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를 말한다.

무정부주의는 개인을 지배하는 국가권력 및 모든 사회적 권력을 부정하고 절대적 자유가 행하여지는 사회를 실현하려고 하는 운동.

정부나 통치의 부재(不在)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an archos'에서 유래한다.

현대의 대표적인 이론가로는 윌리엄 고드윈,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막스 슈티르너, 레오 톨스토이, 폴 굿먼, 허버트 리드, 미하일 바쿠닌, 페테르 크로포트킨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무정부의자로는 신채호와 박열이 있다. 한국의 현대 무정부주의 운동은 3.1운동 후 1920년경부터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한 인사들,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간 유학생과 노동자들 가운데서 싹트기 시작하여 점차 국내로 번져 들어왔다.

중국에서는 신채호(申采浩)의 <조선혁명선언>으로, 일본에서는 박열(朴烈) 등의 이른바 <대역사건(大逆事件;일본 천황 폭살 미수사건)>으로 한국 현대 무정부주의운 동의 막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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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의 대표적 상징인 Circle-A 문양.

아나키즘(Anarchism, 프랑스어: Anarchisme 아나르시슴[*])은 모든 정치적인 조직·권력 따위를 부정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데올로기 또는 이를 전파하고 실현하려는 운동으로, αυ(없는)와 αρχοζ(지도자)가 합성된 고대 그리스어 아나르코스(αυαρχοζ)에서 비롯된 말이다.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라고도 불리지만,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다며 이런 표현을 사용하기 꺼려한다. 대신에 자유연합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출처 필요] 역사에서는 고대의 공동체에서 비롯하여 갖가지 공동체나 고대의 철학, 사상에서도 연원을 찾아 볼 수 있으나 근대에 이르러 자본주의와 권위주의의 폐해에 대한 반발로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함께 발흥하였으며 페미니즘, 펑크 문화 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장점을 포용하는 중용이념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가) 사상

아나키즘은 그 특징때문에 다른 사상들과 달리 정의내리기가 매우 까다롭다. 일반적으로 아나키즘은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을 말하며, 이 외에도 다양한 성향이 있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일어난 만큼 평등을 중요하게 본다. 하지만 현대의 일부 아나키스트들이나 개인주의자들은 평등보다는 자유를 중요시 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국가와 권력에 대한 반대로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기에 공산주의와 대립한다. 이와 같은 평등과 자유를 추구하기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를 반대하고 있다. 19세기 후반에는 공산주의와 세를 다툴 만큼 세계 도처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권력이 부여되는 조직 자체를 부정하는 성향으로 차츰 세력을 잃었지만, 혁명 운동이 일어난 어느 곳에서나 아나키즘은 자유와 평등을 외치면서 살아났다. 대표적인 아나키즘의 투쟁은 파리 코뮌, 에스파냐 내전, 그리고 프랑스 학생혁명이며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에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참가 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발흥한 니힐리즘과의 차이점은 허무주의가 구제도 모두를 부정하고 철저한 파괴를 주장하면서도, 새로운 사회에 대한 대안이 없었으나 이에 반해 아나키즘은 새로운 대안을 공동체 자치에서 찾았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는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파괴나, 몰락후의 계획 경제를 대안으로 하였으나, 아나키즘은 계획 자체를 부정하고 공동체 내의 자립, 자치, 자영 경제를 대안으로 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나) 역사

정치적 아나키즘의 탄생은 윌리엄 고드윈이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받아 저술한 《도덕과 행복에 대한 정치정의의 영향에 대한 연구》가 출판된 1793년으로 간주되며, 고드윈은 이 책에서 모든 형태의 정부를 개인의 개화를 가로막고 부패로 이끌 뿐이라고 비판했다. 막스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은 헤겔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으며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맡았지만 그 당시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아나키사회를 위계질서와 권위가 부재된 것으로 간주했으며, 권위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종교, 국가, 군대 등이 권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개인의 자유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다) 흐름

아나키즘 운동에는 크게 세 조류가 존재하는데,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환경주의적 아나키즘이 있으며 환경주의적 아나키즘은 최근에 생겨난 조류이다. 현재 다양한 아나키즘 이론이 공존하고 있으며, 아나키스트로 자신을 정의하는 집단들 가운데서도 전략, 전술, 조직, 정치철학, 경제학, 사회학적인 면에서 대립하는 경우가 많다.

1)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혹은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는 상호호혜주의, 공산주의, 노동조합주의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유재산의 말소와 생산수단의 공유를 주장한다.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은 프루동에 의해 최초로 시작되었으며 후에 바쿠닌과 그의 추종자들은 제1인터내셔널에서 중요한 세력을 형성했으나 카를 마르크스와의 대립으로 바쿠닌이 국제당에서 축출된 이후 독립된 세력이 되었다.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와 권위주의에 대항하며 공동체주의와 자유지상주의적 연방주의등의 형태로 사회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의 다리 역할로 간주된다.

하위분류로 다음과 같은 분파들이 존재한다.

-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 공산주의적 아나키즘

- 아나코생디칼리즘

- 프루동주의

- 무장아나키즘

- 후기아나키즘

2)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자유지상주의적 개인주의는 사유재산의 소유를 인정한다. 이들에 따르면 권위주의 조직은 민중의 외면 속에서, 혹은 투쟁의 결과로 사라져야 하는 존재이며 이것은 사회에 의해 억압받는 개인의 자유를 위한 중요한 요소로 본다. 국가에 대한 견제 목적으로 개인들 사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중간적 조직들은 군대를 조직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국가적"인 조직이 되지 않는 한 올바른 것으로 본다.

-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 인도주의적 아나키즘

- 에고이스트적 아나키즘

- 자유방임적 아나키즘

- 그리스도교 아나키즘

- 자본주의적 아나키즘

- 시온주의적 아나키즘

3) 환경주의적 아나키즘

환경주의적 아나키즘은 모든 형태의 산업화 경제와 자연의 파괴를 거부하며, 산업화를 주장한 공산주의적 아나키스트들에도 반대한다. 현재 아나키즘의 세번째 극으로 자리 잡혔으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한다. 산업화와 기술의 지배를 거부하며 원시적 사회로의 회귀를 주장하기도 한다.

- 환경주의적 아나키즘

- 원시주의적 아나키즘

- 녹색아나키즘

4) 아나키즘에는 그 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분파들이 존재한다.

- 인식론적 아나키즘

- 아나코페미니즘

- 아나코펑크

- 초월주의적 아나키즘

- 크립토아나키즘

- 국가아나키즘

5) 결론

아나키즘의 다양한 성향들은 개인의 자유가 노동조합, 공동체, 법, 정부를 비롯한 어떤 조직의 권위에도 억압받지 않는 자유지상적인 사회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학, 철학, 문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영감을 얻은 흐름들이 등장했으며, 이들은 때로 고전적 자유지상주의를 전적으로 거부하기도 한다.

아나키즘의 배경이 되는 철학의 다양성은 아나키즘 내의 다양한 흐름의 존재에서 드러나며, 이 때문에 동일한 목적을 가진 아나키스트들이라고 해도 그 강령적인 부분에서 서로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하나의 통일된 운동을 형성하지는 못한다.

(라)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 미하일 바쿠닌

  *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 레프 톨스토이

  * 머레이 북친

  * 엠마 골드만

  * 노암 촘스키

  * 막스 슈티르너

  * 벤자민 터커

  * 윌리엄 고드윈

  * 신채호

  * 박열

  * 이회영

  * 하기락

  * 구승회

  * 박홍규

  * 조약골

(마) 한국의 아나키스트 단체

1) 의열단

의열단(義烈團)은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아나키스트 성격의 무장독립운동단체이다. 이들은 프랑스 조계지역(외국인 치외법권지역)인 중국 상하이에서 폭력항쟁으로 대일본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이 상하이에서 활동한 이유는 프랑스와 일본의 대립으로 인해, 프랑스 경찰이 백범 김구선생을 포함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의열단은 광복을 위해 폭력만을 수단으로, 암살만을 정의로 삼으면서, 5개소의 적 기관 파괴와 7악의 제거를 위해 파괴활동을 벌였다. 이때 5개소의 적 기관은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경찰서·기타 중요 기관이며, 7악은 총독부 고문·군 수뇌·대만 총독·친일파 거물·밀정·반민족적 토호·열신(劣神)이다.[1]

가) 주요 의거

  *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의사가 부산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을 폭사시켰다.

  * 1920년 12월 27일 최수봉의사가 밀양경찰서 소속 모든 경찰이 모인 가운데 폭탄을 투척하였다.

  * 1921년 9월 12일 김익상의사가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폭발로 청사 일부가 부서졌다.

  * 1922년 3월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었다.

  * 1924년 1월 5일 김지섭의사가 도쿄의 궁성 정문 앞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하였다.

  * 1926년 12월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하였다.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김지섭 의사의 도쿄거사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김원봉 단장은 무장투쟁이 단원들만 희생된 채, 큰 성과를 내지 못함에 따라,의열단의 투쟁노선을 재정립하고 방향을 전환할 것을 검토했다. 이후의 활동들은 의열단 지휘부의 체계적인 투쟁이 아닌, 개별적인 투쟁이었다. 1928년 의열단은 '창립 9주년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내고, 향후 대중의 지지에 기반한 투쟁에 역점을 두어 활동하겠다는 점을 밝혔다.

나) 단원

창립단원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 이수택, 이낙준

1923년 상해 일본 총영사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의열단 단원이 천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26년 이후 많은 수의 의열단원들은 중국 국민당정부의 북벌을 위한 학교였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정치교육을 받았다. 이후 이들은 의열단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족혁명당이 각 파벌의 권력투쟁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아 의열단은 조선민족독립당으로 새출발을 하고 11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다) 공약 10조

  *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기로 한다.

  *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몸과 목숨을 희생하기로 한다.

  * 충의(忠義)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으로 한다.

  * 단의 뜻을 우선하고 단원의 뜻을 실행하는데 속히한다.

  * 의백(義伯,올바른 성품을 가진 지도자) 한 사람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하게 한다.

  * 언제 어디서든지 매월 일차씩 상황을 보고한다.

  * 언제 어디서든지 모이도록 요청하면 꼭 응한다.

  * 죽지않고 살아있어 단의 뜻을 이루도록 한다.

  * 한 사람을 다수은 위하여, 다수는 한 사람을 위하여 헌신한다.

  * 단의 뜻에 배반한 자는 처살한다.

라) 의열단 선언

김원봉은 1923년 북경을 방문하여 당시 임시정부의 외교우선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단재신채호선생을 만나 의열단의 정신을 문서화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신채호는 김원봉을 따라 상해로 와서 폭탄 만드는 시설을 살펴보고, 약 한달 동안 여관방에 앉아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의열단선언 즉,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그들은 의열단 선언을 인쇄하여 살포하였고 단원의 필독서로 지정하였다. 의열단원들은 거사 후에 본 선언문을 남겨 거사의 뜻을 전달하였다.

-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파괴·폭동으로써,

-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조선혁명선언 제 5장 마지막 문장>

이 선언에서 신채호는 독립투쟁방법으로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 등을 모두 부차적이라고 설득하였으며, 무장투쟁을 최우선하는 의열단의 뜻을 분명히 밝혀주었다.

마) 임시정부와의 관계

임시정부 초기에 안창호는 부분적인 모험행동을 피하고 적응 시기에 대거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폭탄을 기율없이 단독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임시정부 군사당국에 예속하여 실력을 점축한 뒤 상당한 때에 대거하라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김원봉은 임시정부의 활동을 미온적인 것으로 보았고, 이승만의 신탁통치 제안이나 임정내의 파벌 싸움에 매우 실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자신들의 의열투쟁을 '모험행동'으로 보는 것도 받아 들이기 힘들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개조파는 국민대표회의의 실패 이후에 창조파를 소외시키기 위하여 의열단과 제휴하였다. 이 후 의열단은 임시정부의 한 축이 되었다. 또한 김구선생도 의열단의 활동에 크게 고무되어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이라는 같은 방법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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