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지성을 위한 교양 필독서 21세기 중동과 이슬람 문화의 이해)
급변하는 오늘의 중동-이슬람 30가지 질문
4 각자도생을 택한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의 수교
범이슬람주의는 20세기 초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면서 끝났다. 1960년대 석유수출국기구(OPEC) 결성으로 위력을 발휘했던 아랍 민족주의도 수명을 다했다. 1949년 터키를 필두로 이집트, 요르단 등 이슬람 국가가 오랜 적국인 이스라엘을 승인하고 수교를 감행함으로써 ‘움마툴 이슬람(이슬람 공동체)’이나 무슬림 형재에를 내세우던 느슨한 연대도 빛을 잃었다. 이런 결과는 아랍 각국의 각자도생으로 연결됐다. 이란과 이라크가 같은 시아파 국가이면서도 8년 전쟁(1980~1988)을 치렀고, 1990년에는 이라크가 이웃 아랍 형제국인 쿠웨이트를 점령했다. 곧이어 벌어진 제1차 걸프 전쟁 때는 다국적군을 도와 아랍 국가들이 앞다투어 이라크 공격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또 2017년 6월에는 같은 걸프 형제 국가인 카타르를 상대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등이 단교를 선언함으로써 이제 중동은 종교 대신 실리를, 형제애 대신 왕정 이익을 선택하는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다만 무슬림의 심장에 각인된 팔레스타인 문제만은 별개였다.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긴 팔레스타인의 비극과 1967년 3차 중동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아랍 영토 불법 점령에 대해서는 누구도 양보하지 않았다. 이것은 인류의 보편 가치에 대한 도전이고 유엔 안보리 만장일치 결의안이나 국제법의 위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수교는 무슬림 공통의 연대 가치였던 팔레스타인 묹2ㅔ조차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내팽개칠 수 있다는 우려와 위기의식을 이슬람 세계에 강하게 던져 주었다. 팔레스타인 정부 재정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던 사우디 왕정이 이스라엘과 협력 체제를 구축하면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재정 지원을 대폭 삭감했다. 더구나 걸프 산유국들이 묵시적 동조로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강하게 밀어붙인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지 정착촌에 대한 실효적 지배도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물론 아랍에미리트 측에서는 양국 수교 조건에 이스라엘의 서안 지구 정착촌 병합을 포기해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하지만 지난 50여년간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점령하면서 그들이 이주시킨 60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는 기존 정착촌을 강제 철거하는 문제는 해결될 수가 없는 상황이다. 31-32
5 시리아 내전의 원인과 현황
시리아 내전은 10년(2011~2021)간 계속되더니 일단 유혈 충돌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철군을 선언한 이후 사실상 내전 개입을 포기했고,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지지하던 러시아가 사실상 시리아 통제권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아사드 대통령의 정치 권력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동안 아사드 정권의 뒤에는 러시아와 이란이 버티고 있었고, 반군은 미국, EU,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지원을 받았다. 전형적인 국제 대리전 양상을 띤다. 그 과정에서 2천만 명 국민 중에 약 1,300만 명이 난민이 되어 고향을 등졌고, 50만 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이 영문도 모른 채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가족 곁을 떠나간 정확한 생명의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제2ㅊ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참극이다. 양측의 목표는 정권 획득이지만, 그 과정과 결과는 자국민의 살상과 초토화된 삶의 기반이다. 시리아 내전이 안고 있는 악마 같은 모습이다.
시리아 내전의 도화선은 2011년 아랍 세계를 뒤흔든 재스민 혁명이었다. 튀지니, 이집트 예멘의 독재자들을 끌어내린 분노의 함성은 시리아 독재자 아사드에게로 향했다. 시리아는 구조적으로 국민의 70%를 차지하는 이슬람 수니파가 정권에서 소외돼 억압받는 처지에 있었고, 15% 정도에 불과한 소수 종파인 시아파 계열 알라위 그룹이 국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리아 시위는 비무장으로 출발한 다른 아랍 국가들의 민주화 시쉬와는 달리 애초부터 하마시를 중심으로 한 무장 투쟁으로 시작됐다. 그것은 1982년 하마 대학살의 악몽으로 인한 후유증이었다. 당시 바샤르의 부친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이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던 하마시를 봉쇄하고 정규군을 파견해 약 3만 명의 무고한 시민을 무차별 학살했던 끔찍한 사태였다.
시리아 사태가 2011년 아랍 민주화 물결의 영향을 받아 반정부 시위로 촉발됐으나 비무장 민중 항쟁이 아닌 반군의 무장과 함께 곧바로 내전으로 변질한 배경이다. 러시아는 시리아가 위치한 동부 지중해 타르투스 항구에 군사 거점을 확보하고 미국 독무대인 중동에 진출하려는 강력한 욕구 때문에, 중국은 중동에서의 에너지 협력 체제를 지키고자 반미 전초 기지인 시리아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이란은 이라크-시리아-헤지볼라-하마스로 이어지는 반이스라엘 사아파 벨트의 전략적 이익 때문에 가장 적극적으로 시리아 정권을 지원하고 있다. 더욱이 미국의 극심한 경제 제재와 핵 포기 압박으로 사면초가 상태인 이란이 이웃의 동맹 시리아까지 잃는다면 자국 안보 전략과 중동 패권 구도에 결정적 허점을 안게 되기 때문이다.
터키는 물 문제와 쿠르드 반군 문제로 오랫동안 시리아와 반목해 왔다. 유프라테스강 상수원을 장악하고 있는 터키가 22개의 대형 댐을 조성해 시리아로 흘러 들어가는 방류량을 조절하고 있고, 이에 맞서 시리아는 터키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쿠르드 반군들을 지원하거나 훈련 캠프를 제공해 왔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하는 아랍 걸프 국가들은 시리아가 소수 시아파 정권으로 친이란 노선을 걸어왔던 점 때문에 불편한 관계였고, 시아파 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수파 수니 정권으로 환원한다는 의미에서 아사드 정권 붕괴를 내심 부추기고 있다.
이처럼 상충하는 이해관계 때문에 시리아는 이미 민주 항쟁을 통한 독재 정권 타도 시기를 놓치고 무고한 민간인 인명 피해만 자초했다. 40여 개에 달하는 야권 그룹의 분열, 서방과 아랍의 지원을 받는 다양한 반군 무장 그룹의 게릴라식 분산 투쟁도 아사드의 정치 생명을 연장해 주고 말았다. 이슬람 국가(ISIL)와 급진 이슬람 무장 세력인 알누스라 전선도 한때 반군 세력의 주축을 이루었을 정도로 반아사드 세력은 오합지졸의 대연합이었다.
그 결과 시리아 내전은 러시아와 이란이 지원하는 정부군의 우세로 이미 결정이 난 상황이다. ISIL 궤멸 이후 나토(NATO)의 맹방인 터키마저 시리아 전선에서 러시아와 보조를 맞추으로써 미국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9.11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이 중동에 개입한 이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이어 세 번째 맛보는 처절한 실패다.
그동안 러시아와 시리아 정권은 반군 세력과의 전쟁을 ‘대테러전쟁’으로 규정하면서 서방의 비도덕성과 테러 집단과의 야합을 부각해 왔다. 이는 시리아 반군 핵심에 국제 테러 조직인 ISIL과 알누스라 전선 같은 강경 테러 세력이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리아 내전이 아랍 민주화 시위의 연장선이나 독재 정권 제거를 위한 민주화 투쟁이 아니라 치졸하고 복잡한 강대국의 이권과 경쟁의 플랫폼으로 변질해 버린 슬픈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따라서 미국이 빠지고 러시아와 독재 정권이 주도권을 잡는 시리아의 미래는 더욱 아담해 보인다. 34-37
6 왜 시리아 난민을 국제 사회가 책임져야 하나?
시리아 내전은 더는 시리아 국민 간의 전쟁이아니다. 자국 이익 확보에 혈안이 된 국제사회가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집요하고 무분별하게 개입해 벌이는 국제 살육전쟁이다. 러시아와 미국의 일차적 책임이 훨씬 무겁다는 이야기이다. 정부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삶의 기반을 잃은 자들이 떠나면, 이번에는 반군이 공격해 다마스쿠스와 다른 도시를 초토화한다. 더욱 무서운 것은 화학무기를 포함해서 가공할 첨단 무기를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는 점이다. 가족과 이웃을 잃고 폐허가 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폭격의 위험이 덜한 곳을 향해 죽기살기식 이주를 하면서 난민이 된다.
시리아의 남쪽 국경은 요르단, 북쪽 국경이 터키, 서쪽 국경레바논과 이스라엘이고, 동쪽은 이라크다. 그 국경을 막으면 눈앞에서 수백만 명의 난민들이 그냥 죽어 나간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짓이고 인간의 이름으로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된다. 그래서요르단은 국경을 열고 100만에 가까운 시리아 난민을 수용했다. 요르단에는 이미 70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유입돼 있고, 요르단 전체 인구 950만 명 중 팔레스타인 사람이 요르단 토착 인구보다 더 많은, 난민 수용 국가가 된 지 오래다. 1인당 국민 소득 5천 달러 수준으로 그렇게 잘 살지도 못하는 나라지만 이웃 형제들을 외면할 수 없는일이다. 현재 준전시 상황으로 혼란스러운 동쪽의 이라크에서도 시리아 난민 30만 명 정도가 생명을 부지하고 있다. 시리아 땅인 골란고원과 베카 계곡을 강제 점령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시리아 난민을받아줄 리 없다. 정정이 혼란스럽고 경제적 파탄 상태에 있는 레바논조차 100만 명 이상의 시리아 난민 이웃을 받아들였다. 문제는 북쪽국경이다. 비교적 경제적 여유가 있고 정치적으로 안정됐으며, 무엇보다 유럽으로 향하는 관문인 터키 국경으로 수많은 시리아 난민이몰려들고 있다. 공식 통계로는 360만명 정도, 실제로는 400만 명이상의 시리아 난민이 터키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시리아 난민들은 국내 다른 도시나 이웃 중동 국가에 둥지를 틀었지만, 일부는목숨을 걸고 그래도 삶의 질이 보장된 유럽으로 향하고 있다. 유럽연합과 터키가 '난민 유입 금지 협약'을 맺어 터키를 통한 유럽 유입이힘들어지자 시리아 서부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작은 배에 목숨을 걸고 유럽행을 감행하고 있다. 소위 보트 피플이다. 구조 장비도 제대로 없는 작은 보트에 과잉 승선으로 중간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도 천신만고 끝에 유럽 땅을 밟은 사람이 120만 명이나된다. 독일이 그중에서 80만 명 정도를 선제적으로 받아 주었다.
이처럼 시리아 내전은 이미 미국, 유럽, 러시아는 물론 이웃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이란 등 중동 국가들이 개입하는 그야말로 국제대리전의 양상을 띤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물론이고, 무엇보다 당장 목숨 부지가 어려운 난민을 이웃 국가와 국제 사회가 책임져야 하는 이유다. 여기서 독일이 선뜻 왜 그 많은 시리아 난민을 수용했는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엄청난 여론의 반대와 정치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내린 결정이다.
태생적으로 유럽은 근대 200년간 식민 통치를 하면서 피식민지 이민자들을 국가 발전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받아들인 다문화사회였다.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피식민 국가들의 노동력 덕분에 많은 유럽 국가가 기본 노동력 인구를 유지하면서도 나라가 발전하는셈이다. 앞으로도 이런 구도는 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이민을 받아들이려면 인도적인 입장에서 시간을 끌다가 마지못해 숫자 채우듯이 받아들이는 것보다 선제적으로 선별해 능력과 실력을 갖춘 전문 인력을 우선 받는 것이 훨씬 유리할 것이다. 이것이독일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범죄자가 섞여 들어오고 불순분자나 급진 테러 조직이 유입된다면 사회 불안 요인이 커진다. 더구나 이슬람문화라는 이질적인 문화가 확산되면 사회에 불협화음이 생기고 유럽 주류 문화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 난민 수용 반대론자들이 우려하는 핵심 이유이며, 물론 정당한 걱정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회적 역동성을 유지하는 데 이민이 필수적이라면, 극소수가 저지르는 범죄나 테러 가능성보다 역동성과 노동력 기여 등 순기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에 난민 수용 결정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 인구 절벽의 다문화 시대에 이민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에게도 좋은 시사점이 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1,200명가량의 시리아 사람들이 내전을 피해 입국해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주로 서울 장안동 일대에 집단 거주하면서 중고 자동차나 자동차 부품을 시리아로 수출해서 상당한 경제적 부를 쌓고 있다. 우리나라와 수도 맺지 않고 아직도내전 중이라 위험한 시장을 그들은 고향처럼 활용하며 돈을 벌고 가족을 보살피면서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후일 내전이 끝나고 그들대부분은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가족들이 시리아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려울 때 자신들을 거두어 준 한국을 잊지 못하고,한국에서 배운 우리말과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도 경제 활동을 하고두 나라 사이에 문화적 가교가 될 것이다. 항상 역기능과 함께 순기능도 생각하면서, 국제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글로벌 시민 의식을 동시에 고취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38-42
7 예맨 내전과 난민 문제의 핵심은?
2014년 시작된 예멘 내전은 6년을 넘기고 있다. 본질은 국내 네 파벌의 알력다툼과 권력 투쟁이다. 수도 사나를 중심으로 서부 해안 지대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무함마드 후티 세력, 동부 일부를 장악하고 있는 만수르 하디 대통령세력, 남부과도위원회 세력, 알카에다 잔존 세력 등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각자도생을 위해 갈등하고 있다. 이런 구도에서 사우디가만수르 하디 정권을, 이란이 후티 연합 세력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면서 사실상 양국 대리전 양상을 띠고 있다. 여기에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의회의 반대에도 사우디에 군사를 지원하고 있고, 아랍에미리트가 예멘 남부과도위원회를 지원함으로써 아랍 국가 간 분쟁으로도 확산하고 있다.
예멘은 196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남과 북 두 나라로 쪼개졌다. 지금 후티가 장악한 북부는 자본주의 체제가 들어섰고, 구소련이 통제한 남예멘은 사회주의로 출발했다. 1990년 북예멘이 남쪽을 병합하면서 명목상 통일이 이루어졌지만, 통합은 요원했고 압둘라 살레 대통령의 일인 독재와 부패는 갈수록 민심을 잃어 갔다.2004년 최초의 조직적인 반정부 저항이 일어났다. 후세인 바드레틴후티가 이끄는 북부 시아파 지역이 시작이었다. 오랜 차별과 박해에시달려 온 후티 세력은 수많은 희생을 딛고도 복수와 독재 타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2011년, 아랍 민주화 운동은 예멘에 봄바람 같은 희망이고 도전이었다. 분노한 시민은 포악한 독재자 살레 대통령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성난 민심을 피해 사우디로 도망갔다. 대혼란과 정치적 우여곡절 끝에 당시 부통령이었던 만수르 하디가 2년간 대통령을 맡기로 했지만,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계속 집권했다. 공정한 선거를 통해 민의를 수렴할 여건도, 바닥에 떨어진 삶의 형편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2014년 후티 세력이 등장해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다. 새로운 헌법을 만들고 정부와 의회를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사우디로 쫓겨난 살레 전 대통령이 후퇴를 강력하게 지원했다. 참으로 아이러니다.
후티는 사우디와 북쪽 국경을 맞대면서 정적 하디 대통령을 지원하는 사우디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후티 정권은 곧바로 서방에서 반군으로 지칭되기 시작했다. 이를 놓칠세라 같은 시아파인 이란이 개입해 고립무원인 후티의 최대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다. 위기를 느낀 사우디는 2017년부터 내전에 직접 개입하면서 후티에 대한 군사 공격을 사실상 주도하고 있다. 이제 예멘 내전은 후티와 사우디의 전쟁이 됐고, 미국과 이란이 각각 후원자 역할을 하는 구도가 됐다. 사우디의 무차별 미사일 공격으로 예멘의 민간인 수만 명이 희생됐고, 홍해 연안의 유일한 보급인 후다이바항을 봉쇄하면서 수십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 사회 기반 시설이 붕괴한 상황에서 콜레라까지 창궐해 세계보건기구 보고서에 따르면 엄청난 참극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 후티의 반격 대상은 당연히 사우디아라비아다. 이제까지 수십 차례의 드론 공격으로 사우디에 크고 작은 타격을 주었지만, 군사적 열세로 번번이 한계를 절감해 왔다. 극단적인 보복의한 형태가 2019년 9월 14일 벌어진 사우디 동부 아람코 탈황 시설에대한 드론 공격이었다. 현재로서는 공격 주체가 이란이라기보다는이란의 기술적 지원을 받은 남부의 이라크 민병대인 것으로 보인다.예멘 내전이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기 전에 국제 사회가 적극적으로개입해야 하는 이유다. 세계 경제의 급소를 공격하는 무모하고 비열한 공격을 결코 용서할 수 없지만, 드론 공격의 빌미가 된 건 무고한예멘 민간인을 무차별 공격하고 있는 사우디의 군사 행태다. 여기에는 국제 사회가 강한 제동을 걸어야 한다. 예멘 내전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탈중동 외교정책에 따라 후티 반군 소탕을 위한 군사지원 중단을 선언함으로써 사우디와 후티 간에 타협의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다. 43-45
9 수니파 벨트와 시아파 벨트, 종파 구도인가 이해 판도인가?
이슬람교는 크게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뉜다. 중동 내 여러 이슬람 국가도 종파에 따라 뭉치고 헤어지는 양상을 보인다. 과연 그럴까? 표피적으로 보면 그럴듯하지만 조금만 심층으로 들어가면 종파보다는 또 다른 국익과 이해관계가 본질을 이룬다. 현재 수니파 국민이 다수인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정점으로 쿠웨이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예멘, 오만 등 걸프 국가, 요르단, 레바논,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 지중해 국가, 이집트, 튀니지, 모로코, 알제리, 수단, 소말리아,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국가들이 포함된다. 동남아시아나 터키와 중앙아시아 튀르크 공화국 등 아시아 국가도 대부분 수니파이다. 시아파 국민이 다수인 나라는 이란을 필두로 이라크, 바레인, 아제르바이잔 정도이다. 수니파가 이슬람 세계의약 90%를 차지하기 때문에 그런 구도가 형성된다.
그중에서 주민 다수가 수니파이지만 시아파 소수 정권이 지배하는 이슬람 국가가 시리아이고, 수니파가 다수이지만 시아파 소수왕정이 다스리는 나라가 바레인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권력 구도의 모순으로 정치적 투쟁과 종파적 시위가 그치지 않는다. 이라크도 오랫동안 시아파 다수 주민을 소수 수니파 사담 후세인 정권이 독재하면서 문제가 됐다. 사담 후세인 몰락 이후 권력이 뒤바뀌어 일부 수니파 기득권 세력과 군벌들이 이라크의 알카에다 잔존 세력이 되었다가 2014년 ISIL 출현에 직접적인 토양이 됐다.
그러나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 소수인 시아파가 수니파와 공존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 공존과 화합이 가장 잘 이루어지는 모범적인나라 중 하나가 아제르바이잔이다. 아제르바이잔에는 종파적 개념이거의 없고 서로가 협력하며 아제르바이잔이라는 민족 정체성이 훨씬강하다. 두 종파는 자연스럽게 결혼하고 서로 긴밀하게 사업도 한다.무엇보다 수니파와 시아파가 한 모스크에서 자연스럽게 함께 예배를본다. 수니파 중심 국가지만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예멘,쿠웨이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타지키스탄 등에서는 상당한 비율로 시아파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소수파에 대한 차별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커다란 마찰 없이 공존과 협력 속에 살아가고 있다.
아예 법으로 권력 분점을 정하는 나라도 있다. 대표적인 다종교-다 종파 국가인 레바논에서는 기독교 마론파가 대통령, 수니파가 총리를, 시아파가 국회의장을, 드루즈가 국방부 장관을 맡도록제도화해 종파 간 갈등을 피해 가고 있다. ISIL는 급진 수니파 이념에투철하지만, 사우디나 다른 수니파 국가들은 ISIL의 적극적인 퇴치에앞장섰고, 팔레스타인 하마스는 수니파지만 사우디아라비아보다 오히려 이란과의 협력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레바논도 시아파가 전체인구의 약 25%에 불과하지만, 시아파 헤지불라가 정권을 잡고 그 정권을 유지하려고 이란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다. 예멘도 수니시아파 대결이라기보다는 이란이 시아파인 후티를 전격 지원하고사우디가 수니파 정치 세력을 보호하면서 종파 간 내전으로 보이는것이다. 즉 사실은 철저하게 사우디-이란의 국익 대리전 성격일 지닐 뿐이다.
초기 이슬람 정권의 후계자 계승 방식에서 마지막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통을 중시하는 집단이 시아파이고, 혈통보다는 공동체 합의 방식을 채택한 정치 집단이 후일 수니파로 불리게 됐다. 두 종파의 차이와 특징은 앞으로 자세히 다루겠지만, 꾸란과 하디스라는 기본 성서를 받아들이는 방식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시아파에서는 이맘이라는 최고 종교 지도자를 인정하고 성직 계층을 강조하는 반면, 수니파에서 20세 이상 성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이맘이 될수 있고, 이맘은 예배를 인도하는 기능적 역할을 할 뿐이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예배 방식이나 신비적인 종교 관행에서도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종교적 분파라기보다는 정파적 성격을 띠고 발전했다. 53-55
11 미국은 왜 그토록 이란을 싫어하는가?
모함마드 모사데크(1882~1967)는 스위스 로잔에서 법학을 공부한 엘리트 민족주의 정치가다. 1951년 이란 총리로 취임한 그는 석유라는 엄청난 부를 가졌음에도 국민은 가난하고 미국의 석유 재벌들만배를 불리는 구조를 개선하고자 석유 국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이에 자국 이익을 지키려고 했던 미국은 1953년 8월 미국 중앙정보국이 직접 개입해 군사 쿠데타를 통해 모사데크 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시 성공했다. 이 사건은 이란 국민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이란인에게 미국이라는 거대한 악의 실체를 깊이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동시에 주변 중동 국가들이 미국에 깊은 불신과 가까이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게 된 계기였다.
오랫동안 고통에 빠진 이란 국민이 친미 팔레비 왕정을 몰아내고 1979년 2월 이슬람 시민 혁명으로 새로운 이란을 만들었을 때 당연히 반미 노선을 추구했다. 그 과정에서 일부 과격분자들이 테헤란주재 미국 대사관을 공격해 대사와 외교관들을 인질로 붙잡고 무려444 일 동안 감금한 사건이 발생한다. 여러 차례 구출 작전에 실패하면서 미 대사관 인질 사건은 당시 세계 최강국 미국에 지울 수 없는수치와 모욕감을 안겨 주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란과의 외교를단절하고, 곧 경제 제재를 단행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이란 이슬람 신정 정권을 붕괴시키고자 미국은 1980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부추겨 무려 이란-이라크 8년 전쟁을 획책한다. 이번에는 거꾸로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해 한때 동지였던 사담 후세인정권을 무너뜨리고, 이웃 이란을 압박하려 했으나 이마저 실패했다.그것은 이라크 전쟁으로 사담 후세인이 사라진 이후 미국이 앉혀 놓았던 이라크 시아파 정권이 오히려 강력한 반미를 외치며 같은 시아파인 이웃 이란과 협력 관계를 강화하면서 이라크 내 미군을 공격하는 역설이 벌어졌다. 이에 정책 노선을 바꾼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5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및 독일과 공동으로(p+1) 이란과의 핵 평화 협상을 전격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극단적 대결 구도에서 중동 최대 시장인 이란을 끌어들여 서로 '윈윈'하면서 메가 시너지를 얻겠다는 과감한 발상의 전환을 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자의 평화 협상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초강경 이란 압박 정책으로 회귀하면서 중동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 긴장을또다시 고조시켰다. 2020년 1월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직접 명령으로 이란 혁명수비대 총사령관이자 권력 서열 2위인 반미 선봉장 거넴 슐레이마니 장군을 이란 공식방문중 표적 살해했다. 이로써 국제 사회가 경악했음은 물론, 미국과 이란 관계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연이어 2020년 3월부터 활성화된 이란 내 코로나-19 바이러스위기 상황에서 인도적 기초 의약품 수출마저 미국에 의해 봉쇄됨으로써 이란인의 미국을 향한 불신과 적대감은 더욱 깊어졌다.
미국과의 실패한 핵 협상 결과, 협상 당사자였던 이란의 온건파대통령 하산 로하니는 쓸쓸하게 물러났다. 대신에 2021년 6월 대선에서는 대법원장 출신의 강경파 신학자 에브라힘 라이시가 새 대통령이 되었다. 미국에서도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서 파기됐던 핵협상(JCPOA, 포괄적 공동행동계획)을 재개하면서 이란과의 화해 접점을 찾으려 하고 있다. 64-66
12 이슬람 세계는 왜 그토록 미국을 싫어하는가?
유럽은 많은 것을 이슬람으로부터 배웠다. 그 첫 단추는 십자군 전쟁이었다.
물론 문화 전파에서 가장 획기적인 계기는 항상 전쟁과 교역이었지만, 십자군 전쟁이 유럽에 가져온 변화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들은 동방의 우수한 문화에 압도됐고,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닥치는 대로 죽이고 약탈하고 파괴하면서 이슬람 문화를 배우고 터득했다.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의 예루살렘 침공은 역사상 길이 기억될 치욕이었다. 40일간의 포위 끝에 함락한 예루살렘 성안에서 유대인과 무슬림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성안의 이슬람 사원과 유대 전통 등 소중한 문화유산은 철저히 파괴됐다. 몇년뒤 아랍 장군 살라딘이 다시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때, 그곳에 있던 기독교인에게 손 하나다치지 않도록 관용을 베풀었던 광경과 비교하면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69
이스라엘의 건국과 미국의 일방적 친이스라엘 정책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주도해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분할된 유대 국가 창설을 통과시키고, 1948년 5월 14일 아랍 영토에서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다. 이때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는 끊임없는 전쟁과 갈등, 테러의 연속이었고,기나긴 60여 년의 세월 동안 미국은 거의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두둔해왔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한 다음 날 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압도적으로 승리했고, 그 후 발생한 네 차례 전쟁에서 아랍 진영은 모두 패했다. 아랍인은 자신들의 패배가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일방적인 원조 때문이라고 여기며 두 나라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그 후에도 지금까지 미국은 팔레스타인 평화 협상에서 한 번도 국제 사회의 책임 있는 국가로서 버림받은 약자의 편을 들어준 적이 없다.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로도 용인될 수 없는 노골적인 이스라엘 편애에 많은 무슬림이 인내를 상실해 갔다. 국제법을 위반하고 아랍을 겨냥한 수백 기의 핵탄두를 갖고 있음에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은커녕 핵확산금지조약(NPT)에도 가입하고 있지 않은 이스라엘을 미국은 무조건 감싸고 예외로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이슬람권에서는 그 누구도 산업용 프로그램조차 갖지 못하게 하는 미국의 극단적 이중 잣대(double standard)가 이슬람 세계에 좌절과 분노를 확산시키고 있다.
더욱이 미국은 시온주의 (Zionism,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 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주의 운동)를 인종 차별 이념으로 비난하고자 하는 국제 사회의 열의를 무시하고 2001년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인종 회의에 불참함으로써 이슬람 세계에 극도의 불신감과 배신감을 안겨 주었다.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고자 국제형사재판소 협약과 대인지뢰금지조약의 비준도 반대했다. 터키 총리 레젭 타입 에르도안의 최근 성명을 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유엔이 설립된 이후 이스라엘의 국제법 위반에 대한 89차례의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결행된 적이 없었다. 상대방인 아랍 국가에 대해서는 그렇게 손쉽게 제재를 가하면서도…………. 만약 유엔 안보리 결의안이 제대로 지켜지기만 했어도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은 오래전에 해결됐을 것이다.’ <타임(TIME)> 2011년 10월 10일자, 64쪽. 70-71
문제는 과거의 응어리가 너무 커서 서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급진 이슬람 그룹이다. 알카에다나 이슬람국가(ISIL) 같은 반이슬람적 무장 테러 조직이 대표적이다. 그들을 급진적으로 만든 것은 이슬람의 원리적인 해석보다는 비열한 서구의음모와 불공정한 국제 정책이었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불씨가 되었지만, 걸프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보스니아, 코소보, 체첸, 카슈미르, 아제르바이잔, 필리핀 남부모로와 동티모르 등지에서 보여 준 노골적인 '이슬람 죽이기 정책'에 더는 앉아서 당할 수 없다는 절박감이 일부 급진주의자들을 테러로 내몰았다.
지금도 미국은 아프간을 공격해 앙갚음하고, 이라크를 희생양으로 삼아 점령해 주둔하고 있다. 테러의 진정한 배경인 역사성은 덮고 지금 이 시점에 인류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문명적 범죄 집단의 응징'으로 테러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미국은 현실 중심적인 수평적 사고가 강하고, 배경과 심층적 원인이 되는 역사성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혹은 무지하다. 그런데 무슬림은 억눌린 근대 100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과거 고통의 역사를 잊지 못한다는 것이 그들이 처한 또 다른 고통인지도 모른다.
9.11 테러 후 20년, 지구촌은 테러와의 전쟁으로 모두가 고통받았다. 알카에다를 비호했다는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적 공격과 점령이 이루어졌다. 심지어 9·11 테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라크를 온갖 거짓 정보와 명분을 내세워 침략해 점령했다. 이 기회를 틈타 급진 세력들이 다시 활개 치기 시작했고, 테러와의 전쟁이 진행될수록 미국과 그 협력자들을 겨냥한 지구촌의 테러는 점점 늘어만 갔다.
알카에다 지휘부는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로 와해됐지만, 2014년 6월 29일에는 알카에다의 이라크 지부가 중심이 된 ISIL이 공식 국가를 선포하고 더욱 잔혹한 방식으로 지구촌 곳곳에 살육과 테러를 저질렀다. 이 ISIL이 사라지면서 대규모 테러 조직은 일단 궤멸됐지만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지역 테러 군벌들은 아직도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크고 작은 테러는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예멘, 리비아, 체첸 등지에서 서구의 개입이나 직접 공격으로 이유 없이 목숨을 잃은 무슬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을 향한 지원과 진정한 사과가 따르지 않고 어떻게 그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겠는가? 국제 사회가 안고 있는 큰 숙제다. 72-73
17 중동에서 미국의 과오와 해야 할 일
중동 민주화에 가장 큰 걸림돌은 사실상 미국의 잘못된 중동 정책이다. 미국은 오로지 자구그이 이익을 지키려는 일념으로 튀니지, 이집트, 예멘, 이라크, 리비아 등의 권위주의 장기 독재 정권과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폭압적 왕정을 비호하고 지원해 왔다. ..
국제법이나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마구잡이로 무시하면서 남의 주권 영토를 점령해 영구화하려는 이스라엘의 시도에 미국이 견제하고 비난하기 보다 동조하고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의 중동 분쟁이 안고 있는 아픔이다. 87-88
19 재스민 혁명은 왜 실패했나?
아랍 민주화가 성공하기 위한 선결 조건은 무엇인가? 쉽지는 않겠지만, 첫째로 국제 사회의 개입과 대리전쟁을 막아야 한다. 리비아, 예멘, 시리아, 이라크 등에서 외국 세력들이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내저너에 깊숙이 개입해 갈등 조장자 역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아랍 각국이 정파나 부족 잡단의 단편적 이해 관계보다 국익이나 미래 세대를 위한 양보와 대타협을 우선해야 한다. 마지마긍로 경제 원조나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압박을 통해 민주화가 안착될 수 있도록, 국제 사회가 평화적 중재자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이희수, <21세기 아라비안 나이트> 103
21 알카에다의 등장과 9.11테러 그리고 대테러 전쟁
알카에다는 원래 사우디의 재벌 2세 오사마 빈라덴이 주도해서 세운 국제 구호 협력 단체였다. 1979년 크리스마스 직후 소련이 기습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소련의 팽창과 남하를 막으려고 이슬람권과 미국이 소련에 맞서는 무자히딘 군벌들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10년 장기전에 돌입했다. 이때 알카에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아프가니스탄 이익 대표부 성격을 띠면서 무자히딘을 지원하는 가장 강력한 지원 조직이었다. 당연히 알카에다는 소련의 침공을 결사적으로 저지해야 하는 미국과의 협력 속에서 함께 전쟁하는 동지 관계였다. 그러나 1990년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1차 걸프 전쟁 직후, 사우디 왕정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이례적으로 미군 기지 설치와 미군 주둔을 허용하면서 왕실과의 관계가 틀어졌다. 사우디와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서 본격적인 대미 무장 공격을 개시했다. 그동안 아프리카와 중동 여러 곳에서 수십 차례 미국 시설에 대한 군사 공격을 감행하던 중, 결국 2001년 9·11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워싱턴의 국방성 펜타곤, 대통령 집무실 백악관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는 9.11 테러를 일으킨다. 9.11 테러는 그동안 이슬람 세계의 급진주의자들이 가져 왔던 불만과 경제적 박탈 논리의 극단적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석유가 개발되기 시작한 1900년대 초부터 오일 쇼크가 발발한 1970년대 초까지 국제 유가는 배럴당 2달러 수준이었다. 석유 1배럴이 약 159리터이므로 1리터에 15원 정도였다. 그것도 70년간이나 지금 휘발유의 최종 소비자 가격이 1리터에 2천원 정도임을 고려한다면, 당시 유통 구조의 왜곡과 서구 석유회사들의 자원 착취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생산원가나 개발비가 턱없이 낮은 중동 석유를 거의 헐값으로 가져가 오늘날 서구는 선진 공업국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는 사이 아랍 국가 대부분은 서구의 가혹한 수탈과 민족적 모멸을 경험했다. 이러한 무슬림의 울분은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빈 라덴의 정치적 선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국은 아랍 석유의 판매를 대행함으로써 노골적으로 그 수익을 도둑질하고 있다. 지난 25년 동안 석유 1배럴이 팔릴 때마다 미국은 135달러를 챙겼다. 이렇게 해서 중동이 도둑맞은 금액은 무려 일일 40억 5천만 달러로 추산된다. 이것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도둑질인 것이다. 이런 대규모의 사기에 대해 세계의 12억 무슬림 인구는 1인당 3천만 달러(약 330억 원)씩 보상해 달라고 미국에 요구할 권리가 있다. - 로레타 나폴레오니, (모던 지하드> 343쪽 106-108
22 대테러 전쟁 20년, 인류에게 무엇을 남겼나?
일반적으로 테러는 '정치, 종교, 사상적 목적을 위해 폭력적 방법과 수단으로 민간인이나 비무장 개인, 단체, 국가를 상대로 위협이나 위해를 가하는 일체의 행동'을 일컫는다. 그러나 테러의 정의나 규정은 관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미국 조지타운대의 저명한 테러 이론가 월터 라쿠어 교수는 테러 개념을 100개 이상으로 정의했다. 미국 테러 전문가들의 한계는 테러 개념을 이슬람 정치 집단에 초점을 맞추고, 공권력 남용이나 국가 테러에 대해 비교적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다.
동시에 그들은 끔찍한 테러 결과에 집착해 이를 궤멸하는 데 관심을 집중하지만, 테러의 근원적 발생 원인과 역사성, 서구의 과오에는 거의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이를테면 9·11 테러로 인류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알카에다는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인도양 진출을 막기 위해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협력 관계를 강화하면서 급성장한 테러 조직이었다. 미국의 군사 지원과 사우디 왕정의 든든한 재정 후원으로 소련의 남하를 막아 걸프만 석유라는 미국의 핵심 이익을 지켰지만, 적대 관계로 돌아서면서 미국에 부메랑이 된 것이다. ISIL이라는 조직도 따지고 보면 부시 미국 대통령의 잘못된 이라크 전쟁이 배태한 악의 씨앗이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몰락한 사담 후세인 잔당이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를 만들었는데, 이들이 ISIL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지구촌은 테러라는 괴물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미국 메릴랜드대 테러연구소가 발행하는 《글로벌 테러통계(GID)》에 따르면, 1970년부터 2017년까지 지구촌에선 18만 건 이상의 테러가 발생했다. 여기에는 8만 8천 건의 폭탄 테러와 1만 9천 명의 암살, 1만 1천의 납치가 포함돼있다. 알카에다와 ISIL이 궤멸된 이후인 2017년만해도 비공식 통계로 1,465건의 테러가 일어났고 7,775명의 무고한인명이 희생됐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주도의 대테러전쟁 결과, 지구촌 테러가 적어도 10배 이상 증가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테러분자를 궤멸하기 위한 작전이란 이름의 무차별 공격으로 또 다른 무고한무슬림 시민이 죽어 나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112-113
29 중동의 여성 파워, 여성 시대가 가능할까?
사실상 중동의 여성 문제 이해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우리의 무지에 있었다. '아랍=이슬람'이라는 인식의 등식 구도로 이슬람과 아랍의 전통 관습을 전혀 구분하지 못했다. 무엇이 이슬람의 종교적 가르침이고, 무엇이 가부장적 아랍 사회의 토착적 악습인지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오류였다. 일부다처, 가부장적, 부계 중심, 남아 선호 등은 인류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사회-문화적 현상이다. 여성 할례, 명예살인 악습 등은 이슬람 율법에서도 권장하지 않거나 심지어 범죄로 다루고 있는 일부 유목 중동 사회의 사회적 관습이다. 이슬람은 특수한 상황에서 공동체 절멸을 막기 위해 유효한 삶의 전략으로 일부다처를 허용하고는 있지만, 일부일처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꾸란에서 남녀 창조의 동등성을 강조하고 있고, 일부 꾸란의 남성 중심 표현들도 7세기 시대적 상황에서 벗어나 21세기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절대적 견해다. 이런 논지라면 앞으로 이슬람권 여성들도 서구에 못지않은 자율적인 삶의 향유와 경제적, 정치적 참여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업그레이드시켜 나아가리라는 것이 명백하다. 136-137
CHAPTER 1 잊힌 이슬람 역사와 문명의 복원
그리스 문명은 크레타에서 출발했다. 크레타 문명은 한 축으로는 이집트 문명, 다른 한 축으로는 오리엔트 문명의 지적 성취를 온몸으로 받아들여 꽃피운 종합 해양 문명이었다. 크레타 문명이 그리스 본토로 흘러 들어가 미케네 문명을 잉태하고, 끊임없는 자기화 과정을 거쳐 기원전 6세기 드디어 화려한 그리스 문화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 로마가 덧세워졌다. 건축과 예술, 신화적 구조 종교관, 과학과 철학 등 어느 하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오리엔트 문명의 지적 신세를 지지 않는 분야가 없다. 그럼에도 고대 오리엔트 문명의 실체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제대로 관심을 유발하지도 못했다. .. 서양이 공격하면 정복이나 위대한 승리지만, 동양이 공격하면 찬탈이고 파괴가 되는 우리 세계사 교과서의 서술적인 문제도 역사 왜곡에 큰 몫을 하고 있다. 146
무함마드는 서아시아의 정통적이고 오랜 사상적 기반을 가진 유일신 사상을 다시 한번 설파하면서, 혼란한 당시 사회를 정신적으로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토착 종교와 기존 구조에 대한 포용 정책, 역동적인 유목 군사 시스템을 통해 정복 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슬람 군대는 합리적인 조세 제도와 토착 주민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인정함으로써 전쟁다운 전정을 치르지 않고도 주변 지역을 쉽게 복속할 수 있었다. 이슬람 제국의 시대는 아라비아반도에서 출발해 북아프리카 모로코와 스페인 남부,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인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이슬람 종교와 문화적 유산을 남겼고, 1천 년의 대제국 시대를 거치면서 인류 문명의 성숙에 크게 공헌했다. 중세 유럽이 침체 시기에 잠들고 있을 때 그리스-로마의 지적 유산을 번역하고 재해석해 유럽에 전해 주었으며, 이를 토대로 유럽의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결정적 모티브를 제공했다.
1천 년의 이슬람 제국 시대 모두가 아랍인 중심은 아니었다. 1258년 몽골에 의해 압바스 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은 튀르크인 중심의 오스만 제국으로 이동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세계의 정교 일치적 통치권인 칼리파권을 행사했고, 192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왕정이 무너지고 터키 공화국으로 독립하면서 이슬람 세계의 명목상 통합마저 깨졌다.
오스만 제국의 멸망과 와해는 그 치하에 있던 여러 소수 민족이 독립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었다. 하지만 곧바로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 열강들이 중동 일대를 식민 통치함으로써 오늘날 중동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과 갈등의원인이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분쟁 지역인 팔레스타인만 하더라도 영국과 프랑스가 이 지역을 나눠서 차지하려고 만든 삼중의 상호 모순된 비밀 조약이 빌미가 됐으며, 국제법과 유연. 안전보장잉사회 결의안, 쌍방 간의 평화 협정 등이 지켜지지 않고 미국 등 강대국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두둔하면서 사태가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147-148
기원전 3000년경 유프라테스으 티그리스강 유역의 범람에 대비한 대규모 치수(治水) 사업을 통ㅎ해ㅐ 도시 국가를 형성하고 최초의 문명 생활을 시작한 민족은 수메르인이었다.
수메르인은 쐐기문자를 만들어 점토판에 그들의 삶을 기록해 보존했으며, 보리빵에 맥주를 즐겨 마시기도 했다. 수메르인에 의해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야말로 이후 전개되는 중동 5천 년 역사의 굳건한 모태가 되었다. 149
기원전 2350년경 셈족 계통의 아카드인이 처음 통일 국가를 세운 이후, 중동에서는 줄곧 셈계 민족들이 흥망성쇠의 역사를 주도했다. 특히 바빌로니앙 왕국은 기원전 18세기경 함무라비 왕 때 전성기를 이루어 유명한 성문법전을 남겨 놓았다.
기원전 16세기 후반에는 철기 문화를 일으킨 히타이트(Hitite)가 등장해 바빌로니아를 멸하고 세력을 떨쳤다. 기원전 15세기부터는 메소포타미아는 물론, 동부 지중해 연안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중심으로 광대한 제국들이 수시로 등장하면서 기술과 문명 전파에 가속도가 붙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 2세가 시리아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했고, 기원전 1280년 양국 간에 카데시 펴오하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단락됐다. 시리아를 평화적으로 분활한 카데시 조약은 역사상 세계 최초의 국제 조약으로 알려져 잇다. 또한 히트이트는 처음으로 철제품을 소개해 오리엔트 전 지역에 군사와 농업에서 철기 문화 시대를 열었다. 150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헤브라이 왕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한 유목민인 헤브라이인에 의해 성립되었다. 헤브라이인은 기원전 1500년경 팔레스타인 가나안에 정착했다가 심각한 기근으로 이집트로 이주했다. 파라오의 압제를 피해 모세의 인도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기원전 11세기 말에 헤브라이 왕국을 세웠다. 다비드와 솔로몬 왕 때 전성기를 누린 헤브라이 왕국은 곧 이스라엘과 유대,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 제국에 멸망당했고, 유대 왕국은 기원전 6세기 아시리아 제국에 멸망당했고, 유대 왕국은 기원전 6세기 신바빌로니아 왕국에 정복됐다. 유대교를 성립한 헤브라이인의 유일신 사상은 후일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성립과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고, 서양 문화의 바탕이 되었다. 헤브라이인의 민족사는 구약 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기원전 12세기경부터 약 300년 동안 필리스티아인(Phiistines), 아람인 (Arameans), 헤브라이인(Hebrews)이 팔레스타인-시리아 지역에서 각각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이란과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인도-유럽어계의 메디아인(Medians)과 셈계의 칼데아인(Chaldeans)이 침투해 혼란 속에서 교류와 쟁패를 거듭했다. 이러한 혼란과 분열 상태를 종식한 세력은 아시리아(Assyria)였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1300년경부터 메소파탬아 북부 지방에서 팽창했고, 기원전 8세기경 최초로 오리엔트 전 지역을 통일했다. 아시리아는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왕 때 전성기를 맞았는데, 그는 옛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쐐기문자로 기록된 방대한 점토판을 수집했다. 고대 ㅁ소포타미아의 신화와 서사시, 영웅시 등은 이 점토판 덕택에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졌다. 그러나 아시리아는 정복 일변도 정책을 펼친 결과 아슈르바니팔 왕 사후에 쇠약해졌고, 메디아를 비롯한 소수 민족의 반란으로 기원전 612년 멸망했다.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으로 오리엔트는 다시 메디아(Media), 리디아(Lydia), 이집트, 신바빌로니아의 네 나라로 분열됐다. 그중 칼데아라고도 불리는 신바빌로니아 왕국(기원전 612~538)이 가장 번영했는데, 그 중신지인 바빌론은 세계의 수도로 불릴 만큼 번창했다. 이 왕국은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 기원전 605~562) 왕 때 전성기를 맞았는데,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시리아를 확보한 후 기원전 586년에는 유대 왕국의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이때 많은 유대인이 전쟁 포로로 바빌론으로 끌려간 것을 바빌론 유수라 한다. 이 사건은 유대 문화의 오레인트의 다양한 유산이 이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151-152
이집트를 정복하고 분열된 중동을 재통일한 세력은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 기원전 338년경 그리스 도시 국가를 통일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왕에 의해 페르시아 제국은 기원전 331년 종말을 맞았다. ..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 서쪽을 지배하면서 그리스-로마 문화가 소개됐고, 이슬람이 등장하는 7세기 초까지 거의 1천 년간 동서문화의 교류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헬레니즘이라 불리는 새로운 문화 현상은 그리스 문화의 일방적 전파라기보다는 오리엔트의 오랜 문화적 토양에 그리스적인 요소가 첨가되어 독특하게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그의 제국은 네 개 국가로 분할됐다. 이집트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Ptolemaeos, 기원전 305~30), 중동에 시리아를 중심으로 셀레우코스 왕조(Seleucid, 기원전 312~64)가 성립됐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제6대 안티오코스 3세(Antidchus III) 때 국력이 절정에 도달했으나, 내부 반란으로 급격히 쇠퇴했다. 동부 지역에는 그리스계의 박트리아(Bactria)와 이란계의 파르티아(Parthia)가 독립했으며, 나머지 영토는 결국 1세기 로마에 병합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후 중동 지역은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와 3세기경 파르티아를 멸하고 이란 지방에 새로 등장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오랜 격돌장으로 변모했다. 153-154
7세기 초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오랜 전쟁으로 마비된 육,해상 실크로드를 대신한 우회 루트가 아라비아 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상로였다. 메카와 메디나는 바로 그 중심 도시였다. 이 시기에 이슬람교를 완성한 무함마드가 등장했다.
그는 메카의 명문 쿠레이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일찍 부모를 여의고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등지에서 대상 활동을 하면서 당시 혼란한 사회상에 깊이 회의했고, 기독교와 유대교 사상에도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를 고용한 여주인 카디자와 결혼한 무함마드는 사업보다는 명상 생활을 통해 병든 인간 사회의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구했다. 오랜 명상 끝에 그의 나이 40세 되던 610년 드디어 하느님(알라)으로부터 첫 계시를 받아 우상 숭배 타파, 평등과 평화르 강조하는 범세계적인 이스람 종교를 완성했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이슬람이 처음부터 주변의 호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유일신 사상은 당시 우상 숭배자들인 메카 상류층의 종교적 권위와 상업적 질서를 위협하였기 때문에 메카에서 극심한 배척을 당했다. 그래서 622년 무함마드와 그 추종자들은 메디나로 이주하여 새로운 이슬람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것을 헤지라라 하여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메디나에서 굳간한 이슬람 공동체를 형성한 무함마드는 세 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630년 메카를 무혈 재정복함으로써 획기적인 교세 확장에 성공했다. 154-155
이슬람 공동체는 632년 무함마드가 타계함으로써 후계자 선출ㄹ 문제에 부닥쳤다. 그러나 슈라(shura)라 불리는 부족 합의제 방식으로 후계자인 칼리파를 뽑아 이슬람식 민주주의 전형을 마련했다. 칼리파는 정ㅊ치와 종교를 동시에 관정하는 이슬람 공동체의 최고 통치자였다. 아부 바크르(Abu Bakr, 632~634), 우마르(Umar, 634~644), 우스만(Usman, 644~656), 알리(Ali, 656~661)에 이르는 네 명의 칼리파가 통치하는 시기를 이슬라믜 가르침에 충실한 정통 칼리파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부터 적극적인 대외 정복이 이루어졌다. .. 불과 10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이집트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 당시 비잔틴 및 페르시아의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던 시대적 상황이 이슬람의 진출을 오히려 환영했고, 이슬람 정복 과정에서 강제 게종은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
알리가 암살당하자 이슬람 제국은 다시 무아위야에 의해 우마이야 왕조로 통일되었다. 그러자 알리의 추종 세력들이 이탈해 시아파라는 이슬람의 새로운 이념 아래 결집했다. 155-156
우마이야 시기에 이르러 이슬람은 발생한 지 100년도 안 된 짧은 시간 동안 지금의 아라비아 반도를 비롯해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중국, 스페인을 위시한 유럽까지 점령했다. ..
이슬람교는 새 정복지에서 살육과 직접 통치보다 공납과 간접 통치를 선호했는데, 이 정책은 정복 주민의 환영을 받았고 이로써 무혈의 정복 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또 다른 이슬람 문화의 전파 이유는 특유의 융화력이라 할 수 있다. 아랍인은 정복을 통해 역사상 최초로 오늘날의 인도와 중국의 경계 지역, 그리스, 이탈리아 및 프랑스의 변경 지역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통합했다. 157-158
무슬림은 이교도의 종교를 인정하고 그들의 종교 생활을 보장했다. 전쟁에서 패하면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여자들은 노예로 팔려 가던 시절에 이러한 조치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다만 무슬림은 비무슬림에게 사회적, 법적인 차등 정책을 실시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무슬림보다 비무슬림에게 세금을 조금 더 많이 부과하는 인두세였다. 인두세 역시 당시 비잔틴 제국이나 페르시아 제국에 내던 고율의 세금보다 적었기 때문에 일반 국민의 부담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158-159
압바스 왕조(Abbasids, 750~1258)의 등장 배경은 단순한 군사적 음모나 쿠데타가 아니라 강력한 하부 조직과 선전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왕조의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기고, 압바스 지배층은 인종과 민족을 초월한 범이슬람 제국을 지향했다. 이리하여 후대 역사가들은 압바스 왕조를 진정한 ‘이슬람 제국’이라 부른다. 159
압바스 왕조는 5대 칼리파 하룬 알라시드(Harun al-Rashid, 786~809)와 그의 아들 마문(Ma’mun, 813~832)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때 바그다드는 당나라 장안과 함께 세계 교역과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했고, 활발한 육, 해상 실크로드의 개척으로 동서 문물이 물밀 듯이 유입했다. 측히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제지술이 종이 혁명을 불러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이 번역, 재해석되고, 학문이 꽃을 피워 이슬람의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제지술의 도입은 751년 압바스 군대의 이븐 살리히(Ibn Salih)장군과 당나라의 고선지 장군이 벌인 탈라스 전투의 결과이다. 이 전투에서 중국이 이슬람군에 패했고, 포로로 잡힌 중국 제지 기술자에 의해 종이가 이슬람 세계 전역으로 확산됐다. 더욱이 이 시기에 저술된 많은 아랍 사료에서 신라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발견할 수 있어, 우리나라와 아랍 세계와의 긴밀한 교류와 역사적 접촉을 확인할 수 있다. ..
우마이야 왕조가 망한 뒤 그 일파가 스페인에 후우마이야 왕조를 세우고 통치자가 됭어 969년 스스로 칼리파를 자칭하며 바그다드에 맞섰다. 이집트에서는 시아파에 의한 새로운 이슬람 국가가 독립해 파타마조를 열었다. 또한 바그다드의 약화는 중앙아시아에 퍼져 있던 소규모 국가들의 성장을 자극했다. .. 튀르크계로서는 카라한조와 가즈나조가 특히 중요한데, 이 왕조가 이슬람화됨으로써 중앙아시아 튀르크계 종족의 이슬람과하 가속화 됐다. 160-161
압바스 시기에 세 대륙에 걸쳐 형성된 이스람 제국은 아랍의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오리엔트, 그리스, 로마, 이란 및 인도 문화를 흡수해 독창적인 이슬람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슬람 문화의 특징은 이처럼 광대한 정복지의 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받아들여 국제적이고 종합적인 문화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161
이슬람 세계의 학문과 문화적 성취는 후일 유럽의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164
시간이 지나면서 세금도 적게 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이 주어지는 이슬람으로의 대량 개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슬람 정부는 세금 감면을 노리는 대량 개종을 막으려고 오히려 개종 금지 백서를 발효했다. 국가 수입의 증대를 위해 피정복민의 개종보다 공납을 요구한 것이다.
이럼 점에 비추어 보면, 무력에 의한 이슬람 전파는 근거가 희박하다. 165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 자신의 고유한 문화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허용된 이교도를 ‘딤미’, 혹은 ’아홀 알딤마(계약의 백성)’라 불렀다. 딤미는 무슬림 국가에 의해 허용되고 보호받는 비무슬림 시민을 일컫는 법률적 용어였다. 실제로 그들은 기독교인, 유대인, 동부 지역의 조로아스터교인을 의미했다. 딤미의 지위는 무슬림 통치자와 비무슬림 공동체 간의 계약으로 결정됐다. 계약의 기본 골격은 딤미가 이슬람의 우위와 이슬람 국가의 지배를 인정하고, 나아가 일정한 사회적 제약이나 지즈야라고 불리는 인두세 납부를 통해 딤미의 종속적 지위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물론 무슬림에게 인두세 납부는 면제됐다. 인두세에 대한 대가로 딤미는 생명과 재산의 안전, 외적의 침입 시 보호, 신앙의 자유, 자신들의 문제에서 광범위한 내적 자치 등을 보장받았다. 한편 무슬림은 1년 소득의 40분의 1을 세금으로 납부해야 하는데, 이것이 종교세의 자카트이다.
따라서 딤미는 노예보다는 훨씬 유리한 상황에 있었지만, 자유 무슬림보다는 불리한 처지였다. 그러나 딤미는 무슬림보다 열등하고 그 숫자가 미미하다 해도 거대한 부를 축적해 경제력을 행사하고, 심지어 정치적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167
오늘날 스페인 땅은 711년부터 1492년까지 거의 800년 가까이 이슬람 세계에 속하면서 중세 최고 수준의 학문, 과학, 예술, 문화 등의 결실을 유럽에 전해 주는 지적 창구 역할을 했다.(중세 ‘아랍의 르네상스’는 유럽보다 500년이나 앞섰다. 이슬람 세계의 학문적 성취는 스페인 톨레도에 설치된 번역속에서 라틴어로 번역돼 유럽에 전해짐으로써 유럽의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지적 원동력이 됐다. 169
이슬람 치하의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는 무슬림과 유대인, 기독교인이 함께 조화롭게 살던 사회였다. 공존은 800년(8세기 초 ~ 15세기 말)가까이 지속됐다. .. 떠나는 사람은 적고 몰려드는 사람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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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문학에서 아랍인은 고전 아랍어, 기독교인은 대부분 라틴어, 유대인은 히브리어와 아랍어를 함께 사용하면서 문호하의 혁신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170
안달루시아의 기녀비적인 건축물인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도 문화의 섞임과 조화가 만들어 낸 걸작품이다. 171
기독교 안달루시아가 가톨릭 이외의 모든 종교를 배척하자 문화 다양성의 용광로는 더 가동되지 않았으니, 이는 17세기 이후 스페인이 문화가 정체되는 이유중 하나가 되었다. 172
분열됐던 이슬람 세계는 11세기 투그릴 베이가 이끄는 셀주크 튀르크조에 의해 재통일됐다. ..
1071년 셀주크가 비잔틴군을 격퇴하고 아나톨리아와 소아시아 지역에 진출함으로써 이 지역이 이슬람화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셀주크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비잔틴 제국에 대한 압박은 십자군 전쟁을 유발하는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세력과의 격돌이라기보다는 기독교 내부의 이권 다춤과 물자 약탈이 주가 되었다.
셀주크조는 1157년 술탄 산자르(Sanjar)의 사후 여러 공국(公國)으로 분할됐다가 몽골의 침략으로 종말을 고했다. 나아가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몽골 제국의 대칸인 몽케의 동생 훌라구가 사마르큰트 총독으로 부임한 후, 1258년 2월 대규모 군대로 바그다드를 함락했다. 이로써 500년 역사의 압바스 제국이 멸망했다. 172-173
오스만 제국의 건설자인 오스만 베이(Osman Bey)는 원래 셀주크 튀르크 시대의 한 부족장이었다. 1299년부터 오스만 베이는 정복 사업을 펼쳐 주로 비잔틴 영토를 잠식했고, 그의 아들 오르한(Orhan) 시대에 이미 발칸반도에 진출해 비잔틴의 존재를 위협했다. 1361년 아드리아노플 정복으로 시작된 발칸 공략은 1389년 코소보 전투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것은 1453년이었다. 술탄 메멭트 2세(mehmet II)에 의해 점령된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뀌었다. ..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오스만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한 획을 긋는 큰 사건이었다. 이제 중세가 종식되고 근대가 시작되는 기점이 되었다. 유럽은 오스만 제국이라는 동방 문화권과 직접 접촉함으로써 동방의 새로운 기운과 문명을 급속도로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곧바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인이 스스로 ‘지리상의 발견’이라 불렀던 대항해시대가 도래했다. 174
제국의 영토는 북으로 헝가리에서 남러시아, 남으로는 북아프리카 알제리에서 걸프해에 이르기까지 과거 이슬람 세력권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오스만 제국의 확장과 번영에는 예니체리, 밀레트 등 여러 가지 특징적인 제도가 뒷받침되었다. 우선 귀족 세력의 견제를 통한 술탄의 중앙 집권화와 효과적인 전투력 배양을 위해 예니체리(Janissary)군대가 결성됐다. 예니체리는 술탄의 근위 보병 부대로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또 술탄은 예니체리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데브쉬를메(Devshirme)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데브쉬르메는 주로 발칸 반도의 기독교 소년들을 징집해 엄격한 훈련과 튀르크화 교육을 통해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예니체리에 배속시키는 제도였다.
한편 이슬람 사회 초기의 소수 민족 정책 딤미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 시대에 밀레트(Millet)라는 독측한 체제로 되살아난다. 밀레트는 크게 지배 집단과 종속 집단으로 나누어졌다. 지배 집단은 튀르크족 이외에도 아랍인, 페르시아인, 보스니아인, 알바니아인과 같은 무슬림이었고, 종속 집단에는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이, 유대인, 루마니아인, 슬라브인과 같은 소수 민족이 포함됐다.
밀레트 체제에서 가장 큰 종속 집단은 그리스 정교 공동체였다. ..
두 번째 소수 민족 밀레트응 아르메이나 정교 그룹이었다. ..
세 번째 소수 민족 밀레트는 유대인 집단이었다. 175-176
오스만 제국 내의 소수 집단은 밀레트 내에서 자신들의 산앙과 종교 의례는 물론, 고유한 관습과 언어, 문화적 전통 등을 향휴할 수 있었다. 또한 튀르크인과의 마찰과 갈등으로 인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들의 공동체 내규에 따라 분쟁을 조정하고 해결했다. 176
오스만 제국 치하에 있던 아랍 세계에서는 18세기 중엽 이슬람교의 요람인 아라비아반도를 중심으로 자주를 표방한 민족 운동이 태동했다.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것이 와하비(Wahhabi) 운동으로, 원래는 이슬람교의 변질과 개혁주의에 반대하여 꾸란의 순수한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종교적 열정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오스만의 지배에 저항하는 사우드 가문의 호응을 받아 와하비 왕국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와하비 운동은 아랍인의 각성을 촉구하여 후일 아랍. 여러 나라의 독립에 정신적 바탕을 제공했다.
이집트에서도 18세기 말 나폴레옹의 원정으로 유럽 문화의 영향을 받아 민족적 자각이 촉진되었다. 이집트의 근대화를 추진한 이는 총독 무함마드 알리였다. 그는 아라비아반도로 출병하고 수단을 정복하는 한편, 이집트의 근대화를 위해 나일강을 대대적으로 개발해 경제적 부흥을 이루었다. 그 후 이스마일의 통치기에는 수에즈 운하를 완공하고, 산업, 교통, 교육의 혁신을 가져왔다. 그러나 지나친 재정 기출이 경제를 파탄시켰고, 이 때문에 수에즈 운하의 실권이 영국으로 이관되었다. 결국 1882년 이집트는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79-180
독일 편에 가담했던 오스만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제국이 와해되는 운명을 맞았다. 거의 모든 제국 영토를 뺏기고 터키 본토까지 점령당하자,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독립 전쟁을 수행했다. 그 결과 1923년 로잔 조약에서 최종적인 영토 조정이 이루어졌고,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한 무스타파 케말은 칼리파제와 왕정을 폐하고 터키 공화국을 창설했다. 이로써 1299년 이래 600년 이상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으로 존속해 왔던 오스만 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181
아랍어, 이슬람교, 아랍인이라는 공통분모로 단일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던 아랍은 20개국이 넘는 개별 국가로 분할됐으며, 상충하는 이해관계로 협력과 분쟁을 거듭하고 있다. 181-182
근대 이후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복을 전후로 18세기부터 서구에 의한 이슬람 세계 식민지화가 가속화되면서 ‘지배와 피지배’라는 숙명적 관계를 역전됐다. 162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호히사 설립을 계기로 인도 무굴 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남부의 동남아 이슬람 지역들이 차례로 서구 열강의 식민 상태로 전락했다. 중앙아시아에서도 서투르키스탄과 위구르 지역인 동투르키스탄이 각각 러시아와 중국의 지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
제 1, 2차 세계대전 전후로 탈식민 시대가 시작되면서 이슬람 지역 대부분이 쪼개져 57개 개별 국가로 독립했지만, 서구의 ‘이슬람 편견’은 오늘날까지도 크게 바뀌지 않은 채 ‘이슬라포비아(이슬람 혐오증)’로 이어지고 있다. 183
정치적 목적을 위해 테러라는 도구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슬람권내 정치 세력은 극소수이고, 대중적 지지 기반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이슬람=테러리즘’이라는 만들어진 공식으로 지금 서구와 이슬람 세계는 어느 때보다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다. 183-184
ISIL(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은 원래 알카에다의 이라크 지부로 출발한 AQI가 전신이다. 그들은 시리아 내전을 틈타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정부군을 전복 시키려는 반군 군사 조직에 참여했고, 2014년 6월 29일에 스스로 IS(Islamic State), 곧 ‘이슬람 국가’를 선포했다. ISIL은 시리아 라카를 수도로 삼고, 거점을 확보하면서 서방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2015년 11월에는 파리 시내 레스토랑과 경기장 등 일곱 군데의 다중 시설을 공격하고, 무차별 사격으로 민간인 사망자 130여 명, 부상자 수백 명을 발생시켰다. .. 결국 시리아 쿠르드 민병대가 2017년 지상군을 투입해 미군과 합동으로 ISIL의 마지막 거점이자 수도인 라카를 점령함으로서 일단락되었다.
알카에다와 ISIL의 궤멸로 당분간 대규모 조직적인 민간인 테러는 줄어들겠지만,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팔레스타인 박해, 시리아 내전, 리비아 내전, 예멘 내전 등에서 서방의 개입으로 가족을 잃은 극단적 분노가 뿌리내리고 있다. 이들에 대한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치유 프로그램 가동과 지원책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상식을 뛰어넘는 테러는 줄어들기 어렵다. 이것이야말로 중동-이슬람 세계가 안고 있는 불편한 현실이기도 하다. 193-194
CHAPTER 2 이슬람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지키는가
이슬람교는 기독교, 유대교와 함께 3대 유일신 종교다. 아랍어로 하느님을 알라(ALLAh)라고 하니 하느님의 아랍어 표기가 바로 알라이다. ..
유대인이 믿는 유대교, 예수에서 예수교, 부처에서 불교, 조로아스터에서 조로아스터교 등이다. 그런데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영어로 마호메트)를 믿지 않는다. 따라서 마호메트교는 잘못된 표현이다. 199
이슬람은 종교와 문화를 포괄한 개념이며, 종교를 구분해서 사용할 때는 이슬람교, 여타의 경우에는 이슬람으로 폭넓게 사용한다.
이슬람의 언어학적인 어원은 ‘평화’이고, 신학적인 의미는 ‘복종’이다. 따라서 이슬람 사상의 핵심은 알라(유일신)에게 절대복종하여 내면의 평화를 얻는 것이다. 각 종교 사상의 핵심에서 기독교가 사랑, 불교가 자비, 유교가 인(仁)이라고 한다면, 이슬람 사상의 중심은 평화와 평등이이다. 199
이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중잰자나 대속자 없이 신과 인간의 직접 교통과 직접 구원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누구도 알라에게 대적할 수 없고 대신할 수도 없다. 유일신 알라자식을 두지 않았으며 자식을 낳지도 않았다. 200
구원 방식도 아주 간결하여 현세에서의 선악의 경중에 따라 회후이 날 신의 심판을 받아 천국의 구원과 지옥의 응징으로 나뉜다는 내세관을 갖고 있다. 200
이슬람은 구체적 실천을 위해 다섯 가지 기본적인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첫째, 알라의 유일성과 무함마드가 그분의 예언자임을 믿는다’라는 신앙 고백(Shahada), 둘째 하루 다섯 번의 예배(Salat), 셋째 이슬람력 9월인 라마단 달 한달간 해 있는 동안의 단식(Ramadhan), 넷째 자신의 순수입 2.5%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세금을 내는 자카트(Zakat), 다섯째 평생에 한 번 권장되는 메카 성지 순례(Hajj)등이다. 이를 이슬람의 다섯 기둥, 오주(五柱)라고 한다. 201
“라 일랄라 일라하(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 202
이슬람의 모든 가르침은 무함마드의 계시 내용을 담은 꾸란에 집대성되어 있다. 또한 꾸란과 함께 그의 선별된 언행록인 하디스가 또 다른 경전으로 무슬림에게 삶의 지침이 되고 있다. 꾸란과 하디스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아니한 사항에 대해서는 이슬람 학자들의 유권 해석이나 합의를 통해 해결해 나갔다. 204-205
무함마드는 570년경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쿠레이시라는 명문 귀족의 가난한 유복자로 태어나, 마흔 살이 되던 해인 610년경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 그의 가족사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를 보지 못했던 그는 여섯 살 때 어머니마저 병으로 잃으면서 고아가 되었다. 당시 아랍 유목 주복의 관습에 따라 할아버지 압둘 무탈립의 양육을 받았고, 그의 사후에는 숙부인 아부 탈립의 보호를 받았다.
고아로서 일찍부터 독립한 무함마드는 당시 밑천 없이 뛰어들 수 있었던 험난한 대상 교역의 낙타 몰이꾼으로 인생을 시작했다. 동서양 기록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점은 그는 성실하고 정직했으며 탁월한 협상가이자 중재자였다는 것이다. 그의 정직성과 약육강식의 사막 교역에서 분쟁을 조정하는 놀라는 능력은 모든 자본가의 관심을 끌었고, 당시 메카의 상인이었던 카디자의 피고용인이 되었다. 미망인이었던 여주인 카디자는 무함마드의 성실함과 매력에 끌려 그에게 청혼했고, 두 가문의 합의 아래 결혼했다. 이때 무함마드의 나이는 25세, 카디자는 15세 연상인 40세였다.
무함마드는 결혼 후 여유로운 생활 환경에서 그동안 품어 왔던 사회적 악습과 모순에 대해 15년간 깊은 고뇌와 명상을 시작했고, 40세 되던 610년 메카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인도로 알라의 첫 계시를 받았다. 알라가 글자와 학문을 몰랐던 무함마드를 선택하여 22년에 걸쳐 내린 계시는 꾸란이라는 무슬림의 성스러운 경전으로 집대성됐다. ..
이슬람을 완성한 무함마드는 632년 아내 아이샤(Aisha)의 팦베개를 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208-209
첫째, 그는 아무런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 임종 시 아내 아이샤에게 집안의 모든 재산을 정리하라 이르고, 전 재산 7디나르의 돈을 가난한 자에게 모두 나누어 주도록 했다. 이는 이슬람 사회에서 유산 대부분을 국가와 가난한 이웃에게 환원하고 최대 3분의 1 이하만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는 무슬림 유산 상속의 근간이 되었다.
둘째, 그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혈통보다 능력과 공동체를 지휘하는 지도력으로 높이 평가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후계자는 ‘슈라’라는 부족 공동체 대표자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추대되었다. 그래서 혈통 중심의 아랍 왕정들은 순수 이슬람 전통에 위배되는 정치 형태인 셈이다.
셋째, 무엇보다 무함마드는 순수한 인간이었다. 그는 어떠한 기적도 행하지 않았으며, 결단코 신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의 사후 많은 추종자가 그의 신격화를 꾀했을 때, 후계자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뜻에 따라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무함마드를 섬기고 경배하지 말라. 그는 죽어 없어졌다. 하느님을 섬기고 복종하라, 그분은 영원히 살아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
넷째, 무함마드는 적에 대한 관용과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에 대한 한없는 낮춤의 자세르 가졌다. 아무리 치명적인 손해를 낓친 적이라도 그에게 복종하고 용서를 비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철저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으며, 전쟁에서 전사한 동료 가족은 물론, 적들의 가족까지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그를 택하고 그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최초의 추종자들이 오늘날 세계 최대의 가장 견고한 종교 공동체를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섯째, 그는 종교적 열정과 온화함의 조화를 행동으로 보인 지도자였다. 나아가 모든 어려움을 앞장서 막아 내는 불굴의 정치 지도자였다. 종교 창시자 대부분이 자신의 근거지를 떠나 새로운 세상에서 그 뜻을 펼쳤지만, 무함마드만은 박해의 진원지였던 고향 메카를 설득과 용서를 통해 재정복했다. 그리하여 메카는 무함마드에게 가장 든든한 지지 기반이 되었다.
여섯째, 여성들에 대한 지위와 인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준 이슬람 페미니스트였다. 남성이 여성을 노예로 매매하고 자기 장식물로 여기던 무지의 시대에 무함마드는 여성들을 완전한 인격체로 존중할 것을 명했으며, 여성에 대한 상속을 법제화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가 누구냐는 제자들의 물음에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어머니’라고 대답했으며, 미래의 어머니인 여성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설파했다. 오늘날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낙후된 일부 아랍 국가들을 보면 어쩌면 무함마드의 시대의 가르침보다 더 퇴보한 듯한 생각도 든다. 209-211
무함마드는 생전에 열 두 명의 여성과 결혼을 했다. 211
꾸란은 무함마드가 서기 610년에서 632년까지 23년간 예언자로서 알라로부터 받은 계시 내용을 담은 이슬람 최고의 경전이다. 215
일반적으로 꾸란 내용을 인용할때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문구를 사용하는 반면, 예언자의 말, 즉 하디스를 인용할 때는 “예언자가 말하기를”이라는 문구를 사용한다. 216
구전으로 내려오던 꾸란이 책으로 편찬된 것은 무함마드 사후 10여 년이 지난 3대 칼리파 우스만 시대(644~656)로 알려져 있다. 정복 전쟁을 통해 이슬람의 영토가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등 비아랍어권으로 확대되어 감에 따라 하느님의 말씀인 꾸란이 달리 읽히고 발음되기 시작했다. 어떠한 왜곡이나 의미의 변화를 막기 위해 구전 전통이던 꾸란이 책으로 편찬됐고, 정확한 발음의 통일ㅇㄹ 위해 점차 모음 부호를 붙이게 되었다.
꾸란은 전체가 30파트(Juz)이며, 114개의 장(Surah), 6,236개의 절(Ayat)로 구성되어 있다. 단어 수는 약 8만여 개다. 114개 장 중 86개는 메가에서 계시되었고, 28개 장은 메디나에서 계시되었다. 216-217
모든 무슬림은 매일 다섯 번의 예배를 드리고, 매년 라마단 한 달 동안 단식을 한다. 이 기간에는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서 자신을 인내하고 정화한다. 해가 있는 낮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으며 철저히 금식하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음식을 만들어 먹고 해가 진 뒤에는 충분한 식사를 할 수 있다. 219
이슬람의 단식은 사움(Saum)이라고 부르지만, 단식하는 달 이름을 그대로 따서 라마단이라고도 한다. 220
종교적으로도 단식은 무슬림에게 도덕적 절제와 과욕을 다스리는 훈련의 장이다. 그래서 무슬림은 라마단 기간이 아니더라도 부정이나 유혹에 흔들릴 때 단식을 곧잘 한다. 특히 단식을 제대로 하면 잃어버린 건강을 되찾는 소중한 기회로도 활용할 수 있다. 220
이슬람 종교 의례는 태음력인 이슬람력에 따라 정해지는데, 아홉 번재 달인 라마단은 1년 내내 찾아온다. 서양력의 1년 길이가 365일인데 비해 태음력인 이슬람력의 1년은 354일 정도이니, 매년 이슬람력은 11일 정도씩 짧아진다. 2020년에는 4월 23일부터 시작했고, 2021년에는 4우러 12일경 시작했다. 33년이 자나면 사계절을 돌아 제자리로 오게 된다. 221
하즈(Hajj)라 불리는 성지 순례는 무슬림의 마지막 의무이며, 평생에 한 번 이슬람력 12월 첫 주에 메카를 방문하는 것을 의미한다. 메카는 이슬람이 완성된 곳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집(Bait-al Allah)이 있는 곳이다.
성지 순례의 종교적 관행은 예언자 아브라함(이슬람에서는 이브라힘)이 하느님의 명을 받아 건설한 메카의 카바 신전을 일곱 차례 돌고(타와프),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일이 어머니 하갈과 함께 물을 찾아 뛰어다녔다는 고사가 남아 있는 마르완과 사파 동산을 일곱 차례 뛰면서 왕복하는 것(싸이)에서 연유한다.(이슬람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아내 하갈(Hagar)과 어린 아들 이스마일(Ismail)을 사막에 내버려두고 떠났다. 하갈은 아브라함에게 몇 번이나 자신들을 버리는 이유를 물었다. 아브라함은 신의 뜻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하갈은 겸허하게 신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분이 자신들을 보호해 주시 ㄹ거라고 믿으며 광야로 나아갔다. 배고픔과 목마름에 지친 그들은 고통 속에서 물을 찾았다. 하갈은 이스마일에게 먹일 물을 찾아 이 언덕, 저 언덕을 올랐다. 두 언덕 사이를 일곱 차례나 왕복한 끝에 드디어 물이 솟아나는 곳을 찾았으니, 이 샘은 잠잠이라 불린다. 이곳에 사람들이 터를 잡고 형성된 도시가 바로 오늘날의 메카다. 두 언덕이 바로 메카에 있는 사파(Safa)와 마르완(Marwan)이며, 성지 순례를 할때 순례객들은 이 고사를 떠올리며 사파와 마르완 두 언덕 사이를 일곱 차례 왕복한다.) .. 순례는 다른 절대 의무와는 달리 재정이나 건강이 허락되지 않을 때 다른 선행으로 대체할 수 있는 상대적인 의무라 할 수 있다. 222-223
순례 마지막 날 그들은 이들 아드하라는 희생제를 치르고 예언자 무함마드의 유해가 안치된 메디나를 순례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순례를 마친 사람들에게는 하지(haji)라는 존칭이 따라다닌다. 224
이슬람교에는 성직자 제도가 없다. 이슬람 정신인 평등을 실천하는 가장 확실하고 구체적인 사회적 약속이다. ..
신에게만 책임을 지기 때문에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한 종교 의례나 불필요한 형식이 과감하게 생략된다. ..
통상적으로 성직자들이 주관하는 예배 인도, 모스크 관리, 꾸란 편찬, 종교적 유권 해석, 영적 지침 같은 공동체의 종교적 활동은 누가 맡아서 하는가?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이맘이다. 즉 예배 인도자인 셈이다. 모든 성인 무슬림은 예배를 인도하는 이맘이 될 수 있다. 225
수니파 이맘 대부분은 자신의 고유한 직업을 가진 채, 예배 시간이 되면 모스크에 와서 이맘으로서 예배를 집전하고 다시 자신의 생업으로 되돌아간다. ..
시아파 이맘은 자격과 의미가 수니파와 매우 다르다. 시아파에서 이맘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 신의 대리인으로 간주돼 특별한 위치가 부여된다. 226
세속적인 최고 통치권과 종교적 카리스마를 모두 가진 칼리파조차 신 앞에서는 평신도일 뿐이다. 226-227
학문적 길잡이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울라마이다. 이들은 종교 법학자이자 신학자이고 이슬람학을 전공한 이슬람 학자들이다. ..
울라마와는 별도로 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파생하는 버빌 공방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이슬람 법정이 설치됐다. 이곳의 최고 법학자들을 파끼흐(Fakih)라고 부른다. 동시에 재판관인 까디(Qadi)가 있으며, 이슬람 공동체 최고의 법률 전문가로 대법원장 격인 무프티(Mufti)가 있다. 이들 중 파끼흐는 학자이며, 까디와 무프티는 국가에 의해 공식 임명되는 법조인이다. 227
이슬람의 기본 교리와 관행에서 대부분의 이슬람 공동체는 단합과 통합을 이루고 있으나, 사상이나 종교 의례, 율법적 해석에서 차이를 보이며 여러 분파가 생겨났다.
대표적인 차이가 바로 수니파와 시아파이다
무함마드는 632년에 타계하면서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아랍 무슬림은 아랍 부족의 오랜 대의 정치 전통에 따라 민주적인 만자일치 제도로 후계자를 선출했다. ..
무함마드의 유일한 부계 혈통인 그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 알리는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 .. 656년, 알리가 드디어 네 번째 칼리파가 되었으나 661년에 그만 살해되고 만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유일한 직계 혈통이 겨우 네 번째 칼리파가 된 것은 수긍하기 어려운데, 그의 죽음까지 더해지자 극단적 분노와 적개심이 표출됐다. 바로 ㅇ라리의 추종자들이 시아파가 되었다. ‘시아’란 떨어져 나간 무리’라는 뜻이다. 자연히 남아 있는 무린 수니가 되었다. ..
시아파는 이란을 중심으로 전체 이슬람 세계의 약 10%를 차지한다.
이슬람 세계의 약 90%를 차지하는 수니파는 믿음과 관행에서 시아파와 거의 차이가 없다. 꾸란과 하디스라는 기본적인 경전을 받아들이는 종교적 신념에도 큰 차이가 없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부르고 자유롭게 결혼한다. 상대방의 모스크에 가서 함께 예배도 본다. 그렇지만 신학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별개의 모스크와 종교 의식의 차이, 이맘 직위에 대한 관점의 차이 등에서 분명히 다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수니의 샤하다는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다’로 끝나지만, 시아는 그 뒤에 ‘알리는 신의 사랑을 받은 자이며, 신자들의 사령관이고, 신의 친구이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
또한 수니파는 시아파가 주장하는 알리와 그의 자손 중심의 이맘 제도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러한 차이점도 수니와 시아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킨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233-236
이슬람법의 원천은 무엇인가? 모두가 공감하는 네 개의 신학적 원천이 가장 중요하다. 신의 말씀 그 자체인 꾸란(Qur’an), 오류를 범하지 않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순나(Sunnah), 해당 적용 법규를 꾸란과 하디스(Hadith)에서 유추해 적용하는 끼야스(Qiyas, 유추), 이슬람 율법학자 울라마들의 전원 합의인 이즈마(Ijma, 합의)가 그것이다.
무슬림의 신앙생활에서 절대성을 갖는 꾸란과 순나가 이슬람법의 법원(法源)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끼야스나 이즈마는 상당한 설명이 필요하다. 세 번째 법원인 끼야스는 유추이다. 현대적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사건 사고의 정황들이 모두 구체적으로 꾸란과 순나에서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울라마들은 한 사건에 적용할 수 잇는 가장 유사한 사례들을 꾸란이나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에서 찾아서 유추하여 법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방식이다. 물론 끼야스에는 인간의 이성적 잣대가 개입할 여지가 있으므로 학자 간의 완전하 ㄴ합의와 엄격한 적용 방식이 요구된다.
네 번째 이즈마는 인간 사회의 범죄나 다춤에서 꾸란이나 순나에서 유추해 결정할 수 있는 근거나 합리적 조항을 찾지 못할 때, 당대 울라마들의 심사숙고와 전원 합의를 거쳐 이슬람법으로 규정하는 방식이다. 이는 비슷한 사례를 찾아 유추하는 끼야스보다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 더 강하게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매우 신중한 절차를 따르며, 그 결정에 대해서도 정통파 사이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학자들이 개별적 해석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이즈티하드(Ijtihad)라고 하고, 유권 해석의 권한을 지닌 학자들을 무즈티하드(Mujtihad)라고 부른다. 이슬람법 해석에서 이즈티하드가 갖는 위험성을 간파한 많은 정통 울라마들은 이즈티하드의 문은 닫혔다고 주장하면서 더이상의 무즈티하드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242-243
이슬람법 해석과 법 적용의 규범과 범위 문제를 둘러싸고 학파가 갈렸다. ..
하나피학파 - 이라크 학파를 대표하는 하나피 학파는 4대 학파 중 가장 온건하고 자유로운 성향을 띄며, 무엇보다 이성(ra’y)과 개인의 견해를 이슬람법 해석에서 폭넓게 인정한다. 오늘날 가장 많은 지역에 분포하며, 터키,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 일대의 주된 흐름이다. 튀니지, 이집트 등지에도 분포하고 있다.
말리키학파 - 이슬람 초기 메디나에서 통용되돈 관습법에 근거하기 때문에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보인다. 현재 북아프리카의 대표적인 학파이며, 이집트 북부, 나이지리아, 수단, 걸프해 연안 국가들에 분포되어 있다.
샤피이학파 - 엄격한 메디나 학파의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하나피 학파의 이성적 판단에 의한 유추를 폭넓게 수용하는 절충적 법학파이다. 오늘날 이집트와 인도네시아 중심의 동남아시아에 널리 분포되어 있고, 그 외 사우디아라비아 일부, 인도에도 샤피이 학파 방식이 적용되고 있다.
한발리학파 -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강력한 호응을 받으면서 단단한 뿌리를 내렸다. 가장 보수적인 율법 해석과 메디나 시기의 교저적인 이슬람 정신을 계승하려는 성향을 강하게 보이며, 시대적 상황에 맞는 재해석의 문호를 인정한 다른 학파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한발리 학파의 정통주의와 보수성은 18세기 말 아라비아반도 중심부에서 와하비즘(Wahhabism)으로 부활했고,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의 중심적이 학파가 되었다. 현재는 사우디아라비아 이외에도 시리아, 이라크 등지에 널리 퍼져 있다. 245-247
이슬람을 경전 중심의 이론과 교리로만 해석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영적 본질에 다가가려는 종교적 신비주의를 수피즘(Sufism)이라 한다. 247
CHAPTER 3 이슬람 문화의 향기
새벽 4시가 넘어 서서히 여명이 밝아 오는 이슬람 도시들은 언제나 아잔(Azan) 소리로 하루를 열어 간다. 아잔은 예배 시각을 알리고 예배를 보러 오라고 칭하는 낭송의 소리다. ..
모스크 옆에는 반드시 미나레트(Minaret)라고 하는 높고 뾰족한 첨탑이 있는데, 그 첨탑 위에서 무아진(Muazzin)이라 부르는 독경사가 아잔을 낭송한다. 255
이슬람 건축의 핵심은 모스크, 마드라사(신학교), 궁정, 묘당 등이다. 모스크(mMosque)는 아랍어 마스지드(masjid)가 스페인어 메스키타(Meszquita), 프랑스어 모스캐(Mosquee)를 거쳐 영어로 변한 것이다. 마스지드는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는 곳’을 뜻한다. .. 삶의 중심 공간으로서 모스크는 그리스 시대의 아고라(Agora)나 로마 시대 포럼(Forum)의 성격과도 닮았다.
모스크 옆의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미나레트는 어디서나 보이는 방향키이다. 257
모스크의 건축 구성은 3M(Masjid-Minbar, Mihrab, Minaret)으로 표현한다. 모스크 내부에서 예배 방향인 메카를 표시해 주는 미흐랍(Mihrab)과 금요일 합동 예배의 설교대인 민바르(Minbar), 모스크 바깥의 높은 첨탑인 미나레트(Minaret)가 그것이다. 260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 미흐랍이다. 미흐랍은 예배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내부 공간에 메카 방향을 표시하고자 벽면을 움푹 들어가게 깎아 낸 곳이다. ..
두 번째 구성 요소는 설교를 위한 계단식 연단인 민바르이다. .. 민바르에서의 설교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미가 있다. 신의 말씀을 깨우치는 고유한 종교적 역할 외에도 국가의 주요 정책을 공표하고 왕의 임명과 퇴위를 알리는 공식적인 홍보 창구가 된다. ..
세 번째 요소는 미나레트이다. 261
모스크는 나그네를 위한 쉼터이다. 단순히 신에게 경배를 올리는 예배 공간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가장 역동적인 삶이 펼쳐지는 생활 공간이다. 그래서 모스크를 중심으로 생활 편의와 중심 기능을 담당하는 목욕탕, 여관, 식당, 병원, 시장에 이어 도서관과 학교까지 갖추어져 있다. 가난한 사람과 경비가 떨어져 오갈 데 없는 나그네들을 위한 숙소와 먹을 것이 준비된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함께 예배를 보고, 낮에는 카펫이 깔린 폭신한 모스크 바닥에 항상 흐르는 깨끗한 물로 몸을 청결하게 유지할 수도 있다. 262=263
모스크는 또한 무덤 공간이다. 통치자나 고매한 고승들은 죽어 모스크 뜨락에 묻힌다. 그래서 이슬람 세계의 큰 모스크에는 거의 반드시 주변에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264
아랍안나이트는 아랍어로 기술된 대중 설화 문학의 집대성이다. 1880편으 큰 줄거리와 100여 편의 소주제가 1,001일에 걸친 밤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잡품의 모태는 6세기 페르시아의 설화집인 <하자르 아프사나<천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아랍어로 번역되어 구전된 시기는 840년경으로 추정되며, 10세기ㅣ 중엽 아랍 작가인 마수디와 이븐 나짐이 그들의 작품에서 페르시아어 <하자르 아프사나>를 ‘천일 밤의 이야기’로 번역, 소개함으로써 아라비안나이트가 구전 문학에서 아랍의 기록 문학 속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아라비안나이트는 인도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페르시아를 거치며 많은 이야기가 변형, 첨가, 삭제된 채 아랍으로 전달됐다. 아랍은 여기에 아랍적인 요소를 첨가함으로써 결국 아랍화된 문학으로 자리매김했다. 265-266
아라비안나이트는 정작 본고장인 아랍-이슬람 문하권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는 표준어와 정형화된 문체에 의존한 식자층의 아랍 문화만이 중시되고, 과장과 무한한 상상력으로 포장되고 대담한 성적 표현으로 더덕의 틀을 뛰어넘는 대중 설화 문학을 교양 없는 것으로 비하하는 풍조 때문이었다. 267
아라비안나이트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1886년, 이야기의 첫날밤만을 떼어 <유옥역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했으니 벌써 125년 전이다. 이 제목은 여주인공 샤프라자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268
아라베스크(arabeque)는 .. 대안 예술이자 새로운 문화였다. 사람과 동물 대신 꽃과 나무, 식물과 자연 현상을 아랍어 서체와 결합해 기하학적으로 배치해 예술성을 표현했다. 아라베스크는 반복과 대칭이 특징이며, 꾸란 구절을 아랍어 서체로 장식했다. 모든 예술은 결국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는 의미를 담았고, 시작도 끝도 없는 반복과 대칭 구도 자체가 바로 오묘한 신의 예술이었다. 272
우리나라에서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당초문(唐草紋)으로 알려졌다. 꽃과 식물을 기본 모티브로 사용한 디자인이 당나라를 통ㅎ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처마의 와당 장식, 불교 사찰의 단청, 청자나 백자에 그려진 문양, 전통 가옥의 문살 등에서 흔히 보이는 당초문은 아라베스크를 그 원형으로 한다. 273
이슬람 생활 예술의 꽅으 ㄹ들라면 단여 ㄴ카펫이다. 이슬람의 긴 역사와 삶의 애환, 무슬림의 예술성과 기술, 진한 일상의 시간이 축적된 종합 예술품이다. ..
카펫은 이슬람의 역사이고 작품이다. .. 구도의 기본 디자인을 형성하는 것도 아라베스크 문양이다. 274
인류가 카펫을 사용한 기간은 2,500년이 넘는다. .. 카펫은 처음 중앙아시아의 유목 민족이 만들기 시작했다. .. 첸트를 가리는 스크린이자 바닥 깔개이고, 벽을 가리는 커튼, 말안장 등 포기할 수 없는 실용품이었다. ..
역사적으로 카펫 산업이 가장 발달한 곳은 터키와 페르시아이다. 274-275
카펫은 디자인 예술이다. 디자인만 보고도 그것이 어느 시대에 어디에서 생산됐는지 알 수 있을 정도이다. .. 꽃무늬 양식과 기하학적 양식이 주류를 이룬다. 꽃무늬 양식은 주로 페르시아와 인도에서 사용했고, 캅카스 및 중앙아시아의 투르코만은 기하학적 무늬를 선호했다. 터키에서는 기하학적 무늬가 더 많이 사용됐지만, 두 가지 양식이 모두 애용되었다. .. 같은 디자인이라도 무노하권에 따라 그 해석ㄱ은 각기 다르다. 중국에서 용은 황제의 의미를 내포하지만, 페르시아에서는 악마이며, 인도에서는 죽음을 의미한다. 276-277
초기에 커피는 음식의 일종으로 먹었던 것 같다. 자생하는 커피의 효능을 일찍부터 알고 있던 동부 아프리카나 아라비아 남주 주민은 분쇄된 원두를 동물의 기름과 섞어 응고시켜 오랜 행군이나 전쟁중에 힘을 보충하기 위한 목적으로 복용했을 것이다. 전쟁 필수 에너지바였던 셈이다. 이처럼 커피의 전파와 효능의 확산은 많은 문명 전파 과정이 그러했듯이 어쩌면 전재으이 산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커피를 일상적 음료로 널리 마시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이후 예멘 지방이었던 것 같다. 주로 이슬람 신비주의자나 종교 지도자 사이에 먼저 유행했다. 오랜 명상과 기도를 해야 했던 그들에게 커피는 최상의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279
예멘이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으며 커피는 이슬람 세계를 뛰어넘어 국제화의 길을 걷는다. 커피가 예멘을 대표하는 특산물로 오스만 궁장이 있는 이스탄불에 진상됐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1554년에는 세계 최초의 카페인 차이하네(Chayhane)가 이스탄불에 문을 열었다. 280
밤의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웠던 이스탄불 궁정에서 커피는 최고의 인기 음료였다.
밤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유럽 외교관들은 잠을 쫓기 위해 커피를 거의 매일 밤 상용했다. 그들은 점차 커피 중독자가 되었다. 임기를 마치고 유럽으로 돌아갈 때쯤이면 이미 커피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곤 했다. 외교관들은 오스만 당구그이 커피 유출 금지에도 외교 행랑을 이용해 원두를 자국으로 빼돌렸으니, 이것이 유럽에서 커피를 마시게 된 배경이다.
유럽 최초의 커피 하우슨 ㄴ1652년 영국 런던에 문을 연 파스카 로제 하우스였다. 280
1683년경에는 런던에만 3천 개의 커피 하우스가 생겼다. 281
커피가 순조롭게 그 사회에 정착한 것은 아니었다. 격렬한 종교 논쟁과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고통과 시련의 과정을 거친 이후에 얻어진 영광이었다. 처음 중세 가톨릭교회에서는 시커먼 커피를 보고 이교도가 개발해 마시던 음료라고 하여 악마의 음료로 간주했다. ..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직접 커피를 마신 후 하나의 기호식품으로 인정했다. 커피에 세례를 준 셈이다. 281
근대 유럽인을 매료시켰던 가루째 끓이는 방식의 커피는 지금 터키 커피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터키 커피는 원두와 불의 성질, 끓이는 순간의 기술이 어루러져 만들어 낸 하나의 새로운 문화였다.
커피를 긇이는 것은 새 신부의 가장 중요한 거치가 되었다. 좋은 원두를 골라 잘 볶아내고 애를 갈아 향과 맛이 살아 있는 커피를 끓이는 것은 터키인의 일상적인 문화가 되었다. 자그만 구리 잔에 원두 가루를 넣고 찬물을 부은 다음 약한 불에서 커피를 끓인다. 거품이 일어 커피포트 위로 넘치려는 순간 불에서 멀리해 커피 향이 새 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비법이다. 기호에 따라 설탕을 넣고 끓이기도 한다. 작고 앙증맞은 도자기 커피잔에 따르면 3분의 2가량의 커피 원두가 진흙처럼 가라앉고, 그 위쪽의 맑은 커피 물을 음미한다. 진한 터키 커피는 빈속에 마시면 머리가 핑 돌 정도로 강하다 그러나 양고기를 먹고 기름진 식사 후에 마시는 커피 커피 한 잔으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깔끔한 맛을 느낄 수 있다. 284
세밀화는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을 아주 작게 그려 역사적 이야기나 삶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하고자 하는 이슬람 문화권의 특징적인 예술이다. ..
이슬람은 아랍의 종교로 출발했다.
새롭게 이슬람의 영역으로 드렁온 이란이나 중앙아시아 튀르크족, 인도 등지에서 아랍어는 너무나 어려운 외국어일 뿐이다. 이슬람은 글자를 아는 1%도 안 되는 지적 엘리트 곛층만이 독점하는 폐쇄적 종교로 변질되고 있었다. 여기서 이슬람 사회는 심각한 전환기를 맞았고, 두 가지의 변신을 가져왔다. 종교적으로는 수피 사상이고, 예술적으로는 세밀화(미니어추어)가 발달한 것이 그것이다.
이슬람 신비주의로 번역되는 수피 사상은 꾸란의 언어적 해석을 깨치지 못하더라도 누구든지 하느님을 만나고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잇는 새로운 방식의 길을 열어 주었다. 노래와 춤, 끊이없는 염원과 명상을 통해 일반 신자에게 또 다른 대중적 이슬람의 길을 제시했다.
세밀화의 수용과 성행은 곧 글자를 모르는 신자를 위한 종교 교육을 그리믕로 대신하는 우회적인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인물이나 동물을 묘사하는 것이 우상 숭배라는 전통 가르침의 규율을 뛰어넘기는 절대 만만치 않았다. 여기서 종교와 예술의 절충이 시도된다. 될 수 있으면 그림을 작게 그려 실제적인 이미지를 최소화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원근법과 입체감을 사용하지 않고 생동감을 줄이는 방식으로 우상 숭배의 위험성을 회피하려고 시도했고, 이것이 세밀화로 나타났다. 287-288
CHAPTER 4 무슬림은 어떻게 살아가나
이슬람의 음식 문화는 허용된 것(할랄, halal)과 금지(하람, haram)돼야 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예언자 무함마드도 그의 하디스에서 “할랄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하람은 금지하신 것이나 꾸란에 아무런 언급이 없는 사항은 모두 너희에게 허락되어 있느니라.”라고 대답했다. 따라서 몇 가지 금기 사항만 유의하면 모든 것이 허용된 것이 이슬람 음식의 특징이다. 298
일반적으로 지역의 생태 환경과 문화적 특성에 따라 동물 사육의 선호도가 달라진다. 중국 남부에서는 돼지, 몽골 초원에서는 말, 안데스 고원 지방에서는 라마, 티베트 고산 지방에서는 야크, 툰드라 동토 지방에서는 순록, 아프리카에서는 소, 중앙아시아 대초원 지대에서는 양을 많이 사육한다. 그리고 오아시스에서는 낙타와 양이 주목을 받는다. 301
낙타는 300킬로그램 이상의 짐을 질 수 있고 물이나 식량의 보급 없이 400킬로미터를 이동하는 놀라운 수송력을 지니고 있다. 무려 17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않고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있다. .. 낙타 한 마리를 잡으면 적어도 200킬로그램 정도의 고기가 나온다. 5인 가족이 2킬로그램(3근 반)의 고기를 소비한다 해도 3~4개월을 견딜 수 있는 양이다. 302
우선 낙타는 인간에게 풍부한 젖을 제공해 준다. .. 처음 먹는 사람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기름진 낙타 젖을 그냥 마시면 십중팔구는 설사와 배탈이 난다. 마시고 남은 젖으로는 겔 상태의 응고된 요구르트를 만들고, 다시 발효시켜 졸 상태의 뻑뻑한 막걸리 같은 라반(마시는 요구르트)으로 만들어 먹는다. 또한 수백 종류의 치즈를 만들기도 한다. 일주일 정도 먹을 수 있는 두부 같은 치즈부터 몇 년을 두어도 변하지 않는 바위처럼 딱딱한 치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치즈로 만들어 먹는다. 윗부분에 응고된 지방 성분으로 버터를 만들고 락토스라는 유당을 추출해 당분을 해결한다. 말려서 분유나 전지분으로 보관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정 발효시켜 술을 빚는 일이다. .. 이슬람을 받아들인 이후에 술은 금기시되었지만, 낙유주는 인간이 애환을 달래고 낭만을 노래하게 한 유목 생활의 청량제였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낙타는 젖을 통해 완벽한 유제품 문화를 만들어 주었다. 302-303
이슬람 세계의 축제
-이들 피트르
모든 무슬림은 이슬람력으로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 한 달 동안 단식을 한다. 305
단식이 끝나면 약 5일간의 축제를 즐긴다. 이들 피트르 축제다. 터키에서는 세케르 바이람(Sheker Bayram), 말레이시아 등지에서는 하리 라야(Hari Raya)라 불린다. 아침 일찍 일어나 깨끗하게 목욕한 다음, 전통 의복으로 갈아입고 식사 전에 모스크로 향한다. 함께 모여 축제 예배를 드리고 이맘의 설교와 덕담을 듣는다. 서로 껴안고 단식을 무사히 마친 것을 축하하고, 그동안 서먹했던 사람끼리도 화해하고 용서하는 감동적인 만남의 장이 펼쳐진다. 그러고는 피트라라고 하는 일종의 종교세를 낸다. .. 모스크에서의 만남과 인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가족들이 모여 앉아 맛있는 축제 음식을 든다. 306
가족끼리 축제 음식을 들고 나서는 가깡운 어른에게 인사를 다니고 친지를 만나러 간다. 307
-이들 아드하
두 번째 큰 축제인 이들 아드하는 이슬람력 12월(Dhul al -Hijja) 처서 주에 행하는 성지 순례를 마감하면서 벌이는 이슬람력 전체의 축제이다. 이 순례를 하즈라고 한다. 하즈는 하느님의 집이 있는 성지 메카를 순례하는 무슬림의 5대 의무 중 하나이다. 307
카바 신전을 일곱 바퀴 돌면서 신을 염원하고 생각한다. 신전에 있는 흑석에 입 맞추고, 아라파트 동산에 오르고 미나 평원에서 야영하며 정해진 순례 의식을 마친다. 사파와 마르완이라고 불리는 두 언덕 사이를 일곱 차례 오가기도 한다. 마지막에는 사탄의 기둥을 향해 돌을 던지며 자신의 신앙을 정화한다.
이 순례가 끝날 무렵, 둘 히자달 10일째에 희생제를 치른다. 바로 이들 아드하이다. 가족 단위로 소나 낙타를 잡기도 하지만, 대부분 양을 희생한다. 희생제는 아브라함의 고사에서 연유한다. 308
재미있는 사실은 구약에서는 번제에 올려진 아들이 본처 사라에게서 태어난 이삭이고, 꾸란에서는 하갈의 몸에서 난 이스마일로 바뀌어 있는 점이다. 이슬람에서는 당연히 처음 낳은 이스마일을 장자로 보는 것이다. ..
축제를 즐기는 방식은 이들 피트르와 거의 유사하지만, 양을 잡는 의식이 장관이다. 하루에 수천만 마리의 양이 도살되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309
할랄은 도살 방식에서 생명 존중이라는 영성 의례 과정을 거친다. 첫째, 동물을 도살할 때 한 생명을 앗아가는 일이기 때문에 신의 허락을 받아 신의 이름으로 잡는다. “비쓰밀라(신의 이름으로)”를 세 번 외치면서 인간을 위한 탐욕의 대상으로 한 생명을 의미 없이 죽이지 않도록 한다. 둘째는 고통을 가장 적게 하는 방식으로 도살한다. 목의 경동맥을 칼로 잘라 가장 빠른 순간에 가장 적은 고통으로 생명을 앗아가는 배려를 한다. 셋째, 피는 부패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생명의 상징이기 때문에 먹지 않는다. 도살한 이후에는 몸속의 피를 되도록 많이 뽑아내고 고기만 취한다. 당연히 선지도 먹지 않는다. 넷째, 고기와 가죽, 털을 깔끔하게 해체하고 정리하여 완전한 순환을 이룬다. 털과 가죽도 손상 없이 잘 수습하여 자선단체에 희사해 힘들고 버림받은 약자의 삶에 도움을 준다. 생명을 희생시킨 대가로 사회적 소득 재분배에 기여하게 한다. 다섯째, 판매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축제 때 잡은 고기는 삼등분하여 함께 나누는 미덕을 강좋나다. 종교적 축일에는 보통 3분의 1은 가난한 이웃에게, 3분의 1은 공공단체에, 3분의 1은 가족들이 먹는다. 또한 아주 어린 생명이나 사고로 죽은 동물은 팔거나 취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우리에 가두어 고통을 주면서 키운 동물도 할랄에서 멀어진다. 방목을 장려하는 해피 애니멀(Happy animal)을 추구한다. 한마디로 할랄 식품은 청정과 영성을 준 신뢰의 식품이라는 강점이 있다. 311
작명에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알라의 이름인 99가지 덕목을 따는 것이다. 알라는 친절하고 아름답고 신실하고 정직하고 지혜롭고 전지전능하고 위대하고 등등 99가지 덕목을 이름으로 따오는 방식이다. 그 덕목들은 알라에게 속한 것이므로 이름 앞에 ‘종’이란 의미로 압둘(Abdul-)을 붙인다. 즉 알라의 종인 압둘라(Abdullah), 압둘 라흐만(자비), 압둘 라힘(자애), 압둘 알림(지혜, 압둘 카림(위대함), 압둘 자밀(아름다움)등이다.
둘째는 성서에 나오는 예언자의 이름을 따는 방식이다. 놀라운 것은 마리아, 예수, 솔로몬, 요셉, 요한, 아담 같은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름이 그대로 무슬림의 이름을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아인 경우 마리아에서 마리얌(Mariam), 예언자 무함마드의 부인이었던 카디자, 하프사, 할리마, 살라마, 자이납, 아이샤, 그의 외동딸 파티마등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가장 많은 무슬림 이름은 이슬람의 마지막 예언자인 무함마드이다. 초기 세 명의 정통 칼리파를 찬탈자로 보고 인정하지 않는 시아파에서는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등의 이름을 피한다. 4대 칼리파 알리에 맞섰던 무함마드의 아내 아이샤도 시아파에서는 싫어하는 여성 이름이다. 따라서 시아파에서는 알리, 후세인, 하산, 파티마 등의 이름을 더 선호한다.
셋째는 다른 문화권에서도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지명이나 고향, 행복, 사랑, 자연물(바다, 장미, 바위등)등을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다. 유목 생활을 하던 아랍인은 ‘성’이란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이름과 아버지 이름 사이에 빈(bin)이나 빈트(bint)를 붙여 부자, 부녀간을 표시해 가계를 나타냈다. 예를 들면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은 ‘Abdullah bin Abdul Aziz Al-Saud(알사우드의 아들, 압둘 아지즈의 아들인 압둘라)’로 표시된다. 딸은 아버지 이름 앞에 bin 대신 bint를 붙이면 된다. 현재는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 성을 만들어 쓰고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성이 없던 터키가 1928년 성씨법을 통해 모든 국민에게 갑자기 성을 만들어 사용하게 하면서 여러 많은 부작용과 급격한 전통 의식의 변화가 생겨나기도 했다. 326-327
-아끼까(희생의식)
생후 7일째 작명하는 날, 아기의 머리털을 정수리만 남기고 자르고 그 머리털의 무게에 해당하는 금이나 은을 가난한 사람에게 희사한다. .. 그 다음 주인은 손님을 초대해 동물들을 희생한다. 보통 남아인 경우에는 양 두 마리, 여아인 경우에는 양 한마리를 잡는다. 아끼까(Aqiqah) 의식은 생후 7일째뿐만 아니라, 지방에 따라서는 14일째와 21일째에도 행한다. 328
할례(진정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한다)
남설 할례는 이슬람의 전통이자 관습이다. .. 할례의 시기는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아랍 사회에서는 작명 의례를 행한 직후인 생후 8일째에 할례를 행한다. 그러나 아랍권 일부에서와 비아랍권에서는 생후 40일째 또는 아이가 좀 더 성장한 후인 5~7세 때 할례를 행한다. 상류층 자제가 할례를 할 때는 가진 자가 비용을 대 수십 명의 고아와 가난한 자이 자식들이 함께 할례를 행하는 것이 미덕이다. ..
할례일에는 많은 친지가 지켜보고 축송을 하는 가운데 마취 없이 간단한 수술을 행한다. 어린 나이에도 절대 울지 않는 강건함을 보여 줌으로써 남성의 세계에 입문할 자격을 인정받는다. ..
여아 할례는 이슬람에서 규정된 관습이나 권고 사항이 아니며, 이슬람 이전 아프리카 풍급의 잔재다. 여아 할례는 지역에 따라 적용되는 방법과 정도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수단과 이집트에서는 아직도 여아 할례가 매우 보편적인 데 반해,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하는 사우디아라비아, 북아프리카,터키, 파키스탄 등지에서는 거의 소멸해 가고 있다. 할례 방식도 수단에서는 소음순과 음핵의 돌출 부분을 포함한 광범위한 부위를 제거하는 데 비해, 대부분 지역에서는 음핵의 일부(1~3밀리미터)를 예리한 칼로 제거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현대의 이슬람 학자 대ㅜ분은 여아 할례를 이슬람 이전 시대의 비종교적 의미로 배척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일부 아랍인은 이를 관습적으로 행하고 있다. 그들은 여성 할례가 여성의 성적 기능과 충동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행해진다고 알고 있다. 329-330
할례 이후부터는 아버지에게 절대적 복종과 존경심의 바탕에서 예절, 사회 관습과 관례, 종교 지식 등의 엄격한 가정 교육을 받는다. ‘셰이크’라는 가정 교사를 고용하기도 한다. ..
7세가 되면 남녀가 유별해 하렘에 함부로 왕래할 수 없으며, 여아는 바깥출입시 베일을 쓴다. 331
이슬람 전통 사회에서 결혼은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가족이나 혈연 공동체 모두에게 관련되는 공통의 관심사이다. 따라서 자유 연애결혼은 상상할 수도 없다. .. 요즘은 아랍 사회에서도 결혼 연령이 상당히 늦춰졌다. 나라별로 혹은 도시와 지방 간에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남자는 25~30세, 여자는 22~27세가 새로운 결혼 적령기가 되었다. 332
시아파와 달리 수니파에서는 남자는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속한 가문의 여자와 결혼할 수 있으나, 여자의 경우에는 자신보다 비천한 가문의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333
여자는 부모가 선택해 준 신랑 후보를 거절할 수 있으나 본인이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할 권리를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결혼 후보자는 부모나 후견인과 함께 신랑 혹은 신부를 볼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지만, 혼례일까지 상대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결혼이 금지되는 근친의 범위는 어머니, 딸, 여자 형제, 배다른 누이, 숙모, 고모, 이모, 외숙모, 조카, 질녀, 장모, 의붓딸, 아버지의 다른 부인들, 며느리 등이며, 두 자매와의 동시 결혼, 같은 유모의 젖을 공유했던 사람, 노예와의 결혼도 금지된다. 또한 남녀 모두 부부 생활을 위협하는 지병이나 신체적 결함이 없어야 하고, 남자는 네 명의 아내를 갖지 않은 상태, 여자는 이혼한 후 전 남편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재혼 금지 기간을 충족한 상태여야 한다.
부족에 따라서는 처가 사망한 경우 처제나 처형과의 결혼이 보편적이고, 형제가 사망하는 경우 형수나 제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수계혼(嫂繼婚) 제도가 성행하기도 한다. 333-334
아랍 사회에서 권장된 결혼 관습 중 하나는 사촌 결혼이다. 335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는 대가로 신부 측에 일정한 재화를 지불하는 마흐르 제도는 이슬람 이전 아랍 사회에서도 잔존하던 유습이다. 335
일반적으로 부모의 도움 없이 독신 남성이 준비하기에는 매우 벅찬 금액이다. 따라서 나이 든 노총각과 이혼녀의 결혼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편견 없이 행해진다. 초혼과 재혼에 따라 그 비율도 달라 처녀일 경우를 100으로 할 때, 이혼녀는 75, 미망인은 50에 해당하는 마흐르를 받을 수 있다. .. 최근에는 가난한 총각들을 위해 아랍 은행이 마흐르 금액을 장기 융자해 주기도 한다. 336
이슬람 사회에서의 장례는 빠른 매장(보통 24시간 이내), 간단하고 엄숙한 상례, 내세에 대한 강한 믿음 등의 특징으로 규정된다. 337
미망인은 4개월 10일간 외간 남자와의 접촉을 피하며 집에서 지낸다. 이는 재혼 금지 기간인 잇다(iddah)를 지켜 자유로운 재혼권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미망인은 1년 후 재혼이 허용된다. 342
CHAPTER 5 이슬람 여성, 억압과 현실
이슬람 사회는 종잡을 수 없고 이슬람 여성관도 나라마다 다양하다. 350
우선 여성에 대한 꾸란의 기본 가르침을 살펴보자.
첫째, 꾸란은 남녀 모두 알라의 피조물이며, 동등한 가치와 존엄을 가진 존재로 규정한다. .. 꾸란은 흔히 구약에서 가르치는 여성의 창조 기원설을 배격한다.
둘째, 꾸란에서는 종교적 의무 수행과 보상은 물론, 허용과 금기에서도 조금의 차등 없는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과한다.
셋째, 남녀가 동등하게 교육받을 기회에 대해서도 꾸란은 물론,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에서 많은 예를 찾을 수 있다.
넷째, 꾸란에는 법적 측면에서 여성을 보호하는 장치가 언급돼있다.
다섯째, 꾸란은 양성 사회를 지향한다. 352-355
놀랍게도 이슬람의 기본 결혼 제도는 일부일처이다. 다만 전쟁이나 기근과 같은 특수한 조건에서는 일부다처의 문을 열어 놓고 있다. 358
‘만일 너희가 고아들을 공평하게 대해 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결혼을 할 것이니 너희가 마음에 드는 여인으로 둘, 셋, 또는 넷을 취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을 공평하게 대해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한 여인이나 아니면 너희 오른손이 소유한 것(노비)을 취할 것이다. 그것이 너희가 부정을 범하지 아니할 최선의 길이다. -꾸란 4장 3절’ 359
탈라끄, 남성의 일방적 이혼 통고
이슬람 관행에서 남편이 다처를 두고 싶은데 첫 번째 아니가 동의하지 않으면 남성은 탈라끄(Talaq)라 부르는 일방적인 이혼 통고 제도를 활용한다. ‘나는 당신과 살기 싫다’라는 표현인 탈라끄를 석 달의 시차를 두고 세 번만 하면 이혼이 성립되는 제도다. 361
쿨, 여성의 이혼 청구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예속돼 살 수 없다면 남편의 동의 없이도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 길이 이슬람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이를 쿨(Khul)이라고 한다. 이혼 청구 사유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잘 모아야 하며, 이때 여성은 결혼 시 받았거나 약속받은 지참금의 일부 혹은 전부를 포기해야 한다. 362
역사적으로 히잡 착용의 관습은 이슬람 이전 시대부터 존재해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명시된 것은 꾸란에서였다.
‘밖으로 나타내는 것 이외에는 유혹하는 어떤 것도 보여서는 아니 되니라. 즉 가삼을 가리는 수건을 써서 남편과 그의 부모, 자기 부모, 자기 자식, 자기 형제, 형제의 자식, 소유하고 있는 하녀, 성욕을 갖지 못하는 하인, 성에 대해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어린이 이외의 자에게는 아름다운 곳을 드러내지 않도록 해야 하느니라.’ -꾸란 224장 31절
이 구절을 보면 ‘유혹하는 것’과 가슴이라고 언급했을 뿐 무슬림 여성이 가려야 할 신체 부위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다만 이슬람 법학자들의 해석에 따라 가려야 할 부위가 결정되었다. 365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히잡 착용의 상징성이 변했다. 즉 지배 계층의 하렘에서 여성 격리가 성행하자 히잡은 지배 계층 여성의 경제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표시가 되었다. 한편 히잡은 여성의 순결성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을 유혹의 원천으로 간주했던 보수적 시각에 기인했다. 이로써 히잡 착용 여부가 남성의 성적 욕구를 자극해 남성을 타락하게 하는 기준으로 간주됐고, 히잡은 여성의 순결성과 가문의 명예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고 말았다. 365-366
명예를 위한 살인, 소위 명예살인(honor killing)이다. 일반적으로 가족 중 아버지나 남자 형제가 간통이나 성적 부정을 저지른 여성을 살해함으로써 공동체 내에서 불명예스러운 집안이란 낙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극단적 범죄 행위다.
이토록 잔혹한 살인 게임을 주로 남성 중심의 부족 공동체에 잔존하는 유목 사회의 악습이다. 남성이 생산자와 전사의 역할을 독점하는 혈연 중심의 부족 공동체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소유 의식과 성적 독점욕이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나아가 여성의 성적 정절이 아주 중시된다. 적령기에 도달한 여성이 다른 부족과 족외혼을 하려면 신랑은 신붓집에 상당한 액수의 신부 지참금을 지불해야 한다. 신부 지참금 관습은 이스람 시대에 들어서 여성을 위한 노후 보장책으로 그 성격이 바뀌지만, 관습적 맥락에서는 여전히 빼앗긴 노동력에 대한 일종의 보상인 셈이다. 이런 사회적 구도에서 여성은 중요한 재산이자 상품인 셈이다. 그런데 간통이나 부정행위가 밝혀졌을 경우 정상적인 결혼의 길이 막히고, 그 여성이 헤쳐나갈 수 있는 길은 거의 없다. 명예살인이 직계 가족에 의해 처단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배경이다.
명예살인은 대부분 국가에서 살인죄보다는 관행으로 다루어져 1년 미만의 가벼운 형벌에 처했다. 368-369
명예살인은 수니파, 시아파 할 것 없이 꾸란이나 이슬람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반하는 배교 행위이다. 그런데도 명예살인이 종교적 배결을 가진 것처럼 이해되는 것은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 일어나는 토착적인 악습과 이슬람 율법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이다. 370
아프리카 일부 사회를 제외하고 여성 할례를 강요하는 이슬람 사회는 거의 없다. 371
CHAPTER 6 이슬람 경제와 비즈니스 관행
“인샬라(Inshallah)”, 신의 뜻대로! 375
씨를 뿌리고 땅을 가꾸고 수확했다가 비축하며 1년을 계획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순환 경제 형태를 보인 농경 정주 사회와는 달리 전쟁과 교역이 주된 삶의 방편인 아랍 유목 사회의 전통적 삶은 온통 불확실하다. 모든 성패를 알라에 거는 심성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러다 보니 두터운 신뢰가 축적되지 않은 외부인이나 이방인에 대한 불신이 무엇보다 강하다. 그들과 거래할 때는 신뢰가 필요하다. 시간을 두고 관찰하면서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 인샬라라고 할 수 있다. 375
인샬라는 기다림의 미학이다. 반드시 성사되는 비즈니스 노하우다. 신의 뜻을 건 이상 함부로 일을 내팽개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인샬라에 익숙하고 인샬라를 아름다운 인사로 받아들이면 아랍인의 심성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
일상 대화에서 인샬라 외에도 “말리쉬(Maalesh)”나 “마피쉬 마쉬킬라(mafishi mushikillah)”를 입에 달고 산다. ‘문제없어! 다 잘될 거야!’란 의미다. 동부 아프리카인이 자주 쓰는 스와힐리어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와 정확하게 같은 의미다. ..
실제 상황에서 ‘말리쉬’는 결코 ‘괜찮다’, ‘걱정하지 마
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의 희망이고 책임 회피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지 말고 철저히 따지고 점검해 미리 문제를 막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377
“앗쌀라무 알라이쿰(알라의 평화가 당신에게)!” 무슬림이 첫 만남에서 나누는 첫 인사말이다. “마 쌀라마(평화가)!” 헤어지 ㄹ때도 평화다. 378
이슬람 은행은 이자 없이 운영된다. 이슬람 경제에서 고리대금은 철저하게 금기이다. 꾸란에서도 돈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것을 강하게 비난한다. 사악한 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대신 이윤은 철저히 보장된다. 자신의 노동이나 노력, 투자와 지식을 통해 얻는 이익은 신성한 것으로 폭넓게 인정한다. 이자는 금지지만 이윤은 인정하는 것이 이슬람 경제의 골격이다. 386
실제로는 이슬람 사회의 많은 시민이 확정 이자도 없는 이슬람 은행에 예금하고, 일반 서구식 은행보다 더 많은 예금을 예치한다. 그것은 신앙의 문제만은 아니다. 저축에ㅔ 대한 이슬람 은행의 연말 배당이 서구식 시중 은행보다 높기 때문에 이슬람 은행으로 몰리는 것이다. 388
정상적인 상거래는 이슬람에서도 가장 축복받는 삶의 형태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 이런 경우 은행은 투자에 실패하여 오히려 고객 예금에 손해를 끼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슬람 은행은 확실하고 건강한 기업에 투자하기 때문에 실제로 손해를 보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이 점이 바로 무슬림 고객들이 이자도 없는 이슬람 은행에 돈을 맡기는 이윧다. 389
CHAPTER 7 이슬람을 빛낸 문화 예술인
이슬람 신학 내에서도 종파 갈등과 이론 논쟁들이 가열되면서 이슬람의 분파 그룹이 생겨났다. 이슬람의 순수성과 정통적인 모습이 변지로디고 이슬람 내부의 분파적 모습과 현학적인 논쟁에 염증을 느낀 많은 뜻있는 무슬림은 아예 현실을 회피하면서 칩거를 선호했다. 그들은 ‘적게 먹고 적게 마시며 아무렇게나 옷을 걸치고’ 기존의 권윙와 형식에 맞섰다. 그들은 ‘수피(Sufi)’라 불렸으며, 명상과 기도를 통한 다양한 방식으로 이슬람의 가르침에 다가가려 했다. 메블라나 시대인 13세기에는 이미 수많은 수피 종단들이 생겨났고, 이슬람 신비주의자들로 알려진 수피는 나름의 방식으로 종교 공동체를 이루고 신앙생활을 지속했다. 409
메블라나 루미는 꾸란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도 누구나 일정한 영적인 수련을 통해 신의 영역에 들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았다. 바로 메블라나 종단이다. 세마(sema)라는 독특한 회전 춤을 통해 신의 의지를 경험하고, 궁극적으로는 신과 일체감을 이루면서 이슬람의 오묘한 진리를 체득하게 된다는 믿음이었다. 410
루미는 1273년 콘야에서 사망했다. 메블라나 종단은 지금도 콘야에 본부가 있다. .. 메블라나의 수피 사상은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일부, 터키를 중심으로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 전역에 널리 퍼졌다. 이슬람이란 종교가 전파 과정에서 아랍이라는 민족적 옷을 벗고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토착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포용력을 갖추고 이슬람을 퍼트린 수피주의가 중심에 있었다. 413
<나스레딘 호자이야기>는 <아라비안나이트>와 함께 이슬람 세계의 삶과 관습을 알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아라비안나이트의 무대가 궁정이라면 호자이야기는 우리 주변의 서민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416
CHAPTER 8 한국과 이슬람, 1200년의 만남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한국인 무슬림이 많이 살고 있다. 대부분 개종자인 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기존 종교를 버리고 이슬람을 택했으며,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자기 신앙을 지켜 가고 있다. 한국인 무슬림 숫자는 약 4만 명에 이르며, 모스크는 한국 이슬람교 자료에 따르면 전국에 25개(서울, 부산, 경기광주, 전주, 대구, 울산, 제주, 안양, 안산 등)가 있다. 외국인 무슬림 노동자들이 몰려오면서 그들만의 예배와 모임 공간인 무살라(Musallah)의 숫자도 전국적으로 150여 개에 달한다. 472
1976년에는 서울 한남동에 한국 최초의 중앙 모스크가 문을 열었다. 이어 1980년에 리비아의 지원으로 부산 모스크, 1981년 쿠웨이트의 지원으로 경기도 광주 모스크, 1986년 이집트 독지가의 지원으로 전주 모스크가 차례로 문을 열면서 한국에 본격적으로 이슬람 공동체가 형성됐다. 473
CHAPTER 9 끝나지 않은 전쟁
지하드(Jihad)는 이슬람의 성전(聖殿)이다. 그러나 지하드의 원래 의미는 단순히 성스러운 전쟁을 수행한다는 외적 개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하드 개념을 혼동하면서 오히려 왜곡된 의미가 본질을 덮는 현상이 팽배할 정도다. ..
이슬람권이나 유럽에서 무슬림과 관련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거의 모든 무력 투쟁과 자살 폭탄 테러를 무조건 지하드라고 부른다. ..
아랍어 지하드의 언어적 의미는 ‘분투하다, 노력하다, 힘쓰다’이다. 지하드는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개인의 진지하고 성실한 분투를 의미하며, 사회에서 선을 행하고 부정과 불법, 압제, 악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이다. ..
지하드라는 단어는 꾸란에서도 33번이나 언급된다. 대부분이 폭력보다는 믿음, 참회, 선행, 의무, 윤리와 같은 이슬람의 기본 개념과 함께 사용된다. 이처럼 지하드는 하느님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자신과의 내적 투쟁이 본질이다. 나아가 지하드는 적들의 부당한 압제로부터 인권과 믿음을 보호하기 위한 정의이며, 적들의 잘못은 변화시키고 올바른 개혁으로 유도하기 위한 비폭력적 양식인 것이다. 477-478
이슬람에서 전쟁 지하드는 대화, 협상, 조약 등과 같은 평화적 방법이 실패했을 경우만 허용되는 마지막 투쟁 방식이다. 전쟁 지하드의 목적도 인간들을 강제로 개종시키거나 식민 지배, 또는 영토와 부, 자신의 영광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생명, 재산, 영토, 명예 그리고 자유를 압제자와 불법으로부터 지키기 위함이다. 현재 이슬람 세계가 처해 있는 부당한 현실과 좌절의 응어이, 일상으로 반복되는 가족과 형제들의 희생 등이 원래의 지하드 정신을 닫아버리고 폭력적 지하드를 조장하는 근본 원인이다. 479
‘너희를 상대하여 싸우는 자에 대하여 하느님의 이름으로 싸우라. 그러나 침략하지 마라. 하느님은 침략자를 사랑하지 않으신다.’ - 꾸란 2장 190절 480
전쟁 지하드는 첫째 올바른 하느님의 길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둘째 적이 먼저 무기를 들고 무슬림을 공격할 때, 셋째 적이 싸움을 중지하면 무슬림도 곧 무기를 놓아야 한다 등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원칙에 따라 이스랆 율법은 더욱 세부적으로 지하드 전쟁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첫째, 지하드는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오직 국가만이 선포 할 수 있다.
둘째, 지하드 수행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해서는 안 된다.
셋째, 지하드 수행 과정에서 어떤 명분으로도 무슬림을 살해해서는 안 된다.
넷째, 무슬림의 권익과 자유로운 종교 생활이 보장되는 나라에 지하드를 선포하고 싸울 수 없다. 480
기원전 1천 년경에 유대 민족은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며 살고 있다가 기원전 7세기에 아시리아에 빼앗겼다. 그러다 또다시 국가를 세우지만, 기원후 1세기에 유대 왕국은 로마에 멸망했다.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하면서 건국할 때까지 2천 년간 유대 민족은 국가 없는 유랑생활(diaspora)을 해왔다. 처절한 유랑의 무대는 유럽이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이 아닌 유럽에서 박해와 고문과 민족적인 차별을 당하면서 살아왔다.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된 이래, 적어도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유대인은 악마와 동일시되었다. 기독교 입장에서 유대 민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먹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저주받은 민족이었다. 종교개혁 시기에 유대인의 위상은 크게 향상돼 악마의 지위에서 탈피했다. 그러나 유럽인의 반유대 감정은 너무나 뿌리 깊어서 16세기 종교개혁의 선봉자였던 마르틴 루터조차 그의 저서 《악마론》 서문에서 '악마를 제외하고 가장 흉측하고 광포한 우리의 적은 유대인이다'라고 서슴지 않고 단언할 정도였다.
어찌 되었든 20세기 초까지 유럽인은 유대인을 악마와 동일시했다. 14세기 유럽에 페스트가 번져 2천만 명 이상이 죽었을 때도 교황청에서는 페스트가 하느님의 저주라면서 악마를 제거하여 하느님의 노여움을 풀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래서 페스트로 희생된 사람도 많지만, 유대인은 또한 악마라는 이유로 대거 학살당했다. 한때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유행했는데, 이 사냥의 1차 희생자도 유대인이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인의 유대인에 대한 편견은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로 이어졌지만, 19세기 말에도 조직적인 유대인 제거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1880년경에 러시아 황제가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어떤 청년이 던진 폭탄에 맞아 폭사한 일이 있었다. 암살범은 현장에서 잡혔는데, 조사 결과 할례 의식을 치렀던 유대인이었다. 유럽 사람들은 이를 러시아 황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유대인의 음모로 몰아갔고, 다음 해인 1881년 5월법을 비밀리에 제정해 러시아에 있는 수백만의 유대인을 삼등분해서 제거할 정책을 세웠다. 그 결과 수많은 유대인이 학살당하거나 체포, 구금당했고, 또 수많은 유대인이 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 불가리아,체코 등 동유럽으로 대량 이주했다.
1894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드레퓌스 대위 사건도 유대인 편견과 관련한 파문이었다. 프랑스에 있는 독일 대사관으로 프랑스의 고급 군사기밀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 정부는 그 문건을 프랑스 고위 장교가 넘겨주었을 것으로 판단했고, 문건의 암호명을 드레퓌스 대위의 것이라고 단정하여 그를 범인으로 몰았다. 결국 드레퓌스 대위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악마섬에 유배당했다. 그가 유대인이며 더러운 악마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였다. 당시 에밀 졸라를 비롯해 아나톨 프랑스, 앙리 푸앵카레, 장 조레스 등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아무리 유대인이더라도 그렇게 사건을 꿰맞추는 것은 프랑스 지성에 대한 모독이라며 강력하게 항의하고 정부를 비판했다. 사회적인 파장이 확산되자 프랑스군 당국은 재수사하여 에스테라지 소령을 진범으로 밝혀내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드레퓌스 대위는 우여곡절 끝에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482-484
영국 외상 밸푸어는 1917년 영국의 은행 재벌 로스차일드와 비밀리에회동, 소위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이라는 비밀 조약을 체결했다.이 조약에서 유대인의 전쟁 참여를 대가로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 국가 창설을 약속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이 한참 진행중이었던 1916년 5월 16일, 아랍과 유대인과 맺은 두 비밀 조약 사이에 또 다른 비밀 조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영국 대표 사이크스와 프랑스 대표 피코 사이에 비밀리에 체결된 사이크스-피코협정(Sykes-Picot Agreement)의 골자는 전후 중동 지역의 분할에 관한 것이었다. 이 비밀 협정에 따르면, 프랑스는 시리아의 해안 지대와 그 북부,영국은 팔레스타인과 바그다드를 점령하기로 했다.
다시 말해 팔레스타인이라는 한 지역에 아랍인에게는 아랍 국가의 독립을, 유대인에게는 유대 민족 국가의 창설을 약속해 주고,실상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미 그곳을 점령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처럼 상호 모순된 삼중의 비밀 조약과 강대국의 비도덕적 정치 음모가 오늘날 팔레스타인 분쟁의 불씨를 지핀 근원적인 배경이다. 그들이 저질러 놓은 비도덕적이고 무책임한 영토 분할 구상으로 지금 두 민족이 역사적으로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엄청난 희생과 보복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당사자인 영국과 프랑스, 미국은 평화의 화신임을 가장하며 인류의 공존과 평화를 들먹이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전후 처리를 위한 국제회의가 1919년 파리에서 개최됐다.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 원칙을 제창한 이 회의에서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안이 동시에 채택됐다. 즉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밸푸어선언의 이행을 위해 국제 사회가 노력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의하면, 팔레스타인 땅에서 2천여 년간 주인으로 살아온 아랍인에게 국가 건설의 자결권이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유대인은 당연히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반대했다. 국제 사회의 여론이 유대 국가 창설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영국은 유대인의 지지를 얻어 1920년 산레모 회의에서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안을 통과시켰다. 1922년에는 국제연맹에서 이를 추인받았다.
영국에 배반당한 것을 안 아랍인은 끈질긴 국가 독립운동과 격렬한 반영(反) 투쟁을 시작했다. 흔히 1920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일련의 피나는 투쟁의 시기를 '아랍의 분노 시대'라 한다. 이즈음 팔레스타인 지역에 동구와 유럽에서의 유대인 이민이 늘어나자 자연히 토착 아랍인과 이주 유대인 간 갈등과 대립이 증폭했다. 1920년 1만 6,500명이 이주한 것을 시작으로 팔레스타인에서의 인구 불균형과 사회 질서 파괴는 점차 심각한 양상을 띠었다. 더욱이 1933년 이후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들어서고,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가중되자 유대인 불법 이민이 급증했다. 1936년에는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인 이주민 비율이 8%에서 30%로 급증하면서 생존 공간을 빼앗긴 현지 아랍인과의 갈등은 극에 달한다.
이때부터 두 민족 간의 대결 양상은 점차 복수전의 성격을 띠면서 처절한 피의 악순환을 되풀이했다. 영국 당국은 민족 분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는 기색이었다. 1937년에는 아랍인의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고, 1939년에는 유대인 불법 이민에 대한 행정력을 상실할 상태에 직면했다. 그러자 영국은 유대인의 이민을 제한하는 백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혼란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전세계가 전쟁에 휘말리자 소강 국면에 들어서 잠시 망각됐다. 비열하게도 영국은 1939년 전쟁에서 아랍계의 지원을 얻기 위해 '유대 독립 국가 건설'을 유보한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485-487
이스라엘의 탄생과 고토 회복 전쟁 그리고 반미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장은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역사적 순간을 맞았다. 그날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리해 아랍과 유대, 두 개의 독립 국가로 분할하자는 안이 통과되었다. 찬성 33표, 반대 13표였다. 당초 아랍인이 중심이 되는 팔레스타인 연방안이 우세했으나 미국의 집요한 제3 세계 회유 작전으로 결국 연방안 대신 분할안이 통과되었다. 그 내용은 당시 인구가 아랍인의 3분의 1에 불과하고, 전체 면적의 7퍼센트만을 소유하고 있던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 전역의 56퍼센트를 분할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지역 생계 기반인 올리브 농장과 곡창지대의 80퍼센트, 아랍인 공장의 40퍼센트가 유대인에게 배정되었다. 경작 가능한 대부분의 비옥한 땅은 유대인 차지가 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분노와 좌절은 극에 달했다. 2천 년 동안 그 땅의 주인으로 살아온 아랍인에게는 이주해 온 유대인을 받아들이라는 연방안 자체도 수용하기 힘든 상황이었으며, 더구나 분할안은 불공정한 결의안이었다. 유대인 입장을 보호해 준 미국의 유엔 결의안 주도가 후일 반미의 기점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1947년 그날, 아랍인의 운명을 결정짓는 유엔 표결 현장에 영국은 없었다. 이 표결에서 영국은 기권을 택했다.
유엔으로부터 국가 창설을 인정받은 유대인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으로 구체적인 건국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 땅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 토착 아랍인의 저항이 워낙 완강하여 크게 차질을 빚었다. 이때 유명한 유대 테러 조직이 맹활약한 치욕적인 데일 야신촌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유대 지하 테러 조직인 이르군은 1948년 4월 9일, 예루살렘 서쪽의 조그만 마을인 데일 야신촌을 야밤에 습격하여 254명의 주민을 잔인하게 무차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 이스라엘 수상인 메나헴 베긴이 진두지휘한 이 사건은 문명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제2의 나치 학살 사건으로 불릴 정도였다. 이러한 기습 만행은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자행되었으며, 비무장의 아랍 주민들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심어 주었다. 불과 1달여 만에 100만 가까운 아랍인이 서둘러 인근 국가로 도피하면서 소위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가 생겨났다.
이로부터 한 달쯤 지난 1948년 5월 14일, 유대인은 아랍인을 몰아낸 곳에 이스라엘 국가를 건국했다. 아랍 국가와 제3세계의 반대 속에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아랍인의 심장부에 유대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이스라엘에게는 2천년 만에 탄생한 위대한 국가였겠지만,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는 불운과 재앙의 날이었다. 그들은 이날을 '알나크바(대재앙)'의 날로 기념한다.
세계는 2천 년 유랑생활을 마무리하고 역경을 딛고 일어선 유대인의 승리에 동정과 축하의 눈길을 보냈다. 바로 그날 자신의 고향에서 쫓겨난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은 조국 탈환을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분노했다. 그동안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이 아닌 유럽에서 온갖 민족적 차별과 종교적 박해를 감수하면서 굳건하게 터전을 다졌다. 유대인 박해와 나치 학살로 이어지는 유대인 말살 정책은 유럽인의 죄과였다. 왜 유럽인이 희생시켰던 유대인에 대한 책임을 아무런 역사적 인과가 없는 아랍인에게 전가해야 하나? 팔레스타인 지역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됐다. 힘없는 팔레스타인 아랍인은 오히려 자신들이 난민이 되어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오직 한 가지 고향에 돌아가는 꿈을 꾸면서 그러나 그 꿈은 산산이 조각났다.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아랍 국가들의 즉각적인 저항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1948년에 제1차 중동 전쟁이 일어났고, 1956년에는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한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의 지도 아래 제2차 중동 전쟁이 벌어졌다. 결과는 모두 비참한 패배였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1964년에는 아랍 연맹의 지원으로 야세르 아라파트가 지휘하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가 탄생했다. 그러나 곧이어 소위 '6일 전쟁'으로 알려진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으로 고토 회복은 커녕, 기존 아랍 영토까지 이스라엘에 점령당했다. 지중해 지역의 가자 지구, 요르단강 서안, 시리아 골란고원, 이집트 시나이반도 등이 그곳이다. 유엔은 안보리 결의안 242호, 338호 등을 통해 점령지의 즉각적인 반환을 촉구했지만, 그 결의안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미국이 거부권 행사를 남발하면서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비호했기 때문이다.
좌절한 팔레스타인 극단주의 저항 세력들은 결국 '검은 9월단'이라는 게릴라 조직을 결성하고, 1972년 뮌헨 올림픽 기간 중 이스라엘 선수의 숙소를 테러 공격해 선수들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세계를 경악시켰고,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에 부정적 이미지를 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73년 석유 무기화 조치로 제1차 오일 쇼크로 이어진 제4차 중동 전쟁에서는 처음으로 이슬람 진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부터는 무모한 무력 투쟁보다 현실적인 협상이 병행됐다. 그 결과 1978년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이 중재한 캠프 데이비드 협상을 통해 전쟁 당사자인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양국 사이에 외교 관계와 불가침 조약이 이루어지고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양도했다.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는 그해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팔레스타인의 평화는 멀어만 보였다. 1982년 9월에는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를 침공해서 팔레스타인 난민촌 사브라-샤틸라 학살 사건을 저질러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87년부터는소위 돌멩이로 이스라엘 탱크에 맞서는 비폭력 평화 시위인 인티파다(Intifada, 민중봉기)가 시작되었다. 곧이어 가자 지구를 사실상 통치하는 저항 조직 하마스(Hamas)가 셰이크 아흐마드 야신의 지도로 탄생했다. 그리고 1988년 11월에 팔레스타인은 독립 국가를 선포한다.미국과 이스라엘이 강하게 반대하고 있어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빼앗긴 보금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아랍인의 투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487-491
팔레스타인 문제의 갈등과 비극은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시작됐다. 그해 8월 29일 제1차 세계시온주의자 대회가 바젤에서 열렸고, 테오도어 헤르츨이 주도해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창설한다는 비밀 강령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망령처럼 확산되는 유럽의 반유대주의 물결 속에서 공동체 절멸 위기를 이겨 내고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의 비극을 온몸으로 감내한 유대인의 생존 노력은 그 자체로 존중받고 지지받아야 한다. 그런데 왜 2천 년 동안 평화롭게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땅이 유럽에서 유럽인에 의해 박해받았던 유대인의 영토가 되어야 했나. 강대국의 책임 회피이자 역사의 후퇴다. 496-497
2001년 10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20년(2001~2021) 만에 탈레반의 승리로 끝이 났다. 9.11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알카에다를 비호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프가니스탄의 합법적 집권 세력인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고자 전쟁을 시작했다. 527
현재 아프가니스탄은 많은 종족과 부족 집단 중 일곱 개 부족이 주축을 이룬다. 파슈툰(Pashtun), 타직(Tajik), 우즈벡(Uzbek), 하자라(Hazara), 아이마크(Aimaq), 투르크멘(Turkmen), 발루치(Baluchi) 등을 중심으로 약 3천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 종족별로 뚜렷한 전통과 토착 관습을 보이지만, 종족 사이는 그렇게 배타적이거나 폐쇄적이지 않다. 이해관계가 침해당했을 때 주저 없이 서로 갈등하고 투쟁하지만, 얼마든지 협상을 통한 권력 분점과 통혼이 가능하며, 외부의 적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단합하는 경향을 보인다.
가장 주요한 종족은 파슈툰으로, 인구의 40~45%를 차지하며 파키스탄과의 국경 지대인 남쪽 지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 타직은 서쪽과 북동 지방, 하자라는 중앙부, 우즈벡은 북서부 지방에서 강력한 연고를 유지하고 있다. 아무래도 주력 종족인 파슈툰의 영향력이 가장 클 수밖에 없다. 현재 탈레반 주축 세력이 파슈툰이다. 528-529
1990년대 들어 남부 파키스탄 국경 부근에서 파슈툰족이 주축을 이룬 탈레반 그룹이 갑자기 나타나면서 내전 양상은 새 국면을 맞았다. 1994년 가을, 그들은 스스로 ‘이슬람을 진정으로 공부하는 학생들’, 곧 탈레반이라고 자처하며, 서로 적대 관계에 놓여 있는 군벌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이슬람법에 근거한 이슬람 정부의 탄생을 표방했다. 그들은 전쟁 직후 무정부 상태에서 폭력과 납치, 강간과 약탈이 성행하던 사회를 바로잡기 위한 자경단으로 출발해, 강한 이슬람 율법의 시행만이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진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조직적이고 훈련된 탈레반 그룹들은 1996년 9월 카불을 점령했으며,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을 제외한 아프가니스탄 대부분 지역을 장악해 사실상 집권 세력이 되었다. 531-532
통치 경험이 부족한 탈레반 정부는 극단적 이슬람 원리만 고집하는 무리한 정책을 펴 국민의 지지는 물론, 국제 사회의 신뢰까지 상실했다.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가무와 오락이 금지됐으며, 이슬람을 주제로 하지 않은 영화 및 비디오 상영이 금지되었다. 또한 여성에게는 얼굴까지 가리는 부르카를 강요했으며, 여성의 취업을 불법화해 가정으로 돌려보냈다. 심지어 여성은 흰 양말 착용, 화장과 립스틱, 교육 기회, 꾸란 공부 등이 모두 금지되면서 완전한 차별 정책에 시달렸다. ..
탈레반 정권은 9.11 테러가 일어나자 테러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을 보호하며 끝까지 신병 인도를 거부했고, 이것이 미국의 부당한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일차적인 빌미가 되었다. 탈레반은 구소련을 막아 내기 위한 항쟁의 동료였던 오사마 빈 라덴을 버릴 수 없었다. 9.11 테러 훨씬 이전부터 탈레반이 장악하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의 공격 목표였다. 카스피해 원유를 인도양으로 연결하는 핵심 루트일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이란, 파키스탄과 인도를 사이에 둔 전략적 요충지로서 미국의 세계 전략에 곡 필요한 나라였다. 이처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명분과 실리가 따로 있는 전쟁이었다. 탈레반 정권은 전쟁 즉시 붕괴했고, 미국의 조정을 받는 카르자이 정권이 아프가니스탄의 새 정부를 구성하고 있다. ..
탈레반은 게릴라전을 펴며 미국과 친미 아프간 정부군을 괴롭혔다. 533-534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미국의 대테러 전쟁 20년은 탈레반과의 전쟁이었다. 9.11 테러의 주적인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가 탈레반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년간 알카에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거의 매일 탈레반과의 전쟁이 중심을. 차지했다. 탈레반은 본질적으로 자생적 풀뿌리 민중 조직이다. 따라서 탈레반을 궤멸시킨다는 것은 다른 말로 아프가니스탄. 국민 대다수를 없애겠다는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535
미국 국방부와 브라운 대학교의 ‘전쟁 비용 프로젝트’ 등 전쟁비용을 계산하는 여러 연구 단체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 지난 20년 동안 벌인 ‘테러와의 전쟁’에서 지출한 비용만 6조 4천억 달러에 달한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비용 지출만 약 2조 3천억 달러로 잡고 있다. 상상하기 힘든 천문학적인 숫자다 그런데 이 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사람과 재산의 초토화, 더 큰 분노와 복수의 응어리만 잔뜩 키워 놓았다. 이 비용의 5%만이라도 전쟁 피해 복구나 전쟁 희생자 지원 프로그램, 난민이나 소외 계층의 삶의 질 개선에 사용했더라면 테러는 지금보다 현저하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이는 거의 모든 연구 기관이 내놓는 공통된 결과이다.
지난 4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읽는 코드는 파괴와 살육 그리고 절망이었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980년대 10년 동안은 옛 소련군이 이곳에서 전쟁을 벌였고, 소련이 물러난 뒤인 1990년대 전반기에는 지방 군벌끼리 수도 카불을 차지하려고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그 내전의 최종 승자가 바로 탈레반이었다. 2001년 9.11 테러를 빌미로 최근 20년 동안은 미국과 전쟁을 벌였다. 이제 미국과 탈레반의 평화 협상으로 모든 것이 종식되고 다시 평화의 실마리를 얻었지만, 40년 폐허와 피폐의 깊은 골을 하나씩 메꾸는 데 또 다른 40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536-537
영국의 오랜 식민 통치가 끝나고 1947년 인도 대륙이 무슬림 지역인 파키스탄과 힌두 지역인 인도로 각각 분리 독립했다. 이때 무슬림이 대다수인 지역은 파키스탄, 힌두교도가 대다수인 지역은 인도에 귀속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당시 카슈미르 지역은 전체 인구의 60% 이상이 무슬림이었음에도 힌두 마하라자(토후, 왕) 하리 싱이 주민 의사에 상관없이 카슈미르를 인도에 귀속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무슬림은 즉각 파키스탄으로의 귀속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파키스탄이 동족 보호를 내세우며 군대를 파견했다. 이로써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카슈미를 비극의 시작이다.
카슈미르 문제는 지난 70여년간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 간 분쟁의 핵심 사인이 되었으며, 상황의 지속적인 악화로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더욱이 인도와 파키스탄이 1998년 핵 보유를 공식화하면서 인구 15억을 헤아리는 이 지역의 위험 수위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카슈미르 문제는 영토 분쟁과 함께 무슬림 파키스탄과 힌두 인도 간 종교적 갈등을 내포하고 있어 해결의 실마리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538-539
CHAPTER 10 서구의 이슬람 그리고 공존의 미래
이슬람 원리주의란 무엇인가
서구에서 주장하고 서구 언론에서 일반화한 이슬람 원리주의는 꾸란과 하디스 같은 이슬람 경전의 구절과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면서 타락한 서구 사회는 물론, 변질된 무슬림 사회를 뒤엎거나 변화시키려는 급진적 사상운동을 일컫는다. 동시에 현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시대착오적인 돌출 행동과 과격한 무장 투쟁등으로 지구촌 평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고정 관념을 양산한다. 이는 극히 일부의 극단적 행위를 일반화시키는 고도의 전략적 시나리오이다. 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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