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n1 - 개인적으로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으면 가능하면 가서 듣는다.
또한 같은 강사의 강의를 반복해서 듣는다.. 사실 공부란것은 반복이 아닌가.
내가 학생들에게 공부법을 알려주고 강조하면서 스스로는 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더욱 같은 분의 강의를 찾아서 여러번 듣는다.
그렇게 들어보면 처음 들을때는 많은 것을 가슴에 품으나 몇 번을 더 들으면 점점 줄어드는 강의가 있고..
사실 처음부터 그리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없는 강의들도 있다...그래도 몇 번 들으려 한다.
그럼데 처음들을 때의 뭉클함을 여러번 반복해도 그대로 아니 더욱 커지는 것을 느끼는 강의가 있다.
서진규 박사님의 강의는 그러한 강의 이다...
들을 때 마다 가슴이 시리기도 하고 즐겁기도 뭉클하기도 하다..
그건 아마도 자신의 삶을 그대로 뭍어 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며
인간적인 면과 강렬한 카리스마를 공존 시키는 강의 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앞으로 강의가 더 있으면 들으려 노력할 것이다..^^

<맨 아래에는 서진규 박사님의 카페 링크와 도서내용 링크가 있습니다>


강의 내용 요약

한국에서만도 600여회에 달하는 강연중
2006년 6월 8일 하버드 박사학위 취득
2017년 1월 21일 미국 국무장관에 취임(그의 꿈)
c형 간염의 악화로 한국에 들어오기로 결심 - 인터페론 주사는 우울증을 동반하기에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함(지역전문가 파견시절 폭음과 공부하면서 스트레스로 인한것이라 말하심)

서진규는 초등학교시절 3년동안은 반에서 꼴찌만 하였다.
하지만 어머님의 영향으로 어려운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꿈'을 가지기 시작함.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 성공하려면 박사가 되는것이다.
이때부터 박사를 꿈꾸기 시작했다. - 물론 그 전까지의 꿈은 암행어사 였다. 아는것이 그것밖에 없어서...
초6학년때부터 공부에 대한 눈이 떠지고 방법을 찾아가게 되었다.
"나의 성공비결은 내가 가진것을 최대한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불평 불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게 도움을 베풀어 스스로 바뀌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돕기위해 필요한것 첫째는 인성
                                           둘째는 실력
                                           셋째는 성과
니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명확하다면 '어떻게'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알려줄 것이다.

아버지께 바치는 노래 '한 오백년'
지역전문가를 위해 일어공부를 하는 중에 아버지 폐암말기 알게되었으나, 그때는 사명감에 아버지께 일생의 불효를 저지름.. 한국으로 돌아가는 부모님께 딸만 동행시킴...일반석으로...
평생의 후회가 되는것... '당신들도 살아계신 부모님께 사랑을 전하고 나처럼 바보같은 짓은 하지말라.'
(노래를 부르시는데 온몸에서 닭살이 돋았다... 배와 목으로 노래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가슴 저 밑의 서러움과 죄송함과 자신에 대한 채찍으로 부르기에 전율이 돌았다.. 찍어놓은 동영상을 올릴 수가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무슨 일을 할때 자신에게 하는 질문
1. 꼭 필요한것은 무엇인가?
2. 어떤 것을 가지고 있나?
3.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서진규 박사님의 강의는 여러번 들었다... 짧게도 길게도...
늘 느낌은 하나다...열정...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것이 맞다...이분을 보고 있으면 그럴수 밖에 없다.
강의 영상을 올리지 못해서 아쉬울 뿐이다...ㅡ.ㅡ


딸 조성아와 함께



백과사전에서의 서진규
서진규(1948년 ~ )는 미군 예비역 영관급 장교이자 작가이다

한국에서의 삶

1948년 경상남도 동래군의 어촌마을 월내에서 장수 딸로 태어났으며 형제로는 언니,오빠와 2명의 남동생이 있다. 남동생중 한 사람은 미군 복무중 사고로 요절하였으며, 한 사람은 지능의 발달이 비장애인에 비해 늦은 정신지체 장애인이다. 제천시로 이사, 동명초등학교제천여자중학교를 졸업했다. 풍문여자고등학교 수학을 위해 한국군 장교인 큰아버지댁에서 살았는데, 여학생 잡지를 친구들에게 파는 아르바이트와 아버지가 보내주시는 로 생활하였다. 고등학교 졸업후인 1967년 종로구에 있는 가발공장에서 사촌 언니와 같이 일했지만, 서진규 그 자신이 자서전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북하우스)에서 '딴 생각에 사로잡힌 소녀'라고 회상할 정도로 공장생활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미국에서의 삶

 미국이민

21세때인 1971년 친하게 지내던 미국 개신교 선교사가 식모를 구한다는 말을 들은 서진규는 도미를 생각했다. 주위에서는 온갖 말로 미국에 가겠다는 그의 결심을 꺾으려고 했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었고, 아버지가 겨우 구해준 비행기삯 100달러만 가지고 미국에 갔다. 미국에서 그는 한식당 아리랑의 웨이트리스(여성 웨이터)로 일하며 영문학을 공부했으며, 1975년 한국인 태권도 사범과 결혼하였다.

 입대

 사병시절

하지만 결혼생활은 남편의 폭력으로 얼룩졌으며, 결국 서진규는 미 육군사병으로 입대하였다. 그는 '탈영군인의 마음을 이해할 만큼' 훈련병 생활은 힘들었지만, 살아남겠다는 일념으로 어려움을 참아내어 3개월간의 훈련을 마쳤을 때는 200명중에 일등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다. 일등병이 된 그는 대한민국 용산구주한 미군 부대에서 군수업무를 맡았다.

 장교시절

상등병 시절 주위의 권유로 간부사관을 지원하여 고된 훈련끝에 임관하였다. 장교근무시절 그는 독일일본에서 해외근무를 하였으며, 1987년에 어렵게 메릴랜드 대학교 경영학과 학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하버드대학교 진학

마흔두살때인 1990년 하버드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미군 대위 신분으로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992년에는 하버드대학교 국제외교사와 동아시아 언어학 박사과정에 합격하였다. 당시 서진규는 대학교공부에 필요한 일본말실력을 갖추기 위해 개인교사와 일본말을 잘 하는 아버지에게 일본말을 배웠다. 하지만 공부를 더 많이 하려면 군인의 길을 접어야했기 때문에 1996년 11월 소령으로 전역하여, 20년이나 꾸준히 해온 군생활을 마감하였다.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국제외교사와 동아시아 언어학과에서 박사 학위(수료는 1999년, 박사논문통과는 2006년)를 취득했다.

 가족

가족으로는 딸 조성아 씨,어머니,언니,오빠 내외(《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에 의하면, 서진규 씨의 시누이 그러니까 서진규씨 오빠의 부인은 정신지체 장애인인 서진규의 동생을 정성껏 돌보는 착한 분이라고 한다.)가 있다. 현재 조성아씨는 하버드대학교 졸업후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에서 교육 장교로 복무하고 있으며, 서진규씨는 한국에서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

  •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북하우스,랜덤하우스중앙)
  •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푸른숲)
  • 오디오북《목표에서 눈을 떼지 마라》(아름다운 사회)

서진규의 희망 키워드 ..

아래는 서진규 박사의 강의 마지막에 부르시는 일본에서 발매한 자신의 노래

전체를 듣게 되시길... 


내가 터득한 다섯 가지 인생철학

서 진 규 박사( 희망연구소 소장)

나에게는 반세기의 삶을 통해 얻은 신념과도 같은 인생철학이 있다.

이러한 신념은 내 딸 성아와의 대화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었고,

그 아이의 성격과 태도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

다. 그리고 요즈음 성아와의 대화 속에서 이러한 나의 철학에 물들

어 있는 딸을 발견하는 희열을 느끼곤 한다. 그 희열을 이번 캠프에

참여한 나의 또 다른 분신들에게 주고 싶다.

 

첫째, 인간이 태어나는 데는 아무런 선택이 없다.

 

여자로 남자로, 부잣집에서 가난한 집에서, 권력이 있는 집에서 권력이 없는 집에서 등 자신이 선택해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또한 백인으로 흑인으로 혹은 동양인으로 태어나고자 해서 태어나는 사람도 없다. 어디서 태어나는가에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닌 건만 이 사회는 인간이 태어난 배경이 마치 그들의 공이나 죄인 양 서슴없이 차별을 가한다.

나는 감히 이러한 제도가 턱없이 부당하도고 선언한다. 태어난 배경에 의해서 그 사람의 활동 범위를 정해버리면, 그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기회를 잃고 만다. 그것은 그 사람만의 손실이 아니다.

세계의 위대한 영웅들과 발명가들이 태어난 배경에 의해 한정된 기회를 부여받았더라면 인류 역사에서 오늘과 같은 발전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차별은 차별을 행사하는 사람 자신에게도 큰 손실이 된다.

 

둘째,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에도 아무런 선택이 없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죽는다. 권력을 가진 자도, 돈이 많은 자도 결코 영원히 살지는 못한다. 죽음이 두려워서 항상 겁에 질려 살거나, 올 때 오더라도 겁내지 않고 태연히 알찬 삶을 살거나 죽을 때가 되면 다 죽게 마련이다. 어차피 맞이해야 할 죽음이라면, 이것 역시 자연의 법칙이란 믿고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몸은 죽으면 어차피 썩어서 없어질 자연의 일부다. 아무리 아끼고 귀하게 여겨도 죽은 다음에는 다른 사람의 뜻에 의해 처리된다. 이왕에 내 것이 안 될 봐 에야 차라리 인류를 우해 값진 보탬이 되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일 것이다.

여기서, 잠깐, 내가 1991년 3월 2일 날 써둔 편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성아는 이 편지를 본적이 없다. 언젠가 내가 이러한 뜻을 얘기해 두려 했지만 성아가 듣기를 거부했다. 남에게는 아주 강해 보이는 아이도 엄마의 죽음을 덤덤하게 들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더구나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친구 이상의 사이이고 보면 듣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딸 성아에게

지금 이 편지를 써두고자 함은 내가 심신의 불능으로 삶과 죽음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할 수 없게 되어 누군가가 대신 결정을 해주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 대비해서다.

만약 내가 회복 불가능한 식물인간처럼 되어 더 이상 혼자서 살아갈 수도 또는 정신의 마비 등으로 의사에게 내 생명을 임의로 연장하고 있는 보조선을 끊어달라는 뜻을 전할 수도 없게 될 경우, 나는 네가 이 세상에서의 내 존재를 끝내주기를 간곡히 부탁하며, 네게 그러 수 있는 결정권을 맡긴다.

이런 부탁에 네가 얼마나 가슴아파할지 엄마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단다. 그런데도 하지 않을 수없는 내가 원망스럽구나.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위의 경우 내 삶을 끝내주는 것이 바로 자신을 위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함이 나를 더 많은 고통으로부터 구해주는 일이고, 나를 더욱 해복하게 하는 길이

기에…….

만일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혹은 과학 연구를 위해 내 몸의 일부 또는 전체가 필요하다면, 그런 고귀한 뜻을 위해 무엇이든 기꺼이 주기 바란다. 그리고 나머지 필요 없는 부분들을 태워서 너에게 가장 편리한 곳에 묻어주기 바란다.

언제나 성아를 사랑하는 엄마가.

 

셋째, 인간에게는 이승에서 살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혹자는 우리에게 전생이 있다고 하고, 또 다른 이는 우리는 죽은 후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전생에 무엇을 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후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지금 삶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보면 전생과 후생은 다른 사람의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생과 이승 그리고 후생이 본인의 뜻대로 서로 연결되지 못하니, 결국 인간에게는 이승에서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겠다.

 

넷째, 그러나 이 한번 의 기회를 어떻게 살다 가는가는 바로 내가 결정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축을 때까지 사회 제도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어떤 처지에 닥치더라도 마지막 선택은 자신이 한다. 이 세상에서 주어진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보며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하든가, 아니면 부정적으로 보며 어쩌지 못해 살든가 마지막 선택은 각자의 손에 주어져 있다.

나는 물 반잔의 비유를 자주 든다. 물이 반 남은 것을 보고 " 아, 이제는 반밖에 안 남았구나! 어떡하지?" 하며 안절부절 못하거나 "아, 아직도 반잔은 남았으니 난 얼마나 행운아인가!" ㅎ며 다행스럽게 생각하거나 물이 반잔이라는 현실에는 변함이 없다. 다시 말해서 같은 현실도 마음먹기에 따라 자신이 행복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바로 자신이 하는 것이다.

 

다섯째, 이왕 태어난 삶이다. 한번 힘차고 보람 있게 살다감도 멋있지 않은가.

 

우리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우리는 이미 태어났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깨닫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마는 사람들도 부지시구다. 그들은 자기 소신껏 살아볼 기회마저도 뺴앗겨버린 셈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알 기회가 주어진다. 그리고 죽음이 그들을 데리고 가기 전까지는 자신이 삶을 요리해볼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살이에 질질 끌려 다니며 죽지 못해 살거나, 아니면 자신이 주인이 되어 원하는 삶을 개척하며 힘차게 살거나 마지막 숨이 거두어질 때까지 우리는 '살아 있다'

이왕이면 이승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단 한 번의 기회를 내 뜻대로 멋있게 살다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 것도 매력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16년만에 하버드대 박사학위 따는 서진규 씨

 


 

하버드대 석사 과정에 입학한 지 16년 만에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되는 서진규 씨.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뚝 선 서 씨는 “과거에는 오기와 분노 때문에 힘든 생활을 버텨 왔지만 이제는 ‘꿈’ 때문에 힘든 도전을 계속 한다”고 말했다. 보스턴=공종식 특파원

《가난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나 집안에서 ‘가시나’로 천대받았던 그였다. 고교 졸업 후 가발공장 등을 전전하다 23세 때 100달러짜리 지폐 한 장 들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식모 이민’을 떠났던 그였다. 그가 드디어 하버드대 박사가 된다.

 

6월 8일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박사학위를 손에 쥐게 되는 서진규(58) 씨. 1999년 자전 에세이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로 한국 사회에 ‘희망’이라는 화두를 던져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하버드대 석사 과정 입학 16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는 그를 최근 보스턴 하버드대 교정에서 만났다.》

 

“정말 꿈만 같아요. 제가 속한 하버드대 문리대에서는 석사 과정 입학 10년 안에 박사학위를 따도록 돼 있어요. 제가 1990년에 석사 과정에 입학했으니깐 2000년부터는 매년 대학본부에서 ‘올해까지 박사학위를 따지 못하면 학교를 떠나야 한다’는 ‘협박성 편지’를 보내 왔어요. 그때마다 학과에서 제 사정을 이야기해서 양해를 구하기는 했지만….”

 

서 씨는 “계산을 해보니 제가 학생증을 갖고 있던 기간이 통틀어 31년이다”며 “어렸을 때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어 한이 맺혔는데 그 때문인지 공부를 실컷 하는 게 제 운명인가 봐요”라고 말했다.

 

그의 이력은 평범하지 않다. 가발공장 여공, 골프장 식당 종업원, 가정부로 일하기 위한 미국행, 뉴욕의 레스토랑 웨이트리스, 두 차례의 결혼과 이혼, 미군 입대, 14년간 5개 대학을 옮겨 다닌 끝에 학사학위 취득, 마흔둘의 나이에 소령 예편 후 하버드대 석사 과정 입학….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것도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하버드대 국제외교사 및 동아시아언어학과에서 받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한국에서 미군정에 미친 일본의 영향’.

 

“교수님들은 나이가 든 학생이라고 절대 봐주는 법이 없어요. 몇 차례나 논문이 퇴짜 맞을 때는 내가 과연 박사학위를 딸 수 있을까 하는 회의까지 들었어요.”

 

그는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C형 간염이 악화돼 어려움을 겪은 사실도 털어놓았다.

 

“도저히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돼 병원에 갔는데 수치가 위험한 수준으로 나왔어요. 공부하느라 무리하면서 더 악화됐나 봐요. 이러다 내가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의사는 1년 정도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치료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공부와 병행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해 결국 치료 시기를 미뤘어요. 이제 박사학위를 땄으니깐 한국에 가서 1년 정도 쉬면서 치료를 받을 생각이에요.”

 

50대의 나이에 딸 또래의 학생들과 함께한 하버드대 생활은 어땠을까(서 씨의 딸인 성아 씨도 하버드대 출신이다. 성아 씨는 학생군사교육단에 지원해 현재 미 육군 대위로 하와이에서 근무 중이다).

 

“하버드대 학생들은 무서울 만큼 똑똑해요. 저처럼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사람은 상대가 안돼요. 열등의식이나 자격지심도 많이 느꼈어요. 그러나 저는 경험이 많잖아요. 그래서 강의실에서 토론할 때 주로 경험을 무기로 활용했는데, 항상 아슬아슬했지요. 그래도 함께 맥주도 마시고 친구처럼 지냈어요.”


그는 하버드대에서는 ‘독종’으로 통한다.

 

논문 준비를 위해 읽은 책이 500권을 넘는다. 뒤늦게 시작한 일본어 실력도 이제 일본인을 대상으로 큰 불편 없이 강연할 정도로 수준급이다.

 

그에게 그동안의 수많은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

 

“젊은 시절에는 분노와 오기였어요. ‘왜 나는 무시 받아야 하나’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해야 돼’라는 오기 때문에 살아왔지요. 그러나 제가 어느 정도 성취한 뒤에는 그 같은 오기와 분노는 사라졌어요.

 

이제는 ‘꿈’ 때문에 살아가요. 제가 이 나이에 힘들게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노력했던 것도 이 때문이에요. 그리고 요즘에는 제 책을 읽고 희망을 갖게 돼 새로운 것에 도전하게 됐다는 독자들의 편지도 큰 힘이 됐어요.”

 

그는 앞으로 책을 추가로 쓴다는 계획도 세워 놓고 있다. 일제 치하에서 힘든 시절을 살아온 아버지를 소재로 한 영문 소설도 어느 정도 초고를 잡아 놓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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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          


서진규의 희망                                  



서진규 박사님의 카페 http://cafe.daum.net/ilovecon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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