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다고 하면 보통 '모르는 것에 대해 알아가는 것' '새로움을 경험하는 것'등 이런 유사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먼저 알게 된 이들에 대한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들에 의해 좀 덜 어려운 과정을 거칠 수 있다. 그렇다고 노력이 필요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시말해 배움은 노력을 통해 지식을 얻게 되는 과정을 의미하게 된다.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지식들이 자신의 생각과 이전 경험들과 어우러짐으로 지혜로 이르는 과정을 총괄하게 된다.

이상의 표현들은 누구나 들어왔었고 수차례 이상 접했을 내용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배움에 대한 이 정도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런데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우리는 가장 많이 이해하는 사람 보다는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해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은 공허하게 비워놓은 채, 오직 기억을 채우기 위해서 분투한다'(수상록I)

'나는 기꺼이 교육의 부조리라는 주제로 돌아가겠다. 우리의 교육 목적은 우리를 행복하고 현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머리속에 무엇인가를 집어넣는것 뿐이었다. 그런 목적이라면 성공한 셈이다. 교육은 우리에게 미덕을 추구하고 지혜를 포옹하도록 가르치지 않았다. 단지 기원이나 어원 같은 것들만 각인시켰을 뿐이다.'(수상록II) 라고 지적하였다.


1500년대 사람, 1580년에 완성한 <수상록>은 500년이 넘게 지나온 이야기지만 지금 우리의 배움에 대한 생각없음과 비뚤어진 목표에 대해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어느 시대에나 오류는 있어 왔고, 잘못된 적용이나 무지는 있어 왔다.

그 당시에도 무지에 의한 비뚤어진 교육에 대한 생각들은 있어 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당시 세태에 대해 몽테뉴는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과거의 발명과 발견들을 통해 그리고 시행착오들을 통해 인류는 진보되어 왔다는 점을 생각해 볼때 배움에 대해서는 진보되어가지 못한 것이 중요하다.


현 시대에는 이전보다 더 심한 비뚤어진 교육이 자행되어 있다는 점은 우리가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중의 하나이다.

배움에 관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곳은 첫번째는 가정이고 두번째는 학교이다. 두번째의 경우는 공교육과 사교육 모두 포함시켜야 할 듯하다.

첫번째인 가정 내에서의 교육도 매우 문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두번째를 고려해 보고자 한다. 물론 가정에서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고 있고 교육의 문제가 학교에서의 교육교육을 더욱 비뚤어지게 하는데 조장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배움은 개인적인 부면이지만 이 시대는 단체의 문제를 먼저 생각한다는 점을 보았을때 학교의 배움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것인다. 몽테뉴의 표현 '오직 기억을 채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현실과 얻고자 하는 의지를 뿌리채 뽑아버리는 현실은 우리에게 경각심 보다는 성공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현명한 판단으로 느끼게 하고 있다. 


서두에서 언급한 배움에 대해서 우리 대부분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런 비뚤어짐을 가진 것은 배움 자체를 매우 수동적으로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지식을 들어왔다. 청소년 시절에 단 한번도 주어지는 지식에대해 의문을 품어본적이 없는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의문이 들어도 순간일뿐 염두에 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특히 불교, 유교적인 스승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상은 우리를 더욱 조아리게 만들었지 우리가 하나의 개체로서 고민을 하고 생각을 통해 질문하게끔 만들지 못했다.

그렇기에 앉아서 받아쓰면서, 1은 1이고, 2는 2이다라는 말씀을 받아들이기에 바빴고, 그것들에 대해 기억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만 중히 여기게 된 것이다.

물론 하나의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위의 이유는 우리의 사고를 정지시킨 세뇌로써 가장 큰 작용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배움의 질병을 안고 있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파괴>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콩나물은 부드러운 만큼 아주 민감해요. 물을 자주 주지 않으면 금방 잔 뿌리가 많아져서 못쓰게 됩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키우는 것도 콩나물을 키우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내면의 개안(開眼)은 그래요. 시루에 놓인 콩나물이 하루에 몇 번씩 주는 물을 먹고 자라는 것처럼, 콩나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물이 꼭 필요한 것처럼, 여러분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책에서 얻는 지식이 꼭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콩나물은 절대로 물을 껴안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콩나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물이 꼭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물이 콩나물 사이로 설렁설렁 지나가게 만들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콩나물이 물을 안고 있다면, 금방 썩어버립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는 지식을 안고 있으면 여러분 자신이 썩어버려요. 

적어도 인간의 내적인 성장을 염두에 둔 지식은 그렇습니다. 콩나물의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어요. 아무리 아까워도 그냥 설렁설렁 지나가게 내버려둘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콩나물 사이로 물이 설렁설렁 지나기지만 때가 되면 자라 있는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자라는 것입니다.

마치 콩나물이 자신의 성장을 위하여 물이 지나가는 그 순간에 충실하듯, 여러분도 순간순간의 느낌에 충실하라는 말이었습니다. 변화는 순간이지만, 그 과정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207-209)

저자의 콩나물에 대한 예는 우리에게 배움에서 기억이 지대한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님을 적절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

콩나물이 자라기 위해 물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 물을 잡고 있으면 썩어버리게 된다. 우리의 배움에 지식에 대한 내용이 필요하지만 그 지식만이 모든 것인양 잡고 있으려하면 기억일 뿐이지 배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배움이란 것은 콩나물이 물을 지나가게 하면서도 잘 자라나가듯이 지식들을 통해 기억이아니라 그러한 지점과 자신의 체험적 사고와 경험들을 통해 그리고 이전의 지식들과의 어울림들을 통해 자신이 성장해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마지막 줄에서처럼 '그 과정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며, 배움은 듣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을 자신이 체험하여 자기의 것으로 체득, 체화해 나가는 과정이 매우 큰 역할을 차지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콩나물이 자라는 것이다. 공부에 대한 기술보다는 몸으로 부딪히는 과정 즉, 스스로 경험해 나가는 과정 그것이 우리의 배움이라는 점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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