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체포

“남 서장,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오. 김범우 그놈이 나한테 뭐랬는지 한마디만 해주겠소. 아무리 공산주의 활동을 한 자라도 재판을 거치지 않은 처형은 있을 수 없고, 피해자 가족의 감정이 개입된 보복행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떠들었소. 용공주의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함부로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소. ..”(국회의원 최익승이 남인태서장에게 한 말) 14

해방이라는 것은 참으로 느닷없이 떨어진 벼락이었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불길이었다. 대일본제국이 망하다니…… 그건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세상 판세 돌아가는 것을 빈틈없이 읽어낸다는 소위 지식인이란 사람들은 일본이 적어도 200년 동안은 조선땅을 지배하게 될 거라고 했고, 그 사실을 의심 없이 믿지 않았던가. .. 200년은 곧 영원이었고, 조선이란 나라는 없어지게 되어 있는 운명에서 고작 육심 평생을 살다 가는 인생 설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너무나 자명한 결론이었다. 내선일체에 앞정서며 살아온 인생에 예고 없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죽음과 맞닥뜨리는 절망이었다. 그러나 그 암담한 절망은 결ㅋ 오래가지 않았다. 해방이 몰아온 그 거센 바람을 요령껏 피하고, 그 성난 물결을 눈치껏 타넘을 수 있는 기회가 뒤따라왔던 것이다. 그 결과 어둠으로 앞을 가로막았던 해방이라는 흉물은 정반대의 광명을 가져다준 보물로 둔갑했다. 일정시대의 사업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이란 권력까지 손에 쥐게 해주었던 것이다. ..
군정이 베풀어준 두 가지 은혜에 대해서 그는 그저 감읍하고 감읍할 따름이었다. 미군은 군정을 실시하자마자 민심을 선동해 대고 있던 공산당을 외면하고 한민당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일본식의 통제방법을 전면 폐지하고 미국식의 ‘자유시장’체제를 실시했던 것이다. 그는 재빨리 기부금을 내고 한민당원이 됨으로써 정치적 신분보장을 확보했고, 자유시장체제의 허점을 신속히 파악함으로써 경제적 이익의 확대를 꾀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나갔다. 보성군 일대를 정치발판으로 삼아 한민당 조직을 지주 중심으로 짜나가는 한편, 그 조직을 이용해서 무작정 쌀을 사들였다. ..
일정시대부터 사업을 해온 손 큰 사람들은 뒤늦게 자유시장체제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서로 다투어 매점매석에 뛰어들게 되었다. 다만 그는 남들보다 서너 달이 빨랐을 뿐이다.
시장마다 쌀이 동났고, 쌀값은 날이면 날마나 치솟기 시작했다. 한 달 사이에 세 배로 오르다가, 두 달 사이에 여덟 배로 뛰어올랐다. 쌀을 창고에서 잠을 재울수록 돈은 불어나고 있었다. 19-21

군정은 6개월 만인 147년 2월에 쌀의 자유거래를 중단시키게 되었다. 걷잡을 수 없는 쌀값의 폭등과 품귀현상을 막기 위해 내려진 조처였다. 그 대안으로 군정은 배급제를 내놓았다. 그건 일정말기 방법으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 한민당의 조직을 통해서 그런 조처가 내려지리라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고, 그동안 재산을 막대하게 불려놓았던 것이다. 23

쌀값은 9월까지 줄기차게 올라 자유거래를 실시할 당시보다 300배가 넘어 있었다. ..
해방 직후 한 달 가까운 동안 풍전등화 같던 신세가 가장 위력 있는 정당인 한민당의 지구당위원장으로 발판이 확고해졌고, 거기다가 재산까지 어마어마하게 느렁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미군정이 아니었으면 이룰 수가 없는 은혜로움이었고, 보살핌이었다. 미국이야말로 생광의 나라요, 은혜의 나라요, 부모의 나라가 아닐 수 없었다. 24

“곧 군부대가 주둔하게 될 모양입니다.”
..
“별로 많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
“글쎄요, 벌교까지 군대가 주둔할 필요가 있을까요?”
“작전상 그런 모양이라 하더군요. 벌교 자체의 문제보다도 전체적 소탕계획에 따라 이뤄지는 일이라고 해요.”(김범우의말)
전 원장은 간접화법을 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 원장도 그 소식을 들으며 읍내의 군대 주둔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는 반증이었다. 38

김씨 문중은 일본 서장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걸찍한 집안이었다. 43



12 구만리 장천을 떠도는 구름

누가 좌익이 되고 잡아 좌익이 되간디? 옳은 소리 혀도 좌익, 바른 소리 혀도 좌익, 다 좌익으로 몰아쳐서 꼼지락달싹 못허게 맹그는 판잉께, 좌익질도 한분 똑바라지게 못혀보고 경찰이 맹근 대로 좌익죄 받느니 진짜배기 좌익질이나 한판 해뿔고 보자 허고 남정네덜 맘이 서로 통헌 것 아니겄능가. 고런 속사정 다 암스롱도 자네가 외서댁 볼 때마동 그리 에맨소리 해싸먼 서로 졸 것이 머시가 있능가.”
왕주댁은 샘골댁을 달래는 듯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외서댁은 왕주댁에게 더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57

미곡수매라는 억지법이 생기면서 입 달린 사람이면 누구나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미군정을 욕했고, 한민당을 욕했고, 경찰들을 욕했다. 그런데 경ㅊ찰에서는 그런 욕을 하는 사람들을 무더기로 잡아들여 몽둥이찜질을 해대며 좌익으로 몰아붙였다. 그래도 욕하는 사람들은 늘어만 가고, 손이 모자라게 된 경찰에서는 소방관들과 청년단까지 동원했다. 그렇게 되니 사람들은 소방서나 청년단에 끌려가서 매타작을 당했다. 갑자기 경찰서가 셋으로 불어난 셈이었다. 사람들의 원성이 더 커지는 가운데 좌익으로 생각을 돌리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즈음에 남편이 숨죽여가며 마을사람들에게 열성으로 손을 뻗친 것을 외서댁은 잘 알고 있었다. 59

마침내 고대하고 고대하던 세상이 왔다고 남편은 있는 대로 활갯짓을 쳤지만 그녀는 좀처럼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건 시아버지 때문인지도 몰랐다. 시아버지는 남편이나 그 사람들이 하는 일을 마땅찮아했다. 지주들이 아무리 못된 짓을 했고 부자들이 아무리 미운 짓을 했어도 그렇게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들몰댁의 생각) 71

말이 좋아 농지분배였지 진작에 부자나 지주들과 한패거리가 되어버린 군정이 한 일은 배부른 놈 더 배불려주는 것일 뿐이었다. 소작인들은 벌써부터 군정을 믿지도 않았고, 신용하지도 않았지만 그 일로 더욱 그들이 꼴사나운 ‘양코배기’고 ‘양귀신들’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 군정은 그보다 몇 달 앞서서는 소작료를 삼칠제로 내린다고 했었다. 반타작 오오제에서 삼칠제가 된다는 것은 눈이 번쩍 띄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추수를 하게 되자 지주들은 누넹 불을 달고 호령을 해댔던 것이다.
“누구 맘대로 삼칠제여, 삼칠제가! 삼ㅊ칠제 주장허는 놈덜언 당장나서봐. 영영 소작 띠고 말 것잉께. 땅임자는 나고, 억울허먼 군정에 가서 남치지 물어도라고 혀!”
그 서슬 앞에서 고개 들고 입 놀릴 작인은 없었다. 지주들은 반타작을 밀고 나갔고, 군정에서는 지주들이 하는 일을 모른 척하고 말았다. 73-74

“양코배기도 양코배기제만 그 앞장서서 설레발치는 관공서놈덜이고 순사놈덜이 더 문제시.” “금메 말이여, 고 잡녀러새끼덜언 일정 때넌 왜놈덜 앞잽이로 그리 날치등마 인자 양코배기덜 앞잽이로 또 그리 날쳐대니 오것이 무신 염병헐 놈에 일이당가.” “긍께 쳐죽일 놈덜이제.” 사람들은 모여앉기만 하면 분을 끓였다. 75

“이 사람아, 내 죄럴 이리 키워놓을 수가 있는가. 자네의 깊은 속어찌 모르리. 내 무슨 말을 더 할까.”
정 참봉은 월녀를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월녀는 그 품에서 비로소 쏟아지기 시작하는 눈물을 흘렸다. 정 참봉이 조끼주머니에서 꺼낸 한지에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素花’였다.
“고맙구만이라, 고맙구만이라.”
월녀는 방바닥에 엎드리며 흐느꼈다. 108



13 냉철한 비판을 생리로 가진 역사의 정체는 무엇인가

해방의 소식과 더불어 지리산을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자 자신을 맞이한 것은 기쁨에 넘쳐 있는 읍민들이었다. 못 먹어 메마르고 억눌림에 찌들었던 얼굴들에 밝은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그 밝게피어난 얼굴 얼굴에 어울리게 활갯짓도 시원스러웠다. 자신을 대하는 어떤 사람의 눈길에서나 신뢰와 반가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무슨 일인가를 어서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그들 자신이 벌써 그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친일파나 일본에 붙어먹은 것들은 모두 몰아내고 새 사람들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일치를 보이고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자신은 안창민과 손승호 등을 규합해서 민중들의 그런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군단위 조직을 서둘렀다. 그 조직을 통해 동네마다 이장이 바뀌면서 동시에 건준지부가 결성되었고, 전국 형무소에서 2만여 명의 독립투쟁자들이 석방되었다는 소식을 뒤따라 김태규 선배를 맞이했고, 읍민들은 열렬한 환영을 보냄으로써 독립투쟁자가 겪은 고통을 영광으로 바꿔주었고, 그 아낌없는 박수가 과거의 노고에 보내는 것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라는 것을 민중들은 일깨우고 있었고, 조선인민공화국 선포에 따라 건준지부는 인민위원회로 바뀌면서 새 나라 세우기는 거침없이 이루어져갔다. 일체의 친일반민족세력이 제거된 상태에서 민중들은 인민위원회에 적극적으로 호응했고, 인민위원회를 맡은 책임자들은 민중들을 위해 헌신했다. 지주나 유지가 인민위원회에 개입한 경우는 김사용 같은 양심적이고 신망 있는 사람에 한했다. 읍이나 면단위에서 그들의 죄상 유무를 가려내는 데는 새로운 심사나 기준이 하등 필요하지 않았다. 읍민이나 면민들이 먼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거침없고 막힘 없던 새 나라 세우기는 미군의 점령과 함께 실시된 군정의 조선인민공화국 부정으로부터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군정의 인공 부정은 혁명적 인민의 나라를 파괴하는 1단계 공작이었다. 그리고 미군정은 연속적으로 파괴공작을 펴나갔다. 각 지역으로 군정중대를 파견한 것이 2단계 공작이었고, 그 조직을 이용해 반민족세력인 경찰과 관리를 재등장시킨 것이 3단계 공작이었다. 그리고 경찰을 무장시킨 다음 모든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를 강압적으로 해체시켜 나간 것이 4단계 공작이었다. 따라서 인민위원회 해체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공산당 활동 불법화와 동시에 체포를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 5단계 공작이었다.
공산당의 합법활동은 지하활동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고, 인민위원회 조직이 다 깨어진 상태에서 대부분의 간부들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자신도 예외일 수 없었고, 감옥에 가서 보니 해방이 되고 풀려난 독립투쟁자 3분의 2가 다시 잡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정치하에서 경찰질을 해먹었던 자들의 손에 다시 잡혀 들어온 그들의 죄목은, 일본이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인 것처럼 ‘독립투쟁자’에서 '공산주의자'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자신들의 조직이 지하화되자 군정의 폭력적 파괴공작은 가속화되었고, 그에 맞서기 위해 자신들도 무장투쟁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정은 남쪽에 미국식 정권을 세우기 위해 혁명세력의 말살을 추진하는 한편으로 강제적 경제정책인 미곡수매로 인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강제로 시행된 미곡수매와, 관리들의 부정으로 균형을 상실한 배급제도 때문에 인민은 굶주림에 시달리며 군정에 대한 불만을 키워갔다. 그 불만이 최초로 폭발한 것이 화순에서였다. 첫 번째 맞이한 해방기념일에 광부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시위를 벌였고,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광주를 향해나아갔다. 광부들의 생활 대책을 해결하라는 그 경제성 시위는 군정에 대한 인민들의 최초의 도전인 동시에 군정의 경제정책 실패를 입증하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 중대성을 인식했던 것인지 군정은 그들의 관례를 깨고 미군들을 직접 내세워 시위진압에 나섰다. 미군들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자동차들을 동원해 시위자들을 위협하는 한편 설득작전을 폈다. 곧 요구조건을 들어 해결해 주겠으니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시위대는 그 말을 믿고 화순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것이 시위를 막으려는 미봉책이고 기만이었다는 것은 얼마 가지 않아 드러났다. 군정은 한 달이 지나고, 다시 한 달이지나도 아무런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다. 굶주림에 지친 광부들은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고 다시 들고일어났다. 그 시위는 전보다 사람 수도 많았고, 움직임도 더 격렬했다. 미군들의 대응도 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그들은 탱크를 동원했던 것이다. 10월이 끝나는 날 시작된 미군의 폭력진압은 그들의 잔인성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들은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맨몸의 시위 군중을 탱크로 밀어붙이며 총격을 가해 사람들을 죽였던 것이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쌀 배급이 중단되면서 터지기 시작한 민중항쟁은 경상남도 전역으로 불붙어내려와 마침내 섬진강을 건너 전남으로 그 불길을 옮기게 되었다. 동학농민봉기가 전북에서 일어나 그 불길이 삽시간에 전남을 뒤덮고 섬진강을 건너 경남으로 옮겨붙은 것과는 반대의 경로를 밟은 것이었다. 서로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산맥으로 막혀 있는 두 지역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가 섬진강이었다. 10·1항쟁의 불씨를 품은 바람이 섬진강을 건너와 전남에서 제일 먼저 불꽃을 피운 곳은 화순이었다. 화순은 삼팔 이남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의 탄광지대였기 때문에 일제시대부터 주된 경제권은 다른 지방과는 달리 농토를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탄광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따라서 사회변혁세력도 3천여 명을 헤아리는 광부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일제 때부터 철도청이 있었던 순천의 철도 노동자, 항구로서 일본과의 뱃길이 열려 있었던 여수의 부두 노동자와 함께 지방적 특성을 강하게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해방이 되면서 화순에는 예기치 못한 이변이 밀어닥쳤다. 일본이 물러가면서 사회변동이 생긴데다가 삼팔선이 그어짐에 따라 석탄 소비량이 격감되어 생산이 반으로 줄어버리자 광부들은 날로 심해지는 생활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더구나 쌀을 공출하고 배급을 타먹도록 통제된 군정의 미곡정책 아래서 쌀을 공출한 실적이 없는 그들은 쌀배급마저 제대로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날로 심해만 가는 굶주림 속에서 그들이 살아날 가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마침내 지난 8월의 시위에서 속은 분노와 경상도에서 번져온 불길과 함께 일제히 들고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이 10월 끝날이었다. 그들은 다시 도청소재지인 광주를 향해 나아갔다. 이번에도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미군들이었다. 언제나 경찰을 앞세우고 자신들은 뒤에서 조정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는 그들이 두 번째로 그 원칙을 깬 것이다.
"우리는 굶어죽을 수 없다. 채탄작업을 정상화하라!"
“석탄생산 복구시켜 우리 생계 해결하라!"
3천여 명의 광부들이 미군의 저지에 맞서며 구호를 부르짖었다. 그 대열 속에는 광부만이 아니라 때 묻은 머릿수건을 쓴 아낙네들과 굶주림으로 비쩍 마른 아이들도 끼여 있었다.
미군은 또 설득을 하고 나섰다. 그러나 시위대는 그 말을 듣지않았다. 지난번에 한 번 속은 것으로 족했던 것이다. 설득작전이 먹혀들지 않자 미군 대령이 나섰다. 자기를 믿으라고, 틀림없다고, 요구사항을 금방 해결하겠다고 미군 대령은 자기의 계급을 내세우며 믿어달라고 했다. 전과 다른 높은 사람이라서 광부들은 믿기로 했다. 그래서 시위행진을 중지하고 대열을 다시 화순으로 돌렸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경찰력이 투입되어 주모자 색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자신들을 똑같은 거짓말로 속이고, 보복행위까지 가하게되자 광부들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그들은 총을 가진경찰들에게 맨주먹으로 맞붙었다. 광부들의 기세에 경찰들은 총을 쏘아댔다. 경찰의 총알에 광부들이 무기로 하여 맞선 것은 채탄작업에서 캐낸 돌멩이들이었다. 아무리 총을 가졌다고 하지만 오랜 굶주림에다가 분노까지 겹친 수많은 사람들의 결사적 대항을 이겨내지 못하고 경찰들은 쫓겨갔다. 경찰의 총에 부상당한 동료들의 피를 보자 분노가 더욱 거세어진 광부들은 또다시 광주를 향해 성난 물결이 되어 밀려갔다. 그러나 그들은 광주에 다다르지 못하고 미군에게 앞을 가로막혔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밀고나갔다. 미군들은 그들을 향해 총을 갈겨댔다. 그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변했다. 사방으로 흩어진 그들은 돌팔매질을 퍼부으며 미군들에게 맞섰다. 그리고 돌격대를 만들어 미군 지프차를 공격했다. 여러 사람이 통나무를 지프차 밑에 밀어넣었다. 그리고 지프차를 엎어버렸다. 그들은 매일같이 갱도를 뚫어나가는 생활 속에서 통나무다루기는 그 누구보다 익숙했던 것이다. 막장의 삶을 살아온 고통스러운 인내를 목숨을 내건 살기로 바꾼 광부들의 대항은 악착스럽고 처절했다. 그들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미군들은 도망쳤다. 그러나 미군들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들 또한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글이글 불붙은 석탄덩어리가 된 그들이 광주로 치달아갈 때 그 앞을 차단한 것은 미군의 탱크였다. 탱크는 그들의 머리 위에다 불을 토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공포라고 하지만 소총에 비해 그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차량도 미군들도 몇 갑절 늘어나 있었다. 기동성이 빠른 미군들이 인접 지역에서 동원된 것이었다. 아무리 기를 쓰고 돌멩이를 던져도 쇳덩어리인 탱크는 끄떡도 하지 않고 불을 토하는 괴물로 그들을 밀어붙였다.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건 탱크포만이 아니었다. 탱크포와는 달리 소총은 그들의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광부들은 허기진 피를 토하며 땅바닥에 죽어넘어졌고, 부상을 당해 쓰러졌다. 그들은 동료들을 떠메고 쫓길 수밖에 없었다. 쫓기는 그들을 향해 쇳덩어리 괴물은 계속 불을 토하며 육박해 오고 있었다. 누가 죽고, 누가 다쳤는지를 알 수도 없이 제자리로 쫓겨온 그들을 에워싼 것은 미군들과 경찰이었다. 경찰들은 미군 덕에 되살아나 미군을 위해 충성했던 것처럼 다시 미군들의 엄중한 보호를 받아가며 주모자 색출을 하기 시작했다. 세 명이 즉사했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미군들은 사망자는 물론 부상자들마저 아랑곳하지 않은 채 50여 명을 주모자로 체포해 갔다. 그러나 광부들의 저항은 끝나지 않았다. 처음처럼 전체가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산으로 숨어든 사람들이 여러 개의 조를 만들어 산발적이고 다각적인 공격으로 미군과 경찰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러는 동안에 병원치료를 받을 도리가 없는 부상자들은 호박속이나 찧어 붙이고, 쑥가루를 밀가루에 이겨 붙이면서 하나씩, 둘씩 죽어가고 있었다.
화순탄광사건의 소문은 삽시간에 번져나가는 들불이 되어 산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폭력을 불사하는 강압적인 미곡수집에 불만이 쌓일 대로 쌓여 있던 농민들에게 탄광사건은 행동을 충동질하는 도화선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미군들이 탱크로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밀어붙여 죽였다는 것은 민족감정을 예리하게 자극시켰고, 경찰들이 또 그 앞잡이놀이를 했다는 것은 그동안 누적되어온 적개심을 폭발시키게 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농민들은 벌써부터 경상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서, 이북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단행했다는 소식을 알고 있는 것처럼 환히 듣고 있는 터였다. 미군정의 파괴공작에도 불구하고 인민위원회 조직은 그들을 결속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다! 미군은 물러가라!"
“공출제도 쳐없애고 토지개혁 단행하라!"
이런 구호들이 터져나오며 곳곳에서 민중들이 들고일어났다. 10·1항쟁은 마침내 전라도땅에서 바람 탄 불길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염상진의 생각을 통해 역사 서술) 124-131



14 까마귀떼

소문이란 으레 그렇듯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채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소문들을 믿게 마련이었고, 끝내는 그 소문들에 휘둘리게 되었다.
정부는 ‘여순반란사건 관련자 8명이 11월 1일 사형을 당했다’는 사실을 신문에 보도했다. 168

여수와 순천의 소식들은 끔찍스러웠다.
여수읍민들이고 순천읍민들이고, 표나는 우익들을 빼놓고는 모두가 동네별로 학교 운동장에 끌려나가 심사를 받는다고 했다. 눈이 감겨진 채 실시되는 그 심사는 손가락질로 좌익을 가려내는 것이었고, 거기서 지목당한 사람들은 다시 몇 마디씩의 조사를 받았다. 그 간단간단한 조사에서 생사가 결판나는 것이었다. 손가락질은 이장이나 피해자 가족들이 맡았다. 그러나 간단한 조사마저 필요 없이 확실한 좌익으로 지목된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대창으로 난자해서 죽였다. 조사를 거쳐 좌익 혐의를 받은 사람들은 삼사십 명씩 차에 실려 가까운 산골짜기나 해변으로 끌려나가 무더기로 총살당해 죽었다.
순천에서 죽어간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지만 특히 여수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그 수를 알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 했다.
특히 여수에서는 학생들이 많이 죽어갔다. 14연대 주력은 후퇴를 하면서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동조자들에게 일단 동행을권유했다. 운신이 어렵게 된 일반인들은 상당수 따라나섰지만 학생들은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학생들이 따라나서려고 해도 부모네들이 만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까짓 만세 좀 부른 걸 어쩌겠느냐, 그까짓 삐라 좀 뿌린 게 무슨 큰 죄겠느냐, 하며 자식들을 붙들어앉힌 것이다. 핏줄을 귀히 여기는 마음이 그런 일들을 설마 하고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한 학생이 한둘이 아닌 데다가, '학생'이라는 신분에 대한 믿음도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경의 처벌은 학생이라고 해서 예외를 두지 않았다. 만성리해수욕장뒤 터널의 골짜기로 끌려간 학생들은 줄줄이 총살을 당해갔다. 기관총의 난사 앞에서 시체들은 차곡차곡 쌓였고, 그 수는 수백을 헤아렸다. 물론 거기에는 학생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장소도 그곳만이 아니었다. 허리에 맷돌이며 돌을 매달고 배에 실려나가 바다로 떠밀려 들어가 죽어갔고, 심사를 받는 학교 운동장에서도 죽어갔다. 특히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에 대한 소문은 사람들 속에 찬바람을 일으키며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는 시범을 보이기 위해 사람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공개처형을 했는데, 좌익들을 줄지어 세워 손수 닛뽄도를 휘둘러 목을 쳐죽였다. 그가 닛뽄도를 단 한 번 내려치는 것으로 목 하나씩이 뎅겅뎅겅 잘려 땅바닥에 굴러떨어졌고, 피와 모래가 범벅된 그 두상들은 가족이 손도 못 대고 가마니에 쓸어넣어져 동네마다 전시되었다.
그러나 피해자 가족들은 그 누구도 원망할 사람이 없었다. 강압으로 그 일에 동조한 것이 아니었고, 인민위원장은 14연대가 자원자들을 이끌고 후퇴하던 날 그 대열을 산마루에서 지켜보다가 목매달아 자살을 했던 것이다. 그 책임에 대해서 더 할 말이 있을 수 없었다. 169-171

하댗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걷다가 무심결에 샅을 걷어올렸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마누라 들몰댁의 얼굴이었다. 하대치의 머릿속에서는 퍼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건 마누라와 밥집 여자의 차이였다. 마누라와 밤일을 치르고 나면 지금 같은 기분이 아니었다. 어딘가 편안하고 흡족하고 맺힌 데 없이 확 풀린 기분이었다. 목까지 잠기는 뜨거운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은 시원함이나, 땀 뻘뻘 흘린 들일 중간에 점심 배불리 먹고 그늘에서 낮잠을 자고 난 다음의 개운함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간밤의 일은 전혀 그런 맛이 없었다. 발목까지밖에 차지 않는 찬 개울물을 첨벙댄 것 같은 석연찮음과 미흡함이 남아 있었다. 미지근한 된장국에 식은 밥덩이를 급히 먹었을 때처럼 영 속이 거북스럽고 허했다. 횟수만 거듭하다 보니 샅이 뻐근하고 당겨올리는 것도 과히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 짓거리는 짚은 정 있고서야 지맛이 나는 모냥인갑구만. 하대치는 밤일의 오묘함을 깨닫고 있었다. 비록 마누라는 무덤덤하고 무심한 듯 자신을 받아들였어도 따ㄸ스하고 깊은 물이었고, 장터댁은 활짝활짝 웃고 간드러지는 꽃이었지만 결국은 차갑고 얕은 개울물이었다. 그러니 마누라가 만들어준 쌈지와 장터댁이 사다 준 궐련갑의 감촉이 같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179-180



15 기습이다!

(경찰서장) 남인태의 고향은 담양 옆에 있는 장성이었다. 그는 아홉 살 때부터 주재소의 소사 노릇을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반농사꾼에 반노동자였다. 그래서 집안 형편은 소작인보다 더 쪼들렸다. 그 대신 그의 아버지는 땅밖에 모르는 농사꾼에 비해 세상 보는 눈치는 빨랐다. 읍내 중심가에서 품을 팔며 귀동냥 눈동냥 한 것들이 밑천이었다. “주걱 든 년이 한술 더 뜨고, 정재 파고드는 쥐가 더 기름도는 법잉께, 앞으로 시상에 그래도 배 안 곯고 살자먼 일본사람헌테 붙어야 써. 시상이 일본 시상인디 뒷전에서 일본놈, 일본놈 욕험시로 정작 딱 맞닥뜨리먼 꼼지락도 못 허는 고런 인종덜언 빙신중에 상빙신이여.” 그의 아버지의 지론이었고, 그에 따라 그는 보수없는 소사 노릇을 해야 했다. 그를 하루빨리 일본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아버지의 욕구는 거의 광적이었다. 일본말 일본글을 제대로 익힐 때까지 그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회초리질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의 그런 광적인 욕구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는 갈수록 일본 순사들의 사랑과 신임을 받았고, 독학으로 계속 검정고시를 치러 학력을 쌓아갔다. 그는 결국 아버지가 열망한 대로 일본 순사제복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아홉 살 때부터 주재소의 공기를 마시고 산 그는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고 뛰어난 일본 순사였다. 권력의 맛을 만끽하고, 권력이 당연히 배당하는 부의 맛까지 즐기다가 별안간 해방을 맞게 되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진 것같은 절망감과, 공로가 죄로 뒤바뀌는 공포감에 안절부절을 못했다. 몰매를 맞아 죽을 위기를 서너 차례 모면하며 한 달을 조금 넘게 전전긍긍하다 보니 뜻밖에도 광명이 찾아들었다. 과거 경력자를 주축으로 해서 경찰조직이 재구성된 것이었다. 그에게 해방이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캄캄한 밤이었다면 그 조직이야말로 또 갑작스럽게 열린 눈부신 광명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돌변에 그는 잠시 어리둥절했고, 그리고 이내 당당해졌다. 경찰제복이 그의 과거를 말끔히 가려주었고, 서장이라는 계급이 그의 권력을 떠받들고 있었다. 222-223

“빨갱이 사상으로 말하자면 이북은 복숭아고 이남은 수박이요. 이남 주에서도 여기 전라도하고 경상도는 아주 특제 수박이요.” 이북에서 월남해 순천경찰서에 간부로 있는 어느 경찰이 한 말이었다. 공산주의자를 내세우고 있는 이북은 겉이 붉고 속은 흰데,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이남은 겉은 푸르고 속은 붉다는 뜻이었다. 223

안창민은, 어서 기운을 모아 병원으로 가야 된다고 스스로를 일깨웠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언제까지나 이대로 있고 싶은 나른함에 이끌리고 있었다. 그 나른함은 이상스럽게 혼미한 편안함이었다. 양쪽 어깨를 그 어딘가 든든한 곳에 눕히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견디기 어려운 상처의 통증과는 또 다르게 일어나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안창민은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때 의식의 어느 구석에선가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동맥을 자르는 로마 귀족들의 처형방법이었다. 피가 흘러나옴에 따라 서서히 죽어가는 그 방법은 아무런 고통이 없이 황홀경에 젖어들며 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의식이 흐려지기 전까지 유언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있다고 그 글은 적고 있었다. 235

“도대체 이념이 인간의 뭘 해결한다는 거야."
자신의 부르짖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건 손승호의 말이었다. 한때 누구 못지않게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었던 손승호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렇게 외쳤다. 그건 분명 외침이었다. 손승호는 낮은 목소리로 냉정하게 말했지만 그건 분명 외침이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자기의 생각하는 바를 굽히지 않은 그 말이 바로 외침이 아니고 무엇일 것인가. 염상진이 그의 이마에 권총을 겨누고서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까닭도 그 외침의 무게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념이라는 것이 정치지향적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소. 변증법도, 유물론도, 봉건주의도,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모두 정치지향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기적인 지배도구일 뿐이오. 봉건 왕조를 타도하고 세운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사회가 도대체 절대다수 인간의 삶을 위해 한 것이 뭐가 있소. 그것들은 새로운 구속일 뿐이고 인간의 본질적 문제는 하나도 해결한 것이 없소.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는 20세기의 인간들이, 지배본능이 강한 인간들이 윤색해 낸 정치연극의 각본일 뿐이오. 그것들은 절대적일 수가 없소. 왜냐하면 모순투성이고 부정확한 존재들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오. 그것들은 인간이 갖고 있는 만큼의 모순과 부정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하오. 그러므로 그것들은 절대적일 수가 없고, 신봉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오. 그런데 그것들을 절대적 존재로 신봉하게 되면 그만큼 인간들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오. 인간은 인간이 만든 기계가 아니오. 인간이 인간을 장담하는 것처럼 어리석음을 범하는 일은 없소. 나는 다만 인간이고 싶을 뿐이오."
손승호는 완전무결하게 사회주의를 버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상진은 손승호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며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그가 사회주의를 버린 대신 자본주의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정말 그가 다시 사회주의로 전향할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논리의 타당성을 인정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옛정을 생각했기 때문일까.
안창민은 손승호의 생각을 이해해 주고 싶었다. 그의 말대로 인간은 인간이 만든 기계가 아니었고, 그가 파악하고자 하는 인간에 대한 인식 또한 하나의 가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손승호에게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역사현실을 외면하고 있었고, 인간의 본질적 문제가 삶 자체라는 인식을 결여하고 있었다. 그런 추상적 관념에 지배되고 있는 손승호가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땅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기를 선택하지 않는 한, 그러나 그 생각을 염상진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238-240



16 감꽃은 먹을 수 있는 꽃

“이 해당분자!”
염상진은 차려자세를 취하고 있는 강동식을 후려쳤다. 강동식은 비척비척하다가 곧 똑바로 섰다. 그런데 코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 내렸다. ..
“하 동무, 이자를 끌어다가 저 나무에 묶으시오!”
염상진은 숨을 몰아쉬었다. 피를 보자 더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 감정을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손찌검은 하지 말아야 된다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말했다. 그건 나이의 고하간에 낮춤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과 함께 엄연한 당의 규율이었다. .. 생사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안창민에 대한 초조와 염려가 뒤바뀌어 표출된 것이었다.
피를 보자 염상진의 감정은 일순간에 싸늘하게 식어들었다. 동지의 피는 한 방울이라도 소중한 것이었다. 그건 혁명의 원동력이었다.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굶주리며 핍박받으며 생성시킨 생명의 원천이었다. 피를 흘리고 있는 동지에게 또 손찌검을 해서 더 많은 피를 흘리게 할 권리는 자신에게 없었다. 이미 피를 흘리게 한 것도 반혁명적 행위였다. 262-263

염상진은 안창민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나약한 체구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를 노출시켰던 것이 또 후회로 씹혀졌다. 그것이 부질없는 생각인 줄 알지만 그 후회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이번에 일으킨 혁명사업에 대한 미심쩍음과 연관된 문제였다. 아무리 당중앙이 지하로 잠적해야 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이번 사업의 허망한 실패에 대해서는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제일 납득이 안 되는 것이 당조직의 분열현상이었다. 각 도마다 지방당조직이 엄연한데 어찌하여 일제봉기가 이뤄지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당조직에 이상이 없다면, 그럼 이번 사업은 당중앙의 계획거사가 아니고 지엽적인 것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치밀하고 구체적인 사전계획 없이 충동적이고 순간적으로 일으킨 사업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반혁명적인 행위인가. 공산주의를 적으로 삼는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마당에 부분적이고 산발적으로 일으키는 사업은 힘의 소모만 자초하고 상대적으로 적의힘만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뿐이었다. 그런데 사업확대지령은 엄연히 당으로부터 하달되지 않았던가. 다시 혼란의 미궁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가정은 금물이었지만, 사태 전반을 놓고 가정을 한다면, 당의 그 지령은 여수, 순천지구에서 사업을 일으킨 다음 뒤늦게 내려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지극히 반당적인 회의적 추리르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실패를 의식할 때마다 머리를 드는 생각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263-264

이상한 우수가 뭉클 가슴에 괴어왔다. 나무에 묶인 강동식 탓이고 총상을 입고 혼자 버려진 안창민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가슴에 괸 우수가 설명되지 않았다. 아내의 안부가 염려스러워 조직의 명령도 어기고, 위험도 불사하고 행동한 강동식이 과연 나쁘기만 한 것인가 하는 자문이 무슨 앙금처럼 우수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었다. 부모에 대해서, 자식에 대해서, 배우자에 대해서 마음이 쏠려가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 인간의 삶을 가장 비인간적으로 만든 악조건들을 척결해야 하는 마당에 그 기본조건에 대한 충족은 당분간 유보시켜야 한다. 그런 인내의 고통 업이 혁명의 성취는 얻을 수 없고, 혁명의 성취 없이는 그 기본조건마저 파괴되는 것이다. 265



17 배고픔과 동물과 인간

“.. 공산당은 너나읎이 공평하게 사는 시상 맹근다는 말얼 두고 허는 소리요. 그런 시상이 꿈속에서나 있고, 말로나 있는 것이제 사람이 사는 시상에 워디 있을랍디여. 우리 냄편 따라 공산당 허는 농꾼들도 다 그말만 믿고 나선 것이제라. 대대로 물림허는 가난에 한이 맺히고, 배운 것 읎이 무식헌 농꾼덜이 고런 조청맹키로 달디단 말에 워찌 귀 솔깃혀지지 않컸소. 우리 남편맹키로 식자깨나 들었다는 사람덜이 가난허고 불쌍헌 사람덜헌테 죄 많이 짓고 있는 것이제라. 그라고 워디 빨갱이 된 사람덜만 귀 솔깃혔을랍디여. 쌔고 쌘 가난헌 사람덜언 나라가 금허고 순사가 겁난께 표식 안 내서 그렇제 다 귀 솔깃해 있구……”(죽산댁(염상진 부인)이 토벌대장 인만수에게 조사받으면서 했던 표현) 299-300

“무릇 정치라는 것은 명분이나 합법으로 가장된 인간의 탐욕과 이기의 절정의 표현이지요. 하므로, 그 탐욕이나 이기를 채우는 데 반하는 모든 요소는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시키는 것이 정치새리지요.”(스님과 김범우의 대화중 스님의 말) 314

“절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선생님의 말씀대로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개혁 없이는 사람 사는 세상이 될 수 없지요.”
김범우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선생도 그런 생각을 지녔으니 여기 오실밖에요.” 그분은 나직한 소리로 웃는 듯하더니, “세존께서 일찍이 인생 사고(四苦)를 생(生) 노(老) 병(病) 사(死)라 설파하셨는데, 내 주제넘은 소견으로는 ‘주릴 아(餓)’ 아고를 하나 더 첨가시키고 싶습니다. 굶주리는 고통,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부처님께서도 인간의 몸을 타고 나이서 판단을 하시는 데 환경젹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던게 아닌가 합니다. 인도는 열대에 속하는 땅이라서 최소의 노동을 바치면 절대적 아(餓)는 벗어날 수가 있지요. 땅도 무한히 넓고. 그 대신 기후에 따른 병마는 인간이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병고(病苦))는 있으나 아고(餓苦)는 없는 게 아닌가 합니다. ㄸ고같은 사람끼리 짧은 한평생 살다 가면서 누구는 기름지게 먹고 누구는 굶주림에 허덕여야 합니까. 배부른 자에게 이승은 극락일지 몰라도 굶주림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이승은 지옥입니다. 그리고 굶주리는 자들이 절대다수를 이룰 때 그 세상은 바로 지옥인 것이지요. 이건 인간사의 끝없는 숙제일 것입니다.” 316



18 수혈


19 새가 창공에 그 발자국을 새기지 못하듯이 인간사 그 무엇이 영겁 속에 남음이 있으랴

성일(죽임당한 금융조합장의 아들)이 방에만. 틀어박히게 된 것은 하판석 영감의 사망 소식을 듣고부터였다.
“너 생각대로 하판석인가 뭔가 하는 영감탱이가 죽었다.”
윤태주가 이 말을 하는 순간 성일이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야, 정신 차려 임마. 정신 차리라구.” 381

그날 밤부터 성일은 하판석 영감을 꿈에서 만나야 했다. 몰매질을 가했던 그날 밤의 일이 생생하게 재현되기도 했고, 죽어 있던 영감이 벌떡 되살아나기도 했고,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쫓아 오기도 했고, 영감과 낯 모르는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아 자신이 죽어가곧 했고, 붉은 완정을 찬 영감의 아들에게 붙들려 대창에 전신을 찔려 죽기도 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아버지일 뿐이라고, 아버지는 마흔일곱에 돌아가셨는데, 그 영감은 예순도 더 넘었다고, 아버지는 금융조합장이었는데 그 영감은 농사꾼일 뿐이었다고, 그 어떤 합리화 앞에서도 자신이 그 영감을 죽였다는 죄의식에서는 벗어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382-383

“.. 그래도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현실쯤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것이 신문을 열심히 읽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무언가 전체적인 맥을 잡을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할 터인데, .. 김 선생은 전공이 역사시니 그런 눈을 가지셨으리라 믿는데, 저도 좀 맥을 잡을 수 있도록 해주시지요.”(자애병원 전원장의 말) 399

"역사학자들이 대체로 규정한 통설에 의하면 역사적인 한 사건에 대한 객관적 비판이나 정당한 평가는 100년 후에나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발생하기 시작한 모든 사건들은 2045년쯤에나 가서 냉엄한 역사의 심판대 위에 올려질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전제로 하면 제 이야기가 얼마나 주관적인 것이 될 거며 불확실한 것인지는 상상할 수 있으시지요? 그래도 들으시겠어요?"
입을 꼭 다문 전 원장은 고개만 끄덕였다.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제가 파악하고 있는 대로 대충만 얘기하죠. 그러니까, 2차대전 종전 무렵의 세계적 정치상황은 윌슨이 위장적이나마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던 시대는 이미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의 주역이 식민주의의 대표적 국가인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이었다면 2차대전 종전 무렵에는 그 주역이 미국과 소련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항쟁을 계속해서 벌인 데다, 독일의 침략을 받음으로써 식민주의 국가들은 협공을 당하는 이중적 상황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의 한편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소련이 그 세력을 팽창시켜 나가고 있었고, 자본주의 국가 형성을 완성시킨 신생 미국은 그 힘이 갈수록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미국은 2차대전에 참전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궁지에 몰리고 지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자연스럽게 연합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소련도 뒤늦게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상반된 이념을 추구하면서도 그들이 동지가될 수 있었던 것은 독일과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서로를 방어하고자 하는 공동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실리적인 결합이었고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계를 무대로 삼아 자신들의 이념을 확장시키려는 서로 다른 꿈을 속으로 감추고 있었습니다. 2차대전 종전 전에 그들은 이미 그 준비를 했던 것이고, 종전과 동시에 그들은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들의 이념 팽창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분할점령입니다. 우리나라의 분할점령은 독일의 분할점령과는 전혀 그 성격이나 의미가 다릅니다. 미국과 소련이 전범국인 독일을 분할점령한 것은 승전국으로서 전리품을 처리하는 당연한 권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그런 권한은 또 하나의 전범국인 일본에게 행사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들은 우리나라를 분할점령하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팽창주의는 소련의 팽창주의가 일본에까지 미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연합국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미국은 특히 일본 문제에 있어서는 발언권이 절대적이었지요. 일본을 도맡다시피 해서 싸운 것이 바로 미국이니까요. 그래서 미국은 일본 열도를 독일식으로 나눠먹지 않고 독식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건 태평양으로 뻗치는 소련의 힘을 견제하는 동시에 태평양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의 세력권을 형성하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그 계획에따라 당연히 한반도 분할이 필요했고, 독일에서와는 달리 일본 쪽에 전적이 미미한 소련은 한반도의 반이나마 차지하는 데 동의한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에 일본 지상군의 항복을 받기 위해 한반도에 진주하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고, 뒤이어 '통치능력이 생길동안 신탁통치'를 해주겠다는 일방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해방을 갈망해 왔고, 독립국가 건설을 열망하는 우리 민족의 뜻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두 나라의 점령군을 맞으며 우리는새로운 역사의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첫째, 두 강대국이 내세운 명분을 무산시킬 수 있도록 일사불란한 민족적 단합을 보여야 했습니다. 둘째로, 그들의 정치적 도구가 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며 제2의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첫째도 실패, 둘째도 실패함으로써 식민지 상황보다 나을 것 없는 분단국가를 만드는 데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늘과 같은 정치·사회적 혼란과 자체분열을 일으키는 민족적 희생이 야기되게 되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떠나기 전 그의 앞을 가로막는 군중들에게 ‘여러분, 나에게 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주시오' 한 말은 우리 민족의 행동방향을 단적으로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해방은 식민지 시대의 종식이 아니라 새로운 식민지 시대의 개막이었습니다. 전 시대에는 일본을 공동의 적으로 삼는 민족적 명제나 자존이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백인들이 만들어낸 이즘이라는 것에 최면이 걸리고 마취되어 우리끼리 적을 삼아 살육을 자행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즘을 일단 정치도구화한 이상 상호 양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 실현을 위한 상호 상승작용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정치생리이며 힘의 역학입니다. 벌써 서로를 괴뢰라고 공공연하게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유치하고 졸렬하고 파렴치한 짓들입니까. 그러나 그 뻔뻔스러움과 무모함과 이율배반이 곧 우리의 정치현실입니다. 비판이나 선택이 용납되지 않는 획일적 모순의 질서에 줄을 맞춰야 하는 것이 앞으로의 우리의 길입니다. 그 줄에서 이탈하는 자는 적이고, 적은 처단하는 논리만이 절대적일 뿐입니다. 이 현실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다만 시작이라는 것뿐입니다. 미·소의 세력에 우리가 아무리 민족적으로 단결해서 대항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부류들이 서로 양쪽의 정치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 편가름은 앞으로도 무수한 인명의 희생을 요구할 것입니다. 100년 후의 역사는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비판하고 판정 내리게 될지 모릅니다. 지금, 남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혼란은 원장님도 다 아시는 바대로 그런 정치적 대결로부터 파생되는 피할 수 없는 현상들입니다. 아주 복잡한 문제들입니다." 400-404



20 토벌대 물러가라!

“과거란 망각이 아니라 현재의 축적이라는 말이 맞군.”
김범우는 손승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무슨 소린가?”
“왕년의 마르크시스트다워.”
손승호가 고개를 저었다. 444

"자넨 아까부터 날 자꾸만 놀리는군."
손승호가 지친 듯한 표정으로 김범우를 건너보았다. "놀리는 게 아니라 너무 경이로워서 그러네. 이제 치료도 끝났으니 경위나 간단히 듣세."
그때 간호원이 차를 날라왔다. 무쇠로 만든 찻주전자의 무게감이 고풍스러움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장좌리에 가정방문을 나갔었지. 마침 토벌대가 빨갱이 색출을 나왔는데, 동네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한쪽은 잔치 준비라도 하는 것처럼 음식냄새 풍기며 소란스러웠고, 다른 한쪽은 금방 누구라도 죽일 것처럼 살벌한 분위기였지. 남자들은 모조리 모아 세워놓고 사상조사를 하는 거였네. 장만하고 있는 음식은 그 조사를 적당히 잘해달라는 뜻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거야 이미 동네마다 행해진 일이니까 그러려니 외면을 했지. 그런데 술에 밥에 배 터지게 먹은 그들이 휴식이랍시고 낮잠을 자기 시작했는데, 글쎄 한 놈이 빠져나와 처녀 혼자 있는 집으로 뛰어든 거야. 그래 어찌 됐겠나. 처녀는 반항을 하고 그놈은 덤벼들고 하는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는데 밖에 나갔던 처녀 오빠가 돌아온 거네. 상황이 어찌 됐겠어. 다급해진 그놈이 총을 갈겨댄 거야. 마당에 죽어 넘어진 그 참혹한 꼴이라니. 그 집이 내가 몇 시간 전에 들른 학생 집이었고, 그때 만났던 사람을 피 흘리는 시체로 보아야 했지. 이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총 든 자들 앞에 인명이 파리 목숨이야. 그런데 나를 더 미치게 만들어버린 건 그 부모들의 체념이야. 분하고 원통하지만 자기네처럼 힘없는 사람이 어쩔 수 있느냐는 것이었네.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었네. 나는 그 시체와 절망적 체념에 빠진 부모의 슬픔을 외면하고 돌아설 수가 없었어. 그런 비굴과 비겁을 저지를 용기가 없었던 거야. 그렇다고 내가 그들보다 나은 힘을 가진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또한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네. 그 순간 나는 내가 한 마리 작고 하잘것없는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어.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 인간인가, 이런 집중적인 회의 앞에서 나는 완전히 해체되고 있었어. 그 장소를 외면할 비굴한 용기도 없고, 그렇다고 폭력에 대항할 당당한 용기도 없는 나는 이미 내 눈앞의 시체와 다를 것이 없었지. 그 순간 난 각오했어. 인위적인 힘을 만들자고, 그들에게도 힘이 있음을, 관권의 폭력을 쳐부술 수 있음을 실증시켜 주고 싶었어. 그때의 절망스러움은 나를 내 정신이 아니게 만들었어. 나는 선생이란 무기를 최대한 이용해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했지. 그 시체까지 동원한 선동은 30분도 안 걸려 완료됐지. 줄을 세우고, 구호를 몇 번 연습시키고, 그리고 토벌대놈들이 뺑소니쳐버린 읍내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한 거야." 446-447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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