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로마 제국의 제16대 황제(121년 4월 26일 - 180년 3월 17일)이다. ‘철인황제(哲人皇帝)’로 불리며, 5현제 중 한 사람이다. 중국의 역사서 《후한서》에 기술된 ‘대진국왕(大秦國王) 안돈(安敦)’이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끝으로 로마 제국의 전성기는 끝났으며,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하였다.

생애

121년 4월 26일, 로마에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도미티아 루킬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3살 때 아버지가 죽자 3번이 집정관을 연임한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베루스에게 입양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질이 특출하였던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눈에 띄었다. 136년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후계자로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를 공표하였고, 같은 해 마르쿠스는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의 딸 케이오니아 아파비아와 약혼하여 일약 로마 정계 전면에 부상하였다.

그러나 138년 콤모두스가 죽자 하드리아누스는 마르쿠스의 고모부인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를 양아들로 맞아들여 새로운 후계자로 삼았는데, 나중에 그는 제위에 올라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마르쿠스를 자신의 양아들로 입적하였다. 이때 마르쿠스의 이름은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로 바뀌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나중에 마르쿠스의 약혼을 파기시켜 자신의 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와 약혼시켜 결혼시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와의 공동 통치를 한 뒤에 단독 황제가 되었다. 게르만족의 침입이나 시리아 속주에 있어서의 파르티아의 침공 등 수많은 전쟁에 슬기롭게 대처하였다. 지금까지의 5현제의 관습을 타파하고 친아들인 콤모두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하여 5현제 시대는 끝나게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서기 180년 3월에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다뉴브 강의 진중인 시르미움 근처에서 병에 걸려 급사하였다. 그의 시신은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되었으며,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하였다.

한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사색과 철학에 관한 내용을 토대로 쓴 《명상록》이라 불리는 에세이를 남겼다. 그는 정신적 스승이었던 에픽테토스세네카와 함께 스토아 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금욕과 절제를 주장하였으며 수많은 명언을 남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였다. 전쟁터에서 틈틈이 쓴 그의 <자성록> 12편은 로마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인 책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언제나 인정이 많고 자비로워 백성을 널리 사랑하였으나 정책상 크리스트 교도를 억눌렀다. 그의 유명한 저서인 <명상록>에는 철학인으로서의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로마 제국 16대 황제
재위 기간 공동 황제:161년 3월 7일 - 169년
단독 황제:169년 - 180년 3월 17일
타고난 이름 136년 이전-카틸리우스 세베루스
136년 이후-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황제 이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전임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
공동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
후임 황제 콤모두스


















로마 제국 16대 황제/161년 3월 7일 - 169년/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로마 제국 16대 황제/161년 3월 7일 - 169년/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이 기마상은 고대 세계에서 살아 남은 몇 안 되는 조각 작품 중 하나다. 기독교도들은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대부분의 로마 기마상을 파괴했지만, 이 작품은 최초의 기독교도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의 조각상으로 오인하고 내버려두었다. 이 조각상은 2세기부터 로마 시내에 세워져 있었으나 1980년 공해를 피해 실내로 옮겨졌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로마 제국의 제16대 황제(121년 4월 26일 -180년 3월 17일)이다. ‘철인황제(哲人皇帝)’로 불리며, 5현제 중 한 사람이다. 중국의 역사서 《후한서》에 기술된 ‘대진국왕(大秦國王) 안돈(安敦)’이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끝으로 로마 제국의 전성기는 끝났으며,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하였다.

생애 

121년 4월 26일, 로마에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도미티아 루킬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3살 때 아버지가 죽자 3번이 집정관을 연임한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베루스에게 입양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질이 특출하였던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눈에 띄었다. 136년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후계자로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를 공표하였고, 같은 해 마르쿠스는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의 딸 케이오니아 아파비아와 약혼하여 일약 로마 정계 전면에 부상하였다.

그러나 138년 콤모두스가 죽자 하드리아누스는 마르쿠스의 고모부인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를 양아들로 맞아들여 새로운 후계자로 삼았는데, 나중에 그는 제위에 올라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마르쿠스를 자신의 양아들로 입적하였다. 이때 마르쿠스의 이름은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로 바뀌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나중에 마르쿠스의 약혼을 파기시켜 자신의 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와 약혼시켜 결혼시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와의 공동 통치를 한 뒤에 단독 황제가 되었다.게르만족의 침입이나 시리아 속주에 있어서의 파르티아의 침공 등 수많은 전쟁에 슬기롭게 대처하였다. 지금까지의 5현제의 관습을 타파하고 친아들인 콤모두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하여 5현제 시대는 끝나게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서기 180년 3월에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다뉴브 강의 진중인 시르미움 근처에서 병에 걸려 급사하였다. 그의 시신은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되었으며,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하였다.

한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사색과 철학에 관한 내용을 토대로 쓴 《명상록》이라 불리는 에세이를 남겼다. 그는 정신적 스승이었던 에픽테토스세네카와 함께 스토아 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금욕과 절제를 주장하였으며 수많은 명언을 남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였다. 전쟁터에서 틈틈이 쓴 그의 <자성록> 12편은 로마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인 책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언제나 인정이 많고 자비로워 백성을 널리 사랑하였으나 정책상 크리스트 교도를 억눌렀다. 그의 유명한 저서인 <명상록>에는 철학인으로서의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2001년 아카데미 5개 부문 수상작인 영화 ‘글래디에이터’ 끝부분에는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의 망나니 아들 콤모두스가 반란에 실패한 막시무스(러셀 크로)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쇠사슬에 묶인 막시무스는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콤모두스에게 말한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죽음이 우리에게 미소 짓고 다가오면 미소로 답하라’고 말했지.” 그러자 콤모두스는 “그 친구도 죽을 때 웃었는지 궁금하군”이라며 ‘그 친구’와 막시무스를 비웃는다.

그러자 막시무스는 ‘그 친구’가 바로 콤모두스의 아버지라고 알려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막시무스는 미소로써 죽음을 맞는다. 막시무스야말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철학을 실천한 ‘진정한 아들’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물론 영화 속 막시무스는 가공의 인물이고 두 사람의 대화도 지어낸 이야기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음이 우리에게 미소 짓고 다가오면 미소로 답하라’는 취지의 말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180년 3월 17일 사망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자였다. 그는 죽음을 기뻐하라고 당부한다. 죽음을 자연의 한 과정으로 기다리는 것이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 맞는 태도라는 것이다.

“지나온 날을 헤아리지 말며, 그 짧음을 한탄하지 말라. 너를 여기 데려 온 것은 자연이다. 그러니 가라. 배우가 연출가의 명에 따라 무대를 떠나듯이. 아직 연극의 5막을 다 끝내지 못했다고 말하는가? 그러나 인생에서는 3막으로 극이 끝나는 수가 있다. 그것은 작가의 소관이지 네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 요컨대 인생의 종말이 언제 오건 평정을 잃지 말고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하라는 당부다.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는 다 같이 행복을 추구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 학파가 ‘쾌락’에서 행복을 기대한 것과 달리 스토아 학파는 ‘지혜’를 통해 행복을 추구했다. 그들은 감정을 억제하고 용기 있게 죽음을 맞이한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귀감으로 삼았다.

노예를 ‘살아 있는 도구’로 간주하던 고대 세계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평생 노예 출신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55~135)를 스승으로 흠모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에픽테토스에게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형제라는 만민평등사상을 배웠다. 스토아 철학이 로마법, 특히 만민법의 기초가 된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로마법은 그 후 유럽 각국에 영향을 미쳤고, 우리 법체계에도 그 영향이 지속되고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지혜’와 ‘만민평등의 휴머니즘’은 우리 시대에도 빛을 발한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A bust of Faustina the Younger, Marcus' wife (Lou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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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usoleum of Hadrian, where the children of Marcus and Faustina were bur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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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in of Vologases IV, king of Parthia, from 152/53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 

이른 아침,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는 오늘도 공연히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 은혜를 모르는 사람, 거만한 사람, 남을 속이거나 중상하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이러한 악덕(惡德)은 선악에 대한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의 본질은 아름답고 악의 본질은 추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잘못 범하는 사람도 나와 같은 인간, 혈통을 같이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성(理性)과 신성(神性)의 일부를 나누어 갖는다는 뜻에서 동류지(同類者)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해를 입는 일은 거의 없다. 그것은 내 스스로 원하지 않는 한 아무도 나를 추악한 일에 빠져들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동류자들에게 화를 내거나 그들을 기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치 손발이나 눈시울이나 아래윗니처럼 서로 협력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적대시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는 일이다. 

우주 만물은 줄곧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다. 우연히 발생하는 일도 자연의 원리에 따라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며, 모든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해 다스려지며 모두 이 섭리와 관련이 있다. 만물은 그 섭리에서 흘러나오고 우주 전체의 이익도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당신도 이 우주의 일부분이다. 그밖의 모든 것도 자연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본성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그 본성을 계속 간직하는 것은 선(善)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 신의 섭리인 자연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변화는 자연의 한 속성(屬性)이다. 따라서 우주의 모든 것은 부분적으로 변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도 변한다. 그런 원리를 이해하고 또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그에 따라 행동하라. 자연의 변화에서 만족을 찾으라. 그리하여 고뇌없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신들에게 감사하며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하라. 

당신은 지금까지 이 우주의 작은 부분으로서 존재하여 왔다. 그리고 언젠가는 당신을 태어나게 한 자연의 품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아니, 오히려 당신은 변화에 의해 생성(生成)의 원리 속으로 되돌아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천년이나 만년이라도 살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 지금도 죽음은 다가오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 아직 능력이 있을 때 선한 일을 하라. 

이웃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오직 자신이 해야 할 일에만 관심을 쏟고 그 일이 정당하고 신의 뜻에 합당한가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많은 시간과 수고를 절약할 수 있다. 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타락한 모습을 돌아봄이 없이 곧장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날아갈 뿐이다. 

사후에 명성을 남기려고 연연해하는 사람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역시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어떠한 명성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을 통해 전해지다가 결국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설사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죽지 않고 그들의 기억 역시 영원하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당신이 이미 죽은 후에 그들의 찬양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살아 있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뜻이 있겠는가? 고작해야 어떤 편의(便宜)가 제공될 뿐이다. 아무튼 당신이 후세 사람들의 평판에 신경을 소모하고 있다면 당신은 자연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현재를 잘못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든 아름다운 것은 결국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다. 그 자체에 본성이 있는 것이지 어떤 외부적 요소 때문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찬양이 아름다움이란 본질의 일부분이 될 수는 없다. 찬양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지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말하는 자연물, 예술 작품, 자연 현상 등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진정 아름다운 것은 그런 찬사가 필요하지 않다. 법칙이나 진리, 자비심, 겸손 등이 찬양을 받았다고 해서 더 미화되고 비난을 받았다고 해서 손상되는가? 또 금이나 상아, 자수정, 하프, 단도, 관목 등도 그러하단 말인가? 

만약, 죽은 후에도 영혼이 소멸되지 않고 남는다면 대기는 어떻게 태고적부터 이 수만은 영혼들을 수용해 왔을까? 그리고 육체가 썩지 않는다면 대지는 어떻게 아득한 옛날부터 그 속에 매장된 시체들을 처리할 수 있었을까?

수많은 시체들은 한동안 땅속에 머물러 있다가 이윽고 분해되어 다른 시체에 장소를 비워 주는데, 이처럼 영혼도 얼마 동안 대기 속에 머물러 있다가 변화하고 분해되어 우주의 창조적 원리에 따라 불과 같은 성질이 되었다가 이윽고 새로운 영혼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다. 아마도 영혼불멸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서 매장되는 시체의 숫자만큼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매일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어 그들의 육체에 묻히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된 동물들은 그들을 잡아먹은 동물들의 피와 공기와 물과 같은 성분으로 변하여 사라진다. 이처럼 자연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이용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과 형상 및 형상적인 것의 원인을 구분짓는 분석법으로써 알 수 있다.

철학자 테모크리토스는 '마음의 평정을 얻고 싶다면 많은 일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필요한 일만 하라. 사회적 동물로서의 이성이 요구하는 일만을 이성에 따라 행하라.' 이렇게 함으로써 반드시 해야 할 일만 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평정을 얻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휼륭하게 수행함으로써 오는 마음의 평정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거의가 불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것들을 제거한다면 우리는 더욱 많은 시간을 즐기게 되고 반면에 근심이나 불안이 줄어들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이 일은 꼭 필요한 것인가?' 라고 물어 보라. 또 우리는 불필요한 행동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사상까지도 깨끗이 버려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불필요한 행동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만류(萬有)로부터 주어진 자기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는 사람, 올바르게 행동하고 자신의 인자한 성품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런 선인의 생활이 당신에게도 적합한지 한번 시험해 보라.

당신은 저 여러 가지 일들을 본적이 있는가? 보았다면 이제는 사물의 다른쪽 면을 보라. 마음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도록 단순한 마음을 가져라. 누가 당신에게 피해를 주는가?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결과밖에 안 되니 상관하지 말라.

 

아우렐리우스/명상록Marcus Aurelius ; Ta eis heautond에서

이해와 감상

'명상록'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로마 황제의 입장을 떠나 한 사색하는 생활인, 그리고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 철학자로서 자신의 사상과 체험을 토대로 쓴 에세이로서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스스로 인생을 올바로 살기 위하여 경계한 것, 행한 일을 반성하고 스토아적 입장에서 스스로에게 충고한 것, 귀감이 될 만한 다른 사람의 글을 발췌한 것 등으로 그 내용이 구성되어있다.

 이 글은 그때그때 체험에서 우러나온 단상(斷想)들을 바쁜 틈틈이, 즉 전시(戰時)의 진중이나 청사를 돌보는 사이에 쓴 것이며, 어릴 때부터 익혀 온 수사학의 재능을 십분 발휘한 아름다운 문장이라 평가된다.

 편의상 전체를 12권으로 나누고 있지만 일정한 기간에 어떤 주제를 놓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그 논리적인 체계가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우렐리우스의 스토아 철학의 사상적 기반은 이 책에 일관된 흐름을 부여함으로 내용상으로는 하나의 체제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체계화된 사상일수록 그 사상의 내용에 우주론, 인간론, 그리고 정치 사회론 을 모두 담고 있어야 하며, 이 게 가지는 상호 모순됨이 없이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명상록'은 단편적인 철학적 수상(隨想)들을 모아놓은 것임에도 위의 세 가지 요소를 다 갖추고 있으며, 글을 읽어 내려감에 따라 각 구절마다 이에 그의 사상적 깊이를 새삼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사상은 그가 평생을 두고 연구하고 고민했던 스토아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간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그것을 지배하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신,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갖가지 삶의 국면을 굳건한 사상적 바탕 위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흔히 '명상록'은 스토아 철학의 진수를 설명한 것으로도 평가되고 있다. 에픽테토스의 '어록(語錄)과 함께 고대의 양서로 손꼽히고 있다.

 '명상록'은 어떤 초기 편집자에 의해 12권으로 분류되었는데, 첫째 권을 제외하고는 내용이 뒤 섞여 있어서 각 권의 내용을 만족할 만하게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그 대략의 요점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제1권은 자신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로 배우게 된 교훈이 겸손하게 언급되어 있다. 제2권은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제3권은 진정한 자유인 신에 대한 복종에 대해, 제4권은 기회의 부재에 대해, 제5권은 운명과 역할에 대해, 제6권은 내면적 삶의 절대적인 중요성에 대해, 제7권은 충동의 억제와 자기 만족의 추구에 대해, 제8권은 마음의 평정에 대해, 제9권은 자발적인 의지와 인간을 지배하는 운명에 대해, 제10권은 기인의 주변 환경과 그에 관한 성찰에 대해, 제11권은 이타주의(利他主義)에 대해, 제12권은 죽음에의 초월에 대해 씌어 있다.

 제1권에서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터득한 것이 아니고 조상, 부모, 스승, 신들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여기서 그의 겸손함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리고 자기가 처한 위기, 상황, 환경에 대해 만족하고 감사하는 생활자세를 엿볼 수 있다.

 제2권부터는 '명상록'의 본론이라 할 수 있는데,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않은 단편적인 글들이라 내용도 다소 중복되고, 또 축약된 말들이 있어서 어려운 곳도 있으나 앞에서 스토아 철학에 대한 개괄적인 해설을 읽었다면 아마 별 무리 없이 읽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먼저 자연, 즉 우주에 대한 견해부터 보기로 하자. 자연의 법칙인 운명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스토아 철학의 입장이듯이 아우렐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주 만물은 줄곧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다. 우연히 발생하는 일도 자연의 원리에 따라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며, 모든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해 다스려지고 사물과 관련이 있음을 명심하라. 당신도 이 우주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본성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그 본성을 계속 간직하는 것은 선(善)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명상록> 제2권 2장)    

  그리고 그는 인간이란 영원한 시간 속에서 순간적으로 살다 가는 덧 없는 존재라 하여, 각 권에서 명성이나 부(富) 등을 하찮은 것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죽은 후에 명성을 남기려고 연연해하는 사람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역시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어떠한 명성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을 통해 전해지다가 결국은 사라져버리고 만다…당신이 이미 죽은 후에 그들의 찬양은 무의미한 것이다.(<명상록> 제4권 19장)

  그는 또 죽음이란 것을 다른 사물로의 분해, 변화로 보았으며, 자연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해악이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명상록 의 전반적인 특징을 한마디로 지적한다면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어떠한 외부의 자극이나 압력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으며 평정을 누릴 수 있는 능력있는 존재라 하였다.

  지금 당신이 외부적인 어떤 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면 당신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당신의 판단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명상록> 제8권 47장)

 참고 자료

 아우렐리우스와 스토아 철학

  스토아 철학에서는 자연(Dbysis)이라는 말이 잘 쓰인다. 보통 자연이라고 하면 산과 강과 대지와 짐승과 초목 등을 포함시켜서 생각하지만 소크라테스 이전의 헤라클레이토스(BC 전 535∼475)의 계통을 잇는 스토아 학파에서는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오고 나서 거리로 돌아가는 근원적인 것, 또는 능산적 자연 (能産的 自然)을 의미한다. 또한 좁은 의미에서는 인간의 자연이라든가 포도의 자연이라고 하는 경우처럼 사물의  

본성(本性)을 의미하기도 한다. 광의의 자연은 종교적으로 말하는 신과 같은 것으로 그것은 우주, 로고스, 운명과 동일한 개념이다.

  스토아 학파는-그리고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에서도-자연에 따는다는 마을 자주 하는데 이것은 신, 또는 우주의 질서에 따르고 또는 그것에 합치하는 것을 말한다. 자연에 따른다는 것은 협의로는 각각의 본성에 따르고 그것을 발휘하고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을 예로 든다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것, 곧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이성(理性)을 따르고 발휘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우주의 이성, 곧 광의의 자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므로 인간의 이성에 따르는 것은 우주의 이성에 따르고 자연의 본성에 따르는것이다. 자연이 대우주라면 인간은 그 일부분인 소우주이다. 이러한 스토아 사상이 코즈모폴리터니즘「세계주의」의 사상적 모태임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런데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다. 육체라는 점에서는 동물과 공통되고 영혼이라고 점에서는 동물과 공통되고 영혼이라는 점에서는 신과 공통된다. 스토아에는 영혼은 혈액에서 증발된 것이라고 하는 견해도 없지 않으나 대체로 우주의 로고스의 한 조각이 인간에게 깃든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이성이 깃들어 있는 이상 인간은 다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별, 계급, 피부색깔, 국적을 넘어선 동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스토아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이 성립된다.

  그런데 이성이라고 한 마디로 말하지만 그 작용에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다. 칸트에 따르면 인식론적으로 이론이성(理論理性), 도덕적으로 실천이성으로 가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가끔 이성을 헤게모니콘(지도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종교적 윤리적 색채가 농후한 후기 스토아세서 본심 또는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온갖 욕망을 통제하고 지도하는 능력으로 스토아 철학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외계(外界)는 모두 결정되어 있어서 불변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숙명적인 필연이다. 따라서 스토아 학파에서는 필연을 필연으로 인정하고 운명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뿐 외계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외계는 우리의 의지 밖에 있어서 우리가 좌우할 수 없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 우리들의 생각뿐이다. 그러나 일단 철저하게 마음과 생각을 바꾸면 외계가 변한 것과 동일한 대전환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마음의 전환은 행복을 위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죽음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라고 생각한다. 혹은 원소에의 해체라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나 결국은 원래의 것으로 복귀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죽음은 조금도 무서운 것이 아니다. 곧 '무섭다고 하는 사념 자체가 두려운 것이다' '공상을 제거한다면 죽음은 자연의 작용이다' '해체를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죽음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을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이 무서운 것이다. 따라서 죽음을 자연의 필연적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전환이 필요하고 이러한 전환을 이루면 죽음은 고통스럽거나 무서운 갓이 아니라 평범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스토아 철학은 영혼의 불멸을 말하지 않는다. 영혼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원래의 원소로 해체된다고 한다.

 한편 스토아에서는 자살을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죽음을 자연의 필연적 과정으로 보는 스토아 철학으로서는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사는 것이 신의 명령이라면 죽는 것도 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완수하고 육체적으로 남의 폐를 끼칠 만큼 노쇠했거나 병에 걸리면 이 세상에서 떠나가라는 신의 신호로 알고 자살해야 한다. 이 경우 제멋대로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닌 자살이야말로 우주의 질서, 신에 뜻에 합치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또한 아타테이아 또는 아타락시아라는 말을 스토아 철학에서는 쓰고 있는데, 전자는 부동심(不動心), 무정념(無情念)이라는 뜻이고 후자는 평정(平靜)이라는 뜻이다. 외계의 사물은 본래 우주의 질서에 따라 변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외물을 뒤쫓고 있는 한 대해의 조각배처럼 번롱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마음에 아무런 욕망도 갖지 않고 어떠한 일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마음에 평화는 교란되지 않는다. 이 마음의 평화가 바로 인간의 행복인 것이다.

 

참고 자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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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121∼180)는 121년 로마에서 집정관 아니우스베루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안토니우스 황제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정치가로서의 삶이 열리기 시작했는데, 세 차례나 집정관을 지내면서 정치에 관한 식견을 넓혀 양부 안토니우스 황제를 도왔다.

 그는 스토아 철학에 심취하여 나중에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 사상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명저인 명상록을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161년 안토니우스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그는 일찍이 플라톤이 이상국가의 정치 형태로 제시했던 철인왕(哲人王)의 면모를 보여 왔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싸우거나, 아니면 전염병 퇴치와 타락된 도덕의 회복을 위해 애쓰면서 지냈다.

 그는 175년 반란을 일으켰던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가 자신의 부하에 의해 피살되었을 때, 오히려 자비로서 용서해줄 기회를 잃은 것을 슬퍼할 정도로 적군까지도 사랑하려는 박애주의적 일면도 지니고 있었다. 그간 재위 기간은 로마제국의 전성 시대로 일컬여지는 이른바 '5현제(賢帝) 시대'에 속하는데 96년부터 180년 사이인 이 무렵에는 정치적 안정, 경제적 번영, 영토의 확장이 어느 시대보다 월등하였으며 아우렐리우스 역시 이전 황제들의 선정(善政)을 유지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사색 혹은 명상의 황제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그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끊임없는 독서와 사색에 몰두하였기 때문이다. 그 사색의 기록이 바로 '명상록' 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살펴 보면 로마제국의 제16대 황제(재위 161~180)로 한자명으로는  안돈(安敦). 로마 출생. 5현제(賢帝)의 마지막 황제로, 후기 스토아파(派)의 철학자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가 된 후 140년 로마의 콘술(집정관)이 되었고, 145년 안토니누스의 딸(사촌누이)과 결혼, 161년 안토니누스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로 즉위하였다. 당시의 로마제국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여서 변방에는 외적의 침입이 잦았으며, 특히 도나우강(江) 쪽에서는 마르코만니족 및 쿠아디족이 자주 침입하여 그 방비에 힘썼다. 그 동안 페스트가 유행하여 제국은 피폐하고, 게르만족과의 전쟁에 시달리면서 발칸 북방의 시리아 및 이집트 등의 진영(陣營)에서 병을 얻어 도나우 강변의 진중에서 죽었다.

 유명한 《명상록(冥想錄)》은 이 진중에서 쓴 것으로 스토아적 철인의 정관(靜觀)과 황제의 격무라는 모순에 고민하는 인간의 애조(哀調)가 담겨 있다. 여기에서 그의 철학은 본질적으로는 반 세기 전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한층 내면적으로 침잠해 들어오는 철학을 이루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것은 불이며, 신적(神的)인 세계 영혼으로 관통되고 살려지게 되고 지배받고 있으며, 인간의 영혼도 세계 영혼의 한 유출물에 불과하여 죽으면 자연히 세계 영혼에 귀일하게 된다.

 물질적 ·육체적인 세계의 모든 것은 이 신적인 이성에 의하여 운명적 ·자연필연적으로, 그러면서도 신적 ·합법칙적으로 끊임없이 생멸변화(生滅變化)하고 있다. 따라서 개물(個物)·개인(個人)은 그 이름도 기억도 이 필연의 운동 속에서 소멸되고, 망각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자연필연의 이법(理法)을 확인하여 이를 신의 섭리라 믿고, 외적인 어느 것에도 마음을 괴롭히는 일이 없이 주어진 운명을 감수하며, 내적으로 자유롭고 명랑하고 조용하고 경건하게 그의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있어서는 철학자와 황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그가 죽은 후 로마제국은 쇠퇴하였다. 로마시에는 ‘마르코만니전쟁’을 부조(浮彫)한 기념주(記念柱)와 그의 기마상(騎馬像)이 있다.

스토아학파

키프로스의 제논이 스토아 포이킬레에 창설한 철학의 한 유파.

 BC 3세기부터 로마 제정(帝政) 말에 이르는 후기 고대(古代)를 대표한다. 키프로스섬 태생의 개조(開祖) 제논과 그 제자로서 적빈(赤貧)과 노동으로 이름 높던 소아시아의 아소스인(人) 클레안테스, 그 제자로서 스토아파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킬리키아의 항구 도시 솔로이(솔리)의 크리시포스, 스토아 학설을 로마 사람에게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만든 로도스섬의 파나이티오스, 종교적 경향이 강한 오론테스강 하반(河畔)의 아파메아인 포세이도니오스, 로마황제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 파의 주요 인물들이다.

 제논이 아테네의 광장에 있던 공회당 ‘채색주랑(彩色柱廊)’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 제자들을 ‘스토아파’(柱廊의 사람들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스토아파 철학은 이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고전기(古典期) 그리스를 대표하는 여러 나라의 좋은 가문 출신 사람들의 철학이 아니라, 변경(邊境) 사람이나 이국인의 철학이었으며, 그리스 문물이 좁은 도시국가의 틀을 넘어서 널리 지중해(地中海) 연안의 여러 지방에 미친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이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철학의 여러 파와 스토아파 사이의 대립은 격렬하였다.

 고전기까지의 철학의 여러 학설을 수용하여 일반화 ·통속화한 점에서 절충주의라는 비난을 받지만, 그 기반에는 고전 철학과는 아주 이질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 단지 로마시대 사람들의 저작을 제외하고는 스토아파의 저작은 오늘날 거의 전해지지 않아서 연구상 어려움이 있다.

 애지(愛知:철학)는 논리 부문과 윤리 부문, 자연 부문으로 나뉘나, 이들은 각각 독립된 분파가 아니라 서로 나누기 어렵게 결합되어 있어 하나의 지혜를 사랑하고 구하는 애지를 구성하는 3요소가 된다.

 지혜는 ‘신의 일과 사람의 일에 관한 지식’이라고 정의되지만, 이것은 사물에 관한 관조적(觀照的) 지식이 아니라, 인간생활에서의 모든 것을 올바르게 처리하기 위한 실천적 지식이다. 지혜의 이러한 실천적 성격에 스토아파의 특징이 있으며, 이 원리에 바탕을 두어 스토아철학은 고대철학원리의 주체적인 반성철학이 되었다.

 애지(愛知)는 이러한 지혜를 습득하기 위한 ‘삶의 기술(ars vivendi)’의 연습이며, 이러한 재주를 갖는 사람이 현자(賢者)인 것이다. 그리고 현자의 지혜란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인간은 자연에 의하여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자연의 충동’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칠 때 병으로서의 정념(情念)이 있다. 이 정념에 흔들리지 않고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데에 ‘활달한 삶의 흐름’이 있다. 스토아파의 현자의 이상은 바로 거기에 있다. 스토익이라고 불리는 비정한 금욕주의적 심정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자의 유덕한 삶이란 이성을 갖춘 유한한 개개의 자연물(인간)이 자연에 의하여 부여된 그대로의 자기의 ‘운명’을 알고, 운명대로 살아감으로써 본원(本源)인 자연과 일치하는 ‘동의(同意)’의 삶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 그 자체가 이성적 존재자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자기귀환(自己歸還)에의 활동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현자는 모든 자연물의 근원인 자연 그 자체로서의 신과 일치한 자이며 신과 같은 자, 바로 신 그것인 것이다.

 스토아 철학의 특징은, 이와 같은 자연존재에서의 개별성(個別性)과 전체성(全體性)의 두 계기의 강조와 양자의 긴장 관계에 있으며, 이것에 의하여 스토아 철학은 고대철학 원리의 집성인 동시에 다음 시대의 철학원리를 준비하는 것이 되었다. 언어연구 ·논리학 ·인식론에서도 구체성과 개별성을 중요시하는 스토아 철학은 전통철학에 없었던 새로운 요소를 많이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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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서의 기사 - 아우렐리우스


로마 5현제의 마지막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거대한 석상이 터키 남부의 고대 로마 유적지 사갈라소스에서 발굴됐다고 한다.

   

기나긴 로마역사를 통해 수많은 황제들이 있었고 또한 모두 이름들이 복잡한 관계로 웬만하면 다들 낯설게 느껴지는 존재들이지만 아우렐리우스 만은 웬지 우리에게 친근하게 느껴졌던 것은 바로 영화 '글라디에이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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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주인공 막시무스에게 황제자리를 물려주려다 아들 코모두스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그는 자애로운 황제였지만 졸지에 망나니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운의 인물로 기억된다.

 

실제로는 아우렐리우스는 전쟁을 지휘하다 도나우강 근처에서 병으로 객사했다고 한다. 아들이 있기는 있었지만 지 아비를 죽이고 황제자리를 차지할 만큼 패륜아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당시의 로마사회가 못난 아들에게 로마황제 자리가 계승되는 것을 용납치 않았었다.

 

5 명의 뛰어난 황제가 연속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대물림으로는 불가능하다. 전임황제가 뛰어난 후계자를 지정하여 그가 피붙이던 아니던 간에 황위를 계승하는 시스템이었던 것으로 안다. 물론 아우렐리우스 사후에는 그것도 깨지고 완전 난장판으로 접어들지만 말이다. (만약 진짜로 황제자리에 눈이 멀어 아우렐리우스를 살해하려 했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들 코모두스가 아니라 당시 가장 잘나가는 총독이었다는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였을 것이다.)

 

영화 글라디에이터의 주인공 '막시무스' 도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다만 검의 달인에 카리스마 넘치는 장수가 아니라 스토아학파 철학자였을 뿐,

 

글라디에이터 버젼 아우렐리우스의 죽음에 관해서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시오노의 주장에 따르면 설령 아우렐리우스가 영화에 나오는 대로 장수 막시무스를 총애했다고 하더라도 막시무스의 '국가관' 때문에 황위자리 승계를 권유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영화를 보면 황제가 되라는 아우렐리우스의 권유에 막시무스는 자신은 이번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다며 제의를 거부한다.

 

당시 로마인들은 지도자가 되기 위한 자질로 가족보다 국가를 우선에 놓는 공복의식을 가장 중요히 여겼다고 한다. 더군다나 아우렐리우스 같이 공과 사를 분명히 하는 황제였다면 막시무스의 이 대답을 듣는 순간 자질부족으로 판단 '대권?후보리스트'에서 제외시켰을 거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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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rcus Aurelius

 

우리에게 아우렐리우스를 친근하게 만든 또 하나의 인물은 바로 이회창 씨다. 92년 대선에 김대중 후보에 맞서 출마했던 이씨는 TV토론에서 감명깊게 읽은 책이 뭐냐는 질문에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이라고 답한다. 김대중 씨가 김구선생의 백범일지 라고 답해 지극히 평범하고 서민적인 이미지를 연출한 것에 비해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당시 이회창 씨 보좌진들은 이씨의 그 답변 때문에 몹시 당황해 했다고 한다. 유권자 중 도대체 몇명이나 생전에 아우렐리우스 라는 이름이나 들어 보았을 것이며 설령 그의 명상록을 읽어보았다고 해도 이회창 씨의 지적인 면을 높이사기 보다는 그저 잘난척 하는 것으로 간주 거부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 명상록 답변 때문에 대략 백만표는 날아갔을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실제로 이씨는 선거에 졌다.

 

이회창 씨가 안읽은 책을 읽었다고 거짓말 하지는 않았겠지만 요즘 보여주고 있는 그의 작태를 볼 때 명상록을 제대로 읽은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지하에 있는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의 책을 감명깊게 읽었다는 사람이 저런 행동이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정말 어이없어 할 것이다.  

 

기독교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에서 고대 로마인들과 그들의 역사는 은근히 소외받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고대 로마제국의 유산은 현재 서구문명의 뿌리이자 주춧돌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석상 발굴소식을 계기로 로마사를 한번 관심있게 읽어본다면 유럽과 미국문명을 보다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을 뿐더러 덤으로 그들의 공세에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도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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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영혼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121∼180) 


노예에서 황제까지: 스토아 철학의 힘 
뒷골목 건달과 영웅의 차이는 힘에 있지 않다. 힘세고 싸움 잘하는 것으로 친다면 뒷골목 건달이 영웅호걸보다 더 뛰어날 수 있다. 그러나 건달은 건달 이상이 되지 못한다. 늙고 병들거나 더 주먹 센 사람이 나타나면 사정없이 비난받고 짓밟히는 불쌍한 존재가 되고 만다. 그러나 영웅은 힘을 잃어도 여전히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권위와 명예를 잃지 않는다. 
건달과 영웅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바로 명분과 도덕심에 있다. 건달은 결국 자신과 똘마니들만을 위해 살지만 영웅은 진정 "정의를 위해" 산다. 따라서 영웅이 힘없이 무너진다해도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하며 따르는 것이다. 로마는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帝國)의 역사만도 1,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나라였다. 로마가 단순히 힘만 센 국가였다면 이렇게 오랜 기간 이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치 힘만 센 뒷골목 건달처럼 말이다. 로마는 사람으로 친다면 '영웅호걸'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국가였다. 그렇다면 로마제국을 '영웅호걸'로 특징 지웠던 명분과 도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스토아(Stoa) 철학이다. 역사상 스토아 철학만큼 한 시대의 모든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던 이념은 드물다.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중에는 에픽테투스(Epictetus)같은 노예출신도 있고 세네카(Seneca)같은 정치인도 있으며 이 달에 살펴볼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21∼180)같은 황제도 있었다. 노예부터 황제까지 제국의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던 스토아 철학은 로마를 진정한 강자(强者)로 만든 숨은 힘이었던 것이다. 

"황금시대"에 태어난 꼬마 철학자 
이제 이야기를 이 달의 주인공 아우렐리우스에게로 돌려보자. 아우렐리우스는 121년,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태어났다. 당시 로마는 하드리아누스(Hadrianus) 황제 아래 최고의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구석구석 살피는 꼼꼼한 어머니 밑에서는 가정이 번창할 수밖에 없는 법, 하드리아누스는 제국 이곳저곳을 세심히 챙기느라 일평생을 '출장' 다녔던 황제로 유명하다. 황제가 출장을 마치고 오랜만에 로마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황제 로마 귀환 기념 주화"라는 희한한 화폐를 찍어냈을 정도로 말이다. 수도에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겠지만 치밀한 하드리아누스의 눈에 황제가 될 '재목'이 눈에 안 띄었을 리 없다. 그 재목은 바로 아우렐리우스였다. 
아우렐리우스의 집안은 할아버지가 최고 관직인 집정관을 3 번이나 지냈을 정도의 명문이었다. 다만, 할아버지만큼이나 유명했던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그는 외가에서 자라고 있었다. 전해오는 기록에 따르면 확실히 아우렐리우스는 황제가 사랑할 만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그는 밤늦게까지 공부에 몰두했고 타고난 건강체질은 아니었지만 달리기, 레슬링, 매사냥 등으로 신체를 단련하는 데도 열심이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는 어린이를 기특하게 여기지 않을 어른이 얼마나 있겠는가? 게다가 아우렐리우스는 철학적이기까지 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지나친 욕심과 쾌락추구는 결국 고통으로 연결된다고 보고, 어떠한 유혹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Apatheia)을 강조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스토아의 가르침에 따라 엄격하고 절제된 생활을 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이미 십대 무렵부터 깨달은 바 있어 따뜻한 침대를 버리고 항상 차가운 바닥에서 잠을 잤고, 최고의 오락거리였던 검투사 경기와 마차경기도 멀리했다고 한다. 
이런 '꼬마철학자' 아우렐리우스의 '금욕적인' 태도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마음에 꼭 드는 것이었다. 황제는 그를 무척이나 귀여워하여 '베르시무스(Versimus)'라는 별명으로 부르곤 했는데, 이 말을 우리 식으로 표현한다면 "정말 진국인 아이" 정도가 될 듯 싶다. 

황제가 될 때까지 
황제는 아우렐리우스를 교육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이 '꼬마 철학자'가 최고 수준의 교사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 그 결과 아우렐리우스를 가르쳤던 스승만도 열 일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어느 사회에나 사회 지도층이 되기 위한 "엘리트 코스"가 있는 법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이 엘리트 코스를 충실하게 밟아 나간다. 여덟 살 때 이미 제사장이 되었고 이후 재무관, 집정관, 호민관, 원로원 의원 등의 출세가도를 순조롭게 밟아 나간다. 실로 황제의 배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출세 속도였다. 
확실히 황제는 그를 후계자 감으로 생각했던 같다. 이 점은 젊어서 죽은 하드리아누스의 양아들이 남긴 딸과 그를 약혼시킨 점에 있어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 '꼬마 철학자'가 하드리아누스의 다음 황제가 되기에는 너무 나이가 어렸다. 꼭 이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이 현명한 황제는 후계자로 52세의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를 지명하고 그를 자신의 양아들로 받아들인다. 단, 안토니우스가 아우렐리우스를 다시 양자로 받아드리는 조건으로 말이다. 이로써 지금으로 보아서는 조금은 해괴한 '가족'이 생겨나게 되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나이차이는 열 살밖에 나지 않았고, 아버지는 새롭게 얻은 '아들'이 마음에 들어 할아버지가 맺어준 약혼을 깨버리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나 가족 구성은 '해외 토픽감'이었을지 몰라도, 이 가족을 구성한 할아버지의 선택은 '정치적으로' 정확하고 올바른 것이었다.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는 정말 훌륭하고 뛰어난 황제였다. 그가 다스리던 시대의 역사적 사실은 알려진 것이 많지 않은데, 그 이유는 이 시기의 로마가 너무도 안정되고 평화로워서 도무지 '기사화' 될 만한 사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를 사람들은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라고 불렀다. 이는 '경건한 안토니누스'라는 뜻이다. 그는 '경건'이 별명이 될 정도로 도덕적인 사람이었고 또한 이성적인 삶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스토아의 가르침에도 충실한 사람이었다. 이런 성품은 '아들'을 가르치는 데도 그대로 나타났다. 
한 번은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을 가르쳤던 가정 교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울고 있었다. 이를 본 안토니누스는 다음과 같이 아들을 위로한다. 

"...현명한 이의 철학도 황제의 권력도 감정을 절제하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때가 있단다. 그럴 때에는 네가 사나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참을 수밖에 없지..."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세상일은 모두 우주적 이성(Logos)에 따라 결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해도 슬퍼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그렇게 되도록 결정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어난 어떤 일 때문에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것은 마음의 평온을 깨는 어리석은 일일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logos)을 발휘하여 우주적 이성(Logos)의 깊은 뜻을 깨달아 기쁨도 슬픔도 없는 마음의 평화, 즉 부동심(不動心:Apatheia)을 찾아야 한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가르침대로 평생을 살았다. 후에 자식을 잃은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자기자신을 타일렀다고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렇게 묻는다. 내 아이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지만 그대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이겨낼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참으로 강하고 건전한 삶의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위기와 시련에 처해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로마인의 강인함은 바로 이러한 스토아의 이념에 있었다. 

흔들리는 팍스 로마나 
161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숨을 거둔다. 이로써 이제 마흔 살의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그가 물려받은 제국은 겉으로 보기에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그 자체였다. 전쟁도 없었고 경제도 번창했다. 그러나 겉모습만 그랬을 뿐 로마는 이미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빈부의 차이가 심하게 벌어졌고, 세금과 착취를 견디다 못한 중소 농민들이 토지를 버리고 수도 로마로 몰려드는 바람에 수많은 사회 문제를 낳고 있었다. 제국은 가진 자들의 횡포를 막지도 못하고 못 가진 자들의 생계를 안정시키지도 못한 채 속주에서 들어오는 수입을 이용한 '빵과 서커스'로 사회 불만을 겨우 잠재우고 있는 형편이었다. 아우렐리우스는 뛰어난 행정능력으로 위기의 로마를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이는 무너지려는 둑을 주먹으로 막는 것만큼이나 위태로운 것이었다. 
162년, 로마의 '전통적인 라이벌' 파르티아가 침략해 온다. 그러나 철학자 황제는 전쟁에도 능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쉽사리 파르티아를 격파했을 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확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승리와 정복은 예상치 못한 재앙을 가져왔다. 이 지방에서 유행하던 페스트가 제국으로까지 흘러 들어온 것이었다. 곳곳에서 역병이 돌았고 수많은 시민이 죽어갔다. 또 큰 홍수가 거듭하여 일어나기도 했다. 나아가 166년에는 게르만족이 제국의 방위선인 다뉴브 강을 돌파했고, 168년에는 사르마텐 족이, 169년에는 무어인이 국경을 넘보았다. 아우렐리우스는 이 모든 사태를 수습하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명상록}, 그리고.... 
그러나 아우렐리우스는 그 가운데서도 철학자였다. 그의 명작 {명상록}은 반란과 침략을 막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시절에 군대 막사나 전쟁터에서 쓰여진 것이다. 이 책에는 원래 "내 자신을 훈계함"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 책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보내는 훈계였던 셈이다. 인간의 잔인성이 판을 치는 황량한 전쟁터에서도 아우렐리우스는 끊임없이 이성을 일깨우고 마음의 고요를 찾는 철학자의 면모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명상록} 곳곳에는 그의 인간적인 번민과 철학적 사색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세계는 우주에 비하면 미세한 점에 불과하고, 인간의 삶도 찰나일 뿐이다....인생은 투쟁이고 세계는 낯선 이를 위한 임시 수용소일 뿐이며, 죽음 뒤에 얻은 명성은 허무하다. 그런 우리에게 유일한 버팀목은 철학뿐이다. 철학은 우리 자신 속에 거룩한 정신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고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은 악이 아니라 우리의 운명일 뿐이라고 말해 준다....우주적 이성에 따라 일어나는 일은 결코 나쁜 일일 리 없다..." 

"인간은 서로를 위해서 존재한다." 
계속되는 전쟁과 자연재해로 로마의 재정상태는 점점 어려워져만 갔다. 아우렐리우스는 부족한 재원을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거나 침략을 통해 약탈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으로 한다면 '자선 바자회'라 할만한 것을 실시한다. 황제가 가지고 있던 보석부터 일상 생활에 쓰이는 가구까지 모두 거리에 내놓고 팔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는 위기에 부딪혔을 때 국가 지도자가 제일 먼저 앞장선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상징적인 행위였겠지만 로마시민을 감동시키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데는 크게 효과가 있었던 듯싶다. 이제 로마의 원로원은 그에게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선사한다. 
또한 아우렐리우스는 매우 관대한 사람이었다. 175년, 반란을 일으켰던 시리아의 총독 카시우스(A.Cassius)를 부하장교들이 죽였을 때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베어진 목을 직접 보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카시우스와 다른 이들 사이에 오간 반란에 관한 수많은 편지들을 읽어보지도 않고 모두 불태워 버렸다. 
사실 그의 관대함은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이성(logos)'를 가지고 있다. 이 이성은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우주적 이성(Logos)'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은 피부가 하얗건 거멓건, 라틴어를 쓰건 게르만어를 쓰건 간에 모두 존중해 주어야 할 소중한 존재이다. 내가 이성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으로서 존엄하다면 이성을 가지고 있는 상대방도 존엄하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로마가 내세우던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는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인간의 이성이 모두 '우주적 로고스'에 따른다면 다른 민족의 이성적 인간들이 만든 법도 로마법과 마찬가지로 존엄한 것이다. 그렇다면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본래 있는 것이 민족과 문화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이는 우리가 말하는 자연법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다른 민족의 합리적인 문화나 풍습도 우주적 로고스에 따르는 것으로 당연히 존중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정복이란 곧 약탈과 파괴를 의미했던 고대 문화 속에서도 로마만큼은 오히려 정복당한 민족을 나와 같은 이성을 가진 '동포'로 보고 보호하고 존중했다. 로마의 대 제국은 이러한 스토아 철학의 포옹과 관용 위에서 가능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제국의 이념에 너무도 충실한 사람이었다. 

아우렐리우스의 죽음, 그리고 제국의 몰락 
이제 아우렐리우스에게도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다. 항상 전쟁과 재앙에 시달리던 이 고단한 황제에게 180년, 다시금 도나우 강변이 시끄러워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는 게르만의 침략이 단순히 약탈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북쪽에서 접근하는 또 다른 민족의 공격에 밀려 제국으로까지 넘어오는 것임을 간파했다. 그래서 이들을 로마 국경 안에 정착시키고 질병으로 인구가 줄어든 제국의 새로운 노동력으로 삼으려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나아가 아우렐리우스는 도나우 방어선을 넘어서까지 새롭게 영토를 넓힘으로써 아예 제국이 다시는 게르만 문제로 골머리를 썩히지 않도록 하는 '최후의 전쟁'을 벌이려고 했다. 그러나 우주적 이성은 이러한 황제의 뜻을 받아드려 주지 않았다. 게르만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페스트로 쓰러지고 만다. 
죽음의 순간에도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자다운 담대함을 잃지 않았다. {명상록}에 나오는 한 구절은 그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이제 헤어지는 마당에 남은 사람들을 고약하게 대하지 말라...그대의 가족과도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지 말고 부드럽게 이별하라. 자연(우주적 이성)이 그들을 그대와 결합시켰듯이 이제 자연이 다시 그대를 그들과 떼어놓고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죽음 후, 황제 자리는 철학자 아버지와는 다르게 야비하고 잔인한 성격의 아들 코모도스(Comodos)에게 넘어가게 된다.(큰 성공을 거두었던 영화 "글레디에이터(Gradiator)"는 이런 시대 배경을 소재로 한 것이다) 아우렐리우스에게는 원래 많은 자식들이 있었으나 모두 병으로 죽고 코모두스 만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현명한 아우렐리우스였다고 해도 이러한 '최악의 경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듯 싶다. 아들은 파탄에 이른 로마를 아버지만큼 기술적으로 통치하고 조절할 만한 능력이 없었고, 이후 로마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자연을 따르라." 
스토아철학은 원래 기원전 4세기 말, 그리스 철학자 제논(Zenon)에 의해 출발한 철학이다. 원래 스토아철학은 혼란한 사회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고 한 은자(隱者)의 철학이었다. 그러나 명상과 깨달음을 강조한 불교가 역사상 많은 국가에 있어서 통치이념이 되고 반성과 봉사를 강조한 기독교가 서양 중세를 지배한 이념이 되듯이 스토아철학도 개인의 깨달음을 넘어선 대제국의 통치이념으로 발전해 나갔다. 개인을 훌륭하게 만드는 철학은 사회도 훌륭하게 만들 수 있음을 역사가 증명해준 셈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삶은 우리에게 철학적 반성을 통해 성숙한 개인은 또한 훌륭한 사회 지도자도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항상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자신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라. 이것이 수학 한 문제 더 풀고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는 것보다 더 여러분들을 훌륭한 사회 지도자로 만들어주는 길일 것이다. 아우렐리우스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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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집문당 교양선 12, 김병호 옮김, p 205
 이번 책 소개는 지금 거의 상영이 끝나려는 영화 "글래디에이터 Gladiator"로 시작하려 한다. 30 년 전 거의 동일한 내용의 영화가 "로마제국의 멸망"이라는 제목으로 제작되었었다. 물론 두 영화 모두 세 번째 소개한 책인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기본 줄거리로 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이 영화의 감동이나 가치, 그리고 웅장한 기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 편의 영화나 그림, 음악, 책에서 받는 감동은 개인적인 것이어서 남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단지 여기서는 다른 기록과 비교하여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창조력[?]을 발휘하였는지를 검토해 볼 뿐이다. 또한 영화의 스토리와 역사적인 사실을 혼동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시작되는 기원후 180 년 기번이 아래와 같이 말한 시대이다.
 "만일 세계사에서 인류가 가장 행복하고 또 번영했던 시기는 어느 시기였는가를 질문받는다면, 사람들은 아무런 주저 없이 아마 도미티아누수 황제의 사망(96 년)부터 코모두스 황제 즉위(180 년)까지의 시기를 들 것이다(네르바 황제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이르는 이른바 5 현제(賢帝) 시대이다). 이때는 광대한 로마제국의 전 영토가 덕과 지혜로써 지도된 절대권력 밑에 통치되고 있었다."[로마제국의 쇠망, 1 권, p 123]
 처음으로, 영화와 역사가의 견해가 다른 점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주제 중의 하나인 아우렐리우스 황제(121 - 180; 참고로 삼국지의 유비는 161 - 223 이다)와 코모두스의 관계이다. 기번은 코모두스를 망친 것은 아루렐리우스의 편애, 과중한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영화에서는 코모두스가 폭군이 되는 이유가 아버지 아우렐리우스의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이제 겨우 14 - 15 살밖에 되지 않은 그(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을 황제 권력의 거의 모든 분야에 관여시켰던 것이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가장 사랑을 받았던 아들이 원로원과 군의 환호속에서 즉위하였다. 그가 행복한 젊은이를 왕위에 오르게 했을 때 그 주위에는 단 한 사람의 배제해야 할 경쟁자도 없었거니와 벌줄 적대자도 없었다."[P 131]
 이 아들 코모두스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었다.
 또한 백과사전 브리태니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77년 마르쿠스는 16세의 아들 코모두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했다. 그들은 협력하여 도나우 강 전쟁을 다시 시작했다. 마르쿠스는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제국의 북쪽 국경선을 확장·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180년 마르쿠스가 아들 코모두스를 국정의 최고 조언자로 임명하고 난 직후 군대 사령부에서 숨을 거두었을 무렵 거의 결실을 맺고 있었다."
 영화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코모두스는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계속 전쟁을 하고 있었으며, 그를 완전한 후임자로 임명한 후에 아우렐리우스가 죽은 것이다.
 기번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황인 마르쿠스의 사후까지 코모두스는 대병단의 지휘와 콰디족 및 마르코반족을 상대로 어려운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P 132]
 또한 기번은 영화의 주인공의 하나인 황제의 딸 루실라(Lucilla)에 대해서 영화와 전혀 다른 진술을 하고 있다.
 "183 년 어느날 밤, 코모두스가 자기의 숙소인 내전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어둠에 잠긴 콜로세움의 좁은 주랑(柱廊)을 막 벗어나고 있을 때, 잠복하고 있던 한 자객이 검을 빼어 들고 습격하였다. ...
 코모두스 황제의 누님이며 루키우스 벨루스의 미망인인 루실라가 제국의 서열 3 위의 지위에 있는 것이 미흡하여 참지 못한데다가 황후인 파우스티나에 대한 질투심까지 결부되어 이처럼 자객을 무장시켜 동생 [코모두스]의 생명을 노리게 했던 것이다. 아무리 그녀라 해도 이 무서운 음모에 대하여 현재의 남편이며, 유능한 원로원 의원이자 충성스러운 인물이기도 한 클로리우스 폼페이아누스[이 사람은 영화에 나오지 않으나 여기 언급되는 모든 인물 중 가장 오래 살아 남은 사람이다]에게 이 행동을 상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 그녀의 정부들 중에는 무모하기 그지없는 야심가들도 있었는데 이런 자들은 그녀의 바람기뿐만 아니라 보다 광기어린 집념에까지 기꺼이 봉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런 음모자들은 물론 엄벌을 받았다. 그리고 파렴치한 루실라도 처음에는 유형에 처해졌으나 뒤이어 사형을 받았다."[p 133]
 즉 루실라가 먼저 코모두스를 암살하려 하였으며, 영화와 달리 코모두스보다 먼저 죽었다.
 물론 코모두스가 좋은 황제였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 중 막시무스[Maximus]가 있다. 이 사람과 영화의 막시무스는 동일 인물이 아닐 수 있다.
 "이와 같은 폭정에 쓰러진 무고한 희생자 중에서도 가장 애처롭게 여겨지는 것은 퀸틸리아누스가의 형제들인 막시무스와 콘디아누스 두 사람이다. 이 두사람의 형제애는 그 이름이 오랫동안 망각되었다가 빛을 보게 되어, 후세에까지 향기로운 회상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 막대한 재산을 이어 받았는데도 두 사람에게는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생각 따위는 털끝만큼도 없었고, 이 형제가 협력해서 쓴 한 논문('농업론'이라 하는 것)이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지만, 일생동안 무엇을 해도 두 사람은 완전히 일심동체였다. 이들의 덕행을 존중하고 그들의 화목한 우애심을 기뻐한 두 안토니우스 황제[임주(任註); 아우렐리우스의 전임황제와 아우렐리우스]들은 한날 한시에 두 사람을 모두 집정관으로 임명하였었다. 그후 마르쿠스 황제는 다시 그리스 속주의 민정과 군사권을 이들 두 사람의 공동관리로 위임했는데, 여기서도 이들은 게르만인과의 전쟁에서 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동정심이 많았던' 코모두스 황제의 잔인성은 마지막 죽음에 있어서까지 이 두 사람을 '일심동체'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p 134]
 막시무스가 게르만과의 전쟁에서 대 승리를 거둔 것이 이 영화의 몇 안되는 진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는 코모두스에 의해 사형당했다.
 영화에서 막시무스의 자식과 부인이 십자가에서 화형을 당했다는 것은 사실이기 어렵다. 로마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것은 노예나 로마 시민이 아닌 경우에 한하였다. 그러므로 로마의 체제에서 아무리 폭군 코모두스라 하여도 장군의 아내와 어린 아들을 재판 없이 십자가형에 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지 친위대를 시켜 원로원 의원에게 자살을 명한 것은 역사책에 나온다. 로마인이 법 체계를 존중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 시민이라는 이유로 십자가형을 받지 않았다.
 코모두스가 결정적으로 로마 시민들의 인심을 잃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이다.
 "투기장의 우리에서 100 마리의 사자가 단번에 내몰려 나온 일도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손에서 던져진 100 자루의 투창은 그 사자 무리가 투기장 안을 날뛰며 돌아 다니는 사이에 단 한 자루의 빗나감도 없이 모두를 맞혀서 한 마리 남김없이 사체로 만들고 말았다. 거대한 덩치의 코끼리 몸뚱이도, 코뿔소의 가죽도 그가 던지는 창끝을 막아낼 수 없었다. ...
 그러나 하층계급의 일반민중들조차 이것을 너무 지나친 행위라하여 분노와 치욕감을 느낀 것은, 자기 황제가 하필이면 일개 검투사로 분장하고 등장해서 국법이나 습관도 천한 직업으로 낙인찍어 놓은 그런 직업인의 흉내를 마치 자랑스러운 듯이 연출했을 때였다.
 ... 황제는 투기사 역을 담당하여 실로 735 회나 싸웠다."[p 142]
 실제로 코모두스는 상당히 훌륭한 검투사였다. 영화의 막시무스가 앞에서 설명한 그 막시무스라면 코모두스에게 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30 년 전의 영화에서는 위의 사실을 위해 마지막의 황제의 싸움을 투창으로 하는 것으로 꾸몄다. 물론 그 영화에서도 코모두스가 죽지만 비겁한 승부는 아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악인을 더 비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세상에 날이 갈수록 비겁한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일까?
 코모두스는 여러 사람들을 죽이더니 드디어는 자기 측근에게 죄를 씌워 죽이기 시작하였다. 코모두스의 죽음에 대해서 기번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윽고 그의 가족들조차 공포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운명도 끝장이 났다. 동료나 선임자의 죽음을 보고 깜짝 놀란 애첩(愛妾) 마르키아, 시종무관장 에클렉투스, 근위대 장관 레투스, 이 세 사람이 포악한 군주의 바보같은 변덕으로 혹은 갑작스런 국민의 분노로 언제 [자기들의] 머리위에 떨어질 지 모를 죽음의 운명을 저지하기로 결의하였다."[p 144]
 시종무관장과 근위대장과 더욱이 애첩까지 황제의 반대편에 가담했다는 것은 실제로 황제 주위 사람들이 모두 이반(離叛)한 것이다.
 "때는 마침 황제가 동물사냥으로 기진맥진하였을 때였다. 포도주 한 잔 권하는 기회를 마르키아가 이용하였다. [독약을 먹였다] 황제는 침실로 물러났으나 점차 독과 취기가 온몸에 퍼져서 신음하고 있을 때 갑자기 역기(力技)를 직업으로 하는 건장한 젊은이 한 사람이 침실로 들어와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않고 황제를 목졸라 죽이고 말았다. 시내는 물론 궁중에서도 황제가 죽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는 사이에 사체가 비밀리에 황궁으로부터 밖으로 운반되어 나왔다. 바로 이것이 현명한 군주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외아들 코모두스 황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온갖 권력을 휘둘렀고, 재위 13 년간에 몇 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의 생활을 폭력으로 억눌러 온 대상이던 이 폭군을 쓰러뜨리는 일은 이처럼 매우 간단했던 것이다.(디오-카시우스, '로마사' 제 73 권 22 절, 헤로디아누스, '로마사' 제 1 권, '황제열전' 제 7 권 제 17 절)[p 144]
 적어도 코모두스는 경기장에서 죽지 않았다.
 여하튼 코모두스는 자기 아버지에 비해 논의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들을 영화 제작자는 매우 좋아하는 것 같다.
 
 이제 명상록으로 돌아가자. 나는 여러분이 이 사람을 황제가 아니라 홀로 선 한 사람의, 고독한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이 고백록을 읽어주기를 바란다.
 기원 후 백년 경에는 두 사람의 대(大) 스토아 철학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노예로 에픽테토스이고, 또 한 사람은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다.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은 로마인의 위엄을 간직하고 견실한 생활을 이끌어 나가는 데 크게 힘이 되었다.
 백과사전 브리태니커에는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가 있다. "철인왕(哲人王)의 사상이 담겨 있는 〈명상록〉은 오랜 세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왔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에 관한 백과사전의 내용이 매우 많아 본문 다음에서 소개하였고, 여기서는 스토아 철학에 대한 간단한 내용만을 소개한다.
스토아 철학   Stoicism  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철학.
 모든 탐구의 목표는 평온한 마음과 확실한 도덕을 낳는 행동양식을 인간에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토아 철학의 특성과 영역
 초기 스토아 철학은 이전 철학과 달리 지식의 추구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헬레니즘 철학을 대표한 스토아 철학은 보편적이고 평온하며, 질서있는 존재와는 거리가 먼 생활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삶의 방편(ars vitae)을 내놓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보기에 영원한 우주질서와 불변적인 가치의 근원을 드러내는 일은 이성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은 곧 인간 존재가 따라야 할 모범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이성의 빛이란 세계 전체에 경이로운 질서를 부여하며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하여 질서있게 살아가는 기준이다. 스토아 도덕철학도 세계가 통일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도시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은 이 도시의 충성스런 시민으로서 덕과 올바른 행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 일에 적극적이어야 할 의무가 있다. 스토아 도덕철학은 도덕 가치, 의무, 정의, 굳센 정신 등과 같은 덕목에 중심을 두고 보편적인 우애와 신처럼 넓은 자비심을 강조함으로써 가장 호소력 있는 학설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스토아 학파는 처음 형성된 후 2세기까지 그 영향력이 가장 컸으며, 이후 사상의 발전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후기 로마 시대와 중세에 이르는 동안 스토아 도덕철학의 일부는 그리스도교·유대교·이슬람교 등이 인간과 자연, 국가와 사회, 법과 제재에 관한 이론을 형성하는 데 적용되었다. 현대에 와서도 스토아 철학의 개인중시 사상 및 갈등과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설은 실존주의와 비정통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다시 주목받았다.

책 내용
<1>
1. 나는 조부 베루스에게서 선량한 행실과 격정의 절제를 배웠다.
2. 아버지의 명성과 회상에서 겸손과 남성적인 기질을 배웠다.
3. 어머니에게서는 경건과 인덕(人德), 그리고 나쁜 행위뿐만 아니라 나쁜 생각도 버려야 할 것을 배웠으며, 부자들의 습성에서 멀리 떠나 소박하게 사는 방법을 배웠다.
[임성삼의 주(註); 이 것 이상의 배움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위의 배움은 우리 모두가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4. 증조부로부터는 공립 학교에서 공부하지 않고, 가정에서 훌륭한 스승을 모셔 배우되, 이런 일에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함을 배웠다.
[임성삼의 주(註); 동양에서는 훌륭한 스승을 찾아가 배웠으나 서양에서는 집에 모셔서 배웠다. 결국 현재 문화가 깊은 나라들에서 말썽인 과외공부가 그 시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5. 나의 스승에게서는 경기장의 경주에서 청(靑), 백(白)의 어느 편을 들어서도 안되며, 또 검투사(劍鬪士)의 격투에서는 둥근 방패를 든 편을 들어서도 안 되고 모난 방패를 든 편을 들어서도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노역(勞役)을 견디고, 욕망을 줄이며, 자기 손으로 일을 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며 남의 비방에 귀를 귀울여서는 안된다는 것도 가르쳐 주셨다.
[임성삼의 주(註); 스승에게서는 불편부당(不偏不黨)하며, 참된 인간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6. '디오그네투스'에게서는 번거로운 일에 열중하지 말 것,
[임성삼의 주(註); 번거로운 일에 열중하면 더 중요한 일을 할 수 없다.]
주문(呪文)인 악귀를 쫓는 마술사나 요술가의 말을 믿지 말 것,
[임성삼의 주(註); 이것을 믿게 되면 자신의 이성을 믿지 않게 된다. 자기의 판단력이 없어지는 것이다.]

싸움을 시키기 위한 [독]수리 등속을 기르거나 이러한 일에 열중하지 말 것,
[임성삼의 주(註); 지금으로 말하면 사냥, 낚시 등의 취미생활을 말한다.]
언론의 자유를 용인하고 철학을 숭상할 것, 특히 우선 '바키우스'를 비롯하여 점차로 [여러 좋은 선생의 가르침을 받을 것] 등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결과 어릴 적부터 대화하는 것을 배우고, 널판 침대와 가죽 옷, 그 밖의 그리스식 단련에 속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7. 루스티쿠스에게서는
[임성삼의 주(註); 앞으로 계속 이렇게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물론 그 당시에는 중요한 사람들이었겠으나 우리에게는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말한 내용이 더 중요하다.]
나 자신의 성격을 바로잡고 또한 수양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배운 것은 궤변의 시합이나 공리공론(空理空論)의 붓을 들거나, 번거로운 권고의 변설을 휘두르거나, 또는 많은 수양을 쌓은 것처럼 자기를 과시하거나, 허식적인 자선(慈善)행위를 하는 이러한 그릇된 길에 빠지지 말고, 또한 수사학이나 시와 노래나 화려한 문자를 배격하는 것 등이었다.
[임성삼의 주(註); 친구에게서 좋은 것을 배웠다.]
 또한 외출복의 정장을 한 채로 방안을 걸어다니거나 이와 유사한 일을 하지 말며,
[임성삼의 주(註); 예절은 집에서도 지켜야 한다. 집에서는 집의 옷을 입는 것도 중요한 예절이다.]
편지를 쓰되 "시누에사"라는 곳에서 어머니에게 써 보낸 것처럼 소박하게 쓸 것,
나를 모욕하고 또 무례한 짓을 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들이 화해의 뜻을 표하면 곧 마음을 풀고 융화할 수 있는 기풍을 기를 것,
[임성삼의 주(註); 단지 무례한 자가 화해의 뜻을 표하기 전에 그들에게 내가 아첨으로 화해의 뜻을 전해서는 안된다.]
무릇 책은 정독하여 표면적인 이해에 만족하지 말 것,
[임성삼의 주(註); 이를 위해 나는 현재 거의 모든 책의 중요한 구절을 적어 여러분에게 보내고, 이런 주석을 붙이는 것이다.]
말이 많은 사람들에 대하여는 경솔하게 맞장구를 치지 말 것 등등을 가르쳐 주었다.  .....
8. 아폴로니우스에게서는
의지의 자유와
끝까지 목적을 관철하는 것을 배우고
또한 한동안이라도 이성(理性)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의지하지 말며,
심한 고난을 당하거나 ...
오랫동안 질병으로 고생하더라도 언제나 태연자약(泰然自若)한 태도를 취할 것,
[임성삼의 주(註); 참 어려운 것을 배우셨다.]
그리고 용감무쌍한 동시에 매우 유순하며
자제(子弟)를 가르칠 때는 성급해서는 안 된다는 산 실례(實例)를 분명히 찾아볼 수 있었다.
또한 철학상의 여러 가지 큰 원리를 해설하는 것과 같은 자기의 경험 또는 숙련 등은 조그만 재능에 불과하다고 분명히 자각하고 있는 것을 그에게서 발견하였다.
 뿐더러 친구의 신세를 지면서도 결코 비굴해지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무관심하게 관과하지 않는 태도를 역시 그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9. 세크스투스[플루타르크의 손자, 혹은 조카]에게서는
인자스러운 성격과 자부(慈父)의 미덕에 의해 가꾸어진 가정의 본보기와,
자연에 순응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또 허식이 없는 엄숙한 태도며,
친구들의 이득을 자상하게 고려하고,
무지한 사람들이나 분별없는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는 것 등을 배웠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나, 유쾌한 얼굴로 대하여, 자기를 융화시키는 재능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와의 교제는 어떠한 아부보다도 즐거웠으며,
그 때문에 그는 교제하는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실생활에 필요한 처세의 강령을 발견하는 동시에,
그것을 총명하고 조직적인 형식으로 질서를 세우는 재능도 갖고 있었다.
그는 분노는 물론이고 어떠한 감정도 절대로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모든 감정에 벗어나 있으면서도, 애정이 매우 깊었었다.
그는 떠들썩하게 과시하지 않고서도 칭찬의 의사를 표시할 수가 있었으며, 허식없는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10. 문법학자 알렉산더에게서는
남의 흠을 잡기를 삼가며,
천한 말이나 그릇된 문법이나, 이상한 발음으로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방하지 않고, 오히려 그 경우에 사용해야 할 올바른 표현을 교묘히 가르쳐 주되 직접 그 말로써가 아니라 다만 이에 대한 답변이나, 찬동의 표명이나 또는 질문과 같은 형식을 빌어서 시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11. 프론토우에게서는,
폭군이나 군주에게 어떤 질투와 위선이 존재하는가를 간파할 것과,
[임성삼의 주(註); 폭군과 군주를 동일하게 취급한 것을 인정하자.
어떤 기관이든지 기관장의 성격에는 동일한 면이 있다.]
우리 사이에서 귀족이라고 부르고 있는 자들에게는 대체로 자부(慈父)의 성격이 결핍되어 었음을 간파할 것을 배웠다.
[임성삼의 주(註); 프론토우는 나와 비슷한 성격의 사람이었을지 모르겠다.]
12. 플라톤학파의 알렉산더에게는
자기에게 여가가 없음을 남들에게 때때로, 그리고 부질없이 말하거나, 또는 그것을 편지로 써 보내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급한 일에 몰린 것을 구실로 삼고, 친한 사람들과의 교제에 필요한 의무를 게을리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도 배웠다.
13. 카테울스에게서는
어떤 친구가 자기의 결함을 발견한 경우에, 비록 그것이 무리한 억지라고 하더라도, 이를 모른 체 방임하지 말고, 그 사람을 본래의 성품으로 돌아가게 하도록 힘써야 함을 배웠다.
그리고 스승들에 대하여는 도미티우스와 아케노도투스의 고사(故事)를 본받아 언제나 옳은 말을 하고,
또 자기의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할 것을 배웠다.
14. 사랑하는 형제[역주(譯註); 저자는 형제가 없었으므로 사촌 정도였을 것이다] 세베루스에게서는
자기의 친족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며, 정의를 사랑할 것을 배우고, 또한 그에게서 트라세야, 헬베디우스, 카토, 디온, 브루터스 등에 대하여 배웠다.
[임성삼의 주(註); 자기의 친족을 사랑하는 것은 '중용'에서도 나오는 중요한 덕목이다.
나중에 나오는 여러사람은 과거 공화정의 인물들이다. 과거의 사람에 대해 배우는 것도 큰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만인을 위해 동일한 법칙이 존재한다는 정치적인 주장, 즉 평등의 권리와 언론상의 평등한 자유를 인정하고 통치하는 사상과 ,피치자(被治者)의 거의 모든 자유를 존중하는 왕자다운 통치의 관념을 배우게 되었다.
[임성삼의 주(註); 그 시대의 이 황제가 지금 민주사회의 대부분의 정치가보다 더 진보적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철학에 대한 자기의 입장은 종시 일관하여 변함이 없어야 하며, 선한 일을 행하고,
기꺼이 남에게 베풀며, 선량한 희망을 품고, 친구들에게서 스스로 사랑을 받고 있음을 믿을 것을 그에게서 배우게 되었다.
그는 자기를 배척하는 사람들에게도 자기의 진의를 감추지 않고 말한다.
그러므로 친구들은, 그의 의향을 억측할 필요가 없이 분면하게 알게 됨을, 나는 그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다.
15. 막시무스에게서는
[임성삼의 주(註); 그 당시 흔한 이름이었으나, 내가 앞에서 소개한 그 막시무스일 가능성이 있다.]
자제를 배우고,
또한 다른 일에 미혹되지 않으며 병들었거나 그밖에 모든 경우에 쾌활하고 상냥하며 무뚝뚝한 어느 덕성이나 적당히 조절하여, 불평을 하지 않고, 자기 일을 처리하는 것을 배웠다
 그는 언행이 일치하고, 그가 하는 일은 모두가 한결같이 악의에서 우러나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아무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놀라는 얼굴을 하지 않았으며, 서두는 법이 없었다.
 그런가하면 무슨 일에나 방치하지 않았으며, 당황하지도 않았다.
 실망하거나 자기의 곤경을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일이 없었다.
[임성삼의 주(註); 사회생활에서 자기의 잘못을 웃음으로 얼버무리면 안된다. 그저 묵묵히 인정하는 것이 가장 나은 길이다.]
언제나 인자스러운 행동을 하였고, 남을 용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모든 허위에서 떠나 있었다.
 그는 연단(鍊鍛)을 받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정의에서 떠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아무도 그에게서 멸시를 당했다고 생각하거나, 자기를 그에 비해 뛰어난 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즐겁게 유머를 곧잘 하는 재능도 갖고 있었다.
[임성삼의 주(註); 적어도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나오는 주인공 막시무스와는 전혀 다른 성격이다.]
16. 나의 아버지[전왕(前王); 양부, 안토니우스 피우스]에게서는 온유한 기질과 사물에 대하여 충분히 생각하고 나서 굳은 결의를 한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었다.
[임성삼의 주(註); 바로 전(前) 로마 황제에 대한 언급이 이렇게 16 번째로 나중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이 분도 또한 로마의 5 현제(賢帝)의 한 분이었다. 아래의 사항을 보면 최고의 인간이었던 것 같다.]
 남들이 명예롭게 생각하는 일에 허영을 구하지 않고, 노고와 정진을 사랑하고, 대중의 이익을 위해 건의하는 사람들의 말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고, 각자의 공과 과에 따라 상과 벌을 주어 일을 불공평하게 처리하지 않는 그 견실(堅實)성, 민활한 행동과 사면(赦免)에 있어서 경험이 풍부한 임기응변(臨機應變)의 지려(智慮) - 그러한 것들을 나는 아버지에게서 보고 배웠다. ...
당신을 일반 시민과 조금도 다름없는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당신의 신하에 대해서도 함께 식사를 나누거나 출타할 때에 필요한 시종 등 모든 의무를 면제시켰다. ...
 아버지는 모든 중요한 일에 대하여 용의주도하고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어, 첫눈에 보이는 외관만으로 만족하여 탐구를 그만두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성격상 친구를 오래 사귀며, 곧 싫증을 내거나 또 애정을 마구 표시하는 일이 없고, 언제나 만족하고 쾌활한 얼굴을 하였다.
 또한 모든 사물을 훨씬 이전부터 내다보고, 사소한 일도 허실없이 미리 준비해 두고, 세속의 갈채나 아부를 재빨리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라의 통치에 필요한 일에 대하여는 언제나 주의를 기울이고, 국고금의 훌륭한 관리인이 되고자 애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당신에게 돌아오는 비난을 참을성 있게 견디곤 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왕으로 오랜 기간을 견딘 사람이 전 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유럽에서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5 황제 시대의 다섯 번째 황제가 네 번째 황제에 대하여. 그러나 그 훌륭한 황제들의 행동이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행동과 다른 점이 별로 없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아버지께서는 제신(諸神)에 대하여 결코 미신적인 일이 없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번 책 소개를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강조한 사항이다. 시오노나나미의 말대로 지도자는 어느 시대든 미신에서 자유롭다.]
 또한 선심을 써서 남의 환심을 사거나, 백성들에게 아부하여 민심을 우롱하는 일도 없었다. 모든 일에 근엄하고 견실하며, 결코 비열한 생각을 하거나 행위를 하는 일이 없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런 능력있는 사람들이 이렇게하여 "로마의 평화"를 마련한 것이다.]
 또한 신기한 기호(嗜好)에 빠지지도 않았다.
[임성삼의 주(註); 언제나 그 시대의 기호에 빠지는 사람이 국가의 수장(首長)이 되면 문제가 생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인 다음 황제 코모두스는 그 당시의 기호인 검투(劍鬪)에 빠져 매일 아침 곰이나 사자를 한 마리씩 죽였다. ]
 그리고 어느 모로나 생활을 즐겁게 하고 행운을 윤택하게 공급하는 것이라면, 자랑하지도 않고 천시하는 일도 없이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
 그를 가리켜 궤변가 또는 교양이 없는 경솔한 사람이나, 현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누구나 그를 보고 원만하고 완벽하며, 특히 아부를 떠나 모든 공사(公私)의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였다.
 또 아버지께서는 진실한 철학자들을 존경하는 한편, 단지 철학자인 체하는 인간에 대하여도 결코 비난하지 않고, 이들에게 쉽사리 속지도 않았다.
 좌담에도 뛰어나, 남에게 불쾌한 태도를 취하는 법이 없고, 좌석의 분위기를 즐겁게 조정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건강에 대하여 상당히 주의하였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삶에 집착하지도 않고, 육신의 외모에 마음을 쓰지도 않았으며, 또 전혀 무관심한 것도 아니었다. 이와 같이 조심하는 까닭에 내과의사의 진찰을 받고 약을 쓰거나, 외과의사의 필요를 별로 느끼지 않았다. ...
 그는 일부러 꾸미는 일이 없이, 국가의 제도와 법률을 지켜 나갔다. 또한 변화와 혼란을 좋아하지 않고, 같은 지위에 머물러 동일한 일을 보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두통이 일어난 후에도 곧 기분을 새롭게 하고, 원기 왕성하여 평소의 사무를 보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비밀이 적었다. 그것은 매우 드문 일이고, 단지 공적인 일에 관한 것뿐이었다.
[임성삼의 주(註);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다음 황제의 진술이니 믿을 수 있다.]
 그는 민중의 구경거리, 관공서의 건축, 국민에 대한 자신의 시여(施輿)물 등에 대하여는 신중하고 경제적이었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할 뿐, 굳이 개인의 행위로 손에 넣을 수 있는 허명(虛名)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정에 없는 시간에 목욕을 하는 법이 없었다. 호화로운 거실을 지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의 음식물과 옷감이나 색깔 또는 비복(婢僕)의 미모에 관심이 없었다. ...
 그에게서는 잔인성, 앙심, 난폭 또는 이른바 식은땀을 흘리게 하는 점은 전혀 없었다. 뿐더러 무슨 일이나 조사에 착수할 때에는 시간 여유가 많은 것처럼, 침착하고 순서를 따라 재빨리 계속적으로 진상을 캐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에 관한 기록, 즉, "많이 소유하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고, 소유하면 남용하게 마련인 재화를, 그는 소유하지 않고서도 견디고 소유하고도 적절히 즐길 수 있었다."는 말을 아버지에게 적용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17. 나는 선량한 조부, 선량한 양친, 선량한 자매, 선량한 교사, 선량한 교우(交友) 및 선량한 친족과 친구 등등, 거의 모든 선량한 것을 소유할 수 있는 데 대하여, 신들(諸神)에게 감사하고 있다.
[임성삼의 주(註); 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있지 않다.]
  또 하나 내가 신들에게 감사하고 싶은 것은, 이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에게나 내가 해를 입히는 과오를 저지르지 않은 점이다.
[임성삼의 주(註); 그러나 황제의 능력이 없는 아들에게 권력을 주고 곧 죽음으로써 로마에 막대한 피해를 미쳤다. 그의 능력 범위 밖이었을까?]
 
 나는 본래 기회만 있었더라면, 이러한 과오를 범할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들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시험에 빠지는 우연의 기회는 한 번도 없었다.
...
 내가 통치자로서 혹은 아버지로서 모신 사람은, 내게서 모든 자만심을 제거해 주고, 적어도 남자로서 호위병이라든가, 호화로운 정장이라든가, 혹은 횃불, 석상(石像) 같은 허식을 필요로 하지 않고 궁정에서 생활하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와 같이 생활할 수 있어야만, 자기를 한 사인(私人)이나 다름이 없는 풍습에 젖게 하면서도, 천한 사상을 갖지 않고, 또 행동을 조심하면서 통치자로서의 알맞은 태도로 공익(公益)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임성삼의 주(註); 로마가 가장 융성한 이 때의 황제의 소박한 생활 모습을 증언해주고 있다.]
 또 다시 신들에 감사할 것은 나에게 준 한 사람의 형제[역주(譯註); 의형제 루키루스 베루스]가 그의 도의적인 성격상 언제나 나를 깨우쳐 주고, 그의 존경과 우애가 나를 기쁘게 하여 주며,
또한 내 자식들은 어리석지 않고, 육신적으로 불구자가 아니며,
[임성삼의 주(註); 하지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 아들 코모두스는 뛰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내가 수사학과 시, 그밖에 다른 학문과 예술에 능통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만일 내가 이런 일에 정진할 수 있었던들, 아마도 나는 거기에 철저히 얽매이게 되었을 것이다. .....
[임성삼의 주(註);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능통하지 못한 것도 복이다.]
 나는 아마도 이상적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터이지만, 앞으로는 자연에 순응하여 사는 것을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육신은 오랫동안 그러한 생활을 영위해 왔었다.
 내가 매우 유순하고, 애정이 깊고, 그리고 단순한 아내를 갖고 있는 것도,
[임성삼의 주(註); 역사적으로 이 황제의 아내이며 전 황제의 딸에 대하여는 여러 말이 있다. 위의 표현에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통설(通說)이다. 뒤에 백과사전에서는 위와 같은 개념이지만...]
내 자식들을 위해 많은 훌륭한 선생들을 초빙한 것도,
[임성삼의 주(註);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1 권의 130 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황제의] 도움을 요청 받고 모여든 학덕 높고 유식한 교육고문들은 소년 '코모두스'의 편협한 마음을 열어주어 점차 심화되어가는 악덕을 교정하여 곧 인수받을 제위에 합당한 인물이 되게 하고자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원래 교육의 힘이란, 처음부터 그런 교육이 거의 불필요할 정도로 본바탕 자체가 훌륭한 인간이라면 또 몰라도, 그렇지가 못한 사람이라면 대체로 거의 효과가 없는 것이 보통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 말이 옳은가? 잘 생각해보자. 역사에는 훌륭한 교육을 받은 인간성이 덜 된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우리 주위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자주 눈에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건실한 체하는 철학자의, 전혀 재미도 없는 강의 따위는 놀기 좋아하는 간신배의 한마다 속삭임에 의해 순식간에 잊혀져 버릴 것은 뻔한 일이었다."
 지성적인 황제와 유능한 학자들이 모든 힘을 다해 교육을 시켜도 인간적으로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경우가 이 코모두스만은 아니다.]
 또 내가 철학에 취미를 갖게 되었을 때 궤변학파(詭辯學派)의 손에 떨어지지 않고 역사가와 삼단논법(三段論法)과 추리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혹은 천체 현상의 관측에 몰두하지 않게 된 것도, 신들의 도움을 받은 덕분이다.
 이러한 모든 일에는 신들과 운명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임성삼의 이야기; 명상록의 1 장을 거의 모두 옮겼다.
 이 장의 첫 부분은 이 황제가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배운 내용이다. 사람은 책에서 보다 주위의 다른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우리도 우리 주위의 분들에게 어떤 좋은 점을 배웠는가를 명상(冥想)해 보는 것이 어떨까?
 상당히 많은 부분을 16 절의 전의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의 성격을 묘사하는 데 사용했다. 이상적인 사람이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하는가를 잘 알 수 있다.
 17 절 이후는 자기가 가진 것들에 대한 감사이다. 살면서 감사할 줄 모르면 좋은 사람일 수 없다.]
<2>
1. 아침에는 우선 이렇게 생각할 일이다. 즉 자기는 남의 일에 참견하는 자, 은혜를 모르는 자, 교만한 자, 사기꾼, 질투하는 자, 비사교적인 자와 만나게 될 것이라고.
[임성삼의 주(註); 이런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 로마 황제였다.]
 이 모든 일은 사물의 선악에 대한 무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한 것이 아름답고, 악한 것이 추한 데 대하여, 그 본성을 통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의 성질도 나와 같은 인간으로, 비단 같은 혈통이나 종족에 속할뿐더러 동일한 신의 예지를 동등하게 나눠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나는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 손상되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추악한 것을 나에게 떠맡길 수 없고, 나는 자기의 동포들에게 화를 내거나 증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2. 내가 어떠한 존재이건 간에, 단지 한 고깃덩이와 호흡과 지배적인 부분[정신]에 불과한 것이다.
 그대의 책을 버리라. 이제 그대 자신을 현혹시키지 말라. 그것은 허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한 사람의 늙은이다. 더 이상 [스스로를] 노예로 삼지 말라. 꼭두각시처럼 비사회적인 행동의 끄나풀에 조정되어서는 안된다.
 현재의 처지에 불만을 품어도 안 되고, 미래에서 물러나서도 안된다.
3. ... 우주는 많은 원소(元素)의 여러 가지 변화에 의해 유지되는 동시에 많은 원소가 복합된 여러 가지 사물의 변화에 의하여 유지된다. 그대는 이 원리로 만족하고, 이 원리를 언제나 그대의 견해로 삼으라.
[임성삼의 주(註); 현재의 화학과 별로 다른 개념이 아니다. 단지 화학의 원리를 정신에 끌어들여 철학으로 만들었다.]
 책에 대한 갈망을 버리라. 그것은 고민하는 일이 없이, 쾌활하게 성실하게, 그리고 충심으로 신들에게 감사하면서 죽기 위해서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 말 또한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5. 어떤 순간에도 한 로마인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원만하고 순박한 위엄을 지니는 동시에 사랑과 자유와 정의감을 갖고, 당면한 일을 처리하고, 다른 여러 가지 잡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도록 충실히 사고해야 한다.
[임성삼의 주(註); 정말 좋은 말이다.]
 만일 온갖 부주의와 이성의 명령에 대한 감정적인 반항과 모든 위선, 이기심,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불만을 버리고, 오직 이것이 마지막 일인 것처럼 실생활에서 하나하나 실천해 간다면, 그대는 스스로 안정을 얻게 될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실 생활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는 좋은 방법이다.]
 그대가 아는 바와 같이, 조용한 생활, 신들의 생활과 같은 삶을 보내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실로 근소한 것이다. 신들은 이러한 것을 행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그 밖의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임성삼의 주(註); 기독교의 개념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6. ... 각자의 생명은 충족되어 있다. 그런데 그대의 영혼이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행복을 남들의 영혼에 맡기고 있는 동안에 그대의 생명은 고갈된다.
8. 인간은 남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살피지 않기 때문에 불행하게 되는 경우는 좀처럼 없지만,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주목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에 빠진다.
10. ... 참으로 철학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도록 그[테오프라스토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즉 쾌락을 위하여 저지르는 비행은 고통으로 말미암아 저지른 비행보다 더욱 비난을 받아야 한다. ...
12. 만물은 얼마나 신속히 소멸하는 것인가. 육신은 우주 속으로 사라지고, 그 기억은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모든 현상은 무엇인가? 특히 쾌락으로 인간을 유혹하고, 또한 고통으로 인간을 두렵게 하며, 물거품 같은 명성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것들은 얼마나 무가치하고, 얼마나 비열하며, 얼마나 사멸하기 쉽고, 또 얼마나 말라 죽기 쉬운가 하는 것에 대하여는 예리한 지능만이 깨닫기 마련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 명상록에서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한 논리는 대단히 간단하다. 덧없다는 것이다. 허무의 관념으로 실 생활의 건전함을 내세우자는 논리가 '스토아' 철학의 원리인 것 같다.]
14. 인간은 설령 삼천 년을 살든, 또는 일만 년의 몇 배를 살든, 그래도 역시 모든 인간이 잃는 생활은, 현재 그들이 영위하고 있는 생활일 터이며, 또한 그 생활은 현재 그가 시시각각으로 잃고 있는 생명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리하여 가장 긴 생애나 가장 짧은 생애가 동일하게 된다. ...
[임성삼의 주(註); 이런 개념이 이 책의 끝까지 반복하여 나온다. 앞으로는 생략할 것이다.]
17. 인간의 생애는 하나의 점(點)으로, 물질은 유전(流轉) 속에 있고, 지각(知覺)은 우둔하고, 육체의 됨됨은 썩을 운명에 있으며 그리고 영혼은 선풍(旋風) 같고, 행운은 예측할 수 없으며, 명성은 비판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요컨대 육체에 속하는 것은 하나의 흐름이고, 심령에 속하는 것은 꿈결 같은 운무(雲霧)이며, 생활은 하나의 투쟁이고, 또한 나그네의 행로이며, 그리고 사후의 명예는 망각이다.
[임성삼의 주(註); 황제부터 온 로마 사람이 이러한 허무 속에 있을 때, 기독교가 그들에게 희망과 빛을 주었다. 이 시대에 로마에서는 맹렬하게 기독교가 전파되고 있었다.
  즉 스토아 철학은 로마 사람들의 마음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메마르고 허무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 메마른 마음에 기독교의 복음이 비와 같이 스며 들어갔다.]
 그렇다면 인간을 인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하나 철학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 능욕하거나 가해(加害)하지 말고, 쾌락을 초월하여, 목적이 없는 행동을 하지 말며, 또한 허위나 위선에 찬 행위를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행동 여하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모든 일과 모든 운명을 자기 자신이 태어난 원천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고 감수하며, 끝으로 죽음에 대하여는 모든 생물이 그 구성 분자로 환원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유쾌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
[임성삼의 주(註); 그러나 철학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은 유쾌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것 보다는 기독교의 영생(永生)을 택하게 된다. 그 길이 현세에서는 아주 힘든 순교의 길이라도...]
                           이상은 칼눈툼[다뉴브강 남쪽에 있는 판노니아의 한 고을, 야만족과의 싸움으로 이곳에서 3 년 동안 머물렀다고 함]에서 적었다.
<3>
1. 우리는 자기의 생명이 나날이 소모되고 감퇴되어 간다는 것을 염두에 둘 뿐만 아니라, 또 하나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즉 가령 어떤 사람이 장수를 한다고 해도 과연 그 분별력이 존속되어 사물을 충분히 분간할 수 있으며, 신과 인간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능력을 보유할 수 있을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
 
 우리는 서둘러야 한다. 그것은 비단 우리가 날로 죽음에 접근해 가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물의 개념에 대한 능력과 이해력이 먼저 쇠퇴되기 때문이다.
2. 만일 사람들이 우주에 생성된 사물에 동정과 깊은 통찰력을 갖는다면, 어느 의미에서나 쾌감을 주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맹수의 벌린 턱에서도 화가나 조각가의 작품에 못지않는 쾌감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또한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서도 일종의 원숙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며, 또 젊은 남녀의 매력 있는 사랑스러움도 맑은 안목으로 바라볼 수가 있을 것이다.
3. 히포크라테스(BC 460 - 377 경)는 많은 병을 치료하고 나서, 자기가 병에 걸려 죽었다. 칼데이의 박사들은 많은 사람의 죽음을 예언하였으나, 이윽고 운명은 그들도 앗아갔다. 알렉산더, 폼페우스, 카이우스, 시저 등은 그렇게 번번이 대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전장에서는 몇 십만의 기병대나 보병대를 닥치는 대로 살육하였지만, 이윽고 그들 자신도 죽음을 당하였다.
4. ... 우리는 만일 어떤 사람이 갑자기 "지금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하고 물으면, 공명정대하게 곧 "이러저러한 일"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일만을 언제나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
[임성삼의 주(註); 동양에서는 "혼자 있을 때의 마음을 조심하라."는 말이 여러 책에 있다. 또한 율곡 선생님의 "격몽요결"에 이와 거의 완전히 같은 말이 있다.]
5. 무슨 일이든지 마지못해 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또한 깊이 생각한 연후에 행하되, 마음에 혹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인위적인 허식으로 자기 사상을 장식하여서도 안 되며, 말이 많은 사람이 되거나 많은 일에 매여 너무 분주하여서도 안 된다.
 그리고 자기 자신 속에 깃들어 있는 신성(神聖)으로 하여금 자기의 수호신이 되게 하고, 남아답게 생각이 깊으며, 정치에 관여하고, 로마인으로서, 지배자로서, 자기의 직분을 지켜나갈 때에는 언제나 생명을 내던질 각오를 한 사람처럼 진퇴(進退)를 결정하고, 아무런 서약도, 어떤 사람의 증언도 필요없이 묵묵히 행동해야 한다.
[임성삼의 주(註); 로마인들은 이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또한 쾌활해야 한다. 외부에 원조를 구하지 말며 타인이 주는 평화를 바라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남아는 남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서야 한다.
[임성삼의 주(註); 그 당시 세계의 주인으로 자부하고 있던 로마인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6. 인간 생활에 있어서 그대가 만일 정의, 진리, 절제, 견인(堅忍)보다 더 선한 것을 발견한다면 ... 그대는 거기에 전심전력을 위탁하라. 그리고 그대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향락하도록 하라.
 나는 말하고자 한다. 그대는 다만 단순히, 그리고 자유롭게 최선의 것을 선택하라. 그리고 그것을 고수하라.
8. 세련되고 정화된 인간의 정신 속에는 썩은 것, 부정한 것, 꿰매어 붙인 상처 같은 것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또 언제 죽음의 손에 잡히더라도, 마치 연기를 끝마치기 전에 무대를 떠나는 배우에 대한 비난처럼 미완성의 생활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는 조금도 비굴한 데가 없고, 또한 허식도 없으며, 큰 집착도 느끼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사물을 등지는 일도 없고, 탓할 만한 일도 없으며, 피난처를 찾는 일도 없다.
[임성삼의 주(註); 이 황제가 이런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황제를 힘없고 병든 노인으로 묘사한 영화는 진실이 아니다. 그는 죽을 때 59 세밖에 안되었었다.]
10. ... 그리고 가장 길다는 사후의 명성도 역시 짧은 것으로 대대손손(代代孫孫) 그것을 전하는 것은 다만 가엾은 인간들이며, 그들 자신이 매우 신속히 죽어가고,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자들이므로 먼 옛날에 죽은 사람들에 대하여 알 리가 없다.
[임성삼의 주(註); 죽은 후의 명성에 대하여까지 정확히 분석하였다.
나의 집 사람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 중 이 줄 친 부분만은 틀렸다고 하였다. 지금 우리들은 그의 글을 읽으며 그의 마음을 알고 그와 함께 느끼고 있으니까.]
16. ... 자기의 가슴에 심어 놓은 신성(神聖)을 모독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인상에 의해 그것을 훼방하지 않으며,
신에 순종하고,
진리에 어긋나는 일은 일체 입밖에 내지 않으며,
[임성삼의 주(註); 논어에 나오는 비례물언(非禮勿言; 예절이 아닌 것은 말하지 않는다)]
또한 정의에 위배되는 것은 일체 행하지 않는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역시 논어의 비례물동(非禮勿動)]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이 단순하고 겸손하며, 분수에 어울리는 생활을 하고 있음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어느 누구에 대하여도 불평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자기가 한 평생 도달하려는 목적에 이르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4>
2. 어떤 행위를 하든지 거기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한다.
또한 기술상의 완전한 원리에 따라야 한다.
......
 명성에 대한 욕망이 아마도 그대를 괴롭힐 것이다. 보라, 모든 사물이 얼마나 신속히 망각되는가를.
10. 모든 사물은 정당한 이유에서 생긴다는 것을 명심하라. 만일 깊이 관찰하면, 그대는 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무엇을 하든지 선인(善人)이 될 것을, 다시 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선인이 될 것을 목표로 하고 행동해야 한다.
[임성삼의 주(註); '엄밀한 의미에서 선인'이 될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 착한 사람 비슷하게도 될 수 없다.
율곡 선생님의 "격몽요결"의 첫 귀절은 다음과 같다.
初學 先須立志 必以聖人自期              須(모름지기 수)    期(기약할 기)
처음 학문을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먼저 뜻을 정하기를
반드시 완전한 사람(성인 聖人)이 되기로 스스로를 기약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성인을 선인과 거의 같이 해석한다.]
12. 우리는 언제나 다음 두 가지 규칙을 활용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 하나는 지배와 입법을 맡은 자는 인류의 이득을 위해서만 명령을 내릴 것.
 또 하나는 만일 근처의 어느 사람이 그대의 미망을 제거해 주고 그대의 그릇된 견해를 씻어 준다면 아낌없이 의견을 변경할 것. 그러나 이 의견의 변경은 정의나 혹은 공공의 이익과 같은 어떤 확실한 이유에서 행해야 하며, 그것이 기분 좋게 보인다든가, 또는 명예를 가져온다는 이유에서 변경해서는 안된다.
17. 스스로 만 년 동안이나 살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죽음은 그대 위에 걸려 있다. 그대가 사는 기간은 그대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는 선량하라.
[임성삼의 주(註); 이것이 이 책의 기본 법칙이다. 이 논리에 대해 잘 생각해보자.]
18. 나의 이웃 사람이 말하고, 또 행하며, 혹은 생각하는 것을 알려고 애쓰지 말고, 오직 자기 자신이 하는 일을 올바르고 순결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참으로 많은 괴로움을 모면하게 될 것이다.
 아가톤(그리스의 비극작가. BC 447 - 400)이 말한 바와 같이, 남의 타락된 도덕에 눈을 돌리는 일 없이, 다만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20. 어느 의미에서나 아름다운 것은 모두 그 자체에 있어서 아름답다. ...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진리, 인애(仁愛), 겸손이 칭찬을 받아서 아름다운 것이 되었으며, 비난을 받으면 더러운 것이 된다는 말인가? 비취, 황금, 상아, 자수정 등이 칭찬을 받지 않으면 밉게 보이는가?
[임성삼의 주(註); 칭찬을 바라는 데에 대한 경고]
24.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은 언제나 "이것은 불필요한 일이 아닌가?"하고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인간은 불필요한 행위 뿐 아니라 불필요한 생각까지도 버려야 한다. 이렇게 하면 부질없는 행위를 하지 않게 된다.
28. 간악한 성격, 비겁한 성격, 완고한 성격, 짐승 같은 놈, 어린애 같은 사람, 동물적인 인간, 우둔한 자, 거짓이 많고 비천하고 기만적이고 포악한 자
[임성삼의 주(註); 이러한 온화한 분도 이런 사람들에 의해 수난을 받고 나면 이런 글을 남기게 된다.]
31. 그대가 배운 기술은, 비록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이를 존중하고 만족하라. 그리고 그대 자신을 폭군이나 노예로 삼지 말고, 온 몸과 정신으로 가진 것 일체를 신에게 맡긴 사람과 같이 여생을 보내도록 하라.
33. 전에 귀에 익었던 말도 지금은 낡아 버렸다. 마찬가지로 옛날에 유명했던 사람들의 이름도, 오늘날에 와서는 낡아 버렸다.
34. 자기 자신을 기꺼이 운명의 여신 크로토우에게 맡겨, 그녀가 그대의 실을 마음대로 짜도록 하라.
[임성삼의 주(註); 운명의 여신은 각 개인의 운명을 계속 실로 짜서 그 사람의 삶을 만들어 간다고 그리스 신화에 나와있다.]
35. 기억하는 것도, 기억되는 것도, 다 함께 단 하루뿐인 것이다.
48. 다음과 같은 것을 언제나 마음속에 새겨 두라. 얼마나 많은 의사들이 병자에게 자주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이윽고 자기 자신도 죽어갔는가를. 얼마나 많은 점쟁이들이 남의 죽음을 떠들썩하게 예언하면서, 자기도 덧없이 죽어갔으며, 또 얼마나 많은 철학자들이 죽음과 불멸에 대하여 끊임없이 해명하고 스스로 죽어갔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영웅들이 무수한 사람들을 살육한 연후에 자기도 죽어갔으며, 또 얼마나 많은 폭군들이 자기는 불멸의 화신이나 되는 것처럼 몸서리치는 횡포를 감행하여 생사의 권한을 한 손에 휘두른 연후에 죽어갔던가. 또 얼마나 많은 도시가 멸망했던가. ... 인생이 얼마나 덧없고 얼마나 무상한가. ... 자연에 순응하여 지나가고 ...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그대의 나그네 길을 끝맺도록 하라.
[임성삼의 주(註); 이 시기에 사람들이 착한 행동을 하게 하려면, 이런 빈약한 논리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로마에서 광범위하게 기독교가 퍼져나간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철학의 한계를 보는 것으로 여겨진다.]
49. 언제나 사나운 물결에 부딪치면서도 굳굳하게 서 있으며, 주위의 사나운 물결을 다스리는 곶(岬; 산허리 갑)처럼 있으라.
<5>
1. 아침에 일어나기 싫거든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좋다. - 즉 나는 한 인간으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내가 존재하고, 또 그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파송된 일을 지금 하려고 한다면, 내가 어찌 그것에 불만을 느낄 수 있겠는가?
2. 성가시고 귀찮은 모든 잡념을 깨끗이 버리고, 마음을 안정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7. 아테네 사람들의 기도 - 비를, 비를, 오 제우스여, 아테네 사람들의 경작지와 들에 비를 내리소서
 우리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기도를 한다면, 이와 같이 단순하고 기품이 높은 양식으로 해야 할 것이다.
9. 정당한 원리에 따라서 모든 일을 하였는데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그대는 혐오하지 말고, 낙담하지 말며, 또한 불평을 하지 말라. 그 경우에는 다시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서 자기가 한 일이 거의가 인간의 본성과 일치하면 스스로 만족을 느끼고 그대에게로 돌아오는 것(철학)을 사랑하라. ...
11. 나는 지금 나의 영혼을 무엇에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자문(自問)하여야 한다. 그리고 다시 다음과 같이 자문하여야 한다.
 즉 지금 나의 지배성능이라고 말하는 영혼은 무엇을 파악하고 있는가?
[임성삼의 주(註); 앞으로 지배성능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게 된다.]
그리고 나는 누구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가? 어린이의 영혼인가? 허약한 여자의 영혼인가? 가축의 영혼인가? 폭군의 영혼인가? 혹은 들짐승의 영혼인가?
17. 불가능한 것을 구하는 것은 광기(狂氣)이다. 그리고 악한 자가 악을 저지르는 것은 당연하다.
20. 자기는 인류에게 선을 행하고, 그들의 결점을 참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인간은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이다.
30. 신들에 대하여, 부모에 대하여, 자녀에 대하여, 스승에 대하여, 그리고 그대의 유년과 소년 시절을 돌보아 준 사람들 - 친구, 친척, 노비들에게 대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대는 어떻게 행동해 왔는가? 그대의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소행에 대하여 다음의 말이 합당한가를 생각해 보라.
 언행 중에서 그 어느것도 아직 사람을 해친 적이 없다.
<6>
1. 우주의 실체는 순종이며, 또한 유화(宥和; 용서할 유, 화할 화)이다.
3. 정밀하게 고찰하라. 어떤 사물에 대하여도 그 특수성과 가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임성삼의 주(註); 이런 지성을 가진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6. 복수를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해자와) 같은 무리가 되지 않는 것이다.
18. 사람들은 실로 이상한 행동을 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동일한 시대에 살면서, 자기들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좀처럼 칭찬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도리어 자기가 아직 보지도 못하였으며, 또한 결코 볼 수도 없는 후세의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는 것에 커다란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다.
24.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마부(馬夫)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동등하게 되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 말이 황제의 입에서 나온 것이 신기하다. 이 황제가 죽은 1800 년 후인 현대에도 상당한 수의 전 세계 관리들의 의식 수준은 이 황제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29. 육체가 아직 쇠퇴하지 않는 동안에 심령이 먼저 쇠퇴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임성삼의 주(註); 육체가 왕성한 20 대에 심령부터 쇠퇴하는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
30. 지나치게 황제의 세도를 부리거나, 그런 버릇이 붙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므로,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대는 자기 자신을 단순하게, 선량하게, 진실하게 꾸밈새가 없이, 정의의 벗, 신들의 숭배자가 되어 친절하고 애정이 깊고 모든 일에 정당하게 행동하도록 힘쓰라.
 그대는 철학이 그대의 인격을 완성시키려고 원한 그 상태에 언제나 있으라. 신들을 공경하고 사람들을 도와주어라. 인생은 짧다.
 이 지상의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열매는 경건한 마음씨와 사회적인 행위뿐이다. 모든 일을 안토니우스[먼저 황제]의 제자로서 행하라. 이성에 적합한 행위로 일관한 그의 절제, 모든 사물에 대한 그의 경건, 그의 침착, 그의 우아함, 허명(虛名)의 멸시, 사물을 이해하려는 노력... 등등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는 부당한 비난을 하는 사람들을 공박하지 않고, 어떻게 참았던가.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얼마나 태연자약하였던가. .....
47. 매우 가치있는 가르침의 하나는 그대의 생활을 진리와 정의 속에서 보내고, 거짓말쟁이나 의롭지 못한 자들에게도 너그럽게 대하라는 것이다.
48. 그대 자신을 즐겁게 하려면, 그대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미덕을 생각해 볼 일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의 눈부신 활동이나, 두 번째 사람의 겸손이나, 세 번째 사람의 관용이나, 또는 네 번째 사람의 그 밖의 미덕을 생각할 일이다. 미덕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 속에 나타나고, 그것이 될 수 있는 한 풍부하게 나타날 때만큼 우리를 즐겁게 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러한 실례를 우리 눈으로 언제나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49. 그대는 자기의 체중이 150 kg에 달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만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명에 있어서도 정한 연령 이상을 살지 못한다고 해서 불만스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51.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의 견해를 자기의 행복처럼 생각한다.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감각에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분별력을 지닌 사람은 자기 자신의 행위를 자기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53. 다른 사람이 말하는 일에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되도록 말하는 상대방의 마음속으로 파고 들도록 그대 자신을 길들게 하라.
[임성삼의 주(註); 황제의 가장 큰 자격이다.]
54. 벌집 전체에 이득이 되지 않는 것은, 개개의 벌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
[임성삼의 주(註); 로마제국의 황제로서의 좋은 말이다.]
<7>
1. 사악(邪惡)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그대가 자주 보아 온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할 가치 조차 없다.]
3. 쓸데없는 일거리, 무대 위의 광언, 양의 무리, 소와 말의 무리, 창술(槍術)의 연습, 강아지에게 던진 뼈다귀, 연못의 물고기에 던진 빵, 무거운 짐을 나르는 개미의 노동, 혼이 난 생쥐의 줄도망, 실에 조종되는 인형 ---
이러한 것들 속에서 즐거운 얼굴을 하고, 거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이 그대의 의무일 것이다.
6.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명성에 의해 칭찬을 받은 연후에 망각 속에 묻혀 버렸던가. 그리고 다른 사람의 명성을 찬양해 마지 않던 많은 사람들도 벌써 옛날에 죽은 것이다.
8. 미래의 일에 대하여 걱정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러한 일에 직면할 필요가 생긴다면, 현재 그대가 사용하고 있는 이성이 그대를 도와줄 터이므로.
12. 그대는 똑바로 서라, 그렇지 않으면 똑바로 세워지지 못할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 황제의 아들 코모두스는 결코 똑바로 섰다고 할 수 없다.]
15. 누가 무엇을 하든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하든지, 나는 선량해야 한다. 마치 금이나 에머럴드, 또는 자색 옷은 언제나 "누가 무엇을 하거나, 또 무슨 말을 하거나, 나는 에머럴드이며, 내 본래의 빛을 지녀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24. 얼굴을 찌푸리는 것은 부자연한 일이다. 그것을 자주 되풀이하면 모든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나중에는 다시 명랑성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절멸되어 버린다.
27. 그대가 소유하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그대가 소유하고 있는 것 만큼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대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하여는 최선의 것을 선택할 일이다.
29. 어떤 사람이 저지른 비행(非行)은, 그것이 행해진 곳에 그대로 내버려 두라.
[임성삼의 주(註); 여기 저기에 가서 말하지 말라.]
31. 인류를 사랑하라. 신에게 순종하라.
[임성삼의 주(註); 이런 개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지 모른다. 기독교의 중심 사상을 이미 가지고 있다.]
34. 모래의 더미가 그 전 모래의 더미 위에 덮이는 것처럼, 인생에 있어서도 전에 행한 일은 나중에 행한 일에 덮쳐진다는 사실을 잘 생각해 보라.
36. 안티스테네스에서 --- 선을 행하고 비난을 받는 것은 고귀한 일이다.
[임성삼의 주(註); 현대 사회의 장점은 많이 있다. 그러나 "고귀(高貴)"에 대한 개념을 잃은 것은 슬픈 일이다.]
37. 마음이 명하는 대로 여러 가지 얼굴 표정을 짓는다는 것은 천한 일이다.
그리고 뜻대로 자기를 통제하고 이끌지 못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39. 불멸의 신들과 우리 자신에게 기쁨을 줄지어다.
49. 사십 년동안 인생을 관조(觀照)한 것은 만 년 동안 인생을 관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대는 현재 이상의 것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57. 오직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 그리고 그대의 운명의 실에 짜여지고 있는 일만을 사랑하라. 그 이상 적합한 일이 있는가?
58. 오직 그대 자신을 섬기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선인이 되고자 다짐하라. 언제나 이를 염두에 두라.
62. 그대는 어떤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원하는가. 그들은 어떤 이해력을 갖고 있는가를 언제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대는 실수로 비행을 저지른 사람을 책망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들의 의견이나 정욕의 원천을 주시하면, 그들의 칭찬을 원치 않을 것이다.
64. 고통을 당할 적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즉 이것은 불명예가 아니다. 또 나의 지배적인 영지(靈智)를 나쁘게 하지도 않는다고.
[임성삼의 주(註); 이 황제도 고통을 받은 적이 많은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말이 나올 수 없다.]
65.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갖고 있던 심정이 어떠하였는가를 연구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그가 사람들에 대하여 언제나 올바른 태도를 취했으며,
신들에 대하여 경건하였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인간의 사악함을 헛되니 고민하지 않고,
어떠한 사람의 무지에도 휘말려 들어가는 일이 없었으며,
우주에서 보내온 몫으로서 자기에게 닥친 일은 무엇이건 지체 없이 받아들여, 그것을 잘 견디어 나갔을 뿐만 아니라,
가엾은 육체의 여러 가지 정욕에 대하여는 동정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자기 이해력을 어둡게 하지 않았다는 것 등등,
이러한 일이 과연 어떠했던가를 탐구해야 한다.
67. 설령 세계가 그대를 마구 욕하고 꾸짖을지라도, 또한 야수가 그대의 수족을 물어서 갈갈이 찢더라도, 모든 강제에서 벗어나 극히 안정된 마음을 갖는 것은, 그대의 권한에 속한다.
 이러한 소동 속에서도 정신을 안정하게 하고, 주위의 모든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며, 또한 모든 대상을 자기의 의사대로 사용하는 것을 아무도 훼방할 수 없다.
72. 그대가 어떤 선한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이 이를 인정할 경우에, 여전히 바보와 같이, 어찌하여 이 두 가지 사실 이외에 제 삼의 것, 즉 선행을 하였다는 명성을 얻거나, 칭찬을 받기를 원하는가.
<8>
1. 그대가 그 여생을 그대의 본성이 원하는 대로 보내게 되면 그것에 만족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그대의 본성에 따라서 행하되 다른 어떠한 것에도 휩쓸려서는 안 된다. 삼단논법(三段論法)에도, 재물 속에도, 명성에도, 향락에도 ...
5. 그대는 자기 업무에 시선을 돌리고, 동시에 선인(善人)이 되는 것이 자기의 의무임을 기억하여,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것을 외면하지 말고 이를 행하며, 또 그대에게 가장 옳다고 생각되는 말을 하되 선의(善意)와 겸손과 성실로써 해야 한다.
8. 그대는 책을 읽을 여가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대는 오만을 억제할 여유는 갖고 있다. 그대는 쾌락과 고통을 초월할 여유를 갖고 있으며, 명예욕을 초월하고, 어리석은 배은망덕(背恩忘德)자를 괘씸하게 여기지 않을뿐더러, 그들에게 무관심할 수 있는 여유도 갖고 있다.
10. 쾌락은 선도 아니고, 유용한 것도 아니다.
22. 그대가 그토록 고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 그대가 오늘보다 내일은 더욱 선량해지려고 하므로.
30. 원로원에서도 누구에게나 아는 체 말고 온당하게 이야기하라. 순박한 말을 하라.
33. 부귀나 영화는 교만에 흐르지 말고 받아들이라. 그리고 언제나 그것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36. 미래도 과거도 그대를 괴롭히지 않으며, 다만 현재만이 그대를 괴롭힌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50. 어떤 오이는 쓰다. 이것은 버리는 것이 좋다.
길 한복판에 나무더미가 놓여있다. - 이것은 피하여 지나가면 된다.
이것으로 족하다.
세상에 어찌하여 이런 것이 만들어졌는가? 하고 부질없는 생각을 첨부하지 말라
.
[임성삼의 주(註); 이것이 삶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51. 어떤 사람이 맑은 샘물가에 서서 샘물을 저주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샘물은 계속해서 맑게 치솟을 것이다.
 만일 그가 그 속에 흙덩이나 오물을 던져 넣더라도, 샘물은 곧 그것을 순화시켜 금방 깨끗해질 것이다.
61. 각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마음속으로 돌아가게 하라.
<9>
4. 악을 저지른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고약하게 만들므로, 자기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이다.
12. 그대는 비참한 노예처럼 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동정을 받거나 칭찬을 받는 것 때문에 일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대의 정신을 오직 한 가지 일에 집중시켜, 사회적인 이성이 요구하는 대로 그대 자신을 움직이고, 또한 그대 자신을 억제하라.
17. 위로 던져 올린 돌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악이 아니다. 또한 던져 올린 것이 선이 아님은 물론이다.
20. 다른 사람이 저지른 악행을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은 그대의 의무이다.
42. 어떤 사람의 뻔뻔스러운 행위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할 때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이런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쓸어버릴 수 없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일을 원해서는 안된다."
[임성삼의 주(註); 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황제도 이 문제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던 모양이다.]
<10>
5. 그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영원한 태초부터 그대를 위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여러 가지 원인의 얽힘은, 영원한 태초부터 그대의 존재가 이에 부수되는 사건을 일으키는 그물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라플라스의 악마" 즉 기계론적 인과(因果)론이 이 시대부터 있었다.]
8. 무화과 구실을 하는 것이 무화과이며,
개의 구실을 하는 것이 개이고, 꿀벌 구실을 하는 것이 꿀벌이고,
인간의 구실을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
12. 만일 그대가 사물을 분명히 볼 수 있다면 뒤를 바라보지 말고 이 길을 줄곧 가도록 하라.
37. 누가 무엇을 하고 있건, 그것을 볼 적마다 되도록 "이 사람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는가?"하고 생각해 보는 버릇을 가지라. 그러나 그대는 그대 자신이 그것을 실행하여 우선 체험해 보라.
<11>
18. 그대가 생존하고 있는 동안에 곧 인간다운 인간이 되도록 하라.
22. 시골 쥐와 도시의 쥐에 대하여, 그리고 도시의 쥐의 전전긍긍함과 두려움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
[임성삼의 주(註); 이 분도 이솝이야기의 참된 독자였다.]
24. 스파르타 사람들은 그들의 공개 구경거리를 보일 경우에, 외국 사람들에게는 천막의 그늘진 자리를 제공하고, 그들 자신은 아무 곳에나 앉았다.
25. 소크라테스는 페르디카스 궁정의 초대를 사절할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가장 나쁜 부덕(不德)으로 멸망되고 싶지 않습니다.
즉 나는 내가 갚을 길이 없는 은혜는 받고 싶지 않습니다."
30. 그대는 노예이다. ----- 언론의 자유가 그대에게 허용되어 있지 않으므로
[임성삼의 주(註); 황제에게는 언론의 자유가 없다. 거의 같은 이야기가 당태종의 "정관정요"에 나온다.]
36. 어떤 사람도 우리에게서 자유의지(自由意志)를 빼앗을 수는 없다.
[임성삼의 주(註); 논어에도 나온다. 큰 군대의 지휘자는 포로로 할 수 있으나, 필부에게서 뜻[의지]을 빼앗을 수는 없다.]
<12>
10. 인간에게는 큰 능력이 부여되어 있다.
즉, 인간은 신이 허용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으며, 신이 부여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
14. 등불은 꺼질 때까지 한결같이 빛나는가?
그리고 그대 속에 있는 진리, 정의, 근엄(謹嚴)은 그대가 죽기 전에 소멸하는 것일까?
20. 무엇보다 생각이 따르지 않는 일이나 목적이 없는 일을 하지 말라.

임성삼의 이야기;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주인공 막시무스의 "자식과 아내와 함께 농사짓고 살고 싶어하는 소망"이다. 앞에서 내가 이 영화의 여러 오류를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 막시무스의 소망은 실제로 위대한 로마를 만든 원동력이었다. 이 영화보다 280 년 전[기원 전 100 년]까지는 로마의 군대는 모두 자영(自營)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자기 농토를 지키고, 가족과 함께 농사짓기 위한 소망을 가진 병졸들은 침입자들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 결과 한니발, 피로스 등의 그 당시 능력있는 외국 장군들이 이탈리아 반도에 침입한 것을 물리쳤으며, 그 여세를 몰아 카르타고와 그리스를 점령하였다. 방어만으로는 계속되는 침입을 근절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는 전형적으로 용병을 사용하는 국가였다.
 그러나 일단 강해진 로마는 점령지에서 들어오는 값싼 농산물로 인해 자영 농민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그락쿠스 형제의 개혁]. 또한 광대한 국토를 지키기 위해 먼 곳까지 농민이 파병될 수 없었다. 그 결과 임금을 받는 직업군인이 군대의 주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 군인들도 일정기간 근무하면 변방에 자기의 땅을 분배받아 지주가 될 수 있었다.
 평화로운 삶에 대한 소망은 모든 사람의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정식 이름은 Caesar 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 본명은 Marcus Annius Verus(~161).
121. 4. 26 로마~180. 3. 17 판노니아 빈도보나(지금의 빈) 또는 시르미움.
로마의 황제(161~180 재위).
 스토아 철학이 담긴 〈명상록〉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서양에서 로마 제국의 황금시대를 상징해온 인물이다.
초기생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는 이미 로마의 콘술(집정관)을 연임하는 중이었고 프라이펙투스(장관)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것은 원로원에 들 수 있는 특권을 뜻하는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고모는 황제에 즉위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과 결혼했고 언젠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제위를 계승하기로 정해져 있었다. 그의 외할머니는 로마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집안의 상속녀였다. 이처럼 마르쿠스는 플라비아누스 황제(69~96)를 구심점으로 하여 사회·정치 권력이 집결되어 있던 새로운 로마 체제에서 가장 이름난 몇몇 집안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이 체제의 기풍은 그의 태도와 행동에 배어들었다. 로마 제국을 처음으로 지배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공화국 말기의 지배계급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지방사람을 경멸하고 거만하며 냉소적이고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도회지 로마인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로마 체제는 도시와 지방출신의 황제들이 고루 다스렸으며, 진지함과 훌륭한 일을 개발하고 경건과 신앙심을 더욱 진작시켰다.
 어린 마르쿠스가 장차 특출한 정치적 인물이 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황제에 즉위하게 되었는가는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다. 136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이때부터 L.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라 불림; 임성삼의 주 - 이 사람은 마르쿠스의 아들이 아니다.)가 제위를 계승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같은 해 어린 마르쿠스는 콤모두스의 딸 케이오니아 파비아와 약혼했다. 그러나 138년초 콤모두스가 죽고 그후 하드리아누스 황제마저 세상을 떠나자 파혼했다. 콤모두스가 죽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마르쿠스의 고모부였던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맞아들여 나중에 자신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도록 하고(나중에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됨; 마르쿠스의 전 황제), 대신에 안토니누스에게 콤모두스의 아들과 마르쿠스 두 젊은이를 양자로 삼으라고 명령했다. 이때 마르쿠스의 이름은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로 바뀌었다.
 이리하여 마르쿠스는 17세 이전에 공동 황제에 즉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40세가 되어서야 황제에 즉위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속으로 콤모두스와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장차 황제가 될 한 젊은이 또는 두 젊은이 모두를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안토니누스 황제 아래에서 마르쿠스가 쌓은 오랜 기간의 예비황제 교육은 스승이었던 프론토와 주고받은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는 프론토가 당시 사회의 주요문인이었지만 수사(修辭)가 몸에 밴 음울한 현학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프론토가 편지에 나타난 것만큼 생기없는 인물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두 젊은이와 주고받은 편지 속에는 천재적인 감수성과 진솔한 교류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꾸준하고 진지하며 지적인 마르쿠스는 스승의 한결같은 고급 그리스어와 라틴어 낭독방식에 점차 싫증을 느꼈으며, 대신 한때 노예였으나 스토아 학파의 주요 도덕철학자인 신앙심 깊은 에픽테투스의 〈담론 Diatribai〉을 탐독했다. 이때부터 마르쿠스는 주로 철학에서 지적 흥미와 정신의 영양분을 구했다.
 한편 마르쿠스는 정력적인 황제 안토니누스 곁에서 통치술을 배웠으며 공직을 맡기도 했다. 마르쿠스는 140, 145, 161년에 콘술이 되었다. 145년 사촌이었던 황제의 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와 결혼했으며, 147년에는 공식상 황제직의 주요권력형태였던 '임페리움'(황제권)과 '트리부니카 포테스타스'(호민관의 권한)를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마르쿠스는 일종의 연하의 공동 황제가 되어 안토니누스와 긴밀한 협의를 통해 주요국정을 결정했다(그보다 10세 가량 어렸던 양동생도 적당한 시기에 주요공직을 맡았음). 161년 3월 7일 안토니누스가 사망하던 날 두 형제는 함께 콘술이 되었다.
로마 황제 시기
 마르쿠스가 황제에 즉위하는 과정은 순탄했다. 그는 이미 합법적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완전한 황제자리에 올랐다(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됨). 양동생도 마르쿠스의 강한 요청으로 공동 황제가 되었다(이때부터 그는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받음). 루키우스 베루스가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다는 증거는 없다. 이렇게 하여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는 동등한 법률상 지위와 권력을 갖는 공동 황제가 탄생했다. 그러나 루키우스 베루스의 업적은 뛰어난 황제 마르쿠스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대부분의 재위 기간 동안 변방지역에서 전쟁을 치르고 큰 전염병, 도덕의 타락에 맞서 싸우는 등 중요한 국정은 철저히 마르쿠스가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마르쿠스는 국내정치에서 건설적으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고 독창적인 기풍을 세우느라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틈이 없었다. 그가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분야는 법률분야였던 듯하다. 수많은 법령을 공포하고 사법판결을 확정했으며 민사법의 비정상적이고 가혹한 조항을 제거하고 노예·과부·소수민족같이 국가의 혜택을 적게 받는 계층의 비율을 줄였으며 상속 분야에서 혈연을 인정한 것 등을 업적으로 들 수 있다. 그러나 마르쿠스의 개인적 공헌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법령 개선의 유형은 혁신적이기보다는 전통에 따른 것이었고, 법령은 단지 사회와 법구조를 세련되게 만들었을 뿐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아니었다.
 마르쿠스는 위대한 입법가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를 보호한 헌신적인 실천가였다. 더욱이 이러한 법률적 활동에는 특별히 스토아적인 요소는 없었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 보면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의 시대는 법과 사회의 관계가 이전보다 오히려 퇴보하기 시작한 때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통치기에는 형법에 따른 처벌에서 차별 적용을 받는 '호네스티오레'(honestiore:상류층)와 '휴밀리오레'(humiliore:하류층)라는 두 계급이 서로 구분되기 시작했거나 더욱 뚜렷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휴밀리오레는 형법에서도 언제나 가혹하게 처벌받았다.
 정치가로서 마르쿠스의 자격을 문제 삼는 논란은 아주 다양하게 제기되어왔다. 그중 한 예가 그리스도교도의 박해와 관련된 문제이다. 마르쿠스는 그리스도교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재위하는 동안 어떠한 조직적인 박해도 가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도의 법률상 지위는 트라야누스 황제나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도는 얼마든지 처벌될 수 있었지만 실제로 수배당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불안정한 그리스도교도의 지위는 제국의 안정기와 번성기에는 아무런 해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위기 시에 지역 주민은 그리스도교도를 고발하고 행정관은 중앙권력의 명령에 따라 법대로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 177년에 리옹에서 일어난 순교도 바로 이런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도가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의 재위기간 동안 그전보다 많은 피를 뿌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신은 결코 박해를 주도하지 않았다.
 161년 동방의 중심세력 파르티아가 시리아 지역을 침략했다. 162~166년의 전쟁은 명목상으로는 베루스가 지휘하여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함으로써 승리했지만 실은 황제 휘하의 유명한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이 결정적인 공을 세운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돌아온 군대가 퍼뜨린 전염병은 수년 동안 로마 제국 전역을 휩쓸었으며, 게르만족의 침입과 함께 제국의 안정기에 익숙했던 시민들의 도덕의식을 약화시켰다.
 167년 혹은 168년에 마르쿠스와 베루스는 도나우 강을 건너 게르만족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의 등 뒤에서 게르만 유목민족이 엄청난 기세로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아드리아 해의 요충지였던 아퀼레이아를 점령했다. 위급한 사태에 직면하자 제국의 군사적 취약함과 재정구조의 경직성이 드러났다. 군대를 재편성하기 위한 절망적인 조치들이 취해졌으며,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제국의 재산이 경매되었다. 마르쿠스와 베루스는 게르만족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169년 베루스는 질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도나우 강 국경선을 되찾기 위해 마르쿠스는 온 힘을 기울여 3년간 더 싸워야 했으며, 또다시 3년간 보헤미아 지방에서 싸운 끝에 잠시나마 도나우 강 건너 부족들을 평정할 수 있었다.
〈명상록〉
 마르쿠스가 골치 아픈 국정 수행기간 동안 추구한 사상과 비록 역사적으로 매우 값진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일상 정치사상을 좀더 자세히 알려면 〈명상록〉을 읽으면 된다. 그가 이 책을 쓰면서 어느 정도로 타인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명상록〉은 전쟁을 수행하고 통치하는 동안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단편적으로 기록한 책으로, 논증적인 글과 경구가 번갈아 나타난다. 어떤 면에서 이 글은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쓴 것으로 보인다. 〈
 <명상록〉은 로마인의 가장 내밀한 사상을 다 모아놓은 것이지만 놀랍게도 그리스어로 쓰여졌는데, 이는 당시에 여러 문화들이 통합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마르쿠스의 사상을 찬탄해왔지만,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지나친 까다로움과 히스테리가 뒤섞인 마르쿠스 사상의 병리학적 측면이 더 눈에 띈다. 마르쿠스는 항상 이룰 수 없는 행동목표를 추구하고 있었으며, 사색 속에서 그 자신을 포함한 인간 일반과 물질 세계가 덧없고 야만스럽고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세상을 믿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는 어떤 희망도, 심지어 영원한 명성에 대한 희망도 없이 의무와 직책에 얽매여 있었다. 평생 동안 병고에 시달렸으며 만성 위경련으로 고통받으면서 매일 많은 약을 복용했던 것 같다. 〈명상록〉의 책갈피 속에서 풍기는 종말론적 분위기는 약물중독자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더 확실하고 중요한 점은 마르쿠스의 불안이 다소 과장된 형태이긴 해도 그 시대의 풍조를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철인왕(哲人王)의 사상이 담겨 있는 〈명상록〉은 오랜 세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왔다. 그 사상은 마르쿠스 자신의 것이긴 하지만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스토아주의의 도덕철학이고, 에픽테투스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우주는 지성이 지배하는 하나의 통일체이며, 인간의 영혼은 신이 가진 지성의 일부이기 때문에 혼돈과 변화의 한가운데 홀로 내던져진다 하더라도 더럽혀지지 않고 순수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정확한 이해의 부족 탓이겠지만 마르쿠스 사상의 한두 측면은 스토아 철학을 벗어나 플라톤주의에 가까웠다. 플라톤주의는 당시 에피쿠로스주의를 제외한 모든 이단 철학을 다 끌어안아 신플라톤주의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종류의 영혼불멸의 위안을 받아들일 정도로 스토아주의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마르쿠스가 도나우 강을 가로지르는 국경지역을 평정하고 있는 바로 그때 이집트·스페인·영국 등은 반란과 침공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전에 베루스 아래에서 일했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은 175년에 이르러 로마 제국의 동방지역과 이집트까지 사실상 통치하게 되었다. 그해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은 마르쿠스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을 우연히 듣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마르쿠스는 북부 지역의 미정복 부족들과 평화조약을 맺고 아비디우스의 반란군을 진압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반란 장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부하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마르쿠스는 그 기회에 동방지역을 평정하고 시찰할 목적으로 로마를 떠났다. 그는 안티오크·알렉산드리아·아테네를 방문했으며, 아테네에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엘레우시스 제전을 참관했다. 그러나 이 비의적(秘儀的) 제전은 그의 철학관점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것 같다. 도나우 강 지역 원정에도 동반했던 황비 파우스티나는 이 여행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도 전 로마 시민은 극진한 경의를 표했으며, 마르쿠스도 〈명상록〉에서 사랑과 존경의 글을 그녀에게 바치고 있다. 어떤 고대 사료는 그녀가 정직하지 못하고 충성심이 없었다(즉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와 함께 모반을 꾀했다고)고 쓰고 있지만, 이러한 비난은 아무 설득력이 없다.
 177년 마르쿠스는 16세의 아들 콤모두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했다. 그들은 협력하여 도나우 강 전쟁을 다시 시작했다. 마르쿠스는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제국의 북쪽 국경선을 확장·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180년 마르쿠스가 아들 콤모두스를 국정의 최고 조언자로 임명하고 난 직후 군대 사령부에서 숨을 거두었을 무렵 거의 결실을 맺고 있었다.
평가
 마르쿠스가 단 하나 살아남은 아들을 후계자로 선택한 것은 비극적 역설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콤모두스는 뛰어나지 못한 황제임이 나중에 드러났다. 그러나 다음의 2가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첫째, 고대 사료를 보면 황제란 원로원의 지배계급을 만족시켰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에 따라 훌륭한 황제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황제가 되기도 한다.
둘째, 콤모두스가 북부지역의 전쟁을 서둘러 마무리한 것은 아버지처럼 고집스럽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팽창주의를 추구한 일보다 현명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들이 대를 이어 황제가 되도록 결정한 점을 들어 마르쿠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개 마르쿠스가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유능한 '철학자'의 길을 걸은 뒤 다시 노골적으로 세습왕조를 고수하는 쪽으로 돌아섰다고 잘못 생각한다. 이것은 역사학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는 주장이다. 사실상 마르쿠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마르쿠스가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삼지 않았다면 이것은 그에게 죽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는 정치가였다고 할 수도 있지만 도량이 아주 넓은 정치가는 결코 아니었으며 현자(賢者)도 물론 아니었다. 한마디로 그는 역사적으로 과대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이미 몰락의 징조가 숱하게 드러난 제국의 금빛 휘장 아래서 혼란스런 방식으로 대제국을 통치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 어떤 혹독한 평가일지라도 그의 고귀한 품성과 헌신성을 가리지는 못한다. 말하자면 그는 매우 꼼꼼하게 비용을 따지면서도 또한 서슴지 않고 그 비용을 치른 인물이었다.
부동심 : M. 아우렐리우스, 이영조 역, 풍림출판사, 1985
명상록 : M. 아우렐리우스, 강연호 역, 삼연사, 1981
자성록 : M. 아우렐리우스, 김병익 역, 범조사, 1979
Marcus Aurelius : Anthony Birley, Eyre & Spottiswoode, 1966
Roman Society from Nero to Marcus Aurelius : Sir Samuel Dill, Meridian Books, 1956
Marcus Aurelius:His Life and His World : Authur S. L. Farquharson, D. A. Rees(ed.), Basil Blackwell, 1951
Kaiser Marcus : Ulrich von Wilamowitz-Moellendorf, Weidmann, 1931
Der historische Wert der Vita Marci bei den Scriptores Historiae Augustae : J. Schwedemann, 1923
Marcus Aurelius, a Biography : Henry D. Sedgwick, Yale Univ. Press, 1921
Marc-Aurele et la fin du monde antique : Ernest Renan, Calmann-Levy, 1885
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오현제  五賢帝      Five Good Emperors
로마 제국의 최고 융성기를 주재했던 다섯 황제.
 네르바(96~98 재위), 트라야누스(98~117 재위), 하드리아누스(117~138 재위),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가 그들이다. 이들의 재위 계승은 혈통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네르바는 도미티아누스의 암살자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입양된 후계자들인데 선임자들과 아무 관계가 없거나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먼 친척관계 정도에 불과했다. 마지막의 두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흔히 안토니누스 일가라고 부르며 이 호칭은 때로 두 사람뿐만 아니라 공동황제 루키우스 베루스(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입양된 후계자)와 콤모두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까지 포함하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오현제 시대의 로마 제국은 북부 브리타니아에서 다키아까지, 아라비아와 메소포타미아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영토확장을 이룩했다. 제국은 굳건해졌고 방어태세가 완벽했으며 상당한 통일성을 지닌 속주 행정제도가 제국 전역을 포괄했다. 속국들이 하나하나 속주로 재편되었고 이탈리아의 행정제도도 많은 면에서 속주와 동일하게 편성되어갔다. 이 모든 과정과 더불어 제국의 백성들도 언어와 문화면에서 로마화했다. 오현제 시대는 내정이 안정되고 선정이 베풀어진 것으로 유명하지만 취약점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권력이 완전하게 황제의 수중에 집중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해 놓은 '이원집정제'는 1세기에 이미 비현실적인 것이 되었고 그 당시 형식은 남아 있었지만 실제로는 고의적으로 무시되었다. 그리하여 원로원은 더이상 통치도구가 아니라 황제 휘하의 귀족집단으로 전락했고 주로 선거에 의해 콰이스토르(재무관) 자격을 얻은 사람들이 아니라 황제에 의해 곧바로 귀족지위를 얻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행정관들의 몫으로 남겨둔 제한된 행정분야는 더욱 협소해졌고 그들의 관할권은 점차 황제가 임명한 그리스 관리들의 수중에 넘어가는 추세를 보였다. 황제 휘하에 행정부서가 완전하게 조직되어 국가관료기구로 인정받게 된 것은 주로 하드리아누스의 작품이었다. 그는 장관직책을 자유민들 수중에서 빼앗아 에퀴테스(기사계급) 출신의 행정관들에게 맡겼다.
 이 모든 변화는 불가피할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이로운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친 권력집중으로 인한 폐해를 가져왔다. 이같은 폐해는 강력한 군주들이 중앙권력을 행사하는 동안 잘 드러나지 않기는 했지만 심지어는 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안토니누스 치세 때에도 제국 전체의 힘이 약해졌고 그에 상응해 제국정부 자체에 대한 압력이 갈수록 가중되는 조짐이 나타났다. 초기적인 몰락의 징후를 보인 현상들로는 특히 제국 중심지구의 갈수록 심해지는 인구감소, 끊임없는 재정난, 속주 지방행정의 부패성, 모든 계층이 이제는 갈수록 짐만 되어 가고 있는 지방행정관직을 맡기 꺼리는 것 등이 있었다. 180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고 난 이후 로마 제국은 급속하게 내전의 혼란에 빠져들어갔으며 193년 콤모두스가 암살되고 결국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승리를 거둘 때까지 내전이 계속되었다.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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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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