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지성을 위한 교양 필독서 21세기 중동과 이슬람 문화의 이해)


급변하는 오늘의 중동-이슬람 30가지 질문


4 각자도생을 택한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의 수교
범이슬람주의는 20세기 초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면서 끝났다. 1960년대 석유수출국기구(OPEC) 결성으로 위력을 발휘했던 아랍 민족주의도 수명을 다했다. 1949년 터키를 필두로 이집트, 요르단 등 이슬람 국가가 오랜 적국인 이스라엘을 승인하고 수교를 감행함으로써 ‘움마툴 이슬람(이슬람 공동체)’이나 무슬림 형재에를 내세우던 느슨한 연대도 빛을 잃었다. 이런 결과는 아랍 각국의 각자도생으로 연결됐다. 이란과 이라크가 같은 시아파 국가이면서도 8년 전쟁(1980~1988)을 치렀고, 1990년에는 이라크가 이웃 아랍 형제국인 쿠웨이트를 점령했다. 곧이어 벌어진 제1차 걸프 전쟁 때는 다국적군을 도와 아랍 국가들이 앞다투어 이라크 공격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또 2017년 6월에는 같은 걸프 형제 국가인 카타르를 상대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등이 단교를 선언함으로써 이제 중동은 종교 대신 실리를, 형제애 대신 왕정 이익을 선택하는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다만 무슬림의 심장에 각인된 팔레스타인 문제만은 별개였다.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긴 팔레스타인의 비극과 1967년 3차 중동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아랍 영토 불법 점령에 대해서는 누구도 양보하지 않았다. 이것은 인류의 보편 가치에 대한 도전이고 유엔 안보리 만장일치 결의안이나 국제법의 위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수교는 무슬림 공통의 연대 가치였던 팔레스타인 묹2ㅔ조차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내팽개칠 수 있다는 우려와 위기의식을 이슬람 세계에 강하게 던져 주었다. 팔레스타인 정부 재정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던 사우디 왕정이 이스라엘과 협력 체제를 구축하면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재정 지원을 대폭 삭감했다. 더구나 걸프 산유국들이 묵시적 동조로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강하게 밀어붙인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지 정착촌에 대한 실효적 지배도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물론 아랍에미리트 측에서는 양국 수교 조건에 이스라엘의 서안 지구 정착촌 병합을 포기해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하지만 지난  50여년간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점령하면서 그들이 이주시킨 60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는 기존 정착촌을 강제 철거하는 문제는 해결될 수가 없는 상황이다.  31-32


5 시리아 내전의 원인과 현황
시리아 내전은 10년(2011~2021)간 계속되더니 일단 유혈 충돌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철군을 선언한 이후 사실상 내전 개입을 포기했고,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지지하던 러시아가 사실상 시리아 통제권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아사드 대통령의 정치 권력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동안 아사드 정권의 뒤에는 러시아와 이란이 버티고 있었고, 반군은 미국, EU,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지원을 받았다. 전형적인 국제 대리전 양상을 띤다. 그 과정에서 2천만 명 국민 중에 약 1,300만 명이 난민이 되어 고향을 등졌고, 50만 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이 영문도 모른 채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가족 곁을 떠나간 정확한 생명의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제2ㅊ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참극이다. 양측의 목표는 정권 획득이지만, 그 과정과 결과는 자국민의 살상과 초토화된 삶의 기반이다. 시리아 내전이 안고 있는 악마 같은 모습이다.
시리아 내전의 도화선은 2011년 아랍 세계를 뒤흔든 재스민 혁명이었다. 튀지니, 이집트 예멘의 독재자들을 끌어내린 분노의 함성은 시리아 독재자 아사드에게로 향했다. 시리아는 구조적으로 국민의 70%를 차지하는 이슬람 수니파가 정권에서 소외돼 억압받는 처지에 있었고, 15% 정도에 불과한 소수 종파인 시아파 계열 알라위 그룹이 국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리아 시위는 비무장으로 출발한 다른 아랍 국가들의 민주화 시쉬와는 달리 애초부터 하마시를 중심으로 한 무장 투쟁으로 시작됐다. 그것은 1982년 하마 대학살의 악몽으로 인한 후유증이었다. 당시 바샤르의 부친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이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던 하마시를 봉쇄하고 정규군을 파견해 약 3만 명의 무고한 시민을 무차별 학살했던 끔찍한 사태였다.
시리아 사태가 2011년 아랍 민주화 물결의 영향을 받아 반정부 시위로 촉발됐으나 비무장 민중 항쟁이 아닌 반군의 무장과 함께 곧바로 내전으로 변질한 배경이다. 러시아는 시리아가 위치한 동부 지중해 타르투스 항구에 군사 거점을 확보하고 미국 독무대인 중동에 진출하려는 강력한 욕구 때문에, 중국은 중동에서의 에너지 협력 체제를 지키고자 반미 전초 기지인 시리아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이란은 이라크-시리아-헤지볼라-하마스로 이어지는 반이스라엘 사아파 벨트의 전략적 이익 때문에 가장 적극적으로 시리아 정권을 지원하고 있다. 더욱이 미국의 극심한 경제 제재와 핵 포기 압박으로 사면초가 상태인 이란이 이웃의 동맹 시리아까지 잃는다면 자국 안보 전략과 중동 패권 구도에 결정적 허점을 안게 되기 때문이다.
터키는 물 문제와 쿠르드 반군 문제로 오랫동안 시리아와 반목해 왔다. 유프라테스강 상수원을 장악하고 있는 터키가 22개의 대형 댐을 조성해 시리아로 흘러 들어가는 방류량을 조절하고 있고, 이에 맞서 시리아는 터키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쿠르드 반군들을 지원하거나 훈련 캠프를 제공해 왔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하는 아랍 걸프 국가들은 시리아가 소수 시아파 정권으로 친이란 노선을 걸어왔던 점 때문에 불편한 관계였고, 시아파 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수파 수니 정권으로 환원한다는 의미에서 아사드 정권 붕괴를 내심 부추기고 있다.
이처럼 상충하는 이해관계 때문에 시리아는 이미 민주 항쟁을 통한 독재 정권 타도 시기를 놓치고 무고한 민간인 인명 피해만 자초했다. 40여 개에 달하는 야권 그룹의 분열, 서방과 아랍의 지원을 받는 다양한 반군 무장 그룹의 게릴라식 분산 투쟁도 아사드의 정치 생명을 연장해 주고 말았다. 이슬람 국가(ISIL)와 급진 이슬람 무장 세력인 알누스라 전선도 한때 반군 세력의 주축을 이루었을 정도로 반아사드 세력은 오합지졸의 대연합이었다.
그 결과 시리아 내전은 러시아와 이란이 지원하는 정부군의 우세로 이미 결정이 난 상황이다. ISIL 궤멸 이후 나토(NATO)의 맹방인 터키마저 시리아 전선에서 러시아와 보조를 맞추으로써 미국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9.11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이 중동에 개입한 이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이어 세 번째 맛보는 처절한 실패다.  
그동안 러시아와 시리아 정권은 반군 세력과의 전쟁을 ‘대테러전쟁’으로 규정하면서 서방의 비도덕성과 테러 집단과의 야합을 부각해 왔다. 이는 시리아 반군 핵심에 국제 테러 조직인 ISIL과 알누스라 전선 같은 강경 테러 세력이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리아 내전이 아랍 민주화 시위의 연장선이나 독재 정권 제거를 위한 민주화 투쟁이 아니라 치졸하고 복잡한 강대국의 이권과 경쟁의 플랫폼으로 변질해 버린 슬픈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따라서 미국이 빠지고 러시아와 독재 정권이 주도권을 잡는 시리아의 미래는 더욱 아담해 보인다.  34-37


6 왜 시리아 난민을 국제 사회가 책임져야 하나?
시리아 내전은 더는 시리아 국민 간의 전쟁이아니다. 자국 이익 확보에 혈안이 된 국제사회가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집요하고 무분별하게 개입해 벌이는 국제 살육전쟁이다. 러시아와 미국의 일차적 책임이 훨씬 무겁다는 이야기이다. 정부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삶의 기반을 잃은 자들이 떠나면, 이번에는 반군이 공격해 다마스쿠스와 다른 도시를 초토화한다. 더욱 무서운 것은 화학무기를 포함해서 가공할 첨단 무기를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는 점이다. 가족과 이웃을 잃고 폐허가 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폭격의 위험이 덜한 곳을 향해 죽기살기식 이주를 하면서 난민이 된다.
시리아의 남쪽 국경은 요르단, 북쪽 국경이 터키, 서쪽 국경레바논과 이스라엘이고, 동쪽은 이라크다. 그 국경을 막으면 눈앞에서 수백만 명의 난민들이 그냥 죽어 나간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짓이고 인간의 이름으로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된다. 그래서요르단은 국경을 열고 100만에 가까운 시리아 난민을 수용했다. 요르단에는 이미 70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유입돼 있고, 요르단 전체 인구 950만 명 중 팔레스타인 사람이 요르단 토착 인구보다 더 많은, 난민 수용 국가가 된 지 오래다. 1인당 국민 소득 5천 달러 수준으로 그렇게 잘 살지도 못하는 나라지만 이웃 형제들을 외면할 수 없는일이다. 현재 준전시 상황으로 혼란스러운 동쪽의 이라크에서도 시리아 난민 30만 명 정도가 생명을 부지하고 있다. 시리아 땅인 골란고원과 베카 계곡을 강제 점령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시리아 난민을받아줄 리 없다. 정정이 혼란스럽고 경제적 파탄 상태에 있는 레바논조차 100만 명 이상의 시리아 난민 이웃을 받아들였다. 문제는 북쪽국경이다. 비교적 경제적 여유가 있고 정치적으로 안정됐으며, 무엇보다 유럽으로 향하는 관문인 터키 국경으로 수많은 시리아 난민이몰려들고 있다. 공식 통계로는 360만명 정도, 실제로는 400만 명이상의 시리아 난민이 터키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시리아 난민들은 국내 다른 도시나 이웃 중동 국가에 둥지를 틀었지만, 일부는목숨을 걸고 그래도 삶의 질이 보장된 유럽으로 향하고 있다. 유럽연합과 터키가 '난민 유입 금지 협약'을 맺어 터키를 통한 유럽 유입이힘들어지자 시리아 서부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작은 배에 목숨을 걸고 유럽행을 감행하고 있다. 소위 보트 피플이다. 구조 장비도 제대로 없는 작은 보트에 과잉 승선으로 중간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도 천신만고 끝에 유럽 땅을 밟은 사람이 120만 명이나된다. 독일이 그중에서 80만 명 정도를 선제적으로 받아 주었다.
이처럼 시리아 내전은 이미 미국, 유럽, 러시아는 물론 이웃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이란 등 중동 국가들이 개입하는 그야말로 국제대리전의 양상을 띤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물론이고, 무엇보다 당장 목숨 부지가 어려운 난민을 이웃 국가와 국제 사회가 책임져야 하는 이유다. 여기서 독일이 선뜻 왜 그 많은 시리아 난민을 수용했는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엄청난 여론의 반대와 정치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내린 결정이다.
태생적으로 유럽은 근대 200년간 식민 통치를 하면서 피식민지 이민자들을 국가 발전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받아들인 다문화사회였다.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피식민 국가들의 노동력 덕분에 많은 유럽 국가가 기본 노동력 인구를 유지하면서도 나라가 발전하는셈이다. 앞으로도 이런 구도는 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이민을 받아들이려면 인도적인 입장에서 시간을 끌다가 마지못해 숫자 채우듯이 받아들이는 것보다 선제적으로 선별해 능력과 실력을 갖춘 전문 인력을 우선 받는 것이 훨씬 유리할 것이다. 이것이독일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범죄자가 섞여 들어오고 불순분자나 급진 테러 조직이 유입된다면 사회 불안 요인이 커진다. 더구나 이슬람문화라는 이질적인 문화가 확산되면 사회에 불협화음이 생기고 유럽 주류 문화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 난민 수용 반대론자들이 우려하는 핵심 이유이며, 물론 정당한 걱정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회적 역동성을 유지하는 데 이민이 필수적이라면, 극소수가 저지르는 범죄나 테러 가능성보다 역동성과 노동력 기여 등 순기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에 난민 수용 결정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 인구 절벽의 다문화 시대에 이민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에게도 좋은 시사점이 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1,200명가량의 시리아 사람들이 내전을 피해 입국해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주로 서울 장안동 일대에 집단 거주하면서 중고 자동차나 자동차 부품을 시리아로 수출해서 상당한 경제적 부를 쌓고 있다. 우리나라와 수도 맺지 않고 아직도내전 중이라 위험한 시장을 그들은 고향처럼 활용하며 돈을 벌고 가족을 보살피면서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후일 내전이 끝나고 그들대부분은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가족들이 시리아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려울 때 자신들을 거두어 준 한국을 잊지 못하고,한국에서 배운 우리말과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도 경제 활동을 하고두 나라 사이에 문화적 가교가 될 것이다. 항상 역기능과 함께 순기능도 생각하면서, 국제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글로벌 시민 의식을 동시에 고취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38-42


7 예맨 내전과 난민 문제의 핵심은?
2014년 시작된 예멘 내전은 6년을 넘기고 있다. 본질은 국내 네 파벌의 알력다툼과 권력 투쟁이다. 수도 사나를 중심으로 서부 해안 지대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무함마드 후티 세력, 동부 일부를 장악하고 있는 만수르 하디 대통령세력, 남부과도위원회 세력, 알카에다 잔존 세력 등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각자도생을 위해 갈등하고 있다. 이런 구도에서 사우디가만수르 하디 정권을, 이란이 후티 연합 세력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면서 사실상 양국 대리전 양상을 띠고 있다. 여기에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의회의 반대에도 사우디에 군사를 지원하고 있고, 아랍에미리트가 예멘 남부과도위원회를 지원함으로써 아랍 국가 간 분쟁으로도 확산하고 있다.
예멘은 196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남과 북 두 나라로 쪼개졌다. 지금 후티가 장악한 북부는 자본주의 체제가 들어섰고, 구소련이 통제한 남예멘은 사회주의로 출발했다. 1990년 북예멘이 남쪽을 병합하면서 명목상 통일이 이루어졌지만, 통합은 요원했고 압둘라 살레 대통령의 일인 독재와 부패는 갈수록 민심을 잃어 갔다.2004년 최초의 조직적인 반정부 저항이 일어났다. 후세인 바드레틴후티가 이끄는 북부 시아파 지역이 시작이었다. 오랜 차별과 박해에시달려 온 후티 세력은 수많은 희생을 딛고도 복수와 독재 타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2011년, 아랍 민주화 운동은 예멘에 봄바람 같은 희망이고 도전이었다. 분노한 시민은 포악한 독재자 살레 대통령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성난 민심을 피해 사우디로 도망갔다. 대혼란과 정치적 우여곡절 끝에 당시 부통령이었던 만수르 하디가 2년간 대통령을 맡기로 했지만,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계속 집권했다. 공정한 선거를 통해 민의를 수렴할 여건도, 바닥에 떨어진 삶의 형편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2014년 후티 세력이 등장해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다. 새로운 헌법을 만들고 정부와 의회를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사우디로 쫓겨난 살레 전 대통령이 후퇴를 강력하게 지원했다. 참으로 아이러니다.
후티는 사우디와 북쪽 국경을 맞대면서 정적 하디 대통령을 지원하는 사우디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후티 정권은 곧바로 서방에서 반군으로 지칭되기 시작했다. 이를 놓칠세라 같은 시아파인 이란이 개입해 고립무원인 후티의 최대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다. 위기를 느낀 사우디는 2017년부터 내전에 직접 개입하면서 후티에 대한 군사 공격을 사실상 주도하고 있다. 이제 예멘 내전은 후티와 사우디의 전쟁이 됐고, 미국과 이란이 각각 후원자 역할을 하는 구도가 됐다. 사우디의 무차별 미사일 공격으로 예멘의 민간인 수만 명이 희생됐고, 홍해 연안의 유일한 보급인 후다이바항을 봉쇄하면서 수십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 사회 기반 시설이 붕괴한 상황에서 콜레라까지 창궐해 세계보건기구 보고서에 따르면 엄청난 참극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 후티의 반격 대상은 당연히 사우디아라비아다. 이제까지 수십 차례의 드론 공격으로 사우디에 크고 작은 타격을 주었지만, 군사적 열세로 번번이 한계를 절감해 왔다. 극단적인 보복의한 형태가 2019년 9월 14일 벌어진 사우디 동부 아람코 탈황 시설에대한 드론 공격이었다. 현재로서는 공격 주체가 이란이라기보다는이란의 기술적 지원을 받은 남부의 이라크 민병대인 것으로 보인다.예멘 내전이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기 전에 국제 사회가 적극적으로개입해야 하는 이유다. 세계 경제의 급소를 공격하는 무모하고 비열한 공격을 결코 용서할 수 없지만, 드론 공격의 빌미가 된 건 무고한예멘 민간인을 무차별 공격하고 있는 사우디의 군사 행태다. 여기에는 국제 사회가 강한 제동을 걸어야 한다. 예멘 내전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탈중동 외교정책에 따라 후티 반군 소탕을 위한 군사지원 중단을 선언함으로써 사우디와 후티 간에 타협의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다.  43-45


9 수니파 벨트와 시아파 벨트, 종파 구도인가 이해 판도인가?
이슬람교는 크게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뉜다. 중동 내 여러 이슬람 국가도 종파에 따라 뭉치고 헤어지는 양상을 보인다. 과연 그럴까? 표피적으로 보면 그럴듯하지만 조금만 심층으로 들어가면 종파보다는 또 다른 국익과 이해관계가 본질을 이룬다. 현재 수니파 국민이 다수인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정점으로 쿠웨이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예멘, 오만 등 걸프 국가, 요르단, 레바논,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 지중해 국가, 이집트, 튀니지, 모로코, 알제리, 수단, 소말리아,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국가들이 포함된다. 동남아시아나 터키와 중앙아시아 튀르크 공화국 등 아시아 국가도 대부분 수니파이다. 시아파 국민이 다수인 나라는 이란을 필두로 이라크, 바레인, 아제르바이잔 정도이다. 수니파가 이슬람 세계의약 90%를 차지하기 때문에 그런 구도가 형성된다.
그중에서 주민 다수가 수니파이지만 시아파 소수 정권이 지배하는 이슬람 국가가 시리아이고, 수니파가 다수이지만 시아파 소수왕정이 다스리는 나라가 바레인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권력 구도의 모순으로 정치적 투쟁과 종파적 시위가 그치지 않는다. 이라크도 오랫동안 시아파 다수 주민을 소수 수니파 사담 후세인 정권이 독재하면서 문제가 됐다. 사담 후세인 몰락 이후 권력이 뒤바뀌어 일부 수니파 기득권 세력과 군벌들이 이라크의 알카에다 잔존 세력이 되었다가 2014년 ISIL 출현에 직접적인 토양이 됐다.
그러나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 소수인 시아파가 수니파와 공존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 공존과 화합이 가장 잘 이루어지는 모범적인나라 중 하나가 아제르바이잔이다. 아제르바이잔에는 종파적 개념이거의 없고 서로가 협력하며 아제르바이잔이라는 민족 정체성이 훨씬강하다. 두 종파는 자연스럽게 결혼하고 서로 긴밀하게 사업도 한다.무엇보다 수니파와 시아파가 한 모스크에서 자연스럽게 함께 예배를본다. 수니파 중심 국가지만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예멘,쿠웨이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타지키스탄 등에서는 상당한 비율로 시아파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소수파에 대한 차별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커다란 마찰 없이 공존과 협력 속에 살아가고 있다.
아예 법으로 권력 분점을 정하는 나라도 있다. 대표적인 다종교-다 종파 국가인 레바논에서는 기독교 마론파가 대통령, 수니파가 총리를, 시아파가 국회의장을, 드루즈가 국방부 장관을 맡도록제도화해 종파 간 갈등을 피해 가고 있다. ISIL는 급진 수니파 이념에투철하지만, 사우디나 다른 수니파 국가들은 ISIL의 적극적인 퇴치에앞장섰고, 팔레스타인 하마스는 수니파지만 사우디아라비아보다 오히려 이란과의 협력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레바논도 시아파가 전체인구의 약 25%에 불과하지만, 시아파 헤지불라가 정권을 잡고 그 정권을 유지하려고 이란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다. 예멘도 수니시아파 대결이라기보다는 이란이 시아파인 후티를 전격 지원하고사우디가 수니파 정치 세력을 보호하면서 종파 간 내전으로 보이는것이다. 즉 사실은 철저하게 사우디-이란의 국익 대리전 성격일 지닐 뿐이다.
초기 이슬람 정권의 후계자 계승 방식에서 마지막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통을 중시하는 집단이 시아파이고, 혈통보다는 공동체 합의 방식을 채택한 정치 집단이 후일 수니파로 불리게 됐다. 두 종파의 차이와 특징은 앞으로 자세히 다루겠지만, 꾸란과 하디스라는 기본 성서를 받아들이는 방식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시아파에서는 이맘이라는 최고 종교 지도자를 인정하고 성직 계층을 강조하는 반면, 수니파에서 20세 이상 성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이맘이 될수 있고, 이맘은 예배를 인도하는 기능적 역할을 할 뿐이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예배 방식이나 신비적인 종교 관행에서도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종교적 분파라기보다는 정파적 성격을 띠고 발전했다.  53-55


11 미국은 왜 그토록 이란을 싫어하는가?
모함마드 모사데크(1882~1967)는 스위스 로잔에서 법학을 공부한 엘리트 민족주의 정치가다. 1951년 이란 총리로 취임한 그는 석유라는 엄청난 부를 가졌음에도 국민은 가난하고 미국의 석유 재벌들만배를 불리는 구조를 개선하고자 석유 국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이에 자국 이익을 지키려고 했던 미국은 1953년 8월 미국 중앙정보국이 직접 개입해 군사 쿠데타를 통해 모사데크 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시 성공했다. 이 사건은 이란 국민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이란인에게 미국이라는 거대한 악의 실체를 깊이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동시에 주변 중동 국가들이 미국에 깊은 불신과 가까이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게 된 계기였다.
오랫동안 고통에 빠진 이란 국민이 친미 팔레비 왕정을 몰아내고 1979년 2월 이슬람 시민 혁명으로 새로운 이란을 만들었을 때 당연히 반미 노선을 추구했다. 그 과정에서 일부 과격분자들이 테헤란주재 미국 대사관을 공격해 대사와 외교관들을 인질로 붙잡고 무려444 일 동안 감금한 사건이 발생한다. 여러 차례 구출 작전에 실패하면서 미 대사관 인질 사건은 당시 세계 최강국 미국에 지울 수 없는수치와 모욕감을 안겨 주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란과의 외교를단절하고, 곧 경제 제재를 단행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이란 이슬람 신정 정권을 붕괴시키고자 미국은 1980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부추겨 무려 이란-이라크 8년 전쟁을 획책한다. 이번에는 거꾸로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해 한때 동지였던 사담 후세인정권을 무너뜨리고, 이웃 이란을 압박하려 했으나 이마저 실패했다.그것은 이라크 전쟁으로 사담 후세인이 사라진 이후 미국이 앉혀 놓았던 이라크 시아파 정권이 오히려 강력한 반미를 외치며 같은 시아파인 이웃 이란과 협력 관계를 강화하면서 이라크 내 미군을 공격하는 역설이 벌어졌다. 이에 정책 노선을 바꾼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5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및 독일과 공동으로(p+1) 이란과의 핵 평화 협상을 전격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극단적 대결 구도에서 중동 최대 시장인 이란을 끌어들여 서로 '윈윈'하면서 메가 시너지를 얻겠다는 과감한 발상의 전환을 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자의 평화 협상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초강경 이란 압박 정책으로 회귀하면서 중동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 긴장을또다시 고조시켰다. 2020년 1월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직접 명령으로 이란 혁명수비대 총사령관이자 권력 서열 2위인 반미 선봉장 거넴 슐레이마니 장군을 이란 공식방문중 표적 살해했다. 이로써 국제 사회가 경악했음은 물론, 미국과 이란 관계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연이어 2020년 3월부터 활성화된 이란 내 코로나-19 바이러스위기 상황에서 인도적 기초 의약품 수출마저 미국에 의해 봉쇄됨으로써 이란인의 미국을 향한 불신과 적대감은 더욱 깊어졌다.
미국과의 실패한 핵 협상 결과, 협상 당사자였던 이란의 온건파대통령 하산 로하니는 쓸쓸하게 물러났다. 대신에 2021년 6월 대선에서는 대법원장 출신의 강경파 신학자 에브라힘 라이시가 새 대통령이 되었다. 미국에서도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서 파기됐던 핵협상(JCPOA, 포괄적 공동행동계획)을 재개하면서 이란과의 화해 접점을 찾으려 하고 있다.  64-66


12 이슬람 세계는 왜 그토록 미국을 싫어하는가?
유럽은 많은 것을 이슬람으로부터 배웠다. 그 첫 단추는 십자군 전쟁이었다.
물론 문화 전파에서 가장 획기적인 계기는 항상 전쟁과 교역이었지만, 십자군 전쟁이 유럽에 가져온 변화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들은 동방의 우수한 문화에 압도됐고,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닥치는 대로 죽이고 약탈하고 파괴하면서 이슬람 문화를 배우고 터득했다.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의 예루살렘 침공은 역사상 길이 기억될 치욕이었다. 40일간의 포위 끝에 함락한 예루살렘 성안에서 유대인과 무슬림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성안의 이슬람 사원과 유대 전통 등 소중한 문화유산은 철저히 파괴됐다. 몇년뒤 아랍 장군 살라딘이 다시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때, 그곳에 있던 기독교인에게 손 하나다치지 않도록 관용을 베풀었던 광경과 비교하면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69

이스라엘의 건국과 미국의 일방적 친이스라엘 정책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주도해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분할된 유대 국가 창설을 통과시키고, 1948년 5월 14일 아랍 영토에서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다. 이때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는 끊임없는 전쟁과 갈등, 테러의 연속이었고,기나긴 60여 년의 세월 동안 미국은 거의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두둔해왔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한 다음 날 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압도적으로 승리했고, 그 후 발생한 네 차례 전쟁에서 아랍 진영은 모두 패했다. 아랍인은 자신들의 패배가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일방적인 원조 때문이라고 여기며 두 나라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그 후에도 지금까지 미국은 팔레스타인 평화 협상에서 한 번도 국제 사회의 책임 있는 국가로서 버림받은 약자의 편을 들어준 적이 없다.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로도 용인될 수 없는 노골적인 이스라엘 편애에 많은 무슬림이 인내를 상실해 갔다. 국제법을 위반하고 아랍을 겨냥한 수백 기의 핵탄두를 갖고 있음에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은커녕 핵확산금지조약(NPT)에도 가입하고 있지 않은 이스라엘을 미국은 무조건 감싸고 예외로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이슬람권에서는 그 누구도 산업용 프로그램조차 갖지 못하게 하는 미국의 극단적 이중 잣대(double standard)가 이슬람 세계에 좌절과 분노를 확산시키고 있다.
더욱이 미국은 시온주의 (Zionism,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 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주의 운동)를 인종 차별 이념으로 비난하고자 하는 국제 사회의 열의를 무시하고 2001년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인종 회의에 불참함으로써 이슬람 세계에 극도의 불신감과 배신감을 안겨 주었다.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고자 국제형사재판소 협약과 대인지뢰금지조약의 비준도 반대했다. 터키 총리 레젭 타입 에르도안의 최근 성명을 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유엔이 설립된 이후 이스라엘의 국제법 위반에 대한 89차례의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결행된 적이 없었다. 상대방인 아랍 국가에 대해서는 그렇게 손쉽게 제재를 가하면서도…………. 만약 유엔 안보리 결의안이 제대로 지켜지기만 했어도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은 오래전에 해결됐을 것이다.’ <타임(TIME)> 2011년 10월 10일자, 64쪽. 70-71

문제는 과거의 응어리가 너무 커서 서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급진 이슬람 그룹이다. 알카에다나 이슬람국가(ISIL) 같은 반이슬람적 무장 테러 조직이 대표적이다. 그들을 급진적으로 만든 것은 이슬람의 원리적인 해석보다는 비열한 서구의음모와 불공정한 국제 정책이었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불씨가 되었지만, 걸프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보스니아, 코소보, 체첸, 카슈미르, 아제르바이잔, 필리핀 남부모로와 동티모르 등지에서 보여 준 노골적인 '이슬람 죽이기 정책'에 더는 앉아서 당할 수 없다는 절박감이 일부 급진주의자들을 테러로 내몰았다.
지금도 미국은 아프간을 공격해 앙갚음하고, 이라크를 희생양으로 삼아 점령해 주둔하고 있다. 테러의 진정한 배경인 역사성은 덮고 지금 이 시점에 인류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문명적 범죄 집단의 응징'으로 테러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미국은 현실 중심적인 수평적 사고가 강하고, 배경과 심층적 원인이 되는 역사성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혹은 무지하다. 그런데 무슬림은 억눌린 근대 100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과거 고통의 역사를 잊지 못한다는 것이 그들이 처한 또 다른 고통인지도 모른다.
9.11 테러 후 20년, 지구촌은 테러와의 전쟁으로 모두가 고통받았다. 알카에다를 비호했다는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적 공격과 점령이 이루어졌다. 심지어 9·11 테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라크를 온갖 거짓 정보와 명분을 내세워 침략해 점령했다. 이 기회를 틈타 급진 세력들이 다시 활개 치기 시작했고, 테러와의 전쟁이 진행될수록 미국과 그 협력자들을 겨냥한 지구촌의 테러는 점점 늘어만 갔다.
알카에다 지휘부는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로 와해됐지만, 2014년 6월 29일에는 알카에다의 이라크 지부가 중심이 된 ISIL이 공식 국가를 선포하고 더욱 잔혹한 방식으로 지구촌 곳곳에 살육과 테러를 저질렀다. 이 ISIL이 사라지면서 대규모 테러 조직은 일단 궤멸됐지만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지역 테러 군벌들은 아직도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크고 작은 테러는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예멘, 리비아, 체첸 등지에서 서구의 개입이나 직접 공격으로 이유 없이 목숨을 잃은 무슬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을 향한 지원과 진정한 사과가 따르지 않고 어떻게 그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겠는가? 국제 사회가 안고 있는 큰 숙제다.  72-73


17 중동에서 미국의 과오와 해야 할 일
중동 민주화에 가장 큰 걸림돌은 사실상 미국의 잘못된 중동 정책이다. 미국은 오로지 자구그이 이익을 지키려는 일념으로 튀니지, 이집트, 예멘, 이라크, 리비아 등의 권위주의 장기 독재 정권과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폭압적 왕정을 비호하고 지원해 왔다. ..
국제법이나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마구잡이로 무시하면서 남의 주권 영토를 점령해 영구화하려는 이스라엘의 시도에 미국이 견제하고 비난하기 보다 동조하고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의 중동 분쟁이 안고 있는 아픔이다.  87-88


19 재스민 혁명은 왜 실패했나?
아랍 민주화가 성공하기 위한 선결 조건은 무엇인가? 쉽지는 않겠지만, 첫째로 국제 사회의 개입과 대리전쟁을 막아야 한다. 리비아, 예멘, 시리아, 이라크 등에서 외국 세력들이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내저너에 깊숙이 개입해 갈등 조장자 역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아랍 각국이 정파나 부족 잡단의 단편적 이해 관계보다 국익이나 미래 세대를 위한 양보와 대타협을 우선해야 한다. 마지마긍로 경제 원조나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압박을 통해 민주화가 안착될 수 있도록, 국제 사회가 평화적 중재자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이희수, <21세기 아라비안 나이트>  103


21 알카에다의 등장과 9.11테러 그리고 대테러 전쟁
알카에다는 원래 사우디의 재벌 2세 오사마 빈라덴이 주도해서 세운 국제 구호 협력 단체였다. 1979년 크리스마스 직후 소련이 기습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소련의 팽창과 남하를 막으려고 이슬람권과 미국이 소련에 맞서는 무자히딘 군벌들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10년 장기전에 돌입했다. 이때 알카에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아프가니스탄 이익 대표부 성격을 띠면서 무자히딘을 지원하는 가장 강력한 지원 조직이었다. 당연히 알카에다는 소련의 침공을 결사적으로 저지해야 하는 미국과의 협력 속에서 함께 전쟁하는 동지 관계였다. 그러나 1990년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1차 걸프 전쟁 직후, 사우디 왕정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이례적으로 미군 기지 설치와 미군 주둔을 허용하면서 왕실과의 관계가 틀어졌다. 사우디와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서 본격적인 대미 무장 공격을 개시했다. 그동안 아프리카와 중동 여러 곳에서 수십 차례 미국 시설에 대한 군사 공격을 감행하던 중, 결국 2001년 9·11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워싱턴의 국방성 펜타곤, 대통령 집무실 백악관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는 9.11 테러를 일으킨다. 9.11 테러는 그동안 이슬람 세계의 급진주의자들이 가져 왔던 불만과 경제적 박탈 논리의 극단적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석유가 개발되기 시작한 1900년대 초부터 오일 쇼크가 발발한 1970년대 초까지 국제 유가는 배럴당 2달러 수준이었다. 석유 1배럴이 약 159리터이므로 1리터에 15원 정도였다. 그것도 70년간이나 지금 휘발유의 최종 소비자 가격이 1리터에 2천원 정도임을 고려한다면, 당시 유통 구조의 왜곡과 서구 석유회사들의 자원 착취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생산원가나 개발비가 턱없이 낮은 중동 석유를 거의 헐값으로 가져가 오늘날 서구는 선진 공업국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는 사이 아랍 국가 대부분은 서구의 가혹한 수탈과 민족적 모멸을 경험했다. 이러한 무슬림의 울분은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빈 라덴의 정치적 선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국은 아랍 석유의 판매를 대행함으로써 노골적으로 그 수익을 도둑질하고 있다. 지난 25년 동안 석유 1배럴이 팔릴 때마다 미국은 135달러를 챙겼다. 이렇게 해서 중동이 도둑맞은 금액은 무려 일일 40억 5천만 달러로 추산된다. 이것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도둑질인 것이다. 이런 대규모의 사기에 대해 세계의 12억 무슬림 인구는 1인당 3천만 달러(약 330억 원)씩 보상해 달라고 미국에 요구할 권리가 있다. - 로레타 나폴레오니, (모던 지하드> 343쪽   106-108


22 대테러 전쟁 20년, 인류에게 무엇을 남겼나?
일반적으로 테러는 '정치, 종교, 사상적 목적을 위해 폭력적 방법과 수단으로 민간인이나 비무장 개인, 단체, 국가를 상대로 위협이나 위해를 가하는 일체의 행동'을 일컫는다. 그러나 테러의 정의나 규정은 관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미국 조지타운대의 저명한 테러 이론가 월터 라쿠어 교수는 테러 개념을 100개 이상으로 정의했다. 미국 테러 전문가들의 한계는 테러 개념을 이슬람 정치 집단에 초점을 맞추고, 공권력 남용이나 국가 테러에 대해 비교적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다.
동시에 그들은 끔찍한 테러 결과에 집착해 이를 궤멸하는 데 관심을 집중하지만, 테러의 근원적 발생 원인과 역사성, 서구의 과오에는 거의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이를테면 9·11 테러로 인류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알카에다는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인도양 진출을 막기 위해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협력 관계를 강화하면서 급성장한 테러 조직이었다. 미국의 군사 지원과 사우디 왕정의 든든한 재정 후원으로 소련의 남하를 막아 걸프만 석유라는 미국의 핵심 이익을 지켰지만, 적대 관계로 돌아서면서 미국에 부메랑이 된 것이다. ISIL이라는 조직도 따지고 보면 부시 미국 대통령의 잘못된 이라크 전쟁이 배태한 악의 씨앗이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몰락한 사담 후세인 잔당이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를 만들었는데, 이들이 ISIL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지구촌은 테러라는 괴물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미국 메릴랜드대 테러연구소가 발행하는 《글로벌 테러통계(GID)》에 따르면, 1970년부터 2017년까지 지구촌에선 18만 건 이상의 테러가 발생했다. 여기에는 8만 8천 건의 폭탄 테러와 1만 9천 명의 암살, 1만 1천의 납치가 포함돼있다. 알카에다와 ISIL이 궤멸된 이후인 2017년만해도 비공식 통계로 1,465건의 테러가 일어났고 7,775명의 무고한인명이 희생됐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주도의 대테러전쟁 결과, 지구촌 테러가 적어도 10배 이상 증가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테러분자를 궤멸하기 위한 작전이란 이름의 무차별 공격으로 또 다른 무고한무슬림 시민이 죽어 나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112-113


29 중동의 여성 파워, 여성 시대가 가능할까?
사실상 중동의 여성 문제 이해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우리의 무지에 있었다. '아랍=이슬람'이라는 인식의 등식 구도로 이슬람과 아랍의 전통 관습을 전혀 구분하지 못했다. 무엇이 이슬람의 종교적 가르침이고, 무엇이 가부장적 아랍 사회의 토착적 악습인지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오류였다. 일부다처, 가부장적, 부계 중심, 남아 선호 등은 인류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사회-문화적 현상이다. 여성 할례, 명예살인 악습 등은 이슬람 율법에서도 권장하지 않거나 심지어 범죄로 다루고 있는 일부 유목 중동 사회의 사회적 관습이다. 이슬람은 특수한 상황에서 공동체 절멸을 막기 위해 유효한 삶의 전략으로 일부다처를 허용하고는 있지만, 일부일처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꾸란에서 남녀 창조의 동등성을 강조하고 있고, 일부 꾸란의 남성 중심 표현들도 7세기 시대적 상황에서 벗어나 21세기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절대적 견해다. 이런 논지라면 앞으로 이슬람권 여성들도 서구에 못지않은 자율적인 삶의 향유와 경제적, 정치적 참여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업그레이드시켜 나아가리라는 것이 명백하다.  136-137




CHAPTER 1 잊힌 이슬람 역사와 문명의 복원


그리스 문명은 크레타에서 출발했다. 크레타 문명은 한 축으로는 이집트 문명, 다른 한 축으로는 오리엔트 문명의 지적 성취를 온몸으로 받아들여 꽃피운 종합 해양 문명이었다. 크레타 문명이 그리스 본토로 흘러 들어가 미케네 문명을 잉태하고, 끊임없는 자기화 과정을 거쳐 기원전 6세기 드디어 화려한 그리스 문화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 로마가 덧세워졌다. 건축과 예술, 신화적 구조 종교관, 과학과 철학 등 어느 하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오리엔트 문명의 지적 신세를 지지 않는 분야가 없다. 그럼에도 고대 오리엔트 문명의 실체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제대로 관심을 유발하지도 못했다. .. 서양이 공격하면 정복이나 위대한 승리지만, 동양이 공격하면 찬탈이고 파괴가 되는 우리 세계사 교과서의 서술적인 문제도 역사 왜곡에 큰 몫을 하고 있다.  146

무함마드는 서아시아의 정통적이고 오랜 사상적 기반을 가진 유일신 사상을 다시 한번 설파하면서, 혼란한 당시 사회를 정신적으로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토착 종교와 기존 구조에 대한 포용 정책, 역동적인 유목 군사 시스템을 통해 정복 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슬람 군대는 합리적인 조세 제도와 토착 주민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인정함으로써 전쟁다운 전정을 치르지 않고도 주변 지역을 쉽게 복속할 수 있었다. 이슬람 제국의 시대는 아라비아반도에서 출발해 북아프리카 모로코와 스페인 남부,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인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이슬람 종교와 문화적 유산을 남겼고, 1천 년의 대제국 시대를 거치면서 인류 문명의 성숙에 크게 공헌했다. 중세 유럽이 침체 시기에 잠들고 있을 때 그리스-로마의 지적 유산을 번역하고 재해석해 유럽에 전해 주었으며, 이를 토대로 유럽의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결정적 모티브를 제공했다.
1천 년의 이슬람 제국 시대 모두가 아랍인 중심은 아니었다. 1258년 몽골에 의해 압바스 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은 튀르크인 중심의 오스만 제국으로 이동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세계의 정교 일치적 통치권인 칼리파권을 행사했고, 192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왕정이 무너지고 터키 공화국으로 독립하면서 이슬람 세계의 명목상 통합마저 깨졌다.
오스만 제국의 멸망과 와해는 그 치하에 있던 여러 소수 민족이 독립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었다. 하지만 곧바로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 열강들이 중동 일대를 식민 통치함으로써 오늘날 중동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과 갈등의원인이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분쟁 지역인 팔레스타인만 하더라도 영국과 프랑스가 이 지역을 나눠서 차지하려고 만든 삼중의 상호 모순된 비밀 조약이 빌미가 됐으며, 국제법과 유연. 안전보장잉사회 결의안, 쌍방 간의 평화 협정 등이 지켜지지 않고 미국 등 강대국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두둔하면서 사태가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147-148

기원전 3000년경 유프라테스으 티그리스강 유역의 범람에 대비한 대규모 치수(治水) 사업을 통ㅎ해ㅐ 도시 국가를 형성하고 최초의 문명 생활을 시작한 민족은 수메르인이었다.
수메르인은 쐐기문자를 만들어 점토판에 그들의 삶을 기록해 보존했으며, 보리빵에 맥주를 즐겨 마시기도 했다. 수메르인에 의해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야말로 이후 전개되는 중동 5천 년 역사의 굳건한 모태가 되었다.  149

기원전 2350년경 셈족 계통의 아카드인이 처음 통일 국가를 세운 이후, 중동에서는 줄곧 셈계 민족들이 흥망성쇠의 역사를 주도했다. 특히 바빌로니앙 왕국은 기원전 18세기경 함무라비 왕 때 전성기를 이루어 유명한 성문법전을 남겨 놓았다.
기원전 16세기 후반에는 철기 문화를 일으킨 히타이트(Hitite)가 등장해 바빌로니아를 멸하고 세력을 떨쳤다. 기원전 15세기부터는 메소포타미아는 물론, 동부 지중해 연안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중심으로 광대한 제국들이 수시로 등장하면서 기술과 문명 전파에 가속도가 붙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 2세가 시리아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했고, 기원전 1280년 양국 간에 카데시 펴오하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단락됐다. 시리아를 평화적으로 분활한 카데시 조약은 역사상 세계 최초의 국제 조약으로 알려져 잇다. 또한 히트이트는 처음으로 철제품을 소개해 오리엔트 전 지역에 군사와 농업에서 철기 문화 시대를 열었다.  150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헤브라이 왕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한 유목민인 헤브라이인에 의해 성립되었다. 헤브라이인은 기원전 1500년경 팔레스타인 가나안에 정착했다가 심각한 기근으로 이집트로 이주했다. 파라오의 압제를 피해 모세의 인도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기원전 11세기 말에 헤브라이 왕국을 세웠다. 다비드와 솔로몬 왕 때 전성기를 누린 헤브라이 왕국은 곧 이스라엘과 유대,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 제국에 멸망당했고, 유대 왕국은 기원전 6세기 아시리아 제국에 멸망당했고, 유대 왕국은 기원전 6세기 신바빌로니아 왕국에 정복됐다. 유대교를 성립한 헤브라이인의 유일신 사상은 후일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성립과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고, 서양 문화의 바탕이 되었다. 헤브라이인의 민족사는 구약 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기원전 12세기경부터 약 300년 동안 필리스티아인(Phiistines), 아람인 (Arameans), 헤브라이인(Hebrews)이 팔레스타인-시리아 지역에서 각각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이란과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인도-유럽어계의 메디아인(Medians)과 셈계의 칼데아인(Chaldeans)이 침투해 혼란 속에서 교류와 쟁패를 거듭했다. 이러한 혼란과 분열 상태를 종식한 세력은 아시리아(Assyria)였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1300년경부터 메소파탬아 북부 지방에서 팽창했고, 기원전 8세기경 최초로 오리엔트 전 지역을 통일했다. 아시리아는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왕 때 전성기를 맞았는데, 그는 옛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쐐기문자로 기록된 방대한 점토판을 수집했다. 고대 ㅁ소포타미아의 신화와 서사시, 영웅시 등은 이 점토판 덕택에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졌다. 그러나 아시리아는 정복 일변도 정책을 펼친 결과 아슈르바니팔 왕 사후에 쇠약해졌고, 메디아를 비롯한 소수 민족의 반란으로 기원전 612년 멸망했다.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으로 오리엔트는 다시 메디아(Media), 리디아(Lydia), 이집트, 신바빌로니아의 네 나라로 분열됐다. 그중 칼데아라고도 불리는 신바빌로니아 왕국(기원전 612~538)이 가장 번영했는데, 그 중신지인 바빌론은 세계의 수도로 불릴 만큼 번창했다. 이 왕국은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 기원전 605~562) 왕 때 전성기를 맞았는데,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시리아를 확보한 후 기원전 586년에는 유대 왕국의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이때 많은 유대인이 전쟁 포로로 바빌론으로 끌려간 것을 바빌론 유수라 한다. 이 사건은 유대 문화의 오레인트의 다양한 유산이 이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151-152

이집트를 정복하고 분열된 중동을 재통일한 세력은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 기원전 338년경 그리스 도시 국가를 통일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왕에 의해 페르시아 제국은 기원전 331년 종말을 맞았다. ..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 서쪽을 지배하면서 그리스-로마 문화가 소개됐고, 이슬람이 등장하는 7세기 초까지 거의 1천 년간 동서문화의 교류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헬레니즘이라 불리는 새로운 문화 현상은 그리스 문화의 일방적 전파라기보다는 오리엔트의 오랜 문화적 토양에 그리스적인 요소가 첨가되어 독특하게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그의 제국은 네 개 국가로 분할됐다. 이집트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Ptolemaeos, 기원전 305~30), 중동에 시리아를 중심으로 셀레우코스 왕조(Seleucid, 기원전 312~64)가 성립됐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제6대 안티오코스 3세(Antidchus III) 때 국력이 절정에 도달했으나, 내부 반란으로 급격히 쇠퇴했다. 동부 지역에는 그리스계의 박트리아(Bactria)와 이란계의 파르티아(Parthia)가 독립했으며, 나머지 영토는 결국 1세기 로마에 병합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후 중동 지역은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와 3세기경 파르티아를 멸하고 이란 지방에 새로 등장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오랜 격돌장으로 변모했다.  153-154


7세기 초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오랜 전쟁으로 마비된 육,해상 실크로드를 대신한 우회 루트가 아라비아 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상로였다. 메카와 메디나는 바로 그 중심 도시였다. 이 시기에 이슬람교를 완성한 무함마드가 등장했다.
그는 메카의 명문 쿠레이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일찍 부모를 여의고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등지에서 대상 활동을 하면서 당시 혼란한 사회상에 깊이 회의했고, 기독교와 유대교 사상에도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를 고용한 여주인 카디자와 결혼한 무함마드는 사업보다는 명상 생활을 통해 병든 인간 사회의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구했다. 오랜 명상 끝에 그의 나이 40세 되던 610년 드디어 하느님(알라)으로부터 첫 계시를 받아 우상 숭배 타파, 평등과 평화르 강조하는 범세계적인 이스람 종교를 완성했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이슬람이 처음부터 주변의 호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유일신 사상은 당시 우상 숭배자들인 메카 상류층의 종교적 권위와 상업적 질서를 위협하였기 때문에 메카에서 극심한 배척을 당했다. 그래서 622년 무함마드와 그 추종자들은 메디나로 이주하여 새로운 이슬람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것을 헤지라라 하여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메디나에서 굳간한 이슬람 공동체를 형성한 무함마드는 세 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630년 메카를 무혈 재정복함으로써 획기적인 교세 확장에 성공했다.  154-155

이슬람 공동체는 632년 무함마드가 타계함으로써 후계자 선출ㄹ 문제에 부닥쳤다. 그러나 슈라(shura)라 불리는 부족 합의제 방식으로 후계자인 칼리파를 뽑아 이슬람식 민주주의 전형을 마련했다. 칼리파는 정ㅊ치와 종교를 동시에 관정하는 이슬람 공동체의 최고 통치자였다. 아부 바크르(Abu Bakr, 632~634), 우마르(Umar, 634~644), 우스만(Usman, 644~656), 알리(Ali, 656~661)에 이르는 네 명의 칼리파가 통치하는 시기를 이슬라믜 가르침에 충실한 정통 칼리파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부터 적극적인 대외 정복이 이루어졌다. .. 불과 10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이집트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 당시 비잔틴 및 페르시아의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던 시대적 상황이 이슬람의 진출을 오히려 환영했고, 이슬람 정복 과정에서 강제 게종은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
알리가 암살당하자 이슬람 제국은 다시 무아위야에 의해 우마이야 왕조로 통일되었다. 그러자 알리의 추종 세력들이 이탈해 시아파라는 이슬람의 새로운 이념 아래 결집했다.  155-156

우마이야 시기에 이르러 이슬람은 발생한 지 100년도 안 된 짧은 시간 동안 지금의 아라비아 반도를 비롯해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중국, 스페인을 위시한 유럽까지 점령했다. ..
이슬람교는 새 정복지에서 살육과 직접 통치보다 공납과 간접 통치를 선호했는데, 이 정책은 정복 주민의 환영을 받았고 이로써 무혈의 정복 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또 다른 이슬람 문화의 전파 이유는 특유의 융화력이라 할 수 있다. 아랍인은 정복을 통해 역사상 최초로 오늘날의 인도와 중국의 경계 지역, 그리스, 이탈리아 및 프랑스의 변경 지역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통합했다. 157-158

무슬림은 이교도의 종교를 인정하고 그들의 종교 생활을 보장했다. 전쟁에서 패하면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여자들은 노예로 팔려 가던 시절에 이러한 조치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다만 무슬림은 비무슬림에게 사회적, 법적인 차등 정책을 실시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무슬림보다 비무슬림에게 세금을 조금 더 많이 부과하는 인두세였다. 인두세 역시 당시 비잔틴 제국이나 페르시아 제국에 내던 고율의 세금보다 적었기 때문에 일반 국민의 부담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158-159

압바스 왕조(Abbasids, 750~1258)의 등장 배경은 단순한 군사적 음모나 쿠데타가 아니라 강력한 하부 조직과 선전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왕조의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기고, 압바스 지배층은 인종과 민족을 초월한 범이슬람 제국을 지향했다. 이리하여 후대 역사가들은 압바스 왕조를 진정한 ‘이슬람 제국’이라 부른다.  159

압바스 왕조는 5대 칼리파 하룬 알라시드(Harun al-Rashid, 786~809)와 그의 아들 마문(Ma’mun, 813~832)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때 바그다드는 당나라 장안과 함께 세계 교역과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했고, 활발한 육, 해상 실크로드의 개척으로 동서 문물이 물밀 듯이 유입했다.  측히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제지술이 종이 혁명을 불러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이 번역, 재해석되고, 학문이 꽃을 피워 이슬람의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제지술의 도입은 751년 압바스 군대의 이븐 살리히(Ibn Salih)장군과 당나라의 고선지 장군이 벌인 탈라스 전투의 결과이다. 이 전투에서 중국이 이슬람군에 패했고, 포로로 잡힌 중국 제지 기술자에 의해 종이가 이슬람 세계 전역으로 확산됐다. 더욱이 이 시기에 저술된 많은 아랍 사료에서 신라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발견할 수 있어, 우리나라와 아랍 세계와의 긴밀한 교류와 역사적 접촉을 확인할 수 있다. ..
우마이야 왕조가 망한 뒤 그 일파가 스페인에 후우마이야 왕조를 세우고 통치자가 됭어 969년 스스로 칼리파를 자칭하며 바그다드에 맞섰다. 이집트에서는 시아파에 의한 새로운 이슬람 국가가 독립해 파타마조를 열었다. 또한 바그다드의 약화는 중앙아시아에 퍼져 있던 소규모 국가들의 성장을 자극했다. .. 튀르크계로서는 카라한조와 가즈나조가 특히 중요한데, 이 왕조가 이슬람화됨으로써 중앙아시아 튀르크계 종족의 이슬람과하 가속화 됐다.  160-161

압바스 시기에 세 대륙에 걸쳐 형성된 이스람 제국은 아랍의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오리엔트, 그리스, 로마, 이란 및 인도 문화를 흡수해 독창적인 이슬람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슬람 문화의 특징은 이처럼 광대한 정복지의 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받아들여 국제적이고 종합적인 문화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161

이슬람 세계의 학문과 문화적 성취는 후일 유럽의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164

시간이 지나면서 세금도 적게 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이 주어지는 이슬람으로의 대량 개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슬람 정부는 세금 감면을 노리는 대량 개종을 막으려고 오히려 개종 금지 백서를 발효했다. 국가 수입의 증대를 위해 피정복민의 개종보다 공납을 요구한 것이다.
이럼 점에 비추어 보면, 무력에 의한 이슬람 전파는 근거가 희박하다.  165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 자신의 고유한 문화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허용된 이교도를 ‘딤미’, 혹은 ’아홀 알딤마(계약의 백성)’라 불렀다. 딤미는 무슬림 국가에 의해 허용되고 보호받는 비무슬림 시민을 일컫는 법률적 용어였다. 실제로 그들은 기독교인, 유대인, 동부 지역의 조로아스터교인을 의미했다. 딤미의 지위는 무슬림 통치자와 비무슬림 공동체 간의 계약으로 결정됐다. 계약의 기본 골격은 딤미가 이슬람의 우위와 이슬람 국가의 지배를 인정하고, 나아가 일정한 사회적 제약이나 지즈야라고 불리는 인두세 납부를 통해 딤미의 종속적 지위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물론 무슬림에게 인두세 납부는 면제됐다. 인두세에 대한 대가로 딤미는 생명과 재산의 안전, 외적의 침입 시 보호, 신앙의 자유, 자신들의 문제에서 광범위한 내적 자치 등을 보장받았다. 한편 무슬림은 1년 소득의 40분의 1을 세금으로 납부해야 하는데, 이것이 종교세의 자카트이다.
따라서 딤미는 노예보다는 훨씬 유리한 상황에 있었지만, 자유 무슬림보다는 불리한 처지였다. 그러나 딤미는 무슬림보다 열등하고 그 숫자가 미미하다 해도 거대한 부를 축적해 경제력을 행사하고, 심지어 정치적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167


오늘날 스페인 땅은 711년부터 1492년까지 거의 800년 가까이 이슬람 세계에 속하면서 중세 최고 수준의 학문, 과학, 예술, 문화 등의 결실을 유럽에 전해 주는 지적 창구 역할을 했다.(중세 ‘아랍의 르네상스’는 유럽보다 500년이나 앞섰다. 이슬람 세계의 학문적 성취는 스페인 톨레도에 설치된 번역속에서 라틴어로 번역돼 유럽에 전해짐으로써 유럽의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지적 원동력이 됐다.  169

이슬람 치하의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는 무슬림과 유대인, 기독교인이 함께 조화롭게 살던 사회였다. 공존은 800년(8세기 초 ~ 15세기 말)가까이 지속됐다. .. 떠나는 사람은 적고 몰려드는 사람은 많았다.
..
학문과 문학에서 아랍인은 고전 아랍어, 기독교인은 대부분 라틴어, 유대인은 히브리어와 아랍어를 함께 사용하면서 문호하의 혁신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170

안달루시아의 기녀비적인 건축물인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도 문화의 섞임과 조화가 만들어 낸 걸작품이다.  171

기독교 안달루시아가 가톨릭 이외의 모든 종교를 배척하자 문화 다양성의 용광로는 더 가동되지 않았으니, 이는 17세기 이후 스페인이 문화가 정체되는 이유중 하나가 되었다.  172


분열됐던 이슬람 세계는 11세기 투그릴 베이가 이끄는 셀주크 튀르크조에 의해 재통일됐다. ..
1071년 셀주크가 비잔틴군을 격퇴하고 아나톨리아와 소아시아 지역에 진출함으로써 이 지역이 이슬람화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셀주크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비잔틴 제국에 대한 압박은 십자군 전쟁을 유발하는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세력과의 격돌이라기보다는 기독교 내부의 이권 다춤과 물자 약탈이 주가 되었다.
셀주크조는 1157년 술탄 산자르(Sanjar)의 사후 여러 공국(公國)으로 분할됐다가 몽골의 침략으로 종말을 고했다. 나아가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몽골 제국의 대칸인 몽케의 동생 훌라구가 사마르큰트 총독으로 부임한 후, 1258년 2월 대규모 군대로 바그다드를 함락했다. 이로써 500년 역사의 압바스 제국이 멸망했다.  172-173


오스만 제국의 건설자인 오스만 베이(Osman Bey)는 원래 셀주크 튀르크 시대의 한 부족장이었다. 1299년부터 오스만 베이는 정복 사업을 펼쳐 주로 비잔틴 영토를 잠식했고, 그의 아들 오르한(Orhan) 시대에 이미 발칸반도에 진출해 비잔틴의 존재를 위협했다. 1361년 아드리아노플 정복으로 시작된 발칸 공략은 1389년 코소보 전투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것은 1453년이었다. 술탄 메멭트 2세(mehmet II)에 의해 점령된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뀌었다. ..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오스만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한 획을 긋는 큰 사건이었다. 이제 중세가 종식되고 근대가 시작되는 기점이 되었다. 유럽은 오스만 제국이라는 동방 문화권과 직접 접촉함으로써 동방의 새로운 기운과 문명을 급속도로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곧바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인이 스스로 ‘지리상의 발견’이라 불렀던 대항해시대가 도래했다.  174

제국의 영토는 북으로 헝가리에서 남러시아, 남으로는 북아프리카 알제리에서 걸프해에 이르기까지 과거 이슬람 세력권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오스만 제국의 확장과 번영에는 예니체리, 밀레트 등 여러 가지 특징적인 제도가 뒷받침되었다. 우선 귀족 세력의 견제를 통한 술탄의 중앙 집권화와 효과적인 전투력 배양을 위해 예니체리(Janissary)군대가 결성됐다. 예니체리는 술탄의 근위 보병 부대로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또 술탄은 예니체리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데브쉬를메(Devshirme)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데브쉬르메는 주로 발칸 반도의 기독교 소년들을 징집해 엄격한 훈련과 튀르크화 교육을 통해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예니체리에 배속시키는 제도였다.
한편 이슬람 사회 초기의 소수 민족 정책 딤미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 시대에 밀레트(Millet)라는 독측한 체제로 되살아난다. 밀레트는 크게 지배 집단과 종속 집단으로 나누어졌다. 지배 집단은 튀르크족 이외에도 아랍인, 페르시아인, 보스니아인, 알바니아인과 같은 무슬림이었고, 종속 집단에는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이, 유대인, 루마니아인, 슬라브인과 같은 소수 민족이 포함됐다.
밀레트 체제에서 가장 큰 종속 집단은 그리스 정교 공동체였다. ..
두 번째 소수 민족 밀레트응 아르메이나 정교 그룹이었다. ..
세 번째 소수 민족 밀레트는 유대인 집단이었다.  175-176

오스만 제국 내의 소수 집단은 밀레트 내에서 자신들의 산앙과 종교 의례는 물론, 고유한 관습과 언어, 문화적 전통 등을 향휴할 수 있었다. 또한 튀르크인과의 마찰과 갈등으로 인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들의 공동체 내규에 따라 분쟁을 조정하고 해결했다.  176

오스만 제국 치하에 있던 아랍 세계에서는 18세기 중엽 이슬람교의 요람인 아라비아반도를 중심으로 자주를 표방한 민족 운동이 태동했다.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것이 와하비(Wahhabi) 운동으로, 원래는 이슬람교의 변질과 개혁주의에 반대하여 꾸란의 순수한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종교적 열정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오스만의 지배에 저항하는 사우드 가문의 호응을 받아 와하비 왕국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와하비 운동은 아랍인의 각성을 촉구하여 후일 아랍. 여러 나라의 독립에 정신적 바탕을 제공했다.
이집트에서도 18세기 말 나폴레옹의 원정으로 유럽 문화의 영향을 받아 민족적 자각이 촉진되었다. 이집트의 근대화를 추진한 이는 총독 무함마드 알리였다. 그는 아라비아반도로 출병하고 수단을 정복하는 한편, 이집트의 근대화를 위해 나일강을 대대적으로 개발해 경제적 부흥을 이루었다. 그 후 이스마일의 통치기에는 수에즈 운하를 완공하고, 산업, 교통, 교육의 혁신을 가져왔다. 그러나 지나친 재정 기출이 경제를 파탄시켰고, 이 때문에 수에즈 운하의 실권이 영국으로 이관되었다. 결국 1882년 이집트는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79-180


독일 편에 가담했던 오스만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제국이 와해되는 운명을 맞았다. 거의 모든 제국 영토를 뺏기고 터키 본토까지 점령당하자,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독립 전쟁을 수행했다. 그 결과 1923년 로잔 조약에서 최종적인 영토 조정이 이루어졌고,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한 무스타파 케말은 칼리파제와 왕정을 폐하고 터키 공화국을 창설했다. 이로써 1299년 이래 600년 이상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으로 존속해 왔던 오스만 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181

아랍어, 이슬람교, 아랍인이라는 공통분모로 단일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던 아랍은 20개국이 넘는 개별 국가로 분할됐으며, 상충하는 이해관계로 협력과 분쟁을 거듭하고 있다.  181-182

근대 이후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복을 전후로 18세기부터 서구에 의한 이슬람 세계 식민지화가 가속화되면서 ‘지배와 피지배’라는 숙명적 관계를 역전됐다. 162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호히사 설립을 계기로 인도 무굴 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남부의 동남아 이슬람 지역들이 차례로 서구 열강의 식민 상태로 전락했다. 중앙아시아에서도 서투르키스탄과 위구르 지역인 동투르키스탄이 각각 러시아와 중국의 지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
제 1, 2차 세계대전 전후로 탈식민 시대가 시작되면서 이슬람 지역 대부분이 쪼개져 57개 개별 국가로 독립했지만, 서구의 ‘이슬람 편견’은 오늘날까지도 크게 바뀌지 않은 채 ‘이슬라포비아(이슬람 혐오증)’로 이어지고 있다.  183

정치적 목적을 위해 테러라는 도구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슬람권내 정치 세력은 극소수이고, 대중적 지지 기반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이슬람=테러리즘’이라는 만들어진 공식으로 지금 서구와 이슬람 세계는 어느 때보다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다.   183-184


ISIL(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은 원래 알카에다의 이라크 지부로 출발한 AQI가 전신이다. 그들은 시리아 내전을 틈타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정부군을 전복 시키려는 반군 군사 조직에 참여했고, 2014년 6월 29일에 스스로 IS(Islamic State), 곧 ‘이슬람 국가’를 선포했다. ISIL은 시리아 라카를 수도로 삼고, 거점을 확보하면서 서방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2015년 11월에는 파리 시내 레스토랑과 경기장 등 일곱 군데의 다중 시설을 공격하고, 무차별 사격으로 민간인 사망자 130여 명, 부상자 수백 명을 발생시켰다. ..  결국 시리아 쿠르드 민병대가 2017년 지상군을 투입해 미군과 합동으로 ISIL의 마지막 거점이자 수도인 라카를 점령함으로서 일단락되었다.
알카에다와 ISIL의 궤멸로 당분간 대규모 조직적인 민간인 테러는 줄어들겠지만,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팔레스타인 박해, 시리아 내전, 리비아 내전, 예멘 내전 등에서 서방의 개입으로 가족을 잃은 극단적 분노가 뿌리내리고 있다. 이들에 대한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치유 프로그램 가동과 지원책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상식을 뛰어넘는 테러는 줄어들기 어렵다. 이것이야말로 중동-이슬람 세계가 안고 있는 불편한 현실이기도 하다.  193-194




CHAPTER 2 이슬람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지키는가


이슬람교는 기독교, 유대교와 함께 3대 유일신 종교다. 아랍어로 하느님을 알라(ALLAh)라고 하니 하느님의 아랍어 표기가 바로 알라이다. ..
유대인이 믿는 유대교, 예수에서 예수교, 부처에서 불교, 조로아스터에서 조로아스터교 등이다. 그런데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영어로 마호메트)를 믿지 않는다.  따라서 마호메트교는 잘못된 표현이다.  199

이슬람은 종교와 문화를 포괄한 개념이며, 종교를 구분해서 사용할 때는 이슬람교, 여타의 경우에는 이슬람으로 폭넓게 사용한다.
이슬람의 언어학적인 어원은 ‘평화’이고, 신학적인 의미는 ‘복종’이다. 따라서 이슬람 사상의 핵심은 알라(유일신)에게 절대복종하여 내면의 평화를 얻는 것이다. 각 종교 사상의 핵심에서 기독교가 사랑, 불교가 자비, 유교가 인(仁)이라고 한다면, 이슬람 사상의 중심은 평화와 평등이이다.  199

이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중잰자나 대속자 없이 신과 인간의 직접 교통과 직접 구원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누구도 알라에게 대적할 수 없고 대신할 수도 없다. 유일신 알라자식을 두지 않았으며 자식을 낳지도 않았다.  200

구원 방식도 아주 간결하여 현세에서의 선악의 경중에 따라 회후이 날 신의 심판을 받아 천국의 구원과 지옥의 응징으로 나뉜다는 내세관을 갖고 있다.  200

이슬람은 구체적 실천을 위해 다섯 가지 기본적인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첫째, 알라의 유일성과 무함마드가 그분의 예언자임을 믿는다’라는 신앙 고백(Shahada), 둘째 하루 다섯 번의 예배(Salat), 셋째 이슬람력 9월인 라마단 달 한달간 해 있는 동안의 단식(Ramadhan), 넷째 자신의 순수입 2.5%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세금을 내는 자카트(Zakat), 다섯째 평생에 한 번 권장되는 메카 성지 순례(Hajj)등이다. 이를 이슬람의 다섯 기둥, 오주(五柱)라고 한다.  201


“라 일랄라 일라하(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  202

이슬람의 모든 가르침은 무함마드의 계시 내용을 담은 꾸란에 집대성되어 있다. 또한 꾸란과 함께 그의 선별된 언행록인 하디스가 또 다른 경전으로 무슬림에게 삶의 지침이 되고 있다. 꾸란과 하디스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아니한 사항에 대해서는 이슬람 학자들의 유권 해석이나 합의를 통해 해결해 나갔다.  204-205


무함마드는 570년경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쿠레이시라는 명문 귀족의 가난한 유복자로 태어나, 마흔 살이 되던 해인 610년경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 그의 가족사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를 보지 못했던 그는 여섯 살 때 어머니마저 병으로 잃으면서 고아가 되었다. 당시 아랍 유목 주복의 관습에 따라 할아버지 압둘 무탈립의 양육을 받았고, 그의 사후에는 숙부인 아부 탈립의 보호를 받았다.
고아로서 일찍부터 독립한 무함마드는 당시 밑천 없이 뛰어들 수 있었던 험난한 대상 교역의 낙타 몰이꾼으로 인생을 시작했다. 동서양 기록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점은 그는 성실하고 정직했으며 탁월한 협상가이자 중재자였다는 것이다. 그의 정직성과 약육강식의 사막 교역에서 분쟁을 조정하는 놀라는 능력은 모든 자본가의 관심을 끌었고, 당시 메카의 상인이었던 카디자의 피고용인이 되었다. 미망인이었던 여주인 카디자는 무함마드의 성실함과 매력에 끌려 그에게 청혼했고, 두 가문의 합의 아래 결혼했다. 이때 무함마드의 나이는 25세, 카디자는 15세 연상인 40세였다.
무함마드는 결혼 후 여유로운 생활 환경에서 그동안 품어 왔던 사회적 악습과 모순에 대해 15년간 깊은 고뇌와 명상을 시작했고, 40세 되던 610년 메카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인도로 알라의 첫 계시를 받았다. 알라가 글자와 학문을 몰랐던 무함마드를 선택하여 22년에 걸쳐 내린 계시는 꾸란이라는 무슬림의 성스러운 경전으로 집대성됐다. ..
이슬람을 완성한 무함마드는 632년 아내 아이샤(Aisha)의 팦베개를 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208-209

첫째, 그는 아무런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 임종 시 아내 아이샤에게 집안의 모든 재산을 정리하라 이르고, 전 재산 7디나르의 돈을 가난한 자에게 모두 나누어 주도록 했다. 이는 이슬람 사회에서 유산 대부분을 국가와 가난한 이웃에게 환원하고 최대 3분의 1 이하만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는 무슬림 유산 상속의 근간이 되었다.
둘째, 그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혈통보다 능력과 공동체를 지휘하는 지도력으로 높이 평가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후계자는 ‘슈라’라는 부족 공동체 대표자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추대되었다. 그래서 혈통 중심의 아랍 왕정들은 순수 이슬람 전통에 위배되는 정치 형태인 셈이다.
셋째, 무엇보다 무함마드는 순수한 인간이었다. 그는 어떠한 기적도 행하지 않았으며, 결단코 신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의 사후 많은 추종자가 그의 신격화를 꾀했을 때, 후계자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뜻에 따라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무함마드를 섬기고 경배하지 말라. 그는 죽어 없어졌다. 하느님을 섬기고 복종하라, 그분은 영원히 살아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
넷째, 무함마드는 적에 대한 관용과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에 대한 한없는 낮춤의 자세르 가졌다. 아무리 치명적인 손해를 낓친 적이라도 그에게 복종하고 용서를 비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철저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으며, 전쟁에서 전사한 동료 가족은 물론, 적들의 가족까지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그를 택하고 그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최초의 추종자들이 오늘날 세계 최대의 가장 견고한 종교 공동체를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섯째, 그는 종교적 열정과 온화함의 조화를 행동으로 보인 지도자였다. 나아가 모든 어려움을 앞장서 막아 내는 불굴의 정치 지도자였다. 종교 창시자 대부분이 자신의 근거지를 떠나 새로운 세상에서 그 뜻을 펼쳤지만, 무함마드만은 박해의 진원지였던 고향 메카를 설득과 용서를 통해 재정복했다. 그리하여 메카는 무함마드에게 가장 든든한 지지 기반이 되었다.
여섯째, 여성들에 대한 지위와 인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준 이슬람 페미니스트였다. 남성이 여성을 노예로 매매하고 자기 장식물로 여기던 무지의 시대에 무함마드는 여성들을 완전한 인격체로 존중할 것을 명했으며, 여성에 대한 상속을 법제화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가 누구냐는 제자들의 물음에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어머니’라고 대답했으며, 미래의 어머니인 여성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설파했다. 오늘날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낙후된 일부 아랍 국가들을 보면 어쩌면 무함마드의 시대의 가르침보다 더 퇴보한 듯한 생각도 든다.  209-211


무함마드는 생전에 열 두 명의 여성과 결혼을 했다.  211


꾸란은 무함마드가 서기 610년에서 632년까지 23년간 예언자로서 알라로부터 받은 계시 내용을 담은 이슬람 최고의 경전이다.  215

일반적으로 꾸란 내용을 인용할때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문구를 사용하는 반면, 예언자의 말, 즉 하디스를 인용할 때는 “예언자가 말하기를”이라는 문구를 사용한다.  216

구전으로 내려오던 꾸란이 책으로 편찬된 것은 무함마드 사후 10여 년이 지난 3대 칼리파 우스만 시대(644~656)로 알려져 있다. 정복 전쟁을 통해 이슬람의 영토가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등 비아랍어권으로 확대되어 감에 따라 하느님의 말씀인 꾸란이 달리 읽히고 발음되기 시작했다. 어떠한 왜곡이나 의미의 변화를 막기 위해 구전 전통이던 꾸란이 책으로 편찬됐고, 정확한 발음의 통일ㅇㄹ 위해 점차 모음 부호를 붙이게 되었다.
꾸란은 전체가 30파트(Juz)이며, 114개의 장(Surah), 6,236개의 절(Ayat)로 구성되어 있다. 단어 수는 약 8만여 개다. 114개 장 중 86개는 메가에서 계시되었고, 28개 장은 메디나에서 계시되었다.  216-217


모든 무슬림은 매일 다섯 번의 예배를 드리고, 매년 라마단 한 달 동안 단식을 한다. 이 기간에는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서 자신을 인내하고 정화한다. 해가 있는 낮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으며 철저히 금식하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음식을 만들어 먹고 해가 진 뒤에는 충분한 식사를 할 수 있다.  219

이슬람의 단식은 사움(Saum)이라고 부르지만, 단식하는 달 이름을 그대로 따서 라마단이라고도 한다.  220

종교적으로도 단식은 무슬림에게 도덕적 절제와 과욕을 다스리는 훈련의 장이다. 그래서 무슬림은 라마단 기간이 아니더라도 부정이나 유혹에 흔들릴 때 단식을 곧잘 한다. 특히 단식을 제대로 하면 잃어버린 건강을 되찾는 소중한 기회로도 활용할 수 있다.  220

이슬람 종교 의례는 태음력인 이슬람력에 따라 정해지는데, 아홉 번재 달인 라마단은 1년 내내 찾아온다. 서양력의 1년 길이가 365일인데 비해 태음력인 이슬람력의 1년은 354일 정도이니, 매년 이슬람력은 11일 정도씩 짧아진다. 2020년에는 4월 23일부터 시작했고, 2021년에는 4우러 12일경 시작했다. 33년이 자나면 사계절을 돌아 제자리로 오게 된다.  221


하즈(Hajj)라 불리는 성지 순례는 무슬림의 마지막 의무이며, 평생에 한 번 이슬람력 12월 첫 주에 메카를 방문하는 것을 의미한다. 메카는 이슬람이 완성된 곳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집(Bait-al Allah)이 있는 곳이다.
성지 순례의 종교적 관행은 예언자 아브라함(이슬람에서는 이브라힘)이 하느님의 명을 받아 건설한 메카의 카바 신전을 일곱 차례 돌고(타와프),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일이 어머니 하갈과 함께 물을 찾아 뛰어다녔다는 고사가 남아 있는 마르완과 사파 동산을 일곱 차례 뛰면서 왕복하는 것(싸이)에서 연유한다.(이슬람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아내 하갈(Hagar)과 어린 아들 이스마일(Ismail)을 사막에 내버려두고 떠났다. 하갈은 아브라함에게 몇 번이나 자신들을 버리는 이유를 물었다. 아브라함은 신의 뜻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하갈은 겸허하게 신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분이 자신들을 보호해 주시 ㄹ거라고 믿으며 광야로 나아갔다. 배고픔과 목마름에 지친 그들은 고통 속에서 물을 찾았다. 하갈은 이스마일에게 먹일 물을 찾아 이 언덕, 저 언덕을 올랐다. 두 언덕 사이를 일곱 차례나 왕복한 끝에 드디어 물이 솟아나는 곳을 찾았으니, 이 샘은 잠잠이라 불린다. 이곳에 사람들이 터를 잡고 형성된 도시가 바로 오늘날의 메카다. 두 언덕이 바로 메카에 있는 사파(Safa)와 마르완(Marwan)이며, 성지 순례를 할때 순례객들은 이 고사를 떠올리며 사파와 마르완 두 언덕 사이를 일곱 차례 왕복한다.) .. 순례는 다른 절대 의무와는 달리 재정이나 건강이 허락되지 않을 때 다른 선행으로 대체할 수 있는 상대적인 의무라 할 수 있다.  222-223

순례 마지막 날 그들은 이들 아드하라는 희생제를 치르고 예언자 무함마드의 유해가 안치된 메디나를 순례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순례를 마친 사람들에게는 하지(haji)라는 존칭이 따라다닌다.  224


이슬람교에는 성직자 제도가 없다. 이슬람 정신인 평등을 실천하는 가장 확실하고 구체적인 사회적 약속이다. ..
신에게만 책임을 지기 때문에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한 종교 의례나 불필요한 형식이 과감하게 생략된다. ..
통상적으로 성직자들이 주관하는 예배 인도, 모스크 관리, 꾸란 편찬, 종교적 유권 해석, 영적 지침 같은 공동체의 종교적 활동은 누가 맡아서 하는가?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이맘이다. 즉 예배 인도자인 셈이다. 모든 성인 무슬림은 예배를 인도하는 이맘이 될 수 있다.  225

수니파 이맘 대부분은 자신의 고유한 직업을 가진 채, 예배 시간이 되면 모스크에 와서 이맘으로서 예배를 집전하고 다시 자신의 생업으로 되돌아간다. ..
시아파 이맘은 자격과 의미가 수니파와 매우 다르다. 시아파에서 이맘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 신의 대리인으로 간주돼 특별한 위치가 부여된다.  226

세속적인 최고 통치권과 종교적 카리스마를 모두 가진 칼리파조차 신 앞에서는 평신도일 뿐이다.  226-227


학문적 길잡이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울라마이다. 이들은 종교 법학자이자 신학자이고 이슬람학을 전공한 이슬람 학자들이다. ..
울라마와는 별도로 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파생하는 버빌 공방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이슬람 법정이 설치됐다. 이곳의 최고 법학자들을 파끼흐(Fakih)라고 부른다. 동시에 재판관인 까디(Qadi)가 있으며, 이슬람 공동체 최고의 법률 전문가로 대법원장 격인 무프티(Mufti)가 있다. 이들 중 파끼흐는 학자이며, 까디와 무프티는 국가에 의해 공식 임명되는 법조인이다.   227


이슬람의 기본 교리와 관행에서 대부분의 이슬람 공동체는 단합과 통합을 이루고 있으나, 사상이나 종교 의례, 율법적 해석에서 차이를 보이며 여러 분파가 생겨났다.
대표적인 차이가 바로 수니파와 시아파이다
무함마드는 632년에 타계하면서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아랍 무슬림은 아랍 부족의 오랜 대의 정치 전통에 따라 민주적인 만자일치 제도로 후계자를 선출했다. ..
무함마드의 유일한 부계 혈통인 그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 알리는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 .. 656년, 알리가 드디어 네 번째 칼리파가 되었으나 661년에 그만 살해되고 만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유일한 직계 혈통이 겨우 네 번째 칼리파가 된 것은 수긍하기 어려운데, 그의 죽음까지 더해지자 극단적 분노와 적개심이 표출됐다. 바로 ㅇ라리의 추종자들이 시아파가 되었다. ‘시아’란 떨어져 나간 무리’라는 뜻이다. 자연히 남아 있는 무린 수니가 되었다. ..
시아파는 이란을 중심으로 전체 이슬람 세계의 약 10%를 차지한다.
이슬람 세계의 약 90%를 차지하는 수니파는 믿음과 관행에서 시아파와 거의 차이가 없다. 꾸란과 하디스라는 기본적인 경전을 받아들이는 종교적 신념에도 큰 차이가 없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부르고 자유롭게 결혼한다. 상대방의 모스크에 가서 함께 예배도 본다. 그렇지만 신학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별개의 모스크와 종교 의식의 차이, 이맘 직위에 대한 관점의 차이 등에서 분명히 다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수니의 샤하다는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다’로 끝나지만, 시아는 그 뒤에 ‘알리는 신의 사랑을 받은 자이며, 신자들의 사령관이고, 신의 친구이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
또한 수니파는 시아파가 주장하는 알리와 그의 자손 중심의 이맘 제도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러한 차이점도 수니와 시아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킨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233-236


이슬람법의 원천은 무엇인가? 모두가 공감하는 네 개의 신학적 원천이 가장 중요하다. 신의 말씀 그 자체인 꾸란(Qur’an), 오류를 범하지 않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순나(Sunnah), 해당 적용 법규를 꾸란과 하디스(Hadith)에서 유추해 적용하는 끼야스(Qiyas, 유추), 이슬람 율법학자 울라마들의 전원 합의인 이즈마(Ijma, 합의)가 그것이다.
무슬림의 신앙생활에서 절대성을 갖는 꾸란과 순나가 이슬람법의 법원(法源)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끼야스나 이즈마는 상당한 설명이 필요하다. 세 번째 법원인 끼야스는 유추이다. 현대적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사건 사고의 정황들이 모두 구체적으로 꾸란과 순나에서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울라마들은 한 사건에 적용할 수 잇는 가장 유사한 사례들을 꾸란이나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에서 찾아서 유추하여 법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방식이다. 물론 끼야스에는 인간의 이성적 잣대가 개입할 여지가 있으므로 학자 간의 완전하 ㄴ합의와 엄격한 적용 방식이 요구된다.
네 번째 이즈마는 인간 사회의 범죄나 다춤에서 꾸란이나 순나에서 유추해 결정할 수 있는 근거나 합리적 조항을 찾지 못할 때, 당대 울라마들의 심사숙고와 전원 합의를 거쳐 이슬람법으로 규정하는 방식이다. 이는 비슷한 사례를 찾아 유추하는 끼야스보다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 더 강하게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매우 신중한 절차를 따르며, 그 결정에 대해서도 정통파 사이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학자들이 개별적 해석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이즈티하드(Ijtihad)라고 하고, 유권 해석의 권한을 지닌 학자들을 무즈티하드(Mujtihad)라고 부른다. 이슬람법 해석에서 이즈티하드가 갖는 위험성을 간파한 많은 정통 울라마들은 이즈티하드의 문은 닫혔다고 주장하면서 더이상의 무즈티하드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242-243


이슬람법 해석과 법 적용의 규범과 범위 문제를 둘러싸고 학파가 갈렸다. ..
하나피학파 - 이라크 학파를 대표하는 하나피 학파는 4대 학파 중 가장 온건하고 자유로운 성향을 띄며, 무엇보다 이성(ra’y)과 개인의 견해를 이슬람법 해석에서 폭넓게 인정한다. 오늘날 가장 많은 지역에 분포하며, 터키,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 일대의 주된 흐름이다. 튀니지, 이집트 등지에도 분포하고 있다.
말리키학파 - 이슬람 초기 메디나에서 통용되돈 관습법에 근거하기 때문에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보인다. 현재 북아프리카의 대표적인 학파이며, 이집트 북부, 나이지리아, 수단, 걸프해 연안 국가들에 분포되어 있다.
샤피이학파 - 엄격한 메디나 학파의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하나피 학파의 이성적 판단에 의한 유추를 폭넓게 수용하는 절충적 법학파이다. 오늘날 이집트와 인도네시아 중심의 동남아시아에 널리 분포되어 있고, 그 외 사우디아라비아 일부, 인도에도 샤피이 학파 방식이 적용되고 있다.
한발리학파 -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강력한 호응을 받으면서 단단한 뿌리를 내렸다. 가장 보수적인 율법 해석과 메디나 시기의 교저적인 이슬람 정신을 계승하려는 성향을 강하게 보이며, 시대적 상황에 맞는 재해석의 문호를 인정한 다른 학파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한발리 학파의 정통주의와 보수성은 18세기 말 아라비아반도 중심부에서 와하비즘(Wahhabism)으로 부활했고,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의 중심적이 학파가 되었다. 현재는 사우디아라비아 이외에도 시리아, 이라크 등지에 널리 퍼져 있다.  245-247


이슬람을 경전 중심의 이론과 교리로만 해석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영적 본질에 다가가려는 종교적 신비주의를 수피즘(Sufism)이라 한다.  247




CHAPTER 3 이슬람 문화의 향기


새벽 4시가 넘어 서서히 여명이 밝아 오는 이슬람 도시들은 언제나 아잔(Azan) 소리로 하루를 열어 간다. 아잔은 예배 시각을 알리고 예배를 보러 오라고 칭하는 낭송의 소리다.  ..
모스크 옆에는 반드시 미나레트(Minaret)라고 하는 높고 뾰족한 첨탑이 있는데, 그 첨탑 위에서 무아진(Muazzin)이라 부르는 독경사가 아잔을 낭송한다.  255

이슬람 건축의 핵심은 모스크, 마드라사(신학교), 궁정, 묘당 등이다. 모스크(mMosque)는 아랍어 마스지드(masjid)가 스페인어 메스키타(Meszquita), 프랑스어 모스캐(Mosquee)를 거쳐 영어로 변한 것이다. 마스지드는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는 곳’을 뜻한다. .. 삶의 중심 공간으로서 모스크는 그리스 시대의 아고라(Agora)나 로마 시대 포럼(Forum)의 성격과도 닮았다.
모스크 옆의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미나레트는 어디서나 보이는 방향키이다.  257

모스크의 건축 구성은 3M(Masjid-Minbar, Mihrab, Minaret)으로 표현한다. 모스크 내부에서 예배 방향인 메카를 표시해 주는 미흐랍(Mihrab)과 금요일 합동 예배의 설교대인 민바르(Minbar), 모스크 바깥의 높은 첨탑인 미나레트(Minaret)가 그것이다.  260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 미흐랍이다. 미흐랍은 예배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내부 공간에 메카 방향을 표시하고자 벽면을 움푹 들어가게 깎아 낸 곳이다. ..
두 번째 구성 요소는 설교를 위한 계단식 연단인 민바르이다. .. 민바르에서의 설교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미가 있다. 신의 말씀을 깨우치는 고유한 종교적 역할 외에도 국가의 주요 정책을 공표하고 왕의 임명과 퇴위를 알리는 공식적인 홍보 창구가 된다. ..
세 번째 요소는 미나레트이다.  261

모스크는 나그네를 위한 쉼터이다. 단순히 신에게 경배를 올리는 예배 공간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가장 역동적인 삶이 펼쳐지는 생활 공간이다. 그래서 모스크를 중심으로 생활 편의와 중심 기능을 담당하는 목욕탕, 여관, 식당, 병원, 시장에 이어 도서관과 학교까지 갖추어져 있다. 가난한 사람과 경비가 떨어져 오갈 데 없는 나그네들을 위한 숙소와 먹을 것이 준비된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함께 예배를 보고, 낮에는 카펫이 깔린 폭신한 모스크 바닥에 항상 흐르는 깨끗한 물로 몸을 청결하게 유지할 수도 있다.  262=263

모스크는 또한 무덤 공간이다. 통치자나 고매한 고승들은 죽어 모스크 뜨락에 묻힌다. 그래서 이슬람 세계의 큰 모스크에는 거의 반드시 주변에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264


아랍안나이트는 아랍어로 기술된 대중 설화 문학의 집대성이다. 1880편으 큰 줄거리와 100여 편의 소주제가 1,001일에 걸친 밤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잡품의 모태는 6세기 페르시아의 설화집인 <하자르 아프사나<천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아랍어로 번역되어 구전된 시기는 840년경으로 추정되며, 10세기ㅣ 중엽 아랍 작가인 마수디와 이븐 나짐이 그들의 작품에서 페르시아어 <하자르 아프사나>를 ‘천일 밤의 이야기’로 번역, 소개함으로써 아라비안나이트가 구전 문학에서 아랍의 기록 문학 속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아라비안나이트는 인도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페르시아를 거치며 많은 이야기가 변형, 첨가, 삭제된 채 아랍으로 전달됐다. 아랍은 여기에 아랍적인 요소를 첨가함으로써 결국 아랍화된 문학으로 자리매김했다.  265-266

아라비안나이트는 정작 본고장인 아랍-이슬람 문하권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는 표준어와 정형화된 문체에 의존한 식자층의 아랍 문화만이 중시되고, 과장과 무한한 상상력으로 포장되고 대담한 성적 표현으로 더덕의 틀을 뛰어넘는 대중 설화 문학을 교양 없는 것으로 비하하는 풍조 때문이었다.  267

아라비안나이트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1886년, 이야기의 첫날밤만을 떼어 <유옥역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했으니 벌써 125년 전이다. 이 제목은 여주인공 샤프라자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268


아라베스크(arabeque)는 .. 대안 예술이자 새로운 문화였다. 사람과 동물 대신 꽃과 나무, 식물과 자연 현상을 아랍어 서체와 결합해 기하학적으로 배치해 예술성을 표현했다. 아라베스크는 반복과 대칭이 특징이며, 꾸란 구절을 아랍어 서체로 장식했다. 모든 예술은 결국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는 의미를 담았고, 시작도 끝도 없는 반복과 대칭 구도 자체가 바로 오묘한 신의 예술이었다.  272

우리나라에서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당초문(唐草紋)으로 알려졌다. 꽃과 식물을 기본 모티브로 사용한 디자인이 당나라를 통ㅎ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처마의 와당 장식, 불교 사찰의 단청, 청자나 백자에 그려진 문양, 전통 가옥의 문살 등에서 흔히 보이는 당초문은 아라베스크를 그 원형으로 한다.  273


이슬람 생활 예술의 꽅으 ㄹ들라면 단여 ㄴ카펫이다. 이슬람의 긴 역사와 삶의 애환, 무슬림의 예술성과 기술, 진한 일상의 시간이 축적된 종합 예술품이다. ..
카펫은 이슬람의 역사이고 작품이다. .. 구도의 기본 디자인을 형성하는 것도 아라베스크 문양이다.  274

인류가 카펫을 사용한 기간은 2,500년이 넘는다. .. 카펫은 처음 중앙아시아의 유목 민족이 만들기 시작했다. .. 첸트를 가리는 스크린이자 바닥 깔개이고, 벽을 가리는 커튼, 말안장 등 포기할 수 없는 실용품이었다. ..
역사적으로 카펫 산업이 가장 발달한 곳은 터키와 페르시아이다.  274-275

카펫은 디자인 예술이다. 디자인만 보고도 그것이 어느 시대에 어디에서 생산됐는지 알 수 있을 정도이다. .. 꽃무늬 양식과 기하학적 양식이 주류를 이룬다. 꽃무늬 양식은 주로 페르시아와 인도에서 사용했고, 캅카스 및 중앙아시아의 투르코만은 기하학적 무늬를 선호했다. 터키에서는 기하학적 무늬가 더 많이 사용됐지만, 두 가지 양식이 모두 애용되었다. .. 같은 디자인이라도 무노하권에 따라 그 해석ㄱ은 각기 다르다. 중국에서 용은 황제의 의미를 내포하지만, 페르시아에서는 악마이며, 인도에서는 죽음을 의미한다.  276-277


초기에 커피는 음식의 일종으로 먹었던 것 같다. 자생하는 커피의 효능을 일찍부터 알고 있던 동부 아프리카나 아라비아 남주 주민은 분쇄된 원두를 동물의 기름과 섞어 응고시켜 오랜 행군이나 전쟁중에 힘을 보충하기 위한 목적으로 복용했을 것이다. 전쟁 필수 에너지바였던 셈이다. 이처럼 커피의 전파와 효능의 확산은 많은 문명 전파 과정이 그러했듯이 어쩌면 전재으이 산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커피를 일상적 음료로 널리 마시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이후 예멘 지방이었던 것 같다. 주로 이슬람 신비주의자나 종교 지도자 사이에 먼저 유행했다. 오랜 명상과 기도를 해야 했던 그들에게 커피는 최상의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279

예멘이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으며 커피는 이슬람 세계를 뛰어넘어 국제화의 길을 걷는다. 커피가 예멘을 대표하는 특산물로 오스만 궁장이 있는 이스탄불에 진상됐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1554년에는 세계 최초의 카페인 차이하네(Chayhane)가 이스탄불에 문을 열었다.  280

밤의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웠던 이스탄불 궁정에서 커피는 최고의 인기 음료였다.
밤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유럽 외교관들은 잠을 쫓기 위해 커피를 거의 매일 밤 상용했다. 그들은 점차 커피 중독자가 되었다. 임기를 마치고 유럽으로 돌아갈 때쯤이면 이미 커피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곤 했다. 외교관들은 오스만 당구그이 커피 유출 금지에도 외교 행랑을 이용해 원두를 자국으로 빼돌렸으니, 이것이 유럽에서 커피를 마시게 된 배경이다.
유럽 최초의 커피 하우슨 ㄴ1652년 영국 런던에 문을 연 파스카 로제 하우스였다.  280

1683년경에는 런던에만 3천 개의 커피 하우스가 생겼다.  281

커피가 순조롭게 그 사회에 정착한 것은 아니었다. 격렬한 종교 논쟁과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고통과 시련의 과정을 거친 이후에 얻어진 영광이었다. 처음 중세 가톨릭교회에서는 시커먼 커피를 보고 이교도가 개발해 마시던 음료라고 하여 악마의 음료로 간주했다. ..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직접 커피를 마신 후 하나의 기호식품으로 인정했다. 커피에 세례를 준 셈이다.  281

근대 유럽인을 매료시켰던 가루째 끓이는 방식의 커피는 지금 터키 커피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터키 커피는 원두와 불의 성질, 끓이는 순간의 기술이 어루러져 만들어 낸 하나의 새로운 문화였다.
커피를 긇이는 것은 새 신부의 가장 중요한 거치가 되었다. 좋은 원두를 골라 잘 볶아내고 애를 갈아 향과 맛이 살아 있는 커피를 끓이는 것은 터키인의 일상적인 문화가 되었다. 자그만 구리 잔에 원두 가루를 넣고 찬물을 부은 다음 약한 불에서 커피를 끓인다. 거품이 일어 커피포트 위로 넘치려는 순간 불에서 멀리해 커피 향이 새 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비법이다. 기호에 따라 설탕을 넣고 끓이기도 한다. 작고 앙증맞은 도자기 커피잔에 따르면 3분의 2가량의 커피 원두가 진흙처럼 가라앉고, 그 위쪽의 맑은 커피 물을 음미한다. 진한 터키 커피는 빈속에 마시면 머리가 핑 돌 정도로 강하다 그러나 양고기를 먹고 기름진 식사 후에 마시는 커피 커피 한 잔으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깔끔한 맛을 느낄 수 있다.  284


세밀화는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을 아주 작게 그려 역사적 이야기나 삶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하고자 하는 이슬람 문화권의 특징적인 예술이다. ..
이슬람은 아랍의 종교로 출발했다.
새롭게 이슬람의 영역으로 드렁온 이란이나 중앙아시아 튀르크족, 인도 등지에서 아랍어는 너무나 어려운 외국어일 뿐이다. 이슬람은 글자를 아는 1%도 안 되는 지적 엘리트 곛층만이 독점하는 폐쇄적 종교로 변질되고 있었다. 여기서 이슬람 사회는 심각한 전환기를 맞았고, 두 가지의 변신을 가져왔다. 종교적으로는 수피 사상이고, 예술적으로는 세밀화(미니어추어)가 발달한 것이 그것이다.
이슬람 신비주의로 번역되는 수피 사상은 꾸란의 언어적 해석을 깨치지 못하더라도 누구든지 하느님을 만나고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잇는 새로운 방식의 길을 열어 주었다. 노래와 춤, 끊이없는 염원과 명상을 통해 일반 신자에게 또 다른 대중적 이슬람의 길을 제시했다.
세밀화의 수용과 성행은 곧 글자를 모르는 신자를 위한 종교 교육을 그리믕로 대신하는 우회적인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인물이나 동물을 묘사하는 것이 우상 숭배라는 전통 가르침의 규율을 뛰어넘기는 절대 만만치 않았다. 여기서 종교와 예술의 절충이 시도된다. 될 수 있으면 그림을 작게 그려 실제적인 이미지를 최소화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원근법과 입체감을 사용하지 않고 생동감을 줄이는 방식으로 우상 숭배의 위험성을 회피하려고 시도했고, 이것이 세밀화로 나타났다.  287-288





CHAPTER 4 무슬림은 어떻게 살아가나


이슬람의 음식 문화는 허용된 것(할랄, halal)과 금지(하람, haram)돼야 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예언자 무함마드도 그의 하디스에서 “할랄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하람은 금지하신 것이나 꾸란에 아무런 언급이 없는 사항은 모두 너희에게 허락되어 있느니라.”라고 대답했다. 따라서 몇 가지 금기 사항만 유의하면 모든 것이 허용된 것이 이슬람 음식의 특징이다.  298

일반적으로 지역의 생태 환경과 문화적 특성에 따라 동물 사육의 선호도가 달라진다. 중국 남부에서는 돼지, 몽골 초원에서는 말, 안데스 고원 지방에서는 라마, 티베트 고산 지방에서는 야크, 툰드라 동토 지방에서는 순록, 아프리카에서는 소, 중앙아시아 대초원 지대에서는 양을 많이 사육한다. 그리고 오아시스에서는 낙타와 양이 주목을 받는다.  301

낙타는 300킬로그램 이상의 짐을 질 수 있고 물이나 식량의 보급 없이 400킬로미터를 이동하는 놀라운 수송력을 지니고 있다. 무려 17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않고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있다. .. 낙타 한 마리를 잡으면 적어도 200킬로그램 정도의 고기가 나온다. 5인 가족이 2킬로그램(3근 반)의 고기를 소비한다 해도 3~4개월을 견딜 수 있는 양이다.  302

우선 낙타는 인간에게 풍부한 젖을 제공해 준다. .. 처음 먹는 사람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기름진 낙타 젖을 그냥 마시면 십중팔구는 설사와 배탈이 난다. 마시고 남은 젖으로는 겔 상태의 응고된 요구르트를 만들고, 다시 발효시켜 졸 상태의 뻑뻑한 막걸리 같은 라반(마시는 요구르트)으로 만들어 먹는다. 또한 수백 종류의 치즈를 만들기도 한다. 일주일 정도 먹을 수 있는 두부 같은 치즈부터 몇 년을 두어도 변하지 않는 바위처럼 딱딱한 치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치즈로 만들어 먹는다. 윗부분에 응고된 지방 성분으로 버터를 만들고 락토스라는 유당을 추출해 당분을 해결한다. 말려서 분유나 전지분으로 보관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정 발효시켜 술을 빚는 일이다. .. 이슬람을 받아들인 이후에 술은 금기시되었지만, 낙유주는 인간이 애환을 달래고 낭만을 노래하게 한 유목 생활의 청량제였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낙타는 젖을 통해 완벽한 유제품 문화를 만들어 주었다.  302-303

이슬람 세계의 축제
-이들 피트르
모든 무슬림은 이슬람력으로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 한 달 동안 단식을 한다.  305

단식이 끝나면 약 5일간의 축제를 즐긴다. 이들 피트르 축제다. 터키에서는 세케르 바이람(Sheker Bayram), 말레이시아 등지에서는 하리 라야(Hari Raya)라 불린다. 아침 일찍 일어나 깨끗하게 목욕한 다음, 전통 의복으로 갈아입고 식사 전에 모스크로 향한다. 함께 모여 축제 예배를 드리고 이맘의 설교와 덕담을 듣는다. 서로 껴안고 단식을 무사히 마친 것을 축하하고, 그동안 서먹했던 사람끼리도 화해하고 용서하는 감동적인 만남의 장이 펼쳐진다. 그러고는 피트라라고 하는 일종의 종교세를 낸다. .. 모스크에서의 만남과 인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가족들이 모여 앉아 맛있는 축제 음식을 든다.  306

가족끼리 축제 음식을 들고 나서는 가깡운 어른에게 인사를 다니고 친지를 만나러 간다.  307

-이들 아드하
두 번째 큰 축제인 이들 아드하는 이슬람력 12월(Dhul al -Hijja) 처서 주에 행하는 성지 순례를 마감하면서 벌이는 이슬람력 전체의 축제이다. 이 순례를 하즈라고 한다. 하즈는 하느님의 집이 있는 성지 메카를 순례하는 무슬림의 5대 의무 중 하나이다. 307

카바 신전을 일곱 바퀴 돌면서 신을 염원하고 생각한다. 신전에 있는 흑석에 입 맞추고, 아라파트 동산에 오르고 미나 평원에서 야영하며 정해진 순례 의식을 마친다. 사파와 마르완이라고 불리는 두 언덕 사이를 일곱 차례 오가기도 한다. 마지막에는 사탄의 기둥을 향해 돌을 던지며 자신의 신앙을 정화한다.
이 순례가 끝날 무렵, 둘 히자달 10일째에 희생제를 치른다. 바로 이들 아드하이다. 가족 단위로 소나 낙타를 잡기도 하지만, 대부분 양을 희생한다. 희생제는 아브라함의 고사에서 연유한다.  308

재미있는 사실은 구약에서는 번제에 올려진 아들이 본처 사라에게서 태어난 이삭이고, 꾸란에서는 하갈의 몸에서 난 이스마일로 바뀌어 있는 점이다. 이슬람에서는 당연히 처음 낳은 이스마일을 장자로 보는 것이다. ..
축제를 즐기는 방식은 이들 피트르와 거의 유사하지만, 양을 잡는 의식이 장관이다. 하루에 수천만 마리의 양이 도살되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309


할랄은 도살 방식에서 생명 존중이라는 영성 의례 과정을 거친다. 첫째, 동물을 도살할 때 한 생명을 앗아가는 일이기 때문에 신의 허락을 받아 신의 이름으로 잡는다. “비쓰밀라(신의 이름으로)”를 세 번 외치면서 인간을 위한 탐욕의 대상으로 한 생명을 의미 없이 죽이지 않도록 한다. 둘째는 고통을 가장 적게 하는 방식으로 도살한다. 목의 경동맥을 칼로 잘라 가장 빠른 순간에 가장 적은 고통으로 생명을 앗아가는 배려를 한다. 셋째, 피는 부패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생명의 상징이기 때문에 먹지 않는다. 도살한 이후에는 몸속의 피를 되도록 많이 뽑아내고 고기만 취한다. 당연히 선지도 먹지 않는다. 넷째, 고기와 가죽, 털을 깔끔하게 해체하고 정리하여 완전한 순환을 이룬다. 털과 가죽도 손상 없이 잘 수습하여 자선단체에 희사해 힘들고 버림받은 약자의 삶에 도움을 준다. 생명을 희생시킨 대가로 사회적 소득 재분배에 기여하게 한다. 다섯째, 판매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축제 때 잡은 고기는 삼등분하여 함께 나누는 미덕을 강좋나다. 종교적 축일에는 보통 3분의 1은 가난한 이웃에게, 3분의 1은 공공단체에, 3분의 1은 가족들이 먹는다. 또한 아주 어린 생명이나 사고로 죽은 동물은 팔거나 취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우리에 가두어 고통을 주면서 키운 동물도 할랄에서 멀어진다. 방목을 장려하는 해피 애니멀(Happy animal)을 추구한다. 한마디로 할랄 식품은 청정과 영성을 준 신뢰의 식품이라는 강점이 있다.  311


작명에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알라의 이름인 99가지 덕목을 따는 것이다. 알라는 친절하고 아름답고 신실하고 정직하고 지혜롭고 전지전능하고 위대하고 등등 99가지 덕목을 이름으로 따오는 방식이다. 그 덕목들은 알라에게 속한 것이므로 이름 앞에 ‘종’이란 의미로 압둘(Abdul-)을 붙인다. 즉 알라의 종인 압둘라(Abdullah), 압둘 라흐만(자비), 압둘 라힘(자애), 압둘 알림(지혜, 압둘 카림(위대함), 압둘 자밀(아름다움)등이다.
둘째는 성서에 나오는 예언자의 이름을 따는 방식이다. 놀라운 것은 마리아, 예수, 솔로몬, 요셉, 요한, 아담 같은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름이 그대로 무슬림의 이름을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아인 경우 마리아에서 마리얌(Mariam), 예언자 무함마드의 부인이었던 카디자, 하프사, 할리마, 살라마, 자이납, 아이샤, 그의 외동딸 파티마등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가장 많은 무슬림 이름은 이슬람의 마지막 예언자인 무함마드이다. 초기 세 명의 정통 칼리파를 찬탈자로 보고 인정하지 않는 시아파에서는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등의 이름을 피한다. 4대 칼리파 알리에 맞섰던 무함마드의 아내 아이샤도 시아파에서는 싫어하는 여성 이름이다. 따라서 시아파에서는 알리, 후세인, 하산, 파티마 등의 이름을 더 선호한다.
셋째는 다른 문화권에서도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지명이나 고향, 행복, 사랑, 자연물(바다, 장미, 바위등)등을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다. 유목 생활을 하던 아랍인은 ‘성’이란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이름과 아버지 이름 사이에 빈(bin)이나 빈트(bint)를 붙여 부자, 부녀간을 표시해 가계를 나타냈다. 예를 들면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은 ‘Abdullah bin Abdul Aziz Al-Saud(알사우드의 아들, 압둘 아지즈의 아들인 압둘라)’로 표시된다. 딸은 아버지 이름 앞에 bin 대신 bint를 붙이면 된다. 현재는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 성을 만들어 쓰고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성이 없던 터키가 1928년 성씨법을 통해 모든 국민에게 갑자기 성을 만들어 사용하게 하면서 여러 많은 부작용과 급격한 전통 의식의 변화가 생겨나기도 했다.  326-327

-아끼까(희생의식)
생후 7일째 작명하는 날, 아기의 머리털을 정수리만 남기고 자르고 그 머리털의 무게에 해당하는 금이나 은을 가난한 사람에게 희사한다. .. 그 다음 주인은 손님을 초대해 동물들을 희생한다. 보통 남아인 경우에는 양 두 마리, 여아인 경우에는 양 한마리를 잡는다. 아끼까(Aqiqah) 의식은 생후 7일째뿐만 아니라, 지방에 따라서는 14일째와 21일째에도 행한다.  328

할례(진정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한다)
남설 할례는 이슬람의 전통이자 관습이다. .. 할례의 시기는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아랍 사회에서는 작명 의례를 행한 직후인 생후 8일째에 할례를 행한다. 그러나 아랍권 일부에서와 비아랍권에서는 생후 40일째 또는 아이가 좀 더 성장한 후인 5~7세 때 할례를 행한다. 상류층 자제가 할례를 할 때는 가진 자가 비용을 대 수십 명의 고아와 가난한 자이 자식들이 함께 할례를 행하는 것이 미덕이다. ..
할례일에는 많은 친지가 지켜보고 축송을 하는 가운데 마취 없이 간단한 수술을 행한다. 어린 나이에도 절대 울지 않는 강건함을 보여 줌으로써 남성의 세계에 입문할 자격을 인정받는다. ..
여아 할례는 이슬람에서 규정된 관습이나 권고 사항이 아니며, 이슬람 이전 아프리카 풍급의 잔재다. 여아 할례는 지역에 따라 적용되는 방법과 정도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수단과 이집트에서는 아직도 여아 할례가 매우 보편적인 데 반해,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하는 사우디아라비아, 북아프리카,터키, 파키스탄 등지에서는 거의 소멸해 가고 있다. 할례 방식도 수단에서는 소음순과 음핵의 돌출 부분을 포함한 광범위한 부위를 제거하는 데 비해, 대부분 지역에서는 음핵의 일부(1~3밀리미터)를 예리한 칼로 제거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현대의 이슬람 학자 대ㅜ분은 여아 할례를 이슬람 이전 시대의 비종교적 의미로 배척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일부 아랍인은 이를 관습적으로 행하고 있다. 그들은 여성 할례가 여성의 성적 기능과 충동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행해진다고 알고 있다.  329-330

할례 이후부터는 아버지에게 절대적 복종과 존경심의 바탕에서 예절, 사회 관습과 관례, 종교 지식 등의 엄격한 가정 교육을 받는다. ‘셰이크’라는 가정 교사를 고용하기도 한다. ..
7세가 되면 남녀가 유별해 하렘에 함부로 왕래할 수 없으며, 여아는 바깥출입시 베일을 쓴다.  331


이슬람 전통 사회에서 결혼은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가족이나 혈연 공동체 모두에게 관련되는 공통의 관심사이다. 따라서 자유 연애결혼은 상상할 수도 없다. .. 요즘은 아랍 사회에서도 결혼 연령이 상당히 늦춰졌다. 나라별로 혹은 도시와 지방 간에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남자는 25~30세, 여자는 22~27세가 새로운 결혼 적령기가 되었다.  332

시아파와 달리 수니파에서는 남자는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속한 가문의 여자와 결혼할 수 있으나, 여자의 경우에는 자신보다 비천한 가문의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333

여자는 부모가 선택해 준 신랑 후보를 거절할 수 있으나 본인이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할 권리를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결혼 후보자는 부모나 후견인과 함께 신랑 혹은 신부를 볼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지만, 혼례일까지 상대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결혼이 금지되는 근친의 범위는 어머니, 딸, 여자 형제, 배다른 누이, 숙모, 고모, 이모, 외숙모, 조카, 질녀, 장모, 의붓딸, 아버지의 다른 부인들, 며느리 등이며, 두 자매와의 동시 결혼, 같은 유모의 젖을 공유했던 사람, 노예와의 결혼도 금지된다. 또한 남녀 모두 부부 생활을 위협하는 지병이나 신체적 결함이 없어야 하고, 남자는 네 명의 아내를 갖지 않은 상태, 여자는 이혼한 후 전 남편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재혼 금지 기간을 충족한 상태여야 한다.
부족에 따라서는 처가 사망한 경우 처제나 처형과의 결혼이 보편적이고, 형제가 사망하는 경우 형수나 제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수계혼(嫂繼婚) 제도가 성행하기도 한다.  333-334

아랍 사회에서 권장된 결혼 관습 중 하나는 사촌 결혼이다.  335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는 대가로 신부 측에 일정한 재화를 지불하는 마흐르 제도는 이슬람 이전 아랍 사회에서도 잔존하던 유습이다.  335

일반적으로 부모의 도움 없이 독신 남성이 준비하기에는 매우 벅찬 금액이다. 따라서 나이 든 노총각과 이혼녀의 결혼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편견 없이 행해진다. 초혼과 재혼에 따라 그 비율도 달라 처녀일 경우를 100으로 할 때, 이혼녀는 75, 미망인은 50에 해당하는 마흐르를 받을 수 있다. .. 최근에는 가난한 총각들을 위해 아랍 은행이 마흐르 금액을 장기 융자해 주기도 한다.  336


이슬람 사회에서의 장례는 빠른 매장(보통 24시간 이내), 간단하고 엄숙한 상례, 내세에 대한 강한 믿음 등의 특징으로 규정된다.  337

미망인은 4개월 10일간 외간 남자와의 접촉을 피하며 집에서 지낸다. 이는 재혼 금지 기간인 잇다(iddah)를 지켜 자유로운 재혼권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미망인은 1년 후 재혼이 허용된다.  342





CHAPTER 5 이슬람 여성, 억압과 현실


이슬람 사회는 종잡을 수 없고 이슬람 여성관도 나라마다 다양하다.  350

우선 여성에 대한 꾸란의 기본 가르침을 살펴보자.
첫째, 꾸란은 남녀 모두 알라의 피조물이며, 동등한 가치와 존엄을 가진 존재로 규정한다. .. 꾸란은 흔히 구약에서 가르치는 여성의 창조 기원설을 배격한다.
둘째, 꾸란에서는 종교적 의무 수행과 보상은 물론, 허용과 금기에서도 조금의 차등 없는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과한다.
셋째, 남녀가 동등하게 교육받을 기회에 대해서도 꾸란은 물론,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에서 많은 예를 찾을 수 있다.
넷째, 꾸란에는 법적 측면에서 여성을 보호하는 장치가 언급돼있다.
다섯째, 꾸란은 양성 사회를 지향한다.  352-355


놀랍게도 이슬람의 기본 결혼 제도는 일부일처이다. 다만 전쟁이나 기근과 같은 특수한 조건에서는 일부다처의 문을 열어 놓고 있다.  358

‘만일 너희가 고아들을 공평하게 대해 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결혼을 할 것이니 너희가 마음에 드는 여인으로 둘, 셋, 또는 넷을 취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을 공평하게 대해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한 여인이나 아니면 너희 오른손이 소유한 것(노비)을 취할 것이다. 그것이 너희가 부정을 범하지 아니할 최선의 길이다. -꾸란 4장 3절’  359


탈라끄, 남성의 일방적 이혼 통고
이슬람 관행에서 남편이 다처를 두고 싶은데 첫 번째 아니가 동의하지 않으면 남성은 탈라끄(Talaq)라 부르는 일방적인 이혼 통고 제도를 활용한다. ‘나는 당신과 살기 싫다’라는 표현인 탈라끄를 석 달의 시차를 두고 세 번만 하면 이혼이 성립되는 제도다.  361

쿨, 여성의 이혼 청구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예속돼 살 수 없다면 남편의 동의 없이도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 길이 이슬람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이를 쿨(Khul)이라고 한다. 이혼 청구 사유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잘 모아야 하며, 이때 여성은 결혼 시 받았거나 약속받은 지참금의 일부 혹은 전부를 포기해야 한다.  362


역사적으로 히잡 착용의 관습은 이슬람 이전 시대부터 존재해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명시된 것은 꾸란에서였다.
‘밖으로 나타내는 것 이외에는 유혹하는 어떤 것도 보여서는 아니 되니라. 즉 가삼을 가리는 수건을 써서 남편과 그의 부모, 자기 부모, 자기 자식, 자기 형제, 형제의 자식, 소유하고 있는 하녀, 성욕을 갖지 못하는 하인, 성에 대해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어린이 이외의 자에게는 아름다운 곳을 드러내지 않도록 해야 하느니라.’ -꾸란 224장 31절
이 구절을 보면 ‘유혹하는 것’과 가슴이라고 언급했을 뿐 무슬림 여성이 가려야 할 신체 부위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다만 이슬람 법학자들의 해석에 따라 가려야 할 부위가 결정되었다.  365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히잡 착용의 상징성이 변했다. 즉 지배 계층의 하렘에서 여성 격리가 성행하자 히잡은 지배 계층 여성의 경제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표시가 되었다. 한편 히잡은 여성의 순결성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을 유혹의 원천으로 간주했던 보수적 시각에 기인했다. 이로써 히잡 착용 여부가 남성의 성적 욕구를 자극해 남성을 타락하게 하는 기준으로 간주됐고, 히잡은 여성의 순결성과 가문의 명예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고 말았다.  365-366

명예를 위한 살인, 소위 명예살인(honor killing)이다. 일반적으로 가족 중 아버지나 남자 형제가 간통이나 성적 부정을 저지른 여성을 살해함으로써 공동체 내에서 불명예스러운 집안이란 낙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극단적 범죄 행위다.
이토록 잔혹한 살인 게임을 주로 남성 중심의 부족 공동체에 잔존하는 유목 사회의 악습이다. 남성이 생산자와 전사의 역할을 독점하는 혈연 중심의 부족 공동체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소유 의식과 성적 독점욕이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나아가 여성의 성적 정절이 아주 중시된다. 적령기에 도달한 여성이 다른 부족과 족외혼을 하려면 신랑은 신붓집에 상당한 액수의 신부 지참금을 지불해야 한다. 신부 지참금 관습은 이스람 시대에 들어서 여성을 위한 노후 보장책으로 그 성격이 바뀌지만, 관습적 맥락에서는 여전히 빼앗긴 노동력에 대한 일종의 보상인 셈이다. 이런 사회적 구도에서 여성은 중요한 재산이자 상품인 셈이다. 그런데 간통이나 부정행위가 밝혀졌을 경우 정상적인 결혼의 길이 막히고, 그 여성이 헤쳐나갈 수 있는 길은 거의 없다. 명예살인이 직계 가족에 의해 처단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배경이다.
명예살인은 대부분 국가에서 살인죄보다는 관행으로 다루어져 1년 미만의 가벼운 형벌에 처했다.  368-369

명예살인은 수니파, 시아파 할 것 없이 꾸란이나 이슬람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반하는 배교 행위이다. 그런데도 명예살인이 종교적 배결을 가진 것처럼 이해되는 것은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 일어나는 토착적인 악습과 이슬람 율법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이다.  370


아프리카 일부 사회를 제외하고 여성 할례를 강요하는 이슬람 사회는 거의 없다.  371




CHAPTER 6 이슬람 경제와 비즈니스 관행


“인샬라(Inshallah)”, 신의 뜻대로!  375

씨를 뿌리고 땅을 가꾸고 수확했다가 비축하며 1년을 계획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순환 경제 형태를 보인 농경 정주 사회와는 달리 전쟁과 교역이 주된 삶의 방편인 아랍 유목 사회의 전통적 삶은 온통 불확실하다. 모든 성패를 알라에 거는 심성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러다 보니 두터운 신뢰가 축적되지 않은 외부인이나 이방인에 대한 불신이 무엇보다 강하다. 그들과 거래할 때는 신뢰가 필요하다. 시간을 두고 관찰하면서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 인샬라라고 할 수 있다.  375

인샬라는 기다림의 미학이다. 반드시 성사되는 비즈니스 노하우다. 신의 뜻을 건 이상 함부로 일을 내팽개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인샬라에 익숙하고 인샬라를 아름다운 인사로 받아들이면 아랍인의 심성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
일상 대화에서 인샬라 외에도 “말리쉬(Maalesh)”나 “마피쉬 마쉬킬라(mafishi mushikillah)”를 입에 달고 산다. ‘문제없어! 다 잘될 거야!’란 의미다. 동부 아프리카인이 자주 쓰는 스와힐리어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와 정확하게 같은 의미다. ..
실제 상황에서 ‘말리쉬’는 결코 ‘괜찮다’, ‘걱정하지 마
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의 희망이고 책임 회피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지 말고 철저히 따지고 점검해 미리 문제를 막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377


“앗쌀라무 알라이쿰(알라의 평화가 당신에게)!” 무슬림이 첫 만남에서 나누는 첫 인사말이다. “마 쌀라마(평화가)!” 헤어지 ㄹ때도 평화다.  378


이슬람 은행은 이자 없이 운영된다. 이슬람 경제에서 고리대금은 철저하게 금기이다. 꾸란에서도 돈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것을 강하게 비난한다. 사악한 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대신 이윤은 철저히 보장된다. 자신의 노동이나 노력, 투자와 지식을 통해 얻는 이익은 신성한 것으로 폭넓게 인정한다. 이자는 금지지만 이윤은 인정하는 것이 이슬람 경제의 골격이다.  386

실제로는 이슬람 사회의 많은 시민이 확정 이자도 없는 이슬람 은행에 예금하고, 일반 서구식 은행보다 더 많은 예금을 예치한다. 그것은 신앙의 문제만은 아니다. 저축에ㅔ 대한 이슬람 은행의 연말 배당이 서구식 시중 은행보다 높기 때문에 이슬람 은행으로 몰리는 것이다.  388

정상적인 상거래는 이슬람에서도 가장 축복받는 삶의 형태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 이런 경우 은행은 투자에 실패하여 오히려 고객 예금에 손해를 끼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슬람 은행은 확실하고 건강한 기업에 투자하기 때문에 실제로 손해를 보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이 점이 바로 무슬림 고객들이 이자도 없는 이슬람 은행에 돈을 맡기는 이윧다.  389




CHAPTER 7 이슬람을 빛낸 문화 예술인


이슬람 신학 내에서도 종파 갈등과 이론 논쟁들이 가열되면서 이슬람의 분파 그룹이 생겨났다. 이슬람의 순수성과 정통적인 모습이 변지로디고 이슬람 내부의 분파적 모습과 현학적인 논쟁에 염증을 느낀 많은 뜻있는 무슬림은 아예 현실을 회피하면서 칩거를 선호했다. 그들은 ‘적게 먹고 적게 마시며 아무렇게나 옷을 걸치고’ 기존의 권윙와 형식에 맞섰다. 그들은 ‘수피(Sufi)’라 불렸으며, 명상과 기도를 통한 다양한 방식으로 이슬람의 가르침에 다가가려 했다. 메블라나 시대인 13세기에는 이미 수많은 수피 종단들이 생겨났고, 이슬람 신비주의자들로 알려진 수피는 나름의 방식으로 종교 공동체를 이루고 신앙생활을 지속했다.  409

메블라나 루미는 꾸란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도 누구나 일정한 영적인 수련을 통해 신의 영역에 들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았다. 바로 메블라나 종단이다. 세마(sema)라는 독특한 회전 춤을 통해 신의 의지를 경험하고, 궁극적으로는 신과 일체감을 이루면서 이슬람의 오묘한 진리를 체득하게 된다는 믿음이었다.  410

루미는 1273년 콘야에서 사망했다. 메블라나 종단은 지금도 콘야에 본부가 있다. .. 메블라나의 수피 사상은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일부, 터키를 중심으로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 전역에 널리 퍼졌다. 이슬람이란 종교가 전파 과정에서 아랍이라는 민족적 옷을 벗고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토착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포용력을 갖추고 이슬람을 퍼트린 수피주의가 중심에 있었다.  413

<나스레딘 호자이야기>는 <아라비안나이트>와 함께 이슬람 세계의 삶과 관습을 알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아라비안나이트의 무대가 궁정이라면 호자이야기는 우리 주변의 서민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416




CHAPTER 8 한국과 이슬람, 1200년의 만남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한국인 무슬림이 많이 살고 있다. 대부분 개종자인 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기존 종교를 버리고 이슬람을 택했으며,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자기 신앙을 지켜 가고 있다. 한국인 무슬림 숫자는 약 4만 명에 이르며, 모스크는 한국 이슬람교 자료에 따르면 전국에 25개(서울, 부산, 경기광주, 전주, 대구, 울산, 제주, 안양, 안산 등)가 있다. 외국인 무슬림 노동자들이 몰려오면서 그들만의 예배와 모임 공간인 무살라(Musallah)의 숫자도 전국적으로 150여 개에 달한다.  472

1976년에는 서울 한남동에 한국 최초의 중앙 모스크가 문을 열었다. 이어 1980년에 리비아의 지원으로 부산 모스크, 1981년 쿠웨이트의 지원으로 경기도 광주 모스크, 1986년 이집트 독지가의 지원으로 전주 모스크가 차례로 문을 열면서 한국에 본격적으로 이슬람 공동체가 형성됐다.  473



CHAPTER 9 끝나지 않은 전쟁


지하드(Jihad)는 이슬람의 성전(聖殿)이다. 그러나 지하드의 원래 의미는 단순히 성스러운 전쟁을 수행한다는 외적 개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하드 개념을 혼동하면서 오히려 왜곡된 의미가 본질을 덮는 현상이 팽배할 정도다. ..
이슬람권이나 유럽에서 무슬림과 관련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거의 모든 무력 투쟁과 자살 폭탄 테러를 무조건 지하드라고 부른다. ..
아랍어 지하드의 언어적 의미는 ‘분투하다, 노력하다, 힘쓰다’이다. 지하드는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개인의 진지하고 성실한 분투를 의미하며, 사회에서 선을 행하고 부정과 불법, 압제, 악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이다. ..
지하드라는 단어는 꾸란에서도 33번이나 언급된다. 대부분이 폭력보다는 믿음, 참회, 선행, 의무, 윤리와 같은 이슬람의 기본 개념과 함께 사용된다. 이처럼 지하드는 하느님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자신과의 내적 투쟁이 본질이다. 나아가 지하드는 적들의 부당한 압제로부터 인권과 믿음을 보호하기 위한 정의이며, 적들의 잘못은 변화시키고 올바른 개혁으로 유도하기 위한 비폭력적 양식인 것이다.  477-478

이슬람에서 전쟁 지하드는 대화, 협상, 조약 등과 같은 평화적 방법이 실패했을 경우만 허용되는 마지막 투쟁 방식이다. 전쟁 지하드의 목적도 인간들을 강제로 개종시키거나 식민 지배, 또는 영토와 부, 자신의 영광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생명, 재산, 영토, 명예 그리고 자유를 압제자와 불법으로부터 지키기 위함이다. 현재 이슬람 세계가 처해 있는 부당한 현실과 좌절의 응어이, 일상으로 반복되는 가족과 형제들의 희생 등이 원래의 지하드 정신을 닫아버리고 폭력적 지하드를 조장하는 근본 원인이다.  479

‘너희를 상대하여 싸우는 자에 대하여 하느님의 이름으로 싸우라. 그러나 침략하지 마라. 하느님은 침략자를 사랑하지 않으신다.’ - 꾸란 2장 190절  480

전쟁 지하드는 첫째 올바른 하느님의 길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둘째 적이 먼저 무기를 들고 무슬림을 공격할 때, 셋째 적이 싸움을 중지하면 무슬림도 곧 무기를 놓아야 한다 등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원칙에 따라 이스랆 율법은 더욱 세부적으로 지하드 전쟁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첫째, 지하드는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오직 국가만이 선포 할 수 있다.
둘째, 지하드 수행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해서는 안 된다.
셋째, 지하드 수행 과정에서 어떤 명분으로도 무슬림을 살해해서는 안 된다.
넷째, 무슬림의 권익과 자유로운 종교 생활이 보장되는 나라에 지하드를 선포하고 싸울 수 없다.  480

기원전 1천 년경에 유대 민족은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며 살고 있다가 기원전 7세기에 아시리아에 빼앗겼다. 그러다 또다시 국가를 세우지만, 기원후 1세기에 유대 왕국은 로마에 멸망했다.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하면서 건국할 때까지 2천 년간 유대 민족은 국가 없는 유랑생활(diaspora)을 해왔다. 처절한 유랑의 무대는 유럽이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이 아닌 유럽에서 박해와 고문과 민족적인 차별을 당하면서 살아왔다.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된 이래, 적어도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유대인은 악마와 동일시되었다. 기독교 입장에서 유대 민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먹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저주받은 민족이었다. 종교개혁 시기에 유대인의 위상은 크게 향상돼 악마의 지위에서 탈피했다. 그러나 유럽인의 반유대 감정은 너무나 뿌리 깊어서 16세기 종교개혁의 선봉자였던 마르틴 루터조차 그의 저서 《악마론》 서문에서 '악마를 제외하고 가장 흉측하고 광포한 우리의 적은 유대인이다'라고 서슴지 않고 단언할 정도였다.
어찌 되었든 20세기 초까지 유럽인은 유대인을 악마와 동일시했다. 14세기 유럽에 페스트가 번져 2천만 명 이상이 죽었을 때도 교황청에서는 페스트가 하느님의 저주라면서 악마를 제거하여 하느님의 노여움을 풀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래서 페스트로 희생된 사람도 많지만, 유대인은 또한 악마라는 이유로 대거 학살당했다. 한때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유행했는데, 이 사냥의 1차 희생자도 유대인이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인의 유대인에 대한 편견은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로 이어졌지만, 19세기 말에도 조직적인 유대인 제거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1880년경에 러시아 황제가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어떤 청년이 던진 폭탄에 맞아 폭사한 일이 있었다. 암살범은 현장에서 잡혔는데, 조사 결과 할례 의식을 치렀던 유대인이었다. 유럽 사람들은 이를 러시아 황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유대인의 음모로 몰아갔고, 다음 해인 1881년 5월법을 비밀리에 제정해 러시아에 있는 수백만의 유대인을 삼등분해서 제거할 정책을 세웠다. 그 결과 수많은 유대인이 학살당하거나 체포, 구금당했고, 또 수많은 유대인이 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 불가리아,체코 등 동유럽으로 대량 이주했다.
1894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드레퓌스 대위 사건도 유대인 편견과 관련한 파문이었다. 프랑스에 있는 독일 대사관으로 프랑스의 고급 군사기밀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 정부는 그 문건을 프랑스 고위 장교가 넘겨주었을 것으로 판단했고, 문건의 암호명을 드레퓌스 대위의 것이라고 단정하여 그를 범인으로 몰았다. 결국 드레퓌스 대위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악마섬에 유배당했다. 그가 유대인이며 더러운 악마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였다. 당시 에밀 졸라를 비롯해 아나톨 프랑스, 앙리 푸앵카레, 장 조레스 등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아무리 유대인이더라도 그렇게 사건을 꿰맞추는 것은 프랑스 지성에 대한 모독이라며 강력하게 항의하고 정부를 비판했다. 사회적인 파장이 확산되자 프랑스군 당국은 재수사하여 에스테라지 소령을 진범으로 밝혀내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드레퓌스 대위는 우여곡절 끝에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482-484

영국 외상 밸푸어는 1917년 영국의 은행 재벌 로스차일드와 비밀리에회동, 소위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이라는 비밀 조약을 체결했다.이 조약에서 유대인의 전쟁 참여를 대가로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 국가 창설을 약속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이 한참 진행중이었던 1916년 5월 16일, 아랍과 유대인과 맺은 두 비밀 조약 사이에 또 다른 비밀 조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영국 대표 사이크스와 프랑스 대표 피코 사이에 비밀리에 체결된 사이크스-피코협정(Sykes-Picot Agreement)의 골자는 전후 중동 지역의 분할에 관한 것이었다. 이 비밀 협정에 따르면, 프랑스는 시리아의 해안 지대와 그 북부,영국은 팔레스타인과 바그다드를 점령하기로 했다.
다시 말해 팔레스타인이라는 한 지역에 아랍인에게는 아랍 국가의 독립을, 유대인에게는 유대 민족 국가의 창설을 약속해 주고,실상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미 그곳을 점령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처럼 상호 모순된 삼중의 비밀 조약과 강대국의 비도덕적 정치 음모가 오늘날 팔레스타인 분쟁의 불씨를 지핀 근원적인 배경이다. 그들이 저질러 놓은 비도덕적이고 무책임한 영토 분할 구상으로 지금 두 민족이 역사적으로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엄청난 희생과 보복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당사자인 영국과 프랑스, 미국은 평화의 화신임을 가장하며 인류의 공존과 평화를 들먹이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전후 처리를 위한 국제회의가 1919년 파리에서 개최됐다.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 원칙을 제창한 이 회의에서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안이 동시에 채택됐다. 즉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밸푸어선언의 이행을 위해 국제 사회가 노력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의하면, 팔레스타인 땅에서 2천여 년간 주인으로 살아온 아랍인에게 국가 건설의 자결권이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유대인은 당연히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반대했다. 국제 사회의 여론이 유대 국가 창설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영국은 유대인의 지지를 얻어 1920년 산레모 회의에서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안을 통과시켰다. 1922년에는 국제연맹에서 이를 추인받았다.
영국에 배반당한 것을 안 아랍인은 끈질긴 국가 독립운동과 격렬한 반영(反) 투쟁을 시작했다. 흔히 1920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일련의 피나는 투쟁의 시기를 '아랍의 분노 시대'라 한다. 이즈음 팔레스타인 지역에 동구와 유럽에서의 유대인 이민이 늘어나자 자연히 토착 아랍인과 이주 유대인 간 갈등과 대립이 증폭했다. 1920년 1만 6,500명이 이주한 것을 시작으로 팔레스타인에서의 인구 불균형과 사회 질서 파괴는 점차 심각한 양상을 띠었다. 더욱이 1933년 이후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들어서고,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가중되자 유대인 불법 이민이 급증했다. 1936년에는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인 이주민 비율이 8%에서 30%로 급증하면서 생존 공간을 빼앗긴 현지 아랍인과의 갈등은 극에 달한다.
이때부터 두 민족 간의 대결 양상은 점차 복수전의 성격을 띠면서 처절한 피의 악순환을 되풀이했다. 영국 당국은 민족 분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는 기색이었다. 1937년에는 아랍인의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고, 1939년에는 유대인 불법 이민에 대한 행정력을 상실할 상태에 직면했다. 그러자 영국은 유대인의 이민을 제한하는 백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혼란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전세계가 전쟁에 휘말리자 소강 국면에 들어서 잠시 망각됐다. 비열하게도 영국은 1939년 전쟁에서 아랍계의 지원을 얻기 위해 '유대 독립 국가 건설'을 유보한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485-487

이스라엘의 탄생과 고토 회복 전쟁 그리고 반미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장은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역사적 순간을 맞았다. 그날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리해 아랍과 유대, 두 개의 독립 국가로 분할하자는 안이 통과되었다. 찬성 33표, 반대 13표였다. 당초 아랍인이 중심이 되는 팔레스타인 연방안이 우세했으나 미국의 집요한 제3 세계 회유 작전으로 결국 연방안 대신 분할안이 통과되었다. 그 내용은 당시 인구가 아랍인의 3분의 1에 불과하고, 전체 면적의 7퍼센트만을 소유하고 있던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 전역의 56퍼센트를 분할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지역 생계 기반인 올리브 농장과 곡창지대의 80퍼센트, 아랍인 공장의 40퍼센트가 유대인에게 배정되었다. 경작 가능한 대부분의 비옥한 땅은 유대인 차지가 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분노와 좌절은 극에 달했다. 2천 년 동안 그 땅의 주인으로 살아온 아랍인에게는 이주해 온 유대인을 받아들이라는 연방안 자체도 수용하기 힘든 상황이었으며, 더구나 분할안은 불공정한 결의안이었다. 유대인 입장을 보호해 준 미국의 유엔 결의안 주도가 후일 반미의 기점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1947년 그날, 아랍인의 운명을 결정짓는 유엔 표결 현장에 영국은 없었다. 이 표결에서 영국은 기권을 택했다.
유엔으로부터 국가 창설을 인정받은 유대인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으로 구체적인 건국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 땅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 토착 아랍인의 저항이 워낙 완강하여 크게 차질을 빚었다. 이때 유명한 유대 테러 조직이 맹활약한 치욕적인 데일 야신촌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유대 지하 테러 조직인 이르군은 1948년 4월 9일, 예루살렘 서쪽의 조그만 마을인 데일 야신촌을 야밤에 습격하여 254명의 주민을 잔인하게 무차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 이스라엘 수상인 메나헴 베긴이 진두지휘한 이 사건은 문명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제2의 나치 학살 사건으로 불릴 정도였다. 이러한 기습 만행은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자행되었으며, 비무장의 아랍 주민들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심어 주었다. 불과 1달여 만에 100만 가까운 아랍인이 서둘러 인근 국가로 도피하면서 소위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가 생겨났다.
이로부터 한 달쯤 지난 1948년 5월 14일, 유대인은 아랍인을 몰아낸 곳에 이스라엘 국가를 건국했다. 아랍 국가와 제3세계의 반대 속에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아랍인의 심장부에 유대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이스라엘에게는 2천년 만에 탄생한 위대한 국가였겠지만,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는 불운과 재앙의 날이었다. 그들은 이날을 '알나크바(대재앙)'의 날로 기념한다.
세계는 2천 년 유랑생활을 마무리하고 역경을 딛고 일어선 유대인의 승리에 동정과 축하의 눈길을 보냈다. 바로 그날 자신의 고향에서 쫓겨난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은 조국 탈환을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분노했다. 그동안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이 아닌 유럽에서 온갖 민족적 차별과 종교적 박해를 감수하면서 굳건하게 터전을 다졌다. 유대인 박해와 나치 학살로 이어지는 유대인 말살 정책은 유럽인의 죄과였다. 왜 유럽인이 희생시켰던 유대인에 대한 책임을 아무런 역사적 인과가 없는 아랍인에게 전가해야 하나? 팔레스타인 지역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됐다. 힘없는 팔레스타인 아랍인은 오히려 자신들이 난민이 되어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오직 한 가지 고향에 돌아가는 꿈을 꾸면서 그러나 그 꿈은 산산이 조각났다.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아랍 국가들의 즉각적인 저항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1948년에 제1차 중동 전쟁이 일어났고, 1956년에는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한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의 지도 아래 제2차 중동 전쟁이 벌어졌다. 결과는 모두 비참한 패배였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1964년에는 아랍 연맹의 지원으로 야세르 아라파트가 지휘하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가 탄생했다. 그러나 곧이어 소위 '6일 전쟁'으로 알려진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으로 고토 회복은 커녕, 기존 아랍 영토까지 이스라엘에 점령당했다. 지중해 지역의 가자 지구, 요르단강 서안, 시리아 골란고원, 이집트 시나이반도 등이 그곳이다. 유엔은 안보리 결의안 242호, 338호 등을 통해 점령지의 즉각적인 반환을 촉구했지만, 그 결의안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미국이 거부권 행사를 남발하면서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비호했기 때문이다.
좌절한 팔레스타인 극단주의 저항 세력들은 결국 '검은 9월단'이라는 게릴라 조직을 결성하고, 1972년 뮌헨 올림픽 기간 중 이스라엘 선수의 숙소를 테러 공격해 선수들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세계를 경악시켰고,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에 부정적 이미지를 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73년 석유 무기화 조치로 제1차 오일 쇼크로 이어진 제4차 중동 전쟁에서는 처음으로 이슬람 진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부터는 무모한 무력 투쟁보다 현실적인 협상이 병행됐다. 그 결과 1978년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이 중재한 캠프 데이비드 협상을 통해 전쟁 당사자인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양국 사이에 외교 관계와 불가침 조약이 이루어지고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양도했다.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는 그해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팔레스타인의 평화는 멀어만 보였다. 1982년 9월에는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를 침공해서 팔레스타인 난민촌 사브라-샤틸라 학살 사건을 저질러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87년부터는소위 돌멩이로 이스라엘 탱크에 맞서는 비폭력 평화 시위인 인티파다(Intifada, 민중봉기)가 시작되었다. 곧이어 가자 지구를 사실상 통치하는 저항 조직 하마스(Hamas)가 셰이크 아흐마드 야신의 지도로 탄생했다. 그리고 1988년 11월에 팔레스타인은 독립 국가를 선포한다.미국과 이스라엘이 강하게 반대하고 있어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빼앗긴 보금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아랍인의 투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487-491

팔레스타인 문제의 갈등과 비극은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시작됐다. 그해 8월 29일 제1차 세계시온주의자 대회가 바젤에서 열렸고, 테오도어 헤르츨이 주도해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창설한다는 비밀 강령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망령처럼 확산되는 유럽의 반유대주의 물결 속에서 공동체 절멸 위기를 이겨 내고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의 비극을 온몸으로 감내한 유대인의 생존 노력은 그 자체로 존중받고 지지받아야 한다. 그런데 왜 2천 년 동안 평화롭게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땅이 유럽에서 유럽인에 의해 박해받았던 유대인의 영토가 되어야 했나. 강대국의 책임 회피이자 역사의 후퇴다.  496-497


2001년 10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20년(2001~2021) 만에 탈레반의 승리로 끝이 났다. 9.11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알카에다를 비호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프가니스탄의 합법적 집권 세력인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고자 전쟁을 시작했다.  527

현재 아프가니스탄은 많은 종족과 부족 집단 중 일곱 개 부족이 주축을 이룬다. 파슈툰(Pashtun), 타직(Tajik), 우즈벡(Uzbek), 하자라(Hazara), 아이마크(Aimaq), 투르크멘(Turkmen), 발루치(Baluchi) 등을 중심으로 약 3천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 종족별로 뚜렷한 전통과 토착 관습을 보이지만, 종족 사이는 그렇게 배타적이거나 폐쇄적이지 않다. 이해관계가 침해당했을 때 주저 없이 서로 갈등하고 투쟁하지만, 얼마든지 협상을 통한 권력 분점과 통혼이 가능하며, 외부의 적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단합하는 경향을 보인다.
가장 주요한 종족은 파슈툰으로, 인구의 40~45%를 차지하며 파키스탄과의 국경 지대인 남쪽 지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 타직은 서쪽과 북동 지방, 하자라는 중앙부, 우즈벡은 북서부 지방에서 강력한 연고를 유지하고 있다. 아무래도 주력 종족인 파슈툰의 영향력이 가장 클 수밖에 없다. 현재 탈레반 주축 세력이 파슈툰이다.  528-529

1990년대 들어 남부 파키스탄 국경 부근에서 파슈툰족이 주축을 이룬 탈레반 그룹이 갑자기 나타나면서 내전 양상은 새 국면을 맞았다. 1994년 가을, 그들은 스스로 ‘이슬람을 진정으로 공부하는 학생들’, 곧 탈레반이라고 자처하며, 서로 적대 관계에 놓여 있는 군벌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이슬람법에 근거한 이슬람 정부의 탄생을 표방했다. 그들은 전쟁 직후 무정부 상태에서 폭력과 납치, 강간과 약탈이 성행하던 사회를 바로잡기 위한 자경단으로 출발해, 강한 이슬람 율법의 시행만이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진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조직적이고 훈련된 탈레반 그룹들은 1996년 9월 카불을 점령했으며,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을 제외한 아프가니스탄 대부분 지역을 장악해 사실상 집권 세력이 되었다.  531-532

통치 경험이 부족한 탈레반 정부는 극단적 이슬람 원리만 고집하는 무리한 정책을 펴 국민의 지지는 물론, 국제 사회의 신뢰까지 상실했다.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가무와 오락이 금지됐으며, 이슬람을 주제로 하지 않은 영화 및 비디오 상영이 금지되었다. 또한 여성에게는 얼굴까지 가리는 부르카를 강요했으며, 여성의 취업을 불법화해 가정으로 돌려보냈다. 심지어 여성은 흰 양말 착용, 화장과 립스틱, 교육 기회, 꾸란 공부 등이 모두 금지되면서 완전한 차별 정책에 시달렸다. ..
탈레반 정권은 9.11 테러가 일어나자 테러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을 보호하며 끝까지 신병 인도를 거부했고, 이것이 미국의 부당한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일차적인 빌미가 되었다. 탈레반은 구소련을 막아 내기 위한 항쟁의 동료였던 오사마 빈 라덴을 버릴 수 없었다. 9.11 테러 훨씬 이전부터 탈레반이 장악하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의 공격 목표였다. 카스피해 원유를 인도양으로 연결하는 핵심 루트일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이란, 파키스탄과 인도를 사이에 둔 전략적 요충지로서 미국의 세계 전략에 곡 필요한 나라였다. 이처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명분과 실리가 따로 있는 전쟁이었다. 탈레반 정권은 전쟁 즉시 붕괴했고, 미국의 조정을 받는 카르자이 정권이 아프가니스탄의 새 정부를 구성하고 있다. ..
탈레반은 게릴라전을 펴며 미국과 친미 아프간 정부군을 괴롭혔다. 533-534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미국의 대테러 전쟁 20년은 탈레반과의 전쟁이었다. 9.11 테러의 주적인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가 탈레반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년간 알카에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거의 매일 탈레반과의 전쟁이 중심을. 차지했다. 탈레반은 본질적으로 자생적 풀뿌리 민중 조직이다. 따라서 탈레반을 궤멸시킨다는 것은 다른 말로 아프가니스탄. 국민 대다수를 없애겠다는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535

미국 국방부와 브라운 대학교의 ‘전쟁 비용 프로젝트’ 등 전쟁비용을 계산하는 여러 연구 단체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 지난 20년 동안 벌인 ‘테러와의 전쟁’에서 지출한 비용만 6조 4천억 달러에 달한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비용 지출만 약 2조 3천억 달러로 잡고 있다. 상상하기 힘든 천문학적인 숫자다 그런데 이 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사람과 재산의 초토화, 더 큰 분노와 복수의 응어리만 잔뜩 키워 놓았다. 이 비용의 5%만이라도 전쟁 피해 복구나 전쟁 희생자 지원 프로그램, 난민이나 소외 계층의 삶의 질 개선에 사용했더라면 테러는 지금보다 현저하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이는 거의 모든 연구 기관이 내놓는 공통된 결과이다.
지난 4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읽는 코드는 파괴와 살육 그리고 절망이었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980년대 10년 동안은 옛 소련군이 이곳에서 전쟁을 벌였고, 소련이 물러난 뒤인 1990년대 전반기에는 지방 군벌끼리 수도 카불을 차지하려고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그 내전의 최종 승자가 바로 탈레반이었다. 2001년 9.11 테러를 빌미로 최근 20년 동안은 미국과 전쟁을 벌였다. 이제 미국과 탈레반의 평화 협상으로 모든 것이 종식되고 다시 평화의 실마리를 얻었지만, 40년 폐허와 피폐의 깊은 골을 하나씩 메꾸는 데 또 다른 40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536-537


영국의 오랜 식민 통치가 끝나고 1947년 인도 대륙이 무슬림 지역인 파키스탄과 힌두 지역인 인도로 각각 분리 독립했다. 이때 무슬림이 대다수인 지역은 파키스탄, 힌두교도가 대다수인 지역은 인도에 귀속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당시 카슈미르 지역은 전체 인구의 60% 이상이 무슬림이었음에도 힌두 마하라자(토후, 왕) 하리 싱이 주민 의사에 상관없이 카슈미르를 인도에 귀속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무슬림은 즉각 파키스탄으로의 귀속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파키스탄이 동족 보호를 내세우며 군대를 파견했다. 이로써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카슈미를 비극의 시작이다.
카슈미르 문제는 지난 70여년간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 간 분쟁의 핵심 사인이 되었으며, 상황의 지속적인 악화로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더욱이 인도와 파키스탄이 1998년 핵 보유를 공식화하면서 인구 15억을 헤아리는 이 지역의 위험 수위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카슈미르 문제는 영토 분쟁과 함께 무슬림 파키스탄과 힌두 인도 간 종교적 갈등을 내포하고 있어 해결의 실마리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538-539



CHAPTER 10 서구의 이슬람 그리고 공존의 미래


이슬람 원리주의란 무엇인가
서구에서 주장하고 서구 언론에서 일반화한 이슬람 원리주의는 꾸란과 하디스 같은 이슬람 경전의 구절과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면서 타락한 서구 사회는 물론, 변질된 무슬림 사회를 뒤엎거나 변화시키려는 급진적 사상운동을 일컫는다. 동시에 현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시대착오적인 돌출 행동과 과격한 무장 투쟁등으로 지구촌 평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고정 관념을 양산한다. 이는 극히 일부의 극단적 행위를 일반화시키는 고도의 전략적 시나리오이다.  573


Posted by WN1
,

작가의 말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인생을 얼마쯤 살다 보면 완벽한 행복이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거소가 정반대되는 측면을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즉 완벽한 불행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말이다. 이 양 극단의 실현에 걸림돌이 되는 인생의 순간들은 서로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모든 영원불멸의 것들과 대립하는 우리의 인간적 조건에 기인한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늘 모자란 인식도 그중 하나다. 그것은 어떤 때에는 희망이라 불리고 어떤 때에는 불확실한 내일이라 불린다. 모든 기쁨과 고통에 한계를 지우는 죽음의 필연성도 그중 하나다. 어쩔 수 없는 물질적 근심들도, 이것들이 지속적인 모든 행복을 오염시키듯, 이것들은 또 우리를 압도하는 불행으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돌려놓음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파편화하고, 그만큼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18


위엄 있게 죽음을 맞을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종종 그 소수는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이다. 침묵할 줄 아는 사람, 다른 사람의 침묵을 존중해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20


우리는 모두 그 문 안에 갇힌다. 머리를 박박 깎인 채 알몸으로 서 있다. 발이 물에 잠긴다. 샤워실이다.  29


아우슈비츠 근처 모노비츠에 와 있다.포로들은 일종의 고무인 부나(부나는 원래 부타젠과 나트륨의 첫 글자를 딴 것. 모노비츠에 있는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는 이 합성고무를 만들기 위한 공장이 있었는데 이를 부나 공장이라 불렀다)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한다. 그래서 수용소 이름도 부나다.  31


종이 울리자 여전히 깜깜한 수용소가 깨어나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진다. 5분 동안의 축복이다. ..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뭔지 알 수 없는 넝마 조각들을 우리에게 던졌고 밑창이 나무로 된 신발 한 켤레 속에 우리의 두 손을 쑤셔넣었다. 상황을 이해할 시간도 없이 우리는 바깥에, 새벽녘의 푸르스름한 눈 위에 나와 있다. 맨발에 알몸으로, 손에는 옷과 신발을 든 채 우리는 1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다른 막사까지 달려가야만 한다. 우리는 그 막사에서 옷을 입을 수 있다.  33


우리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옷, 신발,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빼앗아갔다. ..그들은 우리의 이름마저 빼앗아갈 것이다.  34


해프틀링(포로). 나는 내가 해프틀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이름은 174517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고 죽을 때까지 왼쪽 팔뚝에 문신을 지니고 살게 될 터였다...

"숫자를 보여줘야만" 빵과 죽을 받을 수 있었다.  35


수용소의 고참들은 수인번호로 모든 것을 알았다. 수용소에 들어온 시기, 타고 온 기차, 국적이 수인번호에 나타났다. 3만에서 8만 대의 번호를 지닌 사람들을 보면 누구나 존경을 표하곤 했다. 이제 겨우 수백 명에 불과한 이들은 바로 폴란드 게토의(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 14세기 초부터 19세기까지 유럽 곳곳에 존재했다. 독일군은 1940년부터 동유럽의 주요 도시에 게토를 재건했는데, 그곳은 곧 기아와 질병 수용소로의 강제연행 등으로 비극적인 죽음의 무대가 되었다. 바르샤바의 게토에서는 1943년 봄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결국 그곳에 있던 거의 모든 유대인이 학살됨으로써 진압되었다.) 생존자들이었다.  36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수용소가 그런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빨리 그리고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38


막사마다 200~250명씩 수용되는 일반 해프틀링이 사는 곳이다...

공동 침실의 바닥 면적이 얼마나 좁냐 하면, 같은 B블록에 사는 사람들은 반 정도가 침대에 누워 있지 않는다면 전체가 동시에 그 공간에 있기도 힘들다. .

우리는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이 세 부류로 나뉜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범죄자, 정치범, 그리고 유대인이었다. 모두 줄무늬 옷을 입고 있고 모두 해프틀링이지만, 범죄자들은 상의에 박힌 숫자 옆에 초록색 삼각형을 달고 다닌다. 정치범들은 빨간색이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빨간색과 노란색의 유대인 별을 단다.  44


우리는 음식물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다. 이제 우리도 식사를 마친 뒤 반합의 바닥을 열심히 긁어내고 빵을 먹을 때는 부스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턱 밑에 반합을 댄다. 이제 우리는 죽통의 윗부분에서 푼 죽과 밑에서 푼 죽이 같지 않다는 것도 안다. 우리는 죽통의 크기에 따라 줄을 설 때 어느 죽통 앞에 서는 게 제일 유리한지 계산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 쓸모가 있음을 배웠다. 철사는 신발을 묶는 데, 천 조각은 발을 감싸는 데 필요하고 종이는 추위를 막기 위해(불법으로) 상의에 대는 데 필요하다. 우리는 모든 물건을 도둑맞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만 방심하면 반드시 도둑맞는다는 것을 배운다. 도둑맞지 않기 위해 반합부터 신발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모두 강의에 집어넣어 보따리를 만들어 베개로 베고 자는 기술을 익힌다.  45


자신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 이성적일 수 있는 인간은 매우 드물다. 운명이 위태로울 때 사람들은 극단적인 태도를 취한다. 성격에 따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잃었고 여기서는 살 수 없으며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금방 확신하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를 기다리는 삶이 힘겹기는 하지만 구원의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이 멀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믿음과 힘이 있다면 우리집으로 다시 돌아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인 이 두 부류가 그렇게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불가지론자들이 많아서라기보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화 상대와 상황에 따라, 기억도 일관성도 없이 두 극단적인 입장 사이에서 동요하기 때문이다.  50


나는 수레를 밀었고, 삽질을 했고, 비에 젖었고, 바람에 몸을 떨었다. 내 육체는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배는 볼록하게 나왔고 팔다리는 장작개비 같았으며 얼굴은 아침이면 부었다가 저녁이면 홀쭉해졌다. ..

사나흘 만나지 못하면 서로를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우리 이탈리아인들은 매주 일요일 저녁 수용소 한쪽 귀퉁이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곧 그만두어야 했다 숫자를 세는 게 너무 슬펐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는 매번 줄어들었고 매번 몰골이 더 사납고 더 비참해졌다. 모임에 나가려고 몇 발짝 떼어놓는 것도 힘이 들었다. 게다가 다시 만나게 되면 필연적으로 기억을 떠올리고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51


솔직히 고백하면, 수용소 생활 일주일 만에 나는 청결의 욕구를 잃어버렸다. 내가 세면장을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거기에 쉰 살이 다 된 내 친구 슈타인라우프가 웃통을 벗고 서 있었다. 그는 몸을 문지르고 있으나 별 효과가 없다(비누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목과 어깨를 씻는다. 슈타인라우프는 나를 보자 인사를 한다. 그러다 곧바로 정색을 하며 다짜고짜 내가 왜 안 씻는지 묻는다. 내가 왜 씻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면 내게 도움이라도 된다는 건가? 내가 누구의 마음에 더 들게 되기라도 한다는 건가? 하루, 아니 한 시간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 반대다. 오히려 수명이 더 짧아질 것이다. 씻는 일도 노동이고 에너지와 칼로리의 낭비니까. 슈타인라우프는 우리가 석탄 자루밑에서 30분만 낑낑대노라면 자기와 내가 구분조차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런 생활환경에서 얼굴을 씻는다는 것은 어리석고 심지어 무례하기조차 한 것 같다. 이것은 기계적인 습관일 뿐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절멸의 의례를 처량하게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아니, 이미 죽기 시작했다. 기상과 노동 사이에 여우 시간이 10분밖에 없다면, 나는 그 시간을 다른 데 쓰고 싶다. 나 자신 속으로 침잠하여 결산을 하거나, 이것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늘이나 바라보고 싶다. 아니면 아주 잠시나마 한가로움이라는 사치를 즐기도록, 그냥 그렇게 살아 있도록 내버려두고 싶다. 

하지만 슈타인라우프가 내 생각을 가로막는다. 그는 세수를 다 했고, 무릎 사이에 끼워두었던, 나중에 걸칠 아마포 상의로 몸의 물기를 닥는다. 그러고는 나에게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는데, 그 와중에도 자기가 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56-57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도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이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

이것이 바로 마음씨 좋은 사람 슈타인라우프가 나에게 말해준 것이다.  57-58


카베는 크랑켄바우, 즉 위무실의 약자다. ..

회복의 기미를 보이는 사람은 카베에서 치료를 받고, 병이 점점 심해지는 사람은 가스실로 보내진다.

이 모든 게 우리가 다행히 '경제적으로 유용한 유대인'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65


카베의 삶은 림보(<신곡>의 지옥을 구성하는 아홉 개의 원 중 가장 형벌이 가벼운 제1원을 말한다.)의 삶이다. 굶주림과 질병 본래의 아픔 말고는 불편함이 상대적으로 적다. 춤지도 않고 일도 안 한다.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구타를 당하지도 않는다.  72


11시 30분에 오늘 죽은 어느 정도일지, 맛은 어떨지, 죽통의 윗부분 혹은 아랫부분 중 어느 것이 우리 차지가 될지 하는 판에 박은 질문들이 시작된다. 난 이런 질문들을 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그래도 그 대답에 탐욕스럽게 귀를 기울이고 부엌에서 실려오는 연기에 코를 킁킁거리지 않을 수 없다.  103


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모든 힘줄 속에 뿌리 박혀 있다. 이것이 인간 본질이 지닌 속성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이러한 목적에 많은 이름을 부여하며 그 성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토론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문제는 훨씬 더 단순하다.

오늘 그리고 여기서 우리의 목표는 봄에 도달하는 것이다. 지금은 다른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제 이런 목표 뒤에 다른 목표는 아무것도 없다.  106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완전한 행복의 상태를 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 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 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비탄에 잠길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뒤로 또 다른 이유들이 줄을 서 있다.  110-111


민간 관리국은 부나에서 도둑질하는 것을 벌주지만, SS는 오히려 허용하고 조장한다. SS가 엄금하는 수용소 안에서의 도둑질이 민간인들에게는 정상적인 교환 행위로 간주된다. 해프틀링들 간의 도둑질은 일반적으로 처벌을 받으며, 도둑과 피해자가 동일한 강도의 벌을 받는다. 나는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이라는 단어가 수용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지 한번 생각해보라고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다.  130


우리는 명백하고 손쉬운 추론을 믿지 않는다. 모든 문명적 상부구조가 제거되면 인간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우둔하다는 추론 말이다. 이러한 추론에 따르면, '해프틀링'은 거리낌이 없는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생각에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궁핌과 지속적인 육체적 고통 앞에서 수많은 사회적 습관과 본능이 침묵에 빠진다는 것뿐이다.  132

Posted by WN1
,






<이것이 인간인가>는 <안네의 일기>, 빅토르 프랑클의 <밤과 안개>, 엘리 비젤의 3부작 <밤> <새벽> <낮>과 함께 나찌 독일이 저지른 만행의 진상을 전하는 증언 문학의 대표작으로서 지금도 널리 읽힌다.  22


1987년 4월 11일에 또리노의 레 움베르또(Re Umberto)거리에 있는 자택에서 자살했다.  23


67세의 쁘리모 레비는 아파트 4층 난간을 넘어 아래층의 홀로 몸을 던졌다.  27


생전의 쁘리모 레비와 면식이 있던 타께야마 씨는 "내가 아는 레비는 명랑하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를 지닌 쾌활한 인물로, 눈에는 지적 호기심이 넘치고, 언제나 농담을 즐겨 했다.(...) 그런 그가 돌연 자살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고 회고한다.(<지금이 아니면 언제>의 역자후기)

그 부분을 읽을 때, 내가 바로 머릿속에 떠올린 것은 한나 아렌트의 [우리 망명자들]이라는 글이었다. 그 글은 <파리아(pariah, 차별받는자를 뜻한다)로서의 유대인>이라는 평론집에 수록되어 있다.

'우리 중에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참 나눈 후, 집으로 가서 가스를 틀어놓거나 마천루에서 뛰어내리는 기묘한 낙관주의자들이 있다. 우리가 선언한 쾌활함이 죽음을 곧바로 받아들일 듯한 위험스러움과 표리일체임을 그들은 증명하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생명이야말로 최고의 선이며 죽음이 최대의 공포라는 확신 아래서 자랐는데, 생명보다 지고한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 채 죽음보다도 나쁜 테러의 목격자가 되고 희생자가 되었다.'

한나 아렌트가 이 글을 쓴 것은 1943년이었다.  28-29


아렌트는 여기에서 망명 유대인드의 '동화' 지향, '성공' 지향을 비판하고 하이네, 카프카에서 채플린에 이르는 "'의식적 파리아'의 입장을 선호한 유대인 소수파의 전통"을 상기할 것을 주장했다. '파리아'라는 아이덴티티에 입각하여 차별과 억압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모든 '파리아'의 해방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과 통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렌트는 망명 유대인의 자살 충동을 분석하고, "(그들은) 싸우는 대신에 또는 어떻게 하면 저항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대신에, 친구나 친척의 죽음을 바라는 것에 익숙해져버렸다"고 진술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누군가 죽으면 이제야 그 사람이 완전히 어깨의 짐을 벗었구나 하고 쾌활하게 생각하"곤 한다. 결국에는 "자신도 얼마나마 어깨의 짐을 벗을 수 있길 원하게 되고, 그래서 실제로 자살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 표면상의 쾌활함과는 정반대로 그들은 항상 자신에 대한 절망감과 싸운다. 그리고 결국 일종의 자기 본위로 죽음을 선택한다"고 말했다.  29-30


1943년 7월 10일 연합군이 씨칠리아(Sicilia)섬에 상륙하자 이딸리아의 정세는 크게 역전되었다. 7월 25일에 파시스트정권은 내부적으로 붕괴하여 무쏠리니는 실각하고 바돌리오정권이 새로 들어섰다. 바돌리오정권은 독일과 관계를 끊고 연합국과 단독강화의 길을 찾아, 9월 3일 드디어 연합군과 비밀리에 휴전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9월 8일에 그것이 공표되자 독일군은 곧바로 북이딸리아를 점령해 감금되었던 무쏠리니를 구출하고, 그를 옹립하여 가르다(Garda)호반(湖畔 호수호 두둑반)의 쌀로(Salo)를 보넉지로, 흔히 '쌀로공화국'이라 불리는 '이딸리아사회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때부터 반파시즘 운동은 독일 점령군과 그들을 돕는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무장투쟁의 시기로 접어든다.  35


1943년 12월 13일 쁘리모 레비는 스파이에게 속아 산중의 외딴집에 갇힘으로써 어이없이 체포되고 말았다. 부대에 참가한 지 불과 몇 주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38


즉결로 총살된 많은 빨치산과는 다르게, 유대인인 그는 다음 해인 1944년 2월 이딸리아의 포쏠리 디 까르삐(Fossoli di Carpi) 중계수용소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죽음보다도 나쁜 테러의 목격자"가 되었다.  39


쁘리모 레비는 1919년 7월 31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기사(技師 재주기 스승사)였다. 지적인 중산계급 가정에서 자란 레비는 지역의 명문 마씨모 다젤리오(Massimo D'Azeglio) 고등학교를 나온 후 역시 같은 지역의 또리노대학에 들어가 화학을 전공했다. 무쏠리니의 파시스트당이 정권을 쥔 때가 1922년임을 생각하면, 그는 소년기를 전부 파시스트체제 아래서 보낸 것이다.

''아리아인'이든지 유대인이든지, 나 혹은 우리 세대의 전반에는, 파시즘에 저항해야 하며 또 그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아직 확실하게 의식화되지 않았다.'<주기율>  50-51


레비는 대학의 화학과를 함께 다니던 친구 싼드로 델마스뜨로(Sandro Delmastro)에게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물질에 대항해 이긴다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며, 물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주와 우리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때문에 그때 피나는 노력으로 구명하던 멘젤레예프의 주기율이야말로 한 편의 시였으며, 고등학교 시절 암기해온 어떤 시보다도 장중하고 소중했다. (...)

사물을 생각할 수 있는 인간에게 그 무엇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치욕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모든 독단, 증명 없는 단언, 유무를 대답할 수 없는 명령에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가?' ([철], <주기율>)

쁘리모 레비에게는 화학과 물리학이 파시즘에 대한 대항물이었다. 그것은 '명료하며 하나하나가 증명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60


열여섯 살 때 화학에 심취한 그가 친구와 함께 몰래 전기분해 실험을 하는 이야기가 <주기율>의 [수소]라는 단편에 그려져 있다. 어린 쁘리모는 "부푸는 꽃봉오리나 화강암 안에서 빛나는 운모 그리고 자기 자신의 손을 보고" 마음속으로 부르짖는다.

"이것도 밝혀내고 말 테다. 하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바와는 다른 방법으로 모든 걸 밝혀내고 말 테다. 지름길을 밝혀 낼 테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고 말 테다, 문을 비집어 열어 보이겠어."

'이해'에 대한 간절한 욕망, 그것은 소년 시절부터 변함없이 쁘리모 레비의 생애를 관통하고 있다. 과학정신은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였다. 그는 비합리적인 정신주의에 대한 경멸과 혐오감을 통해 파시즘에 의한 부식으로부터 자신의 혼을 지켰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아우슈비츠라는 이해할 수 없는 역(逆 거스를 역)유토피아의 세계에 던져졌을 때, 역유토피아를 지상에서 실현한 '독일인'을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어져갔다.  61


쁘리모 레비의 선조는 1492년 대추방으로 인해 에스빠냐에서 쫓겨난 유대인이며, 남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을 거쳐 1500년경에 삐에몬떼 지방으로 왔다. 그들은 또리노에서 거부당해 삐에몬떼 지방 남부의 농업지대에 정착하며 견직 기술을 도입했지만, "최전성기에도 대단히 수가 적어, 소수파의 상태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73


쁘리모 레비는 또리노를 '진정한 고향'이라고 했는데, 실은 그가 태어난 1919년은 그의 선조 유대교도들이 또리노에서 살도록 허락되고부터 불과 70년 정도밖에 흐르지 않은 싯점이었다. '고향'은 오랜 기간 그들을 계속 거부해왔던 것이다.  74


무쏠리니의 파시스트정권도 당초는 유대인 배격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이딸리아에는 망명 유대인이 유입되었고, 독일에서 압력이 강하게 들어왔다. 무쏠리니 측에서도 독일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할 방침을 정했고, 1937년 11월에 일본, 독일, 이딸리아는 삼국 방공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1938년 9월에 파시스트 정권은 인종법을 제정하여 일련의 반유대 조치를 선포했다.

이 싯점에 이딸리아에는 전인구의 0.1% 전후에 해당하는 약 5만 7천 명의 유대인이 살았다. 그 가운데 약 1만명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망명한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도시에 살았으며, 1만 3700명이 살았던 로마를 필두로 밀라노, 뜨리에스떼에 이어서 쁘리모 레비의 고향인 또리노에는 네번째로 많은 3700명의 유대인이 살았다.  81-82


1939년 6월에 공포된 정부령에 따라서 전문직에 종사하는 유대인은 유대인 고객과 환자만을 상대해야 했다. 또 유대인과 이딸리아인의 결혼을 금지하고, 유대인이 재산 소유, 특히 농지 소유를 제한했다. 1919년 이후에 국적을 취득한 귀화 유대인(쁘리모 레비의 일가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의 국적을 박탈하고, 외국 국적의 유대인과 귀화 유대인에게 1939년 3월까지 재산을 포기하고 이딸리아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1941년 말까지 7천 명의 사람들이 해외로 이주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귀화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이딸리아에서 반유대정책은 불완전하게 실시되었을 뿐이다. 법령은 외견상 독일에서 실시되던 것과 동일할 정도로 철저했는데, 이딸리아 정부는 그 법령을 철저하게 시행할 수 없었다. 실제 이딸리아에서는 유대교도와 기독교도의 '혼합물(混合婚 섞일혼 합할합 혼인할혼)' 비율이 높았고, 상당히 많은 유대인이 군의 장교나 고급관료, 고위정치가 같은 직책에 있었다. 이렇게 유대인이 이딸리아 사회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유대인 박해는 심리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곤란한 측면까지 있었다.(<절멸>)  82-83


쁘리모 레비는 자신을 유대인이라기보다 이딸리아인이라고 느꼈을 것이며, 그보다 이성에만 복종하는 '인간'의 일원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보편성 앞에서는 '유대인'인 것이 '주근깨'정도의 차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대학에 입학한 이듬해에 인종법이 공포되자, 기독교도인 학우와 교수는 대부분 쁘리모 레비에게서 멀어져갔다.  84


아우슈비츠는 폴란드 남서부의 고도(古都 옛고 도읍도) 크라쿠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마을이다. 본래 지명은 오시비엥침이지만 나찌 독일이 점령한 후 그와 같은 독일식 지명으로 개칭했다.  93


'아우슈비츠'라는 말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 마을과 그 주변 지역에 위치한 45개 강제수용소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아우슈비츠'는 수인의 수용, 노역, 절멸과 같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세 단계에 모두 대응할 수 있는 거대한 수용소복합체였다. ..

1942년 7월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이 이송되기 시작해, 종전까지 폴란드에서 30만 명을 비롯해서 네덜란드에서 6만 명, 프랑스에서 6만 9천 명, 헝가리에서 43만 8천 명 등 다수의 유대인이 이송 수감되었다. 그중 이딸리아에서 이송된 7500명은 이들 중에서도 '소수파'였다.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된 희생자 수는 110만 명 내지 150만 명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그중 90%는 유대인이었다.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 1백만 벌 이상의 의복, 7톤의 모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구두와 안경이 발견되었다. 그 싯점에 살아남은 수인은 6만 5천여 명, 그 대부분은 철수하는 나찌에 의해서 '죽음의 행진'에 연행되어갔기 때문에 해방된 수인은 약 7천 명에 불과 했다. 쁘리모 레비는 이 행운의 7천 명 중 한 사람이었다.  96-97


유대인 희생자의 총수는 6백만 명이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97


도시 안의 폐쇄된 좁은 지역에 유대인을 몰아넣는 '게토화'정책. ..

바르샤바에서는 1940년 10월 12일에 게토 설치를 명하는 법령이 공포되었다. 게토는 십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벽으로 외계와 완전히 격리되었고, 그로 인해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접촉은 단절되었다. 바르샤바 전역의 2.4%밖에 안되는 좁은 지역에 시 전체 인구의 30%에 해당하는 4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갇혔다.

주거 환경은 콩나물시루 속과 같아서 4인 기준의 방에 보통 10명에서 15명이 생활했다. 게토에 공급되는 식료품은 심하게 제한되었기 때문에 수인들은 기아에 시달렸으며 열악한 위생 상태와 함께 발진티푸스 등의 전염병으로 하나둘 죽어갔다. 사체는 매장할 인력이 없어 며칠이나 도로에 방치되었다.  99


나찌 친위대(SS) 경제관리본부 본부장 오스발트 폴은 1942년 4월 30일 정부령에서 강제수용소에서의 노동을 이렇게 정의한다. "사역(使役 부릴사 부릴역)이란 최고의 생산 상태를 얻기 위해서 말뜻 그대로 '소모'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해 9월 14일 법무장관 티라크가 괴벨스와 회담할 때 이 '소모'라는 말에 주석을 달아 "노동을 통한 절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반제 회의의 서기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증언에 따르면, 회의에서 '문제 해결의 여러 형태', 즉 여러 살해 방법이 솔직하게 토의되었고, 참가자들에게 "진심 어린 동의" 이상의 것을 얻어냈다. 회의는 한 시간 반 이상 걸리지 않았고, 그후에는 음식이 나와서 그들 모두는 점심 식사를 했다. "기분 좋고 조촐한 사교적 모임"이었다.

'아이히만에게 이 회의가 잊힐 수 없는 데는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는 최종적 해결에 협력하기 위해서 이제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이런 피비린내 나는 폭력에 의한 해결'에는 다소 마음속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 의문이 지금 풀린 것이다. "지금 이 반제 회의에서 당시 가장 높은 자리의 사람들이, 제3국의 법왕들이 발언했던 것이다." 히틀러, 하이드리히와 '스핑크스' 뮐러, SS나 당뿐만 아니라, 전통을 자랑하던 국가관료 엘리뜨들까지도 이 '피비린내 나는' 문제에서 서로 선두에 서려고 경쟁하는 것을 그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빌라도가 맛본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에게는 전혀 죄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01-102


영화 <쇼아>에도 등장하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필립 뮐러(Filip Muller)는 특별작업반으로서 사체 처리작업에 종사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가스실에서의 살육 모습은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몇 알의 치클론 B가 가스실 바닥에서 승화하면, 희생자들은 절규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올라오는 독가스를 피해 도망치려고 힘센 사람은 약한 사람을 때려눕히고, 좀더 살겠노라고 아직 독가스에 오염되지 않은 공기를 찾아서 쓰러진 사람들 위로 올라섰다.

15분 내에 가스실 안의 전원이 사망했다.

약 30분 후에는 문이 다시 열렸다. 사체는 탑처럼 층층이 쌓여 있었고, 앉은 채로 죽은 자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죽은 자도 있었다. 밑에는 아이나 노인의 사체가 있었다. 사체에는 녹색 반점이 있었고, 피부는 핑크빛으로 변해 있었다. 입에 거품을 문 사체나 코피를 흘리는 사체도 있었다. 대소변 배설물로 뒤범벅이 된 사체도 있었고, 임신중이 ㄴ여성 중에서는 출산이 시작된 경우도 있었다.

유대인으로 구성된 특별잡업반이 가스마스크를 착용하고 통로를 만들기 위해 문 근처의 사체를 잡아 끌어낸 후, 사체에 호스로 물을 뿌려, 사체 사이에 남은 독가스를 씻어냈다. 특별작업반은 그런 위에서 비로소 사체를 옮겼다. 

모든 수용소에서 사체의 구멍이란 구멍을 수색해 귀중품을 숨겼는지 확인했고, 죽은 자의 입에서 금니를 뽑았다.  105-106


약 9백만 명의 유럽 유대인 중 3분의 2가 살해되었다. 특히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유대인 주민의 9할이 살해되었다. 

특정한 인간 집단에 대한 이 특이하고 철저한 절멸정책은 오늘날 주로 '홀로코스트'라 불린다. 그 어원은 구약성서에 기술된 "구워서 신전(神殿 귀신신 대궐전)에 바치는 희생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라고 한다. 또한 최근에는 '대파괴, 파멸'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쇼아'가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107


레비의 팔에 새겨진 번호는 174517 이었다.

"수인번호에는 유럽 유대인의 말살 과정이 요약되어 있다." 10000부터 80000까지의 수인은 폴란드의 게토에서 몇 안되는 생존자였고, 119000부터 117000은 그리스의 쌀로니까(Salonica) 출신자였던 것이다. 이딸리아 유대인은 174000번대의 번호를 받았다.  117


인간이 어떻게 이토록 잔혹할 수 있을까?

인간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같은 잔혹함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을까?  137


'아우슈비츠'가 비교 불가능한 '유일무비(唯一無比 오직유 한일 없을무 견줄비)'의 사건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아우슈비츠'는 '비교 가능'한 사건이다. 비교 후에 도출된 대답은 그것이 과거 인간 또는 인간사회의 제도가 보여줄 수 있었던 냉혹함과 잔인함의 극한적 실례라는 것이다.  138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따라서 내일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얼굴을 씻고 이를 닦는다. 자기 자신에게 규율과 질서를 부과하고 자기 생활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때문에 노예보다 못한 신분으로 추락하더라도 '덕과 지'를 구하는 것이다. 단떼를 상기하고, 오디쎄우스처럼 끝없는 고난의 항해를 이겨내려고 하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금 지옥에서 인간세상으로 생환하여 증언하기 위해서.  155


장 아메리(Jean Amery)의 본명은 한스 마이어(Hans Mayer)라고 한다.  157


벨기에에서 추방된 유대인 2만 5437명 가운데 약 2만 3천 명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아메리는 불과 615명의 생존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전후에는 오스트리아 국적을 회복했지만, 브뤼쎌에 계속 거주하며 저술가가 되었다. 본명인 마이어(Mayer)의 철자를 바꿔서 아메리(Amery)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55년부터다. 1976년에 <자신에게 손을 내밀며 - 자살에 대해서>를 간행하고 그 2년 뒤인 1978년 10월 16일 잘츠부르크의 한 호텔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

쁘리모 레비에게 아메리의 자살은 틀림없이 대단히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159


아메리는 말한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수용소에 없다. 오히려 어떻게 죽을까 생각한다. 가스실에서 독가스의 효과가 나타나는 데 걸리는 시간에 대해서 논쟁하거나, 페놀 주사에 의한 죽음의 고통을 추측하여 서로 대화하거나 하는 등.  161


1944년 크리스마스도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쁘리모 레비가 있던 모노비츠 수용소의 수인들은 점호를 받기 위해 광장에 정렬했다. 

투광기의 빛과 나무틀 교수대, 그런 도구들과 잔인한 의식은 그들에게 이미 낯설지 않았다. 쁘리모 레비는 그때까지 열세 차례나 교수형 장면을 목격했다. 예전에는 교수형이 보통 사소한 범죄나 주방에서의 절도, 태업, 탈주 등에 대한 징벌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공개 처형의 희생자는 비르케나우의 소각로를 파괴한 반란 집단의 일원이었다. 이 반란은 가스실에서 사체 처리를 강요받았던 유대인 특별작업반 340명이 감행한 것이었다. 머지않아 자신들도 처분될 거라 확신한 그들은 몇 개월 동안 준비해 경기관총 한 정, 권총 몇 정, 수제 폭탄, 톱, 도끼, 쇠지렛대, 호미 등을 가지고 1944년 10월 7일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제4소각로에 방화하고, 제2소각로의 설비를 파괴한 후 철조망을 절단하여 도주를 기도했다. 그러나 반란은 나찌 친위대의 공격을 받고 250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결국 실패했다. 그날 밤, 또다시 2백 명의 유대인이 사살되었다. 친위대 쪽 희새자는 세 명이었다. 이 사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역사에서 유일한 무장 저항이었다.(<절멸>)  175-176


우리 생존자들은 진정한 증인이 아니다. .. 우리는 극히 적을 뿐만 아니라 이례적인 소수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눈속임이나 요령 혹은 행운에 의해서 심연의 바닥까지 가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이다.(<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  178


츠베땅 토도로프는 쁘리모 레비가 시달리던 수치의 감각을 '기억으로서의 수치' '살아남은 자의 수치' '인간이라는 수치'등 3단계에 걸쳐 분석한다. ...

저항의 의지조차도 전면적으로 파괴된 굴욕의 기억, 자신은 '카인'이라는 자기 고발. 증인으로 자신이 적격한지를 둘러싼 의혹(하지만 궁극적으로 '진정한 증인'은 죽은 자이며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자기 자신도 인간이라는, 수치심을 느껴야 할 종족의 일원이라는 생각... 이렇게 몇 겹으로 쌓인 수치의 감각이 자신의 몸을 갉아먹어가자 쁘리모 레비는 자신의 몸을 '심연의 바닥'에 내던진 것일까?  178-179


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인간이라는 수치'에 시달려야 했을까? 수치스러움을 모르는 가해자의 수치까지도 피해자가 고스란히 받아서 시달려야 하는, 이 부조리한 전도가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은 인간 이하'라는 사상에 희생된 까닭에, 그 사상을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대치해야 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독일인'도 물론 '인간'에서 예외는 아니다. 한번 파괴된 '인간'이라는  척도를 재건하려고 하는 한, '인간'이 저지른 죄는 어김없이 그들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181-182


싸르트르의 이런 말이 떠올랐다. 알제리 해방전쟁중에 프랑스군이 알제리에서 자행한 고문이나 잔학 행위를 고발한 글의 한 부분인데,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적을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라도 그리고 어떤 안전책을 두더라도 모든 국민이, 인류 전체가 비인간적인 것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실제 우리가 왜 인간이 되기 위해서 혹은 계속해서 인간의 위치에 있기 위해서 크게 괴로워하는 걸까? 비인간적인 것이 바로 우리의 진실이 되는 것이다. (...)

음침하며 허위에 가득 찬 그런 생각들은 모두 '인간은 비인간'이라는 동일한 원리에서 나온다([하나의 승리] <상황들>)  184


바르똘로뮤 라스 까싸스가 쓴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서>.

그들은 누가 단칼에 몸을 정확히 두 동강 낼 수 있는지, 누가 일격에 머리를 잘라낼 수 있는지, 내장을 파열시킬 수 있는지 등의 내기를 했다. 그들은 어머니에게서 젖먹이 아이를 빼앗아 그 아이의 다리를 잡고서 바위에 머리를 내려치기도 했다. (...)

그리고 그들은 겨우 발이 땅에 닿을 정도의 커다란 교수대를 만들고, 다른 방법도 있으련만 자신들이 구세주와 12명의 사도를 받들기 위해서라며 항상 13명씩 교수대에 걸고 그 밑에 장작불을 지폈다. 이렇게 그들은 인디오들을 산 채로 구웠다. (...)

보통 그들은 인디오들의 영주나 귀족을 다음과 같은 수법으로 살해했다. 땅속에 박아둔 4개의 봉 위에 가느다랗고 긴 봉으로 만든 석쇠 같은 것을 얹어놓고, 거기에 그들을 매달아 그 밑에서 약한 불을 지폈다. 그러면 영주들은 그 잔학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절망하다가 서서히 죽어갔다. (...)

기독교도들은 마치 미친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인류를 파멸로 내모는 사람들이었으며 인류 최대의 적이었다. 비인도적이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쳐 살아남ㅇㄴ 인디오들은 모두 산속으로 숨거나 다른 방법으로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자 기독교도들은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사냥개를 사납게 훈련했다. 사냥개는 인디오를 한 명이라도 발견하면 순간적으로 그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들'이란 말할 것도 없이 에스빠냐 정복자를 가리킨다.

신대륙으로 건너간 에스빠냐 사람들은 원주민에게 공조(貢租 바칠공 구실조)를 요구하고, 그것이 부족하면 강제노동을 부과했다.  185-186


에스빠냐인은 기독교화라는 미명 아래 아스께까왕국이나 잉까제국을 정복한 후 원주민을 혹사하고 학살했다. ..

라스 까싸스는 1541년 국왕을 알현하고 자신의 견문에 기초한 보고서를 제출하여 정복 중지를 호소했다. 그 보고서를 훗날 가필하여 발간한 것이 바로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서>다. 

라스 까싸스는 이 <보고서>에서 신대륙 도착 이후 40년 동안 1200만 명 내지 1500만 명의 원주민이 희생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 그 희생자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미증유의 제노싸이드(대학살)였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 또한 기독교화되지 않은 원주민은 인간 이하라는 사상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86-187


대서양을 넘어 신대륙으로 '이송'된 아프리카인의 수는 1200만 내지는 2천만 명이라고 하지만, 이 숫자도 지금은 확정 불가능하다. 더구나 거기에는 노예사냥 도중에 죽은 사람이나 항해주엥 죽어서 바다에 버려진 사람들의 수는 포함되지 않았다(<신서 아프리카사>)  189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는 '일부 인간은 인간 이해'라고 하는 사상, '인간은 비인간이다'라는 원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는 한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2


소련군에 의해 해방된 그는 이딸리아인 수인이나 포로 들과 함께 전쟁 말기의 오랜 혼란기 내내 폴란드와 소련의 영토 내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리고 거의 8개월 후에야 비로소 특별열차로 루마니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 영토를 거쳐 이딸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환까지의 혼돈과 권태의 시간, 그 부조리하며 축제 갇기도한 나날을 그린 작품이 쁘리모 레비의 두번재 작품 <휴전>이다.  198


<주기율>의 [바나듐]이라는 단편에 ..

레비가 부나에서 실험실에 배치되었을 때, 거기에 출입하던 민간인 주에 뮐러 박사라는 인물이 있었다. ..

뮐러는 착하고 소심하며 정직하면서도 무기력했다. 대다수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당시 자신의 무관심이나 무기력을 무의식 속에서 정당화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나찌의 범죄에 가담하거나 그것의 수혜를 받은 인물이 희생자에게 무거운 말투로 '원수에 대한 사랑'이나 '인간에 대한 신뢰'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안의 천박함, 아니 불쾌감 ..게다가 그가 완고한 나찌였다면 이야기는 간단했을 테지만, 그는 당혹스럽게도 '과거의 극복'을 바란다고 말한다.

'일단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준비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개전의 태도를 확실히 보일 때, 즉 원수임을 포기할 때 가능하다고 밝혔다. 반대의 경우, 계속 원수로 존재하며 고통을 만들어내겠다고 고집할 경우에는 물론 용서해서는 안된다. 그 사람을 옳은 방향으로 고치려고 노력하고, 그 사람과 토론하는 것은 가능하지만(그래야 한다!),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 현실에서는 무장 집단이 존재했고, 아우슈비츠를 만들었으며, 정직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은 그것을 위한 정지(整地 가지런할정 땅지)작업을 했다. 그 때문에 아우슈비츠에 대해서 바로 모든 독일인에 그리고 인류 전체에 책임이 있으며, 아우슈비츠 이후 무기력한 것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레비가 뮐러의 만나자는 요청에 답하기 위해서 쓴 편지의 초안이다....

결국 이 편지를 우체통에 넣지는 못한다. 뮐러에게서 뜻하지 않게 전화가 걸려 와 만날 약속을 했는데, 그러자마자 그가 병사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세계는 여전히 단절된 그대로였다. 그뿐만 아니라 단절은 점차 절망적인 것이 되었다. 저편과 이편은 '사랑'이나 '인간'이라는 말의 의미조차 서로 통하지 않은 것이다.  200-206


나도 뮐러와 같은 일본인을 자주 만난 적 있다.

일본에는 예전부터 그때는 '시대'가 좋지 않았고 '전쟁'은 그런 것이며, 일부의 '광신적 군인'이 폭주한 것이지 국민도 천황도 이 '사실을 몰랐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조선의 식민지 지배에 관해서는 일본이 아니었으면 러시아가 그렇게 했을 것이라며, 결과는 불행했지만 일본은 뒤처진 조선인을 일본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했고, 그 '선의'는 인정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편다. 하지만 나의 '뮐러'는 이 타입이 아니다.

나의 '뮐러'도 또한 내게 "왜 그렇게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까?"라며 일견 성실한 듯 보이는 둔감함으로 묻곤 한다. 혹은 "왜 그러헥 화난 겁니까?"라든가 "왜 슬퍼하는 겁니까?"라든가... 그들은 자기 자신도 그 불안과 분노 그리고 슬픔의 원인과 관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대개 자신을 휴머니스트이며 평화 애호가라고 굳게 믿고 있다. 서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면, 한국에 여행한 적이 있다는 둥 친한 친구 중 '재일(조선인)'이 있다는 둥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자신은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둥 자신은 '재일일본인'이라는 둥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다도 좀 있으면 '도대체 언제까지 사회하면 되는 걸까요?'라는 흔한 질문을 슬쩍 던져본다. 그리고 이쪽이 무언가 말하려 하기 전에 지금은 '국제화' 시대이기 때문에 서로 '미래지향적'으로 '공생'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며 공소(空疎 빌공 트일소)한 키워드를 늘어놓는다. 

'뮐러와 같은 일본인'이라고 했지만 재일조선인 중에소 '뮐러'는 있다. 이 '뮐러'들은 한목소리로 '공생'을 위해서는 서로 '원한(ressentiment)'을 버릴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혼화한 어조로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들은 미리 자신들을 '원한'등과 같은 비생산적인 감정을 초월한 이성의 높은 위치에 두고, 어느새 이쪽의 위치에 저급한, 보복 감정을 지닌, 비이성적인 사람들이라는 레테르를 붙인다. 나는 조선인이 일본인에게 '원한'을 품는 이유를 얼마든지 댈 수 있지만, 그와 반대의 경우는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서로'라는 말이 어쩐지 수상쩍기만 하다. 이와 같이 그들은 실제 '증오'의 원인이 된 역사적, 사회적 현실을 개선하려고 하기는 커녕 가해자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들고, 상처를 치유할 수 없는 피해자에게 은근한 어조로 과거를 잊어버리라고 강요한다.  206-208


'죄'는 법적 개념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과 관련된다." 그와 다르게 정치 공동체의 성원이라면 누구나 짊어져야 할, 정치적 의미에서의 '집단적 책임'이 있다. 바꿔 말하면 '독일인'이라는 집단 중에서 '죄'를 지은 개인은 있지만 '독일인' 전체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독일인 전체의 죄'라는 생각은 오히려 죄를 지은 개인을 은닉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독일 국민이라면 누구나 독일이라는 정치 공동체의 행위에 '집단적 책임'이 있는 것이다.  212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의 권말에 젊은 독자와의 문답이 실려 있다. 거기에서 "독일인은 몰랐나요?"라는 물음에 레비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대다수 독일인은 알지 못했다. 그것은 알고 싶지 않았고 무지의 상태로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행사하는 테러리즘은 분명 저항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무기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독일 국민이 전혀 저항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 일반 독일 시민은 무지한 채 안주하고, 그 위에 껍질을 씌웠다. 나찌즘에 동의한 것에 대한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무지를 이용한 것이다. 눈, 귀, 입을 모두 닫고 눈앞에서 무엇이 일어나든지 상관하진 않았다. 때문에 자신은 공범이 아니라는 환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220-221


그는 '독일인'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된 지 20년 이상이 지나 유령처럼 나타난 뮐러, 정직하고 무기력한 평균적인 독일인인 그는 '과거의 극복'을 말하는 한편, I.G. 파르벤을 변호하고 유대인이 학살된 사실은 "몰랐다"고 한다. 부나에 있으 ㄹ때조차 유대인인 레비에게 "왜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느냐?"고 물은 인물이었다. 말살의 위협에 노출된 강제수용소의 수인이 매일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측의 사람에게 자신이 왜 불안한지 설명하기를 요구받은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그런 부조리를 전혀 "모른다"고 한다. 그런 인물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227


쁘리모 레비는 생존자들이 두 부류로 나눠진다고 말한다. 첫번째는 잊고자 애쓰면서도 강제수용소의 "악몽에 시달리며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사람들" 혹은 "제대로 잊고 모든 것에서 벗어나 무(無)에서부터 다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한편 두번재 부류의 생존자들은 "기억해내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며, "그들은 잊으려고 하지 않은 채, 오히려 사회가 망각해가는 것을 경계한다." 물론 레비는 자신을 두번째 부류로 규정했다. 그는 "판사보다 증인이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이 보고 견뎌 이겨낸 것을 증거로 가지고 돌아오는" 일이 자신의 '의무'였다고 거듭 밝히고 있다.(<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  242


수용소에서 쁘리모 레비를 매일 밤 고통스럽게 한 악몽은 현실이 되었다. '이편'으로 살아 돌아와보니 사람들은 오디쎄우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옥은 이미 종교적인 신념이나 몽상이 아니라, 집과 돌 그리고 나무처럼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누구 하나 그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파리아로서의 유대인>)  244-245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는 '인간'이라는 이념이 보편적으로 공유된 단순 명쾌한 세계가 아니다. 단절되고 금이간 세계다. 여기에서 '인간'이라는 말은 단절을 숨기는 미사여구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단절 속에서 온몸으로 떨쳐 일어난 증인들이 '인간'의 재건을 위해서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이편'의 사람들은 보신이나 자기애 때문에, 천박함과 나약함 때문에, 상상력의 빈곤함과 공감대의 결여 때문에 증인들의 모습을 바로 보지 않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249



Posted by WN1
,

Since then, at an uncertain hour, 

That agony returns,

And till my ghastly tale is told

This heart within me burns.

그때 이후, 불확실한 시간에

고통은 되돌아온다.

그리고 나의 섬뜩한 이야기가 말해질 때까지

내 안의 심장은 불타리라.

                     -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늙은 뱃사람의 노래> 582~585행




서문 


라거에 대한 진실을 확산시키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독일 민족이 저지른 가장 중대한 집단 범죄의 하나이며 히틀러의 테러로 인해 독일 민족이 다다른 비겁함을 가장 명백하게 증명해주는 것이다. 관습 속으로 들어와버린 비겁함, 너무나 깊어서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자식에게도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비겁함이다. 이 비겁함이 없었더라면 그토록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고 유럽과 세상은 오늘날 달라져 있을 것이다.  14


라거의 악행을 알고 있던 수많은 잠재적 '민간인' 증인들 역시 의도적인 무지와 두려움으로 침묵했다.  15


생존자들 가운데는 포로생활중에 어떤 특권을 누린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여러 해가 지난 오늘날, 라거의 역사는 거의 전적으로 나처럼 바닥까지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쓰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거나, 자신의 관찰 능력이 고통과 몰이해로 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특권층' 증인들은 확실히 더 나은 관측소를 이용했다. 적어도 더 높은 곳에 있었고, 따라서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특권에 의해 크게든 작게든 그 또한 왜곡된 것이었다.  17


나치의 라거로부터 해방된 지 이미 40년 이상이 흘렀다. 이 상당한 간극은 사건을 명확하게 밝혀줄 모순적인 결과들을 가져왔는데, 아래에 열거해보겠다. 

첫째는 바람직하고 정상적인 정제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

세월의 흐름은 역사적으로 부정적인 또 다른 결과를 낳고 있다. 원고와 피고 측 증인 대다수가 이미 사라지고 없으며, 아직 남아 있는, 그리고(자신들의 가책이나 저마다의 상처를 극복하고) 여전히 증언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흐릿하고 정형화된 기억을 갖게 된다. 이는 종종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책을 읽거나 타인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하면서 나중에 알게 된 정보로부터 영향받은 기억들이다.  19


또 다른 정형화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에게, 우리 생활자들에게, 아니 더 정확하게는 우리 가운데 생환자로서 자신의 조건을 가장 단순하고 가장 덜 비판적인 방식으로 살아가기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

라거 내부는 복잡하게 얽히고 계층화된 소우주였다. 내가 앞으로 말하게 될 "회색지대"는 어느 정도는, 또 어쩌면 좋은 의도에서 당국에 협조한 포로들의 층으로 결코 얇지 않았다. ..

처음 받은 위협, 첫 모욕, 첫 구타는 SS로부터 온 게 아니라 다른 포로들, '동료'들, 갓 입소한 사람들이 방금 갈아입은 것과 똑같은 줄무늬 유니폼 차림의 그 불가사의한 인물들로부터 왔던 것이다.  20-21




이 책은 아직까지도 분명치 않아 보이는 라거 현상의 몇 가지 양상들을 밝히는 데 이바지하고자 한다. 보다 야심찬 목적도 있다. 좀 더 급박한 질문, 우리의 이야기를 읽을 기회가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노예 제도나 결투 의식이 그랬던 것처럼, 수용소 세계는 어디까지 사멸했으며 더 이상 되돌아오지 않을 것인가, 어디까지 되돌아왔거나 되돌아오고 있는가, 위협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적어도 이러한 위협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들 각자는 무엇을 할 수있는가?  21





1 상처의 기억


인간의 기억은 놀라운 도구인 동시에 속이기 쉬운 도구이다. ..

세월이 흐르면서 지워지고 종종 변형되며 심지어 상관없는 일들을 껴 넣으면서 자라나기도 한다. 

동일한 사건의 두 목격자가 사건을 같은 방식으로, 또 같은 말로 묘사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23


오스트리아 철학자 장 아메리(한스 마이어)는 벨기에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게슈타포에게 고문당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글은 우리를 경악에 빠뜨린다.

'고문당한 사람은 고문에 시달리는 채로 남는다... 고문당한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적응할 수 없을 것이다.'  25


사건들이 과거 속으로 멀어질수록 편리한 진실의 구축은 점점 더 커지고 더 완벽해진다.  28


내가 보기에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데 익숙한 자는 결국 사적인 자리에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한테도 거짓말을 하게 된다. 자신을 평안하게 살도록 해주는 편리한 진실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선의와 악의를 뚜렷이 구분하는 데는 큰 비용이 요구된다. 자기 자신에 대해 온전히 솔직할 것을 요구하며 지적이고 도덕적인 노력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29


우리가 자라난 체제는 자율적인 결정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신 결정을 내렸고 다른 식으로는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정하는 능력을 거세당했기 때문이다. ..

근대적인 전체주의 국가가 개인에게 행사할 ㅅ 있는 압력은 무시무시하다. 그 무기는 본질적으로 세 가지이다. 교육, 지도, 대중문화로 위장한 프로파간다 또는 직접적인 프로파간다. 정보의 다원주의에 반하는 봉쇄, 그리고 테러가 바로 그것이다.  30 


저지른 죄에 대한 기억을 변형하는 극단적 경우로는 기억의 제거가 있다. ..

기억의 존재를 부인함으로써 그는 배설물이나 기생충을 몰아내듯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로운 기억을 몰아냈다.  32


히틀러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진실로의 길을 봉쇄했다. 모든 도박꾼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미신적인 기만들로 짜인 무대를 자기 주변에 구축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이 모든 독일인에게 요구했던 바로 그 광신적인 믿음을 결국 스스로도 믿게 되었다. 곧 히틀러의 몰락은 인류의 구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진실이 조작될 때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34


방어의 목적에서, 현실은 기억 속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일어나는 행위 자체에서도 왜곡될 수 있다.  35





2 회색지대 


보통 '이해하다'의 의미는 '단순화시키다'라는 말과 일치한다. 심오한 단순화 과정이 없다면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정의할 수 없고 끝도 없이 얽히고 설킨 실타래와 같을 것이다. 이는 곧 우리의 방향설정 능력과 행동결정 능력을 위협할 것이다. 요컨대,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인식 가능한 것들을 도식적으로 축소시킬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역사도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건들이 정렬되는 도식이 언제나 분명하게 규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39


민중사는 물론 학교에서 배우는 정식화된 역사도 중간색과 복합성을 피하는 이러한 이분법적 경향에 영향을 받는다. 즉 인간 세계의 넘쳐흐느는 사건들을 갈등으로, 갈등은 대결로, 우리와 그들, 아테네인과 스파르타인, 로마인과 카르타고인 등과 같은 대결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바로 이것이 축구, 야구, 권투와 같은 두 팀 또는 두 명으로 이루어진 스펙터클한 스포츠가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이유이다. 뚜렷이 구분되고 확인 가능하며 경기가 끝나면 승자와 패자로 갈리기 때문이다. ..

단순화의 욕구는 정당화되지만, 단순화가 언제나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40


굶어 죽거나 굶주림에 비롯된 질병으로 죽는 것이 포로들의 일반적인 운명이었다. 오로지 추가적인 음식 숩취를 해야만 이 운명을 피할 수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크든 작든 특권을 손에 넣어야 했다...

수용소의 현실에 맞닥뜨린 최초의 충격은 예견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었던 누군가의 공격이었느넫, 관리자 포로라는 새롭고 이상한 적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44-45


죄인은 길들여지거나 죽을 때까지 체계적이고 분노에 찬 구타를 당한다.  45


관리자 포로라는 혼성 계층은 수용소의 골격을 형성하며, 동시에 극도의 불안감을 조성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주인과 하인의 두 영역을 나누는 동시에 연결하는, 경계가 불분명한 회색지대이다.  46


'프로텍치아'('특권'을 가리키는 이디시어 방언이자 폴란드어 protekcja)와 협력의 회색지대는 다양한 뿌리로부터 탄생한다. 첫째, 권력층의 그 폭이 좁으면 좁을수록 그만큼 외부의 조력자가 더 필요해진다. ..

두 번째는 억압이 거셀수록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기꺼이 권력에 협력하려는 의향이 더욱더 확산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향은 미묘한 차이들과 다양한 동기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칭송 일색의 성인전 같은 수사학적인 어떤 정형화와는 대조적이다. 공포, 이데올로기적 유혹, 승자를 곧이곧대로 모방하는 것, 어떤 권력이건 간에 -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시간과 장소에 제한된 권력이라 할지라도 - 그것을 향한 근시안적 욕망, 비겁, 명령이나 규율 자체를 교묘하게 피하려는 철저한 계산에 이르기까지 그 동기는 다양하다.  46-48


"선동가들, 탄압자들, 어떤 식으로든 타인을 해치는 모든 자들은 유죄다. 그들이 저지른 악행 때문만이 아니라 상처받은 사람들의 영혼을 타락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한 만초니(Alessandro Manzoni)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억압당하는 환경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49


카포(우두머리, 태장)는 누가되었나?

첫째, 가능성이 주어진 사람들, 즉 라거의 사령관이나 그의 대리인들이(흔히는 뛰어난 심리학자들이었는데) 협력자로서의 잠재력을 알아본 사람들이다.

둘째, 감옥에서 차출해온 일반 범죄자들이다. 그들에게 간수일은 수감생활의 훌륭한 대안을 제공했다. 

셋째, 5~10년의 고통의 세월에 쇠약해진, 아니면 어쨌든 도덕적으로 약화된 정치범들이다. 나중에는 유대인들도 카포가 되었는데, 자신들에게 주어진 보잘것없고 미미한 권력에서 '최종 해결책'을 피할 유일한 방법으로 찾게 된 사람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권력을 원했다. 특히 사디스트들이 권력을 원했다. 물론 숫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커다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특권의 지위란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과 굴욕을 가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좌절한 사람들도 권력을 원했다. 그리고 이 역시 라거라는 소우주 속에 전체주의 사회라는 대우주를 재현하는 특징이다. 당국에 경의를 기꺼이 표하는 자에게 권력이 자비롭게 주어지며, 이런 식으로 그들은 달리는 도달할 수 없는 사회적 진급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억압받는 사람들 중의 많은 이들이 권력을 원했다. 그들은 억압하는 자들로부터 전염되었고 무의식적으로 억압하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53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살인자가 도사리고 있는지 나는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나는 내가 무고한 희생자였고 살인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안다. 나는 살인자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독일에서만이 아니라는 것도, 은퇴했거나 여전히 현역으로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54


협력의 극단적 예는 아우슈비츠와 기타 절멸 수용소의 존더코만도스(Sonderkommandos)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는 특권을 말하기가 머뭇거려진다. 존더코만더스에 속한 사람은 특권층이었지만 부러움을 받는 자리였기 때문에 특권층이었던 것을 물론 아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특혜란 몇 달 동안 충분히 먹을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SS(Schutz-Staffel의 약자, 나치스 친위대. 1929년 히틀러의 경호대로 창설되었다. 그후 독일군 내에서도 나치스 이데올로기르 광신적으로 체현한 특수군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SS의 임무는 유대인을 포함한 나치스의 적들을 탐색하고 체포하는 것, 강제수용소의 관리와 방어 등이었다. - <이것이 인간인가> 13페이지에서)는 "특수부대"라는 적당히 애매한 이름으로 포로들의 한 그룹을 지정한 뒤 화장터의 운영을 맡겼다.  56


한 명은 이렇게 단언했다. "이 일을 하게 되면 첫날 미쳐 버리든가 아니면 익숙해지든가 둘 중 하나다." 반면에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스스로 죽거나 죽임을 당하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고 싶었다. 복수하기 위해 그리고 증언하기 위해. 여러분은 우리가 괴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당신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단지 훨씬 더 불행할 뿐"이라고 했다.  59-60


특수부대를 기획하고 조직한 것은 국가사회주의의 가장 악마적인 범죄였다.

이러한 기관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정확히 말하자면 희생자들에게 죄의 짐을 떠넘기려고 시도한 것이다.  60


특수부대의 베테랑들을 대하는 SS의 태도는 달랐다. 그들은 이 베테랑들을 확장된 동료로 인식했다. 곧, 이제는 자신들만큼이나 비인간적인 존재, 어쩔 수 없이 부과된 공범성이라는 추악한 굴레에 묶인 한 배에 탄 동료로서 말이다.  62


우리의 판단 욕구와 판단력은 특수부대 앞에서 흔들린다. 

왜 그들은 그 임무를 받아들였는가? 왜 그들은 반항하지 않았는가? 왜 그들은 차라리 죽음을 원하지 않았는가?  66


우리가 알고 있는 저 비참한 학살 실행자들은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다. 곧 즉각적인 죽음보다도 다만 몇 주라도 삶을(도대체 무슨 삶인가!) 연장하기를 바랐던 사람들이다. ..

나는 누구든지 감히 심판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추론적 실험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67


베펠노트슈탄트(Befehlnotstand), 즉 '명령에 따른 강제 상태'  68


억압에 의해 치명적으로 유발된 인간의 모호성이라는 근본 주제에 관한 굉장히 웅변적인 이야기.  69


나치의 게토는 중세의 반종교개혁적인 게토 체제를 나치의 근대적인 잔혹성으로 인해 더욱 악화된 모습으로 복구시킨 형태였다.  70


실패로부터 도덕적 힘을 끌어내는 사람들은 소수인 것이다. 정치적 강압은 모호함과 타협의 불분명한 영역을 만들어내며 이것은 거의 필연적이다.

모든 절대 왕좌의 발치에는.. 인간들이 한 줌의 작은 권력을 움켜쥐기 위해 몰려든다. 이것은 되풀이되는 광경이다. ..

처음에는 맹목적이었다가 나중에는 범죄자가 되었고, 죽어가는 사악한 한 줌의 권력을 나눠가지려고 맹렬히 싸웠다. 권력은 마약과도 같다. 권력에 대한 욕망도, 마약에 대한 욕구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러나 우연하게라도 한 번 시작한 뒤에는 중독되고 필요한 투여량은 점점 더 많아진다. 또한 현실에 대한 부정과 전지전능을 갈구하는 유아적 꿈으로 돌아가는 일도 나타난다. ..

즉, 중독은 너무나 강해서 개인의 모든 의지의 불씨를 꺼뜨릴 정도로 보이는 환경에서조차 만연한다는 사실 말이다.  77-78


국가사회주의와 같이, 무시무시한 부패 권력을 행사하는 지옥같은 체제로부터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체제는 자신의 희생자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자신과 비슷하게 만든다. 크고 작은 공범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매우 단단한 도덕적 뼈대가 필요하다...

만약 불가피하게 몰릴 때, 동시에 유혹이 무리 마음을 부추길 때 우리들 각자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78


권력과 위신에 현혹되어 우리의 본질적인 나약함을 잊어버린다. 우리 모두 게토 안에 있다는 것을, 게토 주위엔 담벼락이 둘려 있고 그 밖에는 죽음의 주인들이 있으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자발적이든 아니든 간에 권력과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80





3 수치


"기쁨은 괴로움의 자식"이 아니다. 괴로움이 괴로움의 자식이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단지 운좋은 소수나 굉장히 단순한 영혼들에게만 잠시 환희를 가져왔을 뿐, 거의 언제나 불안의 양상과 겹쳐져 있었다.  82


독일인들은 모르던 수치심, 타인들이 저지른 잘못 앞에서 의로운 자가 느끼는 수치심이었다.  84


우리 각자가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자기 방식대로 라거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원해서도 무기력해서도 아니었고 죄가 있어서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수개월 또는 수년을 동물적인 수준에서 살았다. 우리의 나날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배고픔과 피로와 추위, 두려움으로 채워져 있었고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기 위한 성찰의 자리는 없어졌다. 우리는 더러움과 사샐활의 결핍과 자기 존재의 축소를 정상적인 삶이었을 때보다는 훨씬 덜 괴로워하면서 견뎠다. 우리의 도덕적 잣대가 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우리 모두는 도둑질을 했다. 부엌에서 , 공장에서, 운동장에서, 요컨대 '다른 살마들에게서', 상대편에게서 훔쳤지만, 그래도 도둑질은 도둘질이었다. 소수의 몇몇 사람들은 심지어 자기 동료의 빵까지 훔치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의 나라와 문화뿐만 아니라 가족과 과거, 우리가 그렸던 미래 또한 잊어버렸다. 왜냐하면 우리는 동물들처럼 현재의 순간에만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

해방은 어쨌든, 반성과 우울함이라는 해일과 함께 찾아온 위기의 순간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소비에트 수용소들을 포함해서 라거를 연구하는 많은 역사학자들은, 포로생활 도중에 자살이 일어난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에 동일하게 주목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시도되었다. 나는 세 가지 해석을 제시하는데, 이 해석들이 상호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첫째, 자살은 동물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라는 점이다. 즉, 심사숙고한 행위이고, 자연스럽지도 않고 충동적이지도 않은 하나의 선택이다. ..

둘째, "생각할 다른 일이 있었다"는 점이다. 하루 일과는 빡빡햇다. 허기를 채우고, 어떤 식으로든 피로와 추위를 피하고 구타를 피할 생각을 해야 했다. 늘 코앞에 닥쳐온 죽음 때문에 죽음에 대한 생각에 집중할 시간이 없었다. ..

셋째, 대부분의 경우, 자살은 어떤 형벌도 덜어주지 못한 죄책감에서 생겨난다는 점이다. 이처럼 포로생활의 힘겨움은 형벌로 인식되었고 죄책감은(형벌이 있다면 죄가 있다는 것이므로) 해방 후에 다시 나타나기 위해 제2선으로 밀려나 있었다.  87-89


동료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고 빼앗고 구타한 데 대해 자신의 유죄라고 느낀 생존자들은 소수이다.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은(카포들, 그러나 그들만이 아니다) 그 기억을 지운다. 그에 반해 거의 모든 사람들은 도움을 베풀지 않은 데 대해 자신이 유죄라고 느낀다. 더 약하고 더 서툴고 더 나이가 많거나 아니면 너무 어린 옆자리의 동료는 도움을 청함으로써, 또는 단순히 '있다'는 사실(이미 그 자체로 간청하고 있다)만으로 집요하게 괴롭힌다. ...

보통 그런 요구를 받는 사람도 자기 입장에서는 도움이 필요한 처지에 있었다.  91


뒤늦은 수치심은 합리화될 수 있을까, 없을까?  95


자신을 찬찬히 검토하고, 자신의 기억들을 모두 되살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또 그 기억들 중 무엇도 가면을 쓰고 있거나 위장하고 있지 않기를 바라면서 스스로를 점검해본다. 

명백한 범법행위를 발견하지 못한다. 누구의 자리를 빼앗은 적도 없고, 누구를 구타한 적도 없으며(그럴 힘이라도 있었겠는가?), 어떤 임무를 받아들인 적도 없고(맡겨지지도 않았지만..), 그 누구의 빵도 훔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각자가 자기 형제의 카인이라는 것, 우리 모두가(나는 이번에는 매우 광대한, 아니 보편적인 의미에서 "우리"라고 한다) 자기 옆 사람의 자리를 빼앗고 그 사람 대신에 산다는 것은 하나의 상상, 아니 의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상이 우리의 정신을 갉아먹는 것이다. 좀벌레처럼 우리 머릿속 깊숙이 자리 잡고 들어앉아 갉아먹으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낸다.  95-96


라거의 '구조된 자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곻난 사람들, 메시지의 전달자들이 아니었다. 내가 본 것, 내가 겪은 것은 그와는 정반대임을 증명해 주었다. 오히려 최악의 사람들, 이기주의자들, 폭력자들, 무감각한 자들, '회색지대'의 협력자들, 스파이들이 살아남았다. ..

내 눈앞에서, 남들의 눈앞에서 끝없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느꼈다. 최악의 사람들, 즉 적자(適者 맞을적 사람자)들이 생존했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크라코비아의 시계상이자 신실한 유대인이었던 하임은 죽었다. 그는 외국인인 나에게 언어의 어려움에도 나를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사악함으로 가득한 첫 며칠의 고비에서 수용소의 기본적인 생존 법칙들을 설명해주려고 애썼다. 과묵한 헝가리 농부 사보도 죽었다. 키가 거의 2미터여서 누구보다도 배가 고팠지만, 기력이 있는 한 더 쇠약한 동료들이 밀고 당기는 것을 도와주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주위로 용기와 믿음을 발산하던 소르본느 대학의 교수 로베르도 죽었다. 5개 국어를 할 줄 알앗던 그는 자신의 놀라운 기억 속에 모든 것을 기록하려 애썼고 만약 살아남았다면 내가 답할 수 없는 여러 의문들에 답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리보르노 항구의 부두 하역부였던 바루크도 죽었다. 첫날 바로 죽었느넫, 처음 날아온 주먹에 주먹으로 답했기 때문이다. 연합한 세 명의 카포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들과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용기에도 불구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용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97-98


반복 하지만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 ..

우리 생존자들은 근소함을 넘어서 이례적인 소수이고, 권력 남용이나 수완이나 행운 덕분에 바닥을 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곤(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끔찍한 모습의 세 자매 괴물. 스텐노, 에우리알레, 메두사. 그 중 메두사는 고르곤을 대표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는데, 그 얼굴을 본 사람은 돌이 되었다고 한다)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무슬림들", 가라앉은 자들, 완전하 증인들이고, 자신들의 증언이 일반적인 의미를 지녔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이다.  98-99


끊임없이 잠을 설치게 하는 이름 모를 불편함 때문에 모두가 시달렸다. 그것을 "노이로제"라고 정의하는 것은 너무 환원주의적이고 우스꽝스럽다.  100


좀 더 광범위한 수치심이 있다. 곧 세상에 대한 수치심이다...

타인과 자신의 죄 앞에서 그 죄를 보지 않도록, 그래서 느낄 수 없도록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히틀러 치하의 12년간, 보지 않는 것이 모르는 것이며 모르는 것이 공모와 묵인에 대한 자신들의 부담을 덜어줄 것이라는 환상 속에서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그렇게 행동했다. 자발적인 무지의 장막. ..

우리 가운데 의로운 사람들은(더도 덜도 아니고, 여느 인간 집단에 있는 딱 그만큼 존재했다) 자신들이 아닌 타인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그리고 자신들이 거기에 연루됐다는 생각 때문에 가책과 수치심이라는 고통을 느꼈다.  101





4 소통하기


의사소통이 금지된 나라에서는, 또 그런 시대에는 다른 모든 자유도 곧 시들게 된다. 토론은 영양실조로 죽게 되며, 타인의 견해에 대한 무지가 만연하고 강요된 견해들이 맹위를 떨치게 된다. 토론의 부재 속에, 20년간 수확을 망쳤던 리센코(Trofim Lysenko, 러시아의 농업생물학자, 가을에 심는 밀을 인위적으로 저온에 저장하여 봄에 심는다는 춘화처리법을 실시했다. 이후 농업생산 분야에서의 부진과 과도한 정치적 행동 때문에 비판받았다.)가 소련에 설파한 말도 안 되는 유전학은 이에 대한 유명한 예이다(리센코의 반대자들은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비관용은 검열의 경향을 띠고, 검열은 타인의 논지에 대한 무지, 즉 비관용 자체를 증폭시킨다. 이것은 깨기 어려운 단단한 악순환의 고리이다.  124





5 쓸데없는 폭력


2주간 지속될 수도 있는 여행(살로니카에서 이송되는 유대인의 경우)을 위해 독일 당국은 식량도, 물도, 나무 바닥을 덮을 깔개나 짚도, 생리현상을 해결할 용기도,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마련해주지 않았다. 또한 지역 당국이나 집결수용소의 책임자들(있을 경우)에게 이송 상황을 알리고 어떤 식으로든 병참 물품을 조달하는 데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통지를 하는 것에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바로 이러한 체계적인 태만은 결국 쓸데없는 잔인함으로, 고통 자체가 목적인 고통의 고의적 유발로 변모했다.  132


우리의 역설적인 행운(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행운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망설여진다) 덕분에, 우리의 화물칸에는 몇 개월 안 된 아기들을 데리고 탄 두 명의 젊은 엄마가 있었고 그녀들 중 한 명이 요강을 가지고 있었다. 여행한 지 이틀이 지나고 나서 우리는 판자벽에 박힌 못들을 발견했다. 못 두 개를 빼내 한쪽 구석에 다시 박고 줄을 쳐서 담요를 걸고 임시변통으로 몸을 가릴 곳을 만들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 짐승이 아니라는, 우리가 저항하려고 노력하는 한 우리는 짐승이 안 될 것이라는.  134


거대한 공동화장실, 의무적으로 정해진 짧은 시간,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익숙해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고 적지 않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서서, 참을성 없이, 때로는 애원하며, 또 때로는 윽박지르면서 10초 마다 "하스트 두 게마흐트(Hast du gemacht, 아직 멀었어?)라고 물어온다. 그럼에도 몇 주 안에 불편함은 줄어들더니 결국 사라졌고, 그 자리에 익숙함이(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고!) 찾아왔다. 이는 인간에서 동물로의 변화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자비로운 방식이었다.  135


배설에 대한 강압과 비슷한 것이 바로 나체에 대한 강압이다.  136


공개적이고 집단적인 나체화... 쓸데없는 과도함 때문에 모욕적인 하나의 폭력이었다. ..

의복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차라리 스스로를 땅바닥에 기어다니는 지렁이처럼 벌거벗고 느리고 비천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이 언제라도 짓이겨질 수 있다고 느낀다.

포로생활 첫 며칠 동안 숟가락이 없다는 사실은 이와 똑같은 무력감과 박탈감을 불러일으켰다... 숟가락 없이는 매일 죽을 개처럼 핥지 않고는 먹을 수가 없었다.  137


라거의 SS들은 교묘한 악마라기보다는 둔감한 야수들이었다. 그들은 폭력적이 되도록 교육받았다. 

그들의 얼굴에서, 그들의 몸짓과 언어에서 폭력은 새어나왔다. '적'에게 굴욕감을 주고 고통을 겪에 만드는 것이 날마다 하는 그들의 업무였다. 이런 것들에 대해 그들은 이성적 사고를 하지도 않았고, 다른 목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146-147


하루에 수톤 씩 화장터에서 나온 인간의 재는 대개 치아나 척추 뼈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것은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습지대를 메우기 위해, 목조 건물의 벽 사이에 넣을 단열재로, 심지어 인산비료로 말이다. 특히 수용소 옆에 위치한 SS 군의 마을길을 포장하는데 자갈 대신에 사용되었다. 나는 이것이 순전한 냉담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 재의 출처 때문에, 곧 그것이 짓밟아야 할 재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151


트레블링카의 전(前 앞전) 사령관 프란츠 슈탕글과 지타 세레니의 긴 인터뷰(<그 암흑 속에서>, 아델피 출판사, 밀라노, 1975)에서 발췌한 다음과 같은 두 문장 속에 축약되어 있는 것 같다.

"그들을 어차피 다 죽일 것이었는데... 굴욕감을 주고 잔혹행위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나요?" 뒤셀도르프의 감옥에서 종신형에 처해 있던 슈탕글에게 작가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실질적으로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사람들을 길들이기 위해서, 그들에게 자신들이 하고 있었던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다른 말로 하자면 희생자는 죽기 전에 인간 이하로 비하되어야 했다. 죽이는 자가 자신의 죄의 무게를 덜 느끼게끔 말이다. 이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설명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쓸데없는 폭력의 유일한 유용성이라고 하늘에 외치고 있다.  151-152





6 아우슈비츠의 지식인


장 아메리(한스 마이어)는 .. 이탈리아인들은 거의 희귀할 정도로 소수였기 때문에, 게다가 내가 라거에서 마지막 두 달간 기본적으로 내 일을, 화학자로서의 일을 수행했고 이는 훨씬 더 희귀한 경우였기 때문에 그는 나를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157


가스실 선발이나 공중 폭격 같은 결정적 순간들에서뿐만 아니라, 고된 일상 속에서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살았다. 아메리와 나, 우리 둘 다 그것을 알아차렸다. 종교적 믿음이든 정치적 믿음이든 그들의 믿음이 무엇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가톨릭 사제나 개신교 목사, 다양한 정통성을 가진 랍비들, 전투적 시오니스트, 순진한 마르크스주의자 또는 진화된 마르크스주의자, 여호와의 증인들은 자신들의 믿음 속에서 구원의 힘을 얻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우주는 우리의 우주보다 더 방대하고, 시간과 공간 속에 더 확장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열쇠와 기댈 버팀목이 있었다. 자신의 희생이 의미를 가질 수 있게 해줄 천년왕국의 내일이 있었으며, 천상이나 지상의 어딘가에 정의와 연민이 승리르 거둔(또는, 멀지만 확실한 미래에 승리를 거둘) 장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 그들의 굶주림은 우리의 굶주림과 달랐다. 그것은 신의 형벌이나 속죄, 봉헌물, 또는 자본주의의 부패의 결과였다. 그들 마음속의 고통이나 그들 주위의 고통은 해석 가능한 것이었고, 따라서 절망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들은 연민의 눈길로, 때로는 경멸의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일부는 힘든 노동의 막간에 우리를 전도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어떻게 믿음이 없는 사람이 '시의적절한' 믿음을 단지 시의적절하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거나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177-178


반쯤 죽은 사람들의 섬들, 아마도 교양 잇는 사람들이었거나 믿음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섬들, 그런 그들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은 의미 없고 잔인한 일이다.  179


아메리가 지적하기를, 지식인은(나는 여기서 '지식인'을 젊은 지식인이라고 명시하고 싶다. 아메리와 내가 체포되어 포로생활을 했던 그 시절처럼) 자신의 독서로부터 아무런 냄새도 없고 아름답게 장식된 문학적인 죽음의 이미지를 끌어냈다고 했다. ..

아우슈비츠에서의 죽음은 사소하고 관료적이며 일상적인 일이었다. 언급되지도 않았고 "눈물로 위로를 받지도" 못했다. 죽음 앞에서,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죽음 앞에서 문화와 비문화의 경계는 사라졌다. 아메리는 죽게 될 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 생각했다고 말한다.

'가스실의 독이 그 효과를 발휘하는 데 필요한 시간에 대해 토론을 벌이곤 했다. 페놀 주사에 의한 죽음의 고통스러움에 대해 짐작해보곤 했다. 뒤통수를 한 대 맞고 죽는 것을 바라야 할까, 아니면 의무실에서 기력이 소진해서 죽는 것을 바라야 할까?' ..

아마도 내가 좀 더 젊고 그보다 더 무지했기 때문에, 아니면 좀 덜 괴로웠거나 죽음을 덜 의식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거의 한 번도 죽음에 바칠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다. 나는 다른 수많은 일들로 쉴 틈이 없었다. 빵 조각을 찾는다거나, 무지막지한 노동을 피한다거나, 신발을 덧댄다거나, 빗자루를 훔친다거나, 내 주위의 얼굴들과 징후들을 해석하는 일 따위로 말이다. 삶의 목표는 죽음에 저항하는 최선의 방어이며, 이는 라거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179-181





7 고정관념들


포로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리고 훨씬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가혹한 경험을 한 모든 사람들은) 중간지대가 거의 없이 두 가지 범주로 뚜렷이 나뉜다 곧 침묵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와 같은 태도를 취하는 데에는 양쪽 다 분명한 이유가 있다. 단순화해서 내가 "수치"라고 부른 저 심적 불편함을 더 깊이 느끼는 사람들, 자기 자신과 평화를 이루지 못한 사람들, 또는 상처라 아직도 화끈거리는 사람들은 침묵한다. 반면 다른 쪽 사람들은 서로 다른 충동에 이끌려 말을 한다(대개는 말을 많이 한다). 그들이 말을 하는 것은 다양한 의식 수준에서 삶의 중심이, 또 좋건 나쁘건 자신들의 전(全 온전할전) 존재에 중요한 획을 그은 사건이 자신들의 포로생활(이미 먼 옛날 일이 되었다 할지라도) 속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자신들이 세계적이고 세기적인 규모의 재판에 증인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며, (이디시어 속담에 있듯이) "지나간 고난을 이야기하는 것은 멋진 일"이기 때문이다.  182


왜냐고 묻는 어떤 질문들에 대답하기가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역사가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니며 단지 증인들이다. 어쨌든 인간 만사의 역사가 엄격한 논리적 도식을 따른다고 말할 수 없으며, 모든 변화가 한 가지 이유에서 나왔다고도 할 수 없다. 단순화는 학교의 교과서에만 적합한 것이다. 이유들은 많을 수 있고, 서로 혼란스럽게 얽혀 있거나 알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184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나라들에서,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자유를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 되는 하나의 선(善 착할선)으로 생각한다. 자유 없이는 살 수 없고, 자유는 당연하고 명백한 권리이며, 게다가 건강이나 숨 쉬는 공기처럼 공짜로 갖는 것이라고, 이와 같은 선천적인 권리가 거부되는 시대와 장소는 그들에게 멀고 낯설며 이상해 보인다. 따라서 그들에게 감금이라는 개념은 도망이나 저항과 결부되어 있다. 포로의 조건은 부당하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요컨대 탈출이나 반란으로 치유되어야 할 질병처럼 말이다.  184-185


감금과 탈출의 이러한 도식적 이미지는 강제수용소의 상황과는 유사한 점이 거의 없었다. 강제수용소라는 용어를 보다 넓은 의미로 이해해보면(즉, 이름이 만천하에 알려져 있는 절멸 수용소들 외에도, 군인 포로들과 다양한 피억류자들이 있던 수많은 수용소들을 포함하여), 독일에는 노예 상태에 있던 수백만의 외국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노동의 피로에 지쳐 있었고, 멸시를 받았으며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또 제대로 입지도 보살핌을 받지도 못한 채 조국과의 접촉으로부터도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그들은 '전형적인 포로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강직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의기소침하고 쇠약해진 사람들이었다.  186


그들은 짐을 실어 나르는 가축들보다도 더 가치가 없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느꼈다. 그들은 빡빡 깎은 머리에 당장에 알아볼 수 있는 꾀죄죄한 옷을 걸쳤고, 빠르고 조용한 걸음을 방해하는 나막신을 신고 있었다.  187


노예 한 명의, 특히 "생물학적 가치가 열등한" 종에 속하는 노예의 도주는 말 그대로 패배한 자의 승리와 신화의 붕괴를 타나내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더 현실적으로 말해서, 각 포로는 세상이 알아서는 안 될 것들을 본 사람이기 때무넹 이는 객관적 피해이기도 했다.  188-189


탈주자를 산 채로든 죽은 채로든 찾을 때까지, 막사의 동료들이나 때로는 수용소의 모든 포로들은 시간 제한도 없이 며칠이고, 눈이 오든 비가 오든 뙤약볕이 내리쬐든 점호 광장에 서 있어야 했다.  189


'그곳'에서의 실제 상황과 개략적으로 책이나 영화, 신화들이 키워낸 현재의 상상력에 의해 표현되는 상황 사이의 간극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러한 상상력은 치명적인 단순화와 고정관념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이러한 현상이 가까운 과거에 대한 인식이나 역사적 비극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는 훨씬 더 일반적이고, 타인의 경험을 인지하는 데 잇어 우리가 가진 어려움이나 무능력의 일부를 보여준다. 타인의 경험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또 질적으로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이러한 어려움이나 무능력은 더 심해진다. 우리는 타인의 경험을 '주변'의 경험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아우슈비츠에서의 굶주림이 한 끼를 건너뛴 사람의 배고픔인 것처럼, 또는 트레블링카에서의 탈출이 로마 감옥에서의 탈출과 비슷한 것처럼 말이다. 연구되는 사건들로부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넓어지는 이러한 간극을 메우는 것은 역사가의 과제일 것이다.  192


불편한 진실은 그 길이 험한 법이다. 

감금과 탈출의 결합과 마찬가지로 억압과 반란의 결합 역시 하나의 고정관념이다. 이것이 전혀 유효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언제나 유효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반란의 역사, 그러니까 '소수의 권력자'에 대항하는 '억압받는 다수'의 아래로부터의 봉기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고, 또 그만큼 다양하고 비극적이다. 승리를 거둔 몇몇 소수의 반란이 있었고 많은 반란들은 패배로 끝났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다른 반란들은 역사에 자취를 남기지도 못하고 일찌감치 진압되었다. ..

어떤 경우든 간에 가장 억압받는 개인들은 운동의 선봉에는 결코 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오히려 보통은 대담하고 편협하지 않으며, 개인적으로는 안정적이고 평온하며, 심지어 특권을 누릴 수도 있는 삶을 살 가능성이 있음에도 관대함으로(또는 야망으로) 투쟁에 투신하는 지도자들이 혁명을 이끈다.  194-195


세기말이자 천년의 끝자락을 지나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확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  202





8 독일인들의 편지


나는 특정한 독자를 생각하고 글을 쓴 것은 아니었다. 내게 그 들들은 내 안에 들어 있었던, 나를 압도하고 있던 무엇이었고 나는 그것들을 밖으로 쫓아내야 했다. 그것들을 말해야 했다. 아니 지붕 위에서 소리소리 질러야 했다. 그러나 지붕 위에서 소리 지르는 사람은 모두에게 외치는 것이자, 아무에세도 외치는 것이 아니다. 사막에서 외치는 아우성이다. 그 계약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이 변했고, 내게는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나는 그 책을 물론 아탈리아어로, 이탈리아 사람들을 위해서, 자식들을 위해서, 알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알고 싶어 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위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발적으로든 아니든 인간성에 대한 침해에 동의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썼다. 그러나 이 책의 진정한 수신자는, 마치 무기처럼 이 책이 겨냥하고 있던 사람들은 바로 그들, 독일인들이었다.  205


내 임무는 이해하는 것,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소수의 중범죄자들이 아니라 그들, 그 국민들, 내가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 자신들 중에서 SS대원으로 차출된 바로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 가운데 믿었던 사람들과 믿지 않으면서도 침묵했던 사람들을, 우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작은 용기, 우리에게 빵 한 조각을 던져주거나 인간적인 말 한 마디를 나지막이 중얼거릴 작은 용기도 없었던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206


독자들은 두 부류로 명확히 구분된다. 첫 번째는 기분 좋은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불쾌한 부류이다. 중간에 속하는 경우는 드물다.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기쁨을 주고 가르침을 준다. 그들은 책을 주의 깊게, 흔히는 한 번 이상 읽은 사람들로, 때로는 작가 자신보다도 더 책을 잘 이해하고 사랑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책을 통해 자신들이 풍요로워졌다고 밝히며, 자신들의 견해와 때로는 비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들은 작가에게 작품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며 흔히는 작가에게 답장 쓸 필요가 없다고 대놓고 말한다.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지루함을 주고 시간을 낭비하게 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과시하며 잘난척한다. 흔히는 서랍 안에 자신의 습작들을 넣어두고 있으며, 담쟁이덩굴이 나무둥치 위로 기어오르듯이 책과 작가 위로 기어올려는 의도를 슬며시 드러낸다. 또는 허세를 부리느라, 아니면 내기를 해서, 아니면 작가의 사인을 받기 위해서 편지를 쓰는 어린이나 청소년도 있다.  222


그녀의 첫 편지에 나는 내 책이 독일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내 책을 읽을 필요가 덜 한 독일인들 사이에서였다고 썼다. 죄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죄 없는 사람들이 뉘우치는 편지들을 내게 보내왔던 것이다. 죄인들은 당연히 침묵했다.  237





결론


모든 곳에서 일어날 수 있다.  247


그들은 평균적 인간이었고, 평균적 지능을 가졌으며, 평균적으로 악한 사람들이었다.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면 그들은 괴물이 아니었으며 우리와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교육을 받았다. ..

모두가 크든 작든 책임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독일 국민들 대다수는 정신적 나태함 때문에, 근시안적 타산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국민적 자부심 때문에 애초에 히틀러 대장의 "아름다운 말들"을 받아들였다. 히틀러에게 행운이 따른 동안에 그를 추종했고 아무런 가책도 없이 그를 지지했다.

바로 그런 독일 국민들 대다수의 책임도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  251-252





부록 - 프리모 레비와 <라 스탐파>지의 인터뷰 : 이해하는 것이 용서하는 것은 아니다.


왜 프리모 레비는 문학적 경험을 포함하여 다른 많은 경험을 한 뒤에 다시 이 주제를 선택한 것일까? 진실에 대한 필요 때문이라고 그는 주저 없이 대답한다.  254



Posted by WN1
,


1906. 3. 19 독일 졸링겐~1962. 5. 31 이스라엘 텔아비브.
제1차 세계대전 때 가족과 함께 독일에서 오스트리아 린츠로 이주했다. 1932년 4월 린츠에서 비밀 나치당에 입당했고 11월 하인리히 히믈러가 조직한 나치 친위대(SS) 정예부대에 들어갔다. 1933년 린츠를 떠나 바이에른 레히펠트의 '오스트리아 군단'이라는 테러리스트 양성학교에 들어갔다. 1934년 1~10월 다하우에 있는 SS부대에서 일한 뒤, 베를린의 보안국(Sicherheitsdienst/SD) 중앙본부의 유대인 담당부서에서 일했다. SS 내에서 꾸준히 승진했으며 오스트리아 합병(1938. 3) 뒤에는 유대인을 추방하는 임무를 띠고 빈으로 파견되었다. 1년 뒤 같은 사명을 안고 프라하로 갔다.
1939년 히믈러가 국가안전국(Reichssicherheitshauptamt/RSHA)을 창설했을 때 베를린에 있는 유대인 담당부서로 전보되었다. 1942년 1월 베를린 근처 반제에서 나치 고위관리들이 모여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에 필요한 계획과 병참업무 준비에 관한 회의를 열었다. 아이히만은 이 문제의 책임을 맡음으로써 사실상 대량학살을 뜻하는 이 '마지막 해결책'의 집행자가 되었다. 그는 유대인을 식별하고 집결시켜 그들을 집단수용소로 보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홀로코스트).
전쟁 뒤 아이히만은 미군에 붙잡혔으나 1946년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중동지역을 전전하다가 1958년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나치 전범 추적자 지몬 비젠탈과 이스라엘 '자원봉사' 단체에 의해 정체가 드러나 1960년 5월 11일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에서 체포되어 9일 뒤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이송되었다. 이러한 조치가 아르헨티나 법을 위반했다는 여론이 진정된 뒤,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의 특별 3심 법정에서 재판을 열었다. 1961년 4월 11일에서 12월 15일까지 계속된 이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


[아이히만의 비극-아무 생각 없는 삶의 비극]


아이히만은 독일 나치스 친위대 장교 출신입니다. 그에 의해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된 유대인 수는 약 600 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는 독일 패망 후 아르헨티나에 가족과 함께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숨어 지내다, 1960년 5월 이스라엘 비밀경찰에게 발각, 강제 연행되어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 받아 결국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런 아이히만이 재판에 섰을 때 세계 언론은 '인간의 얼굴을 한 악마'를 보기 위해 취재 열풍이 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열풍은 단 2 주만에 식어 버립니다. 그것은 아이히만이, '너무나 평범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이히만이 성 격파탄자나 정신 이상자일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을 학살한 친위대 장교이면서도, 그는 유대인 여자를 정부(情婦)로 두었습니다. 그는 나치의 정강(政綱)도 몰랐고, 히틀러의 '나의 투쟁'도 읽어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친위대도 그저 친구의 권유에 등 떠밀려 들어간 것이라 합니다. 그를 추적, 관찰한 현대의 유명 철학자 하이데거의 제자 아렌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지극히 가정적인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 그래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일상 생활에서 아주 근면했고 무능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다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가 엄청난 범죄자가 된 것은 순전히 성찰의 부재(thoughtlessness)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비극을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에서 찾았고, 그런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악'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기에 아무 생각 없이 명령을 따랐고, 아무 생각 없이 살기에 함부로 그렇게 엄청난 비극을 초래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분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떠들고 아무 생각 없이 말하고 아무 생각 없이 함부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요즘 흔히 일어나는 성폭행, 사기 등의 온갖 비극이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사 는 우리들에 의해 일어납니다.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결코 할 수 없을 그런 일들을, 아무 생각이 없기에, 그저 내 욕심, 내 삶만 바라보기에 아무 생각 없이 범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히 보는 무심코 버리는 담배 꽁초, 무심코 빼무는 담배 연기, 전철 간에서 흔히 보는 주위를 생각하지 않는 요즘 젊은이들의 짙은 애정 표현도 그런 아무 생각 없는 삶의 한 단면입니다.


더구나 인터넷이나 언론이 특정 목적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부추기고 세뇌시키면 사람들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아무 생각' 없어집니다. 옳다고 하는 일에 옳음에, 그르다고 하는  일엔 그름에 취해, 그리하여 쉽게 분노하고 흥분하여 앞뒤 좌우를 가리지 않고 마녀 사냥을 하며 온 세상을 흔들어 놓습니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도 모르고, 부추기고 세뇌하는 세력들에 의해 마치 스탈린의 '쓸모 있는 바보들'처럼,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이 짜 놓은 각본대로 흘러갑니다.

 

아무리 이성을 찾아라, 편견을 갖지 말고 세상을 똑바로 보라, 한 면만 보지 말고 사물의 양면(中道)을 모두 보라, 제대로 알고 말하라 고 일러 드려도, 그렇게 시작된 아무 생각 없는 아우성, 행동은 도무지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비극은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만 갑니다.


당신들은 아무 생각 없는 것이 아니노라 강변하시겠지만, 그래서 당신도 이성이 있고 나름대로 당신의 길을 간다고 하시겠지만, 죄송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정말 '아무 생각 없는 분들'입니다. 다만 교묘한 방법으로 세뇌되어 세뇌 되신지도 모 른 채 '남 따라 장에 간다'는 속담처럼, 분노에 사로 잡혀 머리끝까지 원통함과 증오로 차 올라 아무 생각 없이 남이 짜 놓은 각본대로 가실 뿐인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 중의 하나가, 그렇게 광란의 분노를 내뱉은 분들이 나중에 사물의 진실을 알고 말씀하는 한 마디가 단지 '그 때는 그게 사실인 줄 알았다!'며 자신에겐 아무 책임도 없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일입니다. 고작해야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더할 뿐, 그 분들에게 더 이상의 잘못은 자신에겐 없습니다.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다른 분을 비통에 빠뜨렸는지,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다른 분들의 삶을 방해했는지에 대한 일말의 반성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보는 우리나라는, 이렇게 온통 아무 생각 없는 분들의 생각 없는 삶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 삶의 성찰보다 그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일색의 삶이 있을 뿐입니다. 비정상적일 정도의 성형 중독, 비쌀수록 잘 팔리는 상품들, 그저 즐기고 자극적인 내용의 TV 드라마들, 난무하는 악플들... 이런 어처구니 없는 모습도 그런 아무 생각 없는 우리 모습의 반영이라 할 것입니다. 



---------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한국에서는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사상가다. 그의 지적 계보를 잇는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의사소통행위 이론'으로 1980년대에 널리 알려진 데 반해, 아렌트는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그의 저작이 번역되기 시작했다. 아렌트의 사상에 알게 모르게 기대고 있는 '시민의 정치참여'가 이 땅에서 대중적 슬로건이 된 것을 감안하면, 그를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걸렸다고 해야 할 정도다. 그 뒤늦음을 만회하려는 듯 그의 주요 저작이 속속 우리말로 옮겨지고 있고, 탄생 100돌을 맞아 지난 달에는 아렌트 학술 심포지엄이 열리기도 했다.

그의 저작 가운데 가장 최근에 번역된 것이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 (김선욱 옮김, 한길사 펴냄)이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은 난이도 높은 그의 사상서 중에서 유일하게 대중적 저작이다. 1961~1962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시대 유대인 학살 실무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의 재판 과정을 이야기체로 풀어 쓴 것이 이 책이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은 아렌트에게 대중적 명성을 안겨 주었고 동시에 그를 엄청난 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 저작은 책의 대중적 성격과는 상관없이 아렌트 정치철학의 핵심 주제를 포괄하고 있어 그의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용이한 통로를 제공한다.

감정 앞세우지 않은 이야기체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의 원고는 애초에 잡지 < 뉴요커 > 에 연재한 기사였다. 1960년 5월 아르헨티나에 숨어 지내던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체포돼 예루살렘으로 압송되자 아렌트는 대학 강의를 중단하고 < 뉴요커 > 특파원 자격으로 그의 재판을 취재했다. < 뉴요커 > 는 지식인들, 특히 교육 받은 뉴욕 사람들을 주요 독자층으로 삼은 대중 잡지였다. 독일 출신으로 나치 박해를 피해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이라는 아렌트의 '신분'이 유대인 학살자 아이히만 재판의 현장 취재 기자라는 '신분'과 만나는 것만으로도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렌트의 글은 연재되자마자 유대계 사회의 거친 분노에 휩싸였다. 아렌트가 홀로코스트라는 참극의 희생자인 유대인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고 있으며, 마치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라는 듯 국외자처럼 사건을 대하고 있다는 것이 분노의 이유였다. 실제로 글 안에서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에 유대인 사회가 어떻게 협력했는지 밝혔을 뿐만 아니라, 그 야만의 집행자 아이히만을 묘사할 때도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그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홀로코스트 범죄의 책임자라기보다는 희생자에 가까운 사람으로 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히만은 '유대인 절멸'을 기획하고 교사한 사람들, 곧 히틀러를 정점으로 한 나치 지도부의 명령을 받은 처지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나치당의 강령도 알지 못했고 히틀러의 < 나의 투쟁 > 도 읽지 않았다. 그의 직급은 나치 친위대의 중간관리자(중령급)에 지나지 않았다. 히틀러는 그를 대면할 기회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며, 설령 대면했다 해도 아이히만의 이름은커녕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법을 준수하는 '건실한 시민'이었던 아이히만은 명령받은 일을 이행하는 것을 의무라고 느꼈고, 유대인 전문가로서 그들을 수용소에 배분하는 일을 착실히 수행했다.

'양심'의 문제가 여기서 불거졌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범죄를 저지른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며, 그의 양심은 상부의 명령을 정확히 행동에 옮기라고 요구했다. 그는 피고석에서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아렌트는 양심이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여건에 제약되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상주의적 열정도 한몫

이상주의적 열정도 아이히만의 정신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는 유대인 독립국가 건설 운동인 시온주의에 열렬히 공감했으며, 그들이 이상주의자라는 점에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의 이상주의는 관념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였고, 그것도 과격한 실천이라는 점에서 독특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이상주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아버지마저도 죽음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경찰 심문에서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나 이상주의자로서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려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이히만은 난데없이 나타난 악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규칙과 명령과 '주어진 이상'에 맞추려고 노력한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이히만이라는 인간형이 이렇게 분석되고 난 뒤, 이 책으로 하여 결정적인 의미를 띄게 된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이히만은 스스로 악인이 되려고 한 적도 없었고, 반듯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하기까지 했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다."

아렌트는 이 '순전한 무사유', 곧 사유하지 않음이야말로 아이히만의 진정한 특성이라고 말한다. 그의 '생각 없음'은 바꿔 말하면,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음'을 뜻한다. 사회적 환경에 제약된 양심을 품고 이상주의로 무장하고서 이 '무사유'를 실천할 때 얼마나 가공할 일이 벌어지는지를 아이히만은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아렌트는 다른 글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의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그의 유일한 특징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이었다."

아렌트는 정치의 영역을 시민들이 저마다 인격을 걸고 의견을 표출하여 경쟁하는 장으로 여겼다. 그 정치 공간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판단하는 훈련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상적인 공론장이다. 그런 정치의 장이 마련되고 강화할 때 아이히만과 같은 사례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아이히만이 평범한 것은 우리가 언제든 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말한다. "우리 안에 아이히만이 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차이와 평등의 정치철학' 한나 아렌트 따라읽기 붐

한나 아렌트 저작의 한국어판은 10년 전인 1996년 처음 얼굴을 내밀었다. 그의 대표작인 < 인간의 조건 > (이진우·태정호 옮김)이 '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의 하나로 출간된 것이다. 1958년에 미국에서 나온 < 인간의 조건 > 은 아렌트를 정치철학자로서 우뚝 세운 저작이다. 아렌트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사상가로 평가받는 데 이 책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그의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실존주의를 재해석해 자신의 정치철학의 밑돌로 삼았다. 그는 인간에게 부여된 실존적 조건을 '복수성' 혹은 '다양성'에서 찾았다. 인간은 서로 다른 차이의 존재이며 따라서 인간들의 삶은 전체로 볼 때 언제나 복수일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차이는 인간이라는 보편성의 지평 위에 놓여 있다. 그것을 아렌트는 평등이라고 불렀다. 다름이 없다면 인간은 교류하고 소통할 이유가 없으며, 평등하지 않다면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할 것이다.

< 인간의 조건 > 출간 뒤 2000년대에 들어 '아렌트 르네상스'라 할 만한 현상이 벌어졌다. < 혁명론 > (홍원표 옮김, 한길사 펴냄) < 과거와 미래 사이 > (서유경 옮김, 푸른숲 펴냄)이 잇따라 나왔고, 1971년 저작 < 정신의 삶1-사유 > (홍원표 옮김, 푸른숲 펴냄)과 < 칸트 정치철학 강의 > (김선욱 옮김, 푸른숲 펴냄)도 출간됐다. 아렌트는 애초에 < 정신의 삶 > 을 '사유' '의지' '판단'이라는 칸트의 세 기획에 맞추어 3부작으로 내려고 했는데, 그 중 '정신'편만 완성했다. 유고를 갈무리한 < 칸트 정치철학 강의 > 는 이 기획의 '판단' 편에 해당한다.

'의지'편은 현재 번역중이며 또 아렌트에게 학자로서 첫 명성을 안겨준 1951년 저작 < 전체주의의 기원 > 도 한국어판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이밖에 < 정치의 약속 > < 공화국의 위기 > 등이 푸른숲에서 나올 예정이다. 이들이 빛을 보면 한나 아렌트 르네상스의 명실상부한 실체를 갖추게 되는 셈이다. 김선욱 숭실대 교수가 쓴 < 정치와 진리 > (책세상 펴냄) < 한나 아렌트 정치판단이론 > (푸른숲 펴냄)은 국내 아렌트 전공자가 쓴 아렌트 해설서로서 아렌트 사상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 노릇을 해준다. 


-----


유대인 학살범 아이히만, 아르헨티나에서 덜미 잡히다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이 예루살렘의 법정 피고석에 앉아 있다. 아데나워 총리 시절(1949~63)의 독일인은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었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았고, 교사들은 그 주제를 피했다. 그들은 아이히만 재판을 계기로 잊으려 애썼던 과거와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

 

[그때 오늘]

 

1960년 5월 11일 저녁 6시30분, 아돌프 아이히만은 늘 하던 대로 버스를 타고 일터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세 사람이 나타나 그를 승용차에 싣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의 한 주택으로 데려갔다. 아이히만은 이스라엘에서 온 ‘전문가들’임을 즉각 알아챘다. 어떠한 폭력도 사용되지 않았다.

1942년 1월 나치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을 수립했고, 아이히만은 그 책임자로서 유대인 집단 학살을 주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군에 체포됐다 1946년 탈출한 그는 이후 몇 년 동안 중동지역을 전전하다 1958년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나치 전범 추적 단체에 의해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에서 체포돼 9일 뒤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이송됐다.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열었다. 1961년 4월부터 12월까지 계속된 이 재판에서 그는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946년 11월의 여론조사에서 독일인 중 33%는 유대인이 아리아인과 동일한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12년간 나치 지배를 받고 난 직후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생각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6년 뒤인 1952년의 조사 결과다. 수치가 더 늘어나 37%가 독일 영토에 유대인이 없는 것이 독일에 더 낫다고 밝혔다. 그들은 세계가 자신들을 어떻게 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피점령국 사람들의 고통보다는, 자신들이 겪었던 전후의 식량·주택 부족 등에 주목하면서 스스로를 ‘희생자’로 간주했다. 1951년 바이에른주 판·검사의 94%, 재무부 직원의 77%가 나치 전력자였다.

전범 아이히만 재판은 독일이 ‘과거’에 관심을 갖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재판과정에서 홀로코스트(대학살)의 실상이 낱낱이 조사되었기에 학살의 참상을 수백만 명에게 교육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 결과 히틀러를 위대한 정치가라고 믿는 서독인의 비율은 1955년 48%에서 1967년 32%로 하락했다. 갈 길은 아직도 남았다. 진정한 변화는 그 후 10여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1970년 브란트 총리는 바르샤바의 나치 희생자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었고,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이 살해되었다.

1979년 독일 텔레비전은 메릴 스트리프 주연의 4부작 미니시리즈 ‘홀로코스트’를 방영했다. 그제야 비로소 유대인의 고통은 독일 국민의 공공 의제가 되었다.

하지만 ‘집단적 기억상실’ 덕분에 나치 잔당에 의해 전후 독일의 놀라운 ‘경제 회복’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정의’와 ‘경제’는 양립할 수 없는 걸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


[홀로코스트]아이히만은 칸트 철학을 어떻게 독해했나?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제8장 법을 준수하는 시민의 의무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몬 살인마, 아돌프 아이히만이, 재판과정에서 칸트 철학과 그의 정언명령에 대해 읽은 적이 있고, 그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는 점이다.

 

학살자의 심리와 독일이성철학이 결합되는 방식과, 독자와 철학자의 책이 오독되는 방식 그리고 그의 오독이 그를 흔들리지 않는 학살자로, 그리고 결국 그를 사형대 위에서 사라지게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의 난독증 에 대한 이야기… ^ ^

 

아렌트의 기록에 따르면, 재판과정에서 아이히만은 칸트의 정언명령에 대한 거의 완벽한 정의를 내렸다고 한다.

 

아이히만 ,“칸트에 대해 언급하면서 제가 말하려 한 것은, 나의 의지의 원칙이 항상 일반적 법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계속되는 질의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읽었노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가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을 추진하라는 명령을 받은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칸트의 원리를 따르지 않았으며, 자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아렌트는 그의 고백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 아이히만은 그가 살던 나치 제3제국치하에서, 즉 국가가 범죄를 합법화한 시대에서, 칸트의 정언명령이 더 이상 적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이고, 이 같은 판단은 칸트철학에 대한 오독이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가령 나치의 법률가 한스 프랑크가 제3제국의 정언명령에 대해, “만일 총통이 당신의 행위를 알았을 때, 총통께서 승인할만한 방식으로 행위하라고 정의한 바 있다.

 

하지만, 아렌트에 따르면, 칸트는 이런 식으로 주장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 칸트적 정신이란, 인간은 법에 대한 복종 이상을 행해야 한다는 것, 단순한 복종을 넘어, 법의 배후에 있는 원리와 자신의 의지를 일치시켜야 한다는 요구에 다름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 철학에서 그 원천은 바로 실천이성이었다. 결국 칸트에게는 모든 사람이 행위를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입법자이며, 인간이 자신의 실천이성을 사용하여, 법의 원칙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 원칙들을 발견해야만 하는 것이며, 결국, 인간에게는 법에 대한 복종이상의 것이 요구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유대인 문제를 최종해결을 수행하면서, 아이히만을 사로잡은 것은 실천이성이 아닌, 총통의 이성이었다.

 

아이히만의 내면에서는, 유대인 문제를 최종해결하라는 히틀러의 이성을 실천하기 위한 철저함이 보인다. 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문제에 관한 불편한 진실이 있다면, 아이히만이, 종전 무렵 하인리히 힘러를 위시한 다수 친위대들이 유대인 문제에 대한 타협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그가 끝까지 철저하게 견지한 비타협성이고,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 그의 광신이 아니라, 그의 양심이라는 점이다.

 

종전이 가까워오고, 나치의 패배가 명약관화해 지면서, 친위대 내부에서는 그 수장 힘러를 위시해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온건파들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연합군 과 유대인들과의 모종의 협상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힘러와 그 부하 온건파들의 타협시도에 대해, 아이히만은 완강히 저항했다. , 총통 히틀러의 의지와 힘러의 의지가 충돌한 경우, 아이히만의 선택은 항상 히틀러의 유대인문제 최종해결 명령이라는 의지였음은 한치의 의심도 없었던 것이고, 협상을 모색한 친위대 온건파들의 관점을 그는 부패라 간주했다. 이 과정에서 만약 아이히만이 어떤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면, 그것은 유대인 대학살을 명령한 그의 최고 상관인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라는 것이 바로 아이히만의 양심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치시대의 양심은 다음과 같은 역설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문명화된 나라에서 살인과 관계된 양심이란, “살인하지 말라라면, 히틀러의 독일 제3제국 시절의 법이란, 비록 살인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상적인 욕구와 성향에 반한다는 것을 유대인 대학살의 조직가들이 아주 잘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히틀러식 양심의 소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너는 살인할 지어다라고 속삭였던 것이다.

 

아이히만의 칸트 읽기와 그 오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은, 인간은 법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상의 판단,실천을 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치의 전범재판 중 하나였던, <뉘른베르크 재판>의 판례에 따르면, 비록 상관 혹은 국가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인륜범죄라면, 명령을 단순히 수행한 자에게도 법적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




Eichmann in Jerusalem - Hannah Arendt


이 책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유대인을 학살한 죄인에 대한 재판을 다룬 책임에도 불구하고 시온주의(유대인 민족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는 점만 해도 이 책의 흥미진진함을 느낄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히만 재판은 그가 나치독일치하에서 유대인 관련업무만을 맡았던 공무원이기에 나치독일의 여러 민족에 대한 범죄로 기소된 뉘른베르크 재판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재판이 열리게 된 과정부터 독특했는데, 이스라엘은 아이히만이 살고있는 아르헨티나에서 국제법을 어기며 납치해왔으며 국제재판소를 여는게 더 적절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 열렸다는 점입니다. 이것에 대해 아이히만 당사자에 대한 재판이 아닌 반유대주의에 대한 재판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로인해 예루살렘 재판은 여러 문제점을 야기했다고 지적하는데, 피고를 위한 증인을 허용하지 않은 점 뿐만 아니라 잘못을 행하려는 의도가 범죄를 구성하는데 필수적이라는 가정을 했다는 점입니다.

이 책은 아이히만의 성장과정을 따라갑니다. 평범한 학생이 성장해 결혼을 하고, 감압정유회사에 취직하고 나치당에 가입했고 친위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당의 정강도 알지 못했고 '나의 투쟁' 도 읽지 않았습니다. 젊은 변호사 칼텐브루너의 "친위대 가입해보면 어때?" 라는 질문에 "그렇게 하지 뭐" 정도의 신념으로 가입했던 것입니다. 그가 유대인 문제 전문가로 성장하며 맡았던 것은 나치당의 유대인 해결책과 동일했습니다. 추방, 수용, 학살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정책이 변화할때마다 그는 맡은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아이히만이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를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마치 본디오 빌라도가 된 심정이였다고 말합니다. 유대인은 예수를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몰아 빌라도에게 고발했고,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했지만 유대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십자가형에 처한뒤 손을 물로 씻으면서 자신의 죄가 없다고 말한 바로 그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추방 및 수용은 몰라도 최종해결책, 즉 학살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결국 자신의 양심을 무마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 방법이란 학살에 반대한 사람을 단 한명도 볼수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입니다.

나치가 유대인을 그토록 많이 학살하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들 중 하나는 바로 유대인 지도자들입니다. 유대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독일은 그 짧은 시기에 유대인을 그렇게 대량으로 학살할수 없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나치는 유대인을 추방,이송하는데 있어서 유대인 공동체를 이용했는데, 명단을 작성하고 돈을 인수하고 기차에 태울수 있게 경찰력을 제공하는 등 유대인 중앙위원회는 유대인처리에 있어서 절대적 권리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비밀을 맹세했고, 자기 민족을 파멸로 이끄는 새로운 권력에 취해 홀로코스트를 이룩함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합니다. 간혹 유대인을 구한 경우도 있었는데 헝가리에서 카스트너 박사는 47만 6000명의 희생자를 내고 1684명을 구출했습니다. 이러한 저명한 유대인은 전쟁중에도 학살당하지 않았고 그들을 위해 덜 저명한 유대인은 항상 희생되었습니다. 히틀러는 340명의 일등급 유대인에게 독일인의 지위를 부여했고 수천명의 반쪽 유대인은 모든 제약을 면제받았습니다. 심지어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을 학살한 의사들은 유대인 부대도 있었습니다.

유대인 위원회가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큰 영향력을 끼친 증거로 나치독일 점령국에서의 유대인 학살과정을 들수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간의 문제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반응에 따라 유대인학살수치에 큰 영향을 가져옴을 알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무국적 유대인을 희생시키는데 있어서 오히려 프랑스 비시정부가 자발적으로 앞장섰으나 프랑스계 유대인을 포함시키려 하자 격렬하게 저항한 결과 25만명의 유대인이 살아남을수 있게 되었습니다. 벨기에의 경우 더 비협조적이였지만 나라가 작다보니 숨기가 어려워 피해가 좀 있었습니다. 덴마크의 경우 독일의 반유대정책에 대해 대놓고 반대했고 무국적자마저 덴마크 정부가 보호해줬을뿐만 아니라 돈없는 유대인을 위해 덴마크시민들이 탈출비를 제공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완강한 저항을 보게 되자 정작 덴마크에 파견된 독일당국마저 베를린의 명령에 대해 거부심을 표하게 됩니다. 불가리아의 경우 더욱 완강한 정책으로 불가리아 유대인은 이송되거나 자연사가 아닌 죽임을 당한 사람은 한명도 없게 됩니다. 그런 반면 루마니아의 경우 독일보다 더 극렬한 반유대정책으로 유대인학살의 원조격인 친위대마저 루마니아인들의 학살에 공포심을 느꼈으며 유대인을 구하기위해 개입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독일의 도움 없이도 독일 친위대가 도착하기 전에 벌써 30만명을 학살했습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였습니다. 그의 친척중에도 유대인의 피를 잇는 사람이 있었고, 교양있는 유대인 지도자들과 친분을 나눴으며 자신이 맡은 유대인학살소(테레지엔슈타트)의 학살과정을 보고 경악했으며 그의 희망은 유대인의 발아래 확고한 땅을 두려는 것이였습니다. 그것은 그의 니스코 모험이나 마다가스카르 계획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최종 해결책이 다가옴에 따라 취소되었고 그는 변경된 정책을 따랐습니다.

이스라엘 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판결문에서 그는 15개의 기소 항목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그것은 유대인의 대량학살 및 폴란드인, 슬로베니아인 추방죄와 집시추방죄를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집시의 학살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판결문에서 살상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대통령은 아이히만의 사면 청원서와 미국랍비중앙회, 미국개혁주의 유대교대표단 등에서 보내온 호소편지문을 모두 물리쳤고 몇시간뒤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쳐해졌습니다.

아이히만은 사악한 동기에서 행동하지 않았고, 누구를 죽일 어떤 의도도 없었으며, 유대인을 증오하지도 않았지만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으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그를 통해 그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사고의 무능력함을 지적했고, 그가 행한 모든 일은 그가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서 인식한 만큼 행동한 것이었다. 그는 경찰과 법정에서 계속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의무를 준수했지만 그 법과 조국, 숭고한 명령에 대해 사고하지 못했음을 지적했고, 설령 대량학살의 조직체에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을 지지했고 인류 구성원 중 어느 누구도 아이히만과 이 지구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할수 없기 때문에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아주 평범하게도, 밀그램의 실험에서 버튼을 누른 대다수의 사람에 불과했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평범한 아버지였고, 평범한 공무원이였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누구라도 그처럼 될수 있는 평범한 악 이였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책이 예루살렘 재판의 성공여부(헌법재판소로서 정의를 부여하는 행위)만을 다루고 있다고 글을 마무리하지만, 역사속에서 유대인학살을 최소화할수있었던 좋은 예들(덴마크나 불가리아의 유대인정책 등)을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알수 있을 것입니다.


----------

한국판 아이히만에 면죄부 준 용산 판결 / 조영관 한겨레

지난달 28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에서 열린 용산참사 재판에서 형사합의27부는 특수공무방해치사상 등의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 9명에게 최고 징역 6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용산참사의 모든 책임은 농성했던 철거민에게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에 책임이 있는 나치의 고위 장교들 중 한 사람으로, 자신은 승진을 위해 특별히 근면했던 것을 제외하고 아무런 악의적 동기가 없었고, 스스로를 ‘오류의 희생자’라 주장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통해 ‘악’이라는 것이 ‘일상적’으로 저질러질 수 있는 ‘단순한’ 것이며, 그러한 행위의 본질은 악을 행하는 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하게 하는 ‘무사유성’이라고 보았다.

이번 사법부의 판결은 한국판 아이히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정치적 판결이다. 용산참사는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세입자들이 생존권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자, 정부가 공권력으로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행위가 ‘정상’이라고 믿으며 작전을 수행했고, 결국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경찰이 목숨을 잃었다. 용산참사에 책임을 지고 있는 수많은 한국판 아이히만들은 이번 판결을 통해 자신의 행위의 결과반성기회거부당했다. 합리적 해결을 바라는 수많은 시민들은 또다시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좌절감을 느끼며, 복종을 강요당했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자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던 구청 공무원, 경찰, 소방관, 용역업체 직원들은 사회 상층부의 행위양식에 또다시 적응해야 했다. 권력에 대한 ‘복종’이 만들어낸 행위의 무사유성은 더 거대한 폭력을 불러올 수 있다.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다는 ‘악의 평범성’은 용산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너무 쉽게 마주할 수 있는 비극이다.

조영관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생각 >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진규 -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0) 2010.09.19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와 명상록  (0) 2010.09.17
유영만  (2) 2010.09.03
소크라테스 일화들  (1) 2010.08.30
소크라테스  (0) 2010.08.26
Posted by WN1
,

아우슈비츠

생각/내용 2010. 9. 8. 00:59


아우슈비츠 수용소 (Auschwitz Concentration Camp)
살인악마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독일 총리로 권력을 잡을 당시(1933년)
수용소 정문. "노동이 자유를 만든다" 라고 씌여있다
버려진 시체들
산을 이룬 희생자들의 신발
가스실 내부
생체실험에 이용된 아이들
      아 !, 아우슈비츠! 이 한마디 외침 밖에 달리 무슨 말이 있을수 있으랴.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잔혹행위의 박물관이라 할 이 거대한 시설을 둘러보는 관광객들은 누구나 입을 굳게 다문다.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야만의 극치가 모두 엄연한 사실이었다고 이 수용소 시설과 유물과 사진들은 웅변하고 있다. 이 역사의 현장과, 전쟁범죄의 전형을 보여주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요즘 평화를 기원하는 사람들의 발길로 붐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아우슈비츠의 외국 관광객 가운데 피해국 이스라엘과 가해국 독일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는 피해자 나라와, 끝없이 과거사를 참회하는 가해자 나라가 모두 정책적으로 이 도시로의 수학여행을 권장하기 때문이다.
 수용소 의사 멩겔레 박사에 의해 인체실험을 받고있던 집시소녀들. 너무 여위어 성별구분도 어려울 정도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폴란드 남부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독일의 강제수용소이자 집단학살수용소. 나치 학살의 생생한 현장에 400만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가스실, 철벽, 군영, 고문실 등이 있다.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0㎞ 지점에 위치한 아우슈비츠는 문명을 배반한 야만의 극치이며 인류가 저지른 가장 잔혹한 행위의 흔적이다.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의 상징인 강제수용소로 잘 알려져 있는 아우슈비츠는 원래 인구 5만 명의 작은 공업도시로, 폴란드어로는 오슈비엥침 이라고 한다. 이 도시의 외곽에 있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수용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생지옥을 만나게 된다. 학살한 시체를 태웠던 소각로, 카펫을 짜기 위해 모아둔 희생자들의 머리카락, 유대인들을 실어 나른 철로, 고문실 등이 끔찍했던 광기의 역사를 전해 준다.4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의 현장.1940년 봄, 친위대 장관인 하인리히 힘러가 주동이 되어 가시철망과 고압전류가 흐르는 울타리, 기관총이 설치된 감시탑을 갖춘 공포의 강제수용소를 세웠다. 그 해 6월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고, 1941년 히틀러의 명령으로 대량살해시설로 확대되었으며, 1942년부터 대학살을 시작하였다. 열차로 실려온 사람들 중 쇠약한 사람이나 노인, 어린이들은 곧바로 공동샤워실로 위장한 가스실로 보내 살해되었다. 이처럼 가스, 총살, 고문, 질병, 굶주림, 심지어는 인체실험을 당하여 죽은 사람이 40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 중 3분의 2가 유대인이다. 희생자의 유품은 재활용품으로 사용했고, 장신구는 물론 금니까지 뽑아 금괴로 만들었으며, 머리카락을 모아 카펫을 짰다. 뼈는 갈아서 골분비료로까지 썼으니 사람의 몸뚱이 중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1945년 1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나치는 대량학살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막사를 불태우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 수용소 건물과 막사의 일부가 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7년 폴란드의회에서는 이를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희생자를 위로하는 거대한 국제위령비를 비르케나우에 세웠으며, 수용소 터에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나치의 잔학 행위에 희생된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 유네스코는 1979년 아우슈비츠를 세계문화유산에 지정하였다.인구 5만명 남짓한 수용소 도시 오시비엔침 시가지를 약간 벗어난 수십만 평 들판에 자리 잡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겉으로는 아주 평화롭게 보인다. 고압전류가 흐르던 철조망만 아니라면, 아직 붉은 색이 고운 2층 벽돌 건물들은 전원적인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키 큰 포플러의 정연한 행렬과, 잘 가꾸어진 잔디와 꽃밭이 연출하는 겉모습이다. 그러나 줄 지어 늘어선 건물 안으로 한 발자국만 들어서면 관광객들은 고통스러운 정서의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수용소 지하감방 '질식의 방' 수감자들이 손톱으로 그린 벽화. 해골같은 모습은 자신들의 얼굴이다.  첫 건물에서는 끔찍하게 살해당한 유태인 시체를 태운 재그릇이 관광객을 맞아준다. 유럽 각지에서 강제로, 혹은 기만적인 수법으로 연행해 온 유태인 열차가 도착하면, 나치는 노동력이 없는 어린이와 노약자, 부녀자, 불구자 등을 따로 집합시켜 즉시 가스실로 데려갔다. 총살, 교수형, 강제노동, 질병, 굶주림, 고문, 인체실험 등으로 죽은 사람들을 합쳐 이 수용소에서 생목숨을 뺏긴 사람은 150만 명으로 추산된다.그렇게 죽은 시체들은 가스실에 딸린 소각시설로는 다 처리할 수가 없었다. 야외 소각장을 여럿 만들어야 했다. 
시체 소각로
      죽은 사람의 옷과 신발과 소지품들은 재활용품으로 쓰였고, 잘라낸 머리칼로는 카펫을 짰고 뼈는 갈아서 골분비료로 썼기 때문에 유태인은 죽어도 버릴 것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는 구역질을 참지 못해 밖으로 달려 나가는 관광객들도 있다. 휴먼 카펫의 원료인 머리털이 전시실을 가득 메운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볼 사람이 있을까.갈비뼈가 앙상한 가슴에 말라붙은 젖가슴을 부끄러워하는 여인과, 인체실험 대상인 집시 소녀들의 앙상한 전신 사진은 체중 35kg이 넘는 여성 재소자가 없었다는 안내자의 설명을 증명해 주었다. 한 여성 재소자가 먹을 것으로 유혹하는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고 빵 3개로 허기를 채웠다니 배고픔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인지를 말해준다. 가스실 바로 옆에 설치된 소각장. 독일에서 만들어 현지에서 조립한 시체소각로.  한꺼번에 900명을 살해하였던 가스실은 인간의 야수성을 웅변하는 증거다. 인근 제2, 제3, 제4수용소에는 그보다 더 큰 가스실이 있었다니 살인의 공업화, 살인기술의 과학화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가스실 옆에 있는 시체소각로는 아직도 가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탈주자, 탈주 방조자, 정치범 등을 처벌하던 지하 감방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최대의 모욕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아사의 방' 이란 곳은 음식공급을 끊어 굶겨 죽이는 곳이고, '질식의 방' 은 산소 결핍으로 서서히 죽게 하는 시설이다. 이 방에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사력을 다해 손톱으로 벽에 새긴 그림과 글씨들이 남아있다. 해골 같은 얼굴들은 아마도, 그 방에서 죽어가던 자신과 동료들 모습일 것이다.1982년 교황청이 성인 순교자로 추서한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가 순교한 곳이 바로 이 방이다. 폴란드 출신 사제였던 그는 탈주자 발생에 대한 징벌로 10명의 동료가 '아사의 방' 으로 가게 되자, 아내와 어린 자식 걱정으로 우는 젊은이를 대신해 그 방에 들어가기를 자청한 것이다. 면적이 54만평이나 되는 제2수용소 구내로 뻗은 철도 인입선. 유럽 각지에서 끌려온 유태인들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남자는 강제노역장, 노약자는 가스실로 끌려갔다.  200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임레 케르테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출신이라는 사실도 우연이 아니다. 유태계 헝가리인인 그는 열다섯 어린 나이에 이 죽음의 도시에 끌려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다.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운명> 3부작에서 홀로코스트는 인간세상에서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규정하였다.그 예단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현대사에서 여러 차례 적중되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르완다와 코소보의 인종청소, 체첸과 중동지역 종족분쟁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아우슈비츠는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런 야만을 인류사회에서 영원히 뿌리 뽑아야 한다.
      글이 너무 장문이어서 읽기에 불편하셨으리라 생각 된다.그러나,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인종말살 사건이니 만큼기왕에 읽는 분들을 위하여 몇 군데 검색을 거쳐압축, 또 압축한 글임을 밝혀 두는 바이다.60 년대 후반의 '킬링필드' 사건처럼 사후에 씌어진 글이라 이론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편적이나마 여러 사진들을 살피며 사실성에 입각 편집 했다.


      ---------------

      아우슈비츠 여성 인체실험 기구 발견


      아우슈비츠 수용소 인근에서 150개가 넘는 부인과 및 외과 시술기구가 무더기로 발견됐다고 아우슈비츠 박물관이 26일 밝혔다.

      이들 기구는 당시 여성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인체실험을 했던 외과의사 카를 클라우베르크의 행적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분석된다.

      문제의 기구들은 폴란드 남부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 근처 한 주택에서 발견됐다.
      나치 학살의 생생한 현장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인근에서 150개가 넘는 부인과 및 외과 시술기구가 무더기로 발견됐다고 아우슈비츠 박물관이 26일(현지시각) 밝혔다.

      이들 기구는 당시 여성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인체실험을 했던 외과의사 카를 클라우베르크의 행적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분석된다.

      문제의 기구들은 폴란드 남부 오시비엥침(독일어로는 아우슈비츠) 근처 한 주택에서 발견됐다.

      박물관 측은 "최근 몇년 사이 가장 눈에 띄는 발견 가운데 하나"라며 "모든 정황이 클라우베르크에 의해 기구들이 사용됐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나치의 SS 엘리트 친위대원이었던 클라우베르크는 여성의 집단 불임시술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여성 수용자 수백명이 그의 실험대상이 돼 생을 마쳐야 했다.

      그는 1945년 1월 옛소련의 '붉은 군대'가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를 몰아내자 독일 베를린 근처의 라벤스브뤽 여성 수용소로 자리를 옮겨 실험을 계속했다.

      그해 6월 소련인들에게 체포돼 25년형을 받은 그는 1955년 서독으로 보내졌다. 이곳에서 수용소 생존자들에 의해 또다시 기소됐고, 2년 뒤 숨졌다.

      이번에 기구들이 발견된 주택은 2차 세계대전때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둘러싸여 완전히 폐쇄됐던 지역에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처음에는 폴란드 정치사범을 수용하기 위해 세워졌지만 유럽 유대인을 집단학살하는 장소가 됐다.

      1940~1945년 이곳 수용자들을 비롯해 폴란드인, 소련인 등 약 110만명이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미워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은(안내자설명)

          첫:어머니가 유방암으로 2년 고생후

          죽었다.유대인 담당의사에게 "우리 어머니를 잘 고쳐 주셔서 고맙다" 고


                      반어법적으로 의사에게 비꼬는 편지를 쓴다. 또 예술학교에 낙방한 것도 유대인 선생이 떨어

          뜨렸다고 한다

          둘:나라없이 떠도는 유대인들이 뛰어난 머리와 장사수완으로 대부분의 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근히


       그들을 미워하고 질투하던 사람들이 그들이 없어지면 자기들에게 이익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는 것


      2차대전 당시 유대인 박해및 학살의 진상

       

      첫째 - 1차대전직후까지 독일은 유대인에 대해 관대했다

      유태인 박해는 다른 유럽국가들이 심했으며 독일은 오히려 관대했다. 그래서 많은 유태인들이 2차대전 전에는 독일에 가장 많이 거주 했다. 그리고 독일계 유태인 금융제벌인 막스바르부르크는 히틀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걸로 유명하다.

       

      둘째 - 독일은 유태인들에 대해 차별을 별로 하지 않았다

      독일 유태인들은 다른 유럽국에 비해 출세나 사업을 하기 쉬웠고 이들은 학계, 법조계, 의학계, 금융계, 언론계등 독일사회 전분야를 장악할수 있었지만 유태인들은 독일사회와 화합하려 하지 않았고 나중에 독일 국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는 원인이된다(1992년 LA폭동때 빈민폭도들이 자수성가한 한인교포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약탈한것과, 인도네시아 폭동때 짱골라교포들이 원주민들에게 당한것과 같은 이치이다)

       

      셋째 - 독일은 유태인의 독립국가 형성에 신경을 썼다

      1933~1941년 까지 독일은 유태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독일의 밀텐슈타인이 유대인이주를 하인리히 히믈러 SS사령관은 시온주의자의 대아랍 지하군사 조직인 '하가나'의 활동을 도왔다.), 1942년 요제프 괴밸스의 본격적인 유태인박해 주장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유태인 학살 보다는 그들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섬으로 보내 그들만의 국가를 형성시키고 나중에 독일의 우방으로 삶으려 했다.

       

      넷째 - 독일의 등뒤에 칼을 꽃은 유태인

      독일이 친영국 성향의 유태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려하자 당시 독일의 경제를 잡고 있던 유태인들은 독일을 굴복시키기위해 독일의 수출을 분쇄시키고 전세계적인 독일상품 불매운동을 벌인다. 그리고 이 활동을 신성한 전쟁이라고 하면서 세계 유태인경제 연합회 회장인 운터마이어가 앞장을 선다 뿐만아니라 전쟁중에 일부 유태인이 연합군과 결탁하여 연합군의 폭격을 유도하는 신호등을 장착하는 등의 밀정행위를 하자 히틀러는 모든 유태인을 소용소에 강금 시킨다.

      이쯤되면 유대인의 행위는 국가 반역죄에 해당되며 국가반역죄는 어느나라에서나 사형에 해당 된다.

       

      다섯째 - 그러나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만다

      시온의 칙훈서(유태인의 세계경영지침서)가 발견되어 알려지고, 공산당활동에 유태인들의 간접협조한 혐의와, 1936년 프랑스주체 독일 외교관을 암살하자 반유대감정으로 독일이 들끓기 시작했고 크리스탈학살 사건으로 유태인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더이상의 피해를 막기위해 유태인이 학살당하지 않도록 2만명의 유태인을 강제로 수용소에서 수용하게 된다.

      좀더 덧붙여서 말하자면 독일을 패하게 만든 세계 1차대전의 배후에는 바질 자하로프라는 유대인 전쟁무기상인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영국의 군수제벌인 빅커스사의 영업이사로써 친독적인 그리스 국왕을 추방하여 세계대전의 장기화를 획책했다고 한다.

      특히 독일의 군사기밀을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으로 빼돌린 사실 하나 만으로도 독일이 유대인을 증오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영국군이 사용한 수류탄은 독일의 기술로 만들어진 수류탄으로써 이 성능좋은 독일제 수류탄이 독일군을 죽이는 촌극까지 벌어지게 된다.

       

      여섯째 - 유태인 600만 학살은 조작 확대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발진티푸스와 장티푸스)

      실제로는 60만정도이며 그것도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과 전염병(더이상의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시체들을 소각하게 된다)으로 사망한 사람이 대다수이다 25(7.6평)평방미터 되는 곳에 7~800명을 집어넣고 독가스로 죽였다는데, 실제론 그런 계산이 안나옴니다,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전시되는 아우슈비츠 가스실과 소각로는 194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스탈린의 소련군 또한 폴란드 유태인을 많이 죽였으며 나중에 이것마저 독일의 만행으로 뒤집어 쓰게 된다.

       

       

      유태인 홀로코스트,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내가 알기로 이 세상에서 유대인만큼 그들이 겪었다는 수모와 고난과 순교에 대해 우는 소리를 하는 족속도 없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들이야말로 유럽의 정치와 경제, 주식시장, 그리고 국가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실질적 군주들이란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1919년에 유태인 희생자가 600만명?
      1차대전 직후 미국과 유럽에서는 그 진위를 떠나 이 전쟁에 대한 유태인 국제은행가들의 배후 음모설이 무성했다. 서구의 유태계 언론은 이러한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런 맥락에서 1919년 미국의 유태계 유력지 American Hebrew 에 실렸던 한 기사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눈길을 끈다:

       

      유태인 남자와 여자 600만 명 생필품의 부족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80만 명의 어린 아이들이 주린 배를 안고 울부짖고 있다. 이러한 비참한 운명은 이들이 신의 계명이나 인간의 법을 어겨서가 아니라 전쟁의 참상과 유태인의 피를 원하는 가혹한 인종차별주의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이와 같은 홀로코스트는...” (The Crucifixion of Jews Must Stop!, October 11, 1919)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이라는 수치는 2차대전과 관련하여 또 다시 등장하게 된다. 뉴욕의 유태교 랍비 이스라엘 골드슈타인은 1942년 12월13일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당시까지 독일 점령지의 유태인 60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으며, 1943년 3월2일 뉴욕 메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열린 유태인들의 독일규탄집회에 대한 1943년 3월 2일자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랍비 헤르츠(Rabbi Hertz)는 히틀러 정권에 희생된 유태인의 수가 600만 명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2세기 로마 치하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던 바코크바 항쟁에 관해 탈무드(Gittin. 57b-58a)는 로마군이 베타르에서 40억명의 유태인을 학살했으며 1천6백만 명의 유태인 어린이들을 두루마리에 감아 불태워 죽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 40억 명의 유태인은 고사하고 1천6백만 명의 유태인 유아들이 지구상에 존재했는지 의문이다.

       

       

      Holocaust revisionism의 선구자 뽈 라시니에; 그 자신이 전쟁 중 독일 강제수용소 수감자였다.

       

       

      홀로코스트 (Holocaust)
       

      a. 美-英의 프로파간다

      - 이미 근거 없는 낭설로 밝혀진 유태인의 기름으로 만든 비누(Haaretz, Nazi Soap Stories Termed 'Invention', February 11, 2005)나 멩겔레 박사의 생체실험에 대한 얘기는 고사하더라도 2차대전 중 미국과 영국에서는 주요언론의 反독일 흑색선전이 난무했다. 한때 미국에서는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유태인들이 조직적으로 감전사(感電死) 당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들까지 가미된 기사가 유포되기도 했다. (이 기사에는 가스실에 대한 언급이 없다.) 1945년 2월 미국의 주요 일간지들은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킨 소련 병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독일군이 “일시에 수백 명을 전기 처형할 수 있는 특수 콘베어 벨트를 가동했고 시신들은 벨트에 의해 소각로에 옮겨져 몇 초 내에 화장된 뒤 그 재는 근처 양배추 밭의 비료로 쓰였다...”고 보도했다. (United Press dispatch from Moscow; Washington D.C. Daily News, February 2, 1945)

       

      - 당시 현직 미국 대법원 판사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연합국측 수석검사로 활약했던 Robert Jackson은 독일군이 일시에 2만 명의 유태인을 자취도 없이 “증발”시킬 수 있는 “새로 발명된” 기계를 아우슈비츠에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blue series, Vol. 16, June 21, 1946)

       

      b.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 (아우슈비츠 사망자 400만 명에 근거)

      - 1990년까지 폴란드 아우슈비츠 기념관에 있었던 추모석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40년에서 1945년까지 이곳에서 수감자 400만 명이 나치 살인마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舊추모석판

       

      그러나 교체된 새 추모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곳이 영원히 인류에 대한 절망의 울부짖음과 경종의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이 곳에서 나치스는 150만 명의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를 살해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끌려온 유태인들이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1940-1945.”

       

      새로 교체된 석판

       

      1991년 10월 20일자 벨기에 일간지 Le Soir 에 따르면, “국제 아우슈비츠 보존위원회는 1990년 11월 400만 명의 희생자를 명시했던 아우슈비츠의 추모석판을 “150만 이상의 희생자”로 표기되어 있는 새 석판과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 1989년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역사가 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 교수는 이제까지 아무 이의 없이 수용되어 왔던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희생자 400만 명設이 의도적인 허구임을 인정할 때가 왔다고 밝혔다. 1990년 7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기념관은 이스라엘의 야드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과 공동으로 유태인과 비유태인을 도합해 약 100만 명이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두 기관은 이들 가운데 몇 명이 의도적으로 처형되었으며, 몇 명이 다른 원인으로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Y. Bauer, Fighting the Distortions, Jerusalem Post - Israel, September 22, 1989)

       

      - 1998년 9월 8일자 워싱턴포스트는 아우슈비츠에서 400만 명의 유태인이 독가스로 살해되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라는 월터 라이히(Walter Reich) 前워싱턴 홀로코스트 박물관장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라이히는 보다 사실에 가까운 숫자는 110만에서 150만일 것이라고 밝혔다.

       

      Former Sorbonne literature professor Robert Faurisson: "The alleged Hitlerite gas chambers and the alleged genocide of the Jews constitute one and the same historical lie, which has made possible a gigantic financial-political swindle, the principal beneficiaries of which are the State of Israel and international Zionism, and whose principal victims are the German people and the entire Palestinian people."

       

      - 유명한 홀로코스트 역사가 제랄드 라이트링어(Gerald Reitlinger)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유태인의 숫자를 약 70만으로 추정했다. 좀더 근래에 들어서, 프랑스 홀로코스트 역사가 장-끌로드 프레삭(Jean-Claude Pressac)은 아우슈비츠의 총사망자 80만 가운데 63만 명을 유태계로 추정했다. (G. Reitlinger, The Final Solution, 1971; J. C. Pressac, Le Crematoires d'Auschwitz: La Machinerie du meurtre de mass, 1993)

       

      - 1990년 5월 31일 프랑스의 보수성향 시사지 National Hebdo 는 아우슈비츠 사망자 수(비유태인 포함)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어떻게 수정되어 왔는가를 보도했다:

       

      “8백만(프랑스 전범조사국) - 5백만(르몽드, 1978년 4월20일자) - 4백만(1990년까지의 아우슈비츠 기념관 추모비) - 3백만(아우슈비츠 소장 Rudolf Hoess의 자백) - 160만 (예후다 바우어 교수) - 125만(Raul Hilberg 교수) - 85만(제럴드 라이트링어, The Final Solution) - 7만5천(소련 국립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아우슈비츠 관련문서들).”

       

      (Source: National Journal, 2003)

      Date

      Official sources of information

      Figures

      31.12.1945 French Investigation Panel on Nazi-War-Crimes

      8.000.000

      19.08.1998 Chief Rabbi from Poland (Süddeutsche Zeitung)

      6.000.000

      20.04.1978 Le Monde (French daily paper)

      5.000.000

      23.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5.000.000

      20.04.1989 Eugen Kogon, Der SS-Staat (famous book of a holocaust survivor, page 176)

      4.500.000

      31.12.1952 Der Neue Herder (Enzyclop., Germany) 7th edition (p. 214)

      4.500.000

      01.10.1946 IMT-doc-ument 008-USSR (Nuremberg Military Tribunal)

      4.000.000

      02.05.1997 USA-Today (daily paper USA)

      4.000.000

      24.11.1989 Chief Prosecutor, Mr. Majorowsky, Wuppertal, Germany (indictment 12 Js 1037/89)

      4.000.000

      26.07.1990 Allgem. Jüdische Wo.Ztg. (Jewish weekly, Bonn)

      4.000.000

      08.10.1993 ZDF-Nachrichten (German TV, ZDF-News Magazine)

      4.000.000

      25.01.1995 Wetzlarer Neue Zeitung (German daily paper)

      4.000.000

      01.10.1946 IMT-doc-ument 3868-PS (Nuremberg Military Tribunal)

      3.000.000

      01.01.1995 Damals (official monthly magazine on history, sponsored by the Bonn government)

      3.000.000

      18.07.1990 The Peninsula Times (daily paper, S.Francisco, USA)

      2.000.000

      25.07.1990 Hamburger Abendblatt (daily paper Germany)

      2.000.000

      27.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quoting Chancellor H. Kohl. Minimum of 2 million)

      2.000.000

      02.05.1997 USA-Today (daily paper USA)

      1.500.000

      11.06.1992 Allgem. Jüdische Wo.Ztg (Jewish weekly, Bonn)

      1.500.000

      08.10.1993 ZDF-Nachrichten (German TV, ZDF-News Magazine)

      1.500.000

      23.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1.500.000

      03.05.2000 Die Welt (German daily paper)

      1.500.000

      01.09.1989 Le Monde (French daily paper)

      1.433.000

      02.02.1995 BUNTE Illustrierte (German weekly magazine)

      1.400.000

      22.01.1995 Welt am Sonntag (German daily, Sunday edition)

      1.200.000

      27.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1.100.000

      27.01.1995 IfZ (Institut for Contemporary History, München, a government institution)

      1.000.000

      03.05.2000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reputed German daily)

      1.000.000

      31.12.1989 Pressac, Auschwitz, Technique ... (official report on Auschwitz, commissioned by the Jewish Beate Klarsfeld Foundation)

      928.000

      27.09.1993 Die Welt (German daily paper)

      800.000

      22.01.1995 Welt am Sonntag (German daily, Sunday edition)

      750.000

      01.05.1994 Focus (German weekly magazine)

      700.000

      23.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700.000

      31.12.1994 Pressac, Die Krematorien ... (2nd official report on Auschwitz, commissioned by the Jewish Beate Klarsfeld Foundation)

      470.000

      08.01.1948 Welt im Film (British news reel, nbr. 137)

      300.000

      06.01.1990 Frankfurter Rundschau (German daily paper)

      74.000

      31.05.1994 Hoffmann, Stalins Vernichtungskrieg (Book on Stalin's war by a renowned German historian, p.302 f.)

      74.000

      17.08.1994 Intern. Red Cross Arolsen - Department of holocaust investigations (Ref. nbr.: 10824)

      66.206

       

      호주 출신 revisionist Dr. Frederick Toben

       

      c. 사망원인


      - 전후 연합군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수용소들의 운영과 관련된 수만 건의 독일 문서들을 획득했으나 이 가운데 독일 수뇌부가 독가스로 유태인을 대량학살하려 했음을 입증하는 문서는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유태계 역사가들은 독일이 연합군이 진주하기 전 관련문서들을 소각했거나, 혹은 독일이 모종의 암호 문서를 통해 대량학살을 조직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연합군이 확보한 독일 문서들 가운데 유태인에 대한 인종말살 계획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문건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역사가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사실 유태인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압수된 독일 측 문서들은 독일과 폴란드에 설치되었던 강제수용소들이 사람을 죽이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 유태인과 전쟁포로들을 동원한 강제노동시설이었음을 보여준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의 Arthur Butz 교수에 의하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다른 수용수로의 배치를 기다리는 수감자들을 수용했던 일종의 강제노동인력 집결지였다.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온 이유는 노역이 불가능한 노약자나 병자가 주로 이곳에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탈출시도를 비롯한 수용소규칙 위반자들에 대한 처형사례를 제외하고 사망자 대다수의 사망원인은 비위생적 환경으로 인한 전염병(특히 발진티푸스)의 창궐과 영양실조 및 기아였다. (Arthur Butz, The Hoax of the Twentieth Century, 1976)

       

       

      - 유태계인 프린스턴대의 Arno Mayer 교수는 1942년 ‘반제회의’에서 도출되었다는 소위 ‘최종해법(Final Solution)'에 대한 그의 저서에서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사망자들 가운데 수용소 당국에 의해 처형된 숫자보다 각종 질병이나 기아에 의한 사망자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고 밝히고 있다. (Arno Mayer, Why Did the Heavens Not Darken?: The 'Final Solution' in History, 1989)

       

      - 전쟁 중반기부터 많은 강제수용소들에서 창궐하기 시작한 발진티푸스를 억제하기 위해 독일 당국은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의도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독일이 유태인을 조직적으로 말살하려했다는 혐의에 반박하기 위해 피고측의 증거물로 제출된 문서들에서도 드러난다. 한 예로 1942년 12월 28일 친위대 산하의 수용소 관리행정국이 아우슈비츠를 포함한 각 수용시설들에 하달한 공문은, “Heinrich Himmler 친위대 총감의 지상명령”이라는 전제 하에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 숫자의 절대적 감소를 위해 수감자들의 건강 및 영양상태와 작업환경을 개선하는데 총력을 기울일 것”과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여 상부에 제출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Nuremberg doc-ument PS-2171, Annex 2. NC & A red series, Vol. 4, pp. 833-834)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d. 독가스 사용설


      -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을 대량 살상하기 위한 독가스실이 가동되었다는 設은 독가스실이나 처형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다는 유태인 前수감자들의 증언에 의존한다. 이는 전쟁 중 독일이 탄환 절약을 위해 독가스로 유태인을 대량학살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연합군은 선전활동의 일환으로 강제수용소들에서 - 딱히 유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 수감자들이 독가스로 집단 처형되고 있다는 요지의 폴란드어와 독일어로 작성된 전단을 자주 살포했다. 또한 같은 내용은 연합군이 운영하는 단파 라디오를 통해 주기적으로 전 유럽에 방송되었다.

       

      아우슈비츠의 한 작업실

       

      - Marika Frank라는 한 유태인 여성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 수감되었을 때는 하루당 최소 2만5천명의 유태인들이 독가스로 처형-화장되고 있었다는 1944년 7월 이었다. 1945년 2월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그곳에 수감되어 있었던 그녀는 아우슈비츠에 머무는 동안 가스실에 대해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으며 그곳에서 유태인들이 독가스로 살해되었다는 얘기는 전쟁이 끝난 뒤에 들었다고 술회했다. (Sylvia Rothschild, Voices from the Holocaust, 1981)

       

      - 33년간 듀퐁社에서 화공학자로 근무했던 William B. Lindsey 박사는 1985년 캐나다의 법정에서 독가스로 그 만한 인명을 살상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technically impossible") 얘기라고 증언했다. 이 분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와 마이다넥에 전시되어 있는 가스실을 현지 조사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했다는 방법으로는 지클론-B로 사람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일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The Globe and Mail - Toronto, February 12, 1985)

       

      *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주요 수용소들에는 실제로 이들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들 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가스실이 존재했다. 이들의 목적은 발진티푸스를 옮기는 이를 죽이기 위해 수용소 운영진을 포함, 수감자들의 의복과, 침구 등을 소독하는 것이었다. DDT가 등장하기 전까지 지클론-B는 세계적으로 널리 쓰였던 대표적인 살균소독제였다.

       

      프레드 루처

       

      - Fred A. Leuchter는 사형수를 처형하기 위한 가스실 제작 전문가로 미주리 주(州)교도소의 가스 사형집행실을 도안하고 제작했던 보스턴 출신의 공학자이다. 1988년 2월 아우슈비츠와 마이다넥 “가스실”에 대한 현장조사를 단행한 그는 법정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단정했다, “현존하는 가스실 및 관련시설들이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 시설들에는 적절한 봉인장치와 환기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만약 이 시설들이 독가스로 인명을 살상하는데 사용되었다면 독일인을 포함, 그 시설 밖에 있는 사람들도 안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The Leuchter Report: An Engineering Report on the Alleged Execution Gas Chambers at Auschwitz, Birkenau and Majdanek, 1988)

       

      이반 라게스

       

      - 1944년 내내 매일같이 독가스로 살해된 수만 구의 시신들이 화장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의문은 남아있다. 캐나다 캘거리에서 대형화장터를 운영하는 Ivan Lagace는 1988년 4월 독일계 홀로코스트 연구가 Ernst Zundel 소송 심리에서 그와 같은 일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증언했다. 이에 덧붙여 그는 하루당 1만에서 최고는 2만구에 이르는 시신들이 화장되었다는 주장은 "한 마디로 비상식적(preposterous)”이며 “현실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beyond the realm of reality)”이라고 증언했다. (Canadian Jewish News - Toronto, April 14, 1988)

       

      수감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미공개 사진)

       

      e. 국제적십자협회(International Red Cross) 보고서

       

      “국제적십자협회 보고서가 지니는 가장 큰 의미는 전쟁의 말기를 향해 의심의 여지없이 이들 수용소에서 대량 발생한 사망자들의 진정한 사망원인을 규명해주고 있다는데서 찾아 볼 수 있다. 보고서의 일부를 발췌하면;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이후 독일의 수송체계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특히 전쟁의 마지막 몇 개월 동안 수용소들은 거의 식량을 보급받지 못했고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사자(餓死者)의 숫자는 급증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독일정부는 1945년 2월 1일 이와 같은 사실을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에 통보해 왔습니다... 1945년 3월, 적십자협회 회장은 독일 친위대의 칼텐브루너 장군과 만나 문제를 논의했고 양자의 합의 하에 ICRC는 구호품을 수용소 수감자들에게 직접 전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ICRC 대리인을 수용소들에 상주시키게 되었습니다...’

       

      Ernst Kaltenbrunner, 1946년 처형; 마지막 유언, "독일에게 행운을!"

       

      수용소들에 대한 식량보급이 중단된 원인으로 독일 교통수송망에 대한 연합군의 공습을 지목한 적십자는 수용소 수감자들의 안위를 위해 1944년 3월 15일, ‘연합군의 야만적인 폭격’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4년 10월 2일 ICRC는 수송체계의 붕괴로 인해 전 독일국민이 대규모 기아사태에 직면해 있다는 우려를 독일 외무성에 전달했다. 영양실조와 기아, 이에 더해 의약품이 극도로 희귀했던 전쟁말기, 발진티푸스를 비롯한 각종 전염병이 만연했다는 사실은 해방된 수용소들에서 연합군 병사들이 발견한 많은 시체들에 대해 설명해준다. (실제로 독일 전역에 흩어져 있었던 강제수용소들은 인근 도시들에서 발생한 폭격, 질병, 기아로 인한 독일인 사망자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따라서 연합군이 발견한 시체더미에는 적지 않은 수의 독일인 시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 중 적십자위원으로 일했던 스위스 태생의 Maurice Rossel 박사는 Serge Lanzmann과의 1993년 인터뷰에서 아우슈비츠를 예고 없이 시찰한 그는 그곳에서 가스실이나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으며 시체를 태우는 냄새도 접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Theresienstadt 수용소에 그가 목격한 것은 좋은 옷을 입은 부유한 유태인들이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뿐이었다.” (Richard E. Harwood, Did Six Million Really Die?, 1988)

       

      *1984년 소련이 최초로 공개한 아우슈비츠 관련 문서들을 토대로 작성된 국제적십자협회의 해당년도 12월 31일자 감사보고서에는 독일이 전쟁기간(1939-1945) 동안 운영했던 모든 강제수용소들에서 발생한 총 사망자수(모든 국적과 사망원인 포함)가 282,077명으로 나타나 있다. 아우슈비츠 사망자 수는 53,633 명이다.

       

       

       

       

      f. 2차대전 前後 세계 유태인 인구

       

       World Almanac, 1929 - 15,630,000 (p.727)

       

       World Almanac, 1933 - 15,316,359 (p.419)

       

       World Almanac, 1936 - 15,753,633 (p.748)

       

       미국유태인위원회(AJC, Bureau of the Synagogue Council), 1939 - 15,600,000

       

       World Almanac, 1940 - 15,319,359 (p.129)

       

       World Almanac, 1941 - 15,748,091 (p.510)

       

       World Almanac, 1947 - 15,690,000 (p.748)

       

       미국 이민귀화국 (INS), 1950 - 15,713,638 (Appendix VII, 'Statistics on Religious Affiliation'; Report to U.S. Senate Judiciary Committee, 1950)

       

      Jews In Europe - 1938:
      8,039,608 - 1948: 9,372,668

       

       

       

      2000년, 유태계인 미국의 노먼 핑클슈타인(Norman G. Finkelstein)교수는 유태인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모든 논란을 이렇게 요약했다:

       

      “히틀러의 유태인 대학살과 관련된 책들의 대부분은 사료(史料)로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실로 홀로코스트 연구는 뻔한 거짓말 아니면 넌센스로 채워져 있다... 홀로코스트 업계가 매일같이 만들어 내는 얘기들의 비상식적 본질을 감안할 때, 신기한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별 의심 없이 그런 얘기들을 믿는다는 사실이다.” (The Holocaust Industry, 2000)

       

       

      Anne Frank
      그녀가 쓴 일기로 인해 안네 프랑크는 아마도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유태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수 많은 다른 유태인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안네와 그녀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1944년 9월, 15세의 나이로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에서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프랑크는 몇 주 뒤 Bergen-Belsen 수용소로 옮겨졌고 이 곳에서 1945년 3월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아우슈비츠에 남아 있던 중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오토 프랑크는 수용소 병원에 입원 중 병상에서 아우슈비츠에 진주한 소련군을 맞았다. 그는 1980년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아우슈비츠 병원

      - 아우슈비츠 수용자인 유대인을 치료해주는 의사 -

       

      아우슈비츠의 간호원들

       

      만약 독일의 국가정책이 유태인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었다면 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가족사가 비극임은 분명하나 그들의 이야기는 독일이 의도적으로 유태인을 말살하려 했다는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전쟁 전 유태인에 대한 독일정부의 주안정책은 국외이민이었고 전쟁발발 직후에는 게토에, 그리고 1943년 이후로는 강제수용소에 수용하는 것이었을 뿐 유태인의 인종적 말살을 노린 genocide가 아니었다.

       

      미국 revisionist Michael Hoffman과 Canada의 Ernst Zundel

       

      관련 링크:

       

       http://www.zundelsite.org/

                   

       http://www.revisionist.com

       

       http://www.ihr.org

       

       http://www.adelaideinstitute.org/

       

       

       

      Abraham Foxman.  ADL National Director
      "The Holocaust is something different. It is a singular event. It is not simply one example of genocide but a near successful attempt on the life of God's chosen children and thus, on God Himself. It is an event that is the antithesis of Creation as recorded in the Bible; and like its direct opposite, which is relived weekly with the Sabbath and yearly with Torah, it must be remembered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ADL bulletin - ADL on the Frontline, January 1994)

       

      *"The Talmudic epigraph of Stephen Spielberg's Schindler's List, "'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 The observant knew that the traditional version, the one taught in all Orthodox yeshivot (religious schools), speaks of 'whoever saves the life of Israel.'" (Peter Novick, The Holocaust in American Life, 1999)

       

      에밀리 & 오스카 쉰들러

       

      "What did I think? I'll tell you. Scheisskopf (sXhead). But I was the idiot for falling in love with him. I am never going to cry; there is no sense in it. Schindler changed women like he changed suits. Once, we were well-off, but then we lost everything and he abandoned me and I have not recovered... There never was a 'Schindler's List'. It was drawn up by a man called Goldman. This man took money to put a name on that list - no money, no place on the list. I was told this by a Dr. Schwartz, in Vienna; he had paid in diamonds to save his wife... Hah! Neither of us was a hero... Oskar was always complex; he was playing both extremes, always, even at the end with Nazis against the Jews." - Emily Schindler, wife of Oskar Schindler, Drudge Report, June 1, 1999

       

       

      Steven Spielberg
      "Flanked by Holocaust survivors, Los Angeles teens and many of the film's stars, including Ralph Fiennes, Ben Kingsley, Embeth Davidtz and Caroline Goodall, Spielberg said he hoped "Schindler's List" would prove to Holocaust deniers that the murder of 6 million Jews did occur and that it would help educate children to prevent history from repeating itself... "There are Holocaust deniers who are so stuck in their hatred for Jews that neither 'Schindler's List' nor the Shoah Foundation will be able to convince them that 6 million murders actually occurred, but still we must try to convince them," Spielberg said... Survivor Helen Jonas-Rosenzweig told the director, "Schindler saved us, but you gave us our second life." Spielberg said that in the decade since the release of "Schindler's List," the world has become a "very sad place again," which shows that people "don't really learn that much from history, and they need to." (Spielberg: Won't comment on 'Passion',
      www.CNN.com, March 4, 2004)

       

       

      The Black Book of Communism - LE LIVRE NOIR DU COMMUNISME
      "An 800-page compendium of the crimes of Communist regimes worldwide, recorded and analyzed in ghastly detail by a team of scholars. The facts and figures, some of them well known, other newly confirmed in hitherto inaccessible archives, are irrefutable. The myth of the well intentioned founders - the good czar Lenin betrayed by his evil heirs - has been laid to rest for good. No one will any longer be able to claim ignorance or uncertainty about the criminal nature of Communism, and those who had begun to forget will be forced to remember anew." (from the dust jacket of English edition, 1997)

       

      Moshe Leshem.  former Israeli ambassador to U.N.
      "This was a movement staffed in its upper echelons by Jewish Communists and yet the world is comparatively silent about the holocaust and war crimes this thoroughly kosher system inflicted and the identity of the persons who were its architects. Auschwitz is on the tip of every tongue but who has heard of Kolyma, Magadan, the Solovetsky islands and the other infernal Soviet centers of human destruction in eastern Siberia? Who has seen films and books about the millions of human beings worked, frozen and starved to death in the construction of the White Sea-Baltic Canal, over which stood a triumphant, colossal statue of the Jewish communist mass murderer Genrikh Yagoda? The Jewish-communist epoch of mass murder has disappeared into history in one of the great vanishing acts of all time. Only practiced deceivers, with all the sleight of hand of the most accomplished stage magicians, could pull off such a coup against the rest of humanity. To trick mankind into focusing nearly all expiatory sentiment, monuments and commemoration on Jewish victims and brand the Mark of Cain - the very words war crime and holocaust itself - on Germany and upon Germans alone as their proprietary trademark, must be regarded as one of the most masterful achievements of psychological warfare in the annals of illusion... Israelis and American Jews fully agree that the memory of the Holocaust is an indispensable weapon - one that must be used relentlessly against their common enemy... Jewish organizations and individuals thus labor continuously to remind the world of it. In America, the perpetuation of the Holocaust memory is now a $100-million-a-year enterprise, part of which is government-funded." (Balaam's Curse: How Israel Lost Its Way, and How It Can Find It Again, 1989)

       

      유태인 공산주의자들의 만행

      1918년부터 1953년까지 유태인이 장악한 소련은 3천만에서 5천만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발틱3국, 폴란드, 헝가리 국민들을 학살했다.

       

      라트비아 1941년

       

      




      1983년 5월말 어느날 폴란드 크라코프市 공항 입국장 앞, 흰머리의 60대 노인이 터질 듯 붉은 색의 장미 39송이를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라? 진짜 실라야?”

      세련된 옷차림의 50대 후반 여인이 그에게 달려와 안겼다. 두 사람은 헤어진 지 39년만에 만났다. 이 남자 유라세크 빌레키의 손에 들린 장미의 개수는 그들이 헤어져있던 년수 만큼이었다.

      1944년 7월 21일 23살 청년이던 폴란드인 빌레키는 나치 친위대 장교 복장을 한 채 유태인 죄수복 차림의 19살 처녀 실라 시불스카를 데리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을 막 통과하고 있었다.

      유태인 수만명이 학살당한 아우슈비츠에서 유라세크는 나치군복생산 공장 인부로 일하고 있었다. 폴란드 태생 유태인 실라는 가족과 함께 끌려와 하루하루 죽음의 문턱을 넘기고 있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실라가 끌려온 첫째 날이었다. 수용소 입구에서 유라세크가 막 잡혀온 유태인무리중에서 실라를 발견한 것이다. 두 사람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실라의 가족은 그날 바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며 나치가 끌고간 ‘샤워실’에서 가스 샤워를 맞고 숨졌다.

      실라는 유라세크가 일하던 공장에 배치돼 일하게 됐다. 유라세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실라를 살리기 위해 탈출계획을 짰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친위대 장교복을 훔쳐 입고 실라를 죄수처럼 끌고 수용소 정문을 걸어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탈출은 성공했다. 9일을 걸어 크라코프의 유라세크 부모집을 찾아갔다. 실라는 안전한 이웃집 농장 지하창고에 숨겨졌다. 둘은 약속했다, “전쟁이 끝나면 꼭 만나 결혼하자”고.

      유라세크는 바르샤바로 가서 레지스탕스가 됐다. 1945년 여름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점령하며 2차대전은 끝났다. 바로 그날 유라세크는 크라코프로 달려갔다. 하지만 실라는 없었다.

      불과 한달전 이 도시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자 실라는 유라세크를 찾아 헤맸다.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고 여긴 실라는 그가 오지 않자 죽었다고 여겼다. 절망한 실라는 생존 유태인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다.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실라는 유라세크를 죽었다고 여겼고, 유라세크는 그녀의 행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1982년 실라가 처음으로 폴란드를 찾았다. 묵었던 호텔에서 누군가에게 오래된 사랑 이야기를 했다. 듣고 있던 사람이 “그 스토리 나도 아는데”라고 했다. 유라세크는 매년 바르샤바에서 크라코프로 찾아와 실라를 수소문했던 것이다.

      1년뒤 공항에서 만난 두 사람의 눈은 뜨여지지가 않았다. 흐르는 눈물이 전혀 멈춰지지가 않았다.

      실라가 말했다, “우리 서로 이혼하고 같이 삽시다”. 유라세크가 말했다, “당신만을 사랑해. 그렇지만 아무 것도 몰랐던 자식과 손자들을 버릴 수는 없어”.

      실라는 “우린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며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2002년 뉴욕에서 노환으로 숨졌다.

      AP통신은 두 사람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탈출한 지 정확히 66년이 되는 21일 “유라세크 빌레키와 실라 시불라스카의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가 이스라엘 야드바셈재단에 의해 공개됐다”고 보도했다.



      사진=AP통신

      통신과의 인터뷰에 나선 유라세크의 손에는 젊은 남녀의 흑백사진이 들려 있었다. 바로 20대 초반의 자신과 10대 후반의 실라였다.

      “우리는 서로 운명이었습니다. 그때가 다시 돌아온다면 똑같이 그녀를 사랑하고 함께 탈출했을 겁니다”

      유라세크 빌레키의 목소리는 89세 노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생각 > 내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자인 리더' 美 아이데오社  (0) 2010.09.11
사이코패스 Psychopath  (0) 2010.09.08
아부그라이브(이라크전 포로 학대)  (0) 2010.09.08
스탠포드 감옥 실험  (2) 2010.09.08
하인리히 법칙  (0) 2010.09.04
Posted by WN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