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 3. 19 독일 졸링겐~1962. 5. 31 이스라엘 텔아비브.
제1차 세계대전 때 가족과 함께 독일에서 오스트리아 린츠로 이주했다. 1932년 4월 린츠에서 비밀 나치당에 입당했고 11월 하인리히 히믈러가 조직한 나치 친위대(SS) 정예부대에 들어갔다. 1933년 린츠를 떠나 바이에른 레히펠트의 '오스트리아 군단'이라는 테러리스트 양성학교에 들어갔다. 1934년 1~10월 다하우에 있는 SS부대에서 일한 뒤, 베를린의 보안국(Sicherheitsdienst/SD) 중앙본부의 유대인 담당부서에서 일했다. SS 내에서 꾸준히 승진했으며 오스트리아 합병(1938. 3) 뒤에는 유대인을 추방하는 임무를 띠고 빈으로 파견되었다. 1년 뒤 같은 사명을 안고 프라하로 갔다.
1939년 히믈러가 국가안전국(Reichssicherheitshauptamt/RSHA)을 창설했을 때 베를린에 있는 유대인 담당부서로 전보되었다. 1942년 1월 베를린 근처 반제에서 나치 고위관리들이 모여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에 필요한 계획과 병참업무 준비에 관한 회의를 열었다. 아이히만은 이 문제의 책임을 맡음으로써 사실상 대량학살을 뜻하는 이 '마지막 해결책'의 집행자가 되었다. 그는 유대인을 식별하고 집결시켜 그들을 집단수용소로 보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홀로코스트).
전쟁 뒤 아이히만은 미군에 붙잡혔으나 1946년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중동지역을 전전하다가 1958년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나치 전범 추적자 지몬 비젠탈과 이스라엘 '자원봉사' 단체에 의해 정체가 드러나 1960년 5월 11일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에서 체포되어 9일 뒤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이송되었다. 이러한 조치가 아르헨티나 법을 위반했다는 여론이 진정된 뒤,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의 특별 3심 법정에서 재판을 열었다. 1961년 4월 11일에서 12월 15일까지 계속된 이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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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의 비극-아무 생각 없는 삶의 비극]


아이히만은 독일 나치스 친위대 장교 출신입니다. 그에 의해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된 유대인 수는 약 600 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는 독일 패망 후 아르헨티나에 가족과 함께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숨어 지내다, 1960년 5월 이스라엘 비밀경찰에게 발각, 강제 연행되어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 받아 결국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런 아이히만이 재판에 섰을 때 세계 언론은 '인간의 얼굴을 한 악마'를 보기 위해 취재 열풍이 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열풍은 단 2 주만에 식어 버립니다. 그것은 아이히만이, '너무나 평범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이히만이 성 격파탄자나 정신 이상자일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을 학살한 친위대 장교이면서도, 그는 유대인 여자를 정부(情婦)로 두었습니다. 그는 나치의 정강(政綱)도 몰랐고, 히틀러의 '나의 투쟁'도 읽어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친위대도 그저 친구의 권유에 등 떠밀려 들어간 것이라 합니다. 그를 추적, 관찰한 현대의 유명 철학자 하이데거의 제자 아렌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지극히 가정적인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 그래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일상 생활에서 아주 근면했고 무능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다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가 엄청난 범죄자가 된 것은 순전히 성찰의 부재(thoughtlessness)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비극을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에서 찾았고, 그런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악'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기에 아무 생각 없이 명령을 따랐고, 아무 생각 없이 살기에 함부로 그렇게 엄청난 비극을 초래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분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떠들고 아무 생각 없이 말하고 아무 생각 없이 함부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요즘 흔히 일어나는 성폭행, 사기 등의 온갖 비극이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사 는 우리들에 의해 일어납니다.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결코 할 수 없을 그런 일들을, 아무 생각이 없기에, 그저 내 욕심, 내 삶만 바라보기에 아무 생각 없이 범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히 보는 무심코 버리는 담배 꽁초, 무심코 빼무는 담배 연기, 전철 간에서 흔히 보는 주위를 생각하지 않는 요즘 젊은이들의 짙은 애정 표현도 그런 아무 생각 없는 삶의 한 단면입니다.


더구나 인터넷이나 언론이 특정 목적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부추기고 세뇌시키면 사람들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아무 생각' 없어집니다. 옳다고 하는 일에 옳음에, 그르다고 하는  일엔 그름에 취해, 그리하여 쉽게 분노하고 흥분하여 앞뒤 좌우를 가리지 않고 마녀 사냥을 하며 온 세상을 흔들어 놓습니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도 모르고, 부추기고 세뇌하는 세력들에 의해 마치 스탈린의 '쓸모 있는 바보들'처럼,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이 짜 놓은 각본대로 흘러갑니다.

 

아무리 이성을 찾아라, 편견을 갖지 말고 세상을 똑바로 보라, 한 면만 보지 말고 사물의 양면(中道)을 모두 보라, 제대로 알고 말하라 고 일러 드려도, 그렇게 시작된 아무 생각 없는 아우성, 행동은 도무지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비극은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만 갑니다.


당신들은 아무 생각 없는 것이 아니노라 강변하시겠지만, 그래서 당신도 이성이 있고 나름대로 당신의 길을 간다고 하시겠지만, 죄송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정말 '아무 생각 없는 분들'입니다. 다만 교묘한 방법으로 세뇌되어 세뇌 되신지도 모 른 채 '남 따라 장에 간다'는 속담처럼, 분노에 사로 잡혀 머리끝까지 원통함과 증오로 차 올라 아무 생각 없이 남이 짜 놓은 각본대로 가실 뿐인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 중의 하나가, 그렇게 광란의 분노를 내뱉은 분들이 나중에 사물의 진실을 알고 말씀하는 한 마디가 단지 '그 때는 그게 사실인 줄 알았다!'며 자신에겐 아무 책임도 없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일입니다. 고작해야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더할 뿐, 그 분들에게 더 이상의 잘못은 자신에겐 없습니다.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다른 분을 비통에 빠뜨렸는지,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다른 분들의 삶을 방해했는지에 대한 일말의 반성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보는 우리나라는, 이렇게 온통 아무 생각 없는 분들의 생각 없는 삶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 삶의 성찰보다 그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일색의 삶이 있을 뿐입니다. 비정상적일 정도의 성형 중독, 비쌀수록 잘 팔리는 상품들, 그저 즐기고 자극적인 내용의 TV 드라마들, 난무하는 악플들... 이런 어처구니 없는 모습도 그런 아무 생각 없는 우리 모습의 반영이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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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한국에서는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사상가다. 그의 지적 계보를 잇는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의사소통행위 이론'으로 1980년대에 널리 알려진 데 반해, 아렌트는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그의 저작이 번역되기 시작했다. 아렌트의 사상에 알게 모르게 기대고 있는 '시민의 정치참여'가 이 땅에서 대중적 슬로건이 된 것을 감안하면, 그를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걸렸다고 해야 할 정도다. 그 뒤늦음을 만회하려는 듯 그의 주요 저작이 속속 우리말로 옮겨지고 있고, 탄생 100돌을 맞아 지난 달에는 아렌트 학술 심포지엄이 열리기도 했다.

그의 저작 가운데 가장 최근에 번역된 것이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 (김선욱 옮김, 한길사 펴냄)이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은 난이도 높은 그의 사상서 중에서 유일하게 대중적 저작이다. 1961~1962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시대 유대인 학살 실무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의 재판 과정을 이야기체로 풀어 쓴 것이 이 책이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은 아렌트에게 대중적 명성을 안겨 주었고 동시에 그를 엄청난 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 저작은 책의 대중적 성격과는 상관없이 아렌트 정치철학의 핵심 주제를 포괄하고 있어 그의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용이한 통로를 제공한다.

감정 앞세우지 않은 이야기체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의 원고는 애초에 잡지 < 뉴요커 > 에 연재한 기사였다. 1960년 5월 아르헨티나에 숨어 지내던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체포돼 예루살렘으로 압송되자 아렌트는 대학 강의를 중단하고 < 뉴요커 > 특파원 자격으로 그의 재판을 취재했다. < 뉴요커 > 는 지식인들, 특히 교육 받은 뉴욕 사람들을 주요 독자층으로 삼은 대중 잡지였다. 독일 출신으로 나치 박해를 피해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이라는 아렌트의 '신분'이 유대인 학살자 아이히만 재판의 현장 취재 기자라는 '신분'과 만나는 것만으로도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렌트의 글은 연재되자마자 유대계 사회의 거친 분노에 휩싸였다. 아렌트가 홀로코스트라는 참극의 희생자인 유대인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고 있으며, 마치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라는 듯 국외자처럼 사건을 대하고 있다는 것이 분노의 이유였다. 실제로 글 안에서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에 유대인 사회가 어떻게 협력했는지 밝혔을 뿐만 아니라, 그 야만의 집행자 아이히만을 묘사할 때도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그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홀로코스트 범죄의 책임자라기보다는 희생자에 가까운 사람으로 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히만은 '유대인 절멸'을 기획하고 교사한 사람들, 곧 히틀러를 정점으로 한 나치 지도부의 명령을 받은 처지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나치당의 강령도 알지 못했고 히틀러의 < 나의 투쟁 > 도 읽지 않았다. 그의 직급은 나치 친위대의 중간관리자(중령급)에 지나지 않았다. 히틀러는 그를 대면할 기회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며, 설령 대면했다 해도 아이히만의 이름은커녕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법을 준수하는 '건실한 시민'이었던 아이히만은 명령받은 일을 이행하는 것을 의무라고 느꼈고, 유대인 전문가로서 그들을 수용소에 배분하는 일을 착실히 수행했다.

'양심'의 문제가 여기서 불거졌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범죄를 저지른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며, 그의 양심은 상부의 명령을 정확히 행동에 옮기라고 요구했다. 그는 피고석에서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아렌트는 양심이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여건에 제약되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상주의적 열정도 한몫

이상주의적 열정도 아이히만의 정신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는 유대인 독립국가 건설 운동인 시온주의에 열렬히 공감했으며, 그들이 이상주의자라는 점에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의 이상주의는 관념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였고, 그것도 과격한 실천이라는 점에서 독특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이상주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아버지마저도 죽음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경찰 심문에서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나 이상주의자로서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려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이히만은 난데없이 나타난 악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규칙과 명령과 '주어진 이상'에 맞추려고 노력한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이히만이라는 인간형이 이렇게 분석되고 난 뒤, 이 책으로 하여 결정적인 의미를 띄게 된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이히만은 스스로 악인이 되려고 한 적도 없었고, 반듯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하기까지 했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다."

아렌트는 이 '순전한 무사유', 곧 사유하지 않음이야말로 아이히만의 진정한 특성이라고 말한다. 그의 '생각 없음'은 바꿔 말하면,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음'을 뜻한다. 사회적 환경에 제약된 양심을 품고 이상주의로 무장하고서 이 '무사유'를 실천할 때 얼마나 가공할 일이 벌어지는지를 아이히만은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아렌트는 다른 글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의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그의 유일한 특징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이었다."

아렌트는 정치의 영역을 시민들이 저마다 인격을 걸고 의견을 표출하여 경쟁하는 장으로 여겼다. 그 정치 공간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판단하는 훈련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상적인 공론장이다. 그런 정치의 장이 마련되고 강화할 때 아이히만과 같은 사례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아이히만이 평범한 것은 우리가 언제든 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말한다. "우리 안에 아이히만이 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차이와 평등의 정치철학' 한나 아렌트 따라읽기 붐

한나 아렌트 저작의 한국어판은 10년 전인 1996년 처음 얼굴을 내밀었다. 그의 대표작인 < 인간의 조건 > (이진우·태정호 옮김)이 '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의 하나로 출간된 것이다. 1958년에 미국에서 나온 < 인간의 조건 > 은 아렌트를 정치철학자로서 우뚝 세운 저작이다. 아렌트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사상가로 평가받는 데 이 책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그의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실존주의를 재해석해 자신의 정치철학의 밑돌로 삼았다. 그는 인간에게 부여된 실존적 조건을 '복수성' 혹은 '다양성'에서 찾았다. 인간은 서로 다른 차이의 존재이며 따라서 인간들의 삶은 전체로 볼 때 언제나 복수일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차이는 인간이라는 보편성의 지평 위에 놓여 있다. 그것을 아렌트는 평등이라고 불렀다. 다름이 없다면 인간은 교류하고 소통할 이유가 없으며, 평등하지 않다면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할 것이다.

< 인간의 조건 > 출간 뒤 2000년대에 들어 '아렌트 르네상스'라 할 만한 현상이 벌어졌다. < 혁명론 > (홍원표 옮김, 한길사 펴냄) < 과거와 미래 사이 > (서유경 옮김, 푸른숲 펴냄)이 잇따라 나왔고, 1971년 저작 < 정신의 삶1-사유 > (홍원표 옮김, 푸른숲 펴냄)과 < 칸트 정치철학 강의 > (김선욱 옮김, 푸른숲 펴냄)도 출간됐다. 아렌트는 애초에 < 정신의 삶 > 을 '사유' '의지' '판단'이라는 칸트의 세 기획에 맞추어 3부작으로 내려고 했는데, 그 중 '정신'편만 완성했다. 유고를 갈무리한 < 칸트 정치철학 강의 > 는 이 기획의 '판단' 편에 해당한다.

'의지'편은 현재 번역중이며 또 아렌트에게 학자로서 첫 명성을 안겨준 1951년 저작 < 전체주의의 기원 > 도 한국어판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이밖에 < 정치의 약속 > < 공화국의 위기 > 등이 푸른숲에서 나올 예정이다. 이들이 빛을 보면 한나 아렌트 르네상스의 명실상부한 실체를 갖추게 되는 셈이다. 김선욱 숭실대 교수가 쓴 < 정치와 진리 > (책세상 펴냄) < 한나 아렌트 정치판단이론 > (푸른숲 펴냄)은 국내 아렌트 전공자가 쓴 아렌트 해설서로서 아렌트 사상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 노릇을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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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학살범 아이히만, 아르헨티나에서 덜미 잡히다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이 예루살렘의 법정 피고석에 앉아 있다. 아데나워 총리 시절(1949~63)의 독일인은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었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았고, 교사들은 그 주제를 피했다. 그들은 아이히만 재판을 계기로 잊으려 애썼던 과거와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

 

[그때 오늘]

 

1960년 5월 11일 저녁 6시30분, 아돌프 아이히만은 늘 하던 대로 버스를 타고 일터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세 사람이 나타나 그를 승용차에 싣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의 한 주택으로 데려갔다. 아이히만은 이스라엘에서 온 ‘전문가들’임을 즉각 알아챘다. 어떠한 폭력도 사용되지 않았다.

1942년 1월 나치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을 수립했고, 아이히만은 그 책임자로서 유대인 집단 학살을 주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군에 체포됐다 1946년 탈출한 그는 이후 몇 년 동안 중동지역을 전전하다 1958년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나치 전범 추적 단체에 의해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에서 체포돼 9일 뒤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이송됐다.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열었다. 1961년 4월부터 12월까지 계속된 이 재판에서 그는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946년 11월의 여론조사에서 독일인 중 33%는 유대인이 아리아인과 동일한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12년간 나치 지배를 받고 난 직후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생각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6년 뒤인 1952년의 조사 결과다. 수치가 더 늘어나 37%가 독일 영토에 유대인이 없는 것이 독일에 더 낫다고 밝혔다. 그들은 세계가 자신들을 어떻게 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피점령국 사람들의 고통보다는, 자신들이 겪었던 전후의 식량·주택 부족 등에 주목하면서 스스로를 ‘희생자’로 간주했다. 1951년 바이에른주 판·검사의 94%, 재무부 직원의 77%가 나치 전력자였다.

전범 아이히만 재판은 독일이 ‘과거’에 관심을 갖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재판과정에서 홀로코스트(대학살)의 실상이 낱낱이 조사되었기에 학살의 참상을 수백만 명에게 교육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 결과 히틀러를 위대한 정치가라고 믿는 서독인의 비율은 1955년 48%에서 1967년 32%로 하락했다. 갈 길은 아직도 남았다. 진정한 변화는 그 후 10여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1970년 브란트 총리는 바르샤바의 나치 희생자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었고,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이 살해되었다.

1979년 독일 텔레비전은 메릴 스트리프 주연의 4부작 미니시리즈 ‘홀로코스트’를 방영했다. 그제야 비로소 유대인의 고통은 독일 국민의 공공 의제가 되었다.

하지만 ‘집단적 기억상실’ 덕분에 나치 잔당에 의해 전후 독일의 놀라운 ‘경제 회복’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정의’와 ‘경제’는 양립할 수 없는 걸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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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아이히만은 칸트 철학을 어떻게 독해했나?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제8장 법을 준수하는 시민의 의무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몬 살인마, 아돌프 아이히만이, 재판과정에서 칸트 철학과 그의 정언명령에 대해 읽은 적이 있고, 그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는 점이다.

 

학살자의 심리와 독일이성철학이 결합되는 방식과, 독자와 철학자의 책이 오독되는 방식 그리고 그의 오독이 그를 흔들리지 않는 학살자로, 그리고 결국 그를 사형대 위에서 사라지게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의 난독증 에 대한 이야기… ^ ^

 

아렌트의 기록에 따르면, 재판과정에서 아이히만은 칸트의 정언명령에 대한 거의 완벽한 정의를 내렸다고 한다.

 

아이히만 ,“칸트에 대해 언급하면서 제가 말하려 한 것은, 나의 의지의 원칙이 항상 일반적 법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계속되는 질의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읽었노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가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을 추진하라는 명령을 받은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칸트의 원리를 따르지 않았으며, 자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아렌트는 그의 고백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 아이히만은 그가 살던 나치 제3제국치하에서, 즉 국가가 범죄를 합법화한 시대에서, 칸트의 정언명령이 더 이상 적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이고, 이 같은 판단은 칸트철학에 대한 오독이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가령 나치의 법률가 한스 프랑크가 제3제국의 정언명령에 대해, “만일 총통이 당신의 행위를 알았을 때, 총통께서 승인할만한 방식으로 행위하라고 정의한 바 있다.

 

하지만, 아렌트에 따르면, 칸트는 이런 식으로 주장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 칸트적 정신이란, 인간은 법에 대한 복종 이상을 행해야 한다는 것, 단순한 복종을 넘어, 법의 배후에 있는 원리와 자신의 의지를 일치시켜야 한다는 요구에 다름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 철학에서 그 원천은 바로 실천이성이었다. 결국 칸트에게는 모든 사람이 행위를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입법자이며, 인간이 자신의 실천이성을 사용하여, 법의 원칙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 원칙들을 발견해야만 하는 것이며, 결국, 인간에게는 법에 대한 복종이상의 것이 요구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유대인 문제를 최종해결을 수행하면서, 아이히만을 사로잡은 것은 실천이성이 아닌, 총통의 이성이었다.

 

아이히만의 내면에서는, 유대인 문제를 최종해결하라는 히틀러의 이성을 실천하기 위한 철저함이 보인다. 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문제에 관한 불편한 진실이 있다면, 아이히만이, 종전 무렵 하인리히 힘러를 위시한 다수 친위대들이 유대인 문제에 대한 타협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그가 끝까지 철저하게 견지한 비타협성이고,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 그의 광신이 아니라, 그의 양심이라는 점이다.

 

종전이 가까워오고, 나치의 패배가 명약관화해 지면서, 친위대 내부에서는 그 수장 힘러를 위시해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온건파들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연합군 과 유대인들과의 모종의 협상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힘러와 그 부하 온건파들의 타협시도에 대해, 아이히만은 완강히 저항했다. , 총통 히틀러의 의지와 힘러의 의지가 충돌한 경우, 아이히만의 선택은 항상 히틀러의 유대인문제 최종해결 명령이라는 의지였음은 한치의 의심도 없었던 것이고, 협상을 모색한 친위대 온건파들의 관점을 그는 부패라 간주했다. 이 과정에서 만약 아이히만이 어떤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면, 그것은 유대인 대학살을 명령한 그의 최고 상관인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라는 것이 바로 아이히만의 양심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치시대의 양심은 다음과 같은 역설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문명화된 나라에서 살인과 관계된 양심이란, “살인하지 말라라면, 히틀러의 독일 제3제국 시절의 법이란, 비록 살인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상적인 욕구와 성향에 반한다는 것을 유대인 대학살의 조직가들이 아주 잘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히틀러식 양심의 소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너는 살인할 지어다라고 속삭였던 것이다.

 

아이히만의 칸트 읽기와 그 오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은, 인간은 법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상의 판단,실천을 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치의 전범재판 중 하나였던, <뉘른베르크 재판>의 판례에 따르면, 비록 상관 혹은 국가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인륜범죄라면, 명령을 단순히 수행한 자에게도 법적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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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chmann in Jerusalem - Hannah Arendt


이 책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유대인을 학살한 죄인에 대한 재판을 다룬 책임에도 불구하고 시온주의(유대인 민족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는 점만 해도 이 책의 흥미진진함을 느낄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히만 재판은 그가 나치독일치하에서 유대인 관련업무만을 맡았던 공무원이기에 나치독일의 여러 민족에 대한 범죄로 기소된 뉘른베르크 재판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재판이 열리게 된 과정부터 독특했는데, 이스라엘은 아이히만이 살고있는 아르헨티나에서 국제법을 어기며 납치해왔으며 국제재판소를 여는게 더 적절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 열렸다는 점입니다. 이것에 대해 아이히만 당사자에 대한 재판이 아닌 반유대주의에 대한 재판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로인해 예루살렘 재판은 여러 문제점을 야기했다고 지적하는데, 피고를 위한 증인을 허용하지 않은 점 뿐만 아니라 잘못을 행하려는 의도가 범죄를 구성하는데 필수적이라는 가정을 했다는 점입니다.

이 책은 아이히만의 성장과정을 따라갑니다. 평범한 학생이 성장해 결혼을 하고, 감압정유회사에 취직하고 나치당에 가입했고 친위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당의 정강도 알지 못했고 '나의 투쟁' 도 읽지 않았습니다. 젊은 변호사 칼텐브루너의 "친위대 가입해보면 어때?" 라는 질문에 "그렇게 하지 뭐" 정도의 신념으로 가입했던 것입니다. 그가 유대인 문제 전문가로 성장하며 맡았던 것은 나치당의 유대인 해결책과 동일했습니다. 추방, 수용, 학살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정책이 변화할때마다 그는 맡은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아이히만이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를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마치 본디오 빌라도가 된 심정이였다고 말합니다. 유대인은 예수를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몰아 빌라도에게 고발했고,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했지만 유대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십자가형에 처한뒤 손을 물로 씻으면서 자신의 죄가 없다고 말한 바로 그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추방 및 수용은 몰라도 최종해결책, 즉 학살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결국 자신의 양심을 무마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 방법이란 학살에 반대한 사람을 단 한명도 볼수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입니다.

나치가 유대인을 그토록 많이 학살하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들 중 하나는 바로 유대인 지도자들입니다. 유대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독일은 그 짧은 시기에 유대인을 그렇게 대량으로 학살할수 없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나치는 유대인을 추방,이송하는데 있어서 유대인 공동체를 이용했는데, 명단을 작성하고 돈을 인수하고 기차에 태울수 있게 경찰력을 제공하는 등 유대인 중앙위원회는 유대인처리에 있어서 절대적 권리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비밀을 맹세했고, 자기 민족을 파멸로 이끄는 새로운 권력에 취해 홀로코스트를 이룩함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합니다. 간혹 유대인을 구한 경우도 있었는데 헝가리에서 카스트너 박사는 47만 6000명의 희생자를 내고 1684명을 구출했습니다. 이러한 저명한 유대인은 전쟁중에도 학살당하지 않았고 그들을 위해 덜 저명한 유대인은 항상 희생되었습니다. 히틀러는 340명의 일등급 유대인에게 독일인의 지위를 부여했고 수천명의 반쪽 유대인은 모든 제약을 면제받았습니다. 심지어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을 학살한 의사들은 유대인 부대도 있었습니다.

유대인 위원회가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큰 영향력을 끼친 증거로 나치독일 점령국에서의 유대인 학살과정을 들수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간의 문제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반응에 따라 유대인학살수치에 큰 영향을 가져옴을 알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무국적 유대인을 희생시키는데 있어서 오히려 프랑스 비시정부가 자발적으로 앞장섰으나 프랑스계 유대인을 포함시키려 하자 격렬하게 저항한 결과 25만명의 유대인이 살아남을수 있게 되었습니다. 벨기에의 경우 더 비협조적이였지만 나라가 작다보니 숨기가 어려워 피해가 좀 있었습니다. 덴마크의 경우 독일의 반유대정책에 대해 대놓고 반대했고 무국적자마저 덴마크 정부가 보호해줬을뿐만 아니라 돈없는 유대인을 위해 덴마크시민들이 탈출비를 제공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완강한 저항을 보게 되자 정작 덴마크에 파견된 독일당국마저 베를린의 명령에 대해 거부심을 표하게 됩니다. 불가리아의 경우 더욱 완강한 정책으로 불가리아 유대인은 이송되거나 자연사가 아닌 죽임을 당한 사람은 한명도 없게 됩니다. 그런 반면 루마니아의 경우 독일보다 더 극렬한 반유대정책으로 유대인학살의 원조격인 친위대마저 루마니아인들의 학살에 공포심을 느꼈으며 유대인을 구하기위해 개입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독일의 도움 없이도 독일 친위대가 도착하기 전에 벌써 30만명을 학살했습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였습니다. 그의 친척중에도 유대인의 피를 잇는 사람이 있었고, 교양있는 유대인 지도자들과 친분을 나눴으며 자신이 맡은 유대인학살소(테레지엔슈타트)의 학살과정을 보고 경악했으며 그의 희망은 유대인의 발아래 확고한 땅을 두려는 것이였습니다. 그것은 그의 니스코 모험이나 마다가스카르 계획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최종 해결책이 다가옴에 따라 취소되었고 그는 변경된 정책을 따랐습니다.

이스라엘 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판결문에서 그는 15개의 기소 항목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그것은 유대인의 대량학살 및 폴란드인, 슬로베니아인 추방죄와 집시추방죄를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집시의 학살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판결문에서 살상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대통령은 아이히만의 사면 청원서와 미국랍비중앙회, 미국개혁주의 유대교대표단 등에서 보내온 호소편지문을 모두 물리쳤고 몇시간뒤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쳐해졌습니다.

아이히만은 사악한 동기에서 행동하지 않았고, 누구를 죽일 어떤 의도도 없었으며, 유대인을 증오하지도 않았지만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으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그를 통해 그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사고의 무능력함을 지적했고, 그가 행한 모든 일은 그가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서 인식한 만큼 행동한 것이었다. 그는 경찰과 법정에서 계속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의무를 준수했지만 그 법과 조국, 숭고한 명령에 대해 사고하지 못했음을 지적했고, 설령 대량학살의 조직체에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을 지지했고 인류 구성원 중 어느 누구도 아이히만과 이 지구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할수 없기 때문에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아주 평범하게도, 밀그램의 실험에서 버튼을 누른 대다수의 사람에 불과했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평범한 아버지였고, 평범한 공무원이였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누구라도 그처럼 될수 있는 평범한 악 이였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책이 예루살렘 재판의 성공여부(헌법재판소로서 정의를 부여하는 행위)만을 다루고 있다고 글을 마무리하지만, 역사속에서 유대인학살을 최소화할수있었던 좋은 예들(덴마크나 불가리아의 유대인정책 등)을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알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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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아이히만에 면죄부 준 용산 판결 / 조영관 한겨레

지난달 28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에서 열린 용산참사 재판에서 형사합의27부는 특수공무방해치사상 등의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 9명에게 최고 징역 6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용산참사의 모든 책임은 농성했던 철거민에게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에 책임이 있는 나치의 고위 장교들 중 한 사람으로, 자신은 승진을 위해 특별히 근면했던 것을 제외하고 아무런 악의적 동기가 없었고, 스스로를 ‘오류의 희생자’라 주장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통해 ‘악’이라는 것이 ‘일상적’으로 저질러질 수 있는 ‘단순한’ 것이며, 그러한 행위의 본질은 악을 행하는 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하게 하는 ‘무사유성’이라고 보았다.

이번 사법부의 판결은 한국판 아이히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정치적 판결이다. 용산참사는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세입자들이 생존권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자, 정부가 공권력으로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행위가 ‘정상’이라고 믿으며 작전을 수행했고, 결국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경찰이 목숨을 잃었다. 용산참사에 책임을 지고 있는 수많은 한국판 아이히만들은 이번 판결을 통해 자신의 행위의 결과반성기회거부당했다. 합리적 해결을 바라는 수많은 시민들은 또다시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좌절감을 느끼며, 복종을 강요당했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자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던 구청 공무원, 경찰, 소방관, 용역업체 직원들은 사회 상층부의 행위양식에 또다시 적응해야 했다. 권력에 대한 ‘복종’이 만들어낸 행위의 무사유성은 더 거대한 폭력을 불러올 수 있다.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다는 ‘악의 평범성’은 용산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너무 쉽게 마주할 수 있는 비극이다.

조영관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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