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다. 이왕 읽는거 좋은 책을 읽으면 좋다.

독서에 정통한 살마들의 조언에 따르면 좋은 책 선별 능력을 길러나가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막연하다. 좋은 책의 기준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상하게 좋은 책의 기준은 고전이라고 설명해준다.

오랜 세월 다야한 사람들에게서 읽혔기에 아무래도 좋은 책임에 틀림없는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는다는 것도 도전이다. 좀이 쑤신다.

그런데 내용마저 딱딱해서 쉽게 빠져들지 못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읽으라 한다.

그것은 관심있는 분야이기에 좀 더 쉽게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질적인 독서보다 양적인 독서, 기능적인 독서라 분류된다. 

양서를 읽는 것은 질적인 독서이다. 좋아하는 분야를 읽으라는 것은 질적인 독서로 나아가는 하나의 길이다.


뜬금없는 질문 하나 해보자.

좋은 사람들만 만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물론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면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라하여 좋은 사람만 만날 수는 없다. 

위의 질문은 자체가 잘못을 가지고 있다.

좋은 사람만 만날 수 있을까?

당연한 것이다. 좋은 사람만을 만날 수는 없다.

좋다는 기준도 모호하다.

좋다는 것은 개인적 기호에 따라 달라진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칭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좋음을 연기해야만 한다. 

모두에게 좋을 순 없으니 일반적인, 통상적인 좋음에 가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두 좋다고 보지만은 않는다.

외형만 보고서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좋은지 아닌지는 겪어봐야만 한다. 꽤 긴 시간동안 그 사람을 겪어봐야 알게되고 판단할 수 있게된다.

결국 우리는 좋은 사람만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은 그 자체가 어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굳이 이런 설명이 없어도 우리는 위의 질문에 답이 없다는 것을 안다.

핵심은 그것이다. 좋다는 개인적 기호에 따라 사람을 겪어봐야지 알 수 있다.

그의 기호, 생각, 가치관, 습관, 이상향 등등,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이다.

책 읽기는 저자와 저자의 생각을 만나는 것이다.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 겪어봐야 하듯이 좋은책을 알려면 읽어봐야 한다.

읽어보고 판단해야 한다.


좋은 사람인 줄 알고 보다보니 아니었던 경험 있는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판단하고 꺼려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좋은 사람이었던 경험이 있는가?

누군가의 평판에 편견을 가지고 있다가 겪어보니 다른 사람이었던 경험은 없는가?


책 읽기도 마찬가지다. 책은 자신이 끌리는 책을 우선으로 읽어나가다 보면 보는 눈이 생기는 것이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축적된 경험으로 좀 더 빨리 좋은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눈이 생기듯, 책도 좋은책이든 아니든 자신이 읽어나가다 보면 그 경험으로 구분해 낼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 겪듯이 책을 겪어봐야만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추천보다 더 좋은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그리 많은 시간을 책 읽기에 투자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하나를 보더라도 좀 더 좋은 책을 읽고 싶다. 독서 좀 해 봤다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아무래도 걸러낼 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한다. 당연히 그 기대는 적절하다. 좋은 책을 추천해 준다. 통상적인 좋은 책 말이다.

자신이 그 좋은책을 읽어낼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잘 읽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자신의 기호에 맞지 않거나, 기호에 맞더라도 자신이 읽기에는 어렵거나, 딱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읽어져 나가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책 읽기는 책장 넘어가는 재미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보니 갇그이나 할 것도 많은데 자주 손이 가질 않게된다. 

우리는 대체로 책을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을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다. 사실 우리는 그런 교육을 받아봤기 때문이다.

결국 자주 손이 가지 않는 책 때문에 다른 책까지도 손을 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손을 놓아버린다. 꽤 긴 시간동안. 생황에 바쁘다가 언젠가 다시금 '그래. 책을 읽어야해!'라는 결심이 생기기 전까지 말이다.


분명 독서광들은 좋은 책을 추천한다.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특정 다수에게 하는 것일 뿐이다.

즉 통상적으로 좋은 책이라는 것이다. '많이 읽다가 보니 좀 더 좋은 책은 이것이 더라'하는 것이다.

이런 추천에 맞느 사람이 많을까, 안 맞는 사람이 많을까?

추천 책에 대한 내용을 보는 사람은 읽기를 원하기에 맞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개인의 기호는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좋은 책, 감명받은 책은 그 누군가의 기호이다. 

그것이 나에게 좋은 책이라고 볼 수는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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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과 동일시 되기 전에는 배척하려는 마음이 있다. 꼭 그런것은 아니겠지만 자신과 틀린것에 특히 배척하려는 의지를 무의식적으로 가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익숙하지 않기에 때론 너무 어색하기에 일단 한걸음 물러서게 된다. 그것이 물리적이든 심적이든 말이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는 사람은 자신의 스타일과 대조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가지지 않는것에 대한 호기심이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게 한다. 

앞서 말한 두 가지의 경우가 혼재하는 경우도 있다. 



영화<타인의 취향>에서 인물들의 애정도가 그렇게 그려지고 있다. 생각보다 애정을 쉽게 형성하기도, 참 어렵게 형성하기도, 결국 형성되지 않기도 한다. 

정진홍씨는 자신을 위해 산티아고 길을 걷고 쓴 책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에서 사랑은 평등하지 않다고 표현한다. '본래 사랑은 평등하지 않다. 꼭 균형이 맞지도 않다. 왠지 기우뚱한 것처럼 보이기 일쑤인 것이 사랑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도 밑질 것 없어 보이는 사이는 사랑이 아니다. 그건 자칙 거래다. 둘 사이가 어느 쪽으론가 기울어야 사랑이다. 기우는 쪽으로 사랑은 흐른다.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사랑하는 쪽에서 사랑받는 쪽으로, 한쪽에서 또다른 한쪽으로 그렇게 기울며 흐르는 게 사랑이다. 하지만 항상 한쪽으로만 기울지 않는다. 살다보면 기우는 방향이 정반대로 바뀌기도 한다. 마치 바람이 이리저리 불듯이 말이다! 그러면서 '기우뚱한 균형'을 잡아가는 것! 그것이 사랑 아닐까 싶다.'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평등하지 않다. 기울어짐 점점 균형점에 이르다가 때때로 시소처럼 이쪽으로 저쪽으로 기울어져 가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지속되어 갈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논리적이지 않다. 감성적이고 감정적이다. 그렇기에 이해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문화론>에서는 '참된 합리성이란 것은 대상의 보이는 면 뿐아니라 보이지 않는 면도, 드러난 것뿐만 아니라 숨겨진 것도 포용하고자 할때 마련된다. 이것이 변증법의 의미다'라고 한다.

변증법적으로 볼때 애정관계는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 된다. 사람과의 애정은 보이는것 보이지 않는것을 아우를 수 있어야 지속적인 관계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는 상대의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보이지 않는것에 더 빠져들고, 그 이후 실망으로 이루어진다. 그 속에서 드러난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을 모두 포용할 때 지속적인 애정은 이어질것이다.


다시 <타인의 취향>으로 돌아가 보면, 주인공 카스텔라(장-피에르 바크리)는 영어과외선생으로 왔었던 클라라(안느 알바로)의 연극하는 모습을 보며 클라라에게 반해 결국은 부인인 안젤리크(크리스티안 밀레)를 떠나게 된다. 

영화에서 카스텔라는 늘 부인의 기호를 존중하는 듯했으나 결국은 그것이 싫다고 화를 내게 된다. 안젤리크는 자신을 배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누가 잘못이었나를 떠나 두 사람은 부부로서 서로의 생각과 감정에 대한 솔직한 소통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었을 것이다. 

다시말해 애정의 시작은 다름과 차이의 호기심일 수 있으나 지속은 솔직한 소통을 통해 드러나지 않은 것 마저도 드러내 서로가 교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것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지 않을까...

시작과 유지는 그 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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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디 같은 사람과 살아간다면 너무 좋겠다'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주연이지만 영화의 절반도 되기전에 죽는다.

'루디도 참 행복하게 죽는구나' 영화를 다보고나서 들었던 생각이다.

이 영화는 위의 두 가지 외에도 현대인들이 꼭 생각해야할 꺼리들을 담아내고 있다.

영화는 애절함을, 뭉클함을, 행복감을 들게도 하였고, 비통함을, 안타까움을 들게도 하였다.

앞의 감정들은 루디와 부인 트루디를 보면서 들게되고, 뒤의 감정은 자녀들을 보면서 들었다.


세 자녀들은 살아가는데 바쁘다. 시간의 여유가 아니라 부모에게 시간을 줄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부모에 대한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에 그리고 편한 것에 더 익숙한 나머지 부모에게 시간을 투자하기위해 자신의 시간을 비워내지 못한다. 돌아가신 후에도..

그들의 대화는 부끄러워지게하여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마음은 가지고 있으나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 모습이 나를 비추는건 아닌가해서..

자녀들은 부모의 방문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첫째아들은 싫어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회사생활을 하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가 어렵다. 부모에게 자신의 시간을 쓰는 것이 투자라고 하는게 맞을까.. 부모는 그리 오래 자식들과 함께할 수 없다. 그렇기에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시간이라면 투자라 할 수 있을것이고 투자해야만 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딸은 동성애자로 나오는데 그 역시 부모에게 시간을 할애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애인이 부모에게 더 잘하는모습이다. 뭔지 모를 부모에게 불만을 가진것처럼 보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반나절쯔음 부모님과 함께 있다가 언성을 높이게 된다.

지극히 일반적이라 할 수도 있을만한 일이긴 한데, 그 모습이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막내 아들 칼은 일본에서 생활한다. 엄마가 좋아하는 일본, 동경하는 일본 하지만 일본을 보기전에 엄마는 세상에 없다. 아버지만 그것도 엄마의 흔적을 함께하여 대신온 아버지만 일본을 방문한다. 루디는 아내의 원을 대신 이루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고 그녀와 함께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하지만 아들의 눈에는 그것이 아니라 이상한 행동을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뿐이다.

아버지가 아침식사로 엄마표 롤을 만들어 주었을때, 엄마의 생각으로 자리에서 울기도 하지만 아버지와의 거리감은 전혀 좁혀지지 않는다. 함께 술을 마시고는 결국은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말을 뱉는다. 직장때문에 가족을 버린 아버지로 생각한다.

퇴근해서 아버지가 계시지 않을 줄 알고 집에서 누나와 통화를 하면서 '아버지가 이상하다. 엄마 옷을 들고 뭐하는지 모르겠다. 혼자 종일 다닌다.'

결국 아버지의 장례식에 모였을때와 엄마의 장례식에서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전혀 연결되는 내용은 아니지만 김애란의 <두근 두근 내인생>에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데인 것처럼...' 맞아. '늙음'에 데인 것처럼 놀랐다고 했어요.

"저는 잘 이해가 안돼요."

"뭐가?"

"나이 든 사람 피부에 탄력이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잖아요."

"그렇지."

"머리가 세는 것도, 이가 빠지고, 눈이 나빠지고, 주름이 느는것도,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잖아요."

"그래."

"그런데 그렇게 좋아했다면서, 그 짧은 접촉 한번에, 마치 늙음이 자기에게 옮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정색하고 돌아설 정도면, 그 여자가 상상한 늙음이란 대체 어떤 거였을까요?"  134-135

책의 내용은 노교수와 젊은 제자의 사이에서 잠시 스친 촉감때문에 일어난 사건의 표현이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그런마음을 가진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행동은 책의 내용에서의 행동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내 경우에서 말이다


소통이란건 마음이 서로에게 닿아야 한다. 소통은 생각이 아니라 생각의 행동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자녀들이 아버지와의 소통자체가 없다. 생각부터 없어보인다. 부모에게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것처럼 소통을 위한 시간을 먼저 만들어 가야 하는것이 아닐까.

대체로 우리는 있을때는 잘 모르다가 없어야 소중함을 느끼게 되듯이, 부모의 존재유무는 매우 큰 자리를 차지한다. 

부모에대해 자신의 마음은 그리고 자신의 행동은 어떠한지 생각해 보게 되는 영화이다.


트루디는 정년을 1년쯤 남겨둔 남편의 암선고를 받게되고, 사실을 숨긴채 남편 루디와 여행을 떠난다. 저녀들이 있는 곳으로 그리고 보고 싶은 바다가 있는 곳으로.. 그리고 트루디는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그녀는 원하던 일본을 가지는 못하였지만, 베를린에서 부토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그림자의 춤 부토. 그녀는 마지막에 부토를 떠올리며 자신이 분장하였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잠결에 숨을 거둔다.

트루디가 남편 루디를 바라보는 눈빛과 표정을 각인하였다. 그 온화하며 잔잔하지만 깊은 사랑을 간직한 표정. 손주의 방에서 침대와 바닥에서 따로 잠을 청하지만 서로 손을 잡으며 짓는 표정은 삶에서 사랑에 의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평온함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두에서 언급한 생각이 든 지점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였지만 그런 마음보다 더 큰 애정을 간진한 사람의 사랑.

남편을 떠나보내야하는 무너지는 가슴에도 애정은 더 커짐이 표정에 담겨있다.

인스턴트 식품에 묻혀 인스턴트 사랑의 시대에 더욱 염원하게 되는 장면이 아닐까. 


트루디를 급작스럽게 떠나보낸 루디는 상실감을 그러면서 그제서야 떠난 부인의 모든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부인이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되고 그녀를 위한 여행을 한다. 막내가 살고 있는 일본으로. 

서먹한 아들의 비수를 찌르는 행동과 말고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을만큼 오직 아내 트루디만 생각한다. 

그녀의 옷가지들을 들고 여행하고 낮시간 다닐때는 코트 속에 부인의 옷을 입고 함께 여행한다. 

한적한 공원에서 부토춤은 추는 유(아야 이리즈키)를 알게되고 그제서야 부토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녀를 통해 아내와 더 교감할 수 있게 되고, 유를 통해 심신의 안정을 조금씩 찾아가게 된다. 결국 함께 후지산으로 향한다. 아내가 보고싶어하는 후지산으로.

그는 후지산이 선명하게 보이는 날 새벽 조용히 부토 화장을 하고 후지산 근처 후지산을 띄운 호수앞에서 부토 춤을 춘다. 영화는 부토 춤을 추는 루디에게 어느새 트루디와 함께 추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루디는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루디는 행복하지 않았을까. 

잊지못하는 상실감을 부인의 마음을 알게되면서 그녀와 공감하며 죽게되는 루디. 나는 행복한 죽음이라 생각하게 된다.






아래는 영화에서 트루디역을 맡은 하넬로레 엘스너의 인터뷰이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찾다가 보았는데 그녀의 설명이 다시금 영화를 생각나게 하여 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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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속에 이야기, 그 속에 다시 이야기가 있는 영화이다.(액자식구성이라고도 하더라.)

1944년 전쟁의 끝에 첫눈에 반한 젊은 군인과 여인은 사랑을 하게 되고 전쟁후 귀국했던 군인은 여인에게로 다시 돌아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에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생활한다.  아이가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죽게 되면서 부부는 상처를 서로 안아주지 못해 별거하게 된다. 그 사이 남자는 무언가에 끌려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 

이후 부인을 찾아가 자신의 글을 건네고 돌아오라하고, 부인은 글을 읽고 감동하여 돌아오지만, 돌아오는 기차에 원고를 두고 내린다. 뒤늦게 원고를 잃어버린걸 알게 된 두 사람은 결국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현대로와서 작가를 꿈꾸는 로리(브래들리 쿠퍼)는 도라(조 샐다나)와의 프랑스로의 신혼 여행에서 골동품점에 들러 가죽가방을 구입한후 돌아온다. 로리 역시 작가가 꿈이며 책을써 출판사들에 돌려도 계속 퇴짜를 맞는 중에 생계를 위해 출판사에서 일을 한다. 출근준비를 하던중 가방에서 우연히 원고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모두 읽고 종일 그 글을 생각한다. 결국 새벽에도 잠이 깨 원고를 철자 하나 틀리지 않게 타이핑 한다. 우연히 도라는 그 들을 읽고 감동하여 출판을 권유하게 되고 결국 로리는 출간하게 되고, 올해의 문학상을 받게 된다.

그러던 중 원고의 원래 저자인 올드맨(제레미 아이언스, 1940년대 젊은 군인)이 방문하여 이야기는 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 내용을 쓰면 왠지 안될것 같아서..ㅎ)





결국 이 내용 전체는 클레이(데니스 퀘이드)의 책 내용이다.

이러한 이야기속에 이야기 또 그속에 이야기를 가진 영화이다. 참고로 영화의 진행순서와는 상관없이 내용을 적은 것이다.


로리는 올드맨을 만난후 자책감에 부인 도라에게 말하고 편집장에게도 밝힌다. 올드맨은 밝히지 말라고 한다. 도라도, 편집장도 밝히지 말것을 종용한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답이야 달라질 질문이지만, 어떻게 하는것이 좋을까?


영화의 내용중에 몇 개의 대사로 생각해 보려한다.

우선 로리가 결혼전 도라와의 동거중에 온전히 글 쓰는데 집중하느라 생활이 어려워지자 아버지를 찾아가 도와줄것을 요구하는 장면에서 아버지는 잔소리를 늘어놓은 후 결국은 도와준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남자란 건 아무리 버틸 수 없는 고통이 있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그것의 한계까지 버텨낼 수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로리가 올드맨에게 찾아가 자신의 생각은 사실을 밝히는 것이라 했을 때 올드맨은 그럴 필요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선택을 해야 하지. 그리고 그걸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곳을 벗어난 로리는 벤치에 앉아서 독백으로 "우리 모두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어려운 부분이다."


영화의 후반에 클레이는 다니엘(올리비아 와일드)에게 "어떤 면에서는 당신은 삶과 픽션에서 선택을 해야해."라 한다.


로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클레이는 어떤 결말을 선택해야 할까?


세 작가의 이야기, 사랑이야기지만 영화를 보면서 선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충분히 우리 삶에서 일어날 수 있을 부류이기에 인생은 하나의 연극이라 부르기도 한다.

자신의 배역과 성격을 선택하여 연기하는 것이란다.

그만큼 선택이란 것의 연속이기에 선택에서 올바른것보다는 편한 선택이 더 유혹적이기에.. 

영화에서 라면 로리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맞을까

답이 없는 질문이기도, 너무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으면 우린 편한 선택을 해버리기 쉽기에, 편한 선택이 무조건 틀린건 아니지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마음에 늘 무거운 돌덩이를 올려놓는 결정을 할 수 있기에, 때론 맹목적을 따라만 가기에.. 


나는 아직 답이 없다. 나였어도 출판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 올드맨을 만나고 그가 밝히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밝히지 않을지 모르겠다. 올드맨이 밝히라고 한다면, 어떨게든 막으려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지점에서 어떤 악행이 추가될지 모른다. 

그래서 고민해봐야 했다. 

나는 답이 언능 떠올리기 힘들어 시간을 두면서 계속 고민할 것같다.

고민하는 중에 그러한 일이 발생되더라도 좀더 바른 결정을 하기 위한 기회를 가질 수 있을거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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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은 왜 일어나는가.. 연쇄살인범에 대해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일반적인 감정이 없다는 점이라고 한다.

흔히 우리는 사이코패스라 부르기도 한다.

그들에겐 감정 능력이 매우 부족하거나 전혀 없다고 한다. 다시말해 고통스러움이나 잔인함같은 느낌을 가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태어날때 부터이든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건 즉, 선천적인 사이코패스와 후천적 사이코 패스가 존재한다고 한다.

<연쇄 살인범의 고백>을 읽으며 덩달아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본다.



우선책은 법의학자인 저자가 쓴 범죄심리 시리즈 세 권 중에 두번째 책이다. 제목에서처럼 엽기적이고 경악스러운 살인 사건에 대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다른 두 권은 아직 접하지 아니하였다. 

사건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통해 사건을 흥미롭게 풀어놓기에 읽어나가는데 편하다. 다만 내용 자체가 무거운 부분들이라는 점은 뒤로하고 말이다. 해결이 된 사건도 있고, 해결되지 않고 증거불충분으로 의혹만 남긴채 끝나버린 이야기도 들어 있다.

이 책이 처음 서점에 진열되었을때 부터 눈에 띄었다.(당연히 서점에서 눈에 잘띄는 곳에 책을 두었겠지만) 다만 쉽게 손이 가질않아서 호기심만 가진채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얼마전우연하게 수중에 책이 들어왔다. 봐야할 책들이 앞서 있기에 앞부분만 훑어봐야지하는 생각으로 펼쳤으나 결국은 모두 읽어버렸다.

앞 부분에서는 뱀파이어의 존재에 관한 내용에 대해 과학적인 설명으로 오해될 수 있는 점들을 풀어준고 있다. 연쇄강간 살인범들, 완전 범죄를 끈질기게 밝혀낸 이야기들, 당시 시대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던 사기사건에 대한 내용들까지 무겁기도 하고 소설같기도한 내용들이 들어있다.


핵심은 시리즈 첫권의 제목처럼, 흔적을 완전하게 숨기기는 어렵다는 내용이다.

물론 내용전개는 추적되어가는 과정에 대해서 서술되어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앞 부분이었다. 뱀파이어로 보일수도 있는 오해에 대한 과학적인 해설이다. 여러 매체들을 통해 뱀파이어 내용들은 점해보았으나 과거 뱀파이어 사건으로 시체의 무덤을 파헤쳐 처리하던 일들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는데, 내용을 통해 알게되고 이해되기도 하였다. 최근에 본 영화<트와일라잇-브레이킹던>까지 생각되었다.(사실 이 영화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주위에서 여러사람들이 보자고 해서 이왕 볼거라면 처음부터 보겠다는 생각에 시리즈 전체를 보고 마지막편을 극장에서 보았다.)

물론 책과 영화가 겹치지는 않는다. 단순히 떠올랐다는 것이다...ㅎ



서두로 돌아가, 연쇄 살인범 이라고 모두 사이코패스는 아니라 한다. 대체로 사이코패스가 많긴하지만.

선천적 사이코패스와 후천적 사이코패스 중에 더 위험한 것은 후천적 사이코패스라 한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 최민식씨(경철 역)가 맡은 역할이 선천적 사이코패스이고, 이병헌씨(수현 역)가 맡은 역할이 후천적 사이코패스다.

영화에서는 두 사람의 대결구도가 전개된다. 대사중에도 경철은 '니가 이긴것 같지, 아니야 내가 이긴거야'라는 말을 하는데, 결국 두 사람 모두 사회에 가정에 그리고 자신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준다. 누가 이기고 지느냐의 문제는 아닌것같다.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누구나 극중의 이병헌처럼 후천적 사이코패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정상적인 평범한 사람도 제복을 입히고 사람을 물화시키는 과정이 진행되면 쉽게 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굉장한 예는 유명한 '스탠포드 감옥실험'이다.

1971년에 실험을 진행했던  담당교수 필립 짐 바르도는 14일간의 실험을 6일만에 중단하고 폐쇄시켰다. 실험은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 지원자들을 무작위로 뽑아 아무런 정보없이 무작위로 교도관과 수감자로 나누어 실험을 진행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며칠도 되지않아 자신이 정말 교도관이고 수감자라 착각하고,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여 결국 충돌이 일어나고 실험은 중단되었다.

내용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2002년에 개봉한 독일영화 <엑스페리먼트>와 2010년에 개봉한 미국영화 <엑스페리먼트>이다. 동일내용을 담은 다른 영화이며, 두 영화는 '스탠포드 감옥실험'을 영화화 한것이다.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아부그라이브 포로 수용소에서 발생한 포로 학대 사건은 매우 유명하다.

포로의 입을 열기 이해 자행된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학대(중동인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것은 가장 극심한 고문이라고 한다. 특히 남자가 여성앞에 옷을 강제로 벗어야 하거나, 속옥을 머리에 쓰는등의 것들.., 포로 수용소의 미군들은 평번한 군인들이고 학비를 벌기위해 자원한 젊은 대학생들도 있었다.)는 짐 바르도 교수로 하여금 '스탠포드 감옥실험'을 다시 떠올리게하여 <루시퍼 이펙트>라는 책을 출간하게 하였다.


실험에 대한 기록과 분석,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의 만행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한다. 교수는 결국 누구나 악행을 저지를 수 있기에 루시퍼 이펙트를 경계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연쇄 살인범의 고백>은 연쇄 살인범들의 고백보다는, 조사과정을 통해 드는 의문들을 해소해 나가는 조사 과정에서 발생된 내용들에 범인들의 실토가 어우러져 진행된다.

책은 법의학자의 관점에서 늘 사건에 대한 호기심어린 의문과 질문으로 시작되어 현장 조사를하며 풀어나가고 다시 질문하는 방식을 통해 숨기려는 자에 대한 생각을 읽게하고 결국은 허점을 찾아내게 된다. 그리고 허점에 대한 증거을 찾아낸다.


이러한 내용에서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이 앞선 내용들이다.

짐 바르도 교수의 지적 즉, 휩쓸려 악행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일어나는 일이나 현상 등에 대해 우리는 늘 질문하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학교에서 교복을 입는다. 경찰이나 군인은 제복을, 회사는 때때로 유니폼을, 의사들은 가운을, 법관들은 법복을 입는다.

이것은 당연히 연대감과 일체감을 주어 소속감과 책임감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다.

입는다고 사이코패스되는건 절대 아니다. 다만 그런 일체감속에서는 종종 진행되는 것이 잘못이든 아니든 생각하지 않고 따라가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후천적 사이코패스를 만들기 위해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일이 일체담을 주는 의상이라는 점이다. 유니폼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유니폼은 인간을 물화시키기에 좋은 전제라고 한다.


세계2차대전후 전범 재판에서 유명한 사람이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히틀러의 명령에 생각없이 따른 사람으로 유명하며,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전범이다. 그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을 통해 우리에게 생각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나쁘다.

다시말해 우리는 선하지만, 악하기도 한 존재이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인데 선택하는 사람은 생각지 않는 지점에서 발생될때 문제가 되기에, 우리는 미리 생각을 통해 질문하고 자문하고 생가함으로 불시에 발생되는 그 시점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 

책을 통해 다시금 떠올리고 생각들을 정리해 볼 수 있었다. 나 스스로 그러한 선택의 시점에서 안전지대에 놓여 있지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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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에게 종종하는 말이 있다. '어차피 먹는거 맛있게 먹는게 좋은것처럼, 어차피 앉아서 하는거 제대로 한 번 하는게 낫다.'

공부는 자신이 하는 것이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역시 어린시절 선생님이나 어른들께 들어보았던것 같다. 흐린 기억을 되새김질 해보면, 당시엔 '그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있나?'하는 생각을 했었던것 같다. 당연한 말이니까. 그런 내가 지금 되읊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공부는 그런 것이다.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들에 자신이 보고 있는것이 무엇인지, 어떤의미인지 알아내고, 이해하고 습득하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 아닌가. 쉽게 나온책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책은 심혈을 기울여 출간된다. 그런 책을 읽는것. 독서는 그 목적이 공부에서 시작되었으며, 알아감의 추구인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책읽는 이들은 꽤 많다. '직장인 1년 평균 독서량이 14.8권.' 2012년 한 조사의 결과 발표이다. 

연령대별 선택도서의 차이는 있지만, 예전보다는 꽤 늘었다. 발표에서도 젊은 층일수록 읽는 수가 많다고 한다. 

스펙을 강요받아서 그럴 수도 있고, 매체를 통해 종종 발표되는 '한국인이 책을 너무 안 읽는다'는 말에 자극을 받았을 수도 있고, 책을 좋아서 읽을 수도 있고,... 이유야 어떻든 책읽는 양과 비중이 늘어난다는 사실은 반가운 것이긴 하다. 


그런데 대체로 공부를 위한 읽기를 제외하면 편하게 읽고 있는 편은 아닐까.

잔혹한 표현인지는 몰라도, 시간때우기로 읽는다면 그건 문제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시간 때우기라도 안읽는 것보다는 더 나은 것이긴 하지만. 그렇기에 그것은 지적할 필요가 없는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말하고 싶은것이 읽더라도 좀더 깊이, 확장되이 읽어보자는 스스로의 독서에 대한 반성이다.

이런 기회를 만들어 생각해보고, 정리하여 좀더 깊이 읽기위한 시간을 가져보자는 의도. 말은 거창하긴 하지만 글을 적어보는 짧은 시간동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에서는 글쓰기에 필요한 덕목을 말한다.

먼저 읽어야 함에 있어서, 이유당 이덕수 선생은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독서는 푹젓는 것을 기하게 여긴다. 푹젖어야 채고가 내가 서로 어울려 하나가 된다.'(p70)

글을 쓰기에 앞서 먼저 읽어야 함을 강조하는데 그냥 읽는 것이 아닌 책 속에 빠져드는 것, 한발 떨어져 바라보는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다가서서 그 속에서 읽어나가는 것을 독서라 했다. 무언가에 덤벼드는 느낌이랄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때 자신도 모르게 상채가 앞으로 기울어져 가는 느낌이든다. 

관심있고 해보고 싶은 열망이 있을때, 그것이 닥치면 우리는 좋아서 덤벼든다. 그것처럼 읽기도 그런 열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리라. 


책의 계속되는 내용을 보면 쓰기에 필요한 덕목이 나오는데 아무리 보아도 읽기의 덕목으로 보인다. 내용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관찰(觀察)하고 통찰(通察)하라.
어항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려면 어항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러나 물고기에게 어항밖으로 나오는 일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그래도 나와야지."  115
어항은 곧 책이다. 책을 꼼꼼하게 읽었다면 다음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관찰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책이 말하는 의미를 명확하게 짚어낼 수 있다.
세상이라는 책도 마찬가지다. 그게 바로 약의 원리다. 약을 알고 난 뒤 넓고 깊게 반복하다 보면 불현듯 통찰의 순간이 온다. 개인의 좁은 안목과 시야가 확장되면서 보편적인 사물의 이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게 오의 단계에 이르면 비로소 그 사물에 대한 글을 쓸 수 있다. 관찰과 통찰이 글을 쓰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사물에 대한 새로운 통찰 없이는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없다.  116
  원칙을 따르되 적절(適切)하게 변통(變通)하라.  의중(意中)을 정확히 전달(傳達)하라.
독서란 책을 읽는 것이다. 그런데 증자의 제자인 공명선은 책을 읽는 대신 스스의 행동을 보고 배우는 길을 택했다. 결국 스승이란 책을 읽은 공명선은 넓은 의미의 독서를 한 셈이었다. 공명선이 택한 길이야말로 독서를 창조적으로 변통한 것이었다. 
한신도 마찬가지였다. 배수진은 병볍에서 금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신은 무턱대고 병볍을 따르는 대신 병볍의 참의미를 읽어냈다. 이것 또한 창조적인 변통의 좋은 사례다. 
글도 마찬가지리라. 남의 의견을 아무 생각 없이 답습해서는 좋은 글을 남길 수 없다.  158
종채는 아버지의 말 하나를 어렵사리 기억해 냈다.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결코 그들을 배우지 않으리라."
사마천과 반고를 배우되, 지금 여기에 맞는 글을 써야 한다는 아버지의 다짐이 담겨 있는 말씀이었다는 것을 종채는 이제야 깨달았다.
쓰는 사람이 자신의 의중을 읽는 사람에게 정확히 전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좋은 글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집과 독선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정밀한 글을 써야 한다.  159
  관점과 관점 사이를 꿰뚫는 '사이'의 통합적(統合的) 관점(觀點)을 만들라.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것에도 제각기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글을 쓸때는 그런 측면들을 빠짐없이 다루어야 한다. 그래야 글을 읽는 사람이 편견에 빠지지 않고 의미를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여러 측면들을 늘어 놓았으면 이제 그것들 사이를 꿰뚫는 새 관점을 만들어야 한다. 
대립되는 시각과 관점을 아우르면서도 둘 사이를 꿰뚫는 새로운 제3의 시각을 제시하는 것, 그것이 바로 통합의 논리다.  188

글을 쓴이가 이렇게 써서 책을 만들어 냈다면 읽는이도 이렇게 읽어가야 하는것 아니겠는가. 

물론 글쓴이의 의도대로 무작정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표현처럼 의중을 정확히 이해하고, 변통하고, 통찰하여 읽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카프카는 자신의 책에서 말했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쳐, 우리를 참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거지? 책이란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되는 거야.'

그 표현이 마음에 들은 박웅현씨는 자신의 책 제목을 <책은 도끼다>라고 정하였다. 

물론 그가 그렇게 지은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책의 첫 페이지에 그도 카프카의 표현을 옮기고 있음을 보고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책 내용역시 자신이 깊이 읽는 유형의 독자이며, 그 책들에 영행을 받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연암에게 글쓰기는 배우다>는 그 도끼같은 책을 만들기 위해 깊이 읽을 수 잇는 지침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가 어떤 의도로 쓰든 독자는 창의적인 해석을 할 수 있다. 그에 더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저자의 의도에서 깊은 인상을 받고 독자의 해석방식으로 변통하고, 그러한 내용들로 새로운 통찰력을 가지는 것. 

책읽는 이의 자세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책을 그냥 읽어도 된다. 앞서 말했듯이, 책읽기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짐으로 얕은 책읽기를 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조금더 발전하는 읽기를 하게 하기 위함이다.


因循姑息, 苟且彌縫(인순고식 구차미봉) : 낡은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눈앞의 편안함만 좇으며 임시로 변통하려 한다.

책을 읽는 것은 당장의 답을 구하기 위함이기보다는 자신의 긴 인생 전반을 위해 읽어가는 것이기에 더 필요한 생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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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이페이이야기>, 국내 개봉명은 <타이페이 카페스토리>에는 몇 가지 질문이 나온다.

그 중에 '만약 선책이 가능하다면, 세계여행카드, 공부의카드?'라는 질문이 나온다.

이 영화는 주인공 두얼의 오랜 꿈이었던 카페 개업으로 시작한다. 두얼과 전혀 다른 스타일의 여동생 창얼은 언니를 도와 카페에서 일을 하는데, 창얼은 손님이 별로 없자 개업식에서 친구들이 주었던 도움안되는 잡동사니 선물을 물물교환을 제안하고, 그것이 알려지며 타이페이 명소로 자리를 잡게 되기도 한다.

스튜어디어스의 폰 액세서리를 두얼이 갖고 싶어하자 창얼은 자신의 이야기와 액세서리를 교환하기로 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어릴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엄마는 두 장의 카드를 작성하여 하나의 카드에는 '세계여행'을 다른 한 장의 카드에는 '공부'를 적고서는 자매에게 한 장씩을 뽑게 한다. 

동생 창얼은 '세계여행'카드를, 언니 두얼은 '공부'카드를 뽑게 되고 두얼은 열심히 공부하는 인생을 충실하게 살았고, 창얼은 그때부터 오랫동안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며 세상을 보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화면은 위에서 표현한 질문을 한다.


(원래는 질문하는 사진을 캡쳐하려 했는데 갑자기 데스크탑의 하드가 날아가버려 영화까지 사라졌다...더 가슴아픈건 최근7년간의 여행에 사진들이 모두 날아갔다...다행이 3년정도는 다른곳에 두어서 찾긴했지만 나머지 4년의 사진들이 모두 ㅠ.ㅠ)


그러면서 인터뷰 화면을 통해 여러 사람들의 답변이 나온다. 공부를 택한 사람, 여행을 택하겠다는 사람들의 영상이 나오고 다시 영화로 돌아온다.


선택을 위한 질문이란 것은, 우리 삶에 있어 끊임없이 나오는 것이다.

그럴때마다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 걸까?

선택의 기로에서 자기만의 기준을 이용하여 결정하게 되는 것일까?

좀더 근본적인 해결을 주는 선택을 학게 될까?

해리포터에서 덤블도어 교장은 '우리는 옳은 것을 선택하기 보다는 편한것을 선택한다'라고 한 표현처럼 우리는 그 시점에서 편해보이는 선택을 하고 있을까?


물론 상황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선책들을 돌아보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점에 비중을 두고 싶다.


세계여행의 카드와 공부의 카드에서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더 많이 하게 될까?

나는 당연히 전자를 훨씬 많이 선택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유는 우선 내가 여행을 좋아하기에 많은 이들이 그럴것이라는 생각에서이기도 하다. 너무 성급한 일반화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근데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당연히 공부가 싫어서라도 여행카드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에 더해 여행은 누구나 동경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탈을 위해서라도 여행을 원하게 된다. 그런데 세계 여행이라는데 싫어할 이유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또한 많은 수의 사람들은 여행을 동경하지만 떠날 용기가 부족하기에 이런 질문이 오면 염원에 대한 두려움에서라도 세계여행을 선택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나는 세계 여행 카드가 더 많은 선택을 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야기하고 있는 그 질문을 이렇게도 해석해 보고 싶다.

세계여행? => 능동적인 공부

공부?  =>  수동적인 공부

표현만 보더라도 어떤 의미인지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무조건적 의미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미리 말해준다. 

이전의 글(배움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하는가?) 에서 언급한 것처럼 매우 수동적인 배움을 한다는 관점에서 바라본 수동적 공부를 말하는 것이다.

공부를 선택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능동적으로,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공부를 할 것이겠지만, 꽤나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기에 표현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는 것이다. 오해마시길..


사실 관광이 아닌, 여기서 말하는 관광은 패키지 여행 상품같은 부류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정해진 일정에 따라 시간 정해놓고 구경하며 사진찍고, 기념품 남기고 대절된 차량에 몸을 싣고 이동하는 짜맞추어진 여행말이다.

이러한 관광은 내가 말하고 싶은 수동적인 부류이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관광이 아닌 여행이다.


여행이라는 것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에서 즉 무에서, 하나하나 정해나가는 것 즉 유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말한다.

조사도 필요하고 어느 정도의 계획도 필요하다. 어느 정도의 계획이란 표현은 계획이 있더라도 변수의 영향으로 수정, 보완이 수시로 일어난다는 의미도 있다. 이것은 부딪힘 즉, 경험이라는 산물이다. 경험은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편견과 고정관념에 유연성을 부여해 주게 된다.

몰개인화(deindividuation) 즉 군중속에서 일어나는 개인 정체성이 상실되어가는 현대에는 더욱더 필요한 경험이 되어 줄것이다.


또한 여행은 과거를 만나게 하고, 현재를 가늠하며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기도 한다.

여행을 통해 과거와 만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큰 마력을 가진다. 인간은 대부분 인간의 기원을 궁금해 하기에 종교도 발전해 온 것처럼 말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극중 애드리아나는(피카소 그림의 모델이자 연인이기도함. 실제 피카소의 연인 중에 이 이름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음) 주인공 길 펜더와의 만남에서 '나에게 과거는 큰 마력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 우연히 길과 더 이전 시대의 과거로 떠나게 되고, 그 시대를 보며 계속 과거의 시대에 머물러 있을것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내가 경험하지 못할 미래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전해들을 수 있는 내용만으로 이루어진 과거에 대한 동경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과거에만 사로 잡혀 있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여행은 과거에만 묻혀 잇도록 하지 않는다. 과거와의 조우를 통해 현실을 더 현명하게 바라보게 해준다. 영화에서 길은 애드리아나가 과거에 남아 있으려 할때 이렇게 대답하고는 다시금 자신의 시대로 돌아간다.

'여기에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되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속의 황금시대를. 현재란 그런거에요. 늘 불만스럽죠. 삶이 원래 그러니까.'



극중 길은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약혼녀의 부모가 파리로 출장차 방문할때 같이 따라왔다. 그는 파리에 머물고 싶어한다. 시나리오 작가로 인지도가 있지만 그는 소설을 쓰고 싶어하고, 영감을 주는 파리에 살고 싶어하기도 한다.(물론 파리는 과거도 아니며, 여행이지만 소설의 영감을 주는 곳이기에 살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연히 시간 여행을 통해 파리의 옛 풍경 속을 여행하게 된 것이다. 그는 여행자로서의 경험을 통해 현실을 제대로 보는 눈이 길러진 것이라 보인다.


여행은 공부다. 그것도 능동적인 공부. 찾아서 할 수 있는 공부. 자신의 현재 위치가 어디이든 여행은 이런 점들에서 일반적인 수동적인 공부에 비하면 좀 더 바람직하며 능동적인 공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리에 앉아서 하는 공부를 폄하하고자 함은 아니다.


이런 능동적인 공부는 즐거움과 기대, 흥분, 짜릿함, 순수함, 감동들까지도 느끼게 한다.

처음 내용으로 돌아가 보면 <타이페이이야기>에서 '당신의 맘속에 가장 큰 가치는 뭔가요?'라는 질문이 있다.

이번에도 인터부 영상이 나오는데 가족, 행복, 평화, 즐거움, 순수함.. 이라는 답들이 나온다.

여기에도 답이 있다고 보았다. 여행이라는 녀석은 위의 답들에 매우 부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행을 통해 가족을? 물론 물리적인 가족을 꾸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은 가까운 사람들, 특히 가족에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일반적으로 추상적인 행복에 대해 생각도 하게되고 새로운 느낌을 가지게도 해준다.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세상에도 자신 안에서도  절실함을 알게 해준다. 더 많은 설명을 할 필요도 없이 누구나 공감할 것이라 생각한다. 


글의 제목보다는 여행 예찬론이 되어가는 느낌이 들긴하지만. '선택'이란 기로는 우리에게 생각 아니 고심을 준다. 그 한가지의 예시 질문을 통해 생각하는 짧은 시간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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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다고 하면 보통 '모르는 것에 대해 알아가는 것' '새로움을 경험하는 것'등 이런 유사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먼저 알게 된 이들에 대한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들에 의해 좀 덜 어려운 과정을 거칠 수 있다. 그렇다고 노력이 필요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시말해 배움은 노력을 통해 지식을 얻게 되는 과정을 의미하게 된다.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지식들이 자신의 생각과 이전 경험들과 어우러짐으로 지혜로 이르는 과정을 총괄하게 된다.

이상의 표현들은 누구나 들어왔었고 수차례 이상 접했을 내용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배움에 대한 이 정도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런데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우리는 가장 많이 이해하는 사람 보다는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해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은 공허하게 비워놓은 채, 오직 기억을 채우기 위해서 분투한다'(수상록I)

'나는 기꺼이 교육의 부조리라는 주제로 돌아가겠다. 우리의 교육 목적은 우리를 행복하고 현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머리속에 무엇인가를 집어넣는것 뿐이었다. 그런 목적이라면 성공한 셈이다. 교육은 우리에게 미덕을 추구하고 지혜를 포옹하도록 가르치지 않았다. 단지 기원이나 어원 같은 것들만 각인시켰을 뿐이다.'(수상록II) 라고 지적하였다.


1500년대 사람, 1580년에 완성한 <수상록>은 500년이 넘게 지나온 이야기지만 지금 우리의 배움에 대한 생각없음과 비뚤어진 목표에 대해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어느 시대에나 오류는 있어 왔고, 잘못된 적용이나 무지는 있어 왔다.

그 당시에도 무지에 의한 비뚤어진 교육에 대한 생각들은 있어 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당시 세태에 대해 몽테뉴는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과거의 발명과 발견들을 통해 그리고 시행착오들을 통해 인류는 진보되어 왔다는 점을 생각해 볼때 배움에 대해서는 진보되어가지 못한 것이 중요하다.


현 시대에는 이전보다 더 심한 비뚤어진 교육이 자행되어 있다는 점은 우리가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중의 하나이다.

배움에 관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곳은 첫번째는 가정이고 두번째는 학교이다. 두번째의 경우는 공교육과 사교육 모두 포함시켜야 할 듯하다.

첫번째인 가정 내에서의 교육도 매우 문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두번째를 고려해 보고자 한다. 물론 가정에서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고 있고 교육의 문제가 학교에서의 교육교육을 더욱 비뚤어지게 하는데 조장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배움은 개인적인 부면이지만 이 시대는 단체의 문제를 먼저 생각한다는 점을 보았을때 학교의 배움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것인다. 몽테뉴의 표현 '오직 기억을 채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현실과 얻고자 하는 의지를 뿌리채 뽑아버리는 현실은 우리에게 경각심 보다는 성공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현명한 판단으로 느끼게 하고 있다. 


서두에서 언급한 배움에 대해서 우리 대부분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런 비뚤어짐을 가진 것은 배움 자체를 매우 수동적으로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지식을 들어왔다. 청소년 시절에 단 한번도 주어지는 지식에대해 의문을 품어본적이 없는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의문이 들어도 순간일뿐 염두에 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특히 불교, 유교적인 스승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상은 우리를 더욱 조아리게 만들었지 우리가 하나의 개체로서 고민을 하고 생각을 통해 질문하게끔 만들지 못했다.

그렇기에 앉아서 받아쓰면서, 1은 1이고, 2는 2이다라는 말씀을 받아들이기에 바빴고, 그것들에 대해 기억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만 중히 여기게 된 것이다.

물론 하나의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위의 이유는 우리의 사고를 정지시킨 세뇌로써 가장 큰 작용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배움의 질병을 안고 있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파괴>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콩나물은 부드러운 만큼 아주 민감해요. 물을 자주 주지 않으면 금방 잔 뿌리가 많아져서 못쓰게 됩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키우는 것도 콩나물을 키우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내면의 개안(開眼)은 그래요. 시루에 놓인 콩나물이 하루에 몇 번씩 주는 물을 먹고 자라는 것처럼, 콩나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물이 꼭 필요한 것처럼, 여러분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책에서 얻는 지식이 꼭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콩나물은 절대로 물을 껴안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콩나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물이 꼭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물이 콩나물 사이로 설렁설렁 지나가게 만들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콩나물이 물을 안고 있다면, 금방 썩어버립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는 지식을 안고 있으면 여러분 자신이 썩어버려요. 

적어도 인간의 내적인 성장을 염두에 둔 지식은 그렇습니다. 콩나물의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어요. 아무리 아까워도 그냥 설렁설렁 지나가게 내버려둘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콩나물 사이로 물이 설렁설렁 지나기지만 때가 되면 자라 있는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자라는 것입니다.

마치 콩나물이 자신의 성장을 위하여 물이 지나가는 그 순간에 충실하듯, 여러분도 순간순간의 느낌에 충실하라는 말이었습니다. 변화는 순간이지만, 그 과정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207-209)

저자의 콩나물에 대한 예는 우리에게 배움에서 기억이 지대한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님을 적절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

콩나물이 자라기 위해 물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 물을 잡고 있으면 썩어버리게 된다. 우리의 배움에 지식에 대한 내용이 필요하지만 그 지식만이 모든 것인양 잡고 있으려하면 기억일 뿐이지 배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배움이란 것은 콩나물이 물을 지나가게 하면서도 잘 자라나가듯이 지식들을 통해 기억이아니라 그러한 지점과 자신의 체험적 사고와 경험들을 통해 그리고 이전의 지식들과의 어울림들을 통해 자신이 성장해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마지막 줄에서처럼 '그 과정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며, 배움은 듣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을 자신이 체험하여 자기의 것으로 체득, 체화해 나가는 과정이 매우 큰 역할을 차지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콩나물이 자라는 것이다. 공부에 대한 기술보다는 몸으로 부딪히는 과정 즉, 스스로 경험해 나가는 과정 그것이 우리의 배움이라는 점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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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좋아하는 이성은 자신과 같은 감정을 생기게 만들기 위한 전략이다. 

우선 혼자서 먼저 좋아하는 상태에 놓여있고, 상대의 마음을 얻기위해 누구나 해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상대의 동선을 조사하여 알아내고, 움직이는 시간, 동행자의 유무, 이동할때의 시간의 촉박성에 대해서도 알아낸다.

업무에 의한 이동인지, 출퇴근인지, 취미활동에 의한 이동인지 자주 이동하는 동선에 의한 이동인지 등에 관해 알고 있으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위해 의심없는 눈도장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조사를 위해 반드시 따라다니며 스토킹할 필요는 없다.

지인들이나 직장 동료나 때로는 스케쥴을 구할 수 있을것이고, 때론 유추의 힘으로도 알아낼 수 있을것이다.

연애 분야에서 이런 방법은 책에서도, 영화에서도 종종 다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만큼 성공확률을 높이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아름다운 파괴>에서 읽은 표현 덕분이다. 

'우연은 그냥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연은 묻고 또 묻는 사람에게 그야말로 우연히 일어납니다. 준비한 사람에게만 의미있는 우연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생각되었던 것들에 대해 묻고 또 묻다보면, 문득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18)

저자는 우연은 '우연'이 일어나기 위한 전제 조건을 갖출때 일어나게 되고 제대로 일어나게 될 수 있다고 표현한다.

물론 노력 없이도 일어나는 우연이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런 우연을 제외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우연이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만들어 가야하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연이 필연이 되기 위해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러 앞서 언급한 감정에 대한 필연을 만들어 내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또 하나의 표현을 보자.

'서로 끌리는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끌린다는 것은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이고, 끌리는 둘의 자연스런 만남을 통하여 합일이 있을 수 있어요. 합일은 절대로 강제적으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자연스럽고 자발적이어야 합니다.'(145)

저자는 끌리는 감정은 동질감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서로가 느낌을 가질때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합일이 되어간다고 한다. 이러한 표현은 서두에 언급한 연애 전략에 대해 공감을 가지게 하였다.


물론 '우연을 가장한 만남으로 만드는건 자연스런 발생이 아니지 않은가.. 그것이 자발적 감정이 되게 만들어 낸것이기에 절반의 인위적인 발생인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생각을 정리해 보자.

'우연은 묻고 또 묻는 과정, 즉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만드는 것'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던 부분에 대해 건전한 질문을 던지면, 관념의 특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다'

'끌리는 감정은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것이고, 이것은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것'이라는 표현에 공감한다.


정말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적용하기 힘든걸까?

절반의 인위적인 발생은, 우연을 묻고 또 물을 때 발생하듯이 상대에 대한 연구, 조사하는 과정 즉,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깊이 바라보는 과정에서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묻고 묻는 과정은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게 되기까지 우연을 발생시키는 질문인 것이다.

물론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만 노력한다는 것은 자신을 모두 죽이는 것이기에 문제가 될 수 있다. 사람은 살아온 시간동안 축적한 습관과 성향을 쉬이 지속적인 변화를 시키기 어렵다. 그렇기에 나의 성향들을 죽여버리고 감정만 얻어내는 것은 문제가 된다.

그런 비정상적 노력이 아닌 것에 한해서 노력하면 상대의 관점에서 늘 일어나는 일상속에서 우연적으로 눈도장을 찍어가면서 익숙해지고 그렇기에 드는 감정애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되며, 관심이나 호기심이 발생하여 관찰도 하게 될 수 있다.

그렇게 될때 대화를 하면서 서로가 자신을 보여주는 시간을 가지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자연발생을 시키는 과정이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은 첫눈에 반하는 경우일때를 제외한다면 노력에 의한 자연발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노력하여 준비할 때 우연한 기회를 바로 볼 수 있는 해안을 가지듯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역시 노력하고 준비하여 서로를 진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억지스러워 보인다면 억지로 끼워 맞춘것 맞다.

철학적 사유는 기존의 것들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하여 분리, 병합, 재조합들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결론을 가지게 하지 않던가!!!

'일본의 빌게이츠'라 불리는 손정의 회장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 자신은 매일 아침 30분간 상관 없어 보이는 둘 이상의 단어를 조합하여 아이디어 발상을 한다고 했다.


나의 억지스러움은 철학적 사유와 손정의 발상법에 한참을 미치지 못하긴 하지만 노력의 일환으로 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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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동화독법>을 읽고 있다. 

10편의 동화와 우화들을 소재로 한 책인데, 절반정도 읽은 시점에서 중간정리하는 생각으로 앞장을 후루룩 넘겨본다. 


저자의 의도는 어린시절 읽었던 동화나 우화에서 보편적인 교훈점이 아닌 세세하게 다시금 읽으며 생각해 본점들에 대한 담론을 가져보자는 점이다.

또한 속도의 시대에 시간의 흐름보다 더 빨리움직이라는 시대의 요구에 반해서 오롯이 여유를 가지며 읽어보는 시간, 세뇌가 아닌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가져보자는 것이다. 


절반인 다섯 편을 읽은 시점에서 써보는 이유는 저자의 의도에 부흥하려는 이유도 있고, 좀 더 천천히 되새겨보며 읽어나가기 위한 이유에서이다. 450여 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이다보니 다 읽고나면 앞쪽은 가물가물해 질듯해서.

성인이 책을 다 읽고 덮은 그 시점에서 기억하는 내용은 대략 47%정도라고 한다.(솔직히 나의 경우로 생각해보면 20~30%정도 밖에 안 되는것 같다.) 우리의 기억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들은 이유가 다양하겠지만, 우선 또렷이 자신의 앞선 경험과 부합하거나 떠올리게하는 내용이거나 아니면 최근의 기억들이 가장 큰 이유들일 것이다. 그렇기에 중간쯤에서 다시 앞으로 넘겨본다.


읽은 다섯편의 동화, 우화는 '미운오리새끼' '신데렐라' '솔로몬의 지혜' 인어공주' '토끼전'이다.

개인적으로 더 좋았던 부분은 미운오리새끼와 솔로몬의지혜 그리고 토끼전이었다.


특히 솔로몬의 지혜에서 저자의 표현으로 바라보는 솔로몬의 의도는 좋은 자극이 되기도 하였다.

진정한 지혜의 왕은 아이의 생명을 기준으로 대했기에 사용하였던 표현이 "저 여자가 그 아이의 어머니이다"이다.

'누구의 아이인가?'라는 주체가 어머니가 아닌 아이, 특히 아이의 생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그 현명한 대처는 큰 교훈이 된다.

두 여인이 서로 자신의 아이라는 주장을 할 때, 모든 사람들은 진짜 엄마를 가릴것을 생각하는 것에 반해 솔로몬이 중히 여긴것은 '아이의 생명'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솔로몬의 아이를 반으로 잘라 나누어 주라는 명령에 감정이 아이에게 동하여 양보한 여인에게 아이를 넘기게 된다. 

성경에는 '아이의 엄마'라는 표현은 없다. 다만 생명을 지닌채 아이를 상대 여인에게 주라는 의미의 표현이 있을 뿐이다. 설사 아이의 친 어미가 아니어도 이정도의 마음이라면 아이를 잘 키우려 할것이란 생각에 동조할 것이다.

진짜 어미일 것이나, 아니라 하여도 어쨌든 아이는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친어미든 아니든 그런 결정을 할 수있는 여인이라면 아이에게 애정을 가지고 키워 나갈 것이란 점이다.

주장하는 이들의 의도를 넘어 바라보는 관점과 넓고 깊음은 진정한 지혜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저자는 이러한 에피소드의 결말의 표현은 "왕을 두려워하였다"라고 하였다. 백성들은 살아있는 아이를 반으로 잘라서 나누어 주라는 명령과 칼의 등장에 왕을 두려워한것도 물론 있을 수 있으나, 왕의 현명함에 대한 존경에 두려움이었을 것이리라.

또한 하느님께 받은 지혜이기에, 하느님에 대한 경배의 차원에서 느끼는 경건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글은 카페에 앉아서 종이에 썼는데, 돌아와 타이핑하면서, 혹시나 하고 성경어플을 설치해서 열왕기상 3:28 열어보니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카톨릭성경어플에서는 '임금이 이러한 판결을 내렸다는 소식을 온 이스라엘이 들었다. 그리고 임금에게 하느님의 지혜가 있어 공정한 판결을 내린다는 것을 알고는 임금을 두려워하였다'라고 되어있었다... 쓰면서 이런생각을 했다면 좋았을걸..ㅎ 그리고 성경의 종류가 매우 많다는 걸 알게도 되었다. 번역자의 차이에 대한 그런 것일까..)


그럼에도 솔로몬은 나이가 들어 '지혜의 왕'이란 수식어를 무색하게 한다. 그의 변절의 내용에 대해 저자는 '거울'의 예를 사용하여 우리의 교훈을 생각해 보게 한다.

'진실을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 이러한 거울은 '유리로 만든 거울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거울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있다'는 것이다.

거울을 자주보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보거나 아예 보지 않는 사람은 없듯이, 우리 역시 마음의 거울을 자주 들여다 봄으로 스스로 진실된 사고와 행동을 하자는 교훈이다.

이러한 내용이라면 '철학'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질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며, 자신을 다듬어 가기위해 자신의 주위의 삶과 환경과 표현, 행동들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해 볼때, 자신을 제대로 바라 볼 수 있으며, 좀더 진실되게 다가가 인간에게 있는 양심의 작용이 어떻게 발휘되는지  알아갈 수 있는 것이리라.


'깨달음'이란 것은 언제 어디서나 발생하게 된다. 그 시점이 철학하는 시점이며, 의도적으로 그러한 순간들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 철학자라 표현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불교에서 '돈오'와 '점오'가 있다.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차이에 대한 단어들인데, 돈오는 단번에  깊은 뜻을 깨닫는것을 말한다. 즉 순간적인 찰나에 깨달음을 얻는것이다. 점오는 점점깊이 깨달아가는것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수련하고 알아가면서 깨달아가는 것이다. 깨달음에 대해 어느것이 맞는지 논란의 대상이기도 하다고 한다. 

철학의 깊이에 대해서는 모른다. 철학도도 아니고 종교인도 아니며 깊은 철학에 참구해 본적도 없다. 다만 '지혜에 대한 사랑'이란 뜻을 지는 철학이란 단어를 생각해보는 부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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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드는 생각은 '웃긴다'이다. 이글을 쓰려고 생각했을때만해도 처음 언급된 '미운오리새끼'에 대해 쓰려고 하며 그 내용들의 페이지들을 다시금 넘겼는데, 우연히 펼친 페이지의 솔로몬의지혜 내용을 적었다.

읽은 내용주에 가장 인상받은 것은 '미운오리새끼'였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적은 내용은 다른 내용.

글을 적어보면서 종종 경험하게 되는데, 그럴때마다 원래 쓰려한 내용을 넘어가는 게 보통이다. 지금도 그렇듯이..

이러한 상황이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재밌기도 하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에 대본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듯, 글을 쓰는 것도 그런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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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고 익숙한 모든 것으로부터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을 때 그게 집이든 감정의 응어리든, 외면의 것이든 내면의 것이든, 진리를 찾아 여행을 떠났을 때,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깨달음의 과정으로 여기고 마주치는 모든이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다면 무엇보다도 인정하기 힘든 자신의 모습을 용서할 준비가 되었다면 진리는 당신에게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2.05.55)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무엇일까? 
진리는 이전 문맥을 통해 해석해 보아야 한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 대한 용기 
깨달음의 과정으로의 배움 
인정하여 자신을 용서하는것 

우선 익숙한 것에서의 결별하려는 용기는, 그만큼 힘들다는 표현이다. 익숙한것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엄청난 두려움이 따른다. 그렇기에 사람은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안주하는 것만큼 편한 생활은 없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익숙한 것은 그것만이 진리라는 착각을 주게 되어 인간의 정신을 고정시킨다. 그러니 그만큼 안락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움에 대한 극한의 반대 입장으로 진실한 눈으로 보는것을 방해하게 된다. 
깨달음의 과정으로의 배움이란것은, 새로운 아니 이미 존재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것들을 통해서 옳은 것이 절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또 다른 표현이 있을 수 있다는 다양성의 받아들임과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경험의 접목은 새로운 해석의 장을 마련해 줄 수 있게 된다. 첫번째 내용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의 과정을 달리 볼 수 있는 눈을 전제로 하기에 새로움의 자극은 깨달음 즉, 조금더 진리에 다가가게 해주는 도구로서의 역할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인정하여 자신을 용서하는것. 갖혀있으면 있을수록 자신을 바라보지 못할 확률이 높으며 바라보더라도 비뚤어진 사고로 바라보고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강박적인 해석을 뒤따르게 할 수 있기에 자신의 문제로 귀결시킬 수 있다. 물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벽을치고 타인을 모두 틀리다고 자신의 마음을 닫아버리는 경우도 발생될 수 있다. 인정한다는 것은 잘못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도 있지만, 다양성의 공존에 의해 모두 옳을 수도 모두 그를수도 없다는 점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 즉 심적 상태의 넓고 깊은 평온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인가? 
다양한 것에 대한 경험과 그로 인해 알고 깨닫게 되는 것들에 의한 평온함의 깊이있어짐과 넓어짐이라 표현하게 될 수 있을까.. 

영화에서 표현한 '진리'를 그렇게 해석하고 싶다. 
왜냐하면 여행은 새로움에 대한 놀라움과 그것들과의 소통으로 인한 인정과 올바른 비판적 수용 그리고 그러한 것들로 인한 새로운 해석과 앎.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의 부드러워짐과 인간적 불완전성에 대한 올바른 견해와 견해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진리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유일하며, 이슬람, 힌두 관점에서도 비슷하고, 불교, 유교적 관점에서 깨달음에 의한 성장이기도하다. 이러한 것들로 볼때 이러한 종교적 진리 또한 어느정도 이상의 해석의 문제를 안고 있다. 
다시말해 유일신에 의한 진리적 유일성이 아니라면, 깨달음의 과정이 중요하다. 더해서 유일한 진리에 대해 알기 위해서도 우리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현재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적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음으로 인해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서양의 산업발달에 의한 정상적 상태로 바라보면 기독교는 분석하고 판단하여 꿰둟어보는 통찰력을 길러서 그것으로 성장, 발전시켜 나가는 것. 종교에 대한 해석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시절이 지나가며 이제는 그에대한 부작용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그것이 중용이 필요하고, 마음 정신적 수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것이다. 그들이 동양적 사상에 심취하고 있다고 하여 그들이 서양 사상을 배척하려는 것이 아니다. 유지하면서 조금보태는 것이다. 즉 보완시키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 여행은 종교적으로 해석한 진리에 대한 의미도 포함할 수 있는 '진리'의 영역을 설명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개풀뜯어먹는 소리가 아니라, 여행은 다양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문화와 전통과 사상을 접하고 체험하게 해준다. 그렇기에 그러한 경험은 통찰력에 가까운 해석력과 수용능력을 배양하여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고대의 여행도, 지금의 여행도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여행이라면 이정도 되는 것이 아닐까.. 관광이 아닌 여행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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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라이 쌓여있는 낙엽위에 누워 본다.

"거기 포근하니?"

"응"

"너는 그것을 느낄 수 있구나."

"검거나 회색보다 훨씬 푹신하고 따스하네!"

"그렇구나. 니가 좋다고 하니 나도 기분이 좋은데, 난 니가 늘 거기에 있어서 마음이 불편했거든. 차가울텐데.. 불편할텐데."

"ㅎ 너의 표현으로라면 바닥이지만, 여긴 내가 늘 살아가는 공간이야. 걱정마 넌 늘 움직이지만 난 낮에만 있잖아!"

"굳이 따스한 것도 아니면서 날 위해 따뜻하다고 해 주는 구나.. 고맙다 친구야~"


내 입장에서만 생각한 바닥이 바닥이 아니었다. 

늘 추울거란 아련함은 나만의 걱정이었다. 

그래도 난 내 그림자에게 좀더 포근한 낙엽위를 드러누워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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