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판 서문

한국 사회 역시 성과사회이고 그에 따른 사회적 폐해와 정신 질환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적어도 그 점에서는 서구 사회와 전혀 다르지 않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6-7




신경성 폭력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연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11-12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전 사회를 장악한 이러한 면역학적 장치의 본질 속에는 어떤 맹목성이 있다.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면역 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자체이다.

아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12


어떤 패러다임 자체가 반성의 대상으로 부상한다는 것은 그 패러다임이 몰락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인 경우가 많다... 냉전의 종식 역시 바로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13


오늘날 이질성은 아무런 명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되었다. 면역학 이후 시대의 차이, 후기근대적 차이는 더이상 병을 유발하지 않는다. 명역학적 차원에서 차이란같은것이나 마찬가지다. 차이에는 말하자면 격렬한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가시가 빠져 있다. 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한다. 낯선 것은 이국적인것으로 변질되며, 여행하는 관광객의 향유 대상이 된다. 관광객, 또는 소비자는 더 이상 면역학적 주체가 아니다.  13-14


보드리야르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 죽는다", "현존하는 모든 시스템의 비만 상태"를 지적하기도 한다.  17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  18-19


보드리야르 "네트워크와 가상세계의 폭력은 바이러스성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은 정면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전염, 연쇄 반응, 모든 면역성의 제거 등과 같은 수단을 통해 작동한다는 점에서 바이러스적이다. 또한 전통적인 부정적 폭력과 반대로 긍정성의 과잉을 통해 작동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끝없는 증식과 비대화, 변이를 통해 몸을 잠식해 들어오는 암세포처럼, 가상성과 바이러스성 사이에는 은밀한 친족성이 있다."

보드리야르가 구성한 적(敵 원수적)의 계보학에 따르면 최초 단계의 적은 늑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늑대는 외부의 적으로서 사람들은 이러한 적을 막기 위해 요새를 짓고 성벽을 쌓는다." 다음 단계에서 적은 쥐의 형태를 취한다. 이 적은 지하에서 활동하며 위생학적 수단으로 퇴치할 수 있다. 그다음 단계인 해충의 단계를 거치고 나면 마지막으로 바이러스적 형태의 적이 출현한다. "네번째 단계는 바이러스이다. 바이러스는 사실상 사차원에서 활동한다. 바이러스는 시스템의 심장부에 들어와 있는 까닭에, 바이러스에 대한 방어는 훨씬 더 까다로운 과제가 된다." "전 지구에 퍼져 있는 적, 하나의 바이러스처럼 도처에 스며들고 권력의 모든 틈새로 파고드는 유령 같은 적"이 출현한다. 바이러스성 폭력은 시스템 속에 테러리즘의 비밀 세포로 자리를 잡고 시스템을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키려 하는 개별자들에게서 나온다.  19-20


신경성 폭력은 어떤 면역학적 시각에도 포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부정성이 없기 때문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  21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노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24


알랭 에랭베르(Alain Ehrenberg)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

우울증을 초래하는 요인 가운데는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도 있다. 우울증의 이러한 측면은 에랭베르의 논의에서 빠져 있다. 그는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이러한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26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28




깊은 심심함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 야생에서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기법이 멀티태스킹인 것이다.

먹이를 먹는 동물은 이와 동시에 다른 과업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를테면 경쟁자가 먹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먹는 중에 도리어 잡아먹히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하며, 동시에 새끼들도 감시하고, 또 짝짓기 상대도 시야에서 놓치지 않아야 한다. 수렵자유구역에 사는 동물은 주의를 다양한 활동에 분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까닭에 깊은 사색에 잠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먹이를 먹을 때도, 짝짓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동물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 사색적으로 몰입할 수 없다. 언제나 그 배경의 사태도 계속 정신적으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멀티태스킹뿐만 아니라 컴퓨터게임과 같은 활동 역시 야생동물의 경계 태세와도 크게 다르지 않는 주의구조, 넓지만 평면적인 주의구조를 생산한다.  30-31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hyperattention)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벤야민은 꿈의 새가 깃드는 이완과 시간의 둥지가 현대에 와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탄한다.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런 것을 "짜지도, 잣지도" 않는다. 심심함이란 "속에 가장 열정적이고 화려한 안감을 댄 따뜻한 잿빛 수건이다." 그리고 "우리는 꿈꿀 때 이 수건으로 몸을 감싼다." 우리는 "수건 안감의 아라베스크 무늬 속에서 안식한다." 이완의 소멸과 더불어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이 소실되고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도 사라진다. 이 공동체의 정반대편에 있는 것이 우리의 활동 공동체이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둔다.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걸으면서 심심해하고 그런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잃고 안절부절못하며 돌아다니거나 이런저런 다른 활동을 해볼 것이다. 하지만 심심한 것을 좀더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어쩌면 걷는 것 자체가 심심함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그로 하여금 완전히 새로운 움직임을 고안하도록 몰아갈 것이다. 달리기, 또는 뜁박질은 새로운 움직임의 방식이라기보다 그저 걷기의 속도를 높인 것일 뿐이다. 이를테면 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움직임이다. 오직 인간만이 춤을 출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걷다가 깊은 심심함에 사로잡혔고 그래서 이런 심심함의 발작 때문에 걷기에서 춤추기로 넘어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걷기가 그저 하나의 선을 따라가는 직선적 운동이라면 장식적 동작들도 이루어진 춤은 성과의 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사치이다.  32-34


떠다니는 것, 잘 눈에 띄지 않는 것,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이야말로 오직 깊은 사색적 주의 앞에서만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긴 것, 느린 것에 대한 접근 역시 오랫동안 머무를 줄 아는 사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지속의 형식 또는 지속의 상태는 과잉활동성 속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34





보는 법의 교육


사색적 삶은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전제한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 과업을 거론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보는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배움의 목표는 니체에 따르면 "고상한 문화"이다.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눈을 평온과 인내, '자기에게 다가오게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눈으로 하여금 깊고 사색적인 주의의 능력, 오래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정신성을 갖추기 위한 최초의 예비 교육"이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의 부재 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여기서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바로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이는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저 긍정하는 수동적인 자기 개방이 아니다. 사색적 삶은 오히려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실상 활동과잉은 다름 아닌 정신적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  47-48


활동성이 첨예화되어 활동과잉으로 치달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성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활동성의 변증법이다. 그것은 자유 대신 새로운 구속을 낳는다. 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48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못하는 과잉활동적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이다. 순수한 활동성은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연장할 뿐이다. 진정 다른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려면 중단의 부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행동의 주체는 오직 잠시 멈춘다는 부정적 계기를 매개로 해서만 단순한 활동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우연의 공간 전체를 가로질러 볼 수 있다. 머뭇거림은 긍정적 태도는 아니지만,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오늘날 우리는 중단, 막간, 막간의 시간이 아주 적은 시대를 살고 있다. [활동적 인간의 주된 결함]이라는 아포리즘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쓴다. "활동적인 사람들은 보통 고차적 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 [..] 이런 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 돌이 구르듯이 활동적인 사람들도 기계적인 어리석게 계속되는 활동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가속화와 활동과잉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분노하는 법도 잊어가고 있다. 분노는 특별한 시간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전반적인 가속화 및 활동과잉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가속화와 활동과잉은 넓은 시간적 지평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때 미래는 현재의 연장시킨 것 정도로 축소되고, 다른 것에 시선을 던질 수 있는 부정적 태도가 싹틀 여지는 전혀 없다. 반면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제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부논의 전제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선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분노는 짜증과 구별된다. 오늘의 사회를 특징짓는 전반적인 산만함은 강렬하고 정력적인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렸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사람들은 불가피한 일에 대해서도 짜증을 내곤 한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불안은 현존재 전체를 붙들고 흔들어댄다. 분노 역시 하나하나의 사태에 관한 것이 아니다. 분노는 전체를 부정한다. 분노가 보여주는 부정성의 에너지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분노는 예외적 상태이다. 세계가 점점 더 긍정적으로 되어가면서 예외적 상태도 더 줄어든다. 아감벤은 이처럼 긍정성이 확대되고 있는 현실을 간과한다. 예외 상태가 한계를 이탈하여 정상 상태가 되어간다는 그의 진단과는 반대로, 오늘날 사회의 전반적인 긍정화는 모든 예외 상태를 흡수해버린다. 그리하여 정상 상태가 전체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증대되는 세계의 긍정성이야말로 "예외 상태"나 "면역성"과 같은 개념에 대해 사람들이 주목하게 된 이유이다. 하지만 그렇게 주목받는다고 해서 이런 개념들이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이들이 소멸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49-51


사회의 긍정성이 증가하면서 불안이나 슬픔처럼 부정성에 바탕을 둔 감정, 즉 부정적 감정도 약화된다. 사유 자체가 "항체와 자연적 면역성으로 이루어진 그물"이라면, 부정성의 부재는 사유를 계산으로 변질시킬 것이다. 컴퓨터가 인간의 뇌보다 더 빨리 계산할 수 있고 엄청난 데이터를 조금도 토해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컴퓨터에 어떤 종류의 이질성도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컴퓨터는 긍정기계이다. 천재 백치가 보통은 계산기 밖에 해낼 수 없는 과제를 척척 해내는 것은 바로 부정성의 부재와 자폐적 자기 관련성 덕택이다. 세계가 전반적으로 긍정화되는 추세 속에서 개인도 사회도 자폐적 성과기계로 변신한다. 또는 성과를 극대화하려는 과도한 노력이 가속화 과정에 방해가 되는 부정성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인간이 부정의 존재라고 한다면, 세계의 전면적 긍정화는 무시할 수 없는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헤겔에 따르면 부정성이야말로 인간 존재를 생동하는 상태로 지탱해주는 것이다.  51-52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니체의 말을 빌린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다. 이러한 부정적 힘은 단순한 무력함, 무언가를 할 능력의 부재와는 다른 것이다. 무력함은 단순히 긍정적인 힘의 대립항일 뿐이다. 무력함은 무언가를 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결국 그 무언가에 대한 종속이며 그 점에서 긍정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부정적 힘은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는 이런 긍정성을 넘어선다. 그것은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지각하지 않을 수 있는 부정적 힘 없이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처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어떤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을 거이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무언가 생각할 힘밖에 없다면 사유는 일련의 무한한 대상들 속으로 흩어질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긍정적 힘, 긍정성의 과잉은 오직 계속 생각해나가기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52-53


무위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예컨대 참선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들이닥쳐 오는 것에서 스스로 해방함으로써 무위의 순수한 부정성, 즉 공(空 빌공)에 도달하려 한다. 그것은 극도로 능동적인 과정이며 수동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참선은 자기 안에서 어떤 주권적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연습이다. 이에 반해 긍정적 힘만을 지닌 사람은 대상에 완전히 내맡겨진 신세가 된다. 역설적이게도 활동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것은 긍정적 힘의 일방적 절대화가 낳은 결과이다.  53-54





피로 사회 

피로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모리스 블랑쇼


활동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성과사회는 서서히 도핑사회로 발전해간다..도핑은 말하자면 성능 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한다. 최근에는 어엿한 과학자들조차 그런 약물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무책임한 태도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외과의사가 신경향상제의 도움으로 좀더 정신을 집중하면서 수술할 수 있다면 실수도 줄어들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신경향상제를 복용하는 것도 별 문제가 아니다.  65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66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72






역자후기


한병철은 긍정성의 과잉이 자아를 새로운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마치 늘어나는 자기 자신의 지방질에 병들어가는 사람처럼,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마모시켜간다. 그 결과 스스로를 낙오자로 느끼는 우울증 환자가 넘쳐나고, 성과를 위해 약물을 불사하는 도핑주체도 증가하고 있다. 이는 금지, 강제, 억압의 철폐, 타자에 대한 관용의 확대가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유토피아로 이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오늘의 주체는 오히려 자유의 무게에 짓눌려 소진되고 있는 것이다. 피로는 성과주체의 만성질환이다.  120-121


한병철이 이야기하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 부정성의 패러다임에서 긍정성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생산적인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학교 교육과 관련하여 체벌이나 학생 인권 조례 등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논쟁은 우리 역시 그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과정 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일 것이다. 의무 과목의 축소 및 철폐, 자기 주도 학습의 강조, 학생 개개인의 창의성과 개별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입시 전형 방식의 도입(예컨대 입학사정관제)은 학생들을 입시 지옥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주체로 길러내기보다는 더욱더 복잡하고 불투명한 경쟁, 한병철이 말하는 "절대적인 경쟁"(남과의 상대적 경쟁이 아니라 스스로를 끝없이 뛰어넘어야 하는 자기 자신과의 경쟁)의 무대로 몰아가고 있다. 입시 지옥에서의 해방을 약속한 최초의 교육부 장관이 내세운 구호가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갈 수 있다'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20개에 가까운 교과목의 무게에 신음하던 학생들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들렸을 이 구호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며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주체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 아니었을까?  122-123


한병철은 성과사회와 성과주체의 이상이 오늘의 세계에서 전일적 지배를 확립한 자본주의의 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더욱 생산적으로 될 것'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본적 요구라면, 이 요구가 관철되는 방식이 후기 자본주의에 이르러 지배와 강제에 의한 타자 착취에서 성공적 인간이 되기 위한 자기 착취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한병철은 그것을 착취의 진화로 파악한다. 타자 착취에 의한 생산성의 향상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더욱 효율적인 방법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바로 자기 착취라는 것이다.  126-127


성공적 인간이라는 이상에 유혹당한 사람들의 열망과 실천이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확대 재생산에 기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작 인간 자신은 소진되고 마모된다...

한 병철은 시스템이 이상적인 자아가 되고자 하는 개인들의 욕망으로 지탱되고 있다면, 개개인이 그러한 욕망의 허구성에 대해 각성하는 데서 비로소 시스템의 변화도 시작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는 우울증을 이 시대의 핵심적 질병으로 지목하고, 그 배후에 성과사회의 압력이 놓여 있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병의 진단은 나왔지만 그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타자의 강제가 인간을 옥죄고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그런 타자에 대한 폭력적 저항을 통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마르크스주의의 모델이다. 그러나 우울증의 배후에 놓인 성과사회의 압력은 단순한 외적 강제가 아니라 유혹의 형태를 취하며, 오직 인간 자신의 욕망을 매개로 해서만 관철된다. 따라서 성과사회의 압력은 끝없는 성공을 향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 12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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