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에 해당되는 글 27건

  1. 2018.10.03 철학에세이 - 조성오 동녘 2005 03100
  2. 2018.09.12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 토니 마이어스 앨피 2005 04160
  3. 2018.08.24 일의 발견(PART THREE) - 조안 B. 시울라 다우출판사 2005 03900
  4. 2018.08.22 일의 발견(PART TWO) - 조안 B. 시울라 다우출판사 2005 03900
  5. 2018.08.20 일의 발견(Part One) - 조안 B. 시울라 다우출판사 2005 03900
  6. 2018.07.04 쇼펜하우어 문장론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훈출판사 2005 03850
  7. 2016.08.15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청아출판사 2005 03180
  8. 2016.03.21 칼 같은 글쓰기 - 아니 에르노 문학동네 2005 03860
  9. 2016.01.04 집착 - 아니 에르노 문학동네 2005 03860
  10. 2012.12.24 끌림 - 이병률 달 2010 03810
  11. 2012.11.06 오 자히르 - 파울로 코엘료 문학동네 2005 03980
  12. 2012.11.05 사랑후에 오는 것들 - 츠지 히토나리 소담출판사 2005 04830 2
  13. 2012.11.04 사랑후에 오는 것들 - 공지영 소담출판사 2005 04810
  14. 2012.08.30 라다크의 미소를 찾아서 - 여태동 이른아침 2005 03900
  15. 2012.04.24 꽃들의 웃음판 - 정민 김점선
  16. 2012.03.30 청춘표류(靑春漂流) - 다치바나 다카시
  17. 2012.03.15 몰입, Flow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 - 미하이 칙센트 미하이
  18. 2012.03.14 우리는 사랑일까 - 알랭 드 보통
  19. 2012.03.14 우리는 사랑일까(The romantic movement) -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2005 03840
  20. 2012.03.12 글쓰기의 전략 - 정희모, 이재성 2
  21. 2012.03.09 생산적 책읽기 50 - 안상헌
  22. 2012.03.01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 알랭 드 보통 생각의 나무 2005 03800
  23. 2012.02.17 불안(Status Anxiety) - 알랭 드 보통 이레 2005 03840
  24. 2012.01.25 사기 중국을 읽는 첫 번째 코드 - 이인호 살림 2005 04080
  25. 2012.01.10 신데렐라맨 Cinderella Man - 제레미샤프 생각의나무 2005 03840
  26. 2011.09.11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 류시화엮음 오래된미래 2005 03810 2
  27. 2011.05.31 30포인트로 읽어내는 로마 제국 쇠망사 - 에드워드 기번 : 가나모리 시게나리 편역 북프렌즈 2005 03920

꽃 봉오리는 피어나고 있다

우리는 사물이 실제로 움직이며 변화하고 있는데도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변화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66)



꽃 : 봉오리가 피어오르기까지의 변화

시계 : 시침의 변화

우주 : 별의 탄생에서 소멸하는 변화

지구 : 대륙이동설에 입각한 대륙의 변화

생물 : 무수한 진화과정

인간 : 원숭이에서 인간으로의 변화. 네발에서 두발로의 변화. 노동으로 인한 언어의 발생

사회 : 공동생산에서 계급사회 봉건제로 다시 현재의 사회로

이러한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즉 현재는 과거와 똑같고 미래도 현재와 똑같다고 생각한다면 새로운 사물이 발생하거나 본래 있던 사물이 변화하여 다른 것으로 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70)



사물에는 정지 상태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물론 있습니다. 달걀은 부화해서 병아리로 변화하지만, 병아리로 변화하기 전의 달걀은 어디까지나 달걀입니다. 사물은 끊임없이 운동, 변화하지만 동시에 일정한 단계에서는 근본적 성격이 변화하지 않으면서 일정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즉 질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지요.(70)



사물은 자체 운동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서 질적 안정성을 가지면서 정지 상태를 유지하지만, 그것은 상대적일 뿐 절대적으로는 끊임없이 운동, 변화하는 과정에 있습니다.(71)



변증법 - 사물이 운동하는 과정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모순으로 인해 자신을 부정하게되고, 다시 이 모순을 지양함으로서 다음 단계로 발전해 가는 논리적 사고법(백과사전)

변증법과 형이상학

모든 사물은 관련되어 있고 변화하고 있다는 입장에 선 철학적 견해를 ‘변증법(dialetics)’이라 부른다.

사물의 상호 관련성을 부인하여 사물을 고립적으로 보고, 사물의 운동, 변화를 부인하여 고정적, 정지적으로 보는 철학적 견해가 있다. 바로 ‘형이상학(metaphysics)’이다.(72)



창과 방패 이야기

변화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물 내부에 있을까요, 외부에 있을까요?(75)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사물 내부에 있습니다.(76)



연못에 돌을 던지면 물결이 일어나는 것은 돌의 영향도 있지만 물이 물결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달걀이 병아리가 되는 것은 그 내부에 병아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정란은 아무리 외부적인 요인을 가져와도 병아리가 될 수 없는것처럼.

사회 발전이라는 변화에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요인은 지리적 요인이나 기후적 요인 같은 사회 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내부에 있는 발전의 가능성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사물은 변화하며 그 변화의 근본 원인은 사물 내부에 있습니다.(78)



사물이 운동, 변화하는 근본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물 내부에 있는 내적 모순(矛盾)’입니다.

모순이라는 말은 중국의 고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모(矛)는 창이라는 뜻이고 순(盾)은 방패라는 뜻입니다.(79)



자신의 무지와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는 서로 대립하는 대립물이면서 상대방을 각각 자기 존재의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

상호대립하는 두 사물이 상대방이 없으면 자신도 존재할 수 없는 관계(이를 상호 의존 관계라고 말합니다)로 결합되어 있는 것을 ‘대립물의 통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물의 통일’이 바로 철학에서 말하는 모순입니다. 즉 모순이란 한편으로는 상호 대립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 의존하는 관계로 통일되어 있는 두 사물의 관계입니다.(82)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모르고 있음을 의식하고 동시에 이를 알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 비로소 공부하는 것이다.

달걀 : 달걀이면서 달걀이 아닐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 모순의 투쟁을 통해 달걀이 병아리로 변화한다.

사람이 왜 죽는가? 생명과 죽음이라는 두 대립물의 통일이며, 내적 모순. 죽음이 생명을 극복했을 때 사람은 죽는다.

상품 : 사용가치와 교환 가치라는 두 대립물의 통일에서. 이 모순에서 상품이 화폐로 변화한다.

외적 원인도 사물의 변화에 영향을 미칩니다.(88)



내적 모순은 변화의 근거이고 외적 원인은 변화의 조건이며, 외적 원인은 내적 모순을 통해 작용합니다.

변화의 근거란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변화가 일어나는 , 바꾸어 말하면 그것이 없는 경우 결코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 없는 근본 원인입니다.

이에 반해 변화의 조건이란 변화의 근거가 있더라도 거기에 이러이러한 조건이 가해지지 않으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부차적 원인을 말합니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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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글 - 지젝에게 물어본 정신분석학의 행방


오늘날 지젝을 최고의 인기 논객으로 만든 것이 다름아닌 그의 정신분석학적, 철학적 '고상함'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6




지젝은 철학을 끊임없이 오락거리로 만든다. .. 

영국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1943~)은 지젝을 "지난 수십 년 동안 유럽에 출현한 사람 중 가장 놀라운 명민함으로 정신분석학, 혹은 문화 이론을 해설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

그는 끊임없이 놀라서 묻는다. 왜 모든 것이 이와 같은가? ..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것은 그와 같다' , '법은 법이다'등)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 순간, 우리가 현실로 대면하고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묻는 순간, "철학은 시작된다."  21-22


지젝은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놀란다. 그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관찰의 향락에 빠질 수 있게, 일반적인 경우라면 반드시 느꼈을 죄의식 없이 향락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마치 '물론 나는 화장실이나 사도마조히즘, 그리고 발기에 관한 이 모든 이야기가 지극히 외설적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모든 삶의 측면들을 이론화해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지젝은 죄의식 속에서 향락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보통 사람들의 자기 책망을 덜어주어, 좀 더 즐겁게 그의 책을 읽을 수 있게 만든다.  24


부정어법은 '어떤 것을 언급하지 않겠다고 말함으로써 바로 그것을 말하는 장치'다. .. 부정어법은 담화 내부의 구멍을 그러낸다. 어떤 것을 언급하지 않겠다고 말함으로써 바로 그것의 윤곽을 드러내는 것이다.  24-25


지젝은 하나의 의미체계를 다른 의미체계로 번역한다. 가령 라캉의 체계는 헤겔의 체계로, 마르크스의 체계는 라캉의 체계로, 할리우드의 체계는 지젝의 체계로 번역된다. 지젝 스스로 조김스럽게 지적하듯이, 이런 번역은 항상 완전한 대응은 아니지만 만만치 않은 설명적 통찰을 가져다준다. 지젝은 '만약 이전의 방법으로는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다른 각도에서는 이해된다면 그 각도에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다.  27


지젝의 책을 주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그가 매번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그러니 그의 책을 읽을 때 각 논의의 세부 사항까지 전부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조만간 일련의 등가성들 속에서 더 생산적인 각도로 이전의 논의를 이해시켜주는 '이것은~가 아닌가?'의 순간에 직면할 테니까. .. 

아르헨티나의 철학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지젝의 첫 번째 영어 저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The Sublime of Ideology)>에 대해 평가한 것처럼.  28


지젝의 지적 여정은 그가 속한 공식 문화와 거리를 두거나 이질적인 특징을 보여왔다.  36


지젝의 이론은 객관적 체계 속의 일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주체적이었다. .. 지젝이 비판 이론에 미친 주된 영향 중 하나가 이 주체의 개념을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다. 지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묻지 않고 넘어간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파고들었다. ...

이 주체가 바로 민주주의의 주체이다. 민주주의는 개별 국민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37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반휴머니즘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람들에 맞춰 만들어진'게 아니라 아무런 감정도 없는, 오직 형식적인 추상에 의해 만들어졌다. 민주주의라는 개념 안에는, 어떤 구체적인 인간적 내용으로 채워지거나 공동체적 결속의 진정성에 내어줄 자리가 없다. 민주주의는 추상적 개인들의 형식적 결합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개별적 인간의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종교, 재산, 식사 예절, 수면 습관 따위에 무관심하다. 민주주의가 취급하는 것은 이 모든 개별적인 특질들이 제거되었을 대 남는 것, 지젝이 '주체'란 용어로 지시한, 모든 시민들이 평등하게 똑같이 고유하는 측면이다.  38


그가 사상가로서 가지만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게 그가 속해 있던 체계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비판철학에 대한 지젝의 가장 중요한 공헌 중 하나인 주체 이론에 초점을 맞춘다.  39




각 분야마다 그에게 주된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는데, 철학에서는 게오르그 헤겔, 정치학에서는 칼 마르크스, 정신분석학에서는 자크 라캉이다.  43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1)은 무수한 주석가들이 지적하듯이, 서구 관념론의 전통에서 정점에 도달한 독일 철학자이다. 관념론이란 세계를 사물들의 연쇄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물에 대한 관념들로 세계를 설명하는 철학체계이다.  43-45


일반적으로 헤겔의 변증법의 세 단계로 되어 있다고 한다. 먼저 어떤 테제(定立 정할정 설입)나 관념이 있고, 다음에는 안티테제(反定立 되돌릴반 정할정 설입)나 관념의 구체적 한정이 그에 대립된다. 마지막으로, 이 둘은 어떤 종합이나 더 포괄적인 관념으로 통합된다. 가령 '모든 영화는 훌륭하다.'는 테제를 주장한다고 할 때, 그 다음엔 그에 대한 안티테제로 '<타이타닉>은 실제로 나쁜 영화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둘의 종합은 '대다수의 영화는 훌륭하다.'가 될 것이다. 이 종합은 새로운 테제가 될 수 있고, 이 과정은 완전한 진실(총체성. 이 경우에는 '오직 몇몇 영화만이 훌륭하다.'는)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될 수 있다.

이것이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관습적인 생각으로, 이에 따르면 서로 다른 관점들은 언제나 더 큰 진리로 화해할 수 있다. .. 지젝이 읽은 헤겔의 변증법은 어떤 화해나 종합적 관점이 아닌, 헤겔 자신이 말한 '모순은 모든 동일성의 내적 조건'이라는 인식을 생산한다.  45-46


테제가 '모든 영화는 훌륭하다.'이고 안티테제가 '<타이타닉>은 실제로 나쁜 영화이다.'라면, 지젝의 종합은 '모든 영화가 훌륭한 것은 <타이타닉>이 실제로 나쁜 영화이기 때문이다.'가 된다. 이것은 일견 사리에 맞지 않거나 모순으로 들린다. 하지만 이 주장의 진실은 바로 이 모순 속에 있다. 만약 나쁜 영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영화가 좋은지 알지 못할 것이다. 서로 비교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영화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쁜 영화가 적어도 하나는 존재해야 한다. 이 경우 <타이타닉>은 문자 그대로 '규칙을 입증하는 예외'이다.  46


모순어법이란 '메마른 비' '차가운 열' '물리적 지성'처럼 모순적인 어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47



마르크스는 사회가 조직되는 방법을 예리하게 비판했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 혹은 자유시장경제 체제는, 다수에 대한 야비한 억압과 지배를 통해 소수가 광대한 부를 축적하도록 허용하는 불평등으로 인해 분열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47


자기 자신을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선언하는 지젝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이 갖는 가치와 진실을 확신하며, 더 나은 방법으로 사회를 조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다. ..

'이론적 실천(praxis)'이라고 불리는 이런 종류의 사유는, 단순히 경험을 반영하거나 범주화하는 게 아니라 경험을 바꾸려는 시도이다.  49


지젝은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인상적인 공헌을 남긴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개인들이 사회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정의한다.  51



라캉은 거치면서 정신분석학은 이 협소한 영역을 넘어 정치학, 철학, 문학, 과학, 종교 등 모든 인간 존재의 활동 영역으로 그 분석적 야망을 확대시켰다. 이 오만한 기획을 위해 라캉이 마련한 초석은, 모든 정신 작용을 분류할 수 있는 세 가지 '질서(Order)' 즉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이다.

일차적으로 상상계는 자아(ego)가 탄생하고 인식된느 과정을 가리킨다. 보통 '거울 단계(mirror stage)'로 불리는 이 과정은, 태어난지 6개월 정도부터 시작된다. 라캉이 지적하듯, 인간은 7세 무렵까지는 자신의 신체적 움직임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미숙한 상태이다.  53-54


* 라캉의 세 질서,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 라캉의 세 질서를 쉽게 설명하면, '개인의 심리행위에 작용하여 그들의 삶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주는 힘의 장(場 마당장)'으로 풀 수 있다. 상상적인 것, 상징적인 것, 실재적인 것, 이 세 형용사형은 특정한 질서를 지칭하는 명사로도 사용된느데, 그 경우 해당 질서와 관련된 특정한 사물이나 경험을 가리킨다. 

또한 '질서'라는 표현이 암시하듯, 이 세 질서는 심적 경험을 분류하는 체계의 일부일 뿐 아니라, 그 경험을 유사윤리적 기준 속에서 등급화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라칸의 저작을 보면 '상상적인' 것은 부정적인 의미로, '상징적인' 것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재계야말로 가장 으뜸가는 것으로, 이 질서를 언급할 때 라캉의 어조에는 거의 존경과 숭배가 묻어난다.  53


상상계는 넓은 의미에서 영원한 자기 찾기를 가리킨다. 그것은 자기 통일의 신화를 수립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본(寫本 베낄사 근본본)과 유사물의 사례를 융합시키는 과정이다. 그래서 상상계는 라캉과 지젝에게 항상 경멸의 시선으로 받는 세계이다. 우리에게는 안됐지만, 라캉은 현대사회를 정점에 도달한 상상계로 본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강박되어 자신과 자신의 창조물을 세계 위에 둔다고 보기 때문이다.

상징계는 언어에서부터 법에 이르는 모든 사회적 체계들을 포함하는 가장 광범위한 세계이다. 상징계는 우리가 보통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의 긍정적인 부분을 구성한다. 상징계는 사회의 비인격적 틀로서, 거기서 우리는 다른 인간 존재들과 함께 특정한 공동체 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령 대다수의 사람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상징계에 등록된다. 이미 이름이 정해지고, 가족이나 사회경제적 집단, 젠더, 인종 등에 소속되기 때문이다.  54-55


실재계는 알 수 없는 삶의 영역을 가리킨다. ..

우리는 결코 직접적으로 세계를 알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실재계는 언어에 의해 포획되기 이전의 세계이다.  59


상징계는 실재계에 대해 작용한다. 라캉이 말했듯, 상징계는 실재계를 절단한다. 그것은 무수하게 다른 방법으로 실재를 분절한다. 그래서 실재를 인식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어떤 것이 상징화에 적용되지 않는 순간을 주목하는 것이다. 앞에서 든 예에서 우리는 인간 존재가 사람과 동물, 유인원, 포유동물, 동물 등으로 상징화되는 모든 사례들을 열거함으로써 그 존재 중 일부는 실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어떤 것을 명명하거나 분류할 때 우리는 상징계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 전에는 실재계 속에 있다.  60


실재는 상징계가 작동하여 분절된 단위로 조각 내기 이전의 충만한 사물의 상태라는 점에서, 상징계에 앞서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실재는 상징계가 이런 분절 과정을 완수하고 남은 잔여물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실재는 상징계 이후에 발생한다.  61


실재와 상징계의 관계에서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만약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에이즈가 CIA의 음모라는 것, 모든 인간 존재는 원숭이와 같은 부류하는 것, 새싹이 식물 세계의 가장 멋진 생산물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인간 존재나 주체가 아닌 단지 상징적 질서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자동기계나 로봇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탈물질화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결정하고 선택하고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우리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63


지젝은 '실재의 철학자'라고도 불린다. .. 우리의 생활과 직접 연관된 '실재적'인 주제를 다룬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얘기한 라캉적 의미의 '실재'를 확장하고 자기화햇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염두에 둘 점은, 지젝은 거의 언제나 상징계와의 관계 속에서 실재를 다룬다는 점이다.  65


이론가들은 상징계와 상상계의 관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지젝은 실재와 상징계 사이의 적대성에 관심을 돌림으로써 성차적(性差的 성품성 어긋날차 과녁적), 이데올로기적, 윤리적, 탈근대적 형상들 속의 주체를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었다.  66




코기토(cogito)에 대한 생각은 원래 기독교 교회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e, 354~430)가 제기하였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코기토는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가 창안한 것이다.  71


'코기토'라는 단어의 의미는 데카르트가 말한 "철학의 제1원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cogito ergo sum)'이다.  73


탈구조주의자에게 코기토는 중심화된 주체 혹은 '개인(individual)'의 토대로, 그들은 코기토를 철학의 방탕아로 여긴다. 개인은 말 그대로 분리 불가능하다.  74


코기토의 '나'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  74-75


지젝에게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현실적 개인의 '나'가 아니라, 부정성의 텅 빈 지점이다. 이 텅 빈 장소는 '아무것도 아닌'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반대편, 모든 규정된 것들의 부정성이다. 지젝은 바로 여기ㅣ, 아무런 내용물도 없는 텅 빈 장소에 주체를 위치시킨다. 즉, 주체는 공백이다.  82-83


* '사라지는 매개자'는 말 그대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 사이의 이행을 매개하고 곧 사라지는 개념이다.  83


주체는 지제그이 용어로, 자연과 문화 상태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 '사라진느 매개자'이다...

코기토에서 정점에 도달한 '자기로의 철회'가, 자연과 문화의 간극을 잇는 사라지는 매개자로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상징적 질서라는 형식으로 실재를 대체하기에 앞서 그 실재를 '제거'해야 한다. 지젝은 이 사라지는 매개자를 광기로 이행하는 것으로 읽으며, 이렇게 해서(사라지는 매개자인) 주체를 광기로 파악한다.  84

우리 자신을 언어나 그 외 상징적 질서에 종속시키는 과정을 지젝은 '주체화'라 부른다.  92


'자기'는 주체의 공백을 메우는 것으로서 주체는 변하지 않지만 '자기'는 끊임없이 갱신된다.  94


우리는 소위 관용적인 서구 사회에서 이를 목격할 수 있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향락의 이미지와 쾌락에 대한 몰두를 보면, 이젠 더 이상 성적 쾌락이 금지되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지젝의 말처럼, 성적 희열은 이미 공식 이데올로기의 지위를 차지했다. 더 나아가 이제는 섹스를 즐기라고 강요받는다. 이 뻔뻔함, "즐겨라!"는 이 명령은 초자아의 귀환을 표시한다.  109


지젝이 지적하듯, 향락이 강제적이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즐겁지 않다.  109


탈 근대의 자유는 문법적 트리 없는 언어활동의 자유와 유사하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해석 규칙이나 구범도 없다. 따라서 대타자의 붕괴가 이를 보상하기 위해 무수히 작은 타자들, 혹은 부분적인 대타자들을 발생시킨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지젝은 그 증거를 과학기술의 성과에거 비롯된 윤리적 딜레마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꾸 전문가 위원회를 찾는 경향에서 찾는다.

이런 위원회의 증가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징적 금기들의 부재를 시사한다. 이런 상징적 금기들의 부재 때문에, 각종 윤리위원회들은 사이버 스페이스, 유전자생물학, 의학 등에 관한 규제 원칙들을 창안해야 한다. 윤리위원회들은 태아에 대한 유전자 조작을 얼마나 허용해야 하는지, 생명 연장 기계에 의존하는 이들이 실질적으로 살아 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인터넷 상에서 하는 섹스에 어떤 문제점이 잇는지 답한다. 이런 윤리적 난제들에 대한 해명 책임을 이들 위원회에 떠넘김으로써, 개별 주체들은 본래 자기들 몫이었던 해명의 자유가 주는 부담을 털어버린다.  114


지젝이 보기에 탈근대적 정치 담론은 자유주의-자본주의의 지평 안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그 지평 내의 서로 다른 부분들, 가령 어떻게 의료 서비스에 필요한 자금을 모을지, 그중에서 세금의 비중은 얼마큼 할지 등에 대해서는 주장을 펴지만, 자본주의 자체는 결코 진지하게 문제 삼지 않는다.  122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탈이데오로기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냉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지배된 세계를 살고 있다. 

지젝은 냉소주의적 태도를 "그들은 자신의 행위 속에서 자식이 환영을 달고 있음을 잘 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렇게 한다"로 요약한다. ..

지젝은 우리가 어떤 이데올로기의 허위를 비난할 수 있는 진리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이데올리기 속에 던져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 방식이 현실과 이데올로기를 대립시키는 이원체계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젝은 삼원체계, 혹은 삼항 구조에 입각하여 이데올로기를 분석한다.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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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THREE 일과 삶

 

10 우리는 시간과 투쟁한다.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전보다 더 오래 살고 있으면서도,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졌기 때문에 시간은 더 없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247

 

아이들에게 기다림을 가르치는 것은 양육에서 중요한 부분인 동시에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은 조직 시간이 자주 자기 시간이나 상호작용 시간보다 우선시되는 세계에서 꼭 필요한 기술이다. 25

 

우리 문화에서 시간은 돈이다... 일을 더 빨리 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시간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비행기, 자동차 컴퓨터는 빠르지만, 우리는 그것들과 더불어 점점 더 많은 곳을 가고 더 많은 일을 한다. 우리가 더 빨리 일할수록 우리의 시간은 더 빨리 새로운 일로 채워진다. 우리가 더 빨리 움직일수록 우리는 더 적은 시간을 갖게 된다. 사람들이 속도에 집중할수록 서로에 대한 인내심은 점점 줄어든다. 또한 빠르게 돌아가는 삶은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사람들은 자유시간이 전혀 없다고 불평한다. 253-254

 

앨빈 토플러가 <미래 충격>에서 지적했듯이, 사회 변화가 빠른 시기에는 문화 전체가 일시적인 공황을 경험할 수 있다. 254

 

시간의 속도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의 수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더 많은 시간 동안 일할 뿐만 아니라 더 많이 이동해야 하고, 가야 할 곳도 더 많다. , 더 많은 것을 사야 하고,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즐겁게 해줄 오락활동들도 더 많이 있다. 우리가 정해진 시간에 더 많은 활동들을 끼워 맞추려고 노력할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가는 듯하다. 오늘날 우리는 시간이 더 없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에 더 시간이 없는 것처럼 느끼는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255

 

사람들이 시간에 맞춰 일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뤄진 현상이 아니다. 과거 고용주들은 사람들을 시간에 맞춰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분투했다... 숙련된 장인들은 늦게 일어나 더 늦게 일을 시작했다. .. 17세기 초까지 영국의 노동자 계급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산업화 이전의 삶은 대학생들의 생활과 약간 유사했다. 불규칙적인 식사와 수면이 과음과 파티, 그리고 잠샘 작업과 어우러져 있었다. ..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산업화 이전 사람들의 시간에 대한 태도는 우스꽝스럽고 유치해 보인다. 우리는 이미 조직 시간의 요구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 산업화 이전의 노동자는 게으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시간을 돈으로 여기지 않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돈보다 여가가 더 가치있는 것이었다. 255-256

 

17세기와 18세기 유럽의 남성 및 여성 근로자들은 매주의 첫날에는 일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스스로 정한 그 휴일을 () 월요일이라고 불렀다. 남성들은 술을 마시고, 길모퉁이를 서성거리고, 싸우고, 투견이나 투계 선술집에서 내기 게임을 하며 월요일은 보냈다. 일요일은 가족을 위한 날이고, 월요일은 친구를 위한 날이었던 것이다. 여성들도 술을 마셨지만 대개는 집안일을 하면서 월요일을 보냈다. 성 월요일의 흔적은 1970년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서 헤일리는 베스트셀러 소설 <자동차>에서,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월요일에 만들어진 차를 결코 사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주말이 끝난 후, 근로자들은 병가를 내서나 피곤한 상태로 출근하기 때문에 월요일에 만들어진 차들은 다른 날 만들어진 차들보다 덜 믿음직한 성능 기록을 가지고 있는 편이라는 것이다. 256

 

고용주들은 사람들에게 규칙적으로 일을 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낮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일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1900년대 초, 헨리 포드는 전혀 다른 방식을 택했다. 노동규율을 강화하기 위해 낮은 임금을 이용하는 대신 오히려 보수를 높여주고 주당 근무 시간도 줄여주었다. 그는 사람들을 착실한 근로자로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탐욕스런 소비자로 만드는 것, 즉 충분한 임금과 쇼핑하기에 충분한 시감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가지 모두 기업에 이득이 되었다. 257

 

테일러화(과학적 관리법의 창시자인 테일러의 이론에 따라 모든 업무를 단편화하고, 개별 작업자의 동작을 규정, 감시함으로써 시간과 동작의 낭비를 줄여 일의 생산성을 높이려는 것.). 260

 

아마도 현대의 일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점은 자신이 생산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시간에 대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점일 것이다. 263

 

시간에 맞춰 일하는 것에 저항했던 산업화 이전의 우리 조상들과, 시간과 과업에 의해 구조화된 일을 하는 현재 사람들의 상태는 일과 시간에 대해 세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첫째 아마도 과업 지향적인 일이 시간 지향적인 일보다 더 자연스럽고 만족스러운 듯하다. 둘째, 아마도 우리들 대다수는 짧은 시간 동안 열심히 일하고 긴 자유시간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셋째, 그러나 우리 문화에 존재하는 시간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고려한다면, 일정한 노동 시간이 정해지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다. 264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고용인들에게 자신의 노동시간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264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어떤 면에서 20세기의 가장 급진적인 경영 혁신이다. .. 지난 백년 동안, 대부분의 경영 혁신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일에 끼워맞추도록 돕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바닷속의 좁쌀 한 알(滄海一粟, 창해일속)’에 불과하지만, 개인이 자기 삶을 중심으로 일을 조절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황에 맞게 일을 조정하도록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시간제 근무이다. 시간제 근무는 최근 나쁜 평판을 얻어왔으며,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많은 고용주들은 전일제 고용인들을 해고한 다음 그들의 자리를 더 값싸고 쉽게 내보낼 수 있는 시간제 고용인들로 메우고 있다. 둘째, 시간제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회보장 혜택을 받고 있지 않으며, 임금 수준도 낮고 승진 가능성도 없는 직업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제 근무를 선호한다. 265

 

우리들 대부분은 업무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266

 

일이 우리 삶에서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할수록 모든 활동은 점점 더 일처럼 느껴진다. 시계와 일정표는 우리의 사회생활로부터 자연스러움을 빼앗아간다. 이제 사람들이 친구의 집을 예고 없이 방문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 되고 있다. .. 현재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거나,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하고 있지 않은 일은 아마도 잠자는 일일 것이다. 신경 생리학자인 스탠리 코랜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첨단 기술인 시계가 지배하는 생활방식 덕분에우리는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보다 연간 500시간의 수면을 덜 취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269

 

최근에는 컴퓨터, 이메일, 팩스, 휴대전화, 호출기 등이 우리를 일터의 벽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제 일부 사람들은 침대에서 잠옷을 입고 일하거나 해변에서 수영복을 입고 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

근로자들이 직장 내의 책상에서 떠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술은 일하는 시간의 범위를 넓히거나 그 시간의 양을 증가시키는 데도 이용된다. 270

 

장소에서의 융통성은 근무시간에도 융통성을 부여한다. ..

신기술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지만, 그것은 잠재적으로 우리를 하루 24시간, 1365일 내내 고용인으로 만든다. 271

 

시간은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것을 팔고, 사용하고, 사고, 투자하고, 아끼고, 죽인다. 274

 

샘 킨은 자신의 책 <열망>에서 .. 일이 사람들을 지배하면 사람들은 무력해지고, 성적 구별이 사라지며, 시장 원칙만이 추종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일직이 알베르 카뮈가 말했듯이, 일이 없으면 삶 전체가 타락한다.”그러나 자유시간이 없어도 삶은 타락할 수 있다. 275

 

 

11 여가와 소비주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가가 인간의 행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믿었다. ..

그리스어로 여가라는 단어는 스콜레(skole)’이며, 라틴어로는 오티움(otium)’이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모두, 일을 뜻하는 단어는 여가를 뜻하는 단어의 부정형이다. ‘이라는 뜻의 아스콜리아(ascholia)’네고티움(negotium)’은 둘다 여가가 아닌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스페인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뜻하는 스페인어네고시오(negosio)’여가각 아닌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어, 라틴어, 스페인어 모두 여가가 마치 생활의 중심인 것처럼 일을 여가와 관련시켜 비유한다. 영어단어 레저(lisure)는 라틴어의 리케레(licere)로부터 파생되었는데, 그것은 허락되다라는 의미이다. 영어에서는 마치 일이 생활의 기준인 듯 여가를 일에 빗대서 표현하고 있다. , 우리가 일을 멈추도록 허락되었을때가 여가라는 것이다. 276-277

 

사업가들은 일요일을 우울하고 지루한 날로 만들려는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그렇게 하면 일을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여가가 너무나 보람차고 즐겁다면 사람들은 일터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279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고용주들은 토요일 휴가를 주는 것에 반대했다. 그들은 고용인들이 말썽만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280

 

TV를 더 보고 싶다는 이유로 일하러 가기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 사람들은 나뭇조각으로 카누를 만들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가한 시간을 원하지만, 단지 TV를 더 많이 보기 위해 여가시간을 원하지는 않는다(비록 한가한 시간에 그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TV를 보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282

 

마르크스는 인간에게 본성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다. 283-284

 

한때 여가는 아마추어를 위한 시간으로 여겨졌다. 아마추어라는 단어는 라틴어 아마토르(amator)’, 애호가라는 단어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아마추어를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애호하는 사람또는 어떤 것에 대해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아마추어는 돈이나 명성 같은 외적인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재미있고 본질적으로 보람을 주기 때문에 취미를 개발한다. 285

 

1970, 경제학자 스테판 린다는 <곤경에 처한 유한계급>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부유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자유시간더 많은 소비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대부분 더 많은 소비를 선택한다고 주장했다. 286

 

돈을 쓰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돈을 벌기 위한 시간, 쇼핑할 시간, 그리고 유람용 모터보트나 패키지 투어 등 돈으로 구매한 물건들을 사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

소비는 일하고자 하는 욕구가 약할 때조차 일을 해야 할 필요를 창출한다.. 287

 

십대(teenager)들조차 자신의 여가를 소비와 교환한다. 과거의 십대들은 가족을 돕거나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 자신이 원하는 사치품을 사기 위해 일하는 중산층 십대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인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젊은이들에게 을 장려했다. 그들은 젊은이들이 일을 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규율을 발전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287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는 것은 십대의 학업을 방해할 뿐 아니라 호기심 많고, 상상력 풍부하고, 호전적이어야 할 시기에 적응된 온화함(adjusted blandness)”을 심어줄 수 있다는 그린버거와 스타인버그의 주장이다. 288

 

여가와 소비재를 교환하는 십대들은 그들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일과 소비의 패턴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을 잃는다. 만약 그들이 물건을 사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자유시간을 포기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여가를 가질 수 없다. 그들은 어떤 활동들이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좋은지 발견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은 (부모를 비롯하여 다른 권위 있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일이다. 말썽을 일으킬 위험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시장이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닌, 자기 방식대로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289

 

우리는 미국인들이 점차 타인 지향적으로 변해가고 있다1950년대 데이비드 리스먼의 주장을 논의한 바 있다. 타인 지향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원할 뿐 아니라 시장의 물질적 동기와 고용주가 제공하는 심리적 유인에 의해 움직인다. 리스먼의 말은 옳았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택권을 제공하는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지만, 아마도 그로 인해 우리의 행동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안에 불어넣은 욕구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쇼어는 소비가 대개 지위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290

 

주디스 윌리엄슨은 <열정의 소비>에서, 시장이 우리의 열정을 소비하고, 그것이 더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무장해제시킨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

돈은 당신이 돈을 번 방법을 포함하여 많은 것을 숨겨준다... 우리는 고객으로서 권력을 가지고 있다. 시장에서는 현금이나 수표, 혹은 신용카드를 갖고 있기만 하면, 당신이 누구든 상관하지 않는다. 292

 

'여가'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본질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가행위를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단지 그 행위 자체를 즐긴다. 293

 

만약 당신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주변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지 않다면, 일과 소비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여가를 즐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 여가는 돈이 들지 않는다. 친구나 가족과 어울리는 것, 소설책을 읽거나 단지 공상에 잠기는 것만으로도 여가를 즐길 수 있다. 여가는 우리에게 소중하고 할 만한 가치가 있는 활동을 하는 시간이다. 여가는 자유로운 시간 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장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릴 것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삶을 이해하는 것이 한층 더 어려울지 모른다. 295

 

 

12 의미 있는 일, 그리고 행복한 삶

 

"의미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어떤 이들에게 의미 있는 일은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일을 뜻한다. 다른 이들은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원한다. 의미 있는 일의 본지로가 그에 대한 욕구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철학적 질문의 모태가 되는 질문에 직면해야만 한다. ,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296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한다. 300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 자체가 정신 질환의 징후라고 생각했다. 마리 보나파르트에게 보낸 편지엣 그는 이렇게 썼다. "누군가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묻는 순간, 그는 이미 병에 걸린 것이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 왜 나는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가?"처럼 부정적인 방식으로 제기되면 우울한것이 사실이다. ..

심리치료자이자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인 빅터 E.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중심으로 치료 방법을 개발했다. '의미치료(logotherapy : 이 이름은 '의미'리는 뜻의 그리스어인 '로고스'로부터 파생되었다)'는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 원동력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 프랭클은 삶의 의미는 변화하는 것이고 사람마다 다른 것이지만, 사람들은 선행을 하고, 가치를 경험하고, 마지막으로 고난을 통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300-301

 

<나의 고백>이라는 글에서 레오 톨스토이는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 시작한다. 톨스토이는 모든 인류가 삶의 의미를 알고 있지만, 자기 자신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303

 

놀랍게도,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관심을 기울인 현대 철학자는 거의 없다. 또한 관심을 기울였더라도, 그들의 대답은 어쩔 수 없이 신학자나 심리학자들의 대답만큼 구체적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질문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곤 한다. E. D. 클림케는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영역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눈다. 첫 번째 질문은 우주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존재 이유와 그 목적에 관한 것이다. 가장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세 번째 질문이다. 나는 왜, 어떤 목적으로 존재하는가? 만약 목적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그것을 발견할 것인가? 목적이 없다면 내 삶은 어떤 의미나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일부 철학자들은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 자체가 하나의 대답만을 암시한다는 이유로 그 질문을 해체시킨다. 다른 이들은 그러한 질문에는 대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무의미한 질문으로 여긴다. 305-306

 

철학자 L.J. 러셀이 지적하듯이, 만약 삶의 의미가 오직 그 결과에 의거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결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내일 잼을 만들어라, 어제 잼을 만들어라. 그러나 오늘은 잼을 만들지 말아라.", "당신은 자녀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당신의 자녀들도 그들의 자녀를 위해 마찬가지로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잼을 먹지는 못한다." 의미 있는 삶이란 현재를 위한 삶과 미래를 위한 삶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러셀을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들은 삶의 의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이라고 좋아한다. 그러나 러셀은 삶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오늘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307

 

도덕성이 반드시 당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다른 모든 이들의 가치 있는 삶을 살 권리를 존중한다면, 이론상으로 우리는 모두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 행복으로 가득한 삶은 의미 있는 삶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행복한 삶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행복하기'위해 해복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 즉 삶의 목표이다. 어리스토텔레스는 실용적인 지혜, 탁월함, 즐거움이라는 세 가지가 행복한 삶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세상에 대해 배우는 것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학구적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수준에서의 학습, 재능이나 기술을 발전시키는 일이 삶의 보람된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세스는 탁월함에 대해서도 도덕적이고 지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우리는 두 가지 설명을 모두 종합하여,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다. 309-310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 또한 행복의 중요한 요소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무 즐거움이나 행복의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오직 고귀하고 도덕적인 즐거움만이 참다운 행복으로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행복은 오직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행복은 활동적인 사람에게만 온다. 이러한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가생활은 게으른 생활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활동적인 삶이다. 인간은 어떤 일을 '' 때 가장 행복하다. 누군가를 감옥의 텅 빈 독방에 가두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최악의 고문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죄수에게서 자유뿐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행위와 상호작용까지 박탈하는 것이다. 포로 수용소의 생존자들은 종종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활동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미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삶 전체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삶의 행복한 부분의 총합 이상이다. 당신이 항상 행복할 필요는 없다. 행복한 삶은 고통과 슬픔까지도 포함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급자족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결핍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는 행복이란 게 반드시 살아가면서 원하는 걸 얻는 데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때때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원하는 것을 얻어도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과 의미는 모두 도덕성과 관련되어 있다. 행복하고 싶다면 당신은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며, 도덕적으로 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원해야 한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행복에 대한 보편적인 요구와 우리 문화에 널리 퍼져있는 불행은 일을 지향하는 문화의 산물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는 오직 일을 통해서만 행복을 얻는다. 그것은 극도의 피로와 회복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310-311

 

심리학자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행복 연구는, '일이 행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만들어낸다'는 아렌트의 견해를 지지하는 듯하다...

칙센트미하이는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 동안에는 약 절반 가량의 시간 동안 몰입을 경험하고, 여가시간에는 18% 정도만 몰입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일에 몰입할 때 창조적이고, 강하고, 활동적이며, 집중적이고, 동기화된 느낌을 더 많이 갖는다는 의미였다. 311

 

칙센트미하이의 연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통찰은, 현재 우리의 문화에서 사람들은 일터가 아닌 곳엣 이러한 행복한 순간을 제공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312-313

 

자본주의는 삶의 수단을 제공할 뿐 삶의 목적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315

 

20세기 내내 고용주들이 조직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이것을 손에 넣어 이용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중 맨 처음에 등장한' 과학적 관리법'은 육체를 손에 넣으려고 시도했고, 다음으로 출연한 '인간관계론'은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으며, 이제 몇몇 컨설턴트들은 '영혼'을 건드리려 하고 있다. 317

 

'직장에서의 영성'은 대중 심리학과, 일시적으로 유행했던 경영학 이론이 항상 해왔던 일을 반복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 그것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듦으로써, 애초에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던 권력과 갈등, 자율성에 관한 심각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대신 그거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이다. 318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제공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의미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320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처럼, 의미 있는 일은 주관적인 특성과 객관적인 특성을 모두 지닌다. .. 일의 사회적 의미와 도덕적 가치는 문화와 개인에 따라, 그리고 시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세상을 '인식'할 뿐 아니라,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창조'해주지 않는다. 320

 

개인이나 조직이 의미를 창출하려고 시도할 수는 있지만, 만약 그러한 의미가 교묘한 속임수로 만들어낸 환상이라면 그것은 냉소주의만을 가져올 뿐이다. 앞서 우리는 따로따로 일하는 사람들을 ""이라고 불렀던 회사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어떤 것의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그 의미까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한 상황 혹은 실재를 파악해야만 한다. .. 모든 고용인들은 존엄과 존중을 가지고 처우받아야 한다(너무나 많은 근로자들이 수년간 자신들이 '성인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해왔다)...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이라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삶에 참여하는 방식에 대해 약간 다른 주장을 했다. 그는 결정하고 생각하는 능력이 결여된 노예라도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워지면 이러한 능력을 되찾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일부 사람들은 노예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대신해서 생각하고 결정해주는 것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한다. 321

 

의미 있는 일은 우리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정의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그것을 보면 알게 된다. 종교직과 같은 일부 직업들은 본질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직업들보차도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이 의미를 발견할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의미 있는 일이 항상 편안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고통이나 고된 일 혹은 스트레스를 수반한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여전히 좌절하거나 지쳐서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은 대체로 개인의 삶에 활기를 북돋워준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경험과 우리가 논의한 숭고한 여가의 개념은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322-323

 

모든 사람이 의미 있는 일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존중받기'를 워하며, 어느 정도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고 싶어할 뿐이다. 결국 선의는 심리적으로 계획되기보다는 존중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번성하는 경향이 있다. 323

 

 

 

에필로그 - '''삶의 질'을 향상시켰는가?

 

이 책은 저주로부터 소명으로, 그리고 그 이상의 것으로 변화한 일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다...

일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첫째, 일은 더 나아졌는가? 그리고 "더 낫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분명 임금 노동자는 노예보다는 낫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을 노예와 농노, 계약제 하인, 그리고 초기 산업 노동자들보다는 육체적으로 덜 고되고 덜 지저분하고 덜 위험하다. 그러나 "더 낫다"는 것은 또한 고용주와 고용인들 간의 도덕적 관계를 포함해야만 한다. 직장 내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공정성이 존재하는가? 개인들은 '더 나은' 처우를 받고 있는가? 혹은 일이 우리의 삶을 향상시켰는가? 이 역시 "더 낫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달려 있다. 일이 삶의 물질적 조건들을 향상시켰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삶의 질'을 향상시켰는가? 우리의 직업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324-325

 

나는 현대의 경영자들이 올바른 직장을 '만들기'보다는 개인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느끼도록'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을 비판해왔다. .. 현대의 경영 기법이 낳은 또 다른 결과는 일이 점차 우리 삶의 보다 큰 부분을 차지하도록 일의 사회적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

오늘날의 고용주들은 자신들이 많은 것을 고용인들에게 약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특히 주주들에게 그토록 많은 것을 약속해야 할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들은 교묘한 속임수로는 신뢰와 헌신을 얻어낼 수 없음을 알고 있다. 325

 

고용주들은 자기 책임을 회피하고 고용인들에 대한 의무 없이 그저 권한만 유지하려 든다. 글나 근로자들은 자신의 실수뿐 아니라 경영자 및 경제의 실수와 "불운"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더욱 나쁜 것은 그들이 그것을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질책한다는 것이다. 326

 

고용불안정은 실업률이 낮을 때보다 새로운 삶의 방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326

 

정직한 직장은, '약속을 지키는 최상의 방법은 자신이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하는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328

 

과거의 사회계약이 사라졌다면 새로운 사회계약은 어떤 것일까? 조직은 직업 안정성을 약속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정보의 공유를 약속할 수는 있다. .. 경영자들은 조직의 모든 정보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용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될 정보는 가능한 한 많이 고용인들과 공유해야 한다. .. '정직한 직장'이란 고통스러운 진실을 이야기해줌으로써 그들이 그것에 대비할 수 있게 해주는 조직을 의미한다. 결국 그것이 "근로자들을 성인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329

 

상호존중은 단기적인 헌신관계를 만들어내는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서로에게 존중을 표하고 존중을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진실이 항상 듣기 좋은 것만은 아니며, 우리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항상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을 '신뢰'한다...

존중, 신뢰, 정직은 양 방향으로 작동한다...

'진실'은 그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울 것이다. 분명 대부분의 고용인들과 학생들은 평균 이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향상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준다면 그들은 진짜로 평균 이상이 될 기회를 얻는 것이다. 330

 

전통적인 노동윤리 아래서 개인의 고결함은 그가 어디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일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일하는지에 달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경영이론가와 고용주 들은 '일을 잘하는 고용인일수록 자기 삶을 희생한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한다. 331

 

 

내가 현대인의 일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한 가지 이유는 단지 직장 내의 불의, 경영 술수, 혹은 경제적 불안정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적인 큰 그림을 살펴보았을 때, 나는 삶 자체가 더 편해져야 할 시대에 이르러서도 유급고용이 살을 지배하는 것을 보고 당혹감을 느꼈다. 우리들 대다수는 어디서 어떻게 살지, 어느 곳에서 일하고 어떤 물건을 구입할지에 대해 전례 없이 많은 선택권을 가진 놀라운 시대, 후기 산업사회에 살고 있다. 기계들은 우리의 노예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기본적인 필수품을 상대적으로 쉽게 얻을 수 있다. 지금은 삶이 온갖 종류의 보람 있는 활동들로 가득 차야 할 시기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오랜 근무시간뿐 아니라 채무에 시달리고 있으며, 스트레스와 외로움, 그리고 가정해체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왜 그런가?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항상 더 많은 것을 워하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331-332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우리는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 , 생활 속에서 선택의 방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학예(liberal arts)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332

 

보다 광범위한 질문은 "우리는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삶을 원하는지 알고 있고, 그것을 위해 무언가를 기꺼이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그것을 위해 현재 포기하고 있는 것만큼의 가치를 갖는가?"이다. ..

일이 지배하는 삶 역시, 그것이 의식적인 선택이고 개인을 행복하게 만든다면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삶을 일에 꿰어맞추는 대신 일을 삶에 통합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333

 

 

 

 

역자 후기 - '일과 삶', 그 본질에 대한 고찰

 

일 혹은 일의 부재는 우리 삶에 너무나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정작 지금껏 우리가 하는 ''에 대해, 그리고 '일과 삶의 관계'에 대해 통찰해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335

 

현대사회에서 일은 자아실현의 수단이자, 개인의 존재를 의미 있게 만드는 도구로 그럴듯하게 포장된다. 일은 우리의 모든 것이며, 우리는 일을 잃음으로써 그에 수반되는 모든 것을 - 심지어 가정까지도 - 잃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올바르고 바람직한 현상인가? 일은 본래부터 모든 희생을 감내하면서 지켜야 하는 무엇이었나? 일은 종류에 상관없이 무조건 개인에게 성취감과 만족을 주는가?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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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TWO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5 일과 자유

 

독립, 자유, 평등과 같은 미국의 문화적 가치들에 비춰볼 때 타인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은 ()미국적인것에 가깝다. 이것은 미국인들이 서로 돕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그들은 자기 방식대로 무언가를 하고 싶어할 뿐이다. 115

 

노예제도는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는 방법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방법이다.

노예제도는 일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 가치의 타락, 최악의 상태로서의 일을 의미한다. 오늘날까지도 노동자들은 그는 나를 노예 취급해라든지 나는 그녀의 노예가 아니야혹은 그 사람은 정말이지 노예 감독관이야라는 말을 종종 한다. 불쾌하지만, 노예제도는 매혹적인 관리법의 전형이다. 그것은 일꾼들에 대한 완전한 소유와 통제를 의미한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위해 일한다. 그러나 노예는 살아 있기위해 일한다. 117-118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도를 찬성했지만, 노예제도가 사람들로 하여금 짐승과 분되는 인간의 측성, 즉 선택하고 숙고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 등을 발휘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인간 이하로 만든다고 저술했다. 그의 글에 따르면, 노예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해 아무런 통제권을 갖지 못하므로 어떠한 행복도 갖지 못했다. 그들의 랆은 대부분 일과벌, 음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노예들을 동기 부여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에게 언젠가는 자유를 주겠다는 상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들은 다시 인간이 되는 셈이다. 118


가장 가혹한 근로조건 아래서 일하는 현대의 고용인들조차도 노예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 노예들과 달리 그들은 항상 일을 그만둘 수 있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유를 되찾을 때까지 보통 여덟 시간만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항상그만둘 수 있을까? . 일터를 떠난다고 해서 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118-119

 

불행히도, 노예제도는 완전히 과거의 것은 아니다. 영국의 노예폐지협회(Anti Slavery Society), 노예제도에 관한 국제연합 실무위원회(UN Working Group on Slavery), 그리고 인도의 노예해방전선(Bonded Liberation Front) 같은 단체는 노예제도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 여전히 존재한다고 보고한다. 이들 집단은 자신의 노동으 자발적으로 그만둘 수 없는 사람은 누구나 노예로 간주한다. 여기에는 대금업자에게 돈을 갚기 위해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하는 강제 노역자들, 자신이 일하는 경작지를 떠날 수 없는 농노들,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착취당하거나 가족에 의해 팔려 무보수로 일하는 아동들이 포함된다. 119

 

계약제 하인들에게 사회계약은 실질적으로 고용주가 대부분의 힘과 권리를 갖는 법적 계약이었다. 뉴잉글랜드 바깥 지역의 초기 백인 이주자들은 절반 이상이 계약제 하인이나 무임도항(無賃渡航) 이주자들(도착한 후 일정 기간 동안 노동을 해주기로 약속하고 무임으로 도항한 이들)로 미국에 왔다. 그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일해야만 했다. 결국 고용이란 자유와 기회로 이어지게 될 일시적인 노예 상태를 의미하였다. 122

 

영국 정부는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한 수단으로 계약노예제도를 인가했다. 앞서 말했듯이, 민간 해운 업체들은 다른 어떤 상품보다도 노동력을 팔아 더 많은 돈을 벌곤 했다. 존 반 더지는 새뮤얼 애덤스, 존 애덤스, 제임스 오티스,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작가들이 폭정(tyranny)’굴종(slavery)’ 같은 단어를 자주 사용한 이유가 계약노예제도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계약노예제도는 과거의 유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연구자들은 불과 몇 년 전에 로스앤젤레스의 노동착취 사업장(sweat shop)에서 계약노예제도를 사용하는 태국인 고용주를 발견했다. 그들은 하루 열일곱 시간씩 재봉틀로 옷을 박는 일흔 네 명의 태국인 여성들을 발견했다. 고용주는 한 아파트에 여성들을 가두고는, 만약 도망치려고 시도하면 그들과 가족들을 해치겠다고 위협했다. 미국의 초기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오는 뱃삯을 갚는 데 수년이 걸렸던 것처럼 태국 여성들도 고용주에게 항공료를 지불하기 위해 칠 년간 일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여성들 중 일부는 자신들에 대한 처우 방식에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오로지 집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부치는 것뿐이었다. 또한 미국에서는 오페어(au pairs)들의 처우에 관련된 추문도 있었다. ‘오페어란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외국 여자로, 숙식을 무료로 제공받는 대신 한 가조고가 살면서 가사를 돕고 아이를 보살피는 일을 한다. 당시 미국에 온 젊은 오페어들은 학대와 과로, 저임금에 시달리곤 했다. 그들은 미국에 가게 된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싼값에도 기꺼이 일하러 온다. 그리고 땔 그들은 자신들이 계약제 하인보다 나을게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24-125

 

노예제도와 계약노예제도에서는 타인의 노동을 빌리기보다는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드러난다. 백인 계약제 하인들은 1650년경에 시작되어 1800년대에 확대된 흑인노예들의 대규모 유입 이전에 미국에 왔다. .. 남부의 농장주들은 백인인 하인들보다 흑인노예들을 훨씬 좋아했는데, 이는 흑인노예들이 기후에 더 잘 적응하고 더 온순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주인이 그들을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5

 

노예제도를 옹호했던 노예 소유자들은, 남부의 노예들이 북부의 임금노예들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오히려 남부의 노예들이 더 나은 상태에 있다고도 주장했다. 주인들이 노예들을 부양하고 있고, 어둡고 더러운 공장에서 일하는 산업 고용인들과는 달리 위생적인 야외에서 더 짧은 시간 동안 일한다는 것이었다. 북부 사람들은, 임금 노동자들이 자신의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자신의 일에 대해 현금으로 보수를 받는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이에 대해 반박했다. 그러나 자물쇠를 채운 상태로 장시간 공장 노동을 시키는 것, 아동의 노동, 위험한 기계, 유해한 공기 등을 포함한 끔찍한 노동조건은 북부인들의 이러한 도덕적 주장을 약화시켰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영국의 산업 노동자들을 미국의 노예들과 비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그들은 미국의 흑인들보다도 못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철저히 감시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처럼 살아가도록,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도록 요구되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그들도 비인간적인 생산양식으로 인해 마찬가지로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북부 생산업자들에 대한 반론은 임금노동자들의 자유가 비인간적인 노동 현실을 보상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126

 

문제는 그들이 과연 북부의 생산업자들보다 더 적은 이윤을 원했거나 필요로 했을까하는 점이다. 127

 

한 개인이 자신의 일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사실이 고용주의 학대를 반드시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문제는 한 개인이 얼마나 많은 선택권을 실제로갖고 있는가이다. 127

 

굶주리고 겁에 질린 사람이 자신에게 음식과 안전을 제공할 만한 사람과의 계약관계를 자유롭게맺기로 선택할 수 있는가? 128

 

철학자 존 로크는 빈곤한 자의 복종은 주인의 동의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굶어죽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하인이 되는 것을 택한 가난한 자의 동의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노예가 되도록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가난한 사람이 당신의 노예나 계약제 하인이 되기로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란 얘기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것일까? 128-129

 

우리는, 착취당하는 가난한 자들이 만약 착취당하지않았다면 훨씬 더 못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라는 착취의 논리에 쉽게 빠져든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이러한 논리를 보여주는, 일하는 원숭이들에 대한 풍자적인 보고서를 실은 적이 있다. 채국 남부에서는 매년 150만 톤의 코코넛 열매를 따기 위해 수천 마리의 원숭이들이 고용된다. 마을의 가족들은 원숭이를 훈련시켜, 농장주들에게 빌려준다. 원숭이들은 농장주로부터 달걀과 쌀, 과일 등 원숭이 임금으로 매달 약 12달러 정도를 벌어들인. 일하는 원숭이들에게는 이름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목욕시키고, 돌보고, 하루 세 번 음식을 준다. 때로 그들의 주인은 자신의 모터스쿠터 뒤에 그들을 싣고 일하는 곳가지 태워다주기도 한다. 아픈 원숭이는 하루 동안 일을 쉰다. 너무 늙어서 일을 할 수 없는 원숭이는 은퇴해서야생으로 돌아가거나 가족의 애완 동물로 남는다. 일하는 원숭이의 불리한 점은 항상 사슬에 묶여 있고 원하는 대로 번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사는 이러한 형태의 고용이 인간에 의해 서식지가 파괴되고 있는 게잡이원숭이 같은 몇몇 종들의 멸종을 막아준다고 지적한다. ...

농부가 원숭이의 자유를 빼앗기는 하지만, 원숭이들은 특히 서식지 대부분을 농부들에게 빼앗긴 이후 그들끼리 야생의 생태계에 남겨지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지내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원숭이의 생각이 어떤지 알 수없다. ... 제도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간단하다. 농부들은 원숭이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생각하기에원숭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원숭이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괜찮다고 한다...

농부는 원숭이가 하루 세 번의 식사를 필요로 한다고 결정하고 원숭이가 이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때로 고용주들은 고용인들이 갖고 있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 욕구를 충족시킨다. 130-131

 

우리 모두 정도는 다르지만 생계를 꾸리기 위해 우리의 노동과 시간을 팔아야 한다. 131

 

일반적으로 우리는 취직을 할때,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고용주들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는 것에 동의한다. ..

임금이 상실된 자유에 대한 보상이라는 견해는 또한 몇몇 터무니없는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은 한 살마이 직업에서 더 적은 자유를 누릴수록, 더 많은 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현실은 정반대이다. 표면적으로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직업일수록 더 높은 지위를 나타내고, 더 많은 돈을 받는 경향이 있다. 폴 퍼셀은 자신의 책 <계급>에서, 한 사람이 직업에서 누리는 자유의 양이야말로 임금보다 나은 계급의 지표하고 주장한다. 132

 

사람들은 직업에서 더 많은 통제권을 갖도록 해주는 전문 지식을 얻기 위해 기꺼이 시간과 돈을 희생한다. 예를 들면, 과거 젊은이들은 장인의 도제로 수년을 보냈는데 이것은 사실상 계약고용었다. 미국의 도제들은 장인과 일하기 위해 노동계약서에 서명했다. 영국의 도제제도는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그 제도를 운용했던 조합은 건너오지 않았다. 그 결과, 자격 기준이나 인증서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133

 

장인의 가치와 힘은 무언가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버지들은 기술의 비밀을 아들들에게 물려주었고 스승들은 도제들에게 물려주었다. .. 비밀은 장인들에게 힘과 자율성을 주었다. 그러나 미국에는 비밀성을 강화해줄 만한 강한 조합제도가 없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장인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책과 간행물을 통한 정보의 보급이 광범위해지면서 몇몇 장인들은 자신의 비밀을 인쇄하여 대중들에게 팔기도 했다. <유용한 천 가지 비밀(1795)>과 같은 실용서(how-to book)들은 조각, 철물상, 니스칠, 시멘트 바르기, 밀랍으로 봉하기, 유리, 페인트, 도금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 135

 

오늘날에도 여전히 번성하고 있는 실용서의 전통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실용서가 아닌 산업화가 장인들의 힘과 권위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일이 갖는 의미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 기계화는 일을 보다 효율적으로 실행시켰을 뿐 아니라 몇몇 업무를 단순 작업화함으로써 사람들은 기계의 일부처럼 쉬비게 대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136

 

 

6 일꾼 길들이기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의 생산업자들은 미국인 숙련 노동자의 태도 문제(attitude problem)”와 싸워야 했다. 숙련된 미국 태생의 일꾼들은 자신의방식으로, ‘자신의 속도에 맞춰 일하고 싶어했다. ..고용주들은 생산에 대한 통제권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미국의 자유와 평등 원칙에 공공연히 위배되지 않으면서도 노동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해야만 했다. 137

 

테일러는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를 중퇴하고, 산업 현장에서 일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할 기회를 거절했다. 140

 

노동자들을 장악하고 생산 속도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열쇠는, 누구나 최대한 효율적으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도록 일을 설계하는것이었다. 141

 

1878년 미드베일 제강에 입사한 테일러는 빠른 속도로 십장과 주임기사 자리에 올랐다. 미드베일에 있는 동안, 그는 산업 생산성을 증진시키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 테일러가 창안한 가장 유명한 과적적 관리법의 실례는 펜실베이니아로 이민 온 네덜란드인 헨리 놀의 사례이다. 테일러는 자신의 연구에서 그를 슈미트라고 이름붙였다. 141

 

테일러는 슈미트가 제대로만 한다면 하루에 47톤의 무쇠를 실어나를 수 있다고 계산했다. 현재 속도는 하루 12.5톤이었다. 테일러는 슈미트와 나눈 대화를 <과학적 경영의 원리>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그는 당신은 몸값이 높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값싼 노동자들 가운데 한 명입니까?” 하고 슈미트에게 묻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그러고는 하루 1.15달러를 벌고 싶은지, 아니면 1.85달러를 벌고 싶은지 물어본다. 슈미트는 후자를 택하고, 테일러는 이 냉정하고 짧은 대화에서 값비싼 일꾼(혹은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한다.

이제 당신은, 몸값이 비싼 사람은 아침부터 밤까지 지시받은 대로 정확히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값비싼 일꾼이라면 당신은 이 남자가 내일 당신에게 지시하는 대로 아침부터 밤까지 정확히 실행해야 합니다. 만약 그가 당신에게 무쇠를 들고 걸으라고 말하면 .. 당신은 무쇠를 들고 걷습니다... 그가 앉아서 쉬라고 하면 당신은 앉습니다. 이제 값비싼 일꾼은 지시받는 대로만 행하고 말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슈미트는 지시에 따랐고 하루에 47.5톤의 무쇠를 운반했다. 60% 더 많은 보수를 받는 대가로 400%나 더 많은 일을 한 것이다. 그러자 다른 노동자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든 돈을 위해서든 혹은 두 가지 모두 때문이든, 그들 여기시 슈미트와 똑같이 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테일러가 <과학적 경영의 원리>를 출판한 덕분에 슈미트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노동자가 되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곧 에스페란토를 포함한 12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테일러의 방식은 세계 도처에서 위대한 발전으로 인정받았다. 비평가들은 슈미트의 경험과 그에 대한 테일러의 묘사에 숱한 경멸감을 나타냈다. 이 책이 노동과 생산에 대한 엄격한 통제에 관한 것임을 고려한다면, 러시아 판에 주를 단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나 아돌프 히틀러, 그리고 한 때 테일러의 미망인을 만나 그의 사진을 요청한 적이 있는 베니토 무솔리니 등이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142-143

 

과학적 관리법의 네 가지 기본 요소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첫째, 과학적 관리법은 중앙집권화된 계획과 일의 순차적 단계들을 정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과거에사람이 먼저였다면, 미래에는 체계가 먼저일 것이다.” 둘째, 과학적 관리법은 각각의 작업을 가장 단순한 부분들로 쪼갰다. 셋째, 과학적 관리법은 경영진에게 고용인들을 훈련시키도록 요구했고, 각각의 노동자들은 업무 수행을 면밀히 감시받게 되었다. 테일러는 일의 구조뿐 아니라 고용인들의 가치관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용인들은 서로를 통해 일뿐만 아니라 할당량을 유지하고”, “남자답게 처신하는도덕적 자세를 배웠기 때문에 회사로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일하도록 고용인들을 훈련시키는 편이 더 나았다. 속도를 중시했던 테일러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할당량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과학적 관리법의 넷째 요소는 고용인이 지시받은 대로 일하도록 하기 위한, 주의 깊게 고안된 임금 체계에 기초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자신의 논문 <왜 생산자들은 대학생을 싫어하는가?>에서 협력이란 노동자들이 지시를 받았을 때 의문을 제기하거나 제안하는 일 없이 신속히 지시받은 대로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저술했다. 테일러는 순종을 얻어내고 할당량을 깨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용인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의 사리사욕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20년대 중반, 과학적 관리법의 논리는 거의 모든 산업에서 호응을 얻는다. 143-144

 

미국노동총연맹에서는 테일러의 체계를 생산성 증가 체계(speedup system)”라고 불렀다. 144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에서는 노동쟁의가 밣생했다. 145

 

대부분의 고용주들은 평온한 노사관계를 원했기 때문에 고용인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기로 했다. 1차 세계대전이 할창일 때, 애국심이 사람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을 보고 감명받은 몇몇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조직에서 그러한 종류의 정신과 헌신을 끌어내는 것을 보고 감명받은 몇몇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조직에서 그러한 종류의 정신과 헌신을 끌어낼 수는 없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복지 자본주의에 대한 영감은 노동 불안에 대한 두려움, 높은 이직률로 인한 비용, 자선 단체들, 그리고 대외관계 등을 포함한 여러 원천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또한 진심으로 고용인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고 싶어하는 사업주들도 있었다. 복지 자본주의의 이면에 자리잡은 일반적인 생각은 고용인들을 행복하게 하거나 그들의 이익이 그들 자신의 계급적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닌, 고용주의 이익과 결합된는 공동체에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146

 

초기 복지제도의 일부는 침대차 제조업자인 조지 모티머 풀먼이 고용인들을 위해 1880년 시카고 외곽에 지은 시범 마을처럼 근로자들의 삶을 통제하기 위해 고안된 온정주의적 기획이었다. 풀먼은 그들의 고용주였을 뿐 아니라 집주인이자 지역 상점의 소유자였다. 146-147

 

또 다른 복지제도들은 근로자들에게 회사의 주식과 더 높은 안정성을 제공하기도 했다. .. 1923P&GIBM같은 회사들은 연간 48주의 전일 고용을 보증하기 시작했다. P&G는 또한 1886년 이익분배제도를 시작했으며, 시어스 로벅 사도 1886년에 그것을 시작했다. 1927년까지 80만 명의 근로자들이 이러한 이익분배제도나 소위 근로자주식소유제도(ESOPs; employee stock ownership plans)10억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 인터내셔널 하비스터 사는 1911년에 연금제도를 실시한 수많은 기업들 중 하나였다. 당시의 또 다른 혁신에는 건강보험, 안전기준의 개선, 회사 구내식당 같은 시설이 포함되었다. 147

 

고용주들은 미국식 제도 아래서 복지 자본주의의 많은 교의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고용인들의 충성과 협력을 얻어낼 수 있기를 바랐다. 148

 

1935, 전국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은 고용인들이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할 권리나 결정에 관한 진정한 발언권을 갖고 있지 않다면 품질관리 서클을 비롯한 모든 유사한 참여 조직들도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법안은 허위조합(sham unions)”, 또는 실제 조합을 막으려는 시도로 고용주가 만든 사내 조합을 금지했다. 오늘날 고용주들은 이 법안이 작업장에서 참여 조직의 활동을 금지한다고 불평하곤 한다. 148

 

복지 자본주의와 미국식 제도는 192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고, 1930년대 대공황이 오자 재빨리 자취를 감추었다. 당시의 한 비평가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분명한 것은 임금노동자들의 복지를 고용주들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많은 회사들은 실제로 고용인들엑 대해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대공황기에 미국식 제도가 소멸되자 곧바로 고용주와 고용인 간의 신뢰와 충성을 방해하는 주요한 장애물 가운데 한 가지가 부각되었다. ..

1935년의 한 경영자 회의에서, 뉴저지 벨 사의 회장인 체스터 버나드는 복지 자본주의가 근로자의 발전이나 협력 증진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49

 

1920년대는 산업 혁신과 실험 그리고 노조 억압의 시대였다. 경영에서의 인간관계 접근은 고용인들의 태도와 감정이 어떻게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 경영진은 고용인들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고용인드로과 대화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방법을 알 필요가 있었다. 150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조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노조라고 하면 어떤 이들은 게으르고 돈만 많이 받는 부패한 특수 이익집단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어떤 이들은 노조가 지나친 욕심과 낮은 생산성으로 세계시장에서 미국의 경쟁력을 파괴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 노동조합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많은 부패와 난폭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의 탄생은 여전히 역사상 가장 중요한 노사관계 혁신이다. 이는 노동조합이 양자간에 존재하는 힘의 불균형을 조절해주기 때문이다. 157

 

 

7 노동의 두 얼굴

 

1950년대에 C.라이트 밀스 같은 사회 비평가들은 대기업이 고용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우려했다. 그는 거대한 관료 조직에서의 사무직 노동의 우울한 모습을 그렸다. 밀스에게 일의 황금기는 가족 농장과 소규모 독립 상인들의 시대인 1850년대였다. 그는 1850년대에는 일이 삶과 잘 통합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다고 기술했다. 자신이 사는 집에서 일했던 장인이나 상인에게는 이것이 사실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밀스는 또한 일을 살에 통합시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고, 소외는 나쁜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는 산업 노동자들과 사무직 노동자들에게는 일의 의미가 너무나 축소된 탓에, 일이 더는 내적인 방향성과 사회와의 연결성을 제공하지 모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믿었다.

밀스가 보기에, 사무직 노동은 어떤 면에서 비숙련 노동보다도 못했다. 그는 계약노예들(paroles)”은 육체적으로는 고생스럽더라도, 적어도 집에 가면 자유인 반면 사무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뿐 아니라 개성까지도 팔아치워야 한다고 말했다. 밀스는 사무직 노동자를 새로운 작은 사람(new little man)””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고, 뿌리가 얕아 충성심이라고는 없으며, 항상 서두르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밀스에 따르면, ‘새로운 작은 사람은 반영웅적이고, 자신의 역사를 알지 못하며, 어려운 시기에 회상할 만한 황금기를 겪어보지 못했다. 162

 

새로운 작은 사람에 대응하는 인물을, 밀스는 미국 조직의 새로운 권력자(new men of power)””라고 불렀다. ...

밀스에 따르면, 일의 상당수가 파편화되고 무의미해져서 계급 이동성과 향상의 여지가 거의 없는 대규모 복합 조직에서는, 열심히 일한 개인이 자기 발전(혹은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가 실행될 수 없다. .. 밀스는 인사 부서의 목적이 쾌활하고 협조적인 부하들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용인들의 감정마저도 조직이 바라는 대로, 조직의 손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직장 내의 정서를 통제함으로써, 고용주들은 근로자들을 소외시키지 않고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정당화할 수 있게 되었다.

밀스는 사무직 근로자가 조직의 목적에 적합한 사람이 되도록 조직에 의해 심리적으로 강요당하며, 자신의 개성을 팔아버렸기 때문에 이후 일 외의 부분에서는 천박하고 보잘것없는 삶을 살도록 운명 지워진다고 주장했다. .. 밀스가 설명하듯이, 일은 가정생활과 공동체 내애서의 생활을 향상시키기보다는 파괴한다. .. 밀스와 같은 비평가들이 실제로 우려하는 것은, 근로자들이 이로 인해 시간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 미치는 조직의 영향력으로 인한, 일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개인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163-164

 

데이비드 리스먼이 1950년에 출간한 책 <고독한 군중>

이 책 속의 타인 지향의 생활: 보이지 않는 손에서 악수하는 손까지라는 장에서, 리스먼은 타인 지향적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공예 기술보다는 사람 다루는 기술을 더 강조하고, 은행계좌의 잔고보다는 교제비를 더 중시한다고 주장했다. 일은 재미있는 것으로 가정되고, 관리자들은 비서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사장과 고객들을 기쁘게 하는 악수하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리스먼에 따르면, 타인 지향적 사람은 회사에 우선적으로 속하고, 가정과 교회, 공동체에는 더 얕게 뿌리내리는 경향이 있다.

1950년대 후반의 직장은 오늘날의 직장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 “사회윤리이러한 윤리는 조직의 충성 요구를 합리화하고, 진심으로 스스로를 희생하는 고용인들에게 헌신하고 있다는 느낌만족을 준다. 이러한 윤리에는, 집단은 창조성의 원천이며 개인은 궁극적으로 소속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리고 경영학 분야에서 일하는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들이 그러한 소속감을 창출하는 방법을 고안할 수 있다는 믿음이 포함된다. 165

 

1950년대의 사회 비평가들은 사람들이 조직에 순응하는 것, 그리고 새로 등장한 교외생활의 가치에 대해 걱정했다. 오늘날 우리는 합의된 가치의 부재와 도시 및 교외 공동체의 파괴를 우려한다. 직장에서는 여전히 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이 증가하고 있고, 집단의 가치가 강조된다. 누구도 창조성의 상실이나, 개인의 정체성이 집단의 정체성에 종속되는 문제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듯하다. 경영자들은 팀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의 문제에 보다 큰 관심을 갖는다. 너무나 많은 그들의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오늘날 경영 이론가들은 집단과 팀이 모든 바람직하고 생산적인 것의 토대라고 믿는다.

와이트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릇된 집단화에서 가장 잘못된 시도는 집단을 창조적 도구로 보려는 시도이다.” 오늘날 인기 있는 경영 개념과는 반대로, 와이트는 사람들이 집단 내에서 제대로 사고하거나 창조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집단은 단지 일의 시행을 지시할 뿐이다. 166

 

와이트의 책 이후로, ‘팀의 영광(glories of teams)’에 대한 끝없는 저작과, ‘집단에 대한 엄청난 양의 연구가 쏟아졌다. 오늘날 조직의 수사학(rhetoric of organizations)은 팀, 파트너, 가족, 동료와 같은 단어를 포함한다. 그러나 단결된 조직과 팀이 일을 하거나 의사결정을 하는 데 늘 최상의 방법인 것은 아니다. 어빙 제니스 같은 연구자들은 우리에게 집단적 사고의 불이익을 경계하라고 충고했다. 집단적 사고 강태에서 한 집단의 구성원들은 비슷하게 사고하기 시작하고,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보지 못하게 된다. ...

조직은 더 이상 와이트가 자신의 책에서 논의했던 인성 검사를 실시하지는 않지만, 대신 마이어스브리그스 유형지표(MBTI ; Myers-Briggs Type Indicator) 같은 다른 유형의 검사들을 실시한다. 이것은 개인의 성격 유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지표이다. 167

 

일부 조직들은 순응적인 고용인을 선택하기 위해 아직도 검사를 이용하고 있다. 168

 

와이트가 보기에 인성 검사는 개인의 자율성과 사생활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러나 많은 고용인들은 그러한 검사를 자기 인식 및 발전을 위한 도구로 여긴다. 별자리 운세나 성적 매력에 대한 잡지 퀴즈들처럼, 심리 검사는 내적인 자아를 명확히 보여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문제는 우리가 직장에서 그러한 검사를 받게 되면, ‘자기 인식을 얻은 대가로 자기 노출과 어쩌면 부당한 분류깢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

책의 결론 부분에서 와이트는 독자들에게 조직과 싸울 것”, 그리고 회사의 순응 요구에 말려들지 말 것을 권고한다. 168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욕구 단계” ...

욕구야말로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전부라고 가정하는 것은 인간의 열정, 이상, 가치가 갖는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자신의 가치나 자신에게 중요한 것에 기반한 선택을 한다. .. 우리는 우리가 가치있게 여기는 것을 선택한다. .. 피라미드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우선순위를 갖고 있는 고용인들은 경영진에게 악몽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조직이 줄 수 있는 것, 즉 소속감과 명성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172

 

일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다양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다른 사람들과 일할 때, 우리들 대부분은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은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우리가 걸치는 페르소나와 허용되는 감정의 범위는 직업에 띠라 달라진다. 181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하는 동안 자기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서비스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특정한 감정 상태를 지녀야 한다. 과거의 서비스 분야 종사자들은 정중해야 했다면, 오늘날에는 친절하기까지 해야 한다. 알리 러셀 혹실드는 그녀의 도발적인 책 <감정의 통제>에서 ...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제품을 생산하는 데 지적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서비스를 제공할 때 자신의 실제 감정을 항상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서비스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은 자신의 존재와 아무 상관도 없는 무언가를 마지못해 생산하고 있다고 느낀다. 182-183

 

유리는 매일 상업화된 개별화와 쾌활함, 친절함에 노출되어 있다(비록 어떤 경우, 이러한 감정은 상당히 진실된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서비스의 즐거운 얼굴(happy face)” 관점은 정중함과 공손함 이상의 것이다. 183

 

 

8 유망한 직장

 

1980년대에는 수많은 최신 경영 방법들이 엄청나게 유행했다. .. 직장 민주주의 실험이 쇠퇴했음에도, 많은 회사들은 고용인들에게 권한을 주거나일에 대한 더 많은 발언권을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학자들은 점점 더 많은 근로자들이 일에서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지식노동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해싿. 1980년대가 되자, 일은 매력적이고 재미있으며 흥미로운 것처럼 보였으며 직장은 마치 행복한 대가족인 듯했다. 187

 

하버드나 와튼 같은 주요 경영대학원들은 그러한 주제에 대한 강의를 들으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6년까지, <포춘>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의 75%사명선언문이나 윤리강령을 갖고 있었다.

윤리강령에 대한 관심이 1980년대에 높아진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일부 회사들은 부정적인 보도 추무느 소소으 불법 활동들에 대해 염려했다. 또 다른 회사들은 고용인들이 다양한 배경과 가치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통된 윤리적 가치를 진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대중 및 고객과 즇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바람을 가진 일부 기업들은 윤리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말뿐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체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사는 윤리강령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막연하게 느끼는 기업 지도자들도 있었다. 188

 

노예제도와 계약노예제도, 그리고 과학적 관리법을 거친 1980년대 중반의 기업들은 과연 이상적인 직장이 되었을까? 189

 

1980년대의 잘 팔리는 경영학 서적들에서 자주 몸델로 제시되었던 회사들은 휴렛팩커드, 존슨 앤 존슨, 리바이 스트라우스, AT&T와 같은 존경받는 성공한 기업들이었다. 또한 경영학 연구에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기업드로과 잘 팔리는 경영학 서적을 쓴 컨설턴트의 고용주들이 이런 책에 자주 등장했다. 이들 회사는 경영 혁신의 성공을 증명한다. 한편 이러한 상황은 대기업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자금 지원을 받은 경영학 연구가 과연 객관성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질손의 견해가 여전히 타당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또한 조직 내의 힘, 권력, 갈등에 관한 질문들이 왜 경영학 교과서나 대중 문학에서 논의되는 일은 드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수 있다. 190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 그리고 주로 일본과의 세계경쟁에 의해 많은 기업들이 황폐화되었던 1980년대에 경영자들은 좋은 충고를 갈망했다. 시장에는 경영자들의 사기를 향상시키고 근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쓰여진 경영학 서적들이 일시적으로 넘쳐났다. 191

 

<초우량 기업의 조건>은 분명 1980년대의 가장 중요한 경영서였다. ..

피터스와 워터만은 조직 속에서의 경영자 역할이 기업문화를 형성하고, 고용인들에게 의미를 창출해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피터스와 워터만은 가치, 상징, 이데올로기, 언어, 신념, 의식([儀式 거동의 법식), 그리고 조직의 신화를 의미하는 말로 기업문화를 사용했다. .. 피터스와 워터만은 직장 민주주의를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통제되고 잘 조직화된 체계 내에서 자신의 일을 잘할 수 있는 자유를 강조했다. 그들은 무엇이 고용인들을 흥분시키는 지 알아내고 조직내에서 호손 효과를 의도적으로 지속시키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고용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2-193

 

1982년에 출판된 텔렌스 E. 딜과 앨련 A. 케네디의 <기업문화>.. “강한 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하는 일을 더 기분 좋게 느끼도록 만든다. 따라서 그들은 더 열심히 일하는 경향이 있다.” ... 딜과 케네디는 강한 기업문화가 고용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 즉 구조와 가치 체계, 그들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회사에 소속되었다는 자부심 등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삶에서 불확실성을 제거해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위 고용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문제점들 중 일부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았다. 과연 고용인드르의 개인적인 취미는 무엇이며, 그들이 거기에 시간을 쓰는 것이 왜 잘못되었는가? 우리는 우리 삶의 가치를 확신하고있어야 하는가? 193-194

 

강한 기업문화의 커다란 이점은 그것이 포괄적이고 자동 조절되는 사회 체제라는 점이다. 불리한 점은 그것이 억압적인 동시에 변화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부정적인 면은 고용인들이 충분히 일 바깥에서 충족시킬 수 있는 욕구, 예를 들면 우정의 욕구 같은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점점 더 일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당신이 실직하게 되면 당신은 이로가 소득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195

 

로버트 하워드는 <놀라운 새 일터>에서 새로운 조직은 일터를 보다 인간적으로 만듦으로써 다시 마술에 걸리도록 시도하는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

하워드의 놀라운 새 직장에서는 도넛 타임이나 맥주 파티 같은 사교 모임들이 의사소통을 증진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임에 참석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일종의 억압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장치들은 팀 정신과 조직에 대한 헌신을 끌어내기 위해 적절히 이용되었다. .. 기업문화가 다양한 노동자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더라도 여전히 모든 살마들은 함께 도넛을 먹어주어야 한다. 마법에 걸린 회사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종류의 일을 하도록 요구한다. 본래의 업무와 이러한 사교생활에 참석하는 일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두 가지 일 모두에 대해 평가를 받는다. 에티켓 전문 작가인 주디스 마틴(“미스 매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업무상 사교(business entertaining)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줌으로써, 직무관계(business dealing)에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충성같은 사회적 기준을 적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업무상 사교는 모순 어법이다. 196-197

 

프레더릭 윈슬로 테일러가 말한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조직에서 일터는 ... 힘과 통제의 관계가 명확했다. 주어진 기능을 수행하면 될 뿐 자아를 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 단순하고 눈에 보이는 세계이다. 하지만 이제 더욱 고달파지고 둔감해진 일의 세계에서는 직업을 계속 유지하는 것 자체가 유인(誘引)이 된다. 197

 

존 미클스웨이트와 애드리언 울드리지는 자신들의 책 <주술사들>에서, 오늘날에는 너무나 많은 경영 이론들이 있으며, 그들이 서로 모순되곤 한다는 점을 지적햇다. 예컨대 어떤 이론은 독특한 기업문화일수록 좋은 것이라 말하고, 다른 이론은 다문화적인 기업일수록 좋은 기업이라고 말한다. 한 이론은 (quality)’’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다른 이론에서는 중요한 것은 속도라고 말한다. .. 경영학 이론의 유행 주기는 10년에서 1년으로 짧아졌다. 컨설팅 회사 베인 앤 컴퍼니25개의 인기 있는 경영학 이론들을 골라, 기업들이 얼마나 많은 이론들을 자신들의 업무에 적용하는지에 대한 조사를 전세계에 걸쳐 실시했다. 조사 결과, 1993년에는 평균 11.8, 1994년에는 12.7개의 이론이 사용되었으며, 1995년에는 그 수가 14.1개로 증가할 것이라고 베인앤 컴퍼니는 추정했다. 제너럴 일렉트릭 사의 CEO인 잭 웰치는 기업이 서로 다른 경영 아이디어들을 시도해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고용인들에게도 유익할까? 201

 

1980년대, 그들은 조직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회사의 사교 모임에 참여했다. 1990년대, 이제 훈련은 팀 만들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202

 

경영학에서의 일시적 유행과 관련된 문제점은 그들이 종종 무비판적이고 역사적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경영 이론가들은 일에 대한 동일한 사실을 반복해서 발견하고, 그것을 발견할 때마다 매번 또다시 기뻐한다. ‘팀워크1980년대와 1990년대 경영자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던 커다란 ()개념들 가운데 하나이다. 203

 

미클스웨이트와 울드리지는 오늘날 스포츠팀은 점점 더 사업가처럼 활동하는 반면, 회사 조직들은 고용인들로 하여금 보다 더 스포츠팀처럼 행동하도록 장려한다며, 이런 상황이 얼마나 반어적인지에 주목한다. ..

팀은 문화보다 훨씬 더 강력한 형태의 사회적 통제를 가능하게 만든다. 204

 

고용인들이 협력을 얻어내는 것은 항상 도전이었다. 많은 회사들이 팀을 만들어 이끌거나 코치하는 법을 배우는 데 투자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205

 

팀 지도자들은 팀과 한몸이 되어야 하는 반면, 팀 구성원들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205-206

 

딜버트 만화는 이러한 태도를 가장 잘 요약한다. 딜버트의 상사가 고용인들에게, 그들을 빠르게 움직이는 팀으로 재편성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자, 고용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좋은 계획이네요 우리가 스스로를 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그 다음엔 우리가 무기력하고 세밀하게 조종되는 노예라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할 테니까요.” 206

 

1980년대의 경영 이론들 중에서 종합적 품질경영(TQM; Total Quality Management)만큼 열렬히 신봉된 것은 없었다.. ..이것은 품질관리가 전 과정에 걸쳐 이루어져야 하지, 과정의 마지막에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208

 

만약 제품의 질을 향상시키면 생산성도 향상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완제품에 대한 품질관리를 하는 대신 전 과정에 걸쳐 품질관리를 하라는 것이다. 209

 

미국 정부는 TQM을 채택하고 장려했다. ...

리처드 J. 피어스는 TQM과 리더십에 관한 자신의 책에서 현장 관리자들이 지도자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 피어스는 계속해서, 근로자들 또한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분야에서 품질 성과를 개선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기는 해도, 아무런 부가적 보상을 가져오지 않을 것(“내게 무슨 득이 돌아오나요?”)이다. 그렇지만 생산성 및 품질의 개선은 장기적으로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 필요가 있다. .. 당근을 대신하는 채찍(혹은 숨겨진 위협)인가? TQM의 이면에는 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제대로 행한 일은 본질적으로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을 포함한 장인윤리의 회복이라는 고귀한 정신이 존재한다. 210-211

 

데밍이 원래 제시했던 품질경영의 열네 가지 본질적 요소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이 회사를 위해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직장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직장에서의 두려움에 관해 연구한 캐슬린 D. 라이언과 대니얼 K. 오스트리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복과 앙갚음, 그리고 징계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두려움을 낳는 또 다른 원인들은 조직 내에서 사람들이 논의하기 두려워하는 것, 논의 불가능한 것들에서 발견된다. 22개 조직의 260인을 대상으로 한 라이언과 오스트리치의 조사에서 가장 논의 불가능한 것으로는 사장의 경영 방식이 꼽혔다. 그 다음으로는 동료의 서오가와 보상 및 급여가 차지했다. .. 생산성 증가는 팀워크코칭과는 전혀 상관없는, 두려움 같은 요인들의 결과일 수 있다. .. TQM을 비롯한 경영 혁신들은 사람들에게 일을 더 나은것으로 만들어주었는가? 다시 말해 일은 보다 즐겁고, 의미 있고, 유익한 것이 되었는가? 이러한 새로운 제도들은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해주었는가? 그것들은 약속했던 모든 것-권한위임, 훈련, 팀 구성원이 되는 기쁨-을 주었는가? 213-214

 

리엔지니어링(Reengineering)20세기의 마지막 주요 경영 이론으로서 과학적 관리법과 적절한 대조를 이룬다... 리엔지니어링은 일련의 과업들이 한 사람에 의해 행해질 수 있도록 조정하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했다. 과학적 관리법은 근로자들을 전문가로 변화시키고, 일을 지루한 것으로 만들었다. 리엔지니어링은 고용인들을 만능일꾼으로 만듦으로써 일을 보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것으로 만든다. ...

리엔지니어링은 마이클 해머와 제임스 챔피의 공동 작품이다. ..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모든 경영 혁신들 주에서, 리엔지니어링은 한 개인이 하는 일을 보다 흥미롭게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214-215

 

한때 지시받은 대로 일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다... 경영자들은 이제 감독관처럼 행동하지 않고 코치처럼 행동한다. 근로자들은 상사에게 덜 신경 쓰는 대신 소비자의 욕구에 더 신경을 쓴다.’ ..

해머는 리엔지니어링은 더 적은 인원으로 더 적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구조조정이나 조직개편과는 다르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리엔지니어링은 더 적은 인워능로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다. 216-217

 

 

9 배신하는 직장

 

1990년대 중반의 많은 미국인들... 회사에서 해고당한다. .. 그들은 회사가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해치우고 싶어했기때문에 직정을 잃은 것이다. 그들은 세계경제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여성들과 소수민족의 사람들도 해고를 당했으며...직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 소득, 연금, 친구, 평판, 심지어 가족까지 잃는 일도 있다, 그들이 일한 세월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조직이 약속했던 것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일만 잘하면 은퇴할 때까지 직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묵언의 사회적 꼐약을 고용주들과 맺었던 것이다. ...

해고의 아픔을 극복하고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기술을 배워 더 나은 직장으 얻은 사람들에 대한 좀더 유쾌한 이야기도 있다. .. 그러나 이들 성공 스토리에 등장하는 사람들조차도 이전 직장에서 누렸던 것과 같은 생활 수준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1995년 노동부는 실직 노동자의 35%만이 동일하거나 더 나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 직장을 얻게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221-222

 

어떤 이들은 구조조정이 올바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잘못될 것이 없다고 좋아한다. ..

1990년대의 커다란 아이러니 중 하나는 실제 경영에 있어서는 구조조정을 강조했던 반면, 당시의 경영서들과 경영학적 수사법들은 헌신”, “충성”, “신뢰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

헌신은 노동력을 줄이고, 근로자들의 작업량을 두 배로 늘린 회사들이 특히 필요로 하는 덕목이었다. 222-223

 

구조조정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존재했으며 강한 노동조합에 의해 강화되어온 노동의 암묵적인 사회계약을 변화시켰다. ..

사회적으로 구조조정은 근로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있었거나 의심해온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 고용주들과 경제는 변덕스러우며, 당신은 조직에 너무 많은 것을 투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말이다. .. 산업화와 더불어 근로자는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취급받았다. 225

 

근로자에 대한 배신에 있어, 구조조정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 지난 20년간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기업들은 고용인들과 이윤을 공유하기는 커녕, 시장과 주식시장에서 거둔 성공을 치하한다며 임원들에게만 막대한 상여금과 스톡옵션을 주고 있다. 226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고든은 저서 <살찌고 비열한>에서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갖고 있는 경제적 문제들의 주요 원천은 대부분의 미국 기업들이 고용인들을 다루는 방식과 비대한 관료주의를 유지해온 방식에 있다고 주장했다. .. 대중은기업의 이윤과 중역들의 보수는 증가하지만 자신들의 임금은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체되거나 하락한 임금을 설명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끌어들이는 혐의는 세계 노동시장에서의 경쟁이다. ..

경제학자 제임스 K. 갤브레이스는 정부가 부자들의 편에 서 있는 탓에 중산층과 빈자들을 위한 정책에 실패하여 임금 및 소득의 불평등이 증가했다고 비난한다. 227

 

1974CEO들은 평균적인 근로자보다 40배나 많은 돈을 벌었다. .. 1999년 노동조합 단체인 페이워치(Paywatch)CEO의 평균 급여가 공장 근로자 평균 임금의 326배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급여 전문가인 그래프 S. 크리스탈은 이렇게 말한다. “CEO의 급여는 너무 빨리 오르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더는 놀라지 않는다.” 228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기분 좋게느끼게 만듦으로써 고용주들은 근로자들의 내게 무슨 득이 돌아오느냐?”고 묻지 않도록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현혹시킨다. .. 오늘날에도 불성실한 경영자들은 갈등과 사기 문제를 피하기 위해 근로자들에 대한 평가를 부풀린다(이것은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영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임금 인상은 억제되었고, 노동조합 참여는 감소했으며, 남아 있는 노조들의 힘도 약해졌다. 힘의 균형은 압도적으로 고용주에게 유리한 상태가 되었다. 229

 

엘튼 메이오의 시대 이후 경영진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돈을 덜 주면서 더 많은 일을 시킬 수 있을까?”였다. 연구 결과는 월급 인상이 반드시 사람들을 더 열심히 일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니며, 근로자들은 자신의 성과에 대해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어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직장에서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주되니 이유가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한다는 느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TQM이 너무나 효과적으로 실행되어서 근로자들이 실제로 내게 득이 되는 게 뭐죠?”라고 묻지 않는 일이 이제 가능해진 것인가? 그들은 정말로 업무 품질에 대한 인정만을 바랄 뿐 보수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가? 231

 

일을 보다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본래 그 자체로는 훌륭한 의도이다. 그러나 근로자들이 부당한 임금을 받고도 열심히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일을 더 그럴듯해 보이게 하는 것은 착취이다. 232

 

미래의 불확실성에 근거한 미묘한 두려움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일에 매달리도록 만든다. 우리들 대다수는 어떤 막연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더 오랫동안 일한다....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와 달리 두려움의 노동윤리는 구원의 희망을 약속하지 않는다. 단지 좀더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시장은 변덕스러워서 개별 고용주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 고용주는 사람들을 해고할 때 미안 하네, 경기가 안 좋아서...”라든지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지 않으면 경쟁할 수가 없네라고 이야기한다. 좌절한 실직자들은 누구를 비난하고, 누구에게 소리쳐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경영자들이나 정치가들을 비난할 수 없다. 그들 역시 세계경제를 통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직한 근로자들은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초점 잃은 분노를 품는다. 확정되지 않은 미래의 언젠가, 그들의 회사를 보다 경쟁력 있게 만들기 위해 그들의 삶은 혼란에 빠진다. 235

 

만약 카를 마르크스가 오늘날에도 살아 있었다면 그는 혁명을 요구했을 것이다. - “전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너희들이 잃을 것은 구속뿐이다.” 그러나 칸막이나 팀 안에서 일하는 오늘날의 근로자들은 단결할 수도 없고, 단결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잃을 것이 있다. 바로 그들의 직장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파업이나 저항 운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

냉소주의자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고, 단결하여 조합을 형성하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기 때문에, 혁명론자들보다도 함께 일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대신에 그들은 봉급을 받을 때 수동적인 저항과 비웃음으로 침묵의 파업을 행한다.

복지 혜책의 과감한 삭감, 더 긴 노동시간, 증가된 노동량, 구조조저으 그리고 급등하는 중역들이 보수에 대한 근로자들의 공공연한 침묵은 우리의 귀를 멀게 한다. 238



PART ONE 일의 의미와 역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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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일의 의미, 삶의 의미를 찾아서

 

우리가 가진 모든 연장들이 우리의 명령에 의해서든, 스스로 필요성을 인식해서든, 알아서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라... 베틀의 북이 혼자서 앞뒤로 움직이고, 연주자가 저절로 움직이는 리라를 연주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면 공장주들은 더 이상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노예의 주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쉬지 않고 일하는 로봇들에 의해 자동화된 공장을 보며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 이 시대를 기쁨으로 맞이하는 대신, 우리는 전보다 더 필사적으로 일(work)에 매달린다. 우리 사회는 일을 지향하는 사회이다. .. 우리는 일을 축복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일을 없애려고 하는 모순적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8

 

이 책은 우리 삶에서 일과 직장이 갖는 의미에 관한 책이다. 8

 

일은 우리의 지위뿐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까지도 결정한다.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시장이나 고용주의 손에 맡겨두는 결과를 가져온다. 괜찮은 삶을 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something more)’을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용주들은 자기개발이나 자아실현 같은 다양하고도 추상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방법을 찾는다. 9-10

 

오늘날의 일은 대부분 우리 사생활의 일부를 포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과거의 노동자들이 단지 과로했을 뿐이라면, 오늘날의 많은 노동자들은 과로할 뿐 아니라 과도한 통제를 받고 있다. 14

 

 

 

PART ONE 일의 의미와 역사

 

1 왜 일하는가?

 

잠시 동안 일하지 않는 생활을 상상하기는 쉽지만, 평생을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어떤 사람들에게 왜 일하는가?”라는 질문은 우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한 선택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합니다.” 이것이 대다수 사람들이 유급노동을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종류의 일을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19

 

윌리엄 줄리어스 윌슨은 그의 저서 <일이 사라졌을 때>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일자리가 부족하면 사람들은 단지 빈곤으로 고통을 겪을 뿐 아니라 공식적인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소소감을 상실한다. 더는 일이 그들의 생활을 규제하는 규칙적인 힘으로 작동하기를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윌슨에 따르면,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일은 규율, 소속감, 규칙성, 자기 효능감 같은 다양한 심리적 사회적 욕구를 만족시킨다. 그러나 과연 일이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가? 왜 실직자들은 여가를 통해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가? 20-21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직자들이 여가를 갖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또 다른 통찰을 제시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평화나 적당한 미덕, 교육이 없이는 여가도 가질 수가 없다. “비즈니스에는 용기와 인내가 요구되며, 여가를 위해서는 철학이 요구된다. 절제와 정의는 두 가지 모두에 필요하지마 특히 평화와 여가의 시기에 더욱 요구된다. 절제와 정의는 두 가지 모두에 필요하지만, 특히 평화와 여가의 시기에 더욱 요구된다. 왜냐하면 전쟁은 사람들을 공정하고 절제하도록 만드는 반면, 평화와 함께 찾아오는 상당한 재산과 여가는 사람들을 오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2

 

두려움, 물질적 필요, 책임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여가를 통해 스스로를 계발하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여가를 위한 교육을 통해 스스로에게 유익한 학습과 활동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활동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들이 읽기, 쓰기, 미술, 신체적 훈련, 음악 같은 과목들을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교양인 학계(liberal arts)’의 기초가 된다. 로마의 키케로도 학예가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교육에서, 삶의 필수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진리와 그 자체로 추구할 가치가 있는 지식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론적으로 볼때 교양은 일하는 방법이 아닌, 여가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

여가는 단순한 자유시간이상이다. 그것은 일에 대한 욕구와 필요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이며, 특정한 일으르 하기 위한 기회이다. 직업을 이맇었거나 직업을 가질 수없는 사람들은 결코 일에서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일할자유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선택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3

 

인간의 가장 흥미롭고 독특한 점은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난 에도 스스로 일하기를 선택한다는 점이다. 24

 

일을 통해 소득을 얻는다는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직업을 갖는 것이 우리 문화에서 그토록 바람직한 이유는 명백하다. 일은 우리에게 유용하기 때문이다. 일은 규율과 정체성, 가치를 제공한다. 일은 우리의 시간을 조직하고 우리의 삶에 리듬을 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이 우리에게 매일매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준다는 점이다. 교육과 소득, 평화와 안전이 주어진다 해도, 유급노동이 일의 중심이 되는 문화에서 자발적으로 일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매일매일을 만족감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활동으로 채울 수 있을까? 우리들 대다수는 그것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일을 통해 만족과 행복을 얻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일은 우리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준다. 그러나 인간이 일 자체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많은 학자들을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장 자크 루소는 게으름이야말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생산활동의 필요성은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부지런한 습관은 일이 가져다주는 산물이며, 우리가 일을 통해 얻는 실용적인 교육이 무언가를 해야 할 필요성과 바쁜 습관을 만들어낸다고 저술하고 있다. 요컨대 우리는 타고난 기질 때문이 아니라, 훈련과 도덕적 조건화로 인해 일할 필요성을 느낀다는 것이다. 25-26

 

일의 의미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일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27

 

개미와 같은 이런 유형의 사람은 은퇴를 위해 저축하며, 남은 20년 동안 이전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바라면서, 삶의 45년 내지 50년 동안 어느 정도의 즐거움을 저당잡힌다. 32

 

개미는 미래를 위해 살지만, 막상 미래가 왔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항상 아는 것은 아니다. 33

 

개미와 달리 베짱이는 현재를 위해 살고 미래를 희생한다. 그의 놀이는 아무데에도 이르지 못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노는 삶에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 있는 삶인가? 꿀벌은 개미처럼 일하면서도 베짱이처럼 자신이 우추구하는 것을 즐긴다. 꿀벌은 다른 사람들이 고맙게 여기는, 훌륭하고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데서 기쁨을 얻고 의미를 찾는다. 꿀벌은 유용하고 보상을 주는 일을 상징한다(물론 실제 꿀벌의 삶은 이야기 속의 꿀벌의 삶과는 전혀 다르다). 개미는 일하는 삶, 안전한 삶의 표본인 반면, 베짱이는 놀이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경솔한 삶을 대표한다. 그렇다고 해서, 베짱이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34-35

 

버나드 수츠 <베짱이의 놀이, , 유토피아>.. 수츠의 주장에 따르면, 당신은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일하면서 놀 수가 있다. 첫째, 당신은 일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둘째, 당신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

이솝 우화의 꿀벌은 개미처럼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개미와 달리 꿀벌은 꿀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즐기거나, 꿀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즐기거나, 여전히 꿀 만들기를 즐긴다. .. 몇몇 생산적인 활동은 필요성은 없으나 만족을 준다. 36

 

매미의 노래처럼, 놀이를 하는 유일한 목적은 즐거움이다. 이솝 우화 속의 베짱이는 무책임해서 굶어 죽지만, 매미는 배고픈 예술가로 그려진다. 매미는 음악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굶어 죽는 것이다. 두 개의 우화는 서로 다른 메시지를 전달한다. 예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반면 일보다 노래를 더 좋아해서 죽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들 대다수에게 더욱 적절한 질문은 만약 당신이 개미처럼 산다면, 즉 나이 들어 쇠약해질 때까지 일해서 돈을 저축한다며, 그것은 의미 있는 인생인가?”이다.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주어진 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37

 

일은 일 이외의 삶을 잠식한다. 일 이외의 삶은 일하는 삶보다 더 많은 것을 제공한다. 44

 

 

2 일이란 무엇인가?

 

일의 의미를 탐색하기 위한 좋은 출발점은 일(work), 노동(labor), 수고(toil), 업무(job)와 같은 단어들의 뜻을 살펴는 것이다. 우리가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정의하는 방식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어휘 사용이 시간이 지남따라 그 단어의 집합적인 이용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46-47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거나, 어떤 것의 이름을 바꾸는 행위는 잠재적으로 강력한 행위이다. 당신이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은 그것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48

 

일에 붙는 직함이나 사람들이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용어들은 직장에 대한 개념도를 형성한다. 고용주가 조직문화를 바꾸고자 할 때, 그들은 자주 재명명 방법을 사용한다. 49

 

필요성’.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 그것을 반드시 해야 하거나,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51

 

모든 문화에서 일에 대한 태도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태국어에서는 을 뜻하는 단어와 파티를 뜻하는 단어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

태국 사람들은 일이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며, ‘일 자체는 좋은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도 태국인들은 결코 게으르지 않다. 그들의 문화는 재미를 뜻하는 사눅(sanuk)’에 큰 가치를 둔다. 모든 활동은 사눅(재미있는)’마이 사눅(mai sanuk:재미없는)’로 구분된다. 사눅은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근심없는 즐거움을 뜻한다. 일이건 놀이이건 상관없이 어떤 활동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속성이 바로 사눅이다. 가령 태국의 어느 마을주민에게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단조로운 업무가 주어진다면, 그는 그 업무를 팽개치고 가버릴 것이다. 그것은 사눅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그 사람은 여러 날 동안 쉬지 않고 마을이 사원을 짓는 일을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일에서는 사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태국에 처음 공장을 지었을 때, 그들은 사눅의 중요성을 발견했다. 사실 초기에는 태국인들이 그다지 열심히 일하지 않았으며, 특히 아침마다 차려 자세로 서서 사가(社歌)를 부르는 의식을 싫어했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관습을 버리고 공장에서 음악을 틀어주기 시작했드며, 더 많은 휴식시간을 주고 작업중에 할 수 있는 놀이도 가르쳐주었다. 태국인들의 의식 속에서 일이 사눅이 되자 생산성이 증가 했다. 일과 놀이에 대한 태국인들의 태도는 같다. , 작업 파티는 생일 파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53

 

(work)은 너무나 다양한 것을 의미한다. 정말이지 대단한 단어이다. 우리는 일(work)하고일터(work)간다.’일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하는것이며, 우리가 만들어내는것이다. 미술 건축 음악 문학 작품(work)’도 있다. 우리는 의사, 회계사, 자동차 수리공이나 카펫 판매원의 솜씨(work)에 감탄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공간이나 나뭇조각, 빵 반죽, 고장난 자물쇠 등을 가지고도 일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의 해답을 내거나(work someone over), 운동을 하거나(work out), 좋은 일을 하거나(do good works), 누군가를 때려주거나(work someone over), 흥분하거나(get worked up), 자칫하면, 심지어 일벌레(workaholics)까지 될 수 있다.

이라는 단어는 동사이자 명사이며, 활동이자 활동의 산물이기도 하다. 55

 

노동(labour)’이라는 단어는 14세기 영어에서 최초로 등장했다. ..

동사노서의 노동(labor)은 행위만을 나타낼 뿐 행위의 대상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지만, 우리는 그가 딸기를 만들었다:고 말하지 안흔다. 비록 그의 행위가 딸기를 따는 이주 노동자보다는 훨씬 더 딸기를 만든 것에 가깝더라도 말이다. 화가가 그림 그리는 행위를 통해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노동하는 사람들은 대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는 육체적인 일을 하지만 직접 그것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56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노동,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필요한 물건을 다루는 일을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하는 하인의 일과 같다고 생각했다. 노동과 일은 두 가지 요인에 의해 구분된다. 첫째, 노동은 일에 비해 육체적 노려고과 더 크게 관련된다. 둘째, 노동자와 노동 대상의 관계는 일하는 사람과 그 대상과의 관계와 다르다. ..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노동자의 첫번째 정의는 봉사행위로서, 혹은 생계를 위해 육체적인 노동을 행하는 살마인 반면 일하는 사람의 첫 번째 정의는 만들거나 창조하거나 생산하거나 고안해내는 사람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노동이라는 단어가 로 격하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이 한 개인에 의해, 그리고 개인을 위해 행해지는 것인 반면 노동이라는 단어는 무언가를 만들거나 행하는 데 대한 개인의 기여를 암시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용어라고 말했다. ‘은 노동의 산물을 나타내는 명사이지만 노동은 일하는 사람들을 나타내는 명사이다. ‘노동은 육체적인 일을 하는 살마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반면, ‘은 다양한 행위나 그러한 행위의 대상을 가리킨다. 우리는 일조합이 아닌, ‘노동조합을 결성한다. 대부분의 조직에서 일은 협동적이며 상호 의존적인 사람들의 집단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터라는 말 대신 일터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집합적이고 육체적인 일보다는 개인적이고 비육체적인 일을 강조하는 것이다. 57

 

노동이나 수고같은 단어어비해 업무(job)’라는 단어는 상당히 유쾌하게 들린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명사 ‘job’덩어리(gob)’라는 단어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려준다. .. 17세기까지.. ‘업무란 영구적인 고용이 아니라, 일시적인 일을 의뢰받거나 잠시 고용되는 것을 가리켰다. 60

 

업무라는 단어는 대개 명사로 사용되는 반면 일하다라는 동사의 형태와 그들의 일에서와 같은 명사의 형태가 거의 비슷하게 사용된다. .. ‘업무의 또 다른 차이는 일은 보수를 받는 것과, 받지 않고 행하는 활동까지 가리키는 반면, ‘업무는 보수나 소득을 얻는 일에만 구체적으로 관련된다는 것이다. 61

 

업무라는 단어는 보수를 받기 위해 하는 도구적인 활동을 나타낸다. 그것은 일, 노동, 수고, 고역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업무의 정의는 일하는 살마과 그 산출물 간의 연관성을 암시하지 않는다. .. 일의 양에 대해서 ..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이 보수를 받기 위해 하는 한정된 양의 활동이라는 점이다. 62

 

 

3 일의 역사

 

살기 위해 일한다는 우리의 인식은 어떻게 해서 일하기 위해 산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을까? 64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일은 저주였다. ... 기원전 4세기의 역사가인 크세노폰은 사람들이 생의 좋은 것들을 누리는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 일이라고 기록했다. 만약 일이 신들의 저주라면, 그것은 정복당한 적이거나 포로가 된 외국인, 혹은 노예의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저주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편이 가장 낫다. 노예는 부유한 고대 그리스인들을 일에서 해방시켰다. 그리스인들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활동을 노예의 일로 여겼다. 노예제도는 인간의 지위를 강등시켰을 뿐 아니라 일의 사회적 도덕적 가치까지도 격하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이란 가능하면 노예들에게 떠맡겨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이득을 얻기 위해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저주가 되리 수 있다고 믿었다. 재산(땅과 노예들)을 소유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야말로 그가 생각한 인간적인 삶의 기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집 안에서 사용할 물건을 만드는 일과 상업적 이득을 위한 일을 구분했다. 그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기 위해 집에서 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인간의 필요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도 유한하다고 말했다. ..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소매업이나 금전적인 이득을 위한 일은 인간의 욕망(want)을 위해 실행되는 것이므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욕망은 인간의 필요(need)와 달리 무한한것이다. .. 돈을 벌거나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는 것 자체에만 열중할 뿐 잘 사는데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 어떤 것을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여가 활동의 정의이다. 게다가 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는데, 그들이 원하는 것과 그것을 얻기 위한 일은 결코 중단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65-66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개인의 생각과 견해가 그의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 평범한 거리의 그리스인은 유용한 상품을 개발하는 것에 대해 이러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을 것 같지 않다. 물론 우리는 그들이 정말로 그랬을지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평범한 살맘들은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하기 전에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원전 여러 동양 문화에서도 물질적인 세계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세계보다 덧없고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들이 을 경멸한 것은 아니다. 67

 

정신적 수양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이었다. 일의 과정은 결과보다 더 중요했다. 부처에게는 바닥을 쓸고 닦고 연료를 모으는 것 같은 가장 비천한 일조차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었다. 68

 

종교나 문화에 따라 일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혹은 중립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문화 내에서도, 서로 다른 종류의 일은 상이한 영적 도덕적 사회적 가치를 지닐 것이다. 모든 사회에는특정 유형의 일에 대한 고유한 편견이 존재한다. 68

 

고대 그리스인들은 다른 살맘들에 대한 봉사와 일반적인 육체노동에 대해 강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봉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시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치학>에서 그는 장인과 노동자들은 공동체의 하인들, “꼭 필요한사람들이기 때문에 시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장인이 시민이 될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로는 그들 대다수가 노예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조각의 황금기에 이 책을 저술했지만 조각가들이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조각은 격렬한 육체노동을 포함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조각을 노예 예술(servile art)’로 여겼다. 고대 그리스에서 육체노동자들은 시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몇몇 훌륭한 조각가들은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반면 그림을 그리는 일은 육체적인 노력을 덜 필요로 했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람이 행하는 학예(學藝)로 간주되었다. 학예는 깨끗하고 지적인 일일 뿐 아니라, 자유로운 사람의 일을 암시했다. ..

육체노동에 대한 편견은 르네상스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그림이 학예와 노예 예술의 중간쯤에 위치한다고 생각한 반면 조각은 여전히 노예 예술이었다. 69

 

생업이 목수였던 그리스도는 직업이란 무의미한 것이라고 설교했다. ...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질서와 정당한 보상, 수양을 위한 일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규칙적으로 살라고 충고한다. “여러분 가운데는 무절제하게 살면서 일을 하지는 않고 만들기만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하는데, 다른 이들의 빵을 먹음으로써 그들에게 짐이 되지 말라.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 여기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있다. 첫째, 일은 생활 리듬의 일부이며 사람들을 시끄러운 문제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둘째, 개미에 관하 이솝 우화에서처럼 일하지 않는 자가 먹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71

 

교회는 을 세 가지 정도로 구분했다. 그것은 삶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 다른 이들을 위한 일, 개인적인 이득이나 물질적 이득을 얻기 위한 일이다. 72

 

우리가 태만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기력이라는 뜻의 아시디아(acedia)’를 대략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태만을 게으름이나 일하기 싫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시디어의 본뜻이 아니다. 태만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게으름에 대한 비난이 아니며, 일의 가치에 대한 긍정도 아니다. 태만은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73

 

단순한 노동에 불과했던 이 두러지게 긍정되기 시작한 것은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이다. .. 529년 성 베네딕트는 몬테 카시노의 꼭대기에 수도원을 지었다. ...

성 베네딕트 이전의 수도사들은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힘들고 고통슬운 노동을 해야 했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육체적인 일에 보다 긍정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규정집의 주제는 오라 에 라보라(ora et labora)’,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이다. 베네딕트는 수도사들에게 신에 대한 헌신의 한 방버브으로서 무슨 일을 하든 착월함을 추구하라고 장려했다. “무엇보다, 어떤 일을 시작하든지 그것을 완전하게 해주십사 하고 신에게 진심으로 기도하라.” 74

 

성 베네딕트에게 일은 직업이나 소명(calling)이 아니라, 일종의 눈에 보이는기도였다. .. 베네딕트 교단은 유럽 전역에 걸쳐 퍼져나갔으며, 중세의 마으로과 도시를 발전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베네딕트회 수도사들은 중세 초기의 가장 능숙한 농부이자, 장인이자 기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노동을 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수도사들 중 가장 낮은 지위로 간주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일 자체를 가치 있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일과 신앙심 사이에 일련의 관계가 있음을 발견햇다 베네딕트 수도회의 전통에서 비롯된 노동윤리는 기독교인의 영적 미덕을 수공업을 비롯한 다른 직업에 까지 확대시켰다. 75

 

12세기에 이르러, 그 사람의 직업과 동일시한 성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베이커(빵 굽는 사람), 카펜터(목수), 대처(이엉장이), 스미스(대장장이), 위버(베 짜는 사람), 골드스미스(금 세공인), (요리사). 77

 

개인 및 집단의 정체성이 직업에 따라 새로이 형성되자 교회의 정책도 자신들의 일에 대해 보다 존중해 달라는, 조합과 중산층의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교회는 기꺼이 실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한 예로, 교회는 이 무렵 증가하는 중산층을 위한 중간 단계의 집으로서 연옥을 만들어냈다. 연옥은 중산층에게 천국과 지옥, 힘 있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존재하는 그들만의 진정한 영적 지위를 부여하였다. 연옥의 개념은 15세기 이전까지는 별로 유행하지 않았다. 15세기에 이르자 비록 비참하기는 해도 훌륭한 자금조달 장치(gimmick)인 연옥이 소곡(小曲)을 통해 찬미되었다. “금고에 동전 소리가 울리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솟아오른다.” 78

 

일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가장 애용하는 묘사, 창조로서의 일은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했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으며 인간은 음악과 미술을 비롯한 아름다운 거슬의 창조자이다. .. “예견하다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프로메테우스.. 고대인들에게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를 고된 노동으로 몰아넣은 사기꾼이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 인류가 운명을 붙잡을 수 있도록 허락한 영웅이 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신의 섭리를 막연히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기 시작하면서, 일이 지니는 가치도 커졌다. 14세기의 피렌체는 우리에게 세계를 만들어내고 자연의 형태를 바꾸는 창조자로서의 인간, 즉 호모 파베르(homo faber)의 이미지를 선사했다. .. 만약 종교가 중세의 아편이었다면 창조성과 미는 르네상스 시대의 각성제였다.

르네상스 시대는 고유한 노동윤리를 가지고 있었다. .. 자신의 돈으로 무엇인가를 도모하되 구두쇠처럼 돈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부자가 되어도 상관이 없었다. ..

육체와 정신을 룬련시켜야 한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믿음에, 르네상스는 손을 훈련시키는 것을 더했다. 81-82

 

15세기 인문주의자 로렌조 발라는 중세의 전통과 교황이 누리는 현세의 권력을 공격했다. 진정한 선의 본질에 대한 그의 저서 <쾌락에 대하여>에서 발라는 쾌락과 덕을 재정의함으로써 쾌락과 아름다움을 가득 찬 삶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소박함과 자기 절제를 명하는 스토아 학파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다. .. 그는 덕()쾌락으로 환원될 수 있는 요소(calculus pleasure)”라고 주장했다. 쾌락은 짐승 같은 충동이 아니라 이성과 통찰의 원리이며, 덕은 재능이자 인내하는 능력이었다. 82-83

 

1516년에 저술된 모어의 <유토피아>는 공리주의 원칙에 입각한 공산주의 사회를 이상향으로 그리고 있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는 청소나 도살, 사냥과 같이 시민들이 비천하고 창피스럽게 여기는 일은 모두 범죄자와 노예들이 도맡아 했다. 따라서 시민들은 보다 흥미로운 일에 종사할 수 있으며, 하루에 여섯 시간만 일해도 된다. ..

1602년에 쓰여진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는 공동체 생활과 과학적인 사회 질서를 강조했다. 캄파넬라의 이상향에서는 모든 사회 계층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그곳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캄판넬라는 가장 고귀한 사람들은 한 가지 이상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

일이 인간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일을 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르네상스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고 성취를 이룬 사람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고 자신의 일을 조절할 수 있는 사라이다. 따라서 전형적이 르네상스인은 오늘날의 인간관과는 급격한 대조를 이룬다. 83

 

16세기부터 18세기 사이에는 노동자의 자살을 금지하는 법이 확산되었다. 이는 당시 사회가 더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했고 그만큼 노동자 가치가 증가한 반면 노동자들의 절망 역시 더 커지고 있음으로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지표이다. 84


루터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게으른 거지와 부랑자들을 꾸짖었다. 그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집이 없는 이유는 그들이 일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었다.(바로 이 시점부터 오늘날까지, 몇몇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러한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다른 주요 종교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 관점에서 크게 이탈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코란에서는 거지들을 세상의 자연스런 질서의 일부라고 생각했으며 자선은 도덕적 영적 의무라고 생각했다. 85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 자체를 위한 일이라는 개념과 휴식과 쾌락에 대한 혐오는 칼뱅과 루터로부터 비롯된 거이다. 이것은 노동윤리라고 불리는 것의 수많은 형태 중 하나에 불과하다. 85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일과 모든 노동자들을 똑같이 존중하도록 가르쳤다는 점이다. .. 루터와 칼뱅의 노동윤리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람들을 구속해온 믿음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선하고, 일하지 않거나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이다. 86

 

종교 개혁가들은 모든 일을 베루프(Beruf, 시간을 차지하는 이르 직업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소명으로 정의했다. 소명은 일의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에 대한 태도를 일컫는다. ... 모든 일이 신의 명령이라는 생각은, 일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불쾌하며 보수가 적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보증해주었다. .. 프로테스탄트의 소명 개념은 일에 영적인 차원을 부여했다. 그것은 결코 일이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 ‘소명이라는 개념은 이제 우리의 일상 언어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현재는 종교적인 직업을 일컫는 데 주로 사용되고 있다. 대신에 소명이라는 말은 천직(vocation)’이라는 말로 세속화되었다. 우리는 때로 소명천직을 번갈아 사용하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창가 있다. 당신의 소명은 신이 결정하지만 천직은 당신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 87

 

우리는 지금까지 종교가 일의 도덕적 가치를 형성해온 과정을 살펴보앗다. 고대인들은 일을 강제적인 것이자 저주로 보았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일에 단순한 위엄(simple dignity)’을 부여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일에 매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신교도들은 일을 의미와 정체성, 구원의 징표를 찾는 과정으로 만들었다. 단순한 노동을 넘어선 일, 즉 소명으로서의 일 개념은 일의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특징을 강조했다. 일은 일종의 기도가 되었다. 일은 삶의 수단을 넘어 삶의 목저이 되어싸다. 일은 저주에서 소명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이르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수많은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88

 

 

4 일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

 

우리가 물려받은 노동윤리는 단일한 개념이 아니라 세 가지 개념이 융합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첫 번째 개념은 공정함과 사회적 책임의 원칙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부양할 의무를 갖는다. .. 두 번째 요소는 우리의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한다는 것. 세 번째는, 루터와 칼뱅의 독특한 견해로 일 자체가 도덕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지니며, 모든 사람은 살면서 어떤 종류의 일을 하도록 신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일은 그것이 아무리 비천해도, 또한 보수가 얼마든 간에 좋은것이다. .. 공정함, 개인의 탁월성, 개인의 선함이라는 이 세 가지 기본 개념으로부터 일은 고역아니라 의미 있는 것이라는, 일에 대한 낭만적 개념이 생겨났다. 그리고 우리는 일을 통해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89-90

 

18세기, 벤자민 프랭클린은 프로테스탄트의 관점과 계몽주의의 이상을 조합하여 새로운 노동윤리를 만들어냈다. 그는 사람들이 인도적인 방법으로 부를 사용하여 사회를 돕기 위해서는 우선은 부를 얻으려고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는 종교적 의무가 아닌,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일을 강조했다. 92

 

막스 베버는 프랭클린이 노동윤리로부터 윤리학을 이끄르어냈다고 생각했다. 프랭클린의 노동윤리가 낳은 윤리학은 두 가지 도덕적 개념에 기반하였다. 첫 번째는 공리주의이다. .. 두 번째 도덕적 개념은, ‘유용성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것이다. 92-93

 

프랭클린은 자서전에서 성공을 위해 필요한 열한 가지 미덕을 열거하는데 절제 침묵, 규율, 결단, 성실, 중용, 청결, 평정, 순결, 겸손이 그것이다. 그는 현세에서의 금욕주의를 설교했지만 또한 돈이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그 목적은 바로 생을 즐길 수 있는 자유였다. 93

 

1836년부터 1900년 사이에 모든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맥거피가 엮은 <간추린 어린이 독본> 시리즈를 읽었다. 이 시리즈는 칼뱅의 신학을 강조했으며 고된 노동과 근면, 검약의 윤리를 찬양했다. 94

 

메인 주 출신의 목사이자 교육자인 자콥 애벗은 1832롤로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 내에 자리잡은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윤리를 명확히 표명했다. 예를 들어 <일하는 롤로>에서 롤로의 아버지는 그에게 한 시간 동안 못을 분류하라고 했다. 롤로는 그 일이 매우 지루하다고 불평했고,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한 가지 일에 꾸준히, 끈이 있게 몰두하는 능력을 가져야 해. 어린 소년들은 일이 놀이처럼 재미있을 거라는 잘못된 기대를 하더구나.” 롤로의 아버지에 따르면, 진정한 남자는 일이 노력과 자제력을 요구하며, 고되고 지루한 것임을 안다.

1950년대 중반, 산업화가 시작될 무렵부터 아이들의 동화는 바뀌기 시작했다. ..

1800년대 중반에 등장한 싸구려 소설은 올리버 옵틱을 비롯한 수많은 아동문학가들로 하여금 이야기의 색채를 바꾸게 만들었다. 지나치게 교훈적인 이야기들은 본격적인 모험소설만큼 잘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옵틱은 범죄나 잃어버린 친척, 인디언 전쟁 등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 이들의 모험은 단지 주인고으이 도덕적 개선이라는 진짜 이야기이 배경이 뿐이라며 독자들을 설득한 것이다. 옵틱의 새로운 영웅들을 여전히 도덕적 모범이 되었지만, 그들의 규범은 부지런히 일하는 것에서 용감한 행동으로, ‘개인적인 절제에서 추진력으로 변화했다. 95

 

일에 대한 교훈이 가득한 아동용 동화들은 미국 남부에서는 제대로 뿌리내린 적이 없었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땅과 노예를 소유하고 싶어했고, 그들은 돈보다 혈통을 더 중시했다. 97

 

경제 전문 기자(business jounalists)의 수가 증가하면서 많은 이들이 사업가들을 추켜세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스코틀랜드 이민자인 버티 찰스 포브스는 덕 잇는 사업가에 대한 찬양을 영구적인 예술의 형태로 표현했는데, 그것은 일과 미덕, 부는 행복과 사회적 이이긍로 이어진다는 프랭클린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1916<포브스>지를 창간하면서 그는 이 간행물이 사업과 인생 전반에 더 많은 인간애, 기쁨, 만족을 줄것이라고 설명했다. 98

 

위대한 사업가의 신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기가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저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99

 

예일 대학교 출신의 콘웰은 1888년 필라델피아에 템플 대학교를 설립한 침례교 전도사였다. 그는 오늘날 사람들이 동기부여자(motivational speaker)”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 콘웰 목사는 도덕적 충고와 사업상의 건전한 충고를 혼합했다. 그는, 돈을 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내어 그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

18세기와 19세기의 노동윤리 옹호자들은 강한 도덕성이야말로 부에 이르는 열쇠라고 설교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데일 카네기가 1936년에 쓴 <카네기 인간 관계론>에 나타나듯이 개인의 성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도덕성이 아니라 심리학이 성공에 이르는 열쇠가 된 것이다. 99-100

 

성공에 대해 이야기하는 19세기의 많은 작가들과 설교자들, 심지어 몇몇 정치가들은 상업을 칭송하고 정치를 비방했다. 제임스 A. 가필드는 대통령이 되기 전인 1869, 워싱턴 전문대학의 졸업반 학생들에게 고전 학문을 가르치는 대학은 젊은이들의 직업 생활 준비에 완전히실패했다고 이야기했다. 100

 

19세기 미국을 방문한 유럽인들은 미국인의 에너지와 근면성에 아연실색했다. 특히 그들은 유한계급이 없다는 것에 대해 놀아워했다. 빈의 이민자인 프란시스 그룬트는 미국에서 상업이 주된 쾌락과 즐거움의 원천이라는 데 주목했다.

활동적인 직업은 그들 행복의 주요 원천이자 그들 국가를 위대하게 만드는 근원이다. .. 그들은 돌체 파르 니엔테(dilce far niente : 게으름의 달콤함)’대신, ‘게으름의 공포만을 알고 있다. 상업이야말로 미국인의 정수이다. .. 모든 인간 행복의 원천으로서 그것을 추구한다. .. ’. 101

 

과거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과 스스로를 동일시했고, 심지어 자기 이름까지 일에 맞추어 지었다. 반면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는 일과 정체성에 대한 두 가지 새로운 견해를 내세웟다. 일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를 발견하거나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1

 

산업화 이후부터는 이리에 대한 두 가지 유형의 견해가 존재했다. 첫 번째 견해는 계몽주의적인 것, 즉 과학과 지식이 진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산업화 이전에 일은 거칠고도 육체적으로 고된 노역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 두 번째 견해는 장 자크 루소와 같은 비평가들이 말한 것으로, 일이 일종의 은총받은 상태로부터 타락했다는 것이다. ‘은총으로서의 일이란, 자율적인 장인이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여 유용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어내고,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농부가 자신의 풍성한 녹색 들판에 씨를 뿌리고 수확하면서 조용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18세기의 저작에서, 루소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임금을 받기 위해 일하는 산업 사회의 몇몇 문제점을 예견했다. 루소는 인류가 타인의 노동으로부터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 일의 황금기는 끝났다고 믿었다. ..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일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창조성과 일하고자 하는 욕구를 잃었다. .. <에밀>에서 루소는 최상의 삶의 방식으로서 장인의 기능을 강조했다. 그의 낭만적 이상은 농부처럼 일하고 철학자처럼 사고하는 인간으로, 말에 편지를 박는 동안 진리와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는 목가적인 르네상스인이었다. 102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유재산과 자본주의 생산체제는 일로부터 얻는 창조적이고 사회적인 보상과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을 사용하는 기쁨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켰다.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일과 동일시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여겼는데, 특히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한 선택권을 거의 갖지 못하고 매우 세부노화된 일을 할 때 그러했다. .. 마르크스는 루소를 흉내내어 이러한 세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가 오른 한 가지 일을 하고 내일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 세상, 사냥꾼이다. 어부, 소 치는 사람이나 비평가가 되지 않고도, 마음먹은 대로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고기를 잡으며 저녁에는 소를 사육하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비평을 할수 있는 세상이다.’ 103

 

중요한 점은 이러한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한 가지 직업의 정체성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일과 정체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를 극단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림 그리는 사람만 있을 뿐 화가는 없을 것이다. 103

 

마르크스의 이상적인 세계에는 단 한 사람의 전문가도 없는 것일까? 병을 고치는 사람만 있을 뿐 의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마르크스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만약 당신이 청소부로 고용되어 있는 동시에 교회 집단의 우두머리이자 조각가라면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을 그저 청소부로만 여기기를 원하겠는가?... 마르크스는 사람들의 살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일이 유급고용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04

 

윌리엄 모리스는 당대의 르네상스인이자, 도이시대인들의 묘사에 따르면 일벌레였다. 그는 설계자, 장인, 시인, 번역가로서 탁월성을 발휘했다. 1884년 모리스는 사회주의 연맹을 창설하고 자본주의 노동체제와 생산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모르스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을 공유했지만, 동시에 일 자체의 심미적 가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한 편지에서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나는 왜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살 수 없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네.... 정말이지 나는 행복하게 일한다네. 그런 나의 시간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운명지워진 것, 칭찬받거나 보상받지 못하는 단조로운 고역일 뿐인 것과 비교하면, 부끄러움을 느낀다네.’

산업화된 영국의 짙은 매연과 보기 흉한 건물을 보며 경악한 모리스는 작업장에 아름다운 정원을 꾸밀 것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대량생산된 상품들의 흉한 모습을 조롱했다. 그는 기계가 노동을 절약해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생각하는 손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 자체가 주는 심미적 가치는 유용성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데서 오는 만족감에서도 비롯된다고 믿었다. 104-105

 

일의 의미에 대한 모리스의 흥미로운 통찰 가운데 하나는 가치 있는 일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모리스는 일이 삶의 빛이 될 수도, 혹은 삶의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첫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있는 반면 두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모리스에 따르면, 사람들로 하여금 일을 원하도록 하고 그 일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희망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가치 있는 일은 휴식의 즐거움에 대한 희망, 일을 통해 만든 것을 사용함으로써 느끼게 되리 즐거움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일상적인 창조의 기능에서 느끼는 즐거움에 대한 희망을 수반한다.” 105

 

가치 있는 일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희망이 잠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일뿐 그 실현 가능성 여부는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주관적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만든 물건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리스의 논점은 만약 그들이 그럴 수 있다면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거나 소유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낄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사람들은 다양한 창조적 기술을 이용하여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할지에 대해 제각기 다른 희망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분한 여가와 고품질의 유용한 산물, 기술을 연마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직업을 갖고 싶어하리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일은 객관적이다. 106

 

인간이 실제로 하는 에는 두 가지 이상적인 유형이 있다. ‘장인의 일혹은 손을 이용해서 하는 일과, ‘전문가의 일혹은 정신을 가지고 하는 일이 그것이다. 106

 

전문가( professional)’ 라는 단어는 원래 성직에 들어가는 사람이 공식적인 선서를 하는데 사용된 공언하다(profess)’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107

 

중세의 유일한 전문직은 대개 학자이자 법률가이자 의사였던 성직자들이었다. 전문직의 근저에는 세 가지 기준이 존재했다(이러한 기준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첫 번째, 모든 전문직은 공식적인 기술교육과 그러한 훈련을 확인시켜주는 일정한 제도적 인증 과정을 요구했다. .. 두 번째 기준은 전문직에서 사용하기 위한 기술을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 세 번째로, 전문가는 그 전문직이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게 이용되도록 보장하는 일종의 제도적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윤리적 행위를 보증할 수 있는 조직화가 이뤄져야 한다. 미국의 변호사협회나 의사협회의 목적이 그러한 것이다. ..

사회학자 탈콧 파슨스는 “”기업인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 상관없이 사리사욕만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반며느 전문가는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이타적으로 봉사한다.” 이것은 그가 50년 전에 쓴 글이다. ...

이상적으로 생각하자면 전문가들은 일에 대한 보수를 받지 않아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문가는 업무를 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비용을 보조받는것이기 때문이다. 108

 

대중이 전문가들의 비윤리적 행위에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여전히 전문가들이 사회에 대해 공식적 서약을 맺는다고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109

 

일에 대한 우리의 열정은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가 되고 싶은 것, 혹은 얻고 싶은 것에 달려 있다. 일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모리스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일을 원하려면 먼저 미래에 대한 어느 정도의 희망 혹은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노예와 농노들, 그리고 지독하게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힘 없는 사람들에게 노동윤리는 결코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111

 

 




PART TWO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바로가기



PART THREE 일과 삶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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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 ; 깊이 생각하기


사색은 주관적 깨달음이다 - 아무리 그 수가 많더라도 제대로 정리해놓지 않으면 장서의 효용가치는 기대할 수 없다. 반대로 그 수는 적더라도 완벽하게 정리해놓은 장서는 많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지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많은 지시을 섭렵해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면 그 가치는 불분명해지고, 양적으로는 조금 부족해 보여도 자신의 주관적인 이성을 통해 여러번 고찰한 결과라면 매우 소중한 지적 자신이 될 수 있다.

습득을 통해 얻어진 진리는 다른 여러 가지 지식과 결합시켜 비교할 필요가 있으며, 이 같은 절차를 거쳐야만 비로소 완전한 의미에서 자신의 것이 된다. 그리고 완전하게 내 것이된 지식을 원하는 사상에 맞게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사상은 주관적인 논리와 스스로 터득한 지식을 기초로 세워지는 건축물이다. 알기 위해서는 물론 배워야 한다. 그러나 안다는 것과 여러 조건을 통해 스스로 깨달은 것은 엄연히 다르다. 앎은 깨닫기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와 학습은 객관적인 앎이다. 그리고 독서와 학습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사색은 주관적인 깨달음이다.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고, 누구나 공부할 수 있지만, 누구나 이를 통해 사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색은 바람이 불면 더욱 거세지는 불길처럼 외부 조건에 의해 조성된다. 이 조건은 객관적인 형태와 주관적인 형태로 나뉘는데, 주관적인 조건은 개인적인 능력, 즉 타고난 두뇌를 뜻한다. 반면에 객관적인 조건은 사색의 호흡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공기처럼 인체의 호흡에 필요한 여러 물질들, 즉 학습이라든가 독서, 외국어 구사 능력 등이다. 11-12


사색적인 두뇌와 독서적인 두뇌 - 인간의 정신은 외부로부터 강압적으로 주입되는 강요에 쉽게 굴복될 만큼 나약한 면이 있다. 14


스스로 이해하는 힘 - 책을 통해 경험한 타인의 사상은 타인이 먹다 남은 찌꺼기, 즉 타인이 벗어 던진 헌옷에 지나지 않는다. 15


스스로 사색하는 사람 - 독서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사색의 대용품에 지나지 않는다. 독서는 사상을 유도하는 역할로 충분하다... 독서는 사상의 분출이 잠시 두절되었을 때 이를 만회하기 위한 휴식으로 사용해야 한다. ..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나만의 고유한 사색에 의해 어떤 진리에 도달했다면, 비록 그 내용이 앞서 다른 책에 기재되었을지라도 타인의 사상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체험이라는 점이다. ..

괴테가 남긴 다음과 같은 격언. ‘그대의 조상이 남긴 유물을 그대 스스로의 힘으로 획득하라.’ 16-18


사색하는 인생은 남다르다 - 독서로 삶을 허비하는 것은 여행 안내서를 통해 어떤 지방의 풍속에 정통해지는 여행 안내인의 삶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여행 안내인들은 그 지방의 풍물과 역사를 빠짐없이 알고 있지만 정작 그곳의 토지가 어떤 상태인지, 봄에는 어떤 꽃이 피는지, 겨울이 되면 눈은 얼마나 오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사색하는 인생은 이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이들은 자신의 두 발로 그 지역을 직접 여행한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이런 사람만이 지역의 진정한 특색에 대해 말할 수 있고, 환경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 22


책상머리 바보 - 우리가 어떤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누구나 이 문제를 타파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과연 어떻게 풀어야 할지 그 해답을 얻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결심은 의지의 역할이기에 누구나 가능하지만, 이 같은 결심을 인도하는 사색은 문제를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명령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억지로 생각한다고 해서 무조건 사색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같은 생각의 파편들이 자연스레 심오한 사색으로 발전하기를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더구나 이런 마음가짐은 뜻하지 않게 찾아오므로 항상 마음을 비우고, 되도록 의지에서 멀어질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쳤을 때 비로소 성숙한 사색이 잉태되고, 그 결과 고유한 사상이 결실을 맺게 된다. 25-26


스스로 결정하는 힘 - 진정한 사색자는 군주와 비슷하다. 그는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으며, 자신의 위에 서려는 모든 자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판단을 군주가 결정하듯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에 의해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은 오직 자기 자신만이 기준이 될 수 있다. 군주가 타인의 명령을 승인하지 않는 것처럼 사색자는 권윌르 인정하지 않으며, 스스로 참된 진리를 확인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결과도 승인하지 않는다. 31-32


권위를 앞세우는 사람 - 세상의 보통 사람들은 어려운 문제와 맞닥뜨리게 되면 권위 있는 말을 인용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자신의 이해력과 통찰력을 활요하는 대신 타인이 남긴 침전물을 동원하고, 이를 자기 생각보다 더욱 확신한다. 물론 동원하고 싶어도 최소한의 능력조차 부족해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짓눌리는 자들도 많다. 이런 자들의 수는 어마어마하다. 세네카의 말처럼 “사람들은 판단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믿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어떤 논쟁을 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주로 선택하는 무기는 권위이다. 그들은 수집한 여러 가지 권위를 무기로 선택한 후 서로 싸움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다가 이런 싸움에 말려든 자가 자신의 근거나 논리를 무기로 삼은 후 자력으로 대항하더라도 권위에 취한 그들을 일깨우지 못한다.

이 같은 자체적인 논증에 대항하는 그들은 비유컨대 죽지 않는 지그프리트(게르만 민족의 영웅전설 가운데서 가장 빛나는 영웅 중의 영웅)로서 사고불능, 판단불능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그들은 타인의 자발적인 논리를 인정하지 않으며, 오직 사라진 자들이 남겨둔 권위만을 유일한 논거로 여기게 된다. 34



글쓰기와 문체 ; 자신의 사색을 녹여서 쓰기



독서 ; 생각하며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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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 

조각난 삶의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엮어 하나의 확고한 형태를 갖춘 의미와 책임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프랭클 박사가 독창적으로 고안해낸 '실존적 분석' 즉 '로고테라피'의 목표이자 과제이다.  15-16


오늘날 유럽은 프로이트의 정신의학에서 크게 방향을 전환해 실존적 분석을 폭넓게 받아들이는 추세로 나아가고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거부하지 않고, 그의 업적 위에 기꺼이 그 자신의 것을 쌓아올리는 것. 자기의 것과는 다른 형태의 실존적 치료법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논쟁하지 않고, 그들과 유대를 맺으며 공동보조를 해나가는 것. 이런 관대함이 프랭클 이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7






1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



감시하는 병사들보다도, 나치 대원들보다도 카포들이 수감자들에게 더 가혹하고 악질적인 겨우가 많았다. 물론 카포들은 수감자 중에서 뽑았다. ...

일단 카포가 되면 그들은 금세 나치대원이나 감시병들을 닮아갔다.  26


일정한 수의 수감자를 다른 수용소로 이동시킨다고 공식적인 발표가 났을 경우를 살펴보자. 그러면 사람들은 그 최종 목적지가 당연히 가스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감자 중에 병에 걸렸거나 쇠약해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뽑아 가스실과 화장터가 있는 큰 수용소로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 해당자를 가리는 과정이 곧 개별적인 수감자들 사이에, 혹은 수감자 집단 사이에 벌어지는 무차별적인 싸움의 도화선이 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희생자 명단에서 자기 자신의 이름이나 친구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다. 한 사람을 구하려면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27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잔혹한 폭력과 도둑질은 물론 심지어는 친구까지도 팔아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29


나는 수용소에서 마지막 몇 주를 제외하고는 정신의학자 노릇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의사 노릇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힌다.  31


나는 119104번 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철로에서 땅을 파고 선로를 부설하는 일로 보냈다.  32


수용소 생활에 대한 수감자의 심리적 반응이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수용소에 들어온 직후이며, 두번째 단계는 틀에 박힌 수용소의 일과에 적응했을 무렵, 그리고 세번째 단계는 석방되어 자유를 얻은 후이다.

첫번째 단계의 특징적인 징후는 충격이다. 어떤 경우에는 수용소로 들어가기도 전에 경험하기도 한다.  33


정신의학에 보면 소위 

집행유예 망상(delusion of reprieve)'이라는 것이 있다.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유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갖는 것이다.  36


수용소에서 자살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객관적으로 계산을 하고, 모든 기회를 감안해 보아도 보통 수감자들이 살아나갈 가능성이 아주 희박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보장도 없이 자기가 수많은 선별의 관문을 무사히 통과해 살아남는 극소수의 사람 중에서 하나가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아우슈비츠의 수감자들은 첫번째 단계에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가스실 조차도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만들었다.  48-49


자기 '구역'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규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몇 주 먼저 이곳에 들어온 동료 한 사람이 몰래 내 막사로 숨어 들어왔다. .. 

그는 익살스러우면서도 저돌적인 말투로 우리에게 몇 가지 정보를 알려 주었다... 

"가능하면 매일 같이 면도를 하게. 유리 조각으로 면도를 해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마지막 남은 빵을 포기해야 하더라도 말일세. 그러면 더 젊어 보일 거야. 뺨을 문지르는 것도 혈색이 좋아 보이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 자네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어. 일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

그러니까 늘 면도를 하고 똑바로 서서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그러면 더 이상 가스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49-50


레싱이 이런 말을 햇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일이 있는가 하면 더 이상 잃을 이성이 없게 만드는 일도 있다."  51


두번째 단계는 상대적인 무감각의 단계로 정신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감정과는 별도로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그 고통을 약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무엇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은 집과 가족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이다. 이 그리움은 너무나 간절해서 그리워하는데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소진시키고 말 정도가 된다.

그런 다음에는 혐오감이 찾아온다. 자기를 둘러싸고 잇는 모든 것에 대한 혐오감, 심지어 그저 생긴 모양에서도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52


처음에 사람들은 다른 그룹의 사람들이 줄지어 행진하며 단체기합을 받는 것을 보면 고개를 돌렸다. .. 며칠 혹은 몇 주가 지나면 사정이 달라진다. ..

감정이 무뎌져서 그것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단계가 된다.  53-54


두번째 단계의 주된 징후인 무감각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이 불확실하면 오로지 한 가지 과제에 모든 노력과 감정이 모아지게 된다. 즉 내 자신의 생명과 친구의 생명을 보존하겟다는 과제이다.  64


수용소 생활이 후반부에 이르렀을 때에는 하루에 한 번밖에 빵이 배급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그 빵을 어떻게 먹을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끝도 없이 논쟁을 벌였다. 생각은 두 편으로 나뉘었다. 그 중 한 편은 그 자리에서 빵을 다 먹어치우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비록 잠깐 동안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극심한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도둑맞거나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에 다른 한 편은 배급받은 빵을 나누어서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편 중에서 나는 결국 후자에 들기로 했다.  69


어느 날 아침에는 평소 꽤 용감하고 의연한 것으로 알려진 한 친구가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우는 것을 보았다. 신발이 그가 신기에는 너무 작아 할 수 없이 맨발로 눈 위를 걸어 작업장까지 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료가 슬퍼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나는 다른 신나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호주머니에서 작은 빵 조각을 꺼내서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70


우리는 어둠 속에서 큰 돌멩이를 넘고 커다란 웅덩이에 빠지면서 수용소 밖으로 난 길을 따라 비틀거리며 걸었다. 호송하던 감시병들은 계속 고함을 지르면서 총의 개머리판으로 우리를 위협했다. 다리가 아픈 사람은 옆 사람의 팔에 의지해서 걸었다. 한 마디도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 때문에 누구든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높이 세운 옷깃으로 입을 감싸고 있던 옆의 남자가 갑자기 이렇게 속삭였다. 

"만약 마누라들이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꼴을 본다면 어떨까요? 제발이지 마누라들이 수용소에 잘 있으면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을 몰랐으면 좋겠소."

그 말을 듣자 아내 생각이 났다. 빙판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수없이 서로를 부축하고,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면서 몇 마일을 비틀거리며 걷는 동안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지금 아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76-77


그때 한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자기 시를 통해서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이 설파하는 숭고한 비밀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 말할 나위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게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천사들은 한없는 영광 속에서 영원한 묵상에 잠겨 있나니.'  77-78


나는 아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랐다.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수용소에는 오는 편지도 가는 편지도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내 사랑의 굳건함, 내 생각, 사랑하는 사람의 영상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사실 그때 아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에 내 자신을 바쳤을 것이다. 나와 그녀가 나누는 정신적 대화 역시 아주 생생하고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나를 그대 가슴에 새겨 주오. 사랑은 죽음만큼이나 강한 것이라고."  79-80


외부 사람들 중에는 강제수용소에 예술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뿐만 아니라 유머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 더 놀랄 것이다. 비록 그 흔적이 아주 희미하고, 몇 초 혹은 몇 분 동안만 지속되지만,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 준다.  86-87


유머 감각을 키우고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기 위한 시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면서 터득한 하나의 요령이다. 고통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수용소에서도 이런 삶의 기술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88


이 말은 곧 아주 사소한 일이 큰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 예로 아우슈비츠에서 다카우에 있는 한 수용소로 갈 때 체험했던 일을 얘기해 보겠다...

우리가 비교적 작은 규모(수용인원이 2,500명밖에 안 되었다)의 이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나이 많은 살마으로부터 드은 첫번째 주요 뉴스는 그곳에는 살인용 오븐도, 화장터도, 가스실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곧 몰골이 '회교도'로 변한 사람도 곧바로 가스실로 갈 염려가 없다는 것을 뜻했다. 아우슈비츠로 돌려 보내기 위한 '환자수송차'가 올 때까지는 적어도 안전하다는 것이다. 이 기쁜 소식이 우리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아우슈비츠에 있던 우리 고참 관리인이 소망하던 것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아우슈비츠와는 달리 '굴뚝'이 없는 그 수용소로 가능한한 빨리 뛰어 들어갔다. 그 후 몇 시간 동안을 아주 힘들게 보내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는 웃으면서 연신 농담을 주고받았다.

도착 후 인원점검을 하면서 한 사람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없어진 사람을 찾을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차가운 바람과 비를 맞으며 밖에 서 있어야 했다. 그는 막사 안에서 발견되었다. 피곤에 지친 나머지 그만 잠에 곯아떨어진 것이다. 그 다음 점호는 기합 행렬로 바뀌었다. 오랜 여행의 긴장도 풀지 못한채 우리들은 밤을 꼬박 새우고 이튿날 아침 늦게까지 꽁꽁 언 채로 비를 맞으며 밖에 서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행복했다. 이 수용소에는 굴뚝이 없고, 또 아우슈비츠는 여기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88-90


우리는 아주 작은 은총에도 고마워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를 잡는 시간을 준다는 것도 우리에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물론 이를 잡는 일 자체는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를 잡기 위해서는 천장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린 추운 막사에서 옷을 벗고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잡는 도중에 공습경보가 울리지 않아 전등불이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고마워했다. 만약 이 시간에 이를 제대로 잡지못하면 하룻 밤의 절반을 꼬박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용소 생활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은 일종의 소극적인 행복 - 쇼펜하우어가 '시련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했던 - 이었고,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상대적인 행복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거의 없었다.  91-92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항상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끄는 강요된 공동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잠시 동안만이라도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때가 이싿.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혼자 있게 되기를, 혼자서 사색에 잠길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들은 자기만의 개인적인 공간, 혼자있는 고독을 열망했다. 그런데 소위 말하는 '요양소'로 옮긴 후, 나는 한번에 5분 정도 혼자 고독을 즐기는 흔치않은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98


수용소에서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지 이것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오로지 번호 뿐이다. 오로지 죄수번호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그 사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글자 그대로 번호가 되었다.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번호'의 생명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그 번호의 이면에 있는 것, 즉 그의 삶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못 된다.  100-101


수용소에 살아남은 사람들, 여전히 일할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해야만 했다. 그들은 절대로 감상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이 전적으로 감시병들의 기분 - 운명의 노리개라고나 할까? - 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이 그들 자신을 환경에 강요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으로 만들었다.

아우슈비츠에 있을 때, 나는 내 자신을 위한 하나의 규칙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좋은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자 그 후 내 동료들도 모두 이 규칙에 따랐다. 나는 대체로 모든 종류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딱 꼬집어서 질문을 받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만약 누군가 내 나이를 물으면 나는 나이를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내 직업을 물었을 때는 다른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그냥 '의사'라고만 대답했다.  102


환자 호송계획이 세워졌다...

그날 저녁 10시 15분 전에 평소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주치의가 다가오더니 넌지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직실에 얘기를 잘 해두었소. 당신을 리스트에서 빼도록 했으니 10시까지 당직실로 가보시오."

나는 그에게 이것이 내 길이 아니라고, 나는 운명이 정해 놓은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나는 내 친구들 곁에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의 눈이 연민의 빛을 띠었다. 마치 내 운명을 알고 있기나 하는 것처럼, 그는 말없이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것은 삶을 위한 악수가 아니라, 삶과 작별하는 악수였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막사로 돌아왔다. 막사에는 친한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 정말로 그 사람들과 함께 가기를 원하나?"

그가 슬픈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네. 나는 갈 거야."

그러자 그의 눈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런 다음 할 일이 있었다. 유언을 하는 것이었다.

"잘 듣게, 오토. 만약 내가 집에 있는 아내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리고 자네가 아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녀에게 이렇게 전해 주게. 내가 매일같이 매시간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잘 기억하게. 두번째로 내가 어느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 세번째로 내가 그녀와함께 했던 그 짧은 결혼생활이 이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여기서 겪었던 그 모든 일보다 나에게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전해 주게."

오토. 자네는 지금 어디에 있나? 아직 살아있나? 우리가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낸 후 자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자네 아내를 다시 만났나? 그리고 기억하나? 자네가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는 동안에도 내가 자네에게 내 유언을 한마디 한마디 외우에 했던 것을.  104-105


이튿날 아침, 나는 호송자들과 함께 그것을 떠났다.

가스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요양소로 가는 것이었다.  105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나는 그 전의 수용소에 있던 한 친구를 만났다. 그는 자기가 수용소의 보안원으로 시체 더미에서 없어진 인육 조각을 어떻게 찾아냈는지를 나에게 말해 주었다. 요리 중인 냄비 안에서 찾아내 압수했다는것이다. 기아에 시달린 나머지 드디어 수용소 안에서 인육을 먹는 사태까지 발생했던 모양이다. 내가 때맞추어 그 수용소를 잘 떠난 셈이다.  106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통해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을 입증해 주는 예(이런 이야기는 종종 영웅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즉 무감각 증세를 극복하고, 불안감을 제압한 경우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수용소에도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120


수면부족과 식량부족 그리고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리 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는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121-122


수감자 중에서 아주 적은 사람만이 충만한 내면의 자유를 지키고, 시련을 견딤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얻었다.  123


수감자들을 심리학적으로 관찰해 보면 내면세계가 간직하고 있는 도덕적, 정신적 자아가 무너지도록 내버려둔 사람이 결국 수용소의 타락한 권력의 희생자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6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130


평범하고 의욕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이 말을 들려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는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 놓았더 ㄴ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그런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들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 수도 있었다.  131


내가 실제로 경험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날 나는 거의 눈물을 흘릴 정도의 극심한 통증(찢어진 신발 때문에 발에 심한 종기가 생겼다)을 겪으며 긴 행렬에 끼어서 수용소에서 작업장까지 몇 킬로미터를 절뚝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날은 추웠고,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우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나는 우리의 누추한 생활과 연관된 끊임없이 자질구레한 문제들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무엇을 먹게 될까? 만약 특별배급으로 소시지가 나온다면 그것을 빵과 바꾸어 먹을까? 2주일 전에 상으로 받았던 담배 한 개비를 수프 한 그릇과 바꾸어 먹을까? 한쪽 신발끈이 끊어졌는데 끈을 대신할 철사를 어디서 구하지? 시간 안에 작업장에 가서 평소에 내가 일하던 작업반에 낄 수 있을까? 그렇지 않고 다른 작업반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고약한 감독을 만나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매일 긴 행렬에 끼어서 작업장에 가지 않고 대신 수용소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 주는 카포는 없을까? 그 카포와 잘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다가 매일같이 시시각각 그런 하찮은 일만 생각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 나는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다. 갑자기 나는 불이 환희 켜진 따뜻하고 쾌적한 강의실의 강단에 서 있었다. 내 앞에는 청중들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내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강제수용소에서의 심리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방법을 통해 나는 어느 정도 내가 처한 상황과 순간의 고통을 이긴느 데 성공했고, 그것을 마치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관찰할 수 있었다. 나 자신과 문제는 내가 주도하는 흥미진진한 정신과학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스피노자가 그의 <윤리학>에서 무엇이라고 했던가?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미래 - 그 자신의 미래 - 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132-133


수용소주치의로부터 들었던 말에 의하면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의 사망률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더 ㄴ추세로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주치의는 이 기간 동안 사망률이 증가한 원인은 보다 가혹해진 노동조건이나 식량 사정의 악화, 기후의 변화, 새로운 전염병 때무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희망적인 뉴스가 들리지 않자 용기를 잃었으며, 절망감이 그들을 덮쳤다. 이것이 그들의 저항력에 위험한 영향을 끼쳤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기에 이른 것이다.  136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137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과제들, 즉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138


각각의 개인을 구별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독자성과 유일성은 인간에 대한 사랑처럼 창조적인 의미를 비니고 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라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142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145


"그대의 경험, 이 세상 어떤 권력자도 빼앗지 못하리!"

경험뿐이 아니다. 우리가 그 동안 했던 모든 일, 우리가 했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생각들,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고통, 이 모든 것들은 비록 과거로 흘러갔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간직해 왔다는 것도 하나의 존재방식일 수 있다.  146


우리가 처한 가혹한 현실에 과감하게 직면하자고 했다.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되고, 우리들의 가망 없는 싸움이 삶의 존엄성과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누군가가 - 친구나 아내, 산 사람, 혹은 죽은 사람, 혹은 하나님 - 각각 다른 시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그 사람은 우리가 자기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의연하고 비굴하지 않게 시련을 이겨내고, 어떤 태도로 죽어야 하는지를 알기를 바란다고.  147


심리적 반응의 세번째 단계, 즉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에 대해 설명할 차례가 되었다.  148


지단과 집단 사이의 경계선이 서로 겹쳐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천사, 저 사람들은 악마라고 부르면서 문제를 단순화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151


강제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인간의 영혼을 파헤치고, 그 영혼의 깊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인간성에서도 선과 악의 혼합이라는 인간 본연의 특성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모든 인간을 관통하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단층은 아주 심오한 곳까지 이르러 인간성긔 바닥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강제수용소라는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152


극도로 긴장했던 며칠이 지난 후 수용소 정문 위에 흰 깃발이 펄럭였던 그날 아침의 경험담 중에서 하나를 소개하리고 하겠다.

우리가 미친 듯이 기뻐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들은 피곤한 발걸음으로 몸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수용소 정문으로 걸어갔다. 조금씩 사방을 둘러보고, 의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서로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과감하게 수용소 밖으로 몇 발자국 걸음을 옮겨보았다. 우리에게 고함을 치며 명령하는 사람이 없었다.

세상세! 감시병들이 우리에게 담배를 권하고 있지 않은가! 처음에 우리는 그들을 거의 못 알아보았다. 왜냐하면 재빠르게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천히 수용소 밖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우리는 절뚝거리며 걸었다. 자유인의 눈으로 그 전까지 미처 보지 못했던 수용소 주위를 한번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유. 우리는 스스로 몇 번이나 이 단어를 되뇌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지난 몇 년간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면서 얼마나 자주 이 단어를 입에 올렸는지 이제는 그것이 의미를 잃고 말았다. 현실이 우리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자유가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다.

드디어 꽃이 만발한 초원에 이르게 되었다. 꽃이 만발해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알았지만 거기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불꽃 튀는 것 같은 기쁨을 느낀 것은 꼬리에 여러 가지 색깔의 깃털을 단 수탉을 보았을 때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저녁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막사에 모였을 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은밀하게 물었다..

"말해 보게. 자네 오늘 기뻤나?"

우리 모두 똑같은 느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 사람이 부끄러운 듯이 대답했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아니야."

우리는 글자 그대로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앞으로 천천히 그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이렇게 갇혀 있다가 석방된 죄수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을 정신의학적인 용어로 '이인증(depersonalization, 離人症 떠날이 사람인 병증세증)'이라고 할 수 있다.  154


육체는 마음보다는 거부감이 적은 법이다. 육체는 처음부터 새롭게 얻은 이 자유를 잘 활용했다. 드디어 우리 육체가 게걸스럽게 먹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몇 시간 동안, 며칠 동안, 그리고 심지어는 한밤중에도 우리는 먹었다. 한 사람이 먹어치우는 음식의 양이 심히 놀라웠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이웃에 있는 친절한 농부의 초대를 받아 그 집에 갔는데, 거기에도 그는 먹고 또 먹고 그리고 커피까지 마셨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혀를 풀리게 했다. 그는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몇 년 동안 그의 마음을 짓누르던 중압감이 마침내 사라진 것이다. 그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알았을 것이다. 그에게 말이 필요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욕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는 것을.  155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며칠 동안 견뎌야 했던 극도의 정신적 긴장(예를 들어 게슈타포의 혹독한 심문 같은 것)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이 아무런 장애 없이 순탄했던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에게는 더 이상 정신적 치료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잘못된 생각이다. 그렇게 심한 정신적 압박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받았던 사람에게는 자유를 얻은 후에도 그전과 똑같은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특히 그런 정신적 억압상태에서 갑자기 벗어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위험은 정신위생학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잠수병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물 속의 잠함에서 일하던 잠수부가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올 때 가장 위험한 것처럼 엄청난 정신적 억압을 받다가 갑자기 풀려난 사람은 도덕적, 정신적 건강에 손상을 입을 위험이 크다.

이런 심리적 단계에서 원색적인 기질을 지닌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야만성의 영향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156-157


어느 날 나는 다른 친구와 함께 들을 가로질러 수용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앞에 농작물이 자라고 있는 밭이 나타났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친구가 내 팔을 잡고 나를 밭으로 끌고 들어갔다. 나는 더듬거리면서 어린 농작물을 짓밟지 말자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러자 그는 짜증을 냈다. 화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그런 말 하지 말게. 그만큼 빼앗아쓰면 충분한 거 아니야? 내 아내와 아이는 가스실에서 죽었어. 그것으로 더 이상 할 말 없는 거 아니야? 그런데도 자네는 내가 귀리 몇 포기 밟는다고 뭐라고 하다니!"

이런 사람들은 아주 천천히 평범한 진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지도해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엑 옳지 못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한 권리는 어느 누구에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158


정신적 억압에서 갑자기 풀려나게 되었을 때, 도덕적 결함이 보이는 현상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성격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 두 가지 기본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을 때 겪에 되는 비통함과 환멸이다.

비통함은 그가 살던 마을로 돌아왔을 때 그가 부딪치게 되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보면 그저 어깨를 으쓱하거나 상투적인 인사치레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 그는 점점 비통해지면서 자기가 과연 무엇 때문에 그 모든 고통을 겪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거의 모든 곳에서 거의 똑같은 말을 듣는다. "우리는 그것을 몰랐어요." 그리고 "우리도 똑같이 고통을 받았어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저 사람들은 정말로 나에게 할 말이 없는 것일까?"

환멸을 경험하는 것은 이와는 또 다른 문제다. 여기서 그가 환멸을 느끼는 것은 사람들(그들의 상투성과 감정결핍이 너무 혐오스러워서 마침내 구멍으로 기어들어간 것처럼 사람들을 더 이상 보려고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게 된다.)이 아니라 그토록 잔인해 보이는 운명 그 자체이다. 몇 년 동안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시련과 고난의절대적인 한계까지 가보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직도 시련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시련에는 끝이 없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시련을, 더 혹독하게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59-160





2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로고테라피는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말하자면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이다.(로고테라피는 이렇게 의미에 중점을 둔 정신치료법이다) 동시에 로고테라피는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데 아주 커다란 역할을 하는 악순환 형성과 송환기재를 약화시킨다. 그렇게 해서 정신질환 환자에게 전형적인 자기집중증상이 발생하고 심화되는 것을 막는다. ...

로고스(Logos)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로고테라피' 혹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빈 제3정신의학파'로 불리는 이 이론은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나가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167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의지도 좌절을 당할 수 있다. 이것을 로고테라피에서는 '실존적 좌절'이라고 한다. 여기서 '실존적'이라는 단어는 다음의 세 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다. 1) 존재 그 자체, 즉 인간 특유의 존재방식 2) 존재의 의미 그리고 3) 각 개인의 삶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찾아내려는 노력, 즉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를 말한다.

실존적 좌절 역시 정신질환을 초래할 수 있다. 정신의학에서는 그 동안 이것을 심인성 노이로제(psyshogenic neurosis)라고 했지만 로고테라피에서는 이것을 누제닉 노이로제(noogenic neurrosis)라고 부른다.  170-171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이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한다.  171


갈등을 겪는다고 해서 다 신경질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의 갈등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고통도 역시 모두 다 병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그 고통이 실존적 좌절 때문에 생긴 경우에는 그것을 신경질환 증세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성취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거나 아니면 그런 것이 과연 있을까 하고 의심하거나 간에 이런 현상이 병 때문에 생긴다거나 혹은 이것 때문에 결국은 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나는 단호하게 부정한다. 실존적 좌절 그 자체는 병적인 것도 병원적인 것도 아니다.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것에 대한 절망도 실존적 고민이지 정신질황은 아니다.  172-173


로고테라피는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 주는 것을 그 과제로 삼고 있다. 그렇게 하려면 환자의 실존 안에 숨겨져 있는 '로소스'를 스스로 깨닫도록 해야 하는데, 이것은 상당한 분석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런 점에서 로고테라피는 정신분서고가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로고테라피가 환자에게 어떤 것을 다시 깨우쳐 주는 과정에서는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본능적 요소에만 국한하지 않고 그의 실존적 현실, 즉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의 의지 뿐만 아니라 앞으로 성취되어야 할 실존의 잠재적 의미까지도 고려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분석이든, 심지어 치료과정엣 정신론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분석일지라도 환자가 자기 존재의 깊숙한 곳에서 정말로 소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인간을 그저 충동과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쾌락을 얻거나 서로 갈등하고 있는 이드와 자아, 초자아를 정충시키거나 혹은 사회와 환경에 그저 순응하고 적응하는 데에만 관시을 갖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주된 관심사하 어떤 의미를 성취한느 데 있다고 보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로고테라피는 정신분석과 구별된다.  173-174





3 비극 속에서의 낙관



명심해야 한다. 낙관적인 생각이 명령이나 지시를 받아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220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221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듯이 사람이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데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일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두번째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의미는 일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로 들어가는 세번째 길이다.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희생양도 그 자신을 뛰어넘고,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인간은 개인적인 비극을 승리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230-231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 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233


한번은 한 미국 여자로부터 이런 비난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신은 어떻게 아직도 책을 독일로 쓸 수가 있지요? 그건 아돌프 히틀러가 쓰던 말 아닙니까?"

이 말에 응수하면서 나는 그녀에게 자기 집 부엌에 칼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녀가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당황스럽고 놀랍다는 제스처를 쓰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살인자들이 칼을 가지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찌르고 죽였는데 어떻게 아직도 칼을 사용할 수가 있지요?"

그 말을 듣고 그녀는 더 이상 내가 독일어로 책을 쓰는 것을 비난하지 않았다.  236


어떤 상황에서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으로 의미 있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 개인의 가치는 언제나 그 사람과 함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람이 과거에 실현시킨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그 사람이 쓸모 있느냐 없느냐 하는 조건에 기반을 둔 것을 절대 아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이런 유용성은 그 사람이 사회에 이로운 존재인가 아닌가 하는 기능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정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사람이 이루어낸 성과를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행복한 사람, 특히 젊은 사람을 숭배하는 것이 요즘 사회의 특징이다.

실제로 이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가치는 무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과, 인간의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차이를 애매모호한 것으로 만든다.

만약 이런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의 가치가 오로지 현재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히틀러의 계획에 따라 자행된 안락사, 즉 나이가 들어서, 불치의 병에 걸려서,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해서, 혹은 고통스러운 어떤 장애 때문에 사회적으로 더 이상 쓸모없게 된 사람들을 죽였던 '자비로운' 행위에 대해 변명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오로지 개인적인 모순의 탓으로 돌려 버린다.  239


"Sed omnia praclara tam difficilia quamrara sunt(그러나 모든 위대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실현시키는 것도 힘들다)" 스피노자 <윤리학>의 마지막 문장이다.  242


이제 경계심을 갖자. 두 가지 측면에서의 경계심을.

아우슈비츠 이후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히로시마 이후로 우리는 무엇이 위험한지를 알게 되었다.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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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척점, 더 정확히 말해 정반대의 극(極 다할극)은 자주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과 우리네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때, 우리와 유사한 것보다는 다른 것을 선호하는 것이다. 체념한 채 타인의 모습에 비친 자기 자신의 반영 외에는 아무것도 찾지 않고, 타인과 나를 동일시하면서만 살고 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의 공통된 세계를 이해할 때 더 많은 것을 배우는 것은, 벼랑 끝에서 포기 직전까지 어렵사리 자신의 연구를 밀고 갈 때보다 남들이 벌인 탐구를 관찰할 때가 아니던가. 독서가 우리에게 자양분을 제공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이다. 독서는 고통을 주는 굴곡 많은 글쓰기 과정에서 우리를 구해주고, 계속 나아갈 힘을 실어준다. - 프레데리크 이브 자네(FYJ)  5-6


AE : 내겐 두 가지 형태의 글쓰기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미리 계획된 텍스트들이 있고, 여기에는 [밖에서 쓰는 일기]와 [외적인 삶]도 포함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병행하여 오래전부터 행해온 잡다한 형태의 일기 쓰기가 있는데, 1982년 이래로 나는 내면일기와는 별도로 '글쓰기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글을 쓰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문제와 의혹을 담는 일기로, 난 이것을 생략된 문장과 약자로, 이를테면 흘려쓰고 있습니다. 내 머릿속엣 이 두 형태의 글쓰기 방식은 조금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문학과 삶, 총체와 미완 사이의 대립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용과 수동성의 대립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요.  31


AE :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와 <탐닉>, 이렇게 단 두 권의 내면일기만을 출판했어요. 이 일기들은 모두 십 년 전에 씌어졌고, 실제로 그 기간에 살았던 삶은 이미 각각 <어떤 여자>와 <단순한 열정>이라는 자전적 이야기의 대상이 되었지요. 이 두 가지 상황- 십년이라는 유예기간과 그 기간에 상응하는 책의 존재 -가운데, 후자가 일기를 출판하도록 부추긴 좀 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유예기간도 중요하겠죠. 그 세월이 내가 나의 일기를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볼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요.  50


AE : 내 작업방식은 주로 기억에 근거합니다. 글을 쓰는 동안, 기억은 끊임없이 재구성해야 할 요소들을 환기시킵니다.... 나는 '보고' '듣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어요. 그런데 내게 그것은 '다시 보기'이며 '다시 듣기'를 의미합니다.  53


FYJ : 당신은 다른 형태의 글쓰기를 추구함으로써 상당히 멀리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이젠 당신이 소설이라는 형태로 되돌아가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해 보입니다. 20세기에 소설 형식이 극한까지 가버린 이 시점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소설이라는 형태의 퇴락을 인정하는지요? 

AE : '소설'과 관련지어, 항상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하는 건가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이상 나의 지평 위에 있지 않습니다. ...

문학 교과서에서나 대학 입학 자격시험이나 중등교사 자격 시험의 문학 시험문제에서는 마치 '소설'이 하나의 본질인양, '예를 들면서' 소설에 관해 논술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책에 관해 빈번하게 벌어지는 대담에서 '소설'이라는 단어는 점점 더 확장된 의미를 지니면서 확산되고 있습니다. 거의 히스테릭한 태도로 '허구'를 옹호하는 자들도 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결국 품질인증표라고 할 수 있는 장르는 아무런 중요성도 지니지 않습니다. 모두 그것을 잘 알고 있어요. 강렬한 감동을 주고, 생각이나 꿈 혹은 욕망을 열어주고, 때로는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책들이 있을 뿐입니다. 루소의 <고백록>,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브르통의 <나자>, 카프카의 <소송>,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이 애초에 인증표를 달고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 설사 그랬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상실해버린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72-74

AE : 내가 나라는 개인의 암흑지대에 마침 별 관심이 없어서인지, 정신분석은 나와는 언제나 무관했습니다. 점처럼 고립된 몇몇 발견들이 내게 뭘 해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것들로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글쓰기에서 그것들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느냐는 말이죠. 독자들 가운데, 글을 쓰는 것 특히 자전적 글쓰기를 행하는 것이 정신 분석을 실천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다는 믿음을 표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어떤 허망한 욕심이나 오해인 것 같아요. 자신의 문제로부터 전적으로 혼자서 스스로 해방될 수 있으리라는 착각, 그리고 그와 동시에 타인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열망, 즉 어떤 심리적-상징적 복권에 당첨되었으면 좋겠다는 욕심, 뭐 그런 것 말이죠. 그건 오해예요. 글쓰기가 깊숙이 감춰진 무엇을 다시 찾으러 나서는 것이며 정신분석의 치료과정과 유사한 것이라고 믿는 거니까요. 나는 글을 씀으로써 내 모든 지식뿐 아니라 교양, 기억 등이 모두 연루된 어떤 작업을 통해, 외양을 넘어서는 나 자신을 세상에 투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작업은 하나의 텍스트로, 따라서 타인들에게로 귀착되지요. 그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냐 하는 것은 내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작업'과는 완전히 반대됩니다. 내가 어떤 것에서 치유되어야 한다면, 내게 그 치유는 오직 언어에 대한 작업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달하는 작업, 즉 하나의 텍스트를 타인에게 증여하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타인이 그것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상관없습니다.

물론 정신분석이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넓히는데 기여한 내용-그것은 정말 엄청나지요-에 관해서나, 문학에 접근할 때 그것을 사용하는 것에 관해서는 어떤 형태로도 비난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신분석은 때때로 경찰처럼 구는 구석이 좀 있지요. 무슨 일이 있엉도 자가의 심리적 구성 요소들을 낱낱이 적발해내고야 말리라는 의지를 품고, 텍스트의 고백을 마치 피고인의 진술인 양 몰아가잖아요. 그러고는 이 모든 게 바로 이것 때문이고, 난 이걸 다 알고 있지! 하는 식이에요. 이땐 실망스러워요. ...

이따금 나는 아도르노처럼 생각한답니다. 그는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정신분석이 개인 실존의 고통스러운 비밀들을 의례적인 진부함으로 만들어버린다고 말한 바 있지요.  78-80


AE : 대게 글쓰기 과정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어느 순간, 어떤 충동이 일어나 몇 페이지를 쓰도록 나 자신을 부추깁니다. 하지만 난 그 글에 아무런 목적도 부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페이지들이 어떤 특정 텍스트의 도입부로 예정되어 있지는 않죠. 그 다음엔 멈춰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그 조각을 한동안 보류시켜 둡니다. 그러는 사이 계획은 좀 더 선명해지면서, 말하자면 그 조각에 악착같이 매달리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 조각은 그 계획 속에서 결정적 요소로 부각되기에 이릅니다. 이런식의 설명이 좀 추상적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내 책들이 각각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을 떠올릴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각 텍스트에 대한 구상(난 이것을 욕망이라고 말하겠어요)속에는 그러니까 각 텍스트에 대한 욕망 속에는 어쨌든 매번 차이점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183


FYJ : 글쓰기 작업의 구체적인 정황을 요약해보지요. 당신은 문단과 문장의 삭제와 덧쓰기, 첨가와 제거를 통해 일을 진행합니다. 어쨌든 덧쓰고 지우는 작업이 유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당신의 모든 텍스트에 적용되는 항구적 필요성에 부응한다면, 그 작업의 성격에 어떤 유형의 관념을 부여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첨가합니까?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그 작업을 합니까? 당신은 버전마다 '원고지 철'을 바꾸는 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작업을 하는것 같은데요...

AE : 내 원고들은 마치 패치워크 같아요. 갈수록 더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원고가 씌어진 종이 위에는 단어들 위나 행간 혹은 여백에 각기 다른 색의 사인펜이나 검은 연필로 덧쓴 자국들로 온통 뒤범벅된 몇 개의 문단이 씌어 있어요. 그 문단들의 자리는 아직 결정되지 않아서, 그것드로가 연관지어 참조해야 할 페이지 번확 표기되어 있지요. 예를 들어 10번 종이에는 10-2, 10-3 혹은 10-4 같은 식으로 종이들이 와서 붙을 수 있어요. 하지만 아직 그 이상의 것을 시도해본 적은 없어요. 그리고 아주 최근에는 포스트잇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잘 떨어지기 때문에 크게 신뢰하는 편은 아닙니다. 난 모든 것을 간직하고 싶거든요. 어느 날은 마음에 들지 않던 것이 그 이튿날에는 다시 좋게 느껴질 때도 있기 때문이죠.

이 모든 것은 계획, 즉 계획을 구성하는 데 내가 몰입했을때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이죠. 한편으로는 아주 천천히 나아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언제든 일상적 삶에서 내게 다가오는 것들을 끊임없이 첨가하고 끌어들이는 식이죠. 삭제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반대로 마지막 단계에서 컴퓨터로 텍스트를 정리할 때는 많은 부분을 삭제합니다. 칠 년 전가지는 타자기를 사용했는데, 그때는 아무래도 정정하거나 수정하는 빈도에 한계가 있었죠. 텍스트가 인쇄되었을 때, 내 원고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종종 내가 이러저러한 것을 왜 지웠는지 스스로 물어본답니다. 그런데 그걸 설명할 수가 없어요. 수사본 연구가들이라면 과연 설명할 수 있을지 나로서는 의심스럽습니다. 텍스트를 매만지는 최종 단계에서, 나는 일종의 필연성에 따라 작업합니다. 하지만 일단 책이 완성되고 출판되면 그 필연성은 상실되고 말지요. 텍스트는 그 총체 속에서 하나의 자율적 생명체처럼 고려되어야 합니다. 텍스트는 내가 글을 쓰는 동안에는 나와 한몸이지만, 결국 내 밖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제거된 어떤 부분들에 대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것입니다.  190-192


FYJ : 글을 쓴다는 것은 당신에게, 프루스트가 말했던 것처럼, "체험된 유일한 삶"이 되는 것입니까?

AE : 프루스트는 "진정한 삶, 마침내 '발견되고 해명된' 삶. 따라서 실제로 체험된 유일하게 진정한 삶. 그것은 문학이다"라고 명시했습니다. 난 "발견되고 해명된 삶"이라는 이 말을 강조하고 싶어요. 내 느낌에 이 말이 핵심인 것 같아요. 혹 글쓰기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다면, 난 이렇게 말하겠어요. 말, 여행, 광경 등, 그 어떤 수단으로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을 글로 쓰면서 발견하는 것. 숙고 또한 홀로는 그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글쓰기 이전에는 현장에 없던 것을 발견하는 것, 바로 거기에 글쓰기의 희열이 있습니다. 글쓰기가 무엇을 다가오게 하고 도래하게 하는지는 결코 미리 알 수 없어요. 그러니 글쓰기에는 공포 또한 도사리고 있는 것이지요.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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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내가 쓴 글이 출간될 때쯤이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어했다. 나는 죽고, 더이상 심판할 사람이 없기라도 할 것처럼 글쓰기, 진실이란 죽음과 연관되어서만 생겨난다고 믿는 것이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9



육 년간의 관계를 끝내고 몇 달 전 W를 떠난 사람은 바로 나였다. 열여덟 해 동안의 결혼생활 뒤 다시 얻게 된 자유를 그가 처음부터 애타게 원했던 동거생활과 맞바꿀 수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싫증이 나서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후로도 계속 전화 연락을 주고 받았고, 가끔씩 만나기도 했다. 어느 저녁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나와서 한 여자와 함께 살 거라는 소식을 알려왔다. 그의 휴대전화로만 해야 하고, 만나는 것도 저녁이나 주말에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듯한 감각 속에서도 나는 새로운 무언가가 솟아올랐음을 깨달았다. 그순간부터 이 다른 여자의 존재가 나를 온통 사로잡았다. 그녀를 통해서가 아니면 더이상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11-12


어떻게 해서든 그 여자의 성과 이름, 나이, 직업을 알아내야만 했다. 개인을 정의하기 위하여 사회가 파악하는 이런 요소들은, 한 사람을 진정으로 알고자 할 경우 별 흥미로운 요소가 아니라고 흔히들 경솔하게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었다.  13


내가 만나는 여성들의 육체가 그 여자의 육체로 탈바꿈하는 현상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내 눈에는 '가는 곳마다 그 여자가 보였다.'  16


질투를 할 때 가장 이상야릇한 것은, 한 도시가, 온 세상이 결코 마주쳤을 일이 없는 하나의 존재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이다.  17


나는 그와의 헤어짐으로 인해 고통받기 시작했다.

그 여자에게 사로잡힌 상태가 아닐 때면, 나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의미를 띠게 된, 우리가 함께 보낸 과거를 악착같이 상기시키는 외부세계의 공격 표적이 되었다.  19


난 무엇보다도 우리 관꼐가 막 시작되던 무렵을, 내 일기에 적혀 있듯이 그의 페니스가 벌이는 '굉장한' 기교를 추억하곤 했다. 결국 내가 내 자기에 세워놓는 사람은 다른 여자가 아니라, 다시는 그렇게 될 수 없을 나, 사랑에 빠져서 그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으며 아직 우리 사이의 그 모든 일이 일어나기 직전의 나였다.

나는 그를 다시 소유하고 싶었다.  22


시나리오가 어떻든 간에 여주인공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면, 여배우의 육체를 빌려서 끔찍스럽게 배가되어 표현되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고통이었다.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영화가 끝나면 안심이 될 정도였다. 어느날 저녁에는 일본 흑백 영화를 보다가, 내 고뇌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고 느꼈다. 전후를 배경으로 한 그 영화에서는 끝도 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고통이 펼쳐지는 것을 봐도 충분한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육 개월 전이었다면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싿. 사실, 열정의 폐해를 겪어보지 못한 살마들만이 카타르시스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23-24


우리는 변함없이 카페나 내 집에서 만나곤 했다.  25


만약 사회가 내 안에 잠재해 있는 충동에 재갈을 물리지 않았다면 내가 저지를 수도 있었을 행위들, 예를 들면 단순히 인터넷에서 그 여자의 이름을 찾아보는 대신 "갈보 같은 년! 더러운 년! 잡년!"이라고 울부짖으며 권총으로 그녀를 마구 쏘아대는 등의 행위들이 언뜻언뜻 떠올랐다. 게다가 권총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나는 커다란 목소리로 종종 그런 짓을 저질렀지 않은가. 결국 내가 겪는 고통, 그것은 그 여자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31


다시 자유로워지는 것, 내 안에 자리잡으 ㄴ이 무게를 바깥으로 던져버리는 것이 문제였기에, 내가 하는 모든 일은 그 목적에 맞추어 이루어졌다.

W가 나를 사귀게 되면서 버렸던 여자가, "바늘을 꽂아서 방자(남에게 재앙이 내리도록 귀신에게 비는 행위) 하겠어"라고 분노에 떨며 말했다던 그 여자가 생각났다. 빵의 말랑말랑한 부분으로 사람 형상을 만들어서 핀을 꽂을 수도 있다는 것이 더이상 천치 같은 생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동시에, 두 손으로 빵을 주무르고 머리나 심장 자리에 정성들여 핀을 꽂고 있는 내 모습을 떠올려보니,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가엾고 순진한 한 여자를 보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 내려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내려가보고 싶은 유혹에는, 우물 안으로 몸을 수그려 저 깊숙한 곳에서 떨고 있는 자신의 영상을 바라볼 때처럼, 사람을 끌어당기면서도 무시무시한 그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여기에 글을 쓰고 있는 행위도, 어쩌면 바늘을 꽂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32-33


그 여자와 W가 살고 있는 건무의 모든 입주장게 전화를 걸어보는 것-미니텔에서 이름과 전화번호를 찾아 명단을 만들어두었다-은 내가 가장 해보고 싶은 일이었고, 또한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36 51(발신자 제한번호)을 누른 다음 꼼꼼하게 모든 전화번호를 눌러보았다.  35


전화를 걸어본 이름들 중에 자동응답기에 자신의 휴대전화번호를 남겨놓은 도미니크 L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36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알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리던 내게, 제쳐놓았던 단서들이 갑작스럽게 다시 의미심장한 것이 될 때가 있었다. 잡다하기 짝이 없는 사실들을 끼워맞춰 인과관계를 부여하는 나의 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가 다음날로 예정되어 있던 우리의 약속을 미루자고 한 날 저녁에 일기예보를 듣다가, 진행자가 "내일은 성 도미니크 축일입니다"라는 말로 일기예보를 마치는 순간, 그 여자의 이름이 도미니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내 집으로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일은 그녀의 축일이니 함께 레스토랑에 갈 것이고, 촛불을 밝히고 저녁 식사를 한다든가 뭐 그런 일들을 해야 할 테니까. 이 추론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도미니크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갑작스럽게 차가워진 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은 나의 추론이 옳다는 확신을 주었다.

이러한 탐색과 광적으로 여러 단서들을 짜맞추는 행위를 보며 지능의 탈선적 사용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차라리 지능의 시적 기능, 문학과 종교 및 편집증엣 작동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그 기능이라고 하고 싶다.  38


나는 일기에다가 "다시는 그를 보지 않기로 결심했다"라고 적었다. 이 말을 적는 순간에는 더이상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글쓰기로 인해 고통이 가벼워진 것을 상실감과 질투가 끝난 것으로 혼동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기장을 덮자마자, 그 여자의 이름을 알고 싶으며, 그 여자에 관한 정보들을, 여전히 고통을 낳게 될 모든 것을 알아내고 싶다는 욕구에 다시금 시달렸다.  41


글쓰기를 통해 나의 강박증과 고통을 여기에 노출하고 있는 행위와, 랍 대로에 가면 그들 눈에 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노출을 두려워하던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글스기, 그것은 무엇보다도 타인의 시선엣 벗어나서 행하는 것이다. 나의 얼굴, 나의 육체, 나의 목소리, 나라는 인간의 특징을 형성하는 이 모든 것을 나와 마찬가지로 집어삼킬 듯 바라보고는 내팽개쳐버릴 누군가의 눈앞에 드러내는 것은 더없이 잔인한 짓이라고 생각했던 만큼이나, 지금은 내 강박증을 드러내고 헤집어보는 일이 전혀 거북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반항심도 전혀 없다. 진실을 말하자면, 난 정말이지 아무 느낌도 없다. 나는 나를 본거지로 삼았던 그 질투가 꾸며내는 온갖 상상과 행동들을 묘사하려고만 애쓰며, 개인적이며 내밀한 것을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는 실체로 변모시키려고만 애쓰고 있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 형체 없는 익명의 사람들이 아마도 그것들을 제 것으로 삼을 것이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더이상 나의 욕망, 나의 질투가 아니라 그저 욕망, 질투에 속하는 것이고, 나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곳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43-44


유일하게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그가 아직도 나를 만나고 있으며, 가령 얼마 전에 내 생일선물로 브래지어와 T팬티를 선물했다는 사실을 그 여자가 알게 되는 상상을 할 때였다. 그러면 온몸의 긴장이 풀어졌고, 진실이 드러났다는 지극한 행복감 속에 잠겨들었다. 마침내 고통이 육체를 바꿔 탄 것이다. 난 그녀가 느낄 고통을 상상하면서 내 고통을 일시적으로나마 덜 수 있었다.  49


가장 커다란 행복처럼 가장 커다란 고통도 타자로부터 오는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움 때문에 그 고통을 피하려고 앴는 사람들을 이해한다. 그들은 그 고통을 두려워하여 적당히 사랑하거나, 음악이나 정치참여, 정원이 있는 집과 같은 관심사의 일치를 더 중시하거나, 혹은 삶과 유리된 쾌락의 대상으로 여러 명의 섹스 파트너를 둠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이 육체적 사회적 고통에 비하면 비이성적이며 심지어 물의를 일으킬 만한 것일지라도, 하나의 사치일지라도, 나는 생의 평온하고 유익했던 몇몇 순간보다도 그 고통을 더 사랑할 것이다.  50


욕망이란 필요한 모든 것을 논거로 끌어다 사용하는 놀랄 만한 능력을 갖고 있어서, 나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잡지 속에나 굴러다니는 상투적이며 진부한 생각들을 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 여자의 딸이 엄마보다도 훨씬 어린 엄마의 연인을 참아내지 못해서, 혹은 딸아이가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되어서 그들이 더이상 함께 살 수 없게 될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52


유일하게 진실한 것, 결코 말하지 않을 진실은 "난 당신과 섹스하고 싶고, 그 여자를 잊게 만들고 싶어"라는 말이었다. 그밖의 것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모두 허구였다.  53


어느 일요일 오후, 프랑스에 잠깐 들른 L과 극장에 갔다. 그를 다시 보는 것은 친 년 만이었다. 그날, 우리는 서로에게 저절로 이끌려 그의 부모 집 거실에 놓여 있는 소파 위에서 섹스를 했다. 그는 내가 아름다우며, 기가 막히게 잘 빨더라고 말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종종 성행위를 통해 얻고자 했던 '정념의 정화'-"아! 네 물건을 어서 넣어줘/ 그리고 끝장내버려/ 아!/ 그 이야기는 이젠 그만"과 같은 외설적 유행가가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성적 쾌락엣 모든 것을, 쾌락 이상의 것을 기대했다. 사랑, 융합, 무한, 글쓰기의 욕망, 이제껏 내가 그에게서 얻어냈다고 여기는 최상의 것, 그것은 냉철함으로, 감상주의에서 탈피해 갑자기 단순하게 세계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56-57


이제 나는 "당신, 페니스 좋아하지, 그렇지? 아무 페니스나 말고, 당신 거" 따위의, 예전엔 거리낌없이 서로 속삭이던 대화를 전화로 나누고 싶어져도 참게 되었다. 그런 말들이 지금의 그의 페니스를 부풀게 하기는 커녕 흥분을 싹 가시게 하는 외설스러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62


(학교에서 문학 텍스트의 구절들에 제목을 붙이듯이, 자기 삶의 순간들에 제목을 붙이는 것은 아마도 삶을 통제하는 수단이 아닐까?)


우리는 가끔씩, 순전히 의례적으로 전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것 역시 끝났다.

그의 페니스가 생각날 때면, 첫날 밤에 본 모습이 그대로 떠오른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내 눈앞에, 거대하고 강력하며 끝이 버섯 갓 모양으로 부푼 채 불끈 솟아 있던 그의 페니스,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낯선 사람의 페니스를 보는 것 같다.  67


에이즈 검사를 받았다. 그것은 청소년기에 고해하러가던 것과 유사한 습관으로, 일종의 정화의식이 되었다.

이젠 그 여자에 관해서 이름은 물론 그 어떤 것도 알아내고 싶은 욕망이 조금도 없다(혹시라도 친절하게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사람들이 생길지도 모르니, 미리 정중히 거절한다는 의사를 밝히는 것이다). 마주치는 모든 여자들이 그 여자처럼 보이는 일도 없어졌다. 파리의 거리를 걸을 때도 이제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는다. [해피 웨딩]이 흘러 나와도 라디오 채널을 돌리지 않는다. 가끔씩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들지만, 더이상 담배나 약물에 의존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는 사람과 흡사한 정도다. 


글쓰기는 더이상 내 현실이 아닌 것, 즉 길거리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엄습하던 감각을 간직하는 방식, 그러나 이제는 '사로잡힘'이자, 제한되고 종결된 시간으로 변해버린 그것을 간직하는 방식이었다.  67-69





옮긴이의 말 - 질투의 심연에서 만난 치열한 글쓰기


'그'가 떠나갔다.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홀몸의 자유를 포기할 정도로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미적지근한 연인관계를 유지해오던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한들, 그것이 '나'의 삶에 무에 그리 영향을 미치겠는가? 하지만 '그'가 '나'를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서라면? 갑자기 '그'에 대한 '나'의 빛바래가던 감정은 애초의 생생한 색깔을 되찾는다. '나'와 '그'의 관계를 규정짓던 타성과 습관은 어느새 그 힘을 상실하고, '그'를 되찾고자 하는 '나'의 무시무시한 눈먼 욕망만이 길길이 날뛴다. 

아니 에르노의 <집착>은 이렇듯 '나-작가'가 겪은 질투에 관한 이야기이다.  73-74


에르노의 <집착>은 '자전적 허구'를 작가들의 노출 욕구나 배출 통로쯤으로 치부하던 독자들에게는 하나의 예외로 다가온다. 우선, 에르노의 글은 치열하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가장 내밀한 부분가지 올올이 드러낸다...

'글쓰기, 그것은 무엇보다도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서 행하는 것이다'라고 못박는 에르노에게 글쓰기란 타인의 시선에서 놓여난 시공간엣 행해야 할 작업이다.  75


에르노는 지극히 이성적이며 계산할 줄 아는 작가이다. 끊임없이 군더더기를 떨어내고, 치밀하게 자르고 다듬어 완벽하게 아귀를 맞추어놓은 문장들 사이에는 세워놓은 바늘을 바라보는 듯한 아슬아슬한 균형이 자리잡는다.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주어와 동사를 품지 않은 문장들은 이 벼리기 작업의 가시적 결과이다. 에르노의 글은 푸근하지 않고, 정련된 문장들이 안져주는 정신의 긴장을 즐기는 독자들로부터 그래서 더욱 인정을 받는다.  77


작가는 '주요 관심사'나 '점령'을 의미하는 'L'occupation'이란 제목을 고름으로써, '질투'의 두 가지 양상을 겨눈다. 하나는 질투의 메커니즘이 작동한 뒤로 어떤 다른 일에도 정신을 쏟지 못하고 '그 여자'를 찾아내는 일이 '나'의 '주요 활동'이 되어버린 것이며, 다른 하나는 마치 무엇엔가 들리기라도 한듯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여자'의 존재에 완전히 사로잡혀버린 '나'의 상태이다.  7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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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번 힘이 되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열정이란 말에는 한 철 태양이 머물다 지나간 들판의 냄새가 있고, 이른 새벽 푸석푸석한 이마를 쓸어올리며 무언가를 끼적이는 청년의 눈빛이 스며 있고, 언제인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타고 떠날 수 있는 보너스 항공권 한 장에 들어 있는 울렁거림이 있다. 열정은 그런 것이다. 그걸 모르면 숨이 막힐 것 같은 어둠에 놓여 있는 상태가 되고, 그걸 갖지 아니하면 신발을 신지 않은 채 낯선 도시에 그 암담함과 다르지 않다. 

사랑의 열정이 그러했고 청춘의 열정이 그러했고 먼 곳을 향한 열정이 그러했듯 가지고 있는 자와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그런것. 이를테면 열정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넌 자와 건너지 않은 자로 비유되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몸을 던져 물살을 타고 먼길을 떠난 자와 아직 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은 자, 그 둘로 비유된다. 열정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



사랑의 시작은 그래요. 어떤 이상적인 호감의 대상이 한번 내 눈을 망쳐놓은 이후로, 자꾸 내 눈은 그 사람을 찾기 위해 그 사람 주변을 맴돌아요. 한 번 본게 다이넫 내 눈은 몹쓸 것으로 중독도니 무엇처럼 그 한 사람으로 내 눈을 축축하게 만들지 않으면 눈이 바싹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거죠.


청춘에 있어서 만큼 사용법이란 없다. 

주저하면 청춘이 아니다. 생각의 벽 안쪽에 갇혀 지내는 것도 청춘이 아니다. 괜히 자기 자신을 탓하거나 그도 아니면 남을 탓하는 것도 청춘의 임무가 아니다. 청춘은 운동장이다. 눈길 줄 데가 많은 번화가이며 마음 들떠 어쩔 줄 모르는 소풍날이다. 

하지만 청춘은 방해받는 것 투성이다. '하지 말라

'는 말들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야 함으로 느낄 수도, 만날 수도, 가질 수도 없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느껴야 하는 것, 만나야 하는 것, 사력을 다해 가져야 하는 것, 그래서 반드시 행복해야 하는 것, 그것이 청춘이다.  

청춘은 한 뼘 차이인지도 모른다. 그 사람과 내가 맞지 않았던 것도, 그 사람과 내가 인연으로 스치지 못했던 것도 그 한 뼘 차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청춘의 모두는 한 뼘과 연관되어 있으며 겨우, 그 한 뼘 때문에 대부분의 결과는 좋지 않다.

청춘은 예민하되 청춘은 복잡하지 않다. 그렇다고 대단하지도 않다.



나는 여행하면서 이런 것들을 챙겨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여전히 신기하다.

 - 트렁크 가득한 책(게다가 그걸 다 읽고 버리고 가는 사람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 평소 즐겨 먹는 원두커피

 - 두춤한 일기장

 - 잠옷

 - 애인.



네 손을 잡는 순간 갑자기 모든 게 괜찮아진다.



사랑해라. 시간이 없다. 사랑을 자꾸 벽에다가 걸어두지만 말고 만지고, 입고 그리고 얼굴에 문대라. 사랑은 기다려주지 않으며, 내릴 곳을 몰라 종점까지가게 된다 할지라도 아무 보상이 없으며 오히려 핑계를 준비하는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사랑해라. 정각에 도착한 그 사랑에 늦으면 안 된다.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기차다. 함께 타지 않으면 같은 풍경을 나란히 볼 수 없는 것. 나란히 표를 끊지 않으면 따로 앉을 수밖에 없는 것. 서로 마음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같은 역에 내릴 수도 없는 것. 그 후로 영원히 영영 어긋나고 마는것.

만약 당신이 그리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을 이해하는 법을, 우주를 바라보는 방법을 익히게 될 것이다. 그러다 어쩌면, 세상을 껴안다가 문득 그를 껴안고, 당신 자신을 껴안는 착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 기분에 울컥해지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아무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당신에게 많은 걸 쏟아놓을 것이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세상을 원하는 색으로 물들이는 기적을 당신은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동전을 듬뿍 넣었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해도 당신 사랑이다. 너무 아끼는 책을 보며 넘기다가, 그만 책자이 찢어져 난감한 상황이 찾아와도 그건 당신의 사랑이다. 누군가 발로 찬 축구공에 밝은 하늘이 쨍하고 깨져버린다 해도, 새로 산 옷에서 상표를 떼어내다가 옷 한 귀퉁이가 찢어져버린다 해도 그럴 리 없겠지만 사랑으로 인해 다 휩쓸려 잃는다 해도 당신 사랑이다. 내 것이라는데,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라는데 다 걸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무엇때문에 난 사랑하지 못하는가, 하고 함부로 생각하지 마라. 그건 당신이 살랑을 '누구나, 언제나 하는 흔한 것' 가운데 하나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왜 나는, 잘하는 것 하나 없으면서 사랑조차도 못하는가, 하고 자신을 못마땅해하지 마라. 그건 당신이 사랑을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흔한 것도 의무도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이다. 

사랑해라,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잃어온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사랑해라, 사랑하고 있을 때만 당신은 비로소 당신이며, 아름다운 유일한 한 사람이다.



"다음 사람을 위하여"

계속해서 감사는 박자를 맞춰 감사를 부를 것이다.



춤을 추어도 혼자는 추지 말고 아픔과 함께 추어라. 대신 얼마나 힘이 됐는지 아픔은 모르게 하라.



거대한 어항 같은 도시 안에서 물기 없는 호흡을 하고 있을 때,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와 떠들고 있을 때, 문득 나를 에워싸고 있는 많은 것들을 놓고 싶을 때, 깊은 밤 잠에서 깨어 통장 잔액 확인을 하고 있을 때, 죽집에 들어가 죽 한 그릇 시켜놓고 기다리다 주인이 가져다준 신문 첫 장을 외면하고 싶을 때, 허파로 숨을 쉬어야 하는 고래가 아플 적에 친구 고래가 아픈 고래를 수면까지 밀어올려서 숨을 쉬게 해준다는 얘길 들었을 때, 웅크린 채로 먼 길 가는 달팽이의 축축한 행로를 지켜보고 있을 때, 아무도 없는 밤바다에 알몸을 담그고 누워도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없을 때, 어쩌면 이 세상은 남자오 ㅏ여자뿐일지도 모른다는 억지스러운 논리와 세상 모든 이야기가 남자와 여자에 관해 이야기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해야 할 때, 기다리는 것이 희망인 줄 정확히 알면서도 희망이 도착하기도 전에 지쳐 버리는 군중들 속에서도, 한낮인데도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찾아왔을 때, 그렇게 한낮이 무거웠을 때, 달큼한 바람이 불고 몸이 뜨거워지고 그래서 눈을 감고 싶을 때, 뭔가 가득 채워놓은 것이 쓰러져 엎어졌을 때, 이사 후, 아무렇게나 기대 놓은 그림을 누군가가 말을 해줘서야 바로잡고 있을 때, 정이 들어버려서 마음이 통해버려서 달빛 아래 각자 다른 길로 헤어지고 싶지 않을 때, 문득 뚜렷한 이유도 대상도 없이 무작정 고마울 때, 보름달 주기를 따라 피었다 졌다를 반복하던 마당의 꽃들이 어느 순간 돌아가야 할 때가 됐다고 말할 때, 다시 또 누군가를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을 때.



교감일거라 생각한다.

낯선 곳으로 여해을 갔을 때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을 때, 그럴 땐 똑같이 생긴 뭔가를 두 개 산 다음 그중 하나에 마음을 담아서 건네면 된다. 환하게 웃으면서 그러면 된다.



좋은 풍경 앞에서 한참 동안 머물다 가는 새가 있어. 그 새는 좋은 풍경을 가슴에 넣어두고 살다가 살다가 짝을 만나면 그 좋은 풍경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일생을 살다 살다 죽어가지. 아름답지만 조금은 슬픈 얘기.



말하세요. 누구든 붙잡고 그걸 이야기하세요. 누가 없으면 혼자서 이야기 하세요. 자신을 힘들게 하는 문제들을, 현상들을요. 말하지 않아서 병이 됩니다. 말하지 않아서 고통스러운 겁니다.



영원히 바뀌지 않을 주소.



기약없이 떠나왔으니 조금 막막한 것도, 하루하루의 시간이 피 마르듯 아깝게 느껴지는 것도, 돈이 다 떨어져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혼자 이국의 바닷가에서 울적해하기보다는 웃을 수 있는 일을 먼저 생각하자고 씁쓸히 마음을 먹는 일도, 떠나는 일은 점퍼의 지퍼 같은 것이어서 지퍼를 채우기만 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도 좋아해. 그리고 눈이 내리고 내리고 쌓이고 또 쌓이는 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는 '당신하고 같이 왔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면서 술이나 사러 나갈까 하며 벗어놓은 양말을 신는 걸 좋아해. 



'돈 없어도 대차게 살자' 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살던 시절이 있었는데, 돈이 없는데 어떻게 대차게 살겠어. 난 왜 그랬는지 모르게 그렇게 한 거야.

내가 갖고 싶은 CD에 붙은 바코드를 떼어버리고 옆에 놓인 싸구려 CD에 붙은 바코드를 붙여서 계산대로 간 거지 그러니까 86프랑짜리를 68프랑에 사기 위해 귀찮게 깎거나 하지 않았어도 됐던 거야. 계산까지 다 했어. 내가 특별 할인시켜놓은 가격으로.....



먼 훗날은 그냥 멀리에 있는 줄만 알았어요. 근데 벌써 여기까지 와버렸잖아요.



상대를 일방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위한 방법은, 완전히 이해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됐다면 아무리 늦었다 해도,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건 분명 사랑인 거다.  



시시한 게 싫다고 시시하지 않은 걸 찾아 떠나는 사람 뒷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시시해요?

처음에 시시하지 않을 것 같아 시작했는데 시작하고 보면 시시해요. 사랑은, 너무 많은 불안을 주고받았고, 너무 많이 충분하려 했고 너무 많은 보상을 요구했고, 그래서 하중을 견디기 못해요. 그래서 시시해요, 사랑은.



습관처럼 다닌다. 습관처럼 여행을 다니려고 한다. 여행을 다니는 습관만큼 내가 사람을 믿는 건 사람한테 열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으로부터 받을 게 있다는 확신에 기대는 바람에 나는 자주 사람에 의해 당하고 패한다...

그렇다고 항상 당하는 쪽인 나 같은 이에게 쓸쓸함만 남는 건 아니다. 고맙게도 쓸쓸하면 할수록 다시 사람을 떠올리며 사람의 풍경 안으로 걸어갈 힘이 생긴다.



한번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여행은 끝이다. 그만큼 자유롭지도 못할 뿐더러 기회도 적기 마련, 세상에 하나뿐이라고 생각한 친구를 믿은 적 있으나 그는 나를 믿어주지 않았고, 한 사람을 믿은 적 있으나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 아닌 듯하였다. 그 울림은 더 장황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옮겨가면 그뿐이었다. 내가 사람에게 함부로 대했던 시절이 분명 있었기에 당함으로써 배우는 것이라 자위하면 되는 것.  



간혹 사람들은 묻는다. 왜 그렇게 다녀야만 하냐고, 피의 문제라고 대답도 했다가 결핍의 문제라고도 했다가 나도 잘 모른다, 라고 대답을 해왔다. 상상력을 위해서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폼 잡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상상력이 부족해서 더 가난한 시대에, 사람들은 함부로 남을 이야기할 때만 상상력을 동원한다. 그 뻔한 상상력만으론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모르고 살고 있는 눈치다.

진정으로 남의 입장이 되어보기 위해서, 낯선 공간으로 끌려들어가기 위해서, 그렇게 먹먹해지고 막막해져서 조금 나은 상상력의 밑천을 짊어지고 돌아오기 위해 나는 먼 길에 머무르기를 좋아한다.



양과 맛을 넘어서지 않는 행복.



대상을 향해 직진하는 편인가. 목적을 향해 내 모든 살아있는 감각들을 작동시키는 편인가. 나는 이런 질문들 앞에서 비교적 '그런 편'이라고 말할 것 같다. '비교적'이라는 꼬리를 단 것은 대상과 목적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중심'이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겪고, 무엇을 이해하는지의 핵심은 항상 '중심'에 있다.



눈을 감더라도 마음을 감아선 안 되리라.



사람의 인연이란 건 대단하다.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니며, 알려 해도 알 길이 없는 것이며 그래서 묘한 것이다.



언제나 한 가지 대답이면 된다. 닥치는대로.. / 될 대로 되라 / 난 겁내지 않는다 / 이것도 운명이다. 이 모든 걸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존재한다. 라틴어 '케 세라 세라(Que Sers Sers).'

내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는 두 가지 정도가 있을 듯. 세세하게 일일이 신경 쓰고,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사는 사람. 그냥 뭉툭하게, 되는대로 터벅터벅 살아가는 사람. 자잘한 신경을 많이 쓰고, 꼼꼼이 계획을 세워서 사는 사람이라도 모두 잘 살고, 모든 일이 잘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그 반대, 조금 심드렁하게 , 또는 대충대충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잘 살지 못하리란 법도 없는 듯.

멋있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멋있다. 안 씻는 사람 안 씽어도 멋있다. 일생 정리정돈 못하는 사람은 그게 멋이다. 아등바등 살아가는 너 같은 사람은 그것도 그대로 멋이다.

솔직히, 가끔은 못하는 것이기에 꿈꾼다. 씩씩하게, 몫하는 거지만 대범하게, 자신 없지만 통 크게. 말 그대로 케 세라 세라(Que Sers Sers), 그렇게.

'너처럼 대충대충 사는 놈이 왜 많은 사람들을 잃는 거냐?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하기 때문이야.  



우리가 오늘을 살면서 하루하루의 가치가 형편없다고 생각된는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많은 곳을 다니면서 그냥 다닌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쉬임 없이 써야만 했던 것이 살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시간을 때우기 위안 것이었는지 또는 존재의 한 방식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분명하지 않음이 슬프기까지 하다. 하지만 열정이 아니고는 그럴 수도 없었을 터, 분명 나에겐 열정이 있었고 아직도 열정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이제 그 열정을 쓰게 된다면 끼적이고 쓰고 하는 일이 아닌, 또 사진을 찍는 일도 아닌, 더 다니는 일에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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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시인 단테는 <신곡>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인간이 진실한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는 날, 짜여 있던 모든 것은 혼란에 빠지고 확고한 진실로 여겨졌던 것들은 모두 뒤흔들릴 것이다' 인간이 사랑하는 법에 눈뜰 때, 비로소 참된 세상이 이루어집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사랑을 안다고 생각하면서 살겠지만, 사랑을 있는 그대로 대면할 용기는 갖지 못할 겁니다. 

사랑은 길들여지지 않는 힘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통제하려 할 때, 그것은 우리를 파괴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가두려 할 때, 우리는 그것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가 사랑을 이해하려 할 때, 사랑은 우리를 방황과 혼란에 빠지게 합니다. 

사랑이라는 힘은 우리에게 기쁜을 주기 위해, 우리를 신께, 우리의 이웃에게 다가서도록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평화로운 일 분을 위해 한 시간씩이나 고뇌하면서 사랑하고 있습니다.  129-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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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같은 하늘 아래에서 그녀와 같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비행기를 탔다.  6


어째서 홍이의 외로움을 좀 더 이해해주지 못했을까. 어째서 그녀 입장에 서서 생각할 수 없었을까.  8


첫눈에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이라고 느꼈다.  12


언제나 첫인상만큼 믿지 못할 것도 없다.  13


마음의 문을 닫고 고집스럽게 칸나를 원망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홍이의 존재는 정말이지 내게 성모 그 자체였다.  30


한마디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그러나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던 탓에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자라고 말았다.  36


시집을 발견한 나는 엎드려 별 생각 없이 책장을 펼쳤다. 읽기 위해서라기보다 거기서 홍이의 흔적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47


둘 사이에는 한 장의 천도, 둘 사이의 가르는 문도, 세상을 차단하는 높은 벽도, 끝없는 국경선도 없었다.  67


바다가 보고 싶다고 떼를 쓰는 저녁이면 대개 혼자서 몰래 울었다. 

"같이 있는데 뭐가 쓸쓸해?"

나는 그녀가 몰래 울 때마다 그렇게 물었다. 홍이는 눈물을 감추며 쓸쓸해서 그런 거 아니야. 하고 말했지만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77


"글쎄, 엄마가 일본 사람하고는 결혼 못한다잖아."

그래도 그때가 우리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132


사소한 한마디, 별 뜻 없이 한 말이 그 틈에 커다란 균열을 만들어 버리는 일이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아무도 그것이 심각한 줄을 모른다. 병을 앓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161


"일본도 마찬가지야! 나도 케이크만 시킬 때가 있다고!"

"누가 준고 생각을 물었어? 난 일반적으로 말해서 한국과 일본은 문화가 다르다고 한 것뿐이야."

"그렇지만 네가 문제를 비약시키잖아. 케이크와 음료가..."

우리는 녹초가 될 때까지 그런 바보스런 논쟁을 되풀이하다 결국엔 등을 돌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홍이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준고, 부탁이야. 내게 다정하게 대해 줘. 부탁이니 무조건 날 지켜 줘. 준고, 부탁이야. 무슨 일이든 내 편만 들어 줘'

그런데도 나는 홍이의 고독한 마음을 받아 주기는 커녕 내치려 했다. 왜 홍이가 조바심을 내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하려 했다면, 홍이가 마리코와 싸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빵집 마리코 탓이 아니었다. 그건 전부 내 탓이었다.  173


"잘못했다고 하면 되잖아. 사과하면 누가 벌이라도 줘? 너희 일본 사람들은 어째서 그런 말 한마디를 못하는 거야?"  178


"엄마가 왜 일본 사람하고 결혼 못하게 하는지 겨우 알 것 같아.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내가 말했었지. 기억 나? 나는 외국 사람하고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그런데 어째서 무책임하게 결혼하자는 말을 했어? 나를 외톨이로 내버려 둘 거면서. 제대로 사과도 안할 거면서."  179


나는 칸나 덕분에 확실히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  203


만약 내가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하고 레코드 가게를 나오며 생각한다. 나는 일본을 미워했을까, 아니면 일본인과 사이좋게 지내려 했을까.  224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과 같은 입장에 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죠. 상대방의 마음을 제멋대로 거짓으로 꾸미는 게 보통이에요.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240


"난 그때 너와 함께 달렸어야 했다. 난 너에 대해 뭐든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알지 못했던 거야. 내가 생각이 모자랐어."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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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니였다면 나는 지난 일 같은 건 그냥 아름답게 간직해 버리고 말 거야. 노래방 같은 데서 노래 부를 때만 조금 생각하고 나머지는 다 잊어버릴 거라고."

"잊는다고?"

내가 물었을 때 록이는 맥주잔을 들다 말고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잊는 거, 잊어버리는 거 말이야."

잊는다는 건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내가 잊으려고 했던 것은 그가 아니라, 그를 사랑했던 내 자신이었다.  26


그때 나는 그의 곁에 있느 모든 여자를 질투했었다. 칸나라는 여자는 물론이고, 그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있던 뚱뚱한 아주머니까지. 공원을 걷다가 그가 일으켜 세워 주었던, 넘어진 열 살짜리 꼬마 아이까지. 그게 누구든 그가 나 이외의 모든 여자에게는 찡그린 표정만 보여 주었으면 했던 것이다. 그게 터무니 있든 없든 그랬다. 나는 그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살고 싶었다. 그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고 싶었다. 가끔 그의 손이 내가 살고 있는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오면 그의 손가락을 만지작 거리며 잠들고 싶었다. 어릴 때 피아노 뚜껑을 덮어 버려서 흉터가 남은 그의 손가락에 내 얼굴을 대고 싶었다. 

"그건 사라잉 아니라 스토킹이야. 집착일 뿐이라고."

나중에 내가 그 이야기를 해주자 친구 지희가 말했었다.  29


그는 부지런했다. 그가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엇다. 나주엥 생각한 일이지만 그는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슬픔이라는 점령군에게 마음의 영토를 다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고 있던 것도 같았다.  33


"너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어. 언젠가 너를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어."

준고는 무슨 말이든지 하라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눈가로 몰려왔다. 피가 얼굴 앞ㅉ고이로 몰려드는 것처럼 아주 무거운 기분이었다.  

담담하고 당당하게 말하려고 햇는데 나는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지난 칠 년을,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내려 앉았던 빨간 심장을 다 토해 버릴 것만 같았다. 

기다렸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새로 휴대전화를 장만하고 나서 그가 당연히 내 전화번호가 바뀌고, 한국의 전화번호는 세 자리 국번에서 네 자리 국번으로 바뀌어 버렸는데도 심장은 내 머리를 비웃으며 그렇게 덜컥거렸다. 사무실에서든 집에서든 전화를 받아 들고 그 소리의 주인공이 여보세요. 하기까지 전화벨은 고통이 시작되는 신호였다. 그렇게 혹시라도 기적처럼 그가 전화를 걸어 와 베니, 넌 잘 있니? 하고 물으면, 그러면 나는 대답하고 싶었다. 

'응, 잘 있어. 나는 최홍이고, 나는 씩씩한 여자고, 나는 잘 있어. 준고. 어쩔 수 없이. 안간힘을 다해서, 필사적으로 그렇게 잘 있단다.'

그리고 나는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 울고 있는 나를 내버려 두었니? 왜 붙잡지 않았니? 잡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그리고 왜 이제야 여기에 온 거니?'  45


아침에 좀 더 신경을 쓰고 나올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도 머리도 좀 더 예쁘게 하고 옷도 좀 더 화사하게 입고 올골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아무런 반짝거림도 없이 그저 시들어 가는 노처녀처럼 보였던 것은 아닐까. 내 자신이 싫어졌다. 더도 덜도 아니고 그가 가슴 아플 만큼만, 그가 후회할 만큼만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 이건 민준을 만나면서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생각이다.  51-52


준고는 늘 바빴다. 아르바이트를 다섯 개나 한다고 했다. 가만히 보니까 어떤 때는 임시 아르바이트까지 하는 것 같았다. 그래야 학비를 번다니. 

"너희 아버지는 뭐 하셔? 너 혹시 고아 아니니?" 나는 물었다.

"아버지는 첼리스트야, 가난한..." 그가 말했다. 

"혹시 가짜 부모님?"

내가 묻자 그가 하하. 하고 웃었다.  66


"베니, 네 얼굴은 늘 이상한 생기로 가득 차 있어. 일이 힘들어지면 나는 늘 네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빛을 기억해." 

그건 준고가 한 말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나이가 든 필자 선생님이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었다. 

"최홍 씨는 가끔 참 어두워. 세상을 다 살아 버린 사람 같아." 그때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

"선생님에게는 독한 추억이 있나요?"

나는 조금 술에 취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시비 걸듯이 대꾸할 수가 없었을 테니까.

"아무리 몸을 씻어도 아무리 딴 생각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 취기 같은, 그런 독한 기억이 있느냐고요?"  76


"엄마는 아빠를 아직도 사랑해?" 내가 물었다. 내가 뺨을 대고 있는 엄머의 등이 잠시 굳어졌다.

"... 사랑은, 하지. 그런데 좋아하지는 않아."  77


"사람이 사는데, 꼭 나쁘다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더구나 누구를 사랑하는데. 그건 말이야, 그저 과거의 일일 뿐이야. 되돌릴 수도 없는 거, 그냥 오늘을 살고 내일을 바라보고 그러는 게 좋지 않겠니?"(민준의 말)  87


엄마는 말이 없어진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게 아니야. 그건 지옥으로 들어가는 거지. 결혼은 좋은 사람하고 하는 거야."  91


혼자서 그의 집을 나오던 그날 밤, 공원 길을 걸어 기치조지역을 향해가면서 나는 중얼거렸었다. 

"대체 왜 그러느냐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진한 눈으로 그렇게 묻지는 마... 내가 너보다 많이 슬펐고, 내가 너보다 많이 기다렸고, 내가 너 보다 많은 걸 걸었으니까. 그러니 이제 나를 잊어. 칸나를 잊듯이. 벚꽃이 일제히 지듯이 그렇게... 더 많이 사랑햇던 사람하고, 더 아팠던 사람하고, 정말 처음이었던 사람들이 이미 불행하기로 되어 있었던 걸 너는 모르겠지. 영영 그렇게 모르겠지. 그러니 잊어. 하나도 남김없이 잊어."

그러면서 나는 아마도 뒤돌아보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실은 마른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인 줄도 모르고 이제 그를 떠나야 한다는 결심과 제발 그가 다가와 날 붙들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팽팽히 맞서는 것을 느끼며 그곳을 떠나왔던 것이다.  101


사랑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픈 건 사랑을 줄 수없다는 것.  109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111


"그런데 지희야, 혹시 사람에겐 일생 동안 쏟을 수 있는 사랑의 양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닐까? 난 그걸 그 사람한테 다 쏟아 버린 거 같아... 그리고 내 표정이 아무리 이상해져도 앞으로도 늘 이렇게 말해 줘. 그런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해 줘. 부탁이야!"  119


이 호숫가는 적어도 그가 없었던 공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여기에는 추억이 없으니까. 여기에는 처음부터 나 혼자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그가 여기 들어섬으로써 나는 기억을 갖게 되어 버렸다. 그러자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칠 년 동안 나를 기다리게 해 놓고. 뭐 딱히 그가 나보고 그러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놓고 겨우 내가 한 바퀴를 도응 동안도 더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가 버린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125-126


가끔은 하늘도 마음을 못 잡고 비가 오다 개다 우박 뿌리다가 하며 몸부림치는데 네 작은 심장이 속수무책으로 흔들린다 해도 괴로워 마.(지희의 메일 내용중에서)  130


"..모범 답안으로만 살명 진짜 무엇인 옳은지 모르는 거야."  132


언제나 어린 동생처럼 보였는데 록이가 훌쩍 큰 듯 느껴졌던 것은 아마 내 마음이 누구에게든 기대고 싶을 만큼 지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34


그가 나를 위해 힘겨운 아르바이트를 다섯 개씩이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비싼 음식들을 먹으로 가자고 졸랐던 것은 그의 짐작대로 내가 돈 걱정 없이 자라서가 아니라 말하자면 멋진 남자와 사랑할 때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 그러니까 좀 더 쾌적하고 로맨틱한 장소에 그와 나의 사랑이 머물렀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와 직원들을 모두 내보낸 부도 직전의 출판사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자장면만 먹으며 일할 때 나는 준고를 생각했었다.

차비 한 푼도 힘겹던 시간이었다. 지희가 남자 친구를 데려와 소개했을 때 이차로 마신 생맥주 값을 나보고 내라고할까 봐 잊어버린 일이 있는 듯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오면서 나는 준고를 생각했었다. 내가 로맨틱한 카페에 가서 프랑스스기 음식을 먹자고 조를 때 그의 눈에 비치던 그 곤혹스러움..., 그가 캔 커피를 사서 공원에서 마시자고 했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하는 것도 떠올랐다. 미안하다고, 내가 너무 철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 버린 뒤였다.  137


'최홍. 너, 여기서, 대체, 뭐하고 있는 거니?

순간 세상의 모든 빛이 암전되어 버린 것처럼 아찔해졌다.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거역할 수 없는 물음이 들려왔다. 

'윤동주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겟다던 너는, 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고?'

마취에서 깨어난 것처럼 온몸이 아파 왔다. 가슴 한구석이 갈라지는 듯했다. 나는 긴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사방을 둘러보았다. 검은 장막이 서서히 걷히며 어렴풋이 사물들의 윤곽이 보였다. 이곳은 좁은 욕실, 준고의 아파트였다. 도쿄였고 일본이었다. 나는 여기서 오전에는 일본어 학원을 다니고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준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196-197


이제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결심을 해야 했다. 나는 준고에게 한국으로 가자고 할 셈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인사를 드리자고 하고 싶었다. 내가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나 인사했듯이 그를 한국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내가 할아버지 이 사람은 좋은 일본인이에요. 하면 할아버지도 빙그레 웃어 주실 것 같았다.


그날 역시 늦게 돌아온 준고는 피곤하다는 듯이 물을 한 잔 마시더니, 자자. 하고 자리에 누웠다.

"할 이야기가 있어."

내가 말을 꺼내자 그는 돌아누우며 제니 내일. 하더니 이불을 뒤집어썼다.

"대체 너에게 나는 누구니?"

등을 돌리고 누운 준고의 뒷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대체 너에게 나는 무슨 의미인 거냐고!"

그가 가늘게 코를 고는 소리가 바다 위에 내리치는 번개처럼 밤새 내 망막에 푸른빛으로 번쩍번쩍했다.

"오늘은 안 되고 내일은 시간이 나니까, 홍. 우리 맛있는 거 먹으로 가자."

아침이 되자 미안하다는 듯 그가 말했다.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 그래, 그럴게. 했다.  198-199


내 생애의 첫 사람인 그..

'하느님 준고를 살려주세요. 원하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에요.' 격정적인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두 손을 모은 채 얼마가 지났을까. 마음이 싸늘히 식어 내리면서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다시 한 번 다짐했었다. 준고는 약속을 그렇게 허투루 어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 뒤에 순간이었지만 만일 그런 사람이 약속을 어긴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202


"끝내자, 준고." 내가 말했다.

준고는 마치 낯선 외국어라도 들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실은 나는 그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 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그랬을 것이다. 우리 지금은 힘든 시간이니까 조금만 이 고비를 넘겨 보자고 말해 주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그랬을 것이다. 아니, 그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 서투른 동거와 이국 생활의 외로움에 나는 지쳐 가고 있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다정하게 흥, 이야기를 해봐, 하고 말한다 해도 나는 떼를 쓰듯 우겼을지도 모른다. 한국으로 갈래, 한국으로 갈래, 하고. 그때 나는 생이 우리에게 얼마만큼 냉정하게 모든 행위에 대해 해명과 책임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스물둘이었다.

'준고, 함께 한국에 가자. 가서 할아버지께, 일본 여자랑 결혼하려던 아빠를 반대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너처럼 좋은 일본 사람도 있다는 걸 말하자. 우리 세대는 다르다고 말하자. 응?'

나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묻지 않았다. 피곤함과 짜증이 섞인 그의 눈빛이 침묵 속에서 비수처럼 나를 찌르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슬픈 얼굴이 내 눈앞을 가로막았다.  204-205


"그래 그럴게. 행복해라..."

그가 말했다. 응, 너도. 라고 말하려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건 내 마음이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착한 여자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 자신이 싫을 것 같았다.  219


"그래, 정말로 달렸어. 그것밖엔 할 수가 없었거든. 말로 분명하게 설명을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먼 길을 돌아오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지만 계속 달렸기 때문에 그때 네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게 되었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넌 혼자서 달렸다는 걸... 난 그때 너와 함게 달렸어야 했다. 난 너에 대해 뭐든 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알지 못했던 거야. 내가 생각이 모자랐어. 미안해. 내가 나빴다... 내가 나빴어. 널 외롭게 해서."  235



지은이 후기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사람이라는 이야기고 살아 있다는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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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날리는 인도 여행을 한 뒤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37


무굴제국 샤자한 왕의 두 번째 아내 '뭄타지(Mumtaz, 일명 아르마주드)'를 위한 무덤이었지만, 무덤 이상의 의미를 담아 '궁전'이라고 표현한다. 인도 사람들은 타지마할을 종교의 성전으로 여기기도 한다.

샤자한 왕은 아내를 잃고 하룻밤 사이에 머리카락이 백발이 될 정도로 슬픔에 잠겼다고 한다.  53-54


인류가 남긴 가장 완벽한 '균형과 대칭의 조화'를 이룬 건축물 타지마할. 무덤 중앙에 서면 온 우주가 그곳으로부터 시작되고 그곳은 온 우주의 중심이 된다.

이 무덤 궁전은 음력 보름 만월(滿月)아래서 보면 대리석 안에 조성된 꽃들이 붉게 피어난다고 한다.  55


갠지스 강은 죽음에 대해 초연함과 비장감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바라나시 갠지스 강으로 향하는 길은 미로(迷路)의 연속이다. 처음 온 여행객은 좁은 길을 이리저리 헤매는 것이 다반사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다 보면 마치 쥐가 미로를 뱅뱅 돌아다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도대체 언제 가트가 나올까 조바심까지 난다. 그렇지만 가트까지는 먼 길이 아니다. 계속 따라 들어가다 보면 갠지스 강에 접해 있는 가트가 불쑥 나타난다.  59


인도 여행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여름철에만 여행길이 열리는 라다크를 돌아보는 일이었다. 세계에서 고도가 가장 높은 지역 중 한곳인 라다크는 티베트 불교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작은 티베트'로 불린다. '곰파'라고 불리는 사원과 불탑 '쵸르텐'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여기에 '탕카'로 불리는 불화도 살펴볼 작정이었다.

또 다른 목적은 불자로서 불교의 발상지를 직접 발로 밟고 성지를 순례해볼 심산이었다. 인도에 가기 전 수많은 로드맵을 그리면서 어떻게 갈까하는 즐거운 고민에 빠졌다. 북부 인도를 순례하고 돌아오는 나머지 시간, 즉 자유 여행 시간에 불교 성지를 순례하기로 마음먹었다.

또 한 가지는 우리보다 30배나 넓은 '인도'라는 나라의 정신적인 영역의 깊이를 느껴보고 싶었다. 예를 들면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에서 기도하는 힌두교도들도 만나보고 싶고, 숲에서 수행하는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사두의 정신 세계는 어떠한지도 알고 싶었다.  202


인도 배낭 여행은 누차 말했지만 순탄하지가 않다. 그렇다고 아주 위험한 것도 아니다.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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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의 웃음판

저자
정민 지음
출판사
사계절 | 2005-05-18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정민 교수가 한시에 나타난 네 계절의 정취를 유려한 문체로 엮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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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 기록 보기


한시로 읽는 사계절의 시정..
한시... 
학교다닐때나 보는 책이라 생각하였다.
그 당시 한시는 참 싫은 부분중의 하나였다. 
'내가 과연 이 책을 읽어 낼 수 있을까?' 생각하였다.
시작은 반신반의 하였으나.. 아주 재밌게 읽었다.
매우 재밌게 읽었다.. 아니 한시가 내 마음에서 느껴졌다고 할면 더 적절한 표현일까... 
내가 한시에게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었다 표현하는 것이 맞을까.. 
느낌이 달랐다.
공부를 하면서 일이되었을때는 느낌이란것이 존재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편하게 감정이 잡혔다...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낭속을 하고 있고, 감탄사를 자아내고 있었다.

평상시 감정이 메말랐다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인 내가 이 정도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참 새롭고도 즐거운 책 읽기 였다.
그 한시에 정민 교수의 해설까지 덧붙여져 있으니, 더욱 이해력을 풍부하게 해주었고, 더 깊이 감정이입을 해 볼 수 있었다.
감저이 북받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이 책을 읽고 '뭐 그정도까지는 아니다'라고 말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지극히 개인적으로 그만큼 좋았다.

속도의 전쟁에서 살아가는 현실에서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것에 영향을 받고 따라가고 있다.
매우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얻은것 보다더 큰 것들을 잃어버렸다.
그 중에 '여유, 풍류, 생각, 사유'..
이러한 것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쫓아가는것에서가 아니라 한 발정도는 떨어져 있어야 가능한 것들이다.

얼마전 윤종신씨가 '놀러와'라는 프로그램에서 한 말이 있다.
지금의 노래는 매체들의 속도에 따라 '추억'을 잃었다고 말하였다.
'예전에는 한 곡이 꽤나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가면서 노래에 얽히는 추억들과 기억들이 남아 있는데.. 지금은 금방 나와서 대체되다 보니 추억을 가지고 향수를 가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사회의 조종이든 아니든 .. 속도에 따라 가고 있다.
그러면서 '생각'을 잃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나에게 그것에서 한 발 물러서 풍류를 가져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한 해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참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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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표류

저자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출판사
예문 | 2005-03-0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일본의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가 직접 만나 취재한 11인의 ...
가격비교


한날 저자의 책을 모두 검색하여 훑어보았다. 그러면서 먼저 볼 책을 선별하여 정리해 두었다.

그러고 얼마후 우연하게도 저자의 책 세 권이 수중에 들어왔다. 

이 책은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러면서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란 책의 제목이 떠올랐다.


저자는 젊은 사람들을 가볍고 대세에 순응적이고 적당주의적인 모습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일 년여 동안 11명의 젊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좋아하는 일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걱정이 기우였다고 하였다. 

물론 저자가 만난 사람들은 세상의 성공에 초점을 두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어쩌면 지금의 세상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 독특한 1%의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다수의 젊은 사람들은 이들과는 정 반대의 삶을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결국 이 책은 그런 방황하는 청춘들에게 대세순응적인 삶이 자신의 삶이라 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의 설 자리를 찾아보자는 의도일 것이다.


청춘의 시작은 대충 감이온다. 하지만 청춘의 끝은 어디쯤일까?

저자는 그것의 정의가 어렵다고 하면서도 조심스럽게 30대까지로 정의내린다. 공자의 표현을 빌려 '40에 들어서는 불혹'즉 미혹되지 않는 나이라는 것이다.


백세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현대에 40대도 청춘이 아닐까.. 굳이 미혹되지 안는다고 청춘이 아니라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다. 

어쩌면 청춘의 범주를 긋는 것이 무의미 할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표현을 빌어 보자면 '망설임과 방황은 청춘의 특징이자 특권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회한은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인생을 살아가지 못할 때 생긴다.'

그렇다. 망설임은 언제나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 보고 싶은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삶이 가장 큰 회한이라는 말처럼 청춘이라는 표현의 정의보다는 자신의 삶을 꾸려나감에 있어서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생각해 보는 삶이 더 중요할 것이다.


저자의 표현중에 '수수께끼의 공백시대'이 있다.

청춘이란 언젠가는 오게될 출범을 준비해 놓는 시간이란 것이다. 즉 '하려는 의지'가 필요한 시기이다.


이런 관점에서 지금 나는 출범을 준비하는 청춘인지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된다.


인터뷰에 나온 청춘들의 공통점은 저자의 표현으로는  '내가 만난 이들은 이상하게도 모두 열등생들이었다.'이다.

그에 더해 내가 드는 공통점은 그들은 모두 열악한 조건을 열악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가 알아주건 아니건 상관하지 않았기에 열악한 조건을 가지고 그에 맞추어 살아가면서 경험을 축적하고 체화해 나갔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신이 하려고 했든 하지 않았든 관계없이 그들 자신의 열정을 믿고 나아갔다는 점이다. 

자신이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무언가를 할때 가장 크게 작용하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지금의 나는 30대이다. 

내가 하는 것에 확신을 가지지만 문득문득 불안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불학실한 미래이기에 불안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이들도 분명 그러한 생각들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을 믿고 나아갔다는 사실은 분명 우리가 깊게 생각해야 할 부면이라 생각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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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FLOW미치도록행복한나를만난다
카테고리 인문 > 심리학
지은이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한울림,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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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센트 미하이 박사의 '몰입' 그는 제목으로 Flow 라 하였다..
즉 물흐르듯이 흐르다... 흐름... 
진정한 몰입은 말 그대로 흐름을 가지고 유지하는 것이라는 말과 일맥 상통한 듯 하다.
그의 표현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책을 읽으며 정리해 놓은 내용(아래내용)을 프린트하여 다이어리에 끼워 한 번씩 내용을 읽고자 노력한다. 
스스로 마음을 잡아가는 것이 어렵거나 할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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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사랑일까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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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3부작 소설이라 불리는 책의 두 번째이다.
이 책 역시 원제와 번역서의 제목은 다르다. 하지만 이 책은 잘 어울리기도 한다.
원제의 뜻을 내용에 맞춰 생각해 보면 '낭만적인 사람의 행동 또는 움직임'이라고 하면 좋을까..

번역자의 제목이 3부작 중에서는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이 든다.
나머지 두 책의 번역자와 이 책의 번역자는 다르다.
개인적으론 3부작 중에 이 책의 번역이 소설적인 성향이 강하게 가미되어 보기에는 좋았다.

원서를 보지 않았기에 누가 잘 번역했다는 말은 할 수 없지만(그런 능력도 안되지만), 이 책은 소설책같은 형식이었다. 다른 두 책은 소설형식을 지닌 에세이이다. 
실제 원제를 보면 에세이와 비밀폭로하는 제목이다. 

아무튼 이 책은 소설의 형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되면서 저자 특유의 지적인 면을 발휘하고 있다.
재밌게 빠져들고 생각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을까?
현재의 사랑은 마지막 사랑을 통해 나온다는 표현처럼 우리는 늘 사랑을 통해 배워나가고 더불어 벽을 높이 쌓아가며 자기 방어를 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영원히 통하기 어려운 존재일 뿐인지 아니면 대화와 타협으로 애정을 쌓아가는 존재인지는 개개인의 사랑에 대한 생각에 따라 다를 것이다.

책은 광고회사를 다니는 사회 초년생 앨리스가 파티에서 만난 에릭과의 관계를 통해 그들이 겪어가면서 길들여져가고 회피하기도 하고 배워가기도 하고 알아 가기도 하는 장면들을 보며, 우리도 경험했던 또는 경험할 만한 점들에 대해 공감할 수 있었다. 특히 저자는 남자와 여자의 심리상태와 인식 차이, 의사소통 방식의 차이, 성장 한경에 따른 문화의 차이등을 제 삼자의 방식으로 전개해 나가며, 저자 특유의 방식인 철학과 인용등을 통해 해설해 나가고 있다.
남자인 저자가 어찌 이리도 양쪽 성의 심리를 꾀뚫어 나갈 수 있는지 매우 놀라웠다. 그에더해서 여자의 심리적인 상태와 상황에 대한 마음을 깨달아가는 시간도 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개인적인 경험들을 떠올리고 지금의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알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 또한 즐거운 시간이었다.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늘 느끼는 것은 상대를 인정해 나갈 수 있는 나의 역량을 돌아보는 것이다.
심리학자의 표현에 따르면 '남녀가 부부로 살아가면서 딱 맞는 부면은 많아도 14%에 그친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는 다른 구조이고, 다른 환경이고, 다른 가치관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생각하는 큰 부면 중에 하나는 상대를 인정해 나가는 것이다.
이게 말처럼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혼이란 단어는 매우 어색한 단어일 것이고, 이혼한 커플은 분명 뉴스의 사회면을 장식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너무너무 어려운 것이다. 
누구나 공감하리라 생각을 해본다.

과연 자신의 사랑은 어떠한 스타일인지 책을 통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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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사람들의 입에서는 대뜸 '몽상가'란 말이 나왔다.
앨리스는 '관계'라는, 의사 불소통의 우스운 연속을 익히 잘 알면서도, 인정할 수 없을 정도로 열정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살아왔다. 식품점 통로에서 이걸 살까 저걸 살까 망설일 때, 통근 열차에서 신문 부고 난을 훑어보는 순간, 청구서 봉투에 붗이려고 달착지근하면서도 쌉싸래한 우표에 침을 바를 때와 같은 뜻하지 않은 순간에 자신의 반쪽을 만나리라는 생각을 유치하지만 고집스럽게 잃지 않았다.  7
앨리스는 사랑을 실용적인 의미로 생각하기 싫었다.  8

세상의 현상[아기가 태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개구리가 알을 낳고, 화산이 분출하고, 정치가들이 거짓말하고]이 만드는 이질적인 거품과 직면해서, 철학자들은 실재하는 물질이냐 정신이냐 선택하도록 끝없이, 물론 매번 독특하게, 권유했다. 
탈레스의 경우 실재는 만물의 근원이며 물질의 기본 원소인 물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헤라클레잍스는 실재의 본질이 불에 있다고 했다. 플라톤은 이성에,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에, 홉스는 운동에, 헤겔은 정신의 진보에, 쇼펜하우어는 의지에, 보바리 부인은 사랑에, 마르크스는 해방을 향한 계급투쟁에...  18
앨리스는 실재에 대한 보바리 부인의 판단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오직 사랑할 때에만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선언할 수도 있었다.  19

남자가 시간과 공을 들여서 키스하는 것, 남자가 에로틱하고 대단히 섬세하게 입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을 앨리스는 높이 평가했다.  25
행복에 이르는 길에는 갈등이 많다. 계급 차이와 나이 차를 뛰어넘어야 하고, 여자의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은 이들 사이를 반대한다.  40

그 남자의 매력에는 위기도 비켜 가는 듯 보였다. 전형적으로 유혹적인 이탈리아 남자처럼 굴었다. 그 남자는 욕망을 숨기지 않았고, 거절당할 가능성이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서투르고 모호하게 사랑을 속삭이느라 평생을 허비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조용히 자살하고 마는, 창백한 북구 남자들[베르테르 같은]의 접근 방식과는 대조되는 현란함이었다.
하지만 에릭이 자신의 의도를 인정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그 효과도 알 것이었다.
"좋아요,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요."
그 남자가 선수를 쳤다.
"지금 이 시간을 즐기며 웃음을 터뜨리지만. 나를 믿어도 될지 몰라서 신경이 쓰이지요? 당신은 이렇게 생각해요. '이 남자가 진짜 괜찮은 거야, 아님 형편없는 자식이야? 몽땅 다 농담이야, 아님 진지한 구석이 있는거야?' 어떻게 대응할지 모르겠죠. 다 농담이라면 상관할 바 없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장난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죠. 유혹하는 남자를 믿느냐 마느냐는 여성들의 영원한 고민이지요. 남자를 믿지 못한 채 좋아할 수도 있지만, 또 상처받는 것은 피하고 싶을 테구요."  60

"당신은 아마 나 같은 사람은 몹시 의심하겠지요."
에릭이 말했다.
"어째서죠?"
"지금껏 상처를 받았으니까."
"꼭 그렇지도 않아요."
"그랬을 걸요. 당신이 고민을 가볍게 치부하는 것뿐이죠. 아무도 당신의 상처를 진지하게 받아주지 않아서 그랬을 거예요. 당신은 다른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많이 느끼고, 깊게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보호막을 만들어야 했을 테구요. 그러느라 힘이 많이 들지요. 잔뜩 긴장하고 있기 때문에 어깨를 그렇게 움츠리고 있는 거예요."  61
점성술이나 그 밖에 개인의 운명을 예언하는 방법들이 오래전부터 인기 있었던 것을 보면, 이해받고픈 욕구가 사람을 과연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덮어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군가 자기를 알아준다고 믿고 싶어하고, 자신에 대한 권위적인 설명을 들으면 녹아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62

타인과 사랑을 나누는 일은 어찌 보면 과거에 같이 잔 사람들의 습관이나 기억과 충돌하는 것이다. 사랑을 나누는 방식에는 우리의 성생할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키스는 과거에 했던 키스들의 종합형이고, 침실에서 하는 행위에는 과거 거쳤던 침실의 흔적이 넘쳐난다.  65
순전히 기술적인 관점에서는 성생활의 역사가 있는 편이 바람직하겠지만, 심리적으로 그것은 복잡 미묘한 영향을 미쳤다. 성생활 역사가 있다는 것은 여러 사람과 성행위를 했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잠자리를 같이한 사람을 차거나 그 사람에게 채였다는 뜻이었다. 좀 어두운 면에서 보자면 섹스 기교의 역사는 실망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66

사랑하는 것일 리가 없다면, 그녀는 아마 사랑을 사랑한 것이다.
이 동어 반복적인 묘한 감정은 무엇인가? 이것은 거울에 비친 사랑이다. 감정을 자아내는 애정의 대상보다는 감정적인 열정에서 더 많은 쾌감을 도출하는 것을 뜻한다.
사랑을 사랑하는 연인은 단순히 X가 멋지다고 여기지 않고, 'X처럼 멋진 사람을 찾아냈다니 대단하지 않아?' 하는 생각을 먼저 한다. 에릭이 배터시 다리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고 구두끈을 맬 때, 앨리스는 '구두끈을 매는 모습이 귀엽잖아?'라는 생각과 함께 '이렇게 귀엽게 구두끈을 매는 사람을 찾아내다니 이게 꿈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했다.  74


1856년,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르뷔 드 파리(Revue de Paris)>에 <보바리 부인>을 연재하면서 세계 최초로 '섹스와 쇼핑 소설' 작가라는 이름을 얻었다. 적어도 <보바리 부인>이 섹스와 쇼핑이라는 두 가지 활동을 명확하고 심리학적으로 결합해서 그린 첫 번째 소설임은 분명하다. 당시의 대중은 에마의 간통에 충격을 받았지만, 그녀의 몰락은 유행하는 의상을 구입하는 데 중독되어 큰 빚을 진 것과 관계가 깊다. 보바리 부인에게 돈을 쓰는 일은 덧문 달린 마차를 탈 때와 같은 위험이 깔린 선정적인 행위였고, 똑같은 쾌감을 주는 일이었다.
플로베르는 섹스와 쇼핑을 인정했을까? '보바리는 바로 나'라고 한 그의 말은 낭만적인 기질에 대한 공감뿐 아니라 소비의 유혹에 대한 깊은 이해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을까? 
산업 자본주의가 진행되던 바로 그 시기에, 보바리 부인이 상업적이고 성적인 오르가슴 때문에 파멸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는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이 칭하는 소비 혁명이 등장하던 때였고, 19세기의 청교도주의가 여성의 자유를 향한 진보적 발전을 방해하던 때였다. 이 소설에 대한 판금 조치는 단순히 성뿐 아니라 쇼핑을 근본적으로 억압하려는 도덕주의적인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이윽고 출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성교를 반대하는 주장은 종교적인 위력을 잃기 시작했고, 필요 없는 소비에 반대하는 주장은 한층 열기를 띠었다. [<보바리 부인>이 발표된 지 겨우 11년 후인 1867년에 마르크스의 <자본>이 나왔다.] 필요 없는 쇼핑에 대한 도덕적인 공격과 출산 없는 성교에 대한 도덕적인 공격 사이에는 뚜렷한 연관이 있다. - 두 가지 다 쾌락을 검열당해왔으며, 특히 모자르 쓰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남자들이 여성의 쾌감을 겸열했다.  100-101
앨리스의 욕망을 끌어내는 견인차는 매달 보는 수많은 잡지인 듯했다. 
그녀는 "잡지 속으로 사라지고 싶다."는 농담을 자주 하여, '자신의 세계가 잡지화'하기를 바라는, 가치 전도된 소망을 표명했다.  101
잡지는 앨리스를 불행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녀는 의상 난을 보면 자신의 옷장에는 없는 옷 때문에 서글펐고, 여가 난을 보면 자신이 가보지 못한 세계 곳곳의 햇살 눈부신 장소들이 떠올랐다.  102
그녀는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확신하지 못했고, 자연히 외부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햇다. 카디건을 사려고 한 것은 혼란스러운 자신을 기왕에 존재하는 스타일에 맞추려 한 시도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제공하는 상(像)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 했다. 그것은 고상하고돈이 많이 드는 흉내 내기였고, 잠재적으로 무한한 특성을 몇 가지 핵심 사조로 축소하는 일이었다. 그러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행태에 안주할 수 있었으니까.  104

그녀의 자신감은 늘 확인을 받아야만 자라는. 불안전한 구조였다-원하는 걸 얻거나, 누군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 자신과 타인에 대한 믿음을 쌓을 수 있었다.  114
"아니면 중국 음식을 먹고 싶어요? 물론 카레도 먹을 수 있어요. 어떡할래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겠지만, 그녀는 문득 에릭에게 "나 좀 안아줘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피자나 카레, 국수는 그만두고 [매우 이성적이지 않지만] '슬퍼서'라거나 하는 이유를 설명할 필요 없이 그냥 울고 싶었다. 허약해진 기분이 엄습해서, 세상의 요구에 적절한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무너질 수 있는 공간을 바랐다. 다시 마음을 수습할 때까지 누군가의 품에 조용히 안기고 싶었다.
"어. 저기 있죠, 못 먹겠어요. 아무것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아무 말 안 해도, 그 남자가 바라보면서 "그래요, 알아요."라고 속삭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115

에릭이 동양에 대해 말할 때 입에 올리는 단어가 가벼움, 질서, 정연함, 깔끔함, 여백들이었다.
"세상은 너무 번잡하고 복잡해요. 내가 동양의 미학을 좋아하는 것은 그 여백, 그리고 일종의 합리성 때문 같아요. 어지러운 사무실에서 집에 돌아오면 오아시스에 있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아파트를 그렇게 꾸몄어요..."  121


그 남자는 삶을 기능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인생도 아파트처럼 잘 배열되기를 바랐다- 사교 생활, 재정 문제, 연애와 섹스가 모두 조화롭고 합리적이기를 원했다.
그 남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잘 정돈된 상태인 것 같지만, 사실 남보다 더 무질서를 두려워하고 의식한다고 볼 수 있었다.  123
그녀는 실내 장식에 대해 기능보다는 감정을 주요시했기에, 물건의 가치도 얼마나 제 기능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기억이 담겨 있느냐로 판단했다. 
하트 모양 쿠션은 부모가 이혼하기 전 마지막으로 가족 여행을 갔을 때 아버지에게서 받은 선물이었다. 그때의 이탈리아 여행을 앨리스는 정겨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127
에릭은 여러 면에서 어른스러웠지만, 아이들이 부모에게 기대하는 것-곧 완전무결함-을 타인이게 기대한다는 점에서는 이상하게 어린아이 같았다. 그 남자는 자기 능력으로 타인의 약점을 보완해주지 못했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식의 잘못을 용서하는 부모와 같은 태도를 취할 줄 몰랐다.  130
에릭은 강화 숲에서 벌거벗은 채 뛰노는 것을 좋아할지는 몰라도, 감정의 벌거숭이가 되는 상황에서는 매우 다급하게 상징적인 '가운'을 찾아 헤맸다. 
자아는 육체에 갇혀 있으므로, 감정의 수줍음을 알아보고 옷을 벗기는데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감정을 잘 벗지 못하는 살마은 옷을 잘 벗지 못하는 사람만큼 많지만.  135
우리는 건축가들을 낭만파와 지성파로 나눌 수 있다. 지성파 건축가는 건물의 무게를 여러 기둥[많을수록 좋다]에 분산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삼아, 사고가 나더라도 다른 기둥들이 무너진 기둥의 몫을 나누어 지도록 한다.


그 남자에게는 개입하기를 꺼리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느끼는 게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가 함께 무엇을 하고 있나?' '다음 주말에 우리는 무엇을 할까?' 라고 자문하고 관계 속의 자기 위치를 받아들이는 것을 망설였다.  138
그 남자는 앨리스의 관심을 끌고 싶을 때는 감기나 독감에 걸렸다거나 등이 아파 죽겠다고 말했다. 이런 행동 뒤에 있을지 모르는 진짜 아픔을 인정하기보다는 그쪽이 편했다.  140
경제의 세계에서는 빚이 나쁜 것이지만, 우정과 사랑의 세계는 괴팍하게도 잘 관리한 빚에 의지한다. 재무 정책으로는 우수한 것이 사랑의 정책으로서는 나쁠 수가 있다-사랑이란 일부분은 빋을 지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뭔가를 빚지는 데 따른 불확실성을 견디고, 상대를 믿고 언제 어떻게 빚을 갚도록 명할 수 있는 권한을 넘겨주는 일이다.  143-144

"만난 지 얼마나 됐는데?"
"이런 세상에, 벌써 몇 달이나 되었네. 6개월쯤 됐나봐."
"섹시해?"
"응, 그런 것 같아."
"어떤 사람이야?"
"어떤 사람이냐고?"
"그래, 알잖아."
"사실은 모르겠어."
"모르다니 무슨 말이야? 너 그남자랑 사귀잖아."
"글쎄, 그이는 .....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그 사람은 ..... 그 사람은 좀 이상해."
앨리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예상치 않게 이상하다는 말이 흘러나온 데에 웃음을 터뜨렸다.  145-146
에릭은 내놓고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을 나폴레옹처럼 생각하지도 않았고, 샤워 캡을 쓰고 잠자리에 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행동에 왠지 묘한 구석이 있어서, 앨리스는 그 남자의 반응을 예상할 수가 없었다.
타인을 상대할 때, 대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반응을 예상하고 행동한다. 
'내가 X라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이 사람은 Y라는 반응을 보이겠지'라는 전제하에 움직이는 행동의 틀이다. 이 틀이 웬만큼 복잡한 상황까지 아우를 수있을 만큼 풍성해지면, 우리는 누군가를 안다고 다소 가설적인 주장을 할 수 있게 된다.  146
그녀는 줄곧 그 남자의 특성을 지도로 그렸고, 그 남자의 성격에 지각 변동이 일어날 때마다 그려온 지도들을 재검토해야 했다. 그녀가 이런 혼란상을 최선의 경우로 해석하려고 애쓰는 의지 내지 힘이 바로 사랑의 증거였다.  151
그 남자는 멀리서는 잘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백만 개나 되는 파편으로 나뉘어 있었다.  154

어떤 사람이 비서한테는 친절하지만 배우자에게는 야수처럼 굴 수 있고, 수학은 잘하지만 감정 처리에는 무능하며, 수플레는 잘 만들지만 양고기에는 젬병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야생동물 보호 모임에 가입하여 사회적인 책임감을 덜면서도, 히틀러가 어린이와 동물을 사랑했다는 말은 듣기 싫어한다. <백설공주>를 보면서 우는 자신을 감수성이 예민하다고 여기지만, 독재자 이디 아민이 그 영화를 제일 좋아했다는 말은 싫다. 독일 문학을 좋아하면서도, 연합군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해방하러 들어갔을 때 독일 친위대 장교들의 소지품에 괴테의 책들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편치 않다. 단지 <시와 진실>에 나오는 구절에 감명 받았다는 이유로자신은 대량 학살범이 될 잠재성을 벗어버렸다고 생각하는 편이 유쾌하지 않은가?  155-156
'에릭이 진짜 성미 고약한 자식이라면, 자기 입으로 그렇다고 말하겠어?' 그녀는, 자기 결점을 아는 것은 그 결점이 없는 것과 같다고 믿는 오류를 범했다. '진짜 나쁜 사람이라면 자기가 나쁜 사람인 줄 모를 거야. 에릭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면 정말 그런 사람일 리가 없잖아?'
남들이 싫어할 만한 점을 어느정도 자각하기 때문에 쉽게 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비판함으로써 외부의 공격을 대부분 피할 줄 안다.  160
러시아 심리학자 파블로프 반응하도록 훈련하던 신호에 충분한 혼란을 주면 개가 몸을 떨고 대소변을 보면서 신경증 상태에 빠질 수 있음을 밝혔다. 종을 울리고 먹이를 주다가 갑자기 종을 울리고 빈 접시를 주면, 개는 몇 번 같은 경험을 한 끝에 빈 접시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종이 울리고 나서 때로는 먹이가 나오고 때로는 안 나오는 식으로 불규칙하게 진행되면, 개는 이제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알 수 없게 되고, 음식과 빈 접시의 연관선을 파악할 수 없어 혼란에 빠진다. 개는 천천히 관견 상태에 빠져들었다.  161

사랑의 영속성 시나리오는 현수교에 비유할 수도 있다. 다릿 기둥은 사랑의 확인을 상징하고, 냉잠한 기간은 기둥 사이에 몇 미터씩 늘어진 케이블이다. 머리에 하는 키스, 애정 어린 눈길은 다릿기둥이고, 말 없는 식사, 응답 없는 전화는 기둥 사이의 케이블이다. 
사람마다 확인이 필요한 정도가 다르고, 따라서 애인 관계에 개입된 케이블의 길이도 각각 다르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167


케이블이 얼마나 길게 늘어질 수 있느냐는, 애인의 성격과 내력에 좌우될 터이다. 자기가 사랑스럽게 타고났다고 생각하면 확인이 필요하지 않을 테고, 상대의 기둥 없이도 케이블을 수백미터 늘어뜨릴 수 있다. 나는 나를 사랑해가 부족함을 벌충하므로 당신을 사랑해란 말이 덜 필요하다. 당신이 왜 날 사랑하지 않겠어?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의 기본 태도다. 내가 나한테 느끼는 감정을 당신이라고 못 느끼겠어?
하지만 앨리스의 경우, 기둥이 훨씬 촘촘히 박혀야 했다. 그녀의 기본 감정은 항상 '당신이 어떻게 날 사랑할 수 있겠어?'였기 때문이다.  168

사랑의 권력은 아무것도 주지 않을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176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177

에릭은 책을 많이 읽긴 하지만, 그 동기가 호기심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남자는 세상사를 알고자 함이 아니라, 세상사와 부대끼는 것을 피하고자 책을 읽었으니까, 그 남자는 겁이 나면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과 관계된 책은 외면하는 식으로, 현실과 맥이 닿는 것을 피했다.  242
책은 피와 살이 있는 사람처럼 직접 말을 걸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말을 걸어주는' 듯한 책에 익숙하다.  243

흔히 아픔과 고민이 생각을 하게 만든다고 한다. 예컨대 우리는 탁자 다리에 발가락을 찧으면 비로소 발가락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발가락이든 더 큰일이든 문제가 생기거나 아플 때에만 따로 생각하게 된다. 심리 과정을 그려보면 이렇다.


쉽게 말하면 앞의 것은 지성인의 주장이고, 뒤의 것은 자연주의자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햄릿은 문제가 생겼기에 그렇게 생각이 많았는가? 아니면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문제가 생겼는가?
지성인들은 햄릿의 생각이 문제를 일으킨 게 아니라 문제에 생각이 비롯되었다고 대답할 터이다.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책이라는 맹신-'생각이 모든 것을 위로한다'는 샹포르의 금언에 대한 믿음-을 두러내는 주장이다.
한편 자연주의자라면, 생각은 문제를 해결할 방책인 체하지만 실은 그것이 바로 문제를 일으키는 질병이라고 볼 터이다. 생각은 심리적인 우울증의 한 형태였다-햄릿은 고통스럽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고통을 느꼈다. 자연주의자라면 그에게 정신 활동을 극소화해야만, 이성이 망가뜨린 자연스런 단숨함과 편안함을 되찾을 수 있다고 충고할 터였다.  267-268
에릭의 정서적 자연주의는 상식주의의 일종으로 낮춰 볼 수도 있다. 그것은 단순함을 지혜의 핵심으로, 진리는 '당연하기에' 분석할 수 없는 것으로 축소하는 경향이다. '삽을 삽이라고 한다'는 기치하에 상식주의자들은 정원용 연장 전체를 삽이라고 불렀다. 그것들을 다 구별하려면 품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간단명료화'라는 이름을 단 축소화였다. 
왜 전쟁이 일어나고, 왜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거나 빠져나오는지, 왜 그렇게 복잡한 일들이 매일 되풀이되는지 물으면, 상식주의자들은 단순히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기 땜누이라고 답할 것이다. 상식주의에서는 복잡성이 아니라 과도한 단순함과 순전한 명백함을 바탕으로, '사유 너머'의 영역을 표시한다. 에릭은 앨리스와 대화하고 싶지 않으면, 둘 사이의 문제가 너무 복잡해서가 아니라 너무 뻔한 일이라서 숨 돌릴 가치도 없다고 자신에게 둘러댔다. 
눈에 보이게 굶주리고, 집이 없거나 한쪽 다리를 잃은 게 아니라면, 다른 고민은 본인이 지어낸 것이며 따라서 따지고 들 가치가 없다는 게 인간 심리에 대한 그 남자의 관점이었다. 바베이도스에 도착한 다음 날, 앨리스가 읽는 책을 가리켜 그 남자가 '자기관찰을 빙자한 제멋대로 개똥철학'이라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이 휴가 중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묘한 것은, 에릭이 그녀의 독서 취향을 비난한 까닭은 잘난 척하는 문체와 단순하기 짝이 없는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책이 지나친 쾌락, 용납할 수 없는 쾌락의 일종으로서 다양한 자아도취를 유도하기 대문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스쿠버 다이빙니나 피냐 콜라다를 마시는 일은 제멋대로인 자기 관찰과 관계가 없을까? 그것은 자아도취적으로 자신을 즐기는 일이고, 자위행위[늘 떳떳하지 못한 성교의 사촌뻘]의 한 형태이고, 자신에 대한 종교적인 경멸을 고대로부터 내포하고 있었다[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을 구분하면서, 두 가지 사랑이 두 도시를 만들엇다고 주장했다. '자기에 대한 사랑으로 신을 경멸하는 것은 지상의 도시, 신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경멸하는 것은 천상의 도시.'-자아도취가 결여된 '나는 가증스럽다'라는 문구를 쓰면서 파스칼이 차용한 주제].  270-271

여자들은 까탈을 부리도록 타고났다는 오랜 통념에 근거하여, 여자가 까탈을 부리는 원인을 제공하는 남자들은 면죄부를 얻었다.  274

여행은 흥미롭게도 지리적이라기보다 심리적인 활동으로 읽을 수 있다-외적인 여정은 내적으로 욕망하는 여정의 은유다. 네팔에서 히말라야를 오르고, 카리브 해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고, 로키 산맥에서 스키를 타고, 오스츠레일리아에서 파도타기하고, 이러한 것들은 이국적이고 유익하지만, 훨씬 심오한 동기를 가리는 시시한 변명에 불과하다. 그 동기란 여행을 예약하는 자신이 이런 활동을 즐기는,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다. 여행사는 비행기 표와 호텔 방 예약, 보험 가입 같은 사소한 일을 처리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드르이 기본 업무는 여행 상품을 사면 기적처럼 자신을 남겨두고 떠나게 되리라는 미묘한 환상에 근거한다. '나'가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여행이 '나'를 바꿔주리라는 생각이다.  288-289

리넨 드레스를 산 일이나 카리브 해에서 휴가를 보내는 일이나, 앨리스는 고전적인 소비의 덫에 걸린 것이었다.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는 행위에 무의식적으로 깔린 목적은 단순히 그것을 가지는 게 아니라,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스스로 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녀가 어렵게 번 80파운드를 드레스와 수영복에 쏟아 부으면서 원했던 것은 꼴같잖게 비싼 옷이 아니었다. 냉소적이고 재능 없는 디자이너가 만들고 패션 잡지가 과대 선전해준 옷이 아니라, 손에 잡히지 않는, 그걸 입은 사람의 존재였다 - 우스운 소리로 들리겠지만, 그녀가 원했던 것은 모델이 입은 옷이 아니라 모델 자체였다.  292-293
그리스어로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뜻이다.  293

누구와 사귈 때, 사람만 달랑 올 수가 없다 -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문화가 따라오고, 관계를 맺은 사람들과 관습이 따라온다. 특정한 지역성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가 함께 온다. 이러한 성향은 민족성으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계층과 지역과집안의 특성이 뒤섞여 구성된다. 본인은 이 무의식적인 요소들의 집합을 정상 상태로 여긴ㄷ. 그가 보는 번화가나 우체국 창구의 정상적인 풍경, 정상적인 저녁 뉴스와 세금 환급 신청서 양식, 친구와 인사하고 침구를 펴고 버터 빵을 먹고 집안을 청소하고 가구를 고르고 음식을 주문하고 차 안에 카세트를 배열하고 화장실을 사용하고 여행지를 결정하고 전화를 끊고 토요일 계획을 짜는 정상적인 방식들.  298

비트겐슈타인(오스트리아 태생인 영국 철학자)의 주장을 빌리면, 타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 우리는 상대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그들이 우리의 농담을 이해하면 우리는 재미난 사람이 되고, 그들의 지성에 의해 우리는 지성 잇는 사람이 된다. 그드르이 너그러움이 우리를 너그럽게 하고, 그들의 모순이 우리를 모순되게 한다. 개성이란 읽는 이와 쓰는 이 양쪽이 다 필요한 언어와 같다.  318
관계의 기반은 상대방의 특성이 아니라, 그런 특성이 우리의 자아상에 미치는 영향에 있다-우리에게 적당한 자아상을 반사 해주는 상대방의 능력에 기초해서. 에릭은 앨리스에게 어떻게 느끼게 하는가? 어떻게 그것을 알려주는가? 모든 게 머릿속 생각일 뿐인지 실제로도 그런지 모르지만, 그녀는 오래전부터 그 남자와 있으면 가치 없는 사람이 된 기분을 느꼈다. 그 남자와 함께 있는 앨리스는 돈을 함부로 쓰고, 지성적이지 않고, 감정적인 데 매달리고, 타인을 귀찮게 하는 의타심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었다.  319

"많은 사람이 단지 혼자 있기 두려워서 결혼하는 것 같아요."  323
대화의 흐름을 나무의 형태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서 가지가 매우 다르게 뻗어갈 수 있다.  325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라메트리(1709~1751)가 1748년 자서 <인간기계론>을 출판하자 교육받은 대중은 분노했다. 라메트리는 인간은 실제로는 복잡한 기계일 뿐이라고 야만스럽게 [당시는 아직 종교적인 시대였으니] 주장했다. 출입문, 배수로, 톱니, 도관, 원자 등드의 집합체 이상 아니라는 것이었다-파충류나 아메바, 항해용 정밀시계가 그렇듯이.
'인간은 기계이며, 전 우주는 다양하게 변형되는 단 한 가지 재료로 되어 있다.'라고 라메트리는 주장했다. 물론 이 재료는 초라한 물질이다. 이것은 이원론에 대한 도전이었다. 인간은 물체와 영호으로 구성된다는 이원론은 플라톤 이후 별다른 이견없이 군림해왔다. 어느 부분이 더 중요한지는 명백했다. 인간에게 생명과 존엄성을 부여하는 것은 영혼이었다. 영혼이 없다면 인간은 단순한 기계가 되어, 주주 총회에서 치명적인 심장 발작을 일으킬 경우 영원한 죽음을 맞을 터였다. 
그러면 이 영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1969년 처음으로 인간을 태우고 달에 착륙한 로켓의 꼭대기에 달린 우주선과 같았다. 우주선은 거대한 아폴로 2호의 세 부분 중 한 부분에 불과했다. 아폴로의 총 길이는 111미터였지만, 8일간의 임무 수행을 마치고 우주 비행사들이 귀환했을 때는 로켓의 꼭대기 부부느 곧 높이가 3미터 조금 넘는, 작은 원뿔만 가지고 왔다. 나머지 부분은 우주 비행사들을 궤도로 쏘아 올리는 기능을 했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활동성이 있는 부분은 거기 탄 우주 비행사들이 간신히 서 있을 정도 크기밖에 안 된 궤도선이었다.


영혼 이론가들은 마찬가지로, 인간 존재란 크지만 쓸모없는 몸과 작지만 비할 데 없이 귀한 영혼으로 나뉜다고 보았다. 몸은 로켓과 같아서, 영혼을 움직이게 하고 잡곡 빵과 더블 치즈버거를 소비함으로써 발사됐다. 몸이 매우 인상적인 경우도 있지만[그래도 키가 111미터나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결국에는 지상에서 소명을 수행하는 데에 불필요한 요소가 됐다. 수십년 인생 여행을 한 끝에는 작은 영혼-우주선만 남을 테니까. 영혼은 초강력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철학자들 대부분은 인간이 영원한 로켓-육체로 나뉜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 가치 있는 우주선에 누가 혹은 무엇이 앉아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우주선에 있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일 테지만, 그건 정확히 무엇으로 구성 될까?
프라톤은 이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여 철학의 새 장을 열고, 영혼을 이상적인 우주선으로 보는 선례를 남겼다. 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우주선을 신에게 속ㅇ한 것, 천국을 열망하는 것으로 보았다-이것은 그 후 몇 개기 동안 우주 비행사들과 민간인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관점이었다. 하지만 계몽주의가 나타나면서 신의 영향력이 줄어들자, 신학적인 면에서 영혼의 역할 역시 변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영혼인데 신은 이제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면, 영혼은 무엇에 바쳐져야 하나?
물론 영혼-우주선에 걔속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믿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과학자들과 라메트리처럼 콧대 높은 철학자들은 유물론자로서 충성심을 발휘해, 영혼에 대한 논의를 격하하기로 불퉁스럽게 합의했다. 영혼-우주선을 채우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신비주의 사상가들과 순진한 시인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그들은 곧 영혼-우주선에 감정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영혼은 인간이면 당연히 갖고 있는 것이었지만 이제 사람에 따라 더 많이, 더 적게 갖는 것이 되었다-얼마나 느끼느냐에 따라서. 오페라 공연 중에 코를 풀고 트림을 하며 시를 멸시하는 천박한 사람들은 '영혼이 없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예전에는 가장 비찬한 얼간이만 듣던 말이었다. '영혼이 없는 사람'이란 미술, 문학, 음악 같은 분야에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을 의미했다. 이는 극작가 존 드라이든[1631-1700]이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현대와 고대를 망라해서 그는 가장 크고 이해심 깊은 영혼을 지닌 시인이었다.'라고 쓴 까닭을 설명해준다. 키츠에 따르면 영혼에는 나름의 자양분[여기서는 더블 치즈버거를 말하는 게 아니다]이 있다. 그 자신과 출판사에게 편리하게도 이것은 시의 형식을 타고 왔다. '시는 위대하고 겸손하여라, 인간의 영혼으로 들어가는 것....'
성적(性的)으로 보면, 영혼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이 몸-로켓 때문에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로 보이게 되었다-침실에서는 그 두가지가 똑같이 한숨으로 마무리 지을지 모르지만, 매릴린 먼로(1926-1962)는 영화 산업의 도덕적 붕괴를 보여주고자, 영혼에 대한 계몽주의 이후의 견해를 천명하며 이런 말을 했다. 할리우드는 '당신의 키스에 천 달러를 내고, 당신의 영혼을 위해서는 50센트를 내는 곳입니다.'  328-332
낭만주의 시대에 영혼의 개념이 감정과 연결되었다면, 감정은 곧 쾌감보다는 아픈 감정으로 통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강렬한 경험이라 하면, 행복해서 샤워를 하면서 휘파람을 불거나 정원에서 노래하는 것을 뜻하지 않았다-영혼을 가진다는 것은 곧 고통을 감수하는 것을 의미했다.  335
미국인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1863-1952)는, 아픔을 통해서만 영혼이 성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혼 역시 처녀성이 있어, 피를 흘려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시릴 코널리는 고통을 겪는 것이 작품 탄생의 필요조건 [영웅적으로 정복할 수 있는 장애물이 아니라]만 아니었으면 보들레르나 랭보가 되고 싶었을 거라고 말했다. 예술가들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이를 이겨내고 창작하는게 아니라, 바로 고통을 겪기 때문에 창작한다는 가설이었다.  336


옮기고나서
사랑은 소설이란 장르가 시작될 때부터 소설의 제재나 주제가 되었다. 공상 과학 소설이나 스릴러 소설까지도 모든 이야기에는 등장인물들이 있고, 사람들이 있으면 이런저런 감정이 얽히며 관계가 형성되고, 거기서 사랑과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세상의 작가들은 사랑의 여러 면을 다양한 내용과 형식을 통해서 보여주지만, 알랭 드 보통처럼 독특한 태도로 사랑이란 주제에 접근하는 작가는 드물 듯하다.  405
작가는 제삼자의 관점에서 남자와 여자의 인식 차이, 의사소통 방식의 차이, 개인의 성장 배경에 따른 문화의 차이 등을 때로 철학이론 등을 동원하며 특유의 재치와 유머를 담아 펼친다.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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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전략
카테고리 인문 > 독서/글쓰기
지은이 정희모 (들녘,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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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이란 단어는 전쟁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단어이다.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술과 전략을 잘 사용하여 성과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글을 쓰는 것에도 전략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생각이 오늘에는 더욱 맞아 떨어지는 듯하다.
이제는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이다. 전문적인 글이든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이든 .. 혼자만 보았던 일기 마저도 공유를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공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오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도 매우 많아졋으며, 이것이 수입의 한 수단으로 자리 잡기도 하었다.
그러기에 글쓰기에도 전략이 충분히 붙여야 하리라 생각된다.
저자는 누구나 하듯이 많이 읽고 많이 써봐야 한다는 서두를 시작으로 좀더 좋은 글이 되기 위해 필요한 사항들과 그것들의 적절한 사용과 배치로 더 좋은 글이 완성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더많은 생각과 틀에서 벗어난 사고력, 비판정신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의 말미에는 책을 쓸때 참고하자는 생각을 들게 하였다..물론 누구에게나 맞는 것은 아니겠지만...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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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적책읽기50미래를위한자기발전독서법
카테고리 인문 > 독서/글쓰기
지은이 안상헌 (북포스,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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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에 관한책... 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꽤나 읽은 것 같다... 시간을 내어 세어보니 합쳐서 130여권 정도 되었다.. 
그 중에서 인상깊은 책 중의 하나 이다..이 책을 읽고 저자의 책들을 찾아 읽었다.
언제부턴가 책을 읽으면서도 뭔가가 빠진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면서 내가 너무 편식된 책읽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인문학에 대한 내용들에 손을 대기를 꺼려 하고 있었다...
생각만으로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고 있었던 것은 찾던 책만을 계속 찾게되는 습관이 문제라는 말도 안되는 변명만으로 시간을 끌고 있었던듯 하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무엇때문에 부족함을 느끼는 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결국은 조금이나마 찾아 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두번째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더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두번째 이야기 내용을 타이핑해보면서 ... 오래전이라 없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 내용도 타이핑을 해 두었던 것을 찾았다..
이 내용을 찾아내고..스스로 한숨을 쉬었다...정리만하고는 더이상 보지 않았구나.. 그러니까 내가 하고도 있는지 조차 기억을 못하고 있구나...역시 책을 읽고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며 다시금 읽어보게되었다... 



책을 읽어도 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책을 대하는 자기 자신의 태도를 바꾸어야만 한다. 첫 번째 방법은 '외우는 것'이다.

wn1 - 나는 한동안 책을 읽는것에만 바빴다.. 그래서 인상깊은 내용을 외우는 과정..다시말해 습득하는 과정을 가지지 않음으로 읽을때만 좋았고 감동받았으나 뒤로는 기억을하지 못해 읽기에서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한 권의 독서가 끝나고, 처음으로 돌아와 줄이 그어진 곳을 다시 읽어 내려가다 보면 내 것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다.

wn1 - 이 부분의 내용은 '두번째 이야기'에서 더 상세한 저자만의 방법을 기술하였다.. 그래서 두번째이야기에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

나 역시도 읽은것들에 관해 표시를 하고 기록도 하지만 그것들을 찾을 수 있는 색인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나 저자는 두번째 이야기에서 괜찮은 방법을 제안하고 있었다. 

질문과 비판이 사고의 확장을 준다는 것은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다..그렇지만 그렇게 읽는 사람이 많지는 않아 보인다.. 
개인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내용의 질뿐아니라 읽는 사람의 질도 중요할 것이라 생각을 한다. 사람의 질이란 그 사람이 어떻게 책을 받아들이고 활용할 방법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정말 좋은 질의 책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과물은 두려움을 없애주고 좀 더 우리를 목적에 가깝게 다가서도록 돕는다.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고 자신을 재창조하도록 한다.

wn1 - 나는 아직도 생각을 많이 하고 있지는 않는다고 본다.. 스스로 깊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여러방면의 접근이 필요한데..그러기에 아직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할 것은 많다고 생각을 하니 그 중요한 시간에 투자를 못하고 있는듯하다.
그러다 보니 아직도 읽고나면 부족함을 느끼는 지도 모른다.

시간을 가지고 생각하는 시간을 투자한다면 어느새 짧은 시간에도 몰입을하여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책읽기에도 균형 잡힌 시각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wn1 - 과연 열심히 사는 것과 의미있게 사는것에 차이가 있을까?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다시금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열심히 살고있다.. 그렇지만 의미있게 살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다.. 이것은 노소를 막론한다.. 학생들을 생각해 보자..
한국에서의 학생들은(초~고등학교) 점수에 의해 구분을 짓게 된다..
수치화된 결과를 위해 더욱 노력을 해야만 하게 되어 있다... 
이 중에서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결과가 투자한 만큼 나오지 않는 아이들이 꽤나 많다.. 그들의 수고 우리가 생각하는 수보다 더욱 많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이런 학생들을 살펴보면 정말 열심히 하는것이 보인다...하지만 그저 열심히만 한다..
핵심 단어는 '그저'이다.. 의미가 없다. 뚜렷한 이유도 없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도 생각이 없다...그저 열심히 하고만 있다..
좋은 방법이라면 좋은 결과는 나온다...다시말하면 좋지 않은 방법으로 하고 있기때문에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고 있음에도 그것을 생각하지는 않고 ..그들은 ...그저 열심히 한다...실제로 따져보면 열심히 하는것도 아닌데 열심히 한다고 자부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은 먼저 자신의 방법자체를 수정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결과를 바라기 어렵다.

시간에 대해서도 두 가지로 분류해보면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로 나눌 수 있다.
크로노스는 물리적인 24시간을 말하는 것이며... 
카이로스는 스스로의 의미가 부여된 시간을 말한다..
              이것은 길게도 느껴질 수 있고, 짧게도 느껴질수도 있다..
넌센스 문제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이란 질문의 답을 보면 카이로스를 절실하게 공감하게 된다.
그 질문의 답은 ...어떤 물리적인 수단이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가는것'이다.
그렇다 그런 사람과 있다면 거리가 멀어도 너무 짧게 느껴진다.

무작정 열심히가 아니라 의미를 부여한 순간순간이 많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멈추지 않는 독서를 통해 자기의 자산을 쌓아온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발전시켜 왔고 미래의 주인공들 또한 독서를 통해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갈 것을 확신한다.

wn1 - 자신을 자극할 수 있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어떤 사람들은 많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다..또한 자신을 자극해야 한다는 생가가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떻든.. 자신을 적절히 자극한다면 보다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고... 깊은 생각을 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자극한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책들을 통해 스스로 자극을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이 된다..
이제 생산적 책읽기 두번째 이야기를 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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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이다.
표지에는 이런 표현을 하고 있다.
'드 보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삶을 낭비하지 않고 삶에 감사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는 실천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로 보고, 프루스트를 일상에서 실행할 수 있는 '문학적 참고서'로 새롭게 조명한다. 전기와 평론이라는 형식을 빌려 유머와 상상력으로 버무린 인생학 개론!'



하나. 현재의 삶을 사랑하는 법
'우리가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된다면 삶은 갑자기 놀라운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것-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은 계획, 여행, 연애, 연구거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미래에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러한 일들을 끝없이 미루는 우리의 게으름은 이것들을 숨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루기를 영원히 불가능하게 하는 위협이 생기면, 삶은 다시 얼마나 아름다워질까요! ... 대재난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느 것도 하지 않을 테지요... 거기서는 무관심이 소망을 죽입니다.'  13

둘. 자신을 위한 독서법
'현실에서 모든 독자는 자기 자신의 독자가 된다. 책이란, 그것이 없었다면 아마 독자가 자신에게 결코 경험해 보지 못했을 어떤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신 속에서 깨달을 때 그 책이 진실하다는 것이 입증된다.'  36
'만약 천재의 새로운 걸작을 읽게 된다면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경멸했던 우리 자신의 성찰들, 우리가 억압햇던 기쁨과 슬픔, 우리가 깔보았지만 그 책이 문득 우리에게 그 가치를 주는 감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를 발견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42

셋. 여유 있게 사는 법
예술 작품의 위대함은 겉으로 보이는 소재의 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전적으로 그 소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고 프루스트는 주장한다. 그래서 잠재적으로 모든 것이 예술의 풍부한 소재이며, 우리는 파스칼의 <팡세>에서만큼이나 비누 광고에서도 귀중한 발견을 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57
"너무 빨리 하지 마세요."는 아마 프루스트주의적 슬로건일 것이다. 그리고 너무 빨리 하지 않으면 생기는 이점은, 그러는 도중에 세상이 더 재미있어진다는 것이다.  63
천천히 생각할 때 더 큰 연민이 생길 수 잇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미쳤군'이라고 한 마디 하고 신문을 넘길 때보다는, 정신이상자 반 블라렌베르그 씨의 범죄에 대해 기다란 성찰의 글을 쓸 때 우리는 그를 더 많이 동정하게 된다.  64
교훈은? 공연에 몰두할 것, 신문기사를 마치 하나의 비극적 또는 희극적 소설의 일부인 것처럼 읽는 것, 그리고 필요할 때는 잠드는 것을 묘사하는 데 30페이지를 쓸 것. 그리고 만약 시간이 없다면, 적어도 올레도르프 사의 알프레드 윔블로나 파스켈 사의 자크 마들렌이 취했던 태도에 저항할 것. 프루스트는 이러한 태도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할 시간이 없다'라는 건 '바쁜' 사람들이-아무리 그들의 일이 어리석을 지라도-느끼는 '자기만족'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66

넷. 훌륭하게 고통을 견디는 법
어떤 사람이 가진 생각이 지혜로운 것인지 평가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그의 정신과 건강상태를 주의 깊게 검토해 조는 것이리라.  67
'내가 진정 슬플 때 위안이 되는 것은 오직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75
프루스트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문제가 있기 전까지는, 즉 우리가 고통에 빠지고 우리가 희망했던 대로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제대로 배울 수 없다. 
'병 하나만으로도 우리느 ㄴ주목하고 배우게 되며, 그것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을 과정들을 분석할 수 있게 된다. 매일 밤 침대 위에 눕자마자 즉시 잠에 들어서 깨어 일어나는 순간까지 죽은 듯이 자는 사람은, 반드시 위대한 발견일 것까지는 없지만, 분명히 수면에 관한 작은 관찰조차도 꿈꿔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자고 있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한다. 약간의 불면증은 우리가 잠에 대해 감사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을 던진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없지 않다. 기억을 잘하는 것은, 기억이라는 현상을 연구하는 데 그다지 큰 이점이 아니다.'
프루스트가 제시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때에만 천저한 탐구심이 생길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앓는다. 고로 생각한다. 그리고 고통을 더 큰 맥락 속에 위치시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땜누에 우리는 생각한다. 생각은 고통의 기원을 이해하고, 그것의 여러 특성ㅇ들을 포착하고, 그 존재를 체념하고 인정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92
그는 개인이 지혜를 얻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선생을 통해서 고통스럽지 않게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삶을 통해서 고통스럽게 얻는 것이다. 그는 고통스럽게 얻는 지혜가 훨씬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93
'지혜란 가르칠 수 있는게 아니다. 누구도 우리 대신 가줄 수 없는 여정을 통해서, 누구도 우리 대신 해줄 수 없는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행복은 몸에 좋다. 그러나 정신의 힘을 길러주는 것은 고뇌다"라고 프루스트는 말했다.  94
만족보다는 불행이, 그리고 플라톤이나 스피노자를 읽는 것보다는 고통스러운 연애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좋으리라는 것이다.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천재보다는, 우리가 욕구하고 우리를 앓게 하는 여성이 훨씬 더 심오하고 생생하게 우리에게서 온갖 종류의 감정을 끌어낸다.'
행복할 때 무지한 것은 아마도 그저 정상적인 일일 것이다.  95
고통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득이란 그것이 지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탐구의 가능성-아주쉽게, 그리고 가장 자주 간과되고 거부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는 것일 뿐이다.  99
'삶의 기술 전부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개별자들을 이용하는데 있다.'  100
언제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101

다섯. 감정을 표현하는 법
"당신의 소설에는 몇 가지 훌륭하고 장엄한 장면들이 그려집니다"라고 프루스트는 섬세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좀더 독창적으로 그려졌으면 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해질녘에 하늘이 불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너무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고, 어슴푸레한 달빛은 시시하고 둔감한 표현입니다."(가브리엘의 <연인과 의사>라는 소설의 원고를 읽은 평)
상투어의 문제는 잘못된 관념을담고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훌륭한 관념들을 피상적으로 조합해 낸다는 데 있다. 해는 해질녘에 불타고 달은 어스레한 빛을 내지만, 우리가 해나 달과 마주칠 때마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이 이 주제에 대해 할 수 있는 첫 번째 말이라기보다는 최종적인 말이라고 결국 믿게 되고 말 것이다. 상투어들은, 한편으로는 단지 피상적으로 스쳐 지나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심어주기 때문에 해로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방식이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느끼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묘사하는가는, 어떤 수준에서는 우리가 그것을 처음에 어떻네 경험하는가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123-124
'모든 작가는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해야 합니다. 마치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자신만의 '음색'을 창조해야 하듯이...형편없이 쓰는 독창적 작가를 좋아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잘 쓰는 사람들을 좋아한다-아마 이게 약점일 수는 있지만-는 것입니다. 하지만 독창적이라는,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했다는 전제하에서만 그들은 잘 쓸 수 있습니다. 정확함과 완벽한 문제가 분명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모든 착오를 겪은 후에야 독창성의 이면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 독창성과 같은 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독창성의 면에는 정확성-'어슴푸레한 달' , '미소짓는 착한 마음' , '모든 연도 중에서도 가장 불쾌했던 해"-이라는것은 조재하지 않습니다. 언어를 보호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그것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스트로스 부인!'  130-131

여섯. 좋은 친구가 되는 법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내용과 타인의 관심사가 쉽게 일치하는 것이 친교라고 가정한다.  165
프루스트는 한번은 친교를 독서에 비유하였다. 왜냐하면 두 가지 활동 모두 타자와의 교류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독서에 결정적인 우위가 있다고 덧붙였다.
'독서에서 친교는 갑자기 그 본래적인 순서성을 회복한다. 책에는 거짓 상냥함이 없다. 우리가 이 친구들과 저녁을 함께 보낸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실로 그러고 싶기 때문이다.'  173

일곱. 일상에 눈을 뜨는 법
모든 것에 올바른 가치를 부여하라고 권했을 터이다. 이는 좋은 삶이란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들을 부당하게 무시하고 헛되이 다른 것을 갈망하는 것은 아니라는 발상의 전환을 의미했다.  190
왜 우리는 사물들을 더 풍부하게 음미하지 않는가? 이것은 부주의나 게으름의 문제를 넘어서는 문제다. 그것은 우리가 아름다운 이미지들에 충분히 노출되지 않은 데서 유래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는 우리 자신의 세계에 충분히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안내하고 우리에게 착상을 불어 넣을 수 있다.  199

여덟. 행복한 사랑을 하는 법
무언가를 박탈당했을 때 우리는 그 소중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사물의 소중함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것을 박탈당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어떤 것을 결핍하고 있을 때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감정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고, 우리가 그것을 결핍하고 있지 않을 때도 그 교훈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한 연인과의 오랜 교제로부터 권태감이 생기고, 그 사람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문제는 우리가 그를 충분히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것일 수 있다. 처음 사귈 때 우리가 상대방에 대해 무지할 것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후로 연인의 곁에서 함께 지내게 되면, 우리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무감각해질 정도로 진정 친숙해진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같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가짜 친숙감에 불과할 것이다.  224

아홉. 책을 치워버리는 법
우리는 책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까?
프루스트는 책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할 때 생기는 위험들, 아니 책을 물신적으로 숭배하는 태도를 취할 때 생기는 위험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책에 대해 존경을 표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문예창작의 정신을 희화화하는 것이다.  237
그는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깨닫기 위해서는 대가가 느꼈던 것을 자신 속에 다시 그려 보려고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에 독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느끼는지 알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책을 읽어야 한다.  244
'독서는 정신적 삶의 문턱 위에 있다. 그것은 우리를 정신적 삶으로 인도할 수 있지만, 정신적 삶을 구정하지는 않는다.'  246
'우리 속 깊은 곳에 있지만 어떻게 들어가는지는 알지 못했던 집의 문을 마법의 열쇠로 열어주는 한, 우리의 삶에서 독서의 역할은 유익한 것이다. 반며에 독서가 정신에 자신만의 삶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지 않고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린다면, 그것은 위험해진다.'  247
'(독서를) 학문 분과로 만드는 것은 단지 '자극'에 불과한 것에 너무 큰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독서는 정신적 삶의 문턱 위에 있다. 그것은 우리를 정신적 삶으로 인도할 수 있지만, 정신적 삶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가장 훌륭한 책들조차도 결국에는 내팽개쳐야만 하게 마련이다.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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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하지 않음' , '분위기 따위가 안정되지 않고 뒤숭숭함'이다.
이 단어를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인간 존재의 밑 바닥에 자리잡은 허무(虛無)로부터 비롯하는 위기적 의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심리적인 것이다. 불안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심리적 단어이다.

우리는 불안을 늘 가지고 살아간다. 사람은 자신이 해 보지 않은 것을 하려 할때 언제나 불안감이 언습한다. 또한 일상에서도 자신이 늘 하는 것과 거리가 있는것일 수록 불안감을 더 느끼게 된다.
아무런 이유없이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하거나, 가슴이 두근두근거리기도 한다.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면 우리는 불안이 엄습하는 느낌을 가진다. 이유를 모르기때문이다. 즉 우리는 이유를 모르는 것이 발생할 때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불안에 대한 저자의 원인 규명과 해법을 서술한 책이다.
'불안'이란 단어는 매우 포괄적이다. 
책의 제목은 단순하게 불안이란 표현을 하였지만, 원서의 제목은 <Status Anxiety> 즉, '지위에 대한 불안'이다. 
저자는 불안 중에도 인간이 많이 느끼는 것 중의 하나인 지위에 대한 인간적인 불안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위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원인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을 제안한다.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원인은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이며, 그에 대한 해법으로는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이다.
한국사람들에게도 꽤나 유명한 저자의 철학적 사색과 철학자들의 사색을 통해 우리는 위안과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세계화에 의한 발전과 압도적인 신자유주의자들의 등살에 대한민국은 죽을때까지 공부해야 하는 나라가 되어 있다. 
그것은 더 나은 직업과 더 나은 지위를 얻지 못하면 안 된다는 심리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실제 세계의 기득권층은 그렇게 만들어 가고 있다. 그들만의 즐거움과 권력을 위해 같은 세대간의 경쟁, 세대간의 경쟁, 진입장벽등을 통해 억누르고, 교육을 통해 이겨야만 한다는 세뇌를 시켜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신세계>에서 유전자 조작으로 이미 태어나고 무의식상태로 세뇌되어 태어날때부터 자신의 역할이 정해져 있다고 느끼는 그러한 상태가 지금의 이 시대에 우리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심리적인 무력감에 기인한다.

우리가 조금 떨어져서 세상을 바라보고 주입된 주관성이 아니라 좀더 넓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그것이 보이게 된다.
보통의 생각과 접근을 따라가면서 객관성에 조금더 가까이 가게 될 수 있을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많이 공감이 간 내용들은 철학과 보헤미안이며,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었던 부분은 예술과 기독교 였다.



정의 
지위 - 사회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 지위(status)는 신분이라는 뜻의 라틴어 statum('서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stare의 과거분사)에서 파생되었다.
        - 좁은 의미에서 이 말은 한 집단 내의 법적 또는 직업적 신분을 가리킨다(기혼자, 중위등). 그러나 더 넓은 의미에서는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을 가리키며, 이 책에서는 이 의미가 더 중요하다.

지위로 인한 불안 -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 위험에 처했으며, 그 결과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 우리가 사다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우리의 자아상(自我像)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 안타까운 것은 높은 지위를 얻기가 어려우며, 그것을 평생에 걸쳐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것이다. 지위는 자신의 실수와 실패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적의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다.
                         - 실패에서 굴욕감이 생긴다. 우리의 가치가 아니라 성공한 사람들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부끄러워할 처지에 놓였다는 괴로운 인식에서 나온다.

명제 - 지위에 대한 갈망은 다른 모든 욕구와 마찬가지로 쓸모가 잇다. 이것은 자신의 재능을 공정하게 평가하도록 자극하며, 남들보자 나아지도록 고무하며, 남에게 해를 주는 괴팍한 행동을 못하게 억제하며, 공동의 가치 체계를 중심으로 사회 구성원들을 결합한다. 그러나 모든 욕구가 그렇듯이, 이 갈망도 지나치면 사람을 잡는다.
       -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가장 유익한 방법은 이 상황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7-10


원인
I. 사랑결핍
지위와 관련된 사랑을 받는 사람 역시 낭만적인 사랑을 받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호의적인 눈길을 받으며 편안함을 느낀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16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The Theory og Moral Sentiment)>에서 "인간 삶의 위대한 목적이라고 하는 이른바 삶의 조건의 개선에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이 주목을 하고, 관심을 쏟고, 공감 어린 표정으로 사근사근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알은체를 해주는 것이 우리가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자가 자신의 부를 즐거워하는 것은 부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의 관심을 끌어 모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부끄러워한다. 가난 때문에 사람들의 시야게서 사라졌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가장 열렬한 욕구의 충족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18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21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22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자신의 인겨겨을 신뢰할 수도 없고 그 인격을 따라 살 수도 없다.  23




II.속물근성
'속물근성(snobbery)'이라는 말은 영국에서 1820년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많은 대학의 시험 명단에서 일반 학생을 귀족 자제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옆에 sine nobilitate(이것을 줄인 말이 's.nob.'이다), 즉 작위가 없다고 적어놓는 관례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말은 처음에는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을 가리켰으나, 곧 근대적인 의미, 즉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28
신문 때문에 문제는 더 복잡해 진다. 속물은 독립적 판단을 할 능력이 없는 데다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갈망한다.  33
두려움은 세대를 따라 전해진다.. 속물도 속물을 낳는다.  35
젊은 시절에 속물근성에 분개했다고 해서 그 뒤에 스스로 속물이 되어가지 말란 법도 없다. 거만한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36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38

III. 기대
18세기 초 영국에서 서양의 위대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농경 기술 덕분에 생산이 급격히 늘어나고, 산업과 교역이 늘게된다.
증기기관과 면 역직기로 사회적 기대가 바뀌었다. 도시 규모가 급격히 팽창했다. 
사치품은 일반용품이 되었으며 일반용품은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46
유럽과 미국 전역에 거대 백화점이 문을 열고, 과학기술 발명품이 속속등장한다. 
전역에 쇼핑몰의 발전은 새로운 갈망들이 생겨났다. 1970년대에 이르자 미국인들은 일터와 쇼핑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55
어떤 것의 적절한 수준은 결코 독립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준거집단(準據集團), 즉 우리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조건과 우리의 조건을 비교하여 결정된다.
설사 웃풍이 심하고 비위생적인 오두막에 살면서 크고 따뜻한 성에 사는 귀족의 지배에 시달린다 해도, 우리와 동등한 사람들이 우리와 똑같이 사는 것을 본다면 우리의 조건은 정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57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겨 우리 자신과 비교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질투할 사람도 늘어난다.  60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1835)의 '왜 미국인은 번영 속에서도 그렇게 불안을 느끼는가'라는 제목의 장에서 불만과 높은 기대, 선망과 평등의 관계를 끈질기게 분석한다.
".. 불평등이 사회의 일반 법칙일 때는 아무리 불평등한 측면이라도 사람들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대체로 평등해지면 약간의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 그래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이 종종 묘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온하고 느긋한 환경에서도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자살률 증가를 걱정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자살은 드문 대신 광증이 다른 어느 곳보다 흔하다고 한다."  67
하버드 심리학 교수인 제임스는 '시도가 없으면 실패도 없고, 실패가 없으면 수모도 없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자존심은 전적으로 자신이 무엇이 되도록 또 무슨 일을 하도록 스스로를 밀어붙이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실체 성취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자존심 = 성공/잠재력'
제임스의 방정식은 우리의 기대 수준이 높아지면 수모를 당할 위험도 높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무엇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 결정된다.  71
장-자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4)에서 다들 야만인과 근대의 노동자 가운데 노동자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과연 정말일까 하고 물었다.
루소의 주장은 부에 대한 명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근대 사회는 첫 번째 방법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욕망에 줄기차게 부채질을 하여 자신의 가장 뛰어난 성취의 한 부분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부유하다고 느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와 같다고 여겼지만 우리보다 더 큰 부자가 된 사람과 실제로나 감정적으로나 거리를 두면 된다. 더 큰 물고기가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옆에 있어도 우리 자신의 크기를 의식하며 괴로울 일이 없는 작은 벗들을 주위에 모으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면 된다.
발전하는 사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보다 높아진 소득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 부유하게 해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볼 때 우리를 더 궁핍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80-81

IV. 능력주의 
예수가 전도를 시작한 서기 약 30년부터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회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처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미에 대하여 세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들은 그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불안을 덜어주었을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 -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 책임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은 사회에서 가장 쓸모가 크다.
두 번째 이야기 - 낮은 지위에 도덕적 의미는 없다.
세 번째 이야기 - 부자는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강탈하여 부를 쌓았다.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서기 30년부터 1989년까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인 가장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그것들이었다. 이 이야기들은 좋은 운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기운을 북돋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86-95
안타깝게도 18세기 중반 무렵부터 괴로운 이야기 세 가지가 생겨나 꾸준히 영향력을 늘여가면서 앞의 이야기들에 도전하게 되었다.
첫 번째 이야기 - 빈자가 아니라 부자가 쓸모있다.
버나드 맨드빌은 운문으로 쓴 소채자 <벌의 우화>를 발표했고, 이것이 부자와 빈자를 바라보는 방법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97
두 번째 이야기 - 지위에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세 번째 이야기 - 가난한 사람들은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어리석음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새뮤얼 스마일스는 <자조>(1859)에서 궁핍한 젊은이드에게 높은 목표를 세우고, 공부하고, 신중하게 돈을 쓰라고 권한 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돕는 정부는 비난했다. '사람들 대신 일을 해주면 그들에게서 스스로 그 일을 할 동기와 필요를 빼앗게 된다. 법을 인간 발전의 동인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과대평가다. 아무리 엄중한 법이라도 게으른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들 수 없고, 낭비벽이 심한 살마을 검소하게 만들 수 없고, 주정뱅이가 술을 끊게 만들 수 없다.'  116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  119

V. 불확실성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 생계를 우지하고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면 적어도 다섯 가지 예측 불가능한 요인이 뜻대로 따라주어야 하는데, 이것은 사회적 위계 내에서 자신이 바라는 자리를 얻거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다섯 가지 이유가 되기도 한다.
① 변덕스러운 재능
지위가 성취에 의존한다면 성공에 일반적으로 필요한 것은 재능과 그 재능을 믿을 만하게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다.  124
② 운
우리의 지위는 '운'이라는 말로 느슨하게 얽어 넣을 수 있는 어떤 범위의 우호적 조건들에 의존하고 있다.  125
승자는 운을 만든다. 이것이 현대의 주문(呪文)이다.  127
③ 고용주
삶의 조건의 예측 불가능성은 우리의 지위 문제가 고용주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더욱 심각해진다.  127
④ 고용주의 이익
고용의 안정성은 조직 내의 정치만이 아니라 회사가 시장에서 계속 이윤으 ㄹ내는 능력에도 달려 있다.  132
⑤ 세계 경제
회사와 종업원들의 생존은 경제 전체의 성적 때문에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기도 한다.  134

우리가 실패에 대한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성공을 해야만 세상이 우리에게 호의를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136
인간은 웃어줄 만한 확실한 이유가 없으면 좀처럼 웃엊지 않는 법이다.  137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에 어떤 동지애가 이룩된다 해도, 노동자가 어떤 선의를 보여주고 아무리 오랜 세월 일에 헌신한다 해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지위가 평생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그 지위가 자신의 성과와 자신이 속한 조직의 경제적 성공에 의존한다느 것, 따라서 자신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감정적인 수준에서 변함없이 갈망하는 바와는 달리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늘 불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142-143



해법
I. 철학
명예의 문제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을(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예를 위해 결투하는 관습)  비난하는 눈으로 바라볼지 모르지만, 그러는 우리도 그런 사람들의 정신구조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공휴하고 있을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의 경멸에 매우 약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존심 역시 다른 사람들이 부여하는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우리도 성질 급하게 결투에 나서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을지 모른다.  152
'다른 사람들의 머리는 진정한 행복이 자리를 잡기에는 너무 초라한 곳이다.' -쇼펜하우어 <소품과 단편집>(1851)
'자연은 나에게 '가난해지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 또 '부자가 되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자연은 나에게 '독립적으로 살라'고 간청할 뿐이다. -샹포르 <격언집>(1795)
'나를 부유하게 하는 것은 사회에서 내가 차지하는 자라기 아니라 나의 판단이다. 판단은 내가 가지고 다닐 수 있다... 판단만이 나의 것이며, 누구도 나에게서 떼어낼 수 없다.' -에픽테토스 <어록>(100년경)  154
철학은 외부의 의견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한다. 상자를 하나 떠올리면 좋을 것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른 살마들의 인식은 모두 이 상자에 먼저 들어가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만일 그것이 참이면 더 강한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만일 거짓이면, 웃음을 터뜨리거나 어깨를 으쓱하고 털어버리는 것으로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주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 철학자들은 이 상자를 '이성'이라고 불렀다.  


철학은 성공과 실패의 위계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 과정을 재구성할 뿐이다.  159
감정은 과녁을 넘어가거나 못 미치기 십상이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이성을 이용하여 감정을 적절한 목표로 이끌라고 충고해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자문해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데미아 윤리학>(기원전 3590년경)에서 인간 행동은 제어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보통 극단으로 흐르는 오류를 범한다고 예를 들어 설명한 뒤, 지혜로우면서도 침착한 중도(中道)를 이상으로 제시하면서, 이성의도움을 받아 중도에 이르는 것을 행동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160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서글픈 동시에 묘하게 위안이 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고 이야기해왔다. 어떤 문제이든 다수의 의견에는 혼란과 오류가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샹포르는 '여론은 모든 의견 가운데 최악의 의견이다.' 
아첨을 하듯이 상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개 언어도단에 가깝다고 덧붙인다. 단순화와 비논리, 편견과 천박함으로 얼룩뎌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나 가장 터무니없는 관습과 가장 어처구니없는 의식들이 '하지만 그것이 전통이야'라는 말로 용인되고 있다.'  163
철학적인 접근 방법의 장점은 심리적인 면에서 드러난다. 누가 우리에게 번대하거나 우리를 무시할 때마다 상처를 입는 대신 먼저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 정당한지 검토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비난 가운데도 오직 진실한 비난만이 우리의 자존심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  164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피상적이고 하찮다는 것, 그들의 시야가 편협하다는것, 그들의 감정이 지질하다는것, 그들의 의견이 빙퉁그러졌다는 것, 그들의 잘못이 수도 없이 많다느 것을 알게 되면 점차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철학적 연세주의의 중요한 모범을 보여준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165
쇼펜하우어는 묻는다. 정말로 그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할까?
'만일 청중 한두 사람만 빼고 모두 귀머거리라면 그들의 우렁찬 박수 갈채를 받는다 해서 연주가가 기분이 좋을까?'  166
이렇게 인간성을 통창력 있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유용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불리한 점은 이런 관점을 따를 경우 친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166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에서는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는 곧이어 모든 젊은이들이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충고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만날 일이 줄어 들수록 더 낫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167
철학자들은 함께 모여 연구를 한 것도 아닌데 입을 모아 외부의 인정이나 비난의 표시보다는 우리 내부의 양심을 따르라고 권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하는 것이다.  168

II. 예술
예술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많은 논평자들이 이런 답을 내 놓았다. 별 쓸모가 없다.  171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보라. 영국 문단에서 시인이자 비평가인 매슈 아널드는 제안한다. '인간의 잘못을 없애고, 인간의 혼돈을 정리하고, 인간의 곤궁을 줄이고자 하는 욕망'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세상을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낫고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갈망'에 사로잡혀 있다. 예술가들이 이런 갈망을 늘 노골적인 정치적 메시지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스스로 그런 갈망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항의가 나타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교육하고, 고통을 이해하거나 감수성에 다시 불을 붙이도록 돕고, 감정이입 능력을 길러주고, 슬픔이나 웃음을 통하여 도덕적인 균형을 다시 잡아주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174


(저자는 소설 그림 비극 희극 유머를 예로들며 예술작품이 인간의 균형을 위한 어떤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비극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실패에 평소보다 훨씬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 잡품을 통해 실패의 유래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더 많이 아는 것은 곧 더 많이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211
프로이트는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1905)에서 '우리는 농담을 통해 장애 때문에 공개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적의 우스꽝스러운 부분을 활용할 수 있다.'
'농담의 형태가 아니라면 결코 듣지 않을 사람의 귀에도 들어가게 할 수 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비판할 때 농담을 특별히 애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23
만화가들의 밑바닥에 깔린 무의식적 목표는 유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그런 식으로 조롱할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세상을 만들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234

III. 정치
지위를 분배하는 원칙은 무엇인가?  244
이상적인 지위는 오래전부터 계속 바뀌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이런 변화 과정을 묘사하는 데 정치라는 말을 사용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246
부를 축적한 사람은 일단 주요한 미덕이 적어도 네 가지는 있다고 칭송을 받는다. 그 네 가지란 창의성, 용기 지능 ,체력이다. 
돈에는 윤리적 가치가 부여된다. 돈은 그 소유자의 미덕의 증거다.  248
이런 이상이 아무리 자연스러워 보인다 해도.. 이것은 단지 인간이 만든 것일 뿐이다.
소스틴 베블런의 <유한계급론>(1899)에서 한 말에 따르면, 상업 사회에서는 덕은 잇지만 가난한 사람은 존재하기 어렵다. 따라서 아무리 물질주의적인 태도와 거리가 먼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부를 축적하여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불명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요구를 느낄 것이며, 그렇게 하지 못하면 불안한 마음과 책임감에 시달릴 것이다.  249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필수품'으로 꼽히게 되었다. 그것들을 소유하지 않으면 아무도 품위 있는 살마이라고 여기기 않으며, 따라서 심리적으로 편안한 생활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250
근대으 성공적 삶이라는 이상은 돈과 선(善)을 연결시킬 뿐 아니라, 또 하나의 연결도 시도한다. 즉 돈과 행복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런 관념은 세 가지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첫째는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로 근대 문명에서 접할 수 있는 엄청나게 다양한 직업과 소비재가 우리의 행복과 별 관계없이 욕망만 부추기는 번지르르한 소모적 전시품이 아니라, 실제로의 가장 중요한 요구 몇 가지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쓸 수 있는 돈이 많을 수록 제품과 용욕도 더 많이 이용할 수 있고, 따라서 우리가 행복해질 가능성도 커진다는 것이다.  258
이런 가정들에 반박하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읽기 쉬운 책은 여전히 장-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다.  259
선사시대에는 인간이 루소가 말하는 자연 상태에서 살았는데, 이때는 사람들이 숲에 살면서 장을 보지도 신문을 읽지도 않았다. 루소는 이 시기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더 수비게 이해했으며, 만족스러운 삶의 핵심적인 특징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고 상상한다.  260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268
우리는 어떤 직업이 주는 매력도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 눈에 보이는 것이다.
선망을 멈추지 못한다면, 엉뚱한 것을 선망하느라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인가.  269
존 러스킨은 <이 최후의 사람에게>에서 부에 대한 일반적인 금전적 관점을 버리고 '삶'에 기초한 관점을 채택하라고 호소했다.  271
토머스 칼라일도 <미다스(Midas)>에서 '우리는 삶의 호화로운 장식은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 와중에 사는 것은 잊어버렸다... 우리는 현금 지불이 인간들의 유일한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273-274

사회적 위계 때문에 아무리 기분이 상하거나 난처해지더라도 우리는 그런 위계가 너무 뿌리가 깊고 너무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그 위계를 지탱하는 공동체나 신념들을 바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이런 위계가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하여 체념을 하고 그냥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275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들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이런 과념들은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면 결코 지배를 할 수가 없다.
이데올로기적인 진술의 핵심은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감각이 없으면 그 편파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무색무취의 가스처럼 사회에 방출된다. 그것은 신문, 광고, 텔레비전 프로그램, 교과서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이데올로기느 ㄴ자신이 편파적인, 어쩌면 비논리적이고 부당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세상에 접근한다는 사실을 감추면서, 자신은 그저 오래된 진실을 이야기할 뿐이며, 오직 바보나 미치광이만이 여기에 반대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278
'꼭 이래야 하는가?'
억압적 상황은 영원한 고통을 겪으라는 자연의 심판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변화 가능한 어떤 사회 세력들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잇다. 이렇게 되면 죄책감과 수치감은 이해로, 지위의 더 평등한 분배 방식에 대한 탐구로 바뀔 수도 있다.  279
관념이나 제도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때는 고통의 책임을 아무에게도 묻지 못하거나 고통을 겪은 당시자에게 묻게 된다.  281
정치적 관점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다. 분석을 통하여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밝혀 그 뇌관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어리둥절한 채 우울한 표정으로 대응하던 태도를 버리고, 눈을 똑똑히 뜨고 그 원인과 결과를 계보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284
정치적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은 기후 위성으로 기상 상태의 위기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늘 문제를 막어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거기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유용한 것을 가르쳐 준다. 그 결과 피해의식, 수동적 태도, 혼란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288

IV. 기독교
죽음을 생각하는 관점에서 의미있는 활동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기독교적인 생각과 세속적인 생각은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 진정한 사회관계, 자선에 대한 강조는 공통되는 것 같다. 또 권력, 군사적인 힘, 금전적인 야욕, 명예에 대한 관심을 비판하는 것도 공통되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한 생각 옆에 갖디 놓으면 어떤 행동들은 하찮아 보일 수밖에 없다.  301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전도서>의 저자는 그렇게 탄식한다(1장 2절)
'한 세대가 가면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이 땅은 영원히 그대로이다'(1장 4절)  303
기독교 도덕가들은 불안을 달래려면 낙관적인 사람들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모든 것이 최악으로 흘러간다고 강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천장은 무너져 내리고, 은행은 폐허가 되고, 우리는 죽고,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사라지고, 우리가 이룬 것들, 심지어 우리의 이름마저 땅에 짓밟힐 것이다. 이런 생각이 위로가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지위에 대한 우리으 ㅣ하찮은 걱정을 천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미미함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된다.  320
우리 자신이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은 우리 자신을 더 중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321

(그림1과 2는 58페이지에 언급된 내용이며, 그림3과 4는 321페이지에 있다.)


물론 기독교는 세속 도시와 그 가치를 없애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도 서양에서 사람들이 부와 미덕을 구분한다면, 또 중요한 사람이냐 아니냐만 따지지 않고 선한 사람이냐 아니냐도 따진다면, 그것은 많은 부분 수백 년 동안 자신의 자원과 위신을 이용하여 지위의 의로운 분배에 대한 몇 가지 특별한 관념을 옹호해온 기독교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342

V. 보헤미아
19세기 초 서구와 미국에서 새로운 집단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박한 옷을 입었고, 도시의 싼 지역에 살았고, 책을 많이 읽었고, 돈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다수는 우울한 기질이었고, 사업이나 물질적 성공보다는 예술과 감정에 충실했고, 가끔 단발이 유행하기 오래전에 단발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들을 '보헤미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앙리 뮈르제가 파리의 다락방과 카페의 생활을 그린 <보헤미안의 생활>(1851)을 써서 성공을 거둔 뒤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품위라는 부르주아적 개념에 들어맞지 않는 광범위한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351
아서 랜섬은 <런던의 보헤미아>(1907)에서 '보헤미아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태도다'라고 말했다.  352


보헤미안들은 부르주아지가 대표하는 거의 모든 것을 지독하게 싫어했으며, 그들을 무절제하게 모욕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353
보헤미아와 부르주아지를 궁극적으로 갈라놓는 것은 대화의 화제나 후식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누가 높은 지위를 얻을 자격이 있고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하는 문제엿다.  354
부르주아지는 상업적 성공과 공적인 평판에 기초하여 지위를 부여한 반면, 보헤미안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 우아한 집이나 옷을 살 수 있는 능력보다 당연히 더 중요했던 것은 세상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감정의 주요한 저장소인 예술에 관람자나 창조자로서 헌실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보헤미안의 가치 체계에서 순교자적 인물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또는 여행이나 친구와 가족에게 헌신하기 위해 안정된 정규 직장과 사회의 존경을 희생한 사람들이었다.  355
보헤미안의 가치 체계에서는 돈으로 명예를 얻지 못하듯이 소유로도 명예를 얻지 못한다. 그것은 오만과 천박의 상징이다.  360
1845년 7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보헤미안 가운데 한 사람인 헨리 소로는 메사추세츠 주 콩코드 시 근처 월든 호수에 자신이 손으로 지은 통나무집으로 이사했다. 
소로는 '사람은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행복해진다.'
'영혼에 필요한 것을 사는 데 돈은 필요하지 않다.'  364
주류 문화와 갈등하면서도 자신 있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직접적인 환경에서 작동하는 가치 체계. 우리가 사교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 우리가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보헤미안들의 통찰이다. 
보헤미안들은 대도시에 살면서 지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피하고 대신 진정한 친구들과 매일 접촉할 수 있는 동네에 모여 살았다.  364
보헤미안들은 또 실패라는 말도 조심스럽게 재규정했다.
보헤미안들은 세상이 어리석음과 편견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여 외적인 실패를 버로 해석하지 않았다.  366
오해를 받고 거부를 당하며 살지만 그럼에도 인사이더보다 우월한 아웃사이더라는 신화는 보헤미아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 다수의 삶을 반영하거나 그 삶을 규정한다.  367
집단과 그 전통은 열등하다는 보헤미아의 믿음과 더불어 개인의 우월성에 대한 강조가 나타났으며, 이와 더불어 관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나타났다.
빅토르 위고는 <에르나나>(1830)의 서문에서 '이제 규칙은 없다. 재능 잇는 사람이 개인적 독창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신이 하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에세이 <자립>(1840)에서도 '인간은 모름지기 순응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결코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지 말자... 이 시대의 매끈한 평범함과 비열한 만족을 모욕하고 질책하자.'  372

보헤미아의 과도한 점을 지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많은 보헤미안들이 영적인 관심을 삶의 전면에 내세우는 데 몰두한 나머지 실제적인 문제를 태만히 햇다. 이 대문에 그들은 생존할 만한 일을 찾는 데 안간힘을 써야 했으며, 이렇게 되자 영을 생각할 시간은 줄어들고 몸 생각을 해야 하는 시간은 늘어났다. 심지어 물질주의적이라고 욕하던 바쁜 판사나 약사보다 나을 것이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380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 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산업가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보헤미안으로부터 인정 받을 수도 있으며,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철학자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다.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이 아무리 불쾌하다 해도 그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좋은 인생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실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창피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야심을 품고, 어떤 결과들을 선호하고, 자신 외의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데서 나오는성공적인 삶과 성공적이지 못한 삶 사이의 공적인 차이를 인정할 경우 치를 수밖에 없는 대가다.
그러나 지위에 대한 요구는 불변이라 해도, 어디에서 그 요구를 채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창피를 당할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은 어떤 집단의 판단 방식을 우리가 이해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결국 우리가 따르는 가치와 관련이 되는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따르는 것은 두려움을 느껴 나도 모르게 복종을 하기 때문이다. 마취를 당해 그 가치가 자연스럽다고, 어쩌면 신이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거기에 노예처럼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너무 조심스러워 대안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 이 다섯 집단은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수치와 명예의 구분 자체는 유지하면서, 무엇이 각 항복에 속해야 하는지를 재규정하려 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각 세대마다 높은 지위에 대한 지배적인 관념들을 충실하게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럼에도 패자나 이름 없는 사람이라는 잔인한 규정과는 다른 규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정당성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결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384-385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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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에서 고전을 친근하게 접할 수 있도록 기획한 안내서이다. 'e시대의 절대사상'이라는 이름으로 고전 시리즈를 기획하여 출판한 책이다.
그렇기에 책은 읽기가 편하다. 
개인적으로 1부의 내용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저자가 사기를 접하게 된 계기로 시작하여 사기가 어떠한 도움을 주게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에 대해 그리고 사기 전체 130편의 형식에 대한 설명들이 쉽지 않은 사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특히나 사기의 형식을 설명하는 파트는 열전 70편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것 같다.
시대적인 배경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읽었기에 전후 문맥을 모두 비교해 보면서 읽은 몇개의 장 이외에는 연결이 잘 되지 못하였는데, 설명을 보면서 시대적인 구분과 열전의 종류들을 구분해 보면서 좀더 사기에 다가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책을 선정했을 때 총 3부의 구성 중에 1부의 부분만을 보려 했다. 
사기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설명은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2부인 본문 발췌 부분도 읽고 싶어 졌다. 그리고 마지막 3부의 사마천 연보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사기를 읽으면서 좀 난해 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런 부분들에 대해 더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사기가 쉽지 않은 내용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고전이 고전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그 만한 이유가 있고, 깊이도 있다는 점을 알게해준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좀 더 독자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을 이다. 
쉽게 접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해설. 
그것이 1부에 있기에 분명 미숙한 나에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사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라면 해설서에 따라 여러 챕터를 나누어서 읽어본다면 덜 힘들게 읽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처음 사기를 접했을때의 생각이 난다. 무작정 덥벼들어 고행하듯이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그렇게라도 끝까지 읽어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중도에 덥어버렸다면 다시금 사기를 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는 한국인이므로 이제 우리 입장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몇 가지로 나누어 본다.
첫째, 현실적인 중국인의 코드를 읽을 수 있습니다.
둘째, 사마천의 <사기>는 중국 문화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셋째, 중국인의 통일 관념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33-43
(사실 이부분은 밑줄 긋는게 큰 의미가 없다 11페이지 전체를 읽어야 좋을것이라 생각든다)

'항우 휘하에서도 계포는 용맹으로써 이름을 날렸으니 장사이다. 그런데도 구차하게 노예가 되다니 무슨 망신인가. 그러나 계포는 자신의 실력을 믿었기에 그렇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태연했다. 언젠가는 실력을 발휘할 날이 있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 제국의 명장이 되었다. 생각이 있는 자는 함부로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찮은 인간들이 감상에 젖어 자살하곤 하는데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막다른 골목에 몰려 뭘 더 해보려고 해도 실력이 없기 때문이다.' 유심히 읽어보면 사마천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49

<사기>를 읽으면 실패한 인생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띕니다. 역사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데 <사기>에는 왜 이렇게 실패한 인생이 많을까요? 사마천은 세속덕인 성공과 실패에 착안하여 인물을 선별한 것이 아닙니다. 설령 실패했다 하더라도 실패한 인생으로부터 역사적 의미를 발굴하여 그들이 현실에서 당한 고난과 고통을 후세의 명예로 위로하고자 했습니다.  54


알고 보면 간단한 <사기>의 형식
본기(本紀)
우선 12편의 '본기(本紀)'를 설정하여 황제(黃帝)로부터 한무제까지 12명의 제왕을 기준으로 국가의 중대사를 연대별로 간명하게 정리했습니다. 편년체로 이루어진 공자의 <춘추>형식을 인물 위주로 개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기'는 무슨 뜻일까요? 본(本)은 근본, 기(紀)는 기(記)의 뜻으로 기록. 그러므로 본기는 '근본이 되는 기록'입니다. 따라서 '본기'에는 정책의 반포 및 개정, 관리의 임명과 파면, 정잰이나 자연 재해, 외교 등의 대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건은 국가의 흥망성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그와 관련된 결정권은 항상 항제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황제의 일대기를 연대순으로 서술하면서 연관된 국가 대사를 언급하면 가장 근본적인 기록이 되는 것입니다. 
본기는 시대순으로 배열된 것입니다. 
사기는 통사이고 '본기'는 기본적으로 편년체 형식이므로 중간에 연도가 비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기> 12본기에는 진본기, 항우본기, 여태후본기 도 있습니다. 물론 당시 천하의 권세가 항우와 여태후에게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126-127

표(表)와 서(書)
10개의 표(表)를 만들었습니다. 태사공자서에서 그는 '같은 시대인데도 연도 표기가 달라서 연대를 명료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10표를 짓는다.
예를들어 춘추전국시대 각 제후국들은 제각기 연도를 기록했기 때문에 상호 공유하는 사건의 흐름이나 인물의 행적등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 힘듭니다. 따라서 각 제후국의 연ㄷ를 통합하여 표로 만들어 주면 언제 무슨 대사건이 발생했는지 훑어만 보아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사마천이 표를 만든 이유는 기본적으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표의 역할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본기나 세가 혹은 열전 등과 상호 보완되도록 기획하였습니다.  130
8개의 서(書)를 마련하여 국가의 중요한 제도를 테마별로 정리하였습니다.  133

세가(世家)
세대 세(世), 집 가(家). 대대손손 이어지는 가문이란 뜻입니다.
북극성과 바퀴 축은 '12 본기'에 등장했던 황제 혹은 패왕을 말하며, 28개 별자리와 30개 바퀴살은 그 황제나 패왕을 보필했던 제후 왕, 혹은 공신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34

열전(列傳)
전형적인 인물을 통하여 시대상을 보여주는 참신한 역사 기술 형태입니다.
열(列)은 열거하다, 전(傳)은 전하다. 그러므로 '열거하여 전한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열거하여 누구에게 전한다는 것일까요? 의로운 사람, 탁월한 사람, 기회를 포착하여 대성한 사람들의 행적을 열거하여 후세에 전한다는 뜻입니다.

백이, 숙제, 노중련, 굴원과 같은 인물은 의로운 사라에 속합니다. 
관중, 범저, 여불위, 이사와 같은 인물은 기회를 포착하여 대성한 사람에 속합니다.
손자, 오자서, 소진, 장의, 인상여, 유경과 같은 인물은 물론 탁월한 인물에 속합니다. 
그렇지만 잔혹한 혹리(酷吏)나 곡학아세의 공손홍, 그리고 호모에 가까운 영행 집단, 조폭에 가까운 유협(遊俠)집단, 코미디언에 가까운 골계(滑稽)집단, 심지어 점쟁이 군상들은 과연 어디에 속할까요? 그러므로 '열전'의 인물은 윤리 도덕적 판단으로 선정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상을 반영하거나 역사적 의미를 기준으로 기록했던 것입니다. 

열전의 인물은 누구 하나라도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갖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이 점을 파악해야 <사기>를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열전'이 '본기'나 '세가'보다 훨씬 흥미로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열전'에 기록된 인물의 신분을 극히 다양합니다. '본기'에 기록된 제왕, '세가'에 기록된 후작들을 제외한 인물 중에 의롭거나 탁월하거나 대성한 사람들이 '열전'에 수록되엇ㅅ브니다.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인물들이 다양하게 활약했던 기록이므로 '본기'나 '세가'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흥미진진한 것입니다.  139-141

열전 70편의 배열 원칙, 시대순 밑 역사적 사회적 의미
연대를 기준으로 하되 인물의 성격이나 사회적 의미를 참고하여 배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연대 별로 7대 범주로 나누고 그 의미를 약술해 보기로 하지요.

1. 백이열전, 관안열전, 노자한비열전, 사마양저열전. 손자오기열전, 오자서열전, 중니제자열전(7편)
상고시대부터 춘추시대까지의 인물입니다. '백이열전'을 첫머리로 장식한 것은 심오한 뜻이 담겨 있지요. '열전'의 작성 기준과 의미를 담았으므로 요즘으로 말하면 책 첫머리의 '일러두기'라 봐도 무방합니다. 관중과 안영은 법가, 노자는 도가, 사마양저와 손자 그리고 오기는 병법가로서 춘추시대의 탁원한 인물들입니다. 오자서는 춘추시대의 명재상이며, 중니(공자)의 제자들은 춘추시대의 유가 학파들이죠.

2. 상군열전, 소진열전, 장의열전, 저리자감무열전, 양후열전, 백기왕전열전, 맹자순경열전, 맹상군열전, 평원군우경열전, 위공자열전, 춘신군열전, 범저채택열전, 악의열전, 염파인상여열전, 전단열전, 노중련추양열전, 굴원가생열전(17편)
전국시대 인물들입니다. 전국시대의 국제정세는 진(秦)나라가 주도했으므로 진나라 인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상군(=상앙)은 진나라가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수훈을 세웠고, 소진은 합종 전략, 장의는 연횡 전략을 각각 구사했던 바 모두 진나라가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저리자, 감무, 양후, 백기, 왕전 등은 모두 진나라의 명재상이거나 맹장ㄷㄹ로서 진시황제의 천하통일에 초석이 되었습니다. 나머지 인물들은 진나라를 제외한 함곡관 동편의 여섯 제후국 인물들입니다.
맹자와 순자(=순경)는 전국시대 유가 학파의 계승자 겸 집대성자였으며, 맹상군, 평원군, 위공자(=신릉군), 춘신군은 모두 진나라에 대항했던 각국의 귀공자들이었습니다. 범저와 채택은 객경(客卿)으로서 진나라 귀족 양후를 축출하고 대성했으므로 그 뒤에 수록했습니다. 악의는 연나라 명장이며, 염파와 인상여는 조나라 명장 및 명재상이었고, 전단은 제나라 명장으로 그 나라의 흥망성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걸출한 인물이었습니다. 노중련과 굴원은 의로운 인물이었는데, 노중련열전과 추양과 가생을 더불어 기록한 이유는 비슷한 계열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3. 여불위열전, 자객열전, 이사열전, 몽염열전(4편)
진시황제의 천하통일이 임박했던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의 격변과 관련되 인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상으로서 진시황제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여불위, 진시황제를 암살하려 했던 형가의 행적, 진시황제의 천하통일과 통일후 일련의 역사적 조치에 깊숙이 관여했던 이사, 진 제국의 건설 및 만리장성 축조와 관련되 몽염 등을 차례대로 기록하였습니다. 

4. 장이진여열전, 위표팽월열전, 경포열전, 회음후열전, 한신노관열전, 전담열전(6편)
진 제국이 무너지고 항우와 유방의 초한(楚漢)쟁패가 시작 되었습니다. 항우와 유방은 이미 '본기'에서 다루었으므로 이 시기에 활약했던 전국시대 각 제후구그이 후예를 중심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장이와 진여는 전국시대 조나라, 위표는 전국시대 위나라, 한신은 전국시대 한나라, 노관은 전국시대 연나라, 전담은 전국시대 제나라의 후예들로 각기 연고지이ㅔ서 활약하였습니다. 한편 팽월과 경포 그리고 회음후는 모두 유방을 도와 한 제국 건립에 공한한 비유씨(非劉氏) 제후 왕들이며 모두 반란죄로 처형되었습니다. 이상 6편의 열전을 초한쟁패의 혼란기에 활약했던 풍운아들입니다.
 
5. 번역등관열전, 장승상열전, 역생육가열전, 부근괴성열전, 유경숙손통열전, 꼐포난포열전(6편)
한고조 유방이 한 제국을 건립할 때 음양으로 수훈을 세웠던 공신들이며 한고조에 이어 여태후 시절까지 충성을 다하여 한 제국의 유지 및 발전에 공헌한 인물들입니다.

6. 원앙조착열전, 장석지풍당열전, 만서장숙열전, 전숙열전, 편작창공열전, 오왕비열전, 위기무안후열전(7편)
한 제국 효문제와 효경제 시절의 문신과 무장들을 다루었습니다. 

7. 한장유열전, 이장군열전, 흉노열전, 위장군표기열전, 평진후주보열전, / 남월열전, 동월열전, 조선열전, 서남이열전, 사마상여열전, 회남형산열전, / 순리열전, 급정열전, 유림열전, 혹리열전, / 대원열전, 유협열전, 영행열전, 일자열전, 귀책열전. / 화식열전(22편) 
한무제 시절의 다양한 인물을 기록하였습니다. 위 22편을 인물의 성격이나 행적으로 다시 세분하면 대략 5개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장유열전, 이장군열전, 흉노열전, 위장군표기열전, 평진후주보열전 등 5편은 북방 기마민족 흉노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남월열전, 동월열전, 조선열전, 서남이열전, 사마상여열전, 회남형산열전 등 6편은 흉노를 제외한 주변 이민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순리열전, 급정열전, 유림열전, 혹리열전 등 4편은 한무제 시기의 정치적 색채를 드러내는 인물을 다루고 있습니다. 대월열전, 유협열전, 영행열전, 골계열전, 일자열전, 귀책열전 등 6편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인물 중심으로 엮은 것입니다. 마지막 화식열전은 한무제 시기를 중점적으로 서술했지만 경제를 중심축으로 하여 사마천 시대까지의 중국경제 문제를 인물에 기대어 서술한 내용입니다.  142-146

열전의 표제 기준
열전의 표제는 일정한 기준을 적용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관직으로, 작위로, 봉읍지로, 호치으로, 성명으로, 성씨만으로, 시호로, 생(生)이나 자(子)는 '선생님'의 뜻으로 다양하게 적용했습니다. 
관직, 작위, 봉읍지, 시호 등으로 명명한 것은 일종의 예우며, 생(生)이나 자(子)로 불러주는 것도 일종의 존칭이라 하겠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사마천은 그대로 채용했을 것입니다.  147-148

열전의 종류 : 전전, 합전, 유전, 부전

전전(專傳) : 전적으로 한 명만을 기록
'전전'이란 오로지 한 명만을 전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오자서열전, 상군열전, 소진열전, 위공자열전, 전단열전, 여불위열전, 회음후열전, 한장유열전, 사마상여열전 등이 그러하지요.

합전(合傳) : 둘 이상을 대등하게 기록
'합전'이란 두 사람 이상을 대등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관안열전, 노자한비열전, 손자오기열전, 중니제자열전, 저리자감무열전, 백기왕전열전, 맹자순경열전, 평원군우경열전, 범저채택열전, 염파인상여열전, 노중련추양열전, 굴원가생열전, 정이진여열전, 위표팽월열전, 한신노관열전, 번역육가열전, 부근괴성열전, 유경숙손통열전, 계포난포열전, 원앙조착열전, 장석지풍당열전, 만석군장숙열전, 편작창공열전, 위기무안후열전, 위장군표기열전, 평진후주보열전, 회남형산열전, 급정열전 등이 그러하죠. 
표제부터 두 명 이상의 인물 성씨 혹은 성명을 나열했기 때문에 첫눈에 '합전'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합전'으로 처리했을까요? 
대략 다음 4가지 이유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합전의 4가지 이유
첫째, 학술적으로 연관된 인물.
노자한비열전, 손자오기열전, 중니제자열전, 맹자순경열전, 편작창공열전 등이 그러합니다. 한비자는 법가이나 그 원류는 도가의 노자입니다. 손무, 손빈, 오기는 모두 병법가입니다. 공자의 제잗르은 당연히 공자를 원조로 삼았습니다. 맹자와 순자는 전국시대 유가학파의 거벽입니다 편작과 창공은 명의들입니다. 이들의 학문은 서로 깊은 연관성이 있으므로 합쳐서 서술한 것이죠. 
비슷하거나 관련된 학술 인물을 합쳐서 서술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노자한비열전처럼 원류로부터 영향까지 그 맥락을 살필 수도 있고, 중니제자열전처럼 해당학파 제자들의 활약상을 통하여 유가사상이 중국의 정치 및 사회이ㅔ서 주도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던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업적이 비슷한 인물. 
관안열전, 백기왕전열전, 번역등관열전, 역생육가열전, 유경숙손통열전, 장석지풍당열전, 위장군표기열전 등이 그러합니다. 관중과 안영은 제나라 명신들로 진시황제의 천하 통일에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번쾌, 역상, 하후영, 관영 등은 전투로 유방을 보좌하여 한 제국 건립에 공한하였습니다. 역이기, 육가는 변사로서 정적을 설복하거나 정책을 제시항 한 제국의 건립 및 안정에 공헌하였습니다. 유경은 관중 땅에 도읍지를 정하는 문제 및 흉노와의 선린 정책을 건의하였고, 숙손통은 조정과 종묘의 예법을 마련한 점에서 모두 한 제국의 안정에 공헌하였습니다. 정석지와 풍당은 한문제에게 직언하며 공정한 법 집행과 사심 없는 행정으로 청명한 정치를 일구었고, 위청과 곽거병은 한무제의 친척으로 흉노와의 전투에서 수훈을 세웠습니다. 이렇듯 업적이 비슷한 인물을 합쳐서 기록하였습니다. 이렇게 처리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업적이 비슷하므로 중복된 사건은 간명하게 처리하면서 편폭까지도 줄일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해당 시기에 어떤 인재와 어떤 정책이 주효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셋째, 삶이 비슷한 인물. 
범저채택열전, 염파인상여열전, 위표팽월열전 한신노관열전, 회남형산열전, 장이진여열전, 원앙조착열전, 위기무안후열전, 평진후주보열전 등이 그러합니다. 범저와 채택은 모두 변사로서 진나라에서 대성했다가 적절한 시기에 자리를 양보하고 산뜻하게 물러났습니다. 염파와 인상여는 서로 양보하고 협력하며 조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었습니다. 위표와 팽월은 초한상쟁 시절에 전국시대 위(魏)나라 지역을 근거지로 항우와 대항하여 한 제국의 건립에 간접적으로 공헌했습니다. 한왕 신과 노관은 흉노에 투항했고, 그 자손들은 다시 한 제국에 귀의하였습니다. 회남여왕 유장 및 회남왕 유안, 그리고 형산왕 유사는 모두 한고조 유방의 종친으로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였습니다. 장이와 진여는 전국시대 위(魏) 지역의 명사들이니데 문경지교에서 철천지원수가 되었습니다. 원앙과 조착은 질투와 알력으로, 위기후 두영과 무안후 전분은 외가 신분으로 암투를 벌이다 자멸하였습니다.. 공손홍과 주보언은 주변 이민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의견의 합치와 불일치로 암투를 벌이다 공멸하였습니다. 이들의 삶은 상호 긴밀하게 ㅇㄴ관되었거나 업무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공통점이 있죠.
삶이 비슷한 인물을 합전으로 처리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기전체란인물 위주의 서술입니다. 그런데 사건을 서술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관련된 인물을 언급하게 됩니다. 중요한 인물일수록 같은 사건을 동일하게 되풀이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중복 서술은 불가피해집니다. 이런 경우 삶이 비슷한 인물을 합전으로 처리하면 관련된 사건이나유사한 사건의 경우 일괄 서술할 수 있으므로 사건의 전후맥락을 분명하게 전개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편폭 또한 크게 절약할 수 있습니다.
넷째, 성품이나 인생관이 비슷한 인물.
계포와 난포는 모두 협객으로 한때 노예로 전락했으며 의리와 신의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만석군 집안과 장숙은 모두 신중한 성격과 돈후한 인품으로 그 당시 군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급암과 정당시는 인품을 도야하며 청렴한 정치에 힘써 세인의존경을 받았습니다. 노중련과 추양은 평민으로서 세도가에게 당당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였습니다. 굴원과 가의는 능력과 인품을 고루 갖추었지만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울적하게 생을 마감했으며 두 사람 모두 사부(辭賦)의 대가였습니다.
성품이나 인생관이 비슷한 인물을 합전으로 처리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해당 시기에 어떤 인재가 어느 분야에서 어떤 역할을 햇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복잡다단한 인물 군상이 간명하게 정리되므로 다연히 편폭도 깔끔하게 줄어듭니다.
이상으로 보건대, 두 사람 이상을 묶어 한 편으로 처리했던 기준은 학술적인 관계, 비슷한 업적, 비슷한 삶, 비슷한 성품이나 인생관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관안열전, 노자한비열전, 손자오기열전, 백기왕전열전, 노중련추양열전, 굴원가생열전, 편작창공열전 등에서 보다시피 수십 수백 년 떨어진 인물을 한 편으로 처리하기도 합니다. 여러 명을 한 편으로 처리하면서도 어떻게 흔적 없이 통합시켰는가 하는 문제는 역사를 보는 안목과 문학적 수양이 관건인데 이런 문제에 있어서 사마천의 혜안과 박력이 돋보입니다.

부전(附傳) : 덜 중요한 관련 인물을 덧붙여 첨부
'부전'이란 중심인물 밑에 덜 중요하나 인물을 첨부하여 서술하는 형식입니다. 따라서 등장인물들이 동등한 가치를 갖는 '합전'과는 구별됩니다. 역사에는 중요한 인물과 사건 이외에도 덜 중요한 인물이나 덜 중요한 사건이 있게 마련이죠. 덜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을 동일한 비중으로 모두 살리려다 보면 기전체와 같은 인물 위주의 역사 기술에서는 편폭이 폭증하여 전체적으로 잡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중요 인물의 행적을 집중적으로기록하면서 그와 관련된 인물을 가볍게 언급해주면 편폭이 간결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덜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도 경제적으로 안배할 수 있게 됩니다. '부전'은 기저체 형식에서 이렇듯 무척 경제적인 서술법이므로 비단 열전에만 국한되지 않고 본기, 세가, 서, 표에서도 적절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관안열전은 관중과 안영을 중심인물로 서술하면서 자연스럽게 포숙아와 월석보도첨부하여 기술하였습니다. 포석아와 월석보는 관안열전에 첨부되면서 그 인물과 행적이 후세에 전해진 셈입니다. 오자서열전의 신포서와 백공, 상군열전의 공숙좌와 조량, 맹상군열전의 풍환, 평원군우경열전의 모수와 이동, 위공자열전의 후영과 주해 그리고 모공과 설공, 춘신군열전의 이원과 주영, 범저채택열전의 수가와 위제, 염파인상여열전의 조사와 조괄 그리고 이목, 전단열전의 태사교녀와 왕촉, 여불위열전의 노애, 이사열전의 조고, 장이진여열전의 관고와 조우, 회음후열전의 괴통, 역생육가열전의 주건, 원앙조착열전의 등공, 평진후주보열전의 서락과 엄안 등등이 모두 관안열저노가 마찬가지로 관련된 인물을 덧붙여 서술해준 경우입니다.
'부전'에서 첨부하는 인물은 그저 관련된 인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 인무로가 비슷한 유형의 인물도 덧붙여 언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자손이나 친척을 더불어 언급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전(類傳) : 비슷한 직업이나 유형의 인물을 통합하여 기록
'유전'이란 비슷한 직업이나 유형의 인물을 모아 기록한 열전입니다. '유전'의 유(類)는 종류의 뜻으로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성어를 떠올리면 쉬비게 이해될 것입니다. 자객열전, 순리열전, 유림열전, 혹리열전, 유헙열전, 영행열전, 골계열전, 일자열전, 귀책열전, 화식열전 등 10편이 이에 해당됩니다. '유전'의 명칭만 봐도 특수한 계층이나 집단이 역사와 사회에 간과할 수 없는 존재로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전'의 설정은 전체 역사를 거시적으로 조감하고 섬세하게 분류하여 간명하게 통합해야 된다는 점에서 사마천의 예리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포인트입니다.
'유전'은 그저 비슷한 유형의 인물만을 모아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인물 집단이 역사와 사회에 하나의 계층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며 또한 정치와 관련되지 않은 집단은 하나도 없습니다.  148-158

사마천의 의도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기록한 것은 아니엇으나 결과적으로 인물 위주의 역사기록 형식 중에서 <사기>보다 완벽한 모습이 없었으므로 후세 사람들은 정사(正史)의 모델로 여거 대대로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와 <고러사>도 <사기>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170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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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맨은 2005년에 영화로 먼저 접했다. 그땐 아무런 생각없이 꽤나 유명한 배우의 영화이기도 하고, 권투영화이기도 하여 보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는 이 영화에 매료되었다.
우선 실화를 바탕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연기력이 뛰어났다. 또한 1920-30년대 미국의 대공황 시절의 배경이라 한국의 배경과 유사한 부면도 있는듯했다. 거기에 더해 주인공의 서민적인 생활과 역경들을 통해 힘든 삶이 다가왔다. 자신의 업인 권투로 훈련을 계속 하는것이 아니라 가정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의 눈물겨운 생활이 현실감있게 다가왔다. 우연치않게도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약점이 개선되어가고 더 튼실하게 다져지는 역할까지 하여 다시금 도전해 볼 수 있는 과정도 좋았다.
부인역으로 나온 르네 젤위거에 대해서도 인상적이었다. 당시에 르네 젤위거는 좋아하는 배우였고, 그녀의 연기는 분위기에 잘 어우러져 있었다. 남편의 직업자체를 싫어하여 그만두기를 원했지만 결국은 삶의 소용돌이 앞에서 돌아가게끔 할 수 밖에 없는 부인의 심정을 잘 표현하였고, 남편을 끝까지 지키려하는 부인의 모습이 많이 다가왔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는 매료되었다.
그래서 이후에도 여러번 보았다. 작년에도 신데렐라 맨을 보았다. 기억으로는 5, 6번은 보았다. 앞으로도 다시 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영화나 책이 자신에게 꽂히는 것은 그 내용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거나 이상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내용이 이상향을 가지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개인적으로는 꽂힌게 맞다. 
여러 부면들에서 나에게 자극이 되고, 도움이 되어 주는 그런 영화이다.

그냥 꽂힌 영화였다. 영화를 보면서 약간의 아쉬움은 브래독의 인생에서 짧은 부면만 다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화에 꽂힌 이상 그 영화가 좋았고 내용이 좋았다. 이것뿐이었다.
그렇지만 책을 찾아보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년초에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였다. 아주 우연하게 북카페에 잠시 들러 책을 둘러보다가 책이 꽂혀 있었다. 
혹시 영화 신데렐라 맨의 내용인가 하며 책을 빼내었을때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난것 같은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바로 책을 구해서 읽었다.
책을 읽으니 그간 깊은 생각은 아니었지만 영화에서 무언가 이해되지 않았거나 의문을 가지던 것들이 많이 해소되었다.
배경지식들 그의 성장기와 그가 초창기에 어느정도의 인정을 받았는지, 왜 한 물간 복서가 될 수 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긴 시간동안 부둣가의 일을 하였는지, 왜 그간 이긴 경기들에서 돈을 꽤 벌었을텐데 대공황에 그렇게 어려웠는지, 단기간에 맥스 베어와의 경기가 이루어 질 수 있었던 이유 등등을 알게 되면서 영화를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와 그의 매니저 조 굴드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믿고 신뢰하였는지에 대해서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미 영화로 꽂혀 있었기에 책은 너무 금방 읽었다.
빠져서 읽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왜 이 책과 영화의 제목이 신데렐라 맨 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에게는 감동적인 영화고 마음에 들어온 영화이며 감동적인 책이며, 감동을 준 인물이다.
물론 책을 통해 영화를 통해 받은 감동이 좀 줄어드는 느낌은 든다. 매우 현실적으로 다루어 주었기에 영화의 극적인 장면들이 제거되면서 그랬다.

우리가 잘 아는 동화 '신데렐라'에서 신데렐라는 한번으로 인생역전을 이루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그런 의미로 브래독에게 지어지는 별명인데, 그는 그에대한 답변으로 이렇게 말했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 천정까지 관중들이 가득 찬 걸 보면 사람들은 메인이벤트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정말 재수가 좋다고 생각하죠. 혹시 다음번에 그런 생각이 들면, 복서는 하룻밤 새에 갑자기 가든에 들어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 사람은 그때까지 아주 길고 고된,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행로를 걸어온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의 복서인생을 보면 분명 몇 년의 시간을 통해 잊혀졌다가 갑자기 부상하게 된다. 그렇기에 어쩌면 이 별명처럼 급부상하긴 했지만, 이면에는 처절한 노력이 숨어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그는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의 무거운 짐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다녔다. 작업장까지 5-6km를 걸어가야했고, 고된 육체노동을 해야하는데 당시에 그는 오른손이 부러져 깁스를 한채 왼손으로만 일을 했어야 했다. 그나마 그곳에서 일자리를 찾으면 하루의 일당을 벌 수 있으나 일이 없으면 그는 다시금 3-4km를 걸어가서 다른 일을 찾아야만 했다. 일을 구하든 구하지 못하든 그는 하루에 10~20km를 걸어서 이동해야만 했다. 
쉬운 일이 아니다. 걸어보면 알겠지만 5km정도 운동이라 생각하고 걷는것만도 결코 쉬운 거리가 아니라는것을 알게 된다.
그는 그 거리으 최소 2배에서 4배까지의 거리를 매일 걸어서 이동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되는 일당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다.

그가 다시금 사각 링에 올라갈때 그의 마음가짐은 누구나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돈이 필요했다. 이기고 지는것에 앞서 돈이 필요했다. 그의 아이들을 다시 집으로 데려와야 했다. 
얼마나 큰 비장함이었을지 짐작가능하리라.
또한 그는 이겨야만했다. 이유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겨야 다시 다른 시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다시 돌아온 링에서의 첫 게임 묘사가 자세하지는 않지만 영화에서는 좀더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자신도 모르게 몸이 가벼워 지는 것과 맷집이 더 좋아진것, 그리고 앞전에는 왼손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손이었으나 지금은 그 왼손이 또다른 오른손의 역할을 한다는것.
자신의 펀치를 받은 상대를 보면서 매니저도 놀라고 자신도 어리둥절해 하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결국은 그것이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영화를 통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도있었다.

그는 데미지가 있는 펀치를 받으면서도 꿋꿋이 버틴다. 이유는 단 하나다 아빠이고 남편이기에 그렇다. 
복싱 선수로 복싱에 대한 자부심보다 더 앞서 있는 이유였다. 이런 그를 누가 이겨내기 쉽겠는가. 결국에 그는 헤비급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 부분이 영화에서는 극적으로 작용하지만 책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책의 내용이 극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상황에 대한 설명들이 있기에 극적인 느낌은 분명 적다.
맥스 베어의 훈련이나 그가 처음에 원하던 경기도 아니었다는것. 
그리고 도전자가 브래독 밖에 있을 수 없었던 이유도 언급이 되어 있다.

영화는 브래독에게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의 생애중 단 5년 내의 언급만 있다.
이와는 달리 책은 짧더라도 태어난 배경부터 그가 챔피언 타이틀을 내어 준 내용까지 언급되어 있다.
좀더 인간적이며, 그 시대의 복서들에 대한 언급들을 통해 연결 고리들을 더 잘 맞출 수 있게 되어 있다.

책의 부제는 '제임스 브래독, 맥스 베어, 위대한 복서들'이다.
이처럼 그 시절 많은 복서들의 이야기도 함께 있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브래독에게 챔피언 타이틀을 건네준 맥스 베어의 이야기는 브래독 만큼이나 양을 차지하고 있다.
두 사람이 비교되는 것은 맥스는 타고난 복서라는 것과, 브래독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노력을 하여 얻어냈다는 것의 차이때문에 내용을 더 재미있게 연결해 주었다.


현재는 권투가 그리 인기 스포츠가 아니다.
야구 축구 농구 골프 ... 등에 가려져 뒤로 많이 쳐져 있지만, 당시는 권투가 가장 인기 스포츠였다.
현시절로 돌아와서도 어릴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 당시까지도 권투가 엄청난 인기 스포츠였다.
어린시절의 기억에 마이크 타이슨의 경기를 여러번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의 체격도 체격이지만 맞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챔피언으로 타이틀 방어전을 치르는데 1라운드 시작되어 1분여 만인지 그 이전인지 게임이 끝났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타이슨이 여러가지 문제로 교도소에도 가고 사건사고가 있은 후에 홀리필드와의 경기도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가 게임이 풀리지 않아 홀리필드의 귀를 물었던 장면을 TV를 통해 보았었다.
처음엔 왜 갑자기 홀리필드가 날뛰는지 몰랐다. 이후에 자료화면들을 통해서 알게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선수인데 헤비급은 아니었고, 백인선수로 매우 잘생긴 외모의 선수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데 몇 개의 체급에서 챔피언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선수였다.
그의 경기도 중계를 통해 여러번 보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그런 경기 중계를 보면서 무슨 사람이 저렇게 많이 구경을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었는데, 그 이전시대 권투가 황금기를 누릴때 사람들이 얼마나 열광했었을지는 조금이나마 유추해 볼 수 있게된다.

잊혀지지 않는 영화와 그 책이 기분 좋게하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1935년 6월 13일, 복서로서 헤비급 세계 챔피언에 도전하는 위치로 도약한다. 그리고 마침내 침피언 타이틀을 따냈을 때, 그는 역대 챔피언들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브래독이 링 안에서 보여준 비범함 때문도, 링을 뛰어넘어 보여준 카리스마 때문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대중에게 그렇게 어필할 수 있었던 건 평범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짐 브래독이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스포츠 동화의 원형이 되었고, 챔피언 타이틀을 따내기 전 저널리스트 데이먼 러니언(Damon Runyon)은 그에게 '신데렐라 맨'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6

두 사람의 파트너십은 역대 어떤 매니저와 복서에 비춰봐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W.C. 하인즈는 '겉으로 보기엔 머트와 제프(미국의 만화 주인공인 키다리와 꼬마)같았고, 행동으로 봐서는 다모노가 피티아스(고대 그리스에서 목숨을 걸고 맹세를 지킨 두 친구) 같았다.'
두 사람은 마치 부부처럼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돈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죽을 때까지 늘 함께했다. 실제로 사람들은 두 사람을 종종 부부로 묘사하기도 했다.  78



아래를 영화 포스터 이다.


아래는 책의 앞에 나오는 몇 장의 사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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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당신이 생존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고, 
자신의 가슴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꿈을 간직하고 있는가 나는 알고 싶다

....
 
당신의 이야기가 진실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에게는 진실할 수 있는가
배신했다는 주위의 비난을 견디더라도
자신의 영혼을 배신하지 않을 수 있는가 알고 싶다.

어떤 것이 예쁘지 않더라도 당신이
그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가
그것이 거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더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가 나는 알고 싶다.

 당신이 누구를 알고 있고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당신이 슬픔과 절망의 밤을 지샌 뒤
지치고 뼛속까지 멍든 밤이 지난 뒤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수 있는가 알고 싶다.

....
      오리아 마운틴 드리머 


그때 왜
저 사람은 거짓말을 너무 좋아해.
저 사람과는 결별해야겠어.
하고 결심했을 때
그때 왜,
나의 수많은 거짓말했던 모습들이 떠오르지 않았지?

저 사람은 남을 너무 미워해.
저 사람과는 헤어져야겠어.
하고 결심했을 때
그때 왜,
내가 수많은 사람을 미워했던 모습들이 떠오르지 않았지?

저 사람은 너무 교만해.
그러니까 저 사람과 그만 만나야지.
하고 결심했을 때
그때 왜,
나의 교만했던 모습들이 떠오르지 않았지?

저 사람은 너무 이해심이 없어.
그러니까 저 사람과 작별해야지.
하고 결심했을 때
그때 왜,
내가 남을 이해하지 못했던 모습들이 떠오르지 않았지?

이 사람은 이래서, 
저 사람은 저래서 하며
모두 내 마음에서 떠나보냈는데
이젠 이곳에 나 홀로 남았네.
김남기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어느 날 페르시아의 왕이 신하들에게
마음이 슬플 때는 기쁘게
기쁠 때는 슬프게 만드는 물건을 
가져올 것을 명령했다.

신하들은 밤새 모여 앉아 토론한 끝에
마침내 반지 하나를 왕에게 바쳤다.
왕은 반지에 적힌 글귀를 읽고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만족해 했다.
반지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슬픔이 그대의 삶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고
소중한 것들을 쓸어가 버릴 때면
그대 가슴에 대고 다만 말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행운이 그대에게 미소 짓고 기쁨과 환희로 가득할 때
근심 없는 날들이 스쳐갈 때면 
세속적인 것들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이 진실을 조용히 가슴에 새기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랜터 윌슨 스미스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뿐임을.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에 달린 일.

나는 배웠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쏟아 다른 사람을 돌보아도
그들은 때로 보답도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임을.

삶은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곁에 있는가에 달려 있음을 나는 배웠다.
우리의 매력이라는 것은 15분을 넘지 못하고
그 다음은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함을.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함을 나는 배웠다.
삶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린 것임을.

또 나는 배웠다.
무엇을 아무리 얇게 베어 낸다 해도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 놓아야 함을 나는 배웠다.
어느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 시간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두 사람이 서로 다툰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지 않는게 아님을 나는 배웠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게 아니라는 것도.
두 사람이 한 가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를 수 있음을.

나는 배웠다.
나에게도 분노할 권리는 있으나
타인에 대해 몰인정하고 잔인하게 대할 권리는 없음을.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 해서
내 전부를 다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나는 배웠다.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 하더라도 이 세상은
내 슬픔 때문에 운행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것과
내가 믿는 것을 위해 내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는 배웠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을.
트라피스트 수도회 중신으로 예수의 작은 형제회를 설립한 샤를르 드 푸코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의 시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막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오르텅스 블루
파리 지하철 공사에서 공모한 시 콩쿠르에서 8천 편의 응모작 중 1등 당선된 시


농담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이문재


삶이 하나의 놀이라면
삶이 하나의 놀이라면 이것이 그 놀이의 규칙이다.
당신에게는 육체가 주어질 것이다.
좋든 싫든 당신은 그 육체를 
이번 생 동안 갖고 다닐 것이다.

당신은 삶이라는 학교에 등록할 것이다.
수업 시간이 하루 스물네 시간인 학교에.
당신은 그 수업을 좋아할 수도 있고
쓸모없거나 어리석은 것이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충분히 배우지 못하면 같은 수업이 반복될 것이다.
그런 후에 다음 과정으로 나아갈 것이다.
당신이 살아 있는 한 수업은 계속되리라.

당신은 경험을 통해 배우리라.
실패는 없다. 오직 배움만이 있을 뿐.
실패한 경험은 성공한 경험만큼
똑같이 중요한 과정이므로.

'이곳'보다 더 나은 '그곳'은 없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당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어떤 삶으 만들어 나갈 것인가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
필요한 해답은 모두 자신 안에 있다.

그리고 태어나는 순간
당신은 이 모든 규칙을 잊을 것이다.
체리 카터 스코트


여행
...
...
나는 알았다. 삶은 단순히 생존한 것 이상임을.
나의 성공은 도착이 아니라 그 여정에 있음을.
낸시 함멜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
나는 알고 있는가.
내가 나를 소유하는 순간은
숨을 들이마시는 동안인가,
아니면 내쉬는 동안인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다음에 무엇을 쓸지
연필이 알고 있는 정도,
또는 다음에 어디로 갈지
그 연필심이 짐작하는 정도.
잘랄루딘 루미


 세상의 미친 자들
세상의 미친 자들에게 붙여지는 이름이 있다.
현실 부적응자,
반항아,
문제아,
부적함 판정을 받은 자.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자들,
이들은 규칙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상 유지를 별로 존중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들의 말을 인용할 수 있고,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들을 칭찬하거나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 당신이 할 수 없는 단 한 가지는 
그들을 무시하는 일.
왜냐하면 그들은 사물을 바꿔 놓기 때문이다.

그들은 발명하고, 상상하고, 치료한다.
탐험하고, 창조하고, 영감을 불어넣는다.
그들은 인류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어쩌면 그들은 미쳐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텅 빈 화폭에서 그름을 볼 수 있겠는가.
어떻게 침묵 속에 앉아
결코 씌어진 적이 없는 노래를 들을 수 있겠는가.
또는 붉은 행성들을 응시하면서
우주 정거장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미치광이라 부르지만,
우리는 그들을 천재라 부른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미친 사람들만이
결국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어느 고등학교 교사가 썼다고 전해지는 이 시는
애플 컴튜너 사의 텔레비전 광고에 사용되었다.


뒤에야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일을 돌아본 뒤에야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음을 알았네.
문을 닫아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이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네.
마음을 쏟은 뒤에야 평소에 마음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네.
중국 명나라 문인 진계유


옳은 말
제발 내가 그것을 극복했는지 묻지 말아 주세요.
난 그것을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테니까요.
지금 그가 있는 곳이 이곳보다 더 낫다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는 지금 내 곁에 없으니까요.
더 이상 그가 고통받지 않을 거라고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가 고통받았다고 난 생각한 적이 없으니까요.
내가 느끼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다고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당신 또한 아이를 잃었다면 모를까요.
내게 아픔에서 회복되기를 빈다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잃은 슬픔은 병이 아니니까요/
내가 적어도 그와 함께 많은 해들을 보냈다고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당신은, 당신의 아이가 몇 살에 죽어야 한다는 건가요?
내게 다만 당신이 내 아이를 기억하고 있다고만 말해 주세요.
만일 당신이 그를 잊지 않았다면.
신은 인간에게 극복할 수 있는 만큼의 형벌만 내린다고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다만 내게 가슴이 아프다고만 말해 주세요.
내가 내 아리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단지 들어만 주세요.
그리고 내 아이를 잊지 말아 주세요.
제발 내가 마음껏 울도록 
지금은 다만 나를 내버려둬 주세요.
(아이를 읽은 엄마의 시)
리타 모란


진정한 여행
....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나짐 히크메트, 감옥에서 쓴 시


신과의 인터뷰
어느 날 나는 신과 인터뷰하는 꿈을 꾸었다.
신이 말했다.
'그래, 나를 인터뷰하고 싶다구?'
내가 말했다.
'네, 시간이 있으시다면.'

신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의 시간은 영원, 
내게는 충분한 시간이 있다.
무슨 질문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가?'

내가 물었다.
'인간에게는 가장 놀라운 점이 무엇인가요?'

신이 대답했다.
'어린 시절이 지루하다고 서둘러 어른이 되는 것
그리고는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하는것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
그리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돈을 다 잃는 것

미래를 염려하느라 현재를 놓쳐 버리는 것
그리하여 결국 현재에도 미래에도 살지 못하는 것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것
그리고는 결코 살아 본 적이 없는 듯 무의미하게 죽는 것'

신이 나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런 다음 내가 겸허하게 말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자식들에게 그 밖에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신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이곳에 있음을 기억하기를.
언제나, 모든 방식으로'
작자미상


또 다른 충고들
고통에 찬 당팽이를 보게 되거든 충고하려 들지 말라.
그 스스로 고통에서 벗어나올 것이다.
너의 충고는 그를 화나게 하거나 상처 입게 만들 것이다.
하늘의 선반 위로 제자리에 있지 않은 별을 보게 되거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라.
풀과 돌, 새와 바람, 그리고 대지 위의 모든 것들처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시계추에게 달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말라.
너의 말이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의 문제들을 가지고 
너의 개를 귀찮게 하지 말라.
그는 그만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으니까.
장 루슬로


힘과 용기의 차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부드러워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힘이
방어 자세를 버리기 위해서는 용기가

이기기 위해서는 힘이
져주기 위해서는 용기가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의문을 갖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힘이 
전체의 뜻에 따르지 않기 위해서는 용기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끼기 위해서는 힘이
자신의 고통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학대를 견디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그것을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홀로 서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누군가에게 기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힘이
사랑받기 위해서는 용기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힘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데이비드 그리피스



....
당신의 가슴속에 온 세상을 담고 싶다고 말하지 말라.
다만 당신이 상처를 받고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두려웠을 때
어떻게 자신을 버리지 않고 
또 다른 실수를 저지르는 일로부터 드을 돌렸는가 말해 달라.

....

영웅적인 행동을 한 전사 같은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다.
하지만 벽에 부딪쳤을 때 당신이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가,
당신의 힘만으론 도저히 넘을 수 없었던 벽에 부딪쳤을 때
무엇이 당신을 벽 건너편으로 데려갔는가를 
내게 말해 달라,
무엇이 자신의 연약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었는가를.
....
오리아 마운틴 드리머 

삶을 하나의 무늬로 바라보라 - 류시화
시는 인간 영혼의 자연스런 목소리다.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삶을 멈추고 듣는 것'이 곧 시다.  138

5백년 전 북인도 바라나시 갠지스 강변에 살았던 시인 까비르는 '죽기 전에 아무리 많은 책을 읽을지라도 이 한 단어를 알지 못하면 그는 아직 진정한 인간이 아니다. 그 단어는 사랑이다.'라고 말했다.  139

자비의 어원은 '함께 상처를 나눈다.'는 뜻이다.  140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 왜냐하면 상처받는 것은 영혼이 아니라 감정이기 때문이다.
힌두교도들은 영혼을 '가슴 안의 가슴'이라고 표현한다.  141

좋은 시는 어느날 문득 자신과 세상을 보는 방식을 새롭게 한다.  142

이 삶 속에 태어났다면, 당신은 거친 세파를 견딜 각오를 해야만 한다. 온갖 불필요한 충고와 소음을 들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 수많은 병고와 사건이 밀려오리라. 그것이 삶이다. 하지만 더불어 자신의 존재를 지켜낼 만반의 준비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사랑이 당신을 정화하리라는 것도. 사랑은 '당신은 누구예요?' 하고 물을 때 '나는 당신입니다.'라고 대답해야 문이 열린다.(이븐 하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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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유명하다.
고대 로마에 관한 내용들로 유명한 책들이 여러 권있는데, <로마인 이야기>, <로마제국 쇠망사>이다.
이 책들은 워낙 유명하고 현재 가장 유명한 것으로 따지면 로마인 이야기 일것이다.
하지만 에드워드 기번의 쇠망사는  1737년에 태어난 기번이76년에 1권을 시작으로 88년에 6권을 발펴면서 10년이넘는 기간동안 조사하여 기록한 것이라 당시만해도 대단한 작품이었다. 
처칠이나 인도 수상이었던 네루도 기번의 책을 탐독했다고 할 정도로 그 책은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쇠망사에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이후부터 기술하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 역사에 대해 잘 아는 편이었고, 특히 쇠망사 이전의 로마 역사에 대해서 (한니발 전투, 포에니 전쟁, 스파르타쿠스 반란, 키게로의 활약, 갈리아 정복기, 클레오파트라 자살.... 등) 익히 잘 아는 편이었기에 기번은 2000년 동안 번영한 로마의 쇠망역사에 초점을 맞추어 최고의 테마로 작성해 내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는 로마 제국의 시작과 번영의 시절이 어느정도 흐른후의 이야기이고, 생각보다 딱딱한 부면이 있다.
그렇기에 <로마인 이야기>는 우리에게 더 쉽게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책 <30포인트로 읽는 ....>은 편역자가 나름대로 30개의 주제로 기번의 내용을 바탕으로하여 이전의 핵심적인 내용과 쇠망사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전달하려 노력하였기에 기번의 책을 어려워 한다면 그 전에 읽어보면 좋을듯 싶다.
기번의 책을 읽으려는 사람이라도 로마 역사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편이라면 먼저 읽어보면 기번의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옮긴이의 표현을 보면...
무엇보다도 로마가 융성한 요인은 기번도 말하고 있듯이 패배자까지도 동화시켜 버리는 로마인의 영민한 지혜와 강력한 정신력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318


로마 제국은 고대에도 현대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배운다. 좋은것이든 좋지 않은것이든...
그들의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무엇이든 자신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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