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지대라는 사선을 넘어왔지만 또 다른 사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오기뿐만 아니라 자존심도 내려놔야 한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했다.  28


탈북민은 한국에서 사회구성원으로 자리하고 인정받기 위해 오랜 기간에 걸쳐 탈북민사회의 호소와 집단행동을 통해 노력해왔다. 소수자가 피해자로 전락하면 안 된다는 외침으로부터 평등한 국민으로 봐달라는 호소까지, 통일의 동반자로 함께하고 민주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기까지의 과정은 민주주의의 발전과 그 궤를 함께해왔다고도 볼 수 있다.  30


2016년 기준 한국인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4.6명으로 OECD 회원국 중 13년 연속 1위였다. 그런데 탈북민의 자살률은 그의 3배에 달한다. 2016년 9월 새누리당 김도읍 국회의원실에서 인용한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탈북민 중 2012년까지 모두 22명이 자살했는데, 2015년 한 해에만 9명이 자살했다. 이처럼 자살자가 급증하는 것은 '따뜻한 남쪽 나라'인 줄 알고 넘어왔던 한국에서의 삶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고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42


탈북민이 가장 문제로 꼽는 것은 경제적 빈곤이나 정착 관련 정책보다 탈북민을 대하는 한국사회의 편견과 차별, 배제가 압도적이다. 이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배태하고 있는데, 첫 번째가 오랜 분단 시대가 만든 적대와 대립의 아비투스(habitus)로, 관습의 차원에서 유래한 것이다. 반공, 반북 의식의 오랜 관습은 북한 정부뿐만 아니라 탈북민에게까지 그대로 투영된다. 2010년 11월, 북한의 연평도 폭격 직후, 어느 면접장에서 "당신네 북한은 왜 저러녀?"라고 내게 묻던 면접관의 태도에서 배타적인 타자성을 보았다.

두 번째는 남북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였다는 우월적 인식에 기인한 태도다. 못나고 가난한 아우를 바라보는 묘한 승자적 감정이다. 탈북민은 일상의 자리에서부터 끊임없이 자신이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생존과 생계의 기회를 얻는다. 이를 강요하고 탈북민을 하대하며 가타르시스를 얻는 사람들을 직면하는 것은 언젠 불편한 일이다. 

세 번째는 무한경쟁사회가 초래한 소외와 배제다. 탈북민은 한국이라는 처음 맞이하는 막막한 환경에서 홀로 서야 한다. 무한경쟁사회에서 탈북민은 애초부터 포용이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이 될 뿐이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경쟁에서 배제된 채 과연 홀로 선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43-44


오래전부터 북한 주민들은 당구그이 선전을 통해서든 탈북민을 통해서든 한국이 무한경쟁사회라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럼에도 탈북민은 한국이 북한보다는 나을 거라는 희망과 우리는 결국 한 동포라는 믿음으로 탈북을 감행한다. 하지만 탈북에 성공하더라도 한국사회에서 직면하는 지독한 편견과 차별, 배제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44


자유가 존재하는 사회에 온 것은 맞지만 탈북민도 똑같이 존중받고 살기 위해서는, 한국의 평범한 시민들보다 더 많이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이었다.  44-45


나름 좋다고 하는 대학을 졸업했고 각종 자격증 취득이며 어학연수까지 다녀와 이른바 8대 스펙에도 거의 근접했다고 생각했는데, 서류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길 없이 어느 날 지원 서류를 다시 한 번 찬찬히 돌아보았다. 이력서의 군 복무 여부를 뭊는 칸에는 굳이 탈북민이라고 기재했고, 자기 소개서의 성장 과정과 입사 후 포부에서조차 나는 스스로 북한 출신임을 친절하게 밝히고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탈북민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 입사 지원을 했다. 그때부터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서류를 제출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았는데 줄줄이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던 것이다. 1차 서류합격만으로도 기쁨을 느낀다는 '서류가즘'이라는 신조어도 있지만 나에겐 그 따위에 비교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격한 슬픔과 비애가 온몸을 감쌌다. 민주주의의 발전과 성숙한 의식 수준을 자랑한다는 한국에서 탈북민이라는 이름은 경쟁사회의 아웃사이더이자 분단사회의 주홍글씨와 같은 꼬리표엿던 것이다.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며 백안시하는 태도를 애써 감추려 하지만, 실제 모습은 제도와 시스템속에 철저히 내재화되어 있었다. 여기에 물질과 이기의 논리가 덧칠해져 유사한 얼개로 괄시와 배척이 가중된다.

흔히 조선족 동포는 '이등 국민'이라는 이미지로 우리 사회에 굳어져 있다. 그동안 주민등록증을 가진 대한민국 국민임에도 북쪽출신이라는 것을 밝히지 못하고 조선족 동포로 행세하며 일하는 탈북민을 종종 봐왔다. 조선족 동포라고 하면 취업이 가능하지만 탈북자임이 알려지면 취직이 어려웠던 까닭이다. 사실상 탈북민은 이등 국민도 아닌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에 가까웠다.  59-60


주민등록번호(000000- 125 0000) 하나로 탈북민인 것을 구별해내는 시스템도 신기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되어 어느 탈북민은 북한에서처럼 강가에서 자동차를 세차하다가 주변의 신고로 파출소로 연행된 적이 있었다.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던 경찰이 곧바로 북에서 왔냐고 소리쳐 당황했다고 한다. 범죄자가 아님에도 수배자처럼 탈북민을 바로 확인해내는 전산시스템을 마주하던 그때의 경험이 훗날 탈남을 결심한 계기였다고 그는 고백했다. 일반 국민과 탈북민을 이중적 공간으로 분리하고 마치 탈북민사회를 특수 집단으로 경계하는 제도와 시스템이 존재하는 한 한국사회에서 탈북민은 결코 당당해질 수 없으며 또한 이들을 향한 한국사회의 무시와 경시 또한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63


- 2009년 '북한 이탈주민 보호, 정착지원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하나원의 소재지를 기준으로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았던 탈북민은 한 차례에 한해 정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입국한 탈북민들도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25나 225로 시작하지 않는 번호를 부여받았다.  64


전부가 정한 공식적인 법적, 행정적 명칭은 '북한이탈주민'이고 별칭은 '새터민'이지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탈북민이 호칭은 수십 가지가 넘는다. 이는 탈북민 정착 재도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현상이다.  67


수년 전 어느 연구 기관에 탈북민 박사 몇 명과 함께 북한과 통일 문제 연구 프로젝트의 자문으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 북한과 통일 문제에 문외한인 담당 연구원들과 전문가이지만 실직자에 가까운 탈북민 자문위원들 간의 만남은 어색하고 불편했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한 탈북민 박사가 "이런 꼴을 보자고 어렵게 학위를 취득한 것이 아닌데..."하고 탄식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오히려 외국에 나가면 우리를 난민이 아니라 정치적 망명자로 존중해줍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자 인문학 분야에서 최정상급으로 인정받는 네덜란드의 레이던 대학교에서 일개 탈북 작가인 저를 학과장 대우로 초빙했는데 국내에서는 어떤가요. 국내에 탈북민이 3만 명인데 북한학과에 탈북민 출신 교수가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70-71


오랜 시간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지내는, 국책 기관에서 일하는 어느 ;탈북민 금수저'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매번 골프 치러 가고 비싼 술을 먹는 것 같지만 매일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살고 있다. 직장에서 끊임없이 받는 경계심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너는 상상하지 못할 거다." 탈북민사회에서 이들의 위치는 성골일지 모르지만, 한국사회에서는 결국 '탈북자'로 대접받고 있다는 고충의 토로였다. 탈북민사회에서 그들은 분명 금수저이지만 그들조차 긴장하며 살아야 할 곳이 바로 만만치 않은 한국사회라는 점도 확인했다.  72


2014년 오준 한국 유엔대사가 임기 마지막 연설에서 "북한 주민은 우리에게 남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한국과 세계의 언론들은 세계를 울린 연설이라고 극찬했다. 이를 지켜보던 한 탈북민 후배의 중얼거림이 지금껏 가슴에 남아 있다. "그럼, 우린 남일까요?"  73


목숨을 걸고 입국한 한국을 다시 등지는 탈북민의 행렬은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정확한 통계가 공개된 적이 없어 구체적으로 알수는 없지만, 일각에서는 약 5,000명의 탈북민이 탈남했거나 탈남했다가 되돌아온 것으로 추산한다. 2017년까지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이 3만 명이니 6명 중 1명이 탈남했거나 탈남 경험이 있는 것이다.  89


배고파서 온 사람들이라서 배만 부르면 잘 정착할 것이라는 판단은 너무나 안일했다. 배고픔보다 더한 고통이 같은 민족으로부터 받는 차별이라는 것이 탈남과 재입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92


2007년 작고한 이기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식사 자리에서는 음식이 담긴 그릇을 앞에 두고, "그릇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함부로 만지지도 담지도 말라"는 또 하나의 당부를 하셨다. 만들어져가는 그릇에 뜨거운 물을 붓거나 손자국을 낸다면 기형적인 모습으로 완성된다는 의미였다.  95


2007년 4월, 32명을 사살하고 17명이 넘는 이들에게 부상을 입혀 세계를 경악케 했던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주범은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난 미국 영주권자였지만, 미국민들은 그를 한국인 모두와 동일시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미국인들의 분노가 한국과 한국인을 향할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미국 언론들은 오히려 이 사건을 이민자 출신의 국민을 제대로 포용하지 못한 미국사회의 문제로 보도했다. 서독에서 간첨 사건이 터질 때 서독에 정착한 탈동독민은 불이익을 받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탈동족민도 서독의 국민이라는 이념적 포용력과 성숙한 인식이 서독사회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독일이 보여준 성숙한 의식을 우리는 언제쯤 확인할 수 있을까.  98


학부 전공 수업에서 들었던 인상 깊은 문장이 아직까지도 뇌리에 남아 있다. "민주주의는 일방적 동화(同化)를 강요하지 않는다."  111


통일로 한 걸음씩이라도 나아가기 위해서는 북한 사람들에게만 일방적 동화와 적응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북한을 모르고서는 함께 살아가야 할 통일도 없다. 독일 통일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도 국민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베를린장벽 붕괴를 주도한 것은 동독 시민이었지만, 통일 국가를 위한 국민투표를 추동하며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라고 외쳤던 이들은 동독과 서독 시민 모두였다. 합법적 방식과 민주적 절차를 통해 동독은 자기보다 우월한 서독으로의 평화적인 체제 이행을 단행했다. 서독으로의 편입을 선택한 동독 시민에게는 통일 국가에서 동등한 주체로 대접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꿈이, 동독 시민을 받아들인 서독 시민에게는 민족의 소망을 이뤄내기 위해서라면 경제적 비용을 비줄하겠다는 각오가 있었다. 오늘날 유럽연합을 주도하는 통일 독일의 저력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111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북한 사람들이 지금의 한국사회에 만연한 탈북민에 대한 자별과 배제를 목격하고, 자신들을 향한 천민자본주의적 행태를 경험한다면, 가까스로 통일을 이워내더라도 그 통일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옛 소련의 해체를 예언했던 정치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전쟁이 끝난다고 평화가 찾아오는 게 아니며 그 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전쟁보다 더 잔인한 것일 수도 있다"라고 했다. ..

나는 통일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다시 타오르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 통일은 한밤중에 얻는 '대박'보다는 시나브로 '작은 통일'이 모여 결실을 맺는 끈기와 인내의 열매여야 한다.  114-115


공문서와 여권 등에 새겨진 각인은 점차 지워지고 있지만, 한국사회 안에서의 주홍글씨는 더욱 선연해지고 있다.

언젠가 북한 말투를 고쳐 신분을 세탁해보려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표준말을 따라하다가 감정이 북받쳐 크게 울었던 날이 있었다. 그날 깨달았던 것은 분단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탈북자'란 꼬리표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121



서북청년단은 해방 직후 북한이 단행한 친일 숙청과 토지개혁등에 의해 탄압받고 재산을 빼앗긴 이북의 청년들이 남한으로 내려온 후 만든 반공단체다. 지주, 자본가, 개신교도, 민족주의자, 친일파 등으로 구성된 이들은 대부분 황해도와 평안도 출신들이었다. 공산당에 의해 재산을 빼앗기고 고향에서 쫓겨나듯 도망쳐야했던 아픈 경험 탓에 북한의 공산당뿐만 아니라 남한의 진보적인 세력까지도 '빨갱이'로 매도하며 거부감과 증오를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특히 남한에 내려온 후 아무런 기반도 없는 처지와 경제적 궁핍함으로 인해 생존이 막막한 현실이 서북청년단의 잔혹성을 키웠다. 서북청년단은 점차 폭력과 테러 등을 통해 존재를 과시했다. 

학자들은 해방 후 한국전쟁까지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월남자 숫자를 80~10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신윤동욱, "박근혜 이후를 묻다", [한겨레21] 1153호, 2017) 이들은 북한에 대한 피해 의식으로 반공, 반북 이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미군정과 우익 세력은 이러한 성향을 간파하고 이들을 최대한 이용했다.  130


서북청년단은 창단 직후부터 미군정과 경찰의 비호를 받고 서북 출신 재력가들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으면서 무소불위의 세력이 되었으며 잔악한 활동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131


1949년 6월 26일 정오 무렵, 서북청년단의 간부였던 안두희는 경교장에 들어가 백범 김구를 암살했다. 그들은 정치 지도자뿐만 아니라 좌편향이란 혐의를 씌워 현직 검사에게 테러를 감행했으며 문화계 인사들이 모인 부산극장에 다이너마이트를 던지기도 했다. 큰 공로를 세운 단원들은 경찰과 군에 취직이 되었고, 이들처럼 출세하려는 이들의 부역 활동은 더욱 극렬해졌다.

서북청년단의 대표적인 만행이 바로 제주 4.3 사건 중에 일어났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로 민간이 6명이 사망한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소요 사태와 무력 충돌,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 당시 30만 명 정도였던 제주도민 중 3만 명 이상이 학살되었는데, 제주도를 피로 물들게 한 이 학살을 주도한 것이 바로 서북청년단이다. 얼마나 끔찍한 학살과 엽기적 만행이 있었는지 지금까지도 정확한 피해 규모조차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132-133


서북청년단은 이 시기에 벌어진 광기의 학살에 가담한 테러 조직이라는 역사의 오명을 쓰게 되었다. 오죽하면 당시 민군정청 사령관이었던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마저 서북청년단의 만행을 보고 진저리를 치며 단체 해산을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결국 이들의 존재는 이승만 정권에게도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왔고, 1948년 12월 모든 청년 단체를 통합해 대한청년단을 출범시켜 서북청년회를 해체해버렸다. 이후 서북청년단 출신 중 남한에서는 출세한 이가 거의 없었다.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경제적 보상도 없이 토사구팽의 신세로 전락했다.  135



남쪽이 방종이 만연한 사회였다면, 북쪽은 부자유가 숨통을 조이는 사회였다.  139


지금도 남북한 어디에도 참여할 수 없는 낯선 이방인들이 있다. 탈북민은 아직 광장을 마음것 누리지 못한다. 탈북민은 아직도 '이명준(최인훈<광장>)'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광장으로 초대받는 데 실패한 이들이, 자신이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고 깨달을 때 할 수 있는 선택이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이 ㄹ수밖에 없다. 제3국으로의 탈남, 아니면 북한으로의 재입북, 다시 재탈북.... 아니면 이명준과 같은 최후의 선택.

1950년대의 이명준처럼, 탈북민은 지금도 북한과 관련된 안 좋은 사건이 터지면 빨갱이라는 말을 듣고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한다. 끌려가서 린치를 당하는 일은 없지만 온라인 댓글과 오프라인에서의 수군거림은 기실 폭력보다 더 매섭고 아프다. 취업도 어렵고 저임금 3D 업종에도 감사하라고만 한다. 차별과 편견에 대해 입을 열면 곧바로 너희의 조국인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나한에 입국 후 얼마간은 안도감을 느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탈북민은 고통스럽고 힘들어한다.  143


유엔난민기구(UNHCR)가 2017년 6월에 발표한 [연간 글로벌 동향 보고서]에 의하면, 외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탈북민이 1,422명, 난민 지위를 받으려고 신청 대기 중인 탈북민이 533명에 달한다.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통계와 이처럼 차이가 나는 이유는 탈남하는 이들이 난민 심사에서 탈락해 강제 추방되거나 해외 정착에 실패할 것을 대비해 임대아파트 등은 정리하지 않고 떠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00년대부터 탈북민사회에서는 '탈남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한동안 해외의 남민 심사에서 한국 국적을 가진 탈북민의 추방 조치가 강화되자 탈남 바람이 주춤하기도 했지만, 최근 캐나다와 영국처럼 한국 국적의 탈북민도 신변의 위험과 위협 등의 상당한 이유가 있다면 난민과 이민 신청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늘고 있다. 

목숨 걸고 경계선을 넘어 한국에 왔으나 극심한 빈곤을 겪고 다시 한국을 떠나려는 사람들, 다시 목숨을 걸고 북한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 한국도 북한도 마땅치 않아 다른 나라에 난민 신청을 하는 사람들... 과연 그들은 자유와 전엄의 땅에 닿을 수 있을까.  188-189


나는 이곳에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것들을 겪었다. 아프고 힘들었던 경험도 재산이라고 스스로 위로로 삼았다. 인내하며 얻어낸 여러 성취의 결과에도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탈북민에 대한 한국사회의 일그러진 민낯 앞에서 나는 여전히 절망하고 좌절한다. 대학교수로 일하는 나조차도 보통의 시민들을 제대로 마주 보거나 말을 건네기가 조심스럽다. 나도 이러한데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탈북민이나 사회적 지위가 빈한한 이들은 얼마나 힘들까.  189




맺는말


대부분의 국민들이 통일을 말하지만 이를 준비하려는 사람은 드물다. '먼저 온 통일'이라 했던 탈북민이 3만 명을 넘어섰지만 그들과 함께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가물다. 탈북민에 대한 무관심만큼이나 통일 이후에 대한 고민도 극히 적다.  191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자 백범 김구 선생은 "아, 왜적 항복! 이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었다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라고 통탄했다. 이역만리에서 풍찬 노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해왔건만 조선의 해방은 우리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해방을 이룬 것이 아니라 해방을 당한 것이라는 그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고 새로운 비극인 분단이 찾아왔다.  195-196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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