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넘었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어머니는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아버지와 한바탕 벌인 말다툼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주엥도 쉽게 멈춰지지 않았고, 식탁을 치우고 밀납을 입힌 식탁보를 훔쳐낸 뒤에도 그칠 줄을 몰라싿. 어머니는 연신 아버지를 비난하며 매번 화가 날 때마다 그랬듯이 쥐구멍만한 부엌-식당과 식품점을 겸하는 가게와 2층으로 연결된 계단 사이에 끼여있는-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버지는 묵묵부답 창가 쪽으로 고개를 발작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아직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낯설고 탁한 목소리로 악을 쓰고는 내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주넉으로 때리며 식당으로 질질 끌고 나왔다. 나는 2층으로 도망쳐 침대로 몸을 던지고는 베개 속에 머리를 파묻었다.이내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살려!" 하는 목소리가 식당 쪽 지하로부터 들려왔다.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온 힘을 다해 악을 썼다. "사람 살려요."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어개인지 목덜미인지를 틀어쥐고 있었다. 아버지의 손에는 평상시 나무 둥치에 박혀 있는 낫이 들려 있었다. 지금 기억나는 건 울음소리와 비명뿐이다. 잠시 후 우리 세 식구는 다시 부엌에 모였다.  7-8


아버지는 "넌 왜 울어.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다고?"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머니는 "자, 이젠 끝났다."라는 말을 했다.

1952년 6월 15일의 일이었다.

훗날 몇몇 사람에게 나는 "내가 열두 살 무렵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려 했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 말을 털어놓고 싶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9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만 해도 나는 자세한 부분까지 낱낱이 기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실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란 그저 그때의 분위기나 부엌에서의 각자의 위치, 몇 마디 말뿐이었다.  10


나는 정신분석이나 가족 심리학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위압적인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죽음으로 위협해서 그녀에 대한 복종심을 파괴한 아버지 등등. 이러한 초보적 결론을 내리는 것이라면 이미 옛날에 어렵지 않게 얻어냈을 것이다. '그건 가족에 대한 정신적 외상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라거나 '유년기의 신의 이미지가 그날부터 몰락한 겁니다.'와 같은 말은 그 장면에 대한 어떤 해석도 하지 못하며, 그 순간 내게 떠오른 '재수 옴 붙었네.'라는 표현만이 그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다. 추상적 단어들은 그저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21


당연히 현실을 추적하는 대신 현실을 생산하고자 하는 옛날 이야기는 꾸며내지 말 것, 추억 속의 이미지를 거론하여 번역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이 이미지를 다양한 접근 방식을 통해 스스로 속살을 드러내는 자료로 취급할 것. 한마디로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될 것.  27


인생의 시간은 '무엇 무엇을 해야 하는 나이'로 구분된다. 영세를 받을 나이, 손목시계를 선물 받을 나이, 여자 아이는 처음으로 파마 머리를 할 나이, 남자 아이들은 첫 양복을 입는 나이, 첫 월경을 하고 스타킹을 신는 나이.

식사주엥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는 나이, 담배 필 권리가 있는 나이, 음담패설을 할 때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있는 나이. 

직장에서 일하고 댄스 파티에 가고 '데이트'할 수 있는 나이, 군대 갈 나이, 오락 영화를 볼 수 있는 나이, 결혼하고 아기를 가질 수 있는 나이, 검은 옷을 입는 나이, 더 이상 일하지 않는 나이, 죽는 나이.

이쯤 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되고 모든 것이 완성 된다.  42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는 말, '발전'되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는데, '발전'이란 거역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불가항력의 힘이라고 여겨졌다. 그 증거도 무수히 늘어나서 플라스틱, 나일론 스타킹, 볼펜, 소형 오토바이, 레토르트 수프, 그리고 의무 교육 같은 것이었다.

나의 열두 살은 이런 세상의 법칙과 관례 속에서 보내졌다. 다른 것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43


남들처럼 살자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목표이자 성취해야 할 이상이었다. 개성은 일탈, 심지어 조금 미친 것 같다는 증세로 간주되었다.  48


당시에는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실망했을 때는 '멍청했었지'. 불만이 있을때는 '나빴었지'같은 표현이 고작이었다.  51


(카톨릭 사립학교 시절) 사진이 있는 연애소설을 읽거나 일요일 오후 포토 회관의 댄스 파티에 가는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번도 억압된 삶을 산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63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그들의 궁핍한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6월 일요일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 이상 인식하지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모멩 배어버렸기 때문이다.  98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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