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자의 노래 - 함석헌 선생 주석의 <바가바드 기타> - 이거룡

<바가바드 기타>는 언제나 서민 대중의 삶 속에서 호흡해온, 대중들의 경전이다.  21

<바가바드 기타>는 쿠루스셰트라 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무대로 한다. 하스티나푸라(Hastinapura)에 자리잡은 쿠루족의 두 형제 가문 즉 카우라바(Kaurava) 형제들과 판다바(Pandava) 형제들이 쿠루크셰트라 들판 양편에 군대를 대치시키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살육전을 벌이려는 극적인 상황에서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이 시작된다. 원래 바라타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였던 유디슈티라(Yudhisthira)가 카우라바 형제들 가운데 맏형 두료다나(Duryodhana)와 도박을 하여 그 결과로 그는 왕국을 잃고 네 형제들과 함께 13년 동안 숲속에 유배되었다. 약속한 기한이 되어 유디슈티라가 두료다나에게 자신의 왕국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거절되고 결국 두 가문 간에 전쟁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바로 이 전쟁이 벌어지려고 하는 찰나에 판다바 가문의 다섯 형제 중 셋째인 아르주나(Arjuna)와 크리슈나(Krsna) 사이에 오간 대화를 적은 것이다.
아르주나는 이 전쟁에 대한 확실한 대의 명분을 가지고 전쟁터로 나갔다. 그러나 그는 상대편 군대에서 자기 사촌들, 아저씨, 할아버지 등 혈족들을 바라보고는 고뇌에 빠진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혈족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혈족을 죽이고 왕국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숲ㅍ으로 은거하여 궁극자에 대한 명상에 몰두하는 고행자의 삶을 택하려 한다. 그때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싸우라’(ii, 18)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곧 크리슈나가 전쟁 그 자체를 옹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크리슈나는 결코 전쟁을 열망하지 않았으며, 그는 오히려 두 가문 간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항 노력하는 평화의 사절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런데 그의 역할은 카우라바 지도자들의 억지 때문에 실패했다. 싸우지 않겠다는 아르주나의 주장을 논박하는 과정에서, 크리슈나는 판다바족에 관한한 그 전쟁이 정당하다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 아르주나의 의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세속적인 관점에서 가장 설득력있는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윌는 여기서 클리슈나의 가르침이 지니는 요체가 정작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옹호가 아니라, 아르주나의 결심, 즉 싸우지 않겠다는 것이 왜 옳지 ㅇ낳은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르주나가 싸우지 않겠다는 것은 단지 그 대상이 자기의 혈족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의 사랑하는 혈족들을 죽이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겠다는 말은 일면 매우 사리에 맞는 것 같지만, 그것은 영원한 자아의 본질을 망각한 결과이며 냉철한 판단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는 무지와 이에 수반되는 격정 때문에 고뇌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가 그의 마음이 어두운 먹구름으로 가려졌으며,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없다고 고백했을 때, 크리슈나는 그에게 바른 지식을 내려 무지를 제거하려고 한다. 그 가르침은 아르주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의 고뇌를 다루는 가운데, 크리슈나는 모든 인류의 선을 위하여 <바가바드기타>를 설한다.
‘싸우라’는 표현에 대하여 샹카라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전쟁을 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슬픔과 미혹으로 생겨난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촉구일 뿐이다. 자아란 육체적 생사를 초월한다는 것과 누구난 자기 신분에 주어진 사회적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설정된 상황이 바로 전쟁이다.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은 슬픔과 미혹과 같은 상사라의 원인을 제거하자는 것이지 결코 전쟁을 명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바가바드기타>의 쿠루크셰트라 전쟁은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모순을 나타내는 인간 내면의 전쟁이다.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이 전쟁이라는 극한 상항에 놓인 아르주나의 고뇌로 시작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쟁은 죽거나 죽여야 하는, 생명이 무참히 살해되는 인간의 극한 상황이다.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은 먼저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고뇌하는 아르주나의 내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아르주나는 내면의 싸움에서 미혹에 눈 멀고 두려움에 떠는 모든 사람을 대변한다.
이어서 설해지는 가르침이 더욱 매혹적인 것은, 그것이 아르주나의 내면의 큰 위기를 나타내는 전쟁이라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 설정되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상황 속엣 여실하게 드러나는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철저한 고뇌가 있기 때문에 참다운 철학이 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위기 상황에서 정확히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 삶 가운데 문득 찾아오는 중대한 위기 상황은 우리위 마음속에 궁극적인 가치에 대한 생각을 자극한다. 오직 그때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감각의 장애를 깨부수고 내적인 실재에 닿는 데 필수적인 긴장을 얻게 된다.
아르주나의 낙심은 단지 실망한 사람의 일시적인 기분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비실재성을 일깨우는 공허감, 가슴속에 느껴지는 일종의 죽음 상태이다. 아르주나는 만일 필요하다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작오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옳은지 모른다. 그는 전율스런 시험에 직면하였으며, 감당하기 어려운 고뇌가 그를 뒤흔든다. 아르주나가 마주치는 절망감은 문득 깨달음의 길에 꼭 지나야 할 영혼의 어두운 밤이다.
이처럼 <바가바드기타>는 전쟁 그 자체보다는 이를 통하여 내면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순과 갈등을 다루고 있다. 영혼의 삶은 쿠루크셰트라의 전쟁터로 상징되며, 카우라바족은 영혼의 진전을 방해하는 적이다. 아르주나는 시험을 물리치고 감정을 제어하ㅏ여 인간의 왕국을 되찾으려고 시도한다. 전진의 길은 고통과 자기 극기를 통해서 가능하다. 내면의 삶에 대한 추구는 “사지가 주저않고, 입은 바싹타며, 전율이 내 몸을 휩싸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아르주나의 고뇌를 요한다. 이어지는 크리슈나의 가르침 - 참된 자아에 대한 - 이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아르주나의 철저한 고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가바드기타>의 시작은 갈등과 모순, 이기심, 악마의 부드러운 속삭임이 교차하는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크리슈나와 아르주나의 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우리가 듣는 것은 전쟁의 아비규환이 아닌 신과 인간 간의 진지한 교감을 보게 된다. 전차는 고요한 명상의 자리가 되고, 가식의 목소리가 잠잠해진 전쟁터는 오히려 참된 진리에 대한 사색을 위한 적합한 장소가 되는 것을 느낀다.  29-32

<바가바드기타>에 따르면, <베다>의 제의식은 욕망에 사로잡힌 무지한 자들의 생각이며(vii, 20), 단지 덧없는 결과를 가져올 뿐(xi, 21), 이를 토애서는 신의 참된 본질이 알려지지 않는다.(xi, 48) 이에 대하여 <바가바드기타>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를 거듭 강조한다.  34

<바가바드기타>는 범신론(汎神, pantheism)이라기보다는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적인 성격이 강하다. 다시 말하여, <바가바드기타>는 모든 것이 신이라는 주장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모든 것이 신 속에 있다고 말한다.  36

<바가바드기타>에서 현저해지는 권화(勸化, avatara)의 이론은 인간에 대한 신의 자비를 웅변적으로 말한다. 만일 신이 인간의 구제자라면, 그는 악의 힘이 인간의 가치를 말살하려 할 때면 언제나 스스로를 현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의가 쇠하고 불의가 성할 때마다, 오, 바라타의 자손이여, 나는 자신을 나타낸다.”(iv, 7) 권화는 인간속에 신의 하강인 동시에 인간의 영적인 본성과 잠재된 신성의 증명이다. 궁극적인 의미로 볼 때, 모든 의식적인 존재는 비록 그것이 가려지고 부분적이라 해도 신의 하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바가바드기타>가 모든 인간 속에 신의 내재를 바다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은 모든 존재의 가슴속에 살고 있으며, 무지의 장막이 걷힐 때 우리는 신의 음성을 듣고 신의 빛을 맞이하며, 신의 권능으로 행한다. 체화된 인간 의식은 불생 불멸의 영원자 속으로 들리워진다. “구다케샤여, 나는 모든 존재들의 중심에 자리잡은 자아이며, 나는 모든 존재들의 시초요 중간이요 또 종말이다.”(x, 20)  38

<바가바드기타>의 사상은 여러 가지 점에서 불교와 공통점을 지닌다. <기타> ii. 55~72에서 언급되는 아힝사(ahimsa)와 고해은 그것이 바라문교보다는 불교 혹은 자이나교와 유사한 정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바가바드기타> xvii.5~6에서 극단적인 자기 고행을 비난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 강도의 차이는 있다 할지라도 <바가바드기타>와 불교는 공히 베다의 절대적인 권위를 부정하며, 경직된 카스트제도를 완화시키려는 시도를 보인다. <바가바드기타>에서 강조하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niskamakarma)도 궁극적으로는 불교의 무소유와 통한다. <바가바드기타>의 이상적인 인간 스티타프라갸(sthitaprajna)는 불교의 아라한이나 보살을 연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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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디야야는 <바가바드기타>에 붓다 혹은 불교에 대한 어떤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불교에 대한 간접적인 시사가 있다고 믿는다. 그는 <우파니샤드>에는 없지만 불교에는 있는 용어들이 <바가바드기타>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40

<바가바드기타>와 불교 간의 차이점 또한 적지 않다. 불교는 출가 수행을 이상적인 것으로 보지만, <바가바드기타>는 바라문교의 아슈라마(asrama) 전통을 받아들여 인생을 학생기(學生期, brahmacarya), 가주기(家住期, grhasta), 임서기(林棲期, vanaprastha), 유행기(遊行期, sannyasa)의 네 과정을 따르는 것을 이상적인 삶으로 여긴다. ..
불교가 인간의 해탈에 있어서 자력을 위주로 한다면, <기타>는 타력에 의한 구원 가능성을 믿는다. 흔히 <바가바드기타> 7백 구절의 요약으로 일컬어지는 xviii. 66은 극단적인 형태의 귀의 신앙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모든 의무를 다 버리고 오직 나에게 귀의하라. 내가 그대를 모든 악에서 건져주리니 슬퍼하지 말라.” 이런 이유로 로린서는 <바가바드기타>의 주요 개념들이 기독교의 신약 성경에서 차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41

<바가바드기타> 각 장의 말미에는 이 경전이 브라흐만, 즉 궁극적 실재에 대한 가르침(brahmavidya)일 뿐 아니라, 요가를 설하는 경전(yoga-sastra)이라고 말한다. 궁극적 실재를 가르칠 뿐 아니라, 여기에 이르는 길(marga), 즉 요가를 설한다는 것이다.  42

<바가바드기타>에서 요가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새겨지지만, 그것은 시종일관 실천적인 측면과 관련을 지닌다.  42

<바가바드기타>에서 설해지는 요가는 크게 세 가지, 즉 지식의 길(jnana yoga), 행위의 길(karma yoga), 그리고 믿음의 길(bhakti yoga)로 나누어진다.
지식의 길이라는 말은 이 길이 참된 지식을 요구한다는 것을 가리키며, 참된 지식은 영원한 것과 덧없는 것에 대한 분별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지식의 길은 이 지식이 인간 본성의 복귀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이 일단 자기의 육체나 마음, 혹은 지성조차도 참다운 자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정확히 말하여 그것을 직관적으로 꿰뚫어보면, 그는 아만(我慢, 자신을 뽐내며 남을 업신여기는 교만한 마음)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는 자기가 행위자이며 인식의 주관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버린다. 왜냐하면, 그의 참된 자아는 육체, 감각, 마음, 지성의 행위를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구도자에 의하여 이해되어야 할 요체이다.
참다운 지식은 우리가 일상적인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며, 결과에 집착함이 없이 행위하게 한다. 지식의 길의 목표는 자아 실현 혹은 범아일여(梵我一如)이다.  43

“그의 모든 일이 욕망과 이기적인 목적을 떠난 사람, 그의 행위가 지혜의 불로 타버린 사람, 지혜로운 자들은 그를 현자라 부른다.”4. 19) 그와 같은 사람은 비록 행위한다 할지라도 실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44

<바가바드기타>는 지식의 길 못지 않게 행위의 길을 강조한다. 실재에 대한 통찰이 역동적인 삶의 필요를 폐지하지 않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행위를 포기함으로써, 혹은 의무를 져버림으로써 무위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것은 미혹에 사로잡힌 것이며, 참된 길이라 할 수 없다.  44

<바가바드기타>는 행위 그 자체의 포기가 아니라,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를 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을 니스카라카르마 요가라고 한다. .. 카르마 요가는 ‘행위의 포기’(renunciation of action)가 아니라, ‘행위 속에서의 포기’(renunciation in action)를 의미한다.  44-45

니스카ㅏ카르마는 .. 단지 행위의 성패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동기에 집착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 목적을 잊어버리라는 것이지 목적을 잃어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45

믿음의 길 혹은 박티 마르가(bhakti marga)는 인격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다. ..”모든 의무를 다 버리고 오직 나에게 귀의하라. 내가 그대를 악에서 건져주리니 슬퍼하지 말라.”(xviii. 66) 인도의 여러 종교 전통 중에 비인격적인 원리에 대한 숭배의 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사람에게 있어서 이것은 쉽지 않다. 이에 비하여 인격신에 대한 숭배는 사회적 계급이나 지식 수준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따를 수 있는 대중적인 구원의 길이다. .. 현생에서는 해탈 가능성이 배제되었던 불촉천민과 여자에 대한 구원의 희망이 제시된 것도 여기이다.
지식의 길이나 행위의 길에 비하여 믿음의 길이 지니는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의 해탈에 있어서 신의 은총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46

지, 정, 의는 인간 본성의 근본이며, 지식의 길, 헌신의 길, 행위의 길은 각각 이에 상으앟는 실천행이라는 것을 알때, 이 세가지 요가가 상호보완적이며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행위릐 길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믿음의 길은 신에 대한 사심없는 봉사이다. 따라서 그것은 행위의 일종이다. 또한 앞에서 본 것처럼 사심없는 행위는 지식없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박티는 오직 참된 지식을 지닌 자에 의해서 완전히 행해질 수 있다고 해야 한다.  46-47




<바가바드기타>를 읽는 독자들에게

진리는 귀족적일 수 없습니다.  56





책을 읽기 전에

<바가바드기타>는 글자대로 하면 신의 노래라는 뜻인데 힌두교에서는 <스루티(Sruti)> 곧 신이 직접 인간에게 계시해 준 경전으로는 알지 않고, <스므리티(Smriti)> 곧 화신이나 성자, 예언자가 경전에 대해 주를 달아서 한 가르침으로 안다.  62

인도의 사상과 지도자의 정신적 취사(趣舍 달릴 취 집 사)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것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63

<기타>안의 대화에는 네 사람이 말을 하고 있다. 드리타라슈트라 왕, 산자야(sanjaya), 아르주나, 크리슈나다.
드리타라슈트라는 소경이었다. 전설로 전해 오는 말에 <기타>의 저자라고 하는 서자 브야사(Vyasa)가 왕에게 쿠루크셰트라의 싸움을 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해주마 하는 것을 왕은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친족의 죽음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브야사는 드리타라슈트라의 신하요 마부인 산자야에게 뚫어봄 뚫어들음의 능력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궁중에 앉아 있으면서 산자야가 저 멀리 전장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듣는 대로 왕에게 알려주었다. 그의 입을 통해 크리슈나와 아르주나의 말은 영매적(靈媒的)으로 보도가 됐고 이따금씩 끊고 자기 자신의 설명을 첨부하기도 한다.  63

브라만을 이 우주와의 관계에서 생각할 때는 하나의 인격적인 신, 곧 이슈바라(Ishvara)라고 한다. 이슈바라는 속성을 가진 신이다.  65

이슈바라의 세 기능 혹 세 모습을 인격화하여, 브라마(Brahma)와 비슈누와 시바(Shiva)라 부른다.  66

브라만의 능력은 모든 마음과 물질의 근본이다. 그것을 프라크리티(prakriti) 혹은 마야(maya)라고 한다.  67

힌두교는 크리슈나, 부처, 예수를 포함해서  많은 화신을 믿는 것을 용납하고 또 앞으로도 많이 있을 것을 예상한다.  67

프라크리티는 구나(gunas)라는 세 가지의 힘(性)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사트바(sattva, 善性)와 라자스(rajas, 動性)와 타마스(tamas, 暗性)다. ‘브라마의 밤’, 곧 가능성의 시대 동안은 이들 ‘성’들은 온전히 균형을 이루어 있으므로 프라크리티는 아무 요동이 없이 가만있다. 창조는 이 균형이 깨지는 데서 나온다. ..
물질계에서는 선성은 모든 순수하고 고운 것을 나타내고, 동성은 날쌘 것을, 암성은 굳고 맞서는 것을 나타낸다. 어떤 것 속에나 세 상은 다 들어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중 하나가 지배적이다. ..
성은 또 어떤 물건이 진화의 어느 단계에 있는가를 표시하기도 한다. 선성은 실현될 형태의 본질이고, 암성은 그 실현에 대해 속에 들어 있는 장애고, 동성은 그 장애를 물리치고 그 본질을 드러나게 하는 힘이다.
사람의 마음에서는 선성은 심리적으로 침착, 정결, 평온을 드러내고, 동성은 열정, 불안정, 도전적 활동을 나타내고, 암성은 우둔, 게으름, 타성적임을 나타낸다. .. 사람은 그 행동, 사상, 생활 양식에 따라 그중 어떤 성도 배양해 낼 수가 있다.  68-69

프라크리티에서 나와서 천차만별의 만물에 이르는 진화의 과정을 더듬으려면 우리는 개인 지성의 근본이 되는 마하트(mahat)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 다음은 물체를 식별 분류하는 힘인 부디(buddhi), 그 다음은 아함카라(ahamkara) 곧 자기 감각이요, 아함카라는 세 가지 기능으로 갈린다.
마나스(manas), 이것은 감각에서 오는 인상을 받아 그것을 부디로 보낸다.
감각의 5관(五官)인 눈, 귀, 코, 혀, 몸과 행동의 5기(五器)인 손, 발, 혀, 생식기, 배설기
다섯 탄마트라(tanmatras) 즉 빛, 소리, 냄새, 맛, 촉각의 본질이 되는 것, 이 기묘한 탄마트라들이 서로 얽히고 다시 얽혀서 소위 5대(五大)라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을 낳는데 이것으로 이 영원한 우주는 이루어져 있다.  69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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