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10'에 해당되는 글 97건

  1. 2022.05.30 여행 없는 여행 - 마고캐런 가지 2020 03810
  2. 2022.05.16 은둔기계 - 김홍중 문학동네 2020 03810
  3. 2022.04.18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 류시화 더숲 2019 03810
  4. 2022.04.11 사소한 부탁 - 황현산 난다 2018 03810
  5. 2022.03.28 밤이 선생이다 - 황현산 문학동네 2013 03810
  6. 2022.03.07 홈스쿨대디 - 김용성 소나무 2019 03810
  7. 2022.01.03 잘 지내나요 내 인생 - 최갑수 보다북스 2020 03810
  8. 2021.12.27 밤의 공항에서 - 최갑수 보다북스 2019 03810
  9. 2019.04.10 마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생텍쥐페리의 아포리즘) E-book - 정여울 홍익출판사 2015 03810
  10. 2018.06.20 여행자의 독서 : 두번째이야기 - 이희인 북노마드 2013 03810
  11. 2018.06.06 나의 친애하는 적 - 허지웅 2016 문학동네 03810
  12. 2018.05.16 ​ 여행의 문장들(여행자의 독서, 세번째 이야기) - 이희인 2016 북노마드 03810
  13. 2016.10.06 내 안에 슬픈 육체가 스며 있다(섹스 뒤의 명상) - 문윤근 스테디북 2001 03810
  14. 2016.09.26 흰(The Elegy of Whiteness) - 한강 문학동네 2016 03810
  15. 2016.08.29 다시, 책은 도끼다 - 박웅현 북하우스 2016 03810
  16. 2016.08.25 책은 도끼다 - 박웅현 북하우스 2011 03810
  17. 2016.08.11 청춘의 독서 - 유시민 웅진지식하우스 2009 03810
  18. 2016.08.04 7년의 밤 - 정유정 은행나무 2011 03810
  19. 2016.06.23 처음처럼(신영복의 언약) - 신영복 돌베개 2016 03810
  20. 2016.06.21 채식주의자 - 한강 창비 2007 03810
  21. 2016.06.13 떠나지 않으면 안될것 같아서 - 이애경 북라이프 2015 03810
  22. 2016.06.09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 - 오영욱 예담 2006 03810
  23. 2016.06.06 오기사, 여행을 스케치하다 - 오영욱 예담 2008 03810 1
  24. 2016.03.10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살아보기 - 김남희 웅진지식하우스 2015 03810
  25. 2016.01.21 결혼 면허 - 조두진 예담 2013 03810
  26. 2015.12.14 책인시공 - 정수복 문학동네 2013 03810 1
  27. 2015.12.10 모든 요일의 기록 - 김민철 북라이프 2015 03810
  28. 2015.11.26 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야하고 이상한 여행기) - 김얀 달 2013 03810
  29. 2015.11.16 오늘이 마지막은 아닐꺼야 - 정도선, 박진희 마음의숲 2015 03810
  30. 2015.10.26 떠나는 이유(가슴 뛰는 여행을 위한 아홉 단어) - 밥장 앨리스 2014 03810




프롤로그
책을 쓰면서 생각했다. 여행을 멈추었을 때도 행복할 수 있는 여행이 진짜 여행이라는 것을.  10

인도에서 여행자로 살면서 고집을 부리거나 욕심을 내는 건 어리석다. 이방인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현지인들의 눈빛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26

내 감정의 온도가 여행의 온도는 아니다.
여행의 속도가 여행의 온도를 달구는 것도 아니다.
이제 나는 이동수단에도 목적지에도 관심이 없다.
그저 내 가슴이 다시 뜨거워지거나 영혼이 치유되는 여행, 느린 여행이라도 진짜 나를 위한 여행을 하고 싶다.  54, 78

가짜인 나를 벗고 진짜인 나를 만나려면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 여행은 떠난다는 의미에서 보면 이동이고, 머문다는 의미에서 보면 공간이다.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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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은신처를 평등하게 분재하는 것, 은신처 속에 숨을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것, 사회의 지배적 여론과 정동으로부터 집요하게 탈주하는 것, 과잉 연결된 관계들을 해체하는 것, 인간들의 세계를 떠나 비인간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 과열된 자본주의적 삶의 형식을 벗어나는 것,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새로운 가능세계를 발명하는 것, 이것이 21세기의 새로운 은둔의 실천이다. 은둔은 이제 생존을 위한 생명의 필사적 재조립이라는 의미를 띤다. 은둔 속에서 노동하고, 생각하고, 산책하고, 읽고, 쓰고, 견디고, 저항하고, 소통하고, 창조하며 다른 무언가로 생성되어가는 이들을 나는 은둔기계라 부른다. 이 책은 은둔기계의 삶에 관한 것이다.  6


1부 은둔하는 삶

악인이 사라진 자리에서, 악인과 싸우던 선인이 새로운 악의 형태들을 발명하고 실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31

자식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인격의 바닥을 드러낸다. 비겁, 용기, 탐욕, 광기, 연민, 죄책감, 불안, 공포 혹은 아주 드물지만 자기-비움(케노시스kenosus).  36

실패한 결혼이 치명적 불행이 아닌 것은, 모든 결혼이 근본적으로 성공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37

사랑 없는 정의보다는 차라리 정의 없는 사랑을 선택할 것. 사랑으로부터 정의가 생성되는 것은 가능하지마, 정의 안에는 사랑의 씨앗이 존재하지 않는다.  37

우리가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지, 우리의 사랑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사랑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
악이 그러하듯이.  42

우리는 ‘미리’ 강건해질 수 없다. ‘미리’ 용맹해질 수도 없고, ‘미리’ 굳건할 수도 없다. ‘미리’ 생존할 수 없다. 오직 때가 닥쳐왔을 때만 그렇게 할 수 있다. 때가 오기전에, 모든 것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때는 모든 것에 존재와 질서와 가시성을 부여한다.  45

진실의 시간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니다. 그것은 ‘머지 않아’이다. 진리는 오직 머지않아 드러난다.
예언자는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발언한다. 진실은 머지않아 나타나기 때문에, 진실의 발언은 언제나 예언처럼 보인다.
우리가 쓰는 글의 참된 의미도(만에 하나 그런 것이 있다면) 머지않아 드러난다. 지금 환호하거나 비판하는 독자들이 아니라 ‘머지않아’의 독자들이 참된 독자다.
‘머지않아’를 잃는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머지않아’를 위해서 우리는 지나친 성공, 갈채, 칭찬, 환호를 누리면 안 된다. 그 향유 가능성을 전략적으로 파괴해야 한다.  50

심오한 고립, 심오한 분리, 심오한 비사회성.  55

20세기가 이상화한, 광기에 가득찬, 생산적 삶의 가치를 파상(破像 깨뜨릴파 형상상)할 것. 사회적 삶을 탈도덕화할 것.  55

도처에 은둔지가 형성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견디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서로의 살, 냄새, 얼굴, 말, 현존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시대. 인간은 서로에 대해 지쳤고, 서로를 지겨워한다. 두려워한다. 사람들 사이에 광대한 사막이 형성되었다. 그 사막은 여러 형태의 기술적 장치들에 가로질러진다. 21세기의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을 의심하고, 경계하고, 직시한다. 인간중심주의와 휴머니즘의 자명성이 파열되고 있다. 이는 병리현상이라기보다는 문명사적 변동의 한 징후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첫번째 세대다. 모더니티의 잠에서 깨어나 충혈된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는 인간이 광폭한 힘을 발휘하여 변형시켜놓은 중생(衆生, 부처의 구제 대상이 되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나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다음사전)의 고통의 극장이다. 인간의 인간성에 자기-제한을 가할 것. 인간의 인간성을 스스로 비워낼 것. 해방이 아니라 포기, 전진이 아니라 이탈, 사교가 아니라 은둔.  55-56

누구는 커피로 은둔하고, 누구는 음악으로, 누구는 산책으로, 누구는 철학으로 은둔한다. 성격으로, 질병으로, 작품으로, 광장에, 대중 속에 은둔하는 자들도 있다. SNS로 은둔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SNS로부터 은둔하는 사람도 있다. 은둔지는 발명될 수 있다. 은둔지를 구축하는 능력이 참된 창조력이다.  56

단순한 생명의 기쁨을 회복하고 싶은 자는 은둔을 꿈꾼다.  56

숨는 것은 인정받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 지금 인정받으면, 미래의 인정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것. 끝까지 인정받지 않고 버티면서, 후일 최대치의 인정을 얻겠다는 귀여운 간계.  59

탈-성장. 반핵(反核). 페미니즘. 생태주의. 포스트휴머니즘. 소박하고 단순한 삶. 비거니즘. 지나친 생산과 이동의 포기. 독신주의. 열린 영성.  20세기적 상상력과의 결별. 신유물론. 61

과도한 연걸, 과도한 생산, 과도한 소통, 과도한 소비, 과도한 학습, 과도한 경쟁, 과도한 활동, 과도한 이동, 과도한 여행, 과도한 존재, 과도한 체험, 과도한 섭취, 과도한 존재로부터의 이탈. 덜 움직이고, 덜 먹고, 덜 소비하고, 덜 벌고, 덜 생각하고, 덜 쓰고, 덜 일하고, 덜 만나고, 덜 경쟁하고, 덜 여행하고, 덜 가르치고, 덜 배우고, 덜 제작하고, 덜 존재하기. 덜 있을 수 있는 능력. 코나투스의 자기-제한. 61
(라틴어 Conatus, 사물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고 스스로를 계속 높이려는 경향을 말한다)

은둔기계는 겁쟁이다. 그는 지배를 두려워하고, 상처를 두려워하고, 폭력을 두려워하고, 갈등을 두려워하고, 오해를 두려워하고, 감염을 두려워하고, 관계를 두려워한다. 그는 의(義)를 말하지 않는다.  (그가 의를 말하는 매우 드문 순간에도 그는 결코 대의를 말하지 않고 오직 소의(小義)만을 말할 것이다.) 우유부단하고,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적이다. 소심하며, 잡스럽다. 그것을 숨기지 못한다. 숨기려 하지만 언제나 쉽게 발각된다. 이 모든 약점들이 그의 힘이다.  62-63

은둔기계는 세계를 바꾸거나, 계몽하거나, 비판하려는 열정이 없다. 그는 오히려 세계를 두려워한다. 세계 위에 서지 않는다. 그는 세계의 무서운 힘을 잘 알고 있다. 은둔기계는 지사(志士 뜻지 선비사)가 아니며 선비도 아니고 열사도 아니다. 그는 생존주의자다. 그는 도망치면서라도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생존은 그에게 지상의 가치다. 다만, 그 지상성(至上性 이를지 윗상 성품성)은 신중하게 은폐되어 있다.  65

은둔기계는 자신의 물러남을 책임진다. 물러난 자들은 대개 모든 것을 비판할 수 있는 자리에 선다는 착각을 하기 쉽다. 이러한 인식은 관객성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 된다는 것은 물러남을 통해 무대의 권리를 내려놓는 것이다. 무대는 언제나 객석보다 더 위대하다. 물러나는 것은 무대로부터의 물러남이며, 그리하여 물러난 자는 자신의 하찮아짐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물러남의 윤리다.  66-67

부재하는 무언가를 현존시키는 것이 상상이라면, 현존하는 것의 공성(空性 ‘진여’의 다른이름. 우주 만유의 보편한 본체로서, 현실적이며 평등무차별한 절대의 진리)을 직관하거나 체험하는 것이 파상이다.  72

파상은 자기-비움의 체험이다.  75

파상 이후, 우리는 은둔기계가 된다.  78

비운다는 말은 그리스어 동사 ‘케노오(kenoo)’이며, 영어로 ‘emptrying’ 혹은
‘making empty’로 번역된다. 그리스어 케노시스(kenosis)는 한자로 자기-비허(卑虛 낮을비 힐허)’, 한글로는 대개 ‘자기-비움’으로 번역된다.  84

중독은 반복에 대한 사랑이다.  95

산책은 걸음으로 선을 긋는 행위다. 바로보는 것은 눈으로 선을 긋는 것이며, 생각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알 수 없는 어딘가에 선을 긋는 것이다. 세계는 선들로 구성되어 있다.  99

사람들은 각자의 막(膜) 속에 산다. 보이지 않는 캡슐이 사람들을 두르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막을 유지하고, 그것이 파손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 악수할 때, 손의 막은 다른 손의 막을 더듬는다. 키스나 성교 속에서 한 인간의 막은 다른 인간의 막과 가장 가깝게 밀착한다. 하지만, 막은 찢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막에 갇혀 있다. 오해, 증오, 불신, 혐오, 경멸이 오갈 때, 불쾌하고 자극적인 스파크가 일어난다. 막과 막 사이에는 무수한 것들이 흘러다닌다. 그런데 이 흐름은 아무에게도 인지 되지 않는다.  103

속도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곳에서 부패가 시작된다. 속도는 연결에서 생긴다. 이동은 연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104

어디가 가려운지 알지 못하면서 피가 날 때까지 아무 곳이나 마구 긁어대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111


2부 글쓰기에 대하여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나쁜 글을 쓰지 않아야 한다. 나쁜 글을 ‘쓰지 않는 것’이 좋은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어렵다. 무언가를 ‘쓰지 않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무언가를 ‘쓰는 법’도 알지 못한다.  115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글을 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문제는 글쓰기 테크닉이 아니라 주체성이다. 무엇이 당신을 휘감고 있는 소용돌이인가? 당신을 통해 말하는 자(것)들은 누구(무엇)인가?  115

좋은 글은 심지어 역겹다. 생명력으로 범람하기 때문이다. 생명은 다른 생명을 탈취하는 잔혹성을 갖고 있다. 좋은 글을 그 잔혹성에 닿아 있다. 진리를 드러내거나 인식을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진실로 간주되어온 것을 무너뜨리고 뭉개버리는 것이다. 생명의 힘에 걸려 진리는 추악한 표정으로 일그러진다.  117

진실을 말하려 하지 말고 진실의 기준을 바꾸라.  117

쓰인 적조차 없거나, 쓰였지만 발표되지 않았거나, 발표되었으니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그런 글이 좋은 글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좋은 글은 무언가를 전달하는 글이 아니라 전달 가능성을 창조하는 글이다.  122

가장 명확한 인정의 증거는 질투이다. 당신의 글이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면, 당신은 이미 인정받은 것이다.  123

반드시 사용하지 않기로 정해놓은 단어들의 목록을 갖고 있어야 한다.  124

비판은 우리 시대 교육의 낡고 비생산적인 관행이다.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나오는 상품처럼, 자동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식상하고 무례한 말들이 비판으로 오인되고 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모든 언술의 결론을 차지하게 된 저 습관적인 공격.  125

뛰어난 비판자는 타인의 작품이나 인격에 흠집을 내고, 생채기를 내고, 피를 흘리게 하지 않는다. 대상을 모욕하지 않는다. 대신 대상이 미처 달성하지 못한 잠재적 세계를 재창조하여 보여준다. 이를 통해 작가와 잡품은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벤야민이 말한 것처럼, 비판의 대상은 ‘타격’이 아니라 차라리 ‘소각’의 대상이다. 대상에 벼락을 때려 전소시켜보리고 불타고 남은 자리에서 사리를 줍는 것이다. 비판자는 대상의 정수(精髓)를 구제하여 제시한다. 이런 비판을 받는 행운을 누리는 자는, 분노가 아닌 부끄러움과 용기를 동시에 느낀다.  126

건조하고 단순하지 않으면 삶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다.  129

의미는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체감된다. 의미를 느끼는 기관은 뇌가 아니라 피부, 살, 뼈, 내장이다. 의미는 우리를 때리고, 우리에게 통증과 쾌감을 준다.  129

단 한 번이라도 시인인 적 있는 사람은, 시가 아닌 문장을 쓸 때 어려움을 느낀다.  130

학문 세계에는 언제나 소수의 앞선 자들이 있고 다수의 뒤진 자들이 있다. 세상이 앞선 자들의 비시대적 통찰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진화한 이후에야 비로소 뒤진 자들은 아무런 저항이나 어려움 없이, 마치 오래전부터 불운했던 선구자들을 이해해온 것처럼, 그들의 지식을 섭취하고 선전하고 찬양하고 소비한다. 그러나 뒤늦은 자들이 뒤늦은 지식을 전파하는 데 열심인 동안, 소수의 앞선 자들은 이미 또다른 세계로 걸어가버렸다는 것.  159

어떤 사회도 충분히 적대하고 있지 못하며, 어떤 사회도 충분히 통합되어 있지 못하다.  159

사회는 꿈이다. 사회 속에서 어느 누구도 모방과 암시를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믿지 않는 그것을 믿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그것을 옳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혐오하는 것을 혐오하지 않음을 밝히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159-160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사교가 아니라 따뜻한 친교다. 사회의 익명성과 억압, 그리고 사회생활에 내재하는 긴장과 고통에 대한 해독제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부담 없는 관계에서 온다.  160

헐벗은 자가 아직 헐벗지 않은 자에게 하는 말은 단상처럼 들린다. 헐벗지 않은 자는, 오직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자신도 헐벗은 이후에야 비로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188

취하면 단상을 쓰지 못한다. 술에도, 기분에도, 감각에도, 자아에도, 세계에도 도취하지 않아야 한다. 명정해야 한다.  188

단상의 생산은 기계적이다. 카메라가 풍경을 끊어내듯, 프레스 기계가 철판을 찍어내듯, 메스가 피부를 절개하듯, 그렇게 하나의 문장이 잘려나온다. 단상은 반-유기적이다.  189

실패한 단상은 꼰대의 훈계이거나 애송이의 트윗이다. 헐벗지 않은 자가 쓰는 단상은 실패한 단상이다. ‘무엇’을 쓰느냐보다 ‘누가’ 쓰느냐가 더 중요한 이유가 이것이다. 단상은 충만하고 풍요로운 정신으로는 쓸 수 없다. 오만하거나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단상에 실패한다.  189

꼰대도 애송이도 단상을 쓸 수 없다. 양자 모두 자신은 헐벗지 않은 채 타인을 헐벗기려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헐벗을 때, 주관이 헐벗을 때, 자아가 헐벗을 때, 문장이, 표현력이, 욕망이 헐벗을 때 단상이 가능하다.  189

객관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오만한 만큼이나, 주관을 정의의 원천으로 내세우는 것은 사악하다.  190

단상은 읍소도 고발도 비판도 아첨도 신음도 엄살도 과장도 아니다. 단상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타자가 사라지면 곧바로 허물어지는 그런 언어가 아니다. 단상은 듣는 자가 ‘아직’ 없을때 행해지는 말이다. 타자의 부재는 단상의 조건이다. 단상 속에서 말은 그 빈약함과 가난함과 헐벗음 속에서도, 꼿꼿함을 상실하지 않는다. 그것이 단상의 자존심이다.  190-191


3부 난류 속으로

인류학자 에두아르도 콘은 아마존 숲에서 ‘인간이 재규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라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재규어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라는 점을 지적한다. 숲은 생존 공간이다. 거기서 우리는 다른 존재자들과의 위험하고, 물질적이고, 해석학적인 관계를 갖는다. 인간만이 자기(self)인것이 아니다.  197

숲에서, 모든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들이 발산하는 기호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다. 인간만이 언어를 갖고, 비인간 세계는 언어가 없는 죽은 물질의 세계라는 착각을 하는 자는 아마존 숲에서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물, 공기, 바람, 흙, 곤충, 식물, 작은 동물, 큰 동물, 날씨, 습도, 정령(spirit), 사자(死者)는 모두 자기(self)다. 이들은 각자의 시선과 권능과 생명과 영혼을 갖는다. 이들은 서로가 발산하는 기호를 읽고 탐구하는 해석학자들이다. 아마존 숲에서 먹이를 찾아 산책하는 재규어와 마주친 인간은 (인간의 관점에서는) 주체이지만 (재규어의 관점에서는) 잠재적 먹이, 즉 대상이다. 자신이 재규어의 먹잇감이 아니라 그와 동등한 또다른 자기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는 재규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재규어에게 아우라를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즉, “재규어의 시선을 돌려 주어야 한다.”(콘, 2018:12)  197-198

“수마코 화산 기슭에 있는 사냥 캠프의 초가지붕 아래서 엎드려 누워 있는데, 후아니쿠가 내게 다가와 경고했다. ‘반듯이 누워 자! 그래야 재규어가 왔을 때 그 녀석을 마주 볼 수 있어. 재규어는 그걸 알아보고 너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엎드려 자면 재규어는 너를 아이차(aicha, 멋잇감)로 여기고 겅격한다고’, 후아니쿠의 이 말은 재규어가 우리를 마주 응시할 능력이 있는 존재로 본다면, 우리를 가만히 놓아둔다는 뜻이다.  그러나 재규어가 우리를 멋잇감-‘그것’-으로 보게 된다면, 우리는 죽은 고기나 다름없다. 다른 부류의 존재들은 우리를 어떻게 볼까? 이 문제는 중요하다”(콘, 2018:12)  198

인간의 악을 직시할 것. 인간의 악을 용서할 것. 자신의 악을 직시할 것. 자신의 악을 용서하지 말 것.  205

“옛 시대의 장비들로 현재의 도전에 응하는 것보다 더 큰 지적 범죄는 없다”(Latour, 2004:231).  206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지 말고 무엇을 ‘수행’하는가를 물을 것.  206

‘실존’하는 것들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있을 수 있기’위해 고투하고 있다. 그저 있는 듯이 보이는 나무는 광합성하고 있고, 성장하고 있고, 분열하고 있다. 바람에 버티고 있으며, 흙을 뚫고 내려가고 있다. 그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자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부단히 운동하고 있다. 흐르고 있고, 불타고 있고, 대립하고 있고, 버티고 있다. 가까이에 다가가서 보면, 모든 존재는 무수한 작용과 겪음의 지속적 ‘과정’이다. 존재가 아니라 생성, 혹은 생존이다.  209

비인간 행위자들의 기호학적 소통능력. 모든 존재자들은 기호의 생산자이며 해석자다. 구름과 별, 동물의 배설물, 식물의 색깔과 모양, 벌레의 움직임, 땅의 냄새, 어떤 분위기.  211

의미한다는 것은 차이를 갖는다는 것이다. 차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아니고 저것을 선택할 때, 거기에 의미가 발생한다. 왜 이것이 아니고 저것인가? 인간의 중대한 선택은 결단이라 불리지만, 결단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미생물도 결단한다.  211

비인간 행위능력을 간파하지 못하는 사람은 ‘센스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가령, 금연중인 친구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짜증을 낼 때, 그것을 혈중 니코틴 부족으로 금단현상을 겪는 ‘뇌’의 짜증이 아니라, 그 친구의 ‘인격의 짜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센스가 없다.  214

에일리언은 존재하기 위해, 연속해서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존재-과정이다. 어떤 주저도, 지체도, 망설임도 없이, 먹이와 숙주를 발견하고 그 생명을 탈취한다. 연민도 슬픔도 없이. 기계를 닮은 냉정한 작동. 에일리언의 벌린 입과 거기 흐르는 산성 타액은 생명현상에 내재한 깊은 공허, 그 텅 빈 성격을 드러낸다. 생명에 대해서 ‘왜’라는 질문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생명을 지속해나가는 끝없는 작동을 수행하는 것뿐이다.  215-216

지구의 여러 생명체에게는 인간이 에일리언이다.  216

바이러스는 단백질과 지질 껍질에 싸여 있는 RNA 혹은 DNA조각들로서,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하지 못하고 물질을 합성하지도 못하는 유전단위다. 오직 숙주세포의 핵산과 단백질 합성기구를 이용하여 자신을 복제해야 하는 기생체다.  

숙주에 침투하기 이전의 바이러스는 캡시드(바이러스 게놈의 핵산을 감싸는 단백질의 집합체)에 둘러싸인 입자에 불과하다. 비리온(virion)이라 불리는 이 입자는 혼자서는 성장, 생식, 대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숙주와의 감염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는 동안에 바이러스는 생명활동을 멈춘 채 그냥 존속한다. 그러나, 일단 숙주에 침투하면, 바이러스는 자기복제를 실행하기 시작한다.

바이러스는 죽음도 아니고 생명도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의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 생명 속에 죽음을 초대함으로써 생명의 능력을 극대화시킨 존재다. 바이러스는 존재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환경에 위탁함으로써 평소에는 차라리 죽어 있기를 택한다.  219

생명의 작동이 멈추었지만 죽지 않은 것. 부활-가능성 속에서 잔존하는 것. 조건이 주어지면 맹렬하게 자기복제하는 것. 유보, 정지, 멈춤을 내장한 생명력. 막강한 변이능력. 그리고 면역 시스템에 식별되지 않을 수 있는 은폐능력. 바이러스의 힘.  220

사람들이 바이러스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미 그들이 바이러스를 행위자로 인정하기 시작했으며, 그 행위능력(agency)을 지각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221

봉준호의 <기생충>에서 아버지 기택(송강호)은 아들 기우(최우식)가 ‘기생’ 작전을 수립하자 감탄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바이러스에게도 계획이 있다. 바이러스는 다음 네 가지 계획을 실행해야 생존한다. 1) 숙주세포를 감염시키기, 2) 숙주세포 내부에서 복제하기, 3) 숙주의 방어막을 피해가기, 4) 새로운 숙주로 옮겨가기(Sompayrac, 2013:4-5). 바이러스는 최소 30억 년 이상 위의 네 가지 목표망을 실행하면서 지구상에서 생존해왔다. 생존에 관한 한, 바이러스는 호모사피엔스보다 훨씬 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222

도서관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에 인쇄된 글자들은 비리온(virion,  비리온이란 바이러스가 숙주 외부에 있을 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내부 중심부에는 핵산이 있으며 외부는 캡시드라 불리는 단백질 막으로 둘러쌓인 바이러스성 입자이며 중심부의 핵산은 감염성을 가지고 있으며 캡시드라 불리는 단백질 막의 구조는 바이러스의 특이성을 결정한다.-위키)상태의 바이러스와 유사하다. 인지되고 이해되기 이전의 글자들은 물리적으로 현존할 뿐이다. 그것은 작용하지도 감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페이지가 펼쳐지고 어떤 의식이 그것을 읽는 순간, 글자와 뇌가 연결되는 순간, 글자는 인쇄된 특정 모양을 지닌 단순한 잉크 자국에서 의미의 활발한 파동으로 변신한다. 글자는 살아나고, 이미지와 생각과 느낌이 되어 읽는 자의 신체와 그 외부로 퍼져나간다.  223

커뮤니케이션은 ‘전염’이다. 기호는 의식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바이러스다.

읽는다는 것은 숙주가 되는 과정이다. 저자가 생산한 바이러스가 읽는 의식에 기생체로 밀려들어온다. 의식 내부에서, 바이러스의 영토화가 발생하고, 새로운 기호의 배치가 생산된다. 쓴다는 것은 의식에 침투한 바이러스의 변이다.  223

바이러스적으로 작용하는 대부분의 기호는 면역계에 의해 차단되고, 파괴되고, 무력화되어 자아의 내부에 침투하지 못한다. 반지성주의, 편견, 우상, 혐오, 독단, 신앙과 같은 강력한 면역 시스템.  224

기호의 핵심에는 ‘의미’가 아니라, 의미의 단속적 ‘출현’이 있다. 의미가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미가 특정 ‘순간’에 나타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의미는 상황에서 솟아나 증식한다.  224

인간은 지구와 뒤엉켜버렸다. 자연은 사회와 뒤엉켜버렸다. 우리에게는 초월적 위치도, 객관적 위치도, 실험적 위치도 없다. 우리는 붙들려 있고, 침투당했고, 피폭되었다. 이것이 21세기 파상적 리얼리티의 풍경이다. 이 냉혹하고 초현실적인 생태-존재론적 위급상태의 이름이 바로 ‘인류세(Anthropocene)’다(김홍중, 2019). 231

인간을 뜻하는 ‘안트로포스(anthropos)’와 시간을 뜻하는 ‘카이노스(Kainos)’를 결합한 신조어인 인류세는, 노벨 화학상 수상자 폴 크뤼첸과 생태학자 유진 스토머가 2000년에 IGBP의 뉴스 레터에 기고한 짧은 글에 처음 등장한다. 이들은 수온 상승과 수질 산성화로 인해 산호초가 탈색되는 현상을 연구하다가 암석, 물, 대기에 인간활동에서 비롯된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인식을 지질학적 시간에 반영해야 할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제기한다.

“인간 행위가 지구와 대기에 미친 중요하고 점증하는 영향을 고려해보건대 (...) 지질학과 환경학에서 인류의 중심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참으로 적절하게 보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현재의 지질학적 시대를 ‘인류세’라고 부를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어쩌면 아마 다가올 몇백만 년 동안 주요한 지질학적 힘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Crutzen&Stoermer, 2000:17-8)

11700년을 이이온 홀로세(Holocene)가 끝나고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주장의 타당성에 대한 논쟁은 어느 정도 정리된 듯이 보인다.  231-232

자연은 아니지만 자연처럼 느껴지며, 언젠가는 소멸할 것이지만 그 소멸을 역사적으로 상상하기 힘든 세계를 타연(他然 다를타 그러할연)이라 부르고자 한다. 가령 21세기 테크노 자본주의 문명.

기술은 우리에게, 세계가 더욱 더 향유 가능한 것이 되었으며, 세계를 더욱 더 향유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의 느낌을 제공한다.  236

인터넷을 통해 우리는 타자들의 얕은 내면에 흐르는 생각과 감정을 즉각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이 기술적 가능성은 사회라는 관념을 위기에 빠뜨린다. 사회적 삶은 내면을 서로 에게 은폐하고, 예의의 가면을 쓴 채 공존하겠다는 암묵적 계약이다. 만일 타인이 우리의 진심을 읽는다면 사회적 관계는 불가능하다.  237

타연을 살아가는 인간은 사고의 주체, 욕망의 주체, 생산의 주체, 언어의 주체, 창조의 주체가 아니라, 향유의 주체다. 향유는 존재(being)가 아니며 소유(possession)도 아니다. 오히려, 향유는 존재를 덧없게 하고 소유물을 파손시키는 것에 더 가깝다. 그 과정에서 흔적들의 묘한 폐허가 만들어진다.

향유는 즐기는 것을 넘어서 즐기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이며, 즐기는 것을 가치화하는 것이며, 즐김의 가능성을 확장해가는 실천이다. 향유에는 부정성이 없다. 향유는 자본주의적 삶의 정점에서 비로소 나타날 수 있는 실천양식, 존재양식, 사유양식이다.

향유대상이 향유 속에서 파손되고 소실된다. 파손과 소실은 향유가 생산하는 가치의 형식이다. 이처럼 반-생산을 생산하고, 반-축적을 축적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물적 자본의 파괴를 새로운 형태의 자본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향유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극한에 접근한다(김홍중, 2017). 향유는 명령한다. 무엇이 되었건 그것을 향유하라. 향유 속에서 대상을 무화시켜라. 물질적 실체들을 사라짐 속으로 투입하라. 없어지는 것이 되도록 변형시켜라. 없어짐을 생산하라. 없어짐의 생산의 증인이 되어라. 덧없음을 추적하여 체험하라. 향유의 체험을 공표하라, 공유하라, 공식화하라. 자본주의의 끝으로 가라. 가서 자본화할 수 없는, 있음과 없음 사이에 펼쳐져 있는 분산된 존재자들을 자본의 회로에 넣어, 그들의 소멸에 현실성을 부여하라. 자본주의의 한계를 경신하라. 향유를 향유하라. 241-242


4부 모든 것을 단순하게

욕망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해방을 욕망하게 하는 ‘억압’을 동시에 욕망한다.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자기(自己)를 창조해야 한다. 대다수 오류와 죄악은 이 과정에서 발생한다. 자기를 아직 정립하지 못한 자가 그 괴로움을 벗어나 주체가 되기 위해 몸부림칠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누구나 자신과의 사이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거리, 우회로, 이해할 수 없는 상징들, 막다른 골목, 미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사막을 갖고 있다.

타인을 험담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두 부류가 있다. 첫째, 타인을 험담하기에 너무나 고결한 품성을 타고난 사람들. 둘째, 타인을 험담하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견디지 못할 만큼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  257

비겁한 자들은 용기 속에 숨어 평온하다. 용기 속에서, 용기 밖에 있는 자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용기는 용기 안으로 들어가 거기에 안착하려는 욕망과도 싸울 수 있는 힘이다. 용기는 비겁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비겁을 내포한다. 비겁할 수 있는 자들만이 용기 있는 자들이다.  258

혐오하는 자들은 빈곤하다. 그것이 존재의 빈곤이건, 인정의 빈곤이건, 금전의 빈곤이건, 혹은 빈곤의 빈곤이건.

냉소는 가장 저렴한 방어기제다.  

시련은 인간을 단련시킨다. 그런데 단련이 반드시 성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종종 인격의 왜곡, 질병, 혹은 정신질환으로 귀결된다.  259

“역사가는 과거로 들어가서는 안 되고, 과거가 그에게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Tiedemann, 2004:240)

마음도 이와 같다. 타인의 마음으로 들어가고자 하면 안 되고, 타인의 마음이 자신에게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공감이란 타인의 마음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오만한 시도다. 오직 통감(痛感 아플통 느낄감)만이, 세상의 마음이 자신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김홍중, 2015:151-61)  260-261

도취의 가장 위험한 점은 영혼을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정신의 어딘가에서 무언가 썩는 냄새가 풍겨오는 순간, 그것은 오래된 도취의 결과임을 깨닫게 된다.  261

우리는 멀리 있는 흉악범보다 주변의 저열한 인간들을 더 견디기 어려워한다. 범죄 행위보다 에티켓의 실수가 더 견디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우리를 가장 분개시키는 것, 우리가 가장 혐오하는 것은 ‘사소한’ 것이다.  261

혐오를 통한 경계의 확정. 우리가 무언가를 멀리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혐오하는 감정을 통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듯이 보인다. 자연 속에서 혐오는 회피와 오염의 방지를 위한 행동 촉구 기제였다.  262-263

너무나 섬세하고 상처를 쉽게 받지만, 회복력도 뛰어난 마음의 소유자. 항상 다치면서도, 결코 냉소나 혐오의 갑옷으로 자아를 보호하지 못하는 사람.  263

소위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과오를 타인의 탓으로 처리하는 단순한 사고회로의 강화에 성공한 사람이다. 정신적 건강은 괴물성과 연결되어 있다.  263

자신을 유쾌하게 비웃지 못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만일 당신이 스스로를 유쾌하게 비웃지 못한다면, 당신은 스스로를 가장 조심해야 한다.  266

타인을 좋아하는 것은 노동이다. 임금으로 보상받아야 한다. 자신이 흠모하고 동경하는데(흠모와 동경의 노동을 그렇게 수행해왔는데) 정작 그 대상이 상응하는 감정을 되돌려주지 않을 때 분노를 느끼는 것은, 등가교환의 원칙이 위배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마음속으로 흠모하면서 그의 응답을 기다리는 자의 ‘사랑’은 그래서 쉽사리 ‘증오’로 돌변한다. 감정의 무상증여는 없다. 적절한 대가를 받지 못한 감정 노동을 한 사람들은 폭력의 정당성을 쉽게 획득한다. 억울하다는 심정의 근저에는 ‘제 몫을 받지 못했다’는 판단이 자리 잡고 있다.  267-268

페이션트(patient)가 된다는 것은 인격이 사라지거나 특이성이 소멸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가 수동적이 될 때, 우리는 능동성을 발휘할 때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우리 자신이 된다. 환자의 자리는 대체될 수 없는 나의 자리다. 내 몸, 내 질병, 내 장기, 내 죽음의 자리는 대체되지 않는다. 대역을 쓸 수 없다. 그것은 단독자의 자리다. 활동이 아니라 감수의 자리에서 우리는 자신을 만난다. 겪어내야 하는 것을 겪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자기(自己)가 된다.  273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의 제조라기보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상태’에 처(處 머무를처)하는 것에 더 가깝다.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일어나는 정황을 ‘겪는 것’. 이렇게 보면, 생각의 힘은 순수한 행위능력이 아니다. 행위와 감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흘러가는 그 흐름을 따를 수 있는 능력이다. 바람이 불어야 떠오르는 연처럼 생각은 떠오른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의 끝을 붙들고, 생각이 움직이는 대로 내가 따르는 것이다.

생각하는 자는 골똘한 자다. 이 골똘함은 ‘제스처’다. 몸짓이다. 골똘한 자세는 생각하지 못하는 자를 생각이 일어나는 상태로 진입하게 해준다. 생각하는 자의 주변환경은 이미 생각들을 품고 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직전 무거워진 구름처럼, 생각은 밀집된 수증기처럼 온통 퍼져서 주변을 감사
싸고 있다. 우리는 안에서 밖으로 생각을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으로부터 안으로 생각을 끌어들인다.

어떤 문제에 봉착하여 깊이 고민할 때,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장기 말이나 바둑돌을 놓아 수순을 상상하고 전략을 짜듯이 그렇게 내적 표상을 구성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생각 이전의 분화되지 않은 정동적 기류에 휘말려 있다.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의미 없는 글자를 쓰거나, 도형을 반복해서 그리거나, 어떤 단어를 혼자 중얼거리거나, 한숨을 쉬고 누웠다가 뒤채고, 이렁나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할 뿐이다. 아직 울음을 터뜨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오랜 시간 후에 비로소 그 표현이 가능해질, 어떤 봉쇄 속에 우리는 갇혀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몸짓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고민한다는 것은 생각에 도달하기 이전, 상당 시간을 이런 부대낌을 견디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견디는 동안 표상은 부서지고, 뭉개지고, 흩어진다. 표상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고민을 통하여 시간과 자신을 발효시킨다. 페이션시(patiency)’.  274-276

사람들은 무언가를 잊기 위해 노력하지만, 노력은 대개 망각을 지연시킨다. 잊으려 애쓸수록 대상은 의식에 더 달라붙는다. 의지를 통해 무언가를 잊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지금’ 잊는 자는 없다. 망각은 행위가 아니라, 과거에 발생했던 것이라고 나중에서야 인지되는 사건이다.  279

감당은 관념이나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구호나 선언이 아니다. 감당은 생명의 방만한 방출이 아니다. 그것은 절제, 삭감, 위축이다. 감당하는 자는 공격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고, 함성을 지르지 않는다. 그는 침묵하면서 짊어진 무게를 견딘다.

박수근의 나무들은 이파리가 하나도 없다. 나목(裸木)은 거의 죽은 듯이 보이기도 한다. 고요히 늙어가는 사람 같다. 나무 주변에 아이를 업은 여인이나 짐을 짊어진 여인이 걸어간다. 나무와 사람이 모두 감당하고 있다. 나무는 나무의 헐벗음을, 사람은 사람의 헓벗음을 짊어지고 있다. 박수근의 그림에 서려 있는 희망은 감당하는 자들이 고독하게 품고 있는 미래로부터 온다. 짊어진 것의 무게가 감당의 유토피아를 만든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견디어내겠다는 의지.  280

헐벗음은 <세한도>의 주제다. 헐벗은 것들의 꼿꼿한 공존. 겨울의 한복판에서 헐벗은 것들이 버티고 있다. 감당은 고독한 사업이지만, 환락이 아닌 감당 속에서야 우리는 참된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추워져야 송백(松柏)이 시들지 않음을 안다.” 계절이 헐벗으면, 헐벗으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것이 다른 무언가를 알아본다. 꼿꼿한 잣나무는 뒤틀린 소나무를 알아본다. 시간을 거슬러, 경계를 거슬러, 차이를 거슬러, 감당하는 자가 감당하는 자를 알아본다. 은둔기계라 은둔기계를 알아본다. 그것과 친구가 된다. 별로 친하지도 애틋하지도 않지만, 함께 헐벗음을 살아내는 것이다. 추사가 그려내는 이 유교적 쿨(cool).  281

감당하는 자들은 대개 침묵한다. 감당에 몰두하여 표현하고 목소리를 낼 힘조차 갖지 못한다. 질병을 감당하는 사람들, 사랑을 감당하고, 부모의 역할을 감당하고, 직무를 감당하고, 존재 자체를 감당하는 자들. 이들의 힘으로 삶이 흘러간다. 자신에게 부과되는 것들을 잘 감당하는 존재자들은 드러나지 않는다.  281-282

서로에게 감당할 수 있는 것만을 기대하는 것이 도덕이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해서 타인을 괴롭히는 사회는 사악하다.

자신에게 닥쳐오는 사태를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참된 윤리다.  283

가까운 사람에게 가한 상처,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대개 가까운 곳에서 온다.  287

존재는 시선에 의해서도, 고통에 의해서도, 언어에 의해서도, 모멸에 의해서도, 실수에 의해서도 벗겨진다. 헐벗음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 헐벗음과 씨름해본 적이 없는 사람, 헐벗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은 천박하고 건강하다.  288

학문이 민중의 감각에 결코 미치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헐벗은 삶에 대한 감수성이 없기 때문이다.  289

헐벗음은 무능력으로 귀결된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과 부딪힐 때, 그때마다 우리의 영혼은 헐벗는다. 자식이 원하는 무언가를 해줄 수 없을 때, 그 무력감 속에서 부모는 헐벗는다.

헐벗음이 집중된 한 지점, 그곳이 장애(障礙)다.

욕망의 정화, 이것이 생명체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업이다. 정화는 헐벗음이다. 오직 헐벗음의 사건들만이 우리를 정화시킨다.  290

어질다는 것은 도덕이나 철학이나 아름다움에 가해지는 제한이다. 인의 규범이 후퇴이며, 진리의 축소이며, 아름다움의 유보다. 불완전성에 대한 항복이다.

‘치열하게’와 같은 오만한 말에 속지 않는 것이다. 두려움을 버리지 않는 것. 용기 따위로 두려움을 이기지 않는 것. 방관하는 것.

어진 이는 허술하다. 규칙이나 규범을 어기며, 심약하고, 애매하고, 어리숙하다. 어진 자는 잘 속고, 매번 속고, 진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상실하지 않는다. 침묵하고 웃는다. 어리석음과 어짊 사이에는 은밀한 연관이 존재한다. 어리석음을 통해서, 이 타협주의와 우유부단을 통해서, 어진 사람은 주어진 관계를 파괴하지 않고 이어나간다. 그는 세계를 멀리서 본다. 세계가 그저 존재하는 무언가로 나타나는 지점까지 물러가서, 세계가 그저 생존하는 무언가로 나타나는 지점까지 물러가서 바라본다. 어짊은 생존주의다. 생존을 존재보다 더 성스러운 것으로 읽는, 처절한 실용주의다.  302-303

희망이 허망함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희망은 미래의 건축이지만, 언제나 실패를 내포하는 잔인한 건축이다. 우리는 안다. 희망은 부서진다는 것을,  그래서 미리 부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그래야 살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절망에 빠져드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절망은 희망보다 더 화려한 몸짓이며 도취일 수 있다. 그것도 깨어져야 한다. 희망에서 벗어나는 힘이 파상력이라면 절망을 깨는 힘도 파상력이다. 파상력은 삶을 향한다. 지금 여기의 물질적 세속을 단호하게 지향한다.  303-304

은둔 속에서, 세상에의 참여가 좌절된 자리에서, 공부에 뜻을 두고 공부의 기쁨을 함게 누리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 생의 흐름, 만물이 함께 얽혀 흘러가는 저 생의 흐름이 야기하는 경이로움에 잠기는 것.

이것은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y)이아니라 생에 대한 사랑(philo-zoe)이다. 필로-조에. 정치적 삶(비오스)이 아니라 생물학적 삶(조에). 필로-조에의관점에서 보면, 학문은 어느 지점에서 멈춰야 한다. 도덕도 현명함도 멈춰야 한다. 종교적 열광도, 예술적 천재도 멈춰야 한다. 더 나갈 수 있는데 멈추는 힘이 참된 힘이다. 공자 사상의 본령에는 냇가에서 정신을 놓고 흐름을 바라보는 저 은둔기계가 있다. 그는 그저 어짊 속에 있는 인간이다. 도덕도 훈계도 진리도 없이, 풍경과 대면하고 세속을 직시하는 저 허름한 얼굴, 이것이 어짊의 참된 얼굴이다.  306

여행에 대한 두려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310

갑자기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여행중이었다. 자기기만이라 생각하며 자신을 비웃는다.  310-311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무렵, 모든 순간이 이미 지나갔고 이제 다시는 그 시간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낄 때가 있다. 예리한 통증을 동반하기도 하는 이 상실의 느낌은 실체가 묘연하다. 여행자는 상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여행을 다녔고, 기억을 소유하게 되었고, 장소들을 체험하게 되었다. 시간을 즐겼으며, 친교와 추억을 축적했다. 상실한 것이 딱히 없는데 그가 느끼는 이 예리한 서운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316-317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과 장소들을 만나는 경험은 우리에게 ‘가능한 삶’을 상상하게 한다. 내가 지금의 나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삶은 어떠했을까? 나는 저 어부였을 수도 있고, 저 어부의 아들이었을 수도 있다. 일본인이었거나, 인도네시아인, 혹은 프랑스인이었을 수도 있다. 이 고장에 이주했다면, 저 직업을 선택했더라면, 저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졌더라면, 저런 집에서 살았더라면, 여기에서 죽었더라면.... 여행은 현실의 자아를 가능세계의 자아들과 연결시킨다. 여행이 끝날 때 상실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여행지 그 자체의 사실적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여행지와 만나면서 촉발된 가능세계들이다.  317

여행하는 인간의 뇌리를 스치는 이미지들은, 살아진 시간과 살아보지 못한 공간의 몽타주다. 여행이 끝날 때쯤 여행자는 여행을 통해 예상치 않게 변화해버린 새로운 자아, 실제 자아의 사실성을 부식시키면서 나타나는, 가능한 자아들과 엮여버린 이상하게 새로운 ‘자아’를 획득한다. 317-318

우리를 실망시킨 것들. 우리가 살 수도 있었던. 가능성들. 살았다 한들 패배하고 허겁지겁 도망쳐나왔을지 모르는 길들. 이들의 총체가 삶이라면, 우리는 여행을 통해서만 삶과 만날 수 있다.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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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경험은 우리안의 불순물을 태워 버린다. 24

강박적인 생각을 내려놓을 때 마음과 가슴이 열린다. 28

생각만큼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없다. 마음은 한개의 해답을 찾으면 금방 천 개의 문제를 만들어 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뛰어난 상상력을 가진 작가이다. 마음이 자기와 전쟁을 벌이지 않을 때 완전히 다른 세상을 경험한다. 30

문제와 화해하고 받아들일 때 그 문제는 작아지고 우리는 커진다. 실제로 우리 자신은 문제보다 더 큰 존재이다. 31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 34

구차하게 의존하는 것, 시도와 모험을 가로막는 것을 제거해야만 낡은 삶을 뒤엎을 수 있다. 47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삶의 여정에서 막힌 길은 하나의 계시이다. 59

‘작가(writer)는 글을 쓰는 사람이며, 기다리는 사람은 웨이터(waiter)이다’라는 말은 나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이상적인 집필 환경을 기다리는 작가는 한 문장도 쓰지 못한 채 인생을 마친다는 말도.
한때는 주로 밤에 글을 썼지만 새벽에 글을 쓴 지 오래되었다. 오전 5시 반에 일어나 20분 명상을 하고 오후 3시까지 글을 쓰고 번역을 한다. 나는 타고난 재능을 가진 작가나 번역가가 전혀 아니기 때문에 매일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한 단락도 끝내지 못하고 오전을 다 보낼 때도 있다. 여행 산문가 피코 아이어가 말한 대로, 글을 쓴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에게 은밀한 편지를 쓰는 것과 같다.
여행 중에도 거의 예외가 없다. 새벽 기차 안에서 글을 쓴 적도 많다. 여명이 터 오는 갠지스강 계단에 앉아서도 쓰고, 히말라야 고개를 넘는 트럭 조수석에서도 계속 중얼거리며 써서 운전사를 겁먹게 만들었다.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면 한 편의 글도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영감은 그저 매일 계속 쓰는 것이다. 멋진 소재가 그냥 굴러들어오는 행운은 매번 나를 비켜 간다. 집필의 신이 내 집필실에는 안 오고 다른 작가들의 집필실만 편애한다는 생각을 지을 수 없다. 다음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 쥐어뜯은 머리카락을 다 모으면 지금보다 훨씬 멋진 장발이 되었을 것이다.
마라톤 선수가 달리기가 쉬워서 달리는 게 아니듯 글쓰기가 쉽다면 나는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생의 모순이다. 글쓰기가 너무 어려워서 계속 쓰고 있는 것이다. 그만두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글을 쓰지 않으면 다른 무엇을 할수있겠는가? 상상력이 완전히 고갈되지 않는 한 내가 무턱대고 할 수 있는 일이 글쓰는 일인데.
글을 잘쓰는 비결을 묻자 『톰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말했다.
“나 자신이 글 쓰는 데 소질이 없음을 발견하는 데 15년이 걸렸다. 하지만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계속 써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때 이미 나는 유명 작가가 되어 있었으니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는 아무리 퇴고를 많이 해도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수십 년 동안 글을 썼는데도 여전히 그렇다.”하고 고백했다.
나는 지금 단순히 ‘노력'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명'을 주제로 이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의 가슴이 원하는 일을 하는 소명 말이다. 하지만 취미 생활이 아니라면 무슨 일이든 수도사가 되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글쓰기 역시 그저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밑바닥에 있는 진실성에 다가가 자신의 것을 건져 올리는 시도여야 하기 때문이다.
인도의 피리 연주자 하리프라사드 초우라시아는 40대에 이미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기 시작했다. 80세인 지금도 그의 연주를 능가할 자가 없다. 나는 20년 가까이 해마다 그의 연주를 들으러 다녔다. 한번은 델리의 신년 음악회에서 만나 “하리지, 이제 한국에 오실 때입니다 ”라고 요청하자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래서 그해 10월 서울과 부산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아침마다 그의 호텔 방에 들렀는데, 그는 매번 연습을 하고 있었다. 평생 피리 연주를 해 왔으며, 예술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인도 정부가 외교관 여권을 발급하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훈장까지 수여받은 대가가 뭄바이에서 델리로, 다시 델리에서 서울로 긴 시간 비행기를 타고 왔음에도 불구 하고 다음날 단 40분의 연주를 위해 계속해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쉬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
지난 2월 동인도 카락푸르에 있는 인도공과대학에서 특별 연주회가 있어서 그와 동행했다. 아침 일찍 콜카타를 출발해 점심 시간이 지나 도착했는데, 그는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저녁 공연을 위해 곧바로 방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바로 전날 밤 콜카타에서 연주회를 가졌는데도!
연주를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에 그 학교에서 요가와 명상을 가르치는 교수가 질문했다.
“당신은 평생 동안 음악을 해 왔는데, 이 삶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
하리지는 말했다.
“나는 이 인생을 통해 분투노력하는 것을 배웠다. 어렸을 때 일찍 어머니를 잃어 한 조각의 차파티(통밀 가루를 반죽해 얇고 둥글게 구운 인도의 주식)를 얻는 데도 분투 노력해야만 했다. 늦게 음악을 시작했을 때는 스승이 원래 레슬링 선수였던 나의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남들처럼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피리를 불라고 가르쳤다. 그것에 적응하기 위해 끝없이 분투노력했다. 나는 타고난 음악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몸을보라 몇년전 교통사고로 어깨를 다쳐 한쪽 팔을 쓰는 것이 힘들다. 따라서 지금도 무한 노력하지 않으면 피리를 불 수 없다. 이곳에 함께온 한국인 친구는 나더러 이제 그만 쉬라고 하지만 나는 숨이 멎을 때까지 피리를 불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삶이 내게 준 소명이다.”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아마도 그 명상 교수는 ‘마음의 평화' 같은 초월적인 대답을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가의 솔직하고 위선적이지 않은 답변, 삶에 대한 진실성에 청중은 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앞에서 밝혔듯이 나는 타고난 작가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애초에 이 글에 담으려고 마음먹었던 주제를 제대로 전달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나름 분투노력했다. 누군가가 말 했듯이 진짜 작가는 그저 계속 글을 쓰는 사람이다. 이 삶에서 진실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축복할 수 있으므로. 당신과 나, 우리는 어차피 천재가 아니다. 따라서 하고 또 하고 끝까지 해서 마법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다. 66-70

세상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대로 존재한다. 무엇을 보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는가. 무엇을 듣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듣는가, 무엇을 느끼는 가가 아니라 어떻게 느끼는가가 우리의 삶을 만들어 나간다. 75

라틴어에서 레푸기움은 ‘피난처, 휴식처’의 의미이다. ...
단순한 생활과 음식이 나를 단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단순함이 나를 나 자신에게 가까워지게 했다. 그 삶은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순전히 내 영혼에 관한 일이었다. 꼭 필요하지 않은 일과 만남들이 줄어들면서 기쁨은 늘어났다. 사치가 문화를 창조하기도 하지만, 소박함은 정신을 창조한다. 그곳에서 나는 사원들을 들여다봤고, 신상들을 보았고, 그런 다음 나 자신 안에서 성소를 발견했다.
<기억, 꿈, 회상> 에서 융은 말한다.
“사람들은 점점 커져 가는 부족감, 불만족, 불안 심리에 떠밀려 새로운 것을 향해 충동적으로 돌진한다.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가 약속해 주는 것들에 의지해 살아간다. 모든 좋은 것이 더 나쁜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눈부신 과학의 발견이 우리에게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인간의 기쁨, 만족, 또는 행복을 증가시키지 못한다. 예를 들면 시간을 단축하는 조치들은 불쾌한 방식으로 속도만 빠르게 해 전보다 더 시간이 부족하게 만든다. 볼링겐에 있는 나의 탑에서는 사람이 마치 수백 년을 사는 것처럼 산다. 만약 16세기 사람이 그 집으로 이사 온다면 그에게 새로운 것은 단지 석유 등잔과 성냥일 것이다.”
당신에게 그런 곳은 어디인가? 자기만의 사유 공간에서 호흡을 들이쉬고 내쉴 수 있는 곳은? ...
자신만의 레푸기움, 자신의 탑을 갖는 일은 중요하다. .. 자신의 본얼굴을 감추느라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자신의 레푸기움에서는 타인을 위해 표정을 꾸밀 필요가 없으며, 외부의 지나친 소란으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지킬 수 있고, 당신을 움켜쥐었던 세상의 요구에서 벗어난다. 85-86

미국 시인 마야 안젤루는 썼다.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과 당신이 한 행동을 잊지만, 당신이 그들에게 어떻게 느끼게 했는가는 잊지 않는다.”
나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가는 감추거나 꾸미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드러내며, 내가 주장하는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동이 나에 대해 가장 잘 말해준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인가? 그것이 가장 진실된 나의 모습에 가깝다. 105

이십 대에 신춘문예로 등단한 나는 몇 권의 시집으로 명성을 얻어 어딜 가나 시인, 혹은 작가로 불리게 되었다. 나 역시 그것을 당연히 여겨 스스로도 자신을 시인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시인’의 품사는 삶, 사랑, 여행처럼 명사보다는 동사에 가깝다. 그 단어들은 현재진행형일 때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시를 쓰고 있을 때 나는 시인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시인이 아니다. 다른 작가의 책을 읽을 때는 독자이고, 버스를 타면 승객이며, 병원에 가면 환자이고, 식당과 카페에서는 손님이다. 사랑하는 이에게는 연인, 아들에게는 아버지, 함께 사는 강아지에게는 반가운 주인이다. 그런가 하면 힌디어 선생에게는 단어를 잘 까먹는 학생이고, 외국에서는 배낭여행자이다. 이렇듯 나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동사이다.
고정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명칭은 역할에 따른 약속 명사일 뿐이다. 115-116

나에게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면 허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역동성에 눈뜨게 된다. 그때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열심히 놀이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다른 놀이로 옮겨 간다.
‘나’의 품사는 흐르는 강처럼 순간순간 변화하는 동사이다. 나는 ‘나의 지난 이야기(My Story)’가 아니라 이 순간에 ‘있음(I Am)’이다. .. 내가 시인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 오히려 나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오직 모름과 모름일 때 존재와 존재로 마주하는 일이 가능하다. 순수한 있음과 순수한 있음으로. 121

추구의 여정에는 두 가지 잘못밖에 없다. 하나는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끝까지 가지 않는 것이다.
“어떤 길을 가든 그 기로가 하나가 되라.”
길 자체가 되기 전에는 그 길을 따라 여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긍정의 길이든 부정의 길이든 자신이 선택한 길과 하나가 되어 묵묵히 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길이 끝나는 곳에서 모든 길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 시인 찰스 부코스키는 썼다.
“무엇인가를 시도할 것이라면 끝까지 가라. 그러면 너는 너의 인생에 올라타 완벽한 웃음을 웃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훌륭한 싸움이다.” 140

생각은 언어만큼이나 쉽게 전염된다. 마음이라는 공간 안에 담겨 있는 ‘나의 고유의 생각’들은 수많은 ‘타인의 생각’들과 혼합되어 있다. 따라서 내가 어떤 생각들과 나를 동일시하면서 ‘이것은 나야’라거나 ‘이것은 내가 아냐’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 참일까? 혹시 외부와 상호작용하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나’인데도 내가 마음이라는 공간 안에 가상의 고정된 나를 만들어 놓고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이 자기 착각은 가장 알아차리기 어렵다.
우리에게는 ‘나’를 유지하기 위해 내 언어, 내 생각, 내 존재가 다른 것들과 분리된 고유의 것이라는 고집스러운 전제가 있는 듯하다. 그 전제마저도 과거로부터, 타인들로부터 배운 것인데도, 만약 실제로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동일하기까지 한 언어와 생각과 마음의 내용물들을 모두 제외시킨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 나는 ‘고유의 나’일까? 그렇다면 붓다는 왜 ‘고유의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단지 세상 만물에 서로 의존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토록 강조했을까? 144

소설가 보르헤스는 썼다.
“우리 살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이들은 각각 특별한 존재이다. 누구든 항상 그의 무언가를 남기고, 또 우리의 무언가를 가져간다. 많은 것을 남긴 사람도 적은 것을 남긴 사람도 있지만, 무엇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누구든 단순한 우연에 의해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이다.” 179-180

평생의 관계는 당신에게 평생의 배움을 준다. 굳건한 감정적 토대를 갖기 위해 당신이 쌓아 나가야만 하는 것들을. 당신이 할 일은 그 배움을 받아들이고,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관계에서 당신이 배운 것을 주변의 모든 관계와 삶의 영역에 적용하는 것이다. 사랑은 맹목적이지만 진정한 우정은 천 리 밖을 본다는 말이 있다.
당신이 내 삶에 나타나 준 것에 감사한다. 그것이 이유가 있는 만남이든, 한 계절 동안의 만남이든, 생애를 관통하는 만남이든. 181

인내는 단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인내는 앞을 내다 볼 줄 알고 살아가는 일이다. 187

티베트어에 ‘셴파’라는 단어가 있다. 대개는 ‘집착’으로 번역하지만, 정확히는 물고기가 낚싯바늘에 걸리듯 ‘붙잡히는 것’ 혹은 ‘생각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티베트 불교에 정통한 페마 초드론은 셴파를 ‘가려운 곳을 긁는 고통’에 비유한다. 가려우면 자꾸만 긁게 되고, 긁을수록 더 가려워진다. 그래서 어느 순간 가려움이 고통으로 변한다. ...
셴파가 가려워서 자꾸 마음이 쓰이는 동시에 가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조차 어리석어서 생기는 고통이다. 모기에게 물렸든 모욕적인 비난을 들었든, 혹은 자기 자신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든 머릿속에서 강박적으로 그것 외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는 상태로 고착되는 것이 셴파이다. 모기에 물린 것도 괴로운데 그곳을 계속 긁어서 스스로 더 고통받는 것이다. 199-200

나날의 삶에서 셴파는 흔하게 일어난다. 누군가의 비난, 무례함, 불친절, 나의 잘못된 판단과 실수 등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영혼을 괴롭힌다. 삶에서 고통받는 이유가 그것이다. 셴파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것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을 자각하는 일이다. 204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덩이를 더 파는 것이 아니라 구덩이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이다.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다. 티베트 속담은 말한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205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잘 모른다는 것과 동의어일 때가 많다. 누군가를 안다고 믿지만,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생각과 감정을 믿는 것이다. 또한 누군가를 조항하고 싫어하지만, 사실은 나의 판단과 편견을 신뢰하는 것이다. 206

관계가 공허해지는 것은 서로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 누군가를 안다는 것, 진실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자신의 편견을 깨고 그와 함께 계단 끝까지 내려가는 숙제를 안는 일이다. 209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바닷물을 뚫고 달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라고 어느 시인은 썼다. 그런 노력없이 상대방의 마음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내 계산법을 가르치려 드는 것은 병이다. 211

트라피스트회 신부 토머스 머튼은 <인간은 섬이 아니다>에서 썼다.
“인간은 다른 누군가와 소통할 수 없는 그 자신만의 비밀과 고독을 가지고 있기에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를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과 자신의 영혼을 모두 황폐하게 만든다. 그것은 자신을 중심에 놓고 자기 삶의 방식에서 상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212


- 독서 모임에서 나온 문장들
어떤 사람을 만날 때 마음이 열리는 순간이 있다. 나의 감각과 느낌, 혹은 삶에서 경험하는 기쁨이나 두려움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과는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자발적인 열람이 폭풍에 길 잃은 새 같던 우리를 연결시켜 주며, 그때 세상과의 거리도 가까워진다. 삶이라는 여행의 한 구간을 그런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행운이다. 104

나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가는 감추거나 꾸미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드러내며, 내가 주장하는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동이 나에 대해 가장 잘 말해준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인가? 그것이 가장 진실된 나의 모습에 가깝다. 105

“너는 누구인가?”
“저는 쿠퍼 부인으로, 이 시의 시장 아내입니다.”
“나는 너의 이름이나 남편에 대해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사랑하는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네가 누구의 엄마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나는 너의 직업을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기독교인이며, 남편을 잘 내조했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는 너의 종교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116

모든 일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며, 모든 만남에는 의미가 있다. 누구도 우리의 삶에 우연히 나타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내 삶에 왔다가 금방 떠나고 누군가는 오래 곁에 머물지만, 그들 모두 내 가슴에 크고 작은 자국을 남겨 나는 어느덧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당신이 내 삶에 나타나 준 것에 감사한다. 그것이 이유가 있는 만남이든, 한 계절 동안의 만남이든, 생애를 관통하는 만남이든. 174-175

힌디어에 ‘킬레가 또 데켕게’라는 격언이 있다. ‘꽃이 피면 알게 될 것이다.When it flowers, we will see.)’라는뜻이다. 지금은 나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고, 설명할 길이 없어도 언젠가 내가 꽅을 피우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해, 자신이 통과하는 계절에 대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시간이 흘러 결실을 맺으면 사람들은 자연히 알게 될 것이므로.
독일 시인 라이너 쿤체는 썼다.
‘꽃피어야만 하는 것은 꽃핀다.
자갈 비탈에서도 돌 틈에서도
어떤 눈길 닿지 않아도’
인내는 단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인내는 앞을 내다 볼 줄 알고 살아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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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을 대신해서 - 머슴새와 ‘밭 가는 해골’
평소에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이런 모순에 갑자기 의문이 생기는 순간을 나는 문학적 시간이라 부른다. 문학적 시간은 대부분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사회적 주제와 연결될 때 그것은 역사적 시간이 된다. 그것은 또한 미학적 시간이고 은혜의 시간이고 깨우침의 시간이다.  8

- 차린 것은 많고 먹을 것은 없고
프랑스의 국립도서관에서는 수년 전부터 소장 도서 전체를 스캔하여 이미지 파일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 놀라운 것은 캐나다 퀘백 대학의 사회과학연구소다. 이 연구소의 사회학 고전 사이트에는 플라톤에서 니체나 프로이트에 이르는 저명 사상가들과 사회학자들의 주요 저작이 프랑스어 텍스트 파일과 PDF 파일로 올라와 있다.  17

문화를 과시하고 소비하려는 기획은 많지만, 문화의 창조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산적 이용의 전망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것이 우리 온라인의 실정이다.  18

- 말의 힘
축약의 남발도 말에 가하는 폭력의 일종이지만, 욕설이나 ‘앵애어’와는 성질이 조금 다르다. 욕설 등속은 말을 여전히 말로 대하는 반면에 과도한 축약어는 말을 오직 기호로만 대한다. 기호를 소통의 도구로 삼는 사람은 오직 외부와 소통할 수 있을 뿐인데, 말을 말로 대접하여 말하는 사람은 저 자신과도 소통한다. 그것이 말의 힘이다.  62

- 악마의 존재 방식
보들레르는 「너그러운 노름꾼」이라는 기이한 산문시를 썼다. 시인이 마귀들의 왕인 사탄을 만난 이야기다. 마음씨 좋은 늙은 귀족의 풍모를 지닌 마왕은 온갖 지식에 통달한 존재이며, 특히 인문학에 이르러서는 그 체계 하나하나가 어떻게 성립되어 어떻게 발전했는지 꿰뚫어 알고 있다. 이런 사탄도 단 한 번뿐이긴 하지만 간담이 서늘한 적이 있다. 어느 예리한 설교자가 "악마의 가장 교묘한 술책은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믿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결코 잊지 말라"고 말했을 때였다. 이 말은 악이 늘 평범한 얼굴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온갖 미명을 동원하여 받들고 있는 제도와 관습 속에 교묘하게 숨어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그러나 저 "악마의 교묘한 술책"을 은유로만 여기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부지런한 보들레르 연구자이며 19세기 프랑스 문학의 전문가인 막스 밀레르는 1960년『프랑스 문학에 나타난 악마』라는 책을 출간했다. 상하권을 합해 천 쪽 가까이 되는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그 연구의 동기가 제2차세계대전의 참극에서 시작되었다고 쓴다. 그 끔찍한 집단적 범죄, 인간 행위의 일반적 척도를 넘어서는 악독한 힘의 폭잘이 오직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일까. 인간의 내부에는 개인적 차원과 집단적 차원을 망라해서 어떤 알 수 없는 명령에 복종하도록 준비된 악덕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바로 이런 의문이 끊임없이 문학의 주제가 되어온 악마의 존재를 다시 검토하게 했다고 말한다. 끝을 알 수 없는 악 앞에서 느끼는 인간의 무력감이 그 거대한 책을 쓰게 한것이다.

이 거대한 무력감을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 다시 느끼고 있다. 수많은 생령,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3백 명이 넘는 생명이 물속에서 숨졌거나 실종했음을 알게 된 순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한도 끝도 없는, 그래서 설명할 길이 없는 악 속에 침몰해 있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막스 밀레르가 생각해본 것처럼, 이 침몰이 정말 악마의 책동에 의한 것이라면 악마는 이 참극을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악마는 먼저 우리 마음을 무디게 만들었다. 쉽게 잊어버리는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는 사건만 이야기하자. 그것이 2009년이던가, 한겨울에 용산에서 제 삶의 터전을 지키려던 사람들이 망루에서 불에 타 숨졌을 때 사람들은 한동안 애통해 하였지만 끝내 없던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같은 해 여름부터 지금까지, 일자리를 잃은 2천여 명 쌍용차 노동자 가운데 스물다섯 명이 비통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는 내내 막장 드라마를 보며 세상이 평화롭다고 믿으려 했고, 도시 정비니 고용 유연성이니 희망퇴직이니 하는 아름다운 말들을 악마는 아무데나 내걸었다.

악마는 용의주도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렇게 아우성을 쳤고 여전히 아우성을 치건만, 저 위험한 배를 비정규직들이 몰아도 그것을 예삿일로 여기도록 끝내 세상을 훈련시켰다. 악마는 제 시선을 벗어난 사람들이 그 몰상식을 고발하더라도 그들을 '종북 빨갱이'로 몰도록 프로그램된 사람들을 높은 자리, 낮은 자리에 뿌려놓았다. 악마의 친화성도 한몫을 했다. 기우뚱거리는 배에 수많은 사람을 태워 바다로 내보내는 회사에 그것을 감시해야 할 사람들이 상을 주었다. 감시해야 할 사람들과 또 그것을 감시해야 할 사람들을 악마가 차례차례 포섭한 것이다.

악마는 섬세하기도 했다. 기울어진 배를 물살이 그렇게 세다는 맹골 수로까지 몰고 가게 했다. 그 위급한 시간에 크게 활약해야 할 사람들이 딴짓을 하게 만든 것도 악마의 셈에 들어 있다. 제 이름으로건 남의 이름으로건 그 회사를 설립하고 이런저런 명목으로 돈을 훑어내어 회사를 빈껍데기로 만든 사람에게 예술가라는 직함을 붙여주기도 했다. 악마는 눈뜨고 그 생때같은 아이들을 잃는 순간에도 우왕좌왕할 정부를 기다려 배를 침몰시켰다. 아이들을 다 구했다는 유언비어를 책임 있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퍼뜨리기도 했다. 악마는 빠뜨린 것이 없었다.

물론 나는 악마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악마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악마만이 저지를 일을 이 땅의 사람들이 저질렀다는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악마의 처사였다면 악마의 연구로 끝날 텐데, 그것이 우리의 죄이니 우리는 이제 앉았던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한다. 나 자신을 용서하지 말고 리본을 달건 촛불을 들건 무슨 일이든지 해야한다.  72-75

- 진정성의 정치
‘진정성’을 외국어 사전에서 해방한 것은 1980년대의 운동권으로, 그때 이 말은 담론의 진실성과 효력을 뜻했다. 한자로는 물론 ‘眞正性’이다. 그러나 이 말을 유행시킨 것은 1990년대의 문학비평이다. 문학에서 말은, 특히 시의 말은 그 한마디 한마디가 감정의 크고 작은 굴곡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 특별한 효과를 거둔다는 것이 이 ‘진정성’의 이데올로기이다.  77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지 못하기에 역사 속에서 자신을 객관화하지 못한다.  ..
‘진정성’이 어떻게 정의되건 그것은 한 인간이 제 마음 깊은 자리에서 끌어낸 생각으로 자신을 넘어서서,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을 때에만 확보된다.  79

- 어느 히피의 자연과 유병언의 자연
세상에 또 하나의 삶이 있음을 자신들의 몸으로 증명하는 일일 터.  87

- 1700개의 섬
모진 사람들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피곤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래서 제 사는 자리를 더욱더 섬으로 만들려 하고 거기에 철벽을 치려 한다.
그러나 철벽의 보호를 받는다고 해서 피곤한 마음이 거기서 편안할 수는 없다. 차라리 피곤함은 그 철벽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105

- 오리찜 먹는 법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책은 도끼라고 니체는 말했다. 도끼는 우리를 찍어 넘어뜨린다. 이미 눈앞에 책을 펼쳤으면 그 주위를 돌며 눈치를 보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읽는 것에 우리를 다 바쳐야 한다. 그때 넘어진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 일어난다.  
책이라는 이름의 도끼 앞에 우리를 바치는 것도 하나의 축제다.  127-128

- <어린 왕자>에 관해, 새삼스럽게
인간은 자기가 공들여 일구고 가꾼 것들과만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이 관계를 통해서만 자기 존재를 확장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일만 사람을 사귀고, 일만 가지 물건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중 어느 것 하나도 자신이 마음과 노력을 부어 길들인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일만 사람을 바쁘게 만나고 만 가지 물건을 숨차게 끌어모았지만, 누구에게도, 어느 물건에도, 자기가 살아온 삶의 시간을 새겨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만 사람은 그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며, 만 가지 물건은 그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생애 내내 눈앞에 보자기보다 더 적은 시간밖에는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가 눈을 감으면 그 시간은 꺼져버릴 것이다.
여우가 ‘길들인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아닌 것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을 그것의 삶 속에,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 있게 하는 일이다. 존재가 세상에 진정한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은 권력이나 소유나 명성이 아니라 이 길들임이라는 것을 말할 것도 없다.  136

여우가 시간에 대한 설명을 통해 ‘의례’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의례란 “어떤 시간을 다른 시간과 다르게 하고, 어떤 날을 다른 날과 다르게 하는 것”이다. 확실히 설날이나 생일, 명절이나 제삿날은 다른 날과 다르다. 그런 날의 시간은 특별한 카리스마를 갖는다. 그 시간들은 인간이 살아온 내력이 찍어놓은 기억의 시간이자 무의식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137

어린 왕자가 이 지구에서 처음 만난 생명도 마지막으로 접촉한 생명도 뱀이었다. 이 뱀은 여우 못지않게 중요하다. 어린 왕자가 뱀을 처음 만났을 때 함께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대화보다는 침묵이 더 길었다. 뱀은 자기가 누구든 한번 건드리기만 하면 그가 ‘태어난 땅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고 말하며, 어린 왕자가 자기 별을 정말로 그리워하면 그를 도와줄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자기가 태어난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물론 죽는다는 말이다. 그의 말은 여우의 말처럼 이해해야 할 말이 아니라 ‘해석해야 할 말’이다. 그것은 감동해야 할 종류의 말이 아니라 학습해야 할 말이다.
어린 왕자는 여우의 종합으로부터 비밀한 지혜를 얻었지만, 결단의 시간이 다가오자, 그 실천을 위해서 뱀이 분석을 선택했다.  137-138

분석의 말은 습관을 넘어선 곳에서 만들어지는 말이며, 그래서 충격의 말이다. 사랑으로만 권태를 치료할 수 있을 때, 또는 사랑이 필요하다는 말까지 권태롭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때, 충격은 거의 유일한 처방이다. 충격은 길들이기가 아니며, 시간을 바치는 일이 아니다. 충격은 관계를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충격은 허위의 관계가 벗겨진 곳에서 진정한 관계를 드리낸다. 그것은 시간의 얇은 보자기가 찢어진 곳에서 시간의 신비로운 깊이를 판다. 어린 왕자는 이 깊이를 타고 제 별로 갔다.
그런데 어린 왕자를 한 번 깨물어 그의 별로 되돌려보내는 뱀의 수법은 오늘날 우리의 전자 문명과 닮은 점이 많다. 한 번의 ‘딸까닥’으로 열리는 수천 개의 세계. 우리는 이렇게 날마나 뱀의 힘을 빌리는 셈이지만 뱀에게 물리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어떤 결단도 없이 이 세계 저 세계를 날아다니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힘은 우리의 존재를 강화하자는 것인데 거꾸로 우리의 존재가 그만큼 졸아든 것이기에 불안하다.  138-139

- 언어, 그 숨은 진실을 위한 여행
어느 언어건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제멋대로 만들어진 임시 언어일 뿐이다. 어쩌면 인류가 여러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 사고의 허약함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이 ‘나무’라고 하면 그 말 자체가 나무여야 할 텐데, 그 나무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말을 우리는 멋대로 만들어서 지껄이고 있지 않은가. 진리가 보편적이라면 그것을 표현하는 말도 보편적이어야 할 텐데, 말에 관한 한 인간은 우연에 우연을 겹쳐놓고 있을 뿐이다.  147

말라르메는 인간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기에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했지만, 언어와 언어 사이를 헤맨 사람들은 거꿀로 인간이 언어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개의 언어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언어는 서로 겹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 대부분의 언어는 ‘눈’에 해당하는 낱말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낱말로 ‘함박눈’에 해당하는 말을 가진 언어는 많지 않다. 한 언어가 적시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언어는 적시한다.  148

- ‘아 대한민국’과 ‘헬조선’
자신감을 가진 자만이 먼저 말을 걸고 먼저 토론을 시작한다.  156

- ‘여성혐오’라는 말의 번역론
불행한 일을 당하면 누구나 그 불행을 책임져야 할 사람을 찾아내고 싶어한다. 탓할 사람을 찾아내지 못한 불행은 지금 눈앞에 닥친 불행보다도 더 고통스럽다. 미국 사회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중하류층 백인들에게 샌더스는 그 책임이 그들에게서 돈을 빼앗아간 월가의 부자들에게 이싿고 말하고, 트럼프는 그들에게서 일자리를 빼앗아간 이민자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한국의 젊은 남자들은 잘나가는 여자들과 페미니스트들에게 그 책임을 돌리려 한다. 그러고는 다시 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여성혐오의 혐의를 둘러싸야 하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 혐오는 그 혐오가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설명을 거치고 나면 말은 얼마나 힘을 잃는가. 여전히 바뀌지 않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우리가 어머니에게, 아내에게, 직장의 여성 동료에게, 길거리에서 만나는 여성에게, 심지어는 만나지도 못할 여자들에게 특별히 기대하는 ‘여자다움’이 사실상 모두 ‘여성혐오’에 해당한다. 나는 한 사람의 번역가지만 ‘여성혐오’라는 번역어의 운명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고통의 시대에 더 많은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불행을 그 오해 속에 묻어버리려는 태도가 비겁하다는 것은 명백하게 말할 수 있다.  184-185

- 문단 내 성추행과 등단 비리
문학교육이건 다른 교육이건 교육만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도 없다. 미숙한 선생은 그 영향력의 깊이로 자신의 교육자적 자질과 가치를 가늠하려 한다. 그래서 마침내는 학생의 정신과 육체를 식민화하려 한다. 글쓰기 교실의 수업처럼 제도의 뒷배가 없는 교육일수록 그 식민화의 욕구가 더 커질 수 있고, 그 지배 상식이 폭력적일수록 학생에게 미치는 선생의 영향력이 깊어진 것 같은 환각이 일어난다. 그러나 학생을 식민화하려는 시도는 선생이 스스로 품고 있는 교육자적 자질에 대한 의구심과 연결될 때가 많다. 비재의 권력이 교육자의 자질을 확인해주지는 않는다. 가르치는 자는 지배하는 자가 아니며, 배우는 자는 지배받는 자가 아니다. 그 관계가 민주적일 때만 교육의 내용도 민주적 가치를 얻게 된다.  187-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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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시대. 그 시절에 우리는 모두 괴물이었다.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시대에 사람들은 분노를 내장에 쌓아두고 살았다. ...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12

책을 읽는 사람과 모자를 쓴 사람과 낚시질을 하는 사람을 함께 그린 그림이 있다. 문제는 “이 그림에서 모자를 쓴 사람은 누구인가?”를 알아내는 것. ...  
그러나 아이는 매우 난감한 얼굴을 하더니 이렇게 되물었다. “내가 어떻게 모자 쓴 사람의 이름을 알겠어요?” ...
학교가 요구하는 학습 능력은 모자 쓴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수준의 능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학교 교육의 코드를 알아차리는 ‘눈치’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학생의 생각이나 의문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문제와 대답의 각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토론식 수업의 중용성을 역설하고, 학생이 질문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코드는 토론되는 것이 아니라 규정되는 것이고, 각본에는 질문이 끼어들 틈이 없다. ...
방문교사는 “모자를 쓴 사람은 누구인가요?”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어느 사람이 모자를 쓰고 있나요?”라거나, 최소한 “누가 모자를 쓰고 있나요?”라고 물었어야 한다. 코등의 바탕을 자체가 문제라는 이야기다. 잘못된 코드는 잘못된 그만큼 더 강압적이다. 삶의 진실과 따로 노는 코드는 결코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14-15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죽음을 견지디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 살아 있는 삶, 다시 말해서 죽음이 함께 깃들어 있는 삶을 고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21

인간이 수수 천년 사용해온 말 속에는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리고 희망이 들어 있다.  39

우리에게 과거의 상처는 너무 악착스럽고, 미래에의 걱정은 갈수록 두터워질 뿐이다. 그래서 현재는 그만큼 줄어들고 눈앞의 삶을 깊이 있는게 누리는 것이 용서되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가 미래의 걱정거리로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학은 지금 이 자리의 살에 자신을 자유롭게 바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해왔다. 대학의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자유의 시간과 공간이 없이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구실 아래 그 자유는 줄어들었으며 이제는 거의 폐기되기까지 했다.  42

이런저런 사건들이 늘 ‘어느 날 갑자기’의 형식으로 찾아오는 곳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변덕스럽지 않기는 어렵다. ‘어느 날 갑지기’앞에서 놀라지 않게 하는 일은 인문학이 늘 내세우는 일이고, 사실 내세워야 할 일이다.  ... 생각을 생산하는 일이 아니라 생각을 소비하는 일에만 매달릴 때 그 위기는 피할 수 없다.  57

판단하고 선택하기전에 모든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가려놓은 채, 생명에 삽질을 하고 시멘트를 발라 둑을 쌓아둔다면, 거기 고이는 것은 창조하는 자의 사랑이 아니라 굴종하는 자의 증오일 것이다.  100

우리는 너무나 많은 폭력 속에 살고 있고, 그 폭력에 의지하여 살기까지 한다. 긴급한 이유도 없이 강의 물줄기를 바꿔 시멘트를 처바르고, 수수만년 세월이 만든 바닷가의 아름다운 바위를 한 시절의 이득을 위해 깨부수는 것이 폭력이고, 복잡한 거리에서 꼬리물기를 하는 것도 폭력이다. 저 높은 크레인 위에 한 인간을 1년이 다 되도록 세워둔 것이나, 그 일에 항의하는 사람을 감옥에 가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너는 앞자리에 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다. 의심스러운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며,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도 따리고 보면 폭력이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폭력이 폭력인 것을 깨닫고, 깨닫게 하는 것이 학교 폭력에 대한 지속적인 처방이다.  115

경영이 교육과 학문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이루어지지 않고, 거꾸로 교육과 학문이 학교 경영을 위한 수단이 될 때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123

우리의 삶이 아무리 비천해도 그 고통까지 마비시키지는 못한다.  124

권태롭다는 것은 삶이 그 의미의 줄기를 얻지 못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감수성을 잃었다는 것이다. 유행에 기민한 감각은 사물에 대한 진정한 감수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거기에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온갖 것들에 대한 싫증이 있을 뿐이며, 새로운 것의 번쩍거리는 빛으로 시선의 깊이를 대신하려는 나태함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며 마음의 깊은 곳에 그 기억을 간직할 때에만 사물도 그 깊은 내면을 열어 보인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감수성이란 자아의 내면에서 그 깊이를 끌어내는 능력이며, 그것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 나와 세상을 함께 길들이려는 관대한 마음이다. 제 깊이를 지니고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은 세상을 살지 않는 것이나 같다.  192

삶을 깊이 있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은 우리가 마음을 쏟기만 한다면 우리의 주변 어디에나 숨어 있다.  매우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 삶을 구성하는 것 하나하나에 깊이를 뚫어 마음을 쌓지 않는다면 저 바깥에 대한 지식도 쌓일 자리가 없다. 정신이 부지런한 자에게는 어디에나 희망이 있다고 새삼스럽게 말해야겠다.  212

나로 말하면, 에르노의 소설에서처럼 희생이란 이름 아래 착취당했던 아버지의 아들이며, 줌파 라히리의 소설에서처럼 아들 앞에 해결해야 할 문젯거리로 서 있는 아버지이다. 그런데 우리 세대 작가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그렸던가,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어떤 기호이거나 험난한 역사의 곡절에 안표가 되는 정도의 추상적 형식을 넘어선 적이 있던가. 지금 2, 30대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아버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 죄는 우리 세대에서 비롯된 것이 확실하다.  227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폭력이 폭력인 줄을 알지 못한다.  231

한 시대에 어떤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덕성과 학식으로 어떤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의견을 공공장소에 영원히, 그것도 토론이 가능하지 않은 형식으로, 내세울 권리는 없다. 겸손하지 않은 도덕은 그 자체가 폭력이다.  233

코드에는 소비가 있을 뿐 생산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 코드는 간편한 데 생산은 어렵고 복잡하다.  279

나는 누구나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시간을, 다시 말해서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남이 모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281

컴퓨터나 핸드폰 같은 물건들은 삶을 투명하게 만든다. 내가 어느 구석에 들어가 있어도 그것들은 나를 추적한다. 아니, 그것들이 나를 추적하기 전에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다는 표적을 내 스스로 남겨놓도록 유도한다. ...  이런 투명성에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사람살이란 묘한 것이어서 우리는 투명한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불투명한 것을 획책한다. 산중에 수도하러 들어간 사람은 자신을 물처럼 투명하게 만들려 하면서도 세상이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이 되려 한다. 대도시에 나와 간결하고 명료한 삶을 살려는 젊은이의 욕망에는 또한 자신을 군중 속에 감추려는 열망이 함께 따라붙는다. 인터넷은 인간들의 모든 삶을 한꺼번에 끌어안기 위해 그 그물을 더욱 넓고 더욱 촘촘하게 짜겠지만, 사람들은 또 어디로 피해 달아나 은근한 사이트를 구성할 것이다. 그래서 그 그물이 더 커진다. 불투명한 것들이 투명한 것의 힘을 만든다. 인간의 미래는 여전히 저 불투명한 것들과 그것들의 근거지인 은밀한 시간에 달려 있다.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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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기독교와 불교에 밀리지 않는 교세를 자랑하는 대학교에 귀의한 가정들이 오늘도 입시를 향해 미친 듯이 내달리고 있는데 세 아들을 데리고 홈스쿨링이라니... 제 아이들은 어떤 미래를 살게 될까요? 사실 저도 궁금합니다. 8-9

우리 부부는 자녀교육 책을 읽고, 전문가의 수업에도 참여했어요. 자녀교육에 대해 배우러 다니면서 돈도 적지 않게 썼습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걸 깨달았어요. 정작 공부가 필요한 건 아들이 아니라 아빠였다는 사실을.  19

누군가는 한국의 교육 환경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19세기 학교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 학생들을 재우고 있다.”
한국을 수차례 방문했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한국 교육을 통렬하게 비판했지요.
“한국의 학생들은 하루 15시간 동안 학교와 학원에서 미래에 필요하지도 않은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54

건축가 유현준 씨는 우리가 ‘12년간 교도소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학교를 두고 한 말이죠. 건축의 관점에서 보면 학교와 교도소의 설계 원칙이 같답니다. 수감자(학생)를 고립시키고, 교도관(교사)이 손쉽게 수감자를 감시하도록 건물을 설계한답니다.   57

어쩌다 학교는 교도소처럼 학생들을 통제하는 기관이 된 걸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 잠시 <호모 데우스>의 작가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의 주장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역사 지식은, 우리의 현실이 필연의 겨로가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준다고. 우리는 종종 ‘현실이 원래 그런 거지. 어쩌겠어’라면서 비판 없이 현실에 순응하지요. 그러나 역사를 공부하면, 과거의 우연과 사건들이 누적되어 현실을 만든다는 걸 알게 됩니다.  59

공교육의 역사는 고작 200년이 조금 넘습니다. 1794년 프로이센이 세계 최초로 학교를 국가의 감독 아래 두는 공교육법을 제정했지요. 18세기 유럽 각국은 경쟁적으로 산업혁명을 시도하고 있었어요. 프로이센은 공업선진국 영국을 따라잡기 위해 과감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공교육을 통해 국민수준을 끌어올려 산업현장에서 필요한 노동자를 양산하기로 계획한 겁니다. 간단히 말해서 프로이센 공교육의 목표는 순종적인 공장노동자를 양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산업화 후발국가 일본, 한국 등이 프로이센의 뒤를 따랐지요. 학교가 양산한 순종적인 공장노동자들은 아시아 경제의 고속성장에 확실하게 일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암기위주 교유그 선다형 시험의 입시 전통이 자리를 잡았고요.
냉정하게 사실을 봅시다. 공교육의 목적은 뭘까요? 사회 유지와 발전에 필요한 시민을 양성하는 겁니다. 더 노골적을 ㅗ말하자면, 충성스러운 군인과 성실한 납세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죠.  60

“교육이란 결국 사실의 학습이 아니라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는 훈련이다.”
누가 말했을까요? 아인슈타인입니다.  66

우리 인정할 건 인정합시다. 우리 아버지들은 아이들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이지요. 이걸 인정해야 변화가 시작됩니다.
‘시간과 돈의 씀씀이를 볼 때 나는 정말 아이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나?’  103-104

진짜 꿈과 가짜 꿈을 구분하는 방법이요. 진짜 꿈을 꾸는 사람은 희생을 불사합니다. 반면, 가짜 꿈을 꾸는 사람은 희생을 하느니 꿈을 버리지요.  127

안타깝게도 한국의 교육은 방향을 못 정한 아이들에게 무조건 속도부터 내라고 재촉합니다. 일단 학생들은 모둔 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고 공부합니다. 나중에 뭐가 될지 모르니 일단은 모든 걸 준비하자는 심산인데, 그렇게 하면 나중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149

우리 모두 어떤 분야에서든 기본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 하지만 조급한 학부모들은 천천히 기본을 다지는 방식을 싫어합니다. 당장 성적이 나와야 하니까 학원과 과외를 선호하지요. 단지 소수의 용감한 사람들만이 느리더라도 확실하게 기본을 다집니다.  ...
손웅정(축구선수 손흥민 아버지) 씨는 교육을 대나무에 비유하더군요. 대나무는 땅 위로 솟아오르기 전에 5년간 조용히 땅속에서 뿌리를 내린답니다. 그리고 일단 뿌리가 확실히 자리를 잡으면 땅위로 줄기가 솟아나는데 하루에 50센티미터씩 자란다고 하네요.  164-165

유대인들은 오랜 기간 박해를 받으면서 이런 지혜를 얻었습니다. ‘부동산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유대인이 사회에서 배척당하면 땅이나 집은 쉽사리 빼앗길 수 있다. 그러니 박해를 피해 도망갈때 가져갈 수 있는 재산을 만들어라.’
유대인들이 교육에 열을 올리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머릿속 지식은 빼앗기지 않으니까요. 더불어 많은 유대인들은 위기의 순간에 쉽게 가져갈 수 있는 귀금속 모으는 걸 좋아했습니다. 다이아몬드 세공업에도 많이 달려들었고요. 지금까지도 전 세계 다이아몬드 거래의 큰손은 대부분 유대인들입니다.
“부다르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 위에  세워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세 아들이 남을 짓밟고 돈을 버는 사랆이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부자들의 낙원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소모품 또한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유대인의 자녀교육 지침 하나를 가슴에 꼭 담고 살아갑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직업에 필요한 기술을 가르치지 않으면 결국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240-241

자본주의가 청소년들의 각성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철없는 소비자를 제일 좋아합니다. .. 마구잡이 소비는 기업의 성장과 발전의 동력이거든요. ... 자본주의는 남이 준 돈을 받아 소비생활을 누리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242

‘청소년’이라는 말 자체가 산업시대 이후에 등장했다는 설도 있어요. 과거에는 남자아이가 10대에 이르면 아버지를 따라 일터에 가서 기술을 배웠고, 여자아이들은 엄마 곁에서 가사 기술을 익혔지요. 그러다가 산업화시대에 공교육이 생기고, 학교는 아이들을 몇 년간 붙잡아 두고 일터로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애매한 아이들을 부를 새로운 단어가 필요했던 거지요. ‘어린이’나 ‘어른’이 순우리말인 것과 달리 청소년(靑少年)이 한자어인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나중에 만들어진 단어라는 거지요. 10대를 뜻하는 영어 Teenager는 13세에서 19세까지의 나이를 뜻합니다. Thirteen(13)부터Nineteen(19)까지 숫자에 모두 Teen이라는단어가 들어 있다고 해서 1920년대에 비로소 만들어진 말입니다.  243

일등은 주어진 과제를 검증된 방법으로 해내려고 애씁니다. 그러니 일등에게 암기와 연습을 강조하고 독창성은 기대하기 어렵지요. ...
일류는 새로운 과제를 스스로 찾아냅니다. 당연히 검증된 방법이란 게 없으니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지요. 실패는 당연한 과정이고요.  262

경졍작가 세스 고딘(Seth Godin)은그의 책 <린치핀>에서 “우리가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학교와 시스템에 의해 세뇌되기 때문”이라고 단언합니다.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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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여행, 이토록 무의미한 아름다움이여.
여행은 우리 마음속에 아름다움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새벽 안개 가득한 거리, 홀로 걸어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던 비엔나의 11월. 내겐 마음이 아직 남아있구나. 나를 글썽이게 만드는 이토록 무의미한 아름다움이여.
여행을 하며 나는 세상과 상관없는 일이 되어 가고 있다. 폭포는 끝없이 낙하하고 폐허는 점점 아름다워지고 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우린 모두 처음 살고 있으니까요.  5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건
‘잘해 보자’, ‘열심히 해 보자’ 이런 게 아니라
조금만 너그러워 지자.
어제보다 하루만큼 더 살아왔으니까 말이다.  15

파이팅!!! 같은 건 하지 말자.
그런 거 안 했지만 우린 지금까지 열심히 잘 달려왔잖아.
최선을 다하려고도 하지 말자.
그것도 하루 이틀이잖아.
매일매일 죽을 힘을 다해 달리려니까 다리에 쥐 난다.
지친 것 같다.
조금은 적당히.
조금은 대충대충.
좀 걸어 보는 건 어떨까.
걸으며 손도 잡고 주위도 돌아보고 그러자.
오늘부터는 하고 싶은 것들을 조금씩 하면서 갖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가져가면서
생각하고 싶은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하면서.  25

나는 좀 더 외로워져야겠다.
안개 뒤에서
길 위에서
불꺼진 창문 너머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1000번 광역 버스 안에서
더블린, 카이로, 루앙프라방, 도쿄 혹은 사파에서.  75

허물어진 사랑은 허물어진 대로
그대로 두겠다.
어쩌면 그것 또한 보기 좋을 것이니.  76

우리가 경험하는 여행은 논픽션이지만 우리가 추억하는 여행은 픽션이다.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은 멋지게 이륙하는 비행기의 가벼운 각도다.
아쉬운 건 우리가 여행을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여행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수백년 전의 여행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여행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분명 매혹적인 일이다.
여행자는 생의 비밀을 엿보고 싶어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어떤 이즘(ism)을 설득하고 성취하기 보다는 그것을 살아버린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여행과 음식, 숙소, 길, 삶의 태도와 방식에 대한 편견은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그들은 그것을 직접 몸으로 느끼고 스스로 얻어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새로운 좌표를 만들어 왔다. 해안선을 넓히고 고도를 높였다. 시간을 확장하고 공간의 깊은 곳을 탐색했다. 지도를 만든 것을 그들이다.

여행, 그것은 삶과의 달콤한 밀월을 즐기는 일이다.
우리의 여행이 서사를 장착할 필요는 없다. 교훈적일 필요는 더더욱 없다. 그건 각설탕 같은 것이다. 넣어도 그만 안 넣어도 된다. 우리의 여행은 단지 생의 체온을 조금 높이는 정도면 충분하다.
‘즐기고 탐닉하라’ 이것이 여행자의 첫 번째 행동강령이다.
여행은 고백의 한 양식, 익명적 중얼거림, 세상에 대한 깊이 없는, 그래서 가벼운 그렇기에 유쾌한 찰나적인 긍정.
여행이 자신을 위해 많은 일을 해 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그러나 여행만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고 믿어라.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우리는 처음 보는 생의 풍경을 문득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겁먹지도 말고 망설이지도 마라. 그 풍경은 당신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니까. 우리는 단지 설레기만 하면 된다.
누구나 자기만의 환상을 좇아 여행을 떠난다. 어떤 이는 환상을 깨기도 하고 어떤 이는 환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어떤 것이 옳다고는 할 수 없다. 여행은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행은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하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일이다. 그 시간 속에 슬며시 심장을 올려놓는 일이다.

길과 가장 잘 사귀는 방법은 외로움과 친구가 되는 거야.
나이가 든 여행자들을 존경하라. 그들 대부분은 인생의 교훈을 체득한 이들이다.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어, 혹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 여행을 시작한 이들이다. 이들은 낯선 풍물을 보며 신기해하지도 않고, 여행지에서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 따위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여행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은 것이다.  
여행이란 생에 골몰하는 가장 유익하고 헌신적인 방법, 생과의 가장 완벽한 열애.
여행은 언제나 실패다. 성공적인 여행은 없다. 우리는 실패를 경험하기 위해 기꺼이 여행을 떠나고 그 실패는 즐겁다.
이번 여행을 통해 당신이 긍정을 배웠으면 좋겠다.  139-141

여행의 정석
가장 빠른 달팽이처럼.  143

모든 여행은 아름답다. 아름다워야 한다. 현실의 반대말은 비현실이 아니라 여행이다. 여행작가는 그렇게 믿어야 하며 여행작가의 가장 소중한 책무는 여행에 대한 로망을 최선을 다해 보여주는 것이다. 전쟁터 같은 현실에서 독자를 피신시기는 것이다. 세상은 더 이상 외롭지 않고,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지평선 너머에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방법을 찾는 것은 커다란 배낭을 지고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 지평선을 넘어가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사진과 글로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물음 : 여행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나요?
답 : 아, 이건 너무 어려운 질문이네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놓치기 싫어 그토록 손에 꽉 쥐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손에 쥔 모래알처럼 별것 아니었다는 것. 아마도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176

물음 : 훌륭한 여행이란 어떤 것일까요?
답 : 그런게 있을까요? 단지 취향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모험을 하든, 쇼핑을 하든, 미술관을 가든, 하루 종이 ㄹ호텔 수영장에 드러누워 햇빛을 쬐든, 타인의 여행에 대해 왈가왈부하기는 좀 그렇군요. 여행은 그냥 여행이지 ‘훌륭한’ 여행이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하다는 것, 과연 ‘누구’에게 훌륭한 것일까요? 훌륭한 여행보다는 좀 더 사려 깊은 여해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177-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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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들은 대부분 외롭고, 외로운 것들은 대부분 아름답다.
혼자이어야만 닿을 수 있는 곳이 있다.  12

다들 시간이 공평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누구는 열 두 시간 동안 생계를 위해 일하고 여섯 시간 동안 자고 여섯 시간 동안 피곤해서 멍하니 아무것도 못하지만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자기 하고 싶은 일만 한다. 우리에겐 같은 시간이 주어져 있지 않다.
뭔가 잘못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많이 잘못되어 있을 때다. 바로잡기가 힘들다. 니체였던가. “살아야 할 이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살아가는 모든 방식을 견뎌낼 수 있다”는 말을 한 사람이. 그렇지만 우린 너무 많이 견뎌 왔다. ... 남을 견디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것. 어느 것이 더 견딜 만한가.  14

잘못된 길이 지도를 만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행운을 만나는 건 언제나 낯선 길 위에서고 우리를 자라게 하는 것은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실수했다고 다그치지 말아 주세요. 대신 응원해 주시면 안될까요. “괜찮아”하고 말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응원이 실수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들어 주니까요. 낭비라고도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요. 조언은 감사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조용히 지켜봐 주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모른 척 해 주시든지.  27

선인장의 가시는 잎이 변해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사막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죠. 넓은 잎으로는 수분 증발을 막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살다 보니 우리도 점점 선인장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릴 적 환한 햇살을 듬뿍 받아들이던 넓은 잎들은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을 거치면서 어느새 뾰족한 가시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상처받을까 싶어 가까이 가기가 두렵고 가까이 오는 사람도 상처가 될까 마냥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32

더 가지고 싶지만 더 가질 수 없는 하루라는 카드. 하루에 하루만큼씩 꼭 사라지는 하루.
그래서 사랑하는 거다. 시간은 언제나 우리 편이 아니고 우린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으니까. 사라져 가고 있으니까. 사랑이 아니면 이 공허와 허무를 견딜 수 없으니까.  49

우리는 맨발로 해변을 걷는다. 서로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다. 가끔 발걸음을 멈추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어둠 속의 바다를 응시하다 보면 어느 천사가 않아 커다란 눈으로 우리를 바락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들은 손을 꼭 잡고 그렇게 오래도록 잘 살아라.’ 우리를 지켜주는 천사를 만나는 일, 확인하는 일, 그것이 어쩌면 여행이 아닐까.
하루키가 말했다. “작가는 소설을 쓴다-이것이 일이다. 비평가는 그에대해 비평을 쓴다-이것도 일이다. 그리고 하루가 끝난다. 각기 다른 입장에 있는 인간이 각자의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사람과 식사를 하고, 그러고 잔다. 그게 세계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켜야 하고 돌아갈 단 하나의 세계가 있다면 그곳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53

사랑을 더 새롭게 하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아요.
더 많이 사랑하는 것밖에는.
사랑을 배우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하는 것 아닐까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네요.  
그러니 사랑하도록 합시다.
어차피 사랑하는 것이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좋은 거잖아요.
어차피 후회할 거라면 사랑하고 나서 후회하는 게 낫잖아요.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가지면 더 좋잖아요.
당신은 여전히 미지의 방향에 있고.
오늘도 나는 더듬거리며 당신에게로 향합니다.  56

카페에 앉아 물끄러미 내 손을 바라보고 있다. 어느 겨울 당신을, 차가운 손을 덮어 주던 그 손이 지금은 식은 커피잔을 쥐고 있다. 우리는 사랑이 오는 건 보지 못하지만, 가는 건 끝까지 지켜본다.
이별이 슬픈 건 네가 울고 있을 때 내가 그 자리에 없다는 것이다. 빈 자리를 보는 것이 제일 슬프다.
이별 후에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고 이별 후에도 많은 생이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낭비된 시간도 없고, 낭비된 마음도 없다. 모든 인연은 몸속 깊이 새겨진 채 우리의 남은 날들을 작동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 살고 있고 당신은 거기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그게 이별이다.  86-88

다들 젊었을 때 전력 질주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낙오한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 어쩌면 우린 출발선상에서부터 이미 낙오해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전력 질주하고 있는 사람들도 뭐 때문에 전력 질주를 하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생은 길고 지루한 싸움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력 질주할 수는 없는 거죠. 전력 질주해야 할 때가 있고 천천히 걸어야 할 때도 있고 그늘에 앉아 쉬어야 할 때가 있는 겁니다. 지금이 꼭 전력 질주해야 할 때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도끼날 이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하루 종일 나무만 베는 사람보다, 중간중간 쉬면서 날을 가는 사람이 결국 나무를 더 많이 벤다는 것이죠.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아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건 지금하고 있는 일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약간의 각오와 약간의 여유, 그리고 즐겨 보자는. 마음가짐.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인생은 우리 뜻대로 되는 게 아니고 우리에겐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 있으니까요. 길게 보자고요.  94-97


원고지 1,000매를 쓰는 방법은 일단 원고지 1매를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1매를 쓰고 또 1매를 쓰고, 1,000매가 될 때까지 1매씩 쓰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목적지에 닿기 위해서는 왼발 앞에 오른발을 두고 다시 오른발 앞에 왼발을 둬야 합니다. 이걸 무수히 반복하다 보면 결국 목적지에 닿게 되죠.
원고지 1,000매를 쓰기 위해서는 일단 원고지 1매를 써야 합니다. 그리고 또 1매를 쓰고, 또 1매를 쓰고, 또 1매를 쓰고.... 1,000매가 될 때까지 1매씩 쓰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목적지에 닿기 위해서는 왼발 앞에 오른발을 두고 다시 오른발 앞에 왼발을 둬야 합니다. 이걸 무수히 반복하다 보면 결국 목적지에 닿게 되죠.
끊임없이 원고지 1매를 쓰는 일, 매일매일 오른발 앞에 왼발을 두는 일. 그것을 우리는 작업이라고 부릅니다. 작업은 꾸준히 행해져야 합니다. 기계처럼 작업하는 사람을 우리는 작가라고 부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책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쓸 수 있을 때는 그 기세를 몰아 많이 써 버린다. 써지지 않을 때는 ‘쉰다’라는 것으로는 규칙성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임카드를 찍듯이 하루에 거의 정확하게 20매를 씁니다.”
소설가 이언 매큐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사무원처럼 일합니다. 다른 몇몇 작가들은 이런 식의 설명을 모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걸 받아들입니다. 저는 마치 사무원처럼 일해요.”
소설가 필립 로스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하루 종일 글을 씁니다. 아침, 오후, 거의 매일 글을 씁니다. 제가 2년 내지 3년 동안 그렇게 앉아 있으면, 마침내 한 편의 작풉이 완성되지요.”
꾸준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계속하다 보면 내 앞에 뭔가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뭔가가 만들어져 있다는 것. 그것만큼 설레고 근사한 일이 있을까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어느 날 당신 앞에 나타난 ‘작품’은 당신이 지난 3년 동안 만들어 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 앞에 그날, 비로소 등장하는 것이죠.
우리가 작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하루에 100매를 쓰고 열흘을 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3년 동안 매일 10매씩 쓰는 사람을 우리는 작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당신 앞에 불현듯 등장하는 그날까지 당신은 고독할 것입니다. 외로울 것입니다. 때로는 절망 속에 허덕일 것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계속 써가는 수밖에요. 네, 맞습니다. 작가를 그런 직업입니다.
꾸준함이 당신의 실수를 줄여줄 것입니다. 복서는 상대방의 펀치가 날아오면 습관적으로 몸을 비틀어 피합니다. 말벌은 날아오는 곤충에게 기계적으로 침을 쏩니다. 고민하거나 망설이지 않죠. 그래서 실수가 없습니다.
꾸준한 작업을 위해선 컨디션 관리가 기본입니다. 일의 특성상 프리랜서는 생활이 불규칙해지기 쉽습니다. 밤샘하고 다음 날 늦게 일어나거나 아예 밤을 새는 경우가 많죠. 이런 리듬으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아침밥을 먹고 야채와 과일을 섭취하고 날마다 조깅을 해야 하죠. 그리고 정해진 시간 동안 서재에 틀어박혀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야 하죠. 루틴을 만들지 않으면 컨디션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작가는 로망이 아니라 현실이거든요.
우리가 만들어낸 작품이 모두 만족스러울 수는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할 확률도 생각보다 낮아요. 루틴을 만들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의욕도 떨어집니다. 소득면에서도 좋지 않습니다. 내일 작업량을 위해 오늘의 에너지를 아낄 수 있는 사람이 10년이고 20년이고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에게 작품은 ‘해야 할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109-112

우리는 거절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절을 못하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때 거절했어야 했어’ 하며 전전긍긍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제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하고 딱 잘라 거절했어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걱정의 낮, 불면의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거절을 못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착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갈등을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하고요. 이들은 가끔 잠수를 탑니다. 연락이 되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게 할 때가 많죠.
아마 상대방도 무리한 부탁일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당신에게 부탁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시간과 노력을 허비해 가며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어도 당신에게 돌아오는 건 ‘년 역시 좋은 사람’이라는 입에 발린 말뿐일 겁니다. 이들에게 내 사정을 들어가며 거절해 보아도 ‘변했다’는 원망뿐일겁니다. 이런 사람들과는 사이가 틀어져도 괜찮습니다. 그들에게는 차라리 나쁜 사람이 됩시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첫걸음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않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거절은 나를 더 이상 소모시키지 않는 권리이자 최선의 방법입니다. 거절을 잘할수록 인생이 편해집니다. 134-135

여행을 할 때마다 ‘세상에 이런 게 있었다니!’하는 놀라움을 느끼고, 그것이 바로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하는데 ...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했듯, 어딘가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그게 우리가 문을 열고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164

후회할 각오가 되어 있고 견딜 자신이 있다면 저질러 보는 게 낫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엔 분명히 있으니까. 세상은 우리가 다가가지 않으면 진면목을 보여 주지 않는다. 여행이 가르쳐 주는 건 언제나 한 가지다. 저질러라, 그 다음에 생각하라.  177

시간을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과 여행을 떠나는 일이라는 것.  200


여러 지표상으로 부탄은 가난한 나라다. 1인당 국민 소득이 2,800달러 남짓밖에 되지 앟는다. 하지만 하루 이틀만 부탄을 겪어 보면 이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지그재그 이어지는 도로는 포장 상태마저도 엉망이지만 서두르는 법 없는 부탄 사람들은 도로 사정이 나쁘다고 여기지 않는다. 나쁜 도로 사정을 탓하는 건 오직 관광객들뿐이다. 히말라야에서 쏟아져 내리는 풍부한 수력으로 전기를 만들어 인도에 팔고 그 돈으로 모든 공산품을 수입해서 쓴다. 그러니 미세 먼지나 공해 따위를 걱정할 이유가 없다. 관광 산업에서 얻는 수익은 무상 교육과 무상 의료를 실시하는 재원이 된다. 여행하는 외국인들도 똑같은 혜택을 받는다. 1999년 부탄의 국가 행복지수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행복을 보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탄 행복 연구소’도지ㅔㄴ졸 소장은 “부탄은 국민의 행복을 모든 정책의 중심에 놓고 국가를 운영한다”고 말했다. 어떤 정책도 ‘국민 행복’과 부합하지 않으면 시행하지 않는다. 실제로 모든 정책은 10~15명으로 구성된 ‘국민 총행복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데 총점 78점을 얻지 못하면 자동으로 폐기된다. 헌법에 숲 면적을 국토 면적의 60퍼센트 이상 유지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 나라가 부탄이다. 4대 국왕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는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의회 민주주의로의 이양을 선택했다. 그결과 2008년 총선이 실시되고 지금은 총리가 수반이 돼 부탄을 통치하고 있다. 하루 7시간 노동도 철저히 지켜진다. 우리나라와 부탄 중 어느 나라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까.  204-205

다치바나 다카시는 그의 책 <사색기행>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역시 이 세상에는 가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 직접 그 공간에 몸을 두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절실하게 했다. 그런 감동을 맛보기 위해서는 바로 그 순간에 내 육체를 그 공간에 두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206

제 자리가 있다면 어떤 방향일까.  242

여행은 생일 잊는 그리고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 253

운명은 언제나 우리를 괴롭히는 것 같습니다. 괴롭히는 것, 그게 운명의 운명 같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어두운 곳으로 자진해서 걸어 들어갑니다. 무릎을 웅크리고 혼자 있습니다. 어둠을 겪어 보지 않고서는 빛을 알 수 없는 법입니다. 마음속에 어둠이 없는 자는 세상을 건널 수 없습니다. 여행은 내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입니다. 사랑은 내가 가진 어둠을 당신과 나누는 일이구요. 이만큼 살아 보니 알겠습니다. 친구 따윈 필요 없더군요. 책과 음악, 그리고 어둠 한 줌이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265

아그라탈라에서 사흘을 머물고 떠났다. 기차가 출발할 때 이 생소한 도시에 다시 올 일이 있을까. 이곳의 풍경 속에서 다시 차를 마시고 이곳의 사람들과 다시 미소를 나눌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까지 여행하는 인생을 살며 ‘다시 오게 된 이곳’이 얼마나 많았던가. 기나긴 기차의 기적 소리를 들으며 나는 분명 이곳에 다시 오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애초에 떠나가지 않았던 것처럼 보통의 걸음으로, 태연한 미간으로 이 저녁에 다시 앉아 있게 되겠지. 달은 보름에 가까워 똑같은 각도에서 이마를 비추겠지. 그러니까 요행은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만드는 일이고 그래서 여행은 사랑과 비슷한 것 아닐까.
‘다시’라는 말. 다시 오게 될 것이고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예감. 피리 소리처럼 가느다란 그 희망과 예감이 우리를 길 위에 올려놓고 우리는 밤새워 기다리게 한다. 모든 꽃들이 시들고 모든 풍경이 사라져도, 세상의 모든 잠언들이 인생이 덧없다고 속삭여도,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고 나는 인생을 이어갈 것이다.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다.  268-269

결국 공항이다. 어디론가 가기 위해 나는 서 있다. 쓰고, 읽고, 떠나는 일이 내겐 다 참고 견디는 방식이다. 여행은 생을 잊는 가장 쉬운 방법. 나는 무심한 세계에 있고 싶다. 카페와 호텔을 전전하는 삶이고 싶다.  291


여행은 우리 생이 만남보다 작별로 가득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작별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도 더 오래 여행을 하며 늙어갔으면 좋겠다.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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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명백하게 이기는 승리도 있지만, 지는 것 같은데 결국 이기는 승리도 있다. 사람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패배도 있고, 누군가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패배도 있다. 인새은 그 사람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가가 아니라, 인생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 전투 조종사



결국 승리냐 패배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경험에서 내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가 중요했던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은 나를 가난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나를 풍요롭게 한다. 그 사람과 나의 만남으로 우리는 인간으로서 각자의 존재일 때보다 더 높은 무언가가 된다. 자신의 목소리만을 듣는 사람이나 유리에 비친 자신만을 찾는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 - 전투 조종사



인간다움이라는 것.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스스로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중략) 겉으로 보기에는 나의 잘못이 아닌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볼 때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동료가 땀 흐렬 얻어낸 성고을 나 또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 아무 생각 없이 깔고 앉은 돌멩이조차도 이 세상의 꼭 필요한 일부분임을 느끼는 그런 태도가 참다운 인간다움이다. - 인간의 대지



고통이나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점점 무감각해지거나,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마음속에 있는 깊은 갈망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나는 경멸한다. 그대는 잊지 말아야 한다. 풀리지 않는 갈등과 모순은 오히려 당신의 마음을 더 크고 깊게 만든다는 것을. - 성채



상처를 피한다는 것은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고, 타인의 관심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고, 결국 인생 자체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다 보면 사람, 인생, 세상이 모두 내 곁에서 멀어지게 되어 있다. 상처 따위에 기죽어선 안 된다. 나는 내 상처보다 훨씬 깊고, 크고, 너른 사람이다.



"꽃의 말을 듣지 말아야 했는데, 꽃이 하는 말은 그대로 믿어서는 안 돼. 그냥 바라보고 향기를 맡아주어야 해. 내 꽃도 내 별을 향기롭게 해주었는데 나는 그걸 즐기는 법을 몰랐어. 그 터무니없는 호랑이 발톱 이야기 때문에 속이 상하긴 했지만, 나는 그 꽃을 가엾게 생각했어야 하는 건데..."

어린 왕자는 계속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어. 행동을 보고 판단해야지 말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그 꽃은 나에게 향기를 선물해주고 내 마음을 환하게 비춰주었어. 꽃을 두고 도망쳐서는 안 되었는데! 그 허영심 섞인 말 뒤에 사랑이 숨어 있는 걸 눈치채야 했는데. 꽃들이란 모순 덩어리거든. 하지만 나는 너무 어려서 그 꽃을 사랑하는 법을 몰랐어." - 어린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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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 여행의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를 여행하는

서슬 퍼런 히틀러 치하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독인 문예이론가 발터 벤야민은 예술과 미디어에 관한 20세기 최고의 논문인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처음으로 ‘아우라’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복제된 이미지들이 난무하는 우리 시대 예술 작품에 사라지거나 빠져 있는 것이 바로 그 ‘아우라’라는 얘기였지요.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세상 유일무이한 진품 <모나리자>를 제외한, 세상 무수한 복제품의 모나리자에는 바로 그 ‘아우라’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비로움, 분위기, 후광 등으로 번역될 만한 ‘아우라’의 부재는 비단 미술작품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 연극이나 영화, 사진 음악 등 모든 예술 장르에 적용될 만하다는 게 논문의 요지였습니다.

얼마전부터 저는 우리 시대의 여행에도 그런 ‘아우라’가 사라져버렸다는 생각을 줄곧 하게 되었습니다. 여행지의 풍광과 풍물을 소개하는 텔레비전이나 책, 넘치는 정보들은 여행자가 품어 마땅할 환상을 퇴식시키는 듯합니다. 돈과 시간만 있으면 세상 어디든, 심지어 에베레스트 정상까지도 오를 수 있는 오늘날 축복받은 환경은, 여행이 힘들고 고단하며 고독과 모험을 즐기는 행위라는 생각을 비웃는 듯합니다. 우리 시대 여행이 18, 19세기 사람들이 누렸던 여행보다 과연 더 행복하고 흥미진진한 것인지도 단언할 수 없습니다. <80일간의 세계일주>나 <여행의 기술>에 서술된 그때의 기록들에는 미지에 대한 호기심, 자신을 과감히 내던지는 용기, 새로운 것을 순전하게 맞닥뜨리는 즐거움과 놀라움이 가득해 보입니다. ‘별을 보고 가야할 길을 찾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던 한 평론가의 탄식은, 지금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누릴 수 있는 여행의 시대에 가슴 절절하게 울려옵니다. 가만 보니 언제부턴가 여행의 빛이 바랜 이유가 이 시대 여행에도 그 ‘아우라’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5-6


땅을 읽는 여행은 저절로 땅의 슬픔을 읽는 일이 되곤 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어떤 여행지에서, 모자를 벗을지언정 머리를 비우며 여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 땅의 내력이 담긴 책들을 가져가야 마땅한 듯합니다. 7


"어째서 경권을 놓아두고 피난갈 수 없다는 거요?"

"우리가 읽은 경권의 수는 뻔하지요. 읽지 못한 경권도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는 읽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 <둔황>에서

다 읽지 못한 책을 놔두고 어디로 도망갈 순 없는 법. 다 읽지 못하고 잠들 수도 없고 읽지 못한 책을 두고 죽을 수도 없다. 세상이 사람으로 하여금 고요히 책을 읽을 수 있게 내버려두면 좋으련만. 28-29


추억을 찾아, 추억이 깃든 장소를 찾아 떠나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한지를. 37


대부분 혼자서 떠다닌 여행들이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때마다 결코 혼자 여행한 게 아니었다. 주위에는 항상 나처럼 낯선 길에 난감해하거나 당황해 하던 외로운 행성 같은 여행자들이 친구가 되어주었고, 따뜻한 마음으로 맞아준 현지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길 위의 가족이었다. 45


여행은 삶의 학교다.

이야기를 찾는 여행이라. 61


하나의 도시, 하나의 장소를 제대로 알려면 도대체 얼마나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까? ... 하나의 도시, 하나의 장소가 가슴에 온전히 안겨오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한 달? 일 년? 그렇게 머문다면 과연 그곳을 완벽하게 알게 될까? 140


전쟁과 폭력, 증오는 언제나 늘 멀지 않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

'여러분은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 모르지만, 전쟁은 여러분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 레온 트로츠키의 말 <사라예보의 첼리스트>에서 167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 <타인의 고통>에서 172


발로 읽는 것 만큼 처음 만나는 도시와 쉽고 완벽하게 친해지는 방법은 달리 없다. 180


유럽 땅들은 거기서 거기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따금 만나는 눈부신 햇살과 한가로운 전원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답고, 교과서를 장식한 예술가들의 자취를 쫓는 일도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지불하는 경비는 너무도 비싼데다 현지인들의 삶 속을 들어가 그들의 삶을 마주할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181


인간이 차마 저지르지 못할 짓은 없구나.

어쩌면 우리는 너무도 많은 아우슈비츠를 이미 보고 겪은 건지도 모르겠다. 사진이나 영화, 책, 텔레비전의 범람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인류에게 닥친 엄청난 폭력을 잘 알고 있다. 자만하면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준 건 아닐까? 202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조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20세기 중반 독일 신학자, 마르틴 211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 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말라, 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는 혁명에 가담하지 마라. 즐겁게 도망치는 당나귀들처럼 뒷발질이나 한 번 하라.(중략)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 '제대로 된 혁명'에서 D.H. 로렌스 231-232


우리가 소설에서 얻을 수 잇고 또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손에 잡히지도 않는 모호하고 거대한 지식, 도덕, 사상보다는 이 황폐한 시대에 어떻게 타인과 만나고 소통해야 하는지에 대한 작은 물음과 해답 정도가 아닐까? 284


'나를 죽이지 못한 시련은 나를 한층 강하게 만들 뿐'이라던 니체의 말은 용기와 객기 사이에 갈 곳을 마련하는 여행자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트래블(Travel)'에 '트러블(trouble)'은 때론 필요악이다'라던 후지와야 신야의 말도 그러하다. 곤란함이 없다면 대체 여행이란 게 뭐란 말인가? 예기치 못한 곤란함과 기꺼이 대면하고 때론 수렁에 빠지다가도 그걸 하나씩 헤쳐 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여행자가 기꺼이 떠안아야할 진짜 여행일 것이다. 312-313


여행은 쓸모없는 짓이다. 그러나 여행에는 진정 의미가 있다. '문학은 써먹을 데가 없어 무용하기 때문에 유용한 것이다. 모든 유용한 것은 그 유용성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만, 문학은 무용하므로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그 대신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라고 했던 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여행 역시 쓸모없는 여행이어야 마땅하다. 쓸모없음이야말로 여행을 떠나는 진정한 의미가 아니겠는가? 우리를 억압하지 않는, 그래서 자유와 부자유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322-323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읶르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때때로 큰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 나간다." - <여행의 기술>에서 323


여행을 하다보면 여행을 하는 것이 내 '몸'이 아니라 내 '생각'이라는 느낌이 종종 든다 그래, 나는 생각하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다. 일상이 강요하는 질서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다른 프레임의 생각을 하기 위해, 생각이 기차를 타고 생각이 물건값을 깎고 생각이 사진을 찍고 생각이 사람들의 땀내를 맡는다. 여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생각'이다. 324


객창감(客窓感 손객 창문창 느낄감). 그렇다. 이 단어다. 내가 여행에서 즐기는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객창감, 그 쓸쓸함의 즐거움이다. 별 까닭도없이 이끌려 젊은 날 많은 시간을 외딴 시골길이나 장터, 비 오는 처마 밑에 서게 했던 감정의 실체. 함께 놀던 친구들이 제 어미들에게 불려들어가 저녁 빈 들판에 혼자 남겨진 아이처럼 홀로 달빛 속으로 유유히 걸어가게 했던 감정. 객창감 속에 떠다닌 여행은 쓸쓸했지만 그 쓸쓸함으로 여행의 시간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희망이나 거짓 행복이 더러 사람을 배신하는 일은 있어도, 쓸쓸하모가 외로움이 사람을 배신하는 일은 드물다. 327


길 가기와 책 읽기에 관해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걸 당신에게만 말해주겠다. 부지런히 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 부지런히 읽는 책이 가장 빨리 읽는 독서다. 어느 날 뒤를 돌아보면 막막했던 길들이 내 등뒤에 납작 엎드려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뒤돌아보면 저걸 언제 읽지 했던 책들이 내 손때를 잔뜩 묻힌 채 서가에 꽂혀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한숨 쉬지 말고 가던 길을 갈 것, 읽던 책을 읽어나갈 것. 329


독일의 문화비평가 발터 벤야민이 언급한 '아우라'라는 개념.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의 산물이 처하게 되는 이러한 상황은 예술작품의 존속에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어쨌든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의 가치를 하락시킨다.(중략)우리는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을 '아우라(Aura, 독특한 분위기)'라는 개념 속에 요약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즉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이다. -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350


20세가 가장 유명한 논문 중 하나인 이 글에서 벤야민은 미술은 물론 사진, 연극, 영화 등을 예로 들어 '아우라'가 상실되는 현상을 고발한다. 나는 여기에 '여행'이란 장르도 포함시킬 수 있지 않을까 종종 생각했다. TV나 사진, 책 등에서 무수히 넘쳐나는 여행의 이미지와 정보들을 통해 우리 시대 여행은 설렘과 기대로 넘쳐나는 '아우라'를 상실한 지 오래다. 비용과 시간만 넉넉하다면 아주 쉽게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여행일뿐더러, 여행사를 통한다면 먹고 자고 보는 것에 대한 일체의 고민이나 수고도 생략된다. 세계 수십 개국의 출입국 스탬프가 찍힌 여권의 소유자는 주변에 흔하디흔하다. 더이상 여행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여행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는 긍정적인 현상의 이면에, 우리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설렘과 두려움, 감동이 가장 희박한 '여행'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포스트모더니즘의 담론들이 흔히 예술에 대해 남발했듯이, 우리 시대에는 '여행'마저도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351-352


어쩌면 읽지 않은 책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책이 아닐까? 어떤 책을 가장 숭고한 채로 남겨두는 방법은 그 책을 읽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궁금함과 호기심, 그 책을 향한 간절함이 있을 때가 책으로서는 가장 숭고한 대접을 받는 때일 터다. 352


아직 읽지 않은 책, 아직 가지 않은 여행을 향한 마음이 간절할 때, 어쩌면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353


여행자는 모름지기 곧잘 감격하고 곧잘 우는 사람이어야 할 터, 기꺼이 손을 내밀거나 내민 손을 맞잡아주는 사람이어야 할 터, 바다를 만나면 바다로 뛰어들고, 산을 만나면 산을 넘는 사람이어야 할 터, 비린내와 땀내를 사랑하고 소낙비레 모처럼 얼굴을 씻는 자여야 할 터, 내 이름은 여행자다.

'바닷가의 모래가 부드럽다는 것을 책에서 읽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맨발로 그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감각으로 먼저 느껴보지못한 일체의 지식이 내겐 무용할 뿐이다. 나다니엘이여! 우리는 언제 이 모든 책들을 다 불태워버리게 될 것인가!'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에서)

기행 혹은 여행의 문학이란 본질적으로 허풍과 과장을 일삼는 문학일지도 모른다. 남들은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얘기를 풀어놓는 순간 이야기꾼으로 변모해버린 여행자에게 과장과 허풍의 유혹을 물리치기란 힘든 일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 여행기들은 과연 그러한 유쾌한 허풍과 과장에서 자유로운가? 여행이 더이상 소수만의 특별한 행위가 아닌 시대에, 여행자의 구라는 여전히 유효한가? 인터넷과 무수한 영상, 책의 팩트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틈에서 여행자는무엇을 보고 무엇을 알고 무엇을 예기할 수 있을까? 여행이 여전히 책상과 서가보다 더 많은 사실과 정보를 제공하는 장소일까? 여행하는 자는 여행하지 않는 자보다 더 많이 아는 자일까? 많은 여행자가 진리에 가까이 갔을지 모르지만 그 반대편으로 멀어져간 이도 틀림없이 있지 않을까? 그러니 여행에 너무 지나친 가치 부여를 삼갈 것. 아, 여행의 구라가 통하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416-417


아름다운 땅일수록 눈물이 많은 따이 아니던가. 풍요로운 땅일수록 굷주림이 많은 땅이고 축복받은 땅일수록 저주받은 땅이지 않던가. 아프리카가 그렇고 아시아가 그랬으며, 라틴 아메리카와 수많은 땅들이 그러했다. 신들이 만들어놓은 축복과 풍요의 땅을 고통과 슬픔의 지옥으로 드라마틱하게 바꾸어 놓은 인간의 이 죄악과 아이러니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423


모든 땅이 그러하듯이, 여행자의 수만큼이나 많은 아프리카가 있을 것이다. 423


다른 사람들은 작품을 발표하거나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오히려 3년 동안이나 여행을 하며 머리로 배운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다. 배운 것을 비워버리는 그러한 작업은 느리고도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강요당했던 모든 배움보다 나에게는 더 유익하였으며, 진실로 교육의 시작이었다. - <지상의 양식>에서 424-425


여행자는 과연 제대로 보는 자인가? 여행자는 깊이 볼 수 있는 자인가? 책 속의 진실과 차창 밖의 진실은 어떻게 만나고 갈등하고 화해하는가? 그것이 어쩌면 세상을 아고 싶은 진지한 여행자의 손에 책이 필요한 까닭이 아닐까?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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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주변 세계를 친애하는 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확실히 도움이 되어 주었습니다. 6


좋은 빛들이 있다. .. 느닷없이 알게 된다. 그 빛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나 또한 그 빛을 그저 나를 밝히기 위해 이용했다는 걸 말이다. 그러고 나면 그 빛이 슬퍼 보인다. 슬프게, 보인다. 15


천장이 슬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하늘이 내려앉아 쥐어짰고, 나는 텅 비고 말았다. 19


'현실주의자가 되자. 하지만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68혁명 당시 체 게바라가 한 말이라고 대중에 알려진 글귀이지만 대개의 유명한 펀치라인이 그러하듯이 실제 화자와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 생각은 내게 참 소중했다. 내가 만난 많은 어른들은 정확히 그와 반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겉으로 몽상가처럼 세상에 관한 따뜻하고 근사한 말을 늘어놓되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단 한 치의 손해도 용납할 수 없다는 뜨거움으로 그를 믿어 왔던 주변의 많은 이들을 집어삼켰다. 21


나는 불행하게도 좋은 어른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다. 그것이 사회 일반의 반영인지 혹은 그저 나의 박복함의 결과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최악의 어른이란 늘 갱신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25


타인의 정상성을 의심하고 억지로 분류할 때 공동체의 정상성은 훼손된다. 반대로 타인의 정상성을 의심하고나 분류하지 않고 그럴 수 있는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을 때 공동체의 성상성은 굳건해진다. 32


내가 경험해보지 않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곧 비정상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살다보면 별일이 다 있기 때문이다. 33


청소보다 중요한 건 정리다. .. 정리가 직관적으로 잘되어 있으면 매일 하는 청소에 드는 시간은 십 분이면 충분하다. 정리가 되어 있는 집은 청소를하루 이틀 하지 않아도 티가 나지 않는다. 정리의 묘는 얼마나 잘 감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버리느냐에 달려 있다. 49


부동산 취득 자격먼허 같은 걸 만들어서 시험장에서 혼자 청소할 수 있는 최대 평수를 측정해 딸 수 있게 하면 좋겠다. 사람의 욕심을 다스릴 수 있는 가장 기능적인 목적의 면허가 아닌가. 52


나는 늘 내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해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115


좋은 다큐는 반드시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진실에 관해 스스로 한 번 더 의심한다. 그리고 그런 의심의 사유를 통해 관객이 영화를 찬양하게 만드는 대신 관객이 영화에 당황하게 만든다. 그런 종류의 당황은 필연적으로 관객의 고민과 깊은 울림을 이끌어 낸다. 229


누구나 그럴듯한 상황과 환경이 주어지면 사랑을, 혈연을, 우정을, 금전을, 위계를 빌미로 악을 행사한다. 그 자신만이 그것을 악으로 인식하지 않고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 혹은 선의로 인식할 뿐이다. 악은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지 않는다. 261


문제는 가해자를 승자인 채로 피해자를 패자인 채로 남겨두고 사회 통합이라는 알량한 거짓말을 들어 침묵하고 지워버리는 태도에 있다. <액트 오브 킬링>과 <침묵의 시선>이 공히 주장하는 건 청산되지 않은 과거를 짊어진 사회는 반드시 곪아 부패한다는 것이다. 294


가치관이 충돌하는 사안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관계를 두고는 균형을 찾을 이유가 없다. 확실한 사실관계를 두고도 무게중심을 찾는다며 진영논리를 끄집어내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라. 그들은 용돈을 받았다. 298


대중매체는 현실을 조명하는 데 게으르다. 혹은 겁을 먹는다. 시청자들이 스크린에서까지 현실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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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 세상에 책이 아닌 것 어디 있으랴

독서술을 체득하고 있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만물이 변하여 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 책과 역사는 풍경이다. - 런위탕 <생활의 발견>중에서


세상의 길이 어떻게 만나는가를 더듬어 알고 발견하는 일이 여행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4


책장에 연필로 밑줄을 긋듯, 땅 위에 밑줄을 긋는 데에는 낡은 카메라 한 대와 작은 수첩 한 권이면 충분했습니다. .. 가난하면서도 높은 여햊아. 5


여행과 독서는 달려들수록 욕망이 줄기는 커녕 더 많은 갈증이 생긴다는 점에서도 비슷합니다. 7


"걸을 때마다 나 자신과 내가 배워온 세계의 허위가 보였다." - 후지와라 신야 <인도방랑>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 없는 법이야."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미혹함 없이 스스로, 진리의 등불 삼으라.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스스로자 등잔등 밝을명 법법 등잔등 밝을명)' 25


스님은 지나칠 정도로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구도 해위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중략) 누군가 구도를 할 경우에는 그 사람의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ㅕ 자기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은 오로지 항상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까닭이며, 그 사라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까닭이지요.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29


김현의 유고 <행복한 책읽기>에서 "좋은 소설이 때로 지루한 대목을 간직하고 있듯이, 좋은 시는 때로 깜짝 놀랄 만큼 신선한 대목을 간직하고 있다" 86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다. -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128


'모든 것이 스스로 요란한 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확인받으려는'(최승자) 소음의 시대에 침묵을 벗하는 일은 행복하다. 128


바로 보려면 우리는 우리가 보는 사물의 명칭을 잊어야 한다. - 모네


나는 에로틱한 단어도 싫어한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써서 하찮고 진부한 것으로 만들었다. - 사진가 헬무트 뉴튼 135


맑은 책을 읽고 싶다. .. 조금은 느리지만, 슬로 미디어인 책을 통해서도 살아가는 지혜나 힘은 충분히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앉은 자리에서 손가락과 눈으로 하는 여행보다 두 다리로 직접 만나고 가슴으로 느낀느 경험히야말로 여전히 가장 의미 있는 배움과 깨달음이 아닐까. 136-137


여행을 하며 머리로 배운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다. 배운 것을 비워버리는 그러한 작업은 느리고도 어려웠다. .. 진실로 교육의 시작이었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책읽기란, 아무튼 숙제가 아닌 쾌락이어야 마땅할 터. ..

여행은 배움의 공간이지만 비움의 시간이기도 한것.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텅 비우는 것 ㄱ역시 우리가 진정 배워야 할 소양이 아닐까. 212


책의 맛을 충분히 알고 이해하기 위해 고토록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216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면 야만적인 힘을 사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함이다. -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삶이란 무엇일까? 던져진 존재로서 그저 살아지는 것일까?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무엇일까? 일상에서 답을 구할 수 없어 여행을 떠나지만 여행을 떠난다고 답을 얻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여행은 무의미한 일상의 연장일 뿐일까? 246


기억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려봐야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루이스 부뉴엘의 말,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251


일본인들이 쓴 불교 입문서인 <불교가 좋다>. 책을 우연히 뒤적이다가 '불교 경전에는 행복(幸福 다행행 복복)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문장을 읽고 무릎을 친 적이 있다. 뭔가 대단한 통찰력을 얻은 느낌이었다. 영어나 불어, 독어, 라틴어로 된 서양의 사상과 문물을 한자어로 번역하던 일본 메이지시대에 새롭게 만들어진 단어인 '행복'의 어원을 쫓으며, 동양인에게는 없던 '행복'의 개념이 그간 어떻게 작용해왔는지를 추적하는 내용이었다. '애 행복이라는 한자에는 서양의 단어에 들어 있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일본인(동양인)들이 '자신의 독특한 생각을 서양인처럼 '행복'이라는 단어로 대신함으로써,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고를 계속해 왔'다는 것이 책의 설명이다. 255


뉴스를 접하면 언론을 호도하고 본즐을 흐려 진실을 가리려는 파렴치한 시도는 사회 상류층으로부터 난무하고 있다. 262


겨울은 달리 보면 '따뜻한' 계절이다. '따뜻한'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계절은 오로지 겨울밖에 없다. '시원한'이 여흠의 형용사이듯 말이다. 하지만 겨울이 딷스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가 절실하다. 온기가 없는 겨울, 따뜻하게 내민 소노가 마음을 나누지 않는 사람들의 계절은 혹한의 겨울보다 더 춥고 매서울 것이다. 285


모든 길과 길 위의 여행은 어디론가 손을 뻗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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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처음 이 단상집의 제목으로 생각한 것은 <섹스 뒤의 명상>이었다. 그때의 '섹스 뒤'는 'after sex'가 아니라 'beyond sex'였다. 그러니까 '섹스를 넘어서 버린 상태에서의 사랑에 대한 명상'인 셈이었다.
여기 수록된 단상들은 섹스에 강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유치한 사랑론과 섹스에 사로잡혀 그곳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음담패설적인 사랑론을 경멸하기 위해 씌어진 것들이다.

 

 

 


남녀 사이에 서로 사랑하는 눈치를 보이는 것을 눈맞춘다고 한다. 사랑은 눈에서 시작된다. 눈맞춤은 모든 사랑의 정지(整地 가지런할정 땅지) 작업이다. - 고종석,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중에서


사랑은 이러이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이러하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니다, 라는 식으로 사랑을 규정하려드는 단세포적인 사람들을 나는 많이 보아왔다. ..
사랑이 어디 혼자 하는 것인가? 섹스가 어디 혼자 하는 것인가? 그대가 했던 사랑이 모두 똑같은 사랑이었던가? 그대는 상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판에 똑같은 섹스를 했던가?  37

21세 때 내가 생각했던 섹스는 현실과 유리된, 어둠 속에서만 할 수 있는 어떤 신성한 것이었다. 나는감히 밝은 빛 아래에서 여자의 속살을 볼 수없었다. 그것은 거부된 지식(denied knowledge)이었다. 요컨대 섹스의 순간은 일상적인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0세가 된 나는 불을 켜고 마음껏 여인의 알몸을 시각적으로 소유한다. 섹스도중 전화가 와도, 절정의 순간이 아닐 경우 거의 대부분은 받는다.(혹은 받으라고 한다) 그리고 전화통화를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서로의 알몸을 애무한다. 내 나이 어디쯤에선가(혹은 어느 여자부터인가)성이 일상으로 편입해 들어온 것이다. 그 옛나르이 신성했던 성이 무의미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지금의, 일상에 편입된 성이 천박하고 동물적이라고 말하지도 않겠다.
신성했던 섹스는 신성했던 섹스대로 나에게 뭔가를 깨우쳐주었고, 일상에 편입된 현재의 섹스 역시 나름대로 나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고 있다.
이제 내 나이 마흔, 나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다른 차원의 만남이 가능하리라는 것을 안다.  39-40

천형(天形 하늘천 형상형)
미안하다. 내 사랑으로는 당신의 상처를 다 품을 수가 없다. 이만큼이 내 사랑의 한계인 것 같다.
내 마음은 당시느이 상처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져주고 싶은데, 내 손은 오히려 당신의 상처를 함부로 찔러대고 있다.
... 여긴 너무 힘든 곳이다.
우리 아예 사랑하지 말까? 상처 같은 건 못 느끼고 그냥 수비게 한세상 살아버릴까? 어차피 밥 먹고 섹스하고 아이 낳아 기르는 건 똑같을 텐데... 그래버릴까?
내 부주의한 손길에 상처입고 비명을 지르며 돌아누운 당신.
전엔 몰랐었다. 이따위 세상, 그냥 바람처럼 지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영혼이지만, 몇십 년 정도는 웃으며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등은 가슴 저미도록 어여쁘기만 하다.
미안하다.
그래, 미안하다. 다시 당신의 상처를 건드리게 된다 할지라도, 그리하여 당신의 상처가 덧나게 된다 할지라도, 다시 당신의 전부를 안고 싶은 것이다.
내 만신창이 된 영혼으로, 어금니 악물고.  44-45

 

 

 

결혼을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항상 되풀이되는 토론의 변함없는 주제였다. 즉 결혼은 개별 존재가 그를 통해 모든 사람들엑 대하여 가치를 지니게 되는 의무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 미셸 푸코, <성의 역사>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해진 길을 간다. 그들은 세계와 자신의 역학 관계를 따져 계획을 세우고, 크든 작든 그 계획의 범주 안에서 무리없이 살아간다. 때때로 모험을 한다고 해도 그 범주 안에서의 모험이다. 그들은 결혼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은 겨혼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낭만주의자들은 어제 계획을 세우고 오늘 그것을 부순다. 도무지 내일을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해와 달이 서로를 마주볼 수 없는것처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헛된 것에 매달려 정열을 소모해 버린다. 이를테면 그들은 자기 생을 방목하는 유목민들이다.  51

인간은 오랜 원시 난혼생활을 하다가 '질투'와 '사유재산'이 발생하여 가족끼리만 성관계를 하는 혈연가족을 형성했다가, 일정한 가족권 내에서 남편과 아내를 공동소유하는 푸날루아(punalua) 가족을 거치고 일부다처제 비슷한 대우혼 가족을 거쳐, 마침내 일부일처 결혼이라는 사회제도를 만들어냈다. ..
공적인 장소에서 사람들은 곧잘 '사랑 없는 결혼이 어디 있는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세상에는 사랑 없는 결혼이 더욱 많다. 그리고 '사랑 있는' 이라는 것도 사랑한다고 믿는 한순간의 착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들은 필요에 의해서,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게 사람 구실을 하는 것 같아서... 등등 매우 건조하고 합리적인 이유로 결혼을 한다.
사랑이 아무리 많아도 조건이 안 맏으면 결혼하지 못한다. 결혼은 사랑의 결합이 아니라 조건과 조건과의 만남, 가족과 가족과의 만남, 즉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정략결혼이고 매춘인 것이다.  52-53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륜을 "맹렬히" 비난한다. 그들은 간음한 자들에게 돌을 던지며 이렇게 외친다.
"나는 너무나도 불행하다. 나는 주어진 운명 때문에 불륜조차 저지르지 못했다. 그런데 저 연놈은 자기들끼리만 몰래 재미를 보지 않았는가!"  60

불건전한 섹스
많은 충돌 끝에 본인이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고 배우자 역시 본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확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어떤 사람들은 과감히 이혼을 하고, 이미 아이가 생겨버린 어떤 사람들은 (오늘의 한국문화의 한계를 절감하며) '미운 정'으로 꾸역꾸역 결혼생활을 유지한다.
그런데 배우자와의 불화를 해결할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이혼 같은 것은 아예 꿈도 꾸지 않으면서, 요컨대 결혼제도가 주는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바람'을 피우겠다고 작정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있기도 한데.. 그들의 사랑은, 그들의 섹스는, 명백히 불건전하다.  61

가정의 붕괴
가정을 파괴하지만 않는다면 불륜은 그다지 지탄받을 이유가 없다. 예고 없이 외박을 하거나 외간남자의 아이를 낳겠다고만 하지 않으면 - 결혼제도 속의 아내몫은 다한 셈이다.
불륜 자체를 정당화하자는 말이 아니다. 부부간에 사랑이 있다면 그런 짓을 하라고 해도 못한다. 나는 지금 사랑 없이 지속되고 있는 결혼, 즉 제도로서의 결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가정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랑 없는 가정, 누군가의 목을 조임으로써 간신히 지탱되는 가정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런 가정일지라도 해체되어선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낡은 가족관에 사로잡힌 자이거나 현재 그런 가족관을 통해 이익을 보는 자일 것이다.
아이들이 받는 정신적 충격? 그것 역시 낡은 가족관의 산물이다.
결혼은 한 번의 약속을 영원히 지속시키기 위한 구속장치일 뿐이다. 사랑과 믿음으로 출발한 결혼이라면 아무리 간통죄를 없앤다 해도 두려워하지 앟을 것이며, 그리고 그러할 때, 내 배우자라 할지라도 언제든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죽음이 갈라놓기 전까지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62-63

자존심
남편의 정부가 자기보다 못난 여자일 때 흔히 아내는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는다. 아니, 뭐가 부족해서 저렇게 못난 여자와 몰래 바람까지 피웠지? 내가 저 여자보다도 못났단 말인가?
남편의 정부가 유명한 여자(혹은 누구나 인정하는 미인)일 경우 아내의 자존심은 그나마 약간 회복된다. 이 경우는 아마 '잘난 남자 간수하기 힘들어' 하고 투덜거리며 남편의 마음이 돌아오길 기다릴 뿐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아내가 바람을 피울 때의 남편의 입장은 약간 다르다. 남편은 자기 아내가 어떤 남자와 바람을 피우든 자존심이 뭉개지는 경험을 한다. 그녀가 자기보다 못난 남자와 바람을 피우든 아니면 훨씬 멋진 남자와 바람을 피우든 말이다.
다르게 나타나는 자존심의 양상은 결혼제도 속의 남녀의 위치 차이에서 온다.(남자는 언제든 가정으로 돌아올 생각으로 '가볍게' 바람을 피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억압적 위치에 있는 여자는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는 '끝장'이라는 각오로 바람을 피운다.)  64

 


성(sex)은 은밀한 것으로, 감추면 감출수록 거기서 먼저 타락의 악취가 풍겨 나오게 마련이다. 성(sex)에 대한 금기와 사회적 억압은 사람들의 감정을 갉아먹고 점점 더 변태와 타락의 미궁으로 몰고 간다. - 현실문화연소4 <신세대:네 멋대로 살아라> 중에서


재산의 적자 상속을 목적으로 출발한,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이 일부일처제에 대하여 나는 아무런 사견도 붙일 생각이 없다. 그러나 편한 상태로 배우자를 찾기 힘든 사회구조 속에서의 일부일처제에는 분명히 어떤 빈틈이 있으며('자유롭게 만나 사랑하고 결혼한다'는 연애 결혼의 신화는 그야말로 신화에 불과하다), 그 빈틈을 간통과 매춘이 메우고 있다는 공공연한 사실 정도는 '역사적 사례'로 제시할 수 있겠다. 간통과 매춘마저 할 능력이 없는 자들이 하는 게 강간이다.
강간을 옹호하거나 단순 폭력으로 그 수위를 내려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단지 나는 강간 피해자가 '단지 강간을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인생을 포기해야만 하는 그런 야만적인 사회에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 할 뿐이다.
여자의 자궁은 여자의 것이다.  81-82

잘못된 것은 제도이지 사랑이 아니다. 섹스가 아니다. 쌍방 합의(흔히 '사랑'이라고 표현한다)에 의한 욕망의 교환은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자 즐거움이다. 아니, 이런 닫힌 언어로 규정해 버리는 게 억울하기조차 한 그 어떤 신비다. 섹스를 불결하다고 말하는 자들이나 섹스를 음담패설의 소재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 신비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일 확률이 매우 높고, 그것은 결코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일이 못 된다.
육체적 접촉을 무시한 사랑은 육체만을 탐하는 사랑만큼이나 비정상적인 것이다.  83

 


사라하는 것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서로 어려운 관계에 놓여 있다. 사랑에 빠진 것 안에는 사랑한다는 것이 들어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무섭도록 사랑을 소유하고 싶어하지만, 또한 능동적으로 사랑을 줄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중에서


예쁜 여자가 섹스도 잘한다.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은 대체적으로 인물은 포기했다면서 몸 관리도 별로 하지 않는다. 평소 배설기관으로밖에 취급되지 못하는 그녀들의 질(vagina) 역시 청결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그녀들도 섹스는 할 줄 안다.
그녀들은 처음엔 안 된다고 남자의 진을 빼다가도, 섹스가 끝나고 나면 이젠 아무것도 감출 필요 없다는 듯이 그대로 널브러지기 일쑤다. 샤워도 하지 않고, 분비물을 닦아낸 휴지조차 제 손으로 치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꼭 샤워를 해야만 하고, 휴지를 여자가 치워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네가 원해서" '그 힘든' 섹스를 했으니까 너는 다 봐줘야 한다는 식인데... 아마 그녀는 섹스에 관한 또 하나의 나쁜 기억을 보태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녀의 섹스를 더욱 더 '힘든' 것으로 만들 것이다.
한번 섹스를 했다고 여자를 자신의 예속물처럼 생각하는 남즈들 역시 여자를 황당하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못 보일 꼴을 함부로 내보인다. 둘 다 섹스를 무슨 계약 취급한 결과다. 인간이라면 똥우줌 정도는 가려가면서 사랑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고집 피운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자신이 예쁘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일단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남자의 진을 빼지 않는다. 섹스 후에도 여전히 예쁘다. 금장 정숙한 여인의 표정으로 돌아와 몸을 적당히 가릴(혹은 노출시킬)줄 알고, 뒷물도 할 줄 알고, 그러면서도 팔 베개를 해달라고 요구할 줄도 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비록 수줍어할지라도 필요 이상으로 움츠러들거나 오버하지 않는다.
물론 '예쁜 여자가 섹스도 잘한다'는 말은 '잘난 남자가 섹스도 잘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118-119

'오 마리아!
어린 아이에게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세요.
그리고 꽃에세 왜 꽃을 피우느냐고 물어보고,
태양에세 왜 빛나느냐고 물어보세요.' - 막스 뮐러
당신은 여자를 사랑할 때 '어디가 못났기 때문에', '어떤 점이 부족하기 때문에' 등등의 이유를 들어 사랑한다. 당신은 옳다. 그러나 여자들은 당신의 떠나간다. 당신은 실수했다. 왜 절 사랑하세요? 라는 여자들의 물음에 당신은 솔직하게 응답했다. 여자들은 당신에게서 '어디가 못났다', '어떤 점이 부족하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자는 단점을 지적당하는 일에 약하다. 속보이는 칭찬에도 행복해져서 제 가진 것 모두 주고 싶어하는 게 여자라는 존재다('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우리 속담은 여기서 나왔다). 단점을 지적하지 말라. 칭찬할 때는 칭찬만 해라. 칭찬 끝에 작은 단점 하나만 언급해도 앞에서 칭찬한 장점들이 전부 무효가 된다.  129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온 세상을 비춰주는 스크린이다. 왜냐하면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세상의 복잡성에서 벗어나 뜻밖의 존재의 가능성, 즉 존재의 근본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 조르쥬 바따이유 <에로티즘>중에서

"나는 어떤 타입도 아닙니다.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나는 성능 나쁜 로봇처럼 '나는 연애를 이런 식으로밖에 하지 못한다'라고 제한하고 싶지 않습니다. 만나는 상대마다 다른 형태의 연애가 나옵니다. .. 나는 상대에 따라 손잡고 걸을 수도 있고, 팔짱을 끼고 걸을 수도 있고, 혹은 각자 주머니에 손 넣고 걸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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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투성이의 문 위에 붓질을 할 때마다 더러움이 지워졌다. 송곳으로 그은 숫자들이 사라졌다. 핏자국 같은 녹물들이 사라졌다.  17



배내옷

내 어머니가 낳은 척 아기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고 했다.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였다고 했다. 여덟 달 만의 조산이라 몸이 아주 작았지만 눈코입이 또렷하고 예뻤다고 했다. 까만 눈을 뜨고 어머니의 얼굴 쪽을 바라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어머니는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아버지와 함께 외딴 사택에 살았다. 산달이 많이 남아 준비가 전혀 없었는데 오전에 갑자기 양수가 터졌다. 아무도 주변에 없었다. 마을에 한 대뿐인 전화기는 이십 분 거리의 정류장 앞 점방에 있었다. 아버지가 퇴근하려면 아직 여섯 시간도 더 남았다.

막 서리가 내린 초겨울이었다. 스물세 살의 엄마는 엉금엉금 부엌으로 기어가 어디선가 들은 대로 물을 끓이고 가위를 소독했다. 반짇고리 상자를 뒤져보니 작은 배내옷 하나를 만들 만한 흰 천이 있었다. 산통을 참으며, 무서워서 눈물이 떨어지는 대로 바느질을 했다. 배내옷을 다 만들고, 강보로 쓸 홑이불을 꺼내놓고, 점점 격렬하고 빠르게 되돌아오는 통증을 견뎠다.

마침내 혼자 아기를 낳았다. 혼자 탯줄을 잘랐다. 피 묻은 조그만 몸에도 방금 만든 배내옷을 입혔다. 죽지 마라 제발. 가느다란 소리로 우는 손바닥만한 아기를 안으며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처음엔 꼭 감겨 있던 아기의 눈꺼풀이, 한 시간이 흐르자 거짓말처럼 방긋 열렸다. 그 까만 눈에 눈을 맞추며 다시 중얼거렸다. 제발 죽지 마. 한 시간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 누워 그 몸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견뎠다. 더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20-21



하얗게 웃는다

하얗게 웃는다, 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그는 하옇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80



당의정

자신에 대한 연민 없이, 마치 다른 사람의 삶에 호기심을 갖듯 그녀는 이따금 궁금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먹어온 알약들을 모두 합하면 몇 개일까? 앓으면서 보낸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마치 인생 자체가 그녀의 전진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반복해서 아팠다. 그녀가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힘이 바로 자신의 몸속에 대기하고 있는 것처럼. 그때마다 주춤거리며 그녀가 길을 잃었던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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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독서는 나만의 해석이다


- <문장론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독서에 관하여> 마르셀 프루스트



'다독(多讀 많을다 읽을독)은 인간의 정신에서 탄력을 빼앗는 일종의 자해(自害 스스로자 해칠해)다. 압력이 너무 높아도 용수철은 탄력을 잃는다.' ..

쇼펜하우어는 무분별한 지식으로 생각할 여력이 없어지는 사람의 모습을 용수철로 표현한 게 아닌가 싶어요. 읽기만 하지 말고 읽은 걸 느껴야 합니다.  17-18


'진정 스스로 사색하는 자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그 소재를 현실세계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독서는 어디까지나 작가에 의해 가공된, 인공적인 현실이다.'

즉, 내가 경험한 것으로부터 나만의 지혜를 찾아야 하는데, 남 얘기나 내가 직접 보지 않은 것에서 내 것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 독서가 내 주변의 제대로 봐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까닭에서 쇼펜하우어는 독서를 반대합니다.  18-19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을 빌려 지금 내가 있는 곳으 살피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겠다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 읽기가 내 생활에 들어와야 합니다. 쇼펜하우어도 아마 이런 부분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책을 읽지 말라고 반문한 게 아닐까요?  19


'많은 지식을 섭렵해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면 그 가치는 불분명해지고, 양적으로는 조금 부족해 보여도 자신의 주관적인 이성을 통해 여러 번 고찰한 결과라면 매우 소중한 지적 자산이 될 수 있다.' ..

'호학심사 심지기의(好學深思 心知基意 좋을호 배울학 깊을심 생각할사 마음심 알지 터기 뜻의), 즐겨 배우고 깊이 생각해서 마음으로 그 뜻을 안다'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우리에게는 심사, 깊이 생각함이 빠져 있는 듯합니다.  20


'알기 위해서는 물론 배워야 한다. 그러나 안다는 것과 여러 조건을 통해 스스로 깨달은 것은 엄연히 다르다. 앎은 깨닫기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내가 안 것을 깨닫기 위해서 '학(學 배울학)'도 필요하고 '호학(好學 좋을호 배울학)'도 필요합니다... 우리 내부에서는 바깥에서 들어온 정보를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읗 해야 합니다.

나만의 단어를 만들어야 합니다.  21


최근에 자주하는 생각인데 지혜란 것은 크고 넓은 것, 많이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 움큼인 것 같아요.  22


'독서와 학습은 객관적인 앎이다. (중략) 사색은 주관적인 깨달음이다.'

책에 쓰여 있는 것은 객관적인 앎입니다. 사색은 주관적인 깨달음인거죠. 이게 지식과 지혜의 차이 같아요. 독서는 주관적인 깨달음을 지향해야 합니다.  22


'나만의 고유한 사색에 의해 어떤 진리에 도달했으면, 비록 그 내용이 앞서 다른 책에 기재되었을지라도 타인의 사상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체험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색을 통해 기대하는 결과는 단순히 산 정사엥 도달했다는 물리적 결과만이 아니라 정상에 도달하는 동안 겪었던 체험도 포함되어 있다.'  23


'그대의 조상이 남긴 유물을 그대 스스로의 힘으로 획득하라.'  24


언제까지 읽기를 끝내야지 하고 목표를 정하지 마시고, 얼마만큼 내 것으로 만들 것인지에 방점을 찍으셨으면 합니다.  24


'읽기 쉽고 정확하게 이해되는 문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주장하고 싶은 사상을 소유'해야 한다.'

너무나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게 없이 원고지 12매를 채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25


'학식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쉽게 말하고, 학식이 부족할수록 더욱 어렵게 말한다.'  26


'"...(상략) 보는 법을 배우라!" 바로 그 순간 작가는 모습을 감춘다. 바로 이것이 독서의 가치이자 한계이다. 시작임에 불과한 것을 마치 규범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독서에 지나치게 큰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독서는 정신적인 삶의 도입부에 있다. 독서는 그러한 삶에 안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나와 다른 영혼이 개입하도록 허용하되, 그때 들어온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들어내는 과정도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28


책을 통해 알았으면 그것을 내 삶을 변화시키는 연료로 써야 하는 것이고, 삶에서 앎을 행하면서 바꿔나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

알랭 드 보통도 비슷한 얘기를 했어요. "모든 독자는 자기가 읽은 책의 저자다."  29


책이 중요한 이유는 새로운 시선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33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말재주와 옷뿐인, 예술가인 체하는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만 조화로운 비율을 한 대상을 찾는다. 하지만 진정한 예술가에게는 주변의 모든 것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작은 근육 하나조차 의미를 가진다.'

주변의 것을 아름답게 보는 시선, 예술의 역할이기도 해요.  38


처음 보는 사람한텐 정말 엄청난 물건인 거죠. 그러나 익숙한 우리에겐 그것이 전혀 새롭지 않아요. 흥미도 없고요. 관습 안에 갇혀 아름다움이 약해진겁니다. 그걸 일깨워주는 것이 예술이고 독서라는 게 프루스트의 이야기죠.  40





2강 관찰과 사유의 힘에 대하여


- <곽재구의 포구 기행> <길귀신의 노래>  곽재구

  <시를 어루만지다> 김사인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법인


'나란히 누워 서로의 살갗을 부비는 집들, 담장들, 빤히 들여다보이는 이웃들의 꿈, 가난, 숨결들.'

별 볼일 없는 풍경, 그것을 주목하는 힘. 그게 삶의 지혜이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이자, 시인의 재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문장이에요.  53-54


'짧은 길을 긴 시간을 들여 여행한 사람은 경험상 행복한 사람입니다.' ..

짧은 길을 긴 시간을 들여서 여행하려고 노력하는 것, 많이 보려고 하지 말고 자세히 보려고 하는 것이 중요해요. 책 읽는 것도 마찬가지 같아요. 제가 다독 콤플렉스를 버리자고 자주 말하는데요. 자랑하려고 많이 읽는 게 핵심이 아니죠. 얼마나 체화했느냐, 얼마나 내 인생에 좋은 영향을 미쳤느냐 이런 것들이 중요합니다.  57


우리의 삶은 모호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명료한 답을 원해요..."어떠한 일반론도 각자 삶의 특수성 앞에서는 무력하다"  61

'한국의 나폴리 ..(중략).. 이런 비유 당신도 좋아하나요. 소박하고 따뜻하고 성실한 자신의 무엇인가를 바보스럽게 위축시키는..'

우리가 무심히 쓰는 말들이죠. 들을 때마다 어딘가 좀 불편한, 한국의 스티브 잡스, 한국의 빌 게이츠, 한국의 누구누구, 이런 표현 속에는 언급하고 있는 그 개인의 존재감에 대한 배려가 없는것 같아요.  63


'살아 있음이란 내게 햇살을 드에 얹고 흙냄새를 맡으며 터벅터벅 걷는 일입니다.'

이 글을 보고 저는 '나이가 한 살 더 든다는 건, 봄을 한 번 더 본다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66


거듭 말하지만 많이 읽는 것보다 제대로 읽는 게 저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71


'시를 쓰고 읽기 위해서는 개념의 운용 능력보다는 실물적 상상력의 운용 능력이, 공감과 일치의 능력이 더 긴요하게 연습되어야 한다.'

개념을 운용하는 능력은 법전 해석이나 논리적인 이야기에서는 중요하겠죠. 철학에서는 아주 엄밀하게 중요하겠죠. 철학에서는 이런 실물적 상상력은 배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학은요, 실물적 상상을 해야 하고, 정서적 공감을 하며, 거기에 내 마음을 일치시키는 능력이 있어야 해요.  73


문학에 임하는 상상력은 이러한 표피적 사실 진술에 잘 만족하지 못한다. 그날 새벽 이순신의 조반상 위에는 어떤 음식이 올랐는지, 그의 심경이 어떠했을 것인지, 그날 바다 빛깔은 어땠는지, 세수는 제대로 했을 것인지, 옷차림은 어땠을 것인지, 방문을 나서는 그의 수염발이 동짓달의 바닷바람에 어떻게 쓸렸을 것인지, 휘하 병사들 하나 하나는 그 심경과 얼굴 표정이 어땠을 것인지 등등 까지를 궁금해한다.

쉽게 말해 4D 영화입니다. 시를 4D로 읽으라는 거예요. 2D로 읽지 말고 문장을 일으켜 세워서 바람도 느끼고, 물방울 튀는 것도 느끼면서 읽으라는 거죠.  74


법정스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지식은 밖에서 들어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우러나온다고요. 사유하는 시간을 갖기 않으면 내 안에서 자생적으로 우러나오는 것들을 못 건져냅니다.  84


'목표가 곧 인생의 목적이고 꿈이라고 착각하는 세상.'

'수행은 늘 깨어 있는 삶을 사는 일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늘 자신을 성찰하고 생각을 높이며 끊임없이 성숙시키는 것이다. 성찰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살피는 것이다. 사색은 사물과 일에서 참되고 깊은 의미를 찾는 일이다.'  86


'달은 어디에나 있지만 보려는 사람에게만 뜬다.'

친구가 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조지아 오키프의 말처럼, 노력해야 해요.  89






3강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미성의 시간이다 


-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레프 톨스토이

  <미크로메가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볼테르



'세상사에 시선이 따뜻한 사람이 시인이다. 

시를 안 써도 시인이다.'  97


토스토이는 작품마다 자신이 살던 시대의 흐름, 당대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을 등장인물들을 통해 투영해놨습니다. 저는 책을 읽을 때 스토리 중심으로 보기보다는 문장을 구석구석 살피며 작가가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 하며 읽습니다.  102


'인간이란 흐르는 강물과 같다.'

저는 '사람은 물이다'라는 얘기를 자주 합니다. 사람은 고여 있지 않죠.  103


'식사를 준비하고 집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고

 일상적 노도을 무시하고서는

 훌륭한 삶을 살 수 없다.'

알랭드 보통은 "우리는 아이를 위해 빵에 버터를 바르고 이부자리를 펴는 것이 경이로운 일임을 잊어버린다"고 말했습니다. 행복은 거기 있는 건데 말이죠.  104


'육체노동이 정신적인 삶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은 정반대이다.

  육체노동을 할 때만이 지적이고 영적인 삶이 가능하다.'

그래서 몸을 번잡하게 만들어야 해요. 잘 살려면 몸을 번잡하게 하고 마음을 평화롭게 해야 합니다.  109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진리는 그저 몸에 살짝 붙어 있는 데 그치지만 스스로 발견한 진리는 몸의 진정한 일부가 된다.'  117





4강 시대를 바꾼 질문, 시대를 품은 미술


- <1417년, 근대의 탄생> 스티븐 그린블랫

  <시대를 훔친 미술> 이진숙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끊임없이 토론을 요청하며 질문을 던졌어요.  144


오직 하나만의 목적을 위해 질문을 내려놓은 시대, 중세와 닮아 있지 않나요?  146


불교에서 수행의 최종 목적은 황새잉 아니라 멸(滅 멸망할멸)이랍니다. 다시는 무엇으로도 태어나지 않는 것이죠. 더 좋은 무엇으로 태어나도 연(緣 인연연)은 필시 생길 따름이고 그러면 삶은 또 다시 무거워질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영원히 태어나지 않는게 목적이랍니다.  149


'모두들 기성 제도와 관습, 관행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에 새로워져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이것에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친부살해의 욕망입니다. 자기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 거예요. 자기 아버지를 죽여야 비로소 새로운 가치가 태어나는 거니까요.  173


시대가 너무 물질적인 가치만 따르며 가다 보니까 나는 다른 길을 찾겠어 한 거죠. 또 다시 친부살해이지요.

'미래를 얻기 위해서 현실과는 단절이 필수적이다. 추상은 구상의 억압과 배제 위에서 탄생한다.'

추상은 두 가지예요. 구상이 비구상화 되는 추상이 있고 시작부터 완전한 추사으로 출발하는 추상이 있어요.  174





5강 희망을 극복한 자유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기행문


- <스페인 기행> <영국 기행> <카잔차키스의 천상의 두 나라>(<일본 중국 기행>개정판) 니코스 카잔차키스


소재보다는 그 소재를 해석해내는 카잔차키스의 역량을 높이 봤스빈다. 카잔차키스의 기행문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이 그 부분입니다. 여행지 자체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여행지를 소재로 한 작가의 생각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말이죠. .. 

카잔차키스의 기행문은 '대상에 대한 저자의 사색'이 주제가 됩니다. ..

카잔차키스의 기행문은 '어떻게 삶을 대할 것인가?'라는 한 가지 방향으로 흐릅니다. 그는 온몸이 촉수인 사람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순간순간 예민하고 싶어 했죠. 

'나는 그런 영혼이오. 세계를 만지는 촉수가 다섯 개 달린 덧없는 동물.'  182-183


왜 온몸이 촉수인 삶을 살아야 할까요?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어디에도 완벽한 것은 없기 때문인 것 같아요. 현명하게 사는 방법은 그 순간을 온전하게 사는 것뿐이죠.  184


'행복은 하늘이나 땅의 딸이 아니라 인간의 딸이다.'

행복은 어디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므로 우리가 찾아내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장자 얘기를 하나 인용해요.

'하늘 아래에는 가을의 작은 나뭇잎 이상 위대한 것은 없다!'

이것은 소재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입니다.  185


'보고 듣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서둘러서는 안 된다. 서두르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할 것이다.'

한 사물을 오랫동안 바라보면 영혼이 훈련이 된 사람들은 그 한 장면을 보고도 그 장면 속에서 많으 이야기들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여러 나라르 다녔다 할지라도 아무것도보지 않은 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작가는 속도에 대한 이야기를 한 다음에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성급함과 초조함과 서두름을 극복했다.'

'예술품의 완전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예술품이 태어난 나무와 물과 언덕 사이에서 그것을 보아야 한다.'  188


아무런 감정도 없고 깊은 접촉도 없이 세상을 냉담한 시선으로 보는 영혼에게는 '객관적인' 진리 - 그것은 얼마나 하찬ㅎ은 것인가! - 만이 존재할 뿐이다. 고통스럽게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은 신비로운 교접을 통해 자신이 보는 풍경과, 마주치는 사람과, 선택하는 사건과 소통한다. 따라서 모든 완벽한 여행자는 항상 자신이 여행하는 나라를 창조하는 것이다.'

풍경들을 객관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서 온전히 느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만의 여행을 할 수 있어요. ..내가 읽고 내 속에서 해석되어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면 비로소 그때에 좋은 책이 되겠지요. 

모두 똑같은 여행은 없습니다.  189


'다른 사람들 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서 있게나.

자신 앞에서는 엄격한 얼굴로 서 있게나.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용감하게 서 있게나.

일상 생활에서는 기분 좋은 얼굴을 하게나.

사람들이 자네를 칭찬할 때면 무심하게나.

사람들이 자네는 야유할 때면 꼼짝도 하지 말게나.'  189-191



인류사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나예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내 인생이니까 그런 겁니다. 세상의 모든 잘난 것들도 내 안의 입법자와 협의해서 동의가 되면 그때 받아들이는 거예요.  197


'사람이 책을 읽으면서 자기가 읽는 대목의 의미를 알고 싶다면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단단하든 부드럽든 단어들의 껍질을 깨고, 그 단어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 응축되어 있는 의미가 자신의 가슴속에서 폭발하게끔 해야 하는 것이다. 작가의 기술이란 인간의 정수를 알파벳 문자들에 압축해 넣는 마술,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독자의 기술은 그 마술적 장치들을 열고 그 속에 갇혀 있는 뜨거운 불이나 부드러운 숨결을 느끼는 것이다.'

김사인 선생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작가는 인간의 정수라 할 만한 무언가를 몇 개의 알파벳 속에 집어넣었어요. 그걸 우리가 제대로 읽으려면 그 문자를 풀어야 해요. 봉인을 해제해야 합니다. 이것은 문장을 일으켜 세운다는 것과 같은 의미죠.  202-203


'나는 이 세상에 왔던 것에 만족합니다. 내가 무수한 고난을 겪었음에, 중대한 실수들을 저질렀음에, 만족합니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겠지만, 실수를 했다고 해도 결과를 받아들이며 다시 살아가죠. 아모르 파티(Amor fati)입니다.  203


'순간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그 순간이 완벽해야 한다.

부족함 없어야 하고 바라는 게 없어야 한다.

모든 희망의 극복이 필요하다.'

언젠가 노트에 적어놓은 메모입니다.  210






6강 장막을 걷고 소설을 만나는 길


- <커튼> 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는 들라크루아의 유명한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예로 드는데요. 그 그림은 철저한 해석입니다. 들라크루아가 생각한 자유의 여신의 이데아를 그려놓은 작품이죠.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이 유명한 그림은 들라크루아가 선해석의 커튼에 있는 장면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바리케이드 위에서 한 젊은 여자가 심각한 얼굴로 가슴을 드러내놓고 겁을 주고 있다. 그 여자 옆에는 권총 한 자루를 손에 쥔 코흘리개가 있다.'

쿤데라가 보기에 이 그림은 키치의 전형입니다. 자유의 여신이 깃발을 들고 있는 바로 옆을 보세요. 옆에서 죽어가는 살마들의 비명소리나 피비린내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자유의 여신의 가슴은 전쟁터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깨끗하잖아요. 이런 것들이 전부 키치인 거예요. 쿤데라는 이렇게 말을 잇습니다. 

'내가 이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이 그림이 명화의 대열에서 제외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226-228











''말 그대로의' 역사, 즉 인류의 역사는 이제는 없는 것들, 직접적으로 우리의 삶에 참여하지 않는 것들의 역사다. 예술의 역사는 가치의 역사이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 항상 현존하는 것, 항상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의 역사다. ..'

마차를 생각해보세요. 요즘 누가 마차를 타요. 없어졌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지금 우리는 아직도 몬테베르디라는 16세기의 작곡가도 만나고 스트라빈스키라는 20세기의 작곡가도 만나고 있어요. 이들은 각자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만약 진보의 역사를 잣대로 두고 판단한다면 몬케베르디의 음악은 없어졌어야죠. 과학이 추구하는 것이 '더 나은(better)'의 세계라면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다른(different)'의 세계입니다. 남들과 어떻게 다를 것이냐.  234-235


키치는 앞에서도 언급했는데요, 다시 말하자면 편집입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겠다는 겆. 로맨티스트는 모두 키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로맨티스트는 어떤 상황이든 낭만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이거든요. 지극히 주관적이죠. 로맨틱한 상황에 방귀 냄새가 나서 되겠어요? 로맨틱한 사람은 그 순간 농담을 던지면 뺨을 때리겠죠. 정신 못 차린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때문에 재치라는 것이 매 순간 좋기만 한건 아니에요.  241


'그러나 몽상은 그만! 우리 모두는 출생의 날짜와 장소에 절망적으로 못박혀 있다. 우리의 '자아'는 우리 삶의 구체적이고 유일한 상황을 벗어나서 생각할 수 없으며, 이러한 상황에서만 그리고 그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조건을 벗어나서 우리의 자아를 생각할 수 없어요. 상황이 중요한 거죠. 내가 어느 나라에서, 어느 시대에 태어나, 어떤 상황 속에 살고 있느냐에 못 박혀 있는 겁니다. 이런 것들을 주목한 사람이 프란츠 카프카입니다. 카프카는 이 사람이 귀족이든 아니든, 성격이 좋든 그렇지 ㅇ낳든,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고 당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소설을 씁니다. <성>과 같은 소설이 그렇습니다.  252-253



니체가 이런 말을 했죠.

'16세기에 교회의 타락이 가장 덜한 곳은 독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곳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음을 지적한다. 오직 "타락의 초기에만 타락을 참을 수 없다고 느끼기"때문이다.'

이탈리아의 교회가 더 많이 타락했지만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거죠. 타락이 몸에 배면 익숙해지고 무뎌지게 되거든요.  

'카프카 시대의 관료주의는 오늘날과 비교할 때 순진한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카프파는 관료주의의 끔찍함을 간파했고 그 후로 관료주의는 일상적이 되어 이제는 아무도 과심을 갖지 않는다.'

카프카가 그 시대의 관료주의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초기 관료주의의 끔찍한 모습을 예민하게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현실이 전혀 부끄러움 없이 되풀이된다면, 그 반복되는 현실에 직면한 사상은 결국 언제나 입을 다물게 되는 법이다.'

이게 참 무서운 것 같아요. 조심해야 할 거고요. 예를 들어서 약자를 대상으로 한 폭력들이 이 사회에 계속 존재하고 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런 문제들에 무덤덤해지는 거죠. 우리는 아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들이지만, 제3자의 시선에서 잡히는 문제들도 분명히 있죠. 시스템의 사회, 관료주의적 사회는 익명성의 시대로 이어집니다.

'예전에 우리 부모들이 휴가를 떠날 때면 기차가 출발하기 십 분 전에 역에서 표를 샀다. 그들은 시골 호텔에 묵었고 마지막 낳 주인에게 현금으로 숙박료를 지불했다. 그들은 아직 슈티프터의 세상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휴가는 다른 세상에서 일어난다.'

오늘날 그런 시대는 끝났죠. 나의 휴가는 다른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우리가 먹는 고기를 생각해보세요. 옛날에는 내가 먹는 고기가 어디서 온 건지 다 알고 먹었는데 지금은 모르죠. 익명성의 시대니까요.

'에어프랑스의 관리들과 노조 관리들 사이에 일어났던 분쟁이 파업으로 이어진다. 전화를 수없이 돌리고 난 후에야 에어프랑스에서 한마디 사과도 없이(K에게 사과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행정은 예의범절 저 너머에 있다.)환불을 받고, 기차표를 산다.'

이게 상황입니다. 누구를 욕하겠어요. 시스템 때문에 어쩔 수없는 거잖아요. 내가 에어프랑스 티켓을 샀으니 비행기를 타고 가는 건 내 권리예요. 그런데 내가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노조 문제가 생겼대요. 이때 나의 민원을 접수한 창구의 사람들은 나에게 미안해 하지 않아요. 그저 환불해주겠다고 간단히 말할 뿐이죠. 이런 얘기들이 이미 카프카의 소설에서 K를 둘러싼 상황을 통해 묘사되면서 예측됐던 것이죠.  254-256


익명성뿐만이 아닙니다. 자유의 개념도 예외 없이 바뀌었죠.

'자유의 개념. 측량사 K에게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기관은 없다. 그러나 정말로 완전히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까? 모든 권리를 가진 시민이라 해도, 가장 가까운 자기의 환경, 자기 집 밑에 지어진 주차장과 창문 바로 맞은편에서 웅웅거리는 확성기를 과연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그의 자유는 무한하지만 그만큼 무력하다.'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행동을 금지하는 기관은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정말 자유로워졌나요? 사생활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법으로 사생활을 보장받고 있어요. 그러나 SNS를 통해 우리의 모든 것이 기록되고 있지 않나요? 진짜 사생활이 있는 건가요? 무력할 수밖에 없죠. 이런 시대로 들어섰어요. 시간의 개념도 변화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의 개념.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대립할 때는 동등한 시간 두 개가 대립한다. 덧없는 인생의 제한된 시간 두 개.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사람 대 사람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과 맞닥뜨린다. 젊음도, 노화도, 피곤도, 죽음도 모르는 존재. 인간의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 인간과 행정은 서로 다른 시간을 산다.'

지난겨울 폭설로 무더기 결항이 된 제주공항 사태 때처럼 책임지는 사람 없이 개인이 바로 행정이라는 거대한 시스템과 맞닥뜨리는 거예요. 결국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요.

'측량 기사 K를 짓누르는 것은 잔인성이 아니라 성의 비인간적 시간이다. 인간은 면담을 요청하고 성은 그것을 뒤로 미룬다. 소송은 길어지고 삶은 끝이 난다.'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가 겪는 일들이에요. 모험도 개념이 바뀌었답니다. 그 옛날의 모험은 내가 모험을 떠나겠어 하고 결심하면서 시작이 되었는데요.

'모험의 개념. 예전에 이 단어는 자유와 마찬가지로 삶에 대한 찬미를 나타냈다. 개인의 용감한 결정으로 자유롭고 확고한, 놀라운 일련의 사건이 시작되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의 피해자 유가족들은 지금 모험의 길에 올랐습니다. 그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시민이 됐어요. 그 사람드의 성격이나 성향이 바뀌었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상황입니다. 모험에 들어선 것은 그 사람의 의지인가요? 상황 때문이잖아요. 어쩔 수 없는 상황,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돈키호테의 모험과는 전혀 다르죠. 그렇다면 그 모험은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찾아오는 일입니까? 아니죠. 그런 상황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지만 나에게도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어요. 어쩔 수 없는 그 상황이 우리에게도 생긱고 나면 우리의 삶 역시 완전히 바뀔 겁니다. 이런 시대에 대한 이야기들은 <커튼>에 들어 있어요.

'싸움의 개념 역시 모험과 비슷하다. (중략) 몸 대 몸의 싸움은 없다. 보험, 사회보장, 상업조합, 법원, 국세청, 경찰, 도청, 시청, 우리의 적에게는 몸이 없다.'

어느 순간 다 우리의 적이 될 수 있는 것들이죠.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적이 될 수 있죠.

'그 모든 소동 후에 K는 지쳐서 죽는다.'

K에 우리 이름을 대입하면 딱 들어맞을 것 같지 않으십니까? 대단한 통찰이에요. 이게 바로 카프카입니다. 놀라울 정도로 지금 우리들이 사는 시대와 꼭 들어맞습니다. 시대를 앞서 읽은 소설이네요.  256-258






7강 소설이 말하는 우리들의 마술 같은 삶


- <콜레라 시대의 사랑>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한밤의 아이들> 살만 루슈디







8강 나만을 위한 괴테의 선물, 파우스트


- <파우스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라.'

방황하지 않는다는 건 노력하지 않는 거죠. 삶을 향한 어떤 노력들과 그로 인한 방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풀어가야 하는지, 이 한 문장에 잘 나와 있어요.  329


'그러면 고서(古書 옛고 글서)들이 신성한 샘물과 같아서,

 그걸 한 모금 마시면 갈증을 영원히 진정시켜준단 말인가?

 그것이 자네 자신의 영혼에서 솟아나지 않는다면,

 결코 상쾌한 마음을 얻지는 못할 것일세.'

체화되지 않는 지식들은 무용합니다. 좀 더 자세히 들어가볼까요? 고서에 적힌 훌륭한 말들이 신성한 샘물처럼 여겨지겠지만 그것들이 갈증을 영원히 진정시켜줄 순 없습니다. 그 말이 내 내면 속에서 영혼속에서 계속해서 솟아나야만 갈증이 가랑앉겠죠. 책을 읽었으면 그걸 내 것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겁니다.  333


'그러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결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할걸세.'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노자가 말했죠. 진실한 말에는 꾸밈이 없고, 꾸미는 말에는 진실이 없다고요. 이걸 <파우스트> 버전으로 볼까요?

'이성이 있고 올바른 생각만 있으면,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연설은 저절로 나오는 법일세.

 자네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진지하다면, 

 말마디를 꾸미려고 애쓸 필요가 있겠는가?'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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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 울림의 공유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개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 1904년 1월, 카프카, [저자의 말] <변신> 중에서 


인간에게는 공유의 본능이 있다. 울림을 공유하고 싶다.



1강 시작은 울림이다


- 이철수 <산벚나무, 꽃피었는데-이철수 신작 판과 100선전>

  이철수 <마른풀의 노래>

  이철수 <이렇게 좋은 날>

  최인훈 전집 1

  이오덕 <나도 쓸모 있을걸>



저는 여느 독서가들과 비교했을 때 독서량이 평균에 미치지 못할 겁니다. 매번 읽은 책들을 메모해놓는데, 통계를 내보면 일 년에 읽는 책이 서른 권에서 마흔 권 사이입니다. 한 달에 세 권 정도 읽는 건데 독서량이 많은 건 절대 아니죠. 대신 저는 책을 깊이 읽는 편입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꼭꼭 눌러 읽습니다. 여기 제가 써놓은 것들을 프린트해왔습니다. 

우선 저는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좋은 부분들, 감동받은 부분들에 줄을 치고, 한 권의 책 읽기가 끝나면 따로 옮겨놓는 작업을 합니다. 이 강의의 목표는 이런 방식의 책 읽기를 통해 제가 느낀 '울림'을 여러분께 전달하는 것입니다.  14


'땅콩을 거두었다

덜 익은 놈일수록 줄기를 놓지 않는다

덜된 놈! 덜떨어진 놈!'


이 한 줄만으로도 덜된다는 게 이런 얘기구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익으면 떨어지는데, 익지 않아 '덜 떨어진다'는 겁니다. 이 한 줄이 자연 현상이 인간사로 넘어오는 순간입니다. 현기증 나는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그냥 자연현상인데 순식간에 사람의 것으로 이입이 됩니다.

이철수는 또 저에게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동양의 삶의 태도와 서양의 삶의 태도를 가장 극명하게 비교하게 해주었는데요, 그것은 역시 판화 [가을사과]에 쓴 한 줄의 글이었습니다.


'사과가 떨어졌다

만유인력 때문이란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과가 떨어진 걸 만유인력 때문이라고 기거이 과학적으로 밝혀내고야 마는 것은 서양의 장점입니다. 그리고 동양의 장점은 때가 되어서 떨어지는 걸 왜 안달복달 난리들이야 하며 자연을 아우르는 철학입니다... 서양의 장점이 가져다준 문명적인 혜택, 충분히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자연적 재앙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연현상을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파악하는 동양의 지예가 다시 힘을 발휘해야 할 때가 되었구나 생각합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런 것이 통찰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창의력이 무엇이냐고 자주 묻는데, 저는 이런 통찰이 창의력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사과를 많이 봤지만, 뉴턴이나 이철수와 같은 생각은 한 번도 못해봤습니다. 같은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이 사람의 힘인 것이죠.  22-23


소설가 김훈에 따르면 글쓰기는 자연현상에 대한 인문적인 말 걸기라고 합니다. 자연은 자연이고 인간의 글은 인문(人文)이잖아요. 그런데 자연을 해석하려고 인문이 노력을 하는 겁니다. 쉽지 않죠? 조금 설명을 덧붙인다면, 

'산에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예전에는 김소월의 [산유화]라는 시를 좋은 줄 모르고 들었습니다. '그게 뭐야, 당연히 산에 꽃이 피지 뭐'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김훈이 이렇게 안내해줬습니다. "이 노래는 말을 걸수 없는 자연을 향해 기어이 말을 걸어야 하는 인간의 슬픔과 그리움의 노래로 나는 들린다"라고 말이죠. 멋진 걸 보고 '우와'라는 표현밖에 못 하는 사람과 다르게 그들은 기어이 말을 걸고 싶은 인문적인 갈증이 있는 것입니다.  25


'깊은데 

 마음을 열고 들으면

 개가 짖어도 

 법문이다' - [개소리] 전문 26


어른들은 .. '지식'으로 세상을 봅니다.

아이들이 .. '감성'으로 본 겁니다.  36


'시골집 선반 위에

 메주가 달렸다.

 메주는 간장, 된장이 되려고

 몸에 곰팡이가 

 피어도 가만히 있는데,

 우리 사람들은

 메주의 고마움도 모르고

 못난 사람들만 보면

 메주라고 한다.' - 부산 감전국교 6년 이경애, [메주]


'껌은 빳빳하지요.

 그러나 입속에 넣으면

 사르르 녹지요.

 아무리 나쁜 사람도

 껌과 같지요.


 모두가 나쁜 사람이라고 

 팽개쳐버려도

 누군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싸 주면

 껌과 같이 사르르 녹겠지요.

 딱딱한 마음이

 껌과 같이 되겠지요.' - 부산 감전국교 6년 김경숙 [껌 같은 사람]  39-40


사람은 물입니다. 조용한 데 이르면 조용히 흐르고, 돌을 만나면 피해가고, 폭포를 만나면 떨어지고, 규정된 성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톨스토이 소설에 악당이 없다..  40


창의성과 아이디어의 바탕이 되는 것은 '일상'입니다. 일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고, 대처 능력이 커지는 것이죠. 

요즘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고수들이 일상의 중요성에 대해 깨달았구나 싶습니다. 박재삼이, 존 러스킨이, 헬렌 켈러가 같은 생각을 했어요. 사과가 떨어져 있는 걸 본 최초의 사람이 뉴턴이 아니잖아요. 사과는 늘 떨어져 있지만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은 겁니다. 상황에 대한 다른 시선, 절박함이 사과를 보고 이론을 정리하게 했죠. 답은 일상 속에 있습니다. 나한테 모든 것들이 말을 걸고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 들을 마음이 없죠. 그런데 들을 마음이 생겼다면, 그 사람은 창의적인 사람입니다.  45



행복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삶은 순간의 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을 레이스로 생각합니다.  46


레이스가 된 삶은 피폐하기 이를 데 없죠.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그래서 저는 순간순간 행복을 찾아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행복은 삶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그러나 풍요롭기 위해서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같은 것을 보고 얼마만큼 감상할 수 있느냐에 따라 풍요와 빈곤이 나뉩니다. 그러니까 삶의 풍요는 감상의 폭이지요.  47


중요한 것은 휘슬러의 <화가의 어머니>를 보면서 소름이 돋으려면 훈련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이 "문화미와 예술미는 훈련한 만큼 보인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47-49


시이불견 청이불문(視而不見 聽而不聞 볼시 말이을이 아닐불 볼견 들을청 말이을이 아닐불 들을문). 제가 좋아하는 말입니다. 시청은 흘려 보고 듣는 것이고 견문은 깊이 보고 듣는 거죠.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면서 그저 지겹다고 하는 것은 시청을 하는 것이고요, 사계의 한 대목에서 소름이 돋는 건 견문이 된 거죠. [모나리자] 앞에서 '얼른 사진 찍고 가자'는 시청이 된 거고요, 휘슬러 [화가의 어머니]에 얼어붙은 건 견문을 한 거죠. 어떻게 하면 흘려보지 않고 제대로 볼 수 있는가가 저에게는 풍요로운 삶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겁니다. 존 러스킨은 "당신이 보고 난 것을 말로 다 표현해보라"라고 했습니다. 나뭇잎을 봤다면, 나뭇잎의 균형감각이 어떻게 되어 있고, 앞뒷면의 촉감이 어떻게 다르고, 끝부분은 어떤 모양이고, 햇살이 떨어진 각도에 따라 나뭇잎의 색깔이 어떻게 다른지 볼 줄 알면 창의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49-50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51





2강 김훈의 힘, 들여다보기


- <자전거 여행>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자전거 여행2>

  <개-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화장]<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바다의 기별>


구어가 곧 문어(文語 글월문 말씀어)라는 겁니다. 말로 나오는 문장을 그냥 받아적으면 글로 쓸 수 있는 정도입니다.

김훈의 특징은 사실적인 글쓰기를 한다는 겁니다.  59


'탐사취재' 

정밀탐사 ...

김훈의 글은 형용사나 부사를 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사실만 불러내서 정서를 전달하는데, 생각보다 그 힘이 굉장히 큽니다.  60


김훈은 무엇을 보든 천천히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64


'디자인은 단순한 멋 부리기가 아니다.

 디자인은 깊은 생각의 반영이고

 공간에 대한 배려다.'  68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인 조르바를 통해 "그에게 두려웟던 것은 낯선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이었다"라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습니다. 익숙한 것 속에 정말 좋은 것들이 주변에 있고, 끊임없이 말을 거는데 듣지 못한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90


'식물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나무밑동에서 살아 있는 부분은 지름의 10분의 1정도에 해당하느 바깥쪽이고, 그 안쪽은 대부분 생명의 기능을 소멸한 상태라고 한다. 동심원의 중심부는 물기가 닿지 않아 무기물로 변해 있고, 이 중심부는 나무가 사는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 이 중심부는 무위와 적막의 나라인데 이 무위의 중심이 나무의 전 존재를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버티어준다.'

지금 생명활동에는 아무런 관여를 하고 있지 않지만, 중심부가 있지 않으면 나무가 서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92


<바다의 기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쓴 장편소설 <칼의 노래> 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입니다. (...) 나는 처음에 이것을 "꽃은 피었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있다가 담배를 한 갑 피면서 고민고민 끝에 "꽃이 피었다"라고 고쳐놨어요. 그러면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하늘과 당의 차이가 있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입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입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나의 문장과 서술은 몽매해집니다.'  93


'보편적 죽음이 개별적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하지는 못한다.'

왜군들은 군인으로 오지만 죽을 때는 개인으로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군들이 올 때는 군인이라는 집단명사로 옵니다. 나라를 위해서, 국가의 명예를 위해서 오는데 죽을 때는 일본 군인으로 죽는 게 아니라 가족과 헤어져 외롭고 고통스러운 슬픈 개인으로 죽습니다. 죽음은 전부 개별적이라는 이야기죠. 보편적 죽음이 개별적 죽음을 설명할 수 없어요. 그리고 위로할 수도 없고요. 그래서

'인간은 보편적 죽음 속에서, 그 보편서오가는 사소한 관련도 없이 혼자서 죽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끝끝태 개별적이다.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이다.'

맞아요. [화장]에 아무리 사랑을 해도 아픔은 전이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픔도 개별적이에요. 냉정하지만 사실이죠. 아무리 자식이 아프다고 해도, 아파하는 걸 보면서 마음이 아플 뿐이지 그 아픔을 진짜 느낄 수는 없어요. 철저히 개별적인 객체입니다. 평소에 너무 아프거나 추해서 의도적으로 보려 하지 않는 것들을 김훈은 날것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렇게 각성과 새로운 시선을 전져주죠. 김훈은 말합니다.

'나는 사실만을 가지런하게 챙기는 문장이 마음에 듭니다.'  96-97





3강 알랭 드 보통의 사랑에 대한 통찰


- <불안>

  <우리는 사랑일까>

  <동물원에 가기>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개정판으로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우리 모두는 불충분한 자료에 기초해서 사랑에 빠지며, 우리의 무지를 욕망으로 보충한다.'

사실 상대에 대한 전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 사랑에 빠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대상이 있으면 그 사람의 어떤 한 면을 봅니다. 말 한마디의 한 컷, 그 사람이 나에게 얘기했던 한순간만 보고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예쁘다, 멋지다. 매력적이고 좋다고 생각한 뒤 나머지 부분은 다 상상으로 채우죠. 그 상상은 나의 욕망으로 채워집니다.  105


우리는 워홀이 통조림에 했던 발견을 자신에게 해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아마 통조림은 워홀을 사랑하고 평생의 연인으로 삼을 겁니다. 눈물을 흘릴지도 몰라요. 자기를 그렇게 아름답게 봐준 사람이 처음이니까요. 아무도 자기를 중요하게 혹은 예쁘게 안 봐줬어요. 그런데 워홀은 '너 대단히 예쁘다'라고 끌어서 액자 속에 걸어놓아줬어요. 사랑의 감정이 싹트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얘기예요.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상대가 다른 누구도 주목해주지 않았던 어떤 부분을 주목해주거나 다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진가를 알아줬을 때 사랑에 빠진다는 거죠. 그걸 연결해서 알랭 드 보통은 워홀이 물감으로 한 일과 사라의 유사점에 대해 또 하나의 이야기를 합니다.

'워홀이 물감으로 한 일과, 오랫동안 있는 줄도 몰랐던, 

코나 손의 점들을 애인이 칭찬해주는 일은 비슷하지 않을까?

애인이 "당신처럼 사랑스런 손목/사마귀/속눈썹/발톱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거 알아? 라고 속삭이는 것과 예술가가 

수프 통조림이나 세제 상자의 미적인 성질을 드러내는 것은 구조적으로 같은 과정이 아닐까?'

대단한 통찰이죠? 우리가 사람에게 하는 것이나 예술가들이 사물에 하는 것이 같은 과정이라는 메시지가 이 소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또 공감할 만한 건 사랑이라는 게임에서 드러나는 '권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보통 권력이라는 건 '뭔가 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란 게임에서만큼은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것', 그게 권력입니다. 만약에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데, 둘 중 영화를 보고 싶거나 여행을 가고 싶거나 뭘 더 하고 싶은 쪽이 상대를 더 사랑한다는 겁니다. 사실 덜 사랑하는 쪽은 상관이 없는 거죠. "하고 싶은 거 해, 뭘 하든 상관 없어"라고 적당히 무관심한 듯 물러서서 아무 의견을 내지 않아요. 그래서 사랑에서의 권력은 무엇을 할 수 있는 느엵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것이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영역에서와는 달리,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115-116


옛날에는 시인을 볼 견(見 볼견)자를 써서 견자(見者 볼견 사람자)라고 했다죠. 들여다보는 사람, 삶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들이 못보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라는 뜻일 겁니다.  123


카프카가 한 말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냐.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  129


책을 많이 읽고 인문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들은 촉수가 민감해지죠.  130


<인문학으로 광고하다>에 존 러스킨의 "말로 그림을 그려보라"라는 말을 인용했는데요. 그런 것이죠. 말로 그림을 그리듯 자세히 볼 줄 알아야 합니다.  134





5강 햇살의 철학, 지중해의 문학


- 김화영 <행복의 충격-지중해, 내 푸른 영혼> <바람을 담는 집>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김화영 예술기행>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천상의 두 나라>

  로버트 카플란 <지중해 오디세이>

  알베르 카뮈 <이방인>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장 그르니에 <섬>

  릴케 <말테의 수기>


영혼을 구원한다는 이유로 신부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다고 하자 뫼르소는 처음으로 불같이 화를 내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너에게는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217





6강 결코 가볍지 않은 사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키치의 세계는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보기 때문이죠. 체제가 다를 뿐 모든 세계에 키치가 존재하는 겁니다. 작가는 키치에 의해 유발된 느낌은 가장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감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과감한 짓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

'그녀는 일생 동안 자신의 적은 키치라고 단언했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조차도 자신의 존재 깊숙한 곳에 키치를 품고 살았던 것을 아닐까? (...) 텔레비전의 멜로드라마 속에서 배은망덕한 딸이 버림받은 아버지를 품 안에 껴안는 모습이나 행복한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의 창문이 황혼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면, 그녀는 두 눈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266





7강 불안과 외로움에서 당신을 지켜주리니, 안나 카레니나


-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1,2,3


'기계적 인문'. 기계적 인문은 제가 만든 말인데, 땅에 발을 디딘 현실적인 인문학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이론만 가지고 사회를 파악하려고 하는 인문을 말합니다. 기계적인 인문을 하는 사람들은 현실과 부딪혀 문제를 풀지 않아요. 책으로만 배운 인문은 민중의 해방을 위해 민중을 교육시켜야해요. 그런데 민중이 일을 해야 하니 일을 하게 둬요. 그리고 밤늦게 일이 다 끝난 후 학습을 시켜요. 그 학습은 민중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시간 투자이기 때문에 절대 빠져서도 안 돼요. 그러니까 잠을 못 자게 하고, 술 한 잔도 정신이 흐트러져 안 된다고 금지하는 거예요. 민중은 그게 싫어요. 사실 그들은 대단한 미래를 바라지도 않아요. 현재도 충분히 행복하니까요.  286






8강 삶의 속도를 늦추고 바라보다


- 법정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손철주 <인생이 그림 같다-미술에 홀리느 손철주 미셀러니>(<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 재출간)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미술이야기>

  오주석 <한국의 미 특강> ㅡ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2 권 <그림 속에 노닐다>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한형조 <붓다의 치명적 농담>



'뼈빠지는 수고를 감당하는 나의 삶도 남이 보면 풍경이다.'

모든 삶이 그 사람한테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지만 멀리서 보면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죠. 그러고 보니까 모든 근경은 전쟁이고, 모든 원경은 풍경 같습니다.  322-323


벗나무 아래 엄숙할 것 없는 문명사. 자연사보다 결코 대단할 것 없는 문명사. 예술을 한 번도 동경한 적 없는 자연.  327


'형상이 드러나지 않은 여백을 바라보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거기에는 마치 위대한 음악의 중간에 침묵의 몇 초를 기다리는 순간과 같은 마음 졸임이 있는 까닭이다.'

'침묵의 위대함은 앞뒤의 음향이 만든다. 그림 속 여백의 의미심장함은 주위의 형상이 조성한다.'  329


'예술의 격조란 정확히 감상자의 수준과 자세만큼 올라간다.'  334


우리는 책에 대한 긍정적인 편견이 있습니다. 책이면 다 좋다는 편견이죠. 하지만 읽는 시간이 아까운 글들도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점수의 삶의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돈오하려면 깨달음을 줄 만한 좋은 책들을 찾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45


호학심사 심지기의(好學深思 心知基意 좋을호 배울학 깊을심 생각할사 마음심 알지 터기 뜻의), 즐겨 배우고 깊이 생각해서 마음으로 그 뜻을 안다는 뜻입니다. 비단 책뿐 아니라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촉수를 모두 열어놓으면 풍요롭고 행복한 인생을 즐기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행복은 선택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잔디이론으로 봅니다. 저쪽 잔디가 더 푸르네, 저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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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리영희 선생은 말한다. 진실, 진리, 끝없는 성찰, 그리고 인식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신념과 지조.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 지식인은 이런 것들과 더불어 산다.  47-48



우리 모두는 갖가지 편견과 고정관념을 지니고 산다.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통념이 논리적, 경험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일일이 시험하고 검토할 수 없는 일이기에, 많은 경우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관념과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는 맬서스와 얼마나 다른가. 내가 옳다고 믿는 것, 내 신념을 받치고 있는 수많은 통념들 가운데 그릇된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없을 것인가? ..

<인구론>과 맬서스는 금이 간 거울이다. 내 생각도 그릇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일그러져 있지 않은지 경계하면서, 거기에 나를 비추어 본다. 생각은 때로 감옥이 될 수 있다!  90-91



배불리 먹고 편안하게 지내기만 하면서 배우지 않으면 백성은 짐승에 가까워지므로...  126



마르크스는 사회를 "대립하는 계급의 통일"로 보았다. 그의 세계에는 언제나 투쟁이 진행 중이며 혁명이 준비되고 있다. 그는 부르주아 독재를 타도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혁명이 필연적이며 그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믿었다.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마르크스가 혁명의 소용돌이에 몸소 뛰어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베블런의 세계는 유한계급과 생산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그의 세계는 매우 안정되어 있다. 여기서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 인습과 제도의 진화가 있을 뿐이다. 보수성은 지배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보편적 특성이다. 유한계급의 규범과 생활양식은 모든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명예로운 표준으로 통용된다. 하층계급은 유한계급을 타도하기보다 그 일원이 되기를 원하며 그들을 흉내 내려고 애쓴다. 사회와 인간을 이렇게 보면 세상의 소란에 신경 쓰지 않고 이방인으로 살다 가는 쪽이 자연스럽다.  238-239


폭력이 '무지'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무지'란 "처지를 바꾸어놓고 생각해보는 능력의 전적인 결여"를 의미한다.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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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모르는 자가 바다를 얕본다. 바다를 얕보는 자, 바다에 데기 마련이었다.  31


은주는 해질녘 놀이터에 익숙한 아이였다. 아이들과 그들의 활기가 빠져나간 자리에도 익숙했다. 어두운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등에 업은 막냇동생을 재우는 일이 갓 여덟 살이 된 그녀의 일상이었으므로, 다섯 살배기 여동생 영주는 가로등 밑에서 혼자 소꿉놀이를 하고, 두 살 배기 기주는 별사탕 같은 손으로 은주의 머리칼을 마구 잡아당기곤 했다. 은주는 그 따분하고 쓸쓸한 시간을 간절한 기도로 보냈다. 시간이 마구 점프하기를, 하루빨리 어른이 되기를, 그리하여 이 지겨운 집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폐차버스를 개조해서 탁자 몇 개 놓고 막걸리를 파는 왕대폿집도 '집'이라 부를 수 있다면.

'지니네 왕대포'의 여주인 지니는 젓가락장단의 고수였다. '목포의 눈물'을 이난영보다 더 간드러지게 부르는 여자였다. 불망 한복저로기 깃이 다 들릴 만큼 젖가슴이 큰 여자였다. 가슴골로 손이 들어오든, 돈이 들어오든 사내의 것이라면 사양하지 않는 여자였다. 코를 찡긋거리며 잇몸까지 드러내고 웃어주는 여자였다. 엉덩이를 뒤로 빼고 오리처럼 둥싯둥싯 걷는 여자였다.  18


제 몸 간수도 제대로 못하는 어린 딸에게 제각각 씨가 다른 여동생과 갓난쟁이 남동생을 떠안긴 여자였다. 은주를 낳은 여자였다.

은주는 막내인 기주가 잠들어야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은주는 지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아마도 도덕시간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자유의지'라는 단어를 칠판에 적더니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는 자기 삶을 지킬 수 있다."

그날 은주는 자신을 꼼꼼하게 평가해봤다. 가진 밑천이 무언지, 잘할 수 있거나, 그럭저럭 해낼 수 있는 일이 뭔지, 무엇을 갖춰야 하고 갖출수 있는지. 손바닥만 한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녀는 자신이 배우가 될 재목이 아님을 인정했다. 귀여운 구석이야 있었지만 지나가는 남자를 기절시킬 만큼 예쁘지는 않았다. 수재가 아니라는 건 성적표를 통해 확인했다. 예술이나 운동에도 재능이 없다는 걸, 수업을 통해 깨우쳤다. 그녀는 음치였고, 몸치였고, 일기 한 줄 그럴싸하게 쓰지 못했다. 그러나 왜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지니처럼 살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타고난 근성이 있었다.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는 자존심이 있었다. 그 정도면 자신의 미래를 믿을 근거로 충분한 것 같았다.은주는 계획을 세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열여덟 살까지 지니네 왕대폿집에 붙어 있을 것. 지니의 빨강 브래지어를 훔쳐다 팔아서라도 고교졸업장을 손에 쥘 것. 취직에 필요한 자격증을 모두 따둘 것. 취직하면 바로 튈 것. 3년 안에 전세방을 얻을 것. 폐차버스를 돌아보지 말 것.  131-132



그의 손은 은주의 뺨으로 날았다. 은주는 이삿짐 사이로 날아가 떨어졌다. ...

그는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자신이 뭔 짓을 저지를지 몰라 두려웠다. 무작정 걷다가 도착한 곳이 동네 소줏집이었다. 술이 들어가자 한 남자가 기억났다. 술만 마시면 살림을 뒤엎고 처자식을 죽사발로 만들던 구척 거한. 월남에서 돌아온 용감한 '최상상'. ..

은주 표현에 의하면, 통제가 안 되는 그의 왼손은 힘이 남아돌아 어쩔 줄 모르는 '오랑우탄'이었다. 최상사가 그의 몸에 남긴 유전자였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최상사의 아들임을 상기시키는 저주의 징표였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최상사처럼 살지 않았다. 다르게 살아왔다고 믿었다.  142-143



아이들 말로, 세령은 '전교생의 왕따'였다. 5년째 다니는 미술학원에서도 외톨이기는 마찬가지였다. ..

그의 세계에 속한 세령과 세상에 속한 세령의 모습이 딴판으로 다르다는 것. 그가 아는 세령은 제 엄마 축소판이었다. 고집 세고, 영악하며, 당돌한 계집애. 세상 속 세령은 지나치게 내성적인 아이였다.  147



난 말이지, 그때나 지금이나 참는 게 제일 싫은 사람이야. 내 맘대로 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고.  289-290



한 집안의 가장 노릇하는 미래가 제 앞에 있었어요. 그것이 삶이긴 하겠지만 과연 나 자신일까, 싶었던 거죠. 나와 내 인생은 일치해야 하는 거라고 믿었거든요.

현수는 자신의 손끝에서 깜박거리는 담뱃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인생과 그 자신이 일치하는 자가 얼마나 될까. 삶 따로, 사람 따로, 운명 따로, 대부분은 그렇게 산다.  323


몇 달 전, 유럽여행을 다녀온 처제부부가 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 선물이라고 사온 것이 칼바도스였다. 한국에선 흔하지 않은 술이라 형부 생각이 나서 샀다고 했다. 그는 고마운 마음으로 받았다. 처제부부가 돌아간 뒤, 은주는 있는 대로 성미를 부렸다. 분노의 몸통은 아니꼬움이었다. '집도 없는 것들이 유럽씩이나 나다니는 정신 나간 행태'에 속이 뒤집혀 있었다.  328



그 시절엔 집안일이 다 내 몫이었어. 동생들 치다꺼리에 집안 청소, 아버지 식사 차려드리는 일. 어머니가 퇴근을 해야 비로소 거기서 해방이 되는 거지. 문제는 내가 야구를 시작하면서 집에 오는 시간이 늦어지고, 그러다 보니 아버지 일상이 불편해졌다는 거야. 운동을 하고 집에 가는 날마다 죽도록 매를 맞았어.  372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총을 가지면 누군가를 쏘게 되어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인간의 천성이라고.  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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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글 - 수 많은 '처음'

수많은 처음이란 결국 끊임없는 성찰(省察 살필성 살필찰)이 나일 수 없습니다.  12







  







우리는 새로운 꿈을 설계하기 전에 먼저 모든 종류의 꿈에서 깨어 나야 합니다. 

꿈보다 깸이 먼저입니다.

꿈은 꾸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서, 누구한테서 꾸어올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꿈과 동시에 갚을 준비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깸은 여럿이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집단적 몽유(夢遊 꿈몽 놀유)는 집단적 각성(覺醒 깨달을각 술깰성)에 의해서만 깨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6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 다할진 착할선 다할진 아름다울미)라 합니다. 목표가 바르지 않고 그 과정이 바를 수가 없으며, 반대로 그 과정이 바르지 않고 그 목표가 바르지 못합니다. 목표와 과정은 하나입니다.  31


바둑에서는 집이 크면 이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는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한다고 합니다. 사람의 크기를 측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사람과 집의 크기를 비교하는 까닭은 짐작이 갑니다. 비슷해야 하는 것은 사람과 집의 크기만이 아닙니다. 사람과 그 사람이 앉아 있는 의자의 크기도 비슷해야 합니다. 의상도 마찬가지입니다.  42


진정한 대환느 애정으로 포용하는 것입니다.  44


높은 곳에서 일할 때의 어려움은 무엇보다도 글씨가 바른지 비뚤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물어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46


우공이산(愚公移山) - 어리석은 사람의 우직함이 세상을 바꾸어 갑니다.  53


모든 시내가 바다를 배운다는 것은 모든 시내가 바다를 향하여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백천학해(百川學海 일백백 내천 배울학 바다해)  55


오늘 저녁의 일몰(日沒)에서 내일 아침의 일출(日出)을 읽는 마음이 지성(知性)입니다.  63


옛사람들에게는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말라는 경구가 있었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거울에 비치는 겉 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경어인(鏡於人 거울경 어조사어 사람인), 모름지기 사람들 속에 자신을 세우고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추어 보기를 가르치는 경구입니다. 무감어수(無鑑於수 없을무 거울감 어조사어 물수)  76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

<주역> 사상의 핵심입니다. 궁극에 이르면 변화하고, 변화하면 열리게 되며, 여려 있으면 오래간다는 뜻입니다. 양적 축적은 결국 질적 변화를 가져오며, 질적 변화가 막힌 상황을 열어 줍니다. 그리고 열려 있을 때만이 그 생명이 지속됩니다. 부단한 혁신이 교훈입니다.  80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역>의 지산겸(地山謙 땅지 뫼산 겸손할겸) 괘는 땅속에 산(山)이 있는 형상입니다. 땅속에 산이 있다니 자연현상과는 모순인 듯합니다. 해설에는 "땅속에 산이 있으니 겸손하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많은 데를 덜어 적은 데에 더하고 사물을 알맞게 하고 고르게 베푼다."고 합니다. 우뚝 솟은 산을 땅속에 숨기고 있어서 겸손하다고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산을 덜어서 낮은 곳을 메워 평지로 만드는 것을 뜻하는지도 모릅니다. "겸손은 높이 있을 때에 빛나고, 낮은 곳에 처할 때에도 사람들이 함부로 넘지 못 한다." 그러기에 겸손은 "군자의 완성"이다. 가히 최고의 헌사라 하겠습니다.  82


물건을 갖고 있는 손은 손이 아닙니다. 더구나 일손은 아닙니다. 갖고 있는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손이 자유로워집니다. 빈손이 일손입니다. 그리고 돕는 손입니다.  98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 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116


속도는 가속으로 가속은 질주로 이어집니다. 자동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1m의 코스모스 길은 한 개의 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이 가을을 남김없이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꽃길이 됩니다.  119


무념무상은 정신의 피로를 회복하는 빈공간입니다. 잠이 육체의 피로를 회복하는 이완의 정점인 것과 같습니다. 이 비움과 이완이야말로 '생각하는 공간'입니다. 

생각은 답습의 단절이고 기존(旣存 이미기 있을존)의 해체이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우리들의 조작가능성 바깥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만나는 세계를 서둘러 개념화하고 분석하기전에 당혹감 그 자체에 충실해야 합니다. 빈공간을 만들어 그 속에 무심히 앉아 있는 것 그것이 생각의 정점입니다.  120


물은 빈 곳을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결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차곡차곡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영과후진(盈科後進 찰영 과정과 뒤후 나아갈진))  124


천 개의 손에는 천 개의 눈이 박혀 있었습니다. 천수천안(千手千眼 일천천 손수 일천천 눈안)이었습니다. 그냥 맨손이 아니라 눈이 달린 손이었습니다. 눈이 달린 손은 맹목(盲目 소경맹 눈목)이 아닙니다. 생각이 있는 손입니다. 마음이 있는 손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능력이 있는 사람이 수많은 손을 가진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마음이 있는 손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128


"색은 마음이 보는 것. 세상에는 흰 색과 검은 색 밖에 없는 것이야. 선 아니면 악일 뿐이야."

"흑백은 아예 색이 아니야. 색을 본다는 것은 우산을 먼저 보고 비를 나중에 보는 어리석음이야. 색은 흑백을 풍부하게 사는 데 써야 하는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홀리고 어지럽게 할 뿐이야. '진리'는 간 데 없고 '진리들'만 난무하게 되는 것이야."

그렇습니다. 사람의 눈동자는 95%가 흑백을 인식하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색을 인식하는 부분은 불과 5%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134


사랑은 사전(事前 일사 앞전)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후(事後 일사 뒤후)에 경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경작되지 이전이라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그 이후라면 새삼스레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은 불모의 땅에서도 사랑을 경작한다는 사실입니다.  138


풍요보다 궁핍이 기쁨보다는 아픔이 우리를 삶의 진상에 마주세웁니다. 그리고 삶의 진상은 다시 삼엄한 대립물이 되어 우리 자신을 냉정하게 대면하게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냉정한 인식은 비정한 것이기는 하지만 빈약한 추수(秋收 가을추 거둘수)에도 아랑곳없이 스스로를 간추려보게 하는 용기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아픈 기억을 잊는 것은 지혜입니다. 아픈 기억을 대면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144


중요한 것은 '나아가면서 길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여기'서부터 길을 만들기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나마도 동시대의 평범한 사람들과 더불어 만들어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148


실패가 있는 미완(未完 아닐미 완전할완)이 삶의 참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삶은 반성이며 가능성이며 항상 새로운 시작입니다.  153


'성을 쌓는자 망하고 길을 떠나는 자 흥하리라' 유목주의의 금언입니다.

창조는 변방에서 이루어집니다. 중심주는 지키는 것에 급급할 뿐입니다. 변방이 창조공간입니다.

그러나 변방이 창조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중심부에 대한 컴플랙스가 없어야 합니다.

컴플랙스가 청산되지 않은 변방은 중심부보다 더욱 완고한 교조(敎條 가르칠교 곁가지조)의 아성이 될 뿐입니다.  156


고행이 공부가 되기도 하고, 방황과 고뇌가 성찰과 각성이 되기도 합니다. 공부 아닌 것이 없고 공부하지 않는 생명은 없습니다. 달팽이도 공부합니다. 지난여름 폭풍 속에서 세찬 비바람 견디며 열심히 세계를 인식하고 자신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공부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 형식입니다.  170


아메리카 인디언은 말을 멈추고 달려온 길을 되돌아봅니다. 영혼이 따라오기를 기다립니다. 

공부는 영혼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노인 목수가 그리는 집 그림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반대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을 맨 나중에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189


우리가 훌륭한 사상을 갖기가 어렵다고 하는 까닭은 그 사상 자체가 무슨 난해한 내용이나 복잡한 체계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상이란 그것이 내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 실현된 것만큼의 사상만이 자기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리 강론하고 공감하더라도 결코 자기 것이 아닙니다.  203


각 방마다 사정이 비슷하다면 아마 한 방에 두 개 또는 세 개씩, 그러니까 20~30개 정도의 수도꼭지가 있었으 ㄹ것으로 계산됩니다. 20~30개의 수도꼭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물은 부족하고 세면장의 아우성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동 전체 인원이 150명이니까 수도꼭지가 150개 있으면 해결될 것 같았습니다. 비상용으로 한 개씩 더 가져야 한다면 300개, 300개가 있으면 물 문제는 해결될 것 같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이것은 교도소의 수도꼭지 얘기가 아닙니다. 수도꼭지가 만약 상품으로 거래된다면 여섯 개 대신에 300개를 만들어 팔 수 있는 구조가 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해지는 물질적인 낭비를 풍자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생산하는 상품이 수도꼭지 하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수많은 상품이 마치 수도꼭지와 같은 형태로 생산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207



"없이 사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사정을 구구절절 다 얘기하면서 살아요? 그냥 욕먹으면서 사는 거지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대개 먹물들은 자기의 사정을 자상하게 설명하고 변명까지 합니다. 못 배운 사람들은 변명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짧은 것이라 하더라도 자기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사람이 아예 없습니다. 그냥 단념하고 욕먹으면서 살 각오를 합니다. 나는 그의 그러한 태도가 바로 춘풍추상이라는 고고한 선비들의 윤리의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정은 잘 알지 못합니다. 반면에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세심한 사정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불가피했던 수많은 이유들에 대해서 소상하게 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추상같이 엄격하고 자기에게는 춘풍처럼 관대합니다. '대인충푼 지기추상'이란 금언은 바로 이와 같은 자기중심적 관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211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합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233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공존의 철학이 화(和 화할화)입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동화하려는 패권의 논리가 동(同 한가지동)입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 화할화 말이을이 아닐부 한가지동)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237


세상 사람들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246


미셀 푸코가 지적하듯이, 자유로운 영혼이 근대사회를 구성하는 감옥, 군대, 병원, 학교, 공장의 모든 시스템을 통과하면 반듯하고 조그마한, 계량화되고 규격화된 주체가 됩니다. 지금은 포섭 기제가 굉장합니다. 옛날에는 물리적 강제로 사람들을 규제했지만 지금은 그런 규제가 없습니다. 대단히 자유롭습니다. 감성 자체를 포획해 버립니다.  259


자유롭고 올바른 생각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가 갇혀 있는 문맥(文脈 글월문 맥맥)을 벗어나야 합니다. 문맥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당대의 문맥을 깨닫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중세 쳔년 동안 마녀 문맥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우리 시대의 문맥을 깨달아야 합니다. 탈문맥(脫文脈 벗을탈 글월문 맥맥)과 탈주(脫走 벗을탈 달릴주), 이것은 어느 시대에도 진리입니다.  260


공부는 망치로 합니다. 갇혀 있는 생각의 틀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262


공부의 옛글자는 사람이 도구를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일이 공부입니다.

공부란 삶을 통하여 터득하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리고 세계와 인간의 변화입니다.

공부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의 존재형식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존재형식은 부단한 변화입니다.  263


생각하면 여행만 여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 하루하루가 여행이라고 생각힙니다.

소통과 변화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 형식입니다.

부단히 만나고, 

부단히 소통하고,

부단히 변화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다시 발까지의 여행이 우리의 삶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만 못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 발 좋은 사람만 못합니다.  264


책은 반드시 세 번 읽어야 합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모든 필자는 당대의 사회역사적 토대에 

발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를 읽어야 합니다.

독자 자신을 읽어야하는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서는 새로운 탄생입니다.

필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탈주(脫走 벗을탈 달리주)입니다.

진정한 독서는 삼독입니다.  266


책상은 그것을 위한 디딤돌일 뿐입니다. 모든 시대의 책상은 당대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장치입니다. 책상 위에 올라서는 것은 '독립'입니다.-죽은시인의사회  285


우리는 누군가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스승으로 살아갑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삶의 연쇄(連鎖 연결할연 쇠사슬쇄) 속에서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  287


소혹성에서 온 어린왕자는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관계맺음이 없이 길들이는 것이나 불평등한 관계로 길들여지는 것은 본질에 있어서 억압입니다. 관계맺음의 진정한 의미는 공유입니다. 한 개의 나무의자를 나누어 앉는 것이며, 같은 창문에서 바라보는 것이며, 같은 언덕에 오르는 동반입니다.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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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9


"자. 어서 아, 해라. 먹어."

...

"얼른 먹어라. 팔 아프다..."

...

"저, 안 먹어요."

...

"보고 있으려니 내 가슴이 터진다. 이 애비 말이 말 같지 않아? 먹으라면 먹어!"

...

"저는, 고기 안 먹어요."

...

"먹어라. 애비 말 듣고 먹거.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다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

...

"아버자,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순간, 장인의 억센 손바닥이 허공을 갈랐다. 아내가 뺨을 감싸쥐었다.

"아버지!" 

처형이 외치며 장인의 팔을 잡았다. 장인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입술을 실룩거리고 있었다.

...

"정서방, 영호, 둘이 이쪽으로 와라."

...

"두 사람이 영혜 팔을 잡아라."

"예?"

"한번만 먹기 시작하면 다시 먹을 거다. 세상천지에, 요즘 고기 안 먹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

처남은 소리쳐 만류했으나, 얼결에 아내를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으음...음!"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아내의 입술에 장인은 탕수육을 짓이겼다. 억센 손가락으로 두 입술을 열었으나, 악물린 이빨을 어쩌지 못했다.

마침내 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장인이 한번 더 아내의 뺨을 때렸다.

"아버지!"

처형이 달려들어 장인의 허리를 안았으나, 아내의 입이 벌어진 순간 장인은 탕수육을 쑤셔넣었다. 처남이 그 서슬에 팔의 힘을 빼자, 으르렁거리며 아내가 탕수육을 뱉어냈다. 짐승같은 비명이 그녀의 입에서 터졌다.

".. 비켜!"

...이를 악문 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하나씩 응시하다가, 아내는 칼을 치켜들었다.

...

아내의 손목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다.  47-51





몽고반점


지나치게 담담해, 대체 얼마나 지독한 것들이 삭혀지거나 앙금으로 가라앉고 난 뒤의 표면인가, 하는 두려움마저 느끼게 하는 시선이었다.  93


아이를 통해 연결되느 군더더기없는, 일종의 동업자의 관계가 이즈음 아내와 그의 관계였다.  99


놀라울 만큼 호기심이 없었고, 그 덕분에 어느 상황에서도 평정을 지틸 수 있는 것 같았다.  105





나무불꽃


오래전 그녀는 영혜와 함께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아홉살이었던 영혜는 말했다. 우리, 그냥 돌아가지 말자.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어싿.

그게 무슨 소리야. 금방 어두워질 텐데. 어서 길을 찾아야지. 

시간이 훌쩍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 아이들을 패주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 만은 조심스러워 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191-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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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가두면 공기가 되어버리니까. 

 난 바람이고 싶어.

 그래서 그냥 통과하게 높아두는 거야.

 가두지 않고."



어른이 된다는건, 몸만 뻣뻣하게 굳는것이 아니라 생각이 흘러가는 길까지 굳어지게 되는것.

중요한건 끝까지 유연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마음도, 생각도, 몸도...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

여행지에서 일어난 일들

여행지에서 향유하는 순간들

여행이 가져다주는 깨달음으로 

우리의 일상은 넉넉해진다.

때론 여행지에서 평소 시도하지 못했던 일들을

스스럼없이 해보기도 하며 

그 과정에서 또다른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래서 떠나면 떠날수록 내가 누구인지

더 잘 알게 되고 

길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삶이란 완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를 채워주고 잘 서 있을 수 있도록 서로 지탱해주는 것이다. 내가 힘이 있을 때는 누군가에게 나의 어깨를 빌려주고 내가 힘들때는 누군가에게 기대하고 의지하는 것. 어떠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이런 지혜를 얻기 위해 여행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말할때 우리는 길을 떠난다고 한다. 

'길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길에게' 떠나는 것이 아니라 

'길을' 떠난다고 말한다.

여행은 새로운 길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던 길을 내려놓거나 지금 가고 있던 그 길을 떠나 

잠시 안녕,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게 익숙한 그 길과

다시 돌아왔을대 변한건 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익숙한 길을 걷다 멈출 줄 아는 용기

익숙한 것들을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

그것이 여행이 길을 떠난 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사람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는 것일까.

나는 그 흘러가는 시간의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여행에는 흔적이 남는다. 

잠시 머문곳이든 매일 아침 지나던 길이든 '안녕'하고 눈 인사를 나눴던 사람이든 스쳐간 것들은 그렇게 기억되고 또 추억이 된다.



내가 가는 모든 길이, 선명하게 보여야 안심할 수 있다는 새악도 어쩌면 욕심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길이 더 평화롭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여행하는 방법은 또 달라질 것이다.

삶을 대하는 방법이 달라지듯 떠나는 방법도 달라지고

또 머무는 방법도 달라지겠지.

이렇게 변화할 수 있어서 그렇게 변하는 나를 보게 해주어서 참 고맙다.

여행이라는 친구에게.


내가 하는 일

내가 가는 곳

내가 먹는 것

내가 만나는 사람은 거의 정해져 있다.

그것을 깰 수 있는 건 

여행뿐이다.



여행은 애인처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

남루해진 마음이 쉬고 싶을 때나 삶이 푸석거리고 재미없을때 언제나 달뜬 마음으로 꿈꾸게 되는 것. 자랑하고 싶으면서도 나만의 것으로 남겨 두고 싶은 것.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시간을 보내든 그 자체로만으로도 충분한 것.

아무리 시간을 많이 보내고 머물렀던 곳을 또 지나간다해도 언제나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것.

여행은 애인처럼 친구들은 부러워하지만 엄마 아빠에게는 왠지 미안한 것.



여행은 스스로 써내려가는 옴니버스 영화의 시나리오 일지도 모른다. 

큰 세트는 일단 정해져 있고, 그 공간을 어떻게 꾸밀것인지는 나에게 달려 있다.

혼자 독백하듯 모놀로그 스타일로 이야기를 전개할 것인지, 각각의 등장인물을 적절히 넣어 흥미있는 에피소드로 풀어갈 것인지는 순전히 글을 쓰는 나의 몫이다. 길을 물어보는 짦은 에피소드에 한 명을 등장시키더라도 이야기를 풍성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면 여행이 즐거워 진다.  



'잠시 내 손에 머물다 가는 것들을 잘 놓을 줄 안다면 내가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면 인생을 여행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울 것 같다.' -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인생은 머무르지 않고 흐르는 것.

세월이 흐르듯, 삶이 흘러가듯, 시간도 흐르고 인연도 흐르는 것.

내가 할 일은 애써 잡으려고 발버둥치는게 아니라 그것들이 내게 잠시 머무는 동안 아끼고 사랑해주는 것이다.

함께 흘러갈 수 있도록 기대하며 같이 있는 동안 즐거워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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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남은 도피가 될 수 있었지만

떠나 있음은 또 다른 삶의 연속이었다.  156


기다림은 

어쩌다 저질러버린

키스의 뒷감당 같은것

아쉬움은 인색했던 사랑 고백처럼

멀어져갈 뿐.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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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견의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나역시 지독한 편견에 빠져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  80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것들이 있다.  100


피곤한데 행복하니?

행복한데 피곤하니?  172


희망도 때로는 피곤했다. 지금을 추억하자.  252


Tourist You are the Terrorist.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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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거대한 물음표였고, 나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질문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4


겨울만 되면 따뜻한 곳으로 '피한'을 떠나고 싶었다. 치안이 좋아서 혼자라도 안심하고 지낼 수 있고, 감수성을 자극할 만한 자연이나 전통이 남아 있는 곳이었으면 했다. 사철 꽅이 피는 곳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산책도 하면서 한껏 게을러지고 싶었다. 딱히 만날 사람도 없고, 꼭 사고 싶은 물건도 없고, 꼭 봐야만 하는 것도 없는 곳, 덜 쓰고, 덜 가지고, 덜 만남으로써 느긋해지고 싶었다. 여행이 주는 긴장감은 덜고, 일상이 주는 지루함은 벗어나 여행과 일상 사이에 머무를 수는 없는 걸까.  5


마치 현지인이라도 된 듯 슬렁슬렁 돌아다녔다. 매일 산책을 했고, 책도 많이 읽었고, 제법 글을 쓰기도 했다. 만날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적다 보니 나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8


여행과 일상의 중간지대에 머물며 덜 쓰고 덜 갖되 더 충만한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

자기만의 속도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좇아 떠나는 여해으, 공부하고 준비해서 떠나지만 가이드북에 의지하지 않는 여행, 여행 안에 여백을 두는 여행, 무엇보다 여행지의 삶과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여행..  9




발리


온갖 조건을 따지다 보니 여행을 시작도 하기 전에 피곤해졌다.  20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은 익숙했던 상대를 재발견하게 만든다. 내 안에 단단하게 굳어있던 상대에 대한 이미지를 녹여준다.  29


발리에서는 자식이 태어나면 이름 짓는라 고민할 필요가 없다. 태어난 순서에 따라 이름이 정해져 있으니까. 먼저 남자 이름 앞에는 I를, 여자 이름 앞에는 Ni를 붙인다. 첫째는 발리어로 와얀 혹은 뿌뚜, 둘째는 마데 혹은 까덱, 셋째는 뇨만 혹은 꼬망, 넷째는 끄뜻이 된다. 다섯 번째 후는 어떻게 하느냐고? 그때는 이름 뒤에 발릭(되돌아간다는 뜻)만 붙여 다시 돌아가면 된다. 마데 발릭, 뇨만 발릭 이런 식으로, 사실 이 뒤에 진짜 개인 이름이 하나씩 더 있는데, 이상하게도 다들 저렇게 부르고 소개를 한다.  36-37


돌아가면 입지도 못할 옷을 굳이 사 입는 이유는 뭘까. 현지인 혹은 다른 여행자들과 섞이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조금 더 과감하게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단지 편안해 보여서 일수도 있다. 어쨌든 여행지에서 옷은 나를 좀 더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수단이 되어준다.  52


여행이 우리가 품은 질문에 답을 주진 않지만 어딘가로 나아갈 수 있도록 등을 떠밀어주긴 하지. 일단 나아가면 결국 답도 찾을 수 있으리라. 아니, 평생 답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의 의미는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던져진 질문과 마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74


놀이와 노동이 분리되지 않은 삶..  97


남이 만들어놓은 것을 소비만 하는 삶에서 잠시 벗어나 스스로 창조하는 기쁨을 온전히 누린다. 

내 손으로 만든 무언가를 들고 ..

인간이 정서적으로나 지적으로 충분히 성장하기 위해서는 손을 쓰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헨리 소로가 그랬다. 소박한 삶의 기본 원치기 가운데 하나는 불필요한 것들을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버는 대신, 꼭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조금 버는 대신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 쓰는 일상을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핸드메이드 라이프를 산다는 것은 시간의 주인으로 사는 일의 은유 같기도 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온전히 몰입해본 사람은 안다. 그때 흘러가는 시간의 속도가 얼마나 다른지를.  98


마사지는 자신의 좋은 기운을 상대에게 나눠주는 행위라는 것.  103


자연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들일수록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세탁기, 청소기, 전기밥솥 등등 시간을 벌어주는 온갖 기계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늘 부족하기만 하다. 

생각해보면 시간이란 얼마나 다양한 속도를 가지고 잇는 것인지!  112


발리인들은 보기보다 영리하고 강인하다. 며칠 전 이브의 남동생이 이런 말을 했다. "너희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면 여행 가는 데 쓰지? 우리는 돈만 생기면 종교의식에 다 써. 그래서 어떤 외국인들은 우리를 비웃지. 하지만 이런 걸 하지 않으면 외국인들이 발리에 오겠어? 발리가 다른 나라와 똑같아지면 누가 여기에 오려고 하겠어?"

외국인이 무엇 때문에 발리를 사랑하는지 이곳 사람들은 잘 안다. 그래서 대대로 지켜온 무화를 외국인에게 비싸게 팔아먹는다. 이들은 우붓 중심가에 들어오려던 맥도널드 매장을 막아낸 경험도 있다. 발리에 개발 바람이 불던 1970년대, 발리 사람들이 정부에 요구했다. 야자 나무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도록, 모든 건물은 전통 가옥의 구조를 따르도록 법을 만들어달라고. '5층 이하'라거나 '지상 20미터' 따위가 아닌 '야자나무보다 낮게'라니. 거기 깃든 시적인 마음과 유연함이 사랑스럽다. 그래서 발리에는 3층 이상의 건물이 거의 없어 어디서나 논과 야자나무가 보이고 숲과 계곡이 몸을 드러낸다.

개발과 성장을 추구하다 전통적인 가치를 잃어버린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발리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플란플란'하게 흘러가는 삶의 속도 속에서 지킬 것은 지키는 의연함이 엿보이니. 한마디로 발리는 자연을 파괴하며 돈에 영혼을 판 그런 흔한 휴양지가 아니다. 농지 정리라며 계단식 논을 싹 밀어버리고, 주택 현대화라며 초가집을 죄다 없애고, 무조건 개발만을 외치며 살아온 나라에서 온 나는 발리 사람들이 부럽기만 한다.  113-116





스리랑카


낯선 나라를 여행하다 우리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장면과 마주친다. 내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내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런 순간에 단정적으로 평가하고 불평하는 것은 쉽지만 왜, 어째서라는 질문을 던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감수해야 지금 여기에서 유럽에는 없고 스리랑카에만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좋은 여행자의 기본은 질문하는 능력과 겸허한 태도라는 사실도.  154


그날의 기분에 따라 차와 찻잔을 골라 물을 끓이고, 찻잎을 넣고,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시간. 그 아무것도 아닌 일에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이 나는 좋다. 그렇게 차를 우리다 보면 내가 세상의 속도와는 상관없이 살고 있다는 기분까지 든다.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차우리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162


폐허에 관한 근사한 글을 쓴 영국의 자각 제프 다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무언가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은 그냥 바라보는 것,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뿐이었다."  222





치앙마이


내 몸에 마지막 도시의 바람 냄새가 남아 있고  253


일상처럼 여행에도 지루한 순간, 쓸쓸한 순간이 찾아온다. 그런 순간에 책은 나를 구원한다. ..

생각해보면 여행과 책은 서로 닮아 있다. 질문을 던짐으로써 일상과 그 일상을 둘러싼 세계에 균열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그렇게 가장 온순한 방법으로 자신이 쌓아온 세계를 부수고 더 넓은 세계를 열어 준다는 점에서.  254





라오스


'좋은 여행이란 무엇일까.' '나는 좋은 여행자인가.' 이런 질문에 천착해왔지만 내가 좋은 여행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375-377


한 도시도 생명을 가진 유기체와 같다. 생겨나고, 번성하고, 쇠락하기도 한다. 나는 변해가는 어떤 장소의 짧은 순간을 함께할 뿐이다. 여행지가 보여주는 찰나의 얼굴. 그 얼굴이 때로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민낯이라 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처럼 그렇게 바라보고 싶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까지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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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와 섹스는 간헐적이나 결혼은 생활이다.'  9


결혼생활학교 수업은 1년 과정에 384시간으로 되어 있었다. 1년 동안 토요일 일요일에 각각 3시간 5시간씩 수업을 받게 되어 있었는데, 1월 초의 등록기간과 명절, 여름휴가철 혹은 개인적 일로 꼭 쉬고 싶은 한 주 정도를 빼면 48주 동안 주말과 휴일마다 꼬박 출석해야 했다. 이것은 어느 학교나 마찬가지였다.

속성반은 없었다. 한꺼번에 몰아서 채우든 어쨌든 384시간만 채우면 되는 게 아니라, 48주에 걸쳐 384시간을 채우도록 정해져 있었다. 1년 과정을 이수하는 동안 발생하기 마련인 심리적 변화에 주목한 제도였다.

결혼생활학교 384시간 강좌를 이수해야 결혼면허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고, 결혼면허증이 있어야 결혼할 수 있다...결혼면허시험. 필기와 실기로 나누어 진행되는 시험에서 각각 70점 이상을 획득하면 결혼면허증이 주어졌다. 시험에 떨어지면 6개월 안에 한 번 더 응시할 수 있으나. 두 번째도 떨어지면 6개월 과정의 보충교육을 받아야 했다. 

보충교육 이수 후 다시 두 번 응시할 수 있으며, 그래도 떨어지면 다시 6개월의 보충교육을 받아야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14-15


결혼을 기준으로 인생을 설계하는것은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사랑과 결혼은 인생의 여러 항목 속에 있는 것이지, 사랑과 결혼을 위해 인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35


행복세. 부부의 1년 수입중 10%에 해당하는 금액.

행복세 정산의 기준은 결혼 11년차에게 부부의 1년 총 수입의 10%, 결혼 21년차에게 전재산의 1%엿다. 10년에 한 번 납부하는 행복세를 내는 것도 아깝다면 그것을 어떻게 행복한 가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행복하지 않은 가정이라면 이혼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55


늦가을에 파종해 겨울을 나고 봄에 거두는 시금치는 비닐하우스에서 화학비료와 난방기를 이용해 속성으로 키운 시금치보다 영양분이 30배 가까이 더 들어 있다고 했다. 한 달 만에 속성으로 키워 수확하는 상추가 아니라 밭에서 두 달 이상을 보내고 조금씩 따먹는 상추는 특유의 향과 맛이 진하다고 했다. 원예 강사는 무 하나 토마토 하나를 키워서 먹더라도 가족끼리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족끼리 사랑한다고 볼을 비벼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과정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자신의 아내와 남편,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더 많은 자부심을 느낀다는 말이었다.  65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고, 이심이체입니다. 아니, 이심이체여야 합니다. 부부가 일심동체여야 한다고 생각에 갇혀 있는 한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아야 하고, 아내가 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78


부부는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결혼과 동시에 지옥을 구경하게 될 것입니다. 너무 가까워지려고 하지 마세요. 익숙함은 경멸을 낳고 낯섦은 매혹을 더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79


남자분들, 아내나 연인이 억지를 부리는 이유를 아십니까?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것은 억지를 부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자기 말이 억지라는 걸 본인도 압니다. 말하자면 여자는 지금, 말도 안 되는 내 질문에 답해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외록고 우울하고 힘드니까 위로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131


환상 너머의 칙칙한 생활에 대해 충분히 대비함으로써, 환상을 현실화하라는 것입니다. 충분히 대비할 능력이나 마음이 없다면 결혼하지 마십시오. 결혼 안 해도 안 죽습니다. 오히려 더 즐겁고 의미 있게 살 수도 있습니다.  136


부부간에는 사랑보다 우정이 있어야 합니다. 평생 친구 같은 아내와 남편이 아주 이상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관계가 되자면 부부관계는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야 합니다...

속물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부부관계만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야 하는 사업도 없습니다. 꼭 경제적인 부분만을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사람의 생존조건 자체가 속물적입니다. 사람은 한끼 굶으면 배가 고프고, 하루를 굶으면 온몸에서 힘이 쏙 빠집니다. 사흘을 굶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도둑질이나 구걸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습니다. 그걸 부정한다고 달라질 건 없습니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이해관계 속에 있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집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고상하거나 취미가 서로 전혀 다르거나, 세계관이 다를 때는 양쪽 모두 힘이 많이 듭니다.

가장 좋은 상재는 나와 비슷한 사람입니다. 음악 하나를 두고도 사람마다 인식이 다릅니다. 아내 입장에서는 청소하다가 스피커 위치를 조금 바꿨을 뿐인데, 또 반대로 내 음악세계를 지켜달라는 남편의 호소를 아내는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딴죽 건다고 받아들입니다.

사람은 흔히 자신과 다른 성향의 이성에 끌린다고 합니다. 소심한 사람은 대범한 상대에게 끌리고, 덤벙대는 사람은 꼼꼼한 사람에게 끌린다는 거죠.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단순한 끌림일 뿐입니다. 이런 끌림만으로 평화로운 결혼생활을 지속하기는 어렵습니다. 끌림은 순간이지만 생활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137-138


나와 비슷한 사람을 어떻게 찾느냐? 복잡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내 친구들을 보면 됩니다. 유유상종이라고 했습니다. 부담 없이 오래 만나는 내 친구들은 나와 이념이나 성향, 세계관, 삶의 수준, 취향이 비슷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배우자 역시 그런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다만 결혼상대를 고를 때와 친구를 사귈 때 다르게 고려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한 집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밖에서는 좋은 친구가 집에서는 전혀 뜻밖으로 안 맞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내 친구드로가 비슷한 사람을 찾되, 집안 환경도 나와 비슷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경제력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내가 양쪽 부모가 모두 계시는 집안에서 자랐다면, 상대 역시 양쪽 부모가 다 있는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 더 적합합니다. 내가 한쪽 부모 아래에서 자랐다면 나의 배우자도 한쪽 부모 아래에서 자란 사람이 좋습니다. 아버지 없이 자랐다면 상대도 아버지 없이 자란 살마이 좋습니다. 내가 스무살 넘어서 부모가 돌아가신 경우에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만...

사람은 학교나 책에서만 배우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역할과 어머니의 역할을 배우고, 자신도 모르게 그런 것에 대한 기대치를 갖기 마련입니다. 결혼생활 중에 이 암묵적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불만이 쌓이게 됩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뭐 한 가지를 잘못해도 아버지 없이 자랐으니 저 모양이다, 엄마 없이 자랐으니 저렇다, 우리 엄마는 안 그랬는데 저 사람은 엄마가 없었으니 엄마 노릇을 못 하는구나, 하는 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양쪽 부모가 다 있으면 좋겠지요. 하지만 그런 문제 때문에 서로의 역할관계가 깨질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무론 부모 없이 자랐더라도 자신의 노력 여하게 따라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오랜 세월 몸이 습관처럼 체화했어야 할 것들을 머리로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머리로 생가하고 행하면 어색하고, 왠지 생객내는 것처럼 비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요. 이런 건 어느 쪽이 맞다 틀리다의 문제가 아니라, 자란 환경이 달라서 생기는 생활문화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9-140


상식적이라는 말, 상식선에서 해결하자는 말은 때때로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147


좋은 남편, 좋은 아내는 내게 맞는 사람입니다. 나와 똑같은 부류의 사람이 나와 맞는 좋은 배우자인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내가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알아야 합니다.  148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면 그 사람을 얻기 위해 나를 속이고 상대를 파악하려고 합니다. 상대에게 맞추려고 합니다. 이거야말로 욕심 때문에 사지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소간 맞춰가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루이틀도 아니고 상대에게 억지로 맞춰가며 평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결혼하면 달라지겠지,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상대에게 억지로 맞추다보면 많은 것을, 어쩌면 타고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나를 아고, 내게 맞는 상대를 찾는 것이 가장 신뢰할 만한 방법입니다.  149


'사람은 끼니마다 배를 채워야 하지만, 식다에서 살지는 않는다.' 늘 식당에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과 가끔 식당에 들렀다 떠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비좁은 공간에서 평화로운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다.

"결혼을 생각하고 남자를 만날 때는 이 사람이 식당에 머물 사람인지, 배만 채우면 금방 일어날 사람인지를 아는 게 중요해."

"가슴이 쿤 내려 앉는 사람이 아니고?"

성애와 인선이 동시에 물었고, 희주는 "놀고들 있네"라고 했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 남자는 연애할 남자고, 결혼할 남자는 함께 밥을 먹을 남자라고 했다.

가슴이 쿵 내려앉을 만큼 매력적이면서도 지겨워하지 않고 밥을 함께 먹어줄 수 있는 남자는 없는 것일까. 꼭 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인생이 너무 측은하다 싶었다.  152


많은 사람들이 결혼하는 이유를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장담하건대 지금까지 없던 행복이 결혼한다고 생겨나지는 않습니다.  177


결혼하기 전에 이미 행복한 사람만이 결혼한 뒤에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기 홀로일 때도 행복했던 사람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는 것이지, 홀로일 때 불행했던 살마이 결혼한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178


가족들을 충분히 사랑하고 배려하십시오. 그리고 희생하십시오. 그러나 집착하지는 마십시오. 가족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183


털털하고 너그럽던 남자가 좀팽이가 되고, 성질을 부리고,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은 대체로 자신이 무기력한 사람이라고 느낄 때입니다.  192


세계적인 문명사학자 윌 듀런트 박사는 '여자가 가정이란 것을 만들고 남자를 자신의 가축으로 길들여 집안에 들이고, 사회성과 예의를 훈련시켰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애초에 가정이나 일부일처제도는 여성이 고안해낸 제도일 뿐 남성과 여성의, 그러니까 인간의 속성과는 거리가 먼 제도라는 말입니다. 안정적이고 행복하다는 가정은 남편이 가축처럼 일하는 데 만족하고, 아내가 집안 전체를 통솔하는 형태인 경우가 많습니다. 남편=가축, 아내=주인인 구조가 흔들릴 때 가정은 불안정하거나 깨지기 일쑵니다. 그 구조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현실입니다.

여성이 일부일처제를 원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여러 가지 원인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남자에게 2세가 친자라는 확신을 주어 충분한 보호와 식량을 얻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227


남자는 기본적으로 한 여자와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한 여자와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혼은 그 자체로 앞으로 평생 거짓말과 거짓행도을 하겠노라는 일종의 약속이라고 했다.  229


여러분이 우리 ML결혼생활학교 1년 과정 동안 저한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씀이 바로 '나와 맞는 배우자를 만나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 좋은 배우자는 아니라는 말씀도 여러 차례 드렸습니다.  300


늘 강조하는 바이지만, 결혼을 한다고 없던 행복이 생기지 않습니다. 먼저 혼자서도 당당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라, 이심이체여야 합니다.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둘이 만나 둘이 되는 것입니다.  305




작가의 말

나는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불행의 근원이 되어버린 '부부라는 관계'에 대해 쓰고 싶었습니다.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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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권리 장전 


양심과 사상의 자유라는 인간 기본권의 밑바닥에는 책을 읽을 자유와 권리가 깔려 있다. 독서할 권리, 그것은 양도할 수 없고 박탈할 수도 없는 신성불가침한 인간의 기본권이다.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고 억압하는 독재정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유로운 독서의 권리를 박탈해왔다. 학교와 가정은 그런 독재정권의 하수인이 되어 자유로운 책 읽기를 방해하고 특정의 책 읽기를 강요해왔다. 이에 신성불가침한 독자의 권리를 천명하는 독자 권리 장전을 선포함으로써 독자의 권리에 대한 일체의 간섭과 규제를 배제하고자 한다.


1. 책을 읽을 권리

인간은 나이, 성별, 종교, 국적에 관계없이 읽고 싶은 책을 마음놓고 읽을 권리를 갖는다. 누구에게나 글을 배우고 책을 읽을 권리, 언제 어디에서라도 책을 읽을 권리가 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교육기관과 사회단체 들은 공공도서관을 만들어 누구라도 원하는 책을 읽을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2.책을 읽지 않을 권리

모든 독자는 아무리 강요해도 읽고 싶지 않으면 읽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 책을 읽으면 삶이 바르고 풍부해진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그러나 봉인이 원하지 않을 때 강요해서 책을 읽게 할 수는 없다. 그건 성인만이 아니라 어린이나 청소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떤 교육적 목적을 제시하더라도 강요와 강압이 있어서는 안된다. 다만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바탕으로 특정의 책을 읽으라는 권유는 허용할 수 있다.


3. 어디에서라도 책을 읽을 권리

모든 독자는 책을 읽을 마음이 생기면 집 안팎 어디엣라도 책을 읽을 권리를 갖는다. 서재나 도서관의 책상 앞만이 아니라 침대, 식탁, 거실, 복도, 화장실, 공원, 수영장, 운동장, 음식점, 길거리, 기차, 비행기, 배, 버스, 지하철, 교도소, 병원, 내무반 등 어디라도 독서의 장소로 허락되어야 한다.


4. 언제라도 책을 읽을 수 있는 권리

누구라도 독자가 책을 읽는 시간을 제한할 수 없다. 새벽, 아침, 낮, 저녁, 밤, 늦은 밤 언제라도 책을 읽을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학교 기숙사, 교도소 감방, 군대 내무반, 병원 병실 등의 경우 소등 시간은 지켜져야 하지만, 기관의 질서를 심각하게 훼손하지 않는다면 책을 읽을 수 있는 장소를 따로 마련해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5. 책을 중간중간 건너뛰며 읽을 권리

모든 독자는 책이 지루하면 중간중간 읽지 않고 넘어갈 권리를 갖는다. 누구라도 독자에게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다 읽으라고 강요할 수 없다. 저자가 쓰고 싶은 것을 자기 방식대로 쓸 권리를 갖듯이 독자는 읽고 싶은 것을 자기 방식대로 읽을 권리를 갖는다. 지루한 책을 무턱대로 차례대로 다 읽으라고 강요할 권리는 교사와 부모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는다.


6.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모든 독자는 책을 끝까지 읽지 않고 중도에 덮어버릴 권리를 갖는다. 재미없는 책을 끝까지 읽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정신적 고문에 해당한다. 세상의 모든 고문이 즉시 사라져야 한다면 중도에 읽고 싶지 않게 된 책을 끝까지 읽으라는 강요도 절대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7. 다시 읽을 권리

모든 독자는 한번 읽은 책을 마음이 내키면 다시 읽을 권리르 갖는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은 인간 본연의 특성이다. 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처음 읽었을 때 재미있었거나 무언가 마음에 남긴 것이 있어서 다시 읽고 싶은 책이 있다. 그런 책은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되풀이해서 읽을 권리가 있다.


8.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모든 독자는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이라면 무엇이든 다 읽을 권리를 갖는다. 사랑의 대상이나 결혼 상대를 본인이 선정해야 하듯이 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본인의 동의 없는 강제결혼이나 강요된 중매결혼이 인권침해이듯이 어떤 책을 읽으라고 강요도 인권침해에 해당된다. 어떤 책을 나쁜 책이라고 규정하여 타인으로 하여금 못 읽게 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은 없다. 세상에 좋은 책과 나쁜 책을 가를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그 판단은 성인 각자에게 맡겨야 한다.


9. 많은 사람이 읽는 책을 읽지 않을 권리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 필독서가 되어서 많은 살마이 읽는 책을 꼭 읽을 필요는 없다. 누구라도 그런 책을 읽지 않았다고 무시당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유행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관심에 따라 스스로 원하는 다양한 책을 골라 읽을 수 있도록 장려하는 분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


10. 책에 대한 검열에 저항할 권리

누구라도, 어떤 이유에서라도 어떤 책이 위험하다거나 불온하다는 이유로 책을 감추거나 훼손하거나 폐기해서는 절대 안 된다. 세상의 독자들은 국가권력이나 학교체제 또는 부모들이 책을 검열하고 압수하고 폐기처분하는 일에 분연히 저항할 정당한 권리를 갖는다.


11. 책의 즐거움에 탐닉할 권리

모든 독자는 책이 주는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에 중독될 권리를 갖는다. 책에 탐닉하거나 중독되는 일을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과 같은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책 읽기는 인간의 행위 가운데 가장 높은 문명의 단계이다. 그러므로 책 중독은 그 자체로 최대한 권장되어야 할 중독이다. 그로 인해 학업이나 사업상의 문제가 발생 한다 해도 그 권리는 절대 억압할 수 없다.  


12. 책의 아무 곳이나 펼쳐 읽을 권리

모든 독자는 책을 처음부터 읽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 책을 꼭 처음부터 읽으라고 강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독자는 책을 아무데나 펴서 읽다가 처음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도중에 그만둘 수도 있다. 책 중간의 삽화나 사진에 관심이 간다면 그것만 보고 책을 덮을 권리도 주어진다.


13. 반짝 독서를 할 권리

모든 독자는 단 몇 분간이라도 책의 어느 구절을 군데군데 읽을 권리를 갖는다. 책은 집과 같다. 집을 살 때는 예외지만 어느 집을 방문할 때 그 집을 속속들이 다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없을 때는 더욱 그렇다. 포도밭에 들어가 마음 가는 대로 손 가는 대로 포도알을 따먹듯이, 모든 독자에게는 우연히 책을 펼쳤을 때 눈에 들어오는 구절만 읽을 권리가 있다.


14. 소리내서 읽을 권리

모든 독자는 원할 때면 언제나 책을 낭독할 권리를 갖는다. 오늘날 소음은 공해의 하나다. 그러나 책 읽는 소리를 자동차 엔진 소리와 동이랗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초등학교 저학년만이 아니라 대학생이나 최고 수준의 학자라도 때로 소리내서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그럴 권리를 최대한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다만 타인의 조용히 있을 권리와 충돌할 경우에는 상황에 따라 조정될 필요가 있다.


15. 다른 일을 하면서 책을 읽을 권리

모든 독자는 독서와 다른 일을 동시에 할 권리를 갖느다. 모든 독자는 독서에만 몰두할 권리를 갖듯이 다른 일과 동시에 독서할 권리도 누린다. 방에 CD플레이어를 틀어놓거나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볼 권리는 물론, 집이나 식당에서 혼자 식사할 경우 식탁 한편에 책을 펴놓고 읽을 권리가 있다. 길을 걸어가면서 책을 읽는 것도 허용되지만 그럴 경우 독자는 충돌사고에 주의할 의무가 있다.


16. 읽은 책에 대해 말하지 않을 권리

모든 독자는 자기가 읽은 책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 모든 인간은 자기 의견을 말할 권리와 더불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 묵비권은 독후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고 난 소감을 말하라고 강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글로 쓰는 독후감은 말할 것도 없고 말로 하는 독후감의 경우에도 묵비권은 최대한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17. 책을 쓸 권리

모든 독자는 어떤 내용 어떤 형식으로라도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글로 써 책으로 펴낼 권리를 누리나. 어느 누구도 어떤 이유에서라도 책을 쓸 권리를 막을 수 없다. 가족과 학교,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누구라도 책을 읽고 쓸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들이 쓴 책을 출판하도록 적극 도와야 한다.


==> 위의 독자 권리 장전은 앞으로 모든 독자의 의견을 고려하고 충분히 토론한 후에 확정되어야 할 시안으로서 프랑스 작가 다니엘 페낙이 <소설처럼>에서 초안한 '독자의 절대적 권리 선언'을 보완한 내용입니다.  9-17




읽지 않고 놓아둔 한 권의 책은 종이 뭉치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을 펴들고 읽는 순간 책은 살아 움직이며 읽는 이에게 말을 건넨다. 그러므로 양서예찬은 곧 독서예찬이 된다. 책 읽기의 즐거움에 대한 예찬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다.  19


송나라의 문인 장횡거는 "책은 이 마음을 지켜준다. 잠시라도 그것을 놓으면 그만큼 덕성이 풀어진다"며 독서를 예찬했고 14세기 일본의 선승 요시다 겐코는 "혼자 등불 아래에서 책을 읽으면서, 내가 전혀 모르는 옛날 사람들을 벗삼는 일이야말로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다"라고 독서의 즐거움을 고백했다. 벼슬자리를 마다하고 낙향한 퇴계 이황은 새벽에 일어나 향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 하루종일 책을 읽는 일로 인생의 후반기를 보냈다. 보길도에서 귀양살이하던 윤선도가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을 자신의 다섯 친구라고 노래했지만, 정작 사랑방에 홀로 앉아 책을 읽을 때는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책뿐인가 하노라"라고 읊었을 것이다.  20



책은 생각의 집이다. 우리는 집을 짓듯이 '책을 짓는다'라고 말한다. 책을 쓴 사람을 지은이라고 말한다. 책은 지은이가 생각으로 지은, 생각이 사는 집이다.  46


시간이 없어서 독서를 못하는 게 아니라 책 읽는 습관이 몸에 붙어 있지 않기 때문에 책을 읽지 않는 것이다. 독서하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은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독서할 시간을 만들어낸다.  64


책을 읽으려면 시간의 여유에 앞서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퇴계 이황은 벼슬길에서 빠져나와 은거하며 서재의 벽에 "번거로움에서 벗어나는 데는 고요함만한 것이 없고, 졸렬함을 벗어나는 데는 부지런함만한 것이 없다"는 구절을 써붙이고 끊임없는 독서에 매진 했다.

책을 읽으려면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고요한 마음을 마련해야 한다.  65


너무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잘 생각하고 잘 말하고 잘 쓰기 위해서는 평소에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특정 주제에 대한 수많은 사실을 모아 질서 있게 배열하면서 조리 있고 정연한 논리를 전개하는 책을 읽다보면 저절로 논리적 사고력이 생기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시나 아름다운 문장으로 쓰인 소설을 읽다보면 저절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하기와 글쓰기를 배우게 된다. 

그러나 그건 독서를 하다보면 부차적으로 얻게 되는 결과물이지 결코 독서의 목표가 될 수 없다. 독서의 중요성은 그런 실용적 목적을 넘어서, 세상을 넓고 깊게 보고 자신의 삶을 고귀하고 의미 있게 만드는 방법을 터득하는 데 있다.  74-75


독서가 주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나이들면서 할 일이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88




한 사람의 서재에 진열된 책들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 니콜 라피에르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타인의 눈을 피해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157


도서관은 미술과, 박물관과 더불어 범속한 일상사와 이해갈등으로 점철된 먼지 나고 시끄러운 현실 세계로부터 떨어져나와 다른 세계로 날아갈 수 있는 자기 완결적 공간이다. 읽고 싶은 좋은 책으로 가득찬 도서관은 언제나 벅찬 기대와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갈 수 있는 열락의 공간이다.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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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 인생의 기록 


독서 환경에 관해서라면 나는 삼면이 책으로 둘러싸인, 사시사철 넉넉한 읽을거리들이 쏟아지는 천혜의 환경에서 살고 있다. 단언컨대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없다.

집은 거실 한 면이 모두 책장이고, 방 한 칸은 도서관처럼 방을 가로지르며 책장들이 있다. 침대는 옆에 책을 둘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한 것이다.  15


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때의 나는 기억난다.  18


나는 셰익스피어를 읽었다, 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셰익스피어에 대해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읽었다는 사실만 기억한다. 그건 읽은 것일까?  32


모든 독서는 기본적으로 오독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오독의 순간도 나에겐 소중할 수밖에 없다. 그 순간 그 책은 나와 교감했다는 이야기니까. 그 순간 그 책은 나만의 책이 되었다는 이야기니까. 그때 나를 성장시켰든, 나를 위로했든,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든, 그 책의 임무는 그때 끝난 거다.  40


내가 이해할 수 없어도, 내가 껴안을 순 없어도, 각자에겐 각자의 삶이 있는 법이다.  51


'일어날 객관적 사태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은 단지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나의 주관적 태도일 뿐입니다. 나는 다만 내가 어쩔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나 자신의 주관적 태도를 고상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58-59


보고 싶은 책보다는 봐야만 하는 서류 더미에 더 많이 할애된 일상, 좋아하는 사람과의 친밀한 소통보다는 의무적으로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 더 많이 소모되는 일상, 갓 갈아낸 자몽주스보다는 믹스커피에 더 친숙함을 느끼는 것이 어쨌거나 일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상을 살아가야만 한다.  72


나는 다른 일상을 꿈꾼다.

여행이 일상이 되는 것을 꿈꾼다. 아침 바게트가 일상이 되고, 노천 카페가 일상이 되고, 밤새워 쓰는 글이, 퐁피두 센터가, 세비야의 햇살이, 라인강변을 따라 달리는 기차가, 렘브란트의 그림이, 고흐의 그림이 일상이 되는 것을 꿈꾼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모든 하루가 내 손에 고스란히 달려 있으며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생활이 일상이 되길 꿈꾼다. 파리가 일상이 되길 꿈꾼다. 

그러나 나의 일상은, 지금, 이곳에, 있다.  73


이곳에서, 지금,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그곳에서도, 그때,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매일 먹는 바게트가 지겨울 테고, 대화할 상대가 없는 일상의 외로움에 몸서리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그땐 그것이 또, 일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의 의무는, 지금, 이곳이다.  75


때론 책이 우리를 구원한다. 책은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책으로 구원받는다. 드물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곤 한다. 귀하게도. 고맙게도.  75


시지프(카뮈의 <시지프신화>)도 자신의 일상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살았다..  87


산다는 건 어쩔 수 없이 선택의 연속이다. 하나를 선택할 수박에 없기 때문에 결국 모든 선택에는 '만약'이 남는다. ..하지만 '만약'은 어디까지나 '만약'이다. 가보지 않았기에 알지 못하고, 선택하지 않았기에 미련만 가득한 단어이다. 그 모든 '만약'에 대한 답은 하나뿐이다. '나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라는 답.  91





듣다 : 감정의 기록


여행은 감각을 왜곡한다. 귀뿐만 아니라 눈과 입과 모든 감각을 왜곡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꺼이 그 왜곡에 열광한다. 그 왜곡을 찾아 더 새로운 곳으로, 누구도 못 가본 곳으로, 나만 알고 싶은 곳으로 끊임없이 떠난다.  130





배우다 : 몸의 기록


결국은 머리의 말을 몸이 알아들은 거니까. 계속하는 거다. 묵묵히. 계속 가보는 거다.  220





쓰다 : 언어의 기록


나는 읽고서 쓰고, 보고서 쓰고, 듣고서 쓰고, 경험하고서 쓴다.  259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시오. 내가 그 사람을 짝사랑한다는 사실을 아는 친구가 그 편지를 본다면 연애편지로 읽히고,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친구에게 보내는 일상적인 편지처럼 읽히도록 쓰시오.'  269


잘 쓰기 위해서는 좋은 토양을 가꿔야지, 라는 핑계로 수없이 읽고, 듣고, 돌아다녔다. 11년을 그랬다. 그 핑계 덕분에 삶은 더없이 풍성해졌다. 누군가 물은 적이 있다. 지금 그 책을 읽는 게 진짜 카피라이팅에 도움이 되냐고, 어떻게 도움이 되냐고, 나는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나는 그 모든 것을 잘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책과 음악이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경우는 드물었고, 그래서 더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소설책이 지금 내가 맡은 슈퍼마켓 광고에 도대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작년에 다녀온 그 여행이, 그 여행에서 또 작뜩 찍어온 벽 사진들이, 그때 마신 술들이, 석유회사 광고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리가 없다. 도움이 된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닥 말한다면 그 역시 거짓말이다. 토양이 비옥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막연하게, 듬성듬성, 이런저런 방법으로 토양을 가꾸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 어떤 필요의 씨앗이 뿌려지면 그 토양에서 건강한 새싹이 자라길 빌 뿐이다.  276-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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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외국의 낯선 도시를 홀로 걸어본 적 있나요?

종종 모든 것에서 벗어나 

낯선 도시 안에 갇히길 소망합니다. 

나에게 낯선 도시는 만남인 동시에 헤어짐이고, 

피난처인 동시에 탈출구입니다.

때로는 캄캄한 밀실이었다가 눈부신 광장이고, 

눈물인 동시에 환희입니다. 

낯선 언어를 듣고 낯선 공기를 마시며

홀로 걸을 때 가만히 당신들을 생각합니다.

결국,

돌이켜보면 그 낯선 도시에서

나는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식당 주인과 이야기를 하던 남자가 어느새 나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거야? 아님 타투가 하고 싶은 거야?"

남자가 나에게 반말로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우리 만난 적 있나요?'라고 물을 뻔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어깨에 있는 레터링 말이에요."

"데스 쉘 해브 노 도미니언. 무슨 뜻인지 알아?"

"죽음은 우릴 지배하지 못하지. 아니에요?"

"맞아. 스무 살에 처음으로 했던 타투야."

"멋있네요. 근데 왜 자꾸 나한테 반말해요?"

...

And death shall have no dominion. 죽음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이 문장은 진저색 헤어 애인이 가장 사랑하던 딜런 토머스의 시구였다.  21


정말 우리의 이 인생에 정답이 있기나 할까요?

뫼비우스의 띠처럼 모든 생각은 끝없이 또다른 생각으로 이어지고, 다시 처음의 생각으로 돌아와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해지고 말지요.  38


글을 쓰기 위해 여행을 한다는 건 사실 핑계였다. 나는 이제껏 많은 나라와 도시를 떠돌았지만, 한 줄도 쓰지 못했다.  45


낯선 나라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건 자신도 모르게 평생 각인되어 버리는 일이라 신중해야만 한다.  55


너는 나의 자유가 부럽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뭔가를 쓴다는 핑계로 온종일 좁은 방 천장을 보고 누워 너를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네가 말한 '나의 자유'는 정말 나에게도 자유였을까. 나는, 그저 너의 그 바쁜 하루가 부러웠다.  64


누르는 순간 그것은 흘러가는 과거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친절한 카메라의 셔터음.  67


생각 없이 살다가 참외 껍질처럼 영야가 없는 남자를 만나고 염소똥 같은 얘기를 하다가 오슬오슬 추워져 서로를 껴안는 일 따위 역시 나쁘지 않다.  100


사랑은 텅 빈 상자와 같았다. 조심조심 공을 들여 포장을 뜯어보면 그 속은 늘 텅 비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에 또 한번 속느니, 차라리 내가 사랑을 글로 지어내는 게 확실하겠다.  113


몇 시간째 강물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결국 강물이 내게 답을 주었다. 강물을 깊이 들여다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 자신을 너무 들여다보지 말 것. 그러니까 나는 그 동안 나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봤던 것이다.  115


남들과 다르지 않게 살 거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은 편안해졌다. 생각은 생각을 낳는다. 이제 나는 거두기 힘들 정도로 많은 생각을 낳지는 않을 거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들은 지금처럼 끈질기게 내 발목 아래에서 질척일 테니.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메인 로드로 향했다. 그래, 바람에 몸을 맡기고 말없이 흐르는 저 강물처럼 살자.  116


흘러가는 대로 흐르지 말아야겠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밤새 뒤척였다. 그렇게 다시 무서운 밤이 찾아왔다.  117



모아놓은 돈도 없는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글만 쓰는 일이 가능할까?  124



처음 만난 우리는 모든 얘기를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아무런 얘기도 할 수 없는 사이였다. 

함께 있을 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135-136


그날.. 푸근하디 푸근한 일상을 닮은 여행을 했다.  157


눈으로만 익혔던 서로의 입술  158


활주로를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는 비행기처럼 남자가 부드럽게 몸을 움직였다. 그러다 점점 빠르게 움직였고 나도 자연스레 남자의 움직임에 조금씩 몸을 맞췄다. 껴안은 남자의 등이 땀으로 조금씩 젖어왔고 움직임은 더욱 강해지고 빨라졌다. 나 역시 거친 숨소리를 뱉다가 형체 없는 언어를 쏟아냈다. 나와 남자의 알 수 없는 언어가 뒤섞이다가 모든 움직임이 끝났을때, 나는 그 느낌이 정말 비행기가 이륙할 때의 느낌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사랑이, 여행이 '시작돼버렸음을 아는 기분'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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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누구나 시간, 돈, 청춘, 열정, 건강 등 많은 것들을 하루하루 잃어가고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어떻게 아낄 수 있는지를 고민할 수 있고,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 수 있다.  4


이제 사라지는 것들에 미련을 두지 않을 생각이다.  6






난 고작 몇 센티미터의 세포덩어리도 이겨내지 못 하는 나약한 인간일 뿐인데, 내가 세상의 정답이라도 되는 것처럼 스스로 판단하고 건방지게 행동했었다. 더 낮아져야겠다고 다짐했다.  32


결혼을 하면 건강은 의무라는 말을 들었다..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단순히 같이 생활한다는 것을 뛰어넘어, 나의 삶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삶까지도 책임을 지겠다는 무언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가족의 삶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38


어느 장소에서 어떤 일을 하든 노동을 하는 것은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일에 치여 지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단 하루만이라도 나처럼 쉬고 싶어 할 것이라 생각하니 나를 처량하다 여겼던 마음이 미안해졌다. 누군가에게는 절실하게 그리운 노동이 어떤이에게는 단 하루만이라도 벗고 싶은 짐이 될 수도 있는것이었다. 

모든 것에는 이중적인 단면이 존재한다.  47


"나는 <Ruby Tuesday> 노랫말처럼 살고 싶어. 가사 중에 '아무것도 얻을 게 없고 잃을 게 없는 세상에 얽매일 수 없어. 허비할 시간이 없어. 꿈이 사라지기 전에 잡아. 항상 죽어 가는데 꿈마저 잃어버리면 미쳐버리게 될 거야' 이런 말이 있어. 나도 내가 원하는 꿈을 향해 나아가는 살을 살고 싶어. 꼭 집을 떠나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살겟다는게 아니야. 남드이 하니까 똑같이 따라서 적당한 집을 사고 적당한 회사를 다니며 살고 싶지는 않다는 거야. 여행을 가고 싶으면 가고 일을 하고, 일을 하고 싶으면 하고, 집을 만들고 싶으면 만들고, 내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있다면 그걸 하며 살고 싶어."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무라카미 류같이 살고 싶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어. 그리고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있으면 좀 힘들어도 가볼 거야. 갔는데 끝에 절벽만 남아있다면 그냥 돌아오면 되니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사람들은 철이 없다고 하더라. 그런 모험은 아주 어릴 때나 꾸는 꿈이라고, 안전한 길로 나아가도 세상은 힘든 곳이라고.."  52


어쩌면 가치에 있어서 옳고 그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는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기 보다 왜 여기까지 나와서 소리를 내는 것인지 그 이유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우선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80


겉핥기로 사물을 바라보고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직접 듣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면 그 가치는 결코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깊이가 있건 없건 하고 싶거나 알고 싶은 것은 부딪쳐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83


외국에서는 친구가 되는 것은 참 쉽다. 지금껏 만난 친구들은 마음을 선뜻 잘 내어주었고 그만큼 나도 내 마음을 잘 내어주었다.  85


소박한 마을 위로 느릿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좋다.  93


우리는 왜 타인의 삶을 구경하려 하는 것일까? 그저 예전 방식 그대로 삼삼오오 모여 사는 사람들이 티비 광고 속의 상품처럼 구경거리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과연 사람이 사람을 구경하는 게 가당키나 한 것일까? 진짜 전통을 배우고 싶고 알고 싶으면 우리는 어떻게 찾아가야 할까?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자 독특한 문화를 상품에 끼워 팔려는 사람들의 욕심보다 돈으로 손쉽게 타인의 삶을 엿보려 했던 내 의식이 문제였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되었다.

낯선 문화를, 우리와 조금 다르게 사는 사람들의 삶을 접할 때는 배우려는 마음과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아마도 편리함을 좇기 위해 모든지 쉽게 버리고 사는 현대인들보다 조금 더 애쓰고 조금 더 부지런히 생활하는 그들에게 경험적인 지혜가 풍부할 것이다. 왜 우리는 세상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까지 도시의 돈문화를 가르치려는 것일까? 여행이 타인의 삶을 망칠 수도 있다면, 우리는 이 여행방법을 버리고 새로운 방법으로 여행을 해야만 할 것이다. 조금 더 대안적인 방법을 찾아보고 싶었다.  106-107


그들의 삶과 비껴선 제3자, 관광객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그 삶의 단면만 보고 그들의 삶을 평가한다는 것은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111


왜 어른들은 아이의 행복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청소년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에 제일 높은 반면 행복률은 제일 낮다는 뉴스가 해가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똑같이 흘러나오는 데, 왜 우린 남의 일처럼 쯧쯧 혀만 차고 방관하고 있을까/ 바로 제 자식이야기인데도 왜 좌시하고만 있을까. 이곳 아이들을 생각하며 난 여전히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생길 우리 아이는 어떻게 자라게 할 것인가에 대해.  112


어쩌면 우리가 흙을 엎어버렸기에 신발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113


"히피들이 시스템이 싫다고 자유를 찾아 떠나왔지. 인도의 고아 주(州 고을주)에서 여기까지 흘러왔어. 여기서는 자유러웠을까? 아니야, 진짜 자유는 시스템을 넘어서는 게 아니라 너와 나, 우리가 융합될 때 느끼는 거야. 여기 모인 사람들도 모두 다 다르다네. 똑같을 수 없지. 다르기 때문에 일치하지 않는 것도 있지.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있어. 그걸 넘어서야 해. 서로 다른 모습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하나될 때 우리는 진짜 자유로울 수 있어."

히피들이 작은 땅을 얻어 전기도, 속세의 더러움도, 부와 배부름도, 그 어떤 것도 들이지 않고 조그맣게 살아가는 곳, 문빌리지. 이곳에서 아이들은 더러운 흙이 온몸에 묻어도 혼나지 않았고 작은 먹거리에도 감사할 줄 알았다. 그리고 어떤 아이들보다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모두 달빛에 반짝이는 별이었다.  114-115


남의 삶을 바라보며 나도 그러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삶은 버거워진다. 내가 타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과 똑같이 살 순없다. 그런데도 나는 바람직하다고 배운 그런 삶을 살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을 하곤 한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진 살의 목표를 십자가처럼 지고 인생의 행로를 이어간다.

버거운 무게에 휘청이는 다리로 인해 몇 번이고 쓰러질 때마다 가슴에서 피눈물이 흐른다. 그런데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산다. 어른들은 자신들 역시 그렇게 살았다며 이 고통을 즐기라고 조언한다. 그래서 그게 마땅한 줄 알았다...

비교를 하지 않으니 남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도, 남보다 더 잘나야 할 이유도 없었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 다른 모습, 서로 다른 생각, 서로 다른 삶, 그것을 잇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무중력의 상태를 느끼는 듯했다. 다시 돌아보니 세상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치열하게 삶을 가꾸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117-118


"장기 여행이 옳다 그르다 할 그런 기준은 없어. 그런데 오래 길 위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것만은 확실히 알더라. 사람 귀한 거 말이야."  121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마음을 통으로 내어주고 있었다.  123


여행은 좀처럼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어쩌면 여행에서는 계획이라는 것 자체가 오류일 수도 있다.  125


언젠가 책에서 '우연은 없고, 언제나 만나야 할 사람만 만나고, 일어나야 할 일들만이 일어난다'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130


독서하는 사람이 줄어든 것은, 서점을 애용하는 사람들이 줄어든것은, 멕시코처럼 다채로운 서점과 서점다운 서점이 대한민국에 없는 것은, 사람들이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삶에 여유가 없는데, 매일매일 삶에 쫓기고 있는데 책이 무슨 소용일까. 그저 순간순간, 하루하루를 이겨내는데 바쁠 것이다.  150-151


어느 곳에서나 화려함 뒤에는 초라함이 숨어있다. 축제를 즐기는 사람과 축제에서 돈을 벌려는 사람, 부모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과 부모님을 기다리느라 외로운 아이들. 어쩔 수 없이 공존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초라함을 불쌍하다거나 불행하다고 여기면 안 된다. 모두가 행복해지려면 이 초라함까지도 같이 수면 위에 올려 함께 누려야 한다. 신영복 선생님의 <함께 맞는 비>를 떠올렸다. 비 오는 날 누군가의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닌 함께 비를 맞으며 동행하고 싶다.  167


어느 도시든 처음 들어섰을 땐 감동받고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곳은 없을 거라며 감탄했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곳은 늘 나타났다. 마치 멕시코의 온 도시들이 미인대회에 나온 미녀들처럼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뽐내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가장 아름다운 곳에 살면서도 땅에 떨어진 먼지만 보며 한숨짓고 살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상 그 어디를 가도 아름다움이 곳곳에 널려 있는데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169


한때는 저것들이 그의 여행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하고 소중한 물건들이었을 것이고, 두고두고 잊지 못할 추억일 텐데 처음 보는 우리들에게 서슴없이 나눠주는 모습이 조금은 비장해 보였다.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이제 여행의 환상은 접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여행자의 마지막 발버둥일까. 예전에 다른 사람을 통해 이런 도움을 받아서일까. 여행 내내 끈질기게 괴롭혔던 비움과 채움, 그 깨달음의 결실일까. 아니면 그냥 짐을 덜어내려는 걸까.

나는 그 이유를 물어보았고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사실 이 물건들은 두세 달 전부터 내게 필요가 없었어요. 당신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배낭은 미련의 무게라는 생각이 들어서 싸그리 버리려고도 했었고요. 근데 있잖아요. 차마 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내가 버리려고 하는 이 물건이 누군가에겐 정말 필요한 물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전 그동안 이 물건들을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배낭에 계속 넣고 다녔어요. 그리고 이제야 당신들을 만나게 된 거예요. 당신들이 남미로 내려가게 되면 제 말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나는 망치로 머리를 두드려 맞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비워내기만 중요하게 생각했던 내가 누군가를 위해 채워 넣고 짊어지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누군가를 위해 짐을 짊어질 수 있다는 것. 그것만큼 숭고한 행위가 또 있을까.  174-175


인간의 욕심이 망가뜨린 건 결국 인간 그 자체였다.  183


자본주의는 경쟁주의 구도를 가져왓고 경쟁은 더 많은 기능을, 더 많은 기능은 시간의 단축을 가져왔지만, 우리는 기계로 인해 줄어든 시간을 인간답게 활용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187


나는 필통 가득 칼로 깎은 연필을 넣어 다니고 싶다.  188


산 페드로에는... 일본인 남편 스스무와 멕시코 산 크리스토발이 고향인 멕시코인 아내 가비...

스스무는 방을 안내하곤 숙소에 대해 소개해줬다. 총 3층으로 된 이 건물은 몇 년째 스스무와 가비가 직접 짓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스스무는 "저희 부모님은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맞벌이를 하셨어요. 처음에는 형편이 어려워서 할 수 없이 맞벌이를 했지만 나중엔 더 좋은 삶을 위해 계속 맞벌이를 하셨죠. 저희 부모님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좋은 동네, 좋은 집, 좋은 차였어요. 그것을 갖추고 유지하면 저도 행복할 거라 굳게 믿으셨죠. 하지만 저는 아니었어요. 워커홀릭인 부모님보다는 제가 커나가는 모습을 옆에서 항상 지켜봐 주는 부모님이 필요했어요. 다함께 아핌을 먹고, 밤에는 키우는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나가고, 가끔 밤하늘의 별을 보며 내 꿈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따뜻한 가정이 필요했어요. 

전 다짐했죠. 제가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우리 부모님과는 다르게 살 거라고. 그리고 전 실천했어요. 물론 아내의 생각도 저와 같아서 가능했지만요. 저흰 아이들이 태어나고 지금까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겪고 지켜봐 왔어요.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부대끼고 살아가는 중에 많은 것들을 배웠답니다. 자연, 생명, 존중, 책임, 배려, 부모이기 전에는 그저 단어로써의 의미만 알았던 것들의 참 의미를 알게 되었어요. 분명 도시에서의 삶 보다는 물질적으로 매우 열악하지만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왜냐면 여기서 누리는 행복이 훨씬 크기 때문이죠. 전 이 생활에 매우 만족합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일테고요."  211-213


갖고 있는 기계가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자꾸만 방 안으로 외로이 기어 들어갔다.  217


우리는 점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 정보가 넘쳐나는 것이 과연 좋은 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매체를 이용해 소통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시대, 시간의 공유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점점 잊게 된 사람들, 공원에 앉아 몇 시간이고 사람들의 웃음을 바라볼 여유를 잊게 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사이버 공간보다 직접 사람을 만나는 광장이, 1초도 안돼 전송되는 메시지보다 몇 번을 구겨버리다 마침내 완성된 편지가, 컴퓨터를 상대로하는 게임보다 다함께 둘러 앉아 하는 놀이가 필요했다. 더 많은 스마트폰을 팔 생각보다 사람과 사람이 더 진실하게 소통할 창구를 만드는 게 시급해 보였다.  245


"요리사는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할 것 같아.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음식과 맛이 존재하는데 많이 맛 보아야 창의적인 메뉴가 나오지 않을까?"

"건축가도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할 것 같아. 동서양의 건축을 합치면 창의적인 건축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사진가도 여행을 많이 다녀야지. 세상엔 담아야 할 것이 아주 많잖아?"

"작가도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하지 않겠어? 세상엔 재미있는 이야기가 너무 많아."

"디자이너도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할 것 같아."

식사를 하다가 멋진 정원을 걷다가 하늘을 보고 사람들을 보며,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음악가도, 공학도도, 예술가도, 회사원도, 부부도 여행을 많이 다녀야할 것 같았다. 학생들도, 청년들도, 꿈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이야기를 하다 보니 모든 사람이 여행을 많이 다녀야만 했다. 여행이 꼭 해외여행이나 장기여행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든 단 몇 시간이든 상관없다. 자신을 둘러싼 주변을 자세히 관찰하고 낯선 환경과 이야기하며 자신만의 시간을 만드는 것이 모든 이에게 필요한 것 같다. 삶이 조그만 움직임에도 창의적으로 변화하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274


여행 후 나는 더 소박한 삶을 살고 싶어졌다.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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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여행을 떠나며 - 장소보다는 맛과 향에 가까운


인생은 당신이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순간 시작된다. - 닐 도널드 월시  10


소설가 배명훈은 "영화든 술이든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들보다 정교한 눈금으로 대상을 보고 한번 정교해진 눈금은 쉽사리 무뎌지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랍의 어느 격언에 따르면 인간은 '움직일 수 없는 사람'과 '움직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움직이는 사람'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11


무미건조하게 산다는 것은 감방 속의 삶이다. 삶이란 교실이고 권태는 자습 감독관이다. 그가 잠시도 쉬지 않고 우리를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열광할 만한 일에 몰두해 있는 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즉시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뇌수를 삼켜버린다. - 루이 페르디낭 셀린드 <밤 끝으로의 여행>  16


우리네 인생은 시작은 다르지만 끝은 정해져 있습니다. 확실한 건 죽을 때까지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뿐입니다.  18


뉴요커의 입맛을 사로잡은 타바론 차는 티 소믈리에가 여러 가지 차를 섞어 그 손님만의 향을 만들어주는 차라고 합니다. 저도 '장소'라는 재료를 섞어서 저만의 여행을 만들어보았습니다.  21




하나. 행운 - 행운은 길을 벗어나길 바란다


패키지여행이 싫다며 자유여행을 떠나보지만 우린 결국 <론리 플래닛>을 철석같이 믿거나 스마트폰으로 쉼 없이 검색합니다. 뻔한 길을 가면서도 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 여해은 어쨌든 달라야 하기에 허풍만 늘어납니다. 낚시꾼들이 자기가 잡은 물고기가 더 크게 보이게끔 카메라 쪽으로 팔을 쭉 뻗어 사진을 찍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면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훈훈하게 맘리합니다. 하지만 <론리 플래닛>을 버리고 블로그에 소개되지 않은 길로 가야 '초행자의 행운'이 찾아옵니다. 행운은 우리가 길을 벗어나길 바랍니다.  36-37




둘. 기념품 - 기억의 부스러기들이 오래간다


기념품을 뜻하는 Souvenir라는 말은 '특별한 시간과 경험을 불러일으키다'라는 뜻의 라틴어 subvenire를 어원으로 둔다고 합니다.  71




셋. 공항+비행 - 여해의 예고편을 맛보고 문턱을 넘다


일본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의 히어로 블랙잭이 한 말-"몇 번 말해야 알겠어? 과거는 바뀌지 앟아. 포기해. 그렇지만 말이야. 미래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  103


비행기는 허공에 떠 있는 시간의 95퍼센트는 진로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조종사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진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 바바라 애버크롬비 <인생을 글로 치유하는 법>

...

'계획을 세우는 데 온통 힘을 써봐야 네 인생의 5퍼센트밖에 도움이 안 되거든. 그러니 범퍼카처럼 살아. 벗어나면 그때 바로잡아도 늦지 않아. 아니 그 방법밖에 없거든.  105




넷. 자연 - 또다른 빛과 색을 찾아서




다섯. 사람 -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거울


헬렌  니어링도 45년의 연구와 공부 뒤에 당혹스러울 만큼 평범한 결론을 내립니다. 자신이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조언은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하라"는 것이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베푸는 가장 큰 호의는 역시 웃음이었습니다.  172


말이 통하지 않으면 이쪽 사람들은 "배고파?" "목말라?" "어디 가려구?" "아픈 데는 없어?" "기분 괜찮아?" "즐거워?" 처럼 꼭 필요한 것만 묻고 바로 해결해줍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오면 "몇 살이야?" "어디 살아?" "가족은 어떻게 돼?" "무슨 일 해?" 처럼 이른바 호구조사부터 합니다. 타고난 여행자인 어린왕자도 어른들은 나이나 몸무게, 아버지 수입 같은 숫자만 좋아할 뿐 정작 중요한 건 묻지 않는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주위에서 "그 애 목손리는 어때?" "무슨 놀이를 좋아해?" "나비를 수집하니?"라고 묻는 법은 결코 없다는 겁니다.  176


젠틀하다는 건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주는 단 몇 분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189




여섯. 음식 - 씹은 만큼 상상한다네


여행을 무서워하는 사람도 꽤 있습니다. 길을 떠나면 가장 먼저 부딪치는 문제가 물과 음식입니다. 낯선 사람보다 물갈이가 무섭고 절벽 사이에 걸쳐 있는 흔들다리보다 샹차이(香菜 향기향 나물채)에 더 몸서리칩니다. 비위가 약한 사람일수록 뭘 씹고 어디까지 먹을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는 것과냄새도 걱정거리입니다. 뭔가 이상한 걸 보거나 냄새를 맡으면 입맛부터 떨어집니다. 인도네시아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라스틱 봉지와 일회용 그릇 쓰레기를 보며 수책구명속 머리카락이 떠오른다면 그날 점심은 물 건너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행이란 비위와의 끊임없는 투쟁입니다.  199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실제로 살아보는 것. 그 문화 속으로 이사하여, 손님으로 받아달라고 부탁해서 언어를 배운다. 어떤 순가이 되면 이해가 찾아온다. 이해는 언제나 비언어적이다. 무엇이 낯선 것인지 이해하게 되는 순간, 설명하려는 충동을 잃어버린다. -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222




일곱. 방송 - 두 눈으로 경험하고 외눈으로 기록하기


마셜 맥루언은 매체에 빠진 육신 없는 인간들이 등장하리라는 걸 이미 1960년대에 예견하였습니다. '앤젤리즘Angelism'이라는  말로 정의하는데 이런 육체와 분리된 '전자적' 인간은 환상과 꿈 사이 어딘가를 좋아하고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를 넘나든다고 합니다. 앤젤리즘에 빠질수록 페로몬이나 목소리와 몸짓, 인간관계 따위의 직접적인 경험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런데 실제로 떠나 보면 이것들이 가장 필요한 덕목입니다. 사람을 만나 친해지고 목소리와 몸짓으로 이야기 나누고 페로몬으로 보이지 않는 매력을 뿜어내야 합니다.  231-232




여덟. 나눔 - 위아래보다는 양옆으로


수잔 손택도 말했듯 개입하면 기록하지 못하고 기록하면 개입하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276


쇼펜하우어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인간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보다 공평하게 대하는 자세라고 하였습니다.  288


캐나다 서부 해안에 살던 콰키우틀 인디언은 생일, 결혼, 장례에 포틀래치라는 특별한 의식을 벌였습니다. 의식의 주인공은 참가자들에게 선물을 잔뜩 주었습니다. 그들은 빚을 내서라도 옷과 무기, 놋그릇을 최대한 많이 퍼주었습니다. 추장이 되려면 심지어 값비싼 모피를 태우거나 놋그릇을 부수기까지 해야 합니다. 그들은가지려고 하기보다 베풀어야만 자신의 위신이 높아진다고 믿었습니다.  289




아홉. 기록 - 카메라보다 몰스킨을 들고서


이제 '여행=사진 찍기'가 되어 카메라는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아 부지런히 셔터를 누르지만 하드 용량만 축내기 일쑤입니다. 사진가 아라키의 말마따나 이젠 기억을 잃어버리고 싶어서 찍어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98


오PD는 아무리 좋은 경치도 5분 이상 보여주면 시청자들이 채널을 돌린다고 했습니다...

여행은 명사("여기가 바로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야!")로 시작됩니다. 이내 감탄사("우와" "이야" "헐")로 바뀌고 곧이어 형용사("파랗고" "깨끗하고" "시원하고" "상큼하네")가 튀어나옵니다. 마지막엔 동사("하나, 둘, 셋! 물속으로 점프!")로 마무리됩니다. 처음 떠난 관강객일수록 '어디'에 가고 '무엇'을 볼지 집착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어땠는지' 수다를 떨고 고수가 될수록 뭐든 자꾸 '해보려고' 합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홍역을 앓듯 여독을 겪게 됩니다. 명사에서 동사로 옮겨갈수록 여독은 심해지지만 홍역 꽃이 진 뒤 흉터가 남듯 몸에 추억이라는 여행의 흔적이 남습니다.

관광이란 '내 눈으로 직접 보러 가는 것'입니다. 가보았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페이스북에 올려 자랑해야 본전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카메라와 스마트폰을 놓지 않으면 관광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라도 그저 외눈박이일 뿐 두 눈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도 카메라를 놓고 떠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얼마나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데' '다음에 또 못 올지도 모르는데'라며 아쉬운 생각도 듭니다.  299-300


여행이란 창을 뛰어넘어 세상을 만지는 일입니다. 창이 있어 여기와 저기가 구분된 세사에서는 저 너머로 떠나는 여행을 꿈꾸게 됩니다. 창을 뛰어넘으면 나를 둘러싼 벽도 사라집니다.  300


소설가 메셸 투르니에는 일차적 인간과 이차적 인간을 나누었습니다. 이차적 인간은 과거와 미래를 참조하여 현재를 살아갑니다. 언뜻 현명해 보이지만 지나간 일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고 앞으로 벌어질 인들은 반드시 현재를 거칩니다. 반면 일차적 인간은 늘 현재에 머무릅니다. 날마다 아침마다 새로운 과거를 만드는 미래의 첫날을 맞이합니다.  302


여행이란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꿈꾸는 유목민 놀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음껏 돌아다니고 마음껏 그리워하기위해 집을 나와 길을 나서는 순간부터 여행은 시작됩니다. 하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고 여행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마지막 장을 넘겼다고 책을 다 읽은 게 아니듯 말이죠. 책을 읽고 독후감을 남기듯이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고 남겨야 비로소 여행은 끝나게 됩니다. 여행에서 남긴 기록이 여행이 되는 셈입니다.  311-312


여행, 그것은 매우 유익하니 상상에 끊임없는 활기를 주기 때문이다. 여타의 소득이란 실망과 피곤뿐이다. 우리들 각자의 여행은 순전히 상상적일 뿐이다. 그것이 여행의 힘이다. - 루이 페르디낭 셀린느 <밤 끝으로의 여행>  313




도착. 여행을 마치며 - 변명거리는 충분해


영국의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그림 그리는 시간 외에는 서재에 박혀 책을 읽는다고 합니다. 자신은 반사회적인 사람이 아니라 그저 '비사회적'일 뿐이라며 씩 웃습니다.  336

...

이제니 시인은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나를 달리게 하는 것은/ 들판이 아니라 들판에 대한 상상"이라고 하였습니다.  336


되레 집 안에 틀어박혀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을 보며 만족하는 사람이 환경을 지키는 실천가하로도 볼 수 있습니다.  337


처음 해외여행을 떠날 때 가이드의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지금은 꼭 필요할 때만 함께 다닙니다. 때로는 여행 책자 하나 없이 떠날 때도 있습니다. 뭐랄까 적당히 믿고 적당히 의심하면서 여행을 즐깁니다...

세상은 넓고 시간은 없습니다.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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