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생각/인물 2010. 8. 26. 18:40



 백과사전에서 말하는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Σωκράτης, 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는 고대 그리스철학자이다.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일생을 철학의 제 문제에 관한 토론으로 일관한 서양 철학의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흔히 4대성인으로 불린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기원전 399년에 고소되어 사형을 당했다.


생애

[편집] 소크라테스 문제

역사상의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적 관점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상당한 논쟁거리이다. 이 문제를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적인 글을 쓴 적이 없다. 소크라테스 자신과 생애, 철학에 대한 지식은 그의 제자들과 당대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플라톤의 기록이며, 그 밖에도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파네스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런 저작들은 정확한 사실이 아닌 철학 또는 극적인 글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 소크라테스를 알기는 어렵다. 당대 고대 그리스에서 투퀴디데스(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나 철학자들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다)를 제외하고는, 소크라테스 시대를 사실에 입각해서 서술하는 사례가 없다. 이런 결과,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언급한 사료들은 역사적으로 정확성을 내세울 까닭이 없었으며, 때론 당파적이기까지도 하였다.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처형한 사람들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업적에 대하여 정확하고 일관성있는 역사를 쓰기 위해 당대 인물들이 쓴 여러 사료들을 일치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반드시 사실적이지는 않으며 다만 일관성을 갖추었을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에 대해 가장 믿을 만하고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일부 저작에서 플라톤은 자신이 저작속에서 구현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실제 소크라테스의 언행보다 더욱 미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저작이나 유물을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단지 플라톤이 날조한 인물은 아님이 드러난다.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은 플라톤의 저작에 나오는 일반적인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 유용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조각가인 소프로니코스를 아버지로, 해산술을 업으로 하던 파이나레테를 어머니로 하여 아테네의 서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따라 조각을 하면서 다른 청년들처럼 기하학·철학·천문학 등을 배웠고, 중장보병에 편입되어 세 번이나 전투에 참가하였다. 기원전 406년, 500명 공회의 일원이 되어 1년간 정치에 참여한 일이 있고, 40세 이후에는 교육자로 청년들의 교화에 힘썼다.

그는 자연 철학을 배웠으나, 그 기계론적 세계관에 불만을 품었다. 그때는 아테네의 몰락기였으므로 보수적·귀족적인 정신과 진보적·개인주의적·비판적 정신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였다. 그도 이러한 경향을 지니게 되었으나 당시의 소피스트들처럼 궤변으로 진리를 상대적·주관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찾아서 이상주의적, 목적론적인 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다.[1]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의·절제·용기·경건 등을 가르쳐 많은 청년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으나, 공포정치 시대의 참주였던 크리티아스 등의 출현이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청년을 부패시키고 국가의 여러 신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고소되고, 배심원들의 투표 결과 40표로 이 애국자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는 도주할 수도 있었으나 그의 투철한 준법 정신에 의해서 "악법도 법이다"라고 하며, 태연히 독배를 들어 마시면서 자신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을 빚졌다며 자신 대신 갚아 달라고 친구에게 당부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 그의 신전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닭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고 한다.)

[편집] 사상

아무런 저서도 남긴 바 없는 소크라테스의 확실한 사상을 알기는 어려우나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 라이르티우스, 크세노폰, 특히 플라톤의 저서 등에 언급된 것을 보면 그는 델피의 신탁인 "만인 중에 소크라테스가 제일 현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스스로의 무지를 자처하던 소크라테스는 신의 신탁이 사실인가 확인 하기 위해 의아심을 품고 여러 현명한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말을 확실히 알고 언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방법으로 제논의 변증법을 활용하여 논변을 진행시키는 사이에 잘못된 판단의 모순을 깨우치고 다시금 옳은 판단으로 유도시켰는데, 이것이 유명한 산파술이다. 그는 합리주의자였으나, 때로는 초경험적인 내심의 소리, 즉 다이몬의 소리를 경청하고, 때로는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였다.

그가 다룬 문제는 종래의 철학이 대상으로 한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었으며 '정신의 배려'를 사명으로 삼았다. 덕은 인간에 내재한다고 믿고 사람들에게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갖 계층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고 용기나 정의 등에 관한 윤리상의 개념을 설교하고 다녔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사약을 마시게 되었다. 그의 탁월한 지적·도덕적 성격에 의해 비단 철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인류 최대의 교사'로 불리고 있다.

[편집] 변론과 크리톤

'악법도 법이다'(라틴어: Dura lex, sed lex)라는 말이 회자되지만, 소크라테스가 직접 이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변론'에서 법정이 철학을 포기한다면 석방해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도 자신이 철학을 하는 이유는 하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법 이상의 철학적 원칙과 신념에 기초하여 의사결정을 했던 몇가지 사례들이 있다. 반면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독배를 내린 법률에 대해 자신이 국외 추방을 제의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으로 동의한 절차적 정당성을 뒤늦게 훼손할 수 없다고 친구인 크리톤에게 밝힌다. 그러나 '크리톤'은 소크라테스가 평소의 냉정한 변증법적·이성적 논법을 구사하지 않고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모습으로 크리톤을 설득하고 있어서 전적으로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변론'과 '크리톤'의 이런 모순적인 모습 중 '크리톤'에 실린 모습이 과장되어 '변론'에 담긴 법령 불복종자로서의 모습을 누르고 지금까지 이어져왔으며 소크라테스의 일관된 삶과 철학에 비추어불 때 이런 말 자체가 결코 성립할 수없는 것이다. 진정한 철학자는 진리조차도 회의하고 가짜로 드러나는 순간 바로 폐기시키는 엄중함이 있는데, 기껏해야 인위적인 실정법을 무조건 옹호할 수없는 것이다.철학과 법의 기본 성격조차 모르는 무지의 소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어이없게도 독재치하에서 정치에 악용되는 방편으로 원전에 대한 확인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 말을 계속 악용하여 왔다. [2]

[편집] 미(美)

소크라테스는 미학적인 범주를 최소한 셋으로 나누었다. 그 세 범주는 부분의 조립을 통해 자연을 표현하는 '이상적인 미', 시선을 통해 영혼을 표현하는 '정신적인 미', 그리고 '유용한(혹은 기능적인) 미'이다.[3]

[편집] 영향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 전해져 메가라 학파, 퀴니코스 학파, 키레네 학파 등을 이루고, 특히 수제자인 플라톤의 관념주의로서 피어나, 그 후의 서양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4]

그는 일생을 통해 자신이 직접 책을 쓴 일이 없고 또한 문학적 흥미도 지닌 바 없으나 그가 철학의 방법으로 취한 대화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걸작 대화집을 낳게 했고, 그의 독창적 개성과 비극적인 죽음은 전기문학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소크라테스만큼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철학자도 없습니다. 그는 무척 뭇생긴 사람이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천하의 악처러 알려진 그의 아내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 만큼이나 유명한데 실제로 그녀가 그토록 지독한 악처였는지는 불확실합니다. 그는 많은 질문을 통해 스승들을 곤라하게 만들었고 마침내는 아테네 청년들의 스승이 되어 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는어떠한 저서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플라톤을 비롯한 제자들의 글에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그에 대해 알수 있을뿐입니다.그는 아테네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하엿는데 그가 태어날당시의 아테네는 에게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는 소피스트의 시대를 살았고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전하여 국력이 기울며 몰락하기 시작하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소피스트들에 반대하여 인간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었습니다. 소피스트들은 분명 철학의 관심을 인간으로 돌려 놓는 공헌을 했습니다.그러나 그들은 지나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설파함으로써 사회의 가치관을 무너 뜨렸고 정신적인 혼란을 던져 주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정신적 혼란기에 나타난 아테네의 스승입니다.

소크라테스는 텔포이 신탁을 계기로 자신이 길을 찾습니다. 어느날 카에로폰이라는 사람이 델포이 신에게 아테네에서 제일 현명한 사람은 소크라텟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신이 거짓말을 할리는 없다고 생각하고자신이 현명한 사람인 이유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한가지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무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소크라테스 자신은 스스로 아는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 때만 무엇을 알수있습니다.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스스로 아는것이 무지를 전제한 후 대화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잘못된 주장에 맞닥뜨렸을대 그 잘못된 주장을 직접 비판하는것이 아니라 상대방이동의할 많안 다른 의견을 제시하며 대화를 이끌어 갑니다.대화 상대자는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동의해 나가는 와중에 스스로 자신의 원래 주장을 부정하게 되거나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대화 상대자의 입장에서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것입니다. 그의질문은 집요합니다.그는 피상적인지식이나 독단적인 관념을거부하기 때문에 항상 정확한 대답을 요구합니다.

예를 들어 경건한것과불경한 것에 대해 에우티프론과 토론할때 소크라테스는 경건한 행동몇 가지가 아닌 모든 경건한 행동을 경건하게 하는 경건성 그자체가 무엇인지 말할것을 요구합니다. 마침내 에우티프론이 모든 신이 사랑하는것이 경건이고 싫어하는것이 불경이라고 대답하자 소크라테스는 '신들이 어떤 행동이 경건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들이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경건한 행동이되는 것인지'를 그에게 되묻습니다. 에우티프론은 피상적인 대답만을 반복하고 소크라테스는그 말을 듣고 더욱 구체적으로 되묻습니다. 에우티프론은 결국 그 자리를 떠나고맙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대화 방법은 그 자체로 인간 이성에 대한 믿으믈 표현합니다.그는 보편적인 진리의 존재를 부인할 수없으며 계속되는 대화를 통하여 진리의 길로 접어들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진리에 대한, 나아가 인간의 능력에 대한 회의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인간은 대화를 통하여 자신으 무지를 깨닫고 모든 사람이 공유할수있는 진리를 발견할수있다고 소크라테스는 믿었던 것입니다.



★ 악처가 철학자 남편을 만든다?


세계 4대 성인중의 한 사람인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행패가 대단히 심해서 악처라고 세상에 이름이 높았었다.

어느 날 그녀는 책을 읽고 있는 소크라테스에게 심한 욕설을
한참 동안이나 퍼붓다가 물이 가득 찬 물통을 들고 들어와
"이 못난 영감쟁이야...물벼락이나 한번 맞아봐라.." 하면서
소크라테스의 머리 위에다 물을 쏟아 부었다.


그제야 소크라테스는 책에서 눈을 떼며 털털한 웃음으로
심술궂은 아내와 맞싸우지 않고 유머로써 웃어 넘겼다. 이때 제자들이
몰려와서 남자는 꼭 결혼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결혼은 반드시 해야지.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나쁜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테니까... 훌륭한 수부는 바다에서
사나운 파도와 싸워보아야 하는 것이고, 또 훌륭한 기수는 성질이 사나운 말을
택하는 법이니,   사나운 말을 잘 달래가며 탈수 있는 기수라면  다른 어떤
말 이라도 다 잘 탈수 있듯이 나 역시 성질 나쁜 아내를 잘 달랠 수 있다면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 훌륭하게 상대할 수가 있을 것 아니겠나 ? "



그는 왜 토론을 하는가?

서양철학자 중에서 아마도 일반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은 소크라테스일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전문가에게 가장 적게 알려진 서양철학자가 바로 소크라테스이다! 심지어 버트런드 러셀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지, 조금 알고 있는지 조차도 확실하지 않다고 말한다.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기원전 469년에 아테네에서 출생하여 기원전 399년에 죽은 소크라테스는 생전에 어떤 글도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대해서 주로 그의 제자 플라톤과 크세노폰, 그리고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남긴 글을 통해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 모습과 생각은 서로 다를 뿐더러, 플라톤의 여러 대화편에서도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연구자들은 무엇이 진짜 소크라테스의 모습인지에 대하여 지금도 논란을 벌이고 있다. 이것을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의 문제(Socrates Problem)’라고 부른다. 플라톤은 상상력이 뛰어난 문학가였으며, 크세노폰은 군인,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는 패러디 전문가였다. 이들 모두가 ‘정품’이 아닌 ‘짝퉁’ 소크라테스를 만들 소질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문제’로 인해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다는 식의 과민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확실하게 알려진 그의 삶에 이미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소크라테스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여러 주제에 대한 그의 생각, 한 마디로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이다. 그러나 이런 논란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 철학자가 자신의 글을 남겨도 일어나는 문제다. 그가 남긴 글의 해석이냐, 아니면 그 글의 해석의 해석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삶을 통해 철학사에 남긴, 아니 인류를 위해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은 무엇일까?


고대 그리스의 도자기에 그려진 토론하는 그리스인들의 모습.
소크라테스는 광장에 나가 격의없는 토론을 즐겼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하기’ 정확히 말해 독백이 아닌 대화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철학자의 이미지는 골방에서 혼자 사색에 잠기거나,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우주의 진리를 글에 담는 모습이기 쉽다. 누가 칸트나 헤겔의 철학이 ‘100분 토론의 결과’라고 주장하겠는가? 놀랍게도 서양철학의 아버지 격으로 숭상되는 소크라테스는 이런 고독한 철학자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가 가장 좋아했고 죽기 직전까지 했던 것은 토론, 즉 어떤 주제에 대하여 논쟁적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테네 토론의 광장 아고라에 나가서 어느 누구와도 격의 없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즐겼다. 플라톤의 대화편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의 나이 불문, 재산 불문하며 대화를 즐겼다고 말한다. 나아가 아테네의 법이 이 즐거움을 금지시키면 자신은 법을 지키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그는 ‘스스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독배를 마시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옥리에게 뇌물을 주고 도망가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도 토론을 했다. 이것이 플라톤의 대화편 [크리톤]의 내용이다. 소크라테스와 동년배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크리톤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는 아테네의 법을 어기고 도망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아무도 토론 마니아 소크라테스를 말릴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소크라테스와 크리톤과의 대화내용을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로 줄여 표현했지만, 이것은 매우 잘못된 해석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말을 했다는 증거도 없고, 아테네의 법을 그는 악법이라고 부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이를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언도를 받아 죽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아테네 시민과 토론을 벌여 많은 적을 만든 것이 화근이 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고, 재판 중에도 자극적 토론을 벌여 사형언도를 받았고, 재판이 끝난 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토론을 벌인 후 “죽는 것이 옳다”는 결론에 따라 행동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토론은 공기와 물 같은 것이었다.

 

 

 

 

영국 경찰이 발견하고 미법무부가 번역하여 공개한 [알 카에다 훈련교범]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가 대결하고자 하는 신앙심 없는 정권은 소크라테스적 토론도, 플라톤적 이상도 아리스토텔레스적 외교도 모른다. 이들은 총알의 대화, 암살, 폭격, 파괴라는 이상, 그리고 대포와 기관총의 외교만을 알 뿐이다.” 알 카에다가 ‘소크라테스적 토론’이 무엇인지 이해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소크라테스로부터 토론을 분리시킬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왜 토론을 하고자 했을까? 물론 그가 남과 이야기하기를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히 옳은 대답이다. 그러나 대답의 전부는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다른 철학자들이 갖고 있지 않는, 설사 갖고 있다 하더라도 남에게 공개하기 꺼리는 경험을 자랑스럽게 공개하였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받은 ‘델피의 신탁’이다. ‘신탁(神託)’이란 신이 사람을 통해 신의 뜻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질문에 답하는 것, 즉 계시 혹은 점과 같은 것이다. 언젠가 소크라테스는 친구와 함께 신탁을 받은 적이 있다. 이때 신탁의 내용은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는 없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적인 토론은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게 하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신탁을 믿어 왔던 소크라테스도 이번 경우에는 신탁의 내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고 일컬어지는 아테네의 정치가, 문학가, 장인들을 찾아다녔다. 과연 이들은 현명한가? 놀랍게도 이들 모두 스스로 현명하다고 자부하였지만, 대화의 결과는 정반대였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어느 누구도 현명하지 않았다. 아테네의 젊은이들은 이런 대화를 재미있게 구경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따라했다. 왜냐하면 ‘현명하다는 사람의 무식이 폭로되는 토론’은 실로 재미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토론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민 중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고, 이것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이처럼 토론을 즐긴 이유는 단순히 상대방의 무식이나 현명하지 못함을 폭로하는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에게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즉 철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덕(virtue)을 밝히고 실행하는 것이었다. 덕의 실행은 재산이나 직위 그리고 명예보다도 중요하며 심지어 죽음도 방해할 수 없는 인간 영혼의 본질이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를 경멸한 이유는 무엇보다 영혼을 계발하는 철학을 돈과 결부시켰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단 한 번도 돈을 받고 대화를 한 적이 없음을 그의 가난이 증명한다고 [변명]에서 말하고 있다. 다른 한편 소크라테스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선이 무엇이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파하였다. 선이 무엇인지 안다면 결코 악행을 저지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지행합일이란 단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현자 찾기 프로젝트’가 실패하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많은 믿음들은 그 옳고 그름이 확인되지 않은 것이 태반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역설적으로 델피의 신탁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소크라테스에게 대화는 재미만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름을 밝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물론 그에게는 이처럼 옳고 그름을 밝히는 토론이 가장 재미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스스로 글을 쓰지 않은 이유도 짐작이 간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토론을 ‘산파술’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산파는 직접 아이를 낳지 않지만 낳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다. 다른 한편 아이를 낳지 않아본 여인은 낳는 것을 도와줄 수 없기에 산파가 될 수도 없다.

 

그리스 자연철학으로부터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관심을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라는 인간사회의 규범으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정의, 덕, 선과 같은 규범적 개념은 사회의 복잡한 관계망에서 쉽게 파악되기 어렵다. 어떤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부정적일 수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에 부합하는 사물의 측면만을 보기 일쑤다. 이때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으로 알려진 부정적 논증(elenchus)이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상대방의 주장이 일단 옳다고 가정하고, 상대방도 동의하는 다른 지식이나 명제들을 원래의 주장과 결합하여 모순을 끌어내는 귀류법(reductio ad absurdum)을 의미한다. 즉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기본적으로 ‘부정의 논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정의 논법을 통해서도 논파되지 않는 주장, 그것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적 토론은 논쟁 기술보다는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 모두에게 훨씬 더 중요한 태도를 요구한다. 그것은 ‘권력이 옳고 그름을 정한다’는 믿음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이런 믿음을 옳다고 말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믿음에 순종하고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아테네 시민에게 신이 보낸 등애(gadfly)라고 표현했다. 등애가 쏘면 황소도 펄쩍 뛴다. 바꿔 말해 소크라테스는 당시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있던 아테네의 큰 문제, 즉 집단적 오류를 등애처럼 날카롭게 쏘아댔다. 그 결과가 소크라테스의 재판이었다. 이처럼 권력과 잘못된 믿음과의 결합은 민주주의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정치체제에서도 있을 수 있으며, 소크라테스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현대는 정보의 공유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쉽고 빠르다. 이를 통해 옳건 그르건 집단화된 믿음이 순식간에 형성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적 토론이 더욱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소크라테스적 토론을 현대 사회에 도입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누명을 쓰고 독배를 마시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까지도 토론을 벌였다.




진리와 이데아의 빛

쪽빛 바다가 한 눈에 가득 들어온다. 지중해 세계에서 빛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빛은 모든 은폐된 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스 사람들은 은폐된 것이 드러나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빛이 있어야 사물을 볼 수 있다. 플라톤 철학의 핵심 개념인 이데아도 그 어원은 본다는 것이다. 이데아의 빛이 비칠 때 세계는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다고 그는 믿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었을 때 그는 스물 여덟의 청년이었다. 그때 그는 심한 혼돈과 현기증을 느꼈다고 한 편지에서 기록했다. 그리고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인식의 근원은 철학”이며, “참된 철학을 열심히 연구하기까지에는 인류는 고민에서 풀려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플라톤 철학의 시작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서 출발한 셈이다. 그래서 플라톤 철학을 이야기할 때는 보통 소크라테스 철학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시작부터 우리는 난감한 사실에 봉착한다.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의 철학은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제자가 그대로 반복했다는 뜻이 아니다.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 철학이 동일한 소스에 담겨있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소크라테스 철학을 플라톤이 쓴 기록을 통해서 읽는다. 플라톤의 [대화편]이라고 부르는 35편의 책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철학에서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역사적 인물로서의 소크라테스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인가 하는 점이 항상 문제가 된다. 그것을 철학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따져보면 이러한 사례는 어찌 소크라테스뿐일까? 공자의 가르침을 기록한 [논어]도 그렇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기록한 불교 경전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공자와 석가모니 역시 자신들이 직접 책을 쓰지 않았다.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옮겨 적었을 따름이다.


소크라테스의 조각상 앞에서 불멸에 대한 사색에 잠긴 플라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동일체를 이룬다.

 

시대를 더 내려오면 신약성경과 코란도 그렇다. 예수도, 무함마드도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기독교와 이슬람 경전을 직접 기록하지는 않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 국한해서 보더라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도 대부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고대 철인들의 말씀을 기록한 많은 책에서는 그것이 진짜냐 가짜냐를 따지는 위서 논란이 심심하면 터져 나온다. 그들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해석학적 문제도 뜨거운 감자가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대 철인의 말씀을 기록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 크게 부각되는 법은 거의 없다. 예외가 있다. 바로 플라톤이다. 그는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모아서 집대성한 단순 기록자로 취급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대화편은 플라톤이 30대에서 70대까지 쓴 책들이다. 스타일은 거의 비슷하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변호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제외하면 모두 대화체 형식이다. 플라톤이 쓴 일련의 책들을 대화편이라고 통칭해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통점이 또 있다. 한 편을 제외하면 모든 대화편에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거의 대부분이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주도하는 주인공이다. 이렇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대화편을 통해서 하나의 철학적 동일체가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 철학을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잠깐! 플라톤의 대화편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초기 대화편에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와 후기 대화편에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에 미묘한 차이가 드러난다. 그래서 고대 철학사를 연구하는 사가들은 플라톤이 젊었을 때 쓴 초기 대화편에서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철학을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반면, 원숙한 나이에 쓴 플라톤의 후기 대화편에서는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서 플라톤 자신의 철학을 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처음에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철학의 손 노릇을 했지만, 나중에는 소크라테스가 플라톤 철학의 입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다. 서두가 좀 길어졌지만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가지치기 작업이기도 하다. 앞에서 우리는 ‘역사적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를 구분하는 난제를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불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대화체 형식의 책을 썼는가 하는 점을 ‘플라톤의 퍼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거리의 철학자였다. 그는 아테네 거리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대화를 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조용한 사색의 장에서 토론과 대화의 장으로 옮긴 인물이다. 그는 대화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때로는 아테네 시민들이 즐겨 찾는 아고라 광장에서, 때로는 푸른 지중해가 한 눈에 보이는 아테네 근처의 바닷가에서, 때로는 지인들과 밤늦게 술잔을 기울이면서 토론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식 철학을 문자로 생중계한 플라톤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토론 철학이 가진 강점과 약점이 동시에 드러난다. 대화편은 마치 한 편의 희곡을 보는 듯한 재미가 있다. 대화의 내용뿐만 아니라 토론을 하는 그때 그곳의 분위기까지 그대로 잡힌다. 마치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일어나는 일이 마치 우리 눈 앞에서 펼쳐지는 듯하다. 그러나 때로는 대화편이 철학 책으로서는 체계적이지 못하고, 때로는 아무런 결론 없이 대화를 마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당연하다. 대화편은 어떤 특정한 주제를 체계적으로 전개하는 논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철학의 역사에서 대화편과 같이 고전적 지위에 우뚝 오른 다른 철학서적,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35권의 대화편은 과제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지도 않고, 다양한 여러 주제들이 하나의 책에 뒤섞여 함께 논의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왜 이렇게 거리에서 철학을 했을까? 그리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아테네 거리 철학을 왜 문자로 생중계했을까? 그 단서는 대화편 중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나온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참된 지식은 글이나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대화를 통해서만 전달된다고 역설한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그림으로 기록할 때 그 그림은 죽어있듯이, 살아 있는 말을 문자로 쓸 때 문자로 기록된 말은 죽어있다고 말한다. 문자로 된 말은 질문을 던지지도 질문을 받지도 못한다. 그렇다. 플라톤이 대화 형식으로 글을 쓴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봐야 한다.

 

아테네 아카데미에 있는 플라톤 조각상.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라는 말처럼 플라톤은 서양철학의 기본을 완성했다.


서양 철학의 역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라는 말이 있다. 20세기 전반에 영국 캠브리지대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철학을 가르친 화이트헤드가 만년에 한 강연에서 한 이야기다. 많은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지만, 플라톤 철학의 요체를 이처럼 적절하게 설명한 말도 드물다. 나는 화이트헤드의 이 말을 플라톤 철학의 체계가 뛰어나다는 칭송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뛰어난 것은 그의 답안에 있지 않고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서 끝없이 던지는 질문 방식에 있다. 서양 철학이 플라톤 철학의 각주가 된 이유는 그의 철학 체계보다는 그가 쓴 철학적 발제에 있다.  지금까지 이 글을 세심하게 읽은 독자라면 이런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좋은 질문을 던진 사람은 플라톤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아닌가?

 

맞다. 굳이 저작권 개념으로 따진다면, 문자 중계한 플라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 발언자인 소크라테스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왜 플라톤이 서양 철학의 전통을 기본 포맷한 철학자로 인정받는가? 이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소크라테스로 돌아가야 한다. 좀 지겹겠지만 할 수 없다. 철학적 동일체를 이룬 스승과 제자의 몸통을 분리하는 수술이 아닌가?

 

 

 

 

소크라테스 철학의 요체는 대화법 또는 산파술로 요약되는 질문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답을 내놓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아는 게 없다. 그래서 그는 대화 상대자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가실 정도로 끝없는 질문을 던진다. 주로 상대방 이야기의 논리의 허점을 파고 든다. 상대방은 자신의 주장이 모순에 빠졌음을 깨닫고 우물쭈물한다. 큰 당혹감과 혼돈에 빠져든다. 상대방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주시한다. 옳은 답을 듣기 위해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답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대화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종료된다. 해결되지 못하고 끝난 문제 – 이것을 철학 용어로는 아포리아(aporia)라고 부른다. 그 어원은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다는 뜻이다. 출구가 막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길도 진리의 길이 아니고, 저 길도 우리를 진리로 이끌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우리와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주의 원리를 규명하는 작업은 잠시 숨을 고른다고 하더라도 매일매일 우리가 숨 가쁘게 살아야 하는 인간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도대체 어떤 기준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가?

 

소크라테스 시대의 아테네로 돌아가자. 고대 그리스 문명의 중심이었던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에서는 이미 철학의 관심이 피시스(자연세계)에서 노모스(인간세계)로 옮겨가고 있었다. 노모스의 세계에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철학의 화두로 떠올랐다. 소피스트라고 불리는 일군의 철학자들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관심도 다르지 않았다. 그 점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재판 법정에서 한 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지하의 일이나 천상의 일을 탐구했다고 고소장에 씌어있지만 자신은 자연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자연에 대해서 간단하게라도 언급한 사실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말해달라고도 주문한다. 그렇다고 자연철학자를 경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도 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는 도대체 어떤 점에서 다른가? 철학사에서는 그 양자의 차이를 보편주의와 상대주의의 격돌로 정리한다. 소피스트는 인간사회의 규범은 상대적이라고 이야기한 반면,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인 규범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보편적 진리를 수호한 순교자로 소크라테스를 자리 매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가? 나는 소크라테스를 보편 철학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답안을 내놓기보다는 상대 답안의 논리적 허점을 등에처럼 성가시게 물고 늘어져 철학적 대화를 아포리아 상태로 몰고 간 소크라테스 철학이 어떻게 보편주의로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논리적 연결고리만큼은 분명히 설명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가르친 철학의 정신이 아닌가? 만약 그 연결고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소크라테스 대화법(엘렌쿠스)은 보편적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보편주의가 아니라 그러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회의주의, 또는 진리는 때와 장소 그리고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상대주의와 더 가깝게 된다.

 

바로 이 대목에서 플라톤 철학의 핵심인 이데아 이론이 빛을 발한다. 플라톤 철학이 스승의 몸통에서 분리되는 대목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포리아가 출구가 막힌 종착점이 아니라 새 탐구의 출발점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집요하게 질문을 던져서 대화를 막장에까지 다다르게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노린 것이 아닐까?

 

스승이 즐겨 사용한 엘렌쿠스로서의 철학은 제자의 이데아 철학의 뒷받침을 얻어 출구에서 탈출한다. 아니, 이 말이 소크라테스에게 큰 모욕이 된다면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을 통해서야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제대로 독해할 수 있다. 앞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제관계에서 처음에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손 노릇을 했지만, 점차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입 노릇을 한다고 지적했다. 그 분기점이 바로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 개념이 등장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또 그 때를 기점으로 토론이 아포리아에서 벗어난다. 아포리아가 해결불능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탐구의 시작이 되는 셈이다. 이 점을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철학은 아포리아의 놀라움에서 시작한다.” 철학적 사유는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철학은 항상 상식적인 사고를 요청하지만 아무도 그 상식에 이의를 달지 않을 때 철학적 사유는 멈춘다.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의 막다른 길에서 이데아의 빛을 향한 플라톤의 사상이 시작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지금으로부터 2400여 년 전에 죽은 소크라테스는 그의 삶과 죽음, 용모에서 언행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우리에게 던져 주었다.  

  기원전 469년.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태어났다. 그리고 70년 후, 시민 500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들 중 280명의 유죄 결정에 의해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 500명의 배심원들은 나이가 예순셋 이상인 노인과,  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견디기 싫증난 사람들에게는 꽤 잡잘한 액수인 배심원 수당 3오블 -당시 그리스 화폐단위-을 받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소크라테스는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 철학자이다. 심하게 못 생긴 얼굴에, 오래 된 누더기옷. 악처로 이름 높은 아내 크산티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인용과,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언 아닌 유언.

  아내 크산티페를 두고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그런 여자와 결혼한 이유를 물으면 " 말[마]을 훈련시키는 사람은 거친 말을 다룰 줄 알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식으로 대답하였다.

  그의 죽음에 관한 그림은 쟈크루이 다비드, 샤를 알퐁스 뒤프레누아, 푸셍, 켕틴, 페이론 등 많은 화가들이 앞다투어 그려냈다고 한다. 동양에 공자가 있다면, 서양엔 소크라테스를 말한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직접 쓴 저서는 없다.  

  그런 그가 떠난지 2400여 년. 왜 그의 죽음을 생각하는가. 그는 이땅에 필로(philo,사랑 )과 소피아(sophia,지혜)를 전파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였기에 이땅의 최소한의 규칙을 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악법도 법이다" 라며 독미나리 잔을 받아들였다. 법은 이 사회, 이 세상 사람들을 잘 살게 하려고 만든 가장 작은 규칙이므로.

  소크라테스가 인용하였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곰곰 되씹어 본다. 이 말은 현대에 와서 다른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에 의해 "우리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부정하여야 한다"라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우리는 이 두 철인의 말을 모두 되새겨야 할 것이다. 부단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부족한 우리 자신을 더욱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도 작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10%의 희망을 가지고 90%의 불가능을 이겨낸 사람들도 있고, 90%의 사람들을 위한답시고 소외된 10% 의 가녀린 외침을 무시했다가 낭패를 당한 자도 있었다. 이에 대하여 일찌기 성경에서는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위하여---"라는 말을 하였다.

  시대의 투철한 시인정신을 지닌 김수영 시인은 "모래야 나는 얼마나 작으냐"라고 반어법적으로 노래하였다.

  소수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 주는 사회를 기대하며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을 다시 중얼거려본다.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백발의 노인. 무리의 중앙에 사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군중에게 설파하고있다.

" 모든 것은 자신이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 " 자! 예를 들어볼까요?

여기에 큰돌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돌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요? 이돌에 대한 사람들의 느낌이 모두 다를 것입니다. " 어떤이는 석상을 만들려할 것이고, 어떤이는 주춧돌을, 또 어떤이는 징검다리로, 마당의 의자로 ... 이처럼 사람들은 같은 사물일지라도 자신의 입장과 느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드립니다. 하지만 각 개인의 느낌이 바로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지배합니다. 이러한 느낌은 진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제 각기 진리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견해대로 행동방향을 결정합니다. 이말은 곧 모두에게 한결같이 적용되는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 진리는 개인의 잣대를 통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연설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고, 그사람은 자신이 가르칠 제자들을 모집중에 있었다.

- 그때 군중을 비집고 들어와 맨 앞쪽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노인이 일어서서 나옴.

군중이 외친다, " 소크라테스 잖아! " 제자(학생)들을 모집하는 강사는 그를 천적으로

인식하는데, 강사는 적지아니 당황한 기색이다.

" 존경하는 강사 선생, 이 무지한 늙은이가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소? " 강사는 마지못해 " 좋습니다. " 라고 말한다. " 선생, 저것이 무엇입니까? " 강사가 답한다. " 돌입니다." 소크라테스 "여러분 중에 저것이 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은 나오십시요.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 선생, 저것으로 만약 제우스 신상을 만들어 놓는다면 선생은 그것을 신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돌이라고 하겠습니까? "

강사 " 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돌이라고,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 소크라테스 " 그래요? 그러면 하나 더 물어봅시다."  " 저 돌로 만든 제우스 신상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저돌은 더 이상 돌이 아닙니까? "

 

강사, 얼굴이 더 붉어지며 머뭇거린다.  " 강사선생, 저것으로 무엇을 만들든 저것은 언제까지나 돌입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저돌을 신으로 생각한다해도 저돌은 여전히 돌일 뿐입니다. " " 따라서 사람의 생각에 따라 사물이 달라진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 사물은 사람의 생각과 관계없이 사물자체의 고유한 성질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만약 저들이 사람의 생각에 따라, 개, 말도 되고 - 사람의 느낌에 따라 변할 수 있다면 개나 말도 사람의 느낌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

강사는 뒷걸음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더 이상 강사를 몰아칠 생각이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군중들을 향해 몸을 돌리는 사이, 강사는 군중들 속을 빠져나간다. 

 

소크라테스, " 돌로 무엇을 만들든 여전히 그것이 돌이듯, 진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느낌에 관계없이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 " 이 변하지 않는 진리에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군중속의 한 젊은이, 묻는다. " 선생님, 그러면 도대체 그 변하지 않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 소크라테스 " 진리를 묻는 그대는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청년, " 저 말입니까? " " 저는 귀족이고, 남자이며 젊고, 영리합니다. 진리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사실 지금 생각해 보니, 저는 제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아는게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린다. " 웃지 마십시요!" " 이 청년은 지금 아주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 "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는게 있는데 " " 그것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 " 진리를 알기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닳아야 합니다."

" 인간은 모든 동물중 유일하게 자기속에 들어있는 진리를 알아 낼 수 있는 힘을 가졌습니다., 그 일의 시작이 바로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함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자기 뿐 아니라 모든 사람 속에 똑같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보편적인 진리에 따라 행동하면 여러분은 가치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곤 소크라테스는 "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을 남기곤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러면 " 나는 누구인가? "  네델란드의 시인, 극작가, 철학가 - 존 쉘라(1759 - 1801)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합니다.

" 누구나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자신이 매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요구하는 가격은 타인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서 위대하고도 또 미약하게도 된다. "

즉, 우리 모두는 환경이나 운명의 꼭두각시로 창조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고 친구를 선택하고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고 우리의 할 일을 결정하는 힘과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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