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에 해당되는 글 28건

  1. 2022.02.14 학교는 하루도 다니지 않았지만 - 임하영 천년의상상 2017 03810
  2. 2018.09.19 (자유로운 아이들) 서머힐 - A. S. 닐 아름드리미디어 2006 03370
  3. 2018.08.15 공부 공부 - 엄기호 따비 2017 03370
  4. 2018.07.25 공부중독(E-book) - 엄기호, 하지현 위고 2015 03300
  5. 2016.05.05 질문하는 공부법 하브루타 - 전성수 양동일 라이온북스 2014 13590
  6. 2016.02.25 하류지향 - 우치다 타츠루 민들레 2014 03370
  7. 2016.01.18 학교의 슬픔 - 다니엘 페낙 문학동네 2014 03860
  8. 2014.12.26 태평육아의 탄생 - 김연희 양철북 2012 03810
  9. 2014.12.17 삶을 위한 철학수업(자유를 위한 작은 용기) - 이진경 문학동네 2013 04100
  10. 2012.11.28 여행 .. 첫번째 터닝포인트
  11. 2012.11.10 배움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하는가 ... <아름다운파괴> <수상록>
  12. 2012.05.10 더 필요한 공부란 무엇일까...<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공부>
  13. 2012.05.05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공부 - 하승창외 상상너머 2011 03300
  14. 2012.04.18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고미숙
  15. 2012.03.24 방배동 김선생의 공부가 희망이다 - 김종선
  16. 2012.02.21 세 얼간이 - 체탄 바갓 북스퀘어 2011 03840
  17. 2012.02.10 (영상소설) 세 얼간이 - 라지쿠마르 히라니각본 황승윤 북스퀘어 13800
  18. 2011.08.30 공부도둑 - 장회익 생각의나무 2008 03810
  19. 2011.04.22 퇴계에게 공부법을 배우다 - 설흔 예담 2009 03800
  20. 2010.12.13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고미숙 그린비 2007 44100
  21. 2010.11.11 (방배동 김선생의) 공부가 희망이다. - 김종선 이다미디어 2007
  22. 2010.09.24 머리 좋은 아이로 키우는 집 - 시지마 야스시, 와타나베 아키코 삼성출판사 2007
  23. 2010.09.13 '학습(공부)'의 의미 1
  24. 2010.08.27 8월 12일에 서점을 갔다..
  25. 2010.08.27 효과적인 시간관리를 위한 7가지 보너스
  26. 2010.08.26 나는 리틀 아인슈타인을 이렇게 키웠다 - 진경혜 중앙M&B 2001
  27. 2010.08.06 (아버지학교를 위한 강의식 교과서) 부모대학 - 추이화팡 휘닉스 2008
  28. 2010.08.03 이 코너를 시작하며




홍세화 선생님은 불합리한 사회에 맞서 싸우려면 두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먼저 이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 사회가 원하는 실력이 없으면 이 사회에 맞서 발언하고 행동할 기회 자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유념해야 할 한가지는 사회가 인정한 본인의 능력이 당연히 보잘것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 ‘보잘것없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홍세화 선생님은 이것이 쉽지 않은 싸움이라고 말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갖추면 안주할 수 있고, 안주하려는 자신을 합리화하다 보면 사회에 대한 시각 또한 비판적이기보다 긍정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초심을 망각한 재 그저 현실에 순응하며 개인의 안위만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지난한 싸움을 버텨낼 수 있단 말인가? 홍 선생님의 충고를 계속 이어진다.
‘그래서 지금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物神)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성의 항체를 기르라는 것이다. 그대의 탓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의 인간성은 너무 오염되었다. 물신은 밀물처럼 일상적으로 그대를 압박해올 것이며, 그대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물질의 크기로 비교당할 것이다. 그것에 늠름하게 맞설 수 있으려면 일상적 성찰이 담보한 탄탄한 가치관이 요구된다. 그리고 자기 성숙의 모색을 게을리하지 말라. 자아실현을 위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다. 그리고 성찰 이성의 성숙 단계가 낮은 사회에서 그대는 자칫 의식이 깨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에 앞서 오만함으로 무장하기 쉽다. 만약 그대가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면 죽는 순간까지 자기 성숙의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모두 쉬운 길을 택한다. 그러나 삶은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그 소중한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자유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물신의 품에 안주할 것인가. 다시금 강조하건대, 그것은 일상적으로 그대를 유혹하는 물신에 맞설 수 있는 가치관을 형성하는가와 자기 성숙을 위해 끝없이 긴장하는 가에 달려 있다.’ - <생각의 좌표>중에서  17-18

“조급해하지 말아야 돼. 초조함은 남과의 비교에서 비롯되는 거야. 남은 중요하지 않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얼마나 다른지, 또 내일은 얼마나 발전할 것인지 나 자신을 비교하고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지.”
“실패하는 것이 중요해.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아주 멋지게 실패하는 거야. 더 멋들어지게 실패하기 위해서는 더 많이 부딪쳐보아야겠지?”(홍세화와 저자의 만남에서)  22

종종 사람들이 언스쿨링에 대해 물어볼 때 부모님은 이런 답변을 내놓곤 한다.
‘언스쿨링은 배움의 주체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아이들 자신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이들은 각자 다양한 잠재력과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아이들 자신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부모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부모들은 끊임없이 호기심을 불어넣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면서 아이가 스스로 터득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돕기만 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무언가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나타낸다면, 부모는 아이가 그쪽으로 더 가까이, 더 깊이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거죠. 기회를 열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기에 푹 빠져들어 많은 것들을 즐겁게 배우게 된답니다. 학습의 주체가 되어가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언스쿨링에서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진학이 최종적인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단순한 ‘진학’보다는 평생 무엇을, 왜, 어떻게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인생의 소명을 찾아나가는 ‘진로’가 더 더욱 중요한 것이지요. 부모는 아이가 본인의 진로를 탐색하는 과정을 조용히 옆에서 돕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진학이 필요하다면 차후에 대학을 선택해서 공부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대학은 필수 조건이 아니라 선택 사항일 뿐입니다.’
언스쿨링은 기존 학교로부터 단호하게 돌아선다. 배움은 교실에서만, 교과서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언스쿨링은 온 세상이 학교요, 모든 사람이 선생님이라고 말한다. 어디에 가든,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보든, 거기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그렇게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관계와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진정한 배움이라는 것이다.  52-53

사진작가 배병우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면서는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이 여행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예술은 절대로 교육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 개의 길을 여행하고 만 권의 책을 읽으면 예술가가 될 수 있습니다.”  155-156

이제는 공부의 정의를 바꿔야 한다. 1등이 되는 법이 아닌 부끄러움을 아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인간으로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 정도(正道)를 익혀야 한다.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성찰하는 법을 배우고, 주입식 교육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공부할 권리도 마땅히 누려야 한다. 그리하여 죽은 공부가 아닌 살아 있는 공부, 복종하는 공부가 아닌 스스로 길을 찾아나가는 공부가 이루어져야 한다.  255

사람들의 인식이 변해야 제도도 바뀔 것이다. 그러나 어디 사람들이 쉽게 생각을 바꾸겠는가. 시험으로 배움을 측량하고, 성적으로 공부를 평가하려는 행위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럼에도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는 무엇인지, 내 삶에 필요한 공부는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평생 나만의 공부를 지속해나갈 수 있다면, 공부를 통해 배움을 얻을 수 있다면, 배움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다면, 배움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다면, 마침내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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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서문

 

<자유로운 아이들 서머힐>A. S. 닐이 선구적인 자치 자유학교인 서머힐을 설립하고 운영해온 50년의 세월을 되돌아본 책이다. 8

 

서머힐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학교를 아이들에게 맞출 수 있는 구조를 갖추려고 했다는 점이다. 10

 

 

닐과 서머힐

 

목표는 유년기와 청소년기 동안에 완전하고 건강한 감정과 개인의 역량을 키워내는 것이었다. 닐은 아이들이 이런 완저함을 성취하기만 하면, 학문에 필요한 것들을 배우려는 동기는 저절로 가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성장으로 이끄는 열쇠는 아이들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에게 맘껏 놀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이었다. ..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한 아이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 14

 

다른 학교에서는 교육과정의 한 부분으로 가르치는 많은 것들을 서머힐에서는 일상생활의 과정 속에서 다루어나간다. 19

 

따뜻한 마음, 낙관주의, 독립심 그리고 자립성은 서머힐에서는 전염병처럼 쉽게 옮아가는 자질이다. 서머힐의 구조는 아이들을 자립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가장 훌륭한 가족이 그러하듯이 서로에 대한 책임감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21

 

 

들어가는 말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자치, 수업에 들어오거나 들어오지 않을 자유, 필요하다면 며칠, 몇 달, 몇 년이라도 놀 수 있는 자유 , 종교나 도덕이나 정치를 막론하고 모든 교화로부터의 자유, 성격 틀에 맞춰 찍어내기(character oulding)로 부터의 자유. 25

 

학생들과 교사들 사이를 나누는 장벽은 필요 없다. 그런 장벽은 아이들이 만드는 게 아니라 어른들이 만든다. ...

독단적인 권위는 아이에게 평생토록 지속될 열등감을 심어준다. 26

 

아이는 작고 나는 크다. 왜 나는 나보다 작은 아이를 때리고 있는가? 27

 

아이의 무례함은 나를 그 아이의 수준으로 내려버렸다. 그것은 궁극적인 권위로서의 나의 위엄과 지위를 훼손했다. 28

 

서머힐에는 세대 간에 차이가 없다. .. 열두 살짜리 여자 아이가 교사에게 그의 수업이 따분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서둘러 한마디 덧붙이자면, 교사 역시 어떤 아이에게 넌 형편없는 말썽꾸러기야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유는 양쪽에 다 적용되어야만 한다.

교육은 개인적이기도 하고 사회적이기도 한 아이들을 길러내야 한다. 자치는 분명히 그것을 해낸다. 28-29

 

어떤 교사도 북을 시끄럽게 두드리는 아이를 치유할 권리는 없다. 꼭 이루어져야 할 유일한 치유는 바로 불행을 치유하는 것이다. 30

 

문제아는 불행한 아이다. 그 아이는 자신과 전쟁 중에 있다. 그 결과 그 아이는 세상과 전쟁을 벌인다. 31

 

 

서머힐의 사상

 

활동적인 아이들을 책상 앞에 붙들어 앉혀놓고 대개는 쓸데없는 과목들을 공부하게 만드는 학교는 분명 나쁜 학교다. 그런 학교를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만 그 학교는 좋은 학교다. 그리고 돈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 문명에 잘 어울리는 유순하고 창조성 없는 아이들을 바라는 창조성 없는 시민들에게도 그 학교는 좋은 학교다. 35

 

서머힐은 어떤 곳인가? 먼저, 수업은 아이들의 선택 사항이다. 아이들은 수업에 들어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원한다면 몇 년 동안 걔속 수업에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 시간표는 있지만 그것은 교사들의 시간표다.

보통은 나이에 따라 학급을 편성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들의 관심사에 따라서 학급이 편성되기도 한다. 우리에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새로운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법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36

 

인간은 결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어느해 봄 나는 몇 주에 걸쳐 감자를 심었다. 그런데 6월 들어서 그 감자들 중 여덟 포기가 뽑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야단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나의 그런 행동은 권위주의에 젖은 사람의 행동과는 다르다. 나는 단지 감자를 문제 삼았지만 권위주의에 빠진 사람은 선과 악이라는 도덕 문제까지 끄집어낼 것이다. 감자를 훔치는 건 나쁜 짓이라고 나는 말하지 않았다.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내 감자의 문제로만 삼았다. 그건 내 감자이므로 다른 사람은 그 감자에 손대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그 차이를 분명히 하고 싶다. 42-43

 

자유로운 아이들은 쉽게 남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다. 44

 

강조할 것은 아이들이 어른들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아홉 살 난 아이가 공놀이를 하다 유리창을 깨면 나한테 와서 그 사실을 말할 것이다. 그 일로 내가 호통을 치거나 혹은 부도덕한 짓이라고 분개할 거라는 걱정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는 사실대로 말한다. 그 아이는 유리창 값은 물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훈계를 듣거나 벌 받을까봐 겁낼 일은 없다.

두려움이 없을 때 아이들은 낯선 사람들과 더 쉽게 친해진다. ...

아이가 할 일은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 44-45

 

 

전체회의

 

학교 생활 가운데 자치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우리의 목표는 아이들에게 어떠한 것도 강요하지 낳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유가 제한되는 측면이 있다. 누가 음식을 조리하고 어떤 음식을 조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체회의의 투표로 결정하지 않는다. 새로운 교직원의 채용 문제는 아이들과 공식 협의를 거치지 않는다. .. 학생들에게 자치는 그들의 공동 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상황을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50

 

자치에서 어른들이 하는 역할은 무엇일까? 어른들은 이끌려고 해서는 안 된다. 어느 정도 바깥으로 물러나 있는 재주가 필요하다. 51

 

민주주의란 완벽한 제도가 아님을 나는 인정한다. 다수결의원리가 그렇게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독재가 아닌 다음에야 다른 대안을 찾기는 어렵다. 여러 해 동안 내가 놀란 것은 우리 학교의 소수자들이 다수의 판결을 잘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55

 

 

자치

 

민주주의는 아이들이 투표권을 가지는 나이인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런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선거인 명부에 등록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59

 

아마 우리 민주주의가 민주 정치보다 더 공정할 것이다. 아이들은 서로에 대해 대단히 너그럽고, 아무런 기득권이 없기 때문이다. 59-60

 

자치를 하지 않는 학교는 진보학교라고 불리면 안 된다. 그건 일종의 절충 학교다. 아이들이 자기네 사회 생활에서 자치를 이루어나가는 데 완전한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면, 아이들은 자유로운 게 아니다. 우두머리가 있을 때는 진정한 자유가 없다. 이것은 엄격한 우두머리보다는 자비로운 우두머리에게 더 해당되는 말이다. 활기찬 아이는 모진 우두머리에게는 반항을 하지만, 부드러운 우두머리 밑에서는 오히려 유약해지고 자신의 진실함 감정을 분명하게 느끼지 못한다.

학교에서 자치가 잘 이뤄지려면 나이 든 학생 몇몇이 필요하다. 그들은 평온한 삶을 좋아하며, 악동이 아이들의 무관심이나 반감에 맞서 싸운다. 그들은 표결에서는 지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자치제도를 진정으로 믿고 원하는 아이들이다. 한편 열두 살 이하의 아이들은 자치제도를 잘 운영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은 아직 사회 생활을 영위할 나이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머힐에서는 일곱 살짜리 애도 전체회의에 거의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유치원생들까지 투표권을 가지며 종종 훌륭한 발언을 한다. 62

 

모든 교육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아이들을 나이와 분리해서 대하는 태도다. 64

서머힐은 바깥 세상의 삶에서 도피하지 않는다. 그래서 서머힐은 시대에 앞선 공동체 정신을 가질 수 있고 또 가지고 있다. 삽을 보고 땅도 잘 파지 못하는 형편없는 삽이라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실제로 그 삽을 가지고 도랑을 파는 사람만이 형편없는 삽이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70-71

 

 

놀이와 자율

 

놀이에 대한 이론은 많다. 그 중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론은, 어린아이들이 나중의 삶을 위한 연습 행위로 놀이를 한다는 것이다. 즉 새끼고양이가 털실을 쫓아다니는 것은 미래의 쥐잡기를 준비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것은 새끼고양이가 발로 얼굴을 닦고 몸단장을 하는 데도 어떤 목적이 있음을 전제한다. 또는 그와 달리 동물의 행동에는 장차 신성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신의 힘이 작용한다고 전제하기도 한다. 이런 두 가지 가정에 모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새끼고양이나 강아지가 놀이를 하는 것은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믿어야할 것이다. 아이들의 경우에 그 에너지는 타고난 육체적 에너지인 듯하다.

아동기는 성인기가 아니다. 어린 시절은 노는 시기다. 그런데 어떤 아이든 충분하게 놀지 못한다. 아이 때는 충분히 놀아야 앞으로 일을 시작해 나갈 수 있고 또 닥쳐오는 어려움에도 맞설 수 있다는 것이 서머힐의 이론이다. 74

 

내가 생각하는 놀이는 바로 공상과 관련된 놀이다. 조직되니 게임은 기술과 경쟁 그리고 팀워크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보통 아이들의 놀이에는 기술이 필요 없으며 경쟁이나 팀워크도 거의 요구되지 않는다. 75

 

서머힐에서 여섯 살짜리 아이들은 하루 종일 논다. 공상의 날개를 펴고서. 어린아이들에게 공상과 실재는 아주 가깝게 붙어 있다. 열 살 난 남자 아이가 유령 모습을 하고 나타나면 어린아이들은 좋아라고 비명을 질러댄다. 하얀 침대보를 뒤집어쓴 유령이 토미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유령이 다가오면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무서워하며 비명을 질러댄다.

어린아이들은 공상 속에서 살면서 그 공상을 실제 행동으로 옮긴다, 여덟 살에서 열네 살까지의 남자 아이들은 갱 놀이나 인디언 놀이를 하는데, 늘 사람을 죽이거나 나무 비행기를 타고 하늘 여기저기를 날아다닌다. 어린 여자 아이들 역시 갱 놀이를 하는데 총이나 칼을 쓰지 않는 대신 인신공격 성향이 강하다. 메리의 패거리와 넬리의 패거리는 서로를 싫어한다. 그래서 서로 간에 말다툼과 거친 말이 오간다. 남자 아이들의 경우 상대 패거리는 오직 놀이에서 적일 뿐이다. 그래서 어린 여자 아이들보다는 어린 남자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편이 훨씬 더 수월하다.

공상이 시작되고 끝나는 경계가 어디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어린아이들에게 실재와 공상은 아주 밀접하다. 한 여자 아이가 장난감 접시에 음식을 담아 인형에게 줄 때 그 아이는 잠시라도 인형이 살아 있다고 믿는 걸까? 흔들목마를 아이들은 진짜 발로 생각하는 걸까? 어떤 남자 아이가 손들어!” 하고 외치며 총을 쏠 때 그 아이는 자기 총을 진짜 총으로 생각하는 걸까? 나는 아이들이 자기 장난감을 진짜라고 상상한다고 여기고 싶다. 어떤 감수성 둔한 어른이 끼어들어 그것이 공상임을 일깨울 때 비로소 아이들은 현실 세계로 풍덩 떨어진다.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은 놀이에 대한 생각이 분명히 다른 것 같다. 남자 아이들은 여자 아이들보다 훨씬 많이 논다. 여자 아이들은 놀이 자체보다는 공상 세계에 더 깊이 빠져드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남자 아이들은 거의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남자 아이들은 여자 아이들과 놀지 않는다. 남자 아이들은 갱 놀이를 하고 술래잡기를 한다. 나무 위에 오두막을 짓고 구멍과 참호를 파며 논다. 남자 아이들은 어린아이들이 보통 하는 그런 일을 다 한다. 75-76

 

서머힐에서는 게임을 장려하는지 사람들은 묻곤 한다. 우리는 정말 어떤 것도 장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이들이 모험과 공상으로 가득 찬 게임을 하면서 노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 ..

나는 게임과 놀이를 구별한다. 나에게 축구, 하키 럭비, 야구 등은 진정한 놀이가 아니다. 그런 게임에는 놀이의 상상력이 없다. 자유로운 아이들은 공상 놀이(더 좋은 이름이 없어 이렇게 부르겠다)를 좋하하기 때문에 팀을 이루어서 하는 게임을 피하려 든다. 77

 

놀이라는 제목이 들어간 장에서 아이들의 책에 관해 거론해서는 안되겠지만 어딘가에서는 한 번 언급되어야 할 이야기. 78

 

아이들이 읽는 책을 대체 얼마나 검열해야 할까? 잔인한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가학적인 이야기도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어느 일요일 밤, 나는 학생들에게 모험 이야기를 해주었다. 식인종의 가마솥에서 마지막 순간에 구조되는 장면에 이르자 아이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펄쩍펄쩍 뛰었다. 79

 

아이들의 마음은 어른들의 마음보다 훨씬 더 깨끗해 보인다. 어떤 남자 아이는 헨리 필딩의 <톰 존스>를 읽도고 외설적인 구절을 발견하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아이들을 성에 대한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면 어떤 책에나 있을 수 있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셈이다. 나는 어떤 연령층의 책들에 대한 검열도 단호히 반대한다.

언젠가 학교에 새로 들어온 열네 살짜리 여자 아이가 내 서가에서 <어느 소녀의 일기>라는 책을 뽑아 들었다. 그 아이는 안던니 킥킥 웃어대며 그 책을 읽었다. 여섯 달 후 아이는 다시 그 책을 읽었다. 그러더니 책이 이전보다 재미없다고 내게 말했다. 모르고 읽었을 때는 짜릿했던 것도, 알고 나서 읽으면 시시해지는 법이다.

프로이트가 어린아이들에게도 성욕이 있다는 사실을 밝힌 후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에 대한 연구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그런데 성욕에 관한 책은 여러 권 나왔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자율적으로 자란 아이들에 관한 책을 쓴 사람은 아무도 없다. 80

 

자율은 인간성에 대한 믿음, 즉 원죄는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는 믿음을 내포한다. 자율은 어린 아기가 외부 권위의 강제 없이 자유롭게 사는 권리를 의미한다. 이는 배고프면 밥을 먹고, 그렇게 하고 싶을 때만 개끗한 옷을 입고, 혼이 나거나 볼기를 맞지 않으며, 늘 사랑받고 보호받는다는 의미다 물론 자율도 다른 이론적인 생각들처럼 일반 상식과 결합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81

 

자율은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속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을 의미한다. 자율적으로 아이를키우기 위해서 따로 교육을 받거나 성품을 계발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노인이 된 스코틀랜드의 한 마을에 살고 있는 메리가 생각난다. 메리는 놀랍도록 차분하고 평온한 사람이었다. 결코 안달하지 않았고 호통도 치지 않았다. 메리는 본능적으로 자기 아이들편에 섰다. 아이들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엄마가 자신들을 인정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병아리들을 돌보는 푸근하고 온화한 암탉과 같은 엄마였다. 메리는 남을 소유하려는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을 남에게 베풀 줄 아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81-82

 

아이에게 장난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아이가 혼자 힘으로 도저히 문제를 풀 수 없을 때까지는 어떤 식으로든 아이를 도와주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이 요구하는 대로 모두 주지 말라. 이 문제에서 나는 조금 주관적일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에게 꽤 많은 돈을 빚찐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값비싼 최고급새 경주용 자전거를 보내왔기 때문인데, 나는 그것이 싫다. 일반적으로 말해 오늘날 아이들은 너무 많은 것을 받아서 그만큼 선물의 진가를 알지 못한다. 83-84

 

다른 한편으로 아이들에게 너무 인색해서도 안 된다. 아이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여러분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선물을 하는 부모는 흔히 자기 아이들을 충분하게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보상 심리로 아이들에게 값비싼 선물을 퍼부어 자신들의 사랑을 보여주고자 한다. 84

 

아이들은 음악과 진흙을 좋아한다. 아이들은 계단을 쿵쾅거리며 오르내리고 시골뜨기처럼 소리를 질러대고, 가구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술래잡기를 하다가 지나다니는 중에 고대 로마시대의 골동품인 포틀랜드 꽃병이 놓여 있으면 아이들은 그냥 뀌어넘어갈 것이다. 그것이 뭔지 쳐다보지도 않고.

문명의 폐해는 어떤 아이도 충분히 놀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이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모든 아이들이 어른의 나이에 이르기 전에 이미 어른이 되도록 온실 재배되고 있다는 것이다.

놀이에 대한 어른들의 태도는 지극히 독단적이다. 우리처럼 나이 든 사람들이 아이들의 시간표를 짠다. 9시부터 11시까지 수업하고, 그 후 1시간 반 동안 점심 식사 하고, 다시 오후 3시까지 수업한다. 만약 자유로운 아이가 손수 자기 시간표를 짠다면, 그 아이는 분명히 노는 시간을 길게 잡고 수업 시간을 짧게 할 것이다.

아이들의 놀이에 대해 어른들이 가지는 반감의 근원은 두려움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근심 어린 질문을 골백번도 더 들어왔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하루 종일 놀기만 하면, 도대체 공부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시험에는 합격할까요?” 다음의 내 대담에 수긍하는 부모는 많지 않을 것이다. “당신 아이가 놀고 싶은 만큼 실컷 놀더라도, 이 년만 바짝 공부하면 대학입학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삶의 요소로서 놀이가 지닌 가치를 무시하는 학교에서는 보통 입시 준비로 오 년, 육 년, 혹은 칠 년을 공부하지요.”

그 말 다음에 나는 꼭 이렇게 덧붙인다. “물론 그것은 그 아이가 시험에 합격하고 싶어할 때만 그렇습니다!” 어쩌면 그 아이는 발레리나나 엔지니어가 되고 싶을지도 모른다. 혹은 의상 디자이너나 목수가 되고 싶을지도.

그렇다, 아이의 미래를 두려워하는 마음때문에 어른들은 아이에게서 놀 권리를 빼앗는다. 아니, 거기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놀이를 허용하지 않는 태도의 배후에는 모호한 도덕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아이라는 존재는 별로 좋은 게 아니라는 암시, 청소년들에게 어린애처럼 굴지 마라고 훈계하는 목소리에 담긴 암시가 그것이다.

자신들이 어린 시절에 가졌던 동경과 열망을 잊어버린 부모들, 어떨게 놀고 어떻게 공상하는지를 잊어버린 부모들이 불쌍한 부모들을 만들어낸다. 노는 능력을 상실한 아이는 신체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그 아이는 자기와 사귀려고 다가오는 다른 아이에게 위험한 존재가 된다. 아이들이 원하는 만큼 놀지 못했을 때 어떤 손상을 입는지를 평가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84-86

 

 

일과 정직

 

아이들의 공동체 의식, 즉 사회적 책임감은 적어도 열여덟 살은 지나야 충분히 발달한다. 아이들의 관심사는 당장 눈앞의 것에 있다. 아이들에게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89

 

아이가 지금 놀아야 하는 시기에 자유롭게 지낸다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는 어떤 어려움에도 맞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인생관이 바로 정립된다면 직업이 어떤 것인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90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을 너무 자주 부려먹는다. "메리어느 달려가서 이 편지를 우체통에 놓고 와." 어느 아이든 이렇게 이용당하는 것을 싫어한다. 91

 

아이들 스스로 관심이 일지 않는데, 억지로 관심을 가지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은 시간당 얼마씩 주기로 하고 아이들을 고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과 나는 같은 토대 위에 서게 된다. 즉 나는 내 텃밭에 관심이 있고, 아이들을 가욋돈을 버는 데 관심이 있다. 92

 

건전한 문명이라면 최소한 열여덟 살이 되기 전까지는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지 않으리라는 게 내 의견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열여덟 살이 되기 전에 벌써 많은 일을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이들에게 놀이와 같은 것이며 아마 부모의 입장에서는 비경제적인 일일 것이다. 94

 

좋은 버릇은 일찍이 어린 시절에 몸에 배지 않으면 나주엥는 평생 발달하지 않을 거라는 일반적인 전제가 있다. 우리가 그 전제에 길들여져왔고 또 그 생각이 도전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 전제를 아무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인다. 나는 그 전제를 부정한다.

아이들은 자유 속에서만 자기가 타고난 방식, 즉 좋은 방식으로 자랄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자유가 꼭 필요하다. 다른 학교에서 전학을 온 학생들에게서는 억압의 결과물들을 볼 수 있다. 거짓 공손함과 가식적인 예의를 드러내 보이는 그 아이들은 정직하지 못하다. 97

 

아주 어려서부터 자유롭게 자란 아이는 거짓된 태도를 취하거나 가식적인 행동을 하는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 98

 

아이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두어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아이들을 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98

 

 

문제아들

 

아이의 범죄는 모든 경우에 사랑의 부족에서 연유한다. 100

 

아이는 본래 이기주의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어떤 다른 것보다 중요한 사실이다. 에고가 충족될 때, 우리는 선이라고 불리는 것을 행한다. 에고가 굶주릴 때, 우리는 범죄라고 불리는 것을 행한다. 자기에게 사랑을 베풀어서 자기 에고의 진가를 인정해주어야 할 사회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범죄자는 사회에 대해서 복수한다. 101

 

아이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은 힘에 대한 욕구가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선하다. 사람은 선행을 하기를 원한다.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한다. 증오와 반항은 오로지 좌절된 사랑이요 좌절된 힘이다. 111

 

무엇이 처벌이고 무엇이 처벌이 아닌지를 결정하기는 정말 어렵다. 112

 

사랑은 다른 사람의 편에 서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112

 

 

또 다른 문제들

 

자유로워지면 아이들이 거짓말을 별로 안 한다... 아이들은 대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두려움으로 가득한 가정일수록 아이들의 거짓말은 번성한다. 두려움을 없애면 거짓말도 사라진다. 115

 

나는 거짓말하는 것과 부정직한 것을 구별한다. 여러분은 정직하더라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은 인생의 큰 문제에서는 정직하지만 사소한 문제에서는 가끔 부정직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의도에서 거짓말을 한다. ...

대개 어른들의 거짓말은 이타적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거짓말은 늘 편협하고 개인적이다. 아이에게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이를 평생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115-116

 

 

개인 상담

 

요즘 나는 정기 심리 치료를 하지 않는다. 신경증에 걸린 아이를 치유하는 것은 그 아이의 억눌린 감정을 풀어주는 일이다. 아이에게 정신의학 이론을 자세하게 설명한다거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방법으로는 아이를 조금도 치유할 수 없을 것이다. 점점 더 나는, 아이들이 자유 속에서 자신의 콤플렉스를 풀고 마음껏 지낼 때는 심리요법이 불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134

 

장차 치유사가 되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할 것이 있다. 친구들에게는 심리요법을 사용하지 말라. 특히 가족들에게는 더더욱 위험하다. 미술 교사들은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잦다. "네 그림을 보니까 너는 엄마를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하는구나." 그 그림에는 한 아이가 도끼를 들고 나무를 자르려 하고 있다.

상징을 해석하는 일은 십자낱말풀이처럼 재미있는 게임이다. 그것은 환자에게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한다. 많은 정신분석가들은 이제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꿈을 해석하는 것이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왕도라고 했지만, 프로이트 이론을 추종하는 정신분석가들도 더 이상 꿈을 해석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하튼 교사는 상징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가 심리학을 사용하려 한다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한다. 아이의 꿈을 해석하는 것보다는 아이를 직접 껴안아주는 일이 훨씬 큰 도움이 된다.

그렇다고 교사는 심리학을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는게 아니다.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135-136

 

내가 사용한 방법을 간단히 설명하면, 아이들을 대하는 잘못된 방법과 정반대로 햇다는 것이다. 보통 학교에서 도둑질을 하면 그 아이는 회초리로 맞거나 적어도 도덕적 훈계를 들어야 한다. 나는 도둑질을 도덕과는 무관한 문제로 만들었다. 세 학교에서 도망친 전력이 있는 남자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서머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집에 갈 차비가 있다. 벽난로 위에다 놔둘 테니까, 여기서 나가고 싶으면 이 돈을 달라고 해라." 그 아이는 서머힐에서 절대 도망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내 태도 때문이었을까? 혹은 난생처음으로 자유를 맛본 즐거움 때문이었을까?

성공만 한 것이 아니라 실패도 했다. 드레스덴에 있을 때였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여자 아이에게 상자를 만드는 데 너무 많은 못을 쓴다고 말했더니, 그 아이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당신도 전에 만난 잘난 체하는 선생들이랑 똑같아." 나는 그 아이와 다시는 진정한 만남을 가질 수 없었다. 아홉 살 난 레이먼드에게 용돈을 주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현관문을 훔친 벌로 6펜스의 벌금형이야." 그러자 레이먼드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 사건 전에 나는 레이먼드에게 정신병 증세가 있다는 점을 알았어야 했다. 아홉 살 난 아이들에게 모험담을 들려주던 중, 우리가 발견한 금을 마틴이 훔쳐갓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중에 마틴이 울면서 나에게 왔다. "난 절대 금을 훔치지 않았어." 그 이후로 나는 아이들을 악당으로 만들어서 이야기하는 법이 없다. 139

 

이제 노인이 된 나는 심리요법에 대해 어떤 입장인가? 나는 심리요법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잘못된 결과로 가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심리요법도 나름의 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 프로이트는 아이들을 위한 자유를 믿지 않았다고 나는 확신한다. 프로이트는 가부장주의를 고수했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심리요법을 찾는 이유는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이지 가족들이 신경증에 안 걸리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142

 

 

건강

 

아이들은 에티켓을 문제 삼는 일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하지만 사회적인 예의라고 불릴 만한 문제에 대해서까지 자유로워서는 안 된다. 146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예의범절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이들에게 가르칠 만한 가치가 없다. 기껏해야 그것은 관습의 유물일 뿐이다. 진정한 예의범절은 저절로 우러나온다. 146

 

서머힐에서처럼 아이가 자신의 이기심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게끔 자유로워지면, 그런 이기심은 점점 이타주의로 바뀌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심과 배려로 변한다. 147

 

우유 문제를 다루어보자. 여러 해 동안 우리 학생들은 독일, 오스트리아, 도싯, 웨일스에 있는 목장에서 짠 우유를 직접 받아먹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온 살균 처리된 우유 외에는 전혀 구할 수가 없다. 또다시 문외한은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내가 아는 바로는 저온 살균 처리된 우유는 맛이 없고 발효되지 않는다. 단지 상할 뿐이다. 살균 처리되지 않은 우유를 먹으면 결핵에 걸릴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가난한 아이들이 영양 부족 때문에 결핵에 걸린다. 우리는 늘 전문가들의 손안에서 놀아난다. 148

 

 

성과 남녀공학

 

우리 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을 잘 보냈다. 그들은 자위행위를 했다고 훈계를 듣거나 벌을 받지 않았다. 많은 아이들이 가정에서 벌거벗은 몸에 익숙했다. 대체로 성에 대한 태도가 건강하고 자연스러웠다. 168

 

남녀공학인 유명한 사립학교에서 온 청소년 몇 명에게, 그 학교에서 이성교제가 이루어지는지 물었더니, 그런 일은 없다고 했다. 그 대답에 내가 놀라자, 아이들이 말했다. "가끔 남자 애와 여자 애가 친구로 지내는 일은 있지만, 서로 사귀는 일은 전혀 없어." 나는 그 학교 교정에서 잘생긴 남자 아이들과 예쁜 여자 아이들을 보앗던 터라, 학교가 학생들에게 사랑에 반하는 관념을 강요하고 있으며, 대단히 도덕적인 학교 분위기가 성을 금기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언젠가 어느 진보학교의 교장에게 물었다. "학교에서 아이들끼리 사귀는 경우가 있습니까?"

"아니오, 없습니다." 그가 근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는 문제아를 받지 않습니다."

조건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가끔 사랑할 능력을 상실한다. 섹스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되는 소식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젊은이에게 사랑을 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인간적으로 커다란 비극이다. 168

 

젊은이의 사랑에 반대하는 주장들 중 이치에 맞는 주장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거의 대부분의 주장이 억압된 감정이나 삶에 대한 증오심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들은 종교적이고 도덕적이며 독단적이고 외설적이다. 170

 

 

극장과 음악

 

연기는 교육에 꼭 필요한 부분이다. 연기는 대체로 자기과시다. 하지만 연기가 단순히 자기과시에 그쳤을 때, 서머힐에서는 그 배우를 칭찬하지 않는다. ..

연기자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동일시하는 힘이 강해야 한다. ..

연기는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갖게 하는 방법이다. 177

 

마음대로 생활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면, 율동은 모든 아이들에게 유익할 것이다. 180

 

 

교사들과 가르침

 

교사들은 나무 뒤의 숲을 보지 못한다. 그 숲은 풍성한 삶, 성격틀에 맞춰 찍어내기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교사들 대상의 강연을 할 때, 나는 교과나 규율 그리고 수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거라고 애초부터 말한다. 청중들은 한 시간 동안 쥐 죽은 듯 조용히 이야기를 경청한다. 진심 어린 박수갈채 속에 강연을 마치면 사회자가 질문을 하라고 한다. 그런데 그 질문 가운데 적어도 4분의 3이 교과나 가르치는 문제에 관해서다.

무슨 우쭐한 마음으로 이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나는 교실 벽과 감옥 같은 학교 건물이 얼마나 교사의 시야를 좁게 만들고 교육의 진정한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슬픈 심정으로 말하는 것이다. 교사들은 아이들의 목 위 머리 부분만 다룬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핵심 부분인 아이들의 감정은 그들에게 낯선 영역이 되고 만다.

부모들 역시 학교에서 학습이란 측면이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잘 깨닫지 못한다. 어른들처럼 아이들도 자기가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운다. 상을 주고 점수를 매기고 시험을 보는 것은 모두 온전한 개성 발달에서 어긋난다. 학자연하는 사람들만이 책을 통한 학습을 교육이라고 주장한다.

책은 학교에서 가장 중요성이 떨어지는 도구다. 아이들에게는 읽기, 쓰기, 산수 세 가지면 족하다. 나머지 필요한 것들은 공구, 찰흙, 운동, 극장, 그림, 자유 등이다.

이제 우리는 학교 공부에 대한 개념에 도전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아이들이 수학, 역사, 지리, 과학, 약간의 예술, 특히 문학을 당연히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깨달아야만 한다. 보통의 아이들은 이런 과목들에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190

 

학습을 놀이에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재미있게 한답시고 의도적으로 학습에 놀이를 가미해서도 안 된다. 191

 

아이에게 배움을 강제하는 것은 의회의 법령으로 종교를 강제하는 것과 똑같다. 그것은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192

 

청소년들이 하는 학교 공부의 대부분은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인내력의 낭비일 뿐이다. 그것은 아이들에게서 놀고 놀고 또 놀 권리를 앗아간다. 아이들의 어깨 위에 늙은이의 머리를 얹는 꼴이다. '교육'은 아이들의 동기를 고려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노려는 욕망, 자유로워지려는 갈망, 그리고 자신의 모습대로 사는 법을 모르는 어른들이 강제로 틀에 맞춰 키워내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갈망을 '교육'은 고려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모든 나라가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공들여 학교를 세운다. 하지만 존이나 피터나 이반이, 부모와 교사 혹은 우리 문명의 강압성이 가한 억압 때문에 입게 된 정서적 손상과 사회악을 극복하는 데 학교의 실험실이나 작업실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학교 교과들이 왜 그렇게 규격화되었는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왜 역사는 있고 식물학은 없는가? 왜 지리학은 있는데 지지학은 없는가? 왜 수학은 있는데 시민학은 없는가? 늙은 퍼블릭스쿨 교장의 말에 그 답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이가 그것을 싫어하는 한,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든 아무 상관없다." 193-194

 

사범대 학생들에게 강연을 하다보면, 쓸모없는 지식들로 가득찬 그 젊은이들의 미성숙함에 자주 충격을 받는다. 그들은 많은 것을 안다. 논리에 뛰어나고 고전들을 인용할 줄도 안다. 하지만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에서 그들 대다수는 어린아이 수준이다. '아는 법'은 배웠지만 '느끼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친절하고 유쾌하고 의욕에 차 있지만, 뭔가가 부족하다. 감정적 요소, 생각을 감정에 종속시킬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들이 놓쳐버렸고 또 지금도 놓치고 있는 그 세계에대해 이야기해준다. 그들의 교과서는 성격이나 사랑, 자유, 자기 결정 같은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그러니 책을 통한 지식 습득만을 목표로 하는 체계가 지속되고, 머리는 가슴에서 계속 분리되어간다. 199

 

우리네 교육에서 진정한 행위, 진정한 자기표현은 얼마나 될까? 손으로 하는 작업은 전문가의 감독 아래 접시를 만드는 게 고작이다. 유도식 놀이 체계로 유명한 몬테소리 교육법조차, 아이로 하여금 행위를 통해 배우게 만드는 인위적인 방식이다. 거기에는 창조적인 면이라곤 하나도 없다.

창조자들은 자신들의 독창성과 천재성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도구들을 얻기 위해 자신들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운다. 학습을 강조하는 교실 안에서 얼마나 많은 창조성이 죽어가고 있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200

 

공부는 중요하다. 하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다. 200

 

 

서머힐의 교직원

 

토요일 밤 전체회의에서는 어른들과 아이들 사이의 갈등이 드러난다. 그런 갈등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연령층으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어린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면 아이들을 완전히 망쳐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 잠자리에 든 시간에 나이 많은 아이들 패거리가 늦게까지 자지 않고 웃고 떠들면 어른들은 싫은 소리를 한다. 해리는 자신이 한 시간이나 걸려 현관문에 쓸 판자를 만들어놓았는데, 점심을 먹고 와보니 빌리가 그것으로 선반을 만들어버린 것을 알고는 볼멘소리로 투덜거린다. 나는 납땜 도구를 빌려가서는 되돌려주지 앟는 아이들을 비난한다. 나이 어린 세 아이가 저녁 식사 후 배가 고프다면서 빵과 잼을 가져갔는데 다음날 아침 복도에 빵 조각이 널려 있는 것을 보고 아내는 흥분해 소리를 지른다. 피터는 도예실에서 아이들이 자기의 귀중한 찰흙을 던지며 장난친다고 몺 언짢아한다. 어른들의 입장과 아이들의 부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계속된다. 하지만 그 싸움은 결코 서로의 인격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거기에는 개인에 대한 어떤 반감도 없다. 이런 갈등으 서머힐을 생동감 있게 만든다. 204

 

당신이 정말 아이의 편이라면 아이는 그것을 안다. 205

 

수업이 강제가 아닐 때, 아이들을 수업에 들어오게 하려면 정말 좋은 교사가 되어야 한다. 물론 내가 원하는 교사는 어느 정도 유머가 있고 위엄은 전혀 없는 교사다. 두려움을 불러일으켜서도 안 되고 도덕가가 되어서도 안 된다.

유머가 없는 사람은 아이들에게는 분명 위험한 존재다. 유머는 아이들에게 친근감, 존경을 표할 필요 없음, 두려움 없음, 다시 말해 어른들의 애정을 의미한다. 유머는 대개 위아래를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교실이란 울터리를 벗어나 있다. 유머는 교사로서 요구하는 존경을 없애버린다. 왜냐하면 아이들과 함께 웃는 교사의 웃음은 그를 너무나 인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장 훌륭한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웃는' 사람이고, 가장 자쁜 교사는 아이들을 보고 '비웃는' 사람이다. 206-207

 

내가 서머힐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다른 재미난 아이들 사이에서 나도 한 명의 재미난 아이가 될 수 있었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재미는 수학이나 역사 그리고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다른 모든 교과목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유머는 일종의 정서적 안전판이다. 재미있게 웃을 수 없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에 죽어 일흔이 되어서야 땅에 묻힌다고 누군가가 썼다. 분명 유머가 없는 사람을 가리켜 한 말이다. 209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어른이나 아이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209

 

많은 사람들이 가르치는 일은 숙련이 필요 없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212

 

 

종교적 자유

 

행복은 모든 아이들의 권리다. 미래의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삶을 대비한답시고 아이들에게 힘든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죄악이다. 216

 

아이들을 도덕적으로 훈계해야 할 경우는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심리학적으로 잘못이다. 어린아이에게 이기적이지 말라고 요구하는것은 잘못이다. 모든 아이들은 이기주의자다. 온 세상이 모두 자기 것이다. 아이들의 열망은 강렬하다. 아이들을 오직 바라기만 하는, 세상의 왕이다. 사과를 손에 쥐면 오직 사과를 먹겠다는 바람 한 가지뿐이다. 그리고 엄마가 동생과 사과를 나눠 먹으라고 하면 아이는 동생을 미워하게 된다.

아이에게 이기적이지 말라고 '' 가르쳐도 이타주의는 나중에 자연스럽게 생긴다. 그런데 아이에게 이기적이지 말라고 가르치면 아마 이타주의는 전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타적인 아이는 자신의 이기심을 만족시키면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기를 좋아하는 아이일 뿐이다.

아이의 이기심을 억업하면 그 이기심은 고착된다. 충족되지 않은 바람은 무의식 속에 잠재한다. 이기적이지 말라고 가르침을 맏은 아이는 평생 이기적인 데 매달릴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훈계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219-220

 

내가 아는 가장 행복한 가정은 부모가 도덕으로 가르치려 들지 않는, 아이들에게 숨김없이 정직한 가정이다.... 거짓된 위엄과 강요된 존경은 사랑과 거리가 멀다. 강요에서 나온 존경에는 '' 두려움이 따른다. ..

잘 자란 아이는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숨을 쉰다. 그것은 바로 아이가 두려움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표시다. 220

 

만약에 아이가 어떤 것을 죄악이라고 배운다면 삶에 대한 그 아이의 사랑은 분명 두려움과 증오로 바뀐다. 자신들이 자유로울 때 아이들은 결코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221

 

 

서머힐의 졸업생들

 

송공에 대한 나의 기준은 '즐겁게 일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230

 

"열한 살이 되었는데 아직 글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른단 말이야!"하고 큰소리치는 아줌마들이 있게 마련이다. 바깥의 환경은 온통 놀이를 반대하고 공부에 찬성한다는 것을, 아이들은 어렴풋하게 느낀다. 243

 

 

서머힐의 미래

 

나는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사소한지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을 익히려 들지 않거나 혹은 아예 그런 안목을 익힐 여지가 없는 부모를 만나면 화를 낸다. 267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른다면 소극적인 구경꾼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 한편 나는, 어떤 아이가 여려 해 동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듯 보이더라도 절대 실망하지 않았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 내면의 본성에 따라 이루어지는 성격 형성하기가 바로 교육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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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설령 천하는 얻었다 하더라도

학생들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열심히 공부하며 온갖 능력을 쌓고 있는데, 대부분 아는 건 많은데 다룰 줄 아는 것은 없는상태로 후퇴하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이 수많은 지식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렇게 무기력하고 무능력할까? 이 무기력과 무능력을 극복하기 위해 노오력하며 자기를 계발하고 있는데, 우리는 왜 퇴행하고 있을까? 왜 우리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기쁘기는 커녕 자기 자신을 고통의 나락으로 밀어 넣고 있을까? 13-14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라는 철학자는 소크라테스를 인용해, “사람이 천하와 반목하더라도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편을 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상황은 정확히 정반대다. 14-15


이미 한국 사회는 세상을 돌보느라자기를 망각하고 망친 사람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자기를 망각하고 망친 채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이들이 자기 자신을 돌보는 법을 모르는 세상을 만들었다. 18


훌륭함이 무엇인지 모르고, 훌륭해지기 위해 자기를 돌보지도 않은 자가 다른 사람이 훌륭해지도록 돕는 것은 불가능하다. ...

역사 속의 현명한 사람들은, 자신이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했다. 지혜로운 자는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을 의미하지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공부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공부의 본질은 지혜에 대한 사랑에 있다. ...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을 망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공부를 통해 양성해야 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모르는 게 뭔지 알기 때문에 알고자 노력하고, 알고자 하는 그 노력이 바로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20-21


철학자 존 듀이는 배움의 근본적인 특징이 의존성이라고 말하며 섣부른 독립을 경계했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살아간다는 게 곧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은 이미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의착하며 배우고 있다. 따라서 홀로 배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가 이미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의착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했을 뿐이다. 이게 배움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교만이다. 공부는 홀로라는 교만에 저항한다.

그렇기에 공부(工夫) 공부(共扶)가 된다. 더불어 돕는 게 공부다. 22


공부와, 공부를 통한 성장의 기쁨을 망가뜨린 현실에 저항해야 한다. 이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공부를 통한 성장의 기쁨을 다시는 누리지 못할 것이다....

이런 세상에 저항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공부가 어떤 기쁨을 주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24


나는 이 책을 통해 공부가 어떤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말하려 한다. 그것을 한계, 능수능란함, 자유, 탁월함, 멋짐, 향유라는 말로 설명할 것이다. 25




01 공부할 이유가 사라지다

01-1 신분 상승과 반학교 문화

상당수 학생은 자기가 잘하는 것에 대해 잘한다는 평가를 공적으로 받아본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자기가 잘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하고 싶은 것이 뭐냐?”라는 말에 하나를 꼽아야 한다는 강박을 갖는다. 그런데 그 가장 긍정적이고 확정적인 하나를 찾고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

이 경우에는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뭐냐?”, “‘어떻게는 살기 싫은가?”라는 질문이 좀더 합리적이다. 하고 싶은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나 할 수 없는 것은 이미 지난 경험 속에서 알게 되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것이다. .. 적어도,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알면 그것을 피해 다른 것을 시도할 수 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의 범위를 좁혀가다 보면 마침내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부정성에 기초한 합리적 사유의 방식이다. 37-38


가르치는 사람이 학교 안에 갇히면, 그는 학교에 적응하고 최적화된 학생들에게만 다가설 수 있다. 39


예측 가능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계산을 하고 미래를 기획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예측 가능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과거를 보며 성찰하고 미래를 보며 기획한다. 성찰과 기획, 이것이 근대 사회에서 사유라고 불리는 것의 핵심을 차지한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성찰하여 그 과거로부터 나에게 주어진 것과 남은 것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돌아보고, 그것을 밑천 삼아 내 삶을 설계하는 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유. ...

기획은 늘 미래를 생각하게 해 사람을 허황되게 만들 수 있기에 기획 중심의 사유는 경할 필요가 잇다. 기획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의 삶을 나쁜 의미에서 공학적으로 바라보며 현재를 억압하거나 차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점을 경계한다면 기획 역시 성찰과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교훈을 주고 배움을 촉진할 수 있다. 40


존 듀이의 경험론. 듀이는 인간의 경험은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봤다. 우리가 불에 손을 집어넣는 것은 능동적인 경험이다. 반면 불에 손을 데는 것은 수동적인 경험이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통해 불에 손을 넣으면 화상을 입는다. 그러니 다시는 불에 손을 넣지 말아야지.’라는 교훈을 얻는다. 듀이는 이때 얻는 교훈이, 손을 데는 수동적인 겪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각이란 능동적인 이 아니라 수동적인 겪음에서 촉발되기 때문이다. 바지런히 무엇인가를 하는 동안에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가 대상에 힘을 가하는 게 아니라 대상이 나에게 힘을 돌려줄 때, 그 반발력을 느끼는 것이 바로 겪음이다. 무엇인가를 한 것이 튕겨 나올 때, 이 대상에 부딪쳐 반발되는 것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 이게 왜 이러지?’하며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한다.

대상의 현존을 인식하며 그 대상의 힘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는 골똘히생각하게 된다. 그 힘의 실체를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다른 것에 정신을 팔지 않고 오롯이 나에게 벌어진 일에 집중한다. 이 집중이 다름 아닌 생각이다. 이렇게 집중하기 위해서는 다른 일을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겨우 가능한 게 신체를 최소한으로 활성화하는 산책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통해 교훈을 얻기 위해서, 가만히 있을 줄 아는 몸이 만들어져야 한다. 생각하기 위해 멈출 줄 하는 몸, 이 몸이 공부하는 몸이다. 43-44


폴 윌리스는 <학교와 계급 재생산>에서 영국 노동계급의 자식들이 왜 역시 노동계급이 되는지 연구했다. 그 책에서 윌리스는 노동계급의 자식들은 일찌감치 교육의 이데올로기를 간파한다고 말한다. , 학교 공부는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그들이 학교 권윙 순응하게 만드는 지배의 도구다. 그 약속은 개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을지언정 전체 노동계급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학생들은 꿰둟어 본다.

학교의 체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간파한 학생들은 학교에 반항(counter)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저항은 학교를 떠나는 것과 같은 전면적인 거부는 아니다. 대신, 학교 안에 머무르며 학교의 권위에 저항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수업 시간에 깐죽거리고 개긴다거나, 짓궂은 질문을 하다거나, 수업을 교란한다거나 무단 조퇴를 하거나 땡땡이를 치는 것 등이 반학교 문화의 특징이다. 학교의 권위에 도전함으로써 사회의 약속을 승인하기를 거부한다.

일차적으로 이들이 학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 권위의 원천인 지식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53


반학교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학생들의 교복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교복은 학교의 권위에 대한 순응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교복을 주어진 그대로 입는 것은 찐따같은 일이다. .. 교복을 얼마나 훼손하는지에 따라 자신이 학교의 권위에 얼마나 저항하는지가 드러난다. 55


반학교 문화가 가진 역설이 있다. 반학교 문화는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학생들의 문화적 현상이다. 따라서 반학교 문화에서는 학교가 학생들에게 세계의 전부다. 학교 바깥에는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 없다. 56



01-2 자아 실현과 탈학교 문화

저항 담론이 형태로 공부의 새로운 목적을 제시하는 흐름이 제도교육 안팎에서 나타났다. 제도교육 안에서는 전국 교직원노동조합과 참교육 학부모회로 대표되는 교육운동이 등장했다. 바깥에서는 공동육아, 대안학교와 같은 흐름이 만들어졌다. ..

이들은 교육이 신분 상승의 도구가 아니라 삶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공부가 좀 더 자유롭고 즐거운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공부가 절대다수의 학생이 자신의 꿈을 탐색하고 발견하고 준비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59


신분 상승이 목적이던 시대에 욕망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었다. 개인의 욕망을 드러내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윤리적/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행동이었다. .. 단적으로, 의대나 법대에 갈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부모의 바람과 달리 인기 없는 철학이나 문학을 전공하겠다고 하면 부모로부터 이런 말이 돌아왔다. “너는 네 생각만 하냐?”

따라서 그 시대에 개인이 어떤 행동을 선택하고 추구하는 기준은 욕망이 아니라 책임이었다. 62


나는 OO가 되고 싶은데라는 말로 교육의 권위와 정당성에 도전한 것은 이런 욕망의 주체로서 개인이 탄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64


국가의 일원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게 행복의 원천이라며, 사람을 개인으로 해방하자는 강력한 요구가 바로 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65


학교 자체가 무의미했지만 어른들의 강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왔다. 그러다보니 학교에 오는 것이 일이고, 학교에 오는 것으로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 교사들 역시 이들을 보며 오는 것만으로도수고했다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학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교사나 부모가 보기에 이들은 완전히 무기력했다. .. 학교를 벗어나면 이들은 살아났다. 71


학생들은 본격적으로 자기 표현의 욕망을 드러냈지만, 학교는 여전히 획일주의적 군대 문화였으며 수업은 입시 위주의 암기식 공부였다. 학교와 교실이라는 공간에 몸을 어거지로 끼워 맞추고 있으니 교실에서 아무리 잠을 자고 팬클럽 활동을 한다고 해도, 학교는 기본적으로 폭력적이고 무의미하면서 고통만 유발하는 공간이었다. 학생들의 몸은 이 공간을 견디지 못했다.

이때부터 학교는 내부로부터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제도교육은 학교 붕괴, 교실 붕괴 담론에 시달렸다. 72-73


의사소통을 통해 공유하고 있는 문제를 함께 알아내고 해결해가는 경험이 필요했지만 여전히 학교 안에서의 의사소통은 일방적인 의사 전달이었다. 서로를 준중해가며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니 학교내의 관계가 폭력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74


학교 폭력에 관한 담론도 폭증했다. 물론 이 말이 학생 간의 폭력이 이 시기에 급증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전과는 달리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74-75


폭력에 관한 한 학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도고 있었다. 욕망이 분출되는 시기에 욕망을 억누르기만 하는 곳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이 있는 학생들에게, 학교는 나중을 위해 지금 당장은 참으라는 말만 반복했다. 75


1990년대 후반부터, 저항과 해방의 언어였던 꿈을 위한 교육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 인상을 찌푸리며 꿈이 없다고 말하거나 꼭 꿈을 가져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학생이 생겼다.

꿈이 해방의 언어가 아닌 새로운 억압의 언어가 된 이유는 꿈을 묻는 교육이 간과한 질문이 있기 때문이다. 꿈을 묻는 이들은, 이 꿈이라는 게 긴 인생 중 어느 시기에 묻고 찾고 발견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인지 질문하기 않았다. 진보적인 사람도 보수적인 사람도 그것은 당연히 청소년 시기에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대학 가기 전에 꿈을 발견하고 준비까지 맟쳐야 한다는 것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을 비판했지만, 생애사적 기획의 관점에서 보면 꿈을 묻는 교육을 말한 사람들조차 이 모든 것을 열여덟살, 즉 대학에 들어가는 나이 이전에 해내야 한다고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75-76


나는 내 아이가 학교 공부를 잘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라며 항변하는 부모가 있다 그러나 이 부모들 역시 다른 방면에서 자녀가 폭풍 성장하리라 기대한다. 기타를 치면 기타에서, 농사를 지으면 농사에서, ‘두각을 나타내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대가 되어서도 자기 자녀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발견하지 못했거나, 하고 싶다고 말한 그 무엇을 잘하지 못하면, 부모와 자녀의 갈등이 정점에 이른다. 자녀가 고등학교 2학년 정도 되었을때 부모가 집중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이 잘하는 것이 하나는 있어야지, 너는 도대체 잘하는 게 뭐냐?”

이런 부모에게, 자녀가 어느 정도 잘하기를 바라느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이 비슷하다. “일등 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해야지요.”라는 답이다. 어느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다시 물어보면 최소 중간 이상이다. 이 정도는 되어야 어느 정도하는 것이 된다 영역이 학교 공부에서 다른 분야로 옮겨간 것일 뿐, 명시적으로 일등을 바라는 것은 아니라 해도 사실상 중상위권 안에 들기를 바라는 일둥주의자들인 것이다.

그 결과, 탈학교 시대의 후반기로 갈수록 어린이/청소년을 해방하고자 한 언어인 은 본의 아니게 억압의 언어가 되었다. 꿈을 가지지 못하면 지질한사림이 되고, 꿈을 가지면 그 모든 준비를 열여덟 살 이전에 완수해야 하는 강압의 언어가 된 것이다. 오히려 입시에 의한 압박보다 꿈에 의한 압박이 사람을 더 궁지로 몰아넣고 비참하게 만든다. 78-79



01-3 교육 불가능과 즐거운 학교

경제 성장은 1997년의 IMF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했다. .. 이른바 생존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 82


아이도 부모도 신분 상승이 가능하지 않다는것을 분명이 알고 있었다.

신분 상승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 생존과 계급 재생산이다. 자식이 부모보다 잘살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 83


학벌이 아래로부터 붕괴했다. 상위권 대학 중심의 대학 서열은 여전히 강고한 듯 보였지만 그 아래의 학벌은 무의미해졌다. ..

서울데 있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취직을 통해 경제자본이 될 수 있는 교육자본이다. 그 이하의 교육자본은 자본으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다시피 했다. 교육이 생존의 도구가 되었다는 증거다. 84

생존이 지상명령이 된 사회에서 중산층은 더욱더 교육에 올인했다. ..

부모가 변호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이라 해도, 그 정도의 생활수준을 자식이 유지하려면 자식 역시 그런 전문직이어야 한다 그래서 한국의 중산층은 자식의 교육에 모든 것을 건다. 거기에 그 가족의 계급적 사활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교육 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전문직 중산층도 그 비용을 대느라 허리가 휘는 지경에 이르렀다. 85


이들은 사교육비가 이 정도 비싼 것이 교육에 대한 진입장벽을 높여 시골의 못살지만 공부를 잘하는학생들을 아예 배제하는 좋은 전략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살인적인 사교육비를 기꺼이 지출한다.

이 상태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오로지 공부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것도 대학 입시에 유리한 공부에만 투자하도록 강요한다. 이전의 부모 사대와 달리 이들은 자녀가 책을 읽는다고 마냥 좋아하지 않는다. 그 책이 대학에 들어가는 데 유리할 때만 환영한다. ...

진보적인 부모가 바라는 것은 학교 공부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은 입시와는 거리를 두지만, 그럼에도 자녀가 읽는 책이 자신이 알고 있는 발달 단계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두고 평가하고 검열한다. “아직은 네가 볼 책이 아니야.”라거나 그거보다는 이 책이 나아.”라며 자녀가 읽을 책을 부모가 고르고 정한다. 86-87


정신의학자들은 사람의 성장이란 좌절을 경험하면서 좌절을 다루는 능력이 커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능감은 어렸을 때 안정감을 갖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지만 인간의 성장과 더불어 깨진다. 자신을 만능의 존재로 바라보다 좌절을 다룰 줄 아는 존재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좌절은 사람의 성장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공부 이외의 것을 부모가 다 알아서 해주고 자기는 온전히 공부에만 집중하며 늘 성과를 내다 보니, 만능감이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되며 좌절을 다루는 역량은 커지지 않는 불상사가 벌어진 것이다. 93


<아이들의 숨겨진 삶>에서 저자는 또래집단을 통해 어린이/청소년이 추구하는 것은 인기와 우정이라고 말한다. 인기와 우정은 다른 것이다. 인기가 많다고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있다고 인기가 많은 것도 아니다. 저자는, 어린이/청소년의 세계에서 인기가 고속도로와 같은 것이라면 우정은 이면도로라고 말한다. 고속도로에서 서로 빨리 가기위해 질주하는 것처럼, 인기를 얻기 위해 서로 우열을 가르고 경쟁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우정은 경쟁적이지 않다. 사람의 삶에 신뢰와 안정감을 주는 것은 우정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또래 집단에서 우정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인기 역시 중요하다. 인기를 얻기 위해 경쟁함으로써 정치를 배우기도 하고 타협과 협력을 이끌어내는 기술도 배운다. 1장에서 말한, 삶을 통해 배우는 과정 중 하나가 또래집단 내부의 위세 경쟁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야합이나 배제, 그리고 폭력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사람은 자기 성향을 알게 되고 그 성향에 따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기도 한다. 94


다른 학생들이 있다. 이들은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아니다 내가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에서 딱 중간이라고 불렀던 학생들이다. 과거에는 이들이야말로 학교에서 가장 고통받던 학생들이었다. ...

학교에서 이들은 존재감도 없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학교에서 사물함보다도 더 존재감이 없었다고 말한다. 교사들이 자기 이름을 외우는 경우는 초등학교 이후로 거의 없었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사고를 치는 것도 아니니 교사들이 이들을 주목할 이유가 없었다. ..10년 전부터 재미있는 변화가 나타났다. “학교에서 공부하느라 고통스럽지 않냐?”고 물어보면, 당황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학생들이 늘었다. 이렇게 답하는 학생들에 관해, 다른 학생이나 교사는 그들이 전형적으로 딱 중간에 속하는 이들이하고 설명했다. 이들은 공부는 싫지만 그래도 학교 오는 것은 재미있다고 말했다. 학교에 와서 친구들과 노는 게 재미있다고, 지루한 수업 시간에는 자면 된다고 말했다. 게다가 학교는 밥도 주는데 엄마가 해주는 밥보다 맛있다고 말하는 학생도 있었다. ...

이 학생들에게 학교가 천국이 된 이유가 있었다. 학생이 사고를 치지 않으면, 학교는 어지간한 일에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했다. .. 교장이나 관리자들도 굳이 문제 삼으려고 하지 않았다. 교사들도 학생들의 반발을 사면서까지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통제한다고 해서 통제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 '공부하는 학생'들이 서울대데 가서 학교를 빛낸다면, 이들은 자기가 다치거나 남을 다치게 하지만 않아도 학교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르치고 배우는 게 중심이 아니라 서로 가급적 덜 건드리고 덜 괴롭혀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심이 되었다. 104-106


억지로 공부를 시키려 하는 대신 모른 척하면서 내버려두다 보니 '딱 중간'에 속하는 학생들에게 학교가 '재미있는' 공간이 되었다. 먹고 자고 노는 총체적인 삶의 공간이 된 것이다. 자조적으로 말하면, 진보적인 교육계 일각에서 학교는 공부하는 곳을 넘어 삶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것이 전혀 의도하지 앟게 뒤에서 만들어진 셈이다. 107





02 자기계발의 공부에서 자기 배려의 공부로

02-4 폐기나 보완이 아니라 전환이 필요한 이유

더 이상 과거처럼 성장이 가능한 사회가 아니라면, 우리 살밍 전환되어야 한다. 공부가 그 전환을 슬기롭게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삶을 어떤 방향으로 전환해야 하며, 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탐색하고 준비할 수 있는 공부로 전환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내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삶의 전환을 위한 공부의 전환이다. 116


모든 것을 바꾸자면서 아무것도 안 바꾸는게 바로 폐기의 니리다. 116


쓸모를 지금 당장’ ‘이라는 말에 종속싴버리는 순간, 공부를 하는 사람은 시간의 노예가 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준비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며, 지금 나의 수준에서 그것을 어느 정도의 속력으로 얻을 수 있는지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대신, 지금 당장의 평가에서 성과, 스펙이 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 117-118


이게 공부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들이 하는 것은 일단 다 해놓고 봐야 한다는 초조함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

실제적이라는 명목으로 공부의 목적을 이처럼 단기화하는 것이 당장은 학생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여 어느 정도 공부로 유인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긴 호흡의 공부를 통해서만 만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만들지 못한다. 공부를 지속할 힘이 있는 몸 말이다. 공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견디고 즐기는 몸을 만드는 것이다. 118


우리가 교육을 통해 양성해야 하는 것은 배울줄 아는 사람, 즉 배움을 지속할 수 있는 배움의 주체다. 121


답을 스스로 찾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 제시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고 어쩔 줄 모른다. ‘지금 당장 쓸모 있는 것을 요구하는 제자에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스승은 똑같은 말을 한다. “너는 배울 준비가 안 되어 있다. 당장 돌아가거라.”

이게 한국에서 스승은 찾지 않고 자기계발서만 범람하는 가장 큰 이유다. 124


이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초조함이다, 단기간에 실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으로 지금 배운 것이 시간나이비면 어쩌나 하는 초조함에 사로잡혀 있다. 좀처럼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이 초조함이야말로 지금 사람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초조해서 긴 호흡으로 자기 자신과 사회를 돌아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구조적인 문제에 관한 고민과 토론을 관념적인 탁상공론으로 여기게 한다. 여기서는 해법을 찾을 수가 없다. 125


지금의 교육이 학생들이 자기 미래를 발견하고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도울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게 이 실제적 도움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여기에서 역설이 벌러진다. 실제적 도움을 강조하며 현재의 교육과정이나 교육 내용의 전면적 폐기 혹은 대대적 보완을 주장하는 입장은,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삶의 전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현재를 강화하는 공부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현재의 미완의 무엇이지 극복해야 할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것을 바꾸자고 하지만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결과를 낳는다. 126


교육의 관점에서 노오력이라는 말을 들여다보자. ‘노오력이라는 말은 청년들이 사용하는 말이다. 청년들이 취직하지 못하거나 성공하지 못했을 때 그건 다 너의 잘못이라는 이 사회의 비난을 자조적으로 비판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130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으면 네가 성과를 내지 못한 게 증거라고 말한다. 따라서 성과를 내야만 내가 노력을 다한 것이 된다. .. ‘성과주의. 성과주의 사회에서는 노력해서 안 되면 더 노력해야 나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노력의 사이에 자만 늘리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노오력이다. ...

황당하겠지만, 를 무한대로 늘리면서 실패를 그 사람의문제로 돌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교육의 이상이다. ..

교육이 만든 말이 무한한 잠재력이다. 131


사람을 포기하지 않게 하려는 이 교육적 배려의 마링 성과주의와 결합하면 지옥을 만들어 낸다. 사람이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고, 노력을 하지 낞은 것은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 서오과를 못 내고 그만둔다는 것은 바로 가장 포기해서는 안 되는 자기 자신을 포기한 것이므로, 이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쓰레기가 되어 버린다. 132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교육적 언어였던 무한한 잠재력, 이처럼 사람의 성장을 도모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파괴하는 말로 돌변해 버렸다. 133


관건은 이 해도 안 된다는 것에 기초해 우리가 어떤 성장을 꿈꿀 수 있고 어떤 사회를 설계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나는, 지금 교육의 폐기나 보완이 아니라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발견하는 진로 교육보다 내가 어허게 살아야 내 삶을 돌볼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발견할 수 있는 전환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이것을 자아실현에서 자기에 대한 배려/돌봄으로의 전환이라고 제안한다. 134



02-5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것

자기 배려를 위한 공부이 중요한 두 측면. 첫 번째는 당연하게도 자기의 한계를 아는 것이다. .. 자기에 관한 앎이 있어야 자기를 보호하고 배려할 수 있다. 자기에 관한 앎 없이는 자기에 대한 배려도 불가능하다.

두 번째로 .. ‘정신이다. 이것을 자기에 대한 집중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에 대한 망각이야말로 자기 배려의 적이다. 137


자기 재능의 한계가 어디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조금 허탈하겠지만, 잡은 충분히 햅았을 때. 내 한계까지 왔다는 것은 스스로 느낄 때까지 해보았을 경우에만 알 수 있다. 여기에 충분히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그게 충분한지 아닌지를 자기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만이 그것이 충분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157


스승의 역할은 제자의 재능을 알아보고 제자가 재능의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동행하며 그것을 깨우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제자가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스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158


현명한 이들은 하고 싶은 것을 이루기 위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삶을 노예의 삶이라고 불렀다. ‘하고 싶은것에 끌려다니는 삶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대의 현자들은 욕망의 주인이 되라고 가르쳤다. 욕망의 주인이 되는 길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언제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언제든 그것을 그만 둘 수 있는 것이다. 주인의 힘은 이루게 하는 힘이 아니라 그만 둘 수 있는 힘이다. 161


최고가 아니라 해도 각자의 재능 역시 이런 선물처럼 주어진 측면이 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각자 하늘로부터 얼마나 풍성한 선물을 받았는지 비교하는 게 아니다. 관건은 그렇게 선물로 받은 재능을 각자 얼마나 잘 쓰고 있는가다. 이렇되면 주어진 것 자체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가, 그 선용의 정도가 탁월함의 기준이 되니다. 이것이 인간이 추구할 수 있고 추구해야 하는 탁월함이다. 162



02-6 자기를 배려하는 법

소크라테스는 자기에 관한 앎자기에 대한 배려를 강보하면서 자기/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자기/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나에게 속한 것이며, 마지막이 자기/나에게 속한 것에 손한 것이다. 이를테면 내 몸은 나에게 속한 것이다. 그리고 구두는 낭에게 속한 것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나에게 속한 것이지 자체가 아니다.

그렇기에 자기 배려를 위해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나에 속한 것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럼 배려의 대상인 는 무엇인가? 이것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대신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 바로 나에게 속한 것이다. .. 나에게 속한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첫째, 무엇보다 우선 재산, 즉 소유가 잇다. .. 내가 나를 대하는 법은 배려. 반면, 나이게 속한 것이나 내가 가진 것은 배려가 아니라 활용의 대상이다. .. ‘는 나의 목적이지만 나에게 속한 것은 나를 돌본다는 목적으 위해 활용하는 수단이다. .. 소유에 넋이 나가는 순간 내가 노예가 된다.

둘째, 육체가 있다. .. 육체를 잘 돌보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 보다는 역시 육체로는 환원되지 않는 를 위한 것이다. 육체 자체가 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육체 역시 배려의 대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셋째, 지위나 정체성 같은 것이 있다... 지위나 정체성 같은 것은 사회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거이다. 이것 역시 나 자체일 수는 없다. 이런 것들은 나의 속성에 불과하다. ..

이런 것들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면 자신을 도구화하게 된다. ..

마지막으로, 욕망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가장 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나의 욕망이다. .

나를 곧 나의 욕망이라고 생각하면서 욕망을 실현하려는 삶은 욕망의 노예가 된 삶에 불과하다. .. 모두가 바라는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며 사는 삶은 역설적이게도 자기가 아니라 자기 욕망이 주체인 삶이다. .. 이런 점에서 욕망은 배려가 아니라 다스림의 대상이다. 165-169


나에게 속한 것의 경계에 있는 것이 있다. 이름이다. ...

이름은 활용이 아니라 돌보아야 할 대상이다. .. 이름은 그 사람의 개체성과 그 개체성의 존엄을 보증한다. 나아가 이름에는 자기 자신의 뿌리와 터전의 존엄과 명예가 걸려 있다. 이런 점에서 이름이야말로 그 이름이 가리키는 사람의 사회적 생명 전체라고 할 수 있다. 170-171


우리는 나 자신에 관해 생각하면 할수록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 이는 자기에 관해 생각해본 살맘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게 무엇인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고 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숭산 큰스님은 오직 모를 뿐이라고 말했다. .. 따라서 자기에 관해 안다는 착각이 자기를 망친다. 자기 아닌 것을 자기라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 반대로, 내가 나에 관해 모른다는 자각이 자기를 배려하게 한다. 여기서 자기 배려의 중요한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 ‘모른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177-178


자기 배려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존재로 대하는 것이다. 모르는 존재, 알 수 없는 존재, 즉 철학에서 하는 타자다. 사르트르는 타자의 가장 큰 특징이 도대체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다. 그의 말을 듣는 것을 제외하면 내가 그를 대할 다른 방법이 없다. .. 모를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이기, 자기 말을 듣기, 이것이 자기 배려의 출발인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원래 이 말은 너 자신이 모르는 게 무엇인지를 알라는 말이었다. 그 모르는 것 중의 모르는 게 자기 자신이라면, 이 말은 이렇게 된다. 너 자신이 스스로에 관해 모른다는 것을 알라. ..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아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오직 그 아는 것을 활용하고 다룰 수 있다. .. ‘모름은 무지가 아니라 지혜의 원천이다. 자신이 모르는 게 뭔지 알고 다룰 수 있는 것의 한계가 아디인지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다. 178-179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모르며 모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낯선 자기와의 만남은 기쁜 일이 된다. 내가 나에 관해 알고 있다는 착각과 미망에서 깨어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180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자기를 모른다는 사실, 모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모르는 자기를 만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기를 안다는 것을 배움의 과정의 문제로 전환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아니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자기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 그 중에서도 자기가 언제 세상을 배움의 자세로 대하는지에 관한 앎이다.

이를 이해하는 데는 존 듀이가 말한 성장과 배움에 관한 이론이 유효하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살아 있는 한 배운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이미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대처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적응과 변용을 위해 현재의 상태와 변화를 읽어내고 적절한 대처법을 찾아내는 능력, 이것이 배움의 능력이다. 이런 점에서 사람, 아니 더 넓게 말해 생명체라면 모두 배움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배우는 능력 자체는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선물(gifted)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배우는 방식은 다른 사람이 배우는 방식과 다르다. 각자가 살아오는 과정에서 사물을 관찰하고 파악하고 그 원리를 이해한 후 그것에 맞추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배우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사람이 자기를 안다는 것은 자기가 배우는 방법이 무엇인지 안다는 뜻이다. 내가 어떻게 배우는지 모른다면 모르는 것을 중심에 놓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기가 어떻게 배우는지 아는 사람만이 배움을 중심에 놓는 삶으로 전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배우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배우는 법을 알기 위해서는,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것처럼, 무엇보다 자기에게 집중해야 한다. 대상의 아름다움, 혹은 변화를 주고 싶은 대상에 넋이 나가버리면 자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배움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배움의 과정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지식과 기술에 집중해 그것을 습득하는 속도에만 신경 쓰면, 그 속도가 기대보다 느릴 때 곧 흥미를 잃고 짜증을 내게 된다.

그게 아니다. 목적의식적인 배움의 과정에서는 자기가 어떻게 배우는지를 깨닫기가 좋다.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에 집중한다는 것은 내 배움의 기술을 관찰하고 파악한다는 뜻이다. 어떤 것을 배우는 과정에서 지금 배우고 있는 그 지식과 기술의 기량만 느는 것이 아니다. 배움의 기술 자체를 동원하고 배우면서, 배움의 기량이 향상된다. 그렇기 때문에 배움의 과정에서는 내 배움의 기술을 관찰하고 파악하기가 좋다. ,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에 집중한다는 것은, 자신이 배움에서 어떤 기술과 방식을 사용하는지 관찰하고 파악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탁월한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어려서부터 사물과 사태를 관찰하는 힘을 키우는 게 매우 중요한 이유다. 전통 사회는 어린이들이 자신의 배우는 방법과 힘을 알게 하기 위해 다양한 놀이를 만들어 권장했다. 예를 들어, 남자 어린이들이 주로 하던 전쟁놀이는 지형지물과 변화를 관찰하고 파악하고 이용하는 기예를 늘리는 데 탁월한 놀이였다. 어떤 놀이는 균형감각을 키워주고, 어떤 놀이는 협력의 기예를 키워줄 수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놀이를 해보는 과정에서, 어린이들은 자기가 어떤 놀이를 특히 선호하고 선호하지 않는지 구분하게 된다. 이 선호는 놀이 자체의 재미에서 기인하기도 했지만, 어린이가 자기 배움의 태도를 파악하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반면, 어린이가 좋아하지 않는 놀이는 적응하고 파악하고 기예를 늘리는 데 서투른 놀이였다. 좋아하는 놀이는 재미를 넘어서 자신이 가진 배움의 힘과 방법을 잘 발휘할 수 있는 놀이였다. 이렇듯 놀이의 역할은 자기가 배우는 태도와 힘을 파악하고, 그 힘과 태도를 선용하게 하는 것이었다. 놀이는 재미뿐만 아니라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182-185


스스의 역할이 중요하고 결정적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를 자 안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의외로 내가 나를 잘 알기는 힘들다. 내 얼굴을 내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스승은 제자의 기량과 그 한계뿐만 아니라 제자가 배워나가는 태도를 관찰하고 파악하는 게 전문인 사람이다. 185


세상을 대하고 집중하고 그 집중을 지속시키는 나의 태도를 알아가는 것이 바로 자신에 관한 앎이다.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은 곧 자기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알아간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듀이가 공부의 과정을 통해 사람은 학습하는 방법을 학습한다고 말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승산 큰 스님의 화두인 오직 모를 뿐’ ... 스님의 화두를 디딤돌 삼아 궁리하다 발견한 내 배움의 힘이자 방법, 태도는 오직 물을 뿐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묻는 사람이었다. 질문이 주어지면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 질문이 타당한 질문인지, 의미 있는 질문인지, 질문에 관해 질문을 할 정도로 끊임없이 묻는 것이 내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였다. 185-186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자기의 성장을 돌보고 지속적으로 도모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래야 나의 삶이 서사적인 것이 되고, 그런 서사적인 삶이 되어야 그걸 자기 삶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삶에 이미 자기가 없는데 자기에 대한 배려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

자기를 안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 세상을 대하는 자기 태도를 안다는 말이 된다. 그래야 자신의 성장을 목적의식적으로 도모하며 성장을 방해하는 것을 회피하여 무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189


자기를 배려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타자에게 넋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를 배려할 수 있다. 190


부모들에게, 자식이 공부를 잘하지 못해서괴롭지 않냐고 묻는다. 그러면 다들 괴롭다고 대답한다. 그럼 그 괴로운 마음을 잘 다스리고 있는가를 물어본다. 그 무엇보다 어렵다고 대답한다. .. 그래서 다시 아니, 자기 마음도 못 다스리는 분이 어떻게 남의 마음을 바꾸겠다고 말씀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말문이 막힌다. 190-191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나쳐 자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식에게 넋을 놓는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자기도 배려하지 못하고 자식과의 관계도 망친다. 자기 자신이 성장해야 하는 문제를 자식의 공부 문제로 돌려버린다. 191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타자라고 하며, 타자의 ‘3대 마왕이 있다. 그 첫째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둘째가 자기가 가르치는 사람이며, 셋째가 이 둘을 합쳐놓은 존재인 자식이다. 이들을 만날 때 깨닫게 된다.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걸 말이다. .. 완전히 깨닫게 된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말이다. .

이 순간 사람은 타자의 끝판왕을 만난다. 3대 마왕의 뒤편에 숨어 있던 끝판왕 말이다. 그게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야말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타자의 끝판왕이다. 내가 나를 다스리는 기예의 한계에 부딪치고 나서야 내가 내 마음 다스리는 법을 모른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은 자명하다. 내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다. 나에게 집중할 때 이 문제를 다룸의 기예, 즉 자식이 아닌 내 배움의 문제로 전환할 수 있다.

이것이 관건이다. 우리는 문제를 나 자신의 배움의 문제로 전환할 수 있는가. 이렇게 전환해야만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재능의 문제를 기예의 문제로 전환하고, 다른 사람의 문제를 내 기예의 문제로 전환할 때,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문제를 배움의 문제로 전환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으며 해결할 수도 없다. 이것이 자기 배려의 초점이다. 전환의 배움은 문제를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192-193




03 공부, 재미에서 기쁨으로

03-7 공부, 성장의 기쁨

해치우는 것으로서의 공부에는 해보는 것만 넘쳐난다. 더구나 이 해치우는 것에는 해보고 난 뒤 결과가 돌아와 나에게 교훔을 주는, 그런 겪음이 없다. ..

이런 공부에는 연속성이 없다. 앞에 한 공부와 뒤에 하는 공부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과 연속성이 없다. 197


삶에서 배움은 필연적인 것(necessity)이다. 듀이가 쓴 <민주주의와 교육>의 옮긴이인 이홍우가 주석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necessity는 필요성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필연성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필요성으로 번역한다면, 이 말은 공부는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인간은 살아 갈 수 없다.한편 필연성으로 번역한다면, 이것은 사람은 살아 있는 한 의식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공부가 함께한다는 뜻이 된다. 전자는 살아가기 위해 목적의식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이 되고, 후자는 살아가는 한 자연발생적으로 사람은 배우고 있다는 말이 된다. ..

성장의 핵심은 연속성이다. 경험의 갱신을 통해 삶이 연속적으로 진행될 때, 우리는 그것을 성장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삶에서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바로 삶의 연속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삶의 연속성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목적의식적인 과정이 바로 좁은 의미에서의 교육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교육이란 자기 경험을 연속적으로 바라볼 줄 알고 만들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성장의 기쁨은 연속성에 있다. 198-199


생각의 핵심은 연관 짓는 것에 있다. 지금 일어나는/하는 일과 뒤에 벌어질 일을 관계 지어 생각하는 것이 지적 활동이다. ...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것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 즉 연관성을 알게 될 때 무질서해 보이던 것의 질서가 보인다. 분별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질서가보이면 내가 그 사이 어디에 개입해야 하는지 보여서 통재할 수 있다. 개입을 통해 바꿀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힘이 지적 쾌감을 준다. ..

지적 쾌감은, 내가 알지 못했다면 연관 짓지 못할 것을 연관 지음으로써,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기량이 늘어나는 데서 온다. 따라서 지적인 흥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결과에 관한 관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한 사람만이 왜 그런 결과가 나오는지에 지적인 흥미를 가질 수 있다. 결과에 관심이 있어야 결과를 예상하거나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현재의 조건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또한 가능한 대안들 사이에서 적절한 수단을 고른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머릿속에서 계속 시뮬레이션을 하고 궁리를 한다. 이것이 지적인 활동이다.

결국 지적 활동이란 원인과 결과, 자기 행동과 영향의 연속성을 가늠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적 활동은 연속성에서 중간 과정을 발견한다. 사람이 지식에 흥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작 단계의 조건과 예상되는 결과 사이에 무엇인가있다는 것을 알 때다. 그 무엇을 알면 시작과 결과를 연결할 수 있다. ‘현재의 힘도달해야 할 목적사이를 연결하는 수단을 듀이는 중간 조건이라고 말한다. 듀이는 사람들이 중간 조건에 흥미를 가지는 이유는 바로 현재 진행 중인 활동이 장차 예견되는 소망의 결과에 도달하는가의 여부가 그것에 달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중간 조건을 알아야 과정을 통제하면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지적 활동이란 중간 조건을 계속해서 알아가는 과정이다. 201-202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을 그저 경험의 수준으로 내버려두지 낞고 그 이치와 원리를 파악하게 되는 것이 바로 지적 과정인 것이다. 203


초심자일수록 배움의 과정에서 그 배움의 결과가 자기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 예상되는 결과에 자신이 영향력을 가지고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204


배우는 이의 기량으로 시작과 결과를 파악할 수 있게 하려면, 현재 배우는 이의 삶/수준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것을 시작점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중간 조건을 발견하는 것 또한 배우는 자의 기량에 맞춰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가르치기 위해서는 배우는 자의 한계와 기량을 파악하고 아는 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205


학교와 가튼 교육현장이 배우는 곳이고 배움을 장려하는 곳이라면, 모르는 자의 용기를 환대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배우는 사람이 자신의 무능과 무지를 드러내는 것을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칭찬하는 곳이 배움의 공간이다. 따라서 배우는 사람이 모른다고 말할 때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보다 환대하며 기뻐해야 한다. 그 모르는 자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자신이 가르치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7


미래가 예측되지 않거나, 미래를 안다 해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결코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214


진지하다는 건 재미를 파괴하는 짓이고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되는 세상이다 바로 이런 현상이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는 것을 방해한다. 생각이 깊어지면 설명충’, ‘진지충’, 나아가 씹선비라는 욕망 먹는다. 굳이 말을 하려면 세 줄 요약이 가능한 사이다같은 말만 해야 한다. 길게 이야기해서는 절대 안 되고 복잡하게 말해서도 안 된다. 이 때문에 더더욱 사람들이 서사적인 삶을 추구하기가 힘들어진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외면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가 횡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따라서 이 시대에 성장의 기쁨을 느끼는 것은 괴로움을 감수할때만 가능하다. 자칫하면 고립되고 외로워질 수 있다. .. 공연히 어려운 이야기를 해서 좋은 자리를 망친다는 핀잔을 듣기 쉽다. ‘프로 불편러라는 욕을 먹을 수도 있다. 베스트셀러가 된 제목처럼, 이 시대에 성장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215-216


나는 앞으로 두 가지 기쁨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하나는 자유와 창조의 기쁨이고, 다른 하나는 향유의 기쁨이다. 사람은 배움으로써 이 두 가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세상의 법칙을 알고 목적에 맞게 잘 사용하는 선용을 넘어, 그것을 변용함으로써 사람은 자유로워지고 창조의 기쁨을 누린다. 창조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능수능란한 기예를 배우고 익히며 연마하는 과정이 바로 공부다. 한편, 인간은 창조하지는 못할지라도 여전히 공부를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누릴 수 있다. 창조하고 향유하는 삶, 이것이 멋진 삶이며, 멋지게 사는 것은 삶의 목표이자. 공부의 쓸모다.

창조와 향유, 이 모두에서 인간이 누리는 기쁨이 바로 성장의 기쁨이다. 216-217



03-8 공부, 자유와 창조의 기쁨

기예란 나에게 주어진 것을 내가 얼마나 잘 다루는가의 문제다. 기예에서 탁월함은 다룸의 정도가 된다. 다룸에서 관건은 5분의 숨과 1분의 숨을 비교하는 게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인 1분의 숨을 얼마나 잘 다루고 그 숨으로 무엇을 하는지다. ...

그러므로 다룸은 능수능란함을 지향한다. 내게 주어진 것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을 때 기적이 일어난다. ... 능수능란함이 주어진 것을 변용할 수 있게 하고, 그 변용을 통해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219


새로운 것의 탄생을 보는 것만큼 기뿐 일은 없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왕자든 거지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220


사람이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

이 말이 가진 의미는 지대하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직면한 근원적인 한계를 지적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존재가 아니므로, 이미 잇는 것, 주어진 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 인간이 무엇인가를 선용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앎은 활용의 전제다. 221


우리는 주어진 것을 세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첫째 나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다. 육체적 한계나 재능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 사회적으로 주어진 것이 있다. 신분이나 재산 같은 것이다. 이것은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정의를 요구해야 할 문제다. 개인의 역량 문제가 아니다. 셋째, 인간을. 넘어서 존재 전체에 공통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자연법칙이 있다. 자연법칙은 모든 존재에게 근원적인 한계로 주어진다. 221-222


앎은 활용의 출발점이다. 안다는 것은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주어지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출발점이 될 수 없다. ...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의 경계를 아는 것, 그게 바로 자기 한계를 아는 것이다. 한계를 아는 사람만이 무리수를 두지 않고 자기를 배려할 수 있다. 223-224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난 다음에 구분해야 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주어질 수 있는 것과 주어질 수 없는 것의 구분이다. 만일 우리가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만을 구분한다면, 사람의 삶에 성장이란 있을 수 없다. ..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결코 주어질 수 없는 것과 어떤 경우에는 주어질 수 있는 것으로 구분된다. 전자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만 후자를 포기하는 것 역시 어리석다. 224


노력도 안 해보고 어떻게 아느냐, 지레 포기한 것 아니냐고 말할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한 것이 충분히 시도해보는 것이다. 내가 충분히, 원 없이 시도해보고 난 다음에는 알 수 있다. ...

충분히 해보면서 자신에게 재능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재능을 발견하기도 한다. 225


중요한 것은 재능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라는 점. 226


재능과 같이 개인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것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 주어진 것을 활용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사회가 있다. 이런 경우 사회적으로 주어진 것사이의 불평등 문제를 반드시 제기해야 한다. 227


사회적으로 주어진 것에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바로 활용의 불평등이며 이 불평등을 시정하는 것이다. 228


좋은 사회란 주어질 수 있는데 주어지지 않은 것을 평등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보정하는 사회다. 좋은 사회란, 사회만 훌륭하고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별 볼일 없는 사회가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 하나하나가 훌륭해지는 것을 공공선으로 삼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228


앎은 활용의 전제다. 문제는, 안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곧바로 활용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공부를 해본 사람은 안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걸 해보려고 하면 생각대로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 이때 만나는 것이 서투른 자기.

이 서투른 자기는, 알기는 하되 활용할 줄은 모르는 상태다. ... 이때 그가 처하는 상태가 바로 부자유.. 자신이 전혀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것이다.

능수능란하게 도구를 다루고 싶다는 갈망이다. 이게 바로 자유다... 자유란 멋대로 하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란 내가 다루는 도구들의 결을 알고 흐름을 타면서 내몸의 일부처럼 이질감 없이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이다. 229-230


미국의 인류학자인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은 이것을 생각하는 손이라고 불렀다. .. 배움은 머리-앎을 넘어 손-다룸으로 옮겨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배움이 사변적인 것이라면 익힘은 그 배움을 육화, 즉 물질로 만드는 과정이다. 육화되지 않는 배움은 쓸 수 없는, 그렇기에 쓸모없는 배움이다. 그렇기에 배움은 앎의 문제에서 다룸의 문제로 전환된다. 230


도구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생각하는 손은 자유로운 손이다. 그 자유가 단지 자유자재와 동의어로서 능수능란함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자유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에 갇힌 존재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한계다. 자신의 육체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도구를 통해 자신의 육체라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다. 그 도구를 자유자재로 다룸으로써 도구와 사람이 하나가 될 때, 그 사람은 인간의 근원적. 한게를 넘어서는 존재가 된다. 인간의 근원적 한계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231


능수능란함의 방법론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손을 다루는 기본에 관해서 말할 수는 있지만 손의 힘을 조절하는 것은 자기가 해보면서 깨닫는 수밖에 업사다. 다룸은 익힘의 문제다. 익힘을 통해 알아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익혀가는 경험 없이 다룰 줄 알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어떻게라는 질문은 다룰 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던지는 질문이다...

익힘의 과정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스승이다. 스승이라고 방법에 관해 가르쳐줄 수는 없지만 제자가 익혀가는 과정을 관찰하면서 그가 주의해야 할 것과 좀 더 연마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 보지 않고서는 가르쳐줄 수가 없는 것이 익힘의 과정이다. 232-233


자연법칙에 관한 ... 법칙은 지키되 그 법칙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유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내가 법칙을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활용할 수 있는지가 자유의 척도가 된다. 234


생각하는 손이 매혹적이며 아름다운 이유는 이 자유가 새로운 양식을 만들기 때문이다.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자유란 뻐칙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여 새로운 양식을 만드는 것이라고했다. 법칙이 주어진 것이라면, 자유는 주어진 것의 바깥으로 탈출하는 게 아니라 그 주어진 것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여 걸림거침없이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양식이 된다. 이런 활용을 변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기예(技藝)라고 부른다. 이렇게 자유로운 손을 만나 매혹되었을 때, 사람들은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 욕망은 성공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예술적 완성에 대한 욕망이다. 이런 매혹 없이 사람이 공부의 길로 들어서기란 불가능하다. 236-237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유를 성공으로 전도시킨 사회에서 살아간다. 한계를 인정하고 자기를 배려하며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꼭 묻는다. 한계를 인정함년 자기 꿈과 이상을 포기해야 하느냐고 말이다. 꿈이 뭐냐고 물으면 요리사와 같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을 든다. 그러면 동네 중국집 요리사가 되는 것도 요리사이니 꿈을 이루는 것 아니겠냐고 말하면, 그건 아니라고 한다. 동네 중국집 요리사도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는 자장면을 만드는데 그건 왜 아니냐고 물으면, 성공한 삶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답한다. 7성급 호텔 요리사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해야 한다. 꿈과 이상이라고 말하지만 그 실체는 사실 성공이다. 자유에 대한 매혹이 아니라 성공에 대한 매혹일 때 그건 자기를 파괴하는 지름길이 된다. 237-238


매혹은 또한 자유로워지는 과정을 견디게 한다. 자유로워지려면 능수능란해져야 하고, 능수능란해지려면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익힘의 과정은 고단하고 지루하다.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고, 그 반복에서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기쁨을 누리기 힘들다. 창조를 기대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변용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생각하는 손의 능수능란함에 대한 매혹 없이는 이런 익힘의 과정을 견딜 수 없다. 배움은 미적 매혹에서 시작하고, 이 매혹이 배움을 견디게 한다. ...

배움에 이어 익힘이 있지 않으면 사람은 절대 자유러워지지 않는다. 238


창조는 앎의 문제에서 다룸의 문제로 공부의 초점을 이동시킨다.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룰 수 있을 때그것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을 때 새로운 양식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다룸이 바로 그 사람의 탁월함의 척도가 된다. 239


한국의 교육이 가진 문제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배우는 것은 많은 데 다룰 수 있는 것이 없다. 배우기만 할 뿐 익히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 정답만 외우는 공부를 하다 보니 익힘의 과정이 없어지고, 익히는 게 없다 보니 할 줄 아는 게 없는 무능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참혹한 것은, 이렇게 익힘이 생략된 채 배우는 것만 많은 상태가 10년 넘게 이어진 결과, 익힘의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학생이 속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240-241


사실 익힘의 과정은 지루하다. .. 익히려고 할 때마다 좌절하게 된다. ..

익힘의 시작 단계에서 이 지루함을 견디게 하는 것은 매혹이다. 그러나 매혹의 힘이 끝까지 가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익힘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익히는 과정에서 또 한 번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은 익힘의 결과에서 과정으로의 전환이다. .. 익힘의 과정에서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어떤 기량이 생기는지 알기 위해 다시 한번 자기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익힐 때, 많은 경우 우리는 익힘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고 익힘의 결과에 집중한다. 그러다 보니 익힘의 과정에서 배우고 익히게 되는 차원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넘어간다. 익힘 자체의 기예가 향상되는 것 말이다. 243


익힘의 과정에 있는 이는 익힘의 결과에 넋을 놓지 말고 익힘의 과정에 있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 .. 익힘의 기예에서 가장 중요한 견디는 힘이 생긴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루함을 견디는 힘이다. ..

물론 여기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이 견디는 과정에서 다시 자기 한계를 생각해야 한다... 견딜 수 없는 지점, 견뎌서는 안 디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는 견딜 수 없다는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 무작정 견디는 것은 우매한 짓이다. ..

무작정 견디라고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고 착취다... 많은 회사나 기관이 배우고 익히게 한다는 핑계로 사람이 견딜 수 없는 모욕과 무시, 그리고 착취를 일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반드시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기에 대한 배려다. 244-245


배움을 통해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배우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다. 배우는 습관이 생긴 사람만이 계속 배움을 이어나갈 수 있다. 245



03-9 공부, 지적 쾌감과 향유의 기쁨

멋진 작품을 만났을 때 우리는 경탄한다. 그것이 예술 작품이든 자연 작품이든 말이다. .. 그거 아름답다, 멋지다고 느끼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작품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작품 너머에 있는 기예를 고민하게 된다. 사람의 기예가 아니더라도 도대체 무엇이, 어떤 과정으로 이런 멋진 것을 만들어냈는지 궁금하고 알고 싶다. .. 이 기예에 눈이 가야 사람은 순간적인 경탄을 넘어 기예에 관한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이처럼 경탄은 기예에 호기심을 가지게 하는 출발점이다... 공부를 시작하게 하는 첫걸음은 바로 경탄이다. 249


먼저 경탄에 관해 알 필요가 있다. 250


너무 아름다워 위협감을 느끼게 하는 이 감정은 유쾌하지 않다. 미학에서 이야기하는 바로는 숭고미에 가깝다. 칸트는 인간의 미적 체험을 숭고미와 아름다움으로 나눈다. 아름다움은 사람이 질서정연한 것을 보았을 때 나오는 쾌()의 감정이다. 쾌락의 캐다. 즐거운 감정이다. 반면 단적으로 큰 것을 만났을 때 느끼는 것이 경악이다. 내가 이전에 경험하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만나면 사람은 경악하게 된다. 이 경악을 쾌가 아니라 불쾌의 감정이다....

그 괴로움은 그저 괴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한 것을 만났다는 흥분에 넘치는 괴로움이었다. 칸트가 말하는 숭고미라고 볼 수 있다.

경탄 중에서도 이런 경악이 가장 강렬한 체험이며, 사람을 공부의 길로 이끄는 경탄이다. 공부라는 게 뭔가? 왜 그런지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대상을 보고 경악하는 것은 그걸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 경악은 내가 모르는 것, 절대적으로 모르는 것과 만나는 경험이다. 251-252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이어서 놀랍긴 하지만 위협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에 관련되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

경악이나 경탄의 실체는 바로 경이(驚異).(이 책에서 나는 경탄과 경악, 그리고 경이를 구분해서 사용하지만, 이 셋의 공통점은 말을 잊을 정도로 놀라는 것이다) 전적으로 이질적인 경험이다. 그것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알지 못하던 존재 타자이다. 254


이름이 있다는 것은 분별의 결과다.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각각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 255


지식의 가장 큰 힘이 바로 분별력이다. 경이롭지만 아직 분별하지 못하던 것을 분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지식이 힘이다. 공부는 이 힘을 키우는 과정이다. 255


부는 분별의 힘을 키워가는 과정이다. 분별의 힘이 있을 때 비로소, 대상에 압도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불쾌에서 쾌로 나아갈 수 있다. ...

알면 향유할 수 있다. 향유하는 과정에 앎이 배치되어야 한다. 256


모르는 자에게는 무질서해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는 자에게는 그렇게 질서정연한 것이었다. .. 지식의 힘은 사물과 사리를 분별하는 것이고, 분별하는 자만이 경탄을 너어 향유할 수 있다. 257-258


무지하니 자유롭고 능수능란하게 향유하지 못한다. 충분히 즐길 수 없다. 그러니 무지하면 아름다움 앞에서 기쁨을 느끼는 게 아니라 답답한 , 즉 슬픔을 느낀다. 이런 답답함이 공부를 시작할 마음을 먹게 한다. 258


자연은 경탄을 통해 향유로 나가게 하는 좋은 대상이며 향유의 언어는 수학적이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분별하고 그 움직임이 만드는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언어가 바로 수학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를 들면, 기하학을 모른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이라 말하는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없다. 알람브라궁전에 흐르는 물의 배치와 흐름, 그리고 궁전의 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과 빛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기하학을 모른다면 결코 향유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아름다움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기하학이라는 지식이 필요하다. 258-259


경이로움을 느낀다고 해서 모두가 그 경이로움을 배움으로 이어가는 것은 아니며,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260


듀이는 인간의 경험을 해보는 것겪는 것으로 구분했대 무엇을 할 때마다 우리는 무엇을 겪는다. .. 그러나 겪는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이 인지되는 것은 아니다. 겪는 것들 중에서 대다수는 그저 지나간다. 이렇게 지나가는 겪음으로는 배움이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겪음을 통해 사람이 배운다고 할 때 그 겪음은 내가 예기치 못한 것, 알지 못하는 것과 만나는 순간이다. 나를 압도할 정도로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261


이런 경험이 사람을 배움으로 이끈다.

겪는다고 바로 배움이 일어나는 게 아니다. 중간에 또 다른 과정이 있다. 그것을 하나씩 들여다보자. 첫째, 내가 예기치 못한 것을 겪었을 때 사람에게 반드시 떠오르는 것이 질문이다. “, 이게 뭐지?” “이게 왜 이렇지?” “어떻게 이렇게 되지?” 예상 하지 못한 것을 만나게 되는 순간 깨닫는 것은, 지금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는 사실이다.

모르기 때문에, 그 반응은 일단 질문의 형태로 떠오른다. 다른 말로 하면, 질문이 발생하지 않는 겪음은 겪음이라고 할 수 없다. 겪자마자 그게 무엇인지 알면, 해결하면 그만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속담처럼, 사람은 아는 것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질문이 없다는 말이다. 질문을 거치지 않고 바로 해답으로 직행하게 된다. 262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생각이다. 질문을 하고 답을 찾기 위해 생가가하는 것은 이 과정 자체에 매혹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리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질문하고 답을 찾기 위해 씨름하는 이 지적인 과정이 주는 쾌감, 즉 분별의 힘이 커지는 걸 경험한 사람만이 이 과정을 견딜 수 있다. 263

경이로움에 충분히 젖고 난 다음에, 그 경이로움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알때 호기심을 갖는다... 경험을 통해 무엇인가를 느끼고 질문이 떠오르면, 그것에 관해 생각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264


경탄이 공부의 춟라점이라고 할 때, 경탄은 감수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감수성이 좋은 이는, 다른 사람은 그저 그런 일로 넘어가는 것도 새롭고 경탄할 만한 일로 경험한다. .. 자극에 지나치게 많이 노출되는 바람에 역치가 높아져서, 어지간한 자극으로는 경탄하지 않게 된 것이다. 모든 게 시시해져버려 경탄할 만한 것을 만나기가 힘들어진다. 이런 경우에도 배움은 잘 발생하지 않는다. 265-266


기 드보르(Guy Ernest Debord)라는 프랑스의 철학자는 우리가 스펙터클, 즉 구경거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스펙터클은 시시하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를 압도한다. 더 큰 크기로, 더 바른 속도로, 더 짜릿한 것으로 사람을 압도한다. 이런 식으로 스펙터클에 압도당하고 나면 다른 모든 것은 시시해지지 않을 수 없다.

스펙터클 사회의 더 큰 문제는 모든 것을 스펫터클, 즉 구경거리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이다. 아무리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 해도, 구경거리가 되면 더 이상배우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지 않는다. 스펙터클은 구경, 즉 소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배움도 마찬가지로 소비가 되고 있다. 지금은 대가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것이 귀하고 드문 일이 아니다. ...

이처럼 스펙터클 사회에서는 배움의 과정이 구경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266


배우는 사람과 공부를 구경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지점에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배우는 사람은 자기에게 집중한다. 공부를 통해 나에게 늘어나는 것이 있는지, 그것이 잘 늘어나고 있는지 관찰한다. 배움의 목적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로부터 배우든,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에게 집중하는 게 배우는 사람이다. 자기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배우는 것이 없다. 반대로, 구경하는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에게 집중한다. 특히 그가 잘 가르치는지 못 가르치는지에 집중하며, 그가 가르치는 것을 즐기고자할 뿐이다. 따라서 놀랍게도, 구경하는 사람은 자기의 성장에 관심이 없다. 자기에게서 무엇이 성장하는지 보는 게 아니라 상대가 나를 잘 접대(entertain)’ 하는지 아닌지에만 관심이 있다. 서비스가 좋으면 만족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만을 제기한다. 그래서 구경하는 사람의 말은 언제나 품평이다. 말하는/가르치는 사람에게 집중하니 그 사람에 대한품평만 있지 자기 성장에 관한 말은 없다. ...

품평을 통해 마치 내가 그것을 알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

이것이 많은 배움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성인의 경우, 배우는 사람 스스로가 자기 배움의 현장을 구경거리로 만든다. 여기저기에서 인문학 강좌니 뭐니 듣고 배우는 자리는 많아졌지만, 그런 자리의 상당수는 공부를 구경거리로 만들어서 소비하고 품평하는 자리다.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그것이 뭘 배웠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고 강의에 관한 말만 넘쳐나는 게 그것이 구경이었다는 증거다. 267-268


우리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기예로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270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이 있다. 향유와 문화자본의 관계다. 향유와 문화자본의 관계에 대한 긴장이 없으면 먹방이나 보고 있는 사람들을 속물이라고 경멸하게 된다. 대신, 문화자본이 많은 이들만 향유의 기예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층 계급에 대한 경멸과 혐오는 대부분 이 문화자본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학교에서도 옷을 촌스럽게 입거나 친구들의 문화끼지 못하는 학생이 소외되고 따돌림당할 가능성이 크다. 271


나는 학교가 해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 전체를 통해 강조한 것처럼, 배우는 이를 잘 관찰하고 그가 가진 향유의 기예를 발견해 같이 언어화하는 일이다. 그가 좋아하는 것, 혹은 흔히 취향이라고 부르는 것을 아름다움의 향유라는 관점에서 보고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같이 찾아보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배우는 이 스스로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위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학생의 말을 통해 수학의 아름다움, 협력하는 기예의 아름다움, 윤리적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언어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가르치는 일 아니겠는가.

다른 하나는, 학교가 학생들의 경제적/사회적 차이와 상관없이 모두 여러 가지 문화적인 것을 즐기고 그 향유의 기예를 키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의 제도교육은 교육이다. 공교육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이를 걔급과 상관없이 보편적인 시민으로 양성한다는 점이다. 귀족만 데려다가 귀족 취향으로 키우는 게 아니라, 이 나라의 보편적인 시민으로서 누구나 어느 수준의 교양을 가지고 세상을 향유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문학이며 음악을 가르치는 게 이런 이치 아니겠는가

이것은 학교만의 문제나 사명이 아니다. 사실 학교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제 역학을 해야 하는 것은 국가라고 할 수 있다. 274


세상은 아름다움을 향유한 사람들이 바꾼다.’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불러오는 도심 재개발에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여행을 다니면서 슬럼화한 동네를 재생하는 곳에 가보고 그 아름다움에 반한 사람들이다. 도시 재생이 재개발이나 그럴듯한 벽화 몇 개 그린 후 관광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나고 교류하며 그 만나을 가꾸는 것이며 그게 아름답다는 걸 느끼고 돌아온 사람들이다.

아름다움을 알기 때문에 이들은 눈에는 추한 것이 바로 들어온다. 사람의 삶을 파괴하고 흩어지게 하는 것이 추하다. 벽화 몇 개 그려놓고 사람들의 삶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키는 것이 추하다. 이들에게는 지금 곳곳에서 벌어지는 재개발이 정화’, ‘미관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추하게 진행되는지가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 추함에 맞서는 일도 할 수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안목이 없었다면 이런 저항이 가꿈, 돌봄, 재생의 방식으로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공부의 목적으로 실제적으로 쓸모 있는 것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로 교육이니 실용 교육이니 하는 말로 공부의 쓸모를 직업과 돈벌이 수단으로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공부의 의미와 목적을 너무나 도구화한다. 신분 상승이나 성공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목적이다. 275-276


공부의 쓸모를 획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276




나가며

설령 자기를 얻는다 하더라도 : 사회를 만드는 기예를 향하여

푸코는 훌륭한 삶이란 주어진 규칙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형식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 공부는 자유롭기 위해 하는 것이다. 교육은 사람을 해방하는 과정이다.

문제는현대 사회에서 자유가 처한 운명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흔히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자유/해방을 통해 사람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시대다. 자유를 억압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사람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통치한다. 각자에게 표준적인 삶을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개성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권장한다. 그렇지 못한 삶은 지질하다고 비난하고 조롱한다. 그래서 우리는 개성을 가진 존재가 되기 위해 각자 자기계발 하느라 노오력하며 살아야 한다.

여기에 이 시대의 자유의 딜레마가 있다. 한편에서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해방이 사람들의 삶을 위험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본문에서 누차 강조했듯이,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노오력하며 사람의 삶을 파괴하고 잇느 것도 자유/해방이다. 마르크스가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농노들이 얻은 자유는 굶어 죽을 자유라고 말한 거서럼, 이 자유는 곳곳에서 사람들의 삶을 일회용으로 착취하고 폐기하며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다. 파탄에 몰린 이 자유로운사람들은 자기를 탓하는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자기 노력과 능력의 부족을, 나중에는 많은 것을 물려주지 못한 부모를,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이 모든 것을 이번 생에서의 운명 탓으로 돌리며 죽어간다.

우리는, ‘사회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처한 이런 공통의 운명에 관해 알아야 하고, 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281-282


이 시대의 교의인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통해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렸지만 동시에 자유 자체를 위험에 빠뜨렸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람이 알고 다루며 스스로의 양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과정을 통치로 흡수함으로써, 자유를 추구하는 게 자유를 위협하는 것이 되는 딜레마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사회를 외면한 자기 배려, 타인의 해방을 저버린 자유란 또 다른 자기계발이 되고 말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282-283


한 사람 한 사람이 해방되고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공동선(共同善)이 되는 사회를 도모할 때 자유는 위험한 것도 아니고, 자유가 위험해지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자유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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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담집은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대담(20150810,902, 0918, 1002)을 엮었습니다.



대담을 시작하며

강의실에 들어서면 나는 한 마리의 ‘똑똑한 원숭이’가 된 느낌이다. 내가 펼치는 ‘화려한 언변’과 ‘풍부한 사례’에 학생들이 감탄한다. 그런데 그 감탄하는 눈동자들 속에서 배움과 성장을 찾기가 힘들다.


똑똑하되 멍청하며, 언변은 좋되 무능하다. 시험 문제는 잘 풀되 삶의 문제를 대하는 능력은 형편없으며, 남을 품평하는 데는 날카로운 날을 세우되 자신을 성찰하는 데는 무디기 짝이 없다.


우리는 배울수록 무능력해지고, 배울수록 화만 내는 처지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공부가 삶의 문제를 푸는 도구가 아니라 삶을 식민화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부는 사실 세상을 읽고 삶을 해석하는 언어라는 좋은 도구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내가 아는 공부는.. 어떤 지식 권력의 정당성과 주도권을 확인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도전하는 것이 공부였다. 삶은 언제나 지식보다 풍부한 것이고, 언어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미 권력화한 지식에 포획되지 않은 ‘삶’을 포착하려는 것이었고 그 삶이 지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공부였다. 그랬기에 공부는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었다. 삶이 공부의 식민지가 아니라 공부가 삶의 도구였다.


공부의 기쁨은 보편성의 발견이다.


시대의 암흑이라는 동시대성을 발견하고 그 문제를 공동의 노력으로 해결해가려고 하는 과정에서 동시대인이 형성된다. 이 동시대인을 형성해가는 것, 그것이 공부가 무능력한 개체들이 아니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를 형성해가는 과정이며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엄기호)




1부 - 공부에 중독된 아이들


하지현 : 미국식 표현으로 ‘잔디깍기 맘’이라는 말이 있어요. 부모가 먼저 잔디깍기 기계로 풀을 깎아줘서 아이가 갈 길을 먼저 열어준다는 뜻이에요.

지금의 486 부모들은 공부를 잘하면 잘살 수 있다는 생각이 자기 몸으로 체득된 세대예요. 그러니까 부모들이 자신이 성공했던 방법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거죠. 그런데 사실 거시적으로 보면 운이 좋은 세대였던 겁니다. 80년대 초반엔 졸업정원제가 있어서 그전에 비해 어렵지 않게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었어요. 그리고 이들이 취업할 무렵인 87, 88년도는 우리나라가 한창 경기가 좋을 때라 대기업 취업이 상대적으로 쉬웠습니다. 좋은 일자리 수에 비해 대졸자가 모자랄 정도였죠. 주거도 마찬가지입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신도시가 만들어질 때 손쉽게 집을 살 수 있었어요. 우리 사회가 해방 이후 양적, 질적으로 엄청난 팽창과 발전을 하던 거시적 흐름에 이 세대는 올라탄 거예요. 일종의 ‘프리라이딩(free-riding)’ 운이 좋은 세대죠.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건 아직 시험을 안 친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시험을 친다는 건 내가 어느 정도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 친구들은 시험은 안 봐요.

시험을 안 보면 좋은 게 실제 내 능력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에요... 그것을 통해서 나는 여전히 가능성 있고 굉장히 잘해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거예요.


엄기호 : 사회적 관점, 즉 통치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니까 너는 아직 준비가 안됐다’라는 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 좋은 이유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시민들에게 자리를 배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모두에게 자리를 배분하면 사회가 안정되죠.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국가의 중요한 역할이란 게 자리를 배분하는 게 아니라 자리를 배분받지 못한 이들에게 네가 왜 자리를 배정받지 못해슨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설명이 ‘네가 준비가 덜됐다’인 거죠.

두려움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주체와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줘야 하는데 그런 정도의 자리를 만들어낼 능력도 의사도 없는 사회 시스템이 절묘하게 만나서 기가막히게 합의를 볼 수 있는 지점인 거죠.

이런 상태가 되면 불만이 밖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 향하게 됩니다. 자리를 만들어주지 못하는 사회가 아니라 준비가 안 된 자기를 탓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반란은 일어나지 않아요.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거야말로 손 안대고 코 푸는 격입니다. 불만을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수월한 방법이죠.


하 : 원초적 경험이 굉장히 중요한데, 지금 아이들은 항상 ‘공부 중’에 있어요.


엄 : 졸업한 상태에서 그렇게 1년이 넘은 뒤에 원서를 내면 회사에서 문제가 있다고 취급해요. 그런데 졸업을 하지 않고 1년을 휴학한 뒤 지원을 하면 문제 삼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학생은 공부 중이었으니까.

이런 직접적인 이유 외에도 졸업을 유예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는 소속감이 없어진다는 불안이에요. 태어나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소속이 안 되어본 적이 없거든요. .. 제도적으로 무중력 상태가 되는 거예요. 리고 제도에 속하지 않으니 작가 뭘 하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제도 안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안 해도 뭔가를 하는 것 같거든요.


엄 :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나한테 바로 배우면 배운 것 같지? 한 달이면 다 까먹는다. 네 것이 안 된다. 어떻게든 네가 찾을 때 그때 비로소 네 언어가 된다”라고 말하곤 해요... 요약정리 쫙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찾고 토론하고 이런 걸 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견디는 과정을 너무 못 참아요.


엄 : 저는 학생들이 이런 만능감을 갖게 된 또 다른 원인 중의 하나가 레퍼런스 그룹의 부재인 것 같아요. 사람이 실수도 하고 틀리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항상 옳을 수는 없는 거니까. 그랬을 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내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를 가리는 것보다 내 주변의 레퍼런스 그룹이 나를 톡톡 쳐주는 것. “야, 지금 너 오버하고 있어, 워워” 이런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 학생들에게는 레퍼런스 그룹이 없어요. 정말 너무 없어요. 친구가 이상한 짓을 하면 “정신차려” 이런 얘기를 해줘야 하는데 안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혼자 앉아서 자기 혼자 고민하고, 자기 혼자 인터넷 뒤지고, 그러다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거예요. 놀랄 정도로 친구가 없고, 친구랑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도 몰라요. 물론 이건 청소년이나 청년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사는 거의 대다수 사람들의 문제이지만요.


하: <아프지 않다는 거짓말>이란 책을 쓴 가이 윈치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관계의 근육’이 쇠퇴한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어요. 인간관계의 기술은 사교, 의사소통, 입장 바꿔 생각하기, 공감 능력 같은 것인데 사회에서 연결 고리가 줄어들어 그 기술을 쓸 필요가 줄어들면 마치 근육을 안 쓰면 약해지듯이 그 능력도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고독의 문제를 깨닫고 사람을 만나서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근력이 약해서 벗어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빠진다는 건데, 저는 참 많은 공감이 되더라고요.


하: 하스퍼거라고 고기능 자폐가 있어요. 이 친구들을 위한 사회 적응 훈련법이 있는데, 가령, 이런 거예요. 전화를 하면 “안녕하세요. 저는 누구입니다. 누구랑 통화할 수 있을까요?” 이런 걸 얘기해야, 누구를 사귀고 싶으면 밥을 먹으로 가자고 하기 전에 차를 먼저 마시자고 해라, 상대가 두 번 거절하면 한 번을 더 물어봐라, 두번째 까지는 정말 시간이 안 될 수도 있는 거다. 네가 싫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런 얘기들이 씌어 있어요. ‘뭐 이런 걸 다르쳐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세하게 가르쳐줘요. 픽업아티스트들이 가르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하 : 사회성을 익힐 겨를이 없는 거죠. 사회성을 익히려면 물리적으로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해요.


엄 : 교육에서 얘기할 때 사람의 성장은 낯선 것, 타자와의 부딪힘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많이 말하거든요.


하 : 학습과 경험이 다른 것이듯, 면역력은 경험을 통해서 아파봐야 생기지 학습한다고 생기지는 않거든요. 물론 학습을 하면 덜 아플 수는 있겠죠.


엄 : 삶은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할 때 배울 수 있습니다. 존 듀이가 말한 대로 하면 불에 손을 집어 넣어서 손을 데는 과정이 있어야 불에 손을 넣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런 일체의 과정을 다 위험한 것이라고 불온시해요. 배우긴 배워야 하는데 위험하지 않게 배워야 하는 것이죠. ... 겪는 것이 없이 그저 배우는 것이죠. 그런데 기스 하나 없이 말끔하게 배우는 게 가능할까요?

저는 사는 건 감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느 정도까지는 겪으면서 감당하는 거고, 감다할 수 없을 때 문제 제기가 되어야 하는데, 감당해나가는 과정이 삭제되어 있다고 해야 할까요?


엄 : 근대라는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은 자기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 항상 두 가지 태도를 요구받습니다. 미래는 기획하고 과거는 성찰하는 태도입니다. 만사가 생각한대로 진행되지는 않기 때문이죠. 생각한 대로 진행되지 않은 과거에 대해서는 성찰하며 교훈을 얻고 그 교훈에 입각해서 다시 미래를 기획합니다. 이중에서 하나만 빠져도 문제가 돼요.


엄 : 자아 중심성이 굉장히 강하니까 자의식은 무척높은데, 자기 의견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없고, 그러다 보니까 한편으로는 굉장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서 어떤 결정을 할 때는 남 얘기에 쉽게 넘어가는 거죠. 자기 의견이 없게 돼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성장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자기 말고 타인이 있다는걸 인지해가는 것이라면, 다른 한편으로는 의견이 생겨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하 :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보는데, 하나는 나를 구겨 넣는 방법, 맞추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환경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방법이에요. 이 두 개를 적절히 조화롭게 사용하면서 우리는 적응을 해나가는 거겠죠. 그런데 이루부 친구들의 자아 중심성의 세계에서는 나를 구겨 넣을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환경을 바꾸고 싶지도 않아요. 환경이 알아서 바뀌어줬으면 좋겠는 거죠.


엄 : 공부를 ‘하는(doing)’게 아니라 ‘구경’하는 거예요. .. 존 듀이가 말한대로라면 ‘언더고잉(undergoing)’ 즉 겪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게 사라져버리는 거죠. 공부 ‘중독’이라고 하는데 중독될 ‘실재’는 없어요.


엄 : 굉장히 매끈하게 요약정리해서 정답을 향해 어떤 주저함도 없이 돌진하는 형태가 모든 공부의 전형이 되어 있고, 그런 식으로 공부해야지만 안심을 하고 시간 낭비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죠. 이렇게 되다 보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의견이라는 것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내 의견과 다른 의견들 속에 섞이지 못해 너무나 괴로워하는 거예요.


엄 : ‘최적화(optimizing)’의 논리인 거죠. 삶을 최적화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 최고의 기쁨이 되고 있어요. .. 시간도 공간도 계속 최적화해서 사는 것을 추구하고 거기에서만 기쁨을 얻다 보니 최적화되지 않은 것을 견디지 못해요. 최적화하려고 하면 할수록 의외성, 낯섦,타자는 사라져버려요.


하 : 이제 부모들도 서서히 그런 악순환의 한계를 깨닫고 있고, 판에서 나가거나 아니면 공감대가 일어나 판이 깨지는 시기가 와야 한다는 것을 감으로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미쳤어 미쳤어” 하면서도 나만 판에서 빠질 수는 없는 거예요. 이 라운드에서는 내가 이기고 나가고 새 라운드가 시작될 때 판이 깨지기를 바라죠. 그러니까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와 내 아이는 이 판만 하면 끝나는 거거든요. 우리 모두 다 같이 하지 맙시다, 그러면 되는데, 내 애라는 관점에서 움직일 때는 난 몇 년 하고 퉁치고 나가면 되는 거예요. 굉장히 이기적이 되는 거죠. 이 판이 곧 깨지더라도 내가 생각한 전략대로 이기고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




2부 누가 공부에 욕심을 내는가


엄 :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즉 능력주의.

어떤 것은 능력이고 이떤 것은 능력이 아닌가? 능력이라는 것이 권력에 의해서 굉장히 이계화, 제도화되어 있잖아요. 공부하라고 할 때 이미 암묵적으로 떤 것을 공부하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것은 공부고 다른 어떤 것은 공부가 아니죠. 왜 공부가 아니냐하면 그건 아무리 키워 봤자 능력으로 쳐주지 않으니까요.


하 : 얼만 전에 <미움받을 용기>의 기시미 이치로 선ㅅㅇ과 좌담을 하면서 “한국의 젊은이들과 일본의 젊은이들의 차이는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분이 얘기한 첫 번째가 한국 젊은이들은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눈치를 너무 많이 보는 것 같다는 거였어요... ‘이래야 된다’라는 표준화된 라이프스타일에서 벗어나며 ㄴ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몇 살이 되면 어디에 다녀야 하고, 뭘 해야 하고, 어디에 가야만 하고.


엄 : 이반 일리치의 개념을 가져와서 쓰면 한국 사회가 ‘스쿨링화된 사회(schooling society)’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회 전체가 학교가 되었다는 거죠. .. 한국 사회는 스쿨 자체가 굉장히 위계회된 학벌사회라서, 어디를 나왔는지가 그 사람의 능력과 그 밖의 모든 것을 검증해주고 보여준다고 보는 사회죠. 그래서 좁은 의미의 공부에 대한 집착 같은 게 생겼죠. 그런데 이게 사회적으로 보면 정말 비극이거든요.


하 : 학교의 가치, 역할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져보고 싶어요. 학교라는 게 근대 교육, 즉 프러시아부터 시작된 2백 년쯤 된 교육이잖아요? 말 잘 듣는 훌륭한 신민을 만들기 위해서 시작된 균질화된 교유그 그전까지는 마이스터에 의한 1 대 1 교유그 도제 교육만 있었는데 산업혁명 이후에 글도 좀 깨우치고, 셈도 좀 가르치고, 남들 때리면 안 되는 거 가르쳐서 내보내니까 말 잘 듣는 신민이 되더라, 라는 사고 하에 만들어진 프러시아의 근대 교육 시스템이 지금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학교 교육의 기본이죠.


엄 : 원래 근대 교육의 목적은 탁월한 살맘을 만드는게 아니라 평균을 높이는 것에 목적이 있었잖아요? 계속해서 평균적인 살맘을 만들고 그 평균을 조금씩 높이는 것이 목적인, 그런 점에서 보면 굉장히 효율성을 강조하는 시스템이죠.


엄 : 한윤형씨가 썼던 표현ㄷ로 하면 ‘평균압’입니다. 평균에 대한 압력이죠. 한국은 적어도 평균이 되어야 한다는 압력이 매우 높은 사회라는 뜻입니다. 평균이 되지 못하면 탈락이고 낙오이며 패배한 인생이라는 말이 돼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균이라는 건 절대 평균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무 높다는 거죠.


엄 : 이전에는 공부가 생애사적 기획을 하는 데 가장 강력한 무기였죠. 그룬데 그게 잘 안 되는 상황이 되고 있단 말이죠. 그렇다면 이제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나와야 하는데,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출현해야 할 그 시점에 다양한 교육이 출현해버린 거죠. 그런데 다양한 교육이란 게 말 그대로 다양한 교육이 아니라 교육이 다양한 영역을 식민화해버린 형태예요. ..

교육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가르칠 수 없고 배워야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르쳐야지만 배울 수 있는 것이죠. 미분과 적분은 가르치지 않으면 배울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학교가 필요한 것이고 교과과정이 필요하죠. 반면 인성은 가르칠 수는 없고 살의 과정에서 배워야만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걸 지금 가르치겠다고 나서는 것이죠. 가르칠 수 없는 걸 가르치겠다고 하는 것, 저는 이게 가장 정확하게 삶을 식민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엄 : 공부라는 것이 삶에 통홥되어 있어야 하잔하요? 그런데 근대 학교가 공부와 삶을 단계론적으로 분리시켜버렸어요. ‘공부를 하고 난 뒤에야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까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사는 것이 아닌 게 된 거죠. 삶이 유예되는 거예요. 지금 학교가 딱 그런 공간이잖아요?

학교에서 우리는 친구랑 만나서 싸우기도 하고, 정치도 하고, 비열한 짓도 하고 그러면서 ‘아, 이러면 안 되겠구나’ 깨닫기도 하고 그래야 해요. 학교가 총ㅊㅈㄱ인 삶의 공간이 되어야 하죠. 그런데 학교를 삶의 공간으로 인지하지 않고, ‘학교는 공부를 하는 곳이다’라고 생각해왔어요...

공부를 한다고 해서 삶이 주어지는가? 지금은 그렇지 않거든요. 그렇다면 학교를 다르게 인지해야 하잖아요? 삶과 공부를 단계론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 그러니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자 그래야 하는데 그 방법을 못 찾다 보니까 오히려 그렇다면 ‘모든 것을 공부하자’ 이런 형태로 나아가버리는 거죠.


엄 : 재미있는 현상이 있어요. 틀 밖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성공을 하고 나면 그것으로 죽 살아가면 되잖아요? 그것이 다른 사람들한테 훨씬 더 영감을 주거든요, 그런데 꼭 책을 씁니다. 학원을 해요. 결국 자신의 성공 방식을 매뉴얼화하는 거예요. 본인이 그러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또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죠. 결국 한국에서 블루오션은 공부밖에 없어요. 출판계도 레드오션이잖아요. 그런데 출판학교는 잘되고 있어요. 출판계는 망해가고 있는데 말예요. 이런 식으로 지금 공부 산업만 블루오션이 된 거죠.


엄 :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출현하려면 하나가 없어져야 해요. 바로 사회적 압력이죠. 표준화된 삶의 시나리오에 대한 압력이 사라져야 해요.


하 : 우리는 일반적으로 행선지가 정해져 있기를 바라죠. 정해져 있지 않으며 안 하고 싶어 해요. 사실 이제는 정해져 있는 건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데 말이죠.


엄 : 넓게 보면 삶은 그 자체가 공부의 과정, 배움의 과정이잖아요? 인간은 살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늘 배울 수밖에 없죠. 그걸 우리가 공부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반면 교육은 그것을 단계론적으로 구분하여 제도화한 것이고 할 수 있어요.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죠. 가르치지 않으면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공부 전체가 교육이 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다르칠 수 없는 것도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만들어버리거든요.

이런 점에서 우리가 이 책에서 말하는 공부 중독이란 사실은 교육 중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3부 중독에서 해독으로


하 : 중도겡 빠져 있으니까 벗어나야 하잔하요. 지금은 공부를 공부로 이기려고 하는데, 공부디톡스를 하려면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하거든요. 프레임 자체에 대한 변화를 주는게 필요해요.


엄 : 대학 진학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어요. 그 필요성에 대해서 말이죠. 그런 변화가 실제로 감지되고 있고요. 대기업의 생산직 노동자,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은 잊 대학 진학에 대해 회의적이에요.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이 돈을 꽤 많이 벌거든요. 노동 계급의 대표는 아니고 중산층화된 노동 계급이죠. 이 사람들은 이제 대학 가 봤자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정도며 ㄴ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중산층의 신분은 유지하되 생산직에서 사무직으로 바꿀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방사립대를 갈 정도다 그러면 아예 전문대를 가라고 합니다. 지방국립대는 좀 헷갈려 하는데, 이렇게 보냈다가 중퇴시켜요. 4년제를 나오면 생산직에 못 들어가거든요. 생산직 보호조치 때문에 그래요. 아쪽에서는 대학을 보내도 소용없다는 걸 일치깜치 깨닫고 초등학교 고학녀에서 중학생이 되면 판가름을 해서 투자를 하지 말지 결정을 해요.

이들보다 조금 더 경제력이 낮은 생산직 노동자들, 자영업자들은 대학 보내려고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요. 이런 살맘들은 교육에 정말 관심이 없어요. 지방ㅇ서 교사들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교사들이 부모들을 만나고 싶어 해요. 학생을 공부를 시키고 싶으니까요. 그런데 이 부모들은 "우린 모르겠어요.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세요"하고 만다는 거예요.

사실 지금 대학을 보내려고 모든 걸 쏟아붓고, 대학에 엄청난 텐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전문직 대기업 사무직, 조금 큰 규모의 자영업을 하고 있는 중산층이에요. 대학 진학은 한국의 중산층 게임이에요. 이 사람들이 대학을 어떻게든 보내려고 하는 거죠. 이 사람들 만나서 얘기해보면 이들한테는 공포가 있어요. 자기 자식대에서 계급이 재생산되지 않을 것 같은 공포가 있는 거죠.

중산층이 이렇게 대학에 목을 매는 건 자기 계급을 재생산해야 하는데 중산층의 부라는 것이 그것만 물려줘서는 재생산이 안 되고, 여기세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하잔항요. 그게 바로 전문직이거든요. 아파트는 물려줄 수 있어요. ㅡ그런데 그것만 갖고는 안 되잖아요? 지속적으로 부를 창출할 전문적 기술이 필요한 거죠. 그래서 이들이 대학에 대해 갖고 있는 텐션이 엄청나게 크고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거죠.

이들이 그동안 별수를 다 써본 거죠. 유학도 보내 봤다가, 사교육도 엄청나게 해봤다가, 요새는 명상도 시킨다고 하더군요. 마인드 컨트롤해야 한다고. 비용이 점점 증가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감당이 안 되는 밑에서부터 떨어져나가는 거죠. 대학 진학에 대한 텐션은 중산층이 아닌 다른 계층에서는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계산이 너무 빤하니까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중산층의 코어에서는 텐션이 점점 더 강해지죠. 거시적인 구조로 보면 그런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요.


엄 : 가장 합리적 선택이란 이기적 선택인데 그 선택이 이타적이기까지 하다면 좋고, 아니면 조금 섭섭한 거고, 하지만 어쨌든 최소한 그 이기적 선택이 남한테 피해는 끼치면 안 된다, 이 정도 선에서 선택 기준을 생각해본다면, 자녀 교육과 관련해서 제가 볼 때 한국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있는 계층은 대기업 생산직이에요.


하 : 그렇네요. 딱 그렇게 하고 있네요. 몸으로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선택이 가능한 거겠죠. 그런데 그 선택은 중산층 지식인들에게는 자기가 안 가본 세계, 모르는 세계인 거예요. 그렇게 봤을 때 중산층 지식인들이 교육에 목을 매는 건 자기가 제일 잘했던 것이기 때문이죠. 그만큼의 과실을 얻었기 때문에 상층부에서 그 신화를 퍼뜨린 거예요. 공부를 잘해서 성공한 이들이 상층부를 차지해서 과실을 더 가져가는 것에 대해서 뭐랄고 하지 마라, 즉 교육 시스템 안에서 자신들의 독과점을 합리화한 거죠. 그들은 그런 시스템에서 잘 해나갈 수 있는 능력치를 갖고 태어났어요. 그래서 그런 시스템을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과 자영업자들까지 '오 그래야 되는구나'라고 믿게 만든 거죠. 이게 몸으로 잃는 것보다 훨씬 오래 가고 괜찮을 것 같다, 존경까지 받고. 그래서 모두 이 게임에 들어오게 되죠. 그런데 생각보다 판이 작아지면서 내 자식들한테 돌아가는 몫이 없고.

선생님 말씀대로 대기업 생산직들이 딱 보니까 아닌 거죠. 그래서 잽싸게 판을 깬 거예요. 이 살맘들은 이것 말고도 먹고살 길이 있거든요. 더구나 이 방법론이 원래 그들에게는 그다지 와 닿지 않는 방법론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무직 근로자와 전문직인 세칭 중산층은 아는 도둑질이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 판타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마ㅣ 모태 신앙과도 같은 거죠. 아무리 기독교에 진력이 나도 '그래도 나는 신앙인으로서 살아갈 거야' 같은. 그런데 우리 집은 종교가 없었는데 친구 따라 교회 갔다가 10년 다녀보니 교회에 신물이 나요. 그러면 금방 빠져나올 수 있거든요.


하 : 자식의 20년 후를 바라보는 그림을 바꿔야 해요. 자기를 중심으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먼저 자신의 삶의 안전판을 만들어야 해요. 은퇴 후 연금, 건강을 위한 대비 혹은 주거 생활의 안정과 같은 안전판을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하고, 거기에 대해서는 자식 때문에 포기하거나 그 안전판을 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게 삶의 우선순위에 올라야 합니다. ....

가소 싶은 게 없으면 "그냥 좀 있어 봐, 그 대신 이리저리 쑤시고 다녀봐"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해요. 쑤시고 다닌다는 게 곧 디투어링이죠. 그게 인생의 낭비는 아니다. 도리어 지금은 그게 필요하다, 그게 공부다, 라는 생각을 가져야 해요.


엄 : 이제는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드는 게 중요한데,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자기 부모처럼 살지 않는 것이거든요.


하 : 신용불량자가 되거나 범죄의 세꺠에 들어서지만 않게끔 하는 최소한의 케어. 정말 간절하게 아이가 원하는 게 있을때 한 번 정도 밀어주는 것. 그게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정도죠. 자기가 원하는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여섯 살 때부터 차곡차곡 줄을 좍 그어놓고 그 길대로 가게 하도록 투자하는 것은 미친 짓이에요. 그러지 말자는 거죠.


하 : 제가 이런 얘기를 강연에서 하면 나오는 특징적인 피드백이 있습니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회 시스템이 변하지 않는 한 결국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은 나 개인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 말은 맞으면서도 현실에 맞지 않는 허황된 얘기로 들린다"라는 것입니다. 사교육 안 시키고 그래서 좋은 대학 못 가고 그래서 취업이 안 되면 사회에서 '듣보잡' 취급받으면서 살 텐데 어떡하느냐는 거죠. 저는 그래서 더욱더 이 부분에 대한 새로운 공감대와 행동을 해낼 개인이 늘어나야 한다고 보는 거예요.

공부에 중독된 사람들이 많은 상태에는 그 어떤 시스템적 변화를 주더라도 결국 또 그 안에서 공부를 중심으로 줄세우기가 만들어질 겁니다. 서울대를 없애고 전국의 국립대학교를 모두 서울대로 바꿔야 한다는 교육 전문가드르의 대책도 저는 조금 당황스럽고, 무엇보다 또다른 판타지 같았어요. 그러면 분명히 그 안에서 다시 줄세우기와 편가르기가 만들어질 겁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대로 공부를 중심으로 한 암묵자가 그대로 작동하고 있는 동안은 백약이 소용이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한 명씩 한 명씩이라도 개인의 선택의 변화가 이어지고, 그 수가 어느 순간 무시할 수 없는 수가 된 다음에는 결국 상식의 전환이라는 거대한 위상 전위를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엄 : 그렇다면 중산층 밑의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면 좋겠어요. 이 학생들도 중독의 폐해를 고스란히 입고 있거든요. 이중 삼중의 고통을 받고 있죠. ...

공부에 목적이 없어요. 정확히 말하면 학생들한테 무슨 공부가 필요한가를 보고 공부를 시키는 게 아니라 이 학생들에게 뭔가를 해야 하는데 해줄 수 있는 게 공부 가르치는 것밖에 없는 거예요.


하 : 완전히 새로운 영역의 공부가 필요해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가 아니라 '뭔가를 알고 싶다'라는 욕구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공부.


엄 : 학교에서 상위 5~10%, 많이 봐야 20%를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은 공부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 좌절이에요. 이 좌절을 통해서 뭘 잃어비리느냐면, 앎에 대한 호기심을 잃어버려요. '아는게 참 재미있는 것이다'라는 걸 잃어버리죠.

앎의 핵심은 모르는 것을 만났을 때 호기심이 발동해야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모르는 것을 만나면 두렵기만 하고 짜증이 나는 거예요. ...

대안학교가 그래서 만들어졌어요. 대안학교가 학생들을 자유럽게 뛰놀게 하자는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앎에 대한 호기심을 회복하자는 것이거든요. 시험 문제를 틀렸다면, 나는 틀린 존재가 아니라 모르는 게 있는 존재인거고, 모르는 것을 발견하면 알고 싶은 욕망이 발동하게끔 해줘야 하는 건데, 그것을 못했던 거죠.


하 : 공부라는 것, 알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 데에는 동기가 필요하거든요. 동기는 크게 세 가지라고 생각해요. 하나는 절박감이에요. '이거 모르면 나 죽어', '어떻게든 알아내야해' 이런 것이죠. 두 번째는 경쟁심이에요. '쟤보다는 나았으면 좋겠어' 하는 욕구. 세 번째는 '그냥 하고 싶어', '알고 싶어' 이런 이상적인 목표가 있는 거예요.


하 : ‘솔부를 잘한다는 것은 뭘가’에 대해서 생각해봤어요. 첫 번째는 핵심, 맥락을 잘 잡아내는 거죠. 둘째는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많은 정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셋째가 진자 공부를 잘하는 것일 텐데, 이치를 깨닫는 것이죠. 큰 흐름 안에서 이게 뭘 의미하고 있고,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 나아가서는 나하고 어떤 관계가 았는가까지 생각하 ㄹ 수 있는 것이게쬬.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공부는 둘째가 90%예요. 성적이 아주 잘 나오는 아이는 첫째 덕목인 맥락을 잘 잡아내서 요령이 좋죠. 정작 중요한 것은 셌째인데 거기에까지 마음이 미칠 여유가 없어요. .. 저는 순서로 볼 때 셋째를 목표로 하면서 첫째를 중심으로 흐름을 잡고, 그리고 둘째는 필요에 의해서 노력하면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야 진짜 공부가 되고 쓸데없는, 독이 되는 공부를 줄일 수 있어요....

저능의 영역이란 낯선 상황에 잘 적응하기 위해 지그 ㅁ이곳이 굴러가는 보이지 않는 이치를 깨달아가는 과정이거든요. 그 이치를 잘 깨달아서 나를 변화시키거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쌓는 것이 핵심이죠. ..

공부 과정의 끝은 사실 지혜를 얻는 거라고 생각해요. ..지혜라는 것을 찾아낼 겨를도 없이 질려버리게 만드는 것이 지금까지의 공부였어요.


하 : 발달이란 기본적으로 ‘나도 저러 ㄴ사람이 되고 싶다’는 동일시의 욕구로부터 시작하거든요. 어찌 보면 그것이 공부의 원형이죠. 따라 하기. 그런 부분에서 짚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공부에 대해 착각하시는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문화센터나 시민 학교에서 엮는 강좌에 중독되어 있어요. 저는 그게 공부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엄 : 그렇죠. 그건 구경이죠.


하 : 사실은, 혼자서 괜찮은 책 찾아보고 나름대로 궁브를 하다가 진짜 궁금한 게 있으면 그 분야의 고수를 찾아가서 물어보고 그러는 과정이 진짜 공부인데.


엄 :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 걸가요? 공부는 성장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능력이 신장되는 것이건, 인격이 성숙하는 것이건 또는 시민으로서 성장하는 것이건 공부는 성장을 하기 위해 하는 것이죠.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의 공부는 성장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고 있어요. 성장과 아무 상관이 없는 공부를 공부라고 하고 있고 그걸 청소년들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학생들이 “이걸 공부한다고 제가 뭔가가 될 수 있나요?”라고 하는 말을 단지 실용적인 질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 말을 직업을 구하고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데 혹은 살아가는 데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지를 묻는 것을 훨신 넘어서는 적극적인 질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이걸 공부하는것이 자신을 무엇으로 어떻게 성장시키는가’에 대한 질문이죠.

이 문제에 답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가 사람의 성장에 대해 ‘성공’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답도 줄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공부를 통해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 수긍을 하지 못하는 것이죠. 이들을 붙들어놓고 지금 ‘공부’를 시키는 것은 정말 무의미한데도 그저 맹목적으로 공부를 시키고만 있어요. 공부를 하는 자가 아니라 공부를 시키는 자가 공부 말고는 시킬 수 있는게 없다 보니 그저 공부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시키는 자의 ‘공부 중독’이에요.

삶이 성장의 과정이라면 공부는 성장하는 삶을 위한 도구여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공부는 삶을 식민화하는 도구일 뿐이에요. 이런 공부를 그만두자는 것입니다. 대신 공부의 자리를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해요. 당대의 문제를 파악하고 헤쳐나가는 삶의 지혜. 기술을 익히는 과정으로서의 공부 말이에요.청소년들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어른들도 잘 모르고 있어요. 무능력하기는 어른들도 매한가지입니다. 공부라는 맥락에서 보면 어른과 청소년 모두가 처한 ‘동시대성’이겠죠.




대담을 마치며

공부라는 블랙홀에서 탈주하기 위하여 - 하지현

아무리 혁명적이고 과격한 처방이 나온다고 해도 그 안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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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왜?"라고 묻고 생각하게 하는 교육, 그것이 하브루타다.



추천사 


생각하며 말하는 하브루타가 자녀를 최고로 만든다 - 류태영(농촌, 청소년미래재단 이사장)


유대인 아버지들은 퇴근을 하면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집안일도 많이 한다. 대신 가정에서 아버지의 자리는 확고하며 가족 모두가 아버지의 권위를 존중한다... 

유대인 교육의 일차 교사는 아버지다...

탈무드는 "아들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사람은 시내산에서 직접 받은 것처럼 실감나게 가르쳐야 한다. 자손에게 그것을 그대로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가정은 인체의 '배꼽'..

유대인 부모들이 일찍부터 대화를 통한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는 창의성을 기르기 위해서이다. 대화를 나눔으로써 자유로운 사고를 하게 만들고, 그런 유연성이 창의적인 능력과 논리성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6-7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 - 김성묵(누란노 아버지학교 대표)


삶으로 가르친 것만이 남는 법이다.  8




프롤로그


가장 큰 힘은 가정에 있다.  14


하브루타란 '짝을 지어 질문하고 대화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는것'을 말한다.  17




유대인은 자녀의 교육을 무엇보다 우선한다. 

자녀를 교육시키는 일이 하나님에 대한 부모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28


부지런히 가르친다는 것은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31


적극적인 의미로는 자녀와 함께 있을 기회를 만들어 가르치라는 뜻이다..

'가르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샤난'의 어원적 으미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날카롭게 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반복하다'이다. ..

전통적인 교육 방법을 철저히 지켜오고 있는 정통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학교를 '예시바'라고 부른다. '예시바'는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서 말로 서로를 가르치는 전통적인 교육 기관이다.

" 이 말씀을 강론하라."에서 강론하라의 원어는 '디베르'이다. 이것은 '그것들에 관해 말하라, 이야기를 나누라'는 뜻이다. 이 동사는 규격을 갖춘 분위기에서의 강론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 속에서 나누는 대화를 의미한다.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종의 무의도적 교육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에서 '강론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디베르'는 어원적으로 일상적인 삶 속에서 나누는 대화를 의미한다.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에서 '강론'을 그대로 풀면 '가르치고 토론하라'는 것이다. 영어로는 'talk about'이다. 말 그대로 이야기를 나누라는 것이다.  32-33


유대인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우리와 매우 다르다. 가정이나 사회생활에서 남녀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 아버지는 직장에서 일을 마치면 바로 퇴근해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 또 가정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에는 독서를 하면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게 한다.  .. 

한국인의 경우, 아이 스스로 생각하거나 결정하지 않고 오로지 부모의 지시에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단시간에 빠른 학습효과를 거두지만 스스로 사고하지 않고 공부하기 때문에 창의성이 부족하고 남의 지시 없이는 공부하지 못한다. 또한 스스로 답을 찾지 않고 누군가가 자신의 질문에 대해 설명해주기를 바란다.  35


유대인 아버지는 안식일에 아이들과 식탁에 앉아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필요한 경우 한 명씩 따로 불러 대화를 나눈다.  36


탈무드는 '무엇'을 사고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를 가르친다.  38


비판적인 사고력이 있으면 정보를 능숙하게 파악하고 그 정보가 어느 정도 중요한지를 알 수 있게 되어 정보의 진정한 가치를 평가할 수 있게 된다.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은 새로운 발견과 진보를 이뤄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힘은 토론을 통해서 가장 잘 기를 수 있다. 토론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하면서 어마어마한 정보의 양에 압도될 수 있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읽는 기술이 필요하다. 

무엇을 읽을 때 이 정보가 믿을만한 것인지, 토론 주제에 적절한 것인지 등 많은 판단을 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보를 골라내는 안목이 길러진다. 정보가 옳고 그른지를 구분하는 능력은 비판적인 듣기도 가능하게 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어떻게 반박을 해야 하는지, 논리적인 허점은 무엇인지를 파악하면서 듣게 되기 때문이다.  40


유대인 아버지들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언어를 자식에게 가르친다. 자신은 히브리어를 못하고, 토라나 탈무드를 히브리어로 못 읽으면서 아들은 유대인 학교나 회당에 보내어 히브리어를 배우게 하지 않는다.  43


유대인 아버지의 이중 언어 교육 방법은 우리 조상들이 자녀에게 한자를 가르쳤던 방법과 일치한다. 우선, 우리 조상들도 기본적으로 시험을 보기 위해 한자를 배운 것이 아니라 성현의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기 위해 글을 배웠다. 둘째, 아버지 본인이 한자를 알고 자녀에게 가르쳤지 본인은 못 하면서 다른 교육자들에게 의존하지 않았다. 셋째, 유교경전이라는 하나의 일관된 주제로 교육했지 이것저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천자문을 떼고, 소학이나 명심보감을 공부하고, 사서삼경으로 들어갔다. 주제는 충효를 기본으로 하는 유교적인 삶의 원리였고 경전의 수준이 올라가면서 사고와 이해의 폭이 깊어졌다. 넷째, 아이라고 쉬운 것만 가르치지 않고 쉬운 글자만 가르치지 않았다. 원문을 그대로 가르치며 이해가 어려운 부분은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44-45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교육법은 '왜?'라는 질문이 끊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49


부모에게 가장 끔찍한 복수는 부모를 직접 살해하는 존속살해일 것이다. 그런데 전체 살인사건 중 존속살해 비율은 6.3%로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미국이 2% 정도이고 영국이 1% 정도로 영국의 6배, 미국의 3배가 넘는다.  52


복수를 당하는 것과 일방적인 피해를 당하는 것의 차이는 원인을 제공했느냐 아니냐의 차이이다. 부모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피해를 당하는 것이지 복수를 당하는 것이 아니다. 복수를 당하는 메커니즘에는 무의식이 있다.  53


한 개의 뇌세포는 수천 개의 다른 뇌세포와 연결되는데 뇌세포가 서로 연결되는 이 과정은 외부 자극에 반응하면서 진행된다. 이를 '신경 가소성'이라고 한다. 뇌세포간의 연결은 외부 자극에 따라 변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초기 3년 동안 뇌에 저장되는 것이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우리 마음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무의식은 그 사람의 성격이 된다....

아이의 뇌는 일정한 단계를 거쳐 일정한 과정에 따라 발달한다. 그 발달 과정을 뛰어넘거나 거스르는 것은 뇌에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54


관심을 가지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에 조금만 도와주면 아이는 쉽게 그것들을 성취한다... 성취감과 자신감을 갖게 된 아이의 뇌에는 긍정적 정서가 무의식으로 형성된다. ..

부모와 자녀의 사이가 좋지 않으면 결코 공부를 잘할 수 없다.  55


지금 한국 부모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자녀와 자신을 구분하는 것이다.  56


부모는 자녀에게 다양한 정보를 주고 선택에 도움을 주는 여러 가지 길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최종 결정은 자녀가 해야 한다. 대부분의 아버지는 자신의 회사에 성적이 좋은 자보다 성격이 좋은 사람이 들어오기를 바란다. 그런데 자녀에 대해서는 성적을 높이는 데 초점을 둘 뿐 성격 좋은 사람으로 키우지 않는다. 이런 이율 배반을 바로 보는 것, 그것이 자녀 교육의 출발이다.  57


정신과 의사들이 정신장애를 가져오는 부모의 양육 태도로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낮은 돌봄'과 과잉보호'다. 낮은 돌봄은 사랑을 주지 않는 것이고 과잉보호는 사랑을 넘치게 주는 것이다...

자녀는 사라오가 더불어 돌봄을 원한다. 구체적으로 안아주고, 보살펴주고 위로해주고, 보호해주기를 바란다.  58


과잉보호가 적고 돌봄이 많은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과잉보호만 있고 돌봄이 적은 것이 가장 나쁜 영향을 미친다. 또한 과잉보호보다는 돌봄의 부족이 그 자녀의 병리에 더 나쁜 영향을 미친다. 돌봄의 부족이란 곧 무관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59


자녀를 다른 사람이나 기관에게 맡기는 모든 것이 낮은 돌봄이다.  60


의무감이 아닌 진심으로 이렇게 아버지가 가정에서 환대받는 가정은 극히 드물다.  61


시간이 없고 자녀와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잘 모르는 아버지들이 가장 쉽게 선택하는 것이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방법이다. 아이가 사달라고하는 장난감을 사주고, 아이가 가고 싶어 하는 놀이공원에 데리고 간다. 하지만 그것은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통할지 모르지만 그 이후로는 거의 말조차 통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63


부모는 반드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64


중요한 것은 시간의 양이 아니라 질이다.  66


자녀와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랑과 관심을 기울이고 함께 교감을 나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67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공부하고, 자녀는 자녀대로 공부하면서 거의 전문가 수준의 논쟁이 된다.  73


최고의 육아는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에 있다. 아이는 부모와의 시간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안목과 구조를 익힌다. 특히 아버지의 시선을 통해 사회를 읽는다...

아이에 대해 잘 알아야 대화와 토론이 가능하다. 아이에 대해서 모르면 대화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76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기보다는 시행착오를 통해 점점 나아지겠다는 태도가 중요하다. 어떤 한 방법을 배워서 실천할 것이 아니라 아이의 변화를 계속 살피고 알아가면서 그에 맞추어 변해가야 한다.  77


우리가 볼 때 분명히 체벌을 해야 할 상황에서도 유대인 아버지는 소리를 높이지 않고 아이와 대화를 나눈다.  78


아버지가 되었지만 아버지 역할을 배운 적이 없고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제대로 된 양육을 받아 본 일이 없어 저절로 겉돈다.  81


게임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86


인간은 장기간에 걸쳐서 보호받고 양육된다. 그 덕에 아이들은 기본적인 운동 능력을 점진적으로 익힐 수 있고, 나중에 독립해서 부딪히게 될 많은 난관과 해결책을 미리 탐색할 수 있다.  87


아이는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가 어렵다.  89


아이가 직접 체험하고 생각하고 행동한 것만 아이 것이 된다.  92


아이와 집에 있을 때 아이의 사고력을 자극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함께 즐기면 된다.  93


먼저 몸으로 가까워진 후 진심이 자녀에게 전달되어야 마음이 열린다. 관계성만 회복하면 그 다음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있다.  95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하고 사소한 갈등이 있어도 대화로 풀어온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갈등 자체에 대해서 그다지 겁먹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수정할 수 있는 사회성 좋은 어른이 된다.  97


공룡이라는 단어는 못써도 공룡을 그리고 설명할 수 있게 키운다... 

체험, 협동, 토론을 통해 교육한다. 직접 하게 하고, 함께하게 하고, 의논하면서 하게 한다.  99


아이가 자라면 자기가 하는 짓이 잘못된 것인 줄 스스로 안다.  102


유대인의 경우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예시바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예시바에서 토라와 탈무드를 가지고 하루 15시간씩 공부하고 그중 10시간 이상을 하브루타로 공부한다.  104


책을 많이 읽는다고 언어의 의미를 파악해낼 수 있는 힘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언어의 의미를 가지고 따져보면서 깊이 있게 공부해야 가능하다.  105


책 읽기는 사랑하는 부모의 품이나 무픔에 안겨 있는 상태에서 시작한다. 부모의 품에서 보호받고 사랑받으면서 이야기를 듣는 일은 아이들에게 독서가 사랑과 연관되어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책을 읽어주는 것은 아이에게 일찍 문자를 깨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일찍부터 '듣기' 자극을 주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마이엘린에 있다. 마이엘린은 신경세포 축색돌기를 둘러싸고 있는 지방질의 백색 피막이다. 전선이 플라스틱 피복에 둘러싸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이엘린은 신경 세포를 둘러싸서 뉴런을 통해 전달되는 전기신호가 누출되거나 흩어지지 않게 보호한다. 뇌의 각 신경세포는 성장 단계에 따라 영역별로 마이엘린화를 거치고 이 과정을 통해 기능이 발달하는데, 일반적으로 마이엘린화 되었다는 것은 그 부분이 잘 발달했다는 의미이다.

책 읽기는 다양한 정보원, 특히 시각 영역과 청각, 언어 및 개념 영역을 연결하고 통합할 수 있는 뇌의 능력에 의존한다. 이러한 통합은 각 부위와 그 연합 영역의 성숙도, 이 부위들을 연결하고 통합시키는 속도에 의존한다. 그러한 영역의 성숙도, 이 부위들을 열결하고 통합시키는 속도에 의존한다. 그러한 속도는 다시 뉴런 축색의 마이엘린화에 따라 달라진다. 축색 주위를 감싼 마이엘린이 많을수록 뉴런이 전기신호를 빨리 전달할 수 있다.

마이엘린의 성장은 각 부위마다 약간씩 다른 발달 순서로 진행된다. 예를 들어 청각신경은 임신 6개월째 마이엘린화 되고, 시신경은 생후 6개월이 되어야 마이엘린화 된다. 사람은 다섯 살이 되기 전 감각 및 운동 부위가 모두 마이엘린화 되고 독립적으로 기능하게 된다. 각회와 같이 시각 언어 및 청각 정보를 빠른 속도로 통합시키는 주요 뇌 부위들은 다섯 살이 지나도 완전히 마이엘린화 되지 않는다.

청각 신경이 가장 먼저 마이엘린화 되고 글을 깨우치는 부분은 훨씬 뒤에 천천히 발달한다는 것은 아이에게 '듣기' 자극이 가장 효과적이며 자연스럽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태교에서 태담이 중요하며 유대인의 베갯머리 교육이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107-108


부모가 책을 읽어준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스토리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이 무엇을 하려는지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어디인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 포함된다. 또 아이는 부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상하거나 궁금한 것들을 질문한다.  109


책을 읽거나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 내용을 가지고 질문하고 대화하는 것이다.  110


즐겁게 공감하면서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눈다. 아이에게 책을 읽는 주도권을 준다...

미국 명문고인 제퍼슨고등학교는 SAT시험 1위를 하는 학교다. 그 비법은 무엇일까? 바로 OR(Outside Reading)프로그램이다. 매일 읽은 책에 대한 작문을 꾸준히 하며 자신이 직접 정리하는 것이다. 독서를 한 후 자신의 여려 가지 생각을 작문하는 것은 모든 과목의 기반이 될 수 있다...

학생들은 평소 주야장천 책만 읽는다. 수업 때는 말만 한다.  111


토론과 논쟁은 어떤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서도 질문하게 만든다. 당연한 것까지도 뒤집어 생각하게 한다. 상대방의 의견과는 다른 나만의 견해를 가져야 토론이 가능하다. 일반적인 상식을 가지고는 토론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래서 하브루타는 나만의 생각, 새로운 생각, 남과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든다.  117


질문이 좋아야 토론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질문이 좋아야 생각을 날카롭게 할 수 있다.  118


119



탈무드 논쟁의 원리를 참고해 하브루타에 적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원리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 하브루타는 질문이 핵심이다. 아이에게 지시나 요구, 설명을 하기보다는 질문을 많이 한다...

유대인 부모들은 학교에 다녀온 아이들에게 다른 것을 묻는다. "오늘 선생님에게 무슨 질문을 했니?"..

유대인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때 "선생님께 질문을 많이 해라."라고 말한다. 즉, 많이 떠들고 오라는 것이다.


둘, 틀린 답을 말해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고 다시 질문으로 답한다...유대인 학교 교실은 항상 시끄럽다.


셋, 하브루타를 하기 전에 충분히 내용에 대해 알게 한다.

유대인들이 토론 수업이 가능한 이유는 공부할 내용을 집에서 충분히 공부해오기 때문이다.


넷, 아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게 한다.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도록 이끈다. 그들은 수많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 자신이 잘하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고 그것을 스스로 지향한다.  123


다섯, 하브루타는 사고력 신장이 목적이다. 뭔가를 외우고 알게 하는 것보다 뇌를 자극해 사고력을 높여 안목과 통찰력, 비판적 사고력을 길러주는 것이 목적이다.

하브루타의 가장 큰 목적은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데 있다...

교육에서 어떤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많은 정보를 머리에 넣고 있다고 뛰어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고 방법이며, 사고력이고, 상상력이고, 창조력이다.


여섯, 질문하고 대화할 때는 집중해서 눈을 보고, 그 어떤 대답도 막지 않고 수용 한다.

유대인들은 토론하는 동안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또 나의 의견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서로의 견해가 어떤 것이 다르고 어떤 것은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과정에 더 중요성을 둔다. 그러는 중에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를 배우고 결론이 나지 않거나 둘이 해결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는 랍비나 교사의 도움을 받는다. 우리는 이기고 설득시키기 위해 논쟁하지만 유대인들은 나를 발전시키고 성숙하기 위해 논쟁한다.


일곱, 대답에서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칭찬한다.

칭찬은 구체성을 띄어야 효과가 있다. 아이들은 진심이 담기지 않은 칭찬이나 거짓된 사과를 얼마든지 눈치챌 수 있다. 진실한 것에 기초한 칭찬이어야 한다...

칭찬의 가장 중요한 법칙은 성격과 인격에 대해 칭찬하지 말고 꼭 아이의 노력과 노력을 통해 얻어진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칭찬하는 것이다. 아이는 구체적으로 칭찬을 받으면 그것을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덟, 남과 다르게 생각하도록 격려한다.

정답은 정해진 옳은 답을 말하고, 해답은 풀어낸 답을 말한다. 정답은 대부분 하나이고 해답은 각자가 풀어낸 답으로 다양한다...

다양한 해답, 나만의 해답, 서로 다른 해답을 요구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아홉, 모르는 것은 책을 다시 보거나 인터넷을 검색하는 등 스스로 찾아보게 한다.

아이가 질문을 하면 질문으로 답해서 아이가 깊은 생각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이가 몰라서 질문하는 경우도 있지만 부모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거나 같이 놀고 싶은 경우도 있다. 그 시간은 충분히 아이의 눈높이에서 즐겁게 놀아주어야 한다.


열, 많은 내용을 하브루타 하기보다는 하나의 내용을 깊이 있고 길게 하브루타 하는 것이 좋다.

책을 많이 읽고 지식을 쌓는 것보다 책을 깊이 읽고 사고하는 것을 강조한다. 

하브루타는 진도가 아니라 심도이다. 깊이 있는 노의를 하기 위해서는 매우 다양한 질문들을 한 문장 한 문장에서 뽑아낼 줄 알아야 한다. 그런 훈련 없이 하브루타 학습이 성공할 수 없다. 잡담만 하다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열하나, 다소 어려운 내용도 쉬운 용어로 질문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 좋다.

유대인은 부모든 교사든 답을 잘 가르쳐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이 몰라서가 아니라 그 기회를 통해 학생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다. 그 과정에 함께 참여해 안내자 역할을 하는 것이 자신들의 본분이라고 생각한다.


열둘, 모든 일상 속에서 하브루타를 하되 시간을 정해서 정기적으로 한다.


열셋, 집에서 하는 경우 잠들기 전이 하브루타를 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다. 

자녀들을 재우기 직전의 시간은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이 시간은 부모가 자녀를 침대에 누이고, 잠들 때까지 함께 있어주는 시간이다. 가족에게 투자하는 시간이고,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시간이다.


열넷, 나이가 어리더라도 쟁점을 만들어 토론과 논쟁으로 끌고 가는 것이 뇌를 계발하는 방법이다.

짝을 지어 질문하고 대화, 토론, 논쟁하는 하브루타의 가장 수준 높은 단계는 '논쟁'이다. 논쟁은 쟁점을 두고 반대되는 두 입장이 다투는 것을 말한다... 흔히 요즘은 논쟁과 토론이란 용어를 쓰지 않고 디베이트(debate)란 용어를 직접 쓰기도 한다.

디베이트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논제에 대해 격식을 갖춰 논의하는 것'을 의미하며 일정한 형식을 전제한다. ..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해서 참가자들이 둘로 나뉘어 정해진 순서와 시간에 맞추어 토론한다.


열다섯, 꼭 가르쳐야 하는 원칙이나 가치관은 대화를 통해 분명하게 인지하게 한다.  121-130



자녀 경제교육에 있어 쓰는 법부터 가르친다.

유대인의 돈 쓰는 법은 다름 아닌 자선활동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193


자녀에게 경제교육을 할 때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불로소득을 없애는 일이다.  196


물건 값을깎는 방법은 첫째로 가게 주인에게 그 물건을 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둘째로 물건의 힘집을 발견하고 값을 제안하는 것이다. 셋째로 발품을 팔아 다른 가게와 가격 비교를 통해 물건을 깎는 것이다.  198


"너의 생각은 어떠니?(마따 호셰프, What do you think about it?)"  228


그들은 "수줍어하는 사람은 배울 수 없다."라고 말한다.  239


공부를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지 진도를 나가는 것이 아니다.  240


자녀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애착의 형성이다. 애착을 형성하려면 반드시 부모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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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5일 비즈니스 카페 재팬이 주최한 최고경영자 모임에서 있었던 강연입니다. 비즈니스 카페 재팬은 나의 오랜 친구 히라카와 카츠미가 설립한 회사로, 컨설턴트를 주 업무로 하고 있습니다.  21



1. 공부로부터 도피하기


교육 받을 기회로부터 스스로 달아난다는 말은 머지않아 '하류사회'로 계층이 내려가는 것을 뜻한다.  25


학령기 자녀를 둔 어른들은 무의적으로 자기 자식을 제외한 다른 아이들의 학력이 내려가면 자기 아이에겐 이익이 된다는 기대감을 자기고 있다. 그런 무의식적인 욕망이 아이들의 학력저하를 심리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31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잠시 보류해 둠으로써 지성이 활성화되는 인간적인 기능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인상을 받는다.  36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모른다'는 것보다 이처럼 '모르는 것이 있어도 개의치 않는 '것이 위기의 징후로 여겨진다.  37


의미를 몰라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이다.  38


어두운 밤 갑판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항해사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바다 위에 떠 있으면 긴장한다. 하지만 만약 시야게 들어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투성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런 상황에서는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또 하나 새로 등장한다 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40


'최근 우리는 하나에서 열까지 돈이 들어가는 생활을 처음으로 경험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각종 미디어에서 정보가 들어오는 생활도 처음이다. 돈이 돈을 낳는 경제구조 속에 완벽하게 말려들어가 있다. 아이들이 일찍부터 '자립'의 감각을 체득하는 것도 이러한 경제 사이클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어 '소비주체'로서의 확신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은 현재의 경제 구조가 보내오는 메시지를 여과 없이 곧바로 받고 있다. 학교가 오늘날의 사회를 가르치고자 '생활주체'나 '노동주체'로서의 자립의 의미를 설명하기도 전에 이미 아이들은 어엿한 '소비주체'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있다. 이미 경제적인 주체인데 학교에 들어가면 새삼스레 교육의 '객체'가 된다는 것은 아이들 입장에서 내키지 않는 일일 것이다.' 스와 테츠지 <왕자와 공주가 되어가는 아이들>

이 부분은 내가 최근 십년 동안 읽었던 교육 관련 글 중에서 가장 계몽적이다. '아이들은 이미 취학 전에 소비주체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있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 

요즘 아이들과 삼십 년 전 아이들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은 처음 사회관계에 들어설 때 노동을 통해 들어가는가, 소비를 통해 들어가는가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벌써 사십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우리들이 어렸을 때 사회적인 활동은 먼저 노동주체로서 자기를 세우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사회적으로 무능력한 어린아이가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가사노동이었다. 식사가 끝난 후 밥그릇을 부엌까지 갖다놓거나, 마당을 쓸거나, 화초에 물을 주거나,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거나, 아버지의 구두를 닦아놓거나, 이처럼 가정에는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꽤 있었다. 부모는 당신들이 분담해야 할 가사노동을 아이들이 적게나마 줄여주니까 당연히 "고맙다"거나 "참 잘했어" 하고 칭찬해준다. 아이들은 그 칭찬이 기쁘고 자랑스럽다.

아이들이 가족이라는 최초의 사회관계 속에서 처음으로 유용한 구성원으로 인지되기 시작하는 것은 가사노동을 분담하면서부터이다. 작지만 가족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감사와 인정을 보상으로 획득하면서 어리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다져간다. 이러한 데서 예전에 아이들은 사회화 과정을 밟아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좀더 자라면 가사노동에 머물지 않고 바깥 사회활동에도 참가하는데, 타인에게 뭔가 도움되는 일을 하면서 그에 대한 감사와 사회적 승인이라는 대가를 받는 교환 행위를 통해 자기 정체성의 기초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는 가사노동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노동의 작은 분담자로서 사회관계 속에 자기를 등록하면서 아이들은 먼저 노동 주체로 자기를 세운다. 아니 이렇게 하는 것 말고는 달리 자기를 세울 방법이 없었다. 적어도 1960년대 중반까지 일본의 아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노동주체로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은 사뭇 다르다. 지금 아이들은 노동 주체라는 형태로 사회적 인정을 받아 스스로를 세울 수 없다. 그럴 기회를 구조적으로 빼앗겼다.

둘러보면 오늘날 가사노동 자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게다가 남은 가사 일이라는 것도 그리 생산적인 일이 아니다. 가령 청소나 빨래처럼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집안이 엉망이 되어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노동은 남아 있지만, 그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거나 성취감을 얻거나, 또는 사회성을 기르고 자연스레 학습과 연결되는 일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개를 산책시키고 화초에 물을 주고 풀을 뽑는 일상적인 일들은 자연과 연결되는 일로, 많든 적든 아이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지만 이제는 가정에서 그런 일을 찾기가 힘들다. 부모들 입자에서는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고 싶어도 일거리가 없어서 가사노동을 시킬 수가 없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부모에게 가사노동 분담이라는 작은 선물을 할 수도 없고, 가정이라는 시스템에 작게나마 자신도 공헌하고 있다는 기쁨을 누릴 기회도 없다. 

오히려 지금의 아이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다. 아이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자체가 집안 질서를 어지럽히는 요소여서, 가능하면 그들에게 할당된 공간 안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공헌이 되었다. 이런 가정이 매우 많다고 본다. "됐으니까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줄래!" 하는 엄마들의 화난 목소리는 요즘 다든 익숙할 정도로 많이 듣는 거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런 식의 금지는 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어린아이의 미약한 도움일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고, 그 고사리 같은 손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일본 속담에 '고양이 손이라도 비리고 싶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부탁할 만한 생산 활동이 거의 없어졌다. 반면에 아이들의 소비활동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촉발된다.  48-51


한 사람 몫으로 사회관계의 장에 등장하는 경우, 만일 그가 네 살짜리 어린아이라면 그를 교섭 상대로 대등하게 대우해줄 어른은 없다. 하지만 돈을 쓰는 사람으로서 등장한다면 그 사람의 나이나 식견, 사회적 능력 따위의 속인적 요소는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쓰는 돈이 얼마인지가 중요하지, 돈을 쓰는 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고려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돈의 투명성'이라는 특권적 성격이다. 사회적 능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어린아이가 여기저기서 쥐어주는 용돈을 가지고 소비주체로 시장에 등장할 때 처음 느끼는 소감은 '법을 뛰어넘는 전능함'일 것이다.  52-53


* 니트(NEET) : 용국 정부가 노동정책상 인구 분류로 정의한 용어로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의 약자이다. 교육을 받지 않고, 노동을 하지 않고, 직업훈련도 받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니트는 일반적으로 '일할 의욕이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63


"그럴 시간 있으면 공부해라" 또는 "학원이나 가라"는 요구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국영수 학원에 가거나 예체능 학원에 간다. 그리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지쳐 말할 기운도 없고, 가족들을 신경 쓸 여력도 없다. 그저 온몸으로 피로와 불쾌함을 표현함으로써, 아이도 아이 나름대로 주어진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엄마 아빠가 그렇듯이 자신도 충분히 기분이 언짢은 상태라는 것으로, 자신도 불쾌함을 견디고 있고 따라서 집안에 보탬이 되고 있음을 과시한다.

가족 중에서 '누가 가장 집안에 보탬이 되는가'를 '누가 가장 기분이 나쁜가'로 측정한다. 이것이 현대 일본 가정의 기본 규칙이다.  65


'시장 원리를 기초로 할 때 배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68


배움이란 자기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모르고, 그것이 어떤 가치와 의미와 유용성을 갖는지도 말할 수 없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71


자신의 유아적 욕망을 가슴에 품고, 결코 성장하거나 변화하지 말고 그저 소비주체로 안주할 것. 시장원리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존재하길 요청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이들을 외계의 변화에 적응해 살아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사실을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77


30센티미터 자로 잴 수 없는 것들, 예컨대 무게나 빛, 탄력 같은 것들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가진 거라곤 30센티 자밖에 없어 오로지 그 잣대로 세상의 모든 것을 계량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어린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82




2. 리스크 사회의 약자들


얼마만큼 노력하면 얼마만큼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노력과 성과의 안정적인 관계가 붕괴하기 시작한 것, 이것이 리스크 사회의 특징이다.  89


리스크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 생존 전략의 선택에 따라서 양극화는 더욱 진행된다.  90


리스크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것이 국민들에게 부여된 중요한 과제라고 정부틑 선언하고 있음에도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위정자와 교육행정 책임자, 대중매체 지식인들은 '리스크를 제거하라'고만 가르치지, 어떻게 '리스크를 방어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중앙교육심의회의 답신이나 교육학자의 제언 중에 '아이들에게 어떻게 리스크 헤지 방법을 교육할 것인가'를 다룬 내용을 본 적이 없다. 리스크 사회가 도래했다고 경종을 울리면서 아무도 '리스크를 헤지하는 법'을 국민들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105


우리들은 지금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실업을 당해도, 노숙자가 되어도, 병이 들어도 모든 것이 이러한 리스크가 있는 삶을 선택한 자신의 책임이라는 말은 리스크란 개인적인 것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왜냐하면 리스크 헤지는 자기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105-106


중국인은 자식들을 일본이나 미국, 호주 등지로 뿔뿔이 유학을 보내 그곳에서 사업을 하게 한다. 어느 한쪽이 전쟁이나 공황으로 재산을 잃거나 인종박해로 추방을 당해도 다른 나라에 있는 친족이 지원하거나 받아줄 수 있도록 안전망을 쳐놓는다. 이것은 역사적 경험 속에서 갈고닦은 리스크 헤지의 기법이다. 

유대인도 마찬가지다. 로스차일드 재벌의 창시자 마이야 로스차일드는 다섯 명의 아들에게 유럽 네 도시에 은행을 열게 했다. 장남은 창업지인 프랑크푸르트 본점에 남겨두고, 둘째는 빈, 셋째는 런던, 넷째는 나폴리, 다섯째는 파리에 지점을 열게 했다. 그로부터 2백년이 흐르는 동안 본저모가 나폴리 지점은 폐업하고, 빈 지점은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때 망했다. 하지만 런던 지점과 파리 지점은 살아남아서 일족의 이름을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과 두 차례에 걸친 유럽 대전에서도 살아남았기에 이것이야말로 리스크 헤지의 교과서 같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알수 있듯이, 리스크 헤지는 '살아남기'를 목표로 집단이 합의한 계획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그러므로 '개인이 리스크 헤지를 하고, 발생한 리스크에 개인이 대처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개인이 리스크 헤지를 한다는 것은 원리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들은 '살아남는 것을 집단의 목표로 내걸고 상부상조하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리스크 사회를 살아간다'는 의미는 항간에서 이야기하듯 '자기가 결정하고 그 결과도 혼자서 책임진다'는 원리로 사는 게 결코 아니다. 자기가 결정하고 결과도 자신이 책임지라는 말은 리스크 사회가 약자에게 강요하는 삶의 방식(또는 죽음의 방식)이다.  107-108


고립된 아이가 혼자서 학교라는 시스템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자기 가치관을 학교 시스템에 대등한 것으로 대치시킨다. "이것을 왜 배워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들이댄다. 스스로 배울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지 못하면 아이는 배움을 거부한다. 이것이 자기결정이다. 배우지 않음으로써 초래되는 리스크를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사칙연산을 못하고, 알파벳을 모르고, 한자를 못 읽는다. 흥미 있는 영역에 대한 사소한 지식은 있을지라도 흥미가 없는 분야는 아예 모른다. 벌레가 파먹은 듯 의미의 구멍이 숭숭 뚫린 세상이 별로 불쾌하지 않다는 듯 살고 있다. 이렇게 아이들은 계층 하강의 리스크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115


오늘날의 교육 문제는.. 아이들이 나태해서 초래된 결과가 아니라 노력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학력저하가 아이들의 나태와 주의산만의 결과라면 그 보정은 교육기술 차원의 문제에 지나지 않지만, 현실에서 상당수의 아이들이 학습을 포기하고 공부로부터 도피하는 데서 자신감과 성취감을 얻는다면, 그리고 그 수가 계속 늘어난다면, 이 문제는 교육기술이나 방법을 바꾸는 식의 기술적 차원으로는 해결하기 힘들다. 사회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이는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120-121




3. 노동으로부터 도피하기


젊은 회사원에 대한 얘기다. 평소 그의 일솜씨를 높이 평가한 상사가 새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어보라고하자 그는 그 길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앉으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자기 일은 자기가 결정한다'는 가지결정권에 대한 고착이다. 자기가 결정한 것이라면, 그 결정이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불이익을 초래할지라도 상관없다. 일종의 '자기결정 페티시즘'이다.  125


선택을 강제하면서 선택한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것을 강요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조리하다.  128


니트는 영국에서 처음으로 문제화된 사회현상이다. 하지만 일본의 니트 문제는 영국의 경우와는 많이 다르다. 영국은 전형적인 계급사회여서, 하층계급 사람들은 취학 기회나 취업훈련 기회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다. 학습 의욕은 있지만 사회적으로 상승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 젊은이들도 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이민을 대량으로 받아들인 사회에서 이민자의 아이들은 교육 기회와 문화자본에서 구조적으로 멀어질 수밖에 없다. 파리 근교에는 HLM(저가 임대 주택)이라는 거대한 주택단지가 있다. 그곳에는 이민자를 비롯한 빈곤층 주민들이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살고 있다. 예전에 이런 교외지역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던 프랑스 여성에게 들었는데, 이런 거대 단지에는 도서관이나 미술관, 책방, 극장, 콘서트홀 같은 문화시설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다고, 설령 예술적 재능이 있다 해도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기회 조차 없는 셈이다. ..

유럽의 니트는 계층화의 한 증상이다. 사회적 상승 욕구가 있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일본의 니트는 유럽과 사뭇 다르다. 사회적 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느넫도 아이들이 스스로 그 기회를 포기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일본에서는 사회적 약자가 자진해서 차별적인 사회구조를 강화하는데 가담하는 방법으로 계층화가 진행되고 있다. 다시 말해 약자가 자신의 사회적 입장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세계에서도 예외에 속하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129-130


공교육의 이념은 유럽의 시민혁명기에 제창되었지만, 일찍이 제도적으로 정비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00년 당시 미국 고등학교 (14세~17세) 취학률은 8.4%였다. 같은 시기 유럽에서 중등하굑 취학률은 3.8% 미만이었다. 그보다 반세기 전 1840년에 초등학교 취학률은 미국 전국 평균이 38.4%였다. 단, 이 경우 '취학자'는 단 하루라도 학교에 갔던 사람까지 포함하고 있고, 당시 미국의 보통학교 개강일은 연간 40일 정도였다(카리야 타케히코 <교육의 세기>)

근대의 초등교육 기관은 부모에 의한 사적 수탈과 지배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는 '피난소'라는 공적 기능도 함께 수행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적인 공교육 사상을 기초로 한 일본 헌법에서는 교육받을 권리를 정한 제26조 다음에 '아동을 혹사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제 27조가 따라온다. 헌법에 이러한 규정이 있는 것은 산업혁명 이후 근대 산업사회가 취학 기회를 갖지 못한 아동을 '저가노동'으로 혹사시켰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다.  131


지금 아이들에게 교육을 받는 것이 '권리'인지 '의무'인지를 묻는다면 아마 90%늬 아이들이 '의무'라고 답할 것이다. 이 대답에는 교육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강제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의무를 위반하는 것을 일종의 정치적 이의제기'로 보는 시각도 성립한다....

'배움'이란 본시 아이들이 먼저 나서서 '침해할 수 없는 권리'로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것을 고역으로 여기게 되었을까?  132


교육의 '권리'를 '의무'로 바꿔서 읽는 도착 행위가 일어난 이유는 경제적 합리성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침투했기 때문이다.  133


노동에의 가치에 비해 임금이 낮은 것은 원리상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임금이란 노동자가 창출한 노동가치에 비해 항상 적다. 당연하다. 그렇지 않다면 기업이 이윤을 낼 수가 없고, 주주에게 배당도 할 수 없으며 설비투자도 불가능하고, 연구개발도 할 수 없다. 경제활동에 들어가는 자금은 모두 노동자로부터 '수탈'한 노동가치에서 조달된다. 노동자가 자신이 창출한 노동가치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경제의 기본 원리다. 여기서 발생한 잉여가 교환을 가속시키고, 그 결과 시장이 형성되고 분업이 이루어지며 계급과 국가가 생겨난다. 인간은 이런 방식으로 사회를 만들어왔다.  141-142


배움의 본질은 지식과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방법에 있기 때문이다.  155

 

졸업생은 '대학이라는 공장'에서 송출한 '제품'이며, 이 제품을 기업이 '매입'한다는 또 하나의 소비모델이 존재한다.  157




4. 이들을 어떻게 도울까


히라카와 : 지식은 일본에서도 활용할 수 있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교환 가능성에 입각하여 표준화됩니다. 모든 것을 표준화해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앞에서 언급했던 '자기 찾기'가 꽤 화재를 모았는데, 모두가 표준화되면 이제 '나'라는 것은 없어집니다. 옆 사람과 나의 차이를 측정하는 도구로 경제적 잣대밖에 없다면, '자기다움'이란 애당초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붕괴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일한 척도인 돈을 양적으로 불려서 자기붕괴를 막고자 합니다.  168


우치다 : 아동학대 사례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만, 이 현상은 육아를 등가교환 관점에서 생각하는 습관이 낳은 피연적인 결과로 보입니다. 육아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엄마들은 육아를 긴 안목으로 생각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극히 짧은 안목으로 생각합니다. 아마도 육아를 비즈니스 관점에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식은 자기가 만들어낸 '제품'이며, 부모의 서오가는 이 제품에 어떤 부가 가치를 덧붙이느냐에 따라 평가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서오가가 평가를 받으면 부모는 '육아의 성고'이라는 형태로 사회적인 자기실현을 다했다고 여깁니다. 회사가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의 매출이나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것과 같은 심리입니다.  

처음에는 똥오줌을 가린다거나, 말을 한다거나, 걸을 수 있다는 식의 눈에 보이는 형태로 아이의 능력을 개발하는 데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 다음에는 영어를 구사한다거나, 피아노를 친다거나, 명문학교에 입학했다거나, 역시 눈에 보이는 형태로 아이들의 부가가치를 높이고자 합니다. 아이들에게 부가된 가치를 부모인 자식의 '사업' 성과로 가시적, 외형적으로 과시하려고 하는 한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학력이나 자격과 같은 외형적으로 주위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누넹 보이는 성과' 이외의 것은 육아의 부가가치로 쳐주지 않습니다.

자식이 있으면 이해하시겠지만 본래 육아는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는 일로, 육아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20년이 걸려도 잘 모르는 법입니다. 잘 모르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육아 노동의 성과를 1~2년안에 눈에 보이는 형태로 드러내 보이라고 압력을 가해서는 곤란합니다. 짧은 시간에 측정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부모들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수치화할 수 있는 형태로, 정량적인 형태로 육아의 서오가를 올리라고 재촉당하고 있습니다. 부모 스스로 이런 압력을 강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성장을 느긋하게 기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종종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또 가닭 모를 행동도 합니다. 이럴 때 "이 아이가 뭘 하는 걸까?"라며 아무 말 없이 그냥 바라보는 것이 옳은 양육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양육법은 오늘날 허용되지 않습니다. 

정시노가 의사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사춘기 때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들의 부모에게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아이가 "기분이 좀 나빠요"라거나 "이건 싫어요"같은 불쾌한 메시지를 발신할 때 부모가 이런 메시지는 선택적으로 배제해버립니다. 아이가 심신에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정보는, 말하자면 '제품'이 소음을 내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제품이 소음을 낸다는 것은 제품 공정에 하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부모는 자신의 '육아 실패'라는 기호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귀를 막아버리는 것이지요. ...

아이들은 몸과 마음에 이상이 오면 위험신호를 보냅니다. 그런데 부모는 그 신호를 청취하면 자신의 육아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정하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발신하는 '도와주세요'라는 신호에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립니다. 이렇게 둔감한 부모와 살고 있는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무너집니다. 

어린 아이들은 아직 자기가 느끼는 몸과 마음의 불쾌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들이 보내오는 위험신호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신호가 아니라 소음으로 들리니까요. 하지만 여기에서 부모가 제대로 자기 역할을 해내야 합니다. 바로 아이들이 발신하는 소음을 신호로 변환시키는 일입니다. 아이들과 긴 시간을 함게 지내다보면 어느 순간에 아이들이 내는 소음이 신호로 들리게 됩니다.

이것은 아이가 모국어를 습득하는 과저오가 똑같습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지속적으로 해주는 의미 불명의 말들을 분절하여 해독함으로써 마침내 모국어를 습득합니다. 다시 말해 무의미하게 들리던 소음이 의미 있는 신호로 바뀌는 것이지요. 이건 흔히 말하는 커뮤니케이션과는 다릅니다. 커뮤니케이션의 기초가 되는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을 일으키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음을 신호로 변환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목숨을 건 도약'입니다.  169-172


전후 60년 동안 일본 사회는 약자의 안전망이었던 중간적인 공동체를 계속해서 무너뜨렸습니다. 지역공동체, 친족, 주종관계, 사제관계 전부 다 무너뜨렸습니다.  201


아이들이 노동주체로 출발할지 소비주체로 출발할지 학교에 들어가기전에 이미 결정됩니다.  211


요로 타케시(해부학자, 도쿄대 명예교수, 마음의 문제나 사회현상을 뇌과학, 해부학을 비롯한 의학, 생물학 영역의 다양한 지식으로 설명하는 저술 활동으로 폭넓은 독자층을 얻고 있다.) 선생님께서 "이제는 삶의 매뉴얼이 없는 시대여서 각자가 연구해야 합니다"라는 내용으로 1시간 30분 정도 강연을 하셨는데 한 질문자가 "선생님, 매뉴얼이 없는 시대에는 어떻게 살면 될까요?"라고 물어서 아연실색하셨다고 합니다. 저 역시 때때로 강연을 하기 때문에 비슷한 느낌을 받는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내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에서 무엇을 듣고 있었을까?"라고 말이빈다. 그런 사람은 그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이전부터 자신이 갖고 있던 틀 속으로 모두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틀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부분은 다 잘라버리고 자기 식으로 이해한 부분만 취합니다. 그래서 가끔 "내가 이런 사고방식은 좋지 않다"고 거론한 부분을 거꾸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설이 있는데, 그런 건 경솔하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라고 얘기했는데, 나중에 "좀 존에 선생님은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하면서 확인하러 옵니다. 그때 "아닙니다"라고 말하면 깜짝 놀랍니다. 자기가 동의할 수 있는 내용만 잘라서 듣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꾸 늘어나고 있습니다.  220


히라카와 : 체험교육이라고 할까 수련이라고 할까, 이런 전통적인 교육 기술을 통해 지금은 잃어버린 능력을 계발하는 방법을 어떻게 교육 시스템 안에 다시 한 번 프로그램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지역사회에 합기도 도장을 연 지 15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설계한 교육 프로그램에는 나름대로 확신이 있지만, 어떻게 이 프로그램을 누구에게든 적용할 수 있는 좀 더 보편적인 형태로 전개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계획이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일단 제자를 많이 길러내어 제 프로그램을 충분히 체험한 제자들이 도장을 열고 이를 통해 이런 내용을 널리 알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수 서당식 체인점 같은 방식으로 말입니다.  22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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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부티의 쓰레기통


나의 미래는 아주 일찍부터 너무 위태로웠던지라 엄마는 나의 현재에 대해 결코 마음을 놓지 못했다.  13


그러니까 나는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었다. 어렸을 때, 나는 날마나 학교에서 들볶이다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왔다. 내 공책에는 선생님들의 꾸지람이 적혀 있었다. 반에서 꼴찌가 아닐 때는 꼴찌 바로 앞이었다. (축배를 들어야 할 일이었다!) 처음엔 계산, 그다음엔 수학에서 꽉 막혔고, 심각한 철자 습득 장애에다, 역사의 연대 암기와 지리의 장소 파악에도 먹통이었고, 외국어 습득 불능에다 (수업은 듣지 않고 숙제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라는 명성이 자자했으며, 음악이나 체육 혹은 그 외의 어떤 과목으로도 벌충하지 못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성적표를 집으로 가져오곤 했다.  16


"그러니까 학교에 관한 책이 또하나 나오는 거네? 그런 책은 꽤 많지 않아?"

"학교에 관한 책이 아냐! 모두들 하굑를 다루고 있고, 신구 논쟁은 끝없이 계속되고 있어. 학교의 프로그램, 학교의 사회적인 역할, 그 궁극적인 목표, 과거의 학교와 오늘의 학교... 그런데 열등생에 관한 책은 없거든!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에 대해 그리고 그로부터 겪게 되는 정신적인 충격을 다루는 책..."

"그게 그렇게 힘들었어?"  22-23


"요컨대 넌 핑계를 만들어냈던 거야,"

그렇다. 그게 바로 열등생의 속성이다. 그들은 자신의 열등함에 대해 굽이굽이 반복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난 한심해, 난 정대 할 수 없어, 그러니 노력해볼 필요도 없어. 이미 다 망했어. 내가 그랬잖아요, 학교는 나한테 맞지 않는다고... 열등생에게 학교는 출입이 금지된 몹시 폐쇄적인 집단으로 보인다.  25


두려움은 분명 학창 시절 내내 나의 가장 큰 문제였고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교사가 된 뒤, 나의 급선무는 공부 못하는 학생들의 두려움을 치료하고 방해물을 치워버려 앎이 스며들 기회를 갖게 해주는 일이었다.  30





2. 되다


어머니들 모두가 조금은 창피해하고, 모두가 자기 아들의 미래를 걱정한다. "대체 이애가 뭐가 될까요?" 대부분의 어머니는 미래라는 강박적인 화폭에 현재를 투영해 그려놓은 것을 아이의 미래로 생각한다. 희망 없는 현재의 이미지가 터무니없이 비대하게 투영된 벽을 미래라고 생각하는 것, 바로 여기에 모든 어머니의 거대한 공포가 있다.  61


나는 우스운 이야기를 시도해본다.

"신을 웃기는 유일한 방법을 아세요?"

전화 저편의 머뭇거림.

"신에게 당신의 계획을 맗는 겁니다."

다시 말해 놀랄 것 없다는 것, 그 어떤 일도 예상대로 이렁나지 않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 미래가 과거가 되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유일한 사실이다.

물론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 쉽게 아물지 않을 상처에 반창고나 붙여주는 격일 테니까. 하지만 나는 전화로는 그렇게 하고 있다.  62-63


어떤 미래도 없다. 

뭔가 되지 못할 아이들.

절망적인 아이들.

초등학생, 다음에는 중학생, 그다음에는 고등학생이 된 나 역시 그렇게 앞날이 없는 삶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것은 바로 공부 못하는 학생이 스스로를 설득하는 최초의 사실이다. 

"이런 성적으로 뭘 기대해?"

"중1이나 마칠 수 있을 것 같니?(중2, 중3, 중4, 고1, 고2는...?)"

"대학에 들어갈 가능성이 얼마나 될 거 같아? 퍼센트로 따져 얼마나 될지 계산 좀 해볼래?"

혹은 정말로 즐거운 비명까지 질러가며 호언장담하던 중학교때 교장 선생님 같은 사람도 있다.

"페나키오니, 네가 중학교를 졸업하겠다고? 절대 그럴 수 없을 거다. 알겠니? 절대로!"

그 여자는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69-70


나는 학교생활을 따라가지 못했고 언제나 그런 모습뿐이었다. 물론 시간은 지나갈 것이었고, 물론 성장할 것이었고, 물론 사건들도 일어날 것이었고, 물론 삶도 계속될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결과에도 결코 이르지 못할 그런 실존을 횡단할 것이었다. 그것은 확신보다 더한 것이었고, 그게 나였다.

어떤 아이들은 이러한 사실에 재빨리 설득당한다. 그리하여 자신을 각성시켜줄 누군가를 찾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실패에 열정을 쏟게 된다. 열정 없이는 살 수 없으므로.  72


겨울 저녁. 나탈리가 흐느껴 울며 학교 계단을 급히 내려간다. 누군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슬픔...

선생은 생각한다. 이런, 학교의 슬픔이로군.. 

"선생님 ... 흑흑... 흑흑... 선생님... 저는 ... 저는 이해를... 이해를 못하겠어요."

"뭘 이해해? 뭘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야?"

"양... 양보..."

그리고 갑자기 병마개가 쑥 뽑히듯 단번에 답이 나온다.

"양보와 대립의 종속 접속절요."

침묵.

웃어선 안 된다.

절대 웃으면 안 된다.

"양보와 대립의 종속 접속절? 그것 때문에 그렇게 울고 있는거야?"

안도감. 선생은 재빨리. 아주 진지하게 문제의 그 접속절을 생각한다. 이 아이에게 그건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 잘 몰라도 그 절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생각한다...

".. 이건 아주 쉬운 거야. 자, 봐. 됐지, 알겠니? 그래, 예문을 하나 만들어봐. 아이는 정확한 문장을 만들어낸다. 이해한 것이다. 자, 이제 좀 괜찮니? 어! 그런데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다. 아이는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다시금 눈물을 흘리고 크게 울먹이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선생님은 아무것도 몰라요. 제 나이 열두 살하고도 반년이 지났는데, 암것도 한 일이 없어요." ...

다음날 저녁이 되어서야 나는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나탈리의 아버지는 어느 회사 간부였는데 십 년간의 성실한 직장생활 끝에 얼마 전 해고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간부직 해고 사태의 첫 사례였다. 때는 80년대 중반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실직이란 말하자면 노동직 문화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회사에서의 자기 역학을 의심하지 않았던 모범적이고 세심한(작년에 나는 나탈리의 아버지를 자주 보았다. 그는 소심하고 자신감이 너무 부족한 딸 때문에 근심이 많았다) 젊은 간부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는 결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고는 가족들이 모인 식탁에서 끊임없이 되뇌었다. "내 나이 서른다섯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  73-76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자살하는 일이 일어날 정도로 말이다. 이것이, 적어도 모든 면에서 나타나는 우리 교육의 균열이다.  86


들통난 거짓말, 선생님들의 분노, 부모의 슬픔, 비난, 처벌, 아마도 퇴학, 자아로의 복귀, 무기력한 죄의식, 모욕, 우울한 희열, 그들 말이 옳아, 나는 한심해, 한심해, 한심해.

난 한신한 놈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자신이 한심하다는 확신에 빠져 잇는 청소년은-이게 바로 체험이 우리에게 가르쳐줄 최소한의 사실인데-하나의 멋잇감이다.  94-95


아이의 거짓말에 동조한 어른들에 관한 이야기 중에 가장 기억할 만한 것은 내 친구 B의 동생에게 일어난 일이다. 당시 B의 동생은 열두세 살쯤이었을 것이다. 그애는 수학 시험이 겁나서 단짝 친구에게 맹장의 정확한 위치를 짚어달라고 했다. 그러더니 끔찍한 발작이 일어난 시늉을 하며 쓰러졌다. 학교 지도부는 그애의 말을 믿는 척하며 집으로 돌려보냈는지데. 어쩌면 그애를 치워버리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부모는-그애는 부모에게 다른 거짓말도 했다-별생각 없이 아이를 인근 병원으로 데려갔는데, 병원에서는 깜짝 놀라며 당장 수술을 했다! 수술 후, 핏빛의 기다란 뭔가가 담긴 병을 들고 나타난 외과의사는 순진하고 환한 얼굴로 이렇게 외쳤다. "수술하기를 잘했습니다. 하마터면 복막염이 될 뻔했어요!"

사회란 공유하는 거짓말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100


가장 좋은 기숙학교는 선생님들도 함께 기숙하는 학교다.  102


열등생이 선생님으로 변신한 것은 무엇에서 기인한 걸까?

덧붙여, 알파벳도 깨치지 못하던 애가 소설가로 변신한 것은?

나는 어떻게 해서 뭔가가 되었을까?  108


아이에게 장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한을 센티미터로 재라고 요구하는 꼴이다. '되다'라는 동사가 아이를 주눅들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어른들의 걱정이나 질책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게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조금도 생각해내지 못했고, 그냥 순진하게 영원히, 언제나 바보일 거라는 그들의 말을 믿었다. '영원히'와 '언제나'는 상처받은 자존심이 열등생에게 시간을 헤아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단위였다.  111


최고 권력자들이 이미 파산선고를 내렸는데 죽어라 공부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보다시피 나는 궤변론자의 태도 같은 걸 키워가고 있었다. 이것은 선생이 된 내가 열등생 제자들에게서 한눈에 구별해내는 기질이다.

그 뒤에 나의 첫번째 구원자가 나타났다.

국어 선생님. 

중4 때.

당시의 나를 있는 그대로 알아보았던 분. 즉 명랑하게 자멸해가는 진지한 망상가로 말이다.

틀림없이 그 선생님은 가르쳐준 것은 배우지 않고, 숙제 못한 핑계를 어떻게 둘러댈까 늘 잔머리를 굴리는 나의 적성에 대경 실색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 소설 한 편을 쓰라고 명령하고 대신 논술을 면제해주기로 작정한 것이다. 일주일에 한 장(章 글장)씩 써서, 한 학기에 소설 한 편을 끝내야 했다. 주제는 자유지만, 틀린 글자 하나 없는 소설을 내야 했다. 선생님은 "비평의 수준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소설 자체는 까맣게 잊어버렸는데도 그 표현만큼은 기억난다.) 그분은 교직 말년을 우리에게 바친 노교사였다. 더이상 궁핍할 수 없는 파리 북쪽 변두리 중학교에서 당신의 은퇴를 연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 낡아빠진 기품을 지닌 노선생이 내 안의 이야기꾼 기질을 알아본 것이다. 그는 내게 철자 습득 장애가 있든 말든 학교 공부를 따라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면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주 열정적으로 소설을 썼다. 사전(그날 이후 사전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의 도움을 받아가며 조심스레 단어 하나하나를 고치고, 신문에 연재하는 전업 작가처럼 날짜를 지켜가며 매주의 분량을 갖다 냈다. 지금 떠올려보면, 아주 슬픈 이야기였고, 당시 내가 큰 영향을 받았던 토머스 하디풍의 글이었다. 토머스 하디의 소설들은 오해에서 재난으로, 재난에서 어찌할 수 없는 비극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운명에 대한 나의 취향을 매혹 했다. 출발선부터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 내 생각이 바로 그거였다.

그해 내가 뭔가에서 중요한 발전을 이루어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학창 시절 처음으로 어떤 선생님이 나에게 하나의 지위를 부여했고, 나는 계속 따라가야 할 노선이 있는 개인으로, 지속적으로 견뎌내고 있는 한 사람으로, 누군가의 눈에 학생으로 존재했다. 물론 나의 후원자인 노선생님이 미치도록 고마워쏘, 그가 꽤 거리를 두고 있었음에도 내 비밀스러운 독서를 털어놓을 만큼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래, 페나키오니, 요즘은 뭘 읽고 있니?"

나에겐 독서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게 나를 구원해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때의 독서는 요즘처럼 터무니없는 자랑거리가 아니었다. 시간 낭비이자 학업을 망치는 일로 평판이 난 소설 읽기는 수업 시간에 금지되었다. 책을 몰래 숨어서 읽는 내 취향은 거기서 비롯했다. 소설책을 교과서로 씌워 읽고, 되도록 모든 곳에 책을 숨겨두고 읽고, 야밤에 손전등을 켜고 읽고, 체육 시간을 면제받아 읽고, 혼자서 책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이든 좋았다. 이런 취미를 길러준 곳이 바로 기숙사다. 나만의 세계가 필요했는데, 그게 책들의 세계였다. 집에 있을 때는 무엇보다 식구들이 책을 읽는 모습을 관찰했다. 아버지는 파이프를 물고 안락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무릎에 책을 올려놓고 둥근 램프 아래, 나무랄 데 없는 가르마를 약지로 무심히 쓰다듬으며 읽었다. 베르나르 형은 방에서 다리를 구부린 채 옆으로 길게 누워 오른손으로 머리를 괴고 읽었다... 이런 태도들에는 행복 같은 게 있었다. 따져보면 나를 독서로 밀어붙였던 것은 책 읽는 사람의 이런 자태였다. 처음에는 오로지 그런 자세들을 따라해보려고, 그리고 다른 자세를 개발해보려고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언제나 지속되는 행복 속에 신체적으로 정착했다. 무엇을 읽었나? <미운 오리 새끼>를 나로 여겨 안데르센의 동화책들을 읽었다. 하지만 검과 말 그리고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동경으로 알렉상드르 뒤마도 읽었다. 그리고 셀마 라겔뢰프의 멋진 <예스타 베를링>, 주교에게 추방당한 그 훌륭한 술주정뱅이 사제는 에세뷔의 다른 기사들과 더불어 내 모험의 지치지 않는 동반자였다. 중3으로 올라갈 때 베르나르 형이 준 <전쟁과 평화>는 맨처음 나타냐와 안드레이 공작의 사랑 이야기로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사랑 이야기에만 집중하면 소설은 100페이지쯤으로 줄어든다. 중4 때 두번째로 그 책을 읽었을 때는 나폴레옹식의 서시시로 읽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보로디노 전투, 모스크바의 화재, 러시아군의 퇴각(나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거대한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수업 시간에 몰래 그렸던 그 작은 인간들을 학살당하게 했다). 이것은 기껏해야 200~300페이지로 압축된다. 고1 때 다시 읽었을 때는 피에르 베주호프의 우정이 눈에 들어왔다(이자는 또다른 미운 오리 새끼이긴 해도 생각보단 많은 걸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3 때 소설의 전체가, 그러니까 러시아와 쿠투조프, 클라우제비츠 같은 인물이, 토지개혁이 그리고 톨스토이가 눈에 들어왔다. 물론 디킨스-올리버 트위스트는 나를 필요로 했다-도 읽고 에밀리 브론테도 읽었다. 브론테의 모럴은 내게 구조를 요청했다. 또한 스티븐슨, 잭 런던, 오스카 와일드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을 처음으로 읽었다. 당연히 <노름꾼>이 있었다(왜 그런지는 알아봐야 하는데, 도스토옙스키는 항상 이 <노름꾼>으로 시작된다). 나의 독서는 이런 식으로 우리집 서재에서 찾아낸 책들로 이루어졌고, 물론 <탱탱> <스피루> 그리고 당시를 휩쓸었던 <흔적의 표시들> 혹은 <봅 모란> 같은 만화도 읽었다. 내가 학교로 가져가는 책들이 첫째 조건은 학교 독서 프로그램에 없는 것이어야 했다. 아무도 내게 묻지 않았다. 누구도 내 어깨 너머로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책의 저자와 나는 우리끼리 오롯이 머물렀다. 책들을 읽으면서 내가 교양을 쌓아가고 있었다는 것, 그 책들이 내 안에 어떤 욕구를 일깨웠소 그 욕구는 책들이 잊히더라도 살아남을 거라는 걸 나는 몰랐다. 청소년기이 이러한 독서는 세상의 기호들을 향해 사방의 문을 열어놓으며 완수되었고, 그중에서도 네 권의 책이 서로 구별되지 않은 채,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이유로 내 안에서 밀접한 친족관계를 직조해냈다.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 위스망스의 <거꾸로>, 롤랑 바르트의 <신화지> 그리고 페렉의 <사물들>이 바로 그 책들이다.

난 고급 독자는 아니었다. 플로베르에게는 실례가 되겠지만, 열다섯 살에 에마 보바리처럼 오로지 감각의 만족을 위해 책을 읽었고, 다행히 그 감각은 지칠 줄 모르고 나타났다. 나는 이러한 독서로부터 학교생활에 도움이 될 어떤 이득도 끌어내지 못했다. 모든 선입관과는 반대로 이처럼 삼키듯 읽은-그리고 아주 빨리 잊힌-수천 페이지의 글은 나의 철자법을 개선해주지 않았고, 철자법은 요즘도 내게 불분명한 채로 남아 언제 어디서든 사전을 찾아봐야 한다. 아니다. 내 철자법의 실수들이 일시적으로나마(하지만 이 일시적인 것이 결정적으로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극복되었던 것은 노선생님이 주문한 소설에서였다. 철자법에 신경쓰느라 독서 수준을 낮추고 싶지 않다는 선생님의 요구에 나는 틀린 글자 없는 원고를 갖다드려야만 했다. 요컨대 대단히 천재적인 교수법이었다. 아마도 오로지 나에게만 통했을, 그리고 오로지 그런 상황에서만 통했을 방법이지만, 어쨌든 천재적이다!

나는 이렇게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선생님을 중4와 고3 사이에 세 분 더 만났다.

한 분은 수학 자체였던 수학 선생님이고, 또 한 분은 역사 구현력이 누구보다 뛰어난 놀라운 재능의 역사 선생님, 그리고 나머지 한 분은 철학 선생님이다...

네 분의 선생님은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구원했다.  112-118


요컨대 우리는 뭔가가 된다.

하지만 사람은 그리 많이 변하지 않는다. 생긴 대로 된다.  123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뭔가가 된다.

예상대로 되는 일은 드물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뭔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때로 계획이 이루어지고 적성이 실현되고 밀래가 약속을 지키기도 한다.  130


우리는 뭔가가 되어간다. 살아가는 한 모두 뭔가가 되고, 때로는 뭔가를 이루어낸 사람들이 되어 서로 마주친다.  131





3. 거기 혹은 '구현의 현재'


자기불만에 휩싸인 선생은 누구보다 재빨리 학생을 야단친다.  158


수업에 완전하게 몰두하는 선생님의 현존은 단번에 감지된다. 아이들은 학기 첫 순간부터 그것을 느끼며, 우리 모두가 그것을 경험했다. 선생님이 막 들어선다. 그는 절대적으로 여기 있다. 그것은 그가 바라보는 방식, 학생들에게 인사하는 방식, 자리에 앉아 자기 책상을 차지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그는 아이들의 반응을 걱정하며 두리번거리지 않으며,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지도 않는다. 그는 처음부터 바로 자기 일에 빨려들어가 그 자리에 현존하고, 아이들 각자의 얼굴을 구별해내며, 학급은 즉시 그의 눈앞에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현존감을 얼마 전 블랑메닐의 어느 학교 교실에서 새롭게 체험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토록 생기 넘치는 아이들의 에어니를 제어하기 위해 어떻게 처신하는지 물었다.

"절대 아이들보다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아요. 그게 요령이죠." ...

"아이들과 함께 있거나 숙제를 검토할 때 나는 딴 데 가 있지 않아요."

"내가 다른 곳에 있으면 절대로 아이들과 함께할 수 없죠." ...

"아이들 각자는 자기 악기로 소리를 내고 있는 건데, 그걸 거스를 필요가 없어요. 까다로운 일은 우리의 음악가들을 잘 꿰뚫어 보고 조화를 찾아내는 거죠. 좋은 학급이란 발맞춰 행진하는 군대가 아니라 모두 함께 같은 교향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예요. 만일 그들이 땡땡거리기만 하는 작은 트라이앵글이나 브롱브롱 소리만 나는 갱바르드(말굽자석처럼 생긴 조그만 악기로, 하모니카처럼 입으로 물고 손가락을 튕겨서 소리를 낸다)를 물려받았다면, 적절한 순간에 최선을 다해 내는 그 모든 소리, 그들이 훌륭한 트라이앵글과 나무랄 데 없는 갱바르드가 되는 일, 그래서 각자의 기여가 전체에 부여한 음악의 질에 자랑스러워하는 일이죠. 조화에 대한 감각은 그들 모두를 발전시키고, 조그만 트라이앵글은 마침내 음악을 알게 되는 겁니다. 아마도 제1바이올린만큼 화려하지는 않겠지만 그 역시 똑같은 음악을 체험하는 거지요." ...

문제는 사람들이 그 아이들에게 제1바이올린 주자만 중시하는 세상을 믿게 한다는 거예요." ...

"어떤 동료들은 자신이 카라얀인 줄 알고 시골의 마을 합창단 지휘를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그들은 모두 베를린 필을 꿈꾸죠. 이해가 가는 일이에요..."  159-162


받아쓰기 - 우리의 받아쓰기가 맞춤법에 치중하여 초등 저학년에 한정된 것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철자와 문법 그리고 구문의 이해력까지 포함하며 성인들의 여가에까지 널리 활용되는 문학적 훈련을 의미한다.  170


나는 언제나 받아쓰기를 언어와의 완전한 만남으로 생각해왔다. 소리나는 대로의 언어, 이야기하는 대로의 언어, 사유하는 대로의 언어, 글로 쓰고 만드는 대로의 언어, 세심한 교정 훈련을 통해 분명해지는 의미. 왜냐하면 받아쓰기의 교정에는 텍스트의 정확한 의미에, 문법 정신에, 말들의 풍부함에 다가가고자 하는 목표 말고 다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172


아이들이 스스로를 형편없다고 고백한 것에 대한 즉각적인 반향으로, 즉석에서 생각해낸 돌발 받아쓰기였다.

니콜라는 철자법에서 항상 빵점일 거라고 주장하는데, 그 유일한 이유는 한 번도 다른 점수를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ㅍ레데리크, 사미, 베로니크도 같은 생각입니다. 맨 처음 받아쓰기 때부터 그들은 쫓아다니던 빵점이 그들을 뒤따라와 삼켜버린 것입니다. 그애들 말로는 저마다 빵점 속에 살고 있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자기들 주머니에 열쇠가 들었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문장을 만들어내는 도안, 아이들의 호기심을 흥겹게 일깨우려는 생각으로 각자에게 역할을 나눠주면서 문법적으로 설명할 것들을 고려했다. 동사 변화와 목적어의 위치, 보어의 위치, 보어 인칭댐ㅇ사의 위치, 주격 관계대명사 등등을.

받아쓰기가 끝나자 우리는 즉각 교정을 시작했다.

"좋아, 니콜라. 맨 첫 문장을 읽어봐라."

"'니콜라는 철자법에서 항상 빵점일 거라고 주장하는데.'"

"그게 첫 문장이야? 거기서 끝나? 확실해?"

"....."

"주의해서 읽어봐."

"아! 아니에요. '그 유일한 이유는 한 번도 다른 점수를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맨 처음 나오는 활용 동사는 뭐지?"

"'주장하는데'?"

"그래. 원형은?"

"'주장하다'요."

"몇 군 동사지?"

"어..."

"3군 동사지. 그건 좀 있다가 설명해주마. 시제는 뭐지?"

"형재형이요."

"주어는?"

"저요. 그러니까 '니콜라'요."

"인칭은?"

"3인칭 단수요."

"그래. '주장하다' 동사의 현재형 3인칭 단수지. 동사의 어미를 주의해라. 자, 이제 베로니크 차례다. 이 문장의 두번째 동사는 뭐지?"

"'못하다'요!"

"'못하다'? 확실해? 다시 읽어봐!"

"..."

"..."

"아, 아니에요, 선생님. 죄송합니다. '받아보지'예요. 그러니까 '받다' 동사요."

"어떤 시제지?"

교정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174-176


체계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은 암기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런 정신의 소유자는 작품의 진수를 이용할 줄 안다는 것이다.  187


"저는 앵무새가 아니에요!"

그들은 마지막까지 항의했고, 그건 정당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건 그런 말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부모들, 아! 그들은 어찌나 변했는지 부모들 스스로 때로 이렇게 말한다. "페나키오니 선생님, 아이들에게 텍스트를 외우게 한다면서요? 세사에, 제 아들은 이제 어린애가 아니랍니다!" 어머님, 언어에 잇어서 만큼은 아드님은 영원히 어린애일 것이고, 어머님 자신도 아주 어린 아기이며, 저는 우스꽝스러운 어린애입니다. 우리 모두가 문학의 구어적이 ㄴ원천이 넘쳐흐르는 거대한 강에 실려가는 잔챙이 물고 기인 한은 말입니다. 아드님은 언어 안에서 헤엄치는 걸 좋아하게 될 테고, 언어에 실려 목을 축이고 젖을 취하며,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자랑스럽게 말입니다. 아이를 믿으세요. 아이는 자기 입속의 말맛, 머릿속 생각의 빛나는 불꽃을 아주 좋아하게 될 것이고, 자신의 대단한 기억력, 그 무한한 유연성, 그 울림통,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노래하게 하고 가장 분명한 생각을 울려퍼지게 하는 놀라운 음량을 발견하게 도리 것입니다. 언젠가 기억 속의 그 끝없는 동굴을 발견할 때는 언어 속에 잠겨 헤엄치며 깊숙이 잠수해 텍스트들을 건져올리는 일을 좋아할 것입니다. 평생 그것들이 그곳에서 자기 존재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즉흥적으로 그것들을 외울 수도 있고, 말들의 묘미를 위해 입 밖으로 소리내볼 수도 있다는 걸 좋아하게 될 겁니다. 그 덕분에 아이는 다시 입말이 된 문학의 전통을 아마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게 될 것입니다. 공유하기 위해서든 유혹의 유희를 위해서든 잘난 척하기 위해서든 그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는문자 이전의 시간, 생각의 존속이 오직 우리의 목소리에만 의존하던 그 시간과 다시 연결될 겁니다. 어머님은 그것을 퇴행이라고 말씀하기지만, 저는 재회라고 말하겟습니다! 앎이란 무엇보다 육체적인 것입니다. 앎을 포착하는 것은 우리의 귀와 눈이고, 그것을 옮기는 것은 우리의 입입니다. 물론 앎은 책으로부터 우리에게 오지만, 책은 우리를 벗어납니다. 생각이란 소란스러우며, 읽고자 하는 의욕은 말하려는 욕구의 유산입니다.  189-190


나는 아이들을 텍스트 속에 방치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들과 함께 그 속에 빠져든다.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들의 텍스트 분석을 따라가면서, 가장 어려운 글을 함께 배우기도 했다... 아이들은 읽은 내용을 이해하게 되자 기억의 능력을 찾아냈고, ...아이들은 나열된 단어를 암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단지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라 언어의 지성, 즉 타자의 언어, 타자의 사유 안에서 소리를 낸 것이다. 단순히 <에밀>을 암기한 것이 아니라 루소의 추론을 복원한 것이다.  196


지식을 가지고 유희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유희란 노력의 숨고르기이고, 심장의 또다른 박동이며, 학습에 심각한 해를 끼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리고 교과를 가지고 노는 일은 그것을 제어하는 훈련이 됩니다.  200


1969년부터 1995년까지, 엄선해서 정원을 뽑은 한 학교에서 보낸 이 년을 제외하면, 내가 맡은 학생들 대둡분이 옛날의 나처럼 학교생활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었다. 가장 심한 상태에 이른 아이들은 그맘때의 나와 거의 같은 증상을 보였다. 자신감 상실, 모든 노력의 포기, 집중 불가, 산만, 과대망상, 불량배 패거리 조직. 가끔은 술도 마시고 마약도 했는데, 자기들 말로는 약한 거라고 했지만 아침에 보면 눈에 축축이 젖어 있곤 했다.  205


노력이라는 말의 개념을 다시 가르쳐주고, 결과적으로 고독과 침묵의 맛을 되찾아주고, 무엇보다 시간을, 즉 권태를 제어하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때로는 아이들을 지속되는 시간 속에 앉혀 놓기 위해 권태를 연습하라고 충고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놀리도 말고, 먹지도 말고, 대화도 하지 말고, 공부도 하지 말고, 요컨대 진짜로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 저녁 이십 분간 권태 연습을 하는 거다. 공부 시작 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

"음악 듣는 것도 안 돼요."

"그거야말로 안 돼."

"이십 분이요?"

"그래, 이십 분. 시계를 손에 쥐고. 오후 5시 20분부터 5시 40분까지. 곧장 집으로 돌아가 아무에게도 말을 건네지 말고, 도중에 딴 데로 새지도 말고, 게임기도 무시하고, 친구들도 못 본 체하고, 너희들 방으로 곧장 들어가 침대 옆 구석에 앉아 책가방도 열지 말고, 워크맨도 끼지 말고 게임기도 들여다보지 말고, 허공에 눈을 박고 이십 분을 기다려봐."

"뭐하러 그래요?"

"어떻게 되나 보게. 흘러가는 시간에 집중하고, 일 분도 놓치지 말고 어땠는지 내일 얘기하는 거야."

"우리가 했는지 어떻게 검사하실 거죠?"

"나야 할 수 없지."

"그리고 이십 분이 지난 다음에는요?"

"허기진 사람처럼 각자의 일에 달려드는 거야."  206-207


세상 누구도 무능함의 사과를 영원히 깨물고 있진 않는다!

가르친다는 일은 아마도 그런 것일 게다.  208


가르치든 교사가 질문을 던질 때마다 학생들이 내놓을 수 있는 답변은 세 가지다. 정답과 오답과 터무니없는 답.  213


터무니없는 대답이 오답과 다른 점은 어떤 추론의 시도도 거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흔히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터무니없는 대답은 반사적인 행위일 뿐이다.

던져진 질문에 대답한 게 아니라 자기한테 질문이 던져졌다는 사실에 대답한 것이다.  215


선생님이 던진 질문을 겨우 이해만 할 뿐이다. 그걸 고백할 수 있나? 침묵을 선택할까? 아니다. 차라리 아무 대답이나 하는 게 낫다. 가능하면 천진난만하게. 제가 엉뚱하게 빗나갔나요, 선생님? 후회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저 운을 한번 걸어봤고, 그게 실패한 것뿐이다. 저한테 빵점을 주시고 사이좋게 지냅시다. 터무니없는 대답은 무지에 대한 외교적인 고백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어떤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물론 전형적인 반항 행위를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선생님이 나를 귀찮게 굴고 나를 꼼짝 못하게 해. 선생님한테 왜 그러느냐고 물어볼까?

이 모든 경우 이런 대답에 점수를 주는 것-일테면 답안지를 교정하면서-은 아무 대답에나 점수를 주기로 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 자체가 터무니없는 교육 행위를 저지르는 일이 된다.  215-216





4.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사실 가족과 선생님들이 공부 못하는 학생에게 가장 흔히 하는 비난 중 하나가 바로 그 불가피한 지적인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다. 직접적인 비난이든("핑계 대지 마.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수많은 설명에 뒤이은 분노든("세상에, 이럴 수는 없어.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제삼자에게 건네진 정보, 즉 혐의자가 부모의 방문 앞에서 듣고 놀라게 될 말이든("분명 그 녀석이 일부러 그러는 거야!") 간에 말이다.  233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어쨌거나 이 문장의 주인공은 일부러라는 부사다. 문법을 무시하고 그 부사를 대명사 너에 직접 연결하면, '너 일부러!'가 된다. 거야는 부차적이고 그러는은 완전히 무색무취다. 중요한 것, 즉 비난받는 사람의 귀에 울려대는 말은 누가 뭐래도 너 일부러라는 말이고, 이것은 꼿꼿이 세워진 검지를 떠오르게 한다.

죄인은 바로 너야.

유일한 죄인,

그것은 고의로 그런 죄인이지!

이것이 메시지다. 

어른들의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라는 말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 아이의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라는 말과 쌍을 이룬다.

격렬하지만 별 기대 없이 맞받아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는 거의 자동적으로 다음과 같은 대꾸를 끌어들인다.

"그러길 바란다!"

"그나마 다행이네!"

"설상가상이군!"

이 반사적인 대화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며 세상의 모든 어른은 적어도 처음에는 자신들의 반격이 정신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거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에서 일부러는 그 위력을 조금 잃고, 그런은 어떤 힘도 얻어내지 못한 채 일종의 보조 역할로 남고, 그거는 여전히 벼로 중요하지 않다. 죄지은 자가 여기서 우리 귀에 울려주려고 애쓰는 말은 아니에요라는 부정어에 연결된 대명사 나다.

너 일부러라는 어른의 말에 아이의 나 아니에요가 대응하는 것이다. 

부사도, 목적어도 없이 나만 있고, 그 안에서 아니다에 들러붙은 이 나는, 이 경우, 나는 나에게 속해 있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다. 

"아니, 분명코 넌 일부러 그랬어!"

"아니, 난 일부러 그러지 않았어요!"

"너 일부러!"

"나 아니에요!"

귀머거리들의 대화, 문제를 회피하고 파국을 연장할 필요. 우리는 해결책도 환상도 없이, 한쪽은 복종하지 않는다고, 다른 쪽은 이해받지 못했다고 확신하고는 헤어져버린다.

여기서는 문법이 여전히 유용해 보일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이 불화의 영역에 버려진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말, 즉 우리 대화의 모든 끈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던 그거라는 말에 관심을 갖기로 동의한다면 말이다.

자, 예전의 문법 연습을 조금 해보자. 내가 '개량'반 아이들과 했던 것처럼, 그냥 한번 보자는 거다.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원어는 Tu le fais expres)'라는 표현에서 그거(le)가 어떤 품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

"저요, 저요! 관사예요. 선생님!"

"관사? 어째서 관사지?"

"그거를 표현하는 le, la, les가 관사잖아요! 정관사요!"

의기양양한 어조. 뭔가 안다는 것을 선생에게 보여주었다는 표정... un, une, des는 부정관사이고, le, la, les는 정관사, 자, 봐요, 맞잖아요!

"그래? 정관사라고? 그러면 그 관사가 한정하는 명사는 도대체 어디 있지?"

"......"

찾아보지만, 명사는 없다. 난처함.

관사가 아니다. 

그럼 이 그거(le)는 뭔가?

"......"

"......"

"그건 대명사예요, 선생님!"

"브라보! 어떤 종류의 대명사지?"

"인칭대명사요!"

"그래?"

"보어대명사요!"

"그래. 아주 잘했다! 바로 그거다."

이제 교실을 떠나 우리 얘기로 다시 돌아와 어른들 사이에서 이 보어대명사를 분석해보자. 신중하게, 이 보어대명사들은 위험한 말이고, 분명한 의미 아래 깊이 숨어 있는 반(反 되돌릴반)인칭적인 폭약이라 뇌관을 잘 제거하지 않으면 여러분 얼굴로 폭발해버린다. 예를 들어 이 그거(le)..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라는 비난의 말을 하면서 그때의 그거라는 말이 그 상황에서 무엇을 표현하는지 우리는 몇 번이나 자문해보았던가? 일부러 뭘 그런다는 것일까? 가장 최근의 바보짓? 아니다. 이 비난을 던졌을 때의 우리 어조(어조 또한 있기 때문이다!)는 그 죄인이 언제나 일부러 그런다는 사실과, 매번 일부러 그러는데 최근의 바보짓은 그런 고집의 확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암시한다. 그렇다면 일부러 뭘 그런다는 것일까?

복종하지 않는다?

공부하지 않는다?

집중하지 않는다?

이해하지 않는다?

이해하려고 노력조차 않는다?

반항한다?

몹시 화가 나게 한다?

선생들을 화나게 한다?

부모들을 절망시킨다?

최악의 결점에 굴복한다?

현재를 망쳐 미래를 침몰시킨다?

세상을 조롱한다?

어, 그런 거야? 세상을 조롱하는 거야? 우리를 선동하는 거야?

그래, 말하자면 이 모든 거라고 하자.

그러면 부사의 문제가 떠오른다. 왜 일부러인가? 무슨 목적으로? 무슨 이유로? 그가 일부러 그런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목표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뭐하러 일부러 그러는가?

순간을 즐기려고? 단지 그 순간을 즐기기 위해? 하지만 불가피한 다음 순간, 즉 그가 나와 함께 보내는 다음의 십오 분은 내가 야단을 치기 때문에 아주 고약한 시간이다! 그는 야단맞는 일에 무심한 채로 게으름의 상태를 평온히 살고 싶은 걸까? 쾌락주의 같은 것? 하지만 그는 무위도식의 행복이 경멸적인 시선의 대가, 자기혐오를 낳는 결정적인 지탄의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그러는가?

다른 열등생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열중하는 게 배신이라서? 젊은이가 노인에게 반항하듯, 일부러 선한 것에 대항하며 악을 즐기는 걸까? 자기 나름의 사회화 방식일까?

아무려나. 어쨌든 그것은 모더니티에 관한 가장 인기 있는 명제다. 무능한 이들의 소집단화 현상.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너나없이 불량배가 우글거리는 거대한 저지대로 도피하는 것. 이런 설명은 사회학적인 진실에 어느 정도 근거한다는 편리한 점이 있으며, 그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어떤 의구심도 없다. 하지만 이 설명은 무리의 현상이건 아니건 간에 언제나 독자적인 그 아이라는 개인을 몰아낸다. 아이는 이러저러한 순간 혼자 있게 되며, 자신의 실패를 홀로 마주하고, 자신의 미래를 홀로 마주하고, 밤에 잠들기 전에도 자기 자신과 홀로 마주한다. 이제 아이를 살펴보자. 잘 바라보자. 그 아이가 행복할 거라는 데 단돈 한푼이라도 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 아이가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사실을 말하자면 이러한 설명 중 어느 것도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모든 설명이 다시간 그럴듯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문법 규칙 같은 것은 접어두고, 그 대명사가 문장 외부의 어떤 대상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을까? 예컨대 우리 자신으... 우리 자신의 눈에 비친 우리 이미지의 하강. 우리의 이미지 또한 바람직한 거울을 많이 필요로 한다.

무능하고 초조한 어른, 이해할 수 없는 거절의 희생자인 어른의 이미지를 타인-여기서는 한심한 학생-이 나에게 되돌려 준다고 비난하는 듯한 그것. 그렇지만 내가 그 아이에게 주입시키려는 원칙들이 건전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흩뿌려준 앎이 정당하다는 것도! 

그 아이의 고독에 어른인 나 자신의 고독이 대답한다.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리고 그것이 반 전체의 문제가 될 때, 서른 명의 학생이 일부러 그러기 시작할 때, 교사인 나는 문화적 린치의 대사이 되고 있음을 확실히 체감한다. 그리고 그 대명사가 한 세대 전체-"우리 때는 그런 건 상상할 수도 없었어!"-에 영향을 미친다면, 연이은 세대들이 일부러 그런다면, 그때 우리는 멸종 위기에 처한 종족의 마지막 대표들로, 젊은이들(그 시절의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던 전(前 앞전) 시대의 생존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노년의 삶에서 외로움을 절감한다. 물론 여전히 명석하고, 아주 세심하고, 얼마나 유능한데! 요컨대 우리들 사이에서는 말이다. 젊었을 때는 문명화된 세대의 얼마 안 되는 증인이었던 우리가 생각은 여전히 제대로 하고 있는데도 현실로부터 어쩔 수 없이 소외된 것처럼.

소외된...

소외감은 단지 순환하는 수많은 원 밖으로 내던져진 사람들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들, 즉 힘 있는 다수인 우리 역시 위협한다. 우리를 둘러싼 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엉뚱한 분위기가 시류를 타는 순간, 소외감은 우리 역시 위협한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당혹스러운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들을 지목하도록 밀어붙인다.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고작 대명사 하나가 그토록 엄청난 고독을 말하다니!  234-241





6. 사랑한다는 말이 뜻하는 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해내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모두 잊게 하는 데는 한 분-단 한반!-의 선생님이면 충분하다. 

어쨌든 그것이 내가발 선생님네 대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다. 

그분은 내가 고2였을 때의 수학 선생님이다. 몸짓의 관점에서 보자면 키팅 선생과 정반대였다. 영화적인 구석이라곤 거의 없는 선생님이었으니까. 타원형 얼굴에 날카로운 목소리, 그리고 시선을 잡아끄는 특징이 전혀 없었다. 당신 책상에 앉아 우리를 기다렸고 다정하게 인사하고는 첫마디부터 우리를 수학에 들어서게 했다. 그렇게 우리를 잡아둔 시간을 무엇으로 메웠느냐고? 무엇보다 발 선생님이 가르치는 과목이자 그분이 자로잡혀 있는 듯 보였던 수학으로 메워졌다. 수학은 묘하게도 그분을 활기차고 차분하고 선량하게 만들었다. 지식 자체에서 탄생한 그 이상한 선량함, 자신의 정신을 매혹했던 '과목'을 우리와 고유하고 싶다는 그 자연스러운 욕망. 그분은 그 과목이 우리에게 혐오스러울 수 있다거나 단지 낯설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발 선생님은 자신의 과목과 제자들로 빚어진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수학의 요람에 사로잡힌 듯한 무언가가, 믿을 수 없는 순수함 같은 게 있었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한번도 스치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 또한 그분을 놀려대고 싶은 마음이 한 번도 들지 않았다. 그만큼 가르침에 대한 그의 행복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온순한 청중이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이 지부티의 쓰레기통 출신이었던 우리는 전혀 흥미로운 학생들이 아니었다. 나만 해도 야밤의 싸움질, 애정과는 거리가 먼 내면의 원한 청산에 몰두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발 선생님의 문턱을 넘어서면 우리는 마치 수학에 몰입하여 성스러워진 듯했고,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테마티코스('수학'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어느 날, 우리 중 가장 형편없는 아이드이 자기들 낙제 점수를 자랑삼아 떠벌리고 있을 때 선생님이 미소 띤 얼굴로 자신은 '공(空)집합'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공집합에 대해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던졌고 그에 대한 우리의 단순한 대답을 아주 귀한 원석처럼 여겼는데, 이런 일이 우리를 아주 즐겁게 했다. 그러더니 칠판에 12라는 숫자를 쓰고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었다.

영악한 아이들이 대답을 시도했다.

"손가락 열두 개요!"

"모세의 12계요!"

하지만 순진무구한 그의 미소는 정말이지 우리의 기를 꺾었다. 

"너희가 바칼로레아에서 받아야 하는 최소 점수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너희가 겁을 먹지 않는다면."

그러고는

"이런 얘기는 다시 하지 않으마. 우리가 여기서 몰두해야 할것은 바칼로레아가 아니라 수학이니까.

정말로 그분은 다시는 바칼로레아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한 해동안 우리를 무지의 심연에서 조금씩 끌어올리는 일에 주력했고, 그런 우리를 매우 박식한 사람으로 여기면서 즐거워했다. 우리 자신이 아무리 부정해도, 그분은 우리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늘 경이로워했다.

"너희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엄청나게 많이 알고 있거든! 봐라, 페나키오니, 너는 네가 그걸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니?"

물론 이러한 산파술만으로 우리 모두가 수학의 귀재가 되지는 못했지만, 발 선생님은 우리를 너무도 깊던 우물에서 그 우룸의 가장자리까지, 즉 바칼로레아의 평균 점수까지 끌어올려주었다. 

다른 많은 선생님들 말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다는 우리의 그 비참한 앞날에 대해서는 털끝만한 암시도 하지 않고서 말이다.  318-321


그분은 위대한 수학자였을까? 그리고 이듬해에 만난 지(Gi) 선생님은 대단한 역사가였을까? 재수 때 나를 가르친 S선생님은 유례없는 철학자였나? 그러리라 추측하지만 솔직히 나는 모른다. 단지 이 세 선생님이 자기 과목을 전해주려는 열정에 빠져 있었다는 것만 알 뿐이다. 선생님들은 그런 열정으로 무장하고서 낙담의 구렁텅이에 있는 나를 찾아왔고, 일단 내 두 발을 자신들의 수업에 굳건히 딛게 하고서야 나를 놓아주었다. 그들의 수업은 내 인생의 전(前)단계가 되었다. 그분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나에게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분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나 못하는 아이들이나 공평하게 대했고, 단지 공부 못하는 아이들에게 이해하려는 욕망을 되살려줄줄 알았던 것뿐이다. 그분들은 내 노력을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해주었고, 우리의 진전을 기뻐했으며, 우리의 느림에 조바심내지 않았고, 우리의 실패를 결코 개인적인 모욕으로 치부하지 않았으며, 가르치는 일의 특성과 일관성과 관대함에 근거한 더없이 엄격한 까다로움을 우리와 함께하는 가운데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점을 제외하면 달라도 너무 다른 선생님들이었다. 발 선생님은 굉장히 차분하고 잘 웃는 상이라 수학 부처님 같았고, 지 선생님은 반대로 회오리바람처럼, 태풍처럼 게으름의 외피로부터 우리를 떼어내 자신과 함께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이끌어갔다. 회의적이고 날카로운(뾰족 코, 뾰족 모자, 뽈롭 배) 철학자인 S 선생님은 잔잔한 얼굴의 통찰력으로 저녁마다 나를소란스러운 질문 속에 남겨두었고,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고 싶어 안달했다. 나는 장황한 논술문을 제출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선생님은 교정자의 편의를 위해 좀더 간결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넌지시 덧붙였다. 

모든 점을 잘 따져보면 이 세 분의 선생님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은 모른다고 하는 우리의 고백에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철자법의 결함을 이유로 내세우며 지 선생님은 내게 얼마나 여러 번 논술문을 다시 쓰게 했던가? 발 선생님은 내가 복도에 멍하니 있거나 자습실에서 몽상에 잠겨 있었다는 이유로 얼마나 여러 번 보충수업을 시켰던가? "시간이 있으니까 우리 한 십오 분만 더 수학을 해보면 어떨까, 페나키오니? 자, 십오 분만 해보자...) 익사 위기에서 구해내려는 그 몸짓의 이미지, 자살하려는 몸짓을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저 위로 나를 끌어올리려는 그 손목, 내 옷자락을 단단히 움켜쥔 살아 있는 손의 생생한 이미지, 이런 것들이 바로 그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맨  처음 떠오르는 모습이다. 그들의 현존 안에서-그들의 과목 안에서-나는 나 자신의 모습에 눈을 떴다. 수학자인 나, 역사가인 나, 철학자인 나로. 그러한 나는 이 스승들을 만날 때까지 진정으로 여기 있다는 느낌을 방해했던 나를 한 시간 동안 잠시 잊고, 나를 괄호 속에 집어넣고, 나로부터 나를 치워버렸다.

또하나, 그분들에게는 하나의 스타일이 있었던 듯하다. 자신의 과목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예술가였다. 수업은 물론 소통 행위였지만, 그것은 거의 자발적인 창조로 통할 만큼 숙달된 지식의 소통이었다. 어찌나 편안하게 수업을 했던지 우리는 매시간의 수업 자체를 하나의 사건처럼 기억할 수 있었다. 지 선생님은 역사를 부활시켰고, 발 선생님은 수학을 재발견했으며, 소크라테스는 S선생님의 입을 통해 표현되었다! 수학공식, 평화조약, 철학개념 같은 것들이 마치 바로 그날 만들어진 것처럼 기념비적인 수업을 해주었다. 그분들은 가르치면서 사건을 창조했던 것이다.

그분들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력은 거기서 멈추었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영향력은 그랬다. 교과목을 벗어나서는 우리에게 어떤 인상을 주려 하지 않았다. 부성(父性) 이미지의 부재로 고심하는 청소년에게 유효한 영향력을 끼치는 걸 영광으로 삼는 그런 선생님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구조하는 스승이라는 의식만 가졌던 걸까? 우리는 그저 수학과 역사와 철학 과목에서 그들의 제자였고, 그게 다였다. 물론 우리는 폐쇄적인 클럽의 회원들처럼 그들의 제자라는 사실에서 약간은 속물적인 자만심을 끌어내긴 했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사십오 년 뒤, 그들 덕에 선생이 된 제자 하나가 동상을 세워줄 정도로 후계자를 자처하려 든다는 사실을 알면 누구보다 먼저 놀라워할 것이다! 그분들은 블랑메닐의 첼로 연주자처럼, 일단 집으로 돌아가면 답안지를 교정하거나 수업 준비를 하는 것 말고는 우리에 대해서는 더이상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들에게는 확실히 다른 관심사, 열린 호기심 같은 게 있었고, 그것이 그들의 힘을 키워냈을 것이고, 이것은 무엇보다 교실 안에서의 그분들의 밀도 있는 존재감을 설명해주었다.(특히 지 선생님은 내가 보기에 세상사와 도서관들을 탐식한 것 같았다.) 이 선생님들이 우리와 공유했던 것은 단지 앎만이 아니라, 앎에 대한 욕망 자체였다! 그리고 나에게 나누어준 것은 그 앎을 전달하고픈 의욕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뱃속의 허기를 느끼며 그들의 수업에 들어가곤 했다. 우리가 그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분명 관심(요즘 젊은이들 말로 하자면 존중)을 받았고, 그 관심은 우리의 숙제에 써놓은 교정 문구들, 우리들 각자에게 일일이 건네주었던 그 코멘트에도 나타나 있었다. 그 분야의 본보기는 고등사범학교 준비반에서 역사를 담당하던 봄 선생님이었는데, 그분은 우리가 제출하는 논술문의 마지막 페이지를 백지로 내게 해 각자의 글에 대한 자세한 교정 내용을-붉은색으로 빽빽하게-타이핑해 돌려주었다.

학창 시절 막바지에 만났던 이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일관성없는 공공의 군집으로 축소시키고 '그런 학급'을 극히 열등하다고 말하던 모든 선생님들에 대한 내 생각을 크게 변화시켰다.  322-326


오늘날 지구상에는 다섯 종류의 아이들이 존재한다. 제 나라안에서 고객이 된 아이, 다른 하늘 아래서 생산자가 된 아이, 다른 곳에서 군인이 된 아이, 매춘부가 된 아이, 그리고 지하철 관고판의 죽어가는 아이. 굶주리고 체념한 그 아이의 모습이 정기적으로 우리의 권태로운 시선에 걸려든다.

다섯 모두 아이들이다.

다섯 모두 도구화된 아이들.  348

고객이 된 아이들 중에는 부모의 수단을 이용하는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있다. 부모에게 돈을 받아 물건을 사거나 어떻게든 돈을 마련햇 사거나. 이 두 경우에 쓰이는 돈이 개인적인 노동의 산물인 경우는 드물 테니 어린 구매자는 대가 없이 소유권을 얻는 것이다. 아이 고객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수많은 소비에서 부모나 선생과 동일한 영역(의복, 음식, 통신기. 음악, 전자기기, 교통수단, 여가...)을 가진 아이는 아무 어려움 없이 사적인 소유권을 얻는다. 그럼으로써 아이는 자신의 교양과 교육을 담당한 어른들과 똑같은 경제적 역할을 하게 된다. 어른들처럼 시장의 거대한 한 부분을 구성하고, 어른들처럼 외화를 유통시킨다(그 외화가 아이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아이의 욕망은 부모의 욕망처럼 기계를 계속 돌리기 위해 늘 자극받고 새러워져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이는 완전한 권리를 가진 중요한 인물이다. 어른들처럼. 

자율적인 소비자.

아이의 최초 욕망에서부터.

그 만족감은 아이가 받는 사랑의 측정치로 간주된다. 

어른들이 막아보려 한들 별수없다. 시장경제사회라는 게 그렇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자기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너무도 바라던 아이였기 때문에 아이의 탄생은 부모에게 끝없는 사랑의 빚 구덩이를 파게 한다)은 아이의 욕망을 사랑하는 일이며, 그 욕망은 대단히 중대한 욕구로 재빨리 표현된다. 사랑의 욕구와 물건에 대한 욕망이 거의 마찬가지인 까닭은 사랑의 징표가 물건의 구매로 통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욕망이란...  349-350


각각의 시대는 가족간의 사랑에 자신의 언어를 강요한다. 우리 시대의 언어는 사물들의 언어를 규정한다.  352


"너희 선생들은 하나같이 똑같아! 너희에게 결핍된 건 무지한 상태에 대한 강의야! 모든 시험을 통화하고 온갖 지식의 경연대회를 통과했을 때, 그때 너희가 갖춰야 할 최초의 자질은 너희는 알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파악해내는 능력이어야 해!.."  361


요컨대 가르치겠다고 나선 자들은 자신의 학창 시절에 대해 분명한 시각을 가져야만 해. 우리를 무지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최소한의 기회라도 얻으려면 무지의 상태를 조금이라도 느껴야 하거든!"  362-363


"감정이입 하지 마! 당신들의 감정이입 따위 관심 없거든! 당신들의 그 감정이입이 우리를 침몰시켜! 누구도 당신들에게 우리 입장이 되어달라고 요구하지 않거든. 도움조차 요청할 수 없는 아이들을 구해달라는 것뿐이야, 이해할 수 있겠어? 당신들의 모든 지식에다 무지에 대한 직관을 보태달라고, 그리고 열등생을 건져내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그게 당신들 일이야! 스스로 헤쳐나가는 법을 가르쳐주면 공부 못하는 학생도 스스로 헤쳐나갈거라고! 당신들한테 요구하는 건 그게 다야!"  364


"감정이입을 치워버리면, '그것'은 어떻게 치유하지?"

여기서 그는 엄청 주저한다.

다그쳐야 한다.

"말해봐,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어도 모든 걸 다 안다며? '그것'에 대해 준비되어 있지 않고서도 가르치는 수간이 뭐야? 방법이 잇기는 한 거야?"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있는 건 방법들뿐이지! 당신들은 언제나 방법들 속으로 숨느라 시간을 보내잖아. 그 방법들만으론 충분하지 않다는 걸 마음속 깊이 잘 알면서 말이야. 뭔가가 빠져 있어."

"뭐가 빠져 있지?"

"말 못해."

"왜?"

"엄청난 말이거든."

"'감정 이입'보다 더해?"

"비교도 안 되지. 네가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아니 대학이나 그 비슷한 곳에서는 절대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이야."

"뭔데? 해봐."

"아니, 정말이지 못하겠어..."

"자, 어서!"

"난 못한다니까! 교육을 말하면서 이 말을 내뱉었다간 넌 린치당할 거야."

"......"

"......"

"......"

"사랑."  366-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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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돈 안 쓰고도 신나고 재미있게 아이를 키울 수 있다'는 명체는 지금과 가은 사회적 불임시대에 누군가는 증명할 중차대한 사회적 과제라며, 혼자만의 사명감으로 불타고 있었다.  7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결코 많은 투입이 많은 산출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많은 보시가 많은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느 사실을... 알면서도 다른 대안이 없어서, 나모가 다르게 살 용기가 없어서 못할 뿐이다.  8


소비를 줄이면 관계도 증폭된다. 예를들어 대물림과 같은 비자본 공동체 경제에 접속하면 그동안 말로만 하던 '더불어 살기'를 쉽고 우아하게 실천할 수 있다. 물건을 물려받는 과정을 통해서 관계는 더 돈독해지고, 이 작은 행동으로부터 협동과 연대라는 공동체 의식이 싹트게 된다. 뭐든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뭔가 부족하면 불편하기 마련인데, 그 불편함 속에 꺄알 같은 재미가 가득하다. 돈을 안 쓰다 보면 궁색해지기 쉬운데, 점점 풍요로워진다.  9


나는 농사에서 육아의 지혜를 많이 얻는 편이다. 

"농사는 누가 짓죠?"

"네?"

"농사는 하늘이 짓는 겁니다."

선문답 같지만 진리다.

'작물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처럼 늘 관심과 애정은 가지되, 최대한 자연의 순리대로, 인위적인 투입은 줄이고, 욕심과 기대는 버려야 한다. 태평육아의 탄생이다.  10


사고도 쳐야 변화가 생긴다.

그냥 어쩌다 임신, 출산, 육아의 세계를 여행하다가 쓴 육아견문록일 뿐이다.

발품 팔아서 골목골목 누벼서, 숨겨진 재미를 발견한 배낭여행기라고나 할까?  11



"어떻게 하면 돈 안 쓰고 애를 키울 수 있을까?"  14


'적극적인 피드백'은 추가 기부를 부르는 기술이다. 물건을 불려받았다면, 기회가 날 때마다 물려받은 물건을 얼마나 잘 쓰고 있는지 보여주면 추가 기부 가능성이 한결 높아진다.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 보답을 물질로만 생각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사례가 벌어질 수 있다. 비 물질적인 립서비스, 식사 초대, 시기적절한 품앗이 등은 좋은 보답이 된다.  16


이게 바로 물려 쓰는 재비다. 물건만 물려받는 게 아니라 이야기, 관계도 함께 물려받는다. 헌 물건은 사연이 있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한다.  17


부부 사이의 대화는 아이 얘기로만 가득 차게 된다. 어떤 때는 아기 얘기를 빼면 둘이 딱히 할 이야기가 없는 순간도 있다. 그런데 텔레비전을 같이 보면서는 서로 이렇게 애틋할 수가 없다.  24



나의 통제가 적어지는 만큼 아이도 자유롭고 신난다.  30


젊은 한의사였는데, 상담과 처방이 참 엉뚱(!)했다.

아이를 어떻게 가지게 됐고, 어떤 환경에서 키우고, 부부관계는 어떻고, 주 양육자는 누구고, 아이는 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뭘 먹고, 주말은 어덯게 보내는지 등등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꺼내놓게 했다. 내 이야기만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애 키우는 이야기까지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첫날 상담을 거의 두 시간이나 했다.

증상만을 없애기 위해 치료하는대증치료가 아니라, 삶 전체를 살피고 그 원인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33


두 돌배기 우리 아기의 하루 일과는 책으로 시작하여 책으로 끝난다. 엄청난 책벌레 납신 것 같지만, 실상은 집에 놀거리가 궁하니 벌어진 일이다.  39



회를 거듭할수록 정다운 부녀놀이. 아빠와 딸이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면서 책을 꽂는데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다.   41


농사는 육아의 원형이고, 육아에 상당한 지혜를 공급한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인간의 생산능력을 회복하고 기본에 충실한 삶을 살겟다는 선언이다. 또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철 따라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농사를 짓게 되면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협동하고 어울려 살 수밖에 없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하나씩 회복하는 삶을 살다 보니 마치 다른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는 세계로 이동해온 것 같다. 다 아기 때문이다. 아기라는 무게 중심이 생겼고, 아기는 각자의 삶을 살던 남편과 나의 생활을 묶어주는 공통의 지반이 되어주었다. 그동안 잃어버렷던 본능을 되찾아주고, 무너졌던 삶의 균형을 바로 잡아주었다. 육아는 아기를 키우는 과정이 아니라 나를 키우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46



옛날식 기저귀.

내가 이 기저귀를 택한 이유는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기저귀를 빨랫줄에 걸어놓으면 시각적으로 보기가 좋다. 새하얀 기저귀가 바람에 팔랑거리는 걸 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두 번째는, 빨리 마르기 때문이다. 소창 기저귀는 얇아서 널어놓으면 한 두 시간 만에 바싹 마르기 때문에 회전이 빠른 편이다. 똥 기저귀는 삶아야 하지만, 오줌 기저귀는 나올 때마다 흔들어 빨어서 널어놓으면 자주 삶을 필요도 없다. 세 번째는, 빳빳하게 마른 기저귀를 갤때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네 번째, 기저귀는 다용도다. 베개로도 쓰이고, 여름에 배 덮는 이불로도 쓸 수 있고, 급할 땐 수건이나 아기를 엎는 보대기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나중에는 잘라서 행주나 걸레로도 사용이 가능하고, 손바느질해서 면생리대로도 사용할 수 있다.  47-48


조산원에서 애 낳고, 늦도록 젖 먹이고, 천 기저귀 쓰고, 포대기로 업는 등. 내가 애 키우는 걸 보고 '전통 방식으로 키운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전통을 고수하고 지키는 수구보수적인 인간이 아니다. 전통적이라서 그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니라, 본능에 충실한 방법을 택하다 보니 그게 전통 육아방식이었을 뿐이다.  50


본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51


내가 고안한 방법이 아예 젖가슴을 풀어놓고 자는 거다. 수유복 지퍼만 열어두면, 아기가 스스로 젖을 찾아 물었다. 수유복 지퍼만 열어두면, 아기가 스스로 젖을 찾아 물었다.  53


모유수유. 하지만 단점이 하나 있다. 도 닦은 것도 아닌데 무성욕의 경지에 이른다는 거다. 모유수유를 (오래)하면 성용기 감퇴된다는 말이 잇는데, 내 경우 실제로 그랬다.  56


우리나라 임산부들의 초음파 촬영 횟수는 평균 10.7회 정도 되는데, 이는 주요 선진국에 비해 3배 이상 높은 편이라고 한다. 다른 건 선진국, 선진국 하면서 이건 왜 안 따라 하는 걸까? 외국에서 출산한 친구들에게 얘기를 들어보니, 많이 해야 세 번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과다한 초음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 일부 의사들이 모인 협회 같은 데서 성명을 낸다. 초음파는 전반적으로(?) 태아에게 위해하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상태이고, 미국 같은 나라에서 적게 하는 것은 많이 하고 싶어도 비싼 의료 수가 때문에 많이 못하는 거란다. 바꿔 말하면, 그렇게 많이 할 필요가 없다는 거고, 태아에게 완전히(!) 무해하다는 증거도 없다는 이야기 아닌가? 똑똑한 분들이 왜 그러시는지... 심지어 몇 해 전 식약청까지 나서서, 초음파 검사가 유해하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반복적인 검사가 태아에 미치는 영향이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진단 목적이 아닌 기념영상을 만들거나 호기심에서 하는 검사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권고하기도 했다. 하긴 요즘에는 초음파 사진을 모아서 앨범이나 동영상을 만들어주고, 심지어 입체 초음파 사진을 잘 나오게 하기 위해 자는 아기를 자극해서 깨우기도 한다고 한다.  72


우리는 보이는 것에만 의존하지 않는가? 사실 다달이 일어나는 내 몸의 변화, 아기의 움직임 등 보이지 않는 사인들이 더 중요할 수도...


<만들어진 모성>이라는 책을 쓴 프랑스 학자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는 당초 모성애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린다. 모성애는 본능이 아니라 학습된 것인데, 이 이데올로기는 19세기 들어 중상주의 정책에 따른 노동력 수요 증가로 국가가 여성들에게 모성애를 강요한 데서 나왔다고 분석한다. 이후 사회적 학습ㅇㄹ 통해 점차 강화된 모성애는 오늘날 모든 어머니의 본능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83


'안전한 예방접종을 위한 모임'이라는 사이트가 있다.  86


예방접종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신경써야 하는 문제는 면역력, 자기치유력을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88


이유식을 생략하면서 딱 한 가지 단점이라면, 유동식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무른 음식, 특히 죽은 잘 먹지 않는다는 거다. 하지만 죽이야 잘 안 먹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97


집안마다 음식문화가 다르고 아이들마다 발달이나 소화 능력이 다르니, 거기에 따라 이유식도 자연스럽게 하면 되는 게 아닐까? 어찌 보면 '이유식'이라는 또 하나의 시장 창출을 위해서 많은 부분들이 조장되고 만들어진 게 아닐까?  98


장난감은 많되 놀이는 없는 경우가 많다. 물질은 풍요로울지 모르나 아이들의 마음은 점점 가난해지고 있다.  102


요즘 아기들은 태어나자마자 탯줄을 자르고 돈줄을 붙이고 산다.  105


한계에 괴로워하지 말고, 한계를 즐기는 '효연지기'가 필요하다. 

세상이 강요하는 대로 살면 베이비 푸어가 되지만, 내 잘난 맛에 내 방식대로 살면 누가 뭐래도 내가 세상의 중심이다.  106


아기의 관점에서 아기의 세계를 탐구하고, 아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117


(반항기)

부정어가 는다는 것은 자기 생각, 자기 의지, 곧 자아가 강해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맘때 아이들의 부정어와 긍정어의 비율이 14대 1이라고 한다.  165


몸으로 하는 생활공부는 욕심이 난다. 모든 걸 소비에만 의존하며 돈 버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공부가 아니라, 자기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은 생산할 줄 아는 생활 균형감이 있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169


작은 손놀림, 말투, 무의식적인 표정까지, 아이들은 부모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배우고 모두 따라 하고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결론은, 내가 키우고 싶은 대로 나부터 그렇게 사는 게 우선이다. 반대로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면, 아이에게도 바라지 않기!  170


가만 생각해보니,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계속'떼는' 과정이다.  179

탯줄, 젖, 기저귀, ...


시공간을 초월한 상상도 허락한다. 특히 생활 속의 물건의 힘이 강력하다. 골동품처럼 너무 귀한 것이라서 장롱 깊숙이 보관해두고 가끔 존재와 가치만 확인하는 물건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막 사용하면서 언제든지 추억을 불러오는 그런 일상의 물건들이 훨씬 강력하다.  213


아이들은 고립되기 시작했고, 함께 해야만 하는 놀이 문화도 사라졌다. 고립은 소비문화와 짝이다.  221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그 철학에 기초한다.  224


올더스 헉슬리의 유토피아 소설 <아일랜드>에는 '상호입양모임'이라는 게 나온다.  225


돈에 의존하지 말고, 체면, 자격지심, 고정관념 따위 던져보리고, 조금 다르게 살면 된다. 없으면 없는 대로, 좀 못해도 태평하게, 좀 못 벌어도 당당하게! 기존에 살던 방식은 개나 주고, 조금 다르게 살아보는 거다. 아주 신난다.  231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어린 시절의 5분은 어른이 되었을 때 5년과 같다. 인생에서 어린 시절은 짧고 어른으로 살아야 할 시간은 길다"라는 말에 공감한다.  239


남편의 옆구리를 계속 찔렀다. 그래도 남편이 망설여서 더 강하게 설득했다. 언제까지 입으로 하는 일(컨설팅)만 할 거냐. 망하더라도 손과 발로 하는 일을 시작해보자.  244




끝맺으며 - 엄마에게 용기를!

엄마 노릇을 하면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은 철저히 자기의 몫이다. 국가가 아이 키우는 데 돈은 조금 보태줄 수는 있엉도 어떻게 하면 행복할지는 고민해주지는 못한다.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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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비루해지기 쉬우며, 자칫하면 찌그러지고 찌질해지기 쉬운 일상적인 삶이야말로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한 곳이고, 그곳이 '지혜에 대한 사랑'을 자처하는 철학이 달려들어야 세계라고 저는 믿습니다.  8


독재나 억압이 더욱 나쁜 것은 마치 그것이 사라지면 사람들이 자유로워질 것 같은 환상을 유포하기 때문이다. 동성애에 대한 금기가 더욱 나쁜 것은 마치 그것이 사라지면 동성애자들이 자유로워지리라는 안이한 발상을 배양하기 때문이다. 그믹와 거리가 먼 이성애자는 모두 자유롭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자유를 위해 모든 구소고가 억압이 사라져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이 때문이다.  13


제약이나 구속 대신 필연성과 대립되는 상태가 자유라고 믿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필연성이란 피할 수 없는 구속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필연성과 대비하여 '가능성'이,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자유의 폭으 ㄹ결정한다고들 한다.  13


돈이 많아 노동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 사람은 자유로울까?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니 자유로울 거라고?

자유를 부러워하는 게 아니라 돈 쓰는 걸 부러워하는 것이다. 자유란 돈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것이지 돈을 실컷 쓰는 게 아니다.  13-15


자유란 이런저런 조건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발행되는 자판기 티켓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든 나 자신이 만들어가야 할 세공품이다.

자유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갈 수 있는 '능력'과 결부된 것이다. 삶이나 행동의 방향과결부된 어떤 힘이나 능력이다. 

억압이나 구속은 그 자체로 자유와 반대되는 상태가 아니라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이 가동되는 출발선에 불과하다.  15


자유를 위해선 자신의 '자유의지'만이 아니라 자신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자신의 생각만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는 게 필요하다.  16


한 줌의 용기가 없다면 사실 자유로운 살밍란 말해봐야 공허한 것이고, 들어봐야 '남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용기는 고통을, 자유를 위해 넘어서야 할 저항으로 바꾼다. 

용기는 모든 것을 거는 어떤 도박적인 내기가 아니라 단지 '한 줌'의 용기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17


단 한 번의 거대한 결단보다 더 어려운 것은 매 순간의 삶에서 자유로운 걸음을 걷는 것이다. 매 순간을 갈 만한 길로 가는 것이고, 매일매일 살 만한 삶을 사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매 순간 진행되는 삶 자체를, 매번 내딛는 발걸음을 자유로운 삶으로 스스로 믿고 가는 법. 그것이 철학을 통해 배워야 할 삶의 지혜다.  19


이런 의미에서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필로-소피아(philo-sophia)는 '삶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필로-비오스(philo-bios)의 다른 이름이라고 나는 믿는다.

옳다고 주어지는 것이 정말 옳은지 다시 생각하고, 자신이 정말 긍정할 수 있는 좋은 삶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하는 것은 이 한 줌의 용기로 시작한다.  20



사건과 자유 -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진" 사건에 대하여


가령 교통사고는 물리학이나 생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노래 한 곡 들은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신체적 변화를 야기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얼른 치료하여 이전의 삶으로 되돌리려 한다. 그것 이전의 삶으로 최대한 되돌아가려 한다. 반면 그로 인한 신체적 변화를 받아들이고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사고 아닌 사건이 될 것이다. 

따라서 '사고'란, 그것이 실제로 나를 애초에 바라던 거소가 다른 곳으로 밀고 가더라도, "없었으면 좋았을" 어떤 것이다. 그로 인해 발생한 두 지점 간 간극의 폭은 그가 느끼는 불행의 크기를 뜻한다. 사고란말에 부정적인 색채가 담겨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그게 '사건'이 되는 것은 그로 인한 변화를 나의 새로운 삶으로 받아들이고 긍정함으로써다. 그것을 받아들인다 함은, 피할 수 없이 이미 내게 밀고 들어온 그것이 내 삶 안에 자리잡았음을 받아들임이며, 그것을 긍정한다 함은 그것으로 인한 변화를 새로운 삶의 기회로, 또다른 삶의 가능성으로 긍정함이다.

사건이란 어떤 일로 인해 발생한 곡절, 애초의 궤적에서 벗어난 이탈에 대한 긍정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에 사고가 많은 인생은 그 사고의 수와 크기만큼 안타깝고 불행하지만 , 사건이 많은 삶은 그 사건의 수와 크기만큼 풍요롭고 행복하다.  27



긍정과 자유 - 기적 같은 삶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다큐 영화 <서칭 포 슈가맨>

처음에 음반 제작자가 찾아왔을 때, 얼마나 기뻤을 것인가. 시를 쓰고 노래를 만들며 사는 멋진 삶이 다가왔다고 생각했을 게다. 대중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도, 혹은 그 이상도 가능할 것 같은 성공이 손을 내미는 것이리라 생각했을 게다. 그만큼 그것이 제작자도 놀랄 만한 실패로 끝났을 때 그가 느꼈을 실망은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참담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패 이후 로드리게스는 잠시 꿈꾸었던 무대 위의 화려함을 얼른 포기하고 어쩌면 남들보다 훨씬 어둡게 느껴졌을 무명의 일상 속으로 돌아간다. 좋아하던 음악을 접고 공장에서 노동을 하는 극히 평범한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공장에서 동료드로가 좀더 나은 삶을 위해 운동을 한다. 목소리를 내기 위해 반복해서 떨어지는 선거에 출마하고, 자식들을 책이 있는 삶으로 인도하는 그런 삶을 산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 다가올 머나먼 타국에서의 기적 같은 부활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은 바로 그 삶을, 큰 기대를 안고 시작했던 노래가 어떤 인기나 성공도 주지 못할 때, 그런 행운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희소한 일인지를 안다면, 정말 이것이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기적이고 아무도 모르는 기적이다. '비밀의 기적'이다.  33-34


각자에겐 각자의 자유가 있다. 좋든 싫든 자신이 안고 살아가야 할 각자의 몸이 있고, 그 각각의 몸에 깃든 능력이 있고, 각자의 몸이 펼칠 각자의 삶이 있다. 그 삶마다 가능한 각자의 자유와 행복이 있다. 각자가 서 있는 곳마다 다를 게 분명한 자유와 행복의 길이 있다. 모든 자유와 행복은 자신의 현재, 지금의 모모가 지금의 조건을 출발점으로 한다. 그 몸과 조건을 자기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자유와 행복의 가능성은 시작된다.  39



고통과 자유 - 피할 수 없는 고토으 그 '운명적인' 만남에 대하여


고통이란 '유기체'의 부적절한 삶의 방식에 대한 기관이나 세포들의 호소와 항의의 목소리고, 질병이란 그 부적절한 삶의 방식에 잠식된 신체의 비명소리다. 이 비명이나 항의의 몫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의식으로 신체 전반의 움직임을 장악한 '유기체'가 자신의 세포나 기관에 대해 무대포의 일방적인 독재를 시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독재의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모든 억압된 것은 되돌아온다는 ㅍ로이트의 말처럼, 억압된 세포와 기관의 고통 역시 되돌아온다. 유기체의 생명과 분리된 채 오직 자기만의 생존을 전면에 내세우며 증식하는 세포들로, 그런 세포를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세상에선 '암세포'라고 명명한다.  43-44


삶이란 어떤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있는게 아니라, 과정 그 자체가 목적이기에, 삶 전체를 걸고 어떤 것을 할 수 있다 함은 삶 자체와 대면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47


고통이 삶을 심오하게 하는 것은 단지 고통에 익숙해지는 훈련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배우려 하지 않는 자에겐 위대한 스승이나 책이 아무것ㅅ도 가르쳐줄 수 없듯이, 고통을 직시하고 고통에서 배우려 하지 안흔 한, 고통은 삶의 깊이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 고통은 고통을 긍정할 수 있는 자에게만, 삶의 심오함을 가르쳐주는 스승으로 온다. 고통을 통해 삶에 물음을 던지며, 고통을 스승으로 삼아 다른 방식으로 살기 위한 길을 찾고자 할 때, 그때 비로소 고통은 지혜로운 삶의 안내자가 된다. 

삶에 던지는 그 물음과 더불어, 그때마다의 답을 들고 현재 속으로 반복하여 되돌아올 때마다, 나는 다른 나로 되돌아온다. 이전의 나와 다른 새로운 내가 탄생한다.  48


강자와 약자..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과 만나고 대면하는 방식의 차이가 그 둘을 갈라놓는다. 약자는 가지보다 강한 자들에게서도 약점이나 단점을 찾지만, 강자는 자기보다 약한 자들에게서도 강점이나 장점을 찾는다.  50


논평이나 비판을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약자들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자신의 약함을 알기에 항상 방어하려는 '본능'이 작동하기 때문이고, 또한 자신의 약함이 드러날까 두려워 날을 세워 듣기 때문이다. 반면 강자는 비판이나 비난에도 동요하지 않으며 칭찬 또한 가볍게 넘긴다.  51


세상에 오직 두 가지 길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필경 거짓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번에는 어떤 방식으로 대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53



기쁨과 자유 - 기쁨의 윤리학과 웃음의 비행술


스피노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양태(mode)'라고 부른다. 사람도 양태, 개도 양태, 컴퓨터도 양태, 물도 양태다. 세상사란 모두 양태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56


신체와 영혼에 발생하는 변화는 어떤 경우든 이 두 가지 방향뿐이다. 수많은 감정들은 강도나 양산을 달리하며 나타나는 이 기쁨과 슬픔의 다른 표현들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감정이나 정서를 크게 둘로 나눈 것이다.  57



꿈과 자유 - 꿈꾸는 영혼의 감옥


돈을 잘 벌면서도 돈 버는 것 말고는 꿈꿀 줄 모른다면 우리의 영혼은 돈에 갇혀 있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만나도 가족밖에는 꿈꿀 줄 모른다면, 우리의 영혼은 가족에 갇혀 있는 것이다.  77



매혹과 자유 - 술병 속의 연인이 내미는 매혹의 손


사물을 인간의 이 목적성 안에서 본다는 것은, 사물이 갖고 있는 힘과 생명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사물이 내미는 손을 감지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 사물과 만나는 어떤 사건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뜻대로 쓰다가 맘에 안 들면 주저 없이 내버리는 이들에게서 사물의 '주인'으로서 행사하는 능력이 아니라, 다가오 ㄴ이의 매력으 ㄹ알아보지 못하는 안목 없는 이의 무능력을 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89



선물과 자유 - 아, 존재 자체만으로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 있다면...


의무가 된 선물, 답례의 의무를 통해 '교환'되는 선물은 과연 선물일까? 데리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답례가 의무가 되는 순간, 선물은 되갚아야 할 채무가 되기 때문이다.  124


  

돈과 자유 - 헝그리 정신과 궁상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려면, 돈을 적게 벌어야 하고, 그러러면 돈을 적게 써야 한다.  133


자본주의와 부에 대해 속속들이 연구했던 맑스는 이런 '경제적 부' 개념과 대비하여, '실질적인 부'란 필요노동시간(먹고사는 데 필요한 비용을 버는 데 사용되는 시간) 이외의 가처분시간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정치경제학 비판요강2>). 쉽게 말하면, 돈을 버는 데 투여되는 시간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부'라는 것이고, 그런 시간이 많은 이들이 '부유한 자'라는 것이다.  135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선 시간만 필요한 게 아니라 돈도 필요하고 그걸 할 수 있는 조건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136


부유함에 대한 이런 관념은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가처분시간을 대개 뻔한 방식으로 패턴화된 소비를 위해 사용하게 한다. 밀리는 자동차 안에서 시간을 보낼 게 뻔함에도 주말이면 자동차를 끌고 나서는 것은, 다른 돈 있는 이들처럼 여가나 레저를 즐기고 있다는 관념을 향유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잘 알려진 관광지를 돌며,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 거기 있음을 확인하고, 이미 익숙한 방식의 소비와 향유 바익을 반복하는 그 패턴화된 소비는 이제 일종의 의무가 된 것 같다. 모두가 하고 있기에 나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핍감과 불안함을 느끼게 되어 어떻게든 동참해야 할 것 같은, 또다른 '일'이 된 듯하다.

나는 실질적 부를 돈을 비롯한 '가처분자원'이나 맑스가 말한 가처분시간보다는 오히려 그런 것을 자신의 삶을 위해 '처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가처분능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간이 있고 돈이 있어도, 능력이 없다면 그것들은 자유를 위한 자원이 아니라 단순한 소비와 소모의 대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139


헝그리 정신은 돈을 쓰지 않는 법이 아니라 돈을 쓰는 법이다. 돈을 잘 쓰기 위한 삶의 원칙이고 이념 내지 철학이다.  142


헝그리 정신은 무엇보다 돈에 대해 '능동적'임을 뜻한다. 돈에 대해 능동적이라 함은 돈을 자기 뜻대로 부리며 산다는 뜻이다...

궁상을 떠는 것은 '대타적으로는' 남들 앞에서 없는 티를 내는 것이고, '대자적으로는' 궁핍 앞에서 사고나 행동이 위축되거나 빈약해지는 것이다...

반면 헝그리 정신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의 삶을 위해 능동적으로 가난을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가난 앞에서 당당하다.  143


항상 검소하게 살고자 하고 엔간하면 돈 쓸 일을 안 만들지만, 써야 할 일이 있을 때 머뭇거리면 안 된다.  145



감각의 자유 - 감각의 자유, 혹은 피 냄새가 나지 않는 비상의 방법에 대하여


감각의 갑옷만큼 우리의 일상적 삶을 구속하고 자유로움을 제한하는 것도 찾기 힘들다. 감각의 구속은 종종 너무 자연스러워서 때로 우리는 구속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기 어렵다. 그 구속은 우리에게 편안함을 준다.  150


철학자 들뢰즈는 진정한 '넘어섬의 경험', '초월의 경험'이란 지각 불가능한 것과의 피할 수 없는 만남엣 온다고 말한 적이 있다(<차이와 반복>). 감각적으로 피할 수 없게 닥쳐왔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없는 어떤 것과의 만남, 그것이 지각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지금의 나의 감각이나 지각능력을 벗어나 있어서일 것이다. 그 지각될 수 없는 것을 향해, 그 알 수 없는 것의 지각을 향해 나의 감각을 밀고 나아갈 때, 나는 나의 감각능력을, 나의 경험능력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을 경험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예컨대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예술작품이나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알기 어려운 책들은, 그것을 피하고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감각능력이나 사고능력을 확장해준다. "문제는 감각의 착란을 통해서 미지의 것에 도달하는 것이다."(랭보)  155-156


자유란 비장한 결단을 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혀용된 영웅들의 문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이들 각자에게 주어진 각자의 문이다. 그런데도 그리 들어가는 이가 적은 것은, 카프카의 유명한 우화 [법 앞에서]의 농부처럼, 그게 자신을 위한 문임에도 평생 그 앞에서 들어갈 수 있을지 찔러보고 그게 정말 나를 위한 문인지 물어볼 뿐, 밀치고 들어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농부처럼 다들 그 앞에서 늙어죽기 때문이다. 

감각의 자유란 익숙하지 않은 것, 새롭고 이질적인 것들 안에 깃들어 있는 어떤 것을 감지하는 능력이다. 처음에는 불편하기에 피하고 싶은 어떤 것을 향해 귀를 여는 작은 용기면 누구나 올라가기 시작하 수 있는 평번한 계단이다. 따라서 어떤 것 앞에서 그저 편안하다면 그것은 혹시 구속의 징표는 아닌지 한번쯤 의심해야 한다.   156-157



감정과 자유 - 이 은밀한 복수의 드라마를 어떻게 정지시킬 것인가?


'능동적인 것'은 먼저 자극하느냐 나중에 반응하느냐의 문제만은 아니다.

능동적 감정은 반동적 감정의 자극에 다르게 '반응'하는 방식으로 시작하기도 한다.   166


'능동적인' 의미의 사랑이란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고, 능동적인 우정이란 친구의 행동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믿고 좋아하는 것 아닐까? 결코 쉬운인은 아니겠지만.  168



지성과 자유 - 누구에게나 주어진, 누구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선물에 대하여 


'유식한' 스승은 자신이 아는 것을 학생들에게 알려주는 데 그치지만, 무지한 스승은 학생 스스로 자신이 모르는 것을 배우게 한다.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가르친다.  173



욕망과 자유 - 언제까지 우리는 '그들의 삶'을 살 것인가?


나는 10년 이상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거의 모든 강의엣 학생들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 첫째 질문에 '저는 이러저러한 것을 잘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답한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었다. 둘째 질문에서는 약간의 단서를 단다. 지금 밥 먹고 싶다, 요즘 연애하고 싶다, 장래에 돈을 많이 벌고 싶다 식의 대답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데, 그걸 물으려는 게 아니라고. 무언가를 진정 하고 싶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걸고 하고 싶은 게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지, 최소한 10년이나 20년 정도는 '아, 이거 하고 살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게 있을 때 그렇다고 답해야 한다고, 이 질문은 앞의 것보다 좀더 쉬운 편인지, 지금까지 다섯 명 정도가 답을 했다. 하지만 10년 넘게 수많은 학생들 가운데 다섯 명 정도라니, 정말 놀라운 숫자 아닌가! 

이 질문을 받으면, 많은 경우 대답 이전에 자신이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없다는 사실에 놀란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이고, 자신의 능력과 욕망에 대한 질문인데, 그것조차 자신이 알고 있지 못하고 있는 셈이니까.  207


어떤 것을 해보지 않고선 내가 그걸 좋아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해본다는 것도 그렇다. 잠시 맛이나 보듯, 혹은 며칠짜리 캠프에 들어가보듯, 찔러보듯이 잠시 해보는 것으로는 그걸 정말 좋아할 수 있을지 아닌지 알기 어렵다. 처음엔 재미있어 보여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어떤 것도 때론 단조로울 수도 있고 때론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힘겨운 터널을 필경 하나는 지나가야 한다. 즉 어떤 일을 정말 잘할 수 있을지, 좋아할 수 있을지 알기 위해선, 특별한 재능이나 인연이 있는 게 아니면, 필경 고통이나 지루함을 수반하는 어려움의 문턱과 대면하고 그것을 넘어선 깊이까지 들어가보아야 한다.  211


프란츠 카프카는 아버지로 대변되는 '그들'의 욕망에 의해, 또한 스스로 먹고살기 위해 보험회사 직원이 되어 일을 했지만, 자신이 정말 하고자 했던 것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했다. 밤, '그들'의 욕망이 잠드는 시간에, 그는 자신이 하고 싶던 것을 했다. <아동의 탄생>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역사가 필리프 아리에스는 '일요 역사가'를 자칭했다. 돈을 벌어야 했기에 대학원에 가지못하고 출판사에서 일을 해야 했지만, '일요일'로 표현된느, 노동이 중단되는 시간에 자신이 정작 하고 싶었던 역사 연구를 계속했다. 카프카도 아리에스도, '그들'이 말하는 삶을 피할 순 없었지만, 그 사이에서, 그들의 욕망 사이에 있는 빈틈에서 자신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216


나의 삶을 시작하기에 '이미 늦었어'의 시제란 없는 것이라고, 아무리 늦었다고 해도 시작하지 않고 끝낼 순 없는 거 아니냐고.  219



인정욕망과 자유 - 날 선 자존심과 '그저 웃는' 자긍심의 차이에 대하여


'나의 욕망'이라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은 사실상 엄마, 아버지, 사회 등 '타자'의 욕망이란 것이다. 인정욕망이 ㅡㄱ 타자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삼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무의식이라는 심층의 깊이에까지 침투한 타자의 욕망이다. 라캉이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224


인간의 본질로까지 소급해서 보면, 칭찬이나 직접적인 인정을 구하는 경우는 물론, 그렇지 않은 욕망까지 모두 인정욕망이 된다. 사실일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우리는 필경 남의 인정을 구하는 삶을 사는 존재가 되고 만다. 이는 그들의 삶, 그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아닐까?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과, 남의 시선을 의식해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하는 행동을, 둘 다 어차피 그게 그거라고 말해도 좋을까? 실은 그걸 구별하는 것이야말로 단지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결정적인 것 아닐까?  225


자긍심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긍지의 표현이다. 그것은 남이 아닌 자신의 시선, 자신의 척도에 스스로를 비추어 본다. 남의 인정을 구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확신하는 것,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에 비추어 자신이 잘했는지, 잘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기 삶에 자긍심을 가진 이라면, 가난을 감추고자 하지도 않을 것이며, 가난이 드러난다고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자신이 선택한 것의 일부고, 자신이 긍정하려는 것이니까. 왜 그런 식으로 사느냐고 누가 물으면, 굳이 해명할 필요도 느끼지 못할 것이고, 누가 오해할까 걱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잘 알려진 김상용의 시에서처럼 "왜 사냐건 웃지요" 식으로 여유 있는 웃음 한 번이면 충분할 것이다. 오직 자기가 세운 기준만이 자기를 흔들 것이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자 그럼 다시 한번'하며 자신이 긍정할 수 있는 곳을 향해 스스로를 일으켜세우고 새로 시작하도록 촉발할 것이다.

자존심은 약한 자들이 자신의 약함을 가리기 위한 방어기제고, 자긍심은 강한 자들이 스스로 갖고 있는 힘에 대한 긍정이다. 전자는 남을 향한 것이라면, 후자는 자기를 향한 것이다.  232


긍정의 긍정.

첫번째 긍정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 잘할 수 있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라면, 두번째 긍정은 그렇게 자신이 긍정하여 선택한 삶으로인해 야기되는 어떤 결과도 긍정하는 것이다.  233


자유로운 삶, 그것은 두 번의 긍정에서 온다.  234



속도와 자유 - 속도의 강박증과 춤추는 신체의 시간


함께 산다는 것은 속도를 맞추어 사는 것이다. 걸음걸이의 속도를 맞추지 않고선 함께 걸을 수 없는 것처럼, 속도를 맞추지 않고선 함께 행동할 수 없고, 함께 대화할 수 없으며, 함께 생활할 수 없다. 물론 속도를 맞춘단느 것은 숫자로 표시되는 어떤 크기를 같은 값이 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신체와 영혼마다 각기 다른 속도가 있기에, 그것을 어느 하나에 일치시키려 한다면 '일치'는 자기 속도에 대한 억압이 된다. 속도를 맞춘다는 것은, 가령 걸음이 빠른 이가 같이 가는 느린 이의 속도에 자기 속도를 '맞추려고'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완급을 조절하는 것이며, 앞서 갔다면 기다려주는 것이다. 느린이도 평소보다는 빨리 걸으며 속도를 '맞추려고'할 것이다.  240



공부와 자유 - 공부와 학인, 혹은 학생부군손오공신위


학습은 머리로 하는 것이라면, 공부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몸에 붙지 않은 것, 몸으로 실철한 수 없는 것은, 절대적 진리라도 '죽은 문구(死句)'에 지나지 않는다.  254


공부는 학습보다 훨씬 어렵다. 알아도 아는 게 아니니 말이다. 항상 자신의 물음을 던지고, 자신의 감각과 생각으로 따져보고 몸에 붙여야 그 일부라도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는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하기 어렵다'는 걸 이유로 배우고 알려는 노력을 냉소해선 안 도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그대로 실행하며 사느냐고 누가 물었을 때, "그렇진 못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애쓰며 산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공부하는 학인의 삶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앴는 마음을 흔히 향상심(向上心 향하다 향, 윗 상, 마음 심)이라 한다. 그 향상심이, 옳다고 아는 것을 조금식 몸에 붙여가는 힘일 것이다.  255


공부를 몸으로 하는 것이지만, '뜻한 대로' 몸을 움직여 원하는 것을 이루는 능력이나 기술에 머문다면, 그것은 아직 공부를 시작한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몸을 움직이는 자신의 '뜻'을 주시하면서 그것을 다스리고 연마하지 못한다면, 몸에 붙은 기예는 재앙의 원천이 될 것이다...

공부는 몸의 연마, 기술의 연마에서 마음의 연마로 넘어갈 때, 밖을 향하던 시선이 자신을 향할 때 시작된다.  257


밖을 향해 있던 선이 안을 향한다 함은 대상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향해 돌리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몸은 관성적이고 습관적인 지금까지의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향하게 된다. 장인적인 기술이나 술법의 숙련은 필요한 동작을 아무생각 없이 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습관적인 움직임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익숙해진 순간, 습관적으로 행하게 한다. 습관이 되고 나면 생각 없이 행하게 하고, 관성의 선을 따라가게 한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것은 그 습관적 관성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이런 것을 '행(行)을 닦는다(修)'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부는 '수(修)-행(行)'이다. 그것은 삶에 던진 시선을 통해 길어올린 다른 삶의 가능성, 아직 살아보지 않은 삶의 가능성을 향해 가는 것이다. 공부란 그런 식으로 다른 삶을, 도래할 삶을 만들어 낸다.  259


도래할 삶을 만드는 것은 이전의 삶에 기대어 그것을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은 난감한 딜레마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습관이나 기억에 기대면서 동시에 그것에 의해 유지되는 동일성을 벗어나야 한다.  261



무아와 자유 - 나 없는 자유의 유쾌한 웃음을 위하여


차이의 철학이란 차이의 긍정을 주장하는 철학이다. 이것의 가장 단순하고 통속적인 버전은 나와 다른 차이를 인정하자는 주장이다. 자기가 옳다는 믿음이 강하면 나와 다른 차이를 인정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269


좀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차이의 긍정이란, 나와 다른 어떤 것과의 만남을 긍정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차이를, 나를 바꿀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이다. 

나를 내려놓을 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척도로서의 나를, 아상(我相 나 아, 서로 상)을 내려놓을 때, 차이의 철학은 비로소 가능하게 될 것이다.  270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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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남의 어려움은 어느정도일까?

사람마다 다르겟지만, 무척이나 어려운 것같다. 아니 굉장히 쉬운 것이다. 

떠남을 '변화'라 표현할 수 있을까?

떠난다는 것은 우선 자신이 현재의 위치나 공간에서 부터의 벗어남이다. 즉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주변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누구나 변화를 원하는 시대이다. 그만큼 자신의 생활을, 넓게 확장하여 현재의 삶에 불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인간은 만족을 모르는 동물'이란 표현에 비추면, 불만에 의한 변화의 갈망은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변화 욕망의 크기만큼 두려움도 큰 것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은 여행을 원하지만, 이것역시 떠남이고 변화이며 현재 상태의 불만이 있기에 두려움도 크다. 늘 염원하지만 온갖것들에 갖혀 떠나기 힘들어진다.

여행을 떠나고 돌아오는 반복된 내 일상을 지켜보며 '대단하다'고 말한다.

'부끄럽다. 대단할것도 없는데 뭐가 대단할까?' 여행자들과의 대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답을 아는 의문이다.

대단한 것이 아님에도 '대단하다'하니 어색하고 부끄럽기까지 하다.(그렇다고 식은죽 먹기라고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막연한 두려움을 생각했을때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당연한 말이고 쉽지만은 않은 말이기도 하지만, 처음이 문제다. 첫걸음을 떼면 여행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모든것에는 '처음'이 참 어려운 것이다.

기대에 대한 설레임과 막연함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처음이다.

누구나 경험해 보았고, 경험하고 있으며, 경험해 나갈 것이다.

기대의 설렘과 막연한 두려움, 이 둘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잡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균형하면 대체로 수평을 떠올리게 된다. 

두려움에 무게가 더해지면 기운다. 그렇게 되면 처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반면 설레임에 무게가 더해지면 기운다. 그러면 처음을 경험한다. 

남은 하나는 완전 수평일 때 이다. 이때는 떠남의 경험을 하게 될까?

나는 떠나게 된다고 본다. 인간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때 저지를 경향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우리가 배운 수학에서 사용한 기호를 사용하면 떠남이란 녀석은 '설레임≥두려움'이다. 


그러한 첫 여행의 순간 여행이라는 것에 첫번째 터닝포인트가 생긴다. 

여러번 언급했듯이 내가 말하는 여행은 스스로 계획하는 또는 무작정 떠나는 여행을 말하는 것이다. 워킹홀리데이나 카우치서핑등을 포함한 배낭여행같은 것들말이다. 패키지 여행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 여행을 시작으로 욕심을 내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럼 어떻게 떠나느냐고? 

묻지마라. 당신의 마음에 물어라. 두려움을 어떻게 줄일 수 있는지 아니면 설레임을 어떻게 늘일 수 있는지를..

떠남은 자신 속에 자리잡고 있다. 

다만 떠나지 못하게 하는 변명거리만 늘어놓을 뿐이다. 


나는 그냥 떠났다. 학창시절 방학때 떠나도 되었다. 직장을 다니며 휴가를 몰아서 떠났다. 

프리랜서로 일을 몰아서 하고 떠났다.

떠날때 마다 언제나 발목잡을 만한 일들은 일어났다. 그래서 떠나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떠났다. 그래보니 그 문제들은 문제가 아니었다.

무작정 떠나면 되냐고?

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떠난건 아니다. 하지만 무작정 떠날 결정을 하면 떠나진다. 여행 다녀보면 그닥 계획이 큰 도움 안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래서 첫 여행은, 첫 떠남은, 첫 변화는 나에겐 터닝포인트로 자리잡고 있다.

첫 여행은 변화에 대한 나의 시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늘 떠날 수 있는 삶을 꿈꾸게도 하였다.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터닝포인트가 되는 시대아닌가 옆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계발만 쌓아야 도태되지 않는다는 사회속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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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다고 하면 보통 '모르는 것에 대해 알아가는 것' '새로움을 경험하는 것'등 이런 유사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먼저 알게 된 이들에 대한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들에 의해 좀 덜 어려운 과정을 거칠 수 있다. 그렇다고 노력이 필요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시말해 배움은 노력을 통해 지식을 얻게 되는 과정을 의미하게 된다.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지식들이 자신의 생각과 이전 경험들과 어우러짐으로 지혜로 이르는 과정을 총괄하게 된다.

이상의 표현들은 누구나 들어왔었고 수차례 이상 접했을 내용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배움에 대한 이 정도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런데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우리는 가장 많이 이해하는 사람 보다는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해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은 공허하게 비워놓은 채, 오직 기억을 채우기 위해서 분투한다'(수상록I)

'나는 기꺼이 교육의 부조리라는 주제로 돌아가겠다. 우리의 교육 목적은 우리를 행복하고 현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머리속에 무엇인가를 집어넣는것 뿐이었다. 그런 목적이라면 성공한 셈이다. 교육은 우리에게 미덕을 추구하고 지혜를 포옹하도록 가르치지 않았다. 단지 기원이나 어원 같은 것들만 각인시켰을 뿐이다.'(수상록II) 라고 지적하였다.


1500년대 사람, 1580년에 완성한 <수상록>은 500년이 넘게 지나온 이야기지만 지금 우리의 배움에 대한 생각없음과 비뚤어진 목표에 대해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어느 시대에나 오류는 있어 왔고, 잘못된 적용이나 무지는 있어 왔다.

그 당시에도 무지에 의한 비뚤어진 교육에 대한 생각들은 있어 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당시 세태에 대해 몽테뉴는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과거의 발명과 발견들을 통해 그리고 시행착오들을 통해 인류는 진보되어 왔다는 점을 생각해 볼때 배움에 대해서는 진보되어가지 못한 것이 중요하다.


현 시대에는 이전보다 더 심한 비뚤어진 교육이 자행되어 있다는 점은 우리가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중의 하나이다.

배움에 관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곳은 첫번째는 가정이고 두번째는 학교이다. 두번째의 경우는 공교육과 사교육 모두 포함시켜야 할 듯하다.

첫번째인 가정 내에서의 교육도 매우 문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두번째를 고려해 보고자 한다. 물론 가정에서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고 있고 교육의 문제가 학교에서의 교육교육을 더욱 비뚤어지게 하는데 조장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배움은 개인적인 부면이지만 이 시대는 단체의 문제를 먼저 생각한다는 점을 보았을때 학교의 배움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것인다. 몽테뉴의 표현 '오직 기억을 채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현실과 얻고자 하는 의지를 뿌리채 뽑아버리는 현실은 우리에게 경각심 보다는 성공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현명한 판단으로 느끼게 하고 있다. 


서두에서 언급한 배움에 대해서 우리 대부분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런 비뚤어짐을 가진 것은 배움 자체를 매우 수동적으로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지식을 들어왔다. 청소년 시절에 단 한번도 주어지는 지식에대해 의문을 품어본적이 없는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의문이 들어도 순간일뿐 염두에 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특히 불교, 유교적인 스승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상은 우리를 더욱 조아리게 만들었지 우리가 하나의 개체로서 고민을 하고 생각을 통해 질문하게끔 만들지 못했다.

그렇기에 앉아서 받아쓰면서, 1은 1이고, 2는 2이다라는 말씀을 받아들이기에 바빴고, 그것들에 대해 기억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만 중히 여기게 된 것이다.

물론 하나의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위의 이유는 우리의 사고를 정지시킨 세뇌로써 가장 큰 작용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배움의 질병을 안고 있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파괴>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콩나물은 부드러운 만큼 아주 민감해요. 물을 자주 주지 않으면 금방 잔 뿌리가 많아져서 못쓰게 됩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키우는 것도 콩나물을 키우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내면의 개안(開眼)은 그래요. 시루에 놓인 콩나물이 하루에 몇 번씩 주는 물을 먹고 자라는 것처럼, 콩나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물이 꼭 필요한 것처럼, 여러분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책에서 얻는 지식이 꼭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콩나물은 절대로 물을 껴안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콩나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물이 꼭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물이 콩나물 사이로 설렁설렁 지나가게 만들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콩나물이 물을 안고 있다면, 금방 썩어버립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는 지식을 안고 있으면 여러분 자신이 썩어버려요. 

적어도 인간의 내적인 성장을 염두에 둔 지식은 그렇습니다. 콩나물의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어요. 아무리 아까워도 그냥 설렁설렁 지나가게 내버려둘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콩나물 사이로 물이 설렁설렁 지나기지만 때가 되면 자라 있는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자라는 것입니다.

마치 콩나물이 자신의 성장을 위하여 물이 지나가는 그 순간에 충실하듯, 여러분도 순간순간의 느낌에 충실하라는 말이었습니다. 변화는 순간이지만, 그 과정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207-209)

저자의 콩나물에 대한 예는 우리에게 배움에서 기억이 지대한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님을 적절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

콩나물이 자라기 위해 물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 물을 잡고 있으면 썩어버리게 된다. 우리의 배움에 지식에 대한 내용이 필요하지만 그 지식만이 모든 것인양 잡고 있으려하면 기억일 뿐이지 배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배움이란 것은 콩나물이 물을 지나가게 하면서도 잘 자라나가듯이 지식들을 통해 기억이아니라 그러한 지점과 자신의 체험적 사고와 경험들을 통해 그리고 이전의 지식들과의 어울림들을 통해 자신이 성장해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마지막 줄에서처럼 '그 과정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며, 배움은 듣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을 자신이 체험하여 자기의 것으로 체득, 체화해 나가는 과정이 매우 큰 역할을 차지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콩나물이 자라는 것이다. 공부에 대한 기술보다는 몸으로 부딪히는 과정 즉, 스스로 경험해 나가는 과정 그것이 우리의 배움이라는 점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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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공부

저자
하승창 지음
출판사
상상너머 | 2011-11-17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참된 삶과 세상, 사람에 대한 아주 특별한 멘토링!『지금 우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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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 기록 보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공부란 무엇일까?

시대의 가치관과 일반화에 근거한 공부일 것이다. 무작정 따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평가하여 더 나은 방법을 배우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꽤나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공부는 우리의 사회 전반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찾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공부들을 하는것이 어려운 현실이다.

그럼에도 기득권층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더 많은 세뇌와 노동력을 착취해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쉬운 일도 아니고 감추어진 것이긴 하지만 조금의 노력만으로도 우리는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

때론 매체를 통해 때론 책을 통해 때론 소셜미디어를 통해 ... 여러가지 방법으로 우리는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어느정도 조종을 당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멋진 신세계>에서 처럼 태어나기 전부터 조작이 되고 어린시절부터 세뇌되어 가는 정도는 아닐테지만, 우리는 어린시절부터 길들여져 가고 있는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무엇에 길들여져 가고 있을까?

돈, 이기심, 독자적존재, ... 

속된말로 '있는놈'들이 그들의 영역을 침해 받지 않기 위해 쳐 놓은 범주안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슨 그런 모함성 발언인가하는 생각이 들지는 모르지만 실제 사회전체를 관찰하게 되면 발견하게 되는 진실이다.

현 시대의 '신자유주의'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경제강국들이 자국의 기업들을 살리기 위해 주창하는 정책이지 않은가?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한미FTA를 해서 득을 보는것은 서민들의 생활에서 가장 쉽게 접하는 소소한 몇 가지 득을 보고, 큰 것들을 내 주고 있는데, 관심을 두지 않고 보면 좋아 보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갈 수록 그들의 영역 안에서 우리는 허우적 거릴 수밖에 없어지는 구조.

생활을 하기 위해 직장에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기업의 상품을 사면서 기업에 다시 건네야 하는구조.

'당연히 생활에 필요한 것을 사야하는것 아닌가?' 맞다. 사야 한다. 하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얼마나 되는가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보다 더 큰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길들여져 간다는 점이다.

그들 원하는데로 변해가는 세상 결국은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멋진 신세계>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주체적인 삶이 아니라 신도 아닌 그들을 신처럼 만들어 부조리한 세상을 만들어가는데 일조하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

그래서 책에서는 말한다.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힘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꿈꾸는 순간 변화를 향한 우리의 열망은 현실이 될 수 있다.

변화와 공존, 정의와 행복이라는 우리 시대 가장 뜨거운 쟁점과 화두에 대해 함게 고민하는 시도.'가 필요한 것이라고.


우리가 변해가야 하는것과 변해가서는 안 되는것을 생각해야 한다.

진짜 대학에서 우리가 무엇을 알아가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사회적 이슈가 왜 일어나게 되는것인지 내면을 볼 수 있는것이 중요하지, 정치 핑계만 대고 있는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의는 함께이지 나만이 아니란 사실을 기억하자고 한다.

우리는 행복해 보이고 싶은지 행복할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한다.

소통이 필요한데 어떠한 소통이 필요한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자고 한다.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런 세력이 되기를 주저하고 새로운 세력을 기다리고만 있는 걸까?


무기력한 것은 우리의 원래 모습이 아니라 세상에 치여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도덕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주위를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기르는것이 기계적인 공부보다 필요한 것은 누구나 알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것이 우리의 인성이 변해서인가 아니면 그렇게 변하도록 만든 세상의 조종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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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승창 - 세상을 바꾸자, 언제? 롸잇나우!(공부의 장을 열며)

다른 정치 세력이라고 해도 차이는 별반 없어 새로운 희망을 주고 있지는 못하다. 몇몇 정치인들이 몸으로 함께 부딪히는 '고마운' 정치 활동을 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위로는 될지언정 문제를 해결해주고 있지는 못하다. 영향력이 약해진 시민단체들은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해도 그렇게 과거처럼 돋보이지도 않는다.

누가 대신해주지 않는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세상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 말하고 우리 스스로 매듭을 풀어가야 한다.  7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힘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꿈꾸는 순간 변화를 향한 우리의 열망은 현실이 될 수 있다.

변화와 공존, 정의와 행복이라는 우리 시대 가장 뜨거운 쟁점과 화두에 대해 함게 고민하는 시도.  8



"모든 것의 시작은 위험하다. 그러나 무엇을 막론하고,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 프리드리히 니체



신영복 - 변화와 불변, 강물처럼 

"삶은 흐르는 강물입니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흐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부딪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텅 빈 사랑입니다." - 수많은 소리와 풍경을 담은 잠들지 않는 물처럼, 신영복  14

우선 변화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뼈대를 지키자', '사람'  17

미셸 푸코는 감옥이란 건 물론 범죄자들을 격리 구금하는 공간이나 시설로 알고 있지만 사실 감옥은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은 갇히지 않았다는 착각을 하게 하는 그런 정치적 장치라고 말입니다.(미셸푸코는 감옥이 문명의 기초가 되는 가장 기본적인 틀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책<감시와 처벌>에서 감옥을 정점으로 하는 감시, 처벌 기구인 가정, 학교, 군대, 병원, 공장 등을 분석하고 사실상 근대사회를 감금사회, 관리사회, 처벌사회, 감시사회로 바라보았다. 푸코에 따르면 우리를 길들여 사회가 바라는 인간으로 탈바꿈시키는 학교나 군대, 아니 사회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라고 할 수 있다.)  21

'역사는 변방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25

중요한 것은 광대한 변방 영역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여럿이 같이 가는 것입니다. 여럿이 함께 가되 속도, 목표, 효율보다는, 그 과정 자체가 인간적이고 아름답고 가치 있어야 됩니다. 

길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도로'가 속도와 효율 자본의 논리라면, '길'은 인간적인 논리 아닐까요? 도로는 직선이지만 길이 직선으로 되어 있는 건 없습니다. 동물들도 대개는 곡선으로 나아갑니다. 냄새도 맡고, 소변도 남기면서 그렇게 가거든요.  26



신영복 - 새로운 변화, 새로운 창조성은 변방에서

새로운 변화, 새로운 창조성은 늘 변방에서 나타납니다. 중심부는 언제나 기득권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는 영역입니다. 중심부에서는 창조적인 변화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의 전개 과정을 보더라도 문명의 중심부는 늘 변방으로, 변방으로 옮아갔어요. 왜 그러냐면 중심부의 저항이 완고할 뿐 아니라 변방은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새로운 것이 태동할 수 있는 창조의 지반이거든요.

하지만 지금 논의되고 있는 연대연합에 관한 이야기는 주로 기존의 집단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일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연합이 그 바깥에서 이루어져야 된다고 봐요. 바깥이라는 것은 반드시 공간적, 물리적인 외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이해관계 집단이 자기 영역들을 과감하게 개방하고 제거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봐요.

알랭 바디우는 탈근대 철학자 가운데 주체 문제를 고민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의 탈근대 담론의 핵심은 '주체해체'입니다. 바디우는 주체해체가 가져오는 무정부성, 무장해제에 대한 위험성을 간파하고 있지요. 주체는 기존의 주체를 승계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원래 주체는 후사건적 실천 과정에서 형성된다고 주장해요. 기존의 진리 체계의 바깥에서 사건으로 돌출하고 그 사건에 충실한 실천가들의 꾸준한 노력이 사후적으로 주체를 만들어낸다는 거죠.(알랭 바디우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주류가 된 들뢰즈에 반대하여 '진리'와 '보편성'을 주장하는 플라톤주의적 전통과 이성적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데카르트주의적 전통을 잇는 프랑스 철학자이다. 알랭 바디우는 주체를 일컬어 '진리의 투사'라고 말한다. 즉, 주체는 진리라고 믿는 것에 대해 충실성을 다하는 상태이며 주체는 존재론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34

외부와 바깥, 변방과 마이너리티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35

먼저 우리 인식의 틀이라든가 우리의 정서를 바꾸어야 해요. 사람이란 게 자기 경험에 갇히기 쉽지요. 우리가 자주 듣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수사는 한마디로 자기 경험 지상주의죠. 좁은 틀에 갇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의 개인적인 경험, 또 우리 시대가 갇혀 있는 문맥, 이걸 깨뜨리는 게 필요합니다. 그게 아주 중요합니다.  37



백낙청 - 원(願 원할 원)을 말하다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 - 전태일

"기본적인 상식이랄까 교양이랄까 인간적인 예의나 염치, 이런 것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지도 되고 평화도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지요." - 새로운 시대의 열쇠란, 백낙청



천준호 - 우리가 꿈꾸는 나라

한국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 정치가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굉장히 넓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는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민들의 열망은 높은데, 현재의 정당들이 정치를 바꾸는 과저에선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그 때문에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개입해서 정치를 변화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요?  54



정수현 - 진짜 대학이란 무엇인가?

어떤 지점들을 Re디지인해야 하나?

사회 안에서 대학의 가장 바람직한 역할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또한 대학 시절만큼은 우리 시대의 바람직한 '가치'에 대해서 끊임없이 묻고 배우고 관계를 맺는 학문의 장이 되어야 해요.

하지만 오늘날 대학들은 평가 시스템과 같은 성과주의나 순위 매기기(몸값 높이기)에 급급한 채 실용적이고 실무적인 과목에만 집중하고 있어요. 인문학의 위기나 기초과학 및 다양한 분야에서 고르게 인재들이 배출되지 못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대학이 '취업학원'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은 부끄럽지만 사실이 되어 가고 있어요.  62

Re디자인을 위한 주요한 의제로는?

첫 번째는 한국 대학들의 구조적 문제(대학생 당사자 권리찾기, 대학의 가치 철학과 경영 방식 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현재 대학이 배움의 장으로서 적절하게 기능하고 있는지, 학생 주체들이 설 곳이 얼마나 제대로 마련되어 있는지, 기업화된 대학들로 인해서 생길 미래의 문제들은 무엇인지 가감없이 이야기 나누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두 번째는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주체들의 역할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즉, 가장 중요한 대학 주체인 대학생들과 교수들, 대학 경영진들, 일반 시민사회, 언론, 정책결정자 등 각각이 대학이라는 공간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필요한 방안을 다자적 접근으로 마련하는 것입니다.  64



조성주 - 청년에게 '빚'이 아닌 '빛'을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 질러!" 사람들은 아프니까 청춘이고, 청춘은 원래 방황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사회구조적으로 청년들이 자연스레 연령이 높아지면서 취업도 되고 가족도 꾸리고 하는 것이 가능할 때 할 수 있는 위로입니다.  75



"스스로 배울 생각이 있는 한, 천지만물 중 하나도 스승이 아닌 것은 없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스승이 있다. 하나는 대자연, 둘째는 인간, 셋째는 사물이다." - 장 자크 루소



박웅현 - 공존! 가슴의 울림으로

B.C. 10,000년부터 시작해서 수평을 달리던 인구곡선이 산업혁명 직후부터 해서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개체 수가 갑자기 확늘어나니 다른 데에 피해가 생길 수밖에 없는 거, 이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거 같습니다.  91



박웅현 -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공부

전 인문학이 아직 뭔지 모르겠어요. 국문학자들이 들으면 "이놈!" 할지 모르겠지만, 문사철만 인문학인가요? 그럼 물리학 같은 건 인문학이 아닌가요? 결국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이런 대화, 시장 아줌마의 살아나가는 모습, 요즘 뜨는 음악의 패턴, 현대 그림의 흐름 이런 게 다 인문학인 것 같아요.  105



이강오 - 한강변에 원전이 세워진다면

식량을 얻기 위해 한 방울의 석유도 필요치 않던 50년 전과 1칼로리의 음식을 섭취하는 데 10칼로리의 석유가 필요한 오늘날, 3억 년 전 석탄기의 태양이 422년 동안 보내준 빛 에너지를 소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 단 1년.

지구 전체 에너지 소비가 공급을 앞질러 '에너지피크'에 도달할 2060년의 미래에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써야 하는 유서는?

1970년대 중반부터 풍력과 태양광 등 재생가능에너지 기술에 관심을 기울여 온 독일은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직후 본격적인 탈원전 계획을 세우고 2002년에는 탈원자력법을 시행했다. 그러나 산엽계의 반발과 고유가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대안으로 전 세계적으로 원전 르네상스가 일면서 독일 정부는 핵발전소 가동 시한을 평균 12년을 더 연장하려 했다. 그러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다시 탈원전 정책으로 돌아가 2022년까지 독일 내 모든 핵발전소를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독일 그린피스는 '지나치게 느리다'고 반박하며 2015년까지 핵에너지로부터의 탈피가 가능하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보고서는 2040년까지 모든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와 2050년까지 재생가능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다.  121

좀 더 근본주의적인 입방으로 보면 그린피스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더 빠르게 진보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만 문제해결이 가능할 것 같아요.

우리가 마시는 콜라 한 잔 같은 경우에도 1칼로리를 위해 20칼로리에 해당하는 석유를 쓰고 있다고 해요.

미국의 '커뮤니티솔루션'이라는 단체에서는 무한경쟁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를 지역공동체 경제 중심으로 바꾸어야만 문제해결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영국 정부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시스템은 소형 열병합발전소인데요. 대형 발전 시스템에서 소형 열병합발전소로 전환하면 기본적으로 에너지소비 30%를 줄일 수 있고, 소비를 감축하여 에너지믹스 체계를 단계적으로 신재생으로 바꾸면 에너지 문제에 충분히 대응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죠.  122



황윤옥 - 분단, 우리가 잊고 있던 불편한 진실

분단이나 통일이나 평화처럼 너무 커 보여서 일상의 나하고는 아무 관계없을 것 같았던 주제에 대해서, 그게 알고 보면 사실 일상과도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단 얘기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127

정치 핑계될 일이 아닙니다.  131



오관영 - 동네 땅값 올리는 게 지방자치?

지방자치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는 분권과 참여입니다. 중앙 정부가 독점하고 있는 재정, 인사 등의 권한이 지방자치 단체로 대폭 이양되어야 합니다. 이러함 분권이 지방자치의 필요조건이라면 참여는 충분조건입니다. 지방자치단체의 모든 권한이 단체장에게만 집중되는 제왕적 단체장이 존재한다면 분둰은 오히려 지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킵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이 자신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주민참여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지방자치가 가능합니다.  138



조국 - 입은 자유롭고 밥은 공정하게!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기계적 중립, 균형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에게 보다 유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오히려 정의롭고 공정한 것이며, 진정한 '중용'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강자가 손해 보며 약자를 배려하는 게 정의, 조국

제가 한국 사회의 법 현실과 법치의 문제점에 대한 얘기를 하면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즉, "악법도 법 아니냐? 당신이 현 체제와 현행 법률에 대해서 불만이 있다 하더라도 일단 실정법률은 지켜야 되는 거 아니냐?"라는 반응입니다. 정부 측 인사는 물론 일반 대중도 이러한 질문을 많이 던집니다. 이에 이어서 "악법도 법이라고 소크라테스도 말을 하지 않았느냐?"라는 말이 나옵니다. 근래 들어 종종 정부는 '국격을 높이려면 법질서가 준수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있기도 하지요.

법치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입 닥치고 법 지켜라"가 될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법치관이 우리 사회에 횡행하고 있지요. 저는 1982년에 법과 대학에 입학하여 1992년에 교수가 된 이후 줄곧 법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마는 이러한 법치관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먼저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했는가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릇된 또는 부정의한 일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을 것이며, 복종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겠다."

그러고는 독배를 마시고 죽었지요.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자기에게 철학을 포기하라고 명하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에게 사형을 선도한 배심에 대해서는 "당신들은 현자를 사형에 처했다고 하는 악명과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악법도 법이다"라고 누가 요약했냐 하면, 일제 시대 때 일본의 군국주의 법착자 오다카 도모오였어요. 소개한 소크라테스의 법사상을 "악법도 법이다"라고 요약한다면 이는 난독증 또는 의도적 왜곡일 것입니다. 대입 논술시험에 이런 식으로 요약한다면 저는 최하점을 줄 것 같습니다.("악법도 법이다"란 말과 소크라테스를 연관지은 가장 오래전의 학자는 일본의 오다카 도모오로, 그는 경성제국대학교, 동경대학교 법학부 교수이자 <실정법질서론>이라는 책을 쓴 일본의 유명 법철학자였다. 1930년대 '번역의 빈곤'이 낳은 이 말은 그 후 우리나라로 건너와 군사독재 시절 권위주의 정권의 억압적인 법 집행을 정당화하는 해석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142-143

"악법도 법이다"라는 주장의 전제는 "존재하고 있는 것은 무조건 옳으니, 그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품지 말고 따르라"라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지요.

질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질서의 전제는 자유입니다.  144

자메이카(23위), 대만(48위), 아프리카 가나(54위), 대한민국(70위), 2011년 세계언론자유도에서 한국은 196개국 중 70위.

미국의 보수성향 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마저 2011년 세계언론자유도에서 한국을 70위로 매겼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던'자유국가'의 지위를 박탈하고, '부분 자유국가'로 강등시켰습니다. '부분 자유국가'인 때가 언제냐 하면 1980년대 때, 즉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이었습니다. 요컨대, 한국 언론의 자유 수준은 1980년대로 후퇴한 것입니다.  147

이명박 정부의 법치관은 'Rule by Law'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학자들은 'Rule by Law'와 'Rule of Law'를 엄격히 구별합니다. 'Rule by Law'는 실정법을 도구로 사용하는 지배, 즉 실정법의 정당성을 묻지 않고 그것의 준수를 요구하고 그것을 통한 지배를 강조하는 관념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의 민주주의 법학자들이 다 공유하고 있는 법치는 'Rule of Law'입니다. 이는 일정한 도덕적 요청과 정의의 요청에 충족하는 법에 의한 지배를 뜻합니다. 실정법의 내용과 실질을 따지는 것이지요.  148



박래군 - 죽음의 행렬, 무엇이 문제인가?

"모든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킬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지킬 권리가 있다." - 세계인권선언 제3조, 생존권

그러나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 대한민국,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 25명, OECD 평균인 11.2명의 2배 이상 또한, OECD 국가 중 산업재해 1위, 근로자 10만 명당 산재사고 사망자 수 18명으로 미국 3.7명, 일본 2.7명에 비해 월등히 높음.(2010년 고용노동부 조사결과)

매년 150명 정도의 청소년들이 자살하고, 해고노동자와 비정규직, 철거민들이 사회적 타살을 당하는 나라, 거리에서는 노숙인이, 쪽방에서는 독거노인이, 시설에서는 장애인이 죽어가는 나라, 빚 독촉에 죽고, 생활고에 죽고, 온갖 차별과 멸시속에 죽음을 택하는 소수자들... 그런데도 너무나도 죽음에 무뎌진 사회.

얼어붙은 세상을 녹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자살 혹은 타살, 죽음의 행렬'에서 이 죽음의 행렬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알죠. 근데 눈에 비치지 않는 일상화된 죽음의 행렬은 인지를 못 하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이 매년 평균적으로 150명씩 죽어갑니다. 거리의 노숙인은 또 얼마나 죽어갈까요?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많은 사람들도요.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1위잖아요. 그런데 이런 죽음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굉장히 무감각해져 있어요.

지금 우리 사회의 구조는 죽은의 구조인데, 이걸 어떻게 타파하고 삶의 구조로 바꿀 것인가가 저한테는 큰 화두거든요. 인권의 기본이 생명권인데,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사회적인 구조, 분위기, 문화가 만연해있어요.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자면 이런 죽음을 드러내 성찰해 보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71

'저 사람의 문제가 내 문제'라는 것이 인권의 가장 중심적인 원리인데, 예전에는 이것을 당위로 받아들였는데 요즘에는 연대의 의미부터 다시 설명해야 하죠. '저 사람의 문제에 내가 관심 갖고 개입하는 것이 나한테 왜 중요한가? 왜 필요한가?' 하는 것들부터 설명해 줘야 해요. 연대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끌어내고, 연대를 위해 필요한 정책돌도 얘기해야 하는 거죠... '인권 감수성'  172

사람들이 '이게 나만의 고통이 아니다' , '저 사람도 저런 고통이 있구나'하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연대를 찾아나가거든요.  173


오창익 -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내가 뽑았지만, 대법관이나 대법원장은 내가 뽑은 적이 없다. 뽑을 기회도 없었고, 얼굴도 모른다. 다시 말해 선출된 권력이 아니다. 그런데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법원이 어떻게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과 국회의원처럼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느냐, 내가 뽑지 않았는데, 내가 그런 권한을 위임해 준 적이 없는데....'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게 바로 시민적 상상력인 것 같아요. 유감스럽게도 이런 상상력이 그 동안의 시민운동진영이나 학계에서는 잘 안 나왔습니다. 법원이 선출된 권력이 아니니까 법원 추천 몫을 줄이거나 없애야 한다는 생각 역시 법조계나 저희처럼 기존의 문법에 익숙한 사람들에게선 잘 안 나왔습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국민이 뽑지만, 국민이 뽑지도 않은 검찰이 어떻게 입법부나 행정부와 같을 수 있나요?'라는 의문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도 얼마든지 품을 수 있다고 봐요. 사실은 이런 의문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상상력이라고도 할 수 있죠. 바로 이 '시민적 상상력'이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는 권력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83



정란아 - 기업은 물건만 잘 만들면 땡인가?

기업이 경제를 끌고가는 큰 원동력이면서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큰 힘인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잘못을 해도 사회적으로 용인하거나 이해해주는 측면이 과해서는 안 된다는 게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기업 활동을 하면서도, 사회의 근본적인 가치들을 존중하고 지키는 것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인 겁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건 어려운 담론도 개념도 아닌, 인권이나 기본권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왜 안 지킬까 고민해보면, 기업이 권력화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거죠.  188

소비자나 시민으로서 기업 권력에 맞서는 액션플랜을 제시해주신다면...

첫째, 일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기업의 제품은 구매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우선은 벌어놓고, 나중에 베풀자'라는 생각을 가진 기업을 경계합니다.

셋째, 기업의 최우선 목적이 주주의 몫을 챙겨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기업을 경계합니다.

넷째, 국외와 국내의 모습이 다른 기업을 조심해야 합니다.  192



이희욱 - 표현이 자유와 권리침해의 충돌

인터넷을 정치적 저항 수단이나 공간으로만 보지는 않지만, 정치와 관련해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정치적 민주화운동이나 사회운동, NGO 활동을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지금, 인터넷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소셜네트워크와 스마트폰 덕분에 정보는 어느 때보다 빠르고 넓고 촘촘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정보 확산이 넓고 깊게 이뤄지면 대응도 다층적이고 다변화된 양상을 띠게 되겠죠. 돌이나 화염병 대신 트윗 한 줄, 문자메시지 한 통이 모이고 엮여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이런 변화를 막으려 투박한 둑이나 산성을 세운다 한들, 조그만 구멍까지 빈틈없이 메우진 못할 겁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보자면, 정치나 사회 변화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는 규제의 기억을 잊지 않고 각인하는게 중요하리라 봅니다. 정치적 격변기엔 규제가 강화되고, 사회적 대응도 거칠어집니다. 허나, 그 시점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쉽게 잊는 게 반복돼온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촘촘히 얽힌 보조기억장치를 갖고 있습니다. 집이든 사무실이든 이동 중이든, 시간 저편에 묻혀 있던 규제의 기억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내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틀림없이 찾아냅니다. 이런 과거의 오류를 바로잡고 제대로 평가하는 게 인터넷 시대에 맞는 사회적 대응이 아닐까요?  198-199

부작용에만 애써 집착할 게 아니라, 이를 바로잡는 시민사회의 정화 능력도 믿어볼 일입니다.  200



"모두 자신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 그렇지만 기술적으로 하나가 된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행복을 바라더라도 남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과 하나가 되지 않는 한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 버트런드 러셀



김여진 - 무조건 행복!

"함께 살아야 합니다. 함께 행복해야 하구요. 하지만 그걸 함께 하는 우리의 마음이 무겁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내가 다 구할 수는 없어요. 한 가지만, 여러분들이 꽂히는 그 한 가지만, 그게 뭐든 한 가지만을 일주일에 그냥 한 두 시간만 내시면 될 거 같아요." - 혼자보다 함께여서 더 좋은 행복, 김여진(230)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나만 행복해지는 법'을 찾기 때문이라고요.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옆에 누군가가 불행한데, 옆에 있는 누군가가 부당한데, 옆에 있는 누군가가 정말 도움이 필요한데, 그걸 모른 체 하고 나는 저런 걸 당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순간 내 마음에는 두려움이 생기죠. '내가 저렇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그 두려움이야말로 우리가 행복해지는 걸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합니다.  212

행복해 보일 것인가 아니면 행복할 것인가를요. 

주로는 행복해 보이기 위해 대부분의 인새을 쓰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마찬가지구요. 행복해 보이려면 안정된 직장,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직장이 있어야겠죠. 또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배우자, 그럴듯한 집, 심지어 아이들한테도 1등하라 그러죠. 저희 어머니도 만날 그러셨어요. 왜? 남들 보기에 그럴듯하니까요. 우리가 평생 가장 많은 힘을 쓰고 있고, 추구하는 거의 모든 부분들은 행복해 보이기 위한 거죠. 남들한테...

그걸 위해 애쓰다 애쓰다 나는 과연 언제 행복한가?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자, 그럼 여기서 우리가 언제 정말 행복한가에 잠깐 집중을 해볼게요. 생각해보니까 저는 이거 같아요. 일단 재미가 있어야 돼요. 만화책 볼때 행복하고, 재밌는 드라마 볼 때 행복하고, 영화 볼때도 행복해요. 친구들하고 수다 떨 때도 행복해요. 근데 그건 잠깐인거 같아요. 그때가 지나면 다시 허무해지죠.

그래서 사람들은 의미를 찾는 거 같아요. 의미 있는 일 말이죠. 이게 어떤 의미가 있나, 어떤 결과를 갖고 오나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죠. 전 행복이란 재미가 있고 의미가 있는 일을 하면서 그때그때 사는게 행복한거지 돈이나 차나 좋은 집이 있다고 행복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돈이 필요가 없단 얘기냐? 그런 거 아닙니다 먹고는 살아야죠. 애도 키워야 되는데, 그럴만한 사회와 환경이 되어야죠. 물론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게 분명히 있어요. 그걸 함께 풀어나가는 것조차도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213

무기가 없는 곳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229



김여진 - 세상을 바꾸는 행복의 힘

직접 가서 내 눈으로 보는 게 최고예요. 

그냥 기사로 보고 책으로 봐서 분노하고 화내는 것은 정말 얼마 안 가요.  233

내가 정말 언제 행복한지 따져보면 돼요. 잠 푹 잤을 때, 맛있는 것 먹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이런 때잖아요. 사실 그 과정에 세상을 바꿔야 하는 것들이 분명히 들어가요. 내 옆의 누군가가 부당한 일로, 또는 먹지 못해서 울고 힘들어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그걸 외면한 단 말이죠. 외면하는 게 편할 것 같아서 도망가요. 두려워요. '내가 저렇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두려움이 생겨서 더 움츠러들어요. 그게 지금의 우리 모습인것 같아요. 부당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은 세상에 굉장히 많은데, 나는 못 하겠다는 거죠. 왜? 무서워서. 내 코가 석 자라서. 모든 사람들의 코가 석 자예요. 모두 다 같이, 개별로 떨어져서 각자 두려움에 떨게 되는 거죠. 정말 단순하게, 배고픈 사람과 빵 나눠 먹고, '너 억울한 일 당했어? 같이 가줄게' 하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한 거죠. 하지만 그 순간 '내가 나서서 일이 잘 안 되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하면 다시 움츠러들어요. 그게 욕심이라는 거죠. 내가 한다고 꼭 잘되리란 보장은 없어요. 그저 최선을 다하는 거죠. 실패하면 방법을 바꿔서 또 해보는 거죠. 

저는 모든 국민이 세상에 기여할 한 가지 문제를 자기 과제로 삼으면 좋겠어요. 한 가지를 정해서 평생 그것만 하는 거예요. 일주일에 한두 시간이라도 내서 그걸 했을 때 자기 마음이 얼마나 부자가 되겠어요? 세상의 주인으로 서는 거잖아요.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는 거잖아요.  237



김창난 - 소통부재의 시대, 행복을 위한 소통

소통의 열쇠, 공감(共感, sympathy)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

"인간은 홉스가 말했듯 경쟁적, 이기적인 동물이 아니다.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나? 물질 소유가 아니다. 공감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협력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 삶은 스트레스 덩어리다. 우리는 서로에게 공감하며, 서로에게 위로받고자 프로그램되어 있는 존재다. 공감의 유전자가 이것을 도와준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본서이다. 공감의 감수성이 인간뿐 아니라 생태계 전체를 향해 확장돼야 한다. 모든 생물권을 존중하며 살아갈 때 지구상에서 우리의 삶이 지속될 수 있다." - <공감의 시대> 작가 제레미 러프킨의 인터뷰 중

프로가 아니고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더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는 거지요. 우리가 프로라고 나선다면 그 순간 우리가 가진 장점들은 다 사라지는 거죠. 그러니까 우린 영원한 아마추어인 거예요.  241

'모 아니면 도'라는 거. 그걸 바꿔야죠. 다양하고 풍부한 마이너리그가 존재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게 풍부해야 메리저리그 주류도 끊임없이 새로운 자양분을 공급받으면서 버텨낼 수 있다는 거죠.  243

누가 이 뽑아서 군대 면제 받았다고 해서 나도 이 뽑아야겠다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누가 음주 운전했다고 나도 해야겠다는 사람도 별로 없구요. 근데 긍정적인 역할 모델이 된다면 그 영향력은 무척 커요. 그런면에서 긍정적 역할 모델이 될 수 잇는 셀러브리티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한국 사회의 변화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죠.  245

'공감'입니다.

김제동, 김미화, 김여진, 박혜경, 권해효, 강풀 같은 셀러브리티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게 공감과 연민의 능력이죠. 그분들이 그렇다고 대단한 진보적 신념을 가졌거나 이념에 따라 행동하는 분들은 아니거든요. 다만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면서 그들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거죠. 이게 중요한 거예요.

공감의 힘이란 예컨대 이런 거죠. 혁명이든 사회변화든, 이론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에요. 대중들에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이론적으로 설명해 봐야 설득이 쉽지 않아요. 그거보다는 "저기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보십시오"라고 말할 때 확실히 공감의 폭이 넓어지는 거죠. 변화의 동력도 생기고요.  246



노민영 - 총체적 삶의 운동과 맛있는 혁명

달팽이를 상징으로 하는 슬로푸드 운동이 중시하는 것은 먹거리와 생물다양성 보호와 미각 교육의 확대 그리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연대!

지킴(사라질 우려가 있는 전통적인 식재료나 요리법. 질 좋은 식품과 전통주를 지킨다)

가르침(성장하는 아이들은 물론 음식 소비자에게 미각 교육을 진행한다)

지지함(질 좋은 식재료를 제공하는 생산자를 보호한다) - 1996년에 발표된 슬로푸드 법렬 중



김지수 - 행복은 과연 성적순일까?

서울시 교육청이 초중고교 65곳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체개발한 '학생행복지수'를 측정한 결과, 성적이 상위권인 학생들의 행복지수 평균은 100점 만점에 71점, 중위권은 62점, 하위권 학생들은 54점으로 나타났다.

경쟁 내몰린 학생들 "행복은 성적순이 맞잖아요."

우리나라 청소년 10명 중 7명(69.6%)은 생활 전반에서 스트레스를 호소, 청소년들의 고민거리 중 가장 큰 부분은 공부(38.6%)와 직업(22.9%)문제.

청소년 8.8%는 "1년간 자살 생각해본 적 있다." - 통계청 2011 청소년 통계


우리 교육은 지금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학생으로 보지 말고 한 인격으로 보면 좋겠어요. 요즘 아이들은 자기 삶에 대해 굉장히 성실하게 고민하고, 자원봉사 같은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세상에 대해 다양하게 경험하고 싶다고 말해요. '교육은 곧 배움'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배움은 그 어디에도 있는 거죠.

성적이 아닌 행복을 키우는 교육,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고, 또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일까요?

행복은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문제이기에 나름대로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행복을 키우는 교육은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지속적으로 자기가 살아가고 싶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도록 힘을 북돋아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이 아이들에게 '가슴 떨림'을 줄 수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이 가슴 떨림을 느낄 수 있게 하느냐가 문제인 거지요. 가슴 떨림은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행동하게 만들고, 그 행동 하나하나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도록 만들어줍니다. 기적과 같은 힘인 거죠.

그런데 지금의 교육은 이상을 꿈꾸는 아이들에게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하겠어?" 라는 말로 아이들의 이상을 현실로 끌어내리고 있어요. 꿈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신념을 가지고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신념으로 만들어진 이상이 현실로 끌려 내려오면 세상은 그만큼 발전하지 못하겠지요. 더 큰 문제는 아이들의 신념도 함께 사라진다는 겁니다. 아이들의 이상이 자유롭고 꿈꿔지고 실천되어질 수 있는 세상, 아이들의 신념이 지속가능하게 유지될 수 있는 세상, 그것을 위해 더 늦기 전에 지금부터라도 아이들이 행복한 교육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60



공부를 바치며 - 변화가 만들어낼 우리의 미래

한 가지 묻고 싶다.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런 세력이 되기를 주저하고 새로운 세력을 기다리고만 있는 걸까?  261

이제 우리는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새로운 시작의 기로에 서있다.

정의와 상식이 통하는 건강한 사회를 위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함께 꿈꾸고 공부하여 깨어 있는 시민,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내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마침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 나는 그리고 또 우리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 상상력이 바꾸는 세상을 꿈꾸며 하승창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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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저자
고미숙 지음
출판사
그린비 | 2007-05-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삶을 만난 공부, 호모 쿵푸스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는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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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비 출판사의 인문학 프로젝트 초창기에 나온 책이다.
일전에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를 재밌고 의미있게 읽었었다.
당시 꼭 인문학 프로젝트 시리즈를 모두 봐야겠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속으로 이핑계 저핑계를 대면서 다른책들에 밀려 있었다.
모처럼 마음먹고 시리즈 몇 권을 들고와서 읽었다.
그중에 한 권인 호모 쿵푸스
저자는 공부에 관한 인문학적인 개념과 자신의 사유에 의한 글들을 적어 놓았는데..
길지 않는 내용이지만 좋은 내용들로 만족스러운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존 공교육의 문제와 사교육의 문제에 대한 지적을 하고 있으며, 미래를 위한 공부는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적혀있다.
그 내용들에 꽤나 동조하기도 하고 있다.
저자는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라고 표현한다. 
과연 그 의미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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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배동김선생의공부가희망이다0세부터10세까지공부습관길들이기
카테고리 가정/생활 > 자녀교육
지은이 김종선 (이다미디어,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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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분명 근본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저자의 경험에 의해서 밝힌것이다.
솔직히 경험을 해보면 이말이 무슨 말인지 안다..너무 잘안다. 
다만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불안하거나 긴가민가 하면서 결국은 시간을 허비할 뿐인것이다.

당신은 부모인가?
내가 말하고 싶은것은 제발 부모가 해보지도 않고 아이에게 무조건 '좋다더라'하면서 시키려 하지마라.
당신이 어렸을때를 생각하라. 그리고 그때와 지금은 당신이 생각하는것 보다 훨씬더 달라졌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아이가 잘하길 원한다면 부모인 당신이 스스로 무엇을 잘해야 하는지 찾아서 하라.
그러면 아이는 따라간다.
왜 해보지도 않고 될까 안될까 망설이고만 있으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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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l iswell' 세 얼간이 하면 떠오르는 표현이다. 
영화를 보면 이 표현이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본것은 2009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한국에서도 개봉을 하고 다시 보게 되었다.
얼마전 <(영상소설) 세얼간이>를 보았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그대로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 책을 보면서 영화를 다시금 떠올리고 책을 읽은 후에 바로 영화를 다시 보았다.
영화는 매우 재밌다. 유쾌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영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지금 인도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영화로 만들었구나하는 생각인데, 보다보면 지금의 한국사람들에게 더욱 필요한 내용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왜 이런 표현을 쓰는지는 영화를 보면 누구나 공감하게 될 것이다.
특히나 영화에서 중점을 둔것으로 '공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또한 '친구'의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한다.
그 외에도 몇 가지가 있었다.

원작 소설인 이 책은 표지에는 영화의 포스터가 나와 있지만 실제로 영화의 내용과는 다소 떨어져 있다.
영화를 보고난 후에 소설을 접한 나로서는 처음 책을 덥었을 때 영화보다는 밍숭밍숭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내용을 정리해보면서 영화보다 현실적이고 영화만큼 생각할 거리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화에서와 원작에서 공통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몇 가지 중에 두 가지가 위에서 언급한 '공부'와 '친구'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의 표현중에 '친구는 여자의 젖이다'란 표현이 나오는데, 책에서는 동일한 표현은 없지만 '친구'란 어떠한 존재이며, 자신이 진정한 친구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영화에서보다 친구들은 더욱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함을 가진 존재들로 나오는데 더 현실적인 면이 강하다. 
그렇기에 개인적인 느낌으로 친구에 대한 생각을 재 정의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친구이기에 친구라서 친구이다. 진정한 친구란 정말 어떠해야 할까...
선을 그어 표현한다는것이 무의미하다. 하지만 선을 그어보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우리들은 선을 그어 보려는 범주를 생각해 보려는 시도부터 필요하다. 
'나는 진정한 친구 인가?' 자문해 보는 시간이 었다.
이들이 함께 어이없는 일들을 꾸미거나 함께 할 때도 이들은 친구이기에 모든 것을 함께 하면서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영화에서는 이들은 얼간이라 보기 힘드는 캐릭터이다. 하지만 원작소설에서는 정말 이들은 얼간이 들이 맞다.
이들은 상식적이지 않은 얼간이 짓들을 함께 해나가면서 친구들의 우정과, 성장을 함께 해나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공부를 위한 공부인가, 자신이 원한는 것을 위한 공부인가?'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하며 끌려 가고 있다.
온갖 자기계발서들이 주장하는 것 주의 하나이다.
맞는 말인지 알면서 우리는 시간을 내어 생각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음을 꼬집어 주는 내용들을 통해 반성의 시간과 다시금 고민해 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다.
'우리의 세 주인공들은 고등학생 시절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수재들이다. 하지만 누구나 우러러보는 인도 최고의 대학, 입학만 하면 미래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바로 그곳에서 이들은 행복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 점수였다. 그 사람이 어떤 가치관과 인성을 갖고 있는지, 그으 ㅣ꿈은 무엇이고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이미 논외가 되었다. 인도 공과대학(IIT)의 학생들은 단 하나의 목표, 좋은 점수를 받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많은 돈을 벌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에 현재으 삶을 기꺼이 희생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정말 행복할까? 나는 이러한 질문을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져보고 싶다. 당신은 정말 행복하십니까?' (옮긴이의 말중에서 334)
우리는 자본주의 나라에서 신자유주의 중심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끝없이 노력하고 배우고 돈을 벌어야만 하는 삶을 살아간다.
과연 그것은 무엇때문일까? 그래야 나이들어서 고생하지 않는다. 늙어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아야만 한다.
누구나 한치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서 돈만이 살길이라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과연 이러한 사실들의 근원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기득권의 세뇌에 의해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위해 조금만의 노력을 해보면 알 수 있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신경제와 약간의 철학과 산업사회 이후의 역사흐름을 알게되면 그러한 사실을 간파해 낼 수 있다. 이렇게 표현해도 여러 분야의 내용이라 지래짐작으로 겁을 낼 지도 모르겠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알수 있는 내용들이란 사실이다.
누군가 신문은 '사실은 있지만 진실은 없다'고 하였다. 우리는 사실만 알고 진실을 알지 못하는 생활을 꼬집고 있는 책을 통해 즐거운 시간과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여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열망으로 벌써 영화를 본 횟 수가 8번을 넘어 간다..



'이 겁쟁이 같으니라고, 적어도 시도는 해봐야지, 끝내고 나면 분명 엄청나게 기분 좋을 거라고,'  39

'IIT가 배출한 위대한 공학자 혹은 과학자가 몇 명이나 되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수많은 최고 경영자나 기업가들이 IIT 출신이잖아.'
'내 말은 IIT가 인도 최고의 대학으로 치부된다는 거야. 10억 인구가 사는 이 나라의 최고 공과대학으로 말이야. 그런데 IIT가 뭐 특별히 발명해 낸 거라도 있어? 아니면 인도에 기술적으로, 기여한 거라도 있느냔 말이야.'  47

'질문은 딱 하나야. 넌 인생에서 뭘 원해? 2분 줄 테니까 생각해 봐.'
인생에 대해선 정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121

'IIT의 시스템은 4년간 생쥐들이 경주를 벌이는 것처럼 머리 쓰는 일도 없이 학생들이 치열한 경쟁에 돌입하게 합니다.'  124

라이언은 그의 윤활유 연구 제안서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라이언이 무너가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걸 보니 기분이 좀 우울했다. 녀석은 일주일에 3일 가량을 컴퓨터 센터나 도서관에서 밤을 보냈다. 게다가 낮 동안에는 유체역학 실험실에서 윤활유를 이것저것 섞어 보며 지냈고, 그런 다음 그것들을 자기 스쿠터로 시함해 봤다. 나는 라이언에게 상반신을 홀딱 벗은 장면이 여섯 번도 더 나오는 영화가 프리야 극장에서 상영중이라고 말해 주었지만, 녀석은 멍하니 날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다시 새 칵테일 제조법으로 녀석을 꾀어 보앗지만 이 자식은 하룻밤에 그저 커피 여섯 잔을 연속으로 들이켜기만 했을 뿐이다.  149

얘들은 모두 벽과 벽돌에 단단히 둘러싸여 있어. 그래서 정말 자신이 누구인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고 있지. 난 걔들한테 이렇게 말하고 싶어.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데에만 몰두하지 말고, 그 전에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고 정리하라고 말이야.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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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3 idiots'는 한국에서 개봉하기 전에 보았다.
재미있다는 소개로 우연하게 보게된 영화였고, 영화 자체의 구성은 좀 엉성한 면이 있었지만 매우 재미있고 유익한 영화였다.
그리고 2011년에 한국에서도 개봉을 하였다. 이전에 본 영화는 2시간 50여분짜리 였고, 개봉한 영화는 2시간 20분짜리 였다. 인도영화 특유의 노래와 춤이 몇 군데 빠지고 중간에 짧막하니 편집이 되어 있었다. 개봉한 영화는 좀더 어색하게 엉성하게 진행되긴 했지만 핵심적인 내용들은 들어 있긴 했다.
영화를 본 사람들도 재미있었다는 평과 함께 유익하다. 아이들도 봐야할 영화라 생각된다고 하였다.

영화를 몇 번이나 보았다. 뻐꾸기는 둥지를 틀지 않고 다른 둥지의 알을 떨어뜨린후에 알을 깐다는 바이러스의 표현처럼 경쟁만이 살길이라는 대학의 모습과 일류가 되지 못하면 기억하지 않는다는 무한경쟁시대의 지금.
그렇기에 생각없이 기계처럼 공부해야 하는 현 시대를 잘 대변하고 있었고, 그것이 삶의 일 순위가 아니라는 주인공 란초의 대립으로 영화는 전개 된다.
3명의 바보인 란초와 파르한과 라주는 결국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바이러스의 생각을 변화시켜 주게 된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내용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높게 평가한 이유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 시대에 우리의 일상을 대변하고 있기도 하고, 이 세명의 모습들에서 이 시대에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친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어린시절만 해도 경쟁보다는 우애를 더 생각하는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고 있는 실정이다.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 우리는 그의 옆에 있어 주는가하는 생각을 영화 전체에서 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의 생각해 볼것들이 있었다.

영화를 본 후로 우연하게 책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읽어봐야 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는 잊고 있었다.
그리고 또 우연하게 책을 보게 되었다. 원래의 체탄바갓의 소설이 원작이고, 이 책은 영화 각본을 그대로 옮겨 놓은 책이다.
책을 보면서 영화의 영상이 머릿속에 그대로 재현되었다. 
그래서 이 책의 이름도 영상 소설이다.
책을 읽고 나서 다시금 이 영화를 보았다. 
우리는 잘못된 질서 속에서 왜곡되어 가는 자신의 꿈을 바로 잡는데 이 영화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할 수있다..고
재밌는 하나의 영화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우리는 그만큼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 란초와 비슷한 '조이'라는 인물이 잠시 나오는데 그는 아버지의 병 간호로 두 달 동안 졸업 작품을 준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늦게라도 바이러스에게 기회를 구했으나 바이러스는 두 달동안 밥먹는걸 잊거나 씻는걸 잊은적 없으면서 이것만 할 수 없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결국 그는 자신이 준비하던 헬리곱터를 버려 버렸다. 그리고 얼마후 자살을 택한다.
조이는 궁리해도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자 망연자실하여 발코니에서 부른 노래다.

내가 살아온 인생은 내 것이 아니었네.
단 한 순간만이라도 내 인생을 살고 싶어.
내게 햇살을 보내 주세요.
비를 내려 주세요.
다시 일어설 수 있게 기회를 주세요.
내게 햇살을 보내 주세요.
비를 내려 주세요.
다시 일어설 수 있게 기회를 주세요.  41
 
조이의 장례식에서 란초는 바이러스에게 조용히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은 학교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바이러스는 란초의 이의에 그럼 니가 교수를 하라며 강의실로 데려갔다. 
란초는 두 단어를 적고 30초 동안 정의를 찾으라고 한후 마감하고 말을 한다.

"아무도 못 찾았나요? 시간을 1분 전으로 되돌려 보겠습니다. 제가 질문을 던졌을 때 설레었나요? 호기심이 생겼나요? 새로운 걸 배운다는 사실에 흥분됐나요? 어때요, 교수님? 모두들 미친 듯이 레이스만 펼쳤죠. 이런 방식이 무슨 소용 있나요? 그게 지식을 늘게 해 주나요? 아뇨, 스트레스만 줄 뿐이죠. 여긴 대학이지, 스트레스 공장이 아니에요. 서커스 사자도 채찍의 두려움으로 의자에 앉는 걸 배우지만, 그런 사자는 잘 훈련됐다고 하지 잘 교육됐다고는 안 합니다."  50

그러자 바이러스는 여긴 철학수업이 아니라고 말한다. 쓸데없는 소리말고 단어의 정의를 말하라고 닥달 한다.
단어는 친구인 라주와 파르한을 표현한 것이다. FARHANITRATE   PRERAJULISATION.

"마음에서 우러나서 공부를 하는 거지. 점수 때문에 하는 건 아니잖아. 이런 얘기가 있어. '공부는 부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성취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너의 재능을 따라가 봐. 그럼 성공은 뒤따라올 거야."  70

"차투르가 그건 안 가르쳐 주디? 친구는 남자의 중요한 젓이라고!"  85

"자살 충동이 들면 란초가 이 사진을 보랬어요. 아들의 시신을 보게 될 부모님 표정을 상상해 보라고 했어요.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설득하고 싶은 거지, 협박하는 게 아니에요."  132

알 이즈 웰...
알 이즈 웰
알 이즈 웰

우리는 정말 알 이즈 웰이 필요한 시대를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망각의 동물 답게 망각 다운 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없이..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의 내용은 공부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위해 하라는 표현들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들은 진정한 친구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휴식(休息) 이란 한자어를 보면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 있고, 스스로 마음을 생각해 보라는 뜻 풀이가 가능해 진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자신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란 뜻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것이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조차도 모르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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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생명을 주장한 장회익 교수의 공부에 대한 이야기였다.
장회익 교수를 알게된건 인문학콘서트에서 였다.
당시 온생명, 낱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논리적으로 타당한 표현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말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었다.

이번에 장회익 교수가 2008년에 자신의 공부하는 삶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다시금 공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2011년에 출간된 공부의 즐거움이란 도서역시도 조만간 읽어볼 계획을 한다.


"예나 지금이나 학문한다는 사람치고 학문 같은 학문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나요? 다들 옛사람들 말이나 되뇌고 있지."  28

"삼씨도 삼밭에 떨어지면 인삼이 되지만 더 척박한 산에 떨어지면 산삼이 된다는 거 명심해 두어라."  48
"인삼밭에 들어가 주는 대로 받아 먹고 자란 희멀건 인삼뿌리가 되고 싶으냐, 아니면 빈 산속에 들어가 먹을 거 제 손으로 챙겨 먹은 산삼뿌리가 되고 싶으냐?"  91

사실 무엇이든지 지나치게 하고 나면 비록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지만 무의식중에 피로를 느껴 싫은 감정이 몸에 베어들게 된다. 반대로 즐겁게 하던 일은 그만둔 뒤에도 오랫동안 그 즐거웠던 감정이 그 일과 연과되어 자기도 모르게 몸속 어디에 배어 있게된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당시 책 몇 쪽을 더 읽느냐 덜 읽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읽음에 대한 내 감정을 어느 쪽으로 간직 하느냐 하는 데에 있다. 즐거운 감정을 불어넣게 되면 당장 다음번에 또 읽을 생각이 나게 할 뿐 아니라 두고두고 그 내용이 내 기억 속에 즐겁게 부각될 것이고, 우선 좀 재미있다 하여 무리해서 지치게 만들면 지친 몸이 이걸 기억하였다가 자기도 모르게 싫은 감정을 불어넣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아버지가 비교적 딱딱한 과학책과 수학택을 붙들고 씨름하면서 나름대로 터득해낸 지혜가 아닌가 생각한다.  71

옛 선비인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 1424~1483) 선생이 쓴 [도자설(盜子設)]에, 그가 아들을 훈계하려고 쓴 글 다섯 편 가운데 하나의 개략을 말하면.. '도둑질을 업으로 삼는 아비와 아들이 있었다. 어느날 밤 아비 도둑은 아들을 데리고 어느 부잣집에 들어갔다. 아들을 보물창고로 들어가게 하고는 아들이 보물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을 때쯤 밖에서 문을 닫고 자물쇠를 건 다음 주인이 들을 수 있게 자물통을 흔들어댔다. 주인이 달려와 쫓아가다가 돌아보니 창고 자물쇠는 그대로 잠겨 있었다. 주인은 방으로 되돌아갔지만 아들 도둑은 창고에 갇힌 채 빠져나올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손톰으로 박박 쥐가 문짝을 긁는 소리를 냈다. 주인이 소리를 듣고 "창고 속에 쥐가 들었나보군, 물건을 망치겠다. 쫓아버려야지." 하고는 등불을 들고 나와 자물쇠를 열고 살펴보려는 순간 아들 도둑이 쏜살같이 빠져나와 달아났다. 주인집 식구들이 모두 나와 쫓아오자 그는 연못가에서 큰 돌을 들어 못에 빠뜨렸다. 사람들이 "도둑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하며 그곳을 살피는 동안 그는 얼른 뒤로 숨어 그 집을 빠져나갔다. 
집에 돌아온 아들은 아비에게 "새나 짐승도 제 새끼를 보홓라 줄 아는데 제가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욕을 보이십니까?" 하며 원망했다. 그러자 아비 도둑이 말했다.
"남에게 배운 것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지만 스스로 터득한 것은 그 응용이 무궁한 법이다. 더구나 곤궁하고 어려운 일은 사람의 심지를 굳게 하고 솜씨를 원숙하게 만드는 법이다. 네가 창고에 갇히고 다급하게 쫓기지 않았던들 어떻게 쥐가 긁은 시늉을 내고 못에 돌을 던지는 꾀를 냈겠느냐. 이제 지혜의 샘이 트였으니 다시는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제 천하의 독보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후에 과연 그는 천하제일의 도둑이 되었다.  85-86

120% 이해하라고 했다. 여기서 120%라는 것은 저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20%까지 더 얹어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자기가 주체가 되어 학습해야 한다는것으로, 이후 내 학습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  161

독자적 학습습관  164

학문의 요체는 자유이다. 생각의 실마리가 그 어떤 구애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펼쳐져야 하고, 성취나 보상 따위의 생각은 끼어들 틈이 없어야 한다. 물론 좋은 책을 읽고 새로운 정보를 얻으며 동료 혹은 스승, 제자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자연스런 성취감이나 보상 심리를 피해가겠는가? 이들이 모두 갖추어진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자유로운 사색의 펼침인 만큼 일것이 방해를 받는다면 이미 죽은 학문이나 다름없다.  190

나는 처음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가만히 눈을 감고 내가 정말 물리학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한번 깊이 되살펴봤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대로라면 그저 교재에 나와 있는 것을 내가 몇 시간 먼저 읽고 그 내용을 뇌까릴 참이엇다. '이것은 아니다. 적어도 내 입으로 강의할 때에는 교과서와 무관하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내뱉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곧 물리학 그 자체에 대한 내 나름의 정리작업에 들어갔다. 이것은 물론 교과서에 없는 것을 가르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먼저 그 내용을 알고 마치 내가 교과서의 저자나 되는 양 그 내용을 내가 내 언어로 재구성하여 가르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때까지 내가 주로 받아왔던 '교과서에 읜존한 평면적 교육'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만족스럽지 않은 교육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교육자 자리에 설때 그와 반대되는 교육방식을 택하게 된다.  193-194
여기서 내가 제일 먼저 착수한 작업은 물리학 전체를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통합적 시각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결코 '수준 높은' 책을 읽어서는 되지 않는다. 많은 곁가지를 걷어내어 굵은 줄거리만 명료하게 연결된, 그러면서도 되도록 평이하게 서술된 책을 구해야 한다.  194

자기가 현재 알고 있는 수준에 맞추어 자기가 알고 싶은 것을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서술한 책이 가장 좋은 책이다. 
학문하는 사람은 이런 점에서 '책 냄새'를 잘 맡을 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한 것이 다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은 다시 음미하여 더 깊은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 모르는 것을 보고 알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195

되새김질  196

스님 방에서 받은 '깨달음' 수업...
"혹시, 깨달음을 얻을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 해서 찾아뵈었습니다."
"깨달음을 얻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지요."
"그게 무엇인지요?"
"하나는 즉석에서 깨닫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조금씩 학습해가며 깨닫는 방법이지요. 어느 쪽을 말해드릴까요?"
...
"즉석에서 깨닫는 방법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훌쩍 일어서시더니 선반 위에서 먼지떨이 같이 생긴 막대를 하나 꺼내들고는 예고도 없이 우리들 머리를 한 대씩 세차게 내려치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한 댔기 얻어맞고 얼얼해 하고 있는데 스님이 우리 앞에 몸을 곧추세우고 앉더니 조용히 말하셨다.
"좀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까?" ...  198

이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스님이 말해주려 했던 두 길은 불가에서 말하는 이른바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그 중 한가지인 돈오(頓悟)의 방법을 알려주려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막대로 내려치는 의외의 상황을 조성함으로써 돈오, 즉 순간적으로 깨달음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내공이 별로 없었던 우리가 그날 이를 통해 깨우침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199

사람이 사물을 이해한다는 것은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된다는것을 의미한다. 그 한 요소가 '이해의 틀'이고 다른 한 요소가 이 틀에 담길 '내용'이다. 우리가 오감이나 언어 등으로 그 어떤 정보를 입수하게 되면 이것은 곧 기왕에 형성된 이해의 틀 안에서 검토되어 적절한 위치를 배정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해의 틀 안에서 '내용'이 자리잡게 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때 만일 이해의 틀이 너무 협소하여 이 정보를 합당하게 정리하지 못할 상황이 되면 우리 사고는 다시 이 이해의 틀 자체를 넓히려고 노력하게 된다. 틀을 키우지 않고는 사물을 더는 의미를 지닌 형태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틀 자체를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직 틀 안에 정리된 내용만을 의식할 뿐이다. 
그러므로 두뇌에서는 내용을 합당하게 담아낼 여러 새로운 틀이 시도되지만 이것 또한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다. 오직 우연히 어떤 틀이 구성되어 이 안에서 새로 입수된 정보와 함께 기왕에 있던 내용이 산뜻하게 새로 정리될 때 우리는 이것을 의식하게 되며, 이렇게 정리된 내용이 기왕에 이해했던 내용과 크게 달라질 때 우리는 이것을 '깨달음'이라 부르게 된다.
이것은 대체로 내가 이해한 깨달음의 구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깨달음을 돈오라고 해야 할까 혹은 점오라고 해야 할까? 이것은 아마도 이해의 바탕이 되는 틀이 중간에서 작은 변화를 겪지 않고 한꺼번에 크게 바뀌느냐 아니면 중간에 여러 변화를 겪어 최종단계에 이르느냐에 달렸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리를 잡지 못하고 헤매던 수많은 정보나 의문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해의 틀 속에서 어느 순간 확연히 그 의미를 드러내게 될 때 이를 돈오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중간 중간에 비교적 소폭의 여러 변화를 겪으며 이해의 폭을 점차 넓혀 나가다가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그 모든 것이 분명해질 때 이를 점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해의 틀이 연속적인 변화를 허용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어떠한 것인지 분명히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불가의 깨달음이 어떠한 형태를 지녀야 할지에 대해 감히 뭐라고 말 할 수 없다.
하지만 학문, 특히 과학이라는 과정을 거쳐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는 그 간의 경험을 통해 몇 가지 이야기할 수 있다. 굳이 돈오-점오의 틀을 빌려 말한다면, 그간 많은 사람은 과학에서의 깨달음을 점오에 해당한다고 보아온 듯하다. 새로운 지식은 기왕의 지식 위에 차곡차곡 쌓여 그 폭과 깊이가 넓어지고 깊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토마스 쿤(Thomas Kuhn)이 등장하면서 과학에서 중요한 깨달음은 오히려 돈오에 가깝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혁명적인 새 아이디어는 기존의 틀에서는 전혀 수용할 수 없고,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해의 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쿤의 이러한 이론은 한 개인이 겪게 되는 지적 편력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과학이 역사적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주로 서술한 것이지만, 과학을 수행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개개의 과학자들이므로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실제로 나 자신이 과학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경험을 해왔으며, 따라서 과학을 하는 데서도 돈오에 해당하는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 경우에는 단 한 번의 깨우침으로 앎의 모든 내용이 선명해지는 경험을 얻지는 못했으며, 과학에 관한 한 어느 누구도 이러한 깨우침에 이르렀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 오히려 과학에서의 깨달음은 작은 규모의 깨달음을 여러번 거쳐가면서 점진적으로 전체를 파악하게 되는 성격을 지닌다고 보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과학에서의 깨달음은 결국 '작은 돈오로 구성되는 하나의 큰 점오'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물음을 던지는 일이 필요하다. 물음이라는 것이 꼭 명시적 질문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한구석 그 어딘가 답답함을 느끼거나 찜찜함을 느끼는 형태로 오기도 한다. 이것이 이미 해명을 요구하는 마음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며, 이렇게 요구된 해명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문득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200-202

그런데 참 이상스러운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의문투성이이면서도 실제로는 이러한 물음을 별로 던지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202
실제 깨달음에 이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둘째 치고 우선 여기에 적합한 물음을 가지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203

제도권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는 끝내 이해가 무엇인지 모르고 지나는 경우가 많다. 학습과정에서 우선 '수용부터 해놓을 것'이 강요되자 수용부터 했다가 끝내 재음미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기 때문이다.  207

내가 외국 유학을 위해 학교를 선정한 기준은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달랐다. 나는 대도시 대신 소도시를 택했고, 경쟁이 높은 곳보다는 경쟁이 낮은 곳을 택했으며, 주변의 사회문화적 여건보다 자연환경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나는 처음부터 학교에 이끌려 공부하겠다는 생각보다는 학교가 나에게 좀더 조용히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공부할 수 있게 허용해 주기만을 바랐다.
이러할 경우 당연히 명성이 그리 높지 않은 학교가 될 가능성이 컸지만 나는 그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학교의 명성에 기대어 혹은 학교의 권위에 이끌려 이를 좀더 유리한 진출의 발판으로 삼을 생각은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 학교가 나에게 공부할 기회만 제공해준다면 내 힘으로 역량을 키우고 내 역량을 바탕으로 활동하면 되지 그 이상 바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내 생애에서 오직 한 번, 이른바 명문이라는 학교에 들어가 보았지만 그것이 내게 해준 것은 별로 없지 않은가?  227

제도권 학계의 평가 잣대에 나를 맞추기보다는 내 가치기준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나뿐 아니라 우리 사회를 가장 잘 위하는 일이라는 게 내 생각이고, 이를 위해 내 활동의 방향을 잡아왔다.  271

실제로 경쟁대상이 되는 것은 학문이 아니라 학문 성취에 부수되는 영예와 보상이다. 그 무엇을 '누가' 했느냐를 중시하는 풍토에서 그 '누가'를 빼앗겼다는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칙적으로 학문과는 무관한 일이다. 오히려 학문을 타락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제사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젯밥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현대문명의 위기가 학문의 부족에서 온 것이 아니라 타락한 학문의 만연에서 온다는 사실을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한다.  274

학문이야말로 인류 공유의 자산이지 어느 국가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국가의 생존이 아니라 인류 그리고 생명 전체의 생존이다.  275

다른 한편 이른바 '자기와의 경쟁'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부단히 자기를 넘어서는 싸움을 해야 하며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 또한 경쟁이니 싸움이니 하는 관념에 지나치게 묶여 있는 데서 나오는 언사이다. 왜 자기가 최선을 다하면 될 일을 굳이 경쟁이니 싸움이니 하는 언사를 동원해서 표현해야 하는가? 이는 이를 통해 경쟁심리, 싸움심리를 최대한 동원해서 있는 모든 힘을 짜내게 하자는 취지로 읽힌다. 그러나 이것 또한 학문에 대해서는 현명하지 못한 자세이다. 학문은 필생의 과제이지 결코 단기적으로 무리한 힘을 동원해 이루어 낼 일이 아니다. 학문이 곧 삶이 되어야 하는데, 삶 자체를 항상 싸움으로만 생각하고서야 어떻게 원한만 삶이 이루어지겠는가?
흔히 야생은 무자비한 경쟁의 세계로 묘사되지만 사실 야생에서는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어진 여건과 조화를 이루어나갈 분 경쟁을 위한 경쟁은 하지 않는다. 야생의 세계에는 '길들여진 경쟁'이 없다. 강아지나 야생동물을 길들이는 과정을 생각해보라. 하나같이 미끼를 활용하고 경쟁을 조장한다.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쟁 학습에 길들여진 학자들이 다시 경쟁 연구를 해나가는 것이 제도권 학계의 이지러진 모습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인정받으려고 서로 물고 뜯는다. 아직 정신적으로 미숙한 어린 단계에서 학습을 조장하기 위해 일정 범위 안에서 이러한 방식을 사용할 수는 있다. 인간이 지닌 원초적 경쟁심리와 보상심리를 교육적으로 활용하여 어려운 고비를 쉽게 넘어가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은 성인의 단계. 심지어 사후까지 연장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추한 일이다. 학문은 어디까지나 그 자체가 보상이다. 배우는 즐거움, 아는 즐거움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이며, 이것이 인류 문명에 어떤 기능을 할지가 작업선정의 기준이어야 하는 것이다. 야생에서 경쟁에 덜 길들여지고 인위적인 미끼에 덜 물든 자세가 그래서 소중하다.  275-276

학문은 말하자면 일생을 두고 오르는 등산길이다. 빨리 올라가 멋진 조망을 보고 남이 오르지 못한 새 봉우리에 첫발을 디뎠다는 영예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이것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길게 보면 이것은 곧 자신의 잠재력을 소진시켜 더는 진전을 어렵게 하고, 성급한 나머지 발을 잘못 디뎌 다칠 위험을 가중시킨다. 오직 자기 몸과 학무느이 세계를 하나로 조화시켜 그 안에서 지속적인 즐거움을 찾아나가는 길만이 장기적인 성취를 가능케 하며, 설혹 특별한 성취가 없더라도 그 삶 자체로 값지다.  289

스승의 손가락을 보지 마라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보상은 자기 자신이 깨달음에 다가갈 좋은 여건에 놓인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책을 읽거나 깨달음에 다가갈 좋은 여건에 놓인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으면 그 무엇을 '알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은 착각이다. 그 착각은 스승(또는 책)의 말과 스승(또는 책)에 대한 신뢰에서 온다. 그 말을 알아듣고 그 말을 기억하면 그것으로 안다고 생각하며, 스승(또는 책)에 대한 신뢰를 통해 스스로 검증해 보지 않고도 그 말이 옳을 것이라고 믿어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달을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스스의 손가락만 보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손가락의 방향만 기억하면서 마치 달을 본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자기가 막상 가르치는 자리에 서게 될 때, 즉 자기가 직접 손가락질을 해야 할 때 비로소 정말 허둥지둥 달을 살피게 된다. 그러니까 많은 경우 가르치는 자리에 서보지 않으면 진정한 앎에 이르기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293

물론 사이비 교사도 많다. 이들은 스스의 손가락질만 기억하고 있다가 자기도 같은 손가락질만 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우리 주위에 달은 보지도 않고 손가락질만 하는 교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294

우리가 학문의 내용을 제대로 알고 보면 훨씬 가깝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교사는 이 길을 찾아내어 그곳으로 학생을 안내해야 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그 학문 내용을 입체적으로 훤히 꿰뚫어 알 필요가 있다. 이 앎은 처음 발견자가 우연히 알고 찾아낸 것을 훨씬 능가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295-296

옛사람들이 "백번 들은 것이 한 번 본 것만 못하다"고 했다지만 사실은 "백번 본 것이 한 번 깨달은 것만 못하다"고 해야 한다. 오히려 격언을 뒤집어 "백번 본 것이 한 번 듣는 것만 못하다"는 말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사실 현대문명의 위기는 바로 깨달음의 위기이기도 하다. 현대문명의 위험은 과학이 제공해 주는 깨달음을 외면하고 과학이 제공해주는 힘, 곧 그 기술적 능력만을 받아들여 개체로서 인간 안에 각인된 눈먼 본능만을 끝없이 만족시키려는 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험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작업은 자신들이 얼마나 어리석을 수 있는지를 아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334-335

"공부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냐? 너무 성과에 연연하지 말고 바른 공부를 해나가기 바란다."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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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은 누구나 천원짜리 지폐를 알고있다. 
그 앞면에는 퇴계 이황과 명륜당 그리고 매화, 뒷면에는 도산서원이 그려져 있다.
한국인의 특징 중에 하나는 액수가 큰 지폐가 더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특성에 의해 오천원권의 율곡 이이에 대해 더 생각을 하려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또한 우리는 학교에서 퇴계와 이이의 이론에 대해 배우면서 이이의 이론에 더 비중을 싫는 외우기 공부를 해왔기에 더더욱 퇴계의 삶이나 철학에 대해서는 관심이 덜한 듯 하다.
액수에 따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세종대왕보다 신사임당을 더 중요한 사람으로 기억해야 한다는 논리가 서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그리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듯 하다.
액수야 어떻든 이런 지폐에 오른 인물이라면 마땅히 우리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책이다. 퇴계 이황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대한 책을 가끔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라 이 책이 눈에 잘 띄었나 보다.
퇴계에 관해서 최근에 읽은 책은 '함양과 체찰'이었다. 물론 지금의 블로그를 만들기 전에 읽었던 책 중에 몇 권이 더 있었다.
그의 생각의 깊이와 마음의 씀씀이가 보통의 사람과는 다르다. 
그는 3명의 왕에게 인정을 받았고, 벼슬을 하사 받았지만, 자신의 공부와 덕과 인을 위해 조용히 물러나기를 여러번 이었다.

사람이 권력의 힘을 맛보면 그 맛에 중독되어 절대 버릴 수 없다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늘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나아갈 길을 바라보았다.
그는 늘 자신을 낮추고, 그렇기에 정진해야 함을 스스로에게 강조하였다.

이 책은 퇴계 선생이 말하는 공부에 대한 내용들을 정리하였는데, 재밌게도 소설 형식을 빌려와 전개해 나갔다. 
읽기도 쉽고, 내용의 핵심을 정리해 주고 있어 이해도 쉬웠으며, 철학적인 사유를 해보기에도 어렵지 않게 해 주었다.

퇴계 이황은 유학자 이다. 그렇기에 공자말씀에 근거한 생활을 하는데, 그를 높이 사는 이유는 그것을 자신의 깊은 사유로 재해석하여 적용하고 실생활에서 나타냈기에 그러하다. 
그가 말하는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첫째날, 배움의 싹이 돋아나다.
나이가 많은 것은 공부를 시작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배움은 마치 닿지 못하는 것처럼 하며, 잃어버릴까 안달하듯 해야 하느니'라는 구절이 <논어>에 나옵니다. 스스로 안달복달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공부를
잘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조급해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고, 말로 표현하려 이쓰지 않으면 퉁겨 주지 않는다. 그러니 스스로 공부하고 싶어 조급해하고 안달복달하는 그대 같은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공부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34
미욱하다는 말을 방패삼아 대충대충 할 뿐 열심히 하지도 않는 사람이 정말 문제인 것입니다.  36
공부를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는 일입니다.
무작정 남의 뒤꽁무니만 따라하는 공부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왜 책을 들고 오랜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가, 왜 나는 농사나 고기 잡는 일이 아니라 공부를 하는가의 이유를 마음 깊은 곳에서 분명히 깨닫고 정리한 뒤에야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41
우주와 인생의 이치를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가 되겠지요. 공부는 단순히 남에게 자랑하고 풍족히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삶의 이치를 깨닫고 그 깨달음대로 평생을 살아가는 지난한 과정이라는 사실
선생은 꾸준히 공부하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45
독서가 산놀이와 비슷하다 하지마는 
이제 보니 산놀이가 독서와 꼭 같아라.
공력을 다할 때는 아래로부터이고
얕고 깊음 아는 것도 모두 자기에게 달린 게지.
일어나는 그름 바라보며 오묘한 이치를 알아채고
물줄기의 근원에 이르러시초를 깨닫는다네.
공부는 순서를 밟아 차근차근 하는 게 중요하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해야 하는 것임을 가르쳐주는 게 이시의 골자였다.  56
공부에는 비법은 없습니다. 당연한 것들을 꾸준히 하는 방법만이 있을 뿐입니다.
첫번째로 공부는 질문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학문(學問)이란 문학(問學). 그러니까 궁금한 것을 묻는 것입니다.
궁금하지 않으면 공부는 결코 시작되지 않습니다.
<중용>에 보면 '순은 크게 지혜로운 자다. 순은 묻기를 좋아하고 평소의 일상적인 말들을 곰곰이 살피길 좋아한다.' 순은 성인이지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58
두번째로 말씀드릴 것은 스스로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자 염유가 능력부족 이라 말할때, 공자는 "힘에 부친다는 것은 힘껏 달리다가 쓰러질때나 할 수 있는 말이니라. 그런데 자네는 제대로 달려보지도 않고 미리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 선을 긋고 있구나."
못난 것을 막는 데에 부지런함보다 나은 것은 없는 법입니다.  59
세번째로 스승을 찾아 헤매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부에 생각이 없는 이들이 흔히 스승 탓을 하고 책 탓을 하는데, 공부에 뜻만 있다면 스승은 우리 주위 어디에든 있습니다.  60
대다수의 사람들은 본성을 자연스럽게 발현하며 살지 못합니다. 
마음이 더러운 찌꺼기로 덮여 깨끗한 본성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본래의 길을 따라 막힘없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경지, 그것이 바로 퇴계의 공부가 추구하는 것입니다.  62
공부란 우리가 이 세상을 올바로 살아가기 위해 꼭 익혀야 할 삶의 기술입니다.  64

첫째 날의 가르침
도대체 공부는 왜 하는가
삶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다. - 과거에 급제해 입신양명하거나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와 인생의 이치를 통해 어떻게 살아갸 할지를 깨닫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다.
삶을 위한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다. - 재물을 모으고 도구를 만드는 데도 기술이 필요하듯 삶을 살아가는 데도 기술이 필요하다. 공부란 우리가 이 세상을 올바로 살아가기 위해 꼭 익혀야 할 삶의 기술이다. 그러니 얼마나 어렵겠는가. 사는 동안은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삶의 기술로서의 공부다.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
항상 안달복달하라. - 배움은 마치 닿지 못하는 것처럼 하며, 잃어버릴까 안달하듯 해야 한다. 결국은 졸라대는 놈에게 떡이라도 하나 더 주게 되는 것이다.
모르면 물어라. - 학문(學問)은 문학(問學)이다. 잘 묻는 사람, 모르는 게 많아 질문이 많은 사람이 공부를 잘할 수 있는 것이다. 순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순은 묻기를 좋아하고 평소의 일상적인 말들을 곰곰이 살피길 좋아했다. 순의 예를 따라야 한다.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마라. - 힘에 부친다는 것은 힘껏 달리다가 쓰러질 때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제대로 달려보지도 않고 안된다고 미리 마음속으로 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 '요순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인데 난들 요순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는 당찬 마음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
스승 탓, 책 탓을 하지마라. -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스승 탓, 책 탓을 하는 법이다. 현명한 이를 보면 어깨를 겨루려 힘쓰고, 현명하지 못한 이를 보면 안을 돌아보아 스스로를 살핀다. 그런 마음이라면 하루하루 만나는 모든 사람과 모든 순간이 공부 아닌 것이 없다. 


둘째 날, 공부의 잎이 무성해지다.
어느 정도 공부에 눈뜬 이들, 그러나 벽에 부딪혀 난감한 상황에 처한 이들을 위한 지침을 알려드린다 했었지요?  101
닭이 알을 부화시키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부화될 때까지 쉼 없이 품고 있는 것입니다.  102
아무리 해도 나아지는 게 느껴지지 않아 속이 터질 지경이지요. 포기의 유혹도 따릅니다. 바로 그때가 중요합니다. 힘들더라도 쉬지 않고 공부에 매진해 그 고비를 무사히 넘기면 그 뒤로는 고통스럽기는 커녕 날로 거울이 밝아지는 듯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105
예란 본래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한 것이니라. 사람에게 해가 된다면 그것은 결코 좋은 형식이라 할 수 없지.  115
고비를 넘겼다면 이제 공부를 즐길 차례입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거워하는 것만 못합니다.  123
공부의 최종 단계는 즐기는 단계입니다.  124
<중용>에 '천하국가는 고르게 할 수 있고, 높은 벼슬도 사양할 수 있고, 서슬 퍼런 칼날도 밟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중용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바로 너의 마음이란 뜻이다. 너의 마음을 제대로 갖추면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수기(修己,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음)와 치인(治人,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중 중요한 것은 수기이다. 그렇다고 치인을 나 몰라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128
아침저녁으로 책읽기에 몰두하고, 경전을 제대로 해석해낸다 해서 과연 공부를 잘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네. 공부를 하고도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른다면 그건 공부를 제대로 한 것이 아니네.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주고, 자기가 알고 싶으면 남도 깨우쳐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인의 마음, 사랑의 마음, 공부한 자의 마음일세.
자네는 지금 인의 마음을 자기고 있는가? 자네 주변에서 능히 취할 수 있는가?  142

둘째 날의 가르침
공부하다 벽에 부딪힌 이들을 위한 지침
닭이 알을 품는 것을 기억하라. - 공부는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것과 같다. 힘들다고 잠시라도 쉬거나 서두른답시고 뜨거운 물에 담가버리면 알은 부화하지 않는다. 결국 공부하다 닥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꾸준히 계속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거울은 닦을수록 깨끗해진다. - 거울은 처음 닦을 때가 가장 힘든 법이다. 두 번째, 세 번째 닦을 때에는 처음보다 덜 힘들뿐만 아니라 조금의 노력으로도 거울을 더 밝게 만들 수 있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낑낑거리며 한계를 넘고 나면 그 뒤로는 훨씬 쉬워진다.
공부의 단계를 알아라. - 아는 것은 좋아하는것만 못하고, 좋아하는것은 즐거워하는 것만 못하다. 공부에는 아는 단계와 좋아하는 단계와 즐거워하는 단꼐가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현재 단계뿐만 아니라 앞으로 갈 길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라. - 공부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위인지학(爲人之學)이 그것이다. 전자는 자신을 위한 공부이며, 후자는 세상에서 활용하기 위한 공부이다. 위기지학을 해야 한다는 것은 공부해서 무엇이 되어야겠다, 하고 고민 하는 게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과 성정을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의미다. 위기지학이 되어야 세상에 나가도 중심을 잃거나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는다.

공부한 사람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한는가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은 잘못을 지적받아도 화를 내지 않는다. - 사람은 오직 배우지 않았기에 스스로 부족한 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부족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을 지적 받으면 화를 내는 것이다. 공부한 사람은 스스로 부족한 것을 금방 깨우치므로 잘못을 지적받아도 화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지적을 들으면 그 말을 마음에 새기고 자신을 바로 잡는 거울로 삼는다.
공부를 한 사람은 남을 배려한다. -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주고, 자기가 알고 싶으면 남도 깨우쳐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인의 마음이다. 공부를 한 사람은 바로 그 인의 마음을 갖추게 된다. 공부한 사람이 세상에 필요한 이유다.
정식으로 배우지 못했어도 잘 배운 사람이 될 수 있다. - 지혜로운 이를 지혜롭게 여기고, 부모를 섬김에는 온 힘을 다하며, 임금을 섬김에는 온몸을 바치고, 벗을 사귐에는 말에 미쁨이 있다면 그사람은 비록 베우지 못했더라도 실제로는 잘 배운 사람이다. 결국 공부가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 그 공부는 말짱 헛것이라는 뜻이다.


 셋째 날, 열매로 주위를 이롭게 하라.
다른 이들의 고통을 모른 체하고서는 공부를 제대로 했다고 말 할 수 없다.  178
퇴계의 공부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생명의 의미를 아는 참된 공부였다.  182
<성학십도(聖學十圖)>
제9도인 '경재잠(敬齋箴)'은 주자께서 자신의 방인 경재에 붙여두고 스스로 경계한 글로써, 지두(地頭)공부, 곧 처한 상황에 따라 해야 할 공부를 나열한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공부란 경 공부입니다. 마음이 몸의 주재라면, 경은 마음의 주재입니다. 그러니 경 공부란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다잡는 집중의 공부를 말하는 것이지요.
경 공부는 어떤 방법으로 하는가.
첫 번째로 '주일무적(主一無敵)'이 있습니다. 단 하나를 붙들 뿐, 딴 데로 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대충하는 경우 눈은 글자를 읽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입니다.
한 번에 하나씩, 온전히 다 끝낸 후에야 다른 공부를 하는 것이 바로 주일무적입니다.  185
두 번째로 말한 것은 '정제엄숙(整齊嚴肅)'은 자세를 가다듬고, 마음을 엄숙하게 가지라는 의미였다. 
세 번째로 '상성성법(常惺惺法)'은 말 그대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
'잠시라도 틈이 나면 만 가지 사욕이 일어나, 불길 없어도 뜨거워지고 얼음 없어도 차가워진다'는 구절이 이에 대한 근거가 될 듯싶다.  186
마지막 방법은 마음을 수렴하여 한 물건도 용납하지 않는 것, '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 不容一物)'이었다.  187
이번에는 제10도인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경재잠이 상황에 따른 공부라면 숙흥야매잠은 시분(時分)공부, 곧 일상에서 시간에 따른 공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중용>에 '군자는 홀로 있을 때 삼간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숙흥야매잠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홀로 있을 때 삼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른바 '신독(愼獨)'이란 것이다. 도란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남이 볼 때와 남이 보지 않을 때의 행동이 다를 수는 없는 법이다.  188
무턱대고 행하는 데만 치우칠 게 아니라 나라는 존재에 대한 깨달음, 그 일을 하는 이유에 대한 깨달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  191
공부는 근본적으로 나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어야 한다.
충서(
忠恕)가 무엇인가?  충은 바로 마음의 중심이고, 서는 나의 마음과 같다는 뜻일세. 그러므로 충서는 내가 깨달은 마음의 중심을 그대로 남들에게 행하는 것일세. 그렇게 되어야 진정한 이일분수를 실천하는 것이고.  192 
누구나 집안 식구에게는 바라는 게 많은 법이네. 집 밖에서는 대범한 군자로 지내다가도 집 안에서는 조그만 일에도 화를 참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일세. 이 모두가 공부가 덜된 탓이네. 감정에만 치우쳐 인이 무엇인지는 생각도 못하게 되는 것이지.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정성을 다해 대해야 하는 법일세.  197
선생(퇴계)은 주위 사람들의 작은 일 하나하나를 모두 머리에 담아두는 것은 물론, 어떻게 하면 그 일을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지까지도 쉼 없이 고민했다. 선생이야말로 단순히 공부를 가르치는 스승이 아니라 인생의 스승이었다.  200

셋째 날의 가르침
일상에서 간단없이 이루어지는 공부
매순간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집중하도록 하라. - 마음을 다잡는 공부, 곧 경 공부에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주일무적(主一無敵)'이다. 단 하나를 붙들 뿐, 딴 데로 가지 말라는 뜻이다. 분명 책을 읽었는데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책을 읽으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거나 그 뒤의 내용을 예단하느라 바빠 주일무적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번에 하났기,나가 다 마무리된 후에야 다른 공부를 하는 것이 바로 주일무적이다.
둘째는 
'정제엄숙(整齊嚴肅)'이다. 정제엄숙은 자셀ㄹ 가다듬고 마음을 엄숙하게 가지라는 의미로, 의관을 정제하라의 '정제'와 엄숙하게 하라의 '엄숙'이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는 외부를 가다듬는 형식적인 면 또한 중요하다. 옷 입는 것이나 자세를 바로잡는 것과 같은 사소한 행동들이 결국은 다 마음을 다잡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셋째는 
'상성성법(常惺惺法)'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모든 순간에 깨어 있어야 미묘한 변화까지 눈치 채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
넷째는 마음을 수렴하여 한 물건도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 不容一物)'이다.
공부는 따로 시간을 정해두고 하느 것이 아니다. - 매일 매순간, 모든 상황에서 공부 아닌 것이 없다. 경재잠은 상황별 공부법이며, 숙흥야매잠은 시간별 공부법이다. 
공부는 일상에서 '
충서(忠恕)'의 마음으로 드러난다. - 충은 내 마음의 중심을, 서는 나의 마음과 다른 이의 마음이 같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충서는 내가 깨달은 내 마음의 중심을 그대로 남들에게 행하는 것이다. 물아일체, 이일분수가 바로 충서에서 비롯된다. 


넷째 날, 씨앗이 되어 돌아가다
진정으로 안다고 하는 것은 문장의 의미를 아는 걸 넘어서 내 일상 자체가 배운 대로 행해질 때 가능한 것이야.  219
돌석아, 공부하는 데 있어, 아니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인지 아느냐?  마음을 한결같이 지니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니라.  220 
("돌석아, 거울을 바꿔 닦자고 한 것은 바로 너겠지?"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그런데 왜 그랬느냐?"
 "아가씨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저야 뭐 늘 하는 일이니까요."
 "지금의 그 마음, 영원히 잊지 말거라."  106 )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돌석아 네가 천연대에서 우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세상이 너를 알아주지 않으니 정말 섭섭하고 힘들었겠지. 하지만 너의 존재는 너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란다.  227

넷째 날의 가르침
공부의 핵심은 무엇인가
미련함으로 장애를 돌파하라. - 재능 있는 사람이 아니라 미련한 사람이 제대로 된 결실을 맺는 법이다. 선생은 고루병폐인임에도 공부에 몰두함으로써 오늘날의 선생이 되었다. 재능이 아닌 미련함과 끈기로 공부를 해라.
공부는 일상에서 쉼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 연비어약은 실은 공부를 하되 미리 기대하지도 말고, 잊지도 말며, 억지로 하지도 말라는 것과 같은 뜻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솔개와 물고긱가 공부의 본보기다. 그들은 욕심도 부리지 않고 쉬지 않ㅎ고 날고 뜀으로써 저에게 주어진 역할을 평생에 걸쳐 자연스럽게 해낸다. 공부는 그렇듯 일상에서 잠시도 쉼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 - 배운다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고, 알아주지 않는 것은 남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충실하다면 화를 낼 이유가 없다 화를 낼 동안 서안 앞에 앉아 한 자라도 더 공부를 하는 것이 옳다.

퇴계가 이함형을 집으로 보내면서 집 대문앞에서 열어보라고 한 편지.
[들으니 그대 부부가 화합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그리 불행한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잘 알지는 못하네. 선생으로서 한 마디 하자면 그데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네. 여자의 성품이 좋지 못해 스스로 소박을 자초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편의 잘못일 가능성이 크네. 남편이 항상 자신을 반성하고 잘 보살펴주면 부부의 도리를 잃고 가정이 파괴되는 끔찍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는 법이란 말일세. 여자는 한 번 시집가면 오직 남편만을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네. 그런데 어찌 정과 의리가 맞지 않는다고 길 가는 사람처럼 대할 수 있겠는가. <대학>에서 이르기를 '자기에게 잘못이 엇는 연후에 남의 잘못을 나무란다'고 하였네.
내가 겪은 결혼 생활을 예로 들어보겠네. 부끄럽지만 나는 결혼 생활을 그리 잘 꾸리지 못했다네. 장가를 두 번 갔으나 아내와 마음이 맞지 않은 탓에 한결같이 불행했네. 그래도 그러 애써 잘 지내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것이 십 수 년, 그 사이 더러 마음이 흔들리고 번민과 고뇌로 견디기 어려운 때도 없지는 않았네. 그러나 그렇다고 어찌 인정을 돌릴 수 있겠는가. 어찌 내 마음대로 인간의 도리를 소홀히하여 홀로 계시는 어머니로 하여금 근심하도록 하겠는가.
후한의 질운이라는 사람이 '아내와 부부의 도리를 어겨 자식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자는 실로 진리를 어지럽히는 사특한 자이다'라고 말하였네. 자네는 마땅히 거듭 깊이 생각하여 고치도록 하게. 그럼에도 끝내 고치는 바가 없다면 공부를 해서 무엇하며, 실천하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부디 이 늙은 이의고언에 귀를 기울여주게나.]  240-241

공부를 한다는 것은 존재으 의미를 찾으려 바동거리다가 마침내 그 의미를 깨닫고 무릎을 치며 기뻐하다. 나중에는 스스로 그 존재 자체에서 멀어져 영원으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물아일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닐까.
공부의 귀결점은 인생에 질문을 던지고, 인생의 의미를 배웠다가, 나중에는 다 놓는 것을 배우는 데 있느 것은 아닐까.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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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참, 희안하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는데, 어째서 학교는 여전히 전쟁터인가.  6
진정 놀라운 건 그 누구도, 어떤 청소년도 이런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 그게 더 끔찍한 일이다.  6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질문이 없으면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7
공부란 세상을 향해 이런 질문의 그물망을 던지는 것이다.  7
일단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책을 애인보다 더 가까이 끼고 살아야 돼... 책 중에서도, 인류 최고의 고수들이 쓴 고전들을 읽어야 해.  9

대중 지성을 움직이는 힘은 오직 앎에 대한 열정이다. 생명과 존재, 삶과 세계에 대한 끊임업슨 물음들, 그것만이 그들을 지배한다.  26

1부 학교, 공부에 대한 거짓말을 퍼뜨리다.
중요한 건 공교육이냐 사교육이냐가 아니라, 어떤 식의 공부가 실현되느냐는 것.  33
근대적 학교제도의 산물 - 동일한 연령대의 학생들을 같은 장소에 몰아넣고 같은 내용을 주입하는 것.(세대간 균질을 만드는건 학교의 일률적인 쪼개기때문..)  35
공부란 눈앞의 실리를 따라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벡터를 지닌다. 오히려 그런 것들과 과감히 결별하고,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삶을 구성하는것, 삶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는것, 그것이 바로 공부다. - 즉, 공부는 무엇보다 자유에의 도정이어야 한다.  40
세대간 장벽을 허물어 뜨리는 운동이 공부가 되어야 한다.  47
한 사회가 공동체적 리듬을 가지려면, 노인은 청녀노가 함께 섞여야 하고 어린이와 청소년은 노인과 함께 있어야 한다. 
공부란 궁극적으로 자기를 넘어서는 것일진대, 거기에는 우와 열이 있을 수 없다.  49
제갈량, 허생, 정약용, 박지원... 그들은 다만 독서를 했을 뿐이었다.  51-52
논술을 잘 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55
다양한 활동이 신체와 '통'하려면 무엇보다 근기(根器)가 튼실해야 한다. 근기란 쉽게 말하면 그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에너지의 분포도'같은 것이다. 그릇이라고도 하고, 카리스마라고도 한다.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건 성적이나 학벌이 아니라, 바로 이 근기다.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충전할 수 있는 길은 단언컨대 독서밖에 없다!!  57
요즘 대학생들의 지식이란 책을 통해 탐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터넷에 떠다니는 검색 다발일 뿐이다.  58
이반 일리히에 따르면, 학교가 유포한 환상 중에 가장 나쁜 것이 사람들을 제도적 서비스에 길들이는 것이라 한다.
좋은 집에 산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삐까번쩍한 외양이 아니라, 환경과 주체 사이의 능동적 교감이다.  63
진정한 창의성은 폼나는 공간에 들어앉아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그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학습 주체와 공간이 어우러져 전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아주 강도 높은 학습의 장을 연출하는 것.  65
콩도르세는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바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66
자율성과 창의성은 나란히 간다. 자율적이지 못하면서 창의적 사고를 한다는 건 불가능한 까닭이다.  67
토론이건 체험학습이건 그것이 강도 높은 학습의 과정이 되려면 고도의 훈련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토론을 통해 자기 생각을 바꾸겠다는 치열한 의지도 뒤따라야 한다. 
오직 의심해야만 자주 분석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의심을 깨뜨리면 이것이 바로 깨달음인 것이다.  69
우월감과 열등감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진정한 평등이다.  70


2부 고전에서 배우는 '미-래'의 공부법
학벌, 위계, 돈과 명예 따위는 말끔히 잊어버려라! 필요한 건 다만 두려움 없는 용기와 지칠 줄 모르는 끈기뿐. '노하우'는 책과 우정!  75
고전이란 시대의 통념과 억압을 뚫고 삶과 사유의 눈부신 비전을 탐색한 전위적 텍스트를 말한다. 고전이 시대마다 서로 다른 의미망을 구성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전위적 열정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전이야말로 진정, '미-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77
코뮌이란 기성의 권력과 습속으로 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구성하고자 하는 이들의 자유롭고 창발적인 집합체 혹은 네트워크를 말한다.  81
학교는 태생부터 제도로 출현했을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더더욱 그런 속성이 강화되었고, 그래서 지금은 누구도 학교가 배움터 혹은 앎의 코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82
무엇보다 고전의 지혜를 적극 응용해야 한다. 즉, 자기가 선 자리를 제도적 울타리가 아니라, 스승을 만나고 벗을 부르는 매움터로 전환해야 한다.
고전의 시대에 좋은 부모란 자식에게 훌륭한 스승을 찾아주는 존재였다.  83
앎의 코뮌에 접속하고, 암송과 구술을 익히고, 그걸 통해서 리더십을 터득하는, 이 모든 과정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독서다.
다산 정약용이 말했듯이, 독서는 "세상을 경륜하는 것은 물론 귀신과 통하고 우주를 지탱하는" 위대한 공부다.  105
사교육 시장에 내몰리고 싶지 않은 꼬마들, 성적의 위계와 입시의 중압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청소년들, 기성세대의 고루한 관습에 저항하고 싶은 청년들, 시각의 지배에 예속되기를 원치 않는 직장인들, 매너리즘에 찌든 일상의 회로를 벗어나고 싶은 아줌마들, 삶의 비전과 지혜를 통찰하고 싶은 노인들 - 이 모든 '대중지성'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독서뿐이다. '책 속에 길이 있다!'  106
얼굴도 멋있어지고, 몸도 건강해지면서 동시에 삶의 비전이 확 열리는 길은 무엇일까? 바로 독서이다. 
유비는 그냥 한눈에 제갈량의 그릇을 알아봤다. 그의 얼굴과 몸에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흘러넘쳤기 때문이다. 
허생은 다짜고짜 장안 최고의 갑부 변부자를 찾아가 만 냥을 빌려달라고 하자, 변부자는 이름도 묻지 않고 즉석에서 만 냥을 내준다. 허생의 내공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그들은 책을 통해 전혀 다른 종류의 신체가 된 것이다.  108
선비가 하루만 글을 읽지 아니하면 얼굴이 단아하지 못하고, 말씨가 단아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몸을 가누지 못하고 두려워하면서 마음을 붙일 곳이 없게 된다. 장기 두고 바둑 두고 술 마시고 하는 것이 애초에 어찌 즐거워서 했겠는가? - <연암집>  111
어떤 책을 읽어야 하지?  116
일단 나보다 훨씬 폭넓게, 강렬하게 살았던 분들이 쓴 책이어야 할테지? 또 저자는 알 수 없지만, 생명의 역동성이 살아 숨쉬는 책, 생가를 가로지르는 원대한 비전이 담긴 책이어야겠지?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는 책, 한 시대의 통념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한 책, 마주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책 등등. 그런 책들을 우리는 '고전'이라 부른다.  117
독서의 세계에 제대로 발을 들여놓고 싶다면, 먼저 고전을 문학, 그것도 서양 문학 중심으로 사유하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119
<서유기> <수호지> <홍루몽> <옥루몽> 등과 같은 장편을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프루스트나 보르헤스 등 사상적 깊이를 갖춘 서양 소설과 함께 읽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노자오 ㅏ장자, 사서삼경 등 동서양의 사상사를 넘나들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  119
쉽고 재미있는 책, 읽어서 몽땅 이해되는 책은 당장 덮어야 한다. 생각해보라. 그건 저자의 수준이 나랑 똑같다는 뜻인데, 그런 책으로부터 대체 뭘 배울 수 있단 말인가?
10대들이 열광하는 일본의 하이틴 소설, 직장 여성을 겨냥한 삼류 연애담이나 감상적 에세이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탐정소설류, 재테크나 성공의 신화를 적당히 가공한 책들. 이런 건 독서의 범위에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 그건 그야말로 취미 활동에 불과하다. 특히 여기에 몰입해서 다른 장르를 멀리하게 되면 그건 게임 중독이나 다를 바가 없다. 스스로 그런 조짐이 느껴질 경우 당장 멈추어야 한다. 패스트 푸드에 길들여지면 다른 음식을 먹을 능력이 없어지는 것처럼 그런 야들야들한 책에 맛들이다 보면 신체는 한없이 나약해진다.  120-121
'너 자신의 눈으로 자료를 보라.'
'너 자신의 고유한 문제를 설정하라.'  131
배움에 있어 가장 불리한 조건은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 혹은 이미 획득한 지식에 갇혀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직성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양이 많건 적건 '비움'은 배움의 필수적 조건이다. 끊임없이 비울 수 있어야 더 큰 앎이 흘러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135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자신의 문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 거울보다 더 투명하게 자신을 비춰줄 것이다.  139
집단 속에서 신뢰를 확보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약속과 시간을 지킨다. 눈과 귀를 몽땅 열어둔다. 즐겁게 공부한다. 배운 만큼 실천한다.  140


3부 인생의 모든 순간을 학습하라.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문자와 몸과 세계가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 "앎은 행위에서 시작되고, 행위는 앎의 완성"(왕양명)이 되는 '지행합일'의 경지, 이것이 바로 고전의 학인들이 지향했던 공부의 진경이다.  145
먹고 살고 번식하고 하는 일이야, 뭐 박테리아도 하지 않는가. 적어도 공부라고 하면 존재 자체가 특별한 단계에 도달하는 과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145
책을 통해 존재와 세계의 심연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리고 존재와 세계의 모든 것을 책으로 변환 - 책을 읽으면 삶이 보이고, 일상을 잘 관찰하노라면 책의 지혜가 확연해진다.  146
자기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만 있다면, 삼라만상이 다 신비로운 기호로 가득 찬 문장이라는 것을 절로 터득하게 된다.  147
니체는 말했다. "인간은 행복조차도 배워야 하는 존재"라고.  154
요즘 신데대 커플이 100일을 넘기기 어려운 것도 내적 충만감보다는 인정욕망에 휘둘리는 이런 식의 문법을 따르기 때문이다.  156
가장 문제적인 건 서로에 대한 집차고가 소유욕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경향이다.  160
'사이에서 존재하기'랑 고기가 물속을 헤엄치듯 배움과 가르침의 흐름 속을 유영하는 것이 아닐까.  193
공부란 특정한 시공간에 고착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존재로 변이되는 것을 의미한다.  195
무엇을 공부하건 공부는 그 자체로 혁명이다.  196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라고 했듯이, 시간을 견뎌내고, 일상의 변화를 끌어내지 못한다면, 그건 단언컨대 혁명이 아니다! 
혁명이란 억압과 소외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러한 혁명의 시작은 공부로부터 시작한다. 인생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는 공부. 이 공부를 통해 삶의 통찰하는 힘이 생길대 비로소 존재의 근원적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  199
억압과 소외의 사슬을 끊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자기가 발 딛고 있는 곳을 배움터의 배치로 바꾸고, 지식의 향연을 구가하는 학습망을 조직할 것.  201
섹스가 아무리 짜릿하다 해도 그 쾌락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하지만, 공부는 그렇지 않다. 날마다 해도, 평생 해도 행복하고, 또 행복하다. 
누구나 평생 공부해야 한다. 실용적 목적이 없이도 공부할 수 있을 때, 그때 공부는 비로소 최고의 지식이자 사회를 변혁하는 무기이면서 동시에 운명을 통찰하는 지혜의 수행이 된다. 
고로, 공부에 외부는 없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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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배동 김선생의) 공부가 희망이다.

김종선 이다미디어 2007

나를 꿈꾸게 했던 아이들

- 책을 많이 읽히고 다양하게 생각하고 경험하도록 가르쳤고, 더불어 세상의 고마운 책들이 우리 아이들을 눈부시게 성장시켜주었다. 나는 돈이 없는 집에서 영재성을 그리 타고나지 않은 아이라도 엄마의 사랑과 노력으로 어떤 성취감을 맛볼 수 있으며, 자기만의 아름다운 꿈을 키울 수 있다는 이야기를 꼭 전하고 싶다.


1장 나는 언제나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는 엄마인가?

- 사는 게 아무리 어려워도 나는 아이들에게 현재의 삶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현재의 소중함보다 더 소중한 가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매달리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아이들은 공을 들인 만큼 잘 자란다. 나렌드라 자드하브(52세)는 집념이 강한 아버지의 헌신이 있었다. 최하층 계급인 불가촉천민(달리트)출신이었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공부만이 신분의 벽을 깰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서 넓은 세상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신분을 뛰어넘으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열정을 쏟아서 공부에만 몰두했다. 나렌드라는 최상급 계급의 브라만이 쓰는 언어인 산스크리트 시험에서 1등을 차지했고, 만 25세에 미국 인디애나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땄다. 자신의 실력 하나로 깨부순 셈이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책을 읽을 전등불조차 사치인 하층민 아이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가장 낮은 신분이 바로 가장 강한 동기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

엄마라면 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자신은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를...

부엌의 식탁이건, 거실의 커다란 식탁이건, 공부방의 책상이건 중요한 사실은 공부하는 집안 분위기와 공부를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아이들의 자세이다. 이것만 잘 유지된다면 어디에서라도 아이들은 공부를 열심히 잘할 수 있다.

자식에게 물려줄 게 없는 부모이지만 떳떳치 못할 건 없다. 물려줄 재산이 없기 때문에 물고기 잡는 법이나 더욱 열심히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다.

* 엄마들이 꼭 명심해야 할 '스스로 공부법'

공부를 가르칠 때는 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전을 이용해서 스스로 찾는 방법을 빨리 가르쳐야 한다. 공부도 되새김해야 완전히 소화가 되고 머리에 입력이 되면서 실력으로 나타나게 된다.


2장 어릴 때 공부 습관이 평생을 결정한다.

- 아이들에게 의도적으로 책을 좋아하게 하기 위해서 억지로 집중을 시키면 오히려 흥미를 잃어버린다. 아이가 그림을 보고 스스로 상상하며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었다. 아이가 처음에 책을 만나게 되는 계기는 아주 중요하다. 곧, 아무리 좋은 뜻으로 아이에게 책을 권해도 아이가 책을 좋아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나는 아이가 책을 장난감처럼 부담 없이 가지고 놀게 했다. 아이가 사용한 공책이나 문제집을 모두 보관해두면 날짜가 기록되어 있어 아이들에게는 나중에 좋은 추억거리로 남게 된다.

집중력은 싫어하는 일이라도 어떤 일정한 과제를 일정한 시간 동안 몰두해서 제대로 해낼수 있는 능력이다. 집중력을 키우려면 남의 말을 집중해서 듣는 태도를 길러주어야 한다. 나는 언제나 아이들과 이야기를 할 때 아이들을 똑바로 보고 눈을 맞추며 말을 했다. 아이가 내 말을 집중해서 듣게 하는 데는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물론 나도 언제나 아이들의 말을 귀담아서 열심히 들어주었고, 또 재미있다가거나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집중력은 무엇인가를 끝까지 잘 해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힘이다.

아이가 질문을 하면 언제, 어디에서,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늘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반응해야 한다. 엄마는 언제나 아이에게 우선권을 줄 수 있어야 하고, 아이의 질문에 속시원한 답을 주거나 함께 고민할 줄 알아야 한다. 아이의 질문에는 바로 반응을 하는 게 효과적인 교육법이다.

절대로 내가 주도적으로 해결해주지 않았다. 아이가 모르는 문제가 있을 때도 정답을 바로 말해주지 않아야 한다. 아이가 문제를 푸는 데 이해를 돕는 설명만 해주고, 아이가 생각해서 문제를 풀 수 있게 해야 한다. 서로 의논하는 게 좋다. 의논을 할 때도 80% 이상을 아이가 주도적으로 의견을 말하며 정할 수 있게 하고, 엄마는 듣는 쪽을 더 많이 택해야 한다. 만일 엄마가 '너는 내 손바닥 안에 다 있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면 아이들은 엄마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어 자율적으로 계획을 실행하기가 힘들어진다.

한숨 돌리려는 핑계를 앞세우고 방에서 나오는 아이를 힐난해보라. 아이는 엄마에 대한 반발심으로 욓려 공부하기를 더 싫어할 수도 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어렵고 힘들어도 참을 줄 알아야 한다고 아이를 격려해주는 게 효과도 휠씬 더 크다. 목표가 없는 인내는 무의미하다. 아이 스스로 목표를 설정할 수 있어야 효과적이다.

감정을 조절하는 문제는 아주 어릴 때부터 훈련으로 가꾸고 다져야 강해진다. "어려움을 참고 견딘 사람은 성공하고, 어려움을 참지 못한 사람은 실패하는 거야." "실수해도 괜찮아. 다음에 같은 일로 실수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고, 실수가 없는 성공은 없는 법이다." 교육은 엄마와 아이의 상호작용이다. 때문에 아이에게서만 문제를 찾을 게 아니라, 엄마라면 자신에게도 무슨 문제가 있는지 항상 성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아이를 키울 때 늘 신경쓸 부분은 공부할 때는 공부에만, 놀떄는 노는 것에만, 먹을 때는 먹는 데만 집중하게 하는 것이다.

무엇 하나를 하더라도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버릇은 어릴 때 길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은 부모, 특히 엄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말하는 공부 습관이란, 무엇에도 최선을 다하는 자세이다. 이것은 아이들이 어릴 때 충분히 길러줄 수가 있다.

"연습이 가장 중요합니다. 반복되는 연습은 모두들 하기 싫어하는 일이지만, 연습은 죽을 때까지 매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절대로 위대한 연주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가 장래의 요요마를 꿈꾸는 첼리스트들에게 조언을 해달라는 질문에 대해 딱 잘라서 한 말이다. 단순히 새로운 것을 알았다고 해서 자기 것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익혀야 비로소 자기 것이 되었노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하는 공부나 행동이 엄마의 마음에 다 들 수는 없다. 또 아이의 공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엄마가 대신 공부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엄마는 아이가 부족하더라도 끝까지 지켜보아야 하고, 또 끊임없이 격려해주어야 한다. 아이가 정말 재미있어하고 원하는 일이라면 누구보다 엄마가 더 잘 알수 있을 것이다. 엄마는 아이에 대해 정확하고 냉정한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행복한 초등학생 시절을 갖지 못한 아이는 불행하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늘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에 대해 아이들에게 충분히 이야기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가르쳤다. 어려서부터 시간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는 자신을 관리할 가장 첫 번째 관문에서 탈락하고 말 것이다. 시간 관리와 자기 관리를 잘 할 수 있어야만 아이는 무엇을 하더라도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의 딸이 미국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에 다니는데, 그 아이가 가장 혀를 내두르며 진저리치는 것이 미국 아이들의 체력이라고 했다. 어찌나 체력들이 좋은지 이틀씩 밤샘 공부를 한 후에도 샤워만 하면 거뜬하다는 것이다. 공부는 체력싸움이다.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하나라도 더 알려고 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정말로 중요하다.

공부에서만은 아이들을 비교하지 않는다. 공부가 아니라도 인생은 즐거울 수 있고 할 일도 무궁부진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남과 비교당하면 어른보다 훨씬 큰 상처를 입게 되어 자신의 능력을 펴보지도 않은 채 쉽게 포기할 수 있기 때문에 어른들이 주의해야 한다.


3장 당당한 엄마가 아이를 바르게 키운다.

무엇보다도 부모의 태도가 일관되어야 한다.

- 자신감은 자존심과도 상관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지켜낼 수 있는 인내심이 있으면 자신에 대한 믿음도 더 커질 것이다. 끝까지 해보아도 안 되는 일이 세상에는 많다. 하지만 그 결과가 나오기 전에 미리 겁을 먹고 안 될지도 모른다는 쪽에 더 무게를 두면 실패하게 마련이다. 엄마의 눈높이를 아이에게 맞추고, 엄마와 함께 성장한다는 느낌을 갖는게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아이들의 놀이 속으로 함께 들어가 한 덩어리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들과 동요 테이프를 같이 듣고 노래를 할 때도 나는 아이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부르며 재미있게 놀아주었다. 아이들은 크면서 다양한 친구를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쌓아가면서 성장해야 한다. 그래야 균형 잡힌 가치관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아이가 이미 'NO'라고 하면 강요할 필요가 없다. 엄마 마음은 좋은 것을 보여주고 싶지만, 그것이 아이를 행복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건 아이가 스스로 재미있어하고 알고 싶어할 때가 아이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오래 앉아 있는 시간은 아이가 주도적으로 목표한 과제를 최대한 짧은 시간에 성공적으로 완수하기까지 앉아 잇는 시간을 말한다. 엄마가 조급함을 버리고 아이의 능력에 맞게 대처해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사실 외로움을 이겨내지 못하면 사람은 무엇을 해도 성공하기가 힘든 법이다. 어느 잡지에서 보니 조순 전 부총리도 학문을 해서 교수가 되고 싶다고 의논해 온 아들에게 "외로움을 이길 자신이 없으면 공부할 생각을 말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그런다. 공부나 가난은 모두 외로움과의 싸움이며 더 강해지기 위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눈부신 성장을 원하면 원할수록 엄마는 오래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엄마가 자식에게 완벽하지 않듯이 모든 자식이 엄마에게 완벽한 존재도 아닐 것이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을수록, 또 아이를 사랑하면 할수록 엄마가 참고 기다려야 할 일은 많다. 아이가 무엇을 할 때 엄마가 감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면, 엄마가 볼 때는 열심히 하고, 보지 않으면 열심히 하지 않는 버릇이 들기가 쉽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그 무엇이라도 아이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교과서 중심으로 공부한다는 게 너무 평범한 방법이어서 그런지 엄마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한다. 그러나 진리는 평범한 곳에 있다.

엄마인 내가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면 아이도 자신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사소한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잘못된 행동을 나무라기보다는 무엇이 왜 잘못된 것인지를 깨우쳐주어야 한다. 언제나 자신을 속이지 않기, 올바르게 생활하기. 자신의 자존심을 소중하게 지키는 방법에 대해 늘 아이와 함께 대화를 해야 한다. 나는 6남매를 키우면서 아이들에게 늘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말을 했다. 아이들에게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라고 했다. 또 소중한만큼 한 번 주어진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는 하기 싫은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집중력이 떨어지고, 무엇보다 스스로 공부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한다. 이 학원 저 학원 다니면서 남이 해주는 공부에 익수해질 뿐 자기 혼자 공부하는 습관을 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아이에게는 놀고 싶은 것을 참고 공부만하라는 것만큼 불합리한 억지도 없다.


4장 책 읽는 엄마가 책 읽는 아이를 만든다.

- 아이들은 견문이 넓어지면서 호기심도 더 많아졌다. 또 그 속에서 지식으로 가지치기를 하며 다른 세계를 몹시 알고 싶어했다. 국어 공부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독서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책을 많이 읽는 아이는 하루 아침에 뚝딱 만들어지지 않는다.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고도의 전략이 필요할 뿐 아니라 읽는 단계도 잘 밟아야 한다.


글을 마치며...- 엄마의 사랑으로 아이들은 자란다.

엄마는 내 아이를 가장 정확하게 알지만 한편으로 내 아이에게 가장 눈이 먼 사람이 되기 쉽다. 내 아이의 모든 것을 제일 빨리 감지하고 결정하는 사람도 엄마이다. 반면 아이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고 크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도 역시 엄마이다. 그것이 나는 엄마의 무서운 힘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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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좋은 아이로 키우는 집

시지마 야스시, 와타나베 아키코 삼성출판사 2007


1장 머리 좋은 아이들은 어떤 집에서 살까?

1. 탁구대의 재발견

- 가족 간의 유대감을 형성시키는 거실에 있는 탁구대..

- 가족들은 탁구대에서 거의 모든 일과를 보낼 수 있어서 가족이 함께 공유하고 화합하는 공간

2. 꼬마 방랑자의 노매드식 학습법

- 그날 그날에 따라 공부하는 곳을 방이며 거실이며 부엌이며 현관이 보이는 곳이며, 심지어는 화장실에서도 공부하는 방법

- 습관이 되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어도 간이 칸막이만 치고 공부를 한다.

- 가족이 함께 있다는 안락함을 느낀다.

3. 가족애가 돈독해지는 아이의 방

- 아이들의 방의 공간이 커서 엄마와 아빠까지도 공부하는 방에서 같이 있게 됨.

- 결국은 방이 거실의 역할을 하게되어 버림.

4. 부엌의 변신은 무죄

- 엄마가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아이들과 아빠는 식탁에서 공부를 한다.

- 결국 부엌에 컴퓨터와 지구본 책꽂이까지 와 있게됨.

- 온 가족이 함께

5. 3층까지 수직으로 오픈된 집

- 좁은 3층 단독주택이라 밀폐될 수 있는 것을 층간 오픈 공간을 만들어줌.

- 아이들이 가족과 원활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 줌

6. 3X의 법칙

- explore(탐구), express(표현), exchange(공유)

- 가족 책꽂이를 사용하여 아이의 견문을 넓혀준다..

7. 이동 책상의 힘

- 적당히 넓은 널빤지와 수납박스로 이동가능한 책상을 만들어.. 어느곳에서나 공부를 한다.

- 방에서 거실에서 현관이 보이는 곳에서 옥상에서도 가능하다.

- 어머니의 시선이 닿는 곳이 공부하는 곳.

8. 가족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집

-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와의 추억을 그대로 두어 그를 통해 안정감을 느끼게 됨.

9. 방이 없는 집

- 원룸 형태의 집에서 함께 생활함.

- 간단한 칸막이로만 구분지어 놓음

- 형과 동생의 책상을 마주보게하고 사이에 책꽂이를 두는데 책꽂이에 레일을 달아 좌우로 움직일 수 있게하여 서로의 책상에서 마주보이게도 아니게도 할 수 있다.

또한 원룸형이라 가족간의 동선들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10. 외딴 방이지만 괜찮아

- 고립형 아파트 구조이지만. 공부는 따로하고 잠은 자매가 같이 자게 한다.

- 옷을 갈아입는 경우가 아니면 방문을 닫거나 잠구지 않는다.

- 책상옆에 부모님 전용의자를 두어 당연히 들락날락할 수 있게 한다.

- 아이의 물건을 집 안 여기저기 분산해 두어 서로간에 얼굴을 더욱 자주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는다.

11. 주말에 만나는 대자연의 집

- 시골에 집을 지어서 1층에서는 주방으로 2층은 방으로 만들어 주말이면 온 가족이 자연으로 돌아간다.

- 절대 공부는 하지 않는다. 꼭필요한 과제정도만 하는데, 1층에서 한다.

- 가족이 함께 청소하고 수리하고 음식도 한다.

wn1 - 이 책에 나오는 예들은 특목고나 특목중에 가는 일본 학생들의 집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특히 1장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생각을 한 단어는 '소통'이다.

집 내부구조가 어떠하든 소통을 위한 여건을 만들어 내어 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게 하였다..



2장 핵심은 커뮤니케이션이다

- 단순히 교과서를 외워 푸는 문제보다 아이들의 생각을 묻고, 답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기술하는 문제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런 문제를 잘 풀기 위해서는 사고력은 물론이고,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능숙하게 전달하고 설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요소가 바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시모어 페퍼느 교수에 의새 처음 주장된 3X

eXplore(탐구하다) , eXpress(표현하다) , eXchange(공유하다)

당시 미국에서는 교육의 3대 요소로 3R Reading(독해),wRiting(작문), arithmetic(산술)을 꼽았다.

시모어 페퍼트 교수는 미국 교육의 기본 요소를 3R에서 3X로 변화시켰다.

3X는 곧 켜뮤니케이션이다.

- 한 학급에서 포스터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는 집 안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두게 했다고 한다. 그 포스터에는 '공부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이라는 제목 아래 10가지 항목이 적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이 네 가지 조항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었다.

2. '지금'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4. '지금'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만한 일은 없는지 생각해보라.

6. '지금'하면 언젠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은 없는지 생각해보라.

10. 자신이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3장 우리 집도 머리 좋은 아이의 집이 될 수 있다

1. 아이 방을 고립시키지 마라.

아이 방의 문을 열어두거나, 방문 재질을 투명하게 바꾼다.

2. 집 안 전체를 공부방으로 만들어라

가족들 모두의 곤강인 거실, 부엌도 아이가 공부할 수 있는 환경으로 꾸며준다.

3. 6개월에 한 번씩 이사하라

방을 맞바꾸거나 방 안의 배치를 바꿔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4.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의 공간을 연출하라

책꽂이에 가족들 모두의 책을 꽂아 가족의 기억을 공유하는 공간을 만든다

5. 어머니의 공간을 멋지게 꾸며라.

어머니가 행복하면 아이도 행복하다. 부엌 등 어머니의 공간을 꾸미는 데 투자한다.

6. 아버지의 존재를 느끼게 하라.

아버지와 아이가 각자 다른 일을 하더라도 같은 공간에서 하도록 한다.

7. 종종 손님을 초대하라.

아이에게 가족 이외의 사람과 어울릴 기회를 준다.

8. 오감을 자극하는 공간을 만들라.

거울 하나에도 신경을 써서 아이의 감각을 발달시킨다.

9. 글로 의사소통하라.

보드, 칠판 등 아이와 글로 의사소통할 장치를 만든다.

10. 갤러리 공간을 만들어라.

가족의 작품을 집에 전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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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학습입니다.
그렇다면 학습에 대해 생각해 보면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학습은 한자로 쓰면 '學習' - 배울 학 , 익힐 습
뜻은 '배우고 익힌다' 입니다.
중학교 2,3학년이면 이정도의 한자는 알고 있으며, 현재는 초등학생들도 한자공부를 많이 하는 편이라 알고 있는 학생들이 많을 것입니다.

여기서 부터 이야기를 진행시켜 보겠습니다.
학습을 나누어 생각해 보지요.

우선은 학(學)  입니다.
배울 학 - 공부에는 먼저 배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배우게 됩니다.
물론 지금은 누구나 학원에서 먼저 배우게 되지요. 지금은 학습의 의미를 탐구하는 시간이니 방법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사교육의 불필요성에 대해서도..)
배움은 학교나 학원이나 교수법의 차이는 있으나, 내용은 동일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배움이 공부에 차지하는 비중은 20% 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습(習) 입니다.
익힐 습 - '익히다' 는 사전에서 '지속적인 과정'이라고 표현합니다
              다시 표현하면 익히는 것은 스스로 해야하는 과정입니다.(이 방법 역시 추후에 다루겠습니다.)
익히는 것은 공부에서 80%를 차지할 만큼 중요합니다.

두 한자를 퍼센트로 나누었다고 해서 중요도가 덜 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실제적인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을 하면서 빨리 적다보니 글씨가 엉망이네요...)
많은 학생들에게 정확한 의미를 주지시킵니다...
그리고 그러한 학생들중에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면 좋은 성과를 내게 됩니다.
실제의 경험들에 의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학과 습을 온전히 구분 할 수 있어야 하고 '학'을 '습'이라 오판하지 않아야 합니다.
과목별로 모두 적용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학을 본다면
학교에서 수업을 또는 학원에서 강의를 듣는것은 '학'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스스로 공부하는 사람일수록 집중을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집중을 잘 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집중이란 것은, 선생님을 쳐다 보고만 있다는 의미가 아니고 또한 수업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다른 생각들을 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온전히 들어야 합니다..물론 힘듭니다...습관적으로 딴 생각이 나기도 합니다..
한국의 고등학생들 평균 집중 지속시간이 16분 정도밖에 되지 않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난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중을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집중지속시간은 늘어납니다...

집중을 하기위한 방법중에 한 가지는 수업시간에 무조건 펜을 들고 있어야 하며, 펜으로 선생님이 해주신 필기 뿐 아니라 필기 내용을 설명하는 내용또한 받아 적는 것입니다..
물론 100% 다 적을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받아적으려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집중을 하게 됩니다..
자신을 돌아보았을때 잡 생각이 많이 드는 사람이라면 가능하면 모두 받아적겠다는 마음으로 수업에 임하십시오...그렇게 하면 집중력이 커지며 지속시간도 꽤 길어질것입니다..

여기까지가 '학'입니다.. 길어보이지만 핵심은 말씀까지도 받아적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습'을 알아 보겠습니다..
위의 연속된 3개의 사진 중에 두번째 사진을 보면 적혀있습니다..
1. 쉬는시간 복습(5분정도)+야자또는 방과후 복습
2. 쉬는시간 복습
3. 야자 또는 방과후 공부
4. 다음날이후
.
.
1번은 가장 좋습니다... 5분 복습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사람은 들은것을 금방 망각해 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뇌는 '소우주'라고 불릴정도로 넓고 방대하다고 합니다...잊어버린것이 아니라 있긴한데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는것입니다...
그렇기에 수업직후 5분 정도 필기한 내용을 읽어보는것(칠판필기 보다는 말씀을 받아적은것을 중심으로)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뇌의 어느지점에 있는지 표시를 해두는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저녁에 다시 한번 꼼꼼하게 읽어보는것이 중요합니다..
이때는 유사 문제를 풀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기까지 그날 모두 해야 하는것입니다.
할것이 많아 보이지만 시간상으론 1시간이 채 걸리지 않게 됩니다..

2번과 3번은 아무래도 1번에 비할바가 못됩니다..3번을 보시면 복습이 아니라 '공부'입니다..
다시말하면 이미 수업시간의 50%정도는 잊어버리기 때문에 새로이 공부한다는 개념이 됩니다..
물론 2번 만으로도 오래 기억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보신것처럼 습은 스스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수학을 예로 들었으니 수학에서의 '습'은 이렇게 하면서 수업후 일주일 내에 유사 문제들을 풀어보는 것 만으로도 6개월 정도 이상의 기억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수학의 특성은 '연계과목'입니다..풀어말하면 앞 단원의 내용을 잘 모르면 다음 단원의 내용도 어려워 진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앞 단원의 내용을 잘 알고 있으면 다음 단원 또한 어렵지 않게 됩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학'과 '습'이 중요합니다...

여기까지 학습의 개념을 대충은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이제부터 공부에 대한 것들을  하나 하나 풀어보려 합니다...
자주는 아니래도 간간이 적어 올리겠습니다...
이글은 공부하려는 학생과 공부에 관해서는 좀 답답함을 느끼는 부모님들을 위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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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내가 관심있어 하는 분야들과...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의 책들이다..

글쓰기와 책쓰기와 관련된 내용들은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다..
늘 글을 쓰면 부족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좀더 제대로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고 정확한게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간결한 표현을 하기 위해서 보려한다..

책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 하나에 빠져 몰입한 결과물을 낸 사람들의 생각과그들의 가치관을 본 받고 싶다..꼭 읽어보려는 책이다.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 그래서 다시금 찍어 보았다.
근래 가장 많이 읽히는 책들..  나는 아직 읽지 않았다.. 여러가지 핑계로..
나름대로 책을 본다는 착각이 정말 혼자만의 착각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대목..



인문학과 철학에 대해 점점 관심을 가져 나가고 있다..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기르기 위해 그리고 인식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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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관리의 궁극적인 목적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결코 모든 시간을 일과 스케줄의 노예로 보내서는 안된다.
 
1.아날로그시계를 활용하라
시간 관리에서 가장 기본적인 도구가 시계이다.
중요한 것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문제이며,
시각보다는 시간의 총량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디지털시계보다는 아날로그시계를 활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아날로그시계의 바늘은 시간을 나타내지만, 시간의 총량도 한꺼번에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아날로그시계가 시간 개념을 갖도록 하는 데 더 유용하다.
바늘이 각을 이루고 있어 시간이 얼마 남아 있는지
혹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쉽게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2.수첩을 잘 활용하라
수첩을 고를 때에는 크기를 고려하라.
너무 작아서도 안 되고,
들고 다니기 불편하게 너무 커서도 안 된다.
수첩을 펼쳤을 때 한쪽 면에는 주 단위의 계획을 세울 수 있어야 하고,
하루씩 나누어 놓은 칸에는 아침 7시부터 저녁 9시까지 나누어 놓으면 좋다.
수첩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야 한다.
매일매일 시간 계획에 맞추어 할 일을 하고,
취침 전에는 아침에 세웠던 계획과 비교하여 얼마나 실천하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3.책상 앞에 달력과 시간표를 붙여 놓아라
시간을 관리하기 위해 달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1년을 한번에 다 볼 수 있는 달력이 훨씬 유용하다.
그것을 책상 앞에 붙여 두어라.
그리고 옆에는 생활 계획표를 붙여 두어라.
생활 계획표는 매일 반복되는 일을 중심으로 기록한다.
 
4.취침 시간을 일정하게 하라
 ‘하루 24시간이 모자란다고 생각되면 잠자는 시간을 줄이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8시간의 숙면은 반드시 취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취침 시간을 일정하게 하자.
자기 관리는 본인 스스로 철저히 해야 한다.
피로가 쌓이면 병에 걸리기 쉽고,
능률도 저하돼 오히려 시간 관리가 어려워질 수 있다.
 
5.우선순위를 만들어라
우선순위를 둘 때 중요한 원칙이 있다.
하기 싫은 일은 가능한 빨리 신속하게 끝내도록 한다.
처음에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겠지만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효과적이다.
싫어하는 일을 처리한 후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면 기쁨이 두 배로 커진다.
반대로 귀찮은 일을 뒤로 미루는 경우 그 일이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 이상,
즐거워야 할 일마저 재미가 반감된다.
싫어하는 일이 마음에 계속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싫어하는 일을 먼저 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기분 좋은 일을 하도록 하자.
 
6.여유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은 쉬지 않고 일만 할 수도 없고, 그렇게 살아도 안 된다.
예상하지 못한 일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유 시간을 미리 확보해야 한다.
오늘 혹은 이번 달까지만 일하고 말 것이 아니라면 여유 있게 생각하라.
시간적 여유는 일의 효율성과 창의성을 높여 주어
개인의 능력 향상에 더욱 발전적일 수 있다.
  
7.해야 할 공부나 일을 중심으로 시간을 계산하라
‘5시간 동안 100쪽의 책을 읽어야 해’ 
혹은 ‘기말고사가 1주일 남았느니 하루에 얼마씩 공부를 해야 해’
하는 식을 계획을 세우면 안 된다.
단순히 계획을 위한 계획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00쪽의 책을 읽으려면 3시간이 필요해’ 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만약 시간이 남으면 다른 공부나 취미 생활을 할 수도 있다.
모자라는 경우에는 우선순위를 정하여 새로 계획을 세우면 된다.
단순히 시간만을 계산한다면 수박 겉핥기가 되거나
시간이 남아 빈둥거리다가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게 될 것이다.

wn1 - 효과적인 시간관리를 위해 꼭 위의 일곱가지만이 필요한것은 아닐 것이다. 반대로 일곱가지나 필요한것만도 아닐것이다.. 자신의 환경과 가치관에 따라 필요한 것들이 다르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곳에서 시간관리의 중요성을 논하며 필요한 것들에 대해 열거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리라 본다.
시간관리라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자기관리' 라 표현할 수 있다.
자기 스스로를 효율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의미이다.
이것을 안다면.. 중요한것은 자신이 열렬히 바라는 무언가를 가지면 시간관리를 스스로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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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리틀 아인슈타인을 이렇게 키웠다

진경혜 중앙M&B 2001

"공부를 의무로 생각하지 말라.

공부하는 아름다운 행위를 통해 너는 기쁨과 자유를 얻을 것이고,

이것은 나중에 네가 속한 사회에 큰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다."

- 쇼의 책상에 붙어 있는 아인슈타인의 말 -

1장

- 텔레비전을 보지 않으면 남는 시간이 무척 많은데, 우리는 그 시간에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하루 종일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일을 통해 무엇을 느꼈는지, 집안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등등 그때그때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아이들 생각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답한다.

wn1 - TV가 없으면 많은 시간이 생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안책으로 인터넷을 통해 TV를 본다.. 그러면서 어디가면 "난 TV가 없어 .. "라고 한다.

TV를 없애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없음으로 소통을 하고 개인적인 계발을 하기 위해서 이다..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 없어야 하지 않을까..


- '저녁 시간 대화'를 통해 얻은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아이들은 대화를 하면서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느낀다.

아이들은 아빠를 보자마자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시시콜콜 수다를 떤다. 그럼 우리 부부는 '왜?'라고 되물으면서 아이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음을 알려 준다.

둘째, 배움에 대한 즐거움과 겸손함, 적극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원래 무엇이든 혼자하는 것보다 여럿이 하는 것이 재미있는 법이다.

셋째,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아이들은 내버려두면 알아서 잘 큰다'고 생각지 않는다. 내 인생을 사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열심히 공부하며 연구해 왔다. 100권의 책을 사 주기보다 정성을 기울여 고른 10권의 책을 100번 읽어주려 노력했고, 미술학원에 보내는 대신 아이와 함께 앉아 물감 놀이를 했다.

- 쇼가 글자를 빨리 익히게 된 것은 아무래도 책을 많이 읽어 주었기 때문인 듯싶다.

- 부모는 아이의 재능을 발견하고 길러 주어야 한다.

- 내가 주장하는 것은 아이들을 제대로 파악해서 개발해 줄 것이 있으면 힘써 도와주고, 없으면 없는 대로 인정하면서 아이를 기르자는 것이다.

wn1 -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열린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또한 소통꺼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함께 책을 보는 것은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킬 수 있게된다..

막상 시간은 있는데 소통할 꺼리가 없어서 몇 마디 하다가 농담좀 하고..각자의 것을 하게 된다.. 이것은 진정한 소통이 아니다..실제로는 이러한 가정이 매우 많다.. 

부모나 자녀나 막상 같이 있으면 할 이야기가 없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한다..그런 말을 하는 사람치고 스스로 할꺼리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없더라...

소통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마음을 열고 인내하리라 각오를 하는것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소통의 꺼리를 찾아야 하는데,, 이것도 만만치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생각보다 쉽다.. 말하고 싶은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것으로 확장을 시킬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말해야 하는 한가지를 정확하게 그리고 오해하지 않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면 ...자연스럽게 확장으로 들어서게 된다...'말도 안되는 소리 같다고?'

의심하지 말고 일단 해보라... 해보기 전에는 말도 안되는 일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말할 꺼리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뒤의 이야기들은 굳이 적지 않아도 스스로 하게 된다..일단은 해봐야 한다,,



2장

- 아이들이 매 맞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정작 행동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

돕슨 박사에 따르면, 매로 아이를 다스릴 수 있는 시기는 8세에서 9세가 되면 끝이 난다고 한다.

- 매를 대기 전에 아이와 대화를 하면 아이의 잘못을 훨씬 더 일깨워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부모의 감정도 누그러져 때려야겠다는 마음이 사라진다.

wn1 - 부모들이 이 대목에서 많이들 실수를 하고 있다...실제로 아이들은 매를 무서워하면서도 순간뿐 뒤를 생각하지 않는게 사실이다..

그러니 매를 맞을거라고 생각을 하지 않고 또다시 생각없는 행동을 반복한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부모가 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

근데 아이에게는 생각의 인과관계에 대해 알려주거나 학습시킨 적이 없으면서 결과만으로 아이를 평가하다보니 ...내 아이가 '너무 어리다'라는 잘못된 생각으로 매를 더욱 대게 된다...하지만 그것도 어릴때뿐...10대 중후반이 되면 '이젠 매를 대면 안되겠다'라고 생각을하고 매를 대지 않는다..

그러면서 ..아주 무시무시한 것이 등장한다..그것은 바로 "방관"이다..

매가 통하지 않는다는것을 언제가 되었든 알게 되었다면...그때부터 부모가 할 일은 아이의 마음속에 조금씩이라도 부모가 들어가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않는다..

알면서도 하지않고 몰라서도 하지않고...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만으로 위안을 삼으려 한다..

제발 찾으라... 인터넷에서 검색만 해봐도 무수한 자료들이나 선배들의 경험이나 전문지식들이 넘쳐난다... 

검증되지 않은 자료를 보고 잘못하면 어떠냐고?...제발 그런 변명은 이제 그만하자.

성이들이고 아이를 키워보았기 때문에 어떤것이 옳고 그른지는 당연히 판단이 된다.

자신은 못 믿겠는가?   그건 아니지 않는가...


-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옳은 일을 '설득'하는 것이고, 아이들이 설득되는 과정에서 부모의 권위가 형성되는 것이다.

- 규율을 통한 교육은 아이가 어릴 때부터 시작해야 효과적이다.

- 나는 예의와 질서는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일조의 사회적인 약속이자 형식으로 부모가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울어도 좋고 실망해도 좋지만 그런 것 때문에 네가 가고자 하는 길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잡초처럼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거라' 라며 말해 준 아빠의 말씀을 오래 기억하겠다.


- 엄마들은 아이들을 감정적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 남편은 아빠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몇 가지 정해 놓았다.

첫째,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 준다.

둘째, 지금 하는 일을 즐겁고, 또 지혜롭게 해 나가도록 도와 준다.

셋째, 아빠도 실수가 많은 인간임을 인정하면서, 친한 친구처럼 언제든 상담할 수있는 아빠가 된다.

넷째, 세상은 늘 좋은 일만 생기는 곳은 아니지만, 아무리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 방식을 심어 준다.

다섯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임무, 즉 우리의 몸을 잘 관리하고, 금전을 지혜롭게 사용하고, 가진 재능과 시간을 쓸데없이 허비하지 않고 잘 관리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wn1 -  책에서 저자는 엄마의 일과 아빠의 할 일이 다르다고 말한다...

어느정도 공감이 된다.. 부모로써 각자의 역할이 있듯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고유의 영역도 있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녀를 키우는데...가장 좋은 것은 잘 맞든 안 맞든...부모 둘이서 같이 소통을 먼저 하는 것이다..

앞에서 부모가 고민해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을 둘이서 같이 자료도 찾아보고 대화를 하면서 고민한다면 더 좋은 방법들이 나올것이고,,,이렇게 소통을 연습하면 자연스럽게 자녀들과 소통을 할 수 있게 되는것이다..

인생에서 시간은 늘 연속적이고 이어져 있듯이...우리의 생활 역시도 이어져 있는 것이다.


-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가르치지 않아도 좌절을 느끼고 조바심을 내며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많다.

'가치 있는 성취는 각 개인의 능력이 자유롭게 개발될 수 있도록 충분한 여유가 주어진 환경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은 부모가 자녀를 교육하면서 오래 곱씹어야 할 말일 것이다.

- 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가 따로 돌아가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이 시대에, 자신의 의견을 남에게 설득시킬 수 있는 능력과, 말해야 할 때 말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진정 우리 아이들이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 네 살짜리 꼬마에게도 집안일을 시킨다고 하면 한국의 엄마들은 '부모가 게을러 아이들을 부려먹는 구나'하고 아이들을 측은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 나는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은 재산이나 지식이 아니라 세상을 따뜻하게 보는 눈과 굳세게 살아갈 수 있는 의지,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자존심, 배움에 대한 겸손한 태도 등이라고 생각한다.

- 삶의 태도는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 꾸준한 연습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게 해준다. 나는 항상 쇼에게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실수를 통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값진 것은 없다. 더구나 실수를 거듭하면서 아이들은 용기를 배울 수 있다. 이 세상 누구나 실수와 실패 속에서 살아간다. 그럼에도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는 것은 실수나 실패를 했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마음가짐과 용기를 가질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 타당한 이유 없이는 목표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도록 균형 있게 이끌어 주어야 한다.

-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지나간 일은 물 흐르듯 흘려 보내야 한다. 물론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그 실패에서 배우는 지혜도 필요하다.



3장

- 놀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느끼는 게 아이들이다.

- 나는 '놀이를 통해 가르쳐라'라는 말에는 '계획성 있게 놀아라' , '엄마가 놀이에 참여해라' , '강요하지 말아라'라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 교육 전문가들은 사물의 다양한 용도를 발견해 활용하는 이런 놀이가 곧 지능 발달과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 호기심은 창의력의 기초이기도 하지만 배움을 불러일으키는 힘이기도 하다.

- 명령만큼 아이들의 기를 꺾고 호기심을 소멸시키는 것이 없다.

- 아이들은 모두 호기심이 많다. 그러나 그것을 계속 유지시키려면 아이의 질문에 "바쁘니까 나중에 대답해 줄게"라고 핑계를 대는 부모의 버릇부터 고쳐야 한다.

- 수잔 존슨 이라는 소아과 의사가 텔레비전이 어떻게 어린이들에게 해를 끼치는지에 대해 쓴 짧은 논문을 보면, '사람의 시각은 우리가 보는 어떤 것이든 찾고 걸러 내고 집중해서 판별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텔레비전을 많이 시청할 수록 이런 능력에 결함이 생긴다'

- 책 읽기는 상상력을 발달시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 평생 긴요하게 쓰일 책 읽기의 습관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지속적인 지도가 있어야 한다.

- 음악과 뇌파의 관계를 살펴본 결과 마음을 안정시키는 클래식 음악이 뇌에서 알파파가 생성되도록 도와 집중력을 강화시킨다고 한다.

- 우리는 아이들이 한 가지의 악기는 잘 다룰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켜왔다. 하나의 악기라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꾸준한 연습과 인내가 필요하고 그 과정이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할 것이다.

- 모든 교육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예술 교육은 즐겁고 유쾌한 경험이 우선해야만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에필로그

- 나는 아이의 재능은 적당한 시기에 발견해 제대로 개발해 주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재능과 좋은 두뇌를 가지고 태어나더라도 무용지물이 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나름대로 아이의 상태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기록해 가면서 필요한 것은 더 채워 주고 넘치는 부분은 낭비하지 않도록 칭찬과 격려로 교육을 해 왔다


wn1 - 중요한것은 이 글을 보는 당신이 직접 책을 읽어보는 것이다.

블로그에 올린것은 지극히 나의 관점에서 좋은 문구만을 올린것이다..

당신이 책을 본다면 분명 나와는 다른 곳에 줄을 긋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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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학교를 위한 강의식 교과서) 부모대학

추이화팡 휘닉스 2008

머리말

- 뱃속의 태아일 때부터 시작해 여섯 살 때까지 가정교육이 아이의 일생을 좌우한다. 소식에 따르면 오스트리아 정부는 부모 자격증을 발급할 예정이라고 한다. 부모의 역할은 선천적인 것이지만 성공적인 부모의 역할은 학습을 통해서 배양된다.

◎ 1학년 : 조기교육

- 조기교육은 결코 지능개발, 선행학습, 강도 높은 교육이 아니다.

1학기

첫째 주:환경조성

- 환경조성은 소리 없이 진행되는 교육이다.

환경은 크게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중에서도 사회환경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더 크다. 심리학자들은 가정을 사람의 인격을 발전시켜 주는 주춧돌로 본다. 환경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데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 아이에게 적합한 거주환경을 조성하라.

아이의 심리상태와 태도는 주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주변이 어지러우면 아이의 마음도 어지러워지지만 주변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으면 정신을 집중하기가 쉽다.

- 좋은 가정 분위기를 만들라.

부모가 솔선수범해야 한다. 교육은 연속적인 과정이다. 아이가 사회에 잘 적응하게 하려면 부모가 기본적인 가치관과 행동방식을 적극적으로 교육시켜야 한다. 최고의 방법은 솔선수범을 보이는 것이다. 아이는 무의식중에 부모의 행동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둘째 주:솔선수범

- 부모는 최초의 선생님이다.

부모의 모든 말과 행동은 아이에게 영향을 주고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부모의 말과 행동을 따라한다. 러시아의 교육자인 비고스키(Lev S.Vygotsky)는 말했다. "아이와 대화를 나누며 지도했다고 해서 아이를 교육시켰다고 착각하지 마라. 생활의 매순간, 심지어 부모가 집에 있지 않을 때도 아이는 교육을 받고 있다. 아이는 부모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으로 보고 마음에 기억해 둔다.

- 자신부터 바르게 하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는 "아이에게 영향을 주는 교육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단연 최고는 당신의 행동이다." 공자는 "자식을 가르치려면 먼저 자신부터 바르게 하라." 부모가 아이를 깨우치는 스승이라면 아이는 부모의 반사경이다. 비고스키는 부모의 언행교육이 매순간 일어난다고 여겼다. 어떤 교육이건 간에 가르치는 사람이 아이에게 스스로 좋은 모습을 보이면 어떤 도리를 말해도 아이가 믿는다. 사실 부모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이 아이에게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상생활에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당장은 아이를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훗날 아이가 커서 같은 거짓말로 부모를 속일 수 있다.

셋째 주:흥미 키워주기

- 흥미는 최고의 선생님이다.

흥미는 아이가 사물을 탐구하고 활동하는 원동력이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인 피아제(Jean Piaget)는 "지적 능력을 사용하는 일은 모두 흥미와 관계가 있다."고 말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을 할 때 모든 정신력과 에너지를 집중하고 성취감을 느낀다.

- 아이의 흥미를 발견하고 인도하라.

현명한 부모는 아이가 특별한 활동을 하도록 격려하고 그 과정에서 아이의 흥미를 발견하고 존중해 준다.

- 아이의 학습흥미를 키워 주어라.

성격에 따른 특징을 고려해야 한다. 성공의 체험은 아이에게 학습흥미를 유발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보잘것없는 발전이라도 아이는 성공의 체험을 함으로써 자신감과 자존심이 높아진다. 인정받고 싶어서이다.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로 자신을 인식한다.

넷째 주:열심히 연습하라.

- 부지런히 공부하라.

도연명이 말했다. "이 모는 매 순간 자라고 있다. 단지 자라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눈으로 볼 수 없을 뿐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니라. 지식은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축적되는 것이기에 본인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지만 꾸준하고 부지런하게 공부하면 지식의 양도 늘어난단다. 저 숫돌은 날마다 눙부들이 칼과 낫과 괭이를 가는 바람에 지금처럼 닳은 것이지 결코 어는 한 순간에 닳은 것이 아니다. 숫돌처럼 중도에 학습을 그만두면 당장은 그 손실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손해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학습이 중간에 중단되면 그간 배운 지식을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잊어버리게 된단다."

- 부지런히 배우고 익히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

부모는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아이가 꿈을 포기하게 하지 말고 먼 미래를 내다보며 장기적인 발전을 꾀해야 한다. 공부는 농사와 같아서 농부가 밭을 매지 않으면 아무것도 수확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없다.

다섯째 주:마음 이해하기

- 아이의 순수한 본성을 존중하라.

가장 중요한 건 왜 그래야 하는지 이치를 깨우쳐주는 것이다.

-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연구에 따르면 한 살짜리 아이도 정서적으로 공감을 느낀다. 사랑은 아이의 성장에 필요한 정신적인 영양소이다. 아이는 자유가 있으면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을 선택하고 좋아하는 일을 한다. 또한 흥미가 있기에 그 일을 반복적으로 하고 그 과정에서 집중하는 법을 배워 좋은 행동방식을 형성하게 된다. 마음은 서로 이해할 때 통하고, 감정은 이성이 있을 때 승화된다. 아이들은 성장 과정에서 어른들의 칭찬과 존중과 믿음을 얻고 싶어 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아를 긍정하고 발전시킨다.

- 아이의 동심을 보호하라.

부모가 부모로서의 위엄을 버리고 아이와의 심리적인 거리를 좁혀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다. 부모가 스스로 동심을 가져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아이의 시선에서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펑즈카이는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에 비유했다. 어른들에게 "아이를 대할 때 애벌레의 몸에 날개를 달려고 하지 말고 나비와 함께 비상하라고 가르쳐라. 이보다 더 옳은 것은 나비가 날개를 접고 애벌레와 함께 기어가는 것이다. 부모가 동심을 가지고 있으면 아이의 동심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때문에 평소 아이들이 보는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특별강의

- 잘 교육하면 보통 아이도 대단한 아이가 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위해서 교육을 강요하고 압박해선 안 됩니다. 교육의 목적은 아이를 전체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어야 합니다. 아이를 지나치게 귀여워하는 것은 독립심 형성에 가장 큰 방해요소가 됩니다. 아이는 부모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말하는지 고대로 따라 배웁니다. 아이들의 심리적인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인내심이 필요해요. 눈에 띄는 발전이 없다고 아이를 바로 포기해 버린다면 이것이야말로 실패한 교육이 되고 말죠. 스스로 자질과 지식수준을 높이려고 끊임없이 교육이론과 교육방법을 연구하세요.

2학기

첫째 주:칭찬으로 유도하기.

- 칭찬과 격려는 아이를 발전하게 하는 원동력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가장 중요한 교육방법은 칭찬과 유인으로 아이가 실제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다."고 말했다. 어릴 때 자주 해주는 칭찬은 아이의 전 생에 걸쳐 영향을 끼친다.

- 지나치게 아이를 책망하지 마라.

아이들은 칭찬받으면 무엇을 하려는 의지가 더 강해져 부모와 선생님에게 칭찬 받으면 자신감을 가지고 더 열심히 노력한다. 적당히 기대하고 합리적으로 평가하라.

- 칭찬에도 방법이 있다.

어린아이들은 물질적인 이익으로 칭찬하고 청소년은 정신적인 격려로써 칭찬한다. 또한 어린아이들은 직접적이고 공개적으로 칭찬하고 청소년은 묵묵히 믿음으로써 칭찬해 주는 것이 좋다. 칭찬받는 이유를 이해하면 더 기뻐할뿐더러 마음의 지혜도 같이 성장하게 된다.

둘째 주:예술로 교감하기

- 아이의 눈높이에서 보라.

부모와 아이 사이에는 서로 다른 관점들이 존재한다. 부모가 아이의 의견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부모가 자유롭게 아이의 생각을 수용하고 함께 토론하고 연구한다면 아이도 자신에게 어려운 문제를 함께 해결할 파트너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고 결정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또한 의견이 다르더라도 온화한 태도로 토론하고 아이의 새로운 생각과 방법을 인정해야 한다. 아이들이 부모 말을 잘 안 듣는 이유는 대부분 부모의 말이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현명한 부모는 아이의 말을 진지하게 들으며 아이의 생각을 파악한다.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는 부모가 싫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불만을 표출하려고 한다.

- 대화 방식에 주의하라.

어떤 부모들은 아이가 어떤 불량한 조짐이 보이거나 잘못을 하면 일단 호되게 혼내고 본다. 그러면 아이가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하지만 자존심에 너무 많은 상처를 받은 나머지 부모를 극단적으로 믿지 못하고 부모의 뜻과 반대로 움직이며 다른 사람들을 따라 행동하게 될 것이다. 가정에서 부모와 아이 사이에 대화가 잘 안 통하는 이유는 부모에게 좋은 대화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부모가 마음을 새롭게 가지고 아이 친구의 입장에서 아이와 평등하게 교류하고 대화한다면 아이는 더욱 더 부모의 말을 잘 따를 것이다.

- 비언어 소통방식을 익혀라.

연구에 따르면 사람과 사람의 교류는 93%가 비언어 소통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7%만이 언어로 소통한다고 한다. 비언어 소통 과정에서 55%는 얼굴표정, 몸짓, 손짓등 신체언어를 사용하고 38%는 목소리의 높낮이를 이용한다.

셋째 주:처세술

- 예절을 가르쳐라.

공자는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세상에 나올 수 없다."고 말한다. 예절은 한 사람의 사상, 도덕수준, 문화예술의 수양상태가 외부로 표출된 것이요, 공중도덕의 중요한 구성요소로써 한 사회의 문화수준, 도덕수준, 생활습관을 반영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때 중요한 것은 어른을 존경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며 스승을 존경하는 것으로 이것은 동양의 오랜 전통미덕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예절이요, 개인의 뛰어난 인격을 표현하는 것이다.

-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가르쳐라.

어떤 사람들은 사교력이 부족해서 사람들과 능숙하게 어울리지 못하는데, 이것은 자아능력의 결핍에 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대인관계의 성공여부는 상대방이 자신을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여 주는 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대인관계에 성공하려면 먼저 존중, 믿음, 예절을 배우고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말과 행동을 예의바르게 하는 습관을 길러 주어야 한다. 장점을 발견하고 칭찬해 주라고 지도해야 한다. 멋대로 중간에 말을 끊거나 맘을 콩밭에 둔 채 자신의 일에만 신경 쓰지 않고 상대방의 말을 진지하게 듣도록 지도해야 한다. 아이가 이익에 따라 사람을 사귀지 않고 먼저 양보하도록 하며 우정의 가치를 깨닫도록 교육시켜야 한다.

넷째 주:재능개발

- 모든 아이들에게는 거대한 잠재력이 있다.

근대 교육의 계몽가인 코메니우스(Johann Amos Comenius)는 잠재력을 마음의 힘이라고 불렀다. "마음의 힘은 무한해서 만물의 지식을 모두 습득할 수 있다."

- 아이의 재능을 개발해서 꽃피워라.

아이의 재능은 보석처럼 숨어 있어서 부모가 발견해서 빛을 발하도록 지도해주어야 한다. 아이는 부모와 함께 있을 때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 자신을 마음껏 표현한다. 잘 관찰해야 한다. 아이의 잠재된 재능은 다양한 형식으로 표출되므로 풍부하고 이채로운 환경을 조성해서 아이에게 다양한 활동과 표현의 기회를 주고 이 과정에서 아이가 어떤 분야에 흥미를 가지고 있고 특출한 능력을 뽐내는지 발견해야 한다.

- 천성대로 키워라.

부모가 결코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이 고유의 독특한 개성을 무시한 채 아이가 좋은 성적을 거두도록 일방적으로 교육을 진행하는 것이다. 아이는 천성대로 발전하도록 두어야 한다.

다섯째 주:지능체조

- 대자연은 가장 훌륭한 스승

- 아이가 대자연에서 뛰어놀도록 잡은 손을 놓아라.

- 대자연을 이용해서 지능발달을 촉진하라.

대자연은 아이에게 가장 좋은 관찰 장소요, 자연 속에 있을 때 아이의 천성과 능력은 마음껏 발휘된다. 사실 부모들이 아이들을 야외로 데리고 나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단지 아이가 대자연을 알고 사랑하도록 안내하지 않을 뿐이다. 부모는 어떻게 해야 아이가 자연 속에 있는 학문을 배울 수 있을지 방법을 골똘히 생각해야 한다.

특별강의 : 영혼의 생활

1) 관용을 배워라!

2) 선하게 살아라!

3) 권위에 도전하라!

◎ 2학년 : 품행교육

제1학기

첫째 주:자신을 바로 세우기

다른 사람들을 바르게 하려면 자신부터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에 전 제 자신을 매우 엄격하게 대했어요.

- 제물을 탐하지 마라.

- 청렴함을 가르쳐라.

둘째 주:절약과 소박함

- 절약은 미덕이다.

유비는 아들 유선에게 "악은 작은 것이라도 하지 말고 선은 작은 것이라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고 옛말에 "삼척 두께의 얼음은 하루 추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 근검절약을 가르쳐라.

"엄마, 아빠도 좋은 옷을 안 입으셨는데요? 옷은 입어서 따뜻하고 깨끗하면 돼요. 공부를 잘하면 사람들이 부러워하기라도 하지만 겉치장만 잘하고 공부를 못하면 그걸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이에게 절약하라고 가르치기 전에 부모가 먼저 모범을 보여라. 물론 집집마다 경제형편이 다 다르지만 부모는 아이가 돈을 합리적으로 사용하게 하려면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유년기 아동에게는 책임지는 훈련을 좀 더 강화시켜야 한다.

- 경제적 어려움을 숨기지 마라

아이도 가족의 일원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가정의 경제적인 상황을 알려주고 자신들이 돈을 힘들게 번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야 아이가 돈의 소중함을 알고 절약한다.

셋째 주:자립자생

- 아이를 응석받이로 키우지 마라

아이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지나치면 아이가 커서도 자립하지 못한다. 의지병에 걸린 아이들은 좌절감을 잘 느낀다.

- 자기 일을 스스로 하도록 격려하라.

아이가 어릴 때부터 자기 일을 스스로 하게끔 해야 한다. 아이는 스스로 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어려움을 극복할 때 성공적인 체험을 맛본다. 아이를 키울 때 스스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하라. 부모가 대신해 주지 말고 스스로 하게 해야 한다. 설령 서툴더라도 부모는 아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어떻게 하는지 설명해 주어야 한다. 요구수준이 높으면 아이가 겁을 먹고 어려워하고 요구수준이 낮으면 아이가 흥미를 잃는다.

- 자립심을 가르쳐라.

스스로 하는 습관이 없는 아이는 독립적으로 생각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만족, 지나친 사랑, 방종이 아니라 생존, 생활, 자립의 능력을 키워 주는 것이다.

넷째 주:진실 추구하기

진리를 추구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는데 타협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 알몸뚱이가 되더라도 거짓 수재가 되지 마라.

- 진리를 추구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라.

1) 인간 됨됨이를 가르쳐라. 지식은 학교에 입학한 뒤에 배워도 되지만 인간 됨됨이의 도리는 되도록 일찍부터 배워야 한다.

2) 솔선수범을 보여라.

3) 아이가 진실한 세상과 직면하게 하라

4) 행동으로 진리를 추구하게 하라. 실천하라

다섯째 주:고난교육

- 고생으로 단련되어야 큰 그릇이 된다.

부모의 의무는 아이를 단련시켜 사회에 잘 적응하게 하는 것이다. 이때 아이의 개성 있는 발전을 막아서는 안 되고 반드시 아이가 최대한 자기 방식으로 환경에 적응하고 자신을 단련시켜 스스로 가치를 깨닫도록 해야 한다.

- 아이를 고생시켜라.

미국의 일부 주립중학교는 학생이 돈을 휴대하지 않은 채 일주일 동안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졸업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고 있는데, 이 규정은 아이의 생존력을 단련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학부형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우위장(중국의 정치가. 교육가)은 자녀들을 열악한 환경에 보내 단련시키는 것을 가정교육의 혁명으로 보았다. 부모는 아이를 지나치게 보호하지 말고 때때로 고생도 시키며 좌절도 안겨주어야 한다.

특별강의 : 증국번의 가서

자손이 높은 벼슬에 오르길 바라지 않았어요. 그저 책을 많이 봐서 도리를 깨우친 군자가 되길 바랐죠. 부지런히 일하고 절약하는 생활에 즐거워한다면 군자라고 할 수 있어요. 모든 일은 스스로 노력해서 쟁취해야함. 본인이 본인의 약점이 무엇인지 잘 아니까 노력해서 약점을 보완해야 해요 그래야 무엇이든 장점을 살려서 실력을 뽐낼 수 있어요. 공부할 때 가장 필요한 건 의지고 둘째가 의식이며 셋째가 꾸준함이예요. 뭐든지 꾸준히 하면 극복하지 못할 문제가 없어요.

제2학기

첫째 주:독립심 단련시키기

- 지나친 사랑은 의존성과 무능함을 키운다.

독립적인 인격은 아이가 평생 써야 할 소중한 재산이다.

- 독립심을 단련시켜라.

아이는 어려도 스스로 자신을 돌보고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가 하도록 맡기자. 아이가 하고 싶다고 하면 부모는 그저 격려해 주기만 하면 된다. 아이가 어려서 아무것도 못할 것 같다는 것은 순전히 부모들의 착각인데, 사실 아이들의 잠재력은 무한하다. 내가 어릴 때 팅에서 일을 많이 시킨 것은 일손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많이 움직이고 일을 많이 해보는 것이 아이의 지능과 성격을 발달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둘째 주:도덕교육

성공의 여부는 고귀한 인격에 달려 있다.

- 도덕교육의 중요성

베이컨(Roger Bacon)은 "미덕은 보석이라서 소박한 배경 속에 있을 때 더 화려해 보인다. 마찬가지로 미덕을 갖춘 사람은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존경스러워 보인다." 도덕은 좋은 인격과 훌륭한 사람의 기초요, 부모들이 아이가 가장 가지길 바라는 미덕이다. 동정심은 도덕의 핵심이다. 양심은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는 강렬한 외침이다. 양심은 성실함, 책임감, 정직함과 같은 중요한 미덕이다. 자제력은 아이가 스스로 행동을 제약하고 바른 일을 하도록 돕는다. 또한 아이가 스스로 정해 놓은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도록 해준다. 자제력은 아이의 지개와 선량함을 불러일으키는 미덕이다. 존중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들의 장점을 감상하게 해준다. 자아존중감도 더 커진다. 선량함은 보살피고 친절을 베풀게 해준다. 관용은 인격을 존중하게 해준다. 공정은 넓은 마음으로 도덕적 민감성이 강해서 부당한 대접을 받는 사람들의 이익을 용감하게 보호해주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한다. 좋은 인격은 만들어 지는 것이다. 결코 쉽지는 않다.

- 솔선수범이 좋은 인격을 만든다.

아이를 도덕적으로 키우는 것은 영원히 부모가 도전해야 할 임무다. 아이를 가르치고 좋은 인격을 키워주기 위해선 부모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 아이에게 도덕을 가르칠 땐 인내심과 세심함이 필요하다. 일상생활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자연스러운 습관이 된다." 아이가 문제를 일으켰을 때 부모는 먼저 자신에게 문제의 원인을 찾아보고 스스로 좋은 역할모델이 되어야 한다.

- 도덕적인 아이로 키워라.

도덕적인 신념은 이성과 감성이 서로 결합할 때 형성된다. 도덕적인 감정은 자신에 대한 도덕적 평가와 타인의 행동에 대한 정서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일어난다. 도덕적인 행동은 후천적인 연습에 의해서 얻어진다. 부모는 달콤한 말로 아이를 속이지 말고 잘못이 있으면 용감하게 인정해 스스로 좋은 역할모델이 되어야 한다.

셋째 주:인성교육

- 인격은 평생의 재산

아이의 일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인성교육이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인격이 저절로 쌓이는 것은 아니다. 모름지기 좋은 인격은 인성교육을 받을 때 다져진다.

- 인격은 인격으로 변화시켜라.

훌륭한 인격은 좋은 교육과 습관에 의해서 형성되므로 둘 중에 하나가 빠져서도 안 된다.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은 충성스럽고 용감하며 부지런하고 절개가 굳다.

- '다른 반쪽의 교육'도 하라.

조기교육은 인격과 품행을 키워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넷째 주:품행교육

- 사물의 이치를 가르쳐라.

부모는 아이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는 동시에 다른 사람을 배려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아이도 부모가 고생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조사에 따르면 50%가 넘는 아이들이 부모의 은혜를 모를뿐더러 부모의 사랑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왜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삼자경(三字經)》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낳되 가르치지 않으면 부모 잘못이요. 가르치되 엄하지 않으면 스승의 태만이다."

- 약속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독일에서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거나 주차장이 아닌 곳에 차를 주차하면 바로 사람들이 달려와서 공중도덕을 지켜 다음 세대들에게 모범을 보이라고 말한다. 아이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가르치려면 부모가 먼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좋은 품행을 키워 주어라.

아이는 자라면서 진실과 선량함과 아름다움이라는 영양소로 거짓과 악한 것과 추한 것을 분별해 낼 줄 알아야 한다. 책임감은 개인이 근심걱정 없이 살아가는 데 기초가 된다.

다섯째 주:자신감 키워주기

- 자신감은 성공을 부른다.

자신감은 사람이 정신적, 신체적으로 발전하고 일을 훌륭하게 처리하도록 해준다. 하지만 자신감이 없으면 모든 면에서 적극성이 떨어진다.

- 아이의 자신감을 키워 주어라.

심리학자에 따르면 자신감은 강력함 심리적인 에너지를 만들어 능력을 마음껏 펼치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감이 생기면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자신감을 잃으면 틀림없이 실패하고 만다. 적극적으로 칭찬해 주어야 한다. "어떤 사람을 칭찬으로 바꾸기는 쉬워도 질책으로 바꾸기는 어렵다."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라. 부모가 비교해야 할 것은 아이가 과거에 비해서 얼마나 발전하고 노력했느냐이다. 아이의 자신감을 견고하게 해주는 데는 시간과 인내력이 필요하다. 부모는 칭찬의 기회를 잡아 아이가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이해시켜 자신감을 키워 주어야 한다.

특별강의 : 청소년의 컴퓨터 사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 -빌 게이츠

부모님이 아이와 함께 인터넷을 하면 아이가 좋은 내용과 나쁜 내용을 구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요.

3학년 : 전통교육

제1학기

첫째 주:기초교육

- 기초교육으로 기초를 다져라.

이상적인 사람은 인격, 건강, 재능 이 세가지가 하나인 사람이다. 교육에 있어 중요한 것은 아이를 전체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 기초교육에 충실하고 균형 있게 발전시켜라.

둘째 주:나라 사랑하기

- 애국심을 심어 주어라.

-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을 심어 주어라.

셋째 주:자신을 바로 알기

- 재능을 끊임없이 채찍질하라.

사람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반성하고 잘못을 용감하게 인정해 이를 채찍 삼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는 것이다.

- 아이가 자신에 대해서 알게 하라.

지기교육을 할 때 부모는 부모로서의 위엄을 버려야지 호통을 치며 아이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 부모는 객관적인 문제도 잘 발견해야 하지만 아이의 내면세계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도 잘 파악하고 이해해서 아이를 도와주어야 한다. 교육의 속도를 아이의 사고력과 이해력에 맞춰야 한다. 이치가 함축되어 있는 사물을 이용해서 아이를 깨우쳐 주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야기를 이용해서 아이를 가르쳐보자. 단, 쉬운 내용이어야 한다.

- 아이가 스스로 자신을 격려하도록 하라.

아이는 자라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격려해야 한다. 현명한 부모는 아이에게 노력을 강조해야 한다.

넷째 주:평범한 위치에서 노력하기

- 특권을 주지 마라.

특권을 누리지 않는 것은 모든 부모들이 따라야 할 원칙이다. 부모가 겉과 속이 같고 약속을 지켜야 아이들에게도 위신이 선다.

- 평범한 사람으로 키워라.

의식이 있는 사람은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미연에 사건을 방지하고 특권을 바라지도 않는다. 평범한 사람으로 지내되 꿈은 원대하게 가져라!

다섯째 주:조용히 생각하고 반성하기

배움은 고요하고 재능은 배워야 하니, 배우지 않으면 재능을 넓힐 수 없고 학문을 이룰 수 없으며 태만하면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고 조급하면 성품을 다스릴 수 없다.

- 편안하고 맑은 마음으로 생각하고 뜻을 세워라.

-조용히 생각하고 반성하도록 가르쳐라.

사람이 자신과 다른 사람의 차이를 인식하면 자신의 결점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를 보완할 수 있으며 자아반성을 통해서 성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아이는 수시로 자신에게 "오늘 한 행동은 잘한 것일까?" "나의 장점은 무엇이고 또 단점은 무엇일까?" "앞으로 더 잘할 수 있을까?" "다음번에는 더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까?" "엄마, 아빠의 말씀을 따라야 할까?"라고 반문해야 한다. 성공을 거두려면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목표를 세워야 한다.

특별강의 : 정훈격언 (강희)

어려서부터 길러 온 좋은 습관은 천성처럼 굳어진다. 아이를 귀여워 하는 것은 괜찮지만 결코 어리광을 받아 줘서는 안 됩니다. 열심히 배우고 솔선수범을 보인다. 안으로는 몸과 마음을 닦고 좋은 책을 많이 읽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밖으로는 겸손한 군자의 기개를 키우라.

제2학기

첫째 주:사랑과 엄격함

- 편애하지 마라.

-사랑과 엄격함을 동시에 보여 주어라.

사랑하는 마음은 가슴에 숨겨 두고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세요. 아이가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부모는 바로 도와주지 말고 스스로 해결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어머니는 엄격하되 자상하지 않으면 안 되고 자식을 사랑하되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명한 부모는 아이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아이가 계속해서 노력하도록 격려해주어야 한다.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고 싶다면 사랑을 베푸는 동시에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가르치고 고생시켜 아이가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의지를 단련시키도록 해야 한다.

둘째 주:공부방법

기록하는 습관, 생각하는 습관, 베껴 쓰는 습관, 부지런한 습관

- 책은 정신의 양식이다.

유아교육 전문가들은 2~3세 때가 독서의 습관이 생기는 중요한 시기로써 이때 아이가 독서할 기회를 많이 접하면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인지능력과 집중력이 더 발달해 안정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독서는 일종의 오락이므로 즐겁게 해야 한다. 아이의 성장에는 즐거움이 필요하다. 즐겁지 않으면 건강하게 성장 할 수 없다.

- 책을 좋아하게 만들라.

먼저 좋은 독서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부모가 아이와 함께 책을 읽으면 아이에게 좋은 독서습관을 키워 줄 수 있다. 독서의 흥미는 아이가 적극적으로 책을 읽으려는 의식경향이다. 부모는 의식적으로 아이에게 독서의 흥미를 키워 주어야 한다. 미국의 교육가는 1~4세 때가 독서의 흥미와 습관이 만들어지는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지적했다.

- 독서방법에 유의하라.

주희는 "마음이 책에 있지 않고 눈으로 자세히 보지 않아 마음과 눈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입으로 읽어도 잘 외워지지 않고 억지로 외워도 그 기억이 오래가지 않는다."고 했다.

- 생각하며 배운다.

공자는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분명하지 않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 진다." 가장 좋은 방법은 책을 보며 생각하는 것이다. 학습은 사고와 근면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셋째 주:엄격함에 관한 교육

- 가정교육을 엄하게 하라.

부모가 엄격하게 가르치지 않으면 아이가 신나게 놀기만 해서 어른이 되어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데. 이렇게 되면 오히려 부모를 원망한다." 아이를 가르칠 땐 일관되게 엄격해야지 조금이라도 강도가 느슨해지면 먼저 한 노력의 효과도 반으로 줄어든다.

- 아이를 존중하고 응석을 받아 주지 마라.

- 몽둥이를 든다고 엄격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 부모들은 종종 아이를 넘치게 사랑하거나 엄격함을 몽둥이로 때리고 벌주는 것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합리적으로 엄격해야 한다. 교육태도가 일관적이어야 한다. 벌을 줄 땐 뒤로 미루지 말고 바로 벌을 주어야 하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주어야 한다.

넷째 주:겸손에 관한 교육

- 겸손하면 이익을 보고 거만하면 손해를 본다.

겸손은 사람을 발전하게 하고 자만은 사람을 뒤처지게 만든다.

- 자만하지 않도록 가르쳐라.

하나만 아는 사람은 대체로 겸손하지 않지만 견식이 풍부한 사람은 반드시 겸손하다.

다섯째 주:탐구하기

- 아이의 탐구심을 죽이지 마라.

- 아이의 탐구심을 자극하라.

아동교육 전문가들은 아이가 질문하면 격려하고 칭찬해 주는 동시에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부모가 환경과 조건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 아는 대로 행동하고 용감하게 탐구하라.

책속의 지식은 사람들이 실천한 경험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책만 봐서는 경험이 간접적이고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다. 만약에 책 속의 지식을 파악했더라도 행동하거나 직접 체험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완전하게 안다고 할 수 없다. 지식은 실천할 때 비로소 실질적으로 사진의 것이 된다. 아이의 행동력과 조작능력과 실천력과 탐구정신을 키워 주는 것은 모두 부모의 책임이다. 아이는 사물을 관찰하며 문제를 발견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에 사물을 많이 접할수록 새로운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다.

특별강의 : 권학 (순황)

지식을 얻으려면 인식의 과정이 필요해요. 공부하는 것이 힘들더라도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해야 해요.

4학년 : 과학교육

제1학기

첫째 주:상황에 맞게 교육하기

- 자신의 경험을 이용해서 가르쳐라.

상황에 따라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경험을 이용해서 수시로 도리를 설명하고 인도하는 것을 말한다.

- 흥미에 따라 가르쳐라.

사람에게는 저마다 취미, 특기가 있다. 부모는 아이가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고 어는 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도록 아이의 개성과 특징을 잘 관찰하고 분석해서 장점을 더욱 살려주어야 한다.

둘째 주:아이에 맞춰 교육하기

- 아이의 본성을 살리고 특징에 맞춰 가르쳐라.

일률적으로 요구하면 개성이 억압되고 그 결과 학생들의 정신적인 에너지도 억압된다.

- 종합적인 맞춤식 교육

-맞춤식 교육에 있어 중요한 두 가지

1) 반드시 아이를 이해하고 아이의 재능을 발견해야 한다.

2) 아이의 특징, 장점, 흥미에 따라 내용과 방법을 선택해 교육시킨다.

셋째 주:감성교육

희망을 잃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적이란다. 결코 그것이 인생에 침입하지 않도록 해라.

- EQ가 IQ보다 중요하다.

- EQ를 키워 주어라.

- EQ교육의 적기를 놓치지 마라.

최신 과학연구 발표에 따르면 3세 이전은 대뇌세포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기이자 아이에게 EQ교육을 시킬 최적기라고 한다.

넷째 주:민주와 평등

- 아이와 평등하게 교류하라.

자녀교육을 하기에 좋은 시점을 찾으려면 먼저 부모가 아이의 좋은 친구가 되고 아이를 평등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 아이와 대화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함께 어떤 일을 하는 것이다. 아이와 소통하려면 부모가 먼저 권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평등한 위치에서 친구 같은 말투로 대화를 한다면 아이와 순조롭게 생각과 감정을 교류할 수 있다. 아이를 존중해 주려면 입으로만 하지 말고 실생활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아이를 존중하려면 먼저 아이를 이해하고 아이의 생각을 바르게 대해야 진심으로 아이를 존중하게 된다. 미국의 어떤 심리학자는 "부모가 잘못했거나 자신이 한 약속을 어겼을 때 아이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면 자존심과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습관도 키워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부모는 아이를 품안에서 풀어 줘 사회를 알게 하고 아이에게 본받을 점이 있으면 배워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부모와 아이가 모두 좋아할 수 있는 활동을 함께 하며 마음껏 뛰어놀면 가족 간의 정이 더욱 깊어진다.

다섯째 주:예술성 개발

-아이는 타고난 예술가이다.

일본의 니혼의과대학 연구소의 연구결과 태아에게 스피커를 통해서 짧은 시를 반복적으로 들려주고 아이가 태어난 뒤에 시를 다시 드려주면 아이의 심장박동수가 빠른 속도로 안정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시를 들려주면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는 곧 아이가 시의 의미를 몰라도 태교를 통해서 시 속의 어휘와 엄마가 시를 읽어 줄 때 음성의 느낌을 기억한다는 뜻이다. 많은 부모들은 신생아의 대뇌는 아무것도 없는 백지장과 같다고 생각한 나머지 대뇌에 숨겨져 있는 놀라운 예술적인 능력을 발견하지 못하고 교육의 적기를 놓치고 만다.

- 예술의 소질을 키워 주어라.

아이들은 부모가 조성한 환경 속에서 자란다. 아이에게 부모는 첫 번째 환경이요, 가정은 두 번째 환경이요, 대자연은 세 번째 환경이다. 아이에게 예술 천국을 만들어 준다는 것은 아이의 마음에 아름다움과 미적감상과 미적 추구를 심어 주는 것이다. 아름다운 환경과 화목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의식적으로 예술에 대한 민감성을 키워 주어야 한다. 대자연을 자주 접하게 해준다. 아이의 적극성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제2학기

Q : 반드시 조기교육을 해야 하는가?

A : 부모는 지식교육과 더불어 아이의 잠재력, 재능, 감성도 개발해 주어야 한다.

Q : 감성교육을 시켜야 하는가? 그렇다면 감성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A : 장기적인 안목으로 아이의 심리상태와 생활력과 같은 비지적요소를 키워 주는 것이 아이의 미래에 더 도움이 된다.

Q : 부모교육은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가?

A : 부모교육이 다루는 내용은 우생학(사람을 유전적으로 개량시키기 위해서 연구하는 학문), 생리학, 위생학, 영양학, 심리학. 교육학, 인재학, 논리학. 사회학에 걸쳐 다양하다. 아이를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려면 부모도 공부해야 한다.

Q : 좌절교육이 꼭 필요한가? 좌절교육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A : 좌절을 바르게 인식할 때 비로소 좌절을 극복할 수 있다. 아이가 좌절을 힘들어 할 때 부모는 인생이 항상 순탄한 것은 아니며 성공의 길에는 종종 고난과 좌절이 도사리고 있다고 말해 주어야 한다. 자신감을 키워주고, 경청하고, 의지력을 단련시켜야 한다.

자녀를 교육하는 것은 부모의 직업이다.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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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블로거 WN1 입니다.
이 코너는 학습에 대한 코칭을 하기 위해 만들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에 대한 초점을 가능하면 맞추려 하겠지만,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들만이 보는 것은 아니구요 부모님들 역시 보셔야 할것입니다.
코칭이라는 단어가 있음을 확인하시구요..
코칭이란것은 답을 제시하기보단 고찰해볼 수 있는 질문을 통해 피코칭자가 답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학습에 있어서 코칭만을 하는것은 무리가 있기에 티칭도 함께 들어갈 것입니다.

아무튼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하구요...

이 글을 보시는 분이 학생이시든 부모님이시든 아니면 학습과 관련된 분이시든 학습코칭과 부모코칭의 글들도 함께 보시면 더욱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도 좋은 일 많이 만드는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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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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