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문 연습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우리는 모눈종이, 연필 커다란 노트를 가지고 부어의 식탁에 앉는다. 우리 둘뿐이다.
둘 중 하나가 말한다.
“네 작문 제목은 ‘할머니 집에도다’야.”
그러면 다른 하나가 다시 말한다.
“네 작문 제목은 ‘우리의 노동’이고.”
우리는 쓰기 시작한다. 종이 두 장에다 두 시간 동안 그 주제로 작문을 한다.
두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서로의 글을 바꿔서 본다, 사전을 찾아가며 상대방의 철자법 틀린 것을 고쳐주고, 끄트머리에는 ‘잘했음’ 또는 ‘잘못했음’ 따위의 평가를 써준다. ‘잘못했음’을 받은 작문은 불 속에 던져버리고, 다음번 작문시간에 같은 주제를 다시 다루게 된다. ‘잘했음’일 경우, 우리는 그 작문 내용을 커다란 작문 노트에 다시 옮겨 적는다.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와 비슷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겐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번병은 친절하다’라고 쓴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당번병이 우리가 모르는 심술궂은 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라서 우리는 이렇게만 써야 한다. 당번병은 우리에게 모포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또한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라고 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단어는 뜻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다. ‘호두를 좋아한다’와 ‘엄마를 좋아한다’는 같은 의미일 수가 없다. 첫 번째 문장은 입 안에서의 쾌감을 말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감정을 나타낸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생각에 깊이 빠지기 시작하면, 인생을 사랑할 수 없어.”


작품해설 중에

글 쓰는 행위/나의 경우, 글쓰기는 하나의 습관이다.

완성된 작품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쓰는 행위를 정신분석과 같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을 때 거기에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하나의 속임수이다. 쓰면 쓸수록 병은 더 깊어진다 쓴다는 것은 자살 행위이다. 나는 쓰는 것 이외에는 흥미가 없다. 나는 작품이 출판되지 못하더라도 계속 쓸 것이다. 쓰지 않으면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쓰지 않으면 따분하다.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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