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당신은 차별이 보이나요?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차별은 차별로 인해 불이익을 입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차별 덕분에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나서서 차별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차별은 분명 양쪽의 불균형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모두에게 부정의함에도, 희한하게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만의 일처럼 이야기된다.  7

나는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착각이고 신화일 뿐이었다. 누군가를 정말 평등하게 대우하고 존중한다는 건 나의 무의식까지 훑어보는 작업을 거친 후에야 조금이나마 가능해질 것 같았다.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나를 발견하는 일 말이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착각과 신화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다.  10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별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이다. 다만 차별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선량한 시민일 뿐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을 곳곳에서 만난다.  11


1부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탄생

토크니즘(tokenism)이란 역사적으로 배제된 집단 구성원 가운데 소수만을 받아들이는 명목상의 차별 시정정책을 말한다. 토크니즘은 차별받는 집단의 극소수만 받아들이고서도 차별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기회가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고, 노력하여 능력을 갖추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다는 기대를 주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은 이상적인 평등의 상황과는 꽤 먼 상태임에도 평등이 달성되었다고 여기는 착시를 일으킨다.  24

사람들은 대체로 평등을 지향하고 차별에 반대한다. 관념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다수자 차별론도 결국은 차별은 옳지 않다는 기본 전제 위에 성립한다. 사람들은 적어도 평등이라는 원칙을 도덕적으로 옳고 정의로운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에게 차별을 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차별에 가담한다는 건 도덕적으로 허락되지 않는다. 차별이 없다는 생각은 어쩌면 내가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길 바란다는 간절한 희망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히려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역설적으로 차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은 높다.  25

특권(privivtege)이란 주어진 사회적 조건이 자신에게 유리해서 누리게 되는 온갖 혜택을 말한다.
불평등과 차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학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특권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발견’인 이유가 있다. 일상적으로 누리는 이런 특권은 대개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조건이라서 많은 경우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권은 말하자면 ‘가진 자의 여유’로서,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이다.  ...  
비행기를 타거나 그것도 비즈니스석을 타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교통수단 탑승을 특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8

나에게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구조물이나 제도가 누군가에게는 장벽이 되는 바로 그때, 우리는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발견할 수 있다.  29

자신이 누리는 일상적 특권. 29

특권을 알아차리는 확실한 계기는 그 특권이 흔들리는 경험을 할 때이다. 더이상 주류가 아닌 상황이 될 때, 그래서 전과 달리 불편해질 때, 지금까지 누린 특권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  32

불평등이란 말이 그러하듯, 특권역시 상대적인 개념이다. 다른 집단과 비교해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유리한 질서가 있다는 것이지, 삶이 절대적으로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 누구의 삶이 더 힘드냐 하는 논쟁은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모두가 똑같이 힘들다”는 말도 맞지 않다. 그보다는 서로 다르게 힘들다고 봐야 한다. 불평등한 구조에서는 기회와 권리가 다르게 분배되고, 그래서 다르게 힘들다. 여기서 초점은 서로 다른 종류의 삶을 만드는 이 구조적 불평등이다.  33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등이라는 대원칙에 동의하고 차별에 반대한다. .. 하지만 상대적으로 특권을 가진 집단은 차별을 덜 인식할 뿐만 아니라 평등을 실현하는 조치에 반대할 이유와 동기를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차별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 기울어진 땅에 서서 양손으로 평행봉을 들면 평행봉 역시 똑같이 기울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36

누군가가 보기엔 세상이 소수자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져 있는데, 누군가의 눈에는 세상이 평등해 보인다. 전자의 관점에서 평등을 이루려는 시도들이 후자의 눈에는 역차별로 보이는 이유다.  38

풍경 전체를 보려면 세상에서 한발짝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이 세계가 어떻게 기울어져 있는지 알기 위해 나와 다른 자리에 서 있는 사람과 대화해보아야 한다.  38

우리는 어떤 사람을 ‘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59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은 외부의 시선에서 시작되지만, 그 구성원들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내면의 시선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집단에 소속감을 가지면서 그 집단을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사회적 정체성(social identity)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때 그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흡수되고 이 고정관념이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고정관념을 내면화하느냐에 따라 본인의 역량이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한다.  66

부정적 고정관념을 자극하면, 부정적 고정관념을 이겨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고, 부담 때문에 수행 능력이 낮아져서, 결국 고정관념대로 부정적인 결과가 나온다. 이런 압박 상황을 고정관념 압박(stereotype threat)이라고 한다. 반면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없는 집단의 수행능력은 상대적으로 향상된다.  67

구조적 차별(systemic discrimination)은 이렇게 차별을 차별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미 차별이 사회적으로 만연하고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어서 충분히 예측 가능할 때, 누군가 의도하지 않아도 각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차별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생긴다. 차별로 인해 이익을 얻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불이익을 얻는 사람 역시 질서 정연하게 행동함으로써 스스로 불평등한 구조의 일부가 되어간다.  74

켄지 요시노는 그의 책 <커버링>에서, ‘손상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낙인이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자신을 포장하는 모습에 주목한다.  .. 차별이 없는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할까?  75

교육이란 본래 모든 사람에게 성장의 기회를 주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 본질적인 기능이 왜곡되어 누군가에게는 우월감을, 누군가에게는 열등감을 심어주는 체제가 되었다.  78

메릴린 프아리는 억압의 상태를 새장에 비유한다 새장을 가까이에서 보면 철망이 한줄씩 보인다. 철망을 하나씩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얇은 선 하나가 새의 비행을 방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새장에서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아야만 그 철망들이 모여 새장을 이루고 있으며 이 새장이 새를 가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새장도 뒤로 물러나야 볼 수 있다. “구조적으로 연결된 강압과 장벽의 네트워크”가 우리의 날갯짓을 방해하고 있음을 말이다.
구조적 차별은 우리의 감각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상일 뿐이다.  78

억압받는 사람은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사회구조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불행이 일시적이거나 우연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차별과 싸우기보다 “어쩔 수 없다”며 감수한다. 유리한 지위에 있다면 억압을 느낄 기회가 더 적고 시야는 더 제한된다. 차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민하다” “불평이 많다” “특권을 누리려고 한다”며 상대에게 그 비난을 돌리곤 한다.
그래서 의심이 필요하다. 세상은 정말 평등한가? 내 삶은 정말 차별과 상관없는가? 시야를 확장하기 위한 성찰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79


2부 차별은 어떻게 지워지는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약함, 불행, 부족함, 서툶을 볼 때 즐거워한다고 했다. 웃음은 그들에 대한 일종의 조롱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관점을 우월성 이론(superiority theory)이라고 한다. 토머스 홉스(Thomas Hhobbes)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할 때 자존감이 높아지면서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나온다고 설명한다. 누군가를 비하하는 유머가 재미있는 이유는 그 대상보다 자신이 우월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86-87

돌프 질만(Dolf Zillmann)과 조앤 캔터(Joanne Cantor)의 1972년 실험은 같은 장면을 보고 전문가와 대학생이 어떻게 달리 반응하지는 보여준다. 참가자들은 상급자-하급자 관계(부모-자녀, 교사-학생, 고용주-피고용인 등)에서 서로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대화 장면을 만화로 보았다. 실험 결과,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은 전문가들은 상급자가 하급자를 깎아내리는 장면을 더 재미있어한 반면,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은 대학생들은 반대로 하급자가 상급자를 깎아내리는 장면을 더 재미있어 했다.
집단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나타난다. 사라들은 자신이 동일시하는 집단을 우월하게 느끼게 하는 농담, 달리 말하면 자신이 동일시하지 않는 집단을 깎아내리는 농담을 즐긴다.  87

토머스 포드(Thomas Ford)와 동료들은 비하성 유머가 마음속 편견을 봉인해제시킨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어떤 집단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더라도 보통의 상화에서는 사회규범 때문에 드러내지 못한다. 하지만 누군가 비하성 유머를 던질 때 차별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 결과 규범이 느슨해지고, 사람들은 편견을 쉽게 드러내면서 차별을 용인하거나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런 설명을 편견규범이론(prejudiced norm theory)이라 부른다.
유머가 금기된 영역의 빗장을 순간적으로 풀어내는 효과가 있다는 뜻이다. 일탈적인 행위가 유머를 통해 놀이 또는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된다.  88

금기된 영역을 넘나들기 때문에 권력에 도전하는 풍자가 가능하고, 사회는 그 가치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 금기의 빗장이 약자를 향해 풀렸을 때 잔혹한 놀이가 시작된다.  89

누군가를 무언가로 호명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이다. 누군가를 향한 놀림을 ‘가벼운’ 농담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권력을 알려준다. 반대로 원하지 않는 기표가 자신에게 부착되는 경험은 소수자로서 사회적 위치와 무력한 상태를 확인시켜준다.  95-96

유머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는 청중의 반응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누가 웃는가?”라는 질문만큼 “누가 웃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웃찾사’의 흑인 분장 사건처럼 웃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유머는 도태된다. 누군가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농담에 웃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런 행동이 괜찮지 않다”는 메시지를 준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어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어야 할 때가, 최소한 무표정으로 소심한 반대를 해야 할 때가 있다.  98-99

능력주의(meritocracy) ...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기만 한다면 평등한 사회라고 여긴다. 능력주의에 따르면 계층이 존재한다는 사실, 즉 불평등한 구조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경쟁에서 쏟은 노력을 보상하기 위해 차등적으로 대우해야 정의로운 사회다. ..
여성으로서 직장에서 불리한 대우를 받더라도 자신의 능력 부족이라고 생각하면 그 상태를 수긍하게 된다.  105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사회는 무언가를 성취한 사람에게 각별한 존경심을 보낸다. .. 사회의 불평등 자체를 원망하기보다 “계층의 사다리가 끊어지고” “개천에서 용 날 수 없는” 세태를 원망한다.  105-106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실제로 능력에 차이가 없다는 사실과 같은 현재 상태가 아니다. 능력주의라는 거대한 신념 체계를 지키기 위해 가치가 다른 두 사람 사이에 어떻게든 차별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106

모두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기만 하면 공정할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차별이 된다.  109

모두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도리어 누군가를 불리하게 만드는 간접차별(indirect discrimination)의 예들이다.  110

능력주의 체계는 편향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능력주의를 맹신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간과한다. 사람은 누구나 개인적 경험, 사회 경제적 배경 등에 따라 어떤 방향으로든 편향된 관점을 가지기 마련이다.  110-111

무슨 능력을 측정할지 정하고 평가하는 사람에게는 편향이 있고, 선정된 평가방식이 다양한 조건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기 어렵다. 게다가 평가에는 오류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한계를 고려할 때 어떤 한가지 평가 결과로 사람의 순위를 매겨 결정 짓는 것은 위험하다. 게다가 그런 평가기준으로 인격적인 대우를 달리 하거나 영구적인 낙인을 부여함으로써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이것이야말로 불공정하고 부정의한 일이 아닐까.  112

왜 어떤 집단은 특별히 잘못이 없어도 거부되는데, 어떤 집단은 개별적으로만 문제삼고 집단으로는 문제삼지 않을까?  123

어떤 차별은 종교적인 이유로 요구된다. 종교에 따라, 교리를 이유로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경우가 있다. 어쩔 수 없이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차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교리 내에서 차별은 나쁜 것이 아니라 신성한 질서이기 때문이다.  128

이 장의 글머리에 인용한 아서 골드버그 대법관의 말을 다시 새겨보자. “차별은 단순히 지폐나 동전이나, 햄버거나 영화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인종이나 피부색을 이유로 그를 공공의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 때, 그가 당연히 느낄 모멸감, 좌절감, 수치심의 문제이다.” 바로,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다.  133

공공의 공간에서 거절당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소수자(minorities)로 만드는 중요한 성질 가운데 하나다. ‘소수’라는 건 수의 많고 적음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여성처럼 숫자로는 많아도 어쩐지 공공의 장에서 보이지 앟는 사람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이유는 여러가지일 수 있다. 우선 아예 없는 경우다. 아예 없는 이유 역시 여러가지일 수 있다. 애초에 태어나지 않도록 했거나, 들어오지 못하게 했거나, 쫓아냈거나, 극단적으로 죽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137-138

격리를 통해 보이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138

실제로 우리는 꽤 자주 누군가에게 경고를 보내기 위해 거리에서 시선을 사용한다. 거리를 걸을 때 누구에게 시선이 머무르는지 생각해보자. 남성 두명이 손을 잡고 걸을 때, 여성이 노출이 많은 옷을 입었을 때, 지저분한 행색의 사람이 지나갈 때 등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그들을 따라간 적이 있지 않은가? 거리는 모든 사람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모두에게 똑같이 허용된 공간이 아니다. 거리에는 사람과 행동을 규율하는 규칙과 감시체제가 있다.
즉 거리는 중립적인 공간인 듯 보이지만 그 공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존재한다. 익명의 다수가 시선으로써, 말이나 행위로써, 혹은 직접적인 방해나 법적 수단을 통해 그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불온한 존재들을 단속하는 데 동참한다. 입장할 자격 없이 공공의 공간에 침범한 사람, 거리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을 추방하거나 교화시킨다. 이런 시선의 익명성과 편재(遍在)성 때문에, ‘낯선존재’인 소수자들이 느끼는 일상의 시선 혹은 ‘감시’의 압박은 삶을 만성적으로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때로는 소수자가 스스로 숨어 있기로 결정한다. 소수자가 안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다. 139-140

증오범죄(hate crime), 다른 말로 편견이 동기가 된 범죄(motivated crime)라고 한다.  143

유럽 인권재판소는 “민주주의는 단순히 다수의 관점이 언제나 지배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배적인 지위의 남용을 피하고 소수자에 대한 공정하고 적절한 대우를 보장하기 위한 균형이 필요하다.”라고 강조  146

노예라는 지위는 그 명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노예는 사람으로서의 권리 없이 노동의 필요만이 요구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울타리 안에 존재하지만 그 땅의 ‘주인’과 평등하지 않은 사람, 정치적 권리가 박탈되어 권리를 요구할 수 없는 사람, ‘주인’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흔적 없이 소멸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현대사회에서 부르는 이름이 무엇이든 그는 ‘노예’가 된다.  148

마이클 왈저(Michael Waizer)는 영토 안에 권리가 적거나 없는 계층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미 민주주의에 반하는 “폭정(tyranny)”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기본 전제로 그 안의 모든 구성원이 평등한 관계를 가지고 동등한 입장에서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국적이 다고 사람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지울 수 있을까. 우리는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윤리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은폐된 불평등을 전제로 평등을 누렸던 그리스의 폴리스와는 다른, 진정한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151


3부 차별에 대응하는 우리들의 자세

권위에 순응하는 경향은 현재의 법과 질서를 고수하려는 경향과 연결된다. 사람들은 익숙한 기존의 법과 질서에서 벗어난 낯선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연구에서는 권위에 순응하는 성향의 사람들이 “세상을 위험한 곳이라고 인식”하고 “타인의 동기를 의심하며 이질적인 사람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이 두려움과 의심 때문에 변화를 반대하게 된다.  160

헌법재판소는 호주제가 위헌이라고 선고하면서, 전통이라고 부르던 기존의 질서가 “사회적 폐습”이 될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논증했다.
‘우리 헌법에서 말하는 ‘전통’ ‘전통문화’란 오늘날의 의미로 재해석된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오늘날의 의미를 포착함에 있어서는 헌법이념과 헌법의 가치질서가 가장 중요한 척도의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여기에 인류의 보편가치, 정의와 인도의 정신 같은 것이 아울러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 역사적 전승으로서 오늘의 헌법이념에 반하는 것은 헌법 전문에서 타파의 대상으로 선언한 ‘사회적 폐습’이 될 수 있을지언정 헌법 제9조가 ‘계승 발전’시키라고 한 전통문화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161-162

헌법재판소의 말처럼 “헌법이념과 헌법의 가치질서” “인류의 보편가치, 정의와 인도의 정신”등에 비추어 어떤 질서는 폐기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차별도 폐기되어야 할 질서 중 하나로, 이런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 사회 혼란을 초래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정당하고 정의로운 행보로 이해되어야 한다.  162

시민은 단순히 통치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165

롤스에 따르면 시민 불복종이란 “법이나 정부의 정책에 변혁을 가져올 목적으로 행해지는 공공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양심적이긴 하지만 법에 반하는 정치적 행위”를 말한다.  ... 시민 불복종은 공개적으로 위법 행동을 함으로써 대중에게 문제 상황을 알린다.  166

멜빈 러너(Melvin Lerner)는 사람들이 공정세계 가설(just-world hypothesis)을 품고 산다고 말한다. 세상은 공명정대하고 사람은 누구나 열심히 한 만큼 결실을 맺는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게 믿는 이유는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어야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할 수 있다.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믿음은 필요하다.
문제는 부정의한 상황을 보고도 이 가설을 수정하지 않으려 할 때 생긴다. 세상이 언제나 공명정대하다는 생각을 바꾸는 대신 ‘피해자를 비난’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왜곡하여 이해하기 시작한다. 세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불행한 상황에 처한 피해자가 안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거나 잘못된 행동을 했기에 그런 일을 겪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공정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바로 그 믿음 때문에 오히려 세상을 공정하게 만들지 못하는 모순이 생긴다.  168-169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다수자와 소수자의 자유는 같지 않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자유론>에서 지적하듯, 다수자는 소수자의 의견을 거침없이 공격할 수 있다. 반면 소수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된다. 다수자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서 잘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사실상 침묵을 강요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정의는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누가 혹은 무엇이 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171

아이리스 영은 ‘차이’라는 단어의 용례에 주목한다. ‘다르다’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사용되지 않는다. 배제되고 억압된 사람들만이 ‘다르다’고 지칭되고, 주류인 사람들은 중립적으로 여겨진다. ‘중립’의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가능성이 펼쳐져 있지만, ‘다른’사람들에게는 몇가지의 정해진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결국 ‘다르다’는 말은 ‘서로 다르다’는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고정된 특정 집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차이’가 낙인과 억압의 기제로 생성되는 것이다.
마치 한국사회에서 ‘다문화’라는 말이 모든 사람이 다양한 문화를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문화적 소수자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의 차이란 주류 집단인 ‘한국인’을 기준점으로 삼아서 다르다는 것으로서, 사실상 ‘정상’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다양성을 강조하는 말로 종종 사용되는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란는 흔한 구호도, 여기서 ‘다름’이 주류 집단의 기준에서 ‘일탈’된 무언가를 지칭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틀림’을 전제하는 형용모순이 된다.
아이리스 영은 억압적 의미를 가지는 ‘차이’를 재정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류 집단의 입장을 보편적이라고 보면서 비주류만을 다르다고 표기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관계적으로 이해해 상대화하는 것”이다. 여성이 다르듯 남성이 다르고, 장애인이 다르듯 비장애인이 다르다고 보는 상대적인 관점이다. 따라서 차이는 본질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맥락에 따라 유동적이다. 휠체어를 탄 사람은 ‘언제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경기와 같은 특정 맥락에서 차이가 있더라도 다른 맥락에서는 차이가 없어진다.
이런 긴 논의는 결국은 식상할 정도로 당연한, 하지만 그래서 더 어려운 결론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모두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우리를 본질적으로 가르는 차이란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사람으로서 보편성을 공유하지만, 세상에 차별이 있는 한 차이는 실재하고 우리는 그 차이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184-185

차별이 구조화된 사회에서는 개인이 행하는 차별 역시 관습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186

불평등한 사회에서의 삶은 자신의 지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이런 사회에서는 지위의 유동성에 따라 개인의 만족감이 달라진다. 불평등이 있더라도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사람들은 안심한다. 하지만 그 편안한 지위에 오르기 위해 평생에 걸쳐 쏟는 수고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억울하면 성공해!”라는 흔한 말처럼, 열등한 지위에서 겪어야 하는 모욕과 무시를 피하기 위해 타인의 인정이 따라올 것이라 예상되는 성취들을 최소한이라도 확보하고자 한다.
불평등한 사회가 주는 삶의 고단함이다. 어느 정도의 지위에 올라가야 정말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아 만족스러운 상태가 될지도 알 수 없다. 결국 일정 지위에 올라간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인정받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려는 동기를 가지며, 이는 매우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다. 학식과 경험이 많으며 사회 변화를 이끌어가도록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저항 세력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186-187

불평등한 사회가 고단한 이유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도록 부당하게 종용하기 때문이다.  187

사회가 하나의 기준을 정하고 개인을 그 기준에 맞추는 이 동화주의 경향은 자유에 대한 근본적 침탈이 된다. 존 스튜어트 밀은 1859년에 발표한 <자유론>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우리 삶이 획일적인 하나의 형태로 거의 굳어진 뒤에야 그것을 뒤집으려 하면, 그때는 불경(不敬)이니 도덕적이니, 심지어 자연에 반하는 괴물과도 같다는 등 온갖 비난과 공격을 감수해야 한다. 사람들은 잠시만 다양성과 벽을 쌓고 살아도 순식간에 그 중요성을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188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불평등한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수고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불편함을 견딜 것인가?  188

차별을 둘러싼 긴장들은 ‘내가 차별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 좋겠다’는 강렬한 욕망 혹은 희망을 깔고 있다. 정말 결정해야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불평등과 차별을 직시할 용기가 있느냐는 것이다. 차별에 민감하거나 둔감할 수 있는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며, 너무나도 익숙한 어떤 발언, 행동, 제도가 차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가? 내가 보지 못한 차별을 누군가가 지적했을 때 방어하고 부인하기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경청하고 성찰할 수 있는가?  188-189

아이리스 영은 말한다. “무의식적이었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억압에 기여한 행동, 행위, 태도에 대해 사람들과 제도는 책임을 질 수 있고 책임을 져야 한다.” 여기서 ‘책임’이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을 성찰하고 습관과 태도를 바꾸어야 할 책임을 말한다.
그러니 내가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몰랐다” “네가 예민하다”는 방어보다는, 더 잘 알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성찰의 계기로 삼자고 제안한다.  189

아무런 저항 없이 평등이 진보한 역사는 없으니.  190

지금까지 차별금지법이 좌절된 실질적인 이유는 일각에서 차별 철폐라는 목적 자체를 부정하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거세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차별을 옹호하는 의견이다.  195

보편성은 차별을 잘 보이지 않게 만들어 은폐시키기도 한다. 보편적으로 모든 차별을 금지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차별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보이게 만들기 위해 차별금지사유를 명시할 필요가 있다.  197

차별금지법의 원칙은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No One Left Behind)”. 199

오래전에 법으로 성희롱을 금지했지만 무엇이 성희롱인지 알고 그런 행동을 하지 않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여전히 개선 중이다.  ... 모두가 평등을 바라지만,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에 관한 상징이며 선언이다.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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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없는 사상은 메마르고, 사상이 빠진 사랑은 경박하다. 82

너새니얼 호손 <주홍 글자> ‘사람이란 오랫동안 이중의 얼굴을 갖고 생활하다 보면 도대체 어떤 것이 진짜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지는 법이다.’  138

한국에서는 사랑을 소유와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해주고 자유롭게 해주며, 상대방이 행복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144

우리는 폭력적인 세상을 살아간다. 사람들도 폭력적이고 사회도 폭력적이며 정치도 폭력적이다. 폭력은 나만 옳다고 확신하며 타자를 증오하고 존중하지 않을 때 생겨난다. 사람들은 타자에 대한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정의의 집행이라고 잘못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이나 폭력을 절대 인정하거나 뉘우치지 않는다.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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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월가점령시위 연설 -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마라"

서구 사회의 우리는 금지가 필요 없다. 이미 지배체제가 우리가 꿈꿀 능력마저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보는 영화를 생각해보라. 세상의 종말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종말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7

기억하라.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다. 체제 그 자체가 문제다. 그것은 사람들을 부패하게 만든다. 적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위에 물타기를 하기 위해 행동에 돌입한 가짜 친구들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카페인 없는 커피, 알코올 없는 맥주, 지방 없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투쟁을 무해한 도덕적 저항으로 만들고자 할 것이다. .. 노동과 고문을 아웃소싱하고 결혼정보업체가 우리의 사랑을 아웃소싱하게 된 이후, 우리는 오랫동안 정치적 참여 역시 아웃소싱 되도록 내버려뒀다. 이제는 되찾아야 한다.  9

사람들은 종종 무언가를 갈망하지만 진정으로 원하지는 않는다. 갈망하는 것을 진정으로 추구하길 두려워하지 마라.  11

2011년 10월 9일 뉴욕 주코티 공원



감수의 글 - '로쟈' 이현우

현재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거스르며 맞서는 행위  15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이라는 게 철학에 대한 그의 정의.  15

왜 모든 문제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늘날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손쉬워진 만큼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15

2012년 초 슬라보예 지젝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달라는 주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사유를 시작하라. 단순한 호기심에 그치지 말고 전 생애에 대해 고민을 해야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을 시작해야 한다."  16




1 와 남 니하단 Wat Nam nihadan


페르시아어에는 '와 남 니하단'이라는 멋진 표현이 있다. "누군가를 살해하려면, 시체를 묻은 다음 그 위에 꽃을 심어 시체를 숨기라."  19

지배이데올로기의 일차적 과제는 이러한 사건들의 진정한 중요성을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언론의 지배적인 반응이야말로 정확히 '와 남 니하단'이 아니었던가?  20

(지젝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핵심 적대'는 크게 네 가지다.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소위 '지적 재산권'과 관련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새로운 기술과학의 발전의 사회 윤리적함의, 새로운 장벽과 빈민가 등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의 생성"(<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창비 2010 p182)  20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결정적인 역사적 순간에는 대다수의 예술적 양식이나 이론적 주장이 모두 합쳐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경향으로 정리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0

현실이 우리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으면, 현실은 그만큼 더 악화될 것이다. 반면 우리의 체계가 적합하다면, (불완전하게나마) 현실에 들어맞는 형식적 틀을 구축하게 된다. 마르크스가 이미 인지했듯이, 사회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규정은 곧 현실에 얽매인 주체들의 '주관적인' 생각, 규정이고, (우리 사고의 한계, 즉 사고의 교착상태와 모순이 곧 객관적인 사회 현실의 적대가 되는)이 구별 불가능한 지점에서는 "진단이 그 자체의 증상"이 된다. 우리의 진단(우리의 행동 범위를 규정하는 모든 가능한 입장들의 체계에 대한 '객관적' 해석)은 그 자체가 '주관적'이다. 진단은 우리가 실천하면서 맞닥뜨리는 교착상태에 대한 주관적인 반응 체계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 해결되지 않는 교착상태 자체의 증상을 나타낸다.  21-22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말했던 "이성의 공적인 사용"이다. 오늘날의 공산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성의 공적인 사용'과 평등주의적 보편적 사유로, 생각하면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칸트에게 '세계시민사회'의 공적 공간이란 보편적 단독성(unversal singularity)의 역설, 즉 일종의 단락(short-circuit)으로 특수성의 매개 없이 곧바로 보편성에 참여하는 단독적 주체의 역설을 가리킨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What is Enlightenment)?>의 그 유명한 구절에서 '사적'에 대립되는 '공적'이라는 표현으로 의미했던 바다. 여기서 '사적'이란 공동적 연대에 반대되는 개인적 유대가 아니라, 한 사람이 특별히 동일시하는 공동적 제도적 질서를 말한다. 이에 반해, '공적'이란 이성의 행사의 초국가적인 보편성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는 이러한 이분법은 좀더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이성의 공적 사용이 지닌 상징적 효능(또는 수행 능력)을 유보하는 데 의존한 것이 아닐까? 칸트는 "생각하지 말고 복종하라!"라는 복종의 일반적인 공식을 거부하지도 않았고, 이와는 '혁명적인' 대척점에 있는 "(남이 시키는 대로) 복종하지 말고 (스스로 머리를 써서) 생각하라!"라는 말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그의 공식은 차라리 "생각하고 복종하라!"였다. (이성을 자유롭게 사용하여)공적으로 생각하고 (권력의 위계 조직의 일부로서) 사적으로 복종하라는 말이다. 

요컨대,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공적 사용'을 통해 기존 질서의 약점과 불의를 목격하게 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통치자에게 개혁을 호소하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G. K. 체스터턴(G. K. Chesterton)처럼 능동적으로 생각하거나 의심할 수 있는 추상적 자유가 실질적 자유를 제한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우리는 대체로 자유사상이 자유를 방지하는 안전 장치 중에서 으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현대적인 예로 다시 표현하면, 노예의 정신적 해방이야말로 노예 해방을 막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의미다. 노예로 하여금 자신이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에 관해 고민하도록 가르쳐라. 그러면 그는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23-25

'이성의 공적 사용'의 보편성과 참여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을 접목시킨 접근만이 우리가 처한 상항에 대한 '인식적 지도'를 제공할 수 있다. 레닌의 말처럼 "우리는 '사실만을 말해야 하고', 어떤 경향이 있다는 진실을 인정해야 한다."  26




2 지배에서 착취와 저항으로(From Domination to Exploitation and Revolt)


현대 자본주의의 세 가지 특징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이윤 추구에서 지대(rent)(주로 사유화된 '공유 지식'과 천연자원에 기초한 두 가지 형태) 추구로 전환되는 장기적 추세다. 둘째, 더 오랜 기간 '착취'당하는 일이 오히려 특권으로 인식되면서 실업의 구조적 역할이 한층 더 강화되는 현상이다. 그리고 마지막 특징은 장 클로드 밀네(Jean-Claude Milner)가 '봉급 부르주아(salaried bourgeoisie)라고 부른 새로운 계급의 부상이다.  29

밀네의 표현에 따르면, 잉여급여의 필요성은 경제적 의미보다 정치적 의미가 더 강하다. 즉 사회적 안정을 위해 '중간계급'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사회적 위계질서의 자의성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핵심인데, 평가의 자의성이 시장 내 성공의 자의성과 유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폭력은 너무 많은 우연성이 존재할 때가 아니라 그 우연성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 폭발할 위험이 있다.  34

소설 <아틀라스 : 지구를 떠받치기를 거부한 신>에서 에인랜드(Ayn Rand)가 즐겨 쓰던 이데올로기적 환상, 즉 파업에 나선 ('창의적') 자본가의 환상을 떠올려보자. 특권을 누리던 '봉급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의 특권(최저임금 이상의 잉여가치)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이는 오늘날의 수많은 파업에서도 이러한 환상이 도착적인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들의 시위는 프롤레타리아적 시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전락할 위험에 저항하는 시위다. 달리 말하면, 정규직을 얻는 것 자체가 특권인 요즘 상황에서 감히 시위를 벌일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는가? (사양 산업인) 섬유업 등에 종사하는 저임금 노동자가 아니라, (주로 경찰, 사법 관계자, 교사, 대중교통 근로자 등 주로 공무원직에 근무하여) 직업이 보장된 특권층 노동자일 것이다. 학생시위의 새로운 흐름도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이들이 시위를 벌이는 주된 동기는 고등교육을 받아도 졸업 후 잉여급여를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인 것이 틀림없다. 

물론 아랍권에서 서유럽까지, 월스트리트에서 중국까지, 스페인에서 그리스까지 번져간 대규모 시위의 부활을 단순한 봉급 부르주아 계급의 봉기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36

진행중인 경제 위기를 한 측면에 함몰되지 않고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  37

오늘날 우리는 생태자본주의(eco-capitalism)부터 기본소득자본주의(Basic Income capitalism)까지 자본주의를 순치하려는 수많은 공세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시도의 배후에는 다음과 같은 추론이 존재한다. 자본주의가 현재로서는 부를 창출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지만, 동시에 이대로 방치될 경우 자본조의의 재생산 과정에서 착취, 천연자원의 파괴, 집단 고통, 불의, 전쟁 등이 수반된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이윤을 추구하는 재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기본 틀은 유지하되, 글로벌 복지와 사회 정의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자본주의를 조정하고 규제해나가는 것이다. 또 시장에는 그 나름의 수요가 있음을 존중하고, 시장 메커니즘을 직접적으로 교란시키면 대재앙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자본주의라는 짐승이 제 기능을 다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 짐승을 길들이는 일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실용주의적 현실주의와 정의를 고수하는 원칙주의를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보통 그러하듯, 선의로 시작하여 조만간 두 가지 차원의 적대라는 실재(the Real)에 직면하게 된다. 자본주의라는 짐승이 자애로운 사회적 규제로부터 도망치는 일이 거듭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시점엔가 우리는 숙명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정말로 자본주의라는 짐승과 함께 가는 것만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방법일까? 아무리 자본주의가 생산적이라고 해도,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커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일 우리가 계속 이 질문을 회피한 채 자본주의를 길들인다면,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힘을 실어주는 꼴밖에 안 될 것이다.  43-44




3 정치적 대표의 꿈 작업(The 'Dream-Work' of Political Representation)


마르크스는 1848년 프랑스 혁명과 그 여파에 대해 분석한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사회적 대표(경제적 계급과 세력을 대표하는 정치적 행위주체(agent))의 논리를 정확히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복잡화(complicate)'했다.  49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줘야 하므로 공공사업에 착수한다. 그러나 공공사업은 국민의 조세 부담을 가중시킨다. 따라서 종래 5부 이자를 4부5리 이자의 공채로 전화하여 금리생활자를 공격함으로써 세금을 낮춘다. 그러나 중간계급에게도 떡고물이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술을 소매로 구입하는 인민에게는 주세를 배로 인상하고, 도매로 사는 중간계급에게는 주세를 반으로 인하한다. 또 현실의 노동자 조합은 해체하면서, 앞으로 꿈같은 조직을 만들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농민도 원조해줘야 한다. 저당은행들 때문에 농민의 부채가 급증하고 부의 편중이 가속화된다. 그러나 이 은행들은 오를레앙가에서 몰수한 영지를 현금화하는 데 이용되어야 한다. 법령에도 나와 있지 않은 이런 조건에 동의할 자본가는 아무도 없고, 그래서 저당은행은 단지 법령으로 남는다, 등.

한마디로 보나파르트는 모든 계급에게 가부장적 은인으로 비쳐지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한 계급을 착취하지 않고서는 그 어느 계급에게도 은혜를 베풀 수 없다.  52-53

스스로 대표하지 못하여 누군가에 의해 대표될 수밖에 없는 계급이란 당연히 분할지 소농 계급을 말한다.  54

모든 계급 위에 군림하고, 모든 계급 사이를 오가며, 모든 계급의 비천한 잔여물에 직접적인 기반을 두면서도, 아울러 스스로 정치적 대표를 요구하는 집단적 행위주체가 될 수 없는 계급을 궁극적으로 대표해야 한다. 이 역설이 의미하는 바는 순수한 대표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라캉 식으로 표현하자면, 계급 적대는 그러한 전체 대표가 실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게 만든다. 계급 적대는 결국 한 사회의 중립적인 '전체'란 없고, 모든 '전체'는 특정 계급에 은밀하게 특권을 부여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55

오늘날 대부분의 '전문가'와 정치가가 따르는 공리를 떠올려보자. 누누이 들어왔듯이, 우리는 적자와 부채로 점철된 위태로운 시대에 살고 있기에, 모두가 고통을 분담하며 생활수준의 저하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니까. (최고) 부유층을 제외한 모두가 말이다. 부유층에 대한 증세는 절대적인 금기사항이다. 세금이 늘면 그들의 투자 의욕이 꺾여 신규 고용 창출이 줄어들므로 우리 모두가 고통받게 된다는 논리다. 결국 이 힘든 시절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빈자는 더욱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부자들의 부가 조금이라도 상실될 위험에 처하면 사회가 나서서 막아줘야 한다. 금융 위기가 과도한 정부 차입과 지출에서 비롯되었다는 금융 위기에 대한 지배적인 시각은 아이슬란드에서 미국까지 위기의 궁극적인 책임이 대규모 민간은행들에 잇다는 사실과 노골적으로 배치된다. 그 은행들의 도산을 막기 위해 정부는 납세자의 엄청난 혈세를 투입하며 개입했던 것이다. 

계급 적대를 부인하고 전체를 대표한다는 입장을 내세우는 전형적인 방법은, 그 적대의 원인을 그 자체로 사회를 위협하는 반사회적 요인이자 사회에서 배설된 과잉의 상징인 외국인 불청객들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유대주의는 단지 수많은 이데올로기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자체로 본원적인 이데올로기다. 반유대주의는 기본 좌표를 설정하는 영도(zero-lenel)(또는 순수한 형태)의 이데올로기를 구현한다. 이로써 사회적 적대('곅,ㅂ투쟁')는 신비화되거나 전치되어 그 원인을 외부 침입자에게 투영할 수 있게 된다. 라캉의 '1+1+a'의 공식의 가장 좋은 예가 이러한 계급투쟁이다. 두 개의 계급에 '유대인'이라는 과잉, 대상a(object), 대립쌍의 보충물이 덧붙는 것이다. 이 보충적 요소의 기능은 이중적이다. 계급투쟁에 대한 물신주의적 부인(fetishistic disavowal)인 동시에, 바로 그 자체가 '계급 평화'를 영원히 가로막는 이 적대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 만약 보충물없이 '1+1' 상태로 두 계급만 존재했다면, '순수한' 계급 적대 대신 두 계급이 상호 보완하여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는 계급 평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계급투쟁의 '순수성'을 흐리거나 전치하는 요인이 바로 계급 투쟁의 원동력이라는 데 역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현실 세계에서 적대적인 두 계급만 존재하는 경우는 절대 없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 비판자들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 바로 그러헥 적대적인 두 계급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계급투쟁이 존속하는 것이다.  55-57

소농은 오늘날 악명 높은 중간계급이 되었다. .. 중간계급은 정치화에 반대한다. 이들은 그저 자신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 간섭 없이 일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사회의 광적이 ㄴ정치적 동원을 종식시켜 모두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겠다고 약속하는 독재 쿠데타를 지지하는 성향을 보인다.  58

주인 담론에서 대학담론으로 바뀌는 전 세계적 추세의 일환으로 새로운 집단이 등장했다. 특정한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않고 중립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으로 상황을 지배(또는 차라리 '관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기술, 금융) 전문가 집단이다.  58

문화 전쟁이 곧 전치된 양식의 계급 전쟁이라는 뜻이다.  69

모든 이데올로기 체계는 연쇄적인 등가물을 정립하거나 부여하려는 헤게모니 투쟁의 산물이자, '객관적인 사회경제적 입장'등 외재적 참조점으로는 결코 보장되지 않는 철저히 우연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투쟁의 산물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답변에서 이 수수께끼는 간단히 자취를 감춘다.

여기서 첫 번째로 주목할 것은 일단 문화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양 진영이 있어야 하고, 문화는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근본주의에 저항하고 다문화적 관용을 옹호하는 데 정치를 집중하는 '계몽된'자유주의자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주제라는 점이다. 핵심 질문은 이렇다. 왜 '문화'가 우리 생활의 중심 영역으로 등장했는가? 종교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실제로 믿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속한 공동사회의 '생활양식'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일부) 종교 의식과 관습에 따를 뿐이다. '전통에 대한 존중심'으로 코셔(kosher-유대인의 율법을 따르는 정결한 음식) 원칙을 지키는 비신도 유대인 등이 그런 예다. "실제로 그것을 믿지는 않아. 그냥 내 문화의 일부일 뿐이야."라는 말이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거부되거나 전치된 신앙의 두드러진 양식인 듯하다. 이렇듯 '실제' 종교, 예술 등과는 구별되는 '문화'의 '비근본주의적' 개념이야말로 버려지거나 특정 개인과 무관해진 신앙의 영역을 보여주는 핵심일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믿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키는 '문화' 말이다.

두번째로 주목할 점은 자유주의자들이 가난한 자와의 연대를 주장하는 한편, 대립적인 계급 메시지로 문화 전쟁을 코드화하는 방식이다. 다문화적 관용과 여성의권리를 지지하는 이들의 싸움은 '하층계급'의 이른 바 비관용, 근본주의, 가부장적 성차별주의와 대척점에 설 때가 많다. 이 혼란을 해소하는 한 가지 방법은 진정한 구분선을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 중재적인 용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최근 이데올로기적 공세에서 '현대화'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방식이 그러한 예다. 우선 '현대화주의자'(경제부터 문화까지 모든 측면에서 글로벌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와 '전통주의자(세계화를 반대하는 사람)' 사이에는 추상적인 대립관계가 형성된다. 그러고 나면 전통적 보수주의자와 포퓰리스트에서 '구좌파(복지국가, 노동조합 등을 계속 지지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전부 이 세계화에 반대하는 사람의 범주로 분류된다. 이러한 범주와는 분명히 사회적 현실의 일면을 포착한다. 2003년 초반에 독일에서 교회와 노동조합이 연대를 통해 상점들의 일요일 영업 법제활르 막았던 일을 떠올려보라. 그러나 이 '문화적 차이'가 다양한 계층과 계급을 아우르는 전반적인 사회적 장을 가로지른다고 말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또 다른 대립관계와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될(그래서 글로벌 자본주의의 '현대화'에 저항하는 보수주의의 '전통적 가치'나 자본주의적 세계화를 완전히 지지하는 도덕적 보수주의자가 나올)수 있다는 말도 부적절하다. 요컨대 이러한 '문화적 차이'가 현대 사회적 과정에서 작동하는 일련의 적대 중 하나라고 주장해봐야 별 소요이 없다.  70-72

세번째로 주목할 것은 페미니스트, 반인종차별주의자, 반성차별주의자 등의 투쟁과 계급투쟁 간의 근본적 차이다. 다른 투쟁의 목적은 적대를 차이로 변화하는 것(다양한 성, 종교, 민족 집단의 평화로운 공존)이지만, 계급투쟁의 목적은 정반대로 차이를 계급 적대로 바꾸는 것이다. '빼기'의 요지는 전체적으로 복잡한 구조를 그 적대적인 극호한 차이로 환원하는 것이다. 인종, 성, 계급의 연쇄는 계급의 경우 정치적 입장에 대한 논리가 다르다는 점을 모호하게 만든다. 반인종차별주의자와 반성차별주의자의 투쟁은 상대를 충분히 인정하려는 노력을 지향하지만, 계급투쟁은 서로를 극복하고 진압하며 심지어 근절하는 데 목표를 둔다. 직접적인 물리적 전멸은 아니더라도, 상대의 사회경제적 역할과 기능을 말살하는 것이 목표다. 다시 말해, 반인종차별주의자가 모든 인종이 저마다의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입장을 자유롭게 주장하고 깨닫기 바란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되어도,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목표가 부르주아 계급이 그 정체성을 충분히 주장하고 목적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전자의 경우에는 다양한 정체성을 인정하는 수평적 논리가 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적과의 투쟁이라는 논리가 존재한다.  73-74




4 사악한 민족주의의 귀환(The Return of the Evil Ethnic Thing)


중동 협상 역시 평화의 문제가 관건이 아니다. '평화협상'이라는 명칭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점령을 기정사실화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인 사라들의 손을 들어주는 셈이다.  80

반유대주의는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동성애반대주의 드오가 같은 연장선상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82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는 노골적인 암시인 것이다. 

우리는 이 논리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는 서로 독립적일 뿐 아니라, 현재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중립적'이고 비정치적인 테크노크라시의 경제 정책에 대한 대중의 반대 속에서 진정한 민주 정치가 표출된다.  89

지금 단계의 우리는 당연히 충분히 관용적이지 못하거나, 아니면 이미 너무 지나치제 관용적이어서 여성권 등을 방치하고 있다.  94

우리의 과제는 단지 타인에 대한 관용을 넘어 진정한 공존과 다양한 문화의 혼합을 영속시킬 수 있는 적극저깅고 해방적인 지배문화를 추구하는 것이고, 그 지배 문화를 위한 다가올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다. 단순히 타인을 존중하지 말고, 그들에게 공동의 투쟁을 제안하자. 오늘날 우리를 가장 크게 압박하는 문제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문제이니 말이다.  95




5 탈이데올로기의 사막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Desert of Post-Ideology)


최근 캘리포니아를 방문한 동안, 나는 어떤 교수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슬로베니아인 친구 한 명과 함께 참석했다. 이 친구는 골초였다. 늦은 저녁, 담배 생각이 간절해진 친구는 집주인에게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워도 되는지 정중히 물엇다. (그에 못지않게) 정중한 태도로 주인이 안 된다고 말하자 친구는 집밖으로 나가서 피우겠다고 말했지만, 그조차도 안 된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이면, 이웃들에게 자기 평판이 떨어진다는 것이 주인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놀란 것은 저녁식사가 끝나고 집주인이 우리에게 가벼운 마약을 권했을 때였다. 이러한 종류의 흡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마치 마약이 담배보다 훨씬 덜 위험하기라도 한 듯이.96-97

라캉이 말하는 '향락(jouissance)'(주이상스)은 치며억인 과잉의 쾌락으로, 쾌락원칙(pleasure principle) 너머에 위치한다. ...

한쪽은 즐거움을 연장시키고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피하기 위해 쾌락을 신중히 계산하는 계몽된 쾌락주의자이고, 다른 한쪽은 치명적으로 과도한 향락 속에서 존재의 절정에 도달하려는 향락주의자(jouisseur)다.  97

계몽된 소비주의적 쾌락주의는 기본적으로 향락에서 그 과잉의 차원, 불온한 잉여, 그리고 아무데도 도움이 안 되는 측면을 박탈하는 기능이 있다. 향락은 용인되고 심지어 권유되지만, 우리의 정신적, 생물학적 안정성을 위협하지 않고 건전해야 한다는 단서조항이 붙는다.  98

예카테리나 대제(Catherine the Grest)의 일화. 그녀는 노예들이 뒤에서 술과 음식을 훔치고 심지어 자신을 조롱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그저 미소만 지었다. 가끔씩 향락의 부스러기를 떨어뜨려줘야 그들이 계속 노예 자리를 지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00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선택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부르짖지만 강요된 민주주의적 합의의 대안이라곤 맹목적인 실력행사뿐인 이 사회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우주인가? .. 유일한 선택이라곤 규칙에 따르는 것과 (자기)파괴적인 폭력 사이 중 하나뿐일 때, 우리가 그토록 찬양하는 선택의 자유란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우리가 점점 더 "세계 없음(Worldless)"으로 경험되는 사회적 공간에 살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공간에서 저항이 취할 수 유일한 형식은 의미 없는 폭력뿐이다.  108-109

영국 폭동이 안고 있는 문제는 폭력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진정한 자기주장이 없었다는 것이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능동적이지 않고 반동적인, 무력한 분노이자 무력(武力 굳셀무 힘력)의 탈을 쓴 절망이었고, 승리의 카니발의 가면을 쓴 질투였다.  120




6 아랍의 겨울, 봄, 여름, 가을(The Arab Winter, Spring, Summer, and Fall)


도하(Doha)의 이슬람미술관(Museum of Islamic Art)의 PO24.1999번 소장품. 

10세기의 단순한 원형 토기접시로, 직경 42센티미터의 매끄러운 흰색 바탕에는 검은색 글씨로 야히아 이븐 지야드(Yahya ibon Ziyad)가 말했다는 속담이 새겨져 있다. "어리석은 자는 기회를 놓치고 나중에 운명을 탓한다."  122

중앙부의 그림. 자기 꼬리를 먹고있는 유명한 뱀 그림과 유사하다.  124

이 말을 뒤집어 보자. "어리석은 자는 기회를 놓치고도 자신의 실패가 운명의 조화임을 알지 못한다." 이것은 세상에 우연이란 없고 모든 것은 불가해한 운명으로 결정된다는 진부한 종교적 문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접시의 속담을 곰곰이 되씹어보면, 이러한 상투적 문구의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다시 한 번 이 접시를 사용하는 시간적 차원을 고려해보자. 저녁 식사가 시작될 때 손님은 음식이 가득 담긴 접시의 가장자리에 새겨진 글귀를 처음 보고 기회를 붙잡으라는 기회주의에 관란 교훈 정도로 일축해버린다. 그러나 음식을 다 먹은 후 접시 밑에 숨어 있던 진짜 메시지가 상투적 상징임을 알고 나면, 처음 본 글귀에 숨어 있던 진실을 놓쳤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 문구로 되돌아가 다시 읽어본 후에야 그것이 기회와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하고 흥미로운 이야기, 즉 운명을 선택하는 것은 그들의 소관이라는 메시지임을 알게 된다.  125-126

독재정권이 최후의 위기에 다다를 때 보통 그 붕괴는 두 단계를 거친다. 실제 무너지기 전에 불가사의한 파열이 생긴다. 어느날 문득 사람들은 이미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깯다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130




7 월가점령시위, 또는 새로운 시작을 부르는 폭력적 침묵(Occupy Wall Street, or The Violent Silence of a New Beginning)


축제를 즐기기는 쉽다. 그러나 그 진정한 가치는 축제 다음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의 일상생활이 어떻게 바뀌었고 또 바뀔 것인지에 달려 있다. 여기에는 힘들고 끈질긴 노력이 요구되며, 시위는 그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시위의 기본 메시지는 이 정도다. "금기는 깨졌다. 우리는 실현 가능한 최선의 세계에 살지 않는다. 고로 우리는 대안을 생각해볼 수 있고, 또 생각해봐야만 한다."  146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식 모티프 - <최악을 향하여>에 나오는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를 의미한다 - 의 이러한 변주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실패 뒤에 남은 결과에 집중해야 한다.  147

시위대는 적뿐 아니라 가짜 친구들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시위대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시위를 무해한 도덕적 저항으로 바꾸어 그 의미를 희석시키고자 갖은 애를 쓴다. 복싱에서 '클린치(clinch)'란 상대방의 펀치를 막거나 방해하기 위해 한 팔이나 양 팔로 상대방의 몸을 붙잡는 행위다 월가점령시위에 대한 빌 클린턴의 대응은 정치적 클린치의 완벽한 사례다. 그는 시위가 "종합적으로 볼 때 긍정적인 일"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대의 모호함에 대해 우려는 표했다. "어떤 일에 반대만 하다 보면 우리가 만든 이 진공을 다른 사람이 채우게 될 테니, 그저 반대만 하지 말고 특정한 어떤 것을 지지해야 한다." 그러면서 클린턴은 "1년 6개월 안에 일자리 200만 개"를 창출하겠다고 주장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일자리 정책을 지지하라고 시위대에 제안했다. 그러나 시위대가 거리로 뛰쳐나온 것은 콜라 캔을 재활용하고, 자선단체에 푼돈을 기부하며, 스타벅스 카푸치노를 구매하여 가격의 1%를 제3세계로 보내는 것마능로 만족하는 세계에 질릴 만큼 질렸기 때문이다.  155-156

민주주의는 법치주의에 기반을 둔다.  158

마르크스는 자유의 문제를 고유의 정치적 영역에서 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국가에서 자유선거가 실시되는가? 사법부가 독립적인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가? 인권이 존중되는가? 등). 실제 자유의 핵심은 오히려 시장에서 가족에 이르는 사회적 관계들의 그물망에 있고, 이 영역을 진정으로 개선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정치적 개혁이 아니라 '비정치적'인 사회적 생산 관계의 변혁이다.  161-162

민주주의 기제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자본주의 재생산의 원활한 가동을 보장하는 '부르주아' 국가 장치의 일부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적은 제국이나 자본이 아니라 민주주의라고 불린다."라는 알랭 바디우의 언뜻 의아하게 들리는 주장은 정곡을 찌른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관계의 모든 급진적 변화를 가로막는 주범은 민주주의적 절차 내에서만 모든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민주주의적 환상'인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구체적 강령을 만들어내기 어려운 데는 이처럼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162

월가점령시위의 수많은 (종종 혼란스런) 발언들 기저에는 두 가지 기본적 통찰이 깔려 있다. 첫째, 현재 대중의 불만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대한 것이다. 문제는 시스템 자체이지 그 특정한 부폐 사례가 아니다. 둘째, 현재와 같은 다당제 형태의 대의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해결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는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월가점령시위의 가장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경제생활의 파괴적 결과 앞에서 속수무책임이 입증된 현행 정치형태를 벗어나 민주주의를 어떻게 확장해 나갈 것인가? 다당제 대의민주주의를 뛰어넘어 이렇게 재발명된 민주주의에 과연 이름이 있을까? 있다.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163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어떻게 민주적 다당제 체계를 넘어 집단적 의사결정을 제도화할 수 있을까? 또 누가 이 재발명이 주역이 될 것인가? 잔인하게 말하자면, 당장 오늘 무엇을 해야할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지식인이든 일반인이든 그것을 아는 주체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은 장님이 장님에게 길을 안내하는, 좀 더 정확히는 장님끼리 길을 안내하면ㅅ 서로 상대방은 볼 수 있다고 믿는 교착상태인 것일까? 아니다. 각자 모르는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중은 답을 가지고 있다. 다만 자신들이 답을 가진(혹은 스스로가 답인) 질문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존 버거(John Berger)는 내부인과 외부인을 가르는 벽의 잘못된 쪽에 서있는 '대중(multitude)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대중은 아직 제기되지 않은 질문의 답을 알고 있고 벽보다 오래 살아남을 능력이 있다. 질문이 아직 제기되지 않은 것은, 그러자면 진심으로 와닿는 용어와 개념이 필요한데 민주주의, 자유, 생산성 등 현재 사건드을 명명할 때 사용되는 용어와 개념은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곧 새로운 개념과 더불어 새로운 질문이 대두할 것이다. 역사는 바로 그러한 질문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니까. '곧'이라면 언제? 한 세대 내에.'165-166




8 <더 와이어>, 이 아무 일 없는 시대에 해야 할일(The Wire, or What to Do in non-Evental Times)


-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허위적인 종언 이후의 '그저 그런 삶(mere life)'과 '진정한 삶(real life)'을 대비시킨다. '그저 그런 삶'은 자신의 삶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삶이고, 자신의 기득권이 아무 탈 없이 그대로 대대손손 보존되기를 매일 기도하는 삶이다. 그것의 정치적 버전이 자유민주주의다. 지젝이 보기에 자유 민주주의의 최대 관심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마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자유민주주의는 무사건의 당(party of non-party)이다."(이현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자음과 모음 2011 p72, 슬라보예 지젝,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자음과 모음 2011 p210 참조  167

금기어를 사용하여 금기를 깨는 효과.  169

'와이어(wire)'에는 다양한 함의가 있지만(철조망을 따라 걷는다거나 도청장치를 착용하는 등) 사이먼에 따르면 이 제목은 주로 "두 개의 미국 사이의 거의 가상적이지만 침범 할 수 없는 경계", 즉 아메리칸 드림에 동참한 사람들과 낙오된 사람들 사이의 경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더 와이어>의 주제는 한마디로 계급투쟁이자 그 문화적 결과를 포함한 우리 시대의 실재다.  170

사이먼은 이 급진적인 분열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매우 명료하게 설명한다. 

'우리는 마약에 대해 전쟁을 벌이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단지 더이상 노동공급원으로 필요가 없어진 도시 최하층계급을 짐승 취급하며 인간성을 말살하고 있을 뿐이다. (중략) <더 와이어>는 미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낙오된 미국에 대한 이야기다. (중략) 마약 전쟁은 현재 최하층계급이 벌이는 전쟁이다. 그것이 전부다. 다른 의미는 없다.'  170-171

운명이 어떻게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승리를 거두는지에 대해 <더 와이어>는 체계적으로, 이어지는 각 시즌마다 한 단계씩 분석을 진행해 나간다.

시즌1은 마약상 대 경찰이라는 갈등을 제시하고, 시즌2는 노동 계급의 붕괴라는 갈등의 궁극적인 원인을 파해치며, 시즌3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 전략 및 경찰과 그 실패를 다룬다. 시즌4는 왜(흑인 노동계급 청소년의) 교육만으로는 불충분한지를 보여주고, 마지막 시즌5는 언론의 역할, 즉 일반 대중이 이 문제의 실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유에 초점을 맞춘다.  173

핵심은 그들 모두 어떤 식으로든 법을 위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178

마르크스도 비록 한정된 주관적 입장에서는 생산의 목적이 생산물, 즉 사람들의 (가상적 또는 현실적) 수요를 충족시킬 물건이고, 다른 말로는 사용 가치지만, 이 시스템 전체라는 '절대적 관점'에서 보자면, 개인의 수요의 충족은 단지 자본주의적 (재)생산 지게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일 뿐이라 말한다.  183

제임슨이 말한 대로 <더 와이어>는 범인이 일개 번죄자(나 범되 단체)가 아니라 사회 전체이자 전체 시스템인 탐정물이다.  183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실재가 추사적이고, 자본의 추상적 가상적 운동이며, 실재와 현실의 라캉식 차이를 동원하자면, 현실이 실재를 가린다는 것이다. '실재의 사막'은 자본의 추상적인 움직임이고, 마르크스가 말한 '실재적 추상(real abstraction)'도 같은 맥락이다.  183

마르크스는 자본의 광포한 자기 증식적 순환을 묘사했고, 자본의 유아론적인 자기 수태적 행보는 오늘날 메타 반영적인 선물 투기에서 절정에 이른다. 아무런 인간적, 환경적 고려 없이 자기 갈 길만 추구하며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는 이 괴물의 유령이란 이데올로기적 추상성에 불과하고, 그 뒤에는 거대한 기생동물 같은 자본적 순환의 토대가 되는 생산력과 자원을 제공하는 실제 사람들과 자연물이 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문제는 그 이데올로기적 추상성이 금융 투기자의 사회 현실에 대한 오해의 일부일 뿐 아니라, 물질적 사회 과정의 구조를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정확히 실재라는 것이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때로는 모든 국가의 운명이 자본의 유아ㅇ론적이고 투기적인 춤사위에 따라 결정되는 판국에, 정작 자본은 자신의 운동이 사회 현실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전혀 무관심한 채 수익성이라는 목표만 추구한다.  183-184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체계적 폭력.

이 폭력은 더 이상 개인이나 그들의 '사악한' 의도에 책임을 물을 수 없이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체계적이며 익명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reality)과 실재(the real)에 대한 라캉식 구분과 마주하게 된다. 현실은 실제 인간들이 상호작용과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사회 현실인 반면, 실재는 사회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결정하는 자본의 냉혹하고 '추상적'이며 유령 같은 논리다. 이 간극은 생태적 파괴나 인간의 고통으로 얼룩져 생활이 분명 혼란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경제 보고서상으로는 '재정적으로 건전한'국가로 발표되는 어떤 국가를 방문해 보면 실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자본의 상황인 것이다.  185

마르크스도 <자본론>의 유명한 구절에서 상품의 교환과 순환으 감춰진 논리를 끄집어내기 위해 의인법에 의존한다. "만약 상품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의 사용가치는 인간들에게 관심사일지는 몰라도 물적 존재로서의 우리에게는 속하지 않는 것이다. 물적 존재로서 우리에게 속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다. 상품으로서 우리가 교환되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단지 교환가치로서만 서로 관계를 맺는다.  187

<더 와이어>는 종종 권력과 저항, 또는 법과 그 위반 사이의 관계에 대한 푸코식 주제(topos)의 관점에서 해석된다. 순응을 요구하는 규제 과정이 오히려 '억압'하고 규제하려는 대상을 낳는다.  192

주변부의 주관적 입장에서 지배적인 장치에 '저항'하는 식의 전략을 확산하고자 애쓸 것이 아니라 지배적인 장치 자체 내에서 가능한 파열 양상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저항의 현장'에 대한 모든 이야기에서, 비록 당장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때로는 우리가 저항하는 장치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193-194

삶은 거대한 순환이고, 우리는 기린을 먹고, 기린은 풀을 먹는다. 그러나 그 후 우리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풀에게 먹혀 순환이 종료된다. 이것이 가장 꼭대기에 있는 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메시지다. 결정적인 것은 우리가 이러한 '지혜'에 부여하는 정치적 해석이다. 이것은 단순한 철수의 문제일까, 아니면 급진적 행동 조건으로서 철수의 문제일까? 다시 말해, 삶은 항상 원을 이루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 위계질서를 오르내릴 뿐 아니라 원 자체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199-200

운명에 저항하는 (그래서 운명의 실현을 돕는, 마치 오이디푸스(Oedipus)의 부모나 바그다드에서 사마라로 도주했던 하인처럼) 것이 아니라, 운명 자체, 그 기본 좌표를 바꾸는 것이다.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는 "무엇인가를 바꾸어야만 모든 것이 그대로 남는다."라는 말을 뒤집어 언젠가 "아무것도 바꾸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이 달라지게 하자."는 의견을 제안했다.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 혁명화가 요구되는 후기 자본주의의 역동성 같은 일부 정치적 성좌에서는, 어떤 것도 바꾸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오히려 진정한 변화의 주체다. 변화의 원리 자체의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00

우리는 오늘날 '전면적인 경제 불황'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전망이 진정한 집단적인 반체제주의를 야기할까? 결과가 어떻든 간에,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사이먼의 비극적인 비관주의를 오나전히 수용하고 (시스템 내에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1-202




9 시기와 분노를 넘어서(Beyond Envy and Resentment)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가 이른바 '복지 국가의 이율배반'이란 문제에 대해 해법으로 제시하는, 단순한 시장 교환을 넘어서는 '기부의 윤리학(ethics of gift-giving)'.  203


그가 말하는 변화를 달성하려면, 민주주의 시대에 이상하게 살아남은 전제정치의 잔재인 국가주의(etatisme)를 탈피해야 한다. 전통 좌파조차 놀랄 만큼 강한 이 개념은 국가가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필요시) 그들의 생산물 일부를 법적 강제력을 동원해 몰수 및 결정할 수 있는 명백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것이다. 시민은 자신의 소득 일부를 국가에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날 때부터 국가에 빚을 진 존재처럼 취급받는다.  204

첫 번째 단계는 납세 의무자에서 자원자로의 변경이다. 부자에게 과중한 세금을 매기는 대신, 자발적으로 자신의 부를 어느 정도나 공공복지에 기부할 지 결정할 (법적) 권한을 제공해야 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세금을 급격히 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기부자가 스스로 어디에 얼마를 기부할지 결정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작은 여지라도 열어놓아야 한다는 뜻이다.이러한 시작은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점차 사회 결속력의 근간이 되는 사회 전체의 윤리를 변화시킬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상화이야 어째됐든 결국 해야만 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게 된다는 오랜 역석레 빠지는 것은 아닐까? 선택의 자유가 실은 강요된 선택에 기초하는 거짓 자유가 아닐까?  205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에서 실시된 연구에 대한 보고 내용.

'... 일정 수준이 충족되면, 사람들은 돈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일에 대해 생각한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을 기꺼이 무료로 하거나 일주일에 20시간, 때로는 30시간을 자원 봉사하는 살마도 대단히 많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것을 팔지 않고 그냥 나눠준다. 대부분 고도의 전문 기술을 보유하고 직업도 있는 이들이 왜 회사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무료로, 때로는 업무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일하는 것일까? 참으로 이상한 경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 '이상한 행동'은 마르크스의 유명한 구호인 '능력에 따른 노동과 필요에 따른 분배'를 좇는 공산주의자의 행동이다. 이것암ㄴ이 진정한 유토피아적 차원을 갖는 유일한 기부의 윤리학이다.  210

MIT 실험에 어떠한 문제가 있든 간에, 자본주의적 경쟁과 이익 극대화가 전혀 '천성적'이지 않다는 점만은 분명히 입증된다. 기본적 욕구가 일정 수준 이상 충족되면, 사람들은 금전적 보수가 아닌 능력에 따라 사회에 기부해가며 '공산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212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건 힘겨운 투쟁을 통해 쟁취하는 것이다. 스파르타인의 가혹한 군사적 규율은 아테네인의 '자유민주주의'와 외적으로 대립하는 동시에 그것의 근간을 이루는 내적 조건이다. 이성이 있는 자유로운 주체는 오로지 혹독한 자기 규율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진정한 자유는 딸기 케이크와 초코 게이크 중 하나를 고르듯이, 안전한 거리를 두고 행해지는 선택의 자유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필연성과 겹쳐진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걸 때에만,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때에만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 조국이 다른 나라에 점령당했을 때 맞서 싸우는 것은 '선택할 자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존엄을 지키고 싶다면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219




10 미래가 보내는 징후(Signs From the Future)


꿈이 사라져버린 듯한 이 우울한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열정이 넘치던 숭고한 순간을 회상하며 향수와 자아도취에 빠지거나,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이러한 시도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냉소적이고 현실적으로 설명하는 것 외에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가장 먼저 언급할 것은 수면 아래에서 여전히 불만이 들끓고 있다는 사실이다. 분노가 계속 쌓여가고 있으니 새로운 저항의 물결이 뒤따를 것이다. .. 확실한 돌파구가 없는데다, 지배 엘리트는 명백히 통치력을 상실하고 있다. 더욱 불안한 것은 민주주의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228

월가점령시위, 아랍의 봄, 그리스와 스페인에서의 시위 같은 사건들은 그렇게 미래에서 보내온 징후로 읽어야 한다. 바꿔 말하자면, 맥락과 기원을 바탕으로 사건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역사주의적 관점을 뒤집어야 한다.  229

우리는 공간상으로는 여기에 위치하고 있지만 시간상으로는 공산주의 사상의 미래, 즉 해방된 미래에 위치한 요소를 적극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에서 인식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징후를 포착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한편, 현재 우리의 행동도 미래가 되어야 온전히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오늘날의 사회에서 '공산주의의 싹'을 필사적으로 찾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허비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가설상 공산주의의) 미래에서 오는 징후를 읽는 이과 그 미래의 근본적인 개방성을 유지하는 일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잡는 일이다. ..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그 균형은 양 극단을 핗는 일종의 현명한 '중도(中道)'와는 무관하다.  229-230

칸트의 이성과 직관의 관계 도식 (-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233

오늘날 공산주의자를 규정짓는 특성은 (현대식 버전의) '기적', 즉 타흐리르 광자의 시위와 같은 예상치 못한 사건 속에서 공산주의적 요소를 찾아내고, 그것을 (공산주의적) 미래에서 온 징후로 읽어내게 해주는 '독트린(이론)'이다.  234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미래는 '객관적'이지 않다. 그 미래를 지탱하는 주관적 참여를 통해서만 현실이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비난을 되돌아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적어도 장기적으로는)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원하지 않는 것, 즉 현재 누리는 '자유' 중에서 포기할 각오가 된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을까? 우리는 커피를 원하지만, 우유나 크림이 없는 커피를 원할까? (국가가 없는 자유? 사유재산이 없는 자유? 등)  235

우리에게 위기가 임박했다고 설득하려는 생태학자에 대한 유일하게 적잘한 답변은 그의 필사적인 설득의 진짜 타깃은 자신의 비(非)신념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대답은 이것이다. "걱정 마, 재앙은 반드시 닥칠 거야! 불가능한 일이 이미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어. 하지마 인내심을 가고 지켜봐. 성급한 추측에 굴복하지도 말고, '지금이야! 두려운 순간이 다가왔어!'라고 생각하며 도착적인 기쁨에 빠지지도 마." 생태학에서 이런 종말론적 환상은 다양한 형태를 띤다. 예를 들어, 지구 온난화로 수십 년 내에 모두 물에 잠길 것이라거나, 유전자공학이 인간의 윤리와 책임의식의 종말을 의미한다거나, 벌들이 곧 멸종하고 전 세계적인 기아가 뒤따를 것이라는 등. 물론 이 모든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이러한 주장에 현혹되거나 거짓된 죄책감과 정의감("우리가 만물의 어머니인 대지를 노하게 했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다!")에 빠져서는 안 된다. 대신 냉정한 상태를 유지한 채 '지켜보자.'

'그러나 지켜보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하모가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3:33~37)

계속 깨어 있으면서 무엇을 지켜보라는 걸까?  236-238

프랑스어에는 영어로 정확히 옮기기 힘든, '미래'를 뜻하는 두 단어가 있다. '퓌뛰흐(futur, 미래)'와 '아브니흐(avenir, 장래)'다. '퓌뛰흐'는 현재의 연속선상으 미래로, 이미 존재하는 경향성이 완전히 실현된 것을 나타낸다. 반면 '아브니흐'는 보다 급진적인 중단, 현재와의 단절을 가리킨다. 단순히 '앞으로 될 것(hwat will be'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 것(what to come)'을 의미한다.  240

파국에 맞서 싸우는 방법은 파국적인 '고정점'으로 치닫는 이 표류를 중단시키고, '도래할' 급진적 타자성(Otherness)을 야기할 위험을 스스로 떠안는 것이다. 여기서 "미래가 없다(no future)"는 슬로건이 얼마나 모호한지를 알 수 있다. 좀더 깊이 파고들면, 이 슬로건은 종결 혹은 변화의 불가능성을 의미하기보다, 우리가 쟁취해야 할 것, 즉 파국적 '미래'의 영향을 중단시키고 이로써 '다가올' 새로운 것을 위한 공간을 여는 일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분에 기초하면, 마르크스(와 20세기 좌파)의 문제를 알 수 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너무 이상적인 꿈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미래적'이어서 문제였다. 마르크스가 플라톤에 대해 썼던 말(플라톤의 <국가>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기존 고대 그리스 사회의 이상적 이미지였다)은 그대로 본인에게 적용된다. 마르크스가 구상했던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이상화된 이미지, 자본주의 없는 자본주의, 즉 이익과 착취가 없는 확대 재생산으로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르크스에서 헤겔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를 인도하는 어떠한 숨은 목적론도 없고, 모든 개입이 곧 미지의 세계로의 도약이며, 따라서 결과가 언제나 우리 기대를 좌절시키는 그러한 사회적 과정에 대한 '비관적' 견해로 말이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기존 체계의 무한한 재생산은 불가능하다는 사실뿐이다. .. 중동의 새로운 전쟁이나 경제적 혼란, 이례적인 환경 참사는 우리 곤경의 기본 좌표를 순식간에 바꿔놓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열린 가능성을 충분히 수용하면서, 미래가 보내는 모호한 징후에 의거하여 스스로를 익르어가야 한다.  24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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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하는데... 안락한 자리만을 바라지. 그런 자리를 차지하고 나면 마음은,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말지." - 아르튀르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 철>  9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의 [착란 1]에 나온 시구를 빌려 와 이렇게 적었다.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어디 사랑만이 그러하겠는가. 랭보의 시 역시 시의 재발명이었고, 오늘날 하염없이 스러져 가는 세월 속에서도 놀라운 자태를 뽐내는 동서고금의 미술 작품 역시 재발명된 회화, 조각들이다. 영화 또한 재발명되어야 한다. 재발명된 것들이 모여 있을 때 비로소 '삶의 재발명'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 루이스 부뉴엘의 <비리디아나>, 피에르 파솔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는 모두 (우리의 삶을 둘러싼) 기존의 영역을 재발명한 영화들이다. 이들 감독의 재발명 방법은 매우 강력하다. 그들은 사랑에 대해, 종교에 대해, 사디즘과 카니발리즘에 대해, 폭력과 도덕에 대해 극단적인 지점까지 밀고 나갔다. 저 영화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구토하게 하고, 혐오감에 빠지게 하며, 심지어 영화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 우리는 이러한 재발명을 꿈꾼다.  10


여기서 다워진 영화들은 기존 영화가 지닌 통념과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새롭게 구현된 재발명은 우리들 스스로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은 무엇인지, 사랑은 무엇인자, 성은 무엇인지, 폭력은 무엇인지, 종교는 무엇인지, 나와 너는 누구인지를 질문하게 한다. 새로운 예술은 항상 재발명의 방식을 통해 재질문하고, 재사유하게 한다.

이 책이 단순히 '교양'이나 '입문' 수준에서 읽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이 책이 삶을 재발명하고, 섹스를 재발명하고, 사유를 재발명하게 하는 '본격적인 재발명 도구'가 되기를 원했다.  11


오늘날 우리는 재발명된 영화와 점점 더 만나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 까닭은 영화가 더 이상 재발며으이 영역이 아닌, 산업 시스템에 사로잡혀 기성품 복제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발명이 아니라 통속적 반복을 되풀이하고 있다. 진정으로 재발명된 영화는, 쾌적한 극장의 안락한 의자에 앉아 달콤한 시간을 누리고 싶어 하는 관객의 기대감을 배신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배신(영화의 대중 배신)은 위험천만한 일로 여겨지고 있으며, 사람들 또한 안온한 극장이 제공하는 향락을 즐기다가 더욱 안전한 집으로 귀가하기를 선택한다. 강렬함을 잃은 영화는 금세 잊힌다. 물론, 영화는 아무것도 구원하지 못한다. 다만 하나의 충격파로서 우리를 흔들어 깨울 것이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길을 내다볼 수 있는 작은 틈을 보여 주리라. 그럴 때 영화는 친구가 된다.  12





전체적으로 그런 기운이 느껴지는 섹스 - <감각의 제국> 1976 일본, 프랑스 108분, 오시마 나기사


<감각의 제국>은 1976년에 만든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작품입니다. .. '감각'이라는 말은 작지만 큰 울림을 지녔어요.  21


동시대를 대표하는 괴물은 '좀비'예요. 좀비의 가장 큰 특징은 감각이 없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고통을 느끼고 있나요. 혹은 어떤 무감각에 빠져 있나요.  22


<감각의 제국>은 1936년도에 실제 일본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었어요.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던 치정 사건을 재현하면서도(내부를 들여다보면서도), 바깥의 시스템(국제 합작)을 통해 주제 의식에 다가선 셈이니까요.  27


많은 이들이 사랑은 금기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랑의 형태에 대해서만큼은 엄격한 잣대를 갖고 있어요. 불륜이 대표적인 사례죠. 

그런데 사랑과 불륜 중 어떤 것이 더 큰 범주에 속합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사랑이 더 큰 범주에 속할 겁니다. 상위 범주에 해당하는 사랑은 금기가 아닌데, 그 하위 개념인 불륜이 금기에 속한다는 건 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요.  29


현실을 들여다보면 사랑에 대한 금기가 참으로 많아요. 불륜도 그렇고,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커플로 잏상한 눈으로 바라봐요. 동성애에 대한 갑론을박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금기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금기들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대단히 협소한 것'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습니다. 금기를 넘어서지 않을 때에만 우리는 사랑을 '사랑'이라고 여기게 되는 겁니다. ..

인간의 자유를 품은 사랑은 '모든 것을 무릅쓰고' 실천하는 행위예요. 이 영화가 위험하고도 지독한 사랑을 다루는 건 협소한 통념을 까발리기 위함이에요.  30


<감각의 제국>이 누군가에겐 '불편한 사랑 이야기'라는 점이 중요한 겁니다. 이들의 강렬한 러브 스토리는 통념에 의해 마비된 감각을 흔들어 깨우니까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사다는 기치의 성기를 자릅니다. 흔히 상대를 파괴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겁니다. 그런데 기치는 기꺼이 그 순간을 용인합니다. ..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까지 상대를 용인할 수 있을까요. .. 저로서는 감히 못 할 일이기에, 이들의 사랑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게 바로 <감각의 제국>의 출발점입니다. 타인의 사랑을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  31


나의 알몸은 상대에 대한 솔집함과 사랑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반면, 전적으로 타인인 누군가의 알몸은 정상적인 것을 벗어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타인이 '옷'으로서 드러나기를 바라죠.

왜 그럴까요. 이것은 인간 사회가 지닌 인식의 문제와도 깊이 연관돼 있어요. 옷은 타인의 경제력, 신분, 직업, 성별 등을 나타내는 기호입니다. 벌거벗은 몸은 '존재 그 자체'로 다가오기에, 우리는 그 타인이 누구인지 분별할 수 없어요. 그게 불편한 겁니다.  32


'벌거벗음'은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삼아요. 일종의 평등주의적 태도죠. 어쩌면 '복면 시위'도 이와 같은 맥락이겠죠.  32-33


그들의 나체는 불편한 게 아니라 오히려 불쌍한 것일 수도 있어요. 벗은 몸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니까요. 항상 그 벗은 몸으로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거죠.  34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말했던 유명한 '무인도 농담'이 있어요. 한 농부가 무인도에 아름다운 슈퍼 모델과 단둘이 갇혔어요. 상황이 좀 그렇다 보니, 결국 두 사람은 성관계를 갖게 됐죠. 그 후 슈퍼 모델이 농부에게 좋았느냐고 물어봐요. 그러자 농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좋았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 부탁을 하나 들어줄 수 있느냐.'라고 대꾸하죠. 그는 슈퍼 모델에게, 얼굴에 수염을 그리고 밀짚모자를 쓴 채 곁에 와 달라고 부탁해요. 슈퍼 모델은 그 청을 들어줍니다. 그녀는 약속한 대로 남장을 하고 농부의 곁에 와 앉죠. 그러자 농부가 슈퍼 모델을 툭 치며 말을 걸죠. '어이, 친구! 방금 내가 멀 했는지 알아? 그 유명한 슈퍼 모델과 잤다고!'

기치와 사다. 이들 두 사람도 그래요. 끊임없이 자신들의 결합을 과시하고 싶어 해요. .. 페이스북에 '아무개와 연애 중'이라고 자신의 '상태'를 공개하는 것도 같은 심리예요...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상태를 노출합니다. 자신들의 관계가 은밀하기를 원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노출되기를 원하는 거죠.

사다와 기치를 변태라고 욕하지 마세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자신을 노출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노출한 신체를 누군가가 봐 주기를 강렬히 희망합니다.  34-35


<감각의 제국>에 등장하는 사다와 기치의 벗은 몸에 대해 부끄러움이나 불편함을 느끼셨다면, 그건 분명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응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그 누구보다도 정열적으로 사랑했던 사람들. 우리도 이만큼 나아가 볼 수 있을까, 사랑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밀고 가 볼 수 있을까? 부끄럽게도 그러지 못할 겁니다. 수치심은 아주 끈질기게 인간의 판단과 사유의 발목을 붙잡고 있으니까요.  37


조르주 바타유가 쓴 <에로티즘>을 참고 문헌.


왜 인간은 이토록 섹스를 하고, 일체감을 얻으려고 할까요. 바타유는 동물과 인간의 섹스를 구분합니다. 동물의 섹스는 후손을 남기기 위한 생산성을 무엇보다도 중시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섹스는 생산에 관심이 없어요. 우리들 모두 '자손을 꼭 남기고 말겠어!'라고 생각하며 섹스를 하지 않잖아요. 오히려 섹스를 통해 쾌락을 추구하죠. 바타유에 따르면 인간은 에로티즘을 통해 쾌락을 추구하는 유일무이한 동물이에요.  40-41


인간은 쾌락을 위해 죽음 직전에까지 이르는 격한 에로티즘을 추구하기도 해요. .. 단지 벗는 행위뿐 아니라 성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금기가 존재하고,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제도화하죠. 에로티즘이 야기하는 '쾌락의 혼돈'을 억누르기 위함이에요. 동시에 미묘한 건, '에로티즘은 금기가 없으면 추구될 수 없다.'라는 바타유이 말입니다. 금기를 위반하는 것만큼 짜릿한 쾌락이 없거든요. 그래서 에로티즘과 금기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붙어 있습니다.  41


에로티즘의 관점에서 보자면 <감각의 제국>은 두 사람 사이의 쾌락을 극단적으로 밀고가는 영화예요. 그들을 둘러싼 금기가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이들은 더 강한 쾌락에 중독될 수밖에 없죠.  42


아무리 사랑이라도, 그 본모습을 정면으로 응시하기는 힘들죠.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는 쓰고 맛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포장하면 이보다 더 달콤할 수 없죠.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사랑은 금기인가?'라는 질문을 드렸죠. 사랑이 금기가 아니라고 여기는 건 우리가 '포장된 사랑'을 주로 봐왔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 주듯, 날것 그대로의 사랑을 마주하면 사실 역겨워요.  43


종교의 금기가 공동체의 금기를 깨는 영화보다 더 자극적인것은 섹스라는 금기를 다루는 영화라고 할 수 있어요. .. 섹스는 여전히 거부감과 결합된 묘한 흥분을 줄 것입니다.  49


들뢰즈처럼 '개념의 창조'를 해보자면 이 영화는 '섹시힐리즘', 즉 '섹스'와 '니힐리즘'을 합친 새로운 개념으로 읽을 수 있어요. 사실 아주 쉽죠. 소유욕의 화신인 사다와 인생이 허무한 남자 기치의 이이기예요.  50


사다의 상황은 빤해요. 그녀는 어린 나이에 남편과 헤어졌고요. 건강하죠. 나이도 분명 20대 초반일 것 같아요. 사다는 갈 데까지 가려고 하고, 소유하고 독점하려고 하죠. .. 사다는 알아요. 이 남자의 허무를 채울 수 없다는 걸요. 그래허 계속 섹스를 원하죠.  .. 진짜 슬픈 건 기치가 사정하고 난 다음이에요. 더 큰 허무가 그를 덮치고 말겠죠. ..

단도직입적으로 섹스가 허무일 수도 있다는 걸 말하고 있어요. 이 영화의 지침은 거기에 있어요. 섹스로 허무를 달랠 수 있지만, 없애지는 못해요.  51


첫 경험을 하고 나면 누구나 섹스에 대해 품고 있던 큰 판타지가 깨져요. 그래도 그 허무를 채우려고 섹스를 계속 이어 가죠. 인간의 섹스는 그래요. 동물의 발정기와 다르기 때문에 매번 더 몰입하죠. 그 순간적인 충만감을 느끼려고요.  52-53


사실 우리가 금기라고 하는 건 말초적인 것들이에요. 어찌 보면 유치하죠.  53


제가 정의를 잘하지 않았나요? '섹시힐리즘', 섹스+니힐리즘이에요. 허무한 남자를 사랑하는, 허무를 잡으려고 했던 한 여자의 이약. 마지막에 사다는 이 남자를 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닫죠. 딱 한 번뿐인 사랑, 목을 조르고 성기를 자르기 직전의 그 마지막 사랑이 그들의 유일한 섹스였을지도 몰라요.  54


결국 중요한 것은 섹시힐리즘에 대한 통찰이 아닐까 해요. 우리는 때때로 허무주의를 달래기 위해 섹스에 몰입합니다. .. 섹시힐리즘은 섹스가 가진 강도와 충만감으로 자신이 느끼는 허무를 채우려는 정신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을 듯해요. 허무는 일종의 무기력입니다. ..

치명적인 섹시힐리즘은 자신의 허무를 오직 섹스로만 채우려고 할 때 작동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행동이든 자꾸 반복하게 되면, 매너리즘에 젖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더 새로운 섹스, 더 기묘한 섹스, 심지어 엽기적이기까지 한 변태적 섹스가 나타나게 되는 거죠. 이럴때 섹스는 이제 그 자체의 즐거움을 잃고, 일종의 절대적인 수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마침내 섹스마저도 허무주의의 먹이가 되는 거죠.  55


어쩌면 사랑은 기꺼이 더러워지는 것, 타자와 섞이는 일인지도 몰라요. 타액을 섞고, 피부를 어루만져야 정신적으로도 더 많은 걸 공유할 수 있어요. 텔레파시같이 정신적으로, 아무런 접촉도 없이 교감할 수 있는 건 실상 없어요. .. 

롤랑 바르트도 서로의 대화가 애무라고 했죠.  58


한 사람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모습, 이미 그 자체로 에로틱한 사건'이라고요! ..

섹스를 말초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대화는 더 섹시한 성기일 수 있어요. 더 육감적인 향기일 수도 있고요. .. 플라토닉러브? 웃기지 마세요. 플라토닉에 집중하지 말고, 러브에 집중해요. 자신감 없는 사람들이 하는 게 플라토닉러브예요. ..

사랑과 불륜이 구별되는 지점은 어디일까요. 사랑이라 생각하면 밀어붙이고, 불륜이라고 느껴지면 관계를 포기할 준비를 하는 건 아닐까요. 수차례 말씀드렸다시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륜은 매우 흔한 테마일뿐 아니라 거의 모든 인류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관계 유형 중 하나예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죄악은 아닌 거죠.  59-60


본인의 마음속 울림이 더 중요하잖아요. 제가 하라고 한들, 하지 말라고 한들 뭐가 대수겠어요?

불륜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세요. 이 단어는 '아니 불(不)' 에 '무리 륜(倫)'자로 이뤄져 있어요. 사랑의 핵심에는 늘 불륜성이 도사리고 있어요. .. 불륜이라는 건 무리에서 떠나는 행위입니다. 그 땜ㄴ에 우리가 불륜을 저주하는 건 고착화된 욕망이에요. 기존의 틀을 유지하겠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죠.  60


사랑의 핵심은 기성의 해체와 새로운 것을 향한 전망이죠. 그걸 감당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 문제예요. 예전 관계에 너무 많이 의존해 있으면 해체하지 못해요. 그건 아무나 하는게 아니에요.  61


즉각적인 혐오에 따라 판단하지 말고, 무엇이든 숙고해 봐야 해요.  63


회자정리(會者定離 모을회 사람자 정할정 떠날리). 만난 것들은 반드시 이별해요.  66


음란한 사람일수록 섹스를 지나치게 신성시해요. 차라리 매춘부들이 가장 플라토닉한 사랑을 하지요.  69



제 주변엔 안타까운 여자 선배들이 많아요 페미니즘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돌연 어떤 남자랑 한 번 자고 나더니 결혼해 버리고 말았어요. 그게 성숙한 걸까요? 유치한 사람일수록 자기 수준을 모르면서 성숙한 줄 알아요.  72





비정상적 영혼의 정상화를 위한 폭력 - <시계태엽 오렌지> 1971 영국 137분, 스탠리 큐브릭


"사람에게 자유 의지가 없다면, 그는 이미 사림이 아니지." - 등장인물 신부의 대사  87


1971년에 선보인 <시계태엽 오렌지>는 앤서니 버지스의 원작 소설을 영화로 옮긴 작품이죠.  91


큐브릭은 '미래3부작'을 선보입니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인류가 달에 가기 1년 전에 만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그리고 <시계태엽 오렌지>가 그것입니다.  92


폭력은 단순히 폭력으로만 끝나지 않죠. 결국 섹스와도 연결이 되고, 정치와도 연결돼요.  96


금기는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하는 명령이에요.  97


루드비코 프로그램은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마음속에 그러한 욕망을 품기만 해도 고통받도록 만들어 버린 거예요. 즉, 루드비코 프로그램은 '욕망'을 처벌합니다.  98


이 영화가 논란을 일으킨 건 '우리는 모두 선이 긍정적이고 아름답다고 배웠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야. 인간은 악이든 선이든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가져야 해. 그것이 인간이야!'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에요. 약물을 주사하든 거세를 하든 따져 보아야 할 것은 자유 의지를 박탈당한 인간이 과연 인간인가, 하는 거예요.  98-99


무엇을 금기하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선뜻 선택할 수 없을 때 바로 금기가 되는 거예요. 선택 할 수 없는 것, 그게 다 금기예요 고를 수 있는 게 단 한 가지뿐이라, 선택이 배제된 것 말이죠. 그래서 이 영화의 주제가 금기인 거예요. 인간은 금기조차도 금기가 아닌 듯 선택할 수 있다는 게 이 영화가 보여 주는 핵심적 주제거든요.  99


인간이 가진 가장 일반적인 특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망하는 게 가장 쉽거든요. 그 순간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선한 자가 되는 겁니다. 니체는 이걸 '노예 감정'이라고 말했어요.

'주인'은 원망하지 않아요. 주인은 문제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원망하기보다 해결하고 타계할 길을 궁구하죠. ..

우리에게 자유로운 선택이 얼마나 허용됐는지를 살펴보면, 우리 안의 금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어요. .. 알렉스가 악마였던 이유는(영화 전반부에 나오듯) 그가 욕망을 '행했기' 때문이에요. 우리 역시 다양한 욕망을 갖고 있어요. 다만 그걸 다 표출하지 않을 뿐이죠. 꿈은 자유롭게 꿀 수 있지만, 모든 꿈을 행하지는 않잖아요. 현실에서는 어느 정도 금기가 작동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오직 금기만 남는다거나 강력한 금기에 붙들리면 문제가 돼요. 자유를 빼앗기게 되니까요.  100


금기의 문제. 첫째,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을 때 금기가 우리 내부에서 작동하기 시작해요. 둘재, 모든 것을 원망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노예'가 되고 말죠. 도덕은 태곳적부터 정해진게 아니에요. 단지 그것이 쌓이고 두터워져 금기가 되는 거예요. 한데 보통 대중매체는 이런 금기를 건드리지 않아요. 불편하니까요. 

예술은 금기를 건드리면서 인간의 자유를 드러내는 영역이에요. ..

사유는 쾌락이 아니라 불쾌함의 여지, 즉 '부정성'을 통해 찾아옵니다. 부정성은 왜 이 영화가 불편한지 묻게 하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 합니다. .. 그것은 금기에 순종하는 게 아니라 금기를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드러나는 부정성입니다.  104


타인에 대해 너무 쉽게 정죄하지 말고, 함부로 판단하지 맙시다.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벌어지는 만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이야기했습니다. 윤리적, 도덕적 잣대는 대개 약자들이 맹싢는 거예요. '나는 순수하다.'라고 믿는 거죠. 가난한 자는 순수해요. 힘이 없어 큰 죄를 저지를 수 없거든요.  106


선은 영원한 선이고 악은 영원한 악이라고 보는 시선이 있어요. 그런데 니체는 <선악의 저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나에게 선(good)과 악(evil)은 없다. 단지 좋은 것(good)과 나쁜 것(bad)만 있다."라고요. 나한테 어떤지가 중요해요. 독을 써서 죽는 사람이 있고 치료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근원적인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한다면 선생님, 아버지, 체제, 사회가 주장하는 선악일 뿐이죠. 따라서 우리에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걸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끊임없이 뭐가 맞는지 물어보죠. 그러다가는 평생 남의 명령만 받다가 죽는 거예요.  106-107


우리 모두 '폭력'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어요. 그런데 그 뉘앙스는 다 다르죠. 명확히 규정해야 해요. '오십보백보 모두 다 폭력이다.'라고 말하면 잘못된 거예요. 권력자가 사용하는 전형적인 물타기 수법이에요. 폭력이 나쁘다는 교육을 받다 보니, 정당방위마저 폭력이라고 생각해요. 균형 감각이 필요합니다. 물론 최소한의 폭력에도 균형 감각은 꼭 필요하죠.  108


정신분석학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딱 한 가지예요. 외적인 지배가 모든 개인에게 금기나 금지를 내면화시킨다는 것! 그 내면화가 완성되는 순간, 한 생명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새로 태어나게 되는 거죠. '나는 고유한 나'라고 생각하는 건 헛소리예요.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들 모두 전부 비슷하게 살고 있잖아요. 누가 누군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요.  113


학창 시절만 봐도 '성적 일등'과 '주먹질 일등'이 학교의 권력을 양분해요. 그들은 서로이 영역을 나눠 갖고 침범하지도, 치고받지도 않아요. 상대의 권력을 인정하는 거죠. 흥미롭지 않나요? 경쟁을 강요해서 일등을 상찬하는 사회 구조에서는 일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걸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 말이에요. 주먹 일등, 게임 일등, 저항 일등, 공부 일등, 섹스 일등 ... 일등만이 모든 인정과 존경을 독점하는 사회! 아렉스는 바로 이런 사회가 길러 낸 괴물, 아니 이런 사회가 낳은 적장자라고 할 수 있지요.  115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느 우리 시대에 대한 비판이 될 수도 있어요. 정치권력에는 개기지 못하니 성적 쾌락에만 몰입하는 시대잖아요. 본디 '코미디'란 금기 체계를 건드려서 희열을 주는 거예요. 광대들은 그 옛날에도, 지엄한 왕에게조차 마음대로 시비를 걸 수 있었어요. 그게 광대(피에로)의 역할이었죠. 결국 코미디는 정치와 성(性), 이 모든 것을 건드려야 재미있어져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적 비판을 제대로 할 수 없어요. 그러니 <SNL>등 온갖 개그 프로그램에 오직 '섹스 코미디'만 오르내리는 겁니다. 알렉스의 경우, <베토벤 교향곡 9번>을 통해 정치적 검열을 당한 거죠. 이제 그는 쫄아서 아무것도 못 할 거예요. 따라서 그에게 남은 건 <싱잉 인 더 레인>의 세계뿐이죠. 미국적 자본주의의 세계, 뮤지컬의 세계 말이에요. 어쩌면 스탠리 큐브릭은 이러한 부분들을 건드리고자 했던 것일 수도 있어요. 어쨌든 알렉스는 정치적 영역에서 거의 '거세'를 당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그는 섹스를 꿈꿀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치유됐다.'라고 선언하죠. 정말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도 이렇게 탄생한 것이구나.'하고 깨달았어요.  121


세뇌는 곧 마비입니다. 자기 스스로 어떤 대상에 다가갈 수 없게, 욕망할 수 없게 하는 거예요. 각종 매체를 통해 획일화된 문화가 대량으로 살포되면서 우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 잊게 돼요.  127


폭력에 무감각해지는 것은 그것에 반복적으로 노출됐기 때문이 아닙니다. 상처 난 데를 또 다치면 아프지, 무감각해지지는 않잖아요. 단지 매체의 힘으로 무감각해질 뿐입니다. 현실의 폭력과 매체가 다루는 폭력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물론 현실의 폭력에 대해서도 무각각해질 수는 있어요. 그러나 이때의 무감각은, 매체를 통해 습득한 무감각과는 완연히 다릅니다.  128


검열의 가장 기본적인 단계가 '타인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해요. 그래서 남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자신의 솔직한 모습, 진솔한 욕망을 방출하거나 표현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129


선택을 할 때는 두 갖를 고려해야 해요. 하나,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방향.

둘, 내 삶을 지금처럼 그대로 유지하는 방향. .. 어떤것을 선택하려면 그 선택의 단점을 모두 감당할 것, 그리고 버린 선택의 장점을 전부 포기할 것! 이 정도는 각오해야 해요.  131





배신하지 않는 동물의 왕국을 꿈꾸는 정치 - <살로, 소돔의 120일> 1975 이탈리아 114분,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파솔리니 감독의 논문 <시의 영화>는 오늘날에도 영화 이론을 연구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문헌으로 통해요.  153


금기라는 주제를 다룰 때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사드 후작이죠.  154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라 할 수 있는 걸 인용해 보겠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쾌락을 느낄 수 있는 건 단순히 육체적 쾌락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떤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들의 말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야말로 성욕, 식욕을 능가하는, 즉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보여 주죠.  160-161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 앎의 의지>에서 권력의 문제를 흥미롭게 성찰합니다. 군주의 주권적 힘을 '생살여탈권'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왕이나 군주가 타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 인간이 타인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면, 그런 권력은 분명 신적인 쾌락을 줄 겁니다. 파시스트들은 이러한 상황에 흥분합니다. 그래서 파시스트가 행하는 권력과 폭력의 강도는 점점 더 세질 수밖에 없어요. 마치 무언가에 중독된 것처럼 말이죠. 맞아요.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에, 그것이 주는 쾌락에 중독되어 가는 거예요.

자본주의도 비슷하죠. 돈이 곧 권력이 되는 시대인 겁니다. 돈이면 못 할게 없다는, 즉 갑질의 야망을 품게 돼요. 타인에 대한 배려는 사라지고,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지죠. 파시즘이 인종주의로 모든 사유를 차단했듯, 자본주의는 돈을 통해 모든 생각을 단순화합니다. "돈 주면 될 것 아니야!" 파시즘과 자본주의는 모두 '한 가지'로 세상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재편하는, 권력의 놀라운 횡포를 보여 줍니다.  162


파시스트들은 소년과 소녀들을 사물로 취급합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가 아름다은 엉덩이를 선별하는 장면입니다. 인간을 상품으로 보는 거이죠. 이러한 시선은 파싯트만 지닌 게 아니에요. 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는 부분이죠.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사물화해요. 그런 면에서 파시즘과 자본주의는 서로 연결됩니다. 인간을 사물처럼 대하는 파시즘은, 생며을 돈으로 환산하는 자본주의와 등가를 이루죠.  165


<살로, 소돔의 120일>은 파시즘의 행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예요. 그런데 이걸 정면으로 보지 못한다면 진짜 세상에 대해선 아예 편히 눈감아 버리게 되지 않을까요.  171


'리베르탱(libertin)'이라는 말입니다. 이걸 검색해 보면 '자유연애주의자'라고 나올겁니다.  174 


우리는 열심히 사랑해야 저항할 수 있어요. 남자가 손을 의연히 들어 올리는 장면, 그게 파솔리니가 말하려고 했던 것의 전부라고 봐요. 파시즘에 저항하지 않으면 우리는 강간당하고 똥을 먹게 되고, 누군가를 고발해 가며 죽여야 해요.  178


온몸으로 체험해 본 우여곡절이 없으니, 남의 이야기만 앵무새처럼 읊조리는 거예요.  186


'절차적 민주주의'라는게 있죠? 이 절차들이 우리를 죽여요. 가령 우리가 시위를 한다고 해 봐요. 헌법에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있으니, 당당하게 해도 될 것 같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도로 교통법'을 더 우선시하죠. 씨발, 이게 뭐야? 그래서 불만을 제기했더니, 옳다구나 하면서 소송을 걸어 보래요. 지금 시위하기도 바쁜데, 대법원까지 가야겠어요? 절차를 복잡 미묘하게 만드는 게, 바로 부르주아 사회의 특징이에요. 

소송이 발생하면 대기업이나 자본가들은 당장 변호사를 사죠. 하지만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변호사를 만날 수조차 없어요. 그러니 소송 과정에서 우리는, 약자들은 진이 빠질 수밖에요. 대기업은 변호사에게 소송을 맡기고 다른 일을 하는데, 우리는 생업을 제쳐 두고 재판에 몰입해야 해요. 설령 소송에서 이기도라도 우리는 망한 거죠. 그중 제일 치사한 게 파업했다고 업무 방해죄로 고소하는 놈들이죠. 정말 법대로 끝까지 가면 결국 노동자가 이길 테지만, 법정에서 소송을 이어 가는 수년 동안 그 사람은 뭘 먹고살겠어요? 어느 광고 문구처럼 '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하는 거죠.  187-188


이탈리아 철학자 중에 그람시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람시가 가장 문제시했던 게 바로 '투표를 통해' 무솔리니를 뽑았다는 사실이었어요. 뻔히 전쟁을 일으킬 미친놈을, 무려 선거로 뽑은 거예요! 우리로 따지면 이명박이나 박근혜를 왜 대통령으로 뽑았느냐, 하는 수준의 문제랄까요. 누가 봐도 정리 해고를 하고 임금 피크제를 시행할 사람들인데도 찍잖아요. 그가 또 지적한 게 있었는데, 이탈리아 대중이 크로체라는 작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었어요. 우리나라에 맞게 말하자면, 왜 사람들이 이문열과 신경숙을 그리도 좋아하는지, 의문을 품었던 거죠. 그러니까 좀 진보적이고 삶에 진짜 도움이 되는 쓰디쓴 이야기는 싫어하고, 보수적이고 대중적이기만 한 글을 좋아하느냐는 거였어요.  193-194


사실 우리가 보는 많은 영화들, 그중에서도 '수직적 관계'를 강조하는 영화들은 몽땅 파시즘적이에요. 남편이 부인을 때리고, 아버지가 자식의 결혼에 반대하는 것도 일종의 파시즘이에요. 파시즘이 아닌 건 '수평적 관계'예요. 가령 파시즘의 허구성을 다룬 게 있다면, 바로 홍상수의 영화예요. 가부장적 권력을 휘두르려는 남자 주인공들이 정말 보잘것없이 그려지잖아요.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정치를 다루지 않더라도 제대로 된 감독들은 다 그런 걸 만든다고요. ..

예술과 인문학의 궁극적 귀결은 자유와 사랑이에요. ..

홍상수 감독은 누가 보든 안 보든, 생활 속의 파시즘을 고발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아요. 반면 이문열과 신경숙의 문학은 비난을 피할 수 없죠. 이문열에게는 뿌리 깊은 영웅주의가 있고, 신경숙에게는 남성에게 복종하며 정신 승리만 해 대는 태도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이야기만 읽으려고 해요. 자신의 얘기, 나를 위로해 주는 이야기만 듣고 싶은 거예요. 비정규직이 많다. 취업이 불안하다. 통탄하면서 오히려 그런 책을 읽죠. 가슴을 후벼 파는 작품은 외면하고요. 결국 똥을 던질 수밖에!  194-195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길 바라는 종교 - <비리디아나> 1961 스페인 90분, 루이스 부뉴엘


그가 극도로 혐오한 것은 종교적 도그마, 맹신주의, 교회의 위선과 억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4


제가 가장 흥미롭게 본 건 '줄넘기'예요. 

첫 번째 장면에서 하녀의 딸이 혼자 줄넘기를 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장면에서는, 비리디아나가 소녀와 함께 줄넘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줄넘기는 숙부가 자살할 때 목을 매는 도구로 쓰입니다. 숙부의 집으로 돌아온 비리디아나가 줄넘기를 목격하고, 곧장 장면이 바뀌더니 다시 줄넘기를 넘는 소녀가 나옵니다. 그때 영기 관리를 돕는 남자 하인이 나타나 소녀를 나무라지요. "왜 죽은 사람이 쓴 줄넘기를 가지고 노느냐."라며 말이죠. 그러자 소녀는 "그건 제 것이니까요."라고 당돌하게 대꾸합니다. 결국 소녀는 아랑곳없이 줄넘기를 넘죠. ..

영화 후반부에 갑작스럽게 줄넘기가 다시 등장합니다. 비리디아나는 숙부의 유산을 가지고, 마을 걸인들과 부랑자들을 모아 일종의 생활 공동체를 만듭니다. 그들 중 한 명이 부엌에 있던 줄넘기를 가져다가 자신의 허리끈으로 사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후 이 줄넘기(혹은 허리끈)는 비리디아나가 부랑자들에게 추행을 당하는 장면에서 또다시 등장합니다. 비리디아나가 완력을 쓰는 부랑자들에게 저항하며 붙드는 것이 바로 그 줄넘기인 겁니다.  221-222


한 사회가 경직되고 금기를 강하게 통제할수록 '이건 꼭 이 방법으로만 써야 한다.'라고 규정을 내려 버립니다. 법의 적용도 마찬가지죠. 사회가 강퍅해지루록 원칙만 강조해 댑니다. 여하튼 사물에는, 근본적으로 맥락이 없어요.  223


줄넘기는 단순한 놀이 기구였어요. 그런데 숙부가 그걸로 목을 매단뒤부터, 줄넘기는 죽음과 관련된 하나의 터부가 됩니다. 이제 줄넘기는 죽음을 암시하는 불길한 대상이 된 겁니다. 하지만 소녀로서는 황당했을 겁니다. 줄넘기는 분명 자신의 소유물이었으니까요. 그러니 무엇이 문제냐며 반문하는 거죠. 이 저항은 뭔가 불쾌하고 미묘한 

느낌을 주는 장면입니다. 이런 느낌은, 영화 후반부에 줄넘기가 부랑자의 허리띠로 전용(轉用 구를전 쓸용)되면서 더 큰 불쾌감으로 증폭됩니다.

줄넘기가 소녀의 손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저 잠깐의 놀이 기구였겠죠. 자살의 도구도, 성폭력의 도구도 아니에요. 그저 하나의 줄일 뿐인데 우리는 이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상한 용도로 사용하지요. 이건 부뉴엘이 사물을 통해 우리의 통념을 흔드는 방식입니다. '줄넘기는 놀이 도구에 불과해.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당신이 장면 장면마다 얼마나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보라고. 당신은 줄넘기를 제대로 가지고 놀 줄도 모르잖아. 줄넘기는 한 사람의 자살 도구이면서, 성적 뉘앙스를 지닌 폭력의 흉기이기도 해. 그게 사물의 본성이야. 사물은 사용하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애초에 부여된 본성은 아무것도 없어.  223-224


부뉴엘은 사물에 대한 의미 부여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소녀와 같은 아이가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흔히 사물에 대한 집착을 페티시라고 합니다. 이 말에는 물건을 신격화하는 미신, 중독적인 욕망까지 아우르는 꽤 광범위한 의미가 들어 있어요. 흔히 페티시즘을 변태 성욕쯤으로 여기는데요. 가령 여성의 팬티에만 유독 집착하는 남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의 욕망을 가리켜 페티시즘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사실 페티시즘은 사물에 집착하는 모든 욕망을 가리켜요. 

비리디아나는 예수의 가시 면류관, 십자가, 칼 같은 것들에 집차과죠. 종교적 집착, 성물(聖物 성스러울성 만물물)에 대한 집착도 페티시즘이에요. 

페티시즘은 단순히 변태 성욕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 돈을 숭배한다면, 돈에 페티시가 있는 거죠.  ..

페티시는 특정 사물에 집착함으로써 발생하는 다양한 우상화 작업이에요. 

부뉴엘은 이러한 페티시즘이야말로 현대인의 본질이라는 점을 보여준 거죠. 동시에 이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덧없고 무의미한 일인지를 보여 주기도 합니다. 

숙부가 지닌 여자 다리에 대한 집착도 당연히 페티시즘이지요. 페티시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결국 자기만의 우상을 품고 있는 겁니다. .. 줄넘기하는 소녀를 달아야 해요. 사물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저 사물일 뿐이에요.  224-225


비리디아나가 집을 비운 사이에 부랑자들이 만찬을 벌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기념사진을 찍는다며 포즈를 취했을 때 나타난 화면 구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과 똑같습니다. ..

인간은 원본을 훼손시키는 걸 참지 못하죠. 그런데 패러디를 활용하는 예술의 가장 놀라운 점은 원본을 '모독'하면서 전혀 새로운 흥미와 가치를 유발한다는 데 있습니다. 

초현실주의가 기치로 내걸었던 것 중 하나가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수많은 예술적, 미적 영역을 훼손하고 모독하는 것이었어요. 모독이 왜 중요하냐고요? 모독은 우리를 원본주의나 절대주의로부터 자유럽게 해 주거든요. 그래서 대통령을 희화한 작품이 많은 곳일수록 민주적 사회인 겁니다.  225-226


일단 어떤 대상을 비판하려면 거기에 매혹돼야 해요. 대뜸 보자마자 생리적으로 '저건 무조건 싫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대상을 제대로 비판할 수 있을까요? 어떤 대상에 흠뻑 빠져 본 사람만이 안팎을 넘나들며 잘 비판할 수 있어요. .. 최악의 비평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호불호만 던지는 거예요.  228


우리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무조건 착하다.'라는 테제에 빠지기 쉬워요. 부자가 나쁘다는 통념처럼, 가난하고 힘없으면 무조건 착하다는 생각 또한 통념이라는 사실을 부뉴엘은 건드리고 있는 거예요. ..

성직자든 누구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위선적인 모습을 가진다는 겁니다.

약자나 소수자는 (약하고 소수이기 때문에) 선할 수밖에 없다는 진영 논리가 생기기도 해요. 그런데 이러한 논리가 더 위험할 수 있죠. 그들을 위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비좁은 테두리 안에 가두는 일이니까요.  231


라캉은 '여자는 히스테리 환자고 남자는 강박증 환자다.'라고 말했어요. 히스테리라는 단어의 어원은 '자궁'이에요. 엄마 말을 잘 듣던 아이가 갑자기 짜증을 내는 거 있죠. 그런 게 바로 히스테리입니다. 히스테리에 걸리는 사람의 특징은 타인의 욕망만 중시하고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는 데에 있어요. 참고 참다가 갑자기 자신의 욕망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바로 이럴 때를 가리켜 '히스테리를 부린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히스테리가 유독 여자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이라고 굳게 믿다가 갑자기 자신의 진짜 욕망을 발견하는 거예요. 

반면 남자는 강박증이에요. 자기 욕망만 중요하다고 여기죠. 가족끼리 산에 가 보면 정확히 알 수 있죠. 오히려 딸들이 항상 산을 잘 올라요. 가족들한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 남자들은 등산을 하다가 힘들면 중간에 퍼져요. 그러고는 아버지한테 이러겠죠. '아우 씨발, 존나 힘들잖아!' 그러면 가족들이 달래요. 그렇게 법석을 놓아도 남자는 쫓겨나지 않아요. 그게 다 가부장제 때문이에요. 그래서 여자들은 집안일을 도우며 부모의 욕망을 잘 맞춰요. 하지만 아들은 안 그래요.  241


비리디아나의 운명도 행복할 것 같지 않아요. 언제쯤 그녀는 자각하게 될까요? 남자와 자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을, 힘 있는 남자로부터 안전을 확보하려는 자신의 욕망을... 그래서 비리디나아는 숙부가 가장 원하는 모습에 계속  맞춰 주려고 하고, 호르헤가 바라는 모습에 결국 자신을 맞추고 마는 히스테릭한 면모를 보이는 겁니다. 그래요. 우리 모두는 성별에 관계없이 비리디아나인지도 모릅니다. 모 두가 히스테리 증상을 가지고 있는 거지요.  243-244


결혼을 왜 해요? 결혼은 '부르주아 제도'예요. 상대의 '성기'에 대한 독점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거예요. 차라리 연애만 하든가, 쿨하게 헤어지든 해야죠. 나중에 이혼하더라도 위자료를 받으면 괜찮다고요? 여러분의 10년, 20년 세월을 1억, 2억에 팔래요? 그런데 대부분 팔아 버리고 말죠. 지금까지 자신의 성기를 사용해 온 사용료를 모두 받아 내는 겁니다. '애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서요. 이게 마지막 자존심인데도 품위를 지키긴 힘들죠. 오만 가지 얘기를 다 하죠. 돈 몇 푼으로 뭘 하려고 그래요? 순간적으로 보면 돈을 받는 게 좋긴 해요. 그게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딜레마입니다. ..

독실한 종교인이라면 결혼하지 마세요. 그냥 하나님과 순수한 사랑이나 나누세요. 아가페를 하며 살아요. 모든 신은 강한 남성성을 가져요. 내 남자 친구는 늘 바쁘다 하고, 다른 사람한테 눈도 돌려요. 사람이니까. 그러니 인간한테는 아무리 기도를 해도, 내게 완전히 오지 않죠. 그런데 신은 기도만 하면 내 옆에 있어 줘요.  246


순수가 유지되리라는 생각을 하지 마세요! 순수는 순간적인 것일 뿐이에요. 그게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지나치게 깨끗함만 추구하려다 보니, 아예 자기 영역에 아무도 안 들이는 사람조차 있어요. 오직 자기만의 만족을 위해 순수를 지향하는 건 미친 짓이에요. 환대를 위해 순수를 추구해야 맞죠. '집을 깨끗하게 청소해서 친구가 편하게 지내도록 해야지.'라고 생각해야지, '집이 깨끗이 청소되었으니, 너는 함부로 어지럽히면 안 돼!'라고 하는게 말이 되나요? 누군가가 오면 처오를 해야지 나 혼자 깨끗하게 있으려고 노상 쓸고 닦는다면 미친 거 아닌가요?  248


나를 위한 청소만 하지 말고, 타인을 위해 청소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그때부터 종교가 탄생하는 거예요. 나만을 위한 총소, 나만을 위한 순수, 그것이 바로 종교의 감각이니까요...

또 아이가 새로운 마음으로 집 안을 어지럽히길 바라며 청소를 하는 부모가 돼야 해요. 아이한테 집에 오자마자 '발 씻어! 손 씻어!'하면 그 애가 집에 오고 싶겠어요? 괴로울 뿐이죠. 타인을 위한 순수가, 결국 사랑이 아닐까 싶어요. 사랑엔 분명 순수의 요소가 들어가지만, 사랑 자체가 순수인건 아닌 셈이지요. ..

단순하게 정리해 보자면, 사랑이 싹트는 과정은 '더러워지는 것'이에요. 만지고 더듬고, 키스하고 침을 섞는 과정인 거죠. .. 감염되고 섞여야 해요. .. 표백된 사랑을 순수하고 보면 안 돼요.  248-249


인간은 적당히 위선적이고 적절히 위악한 게 맞아요. 관념이 앞서면 힘들죠. 관념이 생긴다는 건, 사실 인간은 선하지만 않다는 걸 반증하는 거예요.  250


필요한 건 솔직해지는 거예요. 위선적이라는 말 자체가 솔직하지 않다는 뜻이죠. 어떤 질문에 답하기 어려울 땐 어렵다고 말하면 돼요. 솔직한 게 제일 좋아요. 위선적으로 살지 않으려면 '나는 못 생겼다.' '엄청 무식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시인하면 돼요. 순간순간 닥쳐오는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더 나아가 그대로 행동할 수 있다면 정말 괜찮은 사람인 거죠. 어쨌든 완벽하게 위선적이지 않은 사람이 되긴 정말 어려워요.  250-251


남한테 욕을 들어도 되고 인정을 안 받아도 되면 위선적이지 않게 돼요. 타인의 인정, 점수, 평가에 민감할수록 약자이고, 미성숙한 겁니다. '누가 감히 날 평가해?' 라는 생각을 품고 있다면, 여러분은 완전한 자아를 가진 거예요. 불교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해탈이라고 하죠. .. 국가와 체제가 우리를 조련하는 방법이 무엇인 줄 아세요? 상과 벌입니다. 칭찬받고 싶어하고 욕먹는 걸 싫어한다는 점을 이용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그렇게 배워 왔잖아요. 부모, 국가가 원하는 것만 죽어라 하고 살잖아요. 미셸 푸코라면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타인의 칭찬에 기뻐하지 말고 남의 욕에 화내지 말라고요. 그럼 정말 완벽한 거죠. 이게 말처럼 쉽진 않지만요.

칭찬과 비판, 이 모든 것에 너무 큰 의미를 두면 안 돼요. 나보다 힘이 센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위선이에요.  251


좌우지간 욕먹었다고 상처받지 말아요. 전부 잊어야 해요. 무슨 말을 들었든 거기에 휘둘리면 안 돼요.  252





마치 그곳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낯선 곳을 찾아 들어가야 한다. 여행이 주는 달콤함은 우리 내면을 지배하던 신이 사라진 그 자리에 살냄새가 나는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260




OUTRO - 시험해 보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착한 사람은 남의 말을 그대로 듣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가리켜 착하고 선량하다고 말한다. 결국 착한 사람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의지에 따라 혹은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규칙을 잘 따르는 사람, 혹은 부모든 선생이든 경찰이든 타인이 금지하는 걸 어기지 않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착한 사람이다. 부당한 조건인데도 계약서만 믿고 묵묵히 일하는 사람, 어른들의 몰상식한 대우에도 참고 따르는 고등학생, 갑작스러운 멀미와 현기증이 찾아왔는데도 노약자 지정석에 앉지 못하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여고생, 후미진 곳에서 오줌을 누라고 해도 화장실이 없다며 고추를 잡고 서 있는 어린아이... 정말 착한 사람들이다. 

사실 착한 사람은 길들여진 사람일 뿐이다. 외부에서 강제한 규칙, 혹은 금기가 아예 한 살마의 내면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이제 외부에서 누군가가 완력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내면에 자리를 잡은 규칙이 착한 사람의 행동을 착하게끔 강제하게 된 것이다. 겉으로 보면 외부의 직접적인 강제가 없기에, 착한 사람은 스스로 양심껏 행동하고 있다고 믿기 쉽다. ..결국 착한 사람은 남이 하라는 것만을 하고,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인생을 주체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누구도 그렇다고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다. '자발적 복종' 상태의 핵심은, 바로 '복종'에 있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처음 자신에게 규칙을 강요했던 부모님, 선생님, 혹은 국가 기구가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착한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각인된 초자아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하며 살 것이다. 다니엘 디포가 쓴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 등장하는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갇히고 나서도 영국에서 통용되던 여러 격식들을 자발적으로 수행했던 것처럼 말이다.  267-268


타인들이 나쁘다고 했을 때에만, 우리의 행동은 타자의 이익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행동이 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 평가에 따라 행동하게 될 테다. 자신의 삶에 진짜 좋은 건지 나쁜 것인지, 혹은 자신에게 유쾌한지 불쾌한 일인지를 알려면, 우리는 어떤 규칙이나 금기에 연연하지 말고 직접 도전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 우리는 더 당당하게 외쳐야 하지 않을까. '시험해 보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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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읽기 위한 우회로, 이현우(로쟈)

자신의 주저를 몇 권 꼽아놓은 적이 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외에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까다로운 주체> 그리고 <시차적 관점>까지 네 권의 책이 그것이다... 지젝이 말하는 '시차'란 과학용어로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른 곳에서 보았을 때 서로 다른 위치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을 말한다. ..

지젝은 이러한 두 층위 사이에 어떠한 곸통 언어나 기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변증법적으로 매개, 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시차로 재정의한다. 그리고 철학과 과학, 정치라는 세 가지 주요 양식에 나타나는 시차적 간극에 개념적 질서를 부여하고자 한다.  8-9


그가 보기에 시차란 개념은 변증법적 사유의 장애물이 아니라 그 전복적인 핵심을 간파하도록 해주는 열쇠다. 이 열쇠는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까. 가령 '저항'의 교착상태에 대해 생각해보자. 지젝은 알랭 바디우를 따라서 시스템이 더욱 부드럽게 작동하게끔 만들어주는 국지적 행동에 참여하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진정한 위협은 수동성이 아니라 유사행동이며, '능동적'이고 '참여적'이 되려는 이 충동은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9-10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다원적 경합을 허용하며 그것에 의해서 유지되는 체제이지만, 지젝이 말하는 레닌주의적 제스처는 어떤 근본주의적 태도를 가리킨다. 오늘날 재발명되어야 할 레닌의 유산은 '진리의 정치'라고 그는 주장하며, 근본적 좌파의 목표는 '원칙 없는 관용적 다원주의'와는 정반대라고 선을 긋는다.  12


지젝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을 경제와 정치 사이의 시차(視差 볼시 어긋날차)에 대한 고려라고 본다. 예컨대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두 옆얼굴이냐 꽃병이냐'라는 시각적 패러독스와 유사하다. 즉, 정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격하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는 한갓 기술 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된다.  12-13


지젝은 이렇게 주장한다. "따라서 두 겹의 싸움을 해야 한다. 첫째는, 그래, 반자본주의이다. 그러니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자유주의적 의회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반자본주의는 아무리 '급진적'이라 해도 충분하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유산을 실제로 문제로 삼지 않고도 자본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오늘날의 핵심적인 유혹이다."

가령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나 <인사이더>처럼 무자비한 이윤추구에 몰두하는 대기업에 대한 비판을 다룬 영화들이 아무리 '반자본주의'를 표면상 내세우더라도 "대기업의 음모를 무너뜨리는 정직한 미국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는 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 세계의 견고한 중핵(민주주의)자체는 제거할 수 없다.  14


파리코뮌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독재였다는 것이 엥겔스의 주장인데, 지젝은 영겔스의 말을 받아서 1892-94년의 혁명적 폭력 또한 프롤레타리아독재와 함께 '신적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즉 여기서 '신적 폭력 = 비인간적 폭력 = 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등가관계가 성립한다. 이때 '신적 폭력'이란 말의 해석은 정확히 '백성의 소리는 신의 소리'라는 고대 로마의 격언을 따른 것이다.  15


그가 도출해내는 결론은 "민주주의적 절차보다 상위에 있는 이런 과잉의 평등-민주주의는 오직 자기 대립물로서 혁명적-민주주의의 테러의 형태로만 '제도화되'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진정한 혁명적 과정은 두 가지 계기를 구성소로 갖는다. 프레드릭 제임슨을 따라서 지젝은 그것을 첫째, '극단적인 부정의 제스처', 그리고 둘째 '새로운 삶의 창안'이라고 말한다. "근본적인 혁명 속에서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오래된 꿈을 실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꿈꾸는 방식 자체를 다시 창안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의 꿈을 위해 현실을 변화시키기만 하고 이런 꿈들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조만간 우리는 과거의 현실로 다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이 요점이다.  16


지젝은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이 주장한 교훈을 상기시켜준다. 혁명적 폭력의 목표는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방식과 토대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는 교훈 말이다. 그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이 거기에 있다.  17


지젝이 자신의 핵심적인 테제를 끌어내고 있는 농담 한 가지를 음미해보는 것도 좋겠다. 몽골 지배하에 있던 15세기 러시아가 농감의 배경이다. 한 농군이 아내와 함께 시골길을 걸어가다 말을 타고 오던 몽골의 전사를 만나게 됐다. 이 전사는 농군의 아내를 강간하겠다고 이르고는 "땅에 흙먼지가 많으니 내가 네 아내를 강간할 동안 네놈이 내 고환을 받치고 있어야겠다. 거기가 더러워지면 안되니까!"라고 덧붙였다. 몽골군이 일을 마치고 떠나자 농군은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다. 아내가 어이없어 하며 뭐가 기뻐서 난리냐고 묻자 농군은 이렇게 답했다. "그놈한테 한방 먹였다고! 그놈 불알이 먼지로 뒤덮였단 말이야!"  ...

포이어바흐에 관한 제11테제를 그는 이렇게 비튼다. "우리의 사회들에서 비판적 좌파는 지금까지 권력자들에게 때를 묻히는 데에 성공했을 뿐이나, 진정 중요한 것은 그들을 거세하는 것이다." 그 '거세'는 어떻게 가능한가? 일단 '20세기 좌파정치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지젝이 베케트의 말을 인용하며 다시 강조하는 그 교훈이란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이다. 혁명의 과정이란 점진적 진보가 아니라 몇 번이고 시작을 반복하는 운동이다.  17-18


현재의 세계자본주의 체제에는 어떤 적대가 내재해 있는가. 지젝은 네 가지를 꼽는다.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소위 '지적 재산권'과 관련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새로운 과학기술 발전의 사회, 윤리적 함의, 새로운 장벽(Walls)과 빈민가라는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생성. 이러한 파국적 위협과 불평등, 그리고 분리에 맞선 투쟁이 공유하는 것은 '공통적인 것(the comons)'을 둘러막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인류가 파멸해 봉착할 수 있다는 자각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시장의 실패"로도 불리는 기후위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때문에 '세계시민성'과 '공통관심'을 바탕으로 "시장메커니즘을 조절하고 제압하면서 엄밀하게 공산주의적인 관점을 표현하는 세계적 정치조직을 창설할 필요"가  제기된다. 그것이 '세계의 종말"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다.  

지젝의 공산주의론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구별이다. ..

지젝이 보기에, 세계자본주의 체제가 내속적인 장기적 적대를 넘어 존속하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적 해결책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모종의 사회주의를 재발명하는 것뿐이다. ..

"미국은 더욱더 프랑스처럼 될 것"이라는 일종의 '유러피언 드림'이 그것이다. 또는 빌 클린턴이 추천사를 쓰기도 한 <박애자본주의>같은 책을 그 징후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이 내세운 모토가 "승자만을 위한 자본주의에서 모두를 위한 자본주의로"이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핵심적 적대를 다루지 않는다.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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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책의 전체적인 ..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폭력에 대한 관심이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 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 즉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에 두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폭력이란 말이 즉각적으로 떠올려주는 상투적 '이미지'에서 한걸음 물러날 때만, 우리는 폭력에 대해 본격적으로 사유,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제안이다.  20





서문 


폭력이라고 하면 우리는 즉각, 범죄와 테러 행위, 사회 폭동, 국제 분쟁 같은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는 한 걸음 물러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직접적이며 가시적인 '주관적(subjective)'폭력, 즉 명확히 식별 가능한 행위자가 저지르는 폭력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폭력의 분출이 대체로 어떤 배경 속에서 발생하는 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

주관적 폭력은 세 가지 폭력 가운데 가장 가시적인 일부에 불과하다. 이 세 가지 폭력 중 나머지 둘은 객관적(objective)폭력인데, 그 첫 번째는 하이데거가 '존재의 집' 이라고 칭한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symbilic)'폭력이다. ..

폭력이 언어 자체에 들어 있으며, 언어가 의미 세계를 대상에 부과할 때 따라붙는다. 

두 번째로, 내가 '구조적systemic)'폭력이라 부르고자 하는 폭력이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 우리의 경제 체계와 정치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파국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

주관적 폭력은 '정상적'이고 평온한 상태를 혼란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객관적 폭력은 바로 이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

구조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폭력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고려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폭력은 단지 주관적 폭력의 '비이성적' 폭발로만 보일 것이다.  23-24


폭력에 대한 자유주의적 좌파 담론에 만연하는 가짜 급박감에 대해 생각해 보자. 가령 이들의 담론에서 여성, 흑인, 노숙자, 동성애자 등이 당하는 폭력의 장면을 거론할 때에는, 대개 추상적 개념과 사실적인 (거짓)구체성이 공존한다. "이 나라에서는 6초마다 한 여성이 강간당합니다"라는 진술과 "당신이 이 문단을 읽는 동안, 열 명의 어린이가 굶어 죽을 것입니다"라는 경고는 그저 두 가지 사례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의 뒤에는 도덕적으로 분개하고 있다는 위선적 감정이 깔려 있다. 스타벅스는 바로 몇 년 전에 이런 종류의 거짓 급박감을 써먹은 것이다. 매장 입구에 스타벅스 체인의 이윤 거의 절반이 커피 원산지인 과테말라의 어린이들을 위한 의료시설로 간다는 내용의 포스터를 붙여 놓아,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마다 한 어린이의 생명을 살리게 된다는 의미를 은연중에 풍겼던 것이다.

이런 긴급 지령들에는 근본적으로 반(反 되돌릴반)이론주의적 강렬함이 있다. "생각에 잠길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행동해야 합니다." 이런 거짓 급박감을 통해, 탈산업화 시대의 부자들은 그들끼리 격리된 가상 세계에서 살아가면서도 자기 세계 외부의 혹독한 현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줄곧 적극적으로 떠들어댄다. ..

"그럼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가요? 그냥 손 놓고 기다리라고요?"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대답해야 한다. 

"예, 바로 그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즉각 참여하고자 하는 충동에 저항하는 것, 끈기 있고 비판적인 분석을 사용하여 '일단 기다리면서 두고보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진정으로 '실제적인' 일일 때도 있다. 현실참여는 모든 방향에서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는 듯하다.  29-31 





1. SOS폭력


1922년 소비에트 정부는 철학자와 신학자에서 경제학자와 역사학자 등 주요 반공산주의 지식인들을 강제 추방했다. ...

니콜라이 로스키는 추방당하기 전까지 가족과 함께 하인과 유모들의 시중을 받아가며 상층 부르주아지의 안락한 삶을 누려왔다. ...

구조적 폭력 ..

"아무런 나쁜 일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에 주관적인 악행은 잔혀 없었다. 다만 이런 구조적 폭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배경이 있었을 뿐이다.  35-37


오늘날 지배적인, 관용적 자유주의자들이 가진 주된 관심사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대량 학살, 테러)에서 이데올로기적 폭력(인종주의, 선동, 성차별)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폭력에 반대하는 것인 듯하다. ..

다른 형태들의 폭력을 시야에서 지우고, 따라서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우리가 문제의 진정한 중심에 주의를 돌리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방해하고 있지 않은가?  37


어느 남편이 일터에서 평소보다 일찍 돌아왔다가 아내가 다른 남자와 침대에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깜짝 놀란 아내는 소리쳤다.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온 거야?" 남편은 화가 잔뜩 나서 맞받아쳤다. "딴 놈이랑 누워서 뭐하고 있는 짓이야?" 아내는 태연히 대답했다. "내가 당신한테 먼저 질문했잖아. 주제를 바꾸면서 내 질문에서 빠져나가려 하지 마!" 이런 농담은 폭력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니까 우리의 과제는 바로 '주제를 바꾸는 것', 폭력을 멈추자는 필사적인 인도주의적 SOS 외침에서 벗어나, 다른 SOS에 대한 분석, 즉 주관적 객관적, 상징적이라는 세 가지 방식의 폭력이 복잡하게 벌이는 상호 작요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38


객관적 폭력이라는 개념은 철저히 역사회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주의와 더불어 새로운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자기 증식적 순환을 광적인 것이라고 묘사했다.  39


자본은 자신의 운동이 사회적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무관심하며, 오로지 수익성이라는 목표만을 추구한다.  39


라캉이 말하는 현실과 실재의 차이를 볼 수 있다. '현실(reality)'은 부단한 상호작용과 생산과정을 행하는 실제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적 현실을 말하며, 실재(the Real)'는 사회적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결정하는, 냉혹하고 '추상적인', 유령과 같은 자본의 논리이다. 생활 상태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나라를 방문하면 누구든 이런 격차를 분명하게 체험할 수 있다. 우리 눈에는 파괴된 환경과 비참한 인간들로 가득찬 광경이 들어온다. 그러나 이후에 경제학자가 쓴 보고서를 읽어보면 그 나라의 경제적 상황은 '재정적으로 견실하다'고 알려 준다. 현실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자본의 상황인 셈이다...  40


16세기 멕시코의 비극에서 한 세기 전 벨기에가 콩고에서 저지른 대학살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세계화의 결과로 죽어간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주의를 돌릴 때면 이에 대한 책임은 대부분 부인된다. 그 모든 일은 그저 '객관적인' 과정의 결과물로서 일어났을 뿐이며, 누구도 계획하고 실행한 적이 없었고, '자본주의 선언' 같은 것도 없다.(그나마 '자본주의 선언'에 가장 근접한 걸 쓴 인물은 아인 랜드(Ayn Rand)이다.) 콩고 대학살의 주범인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는 대단한 인도주의자였으며 교황에 의해 성인칭호까지 받았던 사람이었다. ...

가장 커다란 아이러니는 이런 노력에서 얻은 이윤 대부분이 벨기에 국민들의 복지, 공공사업, 박물관 등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레오폴드 왕은 오늘날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 들의 선구자였던 것이 분명하다.  41-42


올리비에 말뉘(Olivier Malnuit)는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하여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십계명을 꼽은 바 있다.

1. 모든 것을 공짜로 줘버려라(저작권이 없는 자유로운 접근...). 단, 부가서비스에만 요금을 받으라. 그러면 부자가 될 수 있다.

2. 물건만 팔게 아니라 세상을 바꾸라. 세계혁명과 사회의 변화를 통해 물건의 품질도 나아질 것이다.

3. 나눔에 신경 쓰고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라.

4. 창조적이 되어라. 디자인과 신기술, 그리고 과학에 초점을 맞추라.

5. 모든 것을 말하라, 비밀이란 없어야 한다. 일처리의 투명함과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을 지지하고 실천하라. 전 인류가 협력하고 소통해야 한다. 

6. 정시 출퇴근하는 직업을 갖지 말고, 노동하지 말라. 다만 스마트하고, 역동적이고, 유연한 즉석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하라. 

7. 학교로 돌아가 평생교육에 참여하라.

8. 효소처럼 행동하라. 시장만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사회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일하라.

9. 가난하게 죽으라. 결코 다 쓰지 못할 만큼 가졌으니 재산을 필요한 자들에게 환원하라.

10. 국가가 되라. 기업과 국가의 협력 관계를 맺으라.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실용주의적이다. ..

실제로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인도주의의 위기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그들의 가장 선한 면을 드러내 보일 기회니까!  46-47


몇몇 거대 다국적 기업이 자사의 남아공 지점에서 모든 인종분리정책을 철폐하고 흑인과 백인에게 동일 직업에 대해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는 등 인종차별 법규를 무시하는 결정을 내렸는데,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결정이 직접적인 정치 투쟁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과 기업의 이익이 맞아 떨어지는 완벽한 사례 아닌가? 그 회사들은 이제 인종차별정책이 사라진 남아공에서 번창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47-48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진정한 세계 시민이다. 그들은 이런저런 것들에 대해 걱정이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포퓰리즘적 근본주의와 무책임하고 탐욕스러운 자본주의 기업들에 대해 걱정한다. ..

그들의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그 과정의 부산물로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는 건 사실이지만, 누가 그걸 불평하겠는가!  48


속지 말아야 할 점은, 기부하려면 일단 돈을 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49


유명한 앤드류 카네기는 사병(私兵 사사로울사 군사병)을 고용해 자신의 철강소에서 노동자 단결을 잔혹하게 억누르면서도, 많은 재산을 교육, 예술, 인도주의적 대의를 위해 내놓았다. 철강왕으로 알려진 그는 마음만은 황금으로 되어 있음을 입증해 보인 셈이다. 같은 식으로 오늘날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한 손으로 일단 벌어들였던 것을 다른 한 손으로 내놓는다.  50-51


빌 게이츠.. 지독한 사업가로서의 그는 실질적 독점을 노리며 경쟁사들을 파산시키거나 사들이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치사한 거래 수법을 동원한다. 반면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규모의 자선가이기도 한 그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지 못하고 이질로 죽어간다면 컴퓨터를 가진다는 게 무슨 소용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윤리로는, 자선을 베풀면 무자비한 이윤 추구 행위도 상쇄된다.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  52


진심이든 위선이든 자선행위는 자본주의적 순환이 논리적으로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는 철저하게 경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연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선 행위는 진정으로 곤궁에 처한 이들에게 부를 나눠준다는 일종의 재분배를 통해 균형을 재확립하며, 치명적인 덫을 피해간다.  53-54


오늘날 악을 대표하는 좋은 예는 평범한 소비자들이 아니다. 그런 전반적 파괴와 오염을 조성하는 데 전적으로 관여했으면서, 돈을 써서 자기 자신이 저지른 결과로부터 쏙 빠져나오는 자들, 빗장 공동체에 살면서, 유기농 식품을 사다 먹으며, 자연 보호 구역에서 휴가를 즐기는 자들이 바로 악이다.  58-59


니체는 서양 문명이 말인(末人 끝말 사람인, the Last Man), 즉 어떤 열정도 헌신도 없는 무심한 인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말인은 꿈꿀 줄 모르고, 삶에 지쳐 있으며, 어떤 위험도 감수하려 하지 않고 오직 안락함과 안정성만을, 그리고 서로에 대한 관용의 표현만을 추구한다. "이따금 약간의 독을 마시고 유쾌한 꿈을 꾼다. 그리고 최후에는 많은 독을 마시고 유쾌한 죽음을 맞는다. 그들에게는 낮의 쾌락과 밤의 쾌락이 따로 있지만, 건강은 챙긴다. '우리는 행복을 발견해 냈어.' 말인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깜빡인다."  59-61


알랭 바디우는 '무조(無調 없을무 고를조)'의 세계(Monde atone)라는 개념을 전개한다. 이는 주인기표(Master-Signifier, 라캉은 우연적인 표상체계를 단일한 의미의 체계로 만들어낼 수 있는 특권적인 중심기표를 주인기표라 부른다)의 개입이 결여된 까닭에 다양성을 가진 혼란스러운 현실에 어떤 의미 있는 질서도 부여하지 못하는 세상을 뜻한다.  67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던 세계의 근본적 특성은 명령(order)을 내리는 주인기표의 이런 작용을 없애려 든다는 점이다. 세계의 복잡성은 무조건적으로 확고히 인정받아야 한다. 그 복잡성에 어떤 질서(order)를 부과하려 드는 주인기표는 모두 해체되고 흩어져야 하는 것이다. "근대는 세계의 '복잡성'을 위해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놓는데, 그것은 정말 무조(無調 없을무 고를조)에 대한 욕마을 일반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68 


주관적 폭력과 싸우는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구조적 폭력의 행위자가 되는데, 이 구조적 폭력이야말로 주관적 폭력을 낳는 원인이다. 관용의 정신으로 에이즈 치료나 교육에 수백만 달러를 내놓는 자선가는 그 자신이 금융 투기로 수많은 이의 삶을 파괴했던 장본인이며, 그리하여 자신이 타파하고자 하는 불관용 그 자체의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

환상은 금물이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오늘날 모든 진보적 투쟁의 적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원인 중 부차적인 것만을 해결하고자 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체제 자체의 잘못된 점을 직접 구현하는 화신이다. 인종주의, 성차별, 종교적 반계몽주의 등과 싸우느라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과 전략적 동맹을 맺고 타협해야 할 때에는 이 점을 반드시 새겨야 한다.

그렇다면, 으리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물론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좋은 사람이고 세계의 빈곤과 폭력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이런 걱정을 할 만한 능력도 되는 사람이다. 사실 그런 사람에게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

또 그는 빈곤과 싸워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건 그가 그 신념을 바타응로 돈을 벌어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70-71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선한 자에 대한 심문]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 준다.


앞으로 나오라, 우리는

그대가 좋은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대는 매수되지 않지만,

집을 내려치는 번개 또한

매수되지 않는다.

그대는 그대가 했던 말을 지켰다.

그러나 어떤 말을 했는가?

그대는 정직하고, 자기 의견을 말한다.

어떤 의견인가?

그대는 용감하다.

누구에게 대항하는 용기인가?

그대는 현명하다.

누구를 위한 현명함인가?

그대는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돌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대는 누구의 이익을 돌보는가?

그대는 좋은 친구이다.

그대는 좋은 사람들에게도 좋은 친구인가?


이제 우리의 말을 들으라, 우리는

그대가 우리의 적임을 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제 그대를 벽 앞에 세우리라. 그러나 그대의 미덕과 장점들을 고려하여 

우리는 그대를 좋은 벽 앞에 세우고 그대를

좋은 총의 좋은 탄환으로 쏠 것이며 그대를 

좋은 삽으로 좋은 땅에 묻어 주리라.  71-72





2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두려워하라!


오늘날은 탈정치적 생명정치(post-political bio-politics)라는 정치 형태가 지배하고 있다. 

'탈정치'란 낡은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벗어나, 대신 전문적인 운영과 관리에 초점을 맞춘다고 주장하는 정치이다. 그리고 '생명정치'란 인간 생활의 안전과 복지를 제도화하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는 정치를 가리킨다. 이 두 영역이 어떻게 겹쳐지는가는 자명하다. ..

탈정치화되고, 사회적으로 객관적이 관리와 이해 조정을 정치의 기본적 차원으로 삼게 된 이상, 사람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적극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포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생명정치란 궁극적으로 공포의 정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부당하게 희생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혹은 괴롭힘을 당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막아내는 것을 중요시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보편적인 공리를 기초로 한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본질적인 부분을 포기해버리는 정치 사이의 차이다. 왜냐하면 후자의 정치는 다음과 같은 온갖 원리들을 동원하면서 공포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민자들에 대한 공포, 범죄에 대한 공포, 성적인 타락에 대한 공포, 많은 세금을 물릴지도 모른다는, 지나치게 개입하는 국가 자체에 대한 공포, 생태적 파국에 대한 공포, 괴롭힘에 대한 공포 등이다... 이러한 (탈)정치는 언제나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우중(ochlos) 혹은 다중(multitude)을 조종하는 수법에 의존한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무섭게 몰아대는 것이다.  73-74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점차 괴롭힘 당하지 않을 권리가 중요한 인권으로 부상하고 있는데, 이는 타인과 안전 거리르 유지할 권리이다.

게다가 탈정치적 생명정치에는 두 가지 측면.. 하나는 인간을 '벌거벗은 생명', 즉 호모 사케르(Homo sacer)로 환원해 버린다는 면이다. 이른바 신성한 존재라고 불리는 호모 사케르란, 전문지식에 기초하여 관리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관타나모의 죄수들이나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처럼 모든 권리가 배제된 이들을 일컫는다. 이와 같은 극단화는 자신이 취약한 존재이며, 항상 다중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지도 모르는 존재라는 식으로 경험하는 자기애적 태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75


우리는 모두, 지각의 착각(perceptual illusion)과 비슷한 일종의 윤리적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셈이다. 우리가 이런 착각에 빠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추상적으로 추론하는 능력이 엄청나게 발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서적-윤리적 대응은 아주 오래된 본능적 반응에 길들여져서 고통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면 동정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대부분은 버튼 하나를 눌러 눈에 보이지 않는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 총으로 누군가를 직접 겨냥해 쏘는 일에 대해 더 큰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76-77


똑같은 사람이 어떻게 적들을 향해서는 끔찍한 폭력 행위를 저지르면서 자기 집단에 속한 이들에게는 따뜻한 인간애와 친절을 베풀 수 있는가,...

자신의 윤리적 고려의 범위를 모든 곳에 적용하는 이들은 깊은 모순, 심지어 '위선'에까지 빠진다. 하버마스의 용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그들은 화용적 모순(pragmatic contradiction)에 휘말린다. 자기 자신이 속한 언어 집단을 지탱하는 윤리적 규범들을 위반하기 때문이다. 우리 공동체의 내부에 속한 사람들에게 부여하는 기초적인 윤리적 권리를 그 외부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부여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83


기독교 윤리를 생각해 보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는 성 바울의 유명한 말처럼 기독교 윤리는 전 인류를 포용한다는 자세를 취하지만, 그럼으로써 동시에 공동체 안에 포함되려 하지 않는 이들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

"모든 인간은 형제"라는 기독교의 금언은 동시에 형제애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

기독교도들은 늘 자신들이 '선택받은 민족' 이라는 유대인의 배타적 신앙관을 극복하고 전 인류를 포용했다고 자화자찬한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신과의 직접연결이라는 특별한 은혜를 받은 선민(選民 가릴선 백성민)이라 여기면서, 사신(邪神 간사할사 귀신신)을 숭배하는 다른 민족도 인간이기는 하다고 인정한다. 반면 기독교가 가진 보편주의의 편향적 태도는 비기독교도를 인류의 보편성 그 자체로부터 배제해 버린다.  91-92


프로이트와 라캉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기본 가르침인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는 본성적으로 문제적인 데가 있다고 주장한다.  ..

이웃이 가진 비인간적 특징으로 인해 이웃은 보편성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입장에 선다는 것은 매우 폭력적인 것이며, 심지어 상처를 받는 것이기도 하다.  93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말처럼 "만약 당신이 타인의 꿈속에 갇힌다면, 끝장이다!"인 셈이다.  94


정중함이라는 방어벽의 붕괴가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서로 다른 문화들이 충돌할 때이다.  96



* 주이상스(Jouissance). 쾌락이 고통을 줄이고 쾌감은 늘리려고 하는 쾌락원칙을 따르는 반면에, 주이상스는 고통마저도 감수하는, 혹은 고통 속에서 느끼는 쾌감을 가리킨다. 따라서 주이상스는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즐김이다.  96



오래 전 프로이트가 이미 간파한 바와 같이, 이웃이란 본래 하나의 사물이고, 충격을 안겨주는 침입자이며, 우리와 다른 생활방식을 지니고 있어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웃은 저 나름의 사회적 관습과 의식에 따라 구체화된, 주이상스를 추구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를 불안케 하는 자이고, 우리 생활방식의 균형을 깨뜨리는 자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이 너무 가까워질 경우 우리는 이 거슬리는 침입자를 없애기 위해 공격적인 반응을 하게 될 수 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더 많은 의사소통이란, 무엇보다도 우선 더 많은 갈등을 뜻한다"고 했다. 그런 이유에서, '서로를 이해하기'라는 태도에 더해 '서로 비켜서기'라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옳다. 적절한 간격을 유지하고, 새로운 '재량 규범'을 도입함으로써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98


뮐레르는 '좋은' 폭력과 '나쁜' 폭력을 구분하려는 시도를 완전히 거부해 버리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폭력을 정의할 때 필수적인 것은 '좋은' 폭력이란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좋은' 폭력과 '나쁜' 폭력을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순간, 우리는 폭력이라는 단어의 고유한 용법을 잃고 혼란에 빠져든다. 무엇보다도, '좋은' 폭력이란 무엇인지를 정의하기 위한 기준을 만들어내는 순간, 우리는 모두 그 기준을 매우 손쉽게 이용하여 우리 자신의 폭력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투쟁과 공격이 삶의 일부인데 어떻게 폭력을 완전히 거부할 수 있겠는가? 쉬운 해결책은 '공격(aggression)과 '폭력'은 '죽음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폭력'이란, 공격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공격이 과도해져 점점 더 많은 것을 욕망하면서 사태의 정상적 흐름을 교란시키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이 과도함을 제거해 버려야 한다.  102


처음에,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 권력을 추구한다. 그러나 주의하지 않으면, 곧 한계를 넘어 남들을 지배하려 들게 될 것이다... 시몬 베유는 "한계가 분명한 욕망은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만, 무한한 욕망은 그렇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103





3 '피로 물든 조수가 범람하다'


2005년 가을, 프랑스 파리 교외에서 폭동이 일어나 수천 대의 차가 불타고 대규모 군중 폭력이 발생했다. 흔히 2005년 8월 29일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덮치고 간 뒤에 발발한 약탈과 1968년 5월 파리의 68혁명을 이 사건과 비교하곤 한다.  115


알랭 바디우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적 공간이 점차적으로, '세계 없음(Worldless)'의 공간(space)으로 경험된다고 했다. 이런 공간에서, '의미없는' 폭력 말고 달리 취할 수 있는 저항의 수단이 있을 수는 없다.  122



* 세계없음(Worlsless). 우리가 예전에는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 '세계(world)'에 살고 있었는데, 유토피아적 전망 자체가 사라져버린 이곳은 이제 세계가 아니라 단순한 장소(place)에 불과하다는, 바디우의 독특한 조어.  122



자본주의는 전지구적이며 전 세계를 포괄하지만, 동시에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없는' 이데올로기적 상황을 유지시키며,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의 인식론적 지도를 그릴 기회가 박탈된 상태로 있다.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는 역사상 최초로 의미를 와해시키는(detotalised meaning) 사회경제 질서다.  123



* 대학담론(university discourse). 라캉에 따르면 의미활동이 시작되는 담론의 행위자가 누구냐에 따라 담롬의 성격이 달라진다. 라캉은 이를 주인담론, 대학담론, 히스테리담론, 분석가담론 등 4가지로 도식화했는데, 대학담론은 탄탄한 지식체계로 무장한 교수들의 '지적' 담론을 순진한 학생들이 전수받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125



이기주의(Egotism), 즉 자신의 안녕에 대한 관심은 공익 대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기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이타적인 규범을 도출해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개인주의 대 공동체주의, 공리주의 대 보편적 규범에 대한 고집이라는 이항대립은 그릇된 것이다. 두 대립항이 결과적으로는 결국 같아지기 때문이다. 쾌락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오늘날의 사회에서 진정한 가치들이 없어지고 있다고 한탄하는 비평가들은 완전히 요점을 놓치고 있는 셈이다. 이기주의적이 자기애의 진짜 반대말은 이타주의, 즉 공익에 대한 고려가 아니라 부러움과 원한이고, 바로 이 부러움과 원한이라는 감정으로 인해 나는 나의 이익에 반(反 되돌린반)하여 행동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죽음 충동은 현실원칙만큼이나 쾌락원칙과도 대립한다.(프로이트의 현실원칙과 쾌락원칙. 프로이트는 모든 본능적 충동이 쾌락을 추구하고 쾌락원칙을 따른다고 봤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아가 그렇게만 행동하면 정상적 인간이 될 수 없으니, 그래서 현실원칙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현실원틱은 쾌락원칙의 반대라기보다는 그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쾌락을 포기했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 모종의 보상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쾌락은 현실적으로 양보된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악, 즉 죽음 충동은 자기파괴를 수반한다. 죽음충동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익에 반(反 되돌리반)하여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캉이 설명했듯, 인간의 욕망이 가진 문제점은 그것이 언제나 '타자의 욕망' 이라는 데 있다. 이때 '타자의 욕망' 이란 타자를 향한 욕망과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특히 타자가 욕망하는 것에 대한 욕망, 이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바로 이 '타자가 욕망하는 것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질시가 발생하며, 부러움이라는 감정 속에는 원한의 감정도 들어 있는데, 이는 인간 욕망을 이루는 근본 요소들이다.  131-132


* 프로이트의 현실원칙과 쾌락원칙. 프로이트는 모든 본능적 충동이 쾌락을 추구하고 쾌락원틱을 따른다고 봤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아가 그렇게만 행동하면 정상적 인간이 될 수 없으니, 그래서 현실원칙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현실원칙은 쾌락원칙의 반대라기보다는 그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쾌락을 포기햇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 모종의 보상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쾌락은 현실적으로 양보된 것이기 때문이다.  132


부러움/원한에 대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런 감정을 갖는다는 것이 단지 내가 이기면 다른 사람은 지게 되는 제로섬 게임의 원칙을 지지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부러움/원한에는 양자 간에 격차가 있다는 점이 함축돼 있는데, 이 격차는 긍정적인 것(아무도 지는 일 없이 모두가 이길 수도 있다)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이다. 내가 얻느냐 내 적이 잃느냐를 두고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내 적이 잃는 편을 택한다. 심지어 그것이 나에게 손해가 될지라도 말이다. 마치 내 적의 손해에서 오는 나의 결과적인 이득이 내 승리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병적인 요소가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불평등이 비인격적이고 보이지 않는 힘으로 인해 발생한다면, 그 불평등을 받아들이기가 훨씬 더 쉽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자본주의 내에서 시장은 '비합리적'으로 돌아가고, 성공과 실패 역시 '비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바로 이게 시장의 장점이다. 내 성공이나 실패를 '내 책임이 아닌 것', 혹은 우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시장에 대한 오래된 모티프가 '예측 불가능한 운명'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라. 이 점을 감안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만하다고 여기는 가장 큰 이유는 자본주의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있다. 사람들은 내가 실패한 것이 나의 열등한 자질 때문이 아니라 우연으로 인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실패를 훨씬 견딜 수 있다는 얘기다.  133-134


루소는 이기주의를 자기애(amour-de-soi)와 자존심(amour-propre)으로 구분했는데, 전자는 있는 그대로의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인데 반해, 후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을 도착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후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을 도착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후자가 강한 사람들은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데 장애물이 될 법한 것들을 제거하는 데 집중한다.

'이 원초적 정념, 즉 자기애(amour-de-soi)는 그 본질이 사랑스럽고 다정다감한 것이다. 이는 오직 우리의 행복만을 생각하며, 또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행복과 관련되는 것들만 대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대하는 것이 목표물에서 장애물로 바뀌게 되면 그들은 대상에 닿고자 하는 노력보다 그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온 마음이 사로잡히게 된다. 이제 그들의 본성은 바뀌어 성마르고 증오에 차게 된다. 고결하고 순수한 마음인 자기애가 자존심(amour-propre)으로 바뀌게 되는건 이런 식이다. 여기서 자존심이란 남과 비교를 위해 동원되는 상대적인 감정이고, 편애를 요구하는 감정이다. 그리고 자존심을 향유한다는 것은 순전히 부정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의 행복에서 만족을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불행에서 만족을 찾게 된다.'

따라서 악한 사람은 이기주의자(egoist)가 아니다. 이기주의자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이기주의자는 자기 이익에 신경 쓰기도 너무 바빠서 남들에게 불행을 일으킬 만한 여유가 없다.  136-137


널리 알려진 인류학적 일화에 따르면, 우리는 '미개인'들이 모종의 미신적 믿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예를 들어 그들이 물고기나 새 등의 후손이라는 믿음), 이런 믿음에 대해 직접 물어 보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당연히 안 믿죠, 우린 바보가 아니라고요! 그런데 우리 조상 중에는 정말 그 얘기를 믿었던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한 마디로,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남에게 전가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대할 때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 가령 우리는 매년 산타클로스 행사를 여는데, 그것은 우리가 아이들은 산타클로스를 믿을 것 같다고 여기고, 따라서 아이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그리고 아이들이 천진난만하다는 우리의 믿음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그리고 물론, 선물을 받으려고)산타클로스를 믿는 척한다. 또 이는 모종의 비리에 연루된 정치인들이 정직한 척 하면서 말하는 흔해빠진 변명과 뭐가 다른가? "저는 그 사실을(혹은 저를) 믿는 평범한 사람들을 실망시켜드릴 수 없습니다"  143


어떤 높은 차원의 정치적 진리를 위해서 거짓말을 해서도 안 되고, 왜곡해서도 안 되며, 혹은 사실을 묵살해서도 안 된다. 요점은 어떤 높은 차원의 정치적 진리를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시실을 왜곡 혹은 묵살하라는게 아니다. 주관적 입장을 바꾸어 실제 사실을 말하는 행동에 발화 행위의 주관적 입장에서 나오는 거짓말을 포함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게 아주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기준이 가진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147


2005년 10월 초, 아프리카 이민들이 계속해서 아프리카 모로코 리프 해안의 스페인령 소도시 멜리야로 필사적 잠입을 시도하자, 이들의 유입을 어떻게 막을까 궁리하던 스페인 경찰은 스페인 영토와 모로코 사이에 장벽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표명했다. 이 장벽의 이미지, 전기 시설로 빈틈없이 무장한 복잡한 구조물의 이미지는 베를린 장벽과 섬뜩하리만치 닮았다. 다만 그 기능이 정반대일 뿐이다. 이 벽의 목적은 사람들이 나가지 못하게 하는게 아니라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분리 조치를 강행해야만 했던 스페인의 호세 사파테로 정부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반인종주의적이고 관용적이라 평가받던 정권이었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잔인한 역설이라 할 수 있다. 유럽의 국가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분리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151





4 관용적 이성의 이율배반


2006년 가을, 오스트레일리아 최고의 무슬림 성직자, 셰이크 타즈 딘 알-힐랄리의 발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은 격분했다. 무슬림 남성들이 집단 강간을 저질렀다가 수감된 사건을 두고,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만일 고기를 포장도 하지 않고 길거리에 내놓았다가..고양이들이 그 고기를 먹었다면.. 누구의 잘못인가, 고양이들인가 고기인가? 포장되지 않은 고기가 문제다." 베일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을 포장하지 않은 날고기에 비유한 자체가 엄청나게 도발적인 것이었기에, 알-힐랄리의 주장에 훨씬 더 놀라운 전제가 숨어 있었음에도, 이 전제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남성의 성적 행위는 여성의 책임인데, 그렇다면 성적 유혹이라 인식하는 것을 잡했을 때 남성들은 완전히 무력하고, 그 유혹에 전혀 저항할 수 없으며, 날고기를 본 한마리 고양이와 똑같이 완전히 성적 욕구의 노예가 된다는 말인가? 남성은 자기 자신의 성적 행동에 책임이 전혀 없다고 가정하는 이런 태도와 대조적으로, 서구에서는 여성의 에로티시즘을 대놓고 강조하는데, 이는 남성이 성욕을 자제할 수 있으며, 성적 충동의 맹목적인 노예가 아니라는 전제에 기초한다.  155-156


홀로코스트는 비판이 금기시되는 성역이 아닌가?  157


어떤 때에는 범죄를 직접 인정하는 것이 그 책임을 회피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서구의 법률만능주의적 위선..  158


칸트의 논의 속에서 이성개념을 부정적인 용법으로 사용할때는 예지계적 대상(poumenal objects)에 한정되며, 우리 또한 이성 개념을 부정어법으로만 사용해야만 한다. 홀로코스트도 마찬가지다. 이는 반드시 부정어법으로만 언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끌어들임으로써 어떤 정치적 수단을 정당화/합법화하고자 하면 안 된다. 반대로 그것은 오직 그 정치적 수단을 비합법화하기 위한, 즉 우리의 정치적 행위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기 위한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홀로코스트와 같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오만한 행동을 비난할 수 있는 것이다.  163


법을 위반하는 강도짓과 법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강도짓은 뭐가 다르냐는 말이다. 이 교훈을 살짝 변형시키면 이렇게 된다. 즉, 국가권력이 벌이는 대테러 전쟁에 비하면 테러 행위는 뭐가 대수인가?  168-170


우리는 불관용에 대해 얼마나 더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가?  184


이브 르 브르통은 루이 9세의 십자군 원정에서 어느 늙은 여인을 만났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여인은 오른손에는 불이 담긴 그릇을, 왼손에는 물이 담긴 사발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무엇을 하는 거냐고 묻자, 여인은 불로는 천국을 불살라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하고, 물로는 지옥의 불을 모조리 끌 거라 대답했다. 여인은 이어서 말했다.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보상을 받기 위해, 혹은 지옥에 떨어진다는 공포 때문에 선행을 하는 이가 아무도 없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직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선행을 베풀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덧붙일 것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하느님도 지워 버리고 그냥 선행 그 자체를 위해 선행을 하면 안 될까? 온전히 기독교적인 이 윤리적 자세가 오늘날 대부분 무신론에만 남아 있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196


타인의 믿음에 대한 존중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는 것은 결국 두 가지 의미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타자를 어린애 대하듯 다루며 그의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상처주지 않는 편을 택하는 태도이거나, '진리 체계들' 이 복수로 존재한다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면서 진리를 명백하게 주장하는 행위는 모두 폭력적인 강요라고 깎아내리는 태도이거나, 이렇게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하지만(다른 모든 종교도 마찬가지지만) 이슬람을 존중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엄격한 태도로 비판적 분석을 해보면 어떨까? 이것이, 그리고 이것만이, 무슬림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들을 자기 믿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진지한 성인들로 대접해야 하는 것이다.  198






5 관용은 이데올로기다


진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으려면 아미시 청소년들은 모든 선택사항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그런 선택사항들 속에서 교육받아야 한다.  205


'관용적인' 서구의 다문화주의적 관점 속에서 말하는 '자유로운 선택의 주체'는 이들이 속한 특정한 생활세계에서 찢겨지고 그 뿌리에서 절단되는 극심한 폭력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얘기다.  207


나아가 타자의 문화를 두고 관용의 태도가 결여돼 있다거나 야만적이라는 둥 치부해버리는 태도의 대척점에는 타자의 문화가 가진 우수성을 너무도 쉽게 인정해버리는 태도가 있다. 가령 인도에 주둔하던 영국 식민 관리들 중 인도의 심오한 영성을 찬양하던 이가 얼마나 많았던가. 서구에서는 합리성과 물질적 부에 대한 집착 때문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며 말이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타자가, 남을 지배하기보다는 조화를 추구하고, 유기적 존재이고자 하며, 덜 경쟁적이고 또 협력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찬양하는 것도 서구 자유주의가 가진 진부한 주제의 목록에 들어가는 것 아닌가? 서구의 자유주의가 타자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미명하에 억압을 못 본 체 하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 심지어는 선택의 자유를 도착적인 방식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가령 과부를 불태워 죽이는 짓을 한다 해도, 그 사람들은 자기의 생활방식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그것이 우리 눈에 비참하고 불쾌해 보인다 해도 우리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209


전체주의 체제가 즐겨 사용하는 전략 중 하나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모두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극도로 엄격한 법적 규제(형법)를 부과하는 수법이다. 다만 그 엄격한 법을 완전히 집행하지는 않는다. 이런 전략을 통해 체제는 자비로운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알겠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너희 전부를 체포해 유죄 판결을 내리는 건 일도 아냐. 하지만 무서워 하지마, 우린 관대하니까.." 이와 동시에 체제는 계속적인 위협으로 기강을 잡으며 체제에 종속된 이들을 길들인다. "너무 기어오르면 안 좋아. 잊지 마, 우리는 언제라도 너희들을.."  222


전체주의 체제는 법의 위반에 대해 관용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전체주의 체제라는 틀 속의 사회적 삶에서는 법을 위반하고, 뇌물을 주고, 부정한 짓을 하는 것이 생존의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223


만일 내가 내 가장 친한 친구와 승진을 두고 경쟁하는 상황에 처했다가 내가 이긴다면, 내가 취해야 할 합당한 행동은 친구가 승진할 수 있도록 내가 물러나겠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모두 우정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 바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상징적 교환, 즉 '거절이 기대되는 제스처'이다. 상징적 교환의 불가사의한 마력은, 결과적으로 양자가 모두 교환이 이루어지기 전과 똑같은 지점에 있지만, 그들이 맺은 단결하자는 약속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양자 모두 분명히 무언가를 얻게 된다는 데 있다. 사과를 주고받는 과정 역시 유사한 논리를 따른다. 만일 무례한 말로 누군가를 불쾌하게 했다면 내가 취해야 할 합당한 행동은 그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고, 한편 그는 "고맙네, 하지만 난 기분 상하지 않았어. 자네가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전혀 사과할 필요 없다네!" 정도의 말로 답하는 것이 도리다. 물론 여기서 요점은, 결국에는 사과할 필요 없다는 결말이 났지만, 그에 앞서 먼저 사과의 말을 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과할 필요 없다'는 말은 오직 내가 사과를 한 이후에만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아무 일 아닌 상황이고 사과가 필요 없다고 분명히 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런 사과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만 얻는 것이 생기고, 우정도 깨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거절해야 하는 제안을 받은 사람이 실제로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내가 친구와의 승진 경쟁에서 진 뒤에 자기 대신 그 지위에 올라가라는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어떨까? 이는 그야말로 파국적인 상황이다. 그런 상황으로 인해 사회질서의 중핵을 이루는 형식적 자유가 붕괴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실체 그 자체의 붕괴, 사회적 유대의 해체나 다름없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로베스피에르에서 존 브라운에 이르는 혁명적 평등주의자들은,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습관을 무시하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보편적 규칙이 작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습관 덕분인데, 말하자면 이들은 습관에 대한 고려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225-226


193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조지 오웨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계급 구분이 사라져야 한다는 바람은 필요하지만, 그럴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한 그런 바람은 전혀 효력이 없다. 우리가 여기서 맞닥뜨려야 하는 사실은 계급 구분을 철폐한다는 것은 곧 당신 자신의 일부를 없앤다는 의미라는 사실이다. 전형적인 중간계급의 일원으로서의 '나'가 있다고 치자. 내가 '계급 구분을 없애고 싶다'고 말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내가 생각화고 말하는 것은 거의 모두가 계급 구분 덕분에 형성된 결과물이다. (..) 나는 나 자신을 완전히 뒤바꾸어, 결국에는 이전의 내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229-230


오웰은 이데올로기적 일상 속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배적 태도는 우리가 진심으로 믿고 있지만 조롱하는 척 거리를 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개이 '지식인'들이 내놓는 좌파적 의견은 대부분 거짓이다. 그는 조롱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대상을 진정으로 믿고 있으며, 단지 조롱하는 척만 할 뿐이다. 여러 가지 예가 있지만 하나만 꼽아 보자면, 명문 사립학교에서 강조하는 명예에 대한 예법. '단체 정신', '쓰러진 사람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 등등의 헛소리를 들 수 있다. 이런 예법을 비웃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지식인'을 자처하는 이라면 그 누가 이를 비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외부에서 이를 비웃는 이를 만난다면 문제가 조금 달라진다. 마치 우리가 일상 속에서는 늘 우리 잉글랜드를 욕하지만, 외국인이 똑같은 욕을 하면 크게 분개하는 것과 같다. (..) 당신과는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을 만났을 때에야, 당신은 당신이 실제로 믿고 있는 게 뭔지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웰이 전제하는 이 진정한 미데올로기적 정체성에는 '내면적인' 면이라곤 전혀 없다. 내면 깊숙한 믿음은 전적으로 '외부에'있으며, 내 몸이라는 육신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관습 속에 체현돼 있다.  231


아랍 문명과 미국 문명의 충돌은 야만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 사이의 충돌이 아니라, 익명으로 행해지는 잔혹한 고문과 미디어의 구경거리가 된 고문, 피해자의 육체가 고문의 가해자인 '무고한 미국인' 의 미소 짓는 얼굴을 돋보이게 하는 무명의 재경 역할을 고문 사이의 충돌이다.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자면, 문명의 충돌은 모두 그 밑에 잠재한 야만끼리의 충돌인 듯하다.  244






6 신적 폭력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에서 탐정 아보가스트가 계단에서 살해당하는 장면은 '신의 시점에서 바라본' 히치콕적인 장면이다. 우리는 1층 복도와 계단에서 이루어지는 전체 장면을 위에서 내려다본다. 한 인물이 괴성을 지르며 화면 속으로 들어와 아보가스트를 난도질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인물의 주관적 시점으로 이동한다. 계단으로 추락하는 아보가스트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잡힌다. 마치 객관적 장면에서 주관적 장면으로의 이동을 통해서, 신 자신이 중립적 위치를 버리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난폭하게 개입하면서 지상에 '강림'한 것처럼 보인다. '신적 폭력'은 이와 같은 난폭한 개입처럼 법을 넘어선 정의를 가리키는 것이다.  245


진정한 원한과 처벌(복수), 용서, 그리고 망각이라는 3항조와 같은, 범죄행위에 대한 일반적 대응방식은 어떻게 연관되는가? 우리가 여기서 첫째로 해야 할 일은 정당한 복수(처벌)라는 유대교적 원칙('눈에는 눈' 이라는 원칙)이 "우리는 당신의 범죄는 용서하겠지만 그것을 잊지는 않겠다"라는 일반적인 정식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용서하면서 동시에 망각하는 유일한 방법은 복수 혹은 정당한 처벌을 하는 것이다. 범죄에 대한 합당한 처벌이 이루어진 후 나는 앞으로 나갈 수 있으며 과거의 일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범죄를 합당하게 처벌하는 일에는 뭔가 해방적인 요소가 있다. 나는 사회에 빚을 갚고 다시 자유로워지며, 과거는 더 이상 나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는 '자비'의 논리는 반대로 훨씬 더 억압적이다. (용서받은 범죄자로서) 나는 영원히 내가 저지른 범죄이ㅔ 시달림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그 범죄는 '무효화' 되지 않았고, 소급해서 취소되지 않았으며, 지워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것이 헤겔이 말하는 처벌의 의미인데 말이다.  262


벤야민의 <폭력비판에 대하여> 마지막 몇 문단.

'모든 영역에서 신화에 대해 신이 맞서듯이 신화적 폭력에도 신적인 폭력이 맞선다. 그리고 신적인 폭력은 모든 면에서 신화적 폭력과 반대다. 신화적 폭력이 법 제정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를 파괴하며, 신화적 폭력이 죄를 부과하면서 동시에 속죄를 시킨다면 신적 폭력은 죄를 면해주고, 신화적 폭력이 위협하는 폭력이라면 신적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죽음을 가져온다. (..) 왜냐하면 피는 단순한 생명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법적 폭력이 소멸된다는 것은 자연적 생명체에 불과한 자들이 지은 죄에서 생겨난 것이다. 결백하고 불행한 생명체였던 이 자연적 생명체는 단지 죄지은 생명체로서 '속죄'해야 하는 징벌을 받은 존재다. 그리고 이 때 죄를 사하여 준다는 것이 죄 자체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사면해준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법의 지배는 단순한 생명체에서 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적 폭력은 폭력 그 자체를 위해 단순한 생명체에 가해지는 유혈의 힘이고, 신적 폭력은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 모든 생명체에 가해지는 순수한 힘이다. 신화적 폭력은 희생을 요구하며, 신적 폭력은 그 희생을 받아들인다.

(..) "죽여도 됩니까?" 란 물음에 대한 답변은 십계명의 "너희는 살인하지 말지어다" 말고는 달리 없다. 이 계명은 마치 신이 어떤 행위를 '가로막는' 것처럼 행위 앞에 버티고 서 있다. 그러나 그 계명은 그것을 따르도록 강제하는 처벌에 대한 공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이미 이루어진 행위에 대해 명령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다. 이미 이루어진 행위에 대해서는 그 계명을 바탕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미 이루어진 행위에 대한 신적 판단이나 그 판단의 근거가 됐던 것 모두는 예단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폭력적으로 살해하는 행위는 그 계명을 근거로 정죄하는 사람들은 잘못이다. 그 계명은 판단의 척도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인격체 또는 공동체에 대해 행도으이 지침으로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하는 인격체나 공동체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그 계명과 대결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그 계명을 도외시한 책임을 스스로 떠안아야 한다.'  271-273


신적 폭력에 의해 제거되는 자들은 명백하게 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희생자(제물)가 아니다.

그들은 희생 없이 죽임을 당하는 셈이다.  273


벤야민은 <폭력비판을 위하여>의 결론부에서 "혁명적 폭력은 인간이 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순수한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274


어떤 폭력이 신적 폭력인지 식별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  275


신적 폭력은 신(대타자) 자신의 무능을 보여주는 징표다.  276





7 에필로그


우리의 탐구는 한 바퀴를 돌았다. 폭력에 반대한다는 거짓 주장을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해방적 폭력을 승인하는 데 이르는 여정이었다. 우리는 주관적 폭력과 싸운다고 하면서 구조적 폭ㅍ력에 가담하는 자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283


이 책의 교훈은 무엇인가?

세 가지다.

첫째, 폭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쁜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하나의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조작이자, 사회적 폭력이 가진 근본형식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일종의 신비화라는 점이다. 다른 형식의 폭력적 학대에 대해서는 그토록 예민한 서양 사회가 우리로 하여금 가장 잔혹한 형식의 폭력에 대해선 무감각하게 만드는 다양한 메커니즘을 동시에 동원해 올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은 대단히 징후적인 일이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런 일은 종종 희생자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동정의 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두 번째 교훈, 진정으로 폭력적이 되는 것, 사회적 삶의 기본  변수를 폭력적으로 뒤흔드는 행위를 감행하는 것은 어렵다.  284


끝으로(세 번째), 주체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말해주는 교훈은 폭력이 어떤 행위의 직접적인 속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폭력은 행위와 그 행위가 이루어진 맥락 사이에, 그리고 어떤 행동이 활동적인 것과 비활동적인 것 사이에도 퍼져 있다. 동일한 행위일지라도 그 맥락에 따라 폭력으로 간주될 수도 있고 비폭력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때로는 공손한 미소도 야수적인 감정의 폭발보다 더 폭력적일 수 있다.  293


오늘날 진짜 위협적인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유사 능동성이다. 곧 '행동하라'는 요구, '참여하라'는 요구, 현재 현재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걸 감추라는 요구다. 사람들은 늘 개입하면서, '뭔가를 한다'. 학자들은 학자들대로 무의미한 논쟁에 참여한다. 진정 어려운 일은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고 철회하는 것이다. 권력을 쥔 자들은 설사 그것이 '비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침묵 보다는 참여와 대화를 더 좋아한다. 우리를 대화에 끌어 들여서 우리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길한 수동성을 깨뜨려버리기 위해서다. 그런 면에서 유권자들의 기권은 진정한 정치적 행위인 셈이다. 바로 그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가 오늘날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공허함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폭력이란 말을 기본적 사회관계를 발본적으로 뒤집어버리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면, 몰지각하고 정신나간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수백 만 명을 학살한 역사상의 '괴물'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이 괴물들이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폭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다고 지젝이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와 관련해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부추기고 있는 게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해다.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우리가 항상 선거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이콧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급진적인 행동을 조직해야 할 상황도 있고 아무 것도 하지 안흔 것이 가장 좋을 때도 있어서, 이는 실용적으로 접근돼야 한다. 모든 것은 상황에 달려있는 것이다."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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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인생을 얼마쯤 살다 보면 완벽한 행복이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거소가 정반대되는 측면을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즉 완벽한 불행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말이다. 이 양 극단의 실현에 걸림돌이 되는 인생의 순간들은 서로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모든 영원불멸의 것들과 대립하는 우리의 인간적 조건에 기인한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늘 모자란 인식도 그중 하나다. 그것은 어떤 때에는 희망이라 불리고 어떤 때에는 불확실한 내일이라 불린다. 모든 기쁨과 고통에 한계를 지우는 죽음의 필연성도 그중 하나다. 어쩔 수 없는 물질적 근심들도, 이것들이 지속적인 모든 행복을 오염시키듯, 이것들은 또 우리를 압도하는 불행으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돌려놓음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파편화하고, 그만큼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18


위엄 있게 죽음을 맞을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종종 그 소수는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이다. 침묵할 줄 아는 사람, 다른 사람의 침묵을 존중해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20


우리는 모두 그 문 안에 갇힌다. 머리를 박박 깎인 채 알몸으로 서 있다. 발이 물에 잠긴다. 샤워실이다.  29


아우슈비츠 근처 모노비츠에 와 있다.포로들은 일종의 고무인 부나(부나는 원래 부타젠과 나트륨의 첫 글자를 딴 것. 모노비츠에 있는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는 이 합성고무를 만들기 위한 공장이 있었는데 이를 부나 공장이라 불렀다)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한다. 그래서 수용소 이름도 부나다.  31


종이 울리자 여전히 깜깜한 수용소가 깨어나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진다. 5분 동안의 축복이다. ..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뭔지 알 수 없는 넝마 조각들을 우리에게 던졌고 밑창이 나무로 된 신발 한 켤레 속에 우리의 두 손을 쑤셔넣었다. 상황을 이해할 시간도 없이 우리는 바깥에, 새벽녘의 푸르스름한 눈 위에 나와 있다. 맨발에 알몸으로, 손에는 옷과 신발을 든 채 우리는 1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다른 막사까지 달려가야만 한다. 우리는 그 막사에서 옷을 입을 수 있다.  33


우리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옷, 신발,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빼앗아갔다. ..그들은 우리의 이름마저 빼앗아갈 것이다.  34


해프틀링(포로). 나는 내가 해프틀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이름은 174517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고 죽을 때까지 왼쪽 팔뚝에 문신을 지니고 살게 될 터였다...

"숫자를 보여줘야만" 빵과 죽을 받을 수 있었다.  35


수용소의 고참들은 수인번호로 모든 것을 알았다. 수용소에 들어온 시기, 타고 온 기차, 국적이 수인번호에 나타났다. 3만에서 8만 대의 번호를 지닌 사람들을 보면 누구나 존경을 표하곤 했다. 이제 겨우 수백 명에 불과한 이들은 바로 폴란드 게토의(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 14세기 초부터 19세기까지 유럽 곳곳에 존재했다. 독일군은 1940년부터 동유럽의 주요 도시에 게토를 재건했는데, 그곳은 곧 기아와 질병 수용소로의 강제연행 등으로 비극적인 죽음의 무대가 되었다. 바르샤바의 게토에서는 1943년 봄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결국 그곳에 있던 거의 모든 유대인이 학살됨으로써 진압되었다.) 생존자들이었다.  36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수용소가 그런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빨리 그리고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38


막사마다 200~250명씩 수용되는 일반 해프틀링이 사는 곳이다...

공동 침실의 바닥 면적이 얼마나 좁냐 하면, 같은 B블록에 사는 사람들은 반 정도가 침대에 누워 있지 않는다면 전체가 동시에 그 공간에 있기도 힘들다. .

우리는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이 세 부류로 나뉜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범죄자, 정치범, 그리고 유대인이었다. 모두 줄무늬 옷을 입고 있고 모두 해프틀링이지만, 범죄자들은 상의에 박힌 숫자 옆에 초록색 삼각형을 달고 다닌다. 정치범들은 빨간색이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빨간색과 노란색의 유대인 별을 단다.  44


우리는 음식물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다. 이제 우리도 식사를 마친 뒤 반합의 바닥을 열심히 긁어내고 빵을 먹을 때는 부스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턱 밑에 반합을 댄다. 이제 우리는 죽통의 윗부분에서 푼 죽과 밑에서 푼 죽이 같지 않다는 것도 안다. 우리는 죽통의 크기에 따라 줄을 설 때 어느 죽통 앞에 서는 게 제일 유리한지 계산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 쓸모가 있음을 배웠다. 철사는 신발을 묶는 데, 천 조각은 발을 감싸는 데 필요하고 종이는 추위를 막기 위해(불법으로) 상의에 대는 데 필요하다. 우리는 모든 물건을 도둑맞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만 방심하면 반드시 도둑맞는다는 것을 배운다. 도둑맞지 않기 위해 반합부터 신발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모두 강의에 집어넣어 보따리를 만들어 베개로 베고 자는 기술을 익힌다.  45


자신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 이성적일 수 있는 인간은 매우 드물다. 운명이 위태로울 때 사람들은 극단적인 태도를 취한다. 성격에 따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잃었고 여기서는 살 수 없으며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금방 확신하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를 기다리는 삶이 힘겹기는 하지만 구원의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이 멀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믿음과 힘이 있다면 우리집으로 다시 돌아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인 이 두 부류가 그렇게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불가지론자들이 많아서라기보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화 상대와 상황에 따라, 기억도 일관성도 없이 두 극단적인 입장 사이에서 동요하기 때문이다.  50


나는 수레를 밀었고, 삽질을 했고, 비에 젖었고, 바람에 몸을 떨었다. 내 육체는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배는 볼록하게 나왔고 팔다리는 장작개비 같았으며 얼굴은 아침이면 부었다가 저녁이면 홀쭉해졌다. ..

사나흘 만나지 못하면 서로를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우리 이탈리아인들은 매주 일요일 저녁 수용소 한쪽 귀퉁이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곧 그만두어야 했다 숫자를 세는 게 너무 슬펐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는 매번 줄어들었고 매번 몰골이 더 사납고 더 비참해졌다. 모임에 나가려고 몇 발짝 떼어놓는 것도 힘이 들었다. 게다가 다시 만나게 되면 필연적으로 기억을 떠올리고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51


솔직히 고백하면, 수용소 생활 일주일 만에 나는 청결의 욕구를 잃어버렸다. 내가 세면장을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거기에 쉰 살이 다 된 내 친구 슈타인라우프가 웃통을 벗고 서 있었다. 그는 몸을 문지르고 있으나 별 효과가 없다(비누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목과 어깨를 씻는다. 슈타인라우프는 나를 보자 인사를 한다. 그러다 곧바로 정색을 하며 다짜고짜 내가 왜 안 씻는지 묻는다. 내가 왜 씻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면 내게 도움이라도 된다는 건가? 내가 누구의 마음에 더 들게 되기라도 한다는 건가? 하루, 아니 한 시간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 반대다. 오히려 수명이 더 짧아질 것이다. 씻는 일도 노동이고 에너지와 칼로리의 낭비니까. 슈타인라우프는 우리가 석탄 자루밑에서 30분만 낑낑대노라면 자기와 내가 구분조차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런 생활환경에서 얼굴을 씻는다는 것은 어리석고 심지어 무례하기조차 한 것 같다. 이것은 기계적인 습관일 뿐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절멸의 의례를 처량하게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아니, 이미 죽기 시작했다. 기상과 노동 사이에 여우 시간이 10분밖에 없다면, 나는 그 시간을 다른 데 쓰고 싶다. 나 자신 속으로 침잠하여 결산을 하거나, 이것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늘이나 바라보고 싶다. 아니면 아주 잠시나마 한가로움이라는 사치를 즐기도록, 그냥 그렇게 살아 있도록 내버려두고 싶다. 

하지만 슈타인라우프가 내 생각을 가로막는다. 그는 세수를 다 했고, 무릎 사이에 끼워두었던, 나중에 걸칠 아마포 상의로 몸의 물기를 닥는다. 그러고는 나에게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는데, 그 와중에도 자기가 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56-57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도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이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

이것이 바로 마음씨 좋은 사람 슈타인라우프가 나에게 말해준 것이다.  57-58


카베는 크랑켄바우, 즉 위무실의 약자다. ..

회복의 기미를 보이는 사람은 카베에서 치료를 받고, 병이 점점 심해지는 사람은 가스실로 보내진다.

이 모든 게 우리가 다행히 '경제적으로 유용한 유대인'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65


카베의 삶은 림보(<신곡>의 지옥을 구성하는 아홉 개의 원 중 가장 형벌이 가벼운 제1원을 말한다.)의 삶이다. 굶주림과 질병 본래의 아픔 말고는 불편함이 상대적으로 적다. 춤지도 않고 일도 안 한다.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구타를 당하지도 않는다.  72


11시 30분에 오늘 죽은 어느 정도일지, 맛은 어떨지, 죽통의 윗부분 혹은 아랫부분 중 어느 것이 우리 차지가 될지 하는 판에 박은 질문들이 시작된다. 난 이런 질문들을 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그래도 그 대답에 탐욕스럽게 귀를 기울이고 부엌에서 실려오는 연기에 코를 킁킁거리지 않을 수 없다.  103


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모든 힘줄 속에 뿌리 박혀 있다. 이것이 인간 본질이 지닌 속성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이러한 목적에 많은 이름을 부여하며 그 성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토론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문제는 훨씬 더 단순하다.

오늘 그리고 여기서 우리의 목표는 봄에 도달하는 것이다. 지금은 다른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제 이런 목표 뒤에 다른 목표는 아무것도 없다.  106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완전한 행복의 상태를 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 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 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비탄에 잠길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뒤로 또 다른 이유들이 줄을 서 있다.  110-111


민간 관리국은 부나에서 도둑질하는 것을 벌주지만, SS는 오히려 허용하고 조장한다. SS가 엄금하는 수용소 안에서의 도둑질이 민간인들에게는 정상적인 교환 행위로 간주된다. 해프틀링들 간의 도둑질은 일반적으로 처벌을 받으며, 도둑과 피해자가 동일한 강도의 벌을 받는다. 나는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이라는 단어가 수용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지 한번 생각해보라고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다.  130


우리는 명백하고 손쉬운 추론을 믿지 않는다. 모든 문명적 상부구조가 제거되면 인간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우둔하다는 추론 말이다. 이러한 추론에 따르면, '해프틀링'은 거리낌이 없는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생각에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궁핌과 지속적인 육체적 고통 앞에서 수많은 사회적 습관과 본능이 침묵에 빠진다는 것뿐이다.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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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은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 분노가 일었다. 소리를 질러 가라앉힐 수 있는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꾹 누르며 견디어 온 분노, 내면을 향한 분노였다.  11


거울 앞에 서서 안경의 물기를 닦고, 얼굴도 닦았다. 이마에 적힌 숫자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따뜻한 물에 수건 끝을 적셔 이마를 문지르려다 말고 멈칫했다 몇 시간 후 그날 일어난 일을 다시 떠올려보면서, 거울 앞에 서 있던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되었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수수께끼 같은 여자와 만난 흔적을 지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그 찰나에 들었던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마에 전화번호가 적힌 채 교실로 들어서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는 이 건물, 아니 이 학교가 세워진 이래 가장 믿을 만하고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사람이었다. 30년 이상 일을 해오는 동안 실수한 적도, 비난받을 일을 한 적도 없었다. 약간 지루한 선생일지는 몰라도 학교 제도의 기둥으로 존경받았고, 고전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 때문에 대학에서조차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새 학년이 시작되면 학생들로부터 사랑이 담긴 놀림을 받았다. 학생들은 그를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고문헌 중에서도 거의 읽지 않는 부분만 골라 해석을 묻곤 했다. 하지만 그는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다른 주석까지 곁들여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학생들은 건조하면서도 창조적인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짧게 줄여서 불러야 할 만큼 엄청나게 고루하고 고전적이었다. 그는 고전문헌학으로 세계 전체를 짊어지고 다니는 것 같았다. '문두스'는 이 같은 그의 본질을 강조하는 데 가장 적절한 단어였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뿐 아니라 헤브라이어에도 조예가 깊었다. 구약학 교수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러니 여러 개의 세계를 지고 다녔다고 표현하는 게 옳았다. "진짜 학자를 보고 싶다면 여기 있는 이분이 바로 그분입니다." 교장은 새로운 학급에 그레고리우스를 소개할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13-14


그레고리우스는 학생들을 한 명 한 명 살펴보았다. 그는 지금 학생들을 향한 자기감정이 어떤지 중간 점검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교실의 가운데쯤 왔을 때, 자기가 얼마나 자주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생각했는지 알게 됐다. 이 아이들에게는 아직 남아 있는 날들이 얼마나 많은가. 창창한 미래, 얼마나 많은 일이 생길 것인가. 무수히 많은 일을 경험하게 될 이 아이들!  19


천천히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가 옷걸이에 걸려 있던 젖은 외투를 내린 다음,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교실에서 나왔다.  20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남의 이목을 끌지 않고 하굑를 관찰할 수 있는 어떤 걸물의 모퉁이까지 갔다. 그곳에서 학교를 바라보며 그는 자신이 학교와 관련된 모든 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앞으로 얼마나 그리워할 것인지를 절절하게 느꼈다. 상상하지 못햇던 격렬한 감정이었다.  20-21


그레고리우스가 졸업시험을 치른 이유는 오로지 아내 플로렌스의 강요 때문이었다. 박사 학위를 딸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중요한 것은 아주 단순했다. 문법이든 표현 양식이든 고전의 외진 구석까지 모두 알고 표현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역사를 아는 것, 다른 마롤 하면 자신의 일을 잘하느 ㄴ것이었다. 이것은 겸손함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요구가 많은 사람이었다. 변덕이나 뒤틀린 허영심도 아니었다. 나중에 그는 가끔, 자신의 이런 태도는 잘난 척하는 세상을 향한 조용한 분노, 허풍선이들을 향한 꺾이지 않는 고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레고리우스보다 훨씬 능력이 없던-정말 말도 안 되게 공부를 못하던-사람들도 졸업시험을 시험을 치르고 확실한 직장을 얻었다. 그러나 그에게 이런 사람들은 다른 세상, 견딜 수 없이 천박한 세상, 그가 경멸하는 기준을 지닌 세상에 속해 있었다. 그를 내보내고 대신 졸업장이 있는 교사를 채용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학교에 아무도 없었다. 교장도 고전문헌학을 전공했지만, 그레고리우스가 자기보다 실력이 월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 그를 내보내면 학생들이 폭동을 일으키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21-22


<언어의 연금술사>  27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 관찰의 대상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말은 경험한 것에서 미끄러져 결국 종이 위에서 모순만 가득하게 남는다. 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혼란스러움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익숙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경험들을 이해하기 위한 왕도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이상하고 묘하게 들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서야 깨어 있다는 느낌, 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27-28



-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28



비행기에 올라타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완전히 다른 세상에 도착한다는 사실-그 중간에 놓인 개별적인 모습들을 받아들일 시간도 없이-은 그레고리우스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30


그레고리우스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벨이 울렸다. 학교로군. 벨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그는 전화 옆에 서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오늘 오전부터 제 인생을 조금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문두스 노릇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저도 모릅니다만, 미룰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전에게 주어진 시간은 흘러가 버릴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삶에서 남는 건 별로 없을 테니까요. 그레고리우스는 크게 소리 내어 이렇게 말해보았다. 이 말은 옳았다. 그는 자기 인생에서 이렇듯 옳고 의미 있는 말을 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전화기에 대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3



- 황금 같은 침묵 속의 언어. 신문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카페에 앉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다 보면 쓰인 글과 하는 말에서 보고 듣는 늘 똑같은 언어 때문에-어법이든 말장난이든 은유든- 혐오감과 구역질을  자주 느끼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보면 나 역시 끊임없이 똑같은 말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들은 소름이 끼치도록 낡았고 평번하며, 수백만 번 사용하여 닳고 닳은 것들이다. 이런 말들에도 과연 의미가 있을까? 무론 말은 나누는 기능을 한다. 사람들은 이 말에 따라 행동하고 웃고 울며,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가고, 종업원은 커피나 차를 가지고 온다. 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이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이런 말이란 그저 쓸데없는 수다가 새겨진 흔적으로써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효과음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그럴 때면 나는 해변으로 가서 목을 길게 늘여 바람에 머리를 맡기고, 우리에게 익숙한 것보다 훨씬 더 차가운 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낡은 단어들과 진부한 언어 습관을 내 머릿속에서 날아가게 하고, 늘 똑같은 잡담의 찌꺼기를 묻히고 사는 나를 씻겨 깨끗한 정신으로 돌아오게 해줄 바람. 그러나 그런 다음에도 뭔가 할 말이 생기면,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바 없는 나를 보게 된다. 내가 원하는 정화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난 이를 위해 무엇인가를, 언어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을? 내가 나의 언어에서 탈출하여 다른 언어로 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언어에서 도피하는 게 아니다. 언어를 새로 발명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

난 아마 포르투갈어 단어들을 새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 새로운 문장들은 낡고 진부하다거나 흥분하여 기교를 부린다거나 의도적이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포르투갈어로 된 문장의 중심을 이루는 원형(原形 근원원 형상형)이라서, 에움길이나 오염이 없이 다이아몬드와 같은 투명한 본질에서 바로 나온다는 느낌을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 단어들은 윤을 낸 대리석처럼 흠이 없고,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은 모두 완벽한 침묵으로 변화시키는 바하의 변주곡 음색처럼 맑아야 한다. 가끔 언어의 진흙 구덩이와 타협하려는 마음이 내 안에 약간 남아 있다면, 그 마음은 화기애애한 거실의 부드러운 고요함이나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느긋한 평온함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끈적거리는 언어 습관에 대한 분노가 나를 에워싸면, 그 분노는 빛이 없는 우주의 맑고 서늘한 적막함 이상이어야 한다. 내가 포르투갈어로 말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 소리 없는 열차를 끌고 가는 우주.... 종업원이나 이발사나 승무원은 새로운 조어를 들으면서 그 문장의 빛나는 간결함, 그 아름다움에 놀랄 것이다. 내 생각에 이런 문장들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엄격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청렴하고 확고부동하게 서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신의 말과 비슷하고, 또한 과장이나 격정이 없이 정확하고 간결하여 단 하나의 단어나 쉼표도 뺄 수 없다는 점에서 언어의 연금술사가 엮은 시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38-40



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드는 잔인함이 그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45


오랫동안 외국-다른 대륙, 다른 기후, 다른 언어 환경-에 살다가돌아온 학생들을 만날 때면 마음의 평정을 더 많이 잃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아직 키르헨펠트에 계세요?" 그들은 이렇게 묻고는 가던 발걸으을 재촉했다. 그런 날 밤이면 그레고리우스는 이 질문에 대한 변명거리를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변명을 해야 한다는 느낌조차 견디기 힘들어졌다.  46


무엇인가와 작별을 할 수 있으려면 내적인 거릳기가 선행되어야 했다.  47



-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이런 생각은 술 취한 저널리스트와 요란하게 눈길을 끌려는 영화제작자, 혹은 머리에 황색 기사 정도만 들어 있는 작가들이 만들어낸 유치한 동화일 뿐이다.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안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無音 없을무 소리음)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55



-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60



"아무 때나 전화하세요. 낮이든 밤이든." 독시아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둘이 처음 만났던 20년 전을 떠올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의사는 외국인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는 독특한 억양으로 말했다. 

"눈이 먼다고요? 아닙니다. 그냥 운이 나빴던 거예요. 정기적으로 망막을 검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레이저도 있는걸요.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는 그레고리우스를 문까지 배웅하다가 멈춰 서더니 눈을 깊게 들여다보며 물었다.

"무슨 다른 걱정거리라도?"

그레고리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플로렌스와의 이혼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말은 몇 달이 지난 후에야 할 수 있었다. 그리스 의사는 별로 놀라지 않은 듯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가끔 정말 두려워하는 어떤 것 때문에 다른 무엇인가에 두려움을 갖기도 하지요." 그때 그가 한 말이었다.  62-63


그때 형태가 잡히지 않은 채 우리 앞에 놓여 있던 그 열린 시간에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무엇을 해야 했을까. 자유로워 깃털처럼 가벼웠고, 불확실하여 납처럼 무거웠던 그 시간에.  75


지나온 시간이 괴롭지 않은 사람도 돌아가려고 할까?  77


낯선 사람의 삶을 산다는 게 어떤 것일까 생각하며 남의 뒤를 밟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금 전 그의 마음속에서 터져 나온 감정은 아주 새로운 호기심이었다. 그 호기심은 기차를 타고 오면서 경험했고, 파리 리용 역에 내리면서도-어제였든 아니면 언제였든- 느꼈던 새로운 종류의 각정과 어울릴 만한 것이었다.  80


그레고리우스는 뭘 해야 좋을지 모를 때마다 독서를 하곤 했다. 베른 근처 산간 마을 농부의 딸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책을 읽는 일이 드물었다. 가끔 읽는다고 해도 루트비히 강호퍼(1855~1920, 향토 소설로 유명한 독일 작가)의 향토소설 정도만 읽었는데, 그것조차도 몇 주씩 걸렸다. 아버지는 텅빈 박물관 전시실의 무료함을 잊는 수단으로 독서를 시작했고, 읽는 데 취미를 붙이고부터는 손에 잡히는 책은 무엇이든 읽었다. "이제 너도 책 속으로 도망치는구나." 독서의 기쁨을 발견한 아들에게 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책에 대한 어머니의 이런 생각, 좋은 글이 지닌 마술과 같은 힘이나 광채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는 그를 슬프게 했다. 

그는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 즉 책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독서를 하는지 하지 않는지는 금방 알 수 있으며, 사람 사이에 이보다 더 큰 구별은 없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들으면 놀랐고, 그의 괴상한 성격에 머리를 가로젖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레고리우스는 알고 있었다. 정말 알고 있었다.  101-102


담배를 피우는 이방인이 유리에 비친 나의 모습에서 일그러진 상(像 형상상)을 만들어 내리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고, 내 관념 세계에 관한 그의 공상은 일그러진 채 점점 쌓여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이중으로 이방인이 된다. 우리 사이에는 허위적인 외부세계뿐 아니라 외부세계가 각자의 내부세계에 만드는 망상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106-107


우리는 서로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108


모든 사람이 똑같은 그를 보았지만, 프라두가 말하듯 사람드링 보는 외부세계의 한 부분은 내면세계의 한 부분이기도 하므로 모두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프라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였던 때는 자기 인생에서 단 일 분도 없다고 확신했다.  108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110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레고리우스는 깃털처럼 가벼운 새 안경을 벗고 눈을 문지른 다음, 다시 한 번 썼다. 그런데 사실이었다. 예전 그 어느 때보다 잘 보였다.  114


새 안경으로 세상은 더 넓어졌고, 공간은 실제로 3차원이 되어 사물들이 마음껏 몸을 펼 수 있었다. 전혀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115



-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과 자비심과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  116



- 사람들의 만남이란 한밤중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달려가는 두 기차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는 뿌연 창문 저편의 흐릿한 불빛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시야에서 바로 사라져서 알아볼 시간도 없는 사람들에게 빠르고 덧없는 시선을 던진다. 무(無)에서 나와 아무런 의미나 목적 없이 텅빈 어둠 속에서 조각처럼 빛나던 창틀, 그 창틀에 들어 있는 유령들처럼 스쳐간 것이 정말 한 남자와 여자였던가? 두 사람은 아는 사이였을까? 둘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가? 웃었던가, 울었던가? 사람들은 이런 광경이란 서로 모르는 타인이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날 산책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말할지 모른다. 이 경우에는 그런 비교가 어느 정도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우리는 많은 살마들과 오랫동안 마주보고 앉아 있다. 함께 먹고 일하며 옆 자리에서 잠을 자고, 한 지붕 아래서 산다. 스쳐 지나가는 덧없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속성과 신뢰감과 친밀한 이해심을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속임수는 아닐까? 매순간 견딜 수 없으므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이 덧없음을 은폐하고 없애려는 시도... 다른 사람을 향한 눈빛이나 시선 교환은, 모든 것을 흔들고 덜컹거리게 만드는 엄청난 속도와 기압에 마비된 기차 승객들이 서로 스쳐 지나가며 던지는 지극히 짧은 시선의 만남과 같은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스치며 지나가는 밤의 만남처럼 언제나 서로에게서 벗어나고, 추측과 생각의 단상과 날조된 특성들만 우리에게 남겨두는 건 아닌지. 만나는 게 사실은 사람들이 아니라, 상상이 던지는 그림자들은 아닌지.  122-123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과거로 돌아가 그를 새롭게 아는 것..

자기 삶과는 완전히 달랐고 자기와는 다른 논리를 지녔던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까.  127


'글을 쓰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깨어 있다고 할 수 없어.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 자기가 어떤 사람이 아닌지는 더욱 알지 못하지고.'(아드리아나의 증언 중)  141


(에사)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1952년 가을, 영국에서였소. 런던에서 브라이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였지...

내가 탄 기차 칸의 문이 열리더니 머리카락이 헬멧처럼 반짝이는 그 사람이 들어오더군. 차가우면서도 부드럽고, 우울해 보이는 눈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그는 신부 파치마와 함께 장거리 여행을 하는 중이었소. 그때든 그 후로든, 그 사람에게 돈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소. 난 그가 의사라는 것, 그리고 특히 뇌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리고 원래 사제가 되려고 했지만, 철저한 유물론자라는 것도. 아주 많은 일에 역설적인 견해를 지녔던 사람이었지. 모순적이 아니라 역설적인 견해 말이오."  150-151


".. 의사들은 믿지 않았거든. 의사들을 믿지 않는 의사라.. 그 사람은 그랬고. 아마데우는."  152


그는 저항운동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소. 성격도 맞지 않았지. 저항운동가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꿈꾸는 사람의 감수성 예민한 영혼이 아니라 나처럼 투박한 두개골이 필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너무 위험 부담이 크고 실수도 하게 되어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어버린다오. 그는 만용에 가까운 행동을 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냉혹했지만, 인내심이나 우직함은 없었소.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어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은 없었지.  153


(멜로디) ".. 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자비하고 타협하지 않는 오빠의 비판을 좋아했어요..."

"..오빠는 벌써 네 살 때 글을 읽기 시작해서 손에 잡히는 건 뭐든 읽었다고 해요. 초등학교에서는 지루해서 죽을 정도였고, 중등학교에서도 두 번이나 월반을 했어요. 스무 살 때는 온갖 것들을 모두 알게 됐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스스로에게 묻기에 이르렀어요. 그러느라 공놀이 같은 건 잊은 거지요."  179


"그레고리우스, 그건 글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말하는 건 글이 아니라고요. 그냥 말을 하는 거예요."

그레고리우스가 사람들이 서로 연관이 없고 모순된 말을 한다고, 그리고 말한 것도 금방 잊어버린다고 불평했을 때 한 대답이었다. 독시아데스는 그의 말에 마음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자기처럼 택시 운전, 그것도 테살로니키엣 택시 운전을 해본 경험이 있다면 사람들이 하는 말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주 확실하게-이렇게 확실하게 아는건 인생에서 몇 개 안 될 정도로-안다고 했다. 그냥 말하기 위해 말을 할 뿐이라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다면, 그럼 말로는 도대체 뭘 해야 하느냐고 그레고리우스가 물었다. 독시아데스는 껄껄 웃었다. 

"스스로 말을 하는 계기로 삼아야지요! 그래서 말이 계속 이어지도록."  180-181



- 영혼의 그림자.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처럼 확실한가? 스스로의 말이라는 것이 맞기는 할까?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들은 신빙성이 있을까? 그러나 내가 고민하는 진짜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정말고민스러운 문제는 이런 이야기에 도대체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있기나 할까라는 것. 외모에 관한 이야기에는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183



- ... 지금의 내가 안니,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그 시절로 다시 가고 싶은-꿈과 같이 격정적인 -갈망.... 다시 한 번 손에 모자를 쥐고 따뜻한 이끼 위에 앉아 있고 싶은 것, 이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길 원하면서 그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겪은 나를 이 여행에 끌고 가려고 하는 것, 이는 모순되는 갈망이 아닌가.  184-185



(바르톨로메우 신부) "..아마데우는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앉아 있었소. 그 아인 기억력이 엄청나게 뛰어났지. 검은 눈은 옆에서 아무리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 해도 흔들리지 않는 달관한 시선과 굉장한 집중력으로 두꺼운 책들을 한 줄씩, 한 쪽씩 모두 빨아들였소. 어떤 선생이 이렇게 말하더군. '아마데우가 책을 읽고나면 그 책에는 더 이상 글씨가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아마데우는 책의 의미만 삼키는 게 아니라 잉크까지 먹는다니까요.'.."  193


"..재능이 많았던 아마데우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소. 하지만 못하는 게 한 가지 있었지. 놀고 즐기고 절제 없이 행동하는 거였소. 엄청난 각성과 통찰과 자제를 향한 열정적인 욕구는 자기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지..."  195


"..아마데우는 천박한 허영심을 대하면 잔인해졌소. 아주 심하게...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드는 듯했지. '천박한 허영심은 우둔함의 다른 형태죠.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주 전체로 봤을 때 얼마나 무의미한지 몰라야 천박한 허영심에 빠질 수 있어요. 그건 어리석음이 조야한 형태로 나타난 거예요.' 그는 늘 이렇게 말했소.."  202


아마데우가 졸업식에 낭독한 글..

첫 문장을  들은 직후부터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소. 시간이 지날수록 정적은 더 심해졌지. 이미 인생을 다 산 듯한 열일곱살짜리 우상파괴자의 펜 끝에서 나온 문장은 마치 채찍질과도 같았소...

나중에 선생도 보게 되겠지만, 마지막 문장은 감동적이면서도 겁을 주는 협박이오..

아마데우는 그 문장을 크게 말하지도,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하지도 않았소. 차분하고 거의 부드럽기까지 한 목소리였소.  209


그레고리우스는 대강당으로 가서 코르테스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프라두의 연설을 듣던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책방 봉지에서 바르톨로메우 신부의 서류철을 꺼내 끈을 풀고, 아마데우가 연설을 끝내고 교탁에 선 채 놀란 청중의 침묵 속에서 정리했던 종이뭉치를 꺼냈다..


- 신의 말씀에 대한 경외와 혐오.

난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이 세상의 범속함에 맞설 대성당의 아름다움과 고상함이 필요하니까. 반짝이는 교회의 유리창을 올려다보며 그 천상의 색에 눈이 부시고 싶다. 더러운 제복의 단조로운 색깔에 맞설 광채가 필요하니까. 교회의 혹독한 냉기로 내 몸을 감싸고 싶다. 병영의 단조로운 고함 소리와 들러리 정치인의재기 넘치는 수다네 맞설, 명령을 내리는 듯한 그 정적이 필요하니까. 행진곡의 새된 천박함에 대항할 물 흐르는 듯한 오르간의 울림이, 흘러넘치는 그 숭고한 음색이 듣고 싶다. 난 기도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천박함과 경솔함이라는 치명적인 독에 대항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필요하니까. 난 성서의 강력한 말씀을 읽고 싶다. 언어의 황폐함과 구호의 독재에 맞설, 그 시(詩)가 지닌 비현실적인 힘이 필요하니까. 이런 것들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이 또 하나 있다. 우리 몸과 독자적인 생각에 악마의 낙인을 찍고 우리의 경험 가운데 최고의 것들을 죄로 낙인찍는 세상, 우리에게 독재자와 압제자와 자객을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세상. 마비시킬 듯한 그들의 잔혹한 군화 소리가 골목에서 울려도, 그들이 고양이나 비겁한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거리로 숨어들어 번쩍이는 칼날로 등 뒤에서 희생자의 가슴까지 꿰뚫어도... 설교단에서 이런 무뢰한을 용서하고 더구나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일 가운데 하낟. 설사 누군가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이는 유례가 없는 허구이며 완벽한 불구하는 값을 치러야 하는 무자비한 자기기만이다. 적을 사랑하라는 이 괴상하고도 비상식적인 명령은 사람들의 의지를 꺾고 용기와 자신감을 빼앗아, 필요하다면 무기까지도 들고 독재자에게 대항하여 일어나야 할 힘을 얻지 못하도록, 그들의 손아귀에서 나긋나긋해 지도록 하기에 적합해 보인다.  

난 신의 말씀을 경외한다. 시적인 그 힘을 사랑하므로, 난 신의 말씀을 혐오한다. 그 잔인함을 증오하므로, 이 사랑은 아주 힘든 사랑이다. 말씀의 광채와 자만하는 신이 만드는 엄청난 예속을 끝없이 구분해야 하니까. 이 증오도 아주 힘든 증오다. 이 세상의 멜로디인 말씀을, 우리가 어릴 때부터 경외하라고 배운 말씀을 어떻게 증오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다음부터 우리를 봉화처럼 비추던 말씀을, 우리로 하여금 지금의 존재가 되도록 이끌어준 그 말씀을?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친자식을 동물처럼 도살하라고 요구했음을. 이런 말씀을 읽을 때 느끼는 분노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자신과 논쟁하려 한다고 욥을 비난하는 신은 도대체 어떤 신인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자기가 겪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욥을? 욥을 그렇게 만든 게 누구던가? 신이 아무런 이유 없이 어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이, 평범한 사람이 그러는 것보다 덜 부당할 이유는 뭔가? 욥이 불평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았던가?

신의 말씀이 지닌 시적 분위기는 너무나 대단해서 모든 것을 침묵하게 하고, 모든 저항을 하잘것없는 불만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선포된 요구와 굴종이 너무 심하여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는 성서를 옆에 밀어놓는 정도가 아니라 던져버려야 한다. 성서에서는 생활과 동떨어져 있으며 즐거움이라고는 없는 신이, 자유로워야 묘사할 수 있는 인생의 그 큰 범위를 복종이라는 단 한 가지 영역으로, 꼼짝할 수 없는 영역으로 한정하려 한다. 우리는 죄를 짊어져 꼬부라지고, 품위를 잃게 하는 예속과 고해성사로 위축되어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긋고, 그의 품 안에서 더 나은 인생을 누리기 위해 수천가지 희망을 거부한 채 무덤을 향해 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모든 기쁨과 자유를 빼앗은 그의 품 안에서 어떻게 인생이 더 나아진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에게서 나오고 그를 향해 가는 말씀은 현혹적으로 아름답다. 복사(服事 옷복 일사) 때 난 그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제단의 촛불 속에서 그 말씀은 얼마나 나를 취하게 했던가! 이 말씀이 온갖 일들의 척도임을 얼마나 당연하게 생각했던가! 사람들이 다른 말-혐오스러운 산란함과 본질의 상실을 의미하는 말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또 얼마나 이해할수 없는 일이었던가! 난 지금도 그레고리오 성가를 들으면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예전의 그 심취가 이제 반란에 돌이킬 수 없이 자리를 내준 사실에 잠시 슬픔에 젖는다. '지성의 희생(sacrificium intellectus)'이라는 두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화염처럼 내 안에서 솟구쳤던 반란...

호기심과 질문, 의혹과 논거, 생각하는 즐거움 없이 우리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우리의 목을 치는 칼날과 같은 두 단어는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느끼고 행동하며 살라는 요구이자 광대한 분열을 향한 선동이며, 우리 삶의 내적인 통일과 조화라는 행복의 정수를 희생하라는 명령이다. 갤리선의 노예는 쇠사슬에 묶여 있지만 원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행위를 가슴 깊은 곳에서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 그것도 기쁨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큰 경멸이 있을까?

신은 그 편재함으로 낮이나 밤이나 우리를 관찰하고 매시간, 매분, 매초마다 우리의 행위와 생각을 장부에 기록하며, 온전하게 우리 자신일 수 있는 시간을 단 한순간도 주지 않는다. 비밀이 없는 사람은,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는 생각과 소망이 없는 사람은 과연 어떠한가? 종교재판 때와 현재의 고문 기술자들은 알고 있다. "피의자가 내부로 후퇴할 길을 차단하라, 불을 절대 끄지 마라, 절대 혼자 두지 마라, 그에게서 잠과 평온함을 빼앗으라, 그러면 곧 자백할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훔쳐가는 고문은 호흡하는 데 필요한 공기와도 같은 외로움, 우리가 스스로와 마주 설 수 있는 그 외로움을 파괴한다. 우리의 구주, 우리의 신은 자신의 방종한 호기심과 반감을 일으키는 그 궁금증으로 불멸이어야 할 우리의 영혼을 훔치고 있다는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영원히 죽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이 과연 있으랴? 누가 영원히 살고 싶어할까? 말 그대로 끝없이 많은 날과 달라 해가 앞으로 오므로, 오늘과 이 달과 올해에 일어나는 일이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지루하고 공허한가? 정말 영원히 산다면, 의미가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을까 우리는 시간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고, 놓치는 것도 없으며, 서두를 필요도 없다. 우리가 어떤 일을 오늘 하든 내일 하든 아무런 상관이, 정말 완벽하게 아무런 상관이 없다. 회복할 시간이 얼마든지 있으므로 수없이 많은 실수도 영원 앞에서는 무(無)가 되고, 뭔가 후회한다는 것도 무의미해진다. 하루하루 태평하고 편안하게 느낄 수도 없다. 이러한 행복은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자각을 먹고 살기 때문에, 그리고 게으름뱅이는 죽음과 마주한 모험가요 성급이라는 명령과 싸우는 십자군이므로, 언제 어디든 누구에게든 시간이 한없이 많다면 시간을 낭비하면서 얻는 기쁨이 설 자리가 어디에 있으랴?

두 번째로 오는 느낌은 처음과 같지 않다. 그것은 반복을 의식함으로써 퇴색된다. 너무 자주 오고 오래 지속되는 감정은 우리를 지치고 싫증나게 한다. 불멸하는 우리의 영혼 속에는 이런것들이 결코,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아는 데서 오는 어마어마한 권태감과 절규하는 절망감이 자랄 것이다. 우리도 변화하는 감정과 함께 변하기를 원한다. 감정은 바로 예전의 자신을 떨쳐버리기 때문에, 그리고 스스로 다시 사라질 미래를 향해가기 때문에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의 물결이 영원으로 흐른다면, 조망이 가능한 시간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가 전혀 상살할 수 없는 수천 가지 감정이 마음속에 생겨날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에게 어떤 약속이 주어지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우리가 영원토록 우리여야 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우리인 이 강요된 상황에서 언젠가 벗어난다는 위안은 결코 없다는 뜻인가? 우린 여기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하며 또 영원히 알 수 없을 터인데, 이런 무지는 축복이다. 불멸이라는 이 낙원은 바로 지옥임을, 그 한 가지 사실은 알고 있으므로.

현재에 아름다움과 두려움을 부여하는 것은 죽음이다. 시간은 죽음을 통해서만 살아 있는 시간이 된다. 모든 것을 안다는 신이 왜 이것은 모르는가? 견딜 수 없는 단조로움을 의미하는 무한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난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유리창의 반짝임과 서늘한 고요함과 명령을 내리는 듯한 정적이, 오르간의 물결과 기도하는 사람들의 성스러운 미사가, 말씀의 신성함과 위대한 시의 숭고함이 필요하니까. 나는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자유와 모든 잔혹함에 대항할 적대감도 필요하다.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무의미하다. 아무도 나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말기를.  215-221


글을 세번 읽는 동안 그레고리우스의 놀라움은 점점 커갔다.  211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가 쓴 글을 숨도 쉬지 않고 읽었다.  248



- 난 그를 위해 그랬던가? 살아남는다는 그의 관점에서 내가 행한 일인가? 그게 내 의지였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까? 환자들을 대할 때면 물론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난 그렇게 행동한다. 어쨌든 그랬길 바란다. 내 행동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자신의 의지였다고 알고 있는 동기 외에 완전히 다른 어떤 동기에 영향을 받는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는?

내 손은 자신만의 고유한 기억을 지닌 듯하고, 이 기억은 자기 관찰을 위한 다른 어떤 원천보다도 더 신뢰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멩지스의 심장에 바늘을 찌르던 이 손의 기억. 이 손은 폭군살해자의 손, 그러나 역설적인 행위로 이미 죽은 폭군을 다시 살린 손이었다. (늘 새롭게 경험하는 일이지만, 내 원래 생각과 반대되는 현상은 여기서도 증명된다. 육체가 정신보다 매수되기 어렵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정신은 스스로에 대한 확실한 신뢰와 스스로에게 더 이상 놀라지 않는 인식의 친근함을 우리에게 그럴듯하게 꾸며대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단어들로 엮여 있는 자기기만의 매력적인 활동 무대다. 이렇듯 수월한 자기 확신 속에서 사는 인생은 얼마나 지루한가!)

그러니 사실은 내가 날 위해 그 일을 한 건가? 내가 훌륭한 의사요 증오를 억누를 수 있는 힘을 지닌 용감한 인간임을 나 스스로에게 보이기 위해? 승리를 거둔 극기를 칭찬하고 자기 통제의 기쁨을 즐기기 위해? 그러니까 도덕적인 허영심, 아니 그것보다 더 나쁜 지극히 일상적인 허영심에서? 그러나 그 몇 초 동안의 경험은 결코 향락적인 허영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확실하다. 오히려 나 자신의 뜻과 반대로 행동하고, 끓어오르는 보복과 심술이라는 감정을 눌러야 했던 경험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허영심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허영심, 반대 감정 뒤에 숨어 있는 허영심도 있지 않을까?

'난 의사요.' 흥분한 군중 앞엣 내가 했던 말이다. '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사람이오, 그건 신성한 선서요. 그 선서를 어기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요. 무슨 일이 있어도...'가로 말할 수도 있었겠지. 난 이런 말을 좋아하고, 또 사랑한다. 이런 말은 나를 감동시키고 황홀하게 한다. 사제의 서약처럼 들리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내가 인간백정에게, 그에게 잃어버린 목숨을 돌려준 것은 일종의 종교적인 행위였을까? 더 이상 교조와 예배를 통해 우월감을 느낄 수 없음을 마음속으로 아쉬워하는, 제단 촛불이 지닌 천상의 광채를 아직도 그리워하는 사람의 행위? 다시 말해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행위? 나 스스로도 느끼지 못했지만, 내 영혼 속에서는 예전에 신부님의 귀여움을 받던 제자와 아직 한 번도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은 폭군살해자 사이에 짧고도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던가? 생명을 구하는 '독'이 든 주사바늘을 심자엥 꽂은 것은 사제와 살인자가 함께한, 각자가 원하던 것을 얻은 행위였나? 

나에게 침을 뱉은 사람이 이네스 살루마옹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면, 난 나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우리가 너에게 요구한 건 살인이 아니었다."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었겠지.

"법적이나 도덕적인 의미에서나 그건 범죄가 아니었어. 그가 그냥 죽게 내버려두었더라도 너에게 판결을 내릴 판사도 없었고, '살인하지 말라'는 모세의 십계명을 어겼다고 말할 사람도 없었다. 우리가 원했던 건 아주 단순명료하고 간단한 일이었어. 우리에게 불행과 고무노가 죽음을 불러온 사람의 목숨, 우리를 불쌍히 여긴 하늘이 이제 드디어 없애려고 하던 목숨을 그렇게 온 힘을 다해, 그가 앞으로도 계속 유혈 체제를 유지하도록 붙잡지는 않는 거였다."

난 무슨 말로 나를 변호했을까?

"어떤 사람이든, 무슨 짓을 저질렀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할 권리가 있다. 우리에겐 다른 사람의 생사 여부를 판단하거나 주관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그게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총을 쏘는 누군가를 발견한다면, 그 사람을 쏘지 않는가? 당신이 살인을 저지르는 멩지스를 눈앞에서 본다면 필요한 경우 살인을 해서라도 그의 살인을 막지 않을까? 당신이 했어야 할 일,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것과 비교하면 별것 아니지 않은가?"

그를 죽게 그냥 내버려두었더라면 내 기분은 지금 어떨까? 사람들이 나에게 침을 뱉는 대신 치명적인 나의 방임을 칭송 했더라면? 분노를 뿜어내는 실망 대신 느긋한 안도의 숨소리가 골목에서 들렸더라면? 난 분명 악몽을 꿀 정도로 시달렸을 것이다. 이유가 뭘까? 내가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 있어서? 아니면 그를 죽게 내버려두는 냉혹한 행위는 내가 나 자신에게 낯설어짐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의 나도 그저 우연의 산물일 뿐이 아닌가.

이네스에게 가서 초인종을 누르고, 이렇게 말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어쩔 수 없었어요. 난 원래 그래요. 사정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됐어요. 내가 생긴 게 워낙 그러니, 달리 어떻게 할 수 없었어요."

그러면 그녀는 아마 이렇게 대답하겠지.

"당신 기분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건 정말 하찮은 거니까. 하지만 멩지스가 건강해져서 제복을 다시 입고, 살해 명령을 계속 내린다고 생각해봐요. 아주 자세하게 상상해보라고요. 자, 이제 자기 자신을 판단해보시죠."

내가 그녀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어떻게, 무슨 말을?  248-252



멩지스가 눈앞에 누워 있을 때, 프라두가 본 것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특정한 개인이었다. 오직 그라는 개별적인 한 인간, 프라두는 멩지스의 삶을 다른 사람들과 연관지어, 더 큰 범위 속의 한 요소로 계산할 수 없었다. 프라두의 혼잣말에 등장하는 여자는 바로 이 점을 비난했다. 그가 개별적인 다른 사람들의 목숨과도 똑같이 관련된, 그것도 여러 사람들의 목숨과 관련된 결과를 생각하지 않은 것. 한 사람의 개별적인 목숨을 여러 사람의 개별적인 목숨을 위해 희생하지 않은 것.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가 이런 일을 배우려고 저항운동에 참여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의도는 실패로 끝났다. "한 사람 대 여러 사람의 목숨. 이런 식으로 계산할 수는 없지 않나요?" 몇 년 뒤에 프라두는 바르톨로메우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253



- "그래, 하지만 왜 불안하지? 고통이나 실망이나 슬픔 또는 분노가 아니라 왜 불안일까? 불안은 이제 앞으로 올 일, 일어날 일에 대해 갖는 감정 아닌가? 네가 피아노를 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늘 알고 있었고, 우린 그걸 '현재'로 다퉜잖아. 이 불행은 지속될지는 몰라도, 불안하다는 느낌이 타당할 만큼 커질 수는 없지 않을까? 연주를 할 수 없을 거라는 뚜렷한 인식은 네 기운을 빠지게 하고 답답하게 만들지는 몰라도, 공포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야."

"그건 오해야."

조르지가 반박했다.

"공포는 새로운 인식 때문이 아니야. 무엇에 대한 인식인지가 문제야. 미래의 것이긴 하지만 현재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내 인생의 불완전함, 지금 이미 결핍이라고 느끼는 이 불완전함이지. 이 결핍이 너무 커서 늘 알고 있었던 사실이 내 안에서 공포로 변해."  266



- 인생이 가볍든 힘들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상관없이 더 많은 삶을 원한다. 끝나고 나면 모자라는 인생을 더 이상 그리워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들은 삶이 끝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복잡하고 분석적인 사유는 직관적인 인식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린 둘 중에 어떤 것을 더 신뢰해야 하나?  269



조르지는.. 왜 이 일에 관심이 있는지 물었다...

"제가 그였더라면 어땠을지 알고 싶어서요."

그레고리우스가 대답했다...

"그게 가능할까요?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 '그'가 된다는 것이?"

그레고리우스는 적어도 그라고 상상하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있지는 않느냐고 대답했다.  280


책은 훔쳤소. 책을 읽는 데는 돈이 들지 말아야 한다는 게 당시 내 생각이었는데,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소.  288


둘은 차를 마시며 체스를 두었다. 말을 움직이는 에사의 손이 떨렸다. 말을 새로 놓을 때마다 딱 소리가 났다. 그레고리우스는 에사의 손등에 난 화상 자국에 번번이 놀랐다. 

"끔찍한 건 고통이나 상처가 아니오."

에사가 말했다. 

"가장 끔찍한 건 굴욕이지. 바지에 오줌을 쌌다는 걸 알았을 때의 굴욕감... 석방되고 나서 난 복수심에 불탔소. 고문기술자들이 퇴근하여 나올 때까지 숨어서 기다렸지. 그들은 사무실에 다니는 사람들처럼 뻣뻣한 외투 차림에 서류가방을 들고 나왔소. 난  그들의 뒤를 밟아 집까지 갔지. 눈에는 누, 이에는 이로 보복하기 위해. 내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을 만지는 게 구역질이 났기 때문이었소. 보복을 하려면 어차피 손을 댈 수밖에 없었소. 총을 사용하는 건 그들에겐 너무 관대한 처벌이었을 테니까. 마리아나는 내가 도덕적인 성숙의 과정을 겪은 줄 알아. 그건 전혀 아니었소. 난 언제나 이른바 '성숙'이라는 걸 거부하던 사람이오. 싫어해. 난 사람들이 말하는 성숙이란 걸 낙관주의나 완벽한 권태라고 생각하오."  290-291



- 실망이라는 향유. 실망은 불행이라고 간주되지만, 이는 분별없는 선입견일 뿐이다.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또한 이런 발견없이 자기 인식의 근본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그러니 실망이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함을 어떻게 얻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우리는 실망을, 없으면 우리 인생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한숨을 지으며 할 수 없이 견뎌야 하는 그 무엇이라고 취급해서는 안 된다. 우린 실망을 찾고 추적하며 수집해야 한다. 젊은 시절에 숭배했던 영화배우가 이제 노화와 쇠락의 징후를 보이는 것에 나는 왜 실망하는가? 성공의 가치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에 대한 실망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부모님에 대한 실망을 평생 동안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 사람들에게서 우린 뭘 기대했던가? 무자비하게 고통스러운 통치 아래서 평생 시달려야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고통을 주고 경제적인 도움도 주는 사람들-행동에서 실망을 느낀다. 그들의 행동이나 말이나 감각은 너무나도 미미하다. 

"뭘 기대하는 겁니까?"

내가 묻는다. 그들은 대답하지 못한다. 이들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기대, 실망할 수도 있는 기대를 오랫동안 품고 다녔다는 사실에 놀란다.

자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실망스러운 경험의 수집이란 그에게 중독과도 같을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독. 그에게는 실망이 뜨겁게 파괴하는 독이 아니라 서늘하게 긴장을 풀어주는 향유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의 진정한 윤곽이 무엇인지 눈을 뜨게 해주는 향유...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실망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실망이 스스로를 향한 길잡이라고 인식한 사람은, 없는 용기와 모자라는 성실함 또는 자신의 감각과 행동과 말에서 끔찍하도록 좁은 한계 등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내기 위해 온갖 힘을 쏟는다. 우리가 우리에게서 바라고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우리에게 한계가 없다는 것? 아니면 우리가 사실은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

기대를 줄임으로써 더 현실적이 되고, 단단하고 신뢰할 만한 본질만 남아 실망의 고통에 맞서는 저항력을 지니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포괄적이고 원대한 기대를 금지하고, 버스의 도착 여부와 같은 무의미한 기대만이 존재하는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292-294



"난 아마데우처럼 거리낌 없이 몽상에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소."

에사가 말했다.

"그리고 실망을 그토록 싫어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소. 아마데우의 이 글은 스스로에게 맞서서 쓴 거요. 자주 자신의 뜻에 거스르며 살아야 했던 그의 삶과 마찬가지로..."  294



- 우스꽝스러운 무대. 우리가 중요하고 슬프고 우습고 아무 의미도 없는 드라마를 상연하기를 기다리는 무대로서의 세계. 이런 생각은 얼마나 감동적이고 매혹적인가, 그리고 올마나 불가피한가!  307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를 잊을 수 있을까?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의 드라마를 상연하는 무대 역할을 한다고 해도? 망각이 아니었다면 그건 무엇이었을까?  309



- 내적인 넓이. 우리는 지금 여기서 산다. 예전에 다른 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과거다. 대부분은 잊어버렸고, 남아 있는 작은 부분들도 무질서한 기억의 파편들일 뿐이다. 단편적인 우연 속에서만 빛을 내다 사라지는 기억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습관적으로 이렇게 생각하곤 한다. 우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다른 사람인 경우에도 이는 가장 자연스러운 사유 방식이다. 이 사람들은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가 아니라 정말 지금 여기 우리 눈앞에 있으므로, 기억의 내적인 일화-그 기억의 현실성이 전적으로 그 사건의 현재성에만 있는-라는 형태를 통해서가 아니면, 이들이 과거와 갖는 관계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나 자신의 내부라는 관점에서 보면 상황은 아주 달라진다. 이 경우 우리는 현재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과거로 깊숙이 들어간다. 이런 일은 깊은 감각, 다시 말해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라는 느낌은 어떤 것인지를 결정하는 감각이 누구만 가능하다. 이 감각은 시간을 초월하고, 시간을 인정하지도 안흔다. 내가 지금도 여전히 손에 모자를 들고 학교 계단에 앉아 혹시 마리아 주앙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여학교로 눈길을 보내는 소년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물론 잘못된 주장이다. 30년도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실이기도 하다. 어려운 과제를 앞두고 두근거리는 내 가슴은, 수학을 담당했던 랑송이스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올 때 뛰던 그 가슴이다. 온갖 권위에 직면했을 때 답답해지는 가슴속에서는, 허리를 굽힌 아버지의 호령이 함께 울려 퍼진다. 모르는 여자의 반짝이는 눈빛과 마주칠 때마다, 그 옛날 학교 유리창에서 마리아 주앙의 시선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고 느꼈을 때처럼 숨이 멎는다. 난 늘 그곳에, 먼 시간의 저편에 있다. 결코 그곳을 떠난 적이 없다. 과거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거나, 그곳에서 출발하며 산다. 이 과거는 단순하고 짧은 일화 형태로 반짝이는 기억이 아니라 현재다. 시간이 몰고 온 수천 가지 변화는, 시간을 초월하는 현재의 이 감각과 비교하면 꿈처럼 덧없고 비현실적이며 환영처럼 기만이 심하다. 이 변화들은, 고통과 걱정거리를 안고 나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내가 마치 완벽한 자신감과 용기를 지닌 의사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불안에 떨며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신뢰감은, 그들이 내 앞에 있는 한 나 스스로 이것을 사실로 믿도록 강요한다. 하지만 환자들이 나가자마자 난 그들에게 소리치고 싶다. 난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학교 계단에 앉아 있는 소년일 뿐이라고, 내가 하얀 가운을 입고 이렇게 거대한 책상 앞에 앉아 환자들에게 충고를 하는 것은 정말 하찮은 일이고 사실은 거짓이라고, 우리가 같잖은 천박함으로 현재라고 부르는 현상에 속지 말라고...

우리는 시간상으로만 광범위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공간적으로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훨씬 넘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나면서 우리의 일부분을 남긴다. 떠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 남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단조로운 바퀴 소리가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그 여정이 아무리 짧더라도-장소로 우리를 데리고 가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까이 가고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을 떠난다. 우리가 낯선 정거장의 플랫폼에 두 번째로 발을 디디면, 그래서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다른 곳과 확연히 구별되는 냄새를 맡으면 우리는 외형상으로만 먼 곳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 먼 곳에도 이른 것이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에게서 아주 외딴 구석, 우리가 다른 곳에 있을 때면 무척 어두워 보이지 않았던 곳에... 그렇지 않고서야 승무원이 지명을 크게 외치고 기차가 멈추느라고 내는 끼익 소리를 들으면, 역 건물의 그림자가 우리는 삼키기 시작하면, 왜 그렇게 가슴이 뛰고 숨이 차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왜 우리는 기차가 마지막으로 덜컥이며 완전히 멈추는 순간을 마술적이고 소리 없는 드라마라고 생각하는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플랫폼에 첫 발자국을 디딘 순간부터, 그 옛날 기차의 첫 덜컥임을 느꼈을 때 중단하고 떠났던 삶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중단된 삶, 온갖 약속으로 가득한 그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 또 어디에 있으랴? '지금'과 '여기'가 본질적이라는 확신으로 이것에 집중하는 행위는 오류이며, 또한 불합리한 폭력이다. 중요한 것은 확실하고 느긋하게, 알맞은 유머와 멜랑콜리로 '우리'라는 시간과 공간상의 내적인 경치 속에서 움직이는 일이다. 여행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뭔가? 그들이 외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내적으로도 뻗어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계발할 수 없고, 스스로를 향한 먼 여행을 떠나 지금의 자기가 아닌 누구 또는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 발견할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살아간다.  315-318



"체스는 그렇게 잘 두면서, 왜 인생에서 싸울 줄은 몰라요?" 프롤렌스는 이런 말을 여러 번 했다. 인생에서 싸우는 건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자기 자신과 싸울 일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 그가 했던 대답이었다.  324



- 계획된 것도 아니고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지만,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남기는 불가피하고도 쉴 새 없는 부담의 흔적-절대 없애지 못하는 화상의 흉터처럼-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려, 부모들이 지닌 의도나 불안의 윤곽은, 완벽하게 무기려하고 자기가 어떻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아이들의 영혼에 달군 철필로 쓴 글씨처럼 새겨지지, 우리는 낙인찍힌 글을 착고 해석하기 위해 평생을 보내면서도, 우리가 그걸 정말 이해했는지 결코 확신할 수 없어.  356



내가 아빠의 상상에 대해 아는 게 있던가? 왜 우리는 부모의 상상에 대해 이다지도 모를까? 어떤 사람이 상상을 통해 받는 이미지에 대해 알지 못하면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과연 무엇을 알 수 있을까?  363



-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384



이따금 나는 인가의 약점보다 '생각 없음'이 더 많은 잔인함을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387


그레고리우스는 고통을 겪는 엄한 판사 아버지와 공명심이 강한 어머니-신처럼 떠받드는 아들을 통해 자기 인생을 살았던-아래에서 자랐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410


(아드리아나)"말을 하지 못하는 것. 오빠는 '감정 교육'이 무엇보다도 느낌을 드러내는 기술, 말을 통해 느낌을 풍요롭게 하는 경험을 우리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곤 했어요. 아버지는 그걸 얼마나 못하셧던지!"  415-416


"마지막 해에 오빠는, 우리 모두가 두려워하는 외로움의 본질이 도무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우리는 외로움이라고 말하는 그게 도대체 뭐지? 단순하게 다른 사람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아. 혼자 있으면서도 전혀 외롭지 않을 수도 있고,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외로울 때가 있으니까. 그러니 그게 뭘까? 오빠는 사람드이 온갖 소란 가운데서도 외로울 때가 있다는 생각에 골몰했어요. '좋아. 다른 사람들이 옆에 있다는 것, 내 옆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상황만 말하려는 건 아니야. 함께 파티를 하거나 친근한 분위기 속에서 감정이 이입된 현명한 조언을 할 때도 그래. 그럴 때도 우린 외로움을 느끼지. 그러니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의 존재 여부는 물론, 함께하는 행위와도 상관이 없어. 그러면 도대체, 도대체 무엇과 관련이 있을까?'.."

'경멸에서 오는 외로움'이라는 메모가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존경과 인정을 거두어가면, 왜 우린 그들에게 '그런 건 필요 없소. 나 자신만으로도 충분하니까'라고 말하지 못하나? 이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건, 소름끼치는 속박의 한 형태가 아닐까?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는 건 아닌가? 이런 일을 견디는 댐이나 보루로 어떤 감정을 세워야 하나? 내적인 견실함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그레고리우스는 책상 위로 몸을 굽히고, 벽에 붙은 메모지의 빛바랜 글씨를 읽었다.

신뢰에서 오는 협박.

"환자들은 오빠에게 아주 사적인 일이나 위험한 일들도 이야기 했어요."

아드리아나가 말했다.

"정치적으로 위험한 일들 말이에요. 그런 다음에 그 사람들은, 자기가 벌거벗었다는 느낌을 갖지 않으려고 오빠도 뭔가 고백하기를 기다렸어요. 오빠는 그걸 이루 말할 수 없이 증오했지요. '난 다른 사람들이 내게서 뭔가 기대하는 게 싫다.' 오빠는 발을 구르며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도대체 경계선을 긋는 일이 왜 이렇게 힘드니?' '어머니와 경계선을 긋는 일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어요. '어머니와 말이야.' 하지만 하지 않았어요. 오빠 스스로 알고 있었으니까."

인내라는 위험한 덕목.

"오빠는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인내라는 단어에 지독한 거부 반응을 보였어요. 인내심을 지닌 누군가를 보면 오빠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어요. '잘못을 저지르는 기괴한 방식일 뿐'이라고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했어요. '우리 안에서 솟구치는 분수에 대한 불안이지.' 난 동맥류를 알고 난 뒤에야 이 말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었어요."  417-419


"난 오빠를 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요. 오빠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믿었어요. 몇 년 동안 매일 오빠를 보아왔고, 자기 느낌과 생각과 더구나 꿈에 대해서도 말하는 걸 들어왔으니까요..."  420


'경멸에서 오는 외로움' 프라두가 생의 마지막에 골몰하던 주제였다. 우리가 타인의 존경과 관심에 의지하고, 그것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  431



- 유치함은 모든 감옥 가운데 가장 악질적이다. 창살은 단순하고 비현실적인 감정으로 도금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를 궁전의 기둥으로 착각한다.  434-



(마리아 주앙)".. 그런 일이 있지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없는지 알지 못해요. 그게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그러다가 그게 나타나면 단 한순간에 확실해지지요..."  455


(마리아 주앙)'상상력은 우리의 마지막 성소다.' 그가 늘 했던 말이지요. '상상력과 친근함은 언어 외에 그가 인정한 유일한 성스러움이었으니까요.  462



(마리아 주앙)".. 조르지를 나쁘게 말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를 향한 아마데우의 비판 없는 경탄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난 농부의 딸이라 농부의 아들들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어요. 낭만적이 아니지요. 큰일이 벌어지면 조르지는 일단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할 사람이었어요. 

아마데우를 매혹했던 것, 거의 취하도록 그를 끌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과 스스로의 경계를 지슨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던 조르지의 성격이었어요. 그는 간단하게 '싫어'라고 말하고는, 그 큰 코를 벌쭉이며 웃으면 그만이었으니까요. 그에 비해 아마데우는, 경계를 지으려면 그게 마치 구원의 문제라도 되는 듯 싸워야 했어요."  464


실우베이라가 말했다. "우리가 인생을 조망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앞으로든 뒤로든. 뭔가 일이 잘 풀렸다면 그건 그냥 운이 좋았던 것이겠지요."  471



- 배신적인 언어. 자기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 대해 또는 단순히 어떤 일에 대해 말을 할 때 우리는 말을 통해 스스로를 열어 보이려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타인에게 알리고, 타인에게 우리의 영혼을 잠깐 엿보기를 허용하는 것이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우리 마음의 한 조각을 타인에게 준다라는 뜻이다. 배 난간에 서 있을 때 어떤 영국인이 나에게 한 말이었는데, 새빨간 축구공을 가지고 있던 올소울의 아일랜드 학생에 대한 추억을 제외하면 그 낯선 나라에서 가지고 온 것들 가운데 좋은 거라고는 그 말이 유일하다.)

이런 상화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여는 문제에 관한 한 독자적인 감독이요 결정권을 지닌 극작가다. 하지만 어쩌면 이건 완벽하게 잘못된 생각, 자기기만이 아닐까? 우리는 말을 통해 자기를 드러낼 뿐 아니라 스스로를 배신하기도 한다. 표현하려던 것보다 훨씬 더 심하게 속내를 드러내어 원래 의도했던 바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타인은 우리의 말을 우리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에 대한 증상으로 해석한다. 우리라는 질병에 대한 증상, 타인을 이렇게 관찰하는 일은 흥미로우며 또한 우리를 매우 관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기도 한다. 타인도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똑같이 본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 입을 열려던 순간 말이 목에 걸린다. 그 충격은 우리를 영원히 침묵하게 만들 수도 있다.  476-477



- 분노라는 들끊는 독. 타인 때문에-그들의 뻔뻔함과 부당함,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우리가 화를 낸다면 우리는 그들의 권력 아래에 놓인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고 자란다. 분노는 들끓는 독과 같아서, 부드럽고 우아하며 평화로운 감정들을 파괴하고 우리에게서 잠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불을 켜고, 우리를 빨아먹고 기운을 빼는 기생충처럼 우리 안에 자리를 잡은 분노를 터뜨린다. 우리가 입은 피해에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오로지 우리 안에만 퍼져간다는 사실에도 분노한다. 우리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감싸며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는 동안, 우리를 희생자로 만든 원인 제공자는 분노의 파괴력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있으니까. 번쩍이는 조명이 무언의 분노에 쏟아지는 내부의 무대, 관객이 없는 그 무대에서 우리는 비현실적인 인물과 비현실적인 언어로 비현실적인 적들에게 효과라고는 전혀 없는 분노-우리가 내부에서 차갑게 들끓는 화염으로 인식하는-를 터뜨리며 우리를 위한 드라마를 홀로 상연한다. 이 모든 것이 상상 속의 드라마일 뿐, 타인에게 해를 입히고 번민의 균형을 만들어낼 실제 논쟁이 아니라는 인식을 우리가 확실하게 하면 할수록 유독한 그림자들은 더 사납게 춤추며 악몽의 가장 어두운 지하무덤까지 우리를 쫓아온다. (잔인하게 역습을 하리라고 생각하며, 상대방에게 소이탄과 같은 효력을 발휘할 만한 말을 밤새도록 궁리한다. 그래서 화창한 평화로움 속에서 우리가 커피를 마실 동안, 분노의 불길이 이번에는 그에게서 타오르도록.)

분노를 올바르게 다스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만나도 상관없는 무정한 존재, 차갑고 냉철한 판단만 내리는 존재, 진정으로 신경을 쓰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그 무엇도 흔들어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분노라는 경험을 전혀 알지 못하고, 메마른 무감각과 구별할 수 없는 태연함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기를 진심으로 원할 리는 없다. 분노도 우리가 누구인가에 관해서 어느 정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우리가 분노를 인식했을 때 그 독에 빠지지 않으며 분노가 우리에게 득이 되도록 하려면 우리 자신을 어떻게 교육하고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이다.

이것이 임종 순간에 마지막 대차대조표의 한 부분으로 남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분노에, 그리고 효과가 없는 상상 속의 드라마-쓰러질 정도로 번민하는 우리만 알고 있는 드라마-에서 타인에게 복수하는 데 너무나 많은 것을, 너무 많은 힘과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이 대차대조표는 청산염처럼 쓴맛이 나리라. 이 표를 개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 부모님이나 선생님, 다른 교육자들은 왜 이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을까? 이 엄청난 의미에 대해 왜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을까? 스스로를 파괴하는 분노 때문에 영혼을 낭비하지 않게 도와줄 나침반은 왜 주지 않은 걸까?  496-498



당신 내가 지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네? 문두스,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에요!" 왜 이런 모든 일이 지금까지도 이렇게 아플까? 왜 20년, 30년이 지나도록 이 기억들은 털어내지 못할까?  503


"문두스,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에요!" 플로렌스는 왜 그냥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까. "당신이 지루한 사람이냐고요? 세상에, 절대로 아니에요!"라고.

인간이 상처를 떨어낼 수 있기는 한 걸까? 우리는 과거로 깊숙이 들어간다. 프라두가 남긴 글이었다. 이런 일은 깊은 감각, 다시 말해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라는 느낌은 어떤 것인지를 결정하는 감각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 감각은 시간을 초월하고, 시간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507


그리고리우스는 그들에게 삶이 만족스러운지 물었다. 베른의 고전문헌학자인 문두스가 세상의 끝에서 가릴시아의 어부들에게 삶에 대한 견해를 묻고 있었다.  508


한 명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만족하냐고? 다른 삶은 모르는 걸!"

어부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나중에는 그칠 줄 모르는 웃음바다로 변했다. 그레고리우스도 얼마나 흥겹게 따라 웃었던지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509


친근함, 그것은 신기루처럼 헛되고 변하기 쉽다. 프라두가 쓴 말이었다.  516


덧없음. 프라두가 좋아하던 단어 가운데 하나라고 마리아 주앙이 말해주었다.  519



- 독재적인 친근함. 우리는 친근함 속에서 서로 뒤엉켜 있다. 보이지 않는 끈들은 '자유롭게 하는 사슬'이다. 이 뒤엉킴은 독재적이라, 독점을 요구한다. 나눔은 배반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사람만 좋아하고 사랑하고 접촉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다양한 친근함을 연출하고, 주제와 말과 몸짓과 함께 나눈 지식과 비밀에 관해 옹졸하리만큼 꼼꼼한 장부를 써야 하는가? 이런 친근함은 소리 없이 떨어지는 독이다.  530



타인을 자기 삶의 건축용 석재로, 자기 구원의 경주를 위한 일벌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536


사람의 정체성은 언제 유지되는가. 늘 그래왔던 그 모습일 때? 스스로를 바라보았을 때처럼? 아니면 들끓는 생각과 감정의 용암이 온갖 거짓과 가면과 자기기만을 묻어버릴 때? 달라졌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사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원하는 그 모습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니까 타인의 안녕에 대한 걱정과 염려라는 가면을 썼을 뿐, 결국 익숙한 것이 흔들릴까봐 대항하는 투쟁 문구의 일종인가?  537


그레고리우스는 여행안내 책자를 사서 수도원을 하나씩 차례로 구경했다. 그는 명소를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뭔가에 몰리면 그는 고집스럽게 바깥에 머물러 있었다. 베스트셀러라는 책들을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읽는 것도 이런 성격 때문이었다. 지금 그는 관광객의 호기심으로 명소를 찾아다니는 게 아니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그레고리우스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프라두의 흔적을 찾아다닌 그동안의 시간이 성당과 수도원에 대한 그의 느낌을 바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544


두 사람이 피니스테레 해변에 앉아 있을 때 배 한 척이 지나갔다. 

"아마테우가 배를 타자고 하더군요. '브라질 밸렘이나 마나우스로, 아마존으로 가는 게 제일 좋겠어. 덥고 습기가 많은 곳으로. 색깔과 냄새와 끈적거리는 식물들과 열대우림과 동물들 이야기를 쓰고 싶어. 난 지금까지 언제나 정신에 관한 글만 썼어.' 그가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 오빠가, 그렇게도 현실적이던 우리 오빠가..." 아드리아나의 말이 떠올랐다.

"사춘기 소년의 낭만이나 중년 남성의 유치함이 아니었어요. 그건 현실이었고, 진정이었어요. 하지만 그것 역시 저와는 상관이 없었지요. 그는 오로지 자신만의 여행, 자기 영혼의 억압된 분노를 향한 여행에 제가 동행하기를 원했던 거예요. 저는 아마데우에게 당신은 너무 허기졌다고, 그 여행에 동행할 수 없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어요.

그가 개선문 아래로 끌어당기던 날 밤, 저는 이 세상 끝까지 그를 따라가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그의 무서운 허기를 알지 못했지요.  553


에스테파니아가 그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오후 내내 책을 읽었어요. 처음에는 놀랐지요. 아마데우가 아니라 저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는 생각에 몹시 놀랐어요. 그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깨어 있던 살마인지, 자신에게 얼마나 무자비할 만큼 공정했는지, 거기에 문장력도.. 이런 살마에게 '당신, 너무 허기졌어요'라고 말했던 제가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렇게 말햇던 게 옳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의 글을 예전에 알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554



- 많은 여자들 가운데 당신인 이유는? 어느 순간엔가 모든 살마이 하는 질문이다. 속으로만 내뱉어도 이 질문이 위험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임의성이나 대체 가능성과 똑같지는 않지만 우연이라는 생각, 우연이라고 발음하는 생각이 그토록 소름 끼치는 이유는? 왜 우리는 이러한 우연을 인정하고 웃음으로 넘기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우연이 사랑의 의미를 축소한다고, 우연을 당연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왜 사랑을 폐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556



'우리가 서로 운명적으로 정해진 사이라고 생각해요?'

서로 운명적으로 정해진 사람은 없소. 그런 섭리도 없을 뿐더러 서로의 운명이 맺어지도록 해주는 그 누군가도 없으니까. 우연한 욕구와 습관의 엄청난 힘을 넘어서는 필연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소...

난 완벽하게 우연히 이곳에, 당신은 완벽하게 우연히 그곳에 있었소. 그 사이에는 샴페인 잔들... 그래요. 그랬던 거요. 필연은 없었소.  557



열린 시선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게으른 존재다.  559

그레고리우스는 사진을 다시 훑어보고, 또 한 번 보았다. 과거가 그의 시선 아래에서 얼어붙기 시작했다. 기억은 과거를 고르고, 조절하고, 수정하고 속일 것이다. 기억 말고는 다른 근거가 없으므로, 누락과 비틀기와 거짓을 나중에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이 소름 끼쳤다.  565





작가와의 대담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건가?"

대담자 " 실리야 우케나


우케나 : .. 우리 모두 삶의 일부분밖에 경험할 수 없는 거라면, 우리 안에 있는 나머지들 즉 경험하지 못한 나머지 대다수 부분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비에리 : 남아 있는 부분은 의미가 아주 큽니다.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해도 우리 삶에 색깔을 입혀주고 멜로디를 주는 건 바로 그 부분입니다. 그 나머지 부분이 어떻게 구현되는가에 따라 자기 삶이 만족스럽거나 진실하게 흘러가겠지요. 하지만 한번 규정한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을 관통할 수도 없고 그만큼 실망할 일도 드물지요. 뭔가를 막연히 기다리면서도 입 밖에 내지 못할 수도 있고요. 이것들은 간혹 그들의 인생에서 극적인 형태로 돌출됩니다. 그때 우리는 도망치거나 파멸하거나 생의 위기를 겪게 되죠. 예기치 못했던 파국은 지극히 사소한 일로 시작합니다. 사실 오랫동안 축적되었던 게 드러나는 경우지만요.  572-573


우케나 : 그냥 떠나는 것, 누구에게나 가능할까요?

비에리 : 무엇보다 자기 인식, 즉 깨달음이 절대적이죠.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별해주는 인식작용 말입니다. 자기 앞에 놓인 생을 그대로 살아갈 것인지, 그게 정말 원하는 것인지 자문하는 거요. 오직 우리 인간만이 자기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고, 진실한 자아를 탐구하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어떤 동물도 내 삶이 옳은 것인지, 지금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것인지 질문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그럴 가능성이 열려 있는 셈이지요. 

우케나 :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삶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떠나는 건 아니잖아요?

비에리 : 아니죠. 누구든 자기 삶이 총체적으로 잘못 진행된다 느끼고 지금 상황이 가망 없다고 판단하면 떠날 수 있습니다... "이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야"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규범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아정체성을 확립할 수도 없고요. 그러니까 '불가피한 떠남'이란 다시 말해 나의 어떤 부분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고 싶은 목적이 있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새롭게 도달하고 싶어하는 그 상태도 결국은 의무, 가능성, 불가능성의 경계를 지닙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요.  574-575


우케나 : 결단이 어려운 경우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까요? 

비에리 : 정해진 것은 없어요. 경우마다 다르기 때문에 해결책도 개별적이지요. .. 

의무감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허덕이면서 다른 사람의 생에 좋은 영향을 줄 수는 없습니다...  576


우케나 : 자유를 향한 인간의 욕구는 과연 얼마나 강력한가요? 

비에리 : 현실에서 떠난다고 해서 모두 자유로워지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어요. 자유를 향한 진일보도 되지만 잘못된 길일 수도 있으니까요. 자신의 경우가 어느 쪽에 해당하는지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판타지는 그래서 중요해요. 판타지를 통해 일탈을 시도해볼 수 있으니까요. 친구들과 나누는 이야기도 아주 중요하지요. 우리 인간의 불행은 대개 감정과 판타지를 언어로 잘 다루지 못하거나 그것들을 말로 표현할 용기를 갖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우케나 : 그런 상황에 처한 친구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을까요?

비에리 " 가장 좋은 길은, 우리가 상상력이 풍부하고 용감한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인정받고 즐겁고 재미있는 환경은 이루지 못한 판타지가 좀 있어도 훨씬 자유롭습니다. 우리는 내면에서 요구하는 모든 삶을 다 살아낼 수 없습니다. 누군가, 그렇다면 경험하지 못한 나머지는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머지 부분은 당신의 판타지를 놓아두는 공간이다"라고 대답할 도리밖에 없습니다. 감당해야 했던 소망의 무게가 극치에 이른 때가 언제인지, 또 이런 소망을 드러내야 한다면 어떤 사람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지 등을 정확하게 아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과연 이것을 인식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예견해 줄 수 없고,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알아내야만 합니다. 행여 그렇게 된다면 대단한 행운이지요.  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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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 네 멋대로 해라 (청소년 인권)


'지랄 총량의 법칙' 

모든 인간에게는 일생 쓰고 죽어야 하는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법칙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정해진 양을 사춘기에 다 써버리고, 어떤 사람은 나중에 늦바람이 나서 그 양을 소비하기도 하는데, 어쨋거나 죽기 전까진 반드시 그 양을 다 쓰게 되어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18


착각할 수 있는 나이에는 착각을 하면 됩니다. 그 착각에 너무 깊이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면? 헤어나올 때까지 힘든 시간을 보내면 됩니다. 그러다가 인생이 늦어진다면? 늦어지면 됩니다. 10대나 20대에는 인생이 남들보다 3~4년 늦어지면 큰일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지나고 보면 몇년 빠르고 늦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시기마다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 딸만은 그런 과정을 생략하기를 바라는 것은 이상한 욕심입니다. 청소년기에 그런 미망(迷妄 미혹할미 망령망)의 시기를 보내지 않고는 성숙이 있을 수 없으니까요.  24-25


교육을 위한 제약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제약은 필요최소한도에 그쳐야 합니다...

불과 30년 전까지 우리나라는 길 가는 멀쩡한 어른들의 머리를 자르고 미니스커트의 길이를 쟀습니다. 그때는 그게 모두 정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50




2장 - 왜 이렇게 불편할까? (성소수자 인권)  


'다름'에서 온 것입니다.  59


내가 그렇게 살 필요는 없지만, 다른 형태의 사랑이 존재함을 최소한 이해는 해야 합니다.  65


특별한 논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주장 중에 논리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까닭입니다. 동성애자를 차별하려면 우선 어떤 사랑(예컨대 이성애)이 다른 사랑(예컨대 동성애)보다 더 우월하고 가치있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그런 차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증명도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동성애자 차별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주로 내세우는 것은 가정의 가치입니다.  70


동성애자들은 단기적이고 일시적인 쾌락만을 추구한다는 편견도 있습니다.  71


동성애는 일종의 질병이기 때문에 치료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오랜 세월 서구사회를 지배해왔습니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징벌로 AIDS라는 치명적인 질병이 생겨났다는 믿음도 동성애 반대의 유력한 근거가 됩니다.  72


어디까지나 혼인과 가족생활은 오직 양성 사이에서만 보장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헌법은 국민에게 보장된 권리와 제도의 최소한의 규정한 것이지, 최대한을 규정한 것이 아닙니다.  73


결국 동성애자들에게 이성애자와 동일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내가 싫어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것은 비윤리적이며, 따라서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76


동성이냐 이성이냐를 떠나서 관계 자체가 지니는 보편성과 개별관계의 특수성을 관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81


순전히 남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동성애자들이 받고 있는 제도적, 법률적 차별의 장벽은 앞으로 점점 무너져갈 것이 분명합니다. 차별할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의 장벽입니다.  87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사는 것이 바로 인권의 황금률입니다.  88




3장 - 뺨따귀로 사랑 표현하기 (여성과 폭력) 


명절 때 잠깐씩 부엌 근처에 어슬렁거리기만 해도 저는 천하에 없는 좋은 남편이 됩니다. 그러나 명절 내내 부엌을 지키는 어머니와 아내의 노동은 언제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작은 차이 같지만, 우리 사회에 뿌리박은 이런 고정관념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남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특권입니다.  94


우리는 어려서부터 남을 존중하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107


평등권 확보라는 기존의 노력을 계속하되, 여성 개인이 자기 색깔을 찾아가는 다양한 노력도 인정할 필요가 있겠지요.  117




4장 - 공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까? (장애인 인권) 


장애인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것도 결국은 권력의 문제, 철학의 문제입니다...

장애용어는 고정불변이 아니라 장애에 관한 인식의 변화에 따라 계속 바뀌는 것입니다.  147


우리나라에서는 유전자검사를 흔히 '기형아'검사하고 부릅니다. 마치 '장애인'과 구분되는, '기형아'라고 하는 범주가 따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형'은 장애를 그야말로 기형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 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153-154


장애인이 일상생활에서 한계를 느끼는 것은 근본적으로 장애인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편견 때문입니다. 

불가능성 패러다임에 기초한 교육과 근로기회의 박탈이 오히려 장애인들을 일하지 못하는 무능력자로 만들어버린 것뿐입니다.  161




5장 - 한국의 <빌리 엘리어트>는 언제 나올까? (노동자의 차별과 단결) 


노조원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노조가 귀찮게 느껴질 수도 있고, 노조지도부가 '귀족'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비정규직이 급증한 후에는 정규직 노조와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노조의 단결뿐입니다. 그래서 헌법은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돈도 권력도 없는 노동자들이 노조까지 잃게 되면 그의 신분은 노조원에서 노예로 급락합니다. 일단 한번 추락하고 나면 다시 노조원의 지위를 회복하기란 너무도 힘이 듭니다. 영국은 그렇게 노동자들이 다시는 목소리를 회복할 수 없었던 좋은 예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영국의 보수당 정권과 보수언론은 1984~85년의 탄광노조 파업에 대해 '폭력이 난무하고,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았으며, 불명료한 선동구호만 넘쳐서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미지를 심어왔습니다. 이 파억이야말로 '영국병'을 상징하는 노조지도자 스카길의 무리수였고, 새처 총리가 이를 과감하게 진압함으로써 영국병을 치유하는 데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그대로 한국까지 전해져 지금도 마치 불변의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빌리 엘리어트>나 <브래스트 오프>는 이런 일방적인 선전을 되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합니다.  178-179


지능적인 공격  179


어차피 사람들은 진실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180


1980년대 후반부터 대법원은 기업이 경영상의 이유로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음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회사 마음대로 아무 때나 정리해고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해고를 하지 않으면 기업 경영이 위태로울 정도로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성이 존재하고, 회사는 해고 회피를 위한 노력을 다했어야 하며, 합리적이고 공정한 정리기준에 따라 해고대상자를 선별해야 하고, 해고에 앞서 노동조합이나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통지를 하고 이들과 성실한 협의를 거쳐야 합니다. 이런 요건들은 1996년 날치기로 통과된 노동법 개정에 의해 근로기준법 안에 수용되었습니다. 겉으로는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처럼 보이지만, 해고 자유의 원칙으로 넘어가기 위한 우회로에 불과했습니다.  184


기간제노동자의 고용기간이 2년을 넘게 되면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도록 의무화하여 노동자를 보호하려고 했더니, 기업들은 2년동안 부려먹은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대신 아예 2년이 되기 전에 잘라버리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186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것마저 귀찮아지자 기업들은 '파견근로자제도'라는 편법을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187


우리나라에서도 대기업 노조와 소규모 노조,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갈라 자기들끼리 싸우게 하는 '이로제로(以勞制勞 써이 일할로 억제할제 일할로)'정책이 성공을 거두기 시작한 것입니다.  191




6장 - 1년에 600명의 청년들이 교도소에 가는 나라 (종교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종교란 매우 비정상적이지만, 동시에 언제나 인간의 삶과 동행해온 일상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209


헌법이 보장하는 여러 기본권 중에서 종교의 자유가 특별히 더 중요한 이유도 바로 이 '비정상성'에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는 외형적으로 가장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의 자유를 보장한 것입니다. 보면 볼수록 이상한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로 한 것이 근대헌법의 가장 위대한 결단입니다.  210




7장 - 영화 화면을 자르는 사람들 (검열과 표현의 자유) 


시대의 억압이 도피를, 도피는 중독을 낳습니다.  242


지금 대한민국에는 제한상영관이 하나도 없습니다. 

네가 성인이든 아니든 간에 제한상영가 영화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영화는 등급을 받아야 하고, 그중의 어떤 영화는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는데, 대한민국에는 현재 제한상영가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게 사전검열이 아니라면 세상에 사전검열이란 어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248


무엇보다 사전검열을 통해 사회의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릴 때가 되었습니다.  251


음란물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은 그런 수준 낮은 작품들을 구매하지 않는 튼튼한 청소년들을 길러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252


미국은 영화의 역사만큼 오래된 검열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영화는 시나 소설 같은 예술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일종의 비즈니스로 취급되었습니다.  253


영화등급에 대해 사람들은 흔히 '누군가 알아서 잘 매기고 있겠지' 생각하고 아무 의심 없이 그 등급을 받아들입니다. 

인간세상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듯이 영화등급 역시 논리의 문제라기보다는 권력의 문제일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아서 잘하겠지' 생각하고 마음을 놓는 순간, 권력의 오남용이 시작됩니다. 당장 나 먹고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남의 일까지 신경쓰나 생각하고 자꾸 넘어가다보면, 어느새 그 일이 내 문제로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늦지요. 내 문제에 대해 남들이 외면하는 것을 보고 뒤늦게 가슴을 쳐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인권감수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누가' 그 일을 하고 있는지 늘 주목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261


부모들은 무조건적인 금지가 아니라, 아이가 던지는 질문들에 정직하게 답변할 마음의 준비부터 갖추어야 합니다.  273




8장 - 누가 앵무새를 죽였는가? (인종차별의 문제) 


소설 속에서 애티커스 핀치가 딸에게 주는 가르침의 핵심은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92




9장 - 그냥 다 죽이면 간단하지 않나요? (차별의 종착역, 제노싸이드) 


우리는 수만명이 폭격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별로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제노싸이드로 부르려면 최소한 100만명쯤은 죽어야 어디 가서 명함을 내밀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폴란드 출신 유대인으로 국제법 전문가였던 라파엘 렘킨(1900~59)이 처음 만들어 끈질긴 노력 끝에 유엔 제노싸이드 범죄방지 및 처벌에 관한 협약에 포함시킨 정의에 따르면, 제노싸이드는 "민족, 종족, 인종, 종교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범해지는 모든 행위"를 의미합니다.  332


제노싸이드가 되기 위해 반드시 '민족, 종족, 인종, 종교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가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 의도를 입증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대량학살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게 제노싸이드라고 보는 게 오히려 합리적인 설명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폭격에 대해 그렇게 관대하고 둔감한 이유는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 간접적으로라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333


<살인의 추억>이나 <추격자>에서 연쇄살인 피해자가 늘어날 때마다 공포에 몸을 떨면서도,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10만명이든 100만명이든 일종의 숫자놀음으로 받아들이는 게 우리들입니다.  334


약자와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는 그런 숨겨진 비밀은 영웅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입니다.  335


국가는 언제든지 괴물로 변할 수 있는 위험한 존재.

국가는 우리에게 국방, 교육, 사회보장, 치안, 사법 등을 제공하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국가를 고마운 존재로만 생각하고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곳에서 인권의 유린이 시작됩니다.  349


우리의 벌거벗은 모습을 혼자 훔쳐본 권력자는 스스로를 '전능한 하나님'으로 착각하게 되고, 한번 맛들인 그 놀라운 정보의 노예가 되기 마련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에는 은밀하게 감춰져야 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권력에 위협이 되는 사람들의 사생활을 알 수 있는 손쉬운 기회를 훨씬 더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권력자가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끊임없이 감시해야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351


괴물이 된 국가씨스템을 움직이는 데는 많은 악마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한두명의 악마와 수많은 평범한 복종자들이 있으면 충분합니다.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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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아메리카에서 생산되는 곡식만으로도 세계가 다 먹고 남는다는데, 왜 이토록 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있어야 하는가... 마음을 아프게 하는 내용이다.
책 내용은 결코 누군가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기심과 이윤추구를 위해서라고 한다.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 이라는 부제로 그의 경험을 통해 바라본 세계의 실태와 오만한 그들의 실상을 밝히고자 했다.

국내에 이 책이 번역되어 들어오기까지 만 7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왜 그럴까...생각해 본다..
이유야 정확히 알 수 없을지 몰라도.. 대충의 짐작은 책 내용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한국... 대한민국.. 이란 나라는 참 독특한 나라이다. 
930여회의 외세의 침략을 받고도 결국은 버티어 낸 나라.
긴 세월동안 (물론 동남아시아에 비하면 많이 짧긴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황폐되었고,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졌음에도 굳건히 버티고 ..
급속한 발전으로 지금 세계경제 10위권에 머물르게 된 나라이다.
정말 대단한 나라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

불과 몇 십년전 외국에서 원조를 받아야만 했던 나라였지만, 지금은 원조를 해주는 나라가 되었다.
전 세계를 보더라도 원조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나라에서 원조를 해주는 나라가 된건 한국이 처음일것이다.
그만큼 대한민국 사람들은 대단하다.

그런데 한국은 절대 행복하지 않은 나라이다.
최근 뉴스에 의하면 한국은 돈은 가졌으나 행복은 가지지 않은 나라라고 표현된다. 
우리의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수긍되고 인정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세계의 약자들을 바라보며 좀더 올바른것은 무엇인지 .. 말로만 교육하는 것으로 넘어가지 않고, 실제로 바라보고 경험하고 같이 아파하며 우리 선조들이 가졌던 '인의예지' ... 우리에게는 좀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런 굶주림은 거대한 횡포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이들의 아픔은 우리의 아픔이 아니다.'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분명 돌아올 수 있는 아픔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조금더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돌보며, 의식을 성장시켜 나갈때 조금이라도 아픔이 줄어들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나를 깊이 반성하게 한다..
이정도의 고통이 분명 지금의 우리에게는 오지 않을 확률이 크다. 
그렇다고 남의 일이 아니다. 이들의 아픔은 분명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비슷한 아픔으로..!!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이 황폐되면 될 수록 우리에게는 새로운 고통들을 주게 된다. 책 내용처럼 그렇다고 우리가 이들이 먹고 살기위해 또는 기업이 자기이 득을 위해 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의견을 세워줄 때 이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해제 - 기아에 관한 어느 국제 전문가의 비망록(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
기아와 관련된 일을 현장에서 자신의 천명으로 알고 활동하는 사람에게 소속이 어디인가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는가?
그리 많지 않은 어린이 기아 관련 저술 중에서 내가 아는 한 이 책은 가장 고급의 정보를 담고 있고, 몇 가지 점에서는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전문성을 확보한 책이다.  9
책은 현재 기아의 현장에서 어떤 사람들이 부당하게 이득을 보고 있고, 그런 이득들이 어떻게 재생산되며 더욱더 많은 어린이들을 굶주림으로 내몰고 있는가를 상세하게 알려준다.  10
기아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나라는 거의 초보적 수준이다.  10
이 책은 전체적으로 지글러가 어린이 무덤에 바치는 참회록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생산할 수 있는 곡물 잠재량 만으로도 전세계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고, 프랑스의 곡물생산으로 유럽 전체가 먹고 살 수 있는 전세계적 식량과잉의 시대에 수많은 어린이 무덤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과연 제 정신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16
'승자독식' , '교육노동' ... '워싱턴 합의'가 그 근본원인이다.  17

한국어판 서문 -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유엔식량농업기구(FAO : Food and Agricultule Oganization)는 2006년 10월 로마에서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2005년 기아로 인한 희생자 수를 집계했다. 2005년 기준으로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1명씩 굷어 죽어가고 있으며, 비타민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이 3분에 1명 꼴이다. 그리고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 5,000만 명이 심각한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 기아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2000년 이후 1,200만 명이나 증가한 것이다. 
아프리카에서는 현재 전인구의 36%가 굶주림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다. 북한의 상황도 절망적이다.  18
'지구의 허파' 아마존은 현재 국제시장에서 가장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는 콩 경작자에 계속 자리를 내주고 있으며, 그에 따라 지구 기후의 파국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20
2006년 유럽 연합 국가들... 보조금으로... 과잉생산.. 아주싼 가격으로 남반구에 수출... 아프리카 각국...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생산된 채소와 과일을 동질의 아프리카 농산물의 절반이나 3분의 1 가격에 살수 있다.... 아프리카 농가에서는 온 가족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 하루 열다섯 시간씩 악착같이 일하고 있다. 그런데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저생계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아프리카 53개국 중 37개국이 거의 순수한 농업국가다.  21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희망은 서서히 변화하는 공공의식에 있다.  
풍요가 넘쳐나는 행성에서 날마다 10만 명이 기아나 영양실조로 인한 질병으로 죽어간다.  22
변화된 의식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고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를 원한다. 기아로 인한 떼죽음은 참으로 끔찍한 반인도적 범죄이다.  23

동남아시아에서는 인구의 18%가 굶주림에 허덕이고, 아프리카에서는 인구의 35%,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약 14%가 굶주리고 있지.  
숫자로 따지면 아시아에 기아인구가 더 많단다.  33

문제의 핵심은 사회구조에 있단다. 식량 자체는 풍부하게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어. 그런 식으로 식량이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매년 수백만의 인구가 굶어죽고 있는거야.  37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죽는다는 자연도태설. 이 개념에는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주의가 담겨 있어.  41
1798년 영국국교회 성직자였던 토머스 맬서스는 인구 법칙에 관한 논문을 발표.
맬서스는 세계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여 25년마다 두 배가 되지만, 식량의 증가는 산술서열을 따르므로, 가난한 가정은 자발적으로 산아제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보조나 지원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했어. 맬서스는 질병과 배고픔은 가슴아픈 일이기는 해도 이 사회에 필수적인 기능을 한다고 주장했단다. 지구상의 인구를 자연적인 수단이라는 얘기였지.
책은 출판되자마나 유럽의 지배층에서 널리 읽혔고, 산업화 초기의 국민경제학자들과 기업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단다. 맬서스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어. ... 맬서스 이론은 근본적으로 틀렸지만, 심리적 기능을 충족시키거든.  41-42

'경제적 기아'와 '구조적 기아'
'경제적 기아'는 '돌발적이고 급격한 일과성의 경제적 위기로 발생하는 기아.'
난민캠프 병원... 한 아버지가 주름이 깊게 파인 걱정스런 얼굴로 병원 앞에 서 있었어. 발치에는 아들이 누워 있었지. 열두 살 아니면 열다섯 살? 아이의 사지는 정말이지 거미다리처럼 너무도 가늘었어. 그 아이를 보면서 너는 떠올렸지. 현지의 유일한 의사인 타마르트 망게샤가 그 아이를 보고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어. 너무 늦어서 어떤 도움도 소용이 없었던 거야. 그 아이는 곧 죽음을 맞게 될 상태였지. 아버지는 전신을 떨었어. 눈물이 하염없이 뺨 위로 흘러내렸어. 아버지는 한 마디 말도 못한 채 의사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어. 의사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지. 아이는 더는 생명을 구할 수 없는 상태였어. 결국 그 아버지는 허리를 굽히더니 가만히 아들을 안고는 가버렸어.  53
에티오피아는 연간 1인당 국민소득이 128달러로 현재 지구상의 최빈국에 속해.  54

'구조적 기아'는 장기간에 걸쳐 식량공급이 지체되는 경우.'  
'구조적 기아'는 선진국에는 없거나 이미 오래전에 퇴치된 전염병이나 질병이 창궐하는 것으로도 드러난단다. 예를 들어 크와시오르코르(쇠약증)나 기생충감염증 같은 것도 그런거야. 크와시오르코르는 사람의 신체를 서서히 손상시키는 질병으로 주로 어린아이들에게 찾아오는데, 이 벼에 걸리면 성장이 멈추게 되지. 처음에는 머리카락이 붉어지다가 나중에는 점차 빠지면서 배도 불러오고, 이가 흔들리다가 빠지게 되고. 이런 식으로 서서히 죽어가게 된단다.  60-61

시카고 곡물거래소... 사실 거래는 몇 안되는 거물급 곡물상의 손에서 결정돼. 그들은 몇 사람 안 되지만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 '화이트칼라 강도들'이라고 부르기도..  74
투기꾼들... 가격은 단 한 가지 원칙에 복종해. 바로 이윤극대화라는 원칙이지.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매주 수백만 달러를 더 벌어들이는 것이지. 배고픈 자들의 고통? 맙소사. 그들을 위해서는 유엔이 있고 국제적십자가 있잖아 하는 식이란다.
중요한 것은 첫째는 수확량이고, 둘째는 시카고 거래소의 투기꾼들이 유엔이나 세계식량계획, 여러 인도적 지원단체, 그리고 만성적인 기아에 시달리는 나라에 제시하는 곡물가격이야.  75-76

유럽연합은 자국의 농민드을 살려야 하고, 그 때문에 농산물가격을 높게 유지해야 해. 배고픈 사람들을 돕는 것은 FAO나 WFP의 과제일 따름이지.  80

구호단체는 극단적인 조건에서 활동하고, 갖가지 모순들과 싸워야 해. 그러나 어떤 대가도 한 아이의 생명에 비할 수는 없어. 단 한 명의 아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그 모든 손해를 보상받게 되는 것이지.  93

대개는 국가적인 폭력이 자행되는 나라에서 배고픔을 무기로 삼는단다.  94

다국적 기업들도 그런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  99

굷주림을 국가 테러의 무기로 사용한다.  103

사막화로 인한 환경난민  107

지금 전세계는 '농촌사회의 종언과 지구 규모의 도시화'라는 혁명 와중에 있단다.  125
세계 총인구의 증가율은 1.6퍼센트인 데 비해 도시인구의 증가율은 4.7%에 달하지. 
도시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는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어. 농지의 피폐화나 사막화. 그리고 각국의 농산물수출 확대정책도 주된 원인이라고 볼 수 있어. 또한 농업의 집중화. 기계화, 공업화가 강력하게 추진되면서 농업 생산이 확대되는 한편, 인력이 불필요해진 농촌에서 농밀들이 방출되어 대도시로 흘러 들었던 거야.  126

식민 정책으로 단일화 집중재배 시스템은 나라의 성장을 저해  131

비극은 끝없이 반복되고 있어.
시간이 지나면서 희생자들은 점차 망각의 제물이 되고, 문제 자체의 존재마저 잊혀버리지. 그리고 깊은 고독 속에서 죽어가게 돼. 처음에는 강했던 국제적인 연대감도 시들해지고.
기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국이 자급자족 경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하는 것 외에는 진정한 출구가 없다고 아빠는 생각해.  152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못하게 된 살인적인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엎어야 해.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윤리를 벗어난 시장원리주의 경제(신자유주의),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이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어.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바로세우고, 자립적인 경제를 가꾸려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거야.  153


에필로그
모든 생물체는 살기 위해 먹어야만 하므로, 먹을 것은 언제 어디서든 필요한 것이었다.  155

신 자유주의의 큰 문제는, 그런 주장이 자세히 검토되지도 않은 채 세계에 침투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이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인가, 무엇이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인가를 따지지 않은 채, 그러 '경제 합리성'이라는 구호만이 난무하고 있다.  164

우리는 기아에 의한 생명파괴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1) 인도적 자원의 효율화
2) 원조보다는 개혁이 먼저
모든 혁명의 목표는 희생자를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자로, 역사의식을 가진 주체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3) 인프라 정비    164-168

소수가 누리는 자유와 복지의 대가로 다수가 절망하고 배고픈 세계는 존속할 희망과 의미가 없는 폭력적이고 불합리한 세계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와 정의를 누리고 배고픔을 달랠 수 있기 전에는 지상에 진정한 평화와 자유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서로 책임져 주지 않는 한 인간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정의에 대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  171

후기
세계 무역의 규모는 지난 해 6조 달러를 넘어섰다. 그중 3분의 1이 각각 다국적기업들 내부에서 이루어진 무역이었다.
세계 무역의 또 다른 3분의 1은 다국적기업 상호간에 행해졌다. 그리고 3분의 1, 그러니까 2조 달러 정도만이 전통적인 무역 거래에 해당되었다.  173

심각한 만성적 영양실조, 부족한 물, 전염병은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세 재앙의 기사들이다. 네 번째 재앙의 기사는 바로 전쟁.  174

소리 없이 매일 많은 사람을 죽이는 기아에 대한 범 세계적 투쟁이 어려운 것은 또한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국제통화 기금의 무차별적인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다.  180

유엔의 특별 기구들, 개발프로그램, 기금, 위원회, 금융 기관들은 매일 매일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5대륙으로 자기 모슨을 알고 활동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전염병과 싸우고, 유엔식량농업기구와 세계식량계획과 유니세프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생명을 되살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유엔개발기구는 저개발 국가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는 극단적인 자유주의와 국가 및 공동체에 적대적인 민영화와 규제 철폐 정책으로 제3세계 나라들의 가뜩이나 약한 구조를 황폐화시키고 있다.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는 이런 모순을 제거하기에는 너무 우유부단하고 유약하다.
기아와의 투쟁은 이런 대립을 끝낼 수 있는가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182-183


부록으로 
남반구에서는 기아 희생자들의 피라미드가 쌓이고 있는 반면에, 북반구에서는 다국적 금융자본과 그과두제가 부를 쌓아가고 있다.
지은이는 이런 끔찍한 기아에 대한 범세계적 투쟁이 어려운 것은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국제통화기금 등의 무차별적인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신자유주의를 말한다 - 주경복 (건국대 교수)

1995년에 WTO가 공식출범하고, 김영삼 정부에서 '세계화'를 선언하며 신보수주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면서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 논쟁이 본격화하였다. 교육계에서는 1995년 5월 31일 교육개혁안이 발표된 뒤로 그런 소용돌이가 첨예하게 분출하였다. 정부가 '시장', '경쟁', '구조조정', '수요자 중심' 등의 개념을 이용하며 펼치는 개혁 논리 속에 신자유주의 요소들이 깊이 스며있었기 때문이다. 정책입안자들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좋은 모형들을 도입하는 것뿐이지 신자유주의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원래 미국이나 영국의 정책들 속에 이미 신자유주의 논리가 많이 스며있었기 때문에 의도와 상관없이 신자유주의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사회 각 분야에서 끝없는 토론과 논쟁이 이어졌기 때문에 오늘날 웬만큼 사회참여 활동을 수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신자유주의 개념은 상식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큰 주저 없이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해 오고 있다. 나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틈틈이 신자유주의에 관한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그 용어법이나 개념의 엇갈린 해석과 오해가 생기는 일을 겪으며 난감할 때가 있었다. 나 스스로는 큰 오류 없이 이해하며 사용하고 있다고 믿지만 혹시는 잘못된 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생겼다. 세계화나 신자유주의에 관한 독서도 꽤 하고 내 나름대로 관점을 정리해 오기는 했지만 너무 안일했거나 타성에 젖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경직된 관념을 지니게 된 것은 아닌지 반추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친 김에 내가 이해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한번 정리하여 객관화하면서 주위의 검증도 받아 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신자유주의 개념에 아직 익숙하지 않거나 관점의 차이 때문에 다소의 오해가 생길 수 있는 네티즌들과도 공유할 것은 공유하고 서로 확인하여 보완할 것은 보완하며 합리적인 소통을 이루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너무 이론적인 문제나 세부적인 이야기를 깊이 하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으므로 상식적인 선에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총체적으로 볼 때, 신자유주의는 매우 복잡한 흐름 속에서 진화하였기 때문에 간단하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지만 편의상 일정한 무리를 감수하면서라도 큰 줄기만 잡아 단순화시켜 서술해 본다.

원래 '자유'라는 말은 그 정확한 시원을 추적하기 힘들만큼 오래된 것이다. 그 만큼 자유라는 개념은 인류의 삶에 일찍부터 깊이 녹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로서 '자유주의'라고 할 때는 보편적 자유를 애호하거나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특수한 의미의 개념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상식 속에 자라잡은 '자유주의'는 대개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고전적 자본주의와 연관하여 이해되고 있다. 정부의 통제를 최대한 줄이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질서를 염두에 둔 개념이다. 말하자면, 자본 활동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어서 일반 대중이나 모든 개인의 보편적인 자유와는 꽤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벤담(Jeremy Bentham)이나 밀(John Stuart Mill) 등 다소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들이 부를 골고루 분배하고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등 자유의 공공적 관리를 통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창함으로써 대중의 자유까지 보호하며 포괄하려는 공공적 자유주의도 나타났으나 역시 고전적 자유주의 흐름에서는 스미스 식의 방임적 자유주의가 대세를 이루었다. 인류 역사 속에서 언제나 영주, 왕, 국가 등의 지배와 관리 속에서 구속받으며 활동하던 인간들에게 '간섭 없는' 자유라는 개념은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특히,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책무 없이 마음껏 부를 축적하며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 더 없이 반가운 이야기였다.

산업혁명 이후 경제활동이 매우 활발해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방임적 '자유주의' 논리는 처음에 상당한 호응을 받았다. 자유주의는 시대를 가로지르는 지배담론이자 하나의 도그마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방임적 자유의 폐해가 노출되기 시작하면서 그런 자유주의는 도전을 받기 시작하였다. 자유를 빙자한 자본의 횡포와 독점이 발생하고 빈부격차가 커져서 서민의 구매력이 감소하여 경기가 침체하는 등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결국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와 역할에 회의를 느끼며 방임적 자유보다 정부의 적극적 관리와 개입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런 흐름에서 자유주의는 여러 가지 형태로 수정되는 길을 걸었다.

1912년에 미국 대통령 후보로 나선 윌슨은 무분별한 '부당' 경쟁을 통해 경제의 독점 현상이 나타나고 부작용이 만연하는 것을 억제하여 새로운 방식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새로운 자유(New Freedom)' 정책을 제시하며 당선되었다. 1930년대 세계 경제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루즈벨트 대통령이 추진한 '뉴딜 정책'도 '새로운 자유' 정책의 흐름으로 꼽힌다. 이 때 이야기되는 ‘새로운 자유 정책(New Freedom Policy)’을 가끔 '신자유주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오늘날 세계화 담론과 결부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는 사뭇 다른 것이다. 앞에서 말하는 '새로운 자유' 정책은 정부가 나서서 경제문제를 챙기는 것이고, 뒤에서 말하는 '신자유주의'는 정부는 가급적 나서지 말고 민간 자본들이 알아서 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자를 후자와 구별하기 위해 '새로운 자유주의(New Liberalism)'라 부르고 후자를 요즘 부르는 용어 그대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고 부르면 좋을 듯 하다.

1920년대 무렵 독일의 오이켄(Walter Eucken)을 비롯한 프라이부르크학파에서는 경제질서의 완전한 자유를 이루려면 경쟁질서가 공정해야 하는데 자유를 방임해서는 그것을 실현할 수 없으므로 생산, 소비, 직업선택 등에 대해서는 자유경쟁을 가급적 보장하되 시장형태 등을 포함한 사회질서의 관리는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질서자유주의(Ordo Liberalismus)’를 제시한 바 있는데, 이것도 고전적 자유주의에 대한 수정이라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흐름의 하나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 역시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와는 구별된다. 그냥 넓은 의미의 '새로운 자유주의' 흐름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현실 정치에서나 경제학 이론가들 사이에서나 아담 스미스가 제시한 자유주의 경제 모형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이론들이 여러 각도로 모색되는 가운데 대표적 대안 이론으로 부상한 것이 바로 케인즈의 수정주의 이론이다. 자본가의 자유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도 국가가 나서서 관리하고, 빈부격차가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복지정책을 도입하고, 경기가 침체되면 공공투자를 늘려 유효수요를 증대시키는 등 자유의 공공성을 지향하였다. 국가가 개입하여 자본의 방임적 자유를 통제하는 '개량'의 흐름이 다시 주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런 흐름도 고전적 자유주의를 수정한 것이므로 편의에 따라서는 '신자유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겠으나 대개 '케인즈주의', '수정자본주의' 또는 '개량(자본)주의'라고는 불러도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는 명칭은 케인즈의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논리로 등장한 흐름에 붙여지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정부가 자본의 흐름에 개입하며 경제활동을 간섭하는 것이 경제적 '효율'을 떨어트린다는 부정적 시각에서 다시 제약 없는 자유를 주장하는 이론이 생겨났는데, 그 내용이 고전적 자유주의 와 꼭 같은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케인즈주의와는 더욱 같지 않기 때문에 이론가들 스스로나 주위에서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흐름은 J.바이너, H.D.사이몬스, F.A.하이에크, F.H.나이트, M.프리드먼, G.J.스티글러 등 이른바 시카고 학파의 경제이론가들이 주도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하이예크나 프리드먼 같은 인물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이들은 생산 ·가격 · 고용 등 경제 수준을 결정하는 요인으로서 통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물가조절, 자원배분 등을 비롯한 대개의 경제 운영은 시장기능을 통해 수행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정부의 개입보다는 민간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중시하였다. 이런 이론과 주장 또는 그 논리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신자유주의' 담론의 뿌리인 것이다.

이런 시카고학파의 신자유주의 논리들이 일찍이 1950년대부터 경제학의 이론으로서 전문가들의 주목은 받았지만 세간의 관심과 호응을 일으키며 현실 정책에 그대로 즉시 반영되지는 않았다. 세계 국가들의 정책에 반영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이고, 보다 더 적극적으로 확산된 것은 1980년대부터이다. 70년대 초반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경제정책에 신자유주의 요소를 도입하여 '닉소노믹스(Nixonomics)'를 낳았지만 시도의 차원에 머물렀고, 그나마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에 휘말려 중도 사임하는 등으로 일관된 시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뒤 1979년 영국에서 집권한 대처 수상이 매우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여 '대처리즘'을 탄생시키고, 1980년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한 레이건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 도입하여 '레이거노믹스'를 탄생시키면서 드디어 신자유주의가 '스타'처럼 국제사회의 인기 있는 담론과 정책으로 부상하였다. 각종 규제를 풀어 자본의 이동을 자유롭게 해주고 자본주의 판단에 따라 쉽게 구조조정을 가하며 자유롭게 기업활동을 할 수 있게 하여 침체되었던 경기를 많이 활성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것은 곧 신자유주의가 매우 유효하다는 심증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신자유주의가 각광을 받게 된 사전 배경에는 1970년대에 세계 국가들이 겪은 석유파동, 스태그플레이션, 실업난 등 경제의 전반적 악조건이 작용하였다. 무엇이든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위기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경제 위기의 원인을 케인즈주의 경제정책 탓으로 돌리면서 그 대안으로서 신자유주의를 제창하여 급부상한 것이다. 위기상황에서 유효한 역할을 못하는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진데다가 여러 가지 규제들 때문에 경제가 활성화되지 않는다는 불만이 늘어났다. 그래서 규제를 최대한 풀며 정부의 역할을 가급적 축소시키고 시장기능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이다. '규제 완화', '세금축소', '공기업민영화', '노동 시장 유연화', '복지정책축소' 등 신자유주의 조치들은 자본가들의 환영과 지지를 받았다.

이렇게 세상의 주목과 사랑을 받으며 유행처럼 확산된 신자유주의는 그 주창자와 순수한 이론가들마저 놀랄 만큼 자가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은 일종의 신화를 낳아 가고 있다. 놀라운 마력을 가진 어떤 주문처럼 그것을 외치고 표현하면 무엇이든 해결점이 나올 것 같은 환상을 자아내는 경향도 보인다. 그렇게 범람하는 흐름에는 시대적 상승 요인이 맞물린 또 다른 배경이 있다. 바로 '세계화'의 물결이 합세한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성취의 욕망이 있고, 인류는 태초부터 집단팽창의 욕망을 지녀왔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국가들은 제국주의 야망을 불태웠고, 현대에 와서도 강대국들은 끊임없이 국제적 헤게모니를 확대하고 싶어 한다. 경제통상 분야에서는 자국의 이익추구에 유리한 무역의 확대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20세기 들어서 탄생한 GATT는 바로 그런 배경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GATT는 여러 가지 한계들 때문에 강대국들이 기대하는 만큼의 개방수준을 달성하기 힘들었다. 그런 교훈을 바탕으로 GATT 체제를 대폭 보완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세계무역기구(WTO)’이다. 세계의 모든 국가들을 일정한 절차로 개방해 나가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IMF, IBRD, OECD, ASEM, APEC, FTA 등도 WTO와 함께 세계화 기제를 구성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을 전후하여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용어와 개념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런 세계화의 흐름에 이론적 무기로 작동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국가의 관리로 존재하는 모든 국경들을 허물고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하여 오직 시장기능만이 모든 경제활동과 삶을 밑받침하게 한다는 논리가 성립하게 된 것이다.

이런 세계적 신자유주의를 배경에서 지원하고 움직이며 가장 많이 혜택을 누리는 것은 초국적 자본이다. 각 국가에서 무한에 가까운 자유를 지향할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하나의 시장으로 삼아 언제 어디서든 돈벌이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되어 가는 것이다.


한국은 1990년대 중반부터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세례를 받으며 흐름에 동참하여 무척 빠른 속도로 적응해 나갔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주도 국가인 미국이나 영국보다 분위기에서는 더 신자유주의적이고 더 세계화를 쫓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영삼 정부가 다분히 의식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한 뒤로, 김대중 정부가 IMF정국 타개를 위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 흐름을 이어받았고, 노무현 정부도 처음에는 적지 않은 망설임을 보였으나 점차 신자유주의 요소가 짙은 정책으로 흘러왔다.

이 세상에 절대선과 절대악은 별로 없다. 대부분 장점과 단점을 함께 지니고 있는데 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본질을 규정하냐에 따라 긍정되거나 부정된다. 신자유주의도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가 지니는 장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많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세 가지만 꼽아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본 활동의 제약을 최소화함으로써 자유롭게 시장 원리에 따라 이윤을 추구함으로써 투여한 자본을 통해 거둘 수 있는 성과를 극대화 할 수 있다. 부의 창출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둘째, 시장의 적자생존 원리에 따라 모든 경제주체가 긴장하며 최선을 다해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함으로써 기능적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한 눈 팔지 못하고 자신이 지닌 능력을 취대한 발휘하게 하여 능률을 높인다는 것이다.

셋째, '욕망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성취욕을 자극하여 일의 성과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적 본능이나 이기심을 자극하여 더 많이 이루고자 하는 에너지를 생성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단점도 매우 많다. 세 가지 정도만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유’의 전제가 잘못되어 그 개념과 현실을 왜곡한다는 것이다. 모든 간섭을 없애고 자유를 줄 테니 알아서 마음껏 하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가진 사람과 없는 사람의 할 수 있는 조건이 다른데 알아서 하라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쪽은 무장을 단단히 하고 나서는데 다른 쪽은 맨 손으로 알아서 싸우라거나 헤비급 선수와 라이트급 선수를 구분 없이 섞어 놓고 알아서 싸우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괴롭힘이자 억압이 되어 버린다 (공정거래위원회 같은 기능을 통해 경쟁의 공정성을 관리한다고 하지만 그 때의 관리는 경쟁 활동의 공정성을 관리하는 것이지 경쟁의 전제조건을 관리하지는 않는다). 그런 뜻에서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자유는 개인과 국가의 편차나 특수한 조건을 무시하며 인권, 생존권, 주권 등을 초월하려는 개념이어서 진정한 의미의 인간적 또는 사회적 자유가 아니라는 개념적 비판을 받게 된다.

둘째, 지나친 경쟁주의로 치달으며 약육강식의 냉혹한 질서가 자리 잡아서 다수의 약자들이 소외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시장으로 내몰며 자유롭게 벌어먹으라고 하므로 경쟁이 치열해 질 수 밖에 없는데 경쟁의 조건이 처음부터 불공평하니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낳으며 양극화의 심화를 초래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또는 세계화를 20:80의 질서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20%의 혜택 받는 사람들을 위해 80%의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희생시킨다는 이야기다. 결국, 신자유주의는 자본가들의 자유를 위한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셋째, 자본의 욕망이 끝없이 확대되어 불필요한 영역들까지 시장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인간의 모든 삶에서 물질만능주의를 부추긴다는 점이다. 시장논리가 만병통치약처럼 통하다보니 문화, 교육, 예술 등 고유한 가치를 지니는 영역들도 시장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며 정책으로 옮기기 때문에 삶의 체계를 건조하게 만들며 인류문화를 황폐화시킨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가진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한편 없는 사람에게는 거부감을 갖게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내막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서민이나 그들 편에서 애쓰는 진보적 활동가들 중에서도 화려한 자본의 담론에 이끌려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시장'과 '경쟁'의 논리를 새로운 희망처럼 추종하는 경향도 있다.

신자유주의는 그 개념과 논리상 자본의 자유와 기득권을 지키거나 확대하고자 하는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여서 사회적 자유와 평등한 세상을 추구하는 진보주의자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데, 정부 정책이나 기업운영 등이 신자유주의를 채택하는 일이 원체 많다보니 그것을 비판하는 일도 너무 많아지고 일상화하다보니 때로는 ‘비판을 위한 비판’ 또는 ‘개혁을 반대하기 위한 비판’으로 오해 받는 경우가 생긴다. 원래 불평등과 소외의 모순이 존재하는 현실을 변혁하려는 목표가 강한 것은 진보주의 쪽인데 자본의 기득권을 강화하는 잘못된 개혁 방향을 비판하다보니 얼핏 보기에는 보수주의가 오히려 더 개혁적으로 느껴지고 진보주의가 더 수구적으로 느껴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결국 정책을 주도하는 주체가 어떤 흐름에 서서 개혁을 추진하느냐에 따라 양상이 달라진다. 요즘 보-혁 전도의 아이러니가 자주 나타나는 것은 정부의 정책들이 대개 진보성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말하자면 서민을 위한 정책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고 오히려 가진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정책이 더 많이 표출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사족을 달자면, 대안 없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기만 하는 것은 결국 경쟁을 피하며 보신주의에 빠지거나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기 쉽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진보적 활동가들이 깊이 고민하며 노력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부조리하게 조장되는 경쟁의 모순을 뛰어넘어 창조적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자는 더 본질적인 목표가 있다. 그러나 그 목표가 구체적인 담론과 기획물로서 제시되지 못하기 때문에 비판의 충정이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가끔은 일단 다가오는 변화에 대한 거부감을 '비판'이라는 형식으로 표출하는 경우도 없지 않으며, 또한 그런 경우가 아니고 진정한 비판일지라도 이제는 모순을 파헤치거나 혁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진보적 대안을 제시하며 새로운 변혁을 이루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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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디즘
성적 대상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인 쾌감을 얻는 이상 성행위.

가학증 또는 학대음란증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문학가 M.de 사드에서 유래된 명칭이며 ‘양성의 앨골래그니어(algolagnia)’라고 부를 때도 있다.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쾌감을 얻게 되는 마조히즘과 대응된다. 심층심리학의 시조인 S.프로이트는 모든 생리적 기능에는 사디즘이 숨어 있으며 마조히즘은 자기자신에게 향하는 사디즘이라고 말했다. 때로는 성목표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공격적이며 고통을 주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경향을 가리킬 때도 있다.

사디즘이라고 최초로 명명한 사람은 R.von 크라프트에빙인데, 사드 이전에도 문학이나 미술 속에서 사디즘의 표현을 볼 수 있다. 플라톤의 《공화국》에 <사형당한 사람의 시체를 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참을 수 없었던 사나이>의 에피소드가 있고, 루크레티우스가 저술한 《만상론()》에는 “죽음과 싸우고 있는 불행한 뱃사람의 조난을 언덕 위에서 구경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라는 글이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든지 성자의 순교나 지옥의 형벌을 그림으로 나타낸 중세의 회화에도 화가의 무의식적인 사디즘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한편 사드를 낭만주의의 원류라고 간주했던 문학사가() M.브라츠는 M.G.루이스의 《몽크》, C.R.매튜린의 《방랑자 멜모스》, C.P.보들레르, G.플로베르, H.스윈번, O.미르보의 《처형의 뜰》 등으로 이어지는 사디즘 문학의 계보를 만들었다. 보들레르는 “잔학성과 향락은 동일한 감각이다”라고 말하였고, 단눈치오는 “양성간의 극단적인 증오야말로 사랑의 기반이다”라고 말하였다. 사르트르의 실존적인 이론의 바탕에도, 초현실주의의 ‘블랙유머’의 기반에도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마조히즘
이성으로부터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학대를 받고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만족을 느끼는 병적인 심리상태.

사디즘(sadism)에 대응하는 뜻을 지녔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L.R.von 자허마조흐가 이와 같은 변태적 성격의 소유자로서 이런 경향의 테마로 작품을 쓴 데서 유래한다.

흔히 남녀간의 성적 행위에서 서로가 가벼운 고통을 주고받거나 함으로써 성적 흥분을 높이는 일이 적지 않으나 마조히즘 ·사디즘의 경우는 정도가 심한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변태성욕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체로 성행위에서 남성이 사디즘의 경향을 나타내고, 여성이 마조히즘의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심한 경우는 매질 또는 흉기나 부젓가락에 의한 폭행 ·상해를 주고받거나, 그 밖에도 상대방에게 노예적으로 굴종()함으로써 성적 쾌감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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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ochism

 

피학 성향, 피학대 성애[性愛]

Flogging demonstration at Folsom Street Fair 2004. 


이성으로부터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학대를 받고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만족을 느끼는 病的인 심리상태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게 하여 성애[性愛]의 충족을 이루고자 하는 성심리 장애이다.

이 용어는 오스트리아 작가 슈발리에 레오폴트 폰 자허 마조흐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는 매를 맞고 굴복당함으로써 얻는 만족감에 대해 광범위한 저술을 펴냈다.
매저키즘과 관련된 고통의 정도는 약간의 폭행을 수반하는 의례적 모욕으로부터
심한 채찍질이나 구타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피학성향자[매저키스트 : Masochist]들은

 어느 정도의 상황통제력이 있기 때문에 학대가 지나쳐 심한 상처를 입는 경우는 드물다.
일반 사람에게도 고통이 어느 정도 성적 흥분을 일으킬 수는 있으나
피학성향자들에게는 고통이 성적 행위의 주된 목표가 된다.
이 용어는 모욕이나 학대상황을 추구하고 즐기는 사람의 행동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sadism[새디즘]에 대응하는 뜻을 지녔다.


Leopold von Sacher-Masoch. An 1860s photo. 

 

오스트리아[Austria]의 작가,

- L.R.von 자허마조흐[Leopold Ritter von Sacher-Masoch, 1836.1.27~1895.3.9]'가

이와 같은 변태적 성격의 소유자로서 이런 경향의 테마로 작품을 쓴 데서 유래한다.

흔히 남녀간의 성적 행위에서

서로가 가벼운 고통을 주고받거나 함으로써 성적 흥분을 높이는 일이 적지 않으나

  마조히즘, 사디즘의 경우는 정도가 심한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변태성욕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체로 성행위에서 남성이 사디즘의 경향을 나타내고,

여성이 마조히즘의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심한 경우는 매질 또는 흉기나 부젖가락'에 의한 폭행 ·상해를 주고받거나,

그 밖에도 상대방에게 노예적으로 굴종[從]함으로써 성적 쾌감을 느끼게 된다.

매저키즘만 독립된 특성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드물고,

보통은 타인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성적 쾌락을 얻는 새디즘'을 결합한 형태로 나타난다.

즉 한 사람이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흥분상태가 되기도 하고,
 역할을 바꾸어서 고통을 가함으로써 흥분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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