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 해당되는 글 37건

  1. 2022.07.18 바가바드 기타 : 함석헌 주석 - 한길사 1996 94270
  2. 2022.07.11 생활 속의 바가바드 기타 - 한혜정 체온365 2016 03270
  3. 2022.06.20 우파니샤드 : 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길 - 이명권 한길사 2011 04100
  4. 2022.06.13 베다 - 인류 최초의 거룩한 가르침 - 이명권 한길사 2013 04100
  5. 2015.10.15 헤세의 여행 - 헤르만 헤세 홍성광편역 연암서가 2014 03850
  6. 2012.10.09 인도에 관한 열일곱가지 루머 - 이상문 도서출판사람들 2011 03810
  7. 2012.10.08 한권으로 만나는 인도 - 이병욱 너울북 2011 03910
  8. 2012.10.05 인도 바로보기 - 고홍근 최종찬 네모북스 2006 03320 2
  9. 2012.09.27 적절한 균형 - 로힌턴 미스트리 아시아 2009 03840 1
  10. 2012.09.22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 이옥순 푸른역사 2002 03900
  11. 2012.09.18 사리 속치마를 벗기다 - 오화석 매경출판 2010 03320
  12. 2012.09.17 아름다운 파괴 - 이거룡 한길사 2010(2000) 03100
  13. 2012.09.16 우주날개 인도에서 행복을 꿈꾸다 - 정미자 BM북스 2008 93810
  14. 2012.09.12 불온한 신화읽기 - 박효엽 글항아리 2011 03100
  15. 2012.09.09 맛살라 인디아 - 김승호 모시는사람들 2008 03910
  16. 2012.09.07 인도방랑 - 후지와라 신야 작가정신 2009 03830
  17. 2012.09.03 떠나라, 외로움도 그리움도 어쩔 수 없다면 - 이하람 중앙books 2011 13910
  18. 2012.08.30 라다크의 미소를 찾아서 - 여태동 이른아침 2005 03900
  19. 2012.08.28 화이트 타이거 - 아라빈드 아디가 베가북스 2009 03840
  20. 2012.08.23 로맨틱 인디아 - 채유희 문학동네 2008 03980
  21. 2012.08.19 이야기 인도사 - 김형준 청아출판사 2006 04900
  22. 2012.08.18 신들의 땅에서 찾은 행복 한 줌 - 문윤정 바움 2006 03810
  23. 2012.08.09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 - 이옥순 책세상 2002 03800 1
  24. 2012.08.07 슬럼독 밀리어네어 - 비카스 스와루프 문학동네 2007 03840
  25. 2012.08.04 인도오지기행 - 조현 한겨레출판사 2008
  26. 2012.08.04 영혼의 순례자 - 조연현 한겨레신문사 2004 03810
  27. 2012.08.03 2시간만에 이해하는 인도 - 시마다 다카시 국일증권경제연구소 2002 14320
  28. 2012.07.31 내가 만난 인도인 - 김도영 산지니 2006 03300 2
  29. 2012.07.29 인도인과 인도문화 - 김도영 산지니 2007 03300 2
  30. 2012.07.28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고진하의 우파니샤드 기행) - 고진하 비채 2009 03810




거룩한 자의 노래 - 함석헌 선생 주석의 <바가바드 기타> - 이거룡

<바가바드 기타>는 언제나 서민 대중의 삶 속에서 호흡해온, 대중들의 경전이다.  21

<바가바드 기타>는 쿠루스셰트라 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무대로 한다. 하스티나푸라(Hastinapura)에 자리잡은 쿠루족의 두 형제 가문 즉 카우라바(Kaurava) 형제들과 판다바(Pandava) 형제들이 쿠루크셰트라 들판 양편에 군대를 대치시키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살육전을 벌이려는 극적인 상황에서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이 시작된다. 원래 바라타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였던 유디슈티라(Yudhisthira)가 카우라바 형제들 가운데 맏형 두료다나(Duryodhana)와 도박을 하여 그 결과로 그는 왕국을 잃고 네 형제들과 함께 13년 동안 숲속에 유배되었다. 약속한 기한이 되어 유디슈티라가 두료다나에게 자신의 왕국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거절되고 결국 두 가문 간에 전쟁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바로 이 전쟁이 벌어지려고 하는 찰나에 판다바 가문의 다섯 형제 중 셋째인 아르주나(Arjuna)와 크리슈나(Krsna) 사이에 오간 대화를 적은 것이다.
아르주나는 이 전쟁에 대한 확실한 대의 명분을 가지고 전쟁터로 나갔다. 그러나 그는 상대편 군대에서 자기 사촌들, 아저씨, 할아버지 등 혈족들을 바라보고는 고뇌에 빠진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혈족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혈족을 죽이고 왕국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숲ㅍ으로 은거하여 궁극자에 대한 명상에 몰두하는 고행자의 삶을 택하려 한다. 그때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싸우라’(ii, 18)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곧 크리슈나가 전쟁 그 자체를 옹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크리슈나는 결코 전쟁을 열망하지 않았으며, 그는 오히려 두 가문 간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항 노력하는 평화의 사절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런데 그의 역할은 카우라바 지도자들의 억지 때문에 실패했다. 싸우지 않겠다는 아르주나의 주장을 논박하는 과정에서, 크리슈나는 판다바족에 관한한 그 전쟁이 정당하다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 아르주나의 의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세속적인 관점에서 가장 설득력있는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윌는 여기서 클리슈나의 가르침이 지니는 요체가 정작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옹호가 아니라, 아르주나의 결심, 즉 싸우지 않겠다는 것이 왜 옳지 ㅇ낳은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르주나가 싸우지 않겠다는 것은 단지 그 대상이 자기의 혈족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의 사랑하는 혈족들을 죽이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겠다는 말은 일면 매우 사리에 맞는 것 같지만, 그것은 영원한 자아의 본질을 망각한 결과이며 냉철한 판단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는 무지와 이에 수반되는 격정 때문에 고뇌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가 그의 마음이 어두운 먹구름으로 가려졌으며,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없다고 고백했을 때, 크리슈나는 그에게 바른 지식을 내려 무지를 제거하려고 한다. 그 가르침은 아르주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의 고뇌를 다루는 가운데, 크리슈나는 모든 인류의 선을 위하여 <바가바드기타>를 설한다.
‘싸우라’는 표현에 대하여 샹카라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전쟁을 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슬픔과 미혹으로 생겨난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촉구일 뿐이다. 자아란 육체적 생사를 초월한다는 것과 누구난 자기 신분에 주어진 사회적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설정된 상황이 바로 전쟁이다.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은 슬픔과 미혹과 같은 상사라의 원인을 제거하자는 것이지 결코 전쟁을 명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바가바드기타>의 쿠루크셰트라 전쟁은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모순을 나타내는 인간 내면의 전쟁이다.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이 전쟁이라는 극한 상항에 놓인 아르주나의 고뇌로 시작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쟁은 죽거나 죽여야 하는, 생명이 무참히 살해되는 인간의 극한 상황이다.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은 먼저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고뇌하는 아르주나의 내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아르주나는 내면의 싸움에서 미혹에 눈 멀고 두려움에 떠는 모든 사람을 대변한다.
이어서 설해지는 가르침이 더욱 매혹적인 것은, 그것이 아르주나의 내면의 큰 위기를 나타내는 전쟁이라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 설정되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상황 속엣 여실하게 드러나는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철저한 고뇌가 있기 때문에 참다운 철학이 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위기 상황에서 정확히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 삶 가운데 문득 찾아오는 중대한 위기 상황은 우리위 마음속에 궁극적인 가치에 대한 생각을 자극한다. 오직 그때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감각의 장애를 깨부수고 내적인 실재에 닿는 데 필수적인 긴장을 얻게 된다.
아르주나의 낙심은 단지 실망한 사람의 일시적인 기분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비실재성을 일깨우는 공허감, 가슴속에 느껴지는 일종의 죽음 상태이다. 아르주나는 만일 필요하다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작오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옳은지 모른다. 그는 전율스런 시험에 직면하였으며, 감당하기 어려운 고뇌가 그를 뒤흔든다. 아르주나가 마주치는 절망감은 문득 깨달음의 길에 꼭 지나야 할 영혼의 어두운 밤이다.
이처럼 <바가바드기타>는 전쟁 그 자체보다는 이를 통하여 내면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순과 갈등을 다루고 있다. 영혼의 삶은 쿠루크셰트라의 전쟁터로 상징되며, 카우라바족은 영혼의 진전을 방해하는 적이다. 아르주나는 시험을 물리치고 감정을 제어하ㅏ여 인간의 왕국을 되찾으려고 시도한다. 전진의 길은 고통과 자기 극기를 통해서 가능하다. 내면의 삶에 대한 추구는 “사지가 주저않고, 입은 바싹타며, 전율이 내 몸을 휩싸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아르주나의 고뇌를 요한다. 이어지는 크리슈나의 가르침 - 참된 자아에 대한 - 이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아르주나의 철저한 고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가바드기타>의 시작은 갈등과 모순, 이기심, 악마의 부드러운 속삭임이 교차하는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크리슈나와 아르주나의 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우리가 듣는 것은 전쟁의 아비규환이 아닌 신과 인간 간의 진지한 교감을 보게 된다. 전차는 고요한 명상의 자리가 되고, 가식의 목소리가 잠잠해진 전쟁터는 오히려 참된 진리에 대한 사색을 위한 적합한 장소가 되는 것을 느낀다.  29-32

<바가바드기타>에 따르면, <베다>의 제의식은 욕망에 사로잡힌 무지한 자들의 생각이며(vii, 20), 단지 덧없는 결과를 가져올 뿐(xi, 21), 이를 토애서는 신의 참된 본질이 알려지지 않는다.(xi, 48) 이에 대하여 <바가바드기타>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를 거듭 강조한다.  34

<바가바드기타>는 범신론(汎神, pantheism)이라기보다는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적인 성격이 강하다. 다시 말하여, <바가바드기타>는 모든 것이 신이라는 주장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모든 것이 신 속에 있다고 말한다.  36

<바가바드기타>에서 현저해지는 권화(勸化, avatara)의 이론은 인간에 대한 신의 자비를 웅변적으로 말한다. 만일 신이 인간의 구제자라면, 그는 악의 힘이 인간의 가치를 말살하려 할 때면 언제나 스스로를 현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의가 쇠하고 불의가 성할 때마다, 오, 바라타의 자손이여, 나는 자신을 나타낸다.”(iv, 7) 권화는 인간속에 신의 하강인 동시에 인간의 영적인 본성과 잠재된 신성의 증명이다. 궁극적인 의미로 볼 때, 모든 의식적인 존재는 비록 그것이 가려지고 부분적이라 해도 신의 하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바가바드기타>가 모든 인간 속에 신의 내재를 바다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은 모든 존재의 가슴속에 살고 있으며, 무지의 장막이 걷힐 때 우리는 신의 음성을 듣고 신의 빛을 맞이하며, 신의 권능으로 행한다. 체화된 인간 의식은 불생 불멸의 영원자 속으로 들리워진다. “구다케샤여, 나는 모든 존재들의 중심에 자리잡은 자아이며, 나는 모든 존재들의 시초요 중간이요 또 종말이다.”(x, 20)  38

<바가바드기타>의 사상은 여러 가지 점에서 불교와 공통점을 지닌다. <기타> ii. 55~72에서 언급되는 아힝사(ahimsa)와 고해은 그것이 바라문교보다는 불교 혹은 자이나교와 유사한 정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바가바드기타> xvii.5~6에서 극단적인 자기 고행을 비난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 강도의 차이는 있다 할지라도 <바가바드기타>와 불교는 공히 베다의 절대적인 권위를 부정하며, 경직된 카스트제도를 완화시키려는 시도를 보인다. <바가바드기타>에서 강조하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niskamakarma)도 궁극적으로는 불교의 무소유와 통한다. <바가바드기타>의 이상적인 인간 스티타프라갸(sthitaprajna)는 불교의 아라한이나 보살을 연상하게 한다.
..
우파디야야는 <바가바드기타>에 붓다 혹은 불교에 대한 어떤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불교에 대한 간접적인 시사가 있다고 믿는다. 그는 <우파니샤드>에는 없지만 불교에는 있는 용어들이 <바가바드기타>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40

<바가바드기타>와 불교 간의 차이점 또한 적지 않다. 불교는 출가 수행을 이상적인 것으로 보지만, <바가바드기타>는 바라문교의 아슈라마(asrama) 전통을 받아들여 인생을 학생기(學生期, brahmacarya), 가주기(家住期, grhasta), 임서기(林棲期, vanaprastha), 유행기(遊行期, sannyasa)의 네 과정을 따르는 것을 이상적인 삶으로 여긴다. ..
불교가 인간의 해탈에 있어서 자력을 위주로 한다면, <기타>는 타력에 의한 구원 가능성을 믿는다. 흔히 <바가바드기타> 7백 구절의 요약으로 일컬어지는 xviii. 66은 극단적인 형태의 귀의 신앙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모든 의무를 다 버리고 오직 나에게 귀의하라. 내가 그대를 모든 악에서 건져주리니 슬퍼하지 말라.” 이런 이유로 로린서는 <바가바드기타>의 주요 개념들이 기독교의 신약 성경에서 차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41

<바가바드기타> 각 장의 말미에는 이 경전이 브라흐만, 즉 궁극적 실재에 대한 가르침(brahmavidya)일 뿐 아니라, 요가를 설하는 경전(yoga-sastra)이라고 말한다. 궁극적 실재를 가르칠 뿐 아니라, 여기에 이르는 길(marga), 즉 요가를 설한다는 것이다.  42

<바가바드기타>에서 요가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새겨지지만, 그것은 시종일관 실천적인 측면과 관련을 지닌다.  42

<바가바드기타>에서 설해지는 요가는 크게 세 가지, 즉 지식의 길(jnana yoga), 행위의 길(karma yoga), 그리고 믿음의 길(bhakti yoga)로 나누어진다.
지식의 길이라는 말은 이 길이 참된 지식을 요구한다는 것을 가리키며, 참된 지식은 영원한 것과 덧없는 것에 대한 분별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지식의 길은 이 지식이 인간 본성의 복귀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이 일단 자기의 육체나 마음, 혹은 지성조차도 참다운 자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정확히 말하여 그것을 직관적으로 꿰뚫어보면, 그는 아만(我慢, 자신을 뽐내며 남을 업신여기는 교만한 마음)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는 자기가 행위자이며 인식의 주관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버린다. 왜냐하면, 그의 참된 자아는 육체, 감각, 마음, 지성의 행위를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구도자에 의하여 이해되어야 할 요체이다.
참다운 지식은 우리가 일상적인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며, 결과에 집착함이 없이 행위하게 한다. 지식의 길의 목표는 자아 실현 혹은 범아일여(梵我一如)이다.  43

“그의 모든 일이 욕망과 이기적인 목적을 떠난 사람, 그의 행위가 지혜의 불로 타버린 사람, 지혜로운 자들은 그를 현자라 부른다.”4. 19) 그와 같은 사람은 비록 행위한다 할지라도 실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44

<바가바드기타>는 지식의 길 못지 않게 행위의 길을 강조한다. 실재에 대한 통찰이 역동적인 삶의 필요를 폐지하지 않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행위를 포기함으로써, 혹은 의무를 져버림으로써 무위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것은 미혹에 사로잡힌 것이며, 참된 길이라 할 수 없다.  44

<바가바드기타>는 행위 그 자체의 포기가 아니라,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를 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을 니스카라카르마 요가라고 한다. .. 카르마 요가는 ‘행위의 포기’(renunciation of action)가 아니라, ‘행위 속에서의 포기’(renunciation in action)를 의미한다.  44-45

니스카ㅏ카르마는 .. 단지 행위의 성패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동기에 집착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 목적을 잊어버리라는 것이지 목적을 잃어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45

믿음의 길 혹은 박티 마르가(bhakti marga)는 인격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다. ..”모든 의무를 다 버리고 오직 나에게 귀의하라. 내가 그대를 악에서 건져주리니 슬퍼하지 말라.”(xviii. 66) 인도의 여러 종교 전통 중에 비인격적인 원리에 대한 숭배의 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사람에게 있어서 이것은 쉽지 않다. 이에 비하여 인격신에 대한 숭배는 사회적 계급이나 지식 수준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따를 수 있는 대중적인 구원의 길이다. .. 현생에서는 해탈 가능성이 배제되었던 불촉천민과 여자에 대한 구원의 희망이 제시된 것도 여기이다.
지식의 길이나 행위의 길에 비하여 믿음의 길이 지니는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의 해탈에 있어서 신의 은총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46

지, 정, 의는 인간 본성의 근본이며, 지식의 길, 헌신의 길, 행위의 길은 각각 이에 상으앟는 실천행이라는 것을 알때, 이 세가지 요가가 상호보완적이며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행위릐 길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믿음의 길은 신에 대한 사심없는 봉사이다. 따라서 그것은 행위의 일종이다. 또한 앞에서 본 것처럼 사심없는 행위는 지식없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박티는 오직 참된 지식을 지닌 자에 의해서 완전히 행해질 수 있다고 해야 한다.  46-47




<바가바드기타>를 읽는 독자들에게

진리는 귀족적일 수 없습니다.  56





책을 읽기 전에

<바가바드기타>는 글자대로 하면 신의 노래라는 뜻인데 힌두교에서는 <스루티(Sruti)> 곧 신이 직접 인간에게 계시해 준 경전으로는 알지 않고, <스므리티(Smriti)> 곧 화신이나 성자, 예언자가 경전에 대해 주를 달아서 한 가르침으로 안다.  62

인도의 사상과 지도자의 정신적 취사(趣舍 달릴 취 집 사)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것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63

<기타>안의 대화에는 네 사람이 말을 하고 있다. 드리타라슈트라 왕, 산자야(sanjaya), 아르주나, 크리슈나다.
드리타라슈트라는 소경이었다. 전설로 전해 오는 말에 <기타>의 저자라고 하는 서자 브야사(Vyasa)가 왕에게 쿠루크셰트라의 싸움을 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해주마 하는 것을 왕은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친족의 죽음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브야사는 드리타라슈트라의 신하요 마부인 산자야에게 뚫어봄 뚫어들음의 능력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궁중에 앉아 있으면서 산자야가 저 멀리 전장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듣는 대로 왕에게 알려주었다. 그의 입을 통해 크리슈나와 아르주나의 말은 영매적(靈媒的)으로 보도가 됐고 이따금씩 끊고 자기 자신의 설명을 첨부하기도 한다.  63

브라만을 이 우주와의 관계에서 생각할 때는 하나의 인격적인 신, 곧 이슈바라(Ishvara)라고 한다. 이슈바라는 속성을 가진 신이다.  65

이슈바라의 세 기능 혹 세 모습을 인격화하여, 브라마(Brahma)와 비슈누와 시바(Shiva)라 부른다.  66

브라만의 능력은 모든 마음과 물질의 근본이다. 그것을 프라크리티(prakriti) 혹은 마야(maya)라고 한다.  67

힌두교는 크리슈나, 부처, 예수를 포함해서  많은 화신을 믿는 것을 용납하고 또 앞으로도 많이 있을 것을 예상한다.  67

프라크리티는 구나(gunas)라는 세 가지의 힘(性)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사트바(sattva, 善性)와 라자스(rajas, 動性)와 타마스(tamas, 暗性)다. ‘브라마의 밤’, 곧 가능성의 시대 동안은 이들 ‘성’들은 온전히 균형을 이루어 있으므로 프라크리티는 아무 요동이 없이 가만있다. 창조는 이 균형이 깨지는 데서 나온다. ..
물질계에서는 선성은 모든 순수하고 고운 것을 나타내고, 동성은 날쌘 것을, 암성은 굳고 맞서는 것을 나타낸다. 어떤 것 속에나 세 상은 다 들어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중 하나가 지배적이다. ..
성은 또 어떤 물건이 진화의 어느 단계에 있는가를 표시하기도 한다. 선성은 실현될 형태의 본질이고, 암성은 그 실현에 대해 속에 들어 있는 장애고, 동성은 그 장애를 물리치고 그 본질을 드러나게 하는 힘이다.
사람의 마음에서는 선성은 심리적으로 침착, 정결, 평온을 드러내고, 동성은 열정, 불안정, 도전적 활동을 나타내고, 암성은 우둔, 게으름, 타성적임을 나타낸다. .. 사람은 그 행동, 사상, 생활 양식에 따라 그중 어떤 성도 배양해 낼 수가 있다.  68-69

프라크리티에서 나와서 천차만별의 만물에 이르는 진화의 과정을 더듬으려면 우리는 개인 지성의 근본이 되는 마하트(mahat)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 다음은 물체를 식별 분류하는 힘인 부디(buddhi), 그 다음은 아함카라(ahamkara) 곧 자기 감각이요, 아함카라는 세 가지 기능으로 갈린다.
마나스(manas), 이것은 감각에서 오는 인상을 받아 그것을 부디로 보낸다.
감각의 5관(五官)인 눈, 귀, 코, 혀, 몸과 행동의 5기(五器)인 손, 발, 혀, 생식기, 배설기
다섯 탄마트라(tanmatras) 즉 빛, 소리, 냄새, 맛, 촉각의 본질이 되는 것, 이 기묘한 탄마트라들이 서로 얽히고 다시 얽혀서 소위 5대(五大)라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을 낳는데 이것으로 이 영원한 우주는 이루어져 있다.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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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의 전체 메시지
세상의 온갖 충격적이고 절망적인 사건들은 왔다가 지나가는 것이며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슬퍼하고 절망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지어내는 ‘허상’에 우리가 속박되는 것일 뿐임을 강조하고 있다.  29

<기타>는 세계의 진상, 실재, 참 세상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는 눈을 어둡게 만드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기적인 욕망이며 그것은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즉 육체라는 물질적 본성에 의존하여 사는 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기타>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물질적 본성을 프라크리티(prakriti)로 부르며,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내적 작용 예컨대 감각능력, 자의식, 인지능력 등은 이러한 프라크리티로부터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기타>에서 인간은 이러한 물질적 본성의 작용에 종속되지 않고 그 작용을 확실히 알고 제어할 수 있을 때 참세상, 참자아를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인식 및 감각의 작용이 프라크리티의 작용임을 깨다다게 되면 푸루샤(purusha)라는 정신적 본성이 드러나게 되는데, 푸루샤는 물질적 본성인 프라크리티와 대조되는 개념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프라크리티만 있는 것이 아니라 푸루샤도 있는데 인간이 푸루샤를 모르고 오로지 프라크리티만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에 의해 일어나는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에 좌지우지되며 살아가는 것은 이기적인 욕망이 푸루샤의 환한 빛을 가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푸루샤는 인간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인식 및 감각의 작용이 프라크리티의 작용임을 깨다다게 될 때 드러난다.  31-32

구나(guna)는 프라크리티로부터 인간의 내적 작용이 시작되도록 하는 동인(動因)으로서 삿트바(sattva) : 밝고 순수하며 평화로운 기운, 라자스(rajas) : 욕망과 집착에서 생기는 격정적인 기운, 타마스(tamas) : 무지에서 비롯되는 어두운 기운이라는 세 가지 속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 삿트바는 라자스나 타마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은 기운으로 보이지만 정신을 육체에 속박당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같다. 즉, 이 세 가지 기운 모두 프라크리티의 작용이 시작되도록 만듦으로서 푸루샤의 환한 빛을 가려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 안에 있는 참자아를 깨닫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33-34

<기타>에서 크리슈나는 허상인 삶 속에서 허상과 싸워 진상에 도달하는 실천 방법을 카르마요가(karma Yoga), 즈나나요가(jnana Yoga), 박티요가(Bhakti Yoga)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설명한다. 흔히 이 세 가지는 행위의 요가, 지혜의 요가, 헌신의 요가로 각각 번역된다.  37

행위를 하되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행하라는 것인데 이것이 곧 카르마 요가(행위의 요가)의 의미이다.  37

‘지혜의 길이 목표로 하는 것과
행위의 길이 목표로 하는 것은 같다.
이 둘은 하나로 보는 자가 참으로 보는 자이다.
행위의 길을 따르지 않고
완전한 포기를 성취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지혜로운 사람은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행위의 길을 통해 빠른 시간 안에 브라흐만에 도달한다. (5:4-6)  39

즈나나 요가(지혜의 요가)는 초월적인 실재에 정신적으로 직접 도달하고자 하는 방법으로서 일상생활 속에서는 자신의 마음이나 인식에 홀연히 일어나는 모든 상념, 구별, 차별 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믿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 이면에 내재한 실재를 보고자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41

박티 요가(헌신의 요가)는 .. 시시각각으로 펼쳐지는 삶의 장면들은 허상이며 진상이 아니라는 것을 굳게 믿으면서 그러한 믿음에 헌신하며 사는 것이다.  41

카르마 요가, 즈나나 요가, 박티 요가를 통해 <기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재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특별한 시기,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시작도 끝도 없이 삶 그 자체가 그것을 깨달아가는 수행의 과정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일상적 삶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되, 결과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홀연히 일어나는 모든 상념, 구별, 차별 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지어낸 허상에 불과하므로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더불어 내가 사는 삶의 장면들은 허상이며 진상이 아니라는 것을 굳게 믿으면서 그러한 믿음에 헌신하며 살아야 한다.  43


<바가바드 기타>의 내용 구성
<기타>는 총 18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장은 전체적인 배경에 대한 설명이, 2장에는 <기타> 전체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3장부터는 2장에 압축적으로 제시된 메시지의 세부 내용 하나하나에 대하여, 아르주나가 질문하면 크리슈나가 대답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르주나는 <기타>를 읽는 독자들이 의문을 가질 만한 부분에 대하여 계속 질문을 하고, 크리슈나는 그것에 대하여 대답을 하므로 독자들은 이러한 아르주나와 크리슈나의 대화를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기타>의 전체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한번 읽는 것만으로 <기타>의 전체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반복하여 읽으면서 읽을 때마다 이해되는 부분들을 퍼즐 맞추듯 끊임없이 맞춰가는 과정을 통해야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
3장에서부터 7장까지는 2장의 내용이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크리슈나의 설명에 대하여 아르주나가 중간중간 질문을 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크리슈나에 의한 일방적인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브라흐만, 아트만, 프라크리티, 구나, 즈나나, 요가, 카르마 요가 등 다양한 개념들에 대하여 간단한 설명이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실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곳곳에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크리슈나의 설명에 대하여 아르주나의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되는 것은 8장부터다. 3장부터 7장까지는 2장에 제시된 전체적인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설명한다면, 8장부터는 이러한 설명에 대한 아르주나의 질문을 통해 2장에 제시된 내용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9장에 제시되는 내용은 앞의 2장에서 8장까지 제시된 내용과 폭과 깊이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지만, 어조가 고양되어 있으며, 이러한 경향이 10장까지 지속되다가 11장에 이르러서는 아르주나의 깨달음에 대한 고백이 시작된다.
12장에서는 박티 요가(헌신의 요가)의 중요성에 대하여 설명한다. 아르주나가 어느 정도 깨달음의 경지에 올랐지만, 한 번 깨달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지속적인 헌신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13장과 14장은 프라크리티와 푸루샤, 구나 등 형이상학적 개념에 대한 쉬운 설명이 제시되며, 15장부터 18장에 걸쳐서는 그 이전까지 이루어졌던 모든 설명이 다양한 예시를 통하여 반복적이고 율동적으로 제시된다.  49-51




즐거움과 괴로움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2:15)  75

무지한 사람들은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말을 최고로 여기고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그것을 떠벌린다.(2:42)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이기적인 욕마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은 쾌락과 초능력을 얻기 위해
갖가지 특별한 의식을 거행한다.
하지만 그들은 욕망에 따른 행위로 인하여
끊임없이 태어나고 죽는 윤회의 바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2:43)  81

그대의 의무는 그대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행위의 결과는 그대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다.
행위의 결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행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고 행위를 피해서도 안 된다.(2:47)  82

경전의 현란한 말과 가르침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깊은 삼매네 안주할 수 있을 때
그대는 완전한 요가를 성취하게 될 것이다. (2:53)  83

감각의 힘은 아주 강하다. (2:60)  84

감각의 대상을 생각하면 그것에 대한 집착이 생기고
집착이 생기면 욕망이 생기고
그 욕망으로부터 분노가 생긴다. (2:62)

분노로부터 어리석음이 생기고
어리석음으로부터 기억의 혼란이 기억의 혼란으로부터 지성의 파멸이 생긴다.
지성이 파멸되면 삶은 황폐해진다. (2:63)  85

감각기관을 제어하지 못하면
지혜와 멀어지고 집중하여 명상하지 못한다.
집중하여 명상하지 못하면 평안을 얻을 수 없고
평안이 없다면 어찌 즐거움이 있을 수 있겠는가?(2:66)  86


깨달은 사람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모든 일을 행함으로써
무지한 사람들이 스스로 따라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3:26)

모든 행위는
타고난 본성적인 기운의 흐름에 의해 저절로 일어난다.
그러나 자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은
‘내가 행위자’라고 생각한다. (3:27)

모든 행위가 세 가지 기운의 상호작용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행위의 결과에 집착한다.
깨달은 사람은 그러한 무지한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면 안 된다. (3:29)  97-98


지혜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어떤 물질을 제물로 바치는 것보다 낫다.
모든 행위는 지혜에 의해 완성된다. (4:33)  108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의 길과 행위의 길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이 둘을 동일한 것으로 본다.
어느 한 길을 통해서든 목표에 도달한 사람은 다른 길을 통해도 똑같은 경지에 이르기 때문이다. (5:4)

지혜의 길이 목표로 하는 것과
행위의 길이 목표로 하는 것은 같다.
이 둘을 하나로 보는 자가 참으로 보는 자이다. (5:5)

행위를 하면서 행위의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감각과 욕망을 정복하여 깨끗하게 정화시킨다.
그들은 만물 속에서 아트만을 보며
그들과 자신이 하나임을 안다.
그들은 무엇을 하든
자신이 행한 행위로 인하여 영향을 받지 않는다. (5:7)

이런 진리를 깨닫고 의식이 참아아와 하나된 사람은 무엇을 하든 자신이 행위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5:8)  111

보고, 듣고, 먹고, 마시고, 만지고, 냄새 맡고 움직이면서도
또 잠자고, 숨쉬고,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감각기관이 그 대상에 작용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5:9)  112

지혜로운 자는
지식과 실천을 겸비한 종교지도자이든
천민이든 코끼리, 소, 개이든 만물을 평등하게 본다. (5:18)

이렇게 만물을 평등하게 보는 자는
이생에서 더 이룰 것이 없다.
그의 마음은 이미 평등한 브라흐만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5:19)  113


자신을 정복하고 완전한 고요함에 이른 자는
춥거나 덥거나 즐겁거나 고통스럽거나
남이 칭찬하거나 욕하거나 언제나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다. (6:7)  117

그렇다.
마음을 제어하는 것은 바람을 재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아르주나여,
규칙적이고 지속적인 수행과
욕망을 버림으로써 마음을 붙잡을 수 있다. (6:35)  122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지고의 본성을 브라흐만이라고 한다.
만물 속에 깃들여 있는 나의 본질을 아트만이라고 하며
만물을 지어내는 그 창조력을 카르마라고 한다. (8:3)  137-138

아르주나여,
브라흐만의 세계를 포함하여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삶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오면 그러한 환생을 하지 않는다. (5:16)  140


어리석은 자들은
존재으 대주재자인 나의 지고의 상태를 알지 못하고
인간의 형상을 한 나를 무시한다. (9:11)

헛된 희망, 헛된 행위, 헛된 지식으로
마음이 혼란한 자는 삶이 온통 악과 재앙뿐이다. (9:12)  145

아르주나여,
믿음으로 충만하여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도
비록 바른 길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를 섬기는 것이다. (9:23)

왜냐하면 나는 일체의 제사를 받는 자이며 그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실로 나를 알지 못하므로
공덕이 다하면 다시 태어난다. (9:24)


기계적인 훈련보다는 지혜의 탐구가 낫고
지혜의 탐구보다는 명상이 나으며
명상보다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포기가 훨씬 낫다.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행위하는 자는 평화를 얻는다. (12:12)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자비로운 사람,
나 또는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으며
고통과 기쁨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모든 것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사람, (12:13)

어떤 상황에나 만족하며
자신을 제어하고 굳은 믿음을 가진 사람,
마음과 생각 전체를 기울여 나에게 몰두하는 사람,
나는 이런 사람을 사랑하며
이런 사람이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다. (12:14)

이런 사람은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으며
세상 또한 이런 사람을 흔들지 못한다.
기쁨, 경쟁심, 두려움, 열망에서 멀리 벗어난 사람,
이런 사람은 나에게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12:15)

무슨 일을 하든지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행하는 순수한 사람,
무슨 일을 하든지 일에 얽매이지 않고
욕망에서 벗어나 행하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따.
이런 사람이 나에게 헌신하는 자이며
나는 이런 사람을 사랑한다. (12:16)  176-177

원수와 친구, 존경과 멸시를 하나로 보며
추위와 더위, 즐거움과 괴로움을
동일하게 여기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12:18)

비난과 칭찬을 동일하게 여기며 침묵하며
어떤 상황에도 만족하는 사람,
거주처에 대한 집착 없이 마음이 확고부동한 사람,
나는 언제 어디서나 나만을 바라보는 이런 사람을 사랑한다. (12:19)  177


아르주나여,
이 육체를 ‘밭’이라고 하고
밭을 알고 경작하는 존재를 ‘밭을 아는 자’라고 한다. (13:1)

아르주나여,
내가 곧 밭을 아는 자이다.
밭과 밭을 아는 자를 동시에 아는 것이 참다운 지혜이다. (13:2)  183

아르주나여,
물질적인 원소, 감각기관, 감각대상
작용기관, ‘나’라는 생각, 기억능력, 분별능력
그리고 아직 물질로 나타나지 않은 에너지 등
이것으로 구성된 것이 밭이다. (13:5)

욕망과 증오, 쾌락과 고통, 육체와 지성
의지의 다양한 형태 등이 밭의 변화이다. (13:6)

밭의 구성요소와 그 변화를 아는 사람은
오만과 거짓에서 벗어난다.
비폭력, 용서, 정직, 순수, 스승에 대한 헌신 등이
그들의 특징이다. (13:7)

그들은 내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잘 제어하고 감각대상과 자아의 욕망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생로병사와 고통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13:8)

밭의 구성요소와 그 변화를 아는 사람은 소유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다.
아내와 자식들에 대해서도 애착을 가지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행운이나 불행을 평등한 눈으로 바라본다. (13:9)

이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에게 헌신하며
세상 사람들과 무리지어 어울리기보다는
한적한 곳에 홀로 있으면서
오직 나를 찾는 일에 몰두하는 것을 좋아한다. (13:10). 184-185

프라크리티와 푸루샤는 둘 다 시작이 없다.
물질의 세 성질과 변화는 모두 프라크리티에서 비롯된다. (13:19)

프라크리티가
모든 행위의 원인이며 결과이며 행위자이다.
하지만 모든 쾌락과 고통의 향수자는 푸루샤이다. (13:20)

푸루샤는 프라크리티 안에 머물면서 프라크리티에서 비롯된 구나의 활동을 지켜보며 경험한다.
구나의 활동에 대한 집착이
선과 악의 세상에의 탄생의 원인이 된다. (13:21)

육체 안에 머물고 있는 지고한 푸루샤는
지켜보는 자이며 인도하는 자이다.
그는 향수하는 자이며 지탱하는 자이다.
그는 향수하는 자이며 지탱하는 자이다.
그가 곧 지고한 참자아이며 대주재자이다. (13:22)  187


삿트바, 라자스, 타마스라는 물질의 세 성질은
불멸의 자아를 육체 속에 가두어 놓는다. (14:5)

삿트바는 밝고 순수하며 평화로운 기운이다.
그러나 삿트바에서 비롯되는 행복과 지혜에 대한 집착은 정신을 육체에 속박 당하게 한다. (14:6)

라자스는 욕망과 집착에서 생기는 격정적인 기운이다.
라자스의 격정적인 활동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소유주인 참자아가 미혹에 갇힌다. (14:7)

타마스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어두운 기운이다.
타마스의 어두운 힘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소유주인 참자아가 미혹에 갇힌다.
모든 존재들이 이 기운으로 말미암아
둔함과 게으름의 잠에 빠진다. (14:8)

아르주나여, 삿트바는 그대를 행복하게 집착하게 하고 라자스는 그대를 활동으로 몰아넣으며
타마스는 그대의 지혜를 덮어 미혹에 빠지게 한다. (14:9)

어떤 때는 삿트바가 라자스와 타마스를 제압한다.
어떤 때는 라자스가 삿트바와 타마스를 제압한다.
어떤 때는 타마스가 라자스와 삿트바를 제압한다. (14:10)

삿트바의 밝고 고요한 기운이 우세할 때는
육체의 모든 세포가 지혜의 빛으로 밝아진다. (14:11(

라자스의 활동적인 기운이 우세할 때는
이기적인 욕망과 집착, 불안 등으로 인해
끊임없이 활동으로 내몰린다. (14:12)

타마스의 어두운 기운이 우세할 때는
무지와 혼란과 게으름과 망상에 빠진다. (14:13)

죽음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삿트바의 밝고 고요한 기운이 우세하면
그는 현자들이 사는 순수한 곳으로 간다. (14:14)

라자스의 활동적인 기운이 우세하면
그는 행위가 지배하는 세상에 태어난다. (14:15)

타마스의 어두운 기운이 우세하면
그는 무지한 존재의 자궁으로 들어간다. (14:15)

선한 행위는 삿트바의 열매이며
고통은 라자스의 열매이고
무지는 타마스의 열매이다. (14:16)

지혜는 삿트바에서 생기고
탐욕은 라자스에서 생기며
무지와 혼란과 미망은 타마스에서 생긴다. (14:17)

삿트바에서 사는 사람은 위에 있는 세계로 가고
라자스에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며
타마스에서 사는 사람은 아래에 있는 세계로 간다. (14:18)  192-194


어떤 사람은 신적인 길을 따라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악마적인 길을 따라 살아간다.  (16:6)

악마적인 길을 가는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열심히 한다.
그들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순수한 것이며
무엇이 진리인지를 모른다. (16:7)

그들은 신이 없다고 말한다.
진리도, 영적인 법칙이나 질서도 없다고 말한다.
세상 만물은 욕망에 의해 우연히 태어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16:8)

이러한 견해를 고집하면서
자기가 아는 부분적인 지식을 최고로 여기면서
이 세상을 고통과 파멸로 몰아넣는 짓을 서슴없이 행한다. (16:9)

그들은 위서노가 자만심과 오만에 사로잡혀있다.
그들은 부질없는 망상에 빠져 살고 있다.
그들의 탐욕은 끝이 없다. (16:10)

그들은 만족할 줄 모르고 이기적인 욕마을 추구한다.
그들은 감각적인 즐거움을 최고라고 생각하며
죽는 날까지 갈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6:11)

그들은 수만 가지 갈망의 올가미에 걸려
탐욕과 분노의 힘에 내몰린다.
욕망의 충족을 위해 재물을 모으는 데 집중한다. (16:12)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지금 이것을 얻었고 이 소원을 성취할 것이다.
이것은 내 것이고 이 재물은 나의 것이 될 것이다.’ (16:13)

‘나는 나의 적을 없애 버렸다. 내일은 다른 적을 없애 버릴 것이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다.
나는 원하는 것을 내 마음대로 즐길 수 있다.
나는 성공했고 힘이 있으며 행복하다.’ (16:14)

‘나는 부유하고 고귀한 집안의 출신이다. 나와 견줄 자는 없다.
나는 제사를 올릴 것이며 보시를 행할 것이며 즐거울 것이다.’ (16:15)

이렇게 탐욕의 올가미에 묶이고 망상의 거미줄에 걸린 사람은 탐욕을 좇다가 마지막에는 어두운 지옥에 떨어진다. (16:16)

그들은 자만심이 강하고 완고하며 돈이 있다고 우쭐해 한다.
제사를 드려도 제사의 참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남에게 보이려고 할 뿐이다. (16:17)  206-208

욕망과 분노와 탐욕은
스스로를 파멸의 지옥으로 던져 넣는 세 가지 문이다. (16:21)  209


인간의 믿음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밝고 고요한 기질에서 비롯되는 믿음,
격정적인 기질에서 비롯되는 믿음,
어두운 기질에서 비롯되는 믿음이다. (17:2)

아르주나여,
믿음은 그 사람의 기질을 닮는다.
사람의 특성은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특성이다.
그 사람의 믿음, 그것이 바로 그다. (17:3)

기질이 밝고 고요한 사람은 신을 숭배한다.
기질이 격정적인 사람은 부와 권력을 숭배한다.
기질이 어두운 사람은 귀신을 섬긴다. (17:4)  210-211

신과 지혜로운 사람과 영적인 스승을 섬기는 것,
청결함과 단순함과 절제와 비폭력,
이것이 몸의 고행이다. (17:14)

위로하는 말과 진실한 말을 하는 것,
친절하고 유익한 말을. 하는 것,
규칙적으로 경전을 낭독하는 것,
이것이 말의 고행이다. (17:15)

고요함과 부드러움과 침묵을 지키는 것,
자기를 제어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는 것,
이것이 마음의 고행이다. (17:16)

기질이 밝고 고요한 사람은
지극한 믿음으로 결과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고
이 세 가지 훈련을 한다. (17:17)

기질이 격정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또는 칭찬을 받기 위하여 고행을 한다.
그들의 고행은 불안정하며 지속성이 없다. (17:18)

기질이 어두운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하여
또는 다른 사람들 파멸시키기 위하여 고행을 한다. (17:19)

기질이 밝고 고요한 사람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당연히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베푼다.
그들은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한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 (17:20)

기질이 격정적인 사람은
대가를 기대하면서 마지못해 자선을 베푼다. (17:21)

기질이 어두운 사람은
때와 장소가 적절치 못한 상황에서 적절하지 않은 사람에게 존중하는 마음도 없이 자선행위를 한다. (17:22)

‘옴’ ‘타트’ ‘사드’ 이 세 개의 음절은 브라흐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세 음절로 표현되는 브라흐만에서
사제와 경전과 제사의식이 나왔다. (17:23)

그러므로 베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제사와 수행과 자선을 시작할 때 ‘옴’을 음송한다. (17:24)

오직 해탈을 추구하며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제사와 고행과 자선을 행하는 이들은
그런 행위를 하는 도중에 ‘타트(tat)’를 음송한다. (17:25)

‘사드(sat)’는 ‘실재’라는 뜻과 ‘선(善)’이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드’는 올바른 행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17:26)

제사와 고행과 자선을 흔들리지 않고
행하는 것도 ‘사드’라고 하며
제사와 고행과 자선에 어울리는 다른 모든 행위도 ‘사드’라고 한다. (17:27)

그러나 아르주나여,
믿음이 없이 행하는 제사와 고행과
자선은 ‘아사드(asat)’라고 한다.
‘아사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아사드’는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아무 쓸모가 없다. (17:28)  212-215


욕망에 종속된 모든 행위를 버리는 것이 포기이며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초연함이 단념이다. (18:2)  216

아르주아나여, 잘 들어라.
내 이제 그대에게 세 가지 종류의 단념에 대해서 말해 주겠다. (18:4)

행위를 포기하는 것은 미망에 사로잡힌 결과이며
그것은 타마스에서 비롯된다. (18:7)

단지 두렵거나 귀찮아서 행위를 포기하는 것은
라자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포기로는 초월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18:8)

주어진 일을 의무로 알고 결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행하는 것은 삿트바에서 비롯된다. (18:9)  217

삿트바에서 비롯되는 포기로 가득찬 자는
싫어하는 일이라고 해서 꺼리지 않으며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서 집착하지도 않는다. (18:10)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행위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정한 포기는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것이다. (18:11)  219

인식과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주체,
이 구분에 의하여 행위는 재촉되며
감각기관, 행위자, 행위 그 자체,
행위는 이 세 가지로 구분되어 파악된다. (18:18)

물질의 세 가지 기운의 차이에 따라
인식과 행위와 행위자는 그 성격이 달라진다.
이제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 말해주겠다. (18:19)

모든 존재 속에서 불멸하는 하나의 실재를 보며
분리되어 있는 만물 속에서 분리되지 앟은 통일성을 보는 것,
이것이 삿트바에서 비롯되는 인식이다. (18:20)

만물을 서로 분리되어 있는 개체로 인식하는 것,
이것은 라자스에서 비롯되는 인식이다. (18:21)

아무런 근거도 없이 아주 작은 부분을 전체로 아는 것,
이것은 타마스에서 비롯되는 인식이다. (18:22)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마음으로
묵묵히 자신의 의무를 행하는 것
이것은 삿트바에서 비롯되는 행위이다. (18:23)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또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
이것은 라자스에서 비롯되는 행위이다. (18:24)

행위의 결과로 오게 될 손실이나
다른 사람이 받을 고통이나 상처를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
이것은 타마스에서 비롯되는 행위이다. (18:25)

집착에서 벗어나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
성공과 실패를 동일하게 여기는 사람은
삿트바적 행위자이다. (18:26)

욕망을 가지고 행위의 결과를 바라며
순수하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행복과 불행에 웃고 우는 사람은
라자스적 행위자이다. (18:27)

자신을 전혀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
저속하고 완고하고 남을 속이는 사람
게으르고 낙담을 잘하며 매사를 질질 끄는 사람은
타마스적 행위자이다. (18:28)  219-221

아르주나여, 잘 들어라.
내 이제 그대에게 물질의 세 가지 기운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세 종류의 지성과 의지에 대하여 말해 주겠다. (18:29)

행하는 것과 행하지 않는 것
안전한 것과 안전하지 않은 것
자유로운 것과 속박 당하는 것을 아는 것은
삿트바에서 비롯되는 지성이다. (18:30)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이것은 라자스에서 비롯되는 지성이다. (18:31)

미망에 가려져
옳은 것을 그른 것으로, 그른 것을 옳은 것으로 여기며
모든 것을 왜곡해서 아는 것은
타마스에서 비롯되는 지성이다. (18:32)

마음과 호흡과 감각기관을 잘 다스리는 것
이것은 삿트바적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18:33)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여
부와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라자스적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18:34)

잠, 두려움, 슬픔, 낙심, 교만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타마스적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18:35)  221-222

아르주나여, 잘 들어라.
내 이제 그대에게 물질의 세 가지 기운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세 가지 행복에 대하여 말해 주겠다.
이것을 알고 훈련하면 그대의 고통은 끝나리라. (18:36)

삿트바에서 비롯되는 행복감은 처음에는 독약처럼 쓰지만 마지막에는 감로처럼 달다.
그것은 참자아에 대한 깨달음과 지혜의 청정함에서 생긴다. (18:37)

라자스에서 비롯되는 행복감은
처음에는 감로처럼 달지마 마지막에는 독약처럼 쓰다.
그것은 감각과 그 대상의 접촉에서 생긴다. (18:38)

타마스에서 비롯되는ㄴ 행복감은
수면, 무지, 게으름, 방만에서 온다.
이런 행복감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아를 미혹시킨다. (18:39)  222-223

사람은 타고난 기운에 따라
브라흐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구분된다. (18:41)

브라흐만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에게는
자기절제, 고요, 순결한 가슴, 인내,
겸손, 진리추구, 고행, 지혜, 믿음 등을
완성할 의무가 주어져 있다. (18:42)

크샤트리아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에게는
용기, 힘, 꿋꿋함, 민첩함, 관대함, 지도력,
그리고 전쟁에서 물러나지 않는 결단력 등을
완성할 의무가 주어져 있다. (18:43)

바이샤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에게는
농사, 목축, 상업 등을 성공시켜야 할 의무가 주어져 있으며
수드라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섬기며 봉사할 의무가 주어져 있다. (18:44)  223-224



후기를 대신하여 - 21세기 현대인에게 <바가바드 기타>가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기타>는 왜곡된 인식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왜곡된 인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살아가면서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왜곡된 인식에서 벗어나 조금씩 맑은 인식을 가질 수 있다고 대답하고 있다.
다음 두 가지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노력은 <기타>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홀연히 드는 생각과 느낌을 멈추려고 항상 노력하자.’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느낌에 머물지 말고 항상 그 반대의 것을 생각하자.
예컨대, 기쁠 때는 슬플 때를 생각하고, 슬플 때는 기쁠 때를 생각하자.’  239-240




부록

요가의 전통은 마음의 발달에서 외적 권위나 형식보다는 개인적, 구체적인 체험을 우선 중요시한다. 즉, 요가의 전통은 마음의 발달기준을 마음 밖에 있는 외적 권위나 형식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마음 안에서 찾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외적 권위나 형식을 중요시하는 인도의 종교적 전통에서 정통이 아닌 이단으로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야 했다.  242

베다(veda)시대에 제사 중심의 브라흐만교는 제사의 형식주의의 오류를 경계하는 요가의 영향으로 형이상학적 사고 중심의 우파니샤드(Upanisad) 철학을 낳았다. 우파니샤드 철학의 출현은 이단에 머물던 요가의 전통이 정통으로 인정되어 표면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타>에 이르러 기존의 모든 종교적 입장은 요가의 입장에서 재통합되었으며 이것은 곧 정통과 이단의 긴 싸움에서 이단에 머물던 요가의 전통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
<기타>가 성립된 시기는 인도철학이 체계화되어 학파가 성립되기 시작한 시깅와 거의 동시대이다. ..
요가(yoga)믐 그 자체에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요가라는 말이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것이 역사적으로 형성, 발전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요가는 수세기를 거치는 동안 개인적인 정신적 각성 또는 깨달음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들 - 가장 초보적인 것에서 가장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정신적 기법과 이론 - 을 흡수, 통합함으로써 형성된 개념이다.  243

베다의 제식 주의에 요가의 요소가 결여될 때 나타나는 한계를 ‘형식주의’라는 말로 표현한다면 우파니샤드의 형이상학적 사고에 요가의 요소가 결여될 때 나타나는 한계의 ‘주지주위’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형식주의와 주지주의가 공통으로 드러내는 위험은 정신적 고갈, 생동감 결여, 직접적 체험의 결여 등으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개인적인 정신적 각성, 깨달음에 대한 구체적 체험을 추구하는 요가 전통의 완전 승리는 아직 미진했다.  248

<기타>와 요가
인도의 서북부로부터 들어와 인더스강과 쟘나강 사이에 자리를 잡고 브라흐만 계급의 주도하에 발전했던 아리안 족의 베다 문화는 기원전 6~7세기경부터 동쪽으로 확대되어 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철기 문화의 수입으로 여태껏 밀림지대였던 곳이 개간되어 농작지가 확대되고 생활이 윤택해짐에 따라 갠지즈강 중류 동쪽에는 여러 곳에 상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문화가 건설되었다. 이에 따라 촌락과 씨족 단위의 유대관계를 기반으로 형성되어 왔던 브라흐만교의 지위는 자연히 흔들리게 되었다. 더욱이 아리안 족의 동점(東漸, 세력을 점차 동쪽으로 옮기어 감)으로 인하여 원주민과의 인종적 혼합도 생기게 되어 정통 브라흐만 계급의 사회적 특권이나 베다의 종교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나 자이나교와 같은 새로운 자유사상적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연히 이러한 자유사상적 운동은 종래의 브라흐만교의 전통에 커다란 충격을 가하였다. 브라흐만교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베다의 제사의식과 이에 따르는 브라흐만 계급의 종교적, 사회적 권위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나 자이나교는 강한 윤리적 합리성에 입각한 종교ㅗ서 반제사주의적 성격을 지녔고 사회적으로도 평등주의적인 윤리관으로 인하여 브라흐만 계급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브라흐만교의 지도자들은 불교와 같은 자유사상적 운동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전통을 재정비할 필요를 느꼈다. 사실상 앞에서 살표본 바와 같이 불교 등이 표방ㅇ하는 자유사상적 경향은 이미 브라흐만교의 내부에서도 일어나 우파니샤드 사상의 배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브라흐만교 내부에서는 아리안 계통이 아닌 인도의 원주민들에게 깊이 뿌리 내리고 있던 토착신앙과의 결탁을 통하여 대중운도응로의 발전과 불교에서 비교적 등한시하는 생활규범으로서의 사회윤리체계의 확립에 힘쓰는 등 다방면에 걸친 재정비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재정비 노력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것은 기존의 요가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그것을 체계적을 발전시킨 것이다. 브라흐만교의 이러한 추세를 잘 반영해주고 있는 문헌은 기원전 약 200년경에 완성되었다고 여겨지는 서사시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이다. 특히 마하바라타 중에 있는 <기타>는 그 당시 요가의 전통과 관련된 브라흐만교의 사상적 경향이 집약적으로 나타나 있는 문헌이다.  248-250

<기타>는 박티 종교의 관점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종교, 철학적 관점을 모두 받아들인다. 베다의 제식 주의 관점도, 우파니샤드의 형이상학적 관점도, 요가 학파와 상캬 학파의 철학적 관점, 그리고 박티 종교의 관점까지 <기타>는 한 체계로 통합한다. 이러한 상호 이질적인 여러 관점을 한 체계 안에 승화시키는 <기타>의 관점이 바로 요가이다.  251

모든 것을 요가의 관점에서 통합한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을 오로지 마음과의 관련 하에서 설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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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 우파니샤드, 인도 철학과 사상의 바이블

우파니샤드는 인도 정신문명의 뿌리인 베다의 꽃이요 열매다. 베다 정신의 총합이 곧 우파니샤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베다의 마지막 결정체라는 뜻으로 우파니샤드를 베단타 철학이라 이른다. 베단타 철학은 우파니샤드의 내용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다른 이름이다.  13-14

우파니샤드 이전에 인도 최초의 고전적 경전인 베다가 신화와 제의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전개했다면, 우파니샤드는 신화와 제의적 겉치레에 종지부를 찍고 인간 내면의 각성과 탐구에 중점을 두는 세계관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구약성서의 모세 율법에 대해 신약성서의 예수가 사랑의 율법을 새롭게 천명한 것과 같다. 따라서 베다를 구약성서에 비유한다면, 우파니샤드는 신약성서에 비유되기도 한다.  15


우파니샤드는 어떤 철학인가 - 우주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가르침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다. 인더스 문명이 발원하던 기원전 3000년 무렵 이후 오랜 침묵의 세월이 흐른 뒤, 서부 아시아에서 아리아인들이 인도 대륙을 점령해 들어오면서 새로운 인도 문화를 꽃피운다. 그 문화의 꽃이 인도 초기의 고전적 종교 경전으로 손꼽히는 유명한 <리그베다>(Rig Veda)에 드러나 있다. 이 경전은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000년 무렵에 형성된 것으로, 우주 창조의 노래, 최초의 인간의 탄생 과정, 죽음과 장례의 노래, 그리고 제의와 각종 신들에 대한 찬가로 가득차 있다.
그 후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 500년간 <리그베다>에 나타난 고대 사상을 인간 내면의 세계와 결부시켜 철학적으로 발전시킨 고전적 지혜의 담론이 우파니샤드(Upanishads)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우파니샤드가 인도 문화와 종교, 사상의 꽃을 피우던 기원전 6세기 무렵에는 자이나교의 창설자 마하비라(Mahavira, 기원전 540~기원전 468)와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 기원전 563~기원전 483)가 나타나 동시대에 각각 다른 형태의 종교적 가르침을 펼치기도 했다. 이 시대에는 브라만(brahman) 계급을 중심으로 한 바라문교와 불교 그리고 자이나교가 널리 퍼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서기 1000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인도에서 불교의 위력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그 후 이슬람 문명의 침입으로 힌두 문명과 함께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문명과 충돌 또는 습합(習合)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19-20

10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도시 중심의 부와 중앙집중식의 권력이 와해되었고, 질서가 무너지면서 통제가 불가능해진 시기에 아리아인(‘고귀한 자’라는 뜻)들이 침입해왔고, 인더스 강의 지류가 변하는 지리학적 변화와 함께 찬란했던 고대 인더스 문명은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리아인들이 백지 상태에서 전혀 새로운 문명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인더스 문명은 잔존해 있었고, 남쪽이나 갠지스 강변에 흩어져 있던 피정복민인 비(非)아리안 민족 속에서도 인더스 문명은 전승되고 있었다. 바로 이들이 간직한 인더스 문명은 전승되고 있었다. 바로 이들이 간직한 인더스 문명이 아리아인들의 문화 속으로 유입되면서 또 하나의 위대한 문명, 곧 인도-아리안 문명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
인더스 문명의 원주민들이 농업을 중심으로 한 농부들이었다면, 아리아인들은 목축업을 위주로 하는 유목민들 이었다.  24

문학적 형태로 된 우파니샤드는 그 문헌의 수가 200개를 넘어선다. 하지만 대개 인도의 전통에서 그 수를 108개로 제한하고 있는데, 이는 <묵티카 우파니샤드>(Miktika Upanishad)에서 구원(해탈)은 108개의 우파니샤드를 공부해야 가능하다고 한 데서 비롯된다.  40

우파니샤드에서 진리란 특정 개인에 속한 것이 아니며 영원한 것이고, 영감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신의 계시와 인간의 응시(contemplation)라는 두 측면을 지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42

우파니샤드는 분명 체계적이고 짜임새 있는 철학적 성찰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정신적 각성과 계몽의 수단으로 작용하며, 고도의 추상적이고도 풍부한 영적 경험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추상적이라 해도 인간의 개인적 경험의 차원을 떠나 있는 것도 아니며 논리적 이성을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내면의 명상에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향한 진정한 지식의 추구라는 점에서 실천적 수행의 차원을 담고 있는 구원의 철학 체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파니샤드의 철학, 곧 브라흐마 비드야는 삶을 통한 지혜의 추구 그 자체다.  43

“진실로 먼저 브라만이 있었다. 그는 오직 그 자신에 대해 ‘나는 브라만이다’라고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이 되었다. 신들 중에 누구든지 이 사실을 진실로 깨달은 자는 그와 같이 되었다. 이것은 현자들이나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실로 현자 바마 데바도 이것을 알고 ‘나는 마누(Manu)였고 태양이었다’고 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이와 같이 ‘나는 브라만이다’라는 깨달음을 얻으면 이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신들도 이같이 브라만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하는 까닭은 깨달은 자는 신들의 아트만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자신과 브라만을 다르게 생각하면서 (그 자신의 아트만 외에)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자는 깨달은 자가 아니다. 그는 신들에게 희생되는 동물과 같다. 짐승들이 사람에게 봉사하듯 그도 신들에게 봉사할 따름이다. 한 마리의 짐승이 없어져도 기분이 나쁠 텐데 많은 짐승들이 없어진다면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신들은 인간이 (브라만을) 깨닫게 되는 것을 조항하지 않는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4.10)
우선 브라만의 우선성을 말하고 있다. … 브라만에게서 만물이 시작되고 만물이 그에게 귀속됨을 말한다. 그런데 그 브라만이 바로 깨닫는 자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이다. ..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 누구에게나 유효하다. …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 행위는 동물들이 인간에게 봉사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그러므로 자신과 브라만의 동일성을 깨닫지 못하고 제사나 드리는 행위는 짐승 같은 행위에 불과하다고 혹평한다.  44-45

“사칼리야가 말했다.
‘야즈나발키야여, 쿠루-판찰라의 브라흐마나를 경시하면서까지 그대가 안다고 말하는 바라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나는 신들과 신들의 기반이 되는 사방의 방향을 알고 있소.’
야즈나발키야가 대답했다.
‘그대가 신들과 그 신들의 기반이 되는 방향을 안다면 동쪽 방향은 어떤 신이라고 생각하오?’
‘태양신이오.’ 야즈나발키야가 대답했다.
‘그러면 태양신의 기반은 무엇이오?’
‘눈(眼, caksus)이오.’
‘눈의 기반은 어디요?’
‘형태(色, rupa)요.’
‘형태의 기반은 어디요?’
‘마음(hrdaye)이오. 마음을 통해 형태를 알 수 있기 때문이오. 오직 마음에만 형태가 기반할 수 있는 것이라오.’ 야주나발키야가 대답했다.
‘야즈나발키야여, 옳은 말씀이오.’”(<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I.9.20)  46-47

“‘남쪽을 그대는 어떤 신으로 여기시오?’
‘죽음의 신이오.’ 야즈나발키야가 대답했다.
‘그러면 죽음의 신의 기반은 무엇이오?’
‘사제에게 바치는 봉헌 제물이오.’
‘사제에게 바치는 봉헌 제물의 기반은 무엇이오?’
‘믿음이오. 믿음이 있을 때 사제에게 봉헌 제물을 바칠 수 있기 때문이오.’
‘그러면 믿음의 기반은 무엇이오?’
‘마음이오.’
‘마음을 통하여 믿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오. 실로 마음에만 믿음이 기반할 수 있는 것이라오.’ 야즈나발키야가 대답했다.
‘야즈나발키야여, 옳은 말씀이오.’”(<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I.9.21). 47-48

제사도 희생적 봉사도 중요하지만 우파니샤드는 브라만과 아트만을 이해하는 지혜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55



1 둘이 아닌 하나의 세계 - 우파니샤드의 불이론

“이제 실로 세 개의 세계가 있다. 인간의 세계, 조상의 세계, 신들의 세계가 그것이다. 인간의 세계는 자식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지 다른 수단을 통하여 되는 것이 아니다. 조상들의 세계는 의례와 같은 행위로 구제되는 것이고, 신들의 세계는 지혜로 획득된다. 실로 신들의 세계는 최상의 세계다. 그러므로 지혜를 찬양하라.”(<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5.16)  
현실적 인간의 세계와 죽은 조상들의 세계, 그리고 죽음이 없는 영원한 신들의 세계라는 세 개의 세계를 상정해놓고, 가장 중요한 세계는 바로 신들의 세계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신들의 세계는 과거처럼 동무르이 희생 제의 같은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지혜를 통해 획득되는 세계다. 그러므로 우파니샤드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지혜다. 산스크리트어의 ‘비드야’(vidya)는 엄격한 의미에서 ‘지식’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세속적인 지식이라기보다는 궁극적 실재를 아는 지식이다. 그런 점에서 이성의 감각에 기초한 지식이라기보다는 직관적 또는 계시적 통찰력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71-72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은 인도 전통 풍속이 관습적으로 지녀오던 카스트(Caste)의 굴레에 매여 있지 않다. 오히려 영적 우주의 세계로 인간의 영역을 확대시키고 있다. ‘그것이 바로 너다’라는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의 선언에서처럼, 인간은 더 이상 어떤 제도와 풍습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본질인 브라만, 그것(Tat)과 다르지 않다는 혁명적인 선언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다시 묻고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인간이 도달하게 되는 최종의 목적은 다음 세상에 더 좋은 하늘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카르마(karma, 業)의 우주적 법칙에서 벗어나 참된 영혼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우파니샤드가 베다의 내용을 중시하고 그것을 깊이 연구 계승하고는 있지만, 가장 중심이 되는 내용은 훌륭한 스승들의 개인적인 경험과 가르침을 토대로 하고 있다. 대표적인 스승들 가운데 야즈나발키야와 샨딜리야 같은 이들이 있으며, 이들이 제자들과 나누는 대화가 우파니샤드의 중심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그 중심 주제는 바로 ‘내가 곧 브라만’이라는 생각의 결론을 얻는 것이다.  78-79



2 위대한 실재, 만물의 근원 - 우파니샤드의 본령 브라만

도이센은 브라만의 사상적인 체계를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첫째, 신학(Theology)은 만물의 첫번째 원리로서의 브라만에 대한 교리이며, 둘째, 우주론(cosmology)은 우주를 형성하게 된 원리로서의 진화에 대한 교리다. 셋째, 심리학(Psychology)은 자신으로부터 전개된 우주 속으로 침투하게 되는 영혼으로서의 브라만의 출현에 대한 교리이며, 넷째, 종말론(Eschatology)과 윤리학(Ethics)은 죽음 이후의 영혼의 운명에 대한 교리와 그에 따라 요청되는 삶의 윤리다.  81-82

브라만의 속성과 본질을 이해하려는 대화 가운데 우선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호흡히었고, 그 호흡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었다. 동시에 호흡은 근원자로서의 브라만이다. 그런데 호흡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아닌 것’이고,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성찰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신앙과 사색’에 기초한다고 말한다. 이 ‘신아오가 사색’이 브라만을 이해하는 신학적 진술의 토대가 된다.
그다음 단계로 가면 신앙과 사색을 올바로 하기 위한 방편으로 견고하게 스승을 공경하는 것과 수행하는 가운데 절제와 집중이라는 실천이 요구된다. 수행은 무한함을 의식하는 기쁨 속에서 가능하다. 그 무한의식이 바로 자아의식과 결부되며 궁극적으로 브라만과 하나 되는 길이 된다. 브라만의 영원성 또는 불멸성의 자유에 이르는 과정에서 수많은 일과 학문과 언어와 노래 등은 부차적으로 존재하는 요소일 뿐이다.  94

인도의 정통 바라문들은 궁극적 진리인 브라만을 이해하기 위한, 그리고 브라만과 하나 되기 위한 이른바 구원의 길, 곧 해탈에 이르는 네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을 아쉬라마라고 부르는 데, 바로 인생의 네 가지 주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 첫 번째는 베다를 공부하는 학습기인 브라흐마차린(brahmacarin)이고, 두 번째는 제사의 의무와 선행을 수행하는 가주기(家住期) 그리하스타(Grihastha), 세 번째는 숲속에서 엄격한 금욕을 수행하는 은둔기 바나프라스타(Vanaprastha), 네 번째는 인생의 마지막 단계로 방랑 걸식하며 영혼의 해방을 추구하고 유행(遊行)하는 산야신(Sannyasin :  방랑 고행자)이자 비구(bhikshu)로서의 삶인 파리브라자카(Parivrajaka)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진정한 아트만, 곧 지고의 아트만을 깨닫고 해탈을 얻게 되는 것으로 설명.  95

“아트만은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neti nnety atma). 이해될 수 없기에 ‘이해될 수 없는 자’이며, 파멸될 수 없기에 ‘파멸될 수 없는 자’이고, 집착하지도 않기에 ‘집착하지 않는 자’이며, 얽매여 있지도 않고 고통을 받지도 않기에 ‘고통이 없는 자’다  …… 깨달은 사람은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그것이 그에게 괴로룸을 주지 못한다.”(<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V.4.22)  96

“모든 베다가 말하고(padam) 있고 모든 고행자가 언급하는, 그리고 베다의 지식을 공부하는 생도의 삶을 살면서 열망하게 되는 그 단어를 그대에게 한마디로 말하겠다. 그것이 옴이다.” (<카타 우파니샤드> I.2.15)
모든 베다라는 것은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주르베다> 아타르바베다>를 의미한다. 이 베다가 말하는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이 바로 ‘옴’이라는 것이다.  104-105

‘옴’의 뜻과 기능은 그리스도교에서 ‘그렇게 될 줄로 믿는다’는 의미로 말하는 ‘아멘’(Amen)과 같다.  106

“악의 길을 단념하지 않는 자, 마음의 평정을 얻지 못한 자,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는 자,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자는 올바른 지식으로도 아트만에 도달하지 못한다.” (<카타 우파니샤드> I.2.24)  113

“빛과 순수의 본질로 인간의 내면에 있는 이 아트만은 진리와 고행과 (아트만을 아는) 올바른 지혜, 그리고 꾸준히 정숙함을 유지하는 것으로 얻어진다. 불완전한 것들을 떨쳐버리는 금욕적인 수행을 통해 그는 아트만을 보게 되리라.” (<문다카 우파니샤드> III.1.5)
압축해서 말하면 진리와 고행이다. …
고행으로서의 마음의 집중 또는 마음의 평정 이외에도 여전히 금욕적 수행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때의 금욕은 정숙함을 유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비움으로서의 도덕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114

아트만(브라만)에 이르는 영성적 삶이 윤리 차원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를 살펴보았다. 브라만에 이르기 위해서는 첫째, 올바른 스승을 일과 다섯 가지의 엄격한 수행이 요구되며, 그 다섯 가지 수행은 내면의 평정, 자기억제, 비움, 인내, 집중이다. 이러한 수행의 조건들이 몇몇 다른 부차적인 수행들과 함께 후기 우파니샤드의 전체적인 내용과 골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114-115



3 아트만을 알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니 - 브라만에 이르는 초월적 지식

우파니샤드에서 아트만은 북과 북소리의 비유를 통해 상징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북을 칠 때 들리는 다양한 소리를 모두 파악할 수는 없지만 북과 북치는 사람의 두들김을 알면 소리도 구분하여 들을 수 있다. 고동을 불면 밖으로 들리는 고동 소리를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고동과 고동 부는 방법을 알면 그 소리를 구분하여 들을 수 있다. 비나(vina: 기타와 유사한 고대 현악기)를 연주할 때 들리는 소리를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비나와 비나의 연주법을 알면 그 소리를 구분하여 들을 수 있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4.7~9)
아트만이 북 같은 악기라면 우주의 현상은 그 악기의 연주 소리에 비유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연주 소리의 이해는 오직 악기를 알 경우에만 파악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우주의 다양한 현상도 아트만을 이해함으로써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139-140

“그것에 의해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되고 감지할 수 업는 것을 감지하고 이해될 수 없는 것이 이해된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I.1.3)
모든 참 지식은 아트만과 관련된 진리를 알지 못하고서는 참 지식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다. … 아트만 이외의 모든 현상적 사물세계는 앞서본 바와 같이 ‘오직 명칭’(nama eva)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140

“아트만은 감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자기원인을 자기는 스스로 존재하는 아트만이 우리의 감각 기관을 밖으로 향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감각적 인식은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지 않고 밖으로만 향한다. 그러나 일부 지혜로운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찾아 그의 눈을 내면으로 돌려 아트만을 발견한다.” (<카타 우파니샤드> II.1.1)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부세계를 바라보고 거기에 만족하고 산다. 그러나 일부 영혼이 성숙한 지혜로운 자들은 내면의 세계로 주의를 돌려 아트만을 찾고 불멸을 얻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감각이 쓸데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적절히 잘 조절되고 통제되면 점차 높은 단계의 초월적 지식으로 가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감각의 눈’에서 ‘초월의 눈’으로의 전환이 필요할 뿐이다. ‘초월의 눈’은 영적인 눈이다. 우파니샤드는 일반적으로 감각을 조절하라고 말하지 억압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영적인 추구는 신적 계시 속으로 들어가는 영혼의 지고한 여행이다.  141-142



4 만물의 근저에 실재 주의 실재로 내재하다 - 만물이 발생하는 원리

“실로 그대들은 모두 이 바이쉬바나라 아트만을 부분적으로만 알고 그대들의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 바이쉬바나라 아트만(우주적 자아)을 자신의 아트만(개체적 자아)으로 알고, 또는 (우주를 측정하는)새로운 특정 도구로 알고 명상하는 자는 모든 세상에서, 모든 존재들 가운데서, 모든 개체적 자아들 속에서 자신의 양식을 삼습니다. 이러한 바이쉬나바라 아ㅡ만에서 머리는 훌륭한 바람이요, 몸통은 광대한 가득함이며, 오줌통은 부유함이며, 발은 땅입니다. 실로 가슴은 제단이며, 머리카락은 거룩한 잔디요, 심장은 가르하파티야의 불입니다. 마음은 안바하르야-파차나 불이며, 입은 아하바니아 불입니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18.1~2)
바아쉬나바라 아트만, 곧 우주적 자아는 다양한 형태의 개체적 자아 속에 존재하지만, 그것을 부분적으로 바라보고 숭배할 것이 아니라 바로 모든 사물 속에 공유되고 있는 개체적 자아의 전체적 연관성을 바라보고, 그 연관성 속에 내재한 통일적 원리로서의 우주적 아트만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게 될때 비로소 자신의 개체적 자아도 우주적 자아와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게 된다는 말이다.  154

아트만은 우파니샤드에서 브라만과 동일시되고 있는 개념이지만, 다음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되기도 한다. 우선 인간의 ‘자아’ 그 자체를 지칭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자아’라고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것에 대해 도이센은 세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첫째, 몸속에 지닌 육체상의 자아다. 둘째, 육체로부터 자유로운 개별 영혼의 자아다. 이것을 우리는 인식 대상과 대조되는 인식 주체로서의 자아라고 부른다. 셋째, 지고(至高)의 영혼으로서 인식의 주관과 객관을 더 이상 구별하지 않는 초월적 인식의 주체다.  155

그런데 다른 본문인 <타이티리야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아트만은 좀더 세분화되어 다섯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그것은 생명과 의지와 지식이라는 세 가지 원리 속에서 각각의 아트만이 상호 작용한 결과다. 다섯 종류의 아트만은 안나마야(Annamaya), 프라나마야(Pranamaya), 마노마야(Manomaya), 비즈나마야(Vijnamaya) 그리고 아난다마야(anandamaya)인데, 이들은 각각 인간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의 아트만이다.
이 다섯 종의 아트만 가운데 앞의 넷은 마지막 다섯 번째인 핵심적 아난다마야 아트만을 둘러싸고 있는 외형적 아트만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이들 아트만을 차례로 하나씩 궁구해가면서 그 외형을 벗겨보면, 마지막 남은 다섯 번째 단계의 아트만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 본질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다섯 가지의 아트만을 차례로 살펴보자.
첫 번째의 안나마야 아트만은 음식에 의존하는 아트만이다. 이것은 육체의 몸을 입고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진 성육화(成肉化)된 아트만이다. 다시 말해 성육신 아트만이다 그리하여 육체의 감각적 기관들이 모두 아트만의 부분을 이룬다.
두 번째의 프라나마야 아트만은 생명의 호흡에 의존하는 아트만이다. 이 아트만은 자연적 생명의 원리다. 그 주된 부분은 생명의 호흡과 관꼐되며 날숨, 들숨을 관장한다. 동시에 이 아트만은 우주적 의미로도 적용되어 우주 공간이 모두 이 아트만의 몸체요, 땅은 그 토대가 된다. 이 아트만을 넘어서 한 단계 더 들어가면 세 번재의 아트만을 대하게 된다.
세 번째의 마노마야 아트만은 마음작용(의지)에 의존하는 아트만이다. 인간의 마음(manas)작용에 의존하는 이 아트만에 대해서는 이미 네 개의 베다와 브라흐마나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과 신들에게 부여된 이 아트만은 인간의 의지작용의 원리에 따라 작용하는 것으로, 주로 인간의 이기적 욕망의 실현을 위해 작용하는 아트만이다. 대체로 베다의 제사 행위와 관련되어 많이 언급되는데, 인간적 욕망의 실현에 적용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네 번째의 비즈나마야 아트만은 지식에 의존하는 아트만이다. 앞서 언급된 것들보다 더욱 심층적인 아트만으로, 제사와 노동등의 행위에서 찬가를 노래하거나 지식을 제공하는데 관련되는 아트만이다. 이때는 각각 독립적으로 신성을 자각하고 예배하게 되는데, 이런 단계도 마침내 외투처럼 벗어버려야 하는 존재다. 진정한 아트만이 바로 그다음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의 아난다마야 아트만은 환희에 근거한 아트만이다.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의 세계에 근원적으로 자리한 이 아트만은 환희(ananda), 곧 무한한 기쁨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환희 앞에서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 외에 모든 단어와 사고가 물러선다.” 더 이상 지식의 대상이 없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경험적 실재의 지식과 달리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으며 의식적으로 의식할 수도 없는 무의식의 비실재(not-reality)다. 이는 경험적 실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실재라고 표현한것으로, 실재가 없다는 뜻의 무실재(un-reality)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아트만은 환희의 존재 그 자체로, 환희를 창조하는 자아기도 하다.  161-163

“실로 처음에 비존재(asat:드러나지 않은 것)가 있었다. 실로 그러부터 존재(sat:드러난 것)가 생겼다. 그 자신이 영혼이 되었다. 그리하여 ‘멋지게 만들어졌다’(sukrtam)고 불린다. 실로 그 ‘멋지게 만들어진 자’야 말로 존재의 본질이다.
이 본질을 깨닫게 되면 누구나 환희를 누린다. 대공 속에서 이러한 환희가 없다면 실로 그 누가 숨을 쉬며 살 수 있을까? 환희를 가져다주는 자가 바로 그다.
보이지도 않고 형체도 없고 규정할 수도 없으며 지지할 수도 없는 그를 지지함으로써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된다면 아무것에도 두려움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를 깨닫기 전까지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 실로 ‘제대로 명상을 하지 못하는 지식인’ 들에게는 두려움이 된다.” (<타이티리야 아파니샤드> II.7.1)  165

환희(ananda)와 두려움(bhaya)은 인간의 근원적 물음이요 해답이다. 두려움이 있는 한 환희는 없고, 환희가 있는 한 두려움은 없다. 이 둘은 절대적 상대다. 아트만의 세계가 환희의 세계요 창조의 세계라면 아트만이 아닌, 다시 말해서 비본질적 세계는 두려움의 세계다. 두려움을 불안하다. 그 불안의 감정은 ‘타자’에 대한 감정에서부터 시작된다. 타자를 넘어선 ‘하나 됨’의 의식 속에서는 불안이 사라진다. 아트만의 세계는 바로 이 ‘타자를 넘어선 하나 됨’의 세계이기에 불안은 근원적으로 해소되고 환희만 춤을 춘다. 166-167



5 상징 안에서만 존재하는 존재 - 브라만의 상징들

신에 대한 찬가로서 힌두교 최초의 경전인 <리그베다>나 그것을 노래한 <사마베다>도 결국 이 ‘옴’에서 하나가 된다. 요컨대 모든 베다의 최종 결정판은 ‘옴’속에 다 들어 있다는 비밀스런 상징적 가르침이다. 특히 <리그베다>와 <사마베다>가 옴을 통해 ‘짝이 되어 하나가 된다’는 표현은, 성적 결합으로서의 ‘하나 됨’을 뜻하기도 하는 ‘미투나’(mithunam)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187



6 존재와 의식과 환희의 브라만 - 브라만과 아트만의 세 가지 본질적 특성

존재로서의 브라만
“만물의 근원인 그 미세한 존재를 세상 만물이 아트만으로 삼고 있다. 그 존재가 진리다(tat satyam), 그 존재가 아트만이다(sa atma), 그것이 바로 너다(tat tvam asi), 슈베타케투야.”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I.8.7)
여기서 우리는 존재가 진리요 아트만이며 더 나아가 ‘그것이 바로 너 자신이다’라는 진술을 듣게 된다. ‘그것이 바로 너다’라는 이 유명한 명제, ‘타트(그것이) 트밤(너) 아시(이다)’는 우파니샤드 전체에서 ‘진리 중의 진리’라는 말로 설명된다. 너 자신이 우주의 근원이며 궁극적 진리라는 충격적인 선언은 ‘참 나’로서의 아트만이 바로 존재 그 자체의 뿌리요 진리라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그 존재가 진리다’(tat satyam)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그 존재가 아트만이며(sa atma) 바로 너 자신’이라고 말한 것이다.  211-212

의식으로서의 브라만
“이것이 소(牛)다, 이것이 말(馬)이다라고 말할 수 있듯이 모든 것 속에 깃들어 있는 아트만으로서 가까이에서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브라만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그것이 아트만이오.’
‘야즈나발키야여,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그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보는 것을 보는 자를 보지 못하고(na drster drastaram), 듣는 것을 듣는 자를 듣지 못하고(na sruter srotaram srnuyah),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는 자를 생각하지 못하고(na mater. Mantaram manvithah),  깨닫는 것을 깨닫는 자를 깨닫지 못하는 법이오(na vijnater vijnataram vijaniyah). 그가 모든 것 속에 깃들어 있는 그대의 아트만이오. 그 밖의 모든 것을 덧없이 소멸되는 것(artam)이오.’
그러자 우사스타는 침묵했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I.4.2)
이 대화에서 우리는 앎의 문제, 곧 깨달음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전 감각적 과정을 거쳐서 결국 터득하게 되는 그 과정에서 감각과 인식을 주관하는 자, 내면의 존재, 즉 아트만을 깨닫는 것이 요청되고 있다. 보는 자를 보고, 듣는 자를 들으며, 생각하는 자를 생각하고, 깨닫는 자를 깨달을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아트만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밖의 것을 본질적인 것이 되지 못하여 변화 속에서 곧 소멸되어버리고 마는 것들이다. 이 모든 과정에 깨달음이라고 하는 ‘의식’의 차원이 브라만/아트만의 실체를 구성하고 있다. 216-218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에서 마이트레이에게 들려주는 비유에 의하면, 의식으로서의 이 아트만은 바다와 같아서 모든 물이 그곳에서 모여드는 것 같은 ‘하나의 도달점’(ekayanam)으로 설명된다. 또 아트만을 인체의 감각 기관에 비유하여, 피부는 모든 감촉을 느끼는 하나의 도달점이며, 혀는 모든 맛을, 코는 모든 냄새를, 눈은 모든 형태를, 귀는 모든 소리를 감지하고, 마음은 모든 생각을 감지하고 의식하는 하나의 도달점이라는 말한다. 또한 두 손은 모든 행위가 하나로 수렴되는 도달점이며, 생식기는 모든 기쁨이, 항문은 모든 배설이, 두 발은 모든 움직임이, 목소리(언어)는 모든 베다가 하나로 수렴되는 도달점이다.
의식으로서의 브라만은 이와 같이 ‘하나의 도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이 이 하나의 의식 속으로 수렴된다는 의미다. 역설적으로 이 의식은 다시 모든 만유 속에 편재하게 된다.  219

환희로서의 브라만
“이제 카홀라 카우시타케야(Kahola Kausitakeya)가 물었다. ‘야즈나발키야여, 곧바로 현존하고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브라만, 곧 모든 것들 속에 깃들어 있는 아트만에 대하여 설명해 주시오.’
‘모든 것들 속에 깃들어 있는 그것이 그대의 아트만이오.’
‘야즈나발키야여, 모든 것 속에 무엇이 들어 있다는 것이오?’
‘배고픔과 목마름, 슬픔과 미혹, 늙음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 들어 있소. 현자는 그 아트만을 알고, 자손에 대한 갈망(esana), 부에 대한 갈망, 세속적인 욕망에 대한 갈망을 버리고 수도승(수행자)의 삶을 살지요. 자손에 대한 갈망은 부에 대한 갈망이며, 부에 대한 갈망은 세속적인 갈망으로 이들 모두 갈망에 불과할 뿐이오. 그러므로 현자는 깨달음(공부)을 얻은 후에 어린아이처럼 살기를 꿈꾸지요. 그는 깨달음을 얻은 후 어린아이처럼 살면서 모든 것을 아는(nirvidya) 성자(munih)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그는 침묵하거나(maunam) 침묵하지 않거나(amaunam) 브라만을 아는 자(Brahmana)가 되는 것입니다.’
‘브라만을 아는 자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그는 무슨 행동을 하게 되든지 브라만을 아는 자로서 행동하게 됩니다. 브라만을 아는 지혜 외에는 일체가 덧없을 뿐입니다.’
그러자 카홀라 카우시타케야는 입을 다물었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I.5.1)
본문에서는 고통이라는 문제와 브라만/아트만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엄연히 현존하는 고통과 슬픔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현자 야즈나발키야의 대답은, 배고픔과 목마름과 슬픔 등 생로병사가 현존하지만 그 현존하는 고통을 초월(극복)하는 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이 브라만이요 아트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초월하게 하는 브라만과 아트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모든 고통의 근원이 ‘갈망(esana, kamah)임을 알고, 그것을 극복하는 공부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며, 그 결과로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상태(balya)’를 유지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상태’의 문자적 의미는 ‘자기중심적 지식의 철저한 비움’(jnana-bala-bhava)이다. 이것을 이른바 ‘비움의 영성’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갈망의 극복으로서의 ‘초월’은 ‘비움’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순수한 비움의 상태에 이를 때 비로소 브라만을 알게 되고 동시에 브라만이 되어 브라만으로서 행동하게 된다. 그 순수함 속에 이미 브라만과 아트만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
어린아이처럼 산다는 것은 직접적이고 단순한 데서 오는 순수성을 말한다.  222-225

깨달음 이후에 얻게 되는 침묵(mauna)은 말을 삼가는 것을 명상적 삶에 도움이 된다. … 실존 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침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병들어 있다. 만일 내가 의사라면,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충고를 부탁한다면 나는 말할 것이다. ‘침묵을 창조하라’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침묵할 수 있도록.”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자라면 불필요한 말을 삼갈 것이며, 동시에 말을 할지라도 시끄럽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고통의 이해에서 출발하여 그 근원이 되는 갈망과 초월의 문제를 비움의 차원에서 논의했다. 그리고 그 비움의 결과는 어린아이처럼 사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226

우파니샤드에서의 환희, 곧 지복(至福)은 브라만의 속성이나 또는 어떤 상태를 말한다가보다는 오히려 브라만의 독특한 본질 그 자체다. 굳이 속성이라고 말한다면 브라만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브라만은 환희를 ‘지닌 자’(anandin)라기보다는 환희(ananda) ‘그 자체’라는 뜻이다. 이러한 브라만과 환희(아난다)의 동일시는 두 가지 견해에 기인하는 것이다. 첫째는 주관과 객관의 대립적 구별을 넘어선 깊고 꿈 없는 잠의 상태로서 브라만과 일시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다는 견해다. 둘째는 모든 고통이 사라진 상태로서의 더없는 기쁨이다.  227

“의식으로서의 이 존재(브라만과 아트만)가 깊은 숙면의 상태에 들면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 채 심장으로부터 온몸에 분포되어 있는 ‘히타’(hitah:선행을 베푼다는 뜻)라 불리는 칠만 이천 개의 정맥 속으로 흘러들어와 심낭 쏙에 머물게 된다. 어린아이가 그리하듯, 또는 훌륭한 왕이나 훌륭한 사제가 그리하는 것처럼 지극한 환희(atighnim anandasya)의 안식을 즐기듯 의식으로서의 브라만과 아트만도 그러한 환희 속에 안식한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I.1.19)
위의 본문 속에서 우리는 브라만과 아트만의 ‘존재’가 어떤 상태로 ‘의식’하며 어떤 상태로 ‘환희’를 누리는가 하는 문제를 동시에 보게 된다. 그것은 아트만이 몸의 중심부가 되는 심장에서 생명을 공급하는 혈맥으로 이어진 정맥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가서 다시 온몸으로 돌아오는 과정 속에 존재할 뿐 아니라, 깊은 숙면의 상태에서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는 의식 그 자체로서 지극한 환희를 즐긴다. 말하자면 주객 도식을 극복한 대상적 의식이 없는 주체적 의식이다.  227-228



7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 - ‘네티 네티’의 브라만

“모든 방향에 모든 생명이 있다. 그러나 아트만은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 이해될 수 없기에 ‘이해될 수 없는 자’이며, 파멸될 수 없기에 ‘파멸될 수 없는 자’이고, 집착하지도 않기에 ‘집착하지 않는 자’이며, 얽매여 있지도 않고 고통을 받지도 않기에 ‘고통이 없는 자’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IV.2.4)
… 아트만은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라는 부정의 진술이다. 이 진술이야말로 브라만과 아트만 이해의 초석이 되는 선언적 명제다.  234

모든 생명이 사방에서 숨을 쉬고 있지만 그 숨의 근원적 실체를 감각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파악할 수 없기에 그는 파악되어지지 않는 자이며, 우주는 끊임없이 생멸을 거듭하면서도 파멸되어지지 않는 것처럼 파멸되어지지 않는 불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으나 이해되어지지 않는 불가지한 존재로 남게 된다.
그렇다면 그 불멸의 브라만과 아트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거듭 ‘’부정의 길’을 통해 더듬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많은 인간은 하느님을 느끼고 감지한다. 다만 그 하느님은 인간마다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다르게 감지될 뿐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는 또 별개의 논의거리다. 허상과 실상,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브라만과 도(道)와 하느님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각각 별개의 존재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도 또 다른 문제제기가 된다. 우리는 지금 우파니샤드의 체계 속에서 브라만과 아트만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인 만큼 어디까지나 우파니샤드 현자들의 이야기에 주목할 뿐이다.  235-236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다.
‘이 물에 소금을 담그고 내일 아침에 오너라.’
아들은 그대로 했다.
아침이 되자 아버지는 아들 슈베타케투에게 말했다.
‘네가 어젯밤에 물에 담근 소금을 꺼내 오거라.’
아들은 완전히 녹아버린 소금물에서 소금을 찾을 수 없었다.
‘이 한쪽 끔에 있는 물 표면의 맛을 조금 보거라 어떠냐?’하고 아버지는 물었다.
‘짭니다.’ 아들이 대답했다.
‘이제 물 가운데 표면의 맛을 조금 보거라. 어떠냐?’
‘짭니다.’
‘이제 물 반대쪽 끝 표면의 맛을 조금 보거라. 어떠냐?’
‘짭니다.’
‘그러면 이제 물을 버리고 내게 오거라.’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아들은 그대로 했고,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소금은 항상 그대로 있음을 알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내 아들아, 실로 순수의 존재가 여기 있어도 너는 알지 못했구나. 실로 그 존재는 여기 있는 것이다. 만물의 근원인 그 미세한 존재를 세상 만물이 아트만으로 삼고 있다. 그 존재가 진리다. 그 존재가 아트만이다. 그것이 바로 너다, 슈베타케투야.’”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I.13.1~3)
‘그것이 너다’라는 선언이 나오기까지 아버지는 아들에게 소금물의 비유를 통해 아트만의 실상을 가르치고 있다. 이 선언은 우파니샤드의 가장 위대한 진술 가운데 하나다. ‘그것이 너다’라는 표현은 직설적이기는 하지만, 아트만을 직접 이해시킬 수 없는 언어의 한계로 인해 비유를 통해 설명한 결과로서의 직설적 표현이다.  239-241

“아트만, 그는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멀리 가 있고 누워 있으면서도 어느 곳이든지 간다.
기뻐하기도 하며 기뻐하지 않기도 하는 신, 그를 나 외에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카타 우프니샤드> I.2.21)
브라만을 이해하는 길은 ‘네티 네티’라는 ‘부정의 길’밖에 없음을 말해왔다.  241-242

<이샤 우파니샤드>의 진술처럼 아트만은 규정할 수 없는 존재로,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움직이는, 또는 움직이기도 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그리고 이 세상 안에도, 또는 이 세상 밖에도 존재하는, 논리를 초월한 존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부동의 동자(不動의 動者)와 유사한 개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절대적 존재가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남을 움직이는 창조적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면, 우파니샤드의 존재자인 브라만/아트만은 ‘자신이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움직이는’, 또는 ‘움직이기도 하고 움직이지 않기도 하는’ 역설적 초논리적 존재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런 점에서 불가지적 존재라는 것이다.  242

“하늘과 그 모든 것을 넘어서, 모든 것 위에 더없이 높은 세계의 저편에 빛나는 빛이 있나니, 실로 그것은 여기 인간의 내면에서도 빛나는 푸루샤의 빛과 같은 것이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III.13.7)
모든 우주 위에서,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서 영원히 빛나는 아트만도 ‘인간의 내면에서 빛나는’(antaah puruse jyotih) 존재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우주적 원리가 곧 인간 내면의 영적 원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의 진술에 의하면, 이 불멸의 아트만은 땅에 머물면서 그 ‘속에서 움직이게 하는 자(아트만)’요, 물에 머물면서 그 ‘속에서 움직이게 하는 자’며, 불에 머물면서 그 ‘속에서 움직이게 하는 자’다.  256



8 이 세계 모든 것이 브라만이다 - 브라만과 세계

브라만의 우주적 원리, 즉 브라만이 세계와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 도이센은 이를 네 가지 범주 속에서 체계화하고 있는데, 인도 사상의 핵심적 분류법인 실재론(realism), 유신론(theism), 범신론(pantheism), 관념론(idealism)이 그것이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실재론적 사고에 입각하면 물질(질료)은 신이나 영원성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신은 그리스 신화의 데미우르고스처럼 단지 세계를 만든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창조력이 행사되는 순간 물질 그 자체는 별개의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상키야 철학이 말하듯이 원형적 인간의 푸루샤와 물질적 세계의 원초적 원리인 프라크리티(prakrti)가 이원화되어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째, 유신론적 세계관에 따른 브라만의 이해다. 이는 신이 무(無)에서 세계를 창조했다는 사상으로 구약성서의 하느님과 유사한 개념이다. 이 유신론은 점차 범신론적으로 기울어간다. 신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서 신 자신이 세계 속으로 스며들어 세계의 실체가 신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셋째, 유신론적 세계관에서 변형된 범신론이다. 신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그 자신을 세계로 변형시킨 결과일 뿐이라는 관점이다. 일단 창조된 물질이 신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된 세계 그 자체가 실재이며 무한할 뿐 아니라 신이 세계를 떠나 따로 독립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며, 동시에 창조된 세계 그 자체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이라는 용어와 세계라는 용어는 동의어가 된다.
넷째, 관념론이다. 신만이 실재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실재일 수 없다. 우주는 오직 공간적으로 신의 연장에 불과하며, 구성된 몸체는 실로 비실재적인 것이다. 그것은 오직 환영에 불과할 뿐이다. 외형적으로 드러난 모든 요소들은 신이 될 수 없고 오직 신의 반영물일 뿐이며 신적인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261-262

주(主)라는 뜻을 지닌 ‘이샤’(Isa) 또는 ‘이슈바라’(Isvara)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
“주(Isa)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이 결합되어 모든 만물을 지탱하고 있다. 주가 아닌(anisas) 개체 아트만(catma, 또는 개체 영혼)은 그 자신의 기쁨(향락)으로 얽매이게 되지만, 신(devam, 아트만)을 알게 됨으로써 모든 족쇄에서 해탈을 얻게 된다.”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 I.8)
모든 만물을 지탱하는 자로서의 아트만이 이제 ‘주’라는 인격신으로 불리고 있다. 동시에 ‘주’가 아닌 개체 영혼은 자신이 추구한 향락으로 인해 세속적인 것들에 얽매이게 된다. 그러나 개체성에서 벗어나 신적인 우주적 통치자로서의 아트만을 깨닫게 됨으로써 모든 억압과 굴레에서 벗어나 참된 해방을 맛보게 된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의 본문에 의하면, 이 불멸의 아트만은 지고(至高)의 아트만으로서 또 다른 이름 ‘하라’(Hara)로도 불린다.
“멸망할 성질 프라드하나(Pradhana, 性質), 멸망하지 않는 불멸(amrtaksaram)의 하라(主), 멸망할 것과 멸망하지 않을 영혼(아트만) 이 두 가지를 오직 이 유일한 신(하라)이 통치한다. 이 하라를 명상(abhidhyana)하고, 그와 연합하여 그를 점점 더 깊이 숙고함으로써 모든 세상의 환영(visva-maya)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 I.10)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아트만의 신명(神名)인 ‘하라’를 접하게 된다. 하라는 세계의 파괴와 재생의 역할을 담당하는 시바(Siva)의 여러 이름 가운데 하나인데, 샹카라에 의하면 하라는 ‘무지(無知)를 제거한 자’라는 뜻을 지닌다. 이 불멸의 신 하라는 멸하는 것과 멸하지 않는 것을 모두 통치한다는 점에서 지고의 신, 곧 파람 이슈바라로서의 브라만/아트만이다.
이 지고의 신과의 합일은, ‘그에 대해 명상’함으로써 그와 연합을 이루게 되어 결국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누리게 되는 것을 말한다. 브라만과의 합일은 근본적 실재와의 합일이며 내적 실재와의 참된 연합이기에 ‘스스로 존재함’에 이르는 해탈과 다르지 않다. 그 해탈은 동시에 모든 ‘세상의 환영’(visva-maya)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이것은 일종의 브라만의 열반, 곧 ‘브라마-니르바나’(brahma-nirvana)이다.  273-276

“움직이는(jagat:변화하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신(Isa:님)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므로 비움으로 그대의 즐거움을 찾고 다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샤 우파니샤드> 1)
…. ‘이샤’(Isa)라고 표현되고 있는 신은 ‘이시타 파람 이슈바라’(Isita paramesvarah)의 의미로, ‘지고의 신 이슈바라’라는 뜻이다. 세계는 이 지고의 신에게 깊이 싸여 있으며, 또한 신들의 거처로 표현되고 있다.
이 세계는 ’변화하는 것’(jagat)이다. 그러므로 ‘비움으로써 즐거움을 찾으라’(tyaktena bhunjitthah)고 말한다. 우주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변화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 무상(無常)을 알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비움’(tyaga)은 아집(我執)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쁨, 곧 환희가 비움에서 온다는 주장은 동서의 주요 경전들이 이미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아님을 알진대, ‘집착하지 말고’(magrdhah) 다만 ‘즐기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들에 핀 개나리와 산수유가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알 때 진정으로 그 꽃을 즐길 수 있듯이 말이다.  276-279



9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을 얻다 - 해탈

아트만은 ‘존재’(being)이지 ‘되어가는 존재’(becoming)가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아트만이 ‘되어감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새로운 형태로의 변형이 아니라 본래적 자아(아트만)로서의 존재를 발견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 처음부터 ‘존재’ 그 자체로 항구여일(恒久如一) 할 뿐이다. 변화하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무상함이 없는 아트만, 곧 인간 내면의 아트만이자 동시에 모든 만유의 총합이며 실재가 되는, 그리하여 만유를 창조하고 지탱하고 보존하는 아트만을 깨닫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305-306

“지고의 브라만을 깨닫는 자(paramam brahma veda), 그가 브라만이 될 것이다. 그의 가문에는 브라만을 알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그는 고통을 넘어서며 죄악을 넘어선다. 그는 얽힌 속박의 매듭을 풀고 불멸의 존재로 해탈을 얻게 된다(vimukto’mrto bhabati).” (<문다카 우파니샤드> III.2.9)
.. 결국 문제는 ‘깨달음’(veda)에 있다. 그런데 그 해탈이란 ‘깨달음으로 얻어지는 결과’라기보다는 ‘깨달음 그 자체 속에 이미 해탈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306-308

“깨달은 자는 죽음을 보지 않고, 질병도 슬픔도 없다. 그는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을 얻는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II.26.2)
깨달음을 얻은 자는 이미 세계 그 자체가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얻을 것도 없어지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얻은 자가 되는 셈이다. 이 같은 상황을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에서는 “흑암도 없고 밤낮도 없고 존재와 비존재의 구별도 없는 오직 그 불멸의 유일한 존재만 있을 뿐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상의 진술을 토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 즉 ‘깨달음은 곧 해탈’이라는 방정식을 얻게 된다.  309

경험적 측면에서 볼 때 아트만은 이해될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아트만은 유일 실재이다. 그러나 그 아트만은 오직 인간이 지닌 비범한 ‘직관’의 통찰로 ‘각성’될 것이다. 그 각성은 ‘아트만의 자기발견’이 될 것이고, 자아를 발견한 아트만은 자신이 세계임을 다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파니샤드가 가르치는 해탈의 방정식이다. ..
살아서 해탈을 얻게 되면 생해탈로서(jivanmukti) 유여열반에 들 것이고, 죽을 때 해탈을 얻게 되면(videhamukti) 무여열반에 들것이다.  310



10 비움으로 소유하다 - 우파니샤드 사상의 요약과 결론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숲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그 숲속의 가르침이 아라냐카였다. 아라냐카는 숲속의 은자들에게 제사의 중요성과 인간과 우주에 대한 신비적 사색을 하게 해줌으로써 베다 사상의 결정판이자 최종적 철학 체계인 우파니샤드의 세계로 안내해주었던 것이다.
아라냐카는 원래 제의 문서인 브라흐마나의 보충적 주석서로 출발했지만, 제의를 비유와 상징적 방식으로 해석하면서 점차 브라흐마나와는 결별하게 되었다. 하지만 완전한 결별은 아니었고, 다만 아라냐카는 제의를 신비적, 사색적으로 해석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아라냐카를 더 깊게 사색한 결과로서의 작품이 베다의 끝을 차지하는 베단타 철학, 곧 우파니샤드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313

윤회의 이론은 바라문의 사고이기보다 왕들을 중심으로 한 크샤트리아들이 제기한 사상이었다.  314

우파니샤드는 지혜, 곧 깨달음으로서의 지식을 중시한다. 그것은 세속적인 지식이 아닌 궁극적 실재를 아는 지식이다. 그러므로 이성적 지식이라기보다는 직관적 또는 계시적 통찰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18

인간은 어떤 제도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본질인 브라만, 즉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혁명적 선언을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319

브라만/아트만의 영적 원리는 우주의 인격신으로 발전한다. 우주적 실재로서의 브라만은 후기 우파니샤드의 시대로 갈수록 관념론적 차원이나 실재론적 차원에서 유일신적 차원으로 점점 발전해가면서 인격신 이슈바라로서의 브라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고대 우파니샤드에서 후기 우파니샤드로 갈수록 신관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다양한 신들이 출현하는 다신론에서 점차 브라만/아트만을 중심으로 하는 유일신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새로운 변화는 브라만/아트만이 ‘주’(主)라는 뜻을 지닌 ‘이샤’(Isa) 또는 ‘이슈바라’(Isvara)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격신으로서의 브라만의 통치를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로서의 이슈바라도 점차 ‘최고의 주’라는 ‘파람 이슈바라’로 불리게 된다.
만물을 지탱하는 자로서의 아트만이 이제 ‘주’라는 인격신으로 불리고 있고, ‘주’가 아닌 개체 영혼은 자신이 추구한 향락으로 인해 세속적인 것들에 얽매이게 된다. 그러나 개체성에서 벗어나 우주적 통치자로서의 아트만을 깨닫게 되면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해방을 맛보게 된다. 이것을 깨닫는 즉시 ‘파람 이슈바라’로서의 브라만/아트만이 된다. 이 지고신과의 합일 후에는 ‘그에 대한 명상’을 통해 그와의 연합을 이룸으로써 속박을 벗어나 해탈을 누리게 된다. 브라만과의 합일은 근원적인 내적 실재와의 참된 연합이기 때문에 ‘스스로 존재함’에 이르는 해탈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그 해탈은 동시에 모든 ‘세상의 환영’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이것이 일종의 브라만의 열반(涅槃), 곧 ‘브라마-니르바나’다.  332-335

불멸의 신적 아트만에 이르는 해탈의 길에 대하여 우파니샤드는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일원론적 차원에서 공통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비록 이원론을 전개하는 상키야 철학에서는 해탈의 방식이 조금 다르기는 해도 해탈의 기본적 전제를 ‘지식’(깨달음)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를 보인다. ‘지식’(지혜)을 통한 해탈이라는 이러한 전제는 우파니샤드의 전체 내용을 관통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혜로서의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선적으로 아트만이 유일한 일자로서의 참된 실재라는 것과 다자로서의 세계는 환영의 세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환영’으로 구성된 다자의 세계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으로서의 지혜(깨달음으로서의 지식)가 곧 해탈에 이르는 필수적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 환영적 세계의 실상을 모르는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로 아트만에 대한 이해에서 가능하다. 무지는 고통이나 족쇄, 또는 집착의 근원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영-무지-윤회’라는 삼중적 세계의 실상을 동시에 통찰해야 한다. 족쇄를 끊는 검으로서의 통찰은 궁극적으로 ‘모든 욕망의 비움’이라는 형식에서 성취된다.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고통스러운 실존으로부터의 해방, 그것이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기도 한 것처럼, 우파니샤드가 말하는 해탈의 길도 고통과 죽음의 극복으로 맞게 되는 구원의 길이요 불멸의 길이다. 환영에서 벗어나 ‘내가 곧 푸루샤요 내가 곧 브라만/아트만이다’라는 실재의 실상을 깨닫는것, 그것이 우파니샤드가 말하는 비밀스런 가르침으로서의 해방의 길, 곧 해탈의 최종적인 가르침이다. 그 궁극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네 개의 위대한 진술, 즉 마하바키야(Mahavakyas)로 압축된다. 이것이 우파니샤드의 결론 중의 결론이다.
“의식이 브라만이다.”(아이타레야 우파니샤드>)
“내가 브라만이다.”(<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그것이 바로 너다.”(<찬도기야 우파니샤드>)
“이 아트만이 브라만이다.”(<만두키야 우파니샤드>)  335-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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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인도인의 삶과 정신세계 : 베다시대
아리아인이 인도로 유입해 오기 전에 이미 인더스 강을 중심으로 상부에 자리한 하라파(Harappa)와 그보다 남쪽으로 약 64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모헨조다로(mohenjo-daro : 죽음의 언덕)라는 도시의 유적은, 인도 서부에 이미 거대한 국가 형태의 도시가 존재했음을 보여주었다.
하라파는 1856년 영국인 브룬튼 형제가 물탄(Multan)과 라호르(Lahore) 사이에 철도 부설 공사를 하던 중에 우연히 발견했다. 1921년이 되어서야 인도 고고학 탐사단의 영국인 총감독 존 마셜경이 하라파를 본격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했고, 그 후 2년 뒤에 다시 모헨조라도를 발굴하기에 이르렀다. 두 도시의 고고학적 발굴성과는 인도의 고대 문명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되었지만, 아직도 그 당시의 문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관계로 인더스 문명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27

도시의 발전은 기원전 2500년에서 도시가 멸망하던 기원전 1500년경까지로 추측되고 있다. ..
두 유적지(하라파 모헨조다로)가 지하에 깊이 묻히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대홍수로 인한 인더스 강물의 범람과 같은 재난으로 땅속에 묻힌 경우다. 다른 하나는 이민족의 침입이나 다른 전쟁으로 인해 멸망되었던 것이 오랜 세월 속에 폐허로 묻혀 있었을 것이라는 두 가지 추측이다.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아리안 족의 침입으로 인한 파괴의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아리안 족의 유입 시기도 기원전 1500년이고 보면, 고대 도시가 멸망하던 시기에 아리안 족이 침입하여 완전히 폐허로 만들고, 새로운 아리안 문명을 건설하지 않았을까하고 추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후 오랜 세월을 거치는 과정에서 사막화가 진행되어 도시 문명 전체가 지하 속으로 묻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9

생산력을 중시하고 과시하는 남성 성기 숭배는 인더스 유적지의 여러 곳에서 발굴되는 ‘링가(lingas:생식력의 상징으로서의 남근상, 후대 힌두교에서 시바 신의 상징으로 등장한다)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35

‘베다’의 의미는 ‘지식의 책’인 동시에 계시되었다는 점에서 ‘거룩한 가르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신들에 대한 찬가를 모은 문헌집 역시 베다라고 부른다. ‘지식’을 뜻하는 ‘베다’(veda)는 원래 고대의 현자(賢者)들에게 ‘계시’된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초기 아리아인의 신은 ‘데바’(devas)라는 명칭 하나로 통칭되었으나, 그 신들의 수는 대략 33개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신들의 이름은 후기로 갈수록 분화되어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해졌다. 신들의 숫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들의 힘과 기능으로서, 어떻게 자연현상과 조우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신들의 역할과 기능에 따라 신의 정체성도 각각 다르다.
신들의 역할과 기능은 대개 세 그룹으로 구분된다. 천상(天上)의 신, 대기(大氣)의 신, 지상(地上)의 신으로, 이 세 영역이 신들의 거주지와 활동 무대가 되며 이런 구분은 자연의 힘과도 결부된다.  36


1 신을 부르는 노래, 베다 - 네 개의 베다

정통 힌두인은 초인적이고 신적인 권위에 베다의 기원을 두고 있다. 베다는 시대가 경과하면서 네 종류로 형성되었다. 가장 초기의 베다가 기원전 1500년경에 이루어진 <리그베다>(Rigveda : 시 모음집)이고, 그 후에 <사마베다>(samaveda : 노래집)와 <야주르베다>(Yajurveda : 제의문서), 그리고 훨씬 후기에 <아타르바베다>(atharvaveda : 불의 사제 아타르반의 베다)가 형성되었다.
이 네 권의 베다 가운데 <사마베다>와 <야주르베다>는 대부분의 내용이 <리그베다>의 내용을 용도에 맞게 재구성한 것이다. 이들 베다는 너무나 거룩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에 기원전 600년경까지는 브라만 계층의 사제들의 입을 통해 구전되어 왔다. 그리하여 베다가 완전한 책의 형태로 편집이 된 것은 기원전 300년경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 각각의 베다는 제의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기원에 따라 다시 세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찬가의 모음집인 <상히타>(Samhita : 본집)와 그 해석서인 <브라흐마나>(Brahmana : 범서梵書), 그리고 제의의 지침서로서 <수트라>(Sutra :  안내서)가 있다.
이들 가운데 본집의 해석서인 <브라흐마나>에는 <아라냐카>(Aranyaka : 숲의 책)와 <우파니샤드>(Upanishad : 철학서)가 포함된다. 우파니샤드는 베다 사상을 철학적으로 심화시킨 최종적인 문헌이다. 각각의 베다는 지식을 다루는 부분(jnana kanda)과 실천 내용을 기술한 부분(Karma Kanda)으로 구분된다.  43-44

완전한 제사를 위해서 각각의 베다에 따른 제사장의 역할과 호칭이 달랐다.
<리그베다>를 사용하여 제의에 신을 초대하기 위해 시를 낭송하는 사람인 호트리(hotri : 신을 부르는 사람), <사마베다>의 노래를 부르면서 제사의 술인 소마를 바치는 우드가트리(udgatri : 노래를 부르는 사람), 제의문서인 <야주르베다>의 시와 찬미의 공식문구(yajus)를 사용하여 제의를 수행하는 일반 사제들인 아드바르유(adhvaryu), 그리고 <아타르바베다>를 노래하는 대사제인 브라흐민(brahmin : 바라문)이 각각 그에 해당하는 제의를 주관했다. 특히 대사제로서의 브라흐민은 <아타르바베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제의 전체를 주관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했다. 44-46

‘리그-베다’라는 말은 ‘찬양의 베다’라는 뜻이다. ‘리그’(rig)라는 말은 원래 산스크리트어로 ‘축제’를 의미하는 뜻에서 비롯되었는데, 일반적으로는 ‘노래 형태의 시’를 뜻한다. 축제에서 부르는 찬양의 노래(mantra)가 베다의 본문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역을 하자면 ‘찬양의 지식’이 된다.  47

전10권으로 된 <리그베다>는 제1권부터 제7권까지는 매번 첫장마다 아그니에 대한 찬가로 시작된다. 그만큼 제사와 그들의 신앙생활에서 아그니의 위상이 높다는 뜻이다. 제8권은 인드라에 대한 찬가로 시작되고, 방대한 분량의 제9권 전체는 소마에 대한 찬가다. 제10권에서는 아그니에 대한 찬가로 다시 시작되지만 우주의 창조주에 대한 기사와 원형적 인간의 차조 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47

33신들에 대한 찬미의 노래가 1,028개나 되지만 대부분이 인드라, 아그니, 소마 신에 대한 노래다. . 인드라는 아리아인의 적인 다스유스를 진멸한 권능의 신이며, 아그니는 불의 신이고, 소마는 식물의 음료의 신이다.  48

<사마베다>는 사제들이 제의를 올릴 때 부르던 찬가집이다. ..
<사마베다>의 사마(Sama)는 샤만(Saman : 멜로디)을 나타내는 말로, ‘달콤한 노래’ 또는 ‘거룩한 노래’라는 뜻을 지닌다. <사마베다>는 이 ‘노래(chants)의 모음집으로서, <리그베다>의 제8권과 제9권에서 주로 뽑아낸 작품들이다.  51

일정한 순서가 없는 찬가의 모음집이었으나,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서 종교적 제의에 맞게 재구성되었다.  52

아리아인이 처음 인도에 왔을 때는 제의를 위한 안내책이 필요 없었을지라도, 정복과 정착 이후에는 점차 종교적 의례를 위해 정교하게 편집된 지침서가 필요했기에 사제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53

<사마베다>의 본문은 1,875개의 만트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 650개의 만트라 구절과 후반부 1,225개의 만트라로 구분된다. ..
신들에 대한 찬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베다에 언급되고 있는 신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는 <사마베다>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베다의 신들은 베다 후기에 나타나는 각종 경전(聖典 : puranas)이나 서사시들에서 볼 수 있는 신들과는 그 성격이 각기 다르다.  53-54

불의 신 아그니(Agni), 폭풍의 신 인드라(Indra) 또는 바람의 신 바유(Vayu), 그리고 태양신 수리아 등이 주요 신으로 등장한다. 이들 중 아그니는 지상(prithivi) 통치하고, 인드라나 바유는 공중의 대기(antariksha)를 통치하며, 수리아는 하늘(dyuloka)을 통치한다. 기원전 800년경에 살았던 베다의 주석가 야스카(Yaska)는 베다의 다른 수많은 신들도 결국 이 세 신의 현현(顯現)에 불과하다고까지 말했다.  54

베다에 나타나는 신들은 주로 지상, 대기, 하늘의 세 영역으로 구분하여 활동하는데, 규정된 신의 수는 베다마다 차이가 있다. 베다의 어떤 본문에서는, 11개의 신들이 각각의 영역(loka)에서 활동한다고 보고 33개의 신들로 규정하기도 하고, 어떤 본문에는 3,339개의 신들로 말하는가 하면, 후대의 푸라나(聖典)에는 신들의 수가 3억 3,000으로 늘어나기도 한다.
반면 모든 다양한 신들이 결국은 동일한 하나의 지고한 신성(supreme godhead)의 현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단일신론(單一神論)적 주장은 특히 후대의 우파니샤드 사상에서 발견된다.  54-55

<야주르베다>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드바르유’(adhvaryu : 일반적인 사제) 사제들이 제의 때에 사용하던 문서로서 ‘제의의 지혜서’라고도 불린다. <야주르베다>는 신앙적 고백의 글이라는 뜻의 ‘야주스’(yajus)라는 말과 ‘베다’의 합성어다. 따라서 사제들이 제의를 드릴 때 불렀던 고백문으로서의 찬가집을 뜻한다. …
제사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상술하고 있다는 것이 <야주르베다>의 특징이다.
<야주르베다>의 편집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기원전 1000년경에 편집된 <흑(黑) 야주르베다>(Black Yajurveda)가 그것이다.
<흑 야주르베다>는 ‘무질서한’ 혹은 ‘뒤섞인’ 본문이라고도 부른다. 이유는 찬가인 만트라 외에도 제의를 위한 신학적 해설서인 산문체의 <브라흐마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백 야주르베다>는 찬가인 만트라만을 수록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다양한 학파를 지니게 된 <야주르베다>는 <리그베다>보다 그 분량이 훨씬 방대하다.  60

<아타르바베다>는 바라문 가문의 이름인 ‘아타르바’(Atharva)에서 취한 이름이다. 네 개의 베다 중에 가장 나중에 편집된 것이기 때문에 ‘제4의 베다’라고도 한다. 전승에 따르면, <아타르바베다>는 주로 브리구(Bhrigus)와 앙기라스((Angirasas)라는 두 현자의 집단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전한다.  67

<리그베다>와 같이 전체가 찬가로 구성되어 있지만, 베다시대의 제의 전통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그것은 <아타르바베다>가 초기 베다와 구분되는 훨씬 후대에 편집된 것이기 때문이다. ..
베다의 내용은 사랑의 성공에서부터 지상에서의 열망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하는 문제 등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
<아타르바베다>가 질병의 퇴치 등에 관한 주술과 같은 독립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일부 찬가인 쿤타파수크티(Kuntapasuktini, 찬가 127~136)를 제외하고는 본집의 제20권 대부분이 <리그베다>의 문구를 그대로 인용할 정도로 똑같은 내용도 있다.  68

제17권은 사소한 관심사들에 대한 일상을 독립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제15~16권은 대부분이 사제들인 바라문의 산문이고, 제14권과 제18권은 각각 아타르반 사제가 주도하는 결혼과 장례에 대한 시로 되어 있다. 이 시는 대부분 <리그베다> 제10권의 만트라와 일치한다.
그런가 하면 제19권은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원문을 개악(改惡)하여 심하게 훼손된 것도 있다. <아타르바베다>의 제12권에는 우주 진화론적이며 신지학적인 노래가 실려 있는데, 땅의 여신에 대한 노래 가운데 “진리와 위대함, 우주적 질서, 힘, 정화, 창조적 열정, 영적 승화, 제의가 지구를 떠받치고 있다”는 것이다.
나머지 제1장부터 젱13장까지의 내용에서는 약물을 사용하는 치유가나 주술사가 등장하여 대부분 주문 형식의 기도를 올린다. 이는 다른 베다가 시인이나 사제들이 노래하는 찬가의 형식인 것과 대조적이다.
특히 질병의 치유를 비는 기도 주문에서는 열병, 두통, 감기, 수종(水腫), 심장병, 만성병, 중풍, 유전병, 문둥병, 정신병 등에 대한 수많은 종류의 질병이 열거되고, 거기에 대한 처방으로서 갖가지 신들이 초대되기도 한다.  68-69

네 가지 베다의 총 분량은 그리스도교 <성서>의 여섯 배나 된다. 이 방대한 베다의 주된 구성은 이와 같이 신드에 대한 찬가아 제의의 방법을 다루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점차 베다 후기로 이어지면서 신화적인 내용이 우주적이 ㄴ차원에서 철학적으로 변해간다.  71



2 우주와 인간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 베다의 창조와 진화

<리그베다>에서는 우주와 인간의 창조, 그리고 발전과정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각도의 관점으로 설명한다. 하나는 어떤 거대한 원리가 만들어낸다는 관점이고, 또 하나는 진화적 관점에서 발생해간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이 상호 배타적인 것만은 아니며, 오히려 두 가지 견해가 서로 결합되는 느낌도 있다.
하나는 어떤 원리가 우주와 인간을 만들어낸다는 견해로, 훌륭한 솜씨를 가진 장인(匠人)인 신이 목수처럼 신과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타파스’와 같은 열기가 발생하여 스스로 진화해가는 과정으로 우주의 창조를 설명한다.
시대와 계층을 달리하던 <리그베다>의 여러 시인들은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을 기초로 다양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여러 신들이 제각각의 기능을 하며 수많은 세계의 요소들을 하나둘씩 만들어가는 것으로 설명한다.  73

한편으로는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탄생된 것도 아닌 스스로 우주의 제물이 되어서 우주를 발생시키는 제물로서의 창조자 푸루샤도 있다. 이 푸루샤의 몸에서 천지 사방과 인간이 탄생되었다는 신화다.
그런가 하면 신화 창조 개념보다는 다소 철학 개념으로 우주창조를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움직이고 정지하는 모든 것의 정신, 곧 아트마(atma)를 창조의 원리로 보는 것이다.  75

<리그베다>에서 창조에 관한 가장 유명한 기사는 우주 찬가 속에 나타난다. 일종의 진화적 측면에서 우주의 탄생을 말하는 것으로, 이른바 비존재(asat)에서 존재(sat)가 드러나는 창조적 진화의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창조의 노래라고 불리는 유명한 나사디아(Nasadiya) 찬가다.
또 다른 각도에서 창조적 진화의 과정을 서술하고 있는 찬가도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타파스’라는 열기에 의해서 모든 것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76

초기 베다에서는 자연현상과 그 세계를 다스리는 자연적 요소, 즉 태양, 불, 천둥, 물 등이 신격의 지위로 격상되어 숭배를 받았다면, 이제는 관심의 초점이 이동되어 그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누가’이 현상을 만들어내거나 조종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졌다.  83

타파스에 관한 한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연역해낼 수 있다. 하나는 자연과 우주 차원의 열기이며, 또 하나는 인간에 관한, 특히 제사와 관련된 고행이나 금욕으로서의 열기하는 측면이다. 이 모두가 창조와 관련이 있다.  86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우주의 근원은 열기, 곧 불(火)이라 했던 것과도 상통한다. 그는 열기가 강해지면 태양처럼 뜨거워지고 식으면 물이 되거나 얼음처럼 변화되는 것이 우주 변화의 원리로 보았던 것이다.
자연의 관점에서 볼 때, 태양의 열기는 땅에서 물을 끌어올리고 비를 생산한다. 반면에 제사에 사용되는 불은 바쳐진 음식물을 끓여서 증기를 유발한다. 사제들이 열정적으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의 몸에서 땀이 솟는다. 태양의 열기든지 사제의 땀이든지 모두 타파스와 관련된다. 자연적 열기로서의 타파스는 태양이 과일을 익히듯이 불이 되어 제사의 음식을 익힌다. 과일이 태양의 열기에 먹기 좋게 익듯이, 제사음식도 먹기 좋게 익는다(pakva).
여기서 다시 ‘먹힘’의 미학을 보게 된다. 제사는 먹음과 먹힘의 사슬관계다. 먹힘이 없는 먹음은 없다. 먹고 먹힘의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타파스다. 다시 말해서 일체의 희생제의는 타파스의 열기로 가능하다. 우주적 희생제의는 바로 타파스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6-87

베다의 창조와 관련된 일자나 타파스에 이어, 좀더 구체적으로 우주창조의 신화를 보여주는 또 다른 본문이 있다. 그것이 이른바 ‘황금의 모태’(the Golden Embryo) 신화다.
<리그베다> 제10권 제 121장에 따르면 태초에 ‘황금의 모태’로 표현되는 히란야가르바(hiranyagarbha)가 있었다고 한다.  88

히란야가르바는 ‘히란야’(hiranya)와 ‘가르바’(garbha)의 합성어로서, 황금과 태(胎)의 복합어다. 황금빛 나는 모태는 후기에 가서 ‘황금계란’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우주의 난생신화(卵生神話)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89

또 다른 이름의 창조주 비슈바카르만을 살펴보자. <리그베다> 제10권 제 81~82장에 따르면 우주를 창조한 신(deva), 곧 전능자로서의 ‘조물주’(造物主)인 비슈카르만(Visvakarman)이 언급되고 있다. 그 조물주는 자신을 위한 우주적 제의 속에서 여러 신성한 제의와 창조력을 지니게 된다. 그는 ‘거룩한 언어의 주’였던 바짜스파티(Vacaspati)와 동일시되기도 하면서, 용광로 같은 불속에서 천지를 창조해낸다. 천지가 부르이 제사를 통해 탄생했다는 이야기다.  93-94

현대 과학에서 우주형성의 기원을 말하는 빅뱅이론도 핵융합 반응의 결과라고 하니, 창조와 불의 신화적 상상력과 그 관련성이 허무한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94

“제사의 직무(Hotar)를 관장하면서 이 모든 세계를 제물로 바치는 현자, 우리의 아버지 그분께서는 풍요로움을 꿈꾸면서 지상에 사람들 가운데 오셨도다.
그가 거처로 삼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무엇이 그를 지탱해주었던가? 도대체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말인가? 비슈바카르만이 권능의 힘으로 만물을 바라보자 영광 속에 땅이 만들어지고 하늘이 드러났도다.
사방으로 눈, 입, 팔, 발을 가진 그가, 일자인 창조주 그가 그의 팔로 날갯짓을 하면서 천지를 만들었도다.
무슨 나무로, 무슨 목재로 그들이 천지를 만들었겠는가? 그대 생각이 깊은 자들이여, 스스로의 마음속에 자문해보라. 그가 만물을 창조할 때 어디에 서 있었겠는가?
가장 높은 곳이든지, 가장 낮은 곳이든지, 또 그 가운데 어떤 곳일지라도, 오, 비슈바카르만이여, 제사 속에서 그대의 친구들을 깨닫게 해주소서. 그대 자신의 법에 따라 사는 자여, 그대 자신의 몸을 희생시켜 그대를 위대하게 만들었도다.
공물을 통하여 위대해진 오, 비슈바카르만이, 자신의 몸인 천지(天地)를 희생시볐도다. 우리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이 어리석음에 빠져서 살지라도 우리는 너그럽고 풍요로운 후원자를 지니자.
사고(思考)만큼 빠른 거룩한 언어의 주(主), 비슈바카르만을 찬미하자. 오늘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돕도록. 의로운 일을 행하시고, 만인에게 자비르 베푸시는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청원을 기꺼이 도우시도록 하자.”(<리그베다> X 81. 1~7)  94-96

‘제사’야말로 우주의 시작이고 끝이다. 아니 그 끝없는 흐름의 연속이요. 우주생성과 생존의 비밀이다. 제사를 현대적 용어로 말하자면, 밥이 되어 ‘먹힘’이다. 먹힘으로써 다음 생이 이어진다. 먼저 창조된 제물의 존재는 후속으로 이어지는 다른 제물의 존재들에게 영광의 자리를 물려주고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우주생성의 비밀이다.
문제는 창조주 자신이 바로 이 세계를 위한 희생제물이 된다는 또 하나의 기막힌 역설이다. 본문에서 조물주 비슈바카르만은 언어의 신 바크(Vac)와 동일시되면서 유일하게 “신들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자”이며 “하늘과 땅을 초월해 있는 자”다. 그리고 그는 ‘황금의 모태’로서 물속에서 우주를 잉태한 히란야가르바아 같은 창조주로서의 명성을 떨친다.
이처럼 비슈바카르만은 언어의 신 바크와 동일시되어, 모두가 물, 불, 사고 그리고 언어라는 각자의 요소가 지닌 창조력이 혼융된 형태로 드러난 ‘제일자’(第一者) 혹은 ‘제일원인(第一原因)이 되고 있다. 결국 만무르이 창조주인 비슈바카르만은 언어의 주(主)이자 동시에 제사를 집행하는 브라흐만(brahman)의 주이며, 불의 신 아그니와 제사를 만들어낸 물에서 진화한 최초의 모태가 된다. 제사의 형식을 통해 우주를 창조해가는 베다의 창조 관념은 베다가 얼마나 제사르 중시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실제로 창조주 삐슈바카르만은 제사의 주(主)이기도 하지만 제사행위 그 자체를 통해 우주를 창조한 것이기도 하다.  98-99

다자, 즉 우주의 생성이 이러한 변증법적 자기발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은 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는 과정의 이야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예컨대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은 ’언어’(말씀)로 ‘빛’과 천지를 창조하면서 자기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한다. .. 그리스도교에서도 베다의 바크처럼 언어로 창조할 뿐 아니라, 자기 형상을 인간을 만드는 것도 일자에서 다자로의 우주적 전개라는 신적 의지가 ‘자기희생’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99

베다가 말하는 우주적 거인, 푸루샤(Purusa)에 대한 묘사는 ‘푸루샤 찬가’(the Purusa Sukta)에서 잘 나타난다. 이 찬가에 따르면 우주가 제사와 관련하여 창조되듯이 우주적 인간도 제사와 관련하여 창조되고 있다. 이 찬가는 두 가지 기본적인 구조로 묘사되는데, 첫 번째 부분은 우주적 인간, 곧 원초적 인간 푸루샤의 기원과 그 위대성에 대한 것이다. 두 번째 부분은 푸루샤의 희생제사다. <리그베다>의 제 10권 제 90장에 등장하는 이 유명한 찬가는, 신들이 우주적 거인인 푸루샤의 몸을 분할함으로써 세계의 일부가 탄생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101

“푸루샤는 천 개의 머리, 천 개의 눈, 천 개의 발을 가졌다. 사방 온 세계에 편만해 있는 그는 열 개의 손가락을 그 너머로 뻗치고 있다.
푸루샤는 정녕 이 모든 세계 그 자체이며, 세계로서 존재해왔고 또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제사)음식을 통하여 탄생시킨 불멸(신들)의 세계를 통치한다.
이것이 푸루샤의 위대성이며, 동시에 푸루샤의 능력은 이것도 넘어선다. 모든 피조물은 푸루샤의 4분의 1에 불과하며 나머지 4분의 3은 하늘에 있는 불멸의 것들이다.
푸루샤의 4분의 3은 위로 올라가고 4분의 1은 여전히 지상에 남는다. 이 지상에서 다시 온 사방으로 뻗쳐 생물(먹는 것)과 무생물(먹지 않는 것)에게 침투한다.
푸루샤로부터 비라즈(Viraj)가 탄생되었고, 비라즈로부터 다시 푸루샤가 나왔다. 푸루샤가 탄생될 때, 그는 지구 너머 그 이면까지 뻗쳤다.” (<리그베다> X 90.1~5)..
대승불교사상 가운데 천수천안(千手千眼)의 보살(菩薩)이 등장하는데, 이것도 푸루샤의 전지전능성과 상징적 측면에서 유사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러한 불교의 상징적 수사(修辭) 또한 베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102-104

신들이 푸루샤를 분할했을 때, 몇 부분으로 나누었던가? 그들은 그의 입을, 그의 두 팔을, 넓적다리와 발을 무엇이라고 불렀던가?
그의 입은 브라만(Brahman) 이 되고, 그의 팔은 전사(戰士, Rajanya), 넓적다리는 평민(Vaisya), 발은 종(Sudra)이 되었다.
달은 그위 마음에서 생겨났고, 태양은 그의 눈에서 생겨났다. 인드라와 아그니는 그의 입에서 나왔으며, 바람은 그의 생명의 숨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배꼽에서는 중간 지대의 공간이 생겨났고, 그의 머리로부터는 하늘이 전개되었고, 그의 두 발로부터는 땅이, 그의 귀에서는 하늘의 사방이 펼쳐졌다. 이와 같이 신들은 세계를 질서 있게 창조했다.
푸루샤를 위해 일곱 개의 봉인된 막대기와 훌륭한 일곱 개의 땔나무가 준비되어 있었다. 신들은 희생제사를 차리면서 푸루샤를 제사용 짐승으로 결박했다.
제사를 통하여 신들은 제물에게 제사를 바쳤다. 이것이 첫번째 제의의 법칙들이다. 이러한 제의의 법칙으로서의힘은 고대의 신들인 사드야(Sadhyas)가 머무는 하느르의 둥근 꼭대기에 도달한다. (<리그베다> X 90.6~16)  106

푸루샤가 크게 네 부분으로 갈라질 때, 입은 브라만이 되고 팔은 전사가 되며, 넓적다리는 평민, 그리고 발은 종과 같은 하인이 된다. 이것이 이른바 인도의 고대 전통사회를 형성하는 4성제도(四姓制度), 곧 카스트(ccaste)의 기초가ㅏ 된다.
푸루샤의 몸통 분할은 사회적 역할의 분할 또는 물리적 우주의 공간 배치라는 의의를 가진다. 예컨대 몸통의 최하위인 발에서 나온 섬기는 자 수드라는 사회의 기본을 이루는 층이 된다. 마치 땅이 우주의 기초가 되는 것과 같다.
넓적다리에서 나온 평민인 바이샤 계급은 왕성한 근육처럼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는 부류다. 팔에서 생긴 크샤트리아는 무기를 다루고 사람을 지휘하는 전사와 지도자의 역할을 한다. 입에서 나온 브라만은 각종 시와 노래로 만트라를 암송하며 제사를 집행하는 사제의 역할을 담당한다.  107



3 모든 것은 제의의 불을 통해 - 베다의 제사

기원전 10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는 아리아인의 세계관에 변화가 시작되었는데, 그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제사에서 숭배되는 신들의 권력이동이다. 예컨대 인드라 신이 초기 베다에는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점차 그 원위를 불의 신 아그니에게 물려주게 된다. 그리하여 부르이 신 아그니는 인드라와 동일시되기도 하고, 모든 신들의 왕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이는 생활 속에서 차지하는 불의 역할이 그만큼 더 중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13

천상(天上)의 신 바루나를 포함한 여러 신들에게서 다양한 권능을 넘겨받은 것은 인드라였다. 인드라는 바루나(Varuna) 신과 다른 열등한 신들(devas)의 권위를 모두 흡수하고 초기 베다시대 이후 오랫동안 신들 가운데서 최상의 권위를 차지해왔다.  
인드라는 신 중의 신으로서 유일신에 가까운 권위를 자랑하는 자리에까지 오르지만 결국 인드라의 권위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무너진다. 대신 그 권력을 지상의 신들, 특히 희생제의를 주관하는 불의 신 아그니에게로 이양된다. 아그니가 제의의 중심이 되면서 최고 권위의 인드라와 대등한 위치 혹은 우위에 서게 된 것이다.
이는 점차 제사에 관한 관심과 중요성이 제사 그 자체의 행위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 불의 제의적 기능을 토앟여 인간은 그들이 요구하는 다양한 신들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114

언어를 떠나 과연 인간이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인류는 분명 저급한 사고 수준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인간은 언어로 수천 년의 문명사를 기록하고 발전시켜왔다. 오늘도 우리는 하루하루 언어로 집을 짓고 산다. 그러나 모호하고 불의(不義)한 소통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바벨탑’이 되어, 엄청난 역사의 퇴보를 가져온 일면도 있다.
소리의 신 바크가 죽음의 신 야마의 역할을 겸하는 이유도, 소리속에 정의가 담겨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크는 ‘정의의 신’이기도 하다. 이제 그 정의의 신은 제단에서 거룩한 소리가 되어 만트라 속에서 울려 퍼진다. 그리하여 소리는 내면의 소리이자 ‘일자의 소리’가 된다. 일자의 소리는 다시 지식의 근원이 된다. 그리스도교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라고 하는 말과도 통한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신앙은 지식의 출발이며, 참 지식은 정의로운 삶 속으로 참 신앙을 불러일으킨다.  124-125

베다에서 의례와 만트라는 고유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적절히 사용되면 원하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반면에, 그것이 부적절하게 사용될 때는 커다란 재앙을 초래한다고 믿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브라만 사제들이 제사의 행위를 적절히 감독하는 직분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126

작은 제사 하나도 우주적 제사행위와 관련되는 것이므로 제사행위를 위한 전문화 교육은 필수였고, 오직 정화되어 순수한 영혼의 사제에게만 창조적 실재인 ‘브라만’의 힘이 부여된다고 믿었다. 그러기에 이들 사제는 늘 순수성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
제사를 수행하는 자는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의 순수성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늘 자신의 몸을 정화시킨다. 목욕을 하거나 머리를 깎고 신선한 버터를 바름으로서 신선한 ‘배아(胚芽)의 상태’를 유지한다. 이때 사제는 <아이트레야 브랄흐마나>가 진술하고 있는 것처럼, ‘봉헌의 오두막(배아)집’을 마련하게 되는 셈이다. ..
사제는 정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심지어 자신의 몸이 가려워도 맨손으로 자신의 몸을 긁어서는 안 되며, 준비된 흑염소의 뿔을 이용해야만 한다.  1127

사제가 오두막에 감금되고 불 가까이에서 염소 가죽 같은 거적을 둘러쓰고 있는 이러한 행위는 제사를 드리는 봉헌자의 ‘열’(熱)을 발산하기 위함이다. 의례를 진행하는 동안에는 땀이 흘러도 물을 마셔서는 안 되고 목욕을 할 수도 없다. 물은 오염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오직 열, 곧 타파스를 발산해야 한다. 파타스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열기이기도 하지만 ‘고행’을 뜻하기도 한다. 수고와 고통 없이는 해산(解産)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다의 제식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바른 수행을 통해 ‘브라만’의 힘을 얻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행방법으로서 사제의 정화노력, 곧 타파스를 발산하는 일 등이 아주 중요한 제의의 요소가 된다.
이러한 고행의 단계를 거친 사제는 신들의 위치로 가는 힘 또는 신들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는 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결국 희생제의를 통해서 얻어진 이러한 ‘힘’으로, 인간이 마침내 우주 그자체를 통제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28

<사타파타 브라흐마나> 문서는 소바(Soma, 酒) 제의, 이를 테면 제단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등의 여러 가지 무넺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128

프라자파티는 열기인 타파스를 이용하여 만물을 창조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타파스는 모든 창조의 원리다.  131

오늘날 인도의 힌두 사원에서 불의 제사가 계속 행해지는 것이나 죽은 자를 화장(火葬)하는 제도 역시 이러한 관념에서 멀지 않다.  131

타파스가 이중적 의미, 곧 ‘열기’이자 ‘고행’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다시 생각해본다면, 창조의 과정은 단순한 열기만이 아니라 고행이 기초가 되고 있음도 읽어내야 할 것이다. 고행은 현대 용어로 ‘수행’(修行) 또는 ’수양’(修養)이라 번역해도 좋을 것이다.  131-132

말은 인도유럽계열에서 전쟁의 영웅으로 숭배되는 지고한 상징이다. <리그베다>에서 말(馬)은 광범위하게 걸쳐 칭송을 받는다. ..
말은 <리그베다>에서 3중의 기능을 한다. 우선 실제로 길들여진 말(馬)로서 인도 아리아인이 인도 유렵 세계를 정복할 때 사용된 군마와, 성(聖)과 속(俗) 사이를 달리는 경주용 말, 그리고 제사에 희생되는 제의의 말이 있다.  132



4 죽은 자가 가는 운명의 길 - 죽음과 환생의 노래

<리그베다>에서 죽음은 주요한 주제다.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만큼 인간의 죽음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베다에는 제의에 대한 찬가가 주로 수록된 만큼 장례의 문제를 다루는 노래가 다양하게 나온다. 장례의 방식에 따라서 화장(火葬)식에서 부르는 노래, 매장(埋葬)식에서 부르는 노래 등이 서로 다르다.
베다에는 죽은 자가 가는 운명의 길이 몇 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하늘나라로 가는 자,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는 자, 혹은 부활하는 자, 화신(化身)이 되는 길 등이 표현되고 있다.
베다의 기록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죽음 후에 각기 저마다 운명의 길을 가되, 하늘나라 혹은 조상들의 세계 등으로 편입되어 가기를 원한다.  145

베다에서 죽음을 관장하는 신은 야마(Yama)다. 야마는 사자(死者)의 왕으로서 죽음의 세계를 지배한다. 야마가 죽음이 신이 된것은 그가 처음으로 죽음을 맛보고 저승으로 간 자이기 때문이다.  145

“험준한 난관을 헤치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길을 찾아낸 비바스반(Vivasvan : 태양)의 아들,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자, 야마 왕에게 공물을 바치면서 그를 공경하라.
야마는 우리를 위해 처음으로 길을 발견한자니, 그곳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곳은 우리의 조상들이 건너간 곳이며, 앞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도 각자의 길을 따라가게 되리라.” (<리그베다> X 14.1~2)  146

장례식의 화장터에서 사자의 주변을 떠돌며 사자를 먹으려고 달려드는 귀신들을 향해 명령하듯 사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버리는 형태의 노래도 있다.  “물러가거라. 쏙 물러갈지어다. 여기서 꺼져버려라. 조상들이 사자를 위해 이곳을 마련한 것이다. 야마가 그에게 낮과 물과 밤으로 장식한 안식처를 주었다.” (<리그베다> X 14.9)
고대의 인도인은 귀신들이 화장터에 살면서 사자의 타는 육체를 먹는다는 생각을 했던 듯하다. 귀신들이 불에 타는 사자를 먹기 위해 달려드는 이유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귀신이 불에 타면서 새로운 형태의 몸을 입고 하늘나라에 가게 되는데, 이때 귀신이 그 몸을 빌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적으로 달려든다는 생각이다. 또 하나는 후대의 힌두교에서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듯이 귀신들이 단지 사자의 시체를 먹기 위해 달려든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두 가지 생각은 점차 후대로 가면서 후자의 생각이 일반화되게 되었다.  149-150

불의 신 아그니는 베다 전체에서 인드라와 더불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신으로, 특히 제사에 관해서는 단연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만큼 제의와 관련항 아그니가 하는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죽음의 제의인 장례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아그니는 죽은 자를 조상에게 보내는 역할뿐만 아니라, 제사에 바쳐진 공물을 신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한다.  153

[죽은 자에 대하여]
”그대의 눈동자는 태양으로, 그대 영혼의 숨결은 바람으로 떠나시오. 그대의 업(業)에 따라 하늘로 가거나 땅으로 가시오. 아니면 그대의 운명이라면 물로 가시오. 가서, 그대의 손발은 식물의 뿌리가 되어 터를 잡으시오.” (<리그베다> X 16.3)
한 인간의 죽음을 두고, 죽음 그 이후에 우주로 환원되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 비유는 실제적인 환생의 모습을 기원하고 있는 것이리라. 불꽃 속에서 한 줌 재로 사라져갈 인간이지만, 그 인간이 생전에 지니고 있던 신체의 모든 부분이 다시 우주속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
위의 베다 본무에서 우리는 인도 사상의 ‘업’(業) 개념을 발견하게 되는데, 인간이 살아생전의 활동에 따른 결과를 후과(後果)로서 죽음 이후에도 받게 된다는 ‘인연업보’ 개념이 형성되는 초기의 사상적 맹아(萌芽)를 볼 수 있다.  155-156

[아그니에 대하여]
“염소는 그대의 몫입니다. 그대의 열기로 염소제물을 태우소서. 그대의 눈부신 빛과 화염으로 제물을 태우소서. 오, 피조물을 아시는 이 자타베다여! 그대의 상서로운 친절한 모습으로 선한 행위를 한 이들이 살고 있는 경건한 나라로 이 사자(死者)를 인도하여 주소서.
아그니여, 우리가 바치는 제의의 소마즙과 함께 죽은 자가 그대에게 제물로 바쳐질 때 그를 다시 자유롭게 하여 조상들에게 보내소서. 그리하여 그가 새로운 생명의 몸을 입고 극의 자손이 번성케 하소서, 피조물을 아시는 이, 자타베다여!” (<리그베다> X 16.4~5)
죽은 자를 위한 장례식에서 염솟가 희생제물로 등장하고 있다. 죽은 자를 위해 소마즙과 함께 바쳐지는 희생물을 통핳여, 죽은 자는 아그니의 도움으로 조상들에게 보내지고 새 생명의 몸으로 자손을 번성케 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죽은 자에 대한 기원의 노래가 이어진다.
[죽은 자에 대하여]
“까마귀가 와서 그대를 쪼아 먹든지, 개미나 뱀이 달려들든지, 아니면 그 어떤 짐승(자칼)의 먹이가 될지라도,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아그니가 그리고 사제들과 함께하는 소마가 그 상처를 온전히 지켜줄 것이오.
암소의 네발로 그대 몸을 감싸고 아그니의 화염 속에서 그대를 보호하시오. 두터운 지방질로 그대 몸을 덮으시오. 그리하여 그대를 완전히 불살라버리려고 하는 아그니의 맹령한 열기로부터 그대를 지키도록 하시오.”(<리그베다> X 16.6~7)
인도에는 유달리 커다란 까마귀가 많은 편이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새가 와서 죽은 자의 시체를 뜯어 먹도록 하지만, 베다의 전통에서는 불로 화장을 함으로써 장례가 진행된다. 화장을 하되 시체가 가급적 온전히 유지된 상태에서 다음 생으로의 신생(新生)을 기약한다.  156-158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매장식(埋葬式)에서, 사제는 죽음에 대하여, 또는 유족에 대하여 충고나 권면의 노래를 부른다. <리그베다> 제10권 제18장 제1~14절 전체에 걸친 매장식의 노래에 담긴 이야기를 중심으로 본문을 분석해보자.
[죽음에 대하여]
“죽음이여 떠나가거라. 신들의 길과는 다른 너의 길로 떠나거라. 눈을 가지고 귀를 가진 너에게 말하노니, 우리의 자녀와 인간(용사)을 해치지 말라.” (<리그베다> X 18.1)  161

“이 광활한 땅, 친절하고 온화한 어머니 - 땅(地母) 속으로 살며시 들어가시오. 어머니 대지는 젊은 여인이오. 공물을 바치는 누구에게나 양털처럼 부드러운 분이오. 어머니 - 땅으로 하여금 날름거리는 ‘파멸’의 혓바닥으로부터 그대를 지키게 하시오.
땅이여, 가슴을 열고 죽은 자를 받아 덮고 무겁게 짓누르지 마시오. 가슴을 열고 죽은 자를 받아 덮고 무겁게 짓누르지 마시오. 편안하게 굴 속에 들어가 그곳에 거하게 하소서. 땅이여 어머니가 아들을 치맛자락으로 감싸듯이 죽은 자를 감싸고 보호하소서.” (<리그베다> X 18.10~11)
<성서>의 표현대로 육신은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지만, <리그베다>처럼 죽은 자에 대하여 어머니 같은 포근하고 온화한 대지로 돌아갈 것을 축원하는 모습은 참으로 이색적잉고 따뜻한 느낌을 갖게 한다. ..
망자를 위로하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산 자에게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게 하고 살아생전 대지에 대한 고마움을 잃지 말고 살라는 교훈으로 들리기도 한다. 어머니 대지를 사랑하는 자는 땅속에서 ‘파멸’이라는 두 번의 죽음을 겪지 않고, 보호받는다는 뜻이다.  168

“나는 그대 주위를 흙으로 돋우고, 이 흙덩이를 내리면서 그대를 상하지 않게 할 것이오. 조상들이 그대를 위해 이 기둥을 굳게 붙잡아줄 것이오. 야마가 그대를 위해 이곳에 집을 지어줄 것이오.” (10.18.13)  169



5 최상의 권위를 자랑하는 위대한 권력자 - 천상(天上)의 신들

<리그베다> 제6권 제50장은 전체 1~15절로 ‘여러 신들’에 대한 찬가가 함께 섞여 있다. .. 불과 1, 2절에서만 해도 아디티, 미트라, 바루나, 아리아만, 사비트리, 브하가, 수리아, 다크샤, 아그니라는 아홉 신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이 모두 ‘아디티야’(Adityas)로서 ‘태양신들의 집단’이 되는 ‘빛’ 또는 ‘태양’과 관련이 있는 신이다.  181

9명의 아디티야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신이 바루나다. 바루나는 1,000개의 눈을 가지고 멀리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빛나는 황금 외투를 입고 있다. 바루나와 미트라를 태양빛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팔로 천상에서 마차를 운전한다. 천상은 1,000개의 기둥과 1,000개의 문이 달려 있는 곳이다.  183

모든 우주적 통치의 역하 ㄹ가운데서도 특별히 바루나는 비를 가져다주는 존재로 자주 언급되며, <리그베다>에서는 바다의 물과 관련해 종종 언급되기도 한다. ..
왕이자 도덕적 통치자이던 태양신은 후기 문헌인 <아타르바베다>에 가서는 성격이 다르게 변화된다. 예컨대 미트라와 바루나는 각각 낮과 밤의 대명사가 되는 것이다. 미트라는 낮의 해가 되고, 바루나는 밤의 달이 되는 것이다.  184-186

낮과 밤의 역할을 떠맡은 미트라와 바루나는 점차 후기로 가면서 다시 그 역할이나 기능이 축소되어간다. 바루나는 천사의 빛의 왕좌에서 다시 물을 통제하는 자로 바뀌어가고, 그의 황금의 집도 이제는 물속에 있게 된다. 바루나가 빗물을 내리면서 바루나와 미트라는 ‘물의 주(主)’가 된다. 바루나의 천상통치는 비를 내리는 행위처럼 점점 물과 관계가 깊어지고 있다. 바루나가 달과 관계가 깊어지는 것도 역시 물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186

바루나의 역할과 기능데 비해 미트라는 상재적으로 베다에서 적게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미트라와 바루나가 동시에 찬양을 받고 있는데, <리그베다>에서 미트라의 역할을 독자적으로 소개한 곳은 유일하게 제3권 제59장뿐이다.  186

아디티야는 다소 한계가 분명하지 않은 신들의 집단이다. <리그베다>의 몇몇 곳에서 태양신 아디티야의 이름은 경우에 따라서 일곱 개 혹은 여덟 개로도 묘사된다. 그러나 대체로 일곱 개인 것이 지배적이다. 이들은 미트라, 아리아만, 브하가 , 바루나, 다크샤, 수리아, 사비트리다. 이밖에도 ‘빛’의 그룹에 속하는 신 푸산 등이 있는데 이들은 뒤에서 별도로 살펴보겠다.
아디티야라는 명칭은 인드라에게도 적용되고 있을 만큼 의미영역이 광범위하다. 물론 인드라 신의 위대성이 점점 터져갈 때 아디티야의 이름에 흡수된 것이지만 말이다.
이와 같이 다양하게 표현되는 태양신 아디티야의 여러 가지 위상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신은 역시 바루나다. 그 다음이 미트라이고 세 번째가 아리아만이다.
이들은 모두 천상의 빛의 신으로서 각 이름의 의미처럼 밝고, 빛나면서 졸지도 않고, 흠 없고 순수하고 거룩한 황금빛의 신이다. 이 태양신들은 적을 가두고 신봉자를 보호해주며, 죄인은 형벌하지만 나약함을 용서해주기도 한다. 동시에 질병르 퇴치하고 장수와 자손의 번성을 도와준다.  187-188

바루나와 미트라에 대한 묘사와 마찬가지로 수리아는 ‘하늘의 눈’으로 표현되는데, 멀리 내다볼 수 있어서 인간들의 행위를 감시하는 자가 된다. 수리아는 아디티야의 하나이지만 동시에 아디티야와 구별되는 독특한 성질을 지닌다.
..
무엇보다 태양신 수리아의 진가는 힘의 세력을 신과 인간을 위해 세계를 비추는 빛에 있다. 그의 빛으로 어둠을 물리치고 어둠과 사악한 힘의 세력을 정복하는 것이다. 수리아는 신들의 사제 역할을 하기도 하고 미트라와 바루나 앞에서 인간들의 무죄를 선언하도록 요청을 받기도 한다. .. 천둥과 폭ㅍ풍수의 신 인드라가 태양을 가리게 하는 힘을 가지고 저마 위력이 커지면서 수리아는 차선으로 밀려나기도 한다.  189

사비트리는 눈, 손,혀, 팔이 모두 황금으로 된 황금의 신이다 사비트리는 황금의 손을 펼쳐서 인간들에게 생명을 선사한다. .. 사비트리는 노란 머리칼을 하고 황갈색의 겉옷을 입고서 황금 마차를 타고 있다. ..
사비트리는 맑은 길을 따라 하늘을 날면서 영혼을 의로운 곳으로 안내하며, 신과 인간에게 불멸을 제공한다.  194

사비트리의 역할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역시 인간들이 각각 자신의 몫을 감당할 수 있도록 고무시키고 격려하는 일과 사제들이 제의를 집행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었다.  195

풍요로움을 주는 푸산은 인색한 자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역할뿐만 아니라, 승리의 길을 만드는 자, 야비한 자의 심장을 찌르는 자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된다. 다른 찬가에서 푸산은 일반적으로 힘과 영광, 지혜, 관용성 등으로 상징된다.  196

<리그베다>에서 비슈누는 다른 신에 비해 극히 제한적으로 찬미되고 있다. 특히 수백 편이 넘는 찬가만을 지니고 있다. 인기 있는 다른 신들이 수천 번 넘게 호명되는 데 비해 비슈누는 100번도 언급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비슈누는 폭풍의 신 루드라와 같이 크게 존경을 받고 있고 후기로 갈수록 인기는 더해간다  
비슈누는 젊은 신으로 거대한 몸집을 하고 있고, 보폭이 넓어 세 번의 큰 걸음으로 악마로부터 세계를 구출해낸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비슈누의 세 걸음은 지상과 공중, 그리고 천상의 가장 높은 곳으로 구분해 설명되는데, 이 걸음은 새로운 우주 공간을 창조해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첫 번째 걸음은 땅의 영역을, 두 번째 걸음은 상층부 하늘, 세 번째 걸음은 가장 높은 천상의 세계로 비슈누가 거주하는 곳이다. 이 세걸음은 새벽과 정오와 석양이라는 태양의 세 가지 현상에 대한 상징적 은유다. 이는 새벽의 여신 우사와 길의 태양신 푸산, 그리고 석양의 태양신 사비트리를 연상하게 한다. 비슈누의 걸음을 ‘비카르마’(vikarma) 또는 ‘파다’(pada)라고 하는데, 특히 후자에는 많은 은유적 해석이 따른다.
첫 번째 해석으로는 ‘발’(foot)이라는 의미로 라틴어의 ‘페스’(pes)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어떤 장소에 머물러 있는 동작을 포함하여 발의 동작에 따른 ‘발걸음’(step)이나 ‘족적’(footprint)으로 해석한다. 셋째는 ‘파다’가 인간과 신이 함께 거주하는 실제적인 장소를 뜻하거나, 소의 바랒국이 찍힌 자국에 무링 고이듯 그곳에서 꿀샘이 솟아나는 장소를 만드는 발걸음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비슈누의 발걸음은 그 보폭으로 인하여 유명할 뿐 아니라, 걸음마저 다양하게 해석된다. ..
<리그베다> 제 1권 제155장에서는 비슈누-인드라 신을 나란히 영웅적인 신으로 찬양하기도 한다.  197-198

비슈누는 처음에는 빛의 신으로 출발하여 후기 베다시대에 갈수록 점점 인기가 높아져 힌두교의 최대신인 창조자 브라흐마, 파괴와 재새으이 신 시바, 그리고 유지의 신 비슈누라는 삼위일체의 최고신 자리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높은 지위와 인기를 누리게 된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비슈누 신이 인간과 동무르이 종족 번식에서 가장 중요한 태아(胎兒)를 보호해주는 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은 다른 어떤 태양신에게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가축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삶의 질이 향상되면서 번영을 기원하는 인간과 사제들에게 더욱 인기 있는 신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더구나 비슈누는 그의 큰 세 걸음으로 후기에 가서는 악마의 대부로 여겨지는 아수라(Asura)로부터 세계를 보호하는 등, 땅과 공중, 천상이라는 세 개의 세계를 모두 정복한다. 때문에 여러 신에게 제사를 드리지만 대부분은 비슈누에게 바쳐진다. 바로 이 점이 점차 비슈누가 가장 위대한 신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특히 베다 후기 문서에서 자주 발견되듯이 비슈누가 에무사(Emusa)로 불리는 수퇘지로 화신(化身])하여 지구를 물에서 건져올리는 모습이라든가, 인도 고대 설화집인 <푸라나>(Purana)에서 거북이가 비슈누의 화신잉 된다는 표현 등은, 모두 희생 행위 또는 제물로서의 비슈누를 위대하게 평가한 것이다.
비슈누의 인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인도 신화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바가바드 기타>의 주인공 크리슈나(Krishna)로 화신하여 인류의 평화를 가져오는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결국 ‘희생제의’의 존재로서 비슈누가 인류와 우주를 건지고 보호하는 가장 위대한 신으로 숭배받게 되었던 것이다. 맟치 그리스도교에서 예수가 십자가의 희생제의를 통해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위치로 승격되었듯이 말이다.  201-202

<푸라나>에 따르면, 마누는 14대의 긴 기간에 걸쳐서 공중에 거처하면서 인간의 의식을 각성시키는데, 그 일곱 번째 시기에 해당하는 마누의 이름이 비바스바트라고도 한다. 이 때문에 인간은 비바스반 아디티야(Vivasvan Aditya)의 후손이 된다. 이간은 태양의 아들인 셈이다.
<리그베다>에서는 비바스바트를 신들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의 아내는 장인(匠人)의 신 트바스트리의 딸 사라뉴(saranyu)다. 사라뉴와의 사이에서 야마와 마차를 이끄는 천상의 신 아쉬빈을 낳는다.  204

아쉬빈은 <리그베다>에서 인드라, 아그니, 소마 다음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찬양을 받는 신이다. 아쉬빈(asvin)이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의미는 ‘마차꾼’이라는 뜻이다. ..
아쉬빈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두 개의 눈, 두 개의 손, 두 개의 발, 두 날개, 그리고 쌍으로 같이 있는 동물들과 비교된다는 점이다. 이들 쌍은 빛나고 기민하며 젊고 아름답다. 또한 붉은색을 띠면서 강한 힘을 자랑하고 법칙을 강화하기도 하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자(全知者)라 불리기도 한다.  205-206



6 공중의 세력을 관장하는 대기의 힘 - 대기(大氣)의 신들

<리그베다>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려긍ㄹ 행사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인드라가 바로 이 대기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신이다. 천둥번개를 일으키며 공중의 세력을 관장하는 인드라와 바람의 신 바유, 폭풍의 신 마루트와 루드라도 대표적인 대기의 신들이다. ..
인드라(Indra)는 ‘대기’(大氣)의 현상을 인격화한 공중의 신이다. <리그베다>에서 가장 위대한 신으로서 ‘신들의 왕’으로 군림한다. ..
인드라는 날씨를 관장하는 주(主)로서 천둥 번개를 일으키며 비를 내려준다. 비를 내려줌으로써 다산(多産)의 신으로 존견을 받지만, 동시에 폭풍을 일으키는 신으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한다.  213

<리그베다>에서 인드라에 대한 찬가는 250개나 된다. 이것은 <리그베다> 전체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214

그가(인드라) 즐기는 음식은 소마인데, 태어나던 날도 소마를 마셨다고 한다. .. 바람의 신 바유나 창조자 브리하스파티, 또는 아그니도 소마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지만, 단연 최고의 애주가(Soma-drinker)로는 역시 인드라가 꼽힌다.  216

사회, 정치적 배경에서 탄생한 인드라 신은 천둥번개를 가진 공포의 대상인 동시에 그를 숭배하는 자들에게 비와 불로 은총을 가져다 주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후기 베다시대로 가면서 인드라는 최고신의 지위에서 비교적 낮은 신으로 떨어진다. 비록 작은 신들의 왕으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긴 하지만, 이른바 인도의 주요한 3신, 즉 브라흐마(Brahma), 비슈누, 시바보다는 열등한 2인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후기에 가서 인드라는 신들이 살고 있는 하늘(Swarga)의 통치자로 묘사되면서, 이 단계에서 인간의 여러 가지 나약함을 보살펴주는 자가 되기도 한다.  235

폭풍의 신 루드라(Rudra)는 인드라나 아그니처럼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리그베다>에서는 루드라에 대한 찬가가 독립적으로 편집된 곳이 단 세군데뿐이다. .. 그러나 루드라는 후대에가서 힌두교에서 가장 위대한 세 신 가운데 하나인 시바(Siva)로 불리며 역할이 승격된다.  236-237

루드라가 자주 불리지는 않지만 칭송을 받을 때는 다른 여러 신들에 비해 독립적으로 높이 찬양받으며 최고신의 대접을 받는다. 이는 인도 베다신화의 대표적인 특징이기도 한데, 예배를 드리는 자가 필요에 따라 그때마다 정한 신에게 최고의 칭호와 찬사를 부여하는 것이다.  241

마루트는 루드라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루드리야(Rudriyas)라 불리기도 한다. 마루트는 폭풍의 아들이자 바람의 신으로서 인드라의 위대함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루드라보다 더욱 많이 칭송되었다.  241

바유는 이름 자체가 ‘불다’라는 뜻의 어근 ‘바’(va)에서 생긴 단어로, 바람의 신으로서 공중의 최고 신인 인드라와 깊은 관계가 있다.  248

친구 인드라와 같이 바유도 순수한 형태의 소마를 즐긴다. 바유는 신들 가운데서도 가장 빠르기 때문에 소바를 처음 마신 자가 되었다. ..
이에 비해 바타는 바람의 힘을 과시하고 거대한 먼지 구름을 일으킨다. 형태는 보이지 않으나 소리는 우렁차며, 신들의 호흡이자 신성한 생령(生靈-살아있는 일반 국민)으로서 공물로 섬김을 받는다. 또한 번개와 태양의 출현을 알리는 전령사이기도 하다. 불그스름한 빛을 만들고 새벽을 빛나게 한다. ..
후기로 갈수록 바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248




7 생명을 살리는 제의의 불과 음료 - 지상의 가장 위대한 신

지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최고 신으로 찬양받고 있는 대표적인 신들로는 단연 아그니와 소마를 들 수 있다. 불의 신 아그니와 술(음료)의 신 소마는 불과 물로 상징되는 만큼이나 서로 관계가 긴밀하다. ..
불과 물은 성질상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인도-유럽적 개념에서 물과 불은 ‘뜨거운 연금술의 액체’와 같이 하나로 융합되어 설명되기도 한다. ..
아그니와 소마는 베다의 시인들에게 제사와 인생의 의미를 찾고 이해하게 하는 주요한 영감을 준다. 아그니가 제의의 생산적 측면과 관련한 ‘아폴론적 영감’을 준다면, 소마는 제의의 파괴적인 요소와 관련해 인생의 비전을 설명한다는 측면에서 ‘디오니소스적인 영감’을 준다고 설명되기도 한다.  251

아그니는 제사행위에서 가장 먼저 초대되는 신이다.  252

또 다른 <리그베다> 본문에서는 아그니의 찬생이 물과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그니는 물의 아들로 탄생되는데, 이는 마치 구름에서 번개가 치는 이치와 같다. 조로아스터교의 성전 <아베스타>(Avesta)에 나오는 깊은 물속의 정령처럼, 아그니는 물에서 탄생한다. 그리하여 아그니는 물의 아들(Apam Napat)이 된다.  265

<리그베다>의 시인 사제들은 아그니 못지 않게 소마에 대하여 많은 부분에서 길고도 장황하게 다루고 있다. 소마는 제의에서 가장 중요한 음료로서 신들이 즐기는 술이기 때문이다. ..
<리그베다> 제9권은 114편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시 전체가 오직 소마에 대한 찬가, ‘소마 파바마나’(Soma Pavamana : 정화시키는 자)로 편집되어 있다. ..
제의에 바쳐지는 음료 소마는 일종의 약초인 소마나무의 즙을 내어 만든다.  267

소마의 다양한 변형은 모두 물과 관련이 깊다. 구름, 암소의 우유, 꿀, 음료, 그리고 식물의 수액이나 동물(황소)의 정액(분비물, 씨앗), 술 등이 모두 물의 이미지와 관계가 깊고, 그 물은 언제나 제의의 한복판에서 신의 음료나 음식으로서 기쁨을 얻게 한다.  271

소마는 신들의 연회에 없어서는 안 될 제의의 기본요소인 술의 신이지만, 인간들에게 힘과 명성을 부여하는 신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불의 신 아그니와 함께, 술의 신 소마는 인두라는 칭호를 부여받으며, 물의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물의 아들이 되기도 한다.
인두는 ‘빛나는 물방울’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인더스(Indus) 강도 바로 이러한 명칭의 뜻을 지닌 ‘빛나는 물줄기’를 반영한 것이다. 소마는 다른 <리그베다>의 본문에서도 종종 인두라는 별칭으로 불리는데, 이두는 이때, 천지간에 보물과 부요함과 물을 가져다 주는 자다.  274



8 천지자연의 신성을 노래하라 - 천지와 자연의 신

<리그베다>에서 천지(天地)의 신은 각각 하늘의 신과 땅의 신으로 숭배를 받기도 하지만, 짝을 이루어 하나의 명사처럼 ‘천지의 신’으로 숭배받기도 한다. 하늘의 신 디야우스(Dyaus)나, 땅의 신 프리티비(Prthivi)는 각각 아버지(pitara)와 어머니(mataa)의 형태로 숭배를 받는데, 둘이 하나로 합쳐진 자웅동체(雌雄同體)의 디야우스프리티비(천지)라는 이름의 신으로도 <리그베다> 여섯 곳에서 독립적으로 찬미되고 있다.  285

천지가 디야우스프리티비라는 한 쌍으로 숭배를 받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서 땅만이 독립적으로 찬양을 받는 시편도 있다. 이른바 땅의 신, 프리티비에 대한 찬가다. 이는 그리스의 지모신(地母神) 가이아(Gaia)에 비교될 수도 있다.  290

“오, 피리티비, 언덕을 나누는 연장을 지닌 지니리의 그대여! 땅을 활기 있게 하는 풍부한 급류를 지닌 전능자여. 오, 자유로운 방랑자여, 밝은 낯빛으로 그대에게 소리 높여 찬미하나이다. 부풀어 오르는 구름같이, 우는 말처럼 달리는 오, 빛나는 색조의 말달리는 자여. 위대한 힘으로 강한 나무륻을 땅위에 붙들며, 구름으로 번개르 일으켜 하늘에서 비의 홍수를 내리는 그대를 찬미하나이다.” (<리그베다> V 84.1~3)  291

흥미로운 것은, <리그베다>에서 아수라가 하늘의 힘 있는 신으로 평가를 받았지만, 벌써 후기 문서에 속하는 <아타르바베다>에 이르러서는 아수라의 위상이 다른 신에게 정복당하는 위치로 전락한다. 땅의 여신마저 아수라가 설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신들의 권력이동과 선악구별의 기준이 후대에 갈수록 점차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 시대에 와서 아수라가 악마적 요소로 변형되는 것도 이 시기를 거치면서다.  293

<리그베다> 본문에는 리부스(Rbhus)의 이름이 100여 곳이 넘게 불리는데, 그중 11편의 찬가에서 독립적으로 등장한다. ..
리부스의 성격을 특징짓기는 어렵지만 인드라를 돕는 신의 역할을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신들을 장식하는 목수로서 장인(匠人) 역할을 하고 있다. ..
리부스가 자랑하는 훌륭한 기술의 특징은 다섯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아쉬빈을 위해 말도 없고 고삐도 없이 세 개의 바퀴로 공간을 여행하는 수레를 만드는 일. 둘째, 인드라를 위해 두 마리 적갈색 군마를 장식하는 일. 셋째, 브리하스파티를 위한 신비의 암소를 제작하는 일. 넷째, 그들의 늙어가는 부모인 천지(天地)를 회춘시키는 일. 다섯째, 트바스트리가 만든 신들의 컵 한개를 흔들어 네 개로 만드는 일이다.  294-295

베다에서 동물은 다른 신들에 비하면 극히 제한적으로 숭배받는다. 그것도 동물에 대한 직접적인 숭배라기보다는, 여러 신들이 동물의 몸을 입고 나타나는 상징적인 비유의 형태다. 그러나 점차 후기로 갈수록 동물에 대한 숭배가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306

동물 가운데서는 무엇보다 말과 소가 가장 많이 등징하여 칭송을 받고, 염소, 멧돼지, 원숭이, 거북이가 비슈누의 화신이 된다. 뱀 또한 숭배의 대상이 되는데, 이는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뜻에서 달래는 차원의 숭배다. 이밖에도 독수리와 같은 새가 인드라나 태양에 비유되면서 신적 존재로 찬미를 받는다.
동물 가운데서 다디크라(Dadhikra) 또는 다디크라반(Dadhikravan)이라고 하는 말(馬)은 <리그베다>에서 가장 유명한 말인데, 네 번에 걸쳐서 독립적으로 찬미를 받는다. 여러 가지의 말 가운데서 다디크라는 그 빠르기로 인해 독수리와 동일시되면서 칭송받고 있다.  307

원숭이는 힌두 신화에서 원숭이 신 하누만(Hanuman)과 연결되는데, 원숭이의 왕인 하누만은 주인에게 충성하는 종(dasya)의 상징이다.  310

동물들 가운데서 들짐승이나 물짐승 외에 하늘을 나는 새는 종종 태양에 비유된다. 태양 새 가루다(Garuda)는 새들의 왕으로서 절반은 인간이고 절반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가루다는 비슈누의 수레가 되고 뱀과 대적한다. 머리와 꼬리, 날개는 독수리의 것이고, 몸통과 다리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  311



9 남성 우월 신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여신 - 베다의 여신들

<리그베다>에서 여성이 대부분 종속적 위치인 것은 사실이지만, 가끔씩은 주체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여신은 천상의 위대한 신 가운데 하나인 새벽의 여신 우사(Usas)다. 우사는 천상의 위대한 신들에 비하면 낮은 서열에 불과하여, 다른 신들처럼 소마의 제의를 함께 나누지는 못한다. 하지만 여신 가운데는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
우사(Usas)는 산스크리트어로 새벽을 뜻한다.  313

새벽의 여신 우사는 그녀의 어머니가 해준 화려한 차림을 하고 인간에게 살짝 가슴을 보여주는 가냘픈 처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사는 거듭거듭 태어나면서 영원히 늙지 않는 젊음을 유지하여 어제와 같이 지금도 빛나지만 미래도 계속해서 빛날 것이다.   313-314

연인이 사랑하는 여인을 뒤따르듯이 태양은 새벽을 따른다. 새벽의 신 우사는 태양신 수리아의 아내다. 그러나 몇몇 다른 자료에서는 우사가 수리아의 어머니로 표현되거나, 우사가 수리아에게서 탄생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곳도 있다.  314

<리그베다>의 다른 본문에 따르면, 사라스바티가 쏟아낸 거대한 눈물이 파도가 산에서 홍수처럼 흘러내려 산과 들을 적신다. 사라스바티의 강둑에는 왕과 백성들이 살고 있고, 시인과 사제들은 이런 축복을 주는 사라스바티가 멀리 타국으로 떠나지 말고 늘 가까이에서 축복을 더해달라고 기원한다. 사라스바티는 천상의 태양신 푸산이나 대기의 신 인드라, 그리고 특히 인드라를 돕는 전사 그룹 마루트와 더불어 많은 찬미를 받는다.
새벽의 여신 우사나 강의 여신 사라스바티의 강력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여신이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322-323

밤의 여신 라트리(Ratri) 또한 자매인 새벽의 여신 우사와 같이 하늘의 딸로 불린다. 밤이지만 어두운 것만이 아니라, 무수한 별빛이 밝게 흐르는 별이 빛나는 밤이다.  323

밤의 여신은 새벽의 여신과 자매로서 빛으로 어둠을 정복하고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자들에게 안내자가 되어준다. 밤의 여신은 우르미야라는 또 다른 명칭으로 존경받는다.  325

<리그베다>에서 아파(apah : 물)에 대한 신격화는 소마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물은 특히 인간의 생명을 유지해주고 새로이 깨끗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여신으로 불린다.  326

베다의 시인은 물을 자애로운 어머니에 비유하여, 아기에게 젖을 주듯이 생명력과 치유력이 풍부한 물의 활력을 얻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327

잠들 줄 모르는 아파는 우주 하늘의 바다가 그 기원이고, 인드라가 개척한 수로를 따라 끊임없이 흐르며 인간들을 이롭게 한다. 이 물은 하늘에서 내려와 산과 들로 흘러 강을 이룬다. 물의 여신 아파는 거대한 강줄기(sindhu, 또는 Indus)를 따라 바다로 향한다. 그 바다는 하늘의 바다이기도 하고, 지상의 바다이기도 하다.
흐르는 물을 따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살아나고 오염된 인간은 물의 여신을 통해 죄악을 씻는다. 이런 사상 아래 오늘날도 힌두인은 갠지스나 인더스 강에서 목욕을 통해 죄를 정화하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기를 비는 것이다.  328-329



10 민중을 위한 주술에서 베단타 철학으로 - <아타르바베다>와 <브라흐마나>

베다의 네 종류 중에서 가장 후기에 속하는 <아타르바베다>(Atharvaveda)는 주술(呪術, magic)적 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 무려 731개가 <리그베다>에서 인용해온 것이다. 그밖의 많은 본문 내용도 출처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민간의 주술적 내용들을 혼합하고 있어서 한때는 위경(僞經, apocryphal) 취급을 받기도 했다. ..
제사를 집행하는 아타르반(Atharvan)이 속죄를 비는 제의나 저주(詛呪)에 관한 문헌, 또는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에서 사용하는 의례적 문구 등이 많다. 아타르반은 고대 인도의 초기 사제들을 지칭하는 말로, 후대의 브라만 사제들의 선조가 되는 셈이다. ‘아타르바베다’라는 말도 여기서 따온 것이다.  345

비록 <아타르바베다>는 <리그베다>에 비해 그 중요성이 뒤지기는 하지만 대부분 <리그베다>에서 뽑아낸 찬가들로 구성된 노래집(saman)인 <사마베다>나 ‘제의의 기도문(yajna)으로 구성된 <야주르베다>에 비하면 그 비중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아타르바베다>가 이렇게 인기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인도 고대의 원시적인 대중 신앙과 미신들을 여과 없이 생생하게 다루어 주는데다가 초기 인도-아리아인의 하층민 생활상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
<리그베다>가 비교적 고대인도-아리아인 상류층의 종교적 신념과 행위들을 봉여주고 있던 데 비해, <아타르바베다>는 고대인도의 주술적 경향과 하층민들의 생활상을 보여줌으로써 <리그베다>를 보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345-346

<아타르바베다>에는 특히 저주를 위한 주문이 많다. 이 때문에 <아타르바베다>는 ‘저주의 베다’(Cursing-Veda)라고도 불린다.  349

<아타르바베다>는 네 개의 베다 가운데 가장 후대에 기록된 문서로, 민중의 생활과 가장 가깝다.  351

재미있는 기도문들을 조금 더 언급해 보자면, 집을 건축할 때 비는 기도문, 씨앗을 뿌릴 때 축복하는 기도문, 곡식의 성장을 촉진하는 주문, 들판의 곡식에 몰려드는 해충 떼를 몰아내기 위한 주문, 곡식이 번개 맞는 것을 막기 위한 주문 같은 것이 있다.
가축의 보호와 번식을 위한 주문, 불의 위험을 막는 주문, 새로운 수로로 강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주문도 있다. 그밖에 상인의 기도, 도박이나 주사위 놀이에서 성공을 비는 기도, 잃어버린 재산을 찾기 위한 주문, 죄와 신성모독의 속죄를 위한 주문 등 그 종류는 무궁무진하다.  351

이밖에도 <아타르바베다>에는 사제들인 바라문의 억압에 대해 저항하는 저주의 기도문이 상당수 있어 흥미롭다. 권력으로 민중을 억압하는 바라문을 이렇게 저주한다.
“바라문을 온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죽여라. 신들을 욕되게 하고 생각 없이 재물만 탐하는 자, 그의 심장에 인드라가 불을 지피리라. 그가 살아 있는 한 천지가 그를 증오하리라. …… 바라문의 혀는 활이 될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화살촉에 걸리는 줄이 되리라. 그리하여 그의 숨통과 이빨이 거룩한 불로 태워져 패대기쳐지리라. 이들 바라문과 같이 신들을 욕되기 하는 자들도 그러하리라. 심장을 꿰뚫는 강한 화살로 신들이 이들을 벌하리라.” (<아타르바베다> V 18.5,8)
제사풍속이 만연한 고대사회에서 사제의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아지면서 자세가 본연의 자세를 잃고 종교적 권력으로 민중을 압제하자, 점차 이에 저항하는 저주의 목소리가 높아갔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352

통제해야할 대상이 더 클수록 정보와 지식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이러한 희생제의의 주술적 개념은 점차 우주적 관념으로 확대되었으며, 그 겨로가 ‘제의의 철학’인 베다의 마지막 철학, 즉 초기 형태의 우파니샤드(베단타 철학)로 나타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베단타 철학은 <리그베다>의 말기 사상으로서, 우주의 최고원리를 일신교(一神敎) 또는 일원론으로 설명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경향은 베다의 가장 후기 저술인 <아타르바베다>의 후반부에서부터 드러난다.  353

후기에는 브라만을 우주의 최고 원리로 내세우는 사상이 더욱 환영받게 되면서 우파니샤드의 원리로 발전한다. 우주적 최고 원리인 브라만을 인간 내면 속의 자아, 곧 아트만(atman, 自我)과 동일시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실로 푸루샤(아트만)를 아는 자는 ‘이것이 브라만이다’라고 생각한다. 그 속에 모든 신격(神格)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암소가 외양간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이.” (<아타르바베다> V 11.8.32)
우주 최고의 원리인 브라만이 인체의 내부에 도사리고 앉아 있다는 이 사상은 인간이 바로 브라만이라는 사실을 통찰하게 하는 우파니샤드 최고의 진술의 사상적 맹아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미 <아타르바베다>의 시인은 인간 내부에서 우주적 통찰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55

<브라흐마나>는 베다의 본집을 해석한 주석서로서, <리그베다>를 포함한 4개의 베다 본문에 대한 각각의 해설서다. 특히 제사의 구체적인 방식과 절차는 물론, 그 의미를 자세히 서술한 사제들의 기본적인 지침서가 주를 이룬다.  356

<브라흐마나>를 다시 내용적으로 구분해보면, 제사의 방식과 규범을 다룬 지침서인 ‘비디’(Vidhi, 儀軌)로 이루어져 있다. 제사의 기원과 전설을 설명해준 아르타바다에서 베단타 철학이 출발하는데, 이것이 우파니샤드 철학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아르타바다의 논의는 베다의 주석서인 <브라흐마나>의 끝부분으로서, 제사에 관한 최종적인 철학적 논의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베다의 끝’(end of the Veda)을 의미하는 ‘베단타’(Vedanta = Veda + anta)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베다의 마지막 문헌 <브라흐마마>, 그리고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아르타바다를 더욱 깊이 숙고하여 철학화한 작품이 바로 <아라냐카>(Aranyakas, 密林書)로서, 베다와 우파니샤드의 사상체계의 과도깅에 해당한다.  357

<브라흐마나>의 주된 사상은 무엇보다 ‘제사 만능주의’다. 베다의 본집이 주로 시인의. 노래와 찬가 형식의 만트라로 구성된 데 비해, <브라흐마나>는 주로 사제들의 편집물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제사가 주축이 되고 제사가 모든 사상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학식이 있으며 베다에 정통한 바라문(브라만)은 인간이라는 신이다.” (<사타파타 브라흐마나> II 2.2, 6)
사제 즉, 바라문(婆羅門, Brahman)은 신들을 대신하여 제식(祭式)을 주관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권위는 점점 더 높아만 갔다. 당시의 세계관에서는 제식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고, 제식이야말로 신들을 강제하거나 우주의 현상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베다의 세계관에서는 신들마저 제식을 수행해야만 비로소 불멸성을 획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이유로 제사를 집행하는 바라문의 권위는 단순히 신에게 봉사하는 경건한 봉사자의 차원을 넘어서 독자적이고 전문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따라서 제식의 힘으로 신들을 지배하는 자인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신, 곧 신인(神人)의 위치로 격상되었다.  358

예컨대 제의 전 과정을 주관하며 총감독의 위치에 있는 리트비즈(Ritvij), <리그베다>의 찬가를 낭송하는 호트리(Hotri), <사마베다>의 노래를 부르는 우드가트리(Udgatri), <야주르베다>의 노래를 부르는 아드바르유(Adhvaryu), 그리고 <아타르바베다>의 사제인 브라민(Brahmin, Brahman)이다.  360

브라만은 사제 계급을 의미하고, 동시에 사제 그 자체를 뜻하는 브라만으로도 혼용하고 있다. 이러한 혼동을 피하고자 사제로서의 브라만을 구분지어 설명하는 용어가 브라민이다.  360

오늘날 힌두교에서 제의를 수행하는 사제에 대한 일반적인 명칭은 브라민(브라만) 외에도 가정에서 가족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 프로히타(Purohita), 브라만 외의 다른 계급에서 자신들의 제사를 드리는 사제인 잔가마(Jangama), 성지순례를 오는 자들을 위해 힌두 사원에서 제의를 안내하고 집행하는 판디야(Pandya), 사원이나 성소에서 주로 의례의 절차와 푸자(puja ; 봉헌 또는 예배)를 담당하는 푸자리(Pujari) 등 다양한 명칭이 있다. 이는 제사의식의 전문화와 사제계급의 분화를 설명해주는 다양한 본보기다.
제사가 점차 중시되면서,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신들이 아니라, 올바른 제사를 드리는 행위 자체로 변해갔으며, 그 제사행위를 제대로 수행하는 사제들의 권위도 높아져갔다. 따라서 제사는 우주적 힘을 지닌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는 후대에 인도의 정통 철학파의 하나로 제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푸르바 미맘사(Purva mimamsa) 학파에서 계승되었다. 제의 속에서 신(神)의 존재 가치는 점점 퇴색하고 있다.  361

프라자파티는 자신을 제물로 삼고자 했다. 그리하여 손을 비비자 희생제물로 버터가 나왔다. 처음 나온 버터는 머리카락이 빠져 있어서 제물로 바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첫 버터를 불에 쏟아버리며, “태워서 마시자”(osa dhaya)라고 했다. 이 “오사드야”라는 ‘말’ 속에서 ‘식물’(osadhayas)이라는 말이 나왔다
온전한 제물을 위하여 두 번째 손을 비비자, 깨끗한 버터와 우유가 나왔다. 이것을 제물로 바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생각하자 “그것을 제물로 바쳐라”라는 심중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프라자파티는 깨달았다. 자신에게서 나온 말, 그 언명의 위대성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sva)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위대한 명령의 언어(aha), 그 소리를 깨닫고 프라자파티는 “스바하!(Svaha)라고 외친다. 스바하는 직역하면, ‘그 자신의 소리’지만, 의역하자면 “그렇게 되라”(So be it!)는 의미다. 이것이 불교에서 ‘사바하’라는 염불(念佛)의 끝을 장식하는 종식언어로 번역됐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아멘’에 해당한다.
프라자파티가 “스바하”를 외치자 태양이 일어나 뜨거워졌고 바람이 크게 불었으며, 아그니는 돌아가버렸다. 프라자파티는 계속 제의를 수행하여 자손을 번식시켰으며, 자신을 삼키려고 달려드는 아그니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불의 제사(Agnihorta)를 드리는 자는 누구든지 프라자파티처럼 자손을 번식하게 된다고 알게 되었다. 누구든지 죽어 불에 던져 화장(火葬)하면, 부모에게서 태어나듯이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불은 오직 그 몸만을 불태울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
창조의 원동력은 고행, 즉 타파스가 기초이고, 그 고행을 통해 불의 신 아그니와 내면의 힘, 언어가 탄생되며,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칠 때 비로소 만물이 번식하면서 ‘존재’의 지속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369-370

<브라흐마나>의 또 다른 특징은 제사의식을 올바로 행해서 얻게 된다는 필연적 결과에 대한 믿음이다. 제사행위의 인과적 보상법칙을 믿는다는 것이다. <리그베다>에서 ‘자연의 법칙’을 의미하던 개념 ‘리타’는 이제 ‘행위의 법칙’을 의미하게 되었다.
후기 인도철학 전반에 가장 큰 특징으로 드러나는 카르마, 즉 행위의 결과에 대한 보응으로서의 업(業)에 대한 개념은 바로 이러한 제사주의 성격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밖에도 <브라흐마나>에서는 인간의 본질도 정신과 육체로 구분하여, 정신을 각각 아트만, 마나스(manas, 意根(온갖 마음의 현상을 이끌어 내는 근원)), 프라나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372



맺음말 - 영원히 열린 계시의 책, 베다

베다는 한국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베다의 위대한 신인 인드라는 불교에서 제석천(帝釋天, Sakra devanam Indra)으로 해석되었고, 이는 단군신화에서 환인(桓因)의 개념으로 전용된다.  373

베다는 각각 본집과 그 본집에서 채택한 의례를 위한 해설서인 <브라흐마나>와 함께, 이를 더욱 심층적으로 토론하고 철학적으로 해명한 ‘숲의 책’, <아라냐카>로 구성되는데, 이것이 곧 베다에 대한 최종적인 철학적 해설서인 우파니샤드로 정립되게 되었다.  374

베다에서 말하는 우주창조론은 <성서>의 창조 기사와 마찬가지로, 다소 후기에 기록된 것일 가능성이 많다. 아리아인의 인도 정복시기에 가장 숭배를 받았던 인드라와 같은 전쟁영웅 신이 점차 기능을 상실해갈 즈음에, 고대 인도인은 우주의 발생에 관해 더 깊고 철학적인 사색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추측이다.
베다의 우주발생의 기원설은 여러 가지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한 현자들이 각각 다양한 시각에서 우주 발생에 대한 상상력을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기원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어떤 원리의 신이 목수처럼 우주라는 건축물을 만들어내면서 여러 기능을 지닌 신들이 창조의 과정에 협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타파스’와 같은 열기가 발생하여 스스로 진화해가는 과정을 말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견해들이 상호배타적 관점인 것은 아니고, 두 가지 견해가 서로 결합되기도 한다.  377-378

베다의 또 하나의 관점은 제사의 기능이었다. 제사의 주된 기능은 인간의 생로병사에 관한 모든 분야를 관장하면서, 축복과 장수를 신에게 비는 것이었고, 그 제사를 담당하는 역할을 떠맡은 자가 사제였다. ..
처음에는 모두 순수한 예언 기능과 시인으로서의 통찰력을 지닌 현자들이었으니, 제사사의 기능이 점차 세속화되어가면서 제사를 권력의 도구로 사용하고 부를 착취하는 수단으로 전락시키기도 했다. ..
점차 후대로 갈수록 제사의 기능은 약화되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궁극적인 물음부터 시작하여, 인간과 우주의 근원에 대한 탐색이 깊어지면서, 베다의 끝인 우파니샤드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379-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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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헤르만 헤세가 들려주는 진정한 여행의 의미


1

유럽에서 최초로 여행 열기가 고조된 시기는 18세기였다.  5


로마를 '세계의 대학'이라고 칭한 빙켈만의 저서 <고대 예술사>(1764)가 오래 전부터 이탈리아 여행을 꿈꾸던 괴테에게 좋은 참고자료가 되었다. 빙켈만의 글에는 자신의 로마 탐구를 토대로 다른 여행자들의 안목을 틔워주려는 의도가 강했다. 그가 중시한 것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닌 "깊은 체험을 통한 변화의 힘"이었다. ...

괴테의 경우 여행의 첫 번재 목표는 인간과 예술가로서의 자기수양이었다. 새로운 세계와 만나 새로운 자연과 문화, 새로운 인간상을 천착해 감으로써 자신의 생각과 삶을 확산 심화 고양시키는 것이었다.  6


젊은 시절 많은 여행을 하고 여행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한 헤세의 글이 우리에게 바람직한 여행에 대한 하나의 지침이 될 수도 있겠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 되어야 하니까.  7



2

토마스 만의 장편 <마의 산>에는 여행에 대한 유명한 글귀가 나온다. "여행을 떠나고 이틀만 지나면 사람, 특히 삶에 아직 굳건히 뿌리박지 않은 젊은이는 자신의 의무, 이해관계, 걱정 및 전망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 즉 일상생활로부터 아련히 멀어지게 된다. 그것도 마차를 타고 역으로 가면서, 어쩌면 자신이 꿈꾸었을지도 모르는 것보다 훨씬 더 멀어지게 도니다. 여행자와 고향 사이에서 구르고 돌며 도피하듯 멀어져 가는 공간에는 보통 시간에만 있다고 생각되는 힘이 깃들어 있다.

공간도 시간과 꼭 마찬가지로 시시각각 내적 변화를 일으킨다. 공간도 시간과 마찬가지로 망각을 낳는다. 공간은 인간을 여러 관계로부터 해방시켜주며, 인간을 원래 그대로의 자유로운 상태로 옮겨놓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 공간은 고루한 사람이나 속물조차도 순식간에 방랑자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걳이다. 시간은 망각의 강이라고 하지만, 여행 중의 공기도 그러한 음료수인 셈이다. 그런데 그 효력은 시간만큼 철저하지 못한 반면 더욱 신속히 나타난다" 이처럼 여행을 통한 공간의 변화는 우리의 정신에 활력을 준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행을 통해 장소가 아닌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을 얻게 된다.

한편 소설도 나름대로 여행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루카치에 따르면, 소설은 '자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누가 자신을 찾아 떠나는가? 바로 근대적인 개인이다. 홀로 남겨진 근대적인 개인이 자신을 찾아 떠나는 모험의 형식이 소설이다. 그러므로 이 여행은 길이 없는 '길 찾기'다. 

"여행이 끝나자 길이 시작되었다." 혹은 "길이 시작되자 여행이 끝났다." 루카치는 이를 '아이러니'라 칭한다. 모든 근대 소설은 아이러니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7-8


헤르만 헤세 소설의 거의 모든 주인공은 현재의 안일한 상황에서 탈피해 방랑과 여행을 통한 자아의 길 찾기를 하고 있다.

헤세의 여행은 속인 내지는 속물로부터의 탈출이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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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람들이 여행하는 주된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의 친척과 친구, 이웃도 여해을 가는데다, 또 여행을 갔다 와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남들에게 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이 유행이고,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다시 매우 쾌적하고 안락한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헤세의 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가치 있는 여행이 되려면 어떻게 여행해야 할까? 헤세의 말은 음미해볼 만하다. "여행은 언제나 체험을 의미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정신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환경에서만 뭔가 가치 있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가는 즐거운 소풍, 어떤 음식점 정원에서의 유쾌한 저녁, 멋진 호수 위에서의 증기 기선 여해은 그 자체로 체험이 아니고,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지 못하며, 계속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자극이 아니다." 이처럼 제대로 된 여행을 해야 하고 그나마 여행하지 않는 자는 책의 한 페이지만 계속 보는 사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여행은 즐거운 것이 되고 좀 더 깊은 의미에서 하나의 체험이 되려면 확고하고 특정한 내용과 의미를 지녀야 한다. 지루한 나머지 또 김빠진 호기심 때문에 내적 본질에 진정한 관심을 느낄 수 없는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는 것은 잘못되고 우스꽝스런 일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성껏 가꾸거나 희생의 제물이 되기도 하는 우정이나 사랑처럼, 신중하게 고르고 사서 읽는 책처럼 모든 유람여행이나 연구여행은 좋아하기, 배우려고하기, 몰두하기를 의미해야 한다. 여행은 어떤 나라와 민족, 어떤 도시나 풍경을 여행자의 정신적 소유물로 만들려는 목적을 지녀야 한다. 여행자는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낯선 것에 귀 기울여야 하고, 낯선 것에 담긴 본질의 비밀을 끈기 있게 알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자연'가까이에서 자연의 힘과 위안을 맛보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장소로 여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널리 만연한 오류다. 번잡하고 숨 막히는 거리를 피해 달아난 도시민에게 바닷가나 산속의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가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도시민의 그것으로 만족해한다. 그는 더 신선한 기분을 느끼고, 더 심호흡을 하며, 잠을 더 잘 잔다. 그리고 '자연'을 이제 제대로 즐기고 내부에 흡수했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그는 그 자연으로부터 가장 피상적인 것, 가장 비본질적인 것만 받아들이고 이해했으며, 가장 좋은 것은 발견하지 못하고 길가에 놓아두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런 자는 보고 찾아내며 여행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한다. 가만히 앉아서가 아니라 움직이면서 사고할 것을 주장하는 니체는 <인간적인 것, 너무나 인간적인 것>에서 여행자의 등급을 다섯 등급으로 나누고 있다. 그 역시 쥘스 지방을 여행하는 도중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여행자에게는 다섯 단계의 등급이 있다. 가장 낮은 등급은 여행하면서 관찰의 대상이 되는 자들이다. 그들은 본래 여행의 대상이며 흡사 장님과 같다. 다음 등급은 실제로 세상을 구경하는 자들이다. 세 번째 등급의 여행자는 관찰한 결과로 무언가를 체험하는 자이다. 네 번째 등급의 여행자는 체험한 것을 체득해서 몸에 지니고 다닌다.

마지막으로 최고의 능력을 지닌 몇몇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관찰한 것을 모두 체험하고 체득한 뒤 집에 돌아온 즉시, 또한 체험하고 체득한 것을 행동이나 일에서 반드시 실천해 나간다. 

인생의 여로(旅路 나그네여 길로)를 걷는 모든 인간은 이 다섯 종류의 여행자와 같다. 가장 낮은 등급의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으로 살아가고, 가장 높은 등급의 인간ㅇ느 내적으로 체득한 것을 남김없이 실천하며 행동하는 자로 살아간다."

그러면 자연과 풍경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헤세는 이렇게 답한다. 금빛으로 물드느 여름저녁을 한가로이 바라보고, 가볍고 순수한 산악 공기를 느긋하고 기분 좋게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는 아직 크게 부족하다. 양지바른 따스한 초원에 드러누워 한가하게 휴식시간을 보내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그러나 산과 시냇물, 오리나무 숲과 멀리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함께 이 초원에 친숙하고 그것을 잘 아는 자만이 자연과 풍경을 완전하게, 백배는 더 깊고 고상하게 즐길 수 있다. 그러한 조그만 땅에서 그 땅의 법칙을 읽고, 그것의 형성과 식생의 필연성을 꿰뚫어보고, 그 필연성을 역사, 건축 양식, 그곳 주민의 기질이나 말투, 의상과 관련해서 느끼려면 사랑과 헌신, 연습리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할 만한 보람이 있다. 여행자가 열성과 사랑으로 친숙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든 나라의 모든 초원과 암석은 온갖 비밀을 여행자에게 알려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베풀어주지 않는 힘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름을 아는 일이 아니라 느끼는 일이다. 학문적 지식은 아무에게도 축복을 안겨주지 않는다.  12-15



5

헤세는 끊임없이 여행과 여행의 의미에 대해 질묺나다. 우리 같은 사람에게 여행을 떠나게 하고, 특히 예술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해마다 여행을 떠나는가? 무엇 때문에 좀 더 풍요로웠던 시대의 건축물과 그림들 앞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거워하는가? 무엇 때문에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낯선 민족들의 삶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지켜보며 흡족해하는가? 무엇 때문에 기차와 배 안에서 낯선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고, 낯선 대도시의 번잡한 거리에 귀 기울이는가? 헤세는 한때 그런 것을 일종의 배움 욕구이자 교양 열기로 여겼다. 여행하면서 그는 옛 교회의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진 벽 위에서 수첩 가득 감상을 적어 넣었고, 식사에서 아낀 돈을 옛 조각품들의 사진을 찍는 데 썼다. 그 후 그런 일에 다시 싫증나게 되었고, 풍경과 낯선 민족성만이 그의 관심을 끄는 좀 더 못사는 나라를 여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그에게 그러한 수수께끼 같은 여행 욕구는 일종의 모험심으로 생각되었다.  17



헤세도 처음에는 다른 여행객과 마찬가지로 이국적인 민족의 살마과 도시를 그냥 신기한 대상으로서만 바라보았고, 무척 재미있지만 기본적으로 자기와 아무 관계없는 동물 곡예단을 바라보듯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입장을 버리고 말레이인, 인도인, 중국인, 일본인을 인간이자 가까운 친척으로 본 시점부터 비로소 그 여행에 가치와 의의를 부여하는 체험이 시작되었다. 헤세는 여행의 체험으로 서양인과 동양인의 영혼이 같고, 아시아인의 영혼도 유럽인의 영혼처럼 온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런 의미에서 "여행이란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바꾸어주는 것이다."는 아나톨 프랑스의 말이 우리의 공감을 얻는다.  19-20



7

이 책은 24세부터 50세까지 헤세가 쓴 여행과 소풍에 대한 에세이와 여러 여행 기록을 엮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여행과 소풍에 대한 에세이 외에 1901년과 1911년, 1913년의 이탈리아 여행, 1904년의 보덴 호 산책, 1911년의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등지의 아시아 여행, 1919년에서 1924년까지 테신 지역 소풍, 1920년 남쪽 지역으로의 방랑, 1927년의 뉘른베르크 등지의 낭송 여행에 대한 소회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21






여행의 노래


태양이 내 마음속 비춰주었네. 

바람이여, 내 걱정과 무거운 마음일랑 날려버리렴!

이 세상을 두루돌아다니는 것보다

더 큰 희열은 없다네.


평지를 향해 서둘러 발걸음 옮기다 보면

햇볕에 몸 그을리고, 바다는 시원하게 해주네.

난 온갖 감각을 활짝 열고

지상에서의 삶을 함께 느끼지.


새날이 올 때마다 

새 친구, 새 형제를 사귀며

온갖 별의 손님이자 친구일지도 모르는 

온갖 힘을 기어코 찬미할 때까지.



누군가가 유람 여행을 계획하고 잇다면 먼저 무엇을 할 것인지, 왜 그 여행을 하는지 아는 것이 좋다. 오늘날 도시에 사는 여행자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도시인이 여행하는 것은 여름에 도시가 너무 덥기 땜ㄴ이다. 그가 여행하는 것은 공기를 바꾸고, 다른 환경과 사람들을 봄으로써 일에 지친 피로를 풀고 푹 쉴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그가 산으로 여행하는 것은 자연과 땅, 식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이해되지 않는 갈망으로 그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그가 로마로 여행하는 것은 그것이 교양 여행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여행하는 주된 이유는 그의 모든 사촌과 이웃도 여행을 가는데다, 또 여행을 갔다 와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하는 것이 유행이고,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다시 무척 쾌적하고 안락한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이해할 만한 정직한 동기이다.  32


여행은 언제나 체험을 의미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정신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환경에서만 뭔가 가치 있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기회 있을때마다 가는 즐거운 소풍, 어느 음식점 정원에서의 유쾌한 저녁, 임의의 호수 위에서의 증기기선 여행은 그 자체로 체험이 아니고,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지 못하며, 계속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자극이 아니다.  33

여행의 시학은 일상적인 단조로움, 일과 분노로부터 휴식을 취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우연히 함께 하고, 다른 광경을 관찰하는 데에 있다. 여행의 시학은 호기심의 충족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체험에, 다시 말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데에, 새로 획득한 것의 유기적인 편입에, 다양성 속의 통일성과 지구와 인류라는 큰 조직에 대한 우리의 이해 증진에, 옛 진리와 법칙을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에서 재발견하는 데에 있다.

내가 특별히 여행의 낭만주의라고 부르고 싶은 것, 다시 말해 인상의 다양성, 명랑하거나 불안한 심정으로 깜짝 놀랄 일을 계속 기다리기,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새롭고 낯선 사람들과의 소중한 교제가 그것에 첨가된다.  36


우연적인 것에 대해 본질적인 것이, 낭만주의에 대해 시학이 망각되어서는 안 된다. 도중에 흘러가는 대로 자신을 맡기고, 우연을 신뢰하는 것은 확실히 좋은 방식이다. 그러나 모든 여행이 즐거운 것이 되고 좀 더 깊은 의미에서 하나의 체험이 되려면 확고하고 특정한 내용과 의미를 지녀야 한다. 지루한 나머지 또 김빠진 호기심 때문에 내적 본질에 진정한 관심을 느낄 수 없는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는 것은 잘못되고 우스꽝스런 일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성껏 가꾸거나 희생의 제물이 되기도 하는 우정이나 사랑처럼, 신중하게 고르고 사서 읽는 책처럼 모든 유람여행이나 연구여행은 스스로 좋아하고, 찾아서 배우려고 하면서, 몰두하는 데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여행은 어떤 나라와 민족, 어떤 도시나 풍경을 여행자의 정신적 소유물로 만들려는 목적을 지녀야 한다. 여행자는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낯선 것에 귀 기울여야 하고, 낯선 것에 담긴 본질의 비밀을 끈기 있게 알아내려 노력해야 한다.  40-41


돈과 시간을 아낄 필요가 없고 여행에서 즐거움을 얻는 자는 눈과 마음으로 탐낼 만한 여러 나라를 하나하나 자기 것으로 만들고, 천천히 배우고 향유하는 중에 세계의 일부를 정복하고, 많은 나라에 뿌리를 내리고, 지구와 지구의 생명체를 폭넓게 이해하는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기 위해 동과 서에서 수석을 수집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될 것이다.  41-42


'자연' 가까이에서 자연의 힘과 위안을 맛보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장소로 여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널리 만연한 오류다. 뜨거운 거리를 피해 달아난 도시인에게 바닷가나 산속의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가 도움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해한다. 그는 더 신선한 기분을 느끼고, 더 심호흡을 하며, 잠을 더 잘 잔다. 그리고 '자연'을 이제 제대로 즐기고 내부에 흡수했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귀향한다. 그런데 그는 그 자연으로부터 가장 피상적인 것, 가장 비본질적인 것만 받아들이고 이해했으며, 가장 좋은 것은 발견하지 못하고 길가에 놓아두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그런 자는 보고 찾아내며 여행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한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영혼이 빈곤해질 것이다.  42-43


여행자는 모든 것을 보거나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스위스 알프스의 두 개의 산과 골짜기를 돌아다니며 철저히 둘러본 자는 같은 시간에 일주 여행 차표로 전 국토를 여행한 자보다 스위스를 더 잘 알게 된다.  44


양지바른 따스한 초원에 드러누워 한가하게 휴식시간을 보내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그러나 산과 시냇물, 오리나무 숲과 멀리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함께 이 초원에 친숙하고 그것을 잘 아는 자만이 자연과 풍경을 완전하게, 백배는 더 깊고 고상하게 즐길 수 있다. 그러한 조그만 땅에서 그 땅의 법칙을 읽고, 그것의 형성과 식생의 필연성을 꿰뚫어보고, 그 필연성을 역사, 건축 양식, 그곳 주민의 기질이나 말투, 의상과 관련해서 느끼려면 사랑과 헌신, 연습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할 만한 보람이 있다.  45-46


중요한 것은 이름을 아는 일이 아니라 느끼는 일이다.  46



익숙해지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가치있는 것의 광채도 떨어지는 법이다.  49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어떻게든 고유한 시학이 있는 법이다.  50



낡은 모자를 쓰고 배낭을 짊어지기 위해 나의 조그만 집, 행복함과 안락을 기꺼이 희생하리라.  74



날이 어두워졌다. 창 앞 골목은 벌써 한 시간 전부터 쥐죽은 듯 고요하다. 높다란 분수만이 꿈꾸며 지치지 않고 계속 재잘거린다. 걸려 있는 놋쇠 등불이 흐릿한 판자벽이 있는 낡은 거실과 벽의 좁은 걸상, 튼튼한 참나무 책상과 벽 가의 희미한 목판화를 비춰준다. 나는 꿈꾸듯 내 집과 내 방의 고요와 정적,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나의 은둔을 즐긴다. 우리는 저녁에 쓸데 없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적에 귀 기울이고 엿듣는 것은 정말 멋지고 놀랍다. 대지는 잠들어 있다. 우물가에 마지막 남은 양동이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호수 저 건너편에선 멀리 마지막 기차가 조용히 기적을 울리며 사라진다.  79


불현듯 비눗방울처럼 마음속에 질문이 떠오른다. 넌 정말 행복한가?

그렇다. 물론이다. 하지만 좀 기다려라. 아니, 그리 행복하지는 않다. 아니, 먼저 곰곰 생각해봐야겠다. 곰곰 생각해보니 행복에 관해선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행복은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의 단어이자 무의미한 것에 불과하다.  82


향유의 힘과 추억의 힘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 향유란 어떤 열매의 단맛을 남김없이 짜내는 것을 뜻한다. 추억이란 한번 향유한 것을 꽉 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점점 순수하게 완성하는 기술을 뜻한다. 우리 각자는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유년 시절을 생각하고, 그러면서 혼란스런 조그만 사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환상이 된 추억이 자기 위의 복된 푸른 하늘을 펼치며 천 가지 아름다운 기억을 단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쾌감과 섞는다. 

이처럼 최고는 멀리 떨어진 날들의 즐거움을 다시 향유할 뿐만 아니라 매일을 행복의 상징이자 동경의 목표이며 천국으로 드높이면서, 자꾸만 새로 향유할 것을 가르친다. 짧은 시간 내에 얼마만큼의 생활감정, 온기와 광채를 짜낼 수 있는지 아는 자는 이제 모든 새날의 선물도 되도록 순수하게 받아들이려 할 것이다. 그러면 그는 고통도 더 공정하게 평가할 것이다. 그는 큰 아픔 역시 큰 소리로 진지하게 맛보려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두운 날들의 기억도 아름답고 신성한 소유물임을 알기 때문이다.  87-88



우리가 모든 아름다운 것 중 한 봉지 가득 보관해서 필요한 시절을 위해 저축할 수 있다면! 물론 그러려면 인공적인 향기를 지닌 인공적인 꽃이라야 되겠다. 날마다 세계의 충만함이 우리 옆을 서둘러 지나간다. 날마다 꽃이 피어나고, 불빛이 반짝이며, 기쁨이 웃음 짓는다. 때로 우리는 그것에 감사하며 실컷 마시고, 때로 우리는 피곤하고 짜증나서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늘 아름다운 것이 넘쳐난다. 모든 기쁨의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점은 그것이 과분하게 오고 결코 돈을 주고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기쁨은 바람에 흩날리는 보리수꽃의 향내처럼 구속을 받지 않고 누구에게나 신의 선물이다. 가지들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보리수꽃을 열심히따는 여자들은 나중에 그것으로 호흡 곤란과 고열에 좋은 차를 만든다. 하지만 그들은 최상의 것과 진정으로 좋은 것은 얻지 못한다. 열므날 저녁 데이트하면서 달콤하고 몽롱한 도취 상태에 있는 한 쌍의 연인들조차 그런 것을 갖지 못한다. 하지만 지나가며 좀 더 깊이 호흡하는 방랑자는 그런 것을 갖는다. 방랑자가 모든 즐거움 중 최상의 것과 가장 좋은 것을 갖는 이유는 그가 맛을 보는 것 외에 모든 기쁨의 덧없음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방랑자는 어떤 샘에서든 물을 마실 수 있으니 걱정할 일이 별로 없다. 그는 과잉에 익숙해져 있다.

반면 그는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도 그다지 개의치 않으며, 한 번 좋았던 곳이라 햇 곧장 뿌리내리려 하지 않는다. 해마다 같은 장소에 가는 행락객들이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곧 다시 오겠다는 결심을 하는 행락객들이 많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일지는 모르나 좋은 방랑자는 아니다. 그들은 사랑에 빠진 남녀의 몽롱하게 취한 상태에 있다. 보리수꽅을 따는 여인들이 조심스럽게 꽃을 따는 심정과 같다. 하지만 그들은 조용하고 진지하게 기뻐하며 늘 떠나려는 방랑자의 마음은 갖고 있지 않다.  101-103


나는 방랑과 외지의 맛이 어떤지 알고 있다. 그 맛은 아주 달콤하다. 향수와 결핍,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103


또 한 번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이로 구속 없이 뻔뻔하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다! 허기지면 길가의 버찌로 식사하고, 네거리가 나오면 상의 단추로 '좌우'를 결정하는 생활을 하고 싶다! 또 한 번 짧고 미지근한 향태 나는 여름밤을 방랑 중 건초 더미 속에서 잠자면서 보내고 싶다! 또 한 번 방랑 시절을 숲의 새들, 도마뱀이나 풍뎅이와 사이좋게 지내며 보내고 싶다! 한 여름이나 한 켤레의 새 신발엔 그것이 가치 있으리라.  104


우리 같은 사람을 여행떠나게 하고, 특히 예술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해바다 여행을 떠나는가? 무엇 때문에 좀 더 풍요로웠던 시대의 건축물과 그림들 앞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거워하는가? 무엇 때문에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낯선 민족들의 삶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지켜보며 흡족해하는가? 무엇 때문에 기차와 배 안에서 낯선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고, 이상하게도 낯선 대도시의 번잡한 거리에 귀 기울이는가? 한대 내게는 그런 것이 배움에 대한 일종의 욕구이자 교양에 대한 열기로 여겨졌다. 당시네 나는 옛 교회의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진 벽 위에서 수첩 가득 적어 넣었고, 식사에서 아낀 돈을 옛 조각품들의 사진을 찍는 데 썼다. 그 후 나는 그런 일에 다시 싫증나게 되었고, 풍경과 낯선 민족성만이 내 관심을 끄는 좀 더 가난한 나라들을 여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내게 이러한 수수께끼 같은 여행 욕구는 일종의 모험심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엄밀히 따져보면 여행 중에 겪는 모험이 아니다. 잘못된 곳으로 가버린 트렁크, 도난당한 외투, 뱀이 나오는 방, 모기가 있는 침대를 모험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그런 것 역시 제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 내게는 지금 교양에 대한 갈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전체 도시와 교회, 대형 박물관을 어슬렁거리며 지나가는 것으로는 지금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면 그러한 사물들에서 발견하고 보는 것을 옛날보다 더 심도 있고 섬세하게 향유하는 지금, 여행에서 모험적이 ㄴ체험을 하게 되리라는 신뢰 역시 내게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나는 15년 전이나 10년 전, 또는 5년 전보다 드물지 않게 여행을 다니고, 여행에 대한 충동과 욕구도 그때보다 줄어들지 않았다.

내 생각에 여행하며 밖으로 돌아다니는 생활은 좀 더 지적으로 된 우리 같은 사람이 더욱 창백하게 체험하는 삶의 한 조각을 일반적으로 대체하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그 생활은 우리 여러 민족들에게 거의 완전히 사라진 순전히 미적인 충동에 의한 활동도 대체하는 것 같다. 위대한 시기의 그리스인이나 독일인, 이탈리아인에겐 그런 미적인 충동이 있었다. 아시아에서도 어디서나 아직 그런 충동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일본에서는 유치하지 않고 현명한 사람들은 목판화, 나무나 암석, 정원이나 하나하나의 꽃을 관찰하면서 우리에겐 흔치 않고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어떤 감각의 훈련, 원숙함과 전문적 지식을 향유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는 것 같다. 순수한 직관, 어떤 목적 추구나 의욕에 의해 흐려지지 않은 관찰, 자체적으로 흡족한 눈과 귀, 코와 촉각의 훈련, 그것은 우리들 중 좀 더 섬세한 사람들이 짙은 향수를 느끼는 하나의 천국인 셈이다. 우리가 여행할 때 가장 잘 또는 가장 순수하게 추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그러한 천국이다. 미적으로 훈련된 사람은 언제나 그러한 집중을 할 수 있지만, 우리 같은 불쌍한 사람들은 적어도 숙박에서 벗어난 이런 날과 순간에나 그것이 가능하다.

고향과 일상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어떠한 걱정도 하지 않고 일에서도 완전히 해방된다. 이러한 여행 분위기에서 우리는 평소에는 하지 못하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몇 개의 훌륭한 그림 앞에서 조용히 감사하며 아무 목적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고, 고귀한 건축물에서 울리는 아름다운 음을 열린 마음으로 황홀하게 들을 수 있으며, 어느 풍경의 선을 진심으로 즐기며 따라갈 수 있다. 그때 평소 단지 우리의 의욕과 관계, 소망의 흐릿한 그물 속에서만 생각되던 것이 우리에게는 그림이 된다. 다시 말해 골목과 시장의 삶, 태양의 유희와 물이나 땅 위 그림자의 유희, 수관(樹冠 나무수 갓관)의 형태, 동물의 외침이나 움직임, 인간의 걸음걸이와 태도 같은 것이, 목적을 추구하는 삶으로부터의 이러한 해방을 마음속으로 추구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는 자는 아무런 결실 없이 빈손으로 돌아오고, 기껏해야 자신의 교양이라는 주머니를 약간 묵직하게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뿐이다.

하지만 순수하게 바라보고 사심 없이 받아들이려는 이런 미적 충동은 더 넓고 높은 관계를 갖지 않는가? 그 충동이 막연한 쾌감에 대한 동경에 불과한 걸까? 그 충동이 단지 소홀히 한 힘과 욕구의 복수하고 경고하는 고통에 불과한 걸까? 은폐된 배고픔과 은폐된 에로틱, 은폐된 분노와 은폐된 약함에 불과한 걸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만테냐의 그림을 보는 것이 멋진 도마뱀을 보는 것보다 내게 더 많은 것을 주는 건 무엇 때문일까? 조토나 시뇨렐리의 그림이 그려진 예배당에서 보내는 한 시간이 해변에서 뒹굴면서 보내는 한 시간보다 더 많은 의미가 있는 것은 결국 무엇 때문일까? 

그렇다. 요컨대 우리는 어디서나 인간적인 것을 추구하고 갈망한다. 내가 어떤 아름다운 산에서 즐기는 것은 우연한 현실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확인한다. 나는 보고 선을 느끼는 능력을 즐긴다. 나는 어느 낯선 아름다운 경치에서 결코 문화로부터 달아나버리지 않고, 경치에서 나의 감각과 사고를 시험해 보면서 순전히 문화를 익히고 사랑하며 즐긴다. 따라서 나는 언제나 다시 감사하며 순순히 예술로 되돌아간다. 따라서 어느 대담한 건축물, 어느 아름답게 그려진 벽, 어느 좋은 음악, 어느 가치 있는 그림은 결국 제어되지 않은 자연을 관찰하는 것보다 더 많은 향유, 막연한 탐색이라는 더 많은 만족을 내게 허용해준다. 내 생각에 미적 충동이 지향하는 바는 가령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나쁜 본능과 습관에서 벗어나 우리 내부의 가장 좋은 것을 확인하고, 인간 정신에 대한 우리의 은밀한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바다에서의 기분 좋은 미역 감기, 즐거운 공놀이, 대담한 눈 속 방랑이 나의 신체적인 자아를 확인해주고, 최상의 욕구와 예감 속에서 자아의 옳음을 인정하며, 별 탈 없는 삶을 통해 자아의 갈망에 답하듯이, 인간 문화와 지적 성과라는 위대한 보물을 순수한 직관으로 인간성 일반에 대한 우리의 강력한 믿음에 답하기 때문이다. 티치아노의 그림들이 내 예감을 실현시켜 주지 않는다면 그의 그림을 보는 즐거움은 무엇 때문에 나의 충동을 확인하고 나의 꿈을 정당화해주겠는가?

그러므로 내 생각에 우리는 깊디깊은 근저에서 인간성의 이상에 대한 구도자로서 외지를 여행하고 바라보며 체험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미켈란젤로라는 인물, 모차르트의 음악, 투스카니아 지방의 성당이나 그리스의 신전이 우리의 생각을 확인하고 굳군하게 해준다. 어떤 감각, 심오한 통일, 인간 문화의 불멸성에 대한 우리의 갈망의 강화와 정당화는 그런 것을 굳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여행하면서 특히 진심으로 향유하는 바로 그것이다.  130-134



저녁이다. 난 호텔 방에 누워 있다. 며칠 전부터 적포도주와 아편으로 살아간다. 장이 형편없이 좋지 않다. 오늘 저녁은 서 있거나 걸어가기에도 용기와 힘이 달린다. 또한 지금은 우기다. 이제 겨우 저녁인데도 바깥은 비에 흥건히 젖어 있고 칠흑같이 캄캄한 밤 같다.  240


지난 몇 달간 받은 무수한 인상들은 나의 젊은 감각을 신선하게 에워싸고 있는 반면 나의 소망과 생각은 벌써 모두 고향에 가 있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아직 아득히 먼 곳에서 반쯤은 비현실적인 상태에 있다. 그 인상들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면 진정으로 '이국적'인 것은 얼마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대부분의 인상은 순전히 인간적인 종류의 것이고, 낯선 의상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과 모든 인간 존재와의 친근성에 의해 중요하고 사랑스럽게 되었다.  251


모든 아름다운 광경들보다 훨씬 기억에 남는 광경은 인간의 수많은 소소한 일들이다.  253


모든 것보다 더 멋진 것은 언제나 우리가 인간에 관해서 본 것이었다. 어느 힌두인의 꿈결 같은 걸음걸이, 얌전한 스리랑카인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노루 같은 부드러운 눈초리, 검은색을 띤 구릿빛의 타밀족 노동자의 새하얀 눈동자, 고상한 중국인의 미소, 낯선 방언으로 중얼거리는 거지의 더듬는 말, 열 개의 상이한 언어를 지닌 민족들의 사람들끼리 말하지 않고도 이해되는 현상,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 우쭐대는 압제자에 대한 조소, 그리고 이들 모두가 우리와 같은 인간이자 형제이며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이라는 독특하게 행복한 감정! 낯선 외모를 지니고 본성과 인종이 약간 은폐된 이들이 우리 곁을 지나갔다. 남인도의 이슬람교도는 도도하고 자의식이 있었고, 의젓하게 걸어가는 중국인은 위엄 있고 명랑했고, 작고 날씬한 스리랑카인은 수줍어하는 소녀 같았고, 아담한 말에이인은 영리하고 부지런했고, 근면한 일본인은 작고 현명했다. 그들 모두는 피부색과 외모는 무척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베를린 출신이든 스톡홀름 출신이든, 취리히나 파리 또는 맨체스터 출신이든 상관없이 우리 외국인이 모두 신비롭지만 아주 명백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속하고 유럽인인 것처럼, 그들 모두는 아시아인이었다. 

이것만 해도 멋지고 때로는 놀랍게 보일 수 있었다. 유럽인과 아시아인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시하긴 하지만, 모든 유럽인에게 뭔가 공통되고 서로를 묶어주는 요소가 있듯이, 모든 아시아인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내게 더 멋지고 엄청나게 더욱 중요한 것은 때때로 온갖 감각 속에서 선명하게 되풀이되는 경험이었다. 그것은 동양과 서양, 즉 유럽과 아시아가 단일체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인류라는 하나의 소속이자 공동체가 있다는 경험이었다. 누구나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사실을 책에서 읽는 것이 아니라 전혀 낯선 민족과 서로 눈을 맞대로 체험하면 그것은 누구에게나 무한히 새롭고 소중하게 된다.  268-269



흰구름


오, 보렴, 다시 두둘실 떠가고 있구나,

잊힌 아름다운 노래들의 

나지막한 선율처럼

푸른 하늘 저쪽으로!


오랫동안 떠돌아다니지 않고

온갖 시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구름을 이해할 수 없지,

방랑의 기쁨을.


해님과 바다와 바람처럼 

난 흰 구름을 사랑하지,

집 없는 사람에겐 

누이이자 천사이기 때문에.



방랑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원시인이다. 유목민이 농부보다 원시적이듯이 말이다. 하지만 정주(定住 정할정 살주)의 극복과 경계의 무시는 그럼에도 나 같은 유형의 사람들을 미래로 향하는 이정표로 만들 것이다. 나처럼 국경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이 많다면 더 이상 전쟁도 봉쇄도 없을 텐데. 경계만큼 보기 싫고 어리석은 것도 없다. 경계는 대포나 장군과 같다. 이성, 인간성과 평화가 지배하는 한 경계에 대해 아무것도 못 느끼고 그것에 대해 비웃는다. 하지만 전쟁과 광기가 발발하자마자 경계는 중요하고 성스러워진다. 전시에는 경계가 우리 같은 방랑자에게 얼마나 고통과 감옥이 되었던가! 그런것은 악마나 잡아 가라지!  281-282


내 눈은 지금있는 것에 만족한다. 그도 그럴 것이 보는 법을 배웠으니까. 세상은 그 이휴로 더 아름다워졌다.

세상은 더 아름다워졌다. 난 혼자지만, 혼자 있는 것에 고통받지는 않는다.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햇볕에 푹 삶아질 용의가 있다. 나는 푹 숙성되기를 갈망한다. 죽을 용의도 있고, 다시 태어날 용의도 있다. 

세상은 더 아름다워졌다.  288



밤길


먼지 덮인 밤길을 걷는다. 

담벼락엔 그림자 비스듬히 떨어지고

포도덩굴 사이로

개천과 길 위의 달빛이 보인다.


한때 불렀던 노래를

나직이 다시 읊조린다.

숱한 방랑의 그림자가

내 앞길을 가로막는다.


여러 해 동안의 바람과 눈, 뙤약볕이

내 귀에 울려온다.

여름밤과 푸른 빛 번개,

폭풍우와 여행의 괴로움이.


갈색으로 그을리고

이 세상의 풍요로움을 흠뻑 마시며

계속 이끌려가는 기분이 든다.

내 오솔길이 어둠에 잠길 때까지.  



배낭족으로 살아가고 너덜너덜한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게 무척 좋다.  290


나는 여자가 아닌 사랑만을 사랑하는 바람둥이에 속한다.

우리 같은 방랑자는 모두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방랑벽과 나그네 생활 자체가 대부분 사랑이자 에로틱이다. 여행의 낭만이란 절반은 다름 아닌 모험에 대한 기대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에로틱한 것을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켜 해소하려는 모의식적 충동이다. 우리 같은 방랑자는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랑의 소망을 가슴에 품고 다니는 데 익숙하다. 또 원래는 여자에게 향했던 그 사랑을 놀이하듯 마을과 산, 호수와 협곡, 길가의 아이들, 다리 밑의 거지, 목초지의 소, 새와 나비에게 나누어주는 데 익숙하다. 우리의 사랑을 그 대상으로부터 떼어낸다. 우리는 사랑 그 자체로 충분하다. 마치 우리가 방랑 중에 목적지를 찾지 않고 단지 방랑 자체의 즐거움과 길 위의 생활을 추구하듯이.  291-292


나무는 내게 언제나 가장 감동적인 설교자였다...

나무는 쉬면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온 힘을 다해 하나만을 얻으려 애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내부에 깃들어 있는 고유한 법칙을 실현하고 자신의 형상을 완성하며 자기 자신을 표현하려 애쓴다. 아름답고 튼튼한 나무보다 더 신성하고 모범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307


나무는 신성한 존재다. 나무와 대화를 나누고, 나무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자는 진리를 알게 된다. 

나무는 개별적인 것은 개의치 않고 삶의 근본 법칙을 설교한다.  308


비 오는 날씨다. 그런 날씨에 나는 생기가 돌고 명랑해진다. 짙은 대기 속에 습기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구름은 끊임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새로운 구름이 계속 나타난다. 우유부단과 언짢은 분위기가 하늘을 지배하고 있다.  312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과 사물은 변하게 마련이다. 그 흐름은 어떤 것도 거스를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몇 십 년 동안 이 몬타뇰라에서 클링조어의 가물거리며 타오르는 열므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좋은 것, 그러니까 놀라운 많은 체험을 했다. 나는 마을과 마을 풍경에 무척 감사해야 한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을 번번이 글로 표현하려고 했다. 나는 산과 숲, 포도밭 언덕과 호수 골짜기를 몇 번이고 시로 노래했다. 또한 클링조어의 거처가 있는 조그만 발코니와 높은 유다나무도 묘사하고 찬미했다.  377


나는 오늘 테신을 떠나 뉘른베르크로 가을 여행을 떠난다. 두달이나 걸리는 여행이다. 그런데 그 여행의 이유가 무엇인지 자문해보자니 무척 당혹스런 기분이 든다. 자세히 살펴볼수록 이유와 동인은 더욱 갈라지고 쪼개지며 나누어져서 결국은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그것들은 단선적인 인과성의 열(列 벌일열)이 아니라 그런 열이 얽히고 설킨 그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결국은 그 자체로 사소하고 우연한 이 여행이 내 이전 삶의 무수한 점들에 의해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그 직물에서 가장 거친 몇 개의 매듭뿐이다.  383



나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며칠 정도나 귀향을 지연시킬 수 있을 것인가? 추측건대 아직도 오랫동안 여행할 것이다. 아마 겨울 내내, 어쩌면 평생 동안, 결국은 곳곳에서 이런저런 친구를 만나 저녁이면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때로는 나의 천사가 어느 어스름한 시간에 다시 내 앞에 나타나리라. 또 내 청춘의 성소(聖所 성스러울성 바소)들이. 그리고 어디서나 내 자유의지로, 차가운 바람을 맞거나 흩날리는 나뭇잎을 보고 단지 슬퍼하지만 않고 웃으리라. 내가 가끔 그렇게 생각했듯이, 아마 내 안에 어떤 해학가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러면 나는 잘 해나갈 것이다. 그 해학가가 아직은 오나전히 발전된 것은 아니지만, 아직은 내가 보기에 완전히 나빠진 것도 아니었다.  47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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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자 기야스 벡은 페르시아의 귀족이었다. 왕의 명을 어긴 죄로 불같은 미움을 사게 된 그는, 어느날 가족들을 대동한 채 야반도주를 시도했다. 목적지는 인도였다. 그런데 그에게는 메흐루니샤라는 어린 딸이 있었다. 길고 험한 여정속에 딸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짐이었다. 라자스탄의 사막에 다다랐을 때 닥쳐온 기갈과 추위는 그에게 독한 맘을 품게 했다. 새벽녘, 잠이 든 어린 딸에게 모래를 이불삼아 덮어준 채 식솔을 다그쳐 길을 떠났다. 수시로 늑대와 전갈이 출몰하는 모래언덕 위로 집채만한 태양이 솟아오를 때 그는 가족들 몰래 아침 노을보다도 더 붉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메흐루니샤의 생명은 질겼다. 아이는 미르자 기야스 벡의 뒤를 따르던 상인들에 의해 모래더미 속에서 발견됐다. 상인들은 자신이 섬기던 귀족의 딸을 비단에 감싸서 아그라로 데려왔다. 이 장면은 그들 부녀의 인생은 물론 무굴제국의 흥망까지 엇갈리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미르자 기야스 벡은 무굴제국의 아크바르 황제의 마음에 들어 새로운 영화를 누리게 되고, 그의 딸은 아름답게 자라 페르시아 소속의 장군에게 출가를 한다. 하지만 사막의 굶주린 늑대에게 먹이가 될 뻔했다가 살아난 그녀의 인생이 그렇게 한갓지게 막을 내리지는 않았다.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서른의 청상이 된 기구한 팔자의 그녀는 아버지가 살고 있는 인도의 아그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아크바르 황제의 후궁 중 한 살마의 시녀가 되어 아그라 성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그녀는 극적인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바로 아크바르의 뒤를 이은 제항기르 황제의 넋을 빼앗고 만 것이다. 풍류남아였던 제항기르는 수많은 여인들 중에서도 범상치 않은 과거를 지닌 페르시아 출신의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단숨에 제국의 왕비가 된 그녀는 누르자한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천성적으로 호방한 성격이고 놀기를 좋아했던 제항기르는 인도 대륙의 북서부에 있는 카시미르 지역을 좋아해 재임 중에 그 지역의 대표 도시인 스리나가르를 자주 방문했다. 스리나가르에 '살리마르 박'이라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누르자한에게 바칠 정도였으니까 제항기르의 인생에 있어 카시미르와 누르자한은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실제로 제항기르는 카시미르에 빠져 영리하고 아름다운 아내 누르자한에게 정치를 맡겨버렸다. 미르자 기야스 벡을 비롯한 페르시아 출신의 와척들이 득세하자 제국의 문화는 급속하게 페르시아 풍으로 변모한다. 힌두문화에 비해 비교적 앞서 있고 세련됐던 이슬람 문명은 누르자한에 의해 대폭 수용되고 심지어는 궁중에서 페르시아어가 통용되기도 했다. 미술과 건툭, 문학과 의상, 음악 등 문화 전반에 걸쳐 아라비아 반도와 인도대륙이 조화를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생겨난 문화는 인도 역사상 가장 독특한 문화로 평가받는다.

누르자한은 자신의 아버지가 죽자 야무나강 북쪽에 이슬람 양식의 무덤을 축조한다. '이티마드 우드 다울라'라는 이 무덤은 훗날 타지마할 죽조의 교과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무덤을 '리틀 타지마할'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완벽한 사각대칭의 건축 양식은 물론이며, 대리석 바탕에 밑그림을 그리고 선을 따라 구멍을 뚫어 각기 다른 색깔의 돌을 끼워 넣어 그림을 완성하는 일종의 상감기법인 '피에트라 두라'는 원래 페르시아의 장식기법인데 이 무덤을 축조할 때 인도에서 처음 사용하였고, 나중에 타지마할을 건설할 때도 중요하게 사용된다.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은 이 기법이 핵심적 역할을 한다.

무굴제국에 누르자한의 그림자는 계속 이어진다. 제항기르를 이은 샤자한 황제의 왕비인 뭄타지마할이 바로 누르자한의 조카였기 때문이다. 샤자한은 왕비를 끔찍하게 사랑했다. 17년의 결혼생활 중 열네 명의 아이를 낳앗다고 한다. 물론 자녀의 숫자가 금슬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엔나 소시지처럼 주렁주렁 아이를 낳을 정도였으니 그들의 사랑이 가볍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고 심지어 전장에도 대동하고 다닐 정도였으니 샤자한이 왕비에게 쏟은 열정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왕비가 열다섯 번째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버렸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자 애통함을 참지 못한 샤자한의 머리카락은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105-108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사원으로 다가간 나는, 맙소사,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사원의 외벽에 새겨진 조각들이 나를 까무러치게 만들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신들을 모신 사원의 외벽에는 온갖 난해한 체위를 한 성애상이 난무했다. 서양화가 임영재 형이 먼저 이곳을 다녀와서 내게 일러준 적이 있어 선지식은 있었지만, 차마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나는 우선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한국에서 온 젊은 대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 없는가 하고, 그들과 함께 이 조각들을 본다면 체면이 말이 아닐 것 같아서 헛기침을 하면서 주위를 살폈지만,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동양인 처녀는 보이지 않았다. 상투만 틀지 않앗을 분이지 마지막 유생임을 자처하셨던 아버지의 정신이 순간적으로 내 피에도 흘렀는가 보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사실은, 세상에 이렇게 노골적일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의 각종 체위가 등장하는 이들 성애상들이 천박하거나 상스럽게 여겨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슴과 둔부가 지나치게 발달해서 상대적으로 허리가 가늘어 보이는 여인이 한쪽 다리로 사내의 허리를 감고 두 팔로 목을 휘감은 채 눈을 허공에 매달고 있었다. 사내 또한 한 쪽 다리를 들어 여인의 가녀린 허리를 감은 채 이 농염한 여인의 도발을 어떻게 감당할까 난감해 하는 표정이고, 마치 기계체조 선수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고난도의 체위를 돕기라도 하려는 듯 좌우에 하녀들이 이들의 교합을 거들고 있었다. 하지만 한 하녀는 고개를 외면한 채 얼굴을 붉히고 있었고, 한 여인은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이 장면은 바로 카마수트라에 나오는 '쟈타베슈티타카'라는 체위다.

그 뿐인가, 오랜 병영생활에 지친 병사가 자신의 말을 상대로 수간을 벌이고 있었고, 그 뒤에서 다른 병사가 하품을 하고 있었다. 다음 순번을 기다리는 그 병사는 기다림에 지친 듯했다. 그 앞을 지나는 여인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가리고 그 광경을 외면하고 있었다.

외벽은 그렇다 치저라도 사원 안의 제단에는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곳에는 시바의 거대한 성기인 링가를 모신 제단이 있고 그 주위로 36가지의 성애 기교를 묘사한 조각상이 있었다. 링가상 앞에는 작은 제단이 또 하나 놓여있는데 그 제단은 젊은 여사제가 올라와 완전 나체로 춤을 추던 곳이라고 한다.

천 년 전 이 제단에서는 성(聖)스러운 성(性)의식이 행해졌다. 승려들은 북을 치고 신자들은 횃불을 밝혔다. 북장단에 춤을 추던 여사제의 춤사위가 절정에 이르면 승려들은 북채를 던지고 차례로 제단으로 올라와 여사제와 정사를 벌였다. 오랜 수도 생활로 다져온 요가 자세로 고난도의 체위를 구사하며 이루어지는 교합에서 승려들은 번번이 패하고 말았다. 여사제의 관능을 극복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였던 것이다. 이 교합에서 사정을 해버린 승려는 다시 수도의 길을 걸어야 하고, 여사제의 온갖 기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텨 그녀를 녹초로 만들어 놓고도 사정을 하지 않은 승려는 드디어 득도의 세계로 접어든다는 것이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찬츠라 수행의 한 방법이다. 힌두에서 생각하는 바에 의하면 인간의 정액은 머리에서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뇌하수체의 자극에 의해 정액이 생성되기 때문에 이 말이 영판 거짓은 아니다. 머리에서 생겨난 정액은 밑으로 내려와 배꼽 아래에 모여 있다가 남녀의 교합에 의해 성기를 통해 바깥으로 배출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힌두에서는 이 정액을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에너지로 본다. 이 에너지가 고갈되면 결국 인간은 죽고 마는 것이다. 일종의 엔트로피 개념이다. 그런데 이 에너지를 사정하여 허비하지 않고 다시 머릿속으로 되돌려 보내면 그 때 비로소 해탈의 순간을 맞는다는 것이다. 자아를 극복하는 것이 깨달음의 첫 번째 문이라면, 탄트라 수행은 득도를 위한 가장 극단적 수행법임이 확실하다. 

나는 카주라호의 사우너에서 카마수트라가 종교 속에서 어떻게 승화되었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인도에서는 이처럼 사원에서도 성(性)을 가르친다. 성은 인간이 사는 세상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므로 성(聖)과 속(俗)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힌두 세계에서는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144-147


테레사 수녀님은 콜카타 빈민촌에 있는 '사랑의 집'에 살면서 가난과 질병, 그리고 기아 속에서 죽어가는 인도인과 평생을 함께 보냈다.

하루는 영국의 한 여기자가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그녀에게 물었다.

"사랑이란 콜카타의 한 소년이 들고 온 사흘 분의 설탕입니다."라고 테레사 수녀님이 선문답처럼 대답했다. 어느날 사랑의 집에 설탕이 떨어졌다는 소문이 있었고, 콜카타의 모든 시민들이 그 소문을 들었다. 그날 저녁 한 소년이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오늘부터 사흔 동안 저는 사탕을 먹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제가 먹지 않은 그 사흘 분의 사탕을 제게 주십시오." 사흘 후 이 소년은 자신이 아낀 사흘 분의 사탕을 들고 사랑의 집에 찾아왔다. 콜카타의 모든 시민이 사랑의 집에 대한 소문을 들었지만, 남에게 걸식조차 할 수 없는 절대 고통의 행려병자들에게 자기 몫의 설탕을 가지고 간 사람은 오직 어린 소년 한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테레사 수녀님이 강조한 사랑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소박한 사랑, 작은 일에도 비분강개하여 정의를 세우고자 하고, 옆집 개가 고뿔에 걸려도 호들갑스럽게 침소봉대하여 박애를 강조하는 사랑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실천할 수 있고, 타인을 위해 작은 희생을 할 수 있는 사랑을 강조한 것이다.  244


인도에서는 항상 갈증을 느낀다. 더운 날씨 탓도 있겠지만 모든 것들에서 욕구불만을 느끼기 때문에 그 갈증은 끝도 없이 반복한다. 마셔도 마셔도 풀리지 않는 갈증을 달래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느 하나 수월한 것이 있다면 인도 여행의 매력은 반으로 뚝 떨어진다. 고통과의 정면승부, 그것은 인도 여행만이 주는 매력일 것이다.  325


만사가 여유롭고 유머러스하며 넉넉하고 망상적이다. 다중적 특성을 가진 것이 인도인의 캐릭터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 닥쳐도 서두르지 않고 아무리 난처한 입장이어도 익살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이해관계에 맞닥뜨리면 절대로 양보하지 않다가도 상대가 곤경에 처하면 발 벗고 나서 도와준다. 참으로 묘한 민족이다.  334


내가 아는 인도와 인도인들은 세간이 평가하는 만큼 그렇게 지리멸렬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일부 호사가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내는 것처럼 신비와 명상으로 치장된 나라도 아니다.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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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독립 이후에 언어 분포를 조사하였는데, 인도 국민이 사용하는 언어가 179개이고, 방언도 544개나 존재한다고 한다. 현재 인도 정부가 공용어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 산스크리트어(Sanskrit, 범어梵語)를 포함해서 18개에 이른다.

이 많은 언어를 크게 구분하면, 북부의 인도아리아 어군(語群)과 남부의 드라비다 어군으로 나눌 수 있다. '인도아리아어'는 인도 인구의 70퍼센트가 넘는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고, 이는 산스크리트에서 파생된 것이다. 인도 아리아어도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누어진다.

1. 힌디(Hindi)는 인도의 북부 지방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언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체 인구의 40.22%가 사용하는 언어다. 수도 뉴델리(주민의 81.6%)를 비롯해서 하리아나(91%), 우타르프라데시(90.1%), 라자스탄(89.6%), 히마찰프라데시(88.9%), 비하르(80.9%), 마디아프라데시(85.6%), 찬디가르(61.1%) 등에서 주(州)의 제1공식어로 사용하고 있다. 또 네팔에서도 800만 명이 힌디를 사용한다.

2. 벵갈리(Bengali, 벵골어)는 캘커타(현재의 콜카타)를 중심으로 한 벵골 지방과 방글라데시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인도 전체 인구의 8.3%가 사용한다. 웨스트벵골 주의 공식어로서 이 주의 주민 86%가 벵갈리를 사용한다. 

3. 우르두(Urdu)는 펀자브 지방과 파키스탄에서 사용하는 이슬람교도(모슬렘) 언어로, 이 언어의 문자와 말은 아라비아어와 비슷하다. 인도 전체 인구의 5.18%가 이 언어를 사용한다.

4. 구자라티(Gujarati, 구자라트어)는 서해안 지방에서 사용되는 언어로, 구자라트 주민 91.5%가 사용한다. 그래서 구자라티는 '인도의 비즈니스맨의 언어'라고도 불린다. 구자라티는 인도 전체 인구의 4.85%가 사용하는데, 전 세계적으로 이 언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6,0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5. 마라티(Marathi, 마라티어)는 인도의 경제 수도 봄베이(지금의 뭄바이)를 중심으로 한 마하라슈트라 지방의 언어로, 이 주의 주민 73.3%가 이 언어를 사용한다. 인도 중부의 데칸 지역에서도 이 언어가 많이 쓰인다. 인도 전체 인구의 7.45%가 이 언어를 사용한다. 

6. 오리야(Oriya)는 동해안 지방에서 사용되는 언어다. 이는 오리사 주민 82.8%가 사용하며, 많은 방언과 지방 사투리가 있는 것이 이 언어의 특징이다. 

인도이ㅡ 남부 지역에서 주로 사용하는 드라비다어는 인도 인구의 30% 정도가 사용하는 언어다. 드라비다어도 몇 가지로 구분된다. 

7. 텔루구(Telugu)는 동부 지방의 안드라프라데시 주민의 84.8%가 사용하는 언어이고, 또한 인도 제2의 실리콘밸리로 통하는 하이데라바드 사람이 주로 사용하는 언어다. 이는 인도 전체 인구의 7.89%가 사용한다.

8. 타밀(Tamil)은 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는 언어다. 또한 타밀나두 주민의 86.7%가 사용하는 언어이고, 인도 전체 인구의 6.32%가 사용하는 언어다. 

9. 칸나다(kannada)s는 남서부의 마이소르(카르나타카 주) 지방에서 사용되는 언어로, 이는 인도 시리콘밸리 방갈로르에서 사용되며, 인도 전체 인구의 3.91%가 사용한다. 

10. 말라야람(Malayaram)은 인도의 가장 남쪽 케랄라 지방에서 쓰이는 언어로, 이는 인도 전체 인구의 3.62%가 사용한다.

그 밖에도 11. 펀자비(Punjabi)는 펀자브 주민의 92.2%가 사용하고, 인도 전체 인구의 2.79%가 사용하는 언어다.

12. 아싸미스(Assamese)는 아삼 주민의 57.8%가 사용하는 언어로, 인도 전체 인구의 1.56%가 사용한다.

13. 신디(Sindhi)는 구자라트 주 등, 인도와 파키스탄의 접경 지역에 사는 주민이 사용하는 언어로, 이는 인도 전체 인구의 0.25%가 사용한다.

14. 네팔리(Nepali)는 네팔의 국어다. 이는 네팔 인구의 90%가 사용하는 언어이며, 인도 전체 인구의 0.25%가 사용하는 언어다.

15. 콘카니는 고아 주민의 51.5%가 사용하는 언어로, 인도 전체 인구의 0.21%가 사용한다. 

16. 마니푸리는 보석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마니푸르에서 사용되는 언어다. 이는 이 지역 주민의 60.4%가 사용하는 언어로, 인도 전체 인구의 0.15%가 사용한다. 

17. 사큐미리(Kashmiri)는 잠무카슈미르 주에서 주민의 55%가 사용하는 언어로, 인도 전체 인구의 0.01%가 사용하는 언어이다.  32-35


2001년 발표된 인구 조사를 보면 인도의 주택 수는 모두 1억 7,900만 개이다. 평군 잡아 한 집에 6명이 사는 셈이다.  35


4만 루피의 연봉을 받는 사람은 한국의 화폐로 약 100만원 정도를 받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5~10배의 소득 효과가 잇다.

최근 인도인은 부수입을 올리기 위해서 상당히 노력하고 있다. 이는 경제에 눈을 뜬 것이고, 그래야 자식 교육과 자신의 노후가 보장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9


1999년 현재, 350만의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 감염자가 있다고 하고, 일부 비정부 기구에서는 800만의 감염자가 있다고 주장한다.  42


웬만한 중산층 가정의 경우 제대로 된 집안에 딸을 시집보내려면 신랑에게 '산트로(현대자동차)'정도는 지참금으로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도의 여성은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낼 수도 없다. 인도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성이 결혼하지 않는 것을 큰 수치로 받아들이고 있고, 독신 여성을 사회적으로 천시하고 있다.  48


사트푸라 마을에서는 차란 부인의 '사티'를 포함해서 지난 50여 년동안 4건의 '사티'가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이 사티 기록을 대단한 자랑과 명예로 여기고 있다.  50


미망인이 끝까지 자결하는 것을 거부할 경우에는 천한 사람으로 낙인찍혀서 집안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 버림을 받았다. 버림받은 미망인은 죽을 때까지 힌두교 사원에 가서 가장 천한 막일을 하거나 심지어 창녀로 일해야 하며, 이렇게 해서 번 돈은 힌두교 사원에 바쳐야 했다.  51


인도에는 "과부가 먹다 남긴 음식은 개도 먹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과부가 다시 시집가는 것도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다. 과부는 시집에서만 아니라 친정에서도 배척을 받는다.

과부들이 브린다반의 사원에 모여들게 된 것은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자신의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이다. 실제로는 남편이 죽자 집안에서 버림을 받고 브린다반으로 쫓겨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52


인구 비례로 따지자면, 영어를 읽고 쓸 수 있는 인구는 4!10%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간단한 영어회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70%는 될 것으로 추정된다.  76



인도 역사를 크게 4시기로 구분하는 견해가 있다. 힌두시대, 이슬람시대, 영국식민지시대, 오느르이 독립국가시대이다.

인도의 한 소설가가 4가지 시대에 대해 재미있는 비유를 들어서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이 소설가는 인도 민중을 참새 부부에 비유한다. 각 시대를 연대순으로 힌두 시대를 '금으로 만든 새장'으로 비유하고, 이슬람 시대를 '은으로 만든 새장', 영국의 식민지 시대를 '알루미늄으로 만든 새장', 오늘날의 독립국가 시대를 '삼색기(三色旗)로 만든 새장'으로 비유하였다.

필자는 '힌두시대'를 4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1시기는 아리아인이 인도에 정착한 시기인 '베다시대'이고, 2시기는 '도시국가'와 '영역국가'가 서로 경합을 벌이던 시대이며, 3시기는 '마우리아 왕조'에 의해서 통일을 이룬 때이고, 4시기는 '굽타 왕조'에 의해서 고전적 힌두 문화가 어느 정도 완성된 시대이다.  81-82


힌두교의 성격으로는 대체로 다음의 6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베다 종교를 계승한 힌두교는 기본적으로 다신교(多神敎)이다. 둘째, 힌두교는 다신교이지만, 여러 신의 배후에 최고신(最高神)을 설정한다. 이것이 브라흐마 비슈누 쉬바의 삼신일체(三神一體)로 나타난다고 한다. 셋째, 힌두교에서 아바타라(avatare, 化身)의 관념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이는 비슈누가 여러 신 인간 동물로 나타난다는 것인데, 이것을 통해서 여러 지방 부족 카스트의 신들을 통일할 수 있었다. 넷째,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특징이 있다. 힌두교에서는 이슬람교나 유대교에 비해서 신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적다. 이는 '아바타라'의 관념에서 파생한 것이다. 다섯째, 힌두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단(異端)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정통과 이단의 대립을 거의 볼 수 없다. 여섯째, 힌두교에 이단이 없다는 점은 힌두교가 다른 종교, 사상과 접촉하는 점에서 관용을 발휘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힌두교에서는 대립하는 모든 종교, 사상에 대해서 정면으로 대결하기보다는 자기영역에 있으면서 대항하지 않거나, 자신의 울타리 안으로 흡수하였다. 예컨대 사회적 신분제도에 저항했던 '불교'도 힌두교의 한 파(派)로 간주되어, 불타(佛陀)는 비슈누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렇지만 불교 자이나교 이슬람교 시타 토착적 요소가 어울려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보면 힌두교도로서 그 주체성을 잃지 않았다.

또한 힌두교에서는 4가지 생활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카마(kama)는 적당한 감각적 쾌락과 성적 향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애정의 기술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한 것이 <카마수트라>이다. 둘째, 아르타(artha)는 재물과 재산의 향유와 이득을 뜻한다. 이는 인생에서 부(富)의 추구가 인간의 정당한 행위라는 것이다. 셋째, 다르마(dharma)는 사회적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 이는 <마누 법전>과 여러 법률서에 나와 있는 내용을 실천하는 것이다. 넷째, 해탈(moksa)은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열반에 들어가서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4가지 생활 목표와 상응해서 인새으이 4주기도 제시하고 있다.

첫째, 범행기는 스승의 지도 아래 <베다>등의 학문을 배우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시기다. 둘째, 가주기는 결혼해서 가정을 돌보는 시기다. 이때 자식을 낳고 부를 추구하는 생활을 하면서 가장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 <마누법전>에 따르면 결혼한 남자에게 주어진 의무는 신, 브라만, 조상 등에게 제사를 성대하게 치르는 것이다. 셋째, 임주기는 재가자의 삶을 마치고 숲속으로 들어가서 은거하고 명상과 금욕생활을 하는 시기다. 이는 세속을 떠나 청정한 종교생활을 하는 시기다. 넷째, 유행기는 숲속에서 수행이 끝난 뒤에 탁발(걸식)하며 돌아다니는 시기다. 이때에는 모든 사회적 유대관계를 끊고 오로지 해탈의 세계만을 추구한다.  140-142


힌두교(브라만교)의 흐름은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에서 6파 철학으로 이어진다. 그 내용을 순서대로 살펴본다.

1. 우파니샤드(Upanisad)는 '가까이 앉는다'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이는 스승과 제자가 가까이 앉아 대화로 비밀스런 지식을 전수한다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사상은 다양해서 일률적으로 개괄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우주의 근원인 '브라흐만(brahman)'과 진정한 자아인 '아트만(atman)'이 같다는 것(梵我一如)이 <우파니샤드> 사상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타이티리야 우파니샤드>에서는 5단계의 아트만을 주장한다. 첫째, 물질로 이루어진 자아인데, 이는 음식을 가리킨다. 둘째, 동물과 식물로 이루어진 자아인데, 이는 식물과 동물에 공통된 생명으로 이루어진 자아이다. 셋째, 동물에만 공통된 지각 활동으로 이루어진 자아이다. 넷째, 인간만이 소유하고 있는 인식활동으로 된 자아이다. 다섯째, 희열로 이루어진 자아인데, 이는 인간의 깊은 곳에있는 브라흐만 그 자체이다. 이것은 인간 내면 깊은 곳에 간직되어 있는 희열이야말로 자신의 참 자아이며 우주의 근원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같다는 주장이 의미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2. <바가바드기타>은 힌두교의 바이블로 불릴 만큼 중요한 문헌이다. <바가바드기타>는 바수데바(Vasudeva)를 신봉하는 종파에서 작성한 시편(詩篇)인데 나중에 <마하바라타>에 편입되었다. '바가바드기타'는 '숭배할 만한 자' 혹은 '지극히 존귀한 자'라는 의미이고, '기타'는 '노래' 혹은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바가바드기타>는 체계적인 철학을 담고 있는 저술이라기보다는 실천적 성격이 강한 종교적 작품이고, 또한 요가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바가바드기타>에서는 3가지 요가를 말하고 있다. 첫째, 지(知)의 요가(jnana-yoga)이다. 이는 뒤에 소개할 상키야학파처럼 영원한 정신으로서 '참 자아'와 '물질적 현상적 자아'를 구분하는 것이고, 또는 <우파니샤드>에서 주장한 것처럼 범아일여(梵我一如)와 신을 아는 지혜를 의미하기도 한다. 둘째, 신애(信愛)의 요가(bhakti-yoga)이다. 이는 신에게, 특히 비슈누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고 그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헌신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셋째, 행(行)의 요가(karma-yoga)이다. 이는 윤리와 해탈 간의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참다운 체념은 '행위를 전혀 하지 않는 체념'이 아니라 '행위 하는 가운데 체념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행위를 하지만 욕망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행위하는 한, 업보(業報)를 부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3. 상키야(Samkhya)학파에서는 2원론을 주장하낟. 이 학파에서는 진정한 자아 푸루샤(purusa)와 현상적인 자아 물직적 근원인 프라크리티(prakrti)를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평범한 사람은 프라크리티를 진정한 자아라고 생각하고 잇다. 이것은 잘못이고 진정한 자아는 푸루샤라는 것이 이 학파의 주장이다. 이 학파에서는 프라크리티에서 육체와 세계가 전개되는 것을 설명한다.

4. 요가(Yoga)학파에서는 상키야학파와 형이상학을 같이하지만 두가지 점에서 다르다. 그것은 마음의 잠재적인 힘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무지(無知)를 주장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 학파에서는 구체적 수행 방법으로 요가를 제시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유신론적(有神論的)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5. 바이셰쉬카(Vaisesika)학파는 다원론의 입장에 선다. 이 학파에서는 6범주 또는 7범주를 말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 항목인 실체이다. 이 학파에서는 실체에 9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지, 수, 화, 풍, 공, 시간, 공간, 의근, 자아이다.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고, '허공'은 소릴는 성질이 어딘가에 있어야 하므로 이 점에 근거해서 추론되는 것이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와 젊음과 늙음을 인식하는 근거로서 추리되는 것이며, '공간'은 여기, 저기, 가깝다, 멀다 등을 인식할 수 있는 근거로서 추론되는 것이다. 의근(意根)은 내적 감각기관이다. 눈과 코 등의 외적 감각기관이 바깥 대상을 인식하듯이, 의근은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는 것이다. 지각은 의근이 작동해야 이루어진다. 자아(영혼)는 인식현상의 밑바닥을 이루는 실체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개인 영혼인데, 이는 의지 욕망 기쁨 아픔 등의 여러 가지 정신적 상태에 근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안다"와 "나는 아프다"라는 말을 통해서 자아가 의식에 속하는 실체임을 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최고 영혼으로서 신이다. 이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영혼으로서 모든 고통과 욕망에서 벗어난 존재이고 세계의 창조자라고 추리되는 존재이다.

6. 니야야(Nyaya)학파에서는 바이셰쉬카학파와 형이상학의 내용은 거의 같이한다. 이 학파에서는 괴로움의 근원이 그릇된 지식에 있다고 보고 올바른 지식을 얻기 위한 인식 방법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래서 이 학파에서는 논리학이 발달하였다.

7. 미맘사(Mimamsa) 학파에서는 <베다>에서 명령하는 행위를 왜 실천해야 하는지 그 의무에 대해 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 학파에서는 무전력(無前力, apurva)을 주장한다. 베다에서 말하는 제사의 행위는 잠깐 동안 이루어지고 이내 끝나기 때문에 제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이에 이 학파에서는 가설로서 '무전력'을 인정하면 제사의 행위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증명할 수 있다고 한다. 제사 지내는 행위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인 '무전력'을 생기게하고, 이 힘이 제사 드리는 주체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서 그 업에 해당하는 과보를 반드시 받게 한다는 것이다. 인도에서는 일반적으로 베다 성전을 '제사부'와 '지식부'로 구분하고 있다. '제사부'는 브라만교의 제사를 설명하는 부분인데, 이것을 중시한 학파가 미맘사학파이다. 뒤에 소개할 베단타 학파는 베다 성전의 '지식부', 곧 <우파니샤드>를 중시하는 학파이다.

8. 베단타(Vedanta) 학파는 힌두교(브라만교)의 사상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있는 것이다. 이 학파는 과거 1,000년 동안 다른 학파의 활동을 누르고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베단타라는 말은 본래 베다의 '끝' 혹은 '목적'을 의미하는 것이엇는데, 이는 <우파니샤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베단타'라는 말이 <우파니샤드>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해석하고 발전시킨 사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베단타학파는  샹카라, 비슈누파, 쉬바파로 구분된다.

이 학파의 근본경전은 <브라흐마 수트라>이다. 이 경전에서 말하는 내용은 브라흐만과 합일하여 해탈하는 것이다. 해탈을 얻는 방법으로, 명상을 통해서 브라흐만을 알게 되는 지(知)를 얻고, 이 '지'를 얻은 사람은 죽은 뒤에 신의 길을 따라 최후에 브라흐만에 이르러 브라흐만과 합일한다는 것이다.

이 <브라흐마 수트라>는 문구가 대단히 간결해서 그 의미를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여러 주석서가 나왔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샹카라, 라마누자, 마드바이다. 샹카라는 가현설(假現說)을 주장했는데, 이는 영혼과 물질세계는 브라흐만이 나타난 것이어서 영혼과 물질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현설'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는 일원론에 속한다. 라마누자는 전변설(轉變說)을 통해서 영혼과 물질세계가 신에 의존해 있는 것이지만, 영혼과 물질세계에는 독자적 성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라마누자는 영혼과 미세한 물질은 실재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이 점에서 라마누자의 주장은 2원론에 속한다. 마드바(Madhva)는 '가현설'과 '전변설'을 부정하고 현실의 차별적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자 하였다. 이 점에서 마드바는 다원론을 주장하였다. 라마누자와 마드바는 비슈누파에 속한다.  143-148


자이나교의 사상

초기 자이나교의 가르침은 7체(諦)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영혼(jiva)은 모든 만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이 영혼은 청정하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청정한 영혼이 업(業)에 의해서 속박당해 자신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둘째, 영혼에 반대되는 비영혼(非靈魂, ajiva)을 설명한다. '비영혼'에는 5가지가 있다. 그것은 물질, 법, 비법, 허공, 시간이다. 물질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법(法)은 원자가 움직이게 하는 원리이며, 비법(非法)은 원자가 정지하게 하는 원리이고, '허공'은 우너자가 놓여 있는 공간이다. '시간'은 초기 자이나교에서 조금 뒤에 추가된 것인데, 원자가 시간 속에서 작용한다는 의미다. 셋째, 유입(流入, asrava)은 몸, 이브 마음의 업으로 미세한 물질인 비영혼이 영혼을 둘러싸는 것이다. 넷째, 계박(繫縛, bandha)은 영혼을 둘러싼 미세한 물질이 미세한 신체를 이루어서 영혼을 속박하는 것이다. 다섯째, 제어(制御, samvara)는 영혼이 속박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새로운 업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이미 들어온 업은 없애는 것이다. 과거의 업을 없애기 위해서는 고행이 필요하다. 새로운 업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기 위해서는 '5대서(五大誓)'를 지켜야 한다. 그것은 살생하지 않는 것, 진실한 말을 하는 것, 도둑질하지 않는 것. 음행하지 않는 것, 무소유이다.

여섯째, 지멸(止滅, nirjara)은 수행이 완성되어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일곱째, 해탈(解脫, moksa)은 업의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은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다.  156-157


자이나교단은 뒤에 백의파와 공의파로 나뉘어졌다. 백의파(白衣派)는 흰옷을 걸치는 종파이고, 공의파(空衣派)는 옷을 걸치지 않는 종파이다.  157


불교는 한국인에게 친밀한 종교이지만, 인도의 불교에 대해서 한국인이 잘 알지는 못한다. 한국인에게 친숙한 불교는 중국불교와 한국불교이다. 물론 중국불교와 한국불교는 인도불교를 근간으로 한 것이므로 크게 보아서 인도불교와 중국불교, 한국불교는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분명히 인도불교와 중국불교, 한국불교에는 다른 측면이 있다. 그 핵심적 내용은 인도 불교에서 논리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또한 카스트제도를 비판하는 진보적 성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161


불교사상의 전개 과정

1. 초기불교의 사상은 3가지 내용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첫째는 사성제(四聖諦)이다. 이는 4가지 성스러운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고(苦)'는 인생의 현실은 고통스럽다는 것이고, '집(集)'은 인생이 고통스러운 원인은 잘못된 욕망에 있다는 것이며, '멸(滅)'은 인생의 고통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고, '도(道)'는 인생의 고통을 없애는 길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도'는 팔정도(八正道)로 구성된다.

둘째는 삼법인(三法印) 또는 사법인(四法印)이다. '법인'은 불교의 징표, 불교의 증거라는 의미다. 이는 제행무상 등의 3가지 또는 4가지 조건이 갖추어지면 그 가르침을 올바른 불교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라는 도장을 찍는다는 의미이므로 그만큼 이 명제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삼법인 또는 사법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고, 모든 것은 고통스럽다는 것이며, 모든 존재는 무아(無我)라는 것이고, 열반(涅槃)의 경지는 고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연결해서 보면, 모든 것은 변하는데 그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집착하면 고통스럽다는 것이고, 이처럼 고통스러운 것에는 진정한 자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모든 것이 변하고 고통스럽고 무아임을 자각할 때, 진정한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삼법인 또는 사법인의 내용이다.

셋째는 연기설(緣起說)이다. 이는 사물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상호 의존성'을 말하는 것인데, 경전에서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기며, 이것이 멸(滅)하기 때문에 저것이 멸(滅)한다"라고 한다. 이는 이 세상 어떤 사물도 서로 관련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일상의 삶이 가능한 것은 누군가가 농사를 짓고 옷을 만들고 기름을 만들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 물건들은 내가 돈을 주고 사용하는 것이지만, 누군가가 만들지 않았다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이것들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에 철저히 기대어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상호의존성이다. 초기 불교에서는 이 연기설을 더욱 발전시켜 12항목의 연기설을 주장한다. 그 요점은 중생이 고통을 겪고 윤회하는 원인은 지혜가 없는 무명(無明)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불교의 경전은 <아함경(阿含經)>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역본과 팔리어본이 있다. 팔리어본은 '니카야(Nikaya)'라고 한다.

2. 불교 고단은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누어진다. 이는 계율문제를 두고 보수파와 진보파로 나누어진 것이다. 상좌부(上座部)는 보수파인데 불타가 정한 율(律)을 그대로 지키자는 쪽이고, 대중부(大衆部)는 진보파로서 불타가 정한 율이라고 할지라도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다. 상좌부와 대중부는 10가지 문제를 놓고 대립을 하였는데, 그 중에 핵심적 사항은 금은을 보시(기증) 받을 것인지 하는 문제였다. 상좌부는 금은을 보시 받아서는 안 된다는 쪽이고, 대중부는 시대가 바뀌었으므로 금은을 보시 받아도 된다는 쪽이다. 이렇게 2개의 부파로 나누어진 다음에 18개 부파로 나누어져 모두 20개 부파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상좌부 불교가 동남아로 전파되었다. 

3. 대승(大乘)불교는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경, 활발한 힌두교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새롭게 출현한 불교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普薩)을 강조하였는데 여기에 2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범부(凡夫)보살인데 대승불교경전에 나오는 미륵, 관세음, 문수, 보현보살 등을 말하는 것이다. 이 대보살은 이미 수행을 완성한 존재이고 한편으로 중생을 교화하고 있는 존재이다. 이 대보살은 힌두교에서 토착신앙을 포섭하고 대중성을 확보한 것에 대항하기 위해서 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존재를 제시한 것이다. 미륵(彌勒)은 미래에 태어난다는 부처님인데, 다음 생(生)에 부처가 되는 것이 결정되어 있고, 현재는 보살로서 도솔천(兜率天)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자비(慈悲)를 상징하는 존재이고, 문수보살(文殊菩薩)은 지혜를, 보현보살(普賢菩薩)은 실천행(實踐行)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또한 대승불교에서는 불타관(佛陀觀)에도 변화가 있었다. 대승불교에서는 불타의 개념이 일반화하였고, 구제자로서 뛰어난 능력을 불타가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중에서도 아촉불(阿?佛), 아미타불(阿彌陀佛), 약사여래(藥師如來)는 많은 사람이 귀의하는 대상이었다. 이는 불교의 대중화를 위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대승불교에서는 ,많은 경전을 제작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화엄경>, <법화경>, <무량수전>, 반야경전 계열, <유마경>, <승만경>, <해심밀경>, <열반경>이다. <화엄경(華嚴經)>은 불타가 되는 수행단계를 50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는 경전으로, 중국에 전해져서 화엄종(華嚴宗)의 근본경전이 되었다. <법화경(法華經)>은 소승(상좌부)불교와 대승불교의 조화를 말하는 경전으로, 중국에 전해져서 천태종(天台宗)의 근본경전이 되었다. <무량수경(無量壽經)>은 중생을 극락정토에 태어나게 한다는 내용의 경전으로, 중국에 전해져서 정토종(淨土宗)의 근본경전의 하나가 되었다.

반야(般若)경전 계열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공(空)의 가르침을 강조하는 경전이다. <유마경(維摩經)>은 출가하지 않는 재가 거사 유마힐(維摩詰)이 등장해서 불교이 가르침을 말하는 경전이다. 이는 재가 중심의 대승불교 정신을 잘 보여주는 경전인데, 중국에서는 <유마경>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승만경(勝?經)>은 출가하지 않은 재가의 여인 승만(勝?) 부인이 부처님을 대신해서 가르침을 말한 경전이다. 이것도 재가 중심의 대승불교 정신을 잘 보여주는 것이고,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성향이 강한 인도에서 매우 이례적인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열반경(涅槃經)>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경전이다. <열반경>은 경전이지만 논서의 치밀함을 보이는 경전이다. <해심밀경(解深密經)>은 인도 대승불교의 유식학파에서 중시하는 경전으로 심층무의식으로서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하고 있다. <능가경(楞伽經)>은 모든 중생이 여래(부처)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여래장사상과 유식학파의 사상을 결합한 경전이다. 이 <능가경>은 중국에 전해져 초기 선종(禪宗)에서 중요시하는 경전이 되었다.

또한 대승불교에서는 2대 학파가 있다. 그것은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이다. 중관(中觀)학파에서는 공(空)사상을 강조하고 범부의 집착을 논리적으로 깨뜨리려고 하였다. 그 대표적 저술이 용수의 <중론(中論)>이다. 유식(唯識)학파에서는 범부의 마음에 주목해서 8식설을 주장하였다. 세친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이 유식학파를 대표하는 저술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승불교가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에 전파되었다.

4. 기원후 7세기와 8세기에 접어들어 힌두교가 인도에서 완전히 주류 문화가 되자 이에 대응하고자 나타난 불교의 흐름이 밀교(密敎)이다. 대승불교도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밀교는 힌두교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이다. 밀교를 대표하는 경전은 <대일경>과 <금강정경>이다. <대일경(大日經)>은 중관사상의 영향을 받은 밀교경전이고, <금강정경(金剛頂經)>은 유식사상의 영향을 받은 밀교경전이다. 그 뒤를 이어서 무상유가(無上瑜伽) 탄트라가 등장했는데, 이는 인도의 탄트라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 밀교 계열의 가르침이 티베트에 전래되었다.  161-166


불교와 힌두교의 차이점

불교는 인도의 문화 토양에서 자라났지만, 힌두교(브라만교)와는 4가지 점에서 구분된다. 첫째, 불교는 힌두교의 카스트제도와 남녀차별을 부정하고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힌두교는 기본적으로 인도의 문화와 토양에 국한되는 '인도의 종교'로 머물렀지만, 불교는 인도의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는 세계 종교로서 보편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국제적인 포교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는 점이다. 셋째, 힌두교에서는 통일된 교리가 없고 믿음의 체계가 여러 가지라고 한다면, 불교는 가르침이 명료하고(철학적 내용은 복잡하지만) 교리체계도 일관성이 있다는 점이다. 넷째, 힌두교는 통일된 조직이 없는 느슨한 종교이지만, 불교는 교단을 구성하고 불교대학을 설립하여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종교활동과 포교활동에 나선다는 점이다.  166


시크교

시크교는 힌두교에 기초를 두고 이슬람교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이 두 가지 사상을 결합시킨 개혁종교이다. 이 종교를 처음 일으켜 세운 사람은 나나크(Nanak, 1469~1539)이다. 그는 카비르(Kabir, 1440~1518)의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았고, 이슬람교 신비주의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나나크는 진정한 종교는 내면성에 있고 또한 진정한 종교는 신을 만나기 위한 심성의 준비라고 보았다. 이 때문에 그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형식적인 의례를 부정하고 우상숭배를 금지하며 고행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나크는 만물은 신의 피조물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카스트와 성적 차별도 부정하였다. 그래서 시크교에서는 어떠한 카스트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함께 동일한 음식물을 먹고 음식물에 관한 금지조항을 만들지 않았다.

또한 나나크는 내면적 청정의 중요성, 곧 종교의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였는데, 그래서 술, 마약, 담배를 금지하였고, 보통의 직업에 종사해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것을 권장하였다. 이것이 바로 자기중심성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자기중심성이 강한 사람은 자아에 결사적으로 집착하여 탐욕과 분노와 집착과 자만에 지배당하고 언제나 불안하고 두려워한다. 따라서 수행자는 이러한 자기중심성을 극복할때 평호를 얻어 자기 자신의 본래적 원만함에 돌아오게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신(神)과 하나가 되는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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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글 

'인도'라는 국가의 명칭이 우리에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명칭의 친숙함만큼 인도의 실상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사람들은 흔히 용어가 친숙하면 그것에 포함된 의미도 모두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우리가 인도를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운 것은 아닐까.

인도는 국토의 크기가 남한의 33배이고 인구는 22배에 달한다. 국경선의 길이가 14,103km, 해안선이 7,000km인 무척 큰 나라이다. 4개 주요인종이 살고 있으며 사용되고 있는 언어만 해도 300개가 넘고 있다. 우리가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인도야'라고 지리적 한계는 말할 수 있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관습과 문화를 쉽게 단정 짓기는 어렵다. 바꿔 말한다면, 인도와 인도인을 '이것이다'라고 정의하는 것보다는 '이것은 아니다'라고 정의하는 것이 쉬울 정도로 복합적이고 다양한 나라이다.

따라서 인도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대체적인 윤곽만을 파악하는 것도 한국인의 입장에서 결코 용이하지 않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정말 엄청나게, 예측 불가능하게 다르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인도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방법'보다는 '인도를 바로 볼 수 있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인도를 바로 볼 수 있는 자세'는 자기중심적인 시각이 아니라 폭넓고 포용성 있는 문화적 상대 주의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인도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1년 동안의 강우량이 6월에서 9월 사이에 집중된다. 따라서 이 3개월 동안의 강우량에 의해서 농작물을 비롯한 기타 산업의 성태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우량이 너무 적을 경우에는 기근이 엄습하게 되고 너무 많은 경우에는 수백만 명의 수재민이 발생하게 되는 홍수의 피해를 입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상 몬순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인도인들의 삶과 생활을 지배해 왔다. 비가 적당히 내리면  한 해 동안의 안락한 생활이 보장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도인들이 숙명론적인 인생관을 가지게 된 데는 이 몬순의 영향이 매우 크다.  23


돼지의 경우 인도에서는 우리에 가두지 않고 방복하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배회하는 것이 자주 눈에 띈다. 돼지들의 자유를 위해 방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기 때문에 방목할 뿐이다. 새의 경우에도 먹을 수 있거나 판매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 자유롭게 노래를 부르고 이쓴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한마디로 인도인들은 동물을 사랑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는다. 다만 무관심할 뿐이다.

자연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물들을 보고 싶다면 인도 여행의 테마를 동물보호구역으로 잡아보는 것도 무척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100개 이상의 국립공원 등에는 숙박시설 등이 그런대로 갖추어져 있고, 최근에는 각 주정부가 관광수입 확대를 위해 각종 편의시설과 프로그램을 확충하고 있으므로 생생한 동물의 세계를 직접 볼 수 있다.  27


인도의 북서부 지역에 위치한 뻔잡(Punjab)사람은 신체 건장하고 용감하며 실질적이고 기계에 잘 적응한다. 또 북동부의 벵갈(Bengal)사람은 지적으로 우수하고 흥분하기 쉬우며 예술적 감정이 풍부하다. 남동부의 첸나이(Chennai)사람들은 보수적이고 종교적이지만 간혹 과학적 재질을 나타내기도 한다. 

지역 주민 간의 기질상의 차이는 무척 뚜렷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31


현재(2006년) 인도의 인구밀도는 제곱킬로미터당 324명으로 남한의 인구밀도 419.3명에 비하면 훨씬 낮은 편이다.  32


언어가 많은 인도에 정작 국어가 없다. 다만 공용어가 있을 따름이다. 

공용어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중앙정부의 공용어로 힌디어이며 부공용어로 영어가 쓰인다. 

다른 하나는 주(州)의 공용어이다. 주의 공용어는 각 주에서 결정한다.  36


일반적으로 종교는 교권체계의 유무에 따라 조직 종교와 비조직 종교로 분류된다. 조직 종교의 대표적인 예는 카톨릭교회로서 교황을 정점으로 교회의 운영과 교리의 해석 등 종교적 업무가 처리된다. 하지만 조직 종교는 신자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한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신자들의 신앙이 일상생활과는 분리된다는 단점도 있다.

비조직 종교의 예로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들 수 있다. 이들 종교에서는 교회라는 조직이 존재하지 않고 각지에 산재해 있는 사제들이 독립적인 현태로 신자들을 관리한다. 비조직 종교는 무척 산만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신자들의 신앙이 일상생활에 곧장 연결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비조직 종교인 힌두교는 인도 사회의 일상생활에 깊이 침투해 있다. 인도의 사회제도와 문화, 그리고 예술의 대부분은 힌두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 형성에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하는 것도 힌두교이다. 따라서 힌두교를 이해하지 못하면 인도와 인도인을 전혀 이애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5


힌두교는 궁극적으로 '범아일여(梵我一如)', 즉 내 자신이 신과 하나 되는 것을 추구하라고 가르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52


신과 인간의 관계라는 궁극적인 문제가... 끝없는 사유와 자기개발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힌두교는 보고 있다.

힌두교의 철학적 사유는 이 '고통'에 대한 진상의 해명으로 일관하여 왔을 뿐만 아니라 이 고통스러운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아 왔다.  53


인도에는 다양한 종교 집단들이 있지만 종파주의의 중심이 되는 것은 힌두와 무슬림이다.  66


1954년 이래 인도에서는 37시간에 1번꼴로 종파폭동이 발생하였고, 30,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폭동에 참여하여 살상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67


인도에서 전통적으로 카스트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오온 것은 바르나(varna)와 자띠(jati)이다.

바르나는 카스트를 광범위하게 구분하는 인종적, 문화적인 분류이고, 자띠는 카스트를 기능적, 지역적, 혈연적으로 분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브라흐만, 끄샤뜨리야, 바이샤, 슈드라의 네가지 바르나와 약 3,000개의 자띠가 있다.  70


인도인들은 긍정의 뜻을 나타낼 때 고개를 우리처럼 앞뒤로 끄덕이지 않는다. 고개를 좌우 어느 쪽이든 한쪽으로 갸우뚱하는 것이 긍정의 표시이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인도인들이 자주 입에 담는 것은 'No problem!'이다  202


'너희들이 사용하는 No problem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냐?'

한 인도인 친구는 '확실하게 답변을 할 수 없을 때 No problem을 사용한다'라고 답했고 다른 친구는 '아무 문제가 없으니 꼭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해보자'라는 뜻으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애매모호한 답변으로 이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것이다.  203


인도 중앙정부는 도시를 인구의 크기로는 여섯 등급으로 분류하고, 인구 10만 명 이상인 1급은 'city'라고 부르고, 그 이하는 'Town'이라고 부른다.  221


2001년 기준으로 1급 도시 중 가장 인구가 많은 곳은 뭄바이로서 1,636만 명, 그 다음인 꼴까따는 1,321만 명이고, 수도인 델리에는 약1279만 명이 거주한다.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도시는 1971년의 9개에서 1991년에는 23개로, 그리고 2001년에는 35개로 증가하고 있다.  221-222


인도 도시 중 상당수는 영국 식민지 시절 착취의 거점으로 형성되었고, 이 부류에 속하는 도시들을 '식민지형 도시'라고 부른다. 즉, 식민지를 유지하는 군사 행정의 중심지였던 델리, 유럽과 연결되는 식민지 최대의 상공업도시 뭄바이, 황마와 차의 수출항이었던 꼴까따, 면화의 수출항이었던 첸나이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이 식민지형 도시외에도 전통적으로 종교의 중심지였던 바라나시 등의 종교도시, 자이뿌르와 같은 성채도시 또 빠뜨나처럼 고대왕궁의 수도였던 도시들도 있다. 하지만 정치 사회 산업의 중심지 역할은 식민지형 도시들이 맡고 있다.

독립 이후에도 새로운 도시들이 태어났다. 산업발전에 의해 형성된 이 도시들은 현재 IT산업의 중심지인 방갈로르, 공업도시 란치, 독립 후 오리사주의 주도로 등장한 부바네슈와르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벵갈로르는 최근 5년간 연 평균 40만 명씩 인구가 증가하는 급성장을 보이고 있다.  222


힌두교의 생각에 따르면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 속에서 창조와 파괴를 거듭하고 있다. 이 우주의 창조와 파괴를 주관하는 브라흐마의 하루는 낮과 밤 두 개의 깔빠(Kalpa:불교의 검에 해당함)로 이루어진다.

하나의 깔빠는 인간의 기준으로 43억 2천만 년에 해당된다.  240


인도인과 약속을 하면 30분에서 1시간 정도 늦게 나타나는 것은 보통이고, 하루 뒤에 나타나는 일도 잇다. "왜 이렇게 늦었냐?"고 물으면 공통적으로 "시간은 무한한 것 아니냐. 기다린다는 것은 만남을 위한 기대감이다. 그 기쁨을 네게 하루 더 준 것이다. 시계라는 것을 신처럼 받들지 말아라.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속박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등의 설교를 들을 수도 있다.

기차도 버스도 한 두 시간 늦게 출발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249


인도 음식은 기본적으로 남부에서는 쌀밥, 북부에서는 밀가루로 만든 인도식 빵 로띠(roti)가 주식이고, 그 외에 콩으로 만든 달(daal), 야채 요리인 사브지(sabzi), 그리고 걸쭉한 과일야채 소스인 짜뜨니(catni) 등이 반찬으로 첨가된다.


음식에 사용되는 향신료는 3,000여 가지에 달한다.  252


3,000여 가지에 달하는 인도의 향신료 중 절대다수가 우리들로서는 구경은 커녕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것들이다. 특히 어떤 향신료는 화장품 냄새가 나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휘발유 맛이 나는 것도 있다.  253


35도가 넘는 더위가 6개월 이상 지속되는 환경에 사는 인도인들로서는 가능한 한 자극적인 맛을 개발하여 체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도인들의 향신료에 대한 집착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다.  254


인도에서 고기(meat)라고 부르는 것은 대개 염소, 양, 닭의 고기를 뜻한다

신선한 해산물을 질길 수 있는 곳은 해안선 지역에 한정되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은 서해안의 뭄바이에서 께랄라주에 이르는 해안지역으로, 아라비아 해에서 나오는 풍부하고 다양한 해산물을 즐길 수 있다.

이 지역에 가는 사람에게 꼭 권하고 싶은 것은 새우커리이다. 

생선으로서는 스내퍼라는 우리의 옥돔과 비슷한 것이 있는데, 튀긴 것을 주문하면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257


고기나 생선류는 가능한 한 크고 좋은 식당에서 먹는 것이 안전하고, 의심스러운 곳에서는 채식으로 만족하는 것이 안전하다.  258


커리라는 말 자체는 인도음식에 들어가는 다양한 향신료들을 표현하기 위해 영국인들이 만든 단어에 불과하다.

인도식 요리법에는 가장 중요한 향신료, 즉 기본적인 향신료가 25가지 있는데 그것들이 합쳐져 우리가 아는 커리의 맛을 내는 것이다.  265


중소 도시에서도 중국음식점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269

버스를 식당차로 개조하여 하는 중국집도 있으니 그곳을 이용해도 된다. 뜨뜻한 국물로 속을 풀 수 있는 유일한 곳도 중국집이다. '핫 앤 싸워 숲(Hot and Sour soup)' 또는 '완탕숲(Wantang soup)'이 좋다.  270


도시에서 가장 좋은 호텔의 커피숍으로 가면 수프나 샐러드를 시키면 빵과 버터, 잼이 더불어 나온다. 빵도 한 두 조각 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바구니 채로 나온다. 가격도 절대 부담이 될 정도는 아니다.  272


인도에서는 아프더라도 함부로 주사를 맞아서는 안 된다. 현대적이고 치료비가 비쌍 병원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주사기를 중기 소독하여 사용하거나, 한 번 사용한 주사기를 그저 깨끗한 물에 씻어 재사용하는 병원이 많다.

참고로 인도에는 570만여 명의 AIDS 보균자가 있으며, 그 중에서 75%가 남인도에 거주한다.  277


적리(이질의 한 종류임, 국내에서는 법정 전염병이고 발열, 복통, 혈액이 섞인 설사를 일으킨다. 세균이 입을 통해 전염된다.)의 위험성을 적게 하는 방법은 첫째, 생야채를 먹지 않는 것. 둘째, 체면 불구하고 야채를 생수로 씻어 먹는 것이다. 꼭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적리에 걸렸을 경우 즉시 병원에 가야한다는 것이다. 주사기를 가져갔을 경우에는 주사도 맞고, 안 가져갔을 경우에는 약만 처방해 달라고 하면 된다.

적리는 인도의 풍토병이기 때문에 치료약도 발전해 있으므로 치로만 받으면 금방 낫는다. 정로환으로 버텨보려 하다가 생명에 위협이 올 수도 있다.  278


가장 중요한 것은 인도가 볼결하다고 불평을 할 것이 아니라 '나도 같이 더러워지지'하는 생각을 갖는 것이 생존의 조건이다. 왜냐하면 인도에 가서 마시는 공기, 밟는 땅에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오물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아무리 혼자 깨끗한 척 하더라도 진흙탕에서 헤엄치면서 진흙을 몸에 안 묻힐는 격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286


인도에 가면 여러 가지 황당한 일들을 당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자주 일어나는 일은 택시 등의 교통수단 운존기사들의 외국인에 대한 바가지 씌우기이다. 어느 나라 사람이건 마찬가지겟지만 다른 사람에게 속는다는 것은 무척 불쾌한 일이다. 그러나 인도에서 바가지 요금 대문에 택시기사를 상대로 길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싸우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뿐이다. 다른 나라의 여행객들, 예를 들어 일본인이나 미국인들은 대부분의 경우 요구하는 대로 돈을 줘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인도에 대해서 사전지식이 없어서 바보처럼 속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인도여행 붐이 일어난 것은 불과 10년이 약간 넘었지만 일본이나 미국의 경우에는 수십 년 전부터 인도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만큼 정보나 여행안내서도 풍부하다. 인도인들의 행태에 대해 우리보다 많은 사전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음엗 그렇게 무심한 듯이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여행에 대한 인식 자체가 우리와는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행동이다. 그들은 여행에서 즐기는 것에 우선적인 가치를 둔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한 불쾌한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하므로 모르는 척 속아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행을 단순히 '즐기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다.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은 놀기 좋아하는 민족이었다. 19세기 말 우리나라에 거주했던 선교사들의 기록을 보면 구경거리나 놀거리만 생기면 산점주인은 상점 문을 닫고 대장장이는 하던 일을 팽개치고 그 장소로 달려갔다고 한다. 어떤 면으로 보면 여유 있는 자세를 가졌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노는 데도 여행하는 데도 목적이 있어야 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배낭여행을 다녀온 학생에게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배웠나?'고 물어야만 훌륭한 교수이지, '잘 놀다 왔어?'하고 물으면 학생에겐 관심이 없는 교수가 된다. 또 학생 입장에서도 '이번 여행에서 나는 무엇을 배웠고, 이것을 내 장래를 위해 이렇게 사용하겠다'고 대답해야만 성숙하고 미래가 밝은 학생으로 주위에서 인정을 받는다. 그저 '재미있었어요'하고 대답하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인간으로 취급당한다.  305-306


'투입=산출'이라는 기계적 사고는 '즐기기 위한 여행'을 '투쟁을 위한 여행'으로 변형시킨다.


인도 전체 사회가 보다 세련되어지고 합리화되어야만 해결되는 일이지 우리가 목청을 높인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이다.  307


인도에 가면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고 분통이 터지는 일을 많이 당하게 된다. 또 인도인들의 뻔뻔스러움과 교활함, 그리고 말 바꾸기 등은 가증스러움을 넘어 인간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도인들의 이런 행태가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잘 알다시피 인도는 오래전에 고도의 문명을 발전시켰다. 문명이란 인간의 삶을 제도화시킨다는 측면도 가지고 있지만 그 제도를 파괴하려는 시도도 끊임없이 존재해 왔다. 이것은 법률이 세분화되고 구체화되면 그 법망을 피하려는 시도도 교묘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이다. 다시 말해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의 순박함을 상실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염증을 느끼는 인도인드르이 행태를 '좋다 또는 나쁘다'라는 가치판단을 내리기전에 이것도 인도문화의 한 부분이라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선행되어야 한다.  308


사실상 인도는 우리가 상실했거나 상실해 가고 있는 많은 것을 지금도 보존하고 있다. 이것을 흔히 '췬성'이라는 말로도 표현하지만 우리에게 향수를 느끼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6.25때 배곯았던 이야기를 눈물을 흘리면서도 즐겁게 이야기하는 심리와 유사한 것이다. 단, 그 사람들에게 그 당시와 똑같은 환경에서 다시 살라고 하면 그렇게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낭만주의는 이런 면에서 현실을 호도하고 잘못된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인도도 우리처럼 '기쁠 때는 웃고 슬플 때는 우는, 보통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317


인도에 오는 우리 여행객들 중 시내버스를 타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는 '왜 아직 차장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 말에는 우리처럼 승객이 요금함에 돈을 넣게 하면 될 텐데 이렇게 비합리적으로 운영하다니 인도가 한심하다는 오만함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인도의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승객의 안전을 확보하고 더불어 실업자를 구제할 수 있다는 합리적 측면을 우리 여행객들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318


'우리 눈 속의 들조'인 졸부적 오만함에서 비롯되는 즉흥적 속단을 버리고 '왜?'라고 묻는 겸손함과 탐구심을 갖는다면 인도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319




부록

'Water Purification Tablet' 을 약국에서 구입하여 한 알을 1리터의 물에 넣고 30분 뒤에 먹으면 안전하지만 물맛은 수영장 물맛이다.  332


인도에의는 님부(Nimbu)라고 부르는 탁구공보다 약간 작은 노란색의 레몬이 있다. 큰 레몬에 비해 비타민 C의 함량이 100배, 강력한 살균력, 그리고 해열작용을 한다. 따라서 아침 식사 후와 저녁식사 후, 님부 반 개를 물 한 컵에 짜서 먹으면 피로회복에 큰 효과가 있고, 약간 불결하게 조리된 음식에도 뿌려 먹으면 살균작용도 한다. 또 갑자기 열이 나지만 병원에 곧 갈 형편이 되지 못할 때에는 님부를 몸에 바르면 열이 내려가기도 한다.  335


인도를 여행하면 흔히 두 가지 점을 느끼게 된다.

첫 번째는 '인도가 너무 좋다'라는 것이다. 이때 자기가 인도를 좋다고 느끼는 이유를 아주 정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아. 인도가 아니라 다른 나라로 여행을 했다고 해도 좋지 않았을까? 외국여행이란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일단 좋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뜨면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한다'가 아니라 '오늘은 뭐하고 놀지?'가 되니 행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도가 좋다'라고 느낀다면 그 이유를 명확히 찾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둘째, 인도는 우리나라와 많은 면에서 다르고 또 많은 면에서 불편하다. 느려 터진 인도인들의 일 처리 솜씨, 불결한 환경,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상인, 끝없이 달려드는 거지와 사기꾼들 등으로 짜증나는 경우가 많다. 이때 화를 낸다거나 싸움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특히 싸움의 경우에는 세계 어느 나라 경찰이든 자국인의 편을 들게 되어 있으므로 이쪽에서 아주 심각하고 명백한 피해를 받지 않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우리에게 불리하다.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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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말 - 내 인생 최고의 책 (피코 아이어)

로힌턴 미스트리의 이전 작품들을 접하지 못한 뉴욕의 한 영화 제작자는 찰스 디킨스를 새로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적절한 균형>이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소설이라 단언한다. 

소설이 폭로하는 내용은 봄베이에 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런던이나 뉴욕에 사는 누구에게라도 충격적이다. 

비평가이자 동료 작가며 펜이기도 한 내가 섣불리 꺼내기 힘든 말이 바로 이 소설로 인해서 당신의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플 거라는 사실이다.



"이 책을 손에 들고 부드러운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으면서 당신은 혼잣말로 이 책이 재미나겠다고 할 겁니다. 그리고 엄청난 불행에 관한 이 이야기를 읽고 난 후에도 당신은 식사를 잘 할 것이고 본인의 무감동에 대해서 작가를 탓하고 그의 지나친 과장과 상상의 비약을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어주십시오. 이 비극은 허구가 아니라 모두 진실입니다." -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중에서



나라얀이 고향 마을로 돌아온 지가 6개월쯤 되던 어느날 아침, 벙기 카스트 한 명이 용기를 내서 오두막집으로 오고 있었다. 밖에서 불 위에다가 물을 끓이던 루파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남자를 보았다. "도대체 어딜 가는 거야?" 그를 막아서며 그녀가 소리쳤다.

"재봉사 나라얀을 찾고 있습니다." 겁에 질린 남자가 누더기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뭐라고?" 그의 뻔뻔함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재봉사고 나발이고 그 입 다물어! 끓는 물로 네 놈의 더러운 몸을 지져 줄 테다! 내 아들은 너 같은 놈들을 위해서는 일하지 않아!"

"어머니! 왜 그러세요?" 나라얀이 모두막집에서 나오며 소리쳤을 때 남자는 달아나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그는 남자를 따라가며 소리쳤다. 보복이 따를까 봐서 무서웠던 벙기는 더 빨리 달렸다.

"이봐요. 돌아와요! 괜찬하요!"

"다음에 오겠습니다. 내일쯤요." 겁에 질린 남자가 말했다. 

"그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꼭 오세요." 오두막집으로 돌아간 나라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를 무섭게 노려보는 어머니를 무시해 버렸다.

"나한테 고개 젓지 마!" 화가난 그녀가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내일 다시 오라고 왜 부른거야? 우린 그런 낮은 카스트 사람들을 상대하면 안 돼! 사람들 집이ㅔ서 똥이나 실어 나르는 작자의 몸 치수를 어떻게 재겠다는 거야?"

"전 어머니가 틀렸다고 생각해요. 전 브라만이든 벙기든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으 위해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 그게 네 생각이냐? 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면 뭐라고 하시는지 들어보자! 브라만은 돼도 벙기는 안 돼!"

그날 저녁 루파는 둑히에게 아들의 터무니없는 생각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네 엄마 말이 맞다." 그가 나라얀에게 말했다.

"왜 저에게 재봉을 배우라고 보내셨던 거죠?"

"무슨 그런 멍청한 질문이 있냐. 네 인생이 잘되라고 그런 거지.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니?"

"그럼요. 카스트가 높은 사람들이 우리를 함부로 다루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금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그들처럼 행동하고 계세요. 그런 걸 원하신다면 전 읍내로 돌아가겠습니다. 전 이렇게는 더 이상 살 수 없습니다."

루파는 그의 최후통첩에 깜짝 놀랐으며, 둑히가 그녀를 보면서 "쟤 말이 맞아"라고 하자 공포에 질렸다.  196-197


둑히는 나방이 등불 유리를 뚫고 들어가려고 연약한 날개를 퍼덕거리는 것을 지켜봤다.  211


"존엄이 없는 삶은 가치가 없습니다."  214


"쇠로 만든 선로가 아주 유용하죠." 이웃집 남자가 말했다. "발판 구실을 해요. 땅보다 높아서 똥이 쌓여도 궁둥이에 닿칠 않거든요."

"요령을 다 아는 모양이죠?" 그들이 바지를 내리고 철로에서 자세를 취할 때 옴이 이웃집 남자에게 물었다. 

"아, 이거야 금방 배우지." 그는 덤불에 있는 남자들을 가리켰다. "지금은 저기 앉으면 위험해. 독이 있는 지네들이 저기서 기어 다니거든. 나라면 저기서 볼일을 안 볼거야. 그리고 덤불에서 균형을 잃어버리면 궁둥이에 가시가 잔뜩 묻는다고."  245


옴은 문간에 앉아서 어제 디나의 방에 떨어져 있던 헝겊들 가운데 호주머니에 슬쩍 집어넣었던 시폰 조각을 만져 보았다. 매우 부드러운 천은 그의 손가락들 사이에서 매우 편한 느낌이 들었다. 왜 삶은 이렇게 부드럽고 매끄러울 수 없는 걸까?


아이들은 썩은 음식 덩어리를 살피던 까마귀 한 마리를 쫓았다. 고집 샌 새가 날아가지 않고 깡총깡총 뛰어다니며 주위를 돌아가 썩은 음식으로 되돌아오자 아이들은 더욱 즐거워했다. 더럽고 발가벗고 굶주려 얼굴에는 부스럼이 나고 피부에는 뾰루지가 난 아이들이 어떻게 저렇게 행복할 수 있는지 옴은 궁금했다. 이런 비참한 곳에서 웃을 일리 뭐가 있을까?  271


"불행, 카스트의 폭력, 정부의 냄담, 관리의 거만함, 경찰의 야만에 관한 기사를 읽다 보면 울고 싶어질 때가 있소,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낄 거고 그게 지극히 당연한 거죠. 그러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W. B. 예이츠)이 말했듯이 너무 오랫동안 희생하다 보면 마음이 돌덩어리가 되죠."  334


'모든 것들은 무너지고 다시 만들어지며 그것들을 새로 만드는 일은 즐겁다.'

"예이츠 인가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선을 긋고 구획을 정해서 그것들으 넘지 않으려고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거요. 때로는 실패를 성공의 징검다리로 삼아야지. 희망과 절망의 적절한 균현을 유지해야 하죠. 그렇지, 결국은 모든게 균형의 문제지."  336


"부잣집 자식아, 언제쯤 현실에 적응할래?"

"부자가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지벵 있는 화장실도 여기처럼 평범해요. 그래도 물통에 물은 있어요. 악취도 나지 않고요."

"문제는 넌 너무 많은 걸 보고 너무 많은 냄새를 맡는다는 거요. 여긴 대도시야. 눈 덮인 아름다운 산들은 없다고. 넌 계집애 같은 눈과 코를 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해."  349


"우리의 시각, 후각, 미각, 촉각, 청각 모두는 완벽한 세계를 즐기기 위해서 맞춰져 있지. 그러나 세계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감각들에다가 가리개를 씌워야 하는 거야."  350


언젠가 아비나시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체스라고 말했었다. 지금 그는 심각한 공격을 당하고 있다. 졸 세개와 차하나를 가지고 제때에 왕을 지킬 수 있었을까? 그리고 디나 아주머니는 거실과 안쪽 방을 오가면서 재봉사들을 상대로 게임을 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게임의 규칙을 지키지 안흔 청량음료 경쟁자들을 상대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저녀깅 되자 방의 그림자가 짙어졌지만 마넥은 불을 켤 생각을 하지 않앗다. 체스에 대한 그의 변덕스러운 생각이 갑자기 어스름 속에서 음산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띠었다. 모든 것이 위험에 처해 있었고 매우 복잡했다. 게임은 냉혹했다. 인생이라는 체스판에서 벌어지는 살육으로 인해서 인간들은 상처를 입는다. 아비나시의 아버지는 결핵에 걸렸고 글의 세 여동생들은 혼인 지참금을 기다리고 있다. 디나 아주머니는 자신의 불행을 이겨내려고 발버등치고 있었다. 아버지는 상심했고 희망이 꺾였지만 어머니는 그가 다시 강해져서 웃을 것이라고 가장했고, 아들이 1년 후 대학을 마치고 돌아와 지하실에서 콜라 가문의 콜라를 만들게 되면 그드르이 삶이 기숙학교로 마넥을 보내기 전처럼 다시 한 번 희망과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될 거라고 가장해싿. 그러나 그렇게 가장하는 일은 동심의 세계에서나 통용될 뿐, 결코 예전 같은 시절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삶은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할 뿐이고 너무 절망적인 듯했다.

그거 접는 체스판을 세게 닫자 바람이 훅하고 불어와 얼굴에  닿았다. 눈물로 젖은 뺨에 부딪친 바람은 차가웠다. 그는 눈물을 닦고 체스판을 마치 풀무처럼 열었다가 다시 세게 접었다. 그런 다음 체스판으로 부채질을 했다.

디나 아주머니가 마침내 저녁 먹을 시간이라고 부르자 마치 감옥에서 해방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396-397


"아무 문제도 없는 사람은 없죠. 걱정 마십시오."  407


"소음도 사람과 마찬가지네요." 이시바가 말했다. "한 번 알고 나면 친구가 되죠."  465


"신은 죽었어요. 독일 철학자가 책에 그렇게 썼어요."

그 말에 그녀가 충격을 받았다. "독일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말했겠지."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데 너도 그 말을 믿니?"

"예전에는 그랬죠. 그런데 지금은 신이 거대한 이불을 만드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끝없이 다양한 디자인을 가진 이불 말이에요. 그런데 그 이불이 너무 크고 호란스러워서 디자인을 볼 수가 없고, 사각형과 다이아몬드형 그리고 삼각형이 ㄱ더 이상 잘 어울리지 않아서 모든 게 무의미해진 거죠. 그래서 신이 그걸 버린 거죠."  495


"넌 그 사람들(이시바와 옴)하고 정말 친구가 된 거지? 그래서 고향 마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도 너한테 말해 준 거고."

그가 잠시 고개를 들고 어깨를 으쓱했다.

"재봉사들이 매일 여기 앉아서 일했는데 나한테는 그런 말을 안 했어. 왜 그럴까?"

그가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자꾸 어깨로 말할 거니? 너의 이불 만드는 신이 입 안에다가 혀를 꿰매기라도 했니? 재봉사들이 너한테는 말을 하고 나한테는 왜 말을 안 했냐니까?"

"아마도 아주머니가 무서웠겠죠."

"날 무서워했다고?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실은 내가 그 사람들이 무서웠어. 수출 회사를 찾아서 나를 제쳐놓을까 봐서 말이야. 안 그러면 더 나은 일을 찾을까 봐서. 때로는 실수를 지적하는 일조차 두려웠어. 재봉사들이 가고 나서 나 혼자 밤에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았지.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날 두려워했다는 거지?"

"아주머니가 더 나은 재봉사들을 찾아서 자기들을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려는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했다. "미리 나한테 말해 주지 그랬니. 그랬으면 안심시켜 줄 수도 있었는데."

그가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496-497



너도 알다시피 민주주의라는 오믈렛을 만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라는 달걀을 몇 개 부숴야 해.(누스완의 말, 디나의 오빠)  541


민주주의라는 오믈렛을 만들기 위해서 민주주의라는 달걀을 몇 개 수붜야 한다는 조금 전의 금언을 고민하며, 그는 머릿속에서 민주주의, 독재, 프라이팬, 불, 암탉, 계란 완숙, 식용유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뭔가 다른 말을 찾아보려고 했다. 한 가지가 떠올랐다. 민주주의라는 오믈렛은 민주주의라는 상표만 붙은 포악한 암탉이 낳은 달걀들로는 만들 수 없다는 말이었다.  543


살은 사람들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다루며, 좋은 것들은 갈기갈기 찢어놓고 나쁜 것들은 냉장되지 않은 음식의 곰팡이처럼 계속 자라도록 만드는 걸까? 원고 교정자 바산트라오 발믹은 이것이 삶의 일부라면서 희망과 정말의 균형을 찾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살아남는 비결이라고 했다. 하지만 불행과 파괴도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지 않다. 충분히 큰 냉장고만 있다면, 이 아파트의 행복했던 시절을 담아서 상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아파트의 행복했던 시절을 담아서 상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냉장이 불가능했다. 결국 모든 것은 상하고 만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633


"정말 아름답습니다." 이시바가 말했다.

"이불이야 아무나 만드는 건데요 뭐, 당신들이 쓰고 남은 헝겊 조각들이에요." 그녀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이것저것 조각들을 모으는 게 대단한 기술이죠."

"저거 봐요." 옴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리가 맨 처음 작업했던 포플린 옷감이에요."

"기억나니?" 디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에 옷을 얼마나 빨리 만들었는지 생각나? 난 정말 재봉 천재 두 명이 나타난 줄 알았단다."

"그때는 배가 고파서 손가락들이 빨리 움직였습니다." 이시바가 웃었다.

"그 다음에 저기 오렌지색 줄무늬가 있는 노란색 칼리코 천을 작업했죠. 옴이 그때 날 얼마나 힘들게 했는데요. 사사건건 싸우고 말다춤을 했잖아요."

"제가 언제요? 싸워요? 절대 그런 적 없는데."

"이 파란색, 흰색 꽃들 생각나요/ 제가 여기로 이사 왔을때 아주머니께서 만들던 치마에서 나온 거죠." 마넥이 말했다.

"정말?"

"그럼요. 그날 아시바 아저씨와 옴이 일하러 안 왔잖아요. 총리의 강제 모임에 납치됐던 날이요."

"아, 그래. 맞다. 옴, 이 예쁜 보일 옷감 기억나니?"

얼굴이 빨개진 옴은 생각나지 않는 척했다.

"아니, 생각 안 나? 어떻게 생각이 안 날 수가 있니? 네가 엄지손가락을 가위에 베어서 피를 흘린 천이잖아."

"전 그런 기억이 없는데요." 마넥이 말했다. 

"네가 오기 한 달 전에 그랬지. 그리고 시폰도 재밌었었는데, 디자인을 맞추기도 힘들고 미끄럽다고 옴이 화를 냈었지."

이시바가 몸을 숙이더니 정사각형의 흰 삼베를 가리켰다. "이거 아시죠? 이 천을 가지고 작업한 첫날에 정부가 우리 집을 부쉈죠. 이걸 볼 때마다 슬퍼집니다."

"가위 가져와요. 잘라 버릴 테니까." 그녀가 농담을 던졌다.

"아닙니다. 그냥 두십시오. 아주 보기 좋습니다." 그는 삼베를 손가락으로 만지며 과거를 떠올렸다."천 한 조각을 두고 슬프다고 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보십쇼. 이 슬픈 조각이 저희가 베란다에서 자기 시작했을 때 작업하던 행복한 조각과 연결돼 있잖습니까. 그리고 그다음 조각은 차파티를 만들 때 작업하던 거교요. 그리고 이 보라색 비단은 저희가 매운 양념 화다 과자를 만들고 다 함께 요리를 하던 때 작업하던 거죠. 또 이 조젯 헝겊 조각은 거지 왕초가 저희를 집주인의 깡패들로부터 구해 줬을 때 작업하던 겁니다."

그는 복잡한 법칙을 명쾌하게 설명하기라도 한 듯이 기뻐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니까 기억해야 할 법칙은, 천 한 조각보다 전체 이불이 훨씬 중요하다는 겁니다."

"우와, 정말 멋지다!" 옴과 마넥이 박수를 치며 외쳤다. 

"정말 현명한 말이로군요." 디나가 말했다.  700-703


시간은 길이도 없고 넓이도 없어. 중요한 건 시간이 지나면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거란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니? 바로 우리들의 삶이 합쳐졌다는 거야."

"이불의 헝겊 조각들처럼 말이죠." 옴이 말했다.  703


인간들은 왜 자신의 감정을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걸까? 그것이 분노든 사랑이든 슬픔이든, 사람들은 항상 숨기려고 한다. 또한 어떤 인간들은 그들의 감정이 다른 사람보다 크고 위대한 척한다. 그래서 작은 골칫거리에도 크게 분노하고, 미소와 웃음으로 충분한데도 히스테리를 부리며 웃는다. 모두 정직하지 못한 행동이다.  721


일요일 저녁이면 그들은 카드놀이를 했다. "자, 다들 어서 모여!" 다섯 시가 되자 누스완이 즉시 그들을 불렀다. "카드놀이 시간이야."

그는 그 시간을 철저히 지켰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꿈을 카드놀이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개는 세 명 뿐이어서 누스완은 러미 게임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가족의 행복을 끈질기게 찾고자 했다.

"카드놀이가 인도에서 처음 시작된 거 알고 있어?" 그가 물었다.

"정말요?" 루비가 놀랐다. 누스완이 그런 얙기를 할 때마다 그녀는 매우 감동했다.

"그럼, 그렇고 말고. 체스도 인도에서 유해된 걱야. 사실, 카드가 체스에서 시작됐다는 이론이 있지. 13세기에 중동을 거쳐서 유럽으로 전파됐어."

"세상에!" 루비가 감탄했다.

그가 패를 다시 배열하더니 카드 한 장을 엎어서 버리고 외쳤다. "러미!"

같은 종류의 카드를 다 모은 걸 보여 주고 그는 다른 사람들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분석해 주었다. "거기서 하트의 잭을 내면 어떡하니, 그래서 네가 진 거야." 그가 디나에게 말했다.

"모험을 해 봤어요."

그가 카드를 모아서 섞었다. "자, 그럼 누가 패를 돌릴 차례지?"

"나예요." 디나가 카드를 받았다.  820-821


"재미없는 인생이란 없는 법이오."(마넥이 돌아와 바산트라오(변호사)를 만났을때 변호사의 표현)  859




옮긴이의 말 - 인도의 판타지, 로힌턴 미스트리의 리얼리즘

<적절한 균형>은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이슬람교, 시크쿄 등 다양한 종교는 물론이고, 계층과 종족 그리고 성정 배경이 확연히 다른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인도 현대사의 문제들을 정면으로 파해친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이 소설은 여러 개인들이 역사의 자장에 휩쓸려 맞게 되는 비극을 담담하게 그리면서도, 이러한 인도인들의 비극이 어느 한 시절에 국한된 게 아니라 독립 훨씬 이전부터 존재한 비극임을 보여준다.  877


소설은 인디라 간디가 선포한 국가비상사태 체제인 1975년에서 1977년을 주요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카스트 제도에 항거해 재봉사가 되는 불가촉천민들, 새로 그어진 국경선으로 큰 사업을 잃고 마는 파르시 기업가, 국가비상사태로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가난한 학생 운동가, 신부 지참금 문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소녀들, 구걸의 수익 증대를 위해서 아이들의 신체를 훼손하는 거지 왕초, 빈민굴 판잣집조차도 빼앗기고 노숙자로 전락하는 가난한 사람들, 국가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생식력마저도 용납하지 않는 폭압적인 관리 등 많은 인물이 등장하여 독립을 전후한 파란만장한 인도 현대사를 증언한다. 디나, 마넥, 이시바, 옴프라카시는 이런 엄혹한 역사 앞에서, 특히 국가의 폭력 앞에서 개인은 도무지 온전하게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야만적인 국가 권력과 불화하는 개인들의 삶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거대한 폭력 앞에서 만신창이가 된 개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을 로힌턴 미스트리만큼 실감나고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인도의 현대 작가는 드물 것이다. 

<적절한 균형>을 통해서 독자들은 역사와 국가의 폭력에 굴하지 않는 개인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진정한 인도의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878


궁극적으로 <적절한 균형>은 개인과 역사, 개인과 국가가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묻는다. 그 적잘한 균형 감각은 무엇일까? 소설의 제목은 역설적이게도 그 균형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웅변한다.  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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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란 동전을 넣고 자동판매기에서 꺼내는 '인스턴트 커피'가 아니다.  10


나는 우선 이 이미지의 '간파'와 '유포'의 혐의를 에드워드 사이드릐 오리엔탈리즘에 둔다. 사이드에 따르면, "오리엔탈리즘은 동양과 서양 간의 인식론적 구분을 창조하고 확인하는 데 기여한, 서양의 동양에 대한 연구와 서양에 의해 재현되고 지지된 어떤 이념적 관점"을 말한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서양이 동양에 대해 가진 본질적인 이미지, 서양이 상상하고 날조하는 동양을 말한다.  12


"먹고 먹히느냐가 동물의 왕국의 규칙이듯이 인간 세계의 규칙은 규정되느냐, 규정하느냐이다"라는 말을 기억한다면, 오리엔탈리즘은 힘센 서양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기와의 관계 속에서 힘없는 동양을 정의하고 구성한 담론임을 짐작할 수 있다. 

어떤 대상을 보고 정의하는 자와 그에게 보여지고 정의되는 자는 대등하지 않다. 이 관계 자체가 전자가 후자보다 우월함을 전제한다. 아는 것이 힘이고 지식이 권력이듯이 보고 말하고 판단하는 것도 권력과 연계되기 때문이다.  13


수동적인 동양은 역동적인 서양의 부정적인 '새김장식'으로 정의된다. 곧 서양이 우수하면 동양은 열등하며, 동양이 후진적/비합리적이면 서양은 진보적/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서양에게 동양이라는 타자는 서양의 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른다. 따라서 열등한 동양은 서양의 우월한 정체성을 확인하고 완성해주는 역할을 한다.  15-16


어쩌면 우리에게 인도는 부정해야 할 '동양'이거나 지우고픈 아픈 기억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서양이 구성한 인도, 인도에 대한 영국의 식민담론을 비판 없이 차용하고 복제하여 우리보다 발전한지 못한 인도를 우리의 '동양'과 타자로 바라보면서 한때 막강한 힘을 가졌던 대영제국의 공범이 되어 심리적 보상을 얻는 것이다.  26


영국이 인도를 버정적을 인식하여 긍정적인 자기 정체성을 강화했듯이, 우리도 인도를 열등한 '동양'으로 타자화하면서 우리 자신을 발전한 서양과 동일시한다.  29


복제 오리엔탈리즘 - 박제 오리엔탈리즘..  


이 글에서 나는 영국이 인도를 지배한 시대에 영국이 창조한 인도의 부정적 이미지를 분석하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어떻게 복게되고 재생산되는지 살펴본다.  30


오리엔탈리즘은 말없이 누운 채 서양의 시선에 몸을 맡기는 수동적 동양을 가정한다.  31


나는 우선 이 책에서 영국과 우리 나라에서 출간된 소설과 여행기, 신문과 잡지에 실린 글 등 문자화된 재현 수단인 텍스트를 분석하여 상상력의 렌즈와 보는 자의 '전지전능한' 시선으로 박제(형성)되고,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복제되고 무의식적으로 수용(재생산)되는 이미지들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구성되고 발전했는지 추적한다. 이는 우리가 인도를 보고 규정하는 방식을 따라가는, 우리 자아에 대한 일종의 탐구 여행이 될 것이다.  33


1898년에 길크리스트(John Gil-christ)는 인도의 정치조직과 저항의 잠재력을 감지하고 "우리가 이방에서 온 정복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 것"과 "인도인은 언제나 우리를 이 나라의 이방인으로 여길 것"이며 "때가 오면 이 무해한 인도인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우리를 추방할 것"이라면서 인도인을 믿지 말라고 충고했다. 이 불안과 두려움이 영국으로 하여금 인도에 대한 '거리 두기'를 장려하게 했다. 마음소의 불안을 눅이는 방법은 문명화의 사명을 수행하는 영국을 이상적인 지배이념으로 만들고 인도를 부정적인 존재로 이분화하는 것이었다.  42


1885년, 듀퍼린 인도 총독이 런던의 인도부 장관에게 보낸 다음의 편지, "뱅골인 바부(babu; 지식인)들이 우리 영국인을 가장 짜증나게 만들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저도 예전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절대로 보여주어서는 안된다는 장관의 말씀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들에게는 켈트족이 지닌 심술궂음과 교활함, 그리고 생명력이 있습니다."  44


인도와 인도인 역시 영국과 영국인이 아닌, 부정적이고 열등한 이미지로박제되기 시작했다.  46




비교적 인도에 동정적인 시각을 가졌다는 평을 받는 포스터조차도 서구 교육을 받은 인도인은 '인도인답지 않다'고 여겼다. 그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 곧 "철도와 우체국 그리고 학교 없이....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문명의 사각 지대에 있는 인도인들은 정치적으로 위험하지 않은 동시에 영국이 가진 문명화의 사명을 정당화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도시에 거주하며 영어로 말하고 서구 교육을 받은 인도 지식인에 대한 찬사는 어느 책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65


인도 여성과 영국 남성의 결합 ... 앵글로-인도인(Anglo-Indian)

영국인은 앵글로-인도인을 '검은 백인'이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79


문명의 기준은 늘 영국이었다.

스틸은 20년이나 인도에 거주하며 인도에 관해 많은 지식을 얻었다고 자부하였고, 수많은 글을 써서 인도의 이미지 형성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한때 펀잡 주의 한 여학교에서 장학사를 지냈고 여학교를 후원하기도 했지만, 그의 소설이나 글에는 영국과 인도를 분리해서 보는 인종 차별적 시선이 짙게 배어 있다.  100


저자는 제 기준으로 재단하고 판단한 뒤 간단히 '전근대'와 야만의 딱지를 붙였다.


인도를 사랑한 것으로 알려진 포스터도 인도인의 미학적 취향을 낮추어 보았다. 인도의 어떤 마하 라자(왕)가 "멋진 풍경과 건축을 좋아한다"고 언급하면서 "이 모든 것은 인도인에게 아주 드문 일이다"라고 덧붙였다. 마치 이런 미감은 영국인만 가지고 있다는 듯한 인종 차별적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사실 포스터는 인도-아리아 양식의 사원 건축의 좋은 예로, 천 년 전 인도인의 일상생활을 정교하게 묘사한 외벽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카주라호의 사원을 '악몽'이라고 표현한 미감의 소유자였다. 10세기경에 만들어진 카주라호 사원군은 건축과 조각, 조각과 건축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 인도의 훌륭한 문화유산이지만, 19세기의 영국인은 사원의 일부 외벽에 새겨진 외설적인 부조 때문에 그 가치를 낮게 매겼다.

이처럼 인도를 원시 수준으로 끌어내려 보려는 일은 번번했고, 다양했다.  101-102


박제된 이미지는 점차 인도의 본질로 여겨졌다.  106


인도의 캘커타를 무대로 제작된 역설적인 제목과 내용의 영화 <시티 오브 조이>를 보는 우리도 결국 가난한 인도인에게 가부장적 시혜를 베푸는 백인 주인공의 눈을 따라간다. 그러나 영화를 떠나서 직접 인도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백인 못지 않게 냉정하고 오만하다. 우리에게 인도인은 백인의 아프리카 흑(토)인처럼 '새까만 얼굴의 토착민'이고, 우리보다 열등하기 때문이다.  113-114


존재의 분열 없이 그저 인도의 이방인으로 인도를 보고 경험하고 전처럼 이방인으로 귀국할 뿐이다. 인도를 찾은 우리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교육을 받은 '문명인'이다. 그들은 가난한 원시인을 만나고 후진 사회를 누비면서 그들보다 우리가 낫다는 비교우위의 행복론을 확인하고 위안을 얻는다. 인도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불안이나 두려움을, 익숙한곳은 이쪽. 낯선 곳은 저쪽 식으로 구분하며 눅이는지도 모른다.  124


인도는 때로 깨달음을 준다

산과 강이 많은 우리나라의 작가들이 왜 인도의 강가나 히말라야에서 깨달음을 얻는가? 인도라는 공간의 영적 우수성 때문으로 볼 수도 있고, 어쩜 이질적인 인도가 주는 문화적 충격의 여파인지도 모른다. 물론, 개인의 깨달음은 순수한 시인의 꾸미지 않은 자연에 동화되는 작용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이미지와 일화가 너무 익숙하게 인도 전체와 연계되고, 그러면서 인도를 반(反)문명, 반(反)현대의 이미지로 본질화한다는 점이다.  131


인도에 가지만 인도인과 소통하지 않는 작가들에게 인도는 깨달을 것 없는 불모의 땅이다. 

환상의 인도는 있지만 실제의 인도는 없다.  133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인도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명상가 같고 철학자 같다. 그들의 삶은 행복할 것 같다. 비록 먹을 것이 부족하고 집이나 돈이 없다고 해도 세상 모든 것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느 누가 불행하겠는가?'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의 주인공들은 다른 소설과 달리 인도인들이다. 그러나 류시화가 "다 명상가 같고 철학자 같다"고 한 인도의 하층민들은 절대적 빈곤 상태에 있다. 정말 가난해도 행복한 걸까?  139


영국의 관점으로 인도와 영국의 차이와 유사성을 재고 판단한 영국인의 여행기처럼 우리 나라의 작가들도 우리의 기준으로 인도를 재고 판단한다. 그래서 우리와 닮은 것들은 진정한 인도의 모습이 아니라고 외면하고, 우리와 다르거나 우리보다 열등하고 혹은 이국적이고 토착적인 것들을 진정한 인도로 선택한다. 이렇게 선정한 진기하며 전설에 가까운 내용을 가지고 기존의 신비한 이미지에 덧붙여 인도를 더욱 신비하고 알 수 없는 나라로 그려내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구성된 타자로서의 인도는 점차 본질이 되어 '인도는 늘 그랬고 언제나 그럴 것이다'로 규정된다. 결국,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 타문화를 직접 탐사하고 기록해야할 여행기가 상상의 영역인 소설(fiction)과 유사하고 그 기능도 비슷해지는 것이다.  156


우리 여행기들은 한결같이 시간속에 정지된 인도의 이미지만 짝사랑한다. 어느 여행기에도 각 지방의 다양한 계층이 생존을 위해 투쟁하거나 능동적으로 변화의 바람을 타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160


인도 여행기들은 그 설명과 묘사는 달라도 인도라는 거울을 통해 자기를 정의한다는 점에선 모두 비슷하다. 매혹이나 불쾌감을 통해 인도를 우리의 대상과 타자로서 확인하고, 타자에 대한 응시를 통해 거울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자기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163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점에선 신문과 잡지와 같은 미디어는 앞에서 살펴본 두 장르, 소설과 여행기와 같은 기능을 담당한다.  165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긍정적인 것은 서양에서, 부정적인 것은 동양에서 기원한다고 여긴다.  206


이 책은 모든 서양을 제국주의자로, 동양을 그 무해한 희생자로 간주하는 본질주의의 시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211


조지 오웰 등의 일부 작가는 영국 제국주의를 야유하고 조소하는 작품을 썼고, 우리 나라에도 균형 잡힌 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인도가 우수하다는 사실의 확인이 아니라, 영국이 창출한 인도의 이미지가 본질적인 것이 되어 우리의 자기 표현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오늘날의 문제이다.

무엇보다 수세기에 걸친 근시안을 넘어서 비뚤어진 심상의 지도를 바로잡고 거기에 새로운 이름을 써넣을 수 있는 균형 잡힌 '우리'의 시선이 필요하다.  212


'신비한 인도'라는 정형화한 이미지를 부정하고 깨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냉철한 시각으로 인도의 '신비하지 않은' 요소를 좀더 면밀하고 다양하게 분석하여 내보이는 것이이라. 

비록 이러한 움직임은 서양을 변방으로 내몰지는 못한다 해도 "'서양이라는 보편성'에 구멍을 내는 수단"은 되지 않을까.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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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교통질서는 인도 도시들에 비하면 양반 중의 양반임을 확인할 수 있다. 교통질서와 관련해 인도 도시는 카오스 그 자체다.  21


인도인들은 끼어들기의 명수다.

경적도 어디서나 시끄럽게 빵빵 울려댄다. 트럭 등 인도 자동차 뒤에는 '앞지르려면 경적을 울려달라(Please blow horn)'는 문구가 적혀 있다.  22

근본적인 이유는 남보다 빨리 가고자 하는 기본 욕구 때문이다.

한마디로 남보다 앞서가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몸에 배어 있다.

새치기를 하고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연시한다. 새치기를 지적하는 사람도 적지만, 지적당했다고 해서 줄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 "알았다"며 그냥 그대로 서 있는 경우가 많다.

공무원들의 부정부패가 심한 것도 생존본능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24

인도인들의 '소탐대실' 상관습도 마찬가지다. 인도인들은 '한 달 뒤의 닭 한 마리보다 당장의 달걀 1개'를 선호하는 편이다. 

인도인들의 말 잘 하고 남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속성도 생존본능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있다.

인도인들은 말을 잘 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듯 하지만 남의 말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남의 잘못을 말로써 지적하고 남 앞에 나서 무수한 다중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25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인도인들은 갈등이 있어도 좀처럼 큰소리를 내거나 멱살 잡고 싸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도 운전사들은 서로 먼저 가려고 아무 때나 들이밀고 새치기도 잘 하지만 남이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앞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면 상대에게 스스럼없이 양보한다.  27


뭄바이(옛 봄베이)의 다라비(Dharavi) 슬럼가는 아시아 최대로 알려져 있다.  31


인도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 법인장은 필자와의 만남에서 인도 경제의 급등세를 보며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인도 국민의 평균 소득도 낮고 대도시 길거리에 사람드르이 행색은 누추해 한심해 보이지요. 그러나 인도는 지금 금융, 산업 등 경제가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지요. 이런 추세로 가면 우리가 조만간 인도를 상전으로 모시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87


인도에 가면 출신에 관계없이 서로 잘 어울려 사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도시에선 서로 다른 카스트 간 결혼도 점증하는 추세고, 부모들도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다. 과거에는 하위 카스트가 상위 카스트와 식사를 하거나 함께 앉는 것이 철저히 금지됐으나 요즘은 식당에서 밥도 같이 먹고, 버스나 기차도 함께 탄다. 대중 사회가 되다 보니 타인의 카스트를 알 수도 없고,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145


하위 카스트가 상층 카스트가 되려는 노력이 있는가 하면, 최근에는 상층 카스트가 하층 카스트화하려는 움직임도 강하다. 정부가 하층 카스트에 부여하는 혜택 때문이다.

대도시에선 카스트 대신 교육과 실력, 경제적 능력이 가장 중요한 파워로 등장했다. 그래서 요즘 인도 사람들은 "돈이 카스트다", "교육이 카스트다"라고 말한다. 아무리 높은 카스트로 태어났다고 해도 교육을 못 받고 돈이 없으면 하위 계층으로 전락한다.  146


브라만 중에 기도를 해주고 일어서는 노인이 있었다. 기도를 바치는데 매우 힘들어했다. 80세는 족히 넘어 보이는 그 노인에게 굳이 이런 일을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이 돌아왔다.

"내 나이 올해 81세인데, 늙어서 나도 이 일을 더 이상 안 했으면 하지요. 그런데 아들이 2명이나 있는데도 애들이 나 하나 부양을 못해요. 살아가기 위해선 이 일을 계속 할 수밖에 없지요."

다른 힌두교 사원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사원의 후문에는 브라만들이 늘어서 사람들에게 잔돈이 있으면 달라고 구걸했다. 어떤 브라만은 일자리를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요리사, 심지어 시체를 화장할 때 쓰는 장작 나르는 일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간청했다. 이런 일은 불가촉천민 등 최하층 카스트가 하는 일인 데도 말이다.  162


인도 시골에서는 여전히 카스트가 힘을 발휘하는 곳이 많다.  165


인도에서 20년 가까이 생활한 프랑스 언론인 프랑수와 고티에(Francois Gautier)는 오늘날 브라만의 추락한 위상을 실감나게 전해준다. 그는 2006년 '브라만은 현대의 달리트인가'란 글에서 "오늘날 브라만들의 지위는 불가촉천민인 달리트 못지않게 추락했다"고 강조했다.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통적인 달리트 직업인 화장실 청소부나 인력거꾼 일을 하는 브라만들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델리 공중화장실 청소부의 50%가 브라만이고, 델리 파텔 나가르 지역 인력거꾼의 거의 절반이 브라만이었다. 뿐만 아니라 힌두교의 성지로 유명한 바라나시의 인력거 꾼 대부분도 브라만이다.

또 한ㄸ 카슈미르 판디트라고 존경을 받던 카슈미르 꼐곡의 4만여 브라만들은 지금 슬럼가에서 근근이 살고 있고, 인도 남부 안드라 프라데시주 가정 청소부와 식모의 75%가 브라만이다. 상당수의 브라만들이 오늘날 불가촉천민 못지않은 하층 계층으로 전락한 것이다. 

'브라만의 나라' 인도에서 특권 계급 브라만의 해체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167-168


평소 온순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것 같은 인도인들이 어떤 계기가 있으면 폭발해 군중 폭력을 자주 야기한다. 군중의 힘으로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의도가 강하게 내포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를 '정의를 위한 군중폭력(Mob Justice)'이라고 부른다.   185


인도에서 군중 폭력이 만연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주민들이 경찰이나 주 정부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움을 요청해도 경찰 등 당국이 신속히 대응하지 않는 탓이 크다. 그래서 자신의 안전이나 재산은 자신들이 지킨다는 자위 의식이 지나치게 강화됐다. 인도인들이 군중 폭력에 휩쓸리는 또 다른 주요 이유는 그들의 욕구가 평소 크게 억눌려 있기 때문이다. 

한 유명한 심리학자는 이렇게 분석했다. "인도의 많은 대중들은 신분이나 재력, 권력 등 여러 요인에 의해 억눌려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계기에 의해 불만을 표출할 기회가 생기면 순간적으로 군중심리에 의해 폭력에 쉽게 가담합니다. 이 때 군중들은 사건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게 누구든 평소 억눌린 자신들의 욕구를 분출시킬 대상이 필요한 것이죠."

셋째, 군중 폭력에 가담한 사람들에 대한 처벌이 약하다는 점도 군중 폭력을 조장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군중들이 폭력을 행사해도 경찰이나 정부는 이들 군중을 엄벌하지 않았다. 그저 '사소한' 경범죄로 처리한다. 기소해도 하지 않고 관용을 베푸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다 보니 폭력에 가담한 군중들은 죄의식 없이 다시금 폭력에 휩싸인다.  186-187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아마티야 센(Amartya Sen) 하버드대 교수는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현재의 인도 법률체계와 경찰 조직은 일반 국민들에게 많은 좌절감을 줍니다. 이런 좌절감을 줄이기 위해선 공정성과 정의에 바탕을 둔 법률적, 사회적 개혁을 실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도 국민들의 특징이었던 비폭력과 온건함을 회복시킬 수 있는지 여부는 인도 정부의 개혁 의지와 실천에 달려있다고 할 것입니다."  191


술 마시는 인도인들이 실제로 그렇게 많을까 하고 의문을 가질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정말 많은 인도인들이 음주를 즐긴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주기적으로 술을 마시는 인도인 수는 2억 명이 넘는다. 이 숫자는 해마다 약 20%씩 늘고 있다. 음주를 즐기는 2억명 가운데 여성은 20% 정도인 4,000만 명에 이른다. 

마시는 술 종류는 주로 맥주나 위스키, 럼주 등이다. 2008년 인도에서 판매된 맥주는 자그마치 3억 박스가 넘는다. 위스키는 9,000만 박스가 팔렸다. 한 박스당 12병이 들었으니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다.  194-195


인도는 세계에서 선천성면역결핍증(AIDS) 환자가 가장 많은 나라 가운데 하나지만, 매춘 시설이나 매춘 인력은 거의 전무한 편이다. 아주 없지는 않지만, 우리 나라나 중국, 동남아시아 등에 비하면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213


카마수트라는 4세기경에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성애(性愛)에 대한 경전이자 교과서다. 성애의 기교, 소녀와의 교접(交接), 나애의 의무, 남의 아내와의 통정(通精), 유녀(遊女), 미약(媚藥)등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 일반시민을 성지식(性知識)의 경여에서 오는 위험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책이다. 카마수트라는 섹스가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강력한 욕망으로 이를 통해 깨달음에 도달 할 수 있다고까지 설파했다. 카마수트라는 불교문화와 함께 중국에 전해졌고, 이는 유명한 소녀경(素女經)의 원조가 되었다. 또 카마수트라는 유럽에도 흘러 들어가 서구 사회에 성의 혁명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인류의 성 지식을 고양시킨 성에 대한 바이블이라 불릴 만하다.  217


과거 힌두교에선 섹스의 자유분방함을 강조했다.  219


인도에서 언제부터 섹스에 대한 이런 자유스런 분위기가 바뀌었을까. 그것은 영국의 식민지를 거치면서부터다.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게 되는 17세기 영국의 통치 왕조는 빅토리아 왕이었다. 이때 유럽은 프로테스탄트가 기세를 떨칠때였다. 

성을 자유분방한 것으로 여기는 힌두교는 사회 도덕을 훼손하는 하위 종교라고 비난 받았다. 

영국의 끊임없는 힌두교 비난에 힌두교 지도자들의 성에 대한 생각도 빠르게 보수화됐다.  220


인도인 개인들의 섹스 생활은 어떨까? 

개인들의 성생활은 매우 적극적인 것으로 조사됐다. 세계 최대 콘좀회사인 듀렉스(Durex)가 전 세계 26개국 2만 6,000명을 대상으로 한 '섹스생활 만족도에 대한 글로벌 서베이' 결과다. 이에 따르면 인도 도시인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적극적인 섹스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도인들은 파트너와의 섹스 대화도 세계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공개적으로 한다고 조사됐다. 

예를 들어 인도 도시인들의 4명 중 3명(74%)은 침실에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섹스 방법 등에 대해 매우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눈다. 이에 비해 세계 평군은 58%, 영국은 49%에 그쳤다. 특히 인도인들의 3분의 2(68%)는 자신들의 섹스 생활이 만족스럽다고 답변했다. 반면 영국인이나 프랑스인들의 섹스 만족도는 각각 38%, 36%에 불과했다.

주목되는 사실은 인도인들이 다양한 기교와 형태의 섹스를 즐긴다는 점이다. 인도인드르이 63%는 체위나 성생활 만족을 위해 섹스 기구나 섹스 인형 등 다양한 형태의 섹스를 즐긴다고 답변했다. 인도인처럼 다양한 섹스를 즐긴다고 답변한 영국인은 47%, 일본인들은 단지 9%에 그쳤다. 게다가 인도인들은 앞으로 만족한 성생활을 위해 인터넷 정보를 활용하겠다고 밝히는 등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인도인들의 부부 간 정절도는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높았다. 인도인드르이 평생 섹스 파트너 수는 3명에 그친데 반해 영국인들은 16명이었고, 전 세계 평균은 13명이었다. 부부간 섹스 횟수도 세계적이었다. 하루에 1회 이상 성관계를 갖는 '변강쇠&옹녀'족들이 10%나 됐고, 80%가 1주일에 2~3회 이상 섹스를 갖는다고 답변했다. 이 통계만보면 인도는 부부 섹스의 세계챔피언 감이라 할만하다.

부부 정절도와 관련해 인도 중산층은 매우 높지만 상류층은 그렇지 않다는 소문도 많다. 필자가 만난 많은 인도인들이 이를 지적했다. 예를 들어 상류층들이 주로 드나드는 고급호텔 등에서 상류층 간의 혼회 정사가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정확한 실태는 잘 모르겠으나, 실제로 인도 언론에서도 상류층 간의 불륜 사례가 종종 보도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인도인들은 비록 혼회정사나 매춘 등에선 매우 보수적이지만, 자신의 침실에서만큼은 세계 최첨단이다. 부부간 섹스에서 카마수트라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221-223


인도의 교육 특징은 소수만을 선택해 키우는 엘리트 교육 방식이다.  226


인도 엘리트 교육은 교육시설에 대한 대규모 투자보다 두뇌에 혜택을 주는 정책이었다. 고등교육의 기회는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소수 학생들에게만 주어졌다. 선택 받은 이들 소수에게는 거의 무료로 교육했다. 장학금을 주어 돈 걱정 없이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런 정책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인도 엘리트 교육은 어릴 적부터 이루어진다. 인도 학교는 공립학교(Goverment or State Schools), 사립학교(Private Schools), 준(準) 사립학교(Deemed Private Schools) 등 3개로 나뉜다. 공립학교는 약 70% 정도로 다수를 차지하나 교육의 질은 상당히 낮다. 교사 숫자가 많이 부족하고, 설사 교사가 있더라도 수업을 빼먹은 교사가 많다고 한다. 시설도 열악하지 짝이 없다.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임에도 불구하고 교육 서비스 질이 형편없어 경제적 능력이 있는 부모들은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낸다. 

인도 엘리트들의 산실인 사립학교는 등록금이 공립학교에 비해 매우 비싸다. 우리 돈으로 수백만 원에서 수천 만 원에 이르는 기부금을 내기도 한다. 입학 경쟁률도 아주 치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내기 위해 안달한다. 사립학교에 다녀야 부모 위신도 서고, 자녀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인도 사립학교는 초등학교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보통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함께 붙어 있다. 단지 몇 학년인가로 초등학생인지 중학생인지 여부를 판단한다. 준 사립학교는 민간에서 설립했으나 재정이 어려워 연방정부 혹은 주 정부의 지원을 받는 학교를 말한다. 준 사립학교는 정부의 지원과 그에 따른 간섭을 받긴 하지만 정부 간섭은 많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사립학교와 준 사립학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30% 정도다.  228-230


인도 사립학교는 수업을 대개 영어로 한다. 영어는 인도에서 성공을 위한 필수 언어처럼 여겨진다. 영어를 확실히 배울 수 있고, 교육의 질도 뛰어나 인도 사립학교 졸업자들은 인도 국내 유명대학은 물론 미국 유럽 등 구미 저명대학에도 많이 입학한다. 

인도 경제가 발전하고 중산층이 확대되면서 사립학교에 대한 수요는 더욱 늘고 있다. 경제적으로 하류 계층에서 신흥 중산층으로 편입된 부모들도 자녀들을 사립학교에 보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기존 사립학교보다 학비가 저렴한 신흥 사립학교도 급증하는 추세다. 신흥 사립학교 중에는 시설이 공립학교보다도 못한 곳도 적지 않다. 그러나 비록 시설은 떨어진다고 해도 교사의 숫자가 많고 교사들의 열의가 강해 교육의 품질은 공립학교보다 우수하다.  

사립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들은 국내 혹은 해외 명문대학에 진학한다. 인도 내에 대학은 2007년 현재 371개가 있다. 

인도 명문대학은 대개 국립이다. 인도공과대학교(IIT), 인도경영대학원(IIM), 인도의과대학교(AIMS), 국립면역학대학교(NII) 등 인도 정부가 최고 전문 인력을 키우기 위해 설립한 대학은 물론 델리대학교와 뭄바이대학교,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콜카타대학교, 푸네대학교 등 많은 대학이 국립니다.  230-231


열악한 시설에도 불구하고 인도 대학이 명성을 가진 이유는 우수한 학생과 교수들 덕분이다.  233


인도 엘리트 교육의 어두운 이면을 간과해선 안 된다. 엘리트 교육에만 치중한 결과 국민 전반의 교육에는 소홀했기 때문이다.

인도느 대학입학 비율이 10%에 불과하고, 문맹률도 30%선으로 여전히 매우 높다.

요즘도 인도에는 초등학교조차 마치지 못하는 어린이가 많다. 의무교육임에도 불구하고 6~14세 어린이의 70% 만이 학교에 다니는 걸로 추산된다.  234 


인도인들은 어떻게 해서 영어를 잘하게 됐을까?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충분한 대답은 아니다. 

2000년 초반만 하더라도 영어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비율은 5%가 채 안 됐다. 그러던 것이 요즘은 영어 인구가 10%(약 1억 2,000만명)가까이 급증했다고 할다.  238

인도의 주요 영어교육 기관은 외국인 학교(설립자가 외국인인 학교)와 사립학교다. 이들 학교는 대부분 유치원 때부터 모든 과목을 영어로만 가르친다.  239


인도 지식인 사회에서 혹시라도 영어를 못하면 왕따를 당한다.  241


간디는 독립운동 기간 동안 산업화를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반대했다. 산업화를 반대했다니,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산업화는 인간에게 저주가 될 것이다."(<젊은 인도> 1931년)

"산업화는 농촌 사회에 치열한 경쟁을 초래하기 때문에 반드시 농촌 사람들에 대한 착취로 귀결될 것이다.")<하리잔> 1936년)

간디가 산업화에 반대한 이유는 인간의 이상적 삶의 형태가 목가적 시골생활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영구구 식민 정부는 인도를 산업화시키겠다고 선전했지만, 산업화의 이익은 대부분 영국 자본가들에게 돌아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직접 목격한 간디로선 산업화를 저지하고 반대하는 것이 당연했다.  245-246


간디의 산업화, 도시화, 서구문물에 대한 반대가 종합적으로 나타난 산물이 유명한 스와데시(Swadeshi)운동이다.

영국 상품을 배척하는 국산품 애용운동.

영국에서 기계로 만들어진 값싸고 대량생산된 직물들이 인도에 홍수처럼 들이닥치자 농촌 지역 직물장인들은 일자리를 잃고, 마을경제는 수렁에 빠졌다. 간디는 농촌의 가내 직물업이 다시 소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간디의 반(反) 산업화, 반 테크놀로지, 반 도시화, 반 외국상품 운동은 인도인들을 자각시키고, 독립을 달성하는 큰 힘이 되었다.  247


네루 총리는 경제 발전 측면에서 인도 사회에 간디보다 더한 부정적 유산을 남겼다.  248

임기 4년인 총리직을 그는 장장 17년간이나 수행했다. 물론 국민의 신임을 바탕으로 한 합법적인 재직이었다.

네루는 인도를 종교적으로 세속주의(世俗主義),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사회주의 체제로 이끌었다. 세속주의란 기구나 관습들이 종교나 종교적 믿음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인간 활동이나 정치적인 의사결정이 종교에 의해 간섭 받기보다는 객관적인 증거와 사실에 기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를 택한 것은 그가 어릴 적부터 영국에 유학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당연하게 생각된다. 영국에서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를 충분히 맛보았기 때문이다.

네루는 인도의 전통적 자영업자와 고리대금업자인 바니아들의 탐욕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며 "사회주의가 이들의 탐욕을 종식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인도에서 돈과 돈 버는 것에 대해 경시하는 풍조가 존재하는 현상은 상당 부분 네루 책임이다.

네루의 이상적 국가 경제상(像)은 자립경제였다. 그는 인도가 충분히 자립경제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간디가 매달렸던 자립경제, 즉 스와데시를 네루는 국가 정책으로 추진한다.

자립경제를 이루기 위해 네루 정부는 또 국영 제철소와 알루미늄 제련소, 대형 수력발전 댐 건설 등 중공업 육성에 몰두했다. 그는 심지어 핵무기 개발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이 같은 중공업 육성이 인도의 국력과 산업 발전상을 과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사업은 대부분 큰 적자를 내고 소중한 국가 재정을 축냈다. 당시 인도는 극심한 빈곤, 높은 문맹률, 만연한 질병 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네루 정부는 이들 시급한 문제는 제쳐둔 채 너무 큰 사업에만 매달렸다.

사회주의 경제를 신봉한 네루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은 기업과 산업에 대한 정부 통제란 형태로 나타났다.

간디의 후계자였던 네루의 인도 농촌에 대한 해법은 간디와 비슷했다. 네루는 간디의 "농촌이 인도 사회의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정책을 통해 충실히 수행했다.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 간디와 네루의 긍정적 업적은 지대하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듯이 이들이 남긴 부정적 유산 역시 적지 않다.  249-253


1966년 인도는 제1차 외환위기를 겪는다.  254

1991년 제2차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치명적 타격을 받는다.

자립경제란 자존심은 만신창이가 됐다. 제2차 외환위기를 계기로 인도는 자립경제정책을 벗어 던지고 개방적 시장경제로 대전환을 시도한다. 네루 이후 40년간 이어져온 스와데시와의 결별이었다.

아직도 인도 엘리트 사이에선 간디와 네루의 유산이 깊게 남아 있다. 이들은 시장경제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 뛰어나와 간디-네루 철학의 부활을 시도할 세력들이다.  255


한국인들의 인도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접촉하는 사람들이 주로 하층민이기 때문인 이유도 크다.  285


인도인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인도에 산 기간이 짧은 사람일수록 더 강하다. 이헌 부정적 관념은 한국에서부터 싹 텄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도에 가기 전 읽은 인도인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쓰인 책이나 얘기를 듣고 그런 생각을 갖게 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후 인도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발생하면 '그렇군. 인도인들은 소문대로 역시 문제군'이라고 단정하고 자신의 고정관념을 강화한다.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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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마음으로 못 갈 곳이 없다고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은 갈 수 있는 곳만 갑니다. 우리의 생각이라는 게 그래요. 마음은 생각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합니다.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을 꿈꾸는 우리로서는 거의 전적으로 마음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마음이란 이렇듯 한정되고 갇혀 있습니다. 한번 만들어진 관념은 자동적으로 자기방어 메커니즘으로 작용합니다. 되짚어 보는 걸 싫어합니다. 기분 나빠해요. 따지고 보면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지만, 우리는 흔히 스스로가 만든 관념의 장막 속으로 들어가 안주하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우선은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9


지금까지 우리가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믿었던 관념들을 한번쯤 되짚어보자는 것이 나의 의도였습니다.  10



나는 여러분이 틀레 박힌 교양인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에너지가 충만한 원시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교양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맹점을 안고 있습니다. 문명은 자칫 나른해지기 쉬운 법이거든요. 정상적인 사람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일탈을 꿈꾸는 괴짜가 되기를 원합니다.

일상은 일탈을 위하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6


나는 가장 '나'다울 때 세계적인 인물이 됩니다.  17


우연은 그냥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연은 묻고 또 묻는 사람에게 그야말로 우연히 일어납니다. 준비한 사람에게만 의미있는 우연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생각되었던 것들에 대해 묻고 또 묻다보면, 문득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18


힌두교는 인도인의 삶 자체라 할 수 있어요.  27

여러 세대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형성되어 온 종교입니다. 자연발생적인 종교라 할 수 있지요.  27

공통 경전이 없습니다.  29

힌두교인들은 포교나 개종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이들의 독특한 사유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는 하나지만 여기에 이르는 길은 여럿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인도인드르이 뿌리 깊은 생각입니다. 진리가 유일하다고 해서 여기에 이르는 길조차도 유일한 건 아닙니다.  30


고대 인도에 어떤 왕이 있었습니다. 좀 괴짜였던 것 같아요. 하루는 왕이 신하에게 명해서 성안에 살고 있는 모든 소경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코끼리 한 마리를 데려다 놓고 소경들이 만져보게 했지요. 각기 다른 부위를 만져본 소경들은 당연히 다른 말을 햇습니다. 머리를 만져본 소경은 뭐라 했겠어요? "코끼리가 마치 항아리 같다"고 했어요. 그러자 귀를 만져본 소경은 "무슨 소리냐, 코끼리는 부채 같다"고 했지요. 배를 만져본 소경은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코끼리는 벽 같다"고 했지요. 결과는 어떻게 되었어요? 서로 의견이 다르니까 다투게 되었지요? 코끼리라는 하나의 실체를 놓고 자기가 만져본 부위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코끼리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소경들의 잘못은 코끼리 그 자체를 잘못 안 게 아닙니다. 다만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이 부분적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게 잘못이지요? 자기가 안 지식은 전체 코끼리에 대한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것을 몰랐기 때문에 서로 다툴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분을 부분으로 알때, 그것은 전체를 바르게 알 수 있는 바른 지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분을 전체로 착각하게 되면, 소경의 지식처럼 그것은 완전히 그릇된 지식이 되고 말아요. 코낄리는 기둥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 말이지만, 코끼리의 일부인 다리는 마치 기둥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코끼리에 대한 바른 지식이 됩니다.  31-32


무엇을 종교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다르지만, 내가 보기에 종교는 우선 무엇보다도 깊이를 추구하는 영역이 아닌가 합니다. 일상적인 삶의 표면을 따라 이리저리 부유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안으로 침잠해가는, 깊이에로의 추구가 곧 종교 아닌가 합니다. 폭보다는 깊이가 훨씬 중요하지요.  32


종교는 없는 것처럼 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종교를 잊어버리고 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종교는 이성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라기보다는 체험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4



한 주간 별일 없었어요? 별일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사실 늘 별일이고 별일이어야 합니다. 

'별일 없는 삶'은 '별 볼 일 없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별일이라는 게 뭡니까? 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서양의 어느 철학자가 누구도 같은 강물을 건널 수 없다고 한 것처럼, 우리가 건너는 삶이라는 상물은 순간순간 처음이고 별일입니다. 삶은 늘 처음일 때 최고일 수 있어요. 알다시피 최초는 최고와 통하거든요.  45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변화에 대한 감정입니다. 변화가 없다면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몸이든 마음이든, 심지어 자연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한 모습이라면 아름답지 않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다면, 그는 생명 없는 아파트나 다름없어요. 끝장입니다. 생명이 있다는 건 변한다는 것입니다. 늘 새롭다는 것입니다. 늘 새로울 때 사람이든 삶이든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48-49


인도 사회는 전반적으로 나와 다른 것에 대하여 유연해요.  51


다른 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될 때, 자유가 있습니다.  53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가 혹 각자의 개성은 무시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잇습니다. 

사회적인 차원이든 종교적인 차원이든, 어떤 경우에도 통일은 절대 무차별의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건 죽음입니다. 의미 있는 통일은 다양한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하나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화라는 표현이 오하려 적합할 수 있지요. 조화라는 게 뭡니까? 붉은색 일색이라면, 노란색 일색이라면 무슨 조화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겠어요? 파란색도 있고 노란색도 있고, 하다못해 흰색이라도 섞여야 조화라는 것이 의미를 지니고 아름다움도 생겨나는 법입니다. 모두가 똑같다면 조화도 없고 다름다움도 없습니다. 변화가 없다면 생명 있는 유기체라 할 수 없는 것처럼, 차이가 없다면 조화도 아름다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인도가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자기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고스란히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유연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6-57


어떤 문화든 그 구성요소의 다양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미 생명을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아도 괜찮습니다.

너와 나의 하나 됨을 추구하기 이전에, 우선 너와 나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너와 나의 하나 됨은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어요.  57


유행(fashion)이라는 말의 일차적인 뉘앙스는 틀을 깨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에게 유행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일종의 구속이며 병입니다. 주체는 없고 추종적으로 따라가기만 하는 수요자만 있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유행이라는 옷을 입고 얼른 대중 속으로 숨어버려요. 그러고는 익명성이 주는 편안함을 즐기지요. 그러나 유행이란 으레 문득 왔다가 문득 가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형태의 익명성에 의지한 편안함이라는 것도 당연히 잠깐일 수밖에 없어요. 대중 속에 숨는가 싶으면, 이미 그들은 또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저만큼 가고 있어요. 나의 익명성은 금방 사라지고 말지요. 그러면 다시 허겁지겁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따라 가기의 악순환이라고 할 수 있지요. 

요즘 우리 주변에서 보는 유행이라는 것은 일종의 병이라고 해도 무방해요. 따라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드는 편집증입니다. 그것은 남과 다른 것이 두려운 공포증이지요. 우리 사회가 유행이라는 중병을 앓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유행이라는 말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획일적인 사고방식에 있어요. 판에 박힌 저울대의 눈목으로 모든 사람을 저울질하고, 이 저울대에 맞지 않으면 낙오자로 소외되는 우리 사회의 통념이 문제지요.  59-60


여러분 중에 한 번쯤 체념 안 해본 사람은 없겠지요? 의식하든 않든 여러분 아니 정도면 누구나 체념해 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물론 체념의 순간을 지켜본 사람은 드물 겁니다. 사실 중요한 건 그건데, 내 마음에 어떤 감정 혹은 상태가 일어났을 때 가만히 지켜보는 것, 그게 명상입니다. 명상은 거창한게 아니지요. 내 마음의 변화를, 일렁거림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 그게 명상이지요. 어떤 감정이 일어날 때 그걸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놀라운 에너지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감정은 잡아두는 순간, 에너지로 변합니다.

체념의 순간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까? 내가 체념할 때, 나의 마음을 지켜본 적이 있어요? 체념의 순간에 언뜻 편안함이 있습니다. 체념이란 분명히 내가 바라는 게 아닌데, 그런데도 체념하고 나면 오히려 속이 후련해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66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있어요. 차라리 포기하고 체념해버리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67


모든 체념이 다 의미 있는 초월로 통할 리는 없습니다.

체념이 의미 있으려면 우선 가능한 것에 대한 체념이어야 합니다. 다시말해서 자발적인 체념만이 의미를 지닙니다. 그걸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포기하는 것, 그게 체념입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여자 태권도 올림픽 출전자를 뽑는 시합이 있었지요. 이때 재미동포 출신 여자 선수가 결승전에서 부상당한 자기 동료와의 시합을 기권한 적이 있습니다. 평소의 실력으로 볼 때 자신보다는 부상당한 동료가 올림픽에 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포기지요. 의미 있는 체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석녀(石女)가 "나는 아이 낳는 것 포기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석녀가 아이 낳는 것은 아예 가능성이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가능성이 없으면 욕망이 일어날 리가 없고, 일어나지 않은 욕망에 대한 체념 혹은 포기라는 것은 한 마디로 웃기는 일입니다.

우선 가능성이 있어야, 그래야 욕망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게 욕망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게 않습니다. 욕망이라는 건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거든요. 가능성이 있을 때 일어납니다. 아예 가능성이 없으면 기대하는 마음도 전혀 일어나지 않아요. 가능성이 없으면 아무런 욕망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정말 외로운 사람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과 같아요.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함께 해 줄 사람이 있는데 지금 그렇지 않을 때, 누군가가 와 줄 사람이 있는데 오지 않을 때, 그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참으로 '올이도 갈 이도 없는'(날 찾아올 사람도 내가 찾아갈 사람도 없는) 사람은 오히려 외로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외로움은 '부재(不在)'를 통하여 '존재(存在)'를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사랑이란 것도 바로 이런 감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이별을 통하여 느끼잖아요?  68-69

가능한 것을 포기할 때, 에너지가 일어납니다.  69


일어난 욕망의 결과는 결국 기쁨이냐 또는 열 받는 거냐,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길게 보면 기쁨이나 노여움은 욕망의 결과라기 보다는 연속입니다. 문제는 기쁨이나 노여움이 일어났을 때, 그때 어떻게 할 거냐 하는 겁니다. 이때 포기가 필요합니다. 체념이 필요해요. 여기서 체념이라는 것, 혹은 포기하는 것은 일어난 감정을 잡아둔다는 것입니다. 일어난 감정을 잡아둘 때, 증폭도니 에너지가 일어나요. 예를 들면 생각해 봅시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남모르는 선행을 했을 때, 그 일을 두고 동네 방네 떠들고 다닌다면 어떻겠어요? 일시적으로는 우쭐해질 수 있겠지만 뒤끝은 허전할 겁니다. 허전하다는 것은 에너지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버렸다는 것입니다. 기쁨은 가슴속에 묻어둘 때, 더합니다. 기쁨은 내 안에 가두어둘 때, 오히려 새끼를 치고 자라나는 것입니다. 오래 잡아둘수록 기쁨은 배가합니다. 씨앗을 땅에 묻어 둔다고 그게 어디 갑니까? 때가 되면 싹을 틔우고 더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감정을 잡아 갈무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  71-72


일어난 감정을 잡아 두었을 때, 그 뒤끝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가능한 것대 대한 체념이 모두 의미 있는 체념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감정을 잡아둔 데 대한 애프터 서비스라고나 할까요. 그래요 자신이 그 감정에 솔직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 자발적인 체념이었는가를 알 수 있어요. 그 뒤끝에 후회가 따르는 체념은 초월이 아니라 단지 일시적인 도피라 할 수 있습니다. 도피는 도피일 뿐이지요. 문제의 해결은 아닙니다.  72-73


추억을 먹고 사는 사람이 자신을 과거에 가두는 것처럼, 꿈을 먹고 사는 사람은 미래에 자신을 가둡니다.  84


업과 윤회는 하나의 믿음이 지니는 두 측면이라 할 수 있지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닙니다. 업은 윤회로 설명될 수 있고, 윤회는 업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업의 다른 말이 윤회라면, 윤회의 다른 말은 업입니다.  86


<우파니샤드>는 인도의 여러 경전들 가운데 가장 철학적인 경전으로 꼽힙니다.  89


업설이나 윤회설은 숙명론이 아닙니다. 업의 자기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그 이면에는 항상 업의 초월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힌두교는 '구제(救濟)의 도(道)라 할 수 없어요. 모든 행위는 업을 남긴다고 가르치지만, 또한 어떤 행위는 이미 쌓은 업을 삭감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오히려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96


참으로 건강한 사람은 건강문제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것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건강하지 못할 때, 거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마음공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마음이 비뚫어지고 황폐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육체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하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마치 눈에 벼이 났을 때 눈을 의식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잘못되고 몸이 병들었기 때문에 마음공부에 대한 관심이나 건강에 대한 욕구가 부쩍 늘어났다 이겁니다. 여러분은 어때요? 건강합니까?  107-110


요가는 넓은 의미에서 길(道)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좀더 설명하자면, 해탈 또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요가라고 합니다. 

요가라는 말의 어원을 따지자면, 이 말은 원래 '결합하다' '멍에를 매다'라는 의미의 범어 동사 '유즈(yuj)'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가라는 것은 '결합' 또는 '멍에를 매는 것'이라는 문자적인 의미를 지니는 셈입니다. 그러면 뭘 결합하느냐? 우선 몸과 마음을 결합하여 하나 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몸과 마음이 하나 된 개체가 궁극적 실재와 하나 되는 것, 그게 요가입니다. 그렇다면 결합이란 무엇이냐, 그건 자유를 의미합니다. 

합일은 완성이며 자유입니다. 유기적인 관계에 있어야 할 두 부분이 따로 노는 것, 그것은 갈등이며 구속이지요. 이에 비하여 합일은 자유라 할 수 있어요. 몸 따로 마음따로 논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한마디로 괴롭습니다.

하나로 결합되어 합일될 때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는 기쁨입니다. 해탈은 다른 말로 자유라 할 수 있지요.

자유라는 건 늘 피 냄새를 풍기는 인내를 요구하는 구석이 있지만, 그 끝에는 기쁨이 있어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건 자유가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란 하나 됨에 있지요. 둘이 하나로 합일될 때, 거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들 사이에서의 자유란 조화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섹스에 몰두하게 되는지 알아요?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두 사람의 영혼이 하나로 녹아 합일하는 체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에 일상 속에서는 쉽게 체험되지 않는 자유가 일어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조화란 쉽지가 않아요.

인위적으로 만들어가는 조화한 언제나 '투쟁'이 요구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고대의 서양 철학자 중에 여러분이 잘 아는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사람은 '투쟁은 조화'라고 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요소가 만나서 하나 되어 조화를 이루고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투쟁을 통하여 가능할 수 있습니다.  110-112


투쟁의 과저을 거친 평화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약속합니다 숱하게 싸우고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둘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 그 둘 사이에 자유가 있습니다. 의리라는 것도 생기고 어지간한 일로는 서로 갈라서지 않는 법입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설사 쌍욕을 듣는다 해도 웃고 넘어갈 수 있지만, 그저 그런 사이에서는 당장 안색이 변할 것입니다. 거기에 자유는 없습니다.  113


인도에서 요가의 역사는 무지 무지 길어요. 심지어 기원전 3000년경 인더스 문명 유적에서 출토되는 인장에서도 요가 자세를 취한 수행자를 볼 수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닙니다. 

장구한 역사를 통하여 힌두교의 각 종파는 각기 제 나름대로 다양한 요가 전통을 발전시켜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빠딴잘리(Patanjali)라는 성자가 요가를 일목요연한 체계로 정리하고 <요가 스뜨라>라는 문헌을 남겼습니다.  115


<요가 수뜨라>에 소개된 내용을 중심으로 요가 수행의 8단계를 살펴보겠습니다. 대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요가는 다리를 꼬고 앉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아닙니다. 


우선 첫 번째 단계로 윤리적인 준비단계(禁戒,Yama)가 요구됩니다. 윤리적으로 준비되지 못한 사람은 요가를 닦을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이 단계에서는 우리가 생활 속에서 금해야 할 다섯 가지, 즉 살생하지 말 것, 거짓말하지 말 것, 남의 것을 춤치지 말 것, 음란에 빠지지 말 것, 불필요한 소유를 탐하지 말 것 등이 강조됩니다. 이 첫 단계의 다섯 가지 계율은 요가 수행체계가 불교나 자이나교와 상당히 밀접한 관련 속에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불교의 경우오ㅓ 마찬가지로 요가에서도 오계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은 역시 불살생입니다. 불살생은 모든 계율 중의 으뜸이라 할 것입니다. 


요가의 두 번째 단계는 내외의 청정, 시니에게의 헌신 등이 적극적으로 권장되는 단계(勸戒, niyama)입니다. 이 단계 역시 윤리적인 준비단계라 할 수 있지만, 첫 번째 단계가 주로 금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두 번째 단꼐는 일종의 권장사항이라 할 수 있지요. 적극적으로 행해야 하는 덕목들입니다. 알다시피 윤리라는 것은 주변 환경고 나의 조화를 추구하는 과정입니다. 윤리 규볌이라는 것은 나와 주변 사람들이 서로 이해의 지평을 맞추어 가는 과정에서 지켜야 하는 룰입니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피차 괴롭습니다. 설사 법적으로 강제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윤리 규범은 은연중에 우리를 강제하는 힘을 지닙니다. 물론 요가는 윤리적인 차원에 머물지는 않습니다. 결국 그 너머로 깨고 나아가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초윤리적이라 할 수 있지만, 초윤리는 결코 윤리를 무시하라는게 아닙니다. 윤리적인 단계를 딛고 넘어서야 합니다.


세 번째 단꼐는 어떤 요가 자세를 취할 것인가를 익히는 좌법(坐法, asana)의 단계입니다. 여기서부터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요가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가 요가하면 흔히 결가부좌를 틀고 앉은 비쩍 마른 수행자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실 요가의 여러 단계 중에서 가장 힘들고 중요한 단계가 바로 이 좌법의 단계라고 할 수 있어요. 가장 긴 시간을 투자해서 익혀야 하는 과정이기도 하지요. <요가 수뜨라>에는 수많은 좌법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전에서는 원래 8만 4천 가지의 좌법이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84가지 정도가 전해질 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빠딴잘리는 이상적인 요가의 자세로 적합할 수 있는 기준을 두 가지 들고 있습니다. 우선 요가 자세는 편안해야 하고, 또한 오래 지속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기준에 부합되는 가장 중요한 자세가 바로 결가부좌입니다. 결가부좌 알지요? 어른들은 양반다리라고 하고 아이들은 아빠 다리라고 부르는 그 자세가 바로 가장 대표적인 요가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각기 특수한 목적에 따라 여거 가지 자세들이 응용될 수 잇습니다. 경전에서는 이상적인 자세로 권장되지만, 체형에 따라 불가능한 자세도 있을 수 있지요.


네 번째 단계는 호흡조절(調息, Pranayama)입니다. 이 단꼐는 앞의 좌법과 함께 하타요가(hatha-yoga)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요가 수행자가 윤리적인 준비를 하고 좌법을 익히는 것을 결국 우리의 마음을 잠잠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호흡조절이야말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핵심 중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호흡은 마음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이 급해질 때 저절로 숨이 거칠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급해진 마음을 진정시키려 할 때는 요가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심호흡을 합니다. 숨을 깊이 들이마셔 아랫배까지 밀어 넣었다가 천천히 밷으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진정됩니다. 

이와 같이 호흡은 마음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하여 호흡을 연구하고 제어하는 것이 필수적인 게 당연하지요. 호흡법을 익히는 것도 무척 긴 시간을 요하는 어려운 과정입니다. 우리는 대개 요가에서 가르치는 호흡법과 정반대의 호흡을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숨을 들이쉴 때는 배가 들어가고 숨을 내쉴 때는 오히려 배가 나오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들숨과 날숨만 있을 뿐 멎는 숨이 거의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 예입니다.

호흡은 마음작용과 관련해서 중요할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명과도 직결됩니다. 한두 주일쯤 밥 안 먹는다고 해서 죽지는 않잖아요? 며칠 동안 잠 안 잔다고 죽나요? 그러나 단 몇 분만 숨을 못 쉬면 죽습니다. 그만큼 호흡은 우리의 생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육체적인 건강을 위하여 단전호흡을 하고 복식호흡이 권장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건강하려면 밥 잘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숨을 잘 쉬어야 합니다. 그러면 건강할 수 있어요. 중국에서 양생법(養生法)의 하나로 널리 행해지는 기공법도 요가만큼 오랜 역사를 지닙니다.


요가의 다섯 번째 단계는 수행자가 자신의 감관을 제어하는 단계(制感, pratyahara)입니다. 방금 마차의 비유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인간의 감관 또는 욕망은 말과 같습니다. 길이든 아니든 갈 수만 있다면 어디든지 내달리는 것이 말입니다. 오죽하면 고삐 풀린 망아지라는 말이 있겠어요? 우리의 감관이라는 것도 이와 같아요. 대상이 있으면 곧장 쫓아갑니다. 늘 바깥으로 향해 있는 것이 감관이지요. 제감은 이와 같이 바깥으로만 내닫는 감관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마치 거북이 사지를 두꺼운 갑 속으로 끌어들이듯이 바깥을 지향하느 감관들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욕망은 제어될 때 새로운 차원의 에너지로 승화될 수 있어요. 사실 모든 감정이 그래요. 사람의 깊고 얕음은 결국 일어난 감정을 어떻게 잡아 두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기쁘다고 떠벌려 버리면 남는 건 허전함이지요? 그러나 기쁨을 꾹 눌러 뱃속 깊이 넣어 두면 두 배 세 배로 새끼를 칩니다. 어떤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은 씨앗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씨앗을 땅 위 환한 곳에 보기 좋게 전시해 두면 싹이 트나요? 싹은커녕 말라 버리잖아요? 씨앗은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 묻어 두어야 싹을 틔우고 몇 갑절의 열매를 맺는 겁니다. 우리의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어나면, 일단 어두운 곳에 묻어둘 필요가 있어요. 묻어 둔다고 그게 어디 가나요? 기쁨을 가슴속에 간직해 둔다고, 보이는 곳에 떠벌리지 않는다고 없어지나요? 그렇지 않잖아요? 마치 묻어 둔 씨앗이 저절로 싹을 틔우듯이 우리의 감정이라는 것도 잘 묻어 두면 저절로 싹을 틔우고 새로운 차원의 에너지로 승화될 수 있어요. 마치 한 톨의 씨앗이 싹이 되고 꽃이 되고 열매가 되는 과정에서 그 본래의 차원이 달라지는 것처럼 우리의 감정이라는 것도 묻어 두면, 잡아 두면 새로운 차우너의 에너지로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쁨이라는 감정뿐만 아니라 슬픔이나 노여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어난 감정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일단 잡아 두면 우리에게 득이 되는 에너지로 변합니다.

감정이란 일단 일어나면, 억누른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억누를수록 오히려 맹렬하게 덤비는 것이 사람의 감정이잖아요? 억누르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걸 조용히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일어난 감정을 일단 잡아 두고 지켜볼 수만 있다면, 그 다음은 저절로 해결되게 되어 있어요. 애게 일어난 감정을 내가 가만히 지켜본다는 것, 물론 그건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게 가능해져야 비로소 우리가 내면의 깊이로 침잠할 수 있는 준비운동이 끝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준지 과정이 끝나면, 다음 단꼐부터는 수행의 중점이 정신적인 영역으로 옮겨갑니다.

여섯 번째 단계인 집지(執持, dharana)는 한정된 심적 영역에 마음을 한정시키는 것입니다. 마음은 오관의 배후에 있는 내적 감관입니다. 마음이 감관에서 떨어져 있으면, 설사 눈이 보고 있다 해도 보는 것이 아니며, 귀가 듣고 있다 해도 듣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따라가지 앟으면 설사 감관이 대상을 향해 있다 해도 인식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바로 앞 단계에서 감관을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이 감관과 분리될 때 완전해진다고 볼 수 있지요.

피상적인 표면을 따라 부유하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하나의 대상에 머물지 않습니다. 마치 나비가 이 꽃 저 꽅을 분주히 옮겨 다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이런저런 대상들을 끊임없이 옮겨 다닙니다. 집지의 목적은 마음을 지속적으로 한 대상에 집중하도록 하며, 다른 대상으로 옮겨갈 때는 재빨리 원래의 대상으로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이동과 방해의 빈도가 낮을수록 집지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지요.


일곱 번째 단계는 정려(靜慮, dhyana)입니다. 범어로는 이 단계를 디야나(dhyana)라고 하는데, 흔히 불교에서 사용되는 선(禪)이라는 말은 바로 디야나에 대한 한자어입니다. 정려는 우리의 마음이 선택된 한 대상을 향하여 아무런 장애 없이 흐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마음을 더욱 내면으로 거두어들여 한 대상에 대해서만 유지시킴으로써 집지의 단계에서 정려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좀더 상세하게 살펴볼까요?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분주하게 이리저리 움직입니다. 한 대상에 대하여 단 몇 초도 지속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지금 당장 눈을 감고 스스로의 마음을 한번 지켜봐 보세요. 어때요? 숱한 대상들이 왔다 갔다 하지요? 친구 얼굴도 떠오르고, 지난번에 갔던 호프집 맥주잔도 떠오르고, 있다가 점심시간에 만나야 할 사람도 떠오르고, 아무튼 온갖 대상들이 왔다가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집지의 단꼐에서는 그 이동의 빈도가 낮아집니다. 잠잠해진다 이겁니다. 잠잠해지는 정도가 점점 깊어져서 정려의 단계에서는 마음이 더 이상 대상을 옮겨 다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여 우리의 마음이 오직 한 대상만 그 내용으로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도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가변적이며, 대상의 범위 내에서 이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요가의 마지막 단계는 삼매(三昧, Samadhi)입니다. 이 말도 우리가 생활 속에서 자주 쓰는 말이지요? 독서삼매니 삼매경에 빠졌다느니 하잖아요? 원래 범어로는 사마디(samadhi)라는 말인데, 한문으로 음역되는 과정에서 삼매가 된 것입니다. <요가 수뜨라>에서는 이 단계를 "선정이 한결같은 상태에 있어서, 그 대상만이 빛나고 자기 자신은 없어진 것같이 되었을 때"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요? 아마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정려의 단계도 그렇거니와 삼매는 사실 말로 설명되는 세계, 혹은 우리의 이성이 논리적으로 분석해 낼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삼매는 이해의 대상이 되는 지식이 아니라 깨달아 알아야 하는, 증득(證得)해야 하는 언표불가능의 세계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삼매의 단계에서는 수행자의 자아의식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정려의 단계에서는 비록 마음이 오직 하나의 대상에 머물러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자아의식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이 수행자 자신과 대상을 가로막는 장애로 작용할 수 있지만 삼매의 단계로 진전되면 이러한 장애가 완전히 제거된다는 것입니다. <요가 수뜨라>에 따르면, 삼매의 상태에서 수행자는 고차적인 직과을 얻습니다. 이러한 직관은 우리가 두뇌에 한정된 사고에서 벗어나는 완전히 새로운 경지라 할 수 있지요. 이때 수행자는 명상의 대상이 지니는 깊고 오묘한 의미를 파악하게 됩니다. 이름과 모양을 갖추고 나타난 세계의 본질을 여실히 들여다볼 수 ㅣ있게 되는 것입니다.  116-125


요가는 반드시 스승이 필요합니다.  125


생각해 보면, 요즘 우리의 삶은 지나치게 분주합니다.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관조할 수 있는 기회가 매우 드물어요.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나 가능할까? 왜 웃어요? 사실 똥을 눌 때 우리의 의식이 맑아져요. 그래서 옛날 어른들이 화장실이야말로 깊은 생각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했습니다. 절에서는 화장실을 해우소(解憂所)라고 합니다. 겉모습이 아무리 하려하면 뭐합니까? 내면의 뜰이 황폐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돌아서면 허전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게으를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바깥일에 분주하지 않을 권리가 있어요. 대게 사람들은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스스로 그 여유를 포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바빠도 가끔은 자신의 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잇습니다. 삼식대가 되고 사십대가 되면 이미 늦습니다. 누구나 바깥일에 '게으를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125-126


후기 힌두교(7~8세기경)의 딴뜨라 전통에 이르면,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단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인ㅅ기이 뚜렷해집니다. 높이 평가할만한 통찰입니다. 딴뜨라(tantra)는 힌두교의 꽃이라 할 수 있지요. 특히 인산의 성(性)에 관한 이해라는 측면에서, 딴뜨라는 그 이전과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차원이 전혀 달라요. 인도사회에서 여자의 지위가 급상승하는 것도 이 시기라 볼 수 있습니다.

여자는 여자이기 이전에 인간입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지요. 남녀의 구분은 마치 칼로 두부 자르듯 그렇게 나눌 수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지요.   137-138


칼 융에 따르면 인간의 에고(ego)는 아니무스(animus 男)와 아니마(anima, 女) 모두를 지닙니다.  138

지금까지 우리는 이 점을 무시해왔지요. 남자는 남자고 여자는 여자라고 가르쳤습니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가능항 한 남자 속에 있는 여자는 무시되고 억눌려왔습니다. 

여자 속의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이상적인 인간상은 우리와 달라요. 남녀가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 남편과 아내가 조화를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우선 한 개체 속에 있는 남성과 여성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남녀 양성을 동시에 구유(具有)한 인간이야말로 조화롭고 이상적인 인간입니다.  140


딴뜨라 전통에서 섹스는 합일을 의미합니다. 합일은 완성이지요. 섹스는 몸을 매개로 남녀의 벽을 허무는 작업입니다. 마침내 너도 없고 나도 없는 무(無)로 떨어지는 순간, 그게 일어납니다. '나'의 상실을 통하여 무한을 체험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합일은 적어도 누적된 상호 교감의 끝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인도 전통에서 남녀의 합일은 좀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한 개체로서의 남자와 한 개체로서의 여자의 합일이 아니라, 한 개체 속에 있는 남성과 여성의 합일입니다. 각 개인은 우주를 축소한 소우주이기 때문에 갈등과 부조화의 궁극적인 해소는 오직 각 개인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게 딴뜨라의 가르침입니다. 성교는 자기 속에 잠자고 있는 다른 성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지요.  143-144


아무튼 정신적인 기쁨이든 육체적인 쾌락이든 우선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여 '너'에게서 혹은 어떤 대상 속에서 '나'혹은 나의 생각과 동질적인 것을 발견하게 될 때 기쁨이나 쾌락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쁨이나 쾌락의 대상은 지극히 주관적인 측면을 지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동질감을 느끼는 대상에 끌립니다.  144


우선 서로 끌리는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끌린다는 것은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이고, 끌리는 둘의 자연스런 만남을 통하여 합일이 있을 수 있어요. 합일은 절대로 강제적으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자연스럽고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145


우빠니샤드에서는 이른바 브라흐만과 아뜨만의 합일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원래 그 둘은 하나였는데, 시작 모를 무지 때문에 마치 분리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윤회 속의 인간이지요. 또한 수행을 통하여 그 본래의 상태를 깨닫는 것이 해탈이며 완성됩니다.  146


우빠니샤드의 범아일여(梵我一如)는 딴뜨라에서 남녀의 성교로 나타나는 셈이지요.  147


한 사람 속에 여자와 남자가 조화를 이룰 때 균형 잡힌 인간이 되는 것처럼, 한 사람 속에 이성과 감성은 균형을 유지할 필요가 있지요. 사실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만이 지극히 감성적일 수 있습니다. 한 개인 속에서 그 둘은 변증법적인 발전을 한다고 볼 수 있지요.  148


전통적으로 인도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연속체로 봅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가 아닙니다. 외적인 마음이 몸이고 내적인 몸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빠니샤드에서는 인간을 다섯 겹(kosa)의 동심원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제일 바깥에는 '음식으로 된 나'(annamayakosa)가 있어요. 이것은 물질적인 몸이라 할 수 있는데, 외부 세계의 물질적인 대상들을 경험하고 향수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 안쪽에 '생기로 된 나'(pranamayakosa)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일반적으로 호흡과 신경계통이 포함된다고 볼 수 있지요. 다시 그 안쪽에 '의근(意根)으로 된 나'(manomayakosa)가 있고 이보다 내밀한 곳에 '식(識)으로 된 나'(vijnanamayakosa)가 있습니다. 이 두 겹은 우리가 흔히 마음이라고 부르는 층입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환희로 된 나'(anandamayakosa)가 있어요. 환희로 된 나의 본질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소 엇갈립니다. 인간의 참된 자아 그 자체라고 보는 견해와, 단지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에 불과하는 견해로 양분됩니다. 

아무튼 이 다섯 겹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우빠니샤드의 인간 이해는 서양의 심신 이원론과 완전히 달라요. 다시 말하여 가장 바깥에 있는 물질적인 몸은 의식 또는 더 나아가서 자아 그 자체와 연속적이라는 것입니다. 몸에는 마음이 반영되어 있어요. 몸에는 마음이 스며있다는 것입니다. 기분이 나쁘면 얼굴에 나타나잖아요? 몸에는 그 사람의 내적인 의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몸은 그 사람의 내적인 성향과 수준에 대한 외적인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지요. 인도 사람들의 사고로 보면 음식으로 된 나로부터 적어도 식으로 된 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심신은 본질적으로 동일해요. 모두가 물질적입니다. 이 문제는 좀 복잡하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물질적인 몸이든 마음이든 모두 쁘라끄리띠라느 근본물질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물질적인 몸과 마음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얼마다 더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가 하는 상대적인 차이에 불과합니다.

몸이 마음과 별개가 아니라 연속적인 것으로 파악될 때, 몸은 비로소 그 본래의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몸은 부정되고 배척되어야 할 '똥통'이 아니라, 그것은 거룩함에 이르는 사다리가 되요. 요가가 의미를 지니는 것도 몸과 마음이 연속적이기 때문입니다.  168-170


몸은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는 양면성을 지닌다고 봐요. 그 자체로는 부정적인 것도 아니고 긍정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굴리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전혀 달라질 수 없어요.  172


대개 사람들은 힌두교 하면 요가와 명상 또는 초월과 신비주의를 생각하기 쉽지만, 따지고 보면 힌두교만큼 현실을 중요시하는 종교도 없어요. 궁극적으로 해탈을 추구하지만, 해탈이란 반드시 죽어서 이루는 게 아닙니다. 몸을 가진 산 사람도 얼마든지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봐요. 또한 해탈의 추구는 철저하게 세속의 삶을 터전으로 합니다. 청빈을 권하는 종교도 아닙니다. 어느 기간까지는 돈을 벌고 경제적인 기반을 다지는 과정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물론 그것은 궁극적으로 버리기 위한 것이지만 말입니다. 인간의 적나라한 욕망을 모른 체 하지도 않아요.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대를 잇는 과정을 통하여 지지고 볶고 싸우는 감정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체험하라 합니다. 그 속에서 욕망의 실체를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욕망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 속에서 욕망을 초월하는 방법을 가르쳐요.

이와 같이 힌두교가 세속의 삶ㅇ르 부정하지 않ㅇ르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해탈에 이르는 사다리로 이해하는 것은, 몸과 마음을 연속적인 것으로 보는 사고방식과 관련을 지닙니다.

체화된 삶  172


힌두교의 입장에서 볼 때, 몸은 윤회의 결과인 동시에 윤회의 원인이 됩니다. 윤회의 원인은 업 때문인데, 업은 체화된 인간의 행위에 그 원인이 있어요. 

요즘 우리 주변에 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잇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억눌렸던 것의 반발이라는 측면도 있고, 알량한 장삿속이 이를 부추기는 점도 있겠어요. 그러나 어떤 점에서 보면, 몸이 뜨는 중요한 이유는 현재 우리의 몸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몸이라는 것은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동안에는 의식되지 않습니다.  173


사람의 이름은 평새을 함께 하는 것이지만, 정작 자기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결정됩니다.  176


이름은 단지 부르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를 책임지자고 있는 것입니다.  180


몸이 마음을 따라가기도 하지만, 마음이 몸을 따라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둘 중에서 마음이 먼저라 해야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마치 닭과 꼐란의 관계처럼 아주 모호한 구석이 있어요. 따지고 보면 몸과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지요.

가장 바깥에 있는 마음이 몸이고 가장 안에 있는 몸이 마음이라 할 수 있거든요.  186


어둠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부정적인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처럼, 맹목이라는 말도 이유없이 푸대접을 받는 게 아닌가 합니다.

순수한 행위는 맹목적입니다. 맹목적인 행위만이 순순할 수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사랑이든 우정이든 목적이 들면 이미 사랑도 아니고 우정도 아닙니다. 다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비즈니스가 있을 뿐이지요. 사고파는 거래가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사랑은 맹목적이어야 해요. 특히 남녀 간의 사랑은 그래요. 남녀 간의 사랑은 모든 사랑의 뿌리지요. 눈멀고 귀먹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다만 맹목적일 때 이해를 따지지 않는 불가사의를 만들어요. 어머니의 사랑이 고귀하다 하는 것도 그런 이유지요. 그것은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 맹목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순수하고 고귀한 것입니다.  199-200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터부시해 온 맹목은 느낌 또는 감정에 대한 맹목이ㅏㄹ 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하여 흔히 우리가 맹목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감정이나 느낌에 따라 움직일 것이 아니라 이성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였어요.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맹목적이지 말라는 말은 이성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를 의미했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이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을 맹목적인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200


만일 느낌에 대한 맹목이 위험을 내포한다면, 극서은 순수와 통하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것은 이미 더럽혀진 것보다 오염되기 쉬워요. 사람이 순수하면 이용당하기 쉽고 물건이 순수하면 사용하기 쉽지요. 이렇게 보면, 느낌에 대한 맹목은 위험하긴 하지만 맹목적인 것 그 자체가 부정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느낌이나 감정에 대한 맹목적인 수용을 무조건 비난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교묘히 이용되고 악용되는 사회가 오히려 문제지요.  201


가능한 것데 대한 체념이 가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맹목은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을 때 가치 있는 맹목일 수 있어요. 목적을 잊어야 맹목적일 수 있는 반면에 목적일 잃어버린다면 이미 그것은 가치 있는 맹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적을 잃어버린 맹목, 나를 잃어버린 맹목의 가장 분명한 징후는, 내가 그것을 그만두고자 했을 때 그만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를 잃어버린 맹목은 끊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끊지 못하는 것이지요. 빠져든다는 징후는 후회가 일어나는 것, 후회가 점점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주객이 뒤바뀐 것이지요. 사람은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시는 것이지요.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으로 끌려가고 있다면 이미 그것은 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나를 잃어버린 맹목의 깊이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본질로 향하는 방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맹목은 깊이에의 추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종교가 중요하고 사랑이 중요하다면, 그것은 맹목적인 사랑이 혹은 맹목적인 종교가 우리를 내면의 깊이로 침잠하게 하기 때문이지요. 종교를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종교보다 강한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종교나 사랑은 일상사의 표면에 부유하는 이런저런 사실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깊이로 침잠하는 것이지요. 폭보다는 깊이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203


우리 사회에 맹목적인 것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그만큼 얕고 허전해졌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203-204


자신의 삶 속에 적어도 한 가지는 맹목적인 게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이든 종교든, 또는 다른 무엇이든, 우리의 삶 속에는 목적을 잊어버리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맹목적인 한 구석이 있어야 합니다. 맹목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그래도 사람은 순수하다는, 순수할 수 있다는 최후의 흔적이 아닐까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맹목의 불씨가 꺼지고 없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참으로 희구하는 목적지에 이를 가능성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04


콩나물은 부드러운 만큼 아주 민감해요. 물을 자주 주지 않으면 금방 잔 뿌리가 많아져서 못쓰게 됩니다. 통상 검은 보자기로 시루를 덮어 두는데, 깜박 잊고 그냥 두면 한나절이 지나지 않아서 콩나물 머리가 금방 푸르게 변해요. 보기 흉해지지요. 

미미한 빛이라도 받으면 콩나물은 금방 변해요.

학생들을 가르치고 키우는 것도 콩나물을 키우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내면의 개안(開眼)은 그래요. 시루에 놓인 콩나물이 하루에 몇 번씩 주는 물을 먹고 자라는 것처럼, 콩나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물이 꼭 필요한 것처럼, 여러분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책에서 얻는 지식이 꼭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콩나물은 절대로 물을 껴안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콩나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물이 꼭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물이 콩나물 사이로 설렁설렁 지나가게 만들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콩나물이 물을 안고 있다면, 금방 썩어버립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는 지식을 안고 있으면 여러분 자신이 썩어버려요. 

적어도 인간의 내적인 성장을 염두에 둔 지식은 그렇습니다. 콩나물의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어요. 아무리 아까워도 그냥 설렁설렁 지나가게 내버려둘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콩나물 사이로 물이 설렁설렁 지나기지만 때가 되면 자라 있는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자라는 것입니다.

마치 콩나물이 자신의 성장을 위하여 물이 지나가는 그 순간에 충실하듯, 여러분도 순간순간의 느낌에 충실하라는 말이었습니다. 변화는 순간이지만, 그 과정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207-209


인도 사람들은 세계의 역사를 순환론적인 입장에서 파악하고 있는데, 이 순환의 주기라는 것이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길어요.

흔히 우리가 무지무지 긴 시간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는 '겁(劫)'이라는 말 알지요? 이 말은 원래 '깔파(kalpa)'라는 범어의 한역(漢譯)입니다.

인도 사람들의 시간관에 따르면, 1겁은 우주의 생성, 유지, 파괴가 일어나는 한 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기간은 86억 4천만 년입니다. 그야말로 겁나게 긴 시간이지요? 우리 인간에게는 겁나게 긴 이 1겁은 브라흐마(Brahma)라는 창조신의 입장에서는 단지 하루에 불과합니다. 브라흐마는 하루를 1겁으로 하는 백 년을 삽니다.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는 실로 황당하게 들리는 이야기라 할 수 있지만, 인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이와 같은 우주적인 시간이 흐르고 있어요.  216-217


내가 보기에 인도의 가장 큰 매력은 느리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233


네 단계의 삶을 통하여 부와 욕망 그리고 자기 본래의 의무를 실현함으로써 결국 해탈을 이루자는 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첫 단계(學生期, 1~25세)는 금욕과 학습의 기간이라 할 수 있느넫, 이 기간 동안에는 경전(베다)를 공부하고 카스트의 구성원으로서 각자가 해야 할 의무를 익히는 데 전념합니다. 남녀의 성적인 접촉을 금하는 금욕이 강조되는 기간이지요.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단계(家住期, 26~50세)로 접어듭니다. 결혼은 남녀가 정신적 육체적인 사랑을 하고, 이를 통하여 희로애락의 온갖 감정들을 체험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물론 자식을 낳고 대를 잇는 것도 중요해요.

세 번째 단계(林捿期, 51~75세)는 앞의 두 단계를 통하여 이룬 경제적인 기반과 가업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숲으로 들어가 명상에 임하는 단계입니다. 손자가 생기거나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지면' 대개 이 단계가 시작된다고 봅니다.

마지막 단계(遊行期, 75~100세)는 숲에서 나와 운수(雲水)의 길을 떠나는 시기가 됩니다. 이때는 탁발이 주요 생계수단이 되지요. 모든 집착을 떨쳐버리고 세상을 주유하며 지금까지 자신이 배우고 명상한 내용들을 현실 속에서 다시 몸으로 확인하는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 있눈 유행자(遊行者)를 흔히 산야신(Sannyasin)이라 부릅니다. 산야신은 스스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사람입니다. 포기한 자라 할 수 있지요.

힌두교인이라면 누구나 산야신이 되기를 원합니다. 겱구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삶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삶은 그 너머의 무엇을 가리키는, 그 너머의 어디엔가 도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들에게 종교가 곧 삶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지닙니다. 삶은 그야말로 철저하게 '자기초월적 상징체계'라 할 수 있어요.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강을 건너기 위한 뗏목에 불과한 것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인 삶이 무의미하다는 건 아닙니다. 무소유의 삶을 사는 산야신이 되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지만, 이들은 부(富)와 몸의 욕망을 삶 속에서 이루는 것도 매우 중요한 것으로 봅니다. 인생의 네 단계 중에서 두 번째 단계는 실상 여기이ㅔ 전념하는 단계라 할 수 있어요.  237-238


욕망은 피하고 억제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바르게 시현될 때 비로소 해결된다고 보는 것이 힌두교의 입장이라면, 불교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부정적입니다.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43


옥상에 있는 물탱크는 물이 가득 차면 저절로 스위치가 올라가서 더 이상 물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욕망은 달라요. 어느 정도 차면 '그만'하고 자동스위치가 켜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욕망은 양적으로 채워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더 채워라'하는 것이 욕망이거든요.  244


정신적인 추구는 분명히 어느 정도의 물질적인 성취를 필요로 합니다.

힌두교의 이상적인 삶의 네 단계가 시사하는 것도 바로 이런 점입니다. 해탈이라는 고도의 정신적인 욕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경제적인 기반을 다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246


인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네 단계가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포기의 철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삶을 통하여 애써 샇아 올리지만, 그것은 결국 버리기 위하여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가진 자만이 벌리 수 있지만, 버리지 앟는 한 가진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각자의 고통이나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라는 것은 결국 버리지 못하는 자들의 고통이며, 또한 포기하지 못하는 사회의 병통이라 할 것입니다. 일찍이 니체가 경고한 것처럼, 물질의 풍요가 지니는 의미를 곡해하는 한 우리는 '가축 무리의 푸른 목장의 행목'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249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자기 본래의 의무를 지니는데, 각자의 의무는 그가 전생에 쌓은 업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봅니다.

자억자득(自業自得)이라는 업의 논리에서 보면, 카스트에 따른 의무의 차별은 전혀 불평등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여 전생에 아주 못된 짓을 많이한 사람이나 선한 행위를 많이 한 사람이나 이생에서 마찬가지로 잘 먹고 잘 산다면 오히려 그것은 불평등이라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250-251


법 앞에 평등 또는 신 앞에 평등은 '업 앞에 평등'이라는 말로 대체되는 셈이지요.  251


인도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본래의 의무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의무의 실천은 아주 중요시합니다.

의무의 실천이 강조되는 것은 그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인 해탈과 직결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힌두교인이 인생에서 이루어야 할 목표는 의무의 실천, 부, 욕망의 실현, 해탈 이 네 가지 입니다.

따라서 의무의 실천은 자기의 해탈을 위하여 필수적인 권리이며, 나아가서는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따라서 인도 사람들에게 의무는 기피하고 싶은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존재 자체의 해방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253-254


알다시피 인도는 편안하게 아름다운 곳을 관광하는 데가 아닙니다. 그런 목적이라면 가까운 방콕이나 홍콩이 훨씬 낫지요. 싼 맛에 인도를 여행하려는 것이라면, 차라리 동네 커피숍이 싸고 편할지도 모릅니다. 인도 여행은 적어도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도 여행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고행이지요. 고정관념은 깨부수는 고행이라 할 만합니다. 인도 여행은 계획이 엉망으로 헐클어질수록 오히려 성공적일 수 있습니다. 계획된 시간에 계획된 루트를 따라 비행기로 혹은 기차로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면, 단체 관광이라면 또 모를까 그것은 이미 인도 여행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발길 닿는대로 차편이 허락하는 대로 기차가 가능하면 기차를 타고 버스가 가능하면 버스를 타야 합니다. 이것저것 따져서는 여행이 불가능하지요. 무작정 떠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의 말처럼 자신과 다른 이들을 개선하고자 떠나는 사람은 철학자지만, 호기심이라 불리는 맹목적 충동에 따라 이 나라 저 나라를 찾는 자는 방랑자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도 여행은 목적을 생각하며 떠나는 철학자보다는 차라리 맹목적인 충동에 충실한 방랑자에 어울리는 여행입니다.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그런 여행이 어울리는 곳이 인도라 할 것입니다.

때로는 아무런 예약 없이 삼등칸 기차를 타고, 발 들일 틈 없이 빼곡히 들어앉은 맨발의 사람들 틈에 끼여 함께 짜이를 마시며 그들의 체념과 기다림과 담배연기를 공유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됩니다. 밤기차에 시달리며, 때로는 화장실 입구 통로까지 밀려나와 쭈그려 앉은 채 밤을 새더라도, 그러는 가운데 한 가닥이나마 허망 분별과 이별할 수 있다면, 고정관념에 찌든 나의 현존을 직시할 수만 있다면, 그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겠지요. 고생을 무릅쓰고라도 길을 떠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인도 여행이 우리에게 의미를 지니는 것은 오히려 충격과 당혹감입니다. 굳이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느낌이 있으면 그것으로 여행은 성공입니다. 충격이 있다면 대성공이지요. 느낌이 일어날 때, 충격으로 몸을 떨 때, 이에 반응하는 나를 내가 지켜보는 것, 그것입니다. 느낌에 충실한 것, 그것으로 여행은 이미 명상일 수 있습니다. 

외부 세계와 나의 내면이 직선으로 대면했을 때 문득 일어나는 충격, 이에 대한 싱싱한 의문에 충실한 것, 그리고 마침내는 내가 내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 서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도 여해에서 잊어버리되 잃어버리지는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262-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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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인식하는 그 정도만 기억되는 부분일 것이다.  108


네 시간만 달리면 땅 끝에 다다를 수 잇는 우리나라의 땅 덩어리와는 달리 언제까지나 끝없이 펼쳐질 것만 같은 대지 위에 있는 지평선, 창문을 힘껏 열어젖혀 사막의 모래바람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창문 틈으로 모래 알갱이들이 미친 듯이 몰아쳐 와서 내 얼굴과 머리는 물론 목구멍까지 타고 들어왔다. 나는 호들갑스럽게 창문을 닫아 내렸다. 기차 안은 이미 뿌연 모래연기로 가득했다. 창문을 연 내가 사고를 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의자며 배낭, 옷가지 위로 모래가 한 가득이다. 손바닥으로 쓰윽 문지르니 모래 덩어리가 묻어나왔다. 벌써부터 문 닫으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니 육두문자를 날리지 않았으면 다행이지 싶었다. 창문을 여는 동안 인도인 누구도 창문을 닫아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나의 이런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웃고만 있었다. 기다려주는 여유, 답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잡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모습. 내가 바라던 여유가 아니겠는가.  110


길 가운데서 길을 잃게 된다는 바라나시에서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

'길을 잃었을 때는 무조건 강가로 나아가라!'

인생도 그러하다. 길은 그렇듯 여러 갈래지만 종극엔 하나의 물줄기로 만나 흐르게 되는 것. 나 역시, 그 강가로 흘라들어 가고 있는 중이리라.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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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기본적으로 <바가바드기타>의 해설서이다. 해설서이긴하되 일반적으로 알려진 해설을 되짚어보고 또 뒤집어보려 한다.

재해설서이기도 하다.  17


<기타>가 인도와 힌두교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힌두교의 전형적인 신학자가 알려주는 다음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베다(Veda)>는 히말라야 설산의 정상과 같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순백(純白)의 정상은 마치 신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장소와 같습니다. '앎'을 뜻하는 베다란 곧 계시입니다. 여러 <우파니샤드>는 그 정상의 백설이 녹아 흐르는 실개천들과 같스비낟. 눈의 결정(結晶)과 같은 계시의 말씀을 인간이 이해하고 체험하면 그 눈이 녹아 인간의 마음에 흐르는 지혜가 될 것입니다. '우파니샤드'라는 말의 뜻처럼 '가까이 내려 앉아' 겸손하게 그 말씀의 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타>는 그 여러 실개천이 모여서 이루어진 산정호수와 같습니다. 인간이 경험한 가지각색의 지혜는 흐르고 흘러 결국 하나의 진리로 수렴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 실개천이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모습과 같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기타(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진리의 기타는 하나뿐이랍니다. 진리는 하나인데 시인들이 여러 방식으로 노래를 부른다고 <베다>에서도 말하지 않습니까.'

<베다>라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 가운데 하나이고, <우파니샤드>라는 것은 <베다>의 끝부분을 형성하는 문헌이다.

<기타>는 이 두 문헌의 위대한 지혜를 모아 보다 대중적인 목소리로 재현한 작품이다.  27-28


호수로 강물이 흘러들어오고 흘러나가듯이 <기타>는 그 이전에 나타난 사고체계의 종착역이요, 그 이후에 등장하는 사고체계의 출발점이다.  29


<기타>를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많다면(실제로 매우 많을 것이다.), 다음의 세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기타>는 본래 누구든지 이해하기 어렵다.

<기타>가 불가해(不可解)하거나 난해(難解)하다는 점이다.

둘째, <기타>는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지만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이해가 불가능하다.

<기타>를 탓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탓하라는 것이다.

셋째, <기타>는 읽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이해의 폭이 천차만별이다.

자기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만큼 <기타>를 이해할 수 잇다는 현실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32-33


<기타>를 향한 맹목적인 숭배는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이분법적 견해와도 관련이 있다.

동도서기는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동양을 정신문명으로, 서양을 물질문명으로 나누면서 동양의 정신문명이 더 우월하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 사상이다.

진정 동양은 정신문명이고 성양은 물질문명인지 묻지 않은 채 동양의 어떤 정신문명이 구체적으로 더 우월한지 찾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아울러 진정 동양의 정신문명이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지와 구호만 있는 곳에는 내용이 빈약하다.  35


무작정 <기타>의 위대함조차 식민지 시대의 통치 전략으로 조작된 것일 수 있으니 그 위대함을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찾아보자는 것이 포함된다.  39


<기타>를 읽을 때는 무엇보다 역사적 배경을 충분히 숙지해야 한다.

<마하바라타>와 이 서사시의 0.7%를 차지하는 <기타>.  40


<기타>의 특징을 말하면

첫째, <마하바라타>의 주인공은 왕족이지만 이 서사시가 '민중의 베다'(민중을 위해 민중의 삶을 녹여서 만든 마치 계시와도 같은 앎)라고 불리듯이 대부분의 가르침은 민중을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타>의 주인공도 왕족이지만 신의 노래(가르침)는 민중을 위한 것이다. <베다>는 인도에 본래 살고 있던 토착민의 사상, 종교, 신화, 전설, 제도, 풍습 등이 반영되고 종합된 문헌이다.

둘째, <마하바라타>에는 고대 인도를 좌지우지하던 여러 사유체계가 절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기타>도 여러 상반된 사상과 사고 방식이 잘 반죽된 채 다양성의 통일을 보여준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 반죽이 너무 성급해서인지 서로 다른 사유 체계 간의 관계를 그려내는 것이 고르지 않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 때문에 <기타>를 읽기가 쉽지 않다.

셋째, <마하바라타>는 근본적으로 인도 또는 힌두의 영웅 이야기이고 이 영웅을 중심으로 인도의 민족 정체성과 힌두의 종교 정체성을 은연중에 강화한다. <기타>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넷째, <마하바라타>는 고대 인도에 힌두교 식의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시키기 위해 힌두교 방식의 도덕을 곳곳에 담고 있다. <기타>는 드러내놓고 그러한 도덕을 강력하게 설파한다.

<마하바라타>가 성립한 시기는 불교가 융성한 시기와 겹친다. 당시 불교의 확산에 두려움을 느낀 힌두교의 지배층은 민중을 힌두교에 단단히 붗들어놓기 위해 민중의 삶을 <마하바라타>로 끌어들였다.  41-42


<기타>를 신비화하는 나쁜 사례들이다.  

첫째, <기타>를 깨달은 사람의 전유물로 간주한다.

둘째, <기타>의 모든 가르침을 영적인 것으로 만든다.

셋째, <기타>의 문제를 독자의 문제로 돌린다.

넷째, <기타>에 대한 파격적인 해석을 깔본다.  45-46


역사적 배경을 짚어가면서 <기타>에 접근하는 것도 왕도는 아니다. 그래도 이 접근이 중요한 이유는 균형감가 때문이다. <기타>를 신비화하는 쪽으로 지나치게 평행저울이 기울어 있어서 그 반대쪽에 무게를 더해주기 위해서다.  47


이 책의 중요한 목적은 <기타>에 대해 새로운 읽기가 지속적으로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데 있다.  48


마하트마 간디의 해석.. 기본적으로 그는 <마하바라타>의 전쟁 자체를 육신의 싸움이 아닌 정신의 싸움으로 보며, 정신의 싸움 중에서도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사이의 싸움으로 본다.  58


아르주나와 크리슈나의 대화는 명상에 비유되기도 한다.

결론은? <기타>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최고의 영적인 스승이 인도하는 가운데 삶의 길을 잃은 듯한 어두운 영혼의 제자가 내면의 명상을 통해 기쁨의 빛이 충만한 경지를 체험하는 과정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발생하고 또 마음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기타>의 숨은 가르침이다.  60


흑백 논리를 거부한다면 그 대척점에 회색 논리가 있다.  61

높은 품격의 회색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극단적이고 극성스런 흑백 논리를 물리치는 회색이다. 세상의 모든 일을 선과 악으로 확실히 나눌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 회색의 임무이다 회색은 흑백을 나누는 기준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63


<마하바라타>는 10만여 편의 시가 얽히고 설키면서 무수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만 이야기의 종착역은 그저 삶의 덧없음이다.  65


아르주나가 누구인가? 

그는 판다바의 다섯 형제 가운데 셋째로서 왕자의 신분이었고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대단한 장수였다. 특히 활에 관하여 그 어떤 적수도 없는 신궁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무사의 의무인 싸움을 철저하게 수행했으며 모든 왕자 가운데 가장 정의롭다고 알려졌다. 고귀한 신분인 데다 자신의 의무에 늘 충설하며 균형 잡힌 정의감을 가진, 한마디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아르주나 "우리가 이기든 저들이 우리를 이기든 어느 쪽이 우리에게 더 좋은지 우리는 그점을 알지 못합니다. 바로 저들을 죽이고서는 우리가 살고 싶지 않은데 저 드리타라슈트라(백부님)의 아들들이 반대편에 정렬해 있습니다. 연민이라는 해악으로 말미암아 제 본성이 뒤흔들리고 정의(의무)에 대한 제 생각이 혼란스러우니 당신께 여쭙니다...."(2.6~2.8)

여태껏 자신이 굳건하게 올바르다고 믿던 것들이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않은 것을 나름대로 확실히 구분하면서 잘 살아왔는데 전쟁을 앞두고 머릿속이 새까맣게 변하면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 고백은 그가 철처하게 회색의 인간으로 서 있음을 암시한다.  71-73

"크리슈나여 양 군대 사이에 저의 마차를 세워주십시오. 싸우기를 원하여 정렬된 저들을 제가 관찰하는 데까지, 시작되려는 전쟁에서 누가 저와 더불어 싸워야만 하는가를 제가 관찰하는 데까지..."(1.20~1.23)  75


아르주나가 그 사이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굳건한 기준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으리라. (양 군대 사이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적군으로 진열해 있는 친족들을 가까이서 보지 못했을 것이다. 친족들을 가까이서 보지 못했다면 아마도 그는 동요되지 않았을 것이다.)  76


요점은 이거예요. 언제든지 우리 삶은 회색의 현실감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거예요. 음, 물론 출발점이 그렇다는 거고 도착점이 그래서는 안 되겠죠. 회색의 현실감을 인정하되 항상 그 회색에서 빠져 나오도록 애써야 한다는 거예요. 회색에서는 도통 의지할 게 없으니 보통 사람이 계속 회색으로 살아가기는 힘들어요. 빠져나와야 하죠.  80


하나, 크리슈나는 고통에 빠져 있는 아르주나의 마음에 커다란 충격을 던지는 말을 한다. 매우 당혹스러운 조언의 요점은 이러하다. '전쟁터에서 육신을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을 죽일 수는 없다. 육신과 달리 영혼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둘, 아르주나는 최후에 크리슈나의 가르침을 다 듣고서 자신의 모든 미혹이 사라졌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잘못된 생각들이 사라졌고 올바른 생각들로 채워졋다는 것이다. 생각이 바뀌면서 난제가 다 해결되엇다면 그것이 마음의 ㅣ문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애초에 아르주나는 스스로 자신의 어리석음과 혼란을 고백한다. 크리슈나 역시 첫 가르침에서 아르주나더러 지혜로운 척하지 말라고 하낟. 이처럼 모든 것은 어리석은 생각 때문이다.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기타>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셋, 아르주나가 고통을 겪는 큰 이유는 너무 많은 생각 때문이므로 키리슈나는 내내 그것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생각을 넘어선 상상이고 상상을 넘어선 망상이다. 그래서 크리슈나는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 행동의 결과를 미리 생각하면서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89-90


<기타>에서 아르주나는 정의롭지 못한 적군에 대비하여 자신의 정의로움에 자부심을 가져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고 있다. 아르주나는 자신의 본성에 맞게 전쟁터에서 진실하게 행동해야 함에도 자신을 속이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크리슈나가 '싸우라!'고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너 자신과 싸우라'고 하는 뜻이다. 자신 안에 놓여 있는 유약함과 거짓됨을 물리치기 위해 그렇게 만든 원인을 찾아 당당하게 대면하고 싸우라는 뜻이다. 따라서 싸우라는 가르침은 폭력의 가르침이 아니다. 도리어 자신과 싸워 이김으로써 진리에 도달하게 만드는 가혹하고 냉철한 비폭력의 가르침이다.  116


라즈니쉬의 <기타> 해석은 간디보다도 한발 더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일단 제가 주목한 부분은 이 구절입니다. <기타>에서 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가치한 자신의 의무가 잘 실행된 타인의 의무보다 낫다오. 자신의 의무 속에서 죽는 것이 낫다오. 타이느이 의무는 두려움을 초래한다오"(3.35) 여기서 자신의 의무와 타인의 의무가 나옵니다. 타인의 의무가 아무리 좋다 한들 초라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아르주나는 무사이기 때문에 무사로서의 자기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조언인 셈이지요. 아르주나가 누굽니까? 천하에 둘도 없는 장수입니다. 장수면 장수답게 전쟁에서 싸워야지 자기가 마치 승려인 양 이상한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117


아르주나에게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라고 조언한 것은 자기 본성에 충실하라고 조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을 왜곡해서 보지 말고 제대로 보라는 것이지요.  118


<기타>에서 비폭력주의를 이끌어낸 것은 언제부터일까?  '비폭력'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아힘사'에서 기원한다. 이 단어는 불살생 즉 살생하지 않음을 뜻한다. 

<기타>에서 요가란 정신을 수련하여 보다 더 잘 살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삶의 길을 가리킨다.

인도인이 따르는 가장 전형적인 세 가지 좋은 삶의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 잘 살기 위한 세 가지 길을 뜻하는 그 세 가지 요가는 주로 지혜(지식)의 요가, 행위의 요가, 사랑(신애, 헌신)의 요가로 불린다.

이런 큰 츨 아래 이 세상에서 세 유형의 인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유형은 앎을 좋아하고 둘째 유형은 행동을 좋아하고 셋째 유형은 감정을 좋아한다. 첫째는 머리로 살고 둘째는 팔과 다리로 살며 셋째는 심장으로 산다. 이 세 유형이 각각 차례대로 지혜, 행위, 사랑의 요가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왜 <기타>의 크리슈나는 세 가지 요가를 가르칠까? 이유는 꽤 분명하다. 전쟁에서 싸우지 않으려는 아르주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다.  144

 

지혜의 요가 - 지혜의 요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는 우리의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보지요. 이 무지를 없애기 위해서 지혜의 길을 내세우는 거예요.

지혜란 뭘까요?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을 구별해서 아는 힘을 가리키지요.

불변하는 것을 그 누구도 소멸시킬 수는 없다오. 이 유한한 육신들이란 영원하고 불멸하며 불가사의한 영혼의 것이라고 말해진다오. 육신은 영원하지 않은 반면 영혼은 영원한 것이라는 가르침이죠.

행위의 요가 - 크리슈나는 행위를 탁월하게 잘하는 것이 행위의 요가라고 말해요. 크리슈나는 '행위에 대해서도 깨달아야만 하고 그릇된 행위에 대해서도 깨달아야만 하며 행위를 하지 않음에 대해서도 깨달아야만 하기 때문이오. 행위의 길은 심오하다오'(4.17)

행위의 요가란 행위를 하되 행위의 결과에 신경쓰지 말고 행위 자체에 몰두하라는 거예요. 

사랑의 요가 - '나에게 모든 행위를 바치고서 나를 지고한 자로 여기며 오로지 전념하는 요가로써 나를 명상하면서 숭배하는 자들에게, 나에게 마음이 몰입된 자들에게, 머지않아 나는 죽음과 윤회의 바다로부터 구해주는 구세주가 된다오. 아르주나여, 바로 나에게 마음을 고정하시오. 나에게 생각을 고정하시오. 그 결과로부터 그대는 의심 없이 바로 나에게 머물 것이오.'(12.6~12.8)

어떤 행위를 하든지 마치 신의 행위인 양 항상 조심스럽게 하라는 거니까요.  177-180


<기타>에서 크리슈나의 모든 설교는 어김없이 이 세가지 요가로 분류된다.  181


각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이 어떤 모습으로 얽히고설켜 있는지 <기타>는 광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상상의 최고 정점에서의 대답은 이것이다. '얽히고 설켜 있는 모양새가 어떠하든지 모든 요가가 하나고 모든 길이 하나다.'  183


행위의 방법, 행위의 본성, 행위의 근거를 죄다 탐구해야만 보다 성공적인 행위가 나온다는 거지요. 그리고 행위의 방법은 행위의 요가이고 행위의 본성은 지혜의 요가이고 행위의 근거는 사랑의 요가.  197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욕망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욕망이 없으면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이 없으면 욕망이 없다.' 이것은 <우파니샤드>의 가르침과도 흡사하다. 두려움이 없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자유이다.  201


작은 것과 큰 것, 작은 결과와 큰 결과, 작은 행복과 큰 행복, 이것은 인도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이층의 사유이다. 일틍은 작운 것의 공간이고 이층은 큰 것의 공간이다. 일층은 시간이 흐르는 무상한 공간이고 이층은 시간이 멈춘 영원한 공간이다. 보통 사람들은 일층에서 살지만 가끔 이층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다.  218


'왜냐하면 태어난 것은 명백하게 죽고 죽은 것은 명백하게 태어나기 때문이라오.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그대는 슬퍼하지 않아야 하오.'(2.27)


제어할 수 없는 것은 제어할 수 없고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제어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둘을 뒤 섞는다. 제어할 수 없는 것을 제어하려고 하고, 제어할 수 있는것을 제어하지 않으려고 한다. 즉 운명을 제어하려고 하고 욕망을 제어하지 않으려고 한다. 즉 운명을 제어하려고 하고 욕망을 제어하지 않으려고 한다.

<기타>의 결론은 이 둘을 뒤섞지 말라는 것이다. 제어할 수 없는것과 제어할 수 있는 것을 분명하게 구별하면서 사는 지혜를 가지라는 말이다.  245


힌두교 연구자를 만난다면 그는 업 이론의 기원과 내용을 다름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해 주리라.

"업 이론이라는 건 쉽게 생각해서 '뿌린 대로 거둔다'는 내용이죠. 사실 굉장히 합리적인 이론이에요. 이 이론은 세 가지 이유에서 만들어졌어요. 첫째는 이 세계가 우연적이지 않고 뭔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제시하기 위해서예요. 콩 심은 대는 콩이 나야지 팥이 나면 안 되잖아요. 둘째는 이 세상의불공평함을 설명하기 위해서예요. 누구는 부자로 태어나고 누구는 가난뱅이로 태어나는 그러한 차별을 설명하고 싶은 거죠. 셋째는 숙명이 아닌 자유의지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확인시키기 위해서예요.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죠. 연재의 삶이 과거에 뿌린 것 때문에 결정된다면 그건 숙명론이에요. 하지만 현재에 무엇을 뿌리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면 이건 자유의지잖아요. 그래요. 업 이론은 확정된 운명을 조금은 받아들이되 자유의지로써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가기 위해 처음 창안된 건데 어쩌다 보니 운명에 순종하는 이론으로만 잘못 알려지고 말았어요."


애당초 업 이론은 숙명론적인 사고방식보다 운명을 개척하는 사고방식에 더 가까웠다. 새로운 씨앗을 잘 뿌리기만 하면 언젠가 훨씬 나은 열매를 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점차 두 가지 특면에서 숙명론이 되었다. 하나는 현재의 고통을 참으면 그 결과로 더 좋은 세상이 오므로 현재의 고통을 숙명인 양 여기면서 인내하라는 것. 다른 하나는 현재의 모든 삶은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고 가치가 있으므로 현재의 위치를 숙명인 듯 수용한 채 만족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매우 적극적으로 운명에 도전하던 인생관은 사라지고 그 운명에 대해 체념하는 인생관이 나타난다. 업은 반드시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 된다. 업은 굴레가 되고 속박이 된다. 자우의 반대말이 되는 것이다. 급기야 업 자체가 고통이다.  246-248


어쩌면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자유를 외치는 목소리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구속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을 가능성도 더 높아지요. 더 강하게 구속하기 위해서는 자유의 달콤함을 담은 희망의 찬가를 계속 틀어주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기타>는 자유의 창문을 열어놓고 잇는 듯하지만 좁은 창문으로 빠져나가려는 사람을 열심히 다시 불러들이죠. 그를 운명의 하수인으로 만들고 순응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예요.'  248-249


"법전의 명령(가르침)을 내버린 채 욕망에 따라 행하는 자는 완성에 도달하지 못하고 행복이나 지고한 목적지에도 도달하지 못한다오."(16.23)

크리슈나의 이 말은 다음의 두 가지를 암시한다. 하나,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행위 이외에 다른 행위들을 결코 행해서는 안 된다. 둘,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행복이나 지고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250


<기타>는 힌두교의 최고신이 인간에게 들려주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노래이다. <기타>는 많은 사람이 귀 기울여 들을 만한 가르침을 담은 지혜서이다. 

어렵지 않게 실행할 수 있는 방법들로 다음 몇 가지를 제시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생명력 있는 내용을 구하기 위한 방법들이다.

첫째, 과대평가와 과소평가를 하지 않도록 한다. <기타>를 신비주의나 영성주의의 시각에서 접근할 때 주로 과대평가에 빠진다. 또 <기타>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지혜를 담고 있다거나 인류에게 가장 보편적인 지혜를 담고 있다고 여기는 것도 엉성한 과대평가이다.

인도인이 <기타>를 과대평가하는 간접적인 예가 있다. 조금만 가방끈이 긴 사람이라면 <기타>의 어느 한 구절을 암송하면서 삶에서 대면하는 이런 저런 문제에 관해 그 구절로써 평가하거나 적용하려는 태도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는 <기타>를 인용하기 위한 인용일 뿐 거의 설득력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은 것처럼 우스꽝스럽다. <기타> 만능주의에 빠진 듯한 사람은 <기타>를 경외하기만 할 뿐 이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른다.

과소평가는 어쩌면 더 위험할 수 있다. 이성과 합리성의 시대에 어찌 미개한 인도의 고대 문헌을 가져와서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바탕 난잡한 말들을 풀어놓느냐, 하는 그런태도다. 눈이 있어도 읽으려 하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오나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서구적인 생각의 틀에 인도의 <기타>가 끼어드는 것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밀어내고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타>에 익숙한 사람조차도 종종 과소평가에 가담하곤 한다. 하지만 과대평가에 적절한 근거를 내세우는 경우가 매우 드문 것처럼 과소평가에도 그런 경우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이 신념과 정서와 감정을 앞세운 채 <기타>를 거부하거나 폄하한다.

둘째, 전후좌우로 종횡무진하며 읽어보도록 한다. 전후라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가리키고 좌우라는 것은 저곳과 이곳을 가리킨다. 그러니 전후좌우란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종횡무진이란 거침없이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기타>를 과거의 유산으로만 여기지 않고 <기타>를 인도만의 문화적 틀에 한정시키지 않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횡성수설하며 함께 더들도록 한다.

넷째, 해석과 체험을 끝없이 순환시키도록 한다.  316-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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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는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와 같이 교직과정을 이수해야 하는데 학부교직(B-ed)을 이수하면 보통 초중등 과정 교사가 되고 석사교직(M-ed)을 이수하면 고등과정 교사가 된다. 공립학교 교사로 임용되면 정년이 보장되지만 사립학교의 경우는 철저한 실력 위주의 선발로 항시 능력을 검증받고 그에 상응한 대우를 받기 때문에 우수한 교사들은 사립학교를 선호한다.

사립학교에서는 단순히 교직 이수 자격증뿐만 아니라 각 과목에 필요한 여러 분야의 자격증을 요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연히 경쟁이 심한 사립학교의 교사들은 자신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인도 수도 델리의 유명한 사립학교 중 하나인 바산트 밸리스쿨에서 5학년 영어수업을 맡고 있는 수렌드란 교사의 말에 따르면 사립학교에는 교사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키우기 위한 자체 프로그램들이 있다고 한다. 그녀가 속한 학교에서도 일 년에 한번씩 교사들의 해외 연구 워크숍을 통해 지속적으로 관련 분야의 최신 정보를 접하고 수준높은 영어로 유지하도록 한다고 한다.  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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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을 때마다 나 자신과 내가 배워온 세계의 허위가 보였다.


그러나 나는 다른 좋은 것도 보았다. 거대한 바냔나무에 깃들인 숱한 삶을 보았다. 그 뒤로 솟아오르는 거대한 비구름을 보았다 인간들에게 덤벼드는 사나운 코끼리를 보았다. '코끼리'를 정복한 기품 있는 소년을 보았다. 코끼리와 소년을 감싸 안은 높다란 '숲'을 보았다. 

세계는 좋았다. 대지와 바람은 거칠었다. 꽃과 나비는 아름다웠다.


나는 걸었다. 

만나는 사람들은 슬프도록 못나고 어리석었다. 

만나는 사람들은 비참했다.

만나는 사람들은 우스꽝스러웠다. 

만나는 사람들은 경쾌했다.

만나는 사람들은 화려했다. 만나는 사람들은 고귀했다.

만나는 사람들은 거칠었다.

세계는 좋았다.


'여행'은 무언의 바이블이었다.

'자연'은 도덕이었다.

'침묵'은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침묵에서 나온 '말'이 나를 사로잡았다.

좋게도 나쁘게도, 모든 것은 좋았다.

나는 모든 것을 관찰했다.

그리고 내 몸에 그것을 옮겨 적어보았다.


<인도방랑>은 내가 스물넷의 나이에 대학을 뛰쳐나와 세계 방랑길에 오른 최초의 여행 기록이다. 일본에서는 1972년, 그러니까 꽤 오래전에 출간되었다.  15


저 인도의 자연을 접한다는 건 평온을 얻는 게 아니라 반대로 엄청나게 아나키적 정신이 되어가는 겁니다. 인도의 자연을 모방하면 인간 사회의 관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버리지요. 사실은 대단히 위험한 겁니다.  36


유유상종이란 말을 하는데 여행이 바로 그런 겁니다. 시시한 여행을 할 때는 시시한 사람을 사귀지요. 얽매인 데 없이 좋은 여행을 할 때는 열에 여덟아홉 정도로 격이 높은 사람을 사귀게 됩니다. 나는 최고의 인간을 만나진 못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높은 인격의 사람을 만나는 여행이 곧 좋은 여행은 아닙니다. 더없이 시시한 녀석부터 차원 높은 사람까지, 오히려 여행 중에 얼마나 다양하게 만났느냐가 중요하지요. 그것이 여행의 풍성함이라고 생각합니다.  37


명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48


화장하는 광경을 이십 일쯤 내리 촬영한 적이 있습니다. 불타고 있는 시신 근처에 가면 불길 때문에 엄청나게 뜨거워요. 나중에 보면 눈썹이 고불고불 그슬려 있기도 해요. 광각 카메라를 들고 머리 같은 게 불타오르는 곳으로 다가갑니다. 연기 속으로 들어가지요. 그렇게 이십 일쯤 기나면 시신 냄새가 몸에 배어버립니다.... 사진을 찍는 것과는 관계없이 모르는 사이에 죽음의 냄새가 들러붙어버립니다. 그런 것도 하나의 명상이지요. 모르는 사이에 한다는 게 좋아요.  49


오랜 여행은 여자와 음식을 좋아하지 않으면 못할 것 같아요. 그런 실감을 근거로 추측해보면 그토록 오랜 세월 여행을 한 마르코 폴로는 분명 호색한이었을 거라고, 친구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친구가 마르코 폴로에 관한 역사 기록을 살펴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실이었어요. 베네치아에서 창부와 싸움을 벌여 재판에 부쳐지자 마지못해 국외로 도망쳤다는 겁니다. 호색한이었던 까닭에 그런 위대한 여행이 가능햇다고 할 수 있어요. 역시 마르코 폴로의 여행은 정통이었던 거지요.(웃음)  62

  

질문 : 후지와라 씨의 사진에는 분명 사물이 찍혀 있지만, 그게 자신의 눈 속 스크린과 바깥 세계의 피사체가 이중으로 찍혀 있는 느낌을 줍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카메라를 사용하는데 어떻게 그런 사진이 찍히는 건가요?

--> 보통은 오른쪽 눈으로 찍는 게 표준입니다. 카메라 역시 그렇게 설계되어 있어서 왼쪽 눈으로 찍으면 와인딩 레버가 얼굴에 부딪히게 되지요. 그런데 나는 철저히 왼쪽 눈입니다. 처음부터..  74



비르바탈은 여름굴만 한 크기에 껍질이 플라스틱처럼 단단하고 매끈하다. 속에는 형태가 분명치 않은 끈적끈적한 주황색 과육이 들어차 있는데, 이것이 설사나 그 밖의 위장병에 직방이다.  125


인도에 온 히피는 처음부터 생각하고 화내고 고민하기를 포기한 채 바람에 나불거리는 꽃잎처럼 인도 곳곳을 떠돌아다니고 있다. 그것은 흡사 울음을 그친 아이가 바람에 눈물이 마르는 것이 기분 좋아 까불며 뛰어다니는 모습 같다.  161


화장터를 이르는 말 .. 일본어는 가소바, 영어는 크리머토리, 힌디어는 스마산.

힌디어는 그 말소리에서 오는 느낌이 실로 상스럽다. 

앗차(좋아)

나힝(아니오)

다히(요구르트)

짤로 짤로(가자 가자, 비켜 비켜)

싸합(선생님, 어르신).  188


<인도방랑>은 열에 들떴던 내 젊은 날의 부끄러운 첫 기록이다.  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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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한 적이 있는가.

실패에 좌졸하고 몇 날 며칠을 서럽게 울어본 적 있는가.

사랑에 절만하고, 사랑에 절실해 본 적이 있는가.

상처를 받는다는 것.

그것은 청춘이 누릴 수 있는 행복한 비명이다.

더 아파하고 더 슬퍼하기. 

우리는 그만큼 단단해지고 평온해질 것이다.  37


가난은 발버둥 쳐도 헤어나올 수 없는 굴레이고, 그 굴레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도라는 나라의 법칙.  61

인도 여행을 하면서 내가 외면했던 그들의 가난. 엄마의 품에 안겨 3등석에 탄 아기는 어른이 되어서도 3등석을 타야 하는 정해진 인생.  66


우리는 둘 다 모서리였다. 누구 하나는 사포가 되어 상대방의 날선 모서리를 문질러줘야 했지만 나만큼 그도 예민한 직업이었고, 오히려 나보다 더 날이 선 하루하루를, 절벽 끝에 매달린 심정으로 살아가고있었다. 둘 다 모서리라 서로 부딪히며 흠집만 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번 부딪혀 보지도 않고 우리는 너무도 일찍 서로를 포기해 버렸다.  94-95


인도 대륙을 돌며 새로운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전혀 다른 세상에 떨어진 기분이다. 사람들의 옷차림과 표정도, 공기의 감촉과 냄새도 기차와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낯설다. 새로운 지역데 도착할 때마다 나는 수없이 인도에 대한 정의를 다시 써내려갔다. 도무지 이 나라는 각 도시들 사이의 닮은꼴이 없다. 그것이 나를 계속 긴장하게 만들었다.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첫인상이 거의 모든 것을 좌우하듯이,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시간과 돈을 들여 애써 떠나왔다는 이유 때문에 여행자들은 웬만하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한다. 거리의 소음에도 '이거 익사이팅할걸?' 맛없는 음식에도 '참 흥미로운 맛인걸?' 사기를 당해도 '참 좋은 경험하는구먼'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정도로 온화한 여행자의 마음이건만, 첫 느낌부터 잘못 왔다 느끼게 만드는 장소라면, 그곳은 마른 하늘에 쌍무지개가 뜨고 우중충한 밤 하늘에 별똥별이 떨어진다고 해도 여행자의 마음을 되돌리기 힘들다.  121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금을 소비하는 국가는 언제나 인도이고, 명품보다 보석으로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유일한 나라가 바로 인도이다. 세계 명품시장이 유독 인도를 뚫지 못하는 이유는 인도인들이 자국의 역사가 담긴 보석과 자수, 수공예품에 더 큰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니 나는 인도의 뭄바이나 방갈로르의 소위 잘나가는 부자 거리에서도 루이뷔통이나 에르메스, 베르사체 같은 명품 간판을 본 적이 없다.  138-139


인도에서 일주일만 보내도, 굳이 극장에 가서 인도 영화를 보지 않아도 당신은 인도 영화에 흠뻑 빠지고 이들의 팬이 될 것이다. 호텔이나 식당의 TV에서는 언제나 지나간 옛 인도 영화가 나오고 있고, 영화의 하이라니트는 잘 편집된 뮤직비디오로 상영된다. 인도의 인기 배우들은 길거리 광고 전광판에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고 TV광고에서도 철철 넘치는 매력을 발휘한다. 우리는 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인도 영화가 흡수되고 말아 어린 시절 유덕화와 주윤발에 빠졌던 것처럼 인도 배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152


인도는 여행하기 쉽지 않은 나라이다.

하지만 인도 여행의 매력은 예상할 수 없는 행복이 찾아왔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 법정 스님은 저서 <인도기행>을 통해 인도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건이 넘쳐나지만, 어느 한순간 다시 눌러앉게 만드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나라라고 말씀하신다.  162


상상할 수 없는 날들의 연속.

3일 고생하면 하루는 반드시 보상이 뒤따른다. 이를테면 온통 채식뿐인 도시에서 고기냄새가 절실해질 때쯤, 내일은 먹음직스러운 양고기와 치킨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비족고 불편한 숙소에서 디스크에 걸릴 정도로 불편한 잠자리에 뒤척였다면, 다음날은 흰 모래사장에 놓인 방갈로와 바람 솔솔 맞으며 몸을 뉘일 수 있는 해먹이 짠하고 등장한다. 숙소를 못 찾아 무거운 배낭을 이고 한 시간 넘게 땀을 뻘뻘 흘리고 헤매면, 그곳엔 기다렸다는 듯 얼음통에 한가득 시원한 맥주를 팔고 있다. 

인도 특유의 향신료 마살라가 지긋지긋해질 때쯤, 어느새 나는 바닷가 마을에 도착해 그릴에 구운 생선요리를 먹고 있었다. 인도는 이렇듯,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을 때마다 놀라운 반전을 선물하는 것이다.  162-163


이별을 해도 더 이상 심장을 쿵쿵 찧는 고통이 없어요. 이별을 할수록 머리만 지끈거려요. 머리만 쥐어뜯을 뿐 더 이상 아프려하지 않아요. 자존심인가봐요.  196


많은 인연을 거치고 이별을 할수록 깨달음은 많아지는데 그렇다고 안목이 높아지는 것 같지는 않아요. 당신도 그런가요? 더 형편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러다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나도 당신처럼 내 나이에 맞는 고민을 해요.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사랑은 사치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그럼에도 펄펄 끓는 사랑을 해야 해요. 그러니 더 이상 사랑에 고개 돌리지 말아요. 지난 사랑에 얽매이지도 말고요.  197


난 내가 그토록 끔찍이 여겼던 맨 바닥에 철퍼덕 앉아버렸다.

그 순간 내게 평온이 찾아왔다. 나도 그들처럼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풀썩 앉아버리니 그보다 편하고 행복할 수 없었다. 어깨를 누르던 걱정도,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슬픔도 아물어가고 있었다.  203


당신이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면 온 마음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철퍼덕 앉길 바란다.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쉽게 풀리기도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단순하고 명쾌하다. 기다림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진다면 기다린 후의 행복도 오지 않는 것이다.

불편하고 괴롭고 힘들기만 했던 인도가 그렇게 내 품에 들어와 살포시 앉았다.  205


여행과 음악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잠깐 외출할 때도 음악을 챙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유독 여행을 할때만 음악을 듣는 사람도 있다.  209


여행은 단순해지려고 떠나는 것이다. 열심히 일한 그대들이 몇 달을 기다리고, 몇 주일을 계획해서 떠나는 것이 진짜 여행이다. 

그런데 나는 글만 쓰는 단조로운 일상을 피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떠날 때만 마음 구석구석이 복잡해지고 심란해진다. 잡다한 생각들은 한국으로 돌아와 소재가 되어 낱장의 글이 되고 책이 된다.  213


인도에서 친절은 돈에 비례하지 않는다.

인도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게 화두를 던진다. 모든 게 뒤엉킨 실타래 같지만, 실 하나만 잘 잡으면 모든 게 스르륵 풀리는 나라.  225


평상시에 수다를 즐겨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 혼자 잘 논다는 뜻이다. 이것이야말로 혼자 여행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된다. 혼자 있어도 지루하지 않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지 않아도 시간은 참 잘도 간다.  244


여행을 하면 진짜 어른이 된다는 말.

세상을 넓게 보고 성숙해진다는 말.

그게 사실이라면 난 지금쯤 세상만사에 도가 터 있겠죠.

그런더ㅔ 나는 돌아오면 똑같은 이유로 고민을 하고, 똑같은 일들에 부딪혀요.

유치한 문제로 친구와 다투고, 엄마의 잔소리에 까칠하게 맞서고, 친구들의 고민에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죠.

인도에서 간 감기약은 인도에서만 낫는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오면 여기에 맞는 처방전은 따로 있나 봐요.

그래도 확실한 건 떠나기 전과 후가 조금은 달라져 있다는 거.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라 나만 알고 있긴 하지만요.  285


꼭 멀리 떠나지 않아도 여행을 할 수 있어요. 

아는 후배는 얼마 전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다녀왔대요. 그곳 제주도의 풍경을, 처음으로 혼자 길을 찾아 나섰던 그 설렘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고.

내 친구는 여름휴가를 아껴뒀다 추석연휴까지 합쳐서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왔어요.

이미 20개국은 여행해 본 그녀에게 이제 진짜 여행은 자신의 체력과 한계에 도전해 보는 일이 된 거예요.

열 여덟 살 소녀에게는 공항에 가는 것만으로도 여행이 될 수 있어요. 

소녀에게는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을 테니까요.

내게는 인도가 가장 먼 나라였어요.

서른에 떠나는 여행은 유럽도 일본도 아닌 꼭 인도여야만 했거든요. 가장 멀리 왔다고 생각하면 그게 여행이에요.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도 내 주변도 그대로라고 느껴져도 실망하지 말아요.

말했잖아요. 누구나 아주 조금은 달라져 있어요.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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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날리는 인도 여행을 한 뒤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37


무굴제국 샤자한 왕의 두 번째 아내 '뭄타지(Mumtaz, 일명 아르마주드)'를 위한 무덤이었지만, 무덤 이상의 의미를 담아 '궁전'이라고 표현한다. 인도 사람들은 타지마할을 종교의 성전으로 여기기도 한다.

샤자한 왕은 아내를 잃고 하룻밤 사이에 머리카락이 백발이 될 정도로 슬픔에 잠겼다고 한다.  53-54


인류가 남긴 가장 완벽한 '균형과 대칭의 조화'를 이룬 건축물 타지마할. 무덤 중앙에 서면 온 우주가 그곳으로부터 시작되고 그곳은 온 우주의 중심이 된다.

이 무덤 궁전은 음력 보름 만월(滿月)아래서 보면 대리석 안에 조성된 꽃들이 붉게 피어난다고 한다.  55


갠지스 강은 죽음에 대해 초연함과 비장감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바라나시 갠지스 강으로 향하는 길은 미로(迷路)의 연속이다. 처음 온 여행객은 좁은 길을 이리저리 헤매는 것이 다반사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다 보면 마치 쥐가 미로를 뱅뱅 돌아다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도대체 언제 가트가 나올까 조바심까지 난다. 그렇지만 가트까지는 먼 길이 아니다. 계속 따라 들어가다 보면 갠지스 강에 접해 있는 가트가 불쑥 나타난다.  59


인도 여행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여름철에만 여행길이 열리는 라다크를 돌아보는 일이었다. 세계에서 고도가 가장 높은 지역 중 한곳인 라다크는 티베트 불교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작은 티베트'로 불린다. '곰파'라고 불리는 사원과 불탑 '쵸르텐'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여기에 '탕카'로 불리는 불화도 살펴볼 작정이었다.

또 다른 목적은 불자로서 불교의 발상지를 직접 발로 밟고 성지를 순례해볼 심산이었다. 인도에 가기 전 수많은 로드맵을 그리면서 어떻게 갈까하는 즐거운 고민에 빠졌다. 북부 인도를 순례하고 돌아오는 나머지 시간, 즉 자유 여행 시간에 불교 성지를 순례하기로 마음먹었다.

또 한 가지는 우리보다 30배나 넓은 '인도'라는 나라의 정신적인 영역의 깊이를 느껴보고 싶었다. 예를 들면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에서 기도하는 힌두교도들도 만나보고 싶고, 숲에서 수행하는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사두의 정신 세계는 어떠한지도 알고 싶었다.  202


인도 배낭 여행은 누차 말했지만 순탄하지가 않다. 그렇다고 아주 위험한 것도 아니다.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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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숨을 고른 다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난 평생으 ㄹ두고 노새나 다름없는 취급을 당했어. 내 아들놈 하나-딱 하나만이라도- 인간답게 사는 것,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49


"어린 친구가 아주 똑똑하고 정직하고, 활발하구먼, 도둑과 등신들이 우글거리는 이 무리에서 말이야. 어떤 정글엘 가더락도 가장 희귀한 짐승이 뭔지 아니? 한 세대에 딱 한 번만 나타나는 동물 말이다."

저는 잠시 생각했다가 대답했습니다.

"화이트 타이거요."

"그래, 바로 네가 화이트 타이거다. 이 험한 정글의 화이트 타이거."  54


옛날 옛적의 인도에는 천 개의 카스트와 천 개의 숙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딱 두개의 카스트만 남았어요. : 배때기가 커다란 남자들 그리고 배때기라곤 없는 남자들.

그리고 숙명 또한 딱 두 가지뿐이랍니다. 먹거나, 먹히거나.  85


자유로운 사람들도 자유의 가치를 모르는 것, 문제는 바로 그겁니다.  142


짐승들은 짐승답게 살도록 내버려두고, 인간들은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것. 한 마디로 그것이 저의 철학이랍니다.  314


인도 혁명이라굽쇼?

아니요, 각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이 나라 국민들은 자기네 자유를 위한 전쟁이 다른 어디에선가부터 - 정글이나, 산이나, 중국이나, 파키스탄으로부터 올 거라고 여전히 기다리고 있거든요. 그런 일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거룩한 도시 베나라스를 만들어야만 합니다. 

인도의 젊은이들이여, 그대 혁명의 책은 바로 그대드르이 뱃속에 들어있도다. 그것을 배출해내서 읽으라!

하지만 대신에 그들은 전부 칼러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크리킷 게임이나 샴푸 광고 따위를 보고 있지요.  344


제가 원했던 것은 오직 하나,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361


저는 말할 것입니다. 단 하루라도, 단 한 시간이라도, 아니, 단 일 분이라도, 하인으로 살지 않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었다고.  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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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인도 사람들은 왜 그렇게 다 나쁘냐고 묻자 한 인도 청년은 이렇게 대답했었다.

"사람의 열 손가락은 모두 같은 손가락이지만 다 다르게 생겼어. 인도 사람들도 모두 같은 사람이지만 다 다르기 마련이야. 인도에는 사람을 속이는 사람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아."

나중에 인도를 떠나게 될 즈음에는 나도 알게 되었다. 인도에는 곪고 거친 손가락도 있지만 예쁘고 곧은 손가락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39


죽음을 접하는 순간이 죽기만큼이나 싫었다.  57


언제부턴가 나는 더이상 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현실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마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서가 아니었을까. 정해진 길이 아닌 남들과 다른 길을 가는 것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지금 나는 인도에 있다.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에게 어떤 길을 가야한다고 말하는 이도 없이 완전 백지상태의 나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 내 가슴이 원하는 대로 가슴 뛰는 삶을 살아 볼 수 있는 온전히 나만의 시간. 내 가슴에 활활 바람을 지필 수 있는 시간.  291-292


내 삶이 길을 잃은 것 같으면 길을 떠나봐.

내 삶이 꿈을 잃은 것 같으면 길을 떠나봐.

길 위에서 잃어버린 나를 다시 만나게 될 테니.


휴지를 하찮은 것쯤으로 생각하는 살마도 있겠지만 휴지 없이 단 하루를 편히 살 수 있겠는가.

내가 인도를 휴지 쪽에 가깝다고 한 이유는 인도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웃고, 울며, 사랑하고, 미워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깨끗하기도 하지만 지저분해지기도 하고 또 그렇게 버려지기도 하는 우리의 삶처럼.

휴지는 우리가 우러러보고 아껴주는 나무이기를 포기하고, 항상 우리 곁에 있고 싶어서 휴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주변에는 휴지처럼 항상 우리 옆에 있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모르는 것들이 참 많다. 깨끗한 물 한 잔부터 친구의 농담 한 조각, 그리고 식탁에 떨어지지 않는 엄마표 김치 한 접시까지.

여행을 하다보면 그런 것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현재 주어진 것에 감사하게 된다. 그 하나만 깨닫더라도 그 여행은 이미 헛된 것이 아니다.  296


인도의 길 위에는 이 찝찝함을 무릅쓰고도 길을 걷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301


길 위에서 무엇을 만나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곳.

인도인이라고 인도를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도가 어떤 나라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인도의 길 위에는 오물만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꽃도 떨어져 있다.  302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분명 사람을 감상에 젖게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밤이 특별할 건 없었어.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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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중국과 더불어 동양의 역사와 사상 및 문화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낟. 그렇기 때문에 동양, 특히 서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는 인도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3000년경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고대 이집트나 아시리아 그리고 바빌로니아의 문명과 거의 동시대에 발전된 문명으로 볼 수 있다.  49



베다 시대

아리아인은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 남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살다가 대략 세 갈래로 민족의 이동을 시작했다. 그 중 일부는 유럽으로 이동하여 유럽 아리아인이, 그리고 일부는 페르시아 지방으로 들어가 페르시아 아리아인이 되었으며 나머지는 인도로 들어와 인도 아리아인이 되었다.


베다 시대에 이르면 사회적으로 다양한 도시 국가들이 형성되고 사상적으로 종래의 브라흐마니즘을 넘어 <우파니샤드>와 같은 정통 사상이 그리고 슈라마니즘이라하는 비정통 사상이 함께 나타났다.


베다 문화는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의 종교와 철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61


<리그베다>는 신들에 대한 찬가의 모음으로 신이 제사장에 등장하도록 청하는 승려들이 부르는 노래이다.

<사마베다>는 <리그베다>에서 뽑아낸 노래 가운데 일정한 선율로 노래를 부르는 승려들의 노래모음이다. 

<야주르베다>는 희생제 의식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 업무를 담당하는 승려들에게 필요한 부분이다.

<아타르바베다>는 주문과 마법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 

<브라흐마나스>는 다양한 희생제 및 제사의식에 필요한 방법과 규칙을

<아라냐카>는 진리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색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인도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우파니샤드>는 <아라냐카>의 철학적 사상을 더욱 발전시키는 한편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해탈과 깨달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64-65


전기 베다 시대가 아리아인의 인도 침입을 통한 이주 및 초기 정착 시기라고 한다면 후기 베다 시대(기원전 1000~기원전 600년)는 인도에서의 영역 확장을 통한 아리아인의 본격적인 정착 시기이다.  85


결혼 역시 오직 같은 카스트 안에서만 가능하며 남자보다도 여자의 경우 자신보다 낮은 계급과 결혼하면 모든 사회적 지위와 권리를 박탈당할 뿐만 아니라 그 집단에서 추방되었다. 반대로 남자의 경우에는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여자와 결혼할 수 있었다.  92



엄격한 결혼의 제한은 맨 처음 아리아인과 비아리아인 간의 혼혈을 방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혼혈 현상이 심화되면서 카스트 제도는 더욱 복잡하고 다양한 직업에 의한 세습 및 신분 제도로 변질되었다.


인생의 시기를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각각의 시기에 인간들이 행해야 할 의무를 결정했다.

아슈마라라고 불리는 이러한 시기 구분은 인생의 시기를 대략 100년으로 간주하여 각각 25년식의 네 단계로 나누었다.

첫 번째 25년의 시기는 스승 밑에서 베다 및 삶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는 학습기이다. 이 시기에는 스승과 함께 생활하면서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 전반에 대한 지식과 제식 그리고 사회인으로서의 의무 등을 배운다.

학습기를 무사히 마친 학생은

두 번째 단계로 이제 집으로 돌아가 결혼을 하고 자신의 가정을 꾸려 나가는 가정생활기로 들어간다. 이 단계에서는 결혼을 통한 자손의 출생과 같은 개인적인 임무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자신이 행해야 할 여러 가지 공공의 의무도 함께 수행한다.

그리하여 대략 50세 정도가 되어 자식들도 무사히 출가시키고 또한 사회적인 의무도 어느 정도 완수하고 나면 

세 번째 단계인 은둔기에 들어간다. 은둔기는 부인과 함께 숲속으로 은퇴하여 사회적인 모든 의무를 벗어나 높은 진리를 추구하는 일종의 종교적 수행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은둔기를 넘어서면 남은 인생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혹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와 함께 홀로 방랑의 길을 떠돌아다니는 유랑기에 접어든다. 유랑기에는 말 그대로 철저하게 무소유의 자유를 누리면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상태대로 영혼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시기가 되면 성스러운 어머니의 강, 갠지스로 가서 이 생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한 뒤 그녀의 품에 안긴 체 다음 생을 위한 긴 휴식에 들어가거나 깨달음을 얻어 고통스런 세계로의 방랑을 멈춘 채 영원한 행복에 안주한다.  93-94


처음 두 단계에서는 주로 세속적인 요소를, 나머지 두 단계는 탈세속적이고 정신적인 면을 갖는다. 생의 네 가지 덕목이 된다.

물질적인 재물을 의미하는 아르타(Artha), 성적 욕망을 포함한 사랑을 뜻하는 카마(Kama), 도덕 윤리적 법칙과 규칙을 의미하는 다르마(Dharma), 최상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 또는 해탈을 의미하는 모크샤(Moksa)로 이루어진다. 

이 가운데 아르타, 카마, 다르마는 생의 네 단계 가운데 주로 전반부의 두 시기에 행해지는 부분이며 모크샤는 후반부의 시기에 지켜야 할 일종의 의무이다.  94


후기 베다 시대에는 급변하는 사회적 변화만큼 종교나 철학과 같은 사상 분야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 사상의 많은 부분이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된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99


전체적으로 후기 베다 시대의 전반기에는 제식주의가 형성되었고 후반기에는 <우파니샤드>의 철학적인 사색이 태동함으로써 오늘날의 힌두이즘을 낳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후기 베다 시대의 인도 사회는 부족국가의 틀을 벗어나 통일된 왕조를 형성하기 시작한 일종의 격동기이다.  102



비베다시대

기원전 6세기 전후의 시기.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부분의 중요한 철학, 종교적 운동이 나타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그리스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를 거쳐 소크라테스로 이어지는 철학적 사색이, 페르시아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그리고 중국에서는 유가의 시조인 공자와 도가 사상의 노자가 등장했다.


전통에 대한 비판과 거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종교가 바로 불교와 자이나교이다. 실제로 인도의 사상이 보다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사색의 틀을 갖추게 된 것도 불교와 자이나교의 영향이다.

인도의 철학과 사상의 근간인 <우파니샤드> 역시 이 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겻으로 브라흐만 자체의 자기 반성적 요소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107


아지비카 학파는 반브라흐마니즘을 주장. 모든 존재의 행위는 인간 스스로 혹은 절대자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보았다.

차르바카 학파는 가치론적인 면에서는 모든 존재가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한 어떠한 경우에도 미래란 불가능하며 오직 현재, 지금 이 순간만 사실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에 도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도덕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현실의 감각적 쾌락만이 인간 삶의 최고 목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10


자이나교는 마하비라라고 불리는 한 위대한 인물의 깨달음에서 비롯된 종교이다.  117

자이나교는 생명 있는 존재를 해치지 말 것, 거짓말을 하지말 것,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말 것, 사유재산을 소유하지 말것, 금욕을 지킬 것 등 다섯 가지 기본적인 계율을 가르쳤다.

불살생 또는 불상해의 계율을 가장 강조했다. 

후에 자이나교는 오직 흰색 옷만 입는 백의파와 어떠한 옷도 걸치지 않는 나의행파로 나뉜다.  119


자이나교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를 자아(Jiva)보다 낮은 위치에 두었다.

자신이 전생에 쌓은 업에 의하여 현생의 삶이 결정되기 때문에 누구든 전생에 쌓은 카르마를 보다 빨리 해소하고 현생에서 더 이상 카르마를 쌓지 않는다면 모두 다 해찰이 가능하다고 마하비라는 주장했다. 그는 또한 제사의식이나 희생제와 같은 행위는 절대로 해탈에 도움을 줄 수 없으며 오직 올바른 지식과 올바른 행위ㅏ 그리고 올바른 믿음만이 진정한 깨달음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121


고타마 싯다르타극 기원전 6세기경 지금의 네팔 지역에 있던 조그만 왕국(일종의 공화국) 카필라바스투의 왕자로 태어났다.  122

35살에 보리수 아래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드이어 붓다(깨달은 자)가 된 고타마는 베나레스 근처의 사르나트(녹야원)에서 처음 설법.

쿠시나가르에서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붓다의 가르침은 아소카 왕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아 인도 전역(

붓다의 입멸 후 200여 년이 지난 뒤)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퍼져나가 오늘날의 세계종교로까지 성장했다.  125


붓다의 사색은 기본적으로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모든 인간들이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과 그에대한 구체적인 해결에 관심을 집중했다. 사성제(四聖諦), 삼법인(三法印), 연기설(緣起設)등으로 일컬어지는 붓다의 근본 사상은 바로이러한 토대 위에서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고통과 괴로움은 왜 발생하는가?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 때문이라고 말한다.  126


붓다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기가 아닌 다른 존재에 의지하거나 그의 도움을 받으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팔정도라는 8가지 올바른 실행방법.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올바로 볼(正見)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올바로 생각(正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가지를 토대로 올바른 말(正言)과 행위(正行, 正業)를 함으로써 올바른 생활(正命)을 영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올바른 노력(正精進)과 올바른 마음가짐(正念) 그리고 올바른 정신집중(正定)이 필수적이다.  127


개혁적인 성향의 브라흐만 사제들은 그간의 폐단을 직시하고는 문제점을 개혁하기 시작했다. 

<우파니샤드>는 종래의 제식 주의를 비판 혹은 수정하면서 한편으로는 슈라마니즘으로 대변되는 비정통 사사의 요소를 접합시킨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 결과 <우파니샤드>는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합일이라는 인도만의 독특한 사상을 낳았다.  130-131


이와는 달리 불교는 종래의 지방어를 통한 가르침을 포기하는 대신 지성인들의 표준어인 산스크리어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기원후 1세기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대승불교 운동은 붓다를 깨달은 사람에서 점차 신격화하는 형태를 취함으로 절대신에 의존하는 브라흐마니즘과 유사한 종교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과 상인 계급의 재정적 도움으로 매우 크게 성장했다. 그럼으로 승려들 각자는 일반인을 위한 대중적 노력보다 붓다가 거부했던 형이상학적인 논의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이비 시작했다.  131


불교의 전통에 의하면 아소카가 전적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힘이 아닌 법에 의한 통치를 펴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다름아닌 칼링가 전투였다.  150

전 인도를 그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는 만족감에 그는 만명에 웃음을 가득 띄운 채 자신이 이룩한 위대한 과업을 다시 한 번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적들의 시체가 널브러진 싸움판 속을 유유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별안간 그의 가슴에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회의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피를 쏟으며 신음하고, 찢겨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바라보면서 아소카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채 몸을 숙였다. 

"보라! 이처럼 죽어 나자빠진 수많은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이렇게 자신들의 목숨을 바쳤을까? 정의, 진리, 법, 과연 어느 것이 그들의 목숨을 이렇게 내던질 수 있게 만들었을까? 그래, 적어도 군인들은 자신들의 의무 때문에 이렇게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치자. 하지만 여기 그들보다 더 많은 브라흐만 사제와 불교 승려들을 포함한 수행자들 그리고 일반인들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분노한 병사들의 눈먼 칼과 창끝에 아무런 이유 없이 목숨을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그렇게 이름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은 전쟁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거나 알 필요조차 없다. 그들의 눈에 비친 전쟁은 위정자들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한 가지 방편일 뿐이다. 자신들이 벌인 전쟁에 대해 위정자들은 겉으로는 정의와 법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소수 권력가들의 끝없는 욕심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은 일상 생활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쟁의 와중에도 오직 생존만이 목적이며 그것을 위해 평생을 몸부림칠 뿐이다."  152


비무에 다음과 같은 심정을 토로했다.

"... 칼링가를 정복하면서 나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브라흐만 사제들, 슈라만 수행자들 그리고 스승의 말에 복종하면서 올바르게 행동하고 가족과 친구와 친지들 그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대하던 민간인들까지 이유없이 죽거나 부상당해 고통받는 모습을 바라보던 나의 가슴에는 정말 온통 후외와 슬픔밖에 남지 않았다... 앞으로 나는 오직 진리에 맞는 법만을 실천하고 가르칠 것이다..."

이후 불교에 귀의한 아소카는 참다운 법과 정의에 의한 정치를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스스로 불교도가 된 아소카는 그럼에도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함께 인정하면서 타종교에 대한 배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53-154


아소카 왕이 불교를 국교로 채택한 이면에는 브라흐만 사제 계급으로부터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이루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강력한 무기와 군대를 바탕으로 한 힘의 정치가 아니라 참다운 사랑과 자비에 근거한 아소카의 정치는 이전의 인도 역사뿐만 아니라 이후의 역사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예라고 할 수 있다.  155


카니슈카 왕은 쿠샨 왕조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그의 치제 기간 중에 쿠샨 왕국은 가장 크게 번성했다.  162

쿠샨 왕조는 비록 인도에서 북부 지역의 지배에 그쳤음에도 인도의 역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65


찬드라굽타 1세는 장자가 아니라 가장 유능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에 따라 왕위를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사무드라 굽타(340~380년)이다.

'인도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릴 정도로 커다란 야망을 가지고 있던 사무드라굽타는 계속되는 전쟁에서 연승 행진을 거듭했다.

포로로 잡은 왕들 가운데 그의 위세에 굴복하여 기꺼이 충성을 맹세하는 자들에게는 영토를 합병하는 대신 조공을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172

인도 전역에 걸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사무드라굽타였지만 직접적인 통치는 주로 갠지스 강 유역과 힌두스탄 평야에 한정되었다. 그 이유는 아직 왕조의 기초가 확고하지 못하여 거대한 영토를 직접 다스리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173


사무드라굽타는 직접 정복하지 않은 지역의 여러 왕국들과도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등 주변 국가와 평화적인 외교 정책을 펴나갔다.  174


찬드라굽타 2세는 데바굽타(신의 굽타), 데바라자(신의 왕), 데바스리(신성한 존재)라고 불리는 한편 스스로는 위대한 통치자를 상징하느 비크라마디티야(무예와 용맹의 태양)라고 불렀다. 그는 부왕과 마찬가지로 유능하고 뛰어난 통치자인 동시에 용감한 정복자였다. 그는 결혼을 통한 평화적인 방법과 군사력 두 가지를 모두 활용하여 부왕으로부터 물려받은 광활한 영토를 더욱 넓히는 데 힘썼다.  175

찬드라굽타 2세 때 굽타 왕조는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177


굽타 왕조 시대는 인도 역사상 황금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엄격한 왕정 제도가 확립되었고 중앙과 지방의 행정 조직도 상당히 유기적으로 체계화되어 있었다. 정치적 안정은 상업의 발전과 더불어 문학, 예술, 종교, 건축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굽타 왕조의 지배력이 직접적을 영향을 미친 곳은 북인도 지역에 한정되었다.   183-184


굽타 왕조는 인도 사회에 몇 가지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첫째는 굽타 왕조 시대에 브라흐마니즘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힌두이즘의 형태로 부활되었고, 둘째는 이민족의 유입이 보다 활발했으며, 셋째는 무역과 상업의 발달로 인해 전체적인 경제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 세 가지 요인은 부와 재력을 바탕으로 한 상인 계급의 지위를 신장시켰으며 인도 문화의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187


굽타 왕조에서는 종래의 베다 중심의 브라흐마니즘을 보다 세속적인 종교의 형태로 변화시키면서 오늘날의 힌두이즘이라고 하는 인도 고유의 종교, 철학 사상을 발전시켰다. 힌두이즘에서는 우주의 창조주로서 브라흐마, 우주의 유지자인 비슈누 그리고 파괴자인 시바의 세 신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 신들은 하나의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신의 세 가지 표현이라는 삼신일체 신앙을 갖는다. 

시대와 상황 그리고 그를 예배하는 사람들의 바람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그의 모습을 지상에 드러내는데 이것을 아바타라(화신)라고 말한다.  188


바가바타 종교는 <바가바드 기타>에 나타난 크리슈나의 가르침을 근거로 한다. 원래<바가바드 기타>는 <마하바라타>라는 인도의 대서사시 가운데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마하바라타>는 <라마야나>와 함께 인도의 2대 서사시로 그리스의 위대한 작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ㅔ이>에 버금가는 작풉은로 평가 받는다.  200


굽타 왕조 시대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만큼 문학과 예술 방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룬 시기였다.

산스크리트어가 국가적인 언어가 되고, 인도의 2대 서사시 <라마야나>와 <바가바드 기타>가 오늘날의 형태로 완성되기도 했다.  207


예술 방면에서도 화폐, 동굴 사원과 벽화, 테라코타와 바위에 새겨진 다양한 그림등이 대표적이며 특히 탑 , 수도원 등 건축물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211


인도에서의 철학과 종교의 목적은 해탈의 추구에 있다.  221


종교적인 부분으로는 삼신일체(트리무르티)라는 힌두교의 독특한 신관이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 즉 힌두교는 우주를 창조하는 브라흐마, 창조된 우주를 유지하고 관장하는 비슈누 그리고 파괴를 담당하는 시바, 삼신일체의 교리를 형성했다.

이 가운데 비슈누 신을 섬기는 바이슈나비즘은 주로 북인도 지방의 대중적인 종교가 되었으며 시바 신을 믿는 쉐이비즘은 남인도 지방에서 널리 성행했다.  223


인도 철학은 크게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정통 철학(아스티카)과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비정통 철학(나스티카)으로 구별된다. 이 가운데 정통철학은 다시 베다에 직접적으로 근거를 둔 미맘사와 베단타 철학 그리고 실제로 베다가 아닌 다른 독립된 근거를 가지고는 있지만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느 상키야, 요가, 느야야, 바이쉐쉬카 철학으로 나뉜다.

이에 반해 비정통철학은 불교와 자이나교 그리고 차르바카라는 유물론 계통의 철학으로 전체적으로 슈라마니즘의 전통을 잇고 있다. 슈라마니즘은 대체로 아리아인의 인도 침입 이전부터 존재했던 금욕주의 혹은 고행주의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키야, 요가의 사상과도 연관을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정통의 육파철학이 체계화되고 브라흐마니즘이 새롭게 힌두이즘으로 변모하면서 힌두교와 불교의 논쟁도 이전보다 훨씬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224


남인도 지역은 적어도 마우리아 왕조의 통일국가 이전까지는, 북인도 지역이 아리아인 문화가 중심인데 비해 주로 드라비다인 계통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235


인도 무굴 제국은 우즈베크 공화국에서 태어난 바부르로부터 시작했다. 1483년 2월 우즈베크의 시르 강 상류 지역에 위치한 페르가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티무르의 5대 손이며 어머니는 칭기즈칸의 15대 손이었다.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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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접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어느 시공간에서 벌어진 일들이 하나하나의 점이 되어

생에 대한 흔적이 한 장의 점묘화(點描畵)로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 또한 한 장의 점묘화가 아닐까.



델리 


양개 선사에게 한 스님이 물었다. "뱀이 개구리를 잡아 먹으려 하고 있을 때 개구리를 구해줘야 합니까, 가만히 내버려둬야 합니까?"

"구해준다면 도를 보지 못하게 되고, 구해주지 않는다면 생명을 저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15


여행자 숙소가 몰려 있다는 파르간지의 메인 바자르(시장)을 찾았다.  16

시크교도들은 힌두교 전통을 따르면서도 카스트의 차별과 모든 의식을 무시하고, 이슬람의 유일신 사상을 강조해 우상숭배를 금하고 있다. 그들은 경전인 <그란트(Granth)>를 구루로 삼아 날마다 암송한다.  21


인도의 명동이라고 할 수 있는 코넛 플레이스는 내가 생각한 인도와는 달랐다.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고, 대형 백화점도 있었다. 쇼핑몰답게 밖에서 봐도 조명의 화려함이 극에 달했다.  26


가네샤는 고난과 재난을 없애는 신으로 숭배되고 있으며, 가게나 버스의 앞유리에는 락슈미 여신의 사진과 함께 가네샤의 사진이 부착되어 있다.

인도의 신들을 알면 인도의 문화를 알게 되고, 그 사람들의 생활방식도 이해하게 된다.  30-31


<바가바드기타>는 인도 문학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마하바라타>의 한 부분이다.  44



아그라


<우파니샤드>에 '우유는 그 안에 소리를 갖고 있어 마시는 사람에게 좋은 소리를 내게 한다'고 쓰여 있다.


타지마할의 입장료로 가난한 인도를 먹여살린다고 한다. 외국 관광객은 950루피, 인도 사람은 15루피.  53

안으로 들어가면 곽을 둘러싼 대리석 판으로 외어 있는 흰 격자창살이 보인다. 격자창살 위는 영원히 지지 않는 튤립이나 작은 꽃들로 장식되어 있다. 여러가지 보석으로 상감한 이 꽅들은 화병에 꽂혀 있으니 샤 자한은 날마다 부인에게 꽃을 바치고 싶었던 것이다. 

영묘 건물은 세 겹의 벽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나는 이곳에서 죽은 영혼 마저 자기 곁을 떠날 수 없게 세 겹의 벽 속에 가두어버린 한 남자의 소유욕을 보았다. 다음 생에 또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왕의 애끓는 사랑이 느껴진다.


달밤에 왕이 여인과 산책하는 그림을 보면, 그 주변의 사물들까지 자세히 화푝에 옮겨놓았기에 두 사람이 나누는 농밀한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질 정도다. 한 가지 재미있느 사실은 이집트의 그림들처럼 사람들의 얼굴을 대부분 측면으로 그려놓았다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사람을 측면으로 그린 이유가 정면 모습을 그리기 어려워서였다고..  54-55


아그라 성의 왕의 알현장은 하얀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그 앞에는 깊은 우물이 있다. 그 우물은 식수 공급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처형을 위한 곳이다.  56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왕이 된 아우랑제브는 왕좌에 오르면서 엄격한 고행에 전념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먹지 않았고 야채와 과일 졸임만 먹었다. 또한 자주 단식을 행했고 아그라에서 큰 혜성이 나타났을 때는 소량의 물과 기장으로 만든 빵만 먹었는데, 자칫 죽을 뻔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우랑제브는 호랑이 가죽 하나만 덮고 땅 위에서 잠잤다고 전할 만큼 금욕적인 생활을 햇다. 그런 금욕적인 생활로 자신의 죄가 씻어지리라 생각했을까? 이러한 인간의 이중성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57-58



파테푸르시크리


무굴 제국의 악바르는 8백여 명의 여인들로 채워진 아방궁을 지녔음에도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아들이 없던 악바르 대왕은 이슬람 수피성자 셰이크 살림 치스티를 찾아가 아들을 점지해달라고 부탁했다. 래서 그는 성자로부터 아들을 갖게 되리라는 예언을 받는다. 성자의 예언대로 1569년 시크리 근방에서 아들 자한기르가 태어나자 크게 기뻐한 악바르 대왕은 황량하게 버려진 억덕이었던 이곳에 도시를 건설할 계획을 세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파테푸르 시크리로, 14년간 무굴 제국의 수도였다. 악바르 대왕은 인도의 여러 종교를 아우르는 통치철학을 갖고 있었는데, 파테푸르 시크리는 힌두와 이슬람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악바르는 자신의 무덤을 살아 있을 때부터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들어가는 네 개의 문마다 힌두, 기독교, 이슬람 등의 양식을 상징해 세웠다고 하니, 그가 각 민족과 여러 종교의 화합을 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의 색깔을 죽인다는 것, 그것을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67-68


악바르 왕이 아홉 개 보석 중 하나로 꼽는 비르발 재상을 위해 지은 건물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악바르 왕은 글자를 모르는 문맹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혜로운 비르발 재상을 항상 옆에 두고 모든 일을 의논했는지도 모른다. 악바르 왕과 비르발 재상 사이에는 수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71

 

파테푸르 시크리의 왕궁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72



오르차


오르차는 인도의 비경 중 하나다. 이곳은 폐허가 된 낡은 성을 보러 오기보다는 작은 마을의 고즈넉함과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75


자한기르 성은 비밀통로가 많아 자칫하면 길을 잃을 정도로 미로다.  77



카주라호

남녀의 교합상을 미투나 상어라고 하는데, 카주라호 사원 외벽에는 온통 미투나상이 조각되어 있다.  85


신은 왜 이런 미투나 상이 필요했을까? 

우리의 거친 에너지를 명상과 기도를 통해 맑은 기운으로 승화시키듯, 탄트라에서는 우리의 에너지를 성행위를 통해 깨달음의 에너지로 변형하려는 것이다. 두 개의 육체를 통한 만남은 깊은 영적 결합으로 승화되어야 하고 궁극에는 빛으로 변형되어 신비의 절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86  


자이나교에서는 무소유를 철저히 지키기 위해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앟고 나체로 수행하기도 한다.  91



바라나시


인도에는 여러 들급의 기차가 있다. 가장 빠르고 시설이 좋은 초특급열차와 특급열차가 있다. 특급열차에도 여섯 등급이 잇어 일등칸부터 삼등칸에는 에어컨이 설치 되어 있다. 배낭여행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특급열차 SL(Sleeper Class) 객실에는 에어컨은 없지만 가격이 저렴한데다 각 칸마다 양쪽으로 세 개의 침대가 있어 장거리 여행을 하는 데 별다른 불편이 없었다.  99


사두들은 죽으면 화장을 하지 않고 오렌지색 천으로 감아 수장시킨다고 한다.  106


아씨 가트에서 가까운 힌두 대학에 갔다. 규모가 워낙 커 걸어서는 다 둘러보지도 못할 정도다  110


저녁 6시가 되면 날마나 갠지스 강변에서 신을 위한 푸자가 행해진다.  112


두르가 사원은 시바의 부인인 두르가 여신을 모신 곳으로, '원숭이 사원'이라 부르기도 한다.  116


바랏트 마타 사원은 영국 식민지 통치 아래서 독립 그리고 종교적인 갈등과 빈부의 격차를 넘어 한 민족으로서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네루가 세웠다.  116


아소카 왕은 최초로 인도의 통일을 완성시킨 왕이며, 인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삼국유사>에는 아육왕이라고 기록.


사르나트 박물관은 작지만 볼 만한 것들이 많았다.  120



라즈기르


인도에서도 몇 개밖에 없다는 온천장.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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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일컬어 흔히 '천의 얼굴'이라고 한다. 당신이 알고 있는 인도는 그토록 두텁고, 그토록 복잡한 인도의 한 조각일 뿐이다. 

인도의 특성, 다원성이 적용 되지 않는 단 하나의 영역이 있으니 바로 '느림'이다.  10


'느리다', '빠르다'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인도인에 대한 '느림'과 '게으름'은 누구의 기준인가?  11


자기의 안경으로만 인도를 본 영국은 인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12


인도인에게 시간은 직선이 아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은 반복되고 다시 돌아오며, 시간은 시작도 끝도 없는 순환고리이다.  13


어쩌면 시간은 직선으로 날아가는 화살이 아니라 나를 떠났다가 다시 내게로 날아오는 부메랑인지도 모른다. 

20세기 최대의 이데올로기인 발전은 환경 파괴라는 부메랑으로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다.  14


알고 보면 위생이니 뭐니 하는것도 목적은 향상시키지 않고 수단만을 강조하는 서양의 산물이 아닌가?  15


볼일이 끝나고 나서는 가까운 강이나 개울로 간다. 진흙으로 몸의 더러워진 부분을 문질러 닦고 물로 헹군다. 두세 차례 반복. 그런 다음 왼손부터 시작하여 손과 발을 진흙으로 여러번 씻는다 다시 다른 흙으로 이 과정을 반복한다. 도시에서는 진흙이 아닌 비누를 쓴다. 자, 이래도 비위생적인가?  19


인도인은 '음식은 먼저 눈으로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 다음에 입과 혀로 맛을 느낀다.'  20


인도인은 발을 천시한다. 가장 천한 발을 다른 사람의 머리에 대거나 신발로 머리를 때리는 것은 그들에게는 최대의 모욕이다.  23


발에는 절대 금 장신구를 하지 않는다. 허리 아래에는 은으로 된 장신구만 착용한다.  24


반대로 머리는 신체 중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다. 남자들은 쇠똥이나 재, 또는 빨간 가루를 이마에 찍어 카스트를 표시하기도 하고, 시바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수평선을, 비슈누 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수직선을 그어 소속된 종파를 광고한다.  24


머리와 발의 차이가 하늘과 땅인 만큼 브라만과 수드라의 차이도 엄청난 것이다.  25


강가의 상류 하리드와르와 리시케시, 중류인 바라나시, 그 끝인 벵골만까지 나는 강가를 열번도 더 보았다. 

강가는 눈 덮인 히말라야를 출발하여 하리드와르와 칸푸르를 지나 알라하바드로 흘러든다. 그곳에서 진흙탕물인 강가는 델리와 아그라를 지나온 그보다 맑은 야무나 강과 합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이미 사라진 사라스와티 강과도 손을 잡는다. 세 강이 만나는 알라하바드는 힌두들의 순례지이다.  39-40


시바 신은 무려 8천 4백만 가지의 다양한 체위를 고안했는데, 숭배자들에게 알려진 건 겨우 8만 4천 가지! 이러니 시바는 다산의 신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다.  56


'카주라호'와 '시바 링감' 그리고 '카마수트라'의 인도. 위성방송이 안방에다 공개적으로 섹스를 팔고, 콘돔이(가장 유명한 콘돔 제품은 당연하게도 '카마수트라'라는 상표를 달고 있다) 무차별 광고를 해대는 곳. 매춘부가 수백만 명이고 에이즈 환자가 3,000,000명이 넘는 나라. 이렇듯 성이 넘치는 에로스의 천국으로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명상과 금욕이라는 또 다른 얼굴을 갖고 있다.  58


브라만 성자와 요가수행자의 공동 목표는 자웅동체이다.  59


옛날 인도에 비폭력을 뿌리내리게 한 인물이 바로 유명한 정복자 아쇼카 황제.  63

'보이지 않는 사랑'은 아름답지만 '보이지 않는 폭력'은 끔찍하다.  66


인도인의 계산을 보자. 먹은 음식은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와 골수가 되었다가 30일이 지나면 정액으로 바뀐다. 40방울의 피가 한 방울의 정액이 되는데, 한 번의 사정으로 14그램 정도의 정액이 소요된다. 이는 27킬로그램의 음식이 만든 에너지와 같다. 한 번의 성관계는 24시간의 정신노동이나 72시간의 육체노동과 동일하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69


해방 후, 인도에서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지방은 벵골, 케랄라. 트리푸라 3개 주이다.

테레사 수녀가 '수고하고 짐진 자'를 보살피는 곳이 바로 벵골 지방이다.  79


영국의 통치가 온건하지도 않고 결코 '은혜'와 '축복'이 아니었다는 점은 얼마든지 예증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기근이다. 영국이 인도에 오기 전에는 대기근에 관한 기록이 한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이 발을 디딘 이후 기근은 종종 찾아왔고, 1943년 벵골 지방에서는 2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 인도의 부가 해외로 유출된 게 주요 원인이었다. 1930년에 영국이 해외에 투자한 자본의 4분의 1은 인도에 투입되었다. 물론 인도에서 근무한 영국 관리들의 봉급과 연금 지급은 처움부터 식민지 인도의 몫이었다. 영국은 참깨를 쥐어짜듯 인도를 쥐어짜 이득을 챙겼던 것이다.

영국이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이해 세운 계획도시 뉴델리에 있는 '인도의 문'에는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위해 싸우다 숨진 8만여 명 인도 청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뿐인가. 2차 세계대전 기간에도 인도군은 지배국 영국을 돕기 위해 '치와 땀'을 흘렸다. 인도군은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20여만 명이었으나 전쟁이 끝난 1945년에는 그 열 배인 220여만 명으로 불어났다. 전쟁기간 동안 소요된 영국의 국방비 역시 절반은 인도가 떠맡았다.

이 열불나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인도가 영국을 '미워 미워 미워'하지 않는 이유는 영국 통치의 긍정적인 영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엄청난 인구를 익르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인도는 영국에 모종의 빚을 졌다고 간주하고 있다. 영국이 도입시킨 의회제도, 철도제도, 교육제도를 인도는 고맙게 생각하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산업발전의 기반을 다진 것에도 좋은 점수를 준다. 각종 제도와 정책을 도입한 식민 정부의 목적이 순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결과적으로 인도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영어와 반영운동이 인도를 통합시켰다는 점도 빠뜨리지 않는다.  83-84


인도인은 대개가 종교에 깊이 중독된 중증 환자들이지만, 그 대다수는 브라만의 베다나 우파니샤드를 모르거니와 고상한 힌두 철학에도 깜깜이다.

대신 인도 사람들은 자기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대상을 경애하고 숭배한다.  103


구루 나낙(1469~1539)이 세운 시크교는 힌두교와 이슬람의 장점을 따서 만든 종교로서 유일신을 믿고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다. 힌두처럼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지만 카스트를 거부하고 갠지스를 순례하지도 않는다. 모두 같은 성을 갖는 것도 카스트의 구분이 없다는 뜻이다.(1500만명이 넘는 그들의 성씨는 모두 '싱', 결혼한 여자는 미세스 싱이 아니라 모두 '카우르'가 된다) 시크는 근면하기 때문에 거지가 없다.

펀자브 지방은 시크의 분리주의 운동이 있었다. 

인도에 갔다가 마약에 돈 떨어지고 담배꽁초까지 떨어지면 시크사원(구루드하라)을 찾아가라. 관용과 사랑을 실천하는 시크 사원에서는 거저 먹여주고 재워주니.  113


시크 못지 않게 돈 버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있다. 배화교도(조로아스터교도)의 후예들이다.  114


고아지방은 포루투갈인과 인도 여인 사이에서 난 혼혈이 많아 이국적이다. 이곳 여인들은 사리보다 스커트를 많이 입고 생활 방식도 다른 지방과 달리 자유롭다.  115


힌두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은 무슬림이엇다. 인도를 통치한 무슬림 지배자들은 자기드로가 구분하여 인도(옛 이름은 힌드)에 사는,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몽땅 힌두라고 불렀다. 전체 인구 - 무슬림 = 힌두였다. 그 뒤를 이어 인도를 지배한 영국도 무슬림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그들 이외의 인구를 힌두로 뭉뚱그렸다. 

힌두교는 종교의 창시자나 예언자가 없음은 물론 자신을 힌두라고 생각하는 살마에게 '하라. 하지 말라'는 정확한 가이드라인을 주지도 않는다. 힌두교에서 성서로 여기는 베다나 푸라나를 읽는 힌두는, 아니 그 이름이라도 아는 사람은 5%밖에 안된다. 일정한 예배의 형식도 없는 자유 그 자체이다.  120


이질적이고 잡다한 생활방식을 모두 인정하는 힌두교는 기원전 1500~500년경에 성ㄹ힙되었다. 중심 사상은 베다의 전통을 따르는 브라만 중심의 브라만교이지만, 여기에 북부 인도에 존재하던 다양한 민간신앙이 결합되어 대중을 이끄는 독자적인 종교 이념으로 발전했고, 세월이 가면서 전 인도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즉 힌두교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브라만교의 독선에 반기를 든 인도의 프로테스탄트, 불교와 자이나교를 수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한 지방에서 동거를 해온 이방의 종교인 이슬람교까지도 포용한다. 

수천 년 동안 무엇이든 받아들여온 힌두교에는 헤브라이즘에서 볼 수 있는 '정통'이나 '이단'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존재하는 살마의 수만큼 신이 존재하고 그 수만큼 다양한 믿음을 인정하는 융통성이 바로 힌두교의 생명이요 진리이다.  121


다른 사람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와 달리 힌두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를 강조한다.

힌두는 구원이나 해탈도 나 스스로 이룬다고 생각한다.  122


카르마(業) - 카르마는 힌두 사회의 수많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개념이다.  125


윤회사상은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다르마)를 다하면 카르마가 좋아진다고 유혹한다. 의무를 다하는 불가촉민은 브라만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보다 나은 불가촉민으로 환생할 수 있다는 논리다.  126


알 수 없음과 두려움이 사람들에게 최선을 부추긴다. 더 열심히 살아서 아예 이 아리송한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탈이며 구원이다. 그리하여 힌두에게 해탈은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 열심히 사는 것이다.  127


예전보다도 많이 약화되었지만 카스트는 아직 살아 있다. 집에서, 거리에서, 사무실에서, 힌두 사원에서 여전히 그 힘을 행사한다. 카스트는 포루투갈어로 혈통을 의미하지만 인도인들은 색깔이라는 뜻의 '바르나'라고 부른다. 이 제도는 모든 인간이 불평등하다는 데서 출발한다.  132


'자티'는 오랜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카스트가 서로 갈리고 나뉘어 3~5천 개의 작은 집단으로 분류된 것으로 한층 세분화된 개념이다. 같은 카스트 안에서도 자티에 따라 다른 위상을 갖고 다른 규칙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 한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는것은 동일한 자티 안에서 이루어진다.

쉽게 설명하면, 북부지방의 브라만과 남부의 브라만은 동일한 계급이 아니다. 두 브라만 가의 갑순이와 갑돌이는 결혼을 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지역의 수드라 사이에는 같은 계층이라도 연대의식이 없다. 그뿐이 아니다. 한 마을에 사는 수드라 내부에도 상하 귀천의 구별이 있다. 대장장이, 옹기장아, 세탁부, 이발사는 자신과 브라만이 다르듯이 서로가 서로를 다르다고 여긴다. 심지어는 같은 청소부라도 거리를 청소하 자티와 '변소 쳐!'를 외치는 자티는 다르다.  133~134

소를 먹이는 집안의 경우는 소 먹이는 자티가 규정한 세밀한 규칙의 속박을 받고, 또 옷감을 짜는 집안의 직녀는 그 자티의 규정을 따르면서 신분에 맞는 제약과 대접을 받는다. 

계층이 낮을수록 부정하게 여겨지며, 금기사항도 적다. 똑같은 수드라 내부에서도 더러운 일에 종사하는 계층이 그렇지 않은 계층보다 위상이 낮다.  134


'언터처블(Untouchable)' 불가촉민(不可觸民), 접촉을 하면 부정을 타므로 접촉해서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남부지방의 남부드리 브라만은 천민을 보기만 해도 부정 탄다고 생각한다.  137

따라서 그들은 몸에 방울을 달아 순수 브라만이 그 소리를 듣고 사전에 피하거나 눈을 감을 수 있게 한다.

우파니샤드를 보면 개나 돼지처럼 취급되는 '찬달라'라는 천민이 있다. 

2세기 불교도 자나카도 마을 밖에 격리되어 사는 천민집단을 언급했다.

마누 법전에도 동구 밖에서 따로 거주하며 햇빛이 있는 낮에는 마을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또 11세기의 알비루니도 마을밖에 살며 더루운 일에 종사하는 집단을 기록했다.

1990년대로 와도 인도의 불가촉민의 삶은 별 차이가 없다.  138

불가촉민은 마을 사람들과 우물이나 강물을 함께 쓰지 못한다. 가까운 마을의 우물을 두고 몇십 리씩 물을 길러 나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139

1991년의 인구 센서스를 보면 불가촉민은 1억 5천만 명으로 인도 총 인구의 약 17%이다.  141


마하트마 간디는 신에게서 버림받은 이들에게 '하리잔(신의 자식)'이라는 역설적인 이름을 지어주고 독립 세력을 이루고 떠나가는 이들을 힌두 세계로 끌어들였다.

여전히 건재하는 높디높은 벽 앞에서 일부 불가촉민은 간디가 지어준 '하리잔'이라는 이름대신 자신을 '달리트(학대받는 자들)'라고 부른다.  142



마누 법전에는 이상적인 남편과 아내의 연령 차이가 16~18세라는 기록이 보인다.  169


힌두의 악습으로 오랫동안 지탄을 받아온 사티 제도, 즉 죽은 남편과 함께 살아 있는 아내를 불에 태우는 것도 실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두려움에서 나왔다고 한다.  170


사티는 본래 수많은 아내를 가진 시바 신의 '퍼스트 레이디'였다. 사티는 아버지가 남편에게 퉁명스럽게 대한 데 대한 항의의 표시로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173



1993년에 마무리된, 장장 8년에 걸친 인도 사회 조사에 따르면 인도 전역에 흩어져 있는 각 집단의 88%가 육식을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209


인도인들은 대개 모든 것을 인정하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음식에 관한 한 타협이 없다. 그중 채식을 고집하는 힌두와 쇠고기를 먹는 무슬림의 심한 갈등이 단적인 예이다. 

힌두는 음식을 감염체로 간주한다.  211


인도에는 2천 개의 기차역이 전국에 흩어져 있다.222


영화를 보러 가면 인도가 보인다. 영화에 나오는 장면의 반대가 바로 인도의 현실이다.  235

인도의 영화는 사회적 가치를 주입하는 역할을 한다. 권선징악의 도덕이 그렇고 전통적인 여성상이 그렇다.  236


자와하르랄 네루

공화국과 세습제는 정치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두 얼굴의 공존이 가능했다. 1947년의 독립 후 50년 도안 네루 집안이 인도를 통치한 기간은 38년. 자와하르랄 네루는 1964년까지 무려 16년 9개월이나 장기집권했다. 

그의 딸 인디라 간디는 1966~77년과 1980~84년 두 차례 정권을 잡았고 인디라의 아들 라지브 간디는 어머니가 암살된 1884년에 사십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혜성처럼 등장. 5년간 총리를 지냈다.  241


비하르와 우타르 프라데시 같은 지방은 인구의 반이 빈공층이며 천만 뭄바이 시민의 절반이 슬럼에서 산다.  259

인도의 도시화는 아직 낮아서 인구의 25%가 인구 5천 명 이사으이 도시에 살고 있는 정도다. 그러나 그 도시 인구의 4분의 1이 슬럼에 거주하고 대도시는 그 비율이 훨씬 높다. 수도 델리의 인구 중 3분의 1은 오늘도 슬럼가에서 하루를 쓸어담는다.  269


인도인은 흰색을 선호한다.  262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검은 까마귀보다 백로를 아꼈던 우리처럼 사람은 보편적으로 검은색보다 흰색을 선호한다. 유럽에서도 흰색은 즐겁고 매력적인 성질을 상징하고 검은색은 그 반대로 대개 불길함과 죽음을 상징한다. 인도 신화에는 시바 신이 아내 파르바티의 검은 피부를 놀리자 그녀가 황금색 피부를 얻기 위해 금욕적인 수행을 하는 장면이 보인다. 여성의 흰 피부에 대한 동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동소이한 모양이다. 인도에서도 흰색은 순수와 정결을 뜻한다. 사라스와티 여신은 늘 흰 옷을 입고 흰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단정한 모습이다.  264


이기의 삶에서 이타의 삶으로....  296

인도를 구경하는 것은 동시에 여러 시대와 여러 문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312



후기 

'인도를 일주일 여행한 사람은 책을 한 권 쓰고 일곱 달을 머문 사람은 글을 한 편 쓰지만 인도에 7년 동안 거주한 사람은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역설적이지만, 알수록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다원적인 인도의 특성 때문이다.  314-315


천의 얼굴 인도는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분명하게 결론을 내리려 드는 20세기의 합리주의를 향해서 비웃음을 던진다. 사실 이 세상에 분명한 것이 어디 있는가? 한낱 내 기분도 아침과 저녁에 다르거늘.

한 길 사람 속도 알기 어려운데 수천 년의 역사와 10억의 인구가 빚어내는 다양한 사회의 집합체인 인도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건 만용을 넘어 무모함에 가깝다.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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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타가 내게 물었다. 

"나도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물어보십시오."

"내가 당신을 집으로 데려왔던 날 저녁, 당신은 내게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동전을 던졌어요. 왜 그랬죠?"

"당신에게 진실을 말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으니까요, 나는 뭔가를 결정할 때마다 그 동전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앞면이 나오면 당신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뒷면이 나오면 그 자리에서 작별 인사를 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앞면이 나왔지요."

"그럼 뒷면이 나왔다면 내게 당신 얘기를 하지 않았겠군요?"

"어차피 뒷면은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당신은 그 정도로 운을 믿나요?"
"동전이 운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이 동전을 보십시오."

그리고 나는 주머니에서 일 루피짜리 동전을 꺼내 스미타에게 건네줬다.

스미타는 동전을 받아들고 살짝 위로 튕겻다가 다시 한번 튕겼다. 

"아니.... 양쪽 모두 앞면이군요!"

"그렇습니다. 그게 내 행운의 동전입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말했듯이 운은 그 동전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나는 스미타에게 동전을 받아 하늘 높이 던졌다. 동전이 위로, 위로 올라가 푸른 하늘에서 반짝거렸다. 그리고 바다에 떨어져 깊이, 깊이 가라앉았다.

"왜 행운의 동전을 던져버렸나요?"

"이젠 더이상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행운은 내면에서 오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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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아래의 표지와 제목은 다르나 내용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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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예고편이 없다. 그날 그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우리는 다시는 맛보지 못할 순간들을 맛보고 있다. 여행 또한 마찬가지다.  14


지금은 자극의 시대다. 진한 조미료로 미각을 자극하지 않은 음식은 찾는 이가 없고, 테크노나 뽕짝의 고음으로 가막을 자극해야 음악을 들었다고 할 뿐 물이 흐르고 산들바람이 불고 곤충이 우는 것을 천지의 교향악으로 여기지 않는다. 음료수도 톡 쏘는 콜라는 '바로 이 맛'이라고 하면서, 톡 쏘지 않는 물 맛이 제 맛인줄 모른다. 어둠 속에 빝나는 폭죽에 환호하고, 일출과 석양빛엔 감격하면서도 변함없이 밝게 빛나는 낮 동안 햇빛의 고마움은 잊는다. 

단맛을 탐닉하면 달지 않은 것을 대할 때마다 불쾌해지고, 자극에 맛을 들이면 자극적이지 않을 때 늘 지루해져. 괴로움에 휩싸이는 과보를 받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61-62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이니, 약견제상(若見諸相)이 비상(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

'모든 형상들은 다 거짓이고 헛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그 형상이 아님을 알면 바로 여래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는 금강경 게송(偈頌)  101


신이 나를 안내한 토굴은 밀교의 고행승이 비밀 수행을 하는 곳이 아니라 인간이 따사움을 나누는 바로 이곳이었다.  113


눈이 게으르지 발은 게으르지 않았다.  121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큰 행복은 없다.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사람과 마시는 차 한 잔의 맛. 그것은 맛을 넘어서는 멋이다.  136


2008년판 부터 책의 제목이 <인도오지기행>으로 변경되었다. 

저자의 이름도 조연현에서 조현으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목차는 변경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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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교육 제도 : 10 - 2 - 3

10년 - 초등(소학교)과 전기중등(하이스쿨)

 2년 - 후기중등(하이어 세컨더리 스쿨)

 3년 - 고등교육(college)


10학년과 12학년에 치르는 전국공통시험(한국 수능형태)

10학년시험에서 문과, 상경, 이공계열 선택

12학년 시험에서 대학 및 학부결정


인도 영어 사용자층의 인구는 약10%정도 - 공립학교 영어교육은 형식적, 사립학교의 영어교육은 체계적이고 스파르타식모방.


인도인들은 처음 만났을때에는 우선 영어로 인사를 한다. 이후 대화에서 서로 동일한 모어의 사용 확인후에는 모어로 대화한다.

인도인의 경우 모든 사람이 최소한 세 가지 언어는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출신지언어와 영어 그리고 애인이나 부인(남편)의 모어.


인도의 출산률은 여전히 높지만 이러한 문제는 빈곤층에 집중. 

그럼에도 계속 아이를 낳는 이유 중에는, 단 한 사람이라도 반듯한 직정에 들어가기만 하면 다른 가족도 덕을 볼 수 있다는 일종의 보험과 같은 사고 방식이 작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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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인의 종교성은 현실 생활에서 어떻게 반영되는가? 생활의 단순성, Simple Living이다.  18


인도인들은 자신에게 불쾌하게 대해도 좀처럼 그들과 관계를 끊고 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인도 사람들은 싫은 사람들과도 끝까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남을 돕는 데 마음을 쓰지만 절대로 돈을 써서는 돕지 않는다. 돈에 대해서는 아주 인색하다.  20-21


흥미로운 것은 이 '돈' 문제가 현실에서 잘 먹고 잘 살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종교의례를 따라 살려니까 돈이 드는 것이다.  21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는 알주나와 인간의 모습을 한 신 크리슈나가 전쟁을 앞두고 벌이는 논쟁이 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바가바드 기타이다.  30


논쟁에는 어느 한쪽의 절대적인 승리라는 것이 없다. 내용에 관한 것이든지 절차에 관한 것이든지 논쟁에서 이겨도, 긴 쪽의 의견은 남게 된다. 그래서 논쟁을 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가져온 것이다.  

인도인에게 침묵은 금이 아니다. 말하는 게 금이다.  31


수많은 인도 신화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왔다.  

이 방대한 베다는 경이롭게도 글귀에 큰 모순이 없이 스승들에게서 제자들에게 구전되어 온 것이다.

마하바라타 한 작품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합친 것의 7배가 넘는다.  32-33


아시아 교육은 암기를 중시하는데, 인도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인은 머리로 외워서 손으로 쓰지만, 인도인은 머리로 외워서 입으로 말한다. 

그 많은 것들을 정확하게 구전하기 위해서 인도에서는 오래 전부터 암기력을 중요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효과적으로 암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천연약재까지 개발해냈다.  33


인도의 언어 종류는 가히 기록적이다. 공용어 18개, 외국어 103개를 포함하여 상용하는 언어만 1,652개를 유지하고 있다. 이 중에 백만 명 이상 사용하는 언어는 33개 이상이다.  36


인도의 전통적인 말하기 문화는 서구 민주주의를 적응하기에 더 궁합이 잘 맞았다.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국민이 자신들의 의사를 말하는 데서 시작한다.  38


맣 많이 하는 것이 약점은 아니다. 말만 많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약점이다.  39


인도인들은 문제가 있을 때 문제를 미루어 놓고 명상을 하는 경우가 많다. 명상을 통해서 문제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러고 나서 그 내용에 대해 집중해서 생각하고, 분석하고 논박해 낸다. 

명상에 들어갈때는 먼저 사념을 버린다. 자연히 감정이 가라앉는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한다. 이 명상은 마음의 평정을 이루어 주고, 자신들의 문제를 차분히 정리 접근하게 돕는다. 명상을 하면 자기주장의 논거가 분명해진다.  39


현재 인도인의 말 잘하기 교육은 Debate Competition(토론대회) 이다.  40


인도인의 문화에 대한 우월감. 인도인은 세계에서 자신들보다 앞선 문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도의 풍부한 신화도 자료 및 사고 공급에 한 몫을 한다.  41


인도인들의 말하는 방법들.

  - 주도적이다.

  - 책임을 지는 언급은 피한다.

  - 상대의 약점을 노출한다.

  - 감정적인 표현을 피한다. 인도인은 일을 단계적으로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감정을 담지 않고 말한다.  42-43


바가바드 기타. 인도인이 가장 중시하는 경전이다. 여기서 마야(Maya), 모(Moh), 크로드(Krodt) 이 세 가지를 주의하도록 가르친다.

마야는 돈을 의미한다. 돈을 주의하라는 말은, 돈은 필요하지만 돈을 쫓는 삶을 살지 말라는 말이다.

모는 세상 것들에, 예를들면 세상 명리나 색에 유혹되지 말라는 것이다. 

크로드는 분노로서, 내면을 가라앉혀 화를 내지 말라는 말이다.

물질을 쫓거나 주색을 추구하는 삶, 화를 내지 않도록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 중 앞의 두 가지는 유혹에 대한 반응이지만 세 번째 것은 자기 통제를 잃은 경우에 대한 반응이다.

인도인들은 첫째로 화내는 사람은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이라고 판단한다.

인도인들은 화내는 사람을 어떻게 취급할까? 먼저, 인격 훈련이 덜된 사람으로 판단한다.

둘째는 화내는 사람에 대해 그 상황에서는 힘이 없다고 판단한다.

셋째는 화내는 사람이 자기 잘못을 감추려고 화를 내고 있다고 판단한다.  52-53


감사 표현을 하지 않는 것은 이 사람들이 특별히 외국인인 우리를 대하여만은 아니다. 인도인 사이에도 감사 표현이 별로 없다. 

이유는?

첫째는 종교적으로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오늘의 선행은 내세를 위한 준비다.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신이 죽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둘째로 사회 관습상 인도인은 감사의 관계를 기억한다는 것이다.

감사를 서둘러 말로 할 필요가 없다. 인도인들은 감사하다고 말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감사를 마음에 새긴다. 인도인들은 도와주고 나서 금방 선물을 받으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선물 대신 지속적이고 끈끈한 관계를 더 원하기 때문이다. 인도인을 도우면 어떤가? 감사하단 말도 하지 않고 선물도 안 준다. 그런데 후에 자기 지위를 이용하여 도움을 준다. 그 당시에 표현하지는 않지만 그 일은 일단락된 것이 아닏. 그 일로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55-60


거짓말을 옳다고 하는 인도인도 없지만 그르다고 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68


델리대 정문에서 마주보이는 야산 공원에는 원숭이들이 수천 마리가 산다 아침저녁으로 사람들은 최소한 200~300루피 어치의 바나나를 사서, 산속을 누비며 원숭이들에게 던져 준다. 그러면 주변에 사는 가난한 아이들이 원숭이와 싸워가며 몇 개씩 집어간다. 바나나를 던져준 사람들은 큰소리로 아이들을 야단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새들을 위해 콩을 가져다가 모이로 던져 준다. 르거면 또 아이들이 쫓차가 흙투성이의 콩을 줍는다. 사람들은 심한 욕설을 하며 아이들을 쫓아낸다.

동물은 먹이는데 사람은 먹이지 않는 인도인의 윤리와 도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동물에게는 측은지심을 보이는데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다니!

이와 같이 윤리관의 문제를 제가히는 건거의 하나는 카스트다.  70


바가바드 기타에 이러한 업의 고리를 끊는 방법이 두 가지가 보인다. 

바로 카르마(Karma)와 박티(Bhakti)다. 카르마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업보에 따른 수행이고, 박티는 헌신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은 모두 행위의 실천 그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결과는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즉, 성공이나 실패에 얽매이지 말고 냉철하게 그리고 욕망과 목적을 버리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74-75


일을 잘해 내는 데 신경을 쓰면서 결과를 중시하지 않는 태도는 현대 인도의 경제, 정치, 안보에 중요한 기준이다. 우리는 요구하는 결과를 고정시켜 놓고 이에 맞추어 나가려면 원치 않는 길을 걸어야 할 때가 많다. 이에 비해 인도인은 힌두신앙의 영향으로 결과를 덜 중시한다. 결과를 중시하지 않으며 카르마에 맞는 행동을 중시한다. 공사를 구분하는 자세와 비슷하다. 자세로는 좋은데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고 하면서 힌두의 이익, 인도의 이이그 자기 가족의 이익, 마지막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따라서 행동하면, 상대방이 피해를 입고, 피해를 입힌 자신은 양심의 가책을 별로 받지 않는다. 이같이 인도인은 상황에 따라 자신을 합리화,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분명하다.  78


인도 여성은 자기 방어에 철저하다. 자기 몫 또는 안전을 챙겨야 하는데, 하다못해 오토릭샤를 타도 여성은 항상 공격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자기 것을 철저히 챙기는데 강하다. 자신이 희생해서 남을 위해 해 주는 일이 드물다. 즉, 남을 이용하는 데 강하다는 말이다.

인도 여성의 성격은 부정적인 듯하지만, 개인의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살기 위해 사회화 과정에서 형성되는 공통 성품이다.  98


실제로 인도인들을 사귀어 보면 필요한 도움을 주고 섬세히 배려를 해 주는 편이다.  129


인도인이 남을 도와주는 것은 언젠가는, 누구를 통해서인가는 혜택이 돌아온다고 믿는 적선(積善) 개념이 깔려 있다.  131


부분적으로 인도에서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은 힘이 없는 사람의 짓으로 보인다. 

한국인은 권력을 쥐고 눈에 드러나게 과시하면 촌스럽게 여긴다. 그런데 인도인은 조그만 권력이라도 쥐면 반드시 과시한다.  153


인도인의 미신적 성격은 어디서 왔는가? 몬순이다.  168

자연적 여건이 좋은 반면 자연재해도 크게 일어날 수 있다. 인도응 홍수나 가뭄 때문에 엄청난 재해를 입는 나라에 속한다. 그리고 사람의 노력이 별로 무슨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자연재해가 거대하고 혹독하기도 하다.  169

이러한 자연현상에 대해 미리 알고 싶어 발전한 것이 점성술이다. 

점성술에 대한 인도인의 신뢰는 대단하다.  170


모든 사람이 꺼리는 동물은 고양이와 까마귀다. 특히 까만 고양이.  176



인도인에게 해서는 안 되는 질문

아는 사람을 밖에서 만났을 때 "어디 가느냐?" , "왜 가느냐?"라고 묻는 것은 힌두 미신으로 볼 때 큰 실례다. 

나가는 인도인들에게 어디(Where), 왜(Why)라고 물으면 안 된다. 그 대신에 구체적으로 "학교에 가느냐?" , "회사에 가느냐?"라고 물어야 한다.  177



인도인과 요일

월요일은 파괴의 신 시바를 섬기는 날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귀는 사람이 시바 숭배자인 경우 월요일은 금식을 하므로 초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화요일은 원숭이 신 하누만의 날이다. 하누만은 물리적인 힘을 상징하는데, 여성들은 힘의 권원으로 샥티(Shakti)를 섬기는 날이다. 화요일은 거의 모든 힌두인들이 오후에 사원에 가서 원숭이 신을 섬긴다. 이날은 머리도 깎지 않고 손톱도 깎지 않으며 면도도 하지 않는다.

목요일에는 스스의 날(Guru day)인데 신들의 스승을 존경하는 의미로 옷을 빨지 않는 날이다. 정 빨아야 하면 비누 없이 빨 수는 있다. 목요일은 보전의 신 비슈누의 날이기도 하다.

수요일은 코끼리상의 신 가네샤의 날로 새로운 것을 사거나 비즈니스를 시작하는 날이다. 

금요일은 산토시 신의 날로서 시대가 바뀌면서 근대에 영입된 신이다. 이날은 락슈미를 섬기기도 한다. 이날 힌두들은 아무 일도 시작하지 않는다. 무슬림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날이란 점도 있다. 

토요일은 인도인들이 전반적으로 불길하게 생각하는 날이다. 이날은 샤니 데이(Shani day)라고 해서 토성(土星)의 신 샤니의 날이다. 이 신은 아주 위험하고 화를 잘 내는 시능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신이 질투하지 않도록 토요일에는 모든 새것을 피한다. 이날은 머릿기름도 바르지 않는다. 육식도 금하고, 와인도 마시지 않는다. 계란조차 먹지 않는다. 

일요일은 태양신 수리야를 섬기는 날로서, 브라만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날이다. 일요일 중에도 우타르프라데시나 비하르주에는 차트라고 하여 4월과 11월에 한 번씩 24~36시간 동안 물도 한 모금 안 마시는 금식을 하면서 첫날의 일몰, 둘째 날의 일출을 숭배하는 날들이 있다.  179-181


인도인들은 다양한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상대의 실수를 받아준다.  187

인도인은 외국인을 속일 수는 있어도 무시하지는 않는다.  188


인도인의 관대함의 사회적 근거는 대가족 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193


인도인에게 음식은 재료가 고기인가 채소인가가 문제지 냄새는 문제가 아니다. 채식 재료에서 나는 냄새는 무엇이든 괜찮다.  199


혼란스럽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인도인은 카스트 안팎의 두 세계를 오가며 살고 있다.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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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만은 흰색으로서 힌두교 사제 계급

크샤트리아는 붉은 색으로서 힘, 정열, 용기를 상징

수드라는 검은색

바이샤는 노란색.  21


인도에는 전통적으로 샤쉬트라뜨(Shashtrath)라고 하는 토론 시간이 있다. 스승이 선문(禪門)을 하면 제자가 다시 질문 형태로 공손히 다른 의견을 제시해보는 논쟁 교육이다.  62


물질적으로 외국인은 더 많은 돈을 낼 수 있는 존재이지만, 종교적으로는 다른 종류의 불가촉천민일 뿐이다.  209


인도인들의 결혼은 윤회와 관계가 있다.

힌두들은 결혼이 없으면 윤회가 완성되지 않는다고 본다.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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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여행이 내 인생의 한 변곡점이 될 줄은 몰랐다.  6


인도의 신화와 종교, 사원, 자연, 그리고 사람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인도의 영성이랄까 그 뿌리를 더듬어보고 싶었다.  7


'우파니샤드'란 말에는 '가까이' '아래로' '앉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니까 우파니샤드는 스승이 아끼는 제자를 무릎이 닿도록 가까이 앉히고 은밀히 전해주는 지혜인 것이다.  10


인도의 4대 성지 가운데 하나인 오리사 주의 푸리. 오리사 주는 유난히 힌두교 사원이 많이 '인도의 영혼'으로 불린다.  20


인도의 신들은 사람들의 삶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그들 삶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29


인도의 신들은 대체로 두 종류로 구분된다. 베다(힌두교 법전)에 나오는 신들과 힌두교의 브라흐만의 신들이 그것이다.

베다에 나오는 신들은 자연의 힘을 의인화한 신으로, 태양신 수리아, 바람의 신 바유, 불의신 아그니등 자연이 곧 신으로 숭배된다.

한편 브라흐만의 신들은 <우파니샤드>가 확립되면서 베다시대의 자연신을 대히한 힌두교 신들이다.

물론 <우파니샤드>는 철학적 성격이 강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인 브라흐만을 우주와 존재의 궁극적 원리로 인식한다. 따라서 브라흐만은 노자가 말하는 도(道)처럼 비인격적인 존재이다.  30


브라흐만은 산스크리트어로 '넓게 퍼져 있다'는 뜻이다.  34


가난한 농사꾼의 집안에서 태어난 카틱에게 "당신은 행복하오?" 하고 물었다.

"집에는 닷새쯤 먹을 수 있는 쌀과 감자가 있답니다. 그리고 아내는 매일 아침 숲에서 땔감을 구해다가 차를 끓여 줍니다. 아내가 끓여주는 차는 아주 맛있습니다. 그걸로 나는 만족합니다."

주어진 여건을 달게 받아들이는 자족의 품성이 넉넉히 몸에 배어 있는 듯 싶었다.  55-56


소리'아움 또는 옴'(AUM, Om이라고도 말해진다)은 우주의 신성한 원음으로 여겨진다.  63


우파니샤드의 현자는 브라흐만을 '존재' '지성' '무한'이라고 일러준다.

첫째로 브라흐만은 불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의 변하는 것들과 구별된다.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변화의 낙인'이 찍혀있다. 따라서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소위 변화를 겪는 것들은 지본재이고 불변하는 브라흐만은 존재인 것이다.

둘째로 브라흐만은 정신의 영역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들과 구별된다. 따라서 물질적인 것은 비지성이고, 브라흐만은 지성이라는 것이다. 즉. 브라흐만은 앎의 대상이 아니라 앎의 근거이므로 참된 지성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브라흐만은 불멸이기 때문에 소멸할 것들과는 구별된다. 따라서 소멸할 것들은 유한이고 불멸의 신비인 브라흐만은 무한이다. 브라흐만은 태어남도 죽음도 여읜 존재이며, 유한한 인간이 갇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이기에 무한이라 일컬어지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본질적 속성에 '희열'을 덧붙이기도 한다. 브라흐만은 절대적 기쁨인 '희열'의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65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금화가 주인이 된 세상에서는 값없는 것들의 고마움을 모른다. 본말이 뒤집혀, 오로지 돈을 주인으로 섬기는 세상에선 값없는 것들의 소중함을 쉽게 망각한다. 쓸모는 오직 돈으로 환산된다. 돈이 안 되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진정 쓸모 있는 것임을 모른다.  76-77


눈을 감고 자리를 틀고 앉아서도 질주 하듯이 살아간다. 그렇게 미친 경주마처럼 질주하고 질주한 결과는 무엇이던가.  78

밥벌이에 급급해 코끝의 숨을 잊고 산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79


숨이 인간의 육신을 지배하듯이 아트만은 인간의 생명을 존재하게 하는 어떤 불변의 원리이다. 숨이 끊어져 육신이 불에 태워져도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영혼이 곧 아트만이다.  82


우파니샤드가 제시하는 아트만이라는 개념은 자기 바깥에서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던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 내면으로 향하도록 만든다.  86


우리가 '내가 아트만이다'라는 놀라운 신비를 깨닫게 되면 만물이 소중해진다고 한다.  87


"강들이 흘러흘러 바다에 도달하면 '강'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바다와 하나가 되듯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은 '이름'과 '형태'의 구속에서 풀려나 신성한 푸루사에 도달하게 되리라." - 문다카 우파니샤드


<이샤 우파니샤드>는 세상을 '변하는 것들'이라 묘사하는데, 사실 산스크리트어로 '세상'이란 말 자체가 '변화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영속하는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127


인도의 대표적인 신 시바는 '춤추는 자들의왕(나타라자)'이라고도 불린다.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시바상은 한쪽 다리를 쳐들고 다른 쪽 다리로는 악마의 머리를 밟고 있다. 네 개의 손 중 하나는 보호의 몸짓을 하고, 다른 손으로는 들어 올린 발을 가리키며, 또 다른 손에는 창조물의 심장 고동을 재기 위한 북을 들고, 마지막 한 손에는 분리의 횃불을 들고 있다. 춤추는 자들의 왕 나타라자의 춤은 정신적 재생과 신과의 합일에서 오는 황홀을 상징한다고 한다.  135


"나 이외에 아무도 없는데 도대체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두려움이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 두려움이란 다른 존재에 대해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의 감정은 '나' 이외에 타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두려움은 항상 그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다.  154


나 역시 젊은 날 구도자 행색을 하고 살아 왔지만, 솔직히 말하면 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반쪽이었다. 신을 사랑하노라 하면서도 그 쏠쏠한 세상 재미에 언제나 한쪽 발을 걸치고 살아왔다. 그런 나에게 인도에서 만난 빈털터리 수행자들의 모습은 충격과 도전으로 다가왔다.  

나는 무엇을 제대로 버린 적이 있던가. 버리기는커녕 무얼 쌓으려고만 하지 않았던가.  168


힌두교인들은 인생의 단계를 성실히 실천하고 살아야 이상적인 삶이라 생각한다.

첫 단계는 학생기(學生期, 1~25세)로 금욕과 학습의 기간이다. 이 시기에는 경전(베다)을 공부하고 카스트의 구성원으로서 각자 해야 할 의무를 익히는 데 전념한다.

둘째 단계는 가주기(家住期, 26~50세)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가족의 부양을 위해 전념하는 기간이다.

셋째 단꼐는 임서기(林棲期, 51~75세)로 앞의 두 단계를 통해 이룬 경제적 기반과 가업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숲으로 들어가 명상에 임하는 시기이다.

마지막 단계는 유행기(遊行期, 76~100세)로 숲에서 나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세상을 주유하는 시기이다. 이때는 탁발이 주요 생계수단이 되며, 세상의 모든 애착을 던져버리고, 지금까지 자기가 배우고 명상한 내용들을 현실 속에서 다시 몸으로 확인하는 단계이다. 이 인생의 네 단계는 인간이 점차 세속의 오염을 씻고 자신의 영적인 본향에 적합하게 되는 과정들을 나타낸다.(라다크리슈난)  169


사람들은 포식으로 자기 몸을 괴롭힐 줄은 알면서도 자기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금식은 하려 하지 않는다.  174


몇 차례의 여행, 짧은 식견으로 인도라는 거대한 나라를 규정하고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넓게 둘러보고,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할 것 같았다. 사랑하면 보인다고 했으니 더 깊이 사랑해야 할 것 같았다.  213


기원전 1000년경에 씌어진 힌두 경전 <리그베다>에는 인간의 계급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에 대ㅐㅎ 인간의 신체에 비유하여 기록되어 있다. 태초에 우주의 보질을 상징하는 신 푸루사가 죽으면서 인간을 창조했는데, 푸루사의 입에서 사제 계급인 브라만이 나왔고, 파에서는 군인계급인 크샤트리아가, 허벅지에서는 상인계급인 바이샤가, 두 발에서는 노예계급인 수드라가 생겨났다고 한다. 상체로 올라갈수록 신분이 높고 하체로 내려갈수록 신분이 낮아진다. 소위 사성제라 부르는 것이다.

이 사성제에도 들지 못한 아웃카스트가 있는데, 그들이 바로 가장 밑바닥에 속하는 불가촉천민들이다. 이 불가촉천민의 수는 인도 인구의 16%인 1억 650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려 3500년 동안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살아온 것이다.  234


'진실한 마음으로 진리를 찾으려는 사람은 카르마나 윤회 이론을 배우는데 시간을 소비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기를 변형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따름이다.' 위대한 구루인 바바 하리다스의 말  247


빛을 비추는 건 태양의 자연스런 존재 방식이다. 그러나 자기 본성에서 멀어진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참자아'를 망각한 인간은 자기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선을 행할 때도 행위 뒤의 결과를 생각한다. 은행에 예치한 돈이 있으면 돌아올 이자를 계산하듯이, 우리의 행위가 가져올 열매를 기대한다는 말이다.

사랑할 때도 손익을 따지고 남을 도울 때도 돌아올 보상을 계산한다. 행위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순수성을 잃어버린 사랑은 소유욕에 불과하다. 순수성을 상실한 자선은 자기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려는 욕심에 불과할 뿐이다.  269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은 행위 그 자체가 되라는 것이다.  270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아!'하고 감탄하는 이는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우파니샤드의 현자는 말했다.  279


'코함'이란 산스크리트어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뜻이다.  283


자신의 본질을  망각한 사람은 '나는 누구인가?'를 거듭해서 물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물론 세상에는 이런 물음조차 지니지 않고 사는 사람이 더 많다.  284


세속적인 것들과의 동일시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는 누구일까?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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