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 25일 비즈니스 카페 재팬이 주최한 최고경영자 모임에서 있었던 강연입니다. 비즈니스 카페 재팬은 나의 오랜 친구 히라카와 카츠미가 설립한 회사로, 컨설턴트를 주 업무로 하고 있습니다.  21



1. 공부로부터 도피하기


교육 받을 기회로부터 스스로 달아난다는 말은 머지않아 '하류사회'로 계층이 내려가는 것을 뜻한다.  25


학령기 자녀를 둔 어른들은 무의적으로 자기 자식을 제외한 다른 아이들의 학력이 내려가면 자기 아이에겐 이익이 된다는 기대감을 자기고 있다. 그런 무의식적인 욕망이 아이들의 학력저하를 심리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31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잠시 보류해 둠으로써 지성이 활성화되는 인간적인 기능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인상을 받는다.  36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모른다'는 것보다 이처럼 '모르는 것이 있어도 개의치 않는 '것이 위기의 징후로 여겨진다.  37


의미를 몰라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이다.  38


어두운 밤 갑판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항해사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바다 위에 떠 있으면 긴장한다. 하지만 만약 시야게 들어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투성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런 상황에서는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또 하나 새로 등장한다 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40


'최근 우리는 하나에서 열까지 돈이 들어가는 생활을 처음으로 경험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각종 미디어에서 정보가 들어오는 생활도 처음이다. 돈이 돈을 낳는 경제구조 속에 완벽하게 말려들어가 있다. 아이들이 일찍부터 '자립'의 감각을 체득하는 것도 이러한 경제 사이클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어 '소비주체'로서의 확신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은 현재의 경제 구조가 보내오는 메시지를 여과 없이 곧바로 받고 있다. 학교가 오늘날의 사회를 가르치고자 '생활주체'나 '노동주체'로서의 자립의 의미를 설명하기도 전에 이미 아이들은 어엿한 '소비주체'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있다. 이미 경제적인 주체인데 학교에 들어가면 새삼스레 교육의 '객체'가 된다는 것은 아이들 입장에서 내키지 않는 일일 것이다.' 스와 테츠지 <왕자와 공주가 되어가는 아이들>

이 부분은 내가 최근 십년 동안 읽었던 교육 관련 글 중에서 가장 계몽적이다. '아이들은 이미 취학 전에 소비주체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있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 

요즘 아이들과 삼십 년 전 아이들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은 처음 사회관계에 들어설 때 노동을 통해 들어가는가, 소비를 통해 들어가는가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벌써 사십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우리들이 어렸을 때 사회적인 활동은 먼저 노동주체로서 자기를 세우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사회적으로 무능력한 어린아이가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가사노동이었다. 식사가 끝난 후 밥그릇을 부엌까지 갖다놓거나, 마당을 쓸거나, 화초에 물을 주거나,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거나, 아버지의 구두를 닦아놓거나, 이처럼 가정에는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꽤 있었다. 부모는 당신들이 분담해야 할 가사노동을 아이들이 적게나마 줄여주니까 당연히 "고맙다"거나 "참 잘했어" 하고 칭찬해준다. 아이들은 그 칭찬이 기쁘고 자랑스럽다.

아이들이 가족이라는 최초의 사회관계 속에서 처음으로 유용한 구성원으로 인지되기 시작하는 것은 가사노동을 분담하면서부터이다. 작지만 가족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감사와 인정을 보상으로 획득하면서 어리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다져간다. 이러한 데서 예전에 아이들은 사회화 과정을 밟아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좀더 자라면 가사노동에 머물지 않고 바깥 사회활동에도 참가하는데, 타인에게 뭔가 도움되는 일을 하면서 그에 대한 감사와 사회적 승인이라는 대가를 받는 교환 행위를 통해 자기 정체성의 기초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는 가사노동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노동의 작은 분담자로서 사회관계 속에 자기를 등록하면서 아이들은 먼저 노동 주체로 자기를 세운다. 아니 이렇게 하는 것 말고는 달리 자기를 세울 방법이 없었다. 적어도 1960년대 중반까지 일본의 아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노동주체로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은 사뭇 다르다. 지금 아이들은 노동 주체라는 형태로 사회적 인정을 받아 스스로를 세울 수 없다. 그럴 기회를 구조적으로 빼앗겼다.

둘러보면 오늘날 가사노동 자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게다가 남은 가사 일이라는 것도 그리 생산적인 일이 아니다. 가령 청소나 빨래처럼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집안이 엉망이 되어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노동은 남아 있지만, 그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거나 성취감을 얻거나, 또는 사회성을 기르고 자연스레 학습과 연결되는 일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개를 산책시키고 화초에 물을 주고 풀을 뽑는 일상적인 일들은 자연과 연결되는 일로, 많든 적든 아이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지만 이제는 가정에서 그런 일을 찾기가 힘들다. 부모들 입자에서는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고 싶어도 일거리가 없어서 가사노동을 시킬 수가 없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부모에게 가사노동 분담이라는 작은 선물을 할 수도 없고, 가정이라는 시스템에 작게나마 자신도 공헌하고 있다는 기쁨을 누릴 기회도 없다. 

오히려 지금의 아이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다. 아이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자체가 집안 질서를 어지럽히는 요소여서, 가능하면 그들에게 할당된 공간 안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공헌이 되었다. 이런 가정이 매우 많다고 본다. "됐으니까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줄래!" 하는 엄마들의 화난 목소리는 요즘 다든 익숙할 정도로 많이 듣는 거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런 식의 금지는 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어린아이의 미약한 도움일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고, 그 고사리 같은 손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일본 속담에 '고양이 손이라도 비리고 싶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부탁할 만한 생산 활동이 거의 없어졌다. 반면에 아이들의 소비활동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촉발된다.  48-51


한 사람 몫으로 사회관계의 장에 등장하는 경우, 만일 그가 네 살짜리 어린아이라면 그를 교섭 상대로 대등하게 대우해줄 어른은 없다. 하지만 돈을 쓰는 사람으로서 등장한다면 그 사람의 나이나 식견, 사회적 능력 따위의 속인적 요소는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쓰는 돈이 얼마인지가 중요하지, 돈을 쓰는 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고려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돈의 투명성'이라는 특권적 성격이다. 사회적 능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어린아이가 여기저기서 쥐어주는 용돈을 가지고 소비주체로 시장에 등장할 때 처음 느끼는 소감은 '법을 뛰어넘는 전능함'일 것이다.  52-53


* 니트(NEET) : 용국 정부가 노동정책상 인구 분류로 정의한 용어로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의 약자이다. 교육을 받지 않고, 노동을 하지 않고, 직업훈련도 받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니트는 일반적으로 '일할 의욕이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63


"그럴 시간 있으면 공부해라" 또는 "학원이나 가라"는 요구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국영수 학원에 가거나 예체능 학원에 간다. 그리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지쳐 말할 기운도 없고, 가족들을 신경 쓸 여력도 없다. 그저 온몸으로 피로와 불쾌함을 표현함으로써, 아이도 아이 나름대로 주어진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엄마 아빠가 그렇듯이 자신도 충분히 기분이 언짢은 상태라는 것으로, 자신도 불쾌함을 견디고 있고 따라서 집안에 보탬이 되고 있음을 과시한다.

가족 중에서 '누가 가장 집안에 보탬이 되는가'를 '누가 가장 기분이 나쁜가'로 측정한다. 이것이 현대 일본 가정의 기본 규칙이다.  65


'시장 원리를 기초로 할 때 배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68


배움이란 자기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모르고, 그것이 어떤 가치와 의미와 유용성을 갖는지도 말할 수 없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71


자신의 유아적 욕망을 가슴에 품고, 결코 성장하거나 변화하지 말고 그저 소비주체로 안주할 것. 시장원리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존재하길 요청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이들을 외계의 변화에 적응해 살아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사실을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77


30센티미터 자로 잴 수 없는 것들, 예컨대 무게나 빛, 탄력 같은 것들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가진 거라곤 30센티 자밖에 없어 오로지 그 잣대로 세상의 모든 것을 계량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어린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82




2. 리스크 사회의 약자들


얼마만큼 노력하면 얼마만큼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노력과 성과의 안정적인 관계가 붕괴하기 시작한 것, 이것이 리스크 사회의 특징이다.  89


리스크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 생존 전략의 선택에 따라서 양극화는 더욱 진행된다.  90


리스크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것이 국민들에게 부여된 중요한 과제라고 정부틑 선언하고 있음에도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위정자와 교육행정 책임자, 대중매체 지식인들은 '리스크를 제거하라'고만 가르치지, 어떻게 '리스크를 방어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중앙교육심의회의 답신이나 교육학자의 제언 중에 '아이들에게 어떻게 리스크 헤지 방법을 교육할 것인가'를 다룬 내용을 본 적이 없다. 리스크 사회가 도래했다고 경종을 울리면서 아무도 '리스크를 헤지하는 법'을 국민들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105


우리들은 지금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실업을 당해도, 노숙자가 되어도, 병이 들어도 모든 것이 이러한 리스크가 있는 삶을 선택한 자신의 책임이라는 말은 리스크란 개인적인 것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왜냐하면 리스크 헤지는 자기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105-106


중국인은 자식들을 일본이나 미국, 호주 등지로 뿔뿔이 유학을 보내 그곳에서 사업을 하게 한다. 어느 한쪽이 전쟁이나 공황으로 재산을 잃거나 인종박해로 추방을 당해도 다른 나라에 있는 친족이 지원하거나 받아줄 수 있도록 안전망을 쳐놓는다. 이것은 역사적 경험 속에서 갈고닦은 리스크 헤지의 기법이다. 

유대인도 마찬가지다. 로스차일드 재벌의 창시자 마이야 로스차일드는 다섯 명의 아들에게 유럽 네 도시에 은행을 열게 했다. 장남은 창업지인 프랑크푸르트 본점에 남겨두고, 둘째는 빈, 셋째는 런던, 넷째는 나폴리, 다섯째는 파리에 지점을 열게 했다. 그로부터 2백년이 흐르는 동안 본저모가 나폴리 지점은 폐업하고, 빈 지점은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때 망했다. 하지만 런던 지점과 파리 지점은 살아남아서 일족의 이름을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과 두 차례에 걸친 유럽 대전에서도 살아남았기에 이것이야말로 리스크 헤지의 교과서 같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알수 있듯이, 리스크 헤지는 '살아남기'를 목표로 집단이 합의한 계획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그러므로 '개인이 리스크 헤지를 하고, 발생한 리스크에 개인이 대처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개인이 리스크 헤지를 한다는 것은 원리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들은 '살아남는 것을 집단의 목표로 내걸고 상부상조하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리스크 사회를 살아간다'는 의미는 항간에서 이야기하듯 '자기가 결정하고 그 결과도 혼자서 책임진다'는 원리로 사는 게 결코 아니다. 자기가 결정하고 결과도 자신이 책임지라는 말은 리스크 사회가 약자에게 강요하는 삶의 방식(또는 죽음의 방식)이다.  107-108


고립된 아이가 혼자서 학교라는 시스템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자기 가치관을 학교 시스템에 대등한 것으로 대치시킨다. "이것을 왜 배워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들이댄다. 스스로 배울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지 못하면 아이는 배움을 거부한다. 이것이 자기결정이다. 배우지 않음으로써 초래되는 리스크를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사칙연산을 못하고, 알파벳을 모르고, 한자를 못 읽는다. 흥미 있는 영역에 대한 사소한 지식은 있을지라도 흥미가 없는 분야는 아예 모른다. 벌레가 파먹은 듯 의미의 구멍이 숭숭 뚫린 세상이 별로 불쾌하지 않다는 듯 살고 있다. 이렇게 아이들은 계층 하강의 리스크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115


오늘날의 교육 문제는.. 아이들이 나태해서 초래된 결과가 아니라 노력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학력저하가 아이들의 나태와 주의산만의 결과라면 그 보정은 교육기술 차원의 문제에 지나지 않지만, 현실에서 상당수의 아이들이 학습을 포기하고 공부로부터 도피하는 데서 자신감과 성취감을 얻는다면, 그리고 그 수가 계속 늘어난다면, 이 문제는 교육기술이나 방법을 바꾸는 식의 기술적 차원으로는 해결하기 힘들다. 사회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이는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120-121




3. 노동으로부터 도피하기


젊은 회사원에 대한 얘기다. 평소 그의 일솜씨를 높이 평가한 상사가 새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어보라고하자 그는 그 길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앉으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자기 일은 자기가 결정한다'는 가지결정권에 대한 고착이다. 자기가 결정한 것이라면, 그 결정이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불이익을 초래할지라도 상관없다. 일종의 '자기결정 페티시즘'이다.  125


선택을 강제하면서 선택한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것을 강요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조리하다.  128


니트는 영국에서 처음으로 문제화된 사회현상이다. 하지만 일본의 니트 문제는 영국의 경우와는 많이 다르다. 영국은 전형적인 계급사회여서, 하층계급 사람들은 취학 기회나 취업훈련 기회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다. 학습 의욕은 있지만 사회적으로 상승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 젊은이들도 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이민을 대량으로 받아들인 사회에서 이민자의 아이들은 교육 기회와 문화자본에서 구조적으로 멀어질 수밖에 없다. 파리 근교에는 HLM(저가 임대 주택)이라는 거대한 주택단지가 있다. 그곳에는 이민자를 비롯한 빈곤층 주민들이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살고 있다. 예전에 이런 교외지역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던 프랑스 여성에게 들었는데, 이런 거대 단지에는 도서관이나 미술관, 책방, 극장, 콘서트홀 같은 문화시설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다고, 설령 예술적 재능이 있다 해도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기회 조차 없는 셈이다. ..

유럽의 니트는 계층화의 한 증상이다. 사회적 상승 욕구가 있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일본의 니트는 유럽과 사뭇 다르다. 사회적 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느넫도 아이들이 스스로 그 기회를 포기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일본에서는 사회적 약자가 자진해서 차별적인 사회구조를 강화하는데 가담하는 방법으로 계층화가 진행되고 있다. 다시 말해 약자가 자신의 사회적 입장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세계에서도 예외에 속하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129-130


공교육의 이념은 유럽의 시민혁명기에 제창되었지만, 일찍이 제도적으로 정비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00년 당시 미국 고등학교 (14세~17세) 취학률은 8.4%였다. 같은 시기 유럽에서 중등하굑 취학률은 3.8% 미만이었다. 그보다 반세기 전 1840년에 초등학교 취학률은 미국 전국 평균이 38.4%였다. 단, 이 경우 '취학자'는 단 하루라도 학교에 갔던 사람까지 포함하고 있고, 당시 미국의 보통학교 개강일은 연간 40일 정도였다(카리야 타케히코 <교육의 세기>)

근대의 초등교육 기관은 부모에 의한 사적 수탈과 지배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는 '피난소'라는 공적 기능도 함께 수행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적인 공교육 사상을 기초로 한 일본 헌법에서는 교육받을 권리를 정한 제26조 다음에 '아동을 혹사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제 27조가 따라온다. 헌법에 이러한 규정이 있는 것은 산업혁명 이후 근대 산업사회가 취학 기회를 갖지 못한 아동을 '저가노동'으로 혹사시켰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다.  131


지금 아이들에게 교육을 받는 것이 '권리'인지 '의무'인지를 묻는다면 아마 90%늬 아이들이 '의무'라고 답할 것이다. 이 대답에는 교육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강제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의무를 위반하는 것을 일종의 정치적 이의제기'로 보는 시각도 성립한다....

'배움'이란 본시 아이들이 먼저 나서서 '침해할 수 없는 권리'로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것을 고역으로 여기게 되었을까?  132


교육의 '권리'를 '의무'로 바꿔서 읽는 도착 행위가 일어난 이유는 경제적 합리성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침투했기 때문이다.  133


노동에의 가치에 비해 임금이 낮은 것은 원리상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임금이란 노동자가 창출한 노동가치에 비해 항상 적다. 당연하다. 그렇지 않다면 기업이 이윤을 낼 수가 없고, 주주에게 배당도 할 수 없으며 설비투자도 불가능하고, 연구개발도 할 수 없다. 경제활동에 들어가는 자금은 모두 노동자로부터 '수탈'한 노동가치에서 조달된다. 노동자가 자신이 창출한 노동가치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경제의 기본 원리다. 여기서 발생한 잉여가 교환을 가속시키고, 그 결과 시장이 형성되고 분업이 이루어지며 계급과 국가가 생겨난다. 인간은 이런 방식으로 사회를 만들어왔다.  141-142


배움의 본질은 지식과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방법에 있기 때문이다.  155

 

졸업생은 '대학이라는 공장'에서 송출한 '제품'이며, 이 제품을 기업이 '매입'한다는 또 하나의 소비모델이 존재한다.  157




4. 이들을 어떻게 도울까


히라카와 : 지식은 일본에서도 활용할 수 있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교환 가능성에 입각하여 표준화됩니다. 모든 것을 표준화해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앞에서 언급했던 '자기 찾기'가 꽤 화재를 모았는데, 모두가 표준화되면 이제 '나'라는 것은 없어집니다. 옆 사람과 나의 차이를 측정하는 도구로 경제적 잣대밖에 없다면, '자기다움'이란 애당초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붕괴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일한 척도인 돈을 양적으로 불려서 자기붕괴를 막고자 합니다.  168


우치다 : 아동학대 사례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만, 이 현상은 육아를 등가교환 관점에서 생각하는 습관이 낳은 피연적인 결과로 보입니다. 육아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엄마들은 육아를 긴 안목으로 생각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극히 짧은 안목으로 생각합니다. 아마도 육아를 비즈니스 관점에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식은 자기가 만들어낸 '제품'이며, 부모의 서오가는 이 제품에 어떤 부가 가치를 덧붙이느냐에 따라 평가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서오가가 평가를 받으면 부모는 '육아의 성고'이라는 형태로 사회적인 자기실현을 다했다고 여깁니다. 회사가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의 매출이나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것과 같은 심리입니다.  

처음에는 똥오줌을 가린다거나, 말을 한다거나, 걸을 수 있다는 식의 눈에 보이는 형태로 아이의 능력을 개발하는 데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 다음에는 영어를 구사한다거나, 피아노를 친다거나, 명문학교에 입학했다거나, 역시 눈에 보이는 형태로 아이들의 부가가치를 높이고자 합니다. 아이들에게 부가된 가치를 부모인 자식의 '사업' 성과로 가시적, 외형적으로 과시하려고 하는 한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학력이나 자격과 같은 외형적으로 주위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누넹 보이는 성과' 이외의 것은 육아의 부가가치로 쳐주지 않습니다.

자식이 있으면 이해하시겠지만 본래 육아는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는 일로, 육아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20년이 걸려도 잘 모르는 법입니다. 잘 모르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육아 노동의 성과를 1~2년안에 눈에 보이는 형태로 드러내 보이라고 압력을 가해서는 곤란합니다. 짧은 시간에 측정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부모들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수치화할 수 있는 형태로, 정량적인 형태로 육아의 서오가를 올리라고 재촉당하고 있습니다. 부모 스스로 이런 압력을 강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성장을 느긋하게 기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종종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또 가닭 모를 행동도 합니다. 이럴 때 "이 아이가 뭘 하는 걸까?"라며 아무 말 없이 그냥 바라보는 것이 옳은 양육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양육법은 오늘날 허용되지 않습니다. 

정시노가 의사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사춘기 때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들의 부모에게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아이가 "기분이 좀 나빠요"라거나 "이건 싫어요"같은 불쾌한 메시지를 발신할 때 부모가 이런 메시지는 선택적으로 배제해버립니다. 아이가 심신에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정보는, 말하자면 '제품'이 소음을 내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제품이 소음을 낸다는 것은 제품 공정에 하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부모는 자신의 '육아 실패'라는 기호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귀를 막아버리는 것이지요. ...

아이들은 몸과 마음에 이상이 오면 위험신호를 보냅니다. 그런데 부모는 그 신호를 청취하면 자신의 육아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정하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발신하는 '도와주세요'라는 신호에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립니다. 이렇게 둔감한 부모와 살고 있는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무너집니다. 

어린 아이들은 아직 자기가 느끼는 몸과 마음의 불쾌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들이 보내오는 위험신호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신호가 아니라 소음으로 들리니까요. 하지만 여기에서 부모가 제대로 자기 역할을 해내야 합니다. 바로 아이들이 발신하는 소음을 신호로 변환시키는 일입니다. 아이들과 긴 시간을 함게 지내다보면 어느 순간에 아이들이 내는 소음이 신호로 들리게 됩니다.

이것은 아이가 모국어를 습득하는 과저오가 똑같습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지속적으로 해주는 의미 불명의 말들을 분절하여 해독함으로써 마침내 모국어를 습득합니다. 다시 말해 무의미하게 들리던 소음이 의미 있는 신호로 바뀌는 것이지요. 이건 흔히 말하는 커뮤니케이션과는 다릅니다. 커뮤니케이션의 기초가 되는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을 일으키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음을 신호로 변환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목숨을 건 도약'입니다.  169-172


전후 60년 동안 일본 사회는 약자의 안전망이었던 중간적인 공동체를 계속해서 무너뜨렸습니다. 지역공동체, 친족, 주종관계, 사제관계 전부 다 무너뜨렸습니다.  201


아이들이 노동주체로 출발할지 소비주체로 출발할지 학교에 들어가기전에 이미 결정됩니다.  211


요로 타케시(해부학자, 도쿄대 명예교수, 마음의 문제나 사회현상을 뇌과학, 해부학을 비롯한 의학, 생물학 영역의 다양한 지식으로 설명하는 저술 활동으로 폭넓은 독자층을 얻고 있다.) 선생님께서 "이제는 삶의 매뉴얼이 없는 시대여서 각자가 연구해야 합니다"라는 내용으로 1시간 30분 정도 강연을 하셨는데 한 질문자가 "선생님, 매뉴얼이 없는 시대에는 어떻게 살면 될까요?"라고 물어서 아연실색하셨다고 합니다. 저 역시 때때로 강연을 하기 때문에 비슷한 느낌을 받는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내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에서 무엇을 듣고 있었을까?"라고 말이빈다. 그런 사람은 그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이전부터 자신이 갖고 있던 틀 속으로 모두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틀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부분은 다 잘라버리고 자기 식으로 이해한 부분만 취합니다. 그래서 가끔 "내가 이런 사고방식은 좋지 않다"고 거론한 부분을 거꾸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설이 있는데, 그런 건 경솔하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라고 얘기했는데, 나중에 "좀 존에 선생님은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하면서 확인하러 옵니다. 그때 "아닙니다"라고 말하면 깜짝 놀랍니다. 자기가 동의할 수 있는 내용만 잘라서 듣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꾸 늘어나고 있습니다.  220


히라카와 : 체험교육이라고 할까 수련이라고 할까, 이런 전통적인 교육 기술을 통해 지금은 잃어버린 능력을 계발하는 방법을 어떻게 교육 시스템 안에 다시 한 번 프로그램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지역사회에 합기도 도장을 연 지 15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설계한 교육 프로그램에는 나름대로 확신이 있지만, 어떻게 이 프로그램을 누구에게든 적용할 수 있는 좀 더 보편적인 형태로 전개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계획이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일단 제자를 많이 길러내어 제 프로그램을 충분히 체험한 제자들이 도장을 열고 이를 통해 이런 내용을 널리 알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수 서당식 체인점 같은 방식으로 말입니다.  226-227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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