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모사하는 자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랑은 더욱더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 파라켈수스



1 사랑은 기술인가?


‘사랑은 기술이다’라는 견해를 전재로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물론 사랑은 즐거운 감정이라고 믿고 있다.
..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특별한 태도는 며 가지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13-14

사랑에 대해서 배울 필요가 없다는 태도의 배경이 되는 두 번째 전제는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정(假定)이다. 14

남자에게 매력있는 여자 그리고 여자에게는 매력있는 남자는 탐나는 경품이다. ‘매력’은 보통 인기 있고 퍼스낼리티(Personality) 시장에서 잘 팔리는 품질 좋고 멋진 포장을 의미한다. 15-16

사랑에 대해서는 배울 필요가 없다는 가정에 이르게 하는 세 번째 오류는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 혹은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사랑에 ‘머물러’있는 상태를 혼동하는 것이다. 17

최초의 조치는 삶이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18

우리 문화권의 사람들은 사랑의 경우 명백히 실패하고 있으면서도 왜 사랑의 기술은 도무지 배우려고 하지 않는가? 19



2 사랑의 이론


1. 사랑,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
성적 오르가슴은 황홀경에 의해 발생하는 상태 또는 마약의 효과와 비슷한 상태를 가져올 수 있다. 공동체의 성적 난행 의식은 여러 원시 의식의 일부였다. 도취 경험을 한 사람들은 얼마 동안은 분리감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다. ..
도취 상태가 부족 내의 공통된 관습으로 행해지는 한, 불안감이나 죄책감은 생기지 않는다. 28

비도취적 무노하군에 살고 있는 개인이 선택하는 형태는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이다. 사회적으로 정형화된 해결에 참여하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은 죄책감과 후회로 괴로워한다. 알코올이나 마약에 피난함으로써 분리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도취 상태가 지나가버리고 나면 그들은 더욱 심한 분리감을 느끼며, 더욱 자주, 더욱 강렬하게 알코올이나 마약에 의존하게 된다.
성적 도취를 해결책으로 삼는 경우는 이와는 약간 다르다. 성적 도취는 어느 정도 분리감을 극복하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형태이며 고립 문제에 대한 부분적 해답이 된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분리 상태를 해결하지 못하는 많은 개인의 경우, 성적 오르가슴 추구는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과 별로 다를 바없는 기능을 떠맡게 된다. 이것은 분리에 의해 생긴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절망적 노력이며, 결과적으로 분리감을 더욱 증대한다.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한순간을 제외하고는, 두 인간 사이의 간격을 좁혀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29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등의 의미는 달라졌다. 이 사회에서 평등이라는 말은 자동 인형의 평등, 개성을 상실한 인간들의 평등을 말한다. 오늘날 평등은 인체성보다는 오히려 동일성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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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을 추구하는 이러한 경향에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해서 기만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차이를 제거하려는 경향의 일부이다. 33

현대 사회는 인간에게 대집단 속에서 마찰 없이 원활하게 일하도록 서로 동일한 원자적(原子的) 인간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몯두 동일한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각기 자신의 욕망에 따르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현대의 대량 생산이 상품의 규격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사회적 과정은 인간의 표준화를 요구하고 이러한 표준화를 ‘평등’이라고 한다.
일치에 의한 합일은 강렬하지도 않고 난폭하지도 않다. 이러한 합일은 냉정하고 관례에 따라 지시되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때로는 분리 상태에서 생기는 불안을 진정시키기에 불충분하다. 34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어떤 종류의 합일에 대해 말하는지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존의 문제에 대한 신중한 해답으로서 사랑을 말하고 있는가, 또는 ‘공서적(共棲的) 합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랑의 미숙한 형태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앞으로 나는 전자의 의미로만 사랑이라는 말을 쓰겠다. 37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는 복종, 또는 임상적 용어를 사용한다면 피학대 음란증(마조히즘, masochis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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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서적 융합의 ‘능동적’ 형태는 지배, 혹은 피학대 음란증에 대응되는 심리학적 용어를 사용하면 가학성 음란증(사디즘, sadism)이다. 38-39

공서적 합일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
우리가 사랑을 활동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활동’이라는 말의 애매한 의미 때문에 난점에 봉착한다. 이 말의 현대적 용법에서 ‘활동’이라는 말은 에너지를 소비하여 기존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행위를 의미한다. 40

활동에 대한 또 하나의 개념은 외부적 변화가 일어났든, 일어나지 않았든 인간의 타고난 힘을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41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42

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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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성 기능의 절정은 준다는 데 있다. 남성은 자기 자신을, 자신의 성기를 여자에게 준다. 오르가슴은 순간에 남자는 정액을 여자에게 준다. 그는 능력이 있는 한, 정액을 주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여자의 경우, 비록 약간 더 복잡하기는 하지만, 사정은 다르지 않다. 여자는 그녀의 여성으로서의 중심을 향해 문을 열어준다. 받아들이는 행위에서 그녀는 주고 있는 것이다. 주는 행위가 불가능하다면, 받기만 한다면, 그녀는 불감증이다. 42-44

준다고 하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 영역이 아니라 이간적인 영역에 있다. 44-45

마르크스는 ..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은 사랑으로만, 신뢰는 신뢰로만 교환하게 될 것이다. 예술을 감상하려 한다면 당신은 예술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을 갖고 싶다면, 당신은 실제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발전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신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관계를 당신의 의지의 대상에 대응하는, 당신의 ‘현실적이고 개별적인’ 생명의 분명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사랑을 일깨우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곧 당신의 사랑이 사랑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만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생명의 표현’에 의해서 당신 자신을 ‘사랑받는 자’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능한 사랑이고 불행이 아닐 수 없다.” 46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 여자를 본다면, 우리는 그녀가 꽃을 ‘사랑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이다.” 이러한 적극적 관심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 47

보호와 관심에는 사랑의 또 하나의 측면, 곧 ‘책임’이라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49

만일 사랑의 세 번째 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할 것이다.
존경은 이 말의 어원(repicere=바라보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49-50

어떤 사람을 존경하려면 그를 잘 ‘알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50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침투하는 것이고, 이러한 침투를 통해 알려고 하는 나의 욕망은 합일에 의해 만족을 얻는다. 융합하는 행위를 통해 나는 당신을 알고 나 자신을 알고 모든 사람을 안다. .. 우리의 사고(思考)가 제시하는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합일의 경험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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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지식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며, 사랑은 합일의 행위를 통해 나의 물음에 대답한다. 사랑하는, 곧 나 자신을 주는 행위에서, 다른 사람에게 침투하는 행위에서 나는 나 자신을 찾아내고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는 우리 두 사람을 발견하고 인간을 발견한다. 53-54

나는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아야 한다. 인간을 객관적으로 알게 될 때에만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인간의 궁극적 본질을 알 수 있다. 54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성숙한 인간, 곧 자신의 힘을 생산적으로 발휘하고 스스로 일한 결과만을 차지하려고 하고, 전지전능이라는 자아 도취적 꿈을 포기하고, 오직 순수한 생산적 활동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내적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이다.
지금까지 나는 인간의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 사랑, 합일에의 열망을 실현하는 사랑에 대해 말했다. 55-56


2.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무조건적이다. 67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이 있는 사랑이다. 69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성숙한 사람은 외부에 잇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으로부터 해방되어 내면에 그 모습을 간직한 사람이다. 71

정신적 건강과 성숙의 기반은 어머니 중심의 애착에서 아버지 중심의 애착으로의 발달, 그리고 이러한 애착의 궁극적 종합에 있다. 72


3. 사랑의 대상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포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다. 74

사랑은 활동이며 영혼의 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단지 올바른 대상을 찾아내는 것만이 필요하며, 그렇게 되면 그 밖의 일은 모두 저절로 될 것이라고 믿는다. 74-75

- 형제애
형제애는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의 특색은 배타성이 없다는 것이다. 76

형제애는 동등한 자 사이의 사랑이다. 77

무력한 인간에 대한 사랑, 가난한 자와 이방인에 대한 사랑은 형제애의 시작이다. 77

- 모성애
모성애는 어린아이에게 살려고 하는 소망뿐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을 천천히 길러준다. 이러한 사상은 성서의 다른 이야기에서도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약속된 땅(땅은 언제나 어머니의 상징이다)은 ‘젖과 꿀이 넘쳐흐른다’고 묘사되고 있다. 젖은 사랑의 첫 번째 측면, 곧 보호와 긍정적 측면의 상징이다. 꿀은 삶의 달콤함, 삶에 대한 사랑, 살아 있다는 행복감을 상징한다. ..
꿀을 줄 수 있으려면 어머니는 ‘좋은 어머니’일 뿐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어야 한다. .. 이 두 태도는 어린아이의 퍼스낼리티 전체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실제로 어린 아이-그리고 어른- 사이에서 ‘젖’만 먹은 자와 ‘젖’과 ‘꿀’을 먹은 자를 가려낼 수 있다. 78-79

- 성애
성애는 완전한 융하브 곧 다른 한 사람과 결합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성애는 본질적으로 배타적이며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성애는 아마도 현존하는 사랑의 형태 중 가장 기만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83

- 자기애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은 양자택일적인 것이 아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될 것이다. 91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고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원하며, 주는 데서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받는 데서만 기쁨을 느낀다. 그는 거기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만 외부 세계를 본다. 그는 다른 사람의 욕구에는 흥미가 없고 다른 사람의 존엄성과 통합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유용성을 기준으르 모든 사람과 사물을 판단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랑할 줄 모른다. 92-93

자기애에 대한 이러한 사상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다음과 같은 말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며,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96

- 신에 대한 사랑
신이 아버지인 한, 나는 어린아이다. 나는 전지전능에 대한 자폐적 욕마응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나는 아직도 인간으로서의 나의 한계, 무지, 무력함을 깨닫는 객관성을 획득하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나를 구해주고 지켜주고 나에게 벌을 주는 아버지, 내가 복종할 때 나를 좋아하고, 내가 찬미하면 기뻐하고, 내가 복종하지 않으면 화를 내는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인적 발달에서 이러한 유아적 단계를극복하지 못한 것은 매우 분명한 이라며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신에 대한 신앙은 도움을 주는 아버지에 대한 신앙-유치한 환상-이다. 몇몇ㅊ 위대한 인류의 스승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종교의 개념을 극복했어도 이것은 아직도 종교의 지배적 형태이다. 105-106

인류 역사에서 우리는 동일한 발달을 보고 또 예상할 수 있다. 곧 어머니인 여신(女神)에 대한 무력한 애착으로서의 신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여, 아버지인 남신(男神)에 대한 순종적인 애착을 거쳐, 신이 이미 외부적 힘이 아니고 인간이 사랑과 정의의 원리를 자기 자신 속에 흡수하여 인간과 신이 일체가 되는 성숙한 단계에 이르고, 마침내 시적, 상징적 의미로서만 신에 대해 말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찰에서 신에 대한 사랑과 어버이에 대한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떤 사람이 어머니나 집단이나 민족에 대한 근친애적 애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또는 상을 주고 벌을 주는 아버지, 또는 어떤 다른 권위에 대한 유치한 의존 상태를 유지한다면, 그는 신에 대한, 더욱 성숙한 사랑을 발달시킬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종교는 신을 모든 일로부터 보호해주는 어머니 또는 상벌을 주는 아버지로서 경험하는 초기 단계의 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 종교에서 우리는 초기이 가장 원시적인 발달 단계에서 최고의 발달 단계에 이르리까지 모든 단계가 현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18-119



3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


서양 생활에 대한 객관적 관찰자들은 누구든지 사랑-형제애, 모성애, 성애(性愛)-이 비교적 희귀한 현상이며 여러 가지 형태의 사이비 사랑-이것은 사랑의 붕괴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형태다-이 사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123

자본은 노동력을 지배한다. 생명이 없는 축적된 물품이 살아 있는 인간의 힘, 곧 노동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시작된 아래로 자본주의의 기본 구조다. .. 자본주의가 발달한 결과, 우리는 자본이 점점 더 중앙집권화하고 직중화하는 가정을 목격하고 있다. 1244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은 노동의 조직화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방법에 있다. 노도잉 철저하게 분업화되고 광범하게 집중화된 기업에서 노동은 조직화되고, 개인은 개성을 잃고 소모적인 기계의 톱니바퀴가 된다. 125

근대 자본주의는 원활하게 집단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 더욱 많이 소비하는 사람들, 그 취미가 표주노하되고 쉽게 영향받고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근대 자본주의는 권위나 원리, 또는 양심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즐거이 명령에 따르고 그들에게 기대되는 일을 하고 마찰 없이 사회 기구에 순응하는 사람들, 폭력 없이 관리되고 지도자 없이 인도 되고 목적 없이 - 좋은 것을 만들어내고 계속 움직이고 기능을 다하고 곧바로 나간다는 목적 이외에는 -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현대인은 자기 자신, 동료,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는 상품으로 변하고, 현재의 시잘 조건 아래서 최대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투자로서 자신의 생명력을 경험한다. 인간 관계는 근본적으로 소외된 자동 기계 같은 관계가 되고, 각자는 군중과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따라서 사상이나 감동이나 행동에서 각자의 차이가 없다.
모든 사람이 되도록이면 타인들과 함께 있으려고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아주 고독하며, 분리 상태가 극복되지 못했을 때 필연적 결과로 생기는 깊은 불확실성과 불안, 죄책감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 문화는 사람들이 이러한 고독을 의식하고 깨닫지 않게끔 도와주는 여러 가지 완화제를 제공한다. 우선 제도화된 기계적 작업의 엄밀한 규격화,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 곧 초월과 합일에 대한 갈망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노동의 규격화만으로는 이러한 일에 성공하지 못하므로, 인간은 오락의 규격화에 의해, 곧 오락산업에 의해 제공되는 음향이나 구경거리를 수동적으로 소비함으로써, 더 나아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사고 이것을 곧 다른 것과 교환하는 데 만족함으로서 자신의 의식되지 않는 정말을 극복한다. 현대인은 사실상 올더스 레너드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그려놓은 상(像)에 가깝다. 곧 잘 먹고 잘 입고 성적으로도 만족하지만 자아가 없고 가장 피상적인 접촉을 제외하고는 동료들과 어떠한 접촉도 없는, 그들은 헉슬리가 다음과 같은 말로 간결하게 표현한 슬로건에 의해 지도되고 있다. “개인이 감정을 가질 때, 공동체는 비틀거린다.” 또는 “오늘 즐길 수 있는 일을 내일로 연기한지 말라.” 또는 절정에 달한 선언이지만 “오늘날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
오늘날 인간의 행복은 ‘즐기는 데’ 있다. 즐긴다는 것은 ‘만족스러운 소비’를 말하고 상품, 구경거리, 음식, 술, 담배, 사람들, 강의, 책, 영화 등을 ‘입수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이 소비되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것이다. 세계는 우리의 식욕에 대한 하나의 커다란 대상으로서 커다란 사과, 커다란 병, 커다란 유방이 된다. 우리는 젖을 빠는 자이고, 영원히 기대하는 자이고, 희망에 가득 찬 자이다. 그리고 영원히 실망하는 자이다. 우리의 성격은 교환하고 받아들이고 싸게 팔아버리고 소비하는 데 적합하다. 모든 것은, 물질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대상도, 교환과 소비의 대상이 된다.
사랑에 관한 한 상황은, 당연한 일이지만, 현대인의 이러한 사회적 성격과 대응된다. 126-128

사랑은 성적 만족의 결과가 아니며, 성적 행복은 오히려-심지어 이른바 성의 기교에 대한 지식조차도-사랑의 결과다. 130

자본주의 정신은 절약을 강조하는 데서 낭비의 강조로, 경제적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자기 억제로부터 끊임없이 확대되는 시장을 바탕으로, 그리고 불안해하고 자동 기계화한 개인을 위한 주된 만족으로서의 소비로 변했다. 어떠한 욕망이든 충족을 지연하지 말라는 것이 모든 물질적 소비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적 분야에서도 주류가 되었다. 134

두 사람이 서로 그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위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 147

현대인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동료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현대인의 주요 목표는 자신의 기술, 지식 그리고 자기 자신 곧 ‘인격의 패키지 상품’을 다른 사람-역시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과 공정하고 유익하게 교환하는 것이다. 150




4 사랑의 실천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든지 자기 혼자서 몸소 겪어야 하는 개인의 경험이다. 155

기술의 실용에는 ‘훈련’이 요구된다. 훈련된 방식으로 이 기술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 기술에 숙달되지 못할 것이다. 156

사실 현대인은 일을 떠나서는 자기훈련의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하고 있다. 156-157

‘정신 집중’이 어떤 기술을 습득하는 데 필수조건이라는 것은 거의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자기훈련 이상으로, 정신 집중도 우리 문화에는 드물다. 157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자기 홀로 있기 어렵다는 점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세 번째 요소는 ‘인내’이다. .. 빠른 결과만을 바란다면, 우리는 결코 기술을 배우지 못한다. 158

끝으로, 어떤 기술을 배우는 조건은 기술 습득에 대한 ‘최고의 관심’이다. ..
이술을 배우는 일반적 조건에 대해서 한 가지를 더 보충해야겠다. 우리는 말하자면 기술을 직접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기 전에 다른 많은 일들 - 때로는 일견 관계없는 듯한 일들-을 배워야 한다.
목공 기술을 배우는 자는 나무를 깎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피아노 연주를 배우는 자는 음계 연습부터 시작해야 한다. .. 우리가 어떤 기술에 숙달하려면 삶 전체를 이 기술에 바치거나 적어도 이 기술과 관련시켜야 한다. 자기 자신이 기술 훈련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159-160

정신 집중을 배우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독서를 하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않고 홀로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사실상 정신을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사랑의 능력의 불가결한 조건이다. 161

정신 집중이 되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일이나 중요하지 않은 일이나, 우리의 충분한 주목을 받게 되기 때문에 새로운 차원의 현실성을 갖게 된다. 162-163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신을 집중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한다는 뜻이다. ..
정신을 집중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현재에,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 따라서 지금 무엇인가 하고 있으면서 다음에 해야 할일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할 것도 없이 정신 집중은 서로 사랑하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실행해야 한다. 164-165

모든 일에는 (이루어지는) 때가 있다.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하고) 억지로 할 필요가 있다. 165

우리는 ‘자기 자신에 민감하지’ 못하면 정신 집중도 배우지 못한다. 165

우리는 피곤하다는 느낌, 또는 우울하다는 느낌을 알고 피로감에 젖거나 언제나 신변에 따르기 마련인 우울한 생각으로 우울감을 부채질하는 대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왜 나는 우울한가?’라고 묻는다.
조바심이 난다거나 화가 난다거나 백일몽에 잠긴다거나, 그밖의 도피적 행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 자기 자신의 내면으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는-흔히 오히려 직접적으로-왜 내가 불안하고 우울하고 조바심내는가를 말해줄 것이다. 166-167

내가 앞에서 말한 사랑의 본성에 따르면, 사랑을 성취하는 중요한 조건은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아도취적 방향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만을 현실로서 경험하는 방향이다. .. 자아도취의 반대 극은 객관성이다. 이것은 사람들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이고, 이러한 객관적 대상을 자신의 욕망과 공포에 의해 형성된 상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이다. 169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이다. 이성의 배후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겸손한 태도이다. 객관적이라는 것, 곧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한 태도를 갖게 되었을 때, 어린아이로서 꿈꾸고 있던 전지전능의 꿈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사랑은 자아도취의 상대적 결여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사랑은 겸손, 객관성, 이서으이 발달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에 전 생애를 바쳐야 한다. ..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고 한다면, 나는 모든 상황에 객과적이기 위해 노력해야하고 내가 객관성을 잃고 잇는 상황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172

탈피, 탄생, 각성의 이러한 과정은 필수적 조건으로서 한 가지 성질, 곧 ‘신앙’을 요구한다. 사랑의 기술의 실용은 신앙의 실천을 요구한다. ..
합리적 신앙은 근본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확신이 갖고 있는 확실성과 견고성이다. 신앙은 특벼란 믿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퍼스낼리티 전체에 고루 퍼져 있는 성격상의 특징이다. 173

비합리적 신앙은 오직 어떤 귄위자나 대다수의 사람이 그와 같이 말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합리적 사고는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생산적 관찰과 사고에 기초를 둔 독립된 확신에 뿌리박고 있다. 175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성실할 수 있다. ..
사람에 대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의 또 한 가지 의미는 다른 사람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관계된다. 176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교육과 조작이 갈라진다. 교육은 아동이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도와준다.
교육과 빤대되는 것이 조작이며, 조작은 이러한 가능성의 성장에 대한 믿음의 결여, 그리고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억압해야만 비로소 어린아이가 올바르게 되리라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177

합리적 신앙은 우리 자신의 관찰과 사고의 소산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상을 믿고 있다. ..
합리적 신앙의 기반은 ‘생산성’이다. 곧 신앙에 의거해서 산다는 것은 생산적으로 산다는 뜻이다. 178

신앙을 가지려면, ‘용기’, 곧 위험을 무릅쓰는 능력, 고통과 실망조차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필요하다. 179

여론이나 예측하지 못한 몇 가지 사실이 자신의 판단을 무효화하더라도 타인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고수하는 것, 자신의 확신이 인기가 없더라도 자신의 확신을 고수하는 것, 이러한 모든 일에는 신앙과 용기가 필요하다. 180

사랑은 활동이다.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나는 그나 그녀만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적극적 관심을 갖는 상태에 놓여 있다. .. 잠자는 것만이 비활동에 적합한 상태이다. 각성 상태는 게으름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상태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놓여 있는 역설적 상태는 깨어 있을 때도 반쯤 잘들어 있고, 잠잘 때 또는 잠들고 싶어할 때도 반쯤 깨어 있다는 것이다. 182

모든 활동은 경제적 목적에 종속하고, 수단은 목적이 되었다. 인간은 잘 먹고 잘 입고 있지만 각별히 인간적인 자신의 자질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조금도 궁극적 관심을 갖지 못한 자동 인형이다. 187

인간이 경제적 기구에 이바지하지 않고 경제적 기구가 인간에게 이바지해야 한다. 인간은 기껏해야 이익을 나누어 갖는 데 그치지 말고 경험을 나누고, 일을 나누어 가질 수 있어야 한다. 188




옮긴이의 말

우리는 사랑의 고갈 현상을 야기한 외부적 원인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에 앞서 우리의 내면에서 사라져버린 것,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226

프롬이 지적하고 있듯이 현대 사회가 시장의 교환 원칙에 지배받고 있고, 따라서 인간의 가치도 결국 경제적 교환 가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평가받지 못하고 그 사람의 이용 가치에 따라 평가되는 현실은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지혜도 ‘돈’으로 사고팔 수 있고, 더구나 ‘사랑’ 따위는 이제 감각적 쾌락 내지는 매음(賣淫])으로 전락해버린 현실은 개탄의 영역을 넘어서 있지 않은가.
단적으로 이것이 인간의 사랑을 고갈시킨 외부적 원인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사랑의 알리바이는 되지 못한다. 227

우리가 사랑하려고 애쓰면서도, 참으로 나를 주는 사랑을 하고 싶으면서도 이러한 사랑에 실패하는 원인은 기술의 미숙성에 있다. 229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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