라흐만의 세계를 포함하여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삶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오면 그러한 환생을 하지 않는다. (5:16)  140


어리석은 자들은
존재으 대주재자인 나의 지고의 상태를 알지 못하고
인간의 형상을 한 나를 무시한다. (9:11)

헛된 희망, 헛된 행위, 헛된 지식으로
마음이 혼란한 자는 삶이 온통 악과 재앙뿐이다. (9:12)  145

아르주나여,
믿음으로 충만하여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도
비록 바른 길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를 섬기는 것이다. (9:23)

왜냐하면 나는 일체의 제사를 받는 자이며 그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실로 나를 알지 못하므로
공덕이 다하면 다시 태어난다. (9:24)


기계적인 훈련보다는 지혜의 탐구가 낫고
지혜의 탐구보다는 명상이 나으며
명상보다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포기가 훨씬 낫다.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행위하는 자는 평화를 얻는다. (12:12)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자비로운 사람,
나 또는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으며
고통과 기쁨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모든 것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사람, (12:13)

어떤 상황에나 만족하며
자신을 제어하고 굳은 믿음을 가진 사람,
마음과 생각 전체를 기울여 나에게 몰두하는 사람,
나는 이런 사람을 사랑하며
이런 사람이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다. (12:14)

이런 사람은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으며
세상 또한 이런 사람을 흔들지 못한다.
기쁨, 경쟁심, 두려움, 열망에서 멀리 벗어난 사람,
이런 사람은 나에게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12:15)

무슨 일을 하든지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행하는 순수한 사람,
무슨 일을 하든지 일에 얽매이지 않고
욕망에서 벗어나 행하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따.
이런 사람이 나에게 헌신하는 자이며
나는 이런 사람을 사랑한다. (12:16)  176-177

원수와 친구, 존경과 멸시를 하나로 보며
추위와 더위, 즐거움과 괴로움을
동일하게 여기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12:18)

비난과 칭찬을 동일하게 여기며 침묵하며
어떤 상황에도 만족하는 사람,
거주처에 대한 집착 없이 마음이 확고부동한 사람,
나는 언제 어디서나 나만을 바라보는 이런 사람을 사랑한다. (12:19)  177


아르주나여,
이 육체를 ‘밭’이라고 하고
밭을 알고 경작하는 존재를 ‘밭을 아는 자’라고 한다. (13:1)

아르주나여,
내가 곧 밭을 아는 자이다.
밭과 밭을 아는 자를 동시에 아는 것이 참다운 지혜이다. (13:2)  183

아르주나여,
물질적인 원소, 감각기관, 감각대상
작용기관, ‘나’라는 생각, 기억능력, 분별능력
그리고 아직 물질로 나타나지 않은 에너지 등
이것으로 구성된 것이 밭이다. (13:5)

욕망과 증오, 쾌락과 고통, 육체와 지성
의지의 다양한 형태 등이 밭의 변화이다. (13:6)

밭의 구성요소와 그 변화를 아는 사람은
오만과 거짓에서 벗어난다.
비폭력, 용서, 정직, 순수, 스승에 대한 헌신 등이
그들의 특징이다. (13:7)

그들은 내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잘 제어하고 감각대상과 자아의 욕망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생로병사와 고통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13:8)

밭의 구성요소와 그 변화를 아는 사람은 소유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다.
아내와 자식들에 대해서도 애착을 가지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행운이나 불행을 평등한 눈으로 바라본다. (13:9)

이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에게 헌신하며
세상 사람들과 무리지어 어울리기보다는
한적한 곳에 홀로 있으면서
오직 나를 찾는 일에 몰두하는 것을 좋아한다. (13:10). 184-185

프라크리티와 푸루샤는 둘 다 시작이 없다.
물질의 세 성질과 변화는 모두 프라크리티에서 비롯된다. (13:19)

프라크리티가
모든 행위의 원인이며 결과이며 행위자이다.
하지만 모든 쾌락과 고통의 향수자는 푸루샤이다. (13:20)

푸루샤는 프라크리티 안에 머물면서 프라크리티에서 비롯된 구나의 활동을 지켜보며 경험한다.
구나의 활동에 대한 집착이
선과 악의 세상에의 탄생의 원인이 된다. (13:21)

육체 안에 머물고 있는 지고한 푸루샤는
지켜보는 자이며 인도하는 자이다.
그는 향수하는 자이며 지탱하는 자이다.
그는 향수하는 자이며 지탱하는 자이다.
그가 곧 지고한 참자아이며 대주재자이다. (13:22)  187


삿트바, 라자스, 타마스라는 물질의 세 성질은
불멸의 자아를 육체 속에 가두어 놓는다. (14:5)

삿트바는 밝고 순수하며 평화로운 기운이다.
그러나 삿트바에서 비롯되는 행복과 지혜에 대한 집착은 정신을 육체에 속박 당하게 한다. (14:6)

라자스는 욕망과 집착에서 생기는 격정적인 기운이다.
라자스의 격정적인 활동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소유주인 참자아가 미혹에 갇힌다. (14:7)

타마스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어두운 기운이다.
타마스의 어두운 힘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소유주인 참자아가 미혹에 갇힌다.
모든 존재들이 이 기운으로 말미암아
둔함과 게으름의 잠에 빠진다. (14:8)

아르주나여, 삿트바는 그대를 행복하게 집착하게 하고 라자스는 그대를 활동으로 몰아넣으며
타마스는 그대의 지혜를 덮어 미혹에 빠지게 한다. (14:9)

어떤 때는 삿트바가 라자스와 타마스를 제압한다.
어떤 때는 라자스가 삿트바와 타마스를 제압한다.
어떤 때는 타마스가 라자스와 삿트바를 제압한다. (14:10)

삿트바의 밝고 고요한 기운이 우세할 때는
육체의 모든 세포가 지혜의 빛으로 밝아진다. (14:11(

라자스의 활동적인 기운이 우세할 때는
이기적인 욕망과 집착, 불안 등으로 인해
끊임없이 활동으로 내몰린다. (14:12)

타마스의 어두운 기운이 우세할 때는
무지와 혼란과 게으름과 망상에 빠진다. (14:13)

죽음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삿트바의 밝고 고요한 기운이 우세하면
그는 현자들이 사는 순수한 곳으로 간다. (14:14)

라자스의 활동적인 기운이 우세하면
그는 행위가 지배하는 세상에 태어난다. (14:15)

타마스의 어두운 기운이 우세하면
그는 무지한 존재의 자궁으로 들어간다. (14:15)

선한 행위는 삿트바의 열매이며
고통은 라자스의 열매이고
무지는 타마스의 열매이다. (14:16)

지혜는 삿트바에서 생기고
탐욕은 라자스에서 생기며
무지와 혼란과 미망은 타마스에서 생긴다. (14:17)

삿트바에서 사는 사람은 위에 있는 세계로 가고
라자스에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며
타마스에서 사는 사람은 아래에 있는 세계로 간다. (14:18)  192-194


어떤 사람은 신적인 길을 따라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악마적인 길을 따라 살아간다.  (16:6)

악마적인 길을 가는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열심히 한다.
그들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순수한 것이며
무엇이 진리인지를 모른다. (16:7)

그들은 신이 없다고 말한다.
진리도, 영적인 법칙이나 질서도 없다고 말한다.
세상 만물은 욕망에 의해 우연히 태어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16:8)

이러한 견해를 고집하면서
자기가 아는 부분적인 지식을 최고로 여기면서
이 세상을 고통과 파멸로 몰아넣는 짓을 서슴없이 행한다. (16:9)

그들은 위서노가 자만심과 오만에 사로잡혀있다.
그들은 부질없는 망상에 빠져 살고 있다.
그들의 탐욕은 끝이 없다. (16:10)

그들은 만족할 줄 모르고 이기적인 욕마을 추구한다.
그들은 감각적인 즐거움을 최고라고 생각하며
죽는 날까지 갈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6:11)

그들은 수만 가지 갈망의 올가미에 걸려
탐욕과 분노의 힘에 내몰린다.
욕망의 충족을 위해 재물을 모으는 데 집중한다. (16:12)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지금 이것을 얻었고 이 소원을 성취할 것이다.
이것은 내 것이고 이 재물은 나의 것이 될 것이다.’ (16:13)

‘나는 나의 적을 없애 버렸다. 내일은 다른 적을 없애 버릴 것이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다.
나는 원하는 것을 내 마음대로 즐길 수 있다.
나는 성공했고 힘이 있으며 행복하다.’ (16:14)

‘나는 부유하고 고귀한 집안의 출신이다. 나와 견줄 자는 없다.
나는 제사를 올릴 것이며 보시를 행할 것이며 즐거울 것이다.’ (16:15)

이렇게 탐욕의 올가미에 묶이고 망상의 거미줄에 걸린 사람은 탐욕을 좇다가 마지막에는 어두운 지옥에 떨어진다. (16:16)

그들은 자만심이 강하고 완고하며 돈이 있다고 우쭐해 한다.
제사를 드려도 제사의 참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남에게 보이려고 할 뿐이다. (16:17)  206-208

욕망과 분노와 탐욕은
스스로를 파멸의 지옥으로 던져 넣는 세 가지 문이다. (16:21)  209


인간의 믿음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밝고 고요한 기질에서 비롯되는 믿음,
격정적인 기질에서 비롯되는 믿음,
어두운 기질에서 비롯되는 믿음이다. (17:2)

아르주나여,
믿음은 그 사람의 기질을 닮는다.
사람의 특성은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특성이다.
그 사람의 믿음, 그것이 바로 그다. (17:3)

기질이 밝고 고요한 사람은 신을 숭배한다.
기질이 격정적인 사람은 부와 권력을 숭배한다.
기질이 어두운 사람은 귀신을 섬긴다. (17:4)  210-211

신과 지혜로운 사람과 영적인 스승을 섬기는 것,
청결함과 단순함과 절제와 비폭력,
이것이 몸의 고행이다. (17:14)

위로하는 말과 진실한 말을 하는 것,
친절하고 유익한 말을. 하는 것,
규칙적으로 경전을 낭독하는 것,
이것이 말의 고행이다. (17:15)

고요함과 부드러움과 침묵을 지키는 것,
자기를 제어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는 것,
이것이 마음의 고행이다. (17:16)

기질이 밝고 고요한 사람은
지극한 믿음으로 결과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고
이 세 가지 훈련을 한다. (17:17)

기질이 격정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또는 칭찬을 받기 위하여 고행을 한다.
그들의 고행은 불안정하며 지속성이 없다. (17:18)

기질이 어두운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하여
또는 다른 사람들 파멸시키기 위하여 고행을 한다. (17:19)

기질이 밝고 고요한 사람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당연히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베푼다.
그들은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한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 (17:20)

기질이 격정적인 사람은
대가를 기대하면서 마지못해 자선을 베푼다. (17:21)

기질이 어두운 사람은
때와 장소가 적절치 못한 상황에서 적절하지 않은 사람에게 존중하는 마음도 없이 자선행위를 한다. (17:22)

‘옴’ ‘타트’ ‘사드’ 이 세 개의 음절은 브라흐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세 음절로 표현되는 브라흐만에서
사제와 경전과 제사의식이 나왔다. (17:23)

그러므로 베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제사와 수행과 자선을 시작할 때 ‘옴’을 음송한다. (17:24)

오직 해탈을 추구하며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제사와 고행과 자선을 행하는 이들은
그런 행위를 하는 도중에 ‘타트(tat)’를 음송한다. (17:25)

‘사드(sat)’는 ‘실재’라는 뜻과 ‘선(善)’이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드’는 올바른 행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17:26)

제사와 고행과 자선을 흔들리지 않고
행하는 것도 ‘사드’라고 하며
제사와 고행과 자선에 어울리는 다른 모든 행위도 ‘사드’라고 한다. (17:27)

그러나 아르주나여,
믿음이 없이 행하는 제사와 고행과
자선은 ‘아사드(asat)’라고 한다.
‘아사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아사드’는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아무 쓸모가 없다. (17:28)  212-215


욕망에 종속된 모든 행위를 버리는 것이 포기이며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초연함이 단념이다. (18:2)  216

아르주아나여, 잘 들어라.
내 이제 그대에게 세 가지 종류의 단념에 대해서 말해 주겠다. (18:4)

행위를 포기하는 것은 미망에 사로잡힌 결과이며
그것은 타마스에서 비롯된다. (18:7)

단지 두렵거나 귀찮아서 행위를 포기하는 것은
라자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포기로는 초월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18:8)

주어진 일을 의무로 알고 결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행하는 것은 삿트바에서 비롯된다. (18:9)  217

삿트바에서 비롯되는 포기로 가득찬 자는
싫어하는 일이라고 해서 꺼리지 않으며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서 집착하지도 않는다. (18:10)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행위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정한 포기는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것이다. (18:11)  219

인식과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주체,
이 구분에 의하여 행위는 재촉되며
감각기관, 행위자, 행위 그 자체,
행위는 이 세 가지로 구분되어 파악된다. (18:18)

물질의 세 가지 기운의 차이에 따라
인식과 행위와 행위자는 그 성격이 달라진다.
이제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 말해주겠다. (18:19)

모든 존재 속에서 불멸하는 하나의 실재를 보며
분리되어 있는 만물 속에서 분리되지 앟은 통일성을 보는 것,
이것이 삿트바에서 비롯되는 인식이다. (18:20)

만물을 서로 분리되어 있는 개체로 인식하는 것,
이것은 라자스에서 비롯되는 인식이다. (18:21)

아무런 근거도 없이 아주 작은 부분을 전체로 아는 것,
이것은 타마스에서 비롯되는 인식이다. (18:22)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마음으로
묵묵히 자신의 의무를 행하는 것
이것은 삿트바에서 비롯되는 행위이다. (18:23)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또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
이것은 라자스에서 비롯되는 행위이다. (18:24)

행위의 결과로 오게 될 손실이나
다른 사람이 받을 고통이나 상처를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
이것은 타마스에서 비롯되는 행위이다. (18:25)

집착에서 벗어나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
성공과 실패를 동일하게 여기는 사람은
삿트바적 행위자이다. (18:26)

욕망을 가지고 행위의 결과를 바라며
순수하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행복과 불행에 웃고 우는 사람은
라자스적 행위자이다. (18:27)

자신을 전혀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
저속하고 완고하고 남을 속이는 사람
게으르고 낙담을 잘하며 매사를 질질 끄는 사람은
타마스적 행위자이다. (18:28)  219-221

아르주나여, 잘 들어라.
내 이제 그대에게 물질의 세 가지 기운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세 종류의 지성과 의지에 대하여 말해 주겠다. (18:29)

행하는 것과 행하지 않는 것
안전한 것과 안전하지 않은 것
자유로운 것과 속박 당하는 것을 아는 것은
삿트바에서 비롯되는 지성이다. (18:30)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이것은 라자스에서 비롯되는 지성이다. (18:31)

미망에 가려져
옳은 것을 그른 것으로, 그른 것을 옳은 것으로 여기며
모든 것을 왜곡해서 아는 것은
타마스에서 비롯되는 지성이다. (18:32)

마음과 호흡과 감각기관을 잘 다스리는 것
이것은 삿트바적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18:33)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여
부와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라자스적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18:34)

잠, 두려움, 슬픔, 낙심, 교만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타마스적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18:35)  221-222

아르주나여, 잘 들어라.
내 이제 그대에게 물질의 세 가지 기운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세 가지 행복에 대하여 말해 주겠다.
이것을 알고 훈련하면 그대의 고통은 끝나리라. (18:36)

삿트바에서 비롯되는 행복감은 처음에는 독약처럼 쓰지만 마지막에는 감로처럼 달다.
그것은 참자아에 대한 깨달음과 지혜의 청정함에서 생긴다. (18:37)

라자스에서 비롯되는 행복감은
처음에는 감로처럼 달지마 마지막에는 독약처럼 쓰다.
그것은 감각과 그 대상의 접촉에서 생긴다. (18:38)

타마스에서 비롯되는ㄴ 행복감은
수면, 무지, 게으름, 방만에서 온다.
이런 행복감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아를 미혹시킨다. (18:39)  222-223

사람은 타고난 기운에 따라
브라흐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구분된다. (18:41)

브라흐만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에게는
자기절제, 고요, 순결한 가슴, 인내,
겸손, 진리추구, 고행, 지혜, 믿음 등을
완성할 의무가 주어져 있다. (18:42)

크샤트리아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에게는
용기, 힘, 꿋꿋함, 민첩함, 관대함, 지도력,
그리고 전쟁에서 물러나지 않는 결단력 등을
완성할 의무가 주어져 있다. (18:43)

바이샤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에게는
농사, 목축, 상업 등을 성공시켜야 할 의무가 주어져 있으며
수드라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섬기며 봉사할 의무가 주어져 있다. (18:44)  223-224



후기를 대신하여 - 21세기 현대인에게 <바가바드 기타>가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기타>는 왜곡된 인식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왜곡된 인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살아가면서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왜곡된 인식에서 벗어나 조금씩 맑은 인식을 가질 수 있다고 대답하고 있다.
다음 두 가지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노력은 <기타>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홀연히 드는 생각과 느낌을 멈추려고 항상 노력하자.’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느낌에 머물지 말고 항상 그 반대의 것을 생각하자.
예컨대, 기쁠 때는 슬플 때를 생각하고, 슬플 때는 기쁠 때를 생각하자.’  239-240




부록

요가의 전통은 마음의 발달에서 외적 권위나 형식보다는 개인적, 구체적인 체험을 우선 중요시한다. 즉, 요가의 전통은 마음의 발달기준을 마음 밖에 있는 외적 권위나 형식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마음 안에서 찾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외적 권위나 형식을 중요시하는 인도의 종교적 전통에서 정통이 아닌 이단으로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야 했다.  242

베다(veda)시대에 제사 중심의 브라흐만교는 제사의 형식주의의 오류를 경계하는 요가의 영향으로 형이상학적 사고 중심의 우파니샤드(Upanisad) 철학을 낳았다. 우파니샤드 철학의 출현은 이단에 머물던 요가의 전통이 정통으로 인정되어 표면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타>에 이르러 기존의 모든 종교적 입장은 요가의 입장에서 재통합되었으며 이것은 곧 정통과 이단의 긴 싸움에서 이단에 머물던 요가의 전통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
<기타>가 성립된 시기는 인도철학이 체계화되어 학파가 성립되기 시작한 시깅와 거의 동시대이다. ..
요가(yoga)믐 그 자체에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요가라는 말이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것이 역사적으로 형성, 발전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요가는 수세기를 거치는 동안 개인적인 정신적 각성 또는 깨달음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들 - 가장 초보적인 것에서 가장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정신적 기법과 이론 - 을 흡수, 통합함으로써 형성된 개념이다.  243

베다의 제식 주의에 요가의 요소가 결여될 때 나타나는 한계를 ‘형식주의’라는 말로 표현한다면 우파니샤드의 형이상학적 사고에 요가의 요소가 결여될 때 나타나는 한계의 ‘주지주위’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형식주의와 주지주의가 공통으로 드러내는 위험은 정신적 고갈, 생동감 결여, 직접적 체험의 결여 등으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개인적인 정신적 각성, 깨달음에 대한 구체적 체험을 추구하는 요가 전통의 완전 승리는 아직 미진했다.  248

<기타>와 요가
인도의 서북부로부터 들어와 인더스강과 쟘나강 사이에 자리를 잡고 브라흐만 계급의 주도하에 발전했던 아리안 족의 베다 문화는 기원전 6~7세기경부터 동쪽으로 확대되어 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철기 문화의 수입으로 여태껏 밀림지대였던 곳이 개간되어 농작지가 확대되고 생활이 윤택해짐에 따라 갠지즈강 중류 동쪽에는 여러 곳에 상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문화가 건설되었다. 이에 따라 촌락과 씨족 단위의 유대관계를 기반으로 형성되어 왔던 브라흐만교의 지위는 자연히 흔들리게 되었다. 더욱이 아리안 족의 동점(東漸, 세력을 점차 동쪽으로 옮기어 감)으로 인하여 원주민과의 인종적 혼합도 생기게 되어 정통 브라흐만 계급의 사회적 특권이나 베다의 종교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나 자이나교와 같은 새로운 자유사상적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연히 이러한 자유사상적 운동은 종래의 브라흐만교의 전통에 커다란 충격을 가하였다. 브라흐만교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베다의 제사의식과 이에 따르는 브라흐만 계급의 종교적, 사회적 권위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나 자이나교는 강한 윤리적 합리성에 입각한 종교ㅗ서 반제사주의적 성격을 지녔고 사회적으로도 평등주의적인 윤리관으로 인하여 브라흐만 계급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브라흐만교의 지도자들은 불교와 같은 자유사상적 운동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전통을 재정비할 필요를 느꼈다. 사실상 앞에서 살표본 바와 같이 불교 등이 표방ㅇ하는 자유사상적 경향은 이미 브라흐만교의 내부에서도 일어나 우파니샤드 사상의 배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브라흐만교 내부에서는 아리안 계통이 아닌 인도의 원주민들에게 깊이 뿌리 내리고 있던 토착신앙과의 결탁을 통하여 대중운도응로의 발전과 불교에서 비교적 등한시하는 생활규범으로서의 사회윤리체계의 확립에 힘쓰는 등 다방면에 걸친 재정비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재정비 노력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것은 기존의 요가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그것을 체계적을 발전시킨 것이다. 브라흐만교의 이러한 추세를 잘 반영해주고 있는 문헌은 기원전 약 200년경에 완성되었다고 여겨지는 서사시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이다. 특히 마하바라타 중에 있는 <기타>는 그 당시 요가의 전통과 관련된 브라흐만교의 사상적 경향이 집약적으로 나타나 있는 문헌이다.  248-250

<기타>는 박티 종교의 관점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종교, 철학적 관점을 모두 받아들인다. 베다의 제식 주의 관점도, 우파니샤드의 형이상학적 관점도, 요가 학파와 상캬 학파의 철학적 관점, 그리고 박티 종교의 관점까지 <기타>는 한 체계로 통합한다. 이러한 상호 이질적인 여러 관점을 한 체계 안에 승화시키는 <기타>의 관점이 바로 요가이다.  251

모든 것을 요가의 관점에서 통합한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을 오로지 마음과의 관련 하에서 설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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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은 고통을 요한다. 방해 없는 집중을. 그것이 열망하는 확실성에 이를 때까지, 반드시 즉각 얻어지는 것은 아닌 그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지켜보는 눈 없이 홀로 날아다닐 수 있는 하늘을. 그리고 프라이버시와 따로 떨어진 장소 - 서성이고, 연필을 질겅질겅 씹고, 휘갈교 쓰고 지우고 다시 휘갈겨 쓸 장소를.
방해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인 경우도, 더 많진 않더라도 그 못지않게 많다. 자기 안의 다른 자아가 휘파람을 불고, 문을 쾅쾅 두드리고, 사색의 연못으로 풍덩 뛰어든다. 그 다른 자아가 하는 말이란? 치과 의사에게 전화해야지. 겨자가 떨어졌어. 스탠리 삼촌 생일이 이 주 남았어. 물론 당신은 반응을 보인다. 그런 다음 작업을다시 시작하지만, 아이디어의 요정은 이미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린 뒤다.  13

자기가 자신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은 보다 어둡고 신기한 문제다.  14


속기나 문구는 모두 기록한 순간과 장소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 기록은 그게 무엇이든 내가 그걸 쓴 이유가 아닌 느낌의 체험으로 나를 데려간다. .. 내가 공책에서 포착하고자 하는 건 논평이나 생각이 아니라 그 순간이다.  22

노새의 기분을 아는 것처럼 굴지 말자.  35

시를 덮을 때는 펼칠 때와 달라야 한다.  123

고양잇과 동물들이 속도와 우아함으로 명성 높고, 검은 개미는 독재와 근면으로 유명하며, 야크와 황소들은 야수적인 힘과 온순한 성격으로 잘 알려져 있듯, 인간은 독창성으로 그 이름을 떨친다. 독창성이야말로 우리 종의 트레이드 마크다. 모든 인간은 열심히 활동하기를 갈망하며, 하루의 일은 무엇이든 새로운 것이다. 거기에 부아 명성, 행복에의 약속이 잇다. 그 누구라도 주위의 낡은 재료들을 모아 그것들을 분해하고 잘라서 새로운 방식으로 붙여 변형된 물질, 전에는 본 적 없는 바람개비, 새로운 색깔의 꽃, 네모난 달걀, 혹은 시 - 낡은 재료가 새로운 통찰로, 낡은 예가 신선한 은유로, 낡은 감정이 변화된 어법으로 다루어져서 낡은 것과 새것이 결합된 시 - 를 세상에 선사한다면 권태로울 이유가 없소 신적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새 창조물을 갖게 된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여기서 인간이라 함은 물론 남자와 소년, 여자와 소녀를 모두 아우르는 종의 개념이다. 특히 어린이는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시인의 목소리는 어린 시절에 인간적 사례, 시간과 체험의 역사 속에서 시작되지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인의 목소리는 첫 사례로 만난 시들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무언가를 행하고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기존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사로잡혀야 한다. 시를 사랑하고 시를 짓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시 한 편을, 그 다음엔 몇 편을 사랑해야만 한다. 우리가 결국 올리브라는 지중해 열매를 즐겨 먹게 된 건 올리브의 관념 때문이 아니라 한 입, 또 한 입 맛보며 더없는 행복에의 확신이 그 범주에, 그 열매 자체의 개념에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여를 통해, 체험을 통해 배우기 시작한다. 올리브를 입에 넣음으로써 배운다. 실제 시를 입 - 이 경우엔 마음 - 에 넣음으로써 배운다. 우리는 호기심과 관심, 직면 그리고 모방에 의해 배운다. 그런 체험과 노력을 통해 지성과 정신은 힘을 얻고 개성을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이러한 어릴 적 체험들 - 첫 시들 - 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124-125


‘나는 나로부터 벗어나서 가르치나, 그 누가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대가 누구든 나는 지금 이 시각부터 그대를 따라간다.
그대가 알아들을 때까지 내 말들은 그대의 귀를 간질인다.
- <나 자신의 노래> 중에서, 휘트먼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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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관, 다름, 그리고 머무는 빛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요한 일보다는 사소한 일에 습관적으로 행동할 때가 많다. .. 습관은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기보다는 우리를 지배한다고 볼 수 있다. 28

다름과 기발함은 달콤하지만, 규칙성과 반복 또한 우리의 스승이다. 29

우리 삶의 양식은 우리를 보여준다. 우리의 습관은 우리를 평가한다. 29

- 개 이야기
어떤 것들은 불변의 야생성을 지니고, 어떤 것들은 온순하게 길들여진다. 호랑이는 야생적이다. 코요테, 올빼미도 그렇다. 나는 길들여졌고 여러분도 그렇다. 야생적인 것들이 변하는 경우도 있지만 겉보기에만 길들여진 것이지 진짜 달라진 건 아니다. 54-55

자유로이 뛰어다니는 개들이 나무라면, 평생 목줄에 묶여 얌전히 걸어 다니는 개들은 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개들은 인간의 소유물 인생의 장식품밖에 안 된다. 그런 개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광대하고 고귀하고 신비한 세계를 상기시켜주지 못한다. 우리를 더 상냥하거나 다정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
목줄에 묶이지 않은 개들만 그걸 해줄 수 있다. 그런 개들은 우리에게만 헌신하는 게 아니라 젖은 밤이나 달, 수풀의 토끼 냄새, 질주하는 제 몸에도 몰두할 때 하나의 시가 된다. 58

- 완벽한 날들
몇 해 전, 이른 아침에 산책을 마치고 숲에서 벗어나 환하게 쏟아지는 포근한 햇살 속으로 들어선 아주 평범한 순간, 나는 돌연 발작적인 행복감에 사로잡혔다. 그건 행복의 바다에 익사하는 것이라기보단 그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에 가까웠다. 나는 행복을 잡으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행복이 거저 주어졌다. 62

- 에머슨 : 서문
문학의 최고 효용은 제한적인 절대성이 아니라 아낌없는 가능성을 지향한다. 문학은 답을 주기보다는 의견, 열띤 설득, 논리, 독자가 자신과의 싸움이나 자신의 곤경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것은 에머슨의 핵심이다. 그는 곧장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주제의 모든 면에서 어슬렁거린다. 친절한 몸짓으로 제안을 하고,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며 우리 눈으로 직집 보라고 말한다. 그가 완강히 주장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우리 스스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삶의 진수니까. 삶의 문제들에 대해 숙고하는 것, 정원에서 잡초를 뽑거나 소젖을 짜면서도 생각에 집중하는 것. 78

품위를 잃은 글은 중요성을 잃는다. 더욱이 영감을 주면서도 절도를 지키는 글을 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에머슨의 요령(비하의 의도를 담은 표현은 아니다)은 글의 소재는 ‘사물들’이면서도, 주제는 개념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희미한 빛에 지나지 않지만 예리한 직관의 눈빛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평범한 말에 놀라운 관념을 결합했다. 그는 이렇게 조언했다. “당신의 마차를 별에 매라.” “물방울은 하나의 작은 바다다.” “어리석은 일관성은 편협한 정신의 헛된 망상이다.” “우리는 표면들 위에서 살며 삶의 진정한 예술은 그 위에서 스케이트를 잘 타는 것이다.” “잠은 평생 우리 눈가에 머문다. 밤이 종일 전나무 가지에 머무는 것처럼 .” “영혼이 육체를 만든다.” “기도는 가장 높은 견지에서 인생의 사실들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다.” 이런 조언들을 들으면 그의 비범한 직관적 실천이 더 분명하게 이해되고 우리에게도 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 82

<일곱 박공의 집>
위대한 옛 소설들은 해가 갈수록 고풍스러워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탁월함이 빛을 잃어가는 건 아니다. 101

세상엔 몇 가지 이야기들밖에 없다. 사악함에 대한 이야기, 선에 대한 이야기, 사랑에 대한 이야기, 시간에 대한 이야기, 마법은 이야기하는 방식에 있다. 우리가 상상력을 통해 이야기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건 바로 표현력이니까. 그리고 그건 분명 모든 훌륭한 책들의 특별한 능력이다. 101

현 세기가 반짝거리는 새것이긴 하지만 우리는 무례한 호기심으로 옛 책들을 대해선 안 된다. 그 책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비록 우리와 표면적인 차이점은 있지만 기이하거나 우리와 다르지 않고 바로 우리라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진정한 즐거움을 주는 이야기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은 옛 희망과 명확성, 열정과 일탈, 자비와 심판을 나타내기에(문학은 숨김이 아니라 나타냄이니까) 공동서술의 일부이기도 하다. 102

가자미, 일곱
(가자미는 작고, 가시가 많고, 그리 중요하진 않지만 조화로운 물고기다)
세상에 시작하고 전진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연필은 없어. 우선 많이 쓰는게 최선이야.
어조가 틀리면 아무것도 맞는 게 없어.
마음의 무기력함은 글의 무기력함이 되지.
태양도 작업 스케줄이 있어. 눈도, 새들도, 초록 잎사귀도. 너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문장이 아무리 교묘해도 화를 숨길 수는 없어.
어떤 글은 한옆으로 제쳐놓고 잊어야 해. 어떠면 거기 소금과 후추를 더 쳐야 할 수도 있어. 아니면, 소금과 후추를 빼야 할 수도 있지.
말이 너무 많으면, 바른 말이라도, 시를 죽일 수 있어.
가끔 너는, 다른 무엇과도 다른, 달콤하고 전기가 통하는 듯한 창작의 나른함을 느낄 거야.
하지만 가끔은 예상했던 결과에 이르지 못한 실패를 견뎌야 해.
시는 바늘처럼 단순하든, 물레고둥 껍데기처럼 화려하든, 백합 얼굴 같든, 상관없어. 시는 말들의 의식(儀式), 하나의 이야기, 기도 초대, 아무런 현실감 없이 독자에게 흘러가서 마음을 흔드는, 진짜 반응을 일으키는 말들의 흐름.
무엇보다도, 일단 써봐. 노래해. 혈관을 흐르는 것처럼. 125-127


소위 문명시대로 불리는 이 시대의 위험성 중 하나는 이 영혼과 풍경, 우리 자신의 최고 가능성들과 우리의 창으로 보이는 경치의 관계를 충분히 인식하고 소중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만큼 우리에게도 세상이 필요하다. 은밀히, 친밀하게, 확실히. 우리에겐 종달새가 날아오르는 들판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새는 단순한 새 이상의 존재, 우주의 목소리다. 신성한 기쁨으로 충만한 힘찬 목소리. 물질 세계가 없다면 그런 희망은 산산조각 난다. 고갈된다. 야생의 세계가 없다면 그 어떤 물고기도 눈부신 빛을 발하며 물 위로 뛰어오를 수 없고, 그 어떤 사슴도 영원한 물처럼 부드러이 들판을 달릴 수 없다. 그 어떤 새도 날개를 펴고 자연의 계획까지도 넘어서는 자신감과 모험심과 용기를 품을 수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도.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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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 우파니샤드, 인도 철학과 사상의 바이블

우파니샤드는 인도 정신문명의 뿌리인 베다의 꽃이요 열매다. 베다 정신의 총합이 곧 우파니샤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베다의 마지막 결정체라는 뜻으로 우파니샤드를 베단타 철학이라 이른다. 베단타 철학은 우파니샤드의 내용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다른 이름이다.  13-14

우파니샤드 이전에 인도 최초의 고전적 경전인 베다가 신화와 제의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전개했다면, 우파니샤드는 신화와 제의적 겉치레에 종지부를 찍고 인간 내면의 각성과 탐구에 중점을 두는 세계관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구약성서의 모세 율법에 대해 신약성서의 예수가 사랑의 율법을 새롭게 천명한 것과 같다. 따라서 베다를 구약성서에 비유한다면, 우파니샤드는 신약성서에 비유되기도 한다.  15


우파니샤드는 어떤 철학인가 - 우주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가르침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다. 인더스 문명이 발원하던 기원전 3000년 무렵 이후 오랜 침묵의 세월이 흐른 뒤, 서부 아시아에서 아리아인들이 인도 대륙을 점령해 들어오면서 새로운 인도 문화를 꽃피운다. 그 문화의 꽃이 인도 초기의 고전적 종교 경전으로 손꼽히는 유명한 <리그베다>(Rig Veda)에 드러나 있다. 이 경전은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000년 무렵에 형성된 것으로, 우주 창조의 노래, 최초의 인간의 탄생 과정, 죽음과 장례의 노래, 그리고 제의와 각종 신들에 대한 찬가로 가득차 있다.
그 후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 500년간 <리그베다>에 나타난 고대 사상을 인간 내면의 세계와 결부시켜 철학적으로 발전시킨 고전적 지혜의 담론이 우파니샤드(Upanishads)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우파니샤드가 인도 문화와 종교, 사상의 꽃을 피우던 기원전 6세기 무렵에는 자이나교의 창설자 마하비라(Mahavira, 기원전 540~기원전 468)와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 기원전 563~기원전 483)가 나타나 동시대에 각각 다른 형태의 종교적 가르침을 펼치기도 했다. 이 시대에는 브라만(brahman) 계급을 중심으로 한 바라문교와 불교 그리고 자이나교가 널리 퍼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서기 1000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인도에서 불교의 위력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그 후 이슬람 문명의 침입으로 힌두 문명과 함께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문명과 충돌 또는 습합(習合)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19-20

10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도시 중심의 부와 중앙집중식의 권력이 와해되었고, 질서가 무너지면서 통제가 불가능해진 시기에 아리아인(‘고귀한 자’라는 뜻)들이 침입해왔고, 인더스 강의 지류가 변하는 지리학적 변화와 함께 찬란했던 고대 인더스 문명은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리아인들이 백지 상태에서 전혀 새로운 문명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인더스 문명은 잔존해 있었고, 남쪽이나 갠지스 강변에 흩어져 있던 피정복민인 비(非)아리안 민족 속에서도 인더스 문명은 전승되고 있었다. 바로 이들이 간직한 인더스 문명은 전승되고 있었다. 바로 이들이 간직한 인더스 문명이 아리아인들의 문화 속으로 유입되면서 또 하나의 위대한 문명, 곧 인도-아리안 문명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
인더스 문명의 원주민들이 농업을 중심으로 한 농부들이었다면, 아리아인들은 목축업을 위주로 하는 유목민들 이었다.  24

문학적 형태로 된 우파니샤드는 그 문헌의 수가 200개를 넘어선다. 하지만 대개 인도의 전통에서 그 수를 108개로 제한하고 있는데, 이는 <묵티카 우파니샤드>(Miktika Upanishad)에서 구원(해탈)은 108개의 우파니샤드를 공부해야 가능하다고 한 데서 비롯된다.  40

우파니샤드에서 진리란 특정 개인에 속한 것이 아니며 영원한 것이고, 영감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신의 계시와 인간의 응시(contemplation)라는 두 측면을 지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42

우파니샤드는 분명 체계적이고 짜임새 있는 철학적 성찰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정신적 각성과 계몽의 수단으로 작용하며, 고도의 추상적이고도 풍부한 영적 경험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추상적이라 해도 인간의 개인적 경험의 차원을 떠나 있는 것도 아니며 논리적 이성을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내면의 명상에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향한 진정한 지식의 추구라는 점에서 실천적 수행의 차원을 담고 있는 구원의 철학 체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파니샤드의 철학, 곧 브라흐마 비드야는 삶을 통한 지혜의 추구 그 자체다.  43

“진실로 먼저 브라만이 있었다. 그는 오직 그 자신에 대해 ‘나는 브라만이다’라고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이 되었다. 신들 중에 누구든지 이 사실을 진실로 깨달은 자는 그와 같이 되었다. 이것은 현자들이나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실로 현자 바마 데바도 이것을 알고 ‘나는 마누(Manu)였고 태양이었다’고 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이와 같이 ‘나는 브라만이다’라는 깨달음을 얻으면 이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신들도 이같이 브라만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하는 까닭은 깨달은 자는 신들의 아트만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자신과 브라만을 다르게 생각하면서 (그 자신의 아트만 외에)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자는 깨달은 자가 아니다. 그는 신들에게 희생되는 동물과 같다. 짐승들이 사람에게 봉사하듯 그도 신들에게 봉사할 따름이다. 한 마리의 짐승이 없어져도 기분이 나쁠 텐데 많은 짐승들이 없어진다면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신들은 인간이 (브라만을) 깨닫게 되는 것을 조항하지 않는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4.10)
우선 브라만의 우선성을 말하고 있다. … 브라만에게서 만물이 시작되고 만물이 그에게 귀속됨을 말한다. 그런데 그 브라만이 바로 깨닫는 자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이다. ..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 누구에게나 유효하다. …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 행위는 동물들이 인간에게 봉사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그러므로 자신과 브라만의 동일성을 깨닫지 못하고 제사나 드리는 행위는 짐승 같은 행위에 불과하다고 혹평한다.  44-45

“사칼리야가 말했다.
‘야즈나발키야여, 쿠루-판찰라의 브라흐마나를 경시하면서까지 그대가 안다고 말하는 바라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나는 신들과 신들의 기반이 되는 사방의 방향을 알고 있소.’
야즈나발키야가 대답했다.
‘그대가 신들과 그 신들의 기반이 되는 방향을 안다면 동쪽 방향은 어떤 신이라고 생각하오?’
‘태양신이오.’ 야즈나발키야가 대답했다.
‘그러면 태양신의 기반은 무엇이오?’
‘눈(眼, caksus)이오.’
‘눈의 기반은 어디요?’
‘형태(色, rupa)요.’
‘형태의 기반은 어디요?’
‘마음(hrdaye)이오. 마음을 통해 형태를 알 수 있기 때문이오. 오직 마음에만 형태가 기반할 수 있는 것이라오.’ 야주나발키야가 대답했다.
‘야즈나발키야여, 옳은 말씀이오.’”(<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I.9.20)  46-47

“‘남쪽을 그대는 어떤 신으로 여기시오?’
‘죽음의 신이오.’ 야즈나발키야가 대답했다.
‘그러면 죽음의 신의 기반은 무엇이오?’
‘사제에게 바치는 봉헌 제물이오.’
‘사제에게 바치는 봉헌 제물의 기반은 무엇이오?’
‘믿음이오. 믿음이 있을 때 사제에게 봉헌 제물을 바칠 수 있기 때문이오.’
‘그러면 믿음의 기반은 무엇이오?’
‘마음이오.’
‘마음을 통하여 믿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오. 실로 마음에만 믿음이 기반할 수 있는 것이라오.’ 야즈나발키야가 대답했다.
‘야즈나발키야여, 옳은 말씀이오.’”(<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I.9.21). 47-48

제사도 희생적 봉사도 중요하지만 우파니샤드는 브라만과 아트만을 이해하는 지혜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55



1 둘이 아닌 하나의 세계 - 우파니샤드의 불이론

“이제 실로 세 개의 세계가 있다. 인간의 세계, 조상의 세계, 신들의 세계가 그것이다. 인간의 세계는 자식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지 다른 수단을 통하여 되는 것이 아니다. 조상들의 세계는 의례와 같은 행위로 구제되는 것이고, 신들의 세계는 지혜로 획득된다. 실로 신들의 세계는 최상의 세계다. 그러므로 지혜를 찬양하라.”(<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5.16)  
현실적 인간의 세계와 죽은 조상들의 세계, 그리고 죽음이 없는 영원한 신들의 세계라는 세 개의 세계를 상정해놓고, 가장 중요한 세계는 바로 신들의 세계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신들의 세계는 과거처럼 동무르이 희생 제의 같은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지혜를 통해 획득되는 세계다. 그러므로 우파니샤드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지혜다. 산스크리트어의 ‘비드야’(vidya)는 엄격한 의미에서 ‘지식’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세속적인 지식이라기보다는 궁극적 실재를 아는 지식이다. 그런 점에서 이성의 감각에 기초한 지식이라기보다는 직관적 또는 계시적 통찰력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71-72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은 인도 전통 풍속이 관습적으로 지녀오던 카스트(Caste)의 굴레에 매여 있지 않다. 오히려 영적 우주의 세계로 인간의 영역을 확대시키고 있다. ‘그것이 바로 너다’라는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의 선언에서처럼, 인간은 더 이상 어떤 제도와 풍습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본질인 브라만, 그것(Tat)과 다르지 않다는 혁명적인 선언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다시 묻고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인간이 도달하게 되는 최종의 목적은 다음 세상에 더 좋은 하늘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카르마(karma, 業)의 우주적 법칙에서 벗어나 참된 영혼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우파니샤드가 베다의 내용을 중시하고 그것을 깊이 연구 계승하고는 있지만, 가장 중심이 되는 내용은 훌륭한 스승들의 개인적인 경험과 가르침을 토대로 하고 있다. 대표적인 스승들 가운데 야즈나발키야와 샨딜리야 같은 이들이 있으며, 이들이 제자들과 나누는 대화가 우파니샤드의 중심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그 중심 주제는 바로 ‘내가 곧 브라만’이라는 생각의 결론을 얻는 것이다.  78-79



2 위대한 실재, 만물의 근원 - 우파니샤드의 본령 브라만

도이센은 브라만의 사상적인 체계를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첫째, 신학(Theology)은 만물의 첫번째 원리로서의 브라만에 대한 교리이며, 둘째, 우주론(cosmology)은 우주를 형성하게 된 원리로서의 진화에 대한 교리다. 셋째, 심리학(Psychology)은 자신으로부터 전개된 우주 속으로 침투하게 되는 영혼으로서의 브라만의 출현에 대한 교리이며, 넷째, 종말론(Eschatology)과 윤리학(Ethics)은 죽음 이후의 영혼의 운명에 대한 교리와 그에 따라 요청되는 삶의 윤리다.  81-82

브라만의 속성과 본질을 이해하려는 대화 가운데 우선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호흡히었고, 그 호흡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었다. 동시에 호흡은 근원자로서의 브라만이다. 그런데 호흡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아닌 것’이고,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성찰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신앙과 사색’에 기초한다고 말한다. 이 ‘신아오가 사색’이 브라만을 이해하는 신학적 진술의 토대가 된다.
그다음 단계로 가면 신앙과 사색을 올바로 하기 위한 방편으로 견고하게 스승을 공경하는 것과 수행하는 가운데 절제와 집중이라는 실천이 요구된다. 수행은 무한함을 의식하는 기쁨 속에서 가능하다. 그 무한의식이 바로 자아의식과 결부되며 궁극적으로 브라만과 하나 되는 길이 된다. 브라만의 영원성 또는 불멸성의 자유에 이르는 과정에서 수많은 일과 학문과 언어와 노래 등은 부차적으로 존재하는 요소일 뿐이다.  94

인도의 정통 바라문들은 궁극적 진리인 브라만을 이해하기 위한, 그리고 브라만과 하나 되기 위한 이른바 구원의 길, 곧 해탈에 이르는 네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을 아쉬라마라고 부르는 데, 바로 인생의 네 가지 주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 첫 번째는 베다를 공부하는 학습기인 브라흐마차린(brahmacarin)이고, 두 번째는 제사의 의무와 선행을 수행하는 가주기(家住期) 그리하스타(Grihastha), 세 번째는 숲속에서 엄격한 금욕을 수행하는 은둔기 바나프라스타(Vanaprastha), 네 번째는 인생의 마지막 단계로 방랑 걸식하며 영혼의 해방을 추구하고 유행(遊行)하는 산야신(Sannyasin :  방랑 고행자)이자 비구(bhikshu)로서의 삶인 파리브라자카(Parivrajaka)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진정한 아트만, 곧 지고의 아트만을 깨닫고 해탈을 얻게 되는 것으로 설명.  95

“아트만은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neti nnety atma). 이해될 수 없기에 ‘이해될 수 없는 자’이며, 파멸될 수 없기에 ‘파멸될 수 없는 자’이고, 집착하지도 않기에 ‘집착하지 않는 자’이며, 얽매여 있지도 않고 고통을 받지도 않기에 ‘고통이 없는 자’다  …… 깨달은 사람은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그것이 그에게 괴로룸을 주지 못한다.”(<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V.4.22)  96

“모든 베다가 말하고(padam) 있고 모든 고행자가 언급하는, 그리고 베다의 지식을 공부하는 생도의 삶을 살면서 열망하게 되는 그 단어를 그대에게 한마디로 말하겠다. 그것이 옴이다.” (<카타 우파니샤드> I.2.15)
모든 베다라는 것은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주르베다> 아타르바베다>를 의미한다. 이 베다가 말하는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이 바로 ‘옴’이라는 것이다.  104-105

‘옴’의 뜻과 기능은 그리스도교에서 ‘그렇게 될 줄로 믿는다’는 의미로 말하는 ‘아멘’(Amen)과 같다.  106

“악의 길을 단념하지 않는 자, 마음의 평정을 얻지 못한 자,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는 자,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자는 올바른 지식으로도 아트만에 도달하지 못한다.” (<카타 우파니샤드> I.2.24)  113

“빛과 순수의 본질로 인간의 내면에 있는 이 아트만은 진리와 고행과 (아트만을 아는) 올바른 지혜, 그리고 꾸준히 정숙함을 유지하는 것으로 얻어진다. 불완전한 것들을 떨쳐버리는 금욕적인 수행을 통해 그는 아트만을 보게 되리라.” (<문다카 우파니샤드> III.1.5)
압축해서 말하면 진리와 고행이다. …
고행으로서의 마음의 집중 또는 마음의 평정 이외에도 여전히 금욕적 수행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때의 금욕은 정숙함을 유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비움으로서의 도덕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114

아트만(브라만)에 이르는 영성적 삶이 윤리 차원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를 살펴보았다. 브라만에 이르기 위해서는 첫째, 올바른 스승을 일과 다섯 가지의 엄격한 수행이 요구되며, 그 다섯 가지 수행은 내면의 평정, 자기억제, 비움, 인내, 집중이다. 이러한 수행의 조건들이 몇몇 다른 부차적인 수행들과 함께 후기 우파니샤드의 전체적인 내용과 골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114-115



3 아트만을 알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니 - 브라만에 이르는 초월적 지식

우파니샤드에서 아트만은 북과 북소리의 비유를 통해 상징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북을 칠 때 들리는 다양한 소리를 모두 파악할 수는 없지만 북과 북치는 사람의 두들김을 알면 소리도 구분하여 들을 수 있다. 고동을 불면 밖으로 들리는 고동 소리를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고동과 고동 부는 방법을 알면 그 소리를 구분하여 들을 수 있다. 비나(vina: 기타와 유사한 고대 현악기)를 연주할 때 들리는 소리를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비나와 비나의 연주법을 알면 그 소리를 구분하여 들을 수 있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4.7~9)
아트만이 북 같은 악기라면 우주의 현상은 그 악기의 연주 소리에 비유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연주 소리의 이해는 오직 악기를 알 경우에만 파악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우주의 다양한 현상도 아트만을 이해함으로써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139-140

“그것에 의해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되고 감지할 수 업는 것을 감지하고 이해될 수 없는 것이 이해된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I.1.3)
모든 참 지식은 아트만과 관련된 진리를 알지 못하고서는 참 지식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다. … 아트만 이외의 모든 현상적 사물세계는 앞서본 바와 같이 ‘오직 명칭’(nama eva)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140

“아트만은 감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자기원인을 자기는 스스로 존재하는 아트만이 우리의 감각 기관을 밖으로 향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감각적 인식은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지 않고 밖으로만 향한다. 그러나 일부 지혜로운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찾아 그의 눈을 내면으로 돌려 아트만을 발견한다.” (<카타 우파니샤드> II.1.1)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부세계를 바라보고 거기에 만족하고 산다. 그러나 일부 영혼이 성숙한 지혜로운 자들은 내면의 세계로 주의를 돌려 아트만을 찾고 불멸을 얻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감각이 쓸데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적절히 잘 조절되고 통제되면 점차 높은 단계의 초월적 지식으로 가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감각의 눈’에서 ‘초월의 눈’으로의 전환이 필요할 뿐이다. ‘초월의 눈’은 영적인 눈이다. 우파니샤드는 일반적으로 감각을 조절하라고 말하지 억압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영적인 추구는 신적 계시 속으로 들어가는 영혼의 지고한 여행이다.  141-142



4 만물의 근저에 실재 주의 실재로 내재하다 - 만물이 발생하는 원리

“실로 그대들은 모두 이 바이쉬바나라 아트만을 부분적으로만 알고 그대들의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 바이쉬바나라 아트만(우주적 자아)을 자신의 아트만(개체적 자아)으로 알고, 또는 (우주를 측정하는)새로운 특정 도구로 알고 명상하는 자는 모든 세상에서, 모든 존재들 가운데서, 모든 개체적 자아들 속에서 자신의 양식을 삼습니다. 이러한 바이쉬나바라 아ㅡ만에서 머리는 훌륭한 바람이요, 몸통은 광대한 가득함이며, 오줌통은 부유함이며, 발은 땅입니다. 실로 가슴은 제단이며, 머리카락은 거룩한 잔디요, 심장은 가르하파티야의 불입니다. 마음은 안바하르야-파차나 불이며, 입은 아하바니아 불입니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18.1~2)
바아쉬나바라 아트만, 곧 우주적 자아는 다양한 형태의 개체적 자아 속에 존재하지만, 그것을 부분적으로 바라보고 숭배할 것이 아니라 바로 모든 사물 속에 공유되고 있는 개체적 자아의 전체적 연관성을 바라보고, 그 연관성 속에 내재한 통일적 원리로서의 우주적 아트만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게 될때 비로소 자신의 개체적 자아도 우주적 자아와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게 된다는 말이다.  154

아트만은 우파니샤드에서 브라만과 동일시되고 있는 개념이지만, 다음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되기도 한다. 우선 인간의 ‘자아’ 그 자체를 지칭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자아’라고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것에 대해 도이센은 세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첫째, 몸속에 지닌 육체상의 자아다. 둘째, 육체로부터 자유로운 개별 영혼의 자아다. 이것을 우리는 인식 대상과 대조되는 인식 주체로서의 자아라고 부른다. 셋째, 지고(至高)의 영혼으로서 인식의 주관과 객관을 더 이상 구별하지 않는 초월적 인식의 주체다.  155

그런데 다른 본문인 <타이티리야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아트만은 좀더 세분화되어 다섯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그것은 생명과 의지와 지식이라는 세 가지 원리 속에서 각각의 아트만이 상호 작용한 결과다. 다섯 종류의 아트만은 안나마야(Annamaya), 프라나마야(Pranamaya), 마노마야(Manomaya), 비즈나마야(Vijnamaya) 그리고 아난다마야(anandamaya)인데, 이들은 각각 인간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의 아트만이다.
이 다섯 종의 아트만 가운데 앞의 넷은 마지막 다섯 번째인 핵심적 아난다마야 아트만을 둘러싸고 있는 외형적 아트만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이들 아트만을 차례로 하나씩 궁구해가면서 그 외형을 벗겨보면, 마지막 남은 다섯 번째 단계의 아트만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 본질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다섯 가지의 아트만을 차례로 살펴보자.
첫 번째의 안나마야 아트만은 음식에 의존하는 아트만이다. 이것은 육체의 몸을 입고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진 성육화(成肉化)된 아트만이다. 다시 말해 성육신 아트만이다 그리하여 육체의 감각적 기관들이 모두 아트만의 부분을 이룬다.
두 번째의 프라나마야 아트만은 생명의 호흡에 의존하는 아트만이다. 이 아트만은 자연적 생명의 원리다. 그 주된 부분은 생명의 호흡과 관꼐되며 날숨, 들숨을 관장한다. 동시에 이 아트만은 우주적 의미로도 적용되어 우주 공간이 모두 이 아트만의 몸체요, 땅은 그 토대가 된다. 이 아트만을 넘어서 한 단계 더 들어가면 세 번재의 아트만을 대하게 된다.
세 번째의 마노마야 아트만은 마음작용(의지)에 의존하는 아트만이다. 인간의 마음(manas)작용에 의존하는 이 아트만에 대해서는 이미 네 개의 베다와 브라흐마나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과 신들에게 부여된 이 아트만은 인간의 의지작용의 원리에 따라 작용하는 것으로, 주로 인간의 이기적 욕망의 실현을 위해 작용하는 아트만이다. 대체로 베다의 제사 행위와 관련되어 많이 언급되는데, 인간적 욕망의 실현에 적용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네 번째의 비즈나마야 아트만은 지식에 의존하는 아트만이다. 앞서 언급된 것들보다 더욱 심층적인 아트만으로, 제사와 노동등의 행위에서 찬가를 노래하거나 지식을 제공하는데 관련되는 아트만이다. 이때는 각각 독립적으로 신성을 자각하고 예배하게 되는데, 이런 단계도 마침내 외투처럼 벗어버려야 하는 존재다. 진정한 아트만이 바로 그다음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의 아난다마야 아트만은 환희에 근거한 아트만이다.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의 세계에 근원적으로 자리한 이 아트만은 환희(ananda), 곧 무한한 기쁨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환희 앞에서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 외에 모든 단어와 사고가 물러선다.” 더 이상 지식의 대상이 없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경험적 실재의 지식과 달리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으며 의식적으로 의식할 수도 없는 무의식의 비실재(not-reality)다. 이는 경험적 실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실재라고 표현한것으로, 실재가 없다는 뜻의 무실재(un-reality)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아트만은 환희의 존재 그 자체로, 환희를 창조하는 자아기도 하다.  161-163

“실로 처음에 비존재(asat:드러나지 않은 것)가 있었다. 실로 그러부터 존재(sat:드러난 것)가 생겼다. 그 자신이 영혼이 되었다. 그리하여 ‘멋지게 만들어졌다’(sukrtam)고 불린다. 실로 그 ‘멋지게 만들어진 자’야 말로 존재의 본질이다.
이 본질을 깨닫게 되면 누구나 환희를 누린다. 대공 속에서 이러한 환희가 없다면 실로 그 누가 숨을 쉬며 살 수 있을까? 환희를 가져다주는 자가 바로 그다.
보이지도 않고 형체도 없고 규정할 수도 없으며 지지할 수도 없는 그를 지지함으로써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된다면 아무것에도 두려움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를 깨닫기 전까지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 실로 ‘제대로 명상을 하지 못하는 지식인’ 들에게는 두려움이 된다.” (<타이티리야 아파니샤드> II.7.1)  165

환희(ananda)와 두려움(bhaya)은 인간의 근원적 물음이요 해답이다. 두려움이 있는 한 환희는 없고, 환희가 있는 한 두려움은 없다. 이 둘은 절대적 상대다. 아트만의 세계가 환희의 세계요 창조의 세계라면 아트만이 아닌, 다시 말해서 비본질적 세계는 두려움의 세계다. 두려움을 불안하다. 그 불안의 감정은 ‘타자’에 대한 감정에서부터 시작된다. 타자를 넘어선 ‘하나 됨’의 의식 속에서는 불안이 사라진다. 아트만의 세계는 바로 이 ‘타자를 넘어선 하나 됨’의 세계이기에 불안은 근원적으로 해소되고 환희만 춤을 춘다. 166-167



5 상징 안에서만 존재하는 존재 - 브라만의 상징들

신에 대한 찬가로서 힌두교 최초의 경전인 <리그베다>나 그것을 노래한 <사마베다>도 결국 이 ‘옴’에서 하나가 된다. 요컨대 모든 베다의 최종 결정판은 ‘옴’속에 다 들어 있다는 비밀스런 상징적 가르침이다. 특히 <리그베다>와 <사마베다>가 옴을 통해 ‘짝이 되어 하나가 된다’는 표현은, 성적 결합으로서의 ‘하나 됨’을 뜻하기도 하는 ‘미투나’(mithunam)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187



6 존재와 의식과 환희의 브라만 - 브라만과 아트만의 세 가지 본질적 특성

존재로서의 브라만
“만물의 근원인 그 미세한 존재를 세상 만물이 아트만으로 삼고 있다. 그 존재가 진리다(tat satyam), 그 존재가 아트만이다(sa atma), 그것이 바로 너다(tat tvam asi), 슈베타케투야.”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I.8.7)
여기서 우리는 존재가 진리요 아트만이며 더 나아가 ‘그것이 바로 너 자신이다’라는 진술을 듣게 된다. ‘그것이 바로 너다’라는 이 유명한 명제, ‘타트(그것이) 트밤(너) 아시(이다)’는 우파니샤드 전체에서 ‘진리 중의 진리’라는 말로 설명된다. 너 자신이 우주의 근원이며 궁극적 진리라는 충격적인 선언은 ‘참 나’로서의 아트만이 바로 존재 그 자체의 뿌리요 진리라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그 존재가 진리다’(tat satyam)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그 존재가 아트만이며(sa atma) 바로 너 자신’이라고 말한 것이다.  211-212

의식으로서의 브라만
“이것이 소(牛)다, 이것이 말(馬)이다라고 말할 수 있듯이 모든 것 속에 깃들어 있는 아트만으로서 가까이에서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브라만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그것이 아트만이오.’
‘야즈나발키야여,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그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보는 것을 보는 자를 보지 못하고(na drster drastaram), 듣는 것을 듣는 자를 듣지 못하고(na sruter srotaram srnuyah),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는 자를 생각하지 못하고(na mater. Mantaram manvithah),  깨닫는 것을 깨닫는 자를 깨닫지 못하는 법이오(na vijnater vijnataram vijaniyah). 그가 모든 것 속에 깃들어 있는 그대의 아트만이오. 그 밖의 모든 것을 덧없이 소멸되는 것(artam)이오.’
그러자 우사스타는 침묵했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I.4.2)
이 대화에서 우리는 앎의 문제, 곧 깨달음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전 감각적 과정을 거쳐서 결국 터득하게 되는 그 과정에서 감각과 인식을 주관하는 자, 내면의 존재, 즉 아트만을 깨닫는 것이 요청되고 있다. 보는 자를 보고, 듣는 자를 들으며, 생각하는 자를 생각하고, 깨닫는 자를 깨달을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아트만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밖의 것을 본질적인 것이 되지 못하여 변화 속에서 곧 소멸되어버리고 마는 것들이다. 이 모든 과정에 깨달음이라고 하는 ‘의식’의 차원이 브라만/아트만의 실체를 구성하고 있다. 216-218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에서 마이트레이에게 들려주는 비유에 의하면, 의식으로서의 이 아트만은 바다와 같아서 모든 물이 그곳에서 모여드는 것 같은 ‘하나의 도달점’(ekayanam)으로 설명된다. 또 아트만을 인체의 감각 기관에 비유하여, 피부는 모든 감촉을 느끼는 하나의 도달점이며, 혀는 모든 맛을, 코는 모든 냄새를, 눈은 모든 형태를, 귀는 모든 소리를 감지하고, 마음은 모든 생각을 감지하고 의식하는 하나의 도달점이라는 말한다. 또한 두 손은 모든 행위가 하나로 수렴되는 도달점이며, 생식기는 모든 기쁨이, 항문은 모든 배설이, 두 발은 모든 움직임이, 목소리(언어)는 모든 베다가 하나로 수렴되는 도달점이다.
의식으로서의 브라만은 이와 같이 ‘하나의 도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이 이 하나의 의식 속으로 수렴된다는 의미다. 역설적으로 이 의식은 다시 모든 만유 속에 편재하게 된다.  219

환희로서의 브라만
“이제 카홀라 카우시타케야(Kahola Kausitakeya)가 물었다. ‘야즈나발키야여, 곧바로 현존하고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브라만, 곧 모든 것들 속에 깃들어 있는 아트만에 대하여 설명해 주시오.’
‘모든 것들 속에 깃들어 있는 그것이 그대의 아트만이오.’
‘야즈나발키야여, 모든 것 속에 무엇이 들어 있다는 것이오?’
‘배고픔과 목마름, 슬픔과 미혹, 늙음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 들어 있소. 현자는 그 아트만을 알고, 자손에 대한 갈망(esana), 부에 대한 갈망, 세속적인 욕망에 대한 갈망을 버리고 수도승(수행자)의 삶을 살지요. 자손에 대한 갈망은 부에 대한 갈망이며, 부에 대한 갈망은 세속적인 갈망으로 이들 모두 갈망에 불과할 뿐이오. 그러므로 현자는 깨달음(공부)을 얻은 후에 어린아이처럼 살기를 꿈꾸지요. 그는 깨달음을 얻은 후 어린아이처럼 살면서 모든 것을 아는(nirvidya) 성자(munih)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그는 침묵하거나(maunam) 침묵하지 않거나(amaunam) 브라만을 아는 자(Brahmana)가 되는 것입니다.’
‘브라만을 아는 자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그는 무슨 행동을 하게 되든지 브라만을 아는 자로서 행동하게 됩니다. 브라만을 아는 지혜 외에는 일체가 덧없을 뿐입니다.’
그러자 카홀라 카우시타케야는 입을 다물었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I.5.1)
본문에서는 고통이라는 문제와 브라만/아트만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엄연히 현존하는 고통과 슬픔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현자 야즈나발키야의 대답은, 배고픔과 목마름과 슬픔 등 생로병사가 현존하지만 그 현존하는 고통을 초월(극복)하는 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이 브라만이요 아트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초월하게 하는 브라만과 아트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모든 고통의 근원이 ‘갈망(esana, kamah)임을 알고, 그것을 극복하는 공부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며, 그 결과로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상태(balya)’를 유지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상태’의 문자적 의미는 ‘자기중심적 지식의 철저한 비움’(jnana-bala-bhava)이다. 이것을 이른바 ‘비움의 영성’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갈망의 극복으로서의 ‘초월’은 ‘비움’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순수한 비움의 상태에 이를 때 비로소 브라만을 알게 되고 동시에 브라만이 되어 브라만으로서 행동하게 된다. 그 순수함 속에 이미 브라만과 아트만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
어린아이처럼 산다는 것은 직접적이고 단순한 데서 오는 순수성을 말한다.  222-225

깨달음 이후에 얻게 되는 침묵(mauna)은 말을 삼가는 것을 명상적 삶에 도움이 된다. … 실존 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침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병들어 있다. 만일 내가 의사라면,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충고를 부탁한다면 나는 말할 것이다. ‘침묵을 창조하라’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침묵할 수 있도록.”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자라면 불필요한 말을 삼갈 것이며, 동시에 말을 할지라도 시끄럽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고통의 이해에서 출발하여 그 근원이 되는 갈망과 초월의 문제를 비움의 차원에서 논의했다. 그리고 그 비움의 결과는 어린아이처럼 사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226

우파니샤드에서의 환희, 곧 지복(至福)은 브라만의 속성이나 또는 어떤 상태를 말한다가보다는 오히려 브라만의 독특한 본질 그 자체다. 굳이 속성이라고 말한다면 브라만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브라만은 환희를 ‘지닌 자’(anandin)라기보다는 환희(ananda) ‘그 자체’라는 뜻이다. 이러한 브라만과 환희(아난다)의 동일시는 두 가지 견해에 기인하는 것이다. 첫째는 주관과 객관의 대립적 구별을 넘어선 깊고 꿈 없는 잠의 상태로서 브라만과 일시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다는 견해다. 둘째는 모든 고통이 사라진 상태로서의 더없는 기쁨이다.  227

“의식으로서의 이 존재(브라만과 아트만)가 깊은 숙면의 상태에 들면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 채 심장으로부터 온몸에 분포되어 있는 ‘히타’(hitah:선행을 베푼다는 뜻)라 불리는 칠만 이천 개의 정맥 속으로 흘러들어와 심낭 쏙에 머물게 된다. 어린아이가 그리하듯, 또는 훌륭한 왕이나 훌륭한 사제가 그리하는 것처럼 지극한 환희(atighnim anandasya)의 안식을 즐기듯 의식으로서의 브라만과 아트만도 그러한 환희 속에 안식한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1.19)
위의 본문 속에서 우리는 브라만과 아트만의 ‘존재’가 어떤 상태로 ‘의식’하며 어떤 상태로 ‘환희’를 누리는가 하는 문제를 동시에 보게 된다. 그것은 아트만이 몸의 중심부가 되는 심장에서 생명을 공급하는 혈맥으로 이어진 정맥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가서 다시 온몸으로 돌아오는 과정 속에 존재할 뿐 아니라, 깊은 숙면의 상태에서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는 의식 그 자체로서 지극한 환희를 즐긴다. 말하자면 주객 도식을 극복한 대상적 의식이 없는 주체적 의식이다.  227-228



7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 - ‘네티 네티’의 브라만

“모든 방향에 모든 생명이 있다. 그러나 아트만은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 이해될 수 없기에 ‘이해될 수 없는 자’이며, 파멸될 수 없기에 ‘파멸될 수 없는 자’이고, 집착하지도 않기에 ‘집착하지 않는 자’이며, 얽매여 있지도 않고 고통을 받지도 않기에 ‘고통이 없는 자’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V.2.4)
… 아트만은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라는 부정의 진술이다. 이 진술이야말로 브라만과 아트만 이해의 초석이 되는 선언적 명제다.  234

모든 생명이 사방에서 숨을 쉬고 있지만 그 숨의 근원적 실체를 감각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파악할 수 없기에 그는 파악되어지지 않는 자이며, 우주는 끊임없이 생멸을 거듭하면서도 파멸되어지지 않는 것처럼 파멸되어지지 않는 불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으나 이해되어지지 않는 불가지한 존재로 남게 된다.
그렇다면 그 불멸의 브라만과 아트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거듭 ‘’부정의 길’을 통해 더듬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많은 인간은 하느님을 느끼고 감지한다. 다만 그 하느님은 인간마다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다르게 감지될 뿐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는 또 별개의 논의거리다. 허상과 실상,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브라만과 도(道)와 하느님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각각 별개의 존재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도 또 다른 문제제기가 된다. 우리는 지금 우파니샤드의 체계 속에서 브라만과 아트만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인 만큼 어디까지나 우파니샤드 현자들의 이야기에 주목할 뿐이다.  235-236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다.
‘이 물에 소금을 담그고 내일 아침에 오너라.’
아들은 그대로 했다.
아침이 되자 아버지는 아들 슈베타케투에게 말했다.
‘네가 어젯밤에 물에 담근 소금을 꺼내 오거라.’
아들은 완전히 녹아버린 소금물에서 소금을 찾을 수 없었다.
‘이 한쪽 끔에 있는 물 표면의 맛을 조금 보거라 어떠냐?’하고 아버지는 물었다.
‘짭니다.’ 아들이 대답했다.
‘이제 물 가운데 표면의 맛을 조금 보거라. 어떠냐?’
‘짭니다.’
‘이제 물 반대쪽 끝 표면의 맛을 조금 보거라. 어떠냐?’
‘짭니다.’
‘그러면 이제 물을 버리고 내게 오거라.’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아들은 그대로 했고,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소금은 항상 그대로 있음을 알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내 아들아, 실로 순수의 존재가 여기 있어도 너는 알지 못했구나. 실로 그 존재는 여기 있는 것이다. 만물의 근원인 그 미세한 존재를 세상 만물이 아트만으로 삼고 있다. 그 존재가 진리다. 그 존재가 아트만이다. 그것이 바로 너다, 슈베타케투야.’”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I.13.1~3)
‘그것이 너다’라는 선언이 나오기까지 아버지는 아들에게 소금물의 비유를 통해 아트만의 실상을 가르치고 있다. 이 선언은 우파니샤드의 가장 위대한 진술 가운데 하나다. ‘그것이 너다’라는 표현은 직설적이기는 하지만, 아트만을 직접 이해시킬 수 없는 언어의 한계로 인해 비유를 통해 설명한 결과로서의 직설적 표현이다.  239-241

“아트만, 그는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멀리 가 있고 누워 있으면서도 어느 곳이든지 간다.
기뻐하기도 하며 기뻐하지 않기도 하는 신, 그를 나 외에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카타 우프니샤드> I.2.21)
브라만을 이해하는 길은 ‘네티 네티’라는 ‘부정의 길’밖에 없음을 말해왔다.  241-242

<이샤 우파니샤드>의 진술처럼 아트만은 규정할 수 없는 존재로,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움직이는, 또는 움직이기도 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그리고 이 세상 안에도, 또는 이 세상 밖에도 존재하는, 논리를 초월한 존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부동의 동자(不動의 動者)와 유사한 개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절대적 존재가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남을 움직이는 창조적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면, 우파니샤드의 존재자인 브라만/아트만은 ‘자신이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움직이는’, 또는 ‘움직이기도 하고 움직이지 않기도 하는’ 역설적 초논리적 존재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런 점에서 불가지적 존재라는 것이다.  242

“하늘과 그 모든 것을 넘어서, 모든 것 위에 더없이 높은 세계의 저편에 빛나는 빛이 있나니, 실로 그것은 여기 인간의 내면에서도 빛나는 푸루샤의 빛과 같은 것이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III.13.7)
모든 우주 위에서,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서 영원히 빛나는 아트만도 ‘인간의 내면에서 빛나는’(antaah puruse jyotih) 존재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우주적 원리가 곧 인간 내면의 영적 원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의 진술에 의하면, 이 불멸의 아트만은 땅에 머물면서 그 ‘속에서 움직이게 하는 자(아트만)’요, 물에 머물면서 그 ‘속에서 움직이게 하는 자’며, 불에 머물면서 그 ‘속에서 움직이게 하는 자’다.  256



8 이 세계 모든 것이 브라만이다 - 브라만과 세계

브라만의 우주적 원리, 즉 브라만이 세계와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 도이센은 이를 네 가지 범주 속에서 체계화하고 있는데, 인도 사상의 핵심적 분류법인 실재론(realism), 유신론(theism), 범신론(pantheism), 관념론(idealism)이 그것이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실재론적 사고에 입각하면 물질(질료)은 신이나 영원성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신은 그리스 신화의 데미우르고스처럼 단지 세계를 만든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창조력이 행사되는 순간 물질 그 자체는 별개의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상키야 철학이 말하듯이 원형적 인간의 푸루샤와 물질적 세계의 원초적 원리인 프라크리티(prakrti)가 이원화되어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째, 유신론적 세계관에 따른 브라만의 이해다. 이는 신이 무(無)에서 세계를 창조했다는 사상으로 구약성서의 하느님과 유사한 개념이다. 이 유신론은 점차 범신론적으로 기울어간다. 신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서 신 자신이 세계 속으로 스며들어 세계의 실체가 신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셋째, 유신론적 세계관에서 변형된 범신론이다. 신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그 자신을 세계로 변형시킨 결과일 뿐이라는 관점이다. 일단 창조된 물질이 신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된 세계 그 자체가 실재이며 무한할 뿐 아니라 신이 세계를 떠나 따로 독립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며, 동시에 창조된 세계 그 자체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이라는 용어와 세계라는 용어는 동의어가 된다.
넷째, 관념론이다. 신만이 실재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실재일 수 없다. 우주는 오직 공간적으로 신의 연장에 불과하며, 구성된 몸체는 실로 비실재적인 것이다. 그것은 오직 환영에 불과할 뿐이다. 외형적으로 드러난 모든 요소들은 신이 될 수 없고 오직 신의 반영물일 뿐이며 신적인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261-262

주(主)라는 뜻을 지닌 ‘이샤’(Isa) 또는 ‘이슈바라’(Isvara)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
“주(Isa)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이 결합되어 모든 만물을 지탱하고 있다. 주가 아닌(anisas) 개체 아트만(catma, 또는 개체 영혼)은 그 자신의 기쁨(향락)으로 얽매이게 되지만, 신(devam, 아트만)을 알게 됨으로써 모든 족쇄에서 해탈을 얻게 된다.”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 I.8)
모든 만물을 지탱하는 자로서의 아트만이 이제 ‘주’라는 인격신으로 불리고 있다. 동시에 ‘주’가 아닌 개체 영혼은 자신이 추구한 향락으로 인해 세속적인 것들에 얽매이게 된다. 그러나 개체성에서 벗어나 신적인 우주적 통치자로서의 아트만을 깨닫게 됨으로써 모든 억압과 굴레에서 벗어나 참된 해방을 맛보게 된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의 본문에 의하면, 이 불멸의 아트만은 지고(至高)의 아트만으로서 또 다른 이름 ‘하라’(Hara)로도 불린다.
“멸망할 성질 프라드하나(Pradhana, 性質), 멸망하지 않는 불멸(amrtaksaram)의 하라(主), 멸망할 것과 멸망하지 않을 영혼(아트만) 이 두 가지를 오직 이 유일한 신(하라)이 통치한다. 이 하라를 명상(abhidhyana)하고, 그와 연합하여 그를 점점 더 깊이 숙고함으로써 모든 세상의 환영(visva-maya)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 I.10)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아트만의 신명(神名)인 ‘하라’를 접하게 된다. 하라는 세계의 파괴와 재생의 역할을 담당하는 시바(Siva)의 여러 이름 가운데 하나인데, 샹카라에 의하면 하라는 ‘무지(無知)를 제거한 자’라는 뜻을 지닌다. 이 불멸의 신 하라는 멸하는 것과 멸하지 않는 것을 모두 통치한다는 점에서 지고의 신, 곧 파람 이슈바라로서의 브라만/아트만이다.
이 지고의 신과의 합일은, ‘그에 대해 명상’함으로써 그와 연합을 이루게 되어 결국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누리게 되는 것을 말한다. 브라만과의 합일은 근본적 실재와의 합일이며 내적 실재와의 참된 연합이기에 ‘스스로 존재함’에 이르는 해탈과 다르지 않다. 그 해탈은 동시에 모든 ‘세상의 환영’(visva-maya)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이것은 일종의 브라만의 열반, 곧 ‘브라마-니르바나’(brahma-nirvana)이다.  273-276

“움직이는(jagat:변화하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신(Isa:님)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므로 비움으로 그대의 즐거움을 찾고 다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샤 우파니샤드> 1)
…. ‘이샤’(Isa)라고 표현되고 있는 신은 ‘이시타 파람 이슈바라’(Isita paramesvarah)의 의미로, ‘지고의 신 이슈바라’라는 뜻이다. 세계는 이 지고의 신에게 깊이 싸여 있으며, 또한 신들의 거처로 표현되고 있다.
이 세계는 ’변화하는 것’(jagat)이다. 그러므로 ‘비움으로써 즐거움을 찾으라’(tyaktena bhunjitthah)고 말한다. 우주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변화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 무상(無常)을 알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비움’(tyaga)은 아집(我執)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쁨, 곧 환희가 비움에서 온다는 주장은 동서의 주요 경전들이 이미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아님을 알진대, ‘집착하지 말고’(magrdhah) 다만 ‘즐기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들에 핀 개나리와 산수유가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알 때 진정으로 그 꽃을 즐길 수 있듯이 말이다.  276-279



9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을 얻다 - 해탈

아트만은 ‘존재’(being)이지 ‘되어가는 존재’(becoming)가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아트만이 ‘되어감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새로운 형태로의 변형이 아니라 본래적 자아(아트만)로서의 존재를 발견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 처음부터 ‘존재’ 그 자체로 항구여일(恒久如一) 할 뿐이다. 변화하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무상함이 없는 아트만, 곧 인간 내면의 아트만이자 동시에 모든 만유의 총합이며 실재가 되는, 그리하여 만유를 창조하고 지탱하고 보존하는 아트만을 깨닫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305-306

“지고의 브라만을 깨닫는 자(paramam brahma veda), 그가 브라만이 될 것이다. 그의 가문에는 브라만을 알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그는 고통을 넘어서며 죄악을 넘어선다. 그는 얽힌 속박의 매듭을 풀고 불멸의 존재로 해탈을 얻게 된다(vimukto’mrto bhabati).” (<문다카 우파니샤드> III.2.9)
.. 결국 문제는 ‘깨달음’(veda)에 있다. 그런데 그 해탈이란 ‘깨달음으로 얻어지는 결과’라기보다는 ‘깨달음 그 자체 속에 이미 해탈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306-308

“깨달은 자는 죽음을 보지 않고, 질병도 슬픔도 없다. 그는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을 얻는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II.26.2)
깨달음을 얻은 자는 이미 세계 그 자체가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얻을 것도 없어지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얻은 자가 되는 셈이다. 이 같은 상황을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에서는 “흑암도 없고 밤낮도 없고 존재와 비존재의 구별도 없는 오직 그 불멸의 유일한 존재만 있을 뿐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상의 진술을 토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 즉 ‘깨달음은 곧 해탈’이라는 방정식을 얻게 된다.  309

경험적 측면에서 볼 때 아트만은 이해될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아트만은 유일 실재이다. 그러나 그 아트만은 오직 인간이 지닌 비범한 ‘직관’의 통찰로 ‘각성’될 것이다. 그 각성은 ‘아트만의 자기발견’이 될 것이고, 자아를 발견한 아트만은 자신이 세계임을 다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파니샤드가 가르치는 해탈의 방정식이다. ..
살아서 해탈을 얻게 되면 생해탈로서(jivanmukti) 유여열반에 들 것이고, 죽을 때 해탈을 얻게 되면(videhamukti) 무여열반에 들것이다.  310



10 비움으로 소유하다 - 우파니샤드 사상의 요약과 결론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숲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그 숲속의 가르침이 아라냐카였다. 아라냐카는 숲속의 은자들에게 제사의 중요성과 인간과 우주에 대한 신비적 사색을 하게 해줌으로써 베다 사상의 결정판이자 최종적 철학 체계인 우파니샤드의 세계로 안내해주었던 것이다.
아라냐카는 원래 제의 문서인 브라흐마나의 보충적 주석서로 출발했지만, 제의를 비유와 상징적 방식으로 해석하면서 점차 브라흐마나와는 결별하게 되었다. 하지만 완전한 결별은 아니었고, 다만 아라냐카는 제의를 신비적, 사색적으로 해석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아라냐카를 더 깊게 사색한 결과로서의 작품이 베다의 끝을 차지하는 베단타 철학, 곧 우파니샤드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313

윤회의 이론은 바라문의 사고이기보다 왕들을 중심으로 한 크샤트리아들이 제기한 사상이었다.  314

우파니샤드는 지혜, 곧 깨달음으로서의 지식을 중시한다. 그것은 세속적인 지식이 아닌 궁극적 실재를 아는 지식이다. 그러므로 이성적 지식이라기보다는 직관적 또는 계시적 통찰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18

인간은 어떤 제도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본질인 브라만, 즉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혁명적 선언을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319

브라만/아트만의 영적 원리는 우주의 인격신으로 발전한다. 우주적 실재로서의 브라만은 후기 우파니샤드의 시대로 갈수록 관념론적 차원이나 실재론적 차원에서 유일신적 차원으로 점점 발전해가면서 인격신 이슈바라로서의 브라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고대 우파니샤드에서 후기 우파니샤드로 갈수록 신관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다양한 신들이 출현하는 다신론에서 점차 브라만/아트만을 중심으로 하는 유일신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새로운 변화는 브라만/아트만이 ‘주’(主)라는 뜻을 지닌 ‘이샤’(Isa) 또는 ‘이슈바라’(Isvara)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격신으로서의 브라만의 통치를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로서의 이슈바라도 점차 ‘최고의 주’라는 ‘파람 이슈바라’로 불리게 된다.
만물을 지탱하는 자로서의 아트만이 이제 ‘주’라는 인격신으로 불리고 있고, ‘주’가 아닌 개체 영혼은 자신이 추구한 향락으로 인해 세속적인 것들에 얽매이게 된다. 그러나 개체성에서 벗어나 우주적 통치자로서의 아트만을 깨닫게 되면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해방을 맛보게 된다. 이것을 깨닫는 즉시 ‘파람 이슈바라’로서의 브라만/아트만이 된다. 이 지고신과의 합일 후에는 ‘그에 대한 명상’을 통해 그와의 연합을 이룸으로써 속박을 벗어나 해탈을 누리게 된다. 브라만과의 합일은 근원적인 내적 실재와의 참된 연합이기 때문에 ‘스스로 존재함’에 이르는 해탈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그 해탈은 동시에 모든 ‘세상의 환영’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이것이 일종의 브라만의 열반(涅槃), 곧 ‘브라마-니르바나’다.  332-335

불멸의 신적 아트만에 이르는 해탈의 길에 대하여 우파니샤드는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일원론적 차원에서 공통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비록 이원론을 전개하는 상키야 철학에서는 해탈의 방식이 조금 다르기는 해도 해탈의 기본적 전제를 ‘지식’(깨달음)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를 보인다. ‘지식’(지혜)을 통한 해탈이라는 이러한 전제는 우파니샤드의 전체 내용을 관통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혜로서의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선적으로 아트만이 유일한 일자로서의 참된 실재라는 것과 다자로서의 세계는 환영의 세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환영’으로 구성된 다자의 세계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으로서의 지혜(깨달음으로서의 지식)가 곧 해탈에 이르는 필수적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 환영적 세계의 실상을 모르는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로 아트만에 대한 이해에서 가능하다. 무지는 고통이나 족쇄, 또는 집착의 근원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영-무지-윤회’라는 삼중적 세계의 실상을 동시에 통찰해야 한다. 족쇄를 끊는 검으로서의 통찰은 궁극적으로 ‘모든 욕망의 비움’이라는 형식에서 성취된다.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고통스러운 실존으로부터의 해방, 그것이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기도 한 것처럼, 우파니샤드가 말하는 해탈의 길도 고통과 죽음의 극복으로 맞게 되는 구원의 길이요 불멸의 길이다. 환영에서 벗어나 ‘내가 곧 푸루샤요 내가 곧 브라만/아트만이다’라는 실재의 실상을 깨닫는것, 그것이 우파니샤드가 말하는 비밀스런 가르침으로서의 해방의 길, 곧 해탈의 최종적인 가르침이다. 그 궁극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네 개의 위대한 진술, 즉 마하바키야(Mahavakyas)로 압축된다. 이것이 우파니샤드의 결론 중의 결론이다.
“의식이 브라만이다.”(아이타레야 우파니샤드>)
“내가 브라만이다.”(<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그것이 바로 너다.”(<찬도기야 우파니샤드>)
“이 아트만이 브라만이다.”(<만두키야 우파니샤드>)  335-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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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인도인의 삶과 정신세계 : 베다시대
아리아인이 인도로 유입해 오기 전에 이미 인더스 강을 중심으로 상부에 자리한 하라파(Harappa)와 그보다 남쪽으로 약 64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모헨조다로(mohenjo-daro : 죽음의 언덕)라는 도시의 유적은, 인도 서부에 이미 거대한 국가 형태의 도시가 존재했음을 보여주었다.
하라파는 1856년 영국인 브룬튼 형제가 물탄(Multan)과 라호르(Lahore) 사이에 철도 부설 공사를 하던 중에 우연히 발견했다. 1921년이 되어서야 인도 고고학 탐사단의 영국인 총감독 존 마셜경이 하라파를 본격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했고, 그 후 2년 뒤에 다시 모헨조라도를 발굴하기에 이르렀다. 두 도시의 고고학적 발굴성과는 인도의 고대 문명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되었지만, 아직도 그 당시의 문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관계로 인더스 문명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27

도시의 발전은 기원전 2500년에서 도시가 멸망하던 기원전 1500년경까지로 추측되고 있다. ..
두 유적지(하라파 모헨조다로)가 지하에 깊이 묻히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대홍수로 인한 인더스 강물의 범람과 같은 재난으로 땅속에 묻힌 경우다. 다른 하나는 이민족의 침입이나 다른 전쟁으로 인해 멸망되었던 것이 오랜 세월 속에 폐허로 묻혀 있었을 것이라는 두 가지 추측이다.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아리안 족의 침입으로 인한 파괴의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아리안 족의 유입 시기도 기원전 1500년이고 보면, 고대 도시가 멸망하던 시기에 아리안 족이 침입하여 완전히 폐허로 만들고, 새로운 아리안 문명을 건설하지 않았을까하고 추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후 오랜 세월을 거치는 과정에서 사막화가 진행되어 도시 문명 전체가 지하 속으로 묻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9

생산력을 중시하고 과시하는 남성 성기 숭배는 인더스 유적지의 여러 곳에서 발굴되는 ‘링가(lingas:생식력의 상징으로서의 남근상, 후대 힌두교에서 시바 신의 상징으로 등장한다)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35

‘베다’의 의미는 ‘지식의 책’인 동시에 계시되었다는 점에서 ‘거룩한 가르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신들에 대한 찬가를 모은 문헌집 역시 베다라고 부른다. ‘지식’을 뜻하는 ‘베다’(veda)는 원래 고대의 현자(賢者)들에게 ‘계시’된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초기 아리아인의 신은 ‘데바’(devas)라는 명칭 하나로 통칭되었으나, 그 신들의 수는 대략 33개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신들의 이름은 후기로 갈수록 분화되어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해졌다. 신들의 숫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들의 힘과 기능으로서, 어떻게 자연현상과 조우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신들의 역할과 기능에 따라 신의 정체성도 각각 다르다.
신들의 역할과 기능은 대개 세 그룹으로 구분된다. 천상(天上)의 신, 대기(大氣)의 신, 지상(地上)의 신으로, 이 세 영역이 신들의 거주지와 활동 무대가 되며 이런 구분은 자연의 힘과도 결부된다.  36


1 신을 부르는 노래, 베다 - 네 개의 베다

정통 힌두인은 초인적이고 신적인 권위에 베다의 기원을 두고 있다. 베다는 시대가 경과하면서 네 종류로 형성되었다. 가장 초기의 베다가 기원전 1500년경에 이루어진 <리그베다>(Rigveda : 시 모음집)이고, 그 후에 <사마베다>(samaveda : 노래집)와 <야주르베다>(Yajurveda : 제의문서), 그리고 훨씬 후기에 <아타르바베다>(atharvaveda : 불의 사제 아타르반의 베다)가 형성되었다.
이 네 권의 베다 가운데 <사마베다>와 <야주르베다>는 대부분의 내용이 <리그베다>의 내용을 용도에 맞게 재구성한 것이다. 이들 베다는 너무나 거룩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에 기원전 600년경까지는 브라만 계층의 사제들의 입을 통해 구전되어 왔다. 그리하여 베다가 완전한 책의 형태로 편집이 된 것은 기원전 300년경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 각각의 베다는 제의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기원에 따라 다시 세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찬가의 모음집인 <상히타>(Samhita : 본집)와 그 해석서인 <브라흐마나>(Brahmana : 범서梵書), 그리고 제의의 지침서로서 <수트라>(Sutra :  안내서)가 있다.
이들 가운데 본집의 해석서인 <브라흐마나>에는 <아라냐카>(Aranyaka : 숲의 책)와 <우파니샤드>(Upanishad : 철학서)가 포함된다. 우파니샤드는 베다 사상을 철학적으로 심화시킨 최종적인 문헌이다. 각각의 베다는 지식을 다루는 부분(jnana kanda)과 실천 내용을 기술한 부분(Karma Kanda)으로 구분된다.  43-44

완전한 제사를 위해서 각각의 베다에 따른 제사장의 역할과 호칭이 달랐다.
<리그베다>를 사용하여 제의에 신을 초대하기 위해 시를 낭송하는 사람인 호트리(hotri : 신을 부르는 사람), <사마베다>의 노래를 부르면서 제사의 술인 소마를 바치는 우드가트리(udgatri : 노래를 부르는 사람), 제의문서인 <야주르베다>의 시와 찬미의 공식문구(yajus)를 사용하여 제의를 수행하는 일반 사제들인 아드바르유(adhvaryu), 그리고 <아타르바베다>를 노래하는 대사제인 브라흐민(brahmin : 바라문)이 각각 그에 해당하는 제의를 주관했다. 특히 대사제로서의 브라흐민은 <아타르바베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제의 전체를 주관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했다. 44-46

‘리그-베다’라는 말은 ‘찬양의 베다’라는 뜻이다. ‘리그’(rig)라는 말은 원래 산스크리트어로 ‘축제’를 의미하는 뜻에서 비롯되었는데, 일반적으로는 ‘노래 형태의 시’를 뜻한다. 축제에서 부르는 찬양의 노래(mantra)가 베다의 본문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역을 하자면 ‘찬양의 지식’이 된다.  47

전10권으로 된 <리그베다>는 제1권부터 제7권까지는 매번 첫장마다 아그니에 대한 찬가로 시작된다. 그만큼 제사와 그들의 신앙생활에서 아그니의 위상이 높다는 뜻이다. 제8권은 인드라에 대한 찬가로 시작되고, 방대한 분량의 제9권 전체는 소마에 대한 찬가다. 제10권에서는 아그니에 대한 찬가로 다시 시작되지만 우주의 창조주에 대한 기사와 원형적 인간의 차조 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47

33신들에 대한 찬미의 노래가 1,028개나 되지만 대부분이 인드라, 아그니, 소마 신에 대한 노래다. . 인드라는 아리아인의 적인 다스유스를 진멸한 권능의 신이며, 아그니는 불의 신이고, 소마는 식물의 음료의 신이다.  48

<사마베다>는 사제들이 제의를 올릴 때 부르던 찬가집이다. ..
<사마베다>의 사마(Sama)는 샤만(Saman : 멜로디)을 나타내는 말로, ‘달콤한 노래’ 또는 ‘거룩한 노래’라는 뜻을 지닌다. <사마베다>는 이 ‘노래(chants)의 모음집으로서, <리그베다>의 제8권과 제9권에서 주로 뽑아낸 작품들이다.  51

일정한 순서가 없는 찬가의 모음집이었으나,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서 종교적 제의에 맞게 재구성되었다.  52

아리아인이 처음 인도에 왔을 때는 제의를 위한 안내책이 필요 없었을지라도, 정복과 정착 이후에는 점차 종교적 의례를 위해 정교하게 편집된 지침서가 필요했기에 사제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53

<사마베다>의 본문은 1,875개의 만트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 650개의 만트라 구절과 후반부 1,225개의 만트라로 구분된다. ..
신들에 대한 찬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베다에 언급되고 있는 신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는 <사마베다>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베다의 신들은 베다 후기에 나타나는 각종 경전(聖典 : puranas)이나 서사시들에서 볼 수 있는 신들과는 그 성격이 각기 다르다.  53-54

불의 신 아그니(Agni), 폭풍의 신 인드라(Indra) 또는 바람의 신 바유(Vayu), 그리고 태양신 수리아 등이 주요 신으로 등장한다. 이들 중 아그니는 지상(prithivi) 통치하고, 인드라나 바유는 공중의 대기(antariksha)를 통치하며, 수리아는 하늘(dyuloka)을 통치한다. 기원전 800년경에 살았던 베다의 주석가 야스카(Yaska)는 베다의 다른 수많은 신들도 결국 이 세 신의 현현(顯現)에 불과하다고까지 말했다.  54

베다에 나타나는 신들은 주로 지상, 대기, 하늘의 세 영역으로 구분하여 활동하는데, 규정된 신의 수는 베다마다 차이가 있다. 베다의 어떤 본문에서는, 11개의 신들이 각각의 영역(loka)에서 활동한다고 보고 33개의 신들로 규정하기도 하고, 어떤 본문에는 3,339개의 신들로 말하는가 하면, 후대의 푸라나(聖典)에는 신들의 수가 3억 3,000으로 늘어나기도 한다.
반면 모든 다양한 신들이 결국은 동일한 하나의 지고한 신성(supreme godhead)의 현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단일신론(單一神論)적 주장은 특히 후대의 우파니샤드 사상에서 발견된다.  54-55

<야주르베다>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드바르유’(adhvaryu : 일반적인 사제) 사제들이 제의 때에 사용하던 문서로서 ‘제의의 지혜서’라고도 불린다. <야주르베다>는 신앙적 고백의 글이라는 뜻의 ‘야주스’(yajus)라는 말과 ‘베다’의 합성어다. 따라서 사제들이 제의를 드릴 때 불렀던 고백문으로서의 찬가집을 뜻한다. …
제사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상술하고 있다는 것이 <야주르베다>의 특징이다.
<야주르베다>의 편집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기원전 1000년경에 편집된 <흑(黑) 야주르베다>(Black Yajurveda)가 그것이다.
<흑 야주르베다>는 ‘무질서한’ 혹은 ‘뒤섞인’ 본문이라고도 부른다. 이유는 찬가인 만트라 외에도 제의를 위한 신학적 해설서인 산문체의 <브라흐마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백 야주르베다>는 찬가인 만트라만을 수록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다양한 학파를 지니게 된 <야주르베다>는 <리그베다>보다 그 분량이 훨씬 방대하다.  60

<아타르바베다>는 바라문 가문의 이름인 ‘아타르바’(Atharva)에서 취한 이름이다. 네 개의 베다 중에 가장 나중에 편집된 것이기 때문에 ‘제4의 베다’라고도 한다. 전승에 따르면, <아타르바베다>는 주로 브리구(Bhrigus)와 앙기라스((Angirasas)라는 두 현자의 집단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전한다.  67

<리그베다>와 같이 전체가 찬가로 구성되어 있지만, 베다시대의 제의 전통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그것은 <아타르바베다>가 초기 베다와 구분되는 훨씬 후대에 편집된 것이기 때문이다. ..
베다의 내용은 사랑의 성공에서부터 지상에서의 열망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하는 문제 등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
<아타르바베다>가 질병의 퇴치 등에 관한 주술과 같은 독립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일부 찬가인 쿤타파수크티(Kuntapasuktini, 찬가 127~136)를 제외하고는 본집의 제20권 대부분이 <리그베다>의 문구를 그대로 인용할 정도로 똑같은 내용도 있다.  68

제17권은 사소한 관심사들에 대한 일상을 독립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제15~16권은 대부분이 사제들인 바라문의 산문이고, 제14권과 제18권은 각각 아타르반 사제가 주도하는 결혼과 장례에 대한 시로 되어 있다. 이 시는 대부분 <리그베다> 제10권의 만트라와 일치한다.
그런가 하면 제19권은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원문을 개악(改惡)하여 심하게 훼손된 것도 있다. <아타르바베다>의 제12권에는 우주 진화론적이며 신지학적인 노래가 실려 있는데, 땅의 여신에 대한 노래 가운데 “진리와 위대함, 우주적 질서, 힘, 정화, 창조적 열정, 영적 승화, 제의가 지구를 떠받치고 있다”는 것이다.
나머지 제1장부터 젱13장까지의 내용에서는 약물을 사용하는 치유가나 주술사가 등장하여 대부분 주문 형식의 기도를 올린다. 이는 다른 베다가 시인이나 사제들이 노래하는 찬가의 형식인 것과 대조적이다.
특히 질병의 치유를 비는 기도 주문에서는 열병, 두통, 감기, 수종(水腫), 심장병, 만성병, 중풍, 유전병, 문둥병, 정신병 등에 대한 수많은 종류의 질병이 열거되고, 거기에 대한 처방으로서 갖가지 신들이 초대되기도 한다.  68-69

네 가지 베다의 총 분량은 그리스도교 <성서>의 여섯 배나 된다. 이 방대한 베다의 주된 구성은 이와 같이 신드에 대한 찬가아 제의의 방법을 다루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점차 베다 후기로 이어지면서 신화적인 내용이 우주적이 ㄴ차원에서 철학적으로 변해간다.  71



2 우주와 인간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 베다의 창조와 진화

<리그베다>에서는 우주와 인간의 창조, 그리고 발전과정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각도의 관점으로 설명한다. 하나는 어떤 거대한 원리가 만들어낸다는 관점이고, 또 하나는 진화적 관점에서 발생해간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이 상호 배타적인 것만은 아니며, 오히려 두 가지 견해가 서로 결합되는 느낌도 있다.
하나는 어떤 원리가 우주와 인간을 만들어낸다는 견해로, 훌륭한 솜씨를 가진 장인(匠人)인 신이 목수처럼 신과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타파스’와 같은 열기가 발생하여 스스로 진화해가는 과정으로 우주의 창조를 설명한다.
시대와 계층을 달리하던 <리그베다>의 여러 시인들은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을 기초로 다양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여러 신들이 제각각의 기능을 하며 수많은 세계의 요소들을 하나둘씩 만들어가는 것으로 설명한다.  73

한편으로는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탄생된 것도 아닌 스스로 우주의 제물이 되어서 우주를 발생시키는 제물로서의 창조자 푸루샤도 있다. 이 푸루샤의 몸에서 천지 사방과 인간이 탄생되었다는 신화다.
그런가 하면 신화 창조 개념보다는 다소 철학 개념으로 우주창조를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움직이고 정지하는 모든 것의 정신, 곧 아트마(atma)를 창조의 원리로 보는 것이다.  75

<리그베다>에서 창조에 관한 가장 유명한 기사는 우주 찬가 속에 나타난다. 일종의 진화적 측면에서 우주의 탄생을 말하는 것으로, 이른바 비존재(asat)에서 존재(sat)가 드러나는 창조적 진화의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창조의 노래라고 불리는 유명한 나사디아(Nasadiya) 찬가다.
또 다른 각도에서 창조적 진화의 과정을 서술하고 있는 찬가도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타파스’라는 열기에 의해서 모든 것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76

초기 베다에서는 자연현상과 그 세계를 다스리는 자연적 요소, 즉 태양, 불, 천둥, 물 등이 신격의 지위로 격상되어 숭배를 받았다면, 이제는 관심의 초점이 이동되어 그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누가’이 현상을 만들어내거나 조종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졌다.  83

타파스에 관한 한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연역해낼 수 있다. 하나는 자연과 우주 차원의 열기이며, 또 하나는 인간에 관한, 특히 제사와 관련된 고행이나 금욕으로서의 열기하는 측면이다. 이 모두가 창조와 관련이 있다.  86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우주의 근원은 열기, 곧 불(火)이라 했던 것과도 상통한다. 그는 열기가 강해지면 태양처럼 뜨거워지고 식으면 물이 되거나 얼음처럼 변화되는 것이 우주 변화의 원리로 보았던 것이다.
자연의 관점에서 볼 때, 태양의 열기는 땅에서 물을 끌어올리고 비를 생산한다. 반면에 제사에 사용되는 불은 바쳐진 음식물을 끓여서 증기를 유발한다. 사제들이 열정적으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의 몸에서 땀이 솟는다. 태양의 열기든지 사제의 땀이든지 모두 타파스와 관련된다. 자연적 열기로서의 타파스는 태양이 과일을 익히듯이 불이 되어 제사의 음식을 익힌다. 과일이 태양의 열기에 먹기 좋게 익듯이, 제사음식도 먹기 좋게 익는다(pakva).
여기서 다시 ‘먹힘’의 미학을 보게 된다. 제사는 먹음과 먹힘의 사슬관계다. 먹힘이 없는 먹음은 없다. 먹고 먹힘의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타파스다. 다시 말해서 일체의 희생제의는 타파스의 열기로 가능하다. 우주적 희생제의는 바로 타파스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6-87

베다의 창조와 관련된 일자나 타파스에 이어, 좀더 구체적으로 우주창조의 신화를 보여주는 또 다른 본문이 있다. 그것이 이른바 ‘황금의 모태’(the Golden Embryo) 신화다.
<리그베다> 제10권 제 121장에 따르면 태초에 ‘황금의 모태’로 표현되는 히란야가르바(hiranyagarbha)가 있었다고 한다.  88

히란야가르바는 ‘히란야’(hiranya)와 ‘가르바’(garbha)의 합성어로서, 황금과 태(胎)의 복합어다. 황금빛 나는 모태는 후기에 가서 ‘황금계란’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우주의 난생신화(卵生神話)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89

또 다른 이름의 창조주 비슈바카르만을 살펴보자. <리그베다> 제10권 제 81~82장에 따르면 우주를 창조한 신(deva), 곧 전능자로서의 ‘조물주’(造物主)인 비슈카르만(Visvakarman)이 언급되고 있다. 그 조물주는 자신을 위한 우주적 제의 속에서 여러 신성한 제의와 창조력을 지니게 된다. 그는 ‘거룩한 언어의 주’였던 바짜스파티(Vacaspati)와 동일시되기도 하면서, 용광로 같은 불속에서 천지를 창조해낸다. 천지가 부르이 제사를 통해 탄생했다는 이야기다.  93-94

현대 과학에서 우주형성의 기원을 말하는 빅뱅이론도 핵융합 반응의 결과라고 하니, 창조와 불의 신화적 상상력과 그 관련성이 허무한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94

“제사의 직무(Hotar)를 관장하면서 이 모든 세계를 제물로 바치는 현자, 우리의 아버지 그분께서는 풍요로움을 꿈꾸면서 지상에 사람들 가운데 오셨도다.
그가 거처로 삼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무엇이 그를 지탱해주었던가? 도대체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말인가? 비슈바카르만이 권능의 힘으로 만물을 바라보자 영광 속에 땅이 만들어지고 하늘이 드러났도다.
사방으로 눈, 입, 팔, 발을 가진 그가, 일자인 창조주 그가 그의 팔로 날갯짓을 하면서 천지를 만들었도다.
무슨 나무로, 무슨 목재로 그들이 천지를 만들었겠는가? 그대 생각이 깊은 자들이여, 스스로의 마음속에 자문해보라. 그가 만물을 창조할 때 어디에 서 있었겠는가?
가장 높은 곳이든지, 가장 낮은 곳이든지, 또 그 가운데 어떤 곳일지라도, 오, 비슈바카르만이여, 제사 속에서 그대의 친구들을 깨닫게 해주소서. 그대 자신의 법에 따라 사는 자여, 그대 자신의 몸을 희생시켜 그대를 위대하게 만들었도다.
공물을 통하여 위대해진 오, 비슈바카르만이, 자신의 몸인 천지(天地)를 희생시볐도다. 우리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이 어리석음에 빠져서 살지라도 우리는 너그럽고 풍요로운 후원자를 지니자.
사고(思考)만큼 빠른 거룩한 언어의 주(主), 비슈바카르만을 찬미하자. 오늘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돕도록. 의로운 일을 행하시고, 만인에게 자비르 베푸시는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청원을 기꺼이 도우시도록 하자.”(<리그베다> X 81. 1~7)  94-96

‘제사’야말로 우주의 시작이고 끝이다. 아니 그 끝없는 흐름의 연속이요. 우주생성과 생존의 비밀이다. 제사를 현대적 용어로 말하자면, 밥이 되어 ‘먹힘’이다. 먹힘으로써 다음 생이 이어진다. 먼저 창조된 제물의 존재는 후속으로 이어지는 다른 제물의 존재들에게 영광의 자리를 물려주고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우주생성의 비밀이다.
문제는 창조주 자신이 바로 이 세계를 위한 희생제물이 된다는 또 하나의 기막힌 역설이다. 본문에서 조물주 비슈바카르만은 언어의 신 바크(Vac)와 동일시되면서 유일하게 “신들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자”이며 “하늘과 땅을 초월해 있는 자”다. 그리고 그는 ‘황금의 모태’로서 물속에서 우주를 잉태한 히란야가르바아 같은 창조주로서의 명성을 떨친다.
이처럼 비슈바카르만은 언어의 신 바크와 동일시되어, 모두가 물, 불, 사고 그리고 언어라는 각자의 요소가 지닌 창조력이 혼융된 형태로 드러난 ‘제일자’(第一者) 혹은 ‘제일원인(第一原因)이 되고 있다. 결국 만무르이 창조주인 비슈바카르만은 언어의 주(主)이자 동시에 제사를 집행하는 브라흐만(brahman)의 주이며, 불의 신 아그니와 제사를 만들어낸 물에서 진화한 최초의 모태가 된다. 제사의 형식을 통해 우주를 창조해가는 베다의 창조 관념은 베다가 얼마나 제사르 중시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실제로 창조주 삐슈바카르만은 제사의 주(主)이기도 하지만 제사행위 그 자체를 통해 우주를 창조한 것이기도 하다.  98-99

다자, 즉 우주의 생성이 이러한 변증법적 자기발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은 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는 과정의 이야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예컨대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은 ’언어’(말씀)로 ‘빛’과 천지를 창조하면서 자기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한다. .. 그리스도교에서도 베다의 바크처럼 언어로 창조할 뿐 아니라, 자기 형상을 인간을 만드는 것도 일자에서 다자로의 우주적 전개라는 신적 의지가 ‘자기희생’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99

베다가 말하는 우주적 거인, 푸루샤(Purusa)에 대한 묘사는 ‘푸루샤 찬가’(the Purusa Sukta)에서 잘 나타난다. 이 찬가에 따르면 우주가 제사와 관련하여 창조되듯이 우주적 인간도 제사와 관련하여 창조되고 있다. 이 찬가는 두 가지 기본적인 구조로 묘사되는데, 첫 번째 부분은 우주적 인간, 곧 원초적 인간 푸루샤의 기원과 그 위대성에 대한 것이다. 두 번째 부분은 푸루샤의 희생제사다. <리그베다>의 제 10권 제 90장에 등장하는 이 유명한 찬가는, 신들이 우주적 거인인 푸루샤의 몸을 분할함으로써 세계의 일부가 탄생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101

“푸루샤는 천 개의 머리, 천 개의 눈, 천 개의 발을 가졌다. 사방 온 세계에 편만해 있는 그는 열 개의 손가락을 그 너머로 뻗치고 있다.
푸루샤는 정녕 이 모든 세계 그 자체이며, 세계로서 존재해왔고 또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제사)음식을 통하여 탄생시킨 불멸(신들)의 세계를 통치한다.
이것이 푸루샤의 위대성이며, 동시에 푸루샤의 능력은 이것도 넘어선다. 모든 피조물은 푸루샤의 4분의 1에 불과하며 나머지 4분의 3은 하늘에 있는 불멸의 것들이다.
푸루샤의 4분의 3은 위로 올라가고 4분의 1은 여전히 지상에 남는다. 이 지상에서 다시 온 사방으로 뻗쳐 생물(먹는 것)과 무생물(먹지 않는 것)에게 침투한다.
푸루샤로부터 비라즈(Viraj)가 탄생되었고, 비라즈로부터 다시 푸루샤가 나왔다. 푸루샤가 탄생될 때, 그는 지구 너머 그 이면까지 뻗쳤다.” (<리그베다> X 90.1~5)..
대승불교사상 가운데 천수천안(千手千眼)의 보살(菩薩)이 등장하는데, 이것도 푸루샤의 전지전능성과 상징적 측면에서 유사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러한 불교의 상징적 수사(修辭) 또한 베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102-104

신들이 푸루샤를 분할했을 때, 몇 부분으로 나누었던가? 그들은 그의 입을, 그의 두 팔을, 넓적다리와 발을 무엇이라고 불렀던가?
그의 입은 브라만(Brahman) 이 되고, 그의 팔은 전사(戰士, Rajanya), 넓적다리는 평민(Vaisya), 발은 종(Sudra)이 되었다.
달은 그위 마음에서 생겨났고, 태양은 그의 눈에서 생겨났다. 인드라와 아그니는 그의 입에서 나왔으며, 바람은 그의 생명의 숨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배꼽에서는 중간 지대의 공간이 생겨났고, 그의 머리로부터는 하늘이 전개되었고, 그의 두 발로부터는 땅이, 그의 귀에서는 하늘의 사방이 펼쳐졌다. 이와 같이 신들은 세계를 질서 있게 창조했다.
푸루샤를 위해 일곱 개의 봉인된 막대기와 훌륭한 일곱 개의 땔나무가 준비되어 있었다. 신들은 희생제사를 차리면서 푸루샤를 제사용 짐승으로 결박했다.
제사를 통하여 신들은 제물에게 제사를 바쳤다. 이것이 첫번째 제의의 법칙들이다. 이러한 제의의 법칙으로서의힘은 고대의 신들인 사드야(Sadhyas)가 머무는 하느르의 둥근 꼭대기에 도달한다. (<리그베다> X 90.6~16)  106

푸루샤가 크게 네 부분으로 갈라질 때, 입은 브라만이 되고 팔은 전사가 되며, 넓적다리는 평민, 그리고 발은 종과 같은 하인이 된다. 이것이 이른바 인도의 고대 전통사회를 형성하는 4성제도(四姓制度), 곧 카스트(ccaste)의 기초가ㅏ 된다.
푸루샤의 몸통 분할은 사회적 역할의 분할 또는 물리적 우주의 공간 배치라는 의의를 가진다. 예컨대 몸통의 최하위인 발에서 나온 섬기는 자 수드라는 사회의 기본을 이루는 층이 된다. 마치 땅이 우주의 기초가 되는 것과 같다.
넓적다리에서 나온 평민인 바이샤 계급은 왕성한 근육처럼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는 부류다. 팔에서 생긴 크샤트리아는 무기를 다루고 사람을 지휘하는 전사와 지도자의 역할을 한다. 입에서 나온 브라만은 각종 시와 노래로 만트라를 암송하며 제사를 집행하는 사제의 역할을 담당한다.  107



3 모든 것은 제의의 불을 통해 - 베다의 제사

기원전 10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는 아리아인의 세계관에 변화가 시작되었는데, 그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제사에서 숭배되는 신들의 권력이동이다. 예컨대 인드라 신이 초기 베다에는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점차 그 원위를 불의 신 아그니에게 물려주게 된다. 그리하여 부르이 신 아그니는 인드라와 동일시되기도 하고, 모든 신들의 왕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이는 생활 속에서 차지하는 불의 역할이 그만큼 더 중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13

천상(天上)의 신 바루나를 포함한 여러 신들에게서 다양한 권능을 넘겨받은 것은 인드라였다. 인드라는 바루나(Varuna) 신과 다른 열등한 신들(devas)의 권위를 모두 흡수하고 초기 베다시대 이후 오랫동안 신들 가운데서 최상의 권위를 차지해왔다.  
인드라는 신 중의 신으로서 유일신에 가까운 권위를 자랑하는 자리에까지 오르지만 결국 인드라의 권위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무너진다. 대신 그 권력을 지상의 신들, 특히 희생제의를 주관하는 불의 신 아그니에게로 이양된다. 아그니가 제의의 중심이 되면서 최고 권위의 인드라와 대등한 위치 혹은 우위에 서게 된 것이다.
이는 점차 제사에 관한 관심과 중요성이 제사 그 자체의 행위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 불의 제의적 기능을 토앟여 인간은 그들이 요구하는 다양한 신들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114

언어를 떠나 과연 인간이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인류는 분명 저급한 사고 수준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인간은 언어로 수천 년의 문명사를 기록하고 발전시켜왔다. 오늘도 우리는 하루하루 언어로 집을 짓고 산다. 그러나 모호하고 불의(不義)한 소통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바벨탑’이 되어, 엄청난 역사의 퇴보를 가져온 일면도 있다.
소리의 신 바크가 죽음의 신 야마의 역할을 겸하는 이유도, 소리속에 정의가 담겨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크는 ‘정의의 신’이기도 하다. 이제 그 정의의 신은 제단에서 거룩한 소리가 되어 만트라 속에서 울려 퍼진다. 그리하여 소리는 내면의 소리이자 ‘일자의 소리’가 된다. 일자의 소리는 다시 지식의 근원이 된다. 그리스도교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라고 하는 말과도 통한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신앙은 지식의 출발이며, 참 지식은 정의로운 삶 속으로 참 신앙을 불러일으킨다.  124-125

베다에서 의례와 만트라는 고유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적절히 사용되면 원하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반면에, 그것이 부적절하게 사용될 때는 커다란 재앙을 초래한다고 믿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브라만 사제들이 제사의 행위를 적절히 감독하는 직분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126

작은 제사 하나도 우주적 제사행위와 관련되는 것이므로 제사행위를 위한 전문화 교육은 필수였고, 오직 정화되어 순수한 영혼의 사제에게만 창조적 실재인 ‘브라만’의 힘이 부여된다고 믿었다. 그러기에 이들 사제는 늘 순수성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
제사를 수행하는 자는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의 순수성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늘 자신의 몸을 정화시킨다. 목욕을 하거나 머리를 깎고 신선한 버터를 바름으로서 신선한 ‘배아(胚芽)의 상태’를 유지한다. 이때 사제는 <아이트레야 브랄흐마나>가 진술하고 있는 것처럼, ‘봉헌의 오두막(배아)집’을 마련하게 되는 셈이다. ..
사제는 정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심지어 자신의 몸이 가려워도 맨손으로 자신의 몸을 긁어서는 안 되며, 준비된 흑염소의 뿔을 이용해야만 한다.  1127

사제가 오두막에 감금되고 불 가까이에서 염소 가죽 같은 거적을 둘러쓰고 있는 이러한 행위는 제사를 드리는 봉헌자의 ‘열’(熱)을 발산하기 위함이다. 의례를 진행하는 동안에는 땀이 흘러도 물을 마셔서는 안 되고 목욕을 할 수도 없다. 물은 오염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오직 열, 곧 타파스를 발산해야 한다. 파타스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열기이기도 하지만 ‘고행’을 뜻하기도 한다. 수고와 고통 없이는 해산(解産)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다의 제식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바른 수행을 통해 ‘브라만’의 힘을 얻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행방법으로서 사제의 정화노력, 곧 타파스를 발산하는 일 등이 아주 중요한 제의의 요소가 된다.
이러한 고행의 단계를 거친 사제는 신들의 위치로 가는 힘 또는 신들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는 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결국 희생제의를 통해서 얻어진 이러한 ‘힘’으로, 인간이 마침내 우주 그자체를 통제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28

<사타파타 브라흐마나> 문서는 소바(Soma, 酒) 제의, 이를 테면 제단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등의 여러 가지 무넺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128

프라자파티는 열기인 타파스를 이용하여 만물을 창조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타파스는 모든 창조의 원리다.  131

오늘날 인도의 힌두 사원에서 불의 제사가 계속 행해지는 것이나 죽은 자를 화장(火葬)하는 제도 역시 이러한 관념에서 멀지 않다.  131

타파스가 이중적 의미, 곧 ‘열기’이자 ‘고행’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다시 생각해본다면, 창조의 과정은 단순한 열기만이 아니라 고행이 기초가 되고 있음도 읽어내야 할 것이다. 고행은 현대 용어로 ‘수행’(修行) 또는 ’수양’(修養)이라 번역해도 좋을 것이다.  131-132

말은 인도유럽계열에서 전쟁의 영웅으로 숭배되는 지고한 상징이다. <리그베다>에서 말(馬)은 광범위하게 걸쳐 칭송을 받는다. ..
말은 <리그베다>에서 3중의 기능을 한다. 우선 실제로 길들여진 말(馬)로서 인도 아리아인이 인도 유렵 세계를 정복할 때 사용된 군마와, 성(聖)과 속(俗) 사이를 달리는 경주용 말, 그리고 제사에 희생되는 제의의 말이 있다.  132



4 죽은 자가 가는 운명의 길 - 죽음과 환생의 노래

<리그베다>에서 죽음은 주요한 주제다.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만큼 인간의 죽음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베다에는 제의에 대한 찬가가 주로 수록된 만큼 장례의 문제를 다루는 노래가 다양하게 나온다. 장례의 방식에 따라서 화장(火葬)식에서 부르는 노래, 매장(埋葬)식에서 부르는 노래 등이 서로 다르다.
베다에는 죽은 자가 가는 운명의 길이 몇 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하늘나라로 가는 자,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는 자, 혹은 부활하는 자, 화신(化身)이 되는 길 등이 표현되고 있다.
베다의 기록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죽음 후에 각기 저마다 운명의 길을 가되, 하늘나라 혹은 조상들의 세계 등으로 편입되어 가기를 원한다.  145

베다에서 죽음을 관장하는 신은 야마(Yama)다. 야마는 사자(死者)의 왕으로서 죽음의 세계를 지배한다. 야마가 죽음이 신이 된것은 그가 처음으로 죽음을 맛보고 저승으로 간 자이기 때문이다.  145

“험준한 난관을 헤치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길을 찾아낸 비바스반(Vivasvan : 태양)의 아들,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자, 야마 왕에게 공물을 바치면서 그를 공경하라.
야마는 우리를 위해 처음으로 길을 발견한자니, 그곳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곳은 우리의 조상들이 건너간 곳이며, 앞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도 각자의 길을 따라가게 되리라.” (<리그베다> X 14.1~2)  146

장례식의 화장터에서 사자의 주변을 떠돌며 사자를 먹으려고 달려드는 귀신들을 향해 명령하듯 사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버리는 형태의 노래도 있다.  “물러가거라. 쏙 물러갈지어다. 여기서 꺼져버려라. 조상들이 사자를 위해 이곳을 마련한 것이다. 야마가 그에게 낮과 물과 밤으로 장식한 안식처를 주었다.” (<리그베다> X 14.9)
고대의 인도인은 귀신들이 화장터에 살면서 사자의 타는 육체를 먹는다는 생각을 했던 듯하다. 귀신들이 불에 타는 사자를 먹기 위해 달려드는 이유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귀신이 불에 타면서 새로운 형태의 몸을 입고 하늘나라에 가게 되는데, 이때 귀신이 그 몸을 빌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적으로 달려든다는 생각이다. 또 하나는 후대의 힌두교에서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듯이 귀신들이 단지 사자의 시체를 먹기 위해 달려든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두 가지 생각은 점차 후대로 가면서 후자의 생각이 일반화되게 되었다.  149-150

불의 신 아그니는 베다 전체에서 인드라와 더불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신으로, 특히 제사에 관해서는 단연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만큼 제의와 관련항 아그니가 하는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죽음의 제의인 장례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아그니는 죽은 자를 조상에게 보내는 역할뿐만 아니라, 제사에 바쳐진 공물을 신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한다.  153

[죽은 자에 대하여]
”그대의 눈동자는 태양으로, 그대 영혼의 숨결은 바람으로 떠나시오. 그대의 업(業)에 따라 하늘로 가거나 땅으로 가시오. 아니면 그대의 운명이라면 물로 가시오. 가서, 그대의 손발은 식물의 뿌리가 되어 터를 잡으시오.” (<리그베다> X 16.3)
한 인간의 죽음을 두고, 죽음 그 이후에 우주로 환원되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 비유는 실제적인 환생의 모습을 기원하고 있는 것이리라. 불꽃 속에서 한 줌 재로 사라져갈 인간이지만, 그 인간이 생전에 지니고 있던 신체의 모든 부분이 다시 우주속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
위의 베다 본무에서 우리는 인도 사상의 ‘업’(業) 개념을 발견하게 되는데, 인간이 살아생전의 활동에 따른 결과를 후과(後果)로서 죽음 이후에도 받게 된다는 ‘인연업보’ 개념이 형성되는 초기의 사상적 맹아(萌芽)를 볼 수 있다.  155-156

[아그니에 대하여]
“염소는 그대의 몫입니다. 그대의 열기로 염소제물을 태우소서. 그대의 눈부신 빛과 화염으로 제물을 태우소서. 오, 피조물을 아시는 이 자타베다여! 그대의 상서로운 친절한 모습으로 선한 행위를 한 이들이 살고 있는 경건한 나라로 이 사자(死者)를 인도하여 주소서.
아그니여, 우리가 바치는 제의의 소마즙과 함께 죽은 자가 그대에게 제물로 바쳐질 때 그를 다시 자유롭게 하여 조상들에게 보내소서. 그리하여 그가 새로운 생명의 몸을 입고 극의 자손이 번성케 하소서, 피조물을 아시는 이, 자타베다여!” (<리그베다> X 16.4~5)
죽은 자를 위한 장례식에서 염솟가 희생제물로 등장하고 있다. 죽은 자를 위해 소마즙과 함께 바쳐지는 희생물을 통핳여, 죽은 자는 아그니의 도움으로 조상들에게 보내지고 새 생명의 몸으로 자손을 번성케 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죽은 자에 대한 기원의 노래가 이어진다.
[죽은 자에 대하여]
“까마귀가 와서 그대를 쪼아 먹든지, 개미나 뱀이 달려들든지, 아니면 그 어떤 짐승(자칼)의 먹이가 될지라도,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아그니가 그리고 사제들과 함께하는 소마가 그 상처를 온전히 지켜줄 것이오.
암소의 네발로 그대 몸을 감싸고 아그니의 화염 속에서 그대를 보호하시오. 두터운 지방질로 그대 몸을 덮으시오. 그리하여 그대를 완전히 불살라버리려고 하는 아그니의 맹령한 열기로부터 그대를 지키도록 하시오.”(<리그베다> X 16.6~7)
인도에는 유달리 커다란 까마귀가 많은 편이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새가 와서 죽은 자의 시체를 뜯어 먹도록 하지만, 베다의 전통에서는 불로 화장을 함으로써 장례가 진행된다. 화장을 하되 시체가 가급적 온전히 유지된 상태에서 다음 생으로의 신생(新生)을 기약한다.  156-158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매장식(埋葬式)에서, 사제는 죽음에 대하여, 또는 유족에 대하여 충고나 권면의 노래를 부른다. <리그베다> 제10권 제18장 제1~14절 전체에 걸친 매장식의 노래에 담긴 이야기를 중심으로 본문을 분석해보자.
[죽음에 대하여]
“죽음이여 떠나가거라. 신들의 길과는 다른 너의 길로 떠나거라. 눈을 가지고 귀를 가진 너에게 말하노니, 우리의 자녀와 인간(용사)을 해치지 말라.” (<리그베다> X 18.1)  161

“이 광활한 땅, 친절하고 온화한 어머니 - 땅(地母) 속으로 살며시 들어가시오. 어머니 대지는 젊은 여인이오. 공물을 바치는 누구에게나 양털처럼 부드러운 분이오. 어머니 - 땅으로 하여금 날름거리는 ‘파멸’의 혓바닥으로부터 그대를 지키게 하시오.
땅이여, 가슴을 열고 죽은 자를 받아 덮고 무겁게 짓누르지 마시오. 가슴을 열고 죽은 자를 받아 덮고 무겁게 짓누르지 마시오. 편안하게 굴 속에 들어가 그곳에 거하게 하소서. 땅이여 어머니가 아들을 치맛자락으로 감싸듯이 죽은 자를 감싸고 보호하소서.” (<리그베다> X 18.10~11)
<성서>의 표현대로 육신은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지만, <리그베다>처럼 죽은 자에 대하여 어머니 같은 포근하고 온화한 대지로 돌아갈 것을 축원하는 모습은 참으로 이색적잉고 따뜻한 느낌을 갖게 한다. ..
망자를 위로하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산 자에게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게 하고 살아생전 대지에 대한 고마움을 잃지 말고 살라는 교훈으로 들리기도 한다. 어머니 대지를 사랑하는 자는 땅속에서 ‘파멸’이라는 두 번의 죽음을 겪지 않고, 보호받는다는 뜻이다.  168

“나는 그대 주위를 흙으로 돋우고, 이 흙덩이를 내리면서 그대를 상하지 않게 할 것이오. 조상들이 그대를 위해 이 기둥을 굳게 붙잡아줄 것이오. 야마가 그대를 위해 이곳에 집을 지어줄 것이오.” (10.18.13)  169



5 최상의 권위를 자랑하는 위대한 권력자 - 천상(天上)의 신들

<리그베다> 제6권 제50장은 전체 1~15절로 ‘여러 신들’에 대한 찬가가 함께 섞여 있다. .. 불과 1, 2절에서만 해도 아디티, 미트라, 바루나, 아리아만, 사비트리, 브하가, 수리아, 다크샤, 아그니라는 아홉 신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이 모두 ‘아디티야’(Adityas)로서 ‘태양신들의 집단’이 되는 ‘빛’ 또는 ‘태양’과 관련이 있는 신이다.  181

9명의 아디티야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신이 바루나다. 바루나는 1,000개의 눈을 가지고 멀리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빛나는 황금 외투를 입고 있다. 바루나와 미트라를 태양빛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팔로 천상에서 마차를 운전한다. 천상은 1,000개의 기둥과 1,000개의 문이 달려 있는 곳이다.  183

모든 우주적 통치의 역하 ㄹ가운데서도 특별히 바루나는 비를 가져다주는 존재로 자주 언급되며, <리그베다>에서는 바다의 물과 관련해 종종 언급되기도 한다. ..
왕이자 도덕적 통치자이던 태양신은 후기 문헌인 <아타르바베다>에 가서는 성격이 다르게 변화된다. 예컨대 미트라와 바루나는 각각 낮과 밤의 대명사가 되는 것이다. 미트라는 낮의 해가 되고, 바루나는 밤의 달이 되는 것이다.  184-186

낮과 밤의 역할을 떠맡은 미트라와 바루나는 점차 후기로 가면서 다시 그 역할이나 기능이 축소되어간다. 바루나는 천사의 빛의 왕좌에서 다시 물을 통제하는 자로 바뀌어가고, 그의 황금의 집도 이제는 물속에 있게 된다. 바루나가 빗물을 내리면서 바루나와 미트라는 ‘물의 주(主)’가 된다. 바루나의 천상통치는 비를 내리는 행위처럼 점점 물과 관계가 깊어지고 있다. 바루나가 달과 관계가 깊어지는 것도 역시 물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186

바루나의 역할과 기능데 비해 미트라는 상재적으로 베다에서 적게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미트라와 바루나가 동시에 찬양을 받고 있는데, <리그베다>에서 미트라의 역할을 독자적으로 소개한 곳은 유일하게 제3권 제59장뿐이다.  186

아디티야는 다소 한계가 분명하지 않은 신들의 집단이다. <리그베다>의 몇몇 곳에서 태양신 아디티야의 이름은 경우에 따라서 일곱 개 혹은 여덟 개로도 묘사된다. 그러나 대체로 일곱 개인 것이 지배적이다. 이들은 미트라, 아리아만, 브하가 , 바루나, 다크샤, 수리아, 사비트리다. 이밖에도 ‘빛’의 그룹에 속하는 신 푸산 등이 있는데 이들은 뒤에서 별도로 살펴보겠다.
아디티야라는 명칭은 인드라에게도 적용되고 있을 만큼 의미영역이 광범위하다. 물론 인드라 신의 위대성이 점점 터져갈 때 아디티야의 이름에 흡수된 것이지만 말이다.
이와 같이 다양하게 표현되는 태양신 아디티야의 여러 가지 위상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신은 역시 바루나다. 그 다음이 미트라이고 세 번째가 아리아만이다.
이들은 모두 천상의 빛의 신으로서 각 이름의 의미처럼 밝고, 빛나면서 졸지도 않고, 흠 없고 순수하고 거룩한 황금빛의 신이다. 이 태양신들은 적을 가두고 신봉자를 보호해주며, 죄인은 형벌하지만 나약함을 용서해주기도 한다. 동시에 질병르 퇴치하고 장수와 자손의 번성을 도와준다.  187-188

바루나와 미트라에 대한 묘사와 마찬가지로 수리아는 ‘하늘의 눈’으로 표현되는데, 멀리 내다볼 수 있어서 인간들의 행위를 감시하는 자가 된다. 수리아는 아디티야의 하나이지만 동시에 아디티야와 구별되는 독특한 성질을 지닌다.
..
무엇보다 태양신 수리아의 진가는 힘의 세력을 신과 인간을 위해 세계를 비추는 빛에 있다. 그의 빛으로 어둠을 물리치고 어둠과 사악한 힘의 세력을 정복하는 것이다. 수리아는 신들의 사제 역할을 하기도 하고 미트라와 바루나 앞에서 인간들의 무죄를 선언하도록 요청을 받기도 한다. .. 천둥과 폭ㅍ풍수의 신 인드라가 태양을 가리게 하는 힘을 가지고 저마 위력이 커지면서 수리아는 차선으로 밀려나기도 한다.  189

사비트리는 눈, 손,혀, 팔이 모두 황금으로 된 황금의 신이다 사비트리는 황금의 손을 펼쳐서 인간들에게 생명을 선사한다. .. 사비트리는 노란 머리칼을 하고 황갈색의 겉옷을 입고서 황금 마차를 타고 있다. ..
사비트리는 맑은 길을 따라 하늘을 날면서 영혼을 의로운 곳으로 안내하며, 신과 인간에게 불멸을 제공한다.  194

사비트리의 역할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역시 인간들이 각각 자신의 몫을 감당할 수 있도록 고무시키고 격려하는 일과 사제들이 제의를 집행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었다.  195

풍요로움을 주는 푸산은 인색한 자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역할뿐만 아니라, 승리의 길을 만드는 자, 야비한 자의 심장을 찌르는 자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된다. 다른 찬가에서 푸산은 일반적으로 힘과 영광, 지혜, 관용성 등으로 상징된다.  196

<리그베다>에서 비슈누는 다른 신에 비해 극히 제한적으로 찬미되고 있다. 특히 수백 편이 넘는 찬가만을 지니고 있다. 인기 있는 다른 신들이 수천 번 넘게 호명되는 데 비해 비슈누는 100번도 언급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비슈누는 폭풍의 신 루드라와 같이 크게 존경을 받고 있고 후기로 갈수록 인기는 더해간다  
비슈누는 젊은 신으로 거대한 몸집을 하고 있고, 보폭이 넓어 세 번의 큰 걸음으로 악마로부터 세계를 구출해낸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비슈누의 세 걸음은 지상과 공중, 그리고 천상의 가장 높은 곳으로 구분해 설명되는데, 이 걸음은 새로운 우주 공간을 창조해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첫 번째 걸음은 땅의 영역을, 두 번째 걸음은 상층부 하늘, 세 번째 걸음은 가장 높은 천상의 세계로 비슈누가 거주하는 곳이다. 이 세걸음은 새벽과 정오와 석양이라는 태양의 세 가지 현상에 대한 상징적 은유다. 이는 새벽의 여신 우사와 길의 태양신 푸산, 그리고 석양의 태양신 사비트리를 연상하게 한다. 비슈누의 걸음을 ‘비카르마’(vikarma) 또는 ‘파다’(pada)라고 하는데, 특히 후자에는 많은 은유적 해석이 따른다.
첫 번째 해석으로는 ‘발’(foot)이라는 의미로 라틴어의 ‘페스’(pes)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어떤 장소에 머물러 있는 동작을 포함하여 발의 동작에 따른 ‘발걸음’(step)이나 ‘족적’(footprint)으로 해석한다. 셋째는 ‘파다’가 인간과 신이 함께 거주하는 실제적인 장소를 뜻하거나, 소의 바랒국이 찍힌 자국에 무링 고이듯 그곳에서 꿀샘이 솟아나는 장소를 만드는 발걸음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비슈누의 발걸음은 그 보폭으로 인하여 유명할 뿐 아니라, 걸음마저 다양하게 해석된다. ..
<리그베다> 제 1권 제155장에서는 비슈누-인드라 신을 나란히 영웅적인 신으로 찬양하기도 한다.  197-198

비슈누는 처음에는 빛의 신으로 출발하여 후기 베다시대에 갈수록 점점 인기가 높아져 힌두교의 최대신인 창조자 브라흐마, 파괴와 재새으이 신 시바, 그리고 유지의 신 비슈누라는 삼위일체의 최고신 자리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높은 지위와 인기를 누리게 된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비슈누 신이 인간과 동무르이 종족 번식에서 가장 중요한 태아(胎兒)를 보호해주는 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은 다른 어떤 태양신에게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가축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삶의 질이 향상되면서 번영을 기원하는 인간과 사제들에게 더욱 인기 있는 신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더구나 비슈누는 그의 큰 세 걸음으로 후기에 가서는 악마의 대부로 여겨지는 아수라(Asura)로부터 세계를 보호하는 등, 땅과 공중, 천상이라는 세 개의 세계를 모두 정복한다. 때문에 여러 신에게 제사를 드리지만 대부분은 비슈누에게 바쳐진다. 바로 이 점이 점차 비슈누가 가장 위대한 신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특히 베다 후기 문서에서 자주 발견되듯이 비슈누가 에무사(Emusa)로 불리는 수퇘지로 화신(化身])하여 지구를 물에서 건져올리는 모습이라든가, 인도 고대 설화집인 <푸라나>(Purana)에서 거북이가 비슈누의 화신잉 된다는 표현 등은, 모두 희생 행위 또는 제물로서의 비슈누를 위대하게 평가한 것이다.
비슈누의 인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인도 신화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바가바드 기타>의 주인공 크리슈나(Krishna)로 화신하여 인류의 평화를 가져오는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결국 ‘희생제의’의 존재로서 비슈누가 인류와 우주를 건지고 보호하는 가장 위대한 신으로 숭배받게 되었던 것이다. 맟치 그리스도교에서 예수가 십자가의 희생제의를 통해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위치로 승격되었듯이 말이다.  201-202

<푸라나>에 따르면, 마누는 14대의 긴 기간에 걸쳐서 공중에 거처하면서 인간의 의식을 각성시키는데, 그 일곱 번째 시기에 해당하는 마누의 이름이 비바스바트라고도 한다. 이 때문에 인간은 비바스반 아디티야(Vivasvan Aditya)의 후손이 된다. 이간은 태양의 아들인 셈이다.
<리그베다>에서는 비바스바트를 신들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의 아내는 장인(匠人)의 신 트바스트리의 딸 사라뉴(saranyu)다. 사라뉴와의 사이에서 야마와 마차를 이끄는 천상의 신 아쉬빈을 낳는다.  204

아쉬빈은 <리그베다>에서 인드라, 아그니, 소마 다음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찬양을 받는 신이다. 아쉬빈(asvin)이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의미는 ‘마차꾼’이라는 뜻이다. ..
아쉬빈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두 개의 눈, 두 개의 손, 두 개의 발, 두 날개, 그리고 쌍으로 같이 있는 동물들과 비교된다는 점이다. 이들 쌍은 빛나고 기민하며 젊고 아름답다. 또한 붉은색을 띠면서 강한 힘을 자랑하고 법칙을 강화하기도 하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자(全知者)라 불리기도 한다.  205-206



6 공중의 세력을 관장하는 대기의 힘 - 대기(大氣)의 신들

<리그베다>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려긍ㄹ 행사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인드라가 바로 이 대기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신이다. 천둥번개를 일으키며 공중의 세력을 관장하는 인드라와 바람의 신 바유, 폭풍의 신 마루트와 루드라도 대표적인 대기의 신들이다. ..
인드라(Indra)는 ‘대기’(大氣)의 현상을 인격화한 공중의 신이다. <리그베다>에서 가장 위대한 신으로서 ‘신들의 왕’으로 군림한다. ..
인드라는 날씨를 관장하는 주(主)로서 천둥 번개를 일으키며 비를 내려준다. 비를 내려줌으로써 다산(多産)의 신으로 존견을 받지만, 동시에 폭풍을 일으키는 신으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한다.  213

<리그베다>에서 인드라에 대한 찬가는 250개나 된다. 이것은 <리그베다> 전체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214

그가(인드라) 즐기는 음식은 소마인데, 태어나던 날도 소마를 마셨다고 한다. .. 바람의 신 바유나 창조자 브리하스파티, 또는 아그니도 소마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지만, 단연 최고의 애주가(Soma-drinker)로는 역시 인드라가 꼽힌다.  216

사회, 정치적 배경에서 탄생한 인드라 신은 천둥번개를 가진 공포의 대상인 동시에 그를 숭배하는 자들에게 비와 불로 은총을 가져다 주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후기 베다시대로 가면서 인드라는 최고신의 지위에서 비교적 낮은 신으로 떨어진다. 비록 작은 신들의 왕으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긴 하지만, 이른바 인도의 주요한 3신, 즉 브라흐마(Brahma), 비슈누, 시바보다는 열등한 2인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후기에 가서 인드라는 신들이 살고 있는 하늘(Swarga)의 통치자로 묘사되면서, 이 단계에서 인간의 여러 가지 나약함을 보살펴주는 자가 되기도 한다.  235

폭풍의 신 루드라(Rudra)는 인드라나 아그니처럼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리그베다>에서는 루드라에 대한 찬가가 독립적으로 편집된 곳이 단 세군데뿐이다. .. 그러나 루드라는 후대에가서 힌두교에서 가장 위대한 세 신 가운데 하나인 시바(Siva)로 불리며 역할이 승격된다.  236-237

루드라가 자주 불리지는 않지만 칭송을 받을 때는 다른 여러 신들에 비해 독립적으로 높이 찬양받으며 최고신의 대접을 받는다. 이는 인도 베다신화의 대표적인 특징이기도 한데, 예배를 드리는 자가 필요에 따라 그때마다 정한 신에게 최고의 칭호와 찬사를 부여하는 것이다.  241

마루트는 루드라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루드리야(Rudriyas)라 불리기도 한다. 마루트는 폭풍의 아들이자 바람의 신으로서 인드라의 위대함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루드라보다 더욱 많이 칭송되었다.  241

바유는 이름 자체가 ‘불다’라는 뜻의 어근 ‘바’(va)에서 생긴 단어로, 바람의 신으로서 공중의 최고 신인 인드라와 깊은 관계가 있다.  248

친구 인드라와 같이 바유도 순수한 형태의 소마를 즐긴다. 바유는 신들 가운데서도 가장 빠르기 때문에 소바를 처음 마신 자가 되었다. ..
이에 비해 바타는 바람의 힘을 과시하고 거대한 먼지 구름을 일으킨다. 형태는 보이지 않으나 소리는 우렁차며, 신들의 호흡이자 신성한 생령(生靈-살아있는 일반 국민)으로서 공물로 섬김을 받는다. 또한 번개와 태양의 출현을 알리는 전령사이기도 하다. 불그스름한 빛을 만들고 새벽을 빛나게 한다. ..
후기로 갈수록 바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248




7 생명을 살리는 제의의 불과 음료 - 지상의 가장 위대한 신

지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최고 신으로 찬양받고 있는 대표적인 신들로는 단연 아그니와 소마를 들 수 있다. 불의 신 아그니와 술(음료)의 신 소마는 불과 물로 상징되는 만큼이나 서로 관계가 긴밀하다. ..
불과 물은 성질상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인도-유럽적 개념에서 물과 불은 ‘뜨거운 연금술의 액체’와 같이 하나로 융합되어 설명되기도 한다. ..
아그니와 소마는 베다의 시인들에게 제사와 인생의 의미를 찾고 이해하게 하는 주요한 영감을 준다. 아그니가 제의의 생산적 측면과 관련한 ‘아폴론적 영감’을 준다면, 소마는 제의의 파괴적인 요소와 관련해 인생의 비전을 설명한다는 측면에서 ‘디오니소스적인 영감’을 준다고 설명되기도 한다.  251

아그니는 제사행위에서 가장 먼저 초대되는 신이다.  252

또 다른 <리그베다> 본문에서는 아그니의 찬생이 물과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그니는 물의 아들로 탄생되는데, 이는 마치 구름에서 번개가 치는 이치와 같다. 조로아스터교의 성전 <아베스타>(Avesta)에 나오는 깊은 물속의 정령처럼, 아그니는 물에서 탄생한다. 그리하여 아그니는 물의 아들(Apam Napat)이 된다.  265

<리그베다>의 시인 사제들은 아그니 못지 않게 소마에 대하여 많은 부분에서 길고도 장황하게 다루고 있다. 소마는 제의에서 가장 중요한 음료로서 신들이 즐기는 술이기 때문이다. ..
<리그베다> 제9권은 114편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시 전체가 오직 소마에 대한 찬가, ‘소마 파바마나’(Soma Pavamana : 정화시키는 자)로 편집되어 있다. ..
제의에 바쳐지는 음료 소마는 일종의 약초인 소마나무의 즙을 내어 만든다.  267

소마의 다양한 변형은 모두 물과 관련이 깊다. 구름, 암소의 우유, 꿀, 음료, 그리고 식물의 수액이나 동물(황소)의 정액(분비물, 씨앗), 술 등이 모두 물의 이미지와 관계가 깊고, 그 물은 언제나 제의의 한복판에서 신의 음료나 음식으로서 기쁨을 얻게 한다.  271

소마는 신들의 연회에 없어서는 안 될 제의의 기본요소인 술의 신이지만, 인간들에게 힘과 명성을 부여하는 신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불의 신 아그니와 함께, 술의 신 소마는 인두라는 칭호를 부여받으며, 물의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물의 아들이 되기도 한다.
인두는 ‘빛나는 물방울’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인더스(Indus) 강도 바로 이러한 명칭의 뜻을 지닌 ‘빛나는 물줄기’를 반영한 것이다. 소마는 다른 <리그베다>의 본문에서도 종종 인두라는 별칭으로 불리는데, 이두는 이때, 천지간에 보물과 부요함과 물을 가져다 주는 자다.  274



8 천지자연의 신성을 노래하라 - 천지와 자연의 신

<리그베다>에서 천지(天地)의 신은 각각 하늘의 신과 땅의 신으로 숭배를 받기도 하지만, 짝을 이루어 하나의 명사처럼 ‘천지의 신’으로 숭배받기도 한다. 하늘의 신 디야우스(Dyaus)나, 땅의 신 프리티비(Prthivi)는 각각 아버지(pitara)와 어머니(mataa)의 형태로 숭배를 받는데, 둘이 하나로 합쳐진 자웅동체(雌雄同體)의 디야우스프리티비(천지)라는 이름의 신으로도 <리그베다> 여섯 곳에서 독립적으로 찬미되고 있다.  285

천지가 디야우스프리티비라는 한 쌍으로 숭배를 받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서 땅만이 독립적으로 찬양을 받는 시편도 있다. 이른바 땅의 신, 프리티비에 대한 찬가다. 이는 그리스의 지모신(地母神) 가이아(Gaia)에 비교될 수도 있다.  290

“오, 피리티비, 언덕을 나누는 연장을 지닌 지니리의 그대여! 땅을 활기 있게 하는 풍부한 급류를 지닌 전능자여. 오, 자유로운 방랑자여, 밝은 낯빛으로 그대에게 소리 높여 찬미하나이다. 부풀어 오르는 구름같이, 우는 말처럼 달리는 오, 빛나는 색조의 말달리는 자여. 위대한 힘으로 강한 나무륻을 땅위에 붙들며, 구름으로 번개르 일으켜 하늘에서 비의 홍수를 내리는 그대를 찬미하나이다.” (<리그베다> V 84.1~3)  291

흥미로운 것은, <리그베다>에서 아수라가 하늘의 힘 있는 신으로 평가를 받았지만, 벌써 후기 문서에 속하는 <아타르바베다>에 이르러서는 아수라의 위상이 다른 신에게 정복당하는 위치로 전락한다. 땅의 여신마저 아수라가 설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신들의 권력이동과 선악구별의 기준이 후대에 갈수록 점차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 시대에 와서 아수라가 악마적 요소로 변형되는 것도 이 시기를 거치면서다.  293

<리그베다> 본문에는 리부스(Rbhus)의 이름이 100여 곳이 넘게 불리는데, 그중 11편의 찬가에서 독립적으로 등장한다. ..
리부스의 성격을 특징짓기는 어렵지만 인드라를 돕는 신의 역할을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신들을 장식하는 목수로서 장인(匠人) 역할을 하고 있다. ..
리부스가 자랑하는 훌륭한 기술의 특징은 다섯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아쉬빈을 위해 말도 없고 고삐도 없이 세 개의 바퀴로 공간을 여행하는 수레를 만드는 일. 둘째, 인드라를 위해 두 마리 적갈색 군마를 장식하는 일. 셋째, 브리하스파티를 위한 신비의 암소를 제작하는 일. 넷째, 그들의 늙어가는 부모인 천지(天地)를 회춘시키는 일. 다섯째, 트바스트리가 만든 신들의 컵 한개를 흔들어 네 개로 만드는 일이다.  294-295

베다에서 동물은 다른 신들에 비하면 극히 제한적으로 숭배받는다. 그것도 동물에 대한 직접적인 숭배라기보다는, 여러 신들이 동물의 몸을 입고 나타나는 상징적인 비유의 형태다. 그러나 점차 후기로 갈수록 동물에 대한 숭배가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306

동물 가운데서는 무엇보다 말과 소가 가장 많이 등징하여 칭송을 받고, 염소, 멧돼지, 원숭이, 거북이가 비슈누의 화신이 된다. 뱀 또한 숭배의 대상이 되는데, 이는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뜻에서 달래는 차원의 숭배다. 이밖에도 독수리와 같은 새가 인드라나 태양에 비유되면서 신적 존재로 찬미를 받는다.
동물 가운데서 다디크라(Dadhikra) 또는 다디크라반(Dadhikravan)이라고 하는 말(馬)은 <리그베다>에서 가장 유명한 말인데, 네 번에 걸쳐서 독립적으로 찬미를 받는다. 여러 가지의 말 가운데서 다디크라는 그 빠르기로 인해 독수리와 동일시되면서 칭송받고 있다.  307

원숭이는 힌두 신화에서 원숭이 신 하누만(Hanuman)과 연결되는데, 원숭이의 왕인 하누만은 주인에게 충성하는 종(dasya)의 상징이다.  310

동물들 가운데서 들짐승이나 물짐승 외에 하늘을 나는 새는 종종 태양에 비유된다. 태양 새 가루다(Garuda)는 새들의 왕으로서 절반은 인간이고 절반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가루다는 비슈누의 수레가 되고 뱀과 대적한다. 머리와 꼬리, 날개는 독수리의 것이고, 몸통과 다리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  311



9 남성 우월 신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여신 - 베다의 여신들

<리그베다>에서 여성이 대부분 종속적 위치인 것은 사실이지만, 가끔씩은 주체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여신은 천상의 위대한 신 가운데 하나인 새벽의 여신 우사(Usas)다. 우사는 천상의 위대한 신들에 비하면 낮은 서열에 불과하여, 다른 신들처럼 소마의 제의를 함께 나누지는 못한다. 하지만 여신 가운데는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
우사(Usas)는 산스크리트어로 새벽을 뜻한다.  313

새벽의 여신 우사는 그녀의 어머니가 해준 화려한 차림을 하고 인간에게 살짝 가슴을 보여주는 가냘픈 처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사는 거듭거듭 태어나면서 영원히 늙지 않는 젊음을 유지하여 어제와 같이 지금도 빛나지만 미래도 계속해서 빛날 것이다.   313-314

연인이 사랑하는 여인을 뒤따르듯이 태양은 새벽을 따른다. 새벽의 신 우사는 태양신 수리아의 아내다. 그러나 몇몇 다른 자료에서는 우사가 수리아의 어머니로 표현되거나, 우사가 수리아에게서 탄생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곳도 있다.  314

<리그베다>의 다른 본문에 따르면, 사라스바티가 쏟아낸 거대한 눈물이 파도가 산에서 홍수처럼 흘러내려 산과 들을 적신다. 사라스바티의 강둑에는 왕과 백성들이 살고 있고, 시인과 사제들은 이런 축복을 주는 사라스바티가 멀리 타국으로 떠나지 말고 늘 가까이에서 축복을 더해달라고 기원한다. 사라스바티는 천상의 태양신 푸산이나 대기의 신 인드라, 그리고 특히 인드라를 돕는 전사 그룹 마루트와 더불어 많은 찬미를 받는다.
새벽의 여신 우사나 강의 여신 사라스바티의 강력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여신이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322-323

밤의 여신 라트리(Ratri) 또한 자매인 새벽의 여신 우사와 같이 하늘의 딸로 불린다. 밤이지만 어두운 것만이 아니라, 무수한 별빛이 밝게 흐르는 별이 빛나는 밤이다.  323

밤의 여신은 새벽의 여신과 자매로서 빛으로 어둠을 정복하고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자들에게 안내자가 되어준다. 밤의 여신은 우르미야라는 또 다른 명칭으로 존경받는다.  325

<리그베다>에서 아파(apah : 물)에 대한 신격화는 소마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물은 특히 인간의 생명을 유지해주고 새로이 깨끗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여신으로 불린다.  326

베다의 시인은 물을 자애로운 어머니에 비유하여, 아기에게 젖을 주듯이 생명력과 치유력이 풍부한 물의 활력을 얻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327

잠들 줄 모르는 아파는 우주 하늘의 바다가 그 기원이고, 인드라가 개척한 수로를 따라 끊임없이 흐르며 인간들을 이롭게 한다. 이 물은 하늘에서 내려와 산과 들로 흘러 강을 이룬다. 물의 여신 아파는 거대한 강줄기(sindhu, 또는 Indus)를 따라 바다로 향한다. 그 바다는 하늘의 바다이기도 하고, 지상의 바다이기도 하다.
흐르는 물을 따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살아나고 오염된 인간은 물의 여신을 통해 죄악을 씻는다. 이런 사상 아래 오늘날도 힌두인은 갠지스나 인더스 강에서 목욕을 통해 죄를 정화하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기를 비는 것이다.  328-329



10 민중을 위한 주술에서 베단타 철학으로 - <아타르바베다>와 <브라흐마나>

베다의 네 종류 중에서 가장 후기에 속하는 <아타르바베다>(Atharvaveda)는 주술(呪術, magic)적 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 무려 731개가 <리그베다>에서 인용해온 것이다. 그밖의 많은 본문 내용도 출처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민간의 주술적 내용들을 혼합하고 있어서 한때는 위경(僞經, apocryphal) 취급을 받기도 했다. ..
제사를 집행하는 아타르반(Atharvan)이 속죄를 비는 제의나 저주(詛呪)에 관한 문헌, 또는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에서 사용하는 의례적 문구 등이 많다. 아타르반은 고대 인도의 초기 사제들을 지칭하는 말로, 후대의 브라만 사제들의 선조가 되는 셈이다. ‘아타르바베다’라는 말도 여기서 따온 것이다.  345

비록 <아타르바베다>는 <리그베다>에 비해 그 중요성이 뒤지기는 하지만 대부분 <리그베다>에서 뽑아낸 찬가들로 구성된 노래집(saman)인 <사마베다>나 ‘제의의 기도문(yajna)으로 구성된 <야주르베다>에 비하면 그 비중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아타르바베다>가 이렇게 인기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인도 고대의 원시적인 대중 신앙과 미신들을 여과 없이 생생하게 다루어 주는데다가 초기 인도-아리아인의 하층민 생활상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
<리그베다>가 비교적 고대인도-아리아인 상류층의 종교적 신념과 행위들을 봉여주고 있던 데 비해, <아타르바베다>는 고대인도의 주술적 경향과 하층민들의 생활상을 보여줌으로써 <리그베다>를 보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345-346

<아타르바베다>에는 특히 저주를 위한 주문이 많다. 이 때문에 <아타르바베다>는 ‘저주의 베다’(Cursing-Veda)라고도 불린다.  349

<아타르바베다>는 네 개의 베다 가운데 가장 후대에 기록된 문서로, 민중의 생활과 가장 가깝다.  351

재미있는 기도문들을 조금 더 언급해 보자면, 집을 건축할 때 비는 기도문, 씨앗을 뿌릴 때 축복하는 기도문, 곡식의 성장을 촉진하는 주문, 들판의 곡식에 몰려드는 해충 떼를 몰아내기 위한 주문, 곡식이 번개 맞는 것을 막기 위한 주문 같은 것이 있다.
가축의 보호와 번식을 위한 주문, 불의 위험을 막는 주문, 새로운 수로로 강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주문도 있다. 그밖에 상인의 기도, 도박이나 주사위 놀이에서 성공을 비는 기도, 잃어버린 재산을 찾기 위한 주문, 죄와 신성모독의 속죄를 위한 주문 등 그 종류는 무궁무진하다.  351

이밖에도 <아타르바베다>에는 사제들인 바라문의 억압에 대해 저항하는 저주의 기도문이 상당수 있어 흥미롭다. 권력으로 민중을 억압하는 바라문을 이렇게 저주한다.
“바라문을 온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죽여라. 신들을 욕되게 하고 생각 없이 재물만 탐하는 자, 그의 심장에 인드라가 불을 지피리라. 그가 살아 있는 한 천지가 그를 증오하리라. …… 바라문의 혀는 활이 될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화살촉에 걸리는 줄이 되리라. 그리하여 그의 숨통과 이빨이 거룩한 불로 태워져 패대기쳐지리라. 이들 바라문과 같이 신들을 욕되기 하는 자들도 그러하리라. 심장을 꿰뚫는 강한 화살로 신들이 이들을 벌하리라.” (<아타르바베다> V 18.5,8)
제사풍속이 만연한 고대사회에서 사제의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아지면서 자세가 본연의 자세를 잃고 종교적 권력으로 민중을 압제하자, 점차 이에 저항하는 저주의 목소리가 높아갔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352

통제해야할 대상이 더 클수록 정보와 지식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이러한 희생제의의 주술적 개념은 점차 우주적 관념으로 확대되었으며, 그 겨로가 ‘제의의 철학’인 베다의 마지막 철학, 즉 초기 형태의 우파니샤드(베단타 철학)로 나타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베단타 철학은 <리그베다>의 말기 사상으로서, 우주의 최고원리를 일신교(一神敎) 또는 일원론으로 설명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경향은 베다의 가장 후기 저술인 <아타르바베다>의 후반부에서부터 드러난다.  353

후기에는 브라만을 우주의 최고 원리로 내세우는 사상이 더욱 환영받게 되면서 우파니샤드의 원리로 발전한다. 우주적 최고 원리인 브라만을 인간 내면 속의 자아, 곧 아트만(atman, 自我)과 동일시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실로 푸루샤(아트만)를 아는 자는 ‘이것이 브라만이다’라고 생각한다. 그 속에 모든 신격(神格)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암소가 외양간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이.” (<아타르바베다> V 11.8.32)
우주 최고의 원리인 브라만이 인체의 내부에 도사리고 앉아 있다는 이 사상은 인간이 바로 브라만이라는 사실을 통찰하게 하는 우파니샤드 최고의 진술의 사상적 맹아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미 <아타르바베다>의 시인은 인간 내부에서 우주적 통찰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55

<브라흐마나>는 베다의 본집을 해석한 주석서로서, <리그베다>를 포함한 4개의 베다 본문에 대한 각각의 해설서다. 특히 제사의 구체적인 방식과 절차는 물론, 그 의미를 자세히 서술한 사제들의 기본적인 지침서가 주를 이룬다.  356

<브라흐마나>를 다시 내용적으로 구분해보면, 제사의 방식과 규범을 다룬 지침서인 ‘비디’(Vidhi, 儀軌)로 이루어져 있다. 제사의 기원과 전설을 설명해준 아르타바다에서 베단타 철학이 출발하는데, 이것이 우파니샤드 철학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아르타바다의 논의는 베다의 주석서인 <브라흐마나>의 끝부분으로서, 제사에 관한 최종적인 철학적 논의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베다의 끝’(end of the Veda)을 의미하는 ‘베단타’(Vedanta = Veda + anta)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베다의 마지막 문헌 <브라흐마마>, 그리고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아르타바다를 더욱 깊이 숙고하여 철학화한 작품이 바로 <아라냐카>(Aranyakas, 密林書)로서, 베다와 우파니샤드의 사상체계의 과도깅에 해당한다.  357

<브라흐마나>의 주된 사상은 무엇보다 ‘제사 만능주의’다. 베다의 본집이 주로 시인의. 노래와 찬가 형식의 만트라로 구성된 데 비해, <브라흐마나>는 주로 사제들의 편집물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제사가 주축이 되고 제사가 모든 사상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학식이 있으며 베다에 정통한 바라문(브라만)은 인간이라는 신이다.” (<사타파타 브라흐마나> II 2.2, 6)
사제 즉, 바라문(婆羅門, Brahman)은 신들을 대신하여 제식(祭式)을 주관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권위는 점점 더 높아만 갔다. 당시의 세계관에서는 제식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고, 제식이야말로 신들을 강제하거나 우주의 현상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베다의 세계관에서는 신들마저 제식을 수행해야만 비로소 불멸성을 획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이유로 제사를 집행하는 바라문의 권위는 단순히 신에게 봉사하는 경건한 봉사자의 차원을 넘어서 독자적이고 전문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따라서 제식의 힘으로 신들을 지배하는 자인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신, 곧 신인(神人)의 위치로 격상되었다.  358

예컨대 제의 전 과정을 주관하며 총감독의 위치에 있는 리트비즈(Ritvij), <리그베다>의 찬가를 낭송하는 호트리(Hotri), <사마베다>의 노래를 부르는 우드가트리(Udgatri), <야주르베다>의 노래를 부르는 아드바르유(Adhvaryu), 그리고 <아타르바베다>의 사제인 브라민(Brahmin, Brahman)이다.  360

브라만은 사제 계급을 의미하고, 동시에 사제 그 자체를 뜻하는 브라만으로도 혼용하고 있다. 이러한 혼동을 피하고자 사제로서의 브라만을 구분지어 설명하는 용어가 브라민이다.  360

오늘날 힌두교에서 제의를 수행하는 사제에 대한 일반적인 명칭은 브라민(브라만) 외에도 가정에서 가족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 프로히타(Purohita), 브라만 외의 다른 계급에서 자신들의 제사를 드리는 사제인 잔가마(Jangama), 성지순례를 오는 자들을 위해 힌두 사원에서 제의를 안내하고 집행하는 판디야(Pandya), 사원이나 성소에서 주로 의례의 절차와 푸자(puja ; 봉헌 또는 예배)를 담당하는 푸자리(Pujari) 등 다양한 명칭이 있다. 이는 제사의식의 전문화와 사제계급의 분화를 설명해주는 다양한 본보기다.
제사가 점차 중시되면서,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신들이 아니라, 올바른 제사를 드리는 행위 자체로 변해갔으며, 그 제사행위를 제대로 수행하는 사제들의 권위도 높아져갔다. 따라서 제사는 우주적 힘을 지닌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는 후대에 인도의 정통 철학파의 하나로 제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푸르바 미맘사(Purva mimamsa) 학파에서 계승되었다. 제의 속에서 신(神)의 존재 가치는 점점 퇴색하고 있다.  361

프라자파티는 자신을 제물로 삼고자 했다. 그리하여 손을 비비자 희생제물로 버터가 나왔다. 처음 나온 버터는 머리카락이 빠져 있어서 제물로 바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첫 버터를 불에 쏟아버리며, “태워서 마시자”(osa dhaya)라고 했다. 이 “오사드야”라는 ‘말’ 속에서 ‘식물’(osadhayas)이라는 말이 나왔다
온전한 제물을 위하여 두 번째 손을 비비자, 깨끗한 버터와 우유가 나왔다. 이것을 제물로 바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생각하자 “그것을 제물로 바쳐라”라는 심중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프라자파티는 깨달았다. 자신에게서 나온 말, 그 언명의 위대성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sva)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위대한 명령의 언어(aha), 그 소리를 깨닫고 프라자파티는 “스바하!(Svaha)라고 외친다. 스바하는 직역하면, ‘그 자신의 소리’지만, 의역하자면 “그렇게 되라”(So be it!)는 의미다. 이것이 불교에서 ‘사바하’라는 염불(念佛)의 끝을 장식하는 종식언어로 번역됐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아멘’에 해당한다.
프라자파티가 “스바하”를 외치자 태양이 일어나 뜨거워졌고 바람이 크게 불었으며, 아그니는 돌아가버렸다. 프라자파티는 계속 제의를 수행하여 자손을 번식시켰으며, 자신을 삼키려고 달려드는 아그니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불의 제사(Agnihorta)를 드리는 자는 누구든지 프라자파티처럼 자손을 번식하게 된다고 알게 되었다. 누구든지 죽어 불에 던져 화장(火葬)하면, 부모에게서 태어나듯이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불은 오직 그 몸만을 불태울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
창조의 원동력은 고행, 즉 타파스가 기초이고, 그 고행을 통해 불의 신 아그니와 내면의 힘, 언어가 탄생되며,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칠 때 비로소 만물이 번식하면서 ‘존재’의 지속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369-370

<브라흐마나>의 또 다른 특징은 제사의식을 올바로 행해서 얻게 된다는 필연적 결과에 대한 믿음이다. 제사행위의 인과적 보상법칙을 믿는다는 것이다. <리그베다>에서 ‘자연의 법칙’을 의미하던 개념 ‘리타’는 이제 ‘행위의 법칙’을 의미하게 되었다.
후기 인도철학 전반에 가장 큰 특징으로 드러나는 카르마, 즉 행위의 결과에 대한 보응으로서의 업(業)에 대한 개념은 바로 이러한 제사주의 성격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밖에도 <브라흐마나>에서는 인간의 본질도 정신과 육체로 구분하여, 정신을 각각 아트만, 마나스(manas, 意根(온갖 마음의 현상을 이끌어 내는 근원)), 프라나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372



맺음말 - 영원히 열린 계시의 책, 베다

베다는 한국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베다의 위대한 신인 인드라는 불교에서 제석천(帝釋天, Sakra devanam Indra)으로 해석되었고, 이는 단군신화에서 환인(桓因)의 개념으로 전용된다.  373

베다는 각각 본집과 그 본집에서 채택한 의례를 위한 해설서인 <브라흐마나>와 함께, 이를 더욱 심층적으로 토론하고 철학적으로 해명한 ‘숲의 책’, <아라냐카>로 구성되는데, 이것이 곧 베다에 대한 최종적인 철학적 해설서인 우파니샤드로 정립되게 되었다.  374

베다에서 말하는 우주창조론은 <성서>의 창조 기사와 마찬가지로, 다소 후기에 기록된 것일 가능성이 많다. 아리아인의 인도 정복시기에 가장 숭배를 받았던 인드라와 같은 전쟁영웅 신이 점차 기능을 상실해갈 즈음에, 고대 인도인은 우주의 발생에 관해 더 깊고 철학적인 사색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추측이다.
베다의 우주발생의 기원설은 여러 가지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한 현자들이 각각 다양한 시각에서 우주 발생에 대한 상상력을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기원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어떤 원리의 신이 목수처럼 우주라는 건축물을 만들어내면서 여러 기능을 지닌 신들이 창조의 과정에 협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타파스’와 같은 열기가 발생하여 스스로 진화해가는 과정을 말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견해들이 상호배타적 관점인 것은 아니고, 두 가지 견해가 서로 결합되기도 한다.  377-378

베다의 또 하나의 관점은 제사의 기능이었다. 제사의 주된 기능은 인간의 생로병사에 관한 모든 분야를 관장하면서, 축복과 장수를 신에게 비는 것이었고, 그 제사를 담당하는 역할을 떠맡은 자가 사제였다. ..
처음에는 모두 순수한 예언 기능과 시인으로서의 통찰력을 지닌 현자들이었으니, 제사사의 기능이 점차 세속화되어가면서 제사를 권력의 도구로 사용하고 부를 착취하는 수단으로 전락시키기도 했다. ..
점차 후대로 갈수록 제사의 기능은 약화되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궁극적인 물음부터 시작하여, 인간과 우주의 근원에 대한 탐색이 깊어지면서, 베다의 끝인 우파니샤드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379-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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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 책을 내며
부처에게는 자기 자신이 어떤 종교의 창시자라는 의식이 전혀없었다. 단지 눈 뜬 사람으로서 그 역할을 다했을 뿐이다. 11

소 치는 사람
33
악마 파피만이 말했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기뻐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로 인해 기뻐한다. 사람들은 집착으로 기쁨을 삼는다. 그러니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기뻐할 것도 없으리라.”

34
스승은 대답하셨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근심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걱정한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는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  25

무소의 뿔
38
자식이나 아내에 대한 집착은 마치 가지가 무성한 대나무가 서로 엉켜 있는 것과 같다. 죽순이 다른 것에 달라 붙지 않도록,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9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27

60
아내도 자식도 부모도 재산도 곡식도, 친척이나 모든 욕망까지도 다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1

62
한번 불타 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2

69
홀로 앉아 명상하고 모든 일에 항상 이치와 법도에 맞도록 행동하며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이 근심인지 똑똑히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3

71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4

천한사람
142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오. 날 때부터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오. 오로지 그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이오.”

자비
143
사물에 통달한 사람이 평화로운 경지에 이르러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유능하고 정직하고, 말씨는 상냥하고 부드러우며, 잘난 체하지 말아야 한다.

144
만족할 줄 알고, 많은 것을 구하지 않고, 잡일을 줄이고 생활을 간소하게 하며, 모든 감각이 안정되고 지혜로워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으며, 남의 집에 가서도 욕심을 내지 않는다.  58

알라바카 야차
186
“성자들이 열반을 얻는 이치를 믿고 부지런히 배우면 그 가르침을 들으려는 열망에 의해서 지혜를 얻는다.

187
적절하게 일을 하고 참을성 있게 노력하면 재물을 얻는다. 성실을 다하면 명성을 떨치고, 베풂으로써 친구를 사귄다.

188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가정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성실과 자제와 인내와 베품, 이 네가지 덕이 있으면, 그는 저 세상에 가서도 걱정이 없을 것이다.

189
만일 이 세상에 성실과 자제와 인내와 베풂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널리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물어 보라.”  72–73

성인
213
홀로 걸어가고, 게으르지 않으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남에게 이끌리지 않고 남을 이끄는 사람. 현자들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  80

수칠로마 야차
270
“탐욕과 혐오는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 좋고 싫은 것, 소름 끼치는 일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 또 온갖 망상은 어디에서 일어나 우리를 방심케 합니까. 마치 어린아이들이 잡았던 까마귀를 놓아 버리는 것처럼.”

271
“탐욕과 혐오는 자신에게서 생긴다. 좋고 싫은 것과 소름 끼치는 일도 자신으로부터 생긴다. 온갖 망상도 자신에게서 생겨 방심케 된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잡았던 까마귀를 놓아 버리는 것처럼.

272
그것들은 집착에서 생겨나고 자신에게서 일어난다.  101-102

바라문에게 어울리는 일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날 거룩한 스승께서는 사밧티의 제타 숲, 외로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장자의 동산에 계셨다. 그때 코살라국에 사는, 큰 부자인 바라문들이-그들은 늙어 쇠약해 있었지만- 스승이 계신 곳에 가까이 와서 인사를 하였다. 서로 기억에 남을 만한 즐거운 인사를 나누더니 한쪽에 가서 앉았다.
큰 부자인 바라문들은 스승께 물었다.
“고타마시여, 지금의 바라문들은 옛날 바라문들이 지펴온 바라문의 법을 따르고 있는 것일까요?”
“바라문들이여, 지금의 바라문들은 옛날 바라문들이 지켰던 바라문의 법을 따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고타마시여, 별 지장이 없으시다면, 옛날 바라문들이 지켜 온 바라문의 법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바라문이여, 명심해 잘 들으시오. 내가 말을 해 드리리다.
“듣겠습니다.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284
“옛 성인들은 자신을 다스리는 고행자였소. 그들은 다섯 가지 욕망의 대상을 버리고 자기의 이상을 실천하였소.

285
바라문들에게는 가축도 없었고, 황금도 곡식도 없었소. 그러나 그들은 베다 경전 ㅗ이는 것을 재산으로 삼고 곡식으로 삼아, 브라만의 창고를 지켰던 것이오.

286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문간에 음식을 마련해 놓았소.

287
아름답게 물들인 옷가지와 이불과 집을 가진 시골의 잘 사는 사람들과 도시 사람들은 모두 바라문을 찾아왔소.

288
바라문들은 법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을 죽이거나 굴복시켜서도 안 되었소. 그들이 문간에 서 있는 것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소.

289
옛날의 바라문들은 사십팔 년 동안 순결한 몸을 지켰소. 그들은 지혜와 덕행을 추구했던 것이오.

290
바라문들은 다른 종족의 여자를 얻지 않았소. 또 그들은 아내를 사지도 않았소. 그저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살고 화목해 하며 즐거워하였소.

291
함께 살면서 즐거워했지만, 바라문들은 월경 때문에 아내를 멀리해야 할 때도 결코 다른 여자와는 성의 접촉을 갖지 않았소.

292
그들은 순결과 계율, 정직, 온화함, 고행, 부드러움과 자비와 관용을 칭찬했소.

293
그들 중에서 용맹하고 으뜸가는 바라문들은 끝까지 순결을 지켰소.

294
이 세상에 있는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을 본받아 순결과 계율과 인내를 찬양했소.

295
쌀과 이불과 옷가지, 가구, 기름을 시주받아 그것으로 제사를 지냈소. 그들은 제사를 지낼 때 결코 소를 잡지 않았소.

296
부모 형제 또는 다른 친척들과 마찬가지로 소는 우리들의 선량한 벗이오. 소한테서는 여러 가지 약이 생기오.

297
소에서 생긴 약은 실료품이 되어 우리에게 기운을 주고 피부를 윤택하게 하며 또 즐거움을 주오. 소한테 이러한 이익이 있음을 알아 그들은 소를 죽이지 않았던 것이오.

298
바라문들은 손발이 부드럽고 몸이 크며 외모가 단정하고 명성이 있으며, 자기 의무에 충실하게 할 일은 하고 해서 안 될 일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소. 그들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이 세상 사람들은 행복하고 번영했소.

299
그런데 그들의 생각이 바뀌게 되었소. 점점 왕자의 부귀 영화와 곱게 단장하고 화려하게 입은 여인들을 보게 됨에 따라.

300
또는 준마가 이끄는 훌륭한 수레, 아름다운 옷, 여러 가지로 설계되어 잘 지어진 집을 보기 시작하면서.

301
바라문들은 많은 가축을 소유하고 미녀들에 둘러싸여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고 말았소.

302
그래서 그들은 베다의 주문을 편찬하고, 저 감자왕에게 가져가서 말했소. ‘당신은 재산도 곡식도 풍성합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의 재산은 많습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의 재산은 많습니다.’

303
그래서 수레와 군사의 주인인 왕은 바라문들의 권유로-말에 대한 제사, 인간에 대한 제사, 화살과 창에 대한 제사, 소에 대한 제사, 아무에게나 공양하는 제사- 이러한 온갖 제사를 지내고 제물을 바라문들에게 주었소.

304
소, 이불, 옷가지, 아름답게 꾸민 여인과 준마가 이끄는 훌륭한 수레며, 아름답게 수놓인 옷들.

305
쓸모있게 잘 설계된 훌륭한 집에, 여러 가지 곡식을 가득 채워 바라문에게 주었소.

306
이와 같이 해서 그들은 재물을 얻었는데, 이번에는 또 그것을 저장하고 싶은 생각이 났던 것이오. 그들은 욕심에 사로잡혀 많은 것을 갖고 싶어했소. 그래서 그들은 또 베다의 주문을 편찬하여 다시 감자왕을 찾아갔소.

307
‘물과 땅과 황금과 재물과 곡식이 살아가는 데 필수품이듯이, 소도 사람들의 필수품입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의 재산은 많습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의 재산은 많습니다.’

308
그래서 수레와 군사의 주인인 왕은 바라문들의 권유로 수백수천 마리의 소를 제물로 잡게 되었소.

309
튼튼한 다리와 날카로운 뿔을 갖고도 결코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소는 양처럼 유순하고, 항아리가 넘치도록 젖을 짤 수 있었소. 그런데 왕은 뿔을 잡고 칼로 찔러서 소를 죽이게 했던 것이오.

310
칼로 소를 찌르자, 모든 신들과 조상의 신령과 제석천, 아수라, 나찰들은 ‘불법한 짓이다!’라고 소리쳤소.

311
예전에는 탐욕과 굶주림과 늙음, 이 세 가지 병밖에는 없었소. 그런데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많은 가축들을 죽인 까닭에 아흔여덟 가지나 되는 병이 생긴 것이오.

312
이와 같이 살생의 몽둥이를 부당하게 내려치는 일은 그 옛날부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렀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소를 죽인 것이오.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도리를 거스르고 있는 것이오.

313
이와 같이 예전부터 내려온 이 좋지 못한 풍습은 지혜로운 이의 비난을 받아 왔소. 사람들은 이러한 일을 볼 때마다 제사 지내는 일을 비난하게 되었소.

314
이렇게 법이 무너질 때, 노예와 서민이 둘로 나뉘었고, 여러 왕족들이 흩어졌고, 아내는 남편을 경멸하게 되었소.

315
왕족이나 범천의 친족 또는 제도에 의해 지켜지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생명의 존엄성을 버리고 욕마에 사로잡히고 만 것이오.”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큰 부자인 바라문들은 스승께 말했다.
“훌륭한 말씀입니다, 고타마시여. 훌륭한 말씀입니다, 고타마시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듯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이에게 길을 가르쳐 주듯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이에게 길을 가르쳐 주듯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이에게 길을 가르쳐 주듯이, 또는 ‘눈이 있는 사람은 빛을 볼 것이다’ 하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빛춰 주듯이, 당신 고타마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저희들은 당신께 귀의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수행자의 모임에 귀의합니다. 당신 고타마께서는 저희들을 재가 수행자로서 받아 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귀의하겠습니다.”  106-114

젊은이 바셋타
620
..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집착이 없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1
모든 속박을 끊고 두려움이 없으며, 집착을 초월하고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2
고삐와 함께 가죽끈과 가죽줄을 끊어 버리고 어리석음을 없애 눈을 뜬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3
죄 없이 욕을 먹고 구타나 구속을 참고 견디며, 인내력이 있고 마음이 굳센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4
성내지 않고 도덕을 지키며 계율에 따라 욕심을 부리지 않고 몸을 잘 다스려 ‘최후이 몸’에 이른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5
연꽃 위의 이슬처럼, 송곳 끝의 겨자씨처럼, 온갖 욕정에 더렵혀지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6
이 세상에서 이미 자기의 고뇌가 소멸된 것을 알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걸림이 없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

650
..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되기도 하고,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안 되기도 하는 것이다.

653
현자는 이와 같이 행위를 있는 그대로 본다.  220-227

동굴
772
동굴 속에 머무르며 집착하고 온갖 번뇌에 뒤덮여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사람. 이러한 사람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참으로 이 세상의 욕망을 버리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773
욕망에 따라 생존의 쾌락에 붙잡힌 사람들은 해탈하기 어렵다. 남이 그를 해탈시켜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래와 과거에 집착하면서 눈앞의 욕망에만 빠져 든다.

776
세상 사람들이 생존에 대한 집착에 붙들려 떨고 있는 것을 나는 본다. 어리석은 사람ㄷ르은 여러 가지 생존에 대한 집착을 떠나지 못한 채 죽음에 직면해 울고 있다.

777
무엇인가를 내것이라고 생각하며 집착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의 모습은 물이 말라 가는 개울에서 허덕이는 물고기와 같다. 이 꼴을 보고 ‘내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여러 가지 생존에 대해 집착을 버려야 한다.

779
생각을 가다듬고 거센 강을 건너라. 성인은 소유하고자 하는 집착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며, 번뇌의 화살을 뽑아 버리고 열심히 정진하여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는다.  272-274

으뜸가는 것
796
세상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보는 것들을 ‘으뜸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 생각에 붙들려 그밖의 다른 것들은 모두 ‘뒤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여러 가지 논쟁을 뛰어넘을 수가 없다.

797
그는 본 것, 배운 것, 계율과 도덕, 사색한 것에 대해서 혼자서 어떤 결론을 내리고, 그것에 집착한 나머지 그밖의 다른 것은 모두 뒤떨어진 것으로 안다.

798
사람이 어떤 한 가지만 중요하다고 여긴 나머지 그밖의 다른 것은 모두 가치 없다고 본다면, 그것은 커다란 장애라고, 진리에 도달한 사람들은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는 본 것, 배운 것, 사색한 것, 또는 계율과 도덕에 붙잡혀서는 안 된다.

799
지혜에 대해서도, 계율이나 도덕에 대해서도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기를 남과 동등하다거나 남보다 못하다거나 남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800
그는 가지고 있던 견해를 버리고 집착하지 않으며, 지혜에도 특별히 의지하지 않는다. 그는 실로 여러 가지 다른 견해로 분열된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어느 한쪽을 따르는 일이 없고, 어떤 견해일지라도 그대로 믿는 일이 없다.

801
그는 양극단에 대해서, 여러 생존에 대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도 저 세상에 대해서도 원하는 바가 없다. 모든 사물에 대해 단정하는 편견이 그에게는 조금도 없다.

802
그는 이 세상에서 본 것, 배운 것, 또는 사색한 것에 대해 티끌만한 편견도 가지지 않는다. 어떠한 견해에도 집착하지 않는 바라문이 이 세상에서 어찌 그릇된 생각을 하겠는가.

803
그는 그릇된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어느 한 견해만을 특별히 존중하지도 않는다. 그는 모든 가르침을 원하지도 않는다. 바라문은 계율이나 도덕에 이끌리지도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피안에 이르러 다시는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는다.  281-283

늙음
805
사람은 내것이라고 집착하는 물건 때문에 근심한다.  284

809
내것이라고 집착하여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걱정과 슬픔과 인색함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평안을 얻은 성인들은 모든 소유를 버리고 떠난 것이다.  285

투쟁
874
“바르게 생각하지도 말고 잘못 생각하지도 말며, 생각을 가지지도 말고 생각을 없애지도 말라. 이렇게 수행하는 자에게 형태가 소멸된다. 그러나 의식은 생각을 인연으로 넓어지는 것이다.”  305

무기를 드는 일
949
과거에 있었던 것(번뇌)을 지워 버리라. 미래에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없게 하라. 중간(현재)에도 아무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평안해지리라.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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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책을 쓰면서 생각했다. 여행을 멈추었을 때도 행복할 수 있는 여행이 진짜 여행이라는 것을.  10

인도에서 여행자로 살면서 고집을 부리거나 욕심을 내는 건 어리석다. 이방인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현지인들의 눈빛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26

내 감정의 온도가 여행의 온도는 아니다.
여행의 속도가 여행의 온도를 달구는 것도 아니다.
이제 나는 이동수단에도 목적지에도 관심이 없다.
그저 내 가슴이 다시 뜨거워지거나 영혼이 치유되는 여행, 느린 여행이라도 진짜 나를 위한 여행을 하고 싶다.  54, 78

가짜인 나를 벗고 진짜인 나를 만나려면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 여행은 떠난다는 의미에서 보면 이동이고, 머문다는 의미에서 보면 공간이다.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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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이스터섬은 과거일까, 미래일까

오늘만 살 것처럼 소비하는 삶에 큰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6



1 상품 소비

에드워드 흄스는 그의 책 <배송 추적>에서 커피 하나의 이동 경로를 추적해보니 4만 8,000킬로미터가 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쓰는 물건 하나하나가 이동한 거리는 대체 얼마일 것이며, 그 거리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탄소가 배출됐을까요? 이러니 물건 소비는 단순히 물건만을 소비하는 일일 수가 없는 거지요. 물건 뒤에 가려진 수많은 것을 동시에 소비하고 또 배출하게 되는 겁니다.  25

그린피스(GREENPEACE)에 따르면 청바지 한 벌을 만드는 데에 물이 약 7,000리터, 티셔츠 한 장에는 약 2,700리터가 쓰입니다.  29

의류 산업은 반(反) 환경 산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 오염이 상당합니다.  31

디지털 영역에서 발생하는 이상화탄소 양을 디지털 탄소 발자국이라 부릅니다.  48

소비에도 격이 있습니다. 어떤 소비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만큼 내 삶의 격도 올라갈 것입니다.  67


2 에너지소비

201년 1월 5일 세계 153개국 과학자 1만 1,258명은 지구가 기후 비상사태에 직면하고 있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86

최근 유럽에서는 비행기 여행을 줄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대표저거인 것인 플뤼그스캄(flygskam)입니다. 플뤼그스캄은 스웨덴어로 ‘비행기 여행의 부끄러움’이라는 뜻입니다.  98

플뤼그스캄과 뜻이 같은 단어(핀란드어로 렌토하페어(lentohapea), 독일어로 플루크샴(flgscham), 네덜란드어로 빌릭삼크(vliegsxhaamte)는모두 ‘비행기 여행의 부끄러움’을 뜻하는 단어들)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 내 자유가 우리 모두의 집인 지구에 부담이 된다면 그래서 인류 생존을 위협하는 데에 가세한다면, 그 자유를 누리는 방식에 대해 한번쯤 재고해 봐야 합니다.  99

화장실 없는 집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계속 요강 개수만 늘리는 개 아니라 집을 폐쇄하는 것입니다.  105

세계에너지기구(IEA)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19년 8월 기준 전 세계 재생 에너지는 전체 전력 생산량의 42%를 차지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4.8%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 가입국 가운데 꼴찌입니다. 심지어 36위인 헝가리도 11.7%입니다.  120


3 마음소비

오존층에 뚫린 구멍을 발견해 1995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네덜란드 대기 화학자 파울 크뤼첸은 2000년 멕시코에서 열린 기후 환경 관련 국제회의에서 인류세를 언급했습니다. 현재 지질 시대를 더 이상 홀로세가 아닌 인류세로 바꿔 불러야 한다는 크뤼첸의 언급 이후 인류세는 국제적인 유행어가 됐습니다. 인류는 대체 어떻게 지구 환경을 변화시켰기에 지질 시대 이름까지 인류세로 바꿔야 한다는 걸까요? 지질 시대마다 각 시대를 규정하는 명확한 단서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를 규정짓는 단서는 뭘까요? 인류가 지층에 남길 단서로 방사성 핵종, 콘크리트, 플라스틱, 질소 비료가 등장하면서 엄청나게 많이 쓰인 질소를 꼽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영국 레스터대 지질학자인 캐리스 베넷을 비롯한 국제 연구진이 한 과학 저널에 밝힌 ‘닭 뼈’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가장 많이 먹는 동물 1위가 닭이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수백 억 마리 닭에서 나온 뼈가 매립지에 쌓이면서 화석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먹는 닭은 야생 닭과는 크게 다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먹는 닭은 야생 닭과는 크게 다릅니다. 1950년대 이후 빨리, 크게 자라도록 육종해 온 결과입니다. 보통 진화는 수백만년에 걸쳐 서서히 이뤄지는데 불과 60-70년 만에 생물의 유전자까지 바꾸는 진화를 이뤘습니다, 인류가 . 먼 훗날 인류보다 고등한 생물이 지구 지층에서 닭뼈를 발견하면 그들은 닭의 진화 속도에 놀랄까요? 어쩌면 정말 지구 행성을 닭이 지배했다고 믿을 수도 있겠습니다.
닭은 좁은 케이지에 갇혀 24시간 훤히 불 밝힌 곳에서 밤낮 없이 알을 낳습니다. 그러다가 알을 못 낳게 되면 폐계가 돼 닭장 바깥으로 밀려납니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외출입니다. 케이지에 갇힌 닭은 흙을 밟을 수 없으니 흙 목욕을 하며 깃털에 기생하는 진드기를 떼어 낼 수 없습니다. 할 수 없이 농가에서는 살충제를 뿌립니다. 동물 본능과 습성을 억제하고 최소한의 복지나 배려도 없으며 화학 물질을 뿌려 대는 환경에서 가축이 정상적으로 성장할 리 없습니다. 그리고 가축에게 뿌려 댄 살충제는 최종적으로 우리 몸에 쌓일 것입니다. 2017년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로 3,800만 마리에 가까운 닭이 살처분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2,500만 마리 이상이 좁은 케이지에 갇혀 기계처럼 알을 낳던 산란계였습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와 구제역에 이어 2019년에 발생한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돼지뿐만 아니라 야생에 살던 멧돼지까지 사살됐습니다. 생명을 생명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닌 조밀한 공간에 대량으로 몰아넣고 오직 경제성만 따지다 병이 돌면 모조리 살처분해 버리는 이 악순환. 그런데도 우리가 호들갑 떠는 지점은 언제나 과정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생명의 존엄이 사라진 과정이 아니라 병을 옮기느냐 마느냐 하는 결과일 뿐이라는 거지요. 조류 인플루엔자나 구제역이 반복되고 먹을거리에 빨간불이 꺼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135-138

전 세계 35개국이 ‘고기 없는 월요일’에 참여하고 있고, 우리나라 역시 2010년부터 함께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도 많이 알려지진 않은 것 같아요.  140

과잉 육식 문제를 해결하려면 육식 채식을 따지기 전에 내가 먹는 음식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내 미각을 우선할 건지 내 건강을 우선할 건지 조화로운 생명의 선물을 어떤 마음으로 대할 건지 성찰하는 일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첫 걸음 아닐까요?  141

홀로세의 홀로(Holo)는 완전하다는 의미로 인류가 살기에 적합한 지질 시대라는 뜻입니다.  145

과도한 화석 연료 사용으로 배출된 온실가스가 지구를 덥히고 그 때문에 기후가 예측할 수 없이 변한다는 것까진 이제 누구나 압니다. 그런데 이 많은 화석 연료가 어디에 쓰이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보통 화석 연료를 쓰는 곳 하면 자동차나 발전소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의외로 탄소 배출이 많은데도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이 바로 먹을거리, 특히 육식입니다. 지난 50년 사이에 전 세계 육류 소비가 100배가량 늘었습니다. 가난한 나라는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니 육식 소비는 대부분 잘사는 나라에 집중됩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발표 자료에 따르면 2014년에 우리나라 1인당 육류 소비는 연간 51.4킬로그램이고 2016년에는 52.5킬로그램이었습니다. 지구에서 사육되는 소가 약 15억 마리로, 무게로 따지면 세계 인구 전체를 합틴 것보다 많이 나갑니다. 지구 전체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1/3을 가축이 먹어 없앱니다. 소고기 1킬로그램을 생산하느라 옥수수 16킬로그램, 물 1만5,000리터가 쓰입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에서 얼음이 없는 지역의 26%가 가축을 기르는 데에 쓰이고, 전체 경작지의 33%에서 가축 사료용 작물을 재배합니다. 작물을 기르고자 벌목이 이어지면서 숲이 사라졌습니다. 온전했다면 이산화탄소를 흡수했을 숲이 말이지요. 작물을 기르는 데에 들어가는 비료며 농약, 살충제는 모두 석유 화학 제품입니다. 소는 되새김질하며 생긴 메탄을 트림으로 연간 1억 톤가량 내보냅니다. 메탄은 적게 잡아도 이산화탄소 보다 20배 이상 온실 효과를 내는 물질입니다. 인류가 배출하는 탄소의 15% 정도가 축산업에서 나옵니다.
현재 인류는 그동안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아 왔던 기후를 변화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변화시킨 기후는 부메랑이 돼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146-147

지금까지 지구 온난화 재난은 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 혁명 이전보다 겨우 1.1도 상승하면서 발생했습니다.  152

지구 전체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 가운데 육류 생산 과정에서 배출되는 양이 무려 15% 정도에 이르기 때문에 이런 캠페인을 벌인 거지요 ... 1만 명이 단 하루만 고기를 먹지 않아도 차 한 대가 28만 8,917킬로미터를 운전할 때 나오는 양만큼 탄소를 줄일 수 있고, 한 사람이 93년간 쓰기에 충분한 물을 절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152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후 변화 인식은 상당 수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탄소 배출은 세계 7위입니다. 지식만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153

폭죽 쓰레기가 처박힌 쓰레기통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먼저, 쓰레기통은 은연중에 사람들에게 쓰레기가 영원히 사라진다는 착각을 심어 주는 것 같습니다. 쓰레기에 대한 책임이 쓰레기통에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쓰레기는 말끔히 치워질까요? 분리배출이 되지 않는 폭죽 쓰레기는 어딘가에 쌓여 있다가 유해 물질을 내뿜으며 태워질 뿐이며, 그러면서 미세 먼지를 배출합니다. 그나마 수거라도 할 수 있으니 폭죽 쓰레기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하늘로 날린 풍선은 아예 잔해를 수거할 수 없고, 바다에 떨어진 풍선 쓰레기는 사라지기는 커녕 오히려 다른 생물의 목숨을 위협합니다. 폭죽놀이를 즐기고, 풍선 이벤트에 환호하는 사람들 가운데 쓰레기의 다음 행방을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소비 사회에서는 즐거움도 물질을 소비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일, 철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가는 풍경 같은 건 더 이상 즐거움일 수 없고, 더욱 자극적이고 역동적이어야 즐겁다고 할 만한 세태인 듯해 어쩐지 씁쓸합니다.  163-164

“우리는 당신들을 환영하지 않는다.” 2016년 9월, 이탈리아 베네치아 시민들이 베네치아항으로 들어오는 대형 크루즈를 막아선 채 들고 있던 피켓에 쓰인 문구입니다. 관광으로 먹고산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도시 베네치아에서 시민들이 이런 피켓을 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베네치아에 사는 사람은 5만 5,000여 명이지만 베네치아를 찾는 관광객은 하루 평균 6만여 명, 사육제 기간에는 17만 명 가까이 이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많은 관광객이 오가다 보니 쓰레기는 넘쳐나고, 소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젠트리피케이션이 이곳에서도 벌어집니다. 치솟는 임대료 때문에 주민들이 다니던 채소 가게는 관광 상품을 파는 가게로 바뀝니다. 그러니 시민들도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던 듯합니다. 관광지가 있는 곳이라면 세계 어느 도시를 막론하고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한옥 마을로 유명한 서울 북촌 주민들 역시 넘쳐나는 관광객들로 고통을 겪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제발 오지 말라는 문구를 붙여 놓은 대문이 어렵잖게 눈에 띕니다.  167-168

크루즈 관광은 환경 친화적인 여행인 양 알려져 있지만 크루즈에 쓰이는 연료는 중유입니다. 육지에서는 유해 쓰레기로 처리되는 연료인 중유는 육지에서 주로 쓰이는 연료인 디젤보다 3,500배 많은 유황을 함유하며 지구 온난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크루즈 한 척이 하루에 대략 중요 150톤을 소비하는데 이는 자동차 수백만대와 맞먹는 대기 오염 물질을 배출하는 셈입니다.  169-170

지구 곳곳에는 다양한 종류의 무덤이 있습니다. ... 문명의 그늘을 보여 주는 한 단면입니다. 새 물건에는 너나 없이 관심을 갖지만 버려진 물건이 어디로 흘러들어 가 어떻게 되는지에는 몇이나 관심이 있을까요?   180

“우린 전부 가진 세대예요. 먹고 싶을 때 먹고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왜 우리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을까요?” (영화 <100일 동안 100가지로 100% 행복찾기> 중에서). ...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수록 우리는 내면의 균형을 잃기 쉽습니다. 물질의 가치가 삶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이 돼 버린 사회는 점점 물질적인 욕망을 추구하도록 부채질합니다. 상대와 끊임없이 비교하며 외양에 치중하도록 만들고 불안감을 추동합니다.  197

어차피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계속 제시하기 때문에 아무리 소유해도 그 소유가 내 행복을 충족시켜 줄 수가 없습니다.  198


4 자연소비

야생에서 40년을 사는 돌고래들이 한국의 수족관 시설에서는 고작 4년밖에 살지 못합니다. 굳이 알려고 들지 않으면 알 수 없고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한 돌고래의 고통은 계속될 겁니다.  204

남획뿐만 아니라 바다로 흘러드는 독성 물질이 늘어나고 각종 개발, 군사기지 건설 등으로 바다 환경이 악화되면서 해양 동물의 서식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연히 자연스런 어업은 점점 어려워지고 우리가 먹을 수산물을 양식하느라 바다는 수조로 바뀌고 있습니다.  205

해수 온도 상승으로 따뜻한 물방울인 블롭(Blob)이 증가하면서 해양 생태계 먹이 체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205

해양은 인간이 활동하며 배출하는 열의 90%를 흡수하기 때문에 날로 상승하는 해수 온도로 해양 생태계는 전방위적으로 위협을 받을 것입니다.  206

19세기 말 위싱턴의 어느 술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담배 공장 노동자였던 마빈 스톤은 어느 여름날 퇴근 후 들른 술집에서 위스키 잔에 손을 대면 술이 뜨듯해져 맛이 변하자 손을 대지 않고 마실 방법을 궁리했습니다. 속이 빈 밀짚이 떠올랐습니다. 빨대가 영어로 straw인 이유입니다. 그런데 밀짚으로 마시니 특유의 냄새 때문에 위스키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게 또 불만이었습니다. 마침 그가 다니던 담배 공장에서 담배를 말던 종이가 떠올랐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메르인도 빨대 비슷한 도구를 썼다고 하나 현대 빨대의 발명은 대개 이때로 봅니다. 빨대는 시원하고 맛난 술을 마시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됐습니다. 어찌 보면 소박한 출발이었습니다. 빨대는 종이에서 플라스틱으로 진화를 거듭하면서 쓰임은 더욱 확장됐습니다.  209

매력에 중독돼 신나게 쓰다보니 어느 순간 플라스틱은 썩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다며 육지며 할 것 없이 쌓이게 됐습니다.  210

바다 위든 아래든 가리지 않고 플라스틱이 점령한 지는 이미 오래며, 이는 곧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를 감당할 만한 여력이 지구에 더 이상 없다는 말입니다. 생명다양성재단과 영국 케임브리지대 동물학과가 공동 조사한 [한국 플라스틱 쓰레기가 해양 동물에 미치는 영향] 연구 보고서가 2019년 7월에 발표됐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에서 배출한 플라스틱 쓰레기 때문에 해마다 바닷새 5,000마리와 바다 포유류 500마리가 죽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전 세계 플라스틱 통계 자료가 있는 2010년을 기준으로 한국에서 배출한 연간 플라스틱 쓰레기 양을 추정해서 발표한 숫자입니다.  211

전 세계 플라스틱 소비는 1950년 이래 65년 동안 200배가 넘게 증가했지만 세계 평균 재활용 비율은 고작 9.5%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연간 800만 톤이며 재활용 배율은 62%라고 하지만, 이는 발전소 등에서 연료로 태우는 것까지 합친 비율입니다. 다시 제품으로 활용되는 것만 따지면 22.7%로 떨어집니다. 유럽 연합 평균이 40%인 것에 비하면 한참 낮은 수준입니다. 게다가 재활용을 하면 할수록 풉질은 떨어집니다. 그러니 재활용은 만능도 아니고 소비의 면죄부가 될수도 없습니다.  212

인간이 내보낸 열의 90%를 바다가 흡수합니다. 1초에 원자 폭탄 5개가 터지는 것과 비슷한 에너지를 우리가 날마다 배출하고 있습니다. 온도를 색으로 표현한 그래픽이 다큐멘터리 화면에 나타났습니다. 붉은색일수록 온도가 높은데 전 세계 바다가 시뻘갰습니다. 기후 변화를 늦추거나 막으려고 탄소 배출을 줄이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한겨울에 반팔을 입고서 그런 말을 합니다. 한여름에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온도가 낮은 건물 안에서, 지하철 안에서 그런 말을 합니다. 탄소 배출은 절대 말로 줄일 수 없습니다. 배출되는 탄소는 우리 삶 아주 깊숙이 그리고 아주 속속들이 연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221

빙하란 무엇일까요? 얼음덩어리 아니, 단순한 얼음덩어리 이상입니다. 빙하와 해류는 지구 기후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육상 빙하는 강의 시원이자 주변 지역의 상수원입니다. 빙하가 급속히 사라진다면 강은 메말라 갈 것이고, 그 일대는 물 부족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히말라야 빙하는 대표적인 육상 빙하입니다.  224-225

북극권에 있는 해상 빙하는 지구로 쏟아져 들어오는 태양 빛을 반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 빙하가 절반으로 줄어들면서 드러나는 바다는 열을 흡수합니다. 반사 부분은 자꾸 줄어들고 열을 흡수하는 면적은 점점 늘어납니다. 그러니 빙하가 녹는 속도는 더 빨라지고 되먹임 현상(positive feedback)도 가속화되면서 북극 빙하의 나머지 절반은 절반이 녹는 데에 걸린 30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빨리 녹을 것으로 기후학자들은 내다보고 있습니다.  225

녹아 사라지고 있는 건 땅속 얼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구 동토층이 빠르게 녹으면서 나오는 메탄가스 때문에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될 거라 과학자들은 경고합니다. 영구 동토란 지표 밑의 온도가 2년 이상 연이어 0도 이하인 토양을 일컫습니다. 북반구 지표면의 약 24%가 영구 동토층입니다.  226

동물이건 사람이건 자기에게 맞는 환경에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럽고, 그런 환경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243

일방적인 권리는 누군가에게는 폭력일 수 있습니다. 내 권리는 보호받으면서 무수한 생명의 생존권을 침해한다면 그건 공정하지 않습니다. .. 이 땅에서 유리창에 부딪혀 하루에 2만 마리, 일 년이면 적어도 800만 마리 새가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투명한 고층 빌딩, 방음벽 때문에 새가 자유로이 날아야 할 창공은 어느새 보이지 않는 덫이 됐습니다.
미국에서는 한 해에 약 3억에서 10억 마리 새가 유리창에 부딪혀 목숨을 잃습니다. 오랜 시간 쌓인 통계에 따르면 새가 목숨을 잃는 직접 원인은 첫 번째가 고양이 공격, 두 번째가 유리창 충돌입니다.  245-246

높은 곳에서도 정확히 먹잇감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시력이 좋은 새가 어째서 방음벽에 자꾸 부딪히는 걸까요? 맹금류를 제외한 대부분의 새 눈은 사람처럼 앞쪽이 아니라 양 옆에 하나씩 있습니다. 그래서 좌우를 넓게 살필 수는 있지만 거리는 잘 파악하지 못해 앞에 있는 방음벽을 쉽게 피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시력이 좋다 해도 유리를 본다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유리라는 것도 실은 창틀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 유리가 있을 거라 짐작할 뿐입니다.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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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은신처를 평등하게 분재하는 것, 은신처 속에 숨을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것, 사회의 지배적 여론과 정동으로부터 집요하게 탈주하는 것, 과잉 연결된 관계들을 해체하는 것, 인간들의 세계를 떠나 비인간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 과열된 자본주의적 삶의 형식을 벗어나는 것,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새로운 가능세계를 발명하는 것, 이것이 21세기의 새로운 은둔의 실천이다. 은둔은 이제 생존을 위한 생명의 필사적 재조립이라는 의미를 띤다. 은둔 속에서 노동하고, 생각하고, 산책하고, 읽고, 쓰고, 견디고, 저항하고, 소통하고, 창조하며 다른 무언가로 생성되어가는 이들을 나는 은둔기계라 부른다. 이 책은 은둔기계의 삶에 관한 것이다.  6


1부 은둔하는 삶

악인이 사라진 자리에서, 악인과 싸우던 선인이 새로운 악의 형태들을 발명하고 실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31

자식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인격의 바닥을 드러낸다. 비겁, 용기, 탐욕, 광기, 연민, 죄책감, 불안, 공포 혹은 아주 드물지만 자기-비움(케노시스kenosus).  36

실패한 결혼이 치명적 불행이 아닌 것은, 모든 결혼이 근본적으로 성공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37

사랑 없는 정의보다는 차라리 정의 없는 사랑을 선택할 것. 사랑으로부터 정의가 생성되는 것은 가능하지마, 정의 안에는 사랑의 씨앗이 존재하지 않는다.  37

우리가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지, 우리의 사랑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사랑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
악이 그러하듯이.  42

우리는 ‘미리’ 강건해질 수 없다. ‘미리’ 용맹해질 수도 없고, ‘미리’ 굳건할 수도 없다. ‘미리’ 생존할 수 없다. 오직 때가 닥쳐왔을 때만 그렇게 할 수 있다. 때가 오기전에, 모든 것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때는 모든 것에 존재와 질서와 가시성을 부여한다.  45

진실의 시간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니다. 그것은 ‘머지 않아’이다. 진리는 오직 머지않아 드러난다.
예언자는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발언한다. 진실은 머지않아 나타나기 때문에, 진실의 발언은 언제나 예언처럼 보인다.
우리가 쓰는 글의 참된 의미도(만에 하나 그런 것이 있다면) 머지않아 드러난다. 지금 환호하거나 비판하는 독자들이 아니라 ‘머지않아’의 독자들이 참된 독자다.
‘머지않아’를 잃는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머지않아’를 위해서 우리는 지나친 성공, 갈채, 칭찬, 환호를 누리면 안 된다. 그 향유 가능성을 전략적으로 파괴해야 한다.  50

심오한 고립, 심오한 분리, 심오한 비사회성.  55

20세기가 이상화한, 광기에 가득찬, 생산적 삶의 가치를 파상(破像 깨뜨릴파 형상상)할 것. 사회적 삶을 탈도덕화할 것.  55

도처에 은둔지가 형성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견디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서로의 살, 냄새, 얼굴, 말, 현존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시대. 인간은 서로에 대해 지쳤고, 서로를 지겨워한다. 두려워한다. 사람들 사이에 광대한 사막이 형성되었다. 그 사막은 여러 형태의 기술적 장치들에 가로질러진다. 21세기의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을 의심하고, 경계하고, 직시한다. 인간중심주의와 휴머니즘의 자명성이 파열되고 있다. 이는 병리현상이라기보다는 문명사적 변동의 한 징후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첫번째 세대다. 모더니티의 잠에서 깨어나 충혈된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는 인간이 광폭한 힘을 발휘하여 변형시켜놓은 중생(衆生, 부처의 구제 대상이 되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나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다음사전)의 고통의 극장이다. 인간의 인간성에 자기-제한을 가할 것. 인간의 인간성을 스스로 비워낼 것. 해방이 아니라 포기, 전진이 아니라 이탈, 사교가 아니라 은둔.  55-56

누구는 커피로 은둔하고, 누구는 음악으로, 누구는 산책으로, 누구는 철학으로 은둔한다. 성격으로, 질병으로, 작품으로, 광장에, 대중 속에 은둔하는 자들도 있다. SNS로 은둔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SNS로부터 은둔하는 사람도 있다. 은둔지는 발명될 수 있다. 은둔지를 구축하는 능력이 참된 창조력이다.  56

단순한 생명의 기쁨을 회복하고 싶은 자는 은둔을 꿈꾼다.  56

숨는 것은 인정받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 지금 인정받으면, 미래의 인정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것. 끝까지 인정받지 않고 버티면서, 후일 최대치의 인정을 얻겠다는 귀여운 간계.  59

탈-성장. 반핵(反核). 페미니즘. 생태주의. 포스트휴머니즘. 소박하고 단순한 삶. 비거니즘. 지나친 생산과 이동의 포기. 독신주의. 열린 영성.  20세기적 상상력과의 결별. 신유물론. 61

과도한 연걸, 과도한 생산, 과도한 소통, 과도한 소비, 과도한 학습, 과도한 경쟁, 과도한 활동, 과도한 이동, 과도한 여행, 과도한 존재, 과도한 체험, 과도한 섭취, 과도한 존재로부터의 이탈. 덜 움직이고, 덜 먹고, 덜 소비하고, 덜 벌고, 덜 생각하고, 덜 쓰고, 덜 일하고, 덜 만나고, 덜 경쟁하고, 덜 여행하고, 덜 가르치고, 덜 배우고, 덜 제작하고, 덜 존재하기. 덜 있을 수 있는 능력. 코나투스의 자기-제한. 61
(라틴어 Conatus, 사물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고 스스로를 계속 높이려는 경향을 말한다)

은둔기계는 겁쟁이다. 그는 지배를 두려워하고, 상처를 두려워하고, 폭력을 두려워하고, 갈등을 두려워하고, 오해를 두려워하고, 감염을 두려워하고, 관계를 두려워한다. 그는 의(義)를 말하지 않는다.  (그가 의를 말하는 매우 드문 순간에도 그는 결코 대의를 말하지 않고 오직 소의(小義)만을 말할 것이다.) 우유부단하고,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적이다. 소심하며, 잡스럽다. 그것을 숨기지 못한다. 숨기려 하지만 언제나 쉽게 발각된다. 이 모든 약점들이 그의 힘이다.  62-63

은둔기계는 세계를 바꾸거나, 계몽하거나, 비판하려는 열정이 없다. 그는 오히려 세계를 두려워한다. 세계 위에 서지 않는다. 그는 세계의 무서운 힘을 잘 알고 있다. 은둔기계는 지사(志士 뜻지 선비사)가 아니며 선비도 아니고 열사도 아니다. 그는 생존주의자다. 그는 도망치면서라도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생존은 그에게 지상의 가치다. 다만, 그 지상성(至上性 이를지 윗상 성품성)은 신중하게 은폐되어 있다.  65

은둔기계는 자신의 물러남을 책임진다. 물러난 자들은 대개 모든 것을 비판할 수 있는 자리에 선다는 착각을 하기 쉽다. 이러한 인식은 관객성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 된다는 것은 물러남을 통해 무대의 권리를 내려놓는 것이다. 무대는 언제나 객석보다 더 위대하다. 물러나는 것은 무대로부터의 물러남이며, 그리하여 물러난 자는 자신의 하찮아짐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물러남의 윤리다.  66-67

부재하는 무언가를 현존시키는 것이 상상이라면, 현존하는 것의 공성(空性 ‘진여’의 다른이름. 우주 만유의 보편한 본체로서, 현실적이며 평등무차별한 절대의 진리)을 직관하거나 체험하는 것이 파상이다.  72

파상은 자기-비움의 체험이다.  75

파상 이후, 우리는 은둔기계가 된다.  78

비운다는 말은 그리스어 동사 ‘케노오(kenoo)’이며, 영어로 ‘emptrying’ 혹은
‘making empty’로 번역된다. 그리스어 케노시스(kenosis)는 한자로 자기-비허(卑虛 낮을비 힐허)’, 한글로는 대개 ‘자기-비움’으로 번역된다.  84

중독은 반복에 대한 사랑이다.  95

산책은 걸음으로 선을 긋는 행위다. 바로보는 것은 눈으로 선을 긋는 것이며, 생각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알 수 없는 어딘가에 선을 긋는 것이다. 세계는 선들로 구성되어 있다.  99

사람들은 각자의 막(膜) 속에 산다. 보이지 않는 캡슐이 사람들을 두르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막을 유지하고, 그것이 파손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 악수할 때, 손의 막은 다른 손의 막을 더듬는다. 키스나 성교 속에서 한 인간의 막은 다른 인간의 막과 가장 가깝게 밀착한다. 하지만, 막은 찢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막에 갇혀 있다. 오해, 증오, 불신, 혐오, 경멸이 오갈 때, 불쾌하고 자극적인 스파크가 일어난다. 막과 막 사이에는 무수한 것들이 흘러다닌다. 그런데 이 흐름은 아무에게도 인지 되지 않는다.  103

속도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곳에서 부패가 시작된다. 속도는 연결에서 생긴다. 이동은 연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104

어디가 가려운지 알지 못하면서 피가 날 때까지 아무 곳이나 마구 긁어대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111


2부 글쓰기에 대하여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나쁜 글을 쓰지 않아야 한다. 나쁜 글을 ‘쓰지 않는 것’이 좋은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어렵다. 무언가를 ‘쓰지 않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무언가를 ‘쓰는 법’도 알지 못한다.  115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글을 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문제는 글쓰기 테크닉이 아니라 주체성이다. 무엇이 당신을 휘감고 있는 소용돌이인가? 당신을 통해 말하는 자(것)들은 누구(무엇)인가?  115

좋은 글은 심지어 역겹다. 생명력으로 범람하기 때문이다. 생명은 다른 생명을 탈취하는 잔혹성을 갖고 있다. 좋은 글을 그 잔혹성에 닿아 있다. 진리를 드러내거나 인식을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진실로 간주되어온 것을 무너뜨리고 뭉개버리는 것이다. 생명의 힘에 걸려 진리는 추악한 표정으로 일그러진다.  117

진실을 말하려 하지 말고 진실의 기준을 바꾸라.  117

쓰인 적조차 없거나, 쓰였지만 발표되지 않았거나, 발표되었으니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그런 글이 좋은 글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좋은 글은 무언가를 전달하는 글이 아니라 전달 가능성을 창조하는 글이다.  122

가장 명확한 인정의 증거는 질투이다. 당신의 글이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면, 당신은 이미 인정받은 것이다.  123

반드시 사용하지 않기로 정해놓은 단어들의 목록을 갖고 있어야 한다.  124

비판은 우리 시대 교육의 낡고 비생산적인 관행이다.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나오는 상품처럼, 자동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식상하고 무례한 말들이 비판으로 오인되고 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모든 언술의 결론을 차지하게 된 저 습관적인 공격.  125

뛰어난 비판자는 타인의 작품이나 인격에 흠집을 내고, 생채기를 내고, 피를 흘리게 하지 않는다. 대상을 모욕하지 않는다. 대신 대상이 미처 달성하지 못한 잠재적 세계를 재창조하여 보여준다. 이를 통해 작가와 잡품은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벤야민이 말한 것처럼, 비판의 대상은 ‘타격’이 아니라 차라리 ‘소각’의 대상이다. 대상에 벼락을 때려 전소시켜보리고 불타고 남은 자리에서 사리를 줍는 것이다. 비판자는 대상의 정수(精髓)를 구제하여 제시한다. 이런 비판을 받는 행운을 누리는 자는, 분노가 아닌 부끄러움과 용기를 동시에 느낀다.  126

건조하고 단순하지 않으면 삶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다.  129

의미는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체감된다. 의미를 느끼는 기관은 뇌가 아니라 피부, 살, 뼈, 내장이다. 의미는 우리를 때리고, 우리에게 통증과 쾌감을 준다.  129

단 한 번이라도 시인인 적 있는 사람은, 시가 아닌 문장을 쓸 때 어려움을 느낀다.  130

학문 세계에는 언제나 소수의 앞선 자들이 있고 다수의 뒤진 자들이 있다. 세상이 앞선 자들의 비시대적 통찰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진화한 이후에야 비로소 뒤진 자들은 아무런 저항이나 어려움 없이, 마치 오래전부터 불운했던 선구자들을 이해해온 것처럼, 그들의 지식을 섭취하고 선전하고 찬양하고 소비한다. 그러나 뒤늦은 자들이 뒤늦은 지식을 전파하는 데 열심인 동안, 소수의 앞선 자들은 이미 또다른 세계로 걸어가버렸다는 것.  159

어떤 사회도 충분히 적대하고 있지 못하며, 어떤 사회도 충분히 통합되어 있지 못하다.  159

사회는 꿈이다. 사회 속에서 어느 누구도 모방과 암시를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믿지 않는 그것을 믿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그것을 옳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혐오하는 것을 혐오하지 않음을 밝히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159-160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사교가 아니라 따뜻한 친교다. 사회의 익명성과 억압, 그리고 사회생활에 내재하는 긴장과 고통에 대한 해독제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부담 없는 관계에서 온다.  160

헐벗은 자가 아직 헐벗지 않은 자에게 하는 말은 단상처럼 들린다. 헐벗지 않은 자는, 오직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자신도 헐벗은 이후에야 비로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188

취하면 단상을 쓰지 못한다. 술에도, 기분에도, 감각에도, 자아에도, 세계에도 도취하지 않아야 한다. 명정해야 한다.  188

단상의 생산은 기계적이다. 카메라가 풍경을 끊어내듯, 프레스 기계가 철판을 찍어내듯, 메스가 피부를 절개하듯, 그렇게 하나의 문장이 잘려나온다. 단상은 반-유기적이다.  189

실패한 단상은 꼰대의 훈계이거나 애송이의 트윗이다. 헐벗지 않은 자가 쓰는 단상은 실패한 단상이다. ‘무엇’을 쓰느냐보다 ‘누가’ 쓰느냐가 더 중요한 이유가 이것이다. 단상은 충만하고 풍요로운 정신으로는 쓸 수 없다. 오만하거나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단상에 실패한다.  189

꼰대도 애송이도 단상을 쓸 수 없다. 양자 모두 자신은 헐벗지 않은 채 타인을 헐벗기려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헐벗을 때, 주관이 헐벗을 때, 자아가 헐벗을 때, 문장이, 표현력이, 욕망이 헐벗을 때 단상이 가능하다.  189

객관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오만한 만큼이나, 주관을 정의의 원천으로 내세우는 것은 사악하다.  190

단상은 읍소도 고발도 비판도 아첨도 신음도 엄살도 과장도 아니다. 단상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타자가 사라지면 곧바로 허물어지는 그런 언어가 아니다. 단상은 듣는 자가 ‘아직’ 없을때 행해지는 말이다. 타자의 부재는 단상의 조건이다. 단상 속에서 말은 그 빈약함과 가난함과 헐벗음 속에서도, 꼿꼿함을 상실하지 않는다. 그것이 단상의 자존심이다.  190-191


3부 난류 속으로

인류학자 에두아르도 콘은 아마존 숲에서 ‘인간이 재규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라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재규어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라는 점을 지적한다. 숲은 생존 공간이다. 거기서 우리는 다른 존재자들과의 위험하고, 물질적이고, 해석학적인 관계를 갖는다. 인간만이 자기(self)인것이 아니다.  197

숲에서, 모든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들이 발산하는 기호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다. 인간만이 언어를 갖고, 비인간 세계는 언어가 없는 죽은 물질의 세계라는 착각을 하는 자는 아마존 숲에서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물, 공기, 바람, 흙, 곤충, 식물, 작은 동물, 큰 동물, 날씨, 습도, 정령(spirit), 사자(死者)는 모두 자기(self)다. 이들은 각자의 시선과 권능과 생명과 영혼을 갖는다. 이들은 서로가 발산하는 기호를 읽고 탐구하는 해석학자들이다. 아마존 숲에서 먹이를 찾아 산책하는 재규어와 마주친 인간은 (인간의 관점에서는) 주체이지만 (재규어의 관점에서는) 잠재적 먹이, 즉 대상이다. 자신이 재규어의 먹잇감이 아니라 그와 동등한 또다른 자기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는 재규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재규어에게 아우라를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즉, “재규어의 시선을 돌려 주어야 한다.”(콘, 2018:12)  197-198

“수마코 화산 기슭에 있는 사냥 캠프의 초가지붕 아래서 엎드려 누워 있는데, 후아니쿠가 내게 다가와 경고했다. ‘반듯이 누워 자! 그래야 재규어가 왔을 때 그 녀석을 마주 볼 수 있어. 재규어는 그걸 알아보고 너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엎드려 자면 재규어는 너를 아이차(aicha, 멋잇감)로 여기고 겅격한다고’, 후아니쿠의 이 말은 재규어가 우리를 마주 응시할 능력이 있는 존재로 본다면, 우리를 가만히 놓아둔다는 뜻이다.  그러나 재규어가 우리를 멋잇감-‘그것’-으로 보게 된다면, 우리는 죽은 고기나 다름없다. 다른 부류의 존재들은 우리를 어떻게 볼까? 이 문제는 중요하다”(콘, 2018:12)  198

인간의 악을 직시할 것. 인간의 악을 용서할 것. 자신의 악을 직시할 것. 자신의 악을 용서하지 말 것.  205

“옛 시대의 장비들로 현재의 도전에 응하는 것보다 더 큰 지적 범죄는 없다”(Latour, 2004:231).  206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지 말고 무엇을 ‘수행’하는가를 물을 것.  206

‘실존’하는 것들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있을 수 있기’위해 고투하고 있다. 그저 있는 듯이 보이는 나무는 광합성하고 있고, 성장하고 있고, 분열하고 있다. 바람에 버티고 있으며, 흙을 뚫고 내려가고 있다. 그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자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부단히 운동하고 있다. 흐르고 있고, 불타고 있고, 대립하고 있고, 버티고 있다. 가까이에 다가가서 보면, 모든 존재는 무수한 작용과 겪음의 지속적 ‘과정’이다. 존재가 아니라 생성, 혹은 생존이다.  209

비인간 행위자들의 기호학적 소통능력. 모든 존재자들은 기호의 생산자이며 해석자다. 구름과 별, 동물의 배설물, 식물의 색깔과 모양, 벌레의 움직임, 땅의 냄새, 어떤 분위기.  211

의미한다는 것은 차이를 갖는다는 것이다. 차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아니고 저것을 선택할 때, 거기에 의미가 발생한다. 왜 이것이 아니고 저것인가? 인간의 중대한 선택은 결단이라 불리지만, 결단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미생물도 결단한다.  211

비인간 행위능력을 간파하지 못하는 사람은 ‘센스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가령, 금연중인 친구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짜증을 낼 때, 그것을 혈중 니코틴 부족으로 금단현상을 겪는 ‘뇌’의 짜증이 아니라, 그 친구의 ‘인격의 짜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센스가 없다.  214

에일리언은 존재하기 위해, 연속해서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존재-과정이다. 어떤 주저도, 지체도, 망설임도 없이, 먹이와 숙주를 발견하고 그 생명을 탈취한다. 연민도 슬픔도 없이. 기계를 닮은 냉정한 작동. 에일리언의 벌린 입과 거기 흐르는 산성 타액은 생명현상에 내재한 깊은 공허, 그 텅 빈 성격을 드러낸다. 생명에 대해서 ‘왜’라는 질문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생명을 지속해나가는 끝없는 작동을 수행하는 것뿐이다.  215-216

지구의 여러 생명체에게는 인간이 에일리언이다.  216

바이러스는 단백질과 지질 껍질에 싸여 있는 RNA 혹은 DNA조각들로서,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하지 못하고 물질을 합성하지도 못하는 유전단위다. 오직 숙주세포의 핵산과 단백질 합성기구를 이용하여 자신을 복제해야 하는 기생체다.  

숙주에 침투하기 이전의 바이러스는 캡시드(바이러스 게놈의 핵산을 감싸는 단백질의 집합체)에 둘러싸인 입자에 불과하다. 비리온(virion)이라 불리는 이 입자는 혼자서는 성장, 생식, 대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숙주와의 감염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는 동안에 바이러스는 생명활동을 멈춘 채 그냥 존속한다. 그러나, 일단 숙주에 침투하면, 바이러스는 자기복제를 실행하기 시작한다.

바이러스는 죽음도 아니고 생명도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의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 생명 속에 죽음을 초대함으로써 생명의 능력을 극대화시킨 존재다. 바이러스는 존재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환경에 위탁함으로써 평소에는 차라리 죽어 있기를 택한다.  219

생명의 작동이 멈추었지만 죽지 않은 것. 부활-가능성 속에서 잔존하는 것. 조건이 주어지면 맹렬하게 자기복제하는 것. 유보, 정지, 멈춤을 내장한 생명력. 막강한 변이능력. 그리고 면역 시스템에 식별되지 않을 수 있는 은폐능력. 바이러스의 힘.  220

사람들이 바이러스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미 그들이 바이러스를 행위자로 인정하기 시작했으며, 그 행위능력(agency)을 지각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221

봉준호의 <기생충>에서 아버지 기택(송강호)은 아들 기우(최우식)가 ‘기생’ 작전을 수립하자 감탄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바이러스에게도 계획이 있다. 바이러스는 다음 네 가지 계획을 실행해야 생존한다. 1) 숙주세포를 감염시키기, 2) 숙주세포 내부에서 복제하기, 3) 숙주의 방어막을 피해가기, 4) 새로운 숙주로 옮겨가기(Sompayrac, 2013:4-5). 바이러스는 최소 30억 년 이상 위의 네 가지 목표망을 실행하면서 지구상에서 생존해왔다. 생존에 관한 한, 바이러스는 호모사피엔스보다 훨씬 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222

도서관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에 인쇄된 글자들은 비리온(virion,  비리온이란 바이러스가 숙주 외부에 있을 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내부 중심부에는 핵산이 있으며 외부는 캡시드라 불리는 단백질 막으로 둘러쌓인 바이러스성 입자이며 중심부의 핵산은 감염성을 가지고 있으며 캡시드라 불리는 단백질 막의 구조는 바이러스의 특이성을 결정한다.-위키)상태의 바이러스와 유사하다. 인지되고 이해되기 이전의 글자들은 물리적으로 현존할 뿐이다. 그것은 작용하지도 감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페이지가 펼쳐지고 어떤 의식이 그것을 읽는 순간, 글자와 뇌가 연결되는 순간, 글자는 인쇄된 특정 모양을 지닌 단순한 잉크 자국에서 의미의 활발한 파동으로 변신한다. 글자는 살아나고, 이미지와 생각과 느낌이 되어 읽는 자의 신체와 그 외부로 퍼져나간다.  223

커뮤니케이션은 ‘전염’이다. 기호는 의식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바이러스다.

읽는다는 것은 숙주가 되는 과정이다. 저자가 생산한 바이러스가 읽는 의식에 기생체로 밀려들어온다. 의식 내부에서, 바이러스의 영토화가 발생하고, 새로운 기호의 배치가 생산된다. 쓴다는 것은 의식에 침투한 바이러스의 변이다.  223

바이러스적으로 작용하는 대부분의 기호는 면역계에 의해 차단되고, 파괴되고, 무력화되어 자아의 내부에 침투하지 못한다. 반지성주의, 편견, 우상, 혐오, 독단, 신앙과 같은 강력한 면역 시스템.  224

기호의 핵심에는 ‘의미’가 아니라, 의미의 단속적 ‘출현’이 있다. 의미가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미가 특정 ‘순간’에 나타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의미는 상황에서 솟아나 증식한다.  224

인간은 지구와 뒤엉켜버렸다. 자연은 사회와 뒤엉켜버렸다. 우리에게는 초월적 위치도, 객관적 위치도, 실험적 위치도 없다. 우리는 붙들려 있고, 침투당했고, 피폭되었다. 이것이 21세기 파상적 리얼리티의 풍경이다. 이 냉혹하고 초현실적인 생태-존재론적 위급상태의 이름이 바로 ‘인류세(Anthropocene)’다(김홍중, 2019). 231

인간을 뜻하는 ‘안트로포스(anthropos)’와 시간을 뜻하는 ‘카이노스(Kainos)’를 결합한 신조어인 인류세는, 노벨 화학상 수상자 폴 크뤼첸과 생태학자 유진 스토머가 2000년에 IGBP의 뉴스 레터에 기고한 짧은 글에 처음 등장한다. 이들은 수온 상승과 수질 산성화로 인해 산호초가 탈색되는 현상을 연구하다가 암석, 물, 대기에 인간활동에서 비롯된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인식을 지질학적 시간에 반영해야 할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제기한다.

“인간 행위가 지구와 대기에 미친 중요하고 점증하는 영향을 고려해보건대 (...) 지질학과 환경학에서 인류의 중심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참으로 적절하게 보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현재의 지질학적 시대를 ‘인류세’라고 부를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어쩌면 아마 다가올 몇백만 년 동안 주요한 지질학적 힘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Crutzen&Stoermer, 2000:17-8)

11700년을 이이온 홀로세(Holocene)가 끝나고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주장의 타당성에 대한 논쟁은 어느 정도 정리된 듯이 보인다.  231-232

자연은 아니지만 자연처럼 느껴지며, 언젠가는 소멸할 것이지만 그 소멸을 역사적으로 상상하기 힘든 세계를 타연(他然 다를타 그러할연)이라 부르고자 한다. 가령 21세기 테크노 자본주의 문명.

기술은 우리에게, 세계가 더욱 더 향유 가능한 것이 되었으며, 세계를 더욱 더 향유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의 느낌을 제공한다.  236

인터넷을 통해 우리는 타자들의 얕은 내면에 흐르는 생각과 감정을 즉각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이 기술적 가능성은 사회라는 관념을 위기에 빠뜨린다. 사회적 삶은 내면을 서로 에게 은폐하고, 예의의 가면을 쓴 채 공존하겠다는 암묵적 계약이다. 만일 타인이 우리의 진심을 읽는다면 사회적 관계는 불가능하다.  237

타연을 살아가는 인간은 사고의 주체, 욕망의 주체, 생산의 주체, 언어의 주체, 창조의 주체가 아니라, 향유의 주체다. 향유는 존재(being)가 아니며 소유(possession)도 아니다. 오히려, 향유는 존재를 덧없게 하고 소유물을 파손시키는 것에 더 가깝다. 그 과정에서 흔적들의 묘한 폐허가 만들어진다.

향유는 즐기는 것을 넘어서 즐기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이며, 즐기는 것을 가치화하는 것이며, 즐김의 가능성을 확장해가는 실천이다. 향유에는 부정성이 없다. 향유는 자본주의적 삶의 정점에서 비로소 나타날 수 있는 실천양식, 존재양식, 사유양식이다.

향유대상이 향유 속에서 파손되고 소실된다. 파손과 소실은 향유가 생산하는 가치의 형식이다. 이처럼 반-생산을 생산하고, 반-축적을 축적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물적 자본의 파괴를 새로운 형태의 자본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향유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극한에 접근한다(김홍중, 2017). 향유는 명령한다. 무엇이 되었건 그것을 향유하라. 향유 속에서 대상을 무화시켜라. 물질적 실체들을 사라짐 속으로 투입하라. 없어지는 것이 되도록 변형시켜라. 없어짐을 생산하라. 없어짐의 생산의 증인이 되어라. 덧없음을 추적하여 체험하라. 향유의 체험을 공표하라, 공유하라, 공식화하라. 자본주의의 끝으로 가라. 가서 자본화할 수 없는, 있음과 없음 사이에 펼쳐져 있는 분산된 존재자들을 자본의 회로에 넣어, 그들의 소멸에 현실성을 부여하라. 자본주의의 한계를 경신하라. 향유를 향유하라. 241-242


4부 모든 것을 단순하게

욕망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해방을 욕망하게 하는 ‘억압’을 동시에 욕망한다.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자기(自己)를 창조해야 한다. 대다수 오류와 죄악은 이 과정에서 발생한다. 자기를 아직 정립하지 못한 자가 그 괴로움을 벗어나 주체가 되기 위해 몸부림칠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누구나 자신과의 사이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거리, 우회로, 이해할 수 없는 상징들, 막다른 골목, 미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사막을 갖고 있다.

타인을 험담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두 부류가 있다. 첫째, 타인을 험담하기에 너무나 고결한 품성을 타고난 사람들. 둘째, 타인을 험담하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견디지 못할 만큼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  257

비겁한 자들은 용기 속에 숨어 평온하다. 용기 속에서, 용기 밖에 있는 자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용기는 용기 안으로 들어가 거기에 안착하려는 욕망과도 싸울 수 있는 힘이다. 용기는 비겁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비겁을 내포한다. 비겁할 수 있는 자들만이 용기 있는 자들이다.  258

혐오하는 자들은 빈곤하다. 그것이 존재의 빈곤이건, 인정의 빈곤이건, 금전의 빈곤이건, 혹은 빈곤의 빈곤이건.

냉소는 가장 저렴한 방어기제다.  

시련은 인간을 단련시킨다. 그런데 단련이 반드시 성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종종 인격의 왜곡, 질병, 혹은 정신질환으로 귀결된다.  259

“역사가는 과거로 들어가서는 안 되고, 과거가 그에게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Tiedemann, 2004:240)

마음도 이와 같다. 타인의 마음으로 들어가고자 하면 안 되고, 타인의 마음이 자신에게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공감이란 타인의 마음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오만한 시도다. 오직 통감(痛感 아플통 느낄감)만이, 세상의 마음이 자신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김홍중, 2015:151-61)  260-261

도취의 가장 위험한 점은 영혼을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정신의 어딘가에서 무언가 썩는 냄새가 풍겨오는 순간, 그것은 오래된 도취의 결과임을 깨닫게 된다.  261

우리는 멀리 있는 흉악범보다 주변의 저열한 인간들을 더 견디기 어려워한다. 범죄 행위보다 에티켓의 실수가 더 견디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우리를 가장 분개시키는 것, 우리가 가장 혐오하는 것은 ‘사소한’ 것이다.  261

혐오를 통한 경계의 확정. 우리가 무언가를 멀리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혐오하는 감정을 통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듯이 보인다. 자연 속에서 혐오는 회피와 오염의 방지를 위한 행동 촉구 기제였다.  262-263

너무나 섬세하고 상처를 쉽게 받지만, 회복력도 뛰어난 마음의 소유자. 항상 다치면서도, 결코 냉소나 혐오의 갑옷으로 자아를 보호하지 못하는 사람.  263

소위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과오를 타인의 탓으로 처리하는 단순한 사고회로의 강화에 성공한 사람이다. 정신적 건강은 괴물성과 연결되어 있다.  263

자신을 유쾌하게 비웃지 못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만일 당신이 스스로를 유쾌하게 비웃지 못한다면, 당신은 스스로를 가장 조심해야 한다.  266

타인을 좋아하는 것은 노동이다. 임금으로 보상받아야 한다. 자신이 흠모하고 동경하는데(흠모와 동경의 노동을 그렇게 수행해왔는데) 정작 그 대상이 상응하는 감정을 되돌려주지 않을 때 분노를 느끼는 것은, 등가교환의 원칙이 위배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마음속으로 흠모하면서 그의 응답을 기다리는 자의 ‘사랑’은 그래서 쉽사리 ‘증오’로 돌변한다. 감정의 무상증여는 없다. 적절한 대가를 받지 못한 감정 노동을 한 사람들은 폭력의 정당성을 쉽게 획득한다. 억울하다는 심정의 근저에는 ‘제 몫을 받지 못했다’는 판단이 자리 잡고 있다.  267-268

페이션트(patient)가 된다는 것은 인격이 사라지거나 특이성이 소멸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가 수동적이 될 때, 우리는 능동성을 발휘할 때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우리 자신이 된다. 환자의 자리는 대체될 수 없는 나의 자리다. 내 몸, 내 질병, 내 장기, 내 죽음의 자리는 대체되지 않는다. 대역을 쓸 수 없다. 그것은 단독자의 자리다. 활동이 아니라 감수의 자리에서 우리는 자신을 만난다. 겪어내야 하는 것을 겪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자기(自己)가 된다.  273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의 제조라기보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상태’에 처(處 머무를처)하는 것에 더 가깝다.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일어나는 정황을 ‘겪는 것’. 이렇게 보면, 생각의 힘은 순수한 행위능력이 아니다. 행위와 감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흘러가는 그 흐름을 따를 수 있는 능력이다. 바람이 불어야 떠오르는 연처럼 생각은 떠오른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의 끝을 붙들고, 생각이 움직이는 대로 내가 따르는 것이다.

생각하는 자는 골똘한 자다. 이 골똘함은 ‘제스처’다. 몸짓이다. 골똘한 자세는 생각하지 못하는 자를 생각이 일어나는 상태로 진입하게 해준다. 생각하는 자의 주변환경은 이미 생각들을 품고 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직전 무거워진 구름처럼, 생각은 밀집된 수증기처럼 온통 퍼져서 주변을 감사
싸고 있다. 우리는 안에서 밖으로 생각을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으로부터 안으로 생각을 끌어들인다.

어떤 문제에 봉착하여 깊이 고민할 때,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장기 말이나 바둑돌을 놓아 수순을 상상하고 전략을 짜듯이 그렇게 내적 표상을 구성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생각 이전의 분화되지 않은 정동적 기류에 휘말려 있다.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의미 없는 글자를 쓰거나, 도형을 반복해서 그리거나, 어떤 단어를 혼자 중얼거리거나, 한숨을 쉬고 누웠다가 뒤채고, 이렁나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할 뿐이다. 아직 울음을 터뜨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오랜 시간 후에 비로소 그 표현이 가능해질, 어떤 봉쇄 속에 우리는 갇혀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몸짓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고민한다는 것은 생각에 도달하기 이전, 상당 시간을 이런 부대낌을 견디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견디는 동안 표상은 부서지고, 뭉개지고, 흩어진다. 표상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고민을 통하여 시간과 자신을 발효시킨다. 페이션시(patiency)’.  274-276

사람들은 무언가를 잊기 위해 노력하지만, 노력은 대개 망각을 지연시킨다. 잊으려 애쓸수록 대상은 의식에 더 달라붙는다. 의지를 통해 무언가를 잊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지금’ 잊는 자는 없다. 망각은 행위가 아니라, 과거에 발생했던 것이라고 나중에서야 인지되는 사건이다.  279

감당은 관념이나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구호나 선언이 아니다. 감당은 생명의 방만한 방출이 아니다. 그것은 절제, 삭감, 위축이다. 감당하는 자는 공격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고, 함성을 지르지 않는다. 그는 침묵하면서 짊어진 무게를 견딘다.

박수근의 나무들은 이파리가 하나도 없다. 나목(裸木)은 거의 죽은 듯이 보이기도 한다. 고요히 늙어가는 사람 같다. 나무 주변에 아이를 업은 여인이나 짐을 짊어진 여인이 걸어간다. 나무와 사람이 모두 감당하고 있다. 나무는 나무의 헐벗음을, 사람은 사람의 헓벗음을 짊어지고 있다. 박수근의 그림에 서려 있는 희망은 감당하는 자들이 고독하게 품고 있는 미래로부터 온다. 짊어진 것의 무게가 감당의 유토피아를 만든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견디어내겠다는 의지.  280

헐벗음은 <세한도>의 주제다. 헐벗은 것들의 꼿꼿한 공존. 겨울의 한복판에서 헐벗은 것들이 버티고 있다. 감당은 고독한 사업이지만, 환락이 아닌 감당 속에서야 우리는 참된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추워져야 송백(松柏)이 시들지 않음을 안다.” 계절이 헐벗으면, 헐벗으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것이 다른 무언가를 알아본다. 꼿꼿한 잣나무는 뒤틀린 소나무를 알아본다. 시간을 거슬러, 경계를 거슬러, 차이를 거슬러, 감당하는 자가 감당하는 자를 알아본다. 은둔기계라 은둔기계를 알아본다. 그것과 친구가 된다. 별로 친하지도 애틋하지도 않지만, 함께 헐벗음을 살아내는 것이다. 추사가 그려내는 이 유교적 쿨(cool).  281

감당하는 자들은 대개 침묵한다. 감당에 몰두하여 표현하고 목소리를 낼 힘조차 갖지 못한다. 질병을 감당하는 사람들, 사랑을 감당하고, 부모의 역할을 감당하고, 직무를 감당하고, 존재 자체를 감당하는 자들. 이들의 힘으로 삶이 흘러간다. 자신에게 부과되는 것들을 잘 감당하는 존재자들은 드러나지 않는다.  281-282

서로에게 감당할 수 있는 것만을 기대하는 것이 도덕이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해서 타인을 괴롭히는 사회는 사악하다.

자신에게 닥쳐오는 사태를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참된 윤리다.  283

가까운 사람에게 가한 상처,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대개 가까운 곳에서 온다.  287

존재는 시선에 의해서도, 고통에 의해서도, 언어에 의해서도, 모멸에 의해서도, 실수에 의해서도 벗겨진다. 헐벗음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 헐벗음과 씨름해본 적이 없는 사람, 헐벗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은 천박하고 건강하다.  288

학문이 민중의 감각에 결코 미치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헐벗은 삶에 대한 감수성이 없기 때문이다.  289

헐벗음은 무능력으로 귀결된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과 부딪힐 때, 그때마다 우리의 영혼은 헐벗는다. 자식이 원하는 무언가를 해줄 수 없을 때, 그 무력감 속에서 부모는 헐벗는다.

헐벗음이 집중된 한 지점, 그곳이 장애(障礙)다.

욕망의 정화, 이것이 생명체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업이다. 정화는 헐벗음이다. 오직 헐벗음의 사건들만이 우리를 정화시킨다.  290

어질다는 것은 도덕이나 철학이나 아름다움에 가해지는 제한이다. 인의 규범이 후퇴이며, 진리의 축소이며, 아름다움의 유보다. 불완전성에 대한 항복이다.

‘치열하게’와 같은 오만한 말에 속지 않는 것이다. 두려움을 버리지 않는 것. 용기 따위로 두려움을 이기지 않는 것. 방관하는 것.

어진 이는 허술하다. 규칙이나 규범을 어기며, 심약하고, 애매하고, 어리숙하다. 어진 자는 잘 속고, 매번 속고, 진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상실하지 않는다. 침묵하고 웃는다. 어리석음과 어짊 사이에는 은밀한 연관이 존재한다. 어리석음을 통해서, 이 타협주의와 우유부단을 통해서, 어진 사람은 주어진 관계를 파괴하지 않고 이어나간다. 그는 세계를 멀리서 본다. 세계가 그저 존재하는 무언가로 나타나는 지점까지 물러가서, 세계가 그저 생존하는 무언가로 나타나는 지점까지 물러가서 바라본다. 어짊은 생존주의다. 생존을 존재보다 더 성스러운 것으로 읽는, 처절한 실용주의다.  302-303

희망이 허망함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희망은 미래의 건축이지만, 언제나 실패를 내포하는 잔인한 건축이다. 우리는 안다. 희망은 부서진다는 것을,  그래서 미리 부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그래야 살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절망에 빠져드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절망은 희망보다 더 화려한 몸짓이며 도취일 수 있다. 그것도 깨어져야 한다. 희망에서 벗어나는 힘이 파상력이라면 절망을 깨는 힘도 파상력이다. 파상력은 삶을 향한다. 지금 여기의 물질적 세속을 단호하게 지향한다.  303-304

은둔 속에서, 세상에의 참여가 좌절된 자리에서, 공부에 뜻을 두고 공부의 기쁨을 함게 누리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 생의 흐름, 만물이 함께 얽혀 흘러가는 저 생의 흐름이 야기하는 경이로움에 잠기는 것.

이것은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y)이아니라 생에 대한 사랑(philo-zoe)이다. 필로-조에. 정치적 삶(비오스)이 아니라 생물학적 삶(조에). 필로-조에의관점에서 보면, 학문은 어느 지점에서 멈춰야 한다. 도덕도 현명함도 멈춰야 한다. 종교적 열광도, 예술적 천재도 멈춰야 한다. 더 나갈 수 있는데 멈추는 힘이 참된 힘이다. 공자 사상의 본령에는 냇가에서 정신을 놓고 흐름을 바라보는 저 은둔기계가 있다. 그는 그저 어짊 속에 있는 인간이다. 도덕도 훈계도 진리도 없이, 풍경과 대면하고 세속을 직시하는 저 허름한 얼굴, 이것이 어짊의 참된 얼굴이다.  306

여행에 대한 두려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310

갑자기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여행중이었다. 자기기만이라 생각하며 자신을 비웃는다.  310-311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무렵, 모든 순간이 이미 지나갔고 이제 다시는 그 시간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낄 때가 있다. 예리한 통증을 동반하기도 하는 이 상실의 느낌은 실체가 묘연하다. 여행자는 상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여행을 다녔고, 기억을 소유하게 되었고, 장소들을 체험하게 되었다. 시간을 즐겼으며, 친교와 추억을 축적했다. 상실한 것이 딱히 없는데 그가 느끼는 이 예리한 서운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316-317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과 장소들을 만나는 경험은 우리에게 ‘가능한 삶’을 상상하게 한다. 내가 지금의 나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삶은 어떠했을까? 나는 저 어부였을 수도 있고, 저 어부의 아들이었을 수도 있다. 일본인이었거나, 인도네시아인, 혹은 프랑스인이었을 수도 있다. 이 고장에 이주했다면, 저 직업을 선택했더라면, 저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졌더라면, 저런 집에서 살았더라면, 여기에서 죽었더라면.... 여행은 현실의 자아를 가능세계의 자아들과 연결시킨다. 여행이 끝날 때 상실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여행지 그 자체의 사실적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여행지와 만나면서 촉발된 가능세계들이다.  317

여행하는 인간의 뇌리를 스치는 이미지들은, 살아진 시간과 살아보지 못한 공간의 몽타주다. 여행이 끝날 때쯤 여행자는 여행을 통해 예상치 않게 변화해버린 새로운 자아, 실제 자아의 사실성을 부식시키면서 나타나는, 가능한 자아들과 엮여버린 이상하게 새로운 ‘자아’를 획득한다. 317-318

우리를 실망시킨 것들. 우리가 살 수도 있었던. 가능성들. 살았다 한들 패배하고 허겁지겁 도망쳐나왔을지 모르는 길들. 이들의 총체가 삶이라면, 우리는 여행을 통해서만 삶과 만날 수 있다.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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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될 경우에만 말해야 한다 ; 그리고 극복해낸 것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 - 다른 모든 것은 잡담이고 ‘문학’이며 교양의 부족이다. 내 저서들은 오직 나 자신이 극복해낸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 거기에는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 한때 나의 적이었던 나, 가장 나 자신과 똑같은 나, 아니 그뿐만 아니라 좀더 자랑스러운 표현이 허락된다면 가장 독자적인 존재인 ‘나’가 있다.  9


1장 혼합된 의견과 잠언들
철학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 만약 너희가 지금까지 삶의 최고 가치를 믿어왔지만 이제는 실망하게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면, 도대체 그것을 가장 헐값에 팔아치워야만 한다는 말인가?  23

공상가들에 반대해서 - 공상가는 자신 앞에서 진리를 부인하지만, 거짓말쟁이는 단지 다른 사람 앞에서만 진리를 부인한다.  25

경우에 따른 인식의 유해성 - 참된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탐구가 가져오는 효용성은 끊임없이 다양하고 새롭게 입증되고 있어서, 바로 그 효용성 때문에 개개의 탐구자는 좀더 섬세하며 드물게 나타나는 유해성 때문에 고통받지 않으면 안 된다. 화학자는 실험하면서 때로는 중독이 되고 어쩔 수 없이 화상을 입는다. - 화학자에게 타당성을 가지는 것은 우리의 문화 전체에 대해서도 타당성을 가진다. 덧붙여 말하면, 이러한 이유에서 화상을 입었을 경우를 대비해 문화는 항상 연고와 해독제를 마련해두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28-29

속된 사람의 필수품 - 속된 사람은 형이상학이라는 보라색 누더기의 추기경 외투나 터번을 착용하는 것이 가장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벗기를 원하지 않는다  ; 이러한 치장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훨씬 덜 우스꽝스러워 보일 것이다.  29

좋은 것은 삶을 유혹한다 - 모든 좋은 것들은 삶에 강한 자극제가 된다. 삶을 반박하는 것으로 씌어진 모든 좋은 책들마저도.  30

세 부류의 사상가들 - 광천 중에는 끓어오르는 광천, 흘러나오는 광천 그리고 뚝뚝 떨어지는 광천이 있다 ; 사상가도 이에 상응하는 세 부류가 있다.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물의 양에 따라 평가하고 전문가는 그 속에 있는 물이 아닌 것에 따라 평가한다.  30

무엇에 대해 침묵이 요구되는가 - 극도로 위험한 빙하와 빙해를 건너는 여행에 대해 설명하는 것처럼 자유정신 활동에 대해 설명한다면, 그 길을 가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마치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심함과 약한 무릎을 탓하기라도 한 것처럼 모욕감을 느낀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고 느끼는 곤란한 일들은 결코 우리 앞에서 언급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31

연극의 연속으로서의 박수 갈채 - 빛나는 눈과 호의적인 미소는 아주 훌륭한, 세상의 희극과 삶의 희극에 주어지는 일조으이 박수 갈채이다. -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야말로 다른 관객을 “박수 갈채를 보내주이소”라고 유혹하려는 희극 중의 희극이기도 하다.  32

지루함에 대한 용기 -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무료하다고 느낄 수 있는 용기를 지니지 않은 사람은, 그가 예술가이건 학자이건 최고의 정신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33

사상가의 가장 내적인 체험으로부터 - 인간에게 사물을 비인격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 ; 이는 사룸 속에서 그 사물만을 보고 인격을 보지 않는 것은 어렵다는 의미이다 ; 실로 인격을 형성하고 인격을 창조하는 충동의 시계 장치를 한순간만이라도 풀어놓는 일이 도대체 인간에게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사상과 관련된 경우조차도 그리고 그것이 추상적인 사상일지라도, 인간은 마치 그 사상이 자신들이 그것과 싸우고 관여하고 보호하고 돌봐주며 키워야만 하는 개인들이기나 한 것처럼 행동한다.  33

학문의 사막에서 - 때로는 사막을 여행하는 것과 다름없는 겸허하고 힘든 여정을 가는 학문적인 인간들에게 우리가 ‘철학적 체계’라고 부르는 저 찬란한 신기루가 나타난다 : 그것은 착각이라는 마력으로 모든 수수께끼의 해답을 보여주고 진정한 생명수인 가장 신선한 음료가 가까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그 지쳐 있는 사람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모든 학문적인 인내와 고통의 목표에 거의 입술이 닿을 정도로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물론 다른 본성을 가진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착각에 마치 마비된 것처럼 멈추어 서버리기도 한다 : 사막은 그들을 삼켜버리고 그들은 학문을 하기에는 이미 죽은 사람과 같다. 그러한 주관적인 위안을 이미 여러 번 체험했던 또 다른 본성을 가진 사람들은, 아마 그 어떤 샘에도 단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채 극도로 불쾌감을 느끼면서, 그 신기루 현상이 입 속에 남겨놓은 주체할 수 없는 갈증을 일으키는 짠맛을 저주하게 될 것이다.  38-39

헌신 - 너희는 도덕적 행위의 특징이 헌신이라고 생각하는가? - 그러나 숙고해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에도, 즉 최선의 행위엣와 마찬가지로 최악의 행우에도 헌신이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라.  43

윤리성을 철저하게 조사하는 사람들에 반대하여 - 한 인간이 자신의 윤리적 본성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강하게 만들어져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가 생각하고 실천하면서 행할 수 있는 최선의 것과 최악의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을 체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43

사랑 속에 있는 기만 -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에서 오는 많은 것을 망각하기도 하고 그것을 의도적으로 생각에서 지워버리기도 한다. 즉 사람들은 과거로부터 미소 짓는 우리의 상이 우리를 기만해주고, 망상이 우리를 기분 좋게 해주기를 바란다. - 우리는 끊임없이 이렇게 자기를 기만하고 있다. - 그런데 ‘사랑 속에 잇는 자기 망각’과 ‘다른 인격 속에 있는 나의 자아의 출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칭송하는 너희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거울을 깨버리고 존경하는 인격 속에 자신을 창작해 넣어, 자신의 자아의 새로운 상을 즐기는 것과 같다. 비록 사람들은 그 상을 다른 인격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말이다. - 그리고 너희 유별난 자들은 이러한 과정 전체가 자기기만도 아니고 이기주의도 아니라고 말한다! - 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을 자신 앞에서 감추는 사람드로가 자신 전체를 자신 앞에서 감추는 사람들은 인식의 보고 속에서 도둑질을 한다는 점에서 똑같다고 생각한다 : 이것으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제가 어떤 잘못에 대하여 경고하는 것인지 명백해질 것이다.  43-44

자신의 허영심을 부인하는 사람에게 - 자신의 허영심을 부인하는 사람은 보통 자신을 경멸하지 않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그것에 대해서 눈 감아버릴 정도로 야만적인 허영심의 양상을 띠고 있다.  44

양심적인 사람들 - 자신의 양심에 따르는 것은, 자신의 오성에 따르는 것보다 더 편하다 : 왜냐하면 양심은 어떠한 실패에도 자기를 변호하고 기분을 전환해주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이성적인 사람은 항상 매우 적은 데 반하여 양심적인 사람은 매우 많다.  46

불쾌해지지 않기 위한 정반대의 방법 - 어떤 기질을 가진 사람은 말로 자신의 불만을 터뜨려버리는 것이 유익하다 : 말하면서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또 다른 ㄴ기질을 가진 사람은 말을 하면서 비로소 완전히 분노하게 된다 : 그러한 사람은 말할 어떤 것을 삼켜버리는 것이 유리하다 :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적이나 상상 앞에서 자제하는 것이 그들의 성격을 개선시키고 너무 날카롭고 불쾌해지는 것을 방지해주는 방법이다.  46

인간적인 ‘물자체’ - 가장 상처받기 쉬우면서도 가장 이겨내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허영심이다 : 게다가 그것의 힘은 상처받음으로써 자라나 결국에는 엄청나게 커질 수도 있다.  47

쾌감과 착각 - 어떤 사람은 자신의 본성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그의 친구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또 다른 사람은 의식적으로 개별적인 행위들을 통해 선행을 베푼다. 비록 전자가 더 고상한 것이라 할지라도, 거리낌 없는 양심과 쾌감, 즉 행위의 공적에 대한 쾌감과 연결되는 것은 후자일 뿐이다. - 그 쾌감은 우리가 자의적으로 우리의 선행과 악행을 행할 수 있다는 신념, 다시 말하면 착각에 근거한 것이다.  49

부정을 행하는 것은 어리석다 - 사람들에게 가했던 자기 자신의 부정은 낯선 사람이 그에게 가한 부정보다도 더 견디기 어렵다(이것은 도덕적 이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 행위자는 본래, 그가 양심의 가책에 좌우될 경우에도 또는 자신의 행위를 통해 사회를 자신에 반대하도록 무장시키고 자신을 고립시킨 것으로 통찰할 경우에도 항상 고통받는 자이다. 따라서 종교와 도덕이 명하는 것은 차치하고 자신의 내적인 행복 때문에라도, 즉 자신에 대한 만족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에게 부정을 행하는 것을 주의해야 하며 나아가 부정한 행위를 당하는 것보다도 더 주의해야 한다 : 왜냐하면 후자는 거리낌 없는 양심, 복수를 향한 희망, 정의로운 사람들과 게다가 악인을 두려워하는 사회 전체의 동정과 박수의 기대라는 위로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부정을 자신에게 가해진 다른 사람의 부정으로 개조하여, 스스로 행한 일에 대한 변명으로 정당방위라는 비상권리를 보류해두는 불결한 자기 기만에 능통하다 :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부담을 더 가볍게 짊어지려고 한다.  49-50

위선적인 동정 - 사람들은 자신이 적개심에 대해서는 초연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을 경우, 동정을 가장하게 된다 : 그러나 그것은 보통 헛일이다. 이 사실을 알고서는 적개심이 더 커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52

너무 가까이하지 말 것 - 좋은 생각들이 너무 빨리 연속해서 떠오른다면, 그것은 좋은 생각에 단점이 된다 ; 생각들이 서로 전망을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 그래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와 저술가들은 평범한 것을 많이 사용했다.  83

가장 나쁜 독자들 - 가장 나쁜 독자들은 약탈하는 군인과 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 그들은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는 꺼내고, 나머지는 더럽히고 엉클어버리며 전체를 비방한다.  91

훌륭한 저술가의 특징 - 훌륭한 저술가들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 그들은 경탄받는 것보다도 이해되는 것을 더 좋아하며 신랄하고 지나치게 예민한 독자를 위해서 글을 쓰지 않는다.  91

냉정한 책 - 훌륭한 사상가는 훌륭한 생각에 들어 있는 행복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독자를 기대한다 : 그래서 냉정하고 소박해 보이는 책도 올바른 안목을 가지고 보면 정신의 명랑함이라는 햇빛에 비춰져서 참다운 영혼의 위안으로 보일 수 있다.  92

정직한 책의 가치 - 정직한 책은, 그렇지 않다면 교활한 영리함이 가장 잘 은폐할 수도 있을 독자의 증오심과 적개심을 끌어내준다는 점에서는 적어도 독자를 정직하게 만든다. 인간에 대해서는 매우 소극적인 사람들이 책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내버려둔다.  94-95

비평과 기쁨 - 타당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편파적이고 부당하기도 한 비평은 비평하는 사람에게는 큰 만족을 주는 것이어서 세상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비평하게 만드는 모든 작품과 모든 행위에 감사해야 할 정도이다 : 왜냐하면 그 비평 뒤에는 기쁨, 기지, 자기 찬미, 자긍심, 교훈, 개선책이라는 번쩍이는 옷자락이 끌려오기 때문이다. - 기쁨의 신은 그가 선을 창조한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 악과 중용을 창조했다.  96-97

글 쓰는 것과 승리를 원하는 것 - 글을 쓴다는 것은 항상 승리를 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단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전달되어야만 할 자기 자신에 대한 극복을 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 그러나 그 무엇을 소화할 수 없을 경우에만, 나아가 그것이 이미 입에서 걸려버린 경우에만 글을 쓰는 소화불량증을 앓는 작가들도 있다 : 그들은 독자에게조차 무의식중에 노여움을 품은 채 불쾌한 기분을 털어놓고 폭력을 쓰려 한다. 즉 : 그들 역시 승리를 원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한 승리를 원한다.  98

‘훌륭한 책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 훌륭한 책들은 모두 세상에 나왔을 때 떫은맛을 낸다 : 그 책은 새로움이라는 결점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저자가 유명하고 그에 대해 많은 것들이 알려져 있을 경우에는 살아 있는 저자는 그 책에 해를 미치게 된다 :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저자와 그의 작품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 속에 영혼, 달콤함, 금빛 광채로 들어 있는 것은 커져가는 존경과 과거의 존경 그리고 마지막에는 전해 내려오는 존경에 의해 다듬어져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비로소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만 하고 많은 거미들이 그물을 쳐놓아야만 한다. 훌륭한 독자는 책을 점점 훌륭하게 만들고, 훌륭한 반박자는 책의 문제를 해결해준다.  98

표지에 오른 이름 - 저자의 이름이 책에 오르는 것은 오늘날에는 관례이며 거의 의무이기도 하다 ; 그러나 이것은 책의 효과를 감소시키는 주원인이다. 즉 만약 책이 훌륭하다면, 그 책은 인격보다 그리고 그의 핵심 사상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표지를 통해 저자가 알려지게 되면 그 핵심 사상은 곧바로 독자에 의해 개인적인 것, 아니 가장 개인적인 것으로 희석되고, 그럼으로써 책의 목적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더 이상 개인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으려는 지성의 명예심이다.  99-100

애착이 있음과 없음 - 모든 좋은 책은 특정한 독자와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 씌어진 것이며, 바로 그 때문에 다른 모든 대다수의 독자들에게는 좋게 여겨지지 않는다 : 따라서 좋은 책의 명성은 좁은 토대에 기초하여 서서히 쌓아질 수 있을 뿐이다. 평범한 책과 저급한 책은 많은 사람의 마음에 들려고 하며 또 많은 사람의 마음에드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평번하고 저급한 것이다.  100

비판하는 사람들의 편에서 - 곤충들은 악의에서가 아니라 그들도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물게 된다 : 비판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 그들은 우리의 피를 원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고통을 원하지는 않는다.  102

격언과 성과 - 충분한 경험을 쌓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격언이 그들에게 자신들의 소박한 진리를 확실히 이해하게 해주면, 항상 그 격언은 진부하고 널리 알려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는 격언의 창시자를 마치 그가 모든 사람의 공동 재산을 훔치려 한 것처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 그들은 인위적인 어설픈 진리에서 기쁨을 느끼고 이 사실을 작가에게 인식시키려 한다. 작가는 그러한 눈짓의 의미를 평가하여 그것에게 쉽게 자신이 어떤 점에서 성공하고 실패했는지 알아차리게 된다.  103

자신을 위해서 글을 쓴다 - 이성적인 작가는 자신의 후세만을 위해 글을 쓰지 어떤 다른 후세를 위해 글을 쓰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신의 노년을 위해, 즉 자신에게서 기쁨을 느끼기 위하여 글을 쓴다.   103

예술 작품으로서의 예술에 반대해서 - 예술은 무엇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삶을 미화해야 하고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참아낼 수 있고 가능하다면 즐거운 존재로 만들어주어야 한다 : 이러한 과제에 주목하면서 예술은 완화시키는 작용을 하고 우리의 감정을 억누르게 하며, 교제의 형시들을 창조하게 할 뿐만 아니라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예의범정, 순수함, 정중함 그리고 때에 맞는 웅벼노가 침무그이 법칙에 구속받게 한다. 따라서 예술은, 어떠한 노력을 하더라도 인간 본성의 기원에 따라 되풀이해서 솟아 나오게 되는 저 고통스러운 것, 끔찍한 것, 혐오스러운 것과 같은 저 모든 추악한 것을 은폐하거나 새로 해석해야 한다 : 즉 예술은 정열과 정신적 고통과 불아느이 관점에서 꾸려나가야 하고, 피할 수 없거나 극복할 수 없는 추악한 것 속에서 의미 있는 것을 투명하게 비추어주어야 한다. 이 위대한, 아니 너무나 위대한 사명을 따르면 이른바 원래의 예술, 즉 예술 작품으로서의 예술은 하나의 부속물일 뿐이다.  113

교육은 왜곡하는 것이다 - 모든 교육 제도에 있는 이상한 불안정성 때문에 오늘날 어른들은 모두 자신의 유일한 교육자는 우연이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 교육 방법과 의도의 변동성은, 오늘날 가장 오래되고 새로운 문화의 힘들이 마치 어수선한 대중 집회에서 그러한 것처럼 이해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들리기를 원하며,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목소리와 외침을 통하여 자신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거나 혹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불쌍한 교사와 교육자들은 먼저 이러한 어리석은 소리들에 마비되어 버리고 그 다음에는 침묵을 지키며 마침내 무감각해져서 모든 것을 잠자코 참아내게 되며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학생들에게도 모든 것을 참아내게 한다. 교사 자신이 교육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들이 교육할 수 있겠는가? 그들 자신이 꼿꼿이 자라난 힘있고 싱싱한 나무줄기가 아닌데 그들과 연결되는 자가 어떻게 휘어지고 구부러지지 않을 수 없으며 마침내 왜곡되고 기형적인 모습이 되지 않을 수 없겠는가.  118-119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문화의 병사는 되지 말 것 - 사람들이 마지막에, 제일 마지막에 배우게 되는 사실은 젊은 시절에는 어떤 것을 알지 못해서 아주 많은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 즉 첫째 훌륭한 일을 할 것, 둘째 그것이 어디서 그리고 어떤 이름으로 발견된다 하더라도 훌륭한 일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 : 또한 모든 불량하고 평범한 것과는 싸우지 말고 곧 길을 비켜 가는 것 그리고 어떤 일의 이득에 대해 의심부터 하는 것 - 이러한 의심은 숙련된 취향이 있는 사람에게는 빨리 생긴다 - 은 그 일에 반대하는 논거로서 그리고 그 일을 완전히 회피하려는 동기로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 물론 그러한 일에서 오류를 범하게 될 위험과 접근하기 어려운 이득은 곧 불량하고 불완전한 것이라고 혼동하게 될 위험이 몇 번은 있을 것이다. 더 좋은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만 문화의 병사로서 세상의 나쁜 일들의 해결에 몰두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문화의 생산 계층과 성직자 계층이 무장을 하고 나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직업과 가정의 평화를 주의와 경계와 악몽을 통해 음산한 불안감으로 바꾸어놓는다면 그 계층은 파멸하고 말 것이다.  120

고대 세계와 기쁨 - 고대 세계의 사람들은 더 많이 기뻐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반면 우리는 덜 우울해지는 방ㅇ법을 알고 있다 ; 그들은 예민한 감각과 풍부한 통찰력으로 기쁨을 느끼고 축제를 누릴 새로운 동기를 발견해냈다 : 반면에 우리는 고통을 받지 않는 것과 불쾌감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에 주목하는 과제를 해결하는데만 정신을 몰두하고 있다. 고대인들은 고통스러운 삶에 관해서는 잊어버리거나 어떻게든 그 감정을 즐거운 것으로 돌려놓으려고 노력했다 : 그래서 그들은 그 속에서 고통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려고 애썼던 반면 우리는 오히려 고통의 원인을 해결하고 전체적으로 고통을 예방하는 쪽으로 행동한다. - 우리는 아마도 후세의 사람들이 다시 기쁨의 신전을 세우도록 기초를 닦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123

존재에 대한 차후의 변호 - 착오와 환상으로 세상에 나오긴 했지만 진리가 되어버린 많은 사상들이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차후에 그 사상들에 참된 기초를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124

유행의 원천과 이득 - 자신의 형식에 대한 개개인의 확실한 자기 만족은 다른 사람의 모방심을 자극하고 점차 다수의 사람들의 형식, 즉 유행을 창조하게 된다 : 이 다수의 사람들은 유행을 통해서 그 형식에 대해 매우 유쾌한 자기 만족감에 젖기를 원하며 또 실제로 그러한 즐거움을 얻게 된다. - 누구든지 불안을 느끼고 소심하게 자신을 은폐하고 싶은 이유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러한 이유로 인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선의의 4분의 3이 못쓰게 되고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유행에 감사해야만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유행이 이 4분의 3을 해방시켜, 서로 그 유행의 규칙에 매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 확신을 갖게 하고 서로에게 명랑한 친절을 베풀도록 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법칙이라 하더라도 다수의 사람들이 구속되어 있는 한, 그것은 마음의 자유와 안정을 준다.  131

자유로운 정신 - 만약 자유정신이라는 이름이, 자신의 어깨 위에 세상의 질투와 모욕이라는 짐을 일부분 짊어짐으로써 나름대로 자유정신이라는 이름을 욕설로 붙이고 다니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중 누가 감히 자유정신으로 불리고자 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진지하게 (거만하거나 관대한 반항심을 가지지 않고) ‘자유로운 정신’ 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를 향한 경향을 우리 정신의 가장 강한 충동으로서 느끼기 때문이며, 또한 소극적이고 거의 경멸적인 표현을 쓰자면, 속박되고 뿌리를 깊이 내린 지성인들과는 반대로, 우리는 우리의 이상을 대부분 정신적인 유목 생활 속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131-132

진부한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 - 진부한 것들과는 너무 거리가 먼 치밀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종종 모든 종류의 우회로와 오솔길을 지나온 후 그러한 진부한 것을 발견하고 크게 기뻐하며 치밀하지 않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133

어디로 여행해야 할 것인가 - 직접적인 자기 관찰도 자신을 알기에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 우리에게는 역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과거란 수많은 물결 속에서 우리에게 계속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 우리 자신은 이 흐름에 대하여 매 순간 느끼는 존재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 이 경우에도 역시, 만약 우리가 겉으로 보아 우리의 가장 고유하고 개인적인 본질로 보이는 흐름 속으로 내려가려고 한다면,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들여놓지 못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격언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 이것은 차츰 진부한 것으로 남아 있는 지혜이다 : 또 욕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역사적 시기의 잔해들을 찾아야만 하며, 늙은 헤로도토스가 여행한 바와 같이 우리는 여러 국가들을 - 이 국가들은 그 위에 우리가 설 수 있는 견고해진 오래된 문화 단계에 있다 - 즉 거기에서는 사람들이 유럽의 옷을 벗어버렸거나 아직 한 번도 입은 적이 없는 이른바 미개한 그리고 반쯤 미개한 민족을 향해 여행해야 한다는 것도 그러한 지혜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곳에서 저곳으로 몇천 마일을 걸어갈 필요가 없는 좀더 세련된 여행 기술과 여행 목표도 있다. 아마 지난 3백 년의 문화는 그 문화의 모든 색채와 굴절을 간직한 채 우리 가까이에서 아직도 살고 있음이 거의 확실하다 : 그것들은 발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 문화의 단층들은 여러 가족들 속에, 아니 개개인 속에 아름답고 선명하게 차곡차곡 쌓여 있다 : 물론 다른 곳에는 좀더 파악하기 어려운 암석 단층도 있을 것이다. 분명 외딴 지역과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에 둘러싸인 공동체속에는 훨씬 더 오래된 감정의 표본이 더 쉽게 보존될 수 있고 또 여기서 그것들을 찾아내야만 한다 : 예를 들어 인간이 피폐해지고 깃털이 뽑혀 세상에 나오게 되는 베를린에서는 아마 그러한 것을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여행 기술의 오랜 훈련을 거친 뒤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Argos)가 된 사람은 마침내 자신의 이오(Io) - 에고(ego)를 의미한다 - 를 어느 곳에나 동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와 그리스, 비잔틴과 로마, 프랑스와 독일에서, 민족 이동의 시기와 정착기에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대에서, 고향과 타향에서, 나아가 바다, 숲, 식물과 산 속에서 생성하고 변화하는 에고의 모험의 여행 자취를 다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이렇게 자기 인식은 과거의 모든 것에 관한 총체적 인식이 되는 것이다 ; 여기서는 암시만이 가능한 다른 고찰 관계에 따르자면, 가장 자유롭고 가장 멀리 내다보는 정신의 자기 규저오가 자기 교육은 언젠가는 미래의 모든 인간적인 것에 관한 총체적인 규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41-143

여행자와 그 등급 - 사람들은 여행자를 다섯 등급으로 구분한다 : 가장 낮은 등급의 여행자는 여행하면서 오히려 관찰당하는 사람들이다. - 그들은 여행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며 동시에 눈먼 자들이다 ; 다음 등급의 여행자는 실제로 스스로 세상을 관찰하는 사람들이다 ; 세 번 째 등그브이 여행자는 관찰한 결과에서 그 무엇을 체험하는 사람들이다 ; 그 다음 등급의 여행자는 체험한 것을 자신 속에 가지고 살며 그것을 지속적으로 지니고 있다 ; 끝으로 최고의 능력을 가진 몇몇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관찰한 모든 것을 체험하고 동화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 그것을 여러 가지 행위와 작업 속에서 기필코 다시 되살려나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 여행자에 대한 이 다섯 부류에 따라 대체로 모든 사람들은 삶의 모든 여정을 지나간다. 가장 낮은 등급의 여행자는 순전히 수동적인 사람들이고, 가장 높은 등급의 여행자는 남겨져 있는 내면적 과정들을 아낌없이 발휘해나가는 사람들이다.  149-150

깊이 있는 사람들 - 깊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교제할 때, 자신이 희극배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늘 먼저 겉모습을 가장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151

자만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것 - 모르는 사람이나 어느 정도만 아는 사람과 대화할 때 선별된 생각만을 말하는 것과 자신의 유명한 지인 관계, 중요한 체험과 여행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그가 긍지를 가잔 사람이 아니라는, 즉 적어도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표시이다. 자만심은 긍지를 가진 사람이 쓰는 겸양의 가면이다.  154

좋은 우정 - 좋은 우정은 상대방을 지극히 그리고 자신보다도 더 존중하고,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상대방을 사랑하는 경우에 성립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쉽게 교제하기 위하여 친밀성이라는 부드러운 겉모습과 솜털을 덧붙이는 법을 알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실제적이고 진정한 친밀성과 나와 네가 혼동되지 않도록 현명하게 유지해나갈 경우에만 성립한다.  154-155

정직함 속의 오산 - 우리가 지금까지 침묵해온 사실들은 때때로 우리가 최근에 사귄 친구들이 먼저 알게 된다 : 이때 우리는 어리석게도 이렇게 신뢰를 증명하는 것이 그들을 단단하게 붙들어 맬 수 있는 가장 강한 사슬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말한 것이 가져올 희생을 충분히 강하게 느낄 만큼 우리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배반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우리의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고 만다 : 그래서 아마 우리는 오랜 친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158

너무 이르지 않게 - 너무 빨리 날카로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와 동시에 너무 가늘어져버리니까.  162

영원한 어린아이 - 우리 근시안들은 동화와 놀이는 유년 시절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마치 우리가 삶의 어떤 시기에는 동화와 놀이 없이 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물론 우리는 그것을 다르게 부르고 다르게 느끼게 되지만 바로 이 점이 그것을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 왜냐하면 어린아이 역시 놀이를 자신의 일로, 그리고 동화를 자신의 진리로 느끼기 때문이다. 짧은 삶이 우리로 하여금 - 마치 각 연령이 새로운 그 무엇을 가져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 지나치게 꼼꼼하게 연령을 구분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어떤 시인이 정말 동화와 노링 없이 살아가는 2백 살의 인간을 그려 보여주지 않을까.  163

때때로 - 그는 도시 성문 안쪽에 앉아 그곳을 지나는 사람에게 바로 이것이 도시의 성문이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은, 그것을 사실이지만 감사를 받고 싶다면 너무 당연한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오, 나는 감사의 말을 원하지 않는다 ; 그러나 때때로 당연한 것을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당연한 것을 유지하는 것도 매우 유쾌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172

부의 위험 -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살마만이 소유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유는 공적으로 위험한 것이 된다. 즉, 소유가 그에게 보장할 수 있는 한가한 시간을 사용할 줄 모르는 소유자는 항상 소유하기 위해 나아갈 것이다 : 이 노력이 그의 즐거움이고, 권태와의 싸움에서의 그의 전략이다. 그래서 정신적인 사람에게 충분할 만큼의 적당한 소유에서 마침내 진정한 부, 더구나 정신적인 비자립성과 빈곤의 찬란한 결과로서 부가 생겨난다. 이제 부는 그의 궁색한 혈통에서 기대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부는 이제 교양과 예술로 가면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 즉 이제 가면을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는 항상 교양을 부러워하고 가면 속에서 가면을 보지 못하는 가난하고 교양이 없는 사람들의 질투심을 자극한다. - 그리고 서서히 사회적 변혁을 준비한다 : 왜냐하면 이른바 ‘문화의 향수’ 속에서 금도금된 저속함과 기만적인 부풀리기 양상은 ‘중요한 것은 오직 돈뿐이다’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물론 돈도 약간은 중요하지만, 정신이 훨씬 더 중요하다.  178

아테네로 향하는 올빼미 - 거대한 국가의 정부는 국민을 두려움과 복종 속에서 자신에게 구속해둘 수 있는 두 가지 수단을 장악하고 있다 : 비교적 조잡한 수단은 군대이며 좀더 세련된 수단은 학교이다. 양쪽 모두가 평범하고 빈약한 재능의 소유자인 활동적이고 건장한 남성들에게는 특유한 것에 불과하지만, 정부는 전자의 도움으로 상류층 국민의 명예욕과 하류층 국민의 힘을 그들 편으로 끌어당긴다 : 그리고 후자의 수단으로는 재능 있는 가난한 자들, 즉 정신적으로 요구하는 바가 많은 중산층의 사람들을 그들 편으로 끌어들인다. 정부는 특히 각 수준의 교사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위’를 우러러보는 정신적인 신하들로 만들어버린다 : 또한 사림학교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사교육을 철저하게 방해함으로써 매우 현저한 수에 달하는 교직을 마음대로 할 힘을 확보해간다. 이제는 만족할 수 있는 자리보다 분명 다섯 배는 많은 수의 굶주리고 굴욕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교직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이 직위는 자신들 편의 사람만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부양하기만 하면 된다 : 그러면 그들 속에는 승진을 바라는 열병 같은 갈망이 유지되어 그들을 정부의 의도에 더 긴밀하게 묶어두게 된다. 왜냐하면 적당한 불만감을 가지게 해두는 것은 용기의 어머니이자 자유로운 생각과 긍지의 할머니인 만족을 주는 것보다 항상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울타리 속에 가두어진 교사 계층을 매개로 하여, 이제 그 나라의 모든 청년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국가에 유용하고 합목적적으로 분류된 특정한 교육 수준까지 끌어올려진다 : 그러나 특히 국가에 의하여 승인되고 보증된 삶의 방향만이 곧 사회적인 우대를 가져온다는 생각이 모든 계층의 미숙하고 야심만만한 사람들에게 거의 보이지 않게 전염되어 간다. 국가 시험과 국가 자격 칭호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매우 광범위해서, 상업이나 수공업으로 성공하여 독립적이었던 사람들까지도, 자신들의 지위 역시 위계와 훈장이 너그럽게 수여됨으로써 위에서 인정받고 승인될 때까지는, 즉 ‘사람들에게 내보일 수’ 있게 되기까지는 가슴속에 불만의 가실르 가진 채 살아가야 할 정도이다. 마지막으로 국가는 국가에 속하는 수많은 관직과 영리직의 임명을, 이 문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국립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우수함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의우와 결부시킨다 : 사회에서의 명예. 자신을 위한 양식, 가족의 영위, 위로부터의 보호, 공동으로 교육을 받은 자들의 동질감, - 이 모든 것이 모든 청년이 달려들 희망의 그물을 만드는 것이다 : 도대체 어디서 그들에게 불신감이 생겨나겠는가! 몇 세기가 지나면 결국 모든 사람에게 몇 년 동안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관습과 전제가 되어버리고, 사람들은 그것에 맞추어 삶의 계획을 설계한다. 이렇게 국가는 학교와 군대, 즉 재능과 명예욕과 힘을 여러 가지 이익에 의하여 서로서로 짜맞추는 장인 기술을 발휘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더 높은 재능을 가진 자와 교양인들을 더 유리한 조건에 의해 군대로 끌어들여 기꺼이 복종하는 군인 정신으로 가득 채운다 : 그 겨로가 그는 아마 언제까지나 국기에 맹세하면서 자신의 재능으로 국각에 새로운 그리고 더 빛나는 명성르 가져오게 될 것이다. - 그러고 나면 거대한 전쟁을 위한 기회 외에는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 기회를 위해 직무상으로, 즉 아주 순수하게 신무노가 거랫 그리고 외교관들을 지원해준다 : 왜냐하면 즉, ‘국민’으로서, 아니 군인 민족으로서 전쟁 시에는 항상 떳떳한 양심을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군인 민족을 위해서 그러한 양심을 먼저 만들어줄 필요도 없겎지만 말이다.  182-184

주권 - 사람들은 나쁜 것도 그것이 마음에 들기만 하면 존경하고 편을 든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호의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이것이 크건 작건 주권이라는 것의 특징이다.  190

여러 의견들에 대한 마지막 의견 - 자신의 의견을 감추거나 그 의견 뒤에 숨어버리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의 이치를 모르거나, 아니면 무모함을 섬기는 경건한 수도회에 속하는 자이다.  193

칭찬을 받은 자에게 - 사람들이 너를 칭찬하는 한, 항상 너는 자신의 궤도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궤도 위에 있다고 믿어라.  193

결코 헛일이 아닌 - 네가 진리의 산을 오르는 것은 결코 헛일이 아니다 : 그것은 네가 오늘 더 높이 올라가거나, 아니면 내일 훨씬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기 위해 힘을 단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99

가능하면 편이 없이 사는 것 - 추종자가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 사람들은 추종자가 추종자이기를 그만두었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202

너무 비싸게 사지 말 것 - 너무 비싸게 산 물건은 역시 대체로 좋지 않게 사용된다. 왜냐하면 물건에 대한 애착이 없이, 씁쓸한 기억과 함께 사용하기 때문이다. - 이렇게 사람들은 이중으로 손해를 보게 된다.  210

창조자와 즐기는 자 - 즐기는 자는 누구나 나무에서 중요한 것은 열매라고 생각한다 ; 그런데 나무에서 중요한 것은 씨이다. - 이것이 모든 창조자와 즐기는 자 사이의 차이다.  213



2장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

현세의 무기력함과 주요 원인 - 주위를 둘러보면 평생 동안 계란을 먹어왔지만 길쭉한 계란이 가장 맛있다는 것, 뇌우가 아랫배에 효력이 있다는 것, 차고 맑은 공기 속에서 좋은 냄새는 가장 넓게 퍼진다는 것, 우리의 미각은 입 안의 여러 부위에서 다르다는 것, 식사 때 많이 이야기하거나 듣는 것이 위에 나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 관찰력의 결여를 나타내는 이러한 실례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하여 전적으로 잘못 간주되고, 거의 관찰되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은 일이란 말인가? - 개개인의 거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무기력함은 이러한 결여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잘 생각해보라 : 생활 양식의 설정, 하루 일의 할당, 교제를 위한 시간과 선택, 직업과 여가, 명령과 복종, 자연과 예술에 대한 감각, 식사, 수면, 반성적 사색에서 무엇이 우리에게 바람직하며 무엇이 우리에게 해로운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 가장 사소한 것과 가장 일상적인 것에 무지하고 예리한 안목이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에게 이 땅을 ‘재앙의 초원’으로 만드는 것이다. 어디서나 그런 것처럼 여기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비이성이다라고 말하지 말라 :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 이성은 충분히, 지나치게 충분히 존재하고 있지만 그 이성은 잘못된 방향으로 돌려져 사소하고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에서 인위적으로 빗나가버린 것이라고, 신부와 교사들 그리고 조잡하건 섬세하건 간에 모든 부류의 이상주의자들의 미묘한 지배욕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중요한 것은 전혀 다른 그 무엇이라고 설득하고 있다 : 즉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구제, 국가에의 봉사, 학문의 발전, 또는 전 인류에 봉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명망과 재산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며, 반면에 개개인의 욕구, 24시간이라는 생활에서 대두되는 크고 작은 필요 등은 경멸스럽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 이미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편에 서서 인간적인 것을 교만하게 등한시하는 것에 전력을 다해 저항했다. 그리고 배려하고 반성해야 할 모든 사항의 참된 범위와 본질에 대해 호메로스의 말을 빌려 경고하기를 좋아했다 : 소크라테스는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집안에서 부딪히는 일’ 이것이야말로 그리고 이것만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223-224

어떠한 새로운 사슬도 느끼지 않는 것 - 우리가 그 어떤 것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한, 우리는 자신을 독립적이라고 간주한다 : 이것은 인간이 얼마나 교만하고 지배욕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오류추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일상적으로 독립해서 살고 있고, 만약 그가 예외적으로 그 독립성을 잃게 되면 그 반대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전제에서 보면, 인간은 구속당하자마자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 반대가 진리라면 어떻게 될까? : 즉 인간은 항상 여러 가지 구속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오랜 습관으로 인해 사슬의 무게를 더 이상 느끼지 않을 때에만 자신을 자유롭다고 간주한다면 어떻게 될까? 다만 새로운 사슬에서만 인간은 여전히 구속감을 느낀다 : - 그렇다면 ‘의지의 자유’란 본래, 어떠한 새로운 사슬도 느끼지 않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228

근본 오류 - 인간이 어떤 정신적 쾌감이나 불쾌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환상 중 어느 하나에 지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 중 하나는, 특정한 사실들과 특정한 감정의 동일성을 믿어야만 한다 : 그러면 그는 현재의 상태를 과거의 상태와 비교함으로써, 또 그것들을 동일시하거나 차별함으로써(모든 기억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정신적인 쾌감이나 불쾌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 또 다른 하나는, 의지의 자유를 믿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이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것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도 있었는데”라고 생각하면 거기에서 마찬가지로 쾌감이나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 모든 정신적 쾌감과 불쾌감에 작용하고 있는 이러한 오류 없이, 인간적 본질은 결코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230

비도덕주의자들 - 도덕주의자들은 오늘날 비도덕주의자로 비난받는 것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도덕을 해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부하려는 사람은 먼저 죽여야만 한다 :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다지 더 잘 알고, 더 잘 판단하고, 더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지 세상 모두를 해루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여전히 모든 도덕주의자들이 그 모든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 그들은 도덕주의자를 도덕의 설교자와 혼동하고 있다. 과거의 도덕주의자들은 도덕을 충분히 해부해보지도 않고 설교하는 일이 너무나 흔했다 : 이 때문에 이러한 혼동뿐만 아니라 현재의 도덕주의자들에 대한 유쾌하지 않은 생각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237-238

균형의 원리 - 도둑과 도둑으로부터 지켜주겠다고 사회에 약속하는 권력잔느 아마 근본적으로는 매우 비슷한 존재일 것이다. 단 후자는 전자가 획득하는 것과는 다르게 자신의 이익을 획득할 뿐이다 : 즉 사회가 그에게 바치는 정기적인 세금에 의해서이지 약탈에 의해 이익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랜 동안 동일한 인물과 다름없는 무역상과 해적 사이의 관계와 같다 : 그들은 이쪽 역할이 불리하게 보이면 다른 쪽 역할을 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인 도덕은 모두 해적 도덕이 영리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 가능한 한 싸게 사서 - 사업비 이외에는 전혀 경비를 들이지 않고 - 가능한 한 비싸게 팔려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 저 권력자는 도둑과는 달리 균형을 유지할 것을 약속한다는 것이다 ; 약자들은 그 속에서 살아나갈 하나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왜냐하면 약자들은 균형을 유지하는 세력과 함께 일하거나 아니면 균형을 유지하는 자에게 종속되거나 (보수를 받는 대신 그에게 봉사한다)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자의 방법이 즐겨 선택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결국 두 가지 위험한 존재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즉 약자는 권력자에 의해서, 또 권력자는 이익의 관점에 의해서 ; 즉 권력자는 종속된 자들을 자비롭게 혹은 적당히 다루어서 그들이 자신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배자까지도 부양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실제로 이 경우는 여전히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대해질 수도 있지만,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파멸과 비교해보면 사람들은 이러한 상태에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다. - 공동사회란 처음에는 위험한 세력들과 균형을 이루기 위한 약자들의 조직이었다. 만약 그들이 적대 세력을 한 번에 파멸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진다면, 이 우월한 힘을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 바람직 할 것이다 : 이러한 일은 개개의 강력한 가해자가 문제가 되었을 경우에 분명히 시도된다. 그러나 그 개개인이 족장이거나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다면, 신속하고 결정적인 파멸의 가능성이 희박할 것이므로 지속적인 불화를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 그러나 이것은 공동사회에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를 가져오게 된다. 왜냐하면 사회는 그 상태 때문에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반드시 규칙적으로 준비해야 할 시간을 잃게 되며, 모든 노동에 따른 수확이 매순간 위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공동사회는 방어와 공격을 위한 자신들의 힘을 위협적인 이웃의 힘과 같은 수준으로 올려놓고, 이제 저울 위에는 똑같은 쇳덩이가 올라가 있으니 서로 좋은 친구가 되어보지 않겠는가라는 입장을 이해시키려 한다. - 따라서 균형이라는 것은 가장 오래된 법 이론과 도덕론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 된다 ; 정의의 토대가 되는 것이 균형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야만적인 시대에 이 이론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말했을 경우, 이것은 이미 달성되어 있는 균형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그 균형을 보복에 의해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 그 결과 한쪽이 다른 쪽에 대하여 해를 가한다 하더라도, 다른 쪽은 더 이상 맹목적인 분노를 지닌 복수를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같은 형벌에 의해 흐트러진 세력 관계의 균형이 회복되는 것이다 : 왜냐하면 이러한 원시 상태에서는 한 눈과 한 팔이 더 많다는 것은 한 조각의 힘과 무게가 더 많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공동사회의 내부에서는 위반 행위, 즉 균형의 원리를 파괴하는 행위에는 수치와 형벌이 가해진다 : 수치는 부당한 가해로 이익을 얻은 가해자에게 부여되는 무게이며, 과거의 이익을 상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압도하는 손실을 수치로 다시 받게 하는 것이다. 형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 모든 범죄자가 자신에게 허락한 우월한 힘에 훨씬 더 우월한 힘을, 즉 폭행에 대해서는 투옥을, 도둑질에 대해서는 배상금과 벌금을 과하는 것이다. 이렇게 범죄자는 자신의 행동 때문에 공동 사회에서, 또 사회의 도덕적 이득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 이 때문에 형벌은 보복일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 자연 상태의 가혹함에 관한 그 무엇인 것이다 ; 형벌은 바로 이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239-241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에 대한 해석 -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은, 어느 누구든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관점에서 나쁜 상태에 처할 수 있다는 것과 걱정이나 후회나 고통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유래한다 : 즉 남에겍 닥쳐온 불행이 그를 자신과 똑같은 위치에 두게 되고 질투를 가라앉히기 때문이다. - 이와 반대로 그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낄 경우에도 자신에게  불행이 닥쳐올 때 적용시키기 위해 이웃의 불행을 의식 속에 자본으로 모아두게 된다 ; 이렇게 그는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즉 평등을 지향하는 마음은 행운과 우연의 영역에 자신의 척도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은 평등의 승리와 회복에 대한 가장 비열한 표현이고, 그리고 좀더 고상한 세계 질서를 가진 곳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인간이 다른 사람 속에서 자신과 같은 인간을 관찰하는 것을 배운 후에, 즉 사회가 건설된 후에 비로소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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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나의 치유와 자기 회복을 위해 언제나 내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고립되어 있고, 고립된 시선으로 보지 않으려는 신념이었다. 10

우리는 ‘자유정신’의 유형이 언젠가 완전해질 때까지 성숙하고 단 맛을 낼 수 있도록 정신이 어떤 위대한 해방 속에서 결정적인 사건을 겪었으며 그 사건이 전에는 얼마나 속박된 정신이었고 귀퉁이와 기둥에 영원히 묶여 있었을 것처럼 보였는지 추측할 수 있다. 무엇이 가장 단단하게 묶을까? 완전히 잘라버릴 수 없는 밧줄은 어떤 것일까? 고상하고 선택된 부류의 인간에게 그것은 의무가 될 것이다. 젊음에 어울리는 외경심, 오랫동안 숭배하고 가치를 부여해온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나약함, 자신들이 성장했던 땅, 자신들을 이끌어주었던 손길, 숭배를 배웠던 성전 등에 대한 감사, 바로 그들의 최고의 순간 그 자체가 그들을 가장 단단히 묶고 가장 지속적으로 의무를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위대한 해방은 이처럼 속박된 것에 마치 지진처럼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 그러면 젊은 영혼은 단 한번에 동요되고 분리되어 떨어져버리고 만다 - 그들 자신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충동과 혼란이 그 영혼을 지배하고 그에게 명령하는 주인이 되어 버린다 ; 의지와 소망은 어떻게든 그리고 어디로든 나아가려고 눈을 뜨게 된다 ; 미지의 세계를 향한 불굴의 모험적인 호기시이 그의 모든 감각에서 불타오르고 불꽃이 흔들거린다. “여시거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 이렇게 단호한 목소리와 유혹이 울려퍼진다. ‘여기’그리고 ‘집에’라는 말은 그가 지금껏 사랑해온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가 사랑해왔던 것에 대한 갑작스런 공포와 의심, 의무로 불렸던 것에 대한 섬광 같은 멸시 그리고 방랑, 타향, 소외, 냉각, 환멸, 냉담에 대한 선동적이고 의식적이며 화산처럼 솟구치는 욕망, 사랑을 향한 증오심, 아마도 자신이 지금까지 숭배했고 사랑했던 곳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신전모독과 같은 행동과 눈초리, 아마도 자신이 방금 한 일에 대한 불타오르는 수치심과 동시에 그 일을 해냈다는 기쁨 그리고 그 승리를 알림으로써 느끼는 더할 나위없는 내면적인 기쁨의 전율이다 - 승리라고? 무엇에 대한, 누구에 대한 승리란 말인가? 그것은 수수께끼 같이 의문스럽고 모호한 승리이긴 하지만 어쨌든 최초의 승리이다 : - 위대한 해방의 역사에는 이와 같은 아픔과 고통이 따른다. 해방은 동시에 인간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하나의 병이기도 하다. 스스로 정의하고 스스로 가치를 정립시키려는 힘과 의지가 만드는 이 최초의 폭발, 자유로운 의지를 향한 이 의지 : 그리고 풀려난 자, 해방된 자가 이제부터 자신이 사물을 지배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할때 그의 거침없는 시도와 기묘한 행동에는 얼마나 많은 질병이 나타날 것인가! 그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으로 무섭게 배회한다 ; 그의 긍지의 위태로운 긴장 상태는 그가 약탈하는 것으로 보상되어야만 한다. 그는 자신을 자극하는 것을 파괴해버린다. 그는 자신이 은폐하는 것, 부끄러움 때문에 간직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을 악의에 찬 미소로 뒤집어버린다 : 그는 만약 이러한 사물들을 뒤집어버리면 그것들이 어떻게 보일 것인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지금까지 좋지 못한 평판을 받아온 것에 자신의 명예를 되돌려놓으려고 한다면, 그리고 호기심으로 시험해보려는 듯이 가장 금지된 것의 주위로 몰래 기어 들어가려 한다면 거기에는 자의와 자의에서 나오는 쾌감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의 행동과 방황의 배후에는 더욱 위험한 호기심의 의문부호가 자리잡는다. 왜냐하면 그는 마치 황야에서처럼 불안하면서도 정처없는 행로의 중간에 있는 것이므로. ‘모든 가치를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일까? 아마도 선은 악이 아닐까? 그리고 신은 악마의 발명품일 뿐이거나 악마를 더욱 고상하게 만들어놓은 것은 아닐까?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허위가 아닐까? 또 우리가 속았다면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동시에 속이는 자가 아닐까? 우리는 속이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 이런 생각이 그를 인도하고 더욱 멀리, 더욱 빗나가도록 그를 현혹한다. 고독이 그를 겹겹이 에워싼다. 저 무시무시한 여신이자 잔인한 정념의 어머니인 고독이 그를 더욱 위협하고 목을 조르고 심장을 짓누른다. - 그러나 고독이 무엇인지를 지금 어느 누가 알겠는가? ...

이러한 병적인 고립 상태와 황량하기만 한 시험기에서 벗어나, 저 흘러 넘치는 섬뜩한 확실성과 가히 질병마저도 포괄하는 건강성에 이르는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질병은 인식의 수단이며 인식을 낚는 낚싯바늘로서 반드시 필요하다. 자기 통제와 심정의 수양이며, 수없이 많은 대립적인 사유방시에 이르는 여러 길을 허용하는 그 성숙한 정신의 자유에까지 이르는 길은 멀다 - 정신이 자신의 길에서도 자신을 잃고 방탕하며 어느 한 구석에 취한 듯 주저앉아 버리게 될 위험을 몰아낼 수 있는 저 넘치는 풍요함의 내면적인 광대함과 자유분방함에 이르게 될 때까지의 길은 멀다. 그리고 위대한 건강의 표시인 저 유연하고 병을 완치하며 모조해내고 재건하는 힘이 넘쳐흐르기까지의 길도 아직 멀다. 그렇게 넘쳐흐르는 힘은 자유정신으로 하여금 시험에 삶을 걸고 모험에 몸을 내맡겨도 된다는 위험스런 특권을 부여한다. 그것은 자유정신의 거장다운 특권이다! 그 사이에는 긴 회복기가 놓여 있다. 그 시간은 고통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이고 다체로운 변화가 가득하여, 벌써 건강이라는 옷을 입고 위장을 한 강이한 건강을 향한 의지에 지배되고 규제되는 시간들이다. 거기에는 나중에 이러한 운명을 가진 한 인간을 감동 없이는 회상할 수 없는 중간 상태가 있다 : 거기에는 창백하고 섬세한 빛과 태양의 행복이 속해 있다. 즉 새의 자유, 새의 조망, 새의 오만에서 나온 감정과 호기심과 갸날픈 멸시의 감정이 얽힌 제3의 감정이 있다. ‘자유정신’ - 이 차가운 단어는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편안하며 따뜻하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랑과 증오의 속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마음대로 가까이 가고 멀어지며, 기꺼이 도주하고 피해다니며 날아다니고 다시 사라지거나 또다시 높이 날아오르며 사는 것이다 ; 사람들은 언젠가 자신 가운데에서 엄청난 다양성을 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변하게 된다. - 그러고는 자신과 무관한 사물을 걱정하는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자유정신을 괴롭히지 않는 그런 것과 관계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

한 단계 더 회복되면, 자유정신은 다시 삶에 천천히, 거의 반항적으로, 거의 의심스러운 듯 가까이 다가간다. 그의 주위는 다시 점점 따뜻해지고 마치 노란색 같은 빛을 띠게 된다 ; 감정과 공감은 깊어지고, 눈을 녹이는 듯한 온갖 바람이 그 위로 지나간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주위에 처음으로 눈을 뜬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그는 놀란 채 조용히 앉아 있다 : 도대체 그는 어디에 있었던가? 이 친근하고 가장 가까운 사물들 : 그 사물들이 그에게 얼마나 달라 보이는가! 그것들은 그 사이에 어떤 솜털과 매력을 얻었는가! 그는 감사하며 뒤를 돌아본다 - 자신의 방랑과 고집, 자기소외, 자신이 차가운 하늘을 새처럼 날며 멀리 보았던 것에 감사하며. 그가 나약하고 우둔한 게으름뱅이처럼 언제나 ‘집에’, 언제나 ‘제정신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던 것은 얼마나 잘한 일인가! 그는 자신을 잊고 있었다 :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서야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 그때 그는 거기서 얼마나 놀라운 것을 발견하는가! 미지의 전율! 회복기에 있는 사람이 느끼는 피로감과 오랜 질병 그리고 병이 재발한 가운데 느끼는 행복! 고통에 쌍 조용히 앉아 인내심을 키우는 일과 햇빛 아래 누워 있는 일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누가 겨울의 행복과 벽에 드리워진 햇빛의 얼룩을 그만큼 잘 알 수 있단 말인가! 삶을 향하여 다시 몸을 반쯤 돌린 이 회복기에 있는 자, 즉 도마뱀이야말로 세사에서 가장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가장 겸손한 동물인 것이다 : - 그들 중에는 질질 끌리는 옷자락에 작은 찬가를 달고 다니지 않으면 하루도 못 견디는 자도 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 이러한 자유정신의 기질을 가지고 병에 걸려 한동안 앓고 나서, 그 후에 더 오랫동안 건강하게, ‘더욱 건강하게’ 되는 것이 모든 염세주의(알려진 것처럼 염세주의는 낡은 이상주의자와 거짓말쟁이의 암이다)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법이다. 그 속에 있는 지혜, 즉 삶의 지혜는 오랜 기간 동안 소량의 약만으로 건강 자체를 처방한다는 것이다. 12-17


제1장 최초와 최후의 사물들에 대하여

인류는 유래와 기원에 관한 질문을 의식에서 몰아내고 싶어한다. 그 반대의 경향을 자기 속에서 느끼게 되려며 ㄴ우리는 거의 탈인간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24

철학자들의 유전적 결함 - 철학자가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두 근본적으로 극히 제한된 시기의 인간에 대한 증언에 불과하다. 여갓적 감각의 결여는 모든 철학자가 지닌 유전적 결함이다. .. 절대적 진리가 없는 거소가 마찬가지로 영원한 사실도 없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역사적으로 철학하는 일이 필요하며, 그와 동시에 겸양의 덕이 필요하다. 24-25

현상과 물 자체 - 수천 년 전부터 우리는 도덕적, 미학적, 종교적 요청과 맹목적인 애착, 정열 또는 경외감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았으며 비논리적인 사고의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세계는 점차 이처럼 이상할 정도로 다채롭고, 끔찍하게 의미심장하고 감정이 넘치게 되었다. 세계가 색채를 띠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색을 칠한 사람은 우리였던 것이다. 인간의 지성이 현상을 나타나게 했으며, 근본적인 자신의 해석을 사물 속으로 끌어들였다. 38

회의(懷疑 품을회 의심의)의 추정적 승리 - 한 번쯤은 회의적인 출발점을 인정해보라. 만약 다른 형이상학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고 우리에게 알려진 유일한 세계에 대한 모든 형이상학에서 나온 설명들이 전적으로 소용없는 것이라면, 그때 우리는 어떤 눈길로 인간과 사물들을 보게 될 것인가? 44

비교하는 시대 - 사람들이 관습에 묶이지 않을수록 그만큼 동기의 내면적 운동은 활발해지며, 그에 상응하여 외적 불안정, 인간의 뒤얽힌 혼란, 노력의 다성음악도 그만큼 커진다. 자기 자시이 있는 곳에 자신과 후손을 묶어두는 엄격한 강제성이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 존재하는가? 도대체 누구에게 아직도 무엇인가 엄격하게 속박하는 것이 존재하는가? 모든 종류의 예술양식이 나란히 모조되고 있다. 모든 단계나 모든 종류의 도덕, 관습, 문화 또한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시대는 서로 다른 세계관, 도덕, 문화가 비교될 수 있고 나란히 체험될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 고뇌를 두려워하지 말자! 오히려 시대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과제를 우리는 가능한 한 크게 생각하도록 하자. 46-47

꽃잎의 향기에 취해서 - 종교와 예술은 세계의 꽃이지만, 그것이 줄기보다 세계의 뿌리에 더 가까운 것은 결코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종교와 예술로 사물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는 없다. 오류는 종교와 예술과 같은 꽃을 피우게 할 만큼 인간을 깊고 섬세하며 상상력이 풍부하게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53

추리할 때의 나쁜 습관들 - 사람들이 가장 흔히 범하는 오류 추리는, 어떤 사항이 실재하므로 그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53

비논리적인 것은 불가피하다 - 비논리적인 것이 인간세계에 필요하며 비논리적인 것에서 좋은 것이 많이 생겨난다는 인식은 사상가를 절망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 중 하나다. 비논리적인 것은 정열, 언어, 예술, 종교 등에 그리고 대체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에 상당히 깊이 파고들어 가 있어서, 이들 아름다운 것들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주지 않고는 비논리적인 것을 퇴치할 수 없다. 54

불공정함은 불가피하다 - 어떤 사람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 우리가 겪은 경험은 총체적 평가를 위한 논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할만큼 완전할 수는 없다. 모든 평가는 성급하며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재는 척도, 즉 우리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코 불변의 크기를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분위기와 동요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에 대한 어떤 사항의 관계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확실한 척도라고 믿어야만 한다. 아마 이상의 모든 면에서 본다면 사람은 전혀 판단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평가하지 않고, 혐오와 애착 없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든 혐오는 모든 애착과 마찬가지로 역시 평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처음부터 비논리적인, 따라서 불공정한 존재이며,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현존재의 가장 크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조화 중의 하나이다. 55-56



제2장 도덕적 감각의 역사에 대하여

매우 진지한 개인과 민족에게 가벼움이 필요하듯, 마찬가지로 다른 부류에 속하는 매우 자극받기 쉬운 자와 동요하기 쉬운 자에게는 자신들의 건강을 위해 가끔 무겁게 짓누르는 짐이 필요하다. 점점 불길에 휩싸여가는 시대의 우리 더욱 정신적인 인간들은 우리가 적어도 지금처럼 부단히 악의 없고 절도를 지키녀 살아갈 수 있도록, 또한 이 시대에 거울과 자기반성으로서 이바지할 수 있도록, 불을 끄고 식히는 존재하는 모든 수단들을 잡기 위해 손을 뻗어야만 하지 않을까? 68

예지적 자유에 대한 우화 - 소위 도덕적 감각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주요 단계를 거친다. 첫째, 사람들은 동기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개별 행위를 단지 이롭거나 해로운 결과들에 의해 선 또는 악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이런 명칭의 유래를 잊고, 그것의 결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행위 자체에 ‘선’ 또는 ‘악’의 특징이 내재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한다. 언어가 돌 자체를 단단하다고, 나무 자체를 푸르다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오류다. 즉 그렇게 함으로써 결과를 원인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선함 또는 악함을 동기 속에 집어 넣고, 행동 자체가 도덕적으로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사람들은 선하다, 악하다는 술어를 개별 동기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 전체에 부여한다. 식물이 흙에서 자라는 것처럼, 인간의 본질에서 동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은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다음에는 행위에 대해서, 다음에는 동기에 대해서,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차례차례 책임을 묻는다. 결과적으로 인간들은 이 본질 역시 필연적인 결과이며, 과거와 현재의 사건들의 여러 요소와 영향으로 결합되어 있는 이상, 그것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곧 인간은 어떤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본질, 동기, 행위, 나아가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로써 도덕적 감각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이자 책임성에 관한 오류의 역사이며, 그것은 의지의 자유에 관한 오류에서 나오고 있다는 인식에 이른다. ... 불만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만은 행동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필요는 없다는 잘못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므로 후회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불만은 인간이 고칠 수 있는 습관이다. 69-70

친절의 경제학 - 인간의 교제에서 가장 효험 있는 약초이며 힘으로 간주되는 친절과 사랑은 대단히 가치 있는 발견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마 이 향기로운 약을 가능한 한 경제적으로 사용하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친절의 경제학이란 가장 무모한 몽상가의 꿈이다. 76

동정을 유발시키려고 하는 것 - 로슈푸코의 (그리고 플라톤의)판단에 의하면 동정이란 영혼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동정을 입증해야 하지만, 동정을 갖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낟. 왜냐하면 불행한 사람들은 어쨌든 동정을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큰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여길 정도로 어리석기 때문이다. ... 동정에 대한 열망은 자기 만족을 향한 열망이며, 더욱이 이웃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동정심은 지극히 자기애에 빠져 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라 로슈푸코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음"때문은 아니다. 78

진리의 명목상의 단계들 - 흔히 있는 잘못된 추리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누군가가 우리에 대해서 진실하고 솔직하기 때문에 그는 진리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부모의 판단을 믿고 그리스도교도는 교회 창설자의 주장을 믿는다. 이처럼 사람들은 지난 몇 세기 동안 행복과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옹호해온것이 모두 오류에 불과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것이 진리의 단계였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무엇인가를 믿고 자신의 믿음을 위해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을 경우에, 사실은 단지 오류가 그를 부추겼을 뿐이었다면, 이것은 너무나 부당한 일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런 과정은 영원한 정의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민감한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정신과는 반대로 다음의 명제를 명령한다. 즉 도덕적 행위와 예지적 통찰 사이에는 철저하게 필연적이 ㄴ유대가 이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영원한 정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81

거짓말 -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신이 거짓말을 금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에는 날조, 위장, 기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위프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짓말을 하는자는 자신이 져야 할 무거운 짐에 관해서는 거의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즉 그는 하나의 거짓말을 주장하기 위해서 또 다른 스무 개의 거짓말을 생각해내야 한다.) 다음으로 단순한 상황에서는 나는 이것을 원한다, 내가 이것을 했다 등으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유리하며, 따라서 강제와 권위를 택하는 편이 교활한 방법보다 훨씬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한 어린이가 복잡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면 그는 이와 같이 자연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언제나 자기에게 이익이 되게끔 말한다. 82

자기분할로서의 인간의 도덕 - 진정으로 자신의 일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작가는 누군가가 찾아와서 그 일을 더 명확하게 표현해주고, 여기에 포함된 문제에 대해 남김없이 대답함으로써 자신을 파괴해주기를 원한다. 사랑을 하고 있는 소녀는 연인이 저지른 부정에서 자신이 사랑이 헌신적이며 충실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군인은 조국의 승리를 위해 전쟁터에서 쓰러지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최고 소원도 조국의 승리를 통해 승리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 즉 수면과 가장 좋은 음식을, 사정에 따라서는 자신의 건강과 재산을 자식에게 주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비이기적인 상황들일까? 쇼펜하우어의 말에 따라 이런 도덕적 행위들은 "불가능하면서도 현실적"이기 때문에 기적일까? 이들의 경우에는 인간은 자신의 그 무엇을, 하나의 사상, 하나의 욕망, 하나의 작품 등을 자신의 다른 것보다 한층 더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분할해서 한쪽을 다른 한쪽의 희생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이 명확하지 않은가? 어느 고집 센 사람이 "내가 이 인간에게 한 걸음이라도 길을 양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총에 맞는 편이 낫다"고 할 때,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일까? 어떤 것에 대한 애착(소원, 충동, 욕망)은 앞서 말한 모든 경우에 존재하고 있다. 애착을 가지는 것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비이기적"이지 않다. 도덕에서 인간은 자신을 분할할 수 없는 것, 개체(individuum)로서가 아니라 분할할 수 있는 것(dividuum)으로서 다룬다. 85

약속할 수 있는 것 - 행동은 약속할 수 있으나 감정은 약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감정은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항상 사랑하겠다거나 미워하겠다거나, 항상 그에게 충실하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은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행동은 약속할 수 있다. 이런 행동은 대체로 사랑, 증오, 충실함의 결과이지만, 한편 다른 동기에서 나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러 방법과 동기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익르어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언제까지나 사랑하겠다는 약속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한 나는 너에게 사랑의 행위를 입증할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ㅇ낳게 되더라도, 다른 동기에 의해서일지라도 나는 똑같은 행동을 너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언제까지나 똑같은 것이라고 하는 가상이 상대방의 머리 속에는 존속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기만 없이 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경우, 그것은 사랑의 가상에 대한 외관상의 지속을 약속하는 것이다. 86

지성과 도덕 - 주어진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좋은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동정심을 가지려면 강력한 상상력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도덕은 지성의 우수함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86

복수하기를 원하는 것과 복수하는 것 - 복수심을 품는 것과 복수를 실행하는 것은 격렬한 열병의 발작에 걸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나가버린다. 그러나 복수를 실행할 힘과 용기가 없는데도 복수심을 품는 것은 만성병, 육체와 영혼의 중동증을 안고 있는 것과 같다. 의도만을 중시하는 도덕은 두 경우를 양이 같은 것으로 평가하고, 통상적으로 전자의 경우를 더 나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아마도 복수의 행동이 수반할지도 모르는 나쁜 결과 때문일것이다). 두 가지 평가 모두 근시안적이다. 87

사랑과 정의 - 왜 인간은 정의를 손상시켜가면서 사랑을 과대평가하고, 마치 정의보다 사랑이 더 고상한 본질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랑을 향해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분명히 사랑은 정의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틀림없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그만큼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것이다. 사랑은 어리석은 것이며, 풍부한 풍요의 뿐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이 뿔에서 자기의 선물을 누구에게나 나누어준다. 그가 그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 번도 그것을 감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서와 경험에 의하면 사랑은 정의롭지 못한 사람뿐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는 정의로운 사람에게도 피부 속까지 흠뻑 젖게 하는 비처럼 공평하다. 91

피해자와 가해자의 착각들 -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서 어떤 소유물을 (예를 들면 영주가 서민한테서 연인을) 빼앗을 경우, 가난한 자는 착각을 한다. 자신이 소유한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빼앗아갈 정도로 그 사람은 참으로 흉악한 사람임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자느 ㄴ개개의 소유물의 가치를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사람의 입장을 생각할 줄 모르며,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심하 ㄴ부정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양자 모두 서로에 대하여 잘못된 표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분갷살 만한 권력자의 부정도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엄청난 것은아니다. 이미 물려받은 감각은 더 높은 것이 요구되는 더 고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 그들을 매우 냉정하게 만들고, 양심을 무디게 한다. 만약 우리와 다른 존재의 차이가 아주 크면, 우리는 모두 부정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어, 예를들어 모기 한 마리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죽이게 된다. 그래서 크세르크세스(Xerxes, 그리스 사람들조차 모두 그를 특별히 고귀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의 경우, 전체 원정군에게 불안하고 불길한 불신감을 조성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몸을 토막내게 한 것은, 그의 사악함의 표시가 아니다. 이런 경우에 한 개인은 마치 불쾌한 곤충처럼 제거된다. 세계의 지배자가 오래 느끼도록 자극하기에는 그는 너무나 무가치한 존재다. 그뿐 아니라 어떠 ㄴ잔인한 자도 학대받은 자가 믿고 잇는 그런 정도로 잔인하지 않다. 고통을 상상하는 것은 고통당하는 괴로우모가는 같지 않다. 공정하지 못한 재판간과 사소한 부정직함으로 인해 세상의 여론을 오도하는 저널리스트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원인과 결과는 이런 모든 경우에 잔혀 다른 감정과 사상들로 둘러싸여 있다. 반면 사람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똑같이 생각하며 느낀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이 전제에 입각하여 한 사람의 죄를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특정한다 96-98

수치심의 예민함 - 사람들은 부정한 것을 생각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이런 부정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브끄러워할 것이다. 98

개개인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평을 통하여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자신 앞에서 입증하고 싶어 한다. .. 그들은 다른 살마의 판단력을 자신의 판단력보다 신뢰하고 있다. 100

성숙한 개인의 도덕 - 자신에게서 완전한 개인을 만들어내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최고의 행복을 주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동정적인 감동과 행위보다 그를 훨씬 더 진보시켜준다. 물론 우리 모두는 여전히 개인적인 것을 너무 사소하게 여기는 병을 앓고 있다. 그것은 잘못 교육되어온 것이다. 우리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자. 우리의 감각은 오히려 강제적으로 개인적인 것에서 분리되었으며, 마치 개인적인 것이란 희생되어야만 하는 나쁜 것이기라도 한 듯 국가, 학문,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희생물로 제공되었다. 104-105

인륜과 윤리적인 것 - 도덕적, 윤리적, 윤리학적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확립되어온 규범이나 관습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억지로 복종하는지 또는 기꺼이 복종하는지의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앟으며 그것을 실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사람들로 하여금 윤리적인 것과 비윤리적인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구별을 가능하게 한 근본적 대립은 '이기적인 것'과 '비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관습과 규범에 구속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방되어 있는가에 있다. 여기서 어떻게 관습이 성립된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관습은 선과 악 또는 어떤 내재적 정언 명법을 고려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한 공동체, 한 민족을 유지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잘못 해석된 우연을 근거로 하여 성립된 모든 미신적 관례는, 그것을 따르는 것이 윤리적이라는 관습을 강요한다. 즉 관습에서 해방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공동사회에서는 개인의 경우보다 훨씬 더 해롭다. 모든 관습은 근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많이 잊혀질수록, 계속 더 존중할 만한 것이 된다. 그리고 관습에 바쳐지는 존중은 세대가 지남에 따라 쌓여, 관습은 마침내 신성한 것이 되며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어떤 경우든 경건의 도덕은 비이기적인 행위들을 요구하는 도덕보다 훨씬 더 오래된 도덕이다. 105-106

인륜 안에서의 쾌감 - 쾌감과 도덕성의 근원에 대한 중요한 부분은 습관에서 생겨난다. ... 인륜이란 쾌적한 것과 유익한 것의 결합체이며, 게다가 그것은 심사숙고할 필요가 없다. 106-107

소위 악한 행위에서의 무죄함 - 모든 '악한' 행위들의 동기는 보존 본능, 더 정확히 말해서 개인은 쾌감을 지향하고 불쾌감을 회피한다는 사실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그렇게 동기 규정된 것이라면 그것은 악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고통을 주는 것'은 철학자들의 두뇌 속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쾌감을 가져다주는 것'(쇼펜하우어적인 의미에서 동정심)도 이와 마찬가지다. 국가 형성 이전의 상태에서 우리는,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나무로 모여들때 우리보다 먼저 그 나무의 열매를 빼앗으려는 자가 있으면 그가 원숭이든 인간이든 죽였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는 불모의 땅에서 방랑하게 될 경우 동물에 대해 그런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를 가장 분노하게 만드는 악한 행위들은, 그런 행위를 우리에게 가하는 상대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그의 의향에 따라 이런 나쁜 행동을 우리에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착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의향이라는 것에 대한 이 믿음은 증오, 복수심, 악의를 야기하고 상상력을 완전히 손상시킨다. 반면 우리는 동물에 대해서는 그렇게 격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들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보존본능에서가 아니라 보복하기 위해 해를 가하는 것. 그것은 잘못된 판단의 결과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뵈가 없다. 개인은 국가 이전의 상태에서는 위협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가혹하고 잔인하게 다룰 수 있었다. 그것은 자기 힘을 위협적으로 시험해 보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 약한 자를 자신에게 굴복시키는 폭력을 행사하는 자, 권력자, 최초의 국가 설립자는 그렇게 행동한다. 오늘날에도 국가가 여전히 그렇게 행하고 있는 것처럼 거기에는 그럴 권리가 있다. 오히려 그것을 방해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예를 들어 사회, 국가와 같은 더 큰 개체와 집단적 개체가 개인을 굴복시켜서 그들의 개별성에서 그들을 이끌어내어 집단으로 흡수하게 되면,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토대가 제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도덕성에는 강제가 선행한다. 또한 도덕성 그 자체는 잠시 동안은 여전히 불쾌감을 피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순응하는 상제일 것이다. 나중에 그것은 인륜이 되고 훨씬 후에느 ㄴ자유로운 복종이 되며, 마침내는 거의 본느에 가까워지고 만다. 그때 그 도덕성은, 오랫동안 익숙해지고 자연적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쾌감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덕이라고 불린다. 109-110

판단하지 말라 - 앞서 간 시대들을 고찰할 때 우리는 부당한 비방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노예제도의 불공정함, 인간가 민족들을 정복하는 과정에서의 잔인성은 우리의 척도로 측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는 정의의 본능이 아직 충분히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기주의는 악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웃' (이 말은 그리스도교적 기우너을 가진 것으로 진실에 일치하지 않느다)에 대한 표성이 우리에게는 극히 미약히기 때문이며,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마치 식물과 돌을 대하느 ㄴ것처럼 자유롭고 책임이 없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다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결코 그것을 완전히 배울 수는 없다. 111-112

'인간은 항상 선하게 행동한다' - 자연이 뇌우를 내려 우리를 젖게 했다고 해서 자연을 비도덕적이라고 탓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해를 끼치는 사람을 비도덕적이라고 부르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후자의 경우에는 자의적으로 타나타는 자유의지를, 전자의 경우에는 필연성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구별은 오류이다. 또한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는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는 것에 대해 비도덕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인간은 모기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모기를 아무 거리낌없이 의도적으로 죽이고, 우리 자신과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범죄자를 의도적으로 처벌하고 그에게 고통을 준다. 첫번째의 경우는 개인이 자기 보존을 위해서 또는 자신이 불쾌해지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자가 되며, 두번째 경우에는 국가가 그러하다. 모든 도덕은 의도적으로 해를 가하는 것을 정당방위로 인정한다. 단 그것이 자기 보존의 문제가 되는 경우라면!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가하는 모든 악행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관점만으로도 충분하다. 인간은 자신으 ㄹ위해서 쾌감을 원하고 불쾌감을 없애고자 한다.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자기 보존의 문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말은 타당하다. 인간은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선을 행한다. 즉 인간은 지성의 정도와 이성의 갖가지 척도에 따라 언제나 자신에게 선하게(유리하게) 보이는것을 행한다. 113

만약 인간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개별적인 모든 행위는 미리 계산될 것이다. 인식의 모든 진보, 모든 오류, 모든 악의도 말이다. 118

많은 행위가 악하다고 말하지만 그 행위들은 단지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를 선택했던 지성의 정도가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한 의미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모든 행위는 어리석다. 왜냐하면 현재 이를 수 있는 최고의 인간 지성은 반드시 또 추월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120




제4장 예술가와 저술가의 영혼으로부터

완전한 것은 생성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 - 우리는 완전한 것에 대해서는 모두 그것의 생성에 의문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현존하는 것이 마치 마술에 의해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즐기는 데 익숙해 있다. ...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즉흥적인 것이라는, 기적처럼 갑자기 생긴 것이라는 믿음을 불러일으킬 때 완전한 효과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예술의 학문은 이런 착각을 가장 분명하게 거부해야 하고, 예술가의 그물에 걸리느 한, 지성의 그릇된 추론과 악습들을 적발해내야 한다. 그것은 자명한 일이다. 167

예술가는 일생 동안 어린아이와 젊은이인 채로 있으며 자신에게 예술 충동이 엄습했던 지점에 머물러 있다. 169

손으로 하는 작업의 성실성 - 재능과 타고난 능력에 대해서만 말하지 말라! 타고난 재능이 거의 없이도 위대해진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위대한 사람이 되었고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천재'가 되었다. 그런한 자질을 의식하고 있는 살마이라면 아무도 그것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커다란 전체를 만드는 일을 감행하기 전에, 우서 부분을 완전히 만든는 것을 배우는 숙련된 장인의 성실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부분을 완성하기 ㅏ여 시간을 부여했다. 왜냐하며 그들은 현혹시키는 전체의 효과보다 작은 것, 지엽적인것을 잘 만드는 일에 더 많은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하여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 있을 까 하는 방법은 쉽게 제공할 수 있으나, '나에게느 재능이 충분치 않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질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느 그 자질을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2페이지를 넘지는 않지만 거기에 포함된 모든 단어가 필연적이라고 할 만큼 명확한 소설을 백 개 이상 습작해보라. 가장 함축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일화의 형식을 배울 때까지 매일 일화를 쓰도록 하라. 인간의 유형과 성격을 수집하거나 윤색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 특히 주위의 다른 사람드에게 미치는 효과를 유심히 바라보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에게 말을 자주 하고 남이 말하는 것을 귀를 쫑긋 세워 듣도록 하라. 풍경화가와 의상 디자이너처럼 여행하도록 하라. 잘 표현되면 예술적 효과를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개개의 학문에서 발췌하도록 하라. 끝으로 인간 행위의 동기에 대해서 잘 생각하고 이 점에서 가르침을 주게 될 어떤 지침도 냉대하지 말고 밤낮으로 이런 것들의 수집가가 돼라. 이와 같은 다양한 훈련으로 2,30년을 내라. 그 후에는 작업실에서 창작된 것이 거리의 빛 속으로 나가도 좋다. 그런데 대부부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들은 부분에서가 아니라 전체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마 한 번은 선택이 적절하여 주목을 끌게 되지만 그때부터 항상 실패할 것이다. 그것은 충분히 당연한 근거에서 나오는 일이다. 때때로 이러한 예술적 삶의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이성과 성격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에는 운명과 필욕 그 자리를 물려받아 미래의 거장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여 그의 손으로 하는 작업의 모든 조건을 거쳐 단계적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181-182

대중의 예술적 교육 - 동일한 주제가 서로 다르 거장에 의해서 수많은 방식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대중은 소재에 관심을 갖는것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작업들에 의해 그 주제르 알게 되고 새로운 것이 주는 매력과 긴장감의 매력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며느 결국에는 이 주제를 취급할 때의 어떤 뉘앙스, 섬세하고 새로운 발명도 파악하고 즐기게 될 것이다. 185

예술가와 그의 추종자는 보조를 맞춰야 한다 - 양식이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진행하는 것은, 예술가뿐 아니라 청중과 관중도 이 진행에 참여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느리게 진행되어야 한다. ... 왜냐하면 예술가가 대중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이미 대중은 급속히 낮은 곳으로 가라앉기 때문이다. 186

집단정신 - 훌륭한 저술가는 자신의 정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구들의 정신까지도 가지고 있다. 192

학문에 대한 관계 - 학문 속에서 그들 스스로 어떤 것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학문을 흥미롭게 여기기 시작했던 사람은 모두 학문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193

작가의 역설들 - 소위 독자가 불쾌하게 느끼는 작가의 역설들은 그 자각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흔히 독자의 머리 속에 있다. 193

기지 - 가장 기지에 넘치 작가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미소를 거의 만들어내지 않는다. 194

문장가로서의 사상가 - 사상가는 대부분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의 사상뿐만 아니라 그 사상을 사유하는 것까지 우리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194

독자의 정신을 거역하는 죄 - 단지 독자와 같아지기 위해서 저자가 자신의 재능을 부인한다면, 그는 독자가 결코 용서하지 않을 치명적이 죄를 범하는 것이다. 즈 독자가 그것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눈치채는 경우에 말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모든 나쁜 욕을 해도 좋다. 그러나 어떻게 그 말을 하는지의 양식에서는 인간의 허영심을 다시 바로 세워줄 방법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194-195

글쓰기와 가르치기에서의 주의점 - 처음으로 글으 써보았거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글쓰기에 대한 정열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시도하고 체험하는 모든 것에서 문체상으로 전달할 수있느 것만을 배운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저술가와 독자들만을 생각한다. 통찰을 원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기 일을 하는 데는 무능력하다. 그는 언제나 자기 학생의 행복을 생각하고, 그가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인 한 모든 인식은 그를 기쁘게 하낟. 결국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열의를 잃어버리고, 지식의 한 통로, 흔히 수단으로 자신을 파악한다. 199

아킬레우스와 호메로스 - 언제나 아킬레우스와 호메로스의 관계 같은 것이 존재한다. 한족은 체허모가 감각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쪽은 그것들을 기술하는 것이다. 참다운 저술가는 남의 격정과 체험에 다만 단어들을 부여할 뿐이며, 자기가 경험했던 적은 것들에서 많은 것을 추측해내는 예술가이다. 예술가들으 결코 대단한 열정을 가진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흔히 열정을 가진 인간으로 무의식적인 감정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 즉 그들의 삶이 예술의 영역에서 체험을 말하게 될 때, 사람들은 그들이 그렸더 열정을 더욱 신뢰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을 자유롭게 내버려두고 자제하지 않으며 자신의 분노와 욕구를 위해 넓은 자리만 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곧 세상 사람은 저 사람은 얼마나 열정적인가! 하고 외친다. 그러나 깊이 파고드는, 개인을 소모시키며 때로는 잠식해 들어가는 열정인 경우에는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이러한 열정을 체험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것을 극이나 음악 또는 소설에서 묘사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예술가가 아니라면 흔히 방종한 개인이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205



제5장 좀 더 높은 문화와 좀 더 낮은 문화의 징후

퇴화를 통해 고상해짐 - 우리는 한 민족의 혈통은, 사람들이 대부분 자신들의 일상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근본 법칙들의 동일성에 따라, 즉 그들의 공동 믿음에 따라 살아 있는 공동심(共同心 함께공 한가지동 마음심)을 가지고 있을 때 가장 잘 존속한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여기서 훌륭하고 탄탄한 풍습이 강화되고, 개체의 종속성을 배우며 품성에는 이미 강인함이 생일 선물로 주어져서, 그 후에는 그것이 습관하된다. 강하고 동질적이며 특징적인 개체들을 기반으로하는 이런 공동체가 가지는 위험은 세습에 의해 점차 강화되는 우둔화이다. 이것은 한번 정착되면 그림자같이 뒤따라다닌다. 그와 같은 공동체의 정신적 진보는 속박받지 않고 더 불안정하며 도덕적으로 더 약한 개체들에게 따라다닌다. 대개 새로운 것과 다양한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종류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약함 때문에 별 뚜렷한 영향도 보이지 않고 소멸해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들이 후손을 가지게 되면, 긴장이 완화되어 때로는 공동체의 안정된 요소에 상처를 초래한다. 새로운 그 무엇은 바로 이 상처로 인해 약화된 자리에서부터 전체로 접종되는 것이다. 그러나 것의 전체적인 힘은 이 새로운 것을 그의 피 속으로 받아들여 동화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해야 한다. 퇴화해가는 본성들은 진보가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대개 모든 진보에는 어떤 부분적 약화가 성행되어야 한다. 가장 강한 본성들은 유형을 계속 지켜나가고 좀더 약한 본성은 유형을 계속 형성해나가는 것을 돕는다. 비슷한 일이 개별적인 인간들에게도 일어난다. 일종의 퇴화, 불구, 나아가서는 악덕 그리고 신체적 또는 도덕적 결손까지도 다르 한편으로는 때때로 하나의 장점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더 심하게 병든 인간들은 아마 호전적이고 침착하지 못한 종족 속에서 혼자 있으 계기를 더 많이 가지게 됨으로써 더욱 침착하고 현명해지며, 외눈을 가진 사람은 더욱 강한 한쪽 눈을 가지게 될 것이고, 눈먼 사람은 한층 더 깊이 내부를 보고 어쨌든 더욱 날카롭게 듣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저 유명한 생존 경쟁이 한 인간과 종족의 진보와 강화가 해명될 수 있는 유일한 관점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두 가지 것이 한데 합쳐져야 한다 그 하나는 신앙과 공통된 감정 안에서 정신들을 결합함으로써 정착된 힘을 증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퇴화해가는 본성들을 그리고 그 정착된 힘을 부분적으로 약화시키고 손상시킴으로써 더 높은 목표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다. 좀더 여리고 섬세한 것으로서의 더 약한 이 본성들이 대체로 모든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 어디에서인가 부패하고 약해져가는, 그러나 전체로서는 아직 강하고 건강한 민족은 새로운 것의 감염을 받아들여 장점으로 동화시킬 수가 있다. 개별적인 인간의 경우, 교육의 과제는 전체적인 인간으로서의 그가 더 이상 자신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를 확고하고 확실하게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그 후에 교육자느 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아니면 운명이 그에게 입힌 상처를 이용해야 한다. 그리하여 고통과 욕구가 생겨나면, 그 상처 입은 부분에 새롭고 고상한 그 어떤 것이 접종될 수 있는 것이다. 교육자의 전체적 본성은 그것을 받아들여, 나중에 그 열매들 속에서 고상해지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국가에 관해서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설프게 교육받은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통치의 형식은 아주 사소한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정치의 최대 목표는 영속성이며, 이것은 자유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어 다른 모든 것을 능가 한다." 대체로 지속적인 발전과 고상하게 하는 접종은 확실하게 기초가 마련되고 영속성이 최대한 보증될 때에만 가능하다. 물론 모든 영속성의 위험한 동료인 권위라는 것이 통상적으로 그 일을 방해하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225-227

자유정신은 상대적 개념이다 - 어떤 혈통과 환경, 신분과 지위 또는 지배적인 시대의 견해를 근거로 그에게서 예살할 수 있는 거소가 다르게 사유하는 사람을 자유정신이라고 부른다. 자유정신은 예외이며 속박된 정신은 상례이다. 속박된 정신은 자유정신의 자유로운 기본 원칙이란 눈에 띄고 싶은 병적인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거나 또는 속박된 도덕과는 전혀 화해할 수 없는 순전히 자유로운 행위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정짓고 자유정신을 비난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자유로운 기본 원칙들이 머리의 괴팍하모가 엉뚱함에서 나온다고 추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말을 하면서 자신의 말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함으로써 단지 상처를 입히려는 악의를 가지고 잇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유정신의 얼굴에는 보통 속박된 정신도 충분히 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지성의 비범한 우수성과 예리함이 증거로서 역력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정신 활동의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원은 공정하게 평가된 것이다. 사실상 많은 자유정신이 이러한 또는 저러한 양식으로 성립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자유정신이 그런 방법으로 성취한 원칙들은 속박된 정신의 원칙들보다도 더 진실하며 신뢰할 수 있다. 진리의 인식에서는, 어떤 충동에서 그것을 추구했으며,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발견했는지가 아니라 그 진리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자유정신이 정당하다면 따라서 속박된 정신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다. 전자가 부도덕에서 진리에 이르렀는가 그리고 후자가 지금까지 도덕에서 비진리를 고집했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자유정신이 정당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에 관계 없이 그가 관습적이 ㄴ것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이 자유정신의본질에 속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유정신은 역시 진리를, 또는 적어도 진리탐구의 정신을 자기 편으로 삼게 될 것이다. 자유정신은 근거를 요구하고 다른 정신들은 신앙을 요구한다. 227-228

신앙의 기원 - 속박된 정신은 자신의 입장을 근거에서가 아니라 습관에서 받아들인다. 228

모든 국가와 신분, 결혼, 교육, 법률과 같은 사회질서, 이 모두는 그것들에 대한 속박된정신의 믿음 속에서만 힘과 영속성을 가지게 된다. 229

속박된 정신에서의 사항의 척도 - 속박된 정신들은 네 가지 종류의 사항에 대하여 그것들이 옳다고 말한다. 첫째, 영속성이 있는 모든 사항은 옳다. 둘째, 우리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모든 사항은 옳다. 셋째, 우리에게 이득을 가져오는 모든 사항은 옳다. 넷째, 그것을 위해 우리가 희생을 치른 모든 사항은 옳다. 예를 들어 이 마지막 것은, 왜 국민의 의지를 거역하여 시작된 전쟁이 우선 희생이 치러지면 곧바로 열광적으로 게속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232

강한 정신 - 관습을 자기 편에 두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근거도 필요하지 ㅇ낳는 사람과 비교하면, 자유정신은 항상 약한 쪽이다. 특히 행동에서 그렇다. 왜냐하면 자유정신은 너무나 많은 동기와 관점들을 알고 있고, 그 때문에 확신이 없으며 미숙한 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가 적어도 자신으 관철시키며 아무 성과도 없이 파멸하지 않을 정도로, 그를 비교적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 있는 것일까? 강한 정신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이것은 개별적인 경우에는 천재의 생산에 대한 문제이다. 한 개인이 관습에 맞서 완전히 개인적인 세계 인식을 지향하는 그 활력, 그 불굴의 힘, 그 인내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232-233

기적적 교육 - 사람들이 신과 신의 배려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바로 그곳에서 교육의 관심은 비로소 크게 성장할 것이다. 마치 기적의 치료에 대한 믿음이 끝났을 때 비로소 치료술이 발전할 수 ㅇ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모두 기적적인 교육을 여전히 믿고 있다. 사람들은 실제로 엄청난 무질서, 목표의 혼란, 상황의 불리한 조건에서 가장 창작력이 풍부하고 가장 강한 사람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러한 것이 당연한 일로 일어날 수 있었던가? 이제 사람들은 앞으로 이런 경우들을 좀더 상세히 관찰하고 세심하게 조사하게 될 것이다. 그때 기적은 결코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상황 아래에서 많은 살맏르이 계속 멸망해간다. 대신 구제된 각 개인들은 대체로 훨씬 더 강력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타고난 강인한 힘으로 이 역경을 타개하고 이 힘을 더욱 훈련하여 키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적은 설명될 수가 있다. 기적을 이미 믿지 않는 교육은 세 가지 사항에 대하여 유의해야 한다. 첫째, 얼마나 많은 활력이 유전되는가? 둘째, 무엇을 통하여 새로운 활력이 점화될 수 있는가? 셋째, 어떻게하면 개인이 불안에 빠져 그 고유성을 파괴당하지 ㅇ낳고 문화의 다양한 요구들에 적응할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하면, 어떻게 한 개인이 사적 문화와 공적 문화의 대위법 속에 참가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가 곡조를 지휘하면서 동시에 그 곡조를 연주할 수 있을까? 242-243

학문의 미래 - 학문은 노력하고 탐구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만족을 주고, 그 성과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극히 적은 만족밖에 주지 않는다. 그러나 학문의 모든 중요한 진리는 조금씩 평번하고 저속해지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 조금밖에 없는 만족도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그 경탄할 만한 구구단을 일단 배우게 되면 이미 더 이상 기쁨을 느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학문이 스스로를 통하여 점점 더 작은 기쁨밖에 주지 못하게 되면, 그리고 위로를 주는 형이상학, 종교, 예술을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더 많은 기쁨을 빼앗게 되면, 인류의 거의 전부가 혜택을 입고 있는 쾌감의 가장 큰 샘이 고갈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좀더 높은 문화는 인간에게 우선 학문을, 그 다음에 비학문을 느낄 수 있는 두 개의 뇌실 즉 이중 두뇌를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두뇌는 혼란 없이 병행하고 분리할 수도 있고 폐쇄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것은 건강상의 요구 사항이다. 한 영역에는 동력원이 있고 다른 영역에는 조절기가 있어서 환상, 편협, 정열로 가열되어야 하며 인식하는 학문의 도움으로 과열된 것의 나쁘고 위험한 결과들이 예방되어야 한다. 만약 좀 더 높은 문화의 이런 요구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아픙로의 인간 발전의 경과는 거의 확실히 예언될 수 있다. 쾌감을 적게 제공하게 되면 참된 것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 버린다. 환상, 오류, 공상은 쾌감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거에 자신들이 주장했던 땅을 단계적으로 쟁취해간다. 그 다음의 학문의 쇠퇴이며 야만으로의 역전이다. 250-251

흥미로운 것의 증가 - 좀더 높은 교양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흥미로워진다. 그는 자신의 사고의 빈 틈이 교양으로 채워질 수 있거나 사상이 교양으로 인해서 확인될 수 있는 곳에서는 재빨리 그 문제의 교훈적인 측면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지적할 줄 안다. 거기서 권태는 점점 더 사라지고, 그와 함께 지나친 감정의 흔분도 사라진다. 그는 마침내 식물 사이를 지나다니는 자연 연구자처럼 인간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자기 자신을 단지 그의 인식 충동을 강하게 자극하느 ㄴ데 불과한 하나의 현상으로 인지한다. 253

학문을 통해서 훈련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능력이다 - 인간이 어느 일정한 시간 동안 엄밀한 학문을 철저히 해왔다는 것의 가치는 그 성과들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성과들은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로 이루어진 바다에 비교한다면 사라져 없어질 만큼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활력, 추진력, 인내력의 강인함을 증대시킨다. 인간은 어떤 목적을 합목적적으로 달성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한 한에서, 언젠가 학문적인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그 뒤에 하게 될 모든 일에서 볼 때 대단히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254

거대한 것에 호의적인 편견 - 사람들은 분명히 모든 거대한 것과 뚜렷한 것을 과대 평가한다. 이는, 만약 어떤 사람이 한 가지 분야에 전력투구하여 자신을 흡사 하나의 거대한 기관으로 만들 때, 이 일이 대단히 유익하다고 느끼게 되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통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확실히 인간 스스로에게는 자신의능력을 균형 있게 훈련하는 것이 더 유익하고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모든 재능은 다른 힘들에서 피와 힘을 빨아먹는 흡혈귀이며, 지나친 생산은 가장 재능 있는 사람까지도 거의 미치게 만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술 안에서도 역시 극단적인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 매우 주의를 끈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는 훨씬 낮은 문화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힘을 가지기를 원하는 모든 것에 굴복한다. 256-257

학교에서의 이성 - 학교는 엄밀한 사고, 신중한 판단, 일관성 있는 추론을 가르치는 것 외의 다른 과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학교는 이 작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것, 예를 들어 종교를 무시해야 한다. 물론 학교는 인간적인 불투명함, 습관 그리고 욕망이 아주 팽팽하게 당겨진 사고의 활을 나중에 다시 느슨하게 만들게 되리라는 것을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학교는 그 영향력이 미치는 한, 인간에게 있는 본질적인 것과 탁월한 것을 강요해야 한다. 그것은 적어도 괴테가 판단하듯이, '인간의 이성과 학문은 최상의 힘'이다. 위대한 자연 탐구자 폰 베어(von Bear)는 동양인에 비해서 모든 유럽인이 뛰어난 점을,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근거들을 말할 수 있는, 훈련된 능력에서 찾고 있다. 동양인들은 이런 능력이 전혀 없다. 유럽은 일관성 있고 비판적인 사고의 학교로 나아갔고, 동양은 여전히 진리와 허구 사이에서 구별할 줄을 모르고, 자신의 호가신이 자신의 관찰과 규칙에 따른 사고에서 유래하는 것인지, 또는 상상력에서 유래하는 것인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서의 이성은 유럽을 유럽으로 만들었다. 중세에 유럽은 다시 동양의 한 부분과 부속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즉 그리스인에게 감사해야 했던 학문적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263-264

좀더 높은 문화는 필연적으로 오해된다 - 지적 충동 외에는 단지 습관이 된 종교적 충동만을 하나 더 가지고 있는 학자들처럼, 자신의악기에 줄을 두 개만 매어놓고 있는 사람은, 더 많은 현으로 연주할 수 있는 사람드을 이해하지 못한다. 더 낮은 사람들에 의하여 항상 잘못 해석되는 것은 많은 현을 가진 더 높은 문화의 본질에 속한다. 잘못된 해석은 예를 들어 예술이 종교적인 것의 가장된 형식으로 간주되는 경우에 일어나게 된다. 오로지 종교적이기만 한 사람들은, 마치 노아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닌 음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문조차도 종교적 감정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275-276

활동적인 사람들의 주요 결점 - 활동적인 사람들에게는 흔히 더 높은 활동이 결여되어 있다. 여기서는 개인적인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관리, 상인, 학자들로서 즉 유적 존재로서는 활동적이지만 아주 특정한 한 개인, 유일무이한 인간으로서는 활동적이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태만하다. 활동적인 사람들의 불행은 그들의 활동이 거의 언제나 약간은 비이성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돈을 모으고 있는 은행가에게 그가 쉬지 않고 일하는 활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서는 안 된다. 이 활동은 비이성적인 것이다. 활동적이 ㄴ사람들은 돌이 굴러가듯 기계적인 성격의 우둔함에 따라 굴러간다. 모든 인간은 모든 시대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노예와 자유인으로 나뉘어 있다. 왜냐하면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노예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그는 자신이 원하는 그 누구, 즉 정치가, 상인, 관리, 학자이다. 277-278

활동적인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태만한가 - 나는 다양한 의견이 가능한 모든 것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 개인은 스스로 다른 모든 사물에 대해서 하나의 새로운,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위치를 차지하는 자기만의 그리고 일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활동적인 사람의 마음속에 근본적으로 들어 있는 태만함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샘에서 물을 깆는 것을 방해한다. 의견의 자유는 건강과 마찬가지다. 양쪽이 모두 개인적인것이며, 양쪽 모두에게서 인정되는 보편 타당한 개념은 세워질 수 없다. 한 개인의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것이 다른 한 개인에게는 이미 질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정신의 자유를 향한 많은 수단과 방법이 더 높이 발달한 본성은 지닌 사람들에게는 부자유로 향하는 방법들과 수단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279-280

부수 효과 - 진정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런 억압이 없어도 결점과 악덕의 경향들을 버리게 될 것이다. 분노와 불쾌함이 그를 엄습하는 일도 좀더 드물어질 것이다. 즉 그의 의지는 인식하는 것과 인식하기 위한 수단, 즉 그 안에서 그가 인식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속적인 상태 외의 아무것도 더 절실히 원하지 않게 될 것이다. 280

앞으로 나아가라 - 그러면 확실한 발걸음과 신뢰를 가지고 지혜의 길로 나아가라! 네가 어떤 존재이든 스스로 경험의 샘이 되어 너 자신으 도우라! 너의 본질에 대한 불만을 던져버리고 네 자신의 자아를 용서하라. 왜냐하면 어쨌든 너는 인식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백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사다리를 가지고 잇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종교와 예술을 어머니와 유모처럼 사랑해봤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명해질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서 바라보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그 마력속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너는 역사에 정통해야 하고, '이쪽-저쪽'의 조심스러운 저울접시 놀이에도 정통해 있어야 한다. 과거의 황야를 통해 그 고통에 찬 위대한 걸음을 걸었던 인류의 발자취를 밟아서 거꾸로 거닐어보라. 그러면 인류가 결코 다시 갈 수 없고 가서는 안 되는 곳을 너는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미래의 매듭이 또 맺어질 것인지를 전력을 다하여 미리 탐색함으로써, 네 자신의 삶은 인식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얻게 된다. 네가 체험한 모든 것, 모든 시도, 오류, 실수, 착각, 정열, 너의 사랑과 희망이 너의 목표속에서 남기없이 꽃을 피우도록 성취하는 것은 네 손에 달려 있다. 이 목표란, 스스로 문화의 고리의 필연적인 하나의 사슬이 되는 것이며, 이 필연성에서 보편적인 문화의 진행 속에 있는 필연성을 추론하는 일이다. 283-284



제6장 교제하는 인간

호의적인 위장 - 사람들과 교제할 때에는 흔히 우리가 마치 그들의 행위의 동기를 간파하지 못한 듯 호의적으로 위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287

평등의 두 가지 방식 - 평등의 욕구는 다른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까지 끌어내리려고 하거나(헐뜯거나 비밀로 하거나 다리를 걸어서) 또는 자신으 모든 사람과 함께 끌어올리려는(인정하거나 도와주거나 남의 성공을 기뻐함으로써)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288-289

신뢰와 친밀함 - 다른 사람과 의도적으로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상대방의 신뢰를 얻고 있는지에 대하여 확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뢰를 확신하는 사람은 친밀함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289-290

사려 깊은 - 아무도 기분 상하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정의로운 기질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이 많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292

논쟁하는 데 필요한 것 - 자신의 사상을 얼음 위에 놓는 법을 이해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논쟁의 열기 속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292

교제와 자만심 - 사람들은 자신이 항상 공로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만심을 잊어버리게 된다. 혼자 잇다는 것은 교만을 심는 결과가 된다. 젊은 사람들은 자만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많은 것을 의미하려는 그들 자신과 똑같은 사람과 사귀고 있기 때문이다. 292-293

공격의 동기 - 사람들은 단지 누구에게 아픔을 주고 그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마 자신의 힘을 의식하기 위해 공격하기도 한다. 293

아첨 - 교제할 때 아첨을 통하여 우리의 조심성을 무디게 하려는 사람들은, 위험한 수단 즉 수면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수면제가 잠이 들게 하지 못하면, 오히려 더 깨어 있게 만들 것이다. 293

침묵 - 양편 모두에게 가장 불쾌한 논쟁의 응수 방법은 화를 내고 침묵을 지키는 일이다. 왜냐하면 공격하는 편은 흔히 침묵을 경멸의 표시로 표명하기 때문이다. 295

대화를 하면서 -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정당함이나 부당함을 인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습관의 문제다. 전자를 인정하는 것도 후자를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가 있다. 297

설명하는 사람 - 그 무엇을 설명하는 사람은 그 사실이 그의 관심을 끌기 때문에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설명하는 것을 통해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싶기 때문에 말하는 것인지를 쉽게 알아차리게 만든다. 후자의 경우에 그는 과정을 하고, 최상급도 사용하며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는 일반적으로 더 서툴게 말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실에 대하여 잘 생각하고 있지 못하지 때문이다. 300-301

모욕하는 것과 모욕당하는 것 - 모욕하고 나중에 용서를 비는 것이 모욕당하고 용서해주는 것보다 훨씬 기분 좋은 일이다. 전자를 행하는 사람은 힘을 과시하고 그 뒤에 성격이 호의적임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후자는, 만약 그가 비인간적이라고 인정받지 않으려면, 이미 용서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강박관념 때문에 상대방을 굴복시킨 데 대한 즐거움도 적어진다. 303

사교 모임 후의 양심의 꺼림직함 - 왜 우리는 일반적인 사교 모임 후에 꺼림칙함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가 중대한 사실을 가볍게 받아들였기 때문이거나, 인물들에 대하여 논의할 때 완전히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는 말을 해야 했을 때 침묵했기 때문이며, 적당한 시기에 일어나서 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사교 모임에서 마치 우리가 거기에 속하는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304

잘못 평가된다 - 자신이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가에 언제나 귀 기울이고 있는 사람은 항상 화가 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우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이미 잘못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들ㄷ조차고 자신들의 언짢음을 때로는 시기하는 말들로 표출한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우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그들이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의 판단은 많은 아픔을 준다. 왜냐하면 그 판단들은 아주 솔직하고 거의 사실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대자인 어떤 사람이 우리가 비밀로 하고 있는 점을 우리 자신처럼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처음에 그 불쾌한 기분은 얼마나 크겠는가! 304

오해된 정직함 - 대화를 하면서 자기 자신을 인용하는 것은("나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자만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된다. 반면 그것은 자주 이와는 정반대의 근원에서 나온다. 그것은 적어도 그 순간을 과거의 어떤 순간에 속하는 묘안들로 장식하고 꾸미지 않으려는 정직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305

자만심의 징후로서 동정심의 요구 -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을 모욕하면서 처음에는 자신을 나쁘게 여기지 않기를, 두 번째에는 자신이 극심한 발작에 지배당하고 있으므로 동정해주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의 자만심은 이렇게 멀리 나아간다. 306

소크라테스의 경험 - 인간은 한 가지 일에 대가가 되고 나면, 통상적으로 바로 그 때문에 대부분의 다른 일들에서는 완전히 무능해진다. 그러나 이미 소크라테스가 경험한 것처럼, 사람들은 정반대로 판단하고 있다. 이것이 대가들과의 교제를 즐겁지 않게 만드는 나쁜 상태다. 307-308

고귀함과 감사하는 마음 - 고귀한 사람은 감사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즐겁게 느끼고, 의무를 가질 기회들을 소심하게 피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후에 감사함을 표현하는 데에도 태연하다. 반면에 천박한 살마은 모든 의무를 지는 것에 대해 저항하거나, 후에 그 감사를 표현하는 데도 과장된 행동을 하거나 너무 고의적으로 애를 쓴다. 그런데 후자의 행동은 더 낮은 혈통 또는 억압된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들에게 보여진 호의가 그들에게는 은혜의 기적을 의미하는 것이다. 309-310

우정을 위한 재능 - 우정에 대해서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는 두 가지 유형이 드러난다. 한 가지 유형은 끊임없는 상승 속에서 어떤 발전 단계에서도 잘 어울리는 친구를 발견한다. 그가 이런 방법으로 얻은 일련의 친구들은 그들끼리 관계를 가지는일이 드물고 때로는 알력과 대립 상태에 빠진다. 이것은 나중의 발전 단계가 앞의 단계들을 지양하거나 해를 입히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런 사람은 농담으로 사다리라고 불려도 좋을 것이다.
또 다른 유형은 전혀 다른 성격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매력을 발휘하여 하나의오나전한 동아리를 이룰 정도의 친구들을 얻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이 친구들은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들끼리 서로 친구가 된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으 ㄹ원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전혀 다른 성향과 본성들의 일체성이 어떻게든 이미 형성되어 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친구를 가지는 재능이 좋은 친구가 되는 재능보다 훨씬 가치 있다. 311

불만의 해소 - 어떤 일에서 실패한 사람은 실패의 원인을 우연으로 돌리기보다 차라리 다른 사람의 나쁜 의지로 돌리낟. 그의 화난 감정은 그가 실패한 게 사물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함으로써 가벼워진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복수를 할 수 있지만 우연에 의한 고통스러움은 억지로 삼ㅌ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주의 측근은 어떤 일에서 실패하면, 어떤 한 사람을 명목상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모든 궁신의 이익을 위하여 그를 희생시키곤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영주는 운명의 여신 자체에게는 복수를 할수가 없으므로 그의 불쾌감이 그들 모두에게 표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312

자만심 - 우리의 모든 좋은 수확을 망치는, 자만심이라 불리는 저 잡초가 자라나는 것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마우것도 없다. 왜냐하면 자만심은 진실한 마음에, 경의의 표현에, 호의적인 친근감에, 연애에, 친절한 충고에, 실수의 고백에, 남을 위한 동정에 들어 있기 때문이며, 그 잡초가 그 사이에서 자라나면 이 모든 아름다운 것이 반감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자만하는 사람, 즉 있는 대로 또는 인정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항상 계산을 잘 한다. 물론 그는 자신의 자만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보통 두려움 또는 편리함 때문에 그가 요구하는 정도의 존경을 그에게 표시하는 한, 순간적인 성과만은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나쁜 보복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그에게 주었던 가치에서 그가 정도를 넘어서 요구한 만큼을 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자만심을 꺾는 일보다 더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는 일은 없다. 자만하는 사람은 자신의 참으로 위대한 업적도 다른 사람의 눈에 의심스럽고 사소하게 보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흙 묻은 발로 그것을 짓밟기도 한다. 자랑스러운 행동이라 할지라도 오해받지 ㅇ낳고 자만으로 보이지 않을 가장 확실한 곳에서만, 예를 들어 친구와 아내 앞에서만 허용될 것이다. 왜냐하면 살마들과의 관계에서 자만심이라는 평판을 초래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손히 거짓말하는 것을 배우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나쁘다. 314-315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ㅇ벗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고 ㄷ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인 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ㅇ벗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고 ㄷ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ㅇ낳앗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이 ㄴ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없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곧 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인 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자유정신과 결혼 - 자유정신이 여성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나는, 자유정신이 고대의 예언하는 새처럼, 현재의 진정으로 생각하는 자 그리고 진리를 말하는 자로 혼자 나는 것을 선호할 것임이 틀림없다고 믿는다. 342

두 화음의 부조화 - 여성들은 봉사하고 싶어하고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자유정신은 봉사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 345



제8장 국가에 대한 조망

문화와 사회계층 - 더 높은 문화는 사회의 서로 다른 두 계층, 노동하는 계층과 여가를 지닌 계층, 즉 참된 여가를 가질 자격을 지닌 계층이 있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또는 좀더 강하게 표현하면 강제노동 게급과 자유노동 계급이 있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있다. 좀더 높은 문화를 생산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경우에는 행복의 분배에 대한 관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도 여가를 가진 계층이 고통을 더 잘 견뎌낼 수 있는 계층이며 고통을 받는 계층이고 현존에 대한 그들의 즐거움은 더 적으며 그들의 과제는 훨씬 더 크다. 353

전복하려는 사람들 중에서 위험한 사람들 - 사회 전복에 대해 숙고하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과 손자를 위해서 그 무엇을 달성하려는 사람들로 나누어보면, 후자가 훨씬 더 위험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욕이 없다는 믿음과 거리낌없는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들은 적당히 물리칠 수가 있다. 지배적인 사회는 그렇게 하기에 아직 충분할 정도로 부유하고 영리하다. 목표들이 비개인적인 것일 때, 위험은 즉시 시작된다. 비개인적인 관심을 가진 혁명가들은, 현존하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모두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하며 따라서 그들보다 스스로가 우월하다고 느낄 수 있다. 363

대중의 위대한 사람 - 대중에게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리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게 주어져 있다. 모든 상황에서 대중에게 아주 즐거운 그 무엇을 마련해주거나 또는 먼저 머리 속에 이것저것이 아주 즐거울 것이라는 생각을 넣어주고 그 다음 그것을 제공하면 된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곧바로 제공해서는 안 되며 최대한의 노력으로 그것을 쟁취하거나 아니면 쟁취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좋다. 강력하고 게다가 정복하기 어려운 하나의 의지력이 거기에 있다는 인사을 대중이 받아야만 한다. 적어도 그러한 의지력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라도 해야 한다. ㄱ상한 의지에는 누구나 다 감탄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사람은 만약 자신이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과 자신의 이기주의에 더 이상 아무러 ㄴ한계가 없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강한 의지가 자신의 열망이 원하는 것에 귀 기울이는 대신 대중에게 아주 즐거운 그 무엇을 얻게 해준다는 것이 보이면, 사람들은 다시 한번 감탄하고 그들 자신의 행복을 원한다. 그 밖에도 그는 대중의 모든 특성을 가지고 잇다 .그래서 대중은 그의 앞에서 그만큼 수치심을 덜 느끼게 되고, 그는 그만큼 더 대중의 인기를 얻는다. 따라서 그는 난폭하고 질투하고 착취를 즐겨하며 음모를 좋아하고 아첨을 잘하고 비굴하고 교만하며 사정에 따라서는 이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다. 367-368

전복에 대한 이론에서의 망상 - 가장 자랑스럽고 훌륭한 인류의 신전이 저절로 드러나리라는 믿음 속에서 모든 질서의 전복을 열렬히 그리고 웅변적으로 촉구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공상가들이 있다. 이러한 위험한 꿈속에는 루소의 미신이 아직도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 미신은 기적적이고 근원적이지만 묻혀진 채 있는 인간 본성의 장점을 믿고, 그 묻혀진 채 있는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사회, 국가, 교육에 나타나는 문화의 여러 제도에 돌리낟.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그러한 모든 전복이 오래 전에 파묻혀버린 아득한 옛 시대의 처참함과 무절제 같은 가장 난폭한 에너지를 새로운 것으로 부활시킨다는 사실을 역사적 체험으로 잘 알고 있다. 즉 전복은 아마 지쳐버린 인류에게는 일종의 힘의 원천일 수는 있겠지만, 결코 인간 본성을 정리하는 자, 건축가, 예술가, 완성자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정리하고 정화하며 개조하는 경향이 있는 볼테르의 절도 있는 본서잉 아니라, 루소의 정열적인 어리석음과 반쯤의 거짓말들이 혁명의 낙관주의적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 정신에 대하여 "그 비열한 자를 굴복시켜라!"고 외친다. 그 정신 때문에 계몽 정신과 진보적 발전의 벙신은 오랫동안 축출되었다. 우리는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서 그 정신을 다시 불러오게 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주시하자! 368-369

학교 제도 - 큰 국가들의 학교제도는 항상 기껏해야 평범한 수준일 뿐이다. 그것은 큰 부엌에서 기껏해야 평범한 정도의 음식이 만들어지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이다. 370

행복의 시간들 - 행복한 시대가 전혀 불가능한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단순히 원하기만 할 뿐, 가지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개인은 그에게 조흔 날들이 찾아오면 틀림없이 불안과 비참함을 기원하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운명은 행복한 순간을 맏을 준비가 되어 있다. 모든 삶에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러나 행복한 시대를 맞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대는 '산의 저편'으로 그리고 조상들의 유산으로 인간의 상상속에 존속해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한 시대라는 개념은 아마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간이 사냥과 전쟁으로 심하게 긴장한 후, 휴식에 몸을 맡기고 팔다리를 뻗으며 잠의 날개가 자신의 주위에서 소리내는 것을 듣는 그런 상태에서 추측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 오랜 습관에 따라서 그가 이제 고통과 수고의 모든 시간 후에도 역시 거기에 상응하는 상승과 지속 속에서 그 행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추론이다. 371-372

종교와 정부 - 국가 또는 좀더 명백히 말해서 정부가 미성숙한 많은 사람들의 후견인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위해서 종교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폐지할 것인지를 숙고해보는 한, 정부는 항상 거의 확실히 종교를 유지하는 쪽으로 결정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상실, 결핍, 두려움, 불신의 시간들, 즉 정부가 개인의 마음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하여 직접적으로 그 무엇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바로 그곳에서 개별적인 심정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편적이고 피할 수 없으며 우선은 불가항력적인 재난(식량난, 금융위기, 전쟁들)에서까지도 종교는 진정시키고 기다리며 신뢰하는 태도를 대중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국가 정부의 필연적 또는 우연적 결함들이나 왕조의 관심사들이 낳은 위험한 결과들이 통찰력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서 그를 반항적으로 만드는 모든 곳에서, 통찰력이 없는 사람들은 신의 손가락을 보게 될 것으로 믿고 위의(이 개념에는 보통 신적 통치 양식과 인간적 통치 양식이 융합되어 있다) 지시들에 인내하면서 복종하게 될 것이다. .. 대체로 국가는 사제들을 끌어들이는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사제들을 끌어들이는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사제들의 가장 개인적이고 은밀한 영혼의 교육이 필요하고, 겉으로 보아 외면적으로는 전혀 다른 관심을 대표하고 있는 시종들을 존중하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국가가 종교에서 더 이상 아무 이익도 스스로 끌어내서는 안 될 경우나, 종교적 조치를 취하느 ㄴ데 정부에게 같은 종류의 통일적인 방법이 허용되어서는 안 될 정도로 국민이 종교적 사실들에 대하여 너무 다양하게 생각하고 있을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종교를 사적인 일로 취급하고 각 개인의 양심과 습관에 넘겨야 하는 타개책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제일 먼저 종교감각이 강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국가가 무심코 또는 고의적으로 생명의 공기를 기꺼이 허락하지 않았던 은폐되고 억압된 종교감정의 동요가 이제 터져나와 극단적으로까지 무절제해진다. 나중에는 종교가 종파들로 뒤덮이게 되고, 종교가 개인적인 문제가 된 그 순간에 용의 이빨이 뿌려졌다는 많은 사실이 입증된다. 싸움의 광경과 종교적 신조가 지닌 모든 약점에 대해 적개심에 차 폭로하는 것은 결국 더 뛰어난 자와 재능이 있는 자로 하여금 비종교성을 개인적인 무넺로 삼게 하는 타개책만을 허용할 뿐이다. 이러한 의향은 통치하는 사람들의 정신에서도 역시 만연하게 되고, 거의 자신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그들이 하는 조처들에 반종교적인 성격을 주게 된다. 이 현상이 나타나면 곧 과거에는 국가를 반쯤 또는 완전히 신성한 그 무엇을 우러러보았던, 여전히 종교적으로 감동되어 있던 사람들의 분위기는 결정적으로 반국가적인 분위기로 변한다. 그들은 정부의 조치에 대해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많이 방해하고 충돌하며 교란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반대파와 비종교적인 사람들을 그들의 항의의 열기를 통하여 국가에 대한 거의 광적인 감격으로 몰아넣는다. ...
모든 통치자들에 대한 불신, 단기간의 투쟁들이 보여주는 무익하고 소모적인 것에 대한 통찰은 사람들로 하여금 와전히 새로운 결심들, 즉 국가 개념의 폐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대립하는 것을 지양하도록 몰라갈 것이 분명하다. 사적인 단체들이 한 단계씩 국가의 업무들을 자신 속으로 끌어들인다. 결국 낡은 통치 활동에서 남아 있는 가장 끈질긴 잔여물(예를 들면 사적인 인간들이 사적인 인간들을 확실히 지켜야 하는 저 활동)까지도 언젠가는 사적인 기업가에 의해 처리될 것이다. 국각의 경시와 붕괴, 국가의 죽음 그리고 사적인 인간(모든 인간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합리성과 불합리성을 잉태하고 있는)를 달성하고 오래된 병이 재발하는 것을 모두 극복하고 나면 인류의 이야기책에는 새로운 한 장이 펼쳐지고 거기서 사람들은 온갖 종료의 기이한 역사들과 아마 몇 개의 좋은 이야기도 읽게 될 것이다. 372-376

수단의 관점에서 본 사회주의 - 사회주의는 거의 노쇠해버린 전제주의의 뒤를 이르려는 공상적인 동생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노력들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반동적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전제주의만이 가졌던 것과 같은 국가 권력의 충만함을 갈망하기 때문이며, 개인의 진정한 파멸을 추구함으로써 과거의 모든 것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사회주의에게는 자연의 부당한 사치로 나타나며 사회주의에 의해서 하나의 합목적적인 공동체의 기관으로 개조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유사성 때문에 사회주의는 항상 고대의 전형적인 사회주의자 플라톤이 시칠리아의 전제군주의 궁정에 나타났던 것처럼, 모든 권력 발전의 과도기적인 주변에서 나타난다. 사회주의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저넺주의의 후계자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 세기의 독재 권력국가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촉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유산조차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사회주의에는 아직 한 번도 그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가장 겸손한 복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국가에 대한 진부한 종교적 경건함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현존하는 국가들을 제거하는 데 힘써야 하므로 그러한 경건함을 제거하기 위하여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 때문에 사회주의는 단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극단적인 테러리즘을 통하여 여기저기에 한 번씩 존재하기를 희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은밀히 공포정치의 조짐을 보이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대중에게 머리에 못을 박듯이 '정의'라는 단어를 머리 속에 박아둔다. 그것은 그들의 오성을 오나전히 빼앗아버리고 (오성이 이미 이 얼치기 교양으로 인해 심하게 손상을 입은 뒤에), 그들이 해야 하느 ㄴ나쁜 장난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이다. 사회주의는 국가 권력의 모든 축적의 위험을 실로 난폭하고 적나라하게 가르치고, 그러한 한 국가 그 자체에 대한 불신삼을 품게 할 수가 있다. 만약 사회주의의 거친 목소리가 '가능한 한 많은 국가를' 이라는 함성으로 다가오면, 그 함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시끄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곧 그것과 반대되는 '가능한 한 적은 국가를' 이라는 함성이 더 큰 힘으로 터져나올 것이다. 378-379



제9장 혼자 있는 사람

진리의 적들 - 신념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391

너무 집착하지 않도록 - 어떤 일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그 일에 충실한 것은 드문 일이다. 그들은 단지 그 깊이를 밝혔을 뿐이다. 항상 그곳에는 매우 불쾌한 것이 보인다. 392

의도하지 않은 고결함 -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들에게 항상 베푸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고결한 행동을 하게 된다. 394

친구 - 동정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기쁨이 친구를 만든다. 395

가장 고귀한 위선자 -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고귀한 위선이다. 396

인간의 운명 -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위하고 판단하더라도, 좀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부당함을 알고 있다. 399

위대함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 어떤 강물도 자기 자신에 의해 크고 풍부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주 많은 지류들을 받아들이며 계속 흘러가는 것, 그것이 강물을 그렇게 만든느 것이다. 모든 정신의 위대함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그 많은 지류들이 뒤따라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다. 그가 처음부터 재능이 없는지 재능이 풍부한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400

너무 큰 목표들 - 공개적으로 큰 목표들을 세우고 그 후 비밀리에 자신은 그것을 하기에 너무나 약하다는 사실을 통찰하게 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그 목표들을 공개적으로 철회하기에 충분한 힘도 가지고 있지 않고 그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위선자가 되어버린다. 405

강물의 흐름 속에서 - 세차게 흐르는 물은 많은 암석과 관목숲을 휩쓸고 가며, 강한 정신은 수많으 ㄴ어리석은 사람들과 명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휩쓸고 간다. 405

정신의 육체화 - 한 사람이 많이 그리고 현명하게 사고하면 그의 얼굴뿐만 아니라 현명한 모습을 얻게 된다. 406

잘 보지 못하고 잘 듣지 못하는 것 -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은 점점 더 적게 보게 되고, 잘 듣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몇 가지를 더 듣게 된다. 406

허영심의 자기만족 - 허영심에 차 있는 사람은 탁월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탁월하다고 느끼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기만과 자기계략의 수단을 거부하지 못한다. 그에게 잊혀지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다. 406

예외적으로 허영심에 차 있는 - 보통 자기를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육체적으로 병에 걸리게 되면, 예외적으로 허영심에 차게 되며 평판과 칭찬에 대해 민감해진다. 그가 자신을 상실해가는 정도 만큼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 즉 외부에서 다시 자신을 되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406-407

유일한 인간의 권리 - 관습적인 것에서 벗어난 사람은 비범한 것에 바쳐진 제물이다. 관습적인 것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관습적인 것의 노예이다. 어떤 경우든 사람들은 파멸하게 되어 있다. 408

얼치기 지식 - 외국어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은 외국어를 훌륭하게 말하는 살마보다 외국어에 대해 더 큰 즐거움을 가지고 있다. 얼치기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만족이 있다. 408

의심을 품는 것 - 사람들은 좋아할 수 없는 인간들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으려고 한다. 409

친구가 없는 것 - 친구가 없는 것은 질투와 자만심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그가 질투할 아무런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다행스러운 상황 덕으로 친구를 가지고 있다. 410

참회 -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나면 그 죄를 잊어버린다. 그러나 대개 다른 사람은 그의 죄를 잊지 않는다. 412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 인간은 사랑하는 것과 호의를 베푸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젊어서부터 배워야 한다. 만약 교육과 우연이 우리에게 이런 감각을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을 때 우리의 영혼은 메마르고 친절한 사람들의 섬세한 감각을 이해하는 데도 적합하지 못하게 된다. 424

다른 사람과 세상에 대한 불만 - 우리가 원래는 자신에게 불만을 느끼고 있으면서, 흔히 그러듯이 다른 사람에게 불만을 터뜨린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판단들을 흐리게 만들고 기만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후에 다른 사람의 실수와 결점을 통해 이 불만에 동기를 부여하려 하고, 자기 자신을 보려 하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 가차없는 재판관이기도 한 종교적으로 엄격한 사람들은 동시에 인간성 일반에 대해 가장 많이 나쁜 욕을 해왔다. 자신에게는 죄를, 다른 사람에게는 덕을 남겨주는 성자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부처의 법도에 따라 자신의 선을 사람들 앞에서 숨기고, 자신의 악만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사람도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426

고독한 사람들 -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함께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져서 자신을 다른 사람과 전혀 비교하지 않고 조용하고 즐거운 기분으로 자기 자신과 좋은 대화를 나누며, 게다가 웃음을 지으며 독자적인 삶을 엮어 나간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하면 자기 자신을 구차하게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 관한 유익하고 정당한 의견을 남에게서 비로소 다시 배우도록 강요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배워 익힌 이 의견에서도 되풀이해서 조금 빼거나 값을 깎으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혼자 있음을 기꺼이 허락해야만 하지만 흔히 일어나는 일처럼 그 때문에 불쌍히 여기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아야만 한다. 436

방랑자 - 어느 정도 이성의 자유에 이른 사람은 지상에서는 스스로를 방랑자로 느낄 수밖에 없다. 비록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하여 여행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왜냐하면 이와 같은 목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세상에서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주시하고 그것에 대하여 눈을 크게 뜨고 보려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개별적인 것에 너무 강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 변화와 무상함에 대한 기쁨을 가진 방랑하는 그 무엇이 그 자신 속에 존재함이 틀림없다.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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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병든 사회에서 거울 보기
에리히 프롬이 그의 마지막 책 <건전한 사회(The Sane Society)>에서 이야기한 ‘정상성의 병리성(pathoiogy of normality)’이라는 개념을 확실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병든 사회에서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이 ‘정상’으로 사는 사람은 과연 정상인가요, 비정상인가요? 저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과 관점을 가지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7

1장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

우리는 상당히 오랜 기간 수많은 투쟁과 희생을 치러냈고, 실로 위대한 민주주의를 이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민주주의는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31

광화문에 모여서 목이 터져라 민주주의를 외친 사람이 집에 가서는 완전히 가부장적인 아버지요, 다음 날 학교에 가서는 아이들을 쥐 잡듯이 들볶는 권위주의적 교사요, 혹은 회사에 가서는 갑질을 일삼는 상사라면, 민주주의는 어디서 하지요? 다시 말하면 이 나라에서는 ‘광장 민주주의’와 ‘일상 민주주의가‘ 괴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충분히 민주주의자가 되지 못한 거지요. 일상 민주주의는 광장 민주주의와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일상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31-32

사회 민주화의 기본 원리는 ‘구성원들의 자치’입니다.  38

문화 민주화, 나아가 문화혁명의 핵심적인 사례인 ‘코뮌(kommune)’운동에 대해 알아보지요. 코뮌이란 무슨 뜻일까요? ..
우리는 흔히 코뮤니즘을 ‘공산주의’라고 알고 있지만, 저는 이것이 아주 잘못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코뮌주의’ 라고 했으면 훨씬 그 의미가 왜곡 없이 전달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공산’이라고 번역해 버리니까, ‘공동체를 중시한다’라는 코뮤니즘의 본래 의미가 지나치게 ‘경제주의적으로’ 축소되어 버린 것입니다. .. 원래 코뮌주의라고 하는 것은 ‘코뮌’, 즉 자치 공동체의 삶을 중시하는 생활 방식,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결사체, 연합, 이런 것들을 뜻합니다.
‘코뮌’이란 넓은 의미에서 모든 종류의 공동체적 삶을 뜻하는 말입니다. ..
68혁명 전후로 독일에서도 많은 코뮌들이 생겨납니다.  50

호칭의 문제, 성 공동체의 실험, 이런 것들이 문화혁명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문화혁명의 또 다른 중요한 단면은 소비주의와 물질문명에 저항하는 탈물질주의의 흐름입니다.  52

우리는 참으로 위대한 정치 민주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우리는 정치 민주화만 이룬 것입니다. 사회 민주화, 경제 민주화, 문화 민주화의 실현은 여전히 먼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 암울한 이유입니다.  53

1969년 선거에서 “민주주의 다 해보자”라는 멋진 선거 구호를 들고 나왔던 브란트는 교육과 관련해서도 정말 아름다운 구호를 내세웠지요. 바로 ‘교육 사회’입니다. ‘교양 사회’라고도 해석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독일인이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아 교양인으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지요. 그러려면 고등교육을 확충해야 하고, 나아가 누구나 부담 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생활비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4

어느 나라든 교육의 중점은 ‘적응’에 있는 법입니다. 기존의 질서와 규범을 익혀 잘 적응하도록 하는 것, 보통 ‘사회화’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교육의 목표이지요. 그러나 독일 교육에서는 ‘적응’보다 ‘비판’을 더 중시합니다. 기존의 질서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을 기르는 것,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 이것이 독일의 비판 교육입니다. 정말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66-67

독일 교육에서는 문학작품을 해석하는 데에도 권력의 문제를 성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정답이라는 이름의 ‘정의 권력’을 인식하고, 필요하면 비판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68

독일의 비판 교육 ... 선다형 문제는 모르고도 맞출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적이라기 보다는 ‘사기’에 가깝다고 봅니다. 단순한 지식을 묻는 것은 위험하다고 여깁니다. 그것은 주입식 교육에 상응하는 평가 방식이고, 주입식 교육은 파시스트 교육의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지배적인 지식은 지배하는 자의 지식이라고 보기 때문에 지식 그 자체보다는 특정 지식이 지배적인 지식이 된 경로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지요. ..
정답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지요.  69

저는 한국 정치인 중 사회적 정의를 외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한국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경쟁력’을 말합니다. 국가 경쟁력, 기업 경쟁력, 교육 경쟁력 등 온통 외치는 것이 경쟁력입니다. 그런데 독일 정치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회적 ‘정의’를 중시하고, 사회적 정의를 이루기 위한 경쟁을 합니다.  72


2장 대한민국의 거대한 구멍

한국인 대다수는 ‘내 안의 파시즘’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억압의 문화, 부조리의 상황을 하나의 문제로서 인식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물의 질서’, ‘세상의 이치’, ‘자연 상태’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에리히 프롬 식으로 말하자면 한국 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정상성의 병리성’ 이었던 것입니다.  95

국회는 기본적으로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 즉 대의기관입니다. 그래서 국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성이 아니라 대표성입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세대 대표성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세대 대표성이 너무도 왜곡되어 있는 것이지요. 현재 한국 전체 인구 중에서 40대 이하의 인구가 약 40% 정도인데 국회에서는 불과 0.6%가 대의되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97

세대 대표성 못지않게 왜곡되어 있는 것이 직능 대표성입니다. 다양한 직업과 직능을 대표하는 의원이 그 현실의 분포에 맞게 국회에서 대표되는 것이 이상적인 의회일 텐데 한국은 그렇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독일 연방의회에는 교사가 많을까요, 교수가 많을까요? 교사가 훨씬 많습니다. 사회에서 교사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대의의 의미이지요. 그러나 한국에서는 법률가, 언론인, 교수가 과잉 대표되어 있습니다. 즉 의회의 대의 기능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대의의 왜곡으로 인해 사회적 갈등이 의회 내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자꾸 의회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97-98

20세기 독일의 가장 위대한 극작가라고 불리는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한 유명한 말.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파시즘을 남기고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저는 이 말이 지금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현실을 이해하는 데 정곡을 찌른다고 생각합니다.  .. ‘내 안의 파시즘’, ‘아주 일상적인 파시즘’을 냉철하게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100-101

많은 사람들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에게는 시대에 상당히 뒤떨어진 현살들이 참 많습니다.
그 첫 번째는 인권 감수성의 부재입니다. 한국 사회는 인권 감수성이 대단히 모자라는 사회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정말 부족합니다.  108

68혁명의 부재가 남긴 두 번째 현상은  소비주의 문화입니다. 이 얘기는 정말 중요합니다. 지금 한국처럼 소비주의가 이렇게 전면적으로 아무런 비판 없이 번창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109

독일의 많은 청소년들이 소비할 때 큰 죄책감을 느낀다고 고백합니다. ‘미래 생명에 대한 책임’, 이것이 그들이 당연히 가져야 할 기본자세라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기실 지구에서 잠시 살다가 떠나는 것이고, 지구는 다음 세대인 미래 생명이 살아야 할 터전이므로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 나의 욕망을 위해서 끝없이 소비하는 것은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11

한국 사회에서 소비주의는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세요. 온통 소비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비를 해야 일자리가 생기고, 경제가 발전하고, 잘사는 나라가 된다는 논리가 우리 사회를 전일적으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도 생태적 상상력, 환경 윤리 의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소비주의와 물질주의 논리만이 전면적으로 지배하는 참으로 놀라운 사회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전면적으로 지배되는 자본 독재 단계에 들어서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111-112

독일에서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그러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성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교육의 첫 번째 원칙입니다. ‘성과 관련해서 절대 윤리적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대원칙입니다. 성을 윤리적으로 비판함으로써 아이들이 죄의식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은 윤리와 아무 상관 없는 영역이라고 봅니다. 성이라는 것은 생명과 관계되고 인권과 관련된 중요하고 예민한 영역이므로, 성과관련하여 충분한 책임 의식을 갖도록 가르쳐야 하지만, 그렇다고 성을 악마화해서 아이들의 내면에 죄의식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성폭력이나 성희롱, 성추행 등 성범죄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엄한 처벌이 내려집니다. 그리고 성교육은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성을 신비화하거나 은폐하는것은 교육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독일에서는 성교육을 가장 중요한 정치 교육으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112-113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을 의미하는 슈퍼에고와 본능과 충동의 세계인 리비도(혹은 이드) 사이에서 흔들리고 동요하는 불안한 존재가 바로 에고 입니다.  114

슈퍼에고가 리비도를 공격하면 할수록 리비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에고가 점점 더 강한 죄의식을 내면화하게 됩니다. 여기서 ‘죄의식’이라는 개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이 정치적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버젓이 살아 있는 것을 악이라고 공격하며, 인간의 자아는 죄의식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일종의 ‘성 정치학’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깊은 죄의식을 내면화한 인간일수록 약한 자아를 갖게 되고, 약한 자아를 가진 인간일수록 권력에 굴종적인 인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죄의식이라는 성적 심리적 문제가 권위주의라는 정치적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지요.
이를 요약하면 인간의 성을 억압하면 할수록, 그 개인은 권력에 굴종적인 인간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권위주의적 성격’ 이론이라고 합니다. ..
권위주의적 성격 이론에 따르면 성교육은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115-116

1970년대 교육개혁 이후 독일에서는 성교육을 정치 교육의 일환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 학교에서 성은 생명과 관계된 문제이고 동시에 인권과 관계된 민감한 영역이기 때문에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결코 윤리적으로 악마화하지는 않습니다.  117-118

성교육은 성숙한 민주주의자를 길러내기 위한 첫 걸음인데, 한국에서 아직도 제대로 된 성교육 전문가조차 없는 형편입니다.  118

68혁명 없는 한국의 상황, 그 세 번째 특징은 한국 사회가 권위주의 사회라는 것입니다. .. 권위주의라는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올라온적도 없습니다. 게다가 학교에서 벌어지는 살인적인 경쟁은 승자 독식의 논리와 연결되어 권위주의 문화를 더욱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119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라는 생각이 이미 1970년대 독일 교육개혁의 기본 원리였습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아이들을 경쟁시켜선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경쟁 이데올로기가 극단화되면 또다시 나치즘 같은 야만을 낳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나치즘의 핵심은 아리안 족이 가장 우수하고 유태족이 가장 열등하다는 식의 차별 의식과 우열 사고이고, 그 바탕에는 경쟁의식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119-120

스포츠는 당연히 경쟁을 하지만, 삶에서 스포츠의 경쟁 방식을 따르는 것은 야만이라고 아도르노도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스포츠에서 중요한 것은 ‘성과’이지만, 삶에서 중요한 것은 ‘행복’이지요.
교육이 무엇입니까? 본래 교육, 즉 ‘에듀케이트(educate)’라는 말은 ‘밖으로(e-) 끌어낸다(duc-)’는 뜻입니다. 독일어의 ‘교육하다(erziehen)’도 의미가 똑같습니다. 고유한 재능은 사람 안에 이미 다 들어 있고, 그걸 꿀어내는 게 교육이지 ‘지식을 처넣는’것이 교육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가 한국에서 배운 교육은 사실 반교육(anti-education)에 가깝습니다.  120-121

독일 만하임응용대학의 빈프리트 베버(Winfried Weber) 교수는 한국 교육을 살펴보고 나서 “독일은 텐샷(10shot)사회인데 반해, 한국은 원샷(1 shot) 사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독일인에게는 열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한국인에게는 한 번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지금 독일이 이렇게 부유하고 성숙한 사회가 된 것은 바로 그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최대한 자신의 재능을 실현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반면 한국은 너무도 많은 재능들이 발현되지 못한 채 사장되는 사회이지요.
한국은 기회를 박탈하는 사회일 뿐만 아니라,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사회이기도 하지요. 사람들은 이러한 ‘이중의 박탈’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도 엄창난 차별과 격차가 존재하지요. 이러한 현실이 우리가 지극히 기형적인 사회에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25

지금 한국은 끔찍한 ‘자기착취’ 사회입니다. 옛날에는 주인이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면서 노예를 착취했습니다. .. 오늘날에는 노예가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착취하도록 만듭니다. 비유하자면, 옛날에는 노예 감독관이 밖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착취했다면, 지금은 노예 감독관을 내 안에 심어놓고 스스로 알아서 착취하게 합니다. 그것이 자기착취입니다. .. 자기착취가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자행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타인이 착취를 하는 경우에는 착취당하는 자의 내면에 착취하는 자에 대한 저항 의식이 생깁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을 착취하는 경우에는 내면에 죄의식이 생겨납니다. .. 착취를 당하면서도 착취자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 문제로 부단히 전가하는 지배자들의 기만적인 논리를 내면화하고 신념화해서는 이 사회를 변혁할 수 없습니다.  126-127

한국인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 그러니까 행복감을 느낄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끊임없이 자기를 착취하도록 요구합니다.  128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내가 느끼는 감정, 내가 어떤 대상을 받아들이는 감수성, 심지어 내가 품고 있는 욕망, 내 꿈에서 나타나는 무의식까지 과연 그게 ‘나’의 것일까요? 아니면 나를 노예로 부리는 자의 것일까요? 이 구호가 던지는 물음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나의 사유, 감정, 감수성, 욕망, 무의식이 나의 것이 아니라 나를 노예로 만드는 자의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거기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129

68세대의 ‘정신적 지도자’ 허버트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에서 “자유인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노예 상태에 있으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노예 상태를 인식하는 것, 이것이 자유인의 첫 번째 조건이니다. 다시 말하면 노예 상태에서 있으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자유인이  못 된다는 거지요. 129-130

이제라도 내 ‘안’에 있는 노예 감독관과 정치 투쟁을 개시해야 합니다. 나의 생각, 감정, 감수성, 욕망, 무의식까지 다시 분해하고, 체질하고, 점검하고, 분리하고, 조합해야 합니다. 무엇이 나의 것이고, 무엇이 저들의 것인지, 무엇이 나를 자유인으로 만들고, 무엇이 나를 노예로 만드는지 꼼꼼히 따져봐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생각, 감정, 욕망, 무의식이 나의 노예 감독관이었음을 충격적으로 각성하는 것, 그것이 ‘최전선에서의 정치투쟁’인 것입니다.
애초에는 권력이나 권위가 외부에 있었습니다. 권력이나 권위는 물리적 폭력에 기초한 외적인 것이었지요. 그 후 권력과 권위의 형태는 내적인 방향으로 발전합니다. 이른바 ‘내적’ 권위 혹은 권력이 강력해지는 것이지요. 도덕이나 윤리가 그런 권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강력한 권위는 또 다른 형태입니다. 이른바 ‘익명’의 권위이지요. 익명의 권위는 무엇일까요? ‘너는 상식도 없니?’ 이런 말은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익명의 다수가 공유하는 지식이나 인식, 즉 상식, 여론 같은 것이 익명의 권위이지요. 요컨대 외적 권위, 내적 권위, 익명적 권위, 이런 것들이 모두 이 사회를 지배하는 권위 혹은 권력이지요.
그런데 사실 이 모든 것은 이 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종의 변형된 지배 방식이지요.  130-131

내 안의 노예 감독관은 ‘물리적 권위’에서 ‘윤리적 권위’로, 다시 ‘익명의 권위’로 발전해 온 것입니다.   131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131

68혁명의 부재와 관련하여 ‘소외(Entfremdung)’의 문제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소외’는 현대인을 이해하는 데 정말 중요한 개념인데, 한국에는 자기착취라는 개념처럼 소외라는 개념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소외는 사실 깊은 철학적 함의를 지닌 좀 어려운 개념입니다. 우리는 일상용어로서 소외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지만, 그 철학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배제시킨다, 고립시킨다, 왕따시킨다 정도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원래 소외의 의미는 ‘배제’라기보다는 ‘전복’에 그 핵심이 있습니다. 즉 흔히 ‘현대인의 소외’라고 말할 때는 현대인이 고립되고 배제된 삶을 산다는 의미보다는 현대인의 삶이 ‘뒤집어져 있다’는 의미가 강한 것이지요. 그래서 소외란 말이 중요합니다. 바로 우리의 삶이 뒤집어져 있으니까요.
소외라는 개념은 원래 종교 분석에서 나왔습니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소위 헤겔 좌파에 속하는 사상가로서 종교를 일종의 ‘소외’ 현상으로 보았습니다. 그의 명제는 간명하고 분명합니다.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다’라는 거지요. 기존의 지배적인 학설인 창조설을 완전히 ‘전복’한 겁니다.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소망, 좌절과 절망을 외부에 투사한 존재인데, 이 신이 인간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면서 어느 순간 낯설어지더니 마치 하나의 독자적인 존재인 것처럼 인간을 지배하고, 역으로 인간이 신을 경배하는 전도된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대상이나 현상이 본래는 ‘나’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나’의 것이었는데, 이것이 점점 ‘나’로부터 멀어져 낯설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 이제는 역으로 ‘나’를 지배하고, ‘나’는 그것에 종속되는 전도 현상 - 이것을 소외하고 부르는 것이지요.
현대사회는 완전히 소외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돈, 즉 화폐를 예로 들어보지요. 돈은 인간이 필요에 의해서 발명한 것이지만, 지금은 돈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화폐는 본래 인간이 교환의 편리를 위해서 만든 수단에 불과하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것이 인간으로부터 낯설어지더니 독자적인 세계에 있는 듯이 자기운동을 하고, 이제는 아예 인간의 통제를 넘어서 버렸습니다. 돈이 ‘나’를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노동을 하고 노력을 해봐야 돈이 자기들 세계에서 노는 것이 내가 창출해 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화폐’라고 일갈한 것입니다. 완전한 전도지요. 화폐는 하나의 사례일 뿐입니다. 132-134

한국에서는 소외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습니다. 우선 우리의 삶이 거대한 소외에 빠져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식이 필요하고, 인식을 위해서는 독서가 필요합니다.  .. 인식과 성찰이 사회 문화로 자리 잡지 못한 공동체에서 소외를 극복하기란 불가능합니다.  135


3장 악순환의 연결 고리를 찾아서

한국인은 ‘노동 기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치 노동하기 위해서 태어난 인간인 것처럼 일하고 있습니다.  154

지금과 같은 끔찍한 사회 질서를 만들어낸 곳은 바로 ‘여의도’입니다.  163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300명 가량의 국회의원 중에서 290명 정도는 자유시장경제(free market economy)를 지지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164

한국 사람들은 자유시장 경제가 정확히 무엇이고, 그것이 자신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64

독일 연방의회(2013~2017)의 사례를 살펴보지요. 베를린에 있는 연방의회에는 631명의 의원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서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의원은 ..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자유민주당이 의회 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이지요. 독일은 정당 지지율이 5%를 넘어야 의회에 진출할 수 있는데, 자유민주당이 4.8%를 얻는 데 그쳐 의회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다른 정당들은 어떤 정당이었을까요? 우선 기독교민주당을 들 수 있지요. 현재 독일 총리를 맡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이 소속된 정당입니다. 독일의 전통적인 정치 구도에서 가장 보수적인 정당입니다. 기민당이 내세우는 기본적인 정책 기조는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입니다. 사회적 시장경제란 시장경제의 활력과 효율성은 활용하되, 시장경제가 몰고 오는 핵심적인 문제, 즉 실업과 불평등은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개인에게 ‘자유롭게’ 내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독일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야수 자본주의(raubtierkapitalismus)’라는 흔히 사용합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자유롭게 놓아두면 인간을 잡아먹는 야수가 된다는 의미이지요. 특히 이는 1970년대 총리를 지냈던 사민당의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가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야수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가 사회에서 인간을 잡아먹는 것을 막아내는 것이 정치의 책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65-166

자본주의가 효율적인 체제임은 분명한데, 인간을 잡아먹는 야수의 속성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때로는 매우 ‘효율적으로’ 잡아먹습니다. .. 많은 나라들이 시장경제의 ‘효율성’은 활용하되, ‘야수성’은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국가가 나서서 야수에게 재갈도 물리고 고삐도 채워 컨트롤을 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사회적 시장경제에 붙은 ‘사회적(social)’이라는 말은 바로 국가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야수가 인간을 잡아먹지 못하게 해야 한다 - 그것이 ‘사회적’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핵심입니다.
기민당이 사회적 시장경제를 정책 기조로 삼아 정책을 펼칠때 가장 중요시하는 수단은 바로 보세제도입니다. 정부는 주로 조세제도를 통해서 시장경제의 야수성을 통제합니다. 그렇다면 야수 자본주의라고 할 때 ‘야수’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무엇이 인간을 잡아먹는 요인일까요? 바로 실업과 불평등, 이에 따르는 빈곤과 불안이지요. 자본주의는 실업과 불평등을 필연적으로 낳는 체제입니다. ..
일반적으로 자본주의는 5~8%의 실업을 내장하고 있는 시스템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실업 문제는 자본주의라는 상당히 효율적인 시스템을 활용하기 위한 일종의 비용, 대가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 기본적으로 실업 문제는 사회의 문제입니다. 실업 문제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돌리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책임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있다는 것이 사회적 시장경제의 기본철학입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실업 문제를 기본적으로 정부가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로 봅니다. 실업자에게 실업수당을 주고, 재교육 프로그램을 돌리고, 이를 통해 재취업에 성공하는 것까지 정부의 책임 영역에 있다는 것이 그들이 공유하는 생각입니다.  166-168

이제 독일 의회에 앉아 있는 두 번째 정당을 볼까요? 기독교민주당보다 왼쪽에 있는 사회민주당은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적 시장경제(socialistic market economy)’를 주장합니다. 그것은 시장경제의 효율성은 인정하지만, 인간이 존엄한 존재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이 되는 영역, 즉 교육, 의료, 주거 영역은 기본적으로 시장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169

세 번째 정당은 많은 분들이 잘 알고 있는 녹색당입니다. 녹색당은 생태적 시장경제(ecological market economy)를 주장합니다. 시장경제는 용인하지만 그것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녹색당의 강경한 입장이지요. 녹색당은 근대의 발전 이데올로기는 잘못된 것이며, 그것이 초래하는 자연 파괴는 인류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는 인식 아래, 환경, 생태 문제에 대단히 전투적이고 비타협적인 입장을 보이는 정당입니다. 그런 정당이 지난번 독일 의회에서 10% 가까이 의원을 보유했습니다.  170

세계적으로 눈을 돌려보아도 우리처럼 과도하게 우편향된 정치 지형을 가진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국인은 대부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한국 정치의 기형성을 모른 채, 우리 정치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언론이 거짓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지금 보수와 진보가 서로 경쟁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것은 한국의 기득권이 만들어낸 최악의 거짓말입니다. 사실 해방 이후 한 번도 보수와 진보가 경쟁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한국의 정치 지형은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수구’와 ‘보수’가 손을 잡고 권력을 분점해 온 구도입니다. 저는 이것을 ‘수구-보수 과두지배(oligarchy)’라고 부릅니다.  172

현실을 잘못된 언어로 이해하는 자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174

보수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공동체입니다.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시하는 것이 보수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개인을 공동체보다 더 중시하는 쪽은 자유주의이지요. 그래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구분할 때의 결정적 기준이 개인을 우선하느냐, 공동체를 우선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
보수주의자는 대부분 민족주의자인 거지요. 김구 선생이 바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
다음으로 보수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역사입니다. 전통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과거에서 배우려는 자세가 보수의 자세이지요. ..
또한 보수주의자들은 문화도 중시합니다. 세련된 언어를 쓰려고 노력하고, 품위와 품격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175-176

수구란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하여 외세와 손잡고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는 무리들입니다.  176

복지국가란 정부가 충분한 재정지출을 통해 자본주의 시장이 초래한 실업과 불평등 문제 등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나라이기에, 재정지출 규모를 보면 그 나라의 복지 수준을 알 수 있는 거지요.  178

재정지출 비율이 큰 나라는 당연히 세금이 많은 나라입니다.  179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조세 저항이 거의 없습니다. 시민들이 자신이 낸 세금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나중에 되돌려 받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80

한국의 수구는 이 분단체제에 기생하여 70여 년을 연명해 온 세력입니다. 반공주의와 독재가 수구 역사의 핵심적인 특징입니다. 한국의 보수는 진보인 척하면서 개혁보다는 기득권 유지에 골몰해 온 세력입니다. 이 두 세력이 사실상 결탁하여 수구-보수 과두지배 체제를 만들었고, 그것이 지난 70년간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것입니다.  180

이들의 대립이 연극에 불과하다는 것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들이 정말로 중요한 싸움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벌개혁을 어떻게 할 것인가, 노동자들을 ‘기업 살인’으로부터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세계 최고의 불평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어떻게 정의로운 과세를 실현할 것인가, 어떻게 아이들을 이 살인적인 경쟁에서 해방시킬 것인가, 어떻게 이 학벌 계급사회를 혁파할 것인가? 모든 국민을 고통스럽게 하는 이런 중요한 문제들을 두고 이들은 싸우지 않습니다. 두 정파 모두 현행 질서의 기득권이기에 현재의 상황에 두 정파 모두 만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극단적으로 우경화된 정치 지형을 가진 나라입니다.  181-182

그러나 선거법을 개정한다면 상황은 바뀔 수 있습니다. 독일처럼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한다면 정의당, 녹색당 같은 정당이 의회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단언컨대 독일의 선거제도처럼 내가 던진 표가 사표가 되지 않고 그대로 의석으로 반영되는 정상적인 선거제도가 실현된다면, 저으이당은 아마도 최소한 20%, 녹색당은 5% 정도의 의석을 확보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기득권 세력에게 유리한 잘못된 선거제도 때문에, 가장 시급한 사회적 의제들이 정치적으로 해결될 가망이 전혀 없는 정체된 사회로 굳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선거법 개정은 단순한 ‘형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선거제도를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어떤 정치 지형을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2019년 선거법 개정 협상은 한국 정치를 질적으로 변혁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결정권을 쥐고 있던 민주당이 보인 당리당략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행태로 인해 의미 있는 개정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저 비례 대표를 약간 늘리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민주당은 기존의 선거 제도를 사실상 고수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민주적 개혁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수구-보수 과두지배 체제의 특원적 지위를 계속 누리겠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표명한 것입니다.  183-184

한국이 수차례의 민주 혁명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의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더 지옥이 되어가는 이유는 이러한 ‘구조적’인 결함에 있습니다.  185

한국의 거의 모든 제도를 미국식입니다. 대학 제도를 보세요. 엘리트 대학 시스템과 과열된 입시 경쟁에서부터 엄청나게 비싼 학비와 과도한 사립대학체제까지 모두 미국의 제도와 관행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188

유럽의 대다수 나라에서는 대학이 평준화되어 있고, 대학 입학의 기회는 폭넓게 열려 있으며, 대부분 국립대학이 고등교육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대학의 학비는 저렴하거나 무료입니다. ..
정치 지형도 미국과 빼닮아 있습니다. 미국은 보수양당제라고 하는 아주 ‘예외적인’ 정치 지형을 가진 나라입니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모두 보수정당이고, 진보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아주 특이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선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사회적 변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188

정치를 통해서 사회적 문제를 이성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장치가 마비된 사회에서 그 많은 사회적 좌절과 절망은 어디에서 출구를 찾을까요 이런 절망적인 사회에서 번성하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190

한국에서 기독교가 놀라울 정도의 성공을 거두고, 기독교 선교사상 유례가 없는 ‘선교의 기적’을 이룬 것은 한국인이 지닌 ‘종교적’ 심성보다는 한국 사회에 각인된 왜곡된 정치사회적 구조와 관련이 깊습니다. 이처럼 종교의 경우에도 미국과 한국은 유사한 점이 많지요.  191

앞서 제도의 미국화에 대해 몇 가지 사례를 들었지만, 더 심각한 것은 ‘영혼의 미국화’입니다. 한국인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보다도 미국인에 가깝습니다.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 감정, 감수성, 욕망, 심지어 무의식까지도 거의 미국인의 그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191-192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상식’들이 국제적인 표준에 비추어 보면 맞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들은 대개 ‘미국식’ 상식인거지요. 그래서 지금의 한국 사회가 왜 이렇게 ‘헬조선’이 됐느냐를 살펴볼 때, 우리가 미국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그리고 미국은 도대체 어떤 나라인지에 대한 객관적인 관점을 갖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193


4장 우리는 함께 웃을 것이다

통일은 천천히 해도 된다고 했지만, 만약 통일을 이룬다면 그 방식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소위 ‘양국 체제론’입니다. 각각 두 개의 서로 다른 나라로 인정하는 것이지요.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생각하면 쉽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같은 게르만 민족이지만 서로 전혀 다른 국가이지요. 상호 대사관도 두고 있고요. 완전히 서로 ‘외국’인 것이지요. 이것을 양국 체제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국가연합제(Konfederation)입니다. 동서독 간의 관계를 생각하면 됩니다. 이를 보통 ‘1민족 2국가론’이라고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서로를 국가로서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외국은 아니다’라는 입장입니다. 독립된 국가로서 서로를 인정하지만 상호 외국은 아닌, 독일만의 특수한 ‘내부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서독은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고, 대사관을 두는 대신 상주 대표부를 두고 교류했던 거지요.
세 번째는 ‘연방제(federation)’입니다. 통일에 가장 가까운 형태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상 하나의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200

독일과 한국을 단순 비교하면서 엄청난 통일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고 과장된 허풍을 늘어놓은 쪽은 주로 일본 언론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특히 <교도 통신>은 ‘천문학적인 통일 비용’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었고, 이를 집중적으로 주도면밀하게, 또 악의적으로 퍼뜨렸습니다. 국내에서는 <조선일보>가 교도 통신의 기사를 받아 열심히 퍼 날랐고요. 그 때문에 통일 비용 문제가 한국에서 통일 논의의 중심이 되고, 반통일 정서를 확산시켰지요. 221

근대 사상가들이 품은 이상은 ‘인간이 이성에 의해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이성의 힘으로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며, 이성의 힘으로 좋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그 ‘이성의 기획’이 바로 사회주의였습니다.  224-225

우리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상상력이 너무도 빈약하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종속변수로 보는 태도도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움직임으로써 새로운 상황을 창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바뀌는 상황에 무조건 적응하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새로운 상황을 만들고, 잘못된 상태를 바꿀 만한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단지 그것을 실행에 옮길 용기와 비전이 없을 뿐입니다.  254


에필로그 - 거울 앞에서 당당하기

삼권분립과 대의민주주의를 신봉한다고 다 민주주의자가 아닙니다. 민주주의자는 어디서나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타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강한 자아’를 가진 자입니다.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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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경험은 우리안의 불순물을 태워 버린다. 24

강박적인 생각을 내려놓을 때 마음과 가슴이 열린다. 28

생각만큼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없다. 마음은 한개의 해답을 찾으면 금방 천 개의 문제를 만들어 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뛰어난 상상력을 가진 작가이다. 마음이 자기와 전쟁을 벌이지 않을 때 완전히 다른 세상을 경험한다. 30

문제와 화해하고 받아들일 때 그 문제는 작아지고 우리는 커진다. 실제로 우리 자신은 문제보다 더 큰 존재이다. 31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 34

구차하게 의존하는 것, 시도와 모험을 가로막는 것을 제거해야만 낡은 삶을 뒤엎을 수 있다. 47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삶의 여정에서 막힌 길은 하나의 계시이다. 59

‘작가(writer)는 글을 쓰는 사람이며, 기다리는 사람은 웨이터(waiter)이다’라는 말은 나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이상적인 집필 환경을 기다리는 작가는 한 문장도 쓰지 못한 채 인생을 마친다는 말도.
한때는 주로 밤에 글을 썼지만 새벽에 글을 쓴 지 오래되었다. 오전 5시 반에 일어나 20분 명상을 하고 오후 3시까지 글을 쓰고 번역을 한다. 나는 타고난 재능을 가진 작가나 번역가가 전혀 아니기 때문에 매일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한 단락도 끝내지 못하고 오전을 다 보낼 때도 있다. 여행 산문가 피코 아이어가 말한 대로, 글을 쓴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에게 은밀한 편지를 쓰는 것과 같다.
여행 중에도 거의 예외가 없다. 새벽 기차 안에서 글을 쓴 적도 많다. 여명이 터 오는 갠지스강 계단에 앉아서도 쓰고, 히말라야 고개를 넘는 트럭 조수석에서도 계속 중얼거리며 써서 운전사를 겁먹게 만들었다.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면 한 편의 글도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영감은 그저 매일 계속 쓰는 것이다. 멋진 소재가 그냥 굴러들어오는 행운은 매번 나를 비켜 간다. 집필의 신이 내 집필실에는 안 오고 다른 작가들의 집필실만 편애한다는 생각을 지을 수 없다. 다음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 쥐어뜯은 머리카락을 다 모으면 지금보다 훨씬 멋진 장발이 되었을 것이다.
마라톤 선수가 달리기가 쉬워서 달리는 게 아니듯 글쓰기가 쉽다면 나는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생의 모순이다. 글쓰기가 너무 어려워서 계속 쓰고 있는 것이다. 그만두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글을 쓰지 않으면 다른 무엇을 할수있겠는가? 상상력이 완전히 고갈되지 않는 한 내가 무턱대고 할 수 있는 일이 글쓰는 일인데.
글을 잘쓰는 비결을 묻자 『톰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말했다.
“나 자신이 글 쓰는 데 소질이 없음을 발견하는 데 15년이 걸렸다. 하지만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계속 써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때 이미 나는 유명 작가가 되어 있었으니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는 아무리 퇴고를 많이 해도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수십 년 동안 글을 썼는데도 여전히 그렇다.”하고 고백했다.
나는 지금 단순히 ‘노력'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명'을 주제로 이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의 가슴이 원하는 일을 하는 소명 말이다. 하지만 취미 생활이 아니라면 무슨 일이든 수도사가 되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글쓰기 역시 그저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밑바닥에 있는 진실성에 다가가 자신의 것을 건져 올리는 시도여야 하기 때문이다.
인도의 피리 연주자 하리프라사드 초우라시아는 40대에 이미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기 시작했다. 80세인 지금도 그의 연주를 능가할 자가 없다. 나는 20년 가까이 해마다 그의 연주를 들으러 다녔다. 한번은 델리의 신년 음악회에서 만나 “하리지, 이제 한국에 오실 때입니다 ”라고 요청하자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래서 그해 10월 서울과 부산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아침마다 그의 호텔 방에 들렀는데, 그는 매번 연습을 하고 있었다. 평생 피리 연주를 해 왔으며, 예술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인도 정부가 외교관 여권을 발급하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훈장까지 수여받은 대가가 뭄바이에서 델리로, 다시 델리에서 서울로 긴 시간 비행기를 타고 왔음에도 불구 하고 다음날 단 40분의 연주를 위해 계속해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쉬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
지난 2월 동인도 카락푸르에 있는 인도공과대학에서 특별 연주회가 있어서 그와 동행했다. 아침 일찍 콜카타를 출발해 점심 시간이 지나 도착했는데, 그는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저녁 공연을 위해 곧바로 방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바로 전날 밤 콜카타에서 연주회를 가졌는데도!
연주를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에 그 학교에서 요가와 명상을 가르치는 교수가 질문했다.
“당신은 평생 동안 음악을 해 왔는데, 이 삶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
하리지는 말했다.
“나는 이 인생을 통해 분투노력하는 것을 배웠다. 어렸을 때 일찍 어머니를 잃어 한 조각의 차파티(통밀 가루를 반죽해 얇고 둥글게 구운 인도의 주식)를 얻는 데도 분투 노력해야만 했다. 늦게 음악을 시작했을 때는 스승이 원래 레슬링 선수였던 나의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남들처럼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피리를 불라고 가르쳤다. 그것에 적응하기 위해 끝없이 분투노력했다. 나는 타고난 음악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몸을보라 몇년전 교통사고로 어깨를 다쳐 한쪽 팔을 쓰는 것이 힘들다. 따라서 지금도 무한 노력하지 않으면 피리를 불 수 없다. 이곳에 함께온 한국인 친구는 나더러 이제 그만 쉬라고 하지만 나는 숨이 멎을 때까지 피리를 불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삶이 내게 준 소명이다.”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아마도 그 명상 교수는 ‘마음의 평화' 같은 초월적인 대답을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가의 솔직하고 위선적이지 않은 답변, 삶에 대한 진실성에 청중은 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앞에서 밝혔듯이 나는 타고난 작가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애초에 이 글에 담으려고 마음먹었던 주제를 제대로 전달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나름 분투노력했다. 누군가가 말 했듯이 진짜 작가는 그저 계속 글을 쓰는 사람이다. 이 삶에서 진실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축복할 수 있으므로. 당신과 나, 우리는 어차피 천재가 아니다. 따라서 하고 또 하고 끝까지 해서 마법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다. 66-70

세상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대로 존재한다. 무엇을 보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는가. 무엇을 듣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듣는가, 무엇을 느끼는 가가 아니라 어떻게 느끼는가가 우리의 삶을 만들어 나간다. 75

라틴어에서 레푸기움은 ‘피난처, 휴식처’의 의미이다. ...
단순한 생활과 음식이 나를 단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단순함이 나를 나 자신에게 가까워지게 했다. 그 삶은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순전히 내 영혼에 관한 일이었다. 꼭 필요하지 않은 일과 만남들이 줄어들면서 기쁨은 늘어났다. 사치가 문화를 창조하기도 하지만, 소박함은 정신을 창조한다. 그곳에서 나는 사원들을 들여다봤고, 신상들을 보았고, 그런 다음 나 자신 안에서 성소를 발견했다.
<기억, 꿈, 회상> 에서 융은 말한다.
“사람들은 점점 커져 가는 부족감, 불만족, 불안 심리에 떠밀려 새로운 것을 향해 충동적으로 돌진한다.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가 약속해 주는 것들에 의지해 살아간다. 모든 좋은 것이 더 나쁜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눈부신 과학의 발견이 우리에게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인간의 기쁨, 만족, 또는 행복을 증가시키지 못한다. 예를 들면 시간을 단축하는 조치들은 불쾌한 방식으로 속도만 빠르게 해 전보다 더 시간이 부족하게 만든다. 볼링겐에 있는 나의 탑에서는 사람이 마치 수백 년을 사는 것처럼 산다. 만약 16세기 사람이 그 집으로 이사 온다면 그에게 새로운 것은 단지 석유 등잔과 성냥일 것이다.”
당신에게 그런 곳은 어디인가? 자기만의 사유 공간에서 호흡을 들이쉬고 내쉴 수 있는 곳은? ...
자신만의 레푸기움, 자신의 탑을 갖는 일은 중요하다. .. 자신의 본얼굴을 감추느라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자신의 레푸기움에서는 타인을 위해 표정을 꾸밀 필요가 없으며, 외부의 지나친 소란으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지킬 수 있고, 당신을 움켜쥐었던 세상의 요구에서 벗어난다. 85-86

미국 시인 마야 안젤루는 썼다.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과 당신이 한 행동을 잊지만, 당신이 그들에게 어떻게 느끼게 했는가는 잊지 않는다.”
나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가는 감추거나 꾸미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드러내며, 내가 주장하는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동이 나에 대해 가장 잘 말해준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인가? 그것이 가장 진실된 나의 모습에 가깝다. 105

이십 대에 신춘문예로 등단한 나는 몇 권의 시집으로 명성을 얻어 어딜 가나 시인, 혹은 작가로 불리게 되었다. 나 역시 그것을 당연히 여겨 스스로도 자신을 시인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시인’의 품사는 삶, 사랑, 여행처럼 명사보다는 동사에 가깝다. 그 단어들은 현재진행형일 때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시를 쓰고 있을 때 나는 시인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시인이 아니다. 다른 작가의 책을 읽을 때는 독자이고, 버스를 타면 승객이며, 병원에 가면 환자이고, 식당과 카페에서는 손님이다. 사랑하는 이에게는 연인, 아들에게는 아버지, 함께 사는 강아지에게는 반가운 주인이다. 그런가 하면 힌디어 선생에게는 단어를 잘 까먹는 학생이고, 외국에서는 배낭여행자이다. 이렇듯 나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동사이다.
고정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명칭은 역할에 따른 약속 명사일 뿐이다. 115-116

나에게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면 허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역동성에 눈뜨게 된다. 그때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열심히 놀이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다른 놀이로 옮겨 간다.
‘나’의 품사는 흐르는 강처럼 순간순간 변화하는 동사이다. 나는 ‘나의 지난 이야기(My Story)’가 아니라 이 순간에 ‘있음(I Am)’이다. .. 내가 시인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 오히려 나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오직 모름과 모름일 때 존재와 존재로 마주하는 일이 가능하다. 순수한 있음과 순수한 있음으로. 121

추구의 여정에는 두 가지 잘못밖에 없다. 하나는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끝까지 가지 않는 것이다.
“어떤 길을 가든 그 기로가 하나가 되라.”
길 자체가 되기 전에는 그 길을 따라 여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긍정의 길이든 부정의 길이든 자신이 선택한 길과 하나가 되어 묵묵히 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길이 끝나는 곳에서 모든 길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 시인 찰스 부코스키는 썼다.
“무엇인가를 시도할 것이라면 끝까지 가라. 그러면 너는 너의 인생에 올라타 완벽한 웃음을 웃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훌륭한 싸움이다.” 140

생각은 언어만큼이나 쉽게 전염된다. 마음이라는 공간 안에 담겨 있는 ‘나의 고유의 생각’들은 수많은 ‘타인의 생각’들과 혼합되어 있다. 따라서 내가 어떤 생각들과 나를 동일시하면서 ‘이것은 나야’라거나 ‘이것은 내가 아냐’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 참일까? 혹시 외부와 상호작용하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나’인데도 내가 마음이라는 공간 안에 가상의 고정된 나를 만들어 놓고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이 자기 착각은 가장 알아차리기 어렵다.
우리에게는 ‘나’를 유지하기 위해 내 언어, 내 생각, 내 존재가 다른 것들과 분리된 고유의 것이라는 고집스러운 전제가 있는 듯하다. 그 전제마저도 과거로부터, 타인들로부터 배운 것인데도, 만약 실제로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동일하기까지 한 언어와 생각과 마음의 내용물들을 모두 제외시킨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 나는 ‘고유의 나’일까? 그렇다면 붓다는 왜 ‘고유의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단지 세상 만물에 서로 의존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토록 강조했을까? 144

소설가 보르헤스는 썼다.
“우리 살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이들은 각각 특별한 존재이다. 누구든 항상 그의 무언가를 남기고, 또 우리의 무언가를 가져간다. 많은 것을 남긴 사람도 적은 것을 남긴 사람도 있지만, 무엇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누구든 단순한 우연에 의해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이다.” 179-180

평생의 관계는 당신에게 평생의 배움을 준다. 굳건한 감정적 토대를 갖기 위해 당신이 쌓아 나가야만 하는 것들을. 당신이 할 일은 그 배움을 받아들이고,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관계에서 당신이 배운 것을 주변의 모든 관계와 삶의 영역에 적용하는 것이다. 사랑은 맹목적이지만 진정한 우정은 천 리 밖을 본다는 말이 있다.
당신이 내 삶에 나타나 준 것에 감사한다. 그것이 이유가 있는 만남이든, 한 계절 동안의 만남이든, 생애를 관통하는 만남이든. 181

인내는 단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인내는 앞을 내다 볼 줄 알고 살아가는 일이다. 187

티베트어에 ‘셴파’라는 단어가 있다. 대개는 ‘집착’으로 번역하지만, 정확히는 물고기가 낚싯바늘에 걸리듯 ‘붙잡히는 것’ 혹은 ‘생각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티베트 불교에 정통한 페마 초드론은 셴파를 ‘가려운 곳을 긁는 고통’에 비유한다. 가려우면 자꾸만 긁게 되고, 긁을수록 더 가려워진다. 그래서 어느 순간 가려움이 고통으로 변한다. ...
셴파가 가려워서 자꾸 마음이 쓰이는 동시에 가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조차 어리석어서 생기는 고통이다. 모기에게 물렸든 모욕적인 비난을 들었든, 혹은 자기 자신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든 머릿속에서 강박적으로 그것 외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는 상태로 고착되는 것이 셴파이다. 모기에 물린 것도 괴로운데 그곳을 계속 긁어서 스스로 더 고통받는 것이다. 199-200

나날의 삶에서 셴파는 흔하게 일어난다. 누군가의 비난, 무례함, 불친절, 나의 잘못된 판단과 실수 등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영혼을 괴롭힌다. 삶에서 고통받는 이유가 그것이다. 셴파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것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을 자각하는 일이다. 204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덩이를 더 파는 것이 아니라 구덩이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이다.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다. 티베트 속담은 말한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205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잘 모른다는 것과 동의어일 때가 많다. 누군가를 안다고 믿지만,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생각과 감정을 믿는 것이다. 또한 누군가를 조항하고 싫어하지만, 사실은 나의 판단과 편견을 신뢰하는 것이다. 206

관계가 공허해지는 것은 서로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 누군가를 안다는 것, 진실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자신의 편견을 깨고 그와 함께 계단 끝까지 내려가는 숙제를 안는 일이다. 209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바닷물을 뚫고 달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라고 어느 시인은 썼다. 그런 노력없이 상대방의 마음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내 계산법을 가르치려 드는 것은 병이다. 211

트라피스트회 신부 토머스 머튼은 <인간은 섬이 아니다>에서 썼다.
“인간은 다른 누군가와 소통할 수 없는 그 자신만의 비밀과 고독을 가지고 있기에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를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과 자신의 영혼을 모두 황폐하게 만든다. 그것은 자신을 중심에 놓고 자기 삶의 방식에서 상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212


- 독서 모임에서 나온 문장들
어떤 사람을 만날 때 마음이 열리는 순간이 있다. 나의 감각과 느낌, 혹은 삶에서 경험하는 기쁨이나 두려움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과는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자발적인 열람이 폭풍에 길 잃은 새 같던 우리를 연결시켜 주며, 그때 세상과의 거리도 가까워진다. 삶이라는 여행의 한 구간을 그런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행운이다. 104

나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가는 감추거나 꾸미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드러내며, 내가 주장하는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동이 나에 대해 가장 잘 말해준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인가? 그것이 가장 진실된 나의 모습에 가깝다. 105

“너는 누구인가?”
“저는 쿠퍼 부인으로, 이 시의 시장 아내입니다.”
“나는 너의 이름이나 남편에 대해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사랑하는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네가 누구의 엄마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나는 너의 직업을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기독교인이며, 남편을 잘 내조했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는 너의 종교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116

모든 일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며, 모든 만남에는 의미가 있다. 누구도 우리의 삶에 우연히 나타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내 삶에 왔다가 금방 떠나고 누군가는 오래 곁에 머물지만, 그들 모두 내 가슴에 크고 작은 자국을 남겨 나는 어느덧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당신이 내 삶에 나타나 준 것에 감사한다. 그것이 이유가 있는 만남이든, 한 계절 동안의 만남이든, 생애를 관통하는 만남이든. 174-175

힌디어에 ‘킬레가 또 데켕게’라는 격언이 있다. ‘꽃이 피면 알게 될 것이다.When it flowers, we will see.)’라는뜻이다. 지금은 나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고, 설명할 길이 없어도 언젠가 내가 꽅을 피우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해, 자신이 통과하는 계절에 대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시간이 흘러 결실을 맺으면 사람들은 자연히 알게 될 것이므로.
독일 시인 라이너 쿤체는 썼다.
‘꽃피어야만 하는 것은 꽃핀다.
자갈 비탈에서도 돌 틈에서도
어떤 눈길 닿지 않아도’
인내는 단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인내는 앞을 내다 볼 줄 알고 살아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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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을 대신해서 - 머슴새와 ‘밭 가는 해골’
평소에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이런 모순에 갑자기 의문이 생기는 순간을 나는 문학적 시간이라 부른다. 문학적 시간은 대부분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사회적 주제와 연결될 때 그것은 역사적 시간이 된다. 그것은 또한 미학적 시간이고 은혜의 시간이고 깨우침의 시간이다.  8

- 차린 것은 많고 먹을 것은 없고
프랑스의 국립도서관에서는 수년 전부터 소장 도서 전체를 스캔하여 이미지 파일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 놀라운 것은 캐나다 퀘백 대학의 사회과학연구소다. 이 연구소의 사회학 고전 사이트에는 플라톤에서 니체나 프로이트에 이르는 저명 사상가들과 사회학자들의 주요 저작이 프랑스어 텍스트 파일과 PDF 파일로 올라와 있다.  17

문화를 과시하고 소비하려는 기획은 많지만, 문화의 창조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산적 이용의 전망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것이 우리 온라인의 실정이다.  18

- 말의 힘
축약의 남발도 말에 가하는 폭력의 일종이지만, 욕설이나 ‘앵애어’와는 성질이 조금 다르다. 욕설 등속은 말을 여전히 말로 대하는 반면에 과도한 축약어는 말을 오직 기호로만 대한다. 기호를 소통의 도구로 삼는 사람은 오직 외부와 소통할 수 있을 뿐인데, 말을 말로 대접하여 말하는 사람은 저 자신과도 소통한다. 그것이 말의 힘이다.  62

- 악마의 존재 방식
보들레르는 「너그러운 노름꾼」이라는 기이한 산문시를 썼다. 시인이 마귀들의 왕인 사탄을 만난 이야기다. 마음씨 좋은 늙은 귀족의 풍모를 지닌 마왕은 온갖 지식에 통달한 존재이며, 특히 인문학에 이르러서는 그 체계 하나하나가 어떻게 성립되어 어떻게 발전했는지 꿰뚫어 알고 있다. 이런 사탄도 단 한 번뿐이긴 하지만 간담이 서늘한 적이 있다. 어느 예리한 설교자가 "악마의 가장 교묘한 술책은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믿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결코 잊지 말라"고 말했을 때였다. 이 말은 악이 늘 평범한 얼굴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온갖 미명을 동원하여 받들고 있는 제도와 관습 속에 교묘하게 숨어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그러나 저 "악마의 교묘한 술책"을 은유로만 여기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부지런한 보들레르 연구자이며 19세기 프랑스 문학의 전문가인 막스 밀레르는 1960년『프랑스 문학에 나타난 악마』라는 책을 출간했다. 상하권을 합해 천 쪽 가까이 되는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그 연구의 동기가 제2차세계대전의 참극에서 시작되었다고 쓴다. 그 끔찍한 집단적 범죄, 인간 행위의 일반적 척도를 넘어서는 악독한 힘의 폭잘이 오직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일까. 인간의 내부에는 개인적 차원과 집단적 차원을 망라해서 어떤 알 수 없는 명령에 복종하도록 준비된 악덕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바로 이런 의문이 끊임없이 문학의 주제가 되어온 악마의 존재를 다시 검토하게 했다고 말한다. 끝을 알 수 없는 악 앞에서 느끼는 인간의 무력감이 그 거대한 책을 쓰게 한것이다.

이 거대한 무력감을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 다시 느끼고 있다. 수많은 생령,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3백 명이 넘는 생명이 물속에서 숨졌거나 실종했음을 알게 된 순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한도 끝도 없는, 그래서 설명할 길이 없는 악 속에 침몰해 있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막스 밀레르가 생각해본 것처럼, 이 침몰이 정말 악마의 책동에 의한 것이라면 악마는 이 참극을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악마는 먼저 우리 마음을 무디게 만들었다. 쉽게 잊어버리는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는 사건만 이야기하자. 그것이 2009년이던가, 한겨울에 용산에서 제 삶의 터전을 지키려던 사람들이 망루에서 불에 타 숨졌을 때 사람들은 한동안 애통해 하였지만 끝내 없던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같은 해 여름부터 지금까지, 일자리를 잃은 2천여 명 쌍용차 노동자 가운데 스물다섯 명이 비통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는 내내 막장 드라마를 보며 세상이 평화롭다고 믿으려 했고, 도시 정비니 고용 유연성이니 희망퇴직이니 하는 아름다운 말들을 악마는 아무데나 내걸었다.

악마는 용의주도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렇게 아우성을 쳤고 여전히 아우성을 치건만, 저 위험한 배를 비정규직들이 몰아도 그것을 예삿일로 여기도록 끝내 세상을 훈련시켰다. 악마는 제 시선을 벗어난 사람들이 그 몰상식을 고발하더라도 그들을 '종북 빨갱이'로 몰도록 프로그램된 사람들을 높은 자리, 낮은 자리에 뿌려놓았다. 악마의 친화성도 한몫을 했다. 기우뚱거리는 배에 수많은 사람을 태워 바다로 내보내는 회사에 그것을 감시해야 할 사람들이 상을 주었다. 감시해야 할 사람들과 또 그것을 감시해야 할 사람들을 악마가 차례차례 포섭한 것이다.

악마는 섬세하기도 했다. 기울어진 배를 물살이 그렇게 세다는 맹골 수로까지 몰고 가게 했다. 그 위급한 시간에 크게 활약해야 할 사람들이 딴짓을 하게 만든 것도 악마의 셈에 들어 있다. 제 이름으로건 남의 이름으로건 그 회사를 설립하고 이런저런 명목으로 돈을 훑어내어 회사를 빈껍데기로 만든 사람에게 예술가라는 직함을 붙여주기도 했다. 악마는 눈뜨고 그 생때같은 아이들을 잃는 순간에도 우왕좌왕할 정부를 기다려 배를 침몰시켰다. 아이들을 다 구했다는 유언비어를 책임 있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퍼뜨리기도 했다. 악마는 빠뜨린 것이 없었다.

물론 나는 악마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악마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악마만이 저지를 일을 이 땅의 사람들이 저질렀다는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악마의 처사였다면 악마의 연구로 끝날 텐데, 그것이 우리의 죄이니 우리는 이제 앉았던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한다. 나 자신을 용서하지 말고 리본을 달건 촛불을 들건 무슨 일이든지 해야한다.  72-75

- 진정성의 정치
‘진정성’을 외국어 사전에서 해방한 것은 1980년대의 운동권으로, 그때 이 말은 담론의 진실성과 효력을 뜻했다. 한자로는 물론 ‘眞正性’이다. 그러나 이 말을 유행시킨 것은 1990년대의 문학비평이다. 문학에서 말은, 특히 시의 말은 그 한마디 한마디가 감정의 크고 작은 굴곡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 특별한 효과를 거둔다는 것이 이 ‘진정성’의 이데올로기이다.  77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지 못하기에 역사 속에서 자신을 객관화하지 못한다.  ..
‘진정성’이 어떻게 정의되건 그것은 한 인간이 제 마음 깊은 자리에서 끌어낸 생각으로 자신을 넘어서서,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을 때에만 확보된다.  79

- 어느 히피의 자연과 유병언의 자연
세상에 또 하나의 삶이 있음을 자신들의 몸으로 증명하는 일일 터.  87

- 1700개의 섬
모진 사람들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피곤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래서 제 사는 자리를 더욱더 섬으로 만들려 하고 거기에 철벽을 치려 한다.
그러나 철벽의 보호를 받는다고 해서 피곤한 마음이 거기서 편안할 수는 없다. 차라리 피곤함은 그 철벽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105

- 오리찜 먹는 법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책은 도끼라고 니체는 말했다. 도끼는 우리를 찍어 넘어뜨린다. 이미 눈앞에 책을 펼쳤으면 그 주위를 돌며 눈치를 보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읽는 것에 우리를 다 바쳐야 한다. 그때 넘어진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 일어난다.  
책이라는 이름의 도끼 앞에 우리를 바치는 것도 하나의 축제다.  127-128

- <어린 왕자>에 관해, 새삼스럽게
인간은 자기가 공들여 일구고 가꾼 것들과만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이 관계를 통해서만 자기 존재를 확장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일만 사람을 사귀고, 일만 가지 물건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중 어느 것 하나도 자신이 마음과 노력을 부어 길들인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일만 사람을 바쁘게 만나고 만 가지 물건을 숨차게 끌어모았지만, 누구에게도, 어느 물건에도, 자기가 살아온 삶의 시간을 새겨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만 사람은 그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며, 만 가지 물건은 그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생애 내내 눈앞에 보자기보다 더 적은 시간밖에는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가 눈을 감으면 그 시간은 꺼져버릴 것이다.
여우가 ‘길들인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아닌 것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을 그것의 삶 속에,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 있게 하는 일이다. 존재가 세상에 진정한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은 권력이나 소유나 명성이 아니라 이 길들임이라는 것을 말할 것도 없다.  136

여우가 시간에 대한 설명을 통해 ‘의례’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의례란 “어떤 시간을 다른 시간과 다르게 하고, 어떤 날을 다른 날과 다르게 하는 것”이다. 확실히 설날이나 생일, 명절이나 제삿날은 다른 날과 다르다. 그런 날의 시간은 특별한 카리스마를 갖는다. 그 시간들은 인간이 살아온 내력이 찍어놓은 기억의 시간이자 무의식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137

어린 왕자가 이 지구에서 처음 만난 생명도 마지막으로 접촉한 생명도 뱀이었다. 이 뱀은 여우 못지않게 중요하다. 어린 왕자가 뱀을 처음 만났을 때 함께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대화보다는 침묵이 더 길었다. 뱀은 자기가 누구든 한번 건드리기만 하면 그가 ‘태어난 땅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고 말하며, 어린 왕자가 자기 별을 정말로 그리워하면 그를 도와줄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자기가 태어난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물론 죽는다는 말이다. 그의 말은 여우의 말처럼 이해해야 할 말이 아니라 ‘해석해야 할 말’이다. 그것은 감동해야 할 종류의 말이 아니라 학습해야 할 말이다.
어린 왕자는 여우의 종합으로부터 비밀한 지혜를 얻었지만, 결단의 시간이 다가오자, 그 실천을 위해서 뱀이 분석을 선택했다.  137-138

분석의 말은 습관을 넘어선 곳에서 만들어지는 말이며, 그래서 충격의 말이다. 사랑으로만 권태를 치료할 수 있을 때, 또는 사랑이 필요하다는 말까지 권태롭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때, 충격은 거의 유일한 처방이다. 충격은 길들이기가 아니며, 시간을 바치는 일이 아니다. 충격은 관계를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충격은 허위의 관계가 벗겨진 곳에서 진정한 관계를 드리낸다. 그것은 시간의 얇은 보자기가 찢어진 곳에서 시간의 신비로운 깊이를 판다. 어린 왕자는 이 깊이를 타고 제 별로 갔다.
그런데 어린 왕자를 한 번 깨물어 그의 별로 되돌려보내는 뱀의 수법은 오늘날 우리의 전자 문명과 닮은 점이 많다. 한 번의 ‘딸까닥’으로 열리는 수천 개의 세계. 우리는 이렇게 날마나 뱀의 힘을 빌리는 셈이지만 뱀에게 물리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어떤 결단도 없이 이 세계 저 세계를 날아다니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힘은 우리의 존재를 강화하자는 것인데 거꾸로 우리의 존재가 그만큼 졸아든 것이기에 불안하다.  138-139

- 언어, 그 숨은 진실을 위한 여행
어느 언어건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제멋대로 만들어진 임시 언어일 뿐이다. 어쩌면 인류가 여러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 사고의 허약함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이 ‘나무’라고 하면 그 말 자체가 나무여야 할 텐데, 그 나무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말을 우리는 멋대로 만들어서 지껄이고 있지 않은가. 진리가 보편적이라면 그것을 표현하는 말도 보편적이어야 할 텐데, 말에 관한 한 인간은 우연에 우연을 겹쳐놓고 있을 뿐이다.  147

말라르메는 인간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기에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했지만, 언어와 언어 사이를 헤맨 사람들은 거꿀로 인간이 언어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개의 언어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언어는 서로 겹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 대부분의 언어는 ‘눈’에 해당하는 낱말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낱말로 ‘함박눈’에 해당하는 말을 가진 언어는 많지 않다. 한 언어가 적시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언어는 적시한다.  148

- ‘아 대한민국’과 ‘헬조선’
자신감을 가진 자만이 먼저 말을 걸고 먼저 토론을 시작한다.  156

- ‘여성혐오’라는 말의 번역론
불행한 일을 당하면 누구나 그 불행을 책임져야 할 사람을 찾아내고 싶어한다. 탓할 사람을 찾아내지 못한 불행은 지금 눈앞에 닥친 불행보다도 더 고통스럽다. 미국 사회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중하류층 백인들에게 샌더스는 그 책임이 그들에게서 돈을 빼앗아간 월가의 부자들에게 이싿고 말하고, 트럼프는 그들에게서 일자리를 빼앗아간 이민자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한국의 젊은 남자들은 잘나가는 여자들과 페미니스트들에게 그 책임을 돌리려 한다. 그러고는 다시 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여성혐오의 혐의를 둘러싸야 하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 혐오는 그 혐오가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설명을 거치고 나면 말은 얼마나 힘을 잃는가. 여전히 바뀌지 않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우리가 어머니에게, 아내에게, 직장의 여성 동료에게, 길거리에서 만나는 여성에게, 심지어는 만나지도 못할 여자들에게 특별히 기대하는 ‘여자다움’이 사실상 모두 ‘여성혐오’에 해당한다. 나는 한 사람의 번역가지만 ‘여성혐오’라는 번역어의 운명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고통의 시대에 더 많은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불행을 그 오해 속에 묻어버리려는 태도가 비겁하다는 것은 명백하게 말할 수 있다.  184-185

- 문단 내 성추행과 등단 비리
문학교육이건 다른 교육이건 교육만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도 없다. 미숙한 선생은 그 영향력의 깊이로 자신의 교육자적 자질과 가치를 가늠하려 한다. 그래서 마침내는 학생의 정신과 육체를 식민화하려 한다. 글쓰기 교실의 수업처럼 제도의 뒷배가 없는 교육일수록 그 식민화의 욕구가 더 커질 수 있고, 그 지배 상식이 폭력적일수록 학생에게 미치는 선생의 영향력이 깊어진 것 같은 환각이 일어난다. 그러나 학생을 식민화하려는 시도는 선생이 스스로 품고 있는 교육자적 자질에 대한 의구심과 연결될 때가 많다. 비재의 권력이 교육자의 자질을 확인해주지는 않는다. 가르치는 자는 지배하는 자가 아니며, 배우는 자는 지배받는 자가 아니다. 그 관계가 민주적일 때만 교육의 내용도 민주적 가치를 얻게 된다.  187-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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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당신은 차별이 보이나요?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차별은 차별로 인해 불이익을 입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차별 덕분에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나서서 차별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차별은 분명 양쪽의 불균형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모두에게 부정의함에도, 희한하게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만의 일처럼 이야기된다.  7

나는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착각이고 신화일 뿐이었다. 누군가를 정말 평등하게 대우하고 존중한다는 건 나의 무의식까지 훑어보는 작업을 거친 후에야 조금이나마 가능해질 것 같았다.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나를 발견하는 일 말이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착각과 신화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다.  10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별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이다. 다만 차별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선량한 시민일 뿐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을 곳곳에서 만난다.  11


1부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탄생

토크니즘(tokenism)이란 역사적으로 배제된 집단 구성원 가운데 소수만을 받아들이는 명목상의 차별 시정정책을 말한다. 토크니즘은 차별받는 집단의 극소수만 받아들이고서도 차별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기회가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고, 노력하여 능력을 갖추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다는 기대를 주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은 이상적인 평등의 상황과는 꽤 먼 상태임에도 평등이 달성되었다고 여기는 착시를 일으킨다.  24

사람들은 대체로 평등을 지향하고 차별에 반대한다. 관념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다수자 차별론도 결국은 차별은 옳지 않다는 기본 전제 위에 성립한다. 사람들은 적어도 평등이라는 원칙을 도덕적으로 옳고 정의로운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에게 차별을 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차별에 가담한다는 건 도덕적으로 허락되지 않는다. 차별이 없다는 생각은 어쩌면 내가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길 바란다는 간절한 희망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히려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역설적으로 차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은 높다.  25

특권(privivtege)이란 주어진 사회적 조건이 자신에게 유리해서 누리게 되는 온갖 혜택을 말한다.
불평등과 차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학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특권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발견’인 이유가 있다. 일상적으로 누리는 이런 특권은 대개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조건이라서 많은 경우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권은 말하자면 ‘가진 자의 여유’로서,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이다.  ...  
비행기를 타거나 그것도 비즈니스석을 타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교통수단 탑승을 특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8

나에게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구조물이나 제도가 누군가에게는 장벽이 되는 바로 그때, 우리는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발견할 수 있다.  29

자신이 누리는 일상적 특권. 29

특권을 알아차리는 확실한 계기는 그 특권이 흔들리는 경험을 할 때이다. 더이상 주류가 아닌 상황이 될 때, 그래서 전과 달리 불편해질 때, 지금까지 누린 특권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  32

불평등이란 말이 그러하듯, 특권역시 상대적인 개념이다. 다른 집단과 비교해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유리한 질서가 있다는 것이지, 삶이 절대적으로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 누구의 삶이 더 힘드냐 하는 논쟁은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모두가 똑같이 힘들다”는 말도 맞지 않다. 그보다는 서로 다르게 힘들다고 봐야 한다. 불평등한 구조에서는 기회와 권리가 다르게 분배되고, 그래서 다르게 힘들다. 여기서 초점은 서로 다른 종류의 삶을 만드는 이 구조적 불평등이다.  33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등이라는 대원칙에 동의하고 차별에 반대한다. .. 하지만 상대적으로 특권을 가진 집단은 차별을 덜 인식할 뿐만 아니라 평등을 실현하는 조치에 반대할 이유와 동기를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차별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 기울어진 땅에 서서 양손으로 평행봉을 들면 평행봉 역시 똑같이 기울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36

누군가가 보기엔 세상이 소수자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져 있는데, 누군가의 눈에는 세상이 평등해 보인다. 전자의 관점에서 평등을 이루려는 시도들이 후자의 눈에는 역차별로 보이는 이유다.  38

풍경 전체를 보려면 세상에서 한발짝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이 세계가 어떻게 기울어져 있는지 알기 위해 나와 다른 자리에 서 있는 사람과 대화해보아야 한다.  38

우리는 어떤 사람을 ‘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59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은 외부의 시선에서 시작되지만, 그 구성원들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내면의 시선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집단에 소속감을 가지면서 그 집단을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사회적 정체성(social identity)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때 그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흡수되고 이 고정관념이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고정관념을 내면화하느냐에 따라 본인의 역량이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한다.  66

부정적 고정관념을 자극하면, 부정적 고정관념을 이겨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고, 부담 때문에 수행 능력이 낮아져서, 결국 고정관념대로 부정적인 결과가 나온다. 이런 압박 상황을 고정관념 압박(stereotype threat)이라고 한다. 반면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없는 집단의 수행능력은 상대적으로 향상된다.  67

구조적 차별(systemic discrimination)은 이렇게 차별을 차별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미 차별이 사회적으로 만연하고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어서 충분히 예측 가능할 때, 누군가 의도하지 않아도 각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차별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생긴다. 차별로 인해 이익을 얻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불이익을 얻는 사람 역시 질서 정연하게 행동함으로써 스스로 불평등한 구조의 일부가 되어간다.  74

켄지 요시노는 그의 책 <커버링>에서, ‘손상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낙인이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자신을 포장하는 모습에 주목한다.  .. 차별이 없는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할까?  75

교육이란 본래 모든 사람에게 성장의 기회를 주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 본질적인 기능이 왜곡되어 누군가에게는 우월감을, 누군가에게는 열등감을 심어주는 체제가 되었다.  78

메릴린 프아리는 억압의 상태를 새장에 비유한다 새장을 가까이에서 보면 철망이 한줄씩 보인다. 철망을 하나씩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얇은 선 하나가 새의 비행을 방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새장에서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아야만 그 철망들이 모여 새장을 이루고 있으며 이 새장이 새를 가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새장도 뒤로 물러나야 볼 수 있다. “구조적으로 연결된 강압과 장벽의 네트워크”가 우리의 날갯짓을 방해하고 있음을 말이다.
구조적 차별은 우리의 감각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상일 뿐이다.  78

억압받는 사람은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사회구조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불행이 일시적이거나 우연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차별과 싸우기보다 “어쩔 수 없다”며 감수한다. 유리한 지위에 있다면 억압을 느낄 기회가 더 적고 시야는 더 제한된다. 차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민하다” “불평이 많다” “특권을 누리려고 한다”며 상대에게 그 비난을 돌리곤 한다.
그래서 의심이 필요하다. 세상은 정말 평등한가? 내 삶은 정말 차별과 상관없는가? 시야를 확장하기 위한 성찰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79


2부 차별은 어떻게 지워지는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약함, 불행, 부족함, 서툶을 볼 때 즐거워한다고 했다. 웃음은 그들에 대한 일종의 조롱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관점을 우월성 이론(superiority theory)이라고 한다. 토머스 홉스(Thomas Hhobbes)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할 때 자존감이 높아지면서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나온다고 설명한다. 누군가를 비하하는 유머가 재미있는 이유는 그 대상보다 자신이 우월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86-87

돌프 질만(Dolf Zillmann)과 조앤 캔터(Joanne Cantor)의 1972년 실험은 같은 장면을 보고 전문가와 대학생이 어떻게 달리 반응하지는 보여준다. 참가자들은 상급자-하급자 관계(부모-자녀, 교사-학생, 고용주-피고용인 등)에서 서로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대화 장면을 만화로 보았다. 실험 결과,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은 전문가들은 상급자가 하급자를 깎아내리는 장면을 더 재미있어한 반면,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은 대학생들은 반대로 하급자가 상급자를 깎아내리는 장면을 더 재미있어 했다.
집단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나타난다. 사라들은 자신이 동일시하는 집단을 우월하게 느끼게 하는 농담, 달리 말하면 자신이 동일시하지 않는 집단을 깎아내리는 농담을 즐긴다.  87

토머스 포드(Thomas Ford)와 동료들은 비하성 유머가 마음속 편견을 봉인해제시킨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어떤 집단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더라도 보통의 상화에서는 사회규범 때문에 드러내지 못한다. 하지만 누군가 비하성 유머를 던질 때 차별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 결과 규범이 느슨해지고, 사람들은 편견을 쉽게 드러내면서 차별을 용인하거나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런 설명을 편견규범이론(prejudiced norm theory)이라 부른다.
유머가 금기된 영역의 빗장을 순간적으로 풀어내는 효과가 있다는 뜻이다. 일탈적인 행위가 유머를 통해 놀이 또는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된다.  88

금기된 영역을 넘나들기 때문에 권력에 도전하는 풍자가 가능하고, 사회는 그 가치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 금기의 빗장이 약자를 향해 풀렸을 때 잔혹한 놀이가 시작된다.  89

누군가를 무언가로 호명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이다. 누군가를 향한 놀림을 ‘가벼운’ 농담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권력을 알려준다. 반대로 원하지 않는 기표가 자신에게 부착되는 경험은 소수자로서 사회적 위치와 무력한 상태를 확인시켜준다.  95-96

유머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는 청중의 반응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누가 웃는가?”라는 질문만큼 “누가 웃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웃찾사’의 흑인 분장 사건처럼 웃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유머는 도태된다. 누군가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농담에 웃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런 행동이 괜찮지 않다”는 메시지를 준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어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어야 할 때가, 최소한 무표정으로 소심한 반대를 해야 할 때가 있다.  98-99

능력주의(meritocracy) ...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기만 한다면 평등한 사회라고 여긴다. 능력주의에 따르면 계층이 존재한다는 사실, 즉 불평등한 구조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경쟁에서 쏟은 노력을 보상하기 위해 차등적으로 대우해야 정의로운 사회다. ..
여성으로서 직장에서 불리한 대우를 받더라도 자신의 능력 부족이라고 생각하면 그 상태를 수긍하게 된다.  105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사회는 무언가를 성취한 사람에게 각별한 존경심을 보낸다. .. 사회의 불평등 자체를 원망하기보다 “계층의 사다리가 끊어지고” “개천에서 용 날 수 없는” 세태를 원망한다.  105-106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실제로 능력에 차이가 없다는 사실과 같은 현재 상태가 아니다. 능력주의라는 거대한 신념 체계를 지키기 위해 가치가 다른 두 사람 사이에 어떻게든 차별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106

모두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기만 하면 공정할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차별이 된다.  109

모두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도리어 누군가를 불리하게 만드는 간접차별(indirect discrimination)의 예들이다.  110

능력주의 체계는 편향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능력주의를 맹신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간과한다. 사람은 누구나 개인적 경험, 사회 경제적 배경 등에 따라 어떤 방향으로든 편향된 관점을 가지기 마련이다.  110-111

무슨 능력을 측정할지 정하고 평가하는 사람에게는 편향이 있고, 선정된 평가방식이 다양한 조건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기 어렵다. 게다가 평가에는 오류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한계를 고려할 때 어떤 한가지 평가 결과로 사람의 순위를 매겨 결정 짓는 것은 위험하다. 게다가 그런 평가기준으로 인격적인 대우를 달리 하거나 영구적인 낙인을 부여함으로써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이것이야말로 불공정하고 부정의한 일이 아닐까.  112

왜 어떤 집단은 특별히 잘못이 없어도 거부되는데, 어떤 집단은 개별적으로만 문제삼고 집단으로는 문제삼지 않을까?  123

어떤 차별은 종교적인 이유로 요구된다. 종교에 따라, 교리를 이유로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경우가 있다. 어쩔 수 없이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차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교리 내에서 차별은 나쁜 것이 아니라 신성한 질서이기 때문이다.  128

이 장의 글머리에 인용한 아서 골드버그 대법관의 말을 다시 새겨보자. “차별은 단순히 지폐나 동전이나, 햄버거나 영화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인종이나 피부색을 이유로 그를 공공의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 때, 그가 당연히 느낄 모멸감, 좌절감, 수치심의 문제이다.” 바로,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다.  133

공공의 공간에서 거절당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소수자(minorities)로 만드는 중요한 성질 가운데 하나다. ‘소수’라는 건 수의 많고 적음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여성처럼 숫자로는 많아도 어쩐지 공공의 장에서 보이지 앟는 사람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이유는 여러가지일 수 있다. 우선 아예 없는 경우다. 아예 없는 이유 역시 여러가지일 수 있다. 애초에 태어나지 않도록 했거나, 들어오지 못하게 했거나, 쫓아냈거나, 극단적으로 죽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137-138

격리를 통해 보이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138

실제로 우리는 꽤 자주 누군가에게 경고를 보내기 위해 거리에서 시선을 사용한다. 거리를 걸을 때 누구에게 시선이 머무르는지 생각해보자. 남성 두명이 손을 잡고 걸을 때, 여성이 노출이 많은 옷을 입었을 때, 지저분한 행색의 사람이 지나갈 때 등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그들을 따라간 적이 있지 않은가? 거리는 모든 사람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모두에게 똑같이 허용된 공간이 아니다. 거리에는 사람과 행동을 규율하는 규칙과 감시체제가 있다.
즉 거리는 중립적인 공간인 듯 보이지만 그 공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존재한다. 익명의 다수가 시선으로써, 말이나 행위로써, 혹은 직접적인 방해나 법적 수단을 통해 그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불온한 존재들을 단속하는 데 동참한다. 입장할 자격 없이 공공의 공간에 침범한 사람, 거리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을 추방하거나 교화시킨다. 이런 시선의 익명성과 편재(遍在)성 때문에, ‘낯선존재’인 소수자들이 느끼는 일상의 시선 혹은 ‘감시’의 압박은 삶을 만성적으로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때로는 소수자가 스스로 숨어 있기로 결정한다. 소수자가 안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다. 139-140

증오범죄(hate crime), 다른 말로 편견이 동기가 된 범죄(motivated crime)라고 한다.  143

유럽 인권재판소는 “민주주의는 단순히 다수의 관점이 언제나 지배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배적인 지위의 남용을 피하고 소수자에 대한 공정하고 적절한 대우를 보장하기 위한 균형이 필요하다.”라고 강조  146

노예라는 지위는 그 명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노예는 사람으로서의 권리 없이 노동의 필요만이 요구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울타리 안에 존재하지만 그 땅의 ‘주인’과 평등하지 않은 사람, 정치적 권리가 박탈되어 권리를 요구할 수 없는 사람, ‘주인’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흔적 없이 소멸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현대사회에서 부르는 이름이 무엇이든 그는 ‘노예’가 된다.  148

마이클 왈저(Michael Waizer)는 영토 안에 권리가 적거나 없는 계층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미 민주주의에 반하는 “폭정(tyranny)”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기본 전제로 그 안의 모든 구성원이 평등한 관계를 가지고 동등한 입장에서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국적이 다고 사람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지울 수 있을까. 우리는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윤리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은폐된 불평등을 전제로 평등을 누렸던 그리스의 폴리스와는 다른, 진정한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151


3부 차별에 대응하는 우리들의 자세

권위에 순응하는 경향은 현재의 법과 질서를 고수하려는 경향과 연결된다. 사람들은 익숙한 기존의 법과 질서에서 벗어난 낯선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연구에서는 권위에 순응하는 성향의 사람들이 “세상을 위험한 곳이라고 인식”하고 “타인의 동기를 의심하며 이질적인 사람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이 두려움과 의심 때문에 변화를 반대하게 된다.  160

헌법재판소는 호주제가 위헌이라고 선고하면서, 전통이라고 부르던 기존의 질서가 “사회적 폐습”이 될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논증했다.
‘우리 헌법에서 말하는 ‘전통’ ‘전통문화’란 오늘날의 의미로 재해석된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오늘날의 의미를 포착함에 있어서는 헌법이념과 헌법의 가치질서가 가장 중요한 척도의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여기에 인류의 보편가치, 정의와 인도의 정신 같은 것이 아울러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 역사적 전승으로서 오늘의 헌법이념에 반하는 것은 헌법 전문에서 타파의 대상으로 선언한 ‘사회적 폐습’이 될 수 있을지언정 헌법 제9조가 ‘계승 발전’시키라고 한 전통문화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161-162

헌법재판소의 말처럼 “헌법이념과 헌법의 가치질서” “인류의 보편가치, 정의와 인도의 정신”등에 비추어 어떤 질서는 폐기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차별도 폐기되어야 할 질서 중 하나로, 이런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 사회 혼란을 초래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정당하고 정의로운 행보로 이해되어야 한다.  162

시민은 단순히 통치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165

롤스에 따르면 시민 불복종이란 “법이나 정부의 정책에 변혁을 가져올 목적으로 행해지는 공공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양심적이긴 하지만 법에 반하는 정치적 행위”를 말한다.  ... 시민 불복종은 공개적으로 위법 행동을 함으로써 대중에게 문제 상황을 알린다.  166

멜빈 러너(Melvin Lerner)는 사람들이 공정세계 가설(just-world hypothesis)을 품고 산다고 말한다. 세상은 공명정대하고 사람은 누구나 열심히 한 만큼 결실을 맺는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게 믿는 이유는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어야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할 수 있다.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믿음은 필요하다.
문제는 부정의한 상황을 보고도 이 가설을 수정하지 않으려 할 때 생긴다. 세상이 언제나 공명정대하다는 생각을 바꾸는 대신 ‘피해자를 비난’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왜곡하여 이해하기 시작한다. 세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불행한 상황에 처한 피해자가 안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거나 잘못된 행동을 했기에 그런 일을 겪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공정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바로 그 믿음 때문에 오히려 세상을 공정하게 만들지 못하는 모순이 생긴다.  168-169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다수자와 소수자의 자유는 같지 않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자유론>에서 지적하듯, 다수자는 소수자의 의견을 거침없이 공격할 수 있다. 반면 소수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된다. 다수자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서 잘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사실상 침묵을 강요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정의는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누가 혹은 무엇이 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171

아이리스 영은 ‘차이’라는 단어의 용례에 주목한다. ‘다르다’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사용되지 않는다. 배제되고 억압된 사람들만이 ‘다르다’고 지칭되고, 주류인 사람들은 중립적으로 여겨진다. ‘중립’의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가능성이 펼쳐져 있지만, ‘다른’사람들에게는 몇가지의 정해진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결국 ‘다르다’는 말은 ‘서로 다르다’는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고정된 특정 집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차이’가 낙인과 억압의 기제로 생성되는 것이다.
마치 한국사회에서 ‘다문화’라는 말이 모든 사람이 다양한 문화를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문화적 소수자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의 차이란 주류 집단인 ‘한국인’을 기준점으로 삼아서 다르다는 것으로서, 사실상 ‘정상’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다양성을 강조하는 말로 종종 사용되는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란는 흔한 구호도, 여기서 ‘다름’이 주류 집단의 기준에서 ‘일탈’된 무언가를 지칭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틀림’을 전제하는 형용모순이 된다.
아이리스 영은 억압적 의미를 가지는 ‘차이’를 재정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류 집단의 입장을 보편적이라고 보면서 비주류만을 다르다고 표기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관계적으로 이해해 상대화하는 것”이다. 여성이 다르듯 남성이 다르고, 장애인이 다르듯 비장애인이 다르다고 보는 상대적인 관점이다. 따라서 차이는 본질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맥락에 따라 유동적이다. 휠체어를 탄 사람은 ‘언제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경기와 같은 특정 맥락에서 차이가 있더라도 다른 맥락에서는 차이가 없어진다.
이런 긴 논의는 결국은 식상할 정도로 당연한, 하지만 그래서 더 어려운 결론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모두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우리를 본질적으로 가르는 차이란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사람으로서 보편성을 공유하지만, 세상에 차별이 있는 한 차이는 실재하고 우리는 그 차이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184-185

차별이 구조화된 사회에서는 개인이 행하는 차별 역시 관습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186

불평등한 사회에서의 삶은 자신의 지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이런 사회에서는 지위의 유동성에 따라 개인의 만족감이 달라진다. 불평등이 있더라도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사람들은 안심한다. 하지만 그 편안한 지위에 오르기 위해 평생에 걸쳐 쏟는 수고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억울하면 성공해!”라는 흔한 말처럼, 열등한 지위에서 겪어야 하는 모욕과 무시를 피하기 위해 타인의 인정이 따라올 것이라 예상되는 성취들을 최소한이라도 확보하고자 한다.
불평등한 사회가 주는 삶의 고단함이다. 어느 정도의 지위에 올라가야 정말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아 만족스러운 상태가 될지도 알 수 없다. 결국 일정 지위에 올라간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인정받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려는 동기를 가지며, 이는 매우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다. 학식과 경험이 많으며 사회 변화를 이끌어가도록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저항 세력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186-187

불평등한 사회가 고단한 이유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도록 부당하게 종용하기 때문이다.  187

사회가 하나의 기준을 정하고 개인을 그 기준에 맞추는 이 동화주의 경향은 자유에 대한 근본적 침탈이 된다. 존 스튜어트 밀은 1859년에 발표한 <자유론>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우리 삶이 획일적인 하나의 형태로 거의 굳어진 뒤에야 그것을 뒤집으려 하면, 그때는 불경(不敬)이니 도덕적이니, 심지어 자연에 반하는 괴물과도 같다는 등 온갖 비난과 공격을 감수해야 한다. 사람들은 잠시만 다양성과 벽을 쌓고 살아도 순식간에 그 중요성을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188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불평등한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수고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불편함을 견딜 것인가?  188

차별을 둘러싼 긴장들은 ‘내가 차별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 좋겠다’는 강렬한 욕망 혹은 희망을 깔고 있다. 정말 결정해야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불평등과 차별을 직시할 용기가 있느냐는 것이다. 차별에 민감하거나 둔감할 수 있는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며, 너무나도 익숙한 어떤 발언, 행동, 제도가 차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가? 내가 보지 못한 차별을 누군가가 지적했을 때 방어하고 부인하기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경청하고 성찰할 수 있는가?  188-189

아이리스 영은 말한다. “무의식적이었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억압에 기여한 행동, 행위, 태도에 대해 사람들과 제도는 책임을 질 수 있고 책임을 져야 한다.” 여기서 ‘책임’이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을 성찰하고 습관과 태도를 바꾸어야 할 책임을 말한다.
그러니 내가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몰랐다” “네가 예민하다”는 방어보다는, 더 잘 알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성찰의 계기로 삼자고 제안한다.  189

아무런 저항 없이 평등이 진보한 역사는 없으니.  190

지금까지 차별금지법이 좌절된 실질적인 이유는 일각에서 차별 철폐라는 목적 자체를 부정하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거세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차별을 옹호하는 의견이다.  195

보편성은 차별을 잘 보이지 않게 만들어 은폐시키기도 한다. 보편적으로 모든 차별을 금지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차별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보이게 만들기 위해 차별금지사유를 명시할 필요가 있다.  197

차별금지법의 원칙은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No One Left Behind)”. 199

오래전에 법으로 성희롱을 금지했지만 무엇이 성희롱인지 알고 그런 행동을 하지 않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여전히 개선 중이다.  ... 모두가 평등을 바라지만,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에 관한 상징이며 선언이다.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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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파도를 만드는 사람은 나 자신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은 마음이 시키는 것이 있을 때에도, 몸이 시키는 일이 있음에도 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마음의 사용법과 몸의 사용법 앞에서 숱하게 주저해왔다. 혼자 헤쳐온 일이 거의 없는 생을 산다면 우리는 자주 난감해할 뿐더러 인생의 그 어떤 무늬도 만들지 못한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살면서 큰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거기서 더욱 성장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아주 작은 일로도 탈진 상태가 된다. 만일 그들 자신에게 의지력이 없거나 자신들의 책임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그들을 쓰러뜨리게 된다
라고.
당신이 혼자 있는 시간은 분명 당신을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어떻게 혼자인 당신에게 위기가 없을 수 있으며, 어떻게 그 막막함으로부터 탈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혼자 시간을 쓰고, 혼자 질문을 하고 혼자 그에 대한 답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닥쳐오는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은 그 외로움 앞에서 의연해지기 위해서라도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면서 써야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을 목숨처럼 써야 한다. 그러면서 쓰러지기도 하고 그러면서 일어서기도 하는 반복만이 당신을 그럴듯한 사람으로 성장시킨다. 비로소 자신의 주인이 되는 과정이다. 물론 자기 안에다 주인을 ‘집사’로 거느리고 사는 사람이다.
오늘밤도 시간이 나에게 의미심장하게 말을 건다. 오늘밤도 성장을 하겠냐고. 아니면 그저 그냥 지나가겠냐고.
인생의 파도를 만드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보통의 사람은 남이 만든 파도에 몸을 싣지만, 특별한 사람은 내가 만든 파도에 다른 많은 사람들을 태운다.

- 이제는 정말로 안녕일까
참 많은 여행을 했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제는 어떻게 어떤 여행을 하는가가 중요한 차례가 되었다.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짧은 여행을 즐기지 않는다. 여행을 하면서도 정주하거나, 여행을 하면서도 그곳 사람들 속에 흠뻑 젖는 것을 선호한다. 거미도 짧게 있으려고 집을 짓지 않는다.

- 나는 능선을 오르는 것이 한 사람을 넘는 것만 같다
누군가에게 산은 무의미일 수 있더라도 나에게는 명백한 의미다. 산을 넘을 때마다 생각한다. 힘겹게 산을 넘을 때마다 힘겹게 한 사람을 여행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산을 넘는 것 같지만 실은 ‘한 사람’을 만나는 과정, 그대로를 따라가보는 것이다. 한 사람을 아느라, 만나느라, 좋아하고 사랑하느라. 그리고 표정이 없어지다가, 멀어지다 놓느라...... 마치 산을 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가졌다는 것은 그 한 사람을 등반하여 끝내 정상을 보겠다는 것, 아닌가. 한 사람의 전부를 머리에 가슴에 이고 지고 오른다.

- 왜 혼자냐고요 괜찮아서요
고독을 모르면서 나이들 수는 없다. 혼자인 채로 태어났으면서 애써 고독을 몰른 체한다면 인생은 더 어렵고 더 꼬이며 점점 비틀린다. 고독의 터널 끝에 가보고 고독의 정점과 한계점을 받고 서서 웃는 자만이 ‘혼자를 경영’할 줄 아는 세련된 사람이 된다. ...
종교가 간절한 시대는 지난 것인지 사람들은 이제야 시간을 믿기 시작했다. 시간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고 시간이 우리에게 보상을 해준다고 믿기로 한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아무렇게나 쓰는 사람 말고 ‘혼자있는 시간’을 잘 쓰는 사람만이 혼자의 품격을 획득한다. ‘혼자의 권력’을 갖게 된다.
혼자 해야 할 것들은 어떤 무엇이 있을지 혼자 가야 할 곳도 어디가 좋을지 정해두자. 혼자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혼자 잘 지내서 가장 기뻐할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것도 알아두자. 이것이 혼자의 권력을 거머쥔 사람이 잘하는 일이다.

- 당신이 나를 따뜻하게 만든이유
어떤 이에게 말을 걸어야 할까. 말을 걸어야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세상엔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만 있다. 많은 사람들은 간단하게 말하는 법, 어떤 상황이 되어도 평균에만 맞춰서 말하는 법, 자기식으로 정리해서 남에게 옮기는 법에만 열심이다.

- 우리 서로가 아주 조금의 빗방울이었다면
‘여행뽕’이라는 말이 있다. 여행중에 우리의 허전함은 어떤 특별한 시간이나 사건을 기대하면서 맥없이 허우적대기도 하는데, 딱히 안 그래도 될 것 같은 상황에서 어느 한 사람(혹은 그곳 분위기)에게 무작정 빠져들고 마는, 그러나 막상 여행지에서 돌아와서는 그 감정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아무래도 약발이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화들짝, 여행뽕이라는 새로 만들어졌다는 그 말 앞에서 나도 모르게 동공이 열리고 마는 것은, 우리가 한때 같이 지낸 사람들과의 좋았던 시절은 그저 여행뽕이거나 ‘사람뽕’에 취한 상태에 불과한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다.

- 매일 밤, 여행을 마친 사람처럼 굿나잇
누군가와 여행을 함께하려고 하지 말라.
큰일난다.
갑자기 나에게 아무 일도 아닌 일로 붉어진 얼굴을 보이거나 어쩌면 짜증 섞인 소리로 다그칠지도 모른다. 그냥,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긋나고 만다.
잠자는 시간도 습관도 다르다. 먹는 시간도 먹는 취향도 다르다.
어떤 분위기를 좋아하고 어떤 분위기에 휩쓸리는지도, 그곳에서 꼭 하고 싶은 한 가지의 목적마저도 다르다. 아무래도 어긋나고 마는 것이다.
혼자는 왜 안된다고 생각하는지ㅡ 혼자여야만 가능한 단 하나가 있는데 그게 바로 여행이다.
그런데도 같이 가겠는가  외로움과 두려움을 조금 해결해보겠다고 나눠보겠다고, 굳이 누구랑 같이 가겠는가. 아니, 말리고만 싶다. 혼자하는 여행의 긴장이 쌓이면 쌓일수록 외로움과 두려움 따윈 집 안에 아무렇게 굴러다니는 고무줄 같은 게 되고 만다.
혼자 여행을 해라. 세상의 모든 나침반과 표지판과 시계들이 내 움직임에 따라 바늘을 움직여준다. 혼자 여행을 해라. 그곳에는 없는 사람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된고, 더군다나 여기에서도 들었던 똑같은 이야기 따위는 듣지 않아도 된다.
혼자 여행을 한다는 건 나를 보호하고 있는 누군가로부터, 내게 애정을 수형해주며 쓸쓸하지 않게 해주는 당장 가까운 이로부터, 더군다가 아주 작게 나를 키워냈던 어머니의 뱃속으로부터 가장 멀리, 멀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자신 만만히 믿었던 것들을 검은색 매직펜으로 지워내는 일이다.
세상 흔한 것을갖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남들 다 하는 것을 하고 싶은게 아니라면 나만 할 수 있고, 나만 가질 수 있는 것들은 오직 혼자여야 가능하다.
혼자 있는 그곳은 속깊은 문장을 알려준다. 내가 숱하게 화를 내야만 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공손하게 손을 모으게 한다.

- 그림으로 사랑의 모양을 그려보세요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사랑의 꼴도 다르다. 누구를 사랑하느냐에따라 내가 얼마만큰의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또한 누구를 어떻게 떠나 보냈는지가 남은 사람을 입체적으로 성장시킨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
....
요즘엔 사랑인지 아닌지 모르는 채 애매한 감정으로 만나고 있는 연인들이 많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그 색이 짙지도 않고 감정이 치열하지도 않은 채로 사랑하는 상태를 그들은 사랑이라 한다. 이 또한 시대의 색깔일까. 차오르는 육체의 감정을 해소시킬 대상을 만나는 것이거나, “사귀는 사람 있어요?” 같은 세상의 잦은 질문들에 대답하기 쉬운 상태에 놓이기를 바라는 것일까. 허전한 공백 상태를 못 견디는 세대의 특성이 시대의 물살을 맹물 같은 사랑으로나마 건너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 관계를 통해 위로는 받을 수 있을지라도 요긴하게 성장을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사랑에 온전히 몸을 박고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 사랑에 몸을 들여놓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줄기가 없으니 사랑의 양분이 가닿을 곳이 없는 형국이다.
사랑을 하느라 아파하는 것은 성장통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많은 질량의 고통을 포함하고 있는데다, 인류가 사랑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헤어나오질 못하는 것은 고통의 바닥에 고여 있는 단물에 빨대를 대고 있어서다. 이건 마치 성장주스와도 같다. 그 한 사람을 사랑했는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그 사랑을 자신이 많이 성장햇는가를 따져보는 것이다. 혼돈의 대륙을 통과하면서 방황하지 않은 사람에게 삶을 읽어내는 능력이란 없다.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성장은 시작된다.  
.....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다른 이름은 ‘생각한다’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이란 ‘생각한다, 생각한다, 생각한다, 생각한다의 연속선’이다. 오죽하면 ‘사랑’이란 말의 어원이 ‘사량’ 즉 ‘생각의 양’이라는 설도 있겠는가. 어떤 경우에도 한 대상이 생각이 나고, 어떤 상황에서도 한 사람을 향한 생각이 불쑥 모든 것을 앞질러 덮는 형편 혹은 경로가 사랑이다. 이 화학 작용 앞에서는 누구도 포로가 된다. 감당이 어렵다. 이런 반복을 통해 대상을 가까이 느끼려 하고 이내 가지려 할 것이므로 결국 ‘생각’은 표적을 거느린 ‘화살’인 것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줄자가 있다. 사랑은 이 줄자를 놓치지 않으려 하면서 좀더 가까운 거리로 당신다. 안간힘으로 당겨보지만 실제 느낌과는 다르게 좀처럼 가까워지지도 않는다. 우리가 사랑을 하고 있는 상태라면 그 거리가 몇 센티인들 적당하다고 믿겠는가.
사랑을 하려는 마음엔느 사랑을 받으려는 넓은 ‘대륙’이 차지하고도 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려니, 자기 자신을 증명해내는 일이 사랑이기도 하려니 그래서 그 욕망의 대륙은 점점 더 손을 쑬 수 없을 정도로 드넓어져 간다. 그러기에 지독히 앓을 뿐이다.
.....
사랑은 ‘정답’과는 거리가 멀다. 차라리 사라은 모든 답을 거부한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가장 유일하 ‘무엇’이 있으니 바로 ‘이것’ 아니겠는가. 사랑.

- 바람이 통하는 상태에 나를 놓아두라
그녀를 안 지 얼마나 됐을 때였을까. L은 독자로 만난 사이였다.
-이병률이 글을 쓰는 것은 뭐 때문일까요?
나는 얼른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글을 쓰는데, 그나마 사람들이 그 글을 읽어주는 건요?
역시 더 어려운 질문이었다. 다시 L이말햇다.
-그건 자기를 지키고 있어서예요. 자기를 어디로든 보내지 않고 묵묵히, 굳건히 자기를 지키고 있어서예요. 그걸 신이 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거고요.
그래서 내가 물었다.
-자기를 지키는 일은 어려운 일인가요?
쉬운 물음 같기도 했으며 물음 같지도 않았지만 나는 어쨌든 물었다. 어쩌면 내가 글이랍시고 쓰는 글을 절대 좋아하지 않기에 나는 물었는지도.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 아닌가요. 어떤 것에 의해 우리는 자신을 쉽게 잃어요. 하늘이 정해준 적당한 범위가 있는데 그걸 자꾸 벗어나려고 하고요. ... 우리 어쩌면 자신을 망치는 일이 더 쉬운지도 몰라요.
내가 숙연해진 것은 그 말이 당연한 말이어서가 아니라 CT 촬영을 해서라도 내가 정녕 그렇게 살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알고 있다. 나를 지키는 삶을 살 수 있을 때 내 머리 위에 늘 나를 지켜주는 새 한마리가 앉아 있을 거라는 걸. 하지만 아직, 내 머리 위에 새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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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신만의 길을 가라
신생아실 창문 앞에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엉엉 소리 내어 울며 기적같이 우리 품으로 날아 와준 아이와 첫 대면을 할 때만 해도, 학교의 변화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었다. 우리에게는 아주 먼 일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갔다. 아이들은 무겁다 아우성쳤지만, 그 가녀린 어깨를 짓누르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아이들을 땅 속으로 꺼져버리게 만들 것만 같았다. 이 세상은 엄마로 살기도 힘겹지만 아이로 살기도 버겁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이를 키우고 있는 이 어이없는 세상에 화가 났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이 세상에 아이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겁이 났다.
하지만 세사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적응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해하려 애쓰지 않았다. 더 이상 오지 않을 세상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내 아이를 위해서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야 했다 무슨 용기였는지, 아니면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겟지만 세상에 순응하기보다는 아이가 선택해서 갈 수는 있는 다른 길으 찾기 시작했다.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남과 다른 선택을 해야만 했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신만의 길을 걷다 보면 그 길 끝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예측하기 어렵다. 불안하고 두렵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자나갔고 지금도 지나가고 있는 잘 닦인 길이 아니다. 거칠고 험할 뿐 아니라 외로운 길이다. 하지만 누군가 성공의 길이라고 미리 정답처럼 보여주는 길에서 그 길을 쫓느라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아도 된다. 내가 선택한 길에서 나만의과정을 만들어가는 동안 ‘오늘’을 살 수 있다. 그것이 뒤에 오는 누군가에게는 또 하나의 다른 길이 될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가지 길을 가거라. 바보 같은 사람들이 무어라 비웃든 간에...”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중에서



언제부터였는지 우리는 누군가 가르치는 것을 배우는 것이 ‘교육’이라 생각해왔다. 그 누군가는 학교나 선생님으로 단정 지었다. 빨리 배울수록 좋다고 생각해서 ‘조기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아이들은 취학연령 훨씬 이전부터 유치원을 비롯해서 어린이집, 문화센터, 방문교육 등 다양한 방법으로 선생님을 만났다. 스스로 무엇인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이미 그것을 알아야 할 것으로 규정한 선생님들이 배워야 할 것으로 가르쳤다. 그렇게 아이들은 타고난 지적 호기심이나 욕구를 느껴보기도 전에 무언가 배우기 위해서는 선생님이 필요한 것이구나 착각하게 된다.

어린 나이에도 능동적인 사고보다 수동적인 사고로 자신을 억제하며 단체 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이 사회성 좋은 아이라 생각한다면, 또 그게 다 사회성을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더 논의할 의미가 없다.

합법적으로 아이들은 가정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분리되고 있다. ‘교육제도’ 또는 ‘복지제도’란 이름으로 부모들이 별 저항 없이 수용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남과 다르면 불안해하고, 강한 개성을 가지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을 만나면 불편해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는 조직에 적응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깊이 간섭하고 통제하며 착하고 말 잘 듣는 아이로 성장하길 바란다. 개성을 밟아버리고 자아 존중감마저 죽이면서.
하지만 지금은 자신만의 색깔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켜낸 사람들이 창의적인 일에서 상상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는 세상이다. 자신을 억누르고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기대치에 맞춰 살아야 하는, 말 잘 듣고 착한 사람으로 사회적 잣대의 성공을 이루었을 때 진심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지켜야 할 수많은 규칙 안에 자신을 가두고, 서둘러서 먼저 배우는 시스템에 아이들은 익숙해졌다. 그런데 그 규칙들은 대부분 아이 당사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단체생활에서 아이들을 원활하게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아이들은 자존감을 익히고 키우기도 전에 타고난 재능은 꺼내 보지도 못하고 ‘적응’에 익숙해진다.

영국 교육학자 켄 로빈슨(Ken Robinson)의2006년 테드(TED) 강연이다.
‘미래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미래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단서가 바로 교육에 있다. 우리는 아이들이 미지의 앞날에 대비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은 무한한 재능을 갖고 있다. 혁신을 창조하는 재능이 있다. 우리의 교육제도는 이러한 재능을 가차 없이 억누르고 있다. 이제 창의력을 읽기, 쓰기와 같은 수준으로 다루어야 한다.
아이들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수하는 것이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잘못하거나 실수해도 괜찮다는 마음이 없다면 신선하고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 어른이 되면 뭔가 실수를 할까봐, 틀릴까봐 걱정을 하면서 살게 된다. 우리의 교육제도는 실수라는 것을 살면서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교육을 통해 사람들의 창의적인 역량을 말살시키고 만다. 우리의 교육 체계는 학습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건 산업화의 산물이다.
피카소가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어린이들은 예술가로 태어난다. 하지만 자라면서 그 예술성을 유지시키는 것이 문제다.” 우리의 창의력은 자라면서 계발되기는커녕 있던 창의력도 없어진다. 교육이 창의력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아이들이 미래에 대처할 수 있는 교육을 하려면 창의성을 중요시하는 전인교육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아이 스스로 미래를 멋지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아무리 좋은 학교, 훌륭한 교사도 내 자녀의 잘못된 교육을 책임지지 못한다.

교육에 대한 마지막 책임을 질 사람은 부모 말고 없다. 또 당연히 그래야 하기에 학교라는 울타리에 내 아이를 교육시킬 최소한의 가치가 남아 있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2014년 9월 <SBS스페셜> ‘부모vs학부모’.
사회는 너무도 간단히 ‘자살했다’ 결론짓는다. ... 사회적 폭력, 그 폭력에 의해 아이들이 희생자가 된 타살이다. ...
후진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잘못된 시스템에서 버티기 위해 가쁜 숨 몰아쉬던 아이들이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어른들이 후진데 아이들이 폼 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정부부처가 다루고, 전문가가 고민하는 교육 문제의 대부분은 실질적인 ‘교육’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현실적인 ‘입시’에 대한 논의다.

학교 교육의 최종 수혜자 기업은 이 잘못된 시스템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학교는 가르치고 싶은 것만 가르치면서 그것이 진실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아이들의 ‘교육’을 관정하는 부처 관계자들은 홈스쿨링은 법적으로 명기돼 있지 않아 불법이라 한다. 초중등교육은 의무교육인데, 이외의 교육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명시해놓은 게 없어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불법이라는 것이다. 법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불법’의 의미가 법으로 정해진 사항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 테고, 그렇게 규제나 규정에서 정해놓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어겼을 때를 불법이라 하는 것 아닐까? 할 수 있는 것만 규정해놓은 법 덕분에 그 어떤 제도적 울타리 없이 허허 발판에 서 있었던 홈스쿨러였다. 홈스쿨러가 증가하는 지난 십 수 년 동안 홈스쿨을 제도화해서 법령 안에서 그들을 포용하고 관리하려는 노력에는 그 누구도 관심조차 주지 않았으면서 법적으로 명기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홈스쿨을 불법이라 단정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다양한 사회적 관계 맺음에 있어서 사람들은 대부분 상대가 착하기를 바란다. ‘착하다’는 것이 뭘까?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아야 하고 잘 길들어져 있어야 한다. 즉 기존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적자생존의 법칙에 순응하며 세상에 자기를 억지로 끼워 맞추기 위해 ‘사회성’이라 이름 붙인 길들여짐을 배우고 있다. 이미 그런 세상에 익숙해진 어른들은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다. 개중에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있다. 학교는 그런 아이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기존 질서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간단하고 단순하게 부적응자라고 낙인찍어 학교 밖으로 자꾸만 몰아낸다.

학교 안에 있어야 기를 수 있다고 믿어지는 그 ‘사회성’은 어떤 모습일까?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눈치 보지 않고 자신 있게 드러낼 수 있을까? 부정과 부패, 비리가 얽혀 있는 ‘패거리 문화’에서 당당히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까?

아이들은 가르치는 것만 배우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들의 타고난 재능인,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나 배우고자 하는 욕구를 밟아 뭉개는 잘못을 부모와 학교가 저지르지만 않으면 된다. ... 그냥 지켜보며 기다리기만 해도 아이들은 신기하게 자신이 관심 잇는 것을 너무 잘 찾아낸다. 아쉽다면 가끔 아이 손잡고 나들이 삼아 전시관이나 공연장을 찾아가 함께 느끼고 즐기면 그만이다.

아이를 믿지 못하는 것은 그만한 노력을 같이 해보지 않아서다.

‘학습자 스스로가 학습의 참여 여부에서부터 목표 설정 및 교육 프로그램의 선정과 교육평가에 이르기까지 교육의 전 과정을 자발적 의사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하여 행하게 되는 학습 형태. 자기주도학습은 특히 사회교육이나 성인학습의 특징적 방법으로 많이 활용된다. 그 이유는 학교 교육의 경우는 통상적으로 정형적 교육(formal education)의 성격상 표준화된 교육과정에 의해, 교사의 주도하에, 타율적인 교육이 실시되나 이와 달리 사회교육에서는 상대적으로 학습자에 의한 자율적 교육의 선택 폭이 넓은 비정형적이고 자율적이며 이질적이고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교육의 주 대상이 되는 성인 학습자는 아동 및 청소년 학습자와는 달리 자아개념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성숙하게 되므로 자기주도학습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이러한 자율적 학습이 보다 효과적인 교육방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주도학습에서 학습자는 단순히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학습 풍토하에서 수동적으로 학습에 임하는 객체가 아니다.’ - 네이버 지식백과, ‘교육학용어사전’
읽으면서 맘에 걸리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학교에 속한 아이들을 위한 학습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를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자동차에 비교해보자. 시속 100마일로 달리는 차는 첨단기업이다. 가장 속도가 빠르다. 비정부기구(NGO)는 90마일의 속도로 달린다. 요즘 그 수가 급증했다. 하지만 같은 도로에서도 느린 차들이 있다. 규제당국은 25마일이다.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다. 공공교육 시스템은 10마일 정도가 될지 모르겠다. 시속 3마일로 달리는 차도 있다. 정부와 관료주의다. - <부의 미래> 앨빈토플러

스스로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찾아내고 선별해서 자기에게 필요한 정조로 재가공하는 힘을 길러줄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학교는 아이들이 능동적을 지식을 찾아갈 수 있도록 제대로 된 교육과 피드백을 주어야 한다. 이런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자기주도학습’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내 아이가 학교에 속해 있는 지금, 이것을 학교로부터 기대할 수 없다면 가정에서라도 지도해주어야 한다. 허울뿐인 ‘자기주도학습’에 속지 말고 진정한 의미의 자기주도학습을 위해 너무 바쁜 하루를 보내야 하는 아이들에게 능동적 지식을 찾을 시간을 돌려주는 것을 우선으로 하면 어떨까.
우리 세대가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제 3의 물결’ 속에서 허우적거렸다면 우리 아이들이 사는 세계는 ‘제 4의 물결’의 시대가 될 것이다. 어쩌면 이미 접어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도무지 변화의 속도를 쫓아갈 능력도 의지도 없는 곳이 ‘학교’다. 교재 연구도 지도 방법도 19세기에 머물러 있는 ‘교실’에서 그나마 변화를 위해 애쓰지만 보이지 않는 벽에 부닥치며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20세기 ‘교사’들이 원래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태어나 그 속도가 낯설지 않은 21세기 ‘학생들’을 상대하는 곳이 학교다. 세상의 속도에도 아이들의 속도에도 맞추지 못하니 제자리걸음도 나아가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곳이 학교다. 그 학교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정부와 관료주의까지 더하면 그 안에서는 답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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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기독교와 불교에 밀리지 않는 교세를 자랑하는 대학교에 귀의한 가정들이 오늘도 입시를 향해 미친 듯이 내달리고 있는데 세 아들을 데리고 홈스쿨링이라니... 제 아이들은 어떤 미래를 살게 될까요? 사실 저도 궁금합니다. 8-9

우리 부부는 자녀교육 책을 읽고, 전문가의 수업에도 참여했어요. 자녀교육에 대해 배우러 다니면서 돈도 적지 않게 썼습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걸 깨달았어요. 정작 공부가 필요한 건 아들이 아니라 아빠였다는 사실을.  19

누군가는 한국의 교육 환경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19세기 학교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 학생들을 재우고 있다.”
한국을 수차례 방문했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한국 교육을 통렬하게 비판했지요.
“한국의 학생들은 하루 15시간 동안 학교와 학원에서 미래에 필요하지도 않은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54

건축가 유현준 씨는 우리가 ‘12년간 교도소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학교를 두고 한 말이죠. 건축의 관점에서 보면 학교와 교도소의 설계 원칙이 같답니다. 수감자(학생)를 고립시키고, 교도관(교사)이 손쉽게 수감자를 감시하도록 건물을 설계한답니다.   57

어쩌다 학교는 교도소처럼 학생들을 통제하는 기관이 된 걸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 잠시 <호모 데우스>의 작가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의 주장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역사 지식은, 우리의 현실이 필연의 겨로가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준다고. 우리는 종종 ‘현실이 원래 그런 거지. 어쩌겠어’라면서 비판 없이 현실에 순응하지요. 그러나 역사를 공부하면, 과거의 우연과 사건들이 누적되어 현실을 만든다는 걸 알게 됩니다.  59

공교육의 역사는 고작 200년이 조금 넘습니다. 1794년 프로이센이 세계 최초로 학교를 국가의 감독 아래 두는 공교육법을 제정했지요. 18세기 유럽 각국은 경쟁적으로 산업혁명을 시도하고 있었어요. 프로이센은 공업선진국 영국을 따라잡기 위해 과감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공교육을 통해 국민수준을 끌어올려 산업현장에서 필요한 노동자를 양산하기로 계획한 겁니다. 간단히 말해서 프로이센 공교육의 목표는 순종적인 공장노동자를 양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산업화 후발국가 일본, 한국 등이 프로이센의 뒤를 따랐지요. 학교가 양산한 순종적인 공장노동자들은 아시아 경제의 고속성장에 확실하게 일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암기위주 교유그 선다형 시험의 입시 전통이 자리를 잡았고요.
냉정하게 사실을 봅시다. 공교육의 목적은 뭘까요? 사회 유지와 발전에 필요한 시민을 양성하는 겁니다. 더 노골적을 ㅗ말하자면, 충성스러운 군인과 성실한 납세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죠.  60

“교육이란 결국 사실의 학습이 아니라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는 훈련이다.”
누가 말했을까요? 아인슈타인입니다.  66

우리 인정할 건 인정합시다. 우리 아버지들은 아이들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이지요. 이걸 인정해야 변화가 시작됩니다.
‘시간과 돈의 씀씀이를 볼 때 나는 정말 아이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나?’  103-104

진짜 꿈과 가짜 꿈을 구분하는 방법이요. 진짜 꿈을 꾸는 사람은 희생을 불사합니다. 반면, 가짜 꿈을 꾸는 사람은 희생을 하느니 꿈을 버리지요.  127

안타깝게도 한국의 교육은 방향을 못 정한 아이들에게 무조건 속도부터 내라고 재촉합니다. 일단 학생들은 모둔 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고 공부합니다. 나중에 뭐가 될지 모르니 일단은 모든 걸 준비하자는 심산인데, 그렇게 하면 나중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149

우리 모두 어떤 분야에서든 기본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 하지만 조급한 학부모들은 천천히 기본을 다지는 방식을 싫어합니다. 당장 성적이 나와야 하니까 학원과 과외를 선호하지요. 단지 소수의 용감한 사람들만이 느리더라도 확실하게 기본을 다집니다.  ...
손웅정(축구선수 손흥민 아버지) 씨는 교육을 대나무에 비유하더군요. 대나무는 땅 위로 솟아오르기 전에 5년간 조용히 땅속에서 뿌리를 내린답니다. 그리고 일단 뿌리가 확실히 자리를 잡으면 땅위로 줄기가 솟아나는데 하루에 50센티미터씩 자란다고 하네요.  164-165

유대인들은 오랜 기간 박해를 받으면서 이런 지혜를 얻었습니다. ‘부동산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유대인이 사회에서 배척당하면 땅이나 집은 쉽사리 빼앗길 수 있다. 그러니 박해를 피해 도망갈때 가져갈 수 있는 재산을 만들어라.’
유대인들이 교육에 열을 올리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머릿속 지식은 빼앗기지 않으니까요. 더불어 많은 유대인들은 위기의 순간에 쉽게 가져갈 수 있는 귀금속 모으는 걸 좋아했습니다. 다이아몬드 세공업에도 많이 달려들었고요. 지금까지도 전 세계 다이아몬드 거래의 큰손은 대부분 유대인들입니다.
“부다르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 위에  세워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세 아들이 남을 짓밟고 돈을 버는 사랆이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부자들의 낙원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소모품 또한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유대인의 자녀교육 지침 하나를 가슴에 꼭 담고 살아갑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직업에 필요한 기술을 가르치지 않으면 결국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240-241

자본주의가 청소년들의 각성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철없는 소비자를 제일 좋아합니다. .. 마구잡이 소비는 기업의 성장과 발전의 동력이거든요. ... 자본주의는 남이 준 돈을 받아 소비생활을 누리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242

‘청소년’이라는 말 자체가 산업시대 이후에 등장했다는 설도 있어요. 과거에는 남자아이가 10대에 이르면 아버지를 따라 일터에 가서 기술을 배웠고, 여자아이들은 엄마 곁에서 가사 기술을 익혔지요. 그러다가 산업화시대에 공교육이 생기고, 학교는 아이들을 몇 년간 붙잡아 두고 일터로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애매한 아이들을 부를 새로운 단어가 필요했던 거지요. ‘어린이’나 ‘어른’이 순우리말인 것과 달리 청소년(靑少年)이 한자어인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나중에 만들어진 단어라는 거지요. 10대를 뜻하는 영어 Teenager는 13세에서 19세까지의 나이를 뜻합니다. Thirteen(13)부터Nineteen(19)까지 숫자에 모두 Teen이라는단어가 들어 있다고 해서 1920년대에 비로소 만들어진 말입니다.  243

일등은 주어진 과제를 검증된 방법으로 해내려고 애씁니다. 그러니 일등에게 암기와 연습을 강조하고 독창성은 기대하기 어렵지요. ...
일류는 새로운 과제를 스스로 찾아냅니다. 당연히 검증된 방법이란 게 없으니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지요. 실패는 당연한 과정이고요.  262

경졍작가 세스 고딘(Seth Godin)은그의 책 <린치핀>에서 “우리가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학교와 시스템에 의해 세뇌되기 때문”이라고 단언합니다.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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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아이를 아이답게 키우는 것이 아이를 위한 일임을 우리는 잘 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아이를 아이답게 키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늘 보고, 듣고, 느낀다. 두렵다.  5



안타깝지만 지금의 학교는 아이를 관리하는 곳이지, 결코 아이의 삶을 존중하고 아이가 최선의 길을 가도록 도움을 주는 곳이 아니다.  22

고등학교까지만 우수한 나라. 문제 풀이에 능해 국제수학올림피아드(IMO)까지는 잘하지만 수학자는 없는 나라. 이런 상황을 모두 다 비판하지만 정작 자신의 아이는 똑같이 그 시스템 안에서 돌리며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나라. 얼마나 가슴 아픈 현실인가.  26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핵심은 사회 인식이다. 즉,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건 사회에 대한 옳고 그름의 인식이다. 그 인식은 다른 누군가의 의견이 아니라 스스로의 경험에서 나온 인식이어야 한다. ...
사회인식이란 남의 경험이 아닌 자신의 경험을 토앻 우리 사는 사회가 어떠한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
요즘 보면 각자 자기주장이 강한 듯 보인다. 사회인식이 확고한 듯 보인다. 하지만 찬찬히 대화를 나눠보면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처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더 구체적이고 광범위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하면 말문이 막히곤 한다. 인식이 정립된 상태에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부실한 인식을 통해 말을 하기 때문이다. ... 이런 잘못된 습관이 만연해 있으니 사회를 보는 인식이 약화되는 것이다.  27-28

사회가 그래서 나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내 아이만 뒤처지게 만들 수 없다고. 결국 모두 앉아서 영화를 보면 편한데, 모두 서서 영화를 보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사회를 바꾸기는 매우 힘들다.
그럼 방법은 없는가? 방법은 스스로 변화하는 것뿐이다. 먼저 내가 올바른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올바른 인식을 내 아이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때로는 용기가 필요한 때가 있다. 그때 용기를 가지고 부딪칠 수 있어야 한다.  28-29

이제 인식을 전환하자. 학교는 의무가 아닌 선택이다.   46

홈스쿨링에 관심 있는 부모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제가 할 수 있을까요?”다. ...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아이를 키울 때 정밀기계를 다루듯이 키우지 않는다. 또한 아이를 키우는 데 어떤 조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더불어 늦는 것은 없다. 물론 빨리 실행하면 좋은 것들이 많지만 늦었다고해서 아이를 잘못 키우는 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걱정을 덜어버리는 일이 우선이다.
아이는 이성과 감정을 가진 인간이다. 혹여 우리가 잘못된 교육방식으로 가르치더라도 시간이 지나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 충분히 좋은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 바로 아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다.  46-47

‘좋은 아이’란 부모가 원하는 모습대로 자란 아이를 의미하진 않는다. 아이가 가진 모습 그대로 올바로 자란 아이를 의미한다. 좋은 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가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 부모가 편견에 사로잡히고 열등감에 빠져 있다면, 아이가 편견과 열등감 없이 자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
어떤 부모가 좋은 부모일까? 아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기본이다. 기본에 한 가지를 더해야 한다. 바로 아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눈이다.  49-50

부모가 노력한다면, 아이를 위해서 기꺼이 스스로 배우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훌륭한 교사가 될 수 있다.  62

많은 아이들은 딱히 재능이 보이지 않는다.  ...
기다려야 한다. 당장 찾지 못한다고 해서 인생이 잘못되는 게 아니다. 대기만성, 아직 보이지 않지만 시간을 가지고 기다리다 보면 재능도, 꿈도 찾게 되는 시기가 온다. 섣불리 재능이라고 해서 무언가를 시작했다가 아이만 상처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다면 기다리자. 아이의 재능 없음을 인정하자.  82

부모도 경험을 통해 안다. 하지만 세상살이의 고단함 때문인지 완주보다는 메달을 원한다. .. 부모는 각성해야 한다. ... 분명 메달보다 소중한 것은 완주이다.  101

어떻게 해야 아이를 온전히 키울 수 있을까? 아이에게 인생의 훈련은 시키되 가르쳐서는 안 된다. 즉, 아이가 먼저 지금 시기에 필요한 것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153

홈스쿨링은 가치에 따른 단점이 분명 존재한다. ... 만약에 아이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간다는 생각이 들면 어덯게 해야 할까? 그때는 지체없이 일단 중단해야 한다. 그것이 홈스쿨링이든 학교든 마찬가지이다. 아이가 거부하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강요하면 깨끗한 도화지에 지울 수 없는 진한 선을 긋는 것이다. 그 선은 아이가 평생 지고 가야 하는 아픔이 된다.  277

번아웃증후군은 의욕적으로 일하다가 목표를 이루거나 이루지 못하거나, 일을 끝내거나 간혹 일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며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번아웃증후군은 새악보다 우리 주위에 가까이 있다. 누군가는 슬럼프 정도로 생각하고 금방 이겨내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번아웃증후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많은 시간을 무기력하게 보내는 경우도 있다.  279

홈스쿨링을 하다가 조금씩 긍정적인 성과가 보이면 더 나은 결과를 내고자 무리하고 싶을 때가 여러번 온다. 그때 마라톤을 뛰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오버페이스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마라톤이 끝났을 때 어떤 결과가 나든 다시 마라톤을 뛸 수 있다.  281

어떻게 하면 .. 번아웃증후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일단 쉬어야 한다. 어느 누구의 간섭도, 눈치도 받지 않고 편하게 쉬어야 한다. 그래야 회복할 수 있다.  ...
잘 쉬었다면 그것으로 끝나지 말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 새롭게 열정이 생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그동안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며 다양하게 경험해야 한다. 그를 통해 새롭게 열정이 생기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찾았다면 이번에는 천천히 뛰기 시작하면 된다.  282-283

우리 사회는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다. 사람들은 예전보다 사회 문제에 관심도 많고, 그에 대한 옳고 그름을 논하는 등 사회인식이 강해진것처럼 행동한다. 사실, 사함들이 더 똑똑해진 듯 보이지만 그것이 ㅣ경험을 통해서 얻은 똑똑함은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생각을 자기 생각이라고 믿는다. 그러다 보니 경험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키우려고 하지 않은채, 댓글만 쫓아다니는 상황이 벌어진다.  290

경험을 통한 사회인식. 그것만이 살길이다. 뼈저리는 아픔 없이 얻은 사회인식은 분명 내 것이 아니다. 내 생각이 아닌데 내 생각인 줄 알고 살다 보면 괴리감이 발생하고 늘 어딘가 모르게 찝찝함을 느낀다. 내 생각대로, 내 경험에 근거한 생각대로 살아야 깨달음이 올 때 바꿀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남의 생각대로 살면 새로운 상황에 부딪쳤을 때 그저 기존의 생각은 버리고, 또다시 새로운 생각을 줍는다. 즉, 문제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생각을 줍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한마디로 생각 없는 사람이 된다. 모든 일에 주위의 눈치를 살피는 사람이 된다.
내 경험에 근거한 사회인식이라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었을 때 누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깨달음이 있으며 때로는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때로는 눈에 불을 켜고 싸울 수 있다.  291

인생에 늦는 건 없다. 짧은 순간이라도 아이가 자신의 인생을 살았다면 행복할 것이다.  294

노련한 부모는 아이에게 어떻게 도움을 주어야 할 지 알고 있었다. ... 수없이 많은 삶의 경험을 자신의것으로 녹여낸 부모가 노련한 부모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쓸데없이 아이와 함께 마라톤을 뛰고 있는 부모는 노련한 부모가 아니다.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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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선생님은 불합리한 사회에 맞서 싸우려면 두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먼저 이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 사회가 원하는 실력이 없으면 이 사회에 맞서 발언하고 행동할 기회 자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유념해야 할 한가지는 사회가 인정한 본인의 능력이 당연히 보잘것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 ‘보잘것없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홍세화 선생님은 이것이 쉽지 않은 싸움이라고 말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갖추면 안주할 수 있고, 안주하려는 자신을 합리화하다 보면 사회에 대한 시각 또한 비판적이기보다 긍정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초심을 망각한 재 그저 현실에 순응하며 개인의 안위만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지난한 싸움을 버텨낼 수 있단 말인가? 홍 선생님의 충고를 계속 이어진다.
‘그래서 지금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物神)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성의 항체를 기르라는 것이다. 그대의 탓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의 인간성은 너무 오염되었다. 물신은 밀물처럼 일상적으로 그대를 압박해올 것이며, 그대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물질의 크기로 비교당할 것이다. 그것에 늠름하게 맞설 수 있으려면 일상적 성찰이 담보한 탄탄한 가치관이 요구된다. 그리고 자기 성숙의 모색을 게을리하지 말라. 자아실현을 위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다. 그리고 성찰 이성의 성숙 단계가 낮은 사회에서 그대는 자칫 의식이 깨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에 앞서 오만함으로 무장하기 쉽다. 만약 그대가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면 죽는 순간까지 자기 성숙의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모두 쉬운 길을 택한다. 그러나 삶은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그 소중한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자유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물신의 품에 안주할 것인가. 다시금 강조하건대, 그것은 일상적으로 그대를 유혹하는 물신에 맞설 수 있는 가치관을 형성하는가와 자기 성숙을 위해 끝없이 긴장하는 가에 달려 있다.’ - <생각의 좌표>중에서  17-18

“조급해하지 말아야 돼. 초조함은 남과의 비교에서 비롯되는 거야. 남은 중요하지 않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얼마나 다른지, 또 내일은 얼마나 발전할 것인지 나 자신을 비교하고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지.”
“실패하는 것이 중요해.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아주 멋지게 실패하는 거야. 더 멋들어지게 실패하기 위해서는 더 많이 부딪쳐보아야겠지?”(홍세화와 저자의 만남에서)  22

종종 사람들이 언스쿨링에 대해 물어볼 때 부모님은 이런 답변을 내놓곤 한다.
‘언스쿨링은 배움의 주체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아이들 자신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이들은 각자 다양한 잠재력과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아이들 자신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부모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부모들은 끊임없이 호기심을 불어넣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면서 아이가 스스로 터득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돕기만 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무언가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나타낸다면, 부모는 아이가 그쪽으로 더 가까이, 더 깊이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거죠. 기회를 열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기에 푹 빠져들어 많은 것들을 즐겁게 배우게 된답니다. 학습의 주체가 되어가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언스쿨링에서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진학이 최종적인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단순한 ‘진학’보다는 평생 무엇을, 왜, 어떻게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인생의 소명을 찾아나가는 ‘진로’가 더 더욱 중요한 것이지요. 부모는 아이가 본인의 진로를 탐색하는 과정을 조용히 옆에서 돕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진학이 필요하다면 차후에 대학을 선택해서 공부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대학은 필수 조건이 아니라 선택 사항일 뿐입니다.’
언스쿨링은 기존 학교로부터 단호하게 돌아선다. 배움은 교실에서만, 교과서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언스쿨링은 온 세상이 학교요, 모든 사람이 선생님이라고 말한다. 어디에 가든,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보든, 거기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그렇게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관계와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진정한 배움이라는 것이다.  52-53

사진작가 배병우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면서는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이 여행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예술은 절대로 교육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 개의 길을 여행하고 만 권의 책을 읽으면 예술가가 될 수 있습니다.”  155-156

이제는 공부의 정의를 바꿔야 한다. 1등이 되는 법이 아닌 부끄러움을 아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인간으로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 정도(正道)를 익혀야 한다.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성찰하는 법을 배우고, 주입식 교육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공부할 권리도 마땅히 누려야 한다. 그리하여 죽은 공부가 아닌 살아 있는 공부, 복종하는 공부가 아닌 스스로 길을 찾아나가는 공부가 이루어져야 한다.  255

사람들의 인식이 변해야 제도도 바뀔 것이다. 그러나 어디 사람들이 쉽게 생각을 바꾸겠는가. 시험으로 배움을 측량하고, 성적으로 공부를 평가하려는 행위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럼에도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는 무엇인지, 내 삶에 필요한 공부는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평생 나만의 공부를 지속해나갈 수 있다면, 공부를 통해 배움을 얻을 수 있다면, 배움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다면, 배움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다면, 마침내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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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그것은 하나가 되었다가 또다시 분리되는 행위다. 가끔 두렵기도 하다. 글이라는 자신의 공간을 내놓는 일은 자신의 성기를 내놓는 것보다 더 폭력적이다. .. 단어와 문장을 견고하게, 꿈쩍이지 않는 문단을 만드는 것.

나는 삶이 글의 ‘소재’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글을 위한 ‘미지의 기획’을 원한다.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라는 이 생각은 형식조차도 실제 내 삶에 의해 부여된 텍스트를 의미한다. 나는 우리가 쓰고 있는 이 글을 절대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삶으로부터 나왔다. 다수의 조각들로 이뤄진-그것 자체도 아직은 알 수 없는 M의 글의 조각들에 의해 부서지게 되겠지만- 사진으로 쓴 글 역시 마찬가지로 다른 무엇보다 이 현실을 담은 ‘최소한의 이야기를 만드는’ 기회를 내게 준다.

뇌로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어쩌면 진짜 쾌락을 모를 수도 있다.

우리는 ‘순간’에 머무른다.

M의책을 펼쳤다가, 젊은 여자가 어린아이와 나이든 여자와 함께 있는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 젊은 여자가 그의 전 부인이란 것을 깨닫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관계 초반에 M은 그녀에 대해 “몸은 예쁜데 얼굴은 그저 그렇다”라고 말했었다. 이 사진들 앞에서 내 첫 번째 반응은 승리감이었다. 그녀의 코, 턱, 디테일한 부분들을 살피며 말했다. “그런데 이 여자 못생겼잖아!” 그리고 그 여자를 완벽한 이미지로 만들어내서 스스로 열등감을 느낀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 뒤로는 슬픔이 나를 사로잡았다. 내게 최악은 이런 못생긴 여자를 M이 사랑했다는 사실이었다. 내게는 그녀를 향한 그의 사랑이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나는 차라리 그녀가 아름다웠으면 했다. 그 여자를 향한 그의 애착이 평범하면서도 객관적인, 외모라는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감정의 언어를 ‘믿으면서’ 사용할 줄을 모른다. 시도를 해봤지만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아는 것은 사물의 언어, 물질적인 흔적의 언어, 가시적인 언어다. (그 언어들을 단어로, 추상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을 멈추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사진을 바라보고 묘사하는 것이 그의 사랑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이 아니라, 명백한 것들 앞에서, 사진을 구성하는 물질적인 증거 앞에서, 내가 절대 답을 찾을 수 없는 ‘그는 나를 사랑할까?’’라는 질문을 피하는 방법인 것 같다.


-옮긴이의 말
생(生)을 위해 싸워나가는 사람(아니 에르노), 연인이 치러내는 전투를 통해 죽음을 배우는 사람(마크 마리), 우리는 그들이 무음으로 주고받은 대화를, 비밀스러운 몸짓들을, 어느 날 아침, 행위가 지나가고 폐허처럼 남겨진 것들을 담은 사진 속에서 알아차린다. 이곳에서 지난밤의 사랑과 욕망은 중요치 않다. 결국에는 사라지고 말 모든 것들을 최선을 다해 붙잡는 그들의 ‘시도’만이 의미를 갖게 될 뿐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그들의 계획에 동참하고 만다. 육체가 빠져나간 이 에로틱한 공연의 관객으로서, 글로 쓰인 사진을 눈과 손으로 더듬으면서, 살과 뼈가 없이 이뤄지는 에로스를 받아들이면서, 단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시간을,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사진으로, 글로 뛰어넘기를 어느덧 소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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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만한 삶이란 쓰는 삶이다.

- 막힌 글을 끝까지 쓰는 요령
1 로그라인(logline) 써보기
‘로그라인’이란 영화 또는 드라마의 전체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한 글을 뜻한다. 나는 글이 정리되지 않을때면 로그라인을 써본다.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한 줄로 써보는 것이다. 발레 강사 이야기를 글로 옮기기로 마음먹었다면 우선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로그라인을 써보고, 그 중 한 가지를 선택해 글을 수정하거나 다시 작성해보는 게 어떨까.
* 내가 경험한 가장 박력 넘치는 예술 ‘발레’
* 내가 만난 가장 박력 넘치는 여자 ‘발레리나’
* 불혹(선배나이), 발레를 배우기 가장 좋은 나이
이렇게 로그라인을 써보면 발레, 발레리나 강사, 그리고 불혹의 나이로 주제가 확연히 드러나므로 글을 쓰기도 쉬워진다.
2 장르와 분량에 신경 쓰지 말 것
3 막히면 일단 관두기
어쨌든 쓰는 시간을 자주 갖는 게 중요하다. 쓰다가 막히면 다른 이야기를 쓰면 된다. 그렇다고 쓰던 이야기를 완전히 버리라는 게 아니다. 글은 김치 같아서 묻어두고 보관하는 기간에 따라 다른 맛을 낸다.

이야기는 쥐어짜는 게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회사를 퇴사하고 떠난 여행, 큰돈과 긴 시간을 투자한 취미,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도전 등. 다양한 경험과 충분한 투자는 신선한 글감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도움이 될 뿐’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글감은 경험이 많은 사람은 물론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에게도 주어진다. 쓸 만한 이야기는 낯선 곳에 있는 게 아니다. 가깝고 익숙한 곳에서도 발견된다.
‘내 주변에는 글감이 없던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대화 방식부터 바꿔보자. 일상적인 대화일지라도 더 묻고 잘 들어보자. 그러니까 질문과 경청에 신경 써보자는 얘기다.

발견된 이야기를 글로 옮길 때도 인터뷰가 필요하다. 이번에는 나 자신과 하는 질의응답이다.
“이 글감이 내게 인상적인 이유는?”
“이 글로 전달하고픈 나만의 메시지는?”
“내가 전달할 메시징 공감할 사람은?”
자신과의 질문이 필요한 이유는 에세이가 기사, 일기와 다르기 때문이다. 기사ㅏ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반면 에세이는 주관적이다. 쓰는 사람의 감정, 생각, 철학이 묻어난다. 일기와 달리 에세이는 읽히기 위한 글이다. 내 글이 독자를 설득하고 공감시킬 수 있을지 냉정히 평가해봐야 한다.
우린 모두 같은 세상을 사는 것 같지만, 저마다 각각 다른 세상을 품고 살아간다. 익숙한 사람에게도 질문을 던지다 보면 의외의 면을 엿보게 된다.

요약은 글 약이다. 요약을 잘하는 사람이 말도 잘하고 길도 잘 쓴다. .. 요약 글은 퇴고가 많이 필요한 글이기도 하다.

- 따라 하면 시간이 단축되는 요약법
1. ‘기’와 ‘결’을 정하고 쓰기
문장 구성 4단계인 기승전결 중 시작인 ‘기’와 끝인 ‘결’을 미리 정하자. 어떤 이야기로 시작에서 어떤 결론으로 끝날지 결정해놓으면 쓰기가 한결 편해진다. 마치 글 내비게이션과 같다. 출발 지점과 도착 지점을 찍고 운전하면 어떻게든 원하는 장소로 갈 수 있고, 길을 잘못 들어섰으 ㄹ때도 새로운 길이 안내된다. 시작과 끝이 정해진 글은 맥락을 벗어날 확률이 낮다.
2. 참고하지 말고 비교하기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참고하는 건 좋은 습관이다. 신문 기사를 예로 들겠다. 같은 소재라도 길고 상세하게 정리된 기사가 있고, 이를 바탕으로 짧게 정리된 기사도 있다. 두 가지 모두를 읽어보면 요약하는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가장 좋은 건 일단 내가 먼저 쓰고 다른 사람이 같은 주제로 쓴 글을 비교해보는 것이다. 요약한다는 건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다. 쓰는 일을 미루고 남이 쓴 좋은 글만 부러워하면 백지상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3. 내 감정은 넣어둘 것
슬펐다. 아팠다. 불행했다. 기뻤다. 무섭다 등. 요약글에서 자신이 느낀 검정은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 요약글 핵심은 ‘전달’이다. 이야기의 줄거리, 사건의 개요, 주제가 쉽게 전달되도록 써야 한다. 그 글을 읽고 어떻게 느낄지는 독자 몫이다. 장황하게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음에도 독자가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면 대성공이다.

- 잘 읽히지 않는 글의 특징
1. 처음부터 끝까지 멋지게 모호한 글
간혹 좋은 문장에 대해 오해하는 분들이 있다. 꾸며질수록 멋진 문장이라 믿는 것이다. 이는 수식어 과잉, 조사 과잉, 감정 과잉 등으로 이어진다. 무엇이든 과하면 부담스럽다. 특히 처음부터 끝까지 잔뜩 힘을 준 글은 읽기 힘들다.
‘회색빛이 감도는 하늘에서 부슬부슬 비가 쏟아져 내리는 날이면, 텅 빈 내 마음에는 황량한 사막처럼 쓸쓸한 고독감이 밀려와서 처절하고 비참하게 외로워진’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다. 이 문장은 ‘비 오는 날은 좀 외롭다’ 정도로만 써도 의미가 잘 전달된다. 문장에도 힘 조절이 필요하다. 강, 약, 중간, 약, 강, 약~
2.  의식의 흐름대로 써서 이해할 수 없는 글
써보지도 않고 고민만 하는 것보다 일단 의식의 흐름대로라도 쓰는 걸 추천한다. 그러나 그렇게 풀어낸 글을 사람들에게 바로 보여줘서는 안 된다.
글쓰기가 감정 치유에 도움이 되는 이유는 ‘퇴고’에 있다. 퇴고는 단숞히 맞춤법을 확인하고 글자 수를 맞추는 작업이 아니다. 머리와 마음으로 쏟아낸 텍스트를 다듬고 정리하는 일이자 남들도 내 마음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타인에게도 잘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면 자신부터 냉정한 독자가 되어야 한다.
‘주제가 명확한가?’
‘문장이 매끄러운가?’
‘불필요한 문장은 없는가?’
글을 읽고 질문해보자. 독자가 되어 내 글을 읽어봐야 한다. 일기는 내 감정을 기록하는 글이지만 에세이는 내 감정을 전달하는 글이란 사실을 잊지 말자.
3. 맥을 짚을 수가 없는 글
사건, 등장인물, 주제가 중구난방인 경우이다. 쓰다 보면 엉뚱한 길로 빠질 때가 있다. 특히 애정이 가는 부분은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조연 또는 엑스트라일 뿐인데도 마음이 쓰여 과하게 집중하여 묘사한다. 여행기에서 사건과 관련 없는 일행들까지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명하는 식이다. 보통 사건에 대해 가능한 한 자세히 설명해야 독자들이 상황을 더 쉽게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받아들여야 하는 정보가 많을수록 독자는 글을 읽는 속도가 느려지고 이해하기도 어려워진다. 불필요한 인물, 정보, 기억, 감정은 과감하게 가지치기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여행은 세 명이 갔더라도, 이야기에 두 명만 등장한다면 나머지 한 명은 아예 생략하는 편이 글의 몰입도나 완성도에는 훨씬 낫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것처럼, 이야기와 관련 없는 부분은 장황하게 보여주면 맥을 짚을 수 없는 글이 되고 만다.

- 읽기 좋고, 듣기도 편한 글을 쓰는 법
1. 쉬운 단어 위주로 사용한다
몇 번이나 강조하지만 글 속에 어려운 단어는 최대한 줄이자. ‘잘 쓰는 사람’은 어려운 단어를 남발하는 대신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써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자기 글을 읽도록 만든다.
2. 문장은 되도록 짧게 쓴다
문장이 길고 장황하면 쓰는 사람 생각도 엉키고, 읽는 사람 머릿속도 어지럽다. 무조건 짧은 문장이 옳은 건 아니다. 그러나 ‘빨리빨리’를 외쳐대는 한국인 특성과 변화된 읽기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 짧고 간결하게 쓰는 연습이 아직은 글쓰기 기본이다.
전체 분량도 길지 않은게 좋다. 책 <1150년 하버드 글쓰기 비법>에 따르면 에세이는 3분 안에 읽히는, 1,500자 분량이 적당하다. 물론 요즘에는 3분도 집중하기 힘들다며 더 짧은 글을 선호하는 사람도 많아지는 추세다.
3. 뉘앙스가 아닌 메시지를 담는다
단어가 쉽고, 문장이 간결하고, 분량도 가벼운데 다 읽고 나면 아리송해지는 글이 있다. 이런 글을 대부분 작가 자신도 어떤 이야기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쓴 글이다. 주제가 분명하지 않은 글이다.
잠시 직장에서 경험한 비효율적인 회의를 떠올려보자. 회의는 의견을 주고받으며 대안을 찾는 시간이다. 한데 문제만 지적하고 타박하다가 끝나는 회의가 허다하다. 이런 회의에 참석하고 나면 기분이 나빠진다. 잘못을 지적받아서이기도 하지만, 쓸데없는 시간 낭비로 업무가 지체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다 읽었는데 메시지가 없으면 읽은 사람은 허무해진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몇 가지 고전적인 ㄱ르쓰기 구성 방법이 존재한다.
‘’기승전결’ 형식으로 구성하기’
‘’의견제시- 이유와 사례- 의견 강조’ 형식으로 구성하기’
독자의 시간을 뺏는 글이 되지 않으려면 ‘맥락과 메시지가 분명한 글’을 써야 한다. 자신이 쓴글을 다시 읽어봤는데 주제가 잘 보이지 않는 다면, 위와 같은 형태로 구성을 바꿔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 외에도 잘 읽히는 글에는 쉼표를 적절히 사용한다든가 중복되는 말과 단어가 없도록 신경을 썼다거나 문체와 말투의 리듬이 잘 어울리도록 썼다는 특징이 있다.
글의 최종 목표는 글쓴이 내면에 있는 감정과 생각을 독자 내면과 교감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 글맛을 살리는 묘사의 예시
1 집안은 조용했다 - 똑똑. 집 안은 수도꼭지에서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 틀릴 뿐이었다.
2 올 여름은 유난히 덥다 - 일주일 내내 폭염 재난경보 메시지가 왔다. 이런 여름은 처음이다.
3 그의 첫인상은 무서웠다 - 만약 그를 어둡고 한적한 골목길에서 만났덛라면 단단히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사실과 느낌을 덧붙여보자. 진부한 표현보다 상세한 묘사가 나을 때가 있다. 묘사는 독자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줘 공감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 알아두면 도움이 되는 퇴고법
1. 처음부터 스토리표를 만들어두기
그런 글이 있다. 쓸 때는 스스로 감동할 정도로 만족스러웠는데, 나중에 읽을 때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글. 이런 글은 소재나 주제가 적절하지 않았다기보다는 구성이 무너진 경우가 많다.
긴 글을 쓸 때는 ‘스토리표’를 만들 것을 권한다. 광고나 영화를 제잘할 때 쓰는 스토리보드와 비슷하다. 스토리보드란 아이디어나 대본을 영상으로 옮기기 위해 그림으로 정리한 계획표다. 대충 그린 만화책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그림을 그리라는 건 아니다. 엑셀이나 A4용지에 표를 만들어 어떤 순서로 내용을 작성할지 순서대로 정리해보자. 글을 넣어도 좋고 그림이나 낙서도 좋다. 완성된 표를 키보드 옆에 두고 글을 쓰면 쓸데없이 내용이 길어지거나 주제를 벗어나는 걸 막을 수 있다.
2. 문장은 짧게 줄이기
문장을 짧게 쓰라는 얘기를 또 한다. 지겨워하지 마시길. 앞으로 글쓰기 관련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게 된다면 이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듣게 될 테니까.
‘주어+목적어+동사’로 이뤄진 간결한 문장을 쓰면 득이 되는 게 뭘까. 일단 독자가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다. 우린 디지털 시대에 살고, 사람들은 주로 작은 휴대전화화면으로 글을 읽는다. 그렇기에 문장은 더욱 간결해져야 한다. 군더더기가 될 수 있는 형용사와 부사를 덜어내고, 쉼표와 마침표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나는 지나치게 쉼표를 남발하는 탓에 퇴고할 때 문장을 많이 고친다. 그러나 쉼표 덕분에 단어를 덩어리채 넣고 빼면서 전체 의미를 바꾸지 않고 빠르게 수정하는 편이기도 하다.
3. 문단 나누기
A4용지한 면에 10포인트 크기의 글자로 빽빽하게 채운 글이 있다고 하자. 이런 글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예상하건대 읽고 싶지 않다는 사람 수가 압도적일 것이다. 이것은 퇴고할 때 ‘문단 나누기’와 ‘행갈이’도 신경 써야 하는 이유다. 단순히 여백을 만들라는 게 아니다. 다 쓴 글을 입으로 읽어가며 문단과 행을 확인해보잔 얘기다. 자신만의 문체는 단어 선택이라든가 표현 외에도 퇴고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만들어지기도 한다.
한 인터뷰에서 박민규 작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독특한 행 띄우기와 문단 나누기, 숨 가쁜 쉼표 등. 과거 파격적인 문제를 보여줬던 그엥게 한 기자가 “작가님 글은 마치 랩 같은데 쓸 때 소리 내서 읽어보세요?”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읽어보죠. 읽으면서 쓰고, 다.  쓴 뒤 읽어보기도 하고, 쉼표도 그렇게 찍어요. 다른 사람이 읽어보는 경우도 있고요. 젋은 사람과 나이든 사람은 읽는 속도가 조금 다르더군요.”
입으로 읽어가며 퇴고하는 방법은 역시 옳다. 특히 자신만의 문체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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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travel’이 ‘여행’이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된 것은 14세기 무렵으로, 고대 프랑스 단어인 ‘travail’에서 파생한 것으로 춛정하고 있다. 이 단어에는 현대의 우리가 ‘여행’ 하면 떠올리는 즐거움과 해방감이 거의 들어 있지 않다. 노동과 수고, 고통 같은 의미들이 담겨 있을 뿐이다. 현대 영어에서는 아직도 ‘travail’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고생, 고역 등이며 ‘in travail’이라고 하면 ‘산고로 몸부림치다’같은 의미가 된다. 자기가 태어난 곳에 머물지 못하고 타향을 헤매는 것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행한 운명으로 여겼다. 우리나라에서도 점을 쳐서 ‘객사’라든가 ‘역마살’이 나오면 불길하게 생각했다. 서양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 20세기 이전까지는 재미로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쉽게 상상하지 못했다. 멀리 떠나는 자는 삶의 터전을 빼앗겼거나,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종교적 열정으로 떠나는 순례도 있었지만 험난하고 고생스러웠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편안한 믿음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이상, 여행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게 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정신이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의 믿음에 집착한다면 여행은 재난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예전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성격 차조 워크숍’이라는 수업이 있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를 창조해보는 수업이었다. 학생들이 만들어온 인물들은 대체로 모호하다. 주인공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회사원(대학생, 공무원 등등)이에요.’ 그럴 때 이렇게 맗하는 것이 선생으로서의 나의 역할이었다.
“평범한 회사원? 그런 인물은 없어.”
모든 인간은 다 다르며, 자셋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조금씩은 다 이상하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다름’과 ‘이상함’을 끝까지 추적해 생생한 캐릭터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스프레드시트로 표를 하나 만들어 소설을 쓸 때마다 사용한다. 비중이 있는 인물이면 그의 외모부터 습관, 취향까지 다양한 항목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해본다. 마치 앙케트 조사와 비슷하다. 역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인물의 내면이다. 윤리적 태도, 성(性)에 대한 관념, 정치적 성향 등, 십여 개의 항목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변하다보면 인물에 대해 좀더 또렷한 윤곽이 그려진다. 그런데 인물의 내면 부분에서 내가 제일 고민하게 되는 항목은 ‘프로그램’이다. 노아 루크먼은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인물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념’으로 ‘프로그램’을 설명한다. 인간의 행동은 입버릇처럼 내뱉고 다니는 신념보다 자기도 모르는 믿음에 더 좌우된다.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된다. ‘흑인은 지적으로 열등하다’ 같은 고정관념도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인종차별주의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백인은 어쩌다 뛰어난 지적 성취를 이룬 흑인을 만다면 ‘흑인이지만 정말 대단하다’는 대사를 칭찬이랍시고 치게된다. 작가가 미리 생각해둔 프로그램이 인물의 대사가 되어 배우의 입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는 순간, 관객은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더 넓게 보자면 ‘프로그램’이란, 인물 자신도 잘 모르면서 하게 되는 사고나 행동의 습관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나쁜 일이 일어나면 모두 자기 탓으로 귀인한다(‘내가 손대면 되던 일도 안 돼’). 반대로 어떤 이는 언제나 남 탓으로 돌린다(‘내가 뭐랬어? 도대체 일을 제대로 하는 놈들이 없다니까!’). 어떤 인물은 뭐든지 신중ㅎ하게 조심하는 게 최선이라고 믿기 때문에 새로운 일을 거의 벌이지 않고, 반면 이떤 사람은 무슨 일이든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게 낫다고 확신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한다. 이런 것도 프로그램이다.

생각과 경험의 관계는 산책을 하는 개와 주인의 관계와 비슷하다. 생각을 따라 경험하기도 하고, 경험이 생각을 끌어내기도 한다. 현재의 경험이 미래의 생각으로 정리되고, 그 생각의 결과로 다시 움직이게 된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밤에 하지 말았어야 할 말부터 떠오르고, 밤이 되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뒤척이게 된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를 말아야 하고, 불안한 미래는 피하는게 상책이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미적거리게 된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놓는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인생이 여행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선가 오고, 여러 가지 일을 겪고, 결국은 떠난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지구라는 별에 도착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여해은 먼저 도착한 이들의 어마어마한 환대에 의해서만 겨우 시작될 수 있다. 신생아는 자기가 도착한 나라의 말을 모른다. 부모와 친척들이 참을성을 가지고 몇 년을 도와야 비로소 기초적인 언어를 익힐 수 있다. 부모는 아이가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가 될 때까지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다. 충분히 성장하면 인간은 지구에 새로 도착한 여행자들을 환대함으로써 자신이 받은 것을 갚는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갈 때, 남아 있는 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을 환송한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문명은, 마치 다른 세계로 떠나는 여행자를 배웅하듯이 망자를 대한다. 관 속에 노잣돈이나 길동무 인형을 넣어준다. 철저한 무신론자조차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면 그들이 다음 세상에서 평안하기를 기원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타인의 환대 없이 지구라는 행성을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도 현지인의 도움을 절댇적으로 필요로 한다. 인류는 오랜 세월 서로를 적대하고 살육해왔지만 한편으로 는 낯선 이들을 손님으로 맏아들이고, 그들에게 절실한 것들을 제공하고,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며 떠나보내오기도 했다. 거의 모든 문명에, 특히 이동이 잦은 유목민들에게는 손님을 잘 대접하라는  계율들이 남아 있다.

환대의 관점에서 지난 여행들을 돌아보면,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쑥 튀어나와 아무 대가 없이 도움을 주었다.

철학자 알폰소 링기스는 여행에서 우리가 낯선 이에게 품는 신뢰, 그것의 기묘함에 해대 썼다.
‘고향과 공동체를 떠나 한동안 먼 곳에서 지내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때 우리는 매일 낯선 사람을 신뢰하게 된다. 그 사람과 핏줄로 이어져 있지 않은 것은 물론 신념이나 공동체를 공유하지도 않고 계약으로 묶여 있지도 않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가 어떤 가족이나 부족의 일원인지도 모르며 그가 사는 마을의 위치도, 그가 사회와 자연과 우주속에서 어떤 부문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를 신뢰한다. 그의 말이나 몸짓도 이해 못하고, 목적이나 동기도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그때 발생하는 신뢰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잘 정의돼 있는 행동으로 이루어놓은 공간을 건너뛰어 그 자리에 당신과 함께 있는 진짜 개인과 곧바로 접촉하는 것이다.
일단 누군가를 신뢰하기로 마음먹으면 우리의 정신속으로 평안함뿐 아니라 자극과 흥분이 파고들어 온다. 신뢰란 다른 생명체와 맺어지는 관계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을 준다. (...)
신뢰란 죽음만큼이나 동기를 짐작할 수 없는 어떤 인물에게 의지하게 만드는 힘이다. 낯선 이를 신뢰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
신뢰 안에는 용기뿐 아니라 기쁨과 유쾌함도 들어 있다. 신뢰는 위기가 닥쳤을 때 웃게 해준다. 그리고 성적인 매혹도 신뢰와 아주 흡사하다.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푹 빠지면 한없이 끌려가게 되듯 무조건적인 신뢰로도 마찬가지다. 역으로 신뢰에도 성적인 면이 있다. 왜냐하며 신뢰는 타인의 알 수 없는 핵심에 집착하는 맹목적인 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뢰는 차인의 감정 및 영향력과 연결된다. 스카이다이버가 낙하산을 건네기 위해서 자신의 뒤를 따라 낙하하는 동료에게 보이는 신뢰감에는 어딘가 성적인 면이 있다. 정글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원주민 젊은이에게 보이는 그 신뢰감도 마찬가지다. 신뢰란 대담하면서도 아찔하고 탐욕스럽다.’(알폰소 링기스 <기 ㄹ위에서 만나는 신뢰의 즐거움> 오늘의책, 2014, 10~14쪽).

어떤 도시에서 여행자들은 현지인처럼 보이고 싶어하기도 한다. 여행자의 표지들, 예컨대 커다란 배낭, 편안한 신발, 손에 든 지도, 카메라 등을 숨긴다. 마치 모처럼 휴일을 맞아 산책을 나온 현지인처럼 보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장’은 여행자들이 선망하는 나라와 도시에서만 수행된다. 뉴욕이나 파리, 바르셀로나와 같은 선진국의 매력젖ㄱ인 도시에서는 ‘습격을 감행하는 여행자’가 되어 스테레오타입으로 분류되기보다는 노바디가 되어 가급적 눈에 띄지 않으려 한다.
반면 ‘여기 사시나봐요?’ 같은 말이 별로 달갑지 않은 나라와 도시도 있다. 그때는 여행자로서 현지인과 적극적으로 구별 짓고자 한다. 마치 식민지 인도에 부임했던 대영제국의 관리들이 찌는 듯한 폭염에도 셔치의 단추를 풀지 않고 긴 소매의 재킷을 고집했던 것처럼 여행자의 표지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이렇듯 여행자는 어디로 여행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그 나라와 도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또한 그 도시의 정주민들이 여행자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방식을 적극적으로 조정하고 맞춘다. 때로 우리는 노바디가 되어 현지인 사이에 숨으려 하고, 섬바디로 확연히 구별되고자 한다. 실뱅 테송의 표현대로 여행이 정말 일종이 습격이라면, 여행자들의 이런 선책은 원주민의 힘과 위계에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여행자를 반기지 않고 심지어 공격할 수도 있는 오많한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면, 그리고 그 도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이라면, 여행자는 자신을 최대한 감추며 드러내지 않고자 할 것이다. 베네치아나 바르셀로나, 암스테르담, 교토 같은 도시에서 최근 대두하고 있는 오버투어리즘에 대한 시민들의 적개심을 여행자들도 분명히 알고 있고 때로 현지에서 피부로 느끼기도 한다. 그들은 관광객들이 에어비앤비 같은 숙박공유 서비스를 통해 집세를 폭등시키고, 쓰레기를 마구 버리며, 교통 혼잡을 야기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습격을 당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반면 현지인 상당수가 관광으로 생계를 해결하고, 여행자에게 비굴할 정도로 친절한 도시에서 우리는 굳이 자신을 현지인으로 가장하거나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 도시의 원주민들이 우리가 떠나온 나라에 대해 강력한 호감까지 갖고 있다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 그럴 때면 개별적인 자아 대신 더 매력적인 집단적 페르소나 뒤에 숨고자 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페르소나’는 연극에서 배우가 쓰는 가면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뒤에 그 말은 사람이나 인격, 성격을 가리키는 단어들의 어원이 되었다. 여행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가면을 쓰면서 자신의 모습을 바꾼다. 그러면서 부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고향에서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여행지에서 쓰는 가면이 조금 낯설 뿐이다.

실뱅 테송의 말처럼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하러 그 먼길을 떠나겠는가.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현명한 여행자의 태도는... 스스로를 낮추고 노바디로 움직이는 것이다.

여행이 길어지면 생활처럼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충분한 안정이 담보되지 않으면 생활도 유랑처럼 느껴진다.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젆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 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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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기르는 데 있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나는 아이가 어떻게 자라길 기대하는가’가 가장 중요해요. 즉 자신만의 육아관을 똑바로 세워야 선택의 순간마다 흔들리지 않고 확실한 결정을 내릴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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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없는 사상은 메마르고, 사상이 빠진 사랑은 경박하다. 82

너새니얼 호손 <주홍 글자> ‘사람이란 오랫동안 이중의 얼굴을 갖고 생활하다 보면 도대체 어떤 것이 진짜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지는 법이다.’  138

한국에서는 사랑을 소유와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해주고 자유롭게 해주며, 상대방이 행복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144

우리는 폭력적인 세상을 살아간다. 사람들도 폭력적이고 사회도 폭력적이며 정치도 폭력적이다. 폭력은 나만 옳다고 확신하며 타자를 증오하고 존중하지 않을 때 생겨난다. 사람들은 타자에 대한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정의의 집행이라고 잘못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이나 폭력을 절대 인정하거나 뉘우치지 않는다.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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