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슈퍼마켓에 가고, 영화를 보고, 세탁소에 옷을 맡기러 가고, 책을 읽고, 원고를 손보기도 하며서 저노가 다름없이 생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몸에 밴 급곤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끔찍스럽게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상마저 내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11


신문에서 그 사람의 나라에 관한 기사를 읽는다.  12


책을 읽을 때 나의 마음을 휘어잡는 문장은 남녀관계를 묘사한 대목이었다. 그런 내용은 내게 A에 관한 무언가를 가르쳐주었고, 사실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들에 확신을 주었다. 가령,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에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포옹할 때 눈을 지그시 감는다"라는 구절을 읽으면, A가 나를 안을 때 그렇게 하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 씌어 있는 그 밖의 다른 내용들은 그 사람과 다시 만날 때까지의 빈 시간을 메워주는 수단일 뿐이었다.

약속 시간을 알려올 그사람의 전화 외에 다른 미래란 내게 없었다. 내가 없을 때 그의 전화가 올까봐 그가 알고 있는 일정에 한해서, 일에 관계된 어쩔 수 없는 용건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외출을 하지 않았다. 또 행여 전화벨 소리를 못 들을가 진공청소기나 헤어드라이어를 사용하는 일조차 피했다.  13


그 사람을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해서 우리의 약속이 깨지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에 시달렸다.  15


나는 이 남자와 함께 침대에서 보낸 오후 한나절의 뜨거운 순간이, 아이를 갖는 일이나 대회에서 입상하는 일, 혹은 멀리 여행을 떠나는 일보다 내 인새에서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음을 가지러 부엌에 들어가서 문 위에 걸려 있는 벽시계를 쳐다보며 "두 시간밖에 남지 않았어" "이제 한 시간..." 혹은 "한 시간 후면 저 사람은 가고 나만 혼자 남게 되겠지"하는 말들을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도대체 현재란 어디에 있는 걸까?"하고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16


나는 그 사람이 내게 남겨놓은 정액을 하루라도 더 품고 있기 위해 다음 날까지 샤워를 하지 않았다.  17


그날 밤을 나는 그 사람의 품 안에 잠들어 있는 듯한 반수(半睡 반반 잘수) 상태로 지냈다. 날이 밝자 그 사람이 내게 해준 말과 애무를 한없이 되새기면서 마비 상태로 또 하루를 보냈다...PER(파리와 외곽을 잇는 고속 전철) 안에서나 슈퍼마켓에서도 그 사람이 "당신 입으로 거길 애무해줘"하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런 몽롱한 상태에서 서서히 벗어나면, 나는 다시 전화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날짜에서 멀어질수록 고통과 불안은 점점 커졌다... 그의 전화를 받지 못한 채로 여러 날이 지나면 그 사람이 나를 떠난 게 틀림없다고 단정 짓곤 했다.  18


가끔, 이러한 열저을 누리는 일은 한 권의 책을 써내는 것과 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완성해야 하는 필요성, 세세한 것까지 정성을 다한다는 점이 그랬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서 글을 완성한 후에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이 열정이 끝까지 다하고 나면-'다하다'라는 표현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겠다-죽게 되더라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19-20


그 사람과 사귀는 동안에는 클래식 음악을 한 번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가요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예전 같으면 관심도 갖지 않았을 감상적인 곡조와 가사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23


일상생활에서 가끔 일어나는 귀찮고 짜증스러운 일에도 나는 무덤덤했다...

나는 도로가 막히거나 은행 창구가 붐벼도 조용히 기다렸고, 직원들이 불친절해도 화는 내지 않았다.  24


요즈음 나는 내가 매우 소설적인 형태의 열정을 지닌 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25


그 사람의 전화만 기다리며 고통을 겪는 일이 너무 끔찍해서 그와 헤어지기를 원했던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럴 때면 나는 그 사람과 헤어지는 순간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사는 나날들이 되풀이되겠지. 나는 결국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사람에게 다른 여자, 아니 여러 여자가 있다고 하더라도(그의 곁에 있는 여자가 한 명일 경우 내 고통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 사람과의 만남을 계속하기로 했다.  39


그 사람은 6개월 전 프랑스를 떠나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다시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45


몇 주 동안,

나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나 아침까지 깨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생각을 할 수도 없는 몽롱한 상태로 있곤 했다. 푹 자고 싶었지만 그가 계속 내 몸 아래에 있는 듯한 느낌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47


A가 떠난 지 두 달쯤 지난 후부터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A와의 관계에 관련된 것들은 무엇이든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다....

글을 쓰는 시간은 열정의 시간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립스틱을 고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 페이지부터 계속해서 반과거 시제를 쓴 이유는, 끝내고 싶지 않았던 '삶이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영원한 반복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52


글에는 자신이 남겨놓고자 하는 것만 남는 법이다....

써 놓은 글을 찬찬히 읽어보니,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59


그 사람이 돌아와주기를 간절히 기원했었다.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65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663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66




해설 - 지난 세기말부터 현재까지 프랑스 문학의 흐름을 정리한 문학사는 이 시기의 주도적 현상을 '자아의 글쓰기'라는 용어로 요약했다.  69


문학사에 따르면 자전적 예술이 이토록 확대된 것은 두 가지 현상이 맞물려 작동한 결과이다. 우선 소위 거대 담론의 붕괴로 인해 작가의 시선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구조에서 주체로 이동한 것이 그 첫번째 현상이라면, 이와 더불어 그간 예술적 관심사에서 외면당했던 평범한 개인의 낮은 목소리와 사소한 몸짓이 부각되면서 일상의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는 현상이 그 두번째일 것이다.  70

Posted by WN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