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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5.30 여행 없는 여행 - 마고캐런 가지 2020 03810
  2. 2022.05.23 착한 소비는 없다 - 최원형 자연과생태 2020 03330
  3. 2022.05.16 은둔기계 - 김홍중 문학동네 2020 03810
  4. 2022.05.09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 - 프리드리히 니체 책세상
  5. 2022.05.02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 프리드리히 니체 책세상 04160
  6. 2022.04.25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 김누리 해냄 2020 03330
  7. 2022.04.18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 류시화 더숲 2019 03810
  8. 2022.04.11 사소한 부탁 - 황현산 난다 2018 03810
  9. 2022.04.04 선량한 차별주의자 - 김지혜 2019 창비 03300
  10. 2022.03.28 밤이 선생이다 - 황현산 문학동네 2013 03810
  11. 2022.03.21 혼자가 혼자에게 - 이병률 달 2019 e-book
  12. 2022.03.14 누리보듬 홈스쿨 - 한진희 비전팩토리 2019 15590 e-book
  13. 2022.03.07 홈스쿨대디 - 김용성 소나무 2019 03810
  14. 2022.02.28 홈스쿨링, 하루 5시간이면 충분하다 - 김재민 파람북 2019 03370
  15. 2022.02.21 히피 - 파울로 코엘료 문학동네 e-book
  16. 2022.02.17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 백범 김구
  17. 2022.02.14 학교는 하루도 다니지 않았지만 - 임하영 천년의상상 2017 03810
  18. 2022.02.07 사진의 용도 - 아니 에르노 마크 마리 1984books 2018 e-book
  19. 2022.01.31 내 하루도 에세이가 될까요 - 이하루 상상출판 e-book
  20. 2022.01.24 여행의 이유 - 김영하 문학동네 e-book
  21. 2022.01.24 아이 마음에 상처 주지 않는 습관 - 이다랑(그로잉맘) 길벗 e-book
  22. 2022.01.17 폭력과 정의 - 안경환 김성곤 김영사 2019 04810
  23. 2022.01.10 나만 알고싶은 유럽 TOP10 - 정여울 e-book
  24. 2022.01.03 잘 지내나요 내 인생 - 최갑수 보다북스 2020 03810
  25. 2021.12.27 밤의 공항에서 - 최갑수 보다북스 2019 03810
  26. 2021.12.20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 채사장 웨일북 e-book
  27. 2021.12.13 나목 - 박완서
  28. 2021.12.06 존엄하게 산다는 것 - 게랄트 휘터 e-book
  29. 2021.11.29 여행의 기쁨(느리게 걸을수록 세상은 커진다) - 실뱅 테송 e-book
  30. 2021.11.22 어떻게 살 것인가 - 유시민 e-book




프롤로그
책을 쓰면서 생각했다. 여행을 멈추었을 때도 행복할 수 있는 여행이 진짜 여행이라는 것을.  10

인도에서 여행자로 살면서 고집을 부리거나 욕심을 내는 건 어리석다. 이방인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현지인들의 눈빛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26

내 감정의 온도가 여행의 온도는 아니다.
여행의 속도가 여행의 온도를 달구는 것도 아니다.
이제 나는 이동수단에도 목적지에도 관심이 없다.
그저 내 가슴이 다시 뜨거워지거나 영혼이 치유되는 여행, 느린 여행이라도 진짜 나를 위한 여행을 하고 싶다.  54, 78

가짜인 나를 벗고 진짜인 나를 만나려면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 여행은 떠난다는 의미에서 보면 이동이고, 머문다는 의미에서 보면 공간이다.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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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이스터섬은 과거일까, 미래일까

오늘만 살 것처럼 소비하는 삶에 큰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6



1 상품 소비

에드워드 흄스는 그의 책 <배송 추적>에서 커피 하나의 이동 경로를 추적해보니 4만 8,000킬로미터가 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쓰는 물건 하나하나가 이동한 거리는 대체 얼마일 것이며, 그 거리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탄소가 배출됐을까요? 이러니 물건 소비는 단순히 물건만을 소비하는 일일 수가 없는 거지요. 물건 뒤에 가려진 수많은 것을 동시에 소비하고 또 배출하게 되는 겁니다.  25

그린피스(GREENPEACE)에 따르면 청바지 한 벌을 만드는 데에 물이 약 7,000리터, 티셔츠 한 장에는 약 2,700리터가 쓰입니다.  29

의류 산업은 반(反) 환경 산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 오염이 상당합니다.  31

디지털 영역에서 발생하는 이상화탄소 양을 디지털 탄소 발자국이라 부릅니다.  48

소비에도 격이 있습니다. 어떤 소비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만큼 내 삶의 격도 올라갈 것입니다.  67


2 에너지소비

201년 1월 5일 세계 153개국 과학자 1만 1,258명은 지구가 기후 비상사태에 직면하고 있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86

최근 유럽에서는 비행기 여행을 줄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대표저거인 것인 플뤼그스캄(flygskam)입니다. 플뤼그스캄은 스웨덴어로 ‘비행기 여행의 부끄러움’이라는 뜻입니다.  98

플뤼그스캄과 뜻이 같은 단어(핀란드어로 렌토하페어(lentohapea), 독일어로 플루크샴(flgscham), 네덜란드어로 빌릭삼크(vliegsxhaamte)는모두 ‘비행기 여행의 부끄러움’을 뜻하는 단어들)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 내 자유가 우리 모두의 집인 지구에 부담이 된다면 그래서 인류 생존을 위협하는 데에 가세한다면, 그 자유를 누리는 방식에 대해 한번쯤 재고해 봐야 합니다.  99

화장실 없는 집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계속 요강 개수만 늘리는 개 아니라 집을 폐쇄하는 것입니다.  105

세계에너지기구(IEA)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19년 8월 기준 전 세계 재생 에너지는 전체 전력 생산량의 42%를 차지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4.8%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 가입국 가운데 꼴찌입니다. 심지어 36위인 헝가리도 11.7%입니다.  120


3 마음소비

오존층에 뚫린 구멍을 발견해 1995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네덜란드 대기 화학자 파울 크뤼첸은 2000년 멕시코에서 열린 기후 환경 관련 국제회의에서 인류세를 언급했습니다. 현재 지질 시대를 더 이상 홀로세가 아닌 인류세로 바꿔 불러야 한다는 크뤼첸의 언급 이후 인류세는 국제적인 유행어가 됐습니다. 인류는 대체 어떻게 지구 환경을 변화시켰기에 지질 시대 이름까지 인류세로 바꿔야 한다는 걸까요? 지질 시대마다 각 시대를 규정하는 명확한 단서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를 규정짓는 단서는 뭘까요? 인류가 지층에 남길 단서로 방사성 핵종, 콘크리트, 플라스틱, 질소 비료가 등장하면서 엄청나게 많이 쓰인 질소를 꼽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영국 레스터대 지질학자인 캐리스 베넷을 비롯한 국제 연구진이 한 과학 저널에 밝힌 ‘닭 뼈’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가장 많이 먹는 동물 1위가 닭이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수백 억 마리 닭에서 나온 뼈가 매립지에 쌓이면서 화석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먹는 닭은 야생 닭과는 크게 다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먹는 닭은 야생 닭과는 크게 다릅니다. 1950년대 이후 빨리, 크게 자라도록 육종해 온 결과입니다. 보통 진화는 수백만년에 걸쳐 서서히 이뤄지는데 불과 60-70년 만에 생물의 유전자까지 바꾸는 진화를 이뤘습니다, 인류가 . 먼 훗날 인류보다 고등한 생물이 지구 지층에서 닭뼈를 발견하면 그들은 닭의 진화 속도에 놀랄까요? 어쩌면 정말 지구 행성을 닭이 지배했다고 믿을 수도 있겠습니다.
닭은 좁은 케이지에 갇혀 24시간 훤히 불 밝힌 곳에서 밤낮 없이 알을 낳습니다. 그러다가 알을 못 낳게 되면 폐계가 돼 닭장 바깥으로 밀려납니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외출입니다. 케이지에 갇힌 닭은 흙을 밟을 수 없으니 흙 목욕을 하며 깃털에 기생하는 진드기를 떼어 낼 수 없습니다. 할 수 없이 농가에서는 살충제를 뿌립니다. 동물 본능과 습성을 억제하고 최소한의 복지나 배려도 없으며 화학 물질을 뿌려 대는 환경에서 가축이 정상적으로 성장할 리 없습니다. 그리고 가축에게 뿌려 댄 살충제는 최종적으로 우리 몸에 쌓일 것입니다. 2017년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로 3,800만 마리에 가까운 닭이 살처분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2,500만 마리 이상이 좁은 케이지에 갇혀 기계처럼 알을 낳던 산란계였습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와 구제역에 이어 2019년에 발생한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돼지뿐만 아니라 야생에 살던 멧돼지까지 사살됐습니다. 생명을 생명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닌 조밀한 공간에 대량으로 몰아넣고 오직 경제성만 따지다 병이 돌면 모조리 살처분해 버리는 이 악순환. 그런데도 우리가 호들갑 떠는 지점은 언제나 과정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생명의 존엄이 사라진 과정이 아니라 병을 옮기느냐 마느냐 하는 결과일 뿐이라는 거지요. 조류 인플루엔자나 구제역이 반복되고 먹을거리에 빨간불이 꺼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135-138

전 세계 35개국이 ‘고기 없는 월요일’에 참여하고 있고, 우리나라 역시 2010년부터 함께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도 많이 알려지진 않은 것 같아요.  140

과잉 육식 문제를 해결하려면 육식 채식을 따지기 전에 내가 먹는 음식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내 미각을 우선할 건지 내 건강을 우선할 건지 조화로운 생명의 선물을 어떤 마음으로 대할 건지 성찰하는 일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첫 걸음 아닐까요?  141

홀로세의 홀로(Holo)는 완전하다는 의미로 인류가 살기에 적합한 지질 시대라는 뜻입니다.  145

과도한 화석 연료 사용으로 배출된 온실가스가 지구를 덥히고 그 때문에 기후가 예측할 수 없이 변한다는 것까진 이제 누구나 압니다. 그런데 이 많은 화석 연료가 어디에 쓰이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보통 화석 연료를 쓰는 곳 하면 자동차나 발전소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의외로 탄소 배출이 많은데도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이 바로 먹을거리, 특히 육식입니다. 지난 50년 사이에 전 세계 육류 소비가 100배가량 늘었습니다. 가난한 나라는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니 육식 소비는 대부분 잘사는 나라에 집중됩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발표 자료에 따르면 2014년에 우리나라 1인당 육류 소비는 연간 51.4킬로그램이고 2016년에는 52.5킬로그램이었습니다. 지구에서 사육되는 소가 약 15억 마리로, 무게로 따지면 세계 인구 전체를 합틴 것보다 많이 나갑니다. 지구 전체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1/3을 가축이 먹어 없앱니다. 소고기 1킬로그램을 생산하느라 옥수수 16킬로그램, 물 1만5,000리터가 쓰입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에서 얼음이 없는 지역의 26%가 가축을 기르는 데에 쓰이고, 전체 경작지의 33%에서 가축 사료용 작물을 재배합니다. 작물을 기르고자 벌목이 이어지면서 숲이 사라졌습니다. 온전했다면 이산화탄소를 흡수했을 숲이 말이지요. 작물을 기르는 데에 들어가는 비료며 농약, 살충제는 모두 석유 화학 제품입니다. 소는 되새김질하며 생긴 메탄을 트림으로 연간 1억 톤가량 내보냅니다. 메탄은 적게 잡아도 이산화탄소 보다 20배 이상 온실 효과를 내는 물질입니다. 인류가 배출하는 탄소의 15% 정도가 축산업에서 나옵니다.
현재 인류는 그동안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아 왔던 기후를 변화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변화시킨 기후는 부메랑이 돼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146-147

지금까지 지구 온난화 재난은 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 혁명 이전보다 겨우 1.1도 상승하면서 발생했습니다.  152

지구 전체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 가운데 육류 생산 과정에서 배출되는 양이 무려 15% 정도에 이르기 때문에 이런 캠페인을 벌인 거지요 ... 1만 명이 단 하루만 고기를 먹지 않아도 차 한 대가 28만 8,917킬로미터를 운전할 때 나오는 양만큼 탄소를 줄일 수 있고, 한 사람이 93년간 쓰기에 충분한 물을 절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152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후 변화 인식은 상당 수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탄소 배출은 세계 7위입니다. 지식만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153

폭죽 쓰레기가 처박힌 쓰레기통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먼저, 쓰레기통은 은연중에 사람들에게 쓰레기가 영원히 사라진다는 착각을 심어 주는 것 같습니다. 쓰레기에 대한 책임이 쓰레기통에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쓰레기는 말끔히 치워질까요? 분리배출이 되지 않는 폭죽 쓰레기는 어딘가에 쌓여 있다가 유해 물질을 내뿜으며 태워질 뿐이며, 그러면서 미세 먼지를 배출합니다. 그나마 수거라도 할 수 있으니 폭죽 쓰레기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하늘로 날린 풍선은 아예 잔해를 수거할 수 없고, 바다에 떨어진 풍선 쓰레기는 사라지기는 커녕 오히려 다른 생물의 목숨을 위협합니다. 폭죽놀이를 즐기고, 풍선 이벤트에 환호하는 사람들 가운데 쓰레기의 다음 행방을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소비 사회에서는 즐거움도 물질을 소비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일, 철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가는 풍경 같은 건 더 이상 즐거움일 수 없고, 더욱 자극적이고 역동적이어야 즐겁다고 할 만한 세태인 듯해 어쩐지 씁쓸합니다.  163-164

“우리는 당신들을 환영하지 않는다.” 2016년 9월, 이탈리아 베네치아 시민들이 베네치아항으로 들어오는 대형 크루즈를 막아선 채 들고 있던 피켓에 쓰인 문구입니다. 관광으로 먹고산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도시 베네치아에서 시민들이 이런 피켓을 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베네치아에 사는 사람은 5만 5,000여 명이지만 베네치아를 찾는 관광객은 하루 평균 6만여 명, 사육제 기간에는 17만 명 가까이 이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많은 관광객이 오가다 보니 쓰레기는 넘쳐나고, 소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젠트리피케이션이 이곳에서도 벌어집니다. 치솟는 임대료 때문에 주민들이 다니던 채소 가게는 관광 상품을 파는 가게로 바뀝니다. 그러니 시민들도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던 듯합니다. 관광지가 있는 곳이라면 세계 어느 도시를 막론하고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한옥 마을로 유명한 서울 북촌 주민들 역시 넘쳐나는 관광객들로 고통을 겪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제발 오지 말라는 문구를 붙여 놓은 대문이 어렵잖게 눈에 띕니다.  167-168

크루즈 관광은 환경 친화적인 여행인 양 알려져 있지만 크루즈에 쓰이는 연료는 중유입니다. 육지에서는 유해 쓰레기로 처리되는 연료인 중유는 육지에서 주로 쓰이는 연료인 디젤보다 3,500배 많은 유황을 함유하며 지구 온난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크루즈 한 척이 하루에 대략 중요 150톤을 소비하는데 이는 자동차 수백만대와 맞먹는 대기 오염 물질을 배출하는 셈입니다.  169-170

지구 곳곳에는 다양한 종류의 무덤이 있습니다. ... 문명의 그늘을 보여 주는 한 단면입니다. 새 물건에는 너나 없이 관심을 갖지만 버려진 물건이 어디로 흘러들어 가 어떻게 되는지에는 몇이나 관심이 있을까요?   180

“우린 전부 가진 세대예요. 먹고 싶을 때 먹고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왜 우리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을까요?” (영화 <100일 동안 100가지로 100% 행복찾기> 중에서). ...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수록 우리는 내면의 균형을 잃기 쉽습니다. 물질의 가치가 삶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이 돼 버린 사회는 점점 물질적인 욕망을 추구하도록 부채질합니다. 상대와 끊임없이 비교하며 외양에 치중하도록 만들고 불안감을 추동합니다.  197

어차피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계속 제시하기 때문에 아무리 소유해도 그 소유가 내 행복을 충족시켜 줄 수가 없습니다.  198


4 자연소비

야생에서 40년을 사는 돌고래들이 한국의 수족관 시설에서는 고작 4년밖에 살지 못합니다. 굳이 알려고 들지 않으면 알 수 없고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한 돌고래의 고통은 계속될 겁니다.  204

남획뿐만 아니라 바다로 흘러드는 독성 물질이 늘어나고 각종 개발, 군사기지 건설 등으로 바다 환경이 악화되면서 해양 동물의 서식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연히 자연스런 어업은 점점 어려워지고 우리가 먹을 수산물을 양식하느라 바다는 수조로 바뀌고 있습니다.  205

해수 온도 상승으로 따뜻한 물방울인 블롭(Blob)이 증가하면서 해양 생태계 먹이 체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205

해양은 인간이 활동하며 배출하는 열의 90%를 흡수하기 때문에 날로 상승하는 해수 온도로 해양 생태계는 전방위적으로 위협을 받을 것입니다.  206

19세기 말 위싱턴의 어느 술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담배 공장 노동자였던 마빈 스톤은 어느 여름날 퇴근 후 들른 술집에서 위스키 잔에 손을 대면 술이 뜨듯해져 맛이 변하자 손을 대지 않고 마실 방법을 궁리했습니다. 속이 빈 밀짚이 떠올랐습니다. 빨대가 영어로 straw인 이유입니다. 그런데 밀짚으로 마시니 특유의 냄새 때문에 위스키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게 또 불만이었습니다. 마침 그가 다니던 담배 공장에서 담배를 말던 종이가 떠올랐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메르인도 빨대 비슷한 도구를 썼다고 하나 현대 빨대의 발명은 대개 이때로 봅니다. 빨대는 시원하고 맛난 술을 마시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됐습니다. 어찌 보면 소박한 출발이었습니다. 빨대는 종이에서 플라스틱으로 진화를 거듭하면서 쓰임은 더욱 확장됐습니다.  209

매력에 중독돼 신나게 쓰다보니 어느 순간 플라스틱은 썩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다며 육지며 할 것 없이 쌓이게 됐습니다.  210

바다 위든 아래든 가리지 않고 플라스틱이 점령한 지는 이미 오래며, 이는 곧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를 감당할 만한 여력이 지구에 더 이상 없다는 말입니다. 생명다양성재단과 영국 케임브리지대 동물학과가 공동 조사한 [한국 플라스틱 쓰레기가 해양 동물에 미치는 영향] 연구 보고서가 2019년 7월에 발표됐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에서 배출한 플라스틱 쓰레기 때문에 해마다 바닷새 5,000마리와 바다 포유류 500마리가 죽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전 세계 플라스틱 통계 자료가 있는 2010년을 기준으로 한국에서 배출한 연간 플라스틱 쓰레기 양을 추정해서 발표한 숫자입니다.  211

전 세계 플라스틱 소비는 1950년 이래 65년 동안 200배가 넘게 증가했지만 세계 평균 재활용 비율은 고작 9.5%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연간 800만 톤이며 재활용 배율은 62%라고 하지만, 이는 발전소 등에서 연료로 태우는 것까지 합친 비율입니다. 다시 제품으로 활용되는 것만 따지면 22.7%로 떨어집니다. 유럽 연합 평균이 40%인 것에 비하면 한참 낮은 수준입니다. 게다가 재활용을 하면 할수록 풉질은 떨어집니다. 그러니 재활용은 만능도 아니고 소비의 면죄부가 될수도 없습니다.  212

인간이 내보낸 열의 90%를 바다가 흡수합니다. 1초에 원자 폭탄 5개가 터지는 것과 비슷한 에너지를 우리가 날마다 배출하고 있습니다. 온도를 색으로 표현한 그래픽이 다큐멘터리 화면에 나타났습니다. 붉은색일수록 온도가 높은데 전 세계 바다가 시뻘갰습니다. 기후 변화를 늦추거나 막으려고 탄소 배출을 줄이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한겨울에 반팔을 입고서 그런 말을 합니다. 한여름에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온도가 낮은 건물 안에서, 지하철 안에서 그런 말을 합니다. 탄소 배출은 절대 말로 줄일 수 없습니다. 배출되는 탄소는 우리 삶 아주 깊숙이 그리고 아주 속속들이 연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221

빙하란 무엇일까요? 얼음덩어리 아니, 단순한 얼음덩어리 이상입니다. 빙하와 해류는 지구 기후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육상 빙하는 강의 시원이자 주변 지역의 상수원입니다. 빙하가 급속히 사라진다면 강은 메말라 갈 것이고, 그 일대는 물 부족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히말라야 빙하는 대표적인 육상 빙하입니다.  224-225

북극권에 있는 해상 빙하는 지구로 쏟아져 들어오는 태양 빛을 반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 빙하가 절반으로 줄어들면서 드러나는 바다는 열을 흡수합니다. 반사 부분은 자꾸 줄어들고 열을 흡수하는 면적은 점점 늘어납니다. 그러니 빙하가 녹는 속도는 더 빨라지고 되먹임 현상(positive feedback)도 가속화되면서 북극 빙하의 나머지 절반은 절반이 녹는 데에 걸린 30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빨리 녹을 것으로 기후학자들은 내다보고 있습니다.  225

녹아 사라지고 있는 건 땅속 얼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구 동토층이 빠르게 녹으면서 나오는 메탄가스 때문에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될 거라 과학자들은 경고합니다. 영구 동토란 지표 밑의 온도가 2년 이상 연이어 0도 이하인 토양을 일컫습니다. 북반구 지표면의 약 24%가 영구 동토층입니다.  226

동물이건 사람이건 자기에게 맞는 환경에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럽고, 그런 환경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243

일방적인 권리는 누군가에게는 폭력일 수 있습니다. 내 권리는 보호받으면서 무수한 생명의 생존권을 침해한다면 그건 공정하지 않습니다. .. 이 땅에서 유리창에 부딪혀 하루에 2만 마리, 일 년이면 적어도 800만 마리 새가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투명한 고층 빌딩, 방음벽 때문에 새가 자유로이 날아야 할 창공은 어느새 보이지 않는 덫이 됐습니다.
미국에서는 한 해에 약 3억에서 10억 마리 새가 유리창에 부딪혀 목숨을 잃습니다. 오랜 시간 쌓인 통계에 따르면 새가 목숨을 잃는 직접 원인은 첫 번째가 고양이 공격, 두 번째가 유리창 충돌입니다.  245-246

높은 곳에서도 정확히 먹잇감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시력이 좋은 새가 어째서 방음벽에 자꾸 부딪히는 걸까요? 맹금류를 제외한 대부분의 새 눈은 사람처럼 앞쪽이 아니라 양 옆에 하나씩 있습니다. 그래서 좌우를 넓게 살필 수는 있지만 거리는 잘 파악하지 못해 앞에 있는 방음벽을 쉽게 피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시력이 좋다 해도 유리를 본다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유리라는 것도 실은 창틀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 유리가 있을 거라 짐작할 뿐입니다.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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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은신처를 평등하게 분재하는 것, 은신처 속에 숨을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것, 사회의 지배적 여론과 정동으로부터 집요하게 탈주하는 것, 과잉 연결된 관계들을 해체하는 것, 인간들의 세계를 떠나 비인간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 과열된 자본주의적 삶의 형식을 벗어나는 것,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새로운 가능세계를 발명하는 것, 이것이 21세기의 새로운 은둔의 실천이다. 은둔은 이제 생존을 위한 생명의 필사적 재조립이라는 의미를 띤다. 은둔 속에서 노동하고, 생각하고, 산책하고, 읽고, 쓰고, 견디고, 저항하고, 소통하고, 창조하며 다른 무언가로 생성되어가는 이들을 나는 은둔기계라 부른다. 이 책은 은둔기계의 삶에 관한 것이다.  6


1부 은둔하는 삶

악인이 사라진 자리에서, 악인과 싸우던 선인이 새로운 악의 형태들을 발명하고 실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31

자식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인격의 바닥을 드러낸다. 비겁, 용기, 탐욕, 광기, 연민, 죄책감, 불안, 공포 혹은 아주 드물지만 자기-비움(케노시스kenosus).  36

실패한 결혼이 치명적 불행이 아닌 것은, 모든 결혼이 근본적으로 성공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37

사랑 없는 정의보다는 차라리 정의 없는 사랑을 선택할 것. 사랑으로부터 정의가 생성되는 것은 가능하지마, 정의 안에는 사랑의 씨앗이 존재하지 않는다.  37

우리가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지, 우리의 사랑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사랑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
악이 그러하듯이.  42

우리는 ‘미리’ 강건해질 수 없다. ‘미리’ 용맹해질 수도 없고, ‘미리’ 굳건할 수도 없다. ‘미리’ 생존할 수 없다. 오직 때가 닥쳐왔을 때만 그렇게 할 수 있다. 때가 오기전에, 모든 것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때는 모든 것에 존재와 질서와 가시성을 부여한다.  45

진실의 시간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니다. 그것은 ‘머지 않아’이다. 진리는 오직 머지않아 드러난다.
예언자는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발언한다. 진실은 머지않아 나타나기 때문에, 진실의 발언은 언제나 예언처럼 보인다.
우리가 쓰는 글의 참된 의미도(만에 하나 그런 것이 있다면) 머지않아 드러난다. 지금 환호하거나 비판하는 독자들이 아니라 ‘머지않아’의 독자들이 참된 독자다.
‘머지않아’를 잃는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머지않아’를 위해서 우리는 지나친 성공, 갈채, 칭찬, 환호를 누리면 안 된다. 그 향유 가능성을 전략적으로 파괴해야 한다.  50

심오한 고립, 심오한 분리, 심오한 비사회성.  55

20세기가 이상화한, 광기에 가득찬, 생산적 삶의 가치를 파상(破像 깨뜨릴파 형상상)할 것. 사회적 삶을 탈도덕화할 것.  55

도처에 은둔지가 형성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견디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서로의 살, 냄새, 얼굴, 말, 현존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시대. 인간은 서로에 대해 지쳤고, 서로를 지겨워한다. 두려워한다. 사람들 사이에 광대한 사막이 형성되었다. 그 사막은 여러 형태의 기술적 장치들에 가로질러진다. 21세기의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을 의심하고, 경계하고, 직시한다. 인간중심주의와 휴머니즘의 자명성이 파열되고 있다. 이는 병리현상이라기보다는 문명사적 변동의 한 징후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첫번째 세대다. 모더니티의 잠에서 깨어나 충혈된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는 인간이 광폭한 힘을 발휘하여 변형시켜놓은 중생(衆生, 부처의 구제 대상이 되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나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다음사전)의 고통의 극장이다. 인간의 인간성에 자기-제한을 가할 것. 인간의 인간성을 스스로 비워낼 것. 해방이 아니라 포기, 전진이 아니라 이탈, 사교가 아니라 은둔.  55-56

누구는 커피로 은둔하고, 누구는 음악으로, 누구는 산책으로, 누구는 철학으로 은둔한다. 성격으로, 질병으로, 작품으로, 광장에, 대중 속에 은둔하는 자들도 있다. SNS로 은둔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SNS로부터 은둔하는 사람도 있다. 은둔지는 발명될 수 있다. 은둔지를 구축하는 능력이 참된 창조력이다.  56

단순한 생명의 기쁨을 회복하고 싶은 자는 은둔을 꿈꾼다.  56

숨는 것은 인정받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 지금 인정받으면, 미래의 인정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것. 끝까지 인정받지 않고 버티면서, 후일 최대치의 인정을 얻겠다는 귀여운 간계.  59

탈-성장. 반핵(反核). 페미니즘. 생태주의. 포스트휴머니즘. 소박하고 단순한 삶. 비거니즘. 지나친 생산과 이동의 포기. 독신주의. 열린 영성.  20세기적 상상력과의 결별. 신유물론. 61

과도한 연걸, 과도한 생산, 과도한 소통, 과도한 소비, 과도한 학습, 과도한 경쟁, 과도한 활동, 과도한 이동, 과도한 여행, 과도한 존재, 과도한 체험, 과도한 섭취, 과도한 존재로부터의 이탈. 덜 움직이고, 덜 먹고, 덜 소비하고, 덜 벌고, 덜 생각하고, 덜 쓰고, 덜 일하고, 덜 만나고, 덜 경쟁하고, 덜 여행하고, 덜 가르치고, 덜 배우고, 덜 제작하고, 덜 존재하기. 덜 있을 수 있는 능력. 코나투스의 자기-제한. 61
(라틴어 Conatus, 사물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고 스스로를 계속 높이려는 경향을 말한다)

은둔기계는 겁쟁이다. 그는 지배를 두려워하고, 상처를 두려워하고, 폭력을 두려워하고, 갈등을 두려워하고, 오해를 두려워하고, 감염을 두려워하고, 관계를 두려워한다. 그는 의(義)를 말하지 않는다.  (그가 의를 말하는 매우 드문 순간에도 그는 결코 대의를 말하지 않고 오직 소의(小義)만을 말할 것이다.) 우유부단하고,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적이다. 소심하며, 잡스럽다. 그것을 숨기지 못한다. 숨기려 하지만 언제나 쉽게 발각된다. 이 모든 약점들이 그의 힘이다.  62-63

은둔기계는 세계를 바꾸거나, 계몽하거나, 비판하려는 열정이 없다. 그는 오히려 세계를 두려워한다. 세계 위에 서지 않는다. 그는 세계의 무서운 힘을 잘 알고 있다. 은둔기계는 지사(志士 뜻지 선비사)가 아니며 선비도 아니고 열사도 아니다. 그는 생존주의자다. 그는 도망치면서라도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생존은 그에게 지상의 가치다. 다만, 그 지상성(至上性 이를지 윗상 성품성)은 신중하게 은폐되어 있다.  65

은둔기계는 자신의 물러남을 책임진다. 물러난 자들은 대개 모든 것을 비판할 수 있는 자리에 선다는 착각을 하기 쉽다. 이러한 인식은 관객성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 된다는 것은 물러남을 통해 무대의 권리를 내려놓는 것이다. 무대는 언제나 객석보다 더 위대하다. 물러나는 것은 무대로부터의 물러남이며, 그리하여 물러난 자는 자신의 하찮아짐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물러남의 윤리다.  66-67

부재하는 무언가를 현존시키는 것이 상상이라면, 현존하는 것의 공성(空性 ‘진여’의 다른이름. 우주 만유의 보편한 본체로서, 현실적이며 평등무차별한 절대의 진리)을 직관하거나 체험하는 것이 파상이다.  72

파상은 자기-비움의 체험이다.  75

파상 이후, 우리는 은둔기계가 된다.  78

비운다는 말은 그리스어 동사 ‘케노오(kenoo)’이며, 영어로 ‘emptrying’ 혹은
‘making empty’로 번역된다. 그리스어 케노시스(kenosis)는 한자로 자기-비허(卑虛 낮을비 힐허)’, 한글로는 대개 ‘자기-비움’으로 번역된다.  84

중독은 반복에 대한 사랑이다.  95

산책은 걸음으로 선을 긋는 행위다. 바로보는 것은 눈으로 선을 긋는 것이며, 생각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알 수 없는 어딘가에 선을 긋는 것이다. 세계는 선들로 구성되어 있다.  99

사람들은 각자의 막(膜) 속에 산다. 보이지 않는 캡슐이 사람들을 두르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막을 유지하고, 그것이 파손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 악수할 때, 손의 막은 다른 손의 막을 더듬는다. 키스나 성교 속에서 한 인간의 막은 다른 인간의 막과 가장 가깝게 밀착한다. 하지만, 막은 찢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막에 갇혀 있다. 오해, 증오, 불신, 혐오, 경멸이 오갈 때, 불쾌하고 자극적인 스파크가 일어난다. 막과 막 사이에는 무수한 것들이 흘러다닌다. 그런데 이 흐름은 아무에게도 인지 되지 않는다.  103

속도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곳에서 부패가 시작된다. 속도는 연결에서 생긴다. 이동은 연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104

어디가 가려운지 알지 못하면서 피가 날 때까지 아무 곳이나 마구 긁어대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111


2부 글쓰기에 대하여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나쁜 글을 쓰지 않아야 한다. 나쁜 글을 ‘쓰지 않는 것’이 좋은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어렵다. 무언가를 ‘쓰지 않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무언가를 ‘쓰는 법’도 알지 못한다.  115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글을 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문제는 글쓰기 테크닉이 아니라 주체성이다. 무엇이 당신을 휘감고 있는 소용돌이인가? 당신을 통해 말하는 자(것)들은 누구(무엇)인가?  115

좋은 글은 심지어 역겹다. 생명력으로 범람하기 때문이다. 생명은 다른 생명을 탈취하는 잔혹성을 갖고 있다. 좋은 글을 그 잔혹성에 닿아 있다. 진리를 드러내거나 인식을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진실로 간주되어온 것을 무너뜨리고 뭉개버리는 것이다. 생명의 힘에 걸려 진리는 추악한 표정으로 일그러진다.  117

진실을 말하려 하지 말고 진실의 기준을 바꾸라.  117

쓰인 적조차 없거나, 쓰였지만 발표되지 않았거나, 발표되었으니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그런 글이 좋은 글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좋은 글은 무언가를 전달하는 글이 아니라 전달 가능성을 창조하는 글이다.  122

가장 명확한 인정의 증거는 질투이다. 당신의 글이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면, 당신은 이미 인정받은 것이다.  123

반드시 사용하지 않기로 정해놓은 단어들의 목록을 갖고 있어야 한다.  124

비판은 우리 시대 교육의 낡고 비생산적인 관행이다.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나오는 상품처럼, 자동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식상하고 무례한 말들이 비판으로 오인되고 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모든 언술의 결론을 차지하게 된 저 습관적인 공격.  125

뛰어난 비판자는 타인의 작품이나 인격에 흠집을 내고, 생채기를 내고, 피를 흘리게 하지 않는다. 대상을 모욕하지 않는다. 대신 대상이 미처 달성하지 못한 잠재적 세계를 재창조하여 보여준다. 이를 통해 작가와 잡품은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벤야민이 말한 것처럼, 비판의 대상은 ‘타격’이 아니라 차라리 ‘소각’의 대상이다. 대상에 벼락을 때려 전소시켜보리고 불타고 남은 자리에서 사리를 줍는 것이다. 비판자는 대상의 정수(精髓)를 구제하여 제시한다. 이런 비판을 받는 행운을 누리는 자는, 분노가 아닌 부끄러움과 용기를 동시에 느낀다.  126

건조하고 단순하지 않으면 삶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다.  129

의미는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체감된다. 의미를 느끼는 기관은 뇌가 아니라 피부, 살, 뼈, 내장이다. 의미는 우리를 때리고, 우리에게 통증과 쾌감을 준다.  129

단 한 번이라도 시인인 적 있는 사람은, 시가 아닌 문장을 쓸 때 어려움을 느낀다.  130

학문 세계에는 언제나 소수의 앞선 자들이 있고 다수의 뒤진 자들이 있다. 세상이 앞선 자들의 비시대적 통찰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진화한 이후에야 비로소 뒤진 자들은 아무런 저항이나 어려움 없이, 마치 오래전부터 불운했던 선구자들을 이해해온 것처럼, 그들의 지식을 섭취하고 선전하고 찬양하고 소비한다. 그러나 뒤늦은 자들이 뒤늦은 지식을 전파하는 데 열심인 동안, 소수의 앞선 자들은 이미 또다른 세계로 걸어가버렸다는 것.  159

어떤 사회도 충분히 적대하고 있지 못하며, 어떤 사회도 충분히 통합되어 있지 못하다.  159

사회는 꿈이다. 사회 속에서 어느 누구도 모방과 암시를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믿지 않는 그것을 믿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그것을 옳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혐오하는 것을 혐오하지 않음을 밝히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159-160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사교가 아니라 따뜻한 친교다. 사회의 익명성과 억압, 그리고 사회생활에 내재하는 긴장과 고통에 대한 해독제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부담 없는 관계에서 온다.  160

헐벗은 자가 아직 헐벗지 않은 자에게 하는 말은 단상처럼 들린다. 헐벗지 않은 자는, 오직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자신도 헐벗은 이후에야 비로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188

취하면 단상을 쓰지 못한다. 술에도, 기분에도, 감각에도, 자아에도, 세계에도 도취하지 않아야 한다. 명정해야 한다.  188

단상의 생산은 기계적이다. 카메라가 풍경을 끊어내듯, 프레스 기계가 철판을 찍어내듯, 메스가 피부를 절개하듯, 그렇게 하나의 문장이 잘려나온다. 단상은 반-유기적이다.  189

실패한 단상은 꼰대의 훈계이거나 애송이의 트윗이다. 헐벗지 않은 자가 쓰는 단상은 실패한 단상이다. ‘무엇’을 쓰느냐보다 ‘누가’ 쓰느냐가 더 중요한 이유가 이것이다. 단상은 충만하고 풍요로운 정신으로는 쓸 수 없다. 오만하거나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단상에 실패한다.  189

꼰대도 애송이도 단상을 쓸 수 없다. 양자 모두 자신은 헐벗지 않은 채 타인을 헐벗기려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헐벗을 때, 주관이 헐벗을 때, 자아가 헐벗을 때, 문장이, 표현력이, 욕망이 헐벗을 때 단상이 가능하다.  189

객관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오만한 만큼이나, 주관을 정의의 원천으로 내세우는 것은 사악하다.  190

단상은 읍소도 고발도 비판도 아첨도 신음도 엄살도 과장도 아니다. 단상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타자가 사라지면 곧바로 허물어지는 그런 언어가 아니다. 단상은 듣는 자가 ‘아직’ 없을때 행해지는 말이다. 타자의 부재는 단상의 조건이다. 단상 속에서 말은 그 빈약함과 가난함과 헐벗음 속에서도, 꼿꼿함을 상실하지 않는다. 그것이 단상의 자존심이다.  190-191


3부 난류 속으로

인류학자 에두아르도 콘은 아마존 숲에서 ‘인간이 재규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라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재규어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라는 점을 지적한다. 숲은 생존 공간이다. 거기서 우리는 다른 존재자들과의 위험하고, 물질적이고, 해석학적인 관계를 갖는다. 인간만이 자기(self)인것이 아니다.  197

숲에서, 모든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들이 발산하는 기호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다. 인간만이 언어를 갖고, 비인간 세계는 언어가 없는 죽은 물질의 세계라는 착각을 하는 자는 아마존 숲에서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물, 공기, 바람, 흙, 곤충, 식물, 작은 동물, 큰 동물, 날씨, 습도, 정령(spirit), 사자(死者)는 모두 자기(self)다. 이들은 각자의 시선과 권능과 생명과 영혼을 갖는다. 이들은 서로가 발산하는 기호를 읽고 탐구하는 해석학자들이다. 아마존 숲에서 먹이를 찾아 산책하는 재규어와 마주친 인간은 (인간의 관점에서는) 주체이지만 (재규어의 관점에서는) 잠재적 먹이, 즉 대상이다. 자신이 재규어의 먹잇감이 아니라 그와 동등한 또다른 자기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는 재규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재규어에게 아우라를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즉, “재규어의 시선을 돌려 주어야 한다.”(콘, 2018:12)  197-198

“수마코 화산 기슭에 있는 사냥 캠프의 초가지붕 아래서 엎드려 누워 있는데, 후아니쿠가 내게 다가와 경고했다. ‘반듯이 누워 자! 그래야 재규어가 왔을 때 그 녀석을 마주 볼 수 있어. 재규어는 그걸 알아보고 너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엎드려 자면 재규어는 너를 아이차(aicha, 멋잇감)로 여기고 겅격한다고’, 후아니쿠의 이 말은 재규어가 우리를 마주 응시할 능력이 있는 존재로 본다면, 우리를 가만히 놓아둔다는 뜻이다.  그러나 재규어가 우리를 멋잇감-‘그것’-으로 보게 된다면, 우리는 죽은 고기나 다름없다. 다른 부류의 존재들은 우리를 어떻게 볼까? 이 문제는 중요하다”(콘, 2018:12)  198

인간의 악을 직시할 것. 인간의 악을 용서할 것. 자신의 악을 직시할 것. 자신의 악을 용서하지 말 것.  205

“옛 시대의 장비들로 현재의 도전에 응하는 것보다 더 큰 지적 범죄는 없다”(Latour, 2004:231).  206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지 말고 무엇을 ‘수행’하는가를 물을 것.  206

‘실존’하는 것들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있을 수 있기’위해 고투하고 있다. 그저 있는 듯이 보이는 나무는 광합성하고 있고, 성장하고 있고, 분열하고 있다. 바람에 버티고 있으며, 흙을 뚫고 내려가고 있다. 그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자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부단히 운동하고 있다. 흐르고 있고, 불타고 있고, 대립하고 있고, 버티고 있다. 가까이에 다가가서 보면, 모든 존재는 무수한 작용과 겪음의 지속적 ‘과정’이다. 존재가 아니라 생성, 혹은 생존이다.  209

비인간 행위자들의 기호학적 소통능력. 모든 존재자들은 기호의 생산자이며 해석자다. 구름과 별, 동물의 배설물, 식물의 색깔과 모양, 벌레의 움직임, 땅의 냄새, 어떤 분위기.  211

의미한다는 것은 차이를 갖는다는 것이다. 차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아니고 저것을 선택할 때, 거기에 의미가 발생한다. 왜 이것이 아니고 저것인가? 인간의 중대한 선택은 결단이라 불리지만, 결단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미생물도 결단한다.  211

비인간 행위능력을 간파하지 못하는 사람은 ‘센스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가령, 금연중인 친구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짜증을 낼 때, 그것을 혈중 니코틴 부족으로 금단현상을 겪는 ‘뇌’의 짜증이 아니라, 그 친구의 ‘인격의 짜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센스가 없다.  214

에일리언은 존재하기 위해, 연속해서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존재-과정이다. 어떤 주저도, 지체도, 망설임도 없이, 먹이와 숙주를 발견하고 그 생명을 탈취한다. 연민도 슬픔도 없이. 기계를 닮은 냉정한 작동. 에일리언의 벌린 입과 거기 흐르는 산성 타액은 생명현상에 내재한 깊은 공허, 그 텅 빈 성격을 드러낸다. 생명에 대해서 ‘왜’라는 질문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생명을 지속해나가는 끝없는 작동을 수행하는 것뿐이다.  215-216

지구의 여러 생명체에게는 인간이 에일리언이다.  216

바이러스는 단백질과 지질 껍질에 싸여 있는 RNA 혹은 DNA조각들로서,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하지 못하고 물질을 합성하지도 못하는 유전단위다. 오직 숙주세포의 핵산과 단백질 합성기구를 이용하여 자신을 복제해야 하는 기생체다.  

숙주에 침투하기 이전의 바이러스는 캡시드(바이러스 게놈의 핵산을 감싸는 단백질의 집합체)에 둘러싸인 입자에 불과하다. 비리온(virion)이라 불리는 이 입자는 혼자서는 성장, 생식, 대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숙주와의 감염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는 동안에 바이러스는 생명활동을 멈춘 채 그냥 존속한다. 그러나, 일단 숙주에 침투하면, 바이러스는 자기복제를 실행하기 시작한다.

바이러스는 죽음도 아니고 생명도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의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 생명 속에 죽음을 초대함으로써 생명의 능력을 극대화시킨 존재다. 바이러스는 존재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환경에 위탁함으로써 평소에는 차라리 죽어 있기를 택한다.  219

생명의 작동이 멈추었지만 죽지 않은 것. 부활-가능성 속에서 잔존하는 것. 조건이 주어지면 맹렬하게 자기복제하는 것. 유보, 정지, 멈춤을 내장한 생명력. 막강한 변이능력. 그리고 면역 시스템에 식별되지 않을 수 있는 은폐능력. 바이러스의 힘.  220

사람들이 바이러스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미 그들이 바이러스를 행위자로 인정하기 시작했으며, 그 행위능력(agency)을 지각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221

봉준호의 <기생충>에서 아버지 기택(송강호)은 아들 기우(최우식)가 ‘기생’ 작전을 수립하자 감탄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바이러스에게도 계획이 있다. 바이러스는 다음 네 가지 계획을 실행해야 생존한다. 1) 숙주세포를 감염시키기, 2) 숙주세포 내부에서 복제하기, 3) 숙주의 방어막을 피해가기, 4) 새로운 숙주로 옮겨가기(Sompayrac, 2013:4-5). 바이러스는 최소 30억 년 이상 위의 네 가지 목표망을 실행하면서 지구상에서 생존해왔다. 생존에 관한 한, 바이러스는 호모사피엔스보다 훨씬 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222

도서관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에 인쇄된 글자들은 비리온(virion,  비리온이란 바이러스가 숙주 외부에 있을 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내부 중심부에는 핵산이 있으며 외부는 캡시드라 불리는 단백질 막으로 둘러쌓인 바이러스성 입자이며 중심부의 핵산은 감염성을 가지고 있으며 캡시드라 불리는 단백질 막의 구조는 바이러스의 특이성을 결정한다.-위키)상태의 바이러스와 유사하다. 인지되고 이해되기 이전의 글자들은 물리적으로 현존할 뿐이다. 그것은 작용하지도 감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페이지가 펼쳐지고 어떤 의식이 그것을 읽는 순간, 글자와 뇌가 연결되는 순간, 글자는 인쇄된 특정 모양을 지닌 단순한 잉크 자국에서 의미의 활발한 파동으로 변신한다. 글자는 살아나고, 이미지와 생각과 느낌이 되어 읽는 자의 신체와 그 외부로 퍼져나간다.  223

커뮤니케이션은 ‘전염’이다. 기호는 의식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바이러스다.

읽는다는 것은 숙주가 되는 과정이다. 저자가 생산한 바이러스가 읽는 의식에 기생체로 밀려들어온다. 의식 내부에서, 바이러스의 영토화가 발생하고, 새로운 기호의 배치가 생산된다. 쓴다는 것은 의식에 침투한 바이러스의 변이다.  223

바이러스적으로 작용하는 대부분의 기호는 면역계에 의해 차단되고, 파괴되고, 무력화되어 자아의 내부에 침투하지 못한다. 반지성주의, 편견, 우상, 혐오, 독단, 신앙과 같은 강력한 면역 시스템.  224

기호의 핵심에는 ‘의미’가 아니라, 의미의 단속적 ‘출현’이 있다. 의미가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미가 특정 ‘순간’에 나타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의미는 상황에서 솟아나 증식한다.  224

인간은 지구와 뒤엉켜버렸다. 자연은 사회와 뒤엉켜버렸다. 우리에게는 초월적 위치도, 객관적 위치도, 실험적 위치도 없다. 우리는 붙들려 있고, 침투당했고, 피폭되었다. 이것이 21세기 파상적 리얼리티의 풍경이다. 이 냉혹하고 초현실적인 생태-존재론적 위급상태의 이름이 바로 ‘인류세(Anthropocene)’다(김홍중, 2019). 231

인간을 뜻하는 ‘안트로포스(anthropos)’와 시간을 뜻하는 ‘카이노스(Kainos)’를 결합한 신조어인 인류세는, 노벨 화학상 수상자 폴 크뤼첸과 생태학자 유진 스토머가 2000년에 IGBP의 뉴스 레터에 기고한 짧은 글에 처음 등장한다. 이들은 수온 상승과 수질 산성화로 인해 산호초가 탈색되는 현상을 연구하다가 암석, 물, 대기에 인간활동에서 비롯된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인식을 지질학적 시간에 반영해야 할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제기한다.

“인간 행위가 지구와 대기에 미친 중요하고 점증하는 영향을 고려해보건대 (...) 지질학과 환경학에서 인류의 중심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참으로 적절하게 보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현재의 지질학적 시대를 ‘인류세’라고 부를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어쩌면 아마 다가올 몇백만 년 동안 주요한 지질학적 힘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Crutzen&Stoermer, 2000:17-8)

11700년을 이이온 홀로세(Holocene)가 끝나고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주장의 타당성에 대한 논쟁은 어느 정도 정리된 듯이 보인다.  231-232

자연은 아니지만 자연처럼 느껴지며, 언젠가는 소멸할 것이지만 그 소멸을 역사적으로 상상하기 힘든 세계를 타연(他然 다를타 그러할연)이라 부르고자 한다. 가령 21세기 테크노 자본주의 문명.

기술은 우리에게, 세계가 더욱 더 향유 가능한 것이 되었으며, 세계를 더욱 더 향유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의 느낌을 제공한다.  236

인터넷을 통해 우리는 타자들의 얕은 내면에 흐르는 생각과 감정을 즉각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이 기술적 가능성은 사회라는 관념을 위기에 빠뜨린다. 사회적 삶은 내면을 서로 에게 은폐하고, 예의의 가면을 쓴 채 공존하겠다는 암묵적 계약이다. 만일 타인이 우리의 진심을 읽는다면 사회적 관계는 불가능하다.  237

타연을 살아가는 인간은 사고의 주체, 욕망의 주체, 생산의 주체, 언어의 주체, 창조의 주체가 아니라, 향유의 주체다. 향유는 존재(being)가 아니며 소유(possession)도 아니다. 오히려, 향유는 존재를 덧없게 하고 소유물을 파손시키는 것에 더 가깝다. 그 과정에서 흔적들의 묘한 폐허가 만들어진다.

향유는 즐기는 것을 넘어서 즐기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이며, 즐기는 것을 가치화하는 것이며, 즐김의 가능성을 확장해가는 실천이다. 향유에는 부정성이 없다. 향유는 자본주의적 삶의 정점에서 비로소 나타날 수 있는 실천양식, 존재양식, 사유양식이다.

향유대상이 향유 속에서 파손되고 소실된다. 파손과 소실은 향유가 생산하는 가치의 형식이다. 이처럼 반-생산을 생산하고, 반-축적을 축적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물적 자본의 파괴를 새로운 형태의 자본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향유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극한에 접근한다(김홍중, 2017). 향유는 명령한다. 무엇이 되었건 그것을 향유하라. 향유 속에서 대상을 무화시켜라. 물질적 실체들을 사라짐 속으로 투입하라. 없어지는 것이 되도록 변형시켜라. 없어짐을 생산하라. 없어짐의 생산의 증인이 되어라. 덧없음을 추적하여 체험하라. 향유의 체험을 공표하라, 공유하라, 공식화하라. 자본주의의 끝으로 가라. 가서 자본화할 수 없는, 있음과 없음 사이에 펼쳐져 있는 분산된 존재자들을 자본의 회로에 넣어, 그들의 소멸에 현실성을 부여하라. 자본주의의 한계를 경신하라. 향유를 향유하라. 241-242


4부 모든 것을 단순하게

욕망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해방을 욕망하게 하는 ‘억압’을 동시에 욕망한다.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자기(自己)를 창조해야 한다. 대다수 오류와 죄악은 이 과정에서 발생한다. 자기를 아직 정립하지 못한 자가 그 괴로움을 벗어나 주체가 되기 위해 몸부림칠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누구나 자신과의 사이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거리, 우회로, 이해할 수 없는 상징들, 막다른 골목, 미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사막을 갖고 있다.

타인을 험담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두 부류가 있다. 첫째, 타인을 험담하기에 너무나 고결한 품성을 타고난 사람들. 둘째, 타인을 험담하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견디지 못할 만큼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  257

비겁한 자들은 용기 속에 숨어 평온하다. 용기 속에서, 용기 밖에 있는 자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용기는 용기 안으로 들어가 거기에 안착하려는 욕망과도 싸울 수 있는 힘이다. 용기는 비겁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비겁을 내포한다. 비겁할 수 있는 자들만이 용기 있는 자들이다.  258

혐오하는 자들은 빈곤하다. 그것이 존재의 빈곤이건, 인정의 빈곤이건, 금전의 빈곤이건, 혹은 빈곤의 빈곤이건.

냉소는 가장 저렴한 방어기제다.  

시련은 인간을 단련시킨다. 그런데 단련이 반드시 성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종종 인격의 왜곡, 질병, 혹은 정신질환으로 귀결된다.  259

“역사가는 과거로 들어가서는 안 되고, 과거가 그에게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Tiedemann, 2004:240)

마음도 이와 같다. 타인의 마음으로 들어가고자 하면 안 되고, 타인의 마음이 자신에게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공감이란 타인의 마음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오만한 시도다. 오직 통감(痛感 아플통 느낄감)만이, 세상의 마음이 자신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김홍중, 2015:151-61)  260-261

도취의 가장 위험한 점은 영혼을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정신의 어딘가에서 무언가 썩는 냄새가 풍겨오는 순간, 그것은 오래된 도취의 결과임을 깨닫게 된다.  261

우리는 멀리 있는 흉악범보다 주변의 저열한 인간들을 더 견디기 어려워한다. 범죄 행위보다 에티켓의 실수가 더 견디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우리를 가장 분개시키는 것, 우리가 가장 혐오하는 것은 ‘사소한’ 것이다.  261

혐오를 통한 경계의 확정. 우리가 무언가를 멀리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혐오하는 감정을 통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듯이 보인다. 자연 속에서 혐오는 회피와 오염의 방지를 위한 행동 촉구 기제였다.  262-263

너무나 섬세하고 상처를 쉽게 받지만, 회복력도 뛰어난 마음의 소유자. 항상 다치면서도, 결코 냉소나 혐오의 갑옷으로 자아를 보호하지 못하는 사람.  263

소위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과오를 타인의 탓으로 처리하는 단순한 사고회로의 강화에 성공한 사람이다. 정신적 건강은 괴물성과 연결되어 있다.  263

자신을 유쾌하게 비웃지 못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만일 당신이 스스로를 유쾌하게 비웃지 못한다면, 당신은 스스로를 가장 조심해야 한다.  266

타인을 좋아하는 것은 노동이다. 임금으로 보상받아야 한다. 자신이 흠모하고 동경하는데(흠모와 동경의 노동을 그렇게 수행해왔는데) 정작 그 대상이 상응하는 감정을 되돌려주지 않을 때 분노를 느끼는 것은, 등가교환의 원칙이 위배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마음속으로 흠모하면서 그의 응답을 기다리는 자의 ‘사랑’은 그래서 쉽사리 ‘증오’로 돌변한다. 감정의 무상증여는 없다. 적절한 대가를 받지 못한 감정 노동을 한 사람들은 폭력의 정당성을 쉽게 획득한다. 억울하다는 심정의 근저에는 ‘제 몫을 받지 못했다’는 판단이 자리 잡고 있다.  267-268

페이션트(patient)가 된다는 것은 인격이 사라지거나 특이성이 소멸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가 수동적이 될 때, 우리는 능동성을 발휘할 때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우리 자신이 된다. 환자의 자리는 대체될 수 없는 나의 자리다. 내 몸, 내 질병, 내 장기, 내 죽음의 자리는 대체되지 않는다. 대역을 쓸 수 없다. 그것은 단독자의 자리다. 활동이 아니라 감수의 자리에서 우리는 자신을 만난다. 겪어내야 하는 것을 겪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자기(自己)가 된다.  273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의 제조라기보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상태’에 처(處 머무를처)하는 것에 더 가깝다.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일어나는 정황을 ‘겪는 것’. 이렇게 보면, 생각의 힘은 순수한 행위능력이 아니다. 행위와 감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흘러가는 그 흐름을 따를 수 있는 능력이다. 바람이 불어야 떠오르는 연처럼 생각은 떠오른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의 끝을 붙들고, 생각이 움직이는 대로 내가 따르는 것이다.

생각하는 자는 골똘한 자다. 이 골똘함은 ‘제스처’다. 몸짓이다. 골똘한 자세는 생각하지 못하는 자를 생각이 일어나는 상태로 진입하게 해준다. 생각하는 자의 주변환경은 이미 생각들을 품고 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직전 무거워진 구름처럼, 생각은 밀집된 수증기처럼 온통 퍼져서 주변을 감사
싸고 있다. 우리는 안에서 밖으로 생각을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으로부터 안으로 생각을 끌어들인다.

어떤 문제에 봉착하여 깊이 고민할 때,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장기 말이나 바둑돌을 놓아 수순을 상상하고 전략을 짜듯이 그렇게 내적 표상을 구성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생각 이전의 분화되지 않은 정동적 기류에 휘말려 있다.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의미 없는 글자를 쓰거나, 도형을 반복해서 그리거나, 어떤 단어를 혼자 중얼거리거나, 한숨을 쉬고 누웠다가 뒤채고, 이렁나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할 뿐이다. 아직 울음을 터뜨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오랜 시간 후에 비로소 그 표현이 가능해질, 어떤 봉쇄 속에 우리는 갇혀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몸짓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고민한다는 것은 생각에 도달하기 이전, 상당 시간을 이런 부대낌을 견디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견디는 동안 표상은 부서지고, 뭉개지고, 흩어진다. 표상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고민을 통하여 시간과 자신을 발효시킨다. 페이션시(patiency)’.  274-276

사람들은 무언가를 잊기 위해 노력하지만, 노력은 대개 망각을 지연시킨다. 잊으려 애쓸수록 대상은 의식에 더 달라붙는다. 의지를 통해 무언가를 잊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지금’ 잊는 자는 없다. 망각은 행위가 아니라, 과거에 발생했던 것이라고 나중에서야 인지되는 사건이다.  279

감당은 관념이나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구호나 선언이 아니다. 감당은 생명의 방만한 방출이 아니다. 그것은 절제, 삭감, 위축이다. 감당하는 자는 공격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고, 함성을 지르지 않는다. 그는 침묵하면서 짊어진 무게를 견딘다.

박수근의 나무들은 이파리가 하나도 없다. 나목(裸木)은 거의 죽은 듯이 보이기도 한다. 고요히 늙어가는 사람 같다. 나무 주변에 아이를 업은 여인이나 짐을 짊어진 여인이 걸어간다. 나무와 사람이 모두 감당하고 있다. 나무는 나무의 헐벗음을, 사람은 사람의 헓벗음을 짊어지고 있다. 박수근의 그림에 서려 있는 희망은 감당하는 자들이 고독하게 품고 있는 미래로부터 온다. 짊어진 것의 무게가 감당의 유토피아를 만든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견디어내겠다는 의지.  280

헐벗음은 <세한도>의 주제다. 헐벗은 것들의 꼿꼿한 공존. 겨울의 한복판에서 헐벗은 것들이 버티고 있다. 감당은 고독한 사업이지만, 환락이 아닌 감당 속에서야 우리는 참된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추워져야 송백(松柏)이 시들지 않음을 안다.” 계절이 헐벗으면, 헐벗으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것이 다른 무언가를 알아본다. 꼿꼿한 잣나무는 뒤틀린 소나무를 알아본다. 시간을 거슬러, 경계를 거슬러, 차이를 거슬러, 감당하는 자가 감당하는 자를 알아본다. 은둔기계라 은둔기계를 알아본다. 그것과 친구가 된다. 별로 친하지도 애틋하지도 않지만, 함께 헐벗음을 살아내는 것이다. 추사가 그려내는 이 유교적 쿨(cool).  281

감당하는 자들은 대개 침묵한다. 감당에 몰두하여 표현하고 목소리를 낼 힘조차 갖지 못한다. 질병을 감당하는 사람들, 사랑을 감당하고, 부모의 역할을 감당하고, 직무를 감당하고, 존재 자체를 감당하는 자들. 이들의 힘으로 삶이 흘러간다. 자신에게 부과되는 것들을 잘 감당하는 존재자들은 드러나지 않는다.  281-282

서로에게 감당할 수 있는 것만을 기대하는 것이 도덕이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해서 타인을 괴롭히는 사회는 사악하다.

자신에게 닥쳐오는 사태를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참된 윤리다.  283

가까운 사람에게 가한 상처,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대개 가까운 곳에서 온다.  287

존재는 시선에 의해서도, 고통에 의해서도, 언어에 의해서도, 모멸에 의해서도, 실수에 의해서도 벗겨진다. 헐벗음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 헐벗음과 씨름해본 적이 없는 사람, 헐벗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은 천박하고 건강하다.  288

학문이 민중의 감각에 결코 미치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헐벗은 삶에 대한 감수성이 없기 때문이다.  289

헐벗음은 무능력으로 귀결된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과 부딪힐 때, 그때마다 우리의 영혼은 헐벗는다. 자식이 원하는 무언가를 해줄 수 없을 때, 그 무력감 속에서 부모는 헐벗는다.

헐벗음이 집중된 한 지점, 그곳이 장애(障礙)다.

욕망의 정화, 이것이 생명체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업이다. 정화는 헐벗음이다. 오직 헐벗음의 사건들만이 우리를 정화시킨다.  290

어질다는 것은 도덕이나 철학이나 아름다움에 가해지는 제한이다. 인의 규범이 후퇴이며, 진리의 축소이며, 아름다움의 유보다. 불완전성에 대한 항복이다.

‘치열하게’와 같은 오만한 말에 속지 않는 것이다. 두려움을 버리지 않는 것. 용기 따위로 두려움을 이기지 않는 것. 방관하는 것.

어진 이는 허술하다. 규칙이나 규범을 어기며, 심약하고, 애매하고, 어리숙하다. 어진 자는 잘 속고, 매번 속고, 진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상실하지 않는다. 침묵하고 웃는다. 어리석음과 어짊 사이에는 은밀한 연관이 존재한다. 어리석음을 통해서, 이 타협주의와 우유부단을 통해서, 어진 사람은 주어진 관계를 파괴하지 않고 이어나간다. 그는 세계를 멀리서 본다. 세계가 그저 존재하는 무언가로 나타나는 지점까지 물러가서, 세계가 그저 생존하는 무언가로 나타나는 지점까지 물러가서 바라본다. 어짊은 생존주의다. 생존을 존재보다 더 성스러운 것으로 읽는, 처절한 실용주의다.  302-303

희망이 허망함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희망은 미래의 건축이지만, 언제나 실패를 내포하는 잔인한 건축이다. 우리는 안다. 희망은 부서진다는 것을,  그래서 미리 부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그래야 살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절망에 빠져드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절망은 희망보다 더 화려한 몸짓이며 도취일 수 있다. 그것도 깨어져야 한다. 희망에서 벗어나는 힘이 파상력이라면 절망을 깨는 힘도 파상력이다. 파상력은 삶을 향한다. 지금 여기의 물질적 세속을 단호하게 지향한다.  303-304

은둔 속에서, 세상에의 참여가 좌절된 자리에서, 공부에 뜻을 두고 공부의 기쁨을 함게 누리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 생의 흐름, 만물이 함께 얽혀 흘러가는 저 생의 흐름이 야기하는 경이로움에 잠기는 것.

이것은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y)이아니라 생에 대한 사랑(philo-zoe)이다. 필로-조에. 정치적 삶(비오스)이 아니라 생물학적 삶(조에). 필로-조에의관점에서 보면, 학문은 어느 지점에서 멈춰야 한다. 도덕도 현명함도 멈춰야 한다. 종교적 열광도, 예술적 천재도 멈춰야 한다. 더 나갈 수 있는데 멈추는 힘이 참된 힘이다. 공자 사상의 본령에는 냇가에서 정신을 놓고 흐름을 바라보는 저 은둔기계가 있다. 그는 그저 어짊 속에 있는 인간이다. 도덕도 훈계도 진리도 없이, 풍경과 대면하고 세속을 직시하는 저 허름한 얼굴, 이것이 어짊의 참된 얼굴이다.  306

여행에 대한 두려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310

갑자기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여행중이었다. 자기기만이라 생각하며 자신을 비웃는다.  310-311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무렵, 모든 순간이 이미 지나갔고 이제 다시는 그 시간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낄 때가 있다. 예리한 통증을 동반하기도 하는 이 상실의 느낌은 실체가 묘연하다. 여행자는 상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여행을 다녔고, 기억을 소유하게 되었고, 장소들을 체험하게 되었다. 시간을 즐겼으며, 친교와 추억을 축적했다. 상실한 것이 딱히 없는데 그가 느끼는 이 예리한 서운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316-317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과 장소들을 만나는 경험은 우리에게 ‘가능한 삶’을 상상하게 한다. 내가 지금의 나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삶은 어떠했을까? 나는 저 어부였을 수도 있고, 저 어부의 아들이었을 수도 있다. 일본인이었거나, 인도네시아인, 혹은 프랑스인이었을 수도 있다. 이 고장에 이주했다면, 저 직업을 선택했더라면, 저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졌더라면, 저런 집에서 살았더라면, 여기에서 죽었더라면.... 여행은 현실의 자아를 가능세계의 자아들과 연결시킨다. 여행이 끝날 때 상실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여행지 그 자체의 사실적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여행지와 만나면서 촉발된 가능세계들이다.  317

여행하는 인간의 뇌리를 스치는 이미지들은, 살아진 시간과 살아보지 못한 공간의 몽타주다. 여행이 끝날 때쯤 여행자는 여행을 통해 예상치 않게 변화해버린 새로운 자아, 실제 자아의 사실성을 부식시키면서 나타나는, 가능한 자아들과 엮여버린 이상하게 새로운 ‘자아’를 획득한다. 317-318

우리를 실망시킨 것들. 우리가 살 수도 있었던. 가능성들. 살았다 한들 패배하고 허겁지겁 도망쳐나왔을지 모르는 길들. 이들의 총체가 삶이라면, 우리는 여행을 통해서만 삶과 만날 수 있다.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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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될 경우에만 말해야 한다 ; 그리고 극복해낸 것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 - 다른 모든 것은 잡담이고 ‘문학’이며 교양의 부족이다. 내 저서들은 오직 나 자신이 극복해낸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 거기에는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 한때 나의 적이었던 나, 가장 나 자신과 똑같은 나, 아니 그뿐만 아니라 좀더 자랑스러운 표현이 허락된다면 가장 독자적인 존재인 ‘나’가 있다.  9


1장 혼합된 의견과 잠언들
철학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 만약 너희가 지금까지 삶의 최고 가치를 믿어왔지만 이제는 실망하게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면, 도대체 그것을 가장 헐값에 팔아치워야만 한다는 말인가?  23

공상가들에 반대해서 - 공상가는 자신 앞에서 진리를 부인하지만, 거짓말쟁이는 단지 다른 사람 앞에서만 진리를 부인한다.  25

경우에 따른 인식의 유해성 - 참된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탐구가 가져오는 효용성은 끊임없이 다양하고 새롭게 입증되고 있어서, 바로 그 효용성 때문에 개개의 탐구자는 좀더 섬세하며 드물게 나타나는 유해성 때문에 고통받지 않으면 안 된다. 화학자는 실험하면서 때로는 중독이 되고 어쩔 수 없이 화상을 입는다. - 화학자에게 타당성을 가지는 것은 우리의 문화 전체에 대해서도 타당성을 가진다. 덧붙여 말하면, 이러한 이유에서 화상을 입었을 경우를 대비해 문화는 항상 연고와 해독제를 마련해두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28-29

속된 사람의 필수품 - 속된 사람은 형이상학이라는 보라색 누더기의 추기경 외투나 터번을 착용하는 것이 가장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벗기를 원하지 않는다  ; 이러한 치장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훨씬 덜 우스꽝스러워 보일 것이다.  29

좋은 것은 삶을 유혹한다 - 모든 좋은 것들은 삶에 강한 자극제가 된다. 삶을 반박하는 것으로 씌어진 모든 좋은 책들마저도.  30

세 부류의 사상가들 - 광천 중에는 끓어오르는 광천, 흘러나오는 광천 그리고 뚝뚝 떨어지는 광천이 있다 ; 사상가도 이에 상응하는 세 부류가 있다.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물의 양에 따라 평가하고 전문가는 그 속에 있는 물이 아닌 것에 따라 평가한다.  30

무엇에 대해 침묵이 요구되는가 - 극도로 위험한 빙하와 빙해를 건너는 여행에 대해 설명하는 것처럼 자유정신 활동에 대해 설명한다면, 그 길을 가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마치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심함과 약한 무릎을 탓하기라도 한 것처럼 모욕감을 느낀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고 느끼는 곤란한 일들은 결코 우리 앞에서 언급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31

연극의 연속으로서의 박수 갈채 - 빛나는 눈과 호의적인 미소는 아주 훌륭한, 세상의 희극과 삶의 희극에 주어지는 일조으이 박수 갈채이다. -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야말로 다른 관객을 “박수 갈채를 보내주이소”라고 유혹하려는 희극 중의 희극이기도 하다.  32

지루함에 대한 용기 -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무료하다고 느낄 수 있는 용기를 지니지 않은 사람은, 그가 예술가이건 학자이건 최고의 정신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33

사상가의 가장 내적인 체험으로부터 - 인간에게 사물을 비인격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 ; 이는 사룸 속에서 그 사물만을 보고 인격을 보지 않는 것은 어렵다는 의미이다 ; 실로 인격을 형성하고 인격을 창조하는 충동의 시계 장치를 한순간만이라도 풀어놓는 일이 도대체 인간에게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사상과 관련된 경우조차도 그리고 그것이 추상적인 사상일지라도, 인간은 마치 그 사상이 자신들이 그것과 싸우고 관여하고 보호하고 돌봐주며 키워야만 하는 개인들이기나 한 것처럼 행동한다.  33

학문의 사막에서 - 때로는 사막을 여행하는 것과 다름없는 겸허하고 힘든 여정을 가는 학문적인 인간들에게 우리가 ‘철학적 체계’라고 부르는 저 찬란한 신기루가 나타난다 : 그것은 착각이라는 마력으로 모든 수수께끼의 해답을 보여주고 진정한 생명수인 가장 신선한 음료가 가까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그 지쳐 있는 사람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모든 학문적인 인내와 고통의 목표에 거의 입술이 닿을 정도로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물론 다른 본성을 가진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착각에 마치 마비된 것처럼 멈추어 서버리기도 한다 : 사막은 그들을 삼켜버리고 그들은 학문을 하기에는 이미 죽은 사람과 같다. 그러한 주관적인 위안을 이미 여러 번 체험했던 또 다른 본성을 가진 사람들은, 아마 그 어떤 샘에도 단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채 극도로 불쾌감을 느끼면서, 그 신기루 현상이 입 속에 남겨놓은 주체할 수 없는 갈증을 일으키는 짠맛을 저주하게 될 것이다.  38-39

헌신 - 너희는 도덕적 행위의 특징이 헌신이라고 생각하는가? - 그러나 숙고해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에도, 즉 최선의 행위엣와 마찬가지로 최악의 행우에도 헌신이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라.  43

윤리성을 철저하게 조사하는 사람들에 반대하여 - 한 인간이 자신의 윤리적 본성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강하게 만들어져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가 생각하고 실천하면서 행할 수 있는 최선의 것과 최악의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을 체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43

사랑 속에 있는 기만 -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에서 오는 많은 것을 망각하기도 하고 그것을 의도적으로 생각에서 지워버리기도 한다. 즉 사람들은 과거로부터 미소 짓는 우리의 상이 우리를 기만해주고, 망상이 우리를 기분 좋게 해주기를 바란다. - 우리는 끊임없이 이렇게 자기를 기만하고 있다. - 그런데 ‘사랑 속에 잇는 자기 망각’과 ‘다른 인격 속에 있는 나의 자아의 출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칭송하는 너희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거울을 깨버리고 존경하는 인격 속에 자신을 창작해 넣어, 자신의 자아의 새로운 상을 즐기는 것과 같다. 비록 사람들은 그 상을 다른 인격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말이다. - 그리고 너희 유별난 자들은 이러한 과정 전체가 자기기만도 아니고 이기주의도 아니라고 말한다! - 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을 자신 앞에서 감추는 사람드로가 자신 전체를 자신 앞에서 감추는 사람들은 인식의 보고 속에서 도둑질을 한다는 점에서 똑같다고 생각한다 : 이것으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제가 어떤 잘못에 대하여 경고하는 것인지 명백해질 것이다.  43-44

자신의 허영심을 부인하는 사람에게 - 자신의 허영심을 부인하는 사람은 보통 자신을 경멸하지 않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그것에 대해서 눈 감아버릴 정도로 야만적인 허영심의 양상을 띠고 있다.  44

양심적인 사람들 - 자신의 양심에 따르는 것은, 자신의 오성에 따르는 것보다 더 편하다 : 왜냐하면 양심은 어떠한 실패에도 자기를 변호하고 기분을 전환해주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이성적인 사람은 항상 매우 적은 데 반하여 양심적인 사람은 매우 많다.  46

불쾌해지지 않기 위한 정반대의 방법 - 어떤 기질을 가진 사람은 말로 자신의 불만을 터뜨려버리는 것이 유익하다 : 말하면서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또 다른 ㄴ기질을 가진 사람은 말을 하면서 비로소 완전히 분노하게 된다 : 그러한 사람은 말할 어떤 것을 삼켜버리는 것이 유리하다 :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적이나 상상 앞에서 자제하는 것이 그들의 성격을 개선시키고 너무 날카롭고 불쾌해지는 것을 방지해주는 방법이다.  46

인간적인 ‘물자체’ - 가장 상처받기 쉬우면서도 가장 이겨내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허영심이다 : 게다가 그것의 힘은 상처받음으로써 자라나 결국에는 엄청나게 커질 수도 있다.  47

쾌감과 착각 - 어떤 사람은 자신의 본성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그의 친구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또 다른 사람은 의식적으로 개별적인 행위들을 통해 선행을 베푼다. 비록 전자가 더 고상한 것이라 할지라도, 거리낌 없는 양심과 쾌감, 즉 행위의 공적에 대한 쾌감과 연결되는 것은 후자일 뿐이다. - 그 쾌감은 우리가 자의적으로 우리의 선행과 악행을 행할 수 있다는 신념, 다시 말하면 착각에 근거한 것이다.  49

부정을 행하는 것은 어리석다 - 사람들에게 가했던 자기 자신의 부정은 낯선 사람이 그에게 가한 부정보다도 더 견디기 어렵다(이것은 도덕적 이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 행위자는 본래, 그가 양심의 가책에 좌우될 경우에도 또는 자신의 행위를 통해 사회를 자신에 반대하도록 무장시키고 자신을 고립시킨 것으로 통찰할 경우에도 항상 고통받는 자이다. 따라서 종교와 도덕이 명하는 것은 차치하고 자신의 내적인 행복 때문에라도, 즉 자신에 대한 만족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에게 부정을 행하는 것을 주의해야 하며 나아가 부정한 행위를 당하는 것보다도 더 주의해야 한다 : 왜냐하면 후자는 거리낌 없는 양심, 복수를 향한 희망, 정의로운 사람들과 게다가 악인을 두려워하는 사회 전체의 동정과 박수의 기대라는 위로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부정을 자신에게 가해진 다른 사람의 부정으로 개조하여, 스스로 행한 일에 대한 변명으로 정당방위라는 비상권리를 보류해두는 불결한 자기 기만에 능통하다 :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부담을 더 가볍게 짊어지려고 한다.  49-50

위선적인 동정 - 사람들은 자신이 적개심에 대해서는 초연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을 경우, 동정을 가장하게 된다 : 그러나 그것은 보통 헛일이다. 이 사실을 알고서는 적개심이 더 커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52

너무 가까이하지 말 것 - 좋은 생각들이 너무 빨리 연속해서 떠오른다면, 그것은 좋은 생각에 단점이 된다 ; 생각들이 서로 전망을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 그래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와 저술가들은 평범한 것을 많이 사용했다.  83

가장 나쁜 독자들 - 가장 나쁜 독자들은 약탈하는 군인과 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 그들은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는 꺼내고, 나머지는 더럽히고 엉클어버리며 전체를 비방한다.  91

훌륭한 저술가의 특징 - 훌륭한 저술가들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 그들은 경탄받는 것보다도 이해되는 것을 더 좋아하며 신랄하고 지나치게 예민한 독자를 위해서 글을 쓰지 않는다.  91

냉정한 책 - 훌륭한 사상가는 훌륭한 생각에 들어 있는 행복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독자를 기대한다 : 그래서 냉정하고 소박해 보이는 책도 올바른 안목을 가지고 보면 정신의 명랑함이라는 햇빛에 비춰져서 참다운 영혼의 위안으로 보일 수 있다.  92

정직한 책의 가치 - 정직한 책은, 그렇지 않다면 교활한 영리함이 가장 잘 은폐할 수도 있을 독자의 증오심과 적개심을 끌어내준다는 점에서는 적어도 독자를 정직하게 만든다. 인간에 대해서는 매우 소극적인 사람들이 책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내버려둔다.  94-95

비평과 기쁨 - 타당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편파적이고 부당하기도 한 비평은 비평하는 사람에게는 큰 만족을 주는 것이어서 세상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비평하게 만드는 모든 작품과 모든 행위에 감사해야 할 정도이다 : 왜냐하면 그 비평 뒤에는 기쁨, 기지, 자기 찬미, 자긍심, 교훈, 개선책이라는 번쩍이는 옷자락이 끌려오기 때문이다. - 기쁨의 신은 그가 선을 창조한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 악과 중용을 창조했다.  96-97

글 쓰는 것과 승리를 원하는 것 - 글을 쓴다는 것은 항상 승리를 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단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전달되어야만 할 자기 자신에 대한 극복을 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 그러나 그 무엇을 소화할 수 없을 경우에만, 나아가 그것이 이미 입에서 걸려버린 경우에만 글을 쓰는 소화불량증을 앓는 작가들도 있다 : 그들은 독자에게조차 무의식중에 노여움을 품은 채 불쾌한 기분을 털어놓고 폭력을 쓰려 한다. 즉 : 그들 역시 승리를 원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한 승리를 원한다.  98

‘훌륭한 책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 훌륭한 책들은 모두 세상에 나왔을 때 떫은맛을 낸다 : 그 책은 새로움이라는 결점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저자가 유명하고 그에 대해 많은 것들이 알려져 있을 경우에는 살아 있는 저자는 그 책에 해를 미치게 된다 :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저자와 그의 작품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 속에 영혼, 달콤함, 금빛 광채로 들어 있는 것은 커져가는 존경과 과거의 존경 그리고 마지막에는 전해 내려오는 존경에 의해 다듬어져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비로소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만 하고 많은 거미들이 그물을 쳐놓아야만 한다. 훌륭한 독자는 책을 점점 훌륭하게 만들고, 훌륭한 반박자는 책의 문제를 해결해준다.  98

표지에 오른 이름 - 저자의 이름이 책에 오르는 것은 오늘날에는 관례이며 거의 의무이기도 하다 ; 그러나 이것은 책의 효과를 감소시키는 주원인이다. 즉 만약 책이 훌륭하다면, 그 책은 인격보다 그리고 그의 핵심 사상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표지를 통해 저자가 알려지게 되면 그 핵심 사상은 곧바로 독자에 의해 개인적인 것, 아니 가장 개인적인 것으로 희석되고, 그럼으로써 책의 목적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더 이상 개인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으려는 지성의 명예심이다.  99-100

애착이 있음과 없음 - 모든 좋은 책은 특정한 독자와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 씌어진 것이며, 바로 그 때문에 다른 모든 대다수의 독자들에게는 좋게 여겨지지 않는다 : 따라서 좋은 책의 명성은 좁은 토대에 기초하여 서서히 쌓아질 수 있을 뿐이다. 평범한 책과 저급한 책은 많은 사람의 마음에 들려고 하며 또 많은 사람의 마음에드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평번하고 저급한 것이다.  100

비판하는 사람들의 편에서 - 곤충들은 악의에서가 아니라 그들도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물게 된다 : 비판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 그들은 우리의 피를 원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고통을 원하지는 않는다.  102

격언과 성과 - 충분한 경험을 쌓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격언이 그들에게 자신들의 소박한 진리를 확실히 이해하게 해주면, 항상 그 격언은 진부하고 널리 알려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는 격언의 창시자를 마치 그가 모든 사람의 공동 재산을 훔치려 한 것처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 그들은 인위적인 어설픈 진리에서 기쁨을 느끼고 이 사실을 작가에게 인식시키려 한다. 작가는 그러한 눈짓의 의미를 평가하여 그것에게 쉽게 자신이 어떤 점에서 성공하고 실패했는지 알아차리게 된다.  103

자신을 위해서 글을 쓴다 - 이성적인 작가는 자신의 후세만을 위해 글을 쓰지 어떤 다른 후세를 위해 글을 쓰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신의 노년을 위해, 즉 자신에게서 기쁨을 느끼기 위하여 글을 쓴다.   103

예술 작품으로서의 예술에 반대해서 - 예술은 무엇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삶을 미화해야 하고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참아낼 수 있고 가능하다면 즐거운 존재로 만들어주어야 한다 : 이러한 과제에 주목하면서 예술은 완화시키는 작용을 하고 우리의 감정을 억누르게 하며, 교제의 형시들을 창조하게 할 뿐만 아니라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예의범정, 순수함, 정중함 그리고 때에 맞는 웅벼노가 침무그이 법칙에 구속받게 한다. 따라서 예술은, 어떠한 노력을 하더라도 인간 본성의 기원에 따라 되풀이해서 솟아 나오게 되는 저 고통스러운 것, 끔찍한 것, 혐오스러운 것과 같은 저 모든 추악한 것을 은폐하거나 새로 해석해야 한다 : 즉 예술은 정열과 정신적 고통과 불아느이 관점에서 꾸려나가야 하고, 피할 수 없거나 극복할 수 없는 추악한 것 속에서 의미 있는 것을 투명하게 비추어주어야 한다. 이 위대한, 아니 너무나 위대한 사명을 따르면 이른바 원래의 예술, 즉 예술 작품으로서의 예술은 하나의 부속물일 뿐이다.  113

교육은 왜곡하는 것이다 - 모든 교육 제도에 있는 이상한 불안정성 때문에 오늘날 어른들은 모두 자신의 유일한 교육자는 우연이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 교육 방법과 의도의 변동성은, 오늘날 가장 오래되고 새로운 문화의 힘들이 마치 어수선한 대중 집회에서 그러한 것처럼 이해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들리기를 원하며,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목소리와 외침을 통하여 자신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거나 혹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불쌍한 교사와 교육자들은 먼저 이러한 어리석은 소리들에 마비되어 버리고 그 다음에는 침묵을 지키며 마침내 무감각해져서 모든 것을 잠자코 참아내게 되며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학생들에게도 모든 것을 참아내게 한다. 교사 자신이 교육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들이 교육할 수 있겠는가? 그들 자신이 꼿꼿이 자라난 힘있고 싱싱한 나무줄기가 아닌데 그들과 연결되는 자가 어떻게 휘어지고 구부러지지 않을 수 없으며 마침내 왜곡되고 기형적인 모습이 되지 않을 수 없겠는가.  118-119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문화의 병사는 되지 말 것 - 사람들이 마지막에, 제일 마지막에 배우게 되는 사실은 젊은 시절에는 어떤 것을 알지 못해서 아주 많은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 즉 첫째 훌륭한 일을 할 것, 둘째 그것이 어디서 그리고 어떤 이름으로 발견된다 하더라도 훌륭한 일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 : 또한 모든 불량하고 평범한 것과는 싸우지 말고 곧 길을 비켜 가는 것 그리고 어떤 일의 이득에 대해 의심부터 하는 것 - 이러한 의심은 숙련된 취향이 있는 사람에게는 빨리 생긴다 - 은 그 일에 반대하는 논거로서 그리고 그 일을 완전히 회피하려는 동기로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 물론 그러한 일에서 오류를 범하게 될 위험과 접근하기 어려운 이득은 곧 불량하고 불완전한 것이라고 혼동하게 될 위험이 몇 번은 있을 것이다. 더 좋은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만 문화의 병사로서 세상의 나쁜 일들의 해결에 몰두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문화의 생산 계층과 성직자 계층이 무장을 하고 나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직업과 가정의 평화를 주의와 경계와 악몽을 통해 음산한 불안감으로 바꾸어놓는다면 그 계층은 파멸하고 말 것이다.  120

고대 세계와 기쁨 - 고대 세계의 사람들은 더 많이 기뻐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반면 우리는 덜 우울해지는 방ㅇ법을 알고 있다 ; 그들은 예민한 감각과 풍부한 통찰력으로 기쁨을 느끼고 축제를 누릴 새로운 동기를 발견해냈다 : 반면에 우리는 고통을 받지 않는 것과 불쾌감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에 주목하는 과제를 해결하는데만 정신을 몰두하고 있다. 고대인들은 고통스러운 삶에 관해서는 잊어버리거나 어떻게든 그 감정을 즐거운 것으로 돌려놓으려고 노력했다 : 그래서 그들은 그 속에서 고통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려고 애썼던 반면 우리는 오히려 고통의 원인을 해결하고 전체적으로 고통을 예방하는 쪽으로 행동한다. - 우리는 아마도 후세의 사람들이 다시 기쁨의 신전을 세우도록 기초를 닦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123

존재에 대한 차후의 변호 - 착오와 환상으로 세상에 나오긴 했지만 진리가 되어버린 많은 사상들이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차후에 그 사상들에 참된 기초를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124

유행의 원천과 이득 - 자신의 형식에 대한 개개인의 확실한 자기 만족은 다른 사람의 모방심을 자극하고 점차 다수의 사람들의 형식, 즉 유행을 창조하게 된다 : 이 다수의 사람들은 유행을 통해서 그 형식에 대해 매우 유쾌한 자기 만족감에 젖기를 원하며 또 실제로 그러한 즐거움을 얻게 된다. - 누구든지 불안을 느끼고 소심하게 자신을 은폐하고 싶은 이유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러한 이유로 인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선의의 4분의 3이 못쓰게 되고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유행에 감사해야만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유행이 이 4분의 3을 해방시켜, 서로 그 유행의 규칙에 매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 확신을 갖게 하고 서로에게 명랑한 친절을 베풀도록 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법칙이라 하더라도 다수의 사람들이 구속되어 있는 한, 그것은 마음의 자유와 안정을 준다.  131

자유로운 정신 - 만약 자유정신이라는 이름이, 자신의 어깨 위에 세상의 질투와 모욕이라는 짐을 일부분 짊어짐으로써 나름대로 자유정신이라는 이름을 욕설로 붙이고 다니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중 누가 감히 자유정신으로 불리고자 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진지하게 (거만하거나 관대한 반항심을 가지지 않고) ‘자유로운 정신’ 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를 향한 경향을 우리 정신의 가장 강한 충동으로서 느끼기 때문이며, 또한 소극적이고 거의 경멸적인 표현을 쓰자면, 속박되고 뿌리를 깊이 내린 지성인들과는 반대로, 우리는 우리의 이상을 대부분 정신적인 유목 생활 속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131-132

진부한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 - 진부한 것들과는 너무 거리가 먼 치밀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종종 모든 종류의 우회로와 오솔길을 지나온 후 그러한 진부한 것을 발견하고 크게 기뻐하며 치밀하지 않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133

어디로 여행해야 할 것인가 - 직접적인 자기 관찰도 자신을 알기에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 우리에게는 역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과거란 수많은 물결 속에서 우리에게 계속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 우리 자신은 이 흐름에 대하여 매 순간 느끼는 존재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 이 경우에도 역시, 만약 우리가 겉으로 보아 우리의 가장 고유하고 개인적인 본질로 보이는 흐름 속으로 내려가려고 한다면,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들여놓지 못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격언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 이것은 차츰 진부한 것으로 남아 있는 지혜이다 : 또 욕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역사적 시기의 잔해들을 찾아야만 하며, 늙은 헤로도토스가 여행한 바와 같이 우리는 여러 국가들을 - 이 국가들은 그 위에 우리가 설 수 있는 견고해진 오래된 문화 단계에 있다 - 즉 거기에서는 사람들이 유럽의 옷을 벗어버렸거나 아직 한 번도 입은 적이 없는 이른바 미개한 그리고 반쯤 미개한 민족을 향해 여행해야 한다는 것도 그러한 지혜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곳에서 저곳으로 몇천 마일을 걸어갈 필요가 없는 좀더 세련된 여행 기술과 여행 목표도 있다. 아마 지난 3백 년의 문화는 그 문화의 모든 색채와 굴절을 간직한 채 우리 가까이에서 아직도 살고 있음이 거의 확실하다 : 그것들은 발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 문화의 단층들은 여러 가족들 속에, 아니 개개인 속에 아름답고 선명하게 차곡차곡 쌓여 있다 : 물론 다른 곳에는 좀더 파악하기 어려운 암석 단층도 있을 것이다. 분명 외딴 지역과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에 둘러싸인 공동체속에는 훨씬 더 오래된 감정의 표본이 더 쉽게 보존될 수 있고 또 여기서 그것들을 찾아내야만 한다 : 예를 들어 인간이 피폐해지고 깃털이 뽑혀 세상에 나오게 되는 베를린에서는 아마 그러한 것을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여행 기술의 오랜 훈련을 거친 뒤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Argos)가 된 사람은 마침내 자신의 이오(Io) - 에고(ego)를 의미한다 - 를 어느 곳에나 동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와 그리스, 비잔틴과 로마, 프랑스와 독일에서, 민족 이동의 시기와 정착기에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대에서, 고향과 타향에서, 나아가 바다, 숲, 식물과 산 속에서 생성하고 변화하는 에고의 모험의 여행 자취를 다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이렇게 자기 인식은 과거의 모든 것에 관한 총체적 인식이 되는 것이다 ; 여기서는 암시만이 가능한 다른 고찰 관계에 따르자면, 가장 자유롭고 가장 멀리 내다보는 정신의 자기 규저오가 자기 교육은 언젠가는 미래의 모든 인간적인 것에 관한 총체적인 규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41-143

여행자와 그 등급 - 사람들은 여행자를 다섯 등급으로 구분한다 : 가장 낮은 등급의 여행자는 여행하면서 오히려 관찰당하는 사람들이다. - 그들은 여행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며 동시에 눈먼 자들이다 ; 다음 등급의 여행자는 실제로 스스로 세상을 관찰하는 사람들이다 ; 세 번 째 등그브이 여행자는 관찰한 결과에서 그 무엇을 체험하는 사람들이다 ; 그 다음 등급의 여행자는 체험한 것을 자신 속에 가지고 살며 그것을 지속적으로 지니고 있다 ; 끝으로 최고의 능력을 가진 몇몇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관찰한 모든 것을 체험하고 동화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 그것을 여러 가지 행위와 작업 속에서 기필코 다시 되살려나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 여행자에 대한 이 다섯 부류에 따라 대체로 모든 사람들은 삶의 모든 여정을 지나간다. 가장 낮은 등급의 여행자는 순전히 수동적인 사람들이고, 가장 높은 등급의 여행자는 남겨져 있는 내면적 과정들을 아낌없이 발휘해나가는 사람들이다.  149-150

깊이 있는 사람들 - 깊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교제할 때, 자신이 희극배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늘 먼저 겉모습을 가장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151

자만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것 - 모르는 사람이나 어느 정도만 아는 사람과 대화할 때 선별된 생각만을 말하는 것과 자신의 유명한 지인 관계, 중요한 체험과 여행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그가 긍지를 가잔 사람이 아니라는, 즉 적어도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표시이다. 자만심은 긍지를 가진 사람이 쓰는 겸양의 가면이다.  154

좋은 우정 - 좋은 우정은 상대방을 지극히 그리고 자신보다도 더 존중하고,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상대방을 사랑하는 경우에 성립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쉽게 교제하기 위하여 친밀성이라는 부드러운 겉모습과 솜털을 덧붙이는 법을 알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실제적이고 진정한 친밀성과 나와 네가 혼동되지 않도록 현명하게 유지해나갈 경우에만 성립한다.  154-155

정직함 속의 오산 - 우리가 지금까지 침묵해온 사실들은 때때로 우리가 최근에 사귄 친구들이 먼저 알게 된다 : 이때 우리는 어리석게도 이렇게 신뢰를 증명하는 것이 그들을 단단하게 붙들어 맬 수 있는 가장 강한 사슬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말한 것이 가져올 희생을 충분히 강하게 느낄 만큼 우리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배반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우리의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고 만다 : 그래서 아마 우리는 오랜 친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158

너무 이르지 않게 - 너무 빨리 날카로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와 동시에 너무 가늘어져버리니까.  162

영원한 어린아이 - 우리 근시안들은 동화와 놀이는 유년 시절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마치 우리가 삶의 어떤 시기에는 동화와 놀이 없이 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물론 우리는 그것을 다르게 부르고 다르게 느끼게 되지만 바로 이 점이 그것을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 왜냐하면 어린아이 역시 놀이를 자신의 일로, 그리고 동화를 자신의 진리로 느끼기 때문이다. 짧은 삶이 우리로 하여금 - 마치 각 연령이 새로운 그 무엇을 가져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 지나치게 꼼꼼하게 연령을 구분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어떤 시인이 정말 동화와 노링 없이 살아가는 2백 살의 인간을 그려 보여주지 않을까.  163

때때로 - 그는 도시 성문 안쪽에 앉아 그곳을 지나는 사람에게 바로 이것이 도시의 성문이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은, 그것을 사실이지만 감사를 받고 싶다면 너무 당연한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오, 나는 감사의 말을 원하지 않는다 ; 그러나 때때로 당연한 것을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당연한 것을 유지하는 것도 매우 유쾌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172

부의 위험 -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살마만이 소유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유는 공적으로 위험한 것이 된다. 즉, 소유가 그에게 보장할 수 있는 한가한 시간을 사용할 줄 모르는 소유자는 항상 소유하기 위해 나아갈 것이다 : 이 노력이 그의 즐거움이고, 권태와의 싸움에서의 그의 전략이다. 그래서 정신적인 사람에게 충분할 만큼의 적당한 소유에서 마침내 진정한 부, 더구나 정신적인 비자립성과 빈곤의 찬란한 결과로서 부가 생겨난다. 이제 부는 그의 궁색한 혈통에서 기대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부는 이제 교양과 예술로 가면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 즉 이제 가면을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는 항상 교양을 부러워하고 가면 속에서 가면을 보지 못하는 가난하고 교양이 없는 사람들의 질투심을 자극한다. - 그리고 서서히 사회적 변혁을 준비한다 : 왜냐하면 이른바 ‘문화의 향수’ 속에서 금도금된 저속함과 기만적인 부풀리기 양상은 ‘중요한 것은 오직 돈뿐이다’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물론 돈도 약간은 중요하지만, 정신이 훨씬 더 중요하다.  178

아테네로 향하는 올빼미 - 거대한 국가의 정부는 국민을 두려움과 복종 속에서 자신에게 구속해둘 수 있는 두 가지 수단을 장악하고 있다 : 비교적 조잡한 수단은 군대이며 좀더 세련된 수단은 학교이다. 양쪽 모두가 평범하고 빈약한 재능의 소유자인 활동적이고 건장한 남성들에게는 특유한 것에 불과하지만, 정부는 전자의 도움으로 상류층 국민의 명예욕과 하류층 국민의 힘을 그들 편으로 끌어당긴다 : 그리고 후자의 수단으로는 재능 있는 가난한 자들, 즉 정신적으로 요구하는 바가 많은 중산층의 사람들을 그들 편으로 끌어들인다. 정부는 특히 각 수준의 교사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위’를 우러러보는 정신적인 신하들로 만들어버린다 : 또한 사림학교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사교육을 철저하게 방해함으로써 매우 현저한 수에 달하는 교직을 마음대로 할 힘을 확보해간다. 이제는 만족할 수 있는 자리보다 분명 다섯 배는 많은 수의 굶주리고 굴욕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교직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이 직위는 자신들 편의 사람만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부양하기만 하면 된다 : 그러면 그들 속에는 승진을 바라는 열병 같은 갈망이 유지되어 그들을 정부의 의도에 더 긴밀하게 묶어두게 된다. 왜냐하면 적당한 불만감을 가지게 해두는 것은 용기의 어머니이자 자유로운 생각과 긍지의 할머니인 만족을 주는 것보다 항상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울타리 속에 가두어진 교사 계층을 매개로 하여, 이제 그 나라의 모든 청년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국가에 유용하고 합목적적으로 분류된 특정한 교육 수준까지 끌어올려진다 : 그러나 특히 국가에 의하여 승인되고 보증된 삶의 방향만이 곧 사회적인 우대를 가져온다는 생각이 모든 계층의 미숙하고 야심만만한 사람들에게 거의 보이지 않게 전염되어 간다. 국가 시험과 국가 자격 칭호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매우 광범위해서, 상업이나 수공업으로 성공하여 독립적이었던 사람들까지도, 자신들의 지위 역시 위계와 훈장이 너그럽게 수여됨으로써 위에서 인정받고 승인될 때까지는, 즉 ‘사람들에게 내보일 수’ 있게 되기까지는 가슴속에 불만의 가실르 가진 채 살아가야 할 정도이다. 마지막으로 국가는 국가에 속하는 수많은 관직과 영리직의 임명을, 이 문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국립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우수함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의우와 결부시킨다 : 사회에서의 명예. 자신을 위한 양식, 가족의 영위, 위로부터의 보호, 공동으로 교육을 받은 자들의 동질감, - 이 모든 것이 모든 청년이 달려들 희망의 그물을 만드는 것이다 : 도대체 어디서 그들에게 불신감이 생겨나겠는가! 몇 세기가 지나면 결국 모든 사람에게 몇 년 동안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관습과 전제가 되어버리고, 사람들은 그것에 맞추어 삶의 계획을 설계한다. 이렇게 국가는 학교와 군대, 즉 재능과 명예욕과 힘을 여러 가지 이익에 의하여 서로서로 짜맞추는 장인 기술을 발휘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더 높은 재능을 가진 자와 교양인들을 더 유리한 조건에 의해 군대로 끌어들여 기꺼이 복종하는 군인 정신으로 가득 채운다 : 그 겨로가 그는 아마 언제까지나 국기에 맹세하면서 자신의 재능으로 국각에 새로운 그리고 더 빛나는 명성르 가져오게 될 것이다. - 그러고 나면 거대한 전쟁을 위한 기회 외에는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 기회를 위해 직무상으로, 즉 아주 순수하게 신무노가 거랫 그리고 외교관들을 지원해준다 : 왜냐하면 즉, ‘국민’으로서, 아니 군인 민족으로서 전쟁 시에는 항상 떳떳한 양심을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군인 민족을 위해서 그러한 양심을 먼저 만들어줄 필요도 없겎지만 말이다.  182-184

주권 - 사람들은 나쁜 것도 그것이 마음에 들기만 하면 존경하고 편을 든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호의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이것이 크건 작건 주권이라는 것의 특징이다.  190

여러 의견들에 대한 마지막 의견 - 자신의 의견을 감추거나 그 의견 뒤에 숨어버리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의 이치를 모르거나, 아니면 무모함을 섬기는 경건한 수도회에 속하는 자이다.  193

칭찬을 받은 자에게 - 사람들이 너를 칭찬하는 한, 항상 너는 자신의 궤도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궤도 위에 있다고 믿어라.  193

결코 헛일이 아닌 - 네가 진리의 산을 오르는 것은 결코 헛일이 아니다 : 그것은 네가 오늘 더 높이 올라가거나, 아니면 내일 훨씬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기 위해 힘을 단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99

가능하면 편이 없이 사는 것 - 추종자가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 사람들은 추종자가 추종자이기를 그만두었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202

너무 비싸게 사지 말 것 - 너무 비싸게 산 물건은 역시 대체로 좋지 않게 사용된다. 왜냐하면 물건에 대한 애착이 없이, 씁쓸한 기억과 함께 사용하기 때문이다. - 이렇게 사람들은 이중으로 손해를 보게 된다.  210

창조자와 즐기는 자 - 즐기는 자는 누구나 나무에서 중요한 것은 열매라고 생각한다 ; 그런데 나무에서 중요한 것은 씨이다. - 이것이 모든 창조자와 즐기는 자 사이의 차이다.  213



2장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

현세의 무기력함과 주요 원인 - 주위를 둘러보면 평생 동안 계란을 먹어왔지만 길쭉한 계란이 가장 맛있다는 것, 뇌우가 아랫배에 효력이 있다는 것, 차고 맑은 공기 속에서 좋은 냄새는 가장 넓게 퍼진다는 것, 우리의 미각은 입 안의 여러 부위에서 다르다는 것, 식사 때 많이 이야기하거나 듣는 것이 위에 나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 관찰력의 결여를 나타내는 이러한 실례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하여 전적으로 잘못 간주되고, 거의 관찰되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은 일이란 말인가? - 개개인의 거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무기력함은 이러한 결여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잘 생각해보라 : 생활 양식의 설정, 하루 일의 할당, 교제를 위한 시간과 선택, 직업과 여가, 명령과 복종, 자연과 예술에 대한 감각, 식사, 수면, 반성적 사색에서 무엇이 우리에게 바람직하며 무엇이 우리에게 해로운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 가장 사소한 것과 가장 일상적인 것에 무지하고 예리한 안목이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에게 이 땅을 ‘재앙의 초원’으로 만드는 것이다. 어디서나 그런 것처럼 여기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비이성이다라고 말하지 말라 :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 이성은 충분히, 지나치게 충분히 존재하고 있지만 그 이성은 잘못된 방향으로 돌려져 사소하고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에서 인위적으로 빗나가버린 것이라고, 신부와 교사들 그리고 조잡하건 섬세하건 간에 모든 부류의 이상주의자들의 미묘한 지배욕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중요한 것은 전혀 다른 그 무엇이라고 설득하고 있다 : 즉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구제, 국가에의 봉사, 학문의 발전, 또는 전 인류에 봉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명망과 재산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며, 반면에 개개인의 욕구, 24시간이라는 생활에서 대두되는 크고 작은 필요 등은 경멸스럽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 이미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편에 서서 인간적인 것을 교만하게 등한시하는 것에 전력을 다해 저항했다. 그리고 배려하고 반성해야 할 모든 사항의 참된 범위와 본질에 대해 호메로스의 말을 빌려 경고하기를 좋아했다 : 소크라테스는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집안에서 부딪히는 일’ 이것이야말로 그리고 이것만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223-224

어떠한 새로운 사슬도 느끼지 않는 것 - 우리가 그 어떤 것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한, 우리는 자신을 독립적이라고 간주한다 : 이것은 인간이 얼마나 교만하고 지배욕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오류추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일상적으로 독립해서 살고 있고, 만약 그가 예외적으로 그 독립성을 잃게 되면 그 반대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전제에서 보면, 인간은 구속당하자마자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 반대가 진리라면 어떻게 될까? : 즉 인간은 항상 여러 가지 구속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오랜 습관으로 인해 사슬의 무게를 더 이상 느끼지 않을 때에만 자신을 자유롭다고 간주한다면 어떻게 될까? 다만 새로운 사슬에서만 인간은 여전히 구속감을 느낀다 : - 그렇다면 ‘의지의 자유’란 본래, 어떠한 새로운 사슬도 느끼지 않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228

근본 오류 - 인간이 어떤 정신적 쾌감이나 불쾌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환상 중 어느 하나에 지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 중 하나는, 특정한 사실들과 특정한 감정의 동일성을 믿어야만 한다 : 그러면 그는 현재의 상태를 과거의 상태와 비교함으로써, 또 그것들을 동일시하거나 차별함으로써(모든 기억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정신적인 쾌감이나 불쾌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 또 다른 하나는, 의지의 자유를 믿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이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것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도 있었는데”라고 생각하면 거기에서 마찬가지로 쾌감이나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 모든 정신적 쾌감과 불쾌감에 작용하고 있는 이러한 오류 없이, 인간적 본질은 결코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230

비도덕주의자들 - 도덕주의자들은 오늘날 비도덕주의자로 비난받는 것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도덕을 해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부하려는 사람은 먼저 죽여야만 한다 :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다지 더 잘 알고, 더 잘 판단하고, 더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지 세상 모두를 해루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여전히 모든 도덕주의자들이 그 모든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 그들은 도덕주의자를 도덕의 설교자와 혼동하고 있다. 과거의 도덕주의자들은 도덕을 충분히 해부해보지도 않고 설교하는 일이 너무나 흔했다 : 이 때문에 이러한 혼동뿐만 아니라 현재의 도덕주의자들에 대한 유쾌하지 않은 생각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237-238

균형의 원리 - 도둑과 도둑으로부터 지켜주겠다고 사회에 약속하는 권력잔느 아마 근본적으로는 매우 비슷한 존재일 것이다. 단 후자는 전자가 획득하는 것과는 다르게 자신의 이익을 획득할 뿐이다 : 즉 사회가 그에게 바치는 정기적인 세금에 의해서이지 약탈에 의해 이익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랜 동안 동일한 인물과 다름없는 무역상과 해적 사이의 관계와 같다 : 그들은 이쪽 역할이 불리하게 보이면 다른 쪽 역할을 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인 도덕은 모두 해적 도덕이 영리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 가능한 한 싸게 사서 - 사업비 이외에는 전혀 경비를 들이지 않고 - 가능한 한 비싸게 팔려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 저 권력자는 도둑과는 달리 균형을 유지할 것을 약속한다는 것이다 ; 약자들은 그 속에서 살아나갈 하나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왜냐하면 약자들은 균형을 유지하는 세력과 함께 일하거나 아니면 균형을 유지하는 자에게 종속되거나 (보수를 받는 대신 그에게 봉사한다)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자의 방법이 즐겨 선택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결국 두 가지 위험한 존재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즉 약자는 권력자에 의해서, 또 권력자는 이익의 관점에 의해서 ; 즉 권력자는 종속된 자들을 자비롭게 혹은 적당히 다루어서 그들이 자신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배자까지도 부양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실제로 이 경우는 여전히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대해질 수도 있지만,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파멸과 비교해보면 사람들은 이러한 상태에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다. - 공동사회란 처음에는 위험한 세력들과 균형을 이루기 위한 약자들의 조직이었다. 만약 그들이 적대 세력을 한 번에 파멸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진다면, 이 우월한 힘을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 바람직 할 것이다 : 이러한 일은 개개의 강력한 가해자가 문제가 되었을 경우에 분명히 시도된다. 그러나 그 개개인이 족장이거나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다면, 신속하고 결정적인 파멸의 가능성이 희박할 것이므로 지속적인 불화를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 그러나 이것은 공동사회에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를 가져오게 된다. 왜냐하면 사회는 그 상태 때문에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반드시 규칙적으로 준비해야 할 시간을 잃게 되며, 모든 노동에 따른 수확이 매순간 위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공동사회는 방어와 공격을 위한 자신들의 힘을 위협적인 이웃의 힘과 같은 수준으로 올려놓고, 이제 저울 위에는 똑같은 쇳덩이가 올라가 있으니 서로 좋은 친구가 되어보지 않겠는가라는 입장을 이해시키려 한다. - 따라서 균형이라는 것은 가장 오래된 법 이론과 도덕론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 된다 ; 정의의 토대가 되는 것이 균형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야만적인 시대에 이 이론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말했을 경우, 이것은 이미 달성되어 있는 균형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그 균형을 보복에 의해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 그 결과 한쪽이 다른 쪽에 대하여 해를 가한다 하더라도, 다른 쪽은 더 이상 맹목적인 분노를 지닌 복수를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같은 형벌에 의해 흐트러진 세력 관계의 균형이 회복되는 것이다 : 왜냐하면 이러한 원시 상태에서는 한 눈과 한 팔이 더 많다는 것은 한 조각의 힘과 무게가 더 많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공동사회의 내부에서는 위반 행위, 즉 균형의 원리를 파괴하는 행위에는 수치와 형벌이 가해진다 : 수치는 부당한 가해로 이익을 얻은 가해자에게 부여되는 무게이며, 과거의 이익을 상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압도하는 손실을 수치로 다시 받게 하는 것이다. 형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 모든 범죄자가 자신에게 허락한 우월한 힘에 훨씬 더 우월한 힘을, 즉 폭행에 대해서는 투옥을, 도둑질에 대해서는 배상금과 벌금을 과하는 것이다. 이렇게 범죄자는 자신의 행동 때문에 공동 사회에서, 또 사회의 도덕적 이득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 이 때문에 형벌은 보복일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 자연 상태의 가혹함에 관한 그 무엇인 것이다 ; 형벌은 바로 이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239-241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에 대한 해석 -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은, 어느 누구든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관점에서 나쁜 상태에 처할 수 있다는 것과 걱정이나 후회나 고통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유래한다 : 즉 남에겍 닥쳐온 불행이 그를 자신과 똑같은 위치에 두게 되고 질투를 가라앉히기 때문이다. - 이와 반대로 그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낄 경우에도 자신에게  불행이 닥쳐올 때 적용시키기 위해 이웃의 불행을 의식 속에 자본으로 모아두게 된다 ; 이렇게 그는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즉 평등을 지향하는 마음은 행운과 우연의 영역에 자신의 척도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은 평등의 승리와 회복에 대한 가장 비열한 표현이고, 그리고 좀더 고상한 세계 질서를 가진 곳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인간이 다른 사람 속에서 자신과 같은 인간을 관찰하는 것을 배운 후에, 즉 사회가 건설된 후에 비로소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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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나의 치유와 자기 회복을 위해 언제나 내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고립되어 있고, 고립된 시선으로 보지 않으려는 신념이었다. 10

우리는 ‘자유정신’의 유형이 언젠가 완전해질 때까지 성숙하고 단 맛을 낼 수 있도록 정신이 어떤 위대한 해방 속에서 결정적인 사건을 겪었으며 그 사건이 전에는 얼마나 속박된 정신이었고 귀퉁이와 기둥에 영원히 묶여 있었을 것처럼 보였는지 추측할 수 있다. 무엇이 가장 단단하게 묶을까? 완전히 잘라버릴 수 없는 밧줄은 어떤 것일까? 고상하고 선택된 부류의 인간에게 그것은 의무가 될 것이다. 젊음에 어울리는 외경심, 오랫동안 숭배하고 가치를 부여해온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나약함, 자신들이 성장했던 땅, 자신들을 이끌어주었던 손길, 숭배를 배웠던 성전 등에 대한 감사, 바로 그들의 최고의 순간 그 자체가 그들을 가장 단단히 묶고 가장 지속적으로 의무를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위대한 해방은 이처럼 속박된 것에 마치 지진처럼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 그러면 젊은 영혼은 단 한번에 동요되고 분리되어 떨어져버리고 만다 - 그들 자신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충동과 혼란이 그 영혼을 지배하고 그에게 명령하는 주인이 되어 버린다 ; 의지와 소망은 어떻게든 그리고 어디로든 나아가려고 눈을 뜨게 된다 ; 미지의 세계를 향한 불굴의 모험적인 호기시이 그의 모든 감각에서 불타오르고 불꽃이 흔들거린다. “여시거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 이렇게 단호한 목소리와 유혹이 울려퍼진다. ‘여기’그리고 ‘집에’라는 말은 그가 지금껏 사랑해온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가 사랑해왔던 것에 대한 갑작스런 공포와 의심, 의무로 불렸던 것에 대한 섬광 같은 멸시 그리고 방랑, 타향, 소외, 냉각, 환멸, 냉담에 대한 선동적이고 의식적이며 화산처럼 솟구치는 욕망, 사랑을 향한 증오심, 아마도 자신이 지금까지 숭배했고 사랑했던 곳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신전모독과 같은 행동과 눈초리, 아마도 자신이 방금 한 일에 대한 불타오르는 수치심과 동시에 그 일을 해냈다는 기쁨 그리고 그 승리를 알림으로써 느끼는 더할 나위없는 내면적인 기쁨의 전율이다 - 승리라고? 무엇에 대한, 누구에 대한 승리란 말인가? 그것은 수수께끼 같이 의문스럽고 모호한 승리이긴 하지만 어쨌든 최초의 승리이다 : - 위대한 해방의 역사에는 이와 같은 아픔과 고통이 따른다. 해방은 동시에 인간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하나의 병이기도 하다. 스스로 정의하고 스스로 가치를 정립시키려는 힘과 의지가 만드는 이 최초의 폭발, 자유로운 의지를 향한 이 의지 : 그리고 풀려난 자, 해방된 자가 이제부터 자신이 사물을 지배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할때 그의 거침없는 시도와 기묘한 행동에는 얼마나 많은 질병이 나타날 것인가! 그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으로 무섭게 배회한다 ; 그의 긍지의 위태로운 긴장 상태는 그가 약탈하는 것으로 보상되어야만 한다. 그는 자신을 자극하는 것을 파괴해버린다. 그는 자신이 은폐하는 것, 부끄러움 때문에 간직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을 악의에 찬 미소로 뒤집어버린다 : 그는 만약 이러한 사물들을 뒤집어버리면 그것들이 어떻게 보일 것인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지금까지 좋지 못한 평판을 받아온 것에 자신의 명예를 되돌려놓으려고 한다면, 그리고 호기심으로 시험해보려는 듯이 가장 금지된 것의 주위로 몰래 기어 들어가려 한다면 거기에는 자의와 자의에서 나오는 쾌감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의 행동과 방황의 배후에는 더욱 위험한 호기심의 의문부호가 자리잡는다. 왜냐하면 그는 마치 황야에서처럼 불안하면서도 정처없는 행로의 중간에 있는 것이므로. ‘모든 가치를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일까? 아마도 선은 악이 아닐까? 그리고 신은 악마의 발명품일 뿐이거나 악마를 더욱 고상하게 만들어놓은 것은 아닐까?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허위가 아닐까? 또 우리가 속았다면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동시에 속이는 자가 아닐까? 우리는 속이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 이런 생각이 그를 인도하고 더욱 멀리, 더욱 빗나가도록 그를 현혹한다. 고독이 그를 겹겹이 에워싼다. 저 무시무시한 여신이자 잔인한 정념의 어머니인 고독이 그를 더욱 위협하고 목을 조르고 심장을 짓누른다. - 그러나 고독이 무엇인지를 지금 어느 누가 알겠는가? ...

이러한 병적인 고립 상태와 황량하기만 한 시험기에서 벗어나, 저 흘러 넘치는 섬뜩한 확실성과 가히 질병마저도 포괄하는 건강성에 이르는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질병은 인식의 수단이며 인식을 낚는 낚싯바늘로서 반드시 필요하다. 자기 통제와 심정의 수양이며, 수없이 많은 대립적인 사유방시에 이르는 여러 길을 허용하는 그 성숙한 정신의 자유에까지 이르는 길은 멀다 - 정신이 자신의 길에서도 자신을 잃고 방탕하며 어느 한 구석에 취한 듯 주저앉아 버리게 될 위험을 몰아낼 수 있는 저 넘치는 풍요함의 내면적인 광대함과 자유분방함에 이르게 될 때까지의 길은 멀다. 그리고 위대한 건강의 표시인 저 유연하고 병을 완치하며 모조해내고 재건하는 힘이 넘쳐흐르기까지의 길도 아직 멀다. 그렇게 넘쳐흐르는 힘은 자유정신으로 하여금 시험에 삶을 걸고 모험에 몸을 내맡겨도 된다는 위험스런 특권을 부여한다. 그것은 자유정신의 거장다운 특권이다! 그 사이에는 긴 회복기가 놓여 있다. 그 시간은 고통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이고 다체로운 변화가 가득하여, 벌써 건강이라는 옷을 입고 위장을 한 강이한 건강을 향한 의지에 지배되고 규제되는 시간들이다. 거기에는 나중에 이러한 운명을 가진 한 인간을 감동 없이는 회상할 수 없는 중간 상태가 있다 : 거기에는 창백하고 섬세한 빛과 태양의 행복이 속해 있다. 즉 새의 자유, 새의 조망, 새의 오만에서 나온 감정과 호기심과 갸날픈 멸시의 감정이 얽힌 제3의 감정이 있다. ‘자유정신’ - 이 차가운 단어는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편안하며 따뜻하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랑과 증오의 속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마음대로 가까이 가고 멀어지며, 기꺼이 도주하고 피해다니며 날아다니고 다시 사라지거나 또다시 높이 날아오르며 사는 것이다 ; 사람들은 언젠가 자신 가운데에서 엄청난 다양성을 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변하게 된다. - 그러고는 자신과 무관한 사물을 걱정하는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자유정신을 괴롭히지 않는 그런 것과 관계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

한 단계 더 회복되면, 자유정신은 다시 삶에 천천히, 거의 반항적으로, 거의 의심스러운 듯 가까이 다가간다. 그의 주위는 다시 점점 따뜻해지고 마치 노란색 같은 빛을 띠게 된다 ; 감정과 공감은 깊어지고, 눈을 녹이는 듯한 온갖 바람이 그 위로 지나간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주위에 처음으로 눈을 뜬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그는 놀란 채 조용히 앉아 있다 : 도대체 그는 어디에 있었던가? 이 친근하고 가장 가까운 사물들 : 그 사물들이 그에게 얼마나 달라 보이는가! 그것들은 그 사이에 어떤 솜털과 매력을 얻었는가! 그는 감사하며 뒤를 돌아본다 - 자신의 방랑과 고집, 자기소외, 자신이 차가운 하늘을 새처럼 날며 멀리 보았던 것에 감사하며. 그가 나약하고 우둔한 게으름뱅이처럼 언제나 ‘집에’, 언제나 ‘제정신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던 것은 얼마나 잘한 일인가! 그는 자신을 잊고 있었다 :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서야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 그때 그는 거기서 얼마나 놀라운 것을 발견하는가! 미지의 전율! 회복기에 있는 사람이 느끼는 피로감과 오랜 질병 그리고 병이 재발한 가운데 느끼는 행복! 고통에 쌍 조용히 앉아 인내심을 키우는 일과 햇빛 아래 누워 있는 일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누가 겨울의 행복과 벽에 드리워진 햇빛의 얼룩을 그만큼 잘 알 수 있단 말인가! 삶을 향하여 다시 몸을 반쯤 돌린 이 회복기에 있는 자, 즉 도마뱀이야말로 세사에서 가장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가장 겸손한 동물인 것이다 : - 그들 중에는 질질 끌리는 옷자락에 작은 찬가를 달고 다니지 않으면 하루도 못 견디는 자도 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 이러한 자유정신의 기질을 가지고 병에 걸려 한동안 앓고 나서, 그 후에 더 오랫동안 건강하게, ‘더욱 건강하게’ 되는 것이 모든 염세주의(알려진 것처럼 염세주의는 낡은 이상주의자와 거짓말쟁이의 암이다)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법이다. 그 속에 있는 지혜, 즉 삶의 지혜는 오랜 기간 동안 소량의 약만으로 건강 자체를 처방한다는 것이다. 12-17


제1장 최초와 최후의 사물들에 대하여

인류는 유래와 기원에 관한 질문을 의식에서 몰아내고 싶어한다. 그 반대의 경향을 자기 속에서 느끼게 되려며 ㄴ우리는 거의 탈인간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24

철학자들의 유전적 결함 - 철학자가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두 근본적으로 극히 제한된 시기의 인간에 대한 증언에 불과하다. 여갓적 감각의 결여는 모든 철학자가 지닌 유전적 결함이다. .. 절대적 진리가 없는 거소가 마찬가지로 영원한 사실도 없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역사적으로 철학하는 일이 필요하며, 그와 동시에 겸양의 덕이 필요하다. 24-25

현상과 물 자체 - 수천 년 전부터 우리는 도덕적, 미학적, 종교적 요청과 맹목적인 애착, 정열 또는 경외감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았으며 비논리적인 사고의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세계는 점차 이처럼 이상할 정도로 다채롭고, 끔찍하게 의미심장하고 감정이 넘치게 되었다. 세계가 색채를 띠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색을 칠한 사람은 우리였던 것이다. 인간의 지성이 현상을 나타나게 했으며, 근본적인 자신의 해석을 사물 속으로 끌어들였다. 38

회의(懷疑 품을회 의심의)의 추정적 승리 - 한 번쯤은 회의적인 출발점을 인정해보라. 만약 다른 형이상학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고 우리에게 알려진 유일한 세계에 대한 모든 형이상학에서 나온 설명들이 전적으로 소용없는 것이라면, 그때 우리는 어떤 눈길로 인간과 사물들을 보게 될 것인가? 44

비교하는 시대 - 사람들이 관습에 묶이지 않을수록 그만큼 동기의 내면적 운동은 활발해지며, 그에 상응하여 외적 불안정, 인간의 뒤얽힌 혼란, 노력의 다성음악도 그만큼 커진다. 자기 자시이 있는 곳에 자신과 후손을 묶어두는 엄격한 강제성이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 존재하는가? 도대체 누구에게 아직도 무엇인가 엄격하게 속박하는 것이 존재하는가? 모든 종류의 예술양식이 나란히 모조되고 있다. 모든 단계나 모든 종류의 도덕, 관습, 문화 또한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시대는 서로 다른 세계관, 도덕, 문화가 비교될 수 있고 나란히 체험될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 고뇌를 두려워하지 말자! 오히려 시대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과제를 우리는 가능한 한 크게 생각하도록 하자. 46-47

꽃잎의 향기에 취해서 - 종교와 예술은 세계의 꽃이지만, 그것이 줄기보다 세계의 뿌리에 더 가까운 것은 결코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종교와 예술로 사물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는 없다. 오류는 종교와 예술과 같은 꽃을 피우게 할 만큼 인간을 깊고 섬세하며 상상력이 풍부하게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53

추리할 때의 나쁜 습관들 - 사람들이 가장 흔히 범하는 오류 추리는, 어떤 사항이 실재하므로 그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53

비논리적인 것은 불가피하다 - 비논리적인 것이 인간세계에 필요하며 비논리적인 것에서 좋은 것이 많이 생겨난다는 인식은 사상가를 절망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 중 하나다. 비논리적인 것은 정열, 언어, 예술, 종교 등에 그리고 대체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에 상당히 깊이 파고들어 가 있어서, 이들 아름다운 것들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주지 않고는 비논리적인 것을 퇴치할 수 없다. 54

불공정함은 불가피하다 - 어떤 사람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 우리가 겪은 경험은 총체적 평가를 위한 논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할만큼 완전할 수는 없다. 모든 평가는 성급하며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재는 척도, 즉 우리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코 불변의 크기를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분위기와 동요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에 대한 어떤 사항의 관계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확실한 척도라고 믿어야만 한다. 아마 이상의 모든 면에서 본다면 사람은 전혀 판단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평가하지 않고, 혐오와 애착 없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든 혐오는 모든 애착과 마찬가지로 역시 평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처음부터 비논리적인, 따라서 불공정한 존재이며,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현존재의 가장 크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조화 중의 하나이다. 55-56



제2장 도덕적 감각의 역사에 대하여

매우 진지한 개인과 민족에게 가벼움이 필요하듯, 마찬가지로 다른 부류에 속하는 매우 자극받기 쉬운 자와 동요하기 쉬운 자에게는 자신들의 건강을 위해 가끔 무겁게 짓누르는 짐이 필요하다. 점점 불길에 휩싸여가는 시대의 우리 더욱 정신적인 인간들은 우리가 적어도 지금처럼 부단히 악의 없고 절도를 지키녀 살아갈 수 있도록, 또한 이 시대에 거울과 자기반성으로서 이바지할 수 있도록, 불을 끄고 식히는 존재하는 모든 수단들을 잡기 위해 손을 뻗어야만 하지 않을까? 68

예지적 자유에 대한 우화 - 소위 도덕적 감각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주요 단계를 거친다. 첫째, 사람들은 동기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개별 행위를 단지 이롭거나 해로운 결과들에 의해 선 또는 악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이런 명칭의 유래를 잊고, 그것의 결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행위 자체에 ‘선’ 또는 ‘악’의 특징이 내재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한다. 언어가 돌 자체를 단단하다고, 나무 자체를 푸르다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오류다. 즉 그렇게 함으로써 결과를 원인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선함 또는 악함을 동기 속에 집어 넣고, 행동 자체가 도덕적으로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사람들은 선하다, 악하다는 술어를 개별 동기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 전체에 부여한다. 식물이 흙에서 자라는 것처럼, 인간의 본질에서 동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은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다음에는 행위에 대해서, 다음에는 동기에 대해서,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차례차례 책임을 묻는다. 결과적으로 인간들은 이 본질 역시 필연적인 결과이며, 과거와 현재의 사건들의 여러 요소와 영향으로 결합되어 있는 이상, 그것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곧 인간은 어떤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본질, 동기, 행위, 나아가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로써 도덕적 감각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이자 책임성에 관한 오류의 역사이며, 그것은 의지의 자유에 관한 오류에서 나오고 있다는 인식에 이른다. ... 불만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만은 행동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필요는 없다는 잘못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므로 후회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불만은 인간이 고칠 수 있는 습관이다. 69-70

친절의 경제학 - 인간의 교제에서 가장 효험 있는 약초이며 힘으로 간주되는 친절과 사랑은 대단히 가치 있는 발견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마 이 향기로운 약을 가능한 한 경제적으로 사용하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친절의 경제학이란 가장 무모한 몽상가의 꿈이다. 76

동정을 유발시키려고 하는 것 - 로슈푸코의 (그리고 플라톤의)판단에 의하면 동정이란 영혼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동정을 입증해야 하지만, 동정을 갖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낟. 왜냐하면 불행한 사람들은 어쨌든 동정을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큰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여길 정도로 어리석기 때문이다. ... 동정에 대한 열망은 자기 만족을 향한 열망이며, 더욱이 이웃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동정심은 지극히 자기애에 빠져 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라 로슈푸코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음"때문은 아니다. 78

진리의 명목상의 단계들 - 흔히 있는 잘못된 추리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누군가가 우리에 대해서 진실하고 솔직하기 때문에 그는 진리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부모의 판단을 믿고 그리스도교도는 교회 창설자의 주장을 믿는다. 이처럼 사람들은 지난 몇 세기 동안 행복과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옹호해온것이 모두 오류에 불과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것이 진리의 단계였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무엇인가를 믿고 자신의 믿음을 위해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을 경우에, 사실은 단지 오류가 그를 부추겼을 뿐이었다면, 이것은 너무나 부당한 일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런 과정은 영원한 정의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민감한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정신과는 반대로 다음의 명제를 명령한다. 즉 도덕적 행위와 예지적 통찰 사이에는 철저하게 필연적이 ㄴ유대가 이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영원한 정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81

거짓말 -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신이 거짓말을 금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에는 날조, 위장, 기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위프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짓말을 하는자는 자신이 져야 할 무거운 짐에 관해서는 거의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즉 그는 하나의 거짓말을 주장하기 위해서 또 다른 스무 개의 거짓말을 생각해내야 한다.) 다음으로 단순한 상황에서는 나는 이것을 원한다, 내가 이것을 했다 등으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유리하며, 따라서 강제와 권위를 택하는 편이 교활한 방법보다 훨씬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한 어린이가 복잡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면 그는 이와 같이 자연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언제나 자기에게 이익이 되게끔 말한다. 82

자기분할로서의 인간의 도덕 - 진정으로 자신의 일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작가는 누군가가 찾아와서 그 일을 더 명확하게 표현해주고, 여기에 포함된 문제에 대해 남김없이 대답함으로써 자신을 파괴해주기를 원한다. 사랑을 하고 있는 소녀는 연인이 저지른 부정에서 자신이 사랑이 헌신적이며 충실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군인은 조국의 승리를 위해 전쟁터에서 쓰러지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최고 소원도 조국의 승리를 통해 승리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 즉 수면과 가장 좋은 음식을, 사정에 따라서는 자신의 건강과 재산을 자식에게 주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비이기적인 상황들일까? 쇼펜하우어의 말에 따라 이런 도덕적 행위들은 "불가능하면서도 현실적"이기 때문에 기적일까? 이들의 경우에는 인간은 자신의 그 무엇을, 하나의 사상, 하나의 욕망, 하나의 작품 등을 자신의 다른 것보다 한층 더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분할해서 한쪽을 다른 한쪽의 희생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이 명확하지 않은가? 어느 고집 센 사람이 "내가 이 인간에게 한 걸음이라도 길을 양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총에 맞는 편이 낫다"고 할 때,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일까? 어떤 것에 대한 애착(소원, 충동, 욕망)은 앞서 말한 모든 경우에 존재하고 있다. 애착을 가지는 것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비이기적"이지 않다. 도덕에서 인간은 자신을 분할할 수 없는 것, 개체(individuum)로서가 아니라 분할할 수 있는 것(dividuum)으로서 다룬다. 85

약속할 수 있는 것 - 행동은 약속할 수 있으나 감정은 약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감정은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항상 사랑하겠다거나 미워하겠다거나, 항상 그에게 충실하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은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행동은 약속할 수 있다. 이런 행동은 대체로 사랑, 증오, 충실함의 결과이지만, 한편 다른 동기에서 나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러 방법과 동기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익르어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언제까지나 사랑하겠다는 약속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한 나는 너에게 사랑의 행위를 입증할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ㅇ낳게 되더라도, 다른 동기에 의해서일지라도 나는 똑같은 행동을 너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언제까지나 똑같은 것이라고 하는 가상이 상대방의 머리 속에는 존속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기만 없이 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경우, 그것은 사랑의 가상에 대한 외관상의 지속을 약속하는 것이다. 86

지성과 도덕 - 주어진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좋은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동정심을 가지려면 강력한 상상력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도덕은 지성의 우수함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86

복수하기를 원하는 것과 복수하는 것 - 복수심을 품는 것과 복수를 실행하는 것은 격렬한 열병의 발작에 걸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나가버린다. 그러나 복수를 실행할 힘과 용기가 없는데도 복수심을 품는 것은 만성병, 육체와 영혼의 중동증을 안고 있는 것과 같다. 의도만을 중시하는 도덕은 두 경우를 양이 같은 것으로 평가하고, 통상적으로 전자의 경우를 더 나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아마도 복수의 행동이 수반할지도 모르는 나쁜 결과 때문일것이다). 두 가지 평가 모두 근시안적이다. 87

사랑과 정의 - 왜 인간은 정의를 손상시켜가면서 사랑을 과대평가하고, 마치 정의보다 사랑이 더 고상한 본질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랑을 향해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분명히 사랑은 정의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틀림없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그만큼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것이다. 사랑은 어리석은 것이며, 풍부한 풍요의 뿐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이 뿔에서 자기의 선물을 누구에게나 나누어준다. 그가 그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 번도 그것을 감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서와 경험에 의하면 사랑은 정의롭지 못한 사람뿐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는 정의로운 사람에게도 피부 속까지 흠뻑 젖게 하는 비처럼 공평하다. 91

피해자와 가해자의 착각들 -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서 어떤 소유물을 (예를 들면 영주가 서민한테서 연인을) 빼앗을 경우, 가난한 자는 착각을 한다. 자신이 소유한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빼앗아갈 정도로 그 사람은 참으로 흉악한 사람임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자느 ㄴ개개의 소유물의 가치를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사람의 입장을 생각할 줄 모르며,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심하 ㄴ부정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양자 모두 서로에 대하여 잘못된 표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분갷살 만한 권력자의 부정도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엄청난 것은아니다. 이미 물려받은 감각은 더 높은 것이 요구되는 더 고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 그들을 매우 냉정하게 만들고, 양심을 무디게 한다. 만약 우리와 다른 존재의 차이가 아주 크면, 우리는 모두 부정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어, 예를들어 모기 한 마리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죽이게 된다. 그래서 크세르크세스(Xerxes, 그리스 사람들조차 모두 그를 특별히 고귀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의 경우, 전체 원정군에게 불안하고 불길한 불신감을 조성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몸을 토막내게 한 것은, 그의 사악함의 표시가 아니다. 이런 경우에 한 개인은 마치 불쾌한 곤충처럼 제거된다. 세계의 지배자가 오래 느끼도록 자극하기에는 그는 너무나 무가치한 존재다. 그뿐 아니라 어떠 ㄴ잔인한 자도 학대받은 자가 믿고 잇는 그런 정도로 잔인하지 않다. 고통을 상상하는 것은 고통당하는 괴로우모가는 같지 않다. 공정하지 못한 재판간과 사소한 부정직함으로 인해 세상의 여론을 오도하는 저널리스트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원인과 결과는 이런 모든 경우에 잔혀 다른 감정과 사상들로 둘러싸여 있다. 반면 사람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똑같이 생각하며 느낀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이 전제에 입각하여 한 사람의 죄를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특정한다 96-98

수치심의 예민함 - 사람들은 부정한 것을 생각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이런 부정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브끄러워할 것이다. 98

개개인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평을 통하여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자신 앞에서 입증하고 싶어 한다. .. 그들은 다른 살마의 판단력을 자신의 판단력보다 신뢰하고 있다. 100

성숙한 개인의 도덕 - 자신에게서 완전한 개인을 만들어내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최고의 행복을 주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동정적인 감동과 행위보다 그를 훨씬 더 진보시켜준다. 물론 우리 모두는 여전히 개인적인 것을 너무 사소하게 여기는 병을 앓고 있다. 그것은 잘못 교육되어온 것이다. 우리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자. 우리의 감각은 오히려 강제적으로 개인적인 것에서 분리되었으며, 마치 개인적인 것이란 희생되어야만 하는 나쁜 것이기라도 한 듯 국가, 학문,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희생물로 제공되었다. 104-105

인륜과 윤리적인 것 - 도덕적, 윤리적, 윤리학적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확립되어온 규범이나 관습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억지로 복종하는지 또는 기꺼이 복종하는지의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앟으며 그것을 실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사람들로 하여금 윤리적인 것과 비윤리적인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구별을 가능하게 한 근본적 대립은 '이기적인 것'과 '비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관습과 규범에 구속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방되어 있는가에 있다. 여기서 어떻게 관습이 성립된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관습은 선과 악 또는 어떤 내재적 정언 명법을 고려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한 공동체, 한 민족을 유지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잘못 해석된 우연을 근거로 하여 성립된 모든 미신적 관례는, 그것을 따르는 것이 윤리적이라는 관습을 강요한다. 즉 관습에서 해방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공동사회에서는 개인의 경우보다 훨씬 더 해롭다. 모든 관습은 근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많이 잊혀질수록, 계속 더 존중할 만한 것이 된다. 그리고 관습에 바쳐지는 존중은 세대가 지남에 따라 쌓여, 관습은 마침내 신성한 것이 되며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어떤 경우든 경건의 도덕은 비이기적인 행위들을 요구하는 도덕보다 훨씬 더 오래된 도덕이다. 105-106

인륜 안에서의 쾌감 - 쾌감과 도덕성의 근원에 대한 중요한 부분은 습관에서 생겨난다. ... 인륜이란 쾌적한 것과 유익한 것의 결합체이며, 게다가 그것은 심사숙고할 필요가 없다. 106-107

소위 악한 행위에서의 무죄함 - 모든 '악한' 행위들의 동기는 보존 본능, 더 정확히 말해서 개인은 쾌감을 지향하고 불쾌감을 회피한다는 사실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그렇게 동기 규정된 것이라면 그것은 악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고통을 주는 것'은 철학자들의 두뇌 속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쾌감을 가져다주는 것'(쇼펜하우어적인 의미에서 동정심)도 이와 마찬가지다. 국가 형성 이전의 상태에서 우리는,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나무로 모여들때 우리보다 먼저 그 나무의 열매를 빼앗으려는 자가 있으면 그가 원숭이든 인간이든 죽였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는 불모의 땅에서 방랑하게 될 경우 동물에 대해 그런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를 가장 분노하게 만드는 악한 행위들은, 그런 행위를 우리에게 가하는 상대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그의 의향에 따라 이런 나쁜 행동을 우리에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착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의향이라는 것에 대한 이 믿음은 증오, 복수심, 악의를 야기하고 상상력을 완전히 손상시킨다. 반면 우리는 동물에 대해서는 그렇게 격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들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보존본능에서가 아니라 보복하기 위해 해를 가하는 것. 그것은 잘못된 판단의 결과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뵈가 없다. 개인은 국가 이전의 상태에서는 위협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가혹하고 잔인하게 다룰 수 있었다. 그것은 자기 힘을 위협적으로 시험해 보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 약한 자를 자신에게 굴복시키는 폭력을 행사하는 자, 권력자, 최초의 국가 설립자는 그렇게 행동한다. 오늘날에도 국가가 여전히 그렇게 행하고 있는 것처럼 거기에는 그럴 권리가 있다. 오히려 그것을 방해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예를 들어 사회, 국가와 같은 더 큰 개체와 집단적 개체가 개인을 굴복시켜서 그들의 개별성에서 그들을 이끌어내어 집단으로 흡수하게 되면,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토대가 제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도덕성에는 강제가 선행한다. 또한 도덕성 그 자체는 잠시 동안은 여전히 불쾌감을 피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순응하는 상제일 것이다. 나중에 그것은 인륜이 되고 훨씬 후에느 ㄴ자유로운 복종이 되며, 마침내는 거의 본느에 가까워지고 만다. 그때 그 도덕성은, 오랫동안 익숙해지고 자연적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쾌감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덕이라고 불린다. 109-110

판단하지 말라 - 앞서 간 시대들을 고찰할 때 우리는 부당한 비방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노예제도의 불공정함, 인간가 민족들을 정복하는 과정에서의 잔인성은 우리의 척도로 측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는 정의의 본능이 아직 충분히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기주의는 악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웃' (이 말은 그리스도교적 기우너을 가진 것으로 진실에 일치하지 않느다)에 대한 표성이 우리에게는 극히 미약히기 때문이며,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마치 식물과 돌을 대하느 ㄴ것처럼 자유롭고 책임이 없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다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결코 그것을 완전히 배울 수는 없다. 111-112

'인간은 항상 선하게 행동한다' - 자연이 뇌우를 내려 우리를 젖게 했다고 해서 자연을 비도덕적이라고 탓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해를 끼치는 사람을 비도덕적이라고 부르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후자의 경우에는 자의적으로 타나타는 자유의지를, 전자의 경우에는 필연성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구별은 오류이다. 또한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는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는 것에 대해 비도덕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인간은 모기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모기를 아무 거리낌없이 의도적으로 죽이고, 우리 자신과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범죄자를 의도적으로 처벌하고 그에게 고통을 준다. 첫번째의 경우는 개인이 자기 보존을 위해서 또는 자신이 불쾌해지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자가 되며, 두번째 경우에는 국가가 그러하다. 모든 도덕은 의도적으로 해를 가하는 것을 정당방위로 인정한다. 단 그것이 자기 보존의 문제가 되는 경우라면!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가하는 모든 악행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관점만으로도 충분하다. 인간은 자신으 ㄹ위해서 쾌감을 원하고 불쾌감을 없애고자 한다.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자기 보존의 문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말은 타당하다. 인간은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선을 행한다. 즉 인간은 지성의 정도와 이성의 갖가지 척도에 따라 언제나 자신에게 선하게(유리하게) 보이는것을 행한다. 113

만약 인간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개별적인 모든 행위는 미리 계산될 것이다. 인식의 모든 진보, 모든 오류, 모든 악의도 말이다. 118

많은 행위가 악하다고 말하지만 그 행위들은 단지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를 선택했던 지성의 정도가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한 의미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모든 행위는 어리석다. 왜냐하면 현재 이를 수 있는 최고의 인간 지성은 반드시 또 추월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120




제4장 예술가와 저술가의 영혼으로부터

완전한 것은 생성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 - 우리는 완전한 것에 대해서는 모두 그것의 생성에 의문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현존하는 것이 마치 마술에 의해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즐기는 데 익숙해 있다. ...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즉흥적인 것이라는, 기적처럼 갑자기 생긴 것이라는 믿음을 불러일으킬 때 완전한 효과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예술의 학문은 이런 착각을 가장 분명하게 거부해야 하고, 예술가의 그물에 걸리느 한, 지성의 그릇된 추론과 악습들을 적발해내야 한다. 그것은 자명한 일이다. 167

예술가는 일생 동안 어린아이와 젊은이인 채로 있으며 자신에게 예술 충동이 엄습했던 지점에 머물러 있다. 169

손으로 하는 작업의 성실성 - 재능과 타고난 능력에 대해서만 말하지 말라! 타고난 재능이 거의 없이도 위대해진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위대한 사람이 되었고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천재'가 되었다. 그런한 자질을 의식하고 있는 살마이라면 아무도 그것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커다란 전체를 만드는 일을 감행하기 전에, 우서 부분을 완전히 만든는 것을 배우는 숙련된 장인의 성실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부분을 완성하기 ㅏ여 시간을 부여했다. 왜냐하며 그들은 현혹시키는 전체의 효과보다 작은 것, 지엽적인것을 잘 만드는 일에 더 많은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하여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 있을 까 하는 방법은 쉽게 제공할 수 있으나, '나에게느 재능이 충분치 않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질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느 그 자질을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2페이지를 넘지는 않지만 거기에 포함된 모든 단어가 필연적이라고 할 만큼 명확한 소설을 백 개 이상 습작해보라. 가장 함축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일화의 형식을 배울 때까지 매일 일화를 쓰도록 하라. 인간의 유형과 성격을 수집하거나 윤색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 특히 주위의 다른 사람드에게 미치는 효과를 유심히 바라보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에게 말을 자주 하고 남이 말하는 것을 귀를 쫑긋 세워 듣도록 하라. 풍경화가와 의상 디자이너처럼 여행하도록 하라. 잘 표현되면 예술적 효과를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개개의 학문에서 발췌하도록 하라. 끝으로 인간 행위의 동기에 대해서 잘 생각하고 이 점에서 가르침을 주게 될 어떤 지침도 냉대하지 말고 밤낮으로 이런 것들의 수집가가 돼라. 이와 같은 다양한 훈련으로 2,30년을 내라. 그 후에는 작업실에서 창작된 것이 거리의 빛 속으로 나가도 좋다. 그런데 대부부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들은 부분에서가 아니라 전체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마 한 번은 선택이 적절하여 주목을 끌게 되지만 그때부터 항상 실패할 것이다. 그것은 충분히 당연한 근거에서 나오는 일이다. 때때로 이러한 예술적 삶의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이성과 성격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에는 운명과 필욕 그 자리를 물려받아 미래의 거장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여 그의 손으로 하는 작업의 모든 조건을 거쳐 단계적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181-182

대중의 예술적 교육 - 동일한 주제가 서로 다르 거장에 의해서 수많은 방식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대중은 소재에 관심을 갖는것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작업들에 의해 그 주제르 알게 되고 새로운 것이 주는 매력과 긴장감의 매력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며느 결국에는 이 주제를 취급할 때의 어떤 뉘앙스, 섬세하고 새로운 발명도 파악하고 즐기게 될 것이다. 185

예술가와 그의 추종자는 보조를 맞춰야 한다 - 양식이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진행하는 것은, 예술가뿐 아니라 청중과 관중도 이 진행에 참여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느리게 진행되어야 한다. ... 왜냐하면 예술가가 대중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이미 대중은 급속히 낮은 곳으로 가라앉기 때문이다. 186

집단정신 - 훌륭한 저술가는 자신의 정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구들의 정신까지도 가지고 있다. 192

학문에 대한 관계 - 학문 속에서 그들 스스로 어떤 것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학문을 흥미롭게 여기기 시작했던 사람은 모두 학문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193

작가의 역설들 - 소위 독자가 불쾌하게 느끼는 작가의 역설들은 그 자각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흔히 독자의 머리 속에 있다. 193

기지 - 가장 기지에 넘치 작가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미소를 거의 만들어내지 않는다. 194

문장가로서의 사상가 - 사상가는 대부분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의 사상뿐만 아니라 그 사상을 사유하는 것까지 우리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194

독자의 정신을 거역하는 죄 - 단지 독자와 같아지기 위해서 저자가 자신의 재능을 부인한다면, 그는 독자가 결코 용서하지 않을 치명적이 죄를 범하는 것이다. 즈 독자가 그것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눈치채는 경우에 말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모든 나쁜 욕을 해도 좋다. 그러나 어떻게 그 말을 하는지의 양식에서는 인간의 허영심을 다시 바로 세워줄 방법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194-195

글쓰기와 가르치기에서의 주의점 - 처음으로 글으 써보았거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글쓰기에 대한 정열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시도하고 체험하는 모든 것에서 문체상으로 전달할 수있느 것만을 배운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저술가와 독자들만을 생각한다. 통찰을 원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기 일을 하는 데는 무능력하다. 그는 언제나 자기 학생의 행복을 생각하고, 그가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인 한 모든 인식은 그를 기쁘게 하낟. 결국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열의를 잃어버리고, 지식의 한 통로, 흔히 수단으로 자신을 파악한다. 199

아킬레우스와 호메로스 - 언제나 아킬레우스와 호메로스의 관계 같은 것이 존재한다. 한족은 체허모가 감각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쪽은 그것들을 기술하는 것이다. 참다운 저술가는 남의 격정과 체험에 다만 단어들을 부여할 뿐이며, 자기가 경험했던 적은 것들에서 많은 것을 추측해내는 예술가이다. 예술가들으 결코 대단한 열정을 가진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흔히 열정을 가진 인간으로 무의식적인 감정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 즉 그들의 삶이 예술의 영역에서 체험을 말하게 될 때, 사람들은 그들이 그렸더 열정을 더욱 신뢰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을 자유롭게 내버려두고 자제하지 않으며 자신의 분노와 욕구를 위해 넓은 자리만 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곧 세상 사람은 저 사람은 얼마나 열정적인가! 하고 외친다. 그러나 깊이 파고드는, 개인을 소모시키며 때로는 잠식해 들어가는 열정인 경우에는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이러한 열정을 체험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것을 극이나 음악 또는 소설에서 묘사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예술가가 아니라면 흔히 방종한 개인이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205



제5장 좀 더 높은 문화와 좀 더 낮은 문화의 징후

퇴화를 통해 고상해짐 - 우리는 한 민족의 혈통은, 사람들이 대부분 자신들의 일상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근본 법칙들의 동일성에 따라, 즉 그들의 공동 믿음에 따라 살아 있는 공동심(共同心 함께공 한가지동 마음심)을 가지고 있을 때 가장 잘 존속한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여기서 훌륭하고 탄탄한 풍습이 강화되고, 개체의 종속성을 배우며 품성에는 이미 강인함이 생일 선물로 주어져서, 그 후에는 그것이 습관하된다. 강하고 동질적이며 특징적인 개체들을 기반으로하는 이런 공동체가 가지는 위험은 세습에 의해 점차 강화되는 우둔화이다. 이것은 한번 정착되면 그림자같이 뒤따라다닌다. 그와 같은 공동체의 정신적 진보는 속박받지 않고 더 불안정하며 도덕적으로 더 약한 개체들에게 따라다닌다. 대개 새로운 것과 다양한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종류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약함 때문에 별 뚜렷한 영향도 보이지 않고 소멸해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들이 후손을 가지게 되면, 긴장이 완화되어 때로는 공동체의 안정된 요소에 상처를 초래한다. 새로운 그 무엇은 바로 이 상처로 인해 약화된 자리에서부터 전체로 접종되는 것이다. 그러나 것의 전체적인 힘은 이 새로운 것을 그의 피 속으로 받아들여 동화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해야 한다. 퇴화해가는 본성들은 진보가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대개 모든 진보에는 어떤 부분적 약화가 성행되어야 한다. 가장 강한 본성들은 유형을 계속 지켜나가고 좀더 약한 본성은 유형을 계속 형성해나가는 것을 돕는다. 비슷한 일이 개별적인 인간들에게도 일어난다. 일종의 퇴화, 불구, 나아가서는 악덕 그리고 신체적 또는 도덕적 결손까지도 다르 한편으로는 때때로 하나의 장점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더 심하게 병든 인간들은 아마 호전적이고 침착하지 못한 종족 속에서 혼자 있으 계기를 더 많이 가지게 됨으로써 더욱 침착하고 현명해지며, 외눈을 가진 사람은 더욱 강한 한쪽 눈을 가지게 될 것이고, 눈먼 사람은 한층 더 깊이 내부를 보고 어쨌든 더욱 날카롭게 듣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저 유명한 생존 경쟁이 한 인간과 종족의 진보와 강화가 해명될 수 있는 유일한 관점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두 가지 것이 한데 합쳐져야 한다 그 하나는 신앙과 공통된 감정 안에서 정신들을 결합함으로써 정착된 힘을 증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퇴화해가는 본성들을 그리고 그 정착된 힘을 부분적으로 약화시키고 손상시킴으로써 더 높은 목표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다. 좀더 여리고 섬세한 것으로서의 더 약한 이 본성들이 대체로 모든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 어디에서인가 부패하고 약해져가는, 그러나 전체로서는 아직 강하고 건강한 민족은 새로운 것의 감염을 받아들여 장점으로 동화시킬 수가 있다. 개별적인 인간의 경우, 교육의 과제는 전체적인 인간으로서의 그가 더 이상 자신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를 확고하고 확실하게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그 후에 교육자느 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아니면 운명이 그에게 입힌 상처를 이용해야 한다. 그리하여 고통과 욕구가 생겨나면, 그 상처 입은 부분에 새롭고 고상한 그 어떤 것이 접종될 수 있는 것이다. 교육자의 전체적 본성은 그것을 받아들여, 나중에 그 열매들 속에서 고상해지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국가에 관해서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설프게 교육받은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통치의 형식은 아주 사소한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정치의 최대 목표는 영속성이며, 이것은 자유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어 다른 모든 것을 능가 한다." 대체로 지속적인 발전과 고상하게 하는 접종은 확실하게 기초가 마련되고 영속성이 최대한 보증될 때에만 가능하다. 물론 모든 영속성의 위험한 동료인 권위라는 것이 통상적으로 그 일을 방해하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225-227

자유정신은 상대적 개념이다 - 어떤 혈통과 환경, 신분과 지위 또는 지배적인 시대의 견해를 근거로 그에게서 예살할 수 있는 거소가 다르게 사유하는 사람을 자유정신이라고 부른다. 자유정신은 예외이며 속박된 정신은 상례이다. 속박된 정신은 자유정신의 자유로운 기본 원칙이란 눈에 띄고 싶은 병적인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거나 또는 속박된 도덕과는 전혀 화해할 수 없는 순전히 자유로운 행위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정짓고 자유정신을 비난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자유로운 기본 원칙들이 머리의 괴팍하모가 엉뚱함에서 나온다고 추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말을 하면서 자신의 말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함으로써 단지 상처를 입히려는 악의를 가지고 잇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유정신의 얼굴에는 보통 속박된 정신도 충분히 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지성의 비범한 우수성과 예리함이 증거로서 역력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정신 활동의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원은 공정하게 평가된 것이다. 사실상 많은 자유정신이 이러한 또는 저러한 양식으로 성립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자유정신이 그런 방법으로 성취한 원칙들은 속박된 정신의 원칙들보다도 더 진실하며 신뢰할 수 있다. 진리의 인식에서는, 어떤 충동에서 그것을 추구했으며,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발견했는지가 아니라 그 진리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자유정신이 정당하다면 따라서 속박된 정신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다. 전자가 부도덕에서 진리에 이르렀는가 그리고 후자가 지금까지 도덕에서 비진리를 고집했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자유정신이 정당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에 관계 없이 그가 관습적이 ㄴ것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이 자유정신의본질에 속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유정신은 역시 진리를, 또는 적어도 진리탐구의 정신을 자기 편으로 삼게 될 것이다. 자유정신은 근거를 요구하고 다른 정신들은 신앙을 요구한다. 227-228

신앙의 기원 - 속박된 정신은 자신의 입장을 근거에서가 아니라 습관에서 받아들인다. 228

모든 국가와 신분, 결혼, 교육, 법률과 같은 사회질서, 이 모두는 그것들에 대한 속박된정신의 믿음 속에서만 힘과 영속성을 가지게 된다. 229

속박된 정신에서의 사항의 척도 - 속박된 정신들은 네 가지 종류의 사항에 대하여 그것들이 옳다고 말한다. 첫째, 영속성이 있는 모든 사항은 옳다. 둘째, 우리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모든 사항은 옳다. 셋째, 우리에게 이득을 가져오는 모든 사항은 옳다. 넷째, 그것을 위해 우리가 희생을 치른 모든 사항은 옳다. 예를 들어 이 마지막 것은, 왜 국민의 의지를 거역하여 시작된 전쟁이 우선 희생이 치러지면 곧바로 열광적으로 게속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232

강한 정신 - 관습을 자기 편에 두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근거도 필요하지 ㅇ낳는 사람과 비교하면, 자유정신은 항상 약한 쪽이다. 특히 행동에서 그렇다. 왜냐하면 자유정신은 너무나 많은 동기와 관점들을 알고 있고, 그 때문에 확신이 없으며 미숙한 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가 적어도 자신으 관철시키며 아무 성과도 없이 파멸하지 않을 정도로, 그를 비교적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 있는 것일까? 강한 정신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이것은 개별적인 경우에는 천재의 생산에 대한 문제이다. 한 개인이 관습에 맞서 완전히 개인적인 세계 인식을 지향하는 그 활력, 그 불굴의 힘, 그 인내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232-233

기적적 교육 - 사람들이 신과 신의 배려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바로 그곳에서 교육의 관심은 비로소 크게 성장할 것이다. 마치 기적의 치료에 대한 믿음이 끝났을 때 비로소 치료술이 발전할 수 ㅇ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모두 기적적인 교육을 여전히 믿고 있다. 사람들은 실제로 엄청난 무질서, 목표의 혼란, 상황의 불리한 조건에서 가장 창작력이 풍부하고 가장 강한 사람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러한 것이 당연한 일로 일어날 수 있었던가? 이제 사람들은 앞으로 이런 경우들을 좀더 상세히 관찰하고 세심하게 조사하게 될 것이다. 그때 기적은 결코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상황 아래에서 많은 살맏르이 계속 멸망해간다. 대신 구제된 각 개인들은 대체로 훨씬 더 강력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타고난 강인한 힘으로 이 역경을 타개하고 이 힘을 더욱 훈련하여 키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적은 설명될 수가 있다. 기적을 이미 믿지 않는 교육은 세 가지 사항에 대하여 유의해야 한다. 첫째, 얼마나 많은 활력이 유전되는가? 둘째, 무엇을 통하여 새로운 활력이 점화될 수 있는가? 셋째, 어떻게하면 개인이 불안에 빠져 그 고유성을 파괴당하지 ㅇ낳고 문화의 다양한 요구들에 적응할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하면, 어떻게 한 개인이 사적 문화와 공적 문화의 대위법 속에 참가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가 곡조를 지휘하면서 동시에 그 곡조를 연주할 수 있을까? 242-243

학문의 미래 - 학문은 노력하고 탐구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만족을 주고, 그 성과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극히 적은 만족밖에 주지 않는다. 그러나 학문의 모든 중요한 진리는 조금씩 평번하고 저속해지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 조금밖에 없는 만족도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그 경탄할 만한 구구단을 일단 배우게 되면 이미 더 이상 기쁨을 느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학문이 스스로를 통하여 점점 더 작은 기쁨밖에 주지 못하게 되면, 그리고 위로를 주는 형이상학, 종교, 예술을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더 많은 기쁨을 빼앗게 되면, 인류의 거의 전부가 혜택을 입고 있는 쾌감의 가장 큰 샘이 고갈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좀더 높은 문화는 인간에게 우선 학문을, 그 다음에 비학문을 느낄 수 있는 두 개의 뇌실 즉 이중 두뇌를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두뇌는 혼란 없이 병행하고 분리할 수도 있고 폐쇄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것은 건강상의 요구 사항이다. 한 영역에는 동력원이 있고 다른 영역에는 조절기가 있어서 환상, 편협, 정열로 가열되어야 하며 인식하는 학문의 도움으로 과열된 것의 나쁘고 위험한 결과들이 예방되어야 한다. 만약 좀 더 높은 문화의 이런 요구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아픙로의 인간 발전의 경과는 거의 확실히 예언될 수 있다. 쾌감을 적게 제공하게 되면 참된 것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 버린다. 환상, 오류, 공상은 쾌감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거에 자신들이 주장했던 땅을 단계적으로 쟁취해간다. 그 다음의 학문의 쇠퇴이며 야만으로의 역전이다. 250-251

흥미로운 것의 증가 - 좀더 높은 교양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흥미로워진다. 그는 자신의 사고의 빈 틈이 교양으로 채워질 수 있거나 사상이 교양으로 인해서 확인될 수 있는 곳에서는 재빨리 그 문제의 교훈적인 측면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지적할 줄 안다. 거기서 권태는 점점 더 사라지고, 그와 함께 지나친 감정의 흔분도 사라진다. 그는 마침내 식물 사이를 지나다니는 자연 연구자처럼 인간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자기 자신을 단지 그의 인식 충동을 강하게 자극하느 ㄴ데 불과한 하나의 현상으로 인지한다. 253

학문을 통해서 훈련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능력이다 - 인간이 어느 일정한 시간 동안 엄밀한 학문을 철저히 해왔다는 것의 가치는 그 성과들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성과들은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로 이루어진 바다에 비교한다면 사라져 없어질 만큼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활력, 추진력, 인내력의 강인함을 증대시킨다. 인간은 어떤 목적을 합목적적으로 달성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한 한에서, 언젠가 학문적인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그 뒤에 하게 될 모든 일에서 볼 때 대단히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254

거대한 것에 호의적인 편견 - 사람들은 분명히 모든 거대한 것과 뚜렷한 것을 과대 평가한다. 이는, 만약 어떤 사람이 한 가지 분야에 전력투구하여 자신을 흡사 하나의 거대한 기관으로 만들 때, 이 일이 대단히 유익하다고 느끼게 되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통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확실히 인간 스스로에게는 자신의능력을 균형 있게 훈련하는 것이 더 유익하고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모든 재능은 다른 힘들에서 피와 힘을 빨아먹는 흡혈귀이며, 지나친 생산은 가장 재능 있는 사람까지도 거의 미치게 만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술 안에서도 역시 극단적인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 매우 주의를 끈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는 훨씬 낮은 문화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힘을 가지기를 원하는 모든 것에 굴복한다. 256-257

학교에서의 이성 - 학교는 엄밀한 사고, 신중한 판단, 일관성 있는 추론을 가르치는 것 외의 다른 과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학교는 이 작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것, 예를 들어 종교를 무시해야 한다. 물론 학교는 인간적인 불투명함, 습관 그리고 욕망이 아주 팽팽하게 당겨진 사고의 활을 나중에 다시 느슨하게 만들게 되리라는 것을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학교는 그 영향력이 미치는 한, 인간에게 있는 본질적인 것과 탁월한 것을 강요해야 한다. 그것은 적어도 괴테가 판단하듯이, '인간의 이성과 학문은 최상의 힘'이다. 위대한 자연 탐구자 폰 베어(von Bear)는 동양인에 비해서 모든 유럽인이 뛰어난 점을,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근거들을 말할 수 있는, 훈련된 능력에서 찾고 있다. 동양인들은 이런 능력이 전혀 없다. 유럽은 일관성 있고 비판적인 사고의 학교로 나아갔고, 동양은 여전히 진리와 허구 사이에서 구별할 줄을 모르고, 자신의 호가신이 자신의 관찰과 규칙에 따른 사고에서 유래하는 것인지, 또는 상상력에서 유래하는 것인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서의 이성은 유럽을 유럽으로 만들었다. 중세에 유럽은 다시 동양의 한 부분과 부속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즉 그리스인에게 감사해야 했던 학문적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263-264

좀더 높은 문화는 필연적으로 오해된다 - 지적 충동 외에는 단지 습관이 된 종교적 충동만을 하나 더 가지고 있는 학자들처럼, 자신의악기에 줄을 두 개만 매어놓고 있는 사람은, 더 많은 현으로 연주할 수 있는 사람드을 이해하지 못한다. 더 낮은 사람들에 의하여 항상 잘못 해석되는 것은 많은 현을 가진 더 높은 문화의 본질에 속한다. 잘못된 해석은 예를 들어 예술이 종교적인 것의 가장된 형식으로 간주되는 경우에 일어나게 된다. 오로지 종교적이기만 한 사람들은, 마치 노아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닌 음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문조차도 종교적 감정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275-276

활동적인 사람들의 주요 결점 - 활동적인 사람들에게는 흔히 더 높은 활동이 결여되어 있다. 여기서는 개인적인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관리, 상인, 학자들로서 즉 유적 존재로서는 활동적이지만 아주 특정한 한 개인, 유일무이한 인간으로서는 활동적이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태만하다. 활동적인 사람들의 불행은 그들의 활동이 거의 언제나 약간은 비이성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돈을 모으고 있는 은행가에게 그가 쉬지 않고 일하는 활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서는 안 된다. 이 활동은 비이성적인 것이다. 활동적이 ㄴ사람들은 돌이 굴러가듯 기계적인 성격의 우둔함에 따라 굴러간다. 모든 인간은 모든 시대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노예와 자유인으로 나뉘어 있다. 왜냐하면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노예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그는 자신이 원하는 그 누구, 즉 정치가, 상인, 관리, 학자이다. 277-278

활동적인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태만한가 - 나는 다양한 의견이 가능한 모든 것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 개인은 스스로 다른 모든 사물에 대해서 하나의 새로운,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위치를 차지하는 자기만의 그리고 일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활동적인 사람의 마음속에 근본적으로 들어 있는 태만함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샘에서 물을 깆는 것을 방해한다. 의견의 자유는 건강과 마찬가지다. 양쪽이 모두 개인적인것이며, 양쪽 모두에게서 인정되는 보편 타당한 개념은 세워질 수 없다. 한 개인의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것이 다른 한 개인에게는 이미 질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정신의 자유를 향한 많은 수단과 방법이 더 높이 발달한 본성은 지닌 사람들에게는 부자유로 향하는 방법들과 수단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279-280

부수 효과 - 진정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런 억압이 없어도 결점과 악덕의 경향들을 버리게 될 것이다. 분노와 불쾌함이 그를 엄습하는 일도 좀더 드물어질 것이다. 즉 그의 의지는 인식하는 것과 인식하기 위한 수단, 즉 그 안에서 그가 인식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속적인 상태 외의 아무것도 더 절실히 원하지 않게 될 것이다. 280

앞으로 나아가라 - 그러면 확실한 발걸음과 신뢰를 가지고 지혜의 길로 나아가라! 네가 어떤 존재이든 스스로 경험의 샘이 되어 너 자신으 도우라! 너의 본질에 대한 불만을 던져버리고 네 자신의 자아를 용서하라. 왜냐하면 어쨌든 너는 인식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백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사다리를 가지고 잇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종교와 예술을 어머니와 유모처럼 사랑해봤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명해질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서 바라보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그 마력속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너는 역사에 정통해야 하고, '이쪽-저쪽'의 조심스러운 저울접시 놀이에도 정통해 있어야 한다. 과거의 황야를 통해 그 고통에 찬 위대한 걸음을 걸었던 인류의 발자취를 밟아서 거꾸로 거닐어보라. 그러면 인류가 결코 다시 갈 수 없고 가서는 안 되는 곳을 너는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미래의 매듭이 또 맺어질 것인지를 전력을 다하여 미리 탐색함으로써, 네 자신의 삶은 인식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얻게 된다. 네가 체험한 모든 것, 모든 시도, 오류, 실수, 착각, 정열, 너의 사랑과 희망이 너의 목표속에서 남기없이 꽃을 피우도록 성취하는 것은 네 손에 달려 있다. 이 목표란, 스스로 문화의 고리의 필연적인 하나의 사슬이 되는 것이며, 이 필연성에서 보편적인 문화의 진행 속에 있는 필연성을 추론하는 일이다. 283-284



제6장 교제하는 인간

호의적인 위장 - 사람들과 교제할 때에는 흔히 우리가 마치 그들의 행위의 동기를 간파하지 못한 듯 호의적으로 위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287

평등의 두 가지 방식 - 평등의 욕구는 다른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까지 끌어내리려고 하거나(헐뜯거나 비밀로 하거나 다리를 걸어서) 또는 자신으 모든 사람과 함께 끌어올리려는(인정하거나 도와주거나 남의 성공을 기뻐함으로써)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288-289

신뢰와 친밀함 - 다른 사람과 의도적으로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상대방의 신뢰를 얻고 있는지에 대하여 확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뢰를 확신하는 사람은 친밀함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289-290

사려 깊은 - 아무도 기분 상하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정의로운 기질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이 많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292

논쟁하는 데 필요한 것 - 자신의 사상을 얼음 위에 놓는 법을 이해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논쟁의 열기 속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292

교제와 자만심 - 사람들은 자신이 항상 공로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만심을 잊어버리게 된다. 혼자 잇다는 것은 교만을 심는 결과가 된다. 젊은 사람들은 자만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많은 것을 의미하려는 그들 자신과 똑같은 사람과 사귀고 있기 때문이다. 292-293

공격의 동기 - 사람들은 단지 누구에게 아픔을 주고 그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마 자신의 힘을 의식하기 위해 공격하기도 한다. 293

아첨 - 교제할 때 아첨을 통하여 우리의 조심성을 무디게 하려는 사람들은, 위험한 수단 즉 수면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수면제가 잠이 들게 하지 못하면, 오히려 더 깨어 있게 만들 것이다. 293

침묵 - 양편 모두에게 가장 불쾌한 논쟁의 응수 방법은 화를 내고 침묵을 지키는 일이다. 왜냐하면 공격하는 편은 흔히 침묵을 경멸의 표시로 표명하기 때문이다. 295

대화를 하면서 -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정당함이나 부당함을 인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습관의 문제다. 전자를 인정하는 것도 후자를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가 있다. 297

설명하는 사람 - 그 무엇을 설명하는 사람은 그 사실이 그의 관심을 끌기 때문에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설명하는 것을 통해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싶기 때문에 말하는 것인지를 쉽게 알아차리게 만든다. 후자의 경우에 그는 과정을 하고, 최상급도 사용하며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는 일반적으로 더 서툴게 말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실에 대하여 잘 생각하고 있지 못하지 때문이다. 300-301

모욕하는 것과 모욕당하는 것 - 모욕하고 나중에 용서를 비는 것이 모욕당하고 용서해주는 것보다 훨씬 기분 좋은 일이다. 전자를 행하는 사람은 힘을 과시하고 그 뒤에 성격이 호의적임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후자는, 만약 그가 비인간적이라고 인정받지 않으려면, 이미 용서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강박관념 때문에 상대방을 굴복시킨 데 대한 즐거움도 적어진다. 303

사교 모임 후의 양심의 꺼림직함 - 왜 우리는 일반적인 사교 모임 후에 꺼림칙함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가 중대한 사실을 가볍게 받아들였기 때문이거나, 인물들에 대하여 논의할 때 완전히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는 말을 해야 했을 때 침묵했기 때문이며, 적당한 시기에 일어나서 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사교 모임에서 마치 우리가 거기에 속하는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304

잘못 평가된다 - 자신이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가에 언제나 귀 기울이고 있는 사람은 항상 화가 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우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이미 잘못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들ㄷ조차고 자신들의 언짢음을 때로는 시기하는 말들로 표출한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우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그들이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의 판단은 많은 아픔을 준다. 왜냐하면 그 판단들은 아주 솔직하고 거의 사실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대자인 어떤 사람이 우리가 비밀로 하고 있는 점을 우리 자신처럼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처음에 그 불쾌한 기분은 얼마나 크겠는가! 304

오해된 정직함 - 대화를 하면서 자기 자신을 인용하는 것은("나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자만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된다. 반면 그것은 자주 이와는 정반대의 근원에서 나온다. 그것은 적어도 그 순간을 과거의 어떤 순간에 속하는 묘안들로 장식하고 꾸미지 않으려는 정직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305

자만심의 징후로서 동정심의 요구 -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을 모욕하면서 처음에는 자신을 나쁘게 여기지 않기를, 두 번째에는 자신이 극심한 발작에 지배당하고 있으므로 동정해주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의 자만심은 이렇게 멀리 나아간다. 306

소크라테스의 경험 - 인간은 한 가지 일에 대가가 되고 나면, 통상적으로 바로 그 때문에 대부분의 다른 일들에서는 완전히 무능해진다. 그러나 이미 소크라테스가 경험한 것처럼, 사람들은 정반대로 판단하고 있다. 이것이 대가들과의 교제를 즐겁지 않게 만드는 나쁜 상태다. 307-308

고귀함과 감사하는 마음 - 고귀한 사람은 감사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즐겁게 느끼고, 의무를 가질 기회들을 소심하게 피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후에 감사함을 표현하는 데에도 태연하다. 반면에 천박한 살마은 모든 의무를 지는 것에 대해 저항하거나, 후에 그 감사를 표현하는 데도 과장된 행동을 하거나 너무 고의적으로 애를 쓴다. 그런데 후자의 행동은 더 낮은 혈통 또는 억압된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들에게 보여진 호의가 그들에게는 은혜의 기적을 의미하는 것이다. 309-310

우정을 위한 재능 - 우정에 대해서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는 두 가지 유형이 드러난다. 한 가지 유형은 끊임없는 상승 속에서 어떤 발전 단계에서도 잘 어울리는 친구를 발견한다. 그가 이런 방법으로 얻은 일련의 친구들은 그들끼리 관계를 가지는일이 드물고 때로는 알력과 대립 상태에 빠진다. 이것은 나중의 발전 단계가 앞의 단계들을 지양하거나 해를 입히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런 사람은 농담으로 사다리라고 불려도 좋을 것이다.
또 다른 유형은 전혀 다른 성격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매력을 발휘하여 하나의오나전한 동아리를 이룰 정도의 친구들을 얻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이 친구들은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들끼리 서로 친구가 된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으 ㄹ원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전혀 다른 성향과 본성들의 일체성이 어떻게든 이미 형성되어 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친구를 가지는 재능이 좋은 친구가 되는 재능보다 훨씬 가치 있다. 311

불만의 해소 - 어떤 일에서 실패한 사람은 실패의 원인을 우연으로 돌리기보다 차라리 다른 사람의 나쁜 의지로 돌리낟. 그의 화난 감정은 그가 실패한 게 사물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함으로써 가벼워진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복수를 할 수 있지만 우연에 의한 고통스러움은 억지로 삼ㅌ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주의 측근은 어떤 일에서 실패하면, 어떤 한 사람을 명목상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모든 궁신의 이익을 위하여 그를 희생시키곤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영주는 운명의 여신 자체에게는 복수를 할수가 없으므로 그의 불쾌감이 그들 모두에게 표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312

자만심 - 우리의 모든 좋은 수확을 망치는, 자만심이라 불리는 저 잡초가 자라나는 것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마우것도 없다. 왜냐하면 자만심은 진실한 마음에, 경의의 표현에, 호의적인 친근감에, 연애에, 친절한 충고에, 실수의 고백에, 남을 위한 동정에 들어 있기 때문이며, 그 잡초가 그 사이에서 자라나면 이 모든 아름다운 것이 반감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자만하는 사람, 즉 있는 대로 또는 인정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항상 계산을 잘 한다. 물론 그는 자신의 자만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보통 두려움 또는 편리함 때문에 그가 요구하는 정도의 존경을 그에게 표시하는 한, 순간적인 성과만은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나쁜 보복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그에게 주었던 가치에서 그가 정도를 넘어서 요구한 만큼을 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자만심을 꺾는 일보다 더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는 일은 없다. 자만하는 사람은 자신의 참으로 위대한 업적도 다른 사람의 눈에 의심스럽고 사소하게 보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흙 묻은 발로 그것을 짓밟기도 한다. 자랑스러운 행동이라 할지라도 오해받지 ㅇ낳고 자만으로 보이지 않을 가장 확실한 곳에서만, 예를 들어 친구와 아내 앞에서만 허용될 것이다. 왜냐하면 살마들과의 관계에서 자만심이라는 평판을 초래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손히 거짓말하는 것을 배우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나쁘다. 314-315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ㅇ벗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고 ㄷ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인 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ㅇ벗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고 ㄷ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ㅇ낳앗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이 ㄴ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없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곧 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인 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자유정신과 결혼 - 자유정신이 여성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나는, 자유정신이 고대의 예언하는 새처럼, 현재의 진정으로 생각하는 자 그리고 진리를 말하는 자로 혼자 나는 것을 선호할 것임이 틀림없다고 믿는다. 342

두 화음의 부조화 - 여성들은 봉사하고 싶어하고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자유정신은 봉사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 345



제8장 국가에 대한 조망

문화와 사회계층 - 더 높은 문화는 사회의 서로 다른 두 계층, 노동하는 계층과 여가를 지닌 계층, 즉 참된 여가를 가질 자격을 지닌 계층이 있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또는 좀더 강하게 표현하면 강제노동 게급과 자유노동 계급이 있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있다. 좀더 높은 문화를 생산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경우에는 행복의 분배에 대한 관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도 여가를 가진 계층이 고통을 더 잘 견뎌낼 수 있는 계층이며 고통을 받는 계층이고 현존에 대한 그들의 즐거움은 더 적으며 그들의 과제는 훨씬 더 크다. 353

전복하려는 사람들 중에서 위험한 사람들 - 사회 전복에 대해 숙고하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과 손자를 위해서 그 무엇을 달성하려는 사람들로 나누어보면, 후자가 훨씬 더 위험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욕이 없다는 믿음과 거리낌없는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들은 적당히 물리칠 수가 있다. 지배적인 사회는 그렇게 하기에 아직 충분할 정도로 부유하고 영리하다. 목표들이 비개인적인 것일 때, 위험은 즉시 시작된다. 비개인적인 관심을 가진 혁명가들은, 현존하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모두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하며 따라서 그들보다 스스로가 우월하다고 느낄 수 있다. 363

대중의 위대한 사람 - 대중에게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리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게 주어져 있다. 모든 상황에서 대중에게 아주 즐거운 그 무엇을 마련해주거나 또는 먼저 머리 속에 이것저것이 아주 즐거울 것이라는 생각을 넣어주고 그 다음 그것을 제공하면 된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곧바로 제공해서는 안 되며 최대한의 노력으로 그것을 쟁취하거나 아니면 쟁취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좋다. 강력하고 게다가 정복하기 어려운 하나의 의지력이 거기에 있다는 인사을 대중이 받아야만 한다. 적어도 그러한 의지력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라도 해야 한다. ㄱ상한 의지에는 누구나 다 감탄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사람은 만약 자신이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과 자신의 이기주의에 더 이상 아무러 ㄴ한계가 없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강한 의지가 자신의 열망이 원하는 것에 귀 기울이는 대신 대중에게 아주 즐거운 그 무엇을 얻게 해준다는 것이 보이면, 사람들은 다시 한번 감탄하고 그들 자신의 행복을 원한다. 그 밖에도 그는 대중의 모든 특성을 가지고 잇다 .그래서 대중은 그의 앞에서 그만큼 수치심을 덜 느끼게 되고, 그는 그만큼 더 대중의 인기를 얻는다. 따라서 그는 난폭하고 질투하고 착취를 즐겨하며 음모를 좋아하고 아첨을 잘하고 비굴하고 교만하며 사정에 따라서는 이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다. 367-368

전복에 대한 이론에서의 망상 - 가장 자랑스럽고 훌륭한 인류의 신전이 저절로 드러나리라는 믿음 속에서 모든 질서의 전복을 열렬히 그리고 웅변적으로 촉구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공상가들이 있다. 이러한 위험한 꿈속에는 루소의 미신이 아직도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 미신은 기적적이고 근원적이지만 묻혀진 채 있는 인간 본성의 장점을 믿고, 그 묻혀진 채 있는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사회, 국가, 교육에 나타나는 문화의 여러 제도에 돌리낟.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그러한 모든 전복이 오래 전에 파묻혀버린 아득한 옛 시대의 처참함과 무절제 같은 가장 난폭한 에너지를 새로운 것으로 부활시킨다는 사실을 역사적 체험으로 잘 알고 있다. 즉 전복은 아마 지쳐버린 인류에게는 일종의 힘의 원천일 수는 있겠지만, 결코 인간 본성을 정리하는 자, 건축가, 예술가, 완성자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정리하고 정화하며 개조하는 경향이 있는 볼테르의 절도 있는 본서잉 아니라, 루소의 정열적인 어리석음과 반쯤의 거짓말들이 혁명의 낙관주의적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 정신에 대하여 "그 비열한 자를 굴복시켜라!"고 외친다. 그 정신 때문에 계몽 정신과 진보적 발전의 벙신은 오랫동안 축출되었다. 우리는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서 그 정신을 다시 불러오게 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주시하자! 368-369

학교 제도 - 큰 국가들의 학교제도는 항상 기껏해야 평범한 수준일 뿐이다. 그것은 큰 부엌에서 기껏해야 평범한 정도의 음식이 만들어지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이다. 370

행복의 시간들 - 행복한 시대가 전혀 불가능한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단순히 원하기만 할 뿐, 가지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개인은 그에게 조흔 날들이 찾아오면 틀림없이 불안과 비참함을 기원하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운명은 행복한 순간을 맏을 준비가 되어 있다. 모든 삶에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러나 행복한 시대를 맞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대는 '산의 저편'으로 그리고 조상들의 유산으로 인간의 상상속에 존속해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한 시대라는 개념은 아마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간이 사냥과 전쟁으로 심하게 긴장한 후, 휴식에 몸을 맡기고 팔다리를 뻗으며 잠의 날개가 자신의 주위에서 소리내는 것을 듣는 그런 상태에서 추측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 오랜 습관에 따라서 그가 이제 고통과 수고의 모든 시간 후에도 역시 거기에 상응하는 상승과 지속 속에서 그 행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추론이다. 371-372

종교와 정부 - 국가 또는 좀더 명백히 말해서 정부가 미성숙한 많은 사람들의 후견인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위해서 종교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폐지할 것인지를 숙고해보는 한, 정부는 항상 거의 확실히 종교를 유지하는 쪽으로 결정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상실, 결핍, 두려움, 불신의 시간들, 즉 정부가 개인의 마음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하여 직접적으로 그 무엇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바로 그곳에서 개별적인 심정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편적이고 피할 수 없으며 우선은 불가항력적인 재난(식량난, 금융위기, 전쟁들)에서까지도 종교는 진정시키고 기다리며 신뢰하는 태도를 대중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국가 정부의 필연적 또는 우연적 결함들이나 왕조의 관심사들이 낳은 위험한 결과들이 통찰력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서 그를 반항적으로 만드는 모든 곳에서, 통찰력이 없는 사람들은 신의 손가락을 보게 될 것으로 믿고 위의(이 개념에는 보통 신적 통치 양식과 인간적 통치 양식이 융합되어 있다) 지시들에 인내하면서 복종하게 될 것이다. .. 대체로 국가는 사제들을 끌어들이는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사제들을 끌어들이는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사제들의 가장 개인적이고 은밀한 영혼의 교육이 필요하고, 겉으로 보아 외면적으로는 전혀 다른 관심을 대표하고 있는 시종들을 존중하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국가가 종교에서 더 이상 아무 이익도 스스로 끌어내서는 안 될 경우나, 종교적 조치를 취하느 ㄴ데 정부에게 같은 종류의 통일적인 방법이 허용되어서는 안 될 정도로 국민이 종교적 사실들에 대하여 너무 다양하게 생각하고 있을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종교를 사적인 일로 취급하고 각 개인의 양심과 습관에 넘겨야 하는 타개책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제일 먼저 종교감각이 강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국가가 무심코 또는 고의적으로 생명의 공기를 기꺼이 허락하지 않았던 은폐되고 억압된 종교감정의 동요가 이제 터져나와 극단적으로까지 무절제해진다. 나중에는 종교가 종파들로 뒤덮이게 되고, 종교가 개인적인 문제가 된 그 순간에 용의 이빨이 뿌려졌다는 많은 사실이 입증된다. 싸움의 광경과 종교적 신조가 지닌 모든 약점에 대해 적개심에 차 폭로하는 것은 결국 더 뛰어난 자와 재능이 있는 자로 하여금 비종교성을 개인적인 무넺로 삼게 하는 타개책만을 허용할 뿐이다. 이러한 의향은 통치하는 사람들의 정신에서도 역시 만연하게 되고, 거의 자신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그들이 하는 조처들에 반종교적인 성격을 주게 된다. 이 현상이 나타나면 곧 과거에는 국가를 반쯤 또는 완전히 신성한 그 무엇을 우러러보았던, 여전히 종교적으로 감동되어 있던 사람들의 분위기는 결정적으로 반국가적인 분위기로 변한다. 그들은 정부의 조치에 대해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많이 방해하고 충돌하며 교란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반대파와 비종교적인 사람들을 그들의 항의의 열기를 통하여 국가에 대한 거의 광적인 감격으로 몰아넣는다. ...
모든 통치자들에 대한 불신, 단기간의 투쟁들이 보여주는 무익하고 소모적인 것에 대한 통찰은 사람들로 하여금 와전히 새로운 결심들, 즉 국가 개념의 폐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대립하는 것을 지양하도록 몰라갈 것이 분명하다. 사적인 단체들이 한 단계씩 국가의 업무들을 자신 속으로 끌어들인다. 결국 낡은 통치 활동에서 남아 있는 가장 끈질긴 잔여물(예를 들면 사적인 인간들이 사적인 인간들을 확실히 지켜야 하는 저 활동)까지도 언젠가는 사적인 기업가에 의해 처리될 것이다. 국각의 경시와 붕괴, 국가의 죽음 그리고 사적인 인간(모든 인간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합리성과 불합리성을 잉태하고 있는)를 달성하고 오래된 병이 재발하는 것을 모두 극복하고 나면 인류의 이야기책에는 새로운 한 장이 펼쳐지고 거기서 사람들은 온갖 종료의 기이한 역사들과 아마 몇 개의 좋은 이야기도 읽게 될 것이다. 372-376

수단의 관점에서 본 사회주의 - 사회주의는 거의 노쇠해버린 전제주의의 뒤를 이르려는 공상적인 동생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노력들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반동적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전제주의만이 가졌던 것과 같은 국가 권력의 충만함을 갈망하기 때문이며, 개인의 진정한 파멸을 추구함으로써 과거의 모든 것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사회주의에게는 자연의 부당한 사치로 나타나며 사회주의에 의해서 하나의 합목적적인 공동체의 기관으로 개조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유사성 때문에 사회주의는 항상 고대의 전형적인 사회주의자 플라톤이 시칠리아의 전제군주의 궁정에 나타났던 것처럼, 모든 권력 발전의 과도기적인 주변에서 나타난다. 사회주의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저넺주의의 후계자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 세기의 독재 권력국가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촉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유산조차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사회주의에는 아직 한 번도 그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가장 겸손한 복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국가에 대한 진부한 종교적 경건함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현존하는 국가들을 제거하는 데 힘써야 하므로 그러한 경건함을 제거하기 위하여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 때문에 사회주의는 단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극단적인 테러리즘을 통하여 여기저기에 한 번씩 존재하기를 희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은밀히 공포정치의 조짐을 보이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대중에게 머리에 못을 박듯이 '정의'라는 단어를 머리 속에 박아둔다. 그것은 그들의 오성을 오나전히 빼앗아버리고 (오성이 이미 이 얼치기 교양으로 인해 심하게 손상을 입은 뒤에), 그들이 해야 하느 ㄴ나쁜 장난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이다. 사회주의는 국가 권력의 모든 축적의 위험을 실로 난폭하고 적나라하게 가르치고, 그러한 한 국가 그 자체에 대한 불신삼을 품게 할 수가 있다. 만약 사회주의의 거친 목소리가 '가능한 한 많은 국가를' 이라는 함성으로 다가오면, 그 함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시끄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곧 그것과 반대되는 '가능한 한 적은 국가를' 이라는 함성이 더 큰 힘으로 터져나올 것이다. 378-379



제9장 혼자 있는 사람

진리의 적들 - 신념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391

너무 집착하지 않도록 - 어떤 일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그 일에 충실한 것은 드문 일이다. 그들은 단지 그 깊이를 밝혔을 뿐이다. 항상 그곳에는 매우 불쾌한 것이 보인다. 392

의도하지 않은 고결함 -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들에게 항상 베푸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고결한 행동을 하게 된다. 394

친구 - 동정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기쁨이 친구를 만든다. 395

가장 고귀한 위선자 -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고귀한 위선이다. 396

인간의 운명 -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위하고 판단하더라도, 좀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부당함을 알고 있다. 399

위대함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 어떤 강물도 자기 자신에 의해 크고 풍부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주 많은 지류들을 받아들이며 계속 흘러가는 것, 그것이 강물을 그렇게 만든느 것이다. 모든 정신의 위대함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그 많은 지류들이 뒤따라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다. 그가 처음부터 재능이 없는지 재능이 풍부한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400

너무 큰 목표들 - 공개적으로 큰 목표들을 세우고 그 후 비밀리에 자신은 그것을 하기에 너무나 약하다는 사실을 통찰하게 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그 목표들을 공개적으로 철회하기에 충분한 힘도 가지고 있지 않고 그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위선자가 되어버린다. 405

강물의 흐름 속에서 - 세차게 흐르는 물은 많은 암석과 관목숲을 휩쓸고 가며, 강한 정신은 수많으 ㄴ어리석은 사람들과 명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휩쓸고 간다. 405

정신의 육체화 - 한 사람이 많이 그리고 현명하게 사고하면 그의 얼굴뿐만 아니라 현명한 모습을 얻게 된다. 406

잘 보지 못하고 잘 듣지 못하는 것 -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은 점점 더 적게 보게 되고, 잘 듣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몇 가지를 더 듣게 된다. 406

허영심의 자기만족 - 허영심에 차 있는 사람은 탁월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탁월하다고 느끼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기만과 자기계략의 수단을 거부하지 못한다. 그에게 잊혀지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다. 406

예외적으로 허영심에 차 있는 - 보통 자기를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육체적으로 병에 걸리게 되면, 예외적으로 허영심에 차게 되며 평판과 칭찬에 대해 민감해진다. 그가 자신을 상실해가는 정도 만큼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 즉 외부에서 다시 자신을 되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406-407

유일한 인간의 권리 - 관습적인 것에서 벗어난 사람은 비범한 것에 바쳐진 제물이다. 관습적인 것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관습적인 것의 노예이다. 어떤 경우든 사람들은 파멸하게 되어 있다. 408

얼치기 지식 - 외국어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은 외국어를 훌륭하게 말하는 살마보다 외국어에 대해 더 큰 즐거움을 가지고 있다. 얼치기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만족이 있다. 408

의심을 품는 것 - 사람들은 좋아할 수 없는 인간들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으려고 한다. 409

친구가 없는 것 - 친구가 없는 것은 질투와 자만심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그가 질투할 아무런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다행스러운 상황 덕으로 친구를 가지고 있다. 410

참회 -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나면 그 죄를 잊어버린다. 그러나 대개 다른 사람은 그의 죄를 잊지 않는다. 412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 인간은 사랑하는 것과 호의를 베푸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젊어서부터 배워야 한다. 만약 교육과 우연이 우리에게 이런 감각을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을 때 우리의 영혼은 메마르고 친절한 사람들의 섬세한 감각을 이해하는 데도 적합하지 못하게 된다. 424

다른 사람과 세상에 대한 불만 - 우리가 원래는 자신에게 불만을 느끼고 있으면서, 흔히 그러듯이 다른 사람에게 불만을 터뜨린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판단들을 흐리게 만들고 기만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후에 다른 사람의 실수와 결점을 통해 이 불만에 동기를 부여하려 하고, 자기 자신을 보려 하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 가차없는 재판관이기도 한 종교적으로 엄격한 사람들은 동시에 인간성 일반에 대해 가장 많이 나쁜 욕을 해왔다. 자신에게는 죄를, 다른 사람에게는 덕을 남겨주는 성자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부처의 법도에 따라 자신의 선을 사람들 앞에서 숨기고, 자신의 악만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사람도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426

고독한 사람들 -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함께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져서 자신을 다른 사람과 전혀 비교하지 않고 조용하고 즐거운 기분으로 자기 자신과 좋은 대화를 나누며, 게다가 웃음을 지으며 독자적인 삶을 엮어 나간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하면 자기 자신을 구차하게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 관한 유익하고 정당한 의견을 남에게서 비로소 다시 배우도록 강요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배워 익힌 이 의견에서도 되풀이해서 조금 빼거나 값을 깎으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혼자 있음을 기꺼이 허락해야만 하지만 흔히 일어나는 일처럼 그 때문에 불쌍히 여기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아야만 한다. 436

방랑자 - 어느 정도 이성의 자유에 이른 사람은 지상에서는 스스로를 방랑자로 느낄 수밖에 없다. 비록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하여 여행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왜냐하면 이와 같은 목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세상에서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주시하고 그것에 대하여 눈을 크게 뜨고 보려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개별적인 것에 너무 강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 변화와 무상함에 대한 기쁨을 가진 방랑하는 그 무엇이 그 자신 속에 존재함이 틀림없다.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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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병든 사회에서 거울 보기
에리히 프롬이 그의 마지막 책 <건전한 사회(The Sane Society)>에서 이야기한 ‘정상성의 병리성(pathoiogy of normality)’이라는 개념을 확실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병든 사회에서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이 ‘정상’으로 사는 사람은 과연 정상인가요, 비정상인가요? 저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과 관점을 가지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7

1장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

우리는 상당히 오랜 기간 수많은 투쟁과 희생을 치러냈고, 실로 위대한 민주주의를 이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민주주의는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31

광화문에 모여서 목이 터져라 민주주의를 외친 사람이 집에 가서는 완전히 가부장적인 아버지요, 다음 날 학교에 가서는 아이들을 쥐 잡듯이 들볶는 권위주의적 교사요, 혹은 회사에 가서는 갑질을 일삼는 상사라면, 민주주의는 어디서 하지요? 다시 말하면 이 나라에서는 ‘광장 민주주의’와 ‘일상 민주주의가‘ 괴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충분히 민주주의자가 되지 못한 거지요. 일상 민주주의는 광장 민주주의와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일상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31-32

사회 민주화의 기본 원리는 ‘구성원들의 자치’입니다.  38

문화 민주화, 나아가 문화혁명의 핵심적인 사례인 ‘코뮌(kommune)’운동에 대해 알아보지요. 코뮌이란 무슨 뜻일까요? ..
우리는 흔히 코뮤니즘을 ‘공산주의’라고 알고 있지만, 저는 이것이 아주 잘못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코뮌주의’ 라고 했으면 훨씬 그 의미가 왜곡 없이 전달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공산’이라고 번역해 버리니까, ‘공동체를 중시한다’라는 코뮤니즘의 본래 의미가 지나치게 ‘경제주의적으로’ 축소되어 버린 것입니다. .. 원래 코뮌주의라고 하는 것은 ‘코뮌’, 즉 자치 공동체의 삶을 중시하는 생활 방식,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결사체, 연합, 이런 것들을 뜻합니다.
‘코뮌’이란 넓은 의미에서 모든 종류의 공동체적 삶을 뜻하는 말입니다. ..
68혁명 전후로 독일에서도 많은 코뮌들이 생겨납니다.  50

호칭의 문제, 성 공동체의 실험, 이런 것들이 문화혁명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문화혁명의 또 다른 중요한 단면은 소비주의와 물질문명에 저항하는 탈물질주의의 흐름입니다.  52

우리는 참으로 위대한 정치 민주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우리는 정치 민주화만 이룬 것입니다. 사회 민주화, 경제 민주화, 문화 민주화의 실현은 여전히 먼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 암울한 이유입니다.  53

1969년 선거에서 “민주주의 다 해보자”라는 멋진 선거 구호를 들고 나왔던 브란트는 교육과 관련해서도 정말 아름다운 구호를 내세웠지요. 바로 ‘교육 사회’입니다. ‘교양 사회’라고도 해석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독일인이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아 교양인으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지요. 그러려면 고등교육을 확충해야 하고, 나아가 누구나 부담 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생활비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4

어느 나라든 교육의 중점은 ‘적응’에 있는 법입니다. 기존의 질서와 규범을 익혀 잘 적응하도록 하는 것, 보통 ‘사회화’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교육의 목표이지요. 그러나 독일 교육에서는 ‘적응’보다 ‘비판’을 더 중시합니다. 기존의 질서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을 기르는 것,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 이것이 독일의 비판 교육입니다. 정말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66-67

독일 교육에서는 문학작품을 해석하는 데에도 권력의 문제를 성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정답이라는 이름의 ‘정의 권력’을 인식하고, 필요하면 비판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68

독일의 비판 교육 ... 선다형 문제는 모르고도 맞출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적이라기 보다는 ‘사기’에 가깝다고 봅니다. 단순한 지식을 묻는 것은 위험하다고 여깁니다. 그것은 주입식 교육에 상응하는 평가 방식이고, 주입식 교육은 파시스트 교육의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지배적인 지식은 지배하는 자의 지식이라고 보기 때문에 지식 그 자체보다는 특정 지식이 지배적인 지식이 된 경로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지요. ..
정답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지요.  69

저는 한국 정치인 중 사회적 정의를 외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한국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경쟁력’을 말합니다. 국가 경쟁력, 기업 경쟁력, 교육 경쟁력 등 온통 외치는 것이 경쟁력입니다. 그런데 독일 정치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회적 ‘정의’를 중시하고, 사회적 정의를 이루기 위한 경쟁을 합니다.  72


2장 대한민국의 거대한 구멍

한국인 대다수는 ‘내 안의 파시즘’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억압의 문화, 부조리의 상황을 하나의 문제로서 인식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물의 질서’, ‘세상의 이치’, ‘자연 상태’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에리히 프롬 식으로 말하자면 한국 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정상성의 병리성’ 이었던 것입니다.  95

국회는 기본적으로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 즉 대의기관입니다. 그래서 국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성이 아니라 대표성입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세대 대표성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세대 대표성이 너무도 왜곡되어 있는 것이지요. 현재 한국 전체 인구 중에서 40대 이하의 인구가 약 40% 정도인데 국회에서는 불과 0.6%가 대의되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97

세대 대표성 못지않게 왜곡되어 있는 것이 직능 대표성입니다. 다양한 직업과 직능을 대표하는 의원이 그 현실의 분포에 맞게 국회에서 대표되는 것이 이상적인 의회일 텐데 한국은 그렇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독일 연방의회에는 교사가 많을까요, 교수가 많을까요? 교사가 훨씬 많습니다. 사회에서 교사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대의의 의미이지요. 그러나 한국에서는 법률가, 언론인, 교수가 과잉 대표되어 있습니다. 즉 의회의 대의 기능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대의의 왜곡으로 인해 사회적 갈등이 의회 내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자꾸 의회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97-98

20세기 독일의 가장 위대한 극작가라고 불리는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한 유명한 말.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파시즘을 남기고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저는 이 말이 지금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현실을 이해하는 데 정곡을 찌른다고 생각합니다.  .. ‘내 안의 파시즘’, ‘아주 일상적인 파시즘’을 냉철하게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100-101

많은 사람들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에게는 시대에 상당히 뒤떨어진 현살들이 참 많습니다.
그 첫 번째는 인권 감수성의 부재입니다. 한국 사회는 인권 감수성이 대단히 모자라는 사회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정말 부족합니다.  108

68혁명의 부재가 남긴 두 번째 현상은  소비주의 문화입니다. 이 얘기는 정말 중요합니다. 지금 한국처럼 소비주의가 이렇게 전면적으로 아무런 비판 없이 번창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109

독일의 많은 청소년들이 소비할 때 큰 죄책감을 느낀다고 고백합니다. ‘미래 생명에 대한 책임’, 이것이 그들이 당연히 가져야 할 기본자세라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기실 지구에서 잠시 살다가 떠나는 것이고, 지구는 다음 세대인 미래 생명이 살아야 할 터전이므로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 나의 욕망을 위해서 끝없이 소비하는 것은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11

한국 사회에서 소비주의는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세요. 온통 소비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비를 해야 일자리가 생기고, 경제가 발전하고, 잘사는 나라가 된다는 논리가 우리 사회를 전일적으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도 생태적 상상력, 환경 윤리 의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소비주의와 물질주의 논리만이 전면적으로 지배하는 참으로 놀라운 사회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전면적으로 지배되는 자본 독재 단계에 들어서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111-112

독일에서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그러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성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교육의 첫 번째 원칙입니다. ‘성과 관련해서 절대 윤리적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대원칙입니다. 성을 윤리적으로 비판함으로써 아이들이 죄의식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은 윤리와 아무 상관 없는 영역이라고 봅니다. 성이라는 것은 생명과 관계되고 인권과 관련된 중요하고 예민한 영역이므로, 성과관련하여 충분한 책임 의식을 갖도록 가르쳐야 하지만, 그렇다고 성을 악마화해서 아이들의 내면에 죄의식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성폭력이나 성희롱, 성추행 등 성범죄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엄한 처벌이 내려집니다. 그리고 성교육은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성을 신비화하거나 은폐하는것은 교육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독일에서는 성교육을 가장 중요한 정치 교육으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112-113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을 의미하는 슈퍼에고와 본능과 충동의 세계인 리비도(혹은 이드) 사이에서 흔들리고 동요하는 불안한 존재가 바로 에고 입니다.  114

슈퍼에고가 리비도를 공격하면 할수록 리비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에고가 점점 더 강한 죄의식을 내면화하게 됩니다. 여기서 ‘죄의식’이라는 개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이 정치적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버젓이 살아 있는 것을 악이라고 공격하며, 인간의 자아는 죄의식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일종의 ‘성 정치학’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깊은 죄의식을 내면화한 인간일수록 약한 자아를 갖게 되고, 약한 자아를 가진 인간일수록 권력에 굴종적인 인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죄의식이라는 성적 심리적 문제가 권위주의라는 정치적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지요.
이를 요약하면 인간의 성을 억압하면 할수록, 그 개인은 권력에 굴종적인 인간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권위주의적 성격’ 이론이라고 합니다. ..
권위주의적 성격 이론에 따르면 성교육은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115-116

1970년대 교육개혁 이후 독일에서는 성교육을 정치 교육의 일환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 학교에서 성은 생명과 관계된 문제이고 동시에 인권과 관계된 민감한 영역이기 때문에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결코 윤리적으로 악마화하지는 않습니다.  117-118

성교육은 성숙한 민주주의자를 길러내기 위한 첫 걸음인데, 한국에서 아직도 제대로 된 성교육 전문가조차 없는 형편입니다.  118

68혁명 없는 한국의 상황, 그 세 번째 특징은 한국 사회가 권위주의 사회라는 것입니다. .. 권위주의라는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올라온적도 없습니다. 게다가 학교에서 벌어지는 살인적인 경쟁은 승자 독식의 논리와 연결되어 권위주의 문화를 더욱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119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라는 생각이 이미 1970년대 독일 교육개혁의 기본 원리였습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아이들을 경쟁시켜선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경쟁 이데올로기가 극단화되면 또다시 나치즘 같은 야만을 낳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나치즘의 핵심은 아리안 족이 가장 우수하고 유태족이 가장 열등하다는 식의 차별 의식과 우열 사고이고, 그 바탕에는 경쟁의식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119-120

스포츠는 당연히 경쟁을 하지만, 삶에서 스포츠의 경쟁 방식을 따르는 것은 야만이라고 아도르노도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스포츠에서 중요한 것은 ‘성과’이지만, 삶에서 중요한 것은 ‘행복’이지요.
교육이 무엇입니까? 본래 교육, 즉 ‘에듀케이트(educate)’라는 말은 ‘밖으로(e-) 끌어낸다(duc-)’는 뜻입니다. 독일어의 ‘교육하다(erziehen)’도 의미가 똑같습니다. 고유한 재능은 사람 안에 이미 다 들어 있고, 그걸 꿀어내는 게 교육이지 ‘지식을 처넣는’것이 교육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가 한국에서 배운 교육은 사실 반교육(anti-education)에 가깝습니다.  120-121

독일 만하임응용대학의 빈프리트 베버(Winfried Weber) 교수는 한국 교육을 살펴보고 나서 “독일은 텐샷(10shot)사회인데 반해, 한국은 원샷(1 shot) 사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독일인에게는 열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한국인에게는 한 번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지금 독일이 이렇게 부유하고 성숙한 사회가 된 것은 바로 그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최대한 자신의 재능을 실현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반면 한국은 너무도 많은 재능들이 발현되지 못한 채 사장되는 사회이지요.
한국은 기회를 박탈하는 사회일 뿐만 아니라,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사회이기도 하지요. 사람들은 이러한 ‘이중의 박탈’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도 엄창난 차별과 격차가 존재하지요. 이러한 현실이 우리가 지극히 기형적인 사회에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25

지금 한국은 끔찍한 ‘자기착취’ 사회입니다. 옛날에는 주인이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면서 노예를 착취했습니다. .. 오늘날에는 노예가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착취하도록 만듭니다. 비유하자면, 옛날에는 노예 감독관이 밖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착취했다면, 지금은 노예 감독관을 내 안에 심어놓고 스스로 알아서 착취하게 합니다. 그것이 자기착취입니다. .. 자기착취가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자행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타인이 착취를 하는 경우에는 착취당하는 자의 내면에 착취하는 자에 대한 저항 의식이 생깁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을 착취하는 경우에는 내면에 죄의식이 생겨납니다. .. 착취를 당하면서도 착취자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 문제로 부단히 전가하는 지배자들의 기만적인 논리를 내면화하고 신념화해서는 이 사회를 변혁할 수 없습니다.  126-127

한국인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 그러니까 행복감을 느낄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끊임없이 자기를 착취하도록 요구합니다.  128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내가 느끼는 감정, 내가 어떤 대상을 받아들이는 감수성, 심지어 내가 품고 있는 욕망, 내 꿈에서 나타나는 무의식까지 과연 그게 ‘나’의 것일까요? 아니면 나를 노예로 부리는 자의 것일까요? 이 구호가 던지는 물음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나의 사유, 감정, 감수성, 욕망, 무의식이 나의 것이 아니라 나를 노예로 만드는 자의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거기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129

68세대의 ‘정신적 지도자’ 허버트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에서 “자유인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노예 상태에 있으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노예 상태를 인식하는 것, 이것이 자유인의 첫 번째 조건이니다. 다시 말하면 노예 상태에서 있으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자유인이  못 된다는 거지요. 129-130

이제라도 내 ‘안’에 있는 노예 감독관과 정치 투쟁을 개시해야 합니다. 나의 생각, 감정, 감수성, 욕망, 무의식까지 다시 분해하고, 체질하고, 점검하고, 분리하고, 조합해야 합니다. 무엇이 나의 것이고, 무엇이 저들의 것인지, 무엇이 나를 자유인으로 만들고, 무엇이 나를 노예로 만드는지 꼼꼼히 따져봐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생각, 감정, 욕망, 무의식이 나의 노예 감독관이었음을 충격적으로 각성하는 것, 그것이 ‘최전선에서의 정치투쟁’인 것입니다.
애초에는 권력이나 권위가 외부에 있었습니다. 권력이나 권위는 물리적 폭력에 기초한 외적인 것이었지요. 그 후 권력과 권위의 형태는 내적인 방향으로 발전합니다. 이른바 ‘내적’ 권위 혹은 권력이 강력해지는 것이지요. 도덕이나 윤리가 그런 권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강력한 권위는 또 다른 형태입니다. 이른바 ‘익명’의 권위이지요. 익명의 권위는 무엇일까요? ‘너는 상식도 없니?’ 이런 말은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익명의 다수가 공유하는 지식이나 인식, 즉 상식, 여론 같은 것이 익명의 권위이지요. 요컨대 외적 권위, 내적 권위, 익명적 권위, 이런 것들이 모두 이 사회를 지배하는 권위 혹은 권력이지요.
그런데 사실 이 모든 것은 이 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종의 변형된 지배 방식이지요.  130-131

내 안의 노예 감독관은 ‘물리적 권위’에서 ‘윤리적 권위’로, 다시 ‘익명의 권위’로 발전해 온 것입니다.   131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131

68혁명의 부재와 관련하여 ‘소외(Entfremdung)’의 문제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소외’는 현대인을 이해하는 데 정말 중요한 개념인데, 한국에는 자기착취라는 개념처럼 소외라는 개념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소외는 사실 깊은 철학적 함의를 지닌 좀 어려운 개념입니다. 우리는 일상용어로서 소외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지만, 그 철학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배제시킨다, 고립시킨다, 왕따시킨다 정도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원래 소외의 의미는 ‘배제’라기보다는 ‘전복’에 그 핵심이 있습니다. 즉 흔히 ‘현대인의 소외’라고 말할 때는 현대인이 고립되고 배제된 삶을 산다는 의미보다는 현대인의 삶이 ‘뒤집어져 있다’는 의미가 강한 것이지요. 그래서 소외란 말이 중요합니다. 바로 우리의 삶이 뒤집어져 있으니까요.
소외라는 개념은 원래 종교 분석에서 나왔습니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소위 헤겔 좌파에 속하는 사상가로서 종교를 일종의 ‘소외’ 현상으로 보았습니다. 그의 명제는 간명하고 분명합니다.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다’라는 거지요. 기존의 지배적인 학설인 창조설을 완전히 ‘전복’한 겁니다.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소망, 좌절과 절망을 외부에 투사한 존재인데, 이 신이 인간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면서 어느 순간 낯설어지더니 마치 하나의 독자적인 존재인 것처럼 인간을 지배하고, 역으로 인간이 신을 경배하는 전도된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대상이나 현상이 본래는 ‘나’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나’의 것이었는데, 이것이 점점 ‘나’로부터 멀어져 낯설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 이제는 역으로 ‘나’를 지배하고, ‘나’는 그것에 종속되는 전도 현상 - 이것을 소외하고 부르는 것이지요.
현대사회는 완전히 소외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돈, 즉 화폐를 예로 들어보지요. 돈은 인간이 필요에 의해서 발명한 것이지만, 지금은 돈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화폐는 본래 인간이 교환의 편리를 위해서 만든 수단에 불과하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것이 인간으로부터 낯설어지더니 독자적인 세계에 있는 듯이 자기운동을 하고, 이제는 아예 인간의 통제를 넘어서 버렸습니다. 돈이 ‘나’를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노동을 하고 노력을 해봐야 돈이 자기들 세계에서 노는 것이 내가 창출해 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화폐’라고 일갈한 것입니다. 완전한 전도지요. 화폐는 하나의 사례일 뿐입니다. 132-134

한국에서는 소외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습니다. 우선 우리의 삶이 거대한 소외에 빠져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식이 필요하고, 인식을 위해서는 독서가 필요합니다.  .. 인식과 성찰이 사회 문화로 자리 잡지 못한 공동체에서 소외를 극복하기란 불가능합니다.  135


3장 악순환의 연결 고리를 찾아서

한국인은 ‘노동 기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치 노동하기 위해서 태어난 인간인 것처럼 일하고 있습니다.  154

지금과 같은 끔찍한 사회 질서를 만들어낸 곳은 바로 ‘여의도’입니다.  163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300명 가량의 국회의원 중에서 290명 정도는 자유시장경제(free market economy)를 지지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164

한국 사람들은 자유시장 경제가 정확히 무엇이고, 그것이 자신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64

독일 연방의회(2013~2017)의 사례를 살펴보지요. 베를린에 있는 연방의회에는 631명의 의원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서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의원은 ..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자유민주당이 의회 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이지요. 독일은 정당 지지율이 5%를 넘어야 의회에 진출할 수 있는데, 자유민주당이 4.8%를 얻는 데 그쳐 의회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다른 정당들은 어떤 정당이었을까요? 우선 기독교민주당을 들 수 있지요. 현재 독일 총리를 맡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이 소속된 정당입니다. 독일의 전통적인 정치 구도에서 가장 보수적인 정당입니다. 기민당이 내세우는 기본적인 정책 기조는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입니다. 사회적 시장경제란 시장경제의 활력과 효율성은 활용하되, 시장경제가 몰고 오는 핵심적인 문제, 즉 실업과 불평등은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개인에게 ‘자유롭게’ 내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독일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야수 자본주의(raubtierkapitalismus)’라는 흔히 사용합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자유롭게 놓아두면 인간을 잡아먹는 야수가 된다는 의미이지요. 특히 이는 1970년대 총리를 지냈던 사민당의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가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야수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가 사회에서 인간을 잡아먹는 것을 막아내는 것이 정치의 책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65-166

자본주의가 효율적인 체제임은 분명한데, 인간을 잡아먹는 야수의 속성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때로는 매우 ‘효율적으로’ 잡아먹습니다. .. 많은 나라들이 시장경제의 ‘효율성’은 활용하되, ‘야수성’은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국가가 나서서 야수에게 재갈도 물리고 고삐도 채워 컨트롤을 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사회적 시장경제에 붙은 ‘사회적(social)’이라는 말은 바로 국가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야수가 인간을 잡아먹지 못하게 해야 한다 - 그것이 ‘사회적’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핵심입니다.
기민당이 사회적 시장경제를 정책 기조로 삼아 정책을 펼칠때 가장 중요시하는 수단은 바로 보세제도입니다. 정부는 주로 조세제도를 통해서 시장경제의 야수성을 통제합니다. 그렇다면 야수 자본주의라고 할 때 ‘야수’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무엇이 인간을 잡아먹는 요인일까요? 바로 실업과 불평등, 이에 따르는 빈곤과 불안이지요. 자본주의는 실업과 불평등을 필연적으로 낳는 체제입니다. ..
일반적으로 자본주의는 5~8%의 실업을 내장하고 있는 시스템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실업 문제는 자본주의라는 상당히 효율적인 시스템을 활용하기 위한 일종의 비용, 대가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 기본적으로 실업 문제는 사회의 문제입니다. 실업 문제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돌리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책임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있다는 것이 사회적 시장경제의 기본철학입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실업 문제를 기본적으로 정부가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로 봅니다. 실업자에게 실업수당을 주고, 재교육 프로그램을 돌리고, 이를 통해 재취업에 성공하는 것까지 정부의 책임 영역에 있다는 것이 그들이 공유하는 생각입니다.  166-168

이제 독일 의회에 앉아 있는 두 번째 정당을 볼까요? 기독교민주당보다 왼쪽에 있는 사회민주당은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적 시장경제(socialistic market economy)’를 주장합니다. 그것은 시장경제의 효율성은 인정하지만, 인간이 존엄한 존재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이 되는 영역, 즉 교육, 의료, 주거 영역은 기본적으로 시장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169

세 번째 정당은 많은 분들이 잘 알고 있는 녹색당입니다. 녹색당은 생태적 시장경제(ecological market economy)를 주장합니다. 시장경제는 용인하지만 그것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녹색당의 강경한 입장이지요. 녹색당은 근대의 발전 이데올로기는 잘못된 것이며, 그것이 초래하는 자연 파괴는 인류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는 인식 아래, 환경, 생태 문제에 대단히 전투적이고 비타협적인 입장을 보이는 정당입니다. 그런 정당이 지난번 독일 의회에서 10% 가까이 의원을 보유했습니다.  170

세계적으로 눈을 돌려보아도 우리처럼 과도하게 우편향된 정치 지형을 가진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국인은 대부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한국 정치의 기형성을 모른 채, 우리 정치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언론이 거짓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지금 보수와 진보가 서로 경쟁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것은 한국의 기득권이 만들어낸 최악의 거짓말입니다. 사실 해방 이후 한 번도 보수와 진보가 경쟁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한국의 정치 지형은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수구’와 ‘보수’가 손을 잡고 권력을 분점해 온 구도입니다. 저는 이것을 ‘수구-보수 과두지배(oligarchy)’라고 부릅니다.  172

현실을 잘못된 언어로 이해하는 자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174

보수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공동체입니다.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시하는 것이 보수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개인을 공동체보다 더 중시하는 쪽은 자유주의이지요. 그래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구분할 때의 결정적 기준이 개인을 우선하느냐, 공동체를 우선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
보수주의자는 대부분 민족주의자인 거지요. 김구 선생이 바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
다음으로 보수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역사입니다. 전통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과거에서 배우려는 자세가 보수의 자세이지요. ..
또한 보수주의자들은 문화도 중시합니다. 세련된 언어를 쓰려고 노력하고, 품위와 품격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175-176

수구란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하여 외세와 손잡고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는 무리들입니다.  176

복지국가란 정부가 충분한 재정지출을 통해 자본주의 시장이 초래한 실업과 불평등 문제 등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나라이기에, 재정지출 규모를 보면 그 나라의 복지 수준을 알 수 있는 거지요.  178

재정지출 비율이 큰 나라는 당연히 세금이 많은 나라입니다.  179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조세 저항이 거의 없습니다. 시민들이 자신이 낸 세금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나중에 되돌려 받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80

한국의 수구는 이 분단체제에 기생하여 70여 년을 연명해 온 세력입니다. 반공주의와 독재가 수구 역사의 핵심적인 특징입니다. 한국의 보수는 진보인 척하면서 개혁보다는 기득권 유지에 골몰해 온 세력입니다. 이 두 세력이 사실상 결탁하여 수구-보수 과두지배 체제를 만들었고, 그것이 지난 70년간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것입니다.  180

이들의 대립이 연극에 불과하다는 것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들이 정말로 중요한 싸움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벌개혁을 어떻게 할 것인가, 노동자들을 ‘기업 살인’으로부터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세계 최고의 불평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어떻게 정의로운 과세를 실현할 것인가, 어떻게 아이들을 이 살인적인 경쟁에서 해방시킬 것인가, 어떻게 이 학벌 계급사회를 혁파할 것인가? 모든 국민을 고통스럽게 하는 이런 중요한 문제들을 두고 이들은 싸우지 않습니다. 두 정파 모두 현행 질서의 기득권이기에 현재의 상황에 두 정파 모두 만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극단적으로 우경화된 정치 지형을 가진 나라입니다.  181-182

그러나 선거법을 개정한다면 상황은 바뀔 수 있습니다. 독일처럼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한다면 정의당, 녹색당 같은 정당이 의회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단언컨대 독일의 선거제도처럼 내가 던진 표가 사표가 되지 않고 그대로 의석으로 반영되는 정상적인 선거제도가 실현된다면, 저으이당은 아마도 최소한 20%, 녹색당은 5% 정도의 의석을 확보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기득권 세력에게 유리한 잘못된 선거제도 때문에, 가장 시급한 사회적 의제들이 정치적으로 해결될 가망이 전혀 없는 정체된 사회로 굳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선거법 개정은 단순한 ‘형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선거제도를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어떤 정치 지형을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2019년 선거법 개정 협상은 한국 정치를 질적으로 변혁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결정권을 쥐고 있던 민주당이 보인 당리당략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행태로 인해 의미 있는 개정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저 비례 대표를 약간 늘리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민주당은 기존의 선거 제도를 사실상 고수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민주적 개혁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수구-보수 과두지배 체제의 특원적 지위를 계속 누리겠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표명한 것입니다.  183-184

한국이 수차례의 민주 혁명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의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더 지옥이 되어가는 이유는 이러한 ‘구조적’인 결함에 있습니다.  185

한국의 거의 모든 제도를 미국식입니다. 대학 제도를 보세요. 엘리트 대학 시스템과 과열된 입시 경쟁에서부터 엄청나게 비싼 학비와 과도한 사립대학체제까지 모두 미국의 제도와 관행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188

유럽의 대다수 나라에서는 대학이 평준화되어 있고, 대학 입학의 기회는 폭넓게 열려 있으며, 대부분 국립대학이 고등교육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대학의 학비는 저렴하거나 무료입니다. ..
정치 지형도 미국과 빼닮아 있습니다. 미국은 보수양당제라고 하는 아주 ‘예외적인’ 정치 지형을 가진 나라입니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모두 보수정당이고, 진보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아주 특이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선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사회적 변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188

정치를 통해서 사회적 문제를 이성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장치가 마비된 사회에서 그 많은 사회적 좌절과 절망은 어디에서 출구를 찾을까요 이런 절망적인 사회에서 번성하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190

한국에서 기독교가 놀라울 정도의 성공을 거두고, 기독교 선교사상 유례가 없는 ‘선교의 기적’을 이룬 것은 한국인이 지닌 ‘종교적’ 심성보다는 한국 사회에 각인된 왜곡된 정치사회적 구조와 관련이 깊습니다. 이처럼 종교의 경우에도 미국과 한국은 유사한 점이 많지요.  191

앞서 제도의 미국화에 대해 몇 가지 사례를 들었지만, 더 심각한 것은 ‘영혼의 미국화’입니다. 한국인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보다도 미국인에 가깝습니다.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 감정, 감수성, 욕망, 심지어 무의식까지도 거의 미국인의 그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191-192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상식’들이 국제적인 표준에 비추어 보면 맞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들은 대개 ‘미국식’ 상식인거지요. 그래서 지금의 한국 사회가 왜 이렇게 ‘헬조선’이 됐느냐를 살펴볼 때, 우리가 미국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그리고 미국은 도대체 어떤 나라인지에 대한 객관적인 관점을 갖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193


4장 우리는 함께 웃을 것이다

통일은 천천히 해도 된다고 했지만, 만약 통일을 이룬다면 그 방식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소위 ‘양국 체제론’입니다. 각각 두 개의 서로 다른 나라로 인정하는 것이지요.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생각하면 쉽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같은 게르만 민족이지만 서로 전혀 다른 국가이지요. 상호 대사관도 두고 있고요. 완전히 서로 ‘외국’인 것이지요. 이것을 양국 체제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국가연합제(Konfederation)입니다. 동서독 간의 관계를 생각하면 됩니다. 이를 보통 ‘1민족 2국가론’이라고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서로를 국가로서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외국은 아니다’라는 입장입니다. 독립된 국가로서 서로를 인정하지만 상호 외국은 아닌, 독일만의 특수한 ‘내부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서독은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고, 대사관을 두는 대신 상주 대표부를 두고 교류했던 거지요.
세 번째는 ‘연방제(federation)’입니다. 통일에 가장 가까운 형태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상 하나의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200

독일과 한국을 단순 비교하면서 엄청난 통일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고 과장된 허풍을 늘어놓은 쪽은 주로 일본 언론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특히 <교도 통신>은 ‘천문학적인 통일 비용’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었고, 이를 집중적으로 주도면밀하게, 또 악의적으로 퍼뜨렸습니다. 국내에서는 <조선일보>가 교도 통신의 기사를 받아 열심히 퍼 날랐고요. 그 때문에 통일 비용 문제가 한국에서 통일 논의의 중심이 되고, 반통일 정서를 확산시켰지요. 221

근대 사상가들이 품은 이상은 ‘인간이 이성에 의해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이성의 힘으로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며, 이성의 힘으로 좋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그 ‘이성의 기획’이 바로 사회주의였습니다.  224-225

우리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상상력이 너무도 빈약하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종속변수로 보는 태도도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움직임으로써 새로운 상황을 창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바뀌는 상황에 무조건 적응하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새로운 상황을 만들고, 잘못된 상태를 바꿀 만한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단지 그것을 실행에 옮길 용기와 비전이 없을 뿐입니다.  254


에필로그 - 거울 앞에서 당당하기

삼권분립과 대의민주주의를 신봉한다고 다 민주주의자가 아닙니다. 민주주의자는 어디서나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타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강한 자아’를 가진 자입니다.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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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경험은 우리안의 불순물을 태워 버린다. 24

강박적인 생각을 내려놓을 때 마음과 가슴이 열린다. 28

생각만큼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없다. 마음은 한개의 해답을 찾으면 금방 천 개의 문제를 만들어 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뛰어난 상상력을 가진 작가이다. 마음이 자기와 전쟁을 벌이지 않을 때 완전히 다른 세상을 경험한다. 30

문제와 화해하고 받아들일 때 그 문제는 작아지고 우리는 커진다. 실제로 우리 자신은 문제보다 더 큰 존재이다. 31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 34

구차하게 의존하는 것, 시도와 모험을 가로막는 것을 제거해야만 낡은 삶을 뒤엎을 수 있다. 47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삶의 여정에서 막힌 길은 하나의 계시이다. 59

‘작가(writer)는 글을 쓰는 사람이며, 기다리는 사람은 웨이터(waiter)이다’라는 말은 나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이상적인 집필 환경을 기다리는 작가는 한 문장도 쓰지 못한 채 인생을 마친다는 말도.
한때는 주로 밤에 글을 썼지만 새벽에 글을 쓴 지 오래되었다. 오전 5시 반에 일어나 20분 명상을 하고 오후 3시까지 글을 쓰고 번역을 한다. 나는 타고난 재능을 가진 작가나 번역가가 전혀 아니기 때문에 매일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한 단락도 끝내지 못하고 오전을 다 보낼 때도 있다. 여행 산문가 피코 아이어가 말한 대로, 글을 쓴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에게 은밀한 편지를 쓰는 것과 같다.
여행 중에도 거의 예외가 없다. 새벽 기차 안에서 글을 쓴 적도 많다. 여명이 터 오는 갠지스강 계단에 앉아서도 쓰고, 히말라야 고개를 넘는 트럭 조수석에서도 계속 중얼거리며 써서 운전사를 겁먹게 만들었다.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면 한 편의 글도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영감은 그저 매일 계속 쓰는 것이다. 멋진 소재가 그냥 굴러들어오는 행운은 매번 나를 비켜 간다. 집필의 신이 내 집필실에는 안 오고 다른 작가들의 집필실만 편애한다는 생각을 지을 수 없다. 다음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 쥐어뜯은 머리카락을 다 모으면 지금보다 훨씬 멋진 장발이 되었을 것이다.
마라톤 선수가 달리기가 쉬워서 달리는 게 아니듯 글쓰기가 쉽다면 나는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생의 모순이다. 글쓰기가 너무 어려워서 계속 쓰고 있는 것이다. 그만두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글을 쓰지 않으면 다른 무엇을 할수있겠는가? 상상력이 완전히 고갈되지 않는 한 내가 무턱대고 할 수 있는 일이 글쓰는 일인데.
글을 잘쓰는 비결을 묻자 『톰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말했다.
“나 자신이 글 쓰는 데 소질이 없음을 발견하는 데 15년이 걸렸다. 하지만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계속 써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때 이미 나는 유명 작가가 되어 있었으니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는 아무리 퇴고를 많이 해도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수십 년 동안 글을 썼는데도 여전히 그렇다.”하고 고백했다.
나는 지금 단순히 ‘노력'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명'을 주제로 이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의 가슴이 원하는 일을 하는 소명 말이다. 하지만 취미 생활이 아니라면 무슨 일이든 수도사가 되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글쓰기 역시 그저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밑바닥에 있는 진실성에 다가가 자신의 것을 건져 올리는 시도여야 하기 때문이다.
인도의 피리 연주자 하리프라사드 초우라시아는 40대에 이미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기 시작했다. 80세인 지금도 그의 연주를 능가할 자가 없다. 나는 20년 가까이 해마다 그의 연주를 들으러 다녔다. 한번은 델리의 신년 음악회에서 만나 “하리지, 이제 한국에 오실 때입니다 ”라고 요청하자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래서 그해 10월 서울과 부산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아침마다 그의 호텔 방에 들렀는데, 그는 매번 연습을 하고 있었다. 평생 피리 연주를 해 왔으며, 예술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인도 정부가 외교관 여권을 발급하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훈장까지 수여받은 대가가 뭄바이에서 델리로, 다시 델리에서 서울로 긴 시간 비행기를 타고 왔음에도 불구 하고 다음날 단 40분의 연주를 위해 계속해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쉬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
지난 2월 동인도 카락푸르에 있는 인도공과대학에서 특별 연주회가 있어서 그와 동행했다. 아침 일찍 콜카타를 출발해 점심 시간이 지나 도착했는데, 그는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저녁 공연을 위해 곧바로 방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바로 전날 밤 콜카타에서 연주회를 가졌는데도!
연주를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에 그 학교에서 요가와 명상을 가르치는 교수가 질문했다.
“당신은 평생 동안 음악을 해 왔는데, 이 삶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
하리지는 말했다.
“나는 이 인생을 통해 분투노력하는 것을 배웠다. 어렸을 때 일찍 어머니를 잃어 한 조각의 차파티(통밀 가루를 반죽해 얇고 둥글게 구운 인도의 주식)를 얻는 데도 분투 노력해야만 했다. 늦게 음악을 시작했을 때는 스승이 원래 레슬링 선수였던 나의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남들처럼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피리를 불라고 가르쳤다. 그것에 적응하기 위해 끝없이 분투노력했다. 나는 타고난 음악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몸을보라 몇년전 교통사고로 어깨를 다쳐 한쪽 팔을 쓰는 것이 힘들다. 따라서 지금도 무한 노력하지 않으면 피리를 불 수 없다. 이곳에 함께온 한국인 친구는 나더러 이제 그만 쉬라고 하지만 나는 숨이 멎을 때까지 피리를 불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삶이 내게 준 소명이다.”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아마도 그 명상 교수는 ‘마음의 평화' 같은 초월적인 대답을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가의 솔직하고 위선적이지 않은 답변, 삶에 대한 진실성에 청중은 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앞에서 밝혔듯이 나는 타고난 작가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애초에 이 글에 담으려고 마음먹었던 주제를 제대로 전달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나름 분투노력했다. 누군가가 말 했듯이 진짜 작가는 그저 계속 글을 쓰는 사람이다. 이 삶에서 진실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축복할 수 있으므로. 당신과 나, 우리는 어차피 천재가 아니다. 따라서 하고 또 하고 끝까지 해서 마법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다. 66-70

세상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대로 존재한다. 무엇을 보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는가. 무엇을 듣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듣는가, 무엇을 느끼는 가가 아니라 어떻게 느끼는가가 우리의 삶을 만들어 나간다. 75

라틴어에서 레푸기움은 ‘피난처, 휴식처’의 의미이다. ...
단순한 생활과 음식이 나를 단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단순함이 나를 나 자신에게 가까워지게 했다. 그 삶은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순전히 내 영혼에 관한 일이었다. 꼭 필요하지 않은 일과 만남들이 줄어들면서 기쁨은 늘어났다. 사치가 문화를 창조하기도 하지만, 소박함은 정신을 창조한다. 그곳에서 나는 사원들을 들여다봤고, 신상들을 보았고, 그런 다음 나 자신 안에서 성소를 발견했다.
<기억, 꿈, 회상> 에서 융은 말한다.
“사람들은 점점 커져 가는 부족감, 불만족, 불안 심리에 떠밀려 새로운 것을 향해 충동적으로 돌진한다.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가 약속해 주는 것들에 의지해 살아간다. 모든 좋은 것이 더 나쁜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눈부신 과학의 발견이 우리에게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인간의 기쁨, 만족, 또는 행복을 증가시키지 못한다. 예를 들면 시간을 단축하는 조치들은 불쾌한 방식으로 속도만 빠르게 해 전보다 더 시간이 부족하게 만든다. 볼링겐에 있는 나의 탑에서는 사람이 마치 수백 년을 사는 것처럼 산다. 만약 16세기 사람이 그 집으로 이사 온다면 그에게 새로운 것은 단지 석유 등잔과 성냥일 것이다.”
당신에게 그런 곳은 어디인가? 자기만의 사유 공간에서 호흡을 들이쉬고 내쉴 수 있는 곳은? ...
자신만의 레푸기움, 자신의 탑을 갖는 일은 중요하다. .. 자신의 본얼굴을 감추느라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자신의 레푸기움에서는 타인을 위해 표정을 꾸밀 필요가 없으며, 외부의 지나친 소란으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지킬 수 있고, 당신을 움켜쥐었던 세상의 요구에서 벗어난다. 85-86

미국 시인 마야 안젤루는 썼다.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과 당신이 한 행동을 잊지만, 당신이 그들에게 어떻게 느끼게 했는가는 잊지 않는다.”
나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가는 감추거나 꾸미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드러내며, 내가 주장하는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동이 나에 대해 가장 잘 말해준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인가? 그것이 가장 진실된 나의 모습에 가깝다. 105

이십 대에 신춘문예로 등단한 나는 몇 권의 시집으로 명성을 얻어 어딜 가나 시인, 혹은 작가로 불리게 되었다. 나 역시 그것을 당연히 여겨 스스로도 자신을 시인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시인’의 품사는 삶, 사랑, 여행처럼 명사보다는 동사에 가깝다. 그 단어들은 현재진행형일 때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시를 쓰고 있을 때 나는 시인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시인이 아니다. 다른 작가의 책을 읽을 때는 독자이고, 버스를 타면 승객이며, 병원에 가면 환자이고, 식당과 카페에서는 손님이다. 사랑하는 이에게는 연인, 아들에게는 아버지, 함께 사는 강아지에게는 반가운 주인이다. 그런가 하면 힌디어 선생에게는 단어를 잘 까먹는 학생이고, 외국에서는 배낭여행자이다. 이렇듯 나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동사이다.
고정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명칭은 역할에 따른 약속 명사일 뿐이다. 115-116

나에게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면 허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역동성에 눈뜨게 된다. 그때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열심히 놀이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다른 놀이로 옮겨 간다.
‘나’의 품사는 흐르는 강처럼 순간순간 변화하는 동사이다. 나는 ‘나의 지난 이야기(My Story)’가 아니라 이 순간에 ‘있음(I Am)’이다. .. 내가 시인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 오히려 나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오직 모름과 모름일 때 존재와 존재로 마주하는 일이 가능하다. 순수한 있음과 순수한 있음으로. 121

추구의 여정에는 두 가지 잘못밖에 없다. 하나는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끝까지 가지 않는 것이다.
“어떤 길을 가든 그 기로가 하나가 되라.”
길 자체가 되기 전에는 그 길을 따라 여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긍정의 길이든 부정의 길이든 자신이 선택한 길과 하나가 되어 묵묵히 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길이 끝나는 곳에서 모든 길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 시인 찰스 부코스키는 썼다.
“무엇인가를 시도할 것이라면 끝까지 가라. 그러면 너는 너의 인생에 올라타 완벽한 웃음을 웃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훌륭한 싸움이다.” 140

생각은 언어만큼이나 쉽게 전염된다. 마음이라는 공간 안에 담겨 있는 ‘나의 고유의 생각’들은 수많은 ‘타인의 생각’들과 혼합되어 있다. 따라서 내가 어떤 생각들과 나를 동일시하면서 ‘이것은 나야’라거나 ‘이것은 내가 아냐’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 참일까? 혹시 외부와 상호작용하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나’인데도 내가 마음이라는 공간 안에 가상의 고정된 나를 만들어 놓고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이 자기 착각은 가장 알아차리기 어렵다.
우리에게는 ‘나’를 유지하기 위해 내 언어, 내 생각, 내 존재가 다른 것들과 분리된 고유의 것이라는 고집스러운 전제가 있는 듯하다. 그 전제마저도 과거로부터, 타인들로부터 배운 것인데도, 만약 실제로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동일하기까지 한 언어와 생각과 마음의 내용물들을 모두 제외시킨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 나는 ‘고유의 나’일까? 그렇다면 붓다는 왜 ‘고유의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단지 세상 만물에 서로 의존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토록 강조했을까? 144

소설가 보르헤스는 썼다.
“우리 살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이들은 각각 특별한 존재이다. 누구든 항상 그의 무언가를 남기고, 또 우리의 무언가를 가져간다. 많은 것을 남긴 사람도 적은 것을 남긴 사람도 있지만, 무엇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누구든 단순한 우연에 의해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이다.” 179-180

평생의 관계는 당신에게 평생의 배움을 준다. 굳건한 감정적 토대를 갖기 위해 당신이 쌓아 나가야만 하는 것들을. 당신이 할 일은 그 배움을 받아들이고,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관계에서 당신이 배운 것을 주변의 모든 관계와 삶의 영역에 적용하는 것이다. 사랑은 맹목적이지만 진정한 우정은 천 리 밖을 본다는 말이 있다.
당신이 내 삶에 나타나 준 것에 감사한다. 그것이 이유가 있는 만남이든, 한 계절 동안의 만남이든, 생애를 관통하는 만남이든. 181

인내는 단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인내는 앞을 내다 볼 줄 알고 살아가는 일이다. 187

티베트어에 ‘셴파’라는 단어가 있다. 대개는 ‘집착’으로 번역하지만, 정확히는 물고기가 낚싯바늘에 걸리듯 ‘붙잡히는 것’ 혹은 ‘생각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티베트 불교에 정통한 페마 초드론은 셴파를 ‘가려운 곳을 긁는 고통’에 비유한다. 가려우면 자꾸만 긁게 되고, 긁을수록 더 가려워진다. 그래서 어느 순간 가려움이 고통으로 변한다. ...
셴파가 가려워서 자꾸 마음이 쓰이는 동시에 가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조차 어리석어서 생기는 고통이다. 모기에게 물렸든 모욕적인 비난을 들었든, 혹은 자기 자신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든 머릿속에서 강박적으로 그것 외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는 상태로 고착되는 것이 셴파이다. 모기에 물린 것도 괴로운데 그곳을 계속 긁어서 스스로 더 고통받는 것이다. 199-200

나날의 삶에서 셴파는 흔하게 일어난다. 누군가의 비난, 무례함, 불친절, 나의 잘못된 판단과 실수 등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영혼을 괴롭힌다. 삶에서 고통받는 이유가 그것이다. 셴파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것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을 자각하는 일이다. 204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덩이를 더 파는 것이 아니라 구덩이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이다.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다. 티베트 속담은 말한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205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잘 모른다는 것과 동의어일 때가 많다. 누군가를 안다고 믿지만,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생각과 감정을 믿는 것이다. 또한 누군가를 조항하고 싫어하지만, 사실은 나의 판단과 편견을 신뢰하는 것이다. 206

관계가 공허해지는 것은 서로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 누군가를 안다는 것, 진실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자신의 편견을 깨고 그와 함께 계단 끝까지 내려가는 숙제를 안는 일이다. 209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바닷물을 뚫고 달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라고 어느 시인은 썼다. 그런 노력없이 상대방의 마음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내 계산법을 가르치려 드는 것은 병이다. 211

트라피스트회 신부 토머스 머튼은 <인간은 섬이 아니다>에서 썼다.
“인간은 다른 누군가와 소통할 수 없는 그 자신만의 비밀과 고독을 가지고 있기에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를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과 자신의 영혼을 모두 황폐하게 만든다. 그것은 자신을 중심에 놓고 자기 삶의 방식에서 상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212


- 독서 모임에서 나온 문장들
어떤 사람을 만날 때 마음이 열리는 순간이 있다. 나의 감각과 느낌, 혹은 삶에서 경험하는 기쁨이나 두려움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과는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자발적인 열람이 폭풍에 길 잃은 새 같던 우리를 연결시켜 주며, 그때 세상과의 거리도 가까워진다. 삶이라는 여행의 한 구간을 그런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행운이다. 104

나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가는 감추거나 꾸미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드러내며, 내가 주장하는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동이 나에 대해 가장 잘 말해준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인가? 그것이 가장 진실된 나의 모습에 가깝다. 105

“너는 누구인가?”
“저는 쿠퍼 부인으로, 이 시의 시장 아내입니다.”
“나는 너의 이름이나 남편에 대해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사랑하는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네가 누구의 엄마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나는 너의 직업을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기독교인이며, 남편을 잘 내조했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는 너의 종교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116

모든 일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며, 모든 만남에는 의미가 있다. 누구도 우리의 삶에 우연히 나타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내 삶에 왔다가 금방 떠나고 누군가는 오래 곁에 머물지만, 그들 모두 내 가슴에 크고 작은 자국을 남겨 나는 어느덧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당신이 내 삶에 나타나 준 것에 감사한다. 그것이 이유가 있는 만남이든, 한 계절 동안의 만남이든, 생애를 관통하는 만남이든. 174-175

힌디어에 ‘킬레가 또 데켕게’라는 격언이 있다. ‘꽃이 피면 알게 될 것이다.When it flowers, we will see.)’라는뜻이다. 지금은 나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고, 설명할 길이 없어도 언젠가 내가 꽅을 피우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해, 자신이 통과하는 계절에 대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시간이 흘러 결실을 맺으면 사람들은 자연히 알게 될 것이므로.
독일 시인 라이너 쿤체는 썼다.
‘꽃피어야만 하는 것은 꽃핀다.
자갈 비탈에서도 돌 틈에서도
어떤 눈길 닿지 않아도’
인내는 단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인내는 앞을 내다 볼 줄 알고 살아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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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을 대신해서 - 머슴새와 ‘밭 가는 해골’
평소에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이런 모순에 갑자기 의문이 생기는 순간을 나는 문학적 시간이라 부른다. 문학적 시간은 대부분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사회적 주제와 연결될 때 그것은 역사적 시간이 된다. 그것은 또한 미학적 시간이고 은혜의 시간이고 깨우침의 시간이다.  8

- 차린 것은 많고 먹을 것은 없고
프랑스의 국립도서관에서는 수년 전부터 소장 도서 전체를 스캔하여 이미지 파일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 놀라운 것은 캐나다 퀘백 대학의 사회과학연구소다. 이 연구소의 사회학 고전 사이트에는 플라톤에서 니체나 프로이트에 이르는 저명 사상가들과 사회학자들의 주요 저작이 프랑스어 텍스트 파일과 PDF 파일로 올라와 있다.  17

문화를 과시하고 소비하려는 기획은 많지만, 문화의 창조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산적 이용의 전망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것이 우리 온라인의 실정이다.  18

- 말의 힘
축약의 남발도 말에 가하는 폭력의 일종이지만, 욕설이나 ‘앵애어’와는 성질이 조금 다르다. 욕설 등속은 말을 여전히 말로 대하는 반면에 과도한 축약어는 말을 오직 기호로만 대한다. 기호를 소통의 도구로 삼는 사람은 오직 외부와 소통할 수 있을 뿐인데, 말을 말로 대접하여 말하는 사람은 저 자신과도 소통한다. 그것이 말의 힘이다.  62

- 악마의 존재 방식
보들레르는 「너그러운 노름꾼」이라는 기이한 산문시를 썼다. 시인이 마귀들의 왕인 사탄을 만난 이야기다. 마음씨 좋은 늙은 귀족의 풍모를 지닌 마왕은 온갖 지식에 통달한 존재이며, 특히 인문학에 이르러서는 그 체계 하나하나가 어떻게 성립되어 어떻게 발전했는지 꿰뚫어 알고 있다. 이런 사탄도 단 한 번뿐이긴 하지만 간담이 서늘한 적이 있다. 어느 예리한 설교자가 "악마의 가장 교묘한 술책은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믿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결코 잊지 말라"고 말했을 때였다. 이 말은 악이 늘 평범한 얼굴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온갖 미명을 동원하여 받들고 있는 제도와 관습 속에 교묘하게 숨어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그러나 저 "악마의 교묘한 술책"을 은유로만 여기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부지런한 보들레르 연구자이며 19세기 프랑스 문학의 전문가인 막스 밀레르는 1960년『프랑스 문학에 나타난 악마』라는 책을 출간했다. 상하권을 합해 천 쪽 가까이 되는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그 연구의 동기가 제2차세계대전의 참극에서 시작되었다고 쓴다. 그 끔찍한 집단적 범죄, 인간 행위의 일반적 척도를 넘어서는 악독한 힘의 폭잘이 오직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일까. 인간의 내부에는 개인적 차원과 집단적 차원을 망라해서 어떤 알 수 없는 명령에 복종하도록 준비된 악덕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바로 이런 의문이 끊임없이 문학의 주제가 되어온 악마의 존재를 다시 검토하게 했다고 말한다. 끝을 알 수 없는 악 앞에서 느끼는 인간의 무력감이 그 거대한 책을 쓰게 한것이다.

이 거대한 무력감을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 다시 느끼고 있다. 수많은 생령,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3백 명이 넘는 생명이 물속에서 숨졌거나 실종했음을 알게 된 순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한도 끝도 없는, 그래서 설명할 길이 없는 악 속에 침몰해 있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막스 밀레르가 생각해본 것처럼, 이 침몰이 정말 악마의 책동에 의한 것이라면 악마는 이 참극을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악마는 먼저 우리 마음을 무디게 만들었다. 쉽게 잊어버리는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는 사건만 이야기하자. 그것이 2009년이던가, 한겨울에 용산에서 제 삶의 터전을 지키려던 사람들이 망루에서 불에 타 숨졌을 때 사람들은 한동안 애통해 하였지만 끝내 없던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같은 해 여름부터 지금까지, 일자리를 잃은 2천여 명 쌍용차 노동자 가운데 스물다섯 명이 비통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는 내내 막장 드라마를 보며 세상이 평화롭다고 믿으려 했고, 도시 정비니 고용 유연성이니 희망퇴직이니 하는 아름다운 말들을 악마는 아무데나 내걸었다.

악마는 용의주도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렇게 아우성을 쳤고 여전히 아우성을 치건만, 저 위험한 배를 비정규직들이 몰아도 그것을 예삿일로 여기도록 끝내 세상을 훈련시켰다. 악마는 제 시선을 벗어난 사람들이 그 몰상식을 고발하더라도 그들을 '종북 빨갱이'로 몰도록 프로그램된 사람들을 높은 자리, 낮은 자리에 뿌려놓았다. 악마의 친화성도 한몫을 했다. 기우뚱거리는 배에 수많은 사람을 태워 바다로 내보내는 회사에 그것을 감시해야 할 사람들이 상을 주었다. 감시해야 할 사람들과 또 그것을 감시해야 할 사람들을 악마가 차례차례 포섭한 것이다.

악마는 섬세하기도 했다. 기울어진 배를 물살이 그렇게 세다는 맹골 수로까지 몰고 가게 했다. 그 위급한 시간에 크게 활약해야 할 사람들이 딴짓을 하게 만든 것도 악마의 셈에 들어 있다. 제 이름으로건 남의 이름으로건 그 회사를 설립하고 이런저런 명목으로 돈을 훑어내어 회사를 빈껍데기로 만든 사람에게 예술가라는 직함을 붙여주기도 했다. 악마는 눈뜨고 그 생때같은 아이들을 잃는 순간에도 우왕좌왕할 정부를 기다려 배를 침몰시켰다. 아이들을 다 구했다는 유언비어를 책임 있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퍼뜨리기도 했다. 악마는 빠뜨린 것이 없었다.

물론 나는 악마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악마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악마만이 저지를 일을 이 땅의 사람들이 저질렀다는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악마의 처사였다면 악마의 연구로 끝날 텐데, 그것이 우리의 죄이니 우리는 이제 앉았던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한다. 나 자신을 용서하지 말고 리본을 달건 촛불을 들건 무슨 일이든지 해야한다.  72-75

- 진정성의 정치
‘진정성’을 외국어 사전에서 해방한 것은 1980년대의 운동권으로, 그때 이 말은 담론의 진실성과 효력을 뜻했다. 한자로는 물론 ‘眞正性’이다. 그러나 이 말을 유행시킨 것은 1990년대의 문학비평이다. 문학에서 말은, 특히 시의 말은 그 한마디 한마디가 감정의 크고 작은 굴곡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 특별한 효과를 거둔다는 것이 이 ‘진정성’의 이데올로기이다.  77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지 못하기에 역사 속에서 자신을 객관화하지 못한다.  ..
‘진정성’이 어떻게 정의되건 그것은 한 인간이 제 마음 깊은 자리에서 끌어낸 생각으로 자신을 넘어서서,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을 때에만 확보된다.  79

- 어느 히피의 자연과 유병언의 자연
세상에 또 하나의 삶이 있음을 자신들의 몸으로 증명하는 일일 터.  87

- 1700개의 섬
모진 사람들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피곤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래서 제 사는 자리를 더욱더 섬으로 만들려 하고 거기에 철벽을 치려 한다.
그러나 철벽의 보호를 받는다고 해서 피곤한 마음이 거기서 편안할 수는 없다. 차라리 피곤함은 그 철벽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105

- 오리찜 먹는 법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책은 도끼라고 니체는 말했다. 도끼는 우리를 찍어 넘어뜨린다. 이미 눈앞에 책을 펼쳤으면 그 주위를 돌며 눈치를 보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읽는 것에 우리를 다 바쳐야 한다. 그때 넘어진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 일어난다.  
책이라는 이름의 도끼 앞에 우리를 바치는 것도 하나의 축제다.  127-128

- <어린 왕자>에 관해, 새삼스럽게
인간은 자기가 공들여 일구고 가꾼 것들과만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이 관계를 통해서만 자기 존재를 확장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일만 사람을 사귀고, 일만 가지 물건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중 어느 것 하나도 자신이 마음과 노력을 부어 길들인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일만 사람을 바쁘게 만나고 만 가지 물건을 숨차게 끌어모았지만, 누구에게도, 어느 물건에도, 자기가 살아온 삶의 시간을 새겨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만 사람은 그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며, 만 가지 물건은 그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생애 내내 눈앞에 보자기보다 더 적은 시간밖에는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가 눈을 감으면 그 시간은 꺼져버릴 것이다.
여우가 ‘길들인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아닌 것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을 그것의 삶 속에,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 있게 하는 일이다. 존재가 세상에 진정한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은 권력이나 소유나 명성이 아니라 이 길들임이라는 것을 말할 것도 없다.  136

여우가 시간에 대한 설명을 통해 ‘의례’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의례란 “어떤 시간을 다른 시간과 다르게 하고, 어떤 날을 다른 날과 다르게 하는 것”이다. 확실히 설날이나 생일, 명절이나 제삿날은 다른 날과 다르다. 그런 날의 시간은 특별한 카리스마를 갖는다. 그 시간들은 인간이 살아온 내력이 찍어놓은 기억의 시간이자 무의식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137

어린 왕자가 이 지구에서 처음 만난 생명도 마지막으로 접촉한 생명도 뱀이었다. 이 뱀은 여우 못지않게 중요하다. 어린 왕자가 뱀을 처음 만났을 때 함께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대화보다는 침묵이 더 길었다. 뱀은 자기가 누구든 한번 건드리기만 하면 그가 ‘태어난 땅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고 말하며, 어린 왕자가 자기 별을 정말로 그리워하면 그를 도와줄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자기가 태어난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물론 죽는다는 말이다. 그의 말은 여우의 말처럼 이해해야 할 말이 아니라 ‘해석해야 할 말’이다. 그것은 감동해야 할 종류의 말이 아니라 학습해야 할 말이다.
어린 왕자는 여우의 종합으로부터 비밀한 지혜를 얻었지만, 결단의 시간이 다가오자, 그 실천을 위해서 뱀이 분석을 선택했다.  137-138

분석의 말은 습관을 넘어선 곳에서 만들어지는 말이며, 그래서 충격의 말이다. 사랑으로만 권태를 치료할 수 있을 때, 또는 사랑이 필요하다는 말까지 권태롭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때, 충격은 거의 유일한 처방이다. 충격은 길들이기가 아니며, 시간을 바치는 일이 아니다. 충격은 관계를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충격은 허위의 관계가 벗겨진 곳에서 진정한 관계를 드리낸다. 그것은 시간의 얇은 보자기가 찢어진 곳에서 시간의 신비로운 깊이를 판다. 어린 왕자는 이 깊이를 타고 제 별로 갔다.
그런데 어린 왕자를 한 번 깨물어 그의 별로 되돌려보내는 뱀의 수법은 오늘날 우리의 전자 문명과 닮은 점이 많다. 한 번의 ‘딸까닥’으로 열리는 수천 개의 세계. 우리는 이렇게 날마나 뱀의 힘을 빌리는 셈이지만 뱀에게 물리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어떤 결단도 없이 이 세계 저 세계를 날아다니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힘은 우리의 존재를 강화하자는 것인데 거꾸로 우리의 존재가 그만큼 졸아든 것이기에 불안하다.  138-139

- 언어, 그 숨은 진실을 위한 여행
어느 언어건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제멋대로 만들어진 임시 언어일 뿐이다. 어쩌면 인류가 여러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 사고의 허약함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이 ‘나무’라고 하면 그 말 자체가 나무여야 할 텐데, 그 나무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말을 우리는 멋대로 만들어서 지껄이고 있지 않은가. 진리가 보편적이라면 그것을 표현하는 말도 보편적이어야 할 텐데, 말에 관한 한 인간은 우연에 우연을 겹쳐놓고 있을 뿐이다.  147

말라르메는 인간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기에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했지만, 언어와 언어 사이를 헤맨 사람들은 거꿀로 인간이 언어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개의 언어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언어는 서로 겹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 대부분의 언어는 ‘눈’에 해당하는 낱말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낱말로 ‘함박눈’에 해당하는 말을 가진 언어는 많지 않다. 한 언어가 적시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언어는 적시한다.  148

- ‘아 대한민국’과 ‘헬조선’
자신감을 가진 자만이 먼저 말을 걸고 먼저 토론을 시작한다.  156

- ‘여성혐오’라는 말의 번역론
불행한 일을 당하면 누구나 그 불행을 책임져야 할 사람을 찾아내고 싶어한다. 탓할 사람을 찾아내지 못한 불행은 지금 눈앞에 닥친 불행보다도 더 고통스럽다. 미국 사회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중하류층 백인들에게 샌더스는 그 책임이 그들에게서 돈을 빼앗아간 월가의 부자들에게 이싿고 말하고, 트럼프는 그들에게서 일자리를 빼앗아간 이민자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한국의 젊은 남자들은 잘나가는 여자들과 페미니스트들에게 그 책임을 돌리려 한다. 그러고는 다시 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여성혐오의 혐의를 둘러싸야 하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 혐오는 그 혐오가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설명을 거치고 나면 말은 얼마나 힘을 잃는가. 여전히 바뀌지 않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우리가 어머니에게, 아내에게, 직장의 여성 동료에게, 길거리에서 만나는 여성에게, 심지어는 만나지도 못할 여자들에게 특별히 기대하는 ‘여자다움’이 사실상 모두 ‘여성혐오’에 해당한다. 나는 한 사람의 번역가지만 ‘여성혐오’라는 번역어의 운명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고통의 시대에 더 많은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불행을 그 오해 속에 묻어버리려는 태도가 비겁하다는 것은 명백하게 말할 수 있다.  184-185

- 문단 내 성추행과 등단 비리
문학교육이건 다른 교육이건 교육만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도 없다. 미숙한 선생은 그 영향력의 깊이로 자신의 교육자적 자질과 가치를 가늠하려 한다. 그래서 마침내는 학생의 정신과 육체를 식민화하려 한다. 글쓰기 교실의 수업처럼 제도의 뒷배가 없는 교육일수록 그 식민화의 욕구가 더 커질 수 있고, 그 지배 상식이 폭력적일수록 학생에게 미치는 선생의 영향력이 깊어진 것 같은 환각이 일어난다. 그러나 학생을 식민화하려는 시도는 선생이 스스로 품고 있는 교육자적 자질에 대한 의구심과 연결될 때가 많다. 비재의 권력이 교육자의 자질을 확인해주지는 않는다. 가르치는 자는 지배하는 자가 아니며, 배우는 자는 지배받는 자가 아니다. 그 관계가 민주적일 때만 교육의 내용도 민주적 가치를 얻게 된다.  187-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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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당신은 차별이 보이나요?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차별은 차별로 인해 불이익을 입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차별 덕분에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나서서 차별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차별은 분명 양쪽의 불균형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모두에게 부정의함에도, 희한하게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만의 일처럼 이야기된다.  7

나는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착각이고 신화일 뿐이었다. 누군가를 정말 평등하게 대우하고 존중한다는 건 나의 무의식까지 훑어보는 작업을 거친 후에야 조금이나마 가능해질 것 같았다.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나를 발견하는 일 말이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착각과 신화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다.  10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별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이다. 다만 차별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선량한 시민일 뿐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을 곳곳에서 만난다.  11


1부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탄생

토크니즘(tokenism)이란 역사적으로 배제된 집단 구성원 가운데 소수만을 받아들이는 명목상의 차별 시정정책을 말한다. 토크니즘은 차별받는 집단의 극소수만 받아들이고서도 차별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기회가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고, 노력하여 능력을 갖추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다는 기대를 주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은 이상적인 평등의 상황과는 꽤 먼 상태임에도 평등이 달성되었다고 여기는 착시를 일으킨다.  24

사람들은 대체로 평등을 지향하고 차별에 반대한다. 관념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다수자 차별론도 결국은 차별은 옳지 않다는 기본 전제 위에 성립한다. 사람들은 적어도 평등이라는 원칙을 도덕적으로 옳고 정의로운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에게 차별을 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차별에 가담한다는 건 도덕적으로 허락되지 않는다. 차별이 없다는 생각은 어쩌면 내가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길 바란다는 간절한 희망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히려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역설적으로 차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은 높다.  25

특권(privivtege)이란 주어진 사회적 조건이 자신에게 유리해서 누리게 되는 온갖 혜택을 말한다.
불평등과 차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학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특권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발견’인 이유가 있다. 일상적으로 누리는 이런 특권은 대개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조건이라서 많은 경우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권은 말하자면 ‘가진 자의 여유’로서,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이다.  ...  
비행기를 타거나 그것도 비즈니스석을 타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교통수단 탑승을 특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8

나에게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구조물이나 제도가 누군가에게는 장벽이 되는 바로 그때, 우리는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발견할 수 있다.  29

자신이 누리는 일상적 특권. 29

특권을 알아차리는 확실한 계기는 그 특권이 흔들리는 경험을 할 때이다. 더이상 주류가 아닌 상황이 될 때, 그래서 전과 달리 불편해질 때, 지금까지 누린 특권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  32

불평등이란 말이 그러하듯, 특권역시 상대적인 개념이다. 다른 집단과 비교해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유리한 질서가 있다는 것이지, 삶이 절대적으로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 누구의 삶이 더 힘드냐 하는 논쟁은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모두가 똑같이 힘들다”는 말도 맞지 않다. 그보다는 서로 다르게 힘들다고 봐야 한다. 불평등한 구조에서는 기회와 권리가 다르게 분배되고, 그래서 다르게 힘들다. 여기서 초점은 서로 다른 종류의 삶을 만드는 이 구조적 불평등이다.  33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등이라는 대원칙에 동의하고 차별에 반대한다. .. 하지만 상대적으로 특권을 가진 집단은 차별을 덜 인식할 뿐만 아니라 평등을 실현하는 조치에 반대할 이유와 동기를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차별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 기울어진 땅에 서서 양손으로 평행봉을 들면 평행봉 역시 똑같이 기울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36

누군가가 보기엔 세상이 소수자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져 있는데, 누군가의 눈에는 세상이 평등해 보인다. 전자의 관점에서 평등을 이루려는 시도들이 후자의 눈에는 역차별로 보이는 이유다.  38

풍경 전체를 보려면 세상에서 한발짝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이 세계가 어떻게 기울어져 있는지 알기 위해 나와 다른 자리에 서 있는 사람과 대화해보아야 한다.  38

우리는 어떤 사람을 ‘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59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은 외부의 시선에서 시작되지만, 그 구성원들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내면의 시선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집단에 소속감을 가지면서 그 집단을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사회적 정체성(social identity)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때 그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흡수되고 이 고정관념이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고정관념을 내면화하느냐에 따라 본인의 역량이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한다.  66

부정적 고정관념을 자극하면, 부정적 고정관념을 이겨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고, 부담 때문에 수행 능력이 낮아져서, 결국 고정관념대로 부정적인 결과가 나온다. 이런 압박 상황을 고정관념 압박(stereotype threat)이라고 한다. 반면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없는 집단의 수행능력은 상대적으로 향상된다.  67

구조적 차별(systemic discrimination)은 이렇게 차별을 차별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미 차별이 사회적으로 만연하고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어서 충분히 예측 가능할 때, 누군가 의도하지 않아도 각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차별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생긴다. 차별로 인해 이익을 얻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불이익을 얻는 사람 역시 질서 정연하게 행동함으로써 스스로 불평등한 구조의 일부가 되어간다.  74

켄지 요시노는 그의 책 <커버링>에서, ‘손상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낙인이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자신을 포장하는 모습에 주목한다.  .. 차별이 없는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할까?  75

교육이란 본래 모든 사람에게 성장의 기회를 주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 본질적인 기능이 왜곡되어 누군가에게는 우월감을, 누군가에게는 열등감을 심어주는 체제가 되었다.  78

메릴린 프아리는 억압의 상태를 새장에 비유한다 새장을 가까이에서 보면 철망이 한줄씩 보인다. 철망을 하나씩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얇은 선 하나가 새의 비행을 방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새장에서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아야만 그 철망들이 모여 새장을 이루고 있으며 이 새장이 새를 가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새장도 뒤로 물러나야 볼 수 있다. “구조적으로 연결된 강압과 장벽의 네트워크”가 우리의 날갯짓을 방해하고 있음을 말이다.
구조적 차별은 우리의 감각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상일 뿐이다.  78

억압받는 사람은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사회구조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불행이 일시적이거나 우연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차별과 싸우기보다 “어쩔 수 없다”며 감수한다. 유리한 지위에 있다면 억압을 느낄 기회가 더 적고 시야는 더 제한된다. 차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민하다” “불평이 많다” “특권을 누리려고 한다”며 상대에게 그 비난을 돌리곤 한다.
그래서 의심이 필요하다. 세상은 정말 평등한가? 내 삶은 정말 차별과 상관없는가? 시야를 확장하기 위한 성찰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79


2부 차별은 어떻게 지워지는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약함, 불행, 부족함, 서툶을 볼 때 즐거워한다고 했다. 웃음은 그들에 대한 일종의 조롱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관점을 우월성 이론(superiority theory)이라고 한다. 토머스 홉스(Thomas Hhobbes)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할 때 자존감이 높아지면서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나온다고 설명한다. 누군가를 비하하는 유머가 재미있는 이유는 그 대상보다 자신이 우월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86-87

돌프 질만(Dolf Zillmann)과 조앤 캔터(Joanne Cantor)의 1972년 실험은 같은 장면을 보고 전문가와 대학생이 어떻게 달리 반응하지는 보여준다. 참가자들은 상급자-하급자 관계(부모-자녀, 교사-학생, 고용주-피고용인 등)에서 서로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대화 장면을 만화로 보았다. 실험 결과,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은 전문가들은 상급자가 하급자를 깎아내리는 장면을 더 재미있어한 반면,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은 대학생들은 반대로 하급자가 상급자를 깎아내리는 장면을 더 재미있어 했다.
집단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나타난다. 사라들은 자신이 동일시하는 집단을 우월하게 느끼게 하는 농담, 달리 말하면 자신이 동일시하지 않는 집단을 깎아내리는 농담을 즐긴다.  87

토머스 포드(Thomas Ford)와 동료들은 비하성 유머가 마음속 편견을 봉인해제시킨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어떤 집단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더라도 보통의 상화에서는 사회규범 때문에 드러내지 못한다. 하지만 누군가 비하성 유머를 던질 때 차별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 결과 규범이 느슨해지고, 사람들은 편견을 쉽게 드러내면서 차별을 용인하거나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런 설명을 편견규범이론(prejudiced norm theory)이라 부른다.
유머가 금기된 영역의 빗장을 순간적으로 풀어내는 효과가 있다는 뜻이다. 일탈적인 행위가 유머를 통해 놀이 또는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된다.  88

금기된 영역을 넘나들기 때문에 권력에 도전하는 풍자가 가능하고, 사회는 그 가치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 금기의 빗장이 약자를 향해 풀렸을 때 잔혹한 놀이가 시작된다.  89

누군가를 무언가로 호명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이다. 누군가를 향한 놀림을 ‘가벼운’ 농담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권력을 알려준다. 반대로 원하지 않는 기표가 자신에게 부착되는 경험은 소수자로서 사회적 위치와 무력한 상태를 확인시켜준다.  95-96

유머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는 청중의 반응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누가 웃는가?”라는 질문만큼 “누가 웃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웃찾사’의 흑인 분장 사건처럼 웃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유머는 도태된다. 누군가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농담에 웃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런 행동이 괜찮지 않다”는 메시지를 준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어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어야 할 때가, 최소한 무표정으로 소심한 반대를 해야 할 때가 있다.  98-99

능력주의(meritocracy) ...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기만 한다면 평등한 사회라고 여긴다. 능력주의에 따르면 계층이 존재한다는 사실, 즉 불평등한 구조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경쟁에서 쏟은 노력을 보상하기 위해 차등적으로 대우해야 정의로운 사회다. ..
여성으로서 직장에서 불리한 대우를 받더라도 자신의 능력 부족이라고 생각하면 그 상태를 수긍하게 된다.  105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사회는 무언가를 성취한 사람에게 각별한 존경심을 보낸다. .. 사회의 불평등 자체를 원망하기보다 “계층의 사다리가 끊어지고” “개천에서 용 날 수 없는” 세태를 원망한다.  105-106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실제로 능력에 차이가 없다는 사실과 같은 현재 상태가 아니다. 능력주의라는 거대한 신념 체계를 지키기 위해 가치가 다른 두 사람 사이에 어떻게든 차별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106

모두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기만 하면 공정할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차별이 된다.  109

모두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도리어 누군가를 불리하게 만드는 간접차별(indirect discrimination)의 예들이다.  110

능력주의 체계는 편향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능력주의를 맹신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간과한다. 사람은 누구나 개인적 경험, 사회 경제적 배경 등에 따라 어떤 방향으로든 편향된 관점을 가지기 마련이다.  110-111

무슨 능력을 측정할지 정하고 평가하는 사람에게는 편향이 있고, 선정된 평가방식이 다양한 조건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기 어렵다. 게다가 평가에는 오류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한계를 고려할 때 어떤 한가지 평가 결과로 사람의 순위를 매겨 결정 짓는 것은 위험하다. 게다가 그런 평가기준으로 인격적인 대우를 달리 하거나 영구적인 낙인을 부여함으로써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이것이야말로 불공정하고 부정의한 일이 아닐까.  112

왜 어떤 집단은 특별히 잘못이 없어도 거부되는데, 어떤 집단은 개별적으로만 문제삼고 집단으로는 문제삼지 않을까?  123

어떤 차별은 종교적인 이유로 요구된다. 종교에 따라, 교리를 이유로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경우가 있다. 어쩔 수 없이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차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교리 내에서 차별은 나쁜 것이 아니라 신성한 질서이기 때문이다.  128

이 장의 글머리에 인용한 아서 골드버그 대법관의 말을 다시 새겨보자. “차별은 단순히 지폐나 동전이나, 햄버거나 영화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인종이나 피부색을 이유로 그를 공공의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 때, 그가 당연히 느낄 모멸감, 좌절감, 수치심의 문제이다.” 바로,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다.  133

공공의 공간에서 거절당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소수자(minorities)로 만드는 중요한 성질 가운데 하나다. ‘소수’라는 건 수의 많고 적음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여성처럼 숫자로는 많아도 어쩐지 공공의 장에서 보이지 앟는 사람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이유는 여러가지일 수 있다. 우선 아예 없는 경우다. 아예 없는 이유 역시 여러가지일 수 있다. 애초에 태어나지 않도록 했거나, 들어오지 못하게 했거나, 쫓아냈거나, 극단적으로 죽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137-138

격리를 통해 보이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138

실제로 우리는 꽤 자주 누군가에게 경고를 보내기 위해 거리에서 시선을 사용한다. 거리를 걸을 때 누구에게 시선이 머무르는지 생각해보자. 남성 두명이 손을 잡고 걸을 때, 여성이 노출이 많은 옷을 입었을 때, 지저분한 행색의 사람이 지나갈 때 등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그들을 따라간 적이 있지 않은가? 거리는 모든 사람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모두에게 똑같이 허용된 공간이 아니다. 거리에는 사람과 행동을 규율하는 규칙과 감시체제가 있다.
즉 거리는 중립적인 공간인 듯 보이지만 그 공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존재한다. 익명의 다수가 시선으로써, 말이나 행위로써, 혹은 직접적인 방해나 법적 수단을 통해 그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불온한 존재들을 단속하는 데 동참한다. 입장할 자격 없이 공공의 공간에 침범한 사람, 거리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을 추방하거나 교화시킨다. 이런 시선의 익명성과 편재(遍在)성 때문에, ‘낯선존재’인 소수자들이 느끼는 일상의 시선 혹은 ‘감시’의 압박은 삶을 만성적으로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때로는 소수자가 스스로 숨어 있기로 결정한다. 소수자가 안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다. 139-140

증오범죄(hate crime), 다른 말로 편견이 동기가 된 범죄(motivated crime)라고 한다.  143

유럽 인권재판소는 “민주주의는 단순히 다수의 관점이 언제나 지배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배적인 지위의 남용을 피하고 소수자에 대한 공정하고 적절한 대우를 보장하기 위한 균형이 필요하다.”라고 강조  146

노예라는 지위는 그 명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노예는 사람으로서의 권리 없이 노동의 필요만이 요구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울타리 안에 존재하지만 그 땅의 ‘주인’과 평등하지 않은 사람, 정치적 권리가 박탈되어 권리를 요구할 수 없는 사람, ‘주인’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흔적 없이 소멸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현대사회에서 부르는 이름이 무엇이든 그는 ‘노예’가 된다.  148

마이클 왈저(Michael Waizer)는 영토 안에 권리가 적거나 없는 계층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미 민주주의에 반하는 “폭정(tyranny)”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기본 전제로 그 안의 모든 구성원이 평등한 관계를 가지고 동등한 입장에서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국적이 다고 사람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지울 수 있을까. 우리는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윤리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은폐된 불평등을 전제로 평등을 누렸던 그리스의 폴리스와는 다른, 진정한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151


3부 차별에 대응하는 우리들의 자세

권위에 순응하는 경향은 현재의 법과 질서를 고수하려는 경향과 연결된다. 사람들은 익숙한 기존의 법과 질서에서 벗어난 낯선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연구에서는 권위에 순응하는 성향의 사람들이 “세상을 위험한 곳이라고 인식”하고 “타인의 동기를 의심하며 이질적인 사람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이 두려움과 의심 때문에 변화를 반대하게 된다.  160

헌법재판소는 호주제가 위헌이라고 선고하면서, 전통이라고 부르던 기존의 질서가 “사회적 폐습”이 될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논증했다.
‘우리 헌법에서 말하는 ‘전통’ ‘전통문화’란 오늘날의 의미로 재해석된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오늘날의 의미를 포착함에 있어서는 헌법이념과 헌법의 가치질서가 가장 중요한 척도의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여기에 인류의 보편가치, 정의와 인도의 정신 같은 것이 아울러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 역사적 전승으로서 오늘의 헌법이념에 반하는 것은 헌법 전문에서 타파의 대상으로 선언한 ‘사회적 폐습’이 될 수 있을지언정 헌법 제9조가 ‘계승 발전’시키라고 한 전통문화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161-162

헌법재판소의 말처럼 “헌법이념과 헌법의 가치질서” “인류의 보편가치, 정의와 인도의 정신”등에 비추어 어떤 질서는 폐기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차별도 폐기되어야 할 질서 중 하나로, 이런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 사회 혼란을 초래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정당하고 정의로운 행보로 이해되어야 한다.  162

시민은 단순히 통치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165

롤스에 따르면 시민 불복종이란 “법이나 정부의 정책에 변혁을 가져올 목적으로 행해지는 공공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양심적이긴 하지만 법에 반하는 정치적 행위”를 말한다.  ... 시민 불복종은 공개적으로 위법 행동을 함으로써 대중에게 문제 상황을 알린다.  166

멜빈 러너(Melvin Lerner)는 사람들이 공정세계 가설(just-world hypothesis)을 품고 산다고 말한다. 세상은 공명정대하고 사람은 누구나 열심히 한 만큼 결실을 맺는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게 믿는 이유는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어야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할 수 있다.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믿음은 필요하다.
문제는 부정의한 상황을 보고도 이 가설을 수정하지 않으려 할 때 생긴다. 세상이 언제나 공명정대하다는 생각을 바꾸는 대신 ‘피해자를 비난’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왜곡하여 이해하기 시작한다. 세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불행한 상황에 처한 피해자가 안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거나 잘못된 행동을 했기에 그런 일을 겪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공정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바로 그 믿음 때문에 오히려 세상을 공정하게 만들지 못하는 모순이 생긴다.  168-169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다수자와 소수자의 자유는 같지 않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자유론>에서 지적하듯, 다수자는 소수자의 의견을 거침없이 공격할 수 있다. 반면 소수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된다. 다수자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서 잘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사실상 침묵을 강요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정의는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누가 혹은 무엇이 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171

아이리스 영은 ‘차이’라는 단어의 용례에 주목한다. ‘다르다’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사용되지 않는다. 배제되고 억압된 사람들만이 ‘다르다’고 지칭되고, 주류인 사람들은 중립적으로 여겨진다. ‘중립’의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가능성이 펼쳐져 있지만, ‘다른’사람들에게는 몇가지의 정해진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결국 ‘다르다’는 말은 ‘서로 다르다’는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고정된 특정 집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차이’가 낙인과 억압의 기제로 생성되는 것이다.
마치 한국사회에서 ‘다문화’라는 말이 모든 사람이 다양한 문화를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문화적 소수자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의 차이란 주류 집단인 ‘한국인’을 기준점으로 삼아서 다르다는 것으로서, 사실상 ‘정상’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다양성을 강조하는 말로 종종 사용되는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란는 흔한 구호도, 여기서 ‘다름’이 주류 집단의 기준에서 ‘일탈’된 무언가를 지칭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틀림’을 전제하는 형용모순이 된다.
아이리스 영은 억압적 의미를 가지는 ‘차이’를 재정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류 집단의 입장을 보편적이라고 보면서 비주류만을 다르다고 표기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관계적으로 이해해 상대화하는 것”이다. 여성이 다르듯 남성이 다르고, 장애인이 다르듯 비장애인이 다르다고 보는 상대적인 관점이다. 따라서 차이는 본질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맥락에 따라 유동적이다. 휠체어를 탄 사람은 ‘언제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경기와 같은 특정 맥락에서 차이가 있더라도 다른 맥락에서는 차이가 없어진다.
이런 긴 논의는 결국은 식상할 정도로 당연한, 하지만 그래서 더 어려운 결론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모두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우리를 본질적으로 가르는 차이란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사람으로서 보편성을 공유하지만, 세상에 차별이 있는 한 차이는 실재하고 우리는 그 차이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184-185

차별이 구조화된 사회에서는 개인이 행하는 차별 역시 관습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186

불평등한 사회에서의 삶은 자신의 지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이런 사회에서는 지위의 유동성에 따라 개인의 만족감이 달라진다. 불평등이 있더라도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사람들은 안심한다. 하지만 그 편안한 지위에 오르기 위해 평생에 걸쳐 쏟는 수고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억울하면 성공해!”라는 흔한 말처럼, 열등한 지위에서 겪어야 하는 모욕과 무시를 피하기 위해 타인의 인정이 따라올 것이라 예상되는 성취들을 최소한이라도 확보하고자 한다.
불평등한 사회가 주는 삶의 고단함이다. 어느 정도의 지위에 올라가야 정말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아 만족스러운 상태가 될지도 알 수 없다. 결국 일정 지위에 올라간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인정받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려는 동기를 가지며, 이는 매우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다. 학식과 경험이 많으며 사회 변화를 이끌어가도록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저항 세력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186-187

불평등한 사회가 고단한 이유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도록 부당하게 종용하기 때문이다.  187

사회가 하나의 기준을 정하고 개인을 그 기준에 맞추는 이 동화주의 경향은 자유에 대한 근본적 침탈이 된다. 존 스튜어트 밀은 1859년에 발표한 <자유론>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우리 삶이 획일적인 하나의 형태로 거의 굳어진 뒤에야 그것을 뒤집으려 하면, 그때는 불경(不敬)이니 도덕적이니, 심지어 자연에 반하는 괴물과도 같다는 등 온갖 비난과 공격을 감수해야 한다. 사람들은 잠시만 다양성과 벽을 쌓고 살아도 순식간에 그 중요성을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188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불평등한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수고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불편함을 견딜 것인가?  188

차별을 둘러싼 긴장들은 ‘내가 차별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 좋겠다’는 강렬한 욕망 혹은 희망을 깔고 있다. 정말 결정해야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불평등과 차별을 직시할 용기가 있느냐는 것이다. 차별에 민감하거나 둔감할 수 있는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며, 너무나도 익숙한 어떤 발언, 행동, 제도가 차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가? 내가 보지 못한 차별을 누군가가 지적했을 때 방어하고 부인하기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경청하고 성찰할 수 있는가?  188-189

아이리스 영은 말한다. “무의식적이었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억압에 기여한 행동, 행위, 태도에 대해 사람들과 제도는 책임을 질 수 있고 책임을 져야 한다.” 여기서 ‘책임’이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을 성찰하고 습관과 태도를 바꾸어야 할 책임을 말한다.
그러니 내가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몰랐다” “네가 예민하다”는 방어보다는, 더 잘 알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성찰의 계기로 삼자고 제안한다.  189

아무런 저항 없이 평등이 진보한 역사는 없으니.  190

지금까지 차별금지법이 좌절된 실질적인 이유는 일각에서 차별 철폐라는 목적 자체를 부정하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거세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차별을 옹호하는 의견이다.  195

보편성은 차별을 잘 보이지 않게 만들어 은폐시키기도 한다. 보편적으로 모든 차별을 금지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차별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보이게 만들기 위해 차별금지사유를 명시할 필요가 있다.  197

차별금지법의 원칙은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No One Left Behind)”. 199

오래전에 법으로 성희롱을 금지했지만 무엇이 성희롱인지 알고 그런 행동을 하지 않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여전히 개선 중이다.  ... 모두가 평등을 바라지만,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에 관한 상징이며 선언이다.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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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시대. 그 시절에 우리는 모두 괴물이었다.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시대에 사람들은 분노를 내장에 쌓아두고 살았다. ...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12

책을 읽는 사람과 모자를 쓴 사람과 낚시질을 하는 사람을 함께 그린 그림이 있다. 문제는 “이 그림에서 모자를 쓴 사람은 누구인가?”를 알아내는 것. ...  
그러나 아이는 매우 난감한 얼굴을 하더니 이렇게 되물었다. “내가 어떻게 모자 쓴 사람의 이름을 알겠어요?” ...
학교가 요구하는 학습 능력은 모자 쓴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수준의 능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학교 교육의 코드를 알아차리는 ‘눈치’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학생의 생각이나 의문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문제와 대답의 각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토론식 수업의 중용성을 역설하고, 학생이 질문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코드는 토론되는 것이 아니라 규정되는 것이고, 각본에는 질문이 끼어들 틈이 없다. ...
방문교사는 “모자를 쓴 사람은 누구인가요?”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어느 사람이 모자를 쓰고 있나요?”라거나, 최소한 “누가 모자를 쓰고 있나요?”라고 물었어야 한다. 코등의 바탕을 자체가 문제라는 이야기다. 잘못된 코드는 잘못된 그만큼 더 강압적이다. 삶의 진실과 따로 노는 코드는 결코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14-15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죽음을 견지디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 살아 있는 삶, 다시 말해서 죽음이 함께 깃들어 있는 삶을 고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21

인간이 수수 천년 사용해온 말 속에는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리고 희망이 들어 있다.  39

우리에게 과거의 상처는 너무 악착스럽고, 미래에의 걱정은 갈수록 두터워질 뿐이다. 그래서 현재는 그만큼 줄어들고 눈앞의 삶을 깊이 있는게 누리는 것이 용서되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가 미래의 걱정거리로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학은 지금 이 자리의 살에 자신을 자유롭게 바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해왔다. 대학의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자유의 시간과 공간이 없이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구실 아래 그 자유는 줄어들었으며 이제는 거의 폐기되기까지 했다.  42

이런저런 사건들이 늘 ‘어느 날 갑자기’의 형식으로 찾아오는 곳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변덕스럽지 않기는 어렵다. ‘어느 날 갑지기’앞에서 놀라지 않게 하는 일은 인문학이 늘 내세우는 일이고, 사실 내세워야 할 일이다.  ... 생각을 생산하는 일이 아니라 생각을 소비하는 일에만 매달릴 때 그 위기는 피할 수 없다.  57

판단하고 선택하기전에 모든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가려놓은 채, 생명에 삽질을 하고 시멘트를 발라 둑을 쌓아둔다면, 거기 고이는 것은 창조하는 자의 사랑이 아니라 굴종하는 자의 증오일 것이다.  100

우리는 너무나 많은 폭력 속에 살고 있고, 그 폭력에 의지하여 살기까지 한다. 긴급한 이유도 없이 강의 물줄기를 바꿔 시멘트를 처바르고, 수수만년 세월이 만든 바닷가의 아름다운 바위를 한 시절의 이득을 위해 깨부수는 것이 폭력이고, 복잡한 거리에서 꼬리물기를 하는 것도 폭력이다. 저 높은 크레인 위에 한 인간을 1년이 다 되도록 세워둔 것이나, 그 일에 항의하는 사람을 감옥에 가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너는 앞자리에 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다. 의심스러운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며,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도 따리고 보면 폭력이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폭력이 폭력인 것을 깨닫고, 깨닫게 하는 것이 학교 폭력에 대한 지속적인 처방이다.  115

경영이 교육과 학문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이루어지지 않고, 거꾸로 교육과 학문이 학교 경영을 위한 수단이 될 때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123

우리의 삶이 아무리 비천해도 그 고통까지 마비시키지는 못한다.  124

권태롭다는 것은 삶이 그 의미의 줄기를 얻지 못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감수성을 잃었다는 것이다. 유행에 기민한 감각은 사물에 대한 진정한 감수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거기에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온갖 것들에 대한 싫증이 있을 뿐이며, 새로운 것의 번쩍거리는 빛으로 시선의 깊이를 대신하려는 나태함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며 마음의 깊은 곳에 그 기억을 간직할 때에만 사물도 그 깊은 내면을 열어 보인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감수성이란 자아의 내면에서 그 깊이를 끌어내는 능력이며, 그것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 나와 세상을 함께 길들이려는 관대한 마음이다. 제 깊이를 지니고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은 세상을 살지 않는 것이나 같다.  192

삶을 깊이 있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은 우리가 마음을 쏟기만 한다면 우리의 주변 어디에나 숨어 있다.  매우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 삶을 구성하는 것 하나하나에 깊이를 뚫어 마음을 쌓지 않는다면 저 바깥에 대한 지식도 쌓일 자리가 없다. 정신이 부지런한 자에게는 어디에나 희망이 있다고 새삼스럽게 말해야겠다.  212

나로 말하면, 에르노의 소설에서처럼 희생이란 이름 아래 착취당했던 아버지의 아들이며, 줌파 라히리의 소설에서처럼 아들 앞에 해결해야 할 문젯거리로 서 있는 아버지이다. 그런데 우리 세대 작가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그렸던가,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어떤 기호이거나 험난한 역사의 곡절에 안표가 되는 정도의 추상적 형식을 넘어선 적이 있던가. 지금 2, 30대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아버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 죄는 우리 세대에서 비롯된 것이 확실하다.  227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폭력이 폭력인 줄을 알지 못한다.  231

한 시대에 어떤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덕성과 학식으로 어떤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의견을 공공장소에 영원히, 그것도 토론이 가능하지 않은 형식으로, 내세울 권리는 없다. 겸손하지 않은 도덕은 그 자체가 폭력이다.  233

코드에는 소비가 있을 뿐 생산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 코드는 간편한 데 생산은 어렵고 복잡하다.  279

나는 누구나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시간을, 다시 말해서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남이 모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281

컴퓨터나 핸드폰 같은 물건들은 삶을 투명하게 만든다. 내가 어느 구석에 들어가 있어도 그것들은 나를 추적한다. 아니, 그것들이 나를 추적하기 전에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다는 표적을 내 스스로 남겨놓도록 유도한다. ...  이런 투명성에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사람살이란 묘한 것이어서 우리는 투명한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불투명한 것을 획책한다. 산중에 수도하러 들어간 사람은 자신을 물처럼 투명하게 만들려 하면서도 세상이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이 되려 한다. 대도시에 나와 간결하고 명료한 삶을 살려는 젊은이의 욕망에는 또한 자신을 군중 속에 감추려는 열망이 함께 따라붙는다. 인터넷은 인간들의 모든 삶을 한꺼번에 끌어안기 위해 그 그물을 더욱 넓고 더욱 촘촘하게 짜겠지만, 사람들은 또 어디로 피해 달아나 은근한 사이트를 구성할 것이다. 그래서 그 그물이 더 커진다. 불투명한 것들이 투명한 것의 힘을 만든다. 인간의 미래는 여전히 저 불투명한 것들과 그것들의 근거지인 은밀한 시간에 달려 있다.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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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파도를 만드는 사람은 나 자신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은 마음이 시키는 것이 있을 때에도, 몸이 시키는 일이 있음에도 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마음의 사용법과 몸의 사용법 앞에서 숱하게 주저해왔다. 혼자 헤쳐온 일이 거의 없는 생을 산다면 우리는 자주 난감해할 뿐더러 인생의 그 어떤 무늬도 만들지 못한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살면서 큰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거기서 더욱 성장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아주 작은 일로도 탈진 상태가 된다. 만일 그들 자신에게 의지력이 없거나 자신들의 책임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그들을 쓰러뜨리게 된다
라고.
당신이 혼자 있는 시간은 분명 당신을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어떻게 혼자인 당신에게 위기가 없을 수 있으며, 어떻게 그 막막함으로부터 탈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혼자 시간을 쓰고, 혼자 질문을 하고 혼자 그에 대한 답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닥쳐오는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은 그 외로움 앞에서 의연해지기 위해서라도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면서 써야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을 목숨처럼 써야 한다. 그러면서 쓰러지기도 하고 그러면서 일어서기도 하는 반복만이 당신을 그럴듯한 사람으로 성장시킨다. 비로소 자신의 주인이 되는 과정이다. 물론 자기 안에다 주인을 ‘집사’로 거느리고 사는 사람이다.
오늘밤도 시간이 나에게 의미심장하게 말을 건다. 오늘밤도 성장을 하겠냐고. 아니면 그저 그냥 지나가겠냐고.
인생의 파도를 만드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보통의 사람은 남이 만든 파도에 몸을 싣지만, 특별한 사람은 내가 만든 파도에 다른 많은 사람들을 태운다.

- 이제는 정말로 안녕일까
참 많은 여행을 했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제는 어떻게 어떤 여행을 하는가가 중요한 차례가 되었다.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짧은 여행을 즐기지 않는다. 여행을 하면서도 정주하거나, 여행을 하면서도 그곳 사람들 속에 흠뻑 젖는 것을 선호한다. 거미도 짧게 있으려고 집을 짓지 않는다.

- 나는 능선을 오르는 것이 한 사람을 넘는 것만 같다
누군가에게 산은 무의미일 수 있더라도 나에게는 명백한 의미다. 산을 넘을 때마다 생각한다. 힘겹게 산을 넘을 때마다 힘겹게 한 사람을 여행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산을 넘는 것 같지만 실은 ‘한 사람’을 만나는 과정, 그대로를 따라가보는 것이다. 한 사람을 아느라, 만나느라, 좋아하고 사랑하느라. 그리고 표정이 없어지다가, 멀어지다 놓느라...... 마치 산을 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가졌다는 것은 그 한 사람을 등반하여 끝내 정상을 보겠다는 것, 아닌가. 한 사람의 전부를 머리에 가슴에 이고 지고 오른다.

- 왜 혼자냐고요 괜찮아서요
고독을 모르면서 나이들 수는 없다. 혼자인 채로 태어났으면서 애써 고독을 몰른 체한다면 인생은 더 어렵고 더 꼬이며 점점 비틀린다. 고독의 터널 끝에 가보고 고독의 정점과 한계점을 받고 서서 웃는 자만이 ‘혼자를 경영’할 줄 아는 세련된 사람이 된다. ...
종교가 간절한 시대는 지난 것인지 사람들은 이제야 시간을 믿기 시작했다. 시간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고 시간이 우리에게 보상을 해준다고 믿기로 한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아무렇게나 쓰는 사람 말고 ‘혼자있는 시간’을 잘 쓰는 사람만이 혼자의 품격을 획득한다. ‘혼자의 권력’을 갖게 된다.
혼자 해야 할 것들은 어떤 무엇이 있을지 혼자 가야 할 곳도 어디가 좋을지 정해두자. 혼자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혼자 잘 지내서 가장 기뻐할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것도 알아두자. 이것이 혼자의 권력을 거머쥔 사람이 잘하는 일이다.

- 당신이 나를 따뜻하게 만든이유
어떤 이에게 말을 걸어야 할까. 말을 걸어야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세상엔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만 있다. 많은 사람들은 간단하게 말하는 법, 어떤 상황이 되어도 평균에만 맞춰서 말하는 법, 자기식으로 정리해서 남에게 옮기는 법에만 열심이다.

- 우리 서로가 아주 조금의 빗방울이었다면
‘여행뽕’이라는 말이 있다. 여행중에 우리의 허전함은 어떤 특별한 시간이나 사건을 기대하면서 맥없이 허우적대기도 하는데, 딱히 안 그래도 될 것 같은 상황에서 어느 한 사람(혹은 그곳 분위기)에게 무작정 빠져들고 마는, 그러나 막상 여행지에서 돌아와서는 그 감정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아무래도 약발이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화들짝, 여행뽕이라는 새로 만들어졌다는 그 말 앞에서 나도 모르게 동공이 열리고 마는 것은, 우리가 한때 같이 지낸 사람들과의 좋았던 시절은 그저 여행뽕이거나 ‘사람뽕’에 취한 상태에 불과한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다.

- 매일 밤, 여행을 마친 사람처럼 굿나잇
누군가와 여행을 함께하려고 하지 말라.
큰일난다.
갑자기 나에게 아무 일도 아닌 일로 붉어진 얼굴을 보이거나 어쩌면 짜증 섞인 소리로 다그칠지도 모른다. 그냥,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긋나고 만다.
잠자는 시간도 습관도 다르다. 먹는 시간도 먹는 취향도 다르다.
어떤 분위기를 좋아하고 어떤 분위기에 휩쓸리는지도, 그곳에서 꼭 하고 싶은 한 가지의 목적마저도 다르다. 아무래도 어긋나고 마는 것이다.
혼자는 왜 안된다고 생각하는지ㅡ 혼자여야만 가능한 단 하나가 있는데 그게 바로 여행이다.
그런데도 같이 가겠는가  외로움과 두려움을 조금 해결해보겠다고 나눠보겠다고, 굳이 누구랑 같이 가겠는가. 아니, 말리고만 싶다. 혼자하는 여행의 긴장이 쌓이면 쌓일수록 외로움과 두려움 따윈 집 안에 아무렇게 굴러다니는 고무줄 같은 게 되고 만다.
혼자 여행을 해라. 세상의 모든 나침반과 표지판과 시계들이 내 움직임에 따라 바늘을 움직여준다. 혼자 여행을 해라. 그곳에는 없는 사람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된고, 더군다나 여기에서도 들었던 똑같은 이야기 따위는 듣지 않아도 된다.
혼자 여행을 한다는 건 나를 보호하고 있는 누군가로부터, 내게 애정을 수형해주며 쓸쓸하지 않게 해주는 당장 가까운 이로부터, 더군다가 아주 작게 나를 키워냈던 어머니의 뱃속으로부터 가장 멀리, 멀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자신 만만히 믿었던 것들을 검은색 매직펜으로 지워내는 일이다.
세상 흔한 것을갖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남들 다 하는 것을 하고 싶은게 아니라면 나만 할 수 있고, 나만 가질 수 있는 것들은 오직 혼자여야 가능하다.
혼자 있는 그곳은 속깊은 문장을 알려준다. 내가 숱하게 화를 내야만 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공손하게 손을 모으게 한다.

- 그림으로 사랑의 모양을 그려보세요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사랑의 꼴도 다르다. 누구를 사랑하느냐에따라 내가 얼마만큰의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또한 누구를 어떻게 떠나 보냈는지가 남은 사람을 입체적으로 성장시킨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
....
요즘엔 사랑인지 아닌지 모르는 채 애매한 감정으로 만나고 있는 연인들이 많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그 색이 짙지도 않고 감정이 치열하지도 않은 채로 사랑하는 상태를 그들은 사랑이라 한다. 이 또한 시대의 색깔일까. 차오르는 육체의 감정을 해소시킬 대상을 만나는 것이거나, “사귀는 사람 있어요?” 같은 세상의 잦은 질문들에 대답하기 쉬운 상태에 놓이기를 바라는 것일까. 허전한 공백 상태를 못 견디는 세대의 특성이 시대의 물살을 맹물 같은 사랑으로나마 건너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 관계를 통해 위로는 받을 수 있을지라도 요긴하게 성장을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사랑에 온전히 몸을 박고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 사랑에 몸을 들여놓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줄기가 없으니 사랑의 양분이 가닿을 곳이 없는 형국이다.
사랑을 하느라 아파하는 것은 성장통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많은 질량의 고통을 포함하고 있는데다, 인류가 사랑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헤어나오질 못하는 것은 고통의 바닥에 고여 있는 단물에 빨대를 대고 있어서다. 이건 마치 성장주스와도 같다. 그 한 사람을 사랑했는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그 사랑을 자신이 많이 성장햇는가를 따져보는 것이다. 혼돈의 대륙을 통과하면서 방황하지 않은 사람에게 삶을 읽어내는 능력이란 없다.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성장은 시작된다.  
.....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다른 이름은 ‘생각한다’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이란 ‘생각한다, 생각한다, 생각한다, 생각한다의 연속선’이다. 오죽하면 ‘사랑’이란 말의 어원이 ‘사량’ 즉 ‘생각의 양’이라는 설도 있겠는가. 어떤 경우에도 한 대상이 생각이 나고, 어떤 상황에서도 한 사람을 향한 생각이 불쑥 모든 것을 앞질러 덮는 형편 혹은 경로가 사랑이다. 이 화학 작용 앞에서는 누구도 포로가 된다. 감당이 어렵다. 이런 반복을 통해 대상을 가까이 느끼려 하고 이내 가지려 할 것이므로 결국 ‘생각’은 표적을 거느린 ‘화살’인 것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줄자가 있다. 사랑은 이 줄자를 놓치지 않으려 하면서 좀더 가까운 거리로 당신다. 안간힘으로 당겨보지만 실제 느낌과는 다르게 좀처럼 가까워지지도 않는다. 우리가 사랑을 하고 있는 상태라면 그 거리가 몇 센티인들 적당하다고 믿겠는가.
사랑을 하려는 마음엔느 사랑을 받으려는 넓은 ‘대륙’이 차지하고도 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려니, 자기 자신을 증명해내는 일이 사랑이기도 하려니 그래서 그 욕망의 대륙은 점점 더 손을 쑬 수 없을 정도로 드넓어져 간다. 그러기에 지독히 앓을 뿐이다.
.....
사랑은 ‘정답’과는 거리가 멀다. 차라리 사라은 모든 답을 거부한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가장 유일하 ‘무엇’이 있으니 바로 ‘이것’ 아니겠는가. 사랑.

- 바람이 통하는 상태에 나를 놓아두라
그녀를 안 지 얼마나 됐을 때였을까. L은 독자로 만난 사이였다.
-이병률이 글을 쓰는 것은 뭐 때문일까요?
나는 얼른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글을 쓰는데, 그나마 사람들이 그 글을 읽어주는 건요?
역시 더 어려운 질문이었다. 다시 L이말햇다.
-그건 자기를 지키고 있어서예요. 자기를 어디로든 보내지 않고 묵묵히, 굳건히 자기를 지키고 있어서예요. 그걸 신이 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거고요.
그래서 내가 물었다.
-자기를 지키는 일은 어려운 일인가요?
쉬운 물음 같기도 했으며 물음 같지도 않았지만 나는 어쨌든 물었다. 어쩌면 내가 글이랍시고 쓰는 글을 절대 좋아하지 않기에 나는 물었는지도.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 아닌가요. 어떤 것에 의해 우리는 자신을 쉽게 잃어요. 하늘이 정해준 적당한 범위가 있는데 그걸 자꾸 벗어나려고 하고요. ... 우리 어쩌면 자신을 망치는 일이 더 쉬운지도 몰라요.
내가 숙연해진 것은 그 말이 당연한 말이어서가 아니라 CT 촬영을 해서라도 내가 정녕 그렇게 살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알고 있다. 나를 지키는 삶을 살 수 있을 때 내 머리 위에 늘 나를 지켜주는 새 한마리가 앉아 있을 거라는 걸. 하지만 아직, 내 머리 위에 새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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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신만의 길을 가라
신생아실 창문 앞에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엉엉 소리 내어 울며 기적같이 우리 품으로 날아 와준 아이와 첫 대면을 할 때만 해도, 학교의 변화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었다. 우리에게는 아주 먼 일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갔다. 아이들은 무겁다 아우성쳤지만, 그 가녀린 어깨를 짓누르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아이들을 땅 속으로 꺼져버리게 만들 것만 같았다. 이 세상은 엄마로 살기도 힘겹지만 아이로 살기도 버겁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이를 키우고 있는 이 어이없는 세상에 화가 났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이 세상에 아이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겁이 났다.
하지만 세사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적응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해하려 애쓰지 않았다. 더 이상 오지 않을 세상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내 아이를 위해서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야 했다 무슨 용기였는지, 아니면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겟지만 세상에 순응하기보다는 아이가 선택해서 갈 수는 있는 다른 길으 찾기 시작했다.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남과 다른 선택을 해야만 했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신만의 길을 걷다 보면 그 길 끝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예측하기 어렵다. 불안하고 두렵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자나갔고 지금도 지나가고 있는 잘 닦인 길이 아니다. 거칠고 험할 뿐 아니라 외로운 길이다. 하지만 누군가 성공의 길이라고 미리 정답처럼 보여주는 길에서 그 길을 쫓느라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아도 된다. 내가 선택한 길에서 나만의과정을 만들어가는 동안 ‘오늘’을 살 수 있다. 그것이 뒤에 오는 누군가에게는 또 하나의 다른 길이 될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가지 길을 가거라. 바보 같은 사람들이 무어라 비웃든 간에...”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중에서



언제부터였는지 우리는 누군가 가르치는 것을 배우는 것이 ‘교육’이라 생각해왔다. 그 누군가는 학교나 선생님으로 단정 지었다. 빨리 배울수록 좋다고 생각해서 ‘조기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아이들은 취학연령 훨씬 이전부터 유치원을 비롯해서 어린이집, 문화센터, 방문교육 등 다양한 방법으로 선생님을 만났다. 스스로 무엇인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이미 그것을 알아야 할 것으로 규정한 선생님들이 배워야 할 것으로 가르쳤다. 그렇게 아이들은 타고난 지적 호기심이나 욕구를 느껴보기도 전에 무언가 배우기 위해서는 선생님이 필요한 것이구나 착각하게 된다.

어린 나이에도 능동적인 사고보다 수동적인 사고로 자신을 억제하며 단체 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이 사회성 좋은 아이라 생각한다면, 또 그게 다 사회성을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더 논의할 의미가 없다.

합법적으로 아이들은 가정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분리되고 있다. ‘교육제도’ 또는 ‘복지제도’란 이름으로 부모들이 별 저항 없이 수용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남과 다르면 불안해하고, 강한 개성을 가지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을 만나면 불편해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는 조직에 적응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깊이 간섭하고 통제하며 착하고 말 잘 듣는 아이로 성장하길 바란다. 개성을 밟아버리고 자아 존중감마저 죽이면서.
하지만 지금은 자신만의 색깔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켜낸 사람들이 창의적인 일에서 상상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는 세상이다. 자신을 억누르고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기대치에 맞춰 살아야 하는, 말 잘 듣고 착한 사람으로 사회적 잣대의 성공을 이루었을 때 진심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지켜야 할 수많은 규칙 안에 자신을 가두고, 서둘러서 먼저 배우는 시스템에 아이들은 익숙해졌다. 그런데 그 규칙들은 대부분 아이 당사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단체생활에서 아이들을 원활하게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아이들은 자존감을 익히고 키우기도 전에 타고난 재능은 꺼내 보지도 못하고 ‘적응’에 익숙해진다.

영국 교육학자 켄 로빈슨(Ken Robinson)의2006년 테드(TED) 강연이다.
‘미래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미래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단서가 바로 교육에 있다. 우리는 아이들이 미지의 앞날에 대비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은 무한한 재능을 갖고 있다. 혁신을 창조하는 재능이 있다. 우리의 교육제도는 이러한 재능을 가차 없이 억누르고 있다. 이제 창의력을 읽기, 쓰기와 같은 수준으로 다루어야 한다.
아이들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수하는 것이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잘못하거나 실수해도 괜찮다는 마음이 없다면 신선하고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 어른이 되면 뭔가 실수를 할까봐, 틀릴까봐 걱정을 하면서 살게 된다. 우리의 교육제도는 실수라는 것을 살면서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교육을 통해 사람들의 창의적인 역량을 말살시키고 만다. 우리의 교육 체계는 학습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건 산업화의 산물이다.
피카소가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어린이들은 예술가로 태어난다. 하지만 자라면서 그 예술성을 유지시키는 것이 문제다.” 우리의 창의력은 자라면서 계발되기는커녕 있던 창의력도 없어진다. 교육이 창의력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아이들이 미래에 대처할 수 있는 교육을 하려면 창의성을 중요시하는 전인교육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아이 스스로 미래를 멋지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아무리 좋은 학교, 훌륭한 교사도 내 자녀의 잘못된 교육을 책임지지 못한다.

교육에 대한 마지막 책임을 질 사람은 부모 말고 없다. 또 당연히 그래야 하기에 학교라는 울타리에 내 아이를 교육시킬 최소한의 가치가 남아 있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2014년 9월 <SBS스페셜> ‘부모vs학부모’.
사회는 너무도 간단히 ‘자살했다’ 결론짓는다. ... 사회적 폭력, 그 폭력에 의해 아이들이 희생자가 된 타살이다. ...
후진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잘못된 시스템에서 버티기 위해 가쁜 숨 몰아쉬던 아이들이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어른들이 후진데 아이들이 폼 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정부부처가 다루고, 전문가가 고민하는 교육 문제의 대부분은 실질적인 ‘교육’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현실적인 ‘입시’에 대한 논의다.

학교 교육의 최종 수혜자 기업은 이 잘못된 시스템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학교는 가르치고 싶은 것만 가르치면서 그것이 진실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아이들의 ‘교육’을 관정하는 부처 관계자들은 홈스쿨링은 법적으로 명기돼 있지 않아 불법이라 한다. 초중등교육은 의무교육인데, 이외의 교육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명시해놓은 게 없어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불법이라는 것이다. 법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불법’의 의미가 법으로 정해진 사항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 테고, 그렇게 규제나 규정에서 정해놓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어겼을 때를 불법이라 하는 것 아닐까? 할 수 있는 것만 규정해놓은 법 덕분에 그 어떤 제도적 울타리 없이 허허 발판에 서 있었던 홈스쿨러였다. 홈스쿨러가 증가하는 지난 십 수 년 동안 홈스쿨을 제도화해서 법령 안에서 그들을 포용하고 관리하려는 노력에는 그 누구도 관심조차 주지 않았으면서 법적으로 명기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홈스쿨을 불법이라 단정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다양한 사회적 관계 맺음에 있어서 사람들은 대부분 상대가 착하기를 바란다. ‘착하다’는 것이 뭘까?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아야 하고 잘 길들어져 있어야 한다. 즉 기존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적자생존의 법칙에 순응하며 세상에 자기를 억지로 끼워 맞추기 위해 ‘사회성’이라 이름 붙인 길들여짐을 배우고 있다. 이미 그런 세상에 익숙해진 어른들은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다. 개중에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있다. 학교는 그런 아이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기존 질서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간단하고 단순하게 부적응자라고 낙인찍어 학교 밖으로 자꾸만 몰아낸다.

학교 안에 있어야 기를 수 있다고 믿어지는 그 ‘사회성’은 어떤 모습일까?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눈치 보지 않고 자신 있게 드러낼 수 있을까? 부정과 부패, 비리가 얽혀 있는 ‘패거리 문화’에서 당당히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까?

아이들은 가르치는 것만 배우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들의 타고난 재능인,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나 배우고자 하는 욕구를 밟아 뭉개는 잘못을 부모와 학교가 저지르지만 않으면 된다. ... 그냥 지켜보며 기다리기만 해도 아이들은 신기하게 자신이 관심 잇는 것을 너무 잘 찾아낸다. 아쉽다면 가끔 아이 손잡고 나들이 삼아 전시관이나 공연장을 찾아가 함께 느끼고 즐기면 그만이다.

아이를 믿지 못하는 것은 그만한 노력을 같이 해보지 않아서다.

‘학습자 스스로가 학습의 참여 여부에서부터 목표 설정 및 교육 프로그램의 선정과 교육평가에 이르기까지 교육의 전 과정을 자발적 의사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하여 행하게 되는 학습 형태. 자기주도학습은 특히 사회교육이나 성인학습의 특징적 방법으로 많이 활용된다. 그 이유는 학교 교육의 경우는 통상적으로 정형적 교육(formal education)의 성격상 표준화된 교육과정에 의해, 교사의 주도하에, 타율적인 교육이 실시되나 이와 달리 사회교육에서는 상대적으로 학습자에 의한 자율적 교육의 선택 폭이 넓은 비정형적이고 자율적이며 이질적이고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교육의 주 대상이 되는 성인 학습자는 아동 및 청소년 학습자와는 달리 자아개념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성숙하게 되므로 자기주도학습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이러한 자율적 학습이 보다 효과적인 교육방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주도학습에서 학습자는 단순히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학습 풍토하에서 수동적으로 학습에 임하는 객체가 아니다.’ - 네이버 지식백과, ‘교육학용어사전’
읽으면서 맘에 걸리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학교에 속한 아이들을 위한 학습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를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자동차에 비교해보자. 시속 100마일로 달리는 차는 첨단기업이다. 가장 속도가 빠르다. 비정부기구(NGO)는 90마일의 속도로 달린다. 요즘 그 수가 급증했다. 하지만 같은 도로에서도 느린 차들이 있다. 규제당국은 25마일이다.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다. 공공교육 시스템은 10마일 정도가 될지 모르겠다. 시속 3마일로 달리는 차도 있다. 정부와 관료주의다. - <부의 미래> 앨빈토플러

스스로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찾아내고 선별해서 자기에게 필요한 정조로 재가공하는 힘을 길러줄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학교는 아이들이 능동적을 지식을 찾아갈 수 있도록 제대로 된 교육과 피드백을 주어야 한다. 이런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자기주도학습’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내 아이가 학교에 속해 있는 지금, 이것을 학교로부터 기대할 수 없다면 가정에서라도 지도해주어야 한다. 허울뿐인 ‘자기주도학습’에 속지 말고 진정한 의미의 자기주도학습을 위해 너무 바쁜 하루를 보내야 하는 아이들에게 능동적 지식을 찾을 시간을 돌려주는 것을 우선으로 하면 어떨까.
우리 세대가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제 3의 물결’ 속에서 허우적거렸다면 우리 아이들이 사는 세계는 ‘제 4의 물결’의 시대가 될 것이다. 어쩌면 이미 접어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도무지 변화의 속도를 쫓아갈 능력도 의지도 없는 곳이 ‘학교’다. 교재 연구도 지도 방법도 19세기에 머물러 있는 ‘교실’에서 그나마 변화를 위해 애쓰지만 보이지 않는 벽에 부닥치며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20세기 ‘교사’들이 원래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태어나 그 속도가 낯설지 않은 21세기 ‘학생들’을 상대하는 곳이 학교다. 세상의 속도에도 아이들의 속도에도 맞추지 못하니 제자리걸음도 나아가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곳이 학교다. 그 학교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정부와 관료주의까지 더하면 그 안에서는 답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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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기독교와 불교에 밀리지 않는 교세를 자랑하는 대학교에 귀의한 가정들이 오늘도 입시를 향해 미친 듯이 내달리고 있는데 세 아들을 데리고 홈스쿨링이라니... 제 아이들은 어떤 미래를 살게 될까요? 사실 저도 궁금합니다. 8-9

우리 부부는 자녀교육 책을 읽고, 전문가의 수업에도 참여했어요. 자녀교육에 대해 배우러 다니면서 돈도 적지 않게 썼습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걸 깨달았어요. 정작 공부가 필요한 건 아들이 아니라 아빠였다는 사실을.  19

누군가는 한국의 교육 환경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19세기 학교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 학생들을 재우고 있다.”
한국을 수차례 방문했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한국 교육을 통렬하게 비판했지요.
“한국의 학생들은 하루 15시간 동안 학교와 학원에서 미래에 필요하지도 않은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54

건축가 유현준 씨는 우리가 ‘12년간 교도소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학교를 두고 한 말이죠. 건축의 관점에서 보면 학교와 교도소의 설계 원칙이 같답니다. 수감자(학생)를 고립시키고, 교도관(교사)이 손쉽게 수감자를 감시하도록 건물을 설계한답니다.   57

어쩌다 학교는 교도소처럼 학생들을 통제하는 기관이 된 걸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 잠시 <호모 데우스>의 작가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의 주장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역사 지식은, 우리의 현실이 필연의 겨로가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준다고. 우리는 종종 ‘현실이 원래 그런 거지. 어쩌겠어’라면서 비판 없이 현실에 순응하지요. 그러나 역사를 공부하면, 과거의 우연과 사건들이 누적되어 현실을 만든다는 걸 알게 됩니다.  59

공교육의 역사는 고작 200년이 조금 넘습니다. 1794년 프로이센이 세계 최초로 학교를 국가의 감독 아래 두는 공교육법을 제정했지요. 18세기 유럽 각국은 경쟁적으로 산업혁명을 시도하고 있었어요. 프로이센은 공업선진국 영국을 따라잡기 위해 과감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공교육을 통해 국민수준을 끌어올려 산업현장에서 필요한 노동자를 양산하기로 계획한 겁니다. 간단히 말해서 프로이센 공교육의 목표는 순종적인 공장노동자를 양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산업화 후발국가 일본, 한국 등이 프로이센의 뒤를 따랐지요. 학교가 양산한 순종적인 공장노동자들은 아시아 경제의 고속성장에 확실하게 일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암기위주 교유그 선다형 시험의 입시 전통이 자리를 잡았고요.
냉정하게 사실을 봅시다. 공교육의 목적은 뭘까요? 사회 유지와 발전에 필요한 시민을 양성하는 겁니다. 더 노골적을 ㅗ말하자면, 충성스러운 군인과 성실한 납세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죠.  60

“교육이란 결국 사실의 학습이 아니라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는 훈련이다.”
누가 말했을까요? 아인슈타인입니다.  66

우리 인정할 건 인정합시다. 우리 아버지들은 아이들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이지요. 이걸 인정해야 변화가 시작됩니다.
‘시간과 돈의 씀씀이를 볼 때 나는 정말 아이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나?’  103-104

진짜 꿈과 가짜 꿈을 구분하는 방법이요. 진짜 꿈을 꾸는 사람은 희생을 불사합니다. 반면, 가짜 꿈을 꾸는 사람은 희생을 하느니 꿈을 버리지요.  127

안타깝게도 한국의 교육은 방향을 못 정한 아이들에게 무조건 속도부터 내라고 재촉합니다. 일단 학생들은 모둔 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고 공부합니다. 나중에 뭐가 될지 모르니 일단은 모든 걸 준비하자는 심산인데, 그렇게 하면 나중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149

우리 모두 어떤 분야에서든 기본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 하지만 조급한 학부모들은 천천히 기본을 다지는 방식을 싫어합니다. 당장 성적이 나와야 하니까 학원과 과외를 선호하지요. 단지 소수의 용감한 사람들만이 느리더라도 확실하게 기본을 다집니다.  ...
손웅정(축구선수 손흥민 아버지) 씨는 교육을 대나무에 비유하더군요. 대나무는 땅 위로 솟아오르기 전에 5년간 조용히 땅속에서 뿌리를 내린답니다. 그리고 일단 뿌리가 확실히 자리를 잡으면 땅위로 줄기가 솟아나는데 하루에 50센티미터씩 자란다고 하네요.  164-165

유대인들은 오랜 기간 박해를 받으면서 이런 지혜를 얻었습니다. ‘부동산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유대인이 사회에서 배척당하면 땅이나 집은 쉽사리 빼앗길 수 있다. 그러니 박해를 피해 도망갈때 가져갈 수 있는 재산을 만들어라.’
유대인들이 교육에 열을 올리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머릿속 지식은 빼앗기지 않으니까요. 더불어 많은 유대인들은 위기의 순간에 쉽게 가져갈 수 있는 귀금속 모으는 걸 좋아했습니다. 다이아몬드 세공업에도 많이 달려들었고요. 지금까지도 전 세계 다이아몬드 거래의 큰손은 대부분 유대인들입니다.
“부다르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 위에  세워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세 아들이 남을 짓밟고 돈을 버는 사랆이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부자들의 낙원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소모품 또한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유대인의 자녀교육 지침 하나를 가슴에 꼭 담고 살아갑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직업에 필요한 기술을 가르치지 않으면 결국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240-241

자본주의가 청소년들의 각성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철없는 소비자를 제일 좋아합니다. .. 마구잡이 소비는 기업의 성장과 발전의 동력이거든요. ... 자본주의는 남이 준 돈을 받아 소비생활을 누리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242

‘청소년’이라는 말 자체가 산업시대 이후에 등장했다는 설도 있어요. 과거에는 남자아이가 10대에 이르면 아버지를 따라 일터에 가서 기술을 배웠고, 여자아이들은 엄마 곁에서 가사 기술을 익혔지요. 그러다가 산업화시대에 공교육이 생기고, 학교는 아이들을 몇 년간 붙잡아 두고 일터로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애매한 아이들을 부를 새로운 단어가 필요했던 거지요. ‘어린이’나 ‘어른’이 순우리말인 것과 달리 청소년(靑少年)이 한자어인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나중에 만들어진 단어라는 거지요. 10대를 뜻하는 영어 Teenager는 13세에서 19세까지의 나이를 뜻합니다. Thirteen(13)부터Nineteen(19)까지 숫자에 모두 Teen이라는단어가 들어 있다고 해서 1920년대에 비로소 만들어진 말입니다.  243

일등은 주어진 과제를 검증된 방법으로 해내려고 애씁니다. 그러니 일등에게 암기와 연습을 강조하고 독창성은 기대하기 어렵지요. ...
일류는 새로운 과제를 스스로 찾아냅니다. 당연히 검증된 방법이란 게 없으니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지요. 실패는 당연한 과정이고요.  262

경졍작가 세스 고딘(Seth Godin)은그의 책 <린치핀>에서 “우리가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학교와 시스템에 의해 세뇌되기 때문”이라고 단언합니다.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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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아이를 아이답게 키우는 것이 아이를 위한 일임을 우리는 잘 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아이를 아이답게 키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늘 보고, 듣고, 느낀다. 두렵다.  5



안타깝지만 지금의 학교는 아이를 관리하는 곳이지, 결코 아이의 삶을 존중하고 아이가 최선의 길을 가도록 도움을 주는 곳이 아니다.  22

고등학교까지만 우수한 나라. 문제 풀이에 능해 국제수학올림피아드(IMO)까지는 잘하지만 수학자는 없는 나라. 이런 상황을 모두 다 비판하지만 정작 자신의 아이는 똑같이 그 시스템 안에서 돌리며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나라. 얼마나 가슴 아픈 현실인가.  26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핵심은 사회 인식이다. 즉,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건 사회에 대한 옳고 그름의 인식이다. 그 인식은 다른 누군가의 의견이 아니라 스스로의 경험에서 나온 인식이어야 한다. ...
사회인식이란 남의 경험이 아닌 자신의 경험을 토앻 우리 사는 사회가 어떠한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
요즘 보면 각자 자기주장이 강한 듯 보인다. 사회인식이 확고한 듯 보인다. 하지만 찬찬히 대화를 나눠보면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처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더 구체적이고 광범위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하면 말문이 막히곤 한다. 인식이 정립된 상태에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부실한 인식을 통해 말을 하기 때문이다. ... 이런 잘못된 습관이 만연해 있으니 사회를 보는 인식이 약화되는 것이다.  27-28

사회가 그래서 나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내 아이만 뒤처지게 만들 수 없다고. 결국 모두 앉아서 영화를 보면 편한데, 모두 서서 영화를 보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사회를 바꾸기는 매우 힘들다.
그럼 방법은 없는가? 방법은 스스로 변화하는 것뿐이다. 먼저 내가 올바른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올바른 인식을 내 아이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때로는 용기가 필요한 때가 있다. 그때 용기를 가지고 부딪칠 수 있어야 한다.  28-29

이제 인식을 전환하자. 학교는 의무가 아닌 선택이다.   46

홈스쿨링에 관심 있는 부모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제가 할 수 있을까요?”다. ...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아이를 키울 때 정밀기계를 다루듯이 키우지 않는다. 또한 아이를 키우는 데 어떤 조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더불어 늦는 것은 없다. 물론 빨리 실행하면 좋은 것들이 많지만 늦었다고해서 아이를 잘못 키우는 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걱정을 덜어버리는 일이 우선이다.
아이는 이성과 감정을 가진 인간이다. 혹여 우리가 잘못된 교육방식으로 가르치더라도 시간이 지나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 충분히 좋은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 바로 아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다.  46-47

‘좋은 아이’란 부모가 원하는 모습대로 자란 아이를 의미하진 않는다. 아이가 가진 모습 그대로 올바로 자란 아이를 의미한다. 좋은 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가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 부모가 편견에 사로잡히고 열등감에 빠져 있다면, 아이가 편견과 열등감 없이 자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
어떤 부모가 좋은 부모일까? 아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기본이다. 기본에 한 가지를 더해야 한다. 바로 아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눈이다.  49-50

부모가 노력한다면, 아이를 위해서 기꺼이 스스로 배우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훌륭한 교사가 될 수 있다.  62

많은 아이들은 딱히 재능이 보이지 않는다.  ...
기다려야 한다. 당장 찾지 못한다고 해서 인생이 잘못되는 게 아니다. 대기만성, 아직 보이지 않지만 시간을 가지고 기다리다 보면 재능도, 꿈도 찾게 되는 시기가 온다. 섣불리 재능이라고 해서 무언가를 시작했다가 아이만 상처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다면 기다리자. 아이의 재능 없음을 인정하자.  82

부모도 경험을 통해 안다. 하지만 세상살이의 고단함 때문인지 완주보다는 메달을 원한다. .. 부모는 각성해야 한다. ... 분명 메달보다 소중한 것은 완주이다.  101

어떻게 해야 아이를 온전히 키울 수 있을까? 아이에게 인생의 훈련은 시키되 가르쳐서는 안 된다. 즉, 아이가 먼저 지금 시기에 필요한 것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153

홈스쿨링은 가치에 따른 단점이 분명 존재한다. ... 만약에 아이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간다는 생각이 들면 어덯게 해야 할까? 그때는 지체없이 일단 중단해야 한다. 그것이 홈스쿨링이든 학교든 마찬가지이다. 아이가 거부하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강요하면 깨끗한 도화지에 지울 수 없는 진한 선을 긋는 것이다. 그 선은 아이가 평생 지고 가야 하는 아픔이 된다.  277

번아웃증후군은 의욕적으로 일하다가 목표를 이루거나 이루지 못하거나, 일을 끝내거나 간혹 일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며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번아웃증후군은 새악보다 우리 주위에 가까이 있다. 누군가는 슬럼프 정도로 생각하고 금방 이겨내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번아웃증후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많은 시간을 무기력하게 보내는 경우도 있다.  279

홈스쿨링을 하다가 조금씩 긍정적인 성과가 보이면 더 나은 결과를 내고자 무리하고 싶을 때가 여러번 온다. 그때 마라톤을 뛰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오버페이스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마라톤이 끝났을 때 어떤 결과가 나든 다시 마라톤을 뛸 수 있다.  281

어떻게 하면 .. 번아웃증후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일단 쉬어야 한다. 어느 누구의 간섭도, 눈치도 받지 않고 편하게 쉬어야 한다. 그래야 회복할 수 있다.  ...
잘 쉬었다면 그것으로 끝나지 말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 새롭게 열정이 생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그동안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며 다양하게 경험해야 한다. 그를 통해 새롭게 열정이 생기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찾았다면 이번에는 천천히 뛰기 시작하면 된다.  282-283

우리 사회는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다. 사람들은 예전보다 사회 문제에 관심도 많고, 그에 대한 옳고 그름을 논하는 등 사회인식이 강해진것처럼 행동한다. 사실, 사함들이 더 똑똑해진 듯 보이지만 그것이 ㅣ경험을 통해서 얻은 똑똑함은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생각을 자기 생각이라고 믿는다. 그러다 보니 경험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키우려고 하지 않은채, 댓글만 쫓아다니는 상황이 벌어진다.  290

경험을 통한 사회인식. 그것만이 살길이다. 뼈저리는 아픔 없이 얻은 사회인식은 분명 내 것이 아니다. 내 생각이 아닌데 내 생각인 줄 알고 살다 보면 괴리감이 발생하고 늘 어딘가 모르게 찝찝함을 느낀다. 내 생각대로, 내 경험에 근거한 생각대로 살아야 깨달음이 올 때 바꿀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남의 생각대로 살면 새로운 상황에 부딪쳤을 때 그저 기존의 생각은 버리고, 또다시 새로운 생각을 줍는다. 즉, 문제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생각을 줍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한마디로 생각 없는 사람이 된다. 모든 일에 주위의 눈치를 살피는 사람이 된다.
내 경험에 근거한 사회인식이라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었을 때 누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깨달음이 있으며 때로는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때로는 눈에 불을 켜고 싸울 수 있다.  291

인생에 늦는 건 없다. 짧은 순간이라도 아이가 자신의 인생을 살았다면 행복할 것이다.  294

노련한 부모는 아이에게 어떻게 도움을 주어야 할 지 알고 있었다. ... 수없이 많은 삶의 경험을 자신의것으로 녹여낸 부모가 노련한 부모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쓸데없이 아이와 함께 마라톤을 뛰고 있는 부모는 노련한 부모가 아니다.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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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네 남은 인생의 첫날이다.
하나의 꿈이 천가지 현실보다 더 힘이 세다.
모든 꿈은 꿈꾸는 자를 필요로 한다.

다른 사람을 믿는 내신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늘 방어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타인을 사랑하거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늘 남에게 잘못을 떠넘기곤 했다. 그러한 삶에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스스로를 믿는 사람은 타인도 믿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배신을 당하더라도-그런 때는 언제든 오기 마련이고, 그저 살다보면 겪게 되는 일일 뿐이다- 스스로를 지켜낼 힘이 있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건 그것이다.

네가 위대한 침묵에 전념한다면, 그에 대해 알게 되리니. 그 침묵을 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너의 운명이기 때문이니. 허나 네가 그 일을 할 때에, ‘신비’를 설명하려 들지 말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경외하게 하라.
빛의 길을 걷는 순례자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사막을 걷는 법을 익히라. 너의 마음과 이야기하라. 말이란 그저 우연한 것일 뿐이니. 말은 타인과 소통하는 데 필요하나. 말의 의미와 설명 때문에 길을 잃지는 말라. 사람들은 듣고 싶은 말만 들을 뿐이다. 절대 누구도 설득하려 들지 말고. 두려움 없이 너의 운명을 따르라. 두려움에 휩싸였대도 꾸준히 너의 길을 가라.
하늘에 닿아 나에게로 이르고 싶은가? 그렇다면 엄격한 규율과 자비라는 두 날개로 나는 법을 배우라.
사원과 교회와 모스크들은 바깥이 두려운 자들로 가득차 있으며 그들은 죽어버린 말에 세뇌되고 있다. 나의 사원은 곧 세상이니. 나의 사원을 벗어나지 말라. 힘이 들더라도. 남들이 너를 비웃더라도. 그곳에 머물라.  
다른 이들과 이야기하되 그들을 설득하려 들지 말라. 다른 이들이 너의 말을 신봉하고 너의 제자가 되기를 절대 허락하지 말라 그들이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그들이 들어야 할 유일한 이야기를 더는 믿지 않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함께 나아가라. 함께 마시고 기뻐하라. 허나 너의가 서로에게 늘 의지하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하라. 넘어짐도 여행의 일부이며, 각자 홀로 서는 법을 익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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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친애하는 3천만 자매 형제여!

우리를 싸고 움직이는 국내외 정세는 위기에 임하였다.

제 2차 대전에 있어서 동맹국은 민주와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천만의 생령을 희생하여 최후의 승리를 전취하였다. 그러나 그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 세계는 다시 두 개로 갈리어졌다. 이로 인하여 제 3차 전쟁은 온양되고 있다. 보라!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남편을 다시 만난 아내는,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아들을 다시 만난 어머니는, 그 남편과 아들을 또다시 전장으로 보내지 아니하면 아니 될 위험이 닥쳐오고 있지 아니한가. 인류의 양심을 가진 자라면 누가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바랄 것이랴! 과거에 있어서 전쟁을 애호한 자는 파시스트 강도군 밖에 없었다. 지금에 있어서도 전쟁이 폭발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자는 파시스트 강도 일본 뿐 일 것이다. 그것은 그놈들이 전쟁만 나면 저희들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현재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남북에서 외력에 아부하는 자만은 흑왈 남정, 흑왈 북벌 하면서 막연하게 전쟁을 희망하고 있지마는 실지에 있어서는 아직 그 현실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촉발된다 하여도 그 결과는 세계의 평화를 파괴하는 동시에 동족의 피를 흘려서 왜적을 살릴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니 될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새 상전들의 투지를 북돋울 것이요, 옛상전의 귀염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이 난다 할지라도 저희들의 자질 만은 징병도 징용도 면제될 것으로 믿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왜정하에서도 그들에게는 그러한 은전이 있었던 까닭이다. 한국은 일본과 수십 년 동안 계속하여 혈투하였다. 그러므로 일본과 전쟁하는 동맹국이 승리할때에 우리도 자유롭고 행복스럽게 날을 보낼줄 알았다.

그러나 왜인은 도리어 환소 중에 유쾌히 날을 보내고 있으되 우리 한인은 공포 중에서 죄인과 같은 날을 보내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말이라면 우리를 배은 망덕하는 자라고 힐책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 신문 기자 리처드 씨의 입장에서 나온 데야 어찌 공정한 말이라 아니 하겠느냐. 우리가 기다리던 해방은 우리 국토를 양분하였으며 앞으로는 그것을 영원히 양국의 영토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의 해방이란 사전상에 새 해석을 올리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유엔은 이러한 불합리한 것을 시정하여 써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며, 전쟁의 위기를 방지하여 써 세계의 평화를 건설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다. 그러므로 유엔은 한국에 대하여도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임시 위원단을 파견하였다. 그 위원단은 신탁 없고 내정 간섭 없는 조건하에 그들의 공평한 감시로써 우리들의 자유로운 선거에 의하여 우리에게 남북 통일의 완전 자주 독립을 줄것과 미·소 양군을 철퇴시킬 것을 약속하였다.

이제 불행히 소련이 보이콧으로써 그 위원단의 사무 진행에 방해가 불무하나 그 위원단은 유엔의 위신을 가강하여 써 세계 평화 수립을 순리하게 진전시키기 위하여 또는 그 위원 제공들의 혁혁한 없적을 한국 독립 운동 사상에 남김으로써 한인은 물론 일체 약소 민족 간에 있어서 영원한 은의를 맺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만일 자기네의 노력이 그 목적을 관철하기에 부족할 때에는 유엔 전체의 역량을 발동하여서라도 기어이 성공할 것은 삼척동자라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이 서광이 비치고 잇는 것이다. 미군 주둔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 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 몰각한 도배들은 국가 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이 없이 통일 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음으로 양으로 유언비어를 조출하여 써 단선 단정의 노선으로 민중을 선동하여 유엔 위원단을 미혹하게 하기에 전심력을 경주하고 있다. 미군정의 난익하에서 육성된 그들은 경찰을 종용하여서 선거를 독점하도록 배치하고 인민의 자유를 유린하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태연스럽게 현실을 투철히 인식하고 장래를 명찰하는 선각자로써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각자는 매국매독의 인진회식 선각자일 것이다.

왜적이 한국을 합병하던 당시의 국제 정세는 합병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애국 지사들이 생명을 도하여 반항하였지만, 합병은 필경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현실을 파악한 일진회는 도쿄까지 가서 합병을 청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자들은 영원히 매국적이 되고 선각자가 되지 못한 것이다. 설령 유엔 위원 단이 금일에 단정을 꿈꾸는 그들의 원대로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한다면 이로써 한국의 원정은 다시 호소할 곳이 없을 것이며, 유엔 위원단 제공을 한인과 영원히 불해의 원을 뱆을 것이요, 한국 분할을 영원히 공고하게 만든 새 일회는 자손 만대의 죄인이 될 것이다.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니,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조국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민족을 사갱에 넣는 극악 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이와 같은 위기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최고 유일의 이념을 재검토하여 국내외에 인식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가 유엔 위원단에 제출한 의견서는 이 필요에서 작성된 것이다. 우리는 첫째로 자주 독립의 통일 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이것을 완성하기 위하여 먼저 남북 정치범을 동시 석방하며, 미소 양군을 철퇴시키며, 남북 지도자 회의 를 소집할 것이니 이 철과 같은 원칙은 우리의 목적을 관철할 때까지 변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불변의 원칙으로서 순식 만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순응 혹 극복하여야 할 것이다. 독립이 원칙인 이상 도립이 희망 없다고 자치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을 왜정하에서 충분히 인식한 것과 같이 우리는 통일 정부가 가망 없다고 단독 정부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단독 정부를 중앙 정부하고 명명하여 위안을 받으려 하는 것은 군정청을 남조선 과도 정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사사 망념은 해인 해기할뿐이니, 통일 정부 수립만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3천만 자매 형제여!

우리가 자주 독립의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면 먼저 국제의 동정을 쟁취하여야 할 것이요, 이것을 쟁취하려면 전민족의 공고한 단결로써 그들에게 정당한 인식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일절 내부 투쟁은 정지하자! 소불인이면 난대모라 하였으니 우리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용감하게 참아 보자.

3천만 자매 형제여!

한국이 있고야 한국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자주 독립적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이때에 있어서 어찌 개인이나 자기의 집단을 사리 사욕을 탐하여 국가 민족의 백년 재계를 그르칠 자가 있으랴. 우리는 과거를 한번 잊어버려 보자.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의심하지 말며 타매하지 말고 피차에 진지한 애국심에 호소해 보자!

암살과 파괴와 파공은 외군의 철퇴를 지연시키며, 조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조출할 것 뿐이다. 악착한 투쟁을 중지하고 관대한 온정으로 임해 보자!

마음 속에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에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내가 불초 하나 일생을 독립 운동에 희생하였다. 나의 연령이 이제 70 유 3인바 나에게 남은 것은 금일 금일하는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재화를 탐내며 명예를 탐낼 것이랴! 더구나 외국 군정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랴! 내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주지하는 것도, 한독당을 주지하는 것도 일체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국가 민족의 이익을 위해서는 일신이나 일당의 이익에 구애되지 아니 할 것이요, 오직 전민족의 단결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3천만 동포와 공동 분투할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서는 누가 나를 모욕하였다 하여 염두에 두지 아니할 것이다. 나는 이번에 마하트마 간디에게서도 배운바가 있다. 그는 자기를 저격한 흉한을 용서할 것을 운명하는 그 순간에 있어서도 잊지 아니하고 손을 자기 이마에 대었다 한다. 내가 사형 언도를 당해 본 일도 있고 저격을 당해 본일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 있어서는 나의 원수를 용서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것을 부끄러워한다.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목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 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38선을 싸고 도는 원귀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러운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3천만 동포 자매 형제여!

붓이 이에 이르매 가슴이 억색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어 말을 더 이루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번 더 심사하라.

대한 민국 30년 (1948)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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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선생님은 불합리한 사회에 맞서 싸우려면 두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먼저 이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 사회가 원하는 실력이 없으면 이 사회에 맞서 발언하고 행동할 기회 자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유념해야 할 한가지는 사회가 인정한 본인의 능력이 당연히 보잘것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 ‘보잘것없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홍세화 선생님은 이것이 쉽지 않은 싸움이라고 말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갖추면 안주할 수 있고, 안주하려는 자신을 합리화하다 보면 사회에 대한 시각 또한 비판적이기보다 긍정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초심을 망각한 재 그저 현실에 순응하며 개인의 안위만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지난한 싸움을 버텨낼 수 있단 말인가? 홍 선생님의 충고를 계속 이어진다.
‘그래서 지금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物神)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성의 항체를 기르라는 것이다. 그대의 탓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의 인간성은 너무 오염되었다. 물신은 밀물처럼 일상적으로 그대를 압박해올 것이며, 그대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물질의 크기로 비교당할 것이다. 그것에 늠름하게 맞설 수 있으려면 일상적 성찰이 담보한 탄탄한 가치관이 요구된다. 그리고 자기 성숙의 모색을 게을리하지 말라. 자아실현을 위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다. 그리고 성찰 이성의 성숙 단계가 낮은 사회에서 그대는 자칫 의식이 깨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에 앞서 오만함으로 무장하기 쉽다. 만약 그대가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면 죽는 순간까지 자기 성숙의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모두 쉬운 길을 택한다. 그러나 삶은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그 소중한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자유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물신의 품에 안주할 것인가. 다시금 강조하건대, 그것은 일상적으로 그대를 유혹하는 물신에 맞설 수 있는 가치관을 형성하는가와 자기 성숙을 위해 끝없이 긴장하는 가에 달려 있다.’ - <생각의 좌표>중에서  17-18

“조급해하지 말아야 돼. 초조함은 남과의 비교에서 비롯되는 거야. 남은 중요하지 않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얼마나 다른지, 또 내일은 얼마나 발전할 것인지 나 자신을 비교하고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지.”
“실패하는 것이 중요해.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아주 멋지게 실패하는 거야. 더 멋들어지게 실패하기 위해서는 더 많이 부딪쳐보아야겠지?”(홍세화와 저자의 만남에서)  22

종종 사람들이 언스쿨링에 대해 물어볼 때 부모님은 이런 답변을 내놓곤 한다.
‘언스쿨링은 배움의 주체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아이들 자신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이들은 각자 다양한 잠재력과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아이들 자신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부모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부모들은 끊임없이 호기심을 불어넣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면서 아이가 스스로 터득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돕기만 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무언가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나타낸다면, 부모는 아이가 그쪽으로 더 가까이, 더 깊이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거죠. 기회를 열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기에 푹 빠져들어 많은 것들을 즐겁게 배우게 된답니다. 학습의 주체가 되어가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언스쿨링에서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진학이 최종적인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단순한 ‘진학’보다는 평생 무엇을, 왜, 어떻게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인생의 소명을 찾아나가는 ‘진로’가 더 더욱 중요한 것이지요. 부모는 아이가 본인의 진로를 탐색하는 과정을 조용히 옆에서 돕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진학이 필요하다면 차후에 대학을 선택해서 공부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대학은 필수 조건이 아니라 선택 사항일 뿐입니다.’
언스쿨링은 기존 학교로부터 단호하게 돌아선다. 배움은 교실에서만, 교과서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언스쿨링은 온 세상이 학교요, 모든 사람이 선생님이라고 말한다. 어디에 가든,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보든, 거기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그렇게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관계와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진정한 배움이라는 것이다.  52-53

사진작가 배병우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면서는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이 여행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예술은 절대로 교육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 개의 길을 여행하고 만 권의 책을 읽으면 예술가가 될 수 있습니다.”  155-156

이제는 공부의 정의를 바꿔야 한다. 1등이 되는 법이 아닌 부끄러움을 아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인간으로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 정도(正道)를 익혀야 한다.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성찰하는 법을 배우고, 주입식 교육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공부할 권리도 마땅히 누려야 한다. 그리하여 죽은 공부가 아닌 살아 있는 공부, 복종하는 공부가 아닌 스스로 길을 찾아나가는 공부가 이루어져야 한다.  255

사람들의 인식이 변해야 제도도 바뀔 것이다. 그러나 어디 사람들이 쉽게 생각을 바꾸겠는가. 시험으로 배움을 측량하고, 성적으로 공부를 평가하려는 행위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럼에도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는 무엇인지, 내 삶에 필요한 공부는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평생 나만의 공부를 지속해나갈 수 있다면, 공부를 통해 배움을 얻을 수 있다면, 배움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다면, 배움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다면, 마침내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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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그것은 하나가 되었다가 또다시 분리되는 행위다. 가끔 두렵기도 하다. 글이라는 자신의 공간을 내놓는 일은 자신의 성기를 내놓는 것보다 더 폭력적이다. .. 단어와 문장을 견고하게, 꿈쩍이지 않는 문단을 만드는 것.

나는 삶이 글의 ‘소재’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글을 위한 ‘미지의 기획’을 원한다.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라는 이 생각은 형식조차도 실제 내 삶에 의해 부여된 텍스트를 의미한다. 나는 우리가 쓰고 있는 이 글을 절대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삶으로부터 나왔다. 다수의 조각들로 이뤄진-그것 자체도 아직은 알 수 없는 M의 글의 조각들에 의해 부서지게 되겠지만- 사진으로 쓴 글 역시 마찬가지로 다른 무엇보다 이 현실을 담은 ‘최소한의 이야기를 만드는’ 기회를 내게 준다.

뇌로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어쩌면 진짜 쾌락을 모를 수도 있다.

우리는 ‘순간’에 머무른다.

M의책을 펼쳤다가, 젊은 여자가 어린아이와 나이든 여자와 함께 있는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 젊은 여자가 그의 전 부인이란 것을 깨닫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관계 초반에 M은 그녀에 대해 “몸은 예쁜데 얼굴은 그저 그렇다”라고 말했었다. 이 사진들 앞에서 내 첫 번째 반응은 승리감이었다. 그녀의 코, 턱, 디테일한 부분들을 살피며 말했다. “그런데 이 여자 못생겼잖아!” 그리고 그 여자를 완벽한 이미지로 만들어내서 스스로 열등감을 느낀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 뒤로는 슬픔이 나를 사로잡았다. 내게 최악은 이런 못생긴 여자를 M이 사랑했다는 사실이었다. 내게는 그녀를 향한 그의 사랑이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나는 차라리 그녀가 아름다웠으면 했다. 그 여자를 향한 그의 애착이 평범하면서도 객관적인, 외모라는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감정의 언어를 ‘믿으면서’ 사용할 줄을 모른다. 시도를 해봤지만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아는 것은 사물의 언어, 물질적인 흔적의 언어, 가시적인 언어다. (그 언어들을 단어로, 추상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을 멈추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사진을 바라보고 묘사하는 것이 그의 사랑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이 아니라, 명백한 것들 앞에서, 사진을 구성하는 물질적인 증거 앞에서, 내가 절대 답을 찾을 수 없는 ‘그는 나를 사랑할까?’’라는 질문을 피하는 방법인 것 같다.


-옮긴이의 말
생(生)을 위해 싸워나가는 사람(아니 에르노), 연인이 치러내는 전투를 통해 죽음을 배우는 사람(마크 마리), 우리는 그들이 무음으로 주고받은 대화를, 비밀스러운 몸짓들을, 어느 날 아침, 행위가 지나가고 폐허처럼 남겨진 것들을 담은 사진 속에서 알아차린다. 이곳에서 지난밤의 사랑과 욕망은 중요치 않다. 결국에는 사라지고 말 모든 것들을 최선을 다해 붙잡는 그들의 ‘시도’만이 의미를 갖게 될 뿐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그들의 계획에 동참하고 만다. 육체가 빠져나간 이 에로틱한 공연의 관객으로서, 글로 쓰인 사진을 눈과 손으로 더듬으면서, 살과 뼈가 없이 이뤄지는 에로스를 받아들이면서, 단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시간을,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사진으로, 글로 뛰어넘기를 어느덧 소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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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만한 삶이란 쓰는 삶이다.

- 막힌 글을 끝까지 쓰는 요령
1 로그라인(logline) 써보기
‘로그라인’이란 영화 또는 드라마의 전체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한 글을 뜻한다. 나는 글이 정리되지 않을때면 로그라인을 써본다.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한 줄로 써보는 것이다. 발레 강사 이야기를 글로 옮기기로 마음먹었다면 우선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로그라인을 써보고, 그 중 한 가지를 선택해 글을 수정하거나 다시 작성해보는 게 어떨까.
* 내가 경험한 가장 박력 넘치는 예술 ‘발레’
* 내가 만난 가장 박력 넘치는 여자 ‘발레리나’
* 불혹(선배나이), 발레를 배우기 가장 좋은 나이
이렇게 로그라인을 써보면 발레, 발레리나 강사, 그리고 불혹의 나이로 주제가 확연히 드러나므로 글을 쓰기도 쉬워진다.
2 장르와 분량에 신경 쓰지 말 것
3 막히면 일단 관두기
어쨌든 쓰는 시간을 자주 갖는 게 중요하다. 쓰다가 막히면 다른 이야기를 쓰면 된다. 그렇다고 쓰던 이야기를 완전히 버리라는 게 아니다. 글은 김치 같아서 묻어두고 보관하는 기간에 따라 다른 맛을 낸다.

이야기는 쥐어짜는 게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회사를 퇴사하고 떠난 여행, 큰돈과 긴 시간을 투자한 취미,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도전 등. 다양한 경험과 충분한 투자는 신선한 글감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도움이 될 뿐’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글감은 경험이 많은 사람은 물론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에게도 주어진다. 쓸 만한 이야기는 낯선 곳에 있는 게 아니다. 가깝고 익숙한 곳에서도 발견된다.
‘내 주변에는 글감이 없던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대화 방식부터 바꿔보자. 일상적인 대화일지라도 더 묻고 잘 들어보자. 그러니까 질문과 경청에 신경 써보자는 얘기다.

발견된 이야기를 글로 옮길 때도 인터뷰가 필요하다. 이번에는 나 자신과 하는 질의응답이다.
“이 글감이 내게 인상적인 이유는?”
“이 글로 전달하고픈 나만의 메시지는?”
“내가 전달할 메시징 공감할 사람은?”
자신과의 질문이 필요한 이유는 에세이가 기사, 일기와 다르기 때문이다. 기사ㅏ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반면 에세이는 주관적이다. 쓰는 사람의 감정, 생각, 철학이 묻어난다. 일기와 달리 에세이는 읽히기 위한 글이다. 내 글이 독자를 설득하고 공감시킬 수 있을지 냉정히 평가해봐야 한다.
우린 모두 같은 세상을 사는 것 같지만, 저마다 각각 다른 세상을 품고 살아간다. 익숙한 사람에게도 질문을 던지다 보면 의외의 면을 엿보게 된다.

요약은 글 약이다. 요약을 잘하는 사람이 말도 잘하고 길도 잘 쓴다. .. 요약 글은 퇴고가 많이 필요한 글이기도 하다.

- 따라 하면 시간이 단축되는 요약법
1. ‘기’와 ‘결’을 정하고 쓰기
문장 구성 4단계인 기승전결 중 시작인 ‘기’와 끝인 ‘결’을 미리 정하자. 어떤 이야기로 시작에서 어떤 결론으로 끝날지 결정해놓으면 쓰기가 한결 편해진다. 마치 글 내비게이션과 같다. 출발 지점과 도착 지점을 찍고 운전하면 어떻게든 원하는 장소로 갈 수 있고, 길을 잘못 들어섰으 ㄹ때도 새로운 길이 안내된다. 시작과 끝이 정해진 글은 맥락을 벗어날 확률이 낮다.
2. 참고하지 말고 비교하기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참고하는 건 좋은 습관이다. 신문 기사를 예로 들겠다. 같은 소재라도 길고 상세하게 정리된 기사가 있고, 이를 바탕으로 짧게 정리된 기사도 있다. 두 가지 모두를 읽어보면 요약하는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가장 좋은 건 일단 내가 먼저 쓰고 다른 사람이 같은 주제로 쓴 글을 비교해보는 것이다. 요약한다는 건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다. 쓰는 일을 미루고 남이 쓴 좋은 글만 부러워하면 백지상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3. 내 감정은 넣어둘 것
슬펐다. 아팠다. 불행했다. 기뻤다. 무섭다 등. 요약글에서 자신이 느낀 검정은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 요약글 핵심은 ‘전달’이다. 이야기의 줄거리, 사건의 개요, 주제가 쉽게 전달되도록 써야 한다. 그 글을 읽고 어떻게 느낄지는 독자 몫이다. 장황하게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음에도 독자가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면 대성공이다.

- 잘 읽히지 않는 글의 특징
1. 처음부터 끝까지 멋지게 모호한 글
간혹 좋은 문장에 대해 오해하는 분들이 있다. 꾸며질수록 멋진 문장이라 믿는 것이다. 이는 수식어 과잉, 조사 과잉, 감정 과잉 등으로 이어진다. 무엇이든 과하면 부담스럽다. 특히 처음부터 끝까지 잔뜩 힘을 준 글은 읽기 힘들다.
‘회색빛이 감도는 하늘에서 부슬부슬 비가 쏟아져 내리는 날이면, 텅 빈 내 마음에는 황량한 사막처럼 쓸쓸한 고독감이 밀려와서 처절하고 비참하게 외로워진’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다. 이 문장은 ‘비 오는 날은 좀 외롭다’ 정도로만 써도 의미가 잘 전달된다. 문장에도 힘 조절이 필요하다. 강, 약, 중간, 약, 강, 약~
2.  의식의 흐름대로 써서 이해할 수 없는 글
써보지도 않고 고민만 하는 것보다 일단 의식의 흐름대로라도 쓰는 걸 추천한다. 그러나 그렇게 풀어낸 글을 사람들에게 바로 보여줘서는 안 된다.
글쓰기가 감정 치유에 도움이 되는 이유는 ‘퇴고’에 있다. 퇴고는 단숞히 맞춤법을 확인하고 글자 수를 맞추는 작업이 아니다. 머리와 마음으로 쏟아낸 텍스트를 다듬고 정리하는 일이자 남들도 내 마음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타인에게도 잘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면 자신부터 냉정한 독자가 되어야 한다.
‘주제가 명확한가?’
‘문장이 매끄러운가?’
‘불필요한 문장은 없는가?’
글을 읽고 질문해보자. 독자가 되어 내 글을 읽어봐야 한다. 일기는 내 감정을 기록하는 글이지만 에세이는 내 감정을 전달하는 글이란 사실을 잊지 말자.
3. 맥을 짚을 수가 없는 글
사건, 등장인물, 주제가 중구난방인 경우이다. 쓰다 보면 엉뚱한 길로 빠질 때가 있다. 특히 애정이 가는 부분은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조연 또는 엑스트라일 뿐인데도 마음이 쓰여 과하게 집중하여 묘사한다. 여행기에서 사건과 관련 없는 일행들까지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명하는 식이다. 보통 사건에 대해 가능한 한 자세히 설명해야 독자들이 상황을 더 쉽게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받아들여야 하는 정보가 많을수록 독자는 글을 읽는 속도가 느려지고 이해하기도 어려워진다. 불필요한 인물, 정보, 기억, 감정은 과감하게 가지치기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여행은 세 명이 갔더라도, 이야기에 두 명만 등장한다면 나머지 한 명은 아예 생략하는 편이 글의 몰입도나 완성도에는 훨씬 낫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것처럼, 이야기와 관련 없는 부분은 장황하게 보여주면 맥을 짚을 수 없는 글이 되고 만다.

- 읽기 좋고, 듣기도 편한 글을 쓰는 법
1. 쉬운 단어 위주로 사용한다
몇 번이나 강조하지만 글 속에 어려운 단어는 최대한 줄이자. ‘잘 쓰는 사람’은 어려운 단어를 남발하는 대신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써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자기 글을 읽도록 만든다.
2. 문장은 되도록 짧게 쓴다
문장이 길고 장황하면 쓰는 사람 생각도 엉키고, 읽는 사람 머릿속도 어지럽다. 무조건 짧은 문장이 옳은 건 아니다. 그러나 ‘빨리빨리’를 외쳐대는 한국인 특성과 변화된 읽기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 짧고 간결하게 쓰는 연습이 아직은 글쓰기 기본이다.
전체 분량도 길지 않은게 좋다. 책 <1150년 하버드 글쓰기 비법>에 따르면 에세이는 3분 안에 읽히는, 1,500자 분량이 적당하다. 물론 요즘에는 3분도 집중하기 힘들다며 더 짧은 글을 선호하는 사람도 많아지는 추세다.
3. 뉘앙스가 아닌 메시지를 담는다
단어가 쉽고, 문장이 간결하고, 분량도 가벼운데 다 읽고 나면 아리송해지는 글이 있다. 이런 글을 대부분 작가 자신도 어떤 이야기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쓴 글이다. 주제가 분명하지 않은 글이다.
잠시 직장에서 경험한 비효율적인 회의를 떠올려보자. 회의는 의견을 주고받으며 대안을 찾는 시간이다. 한데 문제만 지적하고 타박하다가 끝나는 회의가 허다하다. 이런 회의에 참석하고 나면 기분이 나빠진다. 잘못을 지적받아서이기도 하지만, 쓸데없는 시간 낭비로 업무가 지체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다 읽었는데 메시지가 없으면 읽은 사람은 허무해진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몇 가지 고전적인 ㄱ르쓰기 구성 방법이 존재한다.
‘’기승전결’ 형식으로 구성하기’
‘’의견제시- 이유와 사례- 의견 강조’ 형식으로 구성하기’
독자의 시간을 뺏는 글이 되지 않으려면 ‘맥락과 메시지가 분명한 글’을 써야 한다. 자신이 쓴글을 다시 읽어봤는데 주제가 잘 보이지 않는 다면, 위와 같은 형태로 구성을 바꿔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 외에도 잘 읽히는 글에는 쉼표를 적절히 사용한다든가 중복되는 말과 단어가 없도록 신경을 썼다거나 문체와 말투의 리듬이 잘 어울리도록 썼다는 특징이 있다.
글의 최종 목표는 글쓴이 내면에 있는 감정과 생각을 독자 내면과 교감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 글맛을 살리는 묘사의 예시
1 집안은 조용했다 - 똑똑. 집 안은 수도꼭지에서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 틀릴 뿐이었다.
2 올 여름은 유난히 덥다 - 일주일 내내 폭염 재난경보 메시지가 왔다. 이런 여름은 처음이다.
3 그의 첫인상은 무서웠다 - 만약 그를 어둡고 한적한 골목길에서 만났덛라면 단단히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사실과 느낌을 덧붙여보자. 진부한 표현보다 상세한 묘사가 나을 때가 있다. 묘사는 독자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줘 공감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 알아두면 도움이 되는 퇴고법
1. 처음부터 스토리표를 만들어두기
그런 글이 있다. 쓸 때는 스스로 감동할 정도로 만족스러웠는데, 나중에 읽을 때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글. 이런 글은 소재나 주제가 적절하지 않았다기보다는 구성이 무너진 경우가 많다.
긴 글을 쓸 때는 ‘스토리표’를 만들 것을 권한다. 광고나 영화를 제잘할 때 쓰는 스토리보드와 비슷하다. 스토리보드란 아이디어나 대본을 영상으로 옮기기 위해 그림으로 정리한 계획표다. 대충 그린 만화책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그림을 그리라는 건 아니다. 엑셀이나 A4용지에 표를 만들어 어떤 순서로 내용을 작성할지 순서대로 정리해보자. 글을 넣어도 좋고 그림이나 낙서도 좋다. 완성된 표를 키보드 옆에 두고 글을 쓰면 쓸데없이 내용이 길어지거나 주제를 벗어나는 걸 막을 수 있다.
2. 문장은 짧게 줄이기
문장을 짧게 쓰라는 얘기를 또 한다. 지겨워하지 마시길. 앞으로 글쓰기 관련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게 된다면 이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듣게 될 테니까.
‘주어+목적어+동사’로 이뤄진 간결한 문장을 쓰면 득이 되는 게 뭘까. 일단 독자가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다. 우린 디지털 시대에 살고, 사람들은 주로 작은 휴대전화화면으로 글을 읽는다. 그렇기에 문장은 더욱 간결해져야 한다. 군더더기가 될 수 있는 형용사와 부사를 덜어내고, 쉼표와 마침표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나는 지나치게 쉼표를 남발하는 탓에 퇴고할 때 문장을 많이 고친다. 그러나 쉼표 덕분에 단어를 덩어리채 넣고 빼면서 전체 의미를 바꾸지 않고 빠르게 수정하는 편이기도 하다.
3. 문단 나누기
A4용지한 면에 10포인트 크기의 글자로 빽빽하게 채운 글이 있다고 하자. 이런 글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예상하건대 읽고 싶지 않다는 사람 수가 압도적일 것이다. 이것은 퇴고할 때 ‘문단 나누기’와 ‘행갈이’도 신경 써야 하는 이유다. 단순히 여백을 만들라는 게 아니다. 다 쓴 글을 입으로 읽어가며 문단과 행을 확인해보잔 얘기다. 자신만의 문체는 단어 선택이라든가 표현 외에도 퇴고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만들어지기도 한다.
한 인터뷰에서 박민규 작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독특한 행 띄우기와 문단 나누기, 숨 가쁜 쉼표 등. 과거 파격적인 문제를 보여줬던 그엥게 한 기자가 “작가님 글은 마치 랩 같은데 쓸 때 소리 내서 읽어보세요?”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읽어보죠. 읽으면서 쓰고, 다.  쓴 뒤 읽어보기도 하고, 쉼표도 그렇게 찍어요. 다른 사람이 읽어보는 경우도 있고요. 젋은 사람과 나이든 사람은 읽는 속도가 조금 다르더군요.”
입으로 읽어가며 퇴고하는 방법은 역시 옳다. 특히 자신만의 문체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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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travel’이 ‘여행’이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된 것은 14세기 무렵으로, 고대 프랑스 단어인 ‘travail’에서 파생한 것으로 춛정하고 있다. 이 단어에는 현대의 우리가 ‘여행’ 하면 떠올리는 즐거움과 해방감이 거의 들어 있지 않다. 노동과 수고, 고통 같은 의미들이 담겨 있을 뿐이다. 현대 영어에서는 아직도 ‘travail’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고생, 고역 등이며 ‘in travail’이라고 하면 ‘산고로 몸부림치다’같은 의미가 된다. 자기가 태어난 곳에 머물지 못하고 타향을 헤매는 것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행한 운명으로 여겼다. 우리나라에서도 점을 쳐서 ‘객사’라든가 ‘역마살’이 나오면 불길하게 생각했다. 서양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 20세기 이전까지는 재미로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쉽게 상상하지 못했다. 멀리 떠나는 자는 삶의 터전을 빼앗겼거나,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종교적 열정으로 떠나는 순례도 있었지만 험난하고 고생스러웠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편안한 믿음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이상, 여행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게 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정신이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의 믿음에 집착한다면 여행은 재난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예전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성격 차조 워크숍’이라는 수업이 있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를 창조해보는 수업이었다. 학생들이 만들어온 인물들은 대체로 모호하다. 주인공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회사원(대학생, 공무원 등등)이에요.’ 그럴 때 이렇게 맗하는 것이 선생으로서의 나의 역할이었다.
“평범한 회사원? 그런 인물은 없어.”
모든 인간은 다 다르며, 자셋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조금씩은 다 이상하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다름’과 ‘이상함’을 끝까지 추적해 생생한 캐릭터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스프레드시트로 표를 하나 만들어 소설을 쓸 때마다 사용한다. 비중이 있는 인물이면 그의 외모부터 습관, 취향까지 다양한 항목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해본다. 마치 앙케트 조사와 비슷하다. 역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인물의 내면이다. 윤리적 태도, 성(性)에 대한 관념, 정치적 성향 등, 십여 개의 항목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변하다보면 인물에 대해 좀더 또렷한 윤곽이 그려진다. 그런데 인물의 내면 부분에서 내가 제일 고민하게 되는 항목은 ‘프로그램’이다. 노아 루크먼은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인물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념’으로 ‘프로그램’을 설명한다. 인간의 행동은 입버릇처럼 내뱉고 다니는 신념보다 자기도 모르는 믿음에 더 좌우된다.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된다. ‘흑인은 지적으로 열등하다’ 같은 고정관념도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인종차별주의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백인은 어쩌다 뛰어난 지적 성취를 이룬 흑인을 만다면 ‘흑인이지만 정말 대단하다’는 대사를 칭찬이랍시고 치게된다. 작가가 미리 생각해둔 프로그램이 인물의 대사가 되어 배우의 입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는 순간, 관객은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더 넓게 보자면 ‘프로그램’이란, 인물 자신도 잘 모르면서 하게 되는 사고나 행동의 습관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나쁜 일이 일어나면 모두 자기 탓으로 귀인한다(‘내가 손대면 되던 일도 안 돼’). 반대로 어떤 이는 언제나 남 탓으로 돌린다(‘내가 뭐랬어? 도대체 일을 제대로 하는 놈들이 없다니까!’). 어떤 인물은 뭐든지 신중ㅎ하게 조심하는 게 최선이라고 믿기 때문에 새로운 일을 거의 벌이지 않고, 반면 이떤 사람은 무슨 일이든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게 낫다고 확신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한다. 이런 것도 프로그램이다.

생각과 경험의 관계는 산책을 하는 개와 주인의 관계와 비슷하다. 생각을 따라 경험하기도 하고, 경험이 생각을 끌어내기도 한다. 현재의 경험이 미래의 생각으로 정리되고, 그 생각의 결과로 다시 움직이게 된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밤에 하지 말았어야 할 말부터 떠오르고, 밤이 되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뒤척이게 된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를 말아야 하고, 불안한 미래는 피하는게 상책이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미적거리게 된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놓는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인생이 여행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선가 오고, 여러 가지 일을 겪고, 결국은 떠난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지구라는 별에 도착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여해은 먼저 도착한 이들의 어마어마한 환대에 의해서만 겨우 시작될 수 있다. 신생아는 자기가 도착한 나라의 말을 모른다. 부모와 친척들이 참을성을 가지고 몇 년을 도와야 비로소 기초적인 언어를 익힐 수 있다. 부모는 아이가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가 될 때까지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다. 충분히 성장하면 인간은 지구에 새로 도착한 여행자들을 환대함으로써 자신이 받은 것을 갚는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갈 때, 남아 있는 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을 환송한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문명은, 마치 다른 세계로 떠나는 여행자를 배웅하듯이 망자를 대한다. 관 속에 노잣돈이나 길동무 인형을 넣어준다. 철저한 무신론자조차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면 그들이 다음 세상에서 평안하기를 기원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타인의 환대 없이 지구라는 행성을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도 현지인의 도움을 절댇적으로 필요로 한다. 인류는 오랜 세월 서로를 적대하고 살육해왔지만 한편으로 는 낯선 이들을 손님으로 맏아들이고, 그들에게 절실한 것들을 제공하고,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며 떠나보내오기도 했다. 거의 모든 문명에, 특히 이동이 잦은 유목민들에게는 손님을 잘 대접하라는  계율들이 남아 있다.

환대의 관점에서 지난 여행들을 돌아보면,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쑥 튀어나와 아무 대가 없이 도움을 주었다.

철학자 알폰소 링기스는 여행에서 우리가 낯선 이에게 품는 신뢰, 그것의 기묘함에 해대 썼다.
‘고향과 공동체를 떠나 한동안 먼 곳에서 지내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때 우리는 매일 낯선 사람을 신뢰하게 된다. 그 사람과 핏줄로 이어져 있지 않은 것은 물론 신념이나 공동체를 공유하지도 않고 계약으로 묶여 있지도 않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가 어떤 가족이나 부족의 일원인지도 모르며 그가 사는 마을의 위치도, 그가 사회와 자연과 우주속에서 어떤 부문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를 신뢰한다. 그의 말이나 몸짓도 이해 못하고, 목적이나 동기도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그때 발생하는 신뢰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잘 정의돼 있는 행동으로 이루어놓은 공간을 건너뛰어 그 자리에 당신과 함께 있는 진짜 개인과 곧바로 접촉하는 것이다.
일단 누군가를 신뢰하기로 마음먹으면 우리의 정신속으로 평안함뿐 아니라 자극과 흥분이 파고들어 온다. 신뢰란 다른 생명체와 맺어지는 관계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을 준다. (...)
신뢰란 죽음만큼이나 동기를 짐작할 수 없는 어떤 인물에게 의지하게 만드는 힘이다. 낯선 이를 신뢰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
신뢰 안에는 용기뿐 아니라 기쁨과 유쾌함도 들어 있다. 신뢰는 위기가 닥쳤을 때 웃게 해준다. 그리고 성적인 매혹도 신뢰와 아주 흡사하다.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푹 빠지면 한없이 끌려가게 되듯 무조건적인 신뢰로도 마찬가지다. 역으로 신뢰에도 성적인 면이 있다. 왜냐하며 신뢰는 타인의 알 수 없는 핵심에 집착하는 맹목적인 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뢰는 차인의 감정 및 영향력과 연결된다. 스카이다이버가 낙하산을 건네기 위해서 자신의 뒤를 따라 낙하하는 동료에게 보이는 신뢰감에는 어딘가 성적인 면이 있다. 정글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원주민 젊은이에게 보이는 그 신뢰감도 마찬가지다. 신뢰란 대담하면서도 아찔하고 탐욕스럽다.’(알폰소 링기스 <기 ㄹ위에서 만나는 신뢰의 즐거움> 오늘의책, 2014, 10~14쪽).

어떤 도시에서 여행자들은 현지인처럼 보이고 싶어하기도 한다. 여행자의 표지들, 예컨대 커다란 배낭, 편안한 신발, 손에 든 지도, 카메라 등을 숨긴다. 마치 모처럼 휴일을 맞아 산책을 나온 현지인처럼 보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장’은 여행자들이 선망하는 나라와 도시에서만 수행된다. 뉴욕이나 파리, 바르셀로나와 같은 선진국의 매력젖ㄱ인 도시에서는 ‘습격을 감행하는 여행자’가 되어 스테레오타입으로 분류되기보다는 노바디가 되어 가급적 눈에 띄지 않으려 한다.
반면 ‘여기 사시나봐요?’ 같은 말이 별로 달갑지 않은 나라와 도시도 있다. 그때는 여행자로서 현지인과 적극적으로 구별 짓고자 한다. 마치 식민지 인도에 부임했던 대영제국의 관리들이 찌는 듯한 폭염에도 셔치의 단추를 풀지 않고 긴 소매의 재킷을 고집했던 것처럼 여행자의 표지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이렇듯 여행자는 어디로 여행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그 나라와 도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또한 그 도시의 정주민들이 여행자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방식을 적극적으로 조정하고 맞춘다. 때로 우리는 노바디가 되어 현지인 사이에 숨으려 하고, 섬바디로 확연히 구별되고자 한다. 실뱅 테송의 표현대로 여행이 정말 일종이 습격이라면, 여행자들의 이런 선책은 원주민의 힘과 위계에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여행자를 반기지 않고 심지어 공격할 수도 있는 오많한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면, 그리고 그 도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이라면, 여행자는 자신을 최대한 감추며 드러내지 않고자 할 것이다. 베네치아나 바르셀로나, 암스테르담, 교토 같은 도시에서 최근 대두하고 있는 오버투어리즘에 대한 시민들의 적개심을 여행자들도 분명히 알고 있고 때로 현지에서 피부로 느끼기도 한다. 그들은 관광객들이 에어비앤비 같은 숙박공유 서비스를 통해 집세를 폭등시키고, 쓰레기를 마구 버리며, 교통 혼잡을 야기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습격을 당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반면 현지인 상당수가 관광으로 생계를 해결하고, 여행자에게 비굴할 정도로 친절한 도시에서 우리는 굳이 자신을 현지인으로 가장하거나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 도시의 원주민들이 우리가 떠나온 나라에 대해 강력한 호감까지 갖고 있다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 그럴 때면 개별적인 자아 대신 더 매력적인 집단적 페르소나 뒤에 숨고자 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페르소나’는 연극에서 배우가 쓰는 가면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뒤에 그 말은 사람이나 인격, 성격을 가리키는 단어들의 어원이 되었다. 여행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가면을 쓰면서 자신의 모습을 바꾼다. 그러면서 부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고향에서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여행지에서 쓰는 가면이 조금 낯설 뿐이다.

실뱅 테송의 말처럼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하러 그 먼길을 떠나겠는가.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현명한 여행자의 태도는... 스스로를 낮추고 노바디로 움직이는 것이다.

여행이 길어지면 생활처럼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충분한 안정이 담보되지 않으면 생활도 유랑처럼 느껴진다.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젆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 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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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기르는 데 있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나는 아이가 어떻게 자라길 기대하는가’가 가장 중요해요. 즉 자신만의 육아관을 똑바로 세워야 선택의 순간마다 흔들리지 않고 확실한 결정을 내릴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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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없는 사상은 메마르고, 사상이 빠진 사랑은 경박하다. 82

너새니얼 호손 <주홍 글자> ‘사람이란 오랫동안 이중의 얼굴을 갖고 생활하다 보면 도대체 어떤 것이 진짜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지는 법이다.’  138

한국에서는 사랑을 소유와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해주고 자유롭게 해주며, 상대방이 행복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144

우리는 폭력적인 세상을 살아간다. 사람들도 폭력적이고 사회도 폭력적이며 정치도 폭력적이다. 폭력은 나만 옳다고 확신하며 타자를 증오하고 존중하지 않을 때 생겨난다. 사람들은 타자에 대한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정의의 집행이라고 잘못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이나 폭력을 절대 인정하거나 뉘우치지 않는다.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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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무엇을 수확했는가에 따라 하루하루를 판가름하지 말라.
당신이 어떤 씨앗을 심었는가에 따라 하루하루를 평가하라.’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여행이 저절로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여행을 통해서라도 내 삶을 바꾸겠다는 절실한 의지가 우리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여행은 타인의 삶의 터전을 방문함으로써 내 삶의 터전을 가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행위이기도하다. 결국 내가 사는 장소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일상의 화두로 돌아오지 못하는 여행은 영원한 방랑에 그칠 수 밖에 없다.

나는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누군가의 꿈을 응원해준 적이 있는가. 아무런 조건 없이, 내가 도와줬다는 표시도 없이, 아무도 모르게 그의 꿈을 후원해준 적이 있는가. 물론 더 따뜻하고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우리가 좀 더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더 많이 서로의 꿈에 귀 기울이고, 최선을 다해 서로의 꿈을 응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누구도 내 꿈을 응원하지 않을 때, 우리는 내 생의 가장 멋진 후견인은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끊임없는 비극과 고통 속에서도 풀과 나물들은 비명 한 번 내지르지 않고, 불평 한 번 없이, 절대로 도망치는 법도 없이 묵묵히 새 삶을 준비합니다. 다가오는 비극과 고통이 그들을 오히려 더 강한 존재로 만들어줍니다.’ - 김영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그녀는 ‘나 자신을 찾는다’는 것이 옷가게에서 예쁜 옷을 찾는 것 같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위험천만한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자신을 던져야만 해낼 수 있는 세상과의 싸움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침묵하고, 순응하는 여성들에게 선언한다.
‘아무리 사소하고 아무리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성찰하고, 책을 읽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강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충분한 돈을 여러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 바랍니다.’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나는 믿는다. 시간은 사람을 바꾸지 못하지만, 장소는 사람을 바꾼다는 것을. 여행에 진정으로 중독된 사람들은 특정 장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장소에 가면 그 장소에 맞게 자신도 모르게 놀라운 화학변화를 일으키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물의 ‘결’을 안다는 것은 오랜 시간의 관찰과 기다림과 이해심을 필요로 하는 말이다. 타인의 숨결에 익숙해지는 일이 바로 누군가와 친밀감을 쌓는 일인 것처럼, 바다의 물결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파도를 제 몸처럼 다루며 눈부시게 서핑을 즐길 수 있다. ... 진정 아름다운 공간은 그 공간을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석에 이끌이듯 나 스스로 그 장소에 맞게 나의 모든 것을 맞추게 되는 곳임을. 그 장소를 사랑하기 위해 나를 기꺼이 바꾸는 일, 그것이 바로 여행이 가진 신비한 마력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싫어한다’고 했을 때, 그 대상에 대해 정확히 알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어떤 순간적 인상 때문에, 또는 다른 안 좋은 기억과의 엉뚱한 연결 고리 때문에, 아무 죄 없는 대상이 싫어질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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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여행, 이토록 무의미한 아름다움이여.
여행은 우리 마음속에 아름다움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새벽 안개 가득한 거리, 홀로 걸어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던 비엔나의 11월. 내겐 마음이 아직 남아있구나. 나를 글썽이게 만드는 이토록 무의미한 아름다움이여.
여행을 하며 나는 세상과 상관없는 일이 되어 가고 있다. 폭포는 끝없이 낙하하고 폐허는 점점 아름다워지고 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우린 모두 처음 살고 있으니까요.  5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건
‘잘해 보자’, ‘열심히 해 보자’ 이런 게 아니라
조금만 너그러워 지자.
어제보다 하루만큼 더 살아왔으니까 말이다.  15

파이팅!!! 같은 건 하지 말자.
그런 거 안 했지만 우린 지금까지 열심히 잘 달려왔잖아.
최선을 다하려고도 하지 말자.
그것도 하루 이틀이잖아.
매일매일 죽을 힘을 다해 달리려니까 다리에 쥐 난다.
지친 것 같다.
조금은 적당히.
조금은 대충대충.
좀 걸어 보는 건 어떨까.
걸으며 손도 잡고 주위도 돌아보고 그러자.
오늘부터는 하고 싶은 것들을 조금씩 하면서 갖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가져가면서
생각하고 싶은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하면서.  25

나는 좀 더 외로워져야겠다.
안개 뒤에서
길 위에서
불꺼진 창문 너머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1000번 광역 버스 안에서
더블린, 카이로, 루앙프라방, 도쿄 혹은 사파에서.  75

허물어진 사랑은 허물어진 대로
그대로 두겠다.
어쩌면 그것 또한 보기 좋을 것이니.  76

우리가 경험하는 여행은 논픽션이지만 우리가 추억하는 여행은 픽션이다.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은 멋지게 이륙하는 비행기의 가벼운 각도다.
아쉬운 건 우리가 여행을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여행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수백년 전의 여행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여행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분명 매혹적인 일이다.
여행자는 생의 비밀을 엿보고 싶어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어떤 이즘(ism)을 설득하고 성취하기 보다는 그것을 살아버린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여행과 음식, 숙소, 길, 삶의 태도와 방식에 대한 편견은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그들은 그것을 직접 몸으로 느끼고 스스로 얻어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새로운 좌표를 만들어 왔다. 해안선을 넓히고 고도를 높였다. 시간을 확장하고 공간의 깊은 곳을 탐색했다. 지도를 만든 것을 그들이다.

여행, 그것은 삶과의 달콤한 밀월을 즐기는 일이다.
우리의 여행이 서사를 장착할 필요는 없다. 교훈적일 필요는 더더욱 없다. 그건 각설탕 같은 것이다. 넣어도 그만 안 넣어도 된다. 우리의 여행은 단지 생의 체온을 조금 높이는 정도면 충분하다.
‘즐기고 탐닉하라’ 이것이 여행자의 첫 번째 행동강령이다.
여행은 고백의 한 양식, 익명적 중얼거림, 세상에 대한 깊이 없는, 그래서 가벼운 그렇기에 유쾌한 찰나적인 긍정.
여행이 자신을 위해 많은 일을 해 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그러나 여행만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고 믿어라.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우리는 처음 보는 생의 풍경을 문득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겁먹지도 말고 망설이지도 마라. 그 풍경은 당신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니까. 우리는 단지 설레기만 하면 된다.
누구나 자기만의 환상을 좇아 여행을 떠난다. 어떤 이는 환상을 깨기도 하고 어떤 이는 환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어떤 것이 옳다고는 할 수 없다. 여행은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행은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하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일이다. 그 시간 속에 슬며시 심장을 올려놓는 일이다.

길과 가장 잘 사귀는 방법은 외로움과 친구가 되는 거야.
나이가 든 여행자들을 존경하라. 그들 대부분은 인생의 교훈을 체득한 이들이다.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어, 혹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 여행을 시작한 이들이다. 이들은 낯선 풍물을 보며 신기해하지도 않고, 여행지에서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 따위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여행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은 것이다.  
여행이란 생에 골몰하는 가장 유익하고 헌신적인 방법, 생과의 가장 완벽한 열애.
여행은 언제나 실패다. 성공적인 여행은 없다. 우리는 실패를 경험하기 위해 기꺼이 여행을 떠나고 그 실패는 즐겁다.
이번 여행을 통해 당신이 긍정을 배웠으면 좋겠다.  139-141

여행의 정석
가장 빠른 달팽이처럼.  143

모든 여행은 아름답다. 아름다워야 한다. 현실의 반대말은 비현실이 아니라 여행이다. 여행작가는 그렇게 믿어야 하며 여행작가의 가장 소중한 책무는 여행에 대한 로망을 최선을 다해 보여주는 것이다. 전쟁터 같은 현실에서 독자를 피신시기는 것이다. 세상은 더 이상 외롭지 않고,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지평선 너머에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방법을 찾는 것은 커다란 배낭을 지고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 지평선을 넘어가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사진과 글로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물음 : 여행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나요?
답 : 아, 이건 너무 어려운 질문이네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놓치기 싫어 그토록 손에 꽉 쥐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손에 쥔 모래알처럼 별것 아니었다는 것. 아마도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176

물음 : 훌륭한 여행이란 어떤 것일까요?
답 : 그런게 있을까요? 단지 취향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모험을 하든, 쇼핑을 하든, 미술관을 가든, 하루 종이 ㄹ호텔 수영장에 드러누워 햇빛을 쬐든, 타인의 여행에 대해 왈가왈부하기는 좀 그렇군요. 여행은 그냥 여행이지 ‘훌륭한’ 여행이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하다는 것, 과연 ‘누구’에게 훌륭한 것일까요? 훌륭한 여행보다는 좀 더 사려 깊은 여해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177-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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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들은 대부분 외롭고, 외로운 것들은 대부분 아름답다.
혼자이어야만 닿을 수 있는 곳이 있다.  12

다들 시간이 공평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누구는 열 두 시간 동안 생계를 위해 일하고 여섯 시간 동안 자고 여섯 시간 동안 피곤해서 멍하니 아무것도 못하지만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자기 하고 싶은 일만 한다. 우리에겐 같은 시간이 주어져 있지 않다.
뭔가 잘못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많이 잘못되어 있을 때다. 바로잡기가 힘들다. 니체였던가. “살아야 할 이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살아가는 모든 방식을 견뎌낼 수 있다”는 말을 한 사람이. 그렇지만 우린 너무 많이 견뎌 왔다. ... 남을 견디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것. 어느 것이 더 견딜 만한가.  14

잘못된 길이 지도를 만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행운을 만나는 건 언제나 낯선 길 위에서고 우리를 자라게 하는 것은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실수했다고 다그치지 말아 주세요. 대신 응원해 주시면 안될까요. “괜찮아”하고 말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응원이 실수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들어 주니까요. 낭비라고도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요. 조언은 감사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조용히 지켜봐 주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모른 척 해 주시든지.  27

선인장의 가시는 잎이 변해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사막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죠. 넓은 잎으로는 수분 증발을 막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살다 보니 우리도 점점 선인장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릴 적 환한 햇살을 듬뿍 받아들이던 넓은 잎들은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을 거치면서 어느새 뾰족한 가시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상처받을까 싶어 가까이 가기가 두렵고 가까이 오는 사람도 상처가 될까 마냥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32

더 가지고 싶지만 더 가질 수 없는 하루라는 카드. 하루에 하루만큼씩 꼭 사라지는 하루.
그래서 사랑하는 거다. 시간은 언제나 우리 편이 아니고 우린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으니까. 사라져 가고 있으니까. 사랑이 아니면 이 공허와 허무를 견딜 수 없으니까.  49

우리는 맨발로 해변을 걷는다. 서로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다. 가끔 발걸음을 멈추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어둠 속의 바다를 응시하다 보면 어느 천사가 않아 커다란 눈으로 우리를 바락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들은 손을 꼭 잡고 그렇게 오래도록 잘 살아라.’ 우리를 지켜주는 천사를 만나는 일, 확인하는 일, 그것이 어쩌면 여행이 아닐까.
하루키가 말했다. “작가는 소설을 쓴다-이것이 일이다. 비평가는 그에대해 비평을 쓴다-이것도 일이다. 그리고 하루가 끝난다. 각기 다른 입장에 있는 인간이 각자의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사람과 식사를 하고, 그러고 잔다. 그게 세계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켜야 하고 돌아갈 단 하나의 세계가 있다면 그곳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53

사랑을 더 새롭게 하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아요.
더 많이 사랑하는 것밖에는.
사랑을 배우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하는 것 아닐까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네요.  
그러니 사랑하도록 합시다.
어차피 사랑하는 것이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좋은 거잖아요.
어차피 후회할 거라면 사랑하고 나서 후회하는 게 낫잖아요.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가지면 더 좋잖아요.
당신은 여전히 미지의 방향에 있고.
오늘도 나는 더듬거리며 당신에게로 향합니다.  56

카페에 앉아 물끄러미 내 손을 바라보고 있다. 어느 겨울 당신을, 차가운 손을 덮어 주던 그 손이 지금은 식은 커피잔을 쥐고 있다. 우리는 사랑이 오는 건 보지 못하지만, 가는 건 끝까지 지켜본다.
이별이 슬픈 건 네가 울고 있을 때 내가 그 자리에 없다는 것이다. 빈 자리를 보는 것이 제일 슬프다.
이별 후에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고 이별 후에도 많은 생이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낭비된 시간도 없고, 낭비된 마음도 없다. 모든 인연은 몸속 깊이 새겨진 채 우리의 남은 날들을 작동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 살고 있고 당신은 거기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그게 이별이다.  86-88

다들 젊었을 때 전력 질주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낙오한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 어쩌면 우린 출발선상에서부터 이미 낙오해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전력 질주하고 있는 사람들도 뭐 때문에 전력 질주를 하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생은 길고 지루한 싸움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력 질주할 수는 없는 거죠. 전력 질주해야 할 때가 있고 천천히 걸어야 할 때도 있고 그늘에 앉아 쉬어야 할 때가 있는 겁니다. 지금이 꼭 전력 질주해야 할 때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도끼날 이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하루 종일 나무만 베는 사람보다, 중간중간 쉬면서 날을 가는 사람이 결국 나무를 더 많이 벤다는 것이죠.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아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건 지금하고 있는 일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약간의 각오와 약간의 여유, 그리고 즐겨 보자는. 마음가짐.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인생은 우리 뜻대로 되는 게 아니고 우리에겐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 있으니까요. 길게 보자고요.  94-97


원고지 1,000매를 쓰는 방법은 일단 원고지 1매를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1매를 쓰고 또 1매를 쓰고, 1,000매가 될 때까지 1매씩 쓰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목적지에 닿기 위해서는 왼발 앞에 오른발을 두고 다시 오른발 앞에 왼발을 둬야 합니다. 이걸 무수히 반복하다 보면 결국 목적지에 닿게 되죠.
원고지 1,000매를 쓰기 위해서는 일단 원고지 1매를 써야 합니다. 그리고 또 1매를 쓰고, 또 1매를 쓰고, 또 1매를 쓰고.... 1,000매가 될 때까지 1매씩 쓰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목적지에 닿기 위해서는 왼발 앞에 오른발을 두고 다시 오른발 앞에 왼발을 둬야 합니다. 이걸 무수히 반복하다 보면 결국 목적지에 닿게 되죠.
끊임없이 원고지 1매를 쓰는 일, 매일매일 오른발 앞에 왼발을 두는 일. 그것을 우리는 작업이라고 부릅니다. 작업은 꾸준히 행해져야 합니다. 기계처럼 작업하는 사람을 우리는 작가라고 부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책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쓸 수 있을 때는 그 기세를 몰아 많이 써 버린다. 써지지 않을 때는 ‘쉰다’라는 것으로는 규칙성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임카드를 찍듯이 하루에 거의 정확하게 20매를 씁니다.”
소설가 이언 매큐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사무원처럼 일합니다. 다른 몇몇 작가들은 이런 식의 설명을 모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걸 받아들입니다. 저는 마치 사무원처럼 일해요.”
소설가 필립 로스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하루 종일 글을 씁니다. 아침, 오후, 거의 매일 글을 씁니다. 제가 2년 내지 3년 동안 그렇게 앉아 있으면, 마침내 한 편의 작풉이 완성되지요.”
꾸준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계속하다 보면 내 앞에 뭔가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뭔가가 만들어져 있다는 것. 그것만큼 설레고 근사한 일이 있을까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어느 날 당신 앞에 나타난 ‘작품’은 당신이 지난 3년 동안 만들어 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 앞에 그날, 비로소 등장하는 것이죠.
우리가 작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하루에 100매를 쓰고 열흘을 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3년 동안 매일 10매씩 쓰는 사람을 우리는 작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당신 앞에 불현듯 등장하는 그날까지 당신은 고독할 것입니다. 외로울 것입니다. 때로는 절망 속에 허덕일 것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계속 써가는 수밖에요. 네, 맞습니다. 작가를 그런 직업입니다.
꾸준함이 당신의 실수를 줄여줄 것입니다. 복서는 상대방의 펀치가 날아오면 습관적으로 몸을 비틀어 피합니다. 말벌은 날아오는 곤충에게 기계적으로 침을 쏩니다. 고민하거나 망설이지 않죠. 그래서 실수가 없습니다.
꾸준한 작업을 위해선 컨디션 관리가 기본입니다. 일의 특성상 프리랜서는 생활이 불규칙해지기 쉽습니다. 밤샘하고 다음 날 늦게 일어나거나 아예 밤을 새는 경우가 많죠. 이런 리듬으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아침밥을 먹고 야채와 과일을 섭취하고 날마다 조깅을 해야 하죠. 그리고 정해진 시간 동안 서재에 틀어박혀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야 하죠. 루틴을 만들지 않으면 컨디션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작가는 로망이 아니라 현실이거든요.
우리가 만들어낸 작품이 모두 만족스러울 수는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할 확률도 생각보다 낮아요. 루틴을 만들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의욕도 떨어집니다. 소득면에서도 좋지 않습니다. 내일 작업량을 위해 오늘의 에너지를 아낄 수 있는 사람이 10년이고 20년이고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에게 작품은 ‘해야 할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109-112

우리는 거절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절을 못하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때 거절했어야 했어’ 하며 전전긍긍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제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하고 딱 잘라 거절했어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걱정의 낮, 불면의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거절을 못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착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갈등을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하고요. 이들은 가끔 잠수를 탑니다. 연락이 되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게 할 때가 많죠.
아마 상대방도 무리한 부탁일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당신에게 부탁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시간과 노력을 허비해 가며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어도 당신에게 돌아오는 건 ‘년 역시 좋은 사람’이라는 입에 발린 말뿐일 겁니다. 이들에게 내 사정을 들어가며 거절해 보아도 ‘변했다’는 원망뿐일겁니다. 이런 사람들과는 사이가 틀어져도 괜찮습니다. 그들에게는 차라리 나쁜 사람이 됩시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첫걸음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않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거절은 나를 더 이상 소모시키지 않는 권리이자 최선의 방법입니다. 거절을 잘할수록 인생이 편해집니다. 134-135

여행을 할 때마다 ‘세상에 이런 게 있었다니!’하는 놀라움을 느끼고, 그것이 바로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하는데 ...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했듯, 어딘가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그게 우리가 문을 열고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164

후회할 각오가 되어 있고 견딜 자신이 있다면 저질러 보는 게 낫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엔 분명히 있으니까. 세상은 우리가 다가가지 않으면 진면목을 보여 주지 않는다. 여행이 가르쳐 주는 건 언제나 한 가지다. 저질러라, 그 다음에 생각하라.  177

시간을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과 여행을 떠나는 일이라는 것.  200


여러 지표상으로 부탄은 가난한 나라다. 1인당 국민 소득이 2,800달러 남짓밖에 되지 앟는다. 하지만 하루 이틀만 부탄을 겪어 보면 이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지그재그 이어지는 도로는 포장 상태마저도 엉망이지만 서두르는 법 없는 부탄 사람들은 도로 사정이 나쁘다고 여기지 않는다. 나쁜 도로 사정을 탓하는 건 오직 관광객들뿐이다. 히말라야에서 쏟아져 내리는 풍부한 수력으로 전기를 만들어 인도에 팔고 그 돈으로 모든 공산품을 수입해서 쓴다. 그러니 미세 먼지나 공해 따위를 걱정할 이유가 없다. 관광 산업에서 얻는 수익은 무상 교육과 무상 의료를 실시하는 재원이 된다. 여행하는 외국인들도 똑같은 혜택을 받는다. 1999년 부탄의 국가 행복지수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행복을 보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탄 행복 연구소’도지ㅔㄴ졸 소장은 “부탄은 국민의 행복을 모든 정책의 중심에 놓고 국가를 운영한다”고 말했다. 어떤 정책도 ‘국민 행복’과 부합하지 않으면 시행하지 않는다. 실제로 모든 정책은 10~15명으로 구성된 ‘국민 총행복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데 총점 78점을 얻지 못하면 자동으로 폐기된다. 헌법에 숲 면적을 국토 면적의 60퍼센트 이상 유지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 나라가 부탄이다. 4대 국왕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는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의회 민주주의로의 이양을 선택했다. 그결과 2008년 총선이 실시되고 지금은 총리가 수반이 돼 부탄을 통치하고 있다. 하루 7시간 노동도 철저히 지켜진다. 우리나라와 부탄 중 어느 나라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까.  204-205

다치바나 다카시는 그의 책 <사색기행>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역시 이 세상에는 가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 직접 그 공간에 몸을 두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절실하게 했다. 그런 감동을 맛보기 위해서는 바로 그 순간에 내 육체를 그 공간에 두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206

제 자리가 있다면 어떤 방향일까.  242

여행은 생일 잊는 그리고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 253

운명은 언제나 우리를 괴롭히는 것 같습니다. 괴롭히는 것, 그게 운명의 운명 같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어두운 곳으로 자진해서 걸어 들어갑니다. 무릎을 웅크리고 혼자 있습니다. 어둠을 겪어 보지 않고서는 빛을 알 수 없는 법입니다. 마음속에 어둠이 없는 자는 세상을 건널 수 없습니다. 여행은 내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입니다. 사랑은 내가 가진 어둠을 당신과 나누는 일이구요. 이만큼 살아 보니 알겠습니다. 친구 따윈 필요 없더군요. 책과 음악, 그리고 어둠 한 줌이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265

아그라탈라에서 사흘을 머물고 떠났다. 기차가 출발할 때 이 생소한 도시에 다시 올 일이 있을까. 이곳의 풍경 속에서 다시 차를 마시고 이곳의 사람들과 다시 미소를 나눌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까지 여행하는 인생을 살며 ‘다시 오게 된 이곳’이 얼마나 많았던가. 기나긴 기차의 기적 소리를 들으며 나는 분명 이곳에 다시 오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애초에 떠나가지 않았던 것처럼 보통의 걸음으로, 태연한 미간으로 이 저녁에 다시 앉아 있게 되겠지. 달은 보름에 가까워 똑같은 각도에서 이마를 비추겠지. 그러니까 요행은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만드는 일이고 그래서 여행은 사랑과 비슷한 것 아닐까.
‘다시’라는 말. 다시 오게 될 것이고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예감. 피리 소리처럼 가느다란 그 희망과 예감이 우리를 길 위에 올려놓고 우리는 밤새워 기다리게 한다. 모든 꽃들이 시들고 모든 풍경이 사라져도, 세상의 모든 잠언들이 인생이 덧없다고 속삭여도,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고 나는 인생을 이어갈 것이다.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다.  268-269

결국 공항이다. 어디론가 가기 위해 나는 서 있다. 쓰고, 읽고, 떠나는 일이 내겐 다 참고 견디는 방식이다. 여행은 생을 잊는 가장 쉬운 방법. 나는 무심한 세계에 있고 싶다. 카페와 호텔을 전전하는 삶이고 싶다.  291


여행은 우리 생이 만남보다 작별로 가득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작별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도 더 오래 여행을 하며 늙어갔으면 좋겠다.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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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에 대하여
“별 모양의 지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별 모양의 지식이 담겨진 책을 읽으면 될까요? 한 번에 읽으면 안 될 것 같으니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보는 거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방법으로는 별이라는 지식을 얻을 수 없어요. 지식은 그런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게 아닙니다. 다른 책을 펴야 해요. 삼각형이 그려진 책, 사각형이 그려진 책, 원이 그려진 책. 이런 책들을 다양하게 읽었을 때, 삼각형과 사각형과 원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비로소 별을 만드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그것 밖으로 걸어나가서, 그것에서 벗어난 뒤, 다른 것을 둘러보아야만 한다. .. 모든 지식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이 아닌 것들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 노력에 대하여
만약 당신이 한눈팔지 않고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이곳까지 왔다면, 그래서 당신에게 남은 것이 없다면, 당신은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음에 계속 걸어가야 할 것이다. 반대로 당신이 자신을 아끼면서 이곳까지 왔다면, 최선을 다하지 않고, 모든 것을 쏟아붓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고, 걸어오는 동안 발견한 풍경들을 감상하며 이곳에 도달했다면, 당신은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걸을 것인가, 쉴 것인가, 다른 길로 들어설 것인가.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길가를 둘러보며 여유 있게 걷는다는 것. 그것은 한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가기 위해 신중히 걷는 것이다. ..
당신 앞에 세상은 하나의 좁은 길이 아니라 들판처럼 열려 있고, 당신이 보아야 할 것은 보이지 않는 어딘가의 목표점이 아니라 지금 딛고 서 있는 그 들판이다. 발아래 풀꽃들과 주위의 나비들과 시원해진 바람과 낯선 풍경들.
이제 여행자의 눈으로 그것들을 볼 시간이다.


- 나의 이야기1
원래 여행이란 본 적도 없는 세계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고, 아는 길이 아니라 감춰진 길로 들어서는 것.


- 이야기에 대하여
이야기는 나와 세계를 관계 맺게 하는 도구다. 우리는 날것 그대로의 세계를 볼 수 없다. 어떤 안경이 되었든 반드시 집어 들어야 하고, 그 안경의 색깔이 만들어내는 명도와 채도 안에서만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 ...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나에 의해 구성된 이야기는 나의 세계의 진실성을 방영할 뿐이다. 그것은 타자의 세계를 재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고, 세계 전체를 기술하는 보편적 진리가 될 수 없다. 모든 이야기가 마찬가지다.


- 믿음에 대하여
진리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다. 진리의 반대말은 복잡성이다. 거짓만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쉽게 제거할 수 있다. 하지만 거짓 안에 진리가 섞여 있을 경우, 혹은 진리 안에 거짓이 섞여 있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쉽게 제거하지 못한다.
그래서 의심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믿고 있다 하더라도, 너무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의 크기가 너무나 압도적이라 하더라도. 당신이 심리적 위안보다 진실의 이면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의심해봐야 한다.


- 현실에 대하여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자본주의가 사라진 이상적인 세계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 세계는 아무도 독점적인 활동 영역을 갖지 않는 세계다. ‘내가 오늘은 이것을, 내일은 다른 것을 할 수 있고, 아침에 사냥 가고 오후에 고기 잡으러가며, 저녁에는 가축을 돌보고 저녁식사 후에는 비판에 몰두할 수 있게 되어, 나는 사냥꾼이나 어부, 목자나 평론가와 같은 전문인이 되지 않고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자본주의가 생각보다 괜찮은 체제라고 생각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자본주의가 나의 생산자로서의 지위를 박탈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가용한다. 특정 분야의 노동자라는 제한된 역할에 만족하라. 네 전문 분야가 아닌 곳에서는 입을 다물로 소비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라. 나는 이것이 아쉽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놀지 못하고 관계 맺지 못하고 생각할 줄 모르는, 다만 소비해야 하는 존재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이야기’를 점검해보아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사회와 종교와 경제뿐 아니라, 누군가 우리 손에 쥐어준 모든 이야기는 친절하게 세계의 모습을 드러내주는 동시에 그 이야기에 포함되지 않는 다른 세계를 은폐한다. 우리가 의심하지 않고 들춰보지 않을 때 세상은 조용하고 평온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는 동안 우리는 자신에게 내재한 가능성을 끝내 보지 못하고, 자기 세계의 주인이 될 권리를 박탈당한다.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이야기는 유익한 도구인 동시에 숨기고 가리는 도구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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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두, 옥희도 씨를 포함한 모두가 어떻게 살까를 알고 있다는 게 자꾸만 부럽고 불안했지만 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막연하고도 좀 건방지게 들리는 물음 자체가 대단한 철학 용어처럼 난해했다.  186

문득 여벌로 또 하나의 태수가 있었으면 했다. 내가 마음 편하게 무관심할 수 있는 태수와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애착하고 접촉할 수 있는 태수가 따로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한 사람에게 내 멋대로 애착과 무관심을 변덕스럽게 반복한다는 것은 암만해도 좀 잔인했다.  192

“난 이 황량한 도시 어디에나 있는 아름다운 궁전에 잔디가 돋으면 너와 그 궁전의 뜰을 거닐 것을 공상했다. 잔디를 뒹굴며 너를 애무하길 바랐어. 너 그럴 용기가 있니? 있으면 너는 분명히 찰불걸.”
언젠가 미숙이가 미군과 정식 결혼을 해도 양갈보라고 할까 하며 근심하던 생각이 났다. 그 어린것도 결혼에 따른 두려움이나 동경보다는 남의 이목에 대한 두려움이 더 강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은 얼마나 남의 시선에 예민한 족속일까. 양갈보, 실상 나라고 뭇사람의 그런 시선으로부터 초연할 배짱이 있을까.  237

“오, 어떡하면 자네가 알아줄 수  있을까? 내가 살아온, 미칠 듯이 암담한 몇 년을, 그 회색빛 절망을, 그 숱한 굴욕을, 가정적으로가 아닌 예술가로서 말일세. 나는 곧 질식할 것 같았네. 이 절망적인 회색빛 생활에서 문득 경아라는 풍성한 색채의 신기루에 황홀하게 정신을 팔았대서 나는 과연 파렴치한 치한일까? 이 신기루에 바친 소년 같은 동경이 그렇게도 부도덕한 것일까?”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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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말- 이진우(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저자는... 복잡한 세계를 살아갈 수 있는 나침반으로 ‘존엄’을 제시한다.

한 개인이 살아가면서 다양한 외부의 유혹에 맞서 자신의 삶을 지킬 수 있는 내면의 나침반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존엄이다. 사회와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살기를 거부하고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자기성찰이 존엄한 삶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수 많은 사람이 저마다 고안해낸 해결책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해왔다. 누군가는 양심에 호소했고, 가치와 규범을 외쳤으며, 압력을 행사하기도, 법을 만들고 규칙을 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소용이 없었다. 물론 달라진 것도 없다. 인류는 그저 위기에서 또 다른 위기에 직면했을 뿐, 계속해서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지구의 한정된 자원을 남용하고 있다. 인류 스스로가 만들어낸 이 무질서 속에서 허우적대면서,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이주할 준비나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뇌 구조의 특성상 필연적으로 길을 잃게 되어 있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의 뇌는 생각과 감정, 행동을 이끌어내는 뉴런의 연결 패턴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한 개인으로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각종 유혹과 약속, 인생을 살면서 꼭 있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에 용기를 내어 저항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위해 가용할 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깨어 있게 하며, 세상이 말하는 그 모든 유혹과 약속, 상품들보다 더 강인하고 확고하게 뿌리를 내릴 내면의 힘.

일관된 방향을 제시하여 우리 뇌를 무질서의 상태로부터 지켜주고, 그것을 통해 장기적으로 에너지 소비량을 줄여주는 표상. 바로 그 표상을 일컫는 단어가 바로 존엄이다.


1장 잃어버린 존엄을 생각하다

끊임없이 발전을 거듭하며 ‘최적화’하는 알고리즘 앞에 인간들은 무익한 존재가 되고 만다.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하지만 정작 학교에서 우리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지식을 얻는다. 몸을 움직일 시간이 있기는 하지만, 나가봐야 좁은 운동장이 전부다. 그것도 종소리가 울려야 움직일 수 있다. 과거에 우리가 끝도 없이 넓은 자연 환경에서 학습하고, 그만큼이나 제한이 없는 시간 속에서 배움을 즐겼다면, 이제는 45분 단위로 시간을 자르고 나누어 공부를 한다. 한 과목이 끝나면 다른 과목이 이어진다.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다음 수업이 진행되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은 조용히 앉아 선생님의 설명과 질문에 집중해야 한다. 학생들에게는 이 설명과 질문이 별로 흥미롭지 않다. 무엇을, 누가, 언제 배우고 알아야 하는지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사는 동안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인간은 이렇게 순식간에 특정 시스템에 속한 대상, 지배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자기 존엄성을 스스로 깨우칠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2장 존엄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민주주의 이전에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 우리 삶의 모습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3장 지극히 인간다운 뇌

개인의 신념이 가진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 번째 방법은 바로 ‘실패’다. 지금까지의 인생관과 그에 따른 자아상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깊은 고통을 겪고 나면, 지금까지 보지 못한 다른 것을 볼 수있는 눈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옳고 타당하다고 여겼던 이상과 신념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고, 나아가 더 포괄적이고 생산적인 새로운 방향을 찾아나설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실패는 그 고통의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다. 그래서 그 고통을 허용하지 않거나, 모른 척 해버리고 만다. 물론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신념이 하루아침에 모조리 충격적으로 무너지는 경우도 드물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앞으로도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한, 대부분의 사람은 오히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신념을 보다 효율적이고 보다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려고 더욱 노력할 것이다.
실패보다 더 효과적이고, 한 개인이 형성한 이상과 세계관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다. 그 만남을 통해 자신의 신념과는 다른 낯선 신념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완전한 타인을 만나면서 자아상과 세계관을 확장하고, 비로소 자신의 신념을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
자신의 세상과 선택이 틀렸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실패의 고통, 그리고 타자와의 만남에서 낯선 신념으로 마주함으로써 자신의 사고방식과 이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 이는 인류 역사를 관통해온 인간의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4장 사회적 뇌, 존엄을 배우다

우리가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우리의 뇌는 스스로 에너지 소비를 최소한으로 유지하기 위한 작업을 한다. 뇌의 내부 질서가 혼란스러워지면 뇌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해결책을 찾으면 즉시 뇌의 혼란 상태는 안정화되며 비로소 에너지 소비를 낮출 수 있게 된다. 그 해결책 중에서도 가장 흥미롭고, 효과가 있는 방법은 뇌 기능의 원리이기도 한 ‘단순화’ 작업이다. 이는 우리 몸의 다양한 단일 행동과 반응을 조화롭게 조정하기 위해 상위의 패턴을 형성하고, 자동화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어려운 말 같지만, 이는 사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개념이다.

우리의 뇌는 수많은 단일 움직임들을 조정할 목적으로 상위의 행동 패턴을 만들어내고, 에너지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우리의 행동을 조정한다. 우리가 ‘사고방식’, ‘태도’라고 일컫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태도도 자동으로 나타나는 뇌의 반응 중 하나다. 탐험을 좋아하는 것, 개방적인 것, 창의적 활동을 좋아하는 것도 뇌가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만든 행동 패턴이다.


5장 본능에 새겨진 존엄성을 찾아서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줄 장치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태어난 이상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그 인간다움을 찾아가야 한다.


6장 타인의 존엄을 지켜야 하는 까닭

7장 강인한 삶을 향한 여정의 시작

‘우리는 과연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을 바로, ‘인간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버린다.


8장 어떤 세상을 가르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 ... 부모 스스로가 자신들의 존엄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말이다.

자아상은 공동체 안에서의 소속감을 기반으로 형성되어, 일종의 내면의 나침반으로서 타인의 존엄을 해치지 않는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자아상이 형성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유익한 경험을 통해 모든 아이들이 스스로 형성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갖게 되는 자아 성찰과 자아 형성의 과정에 급행은 없다. 아이가 보호받는 가운데 필요로 하는 만큼의 여유가 반드시 주어져야만 한다.

한 인간의 존엄함에 대한 인식은, 행동으로서만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스스로의 존엄함을 드러내고 있는 부모와 동료, 선배들을 통해 학습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존엄한 존재로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다른이의 마음을 이끄는 무언가를 가진 사람들. 그들이 스스로를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는 일단 만나보면 모두가 알아차릴 수 있다. 이들에게는 삶을 이끌어가는 내면의 나침반이 있기에 늘 평안하고 유혹당하지 않으며,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타인을 자신의 의도나 기대, 평가의 대상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바로 이들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존엄함을 인식할 수 있도록 권유하고 격려하며 자극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9장 더 이상 수단으로 살지 않기 위하여

최소한 당연하게 보이는, 변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되돌아볼 수 있는 어떤 철학과 신념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매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갈 것을 결정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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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실뱅 테송 - 반더러(wandere)는 독일어로 고전적인 여행자이자 자유로운 유랑자를 뜻한다.
육체를 마음껏 움직이게 하고 정신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진정한 여행자는 풀잎을 보고도 우주를 상상할 수 있다.  

어느 서양의 떠돌이로 부터(프롤로그)
광고에서는 연신 “움직이세요!”라고 외쳐댄다. “철저하게 형식을!”

이런 유랑생활은 무도병(舞蹈病, 신체 각 부위의 근육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저절로심하게 움직여 마치 춤을 추는 듯이 보이는 신경병)에 불과하다.


1 시간에 맞서는 여행자

나의 목표는 시간을 따라잡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무심해지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세상을 활보하는 자가 시간의 또 다른 차원, 더 두텁고 더 촘촘한 차원을 탐사하게 될 것이다.

내가 주로 신발 밑창을 이동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고통을 즐기는 취향 때문이 아니라 느림이 속도에 가려진 사물들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빠서 서두르는 유목민을 본 적이 있는가?


2 권태의 해독제

번뇌의 ‘주문(mantra)’인 “무엇을 할 것인가?”를 한 단어 한 단어 힘주어 발음하라고 지시할 때 나는 육체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렇게 대답한다. “떠나라!” 내면이 분화구를 식히려면 길을 떠나라. 여행은 시간의 질주에 제동을 걸 뿐만 아니라 넘치는 에너지의 압박에 시달리는 체질을 진정시킨다.

관찰에 적용되는 환유의 원리. 여행자는 풀잎에서 우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어야 하고, 머리 위로 지나가는 구름을 보고 평면구형도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산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꿈을 추억으로 만드는 것이다.  

기도, 관찰, 명상, 암송, 추억. 이것들은 긴 여정을 걸어가는 자가 세계의 암담한 거대함 속에서 자신이 마치 잃어버린 머리핀 장식처럼 느껴질 때 밀려오는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련하는 전략이다.


3 미지의 땅을 찾아서

괴테는 “여행을 할 때 나는 언제나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낙아챈다”라고 썼다. 여행은 여행자가 외부 세계에 감행하는 습격이며, 여행자는 언젠가 노획물을 잔뜩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약탈자다. 약탈자라는 말을 들을 만한 여행자라면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집중할 수 없다. 그는 자기 밖에서 경탄할 만한 것들을 찾아다닌다.

나는 긴 의자를 이용하듯 세상을 이용하는 여행자, 길을 자신의 신경증 치료사로 만들어 길에 모욕을 가하는 여행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길은 여행자가 모든 재물을 버리고 가벼워질 수 있게 도와주지만, 자신의 불행에서 벗어나게 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여행자는 잘 알고 있다.  

눈길을 한 번 주는 것은 그저 한 번 쓰다듬는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고 스치는 것이며, 뒤적여 조사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며, 본질 위를 스쳐 미끄러지는 것이다.


4 반더러, 낭만적 방랑자들

19세기 말에 독일의 낭만적인 방랑자들이 만들어낸 어떤 여행 방식이 있다. 저녁이면 어느 곳간에서 잠을 청하게 될지 모르면서도 아침에는 그런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걸어서 무사태평하게 유럽 대륙을 횡단했다. 그들은 아름다운 전원에 둘러싸여 불어오는 바람에 영혼을 열어두고 자신의 움직임을 느끼는 것만으로 만족을 느꼈다.

유랑생활을 제대로 하는 데 필요한 것은 별로 없다. 유랑하기 좋은 땅, 공평한 정신 상태, 유쾌한 기질과 질서에 대한 증오만 있으면 된다. 유랑하기 가장 좋은 땅은 온화한 자연 속에 있다. 그중에서도 작은 숲과 울창한 숲이 혼재하는 중앙 유럽의 평탄한 토지가 특히 적합하다. 유랑자의 영혼이 자기 존재의 어둡거나 혹은 햇살 가득한 측면을 뛰어다님에 따라 유랑자는 그곳의 안개 낀 숲 속 빈터에서 포근한 짚더미 사이를 오가며 망설일 것이다. 유랑생활을 잘하려면 견디기 힘든 가혹한 자연에서 유랑하지 않는 것이 가장 주요하다. 위험한 함정들을 무릅쓰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모든 에너지를 소환하여 유랑자가 자유로운 상태를 누리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반더러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어떤 끈으로도 묶어둘 수 없는 사람, 자신이 포기한 것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밖의 부름에 응할 수 있는 자들이다. 밧줄을 자를 줄 아는 것보다 아예 밧줄을 갖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방랑자의 유쾌함은 방랑자에게 최고의 양식이다. 그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기쁨은 아니다, 그 유쾌함은 오히려 인생에 대한 가벼운 아이러니, ‘세상에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거대한 기획’으로 배가된 청년다운. 욕구를 연상시킨다.  


5 길 위에서 얻는 행복

어느 쪽으로 방향을 정하든 걷는 것은 여행자를 본질에 이르게 한다.

여행을 하는 것은 질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내재화하는 것이다.  

반더러는 걷는 동안 약탈해온 이 모든 행복을저녁마다 자신의 공책에 모두 집결시킨다. 그는 깨끗한 종이와의 약속 때문에 낮 동안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을 더 열심히 비축하게 된다. 긴 여정을 걸어가는 자에게 글쓰기는 가장 간력한 평정의 계기이고, 낮의 역량을 연장시켜주는 늘임표다. 긴장했던 근육들이 공책 위에서 피로를 푼다. 정신은 기분 좋게 기억 속을 뒤적이는 일에 몰두한다. 저녁마다 글을 쓰면서 여행자는 계속해서 또 다른 길을 가고, 그렇게 평평한 종이 위에서 행군을 연장시킨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수 킬로미터를 주파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한 줄 한 줄 자신의 밭고랑을 파간다. 그의 눈은 배의 항적을 고정시키기라도 할 것처럼 펜의 움직임을 쫓아 간다. 그는 언제나 고독하게 낮에는 모험의 땅에서 길을 가고, 저녁이면 글쓰기의 땅에서 길을 간다. 그리고 밤이 되면 언제나 같은 의식이 치러진다.  


6 내면 유랑을 위한 기마 여행

내면의 유랑을 위해서라면 기마 여행이 정말 이상적이다. 정신이 걷기에 요구되는 집중력을 제공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7 지리학, 여행자의 교양

지리학자는 언제나 여행자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알기 위해 걷는다.

길에서 권태와 싸우는 여행자에게 소중한 것은 시나 기도보다 지리학적 인식이다. 지리학적 인식이 있는 여행자는 무엇(미개척 산업, 선상지, 덤불 같은 용암 고원)을 보든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알아보려는 시선을 가지게 된다. 그 시선은 유랑자에게 소중한 동료다. 언제나 읽을거리가 있다면 여행자가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어떻게 불안에 빠질 수 있겠는가?

훌륭한 번더러의 자질 중 하나는 자신이 빌리는 길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걸음을 뗄 때마다 감정을 따 모으고 새로운 것들을 만끽하지만, 자신이 발견하는 것과 찾기를 바랐던 것 사이에서 상응 관계를 찾아보려 애쓰지는 않는다. 현재와 과거를 비교하면 향수만 느끼게 될 뿐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는 고대의 기억을 지나치게 자주 떠올리지 않으려 주의한다.


8 휴머니즘을 포기한 반더러

휴머니즘을 언급하는 것은 대화를 잠재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반더러’인 나는 인간 수컵의 패권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휴머니스트로 돌아갈 것이다.

혼자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은 더욱 밀도 높은 삶을 살기 위해서다.


10 밤이 들려주는 이야기

야영은 밤과 화해하도록 주어진 기회다. 석교 아래나 나무 아래에 옷을 벗어 던져두는 것은 어둠과의 화해다.

우아함은 고독 속에서도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11 숲 속 오두막, 방랑의 끝

우리는 삶의 첫날부터 지구를 빌린 것일뿐이므로, 조금이라도 빚을 가볍게 하려면 마땅히 빚을 청산해야 할 것이다. 방랑자는 세상의 열매를 따 모으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기면서 생을 보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빚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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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나 답게 살기
나는 비행기에서 책을 읽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으로서 이 책을 썼다.

제1장 어떻게 살 것인가

사람이 즐기는 놀이에는 한계가 없다.

문제는 무슨 일을 했느냐가 아니다. 왜, 어떤 생각으로 그 일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크라잉넛 멤버들은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스스로 설계했고 그 삶을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았다.

크라잉넛 멤버들은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을 물질이나 지위, 사회 통념이나 타인의 시선, 어떤 이념이나 명분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두었다. 마음이 내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면서 행복한 삶을 스스로 설계했다. 그리고 그 삶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밀고 나갔다. 주눅 들지 않고 세상과 부딪쳤다 인생이 성공했으며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계속 그렇게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고 싶다고 한다.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 그러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대로 계속해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이미 훌륭한 인생이다. 그대로 가면 된다. 그러나 계속해서 지금처럼 살 수는 없다고 느끼거나 다르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아직 충분히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 더 훌륭한 삶을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  

세상은 제 갈 길을가고, 사람들은 또 저마다 자기 삶을 살 뿐이다. 세상이, 다른 사람이 내 생각과 소망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해준다면 고맙겠지만, 그렇지 않다고해서 세상을 비난하고 남을 원망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소극적 선택도 선택인 만큼, 성공이든 실패든 내 인생은 내 책임이다. 그 책임을 타인과 세상에 떠넘겨서는 안 된다. 삶의 존엄과 인생의 품격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죄악과 비천함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훌륭한 삶을 살 수 없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자기 결정권’이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이며 권리이다.

재능의 본질은 즐기면서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왜 자살하지 않느냐고 카뮈가 물었다. 그냥 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사는 이유를 찾으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삶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삶의 의미는 사회나 국가가 찾아주지 않는다. 찾아줄 수도 없고, 찾아주어서도 안 된다. 각자 알아서 찾아야 한다. 찾지 못할 경우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가방끈’이 길지 않아도 된다. 재산이 적어도 상관없다. 나이도 관계없다.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에게 타인의 위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도 개선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단지 삶의 환경을 조금 덜 냉혹하게 만들 뿐, 그 자체가 내 삶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한다.

자기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은 문제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책임이든 사회의 책임이든, 닥쳐온 고통은 일단 내가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 세상을 원망해본들 달라질 것은 없다. 누구도 그 짐을 대신 져주지 않는다. .. 각자 이겨내야 한다.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제2장 어떻게 죽을 것인가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철학자 밀의 주장.

원하는 인생을 스스로 설계하고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훌륭한 삶, 품격 있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 나름의 견해를 세워야 한다. 그러려면 삶과 함께 죽음도 알아야 한다. 죽음을 모르거나 오해하면 삶을 망칠 수 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문명이 억압이라는 말에는 분명 일리가 있다.

욕망을 억압하면서 규범을 따르는 일이 참기 어려울 만큼 어색하고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진다면 욕망을 표출할 수 있는 문을 더 넓게 열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규범은 자기 자신이 기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따르면 된다.

칸트(Immanuel Kant)에 따르면 존엄한 것은 ‘가치(value)’를 따질 수 없다. 어떤 것의 ‘가치’는 사람들이 가치를 인정하는지, 인정한다면 얼마만큼 높게 평가하는지에 좌우된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가치를 따질 수 없다.

자유의지를 발현할 때 지켜야 할 규칙 또는 도덕법이 있다. 칸트는 이 규칙을 이성이 내리는 ‘정언명령(Kategorische Imperativ)’이라 했다. 그는 경험의 도움이 없어도 사람은 이 규칙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칸트의 도덕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준칙이라야 한다.” “둘째,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 존엄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옳게 발현하려면 이 두 가지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사지가 마비된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삶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죽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굶어서 죽는 방법은 택하고 싶지 않았다. 굶는 것이 특별히 나쁜 방법이라서가 아니라, 사지가 마비된 사람이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죽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자살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 가운데 오로지 그것만이 허용된다면 강제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강제에 굴복하는 죽음은 존엄하지 않다. 그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가 원하는 벙법은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잠들어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누군가 자기에게 수면제를 제공할 경우 형법의 자살방조죄로 처벌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남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가상 상황이 아니다. 그런 남자가 정말 있었다. 그의 주장은 단순했다. ‘사지가 마비된 삶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자유의지에 따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끝내고 싶다. 이것은 국가와 사회가 억압하거나 침해할 수 없는 정당한 권리이다. 내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행위 역시 정당하다. 그렇게 하는 사람을 처벌하지 마라.’ 이 남자는 정부와 의회에 ‘안락사(安樂死)’를 허용하라는 입법청원을 냈다.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수많은 종교지도자, 의사 , 지식인들과 길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된 여인이 몰래 가져다준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는데 마침내 성공했다. 그의 이름은 라몬 삼페드로(Lamon Sampedro), 스페인 남자였다. 그는 <죽음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였다>라는 책을 남겼다.
스물다섯 살에 물이 빠진 해변에 떨어져 일곱 번째 경추가 부러지는 사고가 없었다면 라몬 삼페드로는 열정적이고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스물 두 살때부터 노르웨이상선을 타고 세계 마흔아홉 군데 항구를 누볐던 이 청년은 여자 친구와 약혼을 할 것인지 여부를 고민하다가 해변가 바위에서 발을 헛디뎠다. 그리고 정밀검사와 재활치료를 받은 끝에, 죽을 수도 없고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라몬 삼페드로는 이때부터 30년 동안 똑같은 하루를 살았다.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침대에서 책과 신문을 읽고, 침대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침대에 누운 채 찾아온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침대에 누워 창문으로 하늘과 바다를 내다보았다. 라몬은 휠체어 타기를 거부했다. 전신이 마비된 삶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로지 죽기만을 원했지만 물과 음식을 끓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것이 강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라몬의 투쟁은 사람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만들었다. 위로하고 격려하는 편지가 쇄도했다. 교황을 비롯한 세계 종교지도자들이 자살은 잘못된 선택이라고 설득하는 편지를 보냈다.  저명한 지식인들이 라몬의 생각을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 스페인 정부와 의회, 법원, 인권재판소는 심리를 회피하면서 대책 없이 시간만 끌거나 다른 기관에 책임을 떠넘겼다. 라몬은 펜을 입에 물고 편지를 쓰고 언론에 기고하였다. 방송에 출연해 자기의 견해를 이야기했다. 1995년 그는 이렇게 쓴 편지와 시, 산문을 한데 묶어 책을 냈다. 여기서 라몬 삼페드로는 자신이 생각하는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면 휠체어를 타든 목발을 짚든 지팡이를 짚든 간에 그 삶은 언제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사라지면, 그래서 그것을 이성으로 깨닫게 되면 그때가 죽을때인 거지요. 전 지금처럼 살아가는 시간이 과연 저에게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많이, 아주 많이 생각했습니다. 결론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고통은 아무 가치가 없고 제 고통의 원인 역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제때 죽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면 그 아픔은 인간적인 수준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죽는다는 건 단지 그런 거예요. 태양이 제 기억 속에 가장 아름다운 작별 인사를 새겨두는 것처럼 각자 가지고 있는 좋은 추억을 이 세상과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에 남겨두는 것, 잠드는 것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슬픔도 원망도 없이 그저 피곤에 지쳐 고요하고 평온하게 눕는 겁니다. 그러나 죽음을 그렇게 느끼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인간적이길 바란다고 할 만큼 굉장히 자유롭고 선해야 하겠지요. 안락사, 또는 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인정하려면 진정으로 인간과 삶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고 선의 심오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쟁은 전쟁이 아니다. 져도 죽지는 않는다. 이겨서 꼭 행복한 것도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 가진 것으로 인생을 산다. ... 끝없는 경쟁 속에 살아야 하지만, 즐기면서 경쟁에 임하면 이겨도 이기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식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두 가지를 가지도록 도와줄 수 있다. 첫째는 행복을 느끼는 능력, 둘째는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다.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가지려면 삶을 설계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자녀가 스스로 이것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시행착오를 경험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아이를 잘 키우려면 도를 닦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두 가지만 이야기하자. 따지고 드는 아이를 존중해야 한다. 공정성(fairness)에 대한 인식이 일찍 발달하는 아이일수록 지적 재능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사회성은 가장 높이 발달한 생물학적 재능이다.  끝없이 “왜?”를 쏟아내는 아이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더 창의적인 아이들은 덜 창의적인 아이들보다 부모를 더 힘들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기존의 규범으로 길들이면 아이는 호기심을 버리고 창의적이기를 그만둔다. 어떤 부모도 자기에게 없는 것을 자식에게 줄 수는 없다. 자녀에 대한 사랑과 훌륭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부모만이 그것을 자녀에게 줄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언어로 대화하는 것이다. 사람은 언어로만 소통하는 존재가 아니지만 소통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언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말을 하기 전에 아이들은 먼저 말을 알아듣는다. 뱃속에 들어 있을 때부터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완전한 문장으로 아이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아이의 뇌 속에 음성 정보를 처리하는 뉴런과 신경세포가 제대로 자리 잡게 하려면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갓난아이 때부터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집중해서 듣는 아이가 있고 그렇지 않은 아이도 있지만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아이를 씻길 때도 지금 목욕을 할 것인지, 아니면 조금 더 놀다가 할 것인지를 물어보는 게 좋다. 어느 쪽이든 큰 문제가 없는 경우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말과 더불어 진행된다. 인간은 언어로 사유한다. 부모가 반쪽짜리 ‘아기 말’을 쓰면 아기의 생각도 반쪽짜리가 된다.
원하는 것을 성취하려면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 아이큐가 높고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경쟁력이 있는게 아니다. 사람의 경쟁력은 인지적, 정신적, 정서적, 신체적 능력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삶에는 인과관계를 찾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그냥 일어나는 일이고, 일단 일어나고 나면 되돌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칸트의 충고를 기억하자.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하라.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도척이 개 범 물어갔다”는 속담이 있다. 나쁜 사람에게 좋지 않은 일을 당하는 것을 볼 때 우리 어머니가 쓰던 속담이다. 그 이름이 수천 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은 도척은 누구인가? 도척은 중국 춘추 시대 혼란기를 주름잡았던 살인강도단 두목이다. 부하 9천 명을 거느리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힘이 약한 제후의 성을 공격해 재물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강간했다. 사람을 죽여 간을 날로 먹었다고도 전해진다. 그런데 도척도 나름 도(道)를 깨달은 자였다고 한다. <장자> [외편]에 따르면, 부하가 도둑질을 하는 데도 도가 있는지 물었다. 도척은 어디에 간들 도가 없겠느냐면서, 다섯 가지 도를 갖추지 못하면 큰 도적이 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남의 집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마음대로 알아맞히는 것이 성인이다.
남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은 용기이다.
남보다 뒤에 나오는 것이 의로움이다.
도둑질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를 아는것이 지혜이다.
고르게 나누어 가짐이 어짊이다.

夫妄意室中之藏 聖也 (부망의실중지장 성야)
入先 勇也 (입선 용야)
出後 義也 (출후 의야)
知可否 知也 (지가부 지야)
分均 仁也 (분균 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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