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니만 사람이냐!

혁명은 조직 없이는 성취되지 않고, 간부가 우선 보호되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겠소. 어느 불가피한 상황 아래서 조직이 와해되었다가 그걸 다시 일으키는 데도 간부가 없어서는 불가능한 일 아니오?  17


3 두 형제의 야행

“정치하는 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아닙니다. 알면서도 억눌러대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한 도리 없는 일입니다. 전국적으로 소작인들 난리가 일어나고, 정부가 엎어져야만 해결될 일입니다. 내란은 괜히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정치하는 꼴은 내란을 조장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전원장과의 대화에서 김범우가 한 말중에)  87

“종교가 타락하면 자체의 자율적인 법을 버리고 세간법을 이용하거나 의탁하게 되는 법입니다. ..”(법일스님의 말중에)  110



4 태백산맥에 내린 소개령

좌익. 무장병들을 섬멸하는 것은 조흥나 수많은 양민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을 저지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여론이 전국화되었고, 결국 그 문제는 국회의 안건으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 국회에서는 투표를 통해 소개령의 발동이 타당하다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그런 결정을 내렸으면 의당 뒤따라야 할 소개당한 사람들의 주거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세워지지 않았다. 국민의 손으로 뽑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국회에서 그 지경을 하는 것을 보며 심재모는 어지러운 가치 혼란과 함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다시금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21



8 어떤 여자 빨치산의 죽음

빨치산은 세 번 죽는다고 했다. 얼어죽고, 굶어죽고, 총 맞아 죽는 것이 그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투쟁의 긍지로 삼고 있었다.  254

‘공산비적’을 줄인 ‘공비’라는 말은 지난 1월 초순에 강원도 경찰책임자가 신문지가를 상대로 쓰게 되면서 ‘빨갱이’란 말을 제치고 급속히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공식용어화하고 있었다. 따라서 ‘반란도배’라는 말의 준말인 ‘반도도’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267



9 민중의 승리, 2대 국회의원 선거

농지를 분배받은 소작인들은 농지값으로 평년작 생산량의 한배 반을 5년간 분할상황하고, 정부는 지주들에게도 같은 조건을 지가 증권을 교부해 주기로 한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농지개혁은 대다수 소작인들의 불만과 실망을 그대로 남겨둔 채 그 막을 내려가고 있었다.  298

신문들은 전국의 선거결과를 보도했다. 먼저 돌출된 것이 여당인 대한국민당의 참패였다. 국민당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 한민당에 등을 돌려버린 이승만을 옹립하여 결성된 의석 70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여당이었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는 겨우 22명의 당선자를 냈을 뿐이다. 그 다음으로 주목을 끄는 것이 한민당계였다. 절대다수 대중들에게 배척을 당하는 가운데 이승ㅇ만한테까지 버림을 받게 된 한민당은 궁여지책으로 민주국민당으로 변신을 꾀했다. 그런데 선거결과는 고작 23명의 당선이었다.  거기에 맞서서 무소속의 당선자는 자그마치 126명이나 되었다. 선거결과는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불신과 친일지주 중심인 한민당 계열의 배척을 분명하고도 선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324-325



10 아,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일말의 양심을 가진 지식인치고 해방 이후의 현실에 대해 환멸하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환멸은 환멸일 뿐이지 무슨 방도가 되겠소? 김 형이나 나나, 월 좀 배우고 생각할 줄 안다는 식자층들은 현실 속에서 이미 허수아비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이분론적 선택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식인들이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소. 혼자 고민해 봤자 공염불이고, 서젓이 모여앉아 고민해 봐도 공염불이오. 양심상 현실세력에 가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항하자니 좌익으로 몰아치는 정치적 올가미가 목을 낚아채고, 이런 상황 속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지식인적 고민은 할 필요가 없소 다만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대중의 한 존재로서 현실을 올바로 지켜보는 일밖에 없다는 생각이오.”
..
“내 생각으로는 이놈의 세상이 달라지는 데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을 것 같소. 그게 뭔가 하면, 기왕 썩은 세상이니까 한 이삼년 더 푹푹 썩게 내버려두는 거요. 권력이 썩을 대로 썩다 보면 제물에 무너지게 될 거고, 그러는 동안에 대중들의 불만과 불신은 쌓일 대로 쌓여 폭발하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세상이 뒤집어질 것 아니겠소. 종기야 곪을 대로 곪아야 뿌리가 빠지는 법이니까요.”
..
민기홍의 말은 막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또. 틀린 말도 아니었다.  328-329



11 1950년 6월 25일

권 서장은 라디오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무리시간이 지나도 똑같은 내용만 되풀이하고 있는 보도를 그대로 놓고 보자면, 전쟁은 북쪽에서 먼저 도발한 것이고, 그 양상은 전면적이고, 상황은 이쪽이 불리하다는 인상이었다. 그가 의문을 갖지않을 수 없는 것은, 대통령이 멸공통일·북진통일을 당당하게 내세운 것이 언제부터였으며, 대통령의 그 힘찬 주장에 발맞추어 국방장관이고 참모총장이 입을 모아, 한시라도 명령만 내리시면 점심밥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밥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가 다 갖추어져 있다는 호언장담을 그 얼마나 자주 했던 것인가. 그 장담은 마치 무슨 노랫가락처럼 유행된 말이 아니던가. 그런데 북쪽한테 먼저 공격을 당하는 것은 뭐며, 상황이 불리해진 것은 또 뭐란 말인가. 국방장관이고 참모총장이고 정작 별다른 실속도 없으면서 대통령이 듣기 좋도록 허풍만 떨어댔단 말인가. 알 수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북쪽의 행위를놓고 '불법남침' 운운하는 점이었다. 주의를 달리하는 두 정권 사이에 상호협약한 무슨 법이라도 있었던 것인가. 그런 법이란 애초에 없었던 상태로 이쪽에서는 멸공북진통일을 내세우며 남쪽의 빨갱이들을 소탕해 왔고, 저쪽에서는 공산혁명통일을 내세우며 남쪽의 자기편을 지원하는 상태로 싸움은 벌써 몇 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불법'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소린가. 상황이 불리해지니까 다급해서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이쪽의 멸공북진통일은 '합법'이고저쪽의 공산혁명통일은 '불법'이라는 것인가. 도대체가 모를 소리다. 불법을 따지자면 2차대전 때 일본이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을 폭격한 경우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 쪽에서는 저쪽 공산정권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한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러면서 무엇을 근거로 해서 따지고 있는 불법인가. 이쪽의 정권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저쪽에서도 이쪽이 북진통일을 감행하는 경우 불법을 따질 근거가 없기는 매일반 아닌가. 그동안 공산혁명을 하겠다고 태백산맥을 통해 지속적으로 남파시킨 빨치산과 이번의 도발과는 뭐가 다른가. 수의 많고 적음이 다를 뿐이 아닌가. 싸움의 규모가 크고 작음이 다를 뿐이 아닌가. 그런데 왜 그때는 불법이라고 하지 않고 이제 와서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인가. 도대체 앞뒤가 안 맞는 소리다. 싸움이 크게 벌어졌으면 그에 맞서 싸우는 일만 있지 않은가. 잠꼬대 같은 엉뚱한 소리 지껄여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싸움은 총으로 하는 것이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니잖은가. 빌어먹을……
권 서장은 울화가 치미는 걸 느끼며 라디오 앞에서 돌아섰다.  374-375

그러니까 보는 각도에 따라, 관점의 차이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게 되어 있소. 그러나 보다 올바른 판단은 있게 마련이고, 착오를 줄이고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사건의 주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소. 먼저, 우리를 분단시키고 오늘의 대립상황을 주도한 미쏘를 주체로 하는 시각인데, 상반된 이데올로기로 대립하고 있는 두 강대국이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서 전쟁을 일으키게 하고, 우리는 그들의 냉전을 실전으로 대신 싸울, 왈 이데올로기 대리전쟁이라는 판단이오. 미쏘의 관계와 우리의 분단현상과의 관계에서 볼 때 아주 그럴듯한 판단이 아닐 수 없소. 그러나 그 판단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아무 뜻도 생각도 없는 바보나 천치로, 그야말로 괴뢰 노릇이나 했다는 뜻이 되오. 물론 그 판단에는 두 나라에게 이 땅의 강점과 분단의 책임을 따져야 한다는 뜻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우리 민족을 스스로 비하시키고 모멸하고, 민족의 삶이나 존재를 부정하는 허점을 가지고 있소. 그와는 달리 우리 자신을 주체로 하는 시각인데, 그러자면 해방의 시점을 연장해서 우리를 보아야 할 것이오. 해방은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커다란 역사변동의 계기나 전환점인 것이 분명했는데, 미쏘가 강점하지 않고 해방을 맞이했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했을 것이냐 하는 점이요. 사회혁명이나 사회개혁은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것이었소. 그것은 계급적으로 지주제도를 척결하는 것이었고, 민족적으로 친일반민족세력들을 처단하는 것 아니었겠소. 그런 역사적 욕구 앞에서 이데올로기라는 건 그것이 무엇이건 상관이 없소. 그 욕구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데올로기로 채택되고, 빛을 내게 되어 있소. 그런데 그 욕구가 강대국 점령하에서 중단되고 좌절된 것이 바로 남쪽 땅이오. 그 욕구는 어쩔 수 없는 폭력 앞에서 숨을 죽인 것이지 소멸되거나 해소된 것이 아니고, 자유민주주의가 설득력을 잃고 불신의 대상이 된 것에 반해 사회주의는 상대적으로 빛을 발하게 되었소. 그런 상태로 두 정권은 대치하면서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실현을 위해 '통일'을 우선과제로 내세우게 되었소. 한쪽은 무조건 공산주의를 없애자는 통일이고, 다른 쪽은 사회혁명을 이루자는 통일인데, 어느 쪽이나 그 방법으로는 전쟁을 전제로 한 것이었소. 바로 이 대목에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죄를 다시 거론하지 않을 수 없소. 미국이 아니었으면 해방이 되고 깨끗하게 처단당했을 자들에게 미국이 국가정치권력을 만들어주고, 무장을 시켜주고 해서 이제 그 반민족세력들이 제놈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오히려 민족을 강제동원해서 제물로 써먹게 되었다 그것이오. 그리고 그놈들의 권력을 무너뜨리기까지 무고한 민중들이 수없이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소. 이것이 다 미국이 저지른 죄요. 그러나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한 피를 흘리더라도 역사는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오. 이번 전쟁은 우리 민족의 삶에 박힌 모든 갈등과 모순을 일소시키기 위해서 외세와 반민족세력을 동시에 척결하는 계기가 될 것이오."
김범우는 이학송을 그저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학송은 손승호보다 한술 더 뜨고 있었던 것이다.  398-400

이 전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손승호의 말도 맞다. 이학송의 말도 맞다. 올바른 의식으로 역사를 본 판단이다. 그러나 전쟁은 그것만으로 이겨지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정의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지 모르지만 전쟁 자체가 정의는 아니다. 전쟁은 정의도 사상도 아니다. 윤리나 도덕은 더구나 아니다. 전쟁은 오로지 힘일 뿐이다. 철저한 폭력으로 결판나는 약육강식이다.  411

김범우는 한 팔을 베개로 그녀에게 내준 채 못 견디게 담배가 피우고 싶은 것을 견디며 모래바닥에 누워 있었다. 아,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한테서도 성욕을 느끼고, 관계를 통햏 희열을 느끼는 수컷의 야비하고 무분별한 본능이여.  415



12 산골짜기를 울리는 한밤중의 총소리들

연대장은 바로 일본 만군출신이었고, 그 경력을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오힣려 그때의 경험들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랑처럼 입에 올리는 위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군수뇌부에 속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들먹여가며 만군시절부터의 관계를 강조해 자기과시를 즐기는 인물이었다. 저런 것들이 장교의 7할을 차지하고 앉았으니…… 심재모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로 참모실 문을 열었다.  423



13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국의 참전, 한국군의 유엔 편입, 미국ㄴ에게 넘어간 통수권, 미군의 제공권 장악, 그런 숨가쁜 상황의 변화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런 바로 이번 전쟁이 조선 인민과 미국과의 전쟁이 된 것을 의미했다. .. “두고 보십시요. 미국이 전쟁에 개입한 이상 피를 흘리고 손해를 보는 건 우리 민족일 뿐입니다. 인민해방은 수포로 돌아가고, 민족좌절만 남게 될 겁니다. 미국은 인디언을 멸종시키다시피 했고, 흑인을 노예로 짓밟아 오늘을 이룩한 역사를 가진 나라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말입니다.” 김범우의 말이 들리고 있었다. 이학송은 눈을 더 크게 열어 어둠 속을 응시했다.  463

“미국을 과대평가하자는 게 절대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자는 겁니다. 이념의 실천이 현실이라는 말, 좋습니다. 그럼 그것을 저지하려는 미군의 세력도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 끼여 희생당하고 있는 대중들도 현실입니다. 이념의 실천이 확고한 보장이 없을 때 대중들의 희생은 무엇으로 보상되고, 어떻게 설명되는 겁니까.” 다시 들리는 김범우의 말이었다.  466

“.. 여순 사건이 좌절되고 나서 어떻게 됐는지 자네도 잘 알잖나. 미군무기로 군겨으이 무장이 강화되었고, 정부는 반공을 정책으로 내세웠고, 좌익은 괴멸상태로 치닫고, 미쏘가 갈라놓은 분단은 민족의 이념적 분단으로 변모되지 않았나 말야. 그때의 상태가 몇십 배로 팽창해서 작용할 것이 이번 전쟁이 좌절한 다음에 초래될 상황이란 말일세. ..”
..
“승호 자넨 근본적으로 내 말을 이해하려고 하질 않는군. 자네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난 민족제일주의자야. 그래서 민족보다 먼저 이념을 내세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튼튼한 민족의 생존을 위해선 그 어떤 이념도 상관하지 않네. 그런 입장에서 민족이 상하기만 하고, 목적 달성이 어려울 이번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게 내 괴로움이란 말일세. 그럼 도대체 어쩌겠다는 거냐고 자넨 묻겠나? 당분간 이 괴로움이 계속되겠지.”  469

"비겁도 좋고 비굴도 좋네. 나야 안목도 짧고 정치권력도 갖고 있지 않으니까 구체적 대안을 낼 수가 없네. 그러나 근대사회의 구성이 철저하게 민중 중심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고, 그 바탕 위에서만 민족의 주체형성이 가능하고, 민주주의도 가능하며, 역사발전도 도모된다는 것을 알고 있네. 그런 최소한의 인식으로 우리의 문제를 볼 때 한 가지 명백한 것은 있네. 미쏘가 우리를 어떤 형태로든 제약하고 있고, 우리가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이념을 하나씩 나눠갖고 사회문제나 민족문제를 해결하려 든다면 그것이야말로 환상이네. 미쏘 두 나라가 맞서 있기 때문에 우리의 어느 쪽 시도든 무위로 끝나는 환상이 될 수밖에 없고, 만에 하나 미쏘 어느 한쪽이 양보를 하거나 포기를 해서 그런 문제를 해결했다 해도 나머지 한 나라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는 한, 민족은 노예적 속박에서도 벗어날 수 없을 거네. 내가 파악하는 건 지금 우리 민족이 처한 상황은 볼셰비키의 혁명상황도 아니고, 중공의 혁명상황도 아니라는 점이네. 로서아에도 중국에도 그들을 제약하거나 속박하는 막강한 두 외국세력은 없었다는 사실이네. 그들이 지금 우리와 같은 상황에 처했어도 혁명을 성취시킬 수 있고, 민족의 문제를 생각대로 해결할 수 있었겠나를 묻고 싶네. 그래서 난 외국세력의 배격이 급선무라고 생각하는 거네."  470-471

"이 동지의 그 솔직함이 좋소. 기사는 죽은 애를 어머니가 안고 통곡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그건 기사란 있는 그대로를 옮겨놓는다는 원칙에 아주 충실해 있소. 그러나 그건 제국주의적 시대착오적 기사작성법이오. 우리는 지금 사회주의 혁명을 실천하고 있으며, 인민해방전쟁을 수행하고 있소. 모든 인민이 노력을 바치는 모든 분야의 일들은 그 두 가지를 성취시키기 위해 복무해야 하며집중되어야 하오. 혁명의식을 고취시키고, 인민선동을 고무시키는문화선전사업의 선봉에 서 있는 신문은 더 말할 것이 없는 것이오.따라서 기사작성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해서 그 두 가지 사실의 실현을 위해 충실한 복무가 되도록 씌어져야 하오. 그러니까이 동지가 쓴 기사가 어떻게 끝나야 하겠소? 애어머니가 애를 끌어안고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마는 것, 그건 전시대적 패배주의고 체념주의며, 그것은 또한 반혁명적이며 반해방적인 꼴일 뿐이오. 우리는 그 시점에서 혁명적인 인간상을 창조해 내야 하며, 해방을 갈구하는 인민상을 창조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오.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되겠소? 이 동지, 주저앉아 통곡하는 어머니를 일으켜세우는 것이오. 그것이 1단계요. 그 다음에 어머니가 안고 있는 죽은자식에게, 너를 이렇게 죽인 미제국주의자들을 쳐부셔 너의 원수를 갚을 때까지 이 에미는 끝까지 싸우겠다. 하는 결의를 소리 높이 외치게 하는 것이오. 어떻소, 이 동지, 이게 조작으로 느껴지오?사실의 왜곡이라고 생각되오? 어디 말해 보시오."
“예, 솔직히 말씀드려서 지금까지 기사를 써온 습관 때문에 익숙하지는 못합니다."
“당연한 일이요. 중요한 건 기자로서의 그러한 기사작성이 사실의 조작이나 왜곡이 아니라 혁명의식의 실천이라는 것을 강요 없이 이해 납득하는 것이고, 그리고 진정한 필요에 의해서 기사가 그런 방향으로 씌어져야 하는 것이오. 자아, 그런 식의 기사작성이사실의 왜곡이나 조작이라는 거부감을 가질까 봐 하는 말인데, 사실의 왜곡이나 조작은 남조선 신문들이 반민특위를 좌익집단으로매도하거나, 좌익을 매국노로 몰아세우거나, 김구 선생을 민족반역자라고 쓰거나, 민족반역자들을 오히려 민족주의자나 애국자로 둔갑시키는 짓들이 아니겠소? 사실의 조작이나 왜곡이란 반역사·반사회·반인민적인 기록일 때를 가리키는 것이오. 애어머니를 일으켜세우고, 그런 결의를 다짐하게 하는 데 반역사·반사회 · 반인민적인 요소가 어디 있소. 그렇게 기사를 써서 인민들의 혁명의식이 고취되고, 해방의지를 고무받게 되면 그 가엾은 어린아이의 죽음은헛되지 않게 되는 것이며, 이 동지는 기자로서 혁명과 해방에 훌륭한 복무자가 되는 것이오. 어떻소, 내 말이 납득이 되오?"
이원조(해방일보 편집국장)는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477-479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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