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 해당되는 글 542건

  1. 2018.11.07 책과 사람이 만나는 곳 동네서점 - 다구치 미키토 펄북스 2016 03300
  2. 2018.10.31 우리는 독서모임에서 읽기 쓰기 책쓰기를 합니다 - 남낙현 더블:엔 2018 03800
  3. 2018.10.24 대리사회 - 김민섭 와이즈베리 2016 03300
  4. 2018.10.17 카메라, 편견을 부탁해 - 강윤중 서해문집 2015 03300
  5. 2018.10.10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 백창화 김병록 남해의봄날 2015 03300
  6. 2018.10.03 철학에세이 - 조성오 동녘 2005 03100
  7. 2018.09.26 나무를 심은 사람 - 장 지오노 두레 2006 03860
  8. 2018.09.19 (자유로운 아이들) 서머힐 - A. S. 닐 아름드리미디어 2006 03370
  9. 2018.09.12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 토니 마이어스 앨피 2005 04160
  10. 2018.09.05 지역을 살리는 협동조합 만들기 7단계 - 그레그 맥레오드 한살림 2012 03300
  11. 2018.08.29 동화 넘어 인문학 - 조정현 을유문화사 2017 03100
  12. 2018.08.24 일의 발견(PART THREE) - 조안 B. 시울라 다우출판사 2005 03900
  13. 2018.08.22 일의 발견(PART TWO) - 조안 B. 시울라 다우출판사 2005 03900
  14. 2018.08.20 일의 발견(Part One) - 조안 B. 시울라 다우출판사 2005 03900
  15. 2018.08.15 공부 공부 - 엄기호 따비 2017 03370
  16. 2018.08.10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 니체 책세상 2001 04160
  17. 2018.07.25 공부중독(E-book) - 엄기호, 하지현 위고 2015 03300
  18. 2018.07.19 교사반성문 - 여행은 참교육
  19. 2018.07.18 교사 반성문 - 지봉환 정한책방 2018 03370
  20. 2018.07.11 인간실격 - 다자이 오사무 민음사 2004 04830
  21. 2018.07.04 쇼펜하우어 문장론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훈출판사 2005 03850
  22. 2018.06.27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2016 03840
  23. 2018.06.20 여행자의 독서 : 두번째이야기 - 이희인 북노마드 2013 03810
  24. 2018.06.13 경제, 알아야 바꾼다 - 주진형 메디치 2017 03320
  25. 2018.06.06 나의 친애하는 적 - 허지웅 2016 문학동네 03810
  26. 2018.05.30 열한계단 - 채사장 웨일북 2016 03100
  27. 2018.05.23 조난자들 - 주승현 생각의힘 2018 03300
  28. 2018.05.16 ​ 여행의 문장들(여행자의 독서, 세번째 이야기) - 이희인 2016 북노마드 03810
  29. 2018.05.09 남쪽으로 튀어 - 오쿠다 히데오 은행나무 2006
  30. 2018.05.02 앨저넌에게 꽃을 - 대니얼 키스 동서문화사 2006

책을 사지 않아도 상관없다. 아무튼 손님이 읽고 싶은 책이 그곳에 놓여 있는 계기와 상황을 서점원이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POP는 그것을 연출하는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이토 씨는 잡지 판매대를 아침, 저녁으로 다르게 새로 진열했다. 서점을 찾는 손님의 연령층이 아침, 저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32-33


이미 잘 팔리고 있는 책을 매입하는 것이 아니라 팔릴 수 있는 책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 매장에서 일구는 단계를 밟지 않은 것은 진짜 판 책이라고 할 수 없다.  46


서점원이 직접 책을 읽고 매장에서 가장 큰 효과를 기대할만한 시기를 가늠해 어떤 책에 어떤 의견을 첨부해서 홍보를 전개할지 고민해야 한다. .. 페잔점 매장에서 팻말과 POP를 동원해 소개하는 책은 우리가 팔고 싶은 책이다. 만일 그럴 생각이 없는 서점에 POP만 가져댜 놓는다면 그곳 서점원에게는 자신들이 팔고 싶은 책이 아니라 '팔아주는 책'이 되어 버린다.  47


차근차근 일궈서 우리 서점에서는 그 책이 달리 보이는 POP를 매장에 걸면 어떻게 될까. 정말 책이 움직인다.  48


책 한 권을 팔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각해야.. 서비스도 신경 쓰고 서가 관리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그야말로 손님 입에서 한 번 "이건 아닌데."라는 말이 나오면 그 손님은 더 이상 서점에 오지 않는다. 그래서 매장 관리에 항상 신중을 기해왔다. 그 일을 게을리한 순간 동네 서점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 어떻게 손님에게 지지받을까, 한 권 한 권 어떻게 팔까. 오로지 그 생각뿐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런 시간이 그 무엇보다 즐거운 시간이다.  57


단순히 책을 진열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팔리지 않는다. 이거다 싶은 책에 어떠헥 시간과 열정을 쏟을까. 그 책을 어느 정도의 시간 간격으로 팔지, 시간의 추세를 생각해야 한다. 손님이 그 책과 어떤 식으로 만나면 그 책의 매력을 최대한 느낄 수 있을까. 그것은 서가를 만드는 서점원이 추측해야 한다.  64


사람들로부터 "책을 파는 즐거움이 뭐예요?"하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늘 느끼는 일인데, 책은 읽은 사람에게 상호작용을 유발해 변화를 일으킨다. 꼭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싶다는 생각은 없지만 독자인 손님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만한 책을 제공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 손님이 어떤 책이 필요할지 상상해서 스스로 책을 만날 수 있도록 여러 길을 만드는 것이 서점의 역할이자 즐거움이다.  69


서점의 개성에는 그 동네의 개성이 녹아 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한다. 그 동네 사람들이 어떤 책을 얼마나 사느냐로 서점에서 우선하는 책이 다랄지고 구색을 갖추는 상품의 폭도 넓어진다. 그 지역만의 서가가 만들어지는 것이고, 동네가 서점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78-79


지금은 데이터로 반품이 자동으로 가능하다. 며칠 팔리지 않으면 며칠 후에 반품한다고 데이터화되었다. 이래서는 서점원에게 한 권 한 권 그 책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팔리는 이유와 팔리지 않는 이유를 생각할 필요도 없어진다. 데이터가 매장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없도록 만들어버릴 우려가 있다. 그리고 데이터의 조종을 받을면 책은 결국 그것들이 '팔아주는' 것이 되어 버린다. 거기에 서점원의 판단이 개입할 수 없어서 '판다'라는 의식이 사라진다. 이래서는 일이 재미있을 수 없다. '책이 좋다'는 단순한 생각이나 데이터에 휩쓸려서가 아니라 자기 생각으로 책을 팔고, 팔리면 그 이유를 파악한다. 매장에서 일어나는 일에 늘 주목하고 늘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114


- 홋카이도의 이와타 서점에는 전국에서 주문이 쇄도하는 '1만 엔 선서' 서비스가 있다. 서점 주인 이와타 씨가 손님 한 명 한 명에게 진지하게 선정한 '책'을 1만 엔어치 골라 담아주는 독자적인 기획인데, 책을 고르기 전에 주문한 사람의 가족구성과 직업, 지금까지 살면서 즐거웠던 일, 슬펐던 일, 읽은 책의 평가 등에 관한 대화를 나눠 그 사람이 가장 기뻐할 책을 보낸다고 한다.  121


이전에는 가능했는데 이제는 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려도 앞으로 이런 것을 해볼 수 있을까 하며 제안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앞이 보이지 않는, 긴 시간을 두고 생각해야 하는 물음의 답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다.  129


독서의 즐거움은 독자가 직접 책을 선택하는 데서부터 시작 된다. 그렇게 스스로 선택하는 즐거움과 기쁨을 맛보는 것 또한 독서의 일부다.

책을 읽는 이유에는 기능적인 독서, 오락적인 독서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독서는 마음을 일구어 자신 안에서 자라난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생각들을 결실로 수확한다. 독서로 자신이 변화하고, 마음에 새롭게 생겨난 무언가를 키우고, 읽은 내용을 일상과 연결하는 것도 가능하다. 

책 한 권 한 권을 어떻게 만날까. 또 읽고 싶은 책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체험의 축적이 독서에 대한 욕구로 이어진다. 책과의 만남의 장은 어디든 상관없다. 인터넷, 서점의 매장, 텔레비전, 잡지, 어느 누군가의 추천 등 한 권의 책에서 또 다른 책으로 이어지며 읽어보고 싶다는 자극을 주는 계기는 많을수록 좋다. 하나의 흥미와 호기심에서 다른 책으로이어지는 여정을 생각했을 때 그 가능성은 무한하다. 그것이 책의 매력이다.  165


그 서점의 얼굴을 확실히 드러내지 않으면 소규모 서점은 침몰한다.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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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데 있어 너무 소심하고 까다롭게 고민하지 말라. 모든 인생은 실험이다. 더 ㅁ낳이 실험할수록 더 나아진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에린 시노웨이와 메릴 미도우가 쓴 <하워드의 선물> '전환점이란 지금가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라는 일종의 신호인 셈이야.'  26


율곡 이이는 "공부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누구나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97


'양질전환(量質轉化 헤아릴양 바탕질 구를전 될화)의 법칙'이란 게 있다. 양이 증가하면 질의 변화도 가져온다는 말이다.  119


아무리 감추려 해도 글은 그 사람을 닮아 있다. 사람과 글이 어떻게 닮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사람 안에서 나온 것인데.  147


책쓰기의 관점은 읽기, 쓰기에서의 관점과는 다르다는 걸 사과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사과 한 알은 자연의 수많은 변화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때 사과를 바라보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시선이 있다. 

'농부의 시선과 소비자의 시선.'

농부는 사과가 열매를 맺고 익어가기까지 과정을 함께힌다. 벌들이 꽃가루를 퍼트려 수분을 돕고 열매를 맺게 해준다. 병충해에 견디고 비바람을 이기며 사과는 자란다. 농부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맛있는 사과를 생산해낸다. 소비자는 탐스럽게 잘 익은 사과를 고르는 데 집중한다. 이처럼 생산자와 소비자가 바라보는 시선은 전혀 다르다. 

책쓰기는 독자의 시선이 아닌 창조적 행위를 하는 생산자의 시선으로 하는 작업이다. 책쓰기를 통해 한 가지 명확히 깨달은 게 있다.  

책을 쓴다는 건 독자를 향해 내가 경험하고 깨달은 것을 적는 작업에서 시작된다.  175-176


<논어> "애태우지 않으면 알려주지 않는다."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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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대리인간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하며


타인의 운전석에서 나는 세 가지의 ‘통제’를 경험했다. 

우선 운전에 필요하지 않은 모든 ‘행위’의 통제다.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고 깜빡이를 켜는, 그런 간단한 조작 외에는 그 무엇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사이드미러나 백미러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도 그럭저럭 운행할 수 있으면 그대로 두고, 의자의 기울기에도 몸을 적응시켜 나간다. 차의 주인이 자기 몸에 맞춰 조절해 놓은 것들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다. 에어컨이나 히터를 작동시키거나 음악의 볼륨을 조절하는 일 역시 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말’의 통제다. 손님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대리기사는 거의 없다. 차의 주인이 화제를 정하고 말을 건네면 반가이 화답하지만, 그가 침묵하면 나도 묵묵히 운전만 한다. 서로 대화를 시작하더라도 제한적으로 “네, 맞습니다”라는 대답만 주로 하게 된다. 그의 의견이 나와 다르더라도 웨남ㄴ해서는 그저 웃으며 동의한다. 특히 종교나 정치와 관련된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차 주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다. 

마지막으로 ‘사유’의 통제다. 주체적으로 행위하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사유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와도 같다. 처음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맴돌아 답답했지만, 나중에는 그런 대로 편해졌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운전만하면 되었고, 손님이 뭐라고 하든 “네, 맞습니다”하고 영혼없이 대답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타인에게 질문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운전석은 이처럼 한 개인의 주체성을 완벽하게 검열하고 통제한다. 신체뿐 아니라 언어와 사유까지도 빼앗는다. 그런데 운행을 마치고 운전석에서 내려와도 나의 신체는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여전히 ‘대리’라는 단어에 묶여 있었다. 8-9


지금껏 우리를 통제해 온 대리사회의 괴물이 있다. 그것은 이 사회가 만들어낸 견고한 시스템과 마주하는 일이다. 외면하고 침묵하는 것으로는 그 무엇도 나아지지 않는다. 온전한 나로서 사유하고, 또 주변의 또 다른 나를 주체로서 일으켜세워야 한다.  11




몸으로 배운 가치들은 삶의 태도를 보다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무엇보다 타인의 입장에서 사유할 수 있는 연습을 반강제로 시켰다. 그것은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환희와 기쁨이었다. 그래서 ‘지방시’의 어느 장에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되든 육체노동을 반드시 하겠다”고 썼다. 거기에도 덧붙였지만 나는 나약한 인간이기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렵게 배운 삶의 태도를 잃어버릴 것 같아 두렵기 때문이었다.  18-19


책을 덮고 일어나야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있다.  21


나는 대학에서 조교와 시간강사로 존재했던 8년을 ‘유령의 시간’으로 규정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리의 시간’이었다. 온전한 나로 존재하지 못하고 타인의 욕망을 위해 보낸 시간이었다. 실존에 대한 고민은 책상에서 일어섰을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임을, 대학을 그만두고 몇 달의 시간을 허비하고서야 다시 배웠다.  21-22


대학이 구축한 시스템은 그 자체로 하나의 ‘괴물’이었습니다. 학부생, 대학원생, 시간강사로 이어지는 노동력 착취의 구조는 공고하며, 그 어떤 기업보다도 신자유주의적입니다. 사무실, 연구소, 기숙사, 대학의 어느 부처에 가든 재학생 근로 조교들이 있습니다. 4대보험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연봉 천만 원 남짓한 시간강사들이 강의의 절반을 책임집니다. .. 그뿐 아니라 학생들의 밥을 퍼준 이도, 강의동의 환경미화와 경비를 책임지는 이도, 모두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 이처럼 여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값싼 노동으로 대학 행정과 강의의 최전선이 지탱되고 있습니다.  24


교수들은 종종 학생들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데 소극적이라고, 그래서 주체적이지 않다고 비판하곤 한다. 그러나 학생을 주체로 대하지 않는 자신의 태도에 문제가 있음은 알지 못한다.  33


타인의 운전석에서 내리며, 나의 신체를 되찾는다. 무엇보다 사유하고 발화할 자유를 되찾아 온다. 더 이상 상대방의 눈치를 보며 기계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조금씩 주체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데 익숙해져 갔다. 상대방이 말하는 대로 수용하고 긍정하는 간편한 대화의 방식, 말하자면 ‘순응’이 어느새 자연스럽게 몸에 각인된 것이다. 누군가 나를 주체로서 대우한다고 해도 익숙해진 몸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면 어디에서든 주체로서 발화할 수 없게 된다. ‘순응하는 몸’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34


부하 직원은 직장 상사에게 아이디어를 내지 않고, 학생은 교사의 의도에서 벗어난 답을 제출하지 않는다. 아이 역시 부모 앞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털어놓지 않는다. 자신이 주체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부터 시작해 교사,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을의 공간'에서 순응하는 방법을 주로 배워왔다.  35


국가는 순응하는 몸을 가진 국민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 어떤 비합리와 비상식과 마주하더라도 그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 국민이 늘어나기를 바란다. 대신 순응하지 않는 이들을 감시하고 격리해 나가면서 자신들의 욕망을 대리할 '대리국민'을 양산해 낸다. 그러한 국민/개인들은 국가/조직이 얼마든지 간편하게 통치/통제할 수 있다. 

국가 시스템에 효율적으로 통제되면서도 자신을 주체로 믿는, 동시에 사유하지 않고 모든 현상을 바라보는 국민은 지금의 국민국가가 지향하는 '대리사회'의 이상향이다. 그렇게 '대리국민'이 된 이들은 국가를 위한 싸움에 스스로 나선다.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국가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자신들의 국가'를 위해, 그에 순응하지 않는 이들과 몸소 싸워나간다.  35-36


욕망을 대리하는 '대리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불평해야 한다. 그것은 한 개인이 가진 사회적 책무이자 다음 세대를 위한 성찰이다.  36


호칭은 한 인간의 주체성을 대리하는 수단이 된다. 자신을 그 공간의 주체라고 믿게 만드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여러 구조적 문제들을 덮어버린다. 나 역시 내가 속한 공간에는 아무런 무넺가 없고 나는 그 구성원이라는 화상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그 환각에 익숙해질 때, 우리 모두는 '대리'가 된다.  53


스스로 물러서서 나를 둘러싼 구조와 마주하지 못하고 호칭이 주는 환각에 취해 살아왔다.  54


대학은 그 어느 기업보다도 더 기민하게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영합해 왔다.  77


스스로 한 발 물러서서 타인의 눈으로 자신의 공간을 바라보는 일은 절대로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괴물에 잡아먹히지 안은 주체들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행위다. 그러고 나면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행동과 말은 통제되더라도 사유하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을 아주 어렵게 배웠다.  77


순간의 감정으로 욱, 하는 이들보다 오히려 타인의 수고를 농락하는 이들이 더 많다. 양쪽에서 전화를 받아 누가누가 먼저 오나 경주를 시키기도 하고, 자신의 요구에 따라 거리를 내달려 온 이들을 취소 문자 하나로 돌려세우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 일상의 '갑질'이다. .. 대리라는 직함을 달고 있다고 해서 감정까지 대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정규직이라고 해서 그 어떤 비정함에 무뎌질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주체로서 아파하고 주체로서 절망한다.  96


어쩌면 가족은 끊임없이 서로를 위한 '대리'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위해, 너는 나를 위해, 우리는 너를 위해, 그렇게 끊임없이 주체와 대리의 경계를 넘나든다. 나는 아직 모든 가족을 주체로 두는 방법을 잘 모른다. 하지만 아내하고든 아이하고든, 조금은 더 많이 대화하려고 한다. 기꺼이 그들을 위한 대리의 삶을 살며, 그렇게 조금은 더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다.  105


연구자이면서 남편가 아버지도 되어야 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장모님을 1년쯤 모시고 살면 어떨지 아내에게 물었다. 몸도 머리도, 그리고 감정도, 지칠 만큼 지쳤을 때였다. 하지만 아내는 장인어른이 그것을 견뎌낼 것 같지 않다고 답했다. 그러고 보니 차로 20분 거리에 계신 장모님은 일주일에 한 번 오가는 일도 버거워했다. 결국 서울에 계신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사정이 이러저러하니 1년 정도 아이 돌보는 것을 도와달라고 여쭈었다. 어머니는 너희가 맞벌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느냐고 되물어싿. 그러면서 우리가 너희를 키울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엄살이 심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머니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주변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모두 육아를 하는 데 양가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항변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두 세대의 희생이 필요한 시대다. 아이의 부모는 일하고, 은퇴한 조부모가 손자를 돌보고, 이것은 어느덧 한 '집안'이 살아남는 방식이 되었다.  136


사회는 우리를 '대리인간'으로 만든다. 나아가 소중한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한다. 그러한 대리사회의 욕망은 결국 모두를 집어 삼키고, 주체로서의 자리 역시 빼앗는다. 하지만 그러한 고난의 시간을 추억으로 남겨서는 안 된다.  138


아이를 보는 데는 두 사람의 하루를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45


나는 노동자가 자신의 유니폼을 위해 돈을 지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용자는 노동자에게 노동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환경을 제공하고, 노동자는 사용자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 그것이 내가 배운 '노동'의 관계다.  172


기업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노동자의 주체성을 농락한다. 자신을 대신해 내세울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에게 언제나 가혹하다. 그런데 그것은 명백한 위법이나 합법도 아닌, 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방식으로 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법의 틈새를 이용한 '편법'이다. 인턴이라는 정체불명의 직함을 부여하고서는 무임금으로 사람을 부리고, 언제든지 해고하고, 기본적인 사회적 안전망조차 보장하지 않아도, 기업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에 더해 국가/정부는 기업을 위한 법안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간다. 결국 노동자는 노동 현장의 주체가 아닌 대리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매장의/학교의 주인처럼 일하라'는 수사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이것은 정말이지 파렴치한 역설이다. 노동자의 주체성을 강탈하는 동시에 그 빈자리에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것이다. 그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자신을 주체로 믿는 대리가 된 노동자만이 존재한다. 어쩌면 '열정 착취'보다도 한 단계 진화한 방식이다. 노력뿐 아니라 행복과 만족까지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영혼 착취'라고 규정하고 싶다. 

우리 시대의 노동은 '대리노동'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의 주체이면서, 또한 주체가 아니다 대리운전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동네 마트에서도, 장례식장에서도, 그 어느 노동의 공간에서도, 우리는 노동자가 아닌 '대리인간'으로서만 존재한다. 지금 이 사회에서 타인의 운전석보다 나은 공간이 얼마나 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173-174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을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또 다른 을이다. 반드시 폭언이나 폭력을 수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전쟁의 수행자가 된다. 내 주변의 목소리를 외면하거나 그와 나 사이에 선을 긋는 것 역시, 갑의 욕망을 대리하는 행위인 것이다.

분노는 주변의 을이 아닌 저 너머의 갑을 향해야 하고, 공고하게 구축된 시스템에 닿아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을은 계속해서 도원되고 희생될 것이다.  183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조직을/사용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먼저 고민하는 것이다.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195



화면을 바라보는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즐겁다.  211


타인의 즐거움을 보며 대리로서 즐거워야 한다면, 역설적으로 나는/우리는 지금 그만큼 즐겁지 않다는 것이다. 현실이 만족스럽다면 남들이 먹고 노래 부르는 것에 지금처럼 필요 이사으로 열광할 이유는 없다. ...

이전에는 출연자들이 외국을 배경으로 평생 먹을 일이 없을 것만 같은 이국적인 음식을 먹고 즐겼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주변의 맛집이나 거리로 간다. 평범한 냉장고에서 누구나의 집에 있을 법한 재료를 꺼내 몇 분 만에 요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일상의 공간에까지 이제 그들은 침투했다. 그리고 익숙함을 무기 삼아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묻는다. "우리는 이렇게 즐겁고 행복한데, 너도 그렇지?"

그들은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즐거워하고, 우리는 그들을 지켜본다. 그러면서 삶의 고단함과 절박함을 잠시 잊는다. 익숙한 공간이 재현되며 이전보다 더욱 주체가 되어 함께 그 즐거움에 동참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대리만족은 오래가지 않는다. 곧 누구에게도 대리시킬 수 없는 허탈함이 찾아온다. 특히 자신을 둘러싼 사회구조에는 아무런 무넺가 없고, 남들처럼 즐거울 수 없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기게 된다.  212


'힐링'이라는 단어의 소멸 이후 '분노'와 '혐오'가 우리 사회를 뒤덮었다. 개인들은 이제 더 이상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둘러싼 구조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213


대리사회의 괴물은 여전히 개인들이 그 분노를 온전히 발산할 수 없게 만든다. 대신 대리만족의 기제를 계속 내보내면서, 행복하지 않은 개인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마취되고 나면 개인의 분노는 자신을 둘러싼 구조, 그 괴물에게 향하지 않는다. 대신 주변의 개인이나 스스로를 혐오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더욱 자극적인 마취/환각제를 원하게 되고, 그에 따라 점점 더 강한 쾌락의 기제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아주 잠시 즐겁고, 오래 외롭다.  213-214


현실이 가혹하고 절박할수록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상의 판타지가 강요된다. 처음에는 그것이 공감과 즐거움을 주기도 했지만 이제는 저마다에게 외로움을 주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분노를 토로하는 개인들도 많아졌다. 아마도 곧 노래와 음식을 넘어 또 다른 대리만족을 주는 무언가가 새롭게 등장할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다시 열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리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개인들은 다시 다양한 방식으로 분노할 것이다. 다만 그 분노가 개인을 향한 혐오가 되어서는 안 되고,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어서는 더욱 안 된다. 익숙한 공간에까지 이미 침투한 대리사회의 괴물에게 온전히 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강요된 환각에서 깨어나 온전한 나로서/우리로서 '즐겁게' 싸워나가야 한다. 그러면 외롭지 않을 것이다.  214-215



사람의 인연은 쉽게 끊을 수 없으니 누군가 먼저 용기를 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곧 잊고 있던 선을 기억해 내고 서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227



 - 운전을 시작하면 손님은 가족에게 전화를 한다. 그러지 않더라도 곧 전화가 오곤 한다. 그런데 "대리 불러서 가고 있어"라고 하는 이들이 있고, "대리 오셔서 가고 있어"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부르다'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고, '오시다'의 주체는 타인이다. '(내가) 대리를 불렀어'와 '(대리가) 왔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가끔은 '대리...'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불렀어'하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 망설임은 아마도 상대방을 주체로 상상하기 위한 시간일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주체의 언어로 말하는 데 인색하다. 별것 아닌 말의 습관이라 할 수 있겠지만, 상대방을 동등한 주체로서 대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가 된다. '대리 오셨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보이는 그 삶의 태도에 대해 순수한 존경을 보낸다.  238


사실 노동의 본질은 '대리'다. ... 과정의 수고로움은 잘 드러나지 않고 결과만이 남는다는 점에서 노동 그 자체는 대개 은폐되기 마련이다.  241



에필로그 - 경계인에게만 보이는 것


사실 그동안 나아가는 법만 배워왔지 물러서야 한다고는 그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 공간에서의 패배를 고백하는 것이고 경쟁에서 도태된다는 의미와도 같다. 무엇보다도 '우리'에서 이탈해 고립되기를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경계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그런 평범한 개인이었다.  250


우리는 모두가 한 사람의 대리운전 기사다. 자신이 그 차의 주인인것처럼 도로를 질주한다. 하지만 조수석에는 이미 누군가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시동을 걸기 이전부터 거기에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것을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그들의 욕망은 내비게이션을 통해 끊임없이 전달되고 개인의 의지는 통제되고 검열된다. 차를 멈추고 운전석에서 잠시 내려, 그렇게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어느 균열의 지점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액셀을 더 강하게 밟는 데만 힘을 쏟는다. 단속 카메라가 보이면 브레이크를 밟고, 경로를 이탈했다는 경고음에 다시 도로로 올라오면서도, 자신이 주체라는 환상에 빠져 계속 운전대를 잡는다. 그렇게 대리사회의 욕망을 대리하는 '대리인간'이 된다. 

대리사회의 괴물은 대리인간에게 물러서지 않는 주체가 되기를 강요한다. '주인 의식'을 가지라고 끊임없이 주문하는 가운데, 정작 한 발 물러서서 자신을 주체로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봉쇄한다. 결국 개인은 주체로서 물러서는 법을 잊는다. 내가 그랬듯 밀려나고서야 자신이 어느 공간의 대리로서 살아왔음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다. 밀려난 개인은 잉여나 패배자로 규정되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대리인간이 들어선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말하자면 우리 사회를 포위한 '대리올로기'의 서사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 누구도 가르쳐준 바 없지만, 결국 우리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야 한다. 밀려나기를 쉽지만 스스로 물러서기는 어렵다. 그것은 공간의 주체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고 절대로 패배가 아니다. 그러고 나면 시스템의 균열이 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그 균열의 확장을 통해, 그동안 자신의 욕망을 대리시켜 온 대리사회의 괴물과 마주할 수 있다. 그때부터는 '사유하는 주체'가 된다. 여전히 행동과 언어는 통제될지라도, 정의로움을 판단하고 타인을 주체로서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강요되는 천박한 욕망을 거부할 용기를 얻는다. 

우리 모두는 경계에 있다. 다만, 한 걸음만 물러설 용기를 가지면 된다 대리인간으로 밀려날 것인지, 스스로 물러서고 다시 나아오는 주체가 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251-252


대학은 세상을 전부가 아닌 조금 특별한 일부일 뿐이다. 나는 대학 바깥에서 얼마든지 '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대학을 나온 몇 개월 동안 몸의 언어로 배웠다.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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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머리에 - 무엇이든 그 실체를 또렷이 봐야 걷어 내는 일도 가능하다


'편견이 없다'는 그동안의 생각은 거짓이었다. 

내 무지와 그로 인한 숱한 편견을 인정하는 것에서 이 책은 시작된다. 나는 가난하지 않아 가난한 이의 한숨을 모르고, 이성애자라 동성애자의 고통을 모르고, 늙지 않아 나이 든 어르신의 외로움을 모른다. 죽음을 부르는 병에 걸린 적이 없어 죽음을 앞둔 이의 두려움을 모르고, 남의 땅에서 일해 보지 못해 이주노동자의 절망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나는 '안다' 또는 '이해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무지와 편견으로 무장한 채 누군가의 삶에 대해 참 쉽게 말하며 살아온 것이다.  4


무엇이든 그 실체를 또렷이 바라봐야 걷어 내는 일도 가능한 것 아닌가.  5


나는 이 책을 '사람여행서'라고 소개하고 싶다.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여행과 닮아서다. 미지의 여행처럼 타인의 삶을 보고 듣고 느끼며 알아 가려했다. 여행에서 자신을 만나듯 다양한 삶의 거울에 나를 비춰 보기도 하고 낯선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 여행이라고 했던가. 오랜 여행에서 돌아오면 내 삶의 자리가 낯설고 새로워 보이는 것처럼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면 가벼비 않은 여운이 가슴 한편을 뻐근하게 했다. 그 울림의 정체는 '변화'가 아닐까. 누군가의 삶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면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나를 보게 된다. 떠나고, 만나고, 돌아고, 변하는 과정이 '사람여행'이라는 단어 속에 오롯이 담길 것 같다.  5




정말 우리는 단 한 번도 차별받지 않았던 완벽한 '주류'일까?



2011년 우리나라는 UN아동권리위원회로부터 '아동의 놀 권리 침해'에 대한 권고를 받은 적이 있다. UN은 우리나라 아이들의 놀 권리를 침해하는 주요 원인으로 사교육을 지목했고 대학 불평등, 대입 시스템 등 공교육 개선 노력을 권고했다.

4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달라진 건 없다.



"놀이가 공부와 다르지 않고, 놀이 안에 공부가 있다"는 오세황 교사의 교육 철학....

"아이들이 인간과 생명을 사랑하며 행복한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양성이 존중받는 정상적인 사회라면 그 행복이 경쟁력이 되지 않을까요."  170



다음 날 저녁, 홍대 거리에서 다시 만난 그에게 물었다.

"감독님에게 예술은 무엇입니까?"

"기존 예술은 경계를 자신은 엘리트이며 관객은 소비의 구조 속에 둡니다. 시간을 투자하고 훈련을 받은 예술가의 독점적 권력이 유지된느 방식이 기존의 예술입니다. 하지만 투자와 훈련이 생략되면 다 같은 것이고 경계는 없습니다. 기성 예술은 보편적 예술성을 독점해 권력화하고 이익을 추구하고 있지요. 일상에 예술이 존재합니다. 일상 그 자체가 예술은 아니지만, 예술적 결단을 할 때 누릴 수 있는 것이 예술입니다. 저는 궁극적을 없음(가난)의 예술을 지속하고자 합니다. 돈 없이 예술을 누리고 향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없음의 예술인 영화, 그 자체가 의미 있는 예술입니다. 그것은 현재, 지금, 여기 '길거리'와 '광장'의 영화지요. 극장과 자본을 향하지 않습니다. 제 영화는 오늘 못 찍으면 다음날 찍으면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병납니다.(웃음) 전문 배우와 스태프를 꾸리고 시나리오 안에서 치밀한 일정대로 추진한다면 그런 여유는 없겠지요. 보통 사람들은 영화에 나오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누구나 원하면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예술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205-208



그는 거액의 기업 지원금을 반납했다고 말했다.

"큰돈이지만 지원금은 닭 모이 같은 것입니다. 겨우겨우 먹고 살게하는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끊어지는 순간 살 길이 없어지죠."  210



리듬을 탄 이야기는 자신의 영화론까지 불러냈다.

"저는 저의 영화론을 '거석'대 '돌멩이' 이론으로 설명합니다 거석은 가진 자의 문화이며, 힘 있는 부족장을 위한 것입니다. 거대한 만리장성과 피라미드도 그렇습니다. 없는 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지요. 돌멩이로 만든 돌탑은 어떻습니까. 이는 민초들의 공동 작업입니다. 큰 돌 위에 조금씩 작은 돌을 얹는 작업이지요. 민초의 꿈과 기도, 상처가 위에 겹겹이 쌓입니다. 무명의 사람들이 오가며 만드는 돌탑이 예술적 이상향입니다. 정교한 돌탑이 등장하지만 이는 가짜입니다. 예술도 마찬가지지요. 보잘것없는 돌탑은 자율적이고 민중 중심적이며 탈권력적입니다. 얘기는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돈 벌려는 영화에는 우리 주위의 얘기가 없지요. 어떤 연기자가 가짜인가요? 전문 배우조차 가짜 아닌가요? 아까 노점에서 보았듯이 나는 그들의 친구가 되려 합니다. 내가 너무 잘 나가면 친구가 안 되지요. 가진 게 없다 보니 친구 되기가 오히려 쉬워집니다. 어떻게든 사람들의 얘기를 만들고 보여 주고 싶습니다."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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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은 사람을 닮는다. 한 발짝 들어서면 꿈꾸고 채우고 지켜가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말을 거는 공간이 있다.  55


길담서원이 처음 문을 열 때부터 함께해온 이재성 학예실장. 그는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특히 학교를 바꾸고 교육을 바꿔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이를 위해 "손을 복원해야 한다"고 했다. 옛날 사람들은 자급자족을 통해 모든 걸 창조해내는 존재였는데 지금은 소비자로만 남아 스스로를 위해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손을 복원함으로써 잃어버린 인문학을 복원할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71-72


여행이라는게 자신이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서서 무언가를, 어딘가를 바라보는 지점 아닌가. 속도가 중요한 달리기 세상에서 문득 멈추어야 가능한 게 여행이 아닌가.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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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봉오리는 피어나고 있다

우리는 사물이 실제로 움직이며 변화하고 있는데도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변화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66)



꽃 : 봉오리가 피어오르기까지의 변화

시계 : 시침의 변화

우주 : 별의 탄생에서 소멸하는 변화

지구 : 대륙이동설에 입각한 대륙의 변화

생물 : 무수한 진화과정

인간 : 원숭이에서 인간으로의 변화. 네발에서 두발로의 변화. 노동으로 인한 언어의 발생

사회 : 공동생산에서 계급사회 봉건제로 다시 현재의 사회로

이러한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즉 현재는 과거와 똑같고 미래도 현재와 똑같다고 생각한다면 새로운 사물이 발생하거나 본래 있던 사물이 변화하여 다른 것으로 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70)



사물에는 정지 상태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물론 있습니다. 달걀은 부화해서 병아리로 변화하지만, 병아리로 변화하기 전의 달걀은 어디까지나 달걀입니다. 사물은 끊임없이 운동, 변화하지만 동시에 일정한 단계에서는 근본적 성격이 변화하지 않으면서 일정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즉 질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지요.(70)



사물은 자체 운동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서 질적 안정성을 가지면서 정지 상태를 유지하지만, 그것은 상대적일 뿐 절대적으로는 끊임없이 운동, 변화하는 과정에 있습니다.(71)



변증법 - 사물이 운동하는 과정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모순으로 인해 자신을 부정하게되고, 다시 이 모순을 지양함으로서 다음 단계로 발전해 가는 논리적 사고법(백과사전)

변증법과 형이상학

모든 사물은 관련되어 있고 변화하고 있다는 입장에 선 철학적 견해를 ‘변증법(dialetics)’이라 부른다.

사물의 상호 관련성을 부인하여 사물을 고립적으로 보고, 사물의 운동, 변화를 부인하여 고정적, 정지적으로 보는 철학적 견해가 있다. 바로 ‘형이상학(metaphysics)’이다.(72)



창과 방패 이야기

변화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물 내부에 있을까요, 외부에 있을까요?(75)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사물 내부에 있습니다.(76)



연못에 돌을 던지면 물결이 일어나는 것은 돌의 영향도 있지만 물이 물결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달걀이 병아리가 되는 것은 그 내부에 병아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정란은 아무리 외부적인 요인을 가져와도 병아리가 될 수 없는것처럼.

사회 발전이라는 변화에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요인은 지리적 요인이나 기후적 요인 같은 사회 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내부에 있는 발전의 가능성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사물은 변화하며 그 변화의 근본 원인은 사물 내부에 있습니다.(78)



사물이 운동, 변화하는 근본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물 내부에 있는 내적 모순(矛盾)’입니다.

모순이라는 말은 중국의 고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모(矛)는 창이라는 뜻이고 순(盾)은 방패라는 뜻입니다.(79)



자신의 무지와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는 서로 대립하는 대립물이면서 상대방을 각각 자기 존재의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

상호대립하는 두 사물이 상대방이 없으면 자신도 존재할 수 없는 관계(이를 상호 의존 관계라고 말합니다)로 결합되어 있는 것을 ‘대립물의 통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물의 통일’이 바로 철학에서 말하는 모순입니다. 즉 모순이란 한편으로는 상호 대립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 의존하는 관계로 통일되어 있는 두 사물의 관계입니다.(82)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모르고 있음을 의식하고 동시에 이를 알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 비로소 공부하는 것이다.

달걀 : 달걀이면서 달걀이 아닐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 모순의 투쟁을 통해 달걀이 병아리로 변화한다.

사람이 왜 죽는가? 생명과 죽음이라는 두 대립물의 통일이며, 내적 모순. 죽음이 생명을 극복했을 때 사람은 죽는다.

상품 : 사용가치와 교환 가치라는 두 대립물의 통일에서. 이 모순에서 상품이 화폐로 변화한다.

외적 원인도 사물의 변화에 영향을 미칩니다.(88)



내적 모순은 변화의 근거이고 외적 원인은 변화의 조건이며, 외적 원인은 내적 모순을 통해 작용합니다.

변화의 근거란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변화가 일어나는 , 바꾸어 말하면 그것이 없는 경우 결코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 없는 근본 원인입니다.

이에 반해 변화의 조건이란 변화의 근거가 있더라도 거기에 이러이러한 조건이 가해지지 않으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부차적 원인을 말합니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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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떤 보상도 바라지 ㅇ낳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잊을 수 없는 한 인격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   9



아주 단순하게 자신이 할 일을 고집스럽게 해 나갈 뿐이었다.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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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서문

 

<자유로운 아이들 서머힐>A. S. 닐이 선구적인 자치 자유학교인 서머힐을 설립하고 운영해온 50년의 세월을 되돌아본 책이다. 8

 

서머힐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학교를 아이들에게 맞출 수 있는 구조를 갖추려고 했다는 점이다. 10

 

 

닐과 서머힐

 

목표는 유년기와 청소년기 동안에 완전하고 건강한 감정과 개인의 역량을 키워내는 것이었다. 닐은 아이들이 이런 완저함을 성취하기만 하면, 학문에 필요한 것들을 배우려는 동기는 저절로 가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성장으로 이끄는 열쇠는 아이들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에게 맘껏 놀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이었다. ..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한 아이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 14

 

다른 학교에서는 교육과정의 한 부분으로 가르치는 많은 것들을 서머힐에서는 일상생활의 과정 속에서 다루어나간다. 19

 

따뜻한 마음, 낙관주의, 독립심 그리고 자립성은 서머힐에서는 전염병처럼 쉽게 옮아가는 자질이다. 서머힐의 구조는 아이들을 자립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가장 훌륭한 가족이 그러하듯이 서로에 대한 책임감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21

 

 

들어가는 말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자치, 수업에 들어오거나 들어오지 않을 자유, 필요하다면 며칠, 몇 달, 몇 년이라도 놀 수 있는 자유 , 종교나 도덕이나 정치를 막론하고 모든 교화로부터의 자유, 성격 틀에 맞춰 찍어내기(character oulding)로 부터의 자유. 25

 

학생들과 교사들 사이를 나누는 장벽은 필요 없다. 그런 장벽은 아이들이 만드는 게 아니라 어른들이 만든다. ...

독단적인 권위는 아이에게 평생토록 지속될 열등감을 심어준다. 26

 

아이는 작고 나는 크다. 왜 나는 나보다 작은 아이를 때리고 있는가? 27

 

아이의 무례함은 나를 그 아이의 수준으로 내려버렸다. 그것은 궁극적인 권위로서의 나의 위엄과 지위를 훼손했다. 28

 

서머힐에는 세대 간에 차이가 없다. .. 열두 살짜리 여자 아이가 교사에게 그의 수업이 따분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서둘러 한마디 덧붙이자면, 교사 역시 어떤 아이에게 넌 형편없는 말썽꾸러기야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유는 양쪽에 다 적용되어야만 한다.

교육은 개인적이기도 하고 사회적이기도 한 아이들을 길러내야 한다. 자치는 분명히 그것을 해낸다. 28-29

 

어떤 교사도 북을 시끄럽게 두드리는 아이를 치유할 권리는 없다. 꼭 이루어져야 할 유일한 치유는 바로 불행을 치유하는 것이다. 30

 

문제아는 불행한 아이다. 그 아이는 자신과 전쟁 중에 있다. 그 결과 그 아이는 세상과 전쟁을 벌인다. 31

 

 

서머힐의 사상

 

활동적인 아이들을 책상 앞에 붙들어 앉혀놓고 대개는 쓸데없는 과목들을 공부하게 만드는 학교는 분명 나쁜 학교다. 그런 학교를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만 그 학교는 좋은 학교다. 그리고 돈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 문명에 잘 어울리는 유순하고 창조성 없는 아이들을 바라는 창조성 없는 시민들에게도 그 학교는 좋은 학교다. 35

 

서머힐은 어떤 곳인가? 먼저, 수업은 아이들의 선택 사항이다. 아이들은 수업에 들어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원한다면 몇 년 동안 걔속 수업에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 시간표는 있지만 그것은 교사들의 시간표다.

보통은 나이에 따라 학급을 편성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들의 관심사에 따라서 학급이 편성되기도 한다. 우리에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새로운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법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36

 

인간은 결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어느해 봄 나는 몇 주에 걸쳐 감자를 심었다. 그런데 6월 들어서 그 감자들 중 여덟 포기가 뽑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야단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나의 그런 행동은 권위주의에 젖은 사람의 행동과는 다르다. 나는 단지 감자를 문제 삼았지만 권위주의에 빠진 사람은 선과 악이라는 도덕 문제까지 끄집어낼 것이다. 감자를 훔치는 건 나쁜 짓이라고 나는 말하지 않았다.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내 감자의 문제로만 삼았다. 그건 내 감자이므로 다른 사람은 그 감자에 손대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그 차이를 분명히 하고 싶다. 42-43

 

자유로운 아이들은 쉽게 남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다. 44

 

강조할 것은 아이들이 어른들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아홉 살 난 아이가 공놀이를 하다 유리창을 깨면 나한테 와서 그 사실을 말할 것이다. 그 일로 내가 호통을 치거나 혹은 부도덕한 짓이라고 분개할 거라는 걱정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는 사실대로 말한다. 그 아이는 유리창 값은 물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훈계를 듣거나 벌 받을까봐 겁낼 일은 없다.

두려움이 없을 때 아이들은 낯선 사람들과 더 쉽게 친해진다. ...

아이가 할 일은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 44-45

 

 

전체회의

 

학교 생활 가운데 자치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우리의 목표는 아이들에게 어떠한 것도 강요하지 낳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유가 제한되는 측면이 있다. 누가 음식을 조리하고 어떤 음식을 조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체회의의 투표로 결정하지 않는다. 새로운 교직원의 채용 문제는 아이들과 공식 협의를 거치지 않는다. .. 학생들에게 자치는 그들의 공동 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상황을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50

 

자치에서 어른들이 하는 역할은 무엇일까? 어른들은 이끌려고 해서는 안 된다. 어느 정도 바깥으로 물러나 있는 재주가 필요하다. 51

 

민주주의란 완벽한 제도가 아님을 나는 인정한다. 다수결의원리가 그렇게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독재가 아닌 다음에야 다른 대안을 찾기는 어렵다. 여러 해 동안 내가 놀란 것은 우리 학교의 소수자들이 다수의 판결을 잘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55

 

 

자치

 

민주주의는 아이들이 투표권을 가지는 나이인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런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선거인 명부에 등록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59

 

아마 우리 민주주의가 민주 정치보다 더 공정할 것이다. 아이들은 서로에 대해 대단히 너그럽고, 아무런 기득권이 없기 때문이다. 59-60

 

자치를 하지 않는 학교는 진보학교라고 불리면 안 된다. 그건 일종의 절충 학교다. 아이들이 자기네 사회 생활에서 자치를 이루어나가는 데 완전한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면, 아이들은 자유로운 게 아니다. 우두머리가 있을 때는 진정한 자유가 없다. 이것은 엄격한 우두머리보다는 자비로운 우두머리에게 더 해당되는 말이다. 활기찬 아이는 모진 우두머리에게는 반항을 하지만, 부드러운 우두머리 밑에서는 오히려 유약해지고 자신의 진실함 감정을 분명하게 느끼지 못한다.

학교에서 자치가 잘 이뤄지려면 나이 든 학생 몇몇이 필요하다. 그들은 평온한 삶을 좋아하며, 악동이 아이들의 무관심이나 반감에 맞서 싸운다. 그들은 표결에서는 지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자치제도를 진정으로 믿고 원하는 아이들이다. 한편 열두 살 이하의 아이들은 자치제도를 잘 운영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은 아직 사회 생활을 영위할 나이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머힐에서는 일곱 살짜리 애도 전체회의에 거의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유치원생들까지 투표권을 가지며 종종 훌륭한 발언을 한다. 62

 

모든 교육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아이들을 나이와 분리해서 대하는 태도다. 64

서머힐은 바깥 세상의 삶에서 도피하지 않는다. 그래서 서머힐은 시대에 앞선 공동체 정신을 가질 수 있고 또 가지고 있다. 삽을 보고 땅도 잘 파지 못하는 형편없는 삽이라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실제로 그 삽을 가지고 도랑을 파는 사람만이 형편없는 삽이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70-71

 

 

놀이와 자율

 

놀이에 대한 이론은 많다. 그 중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론은, 어린아이들이 나중의 삶을 위한 연습 행위로 놀이를 한다는 것이다. 즉 새끼고양이가 털실을 쫓아다니는 것은 미래의 쥐잡기를 준비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것은 새끼고양이가 발로 얼굴을 닦고 몸단장을 하는 데도 어떤 목적이 있음을 전제한다. 또는 그와 달리 동물의 행동에는 장차 신성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신의 힘이 작용한다고 전제하기도 한다. 이런 두 가지 가정에 모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새끼고양이나 강아지가 놀이를 하는 것은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믿어야할 것이다. 아이들의 경우에 그 에너지는 타고난 육체적 에너지인 듯하다.

아동기는 성인기가 아니다. 어린 시절은 노는 시기다. 그런데 어떤 아이든 충분하게 놀지 못한다. 아이 때는 충분히 놀아야 앞으로 일을 시작해 나갈 수 있고 또 닥쳐오는 어려움에도 맞설 수 있다는 것이 서머힐의 이론이다. 74

 

내가 생각하는 놀이는 바로 공상과 관련된 놀이다. 조직되니 게임은 기술과 경쟁 그리고 팀워크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보통 아이들의 놀이에는 기술이 필요 없으며 경쟁이나 팀워크도 거의 요구되지 않는다. 75

 

서머힐에서 여섯 살짜리 아이들은 하루 종일 논다. 공상의 날개를 펴고서. 어린아이들에게 공상과 실재는 아주 가깝게 붙어 있다. 열 살 난 남자 아이가 유령 모습을 하고 나타나면 어린아이들은 좋아라고 비명을 질러댄다. 하얀 침대보를 뒤집어쓴 유령이 토미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유령이 다가오면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무서워하며 비명을 질러댄다.

어린아이들은 공상 속에서 살면서 그 공상을 실제 행동으로 옮긴다, 여덟 살에서 열네 살까지의 남자 아이들은 갱 놀이나 인디언 놀이를 하는데, 늘 사람을 죽이거나 나무 비행기를 타고 하늘 여기저기를 날아다닌다. 어린 여자 아이들 역시 갱 놀이를 하는데 총이나 칼을 쓰지 않는 대신 인신공격 성향이 강하다. 메리의 패거리와 넬리의 패거리는 서로를 싫어한다. 그래서 서로 간에 말다툼과 거친 말이 오간다. 남자 아이들의 경우 상대 패거리는 오직 놀이에서 적일 뿐이다. 그래서 어린 여자 아이들보다는 어린 남자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편이 훨씬 더 수월하다.

공상이 시작되고 끝나는 경계가 어디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어린아이들에게 실재와 공상은 아주 밀접하다. 한 여자 아이가 장난감 접시에 음식을 담아 인형에게 줄 때 그 아이는 잠시라도 인형이 살아 있다고 믿는 걸까? 흔들목마를 아이들은 진짜 발로 생각하는 걸까? 어떤 남자 아이가 손들어!” 하고 외치며 총을 쏠 때 그 아이는 자기 총을 진짜 총으로 생각하는 걸까? 나는 아이들이 자기 장난감을 진짜라고 상상한다고 여기고 싶다. 어떤 감수성 둔한 어른이 끼어들어 그것이 공상임을 일깨울 때 비로소 아이들은 현실 세계로 풍덩 떨어진다.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은 놀이에 대한 생각이 분명히 다른 것 같다. 남자 아이들은 여자 아이들보다 훨씬 많이 논다. 여자 아이들은 놀이 자체보다는 공상 세계에 더 깊이 빠져드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남자 아이들은 거의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남자 아이들은 여자 아이들과 놀지 않는다. 남자 아이들은 갱 놀이를 하고 술래잡기를 한다. 나무 위에 오두막을 짓고 구멍과 참호를 파며 논다. 남자 아이들은 어린아이들이 보통 하는 그런 일을 다 한다. 75-76

 

서머힐에서는 게임을 장려하는지 사람들은 묻곤 한다. 우리는 정말 어떤 것도 장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이들이 모험과 공상으로 가득 찬 게임을 하면서 노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 ..

나는 게임과 놀이를 구별한다. 나에게 축구, 하키 럭비, 야구 등은 진정한 놀이가 아니다. 그런 게임에는 놀이의 상상력이 없다. 자유로운 아이들은 공상 놀이(더 좋은 이름이 없어 이렇게 부르겠다)를 좋하하기 때문에 팀을 이루어서 하는 게임을 피하려 든다. 77

 

놀이라는 제목이 들어간 장에서 아이들의 책에 관해 거론해서는 안되겠지만 어딘가에서는 한 번 언급되어야 할 이야기. 78

 

아이들이 읽는 책을 대체 얼마나 검열해야 할까? 잔인한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가학적인 이야기도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어느 일요일 밤, 나는 학생들에게 모험 이야기를 해주었다. 식인종의 가마솥에서 마지막 순간에 구조되는 장면에 이르자 아이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펄쩍펄쩍 뛰었다. 79

 

아이들의 마음은 어른들의 마음보다 훨씬 더 깨끗해 보인다. 어떤 남자 아이는 헨리 필딩의 <톰 존스>를 읽도고 외설적인 구절을 발견하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아이들을 성에 대한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면 어떤 책에나 있을 수 있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셈이다. 나는 어떤 연령층의 책들에 대한 검열도 단호히 반대한다.

언젠가 학교에 새로 들어온 열네 살짜리 여자 아이가 내 서가에서 <어느 소녀의 일기>라는 책을 뽑아 들었다. 그 아이는 안던니 킥킥 웃어대며 그 책을 읽었다. 여섯 달 후 아이는 다시 그 책을 읽었다. 그러더니 책이 이전보다 재미없다고 내게 말했다. 모르고 읽었을 때는 짜릿했던 것도, 알고 나서 읽으면 시시해지는 법이다.

프로이트가 어린아이들에게도 성욕이 있다는 사실을 밝힌 후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에 대한 연구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그런데 성욕에 관한 책은 여러 권 나왔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자율적으로 자란 아이들에 관한 책을 쓴 사람은 아무도 없다. 80

 

자율은 인간성에 대한 믿음, 즉 원죄는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는 믿음을 내포한다. 자율은 어린 아기가 외부 권위의 강제 없이 자유롭게 사는 권리를 의미한다. 이는 배고프면 밥을 먹고, 그렇게 하고 싶을 때만 개끗한 옷을 입고, 혼이 나거나 볼기를 맞지 않으며, 늘 사랑받고 보호받는다는 의미다 물론 자율도 다른 이론적인 생각들처럼 일반 상식과 결합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81

 

자율은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속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을 의미한다. 자율적으로 아이를키우기 위해서 따로 교육을 받거나 성품을 계발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노인이 된 스코틀랜드의 한 마을에 살고 있는 메리가 생각난다. 메리는 놀랍도록 차분하고 평온한 사람이었다. 결코 안달하지 않았고 호통도 치지 않았다. 메리는 본능적으로 자기 아이들편에 섰다. 아이들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엄마가 자신들을 인정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병아리들을 돌보는 푸근하고 온화한 암탉과 같은 엄마였다. 메리는 남을 소유하려는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을 남에게 베풀 줄 아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81-82

 

아이에게 장난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아이가 혼자 힘으로 도저히 문제를 풀 수 없을 때까지는 어떤 식으로든 아이를 도와주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이 요구하는 대로 모두 주지 말라. 이 문제에서 나는 조금 주관적일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에게 꽤 많은 돈을 빚찐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값비싼 최고급새 경주용 자전거를 보내왔기 때문인데, 나는 그것이 싫다. 일반적으로 말해 오늘날 아이들은 너무 많은 것을 받아서 그만큼 선물의 진가를 알지 못한다. 83-84

 

다른 한편으로 아이들에게 너무 인색해서도 안 된다. 아이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여러분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선물을 하는 부모는 흔히 자기 아이들을 충분하게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보상 심리로 아이들에게 값비싼 선물을 퍼부어 자신들의 사랑을 보여주고자 한다. 84

 

아이들은 음악과 진흙을 좋아한다. 아이들은 계단을 쿵쾅거리며 오르내리고 시골뜨기처럼 소리를 질러대고, 가구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술래잡기를 하다가 지나다니는 중에 고대 로마시대의 골동품인 포틀랜드 꽃병이 놓여 있으면 아이들은 그냥 뀌어넘어갈 것이다. 그것이 뭔지 쳐다보지도 않고.

문명의 폐해는 어떤 아이도 충분히 놀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이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모든 아이들이 어른의 나이에 이르기 전에 이미 어른이 되도록 온실 재배되고 있다는 것이다.

놀이에 대한 어른들의 태도는 지극히 독단적이다. 우리처럼 나이 든 사람들이 아이들의 시간표를 짠다. 9시부터 11시까지 수업하고, 그 후 1시간 반 동안 점심 식사 하고, 다시 오후 3시까지 수업한다. 만약 자유로운 아이가 손수 자기 시간표를 짠다면, 그 아이는 분명히 노는 시간을 길게 잡고 수업 시간을 짧게 할 것이다.

아이들의 놀이에 대해 어른들이 가지는 반감의 근원은 두려움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근심 어린 질문을 골백번도 더 들어왔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하루 종일 놀기만 하면, 도대체 공부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시험에는 합격할까요?” 다음의 내 대담에 수긍하는 부모는 많지 않을 것이다. “당신 아이가 놀고 싶은 만큼 실컷 놀더라도, 이 년만 바짝 공부하면 대학입학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삶의 요소로서 놀이가 지닌 가치를 무시하는 학교에서는 보통 입시 준비로 오 년, 육 년, 혹은 칠 년을 공부하지요.”

그 말 다음에 나는 꼭 이렇게 덧붙인다. “물론 그것은 그 아이가 시험에 합격하고 싶어할 때만 그렇습니다!” 어쩌면 그 아이는 발레리나나 엔지니어가 되고 싶을지도 모른다. 혹은 의상 디자이너나 목수가 되고 싶을지도.

그렇다, 아이의 미래를 두려워하는 마음때문에 어른들은 아이에게서 놀 권리를 빼앗는다. 아니, 거기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놀이를 허용하지 않는 태도의 배후에는 모호한 도덕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아이라는 존재는 별로 좋은 게 아니라는 암시, 청소년들에게 어린애처럼 굴지 마라고 훈계하는 목소리에 담긴 암시가 그것이다.

자신들이 어린 시절에 가졌던 동경과 열망을 잊어버린 부모들, 어떨게 놀고 어떻게 공상하는지를 잊어버린 부모들이 불쌍한 부모들을 만들어낸다. 노는 능력을 상실한 아이는 신체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그 아이는 자기와 사귀려고 다가오는 다른 아이에게 위험한 존재가 된다. 아이들이 원하는 만큼 놀지 못했을 때 어떤 손상을 입는지를 평가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84-86

 

 

일과 정직

 

아이들의 공동체 의식, 즉 사회적 책임감은 적어도 열여덟 살은 지나야 충분히 발달한다. 아이들의 관심사는 당장 눈앞의 것에 있다. 아이들에게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89

 

아이가 지금 놀아야 하는 시기에 자유롭게 지낸다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는 어떤 어려움에도 맞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인생관이 바로 정립된다면 직업이 어떤 것인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90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을 너무 자주 부려먹는다. "메리어느 달려가서 이 편지를 우체통에 놓고 와." 어느 아이든 이렇게 이용당하는 것을 싫어한다. 91

 

아이들 스스로 관심이 일지 않는데, 억지로 관심을 가지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은 시간당 얼마씩 주기로 하고 아이들을 고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과 나는 같은 토대 위에 서게 된다. 즉 나는 내 텃밭에 관심이 있고, 아이들을 가욋돈을 버는 데 관심이 있다. 92

 

건전한 문명이라면 최소한 열여덟 살이 되기 전까지는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지 않으리라는 게 내 의견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열여덟 살이 되기 전에 벌써 많은 일을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이들에게 놀이와 같은 것이며 아마 부모의 입장에서는 비경제적인 일일 것이다. 94

 

좋은 버릇은 일찍이 어린 시절에 몸에 배지 않으면 나주엥는 평생 발달하지 않을 거라는 일반적인 전제가 있다. 우리가 그 전제에 길들여져왔고 또 그 생각이 도전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 전제를 아무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인다. 나는 그 전제를 부정한다.

아이들은 자유 속에서만 자기가 타고난 방식, 즉 좋은 방식으로 자랄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자유가 꼭 필요하다. 다른 학교에서 전학을 온 학생들에게서는 억압의 결과물들을 볼 수 있다. 거짓 공손함과 가식적인 예의를 드러내 보이는 그 아이들은 정직하지 못하다. 97

 

아주 어려서부터 자유롭게 자란 아이는 거짓된 태도를 취하거나 가식적인 행동을 하는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 98

 

아이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두어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아이들을 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98

 

 

문제아들

 

아이의 범죄는 모든 경우에 사랑의 부족에서 연유한다. 100

 

아이는 본래 이기주의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어떤 다른 것보다 중요한 사실이다. 에고가 충족될 때, 우리는 선이라고 불리는 것을 행한다. 에고가 굶주릴 때, 우리는 범죄라고 불리는 것을 행한다. 자기에게 사랑을 베풀어서 자기 에고의 진가를 인정해주어야 할 사회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범죄자는 사회에 대해서 복수한다. 101

 

아이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은 힘에 대한 욕구가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선하다. 사람은 선행을 하기를 원한다.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한다. 증오와 반항은 오로지 좌절된 사랑이요 좌절된 힘이다. 111

 

무엇이 처벌이고 무엇이 처벌이 아닌지를 결정하기는 정말 어렵다. 112

 

사랑은 다른 사람의 편에 서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112

 

 

또 다른 문제들

 

자유로워지면 아이들이 거짓말을 별로 안 한다... 아이들은 대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두려움으로 가득한 가정일수록 아이들의 거짓말은 번성한다. 두려움을 없애면 거짓말도 사라진다. 115

 

나는 거짓말하는 것과 부정직한 것을 구별한다. 여러분은 정직하더라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은 인생의 큰 문제에서는 정직하지만 사소한 문제에서는 가끔 부정직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의도에서 거짓말을 한다. ...

대개 어른들의 거짓말은 이타적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거짓말은 늘 편협하고 개인적이다. 아이에게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이를 평생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115-116

 

 

개인 상담

 

요즘 나는 정기 심리 치료를 하지 않는다. 신경증에 걸린 아이를 치유하는 것은 그 아이의 억눌린 감정을 풀어주는 일이다. 아이에게 정신의학 이론을 자세하게 설명한다거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방법으로는 아이를 조금도 치유할 수 없을 것이다. 점점 더 나는, 아이들이 자유 속에서 자신의 콤플렉스를 풀고 마음껏 지낼 때는 심리요법이 불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134

 

장차 치유사가 되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할 것이 있다. 친구들에게는 심리요법을 사용하지 말라. 특히 가족들에게는 더더욱 위험하다. 미술 교사들은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잦다. "네 그림을 보니까 너는 엄마를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하는구나." 그 그림에는 한 아이가 도끼를 들고 나무를 자르려 하고 있다.

상징을 해석하는 일은 십자낱말풀이처럼 재미있는 게임이다. 그것은 환자에게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한다. 많은 정신분석가들은 이제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꿈을 해석하는 것이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왕도라고 했지만, 프로이트 이론을 추종하는 정신분석가들도 더 이상 꿈을 해석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하튼 교사는 상징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가 심리학을 사용하려 한다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한다. 아이의 꿈을 해석하는 것보다는 아이를 직접 껴안아주는 일이 훨씬 큰 도움이 된다.

그렇다고 교사는 심리학을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는게 아니다.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135-136

 

내가 사용한 방법을 간단히 설명하면, 아이들을 대하는 잘못된 방법과 정반대로 햇다는 것이다. 보통 학교에서 도둑질을 하면 그 아이는 회초리로 맞거나 적어도 도덕적 훈계를 들어야 한다. 나는 도둑질을 도덕과는 무관한 문제로 만들었다. 세 학교에서 도망친 전력이 있는 남자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서머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집에 갈 차비가 있다. 벽난로 위에다 놔둘 테니까, 여기서 나가고 싶으면 이 돈을 달라고 해라." 그 아이는 서머힐에서 절대 도망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내 태도 때문이었을까? 혹은 난생처음으로 자유를 맛본 즐거움 때문이었을까?

성공만 한 것이 아니라 실패도 했다. 드레스덴에 있을 때였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여자 아이에게 상자를 만드는 데 너무 많은 못을 쓴다고 말했더니, 그 아이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당신도 전에 만난 잘난 체하는 선생들이랑 똑같아." 나는 그 아이와 다시는 진정한 만남을 가질 수 없었다. 아홉 살 난 레이먼드에게 용돈을 주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현관문을 훔친 벌로 6펜스의 벌금형이야." 그러자 레이먼드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 사건 전에 나는 레이먼드에게 정신병 증세가 있다는 점을 알았어야 했다. 아홉 살 난 아이들에게 모험담을 들려주던 중, 우리가 발견한 금을 마틴이 훔쳐갓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중에 마틴이 울면서 나에게 왔다. "난 절대 금을 훔치지 않았어." 그 이후로 나는 아이들을 악당으로 만들어서 이야기하는 법이 없다. 139

 

이제 노인이 된 나는 심리요법에 대해 어떤 입장인가? 나는 심리요법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잘못된 결과로 가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심리요법도 나름의 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 프로이트는 아이들을 위한 자유를 믿지 않았다고 나는 확신한다. 프로이트는 가부장주의를 고수했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심리요법을 찾는 이유는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이지 가족들이 신경증에 안 걸리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142

 

 

건강

 

아이들은 에티켓을 문제 삼는 일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하지만 사회적인 예의라고 불릴 만한 문제에 대해서까지 자유로워서는 안 된다. 146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예의범절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이들에게 가르칠 만한 가치가 없다. 기껏해야 그것은 관습의 유물일 뿐이다. 진정한 예의범절은 저절로 우러나온다. 146

 

서머힐에서처럼 아이가 자신의 이기심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게끔 자유로워지면, 그런 이기심은 점점 이타주의로 바뀌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심과 배려로 변한다. 147

 

우유 문제를 다루어보자. 여러 해 동안 우리 학생들은 독일, 오스트리아, 도싯, 웨일스에 있는 목장에서 짠 우유를 직접 받아먹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온 살균 처리된 우유 외에는 전혀 구할 수가 없다. 또다시 문외한은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내가 아는 바로는 저온 살균 처리된 우유는 맛이 없고 발효되지 않는다. 단지 상할 뿐이다. 살균 처리되지 않은 우유를 먹으면 결핵에 걸릴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가난한 아이들이 영양 부족 때문에 결핵에 걸린다. 우리는 늘 전문가들의 손안에서 놀아난다. 148

 

 

성과 남녀공학

 

우리 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을 잘 보냈다. 그들은 자위행위를 했다고 훈계를 듣거나 벌을 받지 않았다. 많은 아이들이 가정에서 벌거벗은 몸에 익숙했다. 대체로 성에 대한 태도가 건강하고 자연스러웠다. 168

 

남녀공학인 유명한 사립학교에서 온 청소년 몇 명에게, 그 학교에서 이성교제가 이루어지는지 물었더니, 그런 일은 없다고 했다. 그 대답에 내가 놀라자, 아이들이 말했다. "가끔 남자 애와 여자 애가 친구로 지내는 일은 있지만, 서로 사귀는 일은 전혀 없어." 나는 그 학교 교정에서 잘생긴 남자 아이들과 예쁜 여자 아이들을 보앗던 터라, 학교가 학생들에게 사랑에 반하는 관념을 강요하고 있으며, 대단히 도덕적인 학교 분위기가 성을 금기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언젠가 어느 진보학교의 교장에게 물었다. "학교에서 아이들끼리 사귀는 경우가 있습니까?"

"아니오, 없습니다." 그가 근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는 문제아를 받지 않습니다."

조건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가끔 사랑할 능력을 상실한다. 섹스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되는 소식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젊은이에게 사랑을 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인간적으로 커다란 비극이다. 168

 

젊은이의 사랑에 반대하는 주장들 중 이치에 맞는 주장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거의 대부분의 주장이 억압된 감정이나 삶에 대한 증오심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들은 종교적이고 도덕적이며 독단적이고 외설적이다. 170

 

 

극장과 음악

 

연기는 교육에 꼭 필요한 부분이다. 연기는 대체로 자기과시다. 하지만 연기가 단순히 자기과시에 그쳤을 때, 서머힐에서는 그 배우를 칭찬하지 않는다. ..

연기자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동일시하는 힘이 강해야 한다. ..

연기는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갖게 하는 방법이다. 177

 

마음대로 생활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면, 율동은 모든 아이들에게 유익할 것이다. 180

 

 

교사들과 가르침

 

교사들은 나무 뒤의 숲을 보지 못한다. 그 숲은 풍성한 삶, 성격틀에 맞춰 찍어내기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교사들 대상의 강연을 할 때, 나는 교과나 규율 그리고 수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거라고 애초부터 말한다. 청중들은 한 시간 동안 쥐 죽은 듯 조용히 이야기를 경청한다. 진심 어린 박수갈채 속에 강연을 마치면 사회자가 질문을 하라고 한다. 그런데 그 질문 가운데 적어도 4분의 3이 교과나 가르치는 문제에 관해서다.

무슨 우쭐한 마음으로 이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나는 교실 벽과 감옥 같은 학교 건물이 얼마나 교사의 시야를 좁게 만들고 교육의 진정한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슬픈 심정으로 말하는 것이다. 교사들은 아이들의 목 위 머리 부분만 다룬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핵심 부분인 아이들의 감정은 그들에게 낯선 영역이 되고 만다.

부모들 역시 학교에서 학습이란 측면이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잘 깨닫지 못한다. 어른들처럼 아이들도 자기가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운다. 상을 주고 점수를 매기고 시험을 보는 것은 모두 온전한 개성 발달에서 어긋난다. 학자연하는 사람들만이 책을 통한 학습을 교육이라고 주장한다.

책은 학교에서 가장 중요성이 떨어지는 도구다. 아이들에게는 읽기, 쓰기, 산수 세 가지면 족하다. 나머지 필요한 것들은 공구, 찰흙, 운동, 극장, 그림, 자유 등이다.

이제 우리는 학교 공부에 대한 개념에 도전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아이들이 수학, 역사, 지리, 과학, 약간의 예술, 특히 문학을 당연히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깨달아야만 한다. 보통의 아이들은 이런 과목들에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190

 

학습을 놀이에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재미있게 한답시고 의도적으로 학습에 놀이를 가미해서도 안 된다. 191

 

아이에게 배움을 강제하는 것은 의회의 법령으로 종교를 강제하는 것과 똑같다. 그것은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192

 

청소년들이 하는 학교 공부의 대부분은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인내력의 낭비일 뿐이다. 그것은 아이들에게서 놀고 놀고 또 놀 권리를 앗아간다. 아이들의 어깨 위에 늙은이의 머리를 얹는 꼴이다. '교육'은 아이들의 동기를 고려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노려는 욕망, 자유로워지려는 갈망, 그리고 자신의 모습대로 사는 법을 모르는 어른들이 강제로 틀에 맞춰 키워내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갈망을 '교육'은 고려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모든 나라가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공들여 학교를 세운다. 하지만 존이나 피터나 이반이, 부모와 교사 혹은 우리 문명의 강압성이 가한 억압 때문에 입게 된 정서적 손상과 사회악을 극복하는 데 학교의 실험실이나 작업실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학교 교과들이 왜 그렇게 규격화되었는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왜 역사는 있고 식물학은 없는가? 왜 지리학은 있는데 지지학은 없는가? 왜 수학은 있는데 시민학은 없는가? 늙은 퍼블릭스쿨 교장의 말에 그 답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이가 그것을 싫어하는 한,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든 아무 상관없다." 193-194

 

사범대 학생들에게 강연을 하다보면, 쓸모없는 지식들로 가득찬 그 젊은이들의 미성숙함에 자주 충격을 받는다. 그들은 많은 것을 안다. 논리에 뛰어나고 고전들을 인용할 줄도 안다. 하지만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에서 그들 대다수는 어린아이 수준이다. '아는 법'은 배웠지만 '느끼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친절하고 유쾌하고 의욕에 차 있지만, 뭔가가 부족하다. 감정적 요소, 생각을 감정에 종속시킬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들이 놓쳐버렸고 또 지금도 놓치고 있는 그 세계에대해 이야기해준다. 그들의 교과서는 성격이나 사랑, 자유, 자기 결정 같은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그러니 책을 통한 지식 습득만을 목표로 하는 체계가 지속되고, 머리는 가슴에서 계속 분리되어간다. 199

 

우리네 교육에서 진정한 행위, 진정한 자기표현은 얼마나 될까? 손으로 하는 작업은 전문가의 감독 아래 접시를 만드는 게 고작이다. 유도식 놀이 체계로 유명한 몬테소리 교육법조차, 아이로 하여금 행위를 통해 배우게 만드는 인위적인 방식이다. 거기에는 창조적인 면이라곤 하나도 없다.

창조자들은 자신들의 독창성과 천재성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도구들을 얻기 위해 자신들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운다. 학습을 강조하는 교실 안에서 얼마나 많은 창조성이 죽어가고 있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200

 

공부는 중요하다. 하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다. 200

 

 

서머힐의 교직원

 

토요일 밤 전체회의에서는 어른들과 아이들 사이의 갈등이 드러난다. 그런 갈등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연령층으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어린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면 아이들을 완전히 망쳐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 잠자리에 든 시간에 나이 많은 아이들 패거리가 늦게까지 자지 않고 웃고 떠들면 어른들은 싫은 소리를 한다. 해리는 자신이 한 시간이나 걸려 현관문에 쓸 판자를 만들어놓았는데, 점심을 먹고 와보니 빌리가 그것으로 선반을 만들어버린 것을 알고는 볼멘소리로 투덜거린다. 나는 납땜 도구를 빌려가서는 되돌려주지 앟는 아이들을 비난한다. 나이 어린 세 아이가 저녁 식사 후 배가 고프다면서 빵과 잼을 가져갔는데 다음날 아침 복도에 빵 조각이 널려 있는 것을 보고 아내는 흥분해 소리를 지른다. 피터는 도예실에서 아이들이 자기의 귀중한 찰흙을 던지며 장난친다고 몺 언짢아한다. 어른들의 입장과 아이들의 부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계속된다. 하지만 그 싸움은 결코 서로의 인격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거기에는 개인에 대한 어떤 반감도 없다. 이런 갈등으 서머힐을 생동감 있게 만든다. 204

 

당신이 정말 아이의 편이라면 아이는 그것을 안다. 205

 

수업이 강제가 아닐 때, 아이들을 수업에 들어오게 하려면 정말 좋은 교사가 되어야 한다. 물론 내가 원하는 교사는 어느 정도 유머가 있고 위엄은 전혀 없는 교사다. 두려움을 불러일으켜서도 안 되고 도덕가가 되어서도 안 된다.

유머가 없는 사람은 아이들에게는 분명 위험한 존재다. 유머는 아이들에게 친근감, 존경을 표할 필요 없음, 두려움 없음, 다시 말해 어른들의 애정을 의미한다. 유머는 대개 위아래를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교실이란 울터리를 벗어나 있다. 유머는 교사로서 요구하는 존경을 없애버린다. 왜냐하면 아이들과 함께 웃는 교사의 웃음은 그를 너무나 인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장 훌륭한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웃는' 사람이고, 가장 자쁜 교사는 아이들을 보고 '비웃는' 사람이다. 206-207

 

내가 서머힐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다른 재미난 아이들 사이에서 나도 한 명의 재미난 아이가 될 수 있었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재미는 수학이나 역사 그리고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다른 모든 교과목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유머는 일종의 정서적 안전판이다. 재미있게 웃을 수 없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에 죽어 일흔이 되어서야 땅에 묻힌다고 누군가가 썼다. 분명 유머가 없는 사람을 가리켜 한 말이다. 209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어른이나 아이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209

 

많은 사람들이 가르치는 일은 숙련이 필요 없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212

 

 

종교적 자유

 

행복은 모든 아이들의 권리다. 미래의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삶을 대비한답시고 아이들에게 힘든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죄악이다. 216

 

아이들을 도덕적으로 훈계해야 할 경우는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심리학적으로 잘못이다. 어린아이에게 이기적이지 말라고 요구하는것은 잘못이다. 모든 아이들은 이기주의자다. 온 세상이 모두 자기 것이다. 아이들의 열망은 강렬하다. 아이들을 오직 바라기만 하는, 세상의 왕이다. 사과를 손에 쥐면 오직 사과를 먹겠다는 바람 한 가지뿐이다. 그리고 엄마가 동생과 사과를 나눠 먹으라고 하면 아이는 동생을 미워하게 된다.

아이에게 이기적이지 말라고 '' 가르쳐도 이타주의는 나중에 자연스럽게 생긴다. 그런데 아이에게 이기적이지 말라고 가르치면 아마 이타주의는 전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타적인 아이는 자신의 이기심을 만족시키면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기를 좋아하는 아이일 뿐이다.

아이의 이기심을 억업하면 그 이기심은 고착된다. 충족되지 않은 바람은 무의식 속에 잠재한다. 이기적이지 말라고 가르침을 맏은 아이는 평생 이기적인 데 매달릴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훈계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219-220

 

내가 아는 가장 행복한 가정은 부모가 도덕으로 가르치려 들지 않는, 아이들에게 숨김없이 정직한 가정이다.... 거짓된 위엄과 강요된 존경은 사랑과 거리가 멀다. 강요에서 나온 존경에는 '' 두려움이 따른다. ..

잘 자란 아이는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숨을 쉰다. 그것은 바로 아이가 두려움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표시다. 220

 

만약에 아이가 어떤 것을 죄악이라고 배운다면 삶에 대한 그 아이의 사랑은 분명 두려움과 증오로 바뀐다. 자신들이 자유로울 때 아이들은 결코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221

 

 

서머힐의 졸업생들

 

송공에 대한 나의 기준은 '즐겁게 일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230

 

"열한 살이 되었는데 아직 글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른단 말이야!"하고 큰소리치는 아줌마들이 있게 마련이다. 바깥의 환경은 온통 놀이를 반대하고 공부에 찬성한다는 것을, 아이들은 어렴풋하게 느낀다. 243

 

 

서머힐의 미래

 

나는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사소한지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을 익히려 들지 않거나 혹은 아예 그런 안목을 익힐 여지가 없는 부모를 만나면 화를 낸다. 267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른다면 소극적인 구경꾼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 한편 나는, 어떤 아이가 여려 해 동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듯 보이더라도 절대 실망하지 않았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 내면의 본성에 따라 이루어지는 성격 형성하기가 바로 교육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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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글 - 지젝에게 물어본 정신분석학의 행방


오늘날 지젝을 최고의 인기 논객으로 만든 것이 다름아닌 그의 정신분석학적, 철학적 '고상함'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6




지젝은 철학을 끊임없이 오락거리로 만든다. .. 

영국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1943~)은 지젝을 "지난 수십 년 동안 유럽에 출현한 사람 중 가장 놀라운 명민함으로 정신분석학, 혹은 문화 이론을 해설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

그는 끊임없이 놀라서 묻는다. 왜 모든 것이 이와 같은가? ..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것은 그와 같다' , '법은 법이다'등)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 순간, 우리가 현실로 대면하고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묻는 순간, "철학은 시작된다."  21-22


지젝은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놀란다. 그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관찰의 향락에 빠질 수 있게, 일반적인 경우라면 반드시 느꼈을 죄의식 없이 향락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마치 '물론 나는 화장실이나 사도마조히즘, 그리고 발기에 관한 이 모든 이야기가 지극히 외설적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모든 삶의 측면들을 이론화해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지젝은 죄의식 속에서 향락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보통 사람들의 자기 책망을 덜어주어, 좀 더 즐겁게 그의 책을 읽을 수 있게 만든다.  24


부정어법은 '어떤 것을 언급하지 않겠다고 말함으로써 바로 그것을 말하는 장치'다. .. 부정어법은 담화 내부의 구멍을 그러낸다. 어떤 것을 언급하지 않겠다고 말함으로써 바로 그것의 윤곽을 드러내는 것이다.  24-25


지젝은 하나의 의미체계를 다른 의미체계로 번역한다. 가령 라캉의 체계는 헤겔의 체계로, 마르크스의 체계는 라캉의 체계로, 할리우드의 체계는 지젝의 체계로 번역된다. 지젝 스스로 조김스럽게 지적하듯이, 이런 번역은 항상 완전한 대응은 아니지만 만만치 않은 설명적 통찰을 가져다준다. 지젝은 '만약 이전의 방법으로는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다른 각도에서는 이해된다면 그 각도에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다.  27


지젝의 책을 주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그가 매번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그러니 그의 책을 읽을 때 각 논의의 세부 사항까지 전부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조만간 일련의 등가성들 속에서 더 생산적인 각도로 이전의 논의를 이해시켜주는 '이것은~가 아닌가?'의 순간에 직면할 테니까. .. 

아르헨티나의 철학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지젝의 첫 번째 영어 저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The Sublime of Ideology)>에 대해 평가한 것처럼.  28


지젝의 지적 여정은 그가 속한 공식 문화와 거리를 두거나 이질적인 특징을 보여왔다.  36


지젝의 이론은 객관적 체계 속의 일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주체적이었다. .. 지젝이 비판 이론에 미친 주된 영향 중 하나가 이 주체의 개념을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다. 지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묻지 않고 넘어간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파고들었다. ...

이 주체가 바로 민주주의의 주체이다. 민주주의는 개별 국민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37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반휴머니즘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람들에 맞춰 만들어진'게 아니라 아무런 감정도 없는, 오직 형식적인 추상에 의해 만들어졌다. 민주주의라는 개념 안에는, 어떤 구체적인 인간적 내용으로 채워지거나 공동체적 결속의 진정성에 내어줄 자리가 없다. 민주주의는 추상적 개인들의 형식적 결합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개별적 인간의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종교, 재산, 식사 예절, 수면 습관 따위에 무관심하다. 민주주의가 취급하는 것은 이 모든 개별적인 특질들이 제거되었을 대 남는 것, 지젝이 '주체'란 용어로 지시한, 모든 시민들이 평등하게 똑같이 고유하는 측면이다.  38


그가 사상가로서 가지만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게 그가 속해 있던 체계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비판철학에 대한 지젝의 가장 중요한 공헌 중 하나인 주체 이론에 초점을 맞춘다.  39




각 분야마다 그에게 주된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는데, 철학에서는 게오르그 헤겔, 정치학에서는 칼 마르크스, 정신분석학에서는 자크 라캉이다.  43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1)은 무수한 주석가들이 지적하듯이, 서구 관념론의 전통에서 정점에 도달한 독일 철학자이다. 관념론이란 세계를 사물들의 연쇄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물에 대한 관념들로 세계를 설명하는 철학체계이다.  43-45


일반적으로 헤겔의 변증법의 세 단계로 되어 있다고 한다. 먼저 어떤 테제(定立 정할정 설입)나 관념이 있고, 다음에는 안티테제(反定立 되돌릴반 정할정 설입)나 관념의 구체적 한정이 그에 대립된다. 마지막으로, 이 둘은 어떤 종합이나 더 포괄적인 관념으로 통합된다. 가령 '모든 영화는 훌륭하다.'는 테제를 주장한다고 할 때, 그 다음엔 그에 대한 안티테제로 '<타이타닉>은 실제로 나쁜 영화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둘의 종합은 '대다수의 영화는 훌륭하다.'가 될 것이다. 이 종합은 새로운 테제가 될 수 있고, 이 과정은 완전한 진실(총체성. 이 경우에는 '오직 몇몇 영화만이 훌륭하다.'는)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될 수 있다.

이것이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관습적인 생각으로, 이에 따르면 서로 다른 관점들은 언제나 더 큰 진리로 화해할 수 있다. .. 지젝이 읽은 헤겔의 변증법은 어떤 화해나 종합적 관점이 아닌, 헤겔 자신이 말한 '모순은 모든 동일성의 내적 조건'이라는 인식을 생산한다.  45-46


테제가 '모든 영화는 훌륭하다.'이고 안티테제가 '<타이타닉>은 실제로 나쁜 영화이다.'라면, 지젝의 종합은 '모든 영화가 훌륭한 것은 <타이타닉>이 실제로 나쁜 영화이기 때문이다.'가 된다. 이것은 일견 사리에 맞지 않거나 모순으로 들린다. 하지만 이 주장의 진실은 바로 이 모순 속에 있다. 만약 나쁜 영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영화가 좋은지 알지 못할 것이다. 서로 비교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영화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쁜 영화가 적어도 하나는 존재해야 한다. 이 경우 <타이타닉>은 문자 그대로 '규칙을 입증하는 예외'이다.  46


모순어법이란 '메마른 비' '차가운 열' '물리적 지성'처럼 모순적인 어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47



마르크스는 사회가 조직되는 방법을 예리하게 비판했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 혹은 자유시장경제 체제는, 다수에 대한 야비한 억압과 지배를 통해 소수가 광대한 부를 축적하도록 허용하는 불평등으로 인해 분열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47


자기 자신을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선언하는 지젝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이 갖는 가치와 진실을 확신하며, 더 나은 방법으로 사회를 조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다. ..

'이론적 실천(praxis)'이라고 불리는 이런 종류의 사유는, 단순히 경험을 반영하거나 범주화하는 게 아니라 경험을 바꾸려는 시도이다.  49


지젝은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인상적인 공헌을 남긴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개인들이 사회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정의한다.  51



라캉은 거치면서 정신분석학은 이 협소한 영역을 넘어 정치학, 철학, 문학, 과학, 종교 등 모든 인간 존재의 활동 영역으로 그 분석적 야망을 확대시켰다. 이 오만한 기획을 위해 라캉이 마련한 초석은, 모든 정신 작용을 분류할 수 있는 세 가지 '질서(Order)' 즉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이다.

일차적으로 상상계는 자아(ego)가 탄생하고 인식된느 과정을 가리킨다. 보통 '거울 단계(mirror stage)'로 불리는 이 과정은, 태어난지 6개월 정도부터 시작된다. 라캉이 지적하듯, 인간은 7세 무렵까지는 자신의 신체적 움직임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미숙한 상태이다.  53-54


* 라캉의 세 질서,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 라캉의 세 질서를 쉽게 설명하면, '개인의 심리행위에 작용하여 그들의 삶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주는 힘의 장(場 마당장)'으로 풀 수 있다. 상상적인 것, 상징적인 것, 실재적인 것, 이 세 형용사형은 특정한 질서를 지칭하는 명사로도 사용된느데, 그 경우 해당 질서와 관련된 특정한 사물이나 경험을 가리킨다. 

또한 '질서'라는 표현이 암시하듯, 이 세 질서는 심적 경험을 분류하는 체계의 일부일 뿐 아니라, 그 경험을 유사윤리적 기준 속에서 등급화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라칸의 저작을 보면 '상상적인' 것은 부정적인 의미로, '상징적인' 것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재계야말로 가장 으뜸가는 것으로, 이 질서를 언급할 때 라캉의 어조에는 거의 존경과 숭배가 묻어난다.  53


상상계는 넓은 의미에서 영원한 자기 찾기를 가리킨다. 그것은 자기 통일의 신화를 수립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본(寫本 베낄사 근본본)과 유사물의 사례를 융합시키는 과정이다. 그래서 상상계는 라캉과 지젝에게 항상 경멸의 시선으로 받는 세계이다. 우리에게는 안됐지만, 라캉은 현대사회를 정점에 도달한 상상계로 본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강박되어 자신과 자신의 창조물을 세계 위에 둔다고 보기 때문이다.

상징계는 언어에서부터 법에 이르는 모든 사회적 체계들을 포함하는 가장 광범위한 세계이다. 상징계는 우리가 보통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의 긍정적인 부분을 구성한다. 상징계는 사회의 비인격적 틀로서, 거기서 우리는 다른 인간 존재들과 함께 특정한 공동체 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령 대다수의 사람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상징계에 등록된다. 이미 이름이 정해지고, 가족이나 사회경제적 집단, 젠더, 인종 등에 소속되기 때문이다.  54-55


실재계는 알 수 없는 삶의 영역을 가리킨다. ..

우리는 결코 직접적으로 세계를 알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실재계는 언어에 의해 포획되기 이전의 세계이다.  59


상징계는 실재계에 대해 작용한다. 라캉이 말했듯, 상징계는 실재계를 절단한다. 그것은 무수하게 다른 방법으로 실재를 분절한다. 그래서 실재를 인식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어떤 것이 상징화에 적용되지 않는 순간을 주목하는 것이다. 앞에서 든 예에서 우리는 인간 존재가 사람과 동물, 유인원, 포유동물, 동물 등으로 상징화되는 모든 사례들을 열거함으로써 그 존재 중 일부는 실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어떤 것을 명명하거나 분류할 때 우리는 상징계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 전에는 실재계 속에 있다.  60


실재는 상징계가 작동하여 분절된 단위로 조각 내기 이전의 충만한 사물의 상태라는 점에서, 상징계에 앞서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실재는 상징계가 이런 분절 과정을 완수하고 남은 잔여물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실재는 상징계 이후에 발생한다.  61


실재와 상징계의 관계에서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만약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에이즈가 CIA의 음모라는 것, 모든 인간 존재는 원숭이와 같은 부류하는 것, 새싹이 식물 세계의 가장 멋진 생산물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인간 존재나 주체가 아닌 단지 상징적 질서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자동기계나 로봇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탈물질화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결정하고 선택하고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우리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63


지젝은 '실재의 철학자'라고도 불린다. .. 우리의 생활과 직접 연관된 '실재적'인 주제를 다룬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얘기한 라캉적 의미의 '실재'를 확장하고 자기화햇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염두에 둘 점은, 지젝은 거의 언제나 상징계와의 관계 속에서 실재를 다룬다는 점이다.  65


이론가들은 상징계와 상상계의 관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지젝은 실재와 상징계 사이의 적대성에 관심을 돌림으로써 성차적(性差的 성품성 어긋날차 과녁적), 이데올로기적, 윤리적, 탈근대적 형상들 속의 주체를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었다.  66




코기토(cogito)에 대한 생각은 원래 기독교 교회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e, 354~430)가 제기하였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코기토는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가 창안한 것이다.  71


'코기토'라는 단어의 의미는 데카르트가 말한 "철학의 제1원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cogito ergo sum)'이다.  73


탈구조주의자에게 코기토는 중심화된 주체 혹은 '개인(individual)'의 토대로, 그들은 코기토를 철학의 방탕아로 여긴다. 개인은 말 그대로 분리 불가능하다.  74


코기토의 '나'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  74-75


지젝에게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현실적 개인의 '나'가 아니라, 부정성의 텅 빈 지점이다. 이 텅 빈 장소는 '아무것도 아닌'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반대편, 모든 규정된 것들의 부정성이다. 지젝은 바로 여기ㅣ, 아무런 내용물도 없는 텅 빈 장소에 주체를 위치시킨다. 즉, 주체는 공백이다.  82-83


* '사라지는 매개자'는 말 그대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 사이의 이행을 매개하고 곧 사라지는 개념이다.  83


주체는 지제그이 용어로, 자연과 문화 상태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 '사라진느 매개자'이다...

코기토에서 정점에 도달한 '자기로의 철회'가, 자연과 문화의 간극을 잇는 사라지는 매개자로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상징적 질서라는 형식으로 실재를 대체하기에 앞서 그 실재를 '제거'해야 한다. 지젝은 이 사라지는 매개자를 광기로 이행하는 것으로 읽으며, 이렇게 해서(사라지는 매개자인) 주체를 광기로 파악한다.  84

우리 자신을 언어나 그 외 상징적 질서에 종속시키는 과정을 지젝은 '주체화'라 부른다.  92


'자기'는 주체의 공백을 메우는 것으로서 주체는 변하지 않지만 '자기'는 끊임없이 갱신된다.  94


우리는 소위 관용적인 서구 사회에서 이를 목격할 수 있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향락의 이미지와 쾌락에 대한 몰두를 보면, 이젠 더 이상 성적 쾌락이 금지되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지젝의 말처럼, 성적 희열은 이미 공식 이데올로기의 지위를 차지했다. 더 나아가 이제는 섹스를 즐기라고 강요받는다. 이 뻔뻔함, "즐겨라!"는 이 명령은 초자아의 귀환을 표시한다.  109


지젝이 지적하듯, 향락이 강제적이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즐겁지 않다.  109


탈 근대의 자유는 문법적 트리 없는 언어활동의 자유와 유사하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해석 규칙이나 구범도 없다. 따라서 대타자의 붕괴가 이를 보상하기 위해 무수히 작은 타자들, 혹은 부분적인 대타자들을 발생시킨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지젝은 그 증거를 과학기술의 성과에거 비롯된 윤리적 딜레마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꾸 전문가 위원회를 찾는 경향에서 찾는다.

이런 위원회의 증가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징적 금기들의 부재를 시사한다. 이런 상징적 금기들의 부재 때문에, 각종 윤리위원회들은 사이버 스페이스, 유전자생물학, 의학 등에 관한 규제 원칙들을 창안해야 한다. 윤리위원회들은 태아에 대한 유전자 조작을 얼마나 허용해야 하는지, 생명 연장 기계에 의존하는 이들이 실질적으로 살아 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인터넷 상에서 하는 섹스에 어떤 문제점이 잇는지 답한다. 이런 윤리적 난제들에 대한 해명 책임을 이들 위원회에 떠넘김으로써, 개별 주체들은 본래 자기들 몫이었던 해명의 자유가 주는 부담을 털어버린다.  114


지젝이 보기에 탈근대적 정치 담론은 자유주의-자본주의의 지평 안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그 지평 내의 서로 다른 부분들, 가령 어떻게 의료 서비스에 필요한 자금을 모을지, 그중에서 세금의 비중은 얼마큼 할지 등에 대해서는 주장을 펴지만, 자본주의 자체는 결코 진지하게 문제 삼지 않는다.  122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탈이데오로기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냉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지배된 세계를 살고 있다. 

지젝은 냉소주의적 태도를 "그들은 자신의 행위 속에서 자식이 환영을 달고 있음을 잘 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렇게 한다"로 요약한다. ..

지젝은 우리가 어떤 이데올로기의 허위를 비난할 수 있는 진리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이데올리기 속에 던져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 방식이 현실과 이데올로기를 대립시키는 이원체계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젝은 삼원체계, 혹은 삼항 구조에 입각하여 이데올로기를 분석한다.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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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자들에게

 

이 책은 공산주의나 자본주의와 다른 접근방법을 찾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과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다. ..

이 책의 기본 견해는 훌륭한 사업이란 우정이 있는 관계를 통해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6

 

1. 3~4명의 소규모 모임부터 시작한다

2. 목표와 가치에 합의한다

3. 기존 사업체를 통해 성공과 실패 요인을 찾는다

4. 무엇을 할 것인지 선택한다

5. 필요한 자원을 발굴한다

6. 사업체의 법인 형태를 선택한다

7. 사업을 시작한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잇다. 기능에 관계 없이 도덕적 헌신성만을 기준으로 지역사회 공동체 사업 모임(community business team)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흔히 나타나는 실수이다. ..

지역사회 공동체들은 여러 유형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상인도 있고, 전문가도 있고, 실업자도 있고, 생활복지 대상자도 있으며, 학생도 있다. 여기에 그물을 던져서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하나의 일관되고 통일된 집단을 영입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15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해야 하기 때문에 일을한다. 사람들은 주로 돈벌이가 되는 일을 하지만 좋아서 하기보다 그 일이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최선의 것이기 때문에 한다. 16

자원활동(volunteering)은 여가 활동의 일종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여가 활동을 한다. 의무감에서 일하는 자원봉사자는 그것이 비록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여도 크게 효과적인 일꾼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17

 

열정적인 태도는 위험할 수 있다.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도록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23

 

유명한 학계의 인물들은 이제 지역에 근거를 두는개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은 다음의 발상과 똑같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있는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더 보편적인 수준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출발점이 다를 뿐이다. 24

 

모임들은 공유할 수 있는 조직의 비전(미래상)을 먼저 발전시키지 못하면 재대로 가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토론은 그때그때 이루어질 수 있다. ..

지역 사회 공동체 기업을 설립하는 맥락에서 공유할 수 있는 비전이란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들을 총합하여 정리한 것이다. .. 일상생활의 행동 유형을 관찰하면 사람들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행동에서 자주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다. 27-28

 

의미 있는 사상을 공유하지 않고는 어떤 의미 있는 행동도 함께하지 못할 것이다. 28

 

기본가치는 다음 5가지 정도다.

첫째, 돈은 수단이다. 돈은 인간의 발전을 위해 쓰여야 하며 그 반대로 쓰이면 안 된다. 지역사회 공동체의 사업은 인간적이고 지역사회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수단이며,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둘째, 개인의 헌신이 기본 요건이다. 이는 신념에 따라 참여한 자원봉사자에게서 나타난다. 금전적 보상에 대한 관심이 아니다.

셋째, 민주주의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이는 투입한 자금의 규모에 관계없이 개인이 각각 동등한 의결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가정하는 것이다. 이 가치는 투표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계속해서 이루어 나가야 하는 과정으로서 경영과 자문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

넷째, 경영 직무는 훈련되어야 하고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 이는 이사회의 구성과 간부의 발탁에 반영된다.

다섯째, 지방의 지역사회 공동체와 연대 관계를 유지한다. 만약 실업이 있을 때는 일자리 창출 기업체들을 만들어 내도록 인격적 투자를 앞서서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28-29

 

최선의 접근방법은 조직 자체를 학습하는 기회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29

 

합의는 행동에 대한 약속까지 포함해야 한다. 32

 

이제는 주위를 살펴볼 차례다. 여러분은 행동을 시작하기 전에 생각이 비슷한 다른 단체들이 하고 있는 일을 분석해야 한다. 그들이 어떤 영역에서 실패했고 어떤 분야에서 성공했는가? 무엇이 잘 작동하였고 무엇이 그렇지 못했는가?

실패 사례에 대해 반드시 던져야 하는 질문은 그 원인이 내부에 있는가, 아니면 외부에 있는가이다. 내부에 원인이 있다면 그 실패가 운영체계의 결과인지 사람의 문제인지 파악해야 한다. 내부적인 요소는 통제할 수 있고 치유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러나 외부적인 요소는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는 경우가 많다. 실수를 범했다고 인정하려는 단체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평가는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하다.

실패 또는 성공 요인을 찾아내는 작업은 어려울 수 있다. 33

 

자치권(autonomy)’은 실패한 지역사회 공동체 사업체들이 주장해 온 가장 공통된 가치 중 하나였다. ..

실패한 지역사회 공동체 사업체들이 언급하는 다른 형태의 공통된 가치는 전통이다. 40

 

성공적인 사업들은 유용한 자원을 발견함으로써 가능하다. .. 자연상태의 물질은 사람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통해서만 자원이 된다는 점 역시 명심해야 한다. 53

 

자원으로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는 상당 부분 선택하는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다. 두 세대 전에만 하더라도 바닷가재는 먹을 수 없는 청소동물(동물 사체를 먹는 동물 종류)로 간주되어싸다. 해덕(Haddock : 대구와 비슷하나 그보다 작은 바닷 고기)이 헐씬 값비싼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의 취향이 뒤바뀌었다. 바닷가재가 해덕보다 훨씬 값비싼 것이 되었다. 54

 

우리의 전통 경제에서 자원으로 인식되어 온 것은 석유, 석탄, 광물 등과 같은 물질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더 복잡하다. 미국의 한 회사에는 밤하늘을 밝히고 있는 수십억 개의 별이 가치 있는 자원이 되었다. 국제별등록회사가 설립되어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별에 요금을 받고 신청자의 이름을 붙여준다. 이 회사는 새롭게 명명된 별의 우주 내 위치가 표시된 증명서를 제공하고 국제등록소에 그 이름을 올려준다. 이제 미국의 젊은이들은 여자 친구에게 다이아몬드를 선물하는 대신 별에 이름을 붙이고 있다. 55

 

성공 여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인적, 금전적 자원과 정부의 자원에 얼마나 잘 접근할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55

 

문제에 대해 고도로 조직화된 대응 체계가 없을 때에는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참여가 중요한 자원이 된다. 56

 

핵심은 지도자의 높은 수준의 정신과 헌신이다...

어떤 지역의 독특한 문화와 역사야말로 핵심 자원들이다. 59

 

지역사회 공동체가 목표인 곳에서는 주주들이(주식회사의) 소유하고 있는 주식의 수에 관계없이 1표씩의 의결권만을 가지도록 제한하는 법률적 합의를 체결해 둔다. 사실상 주식회사도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할 수 있다. 69

 

지역사회 공동체 기업의 더욱 전형적인 형태는 협동조합의 법률적 구조다. 69

 

건실한 사업이라도 무엇이든 성공을 하려면 지방의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 88

 

어떤 유형의 사업이든 경영자가 참석하지 않는 이사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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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를 팔아야 하는 아버지와 아들을 손가락질하게 만든 것도 이런 조작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수의 말을 두려워하고 도 그 말에 휘둘리기도 합니다. 때론 실수를 하고 그러면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기도 하죠. 그런데 우리는 처음부터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한 비웃음을 받고 싶지 않아서겠죠 우유부단하면 안 된다거나 주변 살마들의 말에 휘둘리면 안 된다또는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입니다.

두렵지만 무언가를 시도하고, 여러 번 실패를 겪지만 그 속에서 다시 일어나 성취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성공을 권하는 우리 사회는 실패의 시간을 허락해 주지 않죠. ‘효율성이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패하고 고민하는 시간은 비효율적일 뿐입니다. 당나귀를 팔려고 나갔으면, 빠른 시간 안에 시장에 도착해서 좋은 값을 받고 팔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최대한 빨리 돌아온다면, 그만큼 시간을 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간만큼 밭에라도 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리고 무언가 시도하는 것 자체가 성공의 이데올리기 안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늘 효율적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남들이 말하는 성공을 거둔 이들이 성공을 만끽했다는 이야기도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맛을 안다는 말처럼 무언가를 누리는 것도 겪어봐야 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까 우리에게 강요된 성공의 이미지만 좇다 보면 성공은 할지 몰라도 그것을 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돈은 많지만 돈 쓰는 법을 모르고, 집은 좋지만 과시와 투자 외에는 집의 효용성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이룬 성공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죠.

이솝은 우리에게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라고 전합니다. 여전히 유효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적당히 무시할 줄도 알아야 우리 자아가 온전할 테니까요. 하지만 역사를 보면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성공(?)한 사람만큼 무서운 사람도 없습니다. 고대로부터 폭군, 독재자, 살인자는 모두 단호하고 신속하게 목적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자신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다른 사람의 말에는 귀를 닫았습니다. 그들이 당나귀를 파는 아버지와 아들처럼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고 다른 방법을 고안했다면, 역사 속의 비극적인 사건도 많이 주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30-31

 

규율 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 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 - <피로사회> 한병철 34

 

우리는 학창 시절 내내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우리 교육은 규율에 맞춰 살며 질서를 지키는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무조건 복종하는 인간을 만들어 내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얼마전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보았습니다. 서울대에서 4.0이상의 학점을 받은 학생들의 공부 비법을 알아 본 결과, 대부분이 교수의 말을 토씨 하나까지 틀리지 않게 필기한다고요. 충격이었습니다. 우리의 교육 과정은 마치 단거리 달리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입 시험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질주하게 만들죠. 그래서 질문이 많고 궁금한 것이 많은 학생들이 고득점을 얻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34-35

 

모든 것을 긍정하고, 모든 것에 정력적이어야 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차 무기력한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무기력해진 인간은 분노하는 법도 잊습니다. 저자는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인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 간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자는 사색을 제안합니다. 사색적 삶이란 생각하는 삶을 말합니다. 36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 부정적 힘 없이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처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어떤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무언가를 생각할 힘밖에 없다면 사유는 일련의 무한한 대상들 속으로 흩어질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Nachdenken)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 <피로사회> 한병철 36-37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어른들 중에는 아이들이 규칙을 어기거나 어떤 일에 혼란스러워할 때도 아이의 의견만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사회에서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육은 무엇이 되고 안 되는지를 배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또한 아이들은 절망에 대한 것도 배웁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에 속수무책일 째, 위로받고 힘내는 법도 배웁니다. 어른이, 선생이 옆에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두 가지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격렬하게 우는 아이를 잠시 내버려 둘 줄 알며, 기꺼이 소년의 짝이 되려는 사람이 바로 좋은 선생입니다. 49

 

우리들의 경제 구조는 조직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대립없이 함께 일하며 점점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 기호가 획일화하고, 쉽게 동화하고, 수요를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대중들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제도는 인간이 자유롭고 독립적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남들이 바라는 모든 것들을 다 하는 사람들과, 사회라는 기계에 아무런 마찰도 없이 조립되고 강제나 통솔자가 없어도 통솔되고, 맹목적으로 휘둘려지는 인간들을 필요로 한다. 이런 제도는 사람을 순하게만드는 제도이다.’ - <서머힐> 알렉산더 닐 51-52

 

독일의 철학자 훔볼트(Karl Wilhelm Von Humboldt)모든 인간의 목표는 개인의 능력을 가장 고귀하고 조화롭게 발전시켜 모순이 없고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표면적으로 학교가 내세우는 정신과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개인의 능력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지점에서 말이죠. 훔볼트는 개인은 잠재력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전제하에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가 경험한 학교들을 돌이켜 보면, 대부분 개인의 능력을 무시한 교육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교의 커리큘럼은 아이들의 능력을 발견하는 데 무관심하고, 수많은 시험은 잠재력을 들여다볼 만한 시간을 빼앗죠. 개인의 잠재력과는 상관없이 학교, 혹은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 학교의 목표인 것입니다. 53

 

금기(禁忌 금할금 꺼릴기)’란 어기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호기심은 그 어떤 두려움도 이겨 내기 때문이죠. 59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은 항상 환기가 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음식과 공기와 물이 몸 안과 바깥을 드나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말도 내 몸의 안과 밖으로 들고 나야 합니다. ..

우리가 그토록 친구를 필요로 하고, 어릴 적 친구를 가장 편하게 대하는 이유도 자신의 치부까지 다 본 사이라서 어떤 이야기를 하든, 어떤 상황에 빠져 있든 그대로 봐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존심이 필요 없는 사이가 가장 이상적인 대나무 숲인 것입니다. 64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우리가 우리 안에서 무서운 임금님 노릇을 하는 자존심을 꺾고 자신의 구질구질한 개인사를 남에게 털어놓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화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누군가의 대나무 숲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이유입니다. 65

 

세상을 살다 보면, 너무 아픈 데도 침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대나무 숲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친구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좋은 친구가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가슴에 담아 두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말하면 그도 속상할 테니, 아예 말하지 않아요.” 66

 

인디언의 어느 부족은 친구를 내 짐을 어깨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우리가 내 인생의 짐을 상대의 어깨에 부려 주기도 하고, 내가 견딜 만할 때는 상대의 아픔을 지는 그런 사람이 되면 어떨까요? 지나친 도시화로 대나무 숲을 보기 힘든 이 시대에 말입니다. 66-67

 

위대한 도가 없어지자 인()과 의()가 생겨났고,

(교묘한) 지혜가 나타나자 큰 거짓이 생겨났다.

육친[六親, 아버지 자식 형 동생 남편 아내, 곧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자 효성과 자애가 생겨났고,

국가가 혼란해지자 충신이 나왔다.’ - <노자> 노자 69

 

노자는 자연스러움이 사라진 상태에서 도덕과 윤리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진실을 덮기 위해서 거짓이 거짓을 낳는 것과 비슷한 상태라고도 할 수 있지요. 70

 

어린이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는 것은 반대로 그만큼 모르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어린이만큼 사람 그 자체, 세계 그 자체에 빠져드는 존재도 드물 것입니다. 90

 

아무리 설명한다 해도 진심이 아니면 머리에 남지 않고, 겪지 않으면 가슴에 담기지 않습니다. 97

 

인어 공주는 바다 마녀를 찾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인간 다리와 교환합니다. 어릴 적에는 인어 공주의 용기만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안타깝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인어 공주가 이루려는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고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 교환은 매우 불공정해 보입니다. 이제까지 이 교환에 대해 반발을 느꼈다는 독자가 없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요. 동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어 공주를 살리려는 언니들의 교환 조건을 보죠. 인어 공주를 다시 바다로 데려오기 위해, 죽음의 위기에 빠진 막내의 목숨 값으로 언니들이 마녀에게 준 것은 머리카락뿐입니다. 공주의 머리카락이 제아무리 탐스럽다 해도 목소리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마녀가 내준 약과 칼은 성격이 다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녀의 약과 칼, 둘다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하게 해 주죠.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자가 막내 인어 공주라는 것 또한 같습니다. 인어 공주는 육지로 가기 위해 마지막 순간 모래사장에서 스스로 약을 먹고, 인어 공주로서의 삶을 끊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다로 가기 위해 왕자를 칼로 찔러 왕자를 사랑했던 시절을 끊어야 했죠. 그러므로 마녀가 내준 것은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녀는 같은 성질의 것에 다른 값을 받았습니다. 108-109

 

흔한 사랑의 경구 중에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말이 있죠. 하지만 프롬의 말대로 사랑도 기술처럼 갈고 닦아야 하는 능력이라면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수동적인 자세에서 배울 수 있는 기술은 없으니까요. , 내가 하지 않는 사랑이란 불가능합니다. 127

 

사랑의 근본적인 모순은 하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서로 다른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사랑만큼 어려운 문제도 없습니다. 128

 

고독한 존재로서 우리는 누구나 사랑을 갈망합니다. 하지만 교환 가치가 당연해진 세상에서 사랑 또한 본질이 훼손되었습니다. 물질적이고 획일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랑 또한 교환 가치가 있는 보시 대상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교환 가치를 넘어선 사랑을 꿈꿉니다.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상대가 나를 예쁘고 잘생겼을 때만 사랑한다고 느낄때, 나의 돈과 능력 때문에 나를 소중히 여긴다는 생각이 들때 쓸쓸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아이를 낳고 키우기 때문에, 매월 일정액을 벌어 오기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는 부부 사이에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요? 조건을 넘어 선 사랑, 주고받음의 대차대조표가 없는 사랑이 이상적이라면, 우리의 본능 자체를 이상적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본주의의 편리성에 길들여진 우리는 사랑 또한 교환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릴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을 버리면 사랑을 위해 우리는 진정한 우리 자신과 대면해야 할 테니까요. 에리히 프롬은 자본주의 사회가 사랑에 대한 높은 이상을 훼손시키며 우리를 하찮은 존재로, 사랑을 모르는 존재로 만든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단언합니다. 그러한 세상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요.

현존하는 체계 아래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예외다.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사랑은 필연적으로 주변적인 현상이다. 많은 직업들이 사랑하는 태도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생산 지향적이며, 상품에 탐욕스러운 사회의 정신은 오직 순응하지 않는 자만이 그에 맞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 해결책으로서 사랑에 진지하게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사랑이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주변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 되려면 우리의 사회 구조 내에 중요하도고 급진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129-131

 

엄마란 어떤 사람 일까요...?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하나 없다는데, 엄마에 대해서는 고정된 이미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여자가 100명이라면 엄마의 이미지도 100개여야 할 텐데, 우리는 엄마라는 단어에 헌신적인, 자애로운, 희생적인등의 단어를 갖다 붙입니다. 세상 모든 자식이 똑같은 덕목을 가지지 못했듯, 엄마의 이미지도 획일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엄마와 자식이 사회에서 만든 이상적인 엄마 상이라는 그림에 갇혀 불화를 겪고 상처를 받죠. 140

 

어른의 마음속에는 이상적인 어른의 모습이 있죠. 143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도 부모님께서 어떻게 성공할 거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서, 아무 말 못하고 있어요.”

어느 날, 열일곱 살 친구에게 이런 고민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쓴 청소년 소설의 독자로 만났던 그 친구는 저보다 훨씬 어른스러웠습니다. 모든 면에서 주체적으로 고민하는 모습이 제 열일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죠. 과연 그 친구보다 제가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지 늘 헤살렸지만, 그래도 저를 필요로 하면 그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곤 했습니다.

?”

제가 되물었습니다.

고민했는데, 솔직히 모르겠어요. 어른들은 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고 하잔항요. 학교는 아닌 것 같은데, 다른 방법이 뭐냐고 물으면 말이 막히는 거예요.”

저도 낯설지 않은 화두였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방법을 벗어날 때, 누구나 같은 고민을 하게 되겠죠. 저는 그동안 저를 괴롭히고 헤매게 만든 질문, 그러나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을 그 친구에게 던졌습니다.

왜 성공을 해야 하는데?”

성공해야 행복하잖아요.”

친구는 제가 생각했던 과정을 그대로 밟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게 했듯이 다음 과정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행복이 뭔데?”

?”

구체적으로 말이야. 네가 생각하는 행복의 풍경은 어떤 거야? 괜찮은 차? 서울에 있는 고급 아파트?”

“..... 비슷한 거 아니에요?”

가진 것의 합이 행복일까? 네 행복은 그런 거니?”

열일곱 살 친구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마치 저의 옛 모습을 보는 듯했죠. ‘행복을입에 달고 사는 현대인이지만, 사실 행복의 구체적인 풍경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저는 행복의 풍경을 그리려 몇 번을 고민한 끝에 우리가 세뇌된 행복에 길들여져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서부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에 이르기까지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이 곧 행복이라고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유토피아가 우리의 행복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물질적 풍요가 곧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다고 해서 바로 자신만의 행복을 그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는 행복의 풍경이 우리 자신이 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64-166

 

어른 보다 아이가 바이러스에 치명적인 것처럼, 이 사회의 병든 이데올로기에 가장 취약한 것도 어린아이입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물질적인 것밖에 꿈꾸지 못하는 아이들, 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이기도 합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행복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자가 되면 행복해질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 그 이미지를 만든 것은 우리 자신일까요? 혹시 누군가에 이해 감염된 것을 행복이라 믿는 것은 아닐까요?

세라는 행복해졌다고 작가는 썼습니다. 금광을 소유한 아버지 친구가 세라의 법적 후견인이 되었습니다. 세라는 아버지의 몫 외에도 미혼인 아버지 친구의 재산까지 상속받게 도리 것입니다.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렸던 세라는 친구들과 함게 행복한 생활을 할 뿐 아니라,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며 봉사 활동에도 앞장섭니다. 부유하고 윤택해진 세라, 하지만 세라는 분명히 행복해졌을까요?

세라의 환경에서 변한 것은 경제 상황 뿐입니다. 세라는 여전히 고아이고, 후견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일이 세라 앞에 벌어질 것입니다. 작가는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자마자 세라의 행복을 단언했지만, 세라는 왠지 동의할 것 같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만이 그녀의 행복을 결정한다면, 그녀는 앞으로 돈만 아는 숙녀로 성장하겠죠. 하지만 기품 잇는 그녀는 진지하게 스스로의 미래를, 행복의 풍경을 그려냈을 것만 같습니다. 결코행복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긴 시간 동안 말이죠.(<소공녀> 프랜시스 버넷) 167-168

 

우리는 늘 예쁜 것이 최고의 가치라는 말을 농담(?)처럼 듣고 삽닌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외모 지상 이데올로기에 허우적거리고 있죠. 모델처럼 늘씬하지 않아서, 복근이 없어서, 키가 작아서 ...... 수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외모의 조건에 자신이 세운 기준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외모지상주의의 포로가 되었을까요? 새 왕비에게 거울이 있었다면, 도대체 우리에게는 무엇이 있길래 그럴까요? 우리에게도 마법의 거울이 있습니다. 바로 질문 대신 리모컨으로 작동되는 거울, 피로의 푼다며, 심심하다고 보는 텔레비전. 그것이 바로 오늘날 마법의 거울입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떼려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는 텔레비전은 자본주의에서 선호하는 이미지, 즉 팔리기 좋은 이미지를 강조합니다. 그 이미지들은 또 텔레비전에 예쁘게 나오죠. 소비자인 남성, 혹은 여성이 좋아하는 이미지입니다. 자신의 만족에 의해 설정된 외모 기준이 아니라 텔레비전, 즉 자본주의 사회가 선호하는 외모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메시지를 담은 텔레비전을 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틀어 봅니다. 그리고 내 것이 아닌, 내것이어도 나의 행복은 될 수 없는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마법의 거울은 백설 공주와 새 왕비에게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텔레비전을 꺼야 하는 이유입니다. 거울의 목소리는 신뢰를 가장한 억압이므로, 텔레비전을 끄면 우리는 좀 더 자신의 진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내가 진짜 원하는 삶, 내게 잘 어울리는 이미지를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182-183

 

스펙터클(spectacle)이란 간단히 구경거리라 번역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눈을 뗄 수 없고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의 현란한 구경거리에 스펙터클이란 말이 붙죠.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는 <뽀로로>나 어른들의 저녁 시간을 잡아먹는 드라마는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현대 사회의 스펙터클입니다. 하지만 텔레비전만이 스펙터클은 아닙니다. 1년을 분기별로 나누게 하는 스포츠, 이제는 텔레비전 뉴스에도 나오는 한류 스타들의 공연, 떠들썩한 세몰이로 정치 바람을 일으키려 앴는 전당 대회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엄청나게 역동적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쇼들을 모두 스펙터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펙터클의 세꼐는 역동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현대 사회를 사는 모든 사람은 스펙터클의 세계에서 능동적으로 뛰어들어 사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즐기는 우리도 과연능동적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능동적인 인간은 보는인간이 아니라 행동하는인간입니다. 184-185

 

능동적으로 사는 인간은 스스로 그것에 뛰어들어 활동하는 인간입니다. 자신의 삶에 완벽히 뛰어들면 자신의 삶이 가장 흥미진진한 쇼가 되죠. 굳이 스펙터클한 볼거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185

 

일반적인 역사적 삶이 지니고 있는 결함의 다른 측면은 개인적 삶이 아직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스펙타클적 극화(劇化 심할극 될화) 속에 밀려드는 가장된 사건들은 이 사건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는 사건들이 아니다. (...) 분리된 일상생활에서의 개인적 경험은 언어나 개념이 부재한 채로, 이를 테면 어느 곳에서도 기록되지 않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비판적 접근도 없는 채로 존속한다. 개인적 경험은 고통되지 않는다. 개인적 경험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없는 스펙타클적인 가장된 기억을 위해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망각된다.’ - <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

흔히 셀레브리티(celebity)라 말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학자, 예술인, 정치인만이 아니라 대중 매체가 일자리인 셀레브리티 상당수가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186

 

셀레브리티는 대부분 상류층입니다. 그들 자신과 자녀는 텔레비전을 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즐길 거리도 많습니다. 186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인간은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드라마속 재벌남자와 평범한 여자의 꿈 같은 로맨스가 끝나면, 울는 현실 속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텔레비전의 세계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역동적이면 역동적일수록 우리네 삶이 더욱 남루해보이죠. 187

 

존엄성을 지킨다는 말은 거창해 보이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지킨다는 말입니다 육체는 '자기 자신'의 첫 번째이자 가장 기초적인 요소죠. 자신의 몸을 존중하고, 키우고, 단련하는 법이야말로 가장 어린 시절에 배워야 하는 기초가 아닐까요? 한 끼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그 시간을 충실히 누리는 법을 배우는 것도 기나긴 인생을 위한 수업이 아닐까요?

우리 사회는 어릴 적부터 남의 기준에 맞춰 살도록 강요합니다. 공부라는 타인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라면 나 자신 '따위'는 무시해도 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주입합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누구나 알게 됩니다. 정말 중요한 결정 앞에서 타인의 기준이나 사례는 아무 쓸모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지요.

자신을 가벼이 여기는 삶은 자신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삶입니다. 그 시간이 오래될수록 우리는 인생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헤매게 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깊어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니 어떤 부분이 약한지 모릅니다. 작은 펀치 하나에 온 존재가 휘청이고 나면 이미 때는 늦었죠. 이렇게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닥쳐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때일수록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릴적에 배워야 했던 끼니의 중요함, 체력 키우기 등을 이제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의 손과 발을, 눈과 코와 입술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머리에 새기며 자신과 사귀어야 합니다. 그렇기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신을 인정해 가며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하나하나 받아들여야 합니다. 돌아가는 길이라 더디고 어렵지만, 한 가지 위로할 만한 것은 인간은 생각보다 견고하다는 점입니다. 스스로 빗장을 열러 주지 않는 한, 우리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29-230

 

시스템은 다수의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신이나 왕권 같은 불가침한 영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시스템에 대하여 늘 고민하는데, 현대 철학자 중에 이를 깊이 고민한 학자가 바로 존 롤즈(john Rawls. 1921~2002, 미국의 철학자로, '정의'라는 한 주제에 대해 깊이 연구한 학자로 정평이 나 있다)입니다.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정연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면 개선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 (...) 정의는 타인들이 갖게 될 보다 큰 선을 위하여 소수의 자유를 뺏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본다. 다수가 누릴 보다 큰 이득을 위해서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해도 좋다는 것을 정의는 용납할 수 없다.' - <정의론> 존 롤즈

우리나라에서는 '국가를 위하여', '경제 발전을 위하여'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 많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침묵을 강요한 정부가 그랬고, 노동자에게 희생을 요구한 재계(財界)가 그랬죠. 242


정의로운 사회가 행복한 사회라는 말에 동의를 한다면, .. 한 가지 실험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인을 찾기 위한 실험이 아니라 우리의 시스템을 정의롭게 만들기 위한 실험을 말이죠.

존 롤즈는 이를 위한 사고 실험을 제안했습니다. 통칭 '무지의 베일'이라 불리는 실험이죠. 내가 남한에 태어날지 북한에 태어날지 모르는 상태, 나의 집이 부자일지 가난할지 모르는 상태, 내가 이성애자가 될지 동성애자가 될지 모르는 상태, 내가 건강할지 아닐지 모르는 상태........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의 베일 속의 인간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최대한 공정한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것뿐입니다. ..

내가 생각하는 평등을 다른 사람이 불평등이라 말할 때, 다른 사람의 평등이 내게는 너무나 불평등하게 느껴질 때, 잠시 무지의 베일을 꺼내 보는 것은 어떨까요? 243-244

 

가만히 돌이켜 보니 우리는 소시민에게 감정이입을 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 적 읽은 동화나 어른이 되어 즐기는 영화의 주인공들 대부분은 특별한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즐기기 위한 것입니다. 독서나 영화 관람이 끝난후에 일상생활에서 씁쓸함을 느낀다면, 우리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겠죠. 저는 그것이 일상적 감정이입의 문제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즐길 때나 진행되어야 할 감정이입이 우리의 일상생활까지 지배하고 있다고 말이죠.

평범한 우리가 특별한 사람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특별한 사람의 성취를 목표로 삼다 보니, 작은 성취 같은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커다란 목표를 바라보니 자신은 늘 제자리, 실패자인 것만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내면은 스스로 관객이 되어 평범한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 합니다.

이 사회는 늘 성공하라고 세뇌를 하죠. 성공해야 행복해진다는 이데올로기가 내면 깊이까지 침투해 있습니다. 백인백색(百人百色)이라고 하는데, 이 사회에서는 성공의 모습까지도 기성품처럼 정해져 있습니다. 도심의 평수 넓은 아파트, 멋진 자동차, 명품 옷과 액세서리 등등. 이런 것들을 갖춘다고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성공으로 가는 궤도에서 이탈하는 것은 불안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을 위하여 맹목적으로 달려갑니다. 성공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말을 되뇌이면서요. 하지만 성고이란 자기 충족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기 충족할 수 있을 것 같거나 충족해야만 할 수준의 무언가를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입니다. 임금에게 가장 멋진 옷이 성공의 척도였듯이 우리도 결코 도달하지 못할 목표를 위해 미친듯 달려갑니다. 자기계발이란 말이 고전적 단어가 되고, 이미지 메이킹이란 말도 시들해지니 이제 셀프 브랜딩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충족하는 삶은 임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성공한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퇴화죠.

"나는 이 정도 디자인과 옷감이면 만족해" 혹은 "나는 여기까지만 성공할래"라고 말하는 순간, 비웃음을 당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사회에서 멈추는 순간 허물어질 것이라는 불안도 만연하죠. 사실 우리 사회에서 소시민의 충족한 삶은 살짝 밀기만해도 무너질 만큼 허약합니다. 모두가 그것을 알기에 마족하고 싶어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소시민이면서도, 평생 소시민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서도, 마치 임금이라도 된 양 임금과 같은 각오와 부담감을 안고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어른으로 성장하는 도안 소시민으로 살아도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는 사회, 임금이 되어 본 적도 없는데 벌거벗었다고 손가락질하는 사회, 지금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것을 지키기 위해 더 무엇을 노력해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249-251

 

조선의 세자들은 지독한 조기 영재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보통 예닐곱 살 정도에 시작된 교육은 그 양과 질에서 조선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공부에 야간 자율학습과 월말 평가는 물론이고, 수업 시작 전에는 여러 명의 스승들 앞에서 전날 배운 것을 암송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왕이 그 자리에 직접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스무 명이 넘는 학자들이 어린 세자 한 명을 가르치기 위해 24시간 준비 상태였는데, 그들 모두 내노라하는 공부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매서운 눈으로 감시하며 공부를 시켰으니, 조선의 세자도 웬만해선 버티기 힘든 자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힘든 공부를 사도 세자는 네 살에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넘치는 사랑 덕분에 생후 48개월 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쉴 시간도 없이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어린 사도 세자는 꽤 똘똘한 아이여서 시키는 대로 공부를 곧잘 했다고 합니다. 그렇잖아도 귀여운 아들이 조선 최고 지식인들에게 뛰어나다는 평까지 들으니, 영조의 기대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공부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수업 시간도 늘어났습니다. 한창 뛰어놀아야 할 나이의 건강한 사내아이가 재미있어 할 리가 없겠죠. 그러나 영조는 놀고 싶어 하는 세자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커녕 조금이라도 꾀를 부릴라치면 버럭 화를 냈습니다. 사도 세자의 아내인 혜경궁 홍 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 세자는 영조에 대한 공황장애를 겪었던 것 같습니다. 266-267

 

어른이 아이에게 요구하는 '착함'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조용히 하라고 하면 조용히 하고, 단정하게 입으라고 하면 그리 하고, 자야할 시간에 자는 아이, 한마디로 어른 손을 덜 타는 아이입니다.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도 그럴까요? 갓난 아이는 수동적입니다. 자라나는 아이만이 자신의 생각과 그것을 관철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어른들의 위협으로 그 의지가 꺾이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면, 아이는 개성은 커녕 자신에 대한 주체적 인식조차 성장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합니다. 아이의 말에 윽박지르는 일은 비교육적이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죠. 그래서 되레 식당 같은 공공 장소에서 아이의 제멋대로 행동을 제지하지 않아 사회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286

 

우리 사회의 부모들은 성가시게 하는 질문이나 고집은 수긍해도,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겠다는 말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공부는 이 사회의 인력으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요. ..

어른이 되어 사회가 속삭인 약속이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에는 이미 레일 밖으로 나오기엔 늦었습니다. 부모의 손을 타지 않는 아이, 어른의 말에 순종적인 학생, 사회 질서에 반기를 들 줄 모르는 국민...... 사회가 깔아놓은 레일 위에서 만들어지는 인간 군상입니다. 286-287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우리는 어떠한 외적 권위에도 종속되지 않고, 우리의 사상이나 감정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자유야말로 거의 자동적으로 우리의 개체성을 보장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는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가질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또한 외적 권위로부터의 자유는 내부의 심리적 상황이 우리가 자기의 개체성을 확립할 수 있게 될 때에야 비로소 항구적인 성과가 된다.' 289

 

이 책은 자유롭다는 사회에서 우리가 왜 이렇게 부자유스럽게 살아가는지, 답답하고 절망적인 우리의 병증을 시원하게 아려 줍니다. 프롬은 말합니다. 우리는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자유란 그것을 향유할 우리가 건강해야만, '자신의 생각과 개체성'이 확고 해야만 누릴 수 있다고요.

에리히 프롬은 우리가 왕이나 교회의 권위로부터 자유를 쟁취했다고 믿지만, 실은 경제적으로 자본의 노예가 됨으로써 고독이나 불안을 경험하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도피를 시도한다고 말합니다. 아니, 처음에는 시도였을지 모르지만 자본의 지배가 가속되자 '자유롭다고 믿는 자동인형'을 만드는 시스템은 공고화되었지요. 290

 

'...... 개인이 자기 자신이 됨을 그치고 변화하는 것이다. , 그는 일종의 문화적인 양식에 의해 부여되는 성격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전적으로 동일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자신에게 기대하는 그런 상태로 변화된다. 그와 함께 ''와 외부 세계와의 갈등은 사라지고, 고독과 무력함을 두려워하는 의식도 사라진다. (...) 개인적인 자아를 버리고 자동 인형이 되어 주위 수백만의 다른 자동인형과 동일해진 인간은 이미 고독이나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대신 그가 지불한 대가는 혹독하게 비싼 것으로, 그것은 바로 자아의 상실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회가 자동인형이 된 인간으로 가득해진다고 합니다. 자아를 상실한 인간은 인간적인 무력감과 절망에 휩싸입니다. 자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지고 인생이 무의미해질 때, 인간은 자신을 찾기 위해 싸우는 대신 인생의 의미를 대신 찾아줄 무언가를 갈망하게 됩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사회가 바로 파시즘의 온상이라고 지적합니다.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서서 개인의 개성을 증오하는 그 이데올로기 말입니다.

민주주의라면 인간에 대하여 모든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인생을 스스로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백인백색, 모든 주체적인 인간은 각각의 개성을 뽐내겠지요. 그것은 또한 각 개인의 권리이며 수많은 피를 흘리며 되찾아 온 권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든 권력이 그러하듯 그것을 빼앗으려는 시도는 집요하기만 합니다. 착한 아이, 양순한 시민으로만 살아가서는, 절대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없죠. 가만히 있으라는 기득권의 지시에 반항하지 않고서는 지킬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평생 투쟁심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동인형이 되어 파시즘의 깃발에 열광하여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면 말이지요. 긴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제야 겨우 조금, 풀꽃들 사이에서 춤을 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춤추기 위하여 우리는 언제든 싸울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피곤하게 느끼겠지만, 노예로 사는 것보다 그것이 나은 삶 아닐까요? 당신이 출 춤에 미리 박수를 보냅니다. 291-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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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THREE 일과 삶

 

10 우리는 시간과 투쟁한다.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전보다 더 오래 살고 있으면서도,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졌기 때문에 시간은 더 없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247

 

아이들에게 기다림을 가르치는 것은 양육에서 중요한 부분인 동시에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은 조직 시간이 자주 자기 시간이나 상호작용 시간보다 우선시되는 세계에서 꼭 필요한 기술이다. 25

 

우리 문화에서 시간은 돈이다... 일을 더 빨리 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시간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비행기, 자동차 컴퓨터는 빠르지만, 우리는 그것들과 더불어 점점 더 많은 곳을 가고 더 많은 일을 한다. 우리가 더 빨리 일할수록 우리의 시간은 더 빨리 새로운 일로 채워진다. 우리가 더 빨리 움직일수록 우리는 더 적은 시간을 갖게 된다. 사람들이 속도에 집중할수록 서로에 대한 인내심은 점점 줄어든다. 또한 빠르게 돌아가는 삶은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사람들은 자유시간이 전혀 없다고 불평한다. 253-254

 

앨빈 토플러가 <미래 충격>에서 지적했듯이, 사회 변화가 빠른 시기에는 문화 전체가 일시적인 공황을 경험할 수 있다. 254

 

시간의 속도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의 수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더 많은 시간 동안 일할 뿐만 아니라 더 많이 이동해야 하고, 가야 할 곳도 더 많다. , 더 많은 것을 사야 하고,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즐겁게 해줄 오락활동들도 더 많이 있다. 우리가 정해진 시간에 더 많은 활동들을 끼워 맞추려고 노력할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가는 듯하다. 오늘날 우리는 시간이 더 없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에 더 시간이 없는 것처럼 느끼는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255

 

사람들이 시간에 맞춰 일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뤄진 현상이 아니다. 과거 고용주들은 사람들을 시간에 맞춰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분투했다... 숙련된 장인들은 늦게 일어나 더 늦게 일을 시작했다. .. 17세기 초까지 영국의 노동자 계급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산업화 이전의 삶은 대학생들의 생활과 약간 유사했다. 불규칙적인 식사와 수면이 과음과 파티, 그리고 잠샘 작업과 어우러져 있었다. ..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산업화 이전 사람들의 시간에 대한 태도는 우스꽝스럽고 유치해 보인다. 우리는 이미 조직 시간의 요구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 산업화 이전의 노동자는 게으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시간을 돈으로 여기지 않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돈보다 여가가 더 가치있는 것이었다. 255-256

 

17세기와 18세기 유럽의 남성 및 여성 근로자들은 매주의 첫날에는 일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스스로 정한 그 휴일을 () 월요일이라고 불렀다. 남성들은 술을 마시고, 길모퉁이를 서성거리고, 싸우고, 투견이나 투계 선술집에서 내기 게임을 하며 월요일은 보냈다. 일요일은 가족을 위한 날이고, 월요일은 친구를 위한 날이었던 것이다. 여성들도 술을 마셨지만 대개는 집안일을 하면서 월요일을 보냈다. 성 월요일의 흔적은 1970년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서 헤일리는 베스트셀러 소설 <자동차>에서,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월요일에 만들어진 차를 결코 사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주말이 끝난 후, 근로자들은 병가를 내서나 피곤한 상태로 출근하기 때문에 월요일에 만들어진 차들은 다른 날 만들어진 차들보다 덜 믿음직한 성능 기록을 가지고 있는 편이라는 것이다. 256

 

고용주들은 사람들에게 규칙적으로 일을 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낮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일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1900년대 초, 헨리 포드는 전혀 다른 방식을 택했다. 노동규율을 강화하기 위해 낮은 임금을 이용하는 대신 오히려 보수를 높여주고 주당 근무 시간도 줄여주었다. 그는 사람들을 착실한 근로자로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탐욕스런 소비자로 만드는 것, 즉 충분한 임금과 쇼핑하기에 충분한 시감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가지 모두 기업에 이득이 되었다. 257

 

테일러화(과학적 관리법의 창시자인 테일러의 이론에 따라 모든 업무를 단편화하고, 개별 작업자의 동작을 규정, 감시함으로써 시간과 동작의 낭비를 줄여 일의 생산성을 높이려는 것.). 260

 

아마도 현대의 일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점은 자신이 생산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시간에 대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점일 것이다. 263

 

시간에 맞춰 일하는 것에 저항했던 산업화 이전의 우리 조상들과, 시간과 과업에 의해 구조화된 일을 하는 현재 사람들의 상태는 일과 시간에 대해 세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첫째 아마도 과업 지향적인 일이 시간 지향적인 일보다 더 자연스럽고 만족스러운 듯하다. 둘째, 아마도 우리들 대다수는 짧은 시간 동안 열심히 일하고 긴 자유시간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셋째, 그러나 우리 문화에 존재하는 시간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고려한다면, 일정한 노동 시간이 정해지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다. 264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고용인들에게 자신의 노동시간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264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어떤 면에서 20세기의 가장 급진적인 경영 혁신이다. .. 지난 백년 동안, 대부분의 경영 혁신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일에 끼워맞추도록 돕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바닷속의 좁쌀 한 알(滄海一粟, 창해일속)’에 불과하지만, 개인이 자기 삶을 중심으로 일을 조절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황에 맞게 일을 조정하도록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시간제 근무이다. 시간제 근무는 최근 나쁜 평판을 얻어왔으며,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많은 고용주들은 전일제 고용인들을 해고한 다음 그들의 자리를 더 값싸고 쉽게 내보낼 수 있는 시간제 고용인들로 메우고 있다. 둘째, 시간제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회보장 혜택을 받고 있지 않으며, 임금 수준도 낮고 승진 가능성도 없는 직업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제 근무를 선호한다. 265

 

우리들 대부분은 업무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266

 

일이 우리 삶에서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할수록 모든 활동은 점점 더 일처럼 느껴진다. 시계와 일정표는 우리의 사회생활로부터 자연스러움을 빼앗아간다. 이제 사람들이 친구의 집을 예고 없이 방문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 되고 있다. .. 현재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거나,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하고 있지 않은 일은 아마도 잠자는 일일 것이다. 신경 생리학자인 스탠리 코랜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첨단 기술인 시계가 지배하는 생활방식 덕분에우리는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보다 연간 500시간의 수면을 덜 취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269

 

최근에는 컴퓨터, 이메일, 팩스, 휴대전화, 호출기 등이 우리를 일터의 벽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제 일부 사람들은 침대에서 잠옷을 입고 일하거나 해변에서 수영복을 입고 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

근로자들이 직장 내의 책상에서 떠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술은 일하는 시간의 범위를 넓히거나 그 시간의 양을 증가시키는 데도 이용된다. 270

 

장소에서의 융통성은 근무시간에도 융통성을 부여한다. ..

신기술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지만, 그것은 잠재적으로 우리를 하루 24시간, 1365일 내내 고용인으로 만든다. 271

 

시간은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것을 팔고, 사용하고, 사고, 투자하고, 아끼고, 죽인다. 274

 

샘 킨은 자신의 책 <열망>에서 .. 일이 사람들을 지배하면 사람들은 무력해지고, 성적 구별이 사라지며, 시장 원칙만이 추종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일직이 알베르 카뮈가 말했듯이, 일이 없으면 삶 전체가 타락한다.”그러나 자유시간이 없어도 삶은 타락할 수 있다. 275

 

 

11 여가와 소비주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가가 인간의 행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믿었다. ..

그리스어로 여가라는 단어는 스콜레(skole)’이며, 라틴어로는 오티움(otium)’이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모두, 일을 뜻하는 단어는 여가를 뜻하는 단어의 부정형이다. ‘이라는 뜻의 아스콜리아(ascholia)’네고티움(negotium)’은 둘다 여가가 아닌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스페인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뜻하는 스페인어네고시오(negosio)’여가각 아닌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어, 라틴어, 스페인어 모두 여가가 마치 생활의 중심인 것처럼 일을 여가와 관련시켜 비유한다. 영어단어 레저(lisure)는 라틴어의 리케레(licere)로부터 파생되었는데, 그것은 허락되다라는 의미이다. 영어에서는 마치 일이 생활의 기준인 듯 여가를 일에 빗대서 표현하고 있다. , 우리가 일을 멈추도록 허락되었을때가 여가라는 것이다. 276-277

 

사업가들은 일요일을 우울하고 지루한 날로 만들려는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그렇게 하면 일을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여가가 너무나 보람차고 즐겁다면 사람들은 일터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279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고용주들은 토요일 휴가를 주는 것에 반대했다. 그들은 고용인들이 말썽만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280

 

TV를 더 보고 싶다는 이유로 일하러 가기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 사람들은 나뭇조각으로 카누를 만들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가한 시간을 원하지만, 단지 TV를 더 많이 보기 위해 여가시간을 원하지는 않는다(비록 한가한 시간에 그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TV를 보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282

 

마르크스는 인간에게 본성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다. 283-284

 

한때 여가는 아마추어를 위한 시간으로 여겨졌다. 아마추어라는 단어는 라틴어 아마토르(amator)’, 애호가라는 단어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아마추어를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애호하는 사람또는 어떤 것에 대해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아마추어는 돈이나 명성 같은 외적인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재미있고 본질적으로 보람을 주기 때문에 취미를 개발한다. 285

 

1970, 경제학자 스테판 린다는 <곤경에 처한 유한계급>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부유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자유시간더 많은 소비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대부분 더 많은 소비를 선택한다고 주장했다. 286

 

돈을 쓰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돈을 벌기 위한 시간, 쇼핑할 시간, 그리고 유람용 모터보트나 패키지 투어 등 돈으로 구매한 물건들을 사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

소비는 일하고자 하는 욕구가 약할 때조차 일을 해야 할 필요를 창출한다.. 287

 

십대(teenager)들조차 자신의 여가를 소비와 교환한다. 과거의 십대들은 가족을 돕거나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 자신이 원하는 사치품을 사기 위해 일하는 중산층 십대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인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젊은이들에게 을 장려했다. 그들은 젊은이들이 일을 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규율을 발전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287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는 것은 십대의 학업을 방해할 뿐 아니라 호기심 많고, 상상력 풍부하고, 호전적이어야 할 시기에 적응된 온화함(adjusted blandness)”을 심어줄 수 있다는 그린버거와 스타인버그의 주장이다. 288

 

여가와 소비재를 교환하는 십대들은 그들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일과 소비의 패턴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을 잃는다. 만약 그들이 물건을 사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자유시간을 포기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여가를 가질 수 없다. 그들은 어떤 활동들이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좋은지 발견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은 (부모를 비롯하여 다른 권위 있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일이다. 말썽을 일으킬 위험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시장이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닌, 자기 방식대로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289

 

우리는 미국인들이 점차 타인 지향적으로 변해가고 있다1950년대 데이비드 리스먼의 주장을 논의한 바 있다. 타인 지향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원할 뿐 아니라 시장의 물질적 동기와 고용주가 제공하는 심리적 유인에 의해 움직인다. 리스먼의 말은 옳았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택권을 제공하는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지만, 아마도 그로 인해 우리의 행동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안에 불어넣은 욕구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쇼어는 소비가 대개 지위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290

 

주디스 윌리엄슨은 <열정의 소비>에서, 시장이 우리의 열정을 소비하고, 그것이 더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무장해제시킨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

돈은 당신이 돈을 번 방법을 포함하여 많은 것을 숨겨준다... 우리는 고객으로서 권력을 가지고 있다. 시장에서는 현금이나 수표, 혹은 신용카드를 갖고 있기만 하면, 당신이 누구든 상관하지 않는다. 292

 

'여가'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본질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가행위를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단지 그 행위 자체를 즐긴다. 293

 

만약 당신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주변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지 않다면, 일과 소비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여가를 즐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 여가는 돈이 들지 않는다. 친구나 가족과 어울리는 것, 소설책을 읽거나 단지 공상에 잠기는 것만으로도 여가를 즐길 수 있다. 여가는 우리에게 소중하고 할 만한 가치가 있는 활동을 하는 시간이다. 여가는 자유로운 시간 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장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릴 것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삶을 이해하는 것이 한층 더 어려울지 모른다. 295

 

 

12 의미 있는 일, 그리고 행복한 삶

 

"의미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어떤 이들에게 의미 있는 일은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일을 뜻한다. 다른 이들은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원한다. 의미 있는 일의 본지로가 그에 대한 욕구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철학적 질문의 모태가 되는 질문에 직면해야만 한다. ,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296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한다. 300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 자체가 정신 질환의 징후라고 생각했다. 마리 보나파르트에게 보낸 편지엣 그는 이렇게 썼다. "누군가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묻는 순간, 그는 이미 병에 걸린 것이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 왜 나는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가?"처럼 부정적인 방식으로 제기되면 우울한것이 사실이다. ..

심리치료자이자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인 빅터 E.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중심으로 치료 방법을 개발했다. '의미치료(logotherapy : 이 이름은 '의미'리는 뜻의 그리스어인 '로고스'로부터 파생되었다)'는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 원동력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 프랭클은 삶의 의미는 변화하는 것이고 사람마다 다른 것이지만, 사람들은 선행을 하고, 가치를 경험하고, 마지막으로 고난을 통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300-301

 

<나의 고백>이라는 글에서 레오 톨스토이는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 시작한다. 톨스토이는 모든 인류가 삶의 의미를 알고 있지만, 자기 자신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303

 

놀랍게도,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관심을 기울인 현대 철학자는 거의 없다. 또한 관심을 기울였더라도, 그들의 대답은 어쩔 수 없이 신학자나 심리학자들의 대답만큼 구체적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질문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곤 한다. E. D. 클림케는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영역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눈다. 첫 번째 질문은 우주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존재 이유와 그 목적에 관한 것이다. 가장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세 번째 질문이다. 나는 왜, 어떤 목적으로 존재하는가? 만약 목적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그것을 발견할 것인가? 목적이 없다면 내 삶은 어떤 의미나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일부 철학자들은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 자체가 하나의 대답만을 암시한다는 이유로 그 질문을 해체시킨다. 다른 이들은 그러한 질문에는 대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무의미한 질문으로 여긴다. 305-306

 

철학자 L.J. 러셀이 지적하듯이, 만약 삶의 의미가 오직 그 결과에 의거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결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내일 잼을 만들어라, 어제 잼을 만들어라. 그러나 오늘은 잼을 만들지 말아라.", "당신은 자녀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당신의 자녀들도 그들의 자녀를 위해 마찬가지로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잼을 먹지는 못한다." 의미 있는 삶이란 현재를 위한 삶과 미래를 위한 삶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러셀을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들은 삶의 의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이라고 좋아한다. 그러나 러셀은 삶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오늘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307

 

도덕성이 반드시 당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다른 모든 이들의 가치 있는 삶을 살 권리를 존중한다면, 이론상으로 우리는 모두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 행복으로 가득한 삶은 의미 있는 삶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행복한 삶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행복하기'위해 해복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 즉 삶의 목표이다. 어리스토텔레스는 실용적인 지혜, 탁월함, 즐거움이라는 세 가지가 행복한 삶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세상에 대해 배우는 것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학구적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수준에서의 학습, 재능이나 기술을 발전시키는 일이 삶의 보람된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세스는 탁월함에 대해서도 도덕적이고 지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우리는 두 가지 설명을 모두 종합하여,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다. 309-310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 또한 행복의 중요한 요소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무 즐거움이나 행복의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오직 고귀하고 도덕적인 즐거움만이 참다운 행복으로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행복은 오직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행복은 활동적인 사람에게만 온다. 이러한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가생활은 게으른 생활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활동적인 삶이다. 인간은 어떤 일을 '' 때 가장 행복하다. 누군가를 감옥의 텅 빈 독방에 가두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최악의 고문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죄수에게서 자유뿐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행위와 상호작용까지 박탈하는 것이다. 포로 수용소의 생존자들은 종종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활동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미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삶 전체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삶의 행복한 부분의 총합 이상이다. 당신이 항상 행복할 필요는 없다. 행복한 삶은 고통과 슬픔까지도 포함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급자족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결핍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는 행복이란 게 반드시 살아가면서 원하는 걸 얻는 데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때때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원하는 것을 얻어도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과 의미는 모두 도덕성과 관련되어 있다. 행복하고 싶다면 당신은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며, 도덕적으로 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원해야 한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행복에 대한 보편적인 요구와 우리 문화에 널리 퍼져있는 불행은 일을 지향하는 문화의 산물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는 오직 일을 통해서만 행복을 얻는다. 그것은 극도의 피로와 회복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310-311

 

심리학자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행복 연구는, '일이 행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만들어낸다'는 아렌트의 견해를 지지하는 듯하다...

칙센트미하이는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 동안에는 약 절반 가량의 시간 동안 몰입을 경험하고, 여가시간에는 18% 정도만 몰입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일에 몰입할 때 창조적이고, 강하고, 활동적이며, 집중적이고, 동기화된 느낌을 더 많이 갖는다는 의미였다. 311

 

칙센트미하이의 연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통찰은, 현재 우리의 문화에서 사람들은 일터가 아닌 곳엣 이러한 행복한 순간을 제공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312-313

 

자본주의는 삶의 수단을 제공할 뿐 삶의 목적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315

 

20세기 내내 고용주들이 조직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이것을 손에 넣어 이용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중 맨 처음에 등장한' 과학적 관리법'은 육체를 손에 넣으려고 시도했고, 다음으로 출연한 '인간관계론'은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으며, 이제 몇몇 컨설턴트들은 '영혼'을 건드리려 하고 있다. 317

 

'직장에서의 영성'은 대중 심리학과, 일시적으로 유행했던 경영학 이론이 항상 해왔던 일을 반복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 그것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듦으로써, 애초에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던 권력과 갈등, 자율성에 관한 심각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대신 그거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이다. 318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제공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의미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320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처럼, 의미 있는 일은 주관적인 특성과 객관적인 특성을 모두 지닌다. .. 일의 사회적 의미와 도덕적 가치는 문화와 개인에 따라, 그리고 시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세상을 '인식'할 뿐 아니라,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창조'해주지 않는다. 320

 

개인이나 조직이 의미를 창출하려고 시도할 수는 있지만, 만약 그러한 의미가 교묘한 속임수로 만들어낸 환상이라면 그것은 냉소주의만을 가져올 뿐이다. 앞서 우리는 따로따로 일하는 사람들을 ""이라고 불렀던 회사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어떤 것의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그 의미까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한 상황 혹은 실재를 파악해야만 한다. .. 모든 고용인들은 존엄과 존중을 가지고 처우받아야 한다(너무나 많은 근로자들이 수년간 자신들이 '성인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해왔다)...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이라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삶에 참여하는 방식에 대해 약간 다른 주장을 했다. 그는 결정하고 생각하는 능력이 결여된 노예라도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워지면 이러한 능력을 되찾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일부 사람들은 노예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대신해서 생각하고 결정해주는 것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한다. 321

 

의미 있는 일은 우리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정의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그것을 보면 알게 된다. 종교직과 같은 일부 직업들은 본질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직업들보차도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이 의미를 발견할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의미 있는 일이 항상 편안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고통이나 고된 일 혹은 스트레스를 수반한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여전히 좌절하거나 지쳐서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은 대체로 개인의 삶에 활기를 북돋워준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경험과 우리가 논의한 숭고한 여가의 개념은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322-323

 

모든 사람이 의미 있는 일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존중받기'를 워하며, 어느 정도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고 싶어할 뿐이다. 결국 선의는 심리적으로 계획되기보다는 존중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번성하는 경향이 있다. 323

 

 

 

에필로그 - '''삶의 질'을 향상시켰는가?

 

이 책은 저주로부터 소명으로, 그리고 그 이상의 것으로 변화한 일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다...

일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첫째, 일은 더 나아졌는가? 그리고 "더 낫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분명 임금 노동자는 노예보다는 낫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을 노예와 농노, 계약제 하인, 그리고 초기 산업 노동자들보다는 육체적으로 덜 고되고 덜 지저분하고 덜 위험하다. 그러나 "더 낫다"는 것은 또한 고용주와 고용인들 간의 도덕적 관계를 포함해야만 한다. 직장 내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공정성이 존재하는가? 개인들은 '더 나은' 처우를 받고 있는가? 혹은 일이 우리의 삶을 향상시켰는가? 이 역시 "더 낫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달려 있다. 일이 삶의 물질적 조건들을 향상시켰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삶의 질'을 향상시켰는가? 우리의 직업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324-325

 

나는 현대의 경영자들이 올바른 직장을 '만들기'보다는 개인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느끼도록'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을 비판해왔다. .. 현대의 경영 기법이 낳은 또 다른 결과는 일이 점차 우리 삶의 보다 큰 부분을 차지하도록 일의 사회적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

오늘날의 고용주들은 자신들이 많은 것을 고용인들에게 약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특히 주주들에게 그토록 많은 것을 약속해야 할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들은 교묘한 속임수로는 신뢰와 헌신을 얻어낼 수 없음을 알고 있다. 325

 

고용주들은 자기 책임을 회피하고 고용인들에 대한 의무 없이 그저 권한만 유지하려 든다. 글나 근로자들은 자신의 실수뿐 아니라 경영자 및 경제의 실수와 "불운"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더욱 나쁜 것은 그들이 그것을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질책한다는 것이다. 326

 

고용불안정은 실업률이 낮을 때보다 새로운 삶의 방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326

 

정직한 직장은, '약속을 지키는 최상의 방법은 자신이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하는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328

 

과거의 사회계약이 사라졌다면 새로운 사회계약은 어떤 것일까? 조직은 직업 안정성을 약속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정보의 공유를 약속할 수는 있다. .. 경영자들은 조직의 모든 정보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용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될 정보는 가능한 한 많이 고용인들과 공유해야 한다. .. '정직한 직장'이란 고통스러운 진실을 이야기해줌으로써 그들이 그것에 대비할 수 있게 해주는 조직을 의미한다. 결국 그것이 "근로자들을 성인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329

 

상호존중은 단기적인 헌신관계를 만들어내는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서로에게 존중을 표하고 존중을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진실이 항상 듣기 좋은 것만은 아니며, 우리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항상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을 '신뢰'한다...

존중, 신뢰, 정직은 양 방향으로 작동한다...

'진실'은 그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울 것이다. 분명 대부분의 고용인들과 학생들은 평균 이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향상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준다면 그들은 진짜로 평균 이상이 될 기회를 얻는 것이다. 330

 

전통적인 노동윤리 아래서 개인의 고결함은 그가 어디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일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일하는지에 달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경영이론가와 고용주 들은 '일을 잘하는 고용인일수록 자기 삶을 희생한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한다. 331

 

 

내가 현대인의 일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한 가지 이유는 단지 직장 내의 불의, 경영 술수, 혹은 경제적 불안정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적인 큰 그림을 살펴보았을 때, 나는 삶 자체가 더 편해져야 할 시대에 이르러서도 유급고용이 살을 지배하는 것을 보고 당혹감을 느꼈다. 우리들 대다수는 어디서 어떻게 살지, 어느 곳에서 일하고 어떤 물건을 구입할지에 대해 전례 없이 많은 선택권을 가진 놀라운 시대, 후기 산업사회에 살고 있다. 기계들은 우리의 노예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기본적인 필수품을 상대적으로 쉽게 얻을 수 있다. 지금은 삶이 온갖 종류의 보람 있는 활동들로 가득 차야 할 시기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오랜 근무시간뿐 아니라 채무에 시달리고 있으며, 스트레스와 외로움, 그리고 가정해체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왜 그런가?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항상 더 많은 것을 워하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331-332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우리는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 , 생활 속에서 선택의 방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학예(liberal arts)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332

 

보다 광범위한 질문은 "우리는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삶을 원하는지 알고 있고, 그것을 위해 무언가를 기꺼이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그것을 위해 현재 포기하고 있는 것만큼의 가치를 갖는가?"이다. ..

일이 지배하는 삶 역시, 그것이 의식적인 선택이고 개인을 행복하게 만든다면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삶을 일에 꿰어맞추는 대신 일을 삶에 통합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333

 

 

 

 

역자 후기 - '일과 삶', 그 본질에 대한 고찰

 

일 혹은 일의 부재는 우리 삶에 너무나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정작 지금껏 우리가 하는 ''에 대해, 그리고 '일과 삶의 관계'에 대해 통찰해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335

 

현대사회에서 일은 자아실현의 수단이자, 개인의 존재를 의미 있게 만드는 도구로 그럴듯하게 포장된다. 일은 우리의 모든 것이며, 우리는 일을 잃음으로써 그에 수반되는 모든 것을 - 심지어 가정까지도 - 잃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올바르고 바람직한 현상인가? 일은 본래부터 모든 희생을 감내하면서 지켜야 하는 무엇이었나? 일은 종류에 상관없이 무조건 개인에게 성취감과 만족을 주는가?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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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TWO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5 일과 자유

 

독립, 자유, 평등과 같은 미국의 문화적 가치들에 비춰볼 때 타인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은 ()미국적인것에 가깝다. 이것은 미국인들이 서로 돕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그들은 자기 방식대로 무언가를 하고 싶어할 뿐이다. 115

 

노예제도는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는 방법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방법이다.

노예제도는 일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 가치의 타락, 최악의 상태로서의 일을 의미한다. 오늘날까지도 노동자들은 그는 나를 노예 취급해라든지 나는 그녀의 노예가 아니야혹은 그 사람은 정말이지 노예 감독관이야라는 말을 종종 한다. 불쾌하지만, 노예제도는 매혹적인 관리법의 전형이다. 그것은 일꾼들에 대한 완전한 소유와 통제를 의미한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위해 일한다. 그러나 노예는 살아 있기위해 일한다. 117-118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도를 찬성했지만, 노예제도가 사람들로 하여금 짐승과 분되는 인간의 측성, 즉 선택하고 숙고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 등을 발휘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인간 이하로 만든다고 저술했다. 그의 글에 따르면, 노예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해 아무런 통제권을 갖지 못하므로 어떠한 행복도 갖지 못했다. 그들의 랆은 대부분 일과벌, 음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노예들을 동기 부여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에게 언젠가는 자유를 주겠다는 상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들은 다시 인간이 되는 셈이다. 118


가장 가혹한 근로조건 아래서 일하는 현대의 고용인들조차도 노예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 노예들과 달리 그들은 항상 일을 그만둘 수 있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유를 되찾을 때까지 보통 여덟 시간만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항상그만둘 수 있을까? . 일터를 떠난다고 해서 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118-119

 

불행히도, 노예제도는 완전히 과거의 것은 아니다. 영국의 노예폐지협회(Anti Slavery Society), 노예제도에 관한 국제연합 실무위원회(UN Working Group on Slavery), 그리고 인도의 노예해방전선(Bonded Liberation Front) 같은 단체는 노예제도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 여전히 존재한다고 보고한다. 이들 집단은 자신의 노동으 자발적으로 그만둘 수 없는 사람은 누구나 노예로 간주한다. 여기에는 대금업자에게 돈을 갚기 위해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하는 강제 노역자들, 자신이 일하는 경작지를 떠날 수 없는 농노들,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착취당하거나 가족에 의해 팔려 무보수로 일하는 아동들이 포함된다. 119

 

계약제 하인들에게 사회계약은 실질적으로 고용주가 대부분의 힘과 권리를 갖는 법적 계약이었다. 뉴잉글랜드 바깥 지역의 초기 백인 이주자들은 절반 이상이 계약제 하인이나 무임도항(無賃渡航) 이주자들(도착한 후 일정 기간 동안 노동을 해주기로 약속하고 무임으로 도항한 이들)로 미국에 왔다. 그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일해야만 했다. 결국 고용이란 자유와 기회로 이어지게 될 일시적인 노예 상태를 의미하였다. 122

 

영국 정부는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한 수단으로 계약노예제도를 인가했다. 앞서 말했듯이, 민간 해운 업체들은 다른 어떤 상품보다도 노동력을 팔아 더 많은 돈을 벌곤 했다. 존 반 더지는 새뮤얼 애덤스, 존 애덤스, 제임스 오티스,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작가들이 폭정(tyranny)’굴종(slavery)’ 같은 단어를 자주 사용한 이유가 계약노예제도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계약노예제도는 과거의 유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연구자들은 불과 몇 년 전에 로스앤젤레스의 노동착취 사업장(sweat shop)에서 계약노예제도를 사용하는 태국인 고용주를 발견했다. 그들은 하루 열일곱 시간씩 재봉틀로 옷을 박는 일흔 네 명의 태국인 여성들을 발견했다. 고용주는 한 아파트에 여성들을 가두고는, 만약 도망치려고 시도하면 그들과 가족들을 해치겠다고 위협했다. 미국의 초기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오는 뱃삯을 갚는 데 수년이 걸렸던 것처럼 태국 여성들도 고용주에게 항공료를 지불하기 위해 칠 년간 일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여성들 중 일부는 자신들에 대한 처우 방식에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오로지 집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부치는 것뿐이었다. 또한 미국에서는 오페어(au pairs)들의 처우에 관련된 추문도 있었다. ‘오페어란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외국 여자로, 숙식을 무료로 제공받는 대신 한 가조고가 살면서 가사를 돕고 아이를 보살피는 일을 한다. 당시 미국에 온 젊은 오페어들은 학대와 과로, 저임금에 시달리곤 했다. 그들은 미국에 가게 된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싼값에도 기꺼이 일하러 온다. 그리고 땔 그들은 자신들이 계약제 하인보다 나을게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24-125

 

노예제도와 계약노예제도에서는 타인의 노동을 빌리기보다는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드러난다. 백인 계약제 하인들은 1650년경에 시작되어 1800년대에 확대된 흑인노예들의 대규모 유입 이전에 미국에 왔다. .. 남부의 농장주들은 백인인 하인들보다 흑인노예들을 훨씬 좋아했는데, 이는 흑인노예들이 기후에 더 잘 적응하고 더 온순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주인이 그들을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5

 

노예제도를 옹호했던 노예 소유자들은, 남부의 노예들이 북부의 임금노예들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오히려 남부의 노예들이 더 나은 상태에 있다고도 주장했다. 주인들이 노예들을 부양하고 있고, 어둡고 더러운 공장에서 일하는 산업 고용인들과는 달리 위생적인 야외에서 더 짧은 시간 동안 일한다는 것이었다. 북부 사람들은, 임금 노동자들이 자신의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자신의 일에 대해 현금으로 보수를 받는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이에 대해 반박했다. 그러나 자물쇠를 채운 상태로 장시간 공장 노동을 시키는 것, 아동의 노동, 위험한 기계, 유해한 공기 등을 포함한 끔찍한 노동조건은 북부인들의 이러한 도덕적 주장을 약화시켰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영국의 산업 노동자들을 미국의 노예들과 비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그들은 미국의 흑인들보다도 못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철저히 감시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처럼 살아가도록,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도록 요구되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그들도 비인간적인 생산양식으로 인해 마찬가지로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북부 생산업자들에 대한 반론은 임금노동자들의 자유가 비인간적인 노동 현실을 보상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126

 

문제는 그들이 과연 북부의 생산업자들보다 더 적은 이윤을 원했거나 필요로 했을까하는 점이다. 127

 

한 개인이 자신의 일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사실이 고용주의 학대를 반드시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문제는 한 개인이 얼마나 많은 선택권을 실제로갖고 있는가이다. 127

 

굶주리고 겁에 질린 사람이 자신에게 음식과 안전을 제공할 만한 사람과의 계약관계를 자유롭게맺기로 선택할 수 있는가? 128

 

철학자 존 로크는 빈곤한 자의 복종은 주인의 동의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굶어죽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하인이 되는 것을 택한 가난한 자의 동의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노예가 되도록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가난한 사람이 당신의 노예나 계약제 하인이 되기로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란 얘기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것일까? 128-129

 

우리는, 착취당하는 가난한 자들이 만약 착취당하지않았다면 훨씬 더 못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라는 착취의 논리에 쉽게 빠져든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이러한 논리를 보여주는, 일하는 원숭이들에 대한 풍자적인 보고서를 실은 적이 있다. 채국 남부에서는 매년 150만 톤의 코코넛 열매를 따기 위해 수천 마리의 원숭이들이 고용된다. 마을의 가족들은 원숭이를 훈련시켜, 농장주들에게 빌려준다. 원숭이들은 농장주로부터 달걀과 쌀, 과일 등 원숭이 임금으로 매달 약 12달러 정도를 벌어들인. 일하는 원숭이들에게는 이름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목욕시키고, 돌보고, 하루 세 번 음식을 준다. 때로 그들의 주인은 자신의 모터스쿠터 뒤에 그들을 싣고 일하는 곳가지 태워다주기도 한다. 아픈 원숭이는 하루 동안 일을 쉰다. 너무 늙어서 일을 할 수 없는 원숭이는 은퇴해서야생으로 돌아가거나 가족의 애완 동물로 남는다. 일하는 원숭이의 불리한 점은 항상 사슬에 묶여 있고 원하는 대로 번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사는 이러한 형태의 고용이 인간에 의해 서식지가 파괴되고 있는 게잡이원숭이 같은 몇몇 종들의 멸종을 막아준다고 지적한다. ...

농부가 원숭이의 자유를 빼앗기는 하지만, 원숭이들은 특히 서식지 대부분을 농부들에게 빼앗긴 이후 그들끼리 야생의 생태계에 남겨지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지내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원숭이의 생각이 어떤지 알 수없다. ... 제도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간단하다. 농부들은 원숭이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생각하기에원숭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원숭이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괜찮다고 한다...

농부는 원숭이가 하루 세 번의 식사를 필요로 한다고 결정하고 원숭이가 이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때로 고용주들은 고용인들이 갖고 있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 욕구를 충족시킨다. 130-131

 

우리 모두 정도는 다르지만 생계를 꾸리기 위해 우리의 노동과 시간을 팔아야 한다. 131

 

일반적으로 우리는 취직을 할때,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고용주들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는 것에 동의한다. ..

임금이 상실된 자유에 대한 보상이라는 견해는 또한 몇몇 터무니없는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은 한 살마이 직업에서 더 적은 자유를 누릴수록, 더 많은 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현실은 정반대이다. 표면적으로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직업일수록 더 높은 지위를 나타내고, 더 많은 돈을 받는 경향이 있다. 폴 퍼셀은 자신의 책 <계급>에서, 한 사람이 직업에서 누리는 자유의 양이야말로 임금보다 나은 계급의 지표하고 주장한다. 132

 

사람들은 직업에서 더 많은 통제권을 갖도록 해주는 전문 지식을 얻기 위해 기꺼이 시간과 돈을 희생한다. 예를 들면, 과거 젊은이들은 장인의 도제로 수년을 보냈는데 이것은 사실상 계약고용었다. 미국의 도제들은 장인과 일하기 위해 노동계약서에 서명했다. 영국의 도제제도는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그 제도를 운용했던 조합은 건너오지 않았다. 그 결과, 자격 기준이나 인증서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133

 

장인의 가치와 힘은 무언가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버지들은 기술의 비밀을 아들들에게 물려주었고 스승들은 도제들에게 물려주었다. .. 비밀은 장인들에게 힘과 자율성을 주었다. 그러나 미국에는 비밀성을 강화해줄 만한 강한 조합제도가 없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장인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책과 간행물을 통한 정보의 보급이 광범위해지면서 몇몇 장인들은 자신의 비밀을 인쇄하여 대중들에게 팔기도 했다. <유용한 천 가지 비밀(1795)>과 같은 실용서(how-to book)들은 조각, 철물상, 니스칠, 시멘트 바르기, 밀랍으로 봉하기, 유리, 페인트, 도금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 135

 

오늘날에도 여전히 번성하고 있는 실용서의 전통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실용서가 아닌 산업화가 장인들의 힘과 권위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일이 갖는 의미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 기계화는 일을 보다 효율적으로 실행시켰을 뿐 아니라 몇몇 업무를 단순 작업화함으로써 사람들은 기계의 일부처럼 쉬비게 대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136

 

 

6 일꾼 길들이기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의 생산업자들은 미국인 숙련 노동자의 태도 문제(attitude problem)”와 싸워야 했다. 숙련된 미국 태생의 일꾼들은 자신의방식으로, ‘자신의 속도에 맞춰 일하고 싶어했다. ..고용주들은 생산에 대한 통제권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미국의 자유와 평등 원칙에 공공연히 위배되지 않으면서도 노동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해야만 했다. 137

 

테일러는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를 중퇴하고, 산업 현장에서 일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할 기회를 거절했다. 140

 

노동자들을 장악하고 생산 속도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열쇠는, 누구나 최대한 효율적으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도록 일을 설계하는것이었다. 141

 

1878년 미드베일 제강에 입사한 테일러는 빠른 속도로 십장과 주임기사 자리에 올랐다. 미드베일에 있는 동안, 그는 산업 생산성을 증진시키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 테일러가 창안한 가장 유명한 과적적 관리법의 실례는 펜실베이니아로 이민 온 네덜란드인 헨리 놀의 사례이다. 테일러는 자신의 연구에서 그를 슈미트라고 이름붙였다. 141

 

테일러는 슈미트가 제대로만 한다면 하루에 47톤의 무쇠를 실어나를 수 있다고 계산했다. 현재 속도는 하루 12.5톤이었다. 테일러는 슈미트와 나눈 대화를 <과학적 경영의 원리>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그는 당신은 몸값이 높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값싼 노동자들 가운데 한 명입니까?” 하고 슈미트에게 묻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그러고는 하루 1.15달러를 벌고 싶은지, 아니면 1.85달러를 벌고 싶은지 물어본다. 슈미트는 후자를 택하고, 테일러는 이 냉정하고 짧은 대화에서 값비싼 일꾼(혹은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한다.

이제 당신은, 몸값이 비싼 사람은 아침부터 밤까지 지시받은 대로 정확히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값비싼 일꾼이라면 당신은 이 남자가 내일 당신에게 지시하는 대로 아침부터 밤까지 정확히 실행해야 합니다. 만약 그가 당신에게 무쇠를 들고 걸으라고 말하면 .. 당신은 무쇠를 들고 걷습니다... 그가 앉아서 쉬라고 하면 당신은 앉습니다. 이제 값비싼 일꾼은 지시받는 대로만 행하고 말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슈미트는 지시에 따랐고 하루에 47.5톤의 무쇠를 운반했다. 60% 더 많은 보수를 받는 대가로 400%나 더 많은 일을 한 것이다. 그러자 다른 노동자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든 돈을 위해서든 혹은 두 가지 모두 때문이든, 그들 여기시 슈미트와 똑같이 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테일러가 <과학적 경영의 원리>를 출판한 덕분에 슈미트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노동자가 되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곧 에스페란토를 포함한 12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테일러의 방식은 세계 도처에서 위대한 발전으로 인정받았다. 비평가들은 슈미트의 경험과 그에 대한 테일러의 묘사에 숱한 경멸감을 나타냈다. 이 책이 노동과 생산에 대한 엄격한 통제에 관한 것임을 고려한다면, 러시아 판에 주를 단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나 아돌프 히틀러, 그리고 한 때 테일러의 미망인을 만나 그의 사진을 요청한 적이 있는 베니토 무솔리니 등이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142-143

 

과학적 관리법의 네 가지 기본 요소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첫째, 과학적 관리법은 중앙집권화된 계획과 일의 순차적 단계들을 정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과거에사람이 먼저였다면, 미래에는 체계가 먼저일 것이다.” 둘째, 과학적 관리법은 각각의 작업을 가장 단순한 부분들로 쪼갰다. 셋째, 과학적 관리법은 경영진에게 고용인들을 훈련시키도록 요구했고, 각각의 노동자들은 업무 수행을 면밀히 감시받게 되었다. 테일러는 일의 구조뿐 아니라 고용인들의 가치관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용인들은 서로를 통해 일뿐만 아니라 할당량을 유지하고”, “남자답게 처신하는도덕적 자세를 배웠기 때문에 회사로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일하도록 고용인들을 훈련시키는 편이 더 나았다. 속도를 중시했던 테일러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할당량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과학적 관리법의 넷째 요소는 고용인이 지시받은 대로 일하도록 하기 위한, 주의 깊게 고안된 임금 체계에 기초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자신의 논문 <왜 생산자들은 대학생을 싫어하는가?>에서 협력이란 노동자들이 지시를 받았을 때 의문을 제기하거나 제안하는 일 없이 신속히 지시받은 대로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저술했다. 테일러는 순종을 얻어내고 할당량을 깨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용인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의 사리사욕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20년대 중반, 과학적 관리법의 논리는 거의 모든 산업에서 호응을 얻는다. 143-144

 

미국노동총연맹에서는 테일러의 체계를 생산성 증가 체계(speedup system)”라고 불렀다. 144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에서는 노동쟁의가 밣생했다. 145

 

대부분의 고용주들은 평온한 노사관계를 원했기 때문에 고용인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기로 했다. 1차 세계대전이 할창일 때, 애국심이 사람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을 보고 감명받은 몇몇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조직에서 그러한 종류의 정신과 헌신을 끌어내는 것을 보고 감명받은 몇몇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조직에서 그러한 종류의 정신과 헌신을 끌어낼 수는 없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복지 자본주의에 대한 영감은 노동 불안에 대한 두려움, 높은 이직률로 인한 비용, 자선 단체들, 그리고 대외관계 등을 포함한 여러 원천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또한 진심으로 고용인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고 싶어하는 사업주들도 있었다. 복지 자본주의의 이면에 자리잡은 일반적인 생각은 고용인들을 행복하게 하거나 그들의 이익이 그들 자신의 계급적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닌, 고용주의 이익과 결합된는 공동체에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146

 

초기 복지제도의 일부는 침대차 제조업자인 조지 모티머 풀먼이 고용인들을 위해 1880년 시카고 외곽에 지은 시범 마을처럼 근로자들의 삶을 통제하기 위해 고안된 온정주의적 기획이었다. 풀먼은 그들의 고용주였을 뿐 아니라 집주인이자 지역 상점의 소유자였다. 146-147

 

또 다른 복지제도들은 근로자들에게 회사의 주식과 더 높은 안정성을 제공하기도 했다. .. 1923P&GIBM같은 회사들은 연간 48주의 전일 고용을 보증하기 시작했다. P&G는 또한 1886년 이익분배제도를 시작했으며, 시어스 로벅 사도 1886년에 그것을 시작했다. 1927년까지 80만 명의 근로자들이 이러한 이익분배제도나 소위 근로자주식소유제도(ESOPs; employee stock ownership plans)10억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 인터내셔널 하비스터 사는 1911년에 연금제도를 실시한 수많은 기업들 중 하나였다. 당시의 또 다른 혁신에는 건강보험, 안전기준의 개선, 회사 구내식당 같은 시설이 포함되었다. 147

 

고용주들은 미국식 제도 아래서 복지 자본주의의 많은 교의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고용인들의 충성과 협력을 얻어낼 수 있기를 바랐다. 148

 

1935, 전국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은 고용인들이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할 권리나 결정에 관한 진정한 발언권을 갖고 있지 않다면 품질관리 서클을 비롯한 모든 유사한 참여 조직들도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법안은 허위조합(sham unions)”, 또는 실제 조합을 막으려는 시도로 고용주가 만든 사내 조합을 금지했다. 오늘날 고용주들은 이 법안이 작업장에서 참여 조직의 활동을 금지한다고 불평하곤 한다. 148

 

복지 자본주의와 미국식 제도는 192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고, 1930년대 대공황이 오자 재빨리 자취를 감추었다. 당시의 한 비평가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분명한 것은 임금노동자들의 복지를 고용주들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많은 회사들은 실제로 고용인들엑 대해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대공황기에 미국식 제도가 소멸되자 곧바로 고용주와 고용인 간의 신뢰와 충성을 방해하는 주요한 장애물 가운데 한 가지가 부각되었다. ..

1935년의 한 경영자 회의에서, 뉴저지 벨 사의 회장인 체스터 버나드는 복지 자본주의가 근로자의 발전이나 협력 증진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49

 

1920년대는 산업 혁신과 실험 그리고 노조 억압의 시대였다. 경영에서의 인간관계 접근은 고용인들의 태도와 감정이 어떻게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 경영진은 고용인들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고용인드로과 대화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방법을 알 필요가 있었다. 150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조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노조라고 하면 어떤 이들은 게으르고 돈만 많이 받는 부패한 특수 이익집단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어떤 이들은 노조가 지나친 욕심과 낮은 생산성으로 세계시장에서 미국의 경쟁력을 파괴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 노동조합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많은 부패와 난폭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의 탄생은 여전히 역사상 가장 중요한 노사관계 혁신이다. 이는 노동조합이 양자간에 존재하는 힘의 불균형을 조절해주기 때문이다. 157

 

 

7 노동의 두 얼굴

 

1950년대에 C.라이트 밀스 같은 사회 비평가들은 대기업이 고용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우려했다. 그는 거대한 관료 조직에서의 사무직 노동의 우울한 모습을 그렸다. 밀스에게 일의 황금기는 가족 농장과 소규모 독립 상인들의 시대인 1850년대였다. 그는 1850년대에는 일이 삶과 잘 통합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다고 기술했다. 자신이 사는 집에서 일했던 장인이나 상인에게는 이것이 사실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밀스는 또한 일을 살에 통합시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고, 소외는 나쁜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는 산업 노동자들과 사무직 노동자들에게는 일의 의미가 너무나 축소된 탓에, 일이 더는 내적인 방향성과 사회와의 연결성을 제공하지 모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믿었다.

밀스가 보기에, 사무직 노동은 어떤 면에서 비숙련 노동보다도 못했다. 그는 계약노예들(paroles)”은 육체적으로는 고생스럽더라도, 적어도 집에 가면 자유인 반면 사무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뿐 아니라 개성까지도 팔아치워야 한다고 말했다. 밀스는 사무직 노동자를 새로운 작은 사람(new little man)””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고, 뿌리가 얕아 충성심이라고는 없으며, 항상 서두르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밀스에 따르면, ‘새로운 작은 사람은 반영웅적이고, 자신의 역사를 알지 못하며, 어려운 시기에 회상할 만한 황금기를 겪어보지 못했다. 162

 

새로운 작은 사람에 대응하는 인물을, 밀스는 미국 조직의 새로운 권력자(new men of power)””라고 불렀다. ...

밀스에 따르면, 일의 상당수가 파편화되고 무의미해져서 계급 이동성과 향상의 여지가 거의 없는 대규모 복합 조직에서는, 열심히 일한 개인이 자기 발전(혹은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가 실행될 수 없다. .. 밀스는 인사 부서의 목적이 쾌활하고 협조적인 부하들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용인들의 감정마저도 조직이 바라는 대로, 조직의 손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직장 내의 정서를 통제함으로써, 고용주들은 근로자들을 소외시키지 않고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정당화할 수 있게 되었다.

밀스는 사무직 근로자가 조직의 목적에 적합한 사람이 되도록 조직에 의해 심리적으로 강요당하며, 자신의 개성을 팔아버렸기 때문에 이후 일 외의 부분에서는 천박하고 보잘것없는 삶을 살도록 운명 지워진다고 주장했다. .. 밀스가 설명하듯이, 일은 가정생활과 공동체 내애서의 생활을 향상시키기보다는 파괴한다. .. 밀스와 같은 비평가들이 실제로 우려하는 것은, 근로자들이 이로 인해 시간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 미치는 조직의 영향력으로 인한, 일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개인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163-164

 

데이비드 리스먼이 1950년에 출간한 책 <고독한 군중>

이 책 속의 타인 지향의 생활: 보이지 않는 손에서 악수하는 손까지라는 장에서, 리스먼은 타인 지향적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공예 기술보다는 사람 다루는 기술을 더 강조하고, 은행계좌의 잔고보다는 교제비를 더 중시한다고 주장했다. 일은 재미있는 것으로 가정되고, 관리자들은 비서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사장과 고객들을 기쁘게 하는 악수하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리스먼에 따르면, 타인 지향적 사람은 회사에 우선적으로 속하고, 가정과 교회, 공동체에는 더 얕게 뿌리내리는 경향이 있다.

1950년대 후반의 직장은 오늘날의 직장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 “사회윤리이러한 윤리는 조직의 충성 요구를 합리화하고, 진심으로 스스로를 희생하는 고용인들에게 헌신하고 있다는 느낌만족을 준다. 이러한 윤리에는, 집단은 창조성의 원천이며 개인은 궁극적으로 소속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리고 경영학 분야에서 일하는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들이 그러한 소속감을 창출하는 방법을 고안할 수 있다는 믿음이 포함된다. 165

 

1950년대의 사회 비평가들은 사람들이 조직에 순응하는 것, 그리고 새로 등장한 교외생활의 가치에 대해 걱정했다. 오늘날 우리는 합의된 가치의 부재와 도시 및 교외 공동체의 파괴를 우려한다. 직장에서는 여전히 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이 증가하고 있고, 집단의 가치가 강조된다. 누구도 창조성의 상실이나, 개인의 정체성이 집단의 정체성에 종속되는 문제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듯하다. 경영자들은 팀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의 문제에 보다 큰 관심을 갖는다. 너무나 많은 그들의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오늘날 경영 이론가들은 집단과 팀이 모든 바람직하고 생산적인 것의 토대라고 믿는다.

와이트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릇된 집단화에서 가장 잘못된 시도는 집단을 창조적 도구로 보려는 시도이다.” 오늘날 인기 있는 경영 개념과는 반대로, 와이트는 사람들이 집단 내에서 제대로 사고하거나 창조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집단은 단지 일의 시행을 지시할 뿐이다. 166

 

와이트의 책 이후로, ‘팀의 영광(glories of teams)’에 대한 끝없는 저작과, ‘집단에 대한 엄청난 양의 연구가 쏟아졌다. 오늘날 조직의 수사학(rhetoric of organizations)은 팀, 파트너, 가족, 동료와 같은 단어를 포함한다. 그러나 단결된 조직과 팀이 일을 하거나 의사결정을 하는 데 늘 최상의 방법인 것은 아니다. 어빙 제니스 같은 연구자들은 우리에게 집단적 사고의 불이익을 경계하라고 충고했다. 집단적 사고 강태에서 한 집단의 구성원들은 비슷하게 사고하기 시작하고,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보지 못하게 된다. ...

조직은 더 이상 와이트가 자신의 책에서 논의했던 인성 검사를 실시하지는 않지만, 대신 마이어스브리그스 유형지표(MBTI ; Myers-Briggs Type Indicator) 같은 다른 유형의 검사들을 실시한다. 이것은 개인의 성격 유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지표이다. 167

 

일부 조직들은 순응적인 고용인을 선택하기 위해 아직도 검사를 이용하고 있다. 168

 

와이트가 보기에 인성 검사는 개인의 자율성과 사생활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러나 많은 고용인들은 그러한 검사를 자기 인식 및 발전을 위한 도구로 여긴다. 별자리 운세나 성적 매력에 대한 잡지 퀴즈들처럼, 심리 검사는 내적인 자아를 명확히 보여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문제는 우리가 직장에서 그러한 검사를 받게 되면, ‘자기 인식을 얻은 대가로 자기 노출과 어쩌면 부당한 분류깢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

책의 결론 부분에서 와이트는 독자들에게 조직과 싸울 것”, 그리고 회사의 순응 요구에 말려들지 말 것을 권고한다. 168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욕구 단계” ...

욕구야말로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전부라고 가정하는 것은 인간의 열정, 이상, 가치가 갖는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자신의 가치나 자신에게 중요한 것에 기반한 선택을 한다. .. 우리는 우리가 가치있게 여기는 것을 선택한다. .. 피라미드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우선순위를 갖고 있는 고용인들은 경영진에게 악몽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조직이 줄 수 있는 것, 즉 소속감과 명성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172

 

일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다양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다른 사람들과 일할 때, 우리들 대부분은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은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우리가 걸치는 페르소나와 허용되는 감정의 범위는 직업에 띠라 달라진다. 181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하는 동안 자기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서비스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특정한 감정 상태를 지녀야 한다. 과거의 서비스 분야 종사자들은 정중해야 했다면, 오늘날에는 친절하기까지 해야 한다. 알리 러셀 혹실드는 그녀의 도발적인 책 <감정의 통제>에서 ...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제품을 생산하는 데 지적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서비스를 제공할 때 자신의 실제 감정을 항상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서비스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은 자신의 존재와 아무 상관도 없는 무언가를 마지못해 생산하고 있다고 느낀다. 182-183

 

유리는 매일 상업화된 개별화와 쾌활함, 친절함에 노출되어 있다(비록 어떤 경우, 이러한 감정은 상당히 진실된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서비스의 즐거운 얼굴(happy face)” 관점은 정중함과 공손함 이상의 것이다. 183

 

 

8 유망한 직장

 

1980년대에는 수많은 최신 경영 방법들이 엄청나게 유행했다. .. 직장 민주주의 실험이 쇠퇴했음에도, 많은 회사들은 고용인들에게 권한을 주거나일에 대한 더 많은 발언권을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학자들은 점점 더 많은 근로자들이 일에서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지식노동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해싿. 1980년대가 되자, 일은 매력적이고 재미있으며 흥미로운 것처럼 보였으며 직장은 마치 행복한 대가족인 듯했다. 187

 

하버드나 와튼 같은 주요 경영대학원들은 그러한 주제에 대한 강의를 들으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6년까지, <포춘>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의 75%사명선언문이나 윤리강령을 갖고 있었다.

윤리강령에 대한 관심이 1980년대에 높아진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일부 회사들은 부정적인 보도 추무느 소소으 불법 활동들에 대해 염려했다. 또 다른 회사들은 고용인들이 다양한 배경과 가치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통된 윤리적 가치를 진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대중 및 고객과 즇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바람을 가진 일부 기업들은 윤리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말뿐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체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사는 윤리강령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막연하게 느끼는 기업 지도자들도 있었다. 188

 

노예제도와 계약노예제도, 그리고 과학적 관리법을 거친 1980년대 중반의 기업들은 과연 이상적인 직장이 되었을까? 189

 

1980년대의 잘 팔리는 경영학 서적들에서 자주 몸델로 제시되었던 회사들은 휴렛팩커드, 존슨 앤 존슨, 리바이 스트라우스, AT&T와 같은 존경받는 성공한 기업들이었다. 또한 경영학 연구에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기업드로과 잘 팔리는 경영학 서적을 쓴 컨설턴트의 고용주들이 이런 책에 자주 등장했다. 이들 회사는 경영 혁신의 성공을 증명한다. 한편 이러한 상황은 대기업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자금 지원을 받은 경영학 연구가 과연 객관성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질손의 견해가 여전히 타당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또한 조직 내의 힘, 권력, 갈등에 관한 질문들이 왜 경영학 교과서나 대중 문학에서 논의되는 일은 드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수 있다. 190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 그리고 주로 일본과의 세계경쟁에 의해 많은 기업들이 황폐화되었던 1980년대에 경영자들은 좋은 충고를 갈망했다. 시장에는 경영자들의 사기를 향상시키고 근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쓰여진 경영학 서적들이 일시적으로 넘쳐났다. 191

 

<초우량 기업의 조건>은 분명 1980년대의 가장 중요한 경영서였다. ..

피터스와 워터만은 조직 속에서의 경영자 역할이 기업문화를 형성하고, 고용인들에게 의미를 창출해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피터스와 워터만은 가치, 상징, 이데올로기, 언어, 신념, 의식([儀式 거동의 법식), 그리고 조직의 신화를 의미하는 말로 기업문화를 사용했다. .. 피터스와 워터만은 직장 민주주의를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통제되고 잘 조직화된 체계 내에서 자신의 일을 잘할 수 있는 자유를 강조했다. 그들은 무엇이 고용인들을 흥분시키는 지 알아내고 조직내에서 호손 효과를 의도적으로 지속시키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고용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2-193

 

1982년에 출판된 텔렌스 E. 딜과 앨련 A. 케네디의 <기업문화>.. “강한 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하는 일을 더 기분 좋게 느끼도록 만든다. 따라서 그들은 더 열심히 일하는 경향이 있다.” ... 딜과 케네디는 강한 기업문화가 고용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 즉 구조와 가치 체계, 그들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회사에 소속되었다는 자부심 등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삶에서 불확실성을 제거해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위 고용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문제점들 중 일부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았다. 과연 고용인드르의 개인적인 취미는 무엇이며, 그들이 거기에 시간을 쓰는 것이 왜 잘못되었는가? 우리는 우리 삶의 가치를 확신하고있어야 하는가? 193-194

 

강한 기업문화의 커다란 이점은 그것이 포괄적이고 자동 조절되는 사회 체제라는 점이다. 불리한 점은 그것이 억압적인 동시에 변화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부정적인 면은 고용인들이 충분히 일 바깥에서 충족시킬 수 있는 욕구, 예를 들면 우정의 욕구 같은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점점 더 일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당신이 실직하게 되면 당신은 이로가 소득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195

 

로버트 하워드는 <놀라운 새 일터>에서 새로운 조직은 일터를 보다 인간적으로 만듦으로써 다시 마술에 걸리도록 시도하는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

하워드의 놀라운 새 직장에서는 도넛 타임이나 맥주 파티 같은 사교 모임들이 의사소통을 증진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임에 참석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일종의 억압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장치들은 팀 정신과 조직에 대한 헌신을 끌어내기 위해 적절히 이용되었다. .. 기업문화가 다양한 노동자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더라도 여전히 모든 살마들은 함께 도넛을 먹어주어야 한다. 마법에 걸린 회사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종류의 일을 하도록 요구한다. 본래의 업무와 이러한 사교생활에 참석하는 일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두 가지 일 모두에 대해 평가를 받는다. 에티켓 전문 작가인 주디스 마틴(“미스 매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업무상 사교(business entertaining)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줌으로써, 직무관계(business dealing)에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충성같은 사회적 기준을 적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업무상 사교는 모순 어법이다. 196-197

 

프레더릭 윈슬로 테일러가 말한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조직에서 일터는 ... 힘과 통제의 관계가 명확했다. 주어진 기능을 수행하면 될 뿐 자아를 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 단순하고 눈에 보이는 세계이다. 하지만 이제 더욱 고달파지고 둔감해진 일의 세계에서는 직업을 계속 유지하는 것 자체가 유인(誘引)이 된다. 197

 

존 미클스웨이트와 애드리언 울드리지는 자신들의 책 <주술사들>에서, 오늘날에는 너무나 많은 경영 이론들이 있으며, 그들이 서로 모순되곤 한다는 점을 지적햇다. 예컨대 어떤 이론은 독특한 기업문화일수록 좋은 것이라 말하고, 다른 이론은 다문화적인 기업일수록 좋은 기업이라고 말한다. 한 이론은 (quality)’’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다른 이론에서는 중요한 것은 속도라고 말한다. .. 경영학 이론의 유행 주기는 10년에서 1년으로 짧아졌다. 컨설팅 회사 베인 앤 컴퍼니25개의 인기 있는 경영학 이론들을 골라, 기업들이 얼마나 많은 이론들을 자신들의 업무에 적용하는지에 대한 조사를 전세계에 걸쳐 실시했다. 조사 결과, 1993년에는 평균 11.8, 1994년에는 12.7개의 이론이 사용되었으며, 1995년에는 그 수가 14.1개로 증가할 것이라고 베인앤 컴퍼니는 추정했다. 제너럴 일렉트릭 사의 CEO인 잭 웰치는 기업이 서로 다른 경영 아이디어들을 시도해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고용인들에게도 유익할까? 201

 

1980년대, 그들은 조직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회사의 사교 모임에 참여했다. 1990년대, 이제 훈련은 팀 만들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202

 

경영학에서의 일시적 유행과 관련된 문제점은 그들이 종종 무비판적이고 역사적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경영 이론가들은 일에 대한 동일한 사실을 반복해서 발견하고, 그것을 발견할 때마다 매번 또다시 기뻐한다. ‘팀워크1980년대와 1990년대 경영자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던 커다란 ()개념들 가운데 하나이다. 203

 

미클스웨이트와 울드리지는 오늘날 스포츠팀은 점점 더 사업가처럼 활동하는 반면, 회사 조직들은 고용인들로 하여금 보다 더 스포츠팀처럼 행동하도록 장려한다며, 이런 상황이 얼마나 반어적인지에 주목한다. ..

팀은 문화보다 훨씬 더 강력한 형태의 사회적 통제를 가능하게 만든다. 204

 

고용인들이 협력을 얻어내는 것은 항상 도전이었다. 많은 회사들이 팀을 만들어 이끌거나 코치하는 법을 배우는 데 투자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205

 

팀 지도자들은 팀과 한몸이 되어야 하는 반면, 팀 구성원들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205-206

 

딜버트 만화는 이러한 태도를 가장 잘 요약한다. 딜버트의 상사가 고용인들에게, 그들을 빠르게 움직이는 팀으로 재편성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자, 고용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좋은 계획이네요 우리가 스스로를 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그 다음엔 우리가 무기력하고 세밀하게 조종되는 노예라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할 테니까요.” 206

 

1980년대의 경영 이론들 중에서 종합적 품질경영(TQM; Total Quality Management)만큼 열렬히 신봉된 것은 없었다.. ..이것은 품질관리가 전 과정에 걸쳐 이루어져야 하지, 과정의 마지막에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208

 

만약 제품의 질을 향상시키면 생산성도 향상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완제품에 대한 품질관리를 하는 대신 전 과정에 걸쳐 품질관리를 하라는 것이다. 209

 

미국 정부는 TQM을 채택하고 장려했다. ...

리처드 J. 피어스는 TQM과 리더십에 관한 자신의 책에서 현장 관리자들이 지도자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 피어스는 계속해서, 근로자들 또한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분야에서 품질 성과를 개선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기는 해도, 아무런 부가적 보상을 가져오지 않을 것(“내게 무슨 득이 돌아오나요?”)이다. 그렇지만 생산성 및 품질의 개선은 장기적으로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 필요가 있다. .. 당근을 대신하는 채찍(혹은 숨겨진 위협)인가? TQM의 이면에는 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제대로 행한 일은 본질적으로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을 포함한 장인윤리의 회복이라는 고귀한 정신이 존재한다. 210-211

 

데밍이 원래 제시했던 품질경영의 열네 가지 본질적 요소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이 회사를 위해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직장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직장에서의 두려움에 관해 연구한 캐슬린 D. 라이언과 대니얼 K. 오스트리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복과 앙갚음, 그리고 징계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두려움을 낳는 또 다른 원인들은 조직 내에서 사람들이 논의하기 두려워하는 것, 논의 불가능한 것들에서 발견된다. 22개 조직의 260인을 대상으로 한 라이언과 오스트리치의 조사에서 가장 논의 불가능한 것으로는 사장의 경영 방식이 꼽혔다. 그 다음으로는 동료의 서오가와 보상 및 급여가 차지했다. .. 생산성 증가는 팀워크코칭과는 전혀 상관없는, 두려움 같은 요인들의 결과일 수 있다. .. TQM을 비롯한 경영 혁신들은 사람들에게 일을 더 나은것으로 만들어주었는가? 다시 말해 일은 보다 즐겁고, 의미 있고, 유익한 것이 되었는가? 이러한 새로운 제도들은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해주었는가? 그것들은 약속했던 모든 것-권한위임, 훈련, 팀 구성원이 되는 기쁨-을 주었는가? 213-214

 

리엔지니어링(Reengineering)20세기의 마지막 주요 경영 이론으로서 과학적 관리법과 적절한 대조를 이룬다... 리엔지니어링은 일련의 과업들이 한 사람에 의해 행해질 수 있도록 조정하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했다. 과학적 관리법은 근로자들을 전문가로 변화시키고, 일을 지루한 것으로 만들었다. 리엔지니어링은 고용인들을 만능일꾼으로 만듦으로써 일을 보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것으로 만든다. ...

리엔지니어링은 마이클 해머와 제임스 챔피의 공동 작품이다. ..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모든 경영 혁신들 주에서, 리엔지니어링은 한 개인이 하는 일을 보다 흥미롭게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214-215

 

한때 지시받은 대로 일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다... 경영자들은 이제 감독관처럼 행동하지 않고 코치처럼 행동한다. 근로자들은 상사에게 덜 신경 쓰는 대신 소비자의 욕구에 더 신경을 쓴다.’ ..

해머는 리엔지니어링은 더 적은 인원으로 더 적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구조조정이나 조직개편과는 다르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리엔지니어링은 더 적은 인워능로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다. 216-217

 

 

9 배신하는 직장

 

1990년대 중반의 많은 미국인들... 회사에서 해고당한다. .. 그들은 회사가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해치우고 싶어했기때문에 직정을 잃은 것이다. 그들은 세계경제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여성들과 소수민족의 사람들도 해고를 당했으며...직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 소득, 연금, 친구, 평판, 심지어 가족까지 잃는 일도 있다, 그들이 일한 세월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조직이 약속했던 것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일만 잘하면 은퇴할 때까지 직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묵언의 사회적 꼐약을 고용주들과 맺었던 것이다. ...

해고의 아픔을 극복하고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기술을 배워 더 나은 직장으 얻은 사람들에 대한 좀더 유쾌한 이야기도 있다. .. 그러나 이들 성공 스토리에 등장하는 사람들조차도 이전 직장에서 누렸던 것과 같은 생활 수준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1995년 노동부는 실직 노동자의 35%만이 동일하거나 더 나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 직장을 얻게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221-222

 

어떤 이들은 구조조정이 올바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잘못될 것이 없다고 좋아한다. ..

1990년대의 커다란 아이러니 중 하나는 실제 경영에 있어서는 구조조정을 강조했던 반면, 당시의 경영서들과 경영학적 수사법들은 헌신”, “충성”, “신뢰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

헌신은 노동력을 줄이고, 근로자들의 작업량을 두 배로 늘린 회사들이 특히 필요로 하는 덕목이었다. 222-223

 

구조조정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존재했으며 강한 노동조합에 의해 강화되어온 노동의 암묵적인 사회계약을 변화시켰다. ..

사회적으로 구조조정은 근로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있었거나 의심해온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 고용주들과 경제는 변덕스러우며, 당신은 조직에 너무 많은 것을 투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말이다. .. 산업화와 더불어 근로자는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취급받았다. 225

 

근로자에 대한 배신에 있어, 구조조정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 지난 20년간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기업들은 고용인들과 이윤을 공유하기는 커녕, 시장과 주식시장에서 거둔 성공을 치하한다며 임원들에게만 막대한 상여금과 스톡옵션을 주고 있다. 226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고든은 저서 <살찌고 비열한>에서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갖고 있는 경제적 문제들의 주요 원천은 대부분의 미국 기업들이 고용인들을 다루는 방식과 비대한 관료주의를 유지해온 방식에 있다고 주장했다. .. 대중은기업의 이윤과 중역들의 보수는 증가하지만 자신들의 임금은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체되거나 하락한 임금을 설명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끌어들이는 혐의는 세계 노동시장에서의 경쟁이다. ..

경제학자 제임스 K. 갤브레이스는 정부가 부자들의 편에 서 있는 탓에 중산층과 빈자들을 위한 정책에 실패하여 임금 및 소득의 불평등이 증가했다고 비난한다. 227

 

1974CEO들은 평균적인 근로자보다 40배나 많은 돈을 벌었다. .. 1999년 노동조합 단체인 페이워치(Paywatch)CEO의 평균 급여가 공장 근로자 평균 임금의 326배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급여 전문가인 그래프 S. 크리스탈은 이렇게 말한다. “CEO의 급여는 너무 빨리 오르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더는 놀라지 않는다.” 228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기분 좋게느끼게 만듦으로써 고용주들은 근로자들의 내게 무슨 득이 돌아오느냐?”고 묻지 않도록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현혹시킨다. .. 오늘날에도 불성실한 경영자들은 갈등과 사기 문제를 피하기 위해 근로자들에 대한 평가를 부풀린다(이것은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영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임금 인상은 억제되었고, 노동조합 참여는 감소했으며, 남아 있는 노조들의 힘도 약해졌다. 힘의 균형은 압도적으로 고용주에게 유리한 상태가 되었다. 229

 

엘튼 메이오의 시대 이후 경영진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돈을 덜 주면서 더 많은 일을 시킬 수 있을까?”였다. 연구 결과는 월급 인상이 반드시 사람들을 더 열심히 일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니며, 근로자들은 자신의 성과에 대해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어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직장에서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주되니 이유가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한다는 느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TQM이 너무나 효과적으로 실행되어서 근로자들이 실제로 내게 득이 되는 게 뭐죠?”라고 묻지 않는 일이 이제 가능해진 것인가? 그들은 정말로 업무 품질에 대한 인정만을 바랄 뿐 보수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가? 231

 

일을 보다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본래 그 자체로는 훌륭한 의도이다. 그러나 근로자들이 부당한 임금을 받고도 열심히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일을 더 그럴듯해 보이게 하는 것은 착취이다. 232

 

미래의 불확실성에 근거한 미묘한 두려움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일에 매달리도록 만든다. 우리들 대다수는 어떤 막연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더 오랫동안 일한다....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와 달리 두려움의 노동윤리는 구원의 희망을 약속하지 않는다. 단지 좀더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시장은 변덕스러워서 개별 고용주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 고용주는 사람들을 해고할 때 미안 하네, 경기가 안 좋아서...”라든지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지 않으면 경쟁할 수가 없네라고 이야기한다. 좌절한 실직자들은 누구를 비난하고, 누구에게 소리쳐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경영자들이나 정치가들을 비난할 수 없다. 그들 역시 세계경제를 통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직한 근로자들은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초점 잃은 분노를 품는다. 확정되지 않은 미래의 언젠가, 그들의 회사를 보다 경쟁력 있게 만들기 위해 그들의 삶은 혼란에 빠진다. 235

 

만약 카를 마르크스가 오늘날에도 살아 있었다면 그는 혁명을 요구했을 것이다. - “전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너희들이 잃을 것은 구속뿐이다.” 그러나 칸막이나 팀 안에서 일하는 오늘날의 근로자들은 단결할 수도 없고, 단결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잃을 것이 있다. 바로 그들의 직장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파업이나 저항 운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

냉소주의자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고, 단결하여 조합을 형성하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기 때문에, 혁명론자들보다도 함께 일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대신에 그들은 봉급을 받을 때 수동적인 저항과 비웃음으로 침묵의 파업을 행한다.

복지 혜책의 과감한 삭감, 더 긴 노동시간, 증가된 노동량, 구조조저으 그리고 급등하는 중역들이 보수에 대한 근로자들의 공공연한 침묵은 우리의 귀를 멀게 한다. 238



PART ONE 일의 의미와 역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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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일의 의미, 삶의 의미를 찾아서

 

우리가 가진 모든 연장들이 우리의 명령에 의해서든, 스스로 필요성을 인식해서든, 알아서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라... 베틀의 북이 혼자서 앞뒤로 움직이고, 연주자가 저절로 움직이는 리라를 연주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면 공장주들은 더 이상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노예의 주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쉬지 않고 일하는 로봇들에 의해 자동화된 공장을 보며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 이 시대를 기쁨으로 맞이하는 대신, 우리는 전보다 더 필사적으로 일(work)에 매달린다. 우리 사회는 일을 지향하는 사회이다. .. 우리는 일을 축복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일을 없애려고 하는 모순적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8

 

이 책은 우리 삶에서 일과 직장이 갖는 의미에 관한 책이다. 8

 

일은 우리의 지위뿐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까지도 결정한다.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시장이나 고용주의 손에 맡겨두는 결과를 가져온다. 괜찮은 삶을 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something more)’을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용주들은 자기개발이나 자아실현 같은 다양하고도 추상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방법을 찾는다. 9-10

 

오늘날의 일은 대부분 우리 사생활의 일부를 포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과거의 노동자들이 단지 과로했을 뿐이라면, 오늘날의 많은 노동자들은 과로할 뿐 아니라 과도한 통제를 받고 있다. 14

 

 

 

PART ONE 일의 의미와 역사

 

1 왜 일하는가?

 

잠시 동안 일하지 않는 생활을 상상하기는 쉽지만, 평생을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어떤 사람들에게 왜 일하는가?”라는 질문은 우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한 선택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합니다.” 이것이 대다수 사람들이 유급노동을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종류의 일을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19

 

윌리엄 줄리어스 윌슨은 그의 저서 <일이 사라졌을 때>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일자리가 부족하면 사람들은 단지 빈곤으로 고통을 겪을 뿐 아니라 공식적인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소소감을 상실한다. 더는 일이 그들의 생활을 규제하는 규칙적인 힘으로 작동하기를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윌슨에 따르면,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일은 규율, 소속감, 규칙성, 자기 효능감 같은 다양한 심리적 사회적 욕구를 만족시킨다. 그러나 과연 일이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가? 왜 실직자들은 여가를 통해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가? 20-21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직자들이 여가를 갖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또 다른 통찰을 제시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평화나 적당한 미덕, 교육이 없이는 여가도 가질 수가 없다. “비즈니스에는 용기와 인내가 요구되며, 여가를 위해서는 철학이 요구된다. 절제와 정의는 두 가지 모두에 필요하지마 특히 평화와 여가의 시기에 더욱 요구된다. 절제와 정의는 두 가지 모두에 필요하지만, 특히 평화와 여가의 시기에 더욱 요구된다. 왜냐하면 전쟁은 사람들을 공정하고 절제하도록 만드는 반면, 평화와 함께 찾아오는 상당한 재산과 여가는 사람들을 오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2

 

두려움, 물질적 필요, 책임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여가를 통해 스스로를 계발하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여가를 위한 교육을 통해 스스로에게 유익한 학습과 활동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활동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들이 읽기, 쓰기, 미술, 신체적 훈련, 음악 같은 과목들을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교양인 학계(liberal arts)’의 기초가 된다. 로마의 키케로도 학예가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교육에서, 삶의 필수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진리와 그 자체로 추구할 가치가 있는 지식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론적으로 볼때 교양은 일하는 방법이 아닌, 여가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

여가는 단순한 자유시간이상이다. 그것은 일에 대한 욕구와 필요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이며, 특정한 일으르 하기 위한 기회이다. 직업을 이맇었거나 직업을 가질 수없는 사람들은 결코 일에서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일할자유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선택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3

 

인간의 가장 흥미롭고 독특한 점은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난 에도 스스로 일하기를 선택한다는 점이다. 24

 

일을 통해 소득을 얻는다는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직업을 갖는 것이 우리 문화에서 그토록 바람직한 이유는 명백하다. 일은 우리에게 유용하기 때문이다. 일은 규율과 정체성, 가치를 제공한다. 일은 우리의 시간을 조직하고 우리의 삶에 리듬을 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이 우리에게 매일매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준다는 점이다. 교육과 소득, 평화와 안전이 주어진다 해도, 유급노동이 일의 중심이 되는 문화에서 자발적으로 일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매일매일을 만족감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활동으로 채울 수 있을까? 우리들 대다수는 그것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일을 통해 만족과 행복을 얻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일은 우리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준다. 그러나 인간이 일 자체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많은 학자들을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장 자크 루소는 게으름이야말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생산활동의 필요성은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부지런한 습관은 일이 가져다주는 산물이며, 우리가 일을 통해 얻는 실용적인 교육이 무언가를 해야 할 필요성과 바쁜 습관을 만들어낸다고 저술하고 있다. 요컨대 우리는 타고난 기질 때문이 아니라, 훈련과 도덕적 조건화로 인해 일할 필요성을 느낀다는 것이다. 25-26

 

일의 의미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일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27

 

개미와 같은 이런 유형의 사람은 은퇴를 위해 저축하며, 남은 20년 동안 이전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바라면서, 삶의 45년 내지 50년 동안 어느 정도의 즐거움을 저당잡힌다. 32

 

개미는 미래를 위해 살지만, 막상 미래가 왔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항상 아는 것은 아니다. 33

 

개미와 달리 베짱이는 현재를 위해 살고 미래를 희생한다. 그의 놀이는 아무데에도 이르지 못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노는 삶에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 있는 삶인가? 꿀벌은 개미처럼 일하면서도 베짱이처럼 자신이 우추구하는 것을 즐긴다. 꿀벌은 다른 사람들이 고맙게 여기는, 훌륭하고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데서 기쁨을 얻고 의미를 찾는다. 꿀벌은 유용하고 보상을 주는 일을 상징한다(물론 실제 꿀벌의 삶은 이야기 속의 꿀벌의 삶과는 전혀 다르다). 개미는 일하는 삶, 안전한 삶의 표본인 반면, 베짱이는 놀이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경솔한 삶을 대표한다. 그렇다고 해서, 베짱이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34-35

 

버나드 수츠 <베짱이의 놀이, , 유토피아>.. 수츠의 주장에 따르면, 당신은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일하면서 놀 수가 있다. 첫째, 당신은 일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둘째, 당신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

이솝 우화의 꿀벌은 개미처럼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개미와 달리 꿀벌은 꿀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즐기거나, 꿀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즐기거나, 여전히 꿀 만들기를 즐긴다. .. 몇몇 생산적인 활동은 필요성은 없으나 만족을 준다. 36

 

매미의 노래처럼, 놀이를 하는 유일한 목적은 즐거움이다. 이솝 우화 속의 베짱이는 무책임해서 굶어 죽지만, 매미는 배고픈 예술가로 그려진다. 매미는 음악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굶어 죽는 것이다. 두 개의 우화는 서로 다른 메시지를 전달한다. 예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반면 일보다 노래를 더 좋아해서 죽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들 대다수에게 더욱 적절한 질문은 만약 당신이 개미처럼 산다면, 즉 나이 들어 쇠약해질 때까지 일해서 돈을 저축한다며, 그것은 의미 있는 인생인가?”이다.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주어진 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37

 

일은 일 이외의 삶을 잠식한다. 일 이외의 삶은 일하는 삶보다 더 많은 것을 제공한다. 44

 

 

2 일이란 무엇인가?

 

일의 의미를 탐색하기 위한 좋은 출발점은 일(work), 노동(labor), 수고(toil), 업무(job)와 같은 단어들의 뜻을 살펴는 것이다. 우리가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정의하는 방식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어휘 사용이 시간이 지남따라 그 단어의 집합적인 이용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46-47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거나, 어떤 것의 이름을 바꾸는 행위는 잠재적으로 강력한 행위이다. 당신이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은 그것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48

 

일에 붙는 직함이나 사람들이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용어들은 직장에 대한 개념도를 형성한다. 고용주가 조직문화를 바꾸고자 할 때, 그들은 자주 재명명 방법을 사용한다. 49

 

필요성’.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 그것을 반드시 해야 하거나,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51

 

모든 문화에서 일에 대한 태도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태국어에서는 을 뜻하는 단어와 파티를 뜻하는 단어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

태국 사람들은 일이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며, ‘일 자체는 좋은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도 태국인들은 결코 게으르지 않다. 그들의 문화는 재미를 뜻하는 사눅(sanuk)’에 큰 가치를 둔다. 모든 활동은 사눅(재미있는)’마이 사눅(mai sanuk:재미없는)’로 구분된다. 사눅은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근심없는 즐거움을 뜻한다. 일이건 놀이이건 상관없이 어떤 활동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속성이 바로 사눅이다. 가령 태국의 어느 마을주민에게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단조로운 업무가 주어진다면, 그는 그 업무를 팽개치고 가버릴 것이다. 그것은 사눅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그 사람은 여러 날 동안 쉬지 않고 마을이 사원을 짓는 일을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일에서는 사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태국에 처음 공장을 지었을 때, 그들은 사눅의 중요성을 발견했다. 사실 초기에는 태국인들이 그다지 열심히 일하지 않았으며, 특히 아침마다 차려 자세로 서서 사가(社歌)를 부르는 의식을 싫어했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관습을 버리고 공장에서 음악을 틀어주기 시작했드며, 더 많은 휴식시간을 주고 작업중에 할 수 있는 놀이도 가르쳐주었다. 태국인들의 의식 속에서 일이 사눅이 되자 생산성이 증가 했다. 일과 놀이에 대한 태국인들의 태도는 같다. , 작업 파티는 생일 파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53

 

(work)은 너무나 다양한 것을 의미한다. 정말이지 대단한 단어이다. 우리는 일(work)하고일터(work)간다.’일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하는것이며, 우리가 만들어내는것이다. 미술 건축 음악 문학 작품(work)’도 있다. 우리는 의사, 회계사, 자동차 수리공이나 카펫 판매원의 솜씨(work)에 감탄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공간이나 나뭇조각, 빵 반죽, 고장난 자물쇠 등을 가지고도 일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의 해답을 내거나(work someone over), 운동을 하거나(work out), 좋은 일을 하거나(do good works), 누군가를 때려주거나(work someone over), 흥분하거나(get worked up), 자칫하면, 심지어 일벌레(workaholics)까지 될 수 있다.

이라는 단어는 동사이자 명사이며, 활동이자 활동의 산물이기도 하다. 55

 

노동(labour)’이라는 단어는 14세기 영어에서 최초로 등장했다. ..

동사노서의 노동(labor)은 행위만을 나타낼 뿐 행위의 대상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지만, 우리는 그가 딸기를 만들었다:고 말하지 안흔다. 비록 그의 행위가 딸기를 따는 이주 노동자보다는 훨씬 더 딸기를 만든 것에 가깝더라도 말이다. 화가가 그림 그리는 행위를 통해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노동하는 사람들은 대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는 육체적인 일을 하지만 직접 그것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56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노동,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필요한 물건을 다루는 일을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하는 하인의 일과 같다고 생각했다. 노동과 일은 두 가지 요인에 의해 구분된다. 첫째, 노동은 일에 비해 육체적 노려고과 더 크게 관련된다. 둘째, 노동자와 노동 대상의 관계는 일하는 사람과 그 대상과의 관계와 다르다. ..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노동자의 첫번째 정의는 봉사행위로서, 혹은 생계를 위해 육체적인 노동을 행하는 살마인 반면 일하는 사람의 첫 번째 정의는 만들거나 창조하거나 생산하거나 고안해내는 사람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노동이라는 단어가 로 격하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이 한 개인에 의해, 그리고 개인을 위해 행해지는 것인 반면 노동이라는 단어는 무언가를 만들거나 행하는 데 대한 개인의 기여를 암시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용어라고 말했다. ‘은 노동의 산물을 나타내는 명사이지만 노동은 일하는 사람들을 나타내는 명사이다. ‘노동은 육체적인 일을 하는 살마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반면, ‘은 다양한 행위나 그러한 행위의 대상을 가리킨다. 우리는 일조합이 아닌, ‘노동조합을 결성한다. 대부분의 조직에서 일은 협동적이며 상호 의존적인 사람들의 집단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터라는 말 대신 일터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집합적이고 육체적인 일보다는 개인적이고 비육체적인 일을 강조하는 것이다. 57

 

노동이나 수고같은 단어어비해 업무(job)’라는 단어는 상당히 유쾌하게 들린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명사 ‘job’덩어리(gob)’라는 단어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려준다. .. 17세기까지.. ‘업무란 영구적인 고용이 아니라, 일시적인 일을 의뢰받거나 잠시 고용되는 것을 가리켰다. 60

 

업무라는 단어는 대개 명사로 사용되는 반면 일하다라는 동사의 형태와 그들의 일에서와 같은 명사의 형태가 거의 비슷하게 사용된다. .. ‘업무의 또 다른 차이는 일은 보수를 받는 것과, 받지 않고 행하는 활동까지 가리키는 반면, ‘업무는 보수나 소득을 얻는 일에만 구체적으로 관련된다는 것이다. 61

 

업무라는 단어는 보수를 받기 위해 하는 도구적인 활동을 나타낸다. 그것은 일, 노동, 수고, 고역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업무의 정의는 일하는 살마과 그 산출물 간의 연관성을 암시하지 않는다. .. 일의 양에 대해서 ..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이 보수를 받기 위해 하는 한정된 양의 활동이라는 점이다. 62

 

 

3 일의 역사

 

살기 위해 일한다는 우리의 인식은 어떻게 해서 일하기 위해 산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을까? 64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일은 저주였다. ... 기원전 4세기의 역사가인 크세노폰은 사람들이 생의 좋은 것들을 누리는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 일이라고 기록했다. 만약 일이 신들의 저주라면, 그것은 정복당한 적이거나 포로가 된 외국인, 혹은 노예의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저주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편이 가장 낫다. 노예는 부유한 고대 그리스인들을 일에서 해방시켰다. 그리스인들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활동을 노예의 일로 여겼다. 노예제도는 인간의 지위를 강등시켰을 뿐 아니라 일의 사회적 도덕적 가치까지도 격하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이란 가능하면 노예들에게 떠맡겨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이득을 얻기 위해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저주가 되리 수 있다고 믿었다. 재산(땅과 노예들)을 소유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야말로 그가 생각한 인간적인 삶의 기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집 안에서 사용할 물건을 만드는 일과 상업적 이득을 위한 일을 구분했다. 그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기 위해 집에서 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인간의 필요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도 유한하다고 말했다. ..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소매업이나 금전적인 이득을 위한 일은 인간의 욕망(want)을 위해 실행되는 것이므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욕망은 인간의 필요(need)와 달리 무한한것이다. .. 돈을 벌거나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는 것 자체에만 열중할 뿐 잘 사는데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 어떤 것을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여가 활동의 정의이다. 게다가 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는데, 그들이 원하는 것과 그것을 얻기 위한 일은 결코 중단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65-66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개인의 생각과 견해가 그의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 평범한 거리의 그리스인은 유용한 상품을 개발하는 것에 대해 이러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을 것 같지 않다. 물론 우리는 그들이 정말로 그랬을지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평범한 살맘들은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하기 전에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원전 여러 동양 문화에서도 물질적인 세계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세계보다 덧없고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들이 을 경멸한 것은 아니다. 67

 

정신적 수양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이었다. 일의 과정은 결과보다 더 중요했다. 부처에게는 바닥을 쓸고 닦고 연료를 모으는 것 같은 가장 비천한 일조차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었다. 68

 

종교나 문화에 따라 일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혹은 중립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문화 내에서도, 서로 다른 종류의 일은 상이한 영적 도덕적 사회적 가치를 지닐 것이다. 모든 사회에는특정 유형의 일에 대한 고유한 편견이 존재한다. 68

 

고대 그리스인들은 다른 살맘들에 대한 봉사와 일반적인 육체노동에 대해 강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봉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시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치학>에서 그는 장인과 노동자들은 공동체의 하인들, “꼭 필요한사람들이기 때문에 시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장인이 시민이 될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로는 그들 대다수가 노예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조각의 황금기에 이 책을 저술했지만 조각가들이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조각은 격렬한 육체노동을 포함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조각을 노예 예술(servile art)’로 여겼다. 고대 그리스에서 육체노동자들은 시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몇몇 훌륭한 조각가들은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반면 그림을 그리는 일은 육체적인 노력을 덜 필요로 했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람이 행하는 학예(學藝)로 간주되었다. 학예는 깨끗하고 지적인 일일 뿐 아니라, 자유로운 사람의 일을 암시했다. ..

육체노동에 대한 편견은 르네상스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그림이 학예와 노예 예술의 중간쯤에 위치한다고 생각한 반면 조각은 여전히 노예 예술이었다. 69

 

생업이 목수였던 그리스도는 직업이란 무의미한 것이라고 설교했다. ...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질서와 정당한 보상, 수양을 위한 일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규칙적으로 살라고 충고한다. “여러분 가운데는 무절제하게 살면서 일을 하지는 않고 만들기만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하는데, 다른 이들의 빵을 먹음으로써 그들에게 짐이 되지 말라.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 여기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있다. 첫째, 일은 생활 리듬의 일부이며 사람들을 시끄러운 문제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둘째, 개미에 관하 이솝 우화에서처럼 일하지 않는 자가 먹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71

 

교회는 을 세 가지 정도로 구분했다. 그것은 삶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 다른 이들을 위한 일, 개인적인 이득이나 물질적 이득을 얻기 위한 일이다. 72

 

우리가 태만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기력이라는 뜻의 아시디아(acedia)’를 대략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태만을 게으름이나 일하기 싫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시디어의 본뜻이 아니다. 태만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게으름에 대한 비난이 아니며, 일의 가치에 대한 긍정도 아니다. 태만은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73

 

단순한 노동에 불과했던 이 두러지게 긍정되기 시작한 것은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이다. .. 529년 성 베네딕트는 몬테 카시노의 꼭대기에 수도원을 지었다. ...

성 베네딕트 이전의 수도사들은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힘들고 고통슬운 노동을 해야 했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육체적인 일에 보다 긍정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규정집의 주제는 오라 에 라보라(ora et labora)’,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이다. 베네딕트는 수도사들에게 신에 대한 헌신의 한 방버브으로서 무슨 일을 하든 착월함을 추구하라고 장려했다. “무엇보다, 어떤 일을 시작하든지 그것을 완전하게 해주십사 하고 신에게 진심으로 기도하라.” 74

 

성 베네딕트에게 일은 직업이나 소명(calling)이 아니라, 일종의 눈에 보이는기도였다. .. 베네딕트 교단은 유럽 전역에 걸쳐 퍼져나갔으며, 중세의 마으로과 도시를 발전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베네딕트회 수도사들은 중세 초기의 가장 능숙한 농부이자, 장인이자 기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노동을 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수도사들 중 가장 낮은 지위로 간주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일 자체를 가치 있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일과 신앙심 사이에 일련의 관계가 있음을 발견햇다 베네딕트 수도회의 전통에서 비롯된 노동윤리는 기독교인의 영적 미덕을 수공업을 비롯한 다른 직업에 까지 확대시켰다. 75

 

12세기에 이르러, 그 사람의 직업과 동일시한 성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베이커(빵 굽는 사람), 카펜터(목수), 대처(이엉장이), 스미스(대장장이), 위버(베 짜는 사람), 골드스미스(금 세공인), (요리사). 77

 

개인 및 집단의 정체성이 직업에 따라 새로이 형성되자 교회의 정책도 자신들의 일에 대해 보다 존중해 달라는, 조합과 중산층의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교회는 기꺼이 실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한 예로, 교회는 이 무렵 증가하는 중산층을 위한 중간 단계의 집으로서 연옥을 만들어냈다. 연옥은 중산층에게 천국과 지옥, 힘 있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존재하는 그들만의 진정한 영적 지위를 부여하였다. 연옥의 개념은 15세기 이전까지는 별로 유행하지 않았다. 15세기에 이르자 비록 비참하기는 해도 훌륭한 자금조달 장치(gimmick)인 연옥이 소곡(小曲)을 통해 찬미되었다. “금고에 동전 소리가 울리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솟아오른다.” 78

 

일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가장 애용하는 묘사, 창조로서의 일은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했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으며 인간은 음악과 미술을 비롯한 아름다운 거슬의 창조자이다. .. “예견하다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프로메테우스.. 고대인들에게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를 고된 노동으로 몰아넣은 사기꾼이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 인류가 운명을 붙잡을 수 있도록 허락한 영웅이 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신의 섭리를 막연히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기 시작하면서, 일이 지니는 가치도 커졌다. 14세기의 피렌체는 우리에게 세계를 만들어내고 자연의 형태를 바꾸는 창조자로서의 인간, 즉 호모 파베르(homo faber)의 이미지를 선사했다. .. 만약 종교가 중세의 아편이었다면 창조성과 미는 르네상스 시대의 각성제였다.

르네상스 시대는 고유한 노동윤리를 가지고 있었다. .. 자신의 돈으로 무엇인가를 도모하되 구두쇠처럼 돈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부자가 되어도 상관이 없었다. ..

육체와 정신을 룬련시켜야 한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믿음에, 르네상스는 손을 훈련시키는 것을 더했다. 81-82

 

15세기 인문주의자 로렌조 발라는 중세의 전통과 교황이 누리는 현세의 권력을 공격했다. 진정한 선의 본질에 대한 그의 저서 <쾌락에 대하여>에서 발라는 쾌락과 덕을 재정의함으로써 쾌락과 아름다움을 가득 찬 삶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소박함과 자기 절제를 명하는 스토아 학파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다. .. 그는 덕()쾌락으로 환원될 수 있는 요소(calculus pleasure)”라고 주장했다. 쾌락은 짐승 같은 충동이 아니라 이성과 통찰의 원리이며, 덕은 재능이자 인내하는 능력이었다. 82-83

 

1516년에 저술된 모어의 <유토피아>는 공리주의 원칙에 입각한 공산주의 사회를 이상향으로 그리고 있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는 청소나 도살, 사냥과 같이 시민들이 비천하고 창피스럽게 여기는 일은 모두 범죄자와 노예들이 도맡아 했다. 따라서 시민들은 보다 흥미로운 일에 종사할 수 있으며, 하루에 여섯 시간만 일해도 된다. ..

1602년에 쓰여진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는 공동체 생활과 과학적인 사회 질서를 강조했다. 캄파넬라의 이상향에서는 모든 사회 계층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그곳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캄판넬라는 가장 고귀한 사람들은 한 가지 이상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

일이 인간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일을 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르네상스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고 성취를 이룬 사람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고 자신의 일을 조절할 수 있는 사라이다. 따라서 전형적이 르네상스인은 오늘날의 인간관과는 급격한 대조를 이룬다. 83

 

16세기부터 18세기 사이에는 노동자의 자살을 금지하는 법이 확산되었다. 이는 당시 사회가 더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했고 그만큼 노동자 가치가 증가한 반면 노동자들의 절망 역시 더 커지고 있음으로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지표이다. 84


루터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게으른 거지와 부랑자들을 꾸짖었다. 그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집이 없는 이유는 그들이 일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었다.(바로 이 시점부터 오늘날까지, 몇몇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러한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다른 주요 종교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 관점에서 크게 이탈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코란에서는 거지들을 세상의 자연스런 질서의 일부라고 생각했으며 자선은 도덕적 영적 의무라고 생각했다. 85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 자체를 위한 일이라는 개념과 휴식과 쾌락에 대한 혐오는 칼뱅과 루터로부터 비롯된 거이다. 이것은 노동윤리라고 불리는 것의 수많은 형태 중 하나에 불과하다. 85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일과 모든 노동자들을 똑같이 존중하도록 가르쳤다는 점이다. .. 루터와 칼뱅의 노동윤리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람들을 구속해온 믿음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선하고, 일하지 않거나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이다. 86

 

종교 개혁가들은 모든 일을 베루프(Beruf, 시간을 차지하는 이르 직업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소명으로 정의했다. 소명은 일의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에 대한 태도를 일컫는다. ... 모든 일이 신의 명령이라는 생각은, 일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불쾌하며 보수가 적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보증해주었다. .. 프로테스탄트의 소명 개념은 일에 영적인 차원을 부여했다. 그것은 결코 일이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 ‘소명이라는 개념은 이제 우리의 일상 언어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현재는 종교적인 직업을 일컫는 데 주로 사용되고 있다. 대신에 소명이라는 말은 천직(vocation)’이라는 말로 세속화되었다. 우리는 때로 소명천직을 번갈아 사용하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창가 있다. 당신의 소명은 신이 결정하지만 천직은 당신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 87

 

우리는 지금까지 종교가 일의 도덕적 가치를 형성해온 과정을 살펴보앗다. 고대인들은 일을 강제적인 것이자 저주로 보았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일에 단순한 위엄(simple dignity)’을 부여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일에 매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신교도들은 일을 의미와 정체성, 구원의 징표를 찾는 과정으로 만들었다. 단순한 노동을 넘어선 일, 즉 소명으로서의 일 개념은 일의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특징을 강조했다. 일은 일종의 기도가 되었다. 일은 삶의 수단을 넘어 삶의 목저이 되어싸다. 일은 저주에서 소명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이르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수많은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88

 

 

4 일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

 

우리가 물려받은 노동윤리는 단일한 개념이 아니라 세 가지 개념이 융합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첫 번째 개념은 공정함과 사회적 책임의 원칙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부양할 의무를 갖는다. .. 두 번째 요소는 우리의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한다는 것. 세 번째는, 루터와 칼뱅의 독특한 견해로 일 자체가 도덕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지니며, 모든 사람은 살면서 어떤 종류의 일을 하도록 신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일은 그것이 아무리 비천해도, 또한 보수가 얼마든 간에 좋은것이다. .. 공정함, 개인의 탁월성, 개인의 선함이라는 이 세 가지 기본 개념으로부터 일은 고역아니라 의미 있는 것이라는, 일에 대한 낭만적 개념이 생겨났다. 그리고 우리는 일을 통해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89-90

 

18세기, 벤자민 프랭클린은 프로테스탄트의 관점과 계몽주의의 이상을 조합하여 새로운 노동윤리를 만들어냈다. 그는 사람들이 인도적인 방법으로 부를 사용하여 사회를 돕기 위해서는 우선은 부를 얻으려고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는 종교적 의무가 아닌,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일을 강조했다. 92

 

막스 베버는 프랭클린이 노동윤리로부터 윤리학을 이끄르어냈다고 생각했다. 프랭클린의 노동윤리가 낳은 윤리학은 두 가지 도덕적 개념에 기반하였다. 첫 번째는 공리주의이다. .. 두 번째 도덕적 개념은, ‘유용성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것이다. 92-93

 

프랭클린은 자서전에서 성공을 위해 필요한 열한 가지 미덕을 열거하는데 절제 침묵, 규율, 결단, 성실, 중용, 청결, 평정, 순결, 겸손이 그것이다. 그는 현세에서의 금욕주의를 설교했지만 또한 돈이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그 목적은 바로 생을 즐길 수 있는 자유였다. 93

 

1836년부터 1900년 사이에 모든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맥거피가 엮은 <간추린 어린이 독본> 시리즈를 읽었다. 이 시리즈는 칼뱅의 신학을 강조했으며 고된 노동과 근면, 검약의 윤리를 찬양했다. 94

 

메인 주 출신의 목사이자 교육자인 자콥 애벗은 1832롤로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 내에 자리잡은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윤리를 명확히 표명했다. 예를 들어 <일하는 롤로>에서 롤로의 아버지는 그에게 한 시간 동안 못을 분류하라고 했다. 롤로는 그 일이 매우 지루하다고 불평했고,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한 가지 일에 꾸준히, 끈이 있게 몰두하는 능력을 가져야 해. 어린 소년들은 일이 놀이처럼 재미있을 거라는 잘못된 기대를 하더구나.” 롤로의 아버지에 따르면, 진정한 남자는 일이 노력과 자제력을 요구하며, 고되고 지루한 것임을 안다.

1950년대 중반, 산업화가 시작될 무렵부터 아이들의 동화는 바뀌기 시작했다. ..

1800년대 중반에 등장한 싸구려 소설은 올리버 옵틱을 비롯한 수많은 아동문학가들로 하여금 이야기의 색채를 바꾸게 만들었다. 지나치게 교훈적인 이야기들은 본격적인 모험소설만큼 잘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옵틱은 범죄나 잃어버린 친척, 인디언 전쟁 등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 이들의 모험은 단지 주인고으이 도덕적 개선이라는 진짜 이야기이 배경이 뿐이라며 독자들을 설득한 것이다. 옵틱의 새로운 영웅들을 여전히 도덕적 모범이 되었지만, 그들의 규범은 부지런히 일하는 것에서 용감한 행동으로, ‘개인적인 절제에서 추진력으로 변화했다. 95

 

일에 대한 교훈이 가득한 아동용 동화들은 미국 남부에서는 제대로 뿌리내린 적이 없었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땅과 노예를 소유하고 싶어했고, 그들은 돈보다 혈통을 더 중시했다. 97

 

경제 전문 기자(business jounalists)의 수가 증가하면서 많은 이들이 사업가들을 추켜세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스코틀랜드 이민자인 버티 찰스 포브스는 덕 잇는 사업가에 대한 찬양을 영구적인 예술의 형태로 표현했는데, 그것은 일과 미덕, 부는 행복과 사회적 이이긍로 이어진다는 프랭클린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1916<포브스>지를 창간하면서 그는 이 간행물이 사업과 인생 전반에 더 많은 인간애, 기쁨, 만족을 줄것이라고 설명했다. 98

 

위대한 사업가의 신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기가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저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99

 

예일 대학교 출신의 콘웰은 1888년 필라델피아에 템플 대학교를 설립한 침례교 전도사였다. 그는 오늘날 사람들이 동기부여자(motivational speaker)”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 콘웰 목사는 도덕적 충고와 사업상의 건전한 충고를 혼합했다. 그는, 돈을 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내어 그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

18세기와 19세기의 노동윤리 옹호자들은 강한 도덕성이야말로 부에 이르는 열쇠라고 설교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데일 카네기가 1936년에 쓴 <카네기 인간 관계론>에 나타나듯이 개인의 성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도덕성이 아니라 심리학이 성공에 이르는 열쇠가 된 것이다. 99-100

 

성공에 대해 이야기하는 19세기의 많은 작가들과 설교자들, 심지어 몇몇 정치가들은 상업을 칭송하고 정치를 비방했다. 제임스 A. 가필드는 대통령이 되기 전인 1869, 워싱턴 전문대학의 졸업반 학생들에게 고전 학문을 가르치는 대학은 젊은이들의 직업 생활 준비에 완전히실패했다고 이야기했다. 100

 

19세기 미국을 방문한 유럽인들은 미국인의 에너지와 근면성에 아연실색했다. 특히 그들은 유한계급이 없다는 것에 대해 놀아워했다. 빈의 이민자인 프란시스 그룬트는 미국에서 상업이 주된 쾌락과 즐거움의 원천이라는 데 주목했다.

활동적인 직업은 그들 행복의 주요 원천이자 그들 국가를 위대하게 만드는 근원이다. .. 그들은 돌체 파르 니엔테(dilce far niente : 게으름의 달콤함)’대신, ‘게으름의 공포만을 알고 있다. 상업이야말로 미국인의 정수이다. .. 모든 인간 행복의 원천으로서 그것을 추구한다. .. ’. 101

 

과거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과 스스로를 동일시했고, 심지어 자기 이름까지 일에 맞추어 지었다. 반면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는 일과 정체성에 대한 두 가지 새로운 견해를 내세웟다. 일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를 발견하거나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1

 

산업화 이후부터는 이리에 대한 두 가지 유형의 견해가 존재했다. 첫 번째 견해는 계몽주의적인 것, 즉 과학과 지식이 진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산업화 이전에 일은 거칠고도 육체적으로 고된 노역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 두 번째 견해는 장 자크 루소와 같은 비평가들이 말한 것으로, 일이 일종의 은총받은 상태로부터 타락했다는 것이다. ‘은총으로서의 일이란, 자율적인 장인이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여 유용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어내고,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농부가 자신의 풍성한 녹색 들판에 씨를 뿌리고 수확하면서 조용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18세기의 저작에서, 루소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임금을 받기 위해 일하는 산업 사회의 몇몇 문제점을 예견했다. 루소는 인류가 타인의 노동으로부터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 일의 황금기는 끝났다고 믿었다. ..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일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창조성과 일하고자 하는 욕구를 잃었다. .. <에밀>에서 루소는 최상의 삶의 방식으로서 장인의 기능을 강조했다. 그의 낭만적 이상은 농부처럼 일하고 철학자처럼 사고하는 인간으로, 말에 편지를 박는 동안 진리와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는 목가적인 르네상스인이었다. 102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유재산과 자본주의 생산체제는 일로부터 얻는 창조적이고 사회적인 보상과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을 사용하는 기쁨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켰다.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일과 동일시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여겼는데, 특히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한 선택권을 거의 갖지 못하고 매우 세부노화된 일을 할 때 그러했다. .. 마르크스는 루소를 흉내내어 이러한 세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가 오른 한 가지 일을 하고 내일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 세상, 사냥꾼이다. 어부, 소 치는 사람이나 비평가가 되지 않고도, 마음먹은 대로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고기를 잡으며 저녁에는 소를 사육하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비평을 할수 있는 세상이다.’ 103

 

중요한 점은 이러한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한 가지 직업의 정체성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일과 정체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를 극단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림 그리는 사람만 있을 뿐 화가는 없을 것이다. 103

 

마르크스의 이상적인 세계에는 단 한 사람의 전문가도 없는 것일까? 병을 고치는 사람만 있을 뿐 의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마르크스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만약 당신이 청소부로 고용되어 있는 동시에 교회 집단의 우두머리이자 조각가라면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을 그저 청소부로만 여기기를 원하겠는가?... 마르크스는 사람들의 살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일이 유급고용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04

 

윌리엄 모리스는 당대의 르네상스인이자, 도이시대인들의 묘사에 따르면 일벌레였다. 그는 설계자, 장인, 시인, 번역가로서 탁월성을 발휘했다. 1884년 모리스는 사회주의 연맹을 창설하고 자본주의 노동체제와 생산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모르스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을 공유했지만, 동시에 일 자체의 심미적 가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한 편지에서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나는 왜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살 수 없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네.... 정말이지 나는 행복하게 일한다네. 그런 나의 시간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운명지워진 것, 칭찬받거나 보상받지 못하는 단조로운 고역일 뿐인 것과 비교하면, 부끄러움을 느낀다네.’

산업화된 영국의 짙은 매연과 보기 흉한 건물을 보며 경악한 모리스는 작업장에 아름다운 정원을 꾸밀 것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대량생산된 상품들의 흉한 모습을 조롱했다. 그는 기계가 노동을 절약해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생각하는 손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 자체가 주는 심미적 가치는 유용성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데서 오는 만족감에서도 비롯된다고 믿었다. 104-105

 

일의 의미에 대한 모리스의 흥미로운 통찰 가운데 하나는 가치 있는 일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모리스는 일이 삶의 빛이 될 수도, 혹은 삶의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첫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있는 반면 두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모리스에 따르면, 사람들로 하여금 일을 원하도록 하고 그 일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희망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가치 있는 일은 휴식의 즐거움에 대한 희망, 일을 통해 만든 것을 사용함으로써 느끼게 되리 즐거움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일상적인 창조의 기능에서 느끼는 즐거움에 대한 희망을 수반한다.” 105

 

가치 있는 일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희망이 잠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일뿐 그 실현 가능성 여부는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주관적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만든 물건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리스의 논점은 만약 그들이 그럴 수 있다면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거나 소유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낄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사람들은 다양한 창조적 기술을 이용하여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할지에 대해 제각기 다른 희망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분한 여가와 고품질의 유용한 산물, 기술을 연마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직업을 갖고 싶어하리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일은 객관적이다. 106

 

인간이 실제로 하는 에는 두 가지 이상적인 유형이 있다. ‘장인의 일혹은 손을 이용해서 하는 일과, ‘전문가의 일혹은 정신을 가지고 하는 일이 그것이다. 106

 

전문가( professional)’ 라는 단어는 원래 성직에 들어가는 사람이 공식적인 선서를 하는데 사용된 공언하다(profess)’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107

 

중세의 유일한 전문직은 대개 학자이자 법률가이자 의사였던 성직자들이었다. 전문직의 근저에는 세 가지 기준이 존재했다(이러한 기준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첫 번째, 모든 전문직은 공식적인 기술교육과 그러한 훈련을 확인시켜주는 일정한 제도적 인증 과정을 요구했다. .. 두 번째 기준은 전문직에서 사용하기 위한 기술을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 세 번째로, 전문가는 그 전문직이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게 이용되도록 보장하는 일종의 제도적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윤리적 행위를 보증할 수 있는 조직화가 이뤄져야 한다. 미국의 변호사협회나 의사협회의 목적이 그러한 것이다. ..

사회학자 탈콧 파슨스는 “”기업인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 상관없이 사리사욕만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반며느 전문가는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이타적으로 봉사한다.” 이것은 그가 50년 전에 쓴 글이다. ...

이상적으로 생각하자면 전문가들은 일에 대한 보수를 받지 않아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문가는 업무를 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비용을 보조받는것이기 때문이다. 108

 

대중이 전문가들의 비윤리적 행위에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여전히 전문가들이 사회에 대해 공식적 서약을 맺는다고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109

 

일에 대한 우리의 열정은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가 되고 싶은 것, 혹은 얻고 싶은 것에 달려 있다. 일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모리스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일을 원하려면 먼저 미래에 대한 어느 정도의 희망 혹은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노예와 농노들, 그리고 지독하게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힘 없는 사람들에게 노동윤리는 결코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111

 

 




PART TWO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바로가기



PART THREE 일과 삶 바로가기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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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설령 천하는 얻었다 하더라도

학생들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열심히 공부하며 온갖 능력을 쌓고 있는데, 대부분 아는 건 많은데 다룰 줄 아는 것은 없는상태로 후퇴하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이 수많은 지식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렇게 무기력하고 무능력할까? 이 무기력과 무능력을 극복하기 위해 노오력하며 자기를 계발하고 있는데, 우리는 왜 퇴행하고 있을까? 왜 우리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기쁘기는 커녕 자기 자신을 고통의 나락으로 밀어 넣고 있을까? 13-14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라는 철학자는 소크라테스를 인용해, “사람이 천하와 반목하더라도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편을 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상황은 정확히 정반대다. 14-15


이미 한국 사회는 세상을 돌보느라자기를 망각하고 망친 사람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자기를 망각하고 망친 채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이들이 자기 자신을 돌보는 법을 모르는 세상을 만들었다. 18


훌륭함이 무엇인지 모르고, 훌륭해지기 위해 자기를 돌보지도 않은 자가 다른 사람이 훌륭해지도록 돕는 것은 불가능하다. ...

역사 속의 현명한 사람들은, 자신이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했다. 지혜로운 자는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을 의미하지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공부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공부의 본질은 지혜에 대한 사랑에 있다. ...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을 망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공부를 통해 양성해야 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모르는 게 뭔지 알기 때문에 알고자 노력하고, 알고자 하는 그 노력이 바로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20-21


철학자 존 듀이는 배움의 근본적인 특징이 의존성이라고 말하며 섣부른 독립을 경계했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살아간다는 게 곧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은 이미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의착하며 배우고 있다. 따라서 홀로 배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가 이미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의착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했을 뿐이다. 이게 배움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교만이다. 공부는 홀로라는 교만에 저항한다.

그렇기에 공부(工夫) 공부(共扶)가 된다. 더불어 돕는 게 공부다. 22


공부와, 공부를 통한 성장의 기쁨을 망가뜨린 현실에 저항해야 한다. 이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공부를 통한 성장의 기쁨을 다시는 누리지 못할 것이다....

이런 세상에 저항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공부가 어떤 기쁨을 주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24


나는 이 책을 통해 공부가 어떤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말하려 한다. 그것을 한계, 능수능란함, 자유, 탁월함, 멋짐, 향유라는 말로 설명할 것이다. 25




01 공부할 이유가 사라지다

01-1 신분 상승과 반학교 문화

상당수 학생은 자기가 잘하는 것에 대해 잘한다는 평가를 공적으로 받아본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자기가 잘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하고 싶은 것이 뭐냐?”라는 말에 하나를 꼽아야 한다는 강박을 갖는다. 그런데 그 가장 긍정적이고 확정적인 하나를 찾고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

이 경우에는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뭐냐?”, “‘어떻게는 살기 싫은가?”라는 질문이 좀더 합리적이다. 하고 싶은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나 할 수 없는 것은 이미 지난 경험 속에서 알게 되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것이다. .. 적어도,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알면 그것을 피해 다른 것을 시도할 수 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의 범위를 좁혀가다 보면 마침내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부정성에 기초한 합리적 사유의 방식이다. 37-38


가르치는 사람이 학교 안에 갇히면, 그는 학교에 적응하고 최적화된 학생들에게만 다가설 수 있다. 39


예측 가능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계산을 하고 미래를 기획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예측 가능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과거를 보며 성찰하고 미래를 보며 기획한다. 성찰과 기획, 이것이 근대 사회에서 사유라고 불리는 것의 핵심을 차지한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성찰하여 그 과거로부터 나에게 주어진 것과 남은 것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돌아보고, 그것을 밑천 삼아 내 삶을 설계하는 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유. ...

기획은 늘 미래를 생각하게 해 사람을 허황되게 만들 수 있기에 기획 중심의 사유는 경할 필요가 잇다. 기획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의 삶을 나쁜 의미에서 공학적으로 바라보며 현재를 억압하거나 차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점을 경계한다면 기획 역시 성찰과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교훈을 주고 배움을 촉진할 수 있다. 40


존 듀이의 경험론. 듀이는 인간의 경험은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봤다. 우리가 불에 손을 집어넣는 것은 능동적인 경험이다. 반면 불에 손을 데는 것은 수동적인 경험이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통해 불에 손을 넣으면 화상을 입는다. 그러니 다시는 불에 손을 넣지 말아야지.’라는 교훈을 얻는다. 듀이는 이때 얻는 교훈이, 손을 데는 수동적인 겪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각이란 능동적인 이 아니라 수동적인 겪음에서 촉발되기 때문이다. 바지런히 무엇인가를 하는 동안에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가 대상에 힘을 가하는 게 아니라 대상이 나에게 힘을 돌려줄 때, 그 반발력을 느끼는 것이 바로 겪음이다. 무엇인가를 한 것이 튕겨 나올 때, 이 대상에 부딪쳐 반발되는 것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 이게 왜 이러지?’하며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한다.

대상의 현존을 인식하며 그 대상의 힘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는 골똘히생각하게 된다. 그 힘의 실체를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다른 것에 정신을 팔지 않고 오롯이 나에게 벌어진 일에 집중한다. 이 집중이 다름 아닌 생각이다. 이렇게 집중하기 위해서는 다른 일을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겨우 가능한 게 신체를 최소한으로 활성화하는 산책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통해 교훈을 얻기 위해서, 가만히 있을 줄 아는 몸이 만들어져야 한다. 생각하기 위해 멈출 줄 하는 몸, 이 몸이 공부하는 몸이다. 43-44


폴 윌리스는 <학교와 계급 재생산>에서 영국 노동계급의 자식들이 왜 역시 노동계급이 되는지 연구했다. 그 책에서 윌리스는 노동계급의 자식들은 일찌감치 교육의 이데올로기를 간파한다고 말한다. , 학교 공부는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그들이 학교 권윙 순응하게 만드는 지배의 도구다. 그 약속은 개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을지언정 전체 노동계급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학생들은 꿰둟어 본다.

학교의 체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간파한 학생들은 학교에 반항(counter)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저항은 학교를 떠나는 것과 같은 전면적인 거부는 아니다. 대신, 학교 안에 머무르며 학교의 권위에 저항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수업 시간에 깐죽거리고 개긴다거나, 짓궂은 질문을 하다거나, 수업을 교란한다거나 무단 조퇴를 하거나 땡땡이를 치는 것 등이 반학교 문화의 특징이다. 학교의 권위에 도전함으로써 사회의 약속을 승인하기를 거부한다.

일차적으로 이들이 학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 권위의 원천인 지식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53


반학교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학생들의 교복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교복은 학교의 권위에 대한 순응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교복을 주어진 그대로 입는 것은 찐따같은 일이다. .. 교복을 얼마나 훼손하는지에 따라 자신이 학교의 권위에 얼마나 저항하는지가 드러난다. 55


반학교 문화가 가진 역설이 있다. 반학교 문화는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학생들의 문화적 현상이다. 따라서 반학교 문화에서는 학교가 학생들에게 세계의 전부다. 학교 바깥에는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 없다. 56



01-2 자아 실현과 탈학교 문화

저항 담론이 형태로 공부의 새로운 목적을 제시하는 흐름이 제도교육 안팎에서 나타났다. 제도교육 안에서는 전국 교직원노동조합과 참교육 학부모회로 대표되는 교육운동이 등장했다. 바깥에서는 공동육아, 대안학교와 같은 흐름이 만들어졌다. ..

이들은 교육이 신분 상승의 도구가 아니라 삶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공부가 좀 더 자유롭고 즐거운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공부가 절대다수의 학생이 자신의 꿈을 탐색하고 발견하고 준비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59


신분 상승이 목적이던 시대에 욕망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었다. 개인의 욕망을 드러내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윤리적/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행동이었다. .. 단적으로, 의대나 법대에 갈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부모의 바람과 달리 인기 없는 철학이나 문학을 전공하겠다고 하면 부모로부터 이런 말이 돌아왔다. “너는 네 생각만 하냐?”

따라서 그 시대에 개인이 어떤 행동을 선택하고 추구하는 기준은 욕망이 아니라 책임이었다. 62


나는 OO가 되고 싶은데라는 말로 교육의 권위와 정당성에 도전한 것은 이런 욕망의 주체로서 개인이 탄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64


국가의 일원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게 행복의 원천이라며, 사람을 개인으로 해방하자는 강력한 요구가 바로 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65


학교 자체가 무의미했지만 어른들의 강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왔다. 그러다보니 학교에 오는 것이 일이고, 학교에 오는 것으로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 교사들 역시 이들을 보며 오는 것만으로도수고했다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학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교사나 부모가 보기에 이들은 완전히 무기력했다. .. 학교를 벗어나면 이들은 살아났다. 71


학생들은 본격적으로 자기 표현의 욕망을 드러냈지만, 학교는 여전히 획일주의적 군대 문화였으며 수업은 입시 위주의 암기식 공부였다. 학교와 교실이라는 공간에 몸을 어거지로 끼워 맞추고 있으니 교실에서 아무리 잠을 자고 팬클럽 활동을 한다고 해도, 학교는 기본적으로 폭력적이고 무의미하면서 고통만 유발하는 공간이었다. 학생들의 몸은 이 공간을 견디지 못했다.

이때부터 학교는 내부로부터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제도교육은 학교 붕괴, 교실 붕괴 담론에 시달렸다. 72-73


의사소통을 통해 공유하고 있는 문제를 함께 알아내고 해결해가는 경험이 필요했지만 여전히 학교 안에서의 의사소통은 일방적인 의사 전달이었다. 서로를 준중해가며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니 학교내의 관계가 폭력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74


학교 폭력에 관한 담론도 폭증했다. 물론 이 말이 학생 간의 폭력이 이 시기에 급증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전과는 달리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74-75


폭력에 관한 한 학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도고 있었다. 욕망이 분출되는 시기에 욕망을 억누르기만 하는 곳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이 있는 학생들에게, 학교는 나중을 위해 지금 당장은 참으라는 말만 반복했다. 75


1990년대 후반부터, 저항과 해방의 언어였던 꿈을 위한 교육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 인상을 찌푸리며 꿈이 없다고 말하거나 꼭 꿈을 가져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학생이 생겼다.

꿈이 해방의 언어가 아닌 새로운 억압의 언어가 된 이유는 꿈을 묻는 교육이 간과한 질문이 있기 때문이다. 꿈을 묻는 이들은, 이 꿈이라는 게 긴 인생 중 어느 시기에 묻고 찾고 발견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인지 질문하기 않았다. 진보적인 사람도 보수적인 사람도 그것은 당연히 청소년 시기에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대학 가기 전에 꿈을 발견하고 준비까지 맟쳐야 한다는 것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을 비판했지만, 생애사적 기획의 관점에서 보면 꿈을 묻는 교육을 말한 사람들조차 이 모든 것을 열여덟살, 즉 대학에 들어가는 나이 이전에 해내야 한다고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75-76


나는 내 아이가 학교 공부를 잘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라며 항변하는 부모가 있다 그러나 이 부모들 역시 다른 방면에서 자녀가 폭풍 성장하리라 기대한다. 기타를 치면 기타에서, 농사를 지으면 농사에서, ‘두각을 나타내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대가 되어서도 자기 자녀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발견하지 못했거나, 하고 싶다고 말한 그 무엇을 잘하지 못하면, 부모와 자녀의 갈등이 정점에 이른다. 자녀가 고등학교 2학년 정도 되었을때 부모가 집중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이 잘하는 것이 하나는 있어야지, 너는 도대체 잘하는 게 뭐냐?”

이런 부모에게, 자녀가 어느 정도 잘하기를 바라느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이 비슷하다. “일등 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해야지요.”라는 답이다. 어느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다시 물어보면 최소 중간 이상이다. 이 정도는 되어야 어느 정도하는 것이 된다 영역이 학교 공부에서 다른 분야로 옮겨간 것일 뿐, 명시적으로 일등을 바라는 것은 아니라 해도 사실상 중상위권 안에 들기를 바라는 일둥주의자들인 것이다.

그 결과, 탈학교 시대의 후반기로 갈수록 어린이/청소년을 해방하고자 한 언어인 은 본의 아니게 억압의 언어가 되었다. 꿈을 가지지 못하면 지질한사림이 되고, 꿈을 가지면 그 모든 준비를 열여덟 살 이전에 완수해야 하는 강압의 언어가 된 것이다. 오히려 입시에 의한 압박보다 꿈에 의한 압박이 사람을 더 궁지로 몰아넣고 비참하게 만든다. 78-79



01-3 교육 불가능과 즐거운 학교

경제 성장은 1997년의 IMF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했다. .. 이른바 생존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 82


아이도 부모도 신분 상승이 가능하지 않다는것을 분명이 알고 있었다.

신분 상승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 생존과 계급 재생산이다. 자식이 부모보다 잘살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 83


학벌이 아래로부터 붕괴했다. 상위권 대학 중심의 대학 서열은 여전히 강고한 듯 보였지만 그 아래의 학벌은 무의미해졌다. ..

서울데 있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취직을 통해 경제자본이 될 수 있는 교육자본이다. 그 이하의 교육자본은 자본으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다시피 했다. 교육이 생존의 도구가 되었다는 증거다. 84

생존이 지상명령이 된 사회에서 중산층은 더욱더 교육에 올인했다. ..

부모가 변호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이라 해도, 그 정도의 생활수준을 자식이 유지하려면 자식 역시 그런 전문직이어야 한다 그래서 한국의 중산층은 자식의 교육에 모든 것을 건다. 거기에 그 가족의 계급적 사활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교육 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전문직 중산층도 그 비용을 대느라 허리가 휘는 지경에 이르렀다. 85


이들은 사교육비가 이 정도 비싼 것이 교육에 대한 진입장벽을 높여 시골의 못살지만 공부를 잘하는학생들을 아예 배제하는 좋은 전략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살인적인 사교육비를 기꺼이 지출한다.

이 상태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오로지 공부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것도 대학 입시에 유리한 공부에만 투자하도록 강요한다. 이전의 부모 사대와 달리 이들은 자녀가 책을 읽는다고 마냥 좋아하지 않는다. 그 책이 대학에 들어가는 데 유리할 때만 환영한다. ...

진보적인 부모가 바라는 것은 학교 공부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은 입시와는 거리를 두지만, 그럼에도 자녀가 읽는 책이 자신이 알고 있는 발달 단계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두고 평가하고 검열한다. “아직은 네가 볼 책이 아니야.”라거나 그거보다는 이 책이 나아.”라며 자녀가 읽을 책을 부모가 고르고 정한다. 86-87


정신의학자들은 사람의 성장이란 좌절을 경험하면서 좌절을 다루는 능력이 커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능감은 어렸을 때 안정감을 갖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지만 인간의 성장과 더불어 깨진다. 자신을 만능의 존재로 바라보다 좌절을 다룰 줄 아는 존재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좌절은 사람의 성장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공부 이외의 것을 부모가 다 알아서 해주고 자기는 온전히 공부에만 집중하며 늘 성과를 내다 보니, 만능감이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되며 좌절을 다루는 역량은 커지지 않는 불상사가 벌어진 것이다. 93


<아이들의 숨겨진 삶>에서 저자는 또래집단을 통해 어린이/청소년이 추구하는 것은 인기와 우정이라고 말한다. 인기와 우정은 다른 것이다. 인기가 많다고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있다고 인기가 많은 것도 아니다. 저자는, 어린이/청소년의 세계에서 인기가 고속도로와 같은 것이라면 우정은 이면도로라고 말한다. 고속도로에서 서로 빨리 가기위해 질주하는 것처럼, 인기를 얻기 위해 서로 우열을 가르고 경쟁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우정은 경쟁적이지 않다. 사람의 삶에 신뢰와 안정감을 주는 것은 우정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또래 집단에서 우정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인기 역시 중요하다. 인기를 얻기 위해 경쟁함으로써 정치를 배우기도 하고 타협과 협력을 이끌어내는 기술도 배운다. 1장에서 말한, 삶을 통해 배우는 과정 중 하나가 또래집단 내부의 위세 경쟁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야합이나 배제, 그리고 폭력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사람은 자기 성향을 알게 되고 그 성향에 따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기도 한다. 94


다른 학생들이 있다. 이들은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아니다 내가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에서 딱 중간이라고 불렀던 학생들이다. 과거에는 이들이야말로 학교에서 가장 고통받던 학생들이었다. ...

학교에서 이들은 존재감도 없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학교에서 사물함보다도 더 존재감이 없었다고 말한다. 교사들이 자기 이름을 외우는 경우는 초등학교 이후로 거의 없었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사고를 치는 것도 아니니 교사들이 이들을 주목할 이유가 없었다. ..10년 전부터 재미있는 변화가 나타났다. “학교에서 공부하느라 고통스럽지 않냐?”고 물어보면, 당황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학생들이 늘었다. 이렇게 답하는 학생들에 관해, 다른 학생이나 교사는 그들이 전형적으로 딱 중간에 속하는 이들이하고 설명했다. 이들은 공부는 싫지만 그래도 학교 오는 것은 재미있다고 말했다. 학교에 와서 친구들과 노는 게 재미있다고, 지루한 수업 시간에는 자면 된다고 말했다. 게다가 학교는 밥도 주는데 엄마가 해주는 밥보다 맛있다고 말하는 학생도 있었다. ...

이 학생들에게 학교가 천국이 된 이유가 있었다. 학생이 사고를 치지 않으면, 학교는 어지간한 일에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했다. .. 교장이나 관리자들도 굳이 문제 삼으려고 하지 않았다. 교사들도 학생들의 반발을 사면서까지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통제한다고 해서 통제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 '공부하는 학생'들이 서울대데 가서 학교를 빛낸다면, 이들은 자기가 다치거나 남을 다치게 하지만 않아도 학교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르치고 배우는 게 중심이 아니라 서로 가급적 덜 건드리고 덜 괴롭혀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심이 되었다. 104-106


억지로 공부를 시키려 하는 대신 모른 척하면서 내버려두다 보니 '딱 중간'에 속하는 학생들에게 학교가 '재미있는' 공간이 되었다. 먹고 자고 노는 총체적인 삶의 공간이 된 것이다. 자조적으로 말하면, 진보적인 교육계 일각에서 학교는 공부하는 곳을 넘어 삶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것이 전혀 의도하지 앟게 뒤에서 만들어진 셈이다. 107





02 자기계발의 공부에서 자기 배려의 공부로

02-4 폐기나 보완이 아니라 전환이 필요한 이유

더 이상 과거처럼 성장이 가능한 사회가 아니라면, 우리 살밍 전환되어야 한다. 공부가 그 전환을 슬기롭게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삶을 어떤 방향으로 전환해야 하며, 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탐색하고 준비할 수 있는 공부로 전환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내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삶의 전환을 위한 공부의 전환이다. 116


모든 것을 바꾸자면서 아무것도 안 바꾸는게 바로 폐기의 니리다. 116


쓸모를 지금 당장’ ‘이라는 말에 종속싴버리는 순간, 공부를 하는 사람은 시간의 노예가 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준비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며, 지금 나의 수준에서 그것을 어느 정도의 속력으로 얻을 수 있는지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대신, 지금 당장의 평가에서 성과, 스펙이 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 117-118


이게 공부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들이 하는 것은 일단 다 해놓고 봐야 한다는 초조함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

실제적이라는 명목으로 공부의 목적을 이처럼 단기화하는 것이 당장은 학생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여 어느 정도 공부로 유인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긴 호흡의 공부를 통해서만 만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만들지 못한다. 공부를 지속할 힘이 있는 몸 말이다. 공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견디고 즐기는 몸을 만드는 것이다. 118


우리가 교육을 통해 양성해야 하는 것은 배울줄 아는 사람, 즉 배움을 지속할 수 있는 배움의 주체다. 121


답을 스스로 찾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 제시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고 어쩔 줄 모른다. ‘지금 당장 쓸모 있는 것을 요구하는 제자에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스승은 똑같은 말을 한다. “너는 배울 준비가 안 되어 있다. 당장 돌아가거라.”

이게 한국에서 스승은 찾지 않고 자기계발서만 범람하는 가장 큰 이유다. 124


이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초조함이다, 단기간에 실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으로 지금 배운 것이 시간나이비면 어쩌나 하는 초조함에 사로잡혀 있다. 좀처럼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이 초조함이야말로 지금 사람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초조해서 긴 호흡으로 자기 자신과 사회를 돌아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구조적인 문제에 관한 고민과 토론을 관념적인 탁상공론으로 여기게 한다. 여기서는 해법을 찾을 수가 없다. 125


지금의 교육이 학생들이 자기 미래를 발견하고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도울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게 이 실제적 도움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여기에서 역설이 벌러진다. 실제적 도움을 강조하며 현재의 교육과정이나 교육 내용의 전면적 폐기 혹은 대대적 보완을 주장하는 입장은,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삶의 전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현재를 강화하는 공부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현재의 미완의 무엇이지 극복해야 할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것을 바꾸자고 하지만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결과를 낳는다. 126


교육의 관점에서 노오력이라는 말을 들여다보자. ‘노오력이라는 말은 청년들이 사용하는 말이다. 청년들이 취직하지 못하거나 성공하지 못했을 때 그건 다 너의 잘못이라는 이 사회의 비난을 자조적으로 비판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130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으면 네가 성과를 내지 못한 게 증거라고 말한다. 따라서 성과를 내야만 내가 노력을 다한 것이 된다. .. ‘성과주의. 성과주의 사회에서는 노력해서 안 되면 더 노력해야 나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노력의 사이에 자만 늘리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노오력이다. ...

황당하겠지만, 를 무한대로 늘리면서 실패를 그 사람의문제로 돌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교육의 이상이다. ..

교육이 만든 말이 무한한 잠재력이다. 131


사람을 포기하지 않게 하려는 이 교육적 배려의 마링 성과주의와 결합하면 지옥을 만들어 낸다. 사람이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고, 노력을 하지 낞은 것은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 서오과를 못 내고 그만둔다는 것은 바로 가장 포기해서는 안 되는 자기 자신을 포기한 것이므로, 이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쓰레기가 되어 버린다. 132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교육적 언어였던 무한한 잠재력, 이처럼 사람의 성장을 도모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파괴하는 말로 돌변해 버렸다. 133


관건은 이 해도 안 된다는 것에 기초해 우리가 어떤 성장을 꿈꿀 수 있고 어떤 사회를 설계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나는, 지금 교육의 폐기나 보완이 아니라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발견하는 진로 교육보다 내가 어허게 살아야 내 삶을 돌볼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발견할 수 있는 전환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이것을 자아실현에서 자기에 대한 배려/돌봄으로의 전환이라고 제안한다. 134



02-5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것

자기 배려를 위한 공부이 중요한 두 측면. 첫 번째는 당연하게도 자기의 한계를 아는 것이다. .. 자기에 관한 앎이 있어야 자기를 보호하고 배려할 수 있다. 자기에 관한 앎 없이는 자기에 대한 배려도 불가능하다.

두 번째로 .. ‘정신이다. 이것을 자기에 대한 집중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에 대한 망각이야말로 자기 배려의 적이다. 137


자기 재능의 한계가 어디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조금 허탈하겠지만, 잡은 충분히 햅았을 때. 내 한계까지 왔다는 것은 스스로 느낄 때까지 해보았을 경우에만 알 수 있다. 여기에 충분히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그게 충분한지 아닌지를 자기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만이 그것이 충분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157


스승의 역할은 제자의 재능을 알아보고 제자가 재능의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동행하며 그것을 깨우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제자가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스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158


현명한 이들은 하고 싶은 것을 이루기 위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삶을 노예의 삶이라고 불렀다. ‘하고 싶은것에 끌려다니는 삶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대의 현자들은 욕망의 주인이 되라고 가르쳤다. 욕망의 주인이 되는 길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언제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언제든 그것을 그만 둘 수 있는 것이다. 주인의 힘은 이루게 하는 힘이 아니라 그만 둘 수 있는 힘이다. 161


최고가 아니라 해도 각자의 재능 역시 이런 선물처럼 주어진 측면이 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각자 하늘로부터 얼마나 풍성한 선물을 받았는지 비교하는 게 아니다. 관건은 그렇게 선물로 받은 재능을 각자 얼마나 잘 쓰고 있는가다. 이렇되면 주어진 것 자체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가, 그 선용의 정도가 탁월함의 기준이 되니다. 이것이 인간이 추구할 수 있고 추구해야 하는 탁월함이다. 162



02-6 자기를 배려하는 법

소크라테스는 자기에 관한 앎자기에 대한 배려를 강보하면서 자기/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자기/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나에게 속한 것이며, 마지막이 자기/나에게 속한 것에 손한 것이다. 이를테면 내 몸은 나에게 속한 것이다. 그리고 구두는 낭에게 속한 것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나에게 속한 것이지 자체가 아니다.

그렇기에 자기 배려를 위해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나에 속한 것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럼 배려의 대상인 는 무엇인가? 이것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대신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 바로 나에게 속한 것이다. .. 나에게 속한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첫째, 무엇보다 우선 재산, 즉 소유가 잇다. .. 내가 나를 대하는 법은 배려. 반면, 나이게 속한 것이나 내가 가진 것은 배려가 아니라 활용의 대상이다. .. ‘는 나의 목적이지만 나에게 속한 것은 나를 돌본다는 목적으 위해 활용하는 수단이다. .. 소유에 넋이 나가는 순간 내가 노예가 된다.

둘째, 육체가 있다. .. 육체를 잘 돌보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 보다는 역시 육체로는 환원되지 않는 를 위한 것이다. 육체 자체가 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육체 역시 배려의 대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셋째, 지위나 정체성 같은 것이 있다... 지위나 정체성 같은 것은 사회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거이다. 이것 역시 나 자체일 수는 없다. 이런 것들은 나의 속성에 불과하다. ..

이런 것들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면 자신을 도구화하게 된다. ..

마지막으로, 욕망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가장 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나의 욕망이다. .

나를 곧 나의 욕망이라고 생각하면서 욕망을 실현하려는 삶은 욕망의 노예가 된 삶에 불과하다. .. 모두가 바라는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며 사는 삶은 역설적이게도 자기가 아니라 자기 욕망이 주체인 삶이다. .. 이런 점에서 욕망은 배려가 아니라 다스림의 대상이다. 165-169


나에게 속한 것의 경계에 있는 것이 있다. 이름이다. ...

이름은 활용이 아니라 돌보아야 할 대상이다. .. 이름은 그 사람의 개체성과 그 개체성의 존엄을 보증한다. 나아가 이름에는 자기 자신의 뿌리와 터전의 존엄과 명예가 걸려 있다. 이런 점에서 이름이야말로 그 이름이 가리키는 사람의 사회적 생명 전체라고 할 수 있다. 170-171


우리는 나 자신에 관해 생각하면 할수록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 이는 자기에 관해 생각해본 살맘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게 무엇인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고 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숭산 큰스님은 오직 모를 뿐이라고 말했다. .. 따라서 자기에 관해 안다는 착각이 자기를 망친다. 자기 아닌 것을 자기라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 반대로, 내가 나에 관해 모른다는 자각이 자기를 배려하게 한다. 여기서 자기 배려의 중요한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 ‘모른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177-178


자기 배려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존재로 대하는 것이다. 모르는 존재, 알 수 없는 존재, 즉 철학에서 하는 타자다. 사르트르는 타자의 가장 큰 특징이 도대체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다. 그의 말을 듣는 것을 제외하면 내가 그를 대할 다른 방법이 없다. .. 모를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이기, 자기 말을 듣기, 이것이 자기 배려의 출발인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원래 이 말은 너 자신이 모르는 게 무엇인지를 알라는 말이었다. 그 모르는 것 중의 모르는 게 자기 자신이라면, 이 말은 이렇게 된다. 너 자신이 스스로에 관해 모른다는 것을 알라. ..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아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오직 그 아는 것을 활용하고 다룰 수 있다. .. ‘모름은 무지가 아니라 지혜의 원천이다. 자신이 모르는 게 뭔지 알고 다룰 수 있는 것의 한계가 아디인지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다. 178-179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모르며 모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낯선 자기와의 만남은 기쁜 일이 된다. 내가 나에 관해 알고 있다는 착각과 미망에서 깨어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180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자기를 모른다는 사실, 모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모르는 자기를 만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기를 안다는 것을 배움의 과정의 문제로 전환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아니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자기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 그 중에서도 자기가 언제 세상을 배움의 자세로 대하는지에 관한 앎이다.

이를 이해하는 데는 존 듀이가 말한 성장과 배움에 관한 이론이 유효하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살아 있는 한 배운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이미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대처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적응과 변용을 위해 현재의 상태와 변화를 읽어내고 적절한 대처법을 찾아내는 능력, 이것이 배움의 능력이다. 이런 점에서 사람, 아니 더 넓게 말해 생명체라면 모두 배움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배우는 능력 자체는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선물(gifted)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배우는 방식은 다른 사람이 배우는 방식과 다르다. 각자가 살아오는 과정에서 사물을 관찰하고 파악하고 그 원리를 이해한 후 그것에 맞추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배우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사람이 자기를 안다는 것은 자기가 배우는 방법이 무엇인지 안다는 뜻이다. 내가 어떻게 배우는지 모른다면 모르는 것을 중심에 놓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기가 어떻게 배우는지 아는 사람만이 배움을 중심에 놓는 삶으로 전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배우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배우는 법을 알기 위해서는,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것처럼, 무엇보다 자기에게 집중해야 한다. 대상의 아름다움, 혹은 변화를 주고 싶은 대상에 넋이 나가버리면 자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배움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배움의 과정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지식과 기술에 집중해 그것을 습득하는 속도에만 신경 쓰면, 그 속도가 기대보다 느릴 때 곧 흥미를 잃고 짜증을 내게 된다.

그게 아니다. 목적의식적인 배움의 과정에서는 자기가 어떻게 배우는지를 깨닫기가 좋다.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에 집중한다는 것은 내 배움의 기술을 관찰하고 파악한다는 뜻이다. 어떤 것을 배우는 과정에서 지금 배우고 있는 그 지식과 기술의 기량만 느는 것이 아니다. 배움의 기술 자체를 동원하고 배우면서, 배움의 기량이 향상된다. 그렇기 때문에 배움의 과정에서는 내 배움의 기술을 관찰하고 파악하기가 좋다. ,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에 집중한다는 것은, 자신이 배움에서 어떤 기술과 방식을 사용하는지 관찰하고 파악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탁월한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어려서부터 사물과 사태를 관찰하는 힘을 키우는 게 매우 중요한 이유다. 전통 사회는 어린이들이 자신의 배우는 방법과 힘을 알게 하기 위해 다양한 놀이를 만들어 권장했다. 예를 들어, 남자 어린이들이 주로 하던 전쟁놀이는 지형지물과 변화를 관찰하고 파악하고 이용하는 기예를 늘리는 데 탁월한 놀이였다. 어떤 놀이는 균형감각을 키워주고, 어떤 놀이는 협력의 기예를 키워줄 수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놀이를 해보는 과정에서, 어린이들은 자기가 어떤 놀이를 특히 선호하고 선호하지 않는지 구분하게 된다. 이 선호는 놀이 자체의 재미에서 기인하기도 했지만, 어린이가 자기 배움의 태도를 파악하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반면, 어린이가 좋아하지 않는 놀이는 적응하고 파악하고 기예를 늘리는 데 서투른 놀이였다. 좋아하는 놀이는 재미를 넘어서 자신이 가진 배움의 힘과 방법을 잘 발휘할 수 있는 놀이였다. 이렇듯 놀이의 역할은 자기가 배우는 태도와 힘을 파악하고, 그 힘과 태도를 선용하게 하는 것이었다. 놀이는 재미뿐만 아니라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182-185


스스의 역할이 중요하고 결정적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를 자 안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의외로 내가 나를 잘 알기는 힘들다. 내 얼굴을 내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스승은 제자의 기량과 그 한계뿐만 아니라 제자가 배워나가는 태도를 관찰하고 파악하는 게 전문인 사람이다. 185


세상을 대하고 집중하고 그 집중을 지속시키는 나의 태도를 알아가는 것이 바로 자신에 관한 앎이다.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은 곧 자기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알아간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듀이가 공부의 과정을 통해 사람은 학습하는 방법을 학습한다고 말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승산 큰 스님의 화두인 오직 모를 뿐’ ... 스님의 화두를 디딤돌 삼아 궁리하다 발견한 내 배움의 힘이자 방법, 태도는 오직 물을 뿐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묻는 사람이었다. 질문이 주어지면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 질문이 타당한 질문인지, 의미 있는 질문인지, 질문에 관해 질문을 할 정도로 끊임없이 묻는 것이 내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였다. 185-186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자기의 성장을 돌보고 지속적으로 도모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래야 나의 삶이 서사적인 것이 되고, 그런 서사적인 삶이 되어야 그걸 자기 삶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삶에 이미 자기가 없는데 자기에 대한 배려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

자기를 안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 세상을 대하는 자기 태도를 안다는 말이 된다. 그래야 자신의 성장을 목적의식적으로 도모하며 성장을 방해하는 것을 회피하여 무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189


자기를 배려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타자에게 넋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를 배려할 수 있다. 190


부모들에게, 자식이 공부를 잘하지 못해서괴롭지 않냐고 묻는다. 그러면 다들 괴롭다고 대답한다. 그럼 그 괴로운 마음을 잘 다스리고 있는가를 물어본다. 그 무엇보다 어렵다고 대답한다. .. 그래서 다시 아니, 자기 마음도 못 다스리는 분이 어떻게 남의 마음을 바꾸겠다고 말씀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말문이 막힌다. 190-191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나쳐 자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식에게 넋을 놓는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자기도 배려하지 못하고 자식과의 관계도 망친다. 자기 자신이 성장해야 하는 문제를 자식의 공부 문제로 돌려버린다. 191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타자라고 하며, 타자의 ‘3대 마왕이 있다. 그 첫째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둘째가 자기가 가르치는 사람이며, 셋째가 이 둘을 합쳐놓은 존재인 자식이다. 이들을 만날 때 깨닫게 된다.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걸 말이다. .. 완전히 깨닫게 된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말이다. .

이 순간 사람은 타자의 끝판왕을 만난다. 3대 마왕의 뒤편에 숨어 있던 끝판왕 말이다. 그게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야말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타자의 끝판왕이다. 내가 나를 다스리는 기예의 한계에 부딪치고 나서야 내가 내 마음 다스리는 법을 모른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은 자명하다. 내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다. 나에게 집중할 때 이 문제를 다룸의 기예, 즉 자식이 아닌 내 배움의 문제로 전환할 수 있다.

이것이 관건이다. 우리는 문제를 나 자신의 배움의 문제로 전환할 수 있는가. 이렇게 전환해야만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재능의 문제를 기예의 문제로 전환하고, 다른 사람의 문제를 내 기예의 문제로 전환할 때,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문제를 배움의 문제로 전환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으며 해결할 수도 없다. 이것이 자기 배려의 초점이다. 전환의 배움은 문제를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192-193




03 공부, 재미에서 기쁨으로

03-7 공부, 성장의 기쁨

해치우는 것으로서의 공부에는 해보는 것만 넘쳐난다. 더구나 이 해치우는 것에는 해보고 난 뒤 결과가 돌아와 나에게 교훔을 주는, 그런 겪음이 없다. ..

이런 공부에는 연속성이 없다. 앞에 한 공부와 뒤에 하는 공부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과 연속성이 없다. 197


삶에서 배움은 필연적인 것(necessity)이다. 듀이가 쓴 <민주주의와 교육>의 옮긴이인 이홍우가 주석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necessity는 필요성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필연성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필요성으로 번역한다면, 이 말은 공부는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인간은 살아 갈 수 없다.한편 필연성으로 번역한다면, 이것은 사람은 살아 있는 한 의식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공부가 함께한다는 뜻이 된다. 전자는 살아가기 위해 목적의식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이 되고, 후자는 살아가는 한 자연발생적으로 사람은 배우고 있다는 말이 된다. ..

성장의 핵심은 연속성이다. 경험의 갱신을 통해 삶이 연속적으로 진행될 때, 우리는 그것을 성장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삶에서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바로 삶의 연속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삶의 연속성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목적의식적인 과정이 바로 좁은 의미에서의 교육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교육이란 자기 경험을 연속적으로 바라볼 줄 알고 만들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성장의 기쁨은 연속성에 있다. 198-199


생각의 핵심은 연관 짓는 것에 있다. 지금 일어나는/하는 일과 뒤에 벌어질 일을 관계 지어 생각하는 것이 지적 활동이다. ...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것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 즉 연관성을 알게 될 때 무질서해 보이던 것의 질서가 보인다. 분별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질서가보이면 내가 그 사이 어디에 개입해야 하는지 보여서 통재할 수 있다. 개입을 통해 바꿀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힘이 지적 쾌감을 준다. ..

지적 쾌감은, 내가 알지 못했다면 연관 짓지 못할 것을 연관 지음으로써,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기량이 늘어나는 데서 온다. 따라서 지적인 흥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결과에 관한 관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한 사람만이 왜 그런 결과가 나오는지에 지적인 흥미를 가질 수 있다. 결과에 관심이 있어야 결과를 예상하거나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현재의 조건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또한 가능한 대안들 사이에서 적절한 수단을 고른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머릿속에서 계속 시뮬레이션을 하고 궁리를 한다. 이것이 지적인 활동이다.

결국 지적 활동이란 원인과 결과, 자기 행동과 영향의 연속성을 가늠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적 활동은 연속성에서 중간 과정을 발견한다. 사람이 지식에 흥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작 단계의 조건과 예상되는 결과 사이에 무엇인가있다는 것을 알 때다. 그 무엇을 알면 시작과 결과를 연결할 수 있다. ‘현재의 힘도달해야 할 목적사이를 연결하는 수단을 듀이는 중간 조건이라고 말한다. 듀이는 사람들이 중간 조건에 흥미를 가지는 이유는 바로 현재 진행 중인 활동이 장차 예견되는 소망의 결과에 도달하는가의 여부가 그것에 달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중간 조건을 알아야 과정을 통제하면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지적 활동이란 중간 조건을 계속해서 알아가는 과정이다. 201-202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을 그저 경험의 수준으로 내버려두지 낞고 그 이치와 원리를 파악하게 되는 것이 바로 지적 과정인 것이다. 203


초심자일수록 배움의 과정에서 그 배움의 결과가 자기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 예상되는 결과에 자신이 영향력을 가지고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204


배우는 이의 기량으로 시작과 결과를 파악할 수 있게 하려면, 현재 배우는 이의 삶/수준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것을 시작점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중간 조건을 발견하는 것 또한 배우는 자의 기량에 맞춰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가르치기 위해서는 배우는 자의 한계와 기량을 파악하고 아는 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205


학교와 가튼 교육현장이 배우는 곳이고 배움을 장려하는 곳이라면, 모르는 자의 용기를 환대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배우는 사람이 자신의 무능과 무지를 드러내는 것을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칭찬하는 곳이 배움의 공간이다. 따라서 배우는 사람이 모른다고 말할 때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보다 환대하며 기뻐해야 한다. 그 모르는 자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자신이 가르치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7


미래가 예측되지 않거나, 미래를 안다 해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결코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214


진지하다는 건 재미를 파괴하는 짓이고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되는 세상이다 바로 이런 현상이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는 것을 방해한다. 생각이 깊어지면 설명충’, ‘진지충’, 나아가 씹선비라는 욕망 먹는다. 굳이 말을 하려면 세 줄 요약이 가능한 사이다같은 말만 해야 한다. 길게 이야기해서는 절대 안 되고 복잡하게 말해서도 안 된다. 이 때문에 더더욱 사람들이 서사적인 삶을 추구하기가 힘들어진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외면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가 횡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따라서 이 시대에 성장의 기쁨을 느끼는 것은 괴로움을 감수할때만 가능하다. 자칫하면 고립되고 외로워질 수 있다. .. 공연히 어려운 이야기를 해서 좋은 자리를 망친다는 핀잔을 듣기 쉽다. ‘프로 불편러라는 욕을 먹을 수도 있다. 베스트셀러가 된 제목처럼, 이 시대에 성장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215-216


나는 앞으로 두 가지 기쁨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하나는 자유와 창조의 기쁨이고, 다른 하나는 향유의 기쁨이다. 사람은 배움으로써 이 두 가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세상의 법칙을 알고 목적에 맞게 잘 사용하는 선용을 넘어, 그것을 변용함으로써 사람은 자유로워지고 창조의 기쁨을 누린다. 창조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능수능란한 기예를 배우고 익히며 연마하는 과정이 바로 공부다. 한편, 인간은 창조하지는 못할지라도 여전히 공부를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누릴 수 있다. 창조하고 향유하는 삶, 이것이 멋진 삶이며, 멋지게 사는 것은 삶의 목표이자. 공부의 쓸모다.

창조와 향유, 이 모두에서 인간이 누리는 기쁨이 바로 성장의 기쁨이다. 216-217



03-8 공부, 자유와 창조의 기쁨

기예란 나에게 주어진 것을 내가 얼마나 잘 다루는가의 문제다. 기예에서 탁월함은 다룸의 정도가 된다. 다룸에서 관건은 5분의 숨과 1분의 숨을 비교하는 게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인 1분의 숨을 얼마나 잘 다루고 그 숨으로 무엇을 하는지다. ...

그러므로 다룸은 능수능란함을 지향한다. 내게 주어진 것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을 때 기적이 일어난다. ... 능수능란함이 주어진 것을 변용할 수 있게 하고, 그 변용을 통해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219


새로운 것의 탄생을 보는 것만큼 기뿐 일은 없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왕자든 거지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220


사람이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

이 말이 가진 의미는 지대하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직면한 근원적인 한계를 지적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존재가 아니므로, 이미 잇는 것, 주어진 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 인간이 무엇인가를 선용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앎은 활용의 전제다. 221


우리는 주어진 것을 세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첫째 나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다. 육체적 한계나 재능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 사회적으로 주어진 것이 있다. 신분이나 재산 같은 것이다. 이것은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정의를 요구해야 할 문제다. 개인의 역량 문제가 아니다. 셋째, 인간을. 넘어서 존재 전체에 공통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자연법칙이 있다. 자연법칙은 모든 존재에게 근원적인 한계로 주어진다. 221-222


앎은 활용의 출발점이다. 안다는 것은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주어지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출발점이 될 수 없다. ...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의 경계를 아는 것, 그게 바로 자기 한계를 아는 것이다. 한계를 아는 사람만이 무리수를 두지 않고 자기를 배려할 수 있다. 223-224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난 다음에 구분해야 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주어질 수 있는 것과 주어질 수 없는 것의 구분이다. 만일 우리가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만을 구분한다면, 사람의 삶에 성장이란 있을 수 없다. ..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결코 주어질 수 없는 것과 어떤 경우에는 주어질 수 있는 것으로 구분된다. 전자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만 후자를 포기하는 것 역시 어리석다. 224


노력도 안 해보고 어떻게 아느냐, 지레 포기한 것 아니냐고 말할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한 것이 충분히 시도해보는 것이다. 내가 충분히, 원 없이 시도해보고 난 다음에는 알 수 있다. ...

충분히 해보면서 자신에게 재능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재능을 발견하기도 한다. 225


중요한 것은 재능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라는 점. 226


재능과 같이 개인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것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 주어진 것을 활용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사회가 있다. 이런 경우 사회적으로 주어진 것사이의 불평등 문제를 반드시 제기해야 한다. 227


사회적으로 주어진 것에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바로 활용의 불평등이며 이 불평등을 시정하는 것이다. 228


좋은 사회란 주어질 수 있는데 주어지지 않은 것을 평등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보정하는 사회다. 좋은 사회란, 사회만 훌륭하고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별 볼일 없는 사회가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 하나하나가 훌륭해지는 것을 공공선으로 삼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228


앎은 활용의 전제다. 문제는, 안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곧바로 활용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공부를 해본 사람은 안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걸 해보려고 하면 생각대로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 이때 만나는 것이 서투른 자기.

이 서투른 자기는, 알기는 하되 활용할 줄은 모르는 상태다. ... 이때 그가 처하는 상태가 바로 부자유.. 자신이 전혀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것이다.

능수능란하게 도구를 다루고 싶다는 갈망이다. 이게 바로 자유다... 자유란 멋대로 하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란 내가 다루는 도구들의 결을 알고 흐름을 타면서 내몸의 일부처럼 이질감 없이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이다. 229-230


미국의 인류학자인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은 이것을 생각하는 손이라고 불렀다. .. 배움은 머리-앎을 넘어 손-다룸으로 옮겨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배움이 사변적인 것이라면 익힘은 그 배움을 육화, 즉 물질로 만드는 과정이다. 육화되지 않는 배움은 쓸 수 없는, 그렇기에 쓸모없는 배움이다. 그렇기에 배움은 앎의 문제에서 다룸의 문제로 전환된다. 230


도구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생각하는 손은 자유로운 손이다. 그 자유가 단지 자유자재와 동의어로서 능수능란함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자유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에 갇힌 존재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한계다. 자신의 육체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도구를 통해 자신의 육체라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다. 그 도구를 자유자재로 다룸으로써 도구와 사람이 하나가 될 때, 그 사람은 인간의 근원적. 한게를 넘어서는 존재가 된다. 인간의 근원적 한계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231


능수능란함의 방법론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손을 다루는 기본에 관해서 말할 수는 있지만 손의 힘을 조절하는 것은 자기가 해보면서 깨닫는 수밖에 업사다. 다룸은 익힘의 문제다. 익힘을 통해 알아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익혀가는 경험 없이 다룰 줄 알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어떻게라는 질문은 다룰 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던지는 질문이다...

익힘의 과정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스승이다. 스승이라고 방법에 관해 가르쳐줄 수는 없지만 제자가 익혀가는 과정을 관찰하면서 그가 주의해야 할 것과 좀 더 연마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 보지 않고서는 가르쳐줄 수가 없는 것이 익힘의 과정이다. 232-233


자연법칙에 관한 ... 법칙은 지키되 그 법칙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유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내가 법칙을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활용할 수 있는지가 자유의 척도가 된다. 234


생각하는 손이 매혹적이며 아름다운 이유는 이 자유가 새로운 양식을 만들기 때문이다.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자유란 뻐칙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여 새로운 양식을 만드는 것이라고했다. 법칙이 주어진 것이라면, 자유는 주어진 것의 바깥으로 탈출하는 게 아니라 그 주어진 것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여 걸림거침없이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양식이 된다. 이런 활용을 변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기예(技藝)라고 부른다. 이렇게 자유로운 손을 만나 매혹되었을 때, 사람들은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 욕망은 성공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예술적 완성에 대한 욕망이다. 이런 매혹 없이 사람이 공부의 길로 들어서기란 불가능하다. 236-237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유를 성공으로 전도시킨 사회에서 살아간다. 한계를 인정하고 자기를 배려하며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꼭 묻는다. 한계를 인정함년 자기 꿈과 이상을 포기해야 하느냐고 말이다. 꿈이 뭐냐고 물으면 요리사와 같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을 든다. 그러면 동네 중국집 요리사가 되는 것도 요리사이니 꿈을 이루는 것 아니겠냐고 말하면, 그건 아니라고 한다. 동네 중국집 요리사도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는 자장면을 만드는데 그건 왜 아니냐고 물으면, 성공한 삶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답한다. 7성급 호텔 요리사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해야 한다. 꿈과 이상이라고 말하지만 그 실체는 사실 성공이다. 자유에 대한 매혹이 아니라 성공에 대한 매혹일 때 그건 자기를 파괴하는 지름길이 된다. 237-238


매혹은 또한 자유로워지는 과정을 견디게 한다. 자유로워지려면 능수능란해져야 하고, 능수능란해지려면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익힘의 과정은 고단하고 지루하다.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고, 그 반복에서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기쁨을 누리기 힘들다. 창조를 기대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변용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생각하는 손의 능수능란함에 대한 매혹 없이는 이런 익힘의 과정을 견딜 수 없다. 배움은 미적 매혹에서 시작하고, 이 매혹이 배움을 견디게 한다. ...

배움에 이어 익힘이 있지 않으면 사람은 절대 자유러워지지 않는다. 238


창조는 앎의 문제에서 다룸의 문제로 공부의 초점을 이동시킨다.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룰 수 있을 때그것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을 때 새로운 양식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다룸이 바로 그 사람의 탁월함의 척도가 된다. 239


한국의 교육이 가진 문제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배우는 것은 많은 데 다룰 수 있는 것이 없다. 배우기만 할 뿐 익히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 정답만 외우는 공부를 하다 보니 익힘의 과정이 없어지고, 익히는 게 없다 보니 할 줄 아는 게 없는 무능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참혹한 것은, 이렇게 익힘이 생략된 채 배우는 것만 많은 상태가 10년 넘게 이어진 결과, 익힘의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학생이 속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240-241


사실 익힘의 과정은 지루하다. .. 익히려고 할 때마다 좌절하게 된다. ..

익힘의 시작 단계에서 이 지루함을 견디게 하는 것은 매혹이다. 그러나 매혹의 힘이 끝까지 가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익힘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익히는 과정에서 또 한 번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은 익힘의 결과에서 과정으로의 전환이다. .. 익힘의 과정에서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어떤 기량이 생기는지 알기 위해 다시 한번 자기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익힐 때, 많은 경우 우리는 익힘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고 익힘의 결과에 집중한다. 그러다 보니 익힘의 과정에서 배우고 익히게 되는 차원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넘어간다. 익힘 자체의 기예가 향상되는 것 말이다. 243


익힘의 과정에 있는 이는 익힘의 결과에 넋을 놓지 말고 익힘의 과정에 있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 .. 익힘의 기예에서 가장 중요한 견디는 힘이 생긴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루함을 견디는 힘이다. ..

물론 여기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이 견디는 과정에서 다시 자기 한계를 생각해야 한다... 견딜 수 없는 지점, 견뎌서는 안 디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는 견딜 수 없다는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 무작정 견디는 것은 우매한 짓이다. ..

무작정 견디라고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고 착취다... 많은 회사나 기관이 배우고 익히게 한다는 핑계로 사람이 견딜 수 없는 모욕과 무시, 그리고 착취를 일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반드시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기에 대한 배려다. 244-245


배움을 통해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배우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다. 배우는 습관이 생긴 사람만이 계속 배움을 이어나갈 수 있다. 245



03-9 공부, 지적 쾌감과 향유의 기쁨

멋진 작품을 만났을 때 우리는 경탄한다. 그것이 예술 작품이든 자연 작품이든 말이다. .. 그거 아름답다, 멋지다고 느끼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작품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작품 너머에 있는 기예를 고민하게 된다. 사람의 기예가 아니더라도 도대체 무엇이, 어떤 과정으로 이런 멋진 것을 만들어냈는지 궁금하고 알고 싶다. .. 이 기예에 눈이 가야 사람은 순간적인 경탄을 넘어 기예에 관한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이처럼 경탄은 기예에 호기심을 가지게 하는 출발점이다... 공부를 시작하게 하는 첫걸음은 바로 경탄이다. 249


먼저 경탄에 관해 알 필요가 있다. 250


너무 아름다워 위협감을 느끼게 하는 이 감정은 유쾌하지 않다. 미학에서 이야기하는 바로는 숭고미에 가깝다. 칸트는 인간의 미적 체험을 숭고미와 아름다움으로 나눈다. 아름다움은 사람이 질서정연한 것을 보았을 때 나오는 쾌()의 감정이다. 쾌락의 캐다. 즐거운 감정이다. 반면 단적으로 큰 것을 만났을 때 느끼는 것이 경악이다. 내가 이전에 경험하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만나면 사람은 경악하게 된다. 이 경악을 쾌가 아니라 불쾌의 감정이다....

그 괴로움은 그저 괴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한 것을 만났다는 흥분에 넘치는 괴로움이었다. 칸트가 말하는 숭고미라고 볼 수 있다.

경탄 중에서도 이런 경악이 가장 강렬한 체험이며, 사람을 공부의 길로 이끄는 경탄이다. 공부라는 게 뭔가? 왜 그런지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대상을 보고 경악하는 것은 그걸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 경악은 내가 모르는 것, 절대적으로 모르는 것과 만나는 경험이다. 251-252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이어서 놀랍긴 하지만 위협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에 관련되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

경악이나 경탄의 실체는 바로 경이(驚異).(이 책에서 나는 경탄과 경악, 그리고 경이를 구분해서 사용하지만, 이 셋의 공통점은 말을 잊을 정도로 놀라는 것이다) 전적으로 이질적인 경험이다. 그것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알지 못하던 존재 타자이다. 254


이름이 있다는 것은 분별의 결과다.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각각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 255


지식의 가장 큰 힘이 바로 분별력이다. 경이롭지만 아직 분별하지 못하던 것을 분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지식이 힘이다. 공부는 이 힘을 키우는 과정이다. 255


부는 분별의 힘을 키워가는 과정이다. 분별의 힘이 있을 때 비로소, 대상에 압도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불쾌에서 쾌로 나아갈 수 있다. ...

알면 향유할 수 있다. 향유하는 과정에 앎이 배치되어야 한다. 256


모르는 자에게는 무질서해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는 자에게는 그렇게 질서정연한 것이었다. .. 지식의 힘은 사물과 사리를 분별하는 것이고, 분별하는 자만이 경탄을 너어 향유할 수 있다. 257-258


무지하니 자유롭고 능수능란하게 향유하지 못한다. 충분히 즐길 수 없다. 그러니 무지하면 아름다움 앞에서 기쁨을 느끼는 게 아니라 답답한 , 즉 슬픔을 느낀다. 이런 답답함이 공부를 시작할 마음을 먹게 한다. 258


자연은 경탄을 통해 향유로 나가게 하는 좋은 대상이며 향유의 언어는 수학적이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분별하고 그 움직임이 만드는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언어가 바로 수학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를 들면, 기하학을 모른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이라 말하는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없다. 알람브라궁전에 흐르는 물의 배치와 흐름, 그리고 궁전의 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과 빛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기하학을 모른다면 결코 향유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아름다움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기하학이라는 지식이 필요하다. 258-259


경이로움을 느낀다고 해서 모두가 그 경이로움을 배움으로 이어가는 것은 아니며,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260


듀이는 인간의 경험을 해보는 것겪는 것으로 구분했대 무엇을 할 때마다 우리는 무엇을 겪는다. .. 그러나 겪는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이 인지되는 것은 아니다. 겪는 것들 중에서 대다수는 그저 지나간다. 이렇게 지나가는 겪음으로는 배움이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겪음을 통해 사람이 배운다고 할 때 그 겪음은 내가 예기치 못한 것, 알지 못하는 것과 만나는 순간이다. 나를 압도할 정도로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261


이런 경험이 사람을 배움으로 이끈다.

겪는다고 바로 배움이 일어나는 게 아니다. 중간에 또 다른 과정이 있다. 그것을 하나씩 들여다보자. 첫째, 내가 예기치 못한 것을 겪었을 때 사람에게 반드시 떠오르는 것이 질문이다. “, 이게 뭐지?” “이게 왜 이렇지?” “어떻게 이렇게 되지?” 예상 하지 못한 것을 만나게 되는 순간 깨닫는 것은, 지금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는 사실이다.

모르기 때문에, 그 반응은 일단 질문의 형태로 떠오른다. 다른 말로 하면, 질문이 발생하지 않는 겪음은 겪음이라고 할 수 없다. 겪자마자 그게 무엇인지 알면, 해결하면 그만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속담처럼, 사람은 아는 것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질문이 없다는 말이다. 질문을 거치지 않고 바로 해답으로 직행하게 된다. 262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생각이다. 질문을 하고 답을 찾기 위해 생가가하는 것은 이 과정 자체에 매혹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리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질문하고 답을 찾기 위해 씨름하는 이 지적인 과정이 주는 쾌감, 즉 분별의 힘이 커지는 걸 경험한 사람만이 이 과정을 견딜 수 있다. 263

경이로움에 충분히 젖고 난 다음에, 그 경이로움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알때 호기심을 갖는다... 경험을 통해 무엇인가를 느끼고 질문이 떠오르면, 그것에 관해 생각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264


경탄이 공부의 춟라점이라고 할 때, 경탄은 감수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감수성이 좋은 이는, 다른 사람은 그저 그런 일로 넘어가는 것도 새롭고 경탄할 만한 일로 경험한다. .. 자극에 지나치게 많이 노출되는 바람에 역치가 높아져서, 어지간한 자극으로는 경탄하지 않게 된 것이다. 모든 게 시시해져버려 경탄할 만한 것을 만나기가 힘들어진다. 이런 경우에도 배움은 잘 발생하지 않는다. 265-266


기 드보르(Guy Ernest Debord)라는 프랑스의 철학자는 우리가 스펙터클, 즉 구경거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스펙터클은 시시하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를 압도한다. 더 큰 크기로, 더 바른 속도로, 더 짜릿한 것으로 사람을 압도한다. 이런 식으로 스펙터클에 압도당하고 나면 다른 모든 것은 시시해지지 않을 수 없다.

스펙터클 사회의 더 큰 문제는 모든 것을 스펫터클, 즉 구경거리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이다. 아무리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 해도, 구경거리가 되면 더 이상배우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지 않는다. 스펙터클은 구경, 즉 소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배움도 마찬가지로 소비가 되고 있다. 지금은 대가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것이 귀하고 드문 일이 아니다. ...

이처럼 스펙터클 사회에서는 배움의 과정이 구경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266


배우는 사람과 공부를 구경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지점에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배우는 사람은 자기에게 집중한다. 공부를 통해 나에게 늘어나는 것이 있는지, 그것이 잘 늘어나고 있는지 관찰한다. 배움의 목적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로부터 배우든,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에게 집중하는 게 배우는 사람이다. 자기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배우는 것이 없다. 반대로, 구경하는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에게 집중한다. 특히 그가 잘 가르치는지 못 가르치는지에 집중하며, 그가 가르치는 것을 즐기고자할 뿐이다. 따라서 놀랍게도, 구경하는 사람은 자기의 성장에 관심이 없다. 자기에게서 무엇이 성장하는지 보는 게 아니라 상대가 나를 잘 접대(entertain)’ 하는지 아닌지에만 관심이 있다. 서비스가 좋으면 만족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만을 제기한다. 그래서 구경하는 사람의 말은 언제나 품평이다. 말하는/가르치는 사람에게 집중하니 그 사람에 대한품평만 있지 자기 성장에 관한 말은 없다. ...

품평을 통해 마치 내가 그것을 알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

이것이 많은 배움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성인의 경우, 배우는 사람 스스로가 자기 배움의 현장을 구경거리로 만든다. 여기저기에서 인문학 강좌니 뭐니 듣고 배우는 자리는 많아졌지만, 그런 자리의 상당수는 공부를 구경거리로 만들어서 소비하고 품평하는 자리다.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그것이 뭘 배웠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고 강의에 관한 말만 넘쳐나는 게 그것이 구경이었다는 증거다. 267-268


우리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기예로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270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이 있다. 향유와 문화자본의 관계다. 향유와 문화자본의 관계에 대한 긴장이 없으면 먹방이나 보고 있는 사람들을 속물이라고 경멸하게 된다. 대신, 문화자본이 많은 이들만 향유의 기예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층 계급에 대한 경멸과 혐오는 대부분 이 문화자본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학교에서도 옷을 촌스럽게 입거나 친구들의 문화끼지 못하는 학생이 소외되고 따돌림당할 가능성이 크다. 271


나는 학교가 해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 전체를 통해 강조한 것처럼, 배우는 이를 잘 관찰하고 그가 가진 향유의 기예를 발견해 같이 언어화하는 일이다. 그가 좋아하는 것, 혹은 흔히 취향이라고 부르는 것을 아름다움의 향유라는 관점에서 보고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같이 찾아보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배우는 이 스스로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위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학생의 말을 통해 수학의 아름다움, 협력하는 기예의 아름다움, 윤리적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언어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가르치는 일 아니겠는가.

다른 하나는, 학교가 학생들의 경제적/사회적 차이와 상관없이 모두 여러 가지 문화적인 것을 즐기고 그 향유의 기예를 키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의 제도교육은 교육이다. 공교육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이를 걔급과 상관없이 보편적인 시민으로 양성한다는 점이다. 귀족만 데려다가 귀족 취향으로 키우는 게 아니라, 이 나라의 보편적인 시민으로서 누구나 어느 수준의 교양을 가지고 세상을 향유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문학이며 음악을 가르치는 게 이런 이치 아니겠는가

이것은 학교만의 문제나 사명이 아니다. 사실 학교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제 역학을 해야 하는 것은 국가라고 할 수 있다. 274


세상은 아름다움을 향유한 사람들이 바꾼다.’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불러오는 도심 재개발에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여행을 다니면서 슬럼화한 동네를 재생하는 곳에 가보고 그 아름다움에 반한 사람들이다. 도시 재생이 재개발이나 그럴듯한 벽화 몇 개 그린 후 관광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나고 교류하며 그 만나을 가꾸는 것이며 그게 아름답다는 걸 느끼고 돌아온 사람들이다.

아름다움을 알기 때문에 이들은 눈에는 추한 것이 바로 들어온다. 사람의 삶을 파괴하고 흩어지게 하는 것이 추하다. 벽화 몇 개 그려놓고 사람들의 삶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키는 것이 추하다. 이들에게는 지금 곳곳에서 벌어지는 재개발이 정화’, ‘미관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추하게 진행되는지가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 추함에 맞서는 일도 할 수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안목이 없었다면 이런 저항이 가꿈, 돌봄, 재생의 방식으로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공부의 목적으로 실제적으로 쓸모 있는 것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로 교육이니 실용 교육이니 하는 말로 공부의 쓸모를 직업과 돈벌이 수단으로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공부의 의미와 목적을 너무나 도구화한다. 신분 상승이나 성공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목적이다. 275-276


공부의 쓸모를 획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276




나가며

설령 자기를 얻는다 하더라도 : 사회를 만드는 기예를 향하여

푸코는 훌륭한 삶이란 주어진 규칙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형식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 공부는 자유롭기 위해 하는 것이다. 교육은 사람을 해방하는 과정이다.

문제는현대 사회에서 자유가 처한 운명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흔히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자유/해방을 통해 사람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시대다. 자유를 억압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사람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통치한다. 각자에게 표준적인 삶을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개성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권장한다. 그렇지 못한 삶은 지질하다고 비난하고 조롱한다. 그래서 우리는 개성을 가진 존재가 되기 위해 각자 자기계발 하느라 노오력하며 살아야 한다.

여기에 이 시대의 자유의 딜레마가 있다. 한편에서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해방이 사람들의 삶을 위험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본문에서 누차 강조했듯이,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노오력하며 사람의 삶을 파괴하고 잇느 것도 자유/해방이다. 마르크스가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농노들이 얻은 자유는 굶어 죽을 자유라고 말한 거서럼, 이 자유는 곳곳에서 사람들의 삶을 일회용으로 착취하고 폐기하며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다. 파탄에 몰린 이 자유로운사람들은 자기를 탓하는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자기 노력과 능력의 부족을, 나중에는 많은 것을 물려주지 못한 부모를,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이 모든 것을 이번 생에서의 운명 탓으로 돌리며 죽어간다.

우리는, ‘사회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처한 이런 공통의 운명에 관해 알아야 하고, 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281-282


이 시대의 교의인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통해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렸지만 동시에 자유 자체를 위험에 빠뜨렸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람이 알고 다루며 스스로의 양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과정을 통치로 흡수함으로써, 자유를 추구하는 게 자유를 위협하는 것이 되는 딜레마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사회를 외면한 자기 배려, 타인의 해방을 저버린 자유란 또 다른 자기계발이 되고 말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282-283


한 사람 한 사람이 해방되고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공동선(共同善)이 되는 사회를 도모할 때 자유는 위험한 것도 아니고, 자유가 위험해지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자유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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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나의 치유와 자기 회복을 위해 언제나 내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고립되어 있고, 고립된 시선으로 보지 않으려는 신념이었다.  10


우리는 ‘자유정신’의 유형이 언젠가 완전해질 때까지 성숙하고 단 맛을 낼 수 있도록 정신이 어떤 위대한 해방 속에서 결정적인 사건을 겪었으며 그 사건이 전에는 얼마나 속박된 정신이었고 귀퉁이와 기둥에 영원히 묶여 있었을 것처럼 보였는지 추측할 수 있다. 무엇이 가장 단단하게 묶을까? 완전히 잘라버릴 수 없는 밧줄은 어떤 것일까? 고상하고 선택된 부류의 인간에게 그것은 의무가 될 것이다. 젊음에 어울리는 외경심, 오랫동안 숭배하고 가치를 부여해온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나약함, 자신들이 성장했던 땅, 자신들을 이끌어주었던 손길, 숭배를 배웠던 성전 등에 대한 감사, 바로 그들의 최고의 순간 그 자체가 그들을 가장 단단히 묶고 가장 지속적으로 의무를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위대한 해방은 이처럼 속박된 것에 마치 지진처럼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 그러면 젊은 영혼은 단 한번에 동요되고 분리되어 떨어져버리고 만다 - 그들 자신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충동과 혼란이 그 영혼을 지배하고 그에게 명령하는 주인이 되어 버린다 ; 의지와 소망은 어떻게든 그리고 어디로든 나아가려고 눈을 뜨게 된다 ; 미지의 세계를 향한 불굴의 모험적인 호기시이 그의 모든 감각에서 불타오르고 불꽃이 흔들거린다. “여시거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 이렇게 단호한 목소리와 유혹이 울려퍼진다. ‘여기’그리고 ‘집에’라는 말은 그가 지금껏 사랑해온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가 사랑해왔던 것에 대한 갑작스런 공포와 의심, 의무로 불렸던 것에 대한 섬광 같은 멸시 그리고 방랑, 타향, 소외, 냉각, 환멸, 냉담에 대한 선동적이고 의식적이며 화산처럼 솟구치는 욕망, 사랑을 향한 증오심, 아마도 자신이 지금까지 숭배했고 사랑했던 곳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신전모독과 같은 행동과 눈초리, 아마도 자신이 방금 한 일에 대한 불타오르는 수치심과 동시에 그 일을 해냈다는 기쁨 그리고 그 승리를 알림으로써 느끼는 더할 나위없는 내면적인 기쁨의 전율이다 - 승리라고? 무엇에 대한, 누구에 대한 승리란 말인가? 그것은 수수께끼 같이 의문스럽고 모호한 승리이긴 하지만 어쨌든 최초의 승리이다 : - 위대한 해방의 역사에는 이와 같은 아픔과 고통이 따른다. 해방은 동시에 인간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하나의 병이기도 하다. 스스로 정의하고 스스로 가치를 정립시키려는 힘과 의지가 만드는 이 최초의 폭발, 자유로운 의지를 향한 이 의지 : 그리고 풀려난 자, 해방된 자가 이제부터 자신이 사물을 지배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할때 그의 거침없는 시도와 기묘한 행동에는 얼마나 많은 질병이 나타날 것인가! 그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으로 무섭게 배회한다 ; 그의 긍지의 위태로운 긴장 상태는 그가 약탈하는 것으로 보상되어야만 한다. 그는 자신을 자극하는 것을 파괴해버린다. 그는 자신이 은폐하는 것, 부끄러움 때문에 간직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을 악의에 찬 미소로 뒤집어버린다 : 그는 만약 이러한 사물들을 뒤집어버리면 그것들이 어떻게 보일 것인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지금까지 좋지 못한 평판을 받아온 것에 자신의 명예를 되돌려놓으려고 한다면, 그리고 호기심으로 시험해보려는 듯이 가장 금지된 것의 주위로 몰래 기어 들어가려 한다면 거기에는 자의와 자의에서 나오는 쾌감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의 행동과 방황의 배후에는 더욱 위험한 호기심의 의문부호가 자리잡는다. 왜냐하면 그는 마치 황야에서처럼 불안하면서도 정처없는 행로의 중간에 있는 것이므로. ‘모든 가치를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일까? 아마도 선은 악이 아닐까? 그리고 신은 악마의 발명품일 뿐이거나 악마를 더욱 고상하게 만들어놓은 것은 아닐까?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허위가 아닐까? 또 우리가 속았다면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동시에 속이는 자가 아닐까? 우리는 속이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 이런 생각이 그를 인도하고 더욱 멀리, 더욱 빗나가도록 그를 현혹한다. 고독이 그를 겹겹이 에워싼다. 저 무시무시한 여신이자 잔인한 정념의 어머니인 고독이 그를 더욱 위협하고 목을 조르고 심장을 짓누른다. - 그러나 고독이 무엇인지를 지금 어느 누가 알겠는가? ...


이러한 병적인 고립 상태와 황량하기만 한 시험기에서 벗어나, 저 흘러 넘치는 섬뜩한 확실성과 가히 질병마저도 포괄하는 건강성에 이르는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질병은 인식의 수단이며 인식을 낚는 낚싯바늘로서 반드시 필요하다. 자기 통제와 심정의 수양이며, 수없이 많은 대립적인 사유방시에 이르는 여러 길을 허용하는 그 성숙한 정신의 자유에까지 이르는 길은 멀다 - 정신이 자신의 길에서도 자신을 잃고 방탕하며 어느 한 구석에 취한 듯 주저앉아 버리게 될 위험을 몰아낼 수 있는 저 넘치는 풍요함의 내면적인 광대함과 자유분방함에 이르게 될 때까지의 길은 멀다. 그리고 위대한 건강의 표시인 저 유연하고 병을 완치하며 모조해내고 재건하는 힘이 넘쳐흐르기까지의 길도 아직 멀다. 그렇게 넘쳐흐르는 힘은 자유정신으로 하여금 시험에 삶을 걸고 모험에 몸을 내맡겨도 된다는 위험스런 특권을 부여한다. 그것은 자유정신의 거장다운 특권이다! 그 사이에는 긴 회복기가 놓여 있다. 그 시간은 고통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이고 다체로운 변화가 가득하여, 벌써 건강이라는 옷을 입고 위장을 한 강이한 건강을 향한 의지에 지배되고 규제되는 시간들이다. 거기에는 나중에 이러한 운명을 가진 한 인간을 감동 없이는 회상할 수 없는 중간 상태가 있다 : 거기에는 창백하고 섬세한 빛과 태양의 행복이 속해 있다. 즉 새의 자유, 새의 조망, 새의 오만에서 나온 감정과 호기심과 갸날픈 멸시의 감정이 얽힌 제3의 감정이 있다. ‘자유정신’ - 이 차가운 단어는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편안하며 따뜻하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랑과 증오의 속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마음대로 가까이 가고 멀어지며, 기꺼이 도주하고 피해다니며 날아다니고 다시 사라지거나 또다시 높이 날아오르며 사는 것이다 ; 사람들은 언젠가 자신 가운데에서 엄청난 다양성을 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변하게 된다. - 그러고는 자신과 무관한 사물을 걱정하는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자유정신을 괴롭히지 않는 그런 것과 관계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


한 단계 더 회복되면, 자유정신은 다시 삶에 천천히, 거의 반항적으로, 거의 의심스러운 듯 가까이 다가간다. 그의 주위는 다시 점점 따뜻해지고 마치 노란색 같은 빛을 띠게 된다 ; 감정과 공감은 깊어지고, 눈을 녹이는 듯한 온갖 바람이 그 위로 지나간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주위에 처음으로 눈을 뜬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그는 놀란 채 조용히 앉아 있다 : 도대체 그는 어디에 있었던가? 이 친근하고 가장 가까운 사물들 : 그 사물들이 그에게 얼마나 달라 보이는가! 그것들은 그 사이에 어떤 솜털과 매력을 얻었는가! 그는 감사하며 뒤를 돌아본다 - 자신의 방랑과 고집, 자기소외, 자신이 차가운 하늘을 새처럼 날며 멀리 보았던 것에 감사하며. 그가 나약하고 우둔한 게으름뱅이처럼 언제나 ‘집에’, 언제나 ‘제정신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던 것은 얼마나 잘한 일인가! 그는 자신을 잊고 있었다 :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서야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 그때 그는 거기서 얼마나 놀라운 것을 발견하는가! 미지의 전율! 회복기에 있는 사람이 느끼는 피로감과 오랜 질병 그리고 병이 재발한 가운데 느끼는 행복! 고통에 쌍 조용히 앉아 인내심을 키우는 일과 햇빛 아래 누워 있는 일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누가 겨울의 행복과 벽에 드리워진 햇빛의 얼룩을 그만큼 잘 알 수 있단 말인가! 삶을 향하여 다시 몸을 반쯤 돌린 이 회복기에 있는 자, 즉 도마뱀이야말로 세사에서 가장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가장 겸손한 동물인 것이다 : - 그들 중에는 질질 끌리는 옷자락에 작은 찬가를 달고 다니지 않으면 하루도 못 견디는 자도 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 이러한 자유정신의 기질을 가지고 병에 걸려 한동안 앓고 나서, 그 후에 더 오랫동안 건강하게, ‘더욱 건강하게’ 되는 것이 모든 염세주의(알려진 것처럼 염세주의는 낡은 이상주의자와 거짓말쟁이의 암이다)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법이다. 그 속에 있는 지혜, 즉 삶의 지혜는 오랜 기간 동안 소량의 약만으로 건강 자체를 처방한다는 것이다.  12-17



제1장 최초와 최후의 사물들에 대하여


인류는 유래와 기원에 관한 질문을 의식에서 몰아내고 싶어한다. 그 반대의 경향을 자기 속에서 느끼게 되려며 ㄴ우리는 거의 탈인간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24


철학자들의 유전적 결함 - 철학자가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두 근본적으로 극히 제한된 시기의 인간에 대한 증언에 불과하다. 여갓적 감각의 결여는 모든 철학자가 지닌 유전적 결함이다.  .. 절대적 진리가 없는 거소가 마찬가지로 영원한 사실도 없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역사적으로 철학하는 일이 필요하며, 그와 동시에 겸양의 덕이 필요하다.  24-25


현상과 물 자체 - 수천 년 전부터 우리는 도덕적, 미학적, 종교적 요청과 맹목적인 애착, 정열 또는 경외감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았으며 비논리적인 사고의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세계는 점차 이처럼 이상할 정도로 다채롭고, 끔찍하게 의미심장하고 감정이 넘치게 되었다. 세계가 색채를 띠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색을 칠한 사람은 우리였던 것이다. 인간의 지성이 현상을 나타나게 했으며, 근본적인 자신의 해석을 사물 속으로 끌어들였다.  38


회의(懷疑 품을회 의심의)의 추정적 승리 - 한 번쯤은 회의적인 출발점을 인정해보라. 만약 다른 형이상학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고 우리에게 알려진 유일한 세계에 대한 모든 형이상학에서 나온 설명들이 전적으로 소용없는 것이라면, 그때 우리는 어떤 눈길로 인간과 사물들을 보게 될 것인가?  44


비교하는 시대 - 사람들이 관습에 묶이지 않을수록 그만큼 동기의 내면적 운동은 활발해지며, 그에 상응하여 외적 불안정, 인간의 뒤얽힌 혼란, 노력의 다성음악도 그만큼 커진다. 자기 자시이 있는 곳에 자신과 후손을 묶어두는 엄격한 강제성이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 존재하는가? 도대체 누구에게 아직도 무엇인가 엄격하게 속박하는 것이 존재하는가? 모든 종류의 예술양식이 나란히 모조되고 있다. 모든 단계나 모든 종류의 도덕, 관습, 문화 또한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시대는 서로 다른 세계관, 도덕, 문화가 비교될 수 있고 나란히 체험될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 고뇌를 두려워하지 말자! 오히려 시대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과제를 우리는 가능한 한 크게 생각하도록 하자.  46-47


꽃잎의 향기에 취해서 - 종교와 예술은 세계의 꽃이지만, 그것이 줄기보다 세계의 뿌리에 더 가까운 것은 결코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종교와 예술로 사물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는 없다. 오류는 종교와 예술과 같은 꽃을 피우게 할 만큼 인간을 깊고 섬세하며 상상력이 풍부하게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53


추리할 때의 나쁜 습관들 - 사람들이 가장 흔히 범하는 오류 추리는, 어떤 사항이 실재하므로 그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53


비논리적인 것은 불가피하다 - 비논리적인 것이 인간세계에 필요하며 비논리적인 것에서 좋은 것이 많이 생겨난다는 인식은 사상가를 절망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 중 하나다. 비논리적인 것은 정열, 언어, 예술, 종교 등에 그리고 대체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에 상당히 깊이 파고들어 가 있어서, 이들 아름다운 것들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주지 않고는 비논리적인 것을 퇴치할 수 없다.  54


불공정함은 불가피하다 - 어떤 사람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 우리가 겪은 경험은 총체적 평가를 위한 논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할만큼 완전할 수는 없다. 모든 평가는 성급하며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재는 척도, 즉 우리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코 불변의 크기를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분위기와 동요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에 대한 어떤 사항의 관계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확실한 척도라고 믿어야만 한다. 아마 이상의 모든 면에서 본다면 사람은 전혀 판단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평가하지 않고, 혐오와 애착 없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든 혐오는 모든 애착과 마찬가지로 역시 평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처음부터 비논리적인, 따라서 불공정한 존재이며,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현존재의 가장 크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조화 중의 하나이다.  55-56




제2장 도덕적 감각의 역사에 대하여


매우 진지한 개인과 민족에게 가벼움이 필요하듯, 마찬가지로 다른 부류에 속하는 매우 자극받기 쉬운 자와 동요하기 쉬운 자에게는 자신들의 건강을 위해 가끔 무겁게 짓누르는 짐이 필요하다. 점점 불길에 휩싸여가는 시대의 우리 더욱 정신적인 인간들은 우리가 적어도 지금처럼 부단히 악의 없고 절도를 지키녀 살아갈 수 있도록, 또한 이 시대에 거울과 자기반성으로서 이바지할 수 있도록, 불을 끄고 식히는 존재하는 모든 수단들을 잡기 위해 손을 뻗어야만 하지 않을까?  68


예지적 자유에 대한 우화 - 소위 도덕적 감각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주요 단계를 거친다. 첫째, 사람들은 동기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개별 행위를 단지 이롭거나 해로운 결과들에 의해 선 또는 악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이런 명칭의 유래를 잊고, 그것의 결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행위 자체에 ‘선’ 또는 ‘악’의 특징이 내재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한다. 언어가 돌 자체를 단단하다고, 나무 자체를 푸르다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오류다. 즉 그렇게 함으로써 결과를 원인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선함 또는 악함을 동기 속에 집어 넣고, 행동 자체가 도덕적으로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사람들은 선하다, 악하다는 술어를 개별 동기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 전체에 부여한다. 식물이 흙에서 자라는 것처럼, 인간의 본질에서 동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은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다음에는 행위에 대해서, 다음에는 동기에 대해서,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차례차례 책임을 묻는다. 결과적으로 인간들은 이 본질 역시 필연적인 결과이며, 과거와 현재의 사건들의 여러 요소와 영향으로 결합되어 있는 이상, 그것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곧 인간은 어떤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본질, 동기, 행위, 나아가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로써 도덕적 감각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이자 책임성에 관한 오류의 역사이며, 그것은 의지의 자유에 관한 오류에서 나오고 있다는 인식에 이른다. ... 불만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만은 행동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필요는 없다는 잘못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므로 후회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불만은 인간이 고칠 수 있는 습관이다.   69-70


친절의 경제학 - 인간의 교제에서 가장 효험 있는 약초이며 힘으로 간주되는 친절과 사랑은 대단히 가치 있는 발견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마 이 향기로운 약을 가능한 한 경제적으로 사용하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친절의 경제학이란 가장 무모한 몽상가의 꿈이다.  76


동정을 유발시키려고 하는 것 - 로슈푸코의 (그리고 플라톤의)판단에 의하면 동정이란 영혼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동정을 입증해야 하지만, 동정을 갖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낟. 왜냐하면 불행한 사람들은 어쨌든 동정을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큰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여길 정도로 어리석기 때문이다. ... 동정에 대한 열망은 자기 만족을 향한 열망이며, 더욱이 이웃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동정심은 지극히 자기애에 빠져 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라 로슈푸코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음"때문은 아니다.  78


진리의 명목상의 단계들 - 흔히 있는 잘못된 추리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누군가가 우리에 대해서 진실하고 솔직하기 때문에 그는 진리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부모의 판단을 믿고 그리스도교도는 교회 창설자의 주장을 믿는다. 이처럼 사람들은 지난 몇 세기 동안 행복과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옹호해온것이 모두 오류에 불과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것이 진리의 단계였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무엇인가를 믿고 자신의 믿음을 위해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을 경우에, 사실은 단지 오류가 그를 부추겼을 뿐이었다면, 이것은 너무나 부당한 일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런 과정은 영원한 정의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민감한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정신과는 반대로 다음의 명제를 명령한다. 즉 도덕적 행위와 예지적 통찰 사이에는 철저하게 필연적이 ㄴ유대가 이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영원한 정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81


거짓말 -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신이 거짓말을 금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에는 날조, 위장, 기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위프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짓말을 하는자는 자신이 져야 할 무거운 짐에 관해서는 거의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즉 그는 하나의 거짓말을 주장하기 위해서 또 다른 스무 개의 거짓말을 생각해내야 한다.) 다음으로 단순한 상황에서는 나는 이것을 원한다, 내가 이것을 했다 등으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유리하며, 따라서 강제와 권위를 택하는 편이 교활한 방법보다 훨씬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한 어린이가 복잡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면 그는 이와 같이 자연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언제나 자기에게 이익이 되게끔 말한다.  82


자기분할로서의 인간의 도덕 - 진정으로 자신의 일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작가는 누군가가 찾아와서 그 일을 더 명확하게 표현해주고, 여기에 포함된 문제에 대해 남김없이 대답함으로써 자신을 파괴해주기를 원한다. 사랑을 하고 있는 소녀는 연인이 저지른 부정에서 자신이 사랑이 헌신적이며 충실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군인은 조국의 승리를 위해 전쟁터에서 쓰러지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최고 소원도 조국의 승리를 통해 승리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 즉 수면과 가장 좋은 음식을, 사정에 따라서는 자신의 건강과 재산을 자식에게 주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비이기적인 상황들일까? 쇼펜하우어의 말에 따라 이런 도덕적 행위들은 "불가능하면서도 현실적"이기 때문에 기적일까? 이들의 경우에는 인간은 자신의 그 무엇을, 하나의 사상, 하나의 욕망, 하나의 작품 등을 자신의 다른 것보다 한층 더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분할해서 한쪽을 다른 한쪽의 희생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이 명확하지 않은가? 어느 고집 센 사람이 "내가 이 인간에게 한 걸음이라도 길을 양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총에 맞는 편이 낫다"고 할 때,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일까? 어떤 것에 대한 애착(소원, 충동, 욕망)은 앞서 말한 모든 경우에 존재하고 있다. 애착을 가지는 것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비이기적"이지 않다. 도덕에서 인간은 자신을 분할할 수 없는 것, 개체(individuum)로서가 아니라 분할할 수 있는 것(dividuum)으로서 다룬다.  85


약속할 수 있는 것 - 행동은 약속할 수 있으나 감정은 약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감정은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항상 사랑하겠다거나 미워하겠다거나, 항상 그에게 충실하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은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행동은 약속할 수 있다. 이런 행동은 대체로 사랑, 증오, 충실함의 결과이지만, 한편 다른 동기에서 나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러 방법과 동기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익르어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언제까지나 사랑하겠다는 약속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한 나는 너에게 사랑의 행위를 입증할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ㅇ낳게 되더라도, 다른 동기에 의해서일지라도 나는 똑같은 행동을 너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언제까지나 똑같은 것이라고 하는 가상이 상대방의 머리 속에는 존속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기만 없이 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경우, 그것은 사랑의 가상에 대한 외관상의 지속을 약속하는 것이다.  86


지성과 도덕 - 주어진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좋은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동정심을 가지려면 강력한 상상력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도덕은 지성의 우수함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86


복수하기를 원하는 것과 복수하는 것 - 복수심을 품는 것과 복수를 실행하는 것은 격렬한 열병의 발작에 걸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나가버린다. 그러나 복수를 실행할 힘과 용기가 없는데도 복수심을 품는 것은 만성병, 육체와 영혼의 중동증을 안고 있는 것과 같다. 의도만을 중시하는 도덕은 두 경우를 양이 같은 것으로 평가하고, 통상적으로 전자의 경우를 더 나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아마도 복수의 행동이 수반할지도 모르는 나쁜 결과 때문일것이다). 두 가지 평가 모두 근시안적이다.  87


사랑과 정의 - 왜 인간은 정의를 손상시켜가면서 사랑을 과대평가하고, 마치 정의보다 사랑이 더 고상한 본질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랑을 향해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분명히 사랑은 정의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틀림없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그만큼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것이다. 사랑은 어리석은 것이며, 풍부한 풍요의 뿐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이 뿔에서 자기의 선물을 누구에게나 나누어준다. 그가 그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 번도 그것을 감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서와 경험에 의하면 사랑은 정의롭지 못한 사람뿐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는 정의로운 사람에게도 피부 속까지 흠뻑 젖게 하는 비처럼 공평하다.  91


피해자와 가해자의 착각들 -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서 어떤 소유물을 (예를 들면 영주가 서민한테서 연인을) 빼앗을 경우, 가난한 자는 착각을 한다. 자신이 소유한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빼앗아갈 정도로 그 사람은 참으로 흉악한 사람임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자느 ㄴ개개의 소유물의 가치를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사람의 입장을 생각할 줄 모르며,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심하 ㄴ부정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양자 모두 서로에 대하여 잘못된 표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분갷살 만한 권력자의 부정도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엄청난 것은아니다. 이미 물려받은 감각은 더 높은 것이 요구되는 더 고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 그들을 매우 냉정하게 만들고, 양심을 무디게 한다. 만약 우리와 다른 존재의 차이가 아주 크면, 우리는 모두 부정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어, 예를들어 모기 한 마리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죽이게 된다. 그래서 크세르크세스(Xerxes, 그리스 사람들조차 모두 그를 특별히 고귀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의 경우, 전체 원정군에게 불안하고 불길한 불신감을 조성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몸을 토막내게 한 것은, 그의 사악함의 표시가 아니다. 이런 경우에 한 개인은 마치 불쾌한 곤충처럼 제거된다. 세계의 지배자가 오래 느끼도록 자극하기에는 그는 너무나 무가치한 존재다. 그뿐 아니라 어떠 ㄴ잔인한 자도 학대받은 자가 믿고 잇는 그런 정도로 잔인하지 않다. 고통을 상상하는 것은 고통당하는 괴로우모가는 같지 않다. 공정하지 못한 재판간과 사소한 부정직함으로 인해 세상의 여론을 오도하는 저널리스트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원인과 결과는 이런 모든 경우에 잔혀 다른 감정과 사상들로 둘러싸여 있다. 반면 사람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똑같이 생각하며 느낀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이 전제에 입각하여 한 사람의 죄를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특정한다  96-98


수치심의 예민함 - 사람들은 부정한 것을 생각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이런 부정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브끄러워할 것이다.  98


개개인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평을 통하여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자신 앞에서 입증하고 싶어 한다. .. 그들은 다른 살마의 판단력을 자신의 판단력보다 신뢰하고 있다.  100


성숙한 개인의 도덕 - 자신에게서 완전한 개인을 만들어내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최고의 행복을 주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동정적인 감동과 행위보다 그를 훨씬 더 진보시켜준다. 물론 우리 모두는 여전히 개인적인 것을 너무 사소하게 여기는 병을 앓고 있다. 그것은 잘못 교육되어온 것이다. 우리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자. 우리의 감각은 오히려 강제적으로 개인적인 것에서 분리되었으며, 마치 개인적인 것이란 희생되어야만 하는 나쁜 것이기라도 한 듯 국가, 학문,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희생물로 제공되었다.  104-105


인륜과 윤리적인 것 - 도덕적, 윤리적, 윤리학적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확립되어온 규범이나 관습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억지로 복종하는지 또는 기꺼이 복종하는지의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앟으며 그것을 실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사람들로 하여금 윤리적인 것과 비윤리적인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구별을 가능하게 한 근본적 대립은 '이기적인 것'과 '비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관습과 규범에 구속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방되어 있는가에 있다. 여기서 어떻게 관습이 성립된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관습은 선과 악 또는 어떤 내재적 정언 명법을 고려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한 공동체, 한 민족을 유지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잘못 해석된 우연을 근거로 하여 성립된 모든 미신적 관례는, 그것을 따르는 것이 윤리적이라는 관습을 강요한다. 즉 관습에서 해방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공동사회에서는 개인의 경우보다 훨씬 더 해롭다. 모든 관습은 근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많이 잊혀질수록, 계속 더 존중할 만한 것이 된다. 그리고 관습에 바쳐지는 존중은 세대가 지남에 따라 쌓여, 관습은 마침내 신성한 것이 되며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어떤 경우든 경건의 도덕은 비이기적인 행위들을 요구하는 도덕보다 훨씬 더 오래된 도덕이다.  105-106


인륜 안에서의 쾌감 - 쾌감과 도덕성의 근원에 대한 중요한 부분은 습관에서 생겨난다. ... 인륜이란 쾌적한 것과 유익한 것의 결합체이며, 게다가 그것은 심사숙고할 필요가 없다.  106-107


소위 악한 행위에서의 무죄함 - 모든 '악한' 행위들의 동기는 보존 본능, 더 정확히 말해서 개인은 쾌감을 지향하고 불쾌감을 회피한다는 사실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그렇게 동기 규정된 것이라면 그것은 악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고통을 주는 것'은 철학자들의 두뇌 속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쾌감을 가져다주는 것'(쇼펜하우어적인 의미에서 동정심)도 이와 마찬가지다. 국가 형성 이전의 상태에서 우리는,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나무로 모여들때 우리보다 먼저 그 나무의 열매를 빼앗으려는 자가 있으면 그가 원숭이든 인간이든 죽였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는 불모의 땅에서 방랑하게 될 경우 동물에 대해 그런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를 가장 분노하게 만드는 악한 행위들은, 그런 행위를 우리에게 가하는 상대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그의 의향에 따라 이런 나쁜 행동을 우리에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착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의향이라는 것에 대한 이 믿음은 증오, 복수심, 악의를 야기하고 상상력을 완전히 손상시킨다. 반면 우리는 동물에 대해서는 그렇게 격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들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보존본능에서가 아니라 보복하기 위해 해를 가하는 것. 그것은 잘못된 판단의 결과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뵈가 없다. 개인은 국가 이전의 상태에서는 위협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가혹하고 잔인하게 다룰 수 있었다. 그것은 자기 힘을 위협적으로 시험해 보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 약한 자를 자신에게 굴복시키는 폭력을 행사하는 자, 권력자, 최초의 국가 설립자는 그렇게 행동한다. 오늘날에도 국가가 여전히 그렇게 행하고 있는 것처럼 거기에는 그럴 권리가 있다. 오히려 그것을 방해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예를 들어 사회, 국가와 같은 더 큰 개체와 집단적 개체가 개인을 굴복시켜서 그들의 개별성에서 그들을 이끌어내어 집단으로 흡수하게 되면,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토대가 제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도덕성에는 강제가 선행한다. 또한 도덕성 그 자체는 잠시 동안은 여전히 불쾌감을 피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순응하는 상제일 것이다. 나중에 그것은 인륜이 되고 훨씬 후에느 ㄴ자유로운 복종이 되며, 마침내는 거의 본느에 가까워지고 만다. 그때 그 도덕성은, 오랫동안 익숙해지고 자연적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쾌감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덕이라고 불린다.  109-110


판단하지 말라 - 앞서 간 시대들을 고찰할 때 우리는 부당한 비방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노예제도의 불공정함, 인간가 민족들을 정복하는 과정에서의 잔인성은 우리의 척도로 측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는 정의의 본능이 아직 충분히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기주의는 악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웃' (이 말은 그리스도교적 기우너을 가진 것으로 진실에 일치하지 않느다)에 대한 표성이 우리에게는 극히 미약히기 때문이며,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마치 식물과 돌을 대하느 ㄴ것처럼 자유롭고 책임이 없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다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결코 그것을 완전히 배울 수는 없다.  111-112


'인간은 항상 선하게 행동한다' - 자연이 뇌우를 내려 우리를 젖게 했다고 해서 자연을 비도덕적이라고 탓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해를 끼치는 사람을 비도덕적이라고 부르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후자의 경우에는 자의적으로 타나타는 자유의지를, 전자의 경우에는 필연성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구별은 오류이다. 또한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는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는 것에 대해 비도덕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인간은 모기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모기를 아무 거리낌없이 의도적으로 죽이고, 우리 자신과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범죄자를 의도적으로 처벌하고 그에게 고통을 준다. 첫번째의 경우는 개인이 자기 보존을 위해서 또는 자신이 불쾌해지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자가 되며, 두번째 경우에는 국가가 그러하다. 모든 도덕은 의도적으로 해를 가하는 것을 정당방위로 인정한다. 단 그것이 자기 보존의 문제가 되는 경우라면!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가하는 모든 악행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관점만으로도 충분하다. 인간은 자신으 ㄹ위해서 쾌감을 원하고 불쾌감을 없애고자 한다.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자기 보존의 문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말은 타당하다. 인간은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선을 행한다. 즉 인간은 지성의 정도와 이성의 갖가지 척도에 따라 언제나 자신에게 선하게(유리하게) 보이는것을 행한다.  113


만약 인간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개별적인 모든 행위는 미리 계산될 것이다. 인식의 모든 진보, 모든 오류, 모든 악의도 말이다.  118


많은 행위가 악하다고 말하지만 그 행위들은 단지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를 선택했던 지성의 정도가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한 의미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모든 행위는 어리석다. 왜냐하면 현재 이를 수 있는 최고의 인간 지성은 반드시 또 추월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120





제4장 예술가와 저술가의 영혼으로부터


완전한 것은 생성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 - 우리는 완전한 것에 대해서는 모두 그것의 생성에 의문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현존하는 것이 마치 마술에 의해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즐기는 데 익숙해 있다. ...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즉흥적인 것이라는, 기적처럼 갑자기 생긴 것이라는 믿음을 불러일으킬 때 완전한 효과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예술의 학문은 이런 착각을 가장 분명하게 거부해야 하고, 예술가의 그물에 걸리느 한, 지성의 그릇된 추론과 악습들을 적발해내야 한다. 그것은 자명한 일이다.  167


예술가는 일생 동안 어린아이와 젊은이인 채로 있으며 자신에게 예술 충동이 엄습했던  지점에 머물러 있다.  169


손으로 하는 작업의 성실성 - 재능과 타고난 능력에 대해서만 말하지 말라! 타고난 재능이 거의 없이도 위대해진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위대한 사람이 되었고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천재'가 되었다. 그런한 자질을 의식하고 있는 살마이라면 아무도 그것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커다란 전체를 만드는 일을 감행하기 전에, 우서 부분을 완전히 만든는 것을 배우는 숙련된 장인의 성실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부분을 완성하기 ㅏ여 시간을 부여했다. 왜냐하며 그들은 현혹시키는 전체의 효과보다 작은 것, 지엽적인것을 잘 만드는 일에 더 많은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하여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 있을 까 하는 방법은 쉽게 제공할 수 있으나, '나에게느 재능이 충분치 않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질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느 그 자질을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2페이지를 넘지는 않지만 거기에 포함된 모든 단어가 필연적이라고 할 만큼 명확한 소설을 백 개 이상 습작해보라. 가장 함축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일화의 형식을 배울 때까지 매일 일화를 쓰도록 하라. 인간의 유형과 성격을 수집하거나 윤색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 특히 주위의 다른 사람드에게 미치는 효과를 유심히 바라보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에게 말을 자주 하고 남이 말하는 것을 귀를 쫑긋 세워 듣도록 하라. 풍경화가와 의상 디자이너처럼 여행하도록 하라. 잘 표현되면 예술적 효과를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개개의 학문에서 발췌하도록 하라. 끝으로 인간 행위의 동기에 대해서 잘 생각하고 이 점에서 가르침을 주게 될 어떤 지침도 냉대하지 말고 밤낮으로 이런 것들의 수집가가 돼라. 이와 같은 다양한 훈련으로 2,30년을 내라. 그 후에는 작업실에서 창작된 것이 거리의 빛 속으로 나가도 좋다. 그런데 대부부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들은 부분에서가 아니라 전체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마 한 번은 선택이 적절하여 주목을 끌게 되지만 그때부터 항상 실패할 것이다. 그것은 충분히 당연한 근거에서 나오는 일이다. 때때로 이러한 예술적 삶의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이성과 성격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에는 운명과 필욕 그 자리를 물려받아 미래의 거장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여 그의 손으로 하는 작업의 모든 조건을 거쳐 단계적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181-182


대중의 예술적 교육 - 동일한 주제가 서로 다르 거장에 의해서 수많은 방식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대중은 소재에 관심을 갖는것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작업들에 의해 그 주제르 알게 되고 새로운 것이 주는 매력과 긴장감의 매력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며느 결국에는 이 주제를 취급할 때의 어떤 뉘앙스, 섬세하고 새로운 발명도 파악하고 즐기게 될 것이다.  185


예술가와 그의 추종자는 보조를 맞춰야 한다 - 양식이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진행하는 것은, 예술가뿐 아니라 청중과 관중도 이 진행에 참여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느리게 진행되어야 한다. ... 왜냐하면 예술가가 대중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이미 대중은 급속히 낮은 곳으로 가라앉기 때문이다.  186


집단정신 - 훌륭한 저술가는 자신의 정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구들의 정신까지도 가지고 있다.  192


학문에 대한 관계 - 학문 속에서 그들 스스로 어떤 것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학문을 흥미롭게 여기기 시작했던 사람은 모두 학문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193


작가의 역설들 - 소위 독자가 불쾌하게 느끼는 작가의 역설들은 그 자각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흔히 독자의 머리 속에 있다.  193


기지 - 가장 기지에 넘치 작가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미소를 거의 만들어내지 않는다.  194


문장가로서의 사상가 - 사상가는 대부분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의 사상뿐만 아니라 그 사상을 사유하는 것까지 우리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194


독자의 정신을 거역하는 죄 - 단지 독자와 같아지기 위해서 저자가 자신의 재능을 부인한다면, 그는 독자가 결코 용서하지 않을 치명적이 죄를 범하는 것이다. 즈 독자가 그것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눈치채는 경우에 말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모든 나쁜 욕을 해도 좋다. 그러나 어떻게 그 말을 하는지의 양식에서는 인간의 허영심을 다시 바로 세워줄 방법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194-195


글쓰기와 가르치기에서의 주의점 - 처음으로 글으 써보았거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글쓰기에 대한 정열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시도하고 체험하는 모든 것에서 문체상으로 전달할 수있느 것만을 배운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저술가와 독자들만을 생각한다. 통찰을 원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기 일을 하는 데는 무능력하다. 그는 언제나 자기 학생의 행복을 생각하고, 그가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인 한 모든 인식은 그를 기쁘게 하낟. 결국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열의를 잃어버리고, 지식의 한 통로, 흔히 수단으로 자신을 파악한다.  199


아킬레우스와 호메로스 - 언제나 아킬레우스와 호메로스의 관계 같은 것이 존재한다. 한족은 체허모가 감각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쪽은 그것들을 기술하는 것이다. 참다운 저술가는 남의 격정과 체험에 다만 단어들을 부여할 뿐이며, 자기가 경험했던 적은 것들에서 많은 것을 추측해내는 예술가이다. 예술가들으 결코 대단한 열정을 가진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흔히 열정을 가진 인간으로 무의식적인 감정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 즉 그들의 삶이 예술의 영역에서 체험을 말하게 될 때, 사람들은 그들이 그렸더 열정을 더욱 신뢰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을 자유롭게 내버려두고 자제하지 않으며 자신의 분노와 욕구를 위해 넓은 자리만 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곧 세상 사람은 저 사람은 얼마나 열정적인가! 하고 외친다. 그러나 깊이 파고드는, 개인을 소모시키며 때로는 잠식해 들어가는 열정인 경우에는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이러한 열정을 체험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것을 극이나 음악 또는 소설에서 묘사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예술가가 아니라면 흔히 방종한 개인이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205




제5장 좀 더 높은 문화와 좀 더 낮은 문화의 징후


퇴화를 통해 고상해짐 - 우리는 한 민족의 혈통은, 사람들이 대부분 자신들의 일상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근본  법칙들의 동일성에 따라, 즉 그들의 공동 믿음에 따라 살아 있는 공동심(共同心 함께공 한가지동 마음심)을 가지고 있을 때 가장 잘 존속한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여기서 훌륭하고 탄탄한 풍습이 강화되고, 개체의 종속성을 배우며 품성에는 이미 강인함이 생일 선물로 주어져서, 그 후에는 그것이 습관하된다. 강하고 동질적이며 특징적인 개체들을 기반으로하는 이런 공동체가 가지는 위험은 세습에 의해 점차 강화되는 우둔화이다. 이것은 한번 정착되면 그림자같이 뒤따라다닌다. 그와 같은 공동체의 정신적 진보는 속박받지 않고 더 불안정하며 도덕적으로 더 약한 개체들에게 따라다닌다. 대개 새로운 것과 다양한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종류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약함 때문에 별 뚜렷한 영향도 보이지 않고 소멸해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들이 후손을 가지게 되면, 긴장이 완화되어 때로는 공동체의 안정된 요소에 상처를 초래한다. 새로운 그 무엇은 바로 이 상처로 인해 약화된 자리에서부터 전체로 접종되는 것이다. 그러나 것의 전체적인 힘은 이 새로운 것을 그의 피 속으로 받아들여 동화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해야 한다. 퇴화해가는 본성들은 진보가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대개 모든 진보에는 어떤 부분적 약화가 성행되어야 한다. 가장 강한 본성들은 유형을 계속 지켜나가고 좀더 약한 본성은 유형을 계속 형성해나가는 것을 돕는다. 비슷한 일이 개별적인 인간들에게도 일어난다. 일종의 퇴화, 불구, 나아가서는 악덕 그리고 신체적 또는 도덕적 결손까지도 다르 한편으로는 때때로 하나의 장점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더 심하게 병든 인간들은 아마 호전적이고 침착하지 못한 종족 속에서 혼자 있으 계기를 더 많이 가지게 됨으로써 더욱 침착하고 현명해지며, 외눈을 가진 사람은 더욱 강한 한쪽 눈을 가지게 될 것이고, 눈먼 사람은 한층 더 깊이 내부를 보고 어쨌든 더욱 날카롭게 듣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저 유명한 생존 경쟁이 한 인간과 종족의 진보와 강화가 해명될 수 있는 유일한 관점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두 가지 것이 한데 합쳐져야 한다 그 하나는 신앙과 공통된 감정 안에서 정신들을 결합함으로써 정착된 힘을 증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퇴화해가는 본성들을 그리고 그 정착된 힘을 부분적으로 약화시키고 손상시킴으로써 더 높은 목표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다. 좀더 여리고 섬세한 것으로서의 더 약한 이 본성들이 대체로 모든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 어디에서인가 부패하고 약해져가는, 그러나 전체로서는 아직 강하고 건강한 민족은 새로운 것의 감염을 받아들여 장점으로 동화시킬 수가 있다. 개별적인 인간의 경우, 교육의 과제는 전체적인 인간으로서의 그가 더 이상 자신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를 확고하고 확실하게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그 후에 교육자느 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아니면 운명이 그에게 입힌 상처를 이용해야 한다. 그리하여 고통과 욕구가 생겨나면, 그 상처 입은 부분에 새롭고 고상한 그 어떤 것이 접종될 수 있는 것이다. 교육자의 전체적 본성은 그것을 받아들여, 나중에 그 열매들 속에서 고상해지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국가에 관해서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설프게 교육받은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통치의 형식은 아주 사소한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정치의 최대 목표는 영속성이며, 이것은 자유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어 다른 모든 것을 능가 한다." 대체로 지속적인 발전과 고상하게 하는 접종은 확실하게 기초가 마련되고 영속성이 최대한 보증될 때에만 가능하다. 물론 모든 영속성의 위험한 동료인 권위라는 것이 통상적으로 그 일을 방해하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225-227


자유정신은 상대적 개념이다 - 어떤 혈통과 환경, 신분과 지위 또는 지배적인 시대의 견해를 근거로 그에게서 예살할 수 있는 거소가 다르게 사유하는 사람을 자유정신이라고 부른다. 자유정신은 예외이며 속박된 정신은 상례이다. 속박된 정신은 자유정신의 자유로운 기본 원칙이란 눈에 띄고 싶은 병적인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거나 또는 속박된 도덕과는 전혀 화해할 수 없는 순전히 자유로운 행위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정짓고 자유정신을 비난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자유로운 기본 원칙들이 머리의 괴팍하모가 엉뚱함에서 나온다고 추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말을 하면서 자신의 말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함으로써 단지 상처를 입히려는 악의를 가지고 잇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유정신의 얼굴에는 보통 속박된 정신도 충분히 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지성의 비범한 우수성과 예리함이 증거로서 역력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정신 활동의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원은 공정하게 평가된 것이다. 사실상 많은 자유정신이 이러한 또는 저러한 양식으로 성립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자유정신이 그런 방법으로 성취한 원칙들은 속박된 정신의 원칙들보다도 더 진실하며 신뢰할 수 있다. 진리의 인식에서는, 어떤 충동에서 그것을 추구했으며,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발견했는지가 아니라 그 진리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자유정신이 정당하다면 따라서 속박된 정신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다. 전자가 부도덕에서 진리에 이르렀는가 그리고 후자가 지금까지 도덕에서 비진리를 고집했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자유정신이 정당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에 관계 없이 그가 관습적이 ㄴ것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이 자유정신의본질에 속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유정신은 역시 진리를, 또는 적어도 진리탐구의 정신을 자기 편으로 삼게 될 것이다. 자유정신은 근거를 요구하고 다른 정신들은 신앙을 요구한다.  227-228

 

신앙의 기원 - 속박된 정신은 자신의 입장을 근거에서가 아니라 습관에서 받아들인다.  228


모든 국가와 신분, 결혼, 교육, 법률과 같은 사회질서, 이 모두는 그것들에 대한 속박된정신의 믿음 속에서만 힘과 영속성을 가지게 된다.  229


속박된 정신에서의 사항의 척도 - 속박된 정신들은 네 가지 종류의 사항에 대하여 그것들이 옳다고 말한다. 첫째, 영속성이 있는 모든 사항은 옳다. 둘째, 우리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모든 사항은 옳다. 셋째, 우리에게 이득을 가져오는 모든 사항은 옳다. 넷째, 그것을 위해 우리가 희생을 치른 모든 사항은 옳다. 예를 들어 이 마지막 것은, 왜 국민의 의지를 거역하여 시작된 전쟁이 우선 희생이 치러지면 곧바로 열광적으로 게속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232


강한 정신 - 관습을 자기 편에 두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근거도 필요하지 ㅇ낳는 사람과 비교하면, 자유정신은 항상 약한 쪽이다. 특히 행동에서 그렇다. 왜냐하면 자유정신은 너무나 많은 동기와 관점들을 알고 있고, 그 때문에 확신이 없으며 미숙한 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가 적어도 자신으 관철시키며 아무 성과도 없이 파멸하지 않을 정도로, 그를 비교적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 있는 것일까? 강한 정신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이것은 개별적인 경우에는 천재의 생산에 대한 문제이다. 한 개인이 관습에 맞서 완전히 개인적인 세계 인식을 지향하는 그 활력, 그 불굴의 힘, 그 인내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232-233


기적적 교육 - 사람들이 신과 신의 배려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바로 그곳에서 교육의 관심은 비로소 크게 성장할 것이다. 마치 기적의 치료에 대한 믿음이 끝났을 때 비로소 치료술이 발전할 수 ㅇ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모두 기적적인 교육을 여전히 믿고 있다. 사람들은 실제로 엄청난 무질서, 목표의 혼란, 상황의 불리한 조건에서 가장 창작력이 풍부하고 가장 강한 사람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러한 것이 당연한 일로 일어날 수 있었던가? 이제 사람들은 앞으로 이런 경우들을 좀더 상세히 관찰하고 세심하게 조사하게 될 것이다. 그때 기적은 결코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상황 아래에서 많은 살맏르이 계속 멸망해간다. 대신 구제된 각 개인들은 대체로 훨씬 더 강력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타고난 강인한 힘으로 이 역경을 타개하고 이 힘을 더욱 훈련하여 키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적은 설명될 수가 있다. 기적을 이미 믿지 않는 교육은 세 가지 사항에 대하여 유의해야 한다. 첫째, 얼마나 많은 활력이 유전되는가? 둘째, 무엇을 통하여 새로운 활력이 점화될 수 있는가? 셋째, 어떻게하면 개인이 불안에 빠져 그 고유성을 파괴당하지 ㅇ낳고 문화의 다양한 요구들에 적응할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하면, 어떻게 한 개인이 사적 문화와 공적 문화의 대위법 속에 참가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가 곡조를 지휘하면서 동시에 그 곡조를 연주할 수 있을까?  242-243


학문의 미래 - 학문은 노력하고 탐구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만족을 주고, 그 성과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극히 적은 만족밖에 주지 않는다. 그러나 학문의 모든 중요한 진리는 조금씩 평번하고 저속해지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 조금밖에 없는 만족도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그 경탄할 만한 구구단을 일단 배우게 되면 이미 더 이상 기쁨을 느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학문이 스스로를 통하여 점점 더 작은 기쁨밖에 주지 못하게 되면, 그리고 위로를 주는 형이상학, 종교, 예술을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더 많은 기쁨을 빼앗게 되면, 인류의 거의 전부가 혜택을 입고 있는 쾌감의 가장 큰 샘이 고갈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좀더 높은 문화는 인간에게 우선 학문을, 그 다음에 비학문을 느낄 수 있는 두 개의 뇌실 즉 이중 두뇌를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두뇌는 혼란 없이 병행하고 분리할 수도 있고 폐쇄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것은 건강상의 요구 사항이다. 한 영역에는 동력원이 있고 다른 영역에는 조절기가 있어서 환상, 편협, 정열로 가열되어야 하며 인식하는 학문의 도움으로 과열된 것의 나쁘고 위험한 결과들이 예방되어야 한다. 만약 좀 더 높은 문화의 이런 요구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아픙로의 인간 발전의 경과는 거의 확실히 예언될 수 있다. 쾌감을 적게 제공하게 되면 참된 것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 버린다. 환상, 오류, 공상은 쾌감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거에 자신들이 주장했던 땅을 단계적으로 쟁취해간다. 그 다음의 학문의 쇠퇴이며 야만으로의 역전이다.  250-251


흥미로운 것의 증가 - 좀더 높은 교양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흥미로워진다. 그는 자신의 사고의 빈 틈이 교양으로 채워질 수 있거나 사상이 교양으로 인해서 확인될 수 있는 곳에서는 재빨리 그 문제의 교훈적인 측면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지적할 줄 안다. 거기서 권태는 점점 더 사라지고, 그와 함께 지나친 감정의 흔분도 사라진다. 그는 마침내 식물 사이를 지나다니는 자연 연구자처럼 인간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자기 자신을 단지 그의 인식 충동을 강하게 자극하느 ㄴ데 불과한 하나의 현상으로 인지한다.  253


학문을 통해서 훈련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능력이다 - 인간이 어느 일정한 시간 동안 엄밀한 학문을 철저히 해왔다는 것의 가치는 그 성과들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성과들은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로 이루어진 바다에 비교한다면 사라져 없어질 만큼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활력, 추진력, 인내력의 강인함을 증대시킨다. 인간은 어떤 목적을 합목적적으로 달성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한 한에서, 언젠가 학문적인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그 뒤에 하게 될 모든 일에서 볼 때 대단히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254


거대한 것에 호의적인 편견 - 사람들은 분명히 모든 거대한 것과 뚜렷한 것을 과대 평가한다. 이는, 만약 어떤 사람이 한 가지 분야에 전력투구하여 자신을 흡사 하나의 거대한 기관으로 만들 때, 이 일이 대단히 유익하다고 느끼게 되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통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확실히 인간 스스로에게는 자신의능력을 균형 있게 훈련하는 것이 더 유익하고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모든 재능은 다른 힘들에서 피와 힘을 빨아먹는 흡혈귀이며, 지나친 생산은 가장 재능 있는 사람까지도 거의 미치게 만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술 안에서도 역시 극단적인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 매우 주의를 끈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는 훨씬 낮은 문화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힘을 가지기를 원하는 모든 것에 굴복한다.  256-257


학교에서의 이성 - 학교는 엄밀한 사고, 신중한 판단, 일관성 있는 추론을 가르치는 것 외의 다른 과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학교는 이 작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것, 예를 들어 종교를 무시해야 한다. 물론 학교는 인간적인 불투명함, 습관 그리고 욕망이 아주 팽팽하게 당겨진 사고의 활을 나중에 다시 느슨하게 만들게 되리라는 것을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학교는 그 영향력이 미치는 한, 인간에게 있는 본질적인 것과 탁월한 것을 강요해야 한다. 그것은 적어도 괴테가 판단하듯이, '인간의 이성과 학문은 최상의 힘'이다. 위대한 자연 탐구자 폰 베어(von Bear)는 동양인에 비해서 모든 유럽인이 뛰어난 점을,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근거들을 말할 수 있는, 훈련된 능력에서 찾고 있다. 동양인들은 이런 능력이 전혀 없다. 유럽은 일관성 있고 비판적인 사고의 학교로 나아갔고, 동양은 여전히 진리와 허구 사이에서 구별할 줄을 모르고, 자신의 호가신이 자신의 관찰과 규칙에 따른 사고에서 유래하는 것인지, 또는 상상력에서 유래하는 것인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서의 이성은 유럽을 유럽으로 만들었다. 중세에 유럽은 다시 동양의 한 부분과 부속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즉 그리스인에게 감사해야 했던 학문적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263-264


좀더 높은 문화는 필연적으로 오해된다 - 지적 충동 외에는 단지 습관이 된 종교적 충동만을 하나 더 가지고 있는 학자들처럼, 자신의악기에 줄을 두 개만 매어놓고 있는 사람은, 더 많은 현으로 연주할 수 있는 사람드을 이해하지 못한다. 더 낮은 사람들에 의하여 항상 잘못 해석되는 것은 많은 현을 가진 더 높은 문화의 본질에 속한다. 잘못된 해석은 예를 들어 예술이 종교적인 것의 가장된 형식으로 간주되는 경우에 일어나게 된다. 오로지 종교적이기만 한 사람들은, 마치 노아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닌 음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문조차도 종교적 감정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275-276


활동적인 사람들의 주요 결점 - 활동적인 사람들에게는 흔히 더 높은 활동이 결여되어 있다. 여기서는 개인적인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관리, 상인, 학자들로서 즉 유적 존재로서는 활동적이지만 아주 특정한 한 개인, 유일무이한 인간으로서는 활동적이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태만하다. 활동적인 사람들의 불행은 그들의 활동이 거의 언제나 약간은 비이성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돈을 모으고 있는 은행가에게 그가 쉬지 않고 일하는 활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서는 안 된다. 이 활동은 비이성적인 것이다. 활동적이 ㄴ사람들은 돌이 굴러가듯 기계적인 성격의 우둔함에 따라 굴러간다. 모든 인간은 모든 시대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노예와 자유인으로 나뉘어 있다. 왜냐하면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노예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그는 자신이 원하는 그 누구, 즉 정치가, 상인, 관리, 학자이다.  277-278


활동적인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태만한가 - 나는 다양한 의견이 가능한 모든 것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 개인은 스스로 다른 모든 사물에 대해서 하나의 새로운,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위치를 차지하는 자기만의 그리고 일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활동적인 사람의 마음속에 근본적으로 들어 있는 태만함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샘에서 물을 깆는 것을 방해한다. 의견의 자유는 건강과 마찬가지다. 양쪽이 모두 개인적인것이며, 양쪽 모두에게서 인정되는 보편 타당한 개념은 세워질 수 없다. 한 개인의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것이 다른 한 개인에게는 이미 질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정신의 자유를 향한 많은 수단과 방법이 더 높이 발달한 본성은 지닌 사람들에게는 부자유로 향하는 방법들과 수단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279-280


부수 효과 - 진정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런 억압이 없어도 결점과 악덕의 경향들을 버리게 될 것이다. 분노와 불쾌함이 그를 엄습하는 일도 좀더 드물어질 것이다. 즉 그의 의지는 인식하는 것과 인식하기 위한 수단, 즉 그 안에서 그가 인식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속적인 상태 외의 아무것도 더 절실히 원하지 않게 될 것이다.  280


앞으로 나아가라 - 그러면 확실한 발걸음과 신뢰를 가지고 지혜의 길로 나아가라! 네가 어떤 존재이든 스스로 경험의 샘이 되어 너 자신으 도우라! 너의 본질에 대한 불만을 던져버리고 네 자신의 자아를 용서하라. 왜냐하면 어쨌든 너는 인식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백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사다리를 가지고 잇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종교와 예술을 어머니와 유모처럼 사랑해봤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명해질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서 바라보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그 마력속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너는 역사에 정통해야 하고, '이쪽-저쪽'의 조심스러운 저울접시 놀이에도 정통해 있어야 한다. 과거의 황야를 통해 그 고통에 찬 위대한 걸음을 걸었던 인류의 발자취를 밟아서 거꾸로 거닐어보라. 그러면 인류가 결코 다시 갈 수 없고 가서는 안 되는 곳을 너는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미래의 매듭이 또 맺어질 것인지를 전력을 다하여 미리 탐색함으로써, 네 자신의 삶은 인식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얻게 된다. 네가 체험한 모든 것, 모든 시도, 오류, 실수, 착각, 정열, 너의 사랑과 희망이 너의 목표속에서 남기없이 꽃을 피우도록 성취하는 것은 네 손에 달려 있다. 이 목표란, 스스로 문화의 고리의 필연적인 하나의 사슬이 되는 것이며, 이 필연성에서 보편적인 문화의 진행 속에 있는 필연성을 추론하는 일이다.  283-284




제6장 교제하는 인간 


호의적인 위장 - 사람들과 교제할 때에는 흔히 우리가 마치 그들의 행위의 동기를 간파하지 못한 듯 호의적으로 위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287


평등의 두 가지 방식 - 평등의 욕구는 다른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까지 끌어내리려고 하거나(헐뜯거나 비밀로 하거나 다리를 걸어서) 또는 자신으 모든 사람과 함께 끌어올리려는(인정하거나 도와주거나 남의 성공을 기뻐함으로써)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288-289


신뢰와 친밀함 - 다른 사람과 의도적으로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상대방의 신뢰를 얻고 있는지에 대하여 확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뢰를 확신하는 사람은 친밀함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289-290


사려 깊은 - 아무도 기분 상하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정의로운 기질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이 많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292


논쟁하는 데 필요한 것 - 자신의 사상을 얼음 위에 놓는 법을 이해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논쟁의 열기 속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292


교제와 자만심 - 사람들은 자신이 항상 공로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만심을 잊어버리게 된다. 혼자 잇다는 것은 교만을 심는 결과가 된다. 젊은 사람들은 자만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많은 것을 의미하려는 그들 자신과 똑같은 사람과 사귀고 있기 때문이다.  292-293


공격의 동기 - 사람들은 단지 누구에게 아픔을 주고 그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마 자신의 힘을 의식하기 위해 공격하기도 한다.  293


아첨 - 교제할 때 아첨을 통하여 우리의 조심성을 무디게 하려는 사람들은, 위험한 수단 즉 수면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수면제가 잠이 들게 하지 못하면, 오히려 더 깨어 있게 만들 것이다.  293


침묵 - 양편 모두에게 가장 불쾌한 논쟁의 응수 방법은 화를 내고 침묵을 지키는 일이다. 왜냐하면 공격하는 편은 흔히 침묵을 경멸의 표시로 표명하기 때문이다.  295


대화를 하면서 -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정당함이나 부당함을 인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습관의 문제다. 전자를 인정하는 것도 후자를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가 있다.  297


설명하는 사람 - 그 무엇을 설명하는 사람은 그 사실이 그의 관심을 끌기 때문에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설명하는 것을 통해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싶기 때문에 말하는 것인지를 쉽게 알아차리게 만든다. 후자의 경우에 그는 과정을 하고, 최상급도 사용하며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는 일반적으로 더 서툴게 말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실에 대하여 잘 생각하고 있지 못하지 때문이다.  300-301


모욕하는 것과 모욕당하는 것 - 모욕하고 나중에 용서를 비는 것이 모욕당하고 용서해주는 것보다 훨씬 기분 좋은 일이다. 전자를 행하는 사람은 힘을 과시하고 그 뒤에 성격이 호의적임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후자는, 만약 그가 비인간적이라고 인정받지 않으려면, 이미 용서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강박관념 때문에 상대방을 굴복시킨 데 대한 즐거움도 적어진다.  303


사교 모임 후의 양심의 꺼림직함 - 왜 우리는 일반적인 사교 모임 후에 꺼림칙함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가 중대한 사실을 가볍게 받아들였기 때문이거나, 인물들에 대하여 논의할 때 완전히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는 말을 해야 했을 때 침묵했기 때문이며, 적당한 시기에 일어나서 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사교 모임에서 마치 우리가 거기에 속하는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304


잘못 평가된다 - 자신이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가에 언제나 귀 기울이고 있는 사람은 항상 화가 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우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이미 잘못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들ㄷ조차고 자신들의 언짢음을 때로는 시기하는 말들로 표출한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우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그들이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의 판단은 많은 아픔을 준다. 왜냐하면 그 판단들은 아주 솔직하고 거의 사실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대자인 어떤 사람이 우리가 비밀로 하고 있는 점을 우리 자신처럼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처음에 그 불쾌한 기분은 얼마나 크겠는가!  304


오해된 정직함 - 대화를 하면서 자기 자신을 인용하는 것은("나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자만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된다. 반면 그것은 자주 이와는 정반대의 근원에서 나온다. 그것은 적어도 그 순간을 과거의 어떤 순간에 속하는 묘안들로 장식하고 꾸미지 않으려는 정직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305


자만심의 징후로서 동정심의 요구 -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을 모욕하면서 처음에는 자신을 나쁘게 여기지 않기를, 두 번째에는 자신이 극심한 발작에 지배당하고 있으므로 동정해주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의 자만심은 이렇게 멀리 나아간다.  306


소크라테스의 경험 - 인간은 한 가지 일에 대가가 되고 나면, 통상적으로 바로 그 때문에 대부분의 다른 일들에서는 완전히 무능해진다. 그러나 이미 소크라테스가 경험한 것처럼, 사람들은 정반대로 판단하고 있다. 이것이 대가들과의 교제를 즐겁지 않게 만드는 나쁜 상태다.  307-308


고귀함과 감사하는 마음 - 고귀한 사람은 감사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즐겁게 느끼고, 의무를 가질 기회들을 소심하게 피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후에 감사함을 표현하는 데에도 태연하다. 반면에 천박한 살마은 모든 의무를 지는 것에 대해 저항하거나, 후에 그 감사를 표현하는 데도 과장된 행동을 하거나 너무 고의적으로 애를 쓴다. 그런데 후자의 행동은 더 낮은 혈통 또는 억압된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들에게 보여진 호의가 그들에게는 은혜의 기적을 의미하는 것이다.  309-310


우정을 위한 재능 - 우정에 대해서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는 두 가지 유형이 드러난다. 한 가지 유형은 끊임없는 상승 속에서 어떤 발전 단계에서도 잘 어울리는 친구를 발견한다. 그가 이런 방법으로 얻은 일련의 친구들은 그들끼리 관계를 가지는일이 드물고 때로는 알력과 대립 상태에 빠진다. 이것은 나중의 발전 단계가 앞의 단계들을 지양하거나 해를 입히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런 사람은 농담으로 사다리라고 불려도 좋을 것이다. 

또 다른 유형은 전혀 다른 성격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매력을 발휘하여 하나의오나전한 동아리를 이룰 정도의 친구들을 얻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이 친구들은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들끼리 서로 친구가 된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으 ㄹ원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전혀 다른 성향과 본성들의 일체성이 어떻게든 이미 형성되어 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친구를 가지는 재능이 좋은 친구가 되는 재능보다 훨씬 가치 있다.  311


불만의 해소 - 어떤 일에서 실패한 사람은 실패의 원인을 우연으로 돌리기보다 차라리 다른 사람의 나쁜 의지로 돌리낟. 그의 화난 감정은 그가 실패한 게 사물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함으로써 가벼워진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복수를 할 수 있지만 우연에 의한 고통스러움은 억지로 삼ㅌ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주의 측근은 어떤 일에서 실패하면, 어떤 한 사람을 명목상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모든 궁신의 이익을 위하여 그를 희생시키곤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영주느 ㄴ운명의 여신 자체에게는 복수를 할수가 없으므로 그의 불쾌감이 그들 모두에게 표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312


자만심 - 우리의 모든 좋은 수확을 망치는, 자만심이라 불리는 저 잡초가 자라나는 것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마우것도 없다. 왜냐하면 자만심은 진실한 마음에, 경의의 표현에, 호의적인 친근감에, 연애에, 친절한 충고에, 실수의 고백에, 남을 위한 동정에 들어 있기 때문이며, 그 잡초가 그 사이에서 자라나면 이 모든 아름다운 것이 반감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자만하는 사람, 즉 있는 대로 또는 인정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항상 계산을 잘 한다. 물론 그는 자신의 자만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보통 두려움 또는 편리함 때문에 그가 요구하는 정도의 존경을 그에게 표시하는 한, 순간적인 성과만은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나쁜 보복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그에게 주었던 가치에서 그가 정도를 넘어서 요구한 만큼을 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자만심을 꺾는 일보다 더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는 일은 없다. 자만하는 사람은 자신의 참으로 위대한 업적도 다른 사람의 눈에 의심스럽고 사소하게 보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흙 묻은 발로 그것을 짓밟기도 한다. 자랑스러운 행동이라 할지라도 오해받지 ㅇ낳고 자만으로 보이지 않을 가장 확실한 곳에서만, 예를 들어 친구와 아내 앞에서만 허용될 것이다. 왜냐하면 살마들과의 관계에서 자만심이라는 평판을 초래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손히 거짓말하는 것을 배우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나쁘다.  314-315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ㅇ벗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고 ㄷ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인 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ㅇ벗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고 ㄷ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ㅇ낳앗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이 ㄴ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없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곧 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인 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자유정신과 결혼 - 자유정신이 여성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나는, 자유정신이 고대의 예언하는 새처럼, 현재의 진정으로 생각하는 자 그리고 진리를 말하는 자로 혼자 나는 것을 선호할 것임이 틀림없다고 믿는다.  342


두 화음의 부조화 - 여성들은 봉사하고 싶어하고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자유정신은 봉사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  345




제8장 국가에 대한 조망


문화와 사회계층 - 더 높은 문화는 사회의 서로 다른 두 계층, 노동하는 계층과 여가를 지닌 계층, 즉 참된 여가를 가질 자격을 지닌 계층이 있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또는 좀더 강하게 표현하면 강제노동 게급과 자유노동 계급이 있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있다. 좀더 높은 문화를 생산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경우에는 행복의 분배에 대한 관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도 여가를 가진 계층이 고통을 더 잘 견뎌낼 수 있는 계층이며 고통을 받는 계층이고 현존에 대한 그들의 즐거움은 더 적으며 그들의 과제는 훨씬 더 크다.  353


전복하려는 사람들 중에서 위험한 사람들 - 사회 전복에 대해 숙고하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과 손자를 위해서 그 무엇을 달성하려는 사람들로 나누어보면, 후자가 훨씬 더 위험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욕이 없다는 믿음과 거리낌없는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들은 적당히 물리칠 수가 있다. 지배적인 사회는 그렇게 하기에 아직 충분할 정도로 부유하고 영리하다. 목표들이 비개인적인 것일 때, 위험은 즉시 시작된다. 비개인적인 관심을 가진 혁명가들은, 현존하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모두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하며 따라서 그들보다 스스로가 우월하다고 느낄 수 있다.  363


대중의 위대한 사람 - 대중에게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리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게 주어져 있다. 모든 상황에서 대중에게 아주 즐거운 그 무엇을 마련해주거나 또는 먼저 머리 속에 이것저것이 아주 즐거울 것이라는 생각을 넣어주고 그 다음 그것을 제공하면 된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곧바로 제공해서는 안 되며 최대한의 노력으로 그것을 쟁취하거나 아니면 쟁취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좋다. 강력하고 게다가 정복하기 어려운 하나의 의지력이 거기에 있다는 인사을 대중이 받아야만 한다. 적어도 그러한 의지력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라도 해야 한다. ㄱ상한 의지에는 누구나 다 감탄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사람은 만약 자신이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과 자신의 이기주의에 더 이상 아무러 ㄴ한계가 없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강한 의지가 자신의 열망이 원하는 것에 귀 기울이는 대신 대중에게 아주 즐거운 그 무엇을 얻게 해준다는 것이 보이면, 사람들은 다시 한번 감탄하고 그들 자신의 행복을 원한다. 그 밖에도 그는 대중의 모든 특성을 가지고 잇다 .그래서 대중은 그의 앞에서 그만큼 수치심을 덜 느끼게 되고, 그는 그만큼 더 대중의 인기를 얻는다. 따라서 그는 난폭하고 질투하고 착취를 즐겨하며 음모를 좋아하고 아첨을 잘하고 비굴하고 교만하며 사정에 따라서는 이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다.  367-368


전복에 대한 이론에서의 망상 - 가장 자랑스럽고 훌륭한 인류의 신전이 저절로 드러나리라는 믿음 속에서 모든 질서의 전복을 열렬히 그리고 웅변적으로 촉구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공상가들이 있다. 이러한 위험한 꿈속에는 루소의 미신이 아직도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 미신은 기적적이고 근원적이지만 묻혀진 채 있는 인간 본성의 장점을 믿고, 그 묻혀진 채 있는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사회, 국가, 교육에 나타나는 문화의 여러 제도에 돌리낟.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그러한 모든 전복이 오래 전에 파묻혀버린 아득한 옛 시대의 처참함과 무절제 같은 가장 난폭한 에너지를 새로운 것으로 부활시킨다는 사실을 역사적 체험으로 잘 알고 있다. 즉 전복은 아마 지쳐버린 인류에게는 일종의 힘의 원천일 수는 있겠지만, 결코 인간 본성을 정리하는 자, 건축가, 예술가, 완성자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정리하고 정화하며 개조하는 경향이 있는 볼테르의 절도 있는 본서잉 아니라, 루소의 정열적인 어리석음과 반쯤의 거짓말들이 혁명의 낙관주의적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 정신에 대하여 "그 비열한 자를 굴복시켜라!"고 외친다. 그 정신 때문에 계몽 정신과 진보적 발전의 벙신은 오랫동안 축출되었다. 우리는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서 그 정신을 다시 불러오게 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주시하자!  368-369


학교 제도 - 큰 국가들의 학교제도는 항상 기껏해야 평범한 수준일 뿐이다. 그것은 큰 부엌에서 기껏해야 평범한 정도의 음식이 만들어지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이다.  370


행복의 시간들 - 행복한 시대가 전혀 불가능한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단순히 원하기만 할 뿐, 가지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개인은 그에게 조흔 날들이 찾아오면 틀림없이 불안과 비참함을 기원하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운명은 행복한 순간을 맏을 준비가 되어 있다. 모든 삶에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러나 행복한 시대를 맞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대는 '산의 저편'으로 그리고 조상들의 유산으로 인간의 상상속에 존속해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한 시대라는 개념은 아마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간이 사냥과 전쟁으로 심하게 긴장한 후, 휴식에 몸을 맡기고 팔다리를 뻗으며 잠의 날개가 자신의 주위에서 소리내는 것을 듣는 그런 상태에서 추측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 오랜 습관에 따라서 그가 이제 고통과 수고의 모든 시간 후에도 역시 거기에 상응하는 상승과 지속 속에서 그 행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추론이다.  371-372


종교와 정부 - 국가 또는 좀더 명백히 말해서 정부가 미성숙한 많은 사람들의 후견인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위해서 종교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폐지할 것인지를 숙고해보는 한, 정부는 항상 거의 확실히 종교를 유지하는 쪽으로 결정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상실, 결핍, 두려움, 불신의 시간들, 즉 정부가 개인의 마음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하여 직접적으로 그 무엇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바로 그곳에서 개별적인 심정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편적이고 피할 수 없으며 우선은 불가항력적인 재난(식량난, 금융위기, 전쟁들)에서까지도 종교는 진정시키고 기다리며 신뢰하는 태도를 대중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국가 정부의 필연적 또는 우연적 결함들이나 왕조의 관심사들이 낳은 위험한 결과들이 통찰력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서 그를 반항적으로 만드는 모든 곳에서, 통찰력이 없는 사람들은 신의 손가락을 보게 될 것으로 믿고 위의(이 개념에는 보통 신적 통치 양식과 인간적 통치 양식이 융합되어 있다) 지시들에 인내하면서 복종하게 될 것이다. .. 대체로 국가는 사제들을 끌어들이는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사제들을 끌어들이는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사제들의 가장 개인적이고 은밀한 영혼의 교육이 필요하고, 겉으로 보아 외면적으로는 전혀 다른 관심을 대표하고 있는 시종들을 존중하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국가가 종교에서 더 이상 아무 이익도 스스로 끌어내서는 안 될 경우나, 종교적 조치를 취하느 ㄴ데 정부에게 같은 종류의 통일적인 방법이 허용되어서는 안 될 정도로 국민이 종교적 사실들에 대하여 너무 다양하게 생각하고 있을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종교를 사적인 일로 취급하고 각 개인의 양심과 습관에 넘겨야 하는 타개책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제일 먼저 종교감각이 강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국가가 무심코 또는 고의적으로 생명의 공기를 기꺼이 허락하지 않았던 은폐되고 억압된 종교감정의 동요가 이제 터져나와 극단적으로까지 무절제해진다. 나중에는 종교가 종파들로 뒤덮이게 되고, 종교가 개인적인 문제가 된 그 순간에 용의 이빨이 뿌려졌다는 많은 사실이 입증된다. 싸움의 광경과 종교적 신조가 지닌 모든 약점에 대해 적개심에 차 폭로하는 것은 결국 더 뛰어난 자와 재능이 있는 자로 하여금 비종교성을 개인적인 무넺로 삼게 하는 타개책만을 허용할 뿐이다. 이러한 의향은 통치하는 사람들의 정신에서도 역시 만연하게 되고, 거의 자신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그들이 하는 조처들에 반종교적인 성격을 주게 된다. 이 현상이 나타나면 곧 과거에는 국가를 반쯤 또는 완전히 신성한 그 무엇을 우러러보았던, 여전히 종교적으로 감동되어 있던 사람들의 분위기는 결정적으로 반국가적인 분위기로 변한다. 그들은 정부의 조치에 대해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많이 방해하고 충돌하며 교란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반대파와 비종교적인 사람들을 그들의 항의의 열기를 통하여 국가에 대한 거의 광적인 감격으로 몰아넣는다. ...

모든 통치자들에 대한 불신, 단기간의 투쟁들이 보여주는 무익하고 소모적인 것에 대한 통찰은 사람들로 하여금 와전히 새로운 결심들, 즉 국가 개념의 폐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대립하는 것을 지양하도록 몰라갈 것이 분명하다. 사적인 단체들이 한 단계씩 국가의 업무들을 자신 속으로 끌어들인다. 결국 낡은 통치 활동에서 남아 있는 가장 끈질긴 잔여물(예를 들면 사적인 인간들이 사적인 인간들을 확실히 지켜야 하는 저 활동)까지도 언젠가는 사적인 기업가에 의해 처리될 것이다. 국각의 경시와 붕괴, 국가의 죽음 그리고 사적인 인간(모든 인간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합리성과 불합리성을 잉태하고 있는)를 달성하고 오래된 병이 재발하는 것을 모두 극복하고 나면 인류의 이야기책에는 새로운 한 장이 펼쳐지고 거기서 사람들은 온갖 종료의 기이한 역사들과 아마 몇 개의 좋은 이야기도 읽게 될 것이다.  372-376


수단의 관점에서 본 사회주의 - 사회주의는 거의 노쇠해버린 전제주의의 뒤를 이르려는 공상적인 동생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노력들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반동적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전제주의만이 가졌던 것과 같은 국가 권력의 충만함을 갈망하기 때문이며, 개인의 진정한 파멸을 추구함으로써 과거의 모든 것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사회주의에게는 자연의 부당한 사치로 나타나며 사회주의에 의해서 하나의 합목적적인 공동체의 기관으로 개조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유사성 때문에 사회주의는 항상 고대의 전형적인 사회주의자 플라톤이 시칠리아의 전제군주의 궁정에 나타났던 것처럼, 모든 권력 발전의 과도기적인 주변에서 나타난다. 사회주의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저넺주의의 후계자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 세기의 독재 권력국가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촉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유산조차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사회주의에는 아직 한 번도 그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가장 겸손한 복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국가에 대한 진부한 종교적 경건함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현존하는 국가들을 제거하는 데 힘써야 하므로 그러한 경건함을 제거하기 위하여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 때문에 사회주의는 단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극단적인 테러리즘을 통하여 여기저기에 한 번씩 존재하기를 희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은밀히 공포정치의 조짐을 보이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대중에게 머리에 못을 박듯이 '정의'라는 단어를 머리 속에 박아둔다. 그것은 그들의 오성을 오나전히 빼앗아버리고 (오성이 이미 이 얼치기 교양으로 인해 심하게 손상을 입은 뒤에), 그들이 해야 하느 ㄴ나쁜 장난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이다. 사회주의는 국가 권력의 모든 축적의 위험을 실로 난폭하고 적나라하게 가르치고, 그러한 한 국가 그 자체에 대한 불신삼을 품게 할 수가 있다. 만약 사회주의의 거친 목소리가 '가능한 한 많은 국가를' 이라는 함성으로 다가오면, 그 함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시끄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곧 그것과 반대되는 '가능한 한 적은 국가를' 이라는 함성이 더 큰 힘으로 터져나올 것이다.  378-379




제9장 혼자 있는 사람


진리의 적들 - 신념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391


너무 집착하지 않도록 - 어떤 일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그 일에 충실한 것은 드문 일이다. 그들은 단지 그 깊이를 밝혔을 뿐이다. 항상 그곳에는 매우 불쾌한 것이 보인다.  392


의도하지 않은 고결함 -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들에게 항상 베푸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고결한 행동을 하게 된다.  394


친구 - 동정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기쁨이 친구를 만든다.  395


가장 고귀한 위선자 -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고귀한 위선이다.  396


인간의 운명 -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위하고 판단하더라도, 좀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부당함을 알고 있다.  399


위대함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 어떤 강물도 자기 자신에 의해 크고 풍부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주 많은 지류들을 받아들이며 계속 흘러가는 것, 그것이 강물을 그렇게 만든느 것이다. 모든 정신의 위대함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그 많은 지류들이 뒤따라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다. 그가 처음부터 재능이 없는지 재능이 풍부한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400


너무 큰 목표들 - 공개적으로 큰 목표들을 세우고 그 후 비밀리에 자신은 그것을 하기에 너무나 약하다는 사실을 통찰하게 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그 목표들을 공개적으로 철회하기에 충분한 힘도 가지고 있지 않고 그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위선자가 되어버린다.  405


강물의 흐름 속에서 - 세차게 흐르는 물은 많은 암석과 관목숲을 휩쓸고 가며, 강한 정신은 수많으 ㄴ어리석은 사람들과 명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휩쓸고 간다.  405


정신의 육체화 - 한 사람이 많이 그리고 현명하게 사고하면 그의 얼굴뿐만 아니라 현명한 모습을 얻게 된다.  406


잘 보지 못하고 잘 듣지 못하는 것 -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은 점점 더 적게 보게 되고, 잘 듣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몇 가지를 더 듣게 된다.  406


허영심의 자기만족 - 허영심에 차 있는 사람은 탁월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탁월하다고 느끼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기만과 자기계략의 수단을 거부하지 못한다. 그에게 잊혀지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다.  406


예외적으로 허영심에 차 있는 - 보통 자기를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육체적으로 병에 걸리게 되면, 예외적으로 허영심에 차게 되며 평판과 칭찬에 대해 민감해진다. 그가 자신을 상실해가는 정도 만큼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 즉 외부에서 다시 자신을 되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406-407


유일한 인간의 권리 - 관습적인 것에서 벗어난 사람은 비범한 것에 바쳐진 제물이다. 관습적인 것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관습적인 것의 노예이다. 어떤 경우든 사람들은 파멸하게 되어 있다.  408


얼치기 지식 - 외국어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은 외국어를 훌륭하게 말하는 살마보다 외국어에 대해 더 큰 즐거움을 가지고 있다. 얼치기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만족이 있다.  408


의심을 품는 것 - 사람들은 좋아할 수 없는 인간들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으려고 한다.  409


친구가 없는 것 - 친구가 없는 것은 질투와 자만심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그가 질투할 아무런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다행스러운 상황 덕으로 친구를 가지고 있다.  410


참회 -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나면 그 죄를 잊어버린다. 그러나 대개 다른 사람은 그의 죄를 잊지 않는다.  412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 인간은 사랑하는 것과 호의를 베푸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젊어서부터 배워야 한다. 만약 교육과 우연이 우리에게 이런 감각을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을 때 우리의 영혼은 메마르고 친절한 사람들의 섬세한 감각을 이해하는 데도 적합하지 못하게 된다.  424


다른 사람과 세상에 대한 불만 - 우리가 원래는 자신에게 불만을 느끼고 있으면서, 흔히 그러듯이 다른 사람에게 불만을 터뜨린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판단들을 흐리게 만들고 기만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후에 다른 사람의 실수와 결점을 통해 이 불만에 동기를 부여하려 하고, 자기 자신을 보려 하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 가차없는 재판관이기도 한 종교적으로 엄격한 사람들은 동시에 인간성 일반에 대해 가장 많이 나쁜 욕을 해왔다. 자신에게는 죄를, 다른 사람에게는 덕을 남겨주는 성자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부처의 법도에 따라 자신의 선을 사람들 앞에서 숨기고, 자신의 악만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사람도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426


고독한 사람들 -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함께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져서 자신을 다른 사람과 전혀 비교하지 않고 조용하고 즐거운 기분으로 자기 자신과 좋은 대화를 나누며, 게다가 웃음을 지으며 독자적인 삶을 엮어 나간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하면 자기 자신을 구차하게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 관한 유익하고 정당한 의견을 남에게서 비로소 다시 배우도록 강요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배워 익힌 이 의견에서도 되풀이해서 조금 빼거나 값을 깎으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혼자 있음을 기꺼이 허락해야만 하지만 흔히 일어나는 일처럼 그 때문에 불쌍히 여기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아야만 한다.  436


방랑자 - 어느 정도 이성의 자유에 이른 사람은 지상에서는 스스로를 방랑자로 느낄 수밖에 없다. 비록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하여 여행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왜냐하면 이와 같은 목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세상에서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주시하고 그것에 대하여 눈을 크게 뜨고 보려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개별적인 것에 너무 강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 변화와 무상함에 대한 기쁨을 가진 방랑하는 그 무엇이 그 자신 속에 존재함이 틀림없다.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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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담집은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대담(20150810,902, 0918, 1002)을 엮었습니다.



대담을 시작하며

강의실에 들어서면 나는 한 마리의 ‘똑똑한 원숭이’가 된 느낌이다. 내가 펼치는 ‘화려한 언변’과 ‘풍부한 사례’에 학생들이 감탄한다. 그런데 그 감탄하는 눈동자들 속에서 배움과 성장을 찾기가 힘들다.


똑똑하되 멍청하며, 언변은 좋되 무능하다. 시험 문제는 잘 풀되 삶의 문제를 대하는 능력은 형편없으며, 남을 품평하는 데는 날카로운 날을 세우되 자신을 성찰하는 데는 무디기 짝이 없다.


우리는 배울수록 무능력해지고, 배울수록 화만 내는 처지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공부가 삶의 문제를 푸는 도구가 아니라 삶을 식민화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부는 사실 세상을 읽고 삶을 해석하는 언어라는 좋은 도구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내가 아는 공부는.. 어떤 지식 권력의 정당성과 주도권을 확인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도전하는 것이 공부였다. 삶은 언제나 지식보다 풍부한 것이고, 언어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미 권력화한 지식에 포획되지 않은 ‘삶’을 포착하려는 것이었고 그 삶이 지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공부였다. 그랬기에 공부는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었다. 삶이 공부의 식민지가 아니라 공부가 삶의 도구였다.


공부의 기쁨은 보편성의 발견이다.


시대의 암흑이라는 동시대성을 발견하고 그 문제를 공동의 노력으로 해결해가려고 하는 과정에서 동시대인이 형성된다. 이 동시대인을 형성해가는 것, 그것이 공부가 무능력한 개체들이 아니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를 형성해가는 과정이며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엄기호)




1부 - 공부에 중독된 아이들


하지현 : 미국식 표현으로 ‘잔디깍기 맘’이라는 말이 있어요. 부모가 먼저 잔디깍기 기계로 풀을 깎아줘서 아이가 갈 길을 먼저 열어준다는 뜻이에요.

지금의 486 부모들은 공부를 잘하면 잘살 수 있다는 생각이 자기 몸으로 체득된 세대예요. 그러니까 부모들이 자신이 성공했던 방법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거죠. 그런데 사실 거시적으로 보면 운이 좋은 세대였던 겁니다. 80년대 초반엔 졸업정원제가 있어서 그전에 비해 어렵지 않게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었어요. 그리고 이들이 취업할 무렵인 87, 88년도는 우리나라가 한창 경기가 좋을 때라 대기업 취업이 상대적으로 쉬웠습니다. 좋은 일자리 수에 비해 대졸자가 모자랄 정도였죠. 주거도 마찬가지입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신도시가 만들어질 때 손쉽게 집을 살 수 있었어요. 우리 사회가 해방 이후 양적, 질적으로 엄청난 팽창과 발전을 하던 거시적 흐름에 이 세대는 올라탄 거예요. 일종의 ‘프리라이딩(free-riding)’ 운이 좋은 세대죠.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건 아직 시험을 안 친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시험을 친다는 건 내가 어느 정도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 친구들은 시험은 안 봐요.

시험을 안 보면 좋은 게 실제 내 능력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에요... 그것을 통해서 나는 여전히 가능성 있고 굉장히 잘해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거예요.


엄기호 : 사회적 관점, 즉 통치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니까 너는 아직 준비가 안됐다’라는 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 좋은 이유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시민들에게 자리를 배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모두에게 자리를 배분하면 사회가 안정되죠.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국가의 중요한 역할이란 게 자리를 배분하는 게 아니라 자리를 배분받지 못한 이들에게 네가 왜 자리를 배정받지 못해슨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설명이 ‘네가 준비가 덜됐다’인 거죠.

두려움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주체와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줘야 하는데 그런 정도의 자리를 만들어낼 능력도 의사도 없는 사회 시스템이 절묘하게 만나서 기가막히게 합의를 볼 수 있는 지점인 거죠.

이런 상태가 되면 불만이 밖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 향하게 됩니다. 자리를 만들어주지 못하는 사회가 아니라 준비가 안 된 자기를 탓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반란은 일어나지 않아요.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거야말로 손 안대고 코 푸는 격입니다. 불만을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수월한 방법이죠.


하 : 원초적 경험이 굉장히 중요한데, 지금 아이들은 항상 ‘공부 중’에 있어요.


엄 : 졸업한 상태에서 그렇게 1년이 넘은 뒤에 원서를 내면 회사에서 문제가 있다고 취급해요. 그런데 졸업을 하지 않고 1년을 휴학한 뒤 지원을 하면 문제 삼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학생은 공부 중이었으니까.

이런 직접적인 이유 외에도 졸업을 유예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는 소속감이 없어진다는 불안이에요. 태어나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소속이 안 되어본 적이 없거든요. .. 제도적으로 무중력 상태가 되는 거예요. 리고 제도에 속하지 않으니 작가 뭘 하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제도 안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안 해도 뭔가를 하는 것 같거든요.


엄 :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나한테 바로 배우면 배운 것 같지? 한 달이면 다 까먹는다. 네 것이 안 된다. 어떻게든 네가 찾을 때 그때 비로소 네 언어가 된다”라고 말하곤 해요... 요약정리 쫙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찾고 토론하고 이런 걸 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견디는 과정을 너무 못 참아요.


엄 : 저는 학생들이 이런 만능감을 갖게 된 또 다른 원인 중의 하나가 레퍼런스 그룹의 부재인 것 같아요. 사람이 실수도 하고 틀리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항상 옳을 수는 없는 거니까. 그랬을 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내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를 가리는 것보다 내 주변의 레퍼런스 그룹이 나를 톡톡 쳐주는 것. “야, 지금 너 오버하고 있어, 워워” 이런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 학생들에게는 레퍼런스 그룹이 없어요. 정말 너무 없어요. 친구가 이상한 짓을 하면 “정신차려” 이런 얘기를 해줘야 하는데 안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혼자 앉아서 자기 혼자 고민하고, 자기 혼자 인터넷 뒤지고, 그러다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거예요. 놀랄 정도로 친구가 없고, 친구랑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도 몰라요. 물론 이건 청소년이나 청년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사는 거의 대다수 사람들의 문제이지만요.


하: <아프지 않다는 거짓말>이란 책을 쓴 가이 윈치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관계의 근육’이 쇠퇴한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어요. 인간관계의 기술은 사교, 의사소통, 입장 바꿔 생각하기, 공감 능력 같은 것인데 사회에서 연결 고리가 줄어들어 그 기술을 쓸 필요가 줄어들면 마치 근육을 안 쓰면 약해지듯이 그 능력도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고독의 문제를 깨닫고 사람을 만나서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근력이 약해서 벗어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빠진다는 건데, 저는 참 많은 공감이 되더라고요.


하: 하스퍼거라고 고기능 자폐가 있어요. 이 친구들을 위한 사회 적응 훈련법이 있는데, 가령, 이런 거예요. 전화를 하면 “안녕하세요. 저는 누구입니다. 누구랑 통화할 수 있을까요?” 이런 걸 얘기해야, 누구를 사귀고 싶으면 밥을 먹으로 가자고 하기 전에 차를 먼저 마시자고 해라, 상대가 두 번 거절하면 한 번을 더 물어봐라, 두번째 까지는 정말 시간이 안 될 수도 있는 거다. 네가 싫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런 얘기들이 씌어 있어요. ‘뭐 이런 걸 다르쳐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세하게 가르쳐줘요. 픽업아티스트들이 가르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하 : 사회성을 익힐 겨를이 없는 거죠. 사회성을 익히려면 물리적으로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해요.


엄 : 교육에서 얘기할 때 사람의 성장은 낯선 것, 타자와의 부딪힘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많이 말하거든요.


하 : 학습과 경험이 다른 것이듯, 면역력은 경험을 통해서 아파봐야 생기지 학습한다고 생기지는 않거든요. 물론 학습을 하면 덜 아플 수는 있겠죠.


엄 : 삶은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할 때 배울 수 있습니다. 존 듀이가 말한 대로 하면 불에 손을 집어 넣어서 손을 데는 과정이 있어야 불에 손을 넣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런 일체의 과정을 다 위험한 것이라고 불온시해요. 배우긴 배워야 하는데 위험하지 않게 배워야 하는 것이죠. ... 겪는 것이 없이 그저 배우는 것이죠. 그런데 기스 하나 없이 말끔하게 배우는 게 가능할까요?

저는 사는 건 감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느 정도까지는 겪으면서 감당하는 거고, 감다할 수 없을 때 문제 제기가 되어야 하는데, 감당해나가는 과정이 삭제되어 있다고 해야 할까요?


엄 : 근대라는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은 자기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 항상 두 가지 태도를 요구받습니다. 미래는 기획하고 과거는 성찰하는 태도입니다. 만사가 생각한대로 진행되지는 않기 때문이죠. 생각한 대로 진행되지 않은 과거에 대해서는 성찰하며 교훈을 얻고 그 교훈에 입각해서 다시 미래를 기획합니다. 이중에서 하나만 빠져도 문제가 돼요.


엄 : 자아 중심성이 굉장히 강하니까 자의식은 무척높은데, 자기 의견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없고, 그러다 보니까 한편으로는 굉장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서 어떤 결정을 할 때는 남 얘기에 쉽게 넘어가는 거죠. 자기 의견이 없게 돼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성장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자기 말고 타인이 있다는걸 인지해가는 것이라면, 다른 한편으로는 의견이 생겨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하 :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보는데, 하나는 나를 구겨 넣는 방법, 맞추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환경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방법이에요. 이 두 개를 적절히 조화롭게 사용하면서 우리는 적응을 해나가는 거겠죠. 그런데 이루부 친구들의 자아 중심성의 세계에서는 나를 구겨 넣을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환경을 바꾸고 싶지도 않아요. 환경이 알아서 바뀌어줬으면 좋겠는 거죠.


엄 : 공부를 ‘하는(doing)’게 아니라 ‘구경’하는 거예요. .. 존 듀이가 말한대로라면 ‘언더고잉(undergoing)’ 즉 겪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게 사라져버리는 거죠. 공부 ‘중독’이라고 하는데 중독될 ‘실재’는 없어요.


엄 : 굉장히 매끈하게 요약정리해서 정답을 향해 어떤 주저함도 없이 돌진하는 형태가 모든 공부의 전형이 되어 있고, 그런 식으로 공부해야지만 안심을 하고 시간 낭비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죠. 이렇게 되다 보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의견이라는 것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내 의견과 다른 의견들 속에 섞이지 못해 너무나 괴로워하는 거예요.


엄 : ‘최적화(optimizing)’의 논리인 거죠. 삶을 최적화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 최고의 기쁨이 되고 있어요. .. 시간도 공간도 계속 최적화해서 사는 것을 추구하고 거기에서만 기쁨을 얻다 보니 최적화되지 않은 것을 견디지 못해요. 최적화하려고 하면 할수록 의외성, 낯섦,타자는 사라져버려요.


하 : 이제 부모들도 서서히 그런 악순환의 한계를 깨닫고 있고, 판에서 나가거나 아니면 공감대가 일어나 판이 깨지는 시기가 와야 한다는 것을 감으로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미쳤어 미쳤어” 하면서도 나만 판에서 빠질 수는 없는 거예요. 이 라운드에서는 내가 이기고 나가고 새 라운드가 시작될 때 판이 깨지기를 바라죠. 그러니까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와 내 아이는 이 판만 하면 끝나는 거거든요. 우리 모두 다 같이 하지 맙시다, 그러면 되는데, 내 애라는 관점에서 움직일 때는 난 몇 년 하고 퉁치고 나가면 되는 거예요. 굉장히 이기적이 되는 거죠. 이 판이 곧 깨지더라도 내가 생각한 전략대로 이기고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




2부 누가 공부에 욕심을 내는가


엄 :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즉 능력주의.

어떤 것은 능력이고 이떤 것은 능력이 아닌가? 능력이라는 것이 권력에 의해서 굉장히 이계화, 제도화되어 있잖아요. 공부하라고 할 때 이미 암묵적으로 떤 것을 공부하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것은 공부고 다른 어떤 것은 공부가 아니죠. 왜 공부가 아니냐하면 그건 아무리 키워 봤자 능력으로 쳐주지 않으니까요.


하 : 얼만 전에 <미움받을 용기>의 기시미 이치로 선ㅅㅇ과 좌담을 하면서 “한국의 젊은이들과 일본의 젊은이들의 차이는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분이 얘기한 첫 번째가 한국 젊은이들은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눈치를 너무 많이 보는 것 같다는 거였어요... ‘이래야 된다’라는 표준화된 라이프스타일에서 벗어나며 ㄴ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몇 살이 되면 어디에 다녀야 하고, 뭘 해야 하고, 어디에 가야만 하고.


엄 : 이반 일리치의 개념을 가져와서 쓰면 한국 사회가 ‘스쿨링화된 사회(schooling society)’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회 전체가 학교가 되었다는 거죠. .. 한국 사회는 스쿨 자체가 굉장히 위계회된 학벌사회라서, 어디를 나왔는지가 그 사람의 능력과 그 밖의 모든 것을 검증해주고 보여준다고 보는 사회죠. 그래서 좁은 의미의 공부에 대한 집착 같은 게 생겼죠. 그런데 이게 사회적으로 보면 정말 비극이거든요.


하 : 학교의 가치, 역할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져보고 싶어요. 학교라는 게 근대 교육, 즉 프러시아부터 시작된 2백 년쯤 된 교육이잖아요? 말 잘 듣는 훌륭한 신민을 만들기 위해서 시작된 균질화된 교유그 그전까지는 마이스터에 의한 1 대 1 교유그 도제 교육만 있었는데 산업혁명 이후에 글도 좀 깨우치고, 셈도 좀 가르치고, 남들 때리면 안 되는 거 가르쳐서 내보내니까 말 잘 듣는 신민이 되더라, 라는 사고 하에 만들어진 프러시아의 근대 교육 시스템이 지금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학교 교육의 기본이죠.


엄 : 원래 근대 교육의 목적은 탁월한 살맘을 만드는게 아니라 평균을 높이는 것에 목적이 있었잖아요? 계속해서 평균적인 살맘을 만들고 그 평균을 조금씩 높이는 것이 목적인, 그런 점에서 보면 굉장히 효율성을 강조하는 시스템이죠.


엄 : 한윤형씨가 썼던 표현ㄷ로 하면 ‘평균압’입니다. 평균에 대한 압력이죠. 한국은 적어도 평균이 되어야 한다는 압력이 매우 높은 사회라는 뜻입니다. 평균이 되지 못하면 탈락이고 낙오이며 패배한 인생이라는 말이 돼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균이라는 건 절대 평균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무 높다는 거죠.


엄 : 이전에는 공부가 생애사적 기획을 하는 데 가장 강력한 무기였죠. 그룬데 그게 잘 안 되는 상황이 되고 있단 말이죠. 그렇다면 이제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나와야 하는데,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출현해야 할 그 시점에 다양한 교육이 출현해버린 거죠. 그런데 다양한 교육이란 게 말 그대로 다양한 교육이 아니라 교육이 다양한 영역을 식민화해버린 형태예요. ..

교육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가르칠 수 없고 배워야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르쳐야지만 배울 수 있는 것이죠. 미분과 적분은 가르치지 않으면 배울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학교가 필요한 것이고 교과과정이 필요하죠. 반면 인성은 가르칠 수는 없고 살의 과정에서 배워야만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걸 지금 가르치겠다고 나서는 것이죠. 가르칠 수 없는 걸 가르치겠다고 하는 것, 저는 이게 가장 정확하게 삶을 식민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엄 : 공부라는 것이 삶에 통홥되어 있어야 하잔하요? 그런데 근대 학교가 공부와 삶을 단계론적으로 분리시켜버렸어요. ‘공부를 하고 난 뒤에야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까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사는 것이 아닌 게 된 거죠. 삶이 유예되는 거예요. 지금 학교가 딱 그런 공간이잖아요?

학교에서 우리는 친구랑 만나서 싸우기도 하고, 정치도 하고, 비열한 짓도 하고 그러면서 ‘아, 이러면 안 되겠구나’ 깨닫기도 하고 그래야 해요. 학교가 총ㅊㅈㄱ인 삶의 공간이 되어야 하죠. 그런데 학교를 삶의 공간으로 인지하지 않고, ‘학교는 공부를 하는 곳이다’라고 생각해왔어요...

공부를 한다고 해서 삶이 주어지는가? 지금은 그렇지 않거든요. 그렇다면 학교를 다르게 인지해야 하잖아요? 삶과 공부를 단계론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 그러니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자 그래야 하는데 그 방법을 못 찾다 보니까 오히려 그렇다면 ‘모든 것을 공부하자’ 이런 형태로 나아가버리는 거죠.


엄 : 재미있는 현상이 있어요. 틀 밖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성공을 하고 나면 그것으로 죽 살아가면 되잖아요? 그것이 다른 사람들한테 훨씬 더 영감을 주거든요, 그런데 꼭 책을 씁니다. 학원을 해요. 결국 자신의 성공 방식을 매뉴얼화하는 거예요. 본인이 그러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또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죠. 결국 한국에서 블루오션은 공부밖에 없어요. 출판계도 레드오션이잖아요. 그런데 출판학교는 잘되고 있어요. 출판계는 망해가고 있는데 말예요. 이런 식으로 지금 공부 산업만 블루오션이 된 거죠.


엄 :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출현하려면 하나가 없어져야 해요. 바로 사회적 압력이죠. 표준화된 삶의 시나리오에 대한 압력이 사라져야 해요.


하 : 우리는 일반적으로 행선지가 정해져 있기를 바라죠. 정해져 있지 않으며 안 하고 싶어 해요. 사실 이제는 정해져 있는 건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데 말이죠.


엄 : 넓게 보면 삶은 그 자체가 공부의 과정, 배움의 과정이잖아요? 인간은 살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늘 배울 수밖에 없죠. 그걸 우리가 공부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반면 교육은 그것을 단계론적으로 구분하여 제도화한 것이고 할 수 있어요.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죠. 가르치지 않으면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공부 전체가 교육이 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다르칠 수 없는 것도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만들어버리거든요.

이런 점에서 우리가 이 책에서 말하는 공부 중독이란 사실은 교육 중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3부 중독에서 해독으로


하 : 중도겡 빠져 있으니까 벗어나야 하잔하요. 지금은 공부를 공부로 이기려고 하는데, 공부디톡스를 하려면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하거든요. 프레임 자체에 대한 변화를 주는게 필요해요.


엄 : 대학 진학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어요. 그 필요성에 대해서 말이죠. 그런 변화가 실제로 감지되고 있고요. 대기업의 생산직 노동자,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은 잊 대학 진학에 대해 회의적이에요.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이 돈을 꽤 많이 벌거든요. 노동 계급의 대표는 아니고 중산층화된 노동 계급이죠. 이 사람들은 이제 대학 가 봤자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정도며 ㄴ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중산층의 신분은 유지하되 생산직에서 사무직으로 바꿀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방사립대를 갈 정도다 그러면 아예 전문대를 가라고 합니다. 지방국립대는 좀 헷갈려 하는데, 이렇게 보냈다가 중퇴시켜요. 4년제를 나오면 생산직에 못 들어가거든요. 생산직 보호조치 때문에 그래요. 아쪽에서는 대학을 보내도 소용없다는 걸 일치깜치 깨닫고 초등학교 고학녀에서 중학생이 되면 판가름을 해서 투자를 하지 말지 결정을 해요.

이들보다 조금 더 경제력이 낮은 생산직 노동자들, 자영업자들은 대학 보내려고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요. 이런 살맘들은 교육에 정말 관심이 없어요. 지방ㅇ서 교사들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교사들이 부모들을 만나고 싶어 해요. 학생을 공부를 시키고 싶으니까요. 그런데 이 부모들은 "우린 모르겠어요.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세요"하고 만다는 거예요.

사실 지금 대학을 보내려고 모든 걸 쏟아붓고, 대학에 엄청난 텐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전문직 대기업 사무직, 조금 큰 규모의 자영업을 하고 있는 중산층이에요. 대학 진학은 한국의 중산층 게임이에요. 이 사람들이 대학을 어떻게든 보내려고 하는 거죠. 이 사람들 만나서 얘기해보면 이들한테는 공포가 있어요. 자기 자식대에서 계급이 재생산되지 않을 것 같은 공포가 있는 거죠.

중산층이 이렇게 대학에 목을 매는 건 자기 계급을 재생산해야 하는데 중산층의 부라는 것이 그것만 물려줘서는 재생산이 안 되고, 여기세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하잔항요. 그게 바로 전문직이거든요. 아파트는 물려줄 수 있어요. ㅡ그런데 그것만 갖고는 안 되잖아요? 지속적으로 부를 창출할 전문적 기술이 필요한 거죠. 그래서 이들이 대학에 대해 갖고 있는 텐션이 엄청나게 크고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거죠.

이들이 그동안 별수를 다 써본 거죠. 유학도 보내 봤다가, 사교육도 엄청나게 해봤다가, 요새는 명상도 시킨다고 하더군요. 마인드 컨트롤해야 한다고. 비용이 점점 증가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감당이 안 되는 밑에서부터 떨어져나가는 거죠. 대학 진학에 대한 텐션은 중산층이 아닌 다른 계층에서는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계산이 너무 빤하니까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중산층의 코어에서는 텐션이 점점 더 강해지죠. 거시적인 구조로 보면 그런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요.


엄 : 가장 합리적 선택이란 이기적 선택인데 그 선택이 이타적이기까지 하다면 좋고, 아니면 조금 섭섭한 거고, 하지만 어쨌든 최소한 그 이기적 선택이 남한테 피해는 끼치면 안 된다, 이 정도 선에서 선택 기준을 생각해본다면, 자녀 교육과 관련해서 제가 볼 때 한국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있는 계층은 대기업 생산직이에요.


하 : 그렇네요. 딱 그렇게 하고 있네요. 몸으로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선택이 가능한 거겠죠. 그런데 그 선택은 중산층 지식인들에게는 자기가 안 가본 세계, 모르는 세계인 거예요. 그렇게 봤을 때 중산층 지식인들이 교육에 목을 매는 건 자기가 제일 잘했던 것이기 때문이죠. 그만큼의 과실을 얻었기 때문에 상층부에서 그 신화를 퍼뜨린 거예요. 공부를 잘해서 성공한 이들이 상층부를 차지해서 과실을 더 가져가는 것에 대해서 뭐랄고 하지 마라, 즉 교육 시스템 안에서 자신들의 독과점을 합리화한 거죠. 그들은 그런 시스템에서 잘 해나갈 수 있는 능력치를 갖고 태어났어요. 그래서 그런 시스템을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과 자영업자들까지 '오 그래야 되는구나'라고 믿게 만든 거죠. 이게 몸으로 잃는 것보다 훨씬 오래 가고 괜찮을 것 같다, 존경까지 받고. 그래서 모두 이 게임에 들어오게 되죠. 그런데 생각보다 판이 작아지면서 내 자식들한테 돌아가는 몫이 없고.

선생님 말씀대로 대기업 생산직들이 딱 보니까 아닌 거죠. 그래서 잽싸게 판을 깬 거예요. 이 살맘들은 이것 말고도 먹고살 길이 있거든요. 더구나 이 방법론이 원래 그들에게는 그다지 와 닿지 않는 방법론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무직 근로자와 전문직인 세칭 중산층은 아는 도둑질이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 판타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마ㅣ 모태 신앙과도 같은 거죠. 아무리 기독교에 진력이 나도 '그래도 나는 신앙인으로서 살아갈 거야' 같은. 그런데 우리 집은 종교가 없었는데 친구 따라 교회 갔다가 10년 다녀보니 교회에 신물이 나요. 그러면 금방 빠져나올 수 있거든요.


하 : 자식의 20년 후를 바라보는 그림을 바꿔야 해요. 자기를 중심으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먼저 자신의 삶의 안전판을 만들어야 해요. 은퇴 후 연금, 건강을 위한 대비 혹은 주거 생활의 안정과 같은 안전판을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하고, 거기에 대해서는 자식 때문에 포기하거나 그 안전판을 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게 삶의 우선순위에 올라야 합니다. ....

가소 싶은 게 없으면 "그냥 좀 있어 봐, 그 대신 이리저리 쑤시고 다녀봐"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해요. 쑤시고 다닌다는 게 곧 디투어링이죠. 그게 인생의 낭비는 아니다. 도리어 지금은 그게 필요하다, 그게 공부다, 라는 생각을 가져야 해요.


엄 : 이제는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드는 게 중요한데,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자기 부모처럼 살지 않는 것이거든요.


하 : 신용불량자가 되거나 범죄의 세꺠에 들어서지만 않게끔 하는 최소한의 케어. 정말 간절하게 아이가 원하는 게 있을때 한 번 정도 밀어주는 것. 그게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정도죠. 자기가 원하는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여섯 살 때부터 차곡차곡 줄을 좍 그어놓고 그 길대로 가게 하도록 투자하는 것은 미친 짓이에요. 그러지 말자는 거죠.


하 : 제가 이런 얘기를 강연에서 하면 나오는 특징적인 피드백이 있습니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회 시스템이 변하지 않는 한 결국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은 나 개인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 말은 맞으면서도 현실에 맞지 않는 허황된 얘기로 들린다"라는 것입니다. 사교육 안 시키고 그래서 좋은 대학 못 가고 그래서 취업이 안 되면 사회에서 '듣보잡' 취급받으면서 살 텐데 어떡하느냐는 거죠. 저는 그래서 더욱더 이 부분에 대한 새로운 공감대와 행동을 해낼 개인이 늘어나야 한다고 보는 거예요.

공부에 중독된 사람들이 많은 상태에는 그 어떤 시스템적 변화를 주더라도 결국 또 그 안에서 공부를 중심으로 줄세우기가 만들어질 겁니다. 서울대를 없애고 전국의 국립대학교를 모두 서울대로 바꿔야 한다는 교육 전문가드르의 대책도 저는 조금 당황스럽고, 무엇보다 또다른 판타지 같았어요. 그러면 분명히 그 안에서 다시 줄세우기와 편가르기가 만들어질 겁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대로 공부를 중심으로 한 암묵자가 그대로 작동하고 있는 동안은 백약이 소용이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한 명씩 한 명씩이라도 개인의 선택의 변화가 이어지고, 그 수가 어느 순간 무시할 수 없는 수가 된 다음에는 결국 상식의 전환이라는 거대한 위상 전위를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엄 : 그렇다면 중산층 밑의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면 좋겠어요. 이 학생들도 중독의 폐해를 고스란히 입고 있거든요. 이중 삼중의 고통을 받고 있죠. ...

공부에 목적이 없어요. 정확히 말하면 학생들한테 무슨 공부가 필요한가를 보고 공부를 시키는 게 아니라 이 학생들에게 뭔가를 해야 하는데 해줄 수 있는 게 공부 가르치는 것밖에 없는 거예요.


하 : 완전히 새로운 영역의 공부가 필요해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가 아니라 '뭔가를 알고 싶다'라는 욕구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공부.


엄 : 학교에서 상위 5~10%, 많이 봐야 20%를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은 공부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 좌절이에요. 이 좌절을 통해서 뭘 잃어비리느냐면, 앎에 대한 호기심을 잃어버려요. '아는게 참 재미있는 것이다'라는 걸 잃어버리죠.

앎의 핵심은 모르는 것을 만났을 때 호기심이 발동해야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모르는 것을 만나면 두렵기만 하고 짜증이 나는 거예요. ...

대안학교가 그래서 만들어졌어요. 대안학교가 학생들을 자유럽게 뛰놀게 하자는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앎에 대한 호기심을 회복하자는 것이거든요. 시험 문제를 틀렸다면, 나는 틀린 존재가 아니라 모르는 게 있는 존재인거고, 모르는 것을 발견하면 알고 싶은 욕망이 발동하게끔 해줘야 하는 건데, 그것을 못했던 거죠.


하 : 공부라는 것, 알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 데에는 동기가 필요하거든요. 동기는 크게 세 가지라고 생각해요. 하나는 절박감이에요. '이거 모르면 나 죽어', '어떻게든 알아내야해' 이런 것이죠. 두 번째는 경쟁심이에요. '쟤보다는 나았으면 좋겠어' 하는 욕구. 세 번째는 '그냥 하고 싶어', '알고 싶어' 이런 이상적인 목표가 있는 거예요.


하 : ‘솔부를 잘한다는 것은 뭘가’에 대해서 생각해봤어요. 첫 번째는 핵심, 맥락을 잘 잡아내는 거죠. 둘째는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많은 정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셋째가 진자 공부를 잘하는 것일 텐데, 이치를 깨닫는 것이죠. 큰 흐름 안에서 이게 뭘 의미하고 있고,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 나아가서는 나하고 어떤 관계가 았는가까지 생각하 ㄹ 수 있는 것이게쬬.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공부는 둘째가 90%예요. 성적이 아주 잘 나오는 아이는 첫째 덕목인 맥락을 잘 잡아내서 요령이 좋죠. 정작 중요한 것은 셌째인데 거기에까지 마음이 미칠 여유가 없어요. .. 저는 순서로 볼 때 셋째를 목표로 하면서 첫째를 중심으로 흐름을 잡고, 그리고 둘째는 필요에 의해서 노력하면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야 진짜 공부가 되고 쓸데없는, 독이 되는 공부를 줄일 수 있어요....

저능의 영역이란 낯선 상황에 잘 적응하기 위해 지그 ㅁ이곳이 굴러가는 보이지 않는 이치를 깨달아가는 과정이거든요. 그 이치를 잘 깨달아서 나를 변화시키거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쌓는 것이 핵심이죠. ..

공부 과정의 끝은 사실 지혜를 얻는 거라고 생각해요. ..지혜라는 것을 찾아낼 겨를도 없이 질려버리게 만드는 것이 지금까지의 공부였어요.


하 : 발달이란 기본적으로 ‘나도 저러 ㄴ사람이 되고 싶다’는 동일시의 욕구로부터 시작하거든요. 어찌 보면 그것이 공부의 원형이죠. 따라 하기. 그런 부분에서 짚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공부에 대해 착각하시는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문화센터나 시민 학교에서 엮는 강좌에 중독되어 있어요. 저는 그게 공부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엄 : 그렇죠. 그건 구경이죠.


하 : 사실은, 혼자서 괜찮은 책 찾아보고 나름대로 궁브를 하다가 진짜 궁금한 게 있으면 그 분야의 고수를 찾아가서 물어보고 그러는 과정이 진짜 공부인데.


엄 :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 걸가요? 공부는 성장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능력이 신장되는 것이건, 인격이 성숙하는 것이건 또는 시민으로서 성장하는 것이건 공부는 성장을 하기 위해 하는 것이죠.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의 공부는 성장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고 있어요. 성장과 아무 상관이 없는 공부를 공부라고 하고 있고 그걸 청소년들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학생들이 “이걸 공부한다고 제가 뭔가가 될 수 있나요?”라고 하는 말을 단지 실용적인 질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 말을 직업을 구하고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데 혹은 살아가는 데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지를 묻는 것을 훨신 넘어서는 적극적인 질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이걸 공부하는것이 자신을 무엇으로 어떻게 성장시키는가’에 대한 질문이죠.

이 문제에 답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가 사람의 성장에 대해 ‘성공’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답도 줄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공부를 통해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 수긍을 하지 못하는 것이죠. 이들을 붙들어놓고 지금 ‘공부’를 시키는 것은 정말 무의미한데도 그저 맹목적으로 공부를 시키고만 있어요. 공부를 하는 자가 아니라 공부를 시키는 자가 공부 말고는 시킬 수 있는게 없다 보니 그저 공부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시키는 자의 ‘공부 중독’이에요.

삶이 성장의 과정이라면 공부는 성장하는 삶을 위한 도구여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공부는 삶을 식민화하는 도구일 뿐이에요. 이런 공부를 그만두자는 것입니다. 대신 공부의 자리를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해요. 당대의 문제를 파악하고 헤쳐나가는 삶의 지혜. 기술을 익히는 과정으로서의 공부 말이에요.청소년들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어른들도 잘 모르고 있어요. 무능력하기는 어른들도 매한가지입니다. 공부라는 맥락에서 보면 어른과 청소년 모두가 처한 ‘동시대성’이겠죠.




대담을 마치며

공부라는 블랙홀에서 탈주하기 위하여 - 하지현

아무리 혁명적이고 과격한 처방이 나온다고 해도 그 안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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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반성문> - 여행은 참교육

지봉환 정한책방 2018  03370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 알랭 보통(Aiain de Botton)


교사 : 아이에게 여행을 장려해야 합니다. 여행은 만남입니다.  여행에서는 자신을 만납니다.세상에 홀려 소홀했던 자신에게 눈길을 돌립니다. 자신에게 귀를 기울입니다. 자신을 보고 자신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타인을 만납니다. 타인에게 눈을 돌리고 귀를 엽니다. 다양한 감정 관념들과 만납니다. 다양한 가치와 삶을 만납니다. 다양한 웃음과 눈물을 만납니다. 

만남은 성장입니다. 보고 들음은 성장 에너지가 됩니다. 삶을 다듬기도 합니다. 생활 속에서 쌓인 갈등, 불안, 분노, 질투, 시기, 욕심 부정적인 감정을 깎고 닦고 바르게 합니다. 긍정정인 에너지를 찾는 일입니다. 만남은 성장을 위한 에너지이고 동시에 삶에 놓인 장애요인을 찾는 일이기도 합니다. 자연 또한 중요한 여행의 동반자입니다. 자연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고 답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기쁨을 주고 슬픔을 다독입니다. 울분을 삭혀주고 눈물을 닦아줍니다. 여행은 삶의 영역을 넓혀줍니다. 아집의 껍질을 깨고 타인을 듣도록 합니다. 이기(利己) 버리고 타인을 보도록 합니다. ‘ 있음을 일러줍니다. 


학생 : 여행과 교육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요?


교사 : 여행이 만남과 성장을 위한 행보라면 교육은 만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만남이 교육의 출발점입니다. 만남 없는 교육은 죽은 교육이에요. 생명력이 없는 교육이지요. 만남으로부터 변화는 시작됩니다. 


학생 : 여행이 좋은 학습법이라는 말씀이군요.


교사 : 그렇습니다. 여행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니까요. 많은 것을 만나고 보고 듣고 깨닫고 느낄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인 몽테뉴는 여행과 같은 움직임을 통해서만 개인은 실천적 지혜를 습득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실제가 아닌 문자화된 세계만을 진열해놓은 교과서 이야기는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라는 겁니다. 여행은 공허한 지껄임이 아닌 진정한 것을 학습할 있는 기회라는 것이지요. 세상은 교과서입니다. 그러므로 여행은 교과서와의 만남입니다. 교과서를 펼치는 일이지요. 세상과의 만남에는 누구로부터의 강요도 없어요. 보고 싶은 , 듣고 싶은 , 만지고 싶은 것으로 얼마든지 자유롭게 선택해서 있습니다. 시간 제약도 없어요. 외울 것도 없지요. 무엇을 보고 들어야 한다는 요구도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한다는 규정도 없습니다. 그냥 경험하는 거지요. 아무 거리낌 없이 느끼면 됩니다. 자유로움이 세상이라는 교과서를 사용하는 법입니다. 


학생 : 여행은 자율학습이네요.


교사 : 그렇지요. 누구의 간섭도 없어요. 눈치 일도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의지만이 자신을 이끄는 힘이 됩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의미를 만들면 됩니다. 여행은 속에서, 교실 안에서 만날 없던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일이에요. 교사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세상은 한계를 지니게 마련입니다. 여행은 교실의 한계를 극복할 있는 좋은 방법이에요. 여행은 생명 없는 교재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입니다. 여행은 결국 배움의 영역을 넓히는 이라고 있어요. 


학생 : 여행은 자체로 교육인 셈이네요.


교사 : 그렇지요. 세상이 교실이에요. 세상 모든 것이 교과서이고요. 그리고 세상이라는 교과서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교육인 거지요. 그러므로 세상과의 만남은 소중한 겁니다. 만남은 눈을 열어주고 마음을 열어주거든요.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것을 마음에 담을 있게 합니다. 그리고 가슴을 열고 세상과 소통하게 합니다. 세상이 베푸는 아름다움에 감격해하고 감사함도 배웁니다. 기쁨에 눈물 짓기도 하고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치유받기도 합니다. 


학생 : 새로운 것과 마주할 때의 느낌은 정말 놀랍고 기쁘고 가슴이 벅차요. 특히 자연이 그런 같아요. 자연 앞에 서면 작아지고 겸손해지고 따뜻해지기도 하고 감정이 정화되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그러한 감정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싶어요.


교사 : 그렇지요. 자연만큼 훌륭한 교과서는 없습니다. 자연은 신이 만든 교과서거든요. 자연을 교과서로 생각한 사상가는 프랑스 계몽 사상가인 루소입니다. 루소는 자연을 훌륭한 교과서요, 좋은 교사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을 자연에 의존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연을 도외시한 인간이 만든 교재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이의 자연적 능력의 성장을 방해하는 일입니다. 교과서는 아이가 걸어야 길을 제시합니다. 자연이라는 교과서는 삶의 이정표인 셈이지요. 교과서를 통해 삶을 꿈꾸고 길을 찾습니다. 그리고 교과서가 제시한 길을 따라 걷습니다. 이것이 교과서로서의 자연이 소중한 이유입니다. 


학생 : 아이가 접하는 교과서는 아이의 자연성을 자극하고, 자각하게 하고, 성숙시킬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교사 : 물론입니다. 아이들은 자연을 호흡하고 세상을 호흡할 있어야 해요. 그럴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이를 교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어른의 생각을 나열해놓은 교과서만 바라보면서 생활하도록 하는 것은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을 만날 있는 기회를 빼앗고, 자연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드는 일입니다. 아이들은 자연의 안에서, 자연의 보살핌 속에서 자연을 호흡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아이의 자연성은 꽃을 피웁니다. 


학생 : 종이로 교과서만 보고, 듣고, 냄새 맡게 해서는 된다는 말씀이군요?


교사 : 맞아요. 그렇게 되면 아이들은 교과서만 기억합니다 교과서가 이들 앞에 펼쳐진 유일한 세상이고 이들이 접한 세상의 전부입니다. 교과서 세상은 세상이 아닙니다. 단지 모조품을 뿐입니다. 꾸며진 세상이고 꾸며진 사회이고 만들어진 인간일 뿐입니다. 어른들이 보고, 듣고, 만나고, 느낀 인간과 자연 그리고 세상을 활자화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어른들의 자연이고, 어른의 세상이고, 어른의 인간일 뿐입니다. 

여기에서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e, 1898~1967) 그린 <이미지의 배반>이라는 작품을 생각해볼 있습니다. 작품은 흔히 있는 파이프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림 아래에는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림 파이프는 파이프가 맞지만 그것은 대상의 재현일 대상 자체일 없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림 파이프는 담배를 넣고 불을 붙이면 연기가 피어오르는 진짜 파이프가 아닌 거지요. 단지 물감으로 그려놓은 파이프 그림에 지나지 않은 겁니다. 그림 파이프는 실체와는 엄연히 다른 겁니다. 아이들이 접하는 교과서 세상도 이와 같이 그려지고 만들어진 세상인 겁니다. 세상을 그린 그림인거지요. 세상 속으로 직접 뛰어들 있는 여건과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학생 : 아이를 자연과 직접 만나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교사 : 그렇지요. 어른이 만난 자연을 아이에게 전하는 것은 아이의 성장 기회를 빼앗는 일입니다. 아이가 직접 자연과 만날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연을 직접 만나 호흡하고 냄새 맡고 있게 해야 해요. 자연의 모습을 닮도록 해야 합니다. 자연은 아이들의 삶의 터전입니다. 자연의 법칙이 교육의 법칙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자연은 아이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펼쳐 나아갈 공간이며, 힘의 원천입니다. 자연 속에서 아이들은 삶의 에너지를 얻어요. 자연 속에서 자신을 찾고 자신을 발전시킵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연은 아이들이 읽고 보고 들어야 () 베푼 교과서거든요.


학생 :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자연은 부모님 같다는 느낌도 들어요.


교사 : 그래요. 자연은 아이들의 부모이기도 해요. 아이들은 어머니로부터 삶의 에너지를 얻고, 어머니의 보호 아래 성장하고 개성적 존재가 되어가는 것처럼 자연 역시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에너지원이고 성장의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이들이 자연의 품에서 자라도록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연을 떠난 아이들은 부모를 떠난 아이처럼 성장 동력을 잃기 쉽습니다. 보호자 없는 아이가 바르게 성장하기 어렵듯이 자연을 떠난 아이들 역시 바른 성장 가능성이 적습니다. 아이들을 자연과 어울리도록 하는 것은 부모와 함께 생활하돌고 하는 것처럼 중요한 일입니다. 교실은 아이들을 감금해두는 시설이 아니에요. 이제 교실이라는 좁은 공감에서 해방시켜야 합니다. 자유롭게 자연과 만나고 대화할 있도록 해야 해요. 교과서만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은 아이들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입니다.


학생 : 세상과의 만남을 주선해주라는 말씀이군요. 그리고 아이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교실이고, 아이가 보고 듣는 것이면 무엇이든 교과서라는 말씀이기도 하고요.


교사 : 맞아요. 만남은 자극이에요. 특히 새로운 것은 오감을 춤추게 하지요. 생소한 것과의 만남은 설렘이고, 다른 꿈을 꾸게 합니다.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가르침이고 새로운 배움이에요. 이것은 변화를 촉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주어지는지 살펴야 합니다. 참된 여행의 기회가 주어지는지 자문해야 해요. 그들이 꿈꾸고 바라고 만나고 싶은 곳과의 만남을 주선해야 해요.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마음껏 펼칠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교사에게 얽매인 존재가 아닙니다. 아이의 자유를 교사가 베푸는 자비쯤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학생 : 세상은 자신을 통해 자신을 가르치는 셈이네요. 교사는 세상으로부터의 배움과 세상의 가르침을 방해하지 말라는 말씀이고요. 


교사 : 그렇지요. 따라서 아이를 교실에만 머물도록 요구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학교가 아이를 가두어주는 감옥이어서는 됩니다. 교사는 아이들의 입과 귀를 그리고 행동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억압자가 아닙니다. 어른은 아이들이 세상을 마음껏 만날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과의 만남은 세상을 이해하고 깨달을 있는 기회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지닌 무한한 가치에 대한 이해요, 깨달음입니다. 어른은 스스로 아이와 세상과의 만남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18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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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을 읽는 당신에게


교육은 원래 힘들고 어려운 일일까?  4

교육은 새로움을 추구합니다.  6

교육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회를 돌볼 아는 사람을 만드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교육으로 인해 비로소 사람다움을 갖추어 갑니다. 교육으로 모난 부분이 다듬어지고 부족함이 메워집니다. 거친 부분이 부드러워지고 사나운 부분이 온순해집니다. 얇았던 것이 두터워지고 흐릿했던 것이 진해집니다. 사람은 교육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타인의 존재를 지각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인식합니다. 자신만 바라보던 눈이 타인으로 확대되어 세상으로 놃어집니다.  7

교육은 결코 무엇을 위한 도구적 존재를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스튜어트 밀은 교육은 기술자가 아닌 인간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교육은 정의로울 교육이 됩니다. 정의는 교육의 다른 이름입니다.  7


교육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항상 이루어지는 겁니다. , 내가 있는 곳이 학교고 그곳에서 내가 듣고 보는 것이 교육인 거지요. 이때 내가 무엇을 보고 듣느냐하는 것이 나를 변화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모든 환경이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 자신을 자극하고 자신을 가르치고 자신을 변화시키게 되는데 그것이 교육입니다.  17


학교가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학교가 다양한 환경을 접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겁니다. ..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환경의 모습을 갖가지 형태로 제공합니다.

다른 하나는 학교가 환경을 선택하고 활용하는 능력을 길러줍니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킬 수는 없어요...

다른 하나는 학교 자체가 좋은 환경을 제공해준다는 겁니다. ..

그리고 학교는 환경이 변화할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합니다.  19


삶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야 환경에 눈을 뜨게 되거든요. 삶에 관심 없으면 환경에 신경 이유가 없어요. ...좋은 환경은 자신을 새로운 존재로 창조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의미합니다. .. 

좋은 환경이란 먼저,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있는 볼거리, 들을 거리, 만질 거리 체험 요소를 많이 제공해주는 환경입니다. 그리고 번째는 인간적 환경이라고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있는 것은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21


좋은 환경 여부는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 건가요?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입니다.  22


환경을 판단하는 기준에 대해... 먼저, 교육적 환경의 여부를 가르는 기준은 타인과의 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하고, 자신의 개성과 느역을 찾아 신장시키고, 지식과 기능 그리고 이치를 깨닫고 익히고,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것이 가능한가입니다. 번째로 인간적 환경의 여부를 나누는 기준은 인간이 서로를 목적으로 대하고, 존엄한 인격으로 만날 있는 환경인가입니다. 그리고 윤리적 환경 여부를 구분하는 기준은 사람다운 공동체 형성에 기여하고아름다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넓혀주어 사람들의 행복 증진에 기여할 있는 환경인가입니다. ... 

우리는 급격하게 변하는 환경을 냉철하게 관찰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22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를 위해 인간이 갖추어야 조건 가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는 주체성입니다. 자신의 일을 외부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처리할 있는 주인으로서의 당당한 능력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세상을 바꾸고 변화를 주도할 있는 창조적 힘입니다. 이미 만들어진 세상에 머무는 삶이 아닌 새로운 세상을 고민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의지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윤리적 능력입니다. 윤리적 능력은 자신보다 타인을 앞세울 아는 따뜻함을 말합니다.  28





하나 - 아이들의 능력을 자체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사회는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있는 으력만을 능력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을 평가하는 사회적 시선이 학교에까지 침투하여 학생의 능력평가의 기준으로 작용할 아이들은 졸지에 능력 있는 아이와 능력 없는 아이로 나뉘게 됩니다.  42


아이가 지닌 모든 느역을 인정해줄 아이의 능력은 성장합니다. 능력의 성장은 삶의 성장입니다.  43


묻는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 관심은 애저을 낳고 애정은 변화로 이어집니다. .. 

물음과 교육은 하나의 다른 표현입니다. 물음은 교육이고 교육은 물음이에요.  45


교육은 의문을 품게 만드는 일이에요. 그리고 스스로 답할 있도록 힘으 북돋우는 일입니다.  47


묻지 않을때 사물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물을때 자신은 태어납니다. 물음이 멈추면 자신도 멈춥니다. 물음은 자신을 새롭게 만듭니다. .. 없던 자신이 발견됩니다.  48


물음은 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일입니다. 언제나 물음을 만드는 아이, 씨앗을 뿌리는 아이를 만들어야 합니다.  49


'내일을 위해 오늘은 참아라!'라는 말은 오늘을 즐기려는 아이에게 어른이 흔히 하는 말입니다. 어른들에게 오늘은 없는 날이 같아요.  49


내일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 나쁘다거나 불필요하다고 수는 없지요. 다만 오늘을 몽땅 내일을 위한 날로 치부하여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는 겁니다.  51


믿는 것과 수용하는 것이 학생 자신의 판단에 의한 경우라면 문제 삼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새악은 묻어둔 어른의 생각에 의존해서 믿고 수용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겁니다... 위대하고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사상가와 그의 사상에 대해서 딴지를 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위대하다는 평이 옳아서라기보다 평가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 이미 내려진 평가에 대해 소신 있는 평가를 한다는 것은 많은 비판과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나름의 생각을 피력할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교육이 사고라는 무형의 가치를 키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4-55


어린 아이의 생각을 인정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55


생각은 멈추면 힘을 잃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생각을 멈추지 않도록 도와야 해요.  56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혹은 ' 사람 생각은 이렇다'라는 식으로 제시되는 어른의 판단과 새악은 아이가 생각하고 판단할 참고자료로 활용할 있습니다. '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이런 생각도 가능하겠구나'라는 식이지요.  57


잘못된 생각이나 판단이 죄를 짓는 것은 아니잖아요. 생각도 연습이 필요한 일입니다. 많은 경험이 쌓여야 거칠고 험한 생각들이 다듬어집니다. 그러므로 행여 잘못된 판단일지라도 스스로 느끼고 수정할 있도록 기회를 주고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58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에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눈치를 이유가 없는 거지요. 자신 있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 있어야 해요.  60


판단의 기회를 주고 아이의 판단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육입니다... 어른의 판단을 무조건 수용하도록 하는 것은 비굴한 삶을 살아가도록 부추기는 일입니다.  61


독일의 교육자 잘츠만은 교육자는 아이들이 세운 삶의 목표를 이루는 유용한 것들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62


다른 사람에게 같은 내용을 가르치는 것은 아이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는, 순전히 어른 중심의 교육인 겁니다... 아이의 필요를 살펴야 합니다... 교재 선택은 교육 내용의 선택입니다 교육 내용은 교사들을 위한 것이 아니지요. 전적으로 아이들의 몫이지요. 따라서 아이들의 삶과 관련해서 선택해야 합니다.  63


바제도는 가르치는 양보다 얼마나 유용한가에 관심을 기울인 학자. 그는 생활에 유용한 지식을 질적으로 정선하여 가르칠 것을 권했어요. .. 방대한 양의 지식을 짧은 시간에 가르쳐야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을 바라볼 시간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시간도 없게 돼요.  63-64


지금 순간에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필요를 알고 필요한 지식을 선별하는 능력은 부모로부터 배우지 시작해서 서서히 능력을 쌓아가고, 학교에서도 교사와 학생 필요의 교류를 통해 배움과 가르침의 내용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65


배움이 즐거워야지요... 배워야 하는 지도 모른 책을 펼쳐야 하고, 들어야 하고, 외워야 하는 비극을 끝내야 합니다. .. 삶에 도움 없는 내용을 이상 강요해서는 됩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폭력이에요.  66


아이들의 삶은 그들만의 영역이에요. 누구도 침범할 없습니다.  67


배울 내용의 중요도는 어른이 매기는 것이 아니에요. 아이의 꿈이 정하는 겁니다.  69


다양한 경험은 다양한 능력을 자극해요. 경험이 다양할수록 넓은 능력이 자극받게 됩니다.  75


자극은 보고 듣는 겁니다. 만져보고 맛보는 것이지요.  76


가르치는 자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하나, 경험의 내용과 양을 정해놓고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 특별한 분야의 능력만을 인정하고 능력을 지니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 지니고 있는 능력에 따라 아이를 차별하는 것은 아닌가?  77


어른이 판단하고 결정한 길을 아이들에게 무조건 걷도록 요구하는 것은 아이들을 생각 없는 로봇으로 만들겠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79


교육의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을 도구로 만들기 위해 교육을 악용해온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있습니다. 교육에 목적으로서의 인간은 없고 수단으로서의 인간만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리하여 교육은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센 자들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를 만들기 이해 학교를 세우고, 그곳에서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갖가지 위협과 협박과 폭력을 통해 그들의 입맛에 맞는 도구로서의 인간을 만들어왔던 것입니다.  82


삶의 길은 다양하거든요. 어른들은 많은 사람들이 오고간 길을 옳은 길로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다른 이들이 수없이 걸어간 , 포기, 작은 하나 없는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도 걸을 있는 길만을 올바른 길로 생각하고 그길을 걷도록 유도하는 거지요. 그것이 어른이 아이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길은 개척하는 것입니다.  85


없는 능력을 억지로 만드는 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폭력입니다.  86


교과성적, 논리력, 설득력, 창의력, 문제해결 능력, 인성, 잠재력, 넓은 지식과 교양, 적극성, 공동체 의식, 협동심, 리더십, 자기 주도력, 성실성 등은 상급학교 진학 자격 조건 일부입니다. 학교가 원하는 아이들의 조건인 거지요.... 이처럼 완벽에 가까운 조건을 갖춘 아이들에게 굳이 학교가 필요할까요?  89-90


가진 것이 적고 약하고 볼일 없다고 외면하는 것은 가르치는 자의 도리가 아니지요. 오히려 그들에게 손을 뻗치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교육자의 도리입니다. 배움을 요청하는 아이의 요청을 외면해서는 됩니다. 배움의 요청을 거부하는 것은 배움의 기회를 빼앗는 겁니다.  91


배움의 요구는 권리예요... 배움의 기회는 모든 아이들에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91


교육은 어른들이 자신의 의지나 생각을 아이를 통해 표출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92


아이의 성장을 돕기 위한 교육으로 권하고 싶은 교육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요?

가장 좋은 것은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아이들 성장을 아이들에게 맡기라는 겁니다.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일 있겠지만 어른의 역할을 최소화할 아이는 성장합니다

그러면 어른이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아이의 생각이나 행위 하나하나를 격려하고 지지하는 것이 어른이 해야 일입니다... 교육을 어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회로 이용할 교육 정책은 복잡해집니다.  94


아이들은 어른의 욕심이 바뀔 때마다 휘청댑니다...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무엇을 위한 정책인지, 그리고 결과는 어떻게 될지에 대해 다각도에서 정직하게 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어른은 아이를 위한 존재임을 잊어서는 됩니다... 어른은 아이의 성장을 도울때 비로소 어른이 됩니다.  97


어른은 자신이 지닌 지식이 다른 어떤 지식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다른 분야의 지식보다 자신이 속한 분야의 지식을 먼저 확산시켜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작용하는 모양이에요.  100


'먹이는 것과 먹는 혹은

만들어져 있는 것과 자신이 만드는

사람은

입맛에 맞춰 음식을 만들어 먹지만 

가축은 

싫든 좋든 이미 배합된 재료의 음식만을 

먹어야 한다.

....

재료를 넣고 수도 

젓가락을 수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도 없이

맨손으로 덥석 물어야 하는

음식의 독재'

오세영 시인의 <햄버거를 먹으며>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마음대로 선택할 없이 주어진 대로 무조건 먹어야 하는 상황을 독재라고 말합니다. 어른이 제시한 지식을 선택할 없다면, 그래서 무조건 익혀야 하는 것이라면 또한 '교육 독재' 있습니다. ... 자신이 살아갈 삶의 방식에 필요한 지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식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는 거지요.  101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어렵고 힘들더라도 배워야 이유가 충분합니다. .. 불필요한 지식임에도 필요를 가장해 강요한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102


목재의 쓸모는 나무의 성질이 정하는 겁니다. 목수가 임의로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수는 나무의 성질을 파악하여 성질에 맞는 쓸모를 찾는 겁니다.  106


목수는 나무의 성질을 꿰뚫어볼 있는 안목이 필요.  106


어른의 욕심은 아이의 특성을 나눕니다. 쓸모 있는 특성과 쓸모없는 특성으로 말입니다.  108


배움은 부족함을 깨닫는 거예요. 그리고 채우는 거지요. 결핍된 부분을 보완하는 것이 새로운 존재가 되는 일입니다.  110


자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있는 배움의 욕구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 누구든 새로운 자신을 원하거든요.  111


배움은 타협이에요. 일방적 강요가 아닙니다. 배우는 자의 의지의 작용인 거지요. 교육은 무엇인가를 익히도록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세계에 관심ㅇ을 기울일 잇도록 시야를 넓혀주는 일이에요... 삶의 방식은 간섭의 대상이 아닙니다. 강요의 문제는 더더욱 아닌 거지요. 교육은 삶의 방식일 뿐이에요.  112


교육을 꺼리는 것은 교육의 필요성을 몰라서입니다. ... 교육을 접한 적이 없기에 교육의 으미를 모르고 교육의 필요를 모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교육의 필요는 교육이 가르쳐주는 거지요. 배움의 필요는 배움이 가르쳐줍니다.  112-113


교육은 가르치고 기르는 일입니다.... 사물들을 통해 나를 깨닫고 인간을 알고 세상을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사물들에 대한 깨달음을 강조한 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종교 개혁자이자 교육 사상가인 코메니우스 입니다. 그는 사물을 깨닫게 하는 순서도 정해두었습니다. 그는 사물을 개닫는 순서를 이목구비(耳目口鼻) 중 눈부터 시작할 것을 권합니다. 들려주기 전에 보여주라는 것이지요. 즉, 코메니우스의 교육은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13-114


아이에게 직접 사물을 보여주고 대화하게 하라는 겁니다. 직접 보고 판단하게 하고 느끼게 하라는 거지요. 그 과정에서 사물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자신과 세상을 배우는 기회가 주어지는 거라는 겁니다. 사물에 대한 가르침을 사물로부터 직접 받으라는 거예요. 어른을 통해 배우는 것은 사물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어른의 생각과 느낌을 배우는 것이 될 테니까요. 어른은 다만 사물과의 만남을 주선하면 되는 겁니다.  116




둘 - 명예와 자존심을 존중하겠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하고, 저것은 저렇게 하라'라는 식의 지시와 명령이 그득한 교실에서는 아이들의 당당함은 숨 쉴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늘 불안한 가운데서 생활하게 되지요. 아이들의 눈은 불안을 안은 채 부모나 교사의 입에 집중됩니다.  121


어른의 자리를 옮겨야 해요. 아이의 앞에서 뒤로 가야 합니다.  123


어른은 단지 아이의 요구를 듣고 지원하는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른은 지휘자가 아니라 지원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124


명예를 존중하는 것은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

명예는 존엄함에 대한 인정입니다. 아이가 지니고 잇는 모든 것, 즉 아이의 흥미와 능력, 가치관, 사상, 견해 등 그들의 모든 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해주는 겁니다.  125


인정받는 아이는 스스로를 더욱 나은 모습으로 만들려는 의지를 갖게 됩니다.  126


당당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비굴함이 자라게 마련이에요. 그리고 눈치를 보게 합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포장해 아이 앞에 던져놓은 어른의 생각은 없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127


체벌을 사용하는 것은 교육자에게 결함이 잇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133


공론도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주장은 비교육적일 아니라,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비인간적인 일이에요.  138


말은 듣는 이를 위한 겁니다. .. 말하는 이의 입장만을 내세울 말은 가치를 잃게 됩니다.  140


이것은 이렇게 하고 저것은 저렇게 해라가 아니고, 이런 일은 이렇게 돕고 저런 일은 저렇게 돕겠다는 선언이어야 합니다. .. 네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도록 이런 혹은 저런 도움을 주겠노라는 약속이 담겨야 합니다.  141


언론인이며 소설가인 이병주가 그의 소설 <행복어 사전>에서 행복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구호아래, 전체를 노예로 만들고, 노예들에게 주인이라는 명패만 달아주는 사술(詐術 속일사 재주술) 이야기했듯, 학교에서 아이들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구호 아래 아이를 노예로 만들고 못하는 아이로 만들고 손발을 묶어두는 교육을 한다면 노예에게 주인이라는 명패만 달아주는 꼴이 되는 겁니다.  142


루소가 생각하는 교육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인위적 힘을 최소화시킬 것을 권합니다. 인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것이 가장 바람직한 교육이라는 의미입니다. 아이들의 자연성이 자연스럽게 성장할 있도록 돕는 것이 최선의 교육이라는 것이지요... 

루소의 입장에서 좋은 교사는 아이들의 자연적 능력이 성장하는 방해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145


관찰하는 일부터 출발합니다.  146


교육은 개성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개성을 존중하는 것으로부터 교육은 시작됩니다... 중국 고대 도가 사상가인 장자는 "물오리는 비록 다리가 짧지만 길게 이어주면 걱정하게 것이고, 학의 다리는 비록 길지만 그것을 짧게 잘라주면 슬퍼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개성을 해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개성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47


개성 존중과 관련해서 생각할 있는 교육은 소극 교육입니다. 소극 교육은 아이들의 보호를 우선하는 교육이에요. 어른들의 말이나 기교 그리고 힘이 소극적으로 작용하는 교육을 말합니다. 어른이 적극적으로 다가서지 않는 것은 어른이나 어른의 힘으로 형성된 사회는 악하고, 그릇된 정신이 만연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147-148


아이의 삶을 인정하고 허용한다면 어른이 요구할 것이 그다지 많지 않겠지요.  153


개성을 중시하는 교육을 하려면 개성을 알아야 텐데 어떻게 있을까요?

어려운 과제입니다. 중요한 아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소리에, 걸음걸이와 손놈림에, 행동 하나하나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해요. 개성의 발견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관심을 기울이려면 만나야 합니다. 자주 만나 이야기해야 해요. 아이들의 이야기에 기울여 그들의 생각을 들어야 합니다. .. 세밀히 살펴야 해요. 기쁨과 슬픔까지 함께해야 합니다. 함께 웃고 울어야 그들의 개성과 만날 있습니다

개성 발견을 위한 다른 노력으로 세상과의 접촉을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세상과 직접 만날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다양한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직접 체험할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오랜 시간이 소요됩니다. 지속적인 관심과 끈질긴 노력만이 개성을 만날 있는 길입니다. 많은 정성이 필요한 일입니다. 오랜 시간 아이와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55-156


간섭 그리고 강제는 마음의 문을 닫게 하는 주문이에요.  159


아무리 많은 지원과 훌륭한 환경을 조성해준다해도 자유로운 교육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성장과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160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사상가인 듀이를 포함한 진보주의자들의 생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아이가 필요한 것을 아이 스스로 계획하고, 조직하고, 평가하게 하는 아이의 자발적 활동 내지 자율 학습을 교육 방법의 기본 원리로 채택합니다. 핛브은 강요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입니다.  161


노력 없는 결실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간섭을 배제하는 일입니다. 간섭 배제는 교육적 환경조성 작업 1순위예요. 간섭은 자연성을 움츠리게 하거든요. 뿐만 아니라 간섭은 시야를 좁게 만들고 세상을 보는 눈을 제한합니다.  163


어른들의 입맛에 길들이는 , 그건 이미 교육이 아닙니다. 아이를 어른의 욕구를 대신하는 욕구의 대리인을 만드는 일에 불과한 겁니다. 어른은 아이들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164


교육 과정의 획일화는 교육을 가로막는 가장 장애예요. 획일적 교육은 마치 고추, , 배추, 시금치, 토마토 다양한 농작물을 같은 방식으로 재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같은 시기에 심고, 같은 시기에 같은 거름을 주고, 같은 약품을 뿌리고, 같은 시기에 거두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효과적이지 못할 아니라 오히려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일입니다.  166-167


선택하지 않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예요. 아이의 동의 절차는 애당초 생각지도 않잖아요. 학교 교육은 대부분 그냥 맡기는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171


잘못된 알면서도 방치하는 것은 교육의 포기고 아이들을 포기하는 겁니다.  173


교재는 많은 경우 배우는 내용이나 방법을 결정하고 교육의 결과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교재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175


베이컨은 교재에 특별히 경험을 담을 것을 요구합니다. 교재는 사물을 관찰하고 실험하고 평가하고 기록한 사물에 대한 경험의 산물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 어른의 경험을 정답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경험이 전통이나 권위자의 권위의 산물이어서는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교재는 자연이 녹아 있고 다양한 사람들의 사회적 경험이 농축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178






------ 여행은 참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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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 마라."

"... 해라."

금하는 것도 필요하다. 무엇인가 요구해야 필요도 분명 있다. 모든 욕구를 허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금해야 , 그리고 싫어도 해야 일이 분명 있다. 그러나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유는 합리적이고, 인간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교육적이어야 한다.

이유가 없거나 비합리적인 요구는 학대입니다.  189


생각을 제한하는 것은 생각이 자랄 기회를 빼앗는 . 아이의 생각은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에너지입니다. .. 생각없는 아이는 성장을 멈추게 도지요. 그리고 아이의 생각이 멈춘 자리에는 어른의 생각이 자리하게 마련입니다... 책임 있는 주체로서의 자리를 잃고 말해주지 않으면 알아서 없는 자기 삶의 () 되는 겁니다.  190


어른들은 아이의 생각을 인정해주고 각자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을 허용해야 합니다.  191


시끄러움 속에서 아이는 영글어 갑니다. 봄이 조용하면 가을에 거두어들일 것이없어요. 봄은 시끄러워야 해요. 바빠야지요. 봄이 되면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잖아요. 조용했던 겨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됩니다. 나무의 색깔과 향이 달라지고요. 벌을 유혹하고 나비를 끌어들입니다. 성장을 위해 감당해야 당연한 수고입니다. 그리고 주변의 자연은 나무 변화를 수용하고 허용합니다 누구도 무엇도 시비를 걸지 않지요. 행여 변화를 두려워하여 색깔을 숨기고 향을 감춘다면 성장은 더뎌집니다. 결국 생존이 어려워질 겁니다. 새들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에 열심이지요. 독특한 소리로 시선을 낄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둥지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고요. 이는 짝을 찾고 종족을 번식하기 위한 부산한 노력입니다. 다른 수컷보다 마음을 표현하고 자신을 드러내야 마음에 드는 암컷의 마음을 움직일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러 ㅁ모든 생물들은 자신의 특성을 아낌없이 세상에 드러냅니다, 그들이 풍기는 향과 색깔은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들의 생존은 가능하지 않아요. 자신을 세상이 드러낼 그들은 비로소 존재하게 됩니다. 자신을 표현하지 않으면 존재하되 존재하지 앟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192-193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은 표현의 경험을 통해 형성됩니다. 표현의 내용이나 방식이 무엇이든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말아야 해요. 금할 것이 아니라 허용해야 합니다. 어떤 방식이든 아이가 표현할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 무엇이든 자신의 생각을 삶을 통해 드러낼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해요. 그리고 격려와 칭찬을 해주어야 합니다. 아이가 자신을 표현할 때는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허투루 생각하거나 넘어가서는 됩니다. 작은 일까지도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여주어야 합니다.  193-194


아이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어른은 아이들을 어른 생각대로 이끄는 것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아이의 능력을 인정하는 어른이라면 아이의 생각과 가치관, 삶의 다양한 모습을 격려하고 지지할 겁니다... 아이의 삶이지만 삶을 위한 에너지는 어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까요.  207


아이가 세상과 접촉하는 통로는 아이 자신이어야 해요. 아이가 아닌 어른을 통해 세상으로 나오고 어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어른의 입으로 세상을 이야기하면 아이의 삶은 어디에 있나요?  209


서로의 생각과 삶의 태도를 허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아이는 어른의 존재를 인정하고 어른은 아이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210





- 세상의 주인공은 너야


교사는 규정된 교육을 받고 제도적 검증 절차를 밟아 국가로부터 임명됩니다... 교사는 아이에게 존경을 받을 비로소 교사로서 자격을 갖게 됩니다.  219


역사 스승 중에는 그리스 최대의 철학자로, 백과(百科) 시조로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습니다. 그는 최고의 스승이었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걸었고, 학생들과 이야기하기를 즐겼습니다. 아이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었습니다. 학생 위에 서지도 않았고, 그들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지도 않았습니다. 통제하거나 억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하지도 않았고요. 오로지 학생들의 필요와 요구에 순종했고,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그들과 함께 웃었습니다. 그리고 식사도 함께했습니다.  223-224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이 무엇이고 누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교육에 대한 철학이 분명하면, 결코 억압적일 필요도 강요할 이유도 엄하게 대하고 아이 위에 군림할 이유도 없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224


아이가 따라야 삶의 규범을 제정해놓고 따르도록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발짝 비켜서서 아이가 자신의 시선으로 세사을 바라보고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226


아이의 삶은 지켜봄의 대상일 뿐입니다. 간섭하는 것은 삶을 훼방 놓는 일이에요.  227


교육은 자기 변화를 추구해요. 자리에 머무르는 삶을 거부합니다.  236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은 삶에 의미와 가치를 쌓아가는 일이에요. 자신을 새롭게 하려는 노력 없이 의미 있는 변화를 모색하기는 어렵습니다.  237


교육은 어른의 의무입니다... 교육은 아이들의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고 새로운 자신과 만날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239


안전을 추구하는 곳에서는 지적 발전이 이루어지기 어렵기에 위험하게 살라고 조언한 니체의 말처럼 위험함과 두려움은 지체(遲滯 늦을지 막힐체) 딛고 일어서 발전적 삶을 위해 거쳐야 의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 아이들이 나아갈 세계는 아무도 모르는 세계입니다.  241-242


세계는 보는 이의 것입니다. 듣는 이가 주인이에요.  243


삶을 펼치는 다른 사람의 삶을 참고하는 것은 있을 있습니다. 그러나 통째로 베끼는 삶을 경계하는 겁니다.  245


어른들은 아이들 가슴에 다른 누군가를 심어놓는 버릇이 있습니다. 어른이 바라는 이상적 인간이지요.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가슴에 품고 살게 되는 겁니다.  247-248


어른은 아이의 삶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바람대로 아이의 뜻대로 아이의 욕망대로 살아가도록 아이의 뜻과 욕망을 인정하고 허용해야 해요. 아이가 꿈꾸고 아이가 펼치는 삶이, 윤리를 해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휏손하지 않는 어떤 형태의 삶이든 인정해야 하는 겁니다.  248


아이가 누군가를 닮아갈수록 아이의 정체성은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교육은 정체성을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일이에요. .. 아이의 삶은 아이의 몫입니다. 누가 대신할 수도 대신 해서도 되는 아이의 고유 영역입니다. 삶은 오직 자신이 만들어가는 자신의 작품이에요. 그들이 살아가는 삶과 그들이 살아갈 사회에 대해 어른이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249


영국의 교육자인 알렉산더 닐은 아이의 자유를 말합니다. 닐에게 있어 아이는 자유로운 존재이고, 자유로운 존재여야 합니다. 물론 방종과는 다릅니다. 상대를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 하에서 주어지는 자유거든요.  250


아이들도 어리다는 이유로 교사들을 괴롭히거나 귀찮게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이의 자유뿐 아니라 어른의 자유 또한 중요하거든요. .. 교사와 아이 혹은 어른과 아이는 서로의 자유를 존중해야 합니다. ...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기의 생각을 펼치는 것이 닐이 말하는 자유입니다.  251-252


자유주의 교육 사상가인 엘렌 케이는 아이들의 해방을 이야기합니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부모요, 교사요, 가정이요, 사회입니다.  256


교육은 자신을 옥죄는 일체의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에게 자신의 의지를 심고 성장시키는 일입니다. 교육은 해방운동인 셈입니다.  258


어른이 있어야 곳은 아이의 뒤입니다.  261


교사의 가르침은 적을수록 좋은 거예요. 가르침이 많으면 많을수록 아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많은 가르침은 아이들의 자연성 성장을 가로막고 자연적인 힘을 약화시킵니다. 교사가 활동 범위를 넓히면 넓힐수록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이끌어가야 아이들의 활동의 폭은 줄고 아이의 역시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262-263


'교육의 비결은 교육하지 않는 있다' 엘렌 케이의 가르침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이 강압적이고 억압적이지는 않는지, 억지를 부리고 강제가 횡행하지는 않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264-265


쓸모는 관심으로부터 생겨납니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이 있을까요? 쓸모는 쓸모를 찾으려는 노력으로 생겨납니다. 아이들의 쓸모는 아이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찾아집니다. 어른은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쓸모를 발견하고 쓸모를 실현할 있는 여건을 제공해야 합니다.  265


교육의 전제는 '쓸모없는 능력은 없다'라는 겁니다.  269


어른은 말로 미끼를 던지고, 시선으로 겁박하면서 아이를 높이 그리고 빨리 뛰게 재촉합니다.

어른의 미끼는 무언가?

아이의 미래 모습이지요.  273


아이의 시간을 아이에게 돌려주어야 해요. 자유롭게 사용할 있는 시간을 아이에게 돌려주어야 해요. 자유롭게 사용할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아이는 행복합니다. 그들 마음대로 활용할 있는 시간이 필요해요. 시간은 순전히 아이만의 시간인 겁니다. ...

매일, 매주 아이들이 스스로 꾸미고, 만들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274


에라스무스의 사상을 토대로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선량한 행위 양식에 익숙하게 하는 ', '경건한 마음을 깊게 기르는 ', 이것이 에라스무스가 제시하는 교육의 목적 일부입니다.  279


에라스무스의 교육도 승리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겨룸의 대상이 달라요. 에라스무스는 자신과의 겨룸에서 이기고 승리를 쟁취할 있기를 원합니다. 자만심이나 교만한 마음을, 이기적이고 쓸데없는 욕심을, 탐심과 탐욕스러움을 극복할 있는 경건한 마음을 기를 있도록 노력하라는 거지요. 개개인이 노력해야 하고 그것을 돕는 것이 교육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 교육은 겸손하고 서로 조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서로 정중하게 대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라는 겁니다. 말이나 태도도 위엄이 있고, 정중해야 하고, 점잖고 엄숙해야 한다는 것이 에라스무스의 생각입니다.  283-284


가정환경은 교육환경이기도 겁니다. 인간은 환경적 존재예요. 인간은 환경에 대한 의존도가 높습니다. 환경에 의해 길러진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지요.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교육은 시작되는 겁니다... 환경의 중요도를 평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같은 환경이라도 사람에 따라 영향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 '자녀의 인격과 지성을 발달시키기 위하여 적절한 환경을 준비시키는 것은 시노가 사회에 대한 부모의 빚이다.'라는 말은 에라스무스의 생각입니다.  285


함부로, 아무나 부모가 없는 겁니다. 부모는 자체가 교과서로서의 기능을 해요. 부모의 삶은 자체로 아이의 본보기가 됩니다.  286


아이가 필요로 부모는 비로소 부모가 됩니다. 아이가 있으니 부모이고 아이를 낳았으니 부모가 아니라, 아이가 부모로서의 역할을 부여하고 부모로 인정하고 허용할 비로소 부모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필요와 요구에 맞는 역할을 하고 아이의 기대에 부응할 부모로서의 자격은 계속 유지될 있습니다. 이처럼 부모는 자녀로부터 자격이 주어집니다.  288


부모 교육이 필요해요. .. 평생 계속되어야 해요. 아이의 성장에 따라 부모의 역할도 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 변한느 아이의 요구와 필요에 맞는 맞춤식 부모 교육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289


부모는 행복해야 합니다. 기쁘고 즐거운 생활은 부모의 의무예요. 그것이 아이들의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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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릴 때부터 정말이지 자주 참 행운아다, 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가운데서 사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저더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16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란 것이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웃 사람하고 거의 대화를 못 나눕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입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7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無)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 그런 생각만이 강해져서 저는 익살로 가족을 웃겼고, 또 가족보다 더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한 머슴이랑 하녀들한테까지도 필사적으로 익살 서비스를 했던 것입니다. 19


제 본성은 장난꾸러기 같은 것하고는 도대체가 정반대의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미 저는 하녀와 머슴한테서 서글픈 일을 배웠고 순결을 잃었습니다....만일 제가 진실을 말하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었다면 당당하게 그들의 범죄를 아버지 어머니한테 일러바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 어머니조차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 호소한다. 저는 그런 수단에는 조금도 기대를 걸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한테 호소해도, 어머니한테 호소해도, 순경한테 호소해도, 정부에 호소해도 결국은 처세술에 능한 사람들의 논리에 져버리는 게 고작 아닐까. 25


태어나서 처음 타향에 나온 셈입니다만 저한테는 그 타향 쪽이 제가 태어난 고향보다도 훨씬 마음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중학교 입학때) 30


“나도 이런 도깨비 그림을 그리고 싶어.”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기를 바라는 심리. 신경이 날카로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더 강하게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다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다케이치가 말한 것처럼 과감하게 ‘도깨비 그림’을 그려낸 것입니다. 여기 장래 나의 동료가 있다고 저는 눈물이 날 정도로 흥분하여 “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라고, 왜 그랬는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다케이치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40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악한 것에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희열에 잠겼던 것입니다. 즉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원초적인 비법... 41


저는 이윽고 화방에서 어떤 미술 학도로부터 술과 담배와 창녀와 전당포와 좌익 사상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호리키 마사오). 44

술, 담배, 창녀, 그런 것들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상당히 괜찮은 수단이라는 사실을 저도 이윽고 알게 되었습니다. 47


여자 수행은 창녀한테서 쌓는 것이 제일 엄격하고 효과도 있다고 하던데, 이미 저한테는 ‘여자를 잘 다루는 도사’ 냄새가 배어버려서... 48


뭔가 여자들로 하여금 꿈을 꾸게 만드는 분위기가 저의 어딘가에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은, 이건 여복(女福) 자랑이니 뭐니 하는 그런 바보 같은 농담이 아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49


심부름을 시킨다는 것은 결코 여자를 실망시키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여자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 또한 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57


백치 창녀들 품 안에서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던 느낌하고는 또 완전히 다르게 이 사기범의 아내하고 보낸 하룻밤은 저 한테는 행복하고 해방된 밤이었습니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쓰네코) 62


어차피 들킬 게 뻔한데도 솔직하게 말하기가 무서워서 반드시 거기에 뭔가 꼬리를 다는 것이 저의 서글픈 버릇의 하나인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며 멸시하는 성격과 비슷하지만 저는 무슨 득이라도 보려고 그런 꼬리를 단 적은 거의 없습니다. 81


아무하고도 교제가 없다. 아무 데도 찾아갈 곳이 없다. 82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예전보다도 다소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즈코의 말을 빌리자면 저는 조금 멋대로 굴게 되었고 쭈뼛쭈뼛 겁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93


그리하여 그 다음 날도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어제와 똑같은 관례를 따르면 된다.

즉 거칠고 큰 기쁨을 피하기만 한다면,

자연히 큰 슬픔 또한 찾아오지 않는다.

앞길을 막는 방해꾼 돌을

두꺼비는 돌아서 지나간다.

- 샤를 크로 Guy Chales Cros.

(프랑스 시인. 현실의 고뇌를 섬세한 감수성으로 노래. 저서로 <소리와 침묵>등.). 95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의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 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大洋)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라며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의 환영에 겁먹는 데서 다소 해방되어 예전만큼 이것저것 한도끝도 없이 신경 쓰는 일은 그만두고, 말하자면 필요에 따라 얼마간은 뻔뻔하게 행동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97


저는 점차 세상을 조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이라는 곳이 그렇게 무서운 곳은 아니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여태까지 저의 공포란, 봄바람에는 백일해를 일으키는 세균이 몇십만 마리, 목욕탕에는 눈을 멀게 하는 세균이 몇시만 마리, ... 등의 소위 ‘과학적 미신’에 겁먹는 것이나 다름없는 얘기였던 것입니다. 98


‘조시 이키타’(‘정사(情死, 사랑하는 남녀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함께 자살함), 살았다’ 라는 뜻). 100



<루바이야트> (페르시아의 시인 오마르 하이얌(1048~1131)의 4행시 시집으로 술과 미녀와 장미를 칭송한 감미롭고 우수에 찬 시들로 이루어져 있음.)

‘쓸데없는 기도 따위 그만두라니까

눈물 흘리게 만드는 것 따위 벗어던져 버려

자! 한잔하자고

좋은 일만 떠올리고

쓸데없이 신경 쓰기 따위는 잊어버려

불안과 공포 따위로 사람을 겁주는 놈들은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죄가 두려워

죽은 자의 복수에 대비하려고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계략을 꾸미지

불러라, 술 넘치니 내 가슴도 기쁨으로 충만하고

오늘 아침 깨어나니 황량하기만 하네

기이하다 하룻밤 사이에

달라진 이 기분이라니

뒤탈 따위 생각하는 건 그만둬

멀리서 울리는 북소리처럼

왠지 그 녀석은 불안해

방귀 뀐 것까지 일일이 죄로 친다면 못 살지

정의가 인생의 지침이라고?

그렇다면 피로 물든 전쟁터에

암살자의 칼끝에

어떤 정의가 깃들어 있다는 건가?

어디에 지도의 원리 있는가?

무슨 예지의 빛 있는가?

아름답고도 끔찍한 것은 이 세상이니

연약한 사람의 자식은 짊어질 수 없을 만큼의 짐을 짊어지고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정욕의 씨가 심어진 탓에

선이다 악이다 죄다 벌이다 하며 저주받을 뿐

어쩌지도 못하고 그저 갈팡질팡할 뿐

눌러 꺾을 힘도 의지도 점지받지 못한 탓에

어디를 어떻게 싸다니고 있었던 게야

뭐? 비판, 검토, 재인식?

흥! 헛된 꿈을, 있지도 않은 환영을

에헷, 술을 안 마셨으니 모두 헛된 생각이라고

어때, 이 한도 끝도 없는 하늘을 보렴

그 가운데 콕 떠 있는 점이라고

이 지구가 뭣 때문에 자전하는지 알게 뭐야

자전 공전 반전도 마음대로라고

모든 곳에서 지고한 힘을 느끼고

모든 나라 모든 민족 속에서

동일한 인간성을 발견하는

나는 이단자라나 봐

모두 성경을 잘못 읽고 있는 거라고

아니면 상식도 지혜도 없는 거라고

살아 있는 육신의 기쁨을 금하고 술을 못 먹게 하고

됐어 무스타파, 나 그런 것 끔찍이 싫어해’ 101-103



여성 명사, 중성 명사 등의 구별이 있는데 그렇다면 희극 명사, 비극 명사의 구별도 있어야 마땅하다. 109


반의어 맞히기였습니다. 검정의 반의어는 하양. 그러나 하양의 반의어는 빨강. 빨강의 반의어는 검정. ... 110


“자네는 죄라는 것에 전혀 흥미가 없는 것 같군.”

“그야 그렇지. 너 같은 죄인이 아니니까. 나는 난봉은 즐겨도 여자를 죽게 하거나 여자한테서 돈을 우려내거나 하지는 않거든.”

죽인 게 아니야. 우려낸 게 아니야, 라고 마음속 어딘가에서 희미한 그러나 필사적인 항변의 소리가 끓어올라 왔습니다. 그러나 아니 내가 나쁜 거야, 라고 금방 다시 고쳐 생각해 버리는 이 버릇. 저는 아무리 해도 정면으로 맞서서 당당하게 토론을 하거나 하질 못합니다. 113-114


신뢰는 죄인가요? 117


불행한 사람은 남의 불행에도 민감한 법이니까, ... 그 부인하고 얼굴을 마주 보고 서 있는 사이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부인의 큰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넘쳐 흘렀습니다. 124


다정한 미소가 고맙고 기뻐서 저도 모르게 얼굴을 돌리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 다정한 미소 하나에 저는 완전한 인생의 패배자가 되어 매장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129


제 불행은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130


정신 병원.. 광인, 폐인이라는 낙인.

인간 실격. 131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134




작품 해설


“인간이 아닌” 존재로서의 자기 인식 178


“전쟁에 졌기 때문에 추락하는 게 아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추락하는 것이고, 살아 있기 때문에 추락하는 것이다... 인간은 추락할 수 있는 데까지 추락해야 한다. 그리고 일본도 인간과 함께 떨어져야 한다. 떨어질 데까지 떨어져서 자기 자신을 찾아내고 구원해야 한다. 정치에 의한 구원 따위는 피상적인, 웃기는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사카구치 안고, <타락론>, 1946). 183


현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절망이 요구되는 격변기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은 가치관의 혼란, 세대간의 갈등 증폭,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들 간의 대립 구조 심화 등으로 어떤 해법을 모색해야 할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게 한다. 이런 때일수록 인간이기 때문에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나약함, 불신감, 절망감에 목숨을 걸고 천착하고자 한 다자이 오사무의 작가적 자세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자이의 절망이 그대로 해법이 될 수는 없다고 해도 처절한 자기반성과 책임 의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같은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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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 ; 깊이 생각하기


사색은 주관적 깨달음이다 - 아무리 그 수가 많더라도 제대로 정리해놓지 않으면 장서의 효용가치는 기대할 수 없다. 반대로 그 수는 적더라도 완벽하게 정리해놓은 장서는 많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지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많은 지시을 섭렵해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면 그 가치는 불분명해지고, 양적으로는 조금 부족해 보여도 자신의 주관적인 이성을 통해 여러번 고찰한 결과라면 매우 소중한 지적 자신이 될 수 있다.

습득을 통해 얻어진 진리는 다른 여러 가지 지식과 결합시켜 비교할 필요가 있으며, 이 같은 절차를 거쳐야만 비로소 완전한 의미에서 자신의 것이 된다. 그리고 완전하게 내 것이된 지식을 원하는 사상에 맞게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사상은 주관적인 논리와 스스로 터득한 지식을 기초로 세워지는 건축물이다. 알기 위해서는 물론 배워야 한다. 그러나 안다는 것과 여러 조건을 통해 스스로 깨달은 것은 엄연히 다르다. 앎은 깨닫기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와 학습은 객관적인 앎이다. 그리고 독서와 학습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사색은 주관적인 깨달음이다.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고, 누구나 공부할 수 있지만, 누구나 이를 통해 사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색은 바람이 불면 더욱 거세지는 불길처럼 외부 조건에 의해 조성된다. 이 조건은 객관적인 형태와 주관적인 형태로 나뉘는데, 주관적인 조건은 개인적인 능력, 즉 타고난 두뇌를 뜻한다. 반면에 객관적인 조건은 사색의 호흡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공기처럼 인체의 호흡에 필요한 여러 물질들, 즉 학습이라든가 독서, 외국어 구사 능력 등이다. 11-12


사색적인 두뇌와 독서적인 두뇌 - 인간의 정신은 외부로부터 강압적으로 주입되는 강요에 쉽게 굴복될 만큼 나약한 면이 있다. 14


스스로 이해하는 힘 - 책을 통해 경험한 타인의 사상은 타인이 먹다 남은 찌꺼기, 즉 타인이 벗어 던진 헌옷에 지나지 않는다. 15


스스로 사색하는 사람 - 독서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사색의 대용품에 지나지 않는다. 독서는 사상을 유도하는 역할로 충분하다... 독서는 사상의 분출이 잠시 두절되었을 때 이를 만회하기 위한 휴식으로 사용해야 한다. ..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나만의 고유한 사색에 의해 어떤 진리에 도달했다면, 비록 그 내용이 앞서 다른 책에 기재되었을지라도 타인의 사상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체험이라는 점이다. ..

괴테가 남긴 다음과 같은 격언. ‘그대의 조상이 남긴 유물을 그대 스스로의 힘으로 획득하라.’ 16-18


사색하는 인생은 남다르다 - 독서로 삶을 허비하는 것은 여행 안내서를 통해 어떤 지방의 풍속에 정통해지는 여행 안내인의 삶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여행 안내인들은 그 지방의 풍물과 역사를 빠짐없이 알고 있지만 정작 그곳의 토지가 어떤 상태인지, 봄에는 어떤 꽃이 피는지, 겨울이 되면 눈은 얼마나 오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사색하는 인생은 이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이들은 자신의 두 발로 그 지역을 직접 여행한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이런 사람만이 지역의 진정한 특색에 대해 말할 수 있고, 환경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 22


책상머리 바보 - 우리가 어떤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누구나 이 문제를 타파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과연 어떻게 풀어야 할지 그 해답을 얻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결심은 의지의 역할이기에 누구나 가능하지만, 이 같은 결심을 인도하는 사색은 문제를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명령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억지로 생각한다고 해서 무조건 사색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같은 생각의 파편들이 자연스레 심오한 사색으로 발전하기를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더구나 이런 마음가짐은 뜻하지 않게 찾아오므로 항상 마음을 비우고, 되도록 의지에서 멀어질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쳤을 때 비로소 성숙한 사색이 잉태되고, 그 결과 고유한 사상이 결실을 맺게 된다. 25-26


스스로 결정하는 힘 - 진정한 사색자는 군주와 비슷하다. 그는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으며, 자신의 위에 서려는 모든 자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판단을 군주가 결정하듯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에 의해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은 오직 자기 자신만이 기준이 될 수 있다. 군주가 타인의 명령을 승인하지 않는 것처럼 사색자는 권윌르 인정하지 않으며, 스스로 참된 진리를 확인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결과도 승인하지 않는다. 31-32


권위를 앞세우는 사람 - 세상의 보통 사람들은 어려운 문제와 맞닥뜨리게 되면 권위 있는 말을 인용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자신의 이해력과 통찰력을 활요하는 대신 타인이 남긴 침전물을 동원하고, 이를 자기 생각보다 더욱 확신한다. 물론 동원하고 싶어도 최소한의 능력조차 부족해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짓눌리는 자들도 많다. 이런 자들의 수는 어마어마하다. 세네카의 말처럼 “사람들은 판단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믿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어떤 논쟁을 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주로 선택하는 무기는 권위이다. 그들은 수집한 여러 가지 권위를 무기로 선택한 후 서로 싸움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다가 이런 싸움에 말려든 자가 자신의 근거나 논리를 무기로 삼은 후 자력으로 대항하더라도 권위에 취한 그들을 일깨우지 못한다.

이 같은 자체적인 논증에 대항하는 그들은 비유컨대 죽지 않는 지그프리트(게르만 민족의 영웅전설 가운데서 가장 빛나는 영웅 중의 영웅)로서 사고불능, 판단불능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그들은 타인의 자발적인 논리를 인정하지 않으며, 오직 사라진 자들이 남겨둔 권위만을 유일한 논거로 여기게 된다. 34



글쓰기와 문체 ; 자신의 사색을 녹여서 쓰기



독서 ; 생각하며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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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낭만주의


결혼의 시작은 청혼이 아니고, 심지어 첫 만남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 사랑에 대한 생각이 움틀 때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맨 처음 영혼의 짝을 꿈꿀 때다. 12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심산할 만큼 감동적인 최초의 순간들에 잠식당하고 기만당해왔다. 우리는 러브스토리들에 너무 이른 결말을 허용해왔다.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시작하는지에 대해서는 과하게 많이 알고, 사랑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모하리만치 아는 게 없는 듯하다. 27


그(라비 칸)와 커스틴은 결혼을 하고, 난관을 겪고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28


사랑이란 우리의 약점과 불균형을 바로잡아줄 것 같은 연인의 자질들에 대한 감탄을 의미한다 사랑은 완벽을 추구한다. 30


사랑은 우리의 혼란스럽고 창피하고 당황스러운 부분을 우리의 연인이 다른 누구보다, 어쩌면 우리 자신보다 훨씬 잘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 드러난 순간 최고조에 달한다. 이들은 우리를 간파해내고, 신뢰하고 나눌 줄 아는 우리의 능력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알아보고 공감해주고 용서해준다. 당황스럽고 난처한 영혼에 대한 연인의 통찰력에 바치는 감사의 배당금이다. 35-36


성욕은 처음에는 단지 생리적 현상, 호르몬을 깨우고 신경 말단 을 자극한 결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실은 감각적이라기보다 관념적이다. 무엇보다 받아들여졌다는 생각, 외로움과 부끄러움이 끝날 거라는 기대와 관련이 있다. 41


성 해방에 관한 온갖 담론에도 불구하고, 성을 둘러싼 비밀과 어정도의 부끄러움은 사실 늘 그래왔듯이 지금도 존재한다. 우리는 여전히 누구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한다. 부끄러움과 충동 억제는 단지 우리의 조상들과 절제의 종교들이 ㅇ매하고 불필요한 이유로 붙들고 있었던 것들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상수로 존재한다. 바로 그 때문에, 낯선이가 우리의 방어를 풀고, 한때 몰래 죄를 짓는 마음으로 갈망했던 것과 거의 동일한것을 바랄 수 있게끔 허하는 (일생에 몇 번뿐일지 모를)그 진기한 순간들이 그렇게 큰 힘을 갖게 된다. 44


우리는 흥분이라 부르지만, 사실 그 말이 암시하는 바는 드디어 우리의 내밀한 자아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 연인이 나의 본모습에 드려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격려하고 인정하는 족을 선택했다는 발견의 기쁨이다. 45


역사가 시작된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람들은 논리적 이유로결혼을 했다. .. 합리적 결혼은 어떤 진실한 관점엣도 전혀 합리적이지 않았으며, 자주 편의주의적이고, 편협하고, 속물적이고, 착취적이고, 모욕적이었다. 이를 대체한 것 - 감정에 의거한 결혼 - 이 그 존재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면제받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57


결혼이 실용적인 면에서 '불필요하다'는 것은 오히려 결혼에 더욱 감정적인 설득력을 부여한다. 결혼했다는 것은 조심성, 보수적 경향, 소심함과 연관 지을 수 있지만, 결혼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더 무모하고 그래서 호소력이 더 큰 낭만적 제안이다. 58


우리는 사랑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우리가 추구하는 건 친밀함이다. 우리는 유년기에 아주 익숙했던 감정들 그대로를 성년의 관계 안에서 재현하길 바라고, 그 감정은 다만 애정과 보살핌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렸을 때 맛본 사랑이란 보다 파괴적인 다른 역학들과도 얽혀 있다. 예를 들어, 통제 불능의 어른을 도와주고 싶은 느낌, 아빠나 엄마가 다정하지 않다거나 그들의 분노가 두렵다는 느낌 또는 철없는 소원을 자유롭게 표현할 만큼 집안 분위기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느낌과도 뒤얽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인이 된 우리가 어떤 후보군을 그들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조금은 너무 옳기 때문에 - 왠지 지나치게 안정적이고 성숙하고 분별 있고 믿음직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 거부하게 되는 것도 얼마나 필연적인가. 심정적으로 이러한 올바름은 이질적이고 누군가에게만 특별히 주어진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보다 자극적인 사람을 쫓는다. 그들과 함께하는 삶이 더 조화로울 것이라는 믿음에서가 아니라, 그 삶에서 겪을 좌절의 양식이 안심하리만치 친밀할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기 때문이다. 63-64


결혼 :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 무한히 친절한 도박. 65




2부 그 후로 오래오래


낭만주의는 직관의 합의를 중시하는 철학이다. 진실한 사랑에서는 말로 설명하거나 글로 쓰느라 수고할 필요가 없으며, 두 사람이 하나가 되면 (마침내) 둘 다 세계를 완전히 같은 눈으로 보는 경이로운 상호 감정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72


우리는 삶의 중요한 영역들(국제무역, 이민, 종양학 등)에서는 복잡성을 감안하고, 이견을 수용하고 참을성 있게 해결해나간다. 그러나 가정생활에서만큼은 치명적일 정도로 안이한 가정을 세우곤 하며, 이 때문에 협상이 오래 걸리는 데 대해 날카로운 반감이 생긴다. 76


작은 쟁점들은 사실 단지 필요한 관심을 받지 못한 큰 쟁점들이다.

그가 자신이 몰두하고 실망하는 바를 더 예리하게 파악하는 살마이었다면, 이불 밑에서 (실내 온도와 관련하여)이렇게 설명했을지 모른다. "당신이 한겨울에 창문을 열어놓고 싶다고 말할 때면 난 두렵고 속이 상해. 신체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인 이유에서 말이야. 앞으로 소중한 것들이 짓밟힐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든. 그럴 때면 당신에겐 내가 벗어나고 싶어 하는 가학적인 금욕주의와 너무 왕성한 용기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어떤 잠재의식의 차원에서 당신이 진짜로 원하는 건 상쾌한 공기가 아니라, 당신 특유의 매력적이지만 무뚝뚝하고 합리적이고 사람을 위축시키는 방법으로 나를 창밖으로 밀어내는 것일까 두려워."

이와 마찬가지로 커스틴도 시간을 엄수하려는 자신의 태도를 면밀히 들여다봤다면,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에 라비에게(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운전기사에게) 가슴 뭉클한 연설을 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일찍 출발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 건 결국 공포 증상이야. 그게 내가 무질서하고 놀라운 일이 가득한 세계에서 불안과 정체불명의 지독한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 개발해낸 기술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권력을 갈망하는 거나 내가 시간을 지키고 싶어 하는 거나 매한가지야. 안전의 욕구와 다르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걸 고려하면, 비록 조금이지만 그 조금이라도 이해되지 않아? 온전한 정신을 지키려고 하는 나만의 미친 방법인 거야."

이렇게 각자 욕구의 맥락을 살피고 서로가 상대방의 믿음에 깔린 원인을 이해했다면 새로운 융통성이 뒤따랐을지 모른다. 78-79

협상을 위한 인내심이 없으면 비통해진다. 원인도 잊은 채 화가 나는 것이다. 잔소리를 하는 쪽은 굳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이야기를 끝내려고만 하고, 잔소리를 듣는 쪽은 자신의 반발이 합리적 반론이나 그도 아니면 가엾고 용서받을 만한 성격상의 결함에서 나온 것임을 더는 설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양 당사자는 그들에게 똑가팅 지루하기만 한 이 문제가 그냥 지나가기만을 바란다. 79


우리는 다른 커플들에 비해 우리 커플이 훨씬 나쁜 일들을 겪는다고 상상한다. 불행할 뿐 아니라 우리의 불행이 대단히 드물고 기형적인 것이라 착각한다. 더 나아가 종국에는 우리의 싸움들이 기본적으로 전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결혼 생활의 증거라기보다는, 우리가 뭔가 드물고 근본적인 실수를 범한 징표라고 믿게 된다. 81-82


이 둘은 두 개의 믿을 만한 치유책 덕에 지속적인 비통함에서 벗어난다. 첫째는 나쁜 기억력이다. 목요일 오후 4시쯤 되니 전날 저녁에 택시에서 무엇 때문에 격노했는지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별 이유 없이 일찍 퇴근해야겠느냐는 그의 말에 커스틴이 경솔하고 달갑지 않게 반응한 것과 그녀의 설핏 경멸하는 듯한 말투와 관련이 있다는 건 알지만 불쾌함의 정확한 윤곽은 이미 초점이 흐려졌다. 이는 아침 6시에 커튼을 뚫고 들어온 햇살, 라디오에서 재잘거리는 스키 리조트에 관한 정보, 가득 찬 이메일 수신함, 점심을 먹으며 주고받은 농담, 회의 준비와 웹사이트 디자인에 관한 두 시간짜리 미팅 덕분이다. 이것들이 합쳐져 성숙하고 솔직한 대화를 한 것 못지않게 둘 사이를 거의 바로잡는 효과를 낸다.

두번째 치유책은 보다 추상적이다.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를 생각하면 너무 오랫동안 분노를 안고 가기가 어렵다. 이케아 사거 ㄴ이후 몇 시간이 흐른 오후 나절에 라비와 커스틴은 에든버러 남동쪽에 있는 레머뮤어 구릉으로 오래전에 계획한 산책을 나선다. 출발할 때는 둘 다 말이 없고 시큰둥하지만, 자연이 동정심이 아니라 숭고한 무관심을 통해 그들을 서로에 대한 적개심에서 서서히 해방시킨다. 82-83


토라짐의 핵심에는 강렬한 분노와 분노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려는 똑같이 강렬한 욕구가 혼재해 있다. 토라진 사람은 상대방의 이해를 강하게 원하면서도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설명을 해야 할 필요 자체가 모욕의 핵심이다. 만일 파트너가 설명을 요구하면, 그는 설명을 들을 자격이 없다. 덧붙이자면, 토라짐의 대상자는 일종의 특권을 가진다. 다시 말해, 토라진 사람은 우리가 그들이 입 밖에 내지 않은 상처를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를 존중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토라짐은 사랑의 기묘한 선물 중 하나다. 86-87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토라진 사람의 분노를 감당해야 하는 특별한 표적이 되었을 때에도 온화하게 웃는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진짜 메시지는 지극히 퇴행적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느 ㄴ아직 젖을 먹는 아기이니, 지금 당장 나의 부모가 되어줘야 해. 당신은 무엇이 나를 아프게 하는지를 정확히 헤아려주어야 해. 내가 아기였을 때, 사랑에 대한 관념들이 처음 형성되었을 때, 사람들이 그래주었듯이 말이야."

토라진 연인게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호의는 그들이 불만을 아기의 떼쓰기로 봐주는 것이다. 상대방을 어리게 취급하면 거만하게 윗사람 행세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만연한 탓에 우리는 성숙한 자아 너머의 것을 바라보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내면의 아이를 만나는 - 그리고 용서해주는 - 것이 가끔은 가장 큰 특권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는다. 89-90


사랑이 있을 때에만 섹스가 바람직할 수 있다는 견해는 기독교가 서양 세계에 남긴 가르침이다. 이 종교는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몸을, 눈길을 아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낯선 사람을 성적으로 생각하면 사랑의 참된 정신을 저버리고 신과 자신의 인간성을 배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감동적이기도 하고 무시무시하기도 한 그런 가르침들은 한때 그 토대를 이웠던 믿음이 쇠한 지금에도 완전히 증발하지 ㅇ낳았다. 확고했던 유신론적 근거는 사라졌지만 낭만주의 이데올로기가 그 가르침들을 흡수해, 사랑에는 정절이 내포되어 있다는 개념에 여전히 고귀한 지위를 부여했다. 세속의 세계 역시 일부일처제를 헌신적인 감정과 고결함을 표하는 필요하도고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선언해왔다. 우리 시대는 지나간 종교의 중요한 경향, 즉 참된 사랑에는 완전한 정절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고스란히 유지해온 것이다. 93-94


우리 시대의 분위기는 자유분방하지만, '기이함'과 '정상'의 차이가 사라졌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순진한 생각이다. 그 차이는 언제너처럼 확고하며, 사랑과 섹스의 규범적 한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즉시 을러서 경계선 안으로 밀어 넣는다. 요즘은 짧은 반바지를 입거나 배꼼을 노출하거나 동성과 결혼하거나 재미로 포르노를 좀 보는 것도 '정상'으로 간주하지만, 진실한 사랑은 단혼제에 있고 욕망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믿는것 역시 여전히 확고부동한 '정상'이다. 이 근본 원칙에 반기를 들려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가장 혹독하고 수치스러운 낙인이찍힐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변태라고 말이다. 99


의사 전달을 잘하는 기본 요건은 자신의 성격 중 더 문제가 되거나 더 특이한 면이 있더라도 그 때문에 당황하지 않는 능력이다. 의사 전달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분노나 성적 취향 또는 일반적이지 ㅇ낳고 거북할 수 있는 자기 의견에 대해 자신감을 잃거나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고 숙고할 줄 안다. 그들이 명료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대체로 원만한 사람이라는 대단히 가치있는 인식을 길러낸 덕분이다. 그들은 적정한 수준의 인내심과 상상력을 발휘하며 자신을 표현할 수단만 갖추고 있다면 다른 살마의 호의를 받을 만하고 또한 받을 수 있다고 능히 믿을 만큼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의사 전달을 잘하는 이런 사람은 어릴 적, 모든 면에서 적절하고 완벽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도 아이를 사랑할 줄 아는 보호자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축복을 누렸음이 ㅣ분명하다. 그런 부모는 자식이 - 적어도 한동안은 - 가끔 이상하거나, 난폭하거나, 화를 잘 내거나, 심술궂거나, 기이하거나, 슬퍼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수용할 줄 알고 그래도 가족의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 자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줄 안다. 그렇게 하여 자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도 솔직히 고백하고 대화할 수 있는 용기의 원천을 심어준다. 100-101


잘 들어주는 사람은 잘 말하는 사람 못지않게 드물거나 중요하다.잘 들어주는 사람 역시 특별한 자신감이 그의 비결이다. 이는 어떤 확고한 가정에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는 정보로 인해 경로를 이탈하거나 그 무게에 무너져 내리지 않을 수 있는 수용력을 말한다. 잘 들어주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라면 마음속에 얼마간 담아둘 혼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미 경험을 통해 모든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03


우리는 의식에서 거의 지워져버린 위기들이 오래전에 만들어놓은 대본에 따라 행동할 때가 너무나 많다. 지금은 기억에서 사라져 폐물이 된 논리에 따르고, 우리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밝히지 못할 ㅢ미를 좇는다. 우리는 우리가 진정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있고, 정확히 어떤 사람을 상대하고 있으며, 앞에 있는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른다. 곁에 두기에 약간 고달픈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112-113


마음이 전이에 말려들면 우리는 사람이나 상황을 믿어주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불안에 빠져 즉시 과거가 지정해놓은 최악의 결론으로 나아간다. 애석하게도 우리가 과거의 혼란에 의거하여 지금 벌어지는 일을 해석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은 초라하고 꽤 굴욕적인 일이 느껴진다. 우리의 파트너와 실망스러운 부모, 남편이 잠시 지체하는 것과 아버지의 영원한 유기, 더러운 빨랫감 몇 개와 내전의 차이를 설마 모르겠는가 하는 것이다.

감정을 그 출발점으로 송환하는 일은 사랑의 가장 섬세하고도 필요한 과제다. 전이의 위험성을 인정하면 짜즈오가 비난보다 공감과 이해에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 두 사람은 갑자기 폭발하는 불안이아 적대감이 항상 그들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그러니 그런 폭발에 매번 분노나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대응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격분과 비난이 동정심에게 자리를 내준다. 114-115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116


사랑의 모든 가정들 중 아주 얄팍하리만치 불합리하고 미숙하고 개탄스럽지만 그럼에도 가장 흔히 볼 수있는 것은 우리가 사랑을 서약한 사람이 우리의 감정적 실존의 중심일 뿐 아니라 - 그 로가로서, 또한 대단히 이상하고 객관적으로 비상식적이고 아주 부당한 방식으로 -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다 그에게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듯 사랑에는 기이하고 병적인 특권이 있다. 122


우리가 불만 목록을 노출할 수 있는 사람, 인생의 불의와 결함에 대해 누적된 모든 분노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 사람 탓을 하는 건 당연히 부조리 중에서도 부조리다. 하지만 이렇게만 본다면 사랑의 작동 법칙을 잘못 이해한 셈이다. 우리는 정말로 책임이 있는 권력자에게 소리를 내지를 수가 없기에 우리가 비난을 해도 가장 너그럽게 보아주리라 확신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 주변에 있는 가장 다정하고, 가장 동정 어리고,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 즉 우리를 해칠 가능성이 가장 적으면서도 우리가 마구 소리를 치는 동안에도 우리 곁에 머물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에게 불만을 쏟아놓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퍼붓는 비난들은 딱히 이치에 닿지 않는다. 세상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그런 부당한 말들을 발설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난폭한 비난은 친밀함과 신뢰의 독특한 증거이자 사랑 그 자체의 한 증상이고, 제 나름대로 헌신을 표현하는 비꾸러진 징표다. 분별 있고 예의 바른 말은 모르는 사람에게 할 수 있지만, 밑도 끝도 없이 무분별하고 터무니없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믿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뿐이다. 123-124


혹독한 수업은 학생들에게 그들의 교사가 단지 미쳤거나 성질이 나쁜 것이고 그래서 그 자신들은 논리상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는 안일한 생각에 기댈 여지를 준다. 터무니없이 극단적인 판정을 들으면, 우리는 파트너가 악랄하지만 한편으로는 약간이나마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깨끗이 지워버리고 위안을 얻는다.

감정에 치우쳐 우리는 배우자의 부정적인 평가와-조금이라도 비교할 만한 요구가 지워져 있지 않은-친구 및 가족들의 격려하는 어조를 대비시킨다. 사랑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사랑과 가르침의 관계를 바라보는 유용하고도 시류와 다른 관점을 제안한다. 그들이 보기에 사랑은 무엇보다 먼저 타인의 훌륭한 점을 찬탄하는 감정, 고결한 특질과 대면했을 때 느껴지는 흥분이었다.

그 결과 사랑의 깊어짐은 항상 보다 고결해지는 방법-화를 잘 참거나 관대해지는 법, 탐구심을 키우거나 더 용감해지는 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욕구를 수반하게 됐다. 성실한 연인이라면 상대방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런 수용은 관계의 목적을 나태하고 비겁하게 통째로 배신하는 행위였다. 그런고로 우리 자신을 향상하고 다른 이들에게 가르쳐줄 것들은 항상 존재할 터였다.

이 고대 그리스의 렌즈를 통해 본다면 연인이 상대방의 성격으로 인해 불행하서나 불편한 점을 지적해도 그가 사랑의 정신을 포기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파트너의 자아를 더 발전시키려는, 사랑의 본질에 아주 충실한 일을 하려 했다고 축하받아야 한다. 현재보다 더 진보한 세계, 그리스식 사랑의 이상에 조금 더 깨어 있는 세계에서는 우리가 어떤 것을 알려주고자 할 때에 어색함과 두려움과 공격성이 약간 줄어들고 피드백을 받을 때에도 다소 덜 호전적이고 덜 예민해질 것이다. 관계 안에서 교육이란 개념이 불필요하게 섬뜩하고 부정적이었던 함의를 벗게 될 것이다. 신뢰하고 협력하는 분위기에서는 두 프로젝트-가르치기와 배우기, 상대방의 결점을 환기하고 상대방의 비판을 허용하기-가 결국 사랑의 참된 목적에 충실하다는 점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137-138




3부 아이들


아이들은 결국 나이가 몇 배나 많은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선생이 되어-그들의 철저한 의존서으 자기중심주의, 연약함을 통해-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랑에 대한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한다. 이 사랑은 상호 호혜를 강렬히 원하지도 성급하게 후회하지도 않고, 타인을 위해 자아를 초월하는 것만을 진정한 목표로 한다.  146


아이들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은 봉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사랑이란 말은 갈수록 부정적 의미들을 내포하게 되었다. 개인주의와 자기충족에 빠진 문화는 만족과 타인의 부름에 응하는 행동을 쉽게 등치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타인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매혹하고 위로해주는 능력에 대한 보답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데에 익숙하다. 그러나 아기는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없다. 더 자란 아이들이 가끔 큰 불안을 느끼며 판단을 내리듯이, 아이들은 아무 '요점'이 없고, 이것이 아이들의 요점이다. 아이들은 그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도와줄 위치에 있기 때문에-어떤 보받도 기대하지 않고 베푸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우리는 장점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약점에 대한 동정, 즉 인류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으로 존재하고 한때 나 자신의 것이었고 결국 나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오는 그 취약성을 동정하는 사랑으로 인도되낟. 자율과 독립성을 늘 지나치게 강조하고 싶어 하는 와중에 이 무기력한 피조물은 아무도 결국은 '자력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인생은-문자 그대로-사랑하는 능력에 의지한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남의 종이 되는 것이 굴욕이 아니라 정반대라는 것을 배운다. 나 자신의 왜곡되고 만족을 모르는 본성에 끊임없이 응해야 하는 피곤한 의무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 자신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목표를 부여받았다는 위안과 특권을 알게 된다.  147-148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는 어려운 관례다. 본질상 부모의 사랑은 그 사랑을 베풀기 위해 쏟은 노력을 감추는 작용을 한다. 부모의 사랑은 받는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의 복잡한 사정과 슬픔을 감추고, 부모가 사랑의 이름으로 다른 이익, 친구, 관심사를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를 드러내지 않느다. 부모의 사랑은 무한한 너그러움으로 이 작은 존재를 한동안 우주의 중심에 놓는다. 부모의 사랑이 그토록 강한 것은 아이가 괴롭고 두려운 심정으로 어른 세계의 진짜 척도와 불편한 고독을 이해해야 할 그날을 위해서다.  155


사랑을 위한 노력이 그들을 녹초로 만든다.  156


라비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이렇게 까탈을 부린 적이 없었지만, 동시에 아버지에게서 진심으로 사랑을 받는다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166


좋은 부모의 역할에는 중요하면서도 무척 까다로운 요건이 딸려 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소식을 끊임없이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부모는 필히 아이의 장기적 이익을 폭넓게 지켜줘야 하는데, 아이들로서는 부모의 생각이 유익하다고 흔쾌히 동의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것이 있다는 것도 예상하지 못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는 양치질, 숙제, 방 정돈, 취침 시간, 마음 넓게 쓰기, 컴퓨터 사용 제한에 대해 말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는 재미가 정말 시작되려는데 삶의 달갑지 않은 면들을 들이미는 싫고 짜증 나고 따분한 배역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렇듯 사랑을 드러나지 않게 실행한 결과로, 좋은 부모는 그 실행이 잘된 경우에 강렬한 분노와 적개심의 표적이 되고 만다.  167-168


성적 흥분은 결국 옷을 벗은 상태와 거의 무관한 듯하다. 그 동력은 열렬히 열망하고, 전에는 금지되었으나 이제는 기적적으로 접근 가능해진 상대를 소유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가능성에서 나온다. 성적 흥분은 고립과 단절이 만연한 세계에서 그 손목, 허벅지, 귓불과 목덜미가 마침내 우리 눈앞에 당도했다는 데 대한 거의 불신에 가까운 경탄의 표현이다. 다시 한 번 기쁨에 차 만지고, 채우고, 드러내고, 벗기며 우리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우리의 연인은 얼마나 멀고 독립적으로 느껴졌는지 계속 몇 시간마다 확인하고 싶다는 특수한 개념이다. 성적 욕구는 확고히 친밀해지고자 하는 염원에서 나오며, 그렇기에 사전의 거리감을 전제로 하고, 그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이 매우 독특한 기쁨과 안도감을 선사한다.  184


자위의 판타지에서 무작위로 만난 낯선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낳은 순위의 모티프가 된다는 사실은 낭만주의의 이데올로기에서는 논리를 획득 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친밀함이 만든 무거운 짐들을 바로잡고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랑과 섹스의 냉정한 분리, 바로 그것이다. 모르는 사람을 이용하면 분노, 감정적 취약성, 상대방의 욕구를 신경 써야 할 의무를 우회할 수 있다. 우리는 비난이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원하는 선까지 특이하고 이기적으로 굴 수 있다. 모든 감정이 완벽하게 차단되어, 이해되기를 바라는 일말의 소망도 없고 따라서 잘못 이해될 위험도 없으며 그 결과 괴로워하거나 실망하게 될 위험도 전혀 없다. 마침내 삶의 소모적이고 거치적거리는 나머지 부분을 침대로 가져갈 필요 없이 욕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87-188


어떤 관점에서는, 공상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삶을 추구하는 대신에 판타지를 지어내야 하는 신세가 처량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판타지는 대개 다수의 모순된 소망으로부터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결과물이다. 판타지가 존재하는 덕분에 하나의 현실을 파괴하지 않고 다른 현실에 거주할 수 있다. 판타지는 완전히 무책임하고 무섭도록 기이한 우리의 충동으로부터 우리가 아끼는 사람들을 지켜준다. 판타지는 나름대로 인류의 성취이자 문명의 결실이며, 친절한 행동이다.  189


현대사회는 부부가 모든 면에서 평등하기를 기대한다지만, 실제로 기대하는 것은 고통의 평등이다. 그러나 괴로움의 복용량을 정확히 똑같게 계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불행은 주관적인 경험으로, 각 당사자가 실제로는 자신의 삶이 더 저주받았으며 파트너는 이를 인정하거나 속죄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언제라도 진지한 경쟁에 돌입할 수 있다. 자신이 더 힘들게 살고 있다는 자기 위안식의 결론을 피하려면 초인적인 지혜가 필요하다.  194


오늘날 부모들이 겪는 어려움은 부분적으로 위신을 분배하는 방식 탓에 발생한다. 부부는 매시간 실용적인 요구에 시달릴 뿐 아니라, 그런 일이 굴욕적이고 시시하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단지 요구를 견뎌냈다는 이유마능로 누군가를 동정하거나 칭찬해주는걸 꺼린다. '위신'이란 말은 등하교시키기와 세탁물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들린다. 그런 특성은 수준이 높은 정치나 과학 연구, 영화나 패션 같은 다른 세상에 속해 있다고 가르친 해로운 훈련 때문이다. 그러나 거품을 제거하고 핵심을 보면 위신은 단지 인생에서 가장 고결하고 중요한 무언가를 가리킨다.

우리는 인류의 영광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회사를 설립하고, 경이로울 정도로 얇은 반도체를 생산하는 데에 있을 뿐 아니라, (설령 수십억 인구 사이에 널리 분포된 능력이라 하더라도) 생후 몇 달 된 아기에게 요구르트를 떠먹이고, 사라진 양말을 찾고, 변기를 청소하고, 떼쓰는 아이를 달래고, 식탁에 굳어 있는 기름때를 닦아내는 능력에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듯하다.  195


라비와 커스틴이 고통받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접한 예술이 그런 싸움을 공감하며 반영하는 걸 좀처럼 보지 못하는 데에도 있다. 예술은 오히려 이들이 마주하 ㄴ문제를 얕잡아 보고 유치하게 놀리는 경향이 있다. 예술은 참을성 없이 짜증을 부리며 몸을 꿈틀거리는 아이에게 외국어를 가르치려고 애쓰는 그들의 용기에 감탄하지 않는다. 코트의 단추를 늘 잘 채우고 모자를 잃어버리지 않을 때, 집 안을 정갈하게 유지할 때, 그리고 매일매일 가장 작지만 까다로운 이 사업을 협력해 이끌 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결코 바깥에서 저명해지거나 큰돈을 벌지 못할 테고, 무명 인사로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월계관을 써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그럼에도 문명의 질서정연함과 연속성은 그들이 보이지 않는곳에서 말없이 수행하는 노동에 작지만 필수적으로 의존한다.  196




4부 외도


중년의 유혹자가 솔직한 것은 자신감이나 오만함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처량한 인식에서 나오는 일종의 조급한 절망감 때문이다.  204


배우자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에 불륜에 뛰어드는 경우는 드물다. 파트너를 배신하는 수고를 감내하려면 대개 파트너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207


다른 종류의 행동들은 거의 다 쉽게 묵인하는 사람들에게도 간통은 하늘이 노할 위반이자, 사랑의 가장 신성한 전제들을 깨뜨리는 섬뜩한 행위다. 

첫 번째 전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든 함께하는 삶이 소중하다고 주장하면서-길을 벗어나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런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면 애초부터 사랑은 없었다.  212-213


두 번째 전제 : 간통은 우리가 익히 아는 불성실과는 종류가 다르다. 세상은 벌거벗음을 수반한 계율 위반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이고, 지각변동에 버금가는 엄청난 종류의 배신이라고 말한다. 바람피우는 짓은 그냥 나쁜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한다고 공언하는 상대에게 할 수 있는 극악 행위다.  214


세 번째 전제 : 일부일처제에 충실하다는 것은 상대방을 깊이 배려하고 그의 번영과 안녕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이다. 이를 고수하는 것은 상대방의 최선의 이익을 진심으로 염려한다는 확실한 징표다.  215


네 번째 전제 : 일부일처는 자연스러운 사랑의 모습이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항상 한 사람과 사랑하기를 원한다. 일부일처는 정신 건강의 기준점이다.  216


다른 사람에게 가끔 욕망을 느끼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있을까? ... 우리 모두의 삶이 얼마나 짧은지, 그래서 어떤 절박한 호기심으로 단 한 명의 동시대인보다 더 많은 독특한 관능적 개성을 탐험해야 할지 깨닫지 못하고 유혹을 느끼는 데 실패한 것, 사실은 '잘못된 것' 아닐까? ... 간통의 발생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은 곧 인생의 풍요로움을 부정하는 셈 아닌가? 반대로, 어떤 특정 상황엣 부정한 행위에 정말로 일말의 호기심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신뢰하는 게 합리적인 것일까?  217


성숙해지면 소유욕을 초월하게 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질투는 아기들에게나 어울린다. 성숙한 사람은 어떠 ㄴ사람도 다른 사람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걸 안다. 이는 어렸을 때부터 현명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온 교훈이다. 잭이 네 소방차를 갖고 놀게 해주렴, 그 아이가 한 번 갖고 논다고 해서 남의 것이 되는 건 아니다, 화가 난다고 바닥을 뒹굴면서 네 작은 주먹으로 카펫을 내리치지 마라, 네 여동생이 아빠에게 소중한 사람이듯 너도 아빠에게 소중한 사람이다, 사랑은 케이크가 아니다, 한 사람에게 사랑을 준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줄 사랑이 줄어들진 않는다. 사랑은 집안에 아기가 새로 태어날 때마다 계속 커진다. 

나중에 이 주장은 섹스를 둘러싸고 훨씬 더 합당해진다. 파트너가 한 시간 동안 당신을 떠나 신체의 특정 부위를 낯선 사람의 제한된 부위에 비볐다고 왜 파트너를 나쁘게 생각하겠는가? 어쨌든 그들이 모르는 사람과 체스를 두거나 명상 그룹에서 촛불을 켜놓고 친밀한 얘기를 주고받는다고 분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229-230


질투는 그 우둔함 때문에 우리가 설교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 군침 도는 표적이 된다. 하지만 말을 아끼는 게 좋다. 대단히 볼썽사납고 어리석긴 해도 순간의 질투는 우리를 빗겨 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술을 만지거나 손이라도 스쳤다는 말을 듣는 순간 누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우리가 과거에 어쩌다 바람을 피웠을 때 가졌을 매우 진지하고 충실한 생각과는 상반되고 논리에 어긋난다. 하지만 지금은 이성의 명령이 들리지 않는다. 현명하다는 것은 도저히 현명해질 수 없는 순간을 아는 것이다.  230-231


상대방의 충실함이 무의식을 가득 채워주는 한 외도라는 문제에도 태연자약 할 수 있다. 한 번도 배신당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신의를 계속 유지하기에 좋으 전제조건이 못 된다. 보다 진실하고 충실한 사람이 되려면 적절한 예방 접종을 겪어봐야 한다. 한동안 극한의 공황과 모욕을 겪고 붕괴 일보 직전까지 가봐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배우자를 배신하지 말라는 명령이 틀에 박힌 말이 아니라 영구히 뚜렷하게 빛을 발하는 도덕적 의무로 변모한다.  232


사랑의 열병은 망상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목을 가누는 방식은 실제로 그 사람이 자신 있고, 심술궂고, 예민하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 누군가는 그의 눈이 암시하는 유머와 지성, 그의 입이 넌지시 말하는 상냥함을 실제로 지니고 있을 수 있다. 열병의 오류는 좀 더 교묘한 문제다. 우리가 다양한 단점을 꿰뚫고 있는 현재의 파트너뿐 아니라 사람은 누구에게나 우리가 더 많은 시간으 함게 보낼 때 드러날 상당히 심각한 결점, 황홀했던 처음의 감정을 비웃음거리로 만들 만한 결점도 있다는 인간 본성의 중요한 진리를 잊게 하는 것이다. 우리 눈에 정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우리가 아직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뿐이다. 사랑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  236

결혼 :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  237


아무것도 희생되지 않는 깔끔한 해결 방안은 어디에도 없다. 모험과 안전은 양립할 수 없다는 걸 그는 알았다. 사랑이 넘치는 결혼 생활과 아이들은 자연스러운 성욕을 죽이고, 외도는 결혼 생활을 죽인다. 두 패러다임이 아무리 매력적이라 해도 자유사상가인 동시에 결혼한 낭만주의자가 될 순 없다.  238


우울감은 치료를 요하는 병이 아니다. 우울은 처음부터 이 각본에는 실망이 적혀 있었다는 확신과 마주할 때 밀려오는 일종의 지적 슬픔이다.  239


어떤 관계도 온 마음을 다해 친밀하고자 하는 헌신 없이는 첫걸음을 떼지 못한다. 그러나 사랑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파트너가 여전히 수많은 생각들을 혼자 간직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정직성에 너무 감명하는 탓에 정중함의 미덕들을 망각한다. 아끼는 사람이 우리의 본성에서 상처를 줄 수 있는 면과 항상 전명적으로 마주치지는 않게 하려는 욕구 말이다. 

어느 정도 자제하고 자기 편집에 조금 열성을 보이는 억제 능력은 솔직한 고백 능력 못지않게 당연히 사랑에 포함된다. 스스로 비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정직함'을 내세워 상대방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상처가 되는 정보까지 털어놓는 사람은 절대 사랑의 편이 아니다. 또한 파트너가(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한 일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간밤에 어디에 있었는지 등등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는 의심이 들어도(우리의 관계가 훌륭하다면 주기적으로 그럴것이다), 날카롭고 무자비한 심문자처럼 굴지 않는 편이 좋다. 그저 눈치채지못한 척하는 편이 더 친절하고 더 현명하고 사랑의 참된 정신에 더 가까울 수 있다.  241-242


역사의 거의 전 기간 동안 사람들이 결혼 생활을 유지한 것은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고, 약간의 재산을 지키고, 가문의 통합이 유지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뒤 아주 다른 기준이 서서히 세상을 장악했다. 그에 따르면 부부는 둘 사이에 진실한 열정, 욕망, 충족감 같은 몇몇 감정들이 통용되는 한에서만 함께 있어야 했다. 이 새로운 낭만주의의규칙에서 배우자들은 부부의 일상이 지루해졌거나, 아이들이 그들의 신경을 건드리거나, 섹스가 더 이상 마음을 끌지 못하거나, 어느 쪽이든 최근 들어 약간 불행하다고 느껴왔다면 당연히 각자의 길을 갈 수 있었다.  243




5부 낭만주의를 넘어서


1950년대에 영국의 존 볼비와 그의 동료들이 전개한 애착 이론은 우리가 맨 처음 경험하는 부모의 보살핌에서부터 관계의 긴장과 갈등을 추적한다. 조사 결과 서유럽과 북미 인구 3분의 1이 생애 초기에 부모에 대한 실망을 경험하고(C. B. 바실리, 2013), 그 결과- 견딜 수 없는 불안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원초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신뢰와 친밀함의 능력은 결여되어 있다. 위대한 저직인 <분리 불안>(1959)에서 볼비는 최초의 가정환경에서 실망을 겪은 사람은 성인이 되어 관계의 어려움이나 모호함에 직면 할 때 두 종류의 반응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볼비가 '불안정 애착'이라 명명한, 두려워하고 집착하고 지배하는 행동 양식이고, 둘째는 '회피 애착'이라 명명한, 방어 및 후퇴 작전이다. 불안정한 사람은 파트너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질투심을 분출하고, 그들의 관계가 '더 가깝지' 않은 것을 슬퍼하며 일생의 많은 시간을 보내기 쉽다. 한편 회피적인 사람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식의 말을 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고, 때때로 성적 친밀함에 대한 요구를 힘겹게 느낄 수 있다. - 조애나 페어베언 박사, <부부 관계에서의 안정 애착과 불안정 애착 : 대상관계 이론의 관점>  251-252


불안정 애착의 징후는 침묵, 지연, 막연함 같은 애매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은 즉시 모욕이나 악의적인 공격과 같이 부정적으로 해석된다. 불안정 애착을 가진 사람들은 사소한 모욕, 경솔한 말, 부주의를 파탄의 전조라도 되는 양 불길하고 강력한 위협으로 느낀다. 좀 더 객관적인 설명은 와 닿지 않는다. 이들은 내심 그들이 삶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경험한다. 그들은 보통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유약함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래서 심술궂다거나 성마르다거나 잔인하다는 꼬리표가 붙는다. 253-254


회피 애착 유형은 정서적 피룡가 충족되지 않으면 갈등을 피하고 상대방에게 노출을 줄이려는 강한 욕구를 느낀다는 특징이 있다. 회피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열심히 공격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설득은 전혀 먹히지 않는다고 쉽게 가정한다. 자리를 피해 도개교를 올리고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유감스럽게도 회피적인 사람은 두려움에 찬 방어적인 행동 양식을 파트너에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 결과 그들의 소원하고 무덤덤한 행동들 뒤에 숨어 있는 이유들은 안개 속에 싸인 채 진실과는 정반대로 무정하고 무심하다는 오해를 쉽게 불러일으킨다. 회피적인 사람은 사랑을 주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느끼게 되었을 뿐, 마음속으로는 상대방을 깊이 염려한다. 257-258


하잔과 셰이버가 최초로 고안한 이 설문 조사(1987)는 애착 유형을 평가하는 데에 널리 이용된다. 자신이 어떤 유형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응답자는 아래의 세 진술 중 자신과 가장 가까운 것을 고르게 된다

'나는 정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원하지만, 상대방이 종종 뚜렷한 이유도없이 실망스럽거나 이기적으로 나온다. 나는 스스로 타인과 너무 가까워지는 걸 용인하면 상처를 입게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나는 혼자 지내도 괜찮다.'(회피 애착)

'나는 타인과 정서적으로 친밀해지기를 원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가 바라는 만큼 가까워지는 것을 꺼려 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소중히 생각하는 만큼 그들도 나를 소중히 여길까 하고 걱정한다. 그 때문에 아주 속이 상하고 화가 날 때가 있다.'(불안정 애착)

'나는 비교적 쉽게 다른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친밀해진다. 타인에게 의지하고 그들이 나에게 의지하는 데 편안함을 느낀다. 나는 혼자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안정 애착) 260


한 사람이 파멸에 이르기까지 많은 걸 요하지도 않는다. 그저 몇 번의 실수로 갑자기 그렇게 된다. 상황이 몇 번만 꼬이거나 외부 압박을 어느 정도 받으면 그 역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그가 자신을 제정신이라 여길 수 있게 하는 화학적 행운이란 부서지기 쉬우며, 인생이 제대로 시험해보기로 한다면 그 자신이 비극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다. 267-268


옛날에는 사람이 재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떤 이정표에 도달하면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의 이름이 붙은 집, 리넨으로 가득 채운 혼수, 벽난로 위에 진열된 자격증, 또는 소 몇 마리와 얼마만큼의 땅을 소유하는 것이 그런 이정표였다.

그런 뒤 낭만주의 사사의 영향으로 이런 실질적인 측면이 지나치게 금전을 따지고 계산을 하는 행위가 되었고, 초점이 감정적 특질로 이동했다. 올바른 감정들, 그 중에서도 특히 영혼의 짝을 만났다는 믿음, 상대방이 나를 완벽히 이해한다는 느낌, 다시는 상대 말고는 다른 누구와도 잠자리를 하고 싶지 않다는 확신이 중요하다고 여겨진 것이다. 278


이제 라비는 낭만주의 개념들이 재난을 낳는다는 것을 안다. 그의 준비된 마음을 완전히 다른 기준들에 기초한 결과다. 그가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무엇보다 완벽함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278


연인이 '완벽하다'는 선언은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징표에 불과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상당히 실망시켰을 때 그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알기 시작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연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은 근본에 있어서는 불완전할 것이다. 기차에서 만난 낯선 사람, 옛 동창생, 인터넷에서 사귄 새로운 친구 등도 우리를 실망시킬 소지가 다분하다. 삶의 현실은 우리의 모든 본성을 변형시킨다. 상처 없이 살아온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이상에 못 미치는 양육을 받았다. 우리는 설명하기보다 싸우고, 알려주기보다 들볶고, 고민거리를 분석하기보다 초조해하고, 거짓말을 하고 엉뚱한 데로 화살을 돌린다.

이렇게 우험 요소들이 중첩되어 있는 와중에 완벽한 인간이 나올 가능성은 전무하다. 낯선 이들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알기 전에 그들을 깊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화를 내는지 즉시 나타나지 않을지라도(몇 해가 걸릴 수도 잇다). 이론상 그 존재는 처음부터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결혼할 사람을 선택하기란 감정의 존재 법칙을 우회할 방법을 찾아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고통을 흔쾌히 견딜지 결정하는 일이다. 아니면 우리는 모두 당연히 악몽의 전형인 '엉뚱한 사람'을 곁에 두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재앙일 이유는 없다. 진보한 낭만적 비관주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모든 것일 수는 없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또 다른 타락한 생명체와 함께 사는 현실에 나 자신을 적응시킬 최대한 부드럽고 친절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결혼은 '어지간히 좋은' 결혼만 있을 수 있다.

정착을 하기 전에 몇 명의 애인을 사귀어보는 것도 이 깨달음을 깊이 새기는 데 도움이 된다. '제짝'을 만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은 없으며, 가까이서 보면 사실은 모든 사람이 조금씩 잘못되었다는 진실을 직접 그리고 다양한 상황에서 발견할 기회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278-280


사랑은 아주 든든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이 이해되고 있다는 경험에서 시작된다. 상대방은 나의 외로운 내면을 이해하고, 나는 왜 하필 그 농담이 그렇게 재미있는지를 그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공동의 적을 미워하고, 상당히 특화된 성적 시나리오를 함께 시도해보고 싶어 한다.

이 상황이 영원히 계속되진 않는다. 연인의 이해 능력에는 적정 한계가 잇고, 우리는 언젠가 그 한계에 부딪힌다 하더라도 직무유기라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애석하도록 무능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충분히 헤아릴 수 없으며,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게 정상이다. 어떤 사람도 다른 누군가를 정확히 이해하고 충분히 공감하지 못한다. 280


만일 수시로 자신이란 사람이 당황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자기 이해를 향한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은 것이다. 281


결혼이라는 새장 안에서 집안 살림, 친인척, 청소 분담, 파티, 식료품 같은 사소한 일로 화를 내면 당연히 '까다롭게' 보인다. 하지만 그건 상대방의 허물이 아니며,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려는 삶의 속성일 뿐이다. 애개 난감한 것은 결혼이란 제도이지, 관련된 개인들이 아니다. 281


우리는 마치 '사랑'을 단일하고 분화되지 않은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은 매우 상이한 두 가지 양식인 사랑받기와 사랑하기로 이루어져 있다. 후자를 실행할 준비가 된 동시에 전자에 대한 우리의 비정상적이고 위험한 집착을 인식할 때 결혼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

처음에는 '사랑받기'에 대해서만 알고 인생을 시작하낟. 아주 그릇되게도 사랑받는 일이 표준처럼 보인다. 아이들은 마치 부모가 항상 온정 어린 마음으로 흔쾌히 그들을 위로해주고 인도해주고 즐겁게 해주고 먹여주고 씻겨주는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개념을 성년기까지 갖고 간다. 성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보살핌을 받고 다 받아들여지던 그 느낌을 되살리고 싶어 한다. 우리는 마음속 은밀한 구석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예측하고, 우리의 심정을 읽어내고, 이타적으로 행동하고 모든 면엣 더 나아지게 해줄 연인을 그린다. 이건 '낭만적'인 것 같지만, 재난의 예고이다. 281-282


중요한 여러 분야에서 파트너가 우리보다 더 현명하고 합리적이고 성숙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우기를 바라야 하고, 그들에게 지적당하는 것을 인내해야 한다. 또한 다른 순간에는 최고의 교사로서 모범을 보이고, 소리를 지르거나 상대방도 알리라 지레짐작하지 않고 우리의 제안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미 완벽한 사람만이, 서로 가르친다는 생각은 사랑이 아니라고 일축할 수 있다. 283


낭만주의 결혼관은 '제짝'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우리의 허다한 관심사와 가치관에 공감하는 사람을 찾는 것으로 인식된다. 장기적으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너무 다양하고 특이하다. 영구적인 조화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제짝'의 진정한 표지는 완벽한 상보성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는 차이를 수용하는 능력이다. 조화는 사랑의 성과물이지 전제 조건이 아니다. 283-284


완벽한 행복은 아마 한 번에 5분이 채 넘지 않을, 작고 점진적인 단위들로만 찾아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이 순간은 두 손으로 붙잡아 소중히 간직해야 할 행복이다.

싸움과 갈등은 금세 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 291-292


완전히 평범한 인생을 사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을 유지하고, 거의 정상인이라는지위를 계속 확보하고,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결혼 생활을 지속하면서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 이 계획들이 어느 영웅담 못지않게 영웅적인 면모를 보일 기회를 제공한다. 조국에 봉사하거나 적과 싸우라고 부름을 받을 리는 없지만, 그의 제한된 영역 안에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불안에 굴복하지 않을 용기, 좌절하여 남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 용기, 세상이 부주의하게 입힌 상처를 감지하더라도 너무 분노하지 않을 용기, 미치지 않고 어떻게든 적당히 인내하며 결혼 생활의 어려움들을 극복할 용기, 이것은 진정한 용기이고, 그 무엇보다 더욱 영웅적인 행위이다. 293




옮긴이의 말 - 진짜 러브스토리


결혼이 사랑의 결실인 건 알겠는데, 그렇다면 결혼 생활의 진정한 동력은 무엇일까? 295


일상의 비끗거림은 맹독으로 작용하기 쉽지만 성찰에 담그면 묘약으로 연금된다.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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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 여행의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를 여행하는

서슬 퍼런 히틀러 치하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독인 문예이론가 발터 벤야민은 예술과 미디어에 관한 20세기 최고의 논문인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처음으로 ‘아우라’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복제된 이미지들이 난무하는 우리 시대 예술 작품에 사라지거나 빠져 있는 것이 바로 그 ‘아우라’라는 얘기였지요.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세상 유일무이한 진품 <모나리자>를 제외한, 세상 무수한 복제품의 모나리자에는 바로 그 ‘아우라’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비로움, 분위기, 후광 등으로 번역될 만한 ‘아우라’의 부재는 비단 미술작품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 연극이나 영화, 사진 음악 등 모든 예술 장르에 적용될 만하다는 게 논문의 요지였습니다.

얼마전부터 저는 우리 시대의 여행에도 그런 ‘아우라’가 사라져버렸다는 생각을 줄곧 하게 되었습니다. 여행지의 풍광과 풍물을 소개하는 텔레비전이나 책, 넘치는 정보들은 여행자가 품어 마땅할 환상을 퇴식시키는 듯합니다. 돈과 시간만 있으면 세상 어디든, 심지어 에베레스트 정상까지도 오를 수 있는 오늘날 축복받은 환경은, 여행이 힘들고 고단하며 고독과 모험을 즐기는 행위라는 생각을 비웃는 듯합니다. 우리 시대 여행이 18, 19세기 사람들이 누렸던 여행보다 과연 더 행복하고 흥미진진한 것인지도 단언할 수 없습니다. <80일간의 세계일주>나 <여행의 기술>에 서술된 그때의 기록들에는 미지에 대한 호기심, 자신을 과감히 내던지는 용기, 새로운 것을 순전하게 맞닥뜨리는 즐거움과 놀라움이 가득해 보입니다. ‘별을 보고 가야할 길을 찾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던 한 평론가의 탄식은, 지금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누릴 수 있는 여행의 시대에 가슴 절절하게 울려옵니다. 가만 보니 언제부턴가 여행의 빛이 바랜 이유가 이 시대 여행에도 그 ‘아우라’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5-6


땅을 읽는 여행은 저절로 땅의 슬픔을 읽는 일이 되곤 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어떤 여행지에서, 모자를 벗을지언정 머리를 비우며 여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 땅의 내력이 담긴 책들을 가져가야 마땅한 듯합니다. 7


"어째서 경권을 놓아두고 피난갈 수 없다는 거요?"

"우리가 읽은 경권의 수는 뻔하지요. 읽지 못한 경권도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는 읽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 <둔황>에서

다 읽지 못한 책을 놔두고 어디로 도망갈 순 없는 법. 다 읽지 못하고 잠들 수도 없고 읽지 못한 책을 두고 죽을 수도 없다. 세상이 사람으로 하여금 고요히 책을 읽을 수 있게 내버려두면 좋으련만. 28-29


추억을 찾아, 추억이 깃든 장소를 찾아 떠나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한지를. 37


대부분 혼자서 떠다닌 여행들이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때마다 결코 혼자 여행한 게 아니었다. 주위에는 항상 나처럼 낯선 길에 난감해하거나 당황해 하던 외로운 행성 같은 여행자들이 친구가 되어주었고, 따뜻한 마음으로 맞아준 현지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길 위의 가족이었다. 45


여행은 삶의 학교다.

이야기를 찾는 여행이라. 61


하나의 도시, 하나의 장소를 제대로 알려면 도대체 얼마나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까? ... 하나의 도시, 하나의 장소가 가슴에 온전히 안겨오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한 달? 일 년? 그렇게 머문다면 과연 그곳을 완벽하게 알게 될까? 140


전쟁과 폭력, 증오는 언제나 늘 멀지 않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

'여러분은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 모르지만, 전쟁은 여러분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 레온 트로츠키의 말 <사라예보의 첼리스트>에서 167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 <타인의 고통>에서 172


발로 읽는 것 만큼 처음 만나는 도시와 쉽고 완벽하게 친해지는 방법은 달리 없다. 180


유럽 땅들은 거기서 거기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따금 만나는 눈부신 햇살과 한가로운 전원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답고, 교과서를 장식한 예술가들의 자취를 쫓는 일도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지불하는 경비는 너무도 비싼데다 현지인들의 삶 속을 들어가 그들의 삶을 마주할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181


인간이 차마 저지르지 못할 짓은 없구나.

어쩌면 우리는 너무도 많은 아우슈비츠를 이미 보고 겪은 건지도 모르겠다. 사진이나 영화, 책, 텔레비전의 범람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인류에게 닥친 엄청난 폭력을 잘 알고 있다. 자만하면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준 건 아닐까? 202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조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20세기 중반 독일 신학자, 마르틴 211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 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말라, 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는 혁명에 가담하지 마라. 즐겁게 도망치는 당나귀들처럼 뒷발질이나 한 번 하라.(중략)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 '제대로 된 혁명'에서 D.H. 로렌스 231-232


우리가 소설에서 얻을 수 잇고 또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손에 잡히지도 않는 모호하고 거대한 지식, 도덕, 사상보다는 이 황폐한 시대에 어떻게 타인과 만나고 소통해야 하는지에 대한 작은 물음과 해답 정도가 아닐까? 284


'나를 죽이지 못한 시련은 나를 한층 강하게 만들 뿐'이라던 니체의 말은 용기와 객기 사이에 갈 곳을 마련하는 여행자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트래블(Travel)'에 '트러블(trouble)'은 때론 필요악이다'라던 후지와야 신야의 말도 그러하다. 곤란함이 없다면 대체 여행이란 게 뭐란 말인가? 예기치 못한 곤란함과 기꺼이 대면하고 때론 수렁에 빠지다가도 그걸 하나씩 헤쳐 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여행자가 기꺼이 떠안아야할 진짜 여행일 것이다. 312-313


여행은 쓸모없는 짓이다. 그러나 여행에는 진정 의미가 있다. '문학은 써먹을 데가 없어 무용하기 때문에 유용한 것이다. 모든 유용한 것은 그 유용성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만, 문학은 무용하므로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그 대신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라고 했던 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여행 역시 쓸모없는 여행이어야 마땅하다. 쓸모없음이야말로 여행을 떠나는 진정한 의미가 아니겠는가? 우리를 억압하지 않는, 그래서 자유와 부자유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322-323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읶르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때때로 큰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 나간다." - <여행의 기술>에서 323


여행을 하다보면 여행을 하는 것이 내 '몸'이 아니라 내 '생각'이라는 느낌이 종종 든다 그래, 나는 생각하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다. 일상이 강요하는 질서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다른 프레임의 생각을 하기 위해, 생각이 기차를 타고 생각이 물건값을 깎고 생각이 사진을 찍고 생각이 사람들의 땀내를 맡는다. 여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생각'이다. 324


객창감(客窓感 손객 창문창 느낄감). 그렇다. 이 단어다. 내가 여행에서 즐기는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객창감, 그 쓸쓸함의 즐거움이다. 별 까닭도없이 이끌려 젊은 날 많은 시간을 외딴 시골길이나 장터, 비 오는 처마 밑에 서게 했던 감정의 실체. 함께 놀던 친구들이 제 어미들에게 불려들어가 저녁 빈 들판에 혼자 남겨진 아이처럼 홀로 달빛 속으로 유유히 걸어가게 했던 감정. 객창감 속에 떠다닌 여행은 쓸쓸했지만 그 쓸쓸함으로 여행의 시간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희망이나 거짓 행복이 더러 사람을 배신하는 일은 있어도, 쓸쓸하모가 외로움이 사람을 배신하는 일은 드물다. 327


길 가기와 책 읽기에 관해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걸 당신에게만 말해주겠다. 부지런히 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 부지런히 읽는 책이 가장 빨리 읽는 독서다. 어느 날 뒤를 돌아보면 막막했던 길들이 내 등뒤에 납작 엎드려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뒤돌아보면 저걸 언제 읽지 했던 책들이 내 손때를 잔뜩 묻힌 채 서가에 꽂혀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한숨 쉬지 말고 가던 길을 갈 것, 읽던 책을 읽어나갈 것. 329


독일의 문화비평가 발터 벤야민이 언급한 '아우라'라는 개념.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의 산물이 처하게 되는 이러한 상황은 예술작품의 존속에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어쨌든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의 가치를 하락시킨다.(중략)우리는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을 '아우라(Aura, 독특한 분위기)'라는 개념 속에 요약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즉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이다. -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350


20세가 가장 유명한 논문 중 하나인 이 글에서 벤야민은 미술은 물론 사진, 연극, 영화 등을 예로 들어 '아우라'가 상실되는 현상을 고발한다. 나는 여기에 '여행'이란 장르도 포함시킬 수 있지 않을까 종종 생각했다. TV나 사진, 책 등에서 무수히 넘쳐나는 여행의 이미지와 정보들을 통해 우리 시대 여행은 설렘과 기대로 넘쳐나는 '아우라'를 상실한 지 오래다. 비용과 시간만 넉넉하다면 아주 쉽게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여행일뿐더러, 여행사를 통한다면 먹고 자고 보는 것에 대한 일체의 고민이나 수고도 생략된다. 세계 수십 개국의 출입국 스탬프가 찍힌 여권의 소유자는 주변에 흔하디흔하다. 더이상 여행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여행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는 긍정적인 현상의 이면에, 우리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설렘과 두려움, 감동이 가장 희박한 '여행'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포스트모더니즘의 담론들이 흔히 예술에 대해 남발했듯이, 우리 시대에는 '여행'마저도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351-352


어쩌면 읽지 않은 책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책이 아닐까? 어떤 책을 가장 숭고한 채로 남겨두는 방법은 그 책을 읽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궁금함과 호기심, 그 책을 향한 간절함이 있을 때가 책으로서는 가장 숭고한 대접을 받는 때일 터다. 352


아직 읽지 않은 책, 아직 가지 않은 여행을 향한 마음이 간절할 때, 어쩌면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353


여행자는 모름지기 곧잘 감격하고 곧잘 우는 사람이어야 할 터, 기꺼이 손을 내밀거나 내민 손을 맞잡아주는 사람이어야 할 터, 바다를 만나면 바다로 뛰어들고, 산을 만나면 산을 넘는 사람이어야 할 터, 비린내와 땀내를 사랑하고 소낙비레 모처럼 얼굴을 씻는 자여야 할 터, 내 이름은 여행자다.

'바닷가의 모래가 부드럽다는 것을 책에서 읽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맨발로 그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감각으로 먼저 느껴보지못한 일체의 지식이 내겐 무용할 뿐이다. 나다니엘이여! 우리는 언제 이 모든 책들을 다 불태워버리게 될 것인가!'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에서)

기행 혹은 여행의 문학이란 본질적으로 허풍과 과장을 일삼는 문학일지도 모른다. 남들은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얘기를 풀어놓는 순간 이야기꾼으로 변모해버린 여행자에게 과장과 허풍의 유혹을 물리치기란 힘든 일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 여행기들은 과연 그러한 유쾌한 허풍과 과장에서 자유로운가? 여행이 더이상 소수만의 특별한 행위가 아닌 시대에, 여행자의 구라는 여전히 유효한가? 인터넷과 무수한 영상, 책의 팩트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틈에서 여행자는무엇을 보고 무엇을 알고 무엇을 예기할 수 있을까? 여행이 여전히 책상과 서가보다 더 많은 사실과 정보를 제공하는 장소일까? 여행하는 자는 여행하지 않는 자보다 더 많이 아는 자일까? 많은 여행자가 진리에 가까이 갔을지 모르지만 그 반대편으로 멀어져간 이도 틀림없이 있지 않을까? 그러니 여행에 너무 지나친 가치 부여를 삼갈 것. 아, 여행의 구라가 통하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416-417


아름다운 땅일수록 눈물이 많은 따이 아니던가. 풍요로운 땅일수록 굷주림이 많은 땅이고 축복받은 땅일수록 저주받은 땅이지 않던가. 아프리카가 그렇고 아시아가 그랬으며, 라틴 아메리카와 수많은 땅들이 그러했다. 신들이 만들어놓은 축복과 풍요의 땅을 고통과 슬픔의 지옥으로 드라마틱하게 바꾸어 놓은 인간의 이 죄악과 아이러니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423


모든 땅이 그러하듯이, 여행자의 수만큼이나 많은 아프리카가 있을 것이다. 423


다른 사람들은 작품을 발표하거나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오히려 3년 동안이나 여행을 하며 머리로 배운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다. 배운 것을 비워버리는 그러한 작업은 느리고도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강요당했던 모든 배움보다 나에게는 더 유익하였으며, 진실로 교육의 시작이었다. - <지상의 양식>에서 424-425


여행자는 과연 제대로 보는 자인가? 여행자는 깊이 볼 수 있는 자인가? 책 속의 진실과 차창 밖의 진실은 어떻게 만나고 갈등하고 화해하는가? 그것이 어쩌면 세상을 아고 싶은 진지한 여행자의 손에 책이 필요한 까닭이 아닐까?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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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민주화를 누군가 나서서 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어요.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내각책임제로 개헌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다 이루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봅니다. 104


불편한 진실을 누군가 드러내면 사람들은 우선 조롱으로 응대합니다. 그다음에는 비난으로 응수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인정하게 되겠지요. 118


많은 사람이 지금 방법이 잘못됐다는 사실은 아는데 뭘 어떻게 다르게 해야 하는지 몰라요. 118-119


실제로 구조조정의 의미는 미래지향적인 사업구조 개편, 사업구조조정, 기업구조조정이 다 합친 말이라는 거죠.

우리나라는 미래지향적으로 하지 않아서 문제죠. 저는 미래지향적으로 하고 싶어서 앞부분에서 해야 할 수순을 밟았고요. 사실 알면서도 못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근본적으로 사람을 길러야 하는데 그러러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사람에게 투자한 효과는 자기 재임 기간이 끝나고 나서야 나와요. 그러니 사장들이 사람을 기르는 데 돈을 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121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자 중 10%만 노조가 결성되어 있고 나머지는 노조가 없잖아요. 10%에 해당하는 노조는 자기 노조원 숫자를 늘리려고 하지도 않아요. 우리끼리 살면 되니까요. 대부분은 시베리아 벌판에 있고 일부가 따뜻한 곳에 있는데 이 따뜻한 곳에 있는 사람들만이 노동자인 것처럼 목소리를 냅니다. 125-126


실제로 상당 부분이 사회 권력구조에서 결정돼요. 성 안에 들어간 사람, 못 들어간 사람, 권력에 조금이라도 지분이 있는 사람, 갖지 못한 사람, 그것에 따라 대우가 확 달라집니다. 126


좋은 사람을 리더로 뽑는 과정을 꾸준히 개선하고 만들어가는 일이 결국 그 나라나 조직의 장기적 생존이나 발전을 결정합니다. ... 더 능력 있는 사람을 리더로 뽑기는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리더가 아닌 사람을 모두 쓰레기나 하인 취급을 할 필요는 없지요. 182


우리는 좋은 리더가 뽑히리라고 기대도 안 하고, 그렇게 하지도 않으면서 계속 사람을 바꿉니다. 184


좋은 의사결정을 하려면 숙의(Deliberation)해야 합니다. 같이 토론해서 결정하는 거죠. 192


우리가 지금 어떤 감옥에 갇혀 있는지 알아야 어떻게 빠져나올지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258


우리나라는 경제발전 수준에 비해 교육방식이 잘못되어서 막상 필요한 인력의 질이 많이 부족해요. 303


우리가 처음부터 반복하는 이야기의 맥락이 바로 이 점이죠?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항상 근본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씀이요. ...

근본적인 개혁을 하기가 어렵다고 제가 자꾸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그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는 걸 모르지 않거든요. 근데 여당뿐 아니라 야당도 특수 이익집단의 눈치를 봅니다. 308


지금 한국은 사람으로 치면 머리가 마비된 채 몽유병처럼 헤매고 있는 나라예요. 문제는 야당도 어디서부터 뭘 바꿔야 하는지 잘 모른다는 거죠. 그리고 그걸 국민에게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도 잘 몰라요 국민은 또 믿으려고도 안 해요.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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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주변 세계를 친애하는 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확실히 도움이 되어 주었습니다. 6


좋은 빛들이 있다. .. 느닷없이 알게 된다. 그 빛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나 또한 그 빛을 그저 나를 밝히기 위해 이용했다는 걸 말이다. 그러고 나면 그 빛이 슬퍼 보인다. 슬프게, 보인다. 15


천장이 슬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하늘이 내려앉아 쥐어짰고, 나는 텅 비고 말았다. 19


'현실주의자가 되자. 하지만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68혁명 당시 체 게바라가 한 말이라고 대중에 알려진 글귀이지만 대개의 유명한 펀치라인이 그러하듯이 실제 화자와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 생각은 내게 참 소중했다. 내가 만난 많은 어른들은 정확히 그와 반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겉으로 몽상가처럼 세상에 관한 따뜻하고 근사한 말을 늘어놓되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단 한 치의 손해도 용납할 수 없다는 뜨거움으로 그를 믿어 왔던 주변의 많은 이들을 집어삼켰다. 21


나는 불행하게도 좋은 어른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다. 그것이 사회 일반의 반영인지 혹은 그저 나의 박복함의 결과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최악의 어른이란 늘 갱신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25


타인의 정상성을 의심하고 억지로 분류할 때 공동체의 정상성은 훼손된다. 반대로 타인의 정상성을 의심하고나 분류하지 않고 그럴 수 있는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을 때 공동체의 성상성은 굳건해진다. 32


내가 경험해보지 않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곧 비정상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살다보면 별일이 다 있기 때문이다. 33


청소보다 중요한 건 정리다. .. 정리가 직관적으로 잘되어 있으면 매일 하는 청소에 드는 시간은 십 분이면 충분하다. 정리가 되어 있는 집은 청소를하루 이틀 하지 않아도 티가 나지 않는다. 정리의 묘는 얼마나 잘 감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버리느냐에 달려 있다. 49


부동산 취득 자격먼허 같은 걸 만들어서 시험장에서 혼자 청소할 수 있는 최대 평수를 측정해 딸 수 있게 하면 좋겠다. 사람의 욕심을 다스릴 수 있는 가장 기능적인 목적의 면허가 아닌가. 52


나는 늘 내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해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115


좋은 다큐는 반드시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진실에 관해 스스로 한 번 더 의심한다. 그리고 그런 의심의 사유를 통해 관객이 영화를 찬양하게 만드는 대신 관객이 영화에 당황하게 만든다. 그런 종류의 당황은 필연적으로 관객의 고민과 깊은 울림을 이끌어 낸다. 229


누구나 그럴듯한 상황과 환경이 주어지면 사랑을, 혈연을, 우정을, 금전을, 위계를 빌미로 악을 행사한다. 그 자신만이 그것을 악으로 인식하지 않고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 혹은 선의로 인식할 뿐이다. 악은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지 않는다. 261


문제는 가해자를 승자인 채로 피해자를 패자인 채로 남겨두고 사회 통합이라는 알량한 거짓말을 들어 침묵하고 지워버리는 태도에 있다. <액트 오브 킬링>과 <침묵의 시선>이 공히 주장하는 건 청산되지 않은 과거를 짊어진 사회는 반드시 곪아 부패한다는 것이다. 294


가치관이 충돌하는 사안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관계를 두고는 균형을 찾을 이유가 없다. 확실한 사실관계를 두고도 무게중심을 찾는다며 진영논리를 끄집어내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라. 그들은 용돈을 받았다. 298


대중매체는 현실을 조명하는 데 게으르다. 혹은 겁을 먹는다. 시청자들이 스크린에서까지 현실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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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 당신은 표류하지 않고 항해하는 삶을 살기를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남긴 말이다.

"그렇기에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백발의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 4


인생을 산 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

어떻게 성장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선 표류하는 자신을 깨뜨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을 개뜨리기 위해서는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 그 외부의 힘이란 나를 불편하게 하는 오래된 지혜다. ..

일상에서 표류하는 자신을 멈춰 세우고 깨달음으로 밀어 올리는 불편한 지식들을 만나야 한다. 그 지식들은 지혜가 되어 우리를 성장하게 할 것이다. 5



소년, 불편함의 계단 앞에 서다

계단을 오르는 길에는 사람들이 있다. 나를 앞서가는 사람, 내 뒤를 따르는 사람. 어떤 이는 계단 중간 어딘가에서 이미 자리를 잡았다. 그 계단의 높이가 그는 가장 마음에 들었으리라.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더 오른다.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불안함을 감수하면서, 다른 세계를 보고자 한다. 그는 성장하는 사람이다.

어떤 삶도 괜찮다. 13


내가 전혀 알지 못함에도 이미 거짓이라고 믿고 있던 세계, 그렇게 피해왔던 세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책은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17-18



다섯 번째 계단, 과학

사회와 국가는 당신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회와 국가는 오직 당신의 노동력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전문성의 요구에 저항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노동자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 구각와 사회가 규정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규정해나가는 주체적인 조재로 변모하게 될것이다. 168



여섯 번째 계단, 이상 - 체 게바라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 외에는 타인을 평가할 줄 모르거든. .. 사람들이 보기에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가시적인 서오가를 낸 사람들만이 칭송의 대상이 되지. 238


이상적인 인간은 대주으이 평가, 혹은 사회의 인정과는 무관해. ..

타자의 평가는 이상적인 인간에게 불필요하다. 239



일곱 번째 계단, 현실 - 공산당 선언

낯선 시스템에 던져진 초기에는 누구나 그 시스템의 단점과 문제점을 쉽게 발견한다. 열정적인 그는 저항하고 좌절하면서 내적인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시스템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곧 시스템이 생각보다 효율적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말한다.

단점과 문제점이 없는 완벽한 시스템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때부터 그는 시스템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규칙성 속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우리는 한 가지에만 집중한 사람들의 한계를 쉽게 본다. 책만 본 사람들과, 현실에 적응하기만 한 사람들의 한계. 우선 책만 본 사람들의 한계는 타인에게 엄격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쉽다. 왜냐하면 책의 울타리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실제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까닭에 현실의 폭력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다른 사람들이 나약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하지만 막상 현실에 발을 디디면 이들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당황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나약함을 부정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된다. 모든 일에서 불평 불만거리를 찾아내는 사람, 타인의 잘못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 선과 도덕과 정의를 습관적으로 강조하는 사람.

다음으로 현실에 적응하기만 한 사람들의 한계는 자신에게 너무도 너그럽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계획과 일정에 따라 정확하게 진행되는 일 따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문제에 봉착했을 때, 옳고 그름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타협과 조율을 통해서만 상황에 따라 문제를 봉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된다. 선과 도덕에 대해 하찮게 여기는 사람, 모든 것을 손익으로 판단하는 사람, 심연의 깊은 대화가 불 가능한 사람.

두 가지가 병행되어야 한다. 250-251


삶은 받아들이는 방식으로만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314


우리는 자신이 체험한 만큼의 시야 안에서 세상을 해석하며 살아갑니다. 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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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라는 사선을 넘어왔지만 또 다른 사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오기뿐만 아니라 자존심도 내려놔야 한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했다.  28


탈북민은 한국에서 사회구성원으로 자리하고 인정받기 위해 오랜 기간에 걸쳐 탈북민사회의 호소와 집단행동을 통해 노력해왔다. 소수자가 피해자로 전락하면 안 된다는 외침으로부터 평등한 국민으로 봐달라는 호소까지, 통일의 동반자로 함께하고 민주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기까지의 과정은 민주주의의 발전과 그 궤를 함께해왔다고도 볼 수 있다.  30


2016년 기준 한국인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4.6명으로 OECD 회원국 중 13년 연속 1위였다. 그런데 탈북민의 자살률은 그의 3배에 달한다. 2016년 9월 새누리당 김도읍 국회의원실에서 인용한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탈북민 중 2012년까지 모두 22명이 자살했는데, 2015년 한 해에만 9명이 자살했다. 이처럼 자살자가 급증하는 것은 '따뜻한 남쪽 나라'인 줄 알고 넘어왔던 한국에서의 삶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고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42


탈북민이 가장 문제로 꼽는 것은 경제적 빈곤이나 정착 관련 정책보다 탈북민을 대하는 한국사회의 편견과 차별, 배제가 압도적이다. 이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배태하고 있는데, 첫 번째가 오랜 분단 시대가 만든 적대와 대립의 아비투스(habitus)로, 관습의 차원에서 유래한 것이다. 반공, 반북 의식의 오랜 관습은 북한 정부뿐만 아니라 탈북민에게까지 그대로 투영된다. 2010년 11월, 북한의 연평도 폭격 직후, 어느 면접장에서 "당신네 북한은 왜 저러녀?"라고 내게 묻던 면접관의 태도에서 배타적인 타자성을 보았다.

두 번째는 남북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였다는 우월적 인식에 기인한 태도다. 못나고 가난한 아우를 바라보는 묘한 승자적 감정이다. 탈북민은 일상의 자리에서부터 끊임없이 자신이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생존과 생계의 기회를 얻는다. 이를 강요하고 탈북민을 하대하며 가타르시스를 얻는 사람들을 직면하는 것은 언젠 불편한 일이다. 

세 번째는 무한경쟁사회가 초래한 소외와 배제다. 탈북민은 한국이라는 처음 맞이하는 막막한 환경에서 홀로 서야 한다. 무한경쟁사회에서 탈북민은 애초부터 포용이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이 될 뿐이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경쟁에서 배제된 채 과연 홀로 선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43-44


오래전부터 북한 주민들은 당구그이 선전을 통해서든 탈북민을 통해서든 한국이 무한경쟁사회라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럼에도 탈북민은 한국이 북한보다는 나을 거라는 희망과 우리는 결국 한 동포라는 믿음으로 탈북을 감행한다. 하지만 탈북에 성공하더라도 한국사회에서 직면하는 지독한 편견과 차별, 배제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44


자유가 존재하는 사회에 온 것은 맞지만 탈북민도 똑같이 존중받고 살기 위해서는, 한국의 평범한 시민들보다 더 많이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이었다.  44-45


나름 좋다고 하는 대학을 졸업했고 각종 자격증 취득이며 어학연수까지 다녀와 이른바 8대 스펙에도 거의 근접했다고 생각했는데, 서류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길 없이 어느 날 지원 서류를 다시 한 번 찬찬히 돌아보았다. 이력서의 군 복무 여부를 뭊는 칸에는 굳이 탈북민이라고 기재했고, 자기 소개서의 성장 과정과 입사 후 포부에서조차 나는 스스로 북한 출신임을 친절하게 밝히고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탈북민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 입사 지원을 했다. 그때부터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서류를 제출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았는데 줄줄이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던 것이다. 1차 서류합격만으로도 기쁨을 느낀다는 '서류가즘'이라는 신조어도 있지만 나에겐 그 따위에 비교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격한 슬픔과 비애가 온몸을 감쌌다. 민주주의의 발전과 성숙한 의식 수준을 자랑한다는 한국에서 탈북민이라는 이름은 경쟁사회의 아웃사이더이자 분단사회의 주홍글씨와 같은 꼬리표엿던 것이다.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며 백안시하는 태도를 애써 감추려 하지만, 실제 모습은 제도와 시스템속에 철저히 내재화되어 있었다. 여기에 물질과 이기의 논리가 덧칠해져 유사한 얼개로 괄시와 배척이 가중된다.

흔히 조선족 동포는 '이등 국민'이라는 이미지로 우리 사회에 굳어져 있다. 그동안 주민등록증을 가진 대한민국 국민임에도 북쪽출신이라는 것을 밝히지 못하고 조선족 동포로 행세하며 일하는 탈북민을 종종 봐왔다. 조선족 동포라고 하면 취업이 가능하지만 탈북자임이 알려지면 취직이 어려웠던 까닭이다. 사실상 탈북민은 이등 국민도 아닌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에 가까웠다.  59-60


주민등록번호(000000- 125 0000) 하나로 탈북민인 것을 구별해내는 시스템도 신기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되어 어느 탈북민은 북한에서처럼 강가에서 자동차를 세차하다가 주변의 신고로 파출소로 연행된 적이 있었다.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던 경찰이 곧바로 북에서 왔냐고 소리쳐 당황했다고 한다. 범죄자가 아님에도 수배자처럼 탈북민을 바로 확인해내는 전산시스템을 마주하던 그때의 경험이 훗날 탈남을 결심한 계기였다고 그는 고백했다. 일반 국민과 탈북민을 이중적 공간으로 분리하고 마치 탈북민사회를 특수 집단으로 경계하는 제도와 시스템이 존재하는 한 한국사회에서 탈북민은 결코 당당해질 수 없으며 또한 이들을 향한 한국사회의 무시와 경시 또한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63


- 2009년 '북한 이탈주민 보호, 정착지원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하나원의 소재지를 기준으로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았던 탈북민은 한 차례에 한해 정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입국한 탈북민들도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25나 225로 시작하지 않는 번호를 부여받았다.  64


전부가 정한 공식적인 법적, 행정적 명칭은 '북한이탈주민'이고 별칭은 '새터민'이지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탈북민이 호칭은 수십 가지가 넘는다. 이는 탈북민 정착 재도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현상이다.  67


수년 전 어느 연구 기관에 탈북민 박사 몇 명과 함께 북한과 통일 문제 연구 프로젝트의 자문으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 북한과 통일 문제에 문외한인 담당 연구원들과 전문가이지만 실직자에 가까운 탈북민 자문위원들 간의 만남은 어색하고 불편했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한 탈북민 박사가 "이런 꼴을 보자고 어렵게 학위를 취득한 것이 아닌데..."하고 탄식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오히려 외국에 나가면 우리를 난민이 아니라 정치적 망명자로 존중해줍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자 인문학 분야에서 최정상급으로 인정받는 네덜란드의 레이던 대학교에서 일개 탈북 작가인 저를 학과장 대우로 초빙했는데 국내에서는 어떤가요. 국내에 탈북민이 3만 명인데 북한학과에 탈북민 출신 교수가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70-71


오랜 시간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지내는, 국책 기관에서 일하는 어느 ;탈북민 금수저'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매번 골프 치러 가고 비싼 술을 먹는 것 같지만 매일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살고 있다. 직장에서 끊임없이 받는 경계심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너는 상상하지 못할 거다." 탈북민사회에서 이들의 위치는 성골일지 모르지만, 한국사회에서는 결국 '탈북자'로 대접받고 있다는 고충의 토로였다. 탈북민사회에서 그들은 분명 금수저이지만 그들조차 긴장하며 살아야 할 곳이 바로 만만치 않은 한국사회라는 점도 확인했다.  72


2014년 오준 한국 유엔대사가 임기 마지막 연설에서 "북한 주민은 우리에게 남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한국과 세계의 언론들은 세계를 울린 연설이라고 극찬했다. 이를 지켜보던 한 탈북민 후배의 중얼거림이 지금껏 가슴에 남아 있다. "그럼, 우린 남일까요?"  73


목숨을 걸고 입국한 한국을 다시 등지는 탈북민의 행렬은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정확한 통계가 공개된 적이 없어 구체적으로 알수는 없지만, 일각에서는 약 5,000명의 탈북민이 탈남했거나 탈남했다가 되돌아온 것으로 추산한다. 2017년까지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이 3만 명이니 6명 중 1명이 탈남했거나 탈남 경험이 있는 것이다.  89


배고파서 온 사람들이라서 배만 부르면 잘 정착할 것이라는 판단은 너무나 안일했다. 배고픔보다 더한 고통이 같은 민족으로부터 받는 차별이라는 것이 탈남과 재입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92


2007년 작고한 이기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식사 자리에서는 음식이 담긴 그릇을 앞에 두고, "그릇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함부로 만지지도 담지도 말라"는 또 하나의 당부를 하셨다. 만들어져가는 그릇에 뜨거운 물을 붓거나 손자국을 낸다면 기형적인 모습으로 완성된다는 의미였다.  95


2007년 4월, 32명을 사살하고 17명이 넘는 이들에게 부상을 입혀 세계를 경악케 했던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주범은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난 미국 영주권자였지만, 미국민들은 그를 한국인 모두와 동일시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미국인들의 분노가 한국과 한국인을 향할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미국 언론들은 오히려 이 사건을 이민자 출신의 국민을 제대로 포용하지 못한 미국사회의 문제로 보도했다. 서독에서 간첨 사건이 터질 때 서독에 정착한 탈동독민은 불이익을 받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탈동족민도 서독의 국민이라는 이념적 포용력과 성숙한 인식이 서독사회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독일이 보여준 성숙한 의식을 우리는 언제쯤 확인할 수 있을까.  98


학부 전공 수업에서 들었던 인상 깊은 문장이 아직까지도 뇌리에 남아 있다. "민주주의는 일방적 동화(同化)를 강요하지 않는다."  111


통일로 한 걸음씩이라도 나아가기 위해서는 북한 사람들에게만 일방적 동화와 적응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북한을 모르고서는 함께 살아가야 할 통일도 없다. 독일 통일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도 국민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베를린장벽 붕괴를 주도한 것은 동독 시민이었지만, 통일 국가를 위한 국민투표를 추동하며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라고 외쳤던 이들은 동독과 서독 시민 모두였다. 합법적 방식과 민주적 절차를 통해 동독은 자기보다 우월한 서독으로의 평화적인 체제 이행을 단행했다. 서독으로의 편입을 선택한 동독 시민에게는 통일 국가에서 동등한 주체로 대접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꿈이, 동독 시민을 받아들인 서독 시민에게는 민족의 소망을 이뤄내기 위해서라면 경제적 비용을 비줄하겠다는 각오가 있었다. 오늘날 유럽연합을 주도하는 통일 독일의 저력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111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북한 사람들이 지금의 한국사회에 만연한 탈북민에 대한 자별과 배제를 목격하고, 자신들을 향한 천민자본주의적 행태를 경험한다면, 가까스로 통일을 이워내더라도 그 통일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옛 소련의 해체를 예언했던 정치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전쟁이 끝난다고 평화가 찾아오는 게 아니며 그 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전쟁보다 더 잔인한 것일 수도 있다"라고 했다. ..

나는 통일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다시 타오르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 통일은 한밤중에 얻는 '대박'보다는 시나브로 '작은 통일'이 모여 결실을 맺는 끈기와 인내의 열매여야 한다.  114-115


공문서와 여권 등에 새겨진 각인은 점차 지워지고 있지만, 한국사회 안에서의 주홍글씨는 더욱 선연해지고 있다.

언젠가 북한 말투를 고쳐 신분을 세탁해보려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표준말을 따라하다가 감정이 북받쳐 크게 울었던 날이 있었다. 그날 깨달았던 것은 분단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탈북자'란 꼬리표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121



서북청년단은 해방 직후 북한이 단행한 친일 숙청과 토지개혁등에 의해 탄압받고 재산을 빼앗긴 이북의 청년들이 남한으로 내려온 후 만든 반공단체다. 지주, 자본가, 개신교도, 민족주의자, 친일파 등으로 구성된 이들은 대부분 황해도와 평안도 출신들이었다. 공산당에 의해 재산을 빼앗기고 고향에서 쫓겨나듯 도망쳐야했던 아픈 경험 탓에 북한의 공산당뿐만 아니라 남한의 진보적인 세력까지도 '빨갱이'로 매도하며 거부감과 증오를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특히 남한에 내려온 후 아무런 기반도 없는 처지와 경제적 궁핍함으로 인해 생존이 막막한 현실이 서북청년단의 잔혹성을 키웠다. 서북청년단은 점차 폭력과 테러 등을 통해 존재를 과시했다. 

학자들은 해방 후 한국전쟁까지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월남자 숫자를 80~10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신윤동욱, "박근혜 이후를 묻다", [한겨레21] 1153호, 2017) 이들은 북한에 대한 피해 의식으로 반공, 반북 이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미군정과 우익 세력은 이러한 성향을 간파하고 이들을 최대한 이용했다.  130


서북청년단은 창단 직후부터 미군정과 경찰의 비호를 받고 서북 출신 재력가들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으면서 무소불위의 세력이 되었으며 잔악한 활동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131


1949년 6월 26일 정오 무렵, 서북청년단의 간부였던 안두희는 경교장에 들어가 백범 김구를 암살했다. 그들은 정치 지도자뿐만 아니라 좌편향이란 혐의를 씌워 현직 검사에게 테러를 감행했으며 문화계 인사들이 모인 부산극장에 다이너마이트를 던지기도 했다. 큰 공로를 세운 단원들은 경찰과 군에 취직이 되었고, 이들처럼 출세하려는 이들의 부역 활동은 더욱 극렬해졌다.

서북청년단의 대표적인 만행이 바로 제주 4.3 사건 중에 일어났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로 민간이 6명이 사망한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소요 사태와 무력 충돌,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 당시 30만 명 정도였던 제주도민 중 3만 명 이상이 학살되었는데, 제주도를 피로 물들게 한 이 학살을 주도한 것이 바로 서북청년단이다. 얼마나 끔찍한 학살과 엽기적 만행이 있었는지 지금까지도 정확한 피해 규모조차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132-133


서북청년단은 이 시기에 벌어진 광기의 학살에 가담한 테러 조직이라는 역사의 오명을 쓰게 되었다. 오죽하면 당시 민군정청 사령관이었던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마저 서북청년단의 만행을 보고 진저리를 치며 단체 해산을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결국 이들의 존재는 이승만 정권에게도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왔고, 1948년 12월 모든 청년 단체를 통합해 대한청년단을 출범시켜 서북청년회를 해체해버렸다. 이후 서북청년단 출신 중 남한에서는 출세한 이가 거의 없었다.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경제적 보상도 없이 토사구팽의 신세로 전락했다.  135



남쪽이 방종이 만연한 사회였다면, 북쪽은 부자유가 숨통을 조이는 사회였다.  139


지금도 남북한 어디에도 참여할 수 없는 낯선 이방인들이 있다. 탈북민은 아직 광장을 마음것 누리지 못한다. 탈북민은 아직도 '이명준(최인훈<광장>)'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광장으로 초대받는 데 실패한 이들이, 자신이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고 깨달을 때 할 수 있는 선택이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이 ㄹ수밖에 없다. 제3국으로의 탈남, 아니면 북한으로의 재입북, 다시 재탈북.... 아니면 이명준과 같은 최후의 선택.

1950년대의 이명준처럼, 탈북민은 지금도 북한과 관련된 안 좋은 사건이 터지면 빨갱이라는 말을 듣고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한다. 끌려가서 린치를 당하는 일은 없지만 온라인 댓글과 오프라인에서의 수군거림은 기실 폭력보다 더 매섭고 아프다. 취업도 어렵고 저임금 3D 업종에도 감사하라고만 한다. 차별과 편견에 대해 입을 열면 곧바로 너희의 조국인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나한에 입국 후 얼마간은 안도감을 느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탈북민은 고통스럽고 힘들어한다.  143


유엔난민기구(UNHCR)가 2017년 6월에 발표한 [연간 글로벌 동향 보고서]에 의하면, 외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탈북민이 1,422명, 난민 지위를 받으려고 신청 대기 중인 탈북민이 533명에 달한다.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통계와 이처럼 차이가 나는 이유는 탈남하는 이들이 난민 심사에서 탈락해 강제 추방되거나 해외 정착에 실패할 것을 대비해 임대아파트 등은 정리하지 않고 떠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00년대부터 탈북민사회에서는 '탈남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한동안 해외의 남민 심사에서 한국 국적을 가진 탈북민의 추방 조치가 강화되자 탈남 바람이 주춤하기도 했지만, 최근 캐나다와 영국처럼 한국 국적의 탈북민도 신변의 위험과 위협 등의 상당한 이유가 있다면 난민과 이민 신청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늘고 있다. 

목숨 걸고 경계선을 넘어 한국에 왔으나 극심한 빈곤을 겪고 다시 한국을 떠나려는 사람들, 다시 목숨을 걸고 북한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 한국도 북한도 마땅치 않아 다른 나라에 난민 신청을 하는 사람들... 과연 그들은 자유와 전엄의 땅에 닿을 수 있을까.  188-189


나는 이곳에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것들을 겪었다. 아프고 힘들었던 경험도 재산이라고 스스로 위로로 삼았다. 인내하며 얻어낸 여러 성취의 결과에도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탈북민에 대한 한국사회의 일그러진 민낯 앞에서 나는 여전히 절망하고 좌절한다. 대학교수로 일하는 나조차도 보통의 시민들을 제대로 마주 보거나 말을 건네기가 조심스럽다. 나도 이러한데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탈북민이나 사회적 지위가 빈한한 이들은 얼마나 힘들까.  189




맺는말


대부분의 국민들이 통일을 말하지만 이를 준비하려는 사람은 드물다. '먼저 온 통일'이라 했던 탈북민이 3만 명을 넘어섰지만 그들과 함께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가물다. 탈북민에 대한 무관심만큼이나 통일 이후에 대한 고민도 극히 적다.  191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자 백범 김구 선생은 "아, 왜적 항복! 이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었다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라고 통탄했다. 이역만리에서 풍찬 노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해왔건만 조선의 해방은 우리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해방을 이룬 것이 아니라 해방을 당한 것이라는 그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고 새로운 비극인 분단이 찾아왔다.  195-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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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 세상에 책이 아닌 것 어디 있으랴

독서술을 체득하고 있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만물이 변하여 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 책과 역사는 풍경이다. - 런위탕 <생활의 발견>중에서


세상의 길이 어떻게 만나는가를 더듬어 알고 발견하는 일이 여행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4


책장에 연필로 밑줄을 긋듯, 땅 위에 밑줄을 긋는 데에는 낡은 카메라 한 대와 작은 수첩 한 권이면 충분했습니다. .. 가난하면서도 높은 여햊아. 5


여행과 독서는 달려들수록 욕망이 줄기는 커녕 더 많은 갈증이 생긴다는 점에서도 비슷합니다. 7


"걸을 때마다 나 자신과 내가 배워온 세계의 허위가 보였다." - 후지와라 신야 <인도방랑>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 없는 법이야."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미혹함 없이 스스로, 진리의 등불 삼으라.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스스로자 등잔등 밝을명 법법 등잔등 밝을명)' 25


스님은 지나칠 정도로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구도 해위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중략) 누군가 구도를 할 경우에는 그 사람의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ㅕ 자기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은 오로지 항상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까닭이며, 그 사라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까닭이지요.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29


김현의 유고 <행복한 책읽기>에서 "좋은 소설이 때로 지루한 대목을 간직하고 있듯이, 좋은 시는 때로 깜짝 놀랄 만큼 신선한 대목을 간직하고 있다" 86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다. -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128


'모든 것이 스스로 요란한 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확인받으려는'(최승자) 소음의 시대에 침묵을 벗하는 일은 행복하다. 128


바로 보려면 우리는 우리가 보는 사물의 명칭을 잊어야 한다. - 모네


나는 에로틱한 단어도 싫어한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써서 하찮고 진부한 것으로 만들었다. - 사진가 헬무트 뉴튼 135


맑은 책을 읽고 싶다. .. 조금은 느리지만, 슬로 미디어인 책을 통해서도 살아가는 지혜나 힘은 충분히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앉은 자리에서 손가락과 눈으로 하는 여행보다 두 다리로 직접 만나고 가슴으로 느낀느 경험히야말로 여전히 가장 의미 있는 배움과 깨달음이 아닐까. 136-137


여행을 하며 머리로 배운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다. 배운 것을 비워버리는 그러한 작업은 느리고도 어려웠다. .. 진실로 교육의 시작이었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책읽기란, 아무튼 숙제가 아닌 쾌락이어야 마땅할 터. ..

여행은 배움의 공간이지만 비움의 시간이기도 한것.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텅 비우는 것 ㄱ역시 우리가 진정 배워야 할 소양이 아닐까. 212


책의 맛을 충분히 알고 이해하기 위해 고토록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216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면 야만적인 힘을 사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함이다. -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삶이란 무엇일까? 던져진 존재로서 그저 살아지는 것일까?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무엇일까? 일상에서 답을 구할 수 없어 여행을 떠나지만 여행을 떠난다고 답을 얻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여행은 무의미한 일상의 연장일 뿐일까? 246


기억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려봐야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루이스 부뉴엘의 말,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251


일본인들이 쓴 불교 입문서인 <불교가 좋다>. 책을 우연히 뒤적이다가 '불교 경전에는 행복(幸福 다행행 복복)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문장을 읽고 무릎을 친 적이 있다. 뭔가 대단한 통찰력을 얻은 느낌이었다. 영어나 불어, 독어, 라틴어로 된 서양의 사상과 문물을 한자어로 번역하던 일본 메이지시대에 새롭게 만들어진 단어인 '행복'의 어원을 쫓으며, 동양인에게는 없던 '행복'의 개념이 그간 어떻게 작용해왔는지를 추적하는 내용이었다. '애 행복이라는 한자에는 서양의 단어에 들어 있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일본인(동양인)들이 '자신의 독특한 생각을 서양인처럼 '행복'이라는 단어로 대신함으로써,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고를 계속해 왔'다는 것이 책의 설명이다. 255


뉴스를 접하면 언론을 호도하고 본즐을 흐려 진실을 가리려는 파렴치한 시도는 사회 상류층으로부터 난무하고 있다. 262


겨울은 달리 보면 '따뜻한' 계절이다. '따뜻한'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계절은 오로지 겨울밖에 없다. '시원한'이 여흠의 형용사이듯 말이다. 하지만 겨울이 딷스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가 절실하다. 온기가 없는 겨울, 따뜻하게 내민 소노가 마음을 나누지 않는 사람들의 계절은 혹한의 겨울보다 더 춥고 매서울 것이다. 285


모든 길과 길 위의 여행은 어디론가 손을 뻗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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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운동으로는 안 일어나.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으로 일으키는 것이라고!

집단은 어차피 집단이라고. 부르주아도 프롤레타리아도 집단이 되면 모두 똑같아.

권력을 탐하고 그것을 못 지켜서 안달이지!

개인 단위로 생각할 주 아는 사람만이 참된 행복과 자유를 손에 넣는 거얏!"

 

"모모코, 국가 교육이라는 건 애초에 잘모소디었어. 미국을 좀 봐라. 세계 곳곳엣 전쟁을 벌여 죄 없는 민중을 죽이고, 그러면서도 자기들만이 정의라고 하고 있잖아. 그거야말로 국가적인 사상 교육의 결과야. 일본은 그런 미국의 앞잡이 격이라고."

 

"그 섬은 어느 누구의 통치도 받지 않아. 자급자족으로 살아가고, 전쟁도 없고, 모두가 자유야. 아니, 국가 같은게 아니라니까. 그냥 커뮤니티야. 사람들의 모임, 어느 나라의 영토에도 속자히 않으려고 지도에 실리는 것도 거부한 거야. (중략) 호자 살더라도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들면 정치경제가 발생해.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걸 생각하지 않으면 정치가도 자본가도 필요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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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적인 사람이라면 갑자기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데에 두 가지 경우가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즉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갈 때와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올 때이다. 이는 육체의 눈뿐만 아니라 마음의 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통찰력이 부족한 사람을 보고 함부로 비웃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앞서 그는 이 사람의 영혼이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 그 어둠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어둠에서 밝은 태양 아래로 나와 눈이 부신 것인지를 물을 것이다. 그리고 뒷사람을 복된 이로 생각하고, 앞사람을 불쌍히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어둠에서 빛으로 나온 영혼을 보고 웃는다면, 이 웃음엔느 밝은 곳에서 어두운 굴 속으로 들어온 사람을 보고 웃는 웃음과는 다른, 보다 큰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 플라톤의 <국가>에서

 

박사님은 자네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며, 그렇게하면 자네의 문제를 밝힐 수 가 있다고 말했다. 61

 

당신이 앞으로도 평생 어린아이로 살고 싶다면 예기는 달라지지만, 당신 슷로 답을 찾아야 해요. 옳고 그름을 '직감'할 수 있어야 해요. 찰리, 먼저 자신을 믿는 것을 배워야 해요. 109

 

전에 그들은 나를 조롱하며 내 무지와 우둔함을 경멸했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지능과 지성을 갖췄다 하여 나를 미워 하고 있다. 그들은 왜! 도대체,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 128

 

스트라우스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더 쉽고 평이하게 얘기하고 쓸 필요성을 지적했다. 그는 언어가 마음을 통하게 하는 길이 아니라 때로는 장벽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지능이라는 담장 저편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건 아이러니다. 135

 

노마가 태어나 그녀도 정상적인 아이를 낳을 수 있으며, 내가 잘못 태어난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자, 그녀는 나를 고치겠다는 노력을 그만두었다. 한편 나는 그녀가 원하는 영리한 아이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나를 사랑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168

 

그녀를 쫓아낼 구실은 얼마든지 있지만 나는 단념했다.

"진 있어요?" 하고 그녀가 묻는다.

"아니, 술은 별로 마시지 않아요."

"집에 조금 있으니까 가지고 올게요." 말릴 새도 없이 창문으로 나가서, 3분의 2쯤 들어 있는 술병과 레몬을 한 개 들고 곧 돌아왔다. 부엌에서 술잔을 두 개 가지고 와서 진을 따른다.

"자요. 이걸 마시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예요. 술이 저 직선들을 허물어 버릴 테니까.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건 바로 저거거든요. 모든 것이 숨막힐 듯이 너무 빈틈이 없고 똑발라서 마치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조각 속의 앨저넌처럼."

처음에는 마실 생각이 없었지만, 기분이 너무 침울해서 좀 마셔도 괜찮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상황을 악화시킬 리는 없고, 내 행위를 이해하지 모하는 누에 의해 자신이 보여지고 있다는 의식도 둔해질지도 모른다.

그녀는 나를 취하게 만들고 말았다. 218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지적으로는 계속 성장하는 한편으로, 감정적으로는 어린 찰리 그대로였소. 227

 

내가 작곡한 첫번째 피아노 협주곡을 페이에게 바쳤다. 그녀는 자신에게 헌정되었다는 것으로 흥분했지만, 곡이 마음에 들지는 않아 하는 것 같았다. 한 여자에게 모든 것을 바랄 수는 없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일부다처제를 주장할 이유가 또 한 가지 늘었다. 238

 

"저 안에는 뭐가 있나?"

"냉동고와 소각로." 그는 육중한 문을 열고 불을 켰다.

"표본을 소각로에서 처리하기 전에 동결하는걸세. 부패를 방지하면 악취를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되지." 그는 발길을 돌리려 했지만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앨저넌은 그러지 말게. 그러니까.... 만약.... 그때는 .... 즉 그를 이 안에 던져 넣지 말아달라는 걸세. 나에게 주지 않겠나? 내가 처리할 테니까."

그는 웃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243

 

며칠 동안 나는 심리학 서적에 몰두했다. 임상심리학, 성격심리학, 심리측정학, 학습심리학, 실험심리학, 동물심리학, 생기심리학, 행동주의학파, 게슈탈트학파, 정신분석학파, 기능주의파, 역동론파, 유기체론파 등등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학설과 학파 사상체계를 독파했다. 우려되는 것은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지능과 기억, 학습에 대해 믿음을 두고 있는 학설의 대부분은 모두 이러이러하기를 바란다는 희망적 사고라는 것이다. 247

 

그 중에서 그래도 지능이 높은 사람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어요. 그들은 나간 지 1주일 정도 지나면 대부분 다시 돌아옵니다. 바깥 세상에서는 있을 곳이 아무 데도 없다는 걸 알게 되면요. 세상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곧 깨닫게 되는 거죠. 250

 

"이 아이들은 마, 말수가 적은 편이지요." 그는 내 무언의 질문을 느낀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 농아들입니다."

"이곳에 106명 있습니다." 윈슬로가 보충설명을 했다.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아 특별히 연구하는 아이들이지요."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보통 사람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것 없는 걱만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인가! 정신지체에 귀머거리이고 벙어리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열심히 벤치를 갈고 닦고 있다. 254

 

"돈이나 물질을 주는 사람은 많지만 시간과 애정을 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256

 

워렌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차가운 잿빛 느낌, 체념이 나를 에워쌌다. 체념. 재활이라든가 치료, 또는 그런 사람들을 세상으로 복귀시키는 데 대한 얘기는 한 마디도 없었다. 희망을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받은 인상은 살아있는 시체같다는 느낌이었고, 더 나쁘게 말하면 완전히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모른다는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시든 영혼이 나날의 시공을 그저 응시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는 것이다. 257

 

나는 당신들이 간과한 한 가지를 깨달았어요. 인간적인 애정의 뒷받침이 없는 지능과 교육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말이오...

지능은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자질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지식을 구하는 마음이 애정을 구하는 마음을 배제해 버리는 일이 너무 많아요. 이건 극히 최근에 발견한 건데, 나는 이것을 하나의 가설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즉 애정을 주고 받는 능력이 없는 지능은 정신적, 도덕적인 붕괴를 초래하고, 신경증 내지는 정신병까지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중심적인 목적에서 그 자체에 흡수되어 그 자체에 관여할 뿐인 마음, 인간관계를 배제하는 마음은 폭력과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거지요. 277-278

 

그녀에게(엄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 그녀 자신보다 가족보다 먼저 이웃의 평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옳다고 생각했다. 인생에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보다 주요한 것이 있다고 아버지는 이따금 설교했다.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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