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디 같은 사람과 살아간다면 너무 좋겠다'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주연이지만 영화의 절반도 되기전에 죽는다.

'루디도 참 행복하게 죽는구나' 영화를 다보고나서 들었던 생각이다.

이 영화는 위의 두 가지 외에도 현대인들이 꼭 생각해야할 꺼리들을 담아내고 있다.

영화는 애절함을, 뭉클함을, 행복감을 들게도 하였고, 비통함을, 안타까움을 들게도 하였다.

앞의 감정들은 루디와 부인 트루디를 보면서 들게되고, 뒤의 감정은 자녀들을 보면서 들었다.


세 자녀들은 살아가는데 바쁘다. 시간의 여유가 아니라 부모에게 시간을 줄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부모에 대한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에 그리고 편한 것에 더 익숙한 나머지 부모에게 시간을 투자하기위해 자신의 시간을 비워내지 못한다. 돌아가신 후에도..

그들의 대화는 부끄러워지게하여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마음은 가지고 있으나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 모습이 나를 비추는건 아닌가해서..

자녀들은 부모의 방문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첫째아들은 싫어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회사생활을 하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가 어렵다. 부모에게 자신의 시간을 쓰는 것이 투자라고 하는게 맞을까.. 부모는 그리 오래 자식들과 함께할 수 없다. 그렇기에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시간이라면 투자라 할 수 있을것이고 투자해야만 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딸은 동성애자로 나오는데 그 역시 부모에게 시간을 할애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애인이 부모에게 더 잘하는모습이다. 뭔지 모를 부모에게 불만을 가진것처럼 보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반나절쯔음 부모님과 함께 있다가 언성을 높이게 된다.

지극히 일반적이라 할 수도 있을만한 일이긴 한데, 그 모습이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막내 아들 칼은 일본에서 생활한다. 엄마가 좋아하는 일본, 동경하는 일본 하지만 일본을 보기전에 엄마는 세상에 없다. 아버지만 그것도 엄마의 흔적을 함께하여 대신온 아버지만 일본을 방문한다. 루디는 아내의 원을 대신 이루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고 그녀와 함께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하지만 아들의 눈에는 그것이 아니라 이상한 행동을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뿐이다.

아버지가 아침식사로 엄마표 롤을 만들어 주었을때, 엄마의 생각으로 자리에서 울기도 하지만 아버지와의 거리감은 전혀 좁혀지지 않는다. 함께 술을 마시고는 결국은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말을 뱉는다. 직장때문에 가족을 버린 아버지로 생각한다.

퇴근해서 아버지가 계시지 않을 줄 알고 집에서 누나와 통화를 하면서 '아버지가 이상하다. 엄마 옷을 들고 뭐하는지 모르겠다. 혼자 종일 다닌다.'

결국 아버지의 장례식에 모였을때와 엄마의 장례식에서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전혀 연결되는 내용은 아니지만 김애란의 <두근 두근 내인생>에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데인 것처럼...' 맞아. '늙음'에 데인 것처럼 놀랐다고 했어요.

"저는 잘 이해가 안돼요."

"뭐가?"

"나이 든 사람 피부에 탄력이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잖아요."

"그렇지."

"머리가 세는 것도, 이가 빠지고, 눈이 나빠지고, 주름이 느는것도,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잖아요."

"그래."

"그런데 그렇게 좋아했다면서, 그 짧은 접촉 한번에, 마치 늙음이 자기에게 옮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정색하고 돌아설 정도면, 그 여자가 상상한 늙음이란 대체 어떤 거였을까요?"  134-135

책의 내용은 노교수와 젊은 제자의 사이에서 잠시 스친 촉감때문에 일어난 사건의 표현이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그런마음을 가진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행동은 책의 내용에서의 행동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내 경우에서 말이다


소통이란건 마음이 서로에게 닿아야 한다. 소통은 생각이 아니라 생각의 행동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자녀들이 아버지와의 소통자체가 없다. 생각부터 없어보인다. 부모에게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것처럼 소통을 위한 시간을 먼저 만들어 가야 하는것이 아닐까.

대체로 우리는 있을때는 잘 모르다가 없어야 소중함을 느끼게 되듯이, 부모의 존재유무는 매우 큰 자리를 차지한다. 

부모에대해 자신의 마음은 그리고 자신의 행동은 어떠한지 생각해 보게 되는 영화이다.


트루디는 정년을 1년쯤 남겨둔 남편의 암선고를 받게되고, 사실을 숨긴채 남편 루디와 여행을 떠난다. 저녀들이 있는 곳으로 그리고 보고 싶은 바다가 있는 곳으로.. 그리고 트루디는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그녀는 원하던 일본을 가지는 못하였지만, 베를린에서 부토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그림자의 춤 부토. 그녀는 마지막에 부토를 떠올리며 자신이 분장하였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잠결에 숨을 거둔다.

트루디가 남편 루디를 바라보는 눈빛과 표정을 각인하였다. 그 온화하며 잔잔하지만 깊은 사랑을 간직한 표정. 손주의 방에서 침대와 바닥에서 따로 잠을 청하지만 서로 손을 잡으며 짓는 표정은 삶에서 사랑에 의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평온함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두에서 언급한 생각이 든 지점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였지만 그런 마음보다 더 큰 애정을 간진한 사람의 사랑.

남편을 떠나보내야하는 무너지는 가슴에도 애정은 더 커짐이 표정에 담겨있다.

인스턴트 식품에 묻혀 인스턴트 사랑의 시대에 더욱 염원하게 되는 장면이 아닐까. 


트루디를 급작스럽게 떠나보낸 루디는 상실감을 그러면서 그제서야 떠난 부인의 모든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부인이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되고 그녀를 위한 여행을 한다. 막내가 살고 있는 일본으로. 

서먹한 아들의 비수를 찌르는 행동과 말고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을만큼 오직 아내 트루디만 생각한다. 

그녀의 옷가지들을 들고 여행하고 낮시간 다닐때는 코트 속에 부인의 옷을 입고 함께 여행한다. 

한적한 공원에서 부토춤은 추는 유(아야 이리즈키)를 알게되고 그제서야 부토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녀를 통해 아내와 더 교감할 수 있게 되고, 유를 통해 심신의 안정을 조금씩 찾아가게 된다. 결국 함께 후지산으로 향한다. 아내가 보고싶어하는 후지산으로.

그는 후지산이 선명하게 보이는 날 새벽 조용히 부토 화장을 하고 후지산 근처 후지산을 띄운 호수앞에서 부토 춤을 춘다. 영화는 부토 춤을 추는 루디에게 어느새 트루디와 함께 추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루디는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루디는 행복하지 않았을까. 

잊지못하는 상실감을 부인의 마음을 알게되면서 그녀와 공감하며 죽게되는 루디. 나는 행복한 죽음이라 생각하게 된다.






아래는 영화에서 트루디역을 맡은 하넬로레 엘스너의 인터뷰이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찾다가 보았는데 그녀의 설명이 다시금 영화를 생각나게 하여 퍼온다.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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