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선생님은 불합리한 사회에 맞서 싸우려면 두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먼저 이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 사회가 원하는 실력이 없으면 이 사회에 맞서 발언하고 행동할 기회 자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유념해야 할 한가지는 사회가 인정한 본인의 능력이 당연히 보잘것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 ‘보잘것없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홍세화 선생님은 이것이 쉽지 않은 싸움이라고 말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갖추면 안주할 수 있고, 안주하려는 자신을 합리화하다 보면 사회에 대한 시각 또한 비판적이기보다 긍정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초심을 망각한 재 그저 현실에 순응하며 개인의 안위만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지난한 싸움을 버텨낼 수 있단 말인가? 홍 선생님의 충고를 계속 이어진다.
‘그래서 지금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物神)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성의 항체를 기르라는 것이다. 그대의 탓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의 인간성은 너무 오염되었다. 물신은 밀물처럼 일상적으로 그대를 압박해올 것이며, 그대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물질의 크기로 비교당할 것이다. 그것에 늠름하게 맞설 수 있으려면 일상적 성찰이 담보한 탄탄한 가치관이 요구된다. 그리고 자기 성숙의 모색을 게을리하지 말라. 자아실현을 위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다. 그리고 성찰 이성의 성숙 단계가 낮은 사회에서 그대는 자칫 의식이 깨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에 앞서 오만함으로 무장하기 쉽다. 만약 그대가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면 죽는 순간까지 자기 성숙의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모두 쉬운 길을 택한다. 그러나 삶은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그 소중한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자유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물신의 품에 안주할 것인가. 다시금 강조하건대, 그것은 일상적으로 그대를 유혹하는 물신에 맞설 수 있는 가치관을 형성하는가와 자기 성숙을 위해 끝없이 긴장하는 가에 달려 있다.’ - <생각의 좌표>중에서  17-18

“조급해하지 말아야 돼. 초조함은 남과의 비교에서 비롯되는 거야. 남은 중요하지 않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얼마나 다른지, 또 내일은 얼마나 발전할 것인지 나 자신을 비교하고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지.”
“실패하는 것이 중요해.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아주 멋지게 실패하는 거야. 더 멋들어지게 실패하기 위해서는 더 많이 부딪쳐보아야겠지?”(홍세화와 저자의 만남에서)  22

종종 사람들이 언스쿨링에 대해 물어볼 때 부모님은 이런 답변을 내놓곤 한다.
‘언스쿨링은 배움의 주체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아이들 자신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이들은 각자 다양한 잠재력과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아이들 자신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부모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부모들은 끊임없이 호기심을 불어넣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면서 아이가 스스로 터득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돕기만 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무언가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나타낸다면, 부모는 아이가 그쪽으로 더 가까이, 더 깊이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거죠. 기회를 열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기에 푹 빠져들어 많은 것들을 즐겁게 배우게 된답니다. 학습의 주체가 되어가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언스쿨링에서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진학이 최종적인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단순한 ‘진학’보다는 평생 무엇을, 왜, 어떻게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인생의 소명을 찾아나가는 ‘진로’가 더 더욱 중요한 것이지요. 부모는 아이가 본인의 진로를 탐색하는 과정을 조용히 옆에서 돕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진학이 필요하다면 차후에 대학을 선택해서 공부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대학은 필수 조건이 아니라 선택 사항일 뿐입니다.’
언스쿨링은 기존 학교로부터 단호하게 돌아선다. 배움은 교실에서만, 교과서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언스쿨링은 온 세상이 학교요, 모든 사람이 선생님이라고 말한다. 어디에 가든,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보든, 거기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그렇게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관계와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진정한 배움이라는 것이다.  52-53

사진작가 배병우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면서는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이 여행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예술은 절대로 교육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 개의 길을 여행하고 만 권의 책을 읽으면 예술가가 될 수 있습니다.”  155-156

이제는 공부의 정의를 바꿔야 한다. 1등이 되는 법이 아닌 부끄러움을 아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인간으로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 정도(正道)를 익혀야 한다.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성찰하는 법을 배우고, 주입식 교육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공부할 권리도 마땅히 누려야 한다. 그리하여 죽은 공부가 아닌 살아 있는 공부, 복종하는 공부가 아닌 스스로 길을 찾아나가는 공부가 이루어져야 한다.  255

사람들의 인식이 변해야 제도도 바뀔 것이다. 그러나 어디 사람들이 쉽게 생각을 바꾸겠는가. 시험으로 배움을 측량하고, 성적으로 공부를 평가하려는 행위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럼에도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는 무엇인지, 내 삶에 필요한 공부는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평생 나만의 공부를 지속해나갈 수 있다면, 공부를 통해 배움을 얻을 수 있다면, 배움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다면, 배움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다면, 마침내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256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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