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잃어버린 남자들의 빙충맞음으로 여자들이 당한 수난이었다. 그렇게 고통받은 여자이 도대체 몇 명일까? ..
3만…..아니 5만, …… 7만 ….. 그 전선이 얼마나 넓은데, 10만 …… 심재모는 더 이상의 수를 헤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다 어찌 된 것일까. 분명 해방이 되었는데도 그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한번도 거론된 일이 없지 않았는가. 심재모로서도 그건 너무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임시정부가 귀국해 대대적인 환영식을 벌이고, 광복군이 의기양양하게 귀국해서 기세를 올리고, 죽음을 면한 학도병들은 끌려갈 때와는 정반대의 당당함으로 개선 아닌 개선을 앞세우고 돌아와 조직체를 만들고 법석이었는데, 위안부라는 존재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회는 여자들이 당한 일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겨 잊어버리고 말았을까. 위안부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면 나라 체면을 깎고 위신을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의도적으로 엎어버리고 만 것일까. 여자들 스스로가 창피스럽고 부끄러워 남모르게 꼭꼭 숨어버린 것이었을까. 28-29

무신 바람이 그리 빨를 것이며, 무신 불길이 그리 빨를 것잉가. 고것이야 다 서로 서로 맘이 통혀서 지절로 되는 기맥힌 일 아니겄능가? 근디 말이시, 이 시상 일얼 내다보는 디는 그 눈이 볽아야 써. 둠벙물에도 다 그 줄기가 있디끼, 이 시상 일에도 그 뿌랑구나 맥이 있는 법이시. 무신 일이고 뜸금없이 터지고 맥히는 것이 아니라 다 연관이 있는 법잉께, 그 뿌랑구럴 찾아내고 맥얼 짚을 줄 알어야 시상 일이 지대로 뵈는 법이시. 요분에 터진 일도 그냥 터진 것이 아니라 제주도서 일어난 쌈허고 연관되고, 제주도의 쌈언 단독선거허고 연관되고, 단독선거 반대허고 일어난 것은 재작년 일허고 연관되고, 재작년 일은 해방되고 나라가 반으로 갈라진 디로 연관되는 것 아니겄능가? 나 말 알아묵겄능가? 75

“.. 우리가 사는 것이 혼자서만 살아지는 것이 아니고 서로서로가 서리서리 얼크러지고 설크러져 사는 것인디, 갑오난 때나 지끔이나 앞으로 나서서 싸우고, 죽어가고 헌 사람덜이 워디 자기 혼자 잘살겄다고 그리 혔간디? 잘못된 시상 바로잡아 모다 잘살아보자고 헌 일이제, 앞으로 나슨 사람덜이 믿을 것이 머시겄능가? 자기덜 몸띵이겠는가, 손에 든 총이겄는가? 아니여, 아니여, 고런 것덜 아무것도 아니고, 뒤에 남은 사람덜 맘얼 믿는 것이여. 뒤에 있는 수수많은 사람덜 맘이 자기덜허고 똑같다고 믿는 그 맘으로 쌈도 허고, 죽기도 허는 것이여. 그 믿음이 읎음사 무신 기운으로 싸와지고, 무신 강단으로 죽어가겄어. 지 목심 아껍덜 않은 사람이 워디 있냐고.” 77

문상길 중위의 마지막 유언
“스물 두 살의 나이를 마지막으로 나 문상길은 저세상으로 떠나 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하에 한국 민족을 학살하는 한국 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헤어져 떠나갈 사람의 마지막 바람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81

찬 바람이 일면서 쫄깃서리는 제맛이 나기 때문에 천생 뻘일은 겨울이 제철이었다. 꼬막은 뻘밭이 깊을수록 알이 굵었다. 뻘밭이 깊으면 발이 그만큼 깊이 빠지는 걸 알면서도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건 용기가 아니었고 무모함은 더구나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생계였다. 꼬막을 잡아야만 하루 목숨을 잇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인네들은 살을 찢는 겨울 바닷바람에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어올려 맨살을 드러낸 채 뻘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 앞이 흰 널빤지 위에 왼쪽 다리를 무릎 꿇어 몸을 싯고, 왼손으로 단지와 흰 널빤지끝을 함께 잡고, 오른발로 뻘을 밀며 오른손으로 꼬막을 더듬어 찾는 겨울바람 속의 여인네 모습은 그대로 극한에 달한 빈궁의 표본이었고, 모진 목숨의 상징이었으며, 끈질긴 생명력의 표상이었다. 아니 그것은 눈물이고, 아픔이고, 한이었다. 108-109

가난이란 육신을 배고프게 할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배고프게 만드는 것이다. 최소한의 굶주림을 모면할 길이 없는 빈한 속에서 배움을 얻을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봉건사회의 착취계층은 그 상관관계를 교활하게 이용함으로써 지배계층으로서의 지위까지 대대로 향유할 수 있었다. 대중착취로 부를 축적함과 아울러 대중무지화로 사회 의식이 잉태될 씨부터 말살해 나갔다. 대중의 무지는 개별적인 굴종과 기회주의만을 낳을 뿐이었다. 그 토양 위에 착취계급의 영속적 지배가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무지한 대중은 응집력이 없는 모래와 같다. 모래밭을 응집력을 가진 흙으로 변화시키려면 끊임없이 물길을 대야 하는 것이다. 그 물길이 바로 가르침이고 일깨움이었다. 사회의식을 획득해 가고, 확대해 가는 대중의 응집력-그것은 혁명의 무한한 잠재력인 동시에 원동력이었다. 일제치하를 겇치며 대중들은 일단 왕권의 절대신성이라는 허위를 깨닫고, 더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게끔 되었다. 그런 의식의 변화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대중이 깨닫게 된 인식의 발전이었다.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봉건사회의 거부, 그 인식은 바로 그와 반대되는 정치, 사회구조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것은 모래가 흙으로 변해가는 대중 응집력의 싹틈이었다. 그 상태에서 대중들이 맞이한 것이 해방이었다. 해방은 대중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세상의 실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들의 순박하고 단순한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대중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살기 좋은 세상’이 반봉건적 정치, 사회적 혁명을 거쳐야만 이룩될 수 있다는 필연적 사실까지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대중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일제치하의 극렬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싹터오르는 대주으이 응집력을 혁명의 원동력으로 바꿀 기회를 잃었던 것이고, 해방이 되자마자 그 기회를 잃었던 것만큼 더 열정적으로 대중의 힘을 혁명의 힘으로 불붙여나아가는 과정에서 미제국주의와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134-135


의식화의 필연적 요인 발견, 인간적 신회의 바탕 마련, 점진적인 의식화 작업 착수, 이 세 단계를 거쳐서야 비로소 조직화에 이르게 되는 과정은 최소한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211


단기 4282년 새해는 1월 1일부터가 아니라 2월 11일부터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그 날은 바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본격적 활동이 공개된 날이었다. 301

“.. 일본놈덜헌테 붙어묵은 놈덜이 한둘이 아니고 천지에 쫘악 깔렸는디, 고것덜얼 싹 다 벌헐 수 있을랑가 몰라?”
..
“관공서고 워디고 간에 심쓰는 자리넌 다 그 똥 묻은 잡것덜이 차지허고 앉었는디, 고것덜얼 몽땅 콩밥 믹이자고 하먼 나랏일이 워찌 되겄냐 그것이여. 우리 벌교바닥만 해도 읍사무소고, 경찰서고 싹 다 문 닫아뿌러야 헐 것 아니냐 그 말이시.”
..
“근디 말이여, 친일파 때레잡는 법얼 맹근 것도 중허고 존 일인디, 토지개혁인가 농지개혁인가 허는 법 맹근다는 소식은 신문에 읎능가?”
“고것은 읎는디.”
“참말로 사람 환장허겄네웨. 친일파 때레잡는 법보담 그 법이 먼첨 맹글어져야 지대로 되는 순서 아니겄어?” 306-307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인간은 교육으로 재창조죌 수 있으며, 그건 소년기 교육으로 결정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317

청소도 교육이라고 강조한 일본교육의 모습이 변질 없이 그대로 시행되어 어린것들에게 불필요한 노동을 강요한 결과가 바로 그 복도의 반들거림이었다. 320


1946년과 1947년, 2년 동안 무슨 유행처럼 일어났던 교회짓기는 바로 월남한 목사들의 터잡기였다. 350


“.. 참 자네 혹시 해방. 직후에 대표적이 ㄴ정객들이 내세운 정치관을 비교해 본 적이 있는가?”
“글쎄에, 어떤 식으로 말인가?”
“응, 해방이 되자마ㅏ 새 나라 건설을 전제로 제각기 내놓은 그 사람들의 정치설계를 비교 대조해 보는 거지. 그걸 해보면 현 정권의 문제점이 환하게 드러나네. 해방 직후에 서로 나 잘났다는 정객들이야 부지기수였지만, 그 조직이나 세력으로 보아 네 사람으로 좁힐 수 있잖겠나. 건준을 대표하는 여운형, 임정을 대표하는 김구, 한민당과 손잡은 이승만, 공산당의 박헌영, 그렇겠지. 그런데 해방이 되자마자 김구는 중국땅 중경에서, 여운형과 박헌영은 각각 서울에서 건국강령이라든가 또다른 이름으로 정치설계를 공개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말이네, 세 사람이 제각기 다른 장소에서, 각자의 판단으로 작성한 그것들이 기막힌 일치점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네. 세 사람 모두 토지개혁 단행과 친일파나 민족반역자 처단을 내세운 것이 그것인데, 그것도 각각 열 가지 정도씩이 되는 항목 중에서 그 두 가지를 맨 앞으로 내세워 첫 번째 두 번째 항목으로 잡은 것까지 똑같아. 공통점은 그것뿐만이 아니네. 그 두 가지를 실행하려는 방법까지 똑같에.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하고,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들은 엄중처단하여 일체의 정치참여를 못하게 한다는 것 말이네. 물론 어느 사람은 거기다가 더 강경하게, 평생 동안 투표권도 박탈하겠다고 했지. 그 세 사람이 보인 일치점은 무엇일까. 우연의 일치일까? 그건 절대로 우연의 일치가 아니네. 그거야말로 현실을 직시한 필연의 결과였지. 세 사람의 정치의식이 뛰어나서 그런 일치를 보인 게 아니고, 그 두 가지 문젤 해결하지 않고선 저이가로서 대중들에게 지지나 인정을 받을 수 없게끔 현실상황은 분명했던 거지. 그런데 말야, 그런 확실하고 분명한 정치태도를 표명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바로 이승만이야. 그 무정견한 약삭빠른 기회주의가 미군정과 한민당에 이중으로 업혀 결국 정권을 탈취하게 되었으니, 뭘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 영감탱이야말로 가짜 중에 가짜지.” 손승호는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빈 잔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네. 내가 거기서 등을 돌린 건 그와 반대로 자본주의를 선택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더군다나 무조건적인 반공주의에 협력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결국 상황이 이따위로 획일화되고 말았으니, 결과는 그 꼴을 면할 수 없게 되었거든. 이 직장에 계속 붙어 있으면 앞으로는 더욱더 의무화된 강요를 받아 반공교육을 시키며 적극적인 협력자로 타라갷 갈 거고. 내가 설 자리가 없어. 최소한 날 지키려고, 강요당하는 억지의 삶을 살지 않는 방법은 …… 우선 이 직장을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네.” 그는 침통하게 말했다.
..
“그래, 생계 해결이라는 문제와 구분될 수만 있다면 그게 좋은 방법인지도 모르지. 앞으로의 교육은 자넨 물론이고, 의식 면에서 평범한 교사들도 견디기 어려울 만큼 반공체제로 개편될 테니까. 그건,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스스로는 대통령이 아닌 국부로 추앙받기를 원하는 시대착오적인 본건주의자 이승만이 가장 중대하게 생각하는 정책이니까.”
손승호는 쓰디쓰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릴 뿐 더 말이 없었다. 364-367


심재모는 의식적으로 유주상을 ‘유 단장’이라 불렀던 것이다. .. 그 혈색 좋은 허연 얼굴에는 교활과 간사함이 언제나 감돌고 있었다. 그의 교활기는 염상구의 교환과는 사뭇 다른 냄새를 풍겼다. 염상구의 교활은 단순하면서도 썩는 냄새는 나지 않는데, 그의 교활은 복잡하면서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염상구에게는 주먹패의 의리나마 있지만 그에게는 돈과 권력만을 좇는 파렴치함밖에는 없는 것으로 보였다. 382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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