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빨갱이와 내통한 좌익분자

“.. 속이 차야 볼 것도 바르게 보는 눈이 생기고, 듣는 것도 바르게 듣는 귀가 생기는 법이다. …”(김사용이 아들 김범우에게 한 말 중에) 23

현시점에서 분단상황을 완화시키는 것은 사상대립을 완화시키는 일이고, 사상대립을 완화시키는 것은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일이고,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방법을 택하는 일이고,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법을 채택하는 것은 지주계층의 와해와 함께 사회경제의 새 구조를 탄생시키는 일이고, 사회경제의 새 구조가 탄생되는 것은 민권회복과 인권회복을 동시에 이룩하는 일이고, 민권회복과 인권회복을 이룩하는 것은 절대다수의 의사로 좌우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탄생시키는 일이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탄생되는 것은 민족통일에 이르는 첩경이라고 서민영 선생은 말했다. "그러나 이게 다 잠꼬대 같은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내가 모르지 않으니 비애가 아니겠나. 현 상황으로 내가 한 말의 반대방향으로 내닫고 있으니 암담할 뿐이네." 서민영 선생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는 분단상황의 경직화를 심히 우려했다. 현 정권의 주도세력인 친일 지주계층과 그 하수인 격인 민족반역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경찰과 군대의 기존 조직에다가, 50만을 넘는 월남자 태반이 그 조직에 분산 가세했고, 그와는 반대로 농민들의 원한에 찬 생존욕구가 팽배해 있는 상태에 200만을 넘는 귀환동포가 거기에 흡수 가세한 점을 지적했다. "귀환동포라는 사람들은 그 의식이나 식견이 토착농민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네. 그들도 물론 고향을 떠나기 전에는 대체로 농민들이었는데, 고향을 떠나서는 여러 가지 직종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네. 도시 막노동자, 공장이나 광산·부두 등의 하급노동자로 말이네. 물론 계속 농민생활을 한 사람들도 많은데, 문제는 그들의 생활환경이 우리나라와는 판이했다는 점이지. 우리땅이 폐쇄적이고 통제적이었던 데 반해 그 사람들이 산 일본이나 간도 만주 등지는 훨씬 개방적이고 자율적이었던 게야. 그들은 직종과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라 의식이나 식견이 달라지게 되었네. 경제에 대한 인식은 물론 사회주의나 자유주의 같은 사상적 영향도 많이 받게 된 거지. 그런 그들이 막상 고향에 어찌 되었지? 먹고살 땅이 있나, 잠을 잘 집이 있나. 의식이나 식견이 이미 달라져 있는 그들은 타관생활보다 더 나쁜 생계위협을 당하게 된 게 아닌가. 그들이 자구수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나. 월남한 숫자에 못지않게 월북한 사람들 대부분이 그들이고, 회정리 2구처럼 그들 중에 좌익 가담자가 월등히 많은 것 등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우리 사회의 이 대립적 갈등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란, 내가 보기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른 농지개혁 단행밖에는 없네. 보게, 지금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농토문제만 해결된다면 그 어떤 주의든 지지하고 따르게 되어 있는 상황이네. 이건 바로 갑오란 때와 똑같은 상황이란 말일세.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동학이라는 종교사상이 갑오란을 일으켰느냐, 농민들이 그 종교사상을 행동의 계기로 삼았느냐가 문제인 것이네. 다시 말해, 어떤 사상이 다수의 사람을 의식화로 무장을 시키는 것이냐, 아니면, 다수의 사람이 공동으로 처한 생활의 악조건을 타개하기 위해 어떤 사상을 필요로 하느냐 하는점일세. 그건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상호작용의 관계를 유지하는게 보통이지만, 갑오년 농민항쟁의 경우에 있어서나 지금 우리의상황에 있어서는 후자의 경우가 분명하네. 그 근거는 중국을 보면확실해지네. 모택동의 공산당 정부가 지난 2월 북경으로 옮기지 않았나. 그건 중국대륙의 공산화 성공을 뜻하는 것인데, 그게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의 능력이나, 아니면 봉건사회의 변혁을 원하는 절대다수 민중들의 수용이냐, 하는 점인데, 그건 먼저 후자의 작용인 것이네." 25-27

인생은 여행이고, 여행은 인생이다. 여행은 새로운 체험의 보고이며, 아름다운 추억의 산실이다. 여행은 삶을 풍요롭게 하며, 영혼을 살찌운다. 여행을 이런 식으로 호들갑스럽게 미화하고 과장한 글들에 김범우는 아무런 실감도 동감도 느끼지 못했다. 여행이 새로운 곳, 미지의 세계를 보고 느끼는 것이므로 그렇게들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자신은 단연코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이었다. 지구를 완전히 한 바퀴 돌았으니 말이다. 그 교통수단도 다양해서 배와 비행기까지 다 동원된 것이다. 그런데도 여행에 대한 보드라운 감상이나 낭만적 정서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아마 자의적 선택이 아니라 타의적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행위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일본에서 동지나해를 횡단해 버마에 이른 뱃길, 버마에서 이집트를 경유해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의 비행깃길,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 거기서 다시 인천까지 태평양을 횡단한 뱃길, 이렇게 따지고 보면 자신은 정작 가장 손쉬운 기차를 제일 짧게 탄 셈이었다. 중학 5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통학한 거리를 다 합친다 해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기차와 기찻길은 일본놈들이 시도때도 없이 입에 올리던 자랑거리였다. “우리는 미개한 조선 전역에 기찻길을 놓아주었다. 그 편리한 시설로 걸어다니는 미개생활을 면하게 하고, 타고 다니는 문화생활을 하게 해준 그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조센징은 천황폐하와 대일본제국에 대대로 감사해야 한다." 일본놈들이 뻔뻔스럽고도 자신만만하게 지껄여댄 소리였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서구라파 제국이 이룩한 산업혁명을 선망과 동시에 열등감으로 바라본 유일한 나라가 일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이 부러움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산업혁명의 성취가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이루어진 과학문명의 발달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차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지칠 줄 모르고 달리는 검은 철마, 그 신기한 기계에 대한 일본인들의 끈질긴 관심은 마침내 그들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만들어내게까지 되었다. 그들은 그 신기한 기계를 자신들이 소유한 모든 영토에 미친 듯이 설치해 나가기 시작했다. 본토와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대륙에까지 일본인이 가설한 철도는 끝없이 뻗어나갔다. 결국 서구라파 제국이 산업혁명의 결과로서 발전시켜 온 기차와 철도를 일본인들은 1차적으로 효과적인 식민지 수탈의 수단으로 이용했고, 2차적으로 대륙침략의 무기로 활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였고, 2차대전이 일어나게 되자 그 순서는 완전히 뒤바뀌어, 기차는 중국대륙을 본격적으로 침략하는 전투무기가 되었다. 일본은 본래 섬나라이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에 수많은 항구를 개발해 해상교통을 극대화시켰지만, 만약 철도시설이 없었거나 빈약했더라면 조선의 수탈을 그렇게 잔인할 만큼 철저하고도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었을 것인가는 결코 상상만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일본이 그 짧은 기간 동안에 그렇게 중국대륙 깊숙이 침략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철도시설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는 사실이다. 28-30

농민들은 인생살이의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세상판세 돌아가는 잘잘못이 무엇인지 환히들 알고 있어. 그러면서도 식자라는 것들처럼 소리 내서 말하지 않을 뿐이야. 말을 해도 그들끼리만 낮게 말하고, 그들끼리만 몸으로 하는 말이 있지. 배웠다는 자들은 그것도 모르고 거지 동냥주는 식으로 한다는 짓이 ‘농촌계몽’이야. 그거야말로 식자층이 일방적으로 농민들을 무시하고 멸시한 결과로 나타난 대표적인 행위지. 도대체 삶의 진정한 아픔이나 괴로움을 모르는 자들이 그것을 뼈저리게 체득하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무엇을 계몽한다는 것인가. 글자 몇 자 가르치고, 허황한 소리나 지껄이다 마는 것이 계몽인 줄 아는 모양인데, 내가 알아본 바로는 그 계몽을 고마워하는 농민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네. 고달픈 삶을 온몸으로 겪고, 온몸으로 부대끼고, 온몸으로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따위 어설픈 짓들 하다가 언젠가는 크게 당하게 될 거네. 그런데 말이야, 농민들이 온몸으로 하는 말, 그것을 딱 한마디로 줄일 수 있는 말이 없을까? 나도 생각해 볼 테니, 자네도 한번 생각해 보게.” 김범우는 하룻밤을 생각한 끝에 두 개의 단어를 조립해 낼 수 있었다. “이봐 전신언어나 생체언어가 어떤가?” “전신언어, 생체언어……? 응, 생체언어가 힘도 느껴지고 실감이 나서 더 좋은데. 그래, 생체언어, 그거 좋은 말이야. 농민은 생체언어로 사회에 발언하고, 생체언어로 삶의 진실을 표현하며, 생체언어로 역사에 참여한다. 됐어, 됐어, 아주 잘 어울리는 군.” 박두병은 소년처럼 기뻐했다. 33-34



14 물과 기름

반란군이나 야산대의 소탕이 지지부진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산을 발판으로 삼고 있는 그들이 전진, 후퇴를 신속하게 했고, 민간인들이 그들에게 음성적인 협조를 계속하고 있는 점이었다. 그런 상황에 대처하고 있는 이쪽에도 물론 문제점이 없는 게 아니었다. 먼저, 반란군이나 야산대를 일거에 소탕할 만한 병력 거의가자신처럼 마지못해 총을 잡고 있는 형편이었다. 4·3사건의 진압을 위해 제주도에 집중되었던 군대병력이 여순반란의 돌발로 분산된 채 제주도는 제주도대로 전투가 계속 중인 데다가, 여순반란을계기로 수많은 지역에서 공산당 지하세력이 노출되어 그대로 전투병력화하게 되자 갑자기 팽창된 전투지역을 충분한 군병력으로 채우기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군병력이 그러할 때 지역단위 치안유지 조직인 경찰병력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군의 단위부대 증원은 기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사병력의 충원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 원인은 병역 의무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 대우에 있어서 군대 사병이 경찰하급자와 다른 데다가, 현직 경찰마저 기회만 있으면 이직을 하려는 판에 제발로 군대에 걸어들어올 놈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군인 모집은 모집이아니라 강제적으로 시행된 것이 벌써 오래전부터였다. 지역별 할당에 맞춰 청년단이 앞장서고 경찰이 엄포를 놓아가며 만만한 젊은이들에게 그물을 씌웠다. 만만하다는 것은 으레 가난하고 관에 아무 연줄 없는 사람들이었다. 도둑으로 몰아 감옥살이를 면하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군대에 밀어넣었고, 사촌이나 육촌이 입산한 것을 트집 잡아 군대로 내몰기도 했고, 별의별 방법이 다 동원되었다. 그렇게 억지춘향으로 군복을 입은 자들이 사기가 있을 리 만무했고, 원래 사상이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오기나 반발로 그러는것인지는 모르나 작전 중에 입산해 버리는 자도 적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강압적인 방법은 경찰이나 청년단을 불신하고 경원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일제시대의 경력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똥 묻은 것들'로 불신당해 온 경찰은 계속 악명만을 덧붙여가는 꼴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런 강압적인 편법을 쓰지않으면서 사회적으로 불평 불만을 없애는 길은 병역을 의무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법을 만든다는 게 언제인데 그것은 통과되지 않고 엉뚱하게 반민특위법이 통과되어 그러잖아도 경찰 알기를우습게 아는 사람들의 기를 더욱 세워주는 반면 경찰들은 일할 맛이 싹 떨어지게 기를 꺾고 말았다. 반민특위법이 전국적으로 엄하게 실시되는 한 현직 경찰치고 그 법에 안 걸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콩밥을 먹이게 만든 위치에서 콩밥을 먹어야 하는 신세가 된다.는 사실은 생각만으로도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국회의원이란 놈들은 도대체가 믿을 수가 없는 놈들이었다. 제놈들 국회의원에 당선시켜 주기 위해서 경찰들이 얼마나 애를 썼는가 말이다. 그런데 고작 한다는 짓이 경찰 때려잡는 법이나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놈들이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들이었다. 그런 배신감은 자신만가진 것이 아니었다. 조용히 모여앉은 자리에서는 으레 그 법의 시행에 공동의 관심이 모아지고는 했다. 그 법만 생각하면 그는 전출운동이고 뭐고 사지에 맥이 빠져버렸다. 63-65

‘반란군의 완전소탕’ ‘지역폭도 완전제거’ ‘민간세포조직 완전근절’. 그런 지시 앞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용맹스러운 활동을 전개한 것은 군대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고 서북청년단이었다. 명칭 그대로 이북 청년들로 구성된 그들은 여순반란사건이 이렁나기 전에 이미 제주도의 4.3사건 진압대의 일부로 투입되어 그 용맹을 떨친 바 있었다. 그들이 가는 곳에는 그야말로 공산당의 씨가 마른다는 소문이 일찍부터 바다를 건너와 뭍에까지 퍼졌던 것이다. 공산당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삼팔선을 넘어온 그들은 이남의 공산당을 뿌리 뽑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 용감무쌍하게 싸우는 반공투사들이었다. 그들은 공산주의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치를 떨었고, 공산주의자는 더 말할 것 없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의 혐의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가차 없을 정도로 냉정하게 행동했다. 67

민간인들의 원성이 후유증으로 남게 되었다. 그들에 대해 민간인들 사이에서 ‘악독한 이북내기들’이라거나, ‘이북에서 내려온 악질들’이라는 욕이나 비난이 떠돌았고, 사실 어느 면에서는 억울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68

옷이라는 것이 참 묘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똑같은 천에 색깔이나 모양이 다를 뿐인데 어느 것을 몸에 걸치느냐에 따라 마음이 생판 달라지고 말았다. 제복을 입으면 무언가에 억눌리는 것 같은 압박감과 함께 알 수 없는 힘이 전신을 버팅기고 있는 기분이었고, 사복을 입으면 무슨 짓이든 해도 좋을 것 같은 한없는 자유스러움을 느끼는 반면 어딘가 허전하고 힘이 빠져버릴는 기분이었다. 71

상대방과의 힘의 관계에 있어 언제든지 상황이 나아질 전망은 희박한 데 반해 저쪽은 체계적인 무장화 작업을 꾀해나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우울한 소식은 제주도 항쟁이 거의 막바지로 몰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어진 줄기라고는 없는 외따로 떨어진 하나의 산이면서 섬인 그곳에서 벌써 만 1년 동안 투쟁을 벌여왔는데 그 결과는 절망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런 결과는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구구법 산수처럼 간단명료하게도 힘의 약세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승리를 위한 투쟁이었는가, 투쟁을 위한 투쟁이었는가. 염상진은 언제나 그벽에 막혔고, 그 벽을 허물어뜨리지도 뛰어넘지도 못했다. 다만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생각을 단순화시키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보다 적극적인 투쟁이었다. 79-80



15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여러 말 헐 것 없이 문제는 말이여, 쥔어런 잘못 모시는 종놈은 삭신 녹아내리게 매질당허고 내쫓기는 것이 법칙이다 그것이요. 가끔 보자먼 대체 이 나라 쥔이 누구요? 바로 여그 앉은 우리 겉은 사람덜 아니오. 워째 그냐. 나라 쥔이 한민당잉께 한민당얼 떠받치고 있는 우리덜이 쥔이고, 더 세세허게 따지자먼 여그 읍내 쥔이 바로 우리덜이다 그것이요. 허먼, 심가놈이 헐 일언 무엇이냐. 쥔인 우리럴 편안허게, 안전허게 받들어 뫼시는 것이요. 근디, 그 자석이 쥔이 위험허게 불편허게 잘못 뫼셨응께 잡아다가 매타작부텀 혀얄 것이요.” 107

“.. 심재모, 그 사람은 마땅히 책임져야 하고, 우리는 또 책임을 추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방법이 문제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하신 말씀은 다 옳으나, 그러나 정말로 그 사람을 여기에 끌어다가 목을 비틀거나, 무릎을 꿇리거나, 매질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나 우리끼리 한바탕 욕을 해대는 것으로 기분을 풀고 끝낼 겁니까? 그럴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감정을 누르고 냉정하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숨을 돌릴 겸 뜸을 들이기 위해 유주상은 한 숨길 정도 말을 멈추었다. "에에,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우리의 그런 뜻을 말로 할 것이 아니라 문서로 꾸미자는 겁니다. 말로 하면 감정이 들어가기 쉽고, 또 날아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문서로 꾸미면 감정이 안 들어가 점잖고 확실해지고, 날아가지 않고 언제까지나 남습니다. 제 생각이 어떻습니까?" 여기저기서, 좋소, 좋소, 하는 찬동이 나왔다. “에에, 그 다음이 일을 처리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모여앉기는 했지만 개인에 불과합니다. 이런 일은 개인들의 힘으로는 효과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갑자기 무슨 단체를 만들 수도 없는 일이고 한데, 마침 우리는 지난번에 결성한 좌익척결위원회라는 좋은 단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단체의 이름으로 일을 처리하게 되면 효과가 아주 크리라 믿습니다. 그 단체에서 일을 처리하도록 일임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유주상이 여기서 말을 끝냈다. 108-109

심재모는 언제나 그 대목에서 혼란과 회의를 느꼈다. 군대는 무엇을 하는 조직인가, 나는 누구를 위한 군인인가. 군대는 돈과 힘을 가진 소수를 위해 존재하는가, 나는 그들이 생명과 재산을 무조건 지켜주어야 하는 종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 으레 떠오르는 것이 손승호의 말이었다.
"심 사령관이 기왕 이곳에 근무하게 된 입장이고, 이렇게 마주앉게 됐으니 하는 말입니다만, 이데올로기니 사상이니 하는 것들이 뭐 별겁니까. 식자나 좀 들었다는 사람들은 그걸 자기네들만 아는 무슨 거창한 이론이나 되는 것처럼 어렵게 말하려 하고, 그런 것은 그런 것대로 따로 있고, 생활은 생활대로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들이 심한데, 결국 그런 것이 필요하게 된 건 사람의 목숨이 살아가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 그 자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데올로기나 사상이란 것이 유식한 사람들이나 입에 올릴 수 있는 전유물도 아니고, 책상 앞에서 따지는 연구물도 아니라는 겁니다. 배우지는 못했을망정 기본생활조건의 모순 속에서 끝없는 고통을 겪으며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왜 그런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고, 그 잘못은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무슨 방법으로든 그것은 바뀌어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하나의 이데올로기고 사상입니다. 식자가 든 사람들은 거기에 논리와 이론이 없으니 이데올로기나 사상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그건 식자층의 상투적인 용입니다. 그건 불교나 예수교는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경전을 가졌으니 종교, 무속은 그런 것을 갖추지 못했으니 미신이다. 하는 식과 똑같은 발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절대적인 삶이 생활로 살아가는 것이지 어디 이론으로 살아가는 겁니까. 제가 왜 이런 말을 길게 늘어놓느냐 하면, 이 지방에 사는 절대다수의 가난한 농민들은 자기들이 왜 가난한지, 가난을 면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고, 더구나 해방이 되는 것을 계기로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길을 뚫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일정시대의 억압 속에서도 끊임없이 소작쟁의를 벌여 그 길을 뚫으려 했고, 해방이 되자 이제야 때가 왔다 생각한 그들은 다 같이 힘을 모아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아시다시피 그게 바로 1946년 10월에 전국 규모로 일어난 농민항쟁 아닙니까. 그 항쟁은 결국 폭력 앞에 피만 뿌리고 좌절되었습니다만, 지금 그들은 침묵하고 있을 뿐 그들의 욕구를 포기하거나 망각한 게 아닙니다. 그들은 행동하는 이데올로기의 덩어리고, 사상의 덩어리인겁니다. 그런 그들은 자기네들이 원하는 길을 뚫을 수 있는 그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그들은 그것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삶을 찾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환영하고, 선택합니다. 그들의 그런 행위를 우익적 식자들은 또 부화뇌동이니 비이성적 감정주의니 하는 유식한 문자를 써가며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일축하려 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삶의 절박함과 절실함 속에서 나오는 가장 이성적이고 현명하고 순수한 판단이고, 그들이 행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생존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정치상황은 그들이 원하는 바와는 정반대로 치닫고 있습니다. 심 사령관은 바로 그 틈바구니에 끼여 있습니다. 사람들이 군인이나 경찰을 경원하는 것 같다고 아까 말씀하셨는데, 그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한 현상이 이 지방만의 특성은 물론 아닙니다. 지역적으로 다소의 차이가 있을 뿐 그건 남한 전역에 걸친 문제점입니다. 전 정치는 잘 모릅니다만, 옛날 봉건 왕조 때에도 잘하는 정치는 백성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 했고, 다수의 백성이 원하는 바를 실천하는 임금을 현군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봉건시대가 아니라 명색이 민주주의를 내세운 시댑니다. 그러니 정치가 어때야 하는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어차피 군인이 되신 거, 현명한 군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손승호의 말을 되새길 때마다 자신의 군인으로서의 출발이 너무 순진하고 단순했다는 사실을 심재모는 돌이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된 땅에서 무언가 바르게 한몫을 해보고자 하는 마음을 정했을 때는 이렇듯 복잡미묘한 사회구조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113-116



16 당신을 용공행위로 체포하겠소!

지금 우리 사회에선 공산주의가 무서운 게 아니요. 그런 무지막지한 극우세혁의 폭력이 무서운거요. 144

“그려, 우리가 각단지게 동기맹키로 독헌 맘 묵고 일시에 들고일어나뿔먼 지주놈덜 쳐읎애기야 간딴헌 일인디. 우리 수가 열 배는 더 많음스롱도 그 일얼 못해내는 건 다 우리가 빙신이라서 그런겨.” 마삼수의 침통한 말이었다. 153



17 새로 부는 바람

옳지 않은 건, 그런 순수한 일을 자기네 이익을 위해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부류들이야. 이런 현상은 왈, 이데올로기의 정치종속이고 수단화지. 중요한 건, 지금 우리가 그것과의 싸움에 맞닥뜨려 있다는 사실이네. 이런 싸움은 진작부터 이 나라 도처에서 일어났고, 앞으로는 더 심해질 거라는 사실이지. 그 결과는 이성적이거나 양심적인 비판세력의 말살로 나타날 것이고, 모든 국민은 정치지배의 수단이 된 이데올로기의 울타리 안에 갇혀 순종하는 가축이 돼야 하겠지. 166-167



18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습격

사바사바는 ‘통역정치’ 또는 ‘요정정치’라고 불리었던 미군정의 음성적 정치로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말이었고, 빽은 이승만 정권이 세워지면서 연줄과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풍조 속에서 생겨난 유행어였다. 221



19 그리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승리

습격을 직접 지휘한 중부서장 윤기병, 그 위에서 명령을 내린 시경찰국장 김태선이 일제의 특별고등경ㅇ찰 출신이며, 그보다 더 위인 치안국장 이호와 내무부 차관 장경근은 친일 공무원이었고, 현장에서 난동을 부린 60여 명의 경찰들 모두가 친일경력자들이라는 사실이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238

민기홍이 술을 찔끔 마셨다.
“세상을 살아갈수록, 어떤 일을 성사시키는 덴 적기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되는데, 큰일일수록 더 그렇지. 반민특위는 그 적기를 찾지 못했네. 특위를 발족시킨 뜻이야 백 번 천 번 좋았지만, 뜻만 가지고 일이 되나. 특위 활동이란 애초부터 흉기 든 강도 맨손으로 잡겠다는 식이었고, 토끼가 호랑이한테 덤비는 격이었지 뭔가. 한민당을 중심으로 해서 정치권력이, 경찰을 중심으로 해서 무장세력이 확고하게 조직된 현실에서 글쎄, 무슨 수로 그들을 처단한단 말인가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여 민족정기를 세우고 민족정의를 살리자, 이 얼마나 당연한 일인가. 그러나 백번 당연한 명분만으로 일이 되는가. 특위 활동이란 무슨 계몽운동이나 순화운동이 아니라, 죽이고 죽는 목숨을 내건 싸움이었단 말이네. 특위 활동을 시작하면 친일반역자들이 꼼짝을 못할 줄 알았다면 그거야말로 어리석도록 순진한 감상이지. 그들이 그 정도 양심을 가졌다면 아예 친일도 반역도 하지 않았겠지. 그 목숨을 내건 싸움의 폭발이 이번 사태고, 특위는 당연한 패배를 한 셈이지. 물론 그전에도 도전이야무수히 많았잖았는가. 노덕술이 지휘한 특위위원암살음모, 전화나 편지질의 공갈 협박, 친일파들에게 돈을 받고 동원된 사람들이 하필이면 파고다공원에서 매일 특위해체를 외친 데모, 그런 것들이 효과가 없으니까 이번엔 경찰이 직접 나선 것 아닌가. 군정의 비호아래 이승만 한민당 ·경찰이 상호 협력관계를 긴밀히 유지하며 만들어낸 첫 번째 작품이 단정수립이고, 그 두 번째 작품이 이번 사건인 특위박멸이겠지. 그리고 사실 이번 사건이 터지기 전에 이미 특위는 유명무실해지지 않았나. 박흥식이가 103일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버리고, 재판 결과는 무죄 아니었나 특위가 죽을 고생해가며 잡아들이면 뭘 해. 재판에서 다 그 지경 만들면 도로아미타불이지. 그런데도 특위는 역시 그들 세 세력한테는 마땅찮은 존재였던 거지. 민중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여론이 조성되는 곳이었으니까 편안한 권력유지를 위해서 그들은 마땅히 특위를 깨부숴야 했던 거야."
이학송은 목이 마른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기자로 썩기 아깝게 언변 한번 좋네마는, 그럼 자네 말은 뭐야. 그러니까 특위는 애당초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건가?"
민기홍의 눈이 안경 속에서 예리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니야, 그 반대지." 이학송은 허리를 곧바로 세우며 고개를 단호하게 젓고는, “아까 적기라는 말을 했는데, 우리에겐 그 기회가 딱 한 번 있었네. 친일반역자들의 처단은 해방이 된 그날부터 민중들의 손에 의해서 감행됐어야 했던 거야. 그자들은 거의 몸을 숨겨 스스로의 죄를 입증했으니까 골라내고 말고 할 것도 없었지. 미군이 점령하기 전까지 우리 민중들에겐 20일이 넘는 절호의 시간이 주어져 있었어. 거기다가 건준이 신속하게 조직구성을 했지. 그런데 민중들도 그 아까운 시간을 허송했고, 건준도 전국 방방곡곡에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민중조직을 결속시켜 그 일을 단행하는데 소홀히 하고 말았어. 그나마 나라나 민족을 생각한다는 사람들이, 친일세력을 제거하지 못한 것이 미군의 비호 때문이라고 쉽게 말해 버리는데, 물론 미군이 우리 민족문제에 개입해 저지른 범죄야 엄연하고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에 앞서 우리들 스스로는 그 기막힌 20일 동안을 뭘 했느냐고 냉정하게 우리 스스로를 비판해야 한다 그거네. 난 그때를 계기로 우리 민족이나 민중들의 의식과 역량을 새삼스럽게 회의하게 됐고, 여운형을 근본적으로 불신하게 됐지. 만약 불란서 국민들이 우리 같은 상황이었으면 그 20일을 우리처럼 허송했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과연 우리 민족에게 혁명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가를 회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민 형 자넨 극단론이다 논리주의다 하고 공박하겠지만, 난 그때 20일을 잘못 살아 영원히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됐다네." 248-251

“물론, 예기치 못했던 해방이 너무 갑자기와 민중들은 얼떨떨한 상태에서 우왕좌왕하며 그 중요한 시간을 놓쳐버렸고, 일본 경찰은 계속 무장상태에 있었으며, 건준에서는 미군점령에 대비한 국가기구를 만드느라고 그 문제를 처리할 시간이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또 어떤 창백한 인도주의자는 법적 처벌기준도 없이 그 짧은 기간에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하라는 거냐고 공박하고 들 수도 있겠지. 그럼, 일본놈들이 우리 민족을 살해하고 착취할 때 어떤 법적 기준을 가지고 했던가? 제멋대로 아니었는가 말야. 그런 일본놈들에게 붙어서 그놈들과 똑같은 만행을 자행한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는 데 무슨 법이 필요하단 말인가. 우리에게 해방의 의미는 외적으로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내적으로 민족혁명의 시작이었던 것이네. 민족혁명이란, 민족반역자들을 남김없이 처단하는 인간혁명과 사회제도 전반을 뒤엎어 새로 창출하는 정치혁명, 그 두 가지가 평행적으로 완성되는 걸 말하는 것이지, 혁명은 개조도, 개선도, 변모도, 변화도 아니야. 완전한 새로움의 탄생이야. 그러므로 혁명은 혁명 그 자체가 법이야. 그러나 민족반역자들을 극형처단해야 하는 근거가 꼭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댈 수 있지. 일본놈들이 36년에 걸쳐 직접 살해한 우리 동포의 수가 얼마며, 착취를 해서 굶어죽게 한 간접살해는 또 얼만가를 따져 보세. 수백만 명 아닌가. 민족반역자들을 대략 150만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일제치하에서 죽어간 동포의 수를 300만으로 줄여 잡더라도 그놈들은 하나 앞에 두 사람씩을 죽인 게 아닌가 말야. 그런 살인자들을 어찌 그냥 살려둘 수가 있겠나. 그런데 우린 그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고, 미군에게 점령당했고, 오늘날과 같은 엉망진창의 꼴이 되고 말았지. 그리고 '혁명'이라는 말만 써도 좌익으로 몰아붙이는 우습지도 않은 상황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특위까지 저리 되고 말았으니 이제 끝장난 나라 아닌가"
이 말을 하는 동안 이학송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가시고 짙은 눈썹은 심하게 꿈틀거렸다. 252-254

한 번 배신한 자 두 번 배신하고, 한 번 거짓말한 자 두 번 거짓말하는 법이다. 그건 습관성이 아니라 자기 방어와 자기 합리화를 위한 필수행위다. 256

2차대전이 끝나고 그들도 우리와 비슷한 상황 아니었나. 나치스 협조자, 레지스탕스 밀고자부터 처단하지 않았나. 그들은 우리와 달라, 인종에 우열이 있는 게 아니라 역사가 달라, 그들은 인간의 삶이 바로 역사고, 역사는 인간의 힘으로 뒤바뀌고 창조된다는 것을 알고 믿어, 그런 체험을 했으니까, 혁명을 일으켰고, 성공시켰거든. 우린 그런 역사적 경험이 없어, 그러니 역사에 대한 존엄도, 신뢰도, 책임도, 냉엄도, 두려움도, 아무것도 없어. 256-257



20 백범 김구를 죽인 네 발의 총알

유상몰수, 유상분배 - 지주에게는 돈을 주고 농지를 몰수하며, 소작인은 돈을 내고 농지를 분배받는다는 그 첫 번째 방법에 대해 모든 소작인들은 일제히 반발의 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번 정해진 법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실망과 불만을 동시에 품게 되었다. 그들의 의식 속에 분명하고 확실하게 판박혀 있는 농지개혁이란 무상몰수 무상분배였던 것이다. 해방을 맞이한 뒤로 그리도 목마르게 농지개혁이 되기를 바라고 기다려왔던 것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농지를 갖게 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말은 그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것이고, 농지개혁에는 그 방법바께 없다고 믿어왔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오래전에 그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했으므로 이남에서도 당연히 그러리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280-281

손톱을 일부러 깎아야 하는 것이 그렇게 신기하고도 이상한 기분일 수가 없었다.(들몰댁) 309



21 거꾸로 흐르기 시작한 역사의 물줄기

백범 김구의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고, 백범은 효창공원에 영원히 잠자리를 마련하였다. 316

사실 죽음 그것이 문제이지 장례식이라는 것은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살아 있는 자들 위주로 벌이는 죽은 자에 대한 잔치가 장례식이라는 것이었다. 김범우는 그 요식행위를 보려 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이미 누구보다도 백범의 죽음을 슬퍼하고 아파해온 것이다. 요식행위에 불과한 장례행렬을 보려 하지 않는 그의 마음이 어쩌면 진정한 조의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317-318

“우리의 해방상황을 해방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식민지체제로 파악하고, 외세배격을 위한 제2의 독립투쟁 전개를 내세운 것은 백범다운 용기고, 그 누구도 흉내 못 낸 탁월함이었소. 이승만은미국에 치우치고, 여운형과 박헌영은 소련에 치우쳐 그런 공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엄두도 못 냈으니 말이오. 그러한 선명성을 내세웠을 때 백범은 새로운 민족의 개념을 정립하고, 그것을 정치이데올로기로 실천할 수 있는 민중조직을 구성하고 확대해야 했던 거요. 다시 말해, 백범은 민족주의를 정치이념으로 부르짖었으되 민중을 동감으로 자각시키고, 그 자각으로 민족이 동질의 연대감을갖게 하고, 그 연대감으로 자발적 실천력을 갖게 하는 민중조직으로서의 민족을 창출해내지못했단 말이오. 김형, 함께 생각해 봅시다. 백범의 민족주의가 '민족'이라는 추상명사가 갖는 막연함과흐릿함과 구분되는 그 어떤 구체성이나 명확성이 있소? 좋은 예로,장례식날 그 많이 모인 사람들에게, 백범이 누구냐 물었을 때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소? 하나같이 임시정부주석이라고 대답했을 거요. 그 다음에, 백범의 민족주의가 뭘 말하는 것이냐, 물으면 다 눈만 껌벅거렸을 거요. 그런데 똑같은 사람들에게, 좌익은 자기네들 세상이 되면 뭘 한다더냐, 고 물으면 무슨 대답이 나올 것 같소? 최소한의 대답이 누구나 공평하게 사는 세상을 만든다더라, 아니겠소? 아까 김 형이 말한 대로 백범의 건국강령이 '토지개혁 단행'과 '친일반역자 척결'이었으니, 그 훌륭한 강령을 위로는 깃발로 세우고, 아래로는 민중을 상대로 조직적 선전을 펼쳐, 사람들의 입에서 좌익에 대한 최소한의 대답이 나오듯이 그렇게 만들어야 했다 그 말이오. 그 민중조직을 이끄는 민족주의도 그냥 '민족주의'라고 할 것이 아니라, '민중민족주의'라거나 '혁신민족주의'라거나, 하다못해 '신민족주의'라고 해서라도 그전의 혈연 일체감만을 나타내는 비논리적이고 감상적인 민족주의와 확실하게 구분해야 했던 거요. 그렇게 됐더라면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이 임시정부주석이라고 했겠소? 백범은 해방 아닌 해방의 상황 속에서 그 누구보다 분투했소. 그러나 그 분투가 상부에서만 맴돌았을 뿐 하부로부터의 호응이 전혀 없었소. 민중이라는 존재와 그 힘을 근원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게 백범의 한계였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소.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이 있소. 백범이 좌익만큼의 민중조직을 가지고 남북협상에 임했더라면 김일성에게 그런 식의 푸대접은 받지 않았을 거요. 겉으로 드러난 형식적인 환영이 백 번이면 무슨 소용이 있소. 김일성은 절차상 당연히 있어야 할 연설도 시키지 않았고, 환영과는 반대로 대중들에게, 김구가 항복하려고 도장 가지고 왔다고 선전해 대지 않았소? 백범이 좌익이데올로기에 맞설 수 있는 의식으로 뭉쳐진 민중조직을 가지고 있었다면 감히 김일성이 그런 짓은 못했을 것이오. 김일성은 백범을 종이호랑이로 취급한 거요. 백범의 그점은 참 아쉽고 안타까운 대목이오. 명정에 씌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주석백범김구지구’라는 글자가 상징적으로 모든 걸 설명하고 있소. 내 생각이 어떻소?”
이학송은 목울대가 울리도록 벌컥거리며 술을 들이켰다.
“그 점에 대해선 별로 할 말이 없군요.”
침울한 기색의 김범우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320-322

“물총이란 것이 말이시, 우선에 그 생김생김이 문젠디, 을매나 질고 토실토실허냐 허는 것이시. 그 생김에 따라서 물질이 멀리꺼정 뻗치냐 아니냐 허는 심이 정해진로 질기만 허고 홀쪽허니 가늘어서도 틀린 것이고, 짧음시로 퉁퉁허기만 혀도 틀린 것이시. 긍께로 물질이 씨게 나가는 존 연장일라면 질이가 짐스롱도 몸체가 통통혀야 한다 그 말이시. 그 이치란 것이 아그덜이 갖고 노는 실지 물총을 봐도 그렇고, 우리가 갖고 있는 권총허고 장총허고 비혀도 그렇단 말시. 긍께 자네 연장이 워쩌크름 생겼냐 허는 것이 문제고, 그 담에, 연장이 겉보기에는 길쭉하고 토실토실허니 잘생겼드라도 고것이 찌릿찌릿하고 후끈후끈허고 어질어질하고 옴죽음죽헌 그 요상시런 구녕 속에서 을매나 오래 젼디냐 허는 것이네. 거 문전객사란 말 안 있드라고? 동백지름 잘못 묵고 설사하는 놈맹키로, 들어가는갑다 험시로 싸질르는 연장임사 속곳만 더럽히제 다 틀려묵은 것잉께. 방구도 꽁꽁 참았다가 뀌어야 소리가 크고, 널도 많이 굴러야 높이 솟기대끼 고것도 오래 견디는 심이 있어야 씨게 나가제, 허고, 연장이 오래 견딤스로 그 구녕이 지대로 열을 받게 맹글어야 허는 것이네. 그 씨라는 것이 냉기럴 싫어허니께. .. 긍께로 무신 말인고 허니, 질고 토실토실허니 잘생긴 연장으로 그 구녕에서 오래 젼딤스로, 그 구녕이 씨럴 잘 보전허게 열받게 맹글어갖고 물총질얼 딱 허는 디꺼지가 사람이 맡어 헐 일인 것이고, 그 담에 아덜이냐 딸이냐 정허는 것이 삼신할매가 허는 일이란 말시…” 331-332



22 8월의 들녘



23 자유민주주의라는 허울

“.. 다아는 사실이지만, 그들 두 강대국은 고맙고도 황송하게도, 우리한테 자치능력이 없으니까 자기네들이 신탁통치를 해주겠다고 나섰잖소? 그게 침략을 합리화하는 일방적인 강대국 논린데, 그럼, 과연 우리에게 자치능력이 없었던가? 천만에, 우린 1차로 건국준비위원회를 통해서, 2차로 조선인민공화국을 통해서 완전한 자치능력을 확보하지 않았는가 말이오. 먼저, 건준이나 인공의 구성원을 보면 친일세력을 완전 배제한 상태에서, 어떤 이념에 구애되거나 편중되지 않고 양심적 민족세력으로서 자유민주주의 세력, 공산주의 세력, 중도우파 세력, 중도좌파 세력을 망라해서 민족적 민주세력의 연합체를 만들었었소. 그리고 이런 상부조직에 호응해서 전국에 걸쳐 지방조직이 자발적으로 구성되었지. 이 두 가지의 엄연한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거요? 상부조직은 해방조국 앞에 사욕없는 정치양심을 나타냄과 동시에 화합하는 정치능력을 보인 것이오. 그리고 하부조직은 우리 민족이 새로운 나라 건설을 얼마나 원하고 있으며, 그 능력이 얼마나 확고한지를 증명한 것이었소. 그런데 미군정이 한 짓은 뭐였나. 바로 그 인공을 부인하지 않았소. 그 행위는 바로 우리 민족 전체를 부인하는 만행이었소. 그럼, 상황을바꿔서 생각해 보세. 미국과 쏘련이 바뀌어서, 아니 그렇게 하면 복잡하니까, 인공이 서울이 아닌 평양에서 구성되었다면 쏘련은 어땠을 것 같소! 인정일까, 부정일까? 그들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부인했소. 그들도 미국처럼 자기네한테 필요한 정권을 세워야 하는데인공은 민족주체적 정치조직이고, 따라서 외세배격적 민족세력이었기 때문이오. 우리는 우리의 훌륭한 자치능력을 새로운 침략자들의 폭력으로 파괴당했소. 이렇게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에서 하나로 합쳐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를 내 나름대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인공과 같은 구성, 그 이상은 없소. 모든이념을 가진 조직이 한 테두리 안에 모이고, 그 속에서 각기 정치 활동을 전개하고, 그리고 선택은 오로지 국민전체에게 맡기는 거요. 그 결과로 권력을 맡은 세력이란 그것이 어떤 이념을 표방하는민주제일의 정신에 입각해 있는 민주주의 정권이기 때문이오. 우리가 잃어버린 그 기회의 회복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민족적 과제가 아닐까 싶소."(이학송) 416-417

“.. 더 큰 문제는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의 앞으로의 문제일 거요. 정치만을 반민족세력들이 장악한 게 아니라 경제까지 반민족세력들이 장악하고 말았기 때문이오. 군정은 정치와 경제 양면 모두를 반민족세력에게 떠넘겨줌으로써 이 땅의 남쪽을 명실공히 속국화시켜 버린 것이오. 미곡수집정책으로 쌀값을 500배까지 올려 인플레와 함게 대중경제를 파탄에 몰아넣고는, 미국의 각종 잉여상품과 잉여농산물을 풀어놓지 않았소? 점령지를 자기네 경제에 예속시킴과 동시에 자기네 시장으로 확보한 것이오. 그리고 그들은 그 많은 귀속재산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 기업이윤을 빼먹을 만큼 빼먹고 나서 그것을 또 반민족세력들한테 넘겨주고 말았소. 군정은 정치도 경제도 다 자기네 뜻대로 재편성핳고 조직했소. 그러니 앞으로 대중생활이 어떤 꼴이 되겠소. 해방은 되나마나고, 사회모순은 새롭게 야기되고, 그 결과로 민족모순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오. 그게 다 군정 3년이 남긴 것들이오. 미군은 철수했지만 군정은 끝난 것이 아니라 형태를 다맇해서 계속되도록 되어 있는 게 우리의 실정이오.”(이학송) 422-423

공산주의에 비해 자유민주주의가 정치이념으로서 하등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공산주의와 대등하게 되려면 순수한 대중의 손에 의해 생겨나야 하고, 그 정권은 절대적 대중이 원하는 바에 따라, 절대적 대중을 위해 정치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처한 자유민주주의는 그 과정을 일체생략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허울뿐이고, 대중들의 배척을 받고, 현재로서 북쪽의 체제와는 대적이 안 되는 겁니다. 다알다시피 북쪽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친일반역세력을 일소해 민족감정을 해결했고, 농민을 위해 토지개혁을 했으며, 노동자를 위해서는 노동법을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남로당 지하조직을 통해서 끊임없이 정치선전을 해왔으니 남쪽 체제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과 반감은 날이 갈수록 커갈 수밖에 없습니다. 남쪽이 이 지경이 된건 미국 군인들이 강압적으로 세워놓은 군사정권이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떳떳하게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할 수 있게 되려면 아까 말한 그 과정을 거쳐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건 이미 틀린 일입니다. 그러니까 심중위님 같은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설자리를 찾지 못해 두리번거려야 하고, 혼자 괴로워야 하고, 대중들로부터 오해 받아야 하고, 배척당해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죠. 미국은 남쪽 정책에 있어서 대중들 입장에서는 물론이고 양심적 지식인들 입장에서도 매도를 당할 수밖에 없이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미국은 그 과오에 대해서 앞으로 두고두고 우리한테 비판당하고 매도당하게 될 겁니다. 말씀드린 대로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니 심 중위님은 현재의 위치에서 좋은 쪽으로 그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시킬 날이 올 거라는 걸 믿으면서 말입니다."(이학송, 심재모에게 한 말) 426-427


24 일어서는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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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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