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내용'에 해당되는 글 34건

  1. 2022.02.17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 백범 김구
  2. 2016.07.09 수사학 Rhetoric
  3. 2014.06.21 세계인권선언
  4. 2013.11.19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전문
  5. 2011.05.05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Oedipus complex) 2
  6. 2011.04.16 프루스트의 질문 (질문에 대한 답변 - 프루스트, 마르크스, 마르케스, 맑스의 답변)
  7. 2011.04.16 북크로싱(Book Crossing)운동 2
  8. 2011.04.02 리비도(Libido)적 쾌락과 오이디푸스(Oedipus)적 쾌락
  9. 2011.03.24 광주 인화학교 - 소설 도가니 실제사건
  10. 2011.03.13 문화대혁명 [文化大革命] -마오쩌둥
  11. 2011.02.19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1
  12. 2010.12.20 포정해우(庖丁解牛) 2
  13. 2010.12.14 디스토피아 [dystopia]
  14. 2010.12.14 사디즘 [sadism] (가학음란증, 가학증), 마조히즘 [masochism]
  15. 2010.12.14 아나키즘 [ anarchism ]
  16. 2010.12.14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Zapatista National Liberation Army]
  17. 2010.12.14 노마디즘 [nomadism]
  18. 2010.12.11 파토스 [pathos]
  19. 2010.12.10 아포리즘, 철학을 위한 아포리즘 1
  20. 2010.12.10 에로스와 타나토스 1
  21. 2010.12.10 코뮌주의와 그 비판
  22. 2010.12.05 프로파간다 모델Propaganda Model, 프로파간다의 힘
  23. 2010.12.04 크메르루즈 [Khmer Rouge] -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左翼) 무장단체.
  24. 2010.10.27 사이코패스 테스트 1
  25. 2010.09.26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스토아학파) - 책내용들 3 1
  26. 2010.09.21 CRR(colour reflection reading) 분석법
  27. 2010.09.18 로마 5 현제
  28. 2010.09.15 세일럼(Salem)의 마녀사냥 + 중세유럽의 마녀사냥
  29. 2010.09.11 '디자인 리더' 美 아이데오社
  30. 2010.09.08 사이코패스 Psychopath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친애하는 3천만 자매 형제여!

우리를 싸고 움직이는 국내외 정세는 위기에 임하였다.

제 2차 대전에 있어서 동맹국은 민주와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천만의 생령을 희생하여 최후의 승리를 전취하였다. 그러나 그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 세계는 다시 두 개로 갈리어졌다. 이로 인하여 제 3차 전쟁은 온양되고 있다. 보라!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남편을 다시 만난 아내는,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아들을 다시 만난 어머니는, 그 남편과 아들을 또다시 전장으로 보내지 아니하면 아니 될 위험이 닥쳐오고 있지 아니한가. 인류의 양심을 가진 자라면 누가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바랄 것이랴! 과거에 있어서 전쟁을 애호한 자는 파시스트 강도군 밖에 없었다. 지금에 있어서도 전쟁이 폭발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자는 파시스트 강도 일본 뿐 일 것이다. 그것은 그놈들이 전쟁만 나면 저희들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현재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남북에서 외력에 아부하는 자만은 흑왈 남정, 흑왈 북벌 하면서 막연하게 전쟁을 희망하고 있지마는 실지에 있어서는 아직 그 현실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촉발된다 하여도 그 결과는 세계의 평화를 파괴하는 동시에 동족의 피를 흘려서 왜적을 살릴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니 될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새 상전들의 투지를 북돋울 것이요, 옛상전의 귀염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이 난다 할지라도 저희들의 자질 만은 징병도 징용도 면제될 것으로 믿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왜정하에서도 그들에게는 그러한 은전이 있었던 까닭이다. 한국은 일본과 수십 년 동안 계속하여 혈투하였다. 그러므로 일본과 전쟁하는 동맹국이 승리할때에 우리도 자유롭고 행복스럽게 날을 보낼줄 알았다.

그러나 왜인은 도리어 환소 중에 유쾌히 날을 보내고 있으되 우리 한인은 공포 중에서 죄인과 같은 날을 보내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말이라면 우리를 배은 망덕하는 자라고 힐책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 신문 기자 리처드 씨의 입장에서 나온 데야 어찌 공정한 말이라 아니 하겠느냐. 우리가 기다리던 해방은 우리 국토를 양분하였으며 앞으로는 그것을 영원히 양국의 영토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의 해방이란 사전상에 새 해석을 올리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유엔은 이러한 불합리한 것을 시정하여 써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며, 전쟁의 위기를 방지하여 써 세계의 평화를 건설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다. 그러므로 유엔은 한국에 대하여도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임시 위원단을 파견하였다. 그 위원단은 신탁 없고 내정 간섭 없는 조건하에 그들의 공평한 감시로써 우리들의 자유로운 선거에 의하여 우리에게 남북 통일의 완전 자주 독립을 줄것과 미·소 양군을 철퇴시킬 것을 약속하였다.

이제 불행히 소련이 보이콧으로써 그 위원단의 사무 진행에 방해가 불무하나 그 위원단은 유엔의 위신을 가강하여 써 세계 평화 수립을 순리하게 진전시키기 위하여 또는 그 위원 제공들의 혁혁한 없적을 한국 독립 운동 사상에 남김으로써 한인은 물론 일체 약소 민족 간에 있어서 영원한 은의를 맺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만일 자기네의 노력이 그 목적을 관철하기에 부족할 때에는 유엔 전체의 역량을 발동하여서라도 기어이 성공할 것은 삼척동자라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이 서광이 비치고 잇는 것이다. 미군 주둔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 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 몰각한 도배들은 국가 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이 없이 통일 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음으로 양으로 유언비어를 조출하여 써 단선 단정의 노선으로 민중을 선동하여 유엔 위원단을 미혹하게 하기에 전심력을 경주하고 있다. 미군정의 난익하에서 육성된 그들은 경찰을 종용하여서 선거를 독점하도록 배치하고 인민의 자유를 유린하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태연스럽게 현실을 투철히 인식하고 장래를 명찰하는 선각자로써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각자는 매국매독의 인진회식 선각자일 것이다.

왜적이 한국을 합병하던 당시의 국제 정세는 합병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애국 지사들이 생명을 도하여 반항하였지만, 합병은 필경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현실을 파악한 일진회는 도쿄까지 가서 합병을 청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자들은 영원히 매국적이 되고 선각자가 되지 못한 것이다. 설령 유엔 위원 단이 금일에 단정을 꿈꾸는 그들의 원대로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한다면 이로써 한국의 원정은 다시 호소할 곳이 없을 것이며, 유엔 위원단 제공을 한인과 영원히 불해의 원을 뱆을 것이요, 한국 분할을 영원히 공고하게 만든 새 일회는 자손 만대의 죄인이 될 것이다.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니,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조국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민족을 사갱에 넣는 극악 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이와 같은 위기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최고 유일의 이념을 재검토하여 국내외에 인식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가 유엔 위원단에 제출한 의견서는 이 필요에서 작성된 것이다. 우리는 첫째로 자주 독립의 통일 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이것을 완성하기 위하여 먼저 남북 정치범을 동시 석방하며, 미소 양군을 철퇴시키며, 남북 지도자 회의 를 소집할 것이니 이 철과 같은 원칙은 우리의 목적을 관철할 때까지 변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불변의 원칙으로서 순식 만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순응 혹 극복하여야 할 것이다. 독립이 원칙인 이상 도립이 희망 없다고 자치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을 왜정하에서 충분히 인식한 것과 같이 우리는 통일 정부가 가망 없다고 단독 정부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단독 정부를 중앙 정부하고 명명하여 위안을 받으려 하는 것은 군정청을 남조선 과도 정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사사 망념은 해인 해기할뿐이니, 통일 정부 수립만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3천만 자매 형제여!

우리가 자주 독립의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면 먼저 국제의 동정을 쟁취하여야 할 것이요, 이것을 쟁취하려면 전민족의 공고한 단결로써 그들에게 정당한 인식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일절 내부 투쟁은 정지하자! 소불인이면 난대모라 하였으니 우리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용감하게 참아 보자.

3천만 자매 형제여!

한국이 있고야 한국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자주 독립적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이때에 있어서 어찌 개인이나 자기의 집단을 사리 사욕을 탐하여 국가 민족의 백년 재계를 그르칠 자가 있으랴. 우리는 과거를 한번 잊어버려 보자.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의심하지 말며 타매하지 말고 피차에 진지한 애국심에 호소해 보자!

암살과 파괴와 파공은 외군의 철퇴를 지연시키며, 조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조출할 것 뿐이다. 악착한 투쟁을 중지하고 관대한 온정으로 임해 보자!

마음 속에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에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내가 불초 하나 일생을 독립 운동에 희생하였다. 나의 연령이 이제 70 유 3인바 나에게 남은 것은 금일 금일하는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재화를 탐내며 명예를 탐낼 것이랴! 더구나 외국 군정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랴! 내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주지하는 것도, 한독당을 주지하는 것도 일체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국가 민족의 이익을 위해서는 일신이나 일당의 이익에 구애되지 아니 할 것이요, 오직 전민족의 단결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3천만 동포와 공동 분투할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서는 누가 나를 모욕하였다 하여 염두에 두지 아니할 것이다. 나는 이번에 마하트마 간디에게서도 배운바가 있다. 그는 자기를 저격한 흉한을 용서할 것을 운명하는 그 순간에 있어서도 잊지 아니하고 손을 자기 이마에 대었다 한다. 내가 사형 언도를 당해 본 일도 있고 저격을 당해 본일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 있어서는 나의 원수를 용서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것을 부끄러워한다.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목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 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38선을 싸고 도는 원귀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러운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3천만 동포 자매 형제여!

붓이 이에 이르매 가슴이 억색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어 말을 더 이루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번 더 심사하라.

대한 민국 30년 (1948) 2월 10일


Posted by WN1
,

수사학 Rhetoric

생각/내용 2016. 7. 9. 21:30

수사학.pdf




수사학 기법

 

1. 비유법

1) 직유법 :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다른 사물과 직접 비교하는 기법

예) 강철 같은 근육과 부싯돌 같은 마음

예) 그것은 가뭄의 단비처럼 반가운 소식이었다.

2) 은유법 : 두 가지 사실을 동일체로 단언하듯이 표현하는 기법

예) 인생은 나그네 길이요, 고난의 길이다.

예) 생선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

3) 의인법 : 무생물과 동물, 식물 등에 사람의 의지나 감정, 사상 등 인격적 요소를 부여하는 표현 기법

예) 이제 봄이 온 모양이다. 꽃은 웃고 나비는 춤을 추며 날아다닌다.

예) 천지여, 말하라! 산천이여, 대답하라!

4) 의태법 : 모습이나 움직임을 그 느낌이나 특징에 따라 표현하는 기법

예) 여성의 아름다움을 흔히 반짝반짝 빛나는 눈매에서, 방실방실 웃는 웃음에서 혹은 포동포동 한 살결에서, 보들보들 윤기 나는 입술에서 찾습니다.

5) 성유법 : 사물의 소리나 사람의 음성을 그대로 흉내 내어 현장감을 살리는 기법

예) 그 큰 바윗덩어리가 쩍 하고 갈라지지 않겠습니까?

6) 풍유법 : 비유의 말이나 예를 제시함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그 본뜻을 미루어 짐작하도록 하는 기법

예)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짓밟히지 않을 것이다.

7) 인용법 : 남의 글이나 말을 인용하여 자기의 주장을 이해시키는 기법

예)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8) 대유법 : 나타내려는 명칭을 다른 명칭으로 대신 사용함으로써 은연중 본래의 사물을 나타내는 기법

예)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운명 앞에 이순신 장군 같은 영웅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9) 상징법 : 정작 자신이 표현하려는 본래의 의도를 숨기고 암시로만 그치는 기법

예) 인생이란 화려한 장미를 꺽으려다 앙상한 낙엽을 안고 돌아오는 방랑길에 비길 수 있다.

10) 중의법 : 말 한마디에 두 가지 이상의 다른 뜻을 곁들여 나타내는 기법

예) 그는 음식점에서 갈비탕을 먹고 돈을 내지 않은 채 뺑소니 친 뒤 버스 속에서 소매치기로 돈 30만원을 훔쳤으며, 어느 실직자로부터 취직 미끼로 5백만원을 받아먹다가 쇠고랑을

찼습니다.

11) 모순법 : 서로 모순되는 말의 연결로 특별한 의미를 갖도록 표현하는 기법

예) 나는 그 친구가 평소와는 달리 귓속말로 소곤대는 척하며, 공개된 비밀을 떠벌리는 그 잔인한 친절에는 정나미가 뚝 떨어졌습니다.



2. 강조법

1) 영탄법 : 크게 감명을 받거나 또는 비통한 경우를 당했을 때 감탄어를 사용하는 기법

예) 오호라! 민족의 청사여!

예) 아! 어찌 우리 잊으랴! 통곡의 그날을!

2) 과장법 : 어떠한 사물을 사실보다 크게 표현하거나 또는 실제보다 작게 표현하는 기법

예)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실수가 있는 법이다.

예) 그 일에 대해선 티클만큼도 미련이 없습니다.

3) 점진법 :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층계를 오르내리는 것처럼 점차적으로 그 뜻이 강해지거나 약해지는 기법

예) 여러분은 성냥을 살 권리가 있다. 따라서 성냥을 켤 권리도 있다. 불을 켤 권리가 있으면 물건을 태울 권리도 물론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권리 행사는 마치 성냥을 들고 켜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 자신의 자유에 있는 것이다.

4) 역설법 : 모든 사람이 옳다고 믿거나 혹은 진리라고 믿고 있는 사실을 뒤집어 반대 주장을 관철시키는 방법

예)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5) 대조법 : 나타내고자 하는 사물과 반대되는 사물, 혹은 고저 강약의 한도가 서로 다른 사물을 비교시켜 사물의 상태나 흥취를 한층 강하고 선명하게 하는 기법

예) 충언(忠言)은 벗을 만들고, 감언(甘言)은 벗을 잃게 한다.

6) 열거법 : 서로 비슷한 구절이나 내용상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말을 되풀이하거나 나열해 놓는 기법

예) 어릴 때 나는 푸른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무조건 부러웠습 니다. 그리하여 기차 역무원이 되거나 순경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관사가 되는 게 꿈이었죠.

7) 반복법 : 두 번 세 번 같은 구절,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인상을 깊게 하는 표현 기법

예) 나는 비범한 문재(文才)가 내게 있기를 원한다. 나는 참으로 절세(絶世)의 학문이 내게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도 백 천 배 더 원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단 한번의 뜨거운 열애 (熱愛)이다.

8) 미화법 :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지 않고 아름다운 것은 좀 더 아름답게, 추한 것도 아름답게 미화하는 표현 기법

예) 윈스턴 처어칠은 몹시 화가 나서 상대방 의원에게 거짓말장 이라고 쏘아붙였습니다. 그리하여 처칠은 의장의 발언 취소 요구를 받았습니다. 의회에서 거짖말장이라는 말은 금지된 언사였습니다. 그러자 처칠은 정중히 발언을 취소한 다음 이렇게 고쳐 말했습니다. 불확실한 말의 제공자라고..

9) 억양법 : 처음엔 말소리를 올렸다가 나중에 내리거나 혹은 일단 내렸다가 나중에 올림으로써 본래의 내용을 강조하는 기법

예) 그는 재주는 비상하지만 인간성이 나빠요

10) 단절법 : 접속되는 어귀를 일부러 짧게 자르고 하나하나 독립시킴으로써 강조의 효과를 나타내는 기법

예) 애수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사랑이란 얼마나 고귀한가를 깨달았습니다. 지금껏 잊히지 않은 그 여인을 찾아가기로 결심 했습니다.



3. 변화법

1) 인용법 : 격언, 고사, 속담, 남의 말 등을 끌어다가 자기의 주장에 권위를 부여하거나 또는 내용의 충실성을 기하는 기법

예) 불행에 대한 특효약은 없다고 헉슬리는 말했습니다.

2) 생략법 : 말의 핵심이 되는 부분만을 요령 있게 이야기함으로써 함축의 미와 여운의 멋을 풍기는 기법

예)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3) 도치법 : 말의 순서를 뒤바꾸어 강조하려는 부분을 앞에 놓는 기법

예)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4) 설의법 : 의심의 여지가 없는 상황임에도 고의로 의문 형식을 취함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결론을 내리게 하는 기법

예) 여러분 가운데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또는 잠자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5) 문답법 : 처음에 정의를 세워놓고 나중에 물어보는 형식으로 말한 뒤 다시 그 물음에 답하는 식의 표현 기법

예) 인간의 본질은 정신이다. 그렇다면 정신이란 무엇이냐? 정신이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생각이다.

6) 경귀법 : 기발한 말귀로 익살, 암시, 교훈의 뜻을 내포시키는 기법

예) 나무에 잘 오르는 놈은 언젠가는 나무에서 떨어져 죽고, 헤엄 잘 치는 놈은 언젠가 물에 빠져 죽게 마련이지요.

7) 완곡법 : 간곡히 말할 수 있는 것을 돌려 말하거나 노골적인 인상을 주지 않도록 표현하는 기법

예) 플랫폼에서 흰 손수건을 흔들며 떠나는 그녀의 애틋한 마음을 사랑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8) 불판법 : 같은 말의 반복이나 이야기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상황을 리드미컬하게 표현하는 기법

예) 시가 나오고, 그림이 이루어지며, 음악이 나래를 폅니다.

9) 연쇄법 : 앞의 말이나 뜻을 이어받으면서 쇠사슬처럼 상황을 엮어서 설명하는 기법

예) 권태로운 여성보다 더 불쌍한 것은 슬픔에 싸인 여인이다. 슬픔에 싸인 여인보다는 더 불쌍한 것은 불행을 겪고 있는 여성이다. 불행을 겪고 있는 여성보다 더 불쌍한 것은 병을

앓고 있는 여인이다. 병을 앓고 있는 여인보다는 더 불쌍한 여인은 버림받은 여성이다.

10) 비약법 : 진행 중이던 화제를 돌연 다른 화제로 바꾸거나, 시간적, 공간적으로 비약시키는 기법

예) 그날 따라 명동 거리는 더없이 화려했습니다. 정확히 3년 전 바로 그 시각에 나는 어느 시골의 적막한 오솔길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왜 갑자기 그 오솔길 이야기를

꺼냈는지 아십니까? 본론은 지금부터입니다.



4. 스피치 할 때 세부아이디어를 설명하는 방법

1) 예시

2) 통계

- 긴 숫자는 반올림해서 사용한다.

- 통계 수치의 의미를 부연 설명한다.

- 너무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 통계 자료의 출처를 밝힌다.

3) 증언





수사학과 비판적 사고(Rhetoric and Critical Thinking)

 

 

김 영 정 (Young-Jung Kim)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철학박사

한국논리학회장, 한국인지과학회장 역임

 

 

 

. 철학적 수사와 소피스트적 수사

수사학(rhetoric)은 설득(persuasion)의 방법에 대한 탐구이다. 설득의 방법론으로서의 수사학은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맥락에 따른 상황적응성에 대한 강조와 언어적 표현의 설득적 힘에 대한 강조를 꼽을 수 있다.

수사학은 설득에 있어서 청자의 상황을 고려하고 그에 적합한 언어를 선택하는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각했던 소피스트들이 탄생시킨 학문이다. 일부의 소피스트들이 언어의 힘을 악용함으로써 반 수사적(anti-rhetoric) 전통이 성립했지만,소피스트들이란 동일한 주장이라도 그것을 전달하는 상황과 방식에 따라 설득력이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은 청자 중심적 상황론자들이었다.

본래 수사가인 레토르(rhetor)는 청자의 마음에 쾌감을 일으키는 음유 시인이 아니라 참된 사고의 전달자였다. 수사학은 연설과 토론의 기술에 관한 탐구로 출발했다. 민주주의가 일찍 꽃 핀 고대 그리스에서대화와 토론은 생활의 일부였고, 법정이나 대중 연설에서 청자를 설득하는 기술은 출세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시학(poetics)이 시인의 언어가 쾌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청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을 주는) 그 신비스런 현상에 대한 탐구였다면, 수사학은 참된 사고를 전달함으로써 청자의 생각과 태도에 변화를주는(,‘ 설득을하는) 방법에대한탐구였다.

, 수사학의 주된 목적은 감동을 주고자 하는 것 보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을가능한 폭넓은 동의를 구할 수 있는 방향으로전달하고자 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청자의 상황을 비롯한 담론의 환경과 표현적인 요소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수사가 속임수와 동일시된 것은, 사고적 요소들이 논리학으로 넘어가고 표현적인요소만이 남게 됨으로써였다. 수사학이 변질되는 역사는 논리학과 시학 사이에서 수사학의 정신이 실종되어 갔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사고의 보편적 형식에 대한 탐구에만 몰두했던 전통 논리학에 대한 반성으로 등장한 비판적 사고 운동은 논리적 전통과 수사적 전통의 결합으로 볼 수 있으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실종된 고전 수사학의정신의 복원인 것이다.

 

 

수사에는 두 얼굴이 있다. 그 부정적 측면은 경계의 대상이 되지만, 그 긍정적 측면은 비판적 사고의 중요한 기초가 된다.수사는 주어진 문제 상황에서 최선의 전략을 구상하는 종합적 사고력을 바탕으로 한다. 그 사고력이속임수 추리와 같은 것으로 나타날 때는 변질된 소피스트적 수사가 되지만, ‘비판적 추리로 나타날 때는 수사학의 본래 정신이 발현되는 때이다.

우리는 여기서 비판적 사고와 수사학 간의 의미 있는 연결 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논의의 환경에 대한 고려가 표현에 적극적으로 반영되도록 하는 것이 수사학의 본래 정신이었고, 수사학이 표현적인 요소들을 중히 여긴 것은 논의의 상황 및 환경에 대한 추리의 결과였을 따름이다. 상황에 적합한 설득의 전략을 구상하는 추리력이 수사력의 바탕에 있었지만, 이 추리력이 참되고 정의로운 것을 지향하려는 성향에서 벗어나 어떻게든 청자의 태도만을 변화시키겠다는 목적을 지향하기 시작할 때 수사학은 변질의 역사를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수사학이 가진 두 얼굴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좋은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서 단지 언어의 힘만으로 상대의 믿음, 욕구, 행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며, 반면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합당한 이유를 바탕으로 한 설득의 행위에 있어서 언어의 종류에 따라 설득력이 달라질 수 있음을 유념하는 태도이다.

 

비판적 사고는 완결된 사고가 아니라 잘못된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사고이며 끊임없이 자기 교정을 시도해 가는 과정의 사고이다. 비판적 사고에서 수용할 수 있는 수사란 항상 정의롭고 올바르고자 하는 성향에서 비롯된 언어적 전략으로서의 수사이다. 단지 표현의 기법만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와 연관되는지, 사태를 올바르게 전달하고 있는 것인지를 항상 반성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요구된다.

 

수사학은 상대의 지적 수준이나 감정적 상태 그리고 여러 가지 상황적인 요소들에 대한 고려를 참됨과 정의로 움의 토대 위에서 수행할 때 비판적 사고와 만날 수 있다. 수사학은 단지 기법의 학문이 될 때 궤변론으로 전락하면서 철학과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상황이 배제된 사고의 보편성만을 추구했던 전통 논리학에 대한 반성으로 개별적인 상황에서 사고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구체적인 인간의 사고의 논리를 다루는 것.

이러한 맥락에서 수사학과 시학과의 관계를 논하면서, 한자어수사(修辭)’가 변질된 의미로의‘rhetoric’에 대한 번역어임을 지적하고 고전 수사학의 정신을 담을 수 있는 적합한 번역어의 문제를 거론한 연구로 김헌의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 :시의 언어표현과연설의언어표현,

 고전수사학의전통(II)(한국서양고전학회2004년춘계학술대회) : 1~21쪽을소개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의 요소로 로고스(logos), 즉 논증적 요소, 파토스(pathos), 즉 정서적 요소, 에토스(ethos), 즉 윤리적 요소, 세 가지를 들고 있다(아리스토텔레스, Rhetorik, I, 1356 이하). 설득은 가르치다(docere)와 움직이다(movere)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가르침은 참됨을 기본으로 갖고 있기에 정당한 논거를 포함하며, 또한 가르치기 위해서는 사실을 정확히 나타내는 표현력을 요구한다. 이 둘은 모두 로고스적인 것들이다. 다른 한편 독자(청자)의 움직임을 위해서는 독자(청자)와의 공감대가 바탕이 되기에 공감적 표현(pathos)과 화자의 바람직한 윤리적 태도(ethos)가 요구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수사학적 기술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것은 즉 논거 발견술(inventio), 논거배열술(dispositio), 표현술(elocutio), 기억술(memoria), 연기 술(actio)이다. 이 중 기억술과 연기술은 현대에 들어와 거의 다루지 않고 우리 주제와도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나머지 세 가지 중 논거발견술은 착상, 구상 등으로도 표현되며 이 논거발견술과 논거배열술이 궁극적으로 사고와 직결되는 부분이다. 표현술은 사고를 언어로 전환시키는 능력인데, 근대 수사학은 주로 공감적 측면의 표현술만을 탐구함으로써 문체론으로 대표되는줄어든 수사학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페렐망 등의 신수사학은 사고와 표현의 통합을 추구하고 있다.

 

이 비판적 사고 운동이라고 할 때, 상황 적응력과 언어 표현력 그리고 도덕적 성향을 그 구성 요소로 가지는철학적 수사는 비판적 사고 연구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철학적 수사와 소피스트적 수사에 대한 대조는 이미 그리스 시대 플라톤의 대화편인테아이테토스편에도 나타나 있다.

 

소피스트들은 남을 이기는 법을 가르친다. 하지만 철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법을 가르칠 뿐이다. 소피스트들은 지연, 혈연에 얽매여 있고, (사색할 만한) 여유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래도 그들은 법정에서 논쟁 같은 것을 통해 세상일에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인(부모) 앞에서 노예와 논증을 벌여 일정한 시간 내에 결론을 내리고 승리를 이끌어 내야한다. 이 때문에 늘 피해망상에 걸린 사람처럼 어릴 때부터 공포와 불안에 시달린다. 이것저것 쌓은 지식으로 대단한 지혜를 갖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지혜롭지도 정직하지도 못한 삐뚤어진 마음의 소유자이다.

반면, 철학자들은 지연, 혈연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일에도 초연하기 때문에 사색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다. 철학자들은 어떤 주제에 대하여 정해진 결론을 무리해서 이끌어 내야 할 까닭이 없다. 사람들의 눈에 들기 위해 거짓말을 할 필요도, 자기의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억지 논리를 펴야 할 까닭도 없다. 철학자는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찾기 위해 대화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철학자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 테아이테토스,172b~177c 요약).

 

. 과학적 이유는 항상 좋은 이유인가?

설득은 청자에게 태도의 변화를 유도하는 행위로 정의될 수 있다. 설득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주장에 대한좋은이유가 제시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주장에 대해라는 질문을 할 때는 그 주장의 근거를 묻는 것이다. 주장에 대한 근거 혹은 이유를 제시하는 것은 주장을 정당화하는 행위이며, 이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설득의 행위가 논증이다.

논증에서 청자가 받아들이는 것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좋은 이유이다. 비판적 사고의 연구와 관련해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수사학은 상황에 따라좋은이유가 달라질 수 있음을, 즉 동일한 이유라도 그것들의 제시방식이 설득력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보도록 하자.

 

비만인 사람에게 다름 아닌 A 회사의 우유를 권장하는 이유로,

(1)“ A회사의 우유는 다른 회사의 것들과 비교해서 동일한 영양 성분을 가지면서도 훨씬 더 저지방이다.” 고 말하는 것은A 회사의 우유를 선택해야 하는 좋은 이유를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설득의 유형은 새로운 믿음, 즉 비만과 저지방 간의 과학적 연관을 만들어 주는 방식이다. 반면에,

 

(2)“ A 회사의 우유를 마시는 사람들은 건강해 보이더라.” 고 말하는 것은 앞의 것과 비교해서 좋은 이유가 아니라고 일반적으로 생각될 수 있다. 비판적 사고자는 과학으로 확인될 수 있는 믿음과 증거들을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득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리가 더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2)의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더 설득적일 수 있는 상황이 있다. 저지방과 비만의 관계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는 것이 더 설득적일 수 있다. , 화자와 청자 간에 공유되는 지식의 정도에 따라 설득의 방법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철수의 할머니는비만저지방이라는 개념들과 그것들 간의 과학적 연관에 대한 지식이 없다. 그러할 때 철수는 (1)의 방식보다 (2)의 방식으로 말함으로써 할머니의 믿음과 태도를 변화시켰다고 해보자. 철수는 수사적 고려를 한 것이다.

이 경우 설득을 당한 사람이 비판적 사고자가 아니라고 주장될 수는 있어도, 설득을 한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경우는비판적이란 개념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게 된다. 설득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2)의 방식으로 말한 것은 듣는 사람의 지식수준을, 즉 논의의 상황과 환경을 고려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만이 설득에 최선의 언어임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 고려된 것이며 이는 상황에 대한 종합적 판단의 결과이다.

 

우리는 여기서 비판적 사고자의 성향에 관한 로버트 에니스(Robert Ennis)의 언급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비판적 사고자는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상황에 맞게 증거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비판적 사고를 무엇을 믿고 무엇을 할 것인지에 관한 의사 결정에 초점을 맞춘 합리적이고 반성적인 사고로 정의하면서 비판적 사고자는 다음과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한다.

 

(a) 자신의 믿음이 참인가, 그리고 자신의 결정이 정당화되는 데 관심을 가진다. , 가능한 한 올바르고자 노력한다.

(b) 자신의 입장뿐 아니라 타인의 입장을 정직하고 분명하게 제시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c) 모든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고려한다. 넓게 보면, 수사적 태도는 상대의 존엄성에 대한 배려에서 시작된다. 주장의 근거는 과학적이어야 하지만 상대에 따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음을 고려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다.

사고에 언어의 옷을 입히는 행위가 설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아는 것이 수사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좋은이유가 상황 의존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고려하고자 하는 태도는, 비록 에니스는수사란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수사적 태도이다.

과학적 지식이 몸에 배면 밸수록, 또 사회가 복잡해지면 질수록, 설득의 대상과 그 내용은 더 복잡해 질 뿐 아니라 이를 위해 제시되는 근거들도 훨씬 더 정보적일 것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동일한 사태에 대한 진술에서도 어떤 종류의 언어가 사용되느냐에 따라 설득력이 달라질 수 있음을 고려하는 것도 비판적 사고자의 태도에 속한다. 과학자들 간의 관례에 의해 지배되는 문맥에서 과학을 논할 때는 가능한 객관적 논조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이른바 학술적 담론의 청중은 대개의 경우 동료 과학자들이다. 관찰과 결과를 기술하고 그것들이 도출되는 실험적 방법,예컨대 통계적 분석이나 수학적 분석 등을 언급하는 것은 동료 전문가들을 설득하기 위한 담론의 유형이다. 이때 작가는 과학의 맥락에서 말하고 있다.

반면에“A회사의 우유를 마시는 사람들은 건강해 보이더라고 말하는 것은 과학의 맥락에서 말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과학에 대해 말하는 것(talking about science), 과학의 맥락에서 말하는 것(talking in the context of science)을 구분해야 한다.

(2)의 방식, “A 회사의 우유를 마시는 사람들은 건강해 보이더라고 말하는 것은 과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과학의 맥락에서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학의 맥락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에서부터 덜 과학적으로 사고했다거나 제시된 이유가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이 반드시 도출되지 않는다. 추리의 질은 추리자가 내놓은 말과 글에 나타난 증거들만으로 평가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과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청자의 지식수준을 고려하고자 하는 성향, 즉 수사적 성향이 사고자 안에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에니스는비판적사고자를, 이러한 성향까지 지닌 자로 정의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런데 (2)의 방식으로 말한 것이 과연 비판적 사고자의 태도일까 하는 의문을 여전히 가질 수 있다. 물론 상대의 지적 상황도 고려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비판적 사고자란 과학적인 문맥에서 대화를 시도하고 저지방과 비만의 관계를 알려주고 그럼으로써 상대를 설득해야 하지 않을까?

(2)의 방식으로 말한 사람은 (1)의 방식으로 말한 사람보다 상대에게 설명해 주어야 할 것이 훨씬 더 많이 남아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그렇게 하고자 하는 사람이 보다 완전한 의미에서의 비판적 사고자이다. (2)의 방식으로 말함으로써 설득에 성공한 것에만 만족한다면 소피스트적인 수사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2)의 방식으로 말하지만 만일 화자가 과학적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올바른 수사가 아니다.

(2)의 방식으로 말한 사람이 비만과 저지방이라는 개념들, 그리고 그것들 간의 관계 등을 포함해서 상대에게 설명해야 할 것들을 더 많이 갖게 되는 이유는, 그와 청자 간에 공유되는 지식이나 믿음의 양이 매우적기 때문이다. , 이 경우는 화자와 청자 간에 지적인 거리가 크기 때문에 요구된 수사이다. 수사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조건들이 만족되어야 한다.

 

() 자신의 수사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 상대의 상황을 고려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어야한다.

() 상대에게 더 많은 것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는 지적 책임감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비판적 사고자는 자신의 수사에 대해 보다 많은 설명이 요구되었을 때 그렇게 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하고자 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따라서 수사적 태도는 언제든 가능한 질문과 대화에 열려져 있는 태도이기도 하다. 비판적 사고자는 참된 것을 알려주기 위해 취해져야 할 설득의 단계 및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Posted by WN1
,

세계인권선언

생각/내용 2014. 6. 21. 16:00

전문 

인류가족 모두의 존엄성과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 정의, 평화의 기초다. 인권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만행이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했던가를 기억해보라. 인류의 양심을 분노케 했던 야만적인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오늘날 보통사람들이 바라는 지고지순의 염원은 ‘이제 제발 모든 인간이 언론의 자유, 신념의 자유,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리라.


유엔헌장은 이미 기본적 인권, 인간의 존엄과 가치, 남녀의 동등한 권리에 대한 신념을 재확인했고, 보다 폭넓은 자유 속에서 사회진보를 촉진하고 생활수준을 향상시키자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도대체 인권이 무엇이고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는가?


유엔총회는 이제 모든 개인과 조직이 이 선언을 항상 마음속 깊이 간직하면서, 지속적인 국내적 국제적 조치를 통해 회원국 국민들의 보편적 자유와 권리신장을 위해 노력하도록, 모든 인류가 ‘다 함께 달성해야 할 하나의 공통기준’으로서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한다. 


1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2조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으며, 이 선언에 나와 있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3조 모든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킬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지킬 권리가 있다.


4조 어느 누구도 노예가 되거나 타인에게 예속된 상태에 놓여서는 안 된다. 노예제도와 노예매매는 어떤 형태로든 일절 금지한다.


5조 어느 누구도 고문이나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모욕, 형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 


6조 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 ‘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


7조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며, 차별 없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8조 모든 사람은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침해당했을 때, 해당 국가 법원에 의해 효과적으로 구제받을 권리가 있다. 


9조 어느 누구도 자의적으로 체포, 구금, 추방을 당하지 않는다.


10조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범죄인지 아닌지를 판별받을 때, 독립적이고 공평한 법정에서 공평하고 공개적인 심문을 받을 권리가 있다.


11조 범죄의 소추를 받은 사람은 자신을 변호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보장받아야 하고,  누구든지 공개재판을 통해 유죄가 입증될 때까지 무죄로 추정될 권리가 있다.


12조 개인의 프라이버시, 가족, 주택, 통신에 대해 타인이 함부로 간섭해서는 안 되며,  어느 누구의 명예와 평판에 대해서도  타인이 침해해서는 안 된다.


13조 모든 사람은 자기 나라 영토 안에서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서든 살 수 있다. 또한 그 나라를 떠날 권리가 있고, 다시 돌아올 권리도 있다.


14조 모든 사람은 박해를 피해, 타국에 피난처를 구하고 그곳에 망명할 권리가 있다.


15조 누구나 국적을 가질 권리가 있다. 누구든지 정당한 근거 없이 국적을 빼앗기지 않으며, 자기 국적을 바꾸거나 다른 국적을 취득할 권리가 있다.


16조 성년이 된 남녀는 인종, 국적, 종교의 제한을 받지 않고 결혼할 수 있으며, 가정을 이룰 권리가 있다. 결혼에 관한 모든 문제에 있어서 남녀는 똑같은 권리를 갖는다.


17조 모든 사람은 혼자서 또는 타인과 공동으로 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재산을 정당한 이유 없이 남에게 함부로 빼앗기지 않는다.


18조 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19조 모든 사람은 의사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20조모든 사람은 평화적인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20조 모든 사람은 평화적인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21조 모든 사람은 직접 또는 자유롭게 선출된 대표자를 통해, 자국의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모든 사람은 자기 나라의 공직을 맡을 권리가 있다.


22조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가 있다.


23조 모든 사람은 일할 권리,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권리, 공정하고 유리한 조건으로 일할 권리, 실업상태에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모든 사람은 차별 없이 동일한 노동에 대해 동일한 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다.


24조 모든 사람은 노동시간의 합리적인 제한과 정기적 유급휴가를 포함하여, 휴식할 권리와 여가를 즐길 권리가 있다. 


25조 모든 사람은 먹을거리, 입을 옷, 주택, 의료, 사회서비스 등을 포함해 가족의 건강과 행복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있다. 


26조 모든 사람은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초등교육과 기초교육은 무상이어야 하며, 특히 초등교육은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부모는 자기 자녀가 어떤 교육을 받을지 ‘우선적으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


27조 모든 사람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문화생활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예술을 즐기며, 학문적 진보와 혜택을 공유할 권리가 있다.


28조 모든 사람은 이 선언의 권리와 자유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체제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다.


29조 모든 사람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 한 인간으로서 의무를 진다. 


30조 이 선언에서 말한 어떤 권리와 자유도 다른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짓밟기 위해 사용될 수 없다. 어느 누구에게도 남의 권리를 파괴할 목적으로 자기 권리를 사용할 권리는 없다.

Posted by WN1
,

 

 

공산당 선언문(마르크스-엥겔스) -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공산당선언 (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

 

- K. marx, F. Engels

 

하나의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A spectre is haunting Europe)--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교황과 짜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의 첩보경찰 등 구유럽의 모든 열강은 이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다.

집권당으로부터 공산당이라는 비난을 받아보지 않은 반대당이 있는가? 또한 그 공산주의라는 비난의 낙인을 오히려 자기의 반동적 적들에게, 뿐만 아니라 보다 진보적인 다른 반대당에게 되돌려지지 않는 반대당이 있는가?

이 사실로부터 두 가지 점이 도출된다.

1. 모든 유럽의 열강은 이미 공산주의를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했다.

2. 지금은 공산주의자들이 당 자체의 선언을 통하여 전세계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견해, 목적, 경향성을 발표하고 공산주의의 유령이라는 그 옛날이야기에 대처할 수 있는 가장 알맞는 시기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여러 국적을 가진 공산주의자들은 런던에 모여 다음과 같은 선언을 초안하고 이를 영어, 불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플랑드르어, 덴마크어로 출판하게 된 것이다.

 

 

I.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장인과 직인, 한 마디로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항상 서로 대립하면서 때로는 숨겨진, 때로는 공공연한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각각의 싸움은 그때마다 대대적인 사회의 혁명적 재편 또는 경쟁하는 계급들의 공동파멸로 끝났다.

이전의 역사적 시대에서는 거의 모든 곳에서 사회가 다양한 질서, 잡다한 사회적 서열의 등급으로 복잡하게 배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대 로마에는 귀족, 기사, 평민, 노예가 있었고, 중세에는 봉건영주, 가신(家臣), 길드장인, 직인, 도제, 농노가 있었다. 이들 계급의 거의 대부분은 또 부수적인 등급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봉건사회의 폐허로부터 싹튼 현대 부르주아사회는 계급적대를 없애지 못했다. 단지 낡은 것들 대신 새로운 계급, 새로운 억압의 조건, 새로운 투쟁형태들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 부르주아지의 시대는 명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계급적대를 단순화시킨 것이다. 전체 사회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양대 적대적 진영으로, 서로 직면하고 있는 양대 계급으로 점점 더 분열되어 가고 있다.

중세 농노로부터 초기 도시의 시민이 생겨났으며, 이 시민으로부터 부르주아지의 최초 분자들이 발전해 나왔다.

아메리카의 발견, 케이프 항로의 발견은 떠오르는 부르주아지를 위한 신선한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동인도와 중국의 시장, 아메리카의 식민지화, 식민지와의 무역, 교환수단의 상품의 전반적인 증가는 상업과 해운업 및 공업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충격을 가하였으며, 또 그럼으로써 비틀거리는 봉건사회내의 혁명적 요소에게는 급속한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폐쇄적 길드가 산업생산을 독점하고 있던 봉건적 산업체계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시장이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를 대신한 것이 곧 매뉴팩처 체계였다. 길드장인은 매뉴팩처 중간계급에 의해 밀려났으며, 서로 다른 자치적 길드들 간의 분업은 사라지고 각 공장 내에서의 분업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시장은 꾸준히 성장했으며, 수요 또한 계속 상승하고 있었다. 그래서 매뉴팩처조차도 이제 불충분한 것이 되었다. 또한 증기와 기계가 산업생산을 혁명적으로 발전시켰다. 매뉴팩처의 위치는 거대한 현대산업으로 대체되고 산업 중간계급의 위치는 산업 백만장자, 전체 산업부대의 지휘관, 현대 부르주아지가 차지하게 되었다.

현대산업은 아메리카의 발견으로 길이 트인 세계시장을 확립했다. 세계시장은 상업, 해운업, 육상교통의 엄청난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발전은 거꾸로 산업의 확장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즉 공업, 상업, 해운업, 철도가 확장되는 것과 똑같은 비율로 부르주아지는 발전했으며 자신의 자본을 증가시켰고, 중세시대로부터 이어 내려온 모든 계급을 뒷전으로 밀어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현대 부르주아지 자체가 긴 발전과정의 산물이며, 생산양식과 교환양식에서의 일련의 혁명이 낳은 산물임을 알 수 있다.

부르주아지의 각 발전단계에는 그에 상응하는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진보가 뒤따랐다. 봉건귀족의 지배하에서는 피억압계급으로, 중세 코뮨에서는 무장자치단체--어느 곳에서는 자립적 도시공화국(이탈리아와 독일), 또 어느 곳에서는 군주의 과세대상인 것제3신분겄(프랑스)--로 있던 부르주아지는 이후 메뉴팩처 시기에는 귀족에 대한 대항세력으로서, 사실상 일반적으로는 대군주들의 초석으로서 반(半)봉건군주 또는 절대군주에 봉사했으며, 현대산업과 세계시장이 확립되면서부터는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 현대의 대의제국가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현대국가의 집행기구는 단지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동사를 관리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부르주아지는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지배를 확립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든 봉건적, 가부장적, 전원적 관계를 종식시켜 왔다. 부르주아지는 인간을 것타고난 상하관계겄에 묶어 놓는 잡다한 봉건적 끈을 가차없이 끊어버렸으며, 그 외의 모든 인간의 관계를 적나라한 이기심, 냉혹한 것현금지불관계겄로만 만들어 놓았다. 또한, 가장 신성한 종교적 정열의 환희, 기사도적 열정의 환희, 세속적 감상주의의 환희를 자기중심적 타산이라는 얼음같이 차디찬 물 속에 빠뜨려버렸다. 또, 개인의 존엄성을 교환가치로 용해시켜 버렸으며, 결코 무효화될 수 없이 공인된 무수한 자유 대신 저 자유무역이라는 단 하나의 파렴치한 자유를 세워 놓았다. 한 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정치적 환상으로 가려진 착취를 적나라하고 후안무치하고 노골적이고 야수 같은 착취로 대체한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지금까지 존경과 경건한 경외심으로 받들어졌던 모든 직업으로부터 그 후광을 걷어냈다.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과학자를 자신이 보수를 주는 임금노동자로 전환시켜 버린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가족으로부터 그 감정의 장막을 찢어내고 가족관계를 단순한 돈의 관계로 만들었다.

부르주아지는 복고주의자들이 그토록 경애해마지 않는 중세시대의 야수같은 힘의 과시가 어떻게 하여 가장 게으른 나태로써 훌륭히 보완되는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가 과연 무엇을 낳을 수 있는가를 처음으로 보여준 예였다. 부르주아지는 이집트 피라밋이나 로마의 수도(水道), 고딕 성당을 훨씬 능가하는 기적을 이룩했다. 이전의 모든 민족대이동이나 십자군 따위의 견주지도 못할 원정들을 감행한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끊임없이 생산도구를 혁명적으로 개조하고, 그럼으로써 생산관계를 개조하며, 또 그와 더불어 사회관계 전체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 반면, 이전의 모든 산업 계급들에게는 낡은 생산양식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자신의 1차 존재조건이었다. 끊임없는 생산의 혁명적 발전, 모든 사회적 조건들의 부단한 교란, 항구적인 불안과 동요는 부르주아 시대의 이전의 모든 시대를 구분 짓는 특징이다. 모든 고정되고 꽁꽁 얼어붙은 관계들, 이와 더불어 고색창연한 편견과 견해들은 사라지고, 새로이 형성된 모든 것들은 골격을 갖추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딱딱한 것은 모두 녹아 사라지고, 거룩한 것은 모두 더럽혀지며, 마침내 인간은 냉정을 되찾고 자신의 실제 생활조건, 자신과 인류의 관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생산물을 팔 수 있는 시장을 끊임없이 확장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으로 인해 지구상의 모든 구석구석을 누벼야 한다. 부르주아지는 가는 곳마다 둥지 틀고 자리잡고 연고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세계시장의 착취를 통하여 각 나라의 생산과 소비에 범세계적인 성격을 부여해왔다. 복고주의자들에게는 매우 유감이겠으나 부르주아지는 산업의 발 밑으로부터 산업이 딛고 서 있는 일국적 기반을 빼앗아냈다. 기존에 확립된 모든 일국적 산업들은 이미 파괴되었거나 나날이 파괴되어 가고 있다. 모든 문명민족들이 생사를 걸고 도입하려 하는 새로운 산업, 이제 더 이상 토착 원료자원을 가공하지 않고 가장 먼데서 온 원료자원을 가공하면서도 그 생산물은 국내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구석에서 소비되는 새로운 산업이 그 낡은 산업들을 몰아내고 있다. 그 나라의 생산물로 충족되던 낡은 욕구 대신에, 먼 나라 먼 토양의 생산물로 충족될 수 있는 새로운 욕구가 생겨난다. 낡은 지역적, 민족적, 단절과 자급자족 대신 모든 방면에서의 상호교류 민족들간의 보편적 상호의존이 나타난다. 이는 물질적 생산뿐 아니라 정신적 생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개별 민족의 지적 창조물은 공동의 재산이 된다. 민족적 편향성과 편협성은 점차 불가능해지며, 수많은 민족적, 지역적 문학들로부터 하나의 세계문학이 생겨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생산도구가 급속히 향상되고 교통수단이 엄청나게 개선됨으로써, 가장 미개한 민족을 포함하여 모든 민족을 문명화시킨다. 상품의 저렴한 가격은 모든 만리장성을 무너뜨리고 외국인에 대한 미개인의 매우 고집스런 증오를 굴복시키는 대포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에게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채택할 것이냐 죽을 것이냐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며, 가지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도입할 것 즉, 부르주아 자체가 될 것을 강요한다. 한 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기자신의 모습 그대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시골을 도시의 지배에 복속시켰다. 부르주아지는 거대도시들을 만들었고, 농촌에 비해 도시인구를 엄청나게 증가시켰으며, 이를 통해 상당 부분의 인구를 농촌생활의 백치상태로부터 구출해냈다 .또한 시골이 도시에 종속되도록 만든 것과 똑같이 미개국과 반미개국들이 문명국들에게, 농민의 나라가 부르주아의 나라에게, 동양이 서양에게 종속되도록 만들었다.

부르주아지는 인구, 생산수단, 재산의 분산된 상태를 점차 제거하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인구를 한데뭉치고, 생산수단을 집중시켰으며, 재산을 소수의 손에 집적시켰다. 이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로 정치적 집중이 이루어졌다. 개별적 이해관계와 법률, 정부, 조세제도를 갖고 있던 독립적 지역 또는 그것들과 대충 관련된 지역들은 하나의 정부, 하나의 법조문, 하나의 일국적 계급이해, 하나의 국경, 하나의 관세를 지닌 하나의 나라로 뭉치게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백년 남짓한 자신의 지배기간 동안 이전의 모든 세대들이 이루어낸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거대하고 엄청난 생산력을 창출했다.

인간에 대한 자연력의 복속, 기계, 공업과 농업에서의 화학의 응용, 기선, 철도, 전기통신, 경작을 위한 전 토지의 개간, 운하 건설, 땅에서 솟아난 듯한 거대한 인구--이전세기에 그러한 생산력이 사회적 노동의 품속에 잠자고 있으리라고 예감이나마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할 수 있다. 부르주아지가 딛고 서 있는 토대인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은 봉건사회속에서 생성된 것이다. 이들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이 특정한 발전단계에 이르자, 봉건사회가 생산하고 교환하는 조건, 농업과 제조업의 봉건적 조직, 한마디로 말해, 봉건적 소유관계는 이미 발전되어 있는 생산력과 더 이상 양립할 수 없게 되었으며 오히려 그만큼의 질곡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것들은 산산이 부서져야 했으며, 실제로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그 자리에는 자유경쟁이 대신 들어섰으며, 또 자유 경쟁에 맞는 사회적, 정치적 구조가 뒤따랐고, 부르주아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지배가 뒤따랐다.

지금 우리 눈앞에도 비슷한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 자신의 생산관계, 교환관계, 소유관계를 가지고 있는 현대 부르주아사회, 엄청난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을 출현시킨 이 사회는 자기가 주술로 불러낸 명부(冥府)세계의 힘을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하게 된 마법사와도 같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산업과 상업의 역사는 오직 현대적 생산조건에 대한, 또 부르주아지와 그 지배의 존재조건인 소유관계에 대한 현대적 생산력의 반란의 역사일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주기적으로 일어나면서 갈수록 더 한층 위협적으로 전체 부르주아사회의 존망을 시험대에 올려놓는 상업공황만을 언급해도 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공황에서는 기존 생산물뿐 아니라 이전에 창조된 생산력의 거의 대부분이 주기적으로 파괴된다. 또한 이전의 모든 시대에는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졌을 전염병, 즉 과잉 생산의 전염병이 번지게 된다. 사회는 갑자기 순간적인 야만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마치 기근이나 전면전의 황폐로 인해 모든 생존수단의 공급이 차단된 것처럼 된다. 산업과 상업은 파괴된 듯이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과도한 문명화, 과도한 생존수단, 과도한 산업, 과도한 상업 때문이다. 사회의 수중에 있는 생산력은 더 이상 부르주아적 소유조건을 더 한층 발전시키는 데로 향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생산력은 소유조건에 비해 너무 강력해져서 오히려 그것에 의해 질곡당하며, 질곡을 극복하자마자 생산력은 부르조아사회 전체를 무질서하게 만들고 부르주아적 소유의 존재를 위태롭게 만든다. 부르주아사회의 여러 조건은 생산력이 만들어낸 부를 포괄하기에는 너무 협소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부르주아지는 어떻게 이러한 공황을 극복하는가? 한편으로는 생산력의 대향 파괴를 강화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정복하고 기존의 시장을 더욱 철저하게 착취함으로써 극복한다. 달리 말해 그것은 보다 범위가 넓고 보다 파괴적인 공황을 위한 길을 닦으며, 공황을 예방하는 수단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봉건제를 무너뜨렸던 무기가 이제 부르주아지 자신을 겨냥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자신을 죽이는 무기를 주조했을 뿐 아니라 이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인 현대 노동계급, 곧 프롤레타리아들도 탄생시켰다.

부르주아지, 즉 자본이 발전하는 것과 똑같은 정도로 프롤레타리아트, 즉 현대 노동계급도 발전한다. 이들은 일거리가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으며, 그들의 노동이 자본을 증대시키는 한에서만 일거리를 찾을 수 있다. 이들 노동자는 다른 보통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을 조금씩 팔아야 하는 하나의 상품이며, 따라서 경쟁의 성패 여하에, 시장의 동요 여하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기계의 광범위한 활용과 분업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은 모든 개인적 성격을 잃었으며, 그 결과 노동자에 대한 매력도 사라졌다. 노동자는 이제 기계의 부속물이며,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가장 단순하고 가장 단조로우며 가장 쉽게 획득한 기술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의 생산비용은 거의 전적으로 그가 자신을 유지하고 종족을 번식시키는데 필요한 생존수단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상품의 가격, 곧 노동의 가격은 그 생산비용과 같다. 그러므로 노동에 대해 느끼는 반발심이 강할수록 임금은 감소한다. 그뿐 아니라 기계의 사용과 분업이 증가할수록, 노동시간이 연장되거나 주어진 시간 내에 강제된 노동량이 증대하거나 기계 속도가 빨라지거나 하는 등으로 인해 고통스런 짐 또한 증가한다.

현대산업은 가부장적 장인의 작은 작업장을 산업자본가의 거대한 공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공장으로 결집된 노동자대중은 군대식으로 편성된다. 그들은 산업군대의 사병(私兵)으로써 장교, 하사관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위계의 지휘하에 있다. 그들은 부르주아적 계급, 부르주아국가의 노예일 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시간이 갈수록 기계에 의해, 관리자에 의해, 무엇보다도 개별 부르주아적 공장주 자신에 의해 노예화되고 있다. 이러한 전횡은 영리가 그 목표이자 목적임을 노골적으로 선언하면 할수록 더 한층 인색해지고 증오스러워지고 쓰라린 것이 된다.

육체 노동에 필요한 기술과 발휘되는 힘이 줄어들수록, 바꿔 말해서 현대산업이 발전할수록 더 한층 남성의 노동은 여성의 노동으로 대체된다. 연령과 성별의 차이는 더 이상 노동계급에게 사회적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연령의 성별에 따라 사용하는 값이 다르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노동의 도구인 것이다.

지금까지 노동자에 대해 공장주의 착취가 끝나고 노동자가 임금을 현금으로 받게 되자마자 부르주아적의 기타 부분, 즉 집 주인, 상점 주인, 전당포 주인등이 노동자에게 달려든다.

도매상, 상업주, 일반적으로 은퇴한 상인들, 수공업자와 농민 등 중간계급의 하층은 점차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그들의 영세자본으로는 현대산업이 움직이는 규모를 감당할 수 없고, 대자본가와의 경쟁에서 뒤쳐지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산방식으로 인해 그들의 전문화된 기술이 쓸모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계급의 인구로부터 충원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양한 발전단계를 거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생겨나자마자 부르주아지와의 투쟁도 시작된다. 처음에는 개별 노동자들이 싸움을 시작했으나 다음에는 한 공장의 근로자들이, 그 다음에는 한 직종, 한 지역의 직공들이 자신들을 직접 착취하는 개별 부르주아를 상대로 싸우게 된다. 그들은 부르주아적 생산조건에 대해서가 아니라 생산도구 자체에 대해서 공격을 가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노동과 경쟁하는 수입품을 쳐부수며, 기계를 산산조각내고, 공장을 불지르며, 사라져버린 중세시대 근로자의 지위를 무력으로 회복하고자 한다.

이 단계에서 노동자는 아직 전국에 흩어져 있고 자기들 간의 상호경쟁으로 분열되어 있는 지리멸렬한 대중에 머물러 있다. 설사 그들이 모여 보다 긴밀한 결합체를 이룬다 해도 그것은 아직 그들 자신이 연합한 결과가 아니라 부르주아지가 연합한 결과이다. 부르주아계급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프롤레타리아트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으며, 게다가 아직 당분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적의 적, 즉 절대군주제의 잔재인 지주, 비산업부르주아, 쁘띠부르주아지와 싸우는 것이다. 이리하여 전체 역사적 운동은 부르주아적 수중에 집중된다. 그렇게 얻어진 승리는 모두 부르주아지를 위한 승리인 것이다. 그러나 산업이 발전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숫자가 증가할 뿐 아니라 보다 큰 무리로 집중되어 힘이 더욱 성장하며, 그 힘을 더욱 자각하게 된다. 기계가 노동의 모든 차이들을 소멸시키고 거의 모든 곳에서 임금을 동일하게 낮은 수준으로 감축시키는 것과 비례하여 프롤레타리아트 대열 내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생활조건은 더욱 더 평준화된다. 부르주아들 간의 경쟁이 격화되고 그 결과 상업공황이 일어나면서 노동자의 임금은 갈수록 동요하게 된다. 기계가 급속히 발전하고 끊임없이 개선되면서 노동자의 생활은 갈수록 불안정해진다. 따라서 개별 근로자와 개별 부르주아 간의 충돌은 갈수록 두 계급간의 충돌이라는 성격을 띠게 된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에 반대하는 결사체(노동조합)를 결성하기 시작하며, 임금율을 높이기 위해 한데 뭉치고, 때때로 일어날 충돌에 미리 대비하기 위해 단체를 창건한다. 여기저기에서 싸움은 폭동으로 터지게 된다.

때때로 노동자는 승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다. 싸움의 실제적 결실은 직접적인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팽창하는 노동자들의 단결에 있다 .현대산업이 만들어낸 전달 수단으로 인해 여러 지역의 노동자들이 서로 접촉할 수 있게 됨으로써 단결은 한층 확대된다. 바로 이 접촉이야말로 같은 성격을 지니는 수많은 지역적 투쟁을 계급들간의 하나의 전국적 투쟁으로 집중시키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 중세 시대의 시민이 옹색한 도로를 가지고 수백 년의 기간을 거쳐 달성한 그 단결을 한 대 프롤레타리아는 철도에 힘입어 수 년간 이룩한다.

이렇게 프롤레타리아를 하나의 계급으로, 나아가 하나의 정당으로 조직하는 일은 노동자 자신들 간의 경쟁으로 인해 계속 저해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럴수록 항상 다시 솟아오르며, 강해지며, 굳어지며, 거세지고 있다. 그 조직은 부르조아지 자체의 분열을 이용하여 노동자의 특정한 이해에 대한 입법적 승인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영국에서는 10시간 노동법안이 통과되었다.

기존 사회의 계급들 간에 일어나는 모든 충돌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과정을 촉진시킨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항상적인 싸움속에 있음을 깨닫는다. 부르주아지는 처음에는 귀족과, 이후에는 부르주아지 가운데 산업의 진보에 대해 적대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게 된 일부분과, 그리고 외국의 부르주아지와는 항상, 싸움을 벌여왔다. 이 모든 싸움에서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호소하고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으며, 그리하여 그들을 정치무대로 끌어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결국 부르주아지는 스스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기자신의 정치교육과 일반교육의 요소들을 공급하게 된다. 달리 말해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신과 맞서 싸울 무기를 주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본 대로 지배계급의 모든 분파들은 산업의 진보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하거나, 적어도 자신의 존재조건을 위협당하게 된다. 이들 역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계몽과 진보의 새로운 요소를 공급한다.

마지막으로, 계급투쟁이 결정적인 순간에 다다르게될 때 지배계급 내부에서, 아니 사실상 기존 사회 전체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붕괴과정은 매우 격렬하고 강렬한 성격을 띠게 되므로 지배계급의 일부가 떨어져나와 미래를 자기 수중에 장악하고 있는 혁명적 계급의 편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찍이 귀족의 일부가 부르주아지 편으로 넘어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부르주아적 한 부분, 특히 역사적 운동 전반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으로 스스로를 끌어올린 부르주아적 사상가들의 부분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으로 넘어온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대립하고 있는 모든 계급들 가운데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진정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다른 계급들은 현대산업이 전진함에 따라 몰락하며 결국 사라져가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현대 산업의 특수하고도 본질적인 산물이다.

중간계급 하층, 소규모 공장주, 상점주, 기능공, 농민 등 이들 모두는 중간계급의 각 부분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키지 않기 위해서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운다. 그러므로 그들은 혁명적이 아니고 보수적이다. 게다가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후진시키려 하기 때문에 반동적이기도 하다. 간혹 그들이 혁명적인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로의 전락이 임박했음을 예감했을 경우에만 그러하다. 그때 그들은 자신의 현재 이익이 아닌 미래 이익을 수호하며, 자신의 입장을 버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낡은 사회의 최하층에서도 내팽개쳐진, 수동적으로 썩어가는 대중인 것위험한 계급겄, 사회적 쓰레기는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인해 곳곳에서 운동 속에 휩쓸릴 수 있으나, 그 생활조건 때문에 그들은 거의가 반동적 음모에 의해 매수되는 도구의 일부가 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조건들 가운데 낡은 사회의 조건들은 대부분 이미 사실상 곤궁에 처해있다. 프롤레타리아는 재산도 없고, 처자와의 관계도 이제 더 이상 부르주아적 가족관계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으며, 영국에서나 프랑스에서나 미국에서나 독일에서나 현대적 산업노동, 자본에 대한 현대적 종속으로 인해 그는 일체의 민족적 성격을 잃어버렸다. 그에게 법, 도덕, 종교 따위는 바로 그만큼의 부르조아적 편견과 똑같으며, 그 뒤에는 그만큼의 부르조아적 이익이 매복해 있을 뿐이다.

선행했던 모든 지배계급들은 사회의 대부분을 자신의 전유(專有)조건하에 종속시킴으로써 기존의 지위를 강화하고자 했다. 프롤레타리아는 자기자신의 이전의 전유양식을 폐지하지 않고서는, 또 그럼으로써 다른 모든 전유양식을 폐지하지 않고서는, 또 그럼으로써 다른 모든 전유양식까지 폐지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생산력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들은 획득하고 강화시킬 그 무엇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사명은 지금까지 개인재산을 보호하고 보장해 온 모든 것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전의 역사적 운동은 모두 소수의 운동이며 소수의 이익을 위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거대한 다수의 자의식적이고 자주적인 운동이며, 거대한 다수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우리 현 사회의 최하층인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적 사회의 모든 상위층들이 사라지지 않고서는 움직일 수도 일어설 수도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의 투쟁은 처음에, 내용에서는 아니더라도 형식에서는 일국적인 투쟁이다. 따라서 각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당연히 무엇보다 먼저 자국 부르조아지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일반적인 발전국면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기존 사회 내에서 벌어지는 어느 정도 은폐된 내전을 추적하여, 그 내전이 공개적인 혁명으로 터져나오고 부르조아지를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를 위한 토대를 놓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다.

이미 보았듯이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형태는 억압계급과 피억압계급간의 적대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한 계급을 억압하려면 그 계급이 적어도 자신의 노예적 존재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일정한 조건이 보장되어야 한다. 농노제시대의 농노가 코뮨의 구성원으로 발전해 나갔듯이, 봉건적 절대주의의 멍에 속에 있던 쁘띠부르조아는 부르조아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 노동자는 산업의 진보에 따라 떠오르기는커녕 자기 계급이 존재조건 아래로 더욱 가라앉는다. 노동자는 빈민이 되며, 빈곤은 인구나 부의 증가보다 더 빨리 발전한다. 여기서, 부르조아지가 사회의 지배계급이 되거나 자신의 존재조건을 고압적인 법률로 사회에 강제하는 따위는 이제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즉, 부르조아지는 자신의 노예제 내에서 노예의 생존을 보장해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즉 노예가 자기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노예를 먹여 살려야 하는 상황으로 노예를 빠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지배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사회는 이제 이 부르조아지 아래에서 살 수 없다. 달리 말해 부르조아지의 존재는 더 이상 사회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부르조아계급의 존재와 지배를 위한 본질적 조건은 자본의 형성과 증대이며, 자본의 조건은 임금노동이다. 임금노동은 오직 노동자들 간의 경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타의적이기는 하지만 부르조아지가 촉진시키는 산업의 진보는 경쟁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고립 대신 결사로 인한 혁명적 결합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현대산업의 발전은 부르조아지가 생산물을 생산하고 전유하는 바로 그 토대를 그 발 밑에서 무너뜨리는 셈이다. 결국 부르조아지가 생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무덤을 파는 자일뿐이다. 부르조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양자 모두 불가피한 것이다.

 



II.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공산주의자는 노동계급의 당들과 대립하는 별도의 당을 결성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지는 이해와 별도로 분리된 이해를 가지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자신만의 분파적 원칙을 세워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이 원칙에 뜯어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서만 다른 노동계급의 당들과 구별된다. (1) 각국 프롤레타리아의 일국적 투쟁에서, 일체의 국적으로부터 독립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 이해를 제기하고 전면에 내세운다. (2) 부르조아지에 반대하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거치는 다양한 발전단계에서, 언제 어디서나 그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는 한편으로 실천적인 면에서는 모든 나라 노동계급 당들 가운데 가장 선진적이고 결의에 찬 부분으로서 다른 모든 당들을 밀고 나아가며, 다른 한편으로 이론적인 면에서는 거대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비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행노선, 조건, 궁극적인 전반적 결과들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공산주의자의 당면 목적은 다른 모든 프롤레타리아 당들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시키고, 부르조아 지배를 타도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도록 하는데 있다.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지는 이해와 별도로 분리된 이해를 가지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자신만의 분파적 원칙을 세워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이 원칙에 뜯어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서만 다른 노동계급의 당들과 구별된다. (1) 각국 프롤레타리아의 일국적 투쟁에서, 일체의 국적으로부터 독립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이해를 제기하고 전면에 내세운다. (2) 부르조아지에 반대하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거치는 다양한 발전단계에서, 언제 어디서나 그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는 한편으로 실천적인 면에서는 모든 나라 노동계급 당들 가운데 가장 선진적이고 결의에 찬 부분으로서 이론적인 면에서는 거대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비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행노선, 조건, 궁극적인 전반적 결과들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공산주의자의 당면 목적은 다른 모든 프롤레타리아 당들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시키고, 부르조아 지배를 타도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도록 하는데 있다.

공산주의자의 이론적 명제들은 결코 이러저러한 자칭 보편적 개혁가가 발명 또는 발견한 사상이나 원칙들에 기초하지 않는다.

그 명제들은 단지 일반적인 견지에서 현존하는 계급투쟁으로부터, 바로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운동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실제적 관계들을 표현할 뿐이다. 현존하는 소유관계의 폐지는 결코 공산주의의 명백한 특질이 아니다.

과거의 모든 소유관계는 역사적 조건의 변화에 따른 역사적 변화에 항상 종속되어 왔다.

예를 들어 프랑스혁명은 부르조아적 소유의 편에서 봉건적 소유를 폐지했다.

공산주의의 명백한 특질은 소유 일반의 폐기가 아니라 부르조아적 소유의 폐지이다. 그런데 현대 부르조아적 사유재산은 게급적대에 기초한, 소수에 의한 다수의 착취에 기초한 생산물의 생산, 전유 체제의 최종적이고도 가장 완벽한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산주의자의 이론은 사유재산의 폐지라는 단 하나의 문구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공산주의자는 한 사람이 자기 노동의 결실로서 사적으로 얻은 재산, 이른바 모든 사적 자유, 행동, 자주성의 기반이라고 일컬어지는 재산에 대한 권리를 폐지하려 한다고 비난받아 왔다.

자기가, 자신의 힘으로, 애써 벌어들인 재산이라니!

그것은 부르조아 재산형태에 선행하는 소기능공이나 소농민의 재산을 뜻하는가? 그것이라면 폐지할 필요도 없다. 산업의 발전이 이미 상당히 파괴해 왔고 지금도 나날이 파괴하고 있으므로.

그렇다면 현대 부르조아적 사유재산을 뜻하는가?

그러나 임금노동을 착취하는 재산, 새로운 착취를 위한 임금노동이 새로운 공급을 창출하는 조건이 없이는 증가될 수 없는 재산이다. 현재의 소유형태는 자본과 임금노동의 적대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제 이러한 적대의 양 측면을 검토해 보자.

자본가가 된다는 것은 생산에서 순수히 사적인 지위뿐 아니라 사회적인 지위도 갖는다는 것이다. 자본은 집단적 산물이며, 오직 많은 구성원들의 공동 행동에 의해서만, 아니 궁극적으로는 전사회 구성원들의 공동행동에 의해서만 운동할 수 있다.

요컨대 자본은 사적인 힘이 아니라 사회적인 힘이다.

그러므로 자본이 공동재산, 전 사회 구성원의 소유로 바뀐다고 해서 개인적 소유가 사회적 소유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변화되는 것은 단지 소유의 사회적 성격뿐이다. 소유는 그 계급적 성격을 잃는다.

이제 임금노동을 보자.

임금노동의 평균가격은 최저임금, 즉 노동자를 노동자로서 겨우 생존하게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존수단의 양이다. 그러므로 임금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전유하는 것으로는 단지 그 생존의 연장과 재생산만을 충족시킬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결코 그러한 노동생산물의 사적 전유를 폐지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생활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것일 뿐, 다른 사람의 노동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잉여를 남기지 낳는다. 우리는 오로지 그러한 전유의 비참한 성격을 제거하고자 할뿐이다. 그러한 전유하에서 노동자는 단지 자본을 증대시키기 위해 살아가며, 지배 계급의 이익이 요구하는 한에서만 살아갈 것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부르조아사회에서 산 노동은 축적된 노동을 증가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반면 공산주의사회에서 축적된 노동은 노동자의 생존을 넓히고 풍요롭게 하며 촉진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르조아사회에서는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지만, 공산주의사회에서는 현재가 과거를 지배한다. 부르조아사회에서 자본은 독립적이고 개성을 갖는 반면, 살아 있는 사람은 종속적이고 개성을 갖지 못한다.

부르조아는 이러한 상태의 폐지를 개성과 자유의 폐지라고 말한다! 그것은 옳다. 그것은 바로 부르조아적 개성, 부르조아적 독립성, 부르조아적 자유의 폐지를 목표로 하는 것이므로.

현재의 부르조아적 생산조건하에서 자유라 할 때 그것은 자유거래, 자유매매를 뜻할 뿐이다.

그러나 매매가 사라진다면 자유매매 역시 사라진다. 자유매매에 관한 이야기, 그 밖의 자유 일반에 관한 우리 부르조아지의 것호언장담겄 따위는 모두,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다면 단지 중세시대 속박된 상인들의 제한된 매매와 대비에서만 그러할 뿐, 매매, 부르조아적 생산 조건, 그리고 부르조아지 자체에 대한 공산주의적 폐지와 대비될 때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당신은 우리가 사유재산을 폐지하려 하는데 대해 경악한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9./10의 인구에게 사유재산은 이미 제거되었다. 소수에게 사유재산이 있는 이유는 순전히 그 9/10의 수중에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사회의 광범한 대다수에게 일체의 재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그 존재의 필요조건으로 하는 재산형태를 제거하려 한다고 우리를 비난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당신은 우리가 당신의 재산을 제거하려한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다. 우리는 그것을 하려 한다.

노동이 더 이상 자본이나, 화폐, 지대로, 독점 가능한 사회적 힘으로 전화될 수 없게 되는 순간부터, 다시 말해 개인소유가 더 이상 부르조아적 소유로, 자본으로 전환될 수 없게 되는 그 순간부터 개성은 사라진다고 당신은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것개인겄이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부르조아적 소유자, 중간계급 소유자를 뜻하는 것임을 고백해야 한다. 사실 그런 개인은 깨끗이 일소되어야 한다.

공산주의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사회의 생산물을 전유할 힘을 박탈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전유를 통하여 다른 사람의 노동을 종속시키는 힘을 박탈할 뿐이다.

공산주의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사회의 생산물을 전유할 힘을 박탈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전유를 통하여 다른 사람의 노동을 종속시키는 힘을 박탈할 뿐이다.

사유재산이 폐지되면 모든 노동이 중단되고 곳곳에서 나태가 우리를 덮칠 것이라는 반대가 있어왔다.

그러나 그에 따른다면 이미 오래 전에 부르조아사회는 순전히 게으름으로 인해 파멸해 버려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하는 사회 구성원들은 아무것도 갖지 못하며,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은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반대는 모두 자본이 없다면 임금노도도 있을 수 없다는 동어반복의 또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물질적 생산물의 공산주의적 생산, 전유양식에 대해서 제기된 모든 반대는 똑같은 방식으로 정신적 생산물의 공산주의적 생산, 전유양식에 대해서도 제기되어 왔다. 부르조아지에게는, 계급적 소유의 소멸이 곧 생산 자체의 소명이듯이, 계급문화의 소명은 모든 문화의 소멸과 같다.

부르조아지가 잃고서 애통해하는 바로 그 문화란 실상 엄청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단지 하나의 가계로서 행동하기 위한 훈련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부르조아적 소유의 폐지를 주장하는 데 대해 당신이 자유, 문화, 법 따위 당신의 부르조아적 개념 기준을 적용하려 하는 한 당신은 우리와 말다툼할 필요가 없다. 당신의 법이란 것이 실상은 당신의 계급의지, 즉 당신 계급의 경제적 존재 조건에 의해 그 본질적 성격과 방향이 규정되는 의지가 법제화된 것에 지나지 않듯이, 당신의 바로 그 사상 역시 당신의 부르조아적 생산조건과 부르조아적 소유조건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현재 생산양식과 소유형태--생산의 진보 속에서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역사적 관계--로부터 나오는 사회적인 형태들이 자연과 이성의 영원한 법칙인 것처럼 여기는 이기적이고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당신에 선행했던 모든 지배계급들도 가지고 있었다. 고대적 소유에서 당신이 똑똑히 본 것, 봉건적 소유에서 당신이 인정한 것을 물론 당신은 당신 자신의 부르조아적 소유형태의 경우에는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가족의 폐지라니! 공산주의자의 이 파렴치한 주장에는 가장 급진적인 사람들까지도 분노하고 있다.

지금의 가족, 부르조아적 가족이 서 있는 토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이며 사적 이익이다. 따라서 이 가족이 완전히 발전한 형태는 단지 부르조아지에게만 존재할 뿐이다. 반면 이러한 상태가 진행되면 결국 프롤레타리아에게는 가족이 실제로 사라질 것이며, 공창(公娼)만이 남을 것이다.

당신은 우리가 부모에 의한 자식의 착취를 중지시키려 한다고 해서 비난하는가? 그것도 죄라면 우리는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가 가정교육을 사회교육으로 바꾸려는 것을 모든 관계 중에 가장 성스러운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이 말하는 교육이란 뭔가! 당신의 교육 역시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에 의해, 학교 등을 통한 사회의 직, 간접적 개입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적인 것이 아닌가? 공산주의자는 교육에 대한 성격을 바꾸고, 지배계급의 영향으로부터 교육을 구출하려 할뿐이다.

가족과 교육에 관한, 부모와 자식의 성스런 관계에 관한 부르조아적 말장난은 현대산업의 활동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적인 것이 아닌가? 공산주의자는 교육에 대한 사회의 개입을 발명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개입의 성격을 바꾸고, 지배계급의 영향으로부터 교육을 구출하려 할뿐이다.

가족과 교육에 관한, 부모와 자식의 성스런 관계 관한 부르조아적 말장난은 현대산업의 활동에 의해 프롤레타리아들 간의 모든 가족적 유대가 끊어질수록, 그리고 그들이 자식들이 단순한 상품이나 노동도구로 바뀌어갈수록 더욱 혐오스러워진다.

그렇지만 너희 공산주의자들은 여성공유제를 도입하려는 게 아니냐고 전체 부르조아지는 소리 맞춰 악을 쓴다.

부르조아는 자기아내를 단지 생산도구로만 본다. 그는 생산도구는 공동으로 이용되어야 한다고 들었으므로 자연히 모든 것을 공유한다는 운명이 여성에게도 닥치리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목적하는 바는 단순한 생산도구로서의 여성의 지위를 없애버리려는 데 있다는 것을 그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공산주의자들이 이른바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건설하려 한다는 여성공유제에 대해 우리의 부르조아가 실제로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정말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거의 기억할 수 없을 정도의 먼 옛날부터 존재해 온 것이므로.

우리의 부르조아는 공창은 물론 자기 휘하에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아내와 딸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만족하지 않고 다른 부르조아의 아내를 유혹하는데 커다란 쾌락을 느낀다.

부르조아의 결혼은 사실상 부인공유제이다. 그러므로 설령 공산주의자가 비난받는다 하더라도 그 비난은 위선적으로 은폐된 여성공유제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합법화된 여성공유제를 도입하려 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현 생산제도의 폐지와 더불어 이 제도에서 생겨난 여성공유제, 즉 공창과 사창이 모두 폐지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나아가, 공산주의자는 나라와 국적을 폐지하려 한다고 비난받는다.

노동자에게는 나라가 없다.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빼앗을 수는 없는 일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지배권을 획득해야 하므로, 해당 민족의 영도적 계급으로 떠올라야 하므로, 자신이 스스로 그 민족을 구성해야 하므로, 비록 부르조아적 의미는 아니지만 그 자체가 민족인 것이다.

민족들 간의 민족적 차이와 적대는 부르조아지의 발전, 상업의 자유, 세계시장, 생사양식과 그에 따른 생활조건에서의 제일성 등으로 인해 날이 갈수록 사라져가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는 그것들을 한층 더 빨리 사라지게 할 것이다. 선진문명국의 통일행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방을 위한 1차 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개인에 의한 개인의 착취가 종식되는 것과 비례하여 민족에 의한 민족의 착취도 종식될 것이다. 민족 내에서 계급간의 적대가 사라질수록 민족간의 증오 또한 사질 것이다.

종교, 철학의 견지에서 또는 일반적으로는 이데올로기적 견지에서 나오는 공산주의에 대한 비난은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도 없다.

인간의 관념, 견해, 생각, 한 마디로 인간의 의식이 그의 물질적 존재조건, 사회관계, 사회생활이 변함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그리 깊은 직관을 필요하는가?

사상의 역사는 바로 물질적 생산이 변화하는 정도에 따라 정신적 생산이 그 성격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시대의 지배적 사상은 항상 지배계급의 사상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사회를 변혁하는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곧 낡은사회 내에서 새로운 사회의 요소들이 창조된다는 사실, 낡은 사상의 해체는 항상 낡은 존재조건의 해체와 보조를 같이 한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고대세계가 마지막 진통을 겪고 있을 때 고대종교는 기독교에 의해 정복되었다. 또 기독교 사상이 18세기에 이르러 합리주의 사상에 굴복했을 때 봉건사회는 당시의 혁명적 부르조아지와 목숨을 걸고 싸웠다. 종교적 자유와 양심의 자유라는 사상은 단지 지식의 영역에서도 자유경쟁이 지배한다는 것을 표현할 뿐이었다.

흔히 이렇게들 말한다. 겁의심할 바 없이 종교적, 도덕적, 철학적, 법적 사상은 역사발전과정에서 변형되어 왔다. 그러나 종교, 도덕, 철학, 정치학, 법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항상 살아남았다.겂

겁그밖에도 자유, 정의 등 어떠한 상회에도 공통적인 영원한 진리들이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영원한 진리, 모든 종교나 도덕을 새로운 토대 위에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폐지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는 과거의 모든 역사적 경험과 모순적으로 움직인다.겂

이러한 비난은 어디로 귀결되는가? 모든 과거 사회의 역사는 계급적대,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형태를 취했던 적대의 발전사였다.

그러나 그 형태야 어떠하든 과거 모든 시대에 공통적인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곧 사회의 어느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착취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다종다양하다 하더라도 과거 시대의 사회적 의식은, 계급적대가 모두 없어지지 않으면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일정한 공동형태 또는 일반관념의 범위 내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은 극히 당연한 것이다.

공산주의혁명은 전통적 소유관계와의 가장 근본적인 결별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혁명의 발전은 전통적 사상과의 가장 근본적인 결별을 포함한다.

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부르조아적 반론에 대해서는 이쯤 해두자.

우리는 앞에서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것, 민주주의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임을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조아지에게서 점차로 일체의 자본을 빼앗고, 모든 생산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총생산력을 가능한 한 빨리 증대시키게 될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소유권과 부르조아적 생산조건에 대한 전제적(專制的) 침해를 통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경제적으로는 불충분하고 무리한 듯이 보이지만 발전해 가는 가운데 스스로를 뛰어넘어 낡은 사회질서에 대한 더 이상의 침해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조치, 생산양식을 전면적으로 혁명화하는 수단으로서 불가피한 조치가 없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은 물론 나라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선진적인 나라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매우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1. 토지소유를 폐지하고 모든 지대를 공공의 목적으로 활용한다.

2. 소득에 대해 높은 누진과세를 적용한다.

3. 모든 상속권을 폐지한다.

4. 모든 망명자와 반역자의 재산을 몰수한다.

5. 국가자본과 배타적 독점을 가진 국립은행을 통하여 신용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한다.

6. 전달, 운송수단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한다.

7. 국가소유의 공장과 생산도구를 증대한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공동의 계획에 따라 토질을 개선한다.

8. 모두가 똑같이 노동의 의무를 진다. 특히 농업을 위한 산업군을 편성한다.

9. 농업과 제조업을 결합한다. 인구를 전국적으로보다 균등하게 분배함으로써 도시와 농촌간의 차별을 점차 폐지한다.

10. 공립학교에서 모든 어린이를 위한 무상교육을 실시한다. 현존하는 어린이의 공장노동을 폐지한다. 교육과 산업적 생산을 결합한다, 등등.

발전과정에서 계급적 파별이 없어지고 모든 생산이 광범위한 전국적 단체의 손에 집적되면, 공권력은 정치적 성격을 읽게 된다. 이른바 정치권력이란 본래 단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조직된 힘일 뿐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조아지와의 싸움에서 상황의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계급으로서 조직하게 되면, 또 혁명을 통해 지배계급으로 자라나고, 그 자체로 낡은 생산조건을 무력으로 없애버리게되면, 그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들 생산조건과 더불어 계급적대와 계급 일반의 존재조건을 없애버리게 되면, 그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들 생산조건과 더불어 계급적대와 계급 일반의 존재조건을 없애버리게 될 것이며, 또 그럼으로써 한 계급으로서 가지는 자신의 지배권도 폐지하게 될 것이다.

계급과 계급적대의 낡은 부르조아사회 대신 우리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단체를 가지게 될 것이다.

 


III. 사회주의, 공산주의 문헌

 

1. 반동적 사회주의

 

A. 봉건적 사회주의

 

프랑스와 영국의 귀족들은 그들이 가진 역사적 지위로 인해 현대 부르조아사회를 반대하는 소책자를 쓰는 것을 소명으로 하게 되었다. 1830년 프랑스 7월혁명과 영국의 개혁운동에서 이들 귀족은 다시 한 번 혐오스런 벼락부자에게 굴복했다. 그로부터, 중대한 정치투쟁은 매우 명약관화한 일이 되었다. 이들에게는 문헌투쟁만이 가능했지만 문헌의 영역에서조차 복고시기의 낡은 외침은 불가능해져 버렸다.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귀족들은 겉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피착취 노동계급의 이익만을 쫓아 부르조아지를 고발해야 했다. 이와 같이 귀족은 그들의 새로운 주인을 풍자하는 노래를 부르고 주인의 귀에 다가올 재난의 대한 불길한 예언을 속삭임으로써 보복을 꾀했다.

이렇게 하여 봉건적 사회주의는 생겨났다. 반쯤은 비탄으로 반쯤은 풍자로, 또 반쯤은 과거의 메아리로 반쯤은 미래의 위협으로, 때로는 신랄하고 재치 있는 가시 돋친 비판을 통해 부르조아지에게 철두철미 충격을 가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현대 역사의 행진을 전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결과는 항상 우스꽝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귀족은 사람들을 자기 주위로 결집시키기 위하여 기치를 들고 프롤레타리아 자선함을 흔들어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과 어울릴 때마다 그들의 엉덩이에 봉건 문장(紋章)이 찍힌 것을 보고는 불경스럽게 큰 웃음을 터뜨리며 돌아섰다.

프랑스 정통주의자와 것영국청년단겄의 일파도 이러한 희극을 연출했다.

봉건주의자는 그들의 착취양식이 부르조아지의 착취양식과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그들 역시 이제는 낡아빠졌지만 전혀 다른 상황과 조건에서 착취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지배하에서는 현대 프롤레타리아트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면서도, 현대 부르조아지가 그들 자신의 사회형태에서 나온 필연적 후예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그들의 비판이 가진 반동적 성격을 거의 감추지 않기 때문에, 부르조아지에 대한 그들의 주된 비난은 부르조아 체제하에서 낡은 사회질서를 철저히 분쇄해 버릴 운명을 진 한 계급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까지 지적하고 있다.

그들이 부르조아지를 호되게 비판하는 이유는 부르조아지가 단지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었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정치적 실천에서 그들은 노동계급에 반대하는 모든 강압조치에 동참하며, 일상생활에서는 온갖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산업의 나무에서 떨어진 황금사과를 줍기 위해, 그리고 진리, 사랑, 명예를 양모, 사탕무우, 주정(酒精)과 맞바꾸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것이다.

목사가 영주와 손잡고 나아갔듯이 성직자 사회주의는 봉건적 사회주의와 손잡았다.

기독교적 금욕주의에 사회주의 색채를 가미하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다. 기독교는 원래 사유재산, 결혼, 국가를 비난해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대신 박애와 빈곤, 독신과 신체적 금욕, 수도원 생활과 교회를 설교해 오지 않았던가? 기독교적 사회주의는 단지 성직자가 귀족의 불만에 대해 봉헌하는 성수(聖水)에 지나지 않는다.

 

B. 쁘띠부르조아 사회주의

 

부르조아지가 파멸시킨 계급, 현대 부르조아사회의 대기 속에서 그 존재조건이 취약해지고 사멸한 계급은 봉건귀족만이 아니다. 중세의 시민이나 소농경영자는 현대 부르조아지의 선구자였다. 산업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거의 발전하지 못한 나라들에서 이들 두계급은 떠오르는 부르조아지와 더불어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현대 문명이 충분히 발달한 나라들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 사이에서 동요하며 부르조아사회의 보완물로서 자신을 계속 쇄신하는 쁘띠부르조아의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이 계급의 개별 구성원들은 자유경쟁으로 인해 끊임없이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한다. 현대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그들은 현대 사회의 독립적 부분으로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제조업, 농업, 상업에서의 관리자, 토지관리인, 상점주로 거의 바뀌는 순간까지 눈 앞에 두게된다.

농민이 인구의 절반을 훨씬 넘는 프랑스 같은 나라들에서는, 부르조아지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에 서는 저술가들은 당연히 부르조아체제를 비판하는 데서 농민과 쁘띠부르조아의 기준을 사용해야 했으며, 이들 매개적 계급의 입장에서 노동계급을 위해 곤봉을 들어야 했다. 이리하여 쁘띠부르조아 사회주의가 생겨났다.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에서도 이 학파의 지도자는 시스몽디였다.

이 사회주의 학파는 현대 생산조건의 모순을 매우 날카롭게 분석했으며, 경제학자들의 위선에 찬 변명을 낱낱이 폭로했다. 그리고 기계와 분업의 파멸적 결과, 소수에게로의 자본과 토지 집적, 과잉생산과 공황을 논쟁의 여지없이 입증했다. 또한 그들은 쁘띠부르조아와 농민의 불가피한 몰락, 프롤레타리아트의 고통, 생산의 무정부성, 방치할 수 없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 국가들간의 파멸적 산업전쟁, 낡은 도덕적 유대의 해체, 낡은 가족관계, 낡은 국적 등을 지적했다.

그러나 설사 그 긍정적인 목적에서 보더라도 이 사회주의 형태는 낡은 생산수단과 교환수단 및 이와 더불어 낡은 소유관계와 낡은 사회로 되돌아가고자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현대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에 의해 파괴되어 왔고 또 파괴될 수밖에 없는 낡은 소유관계의 틀 내에 현대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을 가두고자 한다. 양자 어느 경우이거나 반동적이며 공상적이다.

그 최후의 주장은 제조업에서의 법인길드, 농업에서의 가부장적 관계이다.

결국 완강한 역사적 사실이 자기기만의 도취상태를 흩어버렸을 때 이러한 형태의 사회주의는 우울증의 비참한 발작으로 끝나버렸다.

 

C. 독일 사회주의 또는 것진정한겄사회주의

 

* 여기서 진정한의 뜻은 말뿐임을 말함.

 

프랑스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문헌은 권력을 갖고있는 부르조아지의 억압하에서 생겨났으며 그 권력에 대항하는 투쟁의 표현이었다. 이 문헌들은 독일에서 부르조아지가 봉건 절대주의와의 경쟁을 막 시작했을 무렵 독일로 유입되었다.

독일 철학자, 자칭 철학자, 그리고 재담꾼들은 이 문헌들을 열심히 읽어댔지만 이 저작들이 프랑스에서 독일로 옮겨올 때 프랑스의 사회적 조건이 같이 옮겨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잊고 말았다. 독일의 사회적 조건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이들 프랑스 문헌은 직접적인 실천적 의의를 모두 일었으며 순수히 문헌적인 의미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18세기 독일 철학자에게 제 1차 프랑스 혁명에서 나온 요구들은 것실천이성겄 일반의 요구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혁명적인 프랑스 부르조아지의 의지의 발현 또한 그들의 눈에는 순수의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의지, 일반적으로는 진정한 인간의지의 법칙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독일 저술가의 저작은 오로지 그들의 고대철학적 양심에 새로운 프랑스 사상을 조화시키는 것, 아니 그보다는 그들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버리지 않으면서 프랑스 사상을 접목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접목은 외국어가 사용되는, 즉 번역되는 것과 똑같은 식으로 이루어져있다.

수도사들이 어떻게 고대 이단(異端)의 저작들이 쓰여 있는 원고 위에 가톨릭 성자들의 따분한 생애를 덧썼던가는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독일 저술가들은 세 속의 프랑스 문헌을 가지고 이러한 과정을 거꾸로 밟았다. 그들은 프랑스 원본 아래 자신들의 철학적 헛소리를 써넣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그들은 화폐의 경제적 기능에 대한 프랑스 비판서 아래에는 것인간의 소외겄를 써넣었고, 부르조아 국가에 대한 프랑스 비판서 아래에는 것추상적 보편자의 예위겄를 써넣는 식이었다.

프랑스의 역사비판서에 이러한 철학적 문구들을 삽입하는 것에 대해 그들은 것행동의 철학겄, 것진정한 사회주의겄, 것 독일의 사회주의 과학겄, 것사회주의의 철학적 토대겄 따위의 작위를 수여했다.

이리하여 프랑스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문헌은 완전히 알맹이가 빠져버렸다. 또한 독일인의 손에서 이미 그 문헌은 한 계급과 다른 계급의 투쟁을 표현하지 않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독일인은 것프랑스의 편향겄을 극복했다고 보았으며, 진정한 요구가 아니라 진리의 요구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이 아니라 인간본질의 이익을, 즉 아무 계급에도 속하지 않고 실체도 없으며 단지 철학적 환상의 모호한 영역에만 존재하는 인간 일반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이 독일 사회주의는 국민학교 숙제를 상당히 심각하고 근엄하게 받아들이며 그 빈약한 재고품을 협잡에 가득한 양태로 격찬하는 가운데 점차 그 현학적인 무지를 잃어갔다.

봉건귀족과 절대군주에 대항하는 독일인의 투쟁, 특히 프러시아 부르조아지의 투쟁, 달리 말하면 자유주의 운동은 더욱 격화되었다. 그로써 것진정한겄사회주의가 오랫동안 갈망해 오던 기회, 즉 정치적 운동을 사회주의적 요구와 대결시키며, 자유주의에 대해, 대의정부에 대해, 부르조아적 경쟁, 부르조아적 언론의 자유, 부르조아적 입법, 부르조아적 자유와 평등에 대해 전통적인 파문(破門)을 명하고, 대중에게 부르조아 운동으로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읽은 것은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설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독일 사회주의는 프랑스 비판의 단조로운 모방이면서도 프랑스 비판이, 바로 독일에서의 임박한 투쟁이 이루려는 목적인 부르조아사회의 경제적 존재조건과 이에 적합한 정치구조를 가진 현대 부르조아사회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은 때마침 잊어버렸다.

절대주의 정부 및 이에 딸린 목사, 교수, 지방 유지와 관리들에게 것진정한겄사회주의는 부르조아지의 협박에 대항하는 안성맞춤의 허수아비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 정부가 바로 그 당시에 독일 노동계급의 봉기에 대해 투약했던 채찍과 총탄이라는 쓰디쓴 약을 달래주는 달콤한 마무리였다.

이와 같이 것진정한겄사회주의는 정부를 위해 독일 부르조아지와 싸우는 무기로서 역할 하는 동시에, 반동적인 이익, 독일 속물들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독일에서, 16세기 의 유물이자 그때부터 계속 다양한 형태로 다시 나타나곤 했던 쁘띠부르조아계급은 현 상황의 현실적인 사회적 토대이다. 독일에서 이 계급의 존속은 곧 기존 상황의 존속을 뜻한다 .부르조아지의 산업적, 정치적 지배는 한편으로는 자본의 집적으로 인해,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으로 인해 쁘띠부르조아지에게 일정한 파멸의 위협을 가한다. 이들에게 것진정한겄 사회주의는 이 두 마리 새를 하나의 돌로 잡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그것은 전염병처럼 번졌다.

화려한 수사(修辭)의 꽃으로 수놓아지고 창백한 감상의 이슬에 함빡젖은 사색의 거미줄 같은 의상, 독일 사회주의자들이 것영원한 진리겄라는 말라빠진 그들의 육신을 감추기 위한 이 선험의 의상은 대중 속에서 그들의 상품 판매량을 놀랄 만큼 증대시키는데 기여했다.

또한 한편으로 독일 사회주의는 점점 더 쁘띠부르조아 속물의 허풍스런 대변인으로서의 자기 소명을 인식해 갔다. 독일 사회주의는 독일 민족을 모범 민족으로, 그리고 독일 속물들을 전형적인 인간으로 주장했다. 이 모범 인간이 가진 약간의 야비한 구석이라도 보이면 독일 사회주의는 그것을 실제 성격과는 정 반대로, 은폐되고 고상한 사회주의적 해석을 가했다. 또한 장황하리만치 공산주의의 것야수같은 파괴적겄 경향을 정면으로 반대했으며, 모든 계급투쟁에 대해 고상하고 공평한 경멸을 표했다. 몇 가지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한다면 지금(1847) 독일에서 돌아다니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출판물들은 모두 이러한 비열하고 무기력한 문헌의 범주에 속한다.

 

2. 보수적 사회주의 또는 부르조아 사회주의

 

부르조아지의 일부는 부르조아사회의 지속적 생존을 도모하기 위하여 사회적 불만요인을 개선하고자 한다.

이 부분에 속하는 이들로는 경제학자, 자선가, 인도주의자, 노동계급의 상태를 개선하려는 자, 자선의 조직자, 기타 온갖 종류의 하찮은 개혁가들이 있다. 나아가, 이러한 형태의 사회주의는 완전한 체계로 발전되어 왔다.

프루동의 겁빈곤의 철학겂을 이러한 형태로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타자맨 主: 맑스는 프루동의 겁빈곤의 철학겂을 혹독하게 비판한 겁철학의 빈곤겂이라는 저작을 남긴바 있다.)

사회주의적 부르조아는 현대 사회적 조건의 모든 장점을 원하지만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투쟁과 위험은 배제하고자 한다. 그들은 사회의 현 상태에서 그 혁명적이고 붕괴적인 요소를 뺀 것을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없는 부르조아지를 원한다. 부르조아지는 당연히 자신이 패권을 쥐고 있는 세계가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부르조아지 사회주의는 이 안락한 생각을 어느 정도 완전한 여러 체계들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부르조아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러한 체계에 따를 것, 그리하여 사회적 신(新)예루살렘으로 곧장 행진할 것을 요구하지만, 사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기존 사회의 테두리 내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부르조아지에 대한 그들의 모든 증오에 찬 생각을 떨쳐버려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보다 실천적이지만 보다 덜 체계적인 이 사회주의의 또 다른 형태는 정치적 개혁이 아니라 물질적 존재조건, 경제 관계의 변화만이 노동계급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노동계급의 눈앞에서 일체의 혁명운동을 평가절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 존재조건의 변화라고 할 때, 이러한 사회주의 형태는 그것을 오직 혁명에 의해서만 있을 수 있는 부르조아 생산관계의 폐지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산관계의 지속적 유지에 기초한 행정개혁으로만, 따라서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고, 기껏해야 부르조아 정부의 비용을 줄이고 행정업무를 단순화하는 정도의 개혁으로만 이해할 뿐이다.

부르조아 사회주의는 단지 하나의 비유가 될 때, 오직 그때에만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있다.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자유무역,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보호관세,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감옥 개량, 이것이 부르조아 사회주의의 마지막 말이자 유일하게 진지한 말이다.

그것은 다시 다음의 한 문구로 요약된다. 부르조아는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부르조아이다.

 

3.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 공산주의

 

여기서 우리는 현대의 모든 대혁명마다 항상 프롤레타리아트의 요구를 소리높여 외쳐왔던 바뵈프 등의 저작과 같은 문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처음으로 직접 시도한 것은 봉건사회가 불과하고 있던 전반적 격동기였다. 하지만 당시 프롤레타리아트는 미발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행방을 위한 경제적 조건--당시 아직 생성되지 않았으며, 임박한 부르조아 시대에 의해서만 생성될 수 있는 조건-도 없었기 때문에 그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 프롤레타리아트의 초기 운동들을 추종했던 혁명적 문헌들도 반동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들은 극히 조잡한 형태로 보편적 금욕주의와 사회평준화를 가르쳤다.

본래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계인 생시몽, 푸리에, 오웬 등의 체계는 앞서 말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 간의 투쟁이 발전되지 않은 초기 시기에 생겨난다(I절 부르조아지와 프롤레타리아를 보라).

이들 체계의 설립자들도 사실 지배적인 사회형태속에서 와해요소의 활동뿐 아니라 계급적대까지 보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직 유아기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떠한 역사적 창의성도, 어떠한 독자적 정치운동도 갖지 못한 계급의 모습으로 보인다.

계급적대의 발전은 항상 산업의 발전과 보조를 함께 하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는 경제상황은 아직 그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을 위한 물질적 조건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조건을 창출할 새로운 사회과학, 새로운 사회법칙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 행동은 그들의 사적인 창의적 행동으로 대체되고,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해방의 조건은 환상적 조건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점진적이고 자연발생적인 계급조직은 그 발명가들에 의해 특수하게 고안된 사회조직으로 바뀐다. 그들이 보기에 미래 역사는 결국 그들의 사회적 계획의 실천이자 그 실천적 실행일 뿐이다.

계획을 구성하는 데서 그들은 의식적으로 가장 고통 당하는 계급인 노동계급의 이익에 주된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란 오직 가장 고통 당하는 계급이라는 관점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계급투쟁과 그들 자신의 환경의 미발전된 상태로 인해 그러한 종류의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모든 계급적대를 초월해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들은 사회 모든 구성원들, 심지어 가장 형편이 좋은 사람들의 조건조차 개선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습관적으로 계급구분 없이 사회전체에게, 아니 우선적으로는 지배계급에게 호소한다. 하기야 일단 그들의 체계를 이해하고 난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가장 가능한 사회상태의 가장 가능한 계획임을 알지 못하겠는가?(타이핑맨 主 : 이 문장은 마르크스와 앵겔스의 풍자적 독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정치적 행동, 특히 혁명적 행동을 거부한다. 그들은 평화적인 수단으로 그들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며,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잘한 실험들이나 사례의 힘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복음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으려고 애쓴다.

그렇듯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매우 미발전된 상태에서 오직 자신의 입장에 대한 환상적인 생각마을 가지고 있을 무렵에 그려진 미래 사회의 상상화는 산회의 전반적 재건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본능적 기지개에 상당한다.

그러나 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출판물들은 또한 중요한 요소를 담고 있다. 그것들은 기존 사회의 모든 원칙을 공격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노동계급의 계몽을 위한 극히 중요한 자료들로 가득차 있다. 도시와 농촌간의 구별 폐지, 가족의 폐지,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한 산업경영의 폐지, 임금제도의 폐지, 사회적 조화의 주창, 국가기능의 단순한 생산감독 기능으로의 전화등 거기서 제기되는 실천적 조치들은, 당시에 겨우 나타나고 있었으므로 이들 출판물에서는 초기적이고 불명확한 형태로만 인식되었던 계급적대의 소명을 지적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제안들은 순수히 공상적인 성격을 띤다.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중요성은 역사발전과 역관계를 취한다. 현대 계급투쟁이 발전되고 특정한 형태를 취해갈수록, 투쟁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는 이 환상적인 입장, 투쟁에 대한 이 환상적인 공격은 모든 실천적 가치와 모든 이론적 정당성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비록 이들 체계의 창시자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혁명적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진보적 역사발전에 반대하여 스승들의 원래 견해를 굳게 고수한다. 따라서 그들은 계급투쟁을 약화시키고 계급적대를 해소시키기 위해 철저하게 노력하는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사회적 이상향을 실험적으로 실현하는 것을 꿈꾸며, 고립된 것팔랑스떼르겄,것공동부락겄,것작은 이카리아겄--신예루살렘의 축소판--를 건설할 것을 꿈꾼다. 그들은 공중누각을 실현하기 위하여 부르조아의 자비와 지갑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점차로 그들은 앞서 서술한 반동적인 보수적 사회주의자들과는 단지 보다 체계적인 현학을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자기들 사회과학의 기적적인 효과에 대한 미신적인 광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만 다를 뿐 그들과 같은 범주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노동계급의 편에 선 모든 정치적 행동을 격렬히 반대한다. 그들이 보기에 그러한 행동은 새로운 복음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영국의 오웬주의자, 프랑스의 푸리에주의자들은 각각 차티스트와 개혁파를 반대한다.

 


IV. 기존의 여러 반대파에 관한 공산주의자에 입장

 

II절에서 이미 영국의 차티스트나 미국의 농업개혁가들과 같은 기존의 노동계급 당들에 관한 공산주의자의 관계는 명확히 밝혀졌다.

공산주의자는 당면 목표의 달성을 위해, 노동계급의 당면한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싸우는 동시에, 현재의 운동 속에서 이 운동의 미래를 보여주고 이에 관심을 기울인다. 프랑스에서 공산주의자는 보수적 부르조아지와 급진적 부르조아지에 대항하여 사회민주주의자와 동맹을 맺었지만, 대혁명으로부터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문구나 환상적인 생각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권리는 남겨두고 있다.

스위스에서 공산주의자는 급진주의자를 지지하지만, 이 당의 일부는 프랑스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자로, 일부는 급진적 부르조아라는 적대적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놓치지 않는다.

폴란드에서 공산주의자는 농업혁명을 민족해방의 첫째 선결조건으로 주장하며, 1846년 크라쿠프 봉기를 주도했던 당을 지지한다.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는 부르조아지가 절대군주, 봉건지주, 쁘띠뿌르조아지에 반대하여 혁명적으로 행동할 경우 이들과 함께 싸운다.

그러나, 부르조아지가 자신의 지배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도입하게 되는 사회, 정치적 조건을 독일 노동자들이 오히려 부르조아지에 대항하는 무기로써 곧바로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독일 반동계급의 몰락 이후 부르조아지에 대항하는 무기로써 곧바로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독일 반동계급의 몰락 이후 부르조아지에 반대하는 투쟁 자체가 즉시 시작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는 부르조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적대관계에 가장 명확한 인식을 노동계급에 주입시키려 끊임없이 노력한다.

공산주의자는 독일에 주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왜냐하면 독일은 부르조아혁명의 전야에 있으며, 17세기 영국이나 18세기 프랑스에 비해 유럽문명의 보다 선진적인 조건과 보다 발전된 프롤레타리아트를 가지고 부르조아혁명은 곧이어 뒤따를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서곡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공산주의자는 모든 곳에서 기존의 사회, 정치적 질서를 반대하는 모든 혁명을 지지한다.

그 모든 혁명에서 공산주의자는 각국의 발전정도와 관계없이 소유문제를 핵심적인 문제로서 전면에 내세운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자는 어디서나 모든 나라 민주적 정당들의 통일과 합의를 위해 노력한다.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견해와 목적을 감추는 것을 경멸한다.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목적이 오직 기존의 모든 사회적 조건을 힘으로 타도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선포한다. 모든 지배계급을 공산주의혁명 앞에 떨게하라.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세상이다.(Let the ruling classes tremble at a Communistic revolution. The proletarians have nothing to lose but their chains. They have a world to win.)

 


전 세 계 노 동 자 여, 단 결 하 라 !

WORKING MEN OF ALL COUNTRIES, UNITE!

Posted by WN1
,

남성이 부친을 증오하고 모친에 대해서 품는 무의식적인 성적 애착.



그리스 신화 오이디푸스에서 딴 말로서 S.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서 쓴 용어이다.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에피카스테)의 아들인데 숙명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의 왕이 되었다. 어머니인 줄 모르고 결혼한 그들은 그 사실을 알자 이오카스테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자기 눈을 뺀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경향은 남근기(男根期:3∼5세)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며 잠재기(潛在期)에는 억압된다고 한다. ‘아버지처럼 자유롭게 어머니를 사랑하고 싶다’는 원망(願望)은 ‘아버지와 같이 되고 싶다’는 원망으로 변하여 부친과의 동일시(同一視)가 이루어지며 여기에서 초자아(超自我)가 형성된다.

프로이트는 유아는 이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극복하고서야 비로소 성인(成人)의 정상적인 성애가 발전하는 것이지만 이를 이상적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며, 일반적으로 신경증환자는 이 극복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콤플렉스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생물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1929년 말리노프스키의 문화인류학상(文化人類學上)의 발견으로 이 콤플렉스는 로마법과 그리스도교의 도덕에 의하여 지지되고, 부르주아와의 경제조건에 의하여 강화된 아리안족의 부계제 가족(父系制家族)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보편적인 것도 아니며 생리학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특히, 신프로이트파의 학자들은 이 콤플렉스가 사회적 원인과 가족 내의 대인관계로부터 생기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 학자 중에서 E.프롬은 부친의 권위(權威)가 강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이러한 콤플렉스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K.호르나이는 양친(兩親)에 대한 의존 욕구와 적의(敵意)의 갈등에서 생긴 불안이 원인이 되어 이 콤플렉스가 생긴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여자 아이가 부친에 대하여 성적 애착을 가지며 모친에 대하여 증오심을 가지는 성향을 엘렉트라콤플렉스(Elektra complex)라고 한다. 

***
 

 신화 줄거리


라이오스 1세(에디프스의 아버지)는 데베의 왕이 되자 메노에케오스1세의 딸인 요카스타(에디프스의 어머니)와 결혼했다. 이때 델피의 신탁(신의 명령) 에서는 앞으로 그가 아들에 의해 살해당할 운명에 쳐해 있기 때문에 절대로 아들을 낳지말라는 경고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탁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조상들과는 달리 술 혐오증이 없었으므로 신들이 마시는 신성한 음료를 마시고 취한채 아내와 관계를 가져 아들을 배고 말았다.

아들이 태어나자 왕은 핀이나 못으로 그의 발목을 꿰뚫고는 한 목동에게 주어 그 아이를 보이오티아와 아티카 사이에 있는 키타이론 산에 갖다 버리도록 했다. 한편 코린트왕 폴리보스 4세의 기병들은 이 버려진 아이를 주워 왕비 페리보에아 4세에게 갖다 주었고 왕비는 그를양자로 삼아 키웠다. 그녀는 아이의 발목을 치료한후 그에게 에디푸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의 발이 퉁퉁 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디푸스는 폴리보스4세의 궁궐에서 자라 어느덧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그러자 그의 형제들은 질투심이 생겨 그가 왕의 친아들이 아니라면서 놀렸다 왕의 성품은 온순한테 에디푸스는 고집이 세다는 것이었다. 에디푸스 자신도 이 점에대 해 점차 의구심이 생겨 한번은 왕비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녀로 부터 아무 대답도 얻지 못하자 델피의 신탁에 가서 자신의 진정한 부모가 누구인지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신탁은 그에게 그가 고국에 돌아가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게 될 것이므로 절대로 고국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 경고를 듣고 에디푸스는 자신을 양자로 삼은 코린트의 왕이 친부모라고 생각하면서 그곳을 떠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에디푸그가 마차를 타고 가다 좁은 길에서 자신의 친아버지를 만났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1세 역시 자신이 아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때가 왔다는 불길한 예감을 받고 델피의 신탁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자기가 산에 내다 버린 아들이 실제로 죽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들이 좁은 길에서 마주치자 왕의 전례관이 에디푸스에게 길을 비키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에디푸스가 지체하자 그 전례관은 에디푸스의 말중 한마리를 죽였다. 혹자의 견해에 따르면 왕이 자신의 말을 몰아쳐 마차 바퀴로 에디푸스의 발을 스치게 했다고도 한다. 이에 화가 난 에디푸스는 그 전레관을 살해하고 왕도 마차에서 끌어내려 살해해 버렸다. 

테베는 왕 라이오스1세가 죽자 왕비 요카스타의 형제인 크레온 2세가 섭정에 들어갔다. 테베에 엄청난 재앙이 탁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스핑크스란 괴물이 보이오티아에 나타나 테베의 논밭을 황페케 하며 그녀가 내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함면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선포한 것이었다 이 괴물은 여자의 얼굴에 가슴과 발 꼬리 는 사자의 모습을 하고 새처럼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이 괴물은 뮤즈의 신으로부터 수수께기 하나를 배워 와 피키움 언덕에 앉아 자신에게 용감하게 나아온 테베인들에게 문제를 내고 있었다 그녀는 크레온2세에게 백성중에서 누구든지 수수께끼를 푸는 자가 있으면 자신이 그 나라를 떠나겠지만 풀지 못하는 자는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그 수수께기는 다음 과 같았다 

'목소리는 하나인데 네발이 되었다가 두 발이 되고 , 또 세발이 되는것은 무었이냐?"

왕은 이러한 심각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그리스 전역에 포고령을 내려 누구든지 수수께끼를 푸는 자가 있으면 그를 왕으로 삼고 그의 누이 요카스타를 아내로 삼게 해 주겠다고 선언했다. 스핑크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 왕의 포고령을 전해들은 에디푸스는 자신이 정답을 알고 있다면 나섰다. 드디어 스핑크스를 만났을때 그는 '사람'이 바로 정답이로고 대답하며, 인간이 어려서는 팔과 다리로 기어다니기 때문에 네발이고 , 성인이 되어서는 두발로 다니고 노인이 되어서는 지팡이를 집고 있기 때문에 세발 이 된다고 설명했다 에디푸스는 자신의 발이 불구가 되어 지팡이를 집고 있었기 때몬에 답을 쉽게 맞출수 있었다.

정답을 듣자 스핑크스는 자신의 약속대로 요새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리하여 에디푸스는 테베의 왕이 되었고 왕비 요카스타가 자신의 어머니인 것도 모르고 결혼하여 네 자녀까지 낳았다. 어떤 사람은 하늘이 이러한 비정상적인 가족 관계를 증오 하여 재앙을 내려 테베에 기근이 찾아오고 농작물이 황폐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한 듯 신탁의 에언대로 라이오스1세의 살해 사건과 관련된 유혈 사태로 인해 도신 전역에 재앙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그러자 왕은 당황하여 예언자 티레시아스를 불러 재앙을 몰아 내는 방법을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해 에언자는 누구든 나라를 이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있으면 역병은 물러갈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크레온 2세아 요카스타의 아버지인 메노에게오스1세는 에언자의 말을 굳게 믿고 용감하게 성벽에서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고결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재앙은 계속 되었다. 테베에서 이러한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코린트에서는 에디푸스가 친아버맂라고 믿고 있던 폴리보스4세가 죽었다. 이에 왕비 페리보에아4세는 자신이 에디푸스를 양자로 입적한 사실을 밝혀야할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말을 꺼내면 다른 사람도 말문을 열어 처음에는 진실을 밝히기를 거절하던 곳에 증거가 드러나게 마련인 법 , 메노에테오스 1세의 아들임을 확인해 주었다 그제서야 에언자 티레시아스도 처음부터 진실을 알 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에대푸스는 어머니의 옷에 있던 핑을 떼어 자신의 눈을 찔러 스스로 장님이 되고는 자신이 저주한 아들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 클레스 1세에게 나라를 맡기고 자신은 영영 테베를 떠났다.




1. 에디푸스 콤플렉스의 語源(어원) 

에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 그리스 신화에서 Thebes의 에디푸스왕이 자기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였다는 이야기로부터 비롯하여 남자는 잠재적으로 그 아버지에 대하여 반항심을 가지고 어머니에게는 특별한 애착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정신분석학의 용어이다. 반대로 딸이 어머니에 대해서 가지는 이러한 감정을 엘렉트라 콤플렉스(Electra complex)라 한다


2. 정신분석학자가 말하는 에디푸스 기간이란? 

1). 프로이드의 에디푸스 기간 


(1) 구순기 
(2) 항문기 
(3) 남근기 
(4) 잠재기 
(5) 성기기 

남근기phallic stage 

3-6세의 시기이며 남근기phallic stage라 부르는데,이 시기에는 리비도가 성기에 집중되는 시기로, 남ㆍ녀 어린이 모두에게 음경penis이 마음속에서 관심의 주가 된다. 즉 성적인 관심ㆍ자극ㆍ흥분이 성기가 있는 신체부위에 집중하는 것이다. 본능적 욕구로서 성기가 주된 관심의 대상 내지 쾌락의 근거가 된다. 남자 아이들은 자신의 성기를 힘과 우월성의 상징으로 보고 여자 아이는 그것이 없다는 점에서 남근선망penis envy과 더불어 열등감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다. 이시기의 끝부분이 에디푸스기oedipal state인데, 에디푸스기는 남녀가 다른데, 남자의 경우를 보면: 남아는 출생해서 곧바로 어머니를 사랑하고 또 어머니와 동일시identify해 왔기 때문에 '나도 엄마처럼 아빠의 애틋한 사랑을 받아봤으면!'하는 시기가 우선 처음에 온다. 그러다가 그는 여자 아이들은 물론 어른 여자들까지 음경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는 서서히 어머니와 동일시 하는 것을 포기한다. 그리고 다시 자기 어머니 역시 음경이 없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그는 어머니를 어려워하지 않는 눈으로 보고, '나는 아버지와 같은 편'이라는 생각에서 아버지와 동일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한편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듯 자기도 그렇게 어머니를 독점하고 싶어 다.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에게 존경ㆍ선망ㆍ질투ㆍ경쟁을 느끼고, 어머니에게는 그녀를 소유하고 사랑하고 싶은 심정으로 된다. 이것이 바로 에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로서, 이는 그의 남성성masculinity을 발전시키는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일 이 에디푸스 콤플렉스로 심정이 끝까지 활짝 피지 않고 무슨 이유에서든 도중하차하면 그는 다시 퇴행해서 계집아이 같은 남자sissy로 되어, 뒤에 오는 청소년기에서 주체성 확립에 큰 폭풍을 맞을 가능성이 퍽 높다. 그러면 어머니를 짝사랑하는 남아는 왜 끝내는 이를 포기하는가? 여기에는 3가지 이유가 있다. 

① 아버지가 눈치를 채고 자기를 거세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fear of castration 즉 거세공포 때문이고, 
② 아버지에 대한 사랑때문이며, 
③ 자기의 신체적 미숙에 대한 자각 때문이다. 그리고 이 셋 중 첫번째 이유가 그중 으뜸이 되는 이유가 된다. 

그리하여 그는 어머니를 포기하고 방향전환하여 아버지와 더 한층의 동일시를 도모하는 '남자의 길'을 택함으로써 에디푸스 콤플렉스의 굴레에서 벗어나는데, 정신분석에서는 이를 에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resolution이라고 한다 


2). 에릭슨의 에디푸스기간 

(1) 영아기 
(2) 소아기 초기 
(3) 소아기 후기 
(4) 학령기 
(5) 소년기 
(6) 청년기 
(7) 중년기 
(8) 노년기 

소아기 후기(3-6세): 주도성 대 죄의식 initiative versus acceptance of guilt 

주도성 대 죄책감 수용이라는 갈림길에 서 있는 시기이며. 이 시기의 어린이는 사람ㆍ장난감ㆍ물건들을 공격하고 정복하는 짓을 하는 특징을 가진다. 또 기술을 배우고, 에디푸스 콤플렉스를 해소하면서 남성적ㆍ여성적으로 되는 것을 배운다. 성유형이란 남자는 남자의 성격으로, 여자는 여자의 성격으로 그들이 그 사회에서 요구하는 사람으로서 정당하다고 규정을 내리고 있는 신념, 태도, 활동의 규범을 익혀야 한다.이러한 성유형에 따른 성격형성은 부모나 사회에서 늘 강조하고,처 벌하고, 칭찬을 주는 과정을 통하여 어린이에게 형성된다. 또한 에디푸스적 바램은 (남아는 장차 어머니와 결혼하고 그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게 하겠다는 바램과, 여아는 아버지와 결혼해서 훨씬 더 잘 그를 돌보아 주겠다는 바램) 결과적으로 많은 상상을 증가시키고 엄청난 환상을 갖게 한다. 그 결과 또한 깊은 죄책감에 빠진다. 즉,그러한 행위가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것과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했다는 사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범죄행위를 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주도성은 어떤 경우. 논쟁자를 몰아내는 데만 집중해서 질투와 분노정서를 유발하게 한다. 즉 부모중 어느 한쪽을 독차지하려는 욕구가 형제 자매에 까지 극치에 달하며, 불가피하게 따르는 실패는 죄의식과 불안을 유발한다 


3.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에디푸스콤플렉스 

1) 히스트리오닉 


일반적으로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아버지와 딸들과의 관계가 그 반대의 경우보다 좋은 것을 볼 수 있는데 히스테리아에서는 성장과정 특히 3,4세부터 6,7세까지의 에디푸스 기간에서의 아버지와 딸과의 관계에서의 마음의 갈등이 중요한 문제로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딸은 귀엽고 아름다운 여자아이의 역할을 하면서 아버지에게 호감을 가지려고 노력하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을 얻으려는 과정에서 딸은 어머니와 일종의 경쟁자가 되어 때로 어머니를 무시하기도 하면서 어머니와의 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 하지만 보통은 아버지와의 지나친 사랑을 포기하고 어머니의 성숙된 여성성을 받아들이면서 양쪽 부모와의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무사히 이 성장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지 못한 경우 문제가 되어 아버지에게 지속적으로 사랑을 받으려는 무의식적인 욕구가 남아있게 되고 그래서 성숙한 어머니의 여성성을 가지는 대신에 미성숙된 여성성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를 Electra complex라고 하는데 크게 에디푸스 콤플렉스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런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 어머니에 대해 가졌던 증오심이 잘 극복이 되지 않아 여자 친구를 사귀는데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일이 많고 때로는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가 지나치게 많은 경우에는 남자같은 여자아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동성애적인 경향을 가질 수도 있다. 


2) 성도착증 

성적 충동과 성적 흥분을 위해 비정상적인 상상, 행위를 반복적이고 지속적(적어도 6개월 이상)으로 보이는 정신병적 성 장애이다. 남자에게 많으며, 50% 이상이 18세 이전에 발병하며 발병 후 도착 행위는 15~25세 사이에 가장 많이 행하고 이후 감소한다. 정신과학적으로 원인을 분석할 때, 인격이 발달하는 시기중 구순기, 항문기 고착 또는 에디푸스 콤플렉스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강력한 성적 충동과 함께 성적 흥분을 위하여 행위에 있어서 비정상적인 상상, 대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최소 6개월 이상 지속적이며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원인은 인격발달과정 중 구순기나 항문기 수준에 고착되거나 에디푸스 콤플렉스와 연관되기도 하며, 어린 시절의 어머니와의 이별, 성폭력, 성호르몬의 장해와 대뇌 기능장해 등이 있다. 성폭력과 연관될 가능성이 특히 높은 성도착증이다. 


3) 노출증 

정신과 질병의 하나로 노출증(exhibitionism)이 있다. 미리 예상하거나 경계하지 않고 있는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성기를 노출하고픈 강한 충동을 갖거나 실제로 노출하는 행위를 하는 경우로서 성도착증에 해당된다. 환자의 대부분은 남성이다. 요즈음의 젊은 여성들의 노출 행동은 정신과적 질병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노출 행동은 사전적 의미의 과시벽, 자기선전벽과 연관될 수도 있겠다. 

정신분석에서는 인격 발달 과정 중 구강기나 항문기 수준에서 고착(fixation)된 것으로 보거나 에디푸스 콤프렉스와 관련시켜 노출 행동을 이해한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나 어머니와의 이별에 대한 불안을 다스리려는 무의식적 시도로 간주하기도 한다 


4) 거세콤플렉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음경크기에 대하여 고민하며 정상적인 음경을 갖고 있는 사람조차 자신 은 다른 사람들보다 음경이 적다고 느끼게 되는 것일까. 이 문제를 정신적인 측면에서 보면 모든 남자아이들은 일정 기간 어머니를 두고 아버지와 적대적인 감정을 느끼는 에디푸스 콤플렉스시기를 거친다고 말한다. 이 때 어머니를 차지하고 있는 건강한 아버지의 큰 음경과 자신의 작은 음경을 비교하여 자신의 음경을 왜소하다고 생각한다. 또 그런 생각이 발전하여 혹시 자신의 음경이 손상받을 지도 모른 다는 거세콤플렉스를 느끼게 된다. 거세콤플렉스가 성장후에도 내면에 잠재하여 자신의 음경이 왜소하다고 느끼는 원인이 될 수 있다. 


5) 성욕망 장애 

성욕망 장애는 두 가지로 분류한다. 성욕저하 장애는 성행위에 간한 성적 환상과 욕구가 결핍된 경우를 말한다. 물론 주요 우울증이나 정신분열병 같은 병에 의한 것이 아니고, 약물이나 신체 질환에 의한 것도 아니어야 한다. 이에 비해 성혐오 장애는 배우자와 성기를 통한 성접촉을 혐오하며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전자가 후자보다 더 흔하다. 
정신역동적으로는 성에 관한 무의식적 공포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성욕을 억제하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감당할 수 없는 동성애적 충동을 억압하기 위해 성욕을 억압하거나 성접촉을 혐오하는 수도 있다. 프로이드는 성욕의 저하를 에디푸스 갈등이 미해결된 것에 근거한다고 하였다. 배우자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경우나 배우자에게 적개심을 느끼는 경우에도 성욕이 상실될 수 있다. 


6) 결혼기피증과 결혼중독증 

결혼이라는 인생의 한 과제를 지나치게 무겁게 여기면서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영원한 '피터팬'들이 있다. 부모에 대한 에디푸스 콤플렉스, 일렉트라 콤플렉스 때문에 독립을 거부하고 사랑스런 자녀 노릇만 일생 고집하는 사람들도 물론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7) 에로틱한 옷의 소재 

모피 

모피는 위신이나 따뜻함, 부드러움 등을 나타낸다. 모피의 부드러움과 안락감은 모태로 되돌아 가려는 욕구를 유발시키기도 한다. 공공 장소에서도 모피를 걸친 사람을 보면 쓰다듬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며, 보는 이로 하여금 흥분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아울러 모피는 음부를 상징하며 착용자를 동물로 연상케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모피는 인간을 동물과 동일화시켜 동물의 힘과 주요한 성질을 체험하는 한편 동물을 아버지 또는 신에 견주어 토템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동물의 모피를 몸에 두르는 행위는 토템신앙 축제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때때로 모피는 상징의 차원에서 살해된 부모에 대한 죄악감과 함께 에디푸스 콤플렉스의 극복을 상징하기도 한다. 


4. 프로이드는 에디푸스콤플렉스 환자 였다. 

현대 정신분석의 시조라 할 수 있는 프로이드는 프라베르크(Freiberg)란 책코슬로바키아의 작은 카토릭 촌에서 출생하였다. 모직물 상인이었고 대표적인 가부장적 권위주의적 존재였던 그의 아버지(Jacob Freud)는 괘짜였다. 손자까지 본 40 세 때에 20세도 안 되는 유대인 처녀와 재혼, 이 결혼에서 아이들을 8을 낳았다. 프로이드는 이 중 첫 아기였다. 아기로 태어나자마자 이미 아저씨가 된 그는 이미 자기 분석, 신경증(neurosis) 증상을 노정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자기에게 권위와 강압의 대상인 자기 아버지를 무의식적인 질투와 미움으로 거부하였고, 반면에 젊은 어머니에 대하여는 연정(passion)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드는 요즘 우리가 말하는 소위 '에디푸스 콤푸렉스'(Oedipus complex)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프로이드는 아이들을 더 낳지 않기 위해 모든 성적 행위를 기피하였다고 한다. 


5. 문학으로 볼 수 있는 에디푸스 콤풀렉스 

1)영화 에디푸스왕 - Edipo Re 


감독 :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주연 : 프랑코 치티, 실바나 망가노 
이탈리아, 1967년, 104분 

운명의 장난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은, 고대 그리이스의 에디푸스 비극을 재해석하여 이데올로기와 신화의 관계를 탐구한 작품. 


2)책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 

저자 : 김혜남 
출판사 : 중앙M&B 
출판일 : 2002년 05월 

이 책은 그처럼 사랑을 절실히 갈구하면서도 사랑이 두려운 영혼들을 위해 쓰여진 책이다. 저자는 다양한 치료 사례들을 근거로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이책을 써 나갔으며 4장에서는 에디푸스 콤플렉스가 사랑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자세히 쓰여있다. 저자 김혜남씨는 정신분석 전문이이며 그 또한 에디푸스 콤플렉스 환자이다.




---------------------------------------------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이용한 면도기 광고





예전 '야심만만'에서 나왔던 내용 (오이디푸스 관련)






 
Posted by WN1
,



1. 성격의 대표적인 특징

2. 남자들에게 기대할수 있는 가장 좋은 점(남자의 미덕)

3. 여자들에게 기대할수 있는 가장 좋은 점(여자의 미덕)

4. 결정적인 단점

5. 좋아하는 일

6. 나의 행복한 꿈?(당신이 꿈꾸는 행복은 무엇?)

7. 가장 큰 불행은 무엇?

8. 뭐가 되고 싶은가?

9. 내가 살고 싶은 나라는?

10. 가장 좋아하는 소설의 남자 주인공?

11. 가장 좋아하는 소설의 여자 주인공?

12. 현실속에서 나의 영웅(존경하는 모델)

13. 역사속에서 가장 좋아하는 여주인공?

14. 가장 싫어하는것?

15. 역사상 가장 경멸하는 인물상?

16. 가장 소유하고 싶은 천부적인 재능?

17.  어떻게 죽고 싶은가?

18. 가장 용서하고 싶은 나의 과오는?

19. 나의 신조?

20. 사랑이란?


---------------


"프루스트의 질문"에 답한 세 사람 (프루스트, 마르크스, 마르케스)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문답놀이 중에 "프루스트의 질문 Le Questionnaire de Proust"이란 게 있다.
19세기 파리 살롱가에서 여흥거리로 유행했던 놀이였다는데, 
후일『익스프레시옹』지에서 유명 인사들의 사고와 감정을 알아보는 질문지로 적극 활용하면서 인터뷰를 대신해 널리 쓰이고 있는 설문이다.
프루스트가 13살 때 친구의 생일파티에서 이 문답놀이를 한 후, 
그 질문들을 정리하여 "Birthday Book"에 남겼기 때문에 "프루스트의 질문"으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한 TV 방송국에서는 저 질문을 제목으로 하는 명사 인터뷰 프로그램을 20 년째 방송하고 있다. 
(책으로도 발간되었다.)

인터넷에서 프루스트 자신이 그 질문에 남긴 답들을 발견하였기에 이곳에 갈무리 해둔다. (스무살 때 답한 것.)
더불어 마르크스, 마르케스 - 의 답변도 같이 묶어본다.



#. 당신 성격의 가장 큰 특징은? 
프루스트 : 사랑받고자 하는 갈망, 좀 더 정확히는 날 칭찬하기 보다는 어루만쳐주거나 응석을 받아주길 바라는 욕구.
마르크스 : 목적의 단일함
마르케스 : 충성심. 심지어는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도.

#. 당신의 최대 미덕은? 
마르크스 : 단순함
마르케스 : 죽을 때까지 비밀을 간직할 수 있는 능력

#. 당신의 결점은? 
프루스트 : 이해력의 결여와 약한 의지력
마르케스 : 비이성적 낙관주의.

#. 당신의 좌우명은?
프루스트 : 그 대답이 불운을 불러올까봐 두렵다, 대답하지 않겠다.
마르크스 : 모든 것은 의심해 봐야 한다. (De omnibus dubitandum.)

#. 당신이 꿈꾸는 행복은? 
프루스트 : 그리 높은 단계의 행복이 아닐까봐 걱정된다. 난 그게 뭔지 말할 용기도 없고, 만약 말한다면, 난 아마 그 행복을 몇마디 단어들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한 진술로 그 행복을 망쳐버리게 될 것이다.
마르케스 :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는 가능성.

#. 당신이 관대히 용서할 수 있는 실수는? 
프루스트 : 내가 이해하는 것들이라면. 
마르크스 : 속기 쉬움.
마르케스 : 허리 밑에서 저지르는 실수.

#. 당신이 꿈꾸는 이상은? 
마르크스 : 싸우는 것.
마르케스 :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것.

#. 당신의 최대 불행은? 
프루스트 : 내가 어머니와 할머니를 전혀 알지 못했더라면....
마르크스 : 굴복하는 것. 
마르케스 : 내가 영원하지 않다고 속으로 의심하는 것.

#. 당신 친구들의 가장 좋은 점은?
프루스트 : 상냥함. (그들이 상냥함을 지닐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외모를 갖고 있다는 전제하에...)
마르케스 : 아무 용무 없이 내게 전화 하는 것.

#. 제일 좋아하는 작가들은? 
프루스트 : 삐에르 로티. 요즘엔 아나톨 프랑스.
마르크스 : 디드로
마르케스 : 보름마다 바뀌지만, 끊이지 않는 사람은 소포클레스와 콘래드. 이번 주에는 멋진 자서전을 쓴 무하마드 알리.

#.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프루스트 : 보들레르와 알프레드 드 비니
마르크스 : 셰익스피어, 아이스킬로스, 괴테
마르케스 : 지금 현재는 카바피스. 페소아와 네루다.

#.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은? 
프루스트 : 다를뤼, 부트루 , 두 선생님.
마르크스 ; 스파르타쿠스, 케플러
마르케스 : 불길한 예언에 포위당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 가장 좋아하는 격언은? 
마르크스 : nihil humane a me alienum puto(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 
마르케스 : 너무 고전적이라 출판할 수 없음!

#. 남자의 최대 자질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프루스트 : 남성들만의 꾸밈없는 교우관계
마르크스 : 강함
마르케스 : 부드러움.

#. 여성 최대의 자질은? 
프루스트 : 여성적인 아름다움
마르크스 : 약함
마르케스 : 용서.

#.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는? 
프루스트 : 베토벤, 바그너, 슈만
마르케스 : 벨라 바르톡

#.가장 좋아하는 화가는? 
프루스트 : 레오나르도 다빈치, 렘브란트
마르케스 : 고야. 하지만 12시 이전에는 결코 좋아하지 않음.

#. 가장 좋아하는 꽃은? 
프루스트 : 그녀의 것.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모든 꽟을 좋아한다.
마르크스 : 월계수
마르케스 :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메르세데스가 매일 아침 책상에 꽂아 놓는 빨간 장미.

#. 좋아하는 색은? 
프루스트 : 아름다움은 색이 아니라 색의 조화 속에 있다.
마르크스 : 빨강
마르케스 : 자마이카에서 보이는 오후 세시의 카리브 해의 노란색.

#. 가장 좋아하는 새는? 
프루스트 : 제비
마르케스 : 오렌지색 오리

#. 가장 싫어하는 것은? 
프루스트 : 내가 지닌 최악의 단점들
마르크스 : 노예근성
마르케스 : 일요일.

#. 가장 혐오하는 역사적 인물은? 
프루스트 :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역사 교육을 받지 못했다. 
마르크스 : 마틴 터퍼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대중작가)
마르케스 : 콜럼버스와 산탄데르 장군.

#. 좋아하는 소설 속 주인공은? 
프루스트 : 베레니케 berenice (보통 베레니스라고 부르는 연극(라신느)에 나오는 여주인공으로 머리 털자리의 전설을 낳은 고대 이집트 왕비.
마르크스 : 그레트헨(괴테의 '파우스트' 1부의 주인공)
마르케스 : 가르강튀아, 단테와 드라큘라 백작.

# .가장 좋아하는 군사행위는? 
프루스트 : 나 자신이 지원병으로 응모했던 일
마르케스 : 열다섯 명의 생존자를 구해낸 작업.

#. 당신이 갖고 싶은 천부적 재질은?
프루스트 : 의지력과 저항할 수 없는 매력
마르케스 : 점칠 수 있는 능력

# .어떻게 죽고 싶은가? 
프루스트 : 지금의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 무척 사랑받으면서...
마르케스 : 친구들에 둘러싸여 침대에서 죽고 싶음.

#. 어디에서 살고 싶은가?
프루스트 : 내가 바라는 일들만이 실현되는 곳 그리고 늘 사람들이 부드러운 감정들을 주고받는 곳
마르케스 : 지오콘다 깊숙이 있는 슬픈 개울 옆에서.

#. 가장 되고 싶었던 사람은? 
프루스트 :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사람으로서의) 나 자신.
마르케스 : 장터의 마술사.

#.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름은? 
맑스 : 라우라, 예니 (딸들의 이름)



---------------
질문 : 맑스의 답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미덕은 : 단순함 
당신이 남자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미덕은 : 강함
당신이 여자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미덕은 : 약함
당신의 주요한 특징은 : 목적의 단일함
당신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 싸우는 것
당신이 생각하는 불행이란 : 굴복하는 것
당신이 가장 쉽게 용서할 수 있는 악덕은 : 속기 쉬움
당신이 가장 혐오하는 악덕은 : 노예근성
당신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 마틴 터퍼 (빅토리아여왕시대의 대중작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 책에 파묻히기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 셰익스피어,아이스킬로스, 괴테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산문작가는 : 디드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웅은 : 스파르타쿠스, 케플러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여주인공은 : 그레트헨 (괴테의 파우스트 1부의 주인공)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꽃은 : 월계수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 빨강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름은 : 라우라, 예니 (딸들의 이름)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 생선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경구는 : nihil humane a me alienum puto (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좌우명은 : De omnibus dubitandum (모든 것은 의심해 보아야 한다)








Posted by WN1
,



책장 안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 어릴 적 읽었던 책부터 시대를 주름잡았던 베스트셀러까지 가득 꾸며진 책장을 바라보기만 해도 뿌듯하다. 나중에 다시 읽어보겠단 생각으로 하나하나 꼽아뒀지만 생각만큼 손이 가게 되질 않는다. 더 이상 모아둘 공간도 없는데 막상 버리자니 아깝다.

이럴 때 책장 안 잠자는 책들에게 해방감을 맛보게 하는 건 어떨까. 그야말로 책에게 주는 광복절 특사다. 책에도 자유를 주자는 목소리들이 인터넷 동호회를 통해 날로 높아져 가고 있 다. 근데 어떻게 자유를 주라는 걸까.

직장인 김은경씨(32세). 우연히 동네 산책을 나갔다가 공원벤치에서 주인 없는 책 한 권을 주웠다. 겉표지엔 이름은 적혀 있질 않고 알 수 없는 번호가 적혀 있다. 바코드도 아니고 이게 뭘까.

마침 갖고 싶었던 책이고 궁금하기도 해서 일단 가져와 책에 적혀 있는 인터넷 사이트를 방문해 보기로 했다.

‘북크로싱…’이란 말이 뜬다. 이게 무슨 말일까. 어떤 사이트인지 더욱 궁금 해 회원가입까지 하는 김씨. 30여분쯤 둘러보고 난 후 김씨는 자신의 책꽂이에 서 잠자고 있던 책을 꺼내든다. 그리고 주인 없는 책에서 봤던 그 표식(스티커 )을 해당 사이트에서 내려받기 한 후 김씨의 책에 정성스럽게 붙인다. 마치 날 개를 달아주듯. 사람들이 잘 다니는 곳을 곰곰 생각하다 인근 지하철역 부스에 내려놓고 돌아선다. 책은 그렇게 새로운 여행을 시작한다.

이게 바로 ‘북크로싱(Book Crossing) 운동’이다. 예전 ‘아나바다’ 운동을 기억하면 이해하기 더 쉽다.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 쓰는 절약 캠페인의 일환이었다. 책도 마찬가지로 서로 바꿔 읽자는 운동이다. 그냥 아는 사람들끼리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더욱 광범위한 방법으로 고안해 낸 것이 온라인 모임을 활용하는 것.

북크로싱 운동은 2001년 미국인 론 혼베이커(Ron Hornbaker, 37)가 만든 사이 트 www.bookcrossing.com으로부터 시작됐다. 소프트웨어 운영자였던 론 혼베이 커는 읽기(Read)·쓰기(Register)·양도(Release)라는 ‘3R’ 슬로건을 갖고 창안해 낸 것이다. 이 사이트는 전세계에서 매일 500여명, 매년 20만명 이상이 회원으로 등록하고 있다. 미국에서 시작됐지만 유럽 각지로 퍼져나가면서 우리 나라 역시 바통을 이어받았다.

온라인시대를 맞아 출판시장이 심각한 위기를 겪을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예상 외로 인터넷 구입 말고도 블로그, 카페, 미니홈피 등 책을 위한 소그룹 모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책의 움직임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다.

지난해 3월 ‘당신의 책에 자유를 주라’는 목소리를 내며 ‘프리유어북(www.f reeyourbook.com)’이 태어났다.

북크로싱의 원조격인 론 혼베이커 사이트를 열심히 들락거리며 직접 도움도 받 아 북크로싱 운동 전문 사이트를 만들었다. 현재 등록된 도서는 2830권이며 회 원수는 4000여명으로 게시판을 통해 회원간 의견 나눔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 프리유어북 대표 김정호씨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망라하는 즐거운 지적 여행이며 동시에 책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실제로 만남의 기회를 갖게 하는 여 행입니다”라며 북크로싱 운동을 설명한다.

책에 돛을 달아 항해를 시킨다는 의미의 ‘돛단책(www.sailing book.com, 대표 안종권)’도 있다. 지난 9월부터 돛단책 항해가 시작됐다. 북크로싱을 순수 우 리말로 바꿔단 셈이다.

돛단책 사이트는 여러 가지 볼거리, 즐길거리가 가득하다. 북크로싱이 잘 되고 있는지 온라인을 통해 실시간 검색이 되는 것은 물론, 독후감이나 20자 서평대 회, 디카로 만나는 책, 연재방 등 다양한 코너가 있어 회원들 참여를 유도한다 . 연재방은 다른 커뮤니티 사이트와 연계해 인터넷소설가가 직접 연재하는 재 밌는 이야기를 제공한다.

 

■인터넷 통해 서로 바꿔보는 재미■

네이버 블로그 카페에서도 유명한 북크로싱 카페가 있다. ‘책에 날개를 다는 사람들(cafe.naver.com/crossingbookcafe)’이다. 닉네임 ‘나른고냥’으로 통 하는 차우진씨(31)가 책에 날개를 달아주는 사람들의 총책임을 맡고 있다. 200 4년 2월에 시작돼 가장 먼저 북크로싱을 움직인 주인공이다. 블로그답게 아기 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오프라인 모임 장소도 신촌과 대학로 카페를 지정해 둬 회원들이 더 편리하게 북크로싱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대한민국 사이버 도서관을 자처하는 ‘북모임(www.bookmoim.co.kr, 대표 성기 범)’ 역시 지난 9월 문을 열었다. 회원수는 4000여명을 넘어가고 있으며 등록 된 자료도 4만1036건에 이른다. 이중 등록 도서는 3만8093권이며 나머지는 DVD 와 CD등을 포함한다. 크로싱을 책에만 제한하지 않은 까닭이다. 또 북모임 사 이트를 통해 책을 살 경우에는 인터넷서점 예스24·알라딘·모닝365와 연계돼 있어 자동적으로 개인적립금 외의 2~3%가 북모임 앞으로 적립된다. 이것은 차 후 회원들에게 이벤트를 제공하거나 책이 필요한 곳에 사용될 목적이라고. 여 기엔 ‘마이서재’ 기능도 달려 있는데 요즘 인기 있는 싸이월드의 미니홈피를 닮았다. 자신이 갖고 있는 책 목록을 올려놓으면 다른 회원들이 찾아와 빌려달 라고 리플을 달고 갈 수도 있으며 대여리스트까지 제공된다. 때문에 북크로싱 이 익숙지 않아 염려하는 회원들은 이 기능을 적극 이용하기도 한다.

성기범 대표는 “북크로싱 운동은 직장인들의 독서문화 정착에 좋은 수단이 될 것”이라며 “독서경영의 진정한 의미를 북모임의 북크로싱 서비스를 통해 전 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한편, 현재 KBS ‘책을 말하다’에서는 ‘북크로싱(Book Crossing)’에 대한 우리말 명칭을 공모하고 있다. 기간은 채택될 때 까지다. 그야말로 북크로싱의 취지를 십분 살릴 수 있는 이름이 나오길 학수고대 하고 있다. 채택된 네티즌 에겐 ‘TV 책을 말하다’가 선정한 테마북을 증정해 북크로싱 운동이 되게끔 한다.

일반인들 중 아직까지 북크로싱 운동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문득 길 을 가다 새주인 만나기를 갈망하는 책을 만난다면 얼른 집어들어 보자.

갖고 싶었던 책이라고 슬쩍 집안 책꽂이에 꽂아놓을 수도 있을테지만 해방되고 방생된 책을 그냥 가둬두진 못할 것이다. 책 돌려보기를 통해 성숙한 시민의식 과 함께 사장된 책을 다시 살려내는 소중함을 함께 맛보길 기대한다.

 

▷잠깐 용어

·북크로싱(Book Crossing)운동 : 책을 읽은 후, 책과 함께 북크로싱 메시지를 적어 공공장소에 놔두면 다음에 습득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다음 사람에게 책을 넘기는 방식. 예측 불가능한 책 릴레이라고 보면 된다.


 
Posted by WN1
,
리비도 [Libido]
정신분석학 용어로 성본능(性本能)·성충동(性衝動)의 뜻.
이 말은 보통 말하는 성욕, 다시 말해 성기()와 성기의 접합을 바라는 욕망과는 다른, 넓은 개념이다. S.프로이트는 리비도가 사춘기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서서히 발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본능은 구순기(항문기()를 통해 발달하다가 5세경 절정에 이른 후, 억압을 받아 잠재기에 이르고, 사춘기에 다시 성욕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나 리비도는, 중도에서 발달이 중지되기도 하고[], 완전히 발달했다가 거꾸로 되돌아가는 경우도 있다[退]. 이상성욕이나 신경증()이 이에 속한다.

또한 리비도는 대상에 주입()되어 축적되는데, 이러한 리비도를 대상() 리비도라고 한다. 우정, 부자간의 정, 연애 같은 것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자아()에게 주입된 리비도를 자아 리비도 또는 나르시시즘적 리비도라 한다. 자기의 건강상태를 이상스러울 정도로 걱정하는 상태, 말하자면 심기증() 같은 것이 그것이다. 

리비도가 충족되기를 바라다가 충족되지 않을 때는 불안으로 변한다. 또한 리비도는 승화되어 정신활동의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처음에 리비도를 자기보존 본능과 대립되는 것으로 보았으나, 나중에는 이 둘을 결합, 에로스(영원의 결합을 구하는 본능)라고 하여 죽음의 본능, 즉 삶을 파괴하려는 본능과 대립시켰다.


오이디푸스 [Oedipus]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퉁퉁 부은 발'이라는 뜻이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는 에피카스테)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라이오스는 이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한다”는 신탁()을 받았었기 때문에, 그가 태어나자 복사뼈에 쇠못을 박아서 키타이론의 산중에 내다 버렸다. 아이는 이웃나라 코린토스의 목동이 주워다 길러 코린토스의 왕자로 자란다. 청년이 된 왕자는 자기의 뿌리를 알고자 델포이에서 신탁을 받았는데, 그것이 앞의 내용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이를 피하려고 방랑하다가 테베에 이르는 좁은 길에서 한 노인을 만나 사소한 시비 끝에 그를 죽이고 말았다. 그 노인이 곧 자기의 부친인 것을 모르고 죽인 것이다. 당시 테베에는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나타나 수수께끼를 내어 풀지 못하는 사람을 잡아먹고 있었다. 여왕은 이 괴물을 죽이는 자에게 왕위는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그때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를 풀어 스핑크스를 죽인 후 왕위에 올랐고, 모친인 줄도 모르고 왕비를 아내로 삼았다. 둘 사이에는 네 자녀가 태어났는데, 왕가의 불륜이 사단이 되어 테베에 나쁜 병이 나돈다. 오이디푸스는 그 원인이 자기 자신임을 알자 두 눈을 뽑아내고 방랑의 길을 떠나 코로노스의 성림()에서 죽었다. 여왕도 자살하고 나머지 자녀들도 왕위를 둘러싼 골육상쟁으로 모두 죽고 말았다. 시인 소포클레스는 이 전설을 비극 3부곡 《오이디푸스왕》에서 다루었는데 이 이야기가 소포클레스의 비극으로 정착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렀으리라 생각된다. 신화 학자들은 이 근저에는 하나의 농경 제식에서 발단된 신화가 있다고 본다. 그 설명에 따르면 오이디푸스는 해의 신이고 이오카스테는 땅의 신이다. 해의 신은 해마다 땅의 아들로 태어나 묵은 해인 아버지를 배척하고 어머니를 갈고 일구는 지아비가 된다. 또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분석학자에 따르면, 이것은 유아의 어머니에 대한 독점애의 공상적 실현, 즉 아버지에게 반항하여 그를 배척하고 어머니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욕망(오이디푸스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이야기라고 말한다. 
Posted by WN1
,


Posted by WN1
,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중국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운동.

마오쩌둥()에 의해 주도된 사회주의에서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이었으며 그 힘을 빌어 중국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권력투쟁이었다. 

농업국가인 중국에서 과도한 중공업 정책을 펼쳐 정책 국민경제가 좌초되는 실패를 가져왔고 민생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자본주의 정책의 일부를 채용한 정책이 실효를 거두면서 류사오치 (유소기)와 덩샤오핑 (등소평)이 새로운 권력의 실세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권력의 위기를 느낀 마오쩌둥은 부르주아 세력의 타파와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면서 이를 위해 청소년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 각지마다 청소년으로 구성된 홍위병이 조직되었고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전국을 휩쓸어 중국은 일시에 경직된 사회로 전락하게 되었다. 마오쩌둥에 반대되는 세력은 모두 실각되거나 숙청되었고 마오쩌둥 사망 후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에 대해 ‘극좌적 오류’였다는 공식적 평가와 함께 문화대혁명의 광기는 급속히 소멸되었다. 


------------------


대약진운동

1950년대 말에 마오쩌둥의 농업정책과 그로 인한 군중운동을 말한다.

당시 마오쩌둥은 기계보다 인력에 의존하는 노동집약적인 산업화 방안을 내세웠는데모든 마을에 소형 용광로를 개발하여 새로운 대형공장 건설의 필요성을 대체하려 하였다대약진운동은 소련식 모델을 본뜬 산업화 정책의 실패로 일어난 반동운동으로, 1960년대 중·소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또한 무리한 정책추진으로 인해 오히려 많은 인민들이 굶어죽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결국 1960년 초 중국 정부는 대약진운동을 철회하고사유지와 농기구를 농민에게 되돌려주게 되었으며각종 공사조직도 폐지되었다대약진운동의 실패는 당내의 분열을 초래해 1966 초에 일어난 문화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

대약진운동 실패로 권력의 기반이 흔들릴 것을 우려한 마오쩌둥의 주도로 1965 가을부터 약 10여 년 동안 중국 사회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킨 대규모 군중 운동이다.

 

문화 대혁명 일명 홍의병(홍의병)의 난 이라고 합니다

1948년 중국정부가  수립되고 1950년 한국전쟁 1960년대에 일어난 공산주의 수정론 즉(백가쟁명 백화제방론)

공산주의 보다 사회주의 로 수정하는 역사적 대 과업을 진행하게되었고 이에 모택통의 일인 권력기반에 심각한 도전을 받게되었습니다

사회주의로 수정하는과정에  최초 공산당 이론이 다소 붕괴되자 중국사회 전반에 개인의 요구와 각계각층의 반론이 제기되기시작하자 모택동은 이 시점에 정신 혁명을 을 통한  중화사상을 통일시키고저  현대화 과정에 제동을 건  사회 혁명입니다.

이 주체는 모택동이며 이 과정에서 사회 혁명주체세력을 홍의병이란 민간 조직을 이용하여 제일 먼저 정적 탄압과 신문화 도입과 현대화 주장을 한 이론가들을 숙청하기시작하였습니다

 

 

중국에 미치는영향 

중국은 전통적으로 홍(紅)과 전(專)이란 단어를 중시하였는데 여기서 홍은 정신을  전은 기술을 의미 합니다  그래서 홍의병(紅義兵) 정신무장즉 혁명주체사상으로 무장된  병사라는 말입니다 모택동은 이 홍의병을 뒤에서 조종하여 많은 정적과 현대화를 주장한 이론가들을 대거 숙청한  20세기 의 분서갱유라고 보면 됩니다  현대화 보다 정신무장을 앞세운사회 개혁운동인데 이 배후는 모택동의 권력기반을 확고히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모택동의 문화 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중국이 더 일찍 개방되고 현대화 되었을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잘못된것이며  아마 그때 개방되었으면 중국은 지금쯤  나라가 사분 오열되어 오늘의 중국은 없을을것입니다

 

이 문화 혁명으로 모택동의 권력유지로인해 개방 개혁은 후퇴하였으며 오히려 사상무장을로인한 공산독재 체제 강화를 가저다 준것입니다 중국은 등소평집권부터 개방과 개혁을 추구하게된 역사적 물결에 시행착오를가저온 결과 입니다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발단과 전개과정





1965년 11월10일 상하이의 일간지 문회보에 경극 대본 '해서파관'을 집필한 역사학자이며 북경시 부시장인 우한을 비판하는 내용의 글,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하다'가 실렸다. '해서파관'은 명대의 청렴한 관리 해서가 백성들을 위해 황제에게 상소했다가 억울하게 파직된다는 내용이다. 글을 쓴 야오원위안(상해시위원회 정책연구실)은 우한이 마오쩌똥의 대약진운동을 비판하다가 실각한 국방부장 펑더화이를 옹호한다고 비판했다. 펑더화이를 청렴한 관리 해서로 높이고, 모택동을 해서를 파직시킨 가정제로 폄하했다는 것이다.


1950년대 말 중국은 마오쩌둥이 주도한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심각한 식량난, 경제난에 빠져 있었다. 이런 가운데 펑더화이는 1959년에 대약진 정책을 비판하다가 숙청되었다. 이후 1961년부터 리우샤오치와 덩샤오핑이 다분히 실용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하여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어느 정도 복구하는 성과를 올렸다. 마오쩌둥의 절대적인 위치가 흔들리게 된 셈이었고, 이에 마오의 처 지앙칭 일파는 '해서파관'을 공산당 내 우파의 좌파에 대한 공세로 간주하여 야오원위안으로 하여금 문제의 글을 집필하도록 했던 것이다. 대약진운동이 좌절된 이후 중국 공산당 내부의 노선 대립과 권력 투쟁의 시작이었다.


결국 1966년 8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마오쩌둥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안 16개조'를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역시 같은 해 8월에 티엔안먼(天安門)광장에서 열린 백만인 집회에 모인 홍위병들은 전국 각지에 진출하여 마오쩌똥 사상을 찬양하고 전통 문화와 가치, 부르지와적인 것을 일소하기 위한 대대적인 시위를 시작했다. 1967년 1월 28일에 마오쩌둥은 린뺘오(林彪) 휘하의 인민해방군이 문화대혁명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것을 지시했다. 인민해방군은 학교, 공장, 정부기관을 접수하는 한편 초기에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수백만의 홍위병마저 오지로 추방했다. 문화대혁명은 1969년 4월 제9기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마오쩌똥의 절대적 권위가 확립되고, 린뺘오가 후계자로 결정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이후 1971년 9월 린뺘오가 소련으로 탈출하려다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리우샤오치, 덩샤오핑을 공격하면서 협력했던 린뺘오와 지앙칭 일파는 린뺘오가 국가주석에 오르는 문제로 대립했고, 린뺘오는 2인자의 부각을 용납지 않는 마오의 눈밖에 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덩샤오핑은 1973년에 저우언라이의 도움으로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지만, 1976년 1월에 저우언라이가 사망함으로써 지앙칭 일파의 공격을 받아 실각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에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지앙칭 일파가 몰락함으로써, 문화대혁명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된다. 공식적으로는 1977년 8월의 제11기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그 종결이 선포되었으며, 이후 1981년 6월에 중국 공산당은 문화대혁명을 당, 국가, 인민에게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로 규정했다.


공산당 내 좌파는 마오쩌둥을 절대시하면서, 계급 투쟁, 평등, 배외주의 등을 강조했고, 우파는 경제 발전, 교육, 실용주의 외교 등을 강조했다. 문화대혁명을 사상적으로 볼 때 평등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실험으로 평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고, 경제가 피폐해졌으며, 전통 문화와 가치가 철저하게 파괴되면서 사회적인 혼란이 극에 달했다. 또한 사상적인 노선 갈등이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공산당 내 권력 투쟁의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빛과 그늘; 그 결과





마오쩌둥〔毛澤東〕의 주도로 1965년 가을부터 10년간 중국사회를 뒤흔들었던 정치적·사회적 동란. 중국에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라 했던 이 혁명은 사회주의 사회 혁명운동으로서 중국사회를 격심하게 뒤흔들어 전례없는 혼란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특히 66년 여름에 <조반유리(造反有理)>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갑자기 출현했던 홍위병 운동과 정치지도자의 잇단 실각과 마오쩌둥 절대권력의 확립이라는 사태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대변동이었다.


〔당시의 규정〕 중국에서는 당시 문화대혁명을 <사람의 혼을 움직이는 혁명>이라 강조하였고, <중국사회주의 혁명의 새로운 단계>를 구분짓는 것으로 공식 규정했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62년 9월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10회 전체회의(약칭 제8기 10중전회)에서 전당(全黨)·전인민에게 내렸던 <절대로 계급과 계급투쟁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지시를 출발점으로 한 것인데, 이 <혁명>의 최대 목표는 사회주의 사회 계급투쟁의 관철에 있었으며, 우선은 <당내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한 줌의 실권파>를 뿌리째 타도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라 했다.


〔3가지 측면〕 문화대혁명은 일관하여 중국공산당 내부의 권력투쟁적인 성질과 당내투쟁의 대중운동화라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에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사회적 측면 3가지가 있었다. 먼저 정치적으로는 문화대혁명 제1단계에서 마오쩌둥의 절대적 권위를 확립함과 동시에 린뱌오〔林彪〕를 당부주석으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삼는 새로운 정치적 지도권을 강행적으로 확립했다. 그러나 이것은 린뱌오를 중심으로 한 인민해방군의 주도에 의하지 않는 한, 류사오치〔劉少奇〕·덩샤오핑〔鄧小平〕을 비롯한 이른바 실권파 세력으로부터의 탈권(奪權)이 불가능했다는 것도 나타냈으며, 여기에 병영(兵營) 체제화한 중국 권력중추의 정치위기의 내부모순이 나타났던 것이다. 71년 9월 일어난 충격적 린뱌오이변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볼 때 문화대혁명은 처음에는 <문예정풍(文藝整風)>으로 나타난 바와 같이 종래의 문화나 가치의식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는 측면도 있었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사회가 그 발전단계에서 인류문화유산을 어떻게 계승하여 나아가느냐 하는 문제가 내포되어 있었고, 이 점에서 중국은 자기 문명사를 철저하게 고쳐 쓰려는 듯했으나 <마오쩌둥사상>의 절대화는 사상이나 문화를 본래적인 생명에서가 아니라, 체계적인 이데올로기로의 기능이라는 결과밖에 가져오지 못했다. 사회적으로는 이른바 <빈곤의 유토피아>를 추구하여 중국사회를 변혁시키려고 했던 것이고, 마오쩌둥의 의식에는 도시 엘리트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사회의 새로운 계층화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구상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한편 절대적인 마오쩌둥 가부장체제 아래에서 그것을 실천하려는 단계에 중국 민중의 저항을 받고 중국전통사회의 두꺼운 벽에 부딪쳐 마오쩌둥의 이상은 마침내 좌절되었다고 할 수 있다. 75년 여름의 항저우사건〔杭州事件〕, 76년 4월의 천안문사건은 마오쩌둥 정치에 대한 민중의 반란이었고, 같은해 10월 베이징정변〔北京政變〕으로 마오쩌둥 측근인 <사인방(四人幇)>은 실각되고 말았다.


〔전개과정〕 마오쩌둥은 장칭〔江靑〕·장춘차오〔張春橋〕 등 이른바 <장칭문예살롱> 인사들이 모였던 상하이에서 문학대혁명의 개막을 알리고, 65년 11월 10일 젊은 문예비평가 야오원위안〔姚文元;당시 상하이시당위원회 서기〕은 <신편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여, 역사학자로서 이름난 베이징시 부시장인 우한에 대한 전면적 비판을 시작했다. 우한 비판은 베이징의 지도적 지식인들, 이른바 <삼가촌(三家村)그룹>에 대한 비판 쪽으로 확대되었으며, 이윽고 당베이징시당위원회가 실권파 아성이라고 격렬히 비판되었고, 펑전〔彭眞〕·베이징시장(당베이징시 위원회 제1서기) 등이 일제히 규탄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66년 4월 상순, 베이징시 당위원회가 개편되었고, 4월 18일자 인민해방군 기관지 《해방군보(解放軍報)》 사설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으로 처음 공식규명했다. 이어서 5월 16일 문화대혁명의 신호나팔 구실을 했던 당 중앙 <통지>를 공포하고, 당 중앙 문혁소조(조장 陳伯達, 제1부조장 장칭)를 설치했다. 이윽고 5월 25일 베이징대학의 젊은 여성교사 녜위안츠가 교장 루핑〔陵平〕 등을 <삼가촌그룹>의 일파라고 격렬히 비난한 대자보를 붙였다. 6월 1일 마오쩌둥은 이 대자보를 전국에 방송토록 지시하고, 이를 <20세기 60년대 중국의 파리고뮌 선언서>라고 찬양했다. 6월 3일 펑전 등의 해임과 베이징시당위원회의 개편을 발표하고, 실권파 아성의 붕괴를 알림과 동시에 <마오쩌둥사상>을 견지해 온 린뱌오의 공적이 크게 보도되기 시작했다. 66년 8월 중국공산당 제8기 11중전회가 베이징에서 열렸다. 마오쩌둥은 회기중이었던 8월 5일 <사령부를 포격하자―나의 대자보>를 스스로 붙였고, 8월 8일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66년 8월 18일 천안문광장에서 제1회 100만명집회에 모였던 홍위병들은 전국 주요 도시에 가두진출하여 <마오쩌둥사상>을 찬양하면서 격렬한 구문화(舊文化) 파괴행동을 벌였다. 문화대혁명은 홍위병 중심의 가두투쟁단계에서 실권파 타도를 위한 탈권투쟁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실권파의 저항도 끈질겨 각지에서 탈권과 반탈권 사이의 무력투쟁이 계속되었을 때, 린뱌오휘하의 인민해방군은 67년 1월 23일 탈권투쟁에 대한 군(軍)의 전면개입을 결정했다. <1월혁명>이라는 상하이의 탈권투쟁에서 상하이의 반란파는 코뮌형 권력을 구상하기 시작하였으나, 마오쩌둥 등 당 중앙은 이 코뮌구상을 갑자기 눌러버렸다. 이는 문화대혁명의 한 전환점이 되었고, 그 뒤 마오쩌둥·린뱌오주류파는 혁명파의 <대연합>에 의한 탈권을 호소하며 혁명간부, 군(軍) 대표, 혁명적 대중대표로 이루어진 <삼결합(三結合)>의 혁명위원회를 수립하라고 호소했고, 혁명위원회는 68년 9월까지 전국의 모든 1급 행정구에 성립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공산당 제9회 전국대표대회(약칭 9전대회)가 69년 4월에, 56년의 8전대회 이래 13년만에 열렸다. 이 9전대회는 문화대혁명이 위로부터의 당재건이라는 큰 전환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마오쩌둥의 비길 데 없는 권위를 확립하고 린뱌오를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한 의식이었다. 그 동안 마오쩌둥 측근으로 문혁소조 조장이었던 천보다〔陳伯達〕는 70년 8~9월 제 9 기 2중전회에서 <대야심가·음모가>라 하여 실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 린뱌오이변이었다. 린뱌오이변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나, 73년 7월 중국당국은 린뱌오가 마오쩌둥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몽골에서 추락사하였다고 발표했다. 문화대혁명의 한 중대한 결말이 된 린뱌오이변이라는 심각한 사건 후인 73년 8월 중국공산당 10전대회가 열렸다. 10전대회에는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정치보고, 왕훙원〔王洪文〕의 당규약개정 보고를 채택한 뒤에 새로운 중앙 지도부를 선출했다. 중앙위원회 주석에 마오쩌둥을, 부주석에 9전대회 때 부주석이 린뱌오 단 한 사람이었던 데 반해 저우언라이·왕훙원·캉성〔康生〕·예젠잉〔葉劍英〕·리더성〔李德生〕 등 5명을 선출했다. 이 10전대회는 린뱌오 처단과 대(對)소련 비난을 거당적으로 실시한 의식을 나타냈으나, <마오쩌둥체제하의 비(非)마오쩌둥화>와 탈문화대혁명을 지향하는 <조류(潮流)>의 크기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10전대회 전후에 일어난 공자비판(孔子批判)·시황제예찬(始皇帝禮讚) 운동은 이윽고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이 되어 이른바 <반조류>의 반격이 일어나 마오쩌둥체제 말기의 내부각축은 차츰 치열해갔다. 75년 여름에 일어난 항저우사건은 공장노동자의 임금인상요구동맹파업이 몰고 온 항저우 일대의 혼란을 군대가 제압한 사건이었고, <빈곤의 유토피아>를 강제해왔던 마오쩌둥체제의 말기적인 사회적 모순을 안으로부터 노정시킨 사건이었다. 이리하여 <조류>와 <반조류>가 내부적으로 각축하는 가운데, 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총리는 병으로 죽게 되었다. 그의 장례식에서 조사(弔辭)를 읽었던 덩샤오핑부총리는 감히 <4개의 현대화>노선 계승을 문혁파 지도자의 면전에서 서약하여 문혁파들을 크게 초조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주자파(走資派)> 비판운동이 76년 2월 초순부터 일제히 전개되었다. 2월 초순에는 문혁파 비(非)상하이그룹의 화궈펑〔華國鋒〕이 국무원총리대행으로 마오쩌둥의 지명을 받아 일약 부각되었으나, 이러한 <역류>에 대한 대중적 항의로 일어난 것이 천안문사건이었다. 당 중앙은 이 사건을 <반혁명>사건으로 단죄하고 덩샤오핑을 모든 직위에서 해임시켰으나, 후에 천안문사건이 재평가되었을 때에는 <위대한 4·5운동>으로 찬양되었듯이 천안문사건은 마오쩌둥체제하의 대중반란 중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죽자 중국의 권력중추는 마오쩌둥의 죽음을 애도할 겨를도 없이 후계권력 싸움이 마오쩌둥 측근체제 내부에서 격화되었다. 마오쩌둥의 죽음을 결정적인 계기로 하여 10월 7일에는 <기정방침대로 일을 처리한다>는 마오쩌둥의 유훈(遺訓)을 내걸고, 권력계승권을 재빨리 주장했던 문혁파 상하이 그룹인 <사인방>이 모두 실각하는 충격적인 베이징정변과 함께 화궈펑체제가 일거에 형성되었다. 이리하여 화궈펑은 마오쩌둥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당신이 한다면 나는 안심이다>라는 또 하나의 마오쩌둥 유훈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그림자>는 이윽고 중국내정 전체의 마오쩌둥화가 진전됨에 따라 화궈펑의 정치적 장래를 흐리게 하여 77년 7월에는 중국공산당 제10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이 재부활되었다. 같은 해 8월의 중국공산당 제11기전대회에서는 새로운 당규약 가운데 <4개의 현대화>가 명기(明記)되었고, 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는 통일적인 국가목표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은 오늘날의 <4개의 현대화>라는 노선(路線)으로 크게 선회하였다.


〔오늘날의 평가〕중국은 79년 10월 1일, 건국 30주년을 맞아 그 축하집회에서 예젠잉이 처음으로 문화대혁명의 잘못을 지적했다. 또한 81년 6월 중국공산당 제11기 6중전회에 의한 <건국 이래의 당의 약간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이 당의 결의에 의해 정식으로 부인되어 류사오치를 비롯하여 문화대혁명으로 타도된 지도자 모두를 복귀 또는 명예회복시키는 한편, 문혁파는 모두 실추하여 비마오쩌둥화가 진전되었다.



문화 대혁명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


대약진운동 실패로 권력의 기반이 흔들릴 것을 우려한 마오쩌둥의 주도로 1965년 가을부터 약 10여 년 동안 중국 사회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킨 대규모 군중 운동입니다.



일명 홍의병의 난 이라고 합니다

1948년 중국정부가  수립되고 1950년 한국전쟁 1960년대에 일어난 공산주의 수정론 즉


공산주의 보다 사회주의 로 수정하는 역사적 대 과업을 진행하게되었고 이에 모택통의 일인 권력기반에 심각한 도전을 받게되었습니다  사회주의로 수정하는과정에  최초 공산당 이론이 다소 붕괴되자 중국사회 전반에 개인의 요구와 각계각층의 반론이 제기되기시작하자 모택동은 이 시점에 정신 혁명을 을 통한  중화사상을 통일시키고저  현대화 과정에 제동을 건  사회 혁명입니다.


이 주체는 모택동이며 이 과정에서 사회 혁명주체세력을 홍의병이란 민간 조직을 이용하여 제일 먼저 정적 탄압과 신문화 도입과 현대화 주장을 한 이론가들을 숙청하기시작하였습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홍(紅)과 전(專)이란 단어를 중시하였는데 여기서 홍은 정신을  전은 기술을 의미 합니다  그래서 홍의병(紅義兵) 정신무장즉 혁명주체사상으로 무장된  병사라는 말입니다 모택동은 이 홍의병을 뒤에서 조종하여 많은 정적과 현대화를 주장한 이론가들을 대거 숙청하여 20세기 의 분서갱유라고 보면 됩니다  현대화 보다 정신무장을 앞세운사회 개혁운동인데 이 배후는 모택동의 권력기반을 확고히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모택동의 문화 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중국이 더 일찍 개방되고 현대화 되었을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잘못된것이며  아마 그때 개방되었으면 중국은 지금쯤  나라가 사분 오열되어 오늘의 중국은 없을을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문혁은 중국의 발전을 위하고 일인 권력기반 확고하게하고  정신무장으로 이념정립 정적탄압 중국의 분열을 막을수잇는  진시황제 이후 가장 강력한 기반을 갖게된 모택동의  정치 이념의 실천장이였다고 볼수잇습니다


이를방치했다간 중국은 분열될것이고 이 맥락에서 본다면 1990년 천안문사태도  국가 기반이 흔들리는 행위는 용납할수없다는 중국공산당의  중화 사상입니다  작년일어난  티벳사태도 이런 맥락과 연관을 을 갖고있다고 봐야 합니다 즉 올림픽을 포기하는한이 있드라도 중국의 분열을 사전  무력저지해야한다는  기조입니다




Posted by WN1
,

숙흥야매잠 (夙興夜寐箴) ;
夙 ; 일찍, 새벽,
興 ; 일어나다, 시작하다.
夜 ; 밤.
寐 ; 잠잘 때.
箴 ; 경계하다.  

  닭이 울어 잠을 깨면, 이러저러한 생각이 점차로 일어나게 된다.   

  어찌 그 동안에 조용히 마음을 정돈하지 않겠는가! 혹은 과거의 허물을 반성하기도 하고, 혹은 새로 깨달은 것을 생각해 내어, 차례로 조리를 세우며 분명하게 이해하여 두자. 

   근본이 세워졌으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의관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안색을 가다듬은 다음, 이 마음 이끌기를 마치 솟아오르는 해와 같이 밝게 한다. 

  엄숙히 정제하고, 마음의 상태를 허명정일(虛明靜一)하게 가질 것이다. 이때 책을 펼쳐 성현들을 대하게 되면, 공자께서 자리에 계시고, 안자와 증자가 앞뒤에 계실 것이다. 

  성현의 말씀을 친절히 경청하고, 제자들의 문변(問辯)을 반복하여 참고하고 바로 잡아라. 일이 생겨 곧 응하게 되면, 실천으로 시험하여 보라. 천명은 밝고 밝은 것, 항상 여기에 눈을 두어야 한다.  일에 응하고 난 다음에는 나는 곧 예전의 나대로 되어야 한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정신을 모으며 잡념을 버려야 할 것이다. 동과 정이 순환하는 중에도 마음만은 이것을 볼 것이다. 

  고요할 때는 보존하고 움직일 때는 살펴야 하지만, 마음이 두 갈래 세 갈래로 갈려서는 안된다. 독서하고 남은 틈에는 틈틈이 쉬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성정을 길러야 한다. 

  날이 저물고 사람이 권태로워지면 흐린 기운이 엄습하기 쉬우니 장중히 가다듬어 밝은 정신을 떨쳐야 한다. 밤이 늦어지면 잠자리에 들되, 손을 가지런히 하고 발을 모으라. 잡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심신이 돌아와 쉬게 하라. 

  야기(夜氣)로써 길러 나가라. 이미 정이면 원에 돌아오느니라.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여기에 마음을 두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부지런히 힘쓰라.


  퇴계선생 말씀 ;

 위의 잠(箴)은 남당 진무경(陳茂卿)이 지어 스스로 경계한 것입니다. 금화 왕노재(王魯齋)가 일직이 태주의 상채(上蔡) 서원에서 교육을 맡았을 때, 오로지 이 잠만을 가르쳐, 배우는 사람들마다 모두 외고 익혀서 실행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지금 삼가 노재의 경재잠도를 본떠 이 도를 만들어 그의 도와 상대가 되게 하였습니다. 원래 경재잠에는 공부해야 할 영역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 영역에 따라 배열하여 도를 만들었습니다. 이 도에는 공부해야 할 때가 많이 적혀 있으므로, 그 때에 따라 배열하여 도를 만들었습니다.

  무릇 도의 유행은 일상 생활 가운데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한 자리도 이가 없는 곳이 없으니, 어느 곳에서 공부를 그만 둘 수 있겠습니까? 잠깐 사이라도 정지되는 일이 없으므로 한 순간도 이가 없을 때가 없으니, 어느 때인들 공부를 그만두어서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사자(子思子)는 이르기를, "道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삼가 조심하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워한다"고 하였고, 또 "은밀한 곳보다 잘 드러나는 곳이 없고, 세미(細微)한 것보다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를 삼간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생활에 있어, 장소와 때를 막론하고 존양(存養)하고 성찰하여 그 공부를 힘쓰게 하는 법입니다. 과연 이와 같 이 할 수 있으면, 어느 영역에서나 털끝만큼의 과오마저 없게 될 것이며, 어느 때나 순간의 끊임마저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병진해야 합니다. 성인이 되는 요결, 그것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상의 다섯 도는 심성에 근원을 둔 것인데, 요점은 일상생활에 힘쓰고 경외의 태도를 높이는데 있습니다.
 

--------------------

夙興夜寐箴(숙흥야매잠) 

鷄鳴而寤, 思慮漸馳. 盍於其間, 澹以整之.

(   계명이오,       사려점치.       합어기간,       담이정지   )

▶닭이 울어 잠을 깨면, 이러저러한 생각이 점차로 일어나게 된다. 어찌 그 동안에 조용히 마음을 정돈하지 않겠는가!

 

或省舊愆, 或紬新得. 次第條理, 瞭然默識.

(   혹성구건,       혹주신득.       차제조리,        요연묵식  )

▶혹은 지난 허물을 반성하기도 하고, 혹은 새로 깨달은 것을 생각해 내어, 차례로 조리를 세우며 분명하게 이해하여 두자.

 

本旣立矣, 昧爽乃興. 盥櫛衣冠, 端坐斂形.

 (  본기입의,       매상내흥.        관즐의관,       단좌렴형   )

▶근본이 세워졌으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의관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안색을 가다듬어라.

 

提掇此心, 皦如出日. 嚴肅整齊, 虛明靜一

(  제철차심,        교여출일.        엄숙정제,       허명정일   )

▶이 마음 이끌기를 마치 솟아오르는 해와 같이 밝게 한다. 태도를 엄숙하게 겉모습을 단정히 하며, 마음을 비워 밝게 하고 조용히 하기를 한결같이 하라.

 

乃啓方冊, 對越聖賢. 夫子在坐, 顔曾後先.

(   내계방책,       대월성현.        부자재좌,       안증후선   )

▶이때 책을 펼쳐 성현들을 대하여, 공자께서 자리에 계시고, 안자와 증자가 앞뒤에 계신 듯하라.

 

聖師所言, 親切敬聽. 弟子問辨, 反覆參訂.

(   성사소언,      친절경청.         제자문변,       반복참정   )

▶성현의 하신 말씀을 몸소 간절히 경청하고, 제자들의 묻고 따지는 말을 반복하여 참고하고 바로 잡아라.

 

事至斯應, 則驗于爲. 明命赫然, 常目在之.

(   사지사응,       즉험우위.        명명혁연,       상목재지   )

▶일이 생겨 곧 응하게 되면, 실천으로 시험하여 보라. 천명은 밝고 밝은 것이므로 항상 여기에 눈을 두어야 한다.

事應旣已, 我則如故. 方寸湛然, 凝神息慮.

(   사응기이,       아즉여고.       방촌잠연,        응신식려   )

▶일에 응하고 난 다음에는 나는 곧 예전의 나대로 되어야 한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정신을 모으며 잡념을 버려야 할 것이다.

 

動靜循環, 惟心是監. 靜存動察, 勿貳勿參.

(   동정순환,       유심시감.       정존동찰,        물이물삼   )

▶움직임과 멈춤이 순환하는 중에도 마음만은 이것을 볼 것이다. 멈출 때는 보존하고 움직일 때는 살피어 두 갈래 세 갈래로 하지 말라.

 

讀書之餘, 間以游泳. 發舒精神, 休養情性.

(   독서지여,       간이유영.       발서정신,        휴양정성   )

▶독서하고 남은 틈에는 틈틈이 쉬면서, 정신을 푸근히 하여 성정(性情)을 쉬게 하라.

 

日暮人倦, 昏氣易乘. 齋莊整齊, 振拔精明.

(    일모인권,       혼기이승.       재장정제,       진발정명   )

▶날이 저물고 사람이 피곤해지면 흐린 기운이 엄습하기 쉬우니, 장중히 가다듬어 밝은 정신을 떨쳐야 한다.

 

夜久斯寢, 齊手斂足, 不作思惟, 心神歸宿.

(   야구사침,        제수렴족,       부작사유,        심신귀숙   )

▶밤이 늦어지면 잠자리에 들며, 손을 가지런히 하고 발을 모으라. 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심신이 돌아가 쉬게 하라.

 

養以夜氣, 貞則復元. 念茲在茲, 日夕乾乾.

(   양이야기,        정즉복원.       염자재자,       일석건건   )

▶밤기운으로써 길러 나가라. 이미 정이면 원에 돌아오느니라.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여기에 마음을 두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부지런히 힘쓰라.

 

 

☞숙흥야매잠 (夙興夜寐箴)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 잠들때까지 하루 일과에 대한 훈계.  ※夙(일찍 숙), 興(일어날 흥), 夜(밤 야), 寐(잠잘 매), 箴(경계할 잠)

 

☞숙흥야매 (夙興夜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자는 것”을 의미하며, 이 말은 《시경(詩經)》국풍ㆍ위풍(國風ㆍ衛風) “氓”, 소아ㆍ절남산지습(小雅ㆍ節南山之什)“小宛”,대아ㆍ탕지습(大雅ㆍ蕩之什)“抑”에 쓰여 있다.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주역(周易)》건괘(乾卦)에 나오는 구절로, 정(貞)이 다시 원(元)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겨울이 가면 봄이 돌아온다는 것으로 소생(蘇生)을 의미한다.

 

☞허명정일(虛明靜一)이란 "마음을 비워 밝게 하고 조용히 하기를 한  결같이 하다"는 의미이다


--------------------

<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

1. 닭이 울어 잠을 깨면 이러저러한 생각이 점차로 일어나게 된다. 어찌 그 동안에 조용히 마음을 정돈하지 않겠는가! 혹은 과거의 허물을 반성하기도 하고, 혹은 새로 깨달은 것을 생각해 내어 차례로 조리를 세우며 분명하게 이해하여 두자.


2. 근본이 세워졌으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의관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안색을 가다듬은 다음 이 마음 이끌기를 마치 솟아오르는 해와 같이 밝게 한다. 엄숙히 정제하고 마음의 상태를 허명정일(虛明靜一)하게 가질 것이다.


3. 이때 책을 펼쳐 성현들을 대하게 되면,공자께서 자리에 계시고 안자와 증자가 앞뒤에 계실 것이다. 성현의 마음을 친절히 경청하고, 제자들의 문변(問辨)을 반복하여 참고하고 바로 잡아라.


4. 일이 생겨 곧 응하게 되면 실천으로 시험하여 보라. 천명은 밝고 밝은 것, 항상 여기에 눈을 두어야 한다. 일에 응하고 난 다음에는 나는 곧 예전의 나대로 되어야 한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정신을 모으며 잡념을 버려야 할 것이다.


5. 동과 정이 순환하는 중에도 마음만은 이것을 볼 것이다. 고요할 때는 보존하고 움직일 때는 살펴야 하지만, 마음이 두 갈래 세 갈래로 갈려서는 안된다. 독서하고 남은 틈에는 틈틈이 쉬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성정을 길러야 한다.


6. 날이 저물고 사람이 권태로워지면 흐린 기운이 엄습하기 쉬우니 장중히 가다듬어 밝은 정신을 떨쳐야 한다. 밤이 늦어지면 잠자리에 들되 손을 가지런히 하고 발을 모으라. 잡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심신이 돌아와 쉬게 하라.


7. (그 심신을) 야기(夜氣)로써 길러 나가라. 이미 정(貞)이면 원(元)에 돌아오느니라.


8.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여기에 마음을 두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쓰라.







Posted by WN1
,


포정해우 - 포정의 소를 잡는 최고의 솜씨

 

중국 전국시대에 소를 잡는 데 최고의 기술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포정()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포정이 궁정 잔치에 쓰일 소를 잡고 있었다. 마침 우연히 그 곳을 지나던 왕이 그의 솜씨를 보고 감탄하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잡는 기술이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를  있는가?
포정은 칼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으려고 했을 때는 소의 겉 모습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지 3년이 지나니 어느새 소가 부위별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19 년이 흐른 지금은 눈으로 소를 보지 않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소의 살과 뼈, 근육 사이의 틈새를 봅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칼이 지나가게 합니다. 이런 기술로 단 한 번도 칼이 살이나 뼈와 부딪히는 실수를  적이 없습니다.
평범한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그 이유는 칼로 무리하게 뼈를 가르기 때문이다. 솜씨 좋은 백정은 칼을 가지고 소의 살을 베기 때문에 1년 만에 칼을 바꾼다. 그렇지만 포정은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았다. 소의 뼈와 근육 사이에는 어쨌든 틈새가 있기 마련이고 그 틈새로 칼날을 집어 넣어 소를 잡기 때문에 칼날이 전혀 무뎌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포정의 소를 잡는 최고의 솜씨 뜻의 포정해우(押丁解牛)의 고사성어가 여기서 나왔다.



박사가 되지 말고 도를 깨우치기를  .....

 


춘추 전국시대 제(齊)나라에 소를 잡는데 신기에 가까운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도우토(屠牛吐)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루아침에 아홉 마리의 소를 잡아도 칼이 전혀 무뎌지지 않아서 소의 털까지 자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자(莊子)》의 양생주편(養生主篇)에는 도우토 보다도 더 소를 잘 잡았던 포정(庖丁)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포정의 포(庖)는 부엌 포 또는 요리사 포자이다. 정(丁)은 백정을 뜻하므로 포정이란 사람의 이름인 고유명사가 아니라 소를 아주 잘 잡았던 요리사를 지칭하는 보통명사일 가능성도 있다. 어쨌거나 제나라 문혜군(文惠君)의 주방장이기도 했던 포정은 소 한 마리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해체 시킬 수 있었다. 어찌나 능수능란했던지 손 놀리는 것이나 어깨 위에 둘러매는 것, 발을 내디디는 것, 무릎으로 밀어치는 동작, 살점을 쪼개는 소리, 칼로 두들기는 소리가 마치 뽕나무 숲에서 춤을 추듯 음악에 맞고 조화를 이루었다고 한다.


해우(解牛)는 소를 해체하는 즉 소를 잡는 것을 뜻하므로 포정해우(庖丁解牛)란 포정의 소 잡는 기술을 나타내는 말이다. 포정은 무려 19년 동안이나 칼을 갈지 않고 사용했지만 여전히 그가 사용하는 칼의 날은  무디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도우토 보다는 분명 한 수 위였던 것 같다. 문혜군은 토정의 해우술(解牛術)이 고금에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신기를 보유한 것에 감탄하여 물었다.
"어떻게 하면 소 잡는 기술이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포정이 대답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의 겉모습만 보였습니다. 3년이 지나니 소의 겉모습은 눈에 띄지 않고 소가 부위별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10년이 지나고 부터는 마음으로 소를 보지 눈으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눈의 감각 작용이 멈추니 자연스럽게 마음의 정신작용만 남았습니다. 그때 소의 이치에 따라 살과 뼈 근육 사이에 커다란 틈새 속으로 칼을 지나가게 합니다. 그 묘한 기술은 아직 한 번도 칼질을 실수하여 살이나 뼈를 다친 적이 없습니다. “
문혜군은 넋을 놓고 포정의 말을 경청했다. 그의 말이 계속 되었다.


“솜씨 좋은 백정이 1년 만에 칼을 바꾸는 것은 칼로 소의 살을 베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백정은 월마다 칼을 바꾸는데, 이는 칼로 무리하게 뼈를 가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 칼은 19년이나 되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소와 뼈와 살 사이에는 틈새가 있기 마련이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소의 틈새에 넣으니 칼날을 움직이는 데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9년이 되었어도 칼날이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근육과 뼈가 엉킨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그 일의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하여 경계하며 천천히 손을 움직여서 칼의 움직임을 아주 미묘하게 합니다. 살이 뼈에서 털썩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칼을 든 채 일어나서 둘레를 살펴보면 비로소 부위 별로 해체된 소고기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면 칼을 씻어 챙겨 넣습니다."
문혜군은 포정의 말을 듣고 그가 백정이 아니라 도를 깨쳤다는 것을 알았다.


소 잡는 백정은 신분이 가장 미천한 계층에 속한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는 사람도 도를 깨칠 수 있다는 것을 포정이 보여 주었다. 그는 소를 칼로 잡은 것이 아니다.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아서 뼈와 뼈 사이로 칼을 지나가게 하는 이치에 따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소를 해체시킬 수 있는 경지를 터득한 도인이었다.


대학에 진학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면 박사가 된다. 그러나 박사 보다 한 수 위가 도사다. 도술은 이론이 아니라 현장에서 상황에 부딪치며 경험과 수련의 반복을 통해 체득하는 것이다. 빵을 어떻게 하면 영향학적으로 좋게 만드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볼 때 박사학위 소유자는 이론적으로 잘 알고 있고,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도 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도 가지 못하고 일찌감치 공장에 들어가서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갈고 다듬는 과정을 통해 제빵 기술을 익힌 사람보다 더 맛있는 빵은 만들지는 못한다.


우리나라 부모님들은 모두 자식을 박사를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박사보다 한 수 위가 도인이다. 소를 잡는 것을 가지고도 도를 터득하는데, 요리를 하고, 차를 만들고, 배를 만드는 모든 분야에서 도를 깨칠 수 있다. 이론적으로 많이 알아서 무엇 하겠는가. 도는 말로서 알려 줄 수도 없고, 문자에 의해 깨닫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포정해우의 예만 보아도 분명해 진다. 지금 어느 현장에서 무슨 일을 하던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 도를 깨우치기를 바란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을 것이고 참고할 이론도 없다 오직 스스로 정진하여 깨우쳐야 한다. 치열하게 스스로의 내면을 다스리고, 정신을 집중시켜 처절하게 구하라.

깨치고 나면 자유로워 질 것이다.

Posted by WN1
,
유토피아의 반대어.

역()유토피아라고도 한다. 가공의 이상향, 즉 현실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묘사하는 유토피아와는 반대로, 가장 부정적인 암흑세계의 픽션을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문학작품 및 사상을 가리킨다.

대표 작품으로는, A.L.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 G.오웰의 《1984년》(1949) 등이 있다. 이러한 디스토피아는 현대사회 속에 있는 위험한 경향을 미래사회로 확대 투영함으로써 현대인이 무의식중에 받아들이고 있는 위험을 명확히 지적하는 점에서 매우 유효한 방법이다. 미래를 진지하게 논하려면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쌍방의 시점에서 언급해야 한다.


유토피아 [Utopia]
[명사]
1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 =이상향.
2 <문학>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으로, 1515년에서 1516년 사이에 영국의 모어가 지은 공상 사회 소설. 공산주의 경제 체제와 민주주의 정치 체제 및 교육과 종교의 자유가 완벽하게 갖추어진 가상(假想)의 이상국을 그린 작품으로, 유럽 사상사에서 독자적인 계보를 형성하였다.

 

디스토피아 [dystopia]
[명사]
1 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이 극단화한 암울한 미래상. ≒역유토피아.
2 <문학>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허구로 그려 냄으로써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문학 작품. 또는 그 사상. ≒역유토피아. 


-----------

디스토피아 dystopia

 

토마스 모어의 '어디에도 없는 나라'인 유토피아(utopia)는 처음 어떤 방식으로 묘사되고 사용되어졌건 간에 지금에 와서는 '이상향'의 전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어디에도 없다라는 말은 이상이라는 것의 성질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할 수 있는데요, 즉 이상이기 때문에 현실엔 없다 정도의 의미로 해석해 된다 할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는 결과적으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아주 이상적인 국가(혹은 사회상)의 모습을 나타내게 되며 우리가 지향해야할 수렴점으로 그 상징적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유토피아가 이상향의 낙원을 묘사하고 있다면 이에 반하여 등장한 디스토피아(dystopia)는 '역(逆)이상향'을 상징합니다.

초기엔 단순한 유토피아의 반대개념으로 사용되던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가 사회적 현상이 된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독자적인 개념의 발전을 이루게됩니다.

현재에 와서는 비록 인지도는 낮지만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의 개념이 더욱 자주 사용되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디스토피아란 무엇일까요?

 

 

디스토피아는 인류가 현재로부터 예측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유토피아가 우리들의 미래에 펼쳐질 낙원이었다면 디스토피아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미래향을 보여줍니다.

재미있게도 근래에 들어서 문학등을 포함한 각종 미디어에 의하여 거의 정형화된 디스토피아의 모델이 있습니다.

 

1. 불타버린 하늘

디스토피아의 세계에선 해가 뜨지 않습니다.

비록 아침이 있다곤 하지만 거의 묘사되지 않고 배경은 주로 밤, 아침이라 하여도 극심한 환경오염으로 인하여 빛은 땅을 어루만지지 못합니다.

 

  Blade runner, 1982 실로 아름다운 하늘이다. 난 푸른색이 좋더라.

 

 

2. 무너진 치안

디스토피아에선 돈이 곧 법이자 정의 입니다.

더욱 강력해진 공권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 힘은 시민들을 위하여 사용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혹은 극단적으로 잔혹하거나 융통성따위는 없어보입니다.

 

Judge Dredd, 1995 좋은 예시 같지는 않지만 이런 경찰은 사양합니다.

 

 

3. 하늘을 불태운 중공업과 경공업에 몰락에 따른 생활 수준 저하

디스토피아의 하늘이 불타고 오염이 극심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중공업이 극단적으로 발달하는 사회기 때문입니다. 기술과학의 광적이고도 집착적인 진보와 탐욕의 끝을 보여주는 자본주의의 결합은 중공업의 발달로 이루어지고 주로 대중의 삶의 질을 결정 짓는 생필품등과 연관된 경공업은 버려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Innocence, 2004 분명 대낮입니다. 아마 상하이 쪽 같은데... 상하이에 땅 사둔거 있으면 지금 다 팔아버리세요.

 

시간이 가속되어 저 먼 미래가 되었지만 디스토피아속 사람들은 하나같이 지금과 비슷한 의식주를 영위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욱 비참해지면 비참해졌지 개선점은 단 한군대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Blade runner, 1982 맛있어 보이긴 하는데... 난 미래엔 좀 더 좋은걸 먹고 싶다.

 

 

4. 사람보단 쥐에게 더욱 적합한 대도시와 위생

디스토피아의 세상엔 목가적 마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땅은 거대하다 못해 그 끝을 알 수 없는 강철의 도시로 덮혀있고 이 강철의 도시는 시도때도 없이 각종 오염물질을 뿜어냅니다.

공권력은 대중의 삶에 관심이 없고 경공업은 무너진 마당에 매일 밤 내리는 오염물질의 비는 도시를 하나의 거대한 쓰래기장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디스토피아 하면 떠오르는 색깔이 카키색이나 갈색, 혹은 회색인것은 이 때문입니다.

사람보다 쥐가 더 많을 것 같은 세상속에서 사람들은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하고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습니다.

 

Innocence 2004, 찌뜬 사람들의 찌든 도시

 

 

5. 앞선 모든 예시들을 무시하는 좀 있는 사람들

여태 묘사한 디스토피아적 즐거운 삶은 모두 대중의 삶입니다. 반면 뿌리깊은 가문들과 세력으로 이루어진 권력층과 경제력을 장악한 사람들은 그들만의 진정한 '유토피아'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계층화를 넘어선 공공연한 계급화가 이루어진 이 세상속에서 공권력은 그들의 수족입니다.

 

Wonderful days. 2003 이 동네 선택받은 계급은 이런 곳에 삽니다.

 

 

6. 문명을 앞서간 과학과 기술이 개인의 삶에 지나치게 파고든 사회

몇몇 디스토피아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우리가 그 본질을 미쳐 이해하기도 전에 과학이 발달하여 우리의 삶 깊숙이 파고 들고 그에 따라 인간이 과학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 인간성을 빼앗겨 버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를테면 급속히 발전한 인공지능이라던가, 지나치게 사용되는 기계들은 인간성의 상실뿐만 아니라 몰인간화를 가속화 시키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이는 종종 인간 사회의 아주 기본적인 원리인 교류 및 유대감을 파괴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디스토피아는 앞선 몇가지 단편적인 예로볼때 결코 바람직한 세상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가 되면 절대로 안되는 세상인 것이죠.

하지만 이런 디스토피아가 지속적으로 제시되고 지금 우리 사회속에서 소모된다는 것은 디스토피아의 어떠한 속성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처음에 언급했지만, 바로 '현재'에 기반을 둔 문제이 모두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았을 때 만날 수 있는 세상이 디스토피아이기 때문입니다.

 

도덕과 윤리의 사망, 근복적인 인간성의 상실, 침범되어져서는 안되는 기본들이 유린되었을때 우리의 세상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갈림길에서 더욱 디스토피아의 결말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디스토피아적 문물은 단순한 재미를 넘어선 일종의 '경고'입니다.

SF문학이 대부분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점은 SF 특유의 비판적 속성과도 무관하지 않지만 그만큼 지금 현실이 부자연스럽고 위태로움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기도합니다.

SF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세상을 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논리적 개연성이라는 기본 원리를 두고 쓰여지는 SF장르에서 유독 디스토피아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은 지금 세상의 모습을 다시 한번 재고하고 반성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더불어 디스토피아의 또하나의 특징은, '현재'에 내재된 모든 문재점들은 외계인의 침략도 아니오 갑작스런 지구의 대격변도 아니오, 다름아닌 모두 '인간'스스로에게서 오는 문제점들이란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분명 수많은 문제점들과 모순들을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그 모든 문제점들을 바로잡을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디스토피아는 단순 흥미유발에서 나아가 우리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에게 유토피아를 제시해줄 것 입니다.

 

결코 지금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Posted by WN1
,
사디즘
성적 대상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인 쾌감을 얻는 이상 성행위.

가학증 또는 학대음란증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문학가 M.de 사드에서 유래된 명칭이며 ‘양성의 앨골래그니어(algolagnia)’라고 부를 때도 있다.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쾌감을 얻게 되는 마조히즘과 대응된다. 심층심리학의 시조인 S.프로이트는 모든 생리적 기능에는 사디즘이 숨어 있으며 마조히즘은 자기자신에게 향하는 사디즘이라고 말했다. 때로는 성목표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공격적이며 고통을 주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경향을 가리킬 때도 있다.

사디즘이라고 최초로 명명한 사람은 R.von 크라프트에빙인데, 사드 이전에도 문학이나 미술 속에서 사디즘의 표현을 볼 수 있다. 플라톤의 《공화국》에 <사형당한 사람의 시체를 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참을 수 없었던 사나이>의 에피소드가 있고, 루크레티우스가 저술한 《만상론()》에는 “죽음과 싸우고 있는 불행한 뱃사람의 조난을 언덕 위에서 구경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라는 글이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든지 성자의 순교나 지옥의 형벌을 그림으로 나타낸 중세의 회화에도 화가의 무의식적인 사디즘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한편 사드를 낭만주의의 원류라고 간주했던 문학사가() M.브라츠는 M.G.루이스의 《몽크》, C.R.매튜린의 《방랑자 멜모스》, C.P.보들레르, G.플로베르, H.스윈번, O.미르보의 《처형의 뜰》 등으로 이어지는 사디즘 문학의 계보를 만들었다. 보들레르는 “잔학성과 향락은 동일한 감각이다”라고 말하였고, 단눈치오는 “양성간의 극단적인 증오야말로 사랑의 기반이다”라고 말하였다. 사르트르의 실존적인 이론의 바탕에도, 초현실주의의 ‘블랙유머’의 기반에도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마조히즘
이성으로부터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학대를 받고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만족을 느끼는 병적인 심리상태.

사디즘(sadism)에 대응하는 뜻을 지녔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L.R.von 자허마조흐가 이와 같은 변태적 성격의 소유자로서 이런 경향의 테마로 작품을 쓴 데서 유래한다.

흔히 남녀간의 성적 행위에서 서로가 가벼운 고통을 주고받거나 함으로써 성적 흥분을 높이는 일이 적지 않으나 마조히즘 ·사디즘의 경우는 정도가 심한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변태성욕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체로 성행위에서 남성이 사디즘의 경향을 나타내고, 여성이 마조히즘의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심한 경우는 매질 또는 흉기나 부젓가락에 의한 폭행 ·상해를 주고받거나, 그 밖에도 상대방에게 노예적으로 굴종()함으로써 성적 쾌감을 느끼게 된다. 

----------------


masochism

 

피학 성향, 피학대 성애[性愛]

Flogging demonstration at Folsom Street Fair 2004. 


이성으로부터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학대를 받고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만족을 느끼는 病的인 심리상태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게 하여 성애[性愛]의 충족을 이루고자 하는 성심리 장애이다.

이 용어는 오스트리아 작가 슈발리에 레오폴트 폰 자허 마조흐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는 매를 맞고 굴복당함으로써 얻는 만족감에 대해 광범위한 저술을 펴냈다.
매저키즘과 관련된 고통의 정도는 약간의 폭행을 수반하는 의례적 모욕으로부터
심한 채찍질이나 구타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피학성향자[매저키스트 : Masochist]들은

 어느 정도의 상황통제력이 있기 때문에 학대가 지나쳐 심한 상처를 입는 경우는 드물다.
일반 사람에게도 고통이 어느 정도 성적 흥분을 일으킬 수는 있으나
피학성향자들에게는 고통이 성적 행위의 주된 목표가 된다.
이 용어는 모욕이나 학대상황을 추구하고 즐기는 사람의 행동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sadism[새디즘]에 대응하는 뜻을 지녔다.


Leopold von Sacher-Masoch. An 1860s photo. 

 

오스트리아[Austria]의 작가,

- L.R.von 자허마조흐[Leopold Ritter von Sacher-Masoch, 1836.1.27~1895.3.9]'가

이와 같은 변태적 성격의 소유자로서 이런 경향의 테마로 작품을 쓴 데서 유래한다.

흔히 남녀간의 성적 행위에서

서로가 가벼운 고통을 주고받거나 함으로써 성적 흥분을 높이는 일이 적지 않으나

  마조히즘, 사디즘의 경우는 정도가 심한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변태성욕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체로 성행위에서 남성이 사디즘의 경향을 나타내고,

여성이 마조히즘의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심한 경우는 매질 또는 흉기나 부젖가락'에 의한 폭행 ·상해를 주고받거나,

그 밖에도 상대방에게 노예적으로 굴종[從]함으로써 성적 쾌감을 느끼게 된다.

매저키즘만 독립된 특성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드물고,

보통은 타인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성적 쾌락을 얻는 새디즘'을 결합한 형태로 나타난다.

즉 한 사람이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흥분상태가 되기도 하고,
 역할을 바꾸어서 고통을 가함으로써 흥분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생각 > 내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정해우(庖丁解牛)  (2) 2010.12.20
디스토피아 [dystopia]  (0) 2010.12.14
아나키즘 [ anarchism ]  (0) 2010.12.14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Zapatista National Liberation Army]  (0) 2010.12.14
노마디즘 [nomadism]  (0) 2010.12.14
Posted by WN1
,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를 말한다.

무정부주의는 개인을 지배하는 국가권력 및 모든 사회적 권력을 부정하고 절대적 자유가 행하여지는 사회를 실현하려고 하는 운동.

정부나 통치의 부재(不在)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an archos'에서 유래한다.

현대의 대표적인 이론가로는 윌리엄 고드윈,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막스 슈티르너, 레오 톨스토이, 폴 굿먼, 허버트 리드, 미하일 바쿠닌, 페테르 크로포트킨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무정부의자로는 신채호와 박열이 있다. 한국의 현대 무정부주의 운동은 3.1운동 후 1920년경부터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한 인사들,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간 유학생과 노동자들 가운데서 싹트기 시작하여 점차 국내로 번져 들어왔다.

중국에서는 신채호(申采浩)의 <조선혁명선언>으로, 일본에서는 박열(朴烈) 등의 이른바 <대역사건(大逆事件;일본 천황 폭살 미수사건)>으로 한국 현대 무정부주의운 동의 막이 열렸다. 


--------------


아나키즘의 대표적 상징인 Circle-A 문양.

아나키즘(Anarchism, 프랑스어: Anarchisme 아나르시슴[*])은 모든 정치적인 조직·권력 따위를 부정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데올로기 또는 이를 전파하고 실현하려는 운동으로, αυ(없는)와 αρχοζ(지도자)가 합성된 고대 그리스어 아나르코스(αυαρχοζ)에서 비롯된 말이다.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라고도 불리지만,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다며 이런 표현을 사용하기 꺼려한다. 대신에 자유연합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출처 필요] 역사에서는 고대의 공동체에서 비롯하여 갖가지 공동체나 고대의 철학, 사상에서도 연원을 찾아 볼 수 있으나 근대에 이르러 자본주의와 권위주의의 폐해에 대한 반발로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함께 발흥하였으며 페미니즘, 펑크 문화 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장점을 포용하는 중용이념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가) 사상

아나키즘은 그 특징때문에 다른 사상들과 달리 정의내리기가 매우 까다롭다. 일반적으로 아나키즘은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을 말하며, 이 외에도 다양한 성향이 있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일어난 만큼 평등을 중요하게 본다. 하지만 현대의 일부 아나키스트들이나 개인주의자들은 평등보다는 자유를 중요시 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국가와 권력에 대한 반대로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기에 공산주의와 대립한다. 이와 같은 평등과 자유를 추구하기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를 반대하고 있다. 19세기 후반에는 공산주의와 세를 다툴 만큼 세계 도처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권력이 부여되는 조직 자체를 부정하는 성향으로 차츰 세력을 잃었지만, 혁명 운동이 일어난 어느 곳에서나 아나키즘은 자유와 평등을 외치면서 살아났다. 대표적인 아나키즘의 투쟁은 파리 코뮌, 에스파냐 내전, 그리고 프랑스 학생혁명이며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에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참가 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발흥한 니힐리즘과의 차이점은 허무주의가 구제도 모두를 부정하고 철저한 파괴를 주장하면서도, 새로운 사회에 대한 대안이 없었으나 이에 반해 아나키즘은 새로운 대안을 공동체 자치에서 찾았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는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파괴나, 몰락후의 계획 경제를 대안으로 하였으나, 아나키즘은 계획 자체를 부정하고 공동체 내의 자립, 자치, 자영 경제를 대안으로 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나) 역사

정치적 아나키즘의 탄생은 윌리엄 고드윈이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받아 저술한 《도덕과 행복에 대한 정치정의의 영향에 대한 연구》가 출판된 1793년으로 간주되며, 고드윈은 이 책에서 모든 형태의 정부를 개인의 개화를 가로막고 부패로 이끌 뿐이라고 비판했다. 막스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은 헤겔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으며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맡았지만 그 당시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아나키사회를 위계질서와 권위가 부재된 것으로 간주했으며, 권위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종교, 국가, 군대 등이 권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개인의 자유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다) 흐름

아나키즘 운동에는 크게 세 조류가 존재하는데,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환경주의적 아나키즘이 있으며 환경주의적 아나키즘은 최근에 생겨난 조류이다. 현재 다양한 아나키즘 이론이 공존하고 있으며, 아나키스트로 자신을 정의하는 집단들 가운데서도 전략, 전술, 조직, 정치철학, 경제학, 사회학적인 면에서 대립하는 경우가 많다.

1)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혹은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는 상호호혜주의, 공산주의, 노동조합주의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유재산의 말소와 생산수단의 공유를 주장한다.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은 프루동에 의해 최초로 시작되었으며 후에 바쿠닌과 그의 추종자들은 제1인터내셔널에서 중요한 세력을 형성했으나 카를 마르크스와의 대립으로 바쿠닌이 국제당에서 축출된 이후 독립된 세력이 되었다.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와 권위주의에 대항하며 공동체주의와 자유지상주의적 연방주의등의 형태로 사회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의 다리 역할로 간주된다.

하위분류로 다음과 같은 분파들이 존재한다.

-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 공산주의적 아나키즘

- 아나코생디칼리즘

- 프루동주의

- 무장아나키즘

- 후기아나키즘

2)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자유지상주의적 개인주의는 사유재산의 소유를 인정한다. 이들에 따르면 권위주의 조직은 민중의 외면 속에서, 혹은 투쟁의 결과로 사라져야 하는 존재이며 이것은 사회에 의해 억압받는 개인의 자유를 위한 중요한 요소로 본다. 국가에 대한 견제 목적으로 개인들 사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중간적 조직들은 군대를 조직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국가적"인 조직이 되지 않는 한 올바른 것으로 본다.

-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 인도주의적 아나키즘

- 에고이스트적 아나키즘

- 자유방임적 아나키즘

- 그리스도교 아나키즘

- 자본주의적 아나키즘

- 시온주의적 아나키즘

3) 환경주의적 아나키즘

환경주의적 아나키즘은 모든 형태의 산업화 경제와 자연의 파괴를 거부하며, 산업화를 주장한 공산주의적 아나키스트들에도 반대한다. 현재 아나키즘의 세번째 극으로 자리 잡혔으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한다. 산업화와 기술의 지배를 거부하며 원시적 사회로의 회귀를 주장하기도 한다.

- 환경주의적 아나키즘

- 원시주의적 아나키즘

- 녹색아나키즘

4) 아나키즘에는 그 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분파들이 존재한다.

- 인식론적 아나키즘

- 아나코페미니즘

- 아나코펑크

- 초월주의적 아나키즘

- 크립토아나키즘

- 국가아나키즘

5) 결론

아나키즘의 다양한 성향들은 개인의 자유가 노동조합, 공동체, 법, 정부를 비롯한 어떤 조직의 권위에도 억압받지 않는 자유지상적인 사회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학, 철학, 문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영감을 얻은 흐름들이 등장했으며, 이들은 때로 고전적 자유지상주의를 전적으로 거부하기도 한다.

아나키즘의 배경이 되는 철학의 다양성은 아나키즘 내의 다양한 흐름의 존재에서 드러나며, 이 때문에 동일한 목적을 가진 아나키스트들이라고 해도 그 강령적인 부분에서 서로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하나의 통일된 운동을 형성하지는 못한다.

(라)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 미하일 바쿠닌

  *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 레프 톨스토이

  * 머레이 북친

  * 엠마 골드만

  * 노암 촘스키

  * 막스 슈티르너

  * 벤자민 터커

  * 윌리엄 고드윈

  * 신채호

  * 박열

  * 이회영

  * 하기락

  * 구승회

  * 박홍규

  * 조약골

(마) 한국의 아나키스트 단체

1) 의열단

의열단(義烈團)은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아나키스트 성격의 무장독립운동단체이다. 이들은 프랑스 조계지역(외국인 치외법권지역)인 중국 상하이에서 폭력항쟁으로 대일본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이 상하이에서 활동한 이유는 프랑스와 일본의 대립으로 인해, 프랑스 경찰이 백범 김구선생을 포함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의열단은 광복을 위해 폭력만을 수단으로, 암살만을 정의로 삼으면서, 5개소의 적 기관 파괴와 7악의 제거를 위해 파괴활동을 벌였다. 이때 5개소의 적 기관은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경찰서·기타 중요 기관이며, 7악은 총독부 고문·군 수뇌·대만 총독·친일파 거물·밀정·반민족적 토호·열신(劣神)이다.[1]

가) 주요 의거

  *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의사가 부산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을 폭사시켰다.

  * 1920년 12월 27일 최수봉의사가 밀양경찰서 소속 모든 경찰이 모인 가운데 폭탄을 투척하였다.

  * 1921년 9월 12일 김익상의사가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폭발로 청사 일부가 부서졌다.

  * 1922년 3월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었다.

  * 1924년 1월 5일 김지섭의사가 도쿄의 궁성 정문 앞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하였다.

  * 1926년 12월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하였다.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김지섭 의사의 도쿄거사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김원봉 단장은 무장투쟁이 단원들만 희생된 채, 큰 성과를 내지 못함에 따라,의열단의 투쟁노선을 재정립하고 방향을 전환할 것을 검토했다. 이후의 활동들은 의열단 지휘부의 체계적인 투쟁이 아닌, 개별적인 투쟁이었다. 1928년 의열단은 '창립 9주년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내고, 향후 대중의 지지에 기반한 투쟁에 역점을 두어 활동하겠다는 점을 밝혔다.

나) 단원

창립단원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 이수택, 이낙준

1923년 상해 일본 총영사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의열단 단원이 천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26년 이후 많은 수의 의열단원들은 중국 국민당정부의 북벌을 위한 학교였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정치교육을 받았다. 이후 이들은 의열단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족혁명당이 각 파벌의 권력투쟁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아 의열단은 조선민족독립당으로 새출발을 하고 11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다) 공약 10조

  *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기로 한다.

  *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몸과 목숨을 희생하기로 한다.

  * 충의(忠義)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으로 한다.

  * 단의 뜻을 우선하고 단원의 뜻을 실행하는데 속히한다.

  * 의백(義伯,올바른 성품을 가진 지도자) 한 사람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하게 한다.

  * 언제 어디서든지 매월 일차씩 상황을 보고한다.

  * 언제 어디서든지 모이도록 요청하면 꼭 응한다.

  * 죽지않고 살아있어 단의 뜻을 이루도록 한다.

  * 한 사람을 다수은 위하여, 다수는 한 사람을 위하여 헌신한다.

  * 단의 뜻에 배반한 자는 처살한다.

라) 의열단 선언

김원봉은 1923년 북경을 방문하여 당시 임시정부의 외교우선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단재신채호선생을 만나 의열단의 정신을 문서화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신채호는 김원봉을 따라 상해로 와서 폭탄 만드는 시설을 살펴보고, 약 한달 동안 여관방에 앉아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의열단선언 즉,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그들은 의열단 선언을 인쇄하여 살포하였고 단원의 필독서로 지정하였다. 의열단원들은 거사 후에 본 선언문을 남겨 거사의 뜻을 전달하였다.

-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파괴·폭동으로써,

-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조선혁명선언 제 5장 마지막 문장>

이 선언에서 신채호는 독립투쟁방법으로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 등을 모두 부차적이라고 설득하였으며, 무장투쟁을 최우선하는 의열단의 뜻을 분명히 밝혀주었다.

마) 임시정부와의 관계

임시정부 초기에 안창호는 부분적인 모험행동을 피하고 적응 시기에 대거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폭탄을 기율없이 단독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임시정부 군사당국에 예속하여 실력을 점축한 뒤 상당한 때에 대거하라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김원봉은 임시정부의 활동을 미온적인 것으로 보았고, 이승만의 신탁통치 제안이나 임정내의 파벌 싸움에 매우 실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자신들의 의열투쟁을 '모험행동'으로 보는 것도 받아 들이기 힘들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개조파는 국민대표회의의 실패 이후에 창조파를 소외시키기 위하여 의열단과 제휴하였다. 이 후 의열단은 임시정부의 한 축이 되었다. 또한 김구선생도 의열단의 활동에 크게 고무되어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이라는 같은 방법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Posted by WN1
,

1994년 멕시코 치아파스주(州)의 마야계 원주민들에 대한 토지분배와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봉기한 반정부 투쟁단체

1994년 멕시코 정부와 기업인·농장주 등이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원유·천연가스·목재 등 남부의 풍부한 자원을 착취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자, 이에 반발해 치아파스주()의 마야계 원주민들에 대한 토지분배와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봉기한 반정부 투쟁단체를 말한다. 스페인어 'Ejército Zapatista de Liberación Nacional'의  머리글자를 따서 'EZLN'으로도 통한다.

이들의 지도자는 프랑스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한 인텔리이자 동화책을 집필하는 등 멕시코의 체 게바라로 평가받는 인물로, 이름은 마르코스(Marcos)이다. 그는 민족해방군의 부사령관을 맡아 1994년부터 밀림을 거점으로 반정부 투쟁을 지휘하고 있다.

1997년 12월, 세디요(Ernesto Zedillo) 정부 당시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45명의 원주민 농부들이 학살되면서 사태가 악화되어 정부군과 이들 반군 사이에 긴장이 감돌았으나, 2000년 비센테 폭스(Vicento Fox)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반군과의 평화협상 방침을 천명함으로써 사태는 진정 국면에 들어섰다.

그러다 2001년 3월, 이탈리아의 인권단체 회원 등 500여 명의 외국인과 함께 멕시코 전역을 순회하며 15일 동안의 평화행진을 한 뒤 수도인 멕시코시티에 입성함으로써 7년여를 끌어 온 내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는데, 멕시코 정부도 수천 명의 연방경찰과 군 병력을 동원해 이들을 보호함으로써 우려할 만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평화행진을 마친 뒤 민족해방군은 원주민 권익보장촉구대회를 열어 원주민 권리보호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산 안드레스 협정'의 의회 비준과 치아파스주에 있는 정부군의 전면 철수, 수감 중인 반군 포로 및 동조자 전원 석방을 요구하였다.


--------------------------


치아파스는 '사파티스타'라는 정부에 대항하는 반군의 지배 지역이다.

 

우리나라와 경제순위가 비슷한 멕시코의 일부이면서

가난하고 빈곤한 삶속에서도 전혀 정부의 복지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치아파스를 지배하는 사파티스타가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반군처럼 봉기 이유가 특정 이데올로기와 같은 사상,이념에 있지 않다는 것에서

사파티스타는 조금 다르다.

 

커피, 옥수수를 재배하던 깊은 산속 마야인들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강대국 산자유주의의 거대한 물결로 인해 이들이 당할 수 밖에 없던 현실적인 고통은

이들을 마스크와 총을 든 반군으로 만들어 버렸다.

표현하자면 이른바 '생계현 반군'인 것이다.

스페인어 'Ejército Zapatista de Liberación Naciona'의 약자를 따서 EZLN이라고 통하는 사파티스타의

시작은 1992년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부터 시작된다.

 

NAFTA는 미국,캐나다,멕시코 3국이 맺은 자유무역협정이고,

이로 인해 미국의 자본과 기술, 캐나다의 자원, 멕시코의 값싼 노동력이 결합되어

지역경제를 발전시키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치아파스

의 입장에서 보면

수자원, 목재, 목축 커피 옥수수등 풍부한 자연자원을 가진 시골마을은

NAFTA에 가입하면서 옥수수 수입제한, 커피 보조금등의 정책의 폐지를 불러왔고,

이 지역의 주를 이루는 마야 후손들의 취약한 경제 기반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말았다.

삶의 터전을 버리고 농사짓기를 그쳐야 했던, 아이들을 더이상 학교로 보낼 여유조차 가질수 없던 마야인들은

스키마스크와 붉은 마스크를 얼굴에 두르고 총을 들기 시작했다.

한미FTA로 생존권을 위협받는 우리 농민들과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시위가

사파티스타의 봉기와 매우 닮아 있다.

 

그들은 강대국, 다국적기업의 이윤추구 앞에서 처절하게 생존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WN1
,

사전적 의미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철학적 개념.

노마드(nomad)는 '유목민', '유랑자'를 뜻하는 용어로,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가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1968)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현대 철학의 개념으로 자리잡은 용어이다.

노마디즘은 이러한 노마드의 의미를 살려 철학자 이진경이 들뢰즈의 저서 《천()의 고원》(1980)을 강의하면서 남긴 글을 정리하고 보충해서 2002년 출간한 책의 제목으로, 우리말로는 유목주의로 번역된다.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일체의 방식을 의미하며, 철학적 개념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화·심리 현상을 설명하는 말로도 쓰인다.

노마드란 공간적인 이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불모지를 새로운 생성의 땅으로 바꿔 가는 것, 곧 한 자리에 앉아서도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 가는 창조적인 행위를 뜻한다. 철학적으로는 철학·문학·정신분석·신화학·수학·경제학 등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새로운 삶을 탐구하는 사유의 여행을 의미한다.

---------

성대 신문에 실린 서면 인터뷰입니다


- 한국에 처음 노마디즘이라는 용어가 전래되고 자리를 잡게 된 과정은?

 노마디즘은 본래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1968)에서 등장한 개념이었습니다. 그것을 고병권, 이진경, 고미숙이 주도하는 ‘수유 너머’와 이정우가 선전하고 전파시킴으로써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노마디즘을 현대 사회를 설명하는 이데올로기, 미래의 대안이 될만한 이데올로기로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노마디즘이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먹히기 시작한 것은 2000년 이후 자크 아탈리의 『21세기 사전』과 『호모 노마드』가 번역 출간되면서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후 ‘수유 너머’와 이정우의 주장에도 더욱 힘이 실리게 됩니다.

 

『21세기 사전』를 보면, 이정우의 추천사가 실려 있습니다. 저는 이정우가 자크 아탈리의 주장이 자신들의 사회적 입지를 확대시켜주는 계기가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노마디즘은 정말 현대사회의 모든 생활과 연관돼 있는 것 같다. 교육, 직업, 쇼핑 등 여러 분야에 적용되는데, 이럴 수 밖에 없는 원인이 있다면? 

교육, 직업, 쇼핑 등 현대인의 생활을 모두 노마디즘적 패턴으로 귀속시키려는 경향이 생겨난 것은 자크 아탈리 때문입니다. 본래 그럴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어서 노마디즘이 모든 생활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자크 아탈리가 그렇게 주장한 것이 원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들뢰즈의 철학적 개념인 노마디즘을 사회문화적 용어로 변환시켰습니다. 그리고 노마디즘이라는 용어를 현재의 모든 패턴을 설명해주고 미래를 예언하는 요술방망이로 사용했습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주효했던 것이지요.

 


- 한국인들은 유목민적인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런 와중에 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 근하게 된 계기는?

저의 문제의식은 진보와 보수(특히 시장만능주의자들) 모두가 노마디즘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진보와 보수가 특정한 사상에 모두 공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노마디즘을 매개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개인적인 계기도 없진 않습니다. 4-5년 전쯤인가요. 당시 조선일보는 몽골 유목민의 수장으로써 세계를 점령한 칭기즈칸을 재조명함으로써 노마디즘 선전의 첨병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친분이 있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노마디즘을 매개로 조선일보와 타협하는 것을 보고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한겨레문화센터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지금도 ‘수유너머’에서 공부하다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개 자신을 진보적인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들도 노마디즘을 진보적인 이데올로기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노마디즘이 진보주의자들의 사회적 비판의식을 불식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마디즘의 기묘한 논리가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드러내고 그것을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 부정적인 측면이 있음에도 사람들이 이를 계속해서 추구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노마디즘은 간단히 말해서 ‘이동의 담론’입니다. 들뢰즈의 노마디즘은 철학적 ․ 정신적 이동에 대한 담론이고, 아탈리의 노마디즘은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의 이동에 대한 담론이죠. 진보주의자들은 노마디즘에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와 생활태도’를 연상하고, 보수주의자들은 노마디즘에서 이동이 갖는 해방성, 창조성, 생산성에서 친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적 요소들을 발견합니다. 그 결과 진보와 보수가 모두 노마디즘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압도적 다수가 노마디즘에 대해 별다른 반감을 갖지 않고 받아들이는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노마디즘의 현실적 기반이 되는 것은 자동차, 비행기, 노트북, 인터넷, MP3, PDA, 디지털 카메라, 텔레비전, 휴대폰, 네비게이션 같은 첨단기술 제품들입니다. 그것들이 현대인의 이동을 가능케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노마디즘은 친기술주의적 경향을 갖습니다. 이러한 첨단 제품은 대개 초국적 자본이나 대자본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노마디즘의 친기술주의적 경향은 자본에 대한 관용 혹은 찬양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그 결과 진보주의자들이 자본의 논리에 자연스럽게 포섭되는 양상이 전개됩니다.


 

- 현 대학생들이 노마디즘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지금의 대학생들은 ‘88만원 세대’라 불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높은 청년 실업의 문제는 비단 우리 사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청년 실업이 이렇게 만연하게 된 데는 자본주의의 경제 구조 자체의 결함 때문입니다. 여기에 모든 것이 자동화 기계화 되는 것도 청년 실업을 높이는 주범입니다. 자본주의와 기술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가 젊은이가 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젊은이들은 친자본주의적 친기술주의적 경향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최전선에 노마디즘이 있습니다. 노마디즘의 시작은 68혁명을 배경으로 들뢰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들뢰즈의 노마디즘은 68혁명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노마디즘이 회자되는 현실은 68혁명 시기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지금의 현실에 고스란히 적용될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지금의 노마디즘은 들뢰즈의 정신보다는 아탈리의 몫이 훨씬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초기에 건강했던 이데올로기가 세월이 흐르면서 건강하지 못한 것으로 변질되는 경우는 많습니다. 나는 대학생들이 자신을 옭죄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기술만능주의의 입지를 넓혀주는 노마디즘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자는 플라톤의 경우처럼 격투기선수일 수도 있고 아우렐리우스에픽테토스처럼 황제나 노예일 수도 있으며, 스피노자처럼 첨단 과학의 기술자일 수도 있고, 라이프니츠처럼 외교관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목동은 될 수 없는가? 양을 치며 유목하는 민족을 통해 한 종교가 탄생한 이후 목자의 이미지는 종종 사상을 지배해왔다. 가령 하이데거는 ‘존재의 목자’라는 인상 깊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목자의 이미지, 즉 지킴이의 이미지와는 다른 목동의 이미지는 없는가? 물론 있다. 그것이 노마드(nomade, 유목민)이다. 땅에 뿌리내리고 토박이로 살며 정체성과 배타성을 지닌 민족을 이루기보다는, 어떤 정해진 형상이나 법칙에 구애받지 않고 바람이나 구름처럼 이동하며 삶을 정주민적인 고정관념과 위계질서로부터 해방시키는 유목인의 사유가 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존 쿠체(John Maxwell Coetzee)의 작품인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야만인이란 바로 유목민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런 인상 깊은 구절을 이 책에서 읽는다. “유목민들은 1년에 한 번씩 우리를 찾아와 교역을 한다오. 내가 지난 20년 동안 치안판사로서 싸워야 했던 문제는 가장 저질적인 마부들이나 농사꾼들이 유목민인 야만인들을 모욕하고 경멸한다는 사실이었소. 특히, 그 경멸이라는 것이 식사예절이 다르고 눈까풀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 말고는 구체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라면, 당신은 그것의 뿌리를 어떻게 뽑을 수 있겠소?”


이 인용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인종주의에 대한 고발만을 부각시키려고 이 구절을 읽은 것은 아니다. 정주민들은 위계적 정체성을 꾸미고 사는 자들이다. 그들의 정주를 가능케 하는 경계(또는 국경)가 이미 배타적 정체성의 표현인 위계를 내포하고 있다. 농사를 짓는 카인이 가축을 치는 아벨에게 그렇게 했듯 이런 정주민들은 유목민들을 증오해왔다. 아마도 근본적으로는 유목민의 도래가 정주민들이 꾸며온 모든 체계와 질서를 와해시킬지도 모르기 때문이리라. 유목민은 정주민들의 전통과 역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는 자들이며 거기에 동화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쿠체는 말한다. “나는 역사의 바깥에서 살고 싶었다. 나는 제국이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아니 행방불명된 백성들에게조차 강요하는 역사의 바깥에 살고 싶었다. 나는 야만인들에게 제국의 역사를 강요하는 걸 원치 않았다.” 노마드에 대해 사유했던 대표적인 철학자 질 들뢰즈 역시 마찬가지로 이야기한다. “노마드에게는 역사가 없다.”


국가와 같은 형식을 통해 거주하는 자들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역사를 가지지 않으므로, 노마드는 정체성 없는 익명의 힘으로 들이닥쳐 정주민을 파괴한다. 정체성 없는 이러한 힘의 침입을, 그 파괴력을 강조하여 ‘전쟁 기계’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전쟁 기계의 기원은 황제의 주둔병이 되기를 거부하고 유목 생활을 하는 양치기한테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노마드의 출현으로 인한 파괴를 들뢰즈는 “탈영토화의 형식으로서 탈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과거 유목민들의 삶이 보여주듯 말이다. 그리고 이런 노마드의 출현은 어쩌면 해묵은 정주민의 삶에 새로운 가치와 법을 도입하는 ‘창조’의 사건이 되기도 할 것이다. “사막에서 이루어지는 히브리인의 원정, 지중해를 횡단하는 반달 부족의 원정, 스텝을 가로질러 가는 유목민의 원정, 중국인의 원정.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곳은 언제나 탈주선 위에서이다”(들뢰즈). 그런데 민족들이 투쟁하는 대륙에서뿐 아니라 철학의 평원에서도 동일하게, 노마드의 침입과 창조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철학에서 주목할 만한 노마드의 발견은 칸트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처음에 형이상학의 통치는 독단론자의 지배 아래서 전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독단론자의 입법에는 예전 야만의 흔적이 있었기 때문에, 입법은 내란으로 인해 점점 무정부상태로 타락했다. 그 다음 회의론자들이 등장했는데, 그들은 정주하여 개간하는 일을 싫어하는 유목민과 같아서 종종 시민적 단합을 파괴했다.” 이 구절은 독단론적 성격을 가지는 합리론과 회의론으로 치달은 경험론의 싸움을 전제국가와 유목민의 극적인 상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대륙의 독단론이 국가를 세우면, 영국 경험론의 노마드는 그것의 전제적 성격을 간파하고서 시민적 단합을 파괴한다.

 

그러니 영토를 닦아 합리론자들 이상의 체계를 세우려는 독일인들에게도 노마드는 하나의 위협일 수밖에 없다. 들뢰즈는 저 칸트의 구절을 염두에 두고서 다음과 같이 노마드의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다.

“독일은 끊임없이 토양을 갈고 다져야 한다. 다시 말해 건립해야만 한다. 건립하고 쟁취하려는 열정이 독일의 철학에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즉 그리스인들이 원주민들을 통해 소유했던 것을 독일은 정복과 창설에 의해 소유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영국은 독일에게 하나의 강박관념이다. 왜냐하면 영국인들은 철학의 내재적인 구도를 이동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는 토양으로 여긴다. 즉 그들은 그 구도를 바다 위의 섬에서 섬으로 옮겨 다니며 천막을 치기만 하면 되는 열도에 둘러싸인 어떤 세계로 취급하는 노마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텐트만 있으면 된다.”


그리스인들이 원주민처럼 그들의 일상적 삶과 일상적 언어를 통해 철학을 생래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면, 독일인들은 그리스인들에겐 생래적이었던 사유를 학문적 개념의 형태로 애써 복원하여 다시 거주지를 형성해야 했다(예컨대 우리가 상실한 그리스 말의 어원적 의미를 애써 일깨우며 사유를 진행한 하이데거에게서 보듯이 말이다). 반면 경험론자들은 유목민들로서, 개념을 텐트에 넣어가지고 다니다가, 오로지 경험에 노출시켜 개념이 작동하는지 않는지 시험해본다. 이러는 사이 비경험적인 체계로 지어진 정주민의 거주지는 무너지는 것이다.

 

결국 노마드는 철학의 경험주의적 성격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는 개념이다. 노마디즘의 한 예를 보도록 하자. 자신의 철학을 경험주의라고 칭하기도 하는 레비나스는 예술 철학의 문제와 관련하여, 정주적 성격을 지니는 하이데거의 철학에 반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유목주의(nomadisme)는 정주 상태로의 다가감이 아니다. 그것은 거주지 없이 체류하는 것이며, 대지로 돌아갈 수 없음을 나타내는 일종의 관계이다.”

‘인간은 시적으로 대지 위에 거주한다’라는 횔덜린의 시구를 내세우며, 하이데거는 예술을 거주함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로 이해했다. 횔덜린의 시 ‘라인 강’은 라인 강이 본래적으로 있어야 할 거주의 자리를 밝혀준다. 예술작품으로서 그리스 신전은 그리스 민족이 본래적으로 거주하며 살아가는 자리를 열어준다. 이에 반해 레비나스는 유목적 삶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말한다. “모든 뿌리내림과 거주함의 바깥, 고향 상실이 본래성이다!” 예술은 우리가 익숙하던 거주의 자리에서 벗어나 우리를 유목민처럼 낯선 지역으로 내몰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레비나스의 노마드적 사유는 매우 흥미로운 것임에 틀림없지만, 노마드라는 말을 통해 중요한 성찰을 진행한 또 다른 철학, 바로 또 다른 경험론자 들뢰즈의 철학을 위해 노마디즘의 정수 자리를 남겨 두어야겠다. 정주민적인 사상가들이 동일성이나 유비 같은 개념의 울타리 속에 가축들을 가두어 놓듯 존재자를 가두었다면, 어떤 개념의 울타리도 없이 존재자들을 방목하고자 했던 것이 들뢰즈의 노마드적 존재론이다. 들뢰즈는 주저 [차이와 반복]에 ‘방목하다’라는 말의 고대적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상 깊은 구절을 남기고 있다.

“방목하다라는 말의 목축적 의미는 나중에서야 토지의 배당을 함축하게 된다. 호메로스 시대의 사회는 방목장의 울타리나 소유지 개념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당시 사회의 관건은 땅을 짐승들에게 분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짐승들 자체를 분배하고 짐승들을 숲이나 산등성이 등의 한정되지 않은 공간 여기저기에 배분하는 데 있다. 노모스는 우선 점유의 장소를 지칭하지만 그 장소는 가령 마을 주변의 평야처럼 명확한 경계가 없는 곳이다. 여기서부터 ‘노마드’라는 주제 역시 탄생한다.”

 

애초에 가축을 가르는 일은 울타리를 치는 목축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명확한 경계가 없는 장소에 가축을 풀어놓는 일, 유목이었다. 방목의 이러한 의미를 존재론의 관점에서 우리는 이렇게 바꾸어 쓸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어떤 개념적 울타리를 통해 존재자에게 존재를 배분했던 것이 아니다. 경계 없는 존재 위에 존재자를 직접 풀어놓는 것이 관건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철학사를 통해 경험론적 사유가 이 과제에 도전해 왔다.


가령 로마 시대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읽어보자. “단일한 것으로 지각된 순간 속에는, 이성이 발견해내는 수많은 순간들이 숨겨져 있다. 이런 까닭에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서 모든 종류의 시뮬라크르들(이미지들, 흔적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평균적 지각이 동일성을 지닌 사물로 보는 것의 배후에는 수많은 지각의 순간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이라면, 이 동일성의 원천으로 저 피안에 있는 이데아를 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에 충실하자면, 동일한 사물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순간의 수많은 다른 지각들이 있을 뿐이다. 이는 동일성의 개념(울타리)에 매개하지 않고 존재자를 직접 존재의 대지 위에 풀어 놓는 존재론적 유목이 아닌가?


이러한 유목적 사유는 계사(繫辭)에 대한 들뢰즈의 다음과 같은 분석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는 보통 계사를 통해, 주어 자리에 오는 동일성을 지닌 실체에 술어 자리에 오는 필연적이거나 우연적인 속성을 귀속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험 안에 있는 것은 동일성 개념이나 그에 부속하는 성질 개념에 매개되지 않는 감각들이 아닐까?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 ‘하늘은(est/is) 푸르다’는 동일성 개념에 매개된 존재자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임’과(et/and) ‘푸름’이라는 두 속성이 이웃하고 있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즉 계사의 정체는 접속사인 것이다). 그야말로 ‘하늘임’과 ‘푸름’의 가변적인 배치(agencement)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랭보의 표현을 빌려 “모든 감각들의 무질서(un dérèglement de tous les sens)”라 일컬을 수 있는 세계이며, 개념의 울타리 없이 존재자를 존재 위에 풀어 놓는 사고이다.


모든 감각들의 무질서로부터 정주민의 도시를 위협하는 유목민의 저 전쟁 기계가 생겨난다. 이것은 재앙인가? 오히려 존재자들을 동일성이나 신학적 질서를 표현하는 유비 같은 개념의 울타리 안에 가두지 않고, 직접 존재 위에 개방하여, 존재자들을 새롭게 배치해보라는 행운이 우리 손에 떨어진 것은 아닐까? 억압적 효과들을 발휘하는 개념의 체계 바깥에서 존재자들을 방목해볼 최초의 행운, 유목적 삶의 행운 말이다.


'생각 > 내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나키즘 [ anarchism ]  (0) 2010.12.14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Zapatista National Liberation Army]  (0) 2010.12.14
파토스 [pathos]  (0) 2010.12.11
아포리즘, 철학을 위한 아포리즘  (1) 2010.12.10
에로스와 타나토스  (1) 2010.12.10
Posted by WN1
,

파토스 [pathos]

생각/내용 2010. 12. 11. 10:04


철학상의 용어로 정념() ·충동 ·정열 등으로 번역되며 로고스(로고스란건.. 쉽게말해서.... 옳은것을 찾아가는 분별력을 가진 이성을 뜻하고요..파토스란건.. 주위상황에따라 변하는 기분.... 그러니까.. 쾌락이나.. 뭐 그런거요.. 그런걸 뜻해요..)와 상대되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어 paschein(받다)에서 파생된 말로 근본적인 뜻은 ‘받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광의로는 어떤 사물이 ‘받은 변화상태’를 의미하고, 협의로는 특별히 ‘인간의 마음이 받은 상태’를 의미한다. 수동성 ·가변성이 내포되며 그때그때 내외의 상황에 따라 인간의 마음이 받는 기분 ·정서를 총괄하여 표현한 말이다.

이성의 판단과는 다른 원천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쾌()’ ‘고()’의 정()이 기본이 되고 고전윤리학에서는 쾌 ·고의 정을 이성의 판단에 따르도록 하는 것을 ‘덕()’이라고 하였다.

파토스는 종종 이성의 명령에 반항하기 때문에 스토아학파에서는 이것을 병()이라고 하였다.

파토스는 각성적() 의식보다도 의식하()의 근원충동()에 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인간 존재의( 또는 ) 존재상황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인간 존재의 근원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윤리학에서는 대상의 자극을 받아서 생기는 감정을 말하며 특히 현대에는 감정의 격앙 ·격정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1만원을 주웠는데.. 그것을 찾아줘야한다는건 누구나 다 알고있고.. 옳은 것이죠..이것이 로고스죠.. 그렇지만... 그것을 찾아주느냐 않찾아주느냐에 대한 갈등..... 이것이 파토스인 것이죠..)

-----------------





상단에 "Children can learn many things on the internet"이라고 인터넷의 유익한 점을 명시해놓고

바로 아래는 곰 인형이 옷을 벗는 사진을 놓아서 앞의 "Children can learn many things on the internet"이 반어적인 문구가 되게 만들었네요.

즉, 애들이 인터넷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데 외설적인 사이트나 야한 동영상 같은 걸 보고 정서상

유해한 것도 배울 수 있다고 한 것이지요.

 

본론으로 들어가서 여기서 페이소스 또는 파토스는 곰 인형이 털가죽을 벗고 있는 데 있네요.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려 보면 인형이 털 껍데기가 벗겨져 있거나 눈알이 없거나 한 것은

아이들이 오래 가지고 놀면서 의도치 않게 훼손시킨 것, 또는 고장낸 것이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어린이의 천진난만함, 순수함을 나타내는 곰 인형의 털가죽이 벗겨져 있는 것은

의도된 것이지요. 외설적인 사이트에서 누드 모델을 흉내낸 것이랄까. 그로 인해

어린이의 천진난만함이 훼손된 것을 보여주네요.

그러니까 곰인형이 환기시키는 어린시절의 순수가 훼손된 모습으로 제시되어

페이소스를 자아낸다고 볼 수 있죠. 게다가 그 위에 "인터넷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는 문구는

그 원인이 인터넷의 유해 사이트에 있다는 것을 반어적으로 표현하여 이 페이소스를 통해 광고의 설득력

을 강화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Posted by WN1
,


명언(名言)이나 격언(格言), 잠언(箴言)은 어떤 교훈이나 가르침을 주는 말 또는 학문 등의 핵심을 간략하게 외우고 말하기 쉽게 그 내용을 간결하고 짧은 문장으로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 속담과도 비슷한 말이며 보통 속담은 일반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나와 그 작자가 분명하지 않은 것을 가리키고 명언은 저명한 사람의 발언 또는 문장이나, 작자는 불명하나 널리 알려진 고전에서 유래한 것을 가리킨다.


아포리즘에 대한 정의 (모리와 함께  화요일)

 

Aphorism: An aphorism is a short witty sentence which expresses a general truth or comment.

아포리즘은 일반적인 사실이나 의견에 대한 짧은 재치있는 문장을 말한다

- 출처: Collins Cobuild Advanced Learner’s English Dictionary


아포리즘깊은 진리를 간결하며 압축된 형식으로 표현한 짧은  (금언격언잠언경구 )

- 출처민중서림 엣센스 국어사전

 

아포리즘이란 위의 사전적 정의와 같이 짧은 형식으로  금언을 말합니다

아포리즘이란 단어를 처음 접하게  책은

바로 모리와 함께  화요일인데요 (Tuesday with Morrie)

노교수와 제자사이의 대화에서

노교수의 아포리즘을 제자가 경청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모리의 대표적인 아포리즘을 보기로 할까요?

 

Accept what you are able to do and what you are not able to do.

Accept the past as past, without denying it or discarding it.

Learn to forgive yourself and to forgive others.

Don’t assume that’s its too late to get involved.

 

너가 할수 있는 것들과 할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여라

과거는 과거로써 받아들이되 그것을 부정하거나 버리려 하지 말아라

너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남을 용서하라

무엇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었다고 단정하지 말아라

- 출처: Tuesday with Morrie

 

위의 아포리즘을 사랑에 대해 제가 재해석 하자면 이렇습니다

 

사랑에 대해서 너가   있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받아들여라

남을 사랑할 수는 있지만남이 너를 사랑하게  수는 없다

지나간 사랑은 과거로써 받아들이되

그것을 애써 지우려하지말고버리려 하지 말아라

과거는 과거로써 아름다울 뿐이지다만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의 끝에는 당신 그리고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자신의 과오를 돌아보고 나를 용서하고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남을 용서하라

 

사랑이 끝났다고 다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라

네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때다

지금 행동하라





“내가 누구인지 밝혀두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사실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을 수 있다…. 나는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이다. 나는 성인이 되느니 차라리 사티로스이고 싶다.”

 

그는 책의 서문을 그렇게 썼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제자로 규정했다. 그리고 반인반수의 사티로스(Satyros)가 되기를 원했다. 사티로스는 얼굴은 사람이지만 몸은 염소이며, 머리에 작은 뿔이 난 디오니소스의 시종이다. 주신을 모시는 시종답게 술과 여자를 좋아하며, 과장된 표현과 몸짓으로 우스꽝스러움을 자아내는 급이 뚝 떨어지는 잡신이다.




디오니소스의 제자이며 디오니소스의 시종을 희망한 이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그리고 이 책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제목과 서문도 파격이지만, 본문은 한 술 더 뜬다.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네 개의 질문을 던지고 차례로 응답한다.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   

 

세상에! 21세기 오늘을 살아가는 깜찍한 소녀들도 “난 너무 예뻐요”를 노래할 때는 살짝 부끄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콧수염을 기른 근엄한 얼굴의 19세기 철학자가 정색을 하고 “난 왜 이렇게 현명한가”라니!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니체는 도발적으로 글을 썼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글을 물고기를 낚기 위한 낚싯바늘로 표현하기도 했다. 독자를 유혹하기 위한 글이라는 것이다. 요즈음 인터넷 용어로 말하면, 그는 ‘낚시질’의 원조인 셈이다. 그의 낚시질은 다양하다. 예를 들어 그는 [선악의 저편]에서 “진리가 여성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떠한가”는 질문을 던지고, [도덕의 계보]에서는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고 단정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우상의 황혼]에는 ‘망치를 들고 철학 하는 법’이라는 부제를 달았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모두를 위한 책이면서 그 누구도 위한 것이 아닌 책’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개인적으로 니체는 공손한 사람이었다는 게 니체 전기 작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그러나 글로 보는 니체는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거만하고, 무례하며, 위악적이다. 그는 굳이 그 점을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과장한다. 그는 왜 존경 받는 성인이 되기보다 지탄 받는 사티로스가 되기를 희망했을까?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교과서적인 정답을 안다.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도전을 한 무신론자이며, 객관적 진리를 향한 형이상학적 전통에 반기를 든 반형이상학자이고, 보편적 도덕 가치를 정초하는 시도 자체가 무망하다고 본 비도덕주의자다. 그러한 도발적 주장 때문에 니체 철학은 한편으로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비합리적인 철학의 전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 용감한 철학으로 상반되는 평가를 받아왔다.


잠깐! 여기서 짚어보자. 니체는 신을 믿지 않은 최초의 무신론자인가? 아니다. 역사의 시계를 멀리 돌릴 필요도 없다. 니체가 철학의 스승으로 삼았던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도 신을 믿지 않았다. 니체는 형이상학에 반기를 든 최초의 반 형이상학자인가? 아니다. 형이상학을 반대한 근대 철학자는 너

무 많아서 거론하기조차 힘들다. 대체로 근대 경험론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에 반대한다. (David Hume)은 형이상학 책은 불태워버리라고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또 물어보자. 니체는 도덕적 가치의 보편성을 의심한 최초의 인물인가? 아니다. 도덕적 회의주의의 흐름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 이후 도덕적 보편주의를 주장한 철학적 흐름만큼이나 뿌리가 깊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니체 철학은 뜨거운 감자가 되었는가?

 

그 비밀의 열쇠는 니체가 주장한 내용에서 찾지 말고 니체가 주장한 방식에서 찾아야 한다. 니체 철학은 아포리즘(aphorism)의 철학이다. 그가 쓴 글은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경구에서부터 하나의 주제에 대한 비교적 긴 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의 아포리즘이다. 아포리즘은 간결하지만 다의적이다. 쉽게 전달되지만 모호하다. 누구나 쉽게 니체를 읽지만, 니체 철학의 이해가 쉽지 않은 이유다. 그는 왜 이렇게 글을 썼을까? [차라

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피와 아포리즘으로 쓰는 사람은 읽혀지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산과 산 사이를 가장 빨리 가는 길은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긴 다리를 가져야만 한다. 아포리즘은 봉우리들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듣게 된 자들은 키가 크고 높이 솟은 자여야 한다”


단순히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기억되어야 하는 아포리즘은 천천히 음미해 가면서 읽어야 한다. 아포리즘은 사물과 직접적으로 관계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포리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물을 낯설게 제시한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지각 경계를 흔든다.












니체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신은 죽었다”는 말도 그렇다. 이 말은 관찰에서 나온 주장이 아니다. 신의 죽음은 ‘소식’의 형태로 전달된다. 그 소식을 전하는 자는 ‘광인’이다. 1인칭 시점으로 즐겨 글을 쓰는 니체가 이 대목에서는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광인을 등장시켜 그 소식을 전한다. 그런데 그게 묘하다. 광인은 이 소식을 기쁘게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광인은 시장 바닥에서 신을 찾다가 마침내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를 죽였다”고 외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절규한다. 그리고 또 말한다. “어떻게 우리는 모든 살해자 중에서 살해자인 우리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가?”라고. “세상에서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존재가 우리의 칼 아래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며, 이제 누가 우리를 위해 속죄를 해줄 수 있는가 묻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도 신의 죽음이라는 놀라운 소식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니체는 이 광인이 전하는 신의 죽음을 이렇게 맺는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날 광인은 몇몇 교회에 뛰어들어 신의 진혼곡(requiem aeternam deo)을 불렀다고 한다”.     

 

[즐거운 학문]에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 광인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인물로 바꾸어 무덤덤하게 한 마디 한다. “저 사람들은 아직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이지”.

 

니체는 신이 죽었다는 사건을 ‘근래의 최대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이 사건을 극화해서 전한다. 영어권 세계에 니체 철학을 소개한 카우프만(Walter Kaufmann)은 이 극화된 장면이 성가에서 차용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신의 죽음은 과학적 관찰이 아니고, 형이상학적 고찰도 아니며, 19세기 유럽문화에 대한 니체의 상황 진단이다. 이 극화를 통해서 니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주장처럼 신은 원래 없었으며 단지 인간의 속성이 외화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 우화적 표현은 광인이 전하는 신의 죽음이라는 사건보다는 오히려 그 사건을 조롱하고 비웃은 당대 유럽 문화에 대한 고발에 초점을 맞춘다. 신의 죽음을 조롱하는 사람들은 신의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신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신의 죽음 이후에 또 하나의 신을 만들어 그것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신을 죽이고 난 후, 그 신이 남긴 흔적은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새로운 신을 만들어 죽은 신의 자리를 메웠다.      

 

그렇다면 새로운 신은 누구인가? 니체는 그것을 콕 짚어서 주장하지 않는다. 아포리즘을 통해서 기독교 신의 죽음과 새로운 신의 조짐을 경고했을 뿐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새로운 신을 과학으로 읽는다. 종교적 미신이 사라진 자리를 과학적 미신이 차지했다고 바라본다. 어떤 이는 새로운 신을 근대(modernity)로 읽는다. 종교적 신화는 죽었지만, 이성과 계몽을 축으로 하는 근대 신화가 새롭게 생겨났다고 본다.

 

니체는 신이 남긴 유산을 완전히 털어버리기를 원한다. 신의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이 죽었다는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또 다시 아포리즘을 동원한다. 그 아포리즘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때로는 차라투스트라라는 초인을 통해서, 때로는 디오니소스라는 그리스 주신을 통해서, 때로는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라는 한때 그가 숭상했던 인물에 대한 혹독한 실명 비판을 통해서 그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 아포리즘이 궁극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과 예술의 장에서 주로 논의되던 니체를 철학의 장으로 이동한 20세기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그것을 니힐리즘(nihilism)으로 읽는다. 니체는 그의 초기 작품 [비극의 탄생]에서 세계의 근저는 그가 스승으로 삼은 디오니소스적인 심연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 심연을 덮기 위한 인간의 처절한 노력이 영원한 세계를 만들어냈다. 플라톤이 세운 이데아의 왕국은 그런 영원한 세계를 지향한 것이며, 기독교가 만들어낸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를 플라톤 철학을 대중화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세계는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나 플라톤 철학이 말하는 이데아는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감내하지 못하는 인간이 자기 보존을 위해 만든 조건일 따름이다. 삶의 자기 보존을 위해 만든 것을 니체는 ‘가치’라고 부른다. 따라서 모든 가치는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곧 ‘니힐’(nihil)이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의 역사는 디오니소스적 심연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니힐리즘의 역사다.


이런 틀에서 보면 기독교는 니힐리즘이고, 플라톤 이후 지금까지 서양 형이상학도 니힐리즘이며, 도덕의 보편 가치를 주장하는 도덕주의자도 니힐리즘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적 세계와 형이상학적 세계, 그리고 도덕적 세계를 최초로 부정한 철학자도 아닌 니체가 왜 그렇게 위험한 철학자로 취급되었는가 하는 단서를 하나 움켜잡는다. 니체는 지금까지 인류가 세운 모든 가치 체계가 니힐리즘이라는 점을 통찰한 철학자다.

 

니힐리즘은 지금까지 인류가 세운 고귀한 가치를 집어 던진다. 그래서 니체는 고귀한 성인이 되기 보다는 차라리 저속한 사티로스가 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풍자(satire)는 그 어원이 바로 사티로스에서 온 말이다. 니체는 우리가 듣기 싫어하는 독한 말을 내뱉기 위해 사티로스를 희망한 것은 아닐까?

 

지난 세기 후반기에 니체 읽기, 또는 니체 식으로 세상 읽기는 하나의 사조로 퍼져나갔다. 그 불을 지핀 것은 프랑스어권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다원화된 세계를 해석하는 틀로 니체의 아포리즘을 이용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단 하나의 니체 철학이 있다는 점에 반대한다. 니체 철학은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푸코는 니체 철학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고 니체 철학이 우리 삶에 어떤 효용성을 줄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니체 철학이 본질적으로 복수주의(pluralisme)라는 점에 동의하지만, 니체를 니힐리즘이라는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창조적인 생성의 철학자로 적극 해석한다. 생성과 다원성, 그리고 얼핏 보기에 무질서하고 엉뚱해 보이는 우연성이 니체가 제시한 아포리즘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하고 무례한 질문을 던진 니체를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로 니체만큼이나 오만했고, 니체처럼 음울했던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를 떠올린다.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히브리스(hybris)라는 위험한 단어는 모든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의 시금석이다. 바로 거기서 그가 자신의 스승을 이해했는지 또는 오해했는지 드러내 보일 수 있다”.

 

히브리스는 무례하고 거만함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술 마시고 방자한 행동을 하는 것도 히브리스 범주에 들어간다. 타인을 모욕하고 수치심을 주는 행위, 자신을 과시하면서 잘난 체 하는 행동도 모두 히브리스다. 그리스인들은 히브리스를 잘 다스리는 데서 미덕이 나오고, 히브리스가 날뛰는 데서 악덕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비극은 히브리스가 날뛰는 데서 오는 불행을 소재로 한다. 그러나 니체 철학에 따르면, 히브리스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발현이기도 하다. 그것은 삶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나오는 것이다.



결국 니체가 꿈꾸는 미래의 철학이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 하는 여부는 히브리스가 가진 이중성을 이해하는 데 달려있는 셈이다. 물론 니체와 니체주의자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반면 니체에 반대하는 이들은 니체 철학 자체가 히브리스이며 니체의 철학적 사유가 정지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러셀이 니체 철학을 일종의 낭만주의적 흐름으로 보는 이유다. 어원적으로 보면, 니체 철학이 크게 의존하는 아포리즘이라는 말에는 이미 경계를 확정 짓는 지평선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여러분은 니체의 기획이 히브리스의 위험성을 뛰어넘는 생각의 새 지평으로 보는가, 아니면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철학적 히브리스라고 보는가?



'생각 > 내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마디즘 [nomadism]  (0) 2010.12.14
파토스 [pathos]  (0) 2010.12.11
에로스와 타나토스  (1) 2010.12.10
코뮌주의와 그 비판  (0) 2010.12.10
프로파간다 모델Propaganda Model, 프로파간다의 힘  (0) 2010.12.05
Posted by WN1
,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가장 오래된 사랑이야기인 만큼 수많은 시인과 작곡가들이 여기서 영감을 얻어 명작을 써냈다. 그 가운데 이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심오한 면모들을 아주 단순한 구성 속에 놀랍도록 선명하게 부각시킨 작품이 바그너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이다. 이 극의 2막에서 연인들의 밀회와 희열은 음악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랑의 이중창으로 표현되는데, 희열의 절정에서 트리스탄은 느닷없이 이렇게 외친다. “사랑의 밤이여,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잊게 해다오.” 왜 이 남자는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쾌락의 절정을 맞는 순간에 살아있다는 것을 잊고 싶어 하는가? 마치 더할 나위 없는 쾌락은 바로 죽음 자체라는 듯 트리스탄은 생명을 망각 속에 빠뜨리고 싶어 한다. 트리스탄이여, 그대는 마치 타나토스(죽음)가 긴 줄에 메달아 인생의 무대 위에서 연인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는 바보인형, 에로스(사랑) 같구나!



이 악극의 마지막 대사들은 더욱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졸데가 최후에 부르는 [사랑의 죽음 Liebestod]의 마지막 두 행은 이렇게 끝난다. “무의식 속에서/ 더할 나위 없는 쾌락이여!(unbewußt/ höchste Lust!)” 이졸데는 ‘죽음’과 ‘무의식’과 ‘쾌락’이라는 세 가지 개념을 연결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이졸데는 무의식의 정체는 죽음이며, 죽음에 도달하는 일은 쾌락을 얻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바그너 말고도 이루 열거할 수 없는 많은 작가들이 죽음에 대한 동경을 표현해 왔다. 그 가운데 특이한 것을 하나 소개하자면 프랑스 작가 쥴리앙 그라크의 경우인데, 그는 가장 큰 단위의 집단 가운데 하나인 국가 자체가 죽음정확히는 해체을 동경하는 사태조차 그리고 있다. 그라크의 소설 [시르트의 바닷가]에서, 가상의 한 국가는 마치 국가의 운명 안에 내재한 법칙을 충실히 따르기라도 하는 듯 소멸을 향해 달려간다. “국가는 형태가 해체될 뿐이지. 그것은 풀어지는 묶음과도 같아. 묶였던 것이 풀어지고 너무 명확한 형태가 불분명함 속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하는 때가 오기 마련이야.”


도대체 죽음 안에 맛보고 싶은 어떤 달콤한 것이 있는 것일까? 죽음은 무의식 속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어떤 법칙 같은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 보고 싶은 문제다.

1865년 독일 뮌헨 궁정극장에서 초연된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프로이트는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 가운데 하나인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지적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신비스러운 자기학대적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에게도 있지 않은가? 당신이 뭔가 기억하기조차 싫은 실수를 했다고 치자. 만일 당신 마음이 늘 즐거운 것을 추구하기만 한다면 당신은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고 행복을 주는 새로운 사건이나 기억에만 집착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와 반대로 당신은 당신이 저지른 가장 고통스러운 실수를 계속 머릿속에서 반복한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렇게 많이 잘못한 것은 아닐 거야’,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일이지 뭐’ 등등. 이렇게 수많은 방식으로 실수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반복한다. 어린 아이들이 하는 놀이의 경우도 그렇다. 수술이나 주사 맞기 같은 충격적이고도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아이는 그것을 잊기는커녕 당장 병원 놀이 속에서 반복한다. 마치 잘못된 인생을 어떻게든 바로잡아 보려는 것처럼, 지나간 인생을 끊임없이 반추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가 가정한 쾌락원칙 : 인간에게
는 ‘쾌’를 구하고 ‘불쾌’를 피하려는 선천적인 경향이 있다.


왜 우리는 쾌락을 쫓기보다 고통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일을 반복할까? ‘고통’을 가리켜, 스트레스, 감당하기 어려운 에너지, 너무 극심한 충격이라고 일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고통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까닭은 바로 마음 안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이 과대한 에너지의 양을 어떻게든 줄이기 위해서가 아닐까?


가령 미국에서 있었던 911 같은 사건을 보자. 끔찍한 고통의 자리를 외면하지 않고 카메라는 계속 현장으로 되돌아오고, 시청자들은 괴로워하면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런데 화면에 비추어지는 것은 가장 비참한 죽음의 현장 그 자체라기보다는 인명을 구조하는 소방수들의 희생적인 행동, 죽은 이에 대한 유가족들의 사랑 같은 것들이다. 요컨대 눈을 뜨고 바라보기 어려운 비극은 칭찬할 만하고 수용할 만한 가치의 옷을 한 겹 입고서 계속 우리 눈 앞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이것이 알려주는 것은, 우리가 과대한 에너지가 넘실대는 고통의 현장으로 되돌아오는 까닭은 그 에너지를 낮추기 위함이며, 낮추는 방법은 그 강력한 에너지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형태의 표상으로 둔갑시키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바로 여기서 우리의 전체 정신무의식이 대부분을 차지하는의 껍질과도 같은 의식의 역할을 발견한다. 껍질의 역할은 무엇인가? 내부를 보호하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너무 강력한 자극이 들어오면 정신이 손상되지 않도록 자극의 강도를 낮추는 역할을 하는 것이 보호자로서의 껍질, 즉 의식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 정신이 이렇게 자극적인 에너지가 없는 상태를 희구한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정신은 ‘자극이 전혀 없는 무기물의 상태’ 같은 것을 고향처럼 동경한다는 뜻이 아닌가? 즉 어떤 긴장도 없는 죽음의 상태가 정신이 가장 원하는 바가 아닌가? 죽음을 향한 정신의 이 충동(타나토스)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자극을 더욱 더 비자극적인 표상으로 반복해서 바꾸는 역할을 하는 것이 의식의 과제인 것이다.

 

 


 

 

우리가 몰두하는 사랑(에로스)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사랑의 행위는 높은 강도의 자극과 긴장으로 가득 찬 쾌락이지만, 이는 실은 모든 자극이 사라진 죽음의 상태를 맛보는 일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프로이트는 말한다. “쾌락원칙은, 정신 기관을 자극에서 완전히 해방시키고 그 속에 있는 자극의 양을 일정한 수준이나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을 주요 업무로 하는 기능에 봉사해서 작동하는 어떤 경향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기능이 모든 살아있는 물질의 가장 보편적인 노력, 즉 무생물계의 정지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과 관련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인 성행위가 고도로 강화된 흥분의 순간적 소멸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경험한 바 있다.”

 

사랑의 행위에서 일어나는 에너지의 강화와 집중 또는 그냥 간단히 말해 극도의 흥분은 결국 흥분이 소멸된 죽음의 상태를 맛보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죽음을 향한 충동과 떼어 생각할 수 있는 사랑의 쾌락은 없으며, 사랑의 배후에는 늘 모든 긴장과 집중된 에너지의 소멸을 갈망하는 죽음에의 충동이 사랑을 작동시키는 모터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이제 우리는 왜 트리스탄이 사랑의 쾌락의 절정에서 죽음을 원했는지 알 것 같다. 또한 이졸데가 연결해놓은 세 가지 개념, ‘죽음’과 ‘무의식’과 ‘쾌락’의 의미심장한 고리 역시 알 것 같다. 정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무의식은 자신에게 침투해 들어오는 불쾌한 에너지의 긴장을 무화(無化)하려는 죽음에의 충동을 지니고 있다. 쾌락이란 극도로 강화된 흥분의 소멸을 통해 이 죽음 한 조각을 맛보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에너지로 가득 찬 사랑을 하고 늘 활력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 삶의 배후에는 놀랍게도 끊임없이 무(無)로 되돌아가려는 자, 바로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어떤 한 구체적인 인생의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삶을 떠받치고 있는 원리로서 ‘익명의 죽음’이다. 이 익명적 죽음에 실려 때로 추락하기 위해 높이까지 사랑의 에너지를 쌓아 올리거나, 때로 집중된 에너지를 낮추기 위해 고안된 것에 불과한 표상을 마치 그 자체 진리이기나 한 듯 바라보는 그런 인생들이 흘러간다. 죽음은 이렇게, 신나게 뽐내며 행진하는 삶을 커튼 뒤에서 몰래 엿보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WN1
,


◆코뮌이란?=수유+너머에서 주장하는 코뮌이란 ‘비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모임’이다. 

최근 논문과 책을 통해 활발히 코뮌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이진경씨는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이유를 분석하던 도중 현실사회주의가 ‘근대적 주체’를 만들려 했기 때문에 몰락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며 “근대적 주체에서 벗어난다면, 자본주의적 삶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근대적 주체에 대해 권용선씨는 “특정 정체성에 고정돼 있는 존재”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이라는 고정된 정체성을 가지면 그 정체성이라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외국인들을 배척하고 미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권씨는 “반면 ‘비근대적 주체’는 관계맺음에 따라 변화하는 주체이며 정해진 틀이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더 좋은 자신을 찾아 변화·탈주하는 주체”라고 설명했다. 

이렇듯 코뮌주의는 코뮌 공동체 이외의 정해진 틀에 갇히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회·구조적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단 한·미FTA, 평택 미군기지 이전 등의 사안에 대해서는 소수자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에 대해 이진경씨는 “코뮌주의는 비근대성에 대한 사유의 결론이 아니라 비근대성을 사유하기 위한 출발점”이라며 “코뮌주의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기존의 사회·구조적 이론들을 새롭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코뮌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가?=권용선씨는 “나 자신도 책 소유에 집착하는 등 근대적인 삶을 살았지만 수유+너머에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동안의 삶이 과욕적이었고, 비생명적이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진경씨도 “자신의 몸에 배어있는 근대적인 습속과 무의식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선물을 주고받듯 대가 없이 베푸는 관계를 ‘경험’해야 그런 변화가 생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코뮌이 소모임에서는 가능하지만 국가수준의 큰 공동체에서까지도 가능하겠느냐는 비판이 있다. 이에 대해 이진경씨는 “코뮌들의 코뮌, 코뮌들의 네트워크로 더 큰 공동체에서도 가능할 것”이라고 답했다. 


◆코뮌의 한계는?=코뮌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강신준 교수(동아대 경제학과)는 “자본주의적이고 근대적인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려는 코뮌주의의 정신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강 교수는 “소수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코뮌주의가 다수 대중의 사회운동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다수 대중을 참여시키느냐’하는 문제는 등한시 했다”고 말했다.

들뢰즈 연구자인 김재인씨(서울여대 강사) 역시 “실체가 없다”며 코뮌주의를 비판했다. 주장하는 바가 추상적이며 명확하지 않다는 뜻이다. 또 그는 “대표적 코뮌이라는 수유+너머만 해도 자본의 후원과 이진경씨, 고병권씨로 대표되는 상징권력 없이는 존속하지 못하는 비독립적인 공동체”라고 지적했다. 김재인씨는 이어 “사람들이 근대성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는 없다”며 “코뮌주의는 근대성을 안고 좀 더 현실적인 면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Posted by WN1
,

드 허만과 나는『여론의 조작 Manufacturing Consent』이라는 언론 관계 책자를 공저했는데, 이 책에서 "프로파간다 모델Propaganda Model"이라는 자명한 이치를 설명했습니다. 이 모델을 적용해보면, 언론 기관은 그들의 이익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업으로서 오랫동안 존속하지 못할 거니까. 그래서 프로파간다 모델이 언론의 형태를 분석하는 유익한 도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뭐 그리 심오한 도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론의 조작』에서 우리는 두 개의 모델(① 언론이 마땅히 기능해야 하는 방식, ② 언론이 실제로 기능하는 방식)을 대비시켰습니다. ①의 모델은 전통적인 것입니다. 이것은『뉴욕 타임스』가 최근에 자사 발행의 『북 리뷰』에서 "정부를 견제하는 제퍼슨식 언론의 역할"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국민들의 알 권리를 보호하고, 정치 과정에서 일반 대중이 의미 있는 통제를 가하도록 돕기 위하여, 까다롭고, 고집 세고, 어디에서나 출현하는 언론, 그리하여 당국의 권력자들을 괴롭히는 그런 언론이 바로 ①의 모델입니다. 바로 이것이 미국 내의 표준적인 언론 모델이고 언론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은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②의 모델은 언론이 실제 행동하는 방식으로서, 국내의 경제를 장악하고 나아가 정부까지 상당 부분 통제하고 있는 특혜 그룹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아젠다를 보호하고 확충하는 세계관을 대변하는 언론입니다. ②의 모델에 따르면, 언론은 기사를 선정하는 방식, 관심사를 분배하는 방식, 문제의 틀을 정하는 방식, 정보를 여과하는 방식, 분석기사를 집중하는 방식, 그 밖의 다양한 테크닉을 통하여 그들의 사회적 목적에 봉사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언론이 어느 때든 국가 정책에 일방적으로 동의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부 권력의 장악은 우리 사회 내의 다양한 엘리트 그룹들 내에서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제계의 어떤 부분이 어떤 특정 기간에 정부를 장악했다는 사실은,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정치 스펙트럼의 한 부분이 그런 힘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엘리트들끼리도 전략적 의견 불일치가 때때로 생겨날 수 있습니다. "프로파간다 모델"은 이렇게 예측합니다. 언론에는 정치 스펙트럼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가 반영된다. 따라서 언론에 의해서 포섭되지 않는 정치 스펙트럼은 없다.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고요? 물론 이것은 거대하면서도 복잡한 주제입니다. 우선 네 개의 기본적 관찰 사항을 얘기하고 그 다음에 좀더 자세히 들어가 보기로 합시다. 첫 번째 사항은 프로파간다 모델이 엘리트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사실 서방의 엘리트 민주 사상가들 사이에는 그런 전통이 강하게 이어져 왔습니다. 이 사상가들은 언론과 지식인 계급이 프로파간다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른바 "대중의 정신the public mind"을 통제함으로써 일반 대중을 주변화해야 한다고 보았던 겁니다. 이 사상은 300년 동안 영미 민주사상의 핵심 주제였고 현재까지도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사상의 근원을 소급해 보면 서구의 최초 민중민주 혁명이었던 1640년대의 영국 내전(1642~1648년 동안 영국의 정권 장악을 놓고 왕당파와 의회파가 벌인 무력 충돌)까지 올라갑니다.

 

당시의 영국 내전에는 두 파의 엘리트가 참여했습니다. 한 파는 의회의 편을 든 지주 계층과 신흥 상인 계층이었고, 다른 한 파는 전통적인 엘리트 그룹인 왕당파였습니다. 이 두 파는 엘리트 갈등의 맥락에서 발달한 대중들의 움직임을 우려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모든 권위-주종 관계, 국가 당국자의 권위 등-에 도전하는 민중운동이 생겨났던 겁니다. 그 당시 인쇄기가 막 발명되었기 때문에 과격한 책들이 많이 출판되었습니다. 영국 내전의 양쪽 엘리트들은 일반 대중이 갑자기 통제 불능의 상태로 빠져드는 것을 굉장히 우려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반 대중은 너무 호기심이 많고 너무 거만하여 민간 통치에 승복하려는 겸손한 마음이 조금도 없다." 이처럼 왕당파와 의회파는 일반 민중을 힘으로 찍어누르는 능력을 상실해갔고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취한 첫 번째 조치는 힘으로 찍어누르는 능력을 다시 도입하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당분간 철권통치하는 절대국가가 들어섰습니다. 그런 다음에 왕정이 다시 도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왕정은 모든 것을 회복시키지는 못했고 정권을 완전 장악하지도 못했습니다. 민중 운동이 치열하게 투쟁했던 목표들이 상당수 영국의 정치적 민주주의에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이후 민중운동은 기존의 권력을 어느 정도 해체하는 데 성공해 왔습니다. 그러자 서방의 엘리트들 사이에는 이런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무력으로 국민을 통제할 힘이 점점 사라져간다면, 대안으로 국민의 생각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나가야 하겠다. 이러한 인식은 미국으로 건너와서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20세기에 들어와 미국 사상에는 이런 주요한 흐름이 형성되었습니다. 그것은 정치학자, 언론인, 홍보 전문가 등 권력가 밀착된 사람들의 주요 사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 사상은 국가가 힘으로 국민을 강제할 능력이 없으니까, 엘리트가 앞장서서 공공의 마음을 통제하는 효과적인 프로파간다를 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미국 언론계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의 생각입니다. 그는 일반 대중을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무리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리프먼은 이 대중들 사이에 "합의의 조성manufacture of consent"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말했는데 더 쉽게 말하자면 여론조작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무력으로 안 되니까 계산된 "합의의 조성"으로 통제를 계속해나가자는 것이었지요.

 

1920년대 당시 홍보산업의 주요 교범은 아예 제목이『프로파간다』였습니다(그 당시 사람들은 좀더 정직했었지요). 이 교범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대중의 습관과 의견을 의식적이고도 조직적으로 조종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민주 체제의 핵심 특징이다. 그 책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지만 대강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이어 교범은 이렇게 말합니다. "소수 지식인들intelligent minorities"의 임무는 대중의 습관과 의견을 이런 식으로 조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으뜸 원칙인 겁니다. 다시 말해 힘으로 사람들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면 세뇌indoctrination가 가장 좋은 방식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프로파간다 모델의 첫 번째 사항입니다. 이것은 엘리트들의 지적 전통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아온 사상입니다.

 

두 번째 사항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프로파간다 모델은 일종의 사전 개연성prior plausibility을 갖고 있습니다. 언론의 구조를 살펴보면 대기업 언론사들은 미국 사회처럼 기업이 지배하는 사회의 프로파간다 기능에 복무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사항은 일반 대중이 프로파간다 모델의 기본 특징에 동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것과는 다르게, 여론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일반 대중들은 언론이 권력에 너무 순종적이고 복종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론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이미지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것이지만 아무튼 일반 대중은 언론을 그렇게 보고 있는 겁니다.

 

(중략)

 

자, 다시 세 가지 초기 관찰 사항으로 돌아갑시다. 네 번째 관찰 사항은 프로파간다 모델의 경험적 타당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사태의 핵심이지요. 프로파간다 모델이 기술하는 사항은 정확한가? 다시 말해 언론은 "전통적 제퍼슨 식 역할(민중의 등불)"을 수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프로파간다 모델"을 착실히 이행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흡족하게 대답하기 위해서는 조사를 많이 해야 하고 관련 자료를 광범위하게 섭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주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 방법의 윤곽만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여론의 조작』에서 프로파간다 모델을 검사한 첫 번째 방식은 그 모델을 가장 엄격한 테스트에 회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반대파들에게 그들이 검사받을 대상을 직접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비판가들이 언제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자기 주장에 유리한 사례만을 뽑았군." 그래서 반대파들에게 검사 대상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스펙트럼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언론의 반정부적 자세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사례들, 그들이 그들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뽑아낸 사례들-가령 베트남 전쟁, 워터게이트, 기타 등등-을 검사 대상으로 삼아서 그들이 프로파간다 모델을 따르는지 아닌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맨 먼저 이런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우리는 반대파에게 검사 대상을 선택하도록 시켰고 그래서 우리가 엉뚱한 사례를 집어들어 우리의 주장을 증명하려 한다는 시비를 사전에 차단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검사한 결과, 여전히 프로파간다 모델이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행한 또 다른 조사 방식은 언론에 실린 의견들의 범위를 문서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류 언론에서 표현 가능한 생각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살펴보려는 거였지요. 우리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면밀히 살폈습니다. 우리는 서로 유사하여 짝을 이루는 듯한 사례를 언론이 어떻게 다루는지 조사했습니다. 물론 역사는 조사연구자들 좋으라고 통제 가능한 실험 사항들을 일부러 제공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서로 비슷해 보이는 역사적 사건들이 많습니다. 언론이 그 두 사건을 어떻게 다루는지 비교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우리는 적성국가들이 저지르는 잔학행위와 비슷한 규모로 미국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언론이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적성국과 우방국의 선거 결과나 자유의 문제를 어떻게 보도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 밖에도 우리가 조사한 토픽들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우리는 생각해낼 수 있는 여러 방법론적 관점들로부터 많은 사례들을 연구했습니다. 우리의 연구는 프로파간다 모델을 확인해주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주장을 확인해주는 다른 사람들의 책자나 논문들도 수천 건에 달합니다. 그래서 나는 프로파간다 모델이 사회과학에서 가장 잘 입증된 명제의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알기로 이 명제에 반대하는 의논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류 문화는 이런 사실("언론은 프로파간다 모델을 따른다")에 대하여 오불관언("나하고는 관계없음")의 자세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가 사회과학 분야에서 아주 확실하게 정립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류 문화는 그들과 무관한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자연과학 수준에서 증명해도 주류 기관들은 여전히 배척할 겁니다. 왜 이렇게 배척하는가 하면 프로파간다 모델이 옳은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모델은 아무리 잘 증명되어도 엘리트 문화 내에서는 이해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말이지요, 이 모델이 밝혀내는 바가 아주 효율적이고 유익한 이데올로기적 제도를 뒤흔들기 때문이지요. 그런 제도에 역기능을 하니까 배제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촘스키, 세상의 물음데 답하다 1」中 프로파간다 모델의 시험 50-57p, -

*1989년 4월 15-16일, 메사추세츠 주 로우에서 열린 주말 공개 토론회를 바탕으로 엮음




--------------------------



프로파간다의 힘에 대해서 

행인과 일월산(이하 존칭 생략), 두분의 대화를 오늘 비로소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저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는 대화입니다. 특히 일월산에게 구체적 해법에 대해서 추궁하는 것은 '일월산이 제대로 임자 만났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디 두분이서 서로 내용을 채워가는 좋은 대화를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행인의 마지막 글 [프로파간다가 세상을 변혁하나?]를 읽고 문득 드리고 싶은 말이 두가지 정도가 있어서 글을 씁니다. 그 두가지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식권력, 2) 구체성의 정체...이런 두가지입니다. 

1) 지식권력 없이는 변혁은 불가능하다
먼저 행인의 질문 [프로파간다가 세상을 변혁하나?]에 대해서 저는 아주 명확한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프로파간다와 그렇지 못한 프로파간다가 있다"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프로파간다>...이것은 모든 정치투쟁의 필수요소입니다. 저는 이것을 군사력과 맞먹는 또는 더한층 질기고 지속적인 권력으로 규정합니다. 저는 이것을 <지식권력>이라고 부릅니다. 토마스쿤의 패러다임이나 맑시즘 계열의 이데올로기 또는 주체화 양식 또는 담론권력 등등, 뭐라고 불러도 저에겐 동일한 하나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들입니다(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은 원래 물질과학에 대한 것이지만 저는 그것을 계급담론의 인식투쟁에도 적용가능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프로파간다>입니다. 그것은 기본의 지배이데올로기가 훈육시키고 세뇌시킨 <주체화의 양식>을 거부하게 하고, 새로운 또다른 대안적인 주체화로 시민들을 이끌어 들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것이 바로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패러다임이다'라는 프로파간다>가 등장했따는 사실 자체가 어딘가 기존 주체화양식이 자기모순에 봉착했음을 보여줍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기존 지식권력의 주체화양식의 모순을 헤집고 들어간다는 게 맞겠습니다. 예를 들면, 상식-원칙-합리를 표방한 '진보개혁 신주류'가 <국익, 국가이성, 민족평화, 국민통합>이라는 명분으로 <전쟁반대 파병찬성>같은 자가당착을 저지른다거나, 평화와 휴머니즘 교육으로 철저하게 강조해 왔던 그간의 미국교육계가 이번 자국 정부의 전쟁광기와 학살로 곤욕스러워 하는 것이라든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평등을 떠들던 구 사회주의 사회가 실제로는 퇴화된 국가노예제가 되어버리는 것 등이 그런 예입니다. 

이처럼 한 사회의 기본적인 생활관계가 질곡을 드러내면, 지배적인 지식권력의 주체화양식의 자기모순과 균열을 치고 들어가면서 새로운 대안을 내세우는 가지각색의 지식권력'들'이 출현합니다. 그리고 현실세계에서 정치세력들의 군웅할거처럼 지식권력들 역시 자신들의 부족적 진리와 진영 멘탈리티를 '선험화하고 보편화하려는' 투쟁에 돌입합니다. 지식권력이 되고자 하는 이런 다양한 시도들 가운데 오직 극소수만이 유능하고 실력있으며 세력있는 부족원들을 규합해 냅니다. 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그러한 대안적인 지식권력들이었습니다. 지식권력으로의 정립을 위한 여러가지 선전선동 및 의식화과정 자체가 새로운 주체화양식의 작동이지만, 그 실내용은 그리 고상한 것이 아닙니다.

지배적 지식권력에 세뇌되고 훈육된 대부분의 노예들-쁘띠들의 지적 수준은 대단히 빈약합니다. 왜냐면 부르조아는 결코 이들이 피착취 대상물질에 적당히 머물 정도로만 교육시키지, 진짜 부르조아 지식권력의 핵심인 반동적 유물론-이기적 실용주의를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부르조아들은 이들 쁘띠들을 <바른생활>하는 도덕적 관념론자들로 사육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더욱 도움이 되는 것을 정확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권력투쟁들은 태반이 이미지-상징조작의 심리전에 심혈을 기울이게 됩니다. 쁘띠들은 정확하게 리얼리티를 보지 못하며, 이미지-상징으로 조작된 <사연들의 세계> 속에서 흥청망청대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행인이 잘 이해했으면 합니다. 프로파간다의 대상층의 특징 말입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인식심리 상의 특징을 지닙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이미 쓴 글들 '불공정'이란 키워드로 내용검색바랍니다)

1) 인식할당을 불공정하게 합니다
2) 좌파상식에 대한 전이해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3) 잇슈들의 신분차별에 젖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프로파간다>가 되려면 지배적 지식권력의 주체화 양식 하에서 철저하게 쁘띠들의 골수에 새겨진 이 3가지 인식심리를 돌파해야 합니다. 어떻게?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두번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2) 구체성의 정체
행인이 일월산에게 집요하게 요구하는 '구체적 해법'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구체적 해법의 난점이 나타납니다. 말 그대로 구체적 해법이기 위해서는 전문성이 반드시 갖추어져야 합니다. 여기서의 전문성은 교수나 자격증 소지자가 아니라, <해당 문제의 해결을 마련키 위해 철두철미하게 전념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한 인간이 모든 분야에 전문적일 수 없다>는 난점과 충돌합니다. 왜 이게 <프로파간다>에 큰 장애가 되느냐하면 이렇습니다.

<구체적 해법을 제시못하면 주디질 고마해라>가 행인의 주장이라면 그것은 <전문적이지 않다면 해법을 제시할 수 없다>가 됩니다. 구체적 해법이 전문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해당 문제의 전문성을 갖춘 자들만이 주디질할 수 있고, 나머지는 걍~ 관련 사연들이나 읊조려라고 한다면, 이것 속에는 <거대서사는 무용하다>,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프로파간다는 무용하다>라는 이론적 허무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저는 이미 아나키와 오늘 이야기를 나눈 바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이론적 허무주의에 대해서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나무에 대한 집중과 함께 숲을 보는 통찰력 또한 필요합니다. 길을 가는 자들이 지도나 나침반없이 어떻게 여행을 하겠습니까? <전문성에 대한 강조>가 <거대서사에 대한 일방적 부정>으로 이어진다면 이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불필요한 적대관계가 빚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그간 상대적으로 빈약한 구체적 해법의 절대부족이라는 작금의 문제를 무시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구체적 해법>이 할 수 없는 역할, 즉 전략적 지도map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반적 추상적 거대서사> 역시 지식권력 형성에 중요합니다. 특히 지식권력은 쁘띠들 가운데서 선진적인 의식층들의 이탈로부터 형성됩니다. 이들 선진적인 의식층들의 특징은 <새로운 통찰과 안목의 요청>입니다. 이것이 이미지-상징조작에 세뇌된 대부분의 하수 쁘띠들과 다른 선진적인 의식층들의 특징입니다.

게다가 띠리한 이들 하수 쁘띠들은 <구체적 해법> 그자체에도 별반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면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인식할당의 불공정, 좌파상식 전이해 결여, 잇슈의 신분차별>에 푹 젖어서 살기 때문에 백날 설득해 보았자 이해를 못합니다. 헛수고 입니다. 오히려 이들 쁘띠 하수들에게 유효한 지식권력 프로파간다 방식은 행인이 말한 <구체적 해법의 실천 사업-제도화>입니다. 이 미묘한 차이가 이해됩니까? <구체적 해법의 프로파간다>는 무용지물이며, 오로지 <구체적 해법의 사업-제도화>만이 하수 쁘띠들에게 먹힌다는 점입니다.

즉, 인터넷 상에서의 담론교환행위 자체가 일정 이상의 쁘띠 선진층들 이상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구체적 해법>의 토론과 축적이 사실상 넷 좌파의 지식권력에 별반 관심도 관련도 없는 하수 쁘띠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것이라는 묘한 어긋남이 있습니다. 지들을 위해 애를 쓰는 자들에게 정작 일반 쁘띠 하수들은 무관심하게 대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배적 지식권력의 주체화에 세뇌된 쁘띠들의 오늘 현실입니다. 이렇습니다. <구체적 해법의 축적>은 대단히 소중합니다. 저는 그렇기에 <불온이스크라>가 일상에 숨겨진 정치의 발견이자, 초국적 금융자본 단계의 노동계급형성을 위한 새로운 거대서사의 제조창이자 그것이 다성적이고 다양한 미시적 구체적인 해법들의 집적소이길 기대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관계의 정치>를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좌파적 모든 대안의 철학은 <관계가 건강해지면 (그 관계의 총체인) 개인도 건강해진다>이지 그 반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자칫 <구체적 해법과 전문성 강조>가 근시안적인 축소로 인해서 누락시키기 쉬운 <관계의 정치>를 <일반적 추상적 거대서사>가 튼실하게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이해 되시지요? 자본주의는 고립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고립조차도) 관계의 그물망입니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 그러므로 자칫 <구체적 해법>은 자기가 다루는 분야의 사안에만 집중한 나머지, 해당 사안이 전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같은 관계의 걉과 폭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좌파의 정치가 <관계의 정치>라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구체적 해법>과 <관계의 전략적 통찰>, 이 양자가 둘 다 소중합니다. 특히나 변모된 초국적 금융자본의 공세 속에서 <새로운> 패러다임과 전략들 그리고 해법들의 조속한 성장과 축적이 절실합니다. 두분 사이의 좋은 대화를 기대합니다.




Posted by WN1
,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左翼) 무장단체.

‘붉은 크메르’라는 뜻이다. 1967년에 결성된 크메르루주는 시아누크가 1970년 론놀의 우익() 군사쿠데타로 전복되자 농촌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세력확장을 통해 마침내 1975년 4월 수도 프놈펜을 장악함으로써 정권장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폴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주정권의 4년간에 걸친 통치기간은 20세기 어느 좌파정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함과 무자비한 보복으로 얼룩졌다. 150만 이상의 캄보디아인이 학살되었고, 전문지식인층과 기술자층이 기회주의라는 죄명으로 죽어갔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야만()과 살상()은 서방에서 《킬링필드》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전세계에 알려지기도 했다.

1979년 베트남군대와 이를 지지하는 캄보디아 공산동맹군의 공격으로 크메르루주는 전복되었고 이후 캄보디아에는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헹삼린정부가 들어섰다. 크메르루주는 이후 타이 국경 근처에 근거지를 확보하고 중국의 지원하에 무장 게릴라전을 전개했으며, 이로 인해 캄보디아내전은 계속되었다. 그후 유엔의 중재로 캄보디아내전 당사자들이 휴전에 동의하고, 1993년 5월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했으나 크메르루주는 1993년 4월 선거불참을 선언하였다. 총선의 결과로 1993년 9월 캄보디아는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하여, 제1당인 민족연합전선의 지도자 노로돔 라나리드(시아누크의 아들)가 제1총리로, 그리고 프놈펜정권의 총리였던 훈센이 제2총리로 선출되어 정부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크메르루주는 1994년 7월 그들의 지도자인 키우삼판을 총리로 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무장투쟁을 계속할 것을 선언함으로써 캄보디아의 평화정착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크메르루주는 과거의 악명과 계속되는 좌경() 모험주의의 채택으로 그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 전범 징역 30년 선고 2010-07-27 뉴스 <== 클릭보기



크메르루주(Khmer Rouge .Khmers Rouges라고도 함)(프랑스어로 '붉은 크메르'라는 뜻)

게릴라전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후 1975~79년 캄보디아를 통치한 급진적인 공산주의 운동단체.
캄보디아의 무장군으로서 1967년에 형성되었다. 캄보디아 공산주의 운동은 베트남의 베트민 후원 아래 1951년에 형성된 혁명 캄보디아 인민당에서 유래했다.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이 당의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은 당 이름을 캄보디아 공산당으로 개칭했다. 1950년대말까지 이 당의 당원들은 노로돔 시아누크 정부에 대항하는 비밀활동에 참여했으나 그들의 본거지가 시민들과 떨어진 정글과 산악지역에 있었고, 또 그들이 폭동을 종용하려 했던 농민들 사이에서 시아누크가 여전히 인기를 얻고 있었으므로 시아누크에 대항하는 활동들은 거의 진전이 없었다. 하지만 우익 군사 쿠데타에 의해 1970년 시아누크 정부가 전복되자 크메르루주는 그들과 정치적 연합을 형성하고, 캄보디아 농촌지역에 대한 대폭적인 지원을 시작했는데, 이러한 추세는 1970년대초 미국이 캄보디아에 대해 파괴적인 폭탄투하작전을 감행함으로써 가속화되었다. 그당시 크메르루주는 시아누크가 집권하는 동안 지원을 보류해오던 북베트남으로부터 원조를 받고 있었다. 1970년에 시작되어 거의 5년간 계속된 내란 중 크메르루주는 캄보디아 농촌지역에 대한 그들의 통제권을 점진적으로 확장시켰다. 마침내 1975년 4월 크메르루주군은 수도 프놈펜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후 캄보디아를 통치할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그후 4년에 걸친 그들의 캄보디아 통치기간은 20세기의 어떠한 마르크스주의 정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무절제함으로 얼룩졌다. 150만 명에 달하는 캄보디아인들이 죽었고, 캄보디아의 전문지식인층과 기술자층이 거의 근절되었다.

크메르루주 정부는 베트남 군대와 베트남을 지지하는 캄보디아 공산동맹군들의 침략으로 1979년 전복되었으며, 침략군들은 캄보디아에 베트남의 원조와 기술로 지탱되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크메르루주는 원거리지역으로 후퇴하여 게릴라전을 재개했는데, 당시 그들은 타이 국경 근처에 있는 그들의 본거지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했으며, 중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았다. 1982년 그들은 베트남을 등에 업고 있는 중앙정부에 반대하는 2개의 비공산계열 크메르 단체들과 명목상 시아누크를 지도자로 하는 위험한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크메르루주는 이 연합전선에 있어 가장 강력한 동반자가 되었으며, 1990년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그들의 군대를 철수하자 또다시 캄보디아에서 주요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캄보디아 역사

프랑스 식민통치시대 부터 쓰겠습니다...

크메르왕국의 Ang Duong왕은 태국과 베트남을 견제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프랑스의 개입을 유도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태국에 머물던 그의 아들 Norodom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후 다시 태국이 크메르왕국에 침입해왔을 때 프랑스가 개입하여 이를 물리치는 대신 캄보디아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하였고 1884년 Norodom왕으로 하여금 강제로 합방조약에 조인하게 하여 캄보디아는 완전히 식민지화하게 되었다. 반식민지 투쟁도 있었으나 태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시각도 있었다. 프랑스는 Norodom왕의 상징적인 권위를 존중해주는 척하고 뒤엣 캄보디아를 조종함으로써 힘을 덜 들이고 효과적으로 캄보디아를 통치할 수 있었다. 이 식민지 시절에 프랑스인에 의해 앙코르 왓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1860년 프랑스의 여행가 헨리 무오 (Henri Mouhot)에 의해서 발굴되어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Norodom왕에 이어 Sisowath(1904∼1927)가 왕위를 계승하였고 그 뒤를 Monivong(1927∼1941)이 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동남아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캄보디아에서도 일본에게 실권을 빼앗겼었다. 1941년 Monivong왕의 뒤를 이어 Norodom Sihanouk왕자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 당시까지는 프랑스의 입김에 의한 왕위 계승이었다. 이후 캄보디아에서는 일본이 민족주의 세력인 Son Ngnoc Thanh과 손을 잡고 프랑스는 Sihanouk와 연대하여 격렬한 대립을 지속하다가 결국 프랑스, Sihanouk쪽이 우세하게 되었다. Sihanoul는 프랑스와 중립외교노선을 유지하며 독립을 끌어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신세대 민족주의자들이자 다수당인 민주당과는 갈등이 심화되었다. 다수당인 민주당과 사이가 불편했던 Sihanouk는 1953년 1월 의회를 해산시키고 같은 해 11월 독립을 선언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과 8년 전쟁을 치르는 와중이어서 캄보디아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으며 1954년 5월 비엔티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에게 완패당하여 항복하고 말았다. 캄보디아도 이때 어부지리를 얻어 배트남과 함께 1954년 7월 제네바 협정에서 그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해방후의 혼란기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시하누크와 그의 정적간에 마찰이 계속되어 혼란이 거듭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55년 국민투표를 통하여 신임을 얻은 후 정당제도를 폐지하고 왕이 아닌 정당 정치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위하여 왕위를 그의 아버지께 양위하였다. 그가 새로 결성한 인민 사회당 (People's Socialist Community Party)은 1955년 9월 선거에서 압승하였으며 이후 일당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당시 국외는 이념이 극단적으로 대립되던 복잡한 상황이었다. 즉 북부베트남, 남부베트남, 태국, 중국, 소련, 미국 등의 이해관계가 캄보디아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시하누크는 북부베트남이나 중국 쪽의 좌익 성향을 약간 가미한 중립외교노선을 선택하였다. 1964년 미국은 도미노처럼 확산되는 공산주의 세력을 막기 위하여 베트남전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좌익 성향을 띠고 있던 시하누크를 적대시하게 되었다. 시하누크는 이를 인지하고 미국과 단교하고 북베트남군이나 중국과 협력하여 미국과 남베트남에 대항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북부베트남군이 캄보디아에 배치되고 1969년 미국은 캄보디아 내의 공산기지에 폭격을 시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베트남전 내내 캄보디아 동부는 미국에 의한 폭격이 계속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국토는 황폐화되었다. 

론놀 (Lon Nol)정권 치하

1969년까지 우익과 좌익간의 다툼은 점점 더 격화되고 시아누크의 정치적 입지는 점점 불안해졌다. 그러던 와중에 1970년 시아누크가 프랑스 방문중일 때 미국을 등에 업은 우익의 론놀 장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일방적으로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이에 시아누크는 귀국하지 못하고 베이징에 망명정부를 구성하였다. 1970년 4월 미국과 남부베트남군은 캄보디아 내의 베트콩을 소탕하기 위해 캄보디아로 넘어왔다. 이 결과 베트콩은 깊숙이 숨어버려 더욱 론놀 정권에게 위협이 되었다. 또한 론놀 정부의 부패와 타락이 점점 심화되어 국민들로부터의 신뢰가 추락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은 내전상태에서 혼란을 겪고 좌익들은 격분하게 되었으며 이의 지지를 받은 크메르 루즈군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후 크메르 루즈군은 론놀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주된 역할을 하였다. 파리에서 교육을 받은 폴 포트(Pol Pot)과 키우 삼판 (Khieu SamPhan)에 의해 주도된 크메르 루즈군은 막강한 미국의 경제적 지원을 받는 론놀 측에 게릴라전으로 대항하여 효율적으로 내전을 수행해 나갔으며 베트남에서 수세에 밀린 미국도 더 이상 론놀의 힘이 되어주기가 힘들었다. 그리하여 1975년 4월 크메르 루즈군은 프놈펜에 입성하게 되었다. 

크메르루즈 치하

크메르 루즈 (Khmer Rouge)는 급진적 공산주의로, 철두철미하게 사회개조 작업을 서둘렀다. 그들은 민주 캄보디아를 표방하고 모택동식 협동농장 형태로의 전환을 위해서 외부세계와 완전히 차단하고 화폐제도를 폐지해 버렸다. 이는 앙코르 시대에 주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제방공사나 토목공사에 참여시켰던 역사와 비교되어 흥미로운 일면이 있기도 하다. 도시 사람들은 모두 농촌으로 내몰려 협동농장에서 극심한 노동을 하였으며 이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즉시 처형되었다. 론놀 정권하의 관리들과 이에 협력한 사람들, 학자, 학생, 교사, 외국어를 아는 사람, 안경 쓴 사람, 손바닥이 말랑말랑하며 노동자가 아닌 사람은 즉결 처형하여 순간 캄보디아는 공포의 도가니로 변해 버렸다. 당시 약 700만 명의 인구 중 백만 이상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특히 거의 모든 사원들이 파괴되고 8만 여명의 승려들이 처형되었으며 약 500여명의 승려들만이 살아 남았다고 한다. 또한 베트남에 관련된 사람들도 모두 죽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금 캄보디아인들에게 가족사항을 묻는 것은 일종의 실례가 되는 형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나라도 6.25 전후에 이런 상황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새삼 역사의 흐름에 전율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이 겉잡을 수 없는 학살의 양상은 거센 반발을 사게 되었다. 공산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헹 삼린 (Heng Samin)이 대표적 저항세력이었다. 그 와중에 베트남에 대해 적대적인 크메르루즈는 과거에 캄보디아 영토였던 메콩 델타를 회복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는데 기회를 노리고 있던 베트남은 이를 기화로 1978년에 캄보디아를 공격하여 크메르 루즈군은 프놈펜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공산베트남 점령치하

크메르 루즈군이 과거의 영토를 회복한다는 명목으로 베트남 국경을 침범한 것을 계기로 공산베트남은 1978년 11월 캄보디아에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여 순식간에 크메르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리하여 크메르 루즈군은 서쪽 태국과의 국경지대인 정글로 도피하게 되었다. 일반 시민들에게 베트남군은 잔악한 크메르 루즈군에게서 해방시켜주는 해방군으로 인식되었다. 베트남은 자신의 지원을 받았던 헹 삼린을 내세워 친베트남 정부를 구성하였다. 하지만 베트남의 침공으로 캄보디아의 경제 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최악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수십만 명의 난민들이 발생하였다. 한편 프놈펜에 급조된 친베트남 정권은 인근 태국과 중국, 미국 모두에게 달갑지 않은 정권이었다. 그리하여 중국은 시하누크를 앞세워 이 정권에 대항하게 하였고 태국과 미국은 이 정권에 쫓겨 달아난 크메르루즈와 캄보디아 난민들을 지원하는 입장이 되기도 하였다. 

캄보디아의 오늘

베트남에 의해 세워진 꼭두각시 정권은 나름대로 점점 안정되어 갔다. 그러나 베트남은 미국, 중국 등의 압력에 몰려 캄보디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었고, 반면 베트남에 원조를 하던 소령의 고르바초프가 패권주의를 포기하고 개방을 표방하면서 캄보디아에서의 베트남군의 철수를 권유 1989년 베트남은 이에 응하게 되었다.
그 해 베트남군의 마지막 군대가 철수되자 캄보디아 정부는 자체적으로 SOC(State of Cambodia)로 국명을 개명하고 파리평화협정(1991)으로 UNTAC(United Nations Transitional Authority)이 창설되어질 때까지 독자적으로 통치했다. 1993년 5월, 22,000여명의 평화유지군의 감시아래 캄보디아 자유총선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시하누크의 민족연합전선(FUNCINPEC)이 훈센의 CPP (Cambodia People's Party)를 누르고 승리했지만 군 및 경찰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던 훈센과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수상직을 제1, 2로 나누어 두는 기형적인 의회제도를 갖추었고 시하누크는 그의 아들 라나리드에게 제1 수상직과 훈신펙 총재직을 물려주며 다시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실로 그가 처음 왕관을 쓴 이후 52년만의 일이었고 시하누크는 그때부터 민족화합의 상징이 되었다. 이때부터 정식 국명은 캄보디아 왕국 (Kingdom of Cambodia)으로 불려진다. 1997년 양수상의 힘의 불균형에서 온 한 차례 내전의 홍역을 치른 후, 1998년 7월 26일 총선이 실시되어 CPP가 국회의 과반수 (122석중 64석) 의석을 차지하여 다수당으로써의 면모를 일신하게 된다. 그리고 훈신펙 (43석)과 연합정부를 구성하여 라나리드가 국회의장을 맡아 그해 12월 새 정부가 공식 출범을 하였다. 그 당시 상원도 생겨 전 국회의장 (CPP) 체아심이 의장을 맡았다. 현재 경제적으로는 다소 어려움이 있으나 건국 이후 최고의 안정된 정국을 맞고 있다. 반면 크메르루즈는 1998년 후반기 정부군에 쫓겨 태국 국경근처의 알롱벵까지 밀렸고 일부 군 고위 지도자들 (12명)은 무조건 집단 투항하므로 거의 와해되었으며 잇따라 폴 포트의 죽음과 타목의 전향으로 현재는 전멸되다시피 되었으며 국제적인 여론에 밀려 현재 캄보디아 내 법정에서 폴 포트 시절의 대량학살 관련 재판이 진행중이다. 한국과의 관계는 훈센의 실용노선이 대세를 이루어 김영삼 정부시절 이미 정식국교를 맺었으며, 현재 여러 관로를 통해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지속적인 간절한 투자의 손짓을 하고 있어 가능성이 많은 이곳에의 진출을 재촉하고 있다. 하지만 충분한 연구와 돌다리도 두드려서 건넌다는 견실한 자세가 요구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Posted by WN1
,


wn1 - 사이코 패스 테스트를 하시는 분들은 본인이 직접 자신을 테스트 하는거라고 알고 있는듯 합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런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자신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모습들을 보고 테스트 해주는 거라고 하더군요.
철학전공 인문학부 교수님 한 분이 알려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직접 제가 해보긴 했습니다..ㅎㅎ
테스트를 해보면서 자신을 한 번 돌아보기도 하고..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사이코패스는 흔히 연쇄살인범이라고 잘 알려졌는데,, 실은 사이코패스 중에 성공한 CEO들도 꽤 있다고 합니다..물론 그런사람들이 모두 그런건 아니겠지요.. 
또한 군인들 중에도 꽤 있고 의사들 중에도 있다고 하더군요...
어떠한 것을 가지고 있든 자신이 가진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것도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이코패스 테스트입니다.

 

문항의 내용을 보면서 더욱 사이코패스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 싶습니다.

 

1.아니다(0점)   2.조금그렇다(1점)   3.그렇다(2점)

 

 

1 말잘하는것을 매력으로 생각한다

 

2 자기의 가치에대해 자랑하고 다닌다

 

3 거짓말을 입에 달고산다

 

4 속임수를 경멸하거나 극단적으로 싫어한다

 

5 범죄를 저질러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않는다

 

6 감동적인 걸봐도 감동인지 모른다

 

7 매사에 냉담하고 남이 말하는 것에 공감하지 않는다

 

8 책임감이 없거나 부족하다

 

9 일상생활에 정신적 자극이 필요하고 지루함이 많다

 

10 기생충처럼 남에게 빌붙어산다

 

11 나쁜행동을 자제할 능력이 부족하다

 

12 소년비행을 경험하거나 영유아기때 잔인한 짓을 많이 했다

 

13 현실성이 부족한 목표를 길게 끌며, 그것을 할수있다고 믿는다

 

14 매사에 충동적이다

 

15 무책임하다

 

16 소년비행을 해본적있다

 

17 약속을 잘 깬다

 

18 아무데서나 성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는다

 

19 많고 짧은 연애를 한다

 

20 범재적 재능을 타고 낫거나 재능을 이용하라고 한다

 

(이 테스트에서 30점 이상 나오면 사이코패시)

 

 

 

 

 

 

사이코패스는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규범이나 규칙 약속 등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성격 탓으로 인해 자신.타인이나 자기가 속한 사회를 괴롭히는 정신병질(精神病質)' 을 말한다. 어떤 사회악적인 행위를 태연히 벌리면서 그행위에 대한 죄책감과 상식적인 도덕심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



Posted by WN1
,

Posted by WN1
,

wn1 - 얼마전 crr분석법을 접하게 되었다.
나는 빨강 - 청록 - 보라 였다..
꽤나 맞는것 같아서 여러명에게 해보니 그들도 꽤 맞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통계를 통해서 나온것이기 때문에 100%맞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EBS에서 나온것처럼 ... 심리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테스트에서 어떻게 말해도 맞는 부분은 있다고 한다..
ㅎㅎ



 

 

1. 좋아하는 색을 고른다.

 

여덟 개의 색 견본을 보면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이 끌리는 순서대로 세 개를 선택하라. 순간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도 말라. 약 30초 동안 본능적으로 선택하라. 당신이 좋아하는 색이나 어느 색에 얽힌 사연들 따위는 잊어버려야 한다. 굳이 조화가 이루어질 만한 색을 고르려고 애쓰지도 말라.

 

 

2. 순서가 지니는 의미

 

첫 번째에 있는 색 당신의 개인적인 본질을 나타낸다. 당신이 진짜로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부분이다. 당신의 기본 성격과 상황에 따라 반응하는 양식을 반영한다. 이것은 당신의 진실한 자아의 표현이다. 현재 당신이 중점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색일 수도 있다.

 

두 번째에 있는 색 현재를 의미한다. 지금 당신이 처해 있는 현재(육체적, 정신적, 정서적인 면에서 모두)와 관련이 있다. 이 색(혹은 그것의 보색)은 당신의 깊은 무의식적 욕구나 결핍 상태 혹은 약점들을 반영하고 있으며, 당신이 지금 즉시 수용해야 할 색이다. 당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나타내주는 색이기도 하다.

 

세 번째에 있는 색 당신의 목표를 의미한다.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도 나타내준다. 이 색에는 당신의 내면적인 소망, 비전과 꿈이 반영되어 있으며, 그것은 운명의 방향과 앞으로 당신이 밟아야 하는 단계를 지시해준다. 당신이 그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노력한다는 전제 하에서 충분히 성장 가능성이 있는 부분이다. 이 색은 새롭고 신선한 미래를 만들기 위하여 당신에게 어떤 행동들이 필요한지를 알려준다.

 

 

3. 색의 조화

 

당신이 선택한 세 가지 색 가운데 두 가지가 서로 반대되는 위치에 있는 보색 색상환에 들어 있을 경우, 색이 조화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색이 조화를 이룬다면 두 색이 서로 바람직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두 색의 긴밀한 상호작용이 당신의 인생에 균형 감각과 매끄러운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으므로 당신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의 성격과 환경과 목표에 어울리는 길을 따라 건설적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선택한 색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에너지가 분산되거나 낭비되어 초점이 흔들리게 될 가능성이 적어진다는 뜻이다. 보완적인 색들이 안정 장치 혹은 서로를 잡아 당겨주는 닻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색과 첫 번째 색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당신은 진정한 자아와 장기적인 발전 목표를 잘 결합시키고 있다. 그러니 인생에서 성공할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우선 두 번째 색이 드러내는 장애물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색과 첫 번째 색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현재의 상태가 당신의 진정한 자아와 잘 맞물려 있으니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당신의 본래 성격이 개인적인 성장에 도움이 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세 번째 색과 두 번째 색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여기서도 바람직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비록 성공을 위한 노력이 진정한 자아가 아닌 현재의 상태와 어울려 있긴 하지만 말이다. 두 번째 색이 제시하는 도전을 극복해야만 당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색이 조화를 이루지 않았다고 해서, 그 결과가 부정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런 경우에는, 어떤 색이 색채 스펙트럼에서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따뜻한 색이 많은지, 차가운 색이 더 많은지를 보는 것이다. 그것으로 균형을 찾는 방법을 짐작할 수 있다. 주로 차가운 색을 선택한 경우라면 따뜻한 색의 스펙트럼에서 균형을 찾아야 할 것이고, 주로 따뜻한 색을 선택하였다면 차가운 색의 스펙트럼에서 균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따뜻한 색은 마젠타, 빨강, 주황, 노랑이며 차가운 색은 청록, 파랑, 보라이다. 초록은 차가운 색 스펙트럼이 끝에 위치해 있지만 중성적인 색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검사를 12주에 한 번씩 다시 해보기 바란다. 당신이 선택하는 색이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예전의 분석이 더 이상 당신이 현재 상황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4. 위치에 따른 색의 의미

당신이 세 가지 색을 골랐다면 이제 다음에 나오는 내용을 기본으로 그 색의 의미를 해석해보라.

 

빨강

① 첫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의 기본 천성은 남을 따르는 것보다 앞에서 이끄는 쪽이다. 주로 남보다 먼저 개척하고, 먼저 의견을 제시하고, 먼저 창조한다. 사교적인 성격이며 지도력이 있다. 경쟁심이 상당히 강하고 정열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당신은 저돌적인 추진력과 계속 앞으로 뻗어나가려는 성향이 있다. 목표 달성, 성공-이런 말들을 자주 밖으로 표시하곤 한다. 전적으로 목표에 초점을 맞추어 행동하며, 과정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쏟지 않는다. 꼼꼼한 계획이나 전략에 의지한다기보다, 육체적인 힘과 결단력을 더 많이 믿는 편이다. 당신은 적극적이며 강렬하고 정열적인 사람이다. 육체적 감정적 에너지가 끊임없이 솟구친다. 하지만 논리와 감정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겠다. 그래야 당신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인생의 평형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② 두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좀더 자신을 자극하고 분발시켜야 하며 힘을 길러야 한다. 특히 신체적인 힘을 길러야겠다. 하지만 빨강의 원래 특징이 적극적이고 줄기차게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기 때문에, 힘의 고갈 상태를 피하는 것도 또 하나의 과제가 될 것이다. 몸이 지치지 않도록 조심하라. 맹렬한 에너지를 조절하는 것도 중요하다. 당신에게 필요한 또 하나의 중요한 미덕은 인내심이다. 지배적인 경향, 공격성, 대결 본능, 강한 성적 자극에 너무 매달리지 않도록 주의하고, 대신에 사랑, 애정 우정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③ 세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현실에 주의를 집중할 필요가 있다. 두 발을 단단히 땅에 붙이고 현실적으로 행동하라. 지금은 공상에 빠지거나 행동을 미룰 때가 아니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기회를 움켜잡아야 할 때이다. 당신은 내심 무언가 새로운 일을 만들어서 그것을 확실하게 밖으로 표시하고 싶어한다. 이사를 하거나, 새로운 사업을 하거나, 체육관에 다니는 것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당신은 일어서서 달려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빨강을 세 번째로 선택한 것이, 당신이 몹시 지치고 고갈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당신을 진정시키고 가라앉혀서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푸른 하늘, 짙은 파랑이나 청록색의 바다에 의한 생각이 이상적인 영양제가 될 수 있다.

 

주황

① 첫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경쾌하고 낙천적이며 원기가 넘쳐흐른다. 활기차고 즐겁고 민감하고 행복한 기질을 갖추고 있다. 당신은 인생을 최대한 즐기려고 하며 어디에든 기꺼이 참여하고 어디를 가든 명랑함과 용기를 발휘한다. 솔직한 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고 얘기하기를 즐기며 사교적이고 외향적이다. 당신은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며, 그들의 영혼을 드높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성급하게 행동할 때가 많고 극단적으로 흐르는 경향도 있다. 지나치게 활동적인 당신의 성격을 오랫동안 억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이 당신을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때로는 감정적인 폭발까지 이르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균형 있게 일의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한다. 전체적인 상황을 요모조모 따져보고 평가하려고 노력하라. 간혹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너무 열심히 노력하는 면도 있으니, 당신의 기본적인 본성을 믿을 필요가 있다.

② 두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내면적 자아를 좀더 의식해야겠다. 당신의 내적인 자아가 균형을 추구하고 있으므로 몸과 마음 모두 평온함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색은 노랑과 빨강 사이에 있기 때문에, 대단히 활동적인 신테적 특징(빨강)과 꼬치꼬치 파고 들어가는 노랑의 특징을 둘 다 갖고 있다. 그러한 자질이 결합되어, 다른 살마에게 고압적이고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경우가 잦다. 당신은 좀더 느긋하고 편안한 태도를 터득해야 한다. 당신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라. 당신의 일부가 이런 시간을 원하고 있으며, 그 시간이 당신에게 영양분을 제공해줄 것이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시간을 보내야 자신을 통합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다.

③ 세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파괴적인 방식을 지양하고, 더욱더 건설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 순간적인 충동으로 행동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생각에 별로 시간을 쏟지 않는다. 그래서 당신의 지금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를 자주 의심하게 된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좀더 깊은 생각과 신중함이다. 그래야 당신의 에너지를 현명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내적으로 움츠러들어 있어서 세 번째 위치에 주황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지금 당신에게 적절한 행동은 좀더 용감하고 자신 있게 앞으로 발을 내딛는 것, 그리고 인생을 즐기는 것이다.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평소의 행동 양식을 뛰어넘겠다는 의지를 찾아야 한다.

 

노랑

① 첫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오감과 같은 인간의 의식적인 능력을 깨닫고 있다. 이성, 논리, 평가에 초점을 맞추어 인생을 바라본다. 당신은 지적인 측면에서 쉽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으며, 쉼 없이 분석하고 계산할 수 있다. 남을 지배하거나 남보다 우월해지려는 경향이 강하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심술을 부리거나 심지어 악의적인 행동까지 보일 수 있다. 당신은 말솜씨가 뛰어난 편이다.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서 유창한 표현력을 자랑한다. 말이나 숫자가 관련된 일에 주로 참여하고, 책임감과 권위가 있는 직위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부서장이나 자영업자, 과학자 혹은 연구원일 수도 있다. 당신은 사람들과 함께 모이는 자리를 좋아한다. 특히 당신이 관심의 대상이 될 때.

② 두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정신적인 능력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자아까지 생각해야 한다. 현실적이고 셀제적인 인생을 무시한 채 환상이나 꿈, 상상력의 세계에 빠지는 경우가 자주 생기므로, 이러한 개념적인 세계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당신의 명석한 아이디어가 시대보다 너무 앞서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현시대에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당신의 에너지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은 인내심이 부족한 편인 데다가 에너지를 한번에 여러 곳으로 발산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욕구불만과 불만족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③ 세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정신을 확장하고 개방하기 위한 특별 훈련이 필요하다. 당신이 적당하다고 느끼는 훈련을 선택하되, 일단 선택을 했으면 긍정적이고 현실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또한 그 작업이 중요성을 지닐 수 있도록 훈련 과정과 비용, 기간, 장소 등을 상세하고 철저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 단계를 밟는다면, 햇살과 빛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당신의 인생에 낙천성과 행복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휴식일 수도 있다. 태양빛을 듬뿍 받을 수 있는 휴식. 한편으로 당신은 자신의 지식과 이해력을 유익하게 사용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당신이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그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고 싶어한다. 타고난 직감과 잠재력, 지혜를 잘 활용한다면 당신의 노력은 점점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초록

① 첫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지배적이지도 복종적이지도 않고, 외향적이지도 내향적이지도 않다. 양쪽의 균형을 추구하여 어떤 종류의 극단으로도 흐르지 않는다. 항상 행동하기 전에 심사숙고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나서는 면이 부족하기도 하다. 당신은 일터에서 매우 능률적이고 성실한 사람이며, 집에서는 깔끔하고 단정하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언제나 탄복하는 편이며, 공원이나 해변처럼 탁 트인 공간을 좋아한다.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되도록 식물과 꽃들을 주위에 놓아두고 싶어하며, 나무, 흙, 돌 등 천연 소재로 만들어진 것에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주변 상황이나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경향이 있으며, 스스로 만들어놓은 장벽을 쉽게 부수지 못한다. 당신에게는 인생에 대한 태도를 규칙적으로 재평가하고 변화의 필요성을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② 두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감정적인 상처를 달래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상처들은 당신에게 깊은 불안감을 일으켜 궁긍적으로 환멸, 씁쓸함, 시기심과 질투심을 남길 수 있다. 이 감정들을 안으로 삭이려고 이런저런 합리화를 추구하다가 인생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휩쓸려버릴 수도 있다. 겉으로 무난하고 바람직한 행동을 내보이더라도, 그런 행동들이 충족되지 못한 욕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당신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주 위협 당하는 느낌을 받게 되고 자신의 연약함을 절감하곤 한다. 그래서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보호해주기를 바란다.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남에게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편이며, 내적인 감정을 억누르려는 경향이 있다. 당신은 특히 제한된 상황과 그속에 갇혀버린 듯한 느낌을 혐오스러워 한다. 지금 당신에게는 움츠러들고 망설여질 때마다 좀더 감정을 표현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③ 세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편안한 느낌을 주는 사람들과 좀더 어울리면서 새로운 우정을 쌓거나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당신이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익과 가치를 알게 되고, 지금의 상실감과 외로움에서 차츰 벗어날 수 있다. 인생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즐거움을 찾게 되면서, 초록의 전형적인 특징인 죄의식, 원망, 무기력증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당신에게는 정신을 바짝 차리는 기민함이 필요하다. 상황이 당신의 판단을 거치지 않고 무작정 흘러가지 않도록 조심하라.

 

청록

① 첫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기본적으로 불꽃 튀는 젊음을 가지고 있다. 상황에 따라서 신선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드러내기도 한다. 겉으로 보기에 거의 언제나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이며 까다로운 사건들도 수월하게 처리해낸다. 장애물이 생겼을 때 두려움 없이 냉철하게 대처할 수도 있다. 당신의 결단은 빠르고 행동은 확실하다. 그래서 인기 있는 인물인 경우가 많고,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의 목적과 방향 의식을 반영시킬 수 있다. 뛰어난 통찰력과 능력을 지닌 당신은 그 재능을 영적인 길로 더 정진하는 데 사용하고자 한다. 대화를 잘 이끌어나가며 자신을 편안하게 표현할 줄도 안다. 하지만 영적인 면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당신의 비현실성을 극복하고 아이디어를 현실성 있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② 두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사람들과 조금 거리를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신선한 에너지에 이끌려 이런저런 요구로 당신의 공간을 침범하려 할 가능성이 많으므로, 건강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타인에게서 벗어나 내적으로 침잠하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다양한 종류의 극단과 지나친 탐닉에 빠져 있었던 경우라면, 몸과 마음, 그리고 감정을 깨끗이 정화하고 활력을 되찾는 과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것이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당신은 매우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내적인 침잠 시간이나 정화 과정을 소홀히 할 경우에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붕괴되어 질병을 얻을 수 있다.

③ 세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인생에서 닥치는 상황들을 모두 도전으로 간주한다. 새로운 변화로 자주 삶이 복잡해지고 어지러워지기도 하지만, 당연히 변화가 있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변화를 위해 감당해야 하는 행동이 개인적인 변화를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변화를 환영한다. 이 과정에 혼란과 두려움, 근심과 불편함이 동반되기도 하지만, 이것 또한 개인적인 성장과 개발을 위해 필요할 부분이다. 시련과 장애물을 훌쩍훌쩍 뛰어넘다 보면, 활력과 강인함이 보상으로 따르기 마련이다. 당신은 한번 해보자라는 도전 정신을 지니고 있다. 그 움직임과 청록색의 에너지가 당신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 올려줄 것이다.

 

파랑

① 첫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천성적으로 부드럽고 온화하며 평화롭다. 소란스럽지도 않고 쉽게 흥분하는 유형도 아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사람으로 비쳐진다. 존재의 의미나 영적인 자아에 대한 생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경향이 있고, 정신적인 면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진실함과 솔직함 같은 자질들을 귀하게 생각한다. 당신 자신도 진솔하고 믿음직하고 충실하다. 사람들은 당신과 같이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 당신은 아무런 위협감도 주지 않은 채 고요하고 안정된 에너지를 발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은 너무 자신에게 몰입하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혼자 고립되는 경우가 많고, 매일 매일 벌어지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로 자신감을 상실하기도 한다. 당신은 인생에서 질서를 찾고자 하며, 지속성과 안전성을 좋아한다.

② 두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에게는 침묵과 지식이 강점이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의 정신적인 면에서나 육체적인 면에서 고요를 본다. 이 평화로운 외면은 따뜻한 색의 스펙트럼에 치우쳐 있는 사람들에게 부러운 면이다. 하지만 당신은 내면적으로 너무 강력한 그 침묵을 깨뜨려야 할 필요가 있다. 밖으로 자신을 좀더 많이 표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깊은 우울증과 의기소침에 빠져들게 되고, 무기력증과 허탈감 때문에 힘들어질 수 있다. 당신은 뒤로 물러나 숨어 있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말하는 습관과 자기 표현력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균형 있는 인간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③ 세 번째 위치에 있을 때

영적인 생각과 명상, 이런 것들이 당신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부분도 중요하게 여길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하다. 당신은 삶의 순리에 좀더 신뢰를 보내야 한다. 평범해 보이는 매일의 현실에 참여해서 일상적인 문제들을 처리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당신이 추구하는 진정한 아름다움과 자유와 영성을 찾게 될 것이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단어는 융통성이다. 이 커다랗고 추악한 세상에 집어삼켜 질 거라는 두려움 없이 삶에 참여하고 반응할 줄 알아야 한다. 당신이 느긋하고 평화로운 시간 속에서 충만함을 찾을 수 있다 해도, 영원한 도피의 도구가 아니라 임시 방편으로 그것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보라

① 첫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기본적으로 영적인 의식과 인식을 지니고 있다. 물질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움과 정신력의 세계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파랑을 선택했던 사람들보다 현실에 더 잘 적응한다. 보라색 자체가 빨강과 파랑의 결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무 지나치지 않게 당신의 영적인 면을 활용할 수 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봉사를 하고자 하며, 진정한 위엄과 고상함을 갖추고 있다. 스스로를 심미적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예술 계통이나 종교 계통, 부와 사치가 결합된 활동을 직업으로 삼을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한가지 약점은, 자신이 설정한 비전을 달성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자신감 부족에 시달리곤 한다는 점이다.

② 두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여러 가지를 통합하여 짜맞추는 능력이 있다. 타고난 리더로서 높은 직위에 앉아 있을 가능성도 많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어럽게 여기는 일들을 척척 해내면서도, 스스로는 자긍심이 부족하여 정서 불안에 시달린다. 당신은 주위 사람들에게 솔직한 피드백을 받아들여야 한다. 잘한 일이 있을 때에는 잘했다고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 피드백이 돌아오지 않으면 자신만의 고독한 공간으로 숨어들게 될지 모른다. 인생에서 책임져야 할 일을 거부하고(부정적인 빨강) 현실 도피의 과정으로 후퇴하게(부정적인 파랑) 되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은 성숙하지 못하다거나 이기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반드시 끝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성실하고 적극적으로 끈기를 발휘해야만 성숙해질 수 있다.

③ 세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타고난 창의성을 발휘하고 싶어하며 그 자질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한다. 당신에게는 특별한 치료의 능력이 있으니, 그 신념과 직감, 지혜의 능력을 갈고 닦아야 한다. 여기서 치료라는 표현은, 질병을 치료한다는 뜻이 아니라 좀더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범주의 치료를 의미한다. 영적인 능력을 개발해야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

 

마젠타

① 첫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친절하고 온화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다. 타인에게 애정과 따뜻함, 사랑과 연민을 보낼 줄 안다. 인생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성숙함을 지녔으며, 주위 사람들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격력하고 이끌어주려고 노력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상냥함과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카운슬러나 간호사, 혹은 사회사업가와 같이 타인을 보살펴주는 분야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애정을 발산하기 때문에 세상의 소금 같은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 

② 두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인생에서 주고받는 것 사이의 균형을 찾을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지원과 협조를 아끼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들을 격려하며 최선을 발휘하도록 이끌어주지만, 당신 자신이 가진 욕구에 대해서는 소홀한 편이다. 그래서 자주 손해를 보기도 한다. 당신은 주는 것만큼 받는 것도 가치있다는 점을 배워야 한다. 또 의무감이나 죄책감 때문에 애써 보답해줄 필요가 없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표현해야 한다. 당신 자신에게 양분을 제공하라. 가 더 쉬운 것 같을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도 개발하라. 

③ 세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빨강이 가진 육체적인 추진력과 보라색이 가진 영적인 면들을 혼합할 수 있다. 색채 스펙트럼의 첫 번째와 일곱 번째 책이 결합되어, 인생의 기본적인 힘과 하늘의 힘이 아름답게 버무려진다. 이 결합에는 인류에 지대한 유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물질 세계에서 우리가 열망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색이며, 우주적인 통일성을 창조해낼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색의 조합이다. 당신은 이 목표를 향해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거나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한 상태일 것이다. 원시적인 자아에 사로잡히거나 남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상상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당신의 도전 과제이다. 자칫 잘못하면 거만하고 지배적인 천성이 드러나게 된다. 당신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좀더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부분들을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점욕과 타인을 조종하고 다스리려는 성향이 생겨서,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고독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Posted by WN1
,

로마 5 현제

생각/내용 2010. 9. 18. 10:26


로마는 원로원이 66세의 네르바를 제위(帝位)에 추대하면서부터 원로원과 황제의 현명한 타협의 정치체제가 확립되어, 영국의 역사가 E.기번이 ‘인류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라고 절찬한 5현제의 시대가 열렸다. 사회복지 정책의 네르바(재위 96∼98), 최초의 속주(屬州) 출신(에스파냐) 황제로서 적극적인 대외정책과 자선사업을 추진한 트라야누스(재위 98∼117), 반평생을 속주순행(屬州巡幸)에 바친 그리스 문화의 애호가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 경건한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 동분서주하며 외적과 맞선 철인(哲人)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는 각각 전(前) 황제의 양자가 되어, 원로원의 ! 승인을 얻어 제위에 올랐다.

  이 시대의 특징은 제국의 영토가 확대되고 비교적 평화가 계속된 데에 있다. 특히 트라야누스는 동방 나바타이왕국을 합병한 데 이어 파르티아왕국의 수도 크테시폰을 공략하고, 다키아(현재의 루마니아) ·아라비아(나바타이) ·메소포타미아 ·아시리아 등의 속주를 추가하여 제국의 판도가 가장 넓은 시기를 이루었다. 북쪽은 라인 ·도나우 두 강을 자연적 국경으로 하고, 도나우강 하류에서는 다키아까지를 영역으로 하였으며, 동쪽은 유프라테스강과 아라비아사막, 남쪽은 사하라사막에까지 판도가 미쳤다.

  다음의 하드리아누스 때에는 수세(守勢)로 바뀌어 제국 각지를 순수(巡狩)하면서 국경방위 강화에 힘쓰는 한편, 속주의 통치조직 ·제국행정제도 ·관료제도 ·군제(軍制) 등을 개선 ·정비하였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때에 들어와 동부 국경에서는 파르티아군의 침입을 받고, 제국 각지에 전염병이 만연하여 인구는 현저하게 감소하였다. 황제는 동분서주하면서, 특히 북쪽 변경 수비에 몰두하였다. 더구나 다뉴브강 중류 유역에서 밀려온 게르만인의 침입을 끝내 저지하지 못하고 그들 일부에게 제국 내의 토지를 주어 소작농으로 만들고 그들에게 제국 방위를 맡길 수 밖에 없었다

네르바(재위 96∼98), 트라야누스(재위 98∼117),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의 5제(帝)를 말한다. 이 시대에는 제위(帝位)는 세습(世襲)이 아니라 원로원의원(元老院議員)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을 황제로 지명하였기 때문에, 훌륭한 황제가 속출하여 이 호칭이 생겼다.
이 시대에는 로마 제국의 정치가 안정되었으며, 경제도 번영하고 영토 또한 최대의 판도에 이르렀고, 그 문화는 속주(屬州) 각지에 파급되어 제국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었다.

각 황제의 업적


네르바(재위 96∼98).
로마의 5현제 시대를 연 황제이다. 71년과 90년에 집정관(執政官)에 취임하였다. 96년 9월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자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에 즉위하여 원로원과 협조하여 선정을 폈고, 반란의 주모자와 그리스도교도에 대해서도 관대하였다.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하여 후계자로 삼았다.

트라야누스(재위 98∼117)

트라야누스 초상


바이티카 이탈리카 출생. 오현제(五賢帝) 중 제2대 황제이다. 에스파냐 출신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특히 군인으로서 명망이 높아 군대의 신망을 얻었으며, 네르바제(帝)의 양자가 되어 제위를 계승하였다. 원로원과의 협조 자세를 유지하고, 빈민 자녀의 부양정책, 이탈리아의 도시 ·농촌 회복시책을 추진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로마제국 판도의 확장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도나우강을 건너 다키아를 정복하여 속주로 하였으며, 또 남쪽으로는 사하라사막의 경계까지 진출하여 요소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다시 동방으로는 나바타이왕국을 병합하여 속주 아라비아로 하였으며,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파르티아군을 몰아내고 아시리아까지도 속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후 파르티아의 반격, 이집트 ·유대의 반란을 당하여 아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포기하였다. 동방으로부터 로마로 귀환 도중 병사하였다. 로마제국 최대의 판도를 과시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

 하드리아누스 초상


오현제(五賢帝)의 한 사람. 로마 출생. 트라야누스 황제의 조카. 군사 ·정치의 요직을 거쳐,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때는 시리아 지사(知事)로 있었는데, 트라야누스가 임종시에 그를 양자로 삼자, 현지에서 즉위하였다. 선제(先帝)의 대외 적극정책에서 수세(守勢)로 전환하여, 방위를 강화하는 한편, 국력의 충실에 힘썼다.
치세의 반쯤을 속주(屬州)의 순유(巡遊)시찰에 소비하고, 브리타니아에는 장성(長城)을 구축(하드리아누스 성벽), 게르마니아의 방벽(防壁)을 강화하였으며, 파르티아와 화의를 체결, 아르메니아를 보호국 지위로 되돌려놓았다. 또한, 속주 여러 도시의 건설 ·육성, 공공시설의 충실에도 진력하고, 아테네와 로마에 각종 신전을 건조하였다.
이렇듯 속주통치조직, 제국 행정제도, 관료제도, 군사제도의 정비에 힘써, 이후 제국 제반 제도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로마법의 학문연구도 촉진시키고, 문예 ·회화 ·산술을 애호하고, 학자들을 우대하였다. 안토니누스피우스를 양자로 삼았는데, 사후에는 그에 의하여 신격화(神格化)되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

안토니누스의 두상


정식 이름은 Titus Aurelius Fulvus Boionius Antoninus Pius. 피우스란 경건(敬虔)한 자를 뜻한다. 120년에 콘술(집정관)이 되고 또 이탈리아의 사법행정을 지배하였으며, 뒤에 아시아주 총독을 지냈다.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양자가 되고 그가 죽은 뒤 즉위하였고, 원로원으로부터 피우스의 칭호를 받았다. 관대하고 인자하며 온건하여 거의 대부분 로마를 떠나지 않고 정치를 하여, 대체적으로 평화로운 치세를 누렸다. 관리의 지위를 안정시키고 속주(屬州)의 부담을 줄이며 재정을 건전하게 하여 번영을 구가하였다. 사회정책도 추진하여 그리스도교 박해를 금지시켰고, 원로원과의 협조도 잘되어 중앙집권화의 실적을 올렸다. 대지진으로 파괴된 그리스 ·소아시아 ·로도스의 도시들을 재건하는 등 속주의 번영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 법학자를 등용하였고, 황후 파우스티나의 죽음을 기념하여 대규모의 자녀부양시설로 여자고아원을 설립하였다. 외부에 대하여는 방어적이어서 브리타니아에 안토니누스 장성(長城)을 구축하여 변경의 경비를 굳게 하였다. 그러나 변경도 차차 시끄러워졌고, 그가 죽은 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후계자로 즉위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초상
한자명 안돈(安敦). 121년 로마에서 출생하였다. 5현제(賢帝)의 마지막 황제로, 후기 스토아파(派)의 철학자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가 된 후 140년 로마의 콘술(집정관)이 되었고, 145년 안토니누스의 딸(사촌누이)과 결혼, 161년 안토니누스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로 즉위하였다.
당시의 로마제국은 경제적·군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여서 변방에는 외적의 침입이 잦았으며, 특히 도나우강(江) 쪽에서는 마르코만니족 및 쿠아디족이 자주 침입하여 그 방비에 힘썼다. 그동안 페스트가 유행하여 제국은 피폐하고, 게르만족과의 전쟁에 시달리면서 발칸 북방의 시리아 및 이집트 등의 진영(陣營)에서 병을 얻어 도나우 강변의 진중에서 죽었다.
유명한 《명상록(冥想錄)》은 이 진중에서 쓴 것으로 스토아적 철인의 정관(靜觀)과 황제의 격무라는 모순에 고민하는 인간의 애조(哀調)가 담겨 있다. 여기서 그의 철학은 본질적으로는 반 세기 전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한층 내면적으로 침잠해 들어오는 철학을 이루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것은 불이며, 신적(神的)인 세계 영혼으로 관통되고 살려지게 되고 지배받고 있으며, 인간의 영혼도 세계 영혼의 한 유출물에 불과하여 죽으면 자연히 세계 영혼에 귀일하게 된다.
물질적·육체적인 세계의 모든 것은 이 신적인 이성에 의하여 운명적·자연필연적으로, 그러면서도 신적·합법칙적으로 끊임없이 생멸변화(生滅變化)하고 있다. 따라서 개물(個物)·개인(個人)은 그 이름도 기억도 이 필연의 운동 속에서 소멸되고, 망각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자연필연의 이법(理法)을 확인하여 이를 신의 섭리라 믿고, 외적인 어느 것에도 마음을 괴롭히는 일이 없이 주어진 운명을 감수하며, 내적으로 자유롭고 명랑하고 조용하고 경건하게 그의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있어서는 철학자와 황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그가 죽은 후 로마제국은 쇠퇴하였다. 로마시에는 ‘마르코만니전쟁’을 부조(浮彫)한 기념주(記念柱)와 그의 기마상(騎馬像)이 있다.




--------------------



옥타비아누스의 제정 시작과 5현제 시대


1. 옥타비아누스의 원수정

악티온 해전에서 승리한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실제적으로 로마의 모든 지배권을 갖고, 로마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는 과거 다른 군인지배자들이 로마를 지배한 방식인 <군사독재관>이라는 형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로마를 다스립니다. 그것이 앞서 설명한 <원수정>의 형태입니다.

<원수정>이란, 집정관, 호민관 등이 존재하는 공화정 형태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정치형태를 만들어가는 과도기의 체제를 말합니다.

실제 옥타비아누스가 <원수정>이라는 정치체제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볼까요?

일단 옥타비아누스는 대외적으로는 속주의 모든 통제권을 장악한 <총독>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대내적으로는 호민관이면서, 집정관이였습니다. 옥타비아누스의 군사력을 두려워한 원로원 의원들은 옥타비아누스를 원로원 명부의 1번째에 기록해 두었는데, 이 것은 옥타비아누스가 공화정이라는 정치체제에서 <제 1의 시민>임을 의미합니다. 제 1의 시민이라는 의미로 옥타비아누스를 <프린캡스>라고 부릅니다. 로마가 공화정이기 때문에 왕이 아니라 <시민>으로 부른 것이지요. 그러나 실제 왕과 다를 바 없는 독재권력입니다.

이렇게 총독, 호민관, 집정관이라는 3가지 통치권력을 독점한 공화정은 이미 공화정이 아닙니다. 공화정처럼 보일 뿐이지요. 이러한 독재적인 옥타비아누스의 공화정을 <원수정>이라고 합니다.

2. 로마 제정이 시작되다.

<원수정>을 완성한 옥타비아누스 앞에 원로원은 무력했습니다. 원로원은 최후 권한인 <국가 비상시 원로원의 총책임권 ; 비상대권>마저 옥타비아누스에게 바칩니다. 원로원은 군사지휘권, 속주관리권을 모두 옥타비아누스에게 넘기면서, 그에게 존엄자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내립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리게 되면서 이제 로마는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즉, 공화정을 유지한 채 군사권, 재정권 등 통치실권을 장악한 <원수정>의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피를 흘리거나,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바로 평화로운 <제정>단계가 시작된 것이지요.

제 1의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황제 즉위 후 바로 군사, 재정권을 황제 직속으로 장악합니다.

로마와 속주의 로마시민은 정규군으로 편제하고, 속주의 원주민은 보조군으로 편제합니다. 이들은 각각 재산정도에 따라 기병, 보병으로 편제되었습니다. 특히 속주원주민들도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데, 그 이유는 제대 후에 시민권을 보장하거나, 노후보장을 완벽하게 처리해주는 과거 마리우스나 카이사르의 <사병화>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고급지휘관은 원로원 계급에서 황제가 직접 임명하되, 임기는 1년으로 딱 제한해버리고, 실제 군권은 황제의 친위대나 황제의 친속에게 두었습니다. 상설해군을 창설하여 군대를 강하게 만들어, 해외 개척의 기반도 만들죠.

이러한 모든 군권은 로마 황제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원로원은 군권에 있어 아무런 힘이 없죠.

그럼 이렇게 모든 군권에 로마국가가 아닌 황제권에 속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옥타비아누스가 군권 장악과 함께 재정권 장악을 동시에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속주의 재정을 철저하게 감시합니다. 징세청부업자를 확실하게 감독하여, 국가가 속주의 모든 징세제도를 통제하였습니다. 속주의 인구조사, 호적정리, 재산평가 등이 확실하게 이루어진 것이죠. 그 바탕에서 로마의 재정 대부분은 황제의 재정이 된 것입니다. 또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친 악티온 해전 이후 이집트는 옥타비아누스의 사적 재산이였습니다. 그 방대한 아프리카 대륙의 재산만 가지고도 황제는 군권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고, 원로원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군사 재정은 황제의 사적 재정이 투입되는 형식이였습니다. 이로서 황제는 모든 군권을 장악하게 되어 200년간의 로마 평화 시대(Pax Romana)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 무렵 모라의 북방 한계선인 라인강-다뉴브강 경계가 완성됩니다.

3. 아우구스투스 사후의 양자제도와 혼란

로마의 평화 시대는 5현재로 대표되는 로마 제국의 강성기를 말합니다.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황제가 자신의 후계자를 가장 적합한 인물 중에서 선별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양자상속제도가 확립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럼 아우구스투스 사후부터 로마의 평화 시대까지를 간략하게 볼까요?

아우구스투스는 자식복이 없어서 양자인 티베리우스에게 제국을 물려주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55세에 황제에 올랐으나, 곧 조카 아들인 가이우스에게 왕위를 양보합니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친위대장에게 살해되고, 숙부인 클라우디우스가 황제가 됩니다.

클라우디우스는 황제의 행정권을 독식하기 위하여 자신의 노예들을 해방시켜 정치에 참여시키는 <해방노예>정치를 합니다. 이 해방노예들은 황제직속의 관리로서 유능한자는 부자가 될 수 있었으며, 일부는 에퀴테스 계급으로 신분 상승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 황제도 자식복이 없었습니다. 당시 황제들이 자식복이 없는 건 특이한 일이지요.

클라우디우스는 3번이나 결혼 경력이 있는 부인 아그리피나에게 암살당합니다.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를 암살한 것은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네로>를 황제에 올리기 위해서죠. 네로가 16세에 황제가 되자, 아그리피나의 섭정시대가 시작됩니다. 당시, 로마에는 큰 화재가 발생했는데, 네로는 그 화제의 원인을 그리스도교의 소행으로 꾸며 그들을 대학살합니다. 유명한 소설 <퀴어바디스>에서 베드로가 순교했다는 이야기도 이 화재와 관련이 있습니다. 네로는 자신을 도운 재상 세네카도 반역죄를 조작하여 죽여버립니다. 또, 자신의 어머니 아그리피나가 자신을 유혹하여 결혼하려고 하자 어머니를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아그리피나는 아들이 자신의 뜻대로 안되자, 클라우디우스의 다른 어린 왕자를 왕으로 삼으려는 음모를 꾸미다 <네로>에게 비참하게 죽습니다. 일설에는 네로가 어머니까지 죽이려고 자작극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느 쪽이든 이 두 모자가 독한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네로의 이러한 폭정은 로마인의 반란을 초래하여 네로는 자결하고 맙니다.

4. Pax Romana : 로마의 평화 시대가 시작되다.

이러한 로마의 혼란 속에서 원로원 의원 네르바가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에 올랐습니다. 네로 이후 궁중의 암투와 처절한 권력싸움에 이골이 난 원로원은 이제 황제라는 자리를 무능한 자식이나 친족에게 물려주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이 네르바 황제 이후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5황제 시대에는 모두 현명한 자를 양자로 삼아 황제를 잇게하는 정통이 생겼는데, 이것을 <양자상속제>라고 하며, 이 시대를 <5현제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현명한 5황제의 시대가 바로 팍스 로마나라고 불리는 로마 제국의 전성기 시대입니다.

5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학파의 철인황제로서 <명상록>과 같은 명저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부터 게르만족의 침입 및 파르티아의 침입이 늘어나는 시기였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일부 이민족이 로마 영내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고 로마군대에 입대하는 것도 허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으로 로마는 사회체제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강력한 로마인의 군대는 이 시대를 기점으로 사라져가고, 로마 변경을 수비하기 위해 <야만인>이라 불리는 게르만과 이민족이 로마를 지키기 시작했으니까요.  


Posted by WN1
,


세일럼(Salem)의 마녀사냥

 

* 원래 히브리어로 평화(shalom)를 의미하는 세일럼(salem)은 그 명칭과는 달리 수십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악명 높은 마녀재판이 벌어졌던 곳. 게다가 이 오욕의 역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령처럼 출몰해 미국사회를 뒤흔들었으니, 1950년대의 매카시즘 선풍은 그중 가장 두드러진 사례. 세일럼은 또한 미국문학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가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의 고향이기도 함. 마녀사냥의 가해자 편에 선 재판관을 조상으로 둔 호손은 이 역사의 굴곡을 자신의 문학세계로 삼아 조상이 지은 죄업을 속죄라도 하듯이 박해받아온 약자의 삶을 조명하는 소설을 씀으로써 미국문학의 새 지평을 엶. 『주홍글자』(1850)를 쓴 곳도 바로 이곳 세일럼이었음.

 

* 세일럼의 종교적 갈등

▶ 세일럼 타운의 성쇠 : 보스턴 인근 북쪽 해안가는 일찍부터 어자원(魚資源)이 풍부한 것으로 영국에 알려졌고, 그 결과 1623년에 일단의 영국인들이 어업 목적으로 케이프 앤에 이주해와 작은 정착촌을 이루고 살았음 -> 이후 세일럼은 어업과 무역에서 보스턴과 경쟁을 벌이며 항구도시로 발전, 18세기 말까지 세일럼은 뉴잉글랜드의 제일가는 무역항이 됨. 일찍부터 척박한 내륙보다 바다로 눈을 돌린 이곳 상인들은 멀리 아시아·인도까지 배를 보내 무역활동 전개. 해외무역으로 막대한 돈을 번 무역상들은 세일럼에 대저택을 짓는 건축 붐을 일으켜 이들의 집이 들어선 체스넛 가는 한때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택가로 유명했음. 특히 이곳 거리와 부두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엘리아스 더비(Elias Hasket Derby)는 미국 최초의 백만장자 소리를 들을 만큼 막대한 부를 거머쥠 -> but 1812년 미·영 전쟁을 고비로 상권을 보스턴과 뉴욕에 뺏기면서 세일럼은 사양길로 접어듦

▶ 로저 윌리엄스와 로드아일랜드 :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재사(才士)로 신앙적 열정을 겸비한 젊은 성직자 윌리엄스는 1631년 보스턴 교회의 담임 목사로 초빙됨. but 윌리엄스는 보스턴 교회가 타락한 영국 국교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못했다는 이유로 목사직 취임을 거부하고 대신 분리주의자들(Separatists)이 세운 플리머스 식민지 교회의 시무를 택함.

-> 2년 뒤인 1633년 세일럼 교회의 초빙을 받아들여 세일럼 교회 목사가 된 윌리엄스는 <영국 국교회와 완전히 절연할 것 & 국가와 교회의 엄격한 분리> 등을 요구하면서 매사추세츠 식민지 지도층을 비판. 또한 "영국 왕이 인디언의 땅을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공여할 권리가 없으며, 땅이 필요하면 인디언으로부터 직접 사야 한다"고 주장.

-> 1635년 보스턴의 청교도 지도자들은 윌리엄스의 이런 과격한 주장을 문제 삼아 세일럼 교회에 그의 추방을 요구. 때마침 보스턴 식민지와 인근 마블헤드 지역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있던 세일럼 주민들은 분쟁 수습을 조건으로 윌리엄스에 대한 추방 요구를 수용 -> 보스턴 지도층이 그를 체포해 런던으로 압송할 작정임을 알게 된 윌리엄스는 세일럼에서 도망쳐 인근 인디언 부족에게 잠시 의탁해 지내다가 남쪽으로 더 내려가 프로비던스 식민지를 건설 -> 오늘날 영국인들의 로드아일랜드 역사가 시작됨.

▶ 퀘이커교도의 이주와 박해 : 1658년 영국에서 일단의 퀘이커교도들이 이주해오면서 세일럼은 다시 한 번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의 주목을 받음. 조지 폭스(George Fox 1624 91)가 창설한 퀘이커교는 형식화한 종교의식의 폐지 요구, 율법보다는 '내면의 빛'으로 임재하는 성령 체험을 강조. 종교적 태도의 유사성에도 불구,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는 퀘이커교를 이단이라며 탄압, 무엇보다도 위계적인 교회 조직을 부정하는 그들의 과격한 평등주의가 청교도 공동체의 질서와 안녕을 심각하게 위협한다는 판단에서였음.

-> 청교도 지도층은 이들을 식민지 밖으로 추방함으로써 침투를 막고자 애씀. but 내부에서 동참하는 신도가 늘어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보스턴 지도층은 추방된 퀘이커교도가 다시 식민지로 돌아오면 사형에 처한다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함 -> 이런 박해에도 세일럼의 퀘이커 교도들은 굳건한 신앙으로 뉴햄프셔와 메인 주(州)까지 교세를 확장, 뉴잉글랜드 퀘이커교 운동의 중심이 됨.

 

* 세일럼 마녀사냥의 전개

▶ 세일럼 마을이 뉴잉글랜드 지방의 모든 수출입의 통로가 되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면서,  1661-1681년까지 가장 부유한 10%가 마을 재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됨. 정치 참여자들도 옛날 농부가 아니라 갈수록 부를 축적해 가는 상공인들이 됨. 인구분포도 상인:농부 = 6:1 정도

-> 청교도 이상주의를 품고 있던 원래 주민들이 갈수록 가난한 농부로 전락하여 교회에서도 정치에서도 부상하는 상인들에게 밀리게 됨. 사회분위기도 세속화, 물질주의적 추세가 확산되어 이들은 위협과 심리적 갈등을 겪음.

-> 이러한 때에 1688년 세일럼 타운에 새로 부임한 젊은 청교도 목사 새뮤얼 패리스(Samuel Parris)의 고압적인 태도와 그의 처우 문제로 주민들의 의견이 갈리면서 세일럼은 또다시 내분에 휩싸이게 됨.

-> 마을 교회는 2개 분파로 갈라짐 : 마을 동쪽에 거주하는 상업 주도형 세력(존 포터가 이끄는 가족을 중심으로 마을 항구를 통해 사업하는 쪽) vs 항구 반대편인 서쪽에 거주하는 토지에 의존하며 농업에 종사하는 세력(존 푸트남 가문 중심). 푸트남파는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의 책임을 동부인들에게 물어 이들을 교회에서 힘쓰지 못하게 하려고 강력하게 단합함.

-> 패리스 부임 이전에도 여러 명의 목사가 분파 싸움을 이기지 못하고 쫓겨남. 오래전 푸트남 가족의 미움을 사서 쫓겨났던 목사도 마녀 선풍에 휩쓸려 사망함 -> 패리스는 푸트남 가족파와 연합,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로 교회를 더럽히고 있는 악마의 세력들과 싸워 이겨야 함을 거듭 강조함.

▶ 마녀사냥은 의미심장하게도 이런 갈등과 분쟁의 중심에 있던 패리스 목사의 집에서 시작됨. 1692년 2월 어느 날, 패리스의 딸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헛소리를 지름. 며칠 뒤 엘리자베스의 사촌인 애비게일 또한 비슷한 발작을 일으킴. 이에 그치지 않고 마을의 다른 소녀 두서넛도 유사한 증세로 고통을 호소 -> 놀란 패리스 목사와 부모들은 특별히 다른 교구의 목사를 초빙해 이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으나 증세가 멈추지 않음. 결국 의사를 초빙해 소녀들을 진단. 의사는 원인을 찾지 못하자 사탄의 짓이라고 결론내림 -> 이로 인해 사태는 급전. 사탄이 마녀를 내세워 이런 해코지를 한다는 통념에 따라 마을사람들은 소녀들을 심문. 소녀들은 패리스 목사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던 서인도 제도 출신의 티투바, 마을의 거렁뱅이로 입이 험한 새라 굿, 그리고 과거에 행실이 불량해 마을 사람들의 구설에 자주 올랐던 새라 오스본 노파를 그들을 괴롭히는 마녀로 지목.

-> 곧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호손의 선조인 존 호손과 조나단 코윈이 심문관으로 파견됨. 세 소녀는 이들과 대질심문이 시작되자 소리를 지르고 몸을 비틀면서 혼절. 패리스 목사에게 닦달당한 티투바가 악마와 소통한 적이 있다고 자백하자, 세 여자는 마녀로 단정되어 투옥됨.

-> 마녀가 색출된 뒤에도 소녀들의 증세는 가라앉지 않고,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오히려 늘어감. 세일럼 행정관들이 이들을 심문하자 또 다른 마녀가 지목됐는데, 놀랍게도 독실한 신앙생활로 마을 사람들한테 존경을 받아온 마사 코리와 연로한 레베카 너스였음. 심문관이 악령에 시달려왔다는 소녀들과 이들을 대질시키자 소녀들은 다시금 발작 증세를 보임. 두 사람은 꼼짝없이 마녀로 체포돼 투옥됨.

-> 뒤이어 언니를 변호한 레베카 너스의 두 자매도, 마사 코리의 남편 자일즈 코리도 사탄의 사주를 받은 마녀로 체포, 심지어 네 살밖에 안 된 새라 굿의 딸 도카스도 감옥으로 끌려감. 강직한 성품으로 마을의 분쟁에서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았던 존 포터의 부인 엘리자베스가 마녀로 지목됐고, 남편 존 포터가 그녀를 변호하자, 그 역시 악마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체포됨 -> 이런 식의 연쇄 지목으로 5월 말까지 무려 100여 명이 투옥됐고, 그 범위도 세일럼을 넘어 동부 매사추세츠 주 전역으로 확대됨.

▶ 1692년 5월 중순, 영국 왕으로부터 총독으로 임명된 윌리엄 핍스가 새로운 특허장을 쥐고 뉴잉글랜드에 도착. 사태를 보고받은 핍스는 부지사 윌리엄 스타우턴을 재판장으로 한 7인 특별재판부를 즉각 구성, 심리에 착수하도록 하여 본격적인 재판을 전개함. 재판에 맨 먼저 회부된 사람은 1680년에 이미 마녀 혐의로 체포된 바 있는 브리짓 비숍으로, 그녀는 심리 끝에 유죄가 인정되어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이틀 뒤에 갤로우스 힐에서 교수형을 당함.

-> 6월30일, 다시 5명이 사형선고 받아 처형, 이어 8월에 6명, 9월에 8명이 처형됨. 9월에 처형된 마사 코리의 남편 자일즈 코리의 경우는 더욱 처참. 이때 나이가 80세이던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해 심문에 일절 응하지 않고 침묵을 지킴. 재판부는 그의 몸에 널빤지를 놓고 그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는 고문으로 그의 입을 열려고 했으나 그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돌에 짓눌려 사망.

-> 9월에 들어서면서 마녀재판에 반대하는 여론 비등. 재판관 중 한 사람은 부지사 스타우턴이 주도하는 경직된 재판 과정을 비판하며 재판관직 사임. 마녀임을 자인한 사람들은 오히려 심리가 유예되고, 무죄를 주장하는 강직한 사람들은 심리가 신속하게 진행되어 유죄 판결을 받는 재판의 문제점도 지적됨. 더욱이 악령에 시달렸다고 하는 소녀들의 증언, 악마와 소통할 경우 몸에 그 흔적이 남는다는 악마의 징표 유무, 주기도문을 제대로 외우는지 등 '유령의 증거'를 근거로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에 재판의 공정성이 문제시됨.

-> 하버드 대학 총장이자 명망 있는 목사였던 인크리스 매더 또한 『양심의 사례들』이란 팸플릿을 써서 박약한 증거를 근거로 무고한 신자를 마녀로 모는 것은 잘못이라고 경고. 많은 사람이 마녀로 체포됐는데도 소녀들의 증세가 호전되지 않고, 청교도 지도층의 부인들까지 마녀로 지목되는 사태에 이르자 핍스 총독은 재판의 중지를 명함 -> 이듬해 1월 새로운 재판부가 구성되어 재판을 속개, 대부분이 무혐의로 풀려남 -> 5월, 핍스 총독은 이미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을 포함,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모두 방면하고 사건 종결함.

-> 1년 남짓 계속된 마녀사냥 기간에 모두 185명이 체포, 그중 59명이 재판에 회부돼 31명이 유죄 판결 받음. 그중 19명은 처형되고, 1명은 고문으로 압살당하고, 3명은 재판을 기다리다 감옥에서 사망. 마녀사냥의 망령이 걷히고 평상심을 되찾자 곧 자성과 참회가 이어짐.

 

* 치욕의 역사에 대한 반성

-> 1696년 재판관의 한 사람인 새뮤얼 시월은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 참회. 재판에 동참했던 배심원들도 그의 뒤를 따라 과오를 뉘우치며 사과. 1711년 식민지 정부는 아직 생존해 있는 마녀재판의 희생자들에게 소정의 배상금을 지급 & 이들의 유죄 기록을 공식적으로 말소 -> 1992년 세일럼 마녀사냥 300주년을 맞아 세일럼 시민은 이 오욕의 역사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움. 세일럼 제1교회도 1992년 9월 20일자로 자일즈 코리와 레베카 너스를 정식 교인으로 복권.

-> 호손은 『앨리스 도운의 청원』이라는 단편에서 세일럼의 마녀사냥을 "우리 역사에 기록하기 가장 부끄러운 치욕적인 사건"이라고 씀. 이는 상투적 수사만은 아님. 그의 선조가 깊숙이 관여했기에 마녀사냥에 대한 그의 죄의식은 남달랐기 때문.

 

* 집단광기의 근원 

이 어두운 역사에 대한 반성과 회오와 보상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도대체 왜 이런 집단적 광기(狂氣)가 일어났는가. 언덕 위에 멋진 신앙 공동체를 세워 만천하에 신의 소명을 과시하고자 한 청교도 사회의 심장부에, 민주주의 정신의 원천으로 상찬되어온 '뉴잉글랜드 정신'의 요람지에, 어떻게 이런 미혹이 스며들 수 있었던가. 여러 가지 해명이 나옴.

①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그것을 청교도 신앙 자체에 내포된 문제의 표출로 보는 관점 :  청교도들은 세상을 신과 사탄의 싸움터로 봄. 이 싸움의 일환으로 사탄은 선량한 사람의 탈을 쓰고 나타나 사람들을 미망에 빠뜨리는 책동을 부림. 이런 생각은 당시 출중한 청교도 목사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카튼 매더가 마녀재판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쓴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경이』에서도 확인됨. 독실한 신앙인을 마녀로 내몰 수 있었던 것은 청교도의 이러한 마니교적 선악관의 발로라는 것.

  한편, 청교주의 연구가 페리 밀러(Perry Miller)는 문제의 근원이 청교주의의 내부에 있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이와 다른 진단을 내림. 즉 1648년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 혁명의 성공으로 신대륙 신앙공동체 건설의 의의가 퇴색하면서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는데, 이 위기감이 그들로 하여금 신앙의 순수성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었고, 이 비타협적 태도가 결국 마녀사냥이라는 외길을 선택하게 했다는 것. 밀러는 이런 시각에서 마녀사냥을 뉴잉글랜드 청교주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역사적 분수령으로 평가함.

② 근래에는 사태의 근원을 청교도의 내면세계보다는 그들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변화에서 찾으려는 시각이 우세 : 1684년 본국 정부가 신대륙의 여러 식민지를 통합해 직할 식민지로 개편하고, 국왕이 총독을 파견·직접 통치하면서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는 자치권을 상실 -> 이에 불만을 품은 청교도들은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자 국왕이 임명한 총독을 몰아내고 일시 자치를 누렸으나, 본국의 정국이 안정되면서 1692년에 새 총독이 파견됨. 이런 일련의 정치적 혼란과 1675년 필립 왕 전쟁의 패배로 주춤했던 인디언이 세력을 재집결해 대규모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때마침 겹치면서 청교도 사회는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마녀소동이 터지자 이내 집단적 히스테리로 발전했다는 것.

③ 또한 역사가들은 상공업 중심의 세일럼과 농업 중심의 낙후된 세일럼 빌리지의 경제적 갈등에도 주목함. 특히 토지를 둘러싼 잦은 분쟁으로 야기된 반목과 불화가 마녀사냥을 기해 터져 나왔다고 주장. 실제로 마녀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한 소녀 중의 하나인 앤 퍼트남의 집안은 토지 분쟁으로 원한 관계에 있던 포터가(家)의 인척을 46명이나 마녀로 엮어 넣었음.

④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마녀사냥을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빚어낸 참상으로 규정 : 희생자 대다수가 여성인 점을 주목한 칼슨(Carol F. Karlsen)은 『여성의 형상을 한 악마』라는 책에서 세일럼뿐 아니라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일어난 마녀재판 희생자들의 성별·신분별·직업별 분포를 상세히 분석·제시, 청교도 가부장제 사회의 규범적 여성상으로부터 벗어난 가난·독신·행실 불량·자식 없는 여성들이 결국 마녀사냥의 표적이었음을 밝힘.

⑤ 어떤 심리학자는 발작을 일으킨 소녀들의 증상에 주목, 이들이 세일럼 인근에서 많이 재배하는 밀이나 귀리에 기생하는 곰팡이균에 집단으로 감염됐다는 주장을 펴기도 함.

 

=> 이러한 진단과 해석들은 저마다 일정한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임. 요컨대 17세기 말 세일럼의 마녀사냥은 후대인들이 당시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의 사회적, 심리적 측면을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이 되고 있음. 또한 세일럼의 사건을 일으킨 여러 요인들은 이후 미국의 역사 속에서 종종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미국의 정체성과 특성을 드러내고 있음. 



--------


마녀사냥의 진원지 매사추세츠 세일럼

 

종교적 결벽, 정치적 갈등이 빚은 역사의 오욕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고기잡는 곳’이라 불리던 작은 항구도시 세일럼. 바다와 햇살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풍경이지만, 마녀사냥이라는 아픈 역사를 안고 있다. 세일럼이 낳은 대 문호 호손은 선조의 만행에 대한 원죄의식을 ‘일곱 박공의 집’ ‘주홍글자’ 등의 작품을 통해 고스란히 쏟아냈다. 세일럼 기행은 집단 히스테리에 희생된 원혼의 흔적을 찾는 길이기도 하다.

세일럼 마녀박물관.

뉴잉글랜드의 7월 햇살은 화사하기만 했다. 그러나 세일럼(Salem)을 찾아 나선 나에게 성하의 짙푸른 노변 정경은 어쩐지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옛 로마인들은 어느 장소든 그곳을 지켜주는 ‘장소의 정령(Genius loci)’이 있다고 믿었다. 근본적으로 직선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땅에서 이 장소의 정령이 나그네에게 말을 걸어옴직한 만곡부가 있다면 세일럼이 바로 그런 곳이리라.

세일럼은 원래 히브리어로 평화(shalom)를 의미한다. 그러나 세일럼은 명칭과는 달리 수십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악명 높은 마녀재판, 그 어두운 역사의 상흔이 밴 곳이다. 게다가 이 오욕의 역사는 기억의 저편에서 잠들기를 거부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령처럼 출몰해 미국사회를 뒤흔들었으니, 1950년대의 매카시즘 선풍은 그중 가장 두드러진 사례다. 억울하게 죽은 세일럼의 희생자들은 반복되는 이 집단적 히스테리에 필시 편히 잠들 수 없을 것이다. 그로부터 3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떠도는 원혼이 있다면 나 같은 이방의 길손에게라도 어찌 하소연하고 싶지 않겠는가.

세일럼은 또한 미국문학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가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고향이기도 하다. 마녀사냥의 가해자 편에 선 재판관을 조상으로 둔 호손은 이 역사의 굴곡을 자신의 문학세계로 삼아 조상이 지은 죄업을 속죄라도 하듯이 박해받아온 약자의 삶을 조명하는 소설을 씀으로써 미국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가 ‘옛이야기’를 비롯한 초기의 단편들과 ‘주홍글자’를 쓴 곳이 이곳 세일럼이요, 유명한 ‘일곱 박공의 집’의 무대 또한 세일럼이다.

세일럼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인 구당 유길준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1883년 민영익을 단장으로 한 친선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한 유길준은 귀국을 미루고 혼자 남아 세일럼 인근에 있는 바이필드의 덤머 아카데미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이런 연유로 그가 남긴 편지를 비롯한 유품들이 이곳 세일럼의 피바디 엑세스 박물관에 수장돼 있다.

세일럼, 보스턴, 로드아일랜드

보스턴 교외를 벗어나 지방도로 107번을 타고 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차창을 스치는 바람이 거세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닷바람이다. 해안이 가까워지면서 노변의 나무들도 키 작은 관목으로 바뀐다. 이곳 해안가는 일찍부터 어자원(魚資源)이 풍부한 것으로 영국에 알려졌고, 그 결과 1623년에 일단의 영국인들이 어업 목적으로 캐이프앤에 이주해와 작은 정착촌을 이루고 살았다. 이들 중 한 사람인 로저 코낸트(Roger Conant)가 1626년 약 50명의 식민자를 거느리고 이곳 아늑한 항만에 이주하면서 세일럼의 역사는 시작된다.

세일럼의 원래 명칭은 ‘나움케악(Naumkeag)’. 원주민 인디언 말로 ‘고기 잡는 곳(fishing place)’이라는 뜻이다. 이어 1628년 존 엔디콧(John Endecott)이 이끄는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선발대가 도착했다. 엔디콧은 식민지 본진이 정착할 터를 닦으면서 이곳이 평화의 땅이 되길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명을 세일럼으로 바꿨다.

1630년 6월12일, 존 윈스롭이 주축이 된 식민지 본진이 당도했으나 인근을 둘러본 윈스롭은 땅이 척박하고 식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세일럼에 정착하길 포기했다. 남쪽 해안을 계속 답사해 내려간 윈스롭 일행은 찰스 강어귀를 주목하다가 그곳 또한 식수가 충분치 못함을 알고서 최종적으로 강 건너 반도 쪽을 정주지로 정하고, 링컨셔에 있는 그들의 고향 도시 이름을 따서 보스턴이라 명명했다. 이후 세일럼은 어업과 무역에서 보스턴과 경쟁을 벌이면서 항구도시로 발전해 나갔다.

세일럼이 뉴잉글랜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635년 세일럼 교회의 목사 로저 윌리엄스에 의해서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재사(才士)로 신앙적 열정을 겸비한 젊은 성직자 윌리엄스는 1631년 보스턴 교회의 담임 목사로 초빙됐다. 그러나 윌리엄스는 보스턴 교회가 타락한 영국 국교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못했다는 이유로 목사직 취임을 거부하고 대신 분리주의자들이 세운 플리머스 식민지 교회의 시무를 택했다.

   

세일럼의 첫 이주자 로저 코낸트의 동상.

2년 뒤인 1633년 세일럼 교회의 초빙을 받아들여 세일럼 교회 목사가 된 윌리엄스는 영국 국교회와 완전한 절연할 것과 국가와 교회의 엄격한 분리를 요구하면서 매사추세츠 식민지 지도층을 비판했다. 윌리엄스는 또한 영국 왕이 인디언의 땅을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공여할 권리가 없음을 지적하고, 땅이 필요하면 인디언으로부터 직접 사야 한다고 주장했다.

1635년 보스턴의 청교도 지도자들은 윌리엄스의 이런 과격한 주장을 문제 삼아 세일럼 교회에 그의 추방을 요구했다. 때마침 보스턴 식민지와 인근의 마블헤드 지역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있던 세일럼 주민들은 분쟁 수습을 조건으로 윌리엄스의 추방 요구를 수용했다. 보스턴 지도층이 그를 체포해 런던으로 압송할 작정임을 알게 된 윌리엄스는 세일럼에서 도망쳐 인근의 인디언 부족에게 잠시 의탁해 지내다가 남쪽으로 더 내려가 프로비던스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것이 오늘날 로드아일랜드의 시작이다.

댄버스의 광풍(狂風)

1658년 영국에서 일단의 퀘이커교도들이 이주해오면서 세일럼은 다시 한 번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의 주목을 받는다. 조지 폭스(George Fox·1624∼91)가 창설한 퀘이커교는 형식화한 종교의식의 폐지를 요구하고, 율법보다는 ‘내면의 빛’으로 임재하는 성령 체험을 강조했다. 종교적 태도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는 퀘이커교를 이단이라며 탄압했는데, 무엇보다도 위계적인 교회 조직을 부정하는 그들의 과격한 평등주의가 청교도 공동체의 질서와 안녕을 심각하게 위협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청교도 지도층은 이들을 식민지 밖으로 추방함으로써 침투를 막고자 애썼다. 그러나 내부에서 동참하는 신도가 늘어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보스턴 지도층은 추방된 퀘이커교도가 다시 식민지로 돌아오면 사형에 처한다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런 박해에도 세일럼의 퀘이커 교도들은 굳건한 신앙으로 뉴햄프셔와 메인 주(州)까지 교세를 확장해 뉴잉글랜드 퀘이커교 운동의 중심이 됐다. 이런 반역의 역사적 체험이 철없는 몇몇 소녀의 일탈적 행동을 마녀사냥이라는 집단적 히스테리로 비화시킨 원인이 됐는지도 모른다.

필자가 첫 목적지로 삼은 세일럼의 마녀박물관은 세일럼 콤몬의 맞은편, 호손의 이름을 딴 호손 가로의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 박물관 앞에 얼굴이 길쭉한 형상의 고색창연한 청동상이 눈길을 끈다. 마녀사냥에 연루된 인물일 것이라는 짐작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뜻밖에 세일럼의 창설자 로저 코낸트의 동상이다. 1913년에 그를 기리는 협회가 헨리 킷선 (Henry A. Kitson)에게 제작을 의뢰해 봉헌한 것이다. 마녀사냥의 진앙지라는 세일럼에 대한 고정관념이 조각가 킷선의 상상력에 영향을 미친 것일까. 아무튼 코낸트의 동상은 세일럼의 마녀소동이 미국인의 문화적 기억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새삼 확인시켜 준다.

표를 산 후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곧장 기념품 가게다. 가게는 온갖 종류의 마녀 형상과 마술 도구로 가득 차 있다. 그 치욕의 역사가 이제 세일럼의 가장 큰 관광자원으로 탈바꿈해 돈주머니 노릇을 하고 있었다. 돈벌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활용하는 탐욕스러운 자본의 논리가 역사의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가게를 지나 전시실로 들어서니 마녀와 마녀사냥의 역사적 변천사가 벽면을 채웠다. 이어지는 중앙의 큰 홀에서는 마녀사냥의 촉발에서 재판에 이른 과정을 입체화해 설명해주는 프로그램이 상설 운영되고 있었다.

세일럼 마녀사냥의 발원지는 엄밀히 말해 현재의 세일럼이 아니고 서쪽으로 5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댄버스다. 1692년에 댄버스는 ‘세일럼 빌리지’라고 불렸는데, 1637년경에 세일럼 사람들이 더 넓은 땅을 찾아 이주해 세운 곳이다.

도시 주변에 새로이 형성된 정착지는 자치권을 얻어 독자적인 체제로 발전해가는 것이 당시의 통례였다. 하지만 세일럼은 오랫동안 세일럼 빌리지에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무역으로 번성하던 세일럼과 농업을 주로 하는 세일럼 빌리지 사이에서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1689년 세일럼 빌리지의 요청이 마침내 받아들여져, 숙원이던 독자적 교회를 세우고 교구 목사를 새로 초빙할 수 있게 되면서 갈등이 완화되는 듯했으나, 초빙돼온 담임목사 새뮤얼 패리스(Samuel Parris)의 고압적인 태도와 그의 처우 문제로 의견이 갈리면서 세일럼 빌리지는 다시 내분에 휩싸였다.

   

사탄 사주 받은 마녀를 찾아라!

작품 ‘마녀 심문’ (T.H. Matteson, 1853;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

마녀사냥은 의미심장하게도 이런 갈등과 분쟁의 중심에 있던 세일럼 빌리지의 담임목사 패리스의 집에서 시작됐다. 1692년 2월 어느 날, 패리스의 딸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헛소리를 질렀다. 며칠 뒤 엘리자베스의 사촌인 애비게일 또한 비슷한 발작을 일으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마을의 다른 소녀 두서넛도 유사한 증세로 고통을 호소했다. 놀란 패리스 목사와 부모들은 특별히 다른 교구의 목사를 초빙해 이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으나 증세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의사를 초빙해 소녀들을 진단하게 했다.

의사는 원인을 찾지 못하자 사탄의 짓이라고 결론내렸다. 이로 인해 사태는 급전한다. 사탄이 마녀를 내세워 이런 해코지를 한다는 통념에 따라 마을사람들은 소녀들을 심문했다. 소녀들은 패리스 목사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던 바베이도스 출신의 티투바, 마을의 거렁뱅이로 입이 험한 새라 굿, 그리고 과거에 행실이 불량해 마을 사람들의 구설에 자주 올랐던 새라 오스본 노파를 그들을 괴롭히는 마녀로 지목했다.

곧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세일럼으로부터 호손의 선조인 존 호손과 조나단 코윈이 심문관으로 파견됐다. 세 소녀는 이들과 대질심문이 시작되자 소리를 지르고 몸을 비틀면서 혼절했다. 패리스 목사에게 닦달당한 티투바가 악마와 소통한 적이 있다고 자백하자, 세 여자는 마녀로 단정되어 투옥됐다.

마녀가 색출된 뒤에도 소녀들의 증세는 가라앉지 않고,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오히려 늘어갔다. 세일럼 행정관들이 이들을 심문하자 또 다른 마녀가 지목됐는데, 놀랍게도 독실한 신앙생활로 마을 사람들한테 존경을 받아온 마사 코리와 연로한 레베카 너스였다. 심문관이 악령에 시달려왔다는 소녀들과 이들을 대질시키자 소녀들은 다시금 발작 증세를 보였다. 두 사람은 꼼짝없이 마녀로 체포돼 투옥됐다.

뒤이어 언니를 변호한 레베카 너스의 두 자매도, 마사 코리의 남편 자일즈 코리도 사탄의 사주를 받은 마녀로 체포됐고, 심지어 네 살밖에 안 된 새라 굿의 딸 도카스도 감옥으로 끌려갔다. 강직한 성품으로 마을의 분쟁에서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았던 존 프록터의 부인 엘리자베스가 마녀로 지목됐고, 남편 존 프록터가 그녀를 변호하자, 그 역시 악마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체포됐다. 이런 식의 연쇄 지목으로 5월 말까지 무려 100여 명이 투옥됐고, 그 범위도 세일럼 빌리지를 넘어 동부 매사추세츠 주 전역으로 확대됐다.

세일럼의 마녀소동이 뉴잉글랜드 사회에서 처음 일어난 일은 아니다. 매사추세츠 주지사 윈스롭의 일기에 따르면 이미 1647년에 마녀재판이 열린 적이 있고, 그 이듬해에는 마가렛 존즈라는 여자가 마녀로 처형됐다. 1662년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에서 집단적인 마녀소동이 일어나 13명이 체포됐고, 재판에 회부된 5명 중 4명이 혐의가 인정돼 처형됐다. 한 통계에 따르면 1647년에서 1663년까지 뉴잉글랜드에서 모두 79명이 마녀 혐의로 체포됐고, 재판에 회부된 33명 중 15명이 처형됐다. 17세기 뉴잉글랜드 식민지에서 마녀재판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시선을 영국 쪽으로 돌리면 희생자는 더욱 엄청나다. 청교도 혁명 전야인 1645년에서 1647년 사이의 찰스 2세 치하에서 수백명이 마녀라는 죄목으로 처형됐다. 주지하듯 마녀재판은 종교개혁으로 야기된 종파적 갈등에서 반대파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돼왔다. 종교개혁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1500년부터 종교적 관용이 정착되기 시작한 1660년까지 유럽에서 대략 5만~8만명이 마녀재판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어닥친 피바람

세일럼의 마녀재판이 시작된 것은 6월 초순이다. 당시 뉴잉글랜드에는 총독의 부재 탓에 합법적으로 재판부를 구성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집행부가 없었다. 뉴잉글랜드 지도층은 1688년 명예혁명과 더불어 제임스 2세가 임명한 에드먼드 앤드로스 총독을 몰아낸 후 일종의 공안위원회를 구성해 식민지 행정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본국의 정권이 안정된 1692년 5월 중순, 윌리엄과 메리 왕으로부터 총독으로 임명된 윌리엄 핍스가 새로운 특허장을 쥐고 뉴잉글랜드에 도착했다. 사태를 보고받은 핍스는 부지사 윌리엄 스타우턴을 재판장으로 한 7인 특별재판부를 즉각 구성하고 심리에 착수하도록 했다. 재판에 맨 먼저 회부된 사람은 1680년에 이미 마녀 혐의로 체포된 바 있는 브리짓 비숍이었다. 심리 끝에 유죄가 인정되어 결국 사형이 선고됐고, 이틀 뒤인 6월10일 갤로우스 힐에서 교수형이 집행됐다.

6월30일, 다시 5명이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됐고, 이어 8월에 6명, 9월에 8명이 처형됐다. 9월에 처형된 마사 코리의 남편 자일즈 코리의 경우는 더욱 처참했다. 이때 나이가 80세이던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해 심문에 일절 응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재판부는 그의 몸에 널빤지를 놓고 그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는 고문으로 그의 입을 열려고 했으나 그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돌에 짓눌려 사망하고 말았다.

   

마녀사냥 300주년을 기념해 댄버스에 세운 희생자 추모비(1992).

9월에 들어서면서 마녀재판에 반대하는 여론이 비등했다. 재판관 중의 한 사람은 부지사 스타우턴이 주도하는 경직된 재판 과정을 비판하면서 재판관직을 사임했다. 마녀임을 자인한 사람들은 오히려 심리가 유예되고, 무죄를 주장하는 강직한 사람들의 경우는 심리가 신속하게 진행되어 유죄 판결을 받는 재판의 문제점도 지적됐다.

더욱이 악령에 시달렸다고 하는 소녀들의 증언, 악마와 소통할 경우 몸에 그 흔적이 남는다는 악마의 징표 유무, 주기도문을 제대로 외우는지 등 ‘유령의 증거’를 근거로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에 재판의 공정성이 문제시됐다.

하버드 대학의 총장이자 명망 있는 목사였던 인크리스 매더 또한 ‘양심의 사례들’이란 팸플릿을 써서 박약한 증거를 근거로 무고한 신자를 마녀로 모는 것은 잘못이라고 경고했다. 많은 사람이 마녀로 체포됐는데도 소녀들의 증세가 호전되지 않고, 청교도 지도층의 부인들까지 마녀로 지목되는 사태에 이르자 핍스 총독은 재판의 중지를 명했다. 이듬해 1월 새로운 재판부가 구성돼 재판이 속개됐으나 대부분이 무혐의로 풀려났다. 5월에 이르러 핍스 총독은 이미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을 포함해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모두 방면하고 사건을 종결했다.

1년 남짓 계속된 마녀사냥 기간에 모두 185명이 체포되고, 그중 59명이 재판에 회부돼 31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 가운데 19명은 처형되고, 1명은 고문으로 압살당하고, 3명은 재판을 기다리다 감옥에서 사망했다. 마녀사냥의 망령이 걷히고 평상심을 되찾자 곧 자성과 참회가 이어졌다.

1696년 재판관의 한 사람인 새뮤얼 시월은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참회했다. 재판에 동참했던 배심원들도 그의 뒤를 따라 과오를 뉘우치며 사과했다. 1711년 식민지 정부는 아직 생존해 있는 마녀재판의 희생자들에게 소정의 배상금을 지급하고 이들의 유죄 기록을 공식적으로 말소했다. 1992년 세일럼 마녀사냥 300주년을 맞아 세일럼과 댄버스 시민은 이 오욕의 역사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웠다. 세일럼 제1교회 또한 1992년 9월20일자로 자일즈 코리와 레베카 너스를 정식 교인으로 복권시켰다.

집단광기의 근원

이 어두운 역사에 대한 반성과 회오와 보상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도대체 왜 이런 집단적 광기(狂氣)가 일어났는가. 언덕 위에 멋진 신앙 공동체를 세워 만천하에 신의 소명을 과시하고자 한 청교도 사회의 심장부에, 민주주의 정신의 원천으로 상찬되어온 ‘뉴잉글랜드 정신’의 요람지에, 어떻게 이런 미혹이 스며들 수 있었던가. 이에 대해 여러 가지 해명이 나왔다.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그것을 청교도 신앙 자체에 내포된 문제의 표출로 보는 관점이다. 청교도들은 세상을 신과 사탄의 싸움터로 보았다. 이 싸움의 일환으로 사탄은 선량한 사람의 탈을 쓰고 나타나 사람들을 미망에 빠뜨리는 책동을 부린다. 이런 생각은 당시 출중한 청교도 목사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카튼 매더가 마녀재판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쓴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경이’에서도 확인된다. 독실한 신앙인을 마녀로 내몰 수 있었던 것은 청교도의 이러한 마니교적 선악관의 발로라는 것이다.

문제의 근원이 청교주의의 내부에 있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청교주의 연구가 페리 밀러는 이와 다른 진단을 한다. 1648년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 혁명의 성공으로 신대륙 신앙공동체 건설의 의의가 퇴색하면서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는데, 이 위기감이 그들로 하여금 신앙의 순수성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었고, 이 비타협적 태도가 결국 마녀사냥이라는 외길을 선택하게 했다는 것. 밀러는 이런 시각에서 마녀사냥을 뉴잉글랜드 청교주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역사적 분수령으로 평가한다.

근래에는 사태의 근원을 청교도의 내면세계보다는 그들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변화에서 찾으려는 시각이 우세하다. 1684년 본국 정부가 신대륙의 여러 식민지를 통합해 직할 식민지로 개편하고 국왕이 총독을 파견해 직접 통치하면서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는 자치권을 상실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청교도들은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자 국왕이 임명한 총독을 몰아내고 일시 자치를 누렸으나 본국의 정국이 안정되면서 1692년에 새 총독이 파견됐다. 이런 일련의 정치적 혼란과 1675년 필립 왕 전쟁의 패배로 주춤했던 인디언이 세력을 재집결해 대규모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때마침 겹치면서 청교도 사회는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마녀소동이 터지자 이내 집단적 히스테리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상공업 중심의 세일럼과 농업 중심의 낙후된 세일럼 빌리지의 경제적 갈등에 주목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특히 토지를 둘러싼 잦은 분쟁으로 야기된 반목과 불화가 마녀사냥을 기해 터져 나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마녀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한 소녀 중의 하나인 앤 퍼트남의 집안은 토지 분쟁으로 원한 관계에 있던 포터가(家)의 인척을 46명이나 마녀로 엮어 넣었다. 그러기에 아서 밀러는 이를 소재로 한 연극 ‘시련’에서 존 프록터로 하여금 “복수가 곧 법이 되었다”고 부르짖게 했다.

   

치욕의 역사에 대한 반성

호손 문학의 산실인 세일럼에 있는 너새니얼 호손 동상과 호손이 3년간 징세관으로 근무했던 세일럼의 세관.

한편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마녀사냥을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빚어낸 참상으로 규정한다. 희생자의 대다수가 여성인 점을 주목한 칼슨(Carol F. Karlsen)은 ‘여성의 형상을 한 악마’라는 책에서 세일럼뿐 아니라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일어난 마녀재판 희생자들의 성별, 신분별, 직업별 분포를 상세히 분석·제시하면서 청교도 가부장제 사회의 규범적 여성상으로부터 벗어난 가난하고 독신이고 행실이 불량하고 자식이 없는 여성들이 결국 마녀사냥의 표적이었음을 밝혔다.

그런가 하면 어떤 심리학자는 발작을 일으킨 소녀들의 증상에 주목해 이들이 세일럼 인근에서 많이 재배하는 밀이나 귀리에 기생하는 곰팡이균에 집단으로 감염됐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마녀재판 프로그램을 관람하고 박물관을 나서니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느낌이다. 이방의 역사라고 하지만 그 끔찍한 악몽에 가슴이 답답했기 때문일 것이다. 철부지 소녀의 말 한마디에 졸지에 마녀로 몰려 감옥에 갇히고 억울함을 호소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막다른 상황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답답했으면 심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압살당하는 길을 택했겠는가.

무거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화사한 호손 가로를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호손의 고향답게 처처에 호손의 흔적이 배어 있다. 호손 호텔과 너새니얼 식당도 있다. 조금 더 걸으니 모자를 손에 든 커다란 호손의 동상이 앞을 가로막는다. 동상 앞에는 누군가가 바친 꽃다발이 놓여 있다. 나는 문득 호손이 ‘앨리스 도운의 청원’이라는 단편에서 세일럼의 마녀사냥을 “우리 역사에 기록하기 가장 부끄러운 치욕적인 사건”이라고 쓴 것을 기억해냈다. 이를 상투적 수사로만 봐서는 안 된다. 그의 선조가 깊숙이 관여했기에 마녀사냥에 대한 그의 죄의식은 남달랐기 때문이다.

칼슨의 지적대로 마녀사냥이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은 이른바 서구 근대성의 한 음화일진대, 서구 근대를 온몸으로 체험했을 유길준 선생은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문득 이런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나 ‘서유견문’에서 이에 대한 언급은 찾을 수 없다. 다만 보스턴이 미국 정신문화의 중심지라는 것과, 이곳 출신 아이들이 언행이 분명하고 학식이 많아서 어디에 내놓더라도 행동과 말씨로 곧장 그 출신을 알아볼 수 있다는 언급이 보일 뿐이다.

호손 가로의 끝자락에서 왼쪽 더비 가로로 들어섰다. 이내 바다로 길게 뻗은 더비 부두가 보이고, 이어 세일럼 항의 파란 물결이 눈부시게 다가온다. 18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세일럼은 뉴잉글랜드의 제일가는 무역항이었다. 일찍부터 척박한 내륙보다 바다로 눈을 돌린 이곳 상인들은 멀리 아시아와 인도까지 배를 보내 무역활동을 펼쳤다. 해외무역으로 막대한 돈을 번 무역상들은 세일럼에 대저택을 짓는 건축 붐을 일으켜 이들의 집이 들어선 체스넛 가는 한때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택가로 이름 높았다. 특히 이곳 거리와 부두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엘리아스 더비(Elias Hasket Derby)는 미국 최초의 백만장자 소리를 들을 만큼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1812년 영국과 벌인 전쟁을 고비로 상권을 인근 보스턴과 뉴욕에 뺏기면서 세일럼은 사양길로 접어들어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호손이 ‘주홍글자’의 첫 장인 ‘세관’에서 술회하고 있듯이 인근 지역에서 목재와 석탄을 실어 나르는 배들이 이따금씩 드나드는 한산한 항구로 몰락해버렸다. 1938년, 한때 뉴잉글랜드의 해운과 무역의 중심지이던 세일럼의 역사적 중요성을 감안해 세관 건물을 중심으로 세일럼 항구 일대가 사적지로 지정됐고, 그 결과 예전의 영화를 말해주는 건물들이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현실과 상상 어우러진 거장의 고향

호손은 1804년 7월4일, 세일럼 유니언 가 27번지에서 태어났다. 네 살 나던 해, 선장이던 아버지가 남미의 수리남에서 황열병으로 사망한 후 두 누이와 함께 외가에 의지해 성장했다. 그를 평생 따라다닌 가난, 고독, 뿌리뽑힌 실향민 의식은 이렇듯 불우한 환경의 소산일 것이다. 열두 살 때 메인 주 레이먼드에 있는 외가 소유의 시골집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소년기를 보낸 후 호손은 부른스빅의 보든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한 살 때 다시 고향 세일럼으로 돌아왔다.

그후 1842년 결혼해 콩코드로 이주할 때까지 호손은 허버트 가 12번지의 외가 골방에 칩거하면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오직 독서와 글쓰기에만 전념했다. 그는 뉴잉글랜드의 역사와 그 일부를 이루는 가문의 과거사를 깊이 탐구하고, 폭력과 죄로 얼룩진 그 부끄러운 역사와 전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썼다.

   

호손의 동명 소설로 유명해진 일곱 박공의 집.

세일럼은 실로 두 가지 의미에서 호손 문학의 산실이다. 그 굴곡의 역사가 그의 소설의 주 소재라는 점과, 그런 ‘흐릿한 소재’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창작의 터전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문학세계는 이 두 세일럼, 곧 그가 살던 19세기의 세일럼과 17세기 청교도 시대의 세일럼이 서로 교차하면서 만들어낸, ‘주홍글자’의 머리글 표현을 빌려 다시 말한다면, ‘현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이 어우러진 세계인 것이다.

세일럼 항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먼저 세관 건물을 찾았다. ‘주홍글자’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세관 건물과 날개 편 독수리상에 대한 묘사가 참으로 인상적이어서 세일럼 하면 늘 이 대목을 떠올리곤 했더랬다. 책을 통해 친숙해진, 주황색 벽돌로 된 세관 건물이 이내 눈에 띄었다. 3층 건물은 고즈넉하면서도 옛 영화를 상기시키기에 족한 당당한 모습으로 항구를 내려다보며 해안가에 서 있다. 정부기관을 표상하는 날개 편 독수리상도, 줄무늬를 세로로 늘어뜨린 공화국의 국기도, 현관의 주랑도, 화강암 돌계단도 ‘주홍글자’에 묘사된 그대로였다.

호손은 세일럼 세관에서 1846년부터 1849년까지 3년간 수입세 징세관으로 일했다. 결혼 전인 1839년 1년여 동안 보스턴 세관에서 검사관으로 일한 뒤 두 번째로 맡은 공직이었다. 1837년에 작품집 ‘옛이야기’를, 1841년에는 어린이를 위한 뉴잉글랜드 역사 이야기 ‘할아버지의 의자’를, 1846년에는 ‘목사관의 이끼’를 출간하고, 여기저기에 부지런히 글을 기고했지만, 인세 수입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고정 수입을 제공하는 일자리를 마다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 사이 첫딸 우나와 아들 줄리안이 태어나 식구도 늘어나 있었다. 그러나 세관 일은 무미건조한 것이고 더러 시간이 나더라도 창작으로 이어지지 않아 호손은 내심 초조했다. 그는 감수성이 무뎌지고, ‘상상력의 거울이 흐려지고’, 얼마 되지 않는 재능마저 ‘에테르처럼’ 날아가버리지 않을까 염려했다.

애증의 세일럼

그를 구해준 것은 정권교체였다. 1848년 선거에서 휘그당 출신의 재커리 테일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민주당 계열이던 그는 ‘목이 잘렸다.’ 호손은 정치세계의 비정함을 원망하면서도 다시금 글을 쓸 수 있는 계기를 찾은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세관에서 실직한 뒤 두 달도 안 돼, 그의 심리적 지주였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떴다. 호손은 이중의 상실감에서 ‘주홍글자’ 집필에 매달렸고,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탈고했다.

결코 속필이라고 할 수 없는 그로서는 대단한 속도였다. 게다가 첫 장편이었다. ‘주홍글자’의 강렬함은 이처럼 작가로서의 위기감, 상실감, 소외감, 고향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1850년 3월, ‘주홍글자’의 출판과 더불어 그는 세일럼을 떴고, 그 후로 몇 차례의 짧은 방문을 제외하고는 두 번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호손의 이력을 헤아려보는 사이 내 발걸음은 어느새 세관을 뒤로하고 몇 블록 떨어진 ‘일곱 박공의 집’을 향하고 있었다. 세일럼, 터너 가 54번지. 호손의 동명 작품으로 유명해진 바로 그 집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그래서 더 한층 검은빛을 띤 채, 마치 웅크린 동물처럼, 소로의 한 블록을 점령하고 서 있었다. 집 옆에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는 거대한 느릅나무는 소설에서 핀천 느릅나무로 명명된 바로 그 나무일 것이다. 이 느릅나무와 사면으로 튀어나온 가파른 박공(?퉌·합각머리나 맞배지붕의 양쪽 끝머리에 ‘入’ 모양으로 붙인 두꺼운 널 또는 벽)이 하늘을 시원스레 분할하고 있지 않았다면 집은 더 음침한 인상을 주었을 것 같다. 물론 나의 이런 인상은 탐욕으로 인해 저주받은 한 가문의 몰락과 죽음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소설의 내용에 의해 굴절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소설의 모델이 된 실제의 집이 이런 내력을 가진 것은 물론 아니다. 원 소유주의 이름을 따서 터너-잉거솔 가라고도 하는 이 집은 카리브해 무역으로 갑부가 된 존 터너가 1668년에 지은 것이다. 3대째에 이르러 경제적으로 몰락하게 된 터너 가문은 이 집을 호손과 인척 관계인 잉거솔 가에 팔았다. 사촌인 수전 잉거솔을 찾아 이 집을 자주 방문한 호손은 집의 독특한 외관에 영감을 받아 이를 때마침 자신이 구상하던 소설의 제명으로 삼은 것이다. 호손 당시에 이 집의 박공은 4~5개만 남아 있었던 듯한데, 집주인으로부터 원래 박공이 일곱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곱 박공의 집으로 명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1908년 집의 소유권은 다시 캐롤라인 에머튼에게 넘어갔는데, 에머튼은 집을 매입한 뒤 곧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전문가에게 의뢰해 소설에 묘사된 대로 일곱 박공의 집으로 복원했다. 삶이 예술을 모방한 것이다. 일곱 박공의 집은 17세기 목조 주택으로서는 뉴잉글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어서 문학적으로는 물론 건축학적 의미가 큰 건물이기도 하다.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서니 꽃이 화사하게 핀 정원으로 인도된다. 정원이 바다에 면해 있어 세일럼의 내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중충한 집의 외관과는 판이하게 화사한 풍경이 펼쳐져 있어 좀 의외라는 느낌이 든다. 정원 쪽에서 집을 바라보면 거리에 면한 입구 쪽과는 또 다른 모양이다. 서로 다른 크기의 박공이 사면으로 돌출해 있어 집은 방향에 따라 제각기 다른 정경을 연출해낸다. 따라서 집의 전모를 한눈에 보기 어렵다. 전체상을 허용하지 않는 집의 이 다면성! 호손이 왜 이 집에 끌렸는지 이해된다. 이런 독특한 외관이 다원성의 미학을 추구한 그의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한 것이리라. 아닌게아니라 주변 건물의 대다수는 장방형의 이른바 ‘연방 스타일(Federal style)’이다. 오직 이 일곱 박공의 집만 사면으로 뻗은 입체적 양식이다.

‘원죄’ 반성하는 ‘일곱 박공의 집’

‘일곱 박공의 집’은 퇴락해가는 집에 얽힌 삶의 영고성쇠의 이야기다. 그것은 뉴잉글랜드의 과거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 ‘주홍글자’의 연장선상에 있다. 호손은 ‘주홍글자’에 이어 다시 한 번 고문서지기를 자청하고 있는 셈이다. 케케묵은 옛 문서를 뒤적여 파묻힌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문화의 고고학으로서의 소설 쓰기. ‘옛이야기’에서 ‘일곱 박공의 집’에 이르는 호손의 문학적 여정은 이렇게 요약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소설은 일곱 박공의 집을 지은 핀천 가의 5대에 걸친 변전상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집은 가족 혹은 가문의 표상이다. 다시 말해 ‘일곱 박공의 집’은 박경리의 ‘토지’처럼 집을 통해 가문의 내력을 더듬는 가족사 소설인 것이다. 그러나 이 친근한 모티프를 마녀사냥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검토하고 있는 점에 이 소설의 특이함이 있다.

세일럼에 마녀사냥이 한창일 무렵, 마을 외진 곳에서 가난하게 사는 매튜 몰의 오두막 집 터를 오랫동안 탐내왔던 지방 유지 핀천 대령은, 몰을 마귀로 몰아 그를 처형하는 데 앞장선다. 몰은 처형당하면서 핀천 대령을 향해 하나님의 징벌로 피를 토하고 죽게 될 것이라고 저주한다. 핀천 대령은 몰의 집터에 일곱 박공의 집을 짓고 집의 완공을 축하하는 모임을 연 날 저녁, 하객들을 기다리다가 뇌출혈로 급사한다. 그후로 핀천가의 후손들은 점점 쇠락해 급기야 5대째에 이르러서는 구멍가게를 내야 입에 풀칠을 할 정도로 몰락한다. 소설의 이런 줄거리만으로도 호손이 조상의 원죄에 얼마나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핀천가의 몰락은 신앙을 명분으로 사사로운 탐욕을 채운 죄업의 결과다. 죄업이라고 했지만 징벌이 억울하게 죽은 몰의 후손들에 의해서 직접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원죄를 초래한 탐욕과 오만이 대대로 세습되어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결과다. 물론 몰의 후손들은 복수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고 기회가 주어지면 은밀하게 복수를 감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핀천의 후손들 자신이다. 마녀사냥은 따라서 언제라도 되풀이될 수 있다. 일곱 박공의 집이 마녀사냥의 원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뉴잉글랜드 사회의 상징이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인 것이다.

춤추는 녹색 놀이터

집의 내부는 안내를 받아서만 구경할 수 있다. 집안은 집 주인이 동방 무역을 하면서 수집한 귀한 물건들로 장식되어 있다. 안내인은 관광객의 관심을 미로처럼 복잡한 집의 구조로 돌리는 데 더 열중이다. 그는 방과 방 사이를 잇는 비밀의 계단을 보여주면서 호손이 소설에서 이를 활용하지 않았음을 못내 아쉬워한다.

그러나 이는 초점이 빗나간 것이다. 호손의 문학세계를 가로지르는 어둠의 미로는 고딕적 상상력의 발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안내인의 설명은 일곱 박공의 집 내부에 이어 원래의 장소에서 바로 옆자리에 옮겨다 놓은 호손의 생가를 둘러보는 것으로 끝났다. 일곱 박공의 집과는 대조적으로 진홍색으로 채색된 호손의 생가는 무성하게 늘어진 나뭇가지에 감싸여 있었다.

申文秀
● 1952년 출생
●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동 대학원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석사(영문학)·하와이대 박사(영문학)
● 現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미국학연구소장, 한국영어영문학회 부회장
● 저서: ‘모비딕 읽기의 즐거움’, ‘현대영미소설의 이해’(공저), ‘자연’(역서), ‘미국의 노예제도 & 미국의 자유’(공역) 등

자연은 인간이 만드는 어둠의 역사와 상관없이 늘 스스로 충만한 것인가. 정원에 핀 색색의 장미도, 푸르른 잔디도, 느릅나무 잎새도 7월의 햇살 아래 참으로 눈부셨다. 150년 전, 근엄한 청교도의 후손인 소설가의 눈에도 자연의 향연은 마찬가지로 찬란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퇴락해가는 집에 딸린 이 정원을 “반짝이는 빛이 춤추는 녹색의 놀이터”로 찬탄하는 화려한 수사가 이 어두운 소설의 언어 속에 끼어들 수 있겠는가.

   (끝)

출처;신동아2006.05.01 통권 560 호 (p526 ~ 540



---------


미국의 사회문화적 특색 (1) : 퓨리터니즘(Puritanism)

 

* "청교도주의(Puritanism)에 대한 이해 없이는 미국에 대한 이해는 있을 수 없다"(Perry Miller) -> 미국 사회의 모든 면을 퓨리터니즘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아직도 미국 사회의 이념적 가치나 기반이 무엇인가라는 논쟁이 있을 수 있음. 그러나 청교도들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국인의 사상과 전통에 엄청난 유산을 남겨 놓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음. 오늘날 미국 사회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념 혹은 가치나 이상은 분명 퓨리터니즘으로부터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으로 볼 수 있음.

* 우리가 보통 최초의 퓨리턴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1620년 메이플라워(Mayflower) 호를 타고 신대륙에 건너와'메이플라워호 서약'(Mayflower Compact)을 맺으며 정착하기 시작한 일명 필그림(Pilgrims)으로 불리는 사람들임.

-> 그런데 미국적 특징을 일컫는 데 사용되는 이른바 퓨리터니즘, 즉 캘빈주의적 전통을 가진 개신교도들은 이들이 아니라 1630년 레이디 아벨라(the Lady Arbella) 호를 타고 지금의 뉴잉글랜드, 특히 보스턴 주변에 정착해서 신정 정치를 구현한 사람들로, 최초에 미국 땅을 밟은 신교도들과는 다소 상이한 성격을 가짐.

-> 물론 필그림들도 영국 국교회에 반대하여 신대륙에 정착한 사람들이지만, 후일 매사추세츠 식민지를 건설한 이른바 청교도들과는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었음. 필그림들은 영국 교회의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가 신대륙에 정착한 사람들임. 반면 매사추세츠 식민지를 건설한 퓨리턴들은 다소 보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캘빈주의자들임. 이들은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이 유럽 대륙에 비해 미진했기 때문에 영국 성공회를 좀더 정화(purify)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퓨리턴(Puritans)이라고 불려짐. 사실 영국 성공회(Anglicanism)는 교리와 형식 면에서 로마 가톨릭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음. 단지 종교적 수장이 교황이 아니라 국왕이었다는 것이고, 또 경제적 차원에서 로마로 흘러들어 가던 십일조를 영국 국가의 재산으로 귀속하는 조치를 취했을 뿐이었음 -> 따라서 퓨리턴들은 자연스럽게 영국 성공회에 대한 반감을 가졌고, 이러한 배경에서 신대륙을 종교적 피난처로 삼아 신정 정치를 구현할 '언덕 위의 도성'(A City upon a Hill)을 건설하려고 했음.

-> 퓨리턴들은 영국 사회의 엄격한 계서제를 그대로 식민지에 이식하려 했던 사람들로 대부분이 중산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음. 이들은 자유와 평등, 기회의 땅을 상징한다는 신대륙 식민지 사회에서 엄격한 계서제에 입각해 지도자 계층으로 성장했고, 도시나 농촌 지역에서 따라간 존재들은 신대륙 식민지 사회에서도 피지배자층으로 편입됨 -> 따라서 식민지 건설 초기의 사회는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민주주의적 질서가 존재할 수 없었음. 구대륙의 봉건적 질서와 종교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신대륙에 건너온 이들이 이렇게 비민주적인 식민지 사회를 건설하게 된 이면에는 그들이 목숨처럼 여겼던 이른바 캘빈주의의 비민주적인 신정 정치에 기인함.

* 신정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퓨리턴들은 원죄 의식, 예정설, 선민의식, 소명의식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캘빈주의를 신봉함. 이들은 이러한 이념을 바탕으로 엄격한 신정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고, 구대륙의 봉건적 질서 속의 군주를 신이라는 이름으로 대치함. 즉 퓨리턴 공동체의 질서 속에서 신이 곧 왕의 역할을 했던 것임. 식민지 공동체 사회가 자유와 평등과는 거리가 먼 사회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임.

-> 이러한 엄격한 위계질서에 바탕한 퓨리턴 사회는 캘빈주의의 핵심인 예정설에 이르면 더욱 비민주적 질서를 정당화하기에 이름. 즉 예정설은 신이 선택한 극소수의 영혼만이 구원받는다는 사상으로, 이것은 소수에 의한 다수 지배를 정당화하게 됨. 인간은 원죄 때문에 신 앞에서는 모두 죄인이며 죄인 중에서 신에게 선택받은 극소수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예정설은 선택된 소수의 정치적 지배를 신분이 아니라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해 주는 것으로 귀결됨 -> 이런 점에서 오늘날 미국이란 사회가 우리에게 심어준 자유와 평등의 나라, 기회의 나라라는 이미지는 설득력이 약함.

-> 예정설에 기반한 선택된 소수라는 선민의식은 구세계를 구원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신이 마련해 준 신대륙에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해야할 책임이 있다는 소명의식으로 귀결됨 -> 이러한 소명의식은 이른바 '대각성'(Great Awakening) 시대를 거치면서 식민지 전역으로 확산되어 신대륙의 이스라엘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으로 발전하기 시작함. 즉 신대륙에 이주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노아의 방주에 골라 태운 선택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할 소명을 가진 유일한 존재들이라는 믿음을 갖고 '언덕 위의 도성'을 건설하려고 했던 것 -> 미국 정치인들이 늘상 연설 말미에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God bless America)로 끝맺고, 미국 지폐에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라는 문구를 집어넣는 것이 이상할 리 없는 것이다.

* 위와 같은 믿음을 바탕으로 퓨리턴들은 엄격한 관습 아래 모범적인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공익을 우선시하는 일종의 사회봉사정신의 강화에도 기여했으나, 극단적인 그들의 엄격성은 지나친 강박관념으로도 발전해 '세일럼 타운의 마녀사냥'과 같은 일련의 사건도 유발시킴. 즉 퓨리턴들이 식민지에 정착한 지 대략 3대가 지나자,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고 점점 세속화의 경향이 대두되면서 신의 뜻에 따라 모범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식민 정착 초기의 신념이 사라져가는 것에 일종의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 마녀사냥은 바로 이러한 퓨리턴들의 위기의식의 발로였던 셈. 공교롭게도 마녀사냥을 통해 처형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거나 퓨리턴이 아닌 다른 종교의 사람들이었음. 이런 점에서 퓨리턴들의 배타성을 짐작해 볼 수 있음 -> 종교적 자유를 찾아 머나먼 신대륙에 정착한 퓨리턴들이 마녀사냥과 같은 조치를 통해 다른 교파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지 않는 모습을 보인 것. 이와 같은 퓨리턴들의 종교적 배타성은 결국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s)와 같은 반발세력을 양산시켰고, 이러한 흐름은 유럽 대륙으로부터의 이민 증가와 함께 식민지 사회를 팽창시키는 데 일조함.

* 한편, 퓨리턴의 선민의식과 소명의식을 막스 베버(Max Weber)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적 직업윤리와 연관시키기도 함. 즉 원죄로 얼룩진 인간의 예정된 운명은 오로지 전지전능한 신에 의해서만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신이 부여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인데, 그 임무란 바로 현세에서 맡은 바 책무를 다하는 것 -> 이렇게 책무를 다해 현세에서 이룬 성공과 보상이 다름 아닌 구원의 징표라고 퓨리턴들은 생각함 -> 따라서 가톨릭 세계에서 금기시되었던 대금업과 같은 업종들은 신에게 부여받은 소명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되었고, 현세에서의 근검과 절약, 소명을 다하는 노동 윤리는 퓨리턴들에게 세속적인 성공으로 가는 기본적 바탕이었음. 요컨대 막스 베버가 말한 프로테스탄트의 직업 윤리는 캘빈주의적 전통으로부터 발전된 것으로서, 그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는 베버의 논리는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님.

* 미국 자본주의 발전에도 한 몫을 담당한 캘빈주의적 선민의식과 그것에 바탕한 소명의식은 19세기 이후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팽창을 정당화하는 데에도 크게 이바지함 ->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구원자로서의 소명은 미국인들에게 주어진 숙명이자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었던 것임. 우리에게는 프런티어(frontier) 혹은 모험과 개척정신으로 알려진 미국의 서부 팽창과정은 미국인들의 선민의식에 바탕한 소명의식의 결과물인 것. 즉 혹독한 시련 속에서 식민지에 정착해 개척 경험을 쌓았던 미국인들은 그것이 전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일종의 훈련이었고, 따라서 독립 전쟁 이후 전개된 서부 팽창 역시 이와 같은 종교적 선민의식 혹은 종교적 사명을 띤 행위로 간주됨 -> 동부 연안의 13개 주로부터 미시시피 강으로, 그리고 대평원을 지나 로키 산맥에 이르고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해간 프런티어는 퓨리턴들의 용감성과 모험정신, 진취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지만, 그러한 팽창의 기본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한 것은 다름 아닌 캘빈주의로부터 연원한 선민의식과 소명의식이었던 것임.

-> 물론 프런티어는 경제적 팽창으로서의 의미도 지님. 당시 미국인들에게 서부는 자유, 광활함, 거친 야성을 간직한 공간으로 마치 야만과도 같은 상태였고, 그러한 야만과 미개척의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신에게 신성한 의무를 부여받은 퓨리턴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러나 신성한 소명의식이라는 미국인들의 팽창은 결과적으로 수많은 인디언을 학살하고 야만의 개선이라는 이름 아래 진행된 일종의 자연 파괴 과정이었음.

-> 이와 같은 미국인들의 전통적 신념은 19세기 후반 이후 진행된 미국의 세계적 팽창과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근거를 마련해줌. 그러한 팽창과 정당화를 통해 미국인들은 앵글로 색슨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자긍심, 즉 백인 퓨리턴의 우월의식을 정당화했고, 이러한 관념에 기반해 이른바 와스프(WASP)들이 미국을 지배하는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 즉 이들은 캘빈주의적 전통에 침윤된 엘리트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음.

-> 아울러 캘빈주의적 전통에 기반한 선민의식과 소명의식은 미국에게 세계 구원자로서의 모습과 모범을 전파해야할 우월적인 지도자의 이미지를 심는 데 대단한 영향을 끼쳤음. 최근 죄지 W. 부시 대통령이 이란, 이라크, 북한을 가리켜 '악의 축'이라고 규정한 데에는 바로 이와 같은 관념, 즉 퓨리터니즘이 존재하고 있음. 물론 퓨리터니즘만으로 이런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퓨리터니즘에 대한 이해 없이는 미국의 전지구적 팽창도 설명하기 어려움.






wn1 - 위의 영상은 세일럼의 마녀사냥 내용을 영화로 만들었는데요..제목이 '크루서블'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 마녀사냥에 대한 의미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마녀 사냥이 한국의 역사 내에서도 존재 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이 격동의 시기를 지나면서 많았다고 하는군요..
현재는 당연히 없어야 겠지요..

심리학적인 측면에서는 '만들어진 사이코패스'라 불리울 정도로 이러한 영화내의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게 되는데요..
내려오는 말 중에 '여러사람이 한 사람 바보만들기는 쉽다'는 말이 있지요..
이 마녀사냥이란 것이 그 말이 정확함을 여실이 보여줍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힘들어 지겠지요... 
영화 익스페리먼트(스탠포드 감옥실험을 다룬 영화) 나 4월 언젠가(르완다의 인종학살을 다룬 영화), 용서받지 못한자(한국 군인들의 상실을 다루는 영화) 그리고 위의 동영상 영화(마녀사냥을 다룬 영화)
이것들이 한국내에서도 일어났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칫 감정의 대립이 있으면 언제 또 발생될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


중세유럽이라고 하면 '카톨릭', '십자군 원정', '흑사병(페스트)', '마녀사냥' 등이 떠오를 겁니다. 저 4가지는 중세 암흑시대를 상징하는 요소들로 각익되어 있는데요. 하지만 마녀사냥은 중세유럽의 암흑기를 대표한다고 하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는 테마입니다. 왜냐면 마녀사냥은 13세기초에 시작해 무려 18세기말까지 이어졌으며 그 최전성기는 중세시대가 아닌 16~17세기였습니다. 게다가 마녀사냥은 구교지역 뿐만이 아니라 신교지역에서도 폭넓게 행해졌고 심지어는 18세기 미국에서도 버젓이 이루어졌던 행위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성공회의 존 웨슬리 신부 같은 사람조차 마녀사냥의 적극적인 지지자였습니다.(이 분은 무려 "마녀를 묵인하는 건 성경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시던 분.)


그럼 900만 명에 가까운 생명을 앗아간 광기가 600년이나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녀사냥은 의학의 발달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12세기부터 교황의 권력은 절정에 이르러서 유럽 전역의 국가들을 사실상 지배하는 형국이 됩니다. 이 시기에 4회에 걸쳐서 로마의 라티라노 대성당에서 라티라노 공의회(Lateran Council)가 열립니다.(5회는 16세기에 열렸으니 논외로) 이 라티라노 공의회를 자세히 살펴봅시다.

1회(1123년)
교황 칼릭스투스 2세 주재로 열린 서방 최초의 공의회. 성직서임권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보름스협약을 인가하여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명확히 하였다.

2회(113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가 소집. 대립교황(對立敎皇) 아나클레투스 2세의 잔당(殘黨)을 처리하고 브레시아의 아르노르드, 브류이의 피에르 등의 이단설(異端說)을 처벌했으며, 교회규율에 관한 30항의 카논(canon)을 의정했다. 이 회의에는 서유럽 전국가들이 참석, 프레나리아(완전한)공의회라 불렀다.

3회(1179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소집. 추기경 전체 투표수의 3분의 2 이상을 얻어야만 교황에 선출된다는 교황 선거 절차를 확정하였다. 또 이단들을 배제, 교회쇄신을 추진할 것 등이 결정되었다.

4회(1215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소집하였다. 알비파(派), 플로리스의 요아킴, 아말리크 드 벤 등의 여러 이단을 처벌하고, 신자는 1년에 적어도 한번은 고백성사와 배령성체(拜領聖體)를 해야 한다고 규정함과 동시에, 성지회복을 위한 십자군 원정을 명령했다. 또 교회의 승인 없이는 치료행위를 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1215년에 열린 제 4회 라티라노 공의회입니다. 4회 라티라노 공의회는 십자군원정을 명령한 것으로 유명해서 다른 부분들이 소홀하게 여겨지는데요. 여기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회의 승인 없이 치료행위를 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것이 이후 벌어지는 마녀사냥의 불씨를 당기게 됩니다.

당시 유럽에는 오래 전부터 전해지던 민간의술이 존재했습니다. 주술적인 개념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민간의술은 약초에 대한 지식과 인체에 대한 지식(주로 뼈 등), 그리고 출산에 대한 지식 등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중의학이나 한의학과 상당히 비슷한 약초학의 일종입니다. 이러한 약초 지식을 지닌 사람을 빗커(Wicca)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고대영어로 '현명한 여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녀를 지칭하는 위치(Witch)의 어원입니다.


그런데 12세기에 이르면서 서양의학이 크게 발전을 이루면서 기존의 약초학과 대립하게 됩니다. 중세시대만 해도 학문의 중심이 교회와 수도원이었는데요. 이 때문에 서양의학을 배운 의사는 대부분이 성직자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직자들에 의해서 치료 행위가 이루어지고, 이것이 곧 교회의 큰 수입원이 되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약초학을 이용했고 아이를 낳을 때는 약초학에 정통한 산파를 불러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에 교황청은 의사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교회의 의료 수입을 늘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교회의 승인 없이 행해지는 치료행위를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한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 신의 대리자인 교황이 발표한 칙령은 곧 신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을 거역한다는 것은 곧 신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고, 이것은 곧 이단행위가 됩니다. 바로 마녀의 탄생이었던 겁니다.

당시에는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여인들이 생계를 위해서 약초학을 배워서 치료사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약초학의 지식을 지닌 치료사들은 대부분이 40세 이상의 노파였습니다.(중세시대에는 평균수명이 낮고 노화가 빨랐기 때문에 40대 후반만 되어도 거의 노파였죠.) 그리고 약초학에 정통한 노파들은 매일 중노동을 하는 농가의 여인들에 비해서 수명도 길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등 구부러지고 이빨은 다 빠진 마녀의 모습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123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이단심문관을 제도화하고, 1318 년 교황 요하네스 22세가 이단심문관에게 재판 없이 언제라도 죄를 판결해 단죄할 수 있는 권리를 내립니다. 이렇게 해서 이단심문관은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존재로 부각됩니다.

13세기 초부터 시작된 마녀사냥은 그 표적이 주로 약초학 지식을 지닌 여성들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에 희생자 대부분이 노파나 남편을 일찍 여의고 혼자 사는 젊은 과부 등 주로 사회적 약자들이었습니다. 거의 100년 넘게 계속된 마녀사냥의 결과 교회는 유럽의 전통 약초학의 씨를 말리는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유일한 의료시설이 됩니다.

교회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이제 마녀사냥은 별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마녀사냥을 통해 이익을 얻던 집단에게는 좀 달랐습니다. 100년 넘게 마녀사냥이 지속되면서 마녀사냥은 하나의 비즈니스로서 자리잡습니다. 마녀 판정을 위한 각종 서적 산업, 각종 고문도구 산업, 화형식에 필요한 자재를 조달하거나 화형식을 집행하는 대리 업자 산업 등 마녀사냥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산업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당초 목표로 삼았던 대상들이 거의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이 사업들은 유지되기가 힘들었죠. 그래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12세기에 확립된 교회법 중에는 이단 행위자에 대한 재산몰수 규정이 있었습니다. 이단으로 판정 받은 사람은 당연히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고, 심지어는 죽은지 40년 이내에 살아 있던 시절에 행한 이단 행위가 발각될 경우 그 자손들에게 상속된 유산을 전부 몰수하는 규정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산은 당연히 교회에 귀속되는 것이었지만 그 재산을 몰수하는 당사자는 교회가 아닌 이단심문관이었습니다. 이런 끝내주는 사업모델을 구상해냈는데 안타깝게도 유럽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면서 이런 수익모델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뭍혀버립니다.


14세기가 되자 동서양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아시아를 통해 흑사병이 전래된 것입니다. 1347년 콘스탄티노플에 상륙한 흑사병은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1350년까지 불과 3년 사이에 유럽 인구의 1/3이 흑사병으로 죽습니다. 중세유럽에 흑사병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그것을 마녀의 소행이라고 여겨 힘 없는 여성을 잡아 산채로 화형시키는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마녀사냥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인데요.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흑사병의 창궐로 마녀사냥은 한 동안 시들해집니다. 물론 흑사병이 갑자기 퍼진 것에 분노한 시민들이 집단 히스테리 증세를 일으켜 무고한 여성을 마녀로 지목해 화형하는 사례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16~17세기의 마녀사냥에는 비교도 안 되며 13세기에 성행했던 마녀사냥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흑사병이 유행하던 시기에는 전염병의 전파 속도가 너무 빨랐고, 교회의 기능이 사실상 정지되었기 때문에 마녀사냥은 오히려 주춤하게 됩니다.

흑사병은 농민 뿐만 아니라 귀족이나 성직자, 왕족 등 닥치는대로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유럽 인구의 1/3이 죽었다는 것은 당시 유럽을 유지하던 인프라가 거의 다 소멸되었다는 이야기이며, 당연히 마녀사냥이라는 비즈니스를 통해 이익을 취하던 집단도 대부분 소멸했음을 의미합니다.
흑사병의 공포가 지나가고 15세기가 되면 대항해시대가 열립니다. 대항해시대를 통해 유럽은 전세계와 교역하게 되고, 이를 통해서 유럽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합니다. 그러나 교역은 경제의 발전과 함께 새로운 문화와 종교도 함께 가져왔습니다. 이슬람을 비롯한 타 종교의 확산, 기독교 내부에서 계속되던 분리주의 운동 등에 두려움을 느낀 교회에서는 1484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가 '가장 바람직한 것에 관하여'라는 마녀박멸교서 등을 발표하며 이단에 대한 규정을 강화하는 등으로 맞섭니다. 이런 시기에 한 책이 출판됩니다.



도미니크회의 이단심문관이었던 '앙리 엥스티토리스'와 '자크 스프렝거(야곱 슈프렝겐)'가 쓴 <마녀의 망치>라는 책이 1487년에 나온 것입니다. 이 책은 두 이단심문관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마녀에 대한 연구서였습니다. 이 책에는 성교불능, 남근탈락, 유산, 불임은 물론이고 자연재해와 병충해까지 마녀의 소행으로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전 유럽에는 다시금 마녀의 공포가 형성되었고 두 이단심문관은 직접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마녀사냥을 합니다. 이 책의 출판은 마녀사냥의 대상자가 여성에서 남성으로까지, 힘없는 자에게 권력과 재산을 지닌 귀족이나 관리에게까지 확산되는 계기가 됩니다.

물론 <마녀의 망치>는 종교적 맹신에 의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과 함께 불어닥친 마녀사냥의 열풍은 상당한 희생자를 내는데, 이단으로 판정된 사람의 재산을 몰수하는 규정은 이때도 유효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재산 몰수의 집행자는 당연히 이단심문관이었기 때문에 이단심문관은 그 과정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16세기가 되면서 마녀사냥은 또 다시 거대한 비즈니스로 발전합니다.



15세기 말부터 다시금 마녀사냥의 불씨가 살아나면서 수많은 고문도구와 화형의식의 대행 등 많은 비즈니스들이 성장합니다. 비즈니스가 거대해지면서 이 산업의 종사자들은 수익성을 고민하게 되고, 그러면서 보다 수익성이 높은 아이템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녀사냥은 힘없는 사람을 마녀를 몰아서 화형시키는 종교적 광기에서 재산이 있는 사람을 이단으로 몰아 죽인 뒤 그 재산을 몰수해 공모자들끼리 분배하는 야쿠자 비즈니스로 변질됩니다. 실제로 16~17세기에 마녀사냥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상당수가 자산가의 미망인, 지방 지주, 지방 관리, 상인 등이었습니다. 물론 그 중에 자산가의 미망인이 가장 많았음은 말할 것도 없겠죠.


마녀사냥이 재산을 빼앗아 분배하는 비즈니스였음을 입증하는 자료는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1630년 신성로마제국황제가 마녀사냥으로 이단판정을 받은 사람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 조치는 1631년까지 단 2년 동안 지속되었는데요. 1629년까지 매년 평균 100명이 마녀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던 마녀사냥의 메카 독일의 밤베르크(Bamberg)는 1631년에는 단 한 명도 마녀재판으로 처형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16~17세기에 와서는 마녀사냥은 종교적 광기가 아닌 살인을 통해 재산을 빼앗는 야쿠자비즈니스였던 겁니다.


18세기말까지 이어졌던 마녀사냥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나폴레옹입니다. 1714년 독일의 프리드리히 빌헤름 1세가 마녀재판을 금지했음에도 여전히 성행했던 마녀사냥은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인해 프랑스혁명의 정신이 전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사라지게 됩니다. 자유를 알게 된 인민들에 의해 교회의 힘이 약해지고 이로 인해서 마녀사냥은 그 설 자리를 잃어버립니다. 


----------


인도 ‘마녀사냥’으로 매년 200명 희생 충격
                                        2010/07/27기사



중세 유럽에서 벌어졌을 법한 잔인하고 반인권적인 마녀사냥이 오늘날 인도의 일부 지방에서 성행하고 있어 전 세계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국 일간 타임스는 “수많은 인도여성이 마녀로 몰려 마을 사람들에게 온갖 잔인한 폭력을 당하며, 매년 여성 200명이 마녀사냥으로 살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최근 보도했다.

수치는 인도에서 활동하는 법률구호단체(RLEK)가 조사해 발표한 것이다. RLEK는 “북부 자르칸드 주에 있는 가난한 부족집단 마을에서 주로 발생하지만 안드라프라데시, 하리아나, 오리사 주에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마녀로 몰리는 피해 여성들은 남편을 잃고 홀로 살아가는 과부나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 등이 대부분이다. 최근 이뤄진 마녀사냥이 여성들이 가진 땅이나 돈을 갈취하려는 수단으로 악용된 것으로 드러나 더욱 심각한 인권 유린 행태로 파악된다.

이 단체의 어부다시 카우살 회장은 “마녀로 몰린 여성들은 사람들 앞에서 매를 맞거나 머리카락을 잘린다. 억지로 대변이나 소변을 먹기도 하며 옷을 홀딱 벗긴 채 강제로 마을 주변을 걷기도 한다.”며 마녀사냥의 잔인한 행태를 고발했다.

마녀사냥으로 사망에 이르는 여성은 한해 200명 정도이며 지난 15년을 추산한 결과 2500명이 마녀로 몰려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줬다. 혹독한 마녀사냥에 살아남았어도 피해 여성들이 수치심과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건도 허다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조사 결과 드러났다.

자르칸드, 비하르, 차티스가르 주 등에서는 마녀사냥을 금지하는 법이 통과됐으나 시행이 미비한 실정이며 야만행위를 한 사람을 처벌하는 최고형이 겨우 징역 3개월 형에 불과해 인도 당국이 사실상 마녀사냥을 허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단체는 비판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

[한마당-김진홍] 마녀사냥과 고문
 2010/06/24
“여성은 천성이 좋지 않다. 쉽게 유혹에 넘어간다. 쉽게 의심하고, 믿음도 쉽게 부인한다. 이것바로 마술을 하기 위한 기본 소양이다.”

1487년 독일에서 발간된 ‘마녀철퇴’의 한 부분이다. 편견으로 가득 찬 황당무계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를 토대로 유럽에서 대대적인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마녀를 발본색원하라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의 명령도 떨어졌다. 200여년간 수백만명이 약식 재판을 거쳐 화형 또는 참수형, 교수형을 당했다. 희생자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과부를 비롯해 혼자 사는 여성들이 주 타깃이 됐다.

세상에 마녀가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중세인들은 마녀의 존재를 확신했다. 마녀들에게는 악마 집회에 참석했다거나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녔다거나 폭풍을 불러왔다는 등의 황당무계한 죄목이 적용됐다.

이런 일을 가능케 한 것이 가혹한 고문이다. 고문은 합법적으로 이뤄졌다. 불로 발바닥 지지기, 손을 뒤로 묶어 공중에 매달았다가 바닥에 내동댕이치기, 관절 뽑기, 채찍으로 때리기 등을 견뎌낼 여성은 없었다. 물을 이용해 마녀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는 방법도 있었다. 마녀로 지목된 여성을 무거운 바위에 매달아 강에 던져 떠오르면 악마와 접촉한 것이고, 가라앉으면 죄가 없는 것이다. 마녀라고 의심받는 순간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문이 군사정권 시절의 유산쯤으로 여겨졌으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서울시내 한 경찰서 경찰관 4명이 고문한 혐의로 최근 구속됐다. 다른 경찰서에서 고문당했다는 진정이 추가로 접수돼 국가인권위원회가 확인 중이라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 “어떤 이유로든 수사과정에서 고문은 용납할 수 없다”며 엄벌을 지시했다. 창피한 노릇이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우리 정부조사 결과에 의문이 많다는 내용의 서한을 유엔에 보낸 참여연대에 비난이 쏟아지자 좌파성향의 시민단체들이 마녀사냥을 중단하라는 성명을 냈다. 마녀사냥이라니, 중세를 떠올리면 끔찍한 욕이다. 참여연대의 행동이 비난받을 만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국민들이 얼마나 될까. 참여연대가 북한 김정일 정권을 두둔하는 듯한 입장을 보인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김정일 정권은 지금도 고문을 자행하며 정치범들을 마녀사냥하고 있다.

김진홍 논설위원 jhkim@kmib.co.kr


-------------

중세 유럽의 고문방법


처벌의 신발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철로 만들어진 밑창 부분에 스파이크가 돋아있습니다. 죄인이 저 신발을 신고 걷게 되면 스파이크가 살을 파고들어가 뼈를 뚫고 인대까지 파고 들어가게 됩니다.
이단자의 포크
양쪽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포크로 한 쪽은 이단자의 턱을 뚫고 한 쪽은 쇄골을 뚫게 합니다. 이 고문도구가 발명된 이유는 더러운 이단자가 함부로 혀를 놀리지 못하고 오직 고해만을 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머리 붕괴기
이 고문도구를 사용하면 이빨이 잇몸 속으로 뭉개져 들어가면서 턱 주변의 뼈까지 뭉개버립니다. 그러고 나면 눈이 튀어나오고 마지막에는 뇌가 귀에서 뿜어져 나온다고 합니다. 허나 이 고문방법은 현대의 몇몇 국가에서도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유다의 요람
. 저 줄들은 묶여있는 사람이 떨어질 경우 아래에 있는 삼각뿔 위에 희생자의 항문이 찔리게끔 설정되어있습니다. 희생자를 일단 묶고 천장까지 올렸다가 아래로 떨어뜨립니다.

요람

이 요람은 유다의 요람과는 다르게 날카롭게 선 날 위로 희생자를 앉혀놓고 앞 뒤로 끌어당겨 희생자의 성기를 손상시키는 고문방법이었습니다.


철의 여인
고문방법은 설명을 안 해도 아실 것입니다. 이 고문이 끔찍했던 이유는 쇠꼬챙이가 가슴, 눈, 팔, 다리 어깨를 전부 다 찔러도 죽을 만큼 깊이 꿰뚫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철의 여인에 희생자가 갖히게 되면, 관통상으로 죽는 것이 이틀동안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출혈로 죽게 된다고 합니다.

꿰뚫기
이 방법은 알제리, 튀니지 등지에서 국가 반역자에 대한 처형방법이었는데, 드라큐라의 모델이었던 루마니아의 블라드 테페슈 공작이 이 방법으로 자신의 영지 내에 범죄자들을 처단하면서 유명해진 방법이라고 합니다.


희생자가 거꾸로 매달리면 몸 안의 피가 머리 쪽으로 몰리게 됩니다. 이 때 고문집행자가 희생자의 몸을 톱으로 반으로 가르기 시작하는데 머리 속에 있는 피가 너무 몰리게 되면서 정신이 몽롱해지고 고통을 못 느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희생자는 자신의 몸이 반으로 잘리는 것을 천천히 보다가 죽게 된다고 합니다.

 바퀴
이 방법은 중세 독일에서 가장 흔했던 처형방법이었습니다. 우선 희생자를 대자로 벌려 땅에 묶습니다. 이 때 손목 관절, 무릎, 골반, 어깨 아래에 나무를 받쳐놓습니다. 그러면 고문집행자는 아래 그림의 바퀴를 들고 있는 힘껏 내리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겨우 악몽의 시작입니다. 그렇게 여러 번 내려쳐서 뼈가 으깨지고 수족이 흐물 거리기 시작하면 내려쳤던 바퀴에 흐물거리는 희생자의 손발을 엮어서 꼬아버립니다. 이미 흐물거리는 상태이므로 밧줄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숨을 거둘 때까지 평민들이 보도록 올려놓습니다.

의자에 묶어 물에 던지기 
매우 유명한 마녀 판별법입니다. 의자에 묶여있는 여성이 마녀가 아니라면 그대로 물에 빠져 죽음으로써 결백을 증명하고, 마녀라면 물에 뜨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바로 화형장으로 직행시키는 사형법입니다.
장화
희생자의 다리를 두 개의 나무 판자 사이에 끼우고 밧줄로 묶습니다. 밧줄 사이사이에 해머로 때릴 쐐기를 끼우고 쐐기를 망치로 두드립니다. 한번씩 쐐기를 때릴 때마다 정강이 뼈가 박살납니다. 이 고문은 희생자의 정강이가 완전히 부서질 때까지 12번 내외 정도 쐐기를 때릴 수 있다고 합니다. 부츠가 벗겨지면 뼈 조각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지고 피부는 흐믈흐믈한 살덩어리가 된다고 합니다.

고양이 발톱
이 방법은 단순히 희생자의 등에서 피부를 아주 천천히 벗겨내기 위해 고안됐습니다. 너무 많이 벗겨내면 뼈가 전부 드러나게 됩니다. 

잡아뜯기
그림이 조금 짤렸습니다만, 팔다리를 선반 위에 묶어놓고 도르레를 이용해 희생자의 팔다리를 조금씩 잡아 뜯는 고문법입니다.

말로 4등분 만들기.
우리나라의 능지처참과 같은 방법입니다. 희생자를 바닥에 놓고 각각의 팔다리를 줄로 엮은다음 각각의 줄을 네 마리의 말에 묶습니다. 말이 힘껏 달리도록 엉덩이를 때리면 희생자의 팔다리는 엄청난 힘으로 찢겨나갑니다. 주로 귀족을 살해한 사람을 이 방법으로 처형시켰다고 합니다


저 도구를 남성의 경우는 항문, 여성에게는 성기에 집어넣습니다. 손잡이 부분을 돌리면 마개가 점점 열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안에 작은 꼬챙이가 하나 들어있는데, 사용자의 임으로 그 꼬챙이를 항문 안이나 성기 안에서 길어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희생자는 극도의 고통과 함께 장기 파열되어 사망합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고문도구는 일반시중에서 판대 됐었다는 사실입니다.

영혼 정화시키기.
많은 카톨릭 국가에서 성직자는 이단의 부패한 영혼은 정화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단지 그 방법이, 펄펄 끓어오르는 물과 타오르는 석탄 둘 중 하나를 삼킴으로써 내면의 악을 씻거나 태워야지만 가능하다고 믿었답니다.



PS. 중세 역사소설 같은거 보면 이단자로 몰아서 여러 고문을 하며 죽이는 모습을 글속에서 많이 보았는데

이런식으로 고문했다고 떠올리니 엄청 잔인하군요


 

'생각 > 내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CRR(colour reflection reading) 분석법  (0) 2010.09.21
로마 5 현제  (0) 2010.09.18
'디자인 리더' 美 아이데오社  (0) 2010.09.11
사이코패스 Psychopath  (0) 2010.09.08
아부그라이브(이라크전 포로 학대)  (0) 2010.09.08
Posted by WN1
,
wn1 - '유쾌한 이노베이션'이라는 책을 통해 IDEO사의 디자인들과 회사의 철학을 알 수 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추천도서로 넣고 있지요..
이 회사를 보면서 여러 회사들이 생각이 나는데 구글이나 애플, MS 등 유수의 강한기업들이 생각납니다..
그들의 창조적 상상력이 전문성과 결합되어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며 자신의 생각들을 점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여러 기업들이 창조적 사고력에 대해 많이 비중을 두고 있는 추세이지요...

모여서 떠들고 낙서하며... 인간을 디자인 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28번 부두(pier 28).

예전에 대형 선박에서 수출입 컨테이너를 하역하던 선착장 자리에 물류 창고처럼 생긴 단층 건물 하나가 서 있었다.

세계의 디자인 트렌드를 리드하는 디자인 컨설팅 회사의 사무실로는 뜻밖이었다.

'전 세계의 이노베이션 공장'으로 일컬어지는 아이데오(IDEO)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기자의 상식을 테스트하는 듯한 파격(破格)의 연속이다.

사무실 지붕은 몽고의 유르트(Yurt·이동식 가옥)를 연상시켰다.

보통 사무실 높이의 5배는 족히 돼 보이는 천장.

난데없이 자전거 6대가 공중에 매달려 있다.

마케팅 담당 크리스틴 헨드릭슨(Hendrickson)은 "직원들이 통근용으로 타고 다니는 자전거"라고 설명했다.

입구 한쪽 벽에는 아이들이 휘갈겨 쓴 것처럼 보이는 낙서 수십 개를 붙여 놓았다.

직원들의 브레인스토밍에서 나온 습작들이라고 한다.

 

 

▲ 세계적 디자인 컨설팅 회사인 아이데오 직원들이 브레인 스토밍(brainstorming)을 벌이고 있다.

심리학, 건축학, 엔지니어, 마케팅 전공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직원들은 현장에 나가 나름의 시각으로 소비자를 관찰한 뒤 돌아와 난상토론을 벌인다.

토론 중 칠판에 자신만의 느낌을 적기도 하고, 장난감을 가져와 놀면서 영감을 얻기도 한다. / 아이데오 제공

 

지난 3월 미국 경영 잡지 '패스트 컴퍼니(Fast Company)'는 이 회사를 구글과 애플, 페이스북, GE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innovative) 기업 랭킹 5위로 꼽았다.

아이데오는 나이키와 노키아, 아마존, 닌텐도, 프록터&갬블(P&G)을 제쳤다.

 

기자는 사무실 오른편 베란다로 나가면서 탄성을 질렀다.

코발트색 바다에 황금색 햇살이 반짝였다.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를 가로지르는 길이 13.5㎞ 베이브리지가 눈앞에 보인다.

보통 회사라면 중역 사무실이 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곳은 달랐다.

직원용 바(bar)라고 했다.

직원들이 회의도 하고 식사도 한다.

이곳에서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마우스가 탄생했고, 삼성전자의 LCD 모니터 디자인이 나왔다.

아모레퍼시픽과 SKT, LG도 여기에 디자인을 의뢰했다.

CEO 팀 브라운(Brown)은 청바지와 T셔츠 차림이었다.

그에게 왜 기업들이 아이데오에 열광하느냐는 질문부터 던졌다.

그는 "우리는 재무, 회계, 마케팅 시각으로 기업을 해부하는 MBA와 달리 인간을인류학적 관점에서 연구한다"고 말했다.

P&G도, MS도, 삼성도, SKT도 모두가 찾아가는 곳. 

천장엔 자전거가 매달려 있고 회의는 바다가 보이는 bar에서… 

예쁘게만 보이는 디자인은  더이상 디자인이 아니다.

역사학, 건축학, 엔지니어링 전공자들이 머리와 가슴으로 만든 명품  세상을 바꾼 혁신은 부둣가 창고에서 그렇게 태어나고 있었다. 

아이데오는 곧 아이디어다.

 


▲ 전세계 '이노베이션 공장'이라 일컫는 아이데오의 사무실엔 자전거가 사무실 천장에 높이 걸려있다.

한 직원이 장난삼아 통근용 자전거를 천장에 걸어놓았는데, 이게 전통으로 굳어졌다.

창의성을 강조하는 사풍(社風)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 아이데오 제공

 

'전세계의 이노베이션 공장'으로 일컬어지는 아이데오(IDEO)의 본사는 실리콘밸리의 심장부인 팔로 알토(Pal o Alto)에 있다.

그러나 아이데오 측은 기자에게 샌프란시스코 사무실 방문을 권했다.

아이데오의 특징을 더 '맛나게'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팀 브라운(Brown) 사장도 이곳 지사장 출신이다.

이 회사는 전세계에 8개의 사무실이 있지만 직원은 500명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P&G, 펩시콜라, 마이크로소프트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줄을 지어 찾아온다.

P&G의 앨런 래플리(Lafley) 회장은 이노베이션의 비결을 찾기 위해 전 임원을 아이데오의 캘리포니아 사무실로 보내 하루 동안 몰입 교육을 시키기도했다.

아이데오는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이렇게 유명해졌나?

아이데오의 디자이너 3명이 기자에게 성공 사례를 설명해 주었다.

크리스틴 헨드릭슨(Hendrickson), 다나 조(Cho), 선진 량(Ryang)이다.

모두 디자이너라는 명칭으로 부르지만, 경력은 다 달랐다.

각각 마케팅과 건축학, 역사학을 전공했다.

미대를 나온 사람만 디자이너가 된다는 상식을 깨는 아이데오의 창의력 양성 노하우를 여기서도 엿볼 수 있다.

 


▲ 샌프란시스코 베이와 연결돼 있는 베란다.

직원들은 바다를 바라보며 회의를 하거나 휴식을 취한다.

바다 건너편이 오클랜드다.

사진 오른쪽은 주방이다.

일하는 중 주방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해 먹을 수도 있다. / 아이데오 제공


3명의 디자이너는 먼저 일본의 자전거 부품 업체인 시마노(Shimano)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시마노는 2005년에 고민을 들고 아이데오를 찾아왔어요. 한때 1억6100만 명에 이르는 미국인이 자전거를 탔지만, 사람들이 갈수록 자전거를 외면하고 있다는 고민이었죠. 곧장 건축·기계공학·마케터 등의 배경을 가진 아이데오 직원 5~6명이 한 팀이 됐고, 이들은 자전거 판매점과 자전거 시장에 나갔습니다. 자전거 판매점원도 돼보고, 소비자 입장에서 자전거를 사보기도 했어요. 50명 소비자를 집중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결론은 '소비자들이 자전거를 싫어한다기 보다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자전거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 시절 자전거를 타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자전거 점포에 가 보면 새로운 기어 등 처음 들어보는 옵션을 설명하는 점원들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전거를 통해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염두에 없었던 겁니다."

현장 관찰에 이어 팀원들의 브레인스토밍이 끝없이 이어졌다.

토의 끝에 팀원들이 제시한 아이디어는 단순하고, 편안하고, 전통적인 디자인이면서 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이었다.

새 자전거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우선 허리를 깊이 숙이지 않고 편하게 탈 수 있도록 핸들을 높였고, 올라 타기 쉽게 크로스바는 낮췄다.

기어는 수동이 아니라 자동으로 고쳤다.

소비자들은 기어 변환을 귀찮게 여기고 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기어 몸체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

청바지에 기어의 기름이 묻을 걱정이 사라졌다.

브레이크는 손으로 작동할 필요가 없이 페달을 뒤로 돌리면 걸리도록 했다.

 


▲ 세계적인 자전거 부품회사 시마노가 아이데오와 협력해서 새로운 자전거 모델을 내놨다.

사진 속 자전거는 시마노 제의로 만들어진 트렉(Trek)사 제품이다.

페달을 뒤로 돌리면 브레이크가 작동되고 예전보다 핸들이 높아졌다.

시마노는 랄레이(Raleigh), 트렉(Trek) 등 세계 대형 자전거 제조회사들에 새 모델을 제안했고, 최근 1~2년 사이에 신제품들이 나왔다.

다나 조 씨는 "이 새로운 디자인의 자전거는 전세계로 확산 중"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 사례는 쇼핑카트다.

지난 2000년 미국 ABC의 인기 뉴스쇼 프로그램인 나이트라인(Nightl ine)은 아이데오를 상대로 색다른 실험을 했다.

쇼핑센터에서 사용하는 카트(cart)를 5일 만에 아주 새롭게 디자인해 달라고 주문한 것.

그날 아이데오의 엔지니어와 산업디자이너, 심리학, 건축학, 경영학, 언어학, 생물학을 전공한 직원들이 팀원으로 선발됐다.

이들은 그날로 매장에 가서 직접 고객이 돼 보고, 매장 직원들을 인터뷰했다.

다시 돌아와 한 일은 브레인스토밍.

새로운 카트는 상상을 깨뜨렸다. 새 카트는 여섯 개의 바구니를 끼워 넣을 수 있도록 개방 구조로 만들었다.

카트를 세워놓고 바구니만을 들고 매장 이곳 저곳을 다닐 수 있도록 한 배려였다.

롤러 코스터와 유모차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카트에어린이 의자도 만들어 넣었다.

컵 홀더 두 개를 달고, 카트를 옆으로 밀 수 있는 뒷바퀴도 달았다.

방송이 나간 뒤 아이데오 전화기는 불이 났다.

미국 전역의 사업가들로부터의 걸려온 문의 전화였다.

 

■ T자형 인재가 경쟁력의 원천

 

 

작은 거인(巨人) 아이데오가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팀 브라운 사장은 경쟁력의 원천은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가 원하는 인재는 전문가임과 동시에 보다 인간을 두루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를 'T자형 인재'라고 부릅니다. 전문적인 디자인 기술에 머물지 않고, 인간에 대한 다양한 교양을 지니고, 또 이를 종합할 수 있는 능력까지 있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 아이데오의 이노베이션 방법론을 요약하면 무엇인가요?

 

"인류학적 접근 방법입니다. 인간지향적인 접근 방식이라고도 하지요. 그래야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나올 수 있습니다. 맥킨지나 BCG 같은 컨설팅 회사는 재무나 회계, 마케팅 등 MBA(경영대학원)의 시각으로 기업을 해부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소비자들이 기업과 상품을 바라 보는 시각 그 자체를 추구합니다."

 

인류학적 접근은 관찰에서 시작한다. 남태평양 문화를 연구한 마가렛 미드 등 문화인류학자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아이데오의 창업자 톰 켈리(Kelly)는 저서 '이노베이터의 10가지 얼굴(The ten faces of innovation)'에서 인류학적 관찰 방법을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만약 기차역에서 청량음료를 더 팔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려면 기차역에서 서성거리는 잠재 소비자들을관찰해야 한다. 문화인류학적 시각으로 살핀다면, 대부분 사람들이 플랫폼에 서서 고개 너머로 음료수 매점을 바라보고, 손목시계를 바라보다가 기차가 들어오는지 살피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승객들이 뭔가 마실 것을 사고 싶은 욕망과, 기차를 놓치고 싶지 않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한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그렇다면 청량 음료 판매대 옆에 커다란 시계를 갖다 놓는다면? 승객들은 시계도 보고 동시에 음료 판매대로 볼 수 있다. 결국그 기차역의 음료 매출이 상승한다."

 


▲ 미국 ABC방송에서 의뢰해서 나온 쇼핑카트. 6개의 바구니를 카트 안에 끼워넣을 수 있게 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을 관찰하고 사람을 이해하는 일"

 

- 앞으로 아이데오는 얼마나 커질 것으로 보시나요?

 

"몇 년 전만 해도 직원이 100명뿐이었습니다. 주문이 늘면서 지금은 어느새 500명으로 늘었어요. 우리 회사의 실적은 직원들의 능력에 의해 좌우됩니다. 지금도 수백 개에 달하는 경영대학원(MBA)에서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지만, 우리가 찾는 T자형 인재를 찾기는 정말 힘듭니다. 이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디자인 스쿨은 굉장히 적고요. 우리는 성장보다는 성장을 일으킬 수 있는 직원을 구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아이데오의 입사 경쟁은 치열하다.

지난해엔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3000여 명이 지원서를 냈다.

아이데오는 대학이나 대학원을 갓 졸업한학생이 아니라, 관련 업종에서 실적을 낸 인재를 뽑는다.

 

 - 요즘 인재 시장에 나오는 비즈니스스쿨 졸업생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MBA는 경영 과정에서 돌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워야 하고, 창의적으로 사업을 벌이는 것도 가르쳐야 합니다. 수학적 논리에 의한 의사 결정은 성공을 거두기 힘듭니다. 하지만 요즘 MBA의 커리큘럼도 많이 바뀌는 것으로 압니다. 교과 과정에 이노베이션 관련 내용이 늘어났습니다. "

 

 


▲ 삼성이 아이데오와 협력해서 만든 LCD 모니터.

공간을 잘 활용하고 고급 이미지를 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샌프란시스코, 팔로 알토, 시카고, 런던 등 전세계 500여명의 직원들 중에 MBA 출신은 소수에 불과하다.

대신 산업디자인, 건축학, 역사학, 엔지니어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팀원들이 나름대로의 배경을 바탕으로 관찰하고 의견을 내며 함께 프로젝트를 이끌어나간다.


팀 브라운 사장 본인 역시 MBA 출신이 아니다.

영국 왕립예술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했다. CEO가 되려면 MBA를 가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을 가리키며 "나를 보라"고 했다.

 

- 디자인 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전문 지식은 물론이고 인간의 본성을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요?

 

"세상을 잘 관찰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각자 어떤 점을 느끼는지를 잘 이해해야 하고요. 결국 사람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 당신이 겪은 경험 중에서 인상 깊었던 것을 꼽으라면?

 

"최근 몇 년간 강한 인상을 받고 있는 곳이 인도입니다. 첸나이, 뭄바이, 벵갈루루 등을 두루 다녔습니다. 많은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최근 수년간 인도 사회에 엄청난 이노베이션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시각적인 면에서도 볼 게 많습니다. 사원에 가 수천년 전에 만든 불상(佛像)을 보고 느낀 게 많았습니다. "

 

"그토록 공부시키면, 창조적 발상이 나올까요?" 

 

■ '아이데오'CEO 팀 브라운이 보는 한국 


아이데오는 한국에도 고객 기업이 많다.

팀 브라운 사장은 한국과 한국 기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방과 후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수학, 영어 등 과외 공부를 시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에게 딸이 있는데, 학교에서 물론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방과 후에는 되도록이면 지적으로 탐구하고 각종 경험을 쌓도록 기회를 주려고 노력합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그대로 놔두는 거지요. 그래야 경험을 넓힐 수 있고 창의성을 기를 수 있습니다. 너무 타이트하게 아이들을 공부시키면 기존 사회 구조에 몰입되고 맙니다. 이미 일본 등 아시아 국가에서도 교육 방법이 바뀌고 있습니다. 예전의 꽉 짜인 학업 위주의 교육보다 경험을 중시하는 체제로의 변화를 말합니다."

 

- 한국 고객들도 많이 오나요?

 

"LG, 삼성, SKT, 아모레퍼시픽,현대카드 등과 일했습니다. 한국 기업의 특징은 대부분 한창 글로벌화되고 있는 중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많은 기회를 얻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변화는 삼성 등 한국의 제조업뿐 아니라 서비스 회사들도 디자인 이노베이션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세계 공통의 현상입니다. 유럽, 미국, 아시아의 서비스 기업 모두가 디자인 이노베이션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

 

- 한국 기업들에 느낀 점이 있다면?

 

"한국 기업인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에너지가 넘칩니다. 한국 기업인들은 이곳에 오면 큰 아이디어를 찾습니다. 또 다른 아시아 기업과 달리 아이디어가 있으면 그걸 바로 행동으로 옮깁니다. 중국 기업인을 만나보면 그들은 의외로 일본 기업이 아니라 한국 기업을 존경한다고 말하며 삼성 등 한국 기업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 기업의 장점은 두 가지입니다. 스피드, 그리고 위험을 감수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 한국 기업들에 조언을 한다면?

 

"기업들이 당면한 문제는 진짜 고객들이 원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기업들이 직면한 문제는 매우 복잡합니다. 단순하게 뽑아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엔지니어, 마케터, 그래픽 디자이너 등이 모두 협업을 통해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

 

- 한국에도 지사를 차릴 계획이 있나요?

 

"누가 알겠습니까? 언젠가 열지 모르지요.(웃음)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외국 기업들이 아이데오를 찾아오는 것은 글로벌 시장 공략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곳 캘리포니아가글로벌 시장을 연구하기에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국내 시장 공략을 위한 한국 기업들의 요구가 많아진다면 (한국에 지사를 차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병원 대기실, 프라다 탈의실까지 바꿔버렸다 

 

■ '아이데오'의 서비스 디자인 

 

디자인의 영역은 상품에 국한되지 않는다.

병원·금융회사·통신회사 등 서비스 기업들이 고객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찾는 데도 디자인이 필요하다.

이른바 '서비스 디자인'이다.

다만 결과물이 눈에 띄는 형태로 나타나는 상품 디자인과 달리 서비스 디자인은 결과물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요즘 학계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사례를 들어 보자.

2003년 미국의 대형 의료기관 카이저 퍼머넌트(Kaiser Permanente)는 서비스 개선 방법을 찾기 위해 아이데오를 찾았다.

아이데오 프로젝트 팀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상품 디자인과 마찬가지로 소비자(환자) 관찰이었다.

스스로 환자 입장이 돼서 병원 내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아이데오는 환자와 환자 가족들이 접수 창구나 대기실에서 엄청난 불편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 어린이나 노인, 이민자들처럼 보호자가 필요한 환자들이 병원을 방문할 경우 환자와 보호자가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 점도 문제였다.

환자 혼자 진찰실에서 반나체로 20~30분간 누워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따라 아이데오는 보다 편안한 대기실, 그리고 환자와 가족 3~4명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보다 큰 진찰실을 제안했다.

아이데오는 또 간호원들의 교대 근무 때문에 환자들이 겪는 불편도 눈여겨봤다.

A간호원에게 이미 "등이 아프다"고 했는데, 교대 근무로 새로 들어온 B간호원에게처음부터 다시 설명하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었다.

아이데오는 환자 정보를 인수·인계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을 제안했다.

1991년 '데이빗 켈리(Kelley) 디자인' 등 3개의 디자인 회사가 합병해서 아이데오를 설립할 당시엔 상품 디자인이 주축이었다.

그러나 아이데오는 점차 금융 상품 제안, 공공기관 캠페인, 의료 기관 서비스 등 다양한 영역으로 디자인 개념을 넓히고 있다.

아이데오의 작품 중에는 명품 브랜드 프라다(Prada) 뉴욕 대형 매장의 드레싱룸도 있다.

이곳을 찾은 손님들이 옷을 입어보기 위해 드레싱룸에 들어가면 '매직 거울'을 만난다.

그곳에 장착된 카메라는 손님의 뒷모습을 촬영해 4초 뒤에 보여준다.

새 옷을 입은 자신의 뒷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뒤돌아서 거울을 향해 고개를 힘들게 돌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T자형 인재

 

특정 분야의 전문가임과 동시에 자신과 무관한 다른 분야까지 폭넓은 지식을 보유한 사람을 말한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공학박사 등이 대표적이다.

알파벳 T자 모양처럼깊이뿐 아니라 폭도 넓어야 한다는 의미다.

자기 분야는 잘 알지만 다른 분야의 일은 모르는 'I'자형 인재와 대비된다.

GE, 도요타, 삼성 등 세계적인 기업들은 T자형 인재를 핵심 인재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생각 > 내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 5 현제  (0) 2010.09.18
세일럼(Salem)의 마녀사냥 + 중세유럽의 마녀사냥  (0) 2010.09.15
사이코패스 Psychopath  (0) 2010.09.08
아부그라이브(이라크전 포로 학대)  (0) 2010.09.08
스탠포드 감옥 실험  (2) 2010.09.08
Posted by WN1
,


백과사전에서의 사이코패스

사이코패시(Psychopathy)는 인격적 결함의 일종으로 반사회적 인격장애 중의 하나이다. 원인은 뇌의 전두엽의 이상이 오는 것 때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증상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사이코패스(Psychopath)라 부른다.


확립

19세기 프랑스 정신과 의사 필리프 피넬이 사이코패시 증상에 대해 최초로 저술하였고, 1920년대 독일의 심리학자 슈나이더가 사이코패스의 개념을 설명했다. 캐나다의 심리학자 로버트 헤어는 사이코패스 판정도구(PCL-R)를 개발하고 '진단명 사이코패스'라는 책을 저술했다.

 증상

사이코패스들은 감정을 관여하는 전두엽이 일반인들처럼 활성화되지 않기 때문에 감정을 느끼는 데 매우 미숙하다. 상대방의 입장을 해아리지 못해 이기적이며, 대단히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행동을 한다. 대부분의 사이코패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연쇄살인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미국의 경우, 사이코패스의 인구가 500만 명 정도 되는데 그중 살인자는 몇만 명뿐이다.) 폭행이나 상습 절도, 강도같은 범죄를 우발적으로, 연속적으로 일으켜서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경우가 많다. 거짓말에 매우 능하고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나도 눈 하나 꼼짝하지 않으며 곧바로 다른 거짓말을 생각해내기도 한다. 뻔뻔하게 어떤 말이든지 아무렇지 않게 내뱉기 때문에, 매우 무식한 사람이라도(사이코패스는 대체로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 충동적인 성격이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을 막는다.) 아주 박식하고 매력적이며 유능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사이코패스는 주어진 환경적에 따라 다양하게 발현한다. 그렇기때문에 정치계나 업계의 상위 계층에 속한 사람들에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계산적인 행동과 표정과 말투로 사회에서 능숙히 섞여지내고 환경에 따라 발현되는 정도가 달라 범죄를 했을때만 사이코패스를 일반인과 구분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진다. 그래서 보통 사이코패스를 '반사회적 인격장애' 라 부르기도 한다.

 사이코패스의 대표적 사례

대한민국에서는 대표적으로 연쇄살인범 유영철정남규, 강호순, 김윤철, 보성 연쇄살인 어부 오종근, 영암 연쇄살인범 이향열 등이 있다. 그들은 PCL-R 검사에서 40점 만점에 28점 이상의 점수를 받았다.[1]


psychopath

사이코패스

 


'사이코패스(psychopath)' 는 독일학자 슈나이더가 1920년대에 소개한 개념이다.

독일어 발음으로는 '프시코파트' . 간단히 말해 '성격 탓으로 인해 자신.타인이나 자기가 속한 사회를 괴롭히는 정신병질(精神病質)' 을 말한다

 

"사이코패스"라는것은 쉽게 설명하자면 A가 B라는 자신과 아무관계도 원한도 없는 자에게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정도로 난폭한 행동을 취하며 폭행을 했다던가 눈을 돌리고 싶을정도로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를 했다거나 한마디로 어떤 사회악적인 행위를 태연히 벌리면서 그행위에 대한 죄책감과 상식적인 도덕심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흔히 아무런 악의도 없는 순진한 아이가 잠자리의 날개를 태연하게 뜯어내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던가 어린아이가 연못의 개구리를 보고 커다란 돌을 던져 괴롭히며 즐거워하는 심리상태에서 좀더 추악하게 발전한듯한 느낌이랄까..

 

 



 

얼마전 유영철이 죄없는 여인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하고도 그 잔인하고 추악스러운 행위에 대해서 오히려 자신이 "왜?"내가 뭘 잘못했는데?""그냥 여인들이 미워서 그랬는데 어쩌라구"등의 죄책감이 결여된 태연한(난 솔직히 유영철의 이런심리에 구역질부터 났다.)

태도를 일관하여 많은 사람들의 충격을 터뜨리게한 작태도 사이코패스에 포함된다고 볼수 있지 않을까?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건 우리 사회에서의 얼마나 많은 사이코패스심리가 도사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다..

 

이순간 어디에선가 사이코패스의 심리를 보이며 죄없는 급우나 학우를 폭행하고 태연히 괴롭히며 즐거워하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길거리에서 배고파하며 끙끙거리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잔인하게 괴롭히며 즐거워하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역시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넘쳐나는 엄청난 양의 미디어와 무방비하게 노출되는 사회의 썩은 모습의 단면....

우리 아이들은 요즘 너무나 무방비하게 이런 어두운 경로를 접하고 노출되며 자신도 모르게 쇄놰당한채 결국 인간이 가져야할 지극히 정상적인 도덕감을 결여당한채 성장하고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악함"이라는 심리를 가진채 사이코패스의 한부분으로 자라버리는건 아닐까? (물론 그저 단순하게 정신병적인 측면에서 볼수도 있지만)

요즘 뉴스를 보면 길가는 여자아이를 잔인하게 성폭행하고 살인한채 유기해서 길거리에 버린다던가 등의 살벌하고 무서운 뉴스가 매일 쏟아져 나온다.역시 사이코패스의 한단면을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어쩌면 이 사이코패스라는 심리는 우리 사회 모든 사람들에게 어둡게 도사리고 있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죄를 지어놓고도 도덕감을 구별하지 못한채 태연히 웃어가고 웃어가며 길을 걷는 모두의 모습, 넘쳐나는 매스미디어의 홍수속에 무방비하게 노출되며 자라나고 썩은 사회의 모습을 지켜보며 성장해야하는 아이들..

 

 이 사이코패스를 보이는 범죄자들의 대부분은 유년기에 어둡고 어두우며 끔찍한 과거의 트라우마를 입은채 냉혹한 사회속에서 절망한채 성장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쉽게 말해 부모에게 상상하기도 끔찍한 폭행을 매일매일 당하며 울음을 터뜨린채 하루 하루를  겁에질려 보내야만 했던 아이들같은 경우 자라나서도 자신의 아이에게 당연한듯 폭행을 일삼는 경우도 사이코패스의 일종이라고 봐야한다.)

 

나는 가끔 우리가 살아가는 이사회가 너무나 무섭고 두렵게 느껴질때가 있다.

내옆을 지나가는 사람도 이런 심리를 지녔을테고 나역시 사이코패스 심리를 지닌채 태연히

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이기도 할테니.

 



 

이 사이코패스중에는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라는 또다른 모습의 범죄도 존재하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주변에는 이유없이 남을 괴롭히면서 자기만족을 느끼고,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며,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양심의 가책이라고는 조금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이 혹시 사이코패스일 수도... 이들의 전반적인 특성에 대해 알아봅시다.

 



 

사이코 패스에 대하여

 

 

1. 사이코패스의 원인은 무엇인가?


정확히 원인이 규명되지는 않았으나,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를 종합해 보면 유전적인 면과 환경적 측면이 모두 주요한 요인인 것으로 추측된다. 유전적인 측면에서는, MAOA라는 유전자의 활성화 정도가 낮은 경우 세로토닌이라는 물질의 분비가 감소하게 된다. 세로토닌은 전두엽에 작용하는 호르몬 요소들 중 하나로서 전두엽의 활성화에 영향을 미치고, 공격성과 밀접한 상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세로토닌이 감소하면 전두엽의 활성화 수준이 낮아지고, 그에 따라 공격성은 증가하게 된다. 세로토닌 분비를 통제한 쥐와 정상 쥐를 같은 장소에 넣고 관찰한 결과, 세로토닌 분비를 차단한 쥐가 정상 쥐를 죽을 때까지 공격하는 것이 관찰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종단연구를 한 결과는 MAOA유전자가 사이코패스의 원인일 것이라는 점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낮은 MAOA유전자 수준이 사이코패스와 정적인 상관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행동유전적 측면을 해석할 때 주의해야할 점과 마찬가지로 MAOA가 사이코패스의 원인이라고 확정짓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된다.

물론 유전적인 측면만으로는 사이코패스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관련 연구자들은 MAOA의 낮음이 사이코패시를 발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적인 속성을 가지며, 유년기 학대 경험, 범죄 경험, 범죄에 노출되기 쉬운 환경적 조건 등의 요인들(기타 범죄자들의 환경 요인들과 유사하다.)과 유전적 측면이 상호작용하여 사이코패스를 만들어낸다는 설에 의견을 모으고 있다.




2. 사이코패스의 특징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한마디로 R. Hare박사의 말대로 "양심이 없다. Without consciousness"일 것이다. 이들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놀랄 만큼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며,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무관심하다. 타인의 감정상태를 추론하는 능력이 매우 떨어져서 사람의 표정을 제시해 주고 그 사람의 감정을 추론하는 능력을 테스트해본 결과 사이코패스 집단은 일반 집단에 비해 현저히 낮은 추론 수준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특성들은 무감각하고 무책임하게 타인들을 괴롭히고 착취하게 하는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동정심도 없다. 또한 타인들과의 정서적 유대도 잘 맺지 못한다.

반면 자신의 감정이나 고통에 대해서는 무척 예민하게 반응한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위협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냉담하고 잔혹한 반응 특성을 보이며, 감정적 폭발을 보여 폭력적인 행동 특성을 나타낸다. 게다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에 대해서는 관심이 깊다. 이기적이고, 또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거짓말도 거리낌없이 한다. 이들에게 있어 타인들(심지어 가족들조차도)은 자기 이익의 도구일 뿐이다. 성적 측면에서도 매우 문란하여 아무하고나 되는대로 관계를 가지려고 한다.

사이코패스들의 언변은 유창하나, 자세히 들어보면 앞뒤가 혼란스러운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검사의 자백 요구에 대해 사이코패스 범죄자가 "아, 내가 안그랬다니까! 아...젠장...그 때 그자식의 머리를 날렸어야 하는데"라고 하는 경우 등), 이와 관련한 신경학적 원인 중 하나로 추측되는 것이 바로 양측성 언어장애이다. 사이코패스의 뇌를 fMRI로 촬영, 관찰한 결과 이들은 언어 활동을 할 때 양반구의 측두엽이 모두 활성화되는 특징을 보였다고 한다(측두엽에는 언어기능을 담당하는 신경계가 집중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좌측두엽이 언어 기능을 담당한다.). 양반구의 언어 활동에의 동시 작용으로 인해 모순적인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인생 설계가 매우 거창하고 비현실적이며, 인생 목표를 몇십 차례고 바꾸는 면도 있다. 장기적인 계획을 잘 세우지 못하며(이건 순전히 필자의 추측인데, 전두엽 활성화 수준의 낮음이 장기적 계획을 짜는 사고 능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두엽은 장기적 목표를 조직하는 사고와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생설계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3. 사이코패스와 일반 정신질환자들의 주 차이점


사이코패스와 일반 정신질환자(정신분열, 공황 등)의 주요한 차이점은 사이코패스들에게서는 비합리적인 사고, 망상 등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언변이 유창한 편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평소에 사이코패스들의 이상한 점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4. 사이코패스 범죄의 특징


유영철이 희대의 사이코패스로 알려지면서 사이코패스들이 주로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이들이 주로 저지르는 범죄는 절도와 사기이다. 특히 자신의 유창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속여서 사기를 치는 경우가 매우 많다고 한다. 다음으로 강간이 많으며, 살인은 생각보다는 높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쇄살인사건의 범인들이 주로 사이코패스라는 점은 비교적 일관성 있게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범행 대상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보다는 주로 모르는 타인들을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사이코패스의 범행 동기는 사리사욕을 추구하기 위하는 것이 주가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에 비해 감정적인 측면(폭발적 분노 등) 때문에 나타나는 범죄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5. 사이코패스 진단은?_ PCL-R Factors 척도


사이코패스를 판별해내는 진단 기준은 R. Hare가 제작한 PCL-R(Psychopathy CheckList- Revised)척도를 사용한다. 3점 척도(0, 1, 2), 20문항, 40점 만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기보고식 설문 형태가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 과정을 거친 자에 의한 관찰 및 인터뷰, 생활 기록 조사 등을 통해 점수가 기록되게 된다. 40점 만점 중 30점 이상의 경우(북미의 경우) 사이코패스로 판정하게 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PCL-R의 재범예측률은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나며, 반복 측정 시에도 높은 수준의 신뢰도를 보이고, 횡문화적 일관성도 비교적 높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사이코패스 진단 도구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이야기를 Hare 박사의 강연 때 직접 들었던 것이고, 따라서 이 말은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횡문화적 일관성은 Hare박사가 주장한 대로 안정적으로 나타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다.)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이 매우 부정적이고, 도덕적으로 지탄받으며, 치유 가능성이 극도로 낮다는 점 때문에 낙인stigma으로 인식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진단을 내릴 때에는 충분한 훈련을 받은 전문가에 의해 주의 깊게 관찰된 후 신중하게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냉담하거나 이기적인 특성을 보인다고 해서 특정 인물을 "사이코패스"로 낙인찍는 일은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6. 해결책은 없는가?


정말 난감하고 절망적인 이야기이긴 하나, 현재까지 시도되었던 사이코패스 치료 프로그램 같은 것은 모두 쓸모가 없거나, 심지어는 부적 상관을 나타내기도(즉, 오히려 프로그램 후 재범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이코패스들이 프로그램을 냉담하게 받아들이며, 오히려 프로그램 내용을 범죄의 도구로 이용하게 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현재로서는 사이코패스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로서는 사이코패스로 성장하게 만드는 요인들을 제거하는 방법 외에는 뚜렷한 대책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7. 우리 주위에도 사이코패스가?


Hare박사에 의하면 사이코패스는 전체 인구의 1%가량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Hare박사가 강연 때 농담조로 "여러분들이 지금 300명 있네요. 당신들 중 3명은 사이코패스일거야." 라고 하기도 했다.) 이러한 확률을 받아들인다면 주위에 사이코패스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셈이다.

 

 

 

- kbs, "악의 가면, 사이코패스"
- R. Hare/조은경, 황정하 역, "진단명: 사이코패스"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3473779');



-----------

wn1 - 아래의 5단계는 태어난 사이코패스일 수 도 있고, 만들어진 사이코패스일 수도 있겠지요..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는 두 가지의 사이코 패스가 모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최민식씨가 연기한 사이코 패스는 아마도 선천적인 사이코 패스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병헌 씨가 연기한 사이코패스는 후천적인 사이코 패스 일 것입니다.

또다른 영화 '익스페리먼트'에서는 짐 바르도 교수의 스탠포드대학 감옥실험에서의 과정을 영화로 만들어 냈는데,, 두 가지 버전의 영화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독일인지 러시아인지 헷갈리는데요.. 그곳에서 만든 익스페리먼트가 있고, 헐리웃에서 만든 익스페리먼트가 있습니다.

두 가지 영화를 보면 아무래도 전자가 더 낳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를 만든 감독의 해석의 차이가 있는데,, 짐 바르도 교수의 실험의 의도인 인간의 관념의 변화를 잘 읽어낸 영화는 첫 번째 영화였던 것 같습니다..

헐리웃 영화는 아무래도 피튀기는 액션들이 많더군요...

사실 사이코패스에 대해 조사해보기 전에 영화 '악마를 보았다'를 보고는 

여러가지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누가 악마일까? 에서 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의구심들...그리고 얇은 지식으로 내린 결론은 영화에서 이병헌씨가 연기한 인물이 '악마'이다 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만들어진 악마의 악마성은 처음부터 가진 악마보다 더욱 악마스러울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였고...아! 그럼 나 역시도 악마가 안된다는 보장을 할 수 없구나...

그러면서 아부가리브 교도소에서 미군들이 이라크인들을 학대하는 장면들이 떠 올랐고.. 그들역시 평범한 사람으로 군에 입대하여...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을 그렇게 만들건 정부와 군의 지침서에서 시작되었지만...

EBS에서 하는 다큐 중에 몇 가지도 떠 올랐습니다..인간의 두 얼굴 같은 내용인데요...

사람은 누구나 교육의 유무와 는 상관없이상황에 의해 좋을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는것...

참....아이러니 합니다... 아무리 도덕적인 교육으로 무장을 하더라도...그럴 수 있다는 것이..

'나'라는 자신이 무섭기도 하고... 저러한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 볼 수있을까 생각도 하였습니다... 물론 한국은 일제시대를 통해 비인륜적인 만행을 겪었기도 하였지요... 그 당시 일본인들은 참 죽이고 싶을 정도로 만행을 저질 렀는데... 과연 지금의 우리가 그러한 일본인의 상황에 처했다면 어떠했을까... 깊이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가 없네요...


사이코패스가 되는 5가지 단계

 

 

 1. 우월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특정 계층의 사람들에게 반감을 가진다.

 

 사이코패스의 가장 흔한 유형이 여성을 증오하여 불특정한 다수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살해하는 여성혐오주의적인 사이코패스입니다.

 사이코패스는 유명철이나 강호순처럼 여성에 대한 극단적인 분노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미국의 사이코패스도 불특정한 여성을 대상으로 살인행각을 벌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강호순이나 유영철같은 불특정한 다수의 여성들을 살해한 사이코패스는 대부분 남성우월주의적인 성향이 강해 여성들에게 큰 상처를 받아 좌절하게 되어 극도의 분노를 느껴 사이코패스가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유영철의 경우는 아내의 변심으로 상처를 받아 사이코패스가 된 것으로 알려졌고, 강호순의 경우는 사이코패스가 된 이유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여성을 연쇄살해한 다른 사이코패스의 성향을 볼 때 여성에게 상처를 받아 사이코패스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지요.

 

 

 2.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을 타인의 탓으로 돌린다.

 

 유영철의 경우, 아내에게 상처받아 사이코패스가 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내에게 상처받아 연쇄살인행각을 벌인 그를 볼 때 과연 자신의 잘못은 없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남성우월주의적인 사이코패스를 어떤 여자가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사이코패스들은 성격적인 결함이 있어 불행해지는 경우가 많지만, 모든 책임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며 피해의식에 빠지는 경우가 많지요.

 

 

 3. 병적인 피해의식에 빠져 자신이 불행해진 원인을 불특정한 다수에게 찾는다.

 

 사이코패스의 공통점은 피해의식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사이코패스를 보면 자신이 가해자이면서도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라고 말하여

병적인 피해의식을 드러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여성혐오주의적인 사이코패스는 자신이 잘못해서 아내나 연인을 떠나게 만들고도 아내나 연인이 변심해서 자신이 이렇게 되었다며 아내나 연인을 원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자신의 잘못은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불 수 있지요.

 사이코패스는 병적인 피해의식으로 자신이 불행해진 원인을 타인에게서 찾습니다.

 결국 병적인 피해의식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믿어지는 불특정 다수의 계층에 대해서 살인총동을 느낄 정도의 극단적인 증오심을 불러 일으키게 되지요.

 

 

 4. 불특정 다수에 대해서 분노가 폭발하여 살인충동을 느낀다.

 

 피해의식에 젖은 사이코패스는 자신의 불행을 불특정 다수의 계층의 탓으로 생각하여 불행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면 갈수록 증오심이 깊어져 살인총동을 느끼게 됩니다.

 여성혐오주의적인 사이코패스의 경우, 불행한 결혼생활이나 여자친구에게 차였거나, 좋아하는 여성에게 사랑을 거절당했을 때의 상처가 여성 전체에 대한 원망과 증오로 바뀌면서 매력적인 여성들을 보면 증오심이 불타오르게 되지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여성과 만난 적도 여성들을 동일시하여 매력적인 여성을 보면 살인충동을 느끼거나 자신에게 상처를 준 여성일 연상시키면 살인충동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5. 치밀한 범행계획을 세운 후에 실행에 옯긴다.

 

 사이코와 사이코패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사이코는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지만, 사이코패스는 치밀한 계획을 세운 후에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화성연쇄살인 사건도 사이코패스의 범행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치밀한 범죄로 증거조차 남지 않아 아직도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지요.

 미국에서도 수많은 연쇄살인이 미해결 수수께기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이코패스는 증거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의 치밀한 범죄를 계획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이코패스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우월감에 빠진 사람이 좌절한 후에 피해의식에 빠져 사이코패스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성우월주의적인 성향이 있는 남자가 사이코패스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요.

 이러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사람이 범죄하기 전에 교화시키려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고, 잘못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판단능력을 길러주어야 될 것 같습니다.


-----------









#.소시오패스




----------

사이코패스의 10가지 공통적인 특징

사이코패스의 대다수는 남자입니다.

 여자 사이코패스는 그리 많지 않지요.

 사이코패스는 남성우월주의자에 여성혐오주의자인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 피해의식이 강해 자신을 피해자로 여기고 여성을 가해자로 여겨 여성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로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범행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이코패스는 이성교제 실패나 결혼 실패를 통해서 여성을 이유없이 증오하다가 심해지면 사이코패스가 되고 어떤 계기를 통해서 범죄를 계획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사이코패스와 사이코의 차이점은 사이코패스는 자신의 범행을 자제할 능력이 있지만, 계획적으로 범죄를 저질로 죄의 책임을 지지만, 사이코는 자신의 범행을 자제할 능력이 없어 죄를 지어도 죄의 책임을 지지 않는 경우가 많지요.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성형만 사이코패스도 있는데, 감화받아 정상인이 될 수도 있고 폭발하여 사이코패스형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이코패스를 감성적인 교육으로 감화시켜 범죄를 사전에 예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미국과 한국에 알려진 사이코패스를 통해서 사이코패스의 10가지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이코패스의 10가지 공통적인 특징

 

 

 1. 남성우월주의자다.

  

 사이코패스의 대부분은 남성우월주의자입니다.

 사이코패스는 남성우월주의적인 사고로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남자에게 상처를 주거나 변심하는 여자는 죽어마땅하다는 식의 극단적인 남성우월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경우가 많은데,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사고가 무서운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요.

 

 

 2. 여성혐오주의자다.

  

 여성혐오주의자는 여성 전체를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미워하는 남자를 말하는데, 여자를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남자에게 복속된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남자에게 복속된 존재인 여자가 변심하여 남자친구를 배신하는 것을 마치 천륜을 어긴 범죄행위처럼 간주하여 여자친구나 아내가 변심하면 배신심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사이코패스가 되는 경우가 많지요.

 실제로 사이코패스를 보면 여자친구나 아내의 변심에 이성을 잃고 사이코패스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유영철이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유영철은 아내의 변심에 무고한 여성들을 연쇄살인했는데, 여성혐오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지요.

 여성혐오주의자는 길가다가 여자가 미끄러져 넘어지거나, 신문이나 티비나 인터넷같은 매체를 통해 여자가 다친 뉴스를 보면 통쾌해 하거나 인과응보라는(아마도 남자에게 상처를 준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여) 황당한 반응을 하는 경우가 많지요.

 

 

 3. 성도착증이 있다.

 

 사이코패스는 성도착증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성도착증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여자의 속옷이나 구두, 스타킹 등 여성들이 지닌 물건에 이상 반응을 하는 페티쉬즘, 야동에 집착하는 야동증후군, 훔쳐보는 것에 집착하는 관음증 등 정상적인 행동에서 벗어날 정도로 뭔가에 집착하다가 어디선가 본 것을 모방해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4. 새디즘이 있다.

 

 새디즘은 이성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가하여 성적인 만족을 얻는 비정상적인 성욕을 말하는데, 이러한 성향이 있는 사람을 새디스트라고 합니다.

 새디즘을 가지고 있다고 모두 사이코패스는 아니지만, 사이코패스는 새디즘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이코패스는 피해자를 괴롭히면서 쾌감을 얻는 새디스티인 경우가 많지요.

 

 

 5. 완전 범죄를 꿈꾼다.

 

 사이코패스와 사이코와 가장 큰 차이점은 사이코패스는 치밀한 범죄를 계획한 후에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지만, 사이코는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이코냐 사이코 패스냐는 범죄가 충동적이었느냐 계획적이었느냐에 따라 판가름나는 경우가 많지요.

 

 

 6. 남성으로서의 자존심이 병적으로 강하다.

 

 사이코패스는 남성으로서의 자존심이 병적으로 강해 여자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면 분하고 억울해서 일탈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데이트 신청을 했는데, 여자가 거부하면 몹시 격분하거나 여자에게 고백했을 때 거절당하면 몹시 화를 내는 남자가 있는데, 이런 것이 심해지면 자신의 사랑을 거절한 여자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면서 범죄를 저지를 때가 많지요.

 가끔 뉴스를 보면 남자가 데이트 신청을 거절한 여자를 폭행해서 쇠고랑을 차는 뉴스를 볼 수 있는데, 남자로서의 병적인 자존심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7. 성격장애가 병적으로 심하다.

 

 사이코패스는 조그만 일에도 흥분하여 이성을 잃을 정도로 성격장애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자는 이러한 성격장애가 있는 남자를 좋아할리가 없기 때문에 사이코패스는 여성들의 외면을 당할 수 밖에 없지요.

 하지만 자신의 성격장애를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여성들이 자신을 외면하는 사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며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8. 대단히 폭력적이지만 위선적으로 폭력성을 감춘다.

 

 사이코패스는 툭하면 폭력을 휘두들 정도로 폭력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는 폭력적이지만 더 큰 범죄를 위해 폭력성을 감추기도 하지요.

 실제로 사이코패스는 대단히 폭력적이면서도 강호순처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주변의 이웃에게는 친절한 남자로 기억되어 주변 여성들의 호감을 사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9. 피해의식이 병적으로 강하다.

 

 사이코패스는 가해자이면서도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할 정도로 피해의식이 강합니다.

 여자들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거나, 사회가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거나, 주변 환경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거나, 가해자인 자신을 피해자로 생각할 정도로 피해의식이 강하지요.

 지나친 피해의식으로 자신의 범죄를 남탓이나 사회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10. 자신의 범죄에 대해 죄책감이 없다.

 

 사이코패스는 극단적인 남성우월주의자거나 피해의식이 강해 자신의 잘못에 대한 죄책감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죄책감을 가질 정도의 양심이 살아있다면 반인륜적인 사이코패스가 되지도 않았겠지요.

 자신이 범죄를 여성이나 사회의 책임으로 돌리기 때문에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질로도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라는 생각으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대부분이지요. 

 

 

 모든 사이코패스가 이런 성형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사이코패스들은 위의 10가지 성향을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사이코패스는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성에게 상처를 받은 후에 병적인 피해의식을 가져 자신의 범죄를 복수의 개념으로 생각하여 반인륜적인 죄를 짓고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경우가 많지요.

 사이코패스의 출연을 막으려면, 남녀평등에 대한 인식이 사회에 정착되어 여자는 남자에게 복속된 존재라는 남성우월주의자들의 삐뚫어진 여성관을 먼저 바로 잡아야 될 것입니다.


----------------

영화 속 사이코 패스 유형 분석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을 뜻하며, 평상시에는 다른 사람과 다름없이 행동하기 때문에 그들이 정신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채기 힘든 것이 특징입니다.
 
이들은 감정을 지배하는 전두엽 기능이 일반인의 15%밖에 되지 않아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 범죄자보다 재범률도 높고 연쇄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훨씬 높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영철, 강호순 등이 대표적인 사이코패스 범죄자로 꼽힙니다.

평소에 친절하던 사람이 갑자기 짐승으로 돌변한다면? 극단적인 행동 변화 때문에 우리에게 더욱 두려움을 주는 사이코패스들. 오늘은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영화와 그들의 행동 및 성격을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양들의 침묵 - 한니발 렉터(안소니 홉킨스)

한니발 렉터는 사이코패스들 중 가장 무서운 타입이 아닐까 싶습니다.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할 만큼 똑똑한 머리에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취향, 물 흘러가는 듯한 말솜씨까지 모든 걸 갖추고 있지요. 하지만 자신의 미학에 약간이라도 어긋나는 사람이 있으면 잔인하게 살해하고 그 인육을 먹는 것(카니발리즘)을 즐기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최근 개봉작인 한니발 라이징을 통해 그의 어린 시절 및 사이코패스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2. 쏘우 - 직쏘(토빈 벨)

사람들을 폐쇄된 공간에 몰아 넣고 그들의 목숨을 잔인하게 앗아가는 살인마 직쏘. 그의 사이코패스적인 성향은 정교하게 제작된 살인 트랩으로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죽일 수 밖에 없는 트랩의 구조. 트랩을 설치함에 있어서도 직쏘는 한 번에 숨을 끊기보다 최대한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방법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쏘우 1편 마지막에는 엄청난 반전도 있어 관람객들을 깜짝 놀라게 했죠.


3. 아메리칸 사이코 - 패트릭 베이트만(크리스찬 베일)

부와 명예, 외모까지 완벽한 미국의 상류층 신사 패트릭. 사실 그는 무차별적인 살인을 행하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입니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것을 참을 수 없는 결벽증 증세에 모든 사람을 정장 브랜드나 보석 등의 값어치로 판단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보다 좋은 명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고 분노를 느끼는 모습은 그의 성격을 잘 반영하는 예입니다. 패트릭의 살인 행각을 통해 이 영화는 사람의 내면보다는 외면을 중요시하는 물질적인 사회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4. 검은집 - ?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누군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이코패스는 감정이 전혀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타인의 신체를 잘라내고 어떤 이득이 주어진다면 목숨을 뺏는 행동도 서슴치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고통에도 무감각하죠. 영화를 보며 내내 소름이 끼쳤는데 그것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 외 이질적인 존재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실제로 사이코패스를 만나게 된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5. 공공의 적 - 조규환(이성재)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그는 어찌 보면 '아메리칸 사이코'의 패트릭과도 비슷합니다. 다른 점은 패트릭이 정신병으로 인한 발작적인 살인을 하는 반면 그는 철저하게 계획된 냉혹한 살인을 즐긴다는 점입니다. 그가 범인이라 믿고 추격을 계속하는 강철중(설경구)형사를 인맥을 이용해 순경으로 좌천시키는 등 수사를 방해하며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갑니다. 결국 결정적 증거가 잡히며 처벌을 받지만 권력을 가진 사이코패스가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6. 악마를 보았다 - 장경철(최민식)

최근 개봉한 '악마를 보았다'는 그 잔인성으로 더욱 화제를 불러왔습니다. 극 중 김수현(이병헌)의 약혼녀를 살해해 복수의 대상이 되는 사이코패스 장경철(최민식). 그는 여성들을 성폭행한 후 토막 살해하고 여유롭게 기타 연주까지 즐기는 엽기적인 살인마입니다.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인육을 먹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도 있었네요. 여자들이 보기에는 참 두려울 것 같은 영화. 하지만 극단적인 잔인함과 스릴을 즐기고 싶다면 추천합니다.


------------

사이코패스 만큼 위험한 사회속 '소시오패스'


소시오패스(Sociopath)는 정신 장애의 일종으로, 자기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어떤 나쁜 짓을 저질러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소시오패스가 되는 데에는 '유전적 요인'도 있지만 '유년기 시절에 학습한 경험'으로 인해 습관처럼 굳어진 경우도 있다.

이들은 주변인들에 대해 기만적 & 비도덕적이고, 잔혹 & 무책임하며, 타인의 안전을 중요히 여기지 않는 데다가, 물건을 훔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꼬지를 해도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는 '양심실종된 사람들'이다. 이러한 소시오패스들은 끈끈한 정이나 큰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반면 사이코패스(Psychopath)는 뇌 구조가 일반인들과 다른 이들로, 타인과의 공감을 전혀 이뤄내지 못하는 '무공감자'들을 말한다. 소시오패스들이 감정 조절 능력이 뛰어난 것에 비해, 사이코패스들은 자기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막 나갈 때가 있다.

잔혹무도한 범죄자들을 향해 흔히 말하는 '사이코패스'보다 그 수가 훨씬 많은 '소시오패스'는 25명 중 1명 꼴로 나타난다고 한다.[ 전세계 인구4% 정도 ] 우리 주변의 사회나 가정에서 '평범한 얼굴'을 하고 살아가면서, 탁월한 감정 조절 능력으로 자신의 '의도'를 숨긴 채 은연중에 타인에게 큰 해를 끼치는 소시오패스는 싸이코패스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소시오패스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자기 감정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필요에 의해 선한 미소를 짓거나 타인에게 친절하게 대하면서 (자기 '본심'을 숨긴 채) 그들을 조종하여 해를 끼치곤 한다. 이러한 소시오패스들 중엔 남들보다 뛰어난 두뇌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우리 나라 드라마 속 캐릭터에서 찾아보자면, 작년(2009년)에 방영된 <남자 이야기>에서 김강우가 열연을 펼쳐 보인 '채도우' 같은 인물이 '소시오패스'에 가까운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다양한 재능과 천재적인 두뇌를 지니고 있으면서, 자기 주변인들에겐 대체로 친절한 모습을 보이며 뒤로 무서운 일을 꾸몄던 그 드라마 속 '채도우'는 사이코패스라기 보다는 소시오패스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사이코패스들은 대놓고 타인의 생명을 빼앗거나 눈에 띄는 범죄를 저지르지만, 소시오패스들은 티 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만의 성공'을 위해 끊임없이 주변인들을 괴롭힌다. 이들이 무서운 것은 다른 이들에게 파렴치한 짓을 저질러 놓고도, 자신이 한 그 일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시오패스들 중엔 사회에서 나름 큰 능력을 발휘하는 상류층 인사 & 유능한 직업인들이 많다. 어떤 면에서 보면, 자신이 이기기 위해 남을 잘 조종하거나 속일 수 있기에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일 수도 있다. 평소 땐 '선량한 모습의 가면'을 쓰고 정상적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지만, 그 내면엔 '남을 짓밟고 올라가거나 타인에게 해를 끼쳐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 채 이를 정당화' 하려는 '소시오패스'들은 우리 사회에 은연중에 많이 분포되어 있기에,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이다.

가까운 주변인에게서 '자주 속임을 당하거나 이용 당한다고 느낄 때, 감정을 무시 당할 때, 모순된 언행을 자주 발견할 때, 그가 본인을 제외한 타인들을 모두 비난할 때, 끊임없는 자극만을 요할 때, 지능적으로 자신을 괴롭힌다 느낄 때, 타인에게 해를 끼치고도 책임지려 하지 않을 때..' 등등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가 '소시오패스'임을 한 번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혹시라도 그런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면, 큰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그와는 조용히 인연을 끊는 것이 좋다..


----------

여자 사이코패스

 

2000년 5월 남편에게 수면제먹이고 핀으로 눈찔러 실명시킴        

2001년 6월 같은 수법으로 남편의 얼굴에 끓는 기름을 부어 화상입힘..        

2001년 9월 같은 수법으로 남편의 배를 주방용 칼로 찔러 상처 입힘.        

2002년 2월 같은 수법으로 남편의 배를 칼로 찔러 상처 입힘(남편 치료중 사망)        

2002년 11월 재혼한 남편에게 수면제 먹이고 눈 찔러 실명시킴..        

2003년 7월 어머니에게 수면제 섞은 주스를 먹인뒤 양눈을 주사바늘로 찔러 실명시킴        

2003년 11월 오빠에게 수면제 탄 술을 먹인뒤 양눈에 염산을 넣어 실명시킴        

2004년 4월 입원중인 오빠의 링거호스에 이물질을 넣어 살해하려다 미수에그침        

2005년 1월 실명한 오빠에게 수면제 탄 주스를 먹인뒤 불을질러 오빠와 남동생에게 화상을 입힘.        

2005년 1월 세들어 살던 아파트에 불을질러 집주인 사망시킴.        

2005년 2월 입원중이던 병원에 석유뿌리고 불을 지르려다가 미수에 그침        

 

현재 무기징역형 수감중...수감중 어떠한 반성의 기미 없다고함


Posted by WN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