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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2.31 2010년 12월에 참석한 6번의 독서모임
  2. 2010.12.30 인문학 콘서트 - 김경동외 이숲 2010 03040
  3. 2010.12.29 미움의 안경과 사랑의 안경
  4. 2010.12.28 불안한 데뷔 - 래리 킹
  5. 2010.12.27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야..!! 1
  6. 2010.12.26 언어의 달인, 호모 로퀜스 - 윤세진 그린비 2007 44800
  7. 2010.12.25 나이는 생각보다 맛있다. - 김혜경 글담출판사 2009 03810 1
  8. 2010.12.25 행복이 자라기 위해서는
  9. 2010.12.24 열정 있는 사람이 가져야 할 7가지 미덕
  10. 2010.12.24 꿈을 이루는 방법이 아닌 꿈 자체에 집중하라
  11. 2010.12.23 셀리의 법칙, 머피의 법칙
  12. 2010.12.22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 고미숙 그린비 2010 04800
  13. 2010.12.21 오늘을 살기로 해요.
  14. 2010.12.20 포정해우(庖丁解牛) 2
  15. 2010.12.20 괜찮다, 다 괜찮다 - 공지영 지승호 알마 2008 03810
  16. 2010.12.19 꽃들의 웃음판 - 정민 사계절 2005 03800 2
  17. 2010.12.18 질문 릴레이 시즌2
  18. 2010.12.17 떠나지 않으면 청춘이 아니다 - 김태현(택꼬) 더난출판 2010 13810
  19. 2010.12.16 완벽 하고픈 생각의 욕심들 2
  20. 2010.12.15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 고미숙 그린비 2008 04800
  21. 2010.12.14 디스토피아 [dystopia]
  22. 2010.12.14 사디즘 [sadism] (가학음란증, 가학증), 마조히즘 [masochism]
  23. 2010.12.14 놀이의 달인, 호모루덴스 - 한경애 그린비 2007 44300
  24. 2010.12.14 아나키즘 [ anarchism ]
  25. 2010.12.14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Zapatista National Liberation Army]
  26. 2010.12.14 노마디즘 [nomadism]
  27. 2010.12.13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고미숙 그린비 2007 44100
  28. 2010.12.12 Love & Free 러브앤프리 - 다카하시 아유무 동아시아 2002 03830
  29. 2010.12.11 파토스 [pathos]
  30. 2010.12.10 아포리즘, 철학을 위한 아포리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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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 다시 인문학을 논하며
자신의 생각을 그려내고 기록하면서 삼의 고민들을 공유 - 인간의 고뇌는 지식과 지혜로 발전하였고, 긴 세월이 흐르면서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어 왔다.  유인촌   5

책을 열며 - 인문학 열전? 인문학 열정!
인문학이란 한가한 고담준론(高談峻論)이 아니라 내일의 삶을 개척하는 에너지원이자 상상력의 원천이라고, 인문학자들은 강조합니다.  10
인문학의 이해는 '성찰'과 '지식습득'이라는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다시말해 개인적 경험의 집적이 모두 인문적 내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삼아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전문성이 왜 일반인의 관심사여야 하는지를 알리고, 그 필연성과 필요성을 전달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표입니다.  13

우리 인문학의 길 - 김경동  김기현
바로 높은 층위에 있는 이념과 삶의 의미와 관련된 사고, 이것이 인문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굴곡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자기 삶의 의미를 알고, 삶을 포과적으로 이해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23
독서에 관해서도 우리 사회가 조금 더 깊이 성찰해야 할 측면이 있는것 같습니다.  27
오늘날은 학문의 통섭이 이루어지는 시대인 만큼, 사회과학자나 자연과학자도 인문학자드로가 함게 토론하고 담론을 생산하는 데에도 참여합니다만, 이런 움직임이 좀더 활발해지기를 바랍니다.  28
세계철학자대회는 5년마다 열리는 국제적인 행사로 100년의 전통이 있스니다.  31
(2008년 서울에서 세계철학자대회를 치름)
인문학은 그저 '있으면 좋은 것'이 아니라 생존의 필요조건인 공통의 가치관이자 문화이고, 품격 있는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랬을 때 대중에게 인문학은 하나의 바람이 아니라 저변으로서, 우리 사회 전체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리라 봅니다.  34
가정에서 책을 많이 읽자, 교양이 살아 있는 교육.  35
철학자들은 지식의 추구는 상황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도구적 효용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 자체가 숭고한 가치로서 인간을 규정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인식론>에서  36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상황에 반사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거쳐서 대응한다는 점이다.  37


새롭고 낯선 유혹, 통섭 - 최재천
통섭(通涉) - 통할 통(通) 자에, 건널 섭(涉) 
통합은 물리적으로 이질적인 것들을 그냥 한데 묶어놓은 것입니다.
융합은 하나 이상의 물질이 함께 녹아서 화학적으로 서로 합쳐지는 것을 말합니다.  47
통섭은 그냥 거기 섞여 있는 상태로, 녹아 있는 상태로 멈춘게 아니라 거기서부터 뭔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게 만들어지는, 번식하는, 생물학적인 어떤 합침을 의미한다는 거지요.
통섭은 그저 합쳐지는 데서 그치면 안 되고, 거기서 뭔가 새로운 것이 태어나야 합니다.  48
통섭이 일반인들에게도 필요한 이유는? - 온갖 사회문제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 인간 사회가 앞으로 풀어야 할 문제들은 어느 한 분야가 답을 낼 수 없다. 그래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문제를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50
생태학 강의실에 철학과 학생이 있으면, 그 학생이 도서관에서 미분 방정식을 한 달 공부하면 수업을 따라올 수 있나? 어림도 없다!!
국문과 학생을 물리학과 교실에 앉혀 놓고 양자역학 원서를 주면 한 쪽도 못 읽습니다.
이게 우리 교육의 현실입니다. 
실제로 미국 대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복잡한 수학 문제를 내주면, 그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고, 자기에게 부족한 부분이 뭐고, 그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채워서 따라가야 하는지를 알아요. 왜냐하면, 고등학교 때 공부하는 방법에 대한 기본기를 갖우고 대학에 들어왔기 때문이죠.  58
윌리엄 휴얼은 그냥 작은 지류들이 모여서 큰 강을 이룬다는 비유를 하면서 작은 분야의 이론들이 언젠가 한데 모여서 뭔가 큰 것을 만든다고 설명하였다.  60
'현재 산업국가들과 세계 경제를 한데 묶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연과학의 통합이다.' <통섭, 지식의 대통합>에서  65


미래의 대학, 학문의 미래 - 김광웅
행정학자는 행정 문제를 풀지 못하고, 교육학자는 교육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여러 학문이 서로 교류하면 문제의 정곡에 다가갈 수 있는데 담을 너무 높이 쌓아서 그게 안 된다는 거지요.  71
1945~2000년까지 미국의 GDP는 세 배나 늘었지만, GPI(Genuine Progress Index, 국민총생산(GNP)이나 국내총생산(GDP)의 개념에 시장가치로 나타낼 수 없는 경제 활동을 덧붙여 만든 경제지표. 시장가치로 나타낼 수 없는 가사노동, 육아등의 경제활동가치와 범죄, 환경오염, 자원 고갈 등의 비용등 모두 26개 요소의 비용과 평익을 포괄하는 개념이다.)는 그대로 였다는 겁니다. 더 잘살려고 경쟁한 결과가 그렇다면, 이제 어떡해야 하느냐. 자아실현이나 삶의 질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만큼 남의 삶의 질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만큼 남의 살이나 생각도 존중해야지요.  78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자 달랑베르는 학문을 분류하면서 인간의 이해에는 기억의 축, 상상의 축, 이성의 축이라는 세 가지 축이 있다고 함.
기억의 축을 대표하는 학문이 역사이고, 이성의 축을 대표하는 학문이 철학이라면, 상상의 축을 대표하는 학문이 바로 시학(詩學)이라고 했어요. 다시말해 창조적인 상상력을 말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시, 소설, 디자인, 음악과 같은 것들입니다.
제가 과학자들에게 IT(Information Technology), BT(Biology Technology), NT(Nano Technology)는 잘 아시지만, RT가 뭔지 아시느냐고 물어보면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RT는 관계기술입니다. Relations Technology. 디지그노는 분산된 것을 융합해서 더큰 부가가치, 더 역동적인 힘을 끌어내어 아름답게 구미는 지혜와 심미안을 말합니다.  82
흥어시 입어예 성어락(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 사람은 시로써 흥하고, 예로 서고, 락으로 이룬다. 즉, 사람은 시로써 일어나고, 논리와 실증적인 지식을 전수받고 공부함으로써 시작하고, 예로써 서면 도덕적 인간으로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사회에 참여하며, 락으로써 논리 너머의 미학적 감수성을 통해 완성되는 존재이다.  83
미래 리더십은 '너와 내가 함께하는' 리더십이지, 내가 앞서가고 너는 무조건 따라오라는 식의 리더 - 팔로워(Leader-follower)의 리더십 개념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태평성대에는 태상부지유지, 임금은 있는 듯 없는듯 아랫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지일 좋은 거거든요. 
물론 리더는 열심히 노력하고, 융합의 관점에서 많은 것을 알고, 측히 비전을 제시해야 하기에 과학기술이 얼마나 발달하고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94
뭐든 사랑할 줄 알아야 지도자지, 내것만 챙기는 사람은 리더가 될 수 없어요.  95
어떤 변화가 시미사회에 요구되는 걸까요?
우선, 자신을 안다는게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남에게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남을 이해하고 설득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 쌓인다고 해서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소 실천해서 남의 경험을 얻어서 깨우치면 내가 얼마든지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분법적인 사고를 넘어서고, 합리적(reasonable) 사고만이 아니라, 서로 통용될 수 있고, 관용하고,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reasonable) 자세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98

넘치는 교육 열정, 아이의 행복은? - 문용린

우리 나라 말에 아주 좋은 표현이 있는데,

삶과 앏의 복합어 였습니다. 이것이 진짜교육의 의미였단 말이죠.  105

삶의 지혜가 담긴 가르침을 통해 앎과 삶이 결합한 교육. 그래서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하면 사람이 제대로 되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잖아요.  106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학덕을 쌓은 것이 훗날 출세와 성공으로 이어져서 바람직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이 그 사람 개인의 행복도 되고, 그 사람이 사는 사회에도 공헌 할 수 있는 능력(competency)이 되어야 합니다.  107

동양에서는 교육이 하느님의 사업이 아니라 패밀리 비즈니스였지만, 서양에서는 일직부터 교욱이 퍼블릭 비즈니스였던 겁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유일신이 있기에 학교 교육에는 인성교육이나 도덕교육 같은 것이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에서 하니까요.

그러나 동양의 유교적 사고로는 부모가 자기 자식을 교육해야 하거든요. 국가는 평가제도만 운용해서 시럼을 보게 하고 똑똑한 인재를 뽑아서 관리로 임용만 하면 된다는 식이죠. 우리나라 전통적인 과거제도가 바로 그런 개념입니다.  

그러나 교육의 서양화가 되면서 유교적인 관습도 남아있다보니 헷갈리게 되는것.  110

우리나라에서는 교육이 너무 '중요하다'는 겁니다. 왜 중요하냐하면, 우리나라에서는 교육으로 당대에 신분 변환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11

한국, 대만, 일본의 부모는 자식 교육에 대해 '공부는 누구나 하면 된다'는 생각이 철저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미국 부모는 '공부는 아무나 해서 되는게 아니라 소질과 적성이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113

'다중지능이론' - 한마디로 요약하면 교육은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끄집어 내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학교라는 집중적인 과정에서는 학생의 내면에 숨이 있는 그 학생만의 소질, 적성, 능력을 끄집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116

(사진은 클릭하면 원본크기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말에 너무 흔들리지 말고 내 아이에 대해서는 나만의 철학을 갖자는 것입니다.  121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모두 그 자체로 공부입니다.' <부모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쓴소리>중에서  123


인문학적 상상을 통한 종교문화 읽기 - 정진홍
자기 종교만 절대화하기보다는 인간은 왜 종교를 가지고 있는가, 종교적인 삶이란 무엇인가를 조금 거리를 두고 이해햐려는 자세가 필요한 거죠.  129
종교를 객관화해서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문화라면 우선 다양성을 전제할 수 있겠죠. 시간과 공간에 따라 고유한 특성을 가지는 현상이라는 점, 인간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검도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종교에는 초월적인 차원이라든가, 인간의 지성이 도달할 수 없는 신비와 같은 전제가  있게 때문에 그 전제에 공감하지 않으면 종교 현상을 이해할 도리가 없습니다.  129
해답은 끊임없이 열려 있는 해답이어야 합니다. 왜냐면 삶 자체가 정태적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에 무딪힙니다.  132
사유나 의지나 믿음이나 모두 함께 움직이는데, 믿음에는 조금 다른 특성이 있는것 같습니다. 주어진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넘어서는 힘, 추동력이라고 할까요?
지성적인 판단, 이성적인 길이 끝나는 데서 믿음이 시작된다.  134
우물 속의 개구리가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늘이 동전만 하다고 말한다면, 개구리로서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실만을 말한 겁니다. 그런데 하늘은 동전보다 큽니다. 문제는 그 개구리의 정직성이나 성실성이 개구리가 범한 이른바 '지적 과오'를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과오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능력이 있지요. 게다가 모든 종교는 인간이 스스로 성찰하도록 유도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138
기본적으로 종교 언어는 설명의 언어가 아닙니다. 내가 느끼고 의미를 부여한 경험을 고백하는 언어입니다. 또 그런 고백을 일상화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설법도 하고 설교도 하고, 그런 것을 효과적으로 시니게 하려고 주문(呪文)도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138
새로운 종교적 몸짓
첫째, 종교가 몸을 폄하하는 경향. 부처님은 몸을 학대하는 금욕적 태도에서 벗어나서, 깨달음의 경지는 몸을 학대해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주셨죠. 그 전통이 2500년을 지속했는데 금욕적인 몸의 학대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요.
둘째, 우리는 정신을 드러내는 도구로서 몸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인간의 삶에는 사고나 사상으로 충족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있고, 그것은 몸짓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를 이해하려면 사상적인 면도 봐야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제식적 몸짓을 연희하는 지도 봐야 합니다.  139-141
종교인이든 비 종교인이든 상상력의 공간을 확보했으면 좋겠어요.
변화도 수용하는 열린 상상력이 필요하겠죠.  146
'자신의 정직성을 스스로 신뢰하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온갖 것을 자기 나름대로 물을 수 있고, 또 다듬을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그러한 사람만이 학문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보곤 합니다.' <열림과 닫힘>중에서   147
앎과 믿음은 서로 갈등관계에 있지 않다. 앎은 우리에게 정직한 자세를 갖추게 해주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에게 삶을 감사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둘은 늘 함께 있어야 한다.  148


새로운 시대의 윤리 -황경식
철학이 다른 분야에 비해서 매우 유용한 몇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가 바로 개념의 분석입니다. 언어의 의미를 분석하는 거죠.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개념을 사용하는데, 그 개념의 의미가 모호할 때 불필요한 소모가 발생합니다. 철학은 개념을 분석해서 의미를 명료하게 규정하여 담론이 원활하게 소통될 수 있게 하지요. 논변이란 어떤 주장이 있을 때 그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고 논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근거있는 주장이 바로 논변인데 우리가 상대를 합리적으로 설득하려면 반드시 논변을 통해야 합니다. 
둘째는 철학은 논변(論辯)을 중요시합니다. 철학의 역사를 '논변의 역사'라고도 하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철학의 기능은 삶의 가장 근본적인 가치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처럼 우리가 일상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근본을 바라보고,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는 궁극적인 관심을 다시 일깨워주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152-153
우리가 사회를 형성하고 살아가려면 핵심적인 도덕은 반드시 공유해야지요. 그러나 그 나머지 사안에 대해서는 각 개인의 생각에 관용을 베풀어야 할 여지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원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지혜이고, 또 그것이 새로운 윤리가 아닌가 합니다.  156
의무 윤리도 중요하지만, 전통적인 덕(德)의 윤리가 되살아나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의무만 가지고 윤리적인 실천을 다 설명하기는 어렵기에 윤리의 영역을 조금 더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행위, 즉 두잉(doing)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품과 성푸므 존재 자체가 달라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비잉(being)도 중요하다는 겁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의무가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덕의윤리는 바로 그 실천을 특히 강조하는 새로운 추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1
공자와 맹자에게도 가장 중요한 과제가 바로 수양(修養)입니다. 유혹이 와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나의 소신대로 당당하게 옳은 길을 갈 수 있는 도덕적인 용기와 의지력으로 무장하는 것이 도덕적 실천에서 아주 중요한데, 그 점을 요즘 덕 윤리학자들이 강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163
윤리적 실천에는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지(知), 정(情), 의(意)  163
덕 윤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164
한국에서는 태권도, 유도, 검도 등 무술에 '도(道)'자를 붙이지 않습니까?  이 도라는 게 바로 덕을 닦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 덕(道 德)'이라고 이야기하죠. 도를 닦는 것은 덕을 함양하는 겁니다.  165
문제상황을 두고 두루두루 궁리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가장 현명한 선택이 무엇인지 미리 따져두면 실제 상황에 부딪혀도 당황하지 않고 슬리롭게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다.  166
미국에서는 30년 전부터 교육개혁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바로 어린이 철학 교육인데, 특히 논리 교욱을 많이 강화하고 있습니다. 논리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아주 윤리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167
성의 문제는 인생에 대한 자세와 밀접하게 간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을 가볍게 여기면 삶 자체가 진지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성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성데 대해 가장 많이 논의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성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172
누구나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것 같지만, 정작 논의를 시작하면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172
정해진 틀을 가지고 교조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을 조금 부정적인 뜻으로 '도덕론자, 모럴리스트(moralist)'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철학적인 윤리학은 모럴리즘이 아니라, 상당히 개방적인 학문입니다.  174
인문학이 언뜻 보기에는 무용지물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삶에서 겪는 어려움에 돌파구가 될 수 있는, 무용지대용(無用之大用), 즉 무용한 듯이 보이지만 큰 쓰임이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의 겉모습보다 근본적인 뿌리를 선명하게 볼 수 있다면, 현실적인 문제에 거리를 두는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176


내가 누군가를 영원히 사랑하기는 원치 않으면서도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사랑해 주기를 바라거든요. 거기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기적인 욕망이 개입하기 때문이죠.
그런 이중잣대로 재단해서 그 카오스적인 힘을 그냥 소모하고 마는게 아닌가 싶어요.  180
청춘을 이렇게 황폐한 사랑으로 보내고 나면, 인생의 가을과 겨울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가장 소중한 자신의 삶을 대가로 치르면서 그런 걸 쿨하다, 연애 선수다, 작업의 달인이다, 이런 식으로 포장하는게 역겹고 안쓰럽습니다. 자기 존재가 이렇게 메말라 버리는데, 그 대가로 도대체 무엇을 얻을까요?  182
신체가 온전하게 흔들리는 순간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어떤 타자(他者)를 강렬하게 욕망하게 되었을 때거든요. 그럴 때 우리는 전율을 느끼고 심장이 뛰고 잠을 못 이루는 경험을 합니다. 이런 현상은 일상의 감정과는 분명히 다른 것인데, 바로 이때 우리가 새로운 삶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거죠.
이런 폭풍이 한 번 지나간 다음에는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어요. 
일반적으로는 그런 광기나 흥분이 휩쓸고 지나간 다음에 다시 원래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식으로 사유하는 것 같아요. 한바탕 이제 홍역을 치르고 나면 달라진 게 아니라 그냥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고, 또다시 그런 폭풍을 기다리는게 아니라, 내가 폭풍을 경험할 때마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면,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몇 번의 삶을 체험하게 하는 아주 대단한 기회가 되겠죠.  191
사랑과 성이 맺는 관계는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는데, 그것이 자기 존재, 자기 삶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문제는 분명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192
삶이 통째로 소통되고 서로 교감하는 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195
제게는 공부가 에로스적 힘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닌가 해요. 저는 앎이 주는 기쁨이 에로스적인 것보다 더 강렬하다고 믿고, 또 배움은 원초적으로 즐겁고, 인간의 본능은 기본적으로 즐거움이고, 즐거움이 없으면 배움이 아니라고 믿어요.  199
양명학의 대가 왕심재(王心齎, 1483~1540)는 <낙학가(樂學歌)>에서 이렇게 말했다.
'즐겁지 않으면 배움이 아니고, 배우지 않으면 즐거움도 없다. 즐거운 연후에야 배운 것이고, 배운 연후에야 즐겁다. 고로 즐거움이 배움이고, 배움이 곧 즐거움이다. 아아! 세상의 즐거움 중에 이 배움 만한 것이 또 있을 것인가.'  199
두려움 없이 사랑하라는 말은 그 사랑을 통해서 자기 삶을 온전히 긍정할 힘을 얻기 바라는 제 마음의 표현입니다. 두려움과 외로움에 자신을 가두고 살기보다는 그 사랑이 거절당하든, 배신당하든, 또는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되든 간에 한 걸음 내디뎌서 자기 존재를 온전히 긍정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승리가 아닐까요?  203


뇌는 과연 윤리적인가? - 김효은
신경윤리에서는 항상 맥락을 중요시하죠. 일괄적으로 안락사는 된다, 안 된다는 단정적인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211
우리에게는 모두 장기기억(long term memory)과 단기기억(short term memory) 그리고 작업기억(working memory)이 있습니다.
작업기억은 기억이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는 능력을 말하는데, 단기기억이 정보를 잠시 유지하는 수동적 개념이라면 작업기억은 그곳에서 여러 작업이 일어나고 있음에 초점을 둔 능동적 개념입니다. 의식으로 들어오면 그와 연관된 장기기억의 정보가 떠오르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이미 기억하는 정보를 떠올려 새로 습득한 정보와 연관시키기도 합니다. 그 의식의 역동성에 초점을 둔 개념이 작업기억입니다.  221
윤리적인 판단을 내릴 때 우리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이 그동안의 통념이었고, 이성과 감정은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생각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인지작요엥는 감정의 영향이 매우 크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인간을 이성적, 합리적 존재라기보다는 감정이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225


온생명으로 태어나다 - 장회익
사르트르는 '시대적 삶에 동참하고 동시대인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사고를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지식인'이라고 말했다.  234
원래 물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자연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기본 원리를 찾는 거거든요.  236문명이 급격히 발전하고, 인간 삶의 편의는 놀랍게 증가 했는데, 생명의 위기는 훨씬 더 고조되었죠. 발저노가 위기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길항하는 역할을 해온 것 같습니다. 237
우리가 살아 있는 것 하나하나가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죠. 다시 말하면 살아 있는 것의 '살아 있음'이라는 어떤 특징을 나타내는 성격을, 우리는 흔히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든 토끼든 박테리아든 그 안에 생명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안에 들어 있다는 생명이 도대체 뭐냐? 어떤 상황에서 그것이 생명이 되느냐?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이유가 뭔가 봤더니 생명이란 것의 개념 자체가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제가 깨달은 사실은 기존의 관념으로 이해할 수 없고, 훨씬 더 큰 체계로 파악해야 한다, 생명이 이루어지려면 각각의 개체를 뛰어넘는 더 큰 모습의 전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온생명이라고 부른 거죠.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 모여야 비로소 생명이 되느냐는겁니다. 생명이라는 것도 결국 그 어떤 물질적 요소들이 모여 일정한 체계를 구성할 때 나타나는 것인데, 무엇이 어떻게 모였을 때 생명이란 현상이 나타나고, 그렇지 못할 때 생명이 되지 못하는 그 경계가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이것이 곧 생명 현상이 성립되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최소 조건이 무엇인가를 알자는 거지요. 그것을 봐야 생명의전체 모습이 보이거든요.  238-239
생명체 내부를 구성하는것과 생명체 외부 곧 환경을 구성하는 것이 서로 별개가 아니라는 거죠. 이들이 함께 관련을 맺을 때 비로소 생명 현상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239
기술로 자연을 변형하다 보니까, 온생명의생리를 거스르는 결과를 낳는 겁니다.  240
누군가 자기 팔을 움직이면, 흔히 자기 힘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이것은 태양에너지로 움직이는 거거든요. 태양 에너지가 녹색식물에 흡수되고 그 에너지가 음식을 통해 내 몸으로 들어와서 그 팔을 움직여 주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그런 전체 과정을 한 묶음으로 봐야 합니다.  245
온생명을 사람에 비유한다면 두뇌를 구성하고 의식을 담당하는 존재는 다른 생물종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라는 겁니다.  246
지금까지 낱생명을 그냥 '생명'이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생명이 될 수 없기에 반드시 뭔가가 함께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보생명입니다. 보생명과 낱생명이 합쳐진 전체가 온생명이라는 거죠.  248
우리의 몸이 사시은 온생명인데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떨게 살아가는 존재인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거죠.  250
앎이란 개인적인 목적이나 수단으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는 방편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전문적인 지식에만 매달리지 말고 폭넓게 전체를 연결하는 지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삶이 즐겁고 공부가 즐거워야 앎을 얻을 수 있어요.  256


숨의 생면, 생명의 숲 - 차윤정


인간은 매 순간을 늘 깨어 있는 상태로 살아가잖아요. 그러나 나무는 상황이 좋지 않으면 사는걸 멈춥니다. 살아 있는 기간과 정지한 기간을 합치면 그들에게 1년은 10년 단위일 수도 있어요. 그렇게 5000년을 산다는 거죠.  275

나무는 전 조직이 수백 년을 살지 않지요. 살아 있는 조직과 죽은 조직이 공존하지요. 죽은 조직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이미 다른 생물들에게 이용됩니다. 그래서 나무를 그 자체로서 서식지가 되는 생물이라고 합니다.  276






왜 '책' 이어야 하는가? - 도정일
책 읽는 사회의 설립취지는 '생각하는 사회를 만들자'라는 데 있습니다.  293
인문학은 쓸모가 많은, 쓸모가 많은 정도가 아니라 그 쓸모의 중요성을 따질 때 아주 위대한 정신습관, 태도, 학문입니다.  294
인문학적인 관심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관심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295
겉보다는 안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인문학적 태도입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는 인문학 전공자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라 모든 이의 관심사니까요.  296
우리 사회를 어떤 사회로 만들 것인지 고민하기보다는 우선 나부터 성공하고 보자는 추세가 지배적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젊은 세대가 스스로 경계해야 할 정신의 함정 아닌가 합니다.  299
고전을 ... 강제로라도 읽게 해야 합니다.  309
고전 교육이 왜 강제되어야 하느냐. 교욱은 절대로 민주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신세대든, 구세대든 간에 반드시 알아야 할 어휘나 개념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만나게 하는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310
환경이 완전히 달라진 지금 시점엣 왜 옛날 책을 읽어야 하는가 - 아무리 사회가 달라져도, 인간에게는 바뀌지 않는 경험의 조건들이 있습니다.  311
양심의 경험이라는 게 있습니다. 양심의 경험을 하게 하는 삶의 조건도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습니다.  314
어떤 책을 고전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첫째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역사의 책임을 느끼게 하는 책, 인간 경험의 근본적 조건을 생각하게 하는 책입니다. 
둘째는 역사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책임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책입니다.  314
매학기 대학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수업을 시작합니다.
첫째, "나는 어떤 사회에 살고 싶어 하는가?"
둘째,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가?"
셋째, "내가 할 수 잇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는 사회적 사유를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317


판옵티콘, 그 안의 권력 - 박정자
판옵티콘 - 한 눈에 모든 것이 다 보이는, 그런 구조물을 말합니다.  327

판옵티콘의 측징이 시선의 비대칭성이라 하는데, 오늘날 사회도 같은 맥락에 있는게 아닌가 합니다. 
판옵티콘이 규율 권력에 아주 효율적인 이유를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학생이건 노동자건 수감자건 간에 통제받는 주체를 철저히 대상화한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피감시자를 조건화할 수 있습니다.
감시자가 있든 없든 늘 있다고 믿게 마련입니다.
셋째는 자동성입니다. 장치를 한번 만들어 놓으면, 누가 작동하든지 자동으로 움직입니다.  333
왕조시대에는 온 백성이 왕 한 사람을 마치 태양처럼 우러러봤습니다. 다수가 소수를 바라보는 시대였던 거죠. 그런데 근대 이후 현대까지는 시선의 관계가 역전되어서 판옵티콘의 간수가 여러 죄수를 감시하듯이 소수가 다수를 바라보는 시대였습니다.  
오늘날에는 그 관계가 다시 역전된 듯합니다.  342






유토피아를 꿈꾸다 - 김영한
어떤 학자는 유토피아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모든 것을 기획하고, 설계하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359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라는 작품을 통해서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즉, 정의로운 사회, 행복한 사회가 그가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임을 분명히 밝혔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베이컨은 토머스 모어의 작품을 노골적으로 비판하진 않았지만, 그 실효성에 대한 회의를 품었던 것 같습니다. '토머스 모어는 단지 바람직한 사회의 유형을 제시했을 뿐, 구체적으로 그런 사회를 어떻게 실현하겠다는 것인지 방법론이 전혀 개진되지 않았다. 그러니 공허하다.'  370
토머스 모어가 지향하는 평등의 이념과 프랜시스 베이컨이 지향하는 자유나 풍요의 가치관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바람직한 사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후발국이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지상과제는 두 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를, 경제적으로 산업화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과제가 서양처럼 조화를 이루며 명행되었다면 문제가 없는데 우리 한국 사회는 짧은 기간 내에 시간과 경쟁하면서 이 두가지를 실현하다 보니까, 결국 어느 한 쪽이 희생당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안정이냐 자유냐, 성장이냐 평등이냐, 순수냐 참여냐, 이런 문제로 늘 갈등해 왔던 거죠.
정권도 지난번엔 진보 정권이 집권했다가 이번엔 다시 보수 정권이 들어섰는데, 우리 사회도 이처럼 정당정치에 의해서 노선이 바뀌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인 것 같습니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갈등은 어히려 깊어졌지요. 결국, 자유와 평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느냐, 순수와 참여가 어떻게 공존할 수가 있느냐, 이런 문제인데 지금 유럽도 같은 문제로 고심하면서 제3의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저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대립하는 두 가치를 넘어서는 이념이 있다면, 그것은 박애(博愛)가 아닐까 합니다. 375-376
모든 인간 행동의 발상을 크게 보면 자애(自愛)와 타애(他愛)의 요소로 나눌 수 있겠지요.
모든 행동이 대체로 자애, 즉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는데, 다른 한 편으로는 공동체를 생각하는 마음도 있어요.  377
인문적 상상력이 없다면 문명이 나아갈 목표와 방향을 잃게 될 것이고, 과학의 힘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꿈과 상상력은 백일몽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아무리 과학만능의 시대가 도래한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 과학을 이끌어가는 인문적 상상력임을 새롭게 각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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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의 안경과 사랑의 안경  

  
미움의 안경을 쓰고 보면 

똑똑한 사람은 잘난 체 하는사람으로 보이고 

착한 사람은 어수룩한 사람으로 보이고 
얌전한 사람은 소극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활력 있는 사람은 까부는 사람으로 보이고
잘 웃는 사람은 실없는 사람으로 보이고

예의바른 사람은 얄미운 사람으로 보이고
듬직한 사람은 미련하게 보이나 



사랑의 안경을 쓰고 보면

잘난 체 하는 사람도 참 똑똑해 보이고

어수룩한 사람도 참 착해 보이고
소극적인 사람도 참 얌전해 보이고

까부는 사람도 참 활기 있어 보이고
실없는 사람도 참 밝아 보이고

얄미운 사람도 참 싹싹해 보이고
미련한 사람도 참 든든하게 보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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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데뷔 
 
37년 전에 당신이 만약 파리로  둔갑하여 마이에미 비치에 있는 한 라디오 방송국의 스튜디오 벽에 붙어 앉아서
내 방송 경력의 시작을 목격할 수 있었다면, 전문 방송인으로 성공할 내 모습보다 밥벌이하기도 힘들 모습의 나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1957년 5월 1일 아침,  워싱턴가와 1번가의 교차로 근처, 경찰서 맞은편에 자리한 조그만 방송국의 한  스튜디오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는 그때 라디오의 세계로 진출해 보려는  꿈만 가지고 3주째 일거리도 없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 방송국의 사장  시몬즈가 내 목소리는(이 역시 운이 좋아서 타고난 것 가운데 또  한 가지다) 좋지만 빈자리가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말에 나는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나는 당시 기회를 잡을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좋다, 빈자리가 나면 너를 쓰겠다'고 했던 것이다.

마이애미에는 잭 삼촌  부부가 그 방송국 근처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는데, 브루클린을 떠나올 때 확실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돈은 한 푼도 없었고, 삼촌의 아파트 덕분에 다락방이라고 잘 곳은 마련된 셈이었다.
거기서 내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매일 방송국에 갔다.
방송 진행중인 디스크 자키들, 뉴스를  방송하는 아나운서들, 스포츠 뉴스의 진행자들을 구경했다.

거기서 나는 뉴스거리들이 AP나 UPI전송망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을 처음으로 보고 조용한 황홀경에 빠지곤 했다.
짤막한 기사 몇 개를 혼자 써 보기도 했는데, 그 때마다 내가 작성한 기사가 누군가에 의해 실제 방송에서 사용되는 날을 꿈꾸곤  했다.
그렇게 3주가 지났는데  갑자기 아침 방송을 맡아 오던 디제이 한 사람이 그만 두었다.
AKTIF이 나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 일거리를 준 날은 금요일이었는데,  월요일 아침 9시 방송부터 내가 맡게 된  것이다.
주급 55달러,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9시부터 정오까지, 오후에는 뉴스와 스포츠 뉴스를 이것저것 하고 퇴근은 5시.

마침내 꿈이 이루어졌다.
라디오에  나가게 된 것만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 고정 프로그램을 맡은 데다가 매일 오후에도 대여섯 번 출연이라!
당시 CBS의 수퍼스타였던 아더 고드프리만큼 자주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주말에 나는 한숨도 못  잤다.
방송에 나가서 할 말을 준비하고 반복해서 연습했다.
첫날  아침 8시 30분이 되었을  때, 나는 살짝만 건드려도 무너질 정도로 바짝  긴장해 있었다.
입과 목이  말라 붙어서 커피와 물을 계속해서 마셔댔다.
스튜디오에 들어가자마자 턴테이블에 걸려고 프로그램의 주제곡, 레스  엘가트의 '스윙잉 다운 더  레인'의 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일 분, 일 초가 지나면서 점점 더 초조해졌다.

마샬 시몬즈가 내게 행운을 빌어 주기 위하여 사무실로 불렀다.
내가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 '이름은 어떻게 할까요?'하고 물어 왔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이거 원, 래리  자이거라는 이름을 쓸 수는  없어, 소수 민족의 냄새가 물씬 풍기거든.
사람들은 그 이름을 발음하지도 못할 테고 기억할 수도 없을 거야.
좀더  나은 이름을 써야 해. 래리  자이거라는 이름은 절대 아니야."

그 때 그의 책상 위에는 '마이애미 헤럴드'가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
그리고 펼쳐진  면에는 마침  킹 주류 도매상의  전면 광고가  실려 있었다.
AKTIF의 눈길이 그 곳으로 향하더니  이내 짤막하게 '래리 킹이 어때?' 하고 물어 왔다.
"괜찮은데요."
"했어. 그게 이제부터 자네 이름이야--래리 킹. 자네는 이제부터 (더 래리 킹 쇼)를 주재하는 거야."
그렇게 해서 나는 일자리,  프로그램, 주제곡, 게다가 이름가지 새로 얻게 되었다.
9시가 되어 마침내 뉴스가 나갈 시간이 되었다.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스윙잉 다운 더  레인'을 턴테이블에 걸어 놓고, 뉴스가 나오기를 기다릴 청취자에게 방송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내 입안은 솜뭉치라도 물고 있는 것처럼 침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작은 방송국에서는 으레 그렇듯이  아나운서가 기사의 역할을 같이 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손수 주제곡을 틀어야 했다. 음악이 흘러 나왔다.
이어서 방송을 시작하기 위하여  음악의 볼륨을 낮추었다.
여기까지는 잘 나갔는데 그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음악 대신 나와야 할 것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음악의 볼륨을  다시 높이고, 잠시 후에  다시 낮추었다.
그런데 여전히 내 입에서는 한 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볼륨을 높였다 낮추는 일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해야 했다.
그 사이에 청취자들이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주제곡의 볼륨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뿐이었다.
그 사이에 사람의 목소리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내가 그 때 머리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동네의 길거리에서 떠들어댈 수는 있겠지만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할 능력은 내게 없어."
나는 자조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되뇌이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일을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지만 그 일을 막상 맡아서 할 태세가  갖추어지지 않은 점 역시  분명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 일에 필요한 베짱이 내게는 없었다.

결국 내게 그토록 친절을 베풀고  커다란 기회를 제공해 주었던 바로 그 사람, AKTIF 시몬즈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야 말았다.
방송국의 총책임자로서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통제 구역의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와 다음 네 마디를 크게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이건 말로하는 사업이야!"
그리고 그는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그가 그런 바람에 나는 마이크를 향해 몸을 숙이고 방송인으로서 첫마디를 겨우 토해 낼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지금 저는 라디오  방송을 처음 해 봅니다. 나는 언제나 방송계에서 일하게 되기를 갈망해  왔습니다.
지난 주말 내내 연습을 했습니다. 15분 전에 저는 새 이름을 지었습니다. 주제곡을 틀 수 있도록 줄곧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입  안이 자꾸 말라 붙었습니다. 제가 초조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사장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이건 말로 하는 사업'이라고 소리쳤습니다."
일단 말문을 열자 조금 자신이 생겨서 계속해 나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날 나머지 방송은 그런대로  괜찮게 진행되었다.
전문 말꾼으로서 내 첫걸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뒤로는 다시 라디오 방송에 관하여 초조해진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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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야..!!

 

일개미들이 모여 사는 개미굴의 우화입니다.

한 일개미가 다른 개미들이 먹이를 구하러 나가는 사이에도

방구석에서 꼼짝 않고 걱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의아하게 여긴 친구가 다가가 물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손가락에 눌려 죽을까봐

걱정이 돼서 나갈수가 없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어다니면 되잖아."

"먹이를 구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올까봐

걱정이 돼서 그래."

 

"내일 또 나가서 구하면 되지."

"물에 빠져죽을지도 몰라."

"냇가로 조심조심 건너면 걱정 없어."

 

그래도 겁쟁이 개미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열심히 달래보던 친구조차 결국 등을 돌릴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에 휩싸여 일을 하지않은 개미는 결국 굶어죽고 말았습니다.

 

친구는 조용히 말했지요..

"걱정은 사람들의 손가락 밑에서 너를 구해주지도

먹이를 주지도 않아 물에 빠지지 않게 지켜주지도 않지

네 발로 나가서 먹이를 구하고 냇가를 건너는 편이

훨씬 좋았을 텐데 리석은 친구 같으니."

 

가끔은 제멋대로 떠다니는 걱정들과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난처하게 만듭니다.

근심 많은 겁쟁이 개미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이 우화의 마지막을 기억해야 합니다.

근심 많은 개미는 스스로의 헛된 망상과

고민에 삶을 모두 바쳤습니다.

 

친구들이 열심히 먹이를 나르고 생활을 꾸려나가는 동안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일생을 두려움에 속에 지샌것입니다.

우리는 겁쟁이 개미의 삶을 헛된 삶이라 말할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개미들은 사람의 손가락과

먹이를 구하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 냇물이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들도 아침에 일을 나갈 때마다 남몰래 한숨을 쉬었을 것이며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생명의 위험을 느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극복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소소한 두려움을 극복한 승리자입니다.

 

얼굴은 무표정 하지만 가슴 안에서 무수한

고민거리와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안한 미래는 그들의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두려움과 맞닥뜨립니다.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면 어쩌지?"

우리는 '하루에 한줄씩' 써 내려가 삼백 페이지의

논문을 써낸 박사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서두르려 하지 않고 차분히 목표를

 바라본다면 이루어질 것입니다.

 

"취직이 되지 않거나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당신이 준비가 되었다면 어느 곳에서든 당신을 환영할 것입니다.

선택한 직장에서는 분명히 인정받을 것입니다.

 

당신을 신뢰하는 직장이라면

당신 역시 스스로 일할 마음이 생겨날 테지요.

"사고를 당하거나 병이 걸릴까봐 두렵다."

당신의 친구는 말해줄 것입니다.

 

"걱정은 사고의 위험에서 너를 지켜주지 않으며

새로운 직장이나 마음에 드는 학교를 주지도 않아

네 발로 딛고 나가서 직장을 구하고 학교를

선택하는 편이 훨씬 나을 거야."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겠지요.

걱정하지마..!! 다 잘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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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머리에
중요한 건, 자신의 언어를 갖는 것, 부지런히 무언가를 하는 것, 그 과정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이다.  7

프롤로그
언어가 사회적이라는 말은, 물질적인 조건과 계층, 그리고 당대 문화의 속도로부터 유리된 채 객관적(과학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언어는 우리의 활동에서 나오고, 우리의 활동에 작용하는, 그 자체로 하나의 활동이다.  13
법칙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는 법칙에 어긋나는 모든 것이 예외이고 그른 것이지만, 작동하고 변화하는 실재 언어의 차원에서 보자면 '올바른 언어'와 '순수한 언어'라는 개념이야말로 예외적인 것에 불과하다. '모국어'나 '표준어'는 언어의 절대적인 표준이 될 수 없을 뿐더러, 말하는 주체의 지표가 될 수도 없다. 중요한 거느 어떤 언어냐가 아니라,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공명하느냐이다.  14
책은 책의 속도와 기능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책은 다른 매체를 배척하는 게 아니라 다른 매체와 접속하는 능력을 증대시킨다.  15
책보다 더 다양한 속도를 품은 세계는 경험한 적이 없다.
매체가 뭐든, 우리를 때리고 찌그로 움직이게 만드는 글들은 우리 안의 언어를 꿈틀거리게 만든다.  16

다른 사람들의 언어활동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나의 언어를 만들어낼 것인가? 이것이 이 책의 질문이다.
마우스를 눌러 오리고 복사하고 붙인 누더기 글 말고, 여러분 안에서 꿈틀거리는 언어, 목구멍 밖으로 비집고 올라오는 생생한 언어로 구성된, 여러분 자신의 '진심'이 담긴 글을 보고 싶은 맘 간절하다.  16


1부 언어의 삶, 삶의 언어
내가 하는 말, 내가 쓰는 글,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말과 글, 그 모든 것들이 겹치고, 가로지르고, 부딪히면서 만들어내는, 언어의 여러 지층들. 그 공간을 여행하고 나서 전혀 다른 목소리로 말을 하고, 새롭고 된 손으로 글을 쓰는 것. 한마디로,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게 이 여행의 목표이다.  21
우리의 언어생활은 다양한 규칙들을 알고 각각의 상황 속에서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을 때에만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언어활동은 일종의 게임이다. 경우마다 공유하는 언어 규칙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23
똑같은 얘기를 해도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얘기를 하는지에 따라 다른 음색과 어조로 얘기한다.  27

언어는 단지 언어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발화되는 상황에서 언제나 우리의 행위를 문제 삼는다.  언어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36
언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행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기도 하다.  37
따라서 내게 명령하고 나의 행위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강제하는 언어에 얽매여 눈물을 흘리거나 분노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명령들을 가벼운 것으로 만들고, 명령 자체를 변형시키며, 그리하여 마침내 새로운 삶의 방식들을 노래할 수 있는 수 많은 언어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이다.  39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그 목소리들을 하나하나 꺼내서 따져보면, 어떤 것은 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공부해!'를 외치는 엄마의 목소리를 닮았고, 또 어떤 것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살 길이다!'라고 외치는 자본주의의 목소리를 닮았다.  47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언어를 통해 명령을 가볍게 만들 수 있는가?"
"어떻게 다양한 규칙들이 작동하는 언어게임의 공간들을 활주할 것인가?"  48
언어를 새롭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수많은 '나들'의 동일성을 보증하는 단 하나의 '나'를 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51
내 말은 내 것이 아니다. 그 안엔 이미 우리가 만난 여러 사람들이, 우리가 경험한 세계가 담겨 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은 여려 개의 목소리를 배우고 담게 된다.  54
실제 언어생황에서 의미와 정의가 일치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정의'는 단어에 경계를 부여하는 것이지만, 의미는 경계 밖에서 매번 다른 방식으로 불쑥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64
불교에서의 '선문답(禪問答)'이라는 언어게임은 말 자체에 집착해서는 의미에 닿을 수 없다. 
의미는 말로 완전히 포착될 수 없는, 말을 매개로 하지만 말을 멋어나 있는 것이다.  67
의미는 항상 이쪽과 저쪽의 경계 위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나 갈 수 있다.  73
의미가 생성되는 것은 다양한 우연과 해석이 침입하는 사건들 속에서다. 즉, 언어는 특정한 맥락 속에서 다른 요소들과 마주치고 접속될 때 비로소 하나의 의미를 갖게 된다.  77
누군가의 행동을 어떤 식으로도 의미화 할 수 없는 경우, 우리는 대개 그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해버린다.  79
어딘가 깊숙이 숨어 있을 '하나의' 의미를 찾는 언어게임, 모든  행위를 명쾌하게 분류하고 의미화하며, 그 체계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가차 없이 제거해버리는 언어게임은 우리의 사고와 행위를 고착 시킨다.
우리의 언어게임은 이 게이모가 저 게임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지배적 의미들을 교란시키고 우리만의 새로운 의미, 짓궂고 가볍지만 진지한, 우리만의 '멋진' 의미들을 생성해낼 수 있는 그런 게임이어야 하지 않을까? 즐겁고 떠들썩한 언어게임!  82
언어 활동은 언어만으로 국한되지 않는 하나의 행위이며, 의미는 이 모든 요소들의 화학반응 속에서 매번 다르게 생산된다. 다시 말해서 의미는 결코 언어기호에 고유한, 숨겨진 '비밀'이 아니다. 의미는 언어 아닌 것들이 언어를 감싸고 그 언어에 침입할 때, 그때 비로소 발생한다.  91
언어를 버려야 한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하나의 언어, 하나의 규칙, 하나의 목소리를 버리자는 얘기다.  91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떻게 의미를 찾아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의미를 여러 방향으로 튀게 만들 것인가'이다.  92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향해 귀를 열고, 변신을 즐겨라! 고정된 의미를 의심하고, 언어의 명령을 의심하기, 말하지 않는 자들의 언어, 말할 수 없는 자들의 언어를 듣고, 말할 수 없는 것, 말해선 안 되는 것을 말하기. 내 목소리 안에 세계를 담기! '언어의 탈주'란 그런 의미다. 언어를 버리라는 게 아니라, 언어를 통해 다르게 되라는 것!  95
언어는 단순히 사고의 표현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행위다.  95


2부 국어의 빗장을 열어라!
다수어란 많은 사람들이 쓰는 언어가 아니라 '보편적'이라고 가정되는, 권력의 언어다.  99
필요하다면 그 얻너 것도 우리말과 섞어 쓸 수 있어야 한다. 우리말을 풍부하게 하는 것은 다른 말들로부터 우리말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말들을 우리말 속에 포용하는 것이 아닐까?  122


3부 행복한 책읽기
난 여러분에게 '책을 읽어야 한다'고 무섭게 강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책을 읽는 행복함을 함께 나누고 싶을 뿐이다.  161
우리는 모니터에 '뜬' 글을 '읽는다'기 보다는 '본다'. 책을 읽을 때는 한 단락을 건너뛴다든지 쓱 '훑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한 글자 한 글자에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뜻을 음미하게 된다.그래서 속도는 더디지만 내용은 눈과 머리에 새겨진다.
모니터 상에서는 '생각하면서 읽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163
속도는 빠름만의 문제가 아니라 느림의 문제 이기도 한 것이다.
한번 그 빠름에 중독되고 나면 다른 속도에 반응할 수도, 다른 속도를 즐길 수도 없게 된다. 
책은 인터넷만큼 신속, 친절하지는 않지만 인터넷에 결여된 기다림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
책은 알려줄 뿐 아니라 질문하고, 우리를 잡아 이끌 뿐 아니라 멈춰 세우며, 수다스럽기만 한게 아니라 침묵하기도 한다. 책은 책을 향해 걸어오는 모든 생각의 속도를 긍정한다.  164
인터넷의 빠름 만큼이나 책읽기의 느림이 주는 기쁨을 알 수 있다면 우리의 사고와 감각이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165
책읽기는 무엇보다도 우선 하나의 놀이여야 한다.
놀이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것이다. 그리고 즐거운 것이다.  171
'무슨 책'을 읽어야 하나? - 미식가들의 공통점
첫째, 그들은 먹는 걸 즐기고 그 순간 진심으로 행복해한다. 
둘재, 그들은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 먹어보는 낯선 맛을 즐긴다. 각각의 음식들에서 고유한 맛을 뽑아낼 줄 알고, 각 재료들이 어떤 음식 속에서 어떤 맛을 발산하는지 그 미세한 차이를 긍정한다. 
책 읽는 가장 좋은 태도는 이런 미식가가 되는 것이다.  183
어떻게 읽어야 하나? -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쉬우면 쉬운 대로 부지런히 책들을 여행하다 보면, 어느 순간 뒤통수를 내리치거나 가슴에 팍 꽂히는 책들을 만나게 될 테고, 그때 책은 즐거움이 되고 책읽기는 놀이가 될 것이다.
기다려라. 그러나 가만히 서서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우연 역시 스스로가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법이니까. 책의 주제나 의도는 숨겨진 보물 같은 게 아니라 독자 스스로 완성해야 하는 여백 같은 것이다.  185
이제 책의 정확한 내용과 정해진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책의 의미는 그 책이 누구를 어디에서 만나는가, 측 어떤 기계와 접속되는가에 따라서 매번 달라지는 것이다.  196
이건 무거워 라고 탓하며 책을 던지기 전에, 먼저 배울 점을 찾아보자.  197
책은 물론이고 우리가 어떤 그림이나 영화를 보면서 지루함과 부담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텍스트를 읽는 우리 자신의 역할을 단순한 '기호 해독자'로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그건 결국 텍스트를 가지고 놀 수 없다는것, 즐길 수 없다는 것,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202
'고전'이나 '걸작'은 모든 시대에, 모든 독자들에게 '열린'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열린 텍스트'란 그 안에 여러 가지 해석의 방향을 함축하고 있는, 즉 텍스트의 의미를 한 가지로 고정할 수 없는 텍스트를 의미한다.  204
책을 사랑하는 것은 연애편지를 읽듯이 책을 읽는 것이다. 내가 가진 최대의 능력을 발휘해서 책의 공간을 여행하는 것. 글자와 그 의미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여백을 읽고 그 여백을 나의 언어로 채우는 것. 
텍스트에 빛깔과 향기와 무게를 담는 것.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독서, 행복하도고 강렬한 독서는 '연애편지 읽기'다!  225
독서는 자유다. 그것은 맞아들이고, 승낙하고, 나와 다른 것을 긍정하는 자유다.  231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 - 시험이나 이념 때문이 아니라 거기 담긴 '오래된 지혜' 때문이다.  234
고전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는게 답답하게 느껴지거나, 자신의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고전 텍스트 한 권을 펼쳐 들어라.  237
카프카는 말한다. "우리가 읽는 책이 단 한주먹으로 정수리를 갈겨 우리를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하러 책을 읽겠는가? ....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  238
읽어야 하는 책과 읽어선 안 되는 책이 아니라, 익숙함으로 유혹하는 책과 새로운 사유를 자극하는 책, 순종하는 책과 위험한 책, 딱 한 번 작동하고 전사하는 책과 끊임엇이 작동하는 책, 우리로부터 '할 수 있는 힘'을 뺏으면서 한자리에 머무르도록 하는 책과 우리의 에너지를 배가시키면서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책이 있을 뿐이다.  241
우리가 책 읽기를 통해 진정으로 어떤 기쁨을 느끼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나의 감각을 불편하게 만들고 혼란시키며 그럼으로써 모든 감각들을 한꺼번에 열어젖히는 새로운 일탈을 찾아나서야 한다.  242
책을 사랑하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첫번째는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이고, 
두번째는 그 책에 대해 비평하는 것이며, 
마지막은 책을 쓰는 것이다.  243


4부 펜을 들고 세상 속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특별한 능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것들을 밖으로 표현하는 여러 활동 중 하나다. 말을 쏟고, 땀을 쏟고, 배설물을 쏟는 것처럼, 글 역시 내 안에서 넘쳐나는 그 무엇인 것, 즉 글쓰기는 나 자신을 드러내고, 내 존재를 확인하는 자연스러운 인간 행위 중 하나이다.  248
글은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떠날 수 있을 때 시작 된다.  251
글을 잘 쓴다는 건 완벽하게 쓰는 걸 의미하는게 아니라 글쓰기를 통해 매번 달라지는 자신을 긍정한다는 걸 의미한다. 
글을 잘쓰는 첫번째 방법 - 글에서 자신을 보고, 자신을 떠나라! 253
목구멍 사이에 토해내고 싶지만 감히 토해내지 못하는 수많은 것이 있으며, 그의 입에 또한 때때로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것이 있어, 이것이 오랫동안 쌓이고 쌓여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형세가 되는 것이다.  254
글을 잘쓰는 두번째 방법 - 생각이 고여 넘쳐나기를 기다려라. 단, 사방을 향해 촉수를 곤두세우고,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연암 박지원에게 글쓰기(<소단적치인>에서)란 제목이라는 적국과 벌이는 한판 전투다. 예컨대 '행복론'이라는 글을 쓴다고 생각해보자. '행복'이라는 적국을 쓰러뜨리려면 먼저 그 적국의 지형도를 파악하고 난 다음(다른 사람들은 행복에 대해 뭐라고 말했나, 우리는 행복을 뭐라고 생각하나 등등), 적국을 가장 효과적으로 정복할 수 있는 병사를 뽑아 배치하고, 진지를 구축하고, 북을 울리며 출정한다.(어떤 글자를 쓸 것인가, 무슨 글을 인용할 것인가, 문장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그리고 싸운다. 최선을 다해(써내려간다. 진심으로). 물론 싸움에서 패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차피 아무도 죽지 않는 싸움인 걸, 또 다시 병사를 모아 진지를 구축하고 적국을 향해 돌진하면 그만이다.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위험한 전투!  256-257
글쓰기에서 형식이나 규칙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257
글을 잘쓰는 세번째 방법 - 자신만의 병법을 짜라. 그리고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알고 있는 대로가 아니라 느끼는 대로, 그렇게 말해야 하는 대로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길어올린 말들로 세상을 표현하는 대로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길어올린 말들로 세상을 표현하는 어린아이가 진부한 글의 권위를 강요하는 작가들보다 더 좋은 글쓰기 스승이다.  263
자기만 아는 비유와 맥락없는 인용들, 현학적인 어휘들로 가득찬 글을 보여주면서 이해 못화는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남들이 지적하는 단점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글만을 고집하는 건, 글쓰기에 있어서 치명적인 병통이다. 
글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만물과 접속하려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고 공명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267
같은 말이라도 어떤 방식으로 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처럼, 같은 내용이라도 그걸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 어떤 색깔로 표현할 것인가에 따라 전혀 다른 글이 될 수 있다. 생기 있는 글, 살아 있는 글이란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진 글이다.  274
어떤 문자을, 어떤 길이로, 어떤 단어를 사용해서,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따라 글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자신만의 색채를 표현하기 위해 고심하는 화가처럼, 여러분 자신만의 리듬과 색을 갖는 문체를 창조해보시길!  280

하나. 참고서나 교과서에 실린 현대어 해석을 보라. 그러면 이 '외국말' 같은 글이 무슨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둘. 그런 다음에 다시 원문으로 돌아와서, 이번 기회에 한자 공부나 한 번 해보는 셈치고 한자어에 독음을 달도록 하라.
셋. 목소리를 가다듬고, 처음부터 큰 소리로 읽기 시작하라. 읽을 때는 자신이 마치 무슨 독립운동가라도 되는 양 감정을 잡고 읽을 수록 효과가 크다.
넷. 다시 한 번 읽어라. 이번에는 한 번 읽은 경험을 살려 문장의 강약과 단어의 길이까지도 고려하면서 읽는 것이 좋다.   281
자신만의 언어 리듬을 살려라!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접속하기!  글 쓰는 데 그 이상의 왕도는 없다.  285
글을 바꾸고 싶은 사람은 먼저 자신의 신체를 바꾸시라! 자신의 신체가 바뀌고 리듬이 바뀌고 삶이 바뀌면, 글은 꼭 그만큼 바뀐다.  글은 삶이.!!  293
글쓰기에서 '글의 종류' 즉 '미리 정해진 형식'이라는 건 없다. 우리가 지금까지 백지 앞에서 느껴왔던 공포는 글의 경계 안에 머물러야 했던 데서 오는 일종의 '폐소공포증'이다.  300
하나의 현실, 하나의 진실이란 없다. 표현된 다양한 현실이 있을 뿐이다.
현실은 그렇게 '포착된' 어떤 것이지 '객관적인' 어떤 것으로 존재하면서 누군가가 참모습을 찾아주기를 기다릭 있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어떤 눈으로 어떻게 이 세계를 나만의 스타일로 그려낼 것인가, 어떤 형식에 그 세계를 담아낼 것인가'다. 내가 본 세계를 표현하는 하나의 무기가, 노래가, 시가, 그리고 그림이 되는 글쓰기.
그런 글을 쓰기 위해선 먼저, 우리들의 눈과 귀가 좀더 크게 열려야 하고, 손은 좀더 날렵해야 하며, 사고는 좀더 다채로워질 필요가 있다.  305
우리는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을 볼 수 있고,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는 자라야 비로소 자신을 떠날 수 있다.
글쓰기는 무언가를 드러내고 싶은 하나의 욕망이지만 더 나아가서 나를 바꾸는 힘이기도 하다.  306


에필로그 - 언어를 통해 세상 속으로
언어활돌에서 중요한 건 언어 자체의 체계나 규칙이 아니라 언어를 작동시키는 실제적인 맥락, 그리고 의미를 생성시키는 비언어적 요소들이다.  308
중요한 건, 자신의 언어(혹은 언어를 대체할 자신만의 표현무기)를 가지고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고, 세상의 모든 존재들로부터 자신의 언어를 길어내는 것이다.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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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연필깎이를 통해 연필만 깍는 게 아니라 마음도 깎는 것 같다. 
인생은 42.195킬로미터의 긴긴 마라톤이니까. 중간중간 물도 마시고, 응원하는 사람에게 손도 한번 흔들어 주고, 차가 오면 비켜나기도 하면서 페이스 조절을 해야 한다. 
아무렇게나 살아 버리기엔 인생은 너무 길다. 1등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건 끝까지 문제없이 완주하는 것이다.  21

남들 하는 거 다 하면서, 남들 가진 거 다 가지면서, 남들보다 뛰어나길 바라는 건 욕심이다. 죽으라고 열심히 해서 남들보다 앞서 가든가, 적당히 놀고 적당히 일하면서 무난하게 살든가, 그 둘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25

인생에 있어서 넓이와 깊이는 절대 공존할 수 엇는 것, 어떤 것을 추구할 것인가는 절대적으로 자신의 선택이지만 진짜가 되려면 조금 더 깊이의 편에 서는 게 좋다.  31

글도 그림도 더 나아가 인생도 똑같다. 꾸미고, 덧칠할수록 추해진다.  38

실제로 기운없고 힘 빠지면 놀아도 재미가 없고 새로운 것, 좋은 것을 봐도 시튼둥해진다. 감히 단언하건데 노는 데 미친 시간이 많을수록 일에 성공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43

인도의 시인 누군가는  "네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진실이 아니다."라고 했다.  51

물 위에선 고고한 척 우아를 떨지만 물 밑에서 오두방정을 떨며 발을 젓는 백조처럼 그런 소리를 듣기 위해 나도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걸 사람들은 모른다.  56

지금은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과거가 없었다면 지금도 없다.  75

교육의 기본은 일관성이라고 한다.  94

아들이 과묵해지는 건 자기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말이 없어진다는 건 또 다른 자기와 치열한 대화를 하고 잇는 것이다. 좋은 부모가 된다는 건 자식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한다는 것. 
그런데 사실 이 당연한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96

누군가 가장 무서운 암이 '비교암'이라고 했다.  100

사람들은 나이와 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옷이 잇다고 말하지만 나는 어울리는가, 어울리지 않는가가 훨씬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11


2부

자살을 시도했을 때 누군가가 그녀를 잡아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던 그때의 기억이 잊히지 않아, 상처받은 마음 어쩌지 못해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려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한다.  151
캐스팅도 마케팅적으로 접근해야 한다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결국 '마음'이다.  152

지금은 독불장군이 잘 먹히지 않는 세상이다. 지식은 공유되고 재능 또한 상향 평준화되고 있다.  163
일로 성공한 마흔여섯의 여자도 아름답지만 엄마일 때 여자는 나이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170

'답다'라는 것은 우리가 갖춰야 할 첫 번재 미덕이다. 교수님이면 교수님답게 나이들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열심히 공부하고,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지식층이 있다는 건 참 다행이다.  180
"가장 멋진 남자는 여자를 여자로 늒도록 해주는 남자예요."  182

서른이 되면 사람은 돈을 버는 사람과 시간을 버는 사람으로 나뉜다. 
난 어느쪽일까?
"남들은 돈을 벌지만 난 시간을 벌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내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싶어서요. 그래서, 아마 앞으로도 쭈욱 가난할 것 같아요. 당신은 어떤가요?"  194
내가 좋아하는 사탕만큼 나도 사람드에게 달콤하게 기억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기억하면 쓰디쓴 인연이 아니라 생각할 때마다 청포도맛 사탕처럼 새콤하고 츄파춥스처럼 명랑한 사람이 되고 싶다.  194
우릴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양간의 너그러움과 넘치지 않는 분명함 그리고 부끄러움을 아는 지혜일 것이다. 또 나이 먹는다는 건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것일 테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자.  198

이름은 그렇게 성(姓)과 만나 하나의 완벽한 객체가 된다. 
이름 석 자 안에 그 사람의 모든 평판과 이미지가 담긴다. 
'이름 석 자가 부끄럽지 않게'란 말도 그래서 나왔나 보다.  238

우리의 숨통을 조이는 인생의 복병은 사자 같은 맹수가 아니라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 개미일지 모르는 것이다.
누군가를 맹수급과 개미급으로 함부로 분류하고 있다면 다시 돌아보라. 
그 기준은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으니까. 이것만으로도 인생의 교훈이 되지 않을까?  258
살면서 치르게 되는 인생 수업료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조금 깊이 있게, 조금 유연하게 나이 들기 위한 수업료라면 그게 얼마든 치를 가치가 있지 않을까.  259

어릴 땐 어떻게 하면 나를 더 멋지고 예쁘게 포장할까에 대해 고민해 왔는데,
이젠 어떻게 하면 포장을 멋길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280
저는 아닌 건 아니라고 하고, 좋은 건 좋다고 해요.
좋은건 누가 봐도 좋은 거니까요.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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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자라기위해서 매일 물과 햇빛이 필요하듯이
행복이 자라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어 보이는 건 가진게 없는게 아니라
내 자신에게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웃음을 행복으로 보고 아무일도 없던 늘 그런 일상에도 감사합니다.

행복을 저금하면 이자가 붙습니다. 
삶에 희망이 불어나는거지요.

지금 어려운건 훗날 커다란 행복의 그늘을 만들어 줄 것임을 믿습니다.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건 두려움이 아니라 행복의 자잘한 열매입니다.

썩은 열매는 스스로 떨어지고 탐스런 열매만이 살찌우게 됩니다.
행복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마음의 밑바닥에서 시들어가는 행복을 꺼내고 키우셔요.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으려는 거.. 그것은 죄입니다.
누군가 나를 안타까운 맘으로 지켜보고 있다면 보여주셔요.. 

그게 행복의 시작이 됩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야만 합니다.
내 존재의 가벼움은 처음부터 없는거죠.

사랑받고 있음을 잊었나 봅니다..

잠시 일상의 중독에서 벗어나 햇살과 만나보셔요.
세상은 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유하기 위해서만 사는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요..
사는 모습이 다 다르듯..보는 눈도 달라져야 여러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가지의 눈은 하나만 보게 된다는 거..가진 것은 언제든 잃을 수 있지만
내 행복은 지킬 수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쉽게 무너지는 마음은 당신의 모습이 아님을 잘 알고 있지요.
그 누구보다도 모두 행복 할 권리를 누려 보도록 해요.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이유로 귀결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떤 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불행이라고 말하는 그 어떤 것을 
나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 내 모습을 지나친 욕심과 불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 현재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 당신의 현실을 기쁘게 받아 들이십시오. 


불평불만으로 자신의 자리에 선 사람의 인생과 
자신이 선 그 자리를 행복한 마음으로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인생 사이에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생겨나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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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있는 사람이 가져야 할 7가지 미덕

1.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주지하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보다는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이다”라고 독일의 철학자 괴테는 말한다 . 열정을 다하기 전에 내가 나아야 할 방향을 세우고 나아가라. 절대로 초라한 목적에 열정을 쏟지 마라 .

2. 힘들겠지만 실패를 받아들여라.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힘든 사람이 많다 . 열정 있는 사람일수록 상처 받기 쉽다. 실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아파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실패의 그늘에서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다.

3. 장애물 앞에 더욱더 강해지는 열정을 보여줘라.
진정한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일수록 많은 난관이나 장애물까지도 열정으로 녹여버린다 . 장애물이 있을수록 오기가 생기게끔 노력하라.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일수록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4. 자신 보다 약한 사람에게 넉넉함을 보여줘라!
자신 보다 힘이 약하거나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넉넉함을 보여줘라 . 비록 지금 자신에게 금전적인 손해가 있더라도 차후에 그 일이 당신을 더욱더 빛나게 할 것이다.

5. 실속만 챙기는 이익을 멀리하고 자신의 일에 매진해라.
너무 자신의 실속만 챙기려 하지 마라 . 넘어진 사람에게는 이유를 묻지 말고 도와줘야 한다. 당신이 내민 작은 손이 당신과 그 사람에게 큰 선물이 될 것이다.

6. 흔해빠진 이야기 보다 독특한 이야기를 하라.
해병의 구호를 보면 , “아무나 해병대원이 될 수 있다면 나는 해병대를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아예 하지 마라. 독특한 자신의 열정을 키워라.

7. 작지만 큰 선물을 해라.
세상에 선물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 그러나 너무 부담되지 않게 꼭 주려는 직장 동료에게 필요한 선물을 하라. 받은 분을 고려하지 않은 선물은 안 한 것보다 못할 수 있으니 주의하라.
열정은 아름다움을 더욱더 아름답게 만든다. 열정은 무엇인가에 미치는 것을 뜻한다. 열정은 너무나 뜨겁기에 주위에도 전달되며, 열정을 지닌 자는 눈빛이 살아있다. 그리고, 결국은 한계를 초월한다. 당신의 삶은 지금 훌륭하다고 생각하며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가. 그렇다면 그 열정을 느끼는 당신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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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이루는 방법이 아닌 꿈 자체에 집중하라


인생에서 이루고자 하는 꿈을 정했다면 꿈을 이루는 방법 말고
꿈 자체에 집중하도록 하라.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꿈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가 결국 꿈 자체를 포기하고 만다.
현재 상태에서 단번에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가
시도도 해보기 전에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존 F. 케네디가 "10년 안에 인간은 달 위를 걷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당시 인류는 그럴 만한 기술도 없었고, 케네디 자신도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10년안
에 인간을 달로 보내겠다는 비전을 수립했고, 결국은 그렇게
되었다.

토머스 에디슨이 전기로 불을 켤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야겠다는
비전을 수립했을 때도 그는 그 구체적인 방법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거친 뒤 결국 전구를 발명했다.

꿈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 꿈을 포기하기보다는 꿈 자체
에 집중하도록 하라. 도달해야 할 곳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면
그곳으로 가는 길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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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리의 法則 

이승복박사 는
여덟 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가서
최고 체조선수가 되어 올림픽을 대비하던 중
거꾸로 처박혀 온몸의 신경이 끊어졌으나,
사지마비를 극복(克服)하고 세계적인
재활의사가 되어 한국에 왔다.

그는 전형적인 머피의 법칙을 이겨내고
셀리의 법칙으로 전환한 사람이다.

일이 계속 꼬이는 경우,
이를 머피의 법칙 이라고 말한다면
그와 반대되는 일이 바로 셀리의 법칙 이다.

‘셀리 헬프 미~’를 아침에 3번만 부르면
다음과 같은 일이 그날 반드시
일어난다고 믿고 있다.

건널목에서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뀐다.
시험 때에 5분전에 공부한 부분에서 나온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소나기가 내린다.
등등...

우리의 삶은 과연
머피의 법칙이 더 많이 적용이 될까,
아니면 셀리의 법칙이 더 자주 일어난다고 생각할까.
당연히 사람들은 셀리의 법칙을 소원하고 있다.

이 두 법칙을 간단하게 생각하면
순전히 운(運)에 따라 결과가 나타나는 것 같으나,
깊이 생각해보면 그러한 결과물들은 결코
우연(偶然)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자아(自我)를 벗어나지 못하면
당연히 머피의 법칙이 자주 적용될 것이고,
자신을 벗어나 밀알로 살아갈 때는
반드시 셀리의 법칙들이 더 잦아 질 것이다.


재활의(再活醫) 이 박사도 사고 당시에는 분명
머피의 법칙에 걸렸다고 볼 수 있으나,
오히려 그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 치밀한 신의 계획이 있음을
믿고 최선을 다했기에 장애를 극복하고
셀리의 원칙처럼 좋은 일들만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는 살면서 수 없이 초대하지 않는 머피가
찾아올 수 있지만 자신의 인생태도에 따라
머피는 얼마든지 셀리로 바뀔 수 있다.

머피와 셀리의 법칙보다 더
우선적이고 중요한 ‘삶의 자세’라는 인생의
원리(原理)가 있는데 그것은 항상 우연을 이겨왔다는
진리를 우리는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만 한다.

단연코 머피의 법칙이나 셀리의 법칙은
우연히 찾아온 손님들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자세(姿勢) 여하에 따라
올 수도 있었고 또 빨리 물리치기도 했던 것이다.



첫째로 긍정적(肯定的)인 자세다.
어느 철학자는 ‘좋은 것도 좋지 않은 것도 없다.
다만 생각이 그것을 만들어 낼 뿐이다.’라며
사고(思考)의 차이가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역설했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긍정과 부정이라는 생각의 방향에 따라
오늘의 현실을 만들어 낸 것이다.

곧 성공과 실패까지도 아니 건강조차도
두 생각에서 나온 결과물들이다.

실제로 매사에 긍정적(肯定的)인 사람은
면역성이 강하여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건강도 정상이고,
대인관계도 좋을 수밖에 없어서
셀리의 법칙이 더 적용(適用)되기가 쉽고
더불어 운(運)도 따를 수밖에 없다.

만나면 기분 좋은 사람,
무엇에 홀리듯 함께 있다는 자체가
행복이라고 느끼게 하는 사람에게 어찌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지 않겠는가.

우리나라 최초 웃음전도사인
황수관 박사도 대구교대를 나왔지만,
워낙 플러스 사고가 강한 사람이었기에
헌신적인 노력들은 좋은 관계들을 맺게 하여
의대교수까지 되어 오늘의 빛을 보게 했던 것이다.

인생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가짐에 있다.

한탕주의가 아니라
긍정적 사고(思考)를 가지고
성실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
누구라도 셀리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둘째는 성실(誠實)한 자세가 셀리를 만들고 있다.
머피 법칙의 절대적인 원칙 두 가지는 좋지 않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것과,
동일한 사람에게만 반복(反復)해서 불행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 원리들은 틀린 말이 아니다.

머피의 법칙이 자주 발생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그 의문은 금방 풀려진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회사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음에도 전날 늦잠을 자서 다음 날 늦게 일어난다면
마음이 급해서 모든 일들을 서두르다보니 평소보다 더 실수도 많고 일은 꼬이기만 할 것이다.
결국(結局) 회의에 늦게 참석하다보니 당황하여 발표도 제대로 못해 성과도 좋지 않았다.
이렇게 자신의 게으름 때문에 모든 일들이 뒤죽박죽되었음에도,
자신은 언제나 하는 일마다 재수가 없다고 머피의 법칙을 운운한다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김영희 씨는 29년 전 얼굴색이 다른 두살 배기 아들과 함께 미국에 갔으나
희망(希望)은커녕 남편에게 버림만 당하고 영어도 못하고 아무 경제적 능력도 없었지만,
그녀는 ‘머피’의 환경에 기죽지 않고 성실하게 일했기에
아들 하인스 워드 를 미 수퍼볼 MVP로 키워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했던 것이다.

그녀의 희생은 아들에게 감동(感動)을 주게 되었고 아들은 그 감동을 더 큰 영광(榮光)으로 다시 어머니에게 돌려 드렸던 것이다.
워드의 말대로 모두가 신(神)의 자녀다.
중요한건 피부색이 아니라 능력(能力)이다. 곧 주어진 환경이 아니라 본인 노력에 따라 운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자연 속에 가장 보편적인 진리란 한 알의 밀알이 썩음으로 많은 결실을 거둔다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생략된 부분이 있다.
곧 씨를 뿌린 후에 정성으로 돌보는 농부의 수고와 헌신(獻身)이다.
봄에 뿌려 가을 추수의 시기가 오기까지 가꾸고 돌보는 정성이 없다면 열매는 어떻게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셋째는 자신을 극복(克服)하는 자세다.
일이 잘되면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안 되면 모든 것을 머피의 탓으로 돌려버린다.
이렇게 운(運)만 탓할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에서 실패(失敗)한 것을 탓해야만 한다.
날마다 많은 적(敵)들이 우리들을 끊임없이 괴롭히지만 가장 무서운 적은 항상 내 안에 있었다.
내 욕망, 내 나약함 그리고 게으름이라는 심각한 아군 같은 적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라는 어느 선학자의 좌우명처럼
인생의 본질(本質)은 다른 것에 있지 않고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만사 모든 일들도
알고 보면 자기와의 싸움에 관한 일이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나 다이어트 하는 일이든,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 뿐만 아니라

마귀와의 싸움까지도 전부
자신과의 싸움에 속한 일들이다.
결국 모든 싸움은 자신과의 처절한 다툼이다.

남과의 싸움에서는 목숨 걸고 싸우면서도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어이없게도
전의(戰意)조차 상실한 채
처참하게 무너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가 성공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이 싸움에서 참패하여 한 순간에
인생의 막장으로 내려가면서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다.

인생에서 싸우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싸움에서 진다면 우리가 인생에서
얻을 거라곤 아무 것도 없다.



※셀리의 법칙 (Shally's Law)
잘 될 가능성이 있는 일은 항상 잘 된다
예를 들면
"시험 당일 아침에 우연히 펼쳐 봤던 책에서 문제가 나온다"
"지각이라 잔뜩 기가 죽어 교실 문을 여는데 선생님이 아직 안들어오셨다"
"공부하다 졸리운 참에 갑자기 정전된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성실과 극기 그리고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삶의 자세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인용된다.



※머피의 법칙 (Murphy's Law)
하려는 일마다 잘 되지않는 그런 현상이다.

"잘못되는 것은 원래 그런 것" 이라는 뜻으로 일이 좀처럼 풀리지 않을때 쓰는 말

"버스는 기다리면 안 오고, 개 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등이 그 예이다.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어김없이 잘못되어 간다"는 의미로,
인생살이에 있어서 나쁜 일은 겹쳐서 일어난다는 설상가상의 법칙으로 곧잘 인용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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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대한 참을 수 엇는 욕망으로 삶을 불태워버리거나 아니면 '무소유'라는 초월적 장으로 도피해 버린다. 이 책은 이 양변을 떠나 제3의 길을 찾고자 하는 갈증의 소산이다.

프롤로그 - 돈에 대한 '아주 원초적' 질문 셋
하나 - 청춘의 꿈, 10억?
그냥 고액의 연봉, 다시 말해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뜻일 뿐이다.
대체 그 돈으로 뭘 할 건데?  그러면 갑자기 표정들이 멍해진다.  12
둘 - 미워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돈에 대한 적대 혹은 무관심.
돈의 새로운 용법을 배우거나 그것을 일상적으로 실천할 생각은 도통 하질 않는다는 뜻이다.  13
셋 - 낙타와 포대화상.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불교 - 북한산의 도선사에 가면 불상이 하나있는데, 이름이 포대화상!
몸매가 통통한데 2.5등신 정도이며 얼굴표정은 천진난만 그 자체.
커다란 포대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탁발하여 포대가 꽉 차면 사람드에게 나누어주고 다시 탁발하였다.   16
'진정한 경제학은 최상의 윤리적 기준과 갈등하지 않는다.' 마하트마 간디.


1부 문제는 돈이다? - 돈타령 '천태만상'
고등학생들이 대학과 학과를 고르는 기준은 절대적으로 돈이다.  24
전 계층의 돈에 대한 태도는 거의 동질화되어 간다. - 한방에 다다익선!  이것은 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유포한 정서적 기제다.  32
대중들은 부에 대한 판타지를 결코 멈추지 않는다. 왜? 성공의 이미지가 늘 미디어를 통해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미디어에는 언제나 벼락부자 혹은 미다스의 손들이 화려하게 무대를 장식한다. 무대를 채우는 배우는 끊임없이 바뀌지만, 대중들은 그걸 감지하지 못한다. 달빛만 보고 그 이면을 보지 못하듯이. 
다시말해서, 부의 정점, 그 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다.  65
자본주의는 사적 소유에 기초하고 있다. 즉, 신분적 차별이 사라진 대신, 소유가 곧 인격이자 정체성이 되어 버린 시대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란 '사적 소유와 자아'가 그대로 '혼연일체'를 이루는 체제라 할 수 있다.  65

2부 돈 - 잘! 벌고 잘 쓰는! 실전 '노하우'
'잘' 번다는 건 돈을 버는 것과 나의 자존심이 오버랩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벌면 벌수록 자신에 대한 존중감이 높아지는 것, 그것이 제대로 잘 버는 것이다.
'쓴다'는 것은 돈은 쓰기 위해 버는 것이다. 쓰면 쓸수록 더더욱 삶이 풍요러워지고 자존감이 높아져야 하는 것이다.  71
<부자아빠 가난한아빠> 에서는 자신을 통제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돈부터 벌지 말고 해병대나 명상센터에 가서 마음수련을 먼저 하라는 대목이 있다.  75
'경쟁, 경쟁'하지만 그 속내를 따져 보면 그 이면엔 서울 중산층의 삶이라는 기준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그걸 기준점으로 삼으면 거의 대부분이 헐떡일 수밖에 없다.
가장 중요한 라이프스타일에선 왜 그토록 몰개성한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게 자신의 인생이라면 그에 걸맞은 개성을 연출해야 하지 않을까? 복잡할 것 없이 그냥 자기가 선 자리에서 시작하면 된다.  81
아기들이 걸음마를 배우는 이치가 딱 이렇다. 걸음을 떼기 위해선 일단 넘어져야 한다. 넘어지지 않고 걷는 법은 세상에 없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넘어져야 일어선다. - 이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82
우주에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있듯이 한 사람이 평생 감당해야 하는 고생의 양과 질도 대강 정해져 있다. 그러니 이왕이면 젊었을 때 겪는 것이 낫지 않을까. 젊었을 때 요리조리 피해 가거나 부모의 덕으로 대충 넘어가면 결국 중년이나 노년에 그 고난의 문턱을 다시 마주치게 된다.  82
고생의 핵심은 몸이다  83
돈을 벌어서 외로움을 극복하려 하지 말고 그냥 어렸을 적부터 우정과 친밀감을 터득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98
돈을 버느라 친구를 다 잃어버리고 나서 그 외로움을 달래기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붓는 그런 멍청한 짓을 하지 말라는 의미다. 친구와 돈 - 이 두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라는 뜻이다.  99
좋은 친구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자신이 먼저 좋은 친구가 되는 것뿐이다.  100
사람과 배움에 대한 열정, 문제는 그것이다.
친구들 사이의 일상적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돈은 저절로 이 루트를 따라 흐르게 되어 있다.  106
무지는 불안을 낳고 불안은 동요를 낳는 법. 이런 '몽메한'상황을 타파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공부가 그렇지만, 돈에 대한 공부 역시 '절차탁마'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113
터놓고 말하기! - 자기 안에서 분열이나 간극이 없어야 타인과도 소통이 가능한 법. 안팎이 서로 '통'한다는 건 이런 의미일 터이다. 평소에 툭 터놓고 말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필요한 건 오직 일상에서의 끈기 있는 훈련뿐이다.  115
최소한의 화폐로 다양한 삶을 연출해 낸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 가치와 효용성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돈놀이'의 진수다.  121
돈의 달인이 되려면 돈 대신 몸을 잘 쓰면 된다. 그래야 불필요한 소비행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125
젊은이가 고용주의 마음에 들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설명에 한마디로 역겨움을 느낀다.... 우리 인간의 삶이란 고귀한 것이어서 취업시장에 나가기 위해, 또는 인생을 고용주를 위해 바치느라 커버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325쪽  138
인간은 원초적으로 프리랜서다. 평생 동안 한 직장에서 쳇바퀴처럼 살기를 원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노릇 아닌가.  138
미국의 유명한 대체의학자 크리스티안 노스럽은 '창의적이고 풍요러워진다는 것은 돈과 일에 대한 생각을 바꾼다는 뜻이다... 돈은 우리가 생명에너지와 바꾸고 있는 물질이다. 따라서... 당신의 일을 생명 에너지로 환산할 때 어느 정도의 대가르 치러야 하는지를 계산해 본다. 고된 노동으로 고갈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서 값비싼 휴가와 빈번한 병치레를 요구한다면 결국 당신은 손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 422-423쪽  140
현대인들은 운명을 극복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잘 따져 보면 출세해서 부귀를 누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부귀의 내용은 대부분 쾌락 아니면 방탕이고, 여기에 본선의 문제는 빠져 있다. 이런 경우 그걸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부귀를 위해 내 몸과 삶을 바친 것일 뿐! 성공이란 무엇을 얻었느냐가 아니라, 본성과 경제가 얼마나 일치되는가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경제학이다.  143

3부 돈에대한 우주적 상상력 - 카오스 경제학을 향하여!

























아래는 저자의 인터뷰 내용들과 동영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을 소유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또, 제대로 쓰는 것은 충분히 벌고 난 다음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늘 돈이 부족하기 때문에 제대로 쓸 겨를없이 계속 벌어야 합니다. 돈을 버는 동안 행복하게 쓰면서 살 수는 없을까요? 돈을 '잘 쓰는 법'에 대한 이야기는 왜 없을까요?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의 저자 고미숙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가 돈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돈에 대한 일반적인 잣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돈으로부터 더욱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요?


책에도 나왔지만, 강연요청을 받을 때 미리 금액을 물어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가까운 사이여도 돈 이야기를 꺼내기 쉽지 않은데, 왜 돈 이야기는 특히 투명하게 말하기 어려울까?

돈에 대해 투명하게 말하는 것을 꺼리는 정서는 근대 이전, 자본주의 이전에는 돈 외의 다른 가치가 있었고, 이러한 가치가 돈으로 환원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것 같다. 지금 돈에 대해 투명하지 않은 것은 자기 소유에 대한 욕망을 남에게 숨기고자 하는 은밀함이라서 인성에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강연요청을 할 때 강연료를 숨기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탐색하는 느낌이 들고, 그런 경우는 늘 강연료가 적다. 스스로 적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떳떳하지 않은 것이다. 돈을 떠나서 더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자신들의 입장만 생각하고 돈과 상관없이 해주기를 바라거나 자기들 입장만 이해해달라고 시작하면 안 되는 거다. 돈의 액수를 떠나서 돈의 용법을 모르는 것이다. 

돈을 쓰는 용법에 대해 아직 막막하다. 기억에 남은 ‘돈 쓴’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 달라.
미국에서 생활할 때 센트까지 나눠서 더치페이를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서로 부담을 안 주겠다는 호의가 담겨 있는 건 알겠는데, 그 자체로 너무 각박한 느낌이었다. 그러면 관계가 계약적인 것 이상을 넘어갈 수가 없다. 누군가는 그 관계를 넘어야 되는데, 그런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만날 외롭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고, 소외당했다고 말하는 건 너무 모순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때 여러 가지 실험을 했고, 그 중 하나가 더치페이 습관을 깨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후배들뿐 아니라, 거기에 있던 지식인들과도 다양한 교류를 하게 되었고, 돌아올 때는 미국에서 번 돈을 다 털고 왔다.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의 뒷부분에 부록에 있는 44만 원 세대 청소년, 88만 원 세대 직장인, 청년백수 세 사람의 이야기를 싣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처음에는 내가 할당을 해서 글을 쓰라고 했다. 해완이에게는 44만 원 세대는 어떻게 돈을 쓰는지 인터뷰를 해봐라, 88만 원 세대인 임군과 대학 졸업한 지 한참 된 청년 백수는 왜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느냐 이 이야기를 물어본 건데, 본인들도 그 테마가 궁금해진 거다. 그래서 해완이도 열심히 인터뷰를 하고, 시성(졸업한 지 한참 된 청년 백수)이도 어떻게 ‘수유+너머 구로’에서 활동하게 됐는지 정리하게 됐다. 임군이 쓴 이야기는 정말 내게 소나기 같았는데, 나는 그런 88만 원 세대를 만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글들을 보고 ‘아 이제 글을 쓸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다. 책의 전체적인 구도와 내가 돈을 쓰고 실험했던 건 있는데, 구체적인 현장이 너무 없어서 그게 항상 목말랐다. 그 글들을 보고 현장감이 생기게 된 것이다.

삶과 괴리되지 않고, 삶을 풍족하게 할 수 있는 돈 쓰는 ‘용법’을 어떻게 발명해야 할까?
돈에 대해 생각하면서 참 놀랐던 것이 다른 분야는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강조하면서, 돈의 용법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너무나 획일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무조건 많이 버는 것, 또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화폐와 교환한다 그런 거 말고는 없다. 자본주의에 찬성하는 사람이건, 자본주의와 평생을 걸고 싸우겠다고 하는 사람이건, 젊은이건, 노인이건 다 똑같다는 점인데 이게 너무 신기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참 돈을 좋아하고, 백만 원이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그걸 어떻게 쓸지 궁리하느라 잠을 못 잔 적도 있다. 그래서 수유+너머 연구실을 시작하기 전에 돈을 모으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비정규직이건, 정규직이건 돈을 잘 모으지도 않지만 모아서 거침없이 쓴다고 하면 명품매장에 가서 그냥 덜커덕 구매하는 게 기본모드가 됐다고 들었다. 이렇게 쓰는 방식이라면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고 빈부의 격차가 줄어든다고 한들 결국 제도의 코스를 따라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돈의 액수가 얼마로 바뀌느냐지, 돈을 통해서 행복해지는 길은 있을 수가 없다. 백만 원을 가지고 천만 원, 일억을 가진 사람들보다 더 다양하게 쓰는 법. 돈의 달인! 정말! 그래서 이제 ‘쓰는 것이 버는 것을 규정한다’는 말처럼 어떻게 쓸지에 대해 상상력을 작동시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달인 시리즈’ 세 권을 냈다. 공부, 사랑, 돈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전하려고 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공부와 사랑, 돈. 모두 자유와 행복을 위한 기술로 써야 된다. 존재의 명령은 하나다. “행복해라.” 근데 행복은 그냥 들으면 닭살 돋는 감상적인 가치처럼 보이는데,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유를 얻어야 한다. 자유는 뭐냐 하면 나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공부가 나를 가로막는다면 공부법이 잘못된 것이고, 연애 때문에 허덕인다면 당연히 벗어나야 된다. 돈이 나를 억압한다면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그런 과정만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는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행복해라.” 이것은 “스스로 자유를 터득하라”고 하는 존재의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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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커다란 일도 어제로
밀려나고야  말았네요.

아무리 힘들었던 일도 어제라는
바닷물에 묻히고 말았지요.

은근히 찔러대는 가시 같은 아픔들도
하늘이 무너질 것같은
커다란 문제들도 흐르는
시냇물처럼 흘러 지나가고

오늘은 오늘일 뿐
새하얀 도화지에
다시 그림을 그리듯 그렇게
새벽 도화지는 
새롭고 깨끗할 뿐입니다.

어제일을 다시 가져다
그리지 말기로 해요.

새로 지은 새집에
새로운 가구를 들여놓듯
오늘이라는 새집에는
새로운 오늘을 들여 놓아요.

흘려 지내 버려야 할
어제의 낡은 문제들은 미련없이
손에서부터 놓아 버리기로 해요.

힘차게 웃으며
오늘이라는 도화지에 새롭고
신선한 고운 그림을 그리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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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정해우 - 포정의 소를 잡는 최고의 솜씨

 

중국 전국시대에 소를 잡는 데 최고의 기술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포정()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포정이 궁정 잔치에 쓰일 소를 잡고 있었다. 마침 우연히 그 곳을 지나던 왕이 그의 솜씨를 보고 감탄하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잡는 기술이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를  있는가?
포정은 칼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으려고 했을 때는 소의 겉 모습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지 3년이 지나니 어느새 소가 부위별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19 년이 흐른 지금은 눈으로 소를 보지 않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소의 살과 뼈, 근육 사이의 틈새를 봅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칼이 지나가게 합니다. 이런 기술로 단 한 번도 칼이 살이나 뼈와 부딪히는 실수를  적이 없습니다.
평범한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그 이유는 칼로 무리하게 뼈를 가르기 때문이다. 솜씨 좋은 백정은 칼을 가지고 소의 살을 베기 때문에 1년 만에 칼을 바꾼다. 그렇지만 포정은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았다. 소의 뼈와 근육 사이에는 어쨌든 틈새가 있기 마련이고 그 틈새로 칼날을 집어 넣어 소를 잡기 때문에 칼날이 전혀 무뎌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포정의 소를 잡는 최고의 솜씨 뜻의 포정해우(押丁解牛)의 고사성어가 여기서 나왔다.



박사가 되지 말고 도를 깨우치기를  .....

 


춘추 전국시대 제(齊)나라에 소를 잡는데 신기에 가까운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도우토(屠牛吐)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루아침에 아홉 마리의 소를 잡아도 칼이 전혀 무뎌지지 않아서 소의 털까지 자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자(莊子)》의 양생주편(養生主篇)에는 도우토 보다도 더 소를 잘 잡았던 포정(庖丁)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포정의 포(庖)는 부엌 포 또는 요리사 포자이다. 정(丁)은 백정을 뜻하므로 포정이란 사람의 이름인 고유명사가 아니라 소를 아주 잘 잡았던 요리사를 지칭하는 보통명사일 가능성도 있다. 어쨌거나 제나라 문혜군(文惠君)의 주방장이기도 했던 포정은 소 한 마리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해체 시킬 수 있었다. 어찌나 능수능란했던지 손 놀리는 것이나 어깨 위에 둘러매는 것, 발을 내디디는 것, 무릎으로 밀어치는 동작, 살점을 쪼개는 소리, 칼로 두들기는 소리가 마치 뽕나무 숲에서 춤을 추듯 음악에 맞고 조화를 이루었다고 한다.


해우(解牛)는 소를 해체하는 즉 소를 잡는 것을 뜻하므로 포정해우(庖丁解牛)란 포정의 소 잡는 기술을 나타내는 말이다. 포정은 무려 19년 동안이나 칼을 갈지 않고 사용했지만 여전히 그가 사용하는 칼의 날은  무디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도우토 보다는 분명 한 수 위였던 것 같다. 문혜군은 토정의 해우술(解牛術)이 고금에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신기를 보유한 것에 감탄하여 물었다.
"어떻게 하면 소 잡는 기술이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포정이 대답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의 겉모습만 보였습니다. 3년이 지나니 소의 겉모습은 눈에 띄지 않고 소가 부위별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10년이 지나고 부터는 마음으로 소를 보지 눈으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눈의 감각 작용이 멈추니 자연스럽게 마음의 정신작용만 남았습니다. 그때 소의 이치에 따라 살과 뼈 근육 사이에 커다란 틈새 속으로 칼을 지나가게 합니다. 그 묘한 기술은 아직 한 번도 칼질을 실수하여 살이나 뼈를 다친 적이 없습니다. “
문혜군은 넋을 놓고 포정의 말을 경청했다. 그의 말이 계속 되었다.


“솜씨 좋은 백정이 1년 만에 칼을 바꾸는 것은 칼로 소의 살을 베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백정은 월마다 칼을 바꾸는데, 이는 칼로 무리하게 뼈를 가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 칼은 19년이나 되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소와 뼈와 살 사이에는 틈새가 있기 마련이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소의 틈새에 넣으니 칼날을 움직이는 데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9년이 되었어도 칼날이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근육과 뼈가 엉킨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그 일의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하여 경계하며 천천히 손을 움직여서 칼의 움직임을 아주 미묘하게 합니다. 살이 뼈에서 털썩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칼을 든 채 일어나서 둘레를 살펴보면 비로소 부위 별로 해체된 소고기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면 칼을 씻어 챙겨 넣습니다."
문혜군은 포정의 말을 듣고 그가 백정이 아니라 도를 깨쳤다는 것을 알았다.


소 잡는 백정은 신분이 가장 미천한 계층에 속한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는 사람도 도를 깨칠 수 있다는 것을 포정이 보여 주었다. 그는 소를 칼로 잡은 것이 아니다.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아서 뼈와 뼈 사이로 칼을 지나가게 하는 이치에 따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소를 해체시킬 수 있는 경지를 터득한 도인이었다.


대학에 진학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면 박사가 된다. 그러나 박사 보다 한 수 위가 도사다. 도술은 이론이 아니라 현장에서 상황에 부딪치며 경험과 수련의 반복을 통해 체득하는 것이다. 빵을 어떻게 하면 영향학적으로 좋게 만드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볼 때 박사학위 소유자는 이론적으로 잘 알고 있고,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도 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도 가지 못하고 일찌감치 공장에 들어가서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갈고 다듬는 과정을 통해 제빵 기술을 익힌 사람보다 더 맛있는 빵은 만들지는 못한다.


우리나라 부모님들은 모두 자식을 박사를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박사보다 한 수 위가 도인이다. 소를 잡는 것을 가지고도 도를 터득하는데, 요리를 하고, 차를 만들고, 배를 만드는 모든 분야에서 도를 깨칠 수 있다. 이론적으로 많이 알아서 무엇 하겠는가. 도는 말로서 알려 줄 수도 없고, 문자에 의해 깨닫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포정해우의 예만 보아도 분명해 진다. 지금 어느 현장에서 무슨 일을 하던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 도를 깨우치기를 바란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을 것이고 참고할 이론도 없다 오직 스스로 정진하여 깨우쳐야 한다. 치열하게 스스로의 내면을 다스리고, 정신을 집중시켜 처절하게 구하라.

깨치고 나면 자유로워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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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들어가는 말
고통은 나를 고립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상처들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축복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어리석은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건 내가 어리석은 나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8

세 번의 이혼, 성이 다른 세 아이의 어머니, 그 싱생이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당사자가 아니면 짐작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22
"우리가 보는 것들 이면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감추어져 있는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때로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얼마나 치명적인가." <즐거운 나의집>  23
사실 우리는 이면은 커녕 보이는 것조차 얼마나 왜곡해서 보고 있으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상처는 또 얼마나 치명적인가?   23

하느님이나 예수님이 언어라는 것을 사용할 때가 딱 두 경우인데, 하나는 창조할 때고 다른 하나는 지유할 때라는 거예요.  26
기도해서 병을 낫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람들한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치유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27
털어놓는 것 자체가 치유의 시작이거든요.  28
"이 세상에 똑같은 나뭇잎도 없고, 똑같은 눈송이도 없고, 모든 것이 다 원본이다." 남들 눈에는 하나는 삐뚤어져 보이고, 하나는 벌레 먹어 보여도 그게 다 원본이고, 완벽한 세상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평화를 얻었죠.  34

싸우는 것도 잘  싸워야 될 것 같아요. 말은 다 못 하고, 엉뚱한 것으로 상처만 주는 싸움은 안 하느니만 못하고요.  51
젊을 때만이 실패할 수 잇는 권리가 있는 거다. 나이 들어서 시패하면 힘들다. 지금 마음껏 실패 다 해봐라. 그러면 적어도 어떻게 하면 실패하는 줄은 안다.  59
사람이 길게 살아보고 나서야 얘기해야 될 것 같아요.  67

에베레스트 등정을 한 번에 성공한 사람이 산에 대해서 더 잘 알겟어요? 몇 번의 조난을 당한 후 에베레스트에 올라본 사람이 그 산을 더 잘 알겠어요?  83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지난 경험에서 새로운 것을 얻어내지 못한다. 지난 경험을 반추해보면서 스스로를 성찰해보는 시간이 없어서일 것이다. 
공지영은 그런 시간을 가져야만 과거의 상처를 극복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와 진심으로 대면하는 그런 시간.  83

나이 드는 게 좋다기보다는 내가 세월과 함께 버렸던 수많은 쓸데없는 것들이 나를 점점 더 편안하게 해주니까, 하루하루 갈수록 편안해지면서 더 좋은 것 같아요.
거꾸로 버리는 것없이 그냥 나이만 들면 힘들 것 같아요. 아집만 생기고, 몸도 늙고, 히들 것 같아요.  89
내가 희생당할 것인가, 차라리 이기적일 것인가를 결정해야 된다면 이기적이 되라고 얘기해요. 그래서 네가 많이 강해졌을 때 그때는 희생을 해라, 아니 희생을 허락하라고 하거든요.  99
제가 앞으로 아마도, 결코 안 할 것이 안티예요. 안티는 절대로 옳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가진 옳은 부분을 이야기하면 돼요. 안티는 결국 기생하는 거거든요.
항상 논리는 저쪽에서 창조하고, 이쪽에서는 반대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 것은 앞으로도 안 할 거예요. 쉽게 말해서 전쟁 반대는 하지 말고, 평화에 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거죠. 그 중의 하나가 전쟁도 막는 것이겠지만 전쟁 반대 자체가 모토가 되지는 않게 애햐 하는 거죠. 그것이 평화는 아니니까요.  100-101

우울은 분노의 거짓 감정.
분노라는 감정에 대한 해석과 우리가 알게 모르게 이것을 억제함으로써 병으로 변하느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것, 결국 정신분석이 그에 관한 얘기. 감정의 억압 중에서 분노의 억압이 제일 중요하다. 그것의 근원이 사랑의 결핍에서 시작돼서 사랑으로만 치유가 된다는 것.
'이 모든 마음의 병이 사랑의 결핍에서 오고, 그것의 치유는 사랑으로만 가능하네.  178

사람이라는게 명품, 짝퉁으로 나눌 순 없지만 자기한테 맞는 사람이 있을 순 있다. 자기한테 맞는 사람을 명품이라고 할 때, 외로울 때 짝퉁을 명품으로 착각해서 덥석 구입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 불행해진다. - 스스로 행복할 때에만 눈이 제대로 뜨니는 것 같아요.  홀로여도 행복한데, 네가 있어서 더 좋다. 그런 관계가 제일 좋은 것 같아요.  190

책상이나 방을 정리하다가 그런 생각을 하죠. 정리한다는 것이 다 버리는 거구나. 마음 정리한다는것이,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것이, 결국 있는 것 내다 버리는 일이구나. 뭘 들여와서 정리하는 사람은 거의 못 본 것 같아요. 갖다 버려야지 정리가 되는 거죠.  213

소설 공부는... 자기르 냉정하게 객관화시켜서 바라볼 줄 알아야죠. 그런 부분도 굉장히 중요하고, 그래서 내가 돈을 벌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우선 돈을 벌어보라고, 그리고 그 다음에 책을 무지무지 않이 읽고, 그래서 어느 날 쓰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을 때 써보는 것예요. 
'미칠 것 같은 순간이 안 오면 어떻게 하냐?'고 하는데, 그러면 계속 돈 벌고 살면 되죠. 책 읽고, 그것도 훌륭한 삶인 거죠.  219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언어를 다루는 감각이 가장 중요하겠죠. 어떤 작가든 언어에 대한 감각은 독서를 통해서 길러지는 것 같고요. 타고난 것도 있어야 될 것 같고.  222
나이키의 라이벌이 닌텐도라고 하는 것처럼 소설의 라이벌이 텔레비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무한도전>같은 프로그램에 빠지면 책을 들기 힘들죠. - 그것보다는 인터넷인 것 같아요. 인터넷의 짧고 무의미한 글 쓰기가 문학의 적인 것 같아요.  232

정말 믿어주는 것. 하느님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믿어주는 것이 진짜 사랑이 아닐까 싶어요.  260
'너만 아프냐?'고 말하는 살마들 대부분은 제대로 아파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정말 처절하게 아파본 사람은 남의 고통에 대해 쉽게 얘기하지 않는 법이다.  270

작가가 계속 성장하기 위해서는? 고통과 고독과 독서, 세 가지가 거의 필수적인것 같아요.  286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도 '이것에 의미가 있다고 믿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이겨 나갈 수 있다.'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삶을 굉장히 크게 바꿔놓더라고요. 삶이 바뀌니까 글도 바뀌고, 삶을 조금 더 윤택하게. 편안하게 살제 해주는 것 같아요.  313

'우리'라는 말이 사실은 참 좋잖아요. 그래서 '우리집, 우리엄마, 우리딸, 우리남편, 우리아내'이러게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이게 잘못하면 굉장한 폭력이 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늘 얘기하죠. 라틴어 계통의 언어들을 보면 격변화에서 1인칭 복수, 2인칭 복수, 3인칭 복수가 잇는데요. 우리, 너희들, 그들이라고 했을 때 우리에서 내가 빠지면 너희들이나 그들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안에는 꼭 내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의 안에는 내가 없는 것 같아요. 저는 그래서 개인주의의 성숙이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341

일단 책을 익는 것이 즐거워야 해요.  348

'더 많이 사랑할까봐 두려워하지 말아라. 믿으려면 짐심으로, 그러나 천천히 믿어라. 다만 그를 사랑하는 일이, 너를 사랑하는 일이 되어야 하고, 너의 성장의 방향과 일치해야 하고, 너의 일의 윤활유가 되어야 한다. 만일 그를 사랑하는 일이 너를 사랑하는 일을 방해하고 너의 성장을 해치고 너의 일을 막는다면 그건 사랑을 하는 것이아니라, 네가 그의 노예로 들어가고 싶다는 선언을 하는 것이니까 말이야.'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349

진짜 우파, 보수라는게 아른다운 가치를 지키는 건데.. 원래 우파가 예의 바른 건데, 한국에서 우파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극우니까 그렇죠. 내가 합리적 우파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별로 없어서 그렇지.  352
보수의 본령은 원래 예의 바르고, 형식을 중요시하기 대문에 말 점잖게 하고...  355

내 맘에 드는 것을 썼을 때 희열 같은 게 있잖아요. 그 다음에 글이 풀렸을 때의 희열, 그때 정말 너무 좋아요.  381

소를 잡는 사람과 임금이 하는 대화예요. 이 사람이 뼈를 전혀 안 다치게 소를 잘 잡느데, 칼날을 한 번도 갈지 않았대요. 그래서 물어보니까 "하늘의 이치에 의지하여 큰 틈새에 칼을 집어넣고, 빈곳을 따라 소의 몸 구조대로 할 뿐입니다. 아직 한 번도 살이나 인대를 다치게 한 일이 엇는데, 큰 뼈를 다치겠습니까? 신의 칼은 19년이나 되었고, 잡은 소만도 수천 마리에 이릅니다. 그러나 칼날은 마치 방금 숫돌에 간 것처럼 여전히 날카롭습니다. 이세상의 어떤 소도 몸의 구조가 똑같은 것은 없습니다." 하면서 임금한테 던진 한 마디가 뭐냐 하면, "제가 잡은 것은 죽은 소입니다. 죽은 소마저도 각각의 생김새대로 다루어야 한다면 하물며 살아 있는 존재는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 사람이 말하자면 대상인 소의 각각의 것을 인정하고 거기에 순응하는 거잔아요.  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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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이은상은 <적벽유(赤壁遊)>에서 
            백년도 잠깐이요 천년이라도 꿈이라건만
            여름날 하루해가 그리도 길더구나
            인생은 유유히 살자 바쁠 것이 없느니
바쁠 것 하나 없는 뜬구름 인생들이 이리 복닥 저리 복닥 대며 아웅다웅 다투는 꼴이 새삼 부끄럽구나..  96

그렇다. 
한 번 살다가는 인생인데 우리가 사회의 조작(?)에 따라 속도만 키우면서 잃어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글쓴이의 머리말
시는 고도로 농축된 언어다.
한시는 절제와 함축을 강조한다. 한시는 과장의 언어다. 그래서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된다. 따져 보고 가늠할 줄 알아야 한다.  4

평생에 품은 바람 이미 다 글렀으니 
게으름 열 배 더함 어이하지 못하겠네.
꽃 그늘 돌아들어 낮잠에서 깨어나 
어린 아들 손을 잡고새 연꽃을 보노라.
  - 이첨 李詹 1345~1405 <용심 慵甚>   62

활짝 펼친 운전지에 취중 시가 더디더니 
수풀도 잔뜩 흐려 빗방울이 후두둑.
서까래 같은 붓을 움켜쥐고 일어나
낚아채듯 휘두르니 먹물이 뚝뚝 듣네.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 정약용 丁若鏞  1762~1836 <불역쾌재행 不亦快哉行>  88

곱던 모습 아련히 보일 듯 사라지고 
깨어 보면 등불만 외로이 타고 있네.
가을비가 잠 깨울 줄 진작 알았더라면
창 앞에다 오동일랑 심지 않았을 것을
  - 이서우  1633~1709  <도망실>  145

월하노인 통하여 저승에 하소연해 
내세에는 우리 부부 바꾸어 태어나리.
나는 죽고 그대만이 천리 밖에 살아남아
이 마음의 이 슬픔을 그대에게 알게 하리.
  - 김정희 1786~1856 <배소만처상>  147
   이승에서의 미진한 사랑을 잇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때에는 내가 먼저 죽고 당신은 살아남아, 지금의 내찢어질 듯 아픈 마음을 당신으로 하여금 알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이것은 독백이 아니라 절규다.  147

사람을 기다리기 괴롭지만은 
하늘 가서 자식을 기다림이랴.
사는 일은 자식들 걱정뿐인데
막힌 길의 아비 노릇 부끄럽구나.
  - 이광사 1705~1777  <대아행>  182

여덟 해에 일곱 해를 병 앓았으니 
돌아가 눕는 것이 편안할 테지.
흰 눈ㄴ이 펄펄 오는 오늘 이 밤에
어밀 떠나 추운 줄도 모르는구나.
  - 남씨  생몰미상  <곡손녀>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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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릴레이 시즌2

2010. 12. 1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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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하다. 즐겁다. 난감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 중에 강력한 느낌들이다.

630일간의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국내나 일본이나 대만같은 나라들에서 자전거
여행자들은 간간이 볼 수 있었고,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런데 아메리카 .. 
북아메리카도 놀라운데 중앙 그리고 남아메리카를 자전거로 돌았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고도 난감하다.

그 험한 나라들에서 자전거로 다닌다는것 자체가 익사이팅하다..
그에 더해 이미 블로그에서 유명하고 그로인해 책으로 출간되었다.

나는 글을 읽고 사진을 보면서 그의 자유로움에 감탄을 했다. 그리고 그의 무모함에 박수를 쳐댔다.. 나는 저 나이에 여행에 빠지긴 했어도 저만큼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사진을 보며 일본삘이 난다고 생각을 했는데..'오타쿠'라고나 할까...

나로서는 그가 동경의 대상으로 남았다.. 지금이라도 하면 되지 않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세상에 때를 그대로 뭍혀두고 있다고 핑계를 대고 있다.
아니 내 나이 20대 후반때에도 저정도의 생각과 실행력은 없었었다.. 나는 걱정이 앞섰고, 이것저것 안될 수 밖에 없는 핑계를 대고 있었다..그러기에 그가 동경의 대상일 수 밖에 없다.. 

여행중독자.. 그를 표현하기에 가장 맞는 표현이리라.
그는 여행중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의 소통으로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었다.
책의 내용을 보면 알게 되기도 하지만 내용이 없이 사진들만 보아도 그의 소통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의 글은 편하게 읽힌다... 지식인이라 칭하는 이들의 난해한 표현은 전혀 없다. 그러기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 
또한 그만큼 그림을 더 그려볼 수도 있다.
이글을 보면서 나도 이만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없으리라 생각은 되지만 그에 반해 그의 열정에 감복하고 그의 열정을 따르는 사람은 꽤나 있으리라 생각이 된다.
그의 하루하루들을 읽으며 즐거운일 고마운일 안타까운일 아픈일 화나는일 까지 모두 보면서 그와 공감하고 그와 함께할 수 있다.

그는 에필로그에서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 여행기를 읽고 감동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정말 큰 감동을 받은 이는 바로 나였다. ...나는 다시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을 찾아서, ㄱ리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기 위해서.  
내 인생 최고의 게임을 조금 더 즐기고 싶다.'

떠나려는 용기가 부족한 사람들은 이 말을 가슴깊이 새겨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간접 경험만으로는 절대 진정한 감동을 느낄 수 없기에.. 그것에서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앎을 알 수 없기에..(물론 떠나지 않는다고 앎을 모른다는건 아니다.. 그것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여행은 공감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아량을 키워준다. 
여행은 진정한 용기를 카르쳐준다.
여행은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을 준다.
여행은 어떠한 것도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
여행은 세세한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
.
.
여행은 나를 키워주는 가장 큰 스승이다.

그의 마지막 페이지의 말처럼 '떠나지 않으면 청춘이 아니다.'
나는 그의 이 표현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표현을 떠올린다.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진정한 청춘일지도 모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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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 하고픈 생각의 욕심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고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만은 완벽한 것 처럼 
말들을 하고 행동들을 합니다. 
자신들만은 잘못된 것은 전혀 없고 
남들의 잘못만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남들의 잘못된 일에는 험담을 일삼고 
자신의 잘못은 숨기려 합니다. 
그러면서 남의 아픔을 즐거워하며 
나의 아픔은 알아 주는 이가 없어 
서글퍼 하기도 합니다.

 

남의 잘못을 들추어 내며 
허물을 탓하고 험담을 입에 담는다면 
남들도 돌아서면 자신의 허물과 험담이 
더욱 부풀려져 입에 오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조금 부족한 듯이 마음을 비우고 
조금 덜 채워지는 넉넉한 마음으로 
조금 물러서는 여유로움으로 
조금 무거운 입의 흐름으로 간직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의 부드러움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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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공동체가 추구하는 사랑과 성의 윤리적 배치란 과연 어떤 것일까? 탈주와 전복이라는 코뮌의 비전과 그것은 대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이 책은 위의 질문들에 대한 최초의 응답이다.  6

프롤로그
복수혈전이 펼쳐진다는 건, 나는 별로 원하지 않았는데 상대의 유혹에 의해 엮인 것이라고 하는. 그리고 역시 상대한테 속아서 억지로 희생과 헌신을 강요당했다고 하는. 요컨대, 원인이 모조리 상대에게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을 언제나 대상의 문제로 환원한다.  14
사랑 따로 대상 따로 나 따로가 아니라, 나와 사랑과 대상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사랑이라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랑과 대상과 나 사이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 사랑하는 대상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  15
사랑은 무상하다.  16
실연은 행운이다! 나로 하여금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미리미리 길을 '비켜 준' 존재들한테 축복 있기를!!  17
'사랑도 공부를 해야 하나?'가 아니라, 사랑이야말로 공부가 필요하다.
앎의 크기가 내 존재의 크기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앎의 열정이 없는 존재가 운명적 사랑을 한다는 건 우주적 이치상 불가능하다.
주류적 척도로부터 멋어나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열정, 자본과 권력의 외부를 향해 과감하게 발을 내디딜 수 있는 내공, 공부는 무엇보다 이 열정과 내공을 쌓아 가는 과정이다.  18
"오직 배우는 마음만이 열정이 넘칩니다."  19


1부 오만과 편견, 사랑과 성(性,sex)에 대한
홀로 갈 수 없다면, 정대 타자를 사랑할 수 없다. 혼자 갈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가벼워야 한다. 망상은 무겁다. 갖가지 오만과 편견으로 존재를 한없이 무겁게 얽어 맨다.  23
사랑이 다양한 관계를 망라하는 보편적인 명칭이라면, 연애는 1920년대에 수입된 신조어다. 'Love'의 일본식 번역어다. 
사랑이 수많은 의미의 생산이 가능한 용어라면 연애는 남녀 사이의 이성적 관계라는 의미로 압축된다. 
그럼 작업은? IMF 이후 등장한 신조어이다. 연애보다 더 의미가 축소되어 아주 특정한 방식의 연애행태를 지칭한다.  27
아름다운 순간들을 추억하는 일, 그리고 또 다시 그와 같은 순간이 오기를 몽상하는 일. 추억하거나 몽상하거나. 이들 순정파들은 한마디로 이런 유의 낭만적 궤도 안에 갇힌 '고매한 족속들'이다. 그들의 연애 또한 늘 실패한다.  31
야동은 말할 것도 없고, 야식(특히 폭식)은 외로움의 신체적 표상이다. 정신적 공허를 채우기 위한 몸적 반응이 바로 허기이기 때문이다.  35
우리의 마음은 사랑과 연애, 섹스에 대한 무수한 망상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고유의 것'이라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 이상을, 그 외부를 사유하려 하지 않는다.  37
'사시사철 두리번 두리번 살금살금하면서,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잠시도 안심할 수 없는 게 현대인이 안고 있는 마음의 병이야. 문명의 저주인 거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541-542쪽  42
이 자의식은 문명의 저주다. 타자와의 소통을 가로 막는 장벽이기 때문이다.  42
머리를 굴려 대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자의식을 침범당하는 게 두려워서다.  43
충동과 열정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충동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그래서 늘 중독적 상태로 치닫는 힘이다. 나에게 엄청난 쾌락을 주지만, 그 원인은 늘 외부에 있다. 그러므로 강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나는 노예적으로 끄달리게 된다.
열정은 아무리 뜨겁게 솟구친다 해도 삶의 의지와 연동되어 있다. 그러므로 절대 중독되지 않는다. 열정은 '유래 없는 평온'을 선사한다.  45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성욕을 느끼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47
여성들은 여전히 다수의 남성들로부터 프러포즈를 받는 걸 '인생의 큰 의미'라고 여기는 게 분명하다. 이러니 사랑의 성공과 실패는 결국 찼는가 차였는가로 귀결될 밖에. 허나, 따지고 보면 이런 논법만큼 무지한 것도 드물다.  52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점쟁이들이 무려 45만이라고 한다.
청춘남녀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사항은 운명적 파트너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과 딱 맞는 반쪽이 있다면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 거라는 맹목적 믿음에 근거한다. 
결론 부터 말하면, 반쪽이는 없다!  59
중요한건 반쪽이를 향한 무한도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함께 걸어갈 수 있는 짝을 찾는 일이다.  60
정말로 사랑에 목숨을 거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솔직히 현실적으론 사랑을 위해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다만 망상 속에서 그렇게 동경할 따름이다.  64
참고 견딘다는 건 속에다 꾹꾹 눌러 담는 것이지 상대와 진심으로 소통하는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67
희생이라는 포장 속에 어설픈 평화를 누리기보다 솔직하게 서로의 욕망을 드러내면서 화끈하게 전투를 벌이느 것이 사랑의 본래 면목에 더 가깝지 않을까. 고로, 희생과 헌신이라는 미덕만큼 사랑과 거리가 먼 항목도 없다.  68
감정적 간극이 벌어지게 되면 자주 투닥거리게 되고, 어느새 결별의 상황에 이르고, 그러면 또 다시 새로운 짝을 찾아 헤맨다.  69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라는 말은, 곰곰이 따져 보면, 사랑은 늘 처음의 그 격정적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변한 것, 아니 변절에 해당한다.  70
이런 망상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사랑이란 추억 아니면 몽상으로만 존재한다.
추억은 지나간 것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고, 몽상은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다.
말로는 아름답다, 순수하다, 아직도 그리워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뿐이다. 막상 만날 기회가 오면 거의 대부분 달아나 버린다. 왜? 아름다운 추억이 망가질까봐.  71
지금, 이 순간을 살지 못한다. 단 한순간도 '지금, 여기'의 사랑을 누리지 못한다.  72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사랑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랑의기술>13쪽  73
남자들은 오직 권력과 돈, 여성들은 성적 매력과 몸치장에 몰두한다. 마치 그것만 갖춰지면 사랑은 절로 굴러온다는 듯이 말이다.  73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은 절대 배움의 대상이 아니라고 간주한다. 공부는 근본적으로 몸과 우주에 대한 탐구이다.  73
우리 주변엔 실전연애 노하우에 대한 숱한 책들이 널려 있다.... 참, 어처구니가 없다. 정말 이런 식으로 감정을 교류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걸까?기교라고 쳐도 참으로 유치한 수준 아닌가. 그만큼 연애가 힘들다는 뜻일터. 
순정파건 냉소파건 다들 나름대로 테크닉에 골몰하는 건 틀림없다.  75
요즘 커플들이 100일을 넘기기 어려운 것도 내적 충만감보다는 인정욕망에 휘둘리는 이런 식의 문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일터. 타인의 시선에 집착하면 할수록 나의 내부는 비어 간다.  77
사람은 평생 단 하나의 병만을 앓는다는 말이 있다. 신체적으로 볼때, 하나의 약한 고리를 중시으로 다양한 병들이 변주된다는 뜻이다. 마찬가지 이치로 사람은 평생 단 한 종류의 연애만 한다고 할 수 있다.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위안이나 동정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의 사랑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럴 때라야 진정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법이다. 헌데, 문제는 다들 상담을 받거나 점쟁이를 찾아가려 하지 스스로 깨우치려고 하질 않는다는 데 있다.
이런 식이니, 사랑에 관한 한 성숙해진다는 관념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79
솔직히 성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유치하기 짝이 없다면 그건 일종의 발달장애에 해당한다. 헌데, 그것이 졸지에 순수함으로, 그리고 다시 사랑의 미덕으로 치환되어 버린다.  80
 

2부 청춘의 '덫'. 국가와 가족, 학교 그리고 쇼핑몰
20세기 초 서구문명이 이 땅에 도래할 즈음, 당대를 주름잡던 계몽가들은 가종 신문매체를 통해 엄숙하게 경고했다. 조선이 망한 건 열대여섯 살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들을 억지로 혼인시켰기 때문이라고.  93
그럼 지금은? 만약 스물두 살쯤 된 청년이 결혼이나 동거를 하겠다고 나선다면? 택도 없는 소리다!
지금의 경제조건에선 최소한 서른은 되어야 사회적으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견적이 나오기 때문이다.  94
좀 이상하지 않은가? 선진문명을 이룰수록 청춘들의 원초적 욕망은 계속 지체되어야 하다니 말이다.  96
지난 100년간 우리가 엄청난 속도로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었던 건 '성에너지의 국가적 몰수'라는 대가를 치렀기에 가능했던 셈이다.  98
세상에는 사랑을 나눌 수 없을 만큼 나약한 존재도 없고, 사랑이 필요없을 만큼 강한 존재 또한 없다!  103
'엄마의 늪' 우리으 청춘들은 아직 엄마의 품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105
온실과 정글. 엄마의 관리와 보호가 미치는 곳은 온실, 그래서 혼자 힘으로 맨몸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 곳은 정글.  105
요즘 청년들에게서 열정이나 패기를 찾아보기란 참으로 어렵다. 외모나 체격은 눈부시게 개량(?)되었지만, 청춘이 내뿜는 특유의 포스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아주 일찌감치 '삭아서' 자신이 뭘 원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모르는 경우도 많다.  
정글에서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두 발로 당당하게 설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부모의 전방위적 마크하에서 그런 신체적 능력을 터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111
"젊음이란 20대 청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연령에 걸맞는 청춘을 매번 새롭게 '창조하는'것이다." - 들뢰즈
마음이 성욕과 야망과 투쟁과 적대감과 온갖 욕망의 전쟁을 치르고나서, 자신 속으로 돌아가 자시노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리고 마음이 연구와 학문에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다면, 노년보다 더 즐거운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네.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126
어떤 종류의 관계든, 어떤 활동영역이든 존재의 자유와 충만감이 분출될 수 있다면, 그것은 모두 에로스다!  142


3부 청춘이여, 욕망하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사랑이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다. 즉, 내가 어떻게 관계를 구성하느냐가 사랑의 내용과 형식 모두를 결정한다.  146
사랑의 기술을 터득하기 위한 가장 일차적인 행동지침은 자신의 몸과 능동적인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다.  147
질의 차이가 없다면, 사랑은 불가능하다.  150
니체는 말했다. "네 안에 너를 멸망시킬 태풍이 있는가?" 나를 멸망시킨다는 건 바로 지금까지의 나, 자아 혹은 자의식의 성채를 무너뜨리는 힘의 도래를 의미한다.  152
이것은 미쳐 날뛰는 광기나 변덕스런 충동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광기나 충동은 절대 폭풍을 일으키지 못한다.  153
상상하는 연애에서 관찰하는 연애로!
"연애를 하는데 남자친구 때문에 너무 괴로워해요. 근데, 왜 해어지지 않느냐구 했더니 대답이 아주 재밌어요. 몇 년이나 사귀었지만, 이 남자가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최소한 이해를 한 다음에 헤어질 작정이다. 그래야 인생에 대해 뭔가 알게 되지 않겠냐 이거죠."
 이 정도의 뚝심은 있어야 한다. 이게 바로 관찰하는 연애다.  157
나를 관찰하고 상대를 관찰하고 몸과 마음의 간극을 줄이는 것! 연인은 사랑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나와 같은 시공간 속에 있는 '친구'이다. 그 친구를 공부하는 것이 곧 그를 향한 최고의 '사랑법'이 아닐까?  158
성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그것을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욕망의 구조가 있을 뿐이다.  162
중요한 건 자유다. 쾌락을 즐기건 금욕을 하건 누구든 자기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몸과 우주가 소통하는 그만큼 자유의 곤강이 열릴 것이다.  170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왜 부끄러운 일인가? 그거야말로 내 몸이 특별한 리듬과 강도를 갖게 된 것인데, 그게 왜 창피한 일인가? 그렇게 느끼는 건 전적으로 사랑과 성을 권력관계로 보게끔하는 망상구조 탓이다.  182
우리시대의 연애가 썰렁해진 건 무엇보다 '차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수준은 물론 학벌, 가족관계, 거기다 외모까지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 어떻게 열정이 폭발하겠는가.  194
사랑이 탈주선이 되려면, 무엇보다 이 쇼 망상의 그물을 가차없이 해체해야 한다.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기념일 챙기는 것부터 걷어 치워라. 세상에 그런 멍청한 짓거리가 어디 있는가. 대체 사랑의 시작점을 잡는다는 게 말이 되나? 그리고 시작점을 헤아리는 건 끝날 때를 미리 대비하는 거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뭣 때문에 카운트다운을 하는가 말이다.  195
진짜 소중한 선물에는 '삶의 서사'가 묻어 있어야 한다. 즉, 나의 일상의 리듬과 무관한 선물이란 그야말로 쇼에 지나지 않는다.  197
쇼! 하지마라! 쇼! 
그럼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는가? 그래서 창의성이 필요하다. 나의 사랑이 지닌바 특이성이 유감없이 발휘될 수 있는 사랑법을 창안하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유한 사랑법을.  198
걷고 자전거 타고 산에 오르고 삶의 서사 혹은 일상의 활발한 기운을 서로 선물하고, 이것이 기본기라면, 그 위에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필수코스가 있다. 책읽기 혹은 공부하기.  203
지성과 에로스는 절대 따로 놀지 않는다.  204
대장금  205
연애 중독증의 가장 큰 특징은 절대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  209
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를 전혀 다른 세계로 이끌어 주는 전령사다. 마주치는 순간, 전혀 다른 매트릭스, 아주 이질적인 우주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 그것이 곧 책이다.  211
질문의 크기가 곧 내 존재의 크기다.  212
가장 좋은 건 늘 누군가와 세미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공부란 본래적으로 네트워킹이다. 홀로 서재에서 끙끙거리며 남을 지배하기 위해 하는 건 경쟁을 위한 도구지, 절대 공부가 아니다. 즉, 공부를 한다는 건 무조건 친구들과 함께 세미나를 한다는 뜻이다.  213
연인 사이가 끝난다고 그와의 모든 인연이 종결된다면, 더구나 함게 공유했던 배경까지 몽땅 잃어버려야 한다면, 그거야말로 자연의 흐름에 반하는 것이 아닐까.  215


4부 에로스와 '운명애'
에로스와 지적 능력의 함수관계 - 지성에서 비롯된 매력은 위이 사라지지 않는다. 장금이가 그랫고, 루쉰이 그랬고, 사르트르가 그러했다. 우리는 흔히 '매력'을 멋지고 세련된 외모와 일치시키지만, 사실 네루다와 조르바가 그렇게 많은 여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게 그들이 '잘생겼'기 때문이던가? 이 '사랑의 달인'들이 가진 공통점은, 지성과 서사가 흘러넘쳤다는 사실이다. 고로, 공부하라, 그러면 사랑은 절로 따라올 테니!  222
사랑을 원한다면 혹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다면, 무엇보다 서사의 능력을 키우도록 하라. 서사는 화술이 아니라, 나의 삶과 외부가 맺는 관계성의 문제다. 따라서 서사능력을 키우려면 두 가지 전략이 필요하다. 하나는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삶의 영역을 개척하는 것, 또 하나는 자신의 평범한 일상에 생생한 힘과 활력을 불어넣는 것.  225
건강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사람들과, 사건들과 맞닥뜨리고 관계하는 방식입니다. 관계의 건강성, 바로 그것이 나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이렇다. 사랑은 나의 기쁨이 흘러넘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라의 원인이 되는 나의 존재를 긍정하는 힘이기도 하다.  234
사랑의 창조, 그 궁극적 지점은 다름 아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235
유머의 힘은 실로 막강하다. 그러므로 어떤 대상과도 접속할 수 있고, 끊임없이 자기로부터 떠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유머러스한 신체'가 되어야 한다.  240
그 사랑은 미련도, 회한도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다. 한편으론 자나간 것, 곧 추억에 매달리고, 다른 한편으론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과 몽상 속에서 정작 '지금, 여기'에 온전히 기투하지를 못한다. 대개는 자신으 ㅣ과거 또는 상대방의 과거의 그림자에 사로잡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한다.  249


에필로그
"모든 인간은 자신으 능력만큼 신을 만난다." 스피노자의 말이다. 사랑도 똑같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 되는 사항이 하나 있다. 이 능력의 차이를 위계화하지 말것. 각기 다른 방식의 사랑법이 있을 뿐이다.  260
중독된다는 건 삶과 분리되어 오직 쾌감의 증대를 향해 치닫는 것이다.  261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386쪽 "책이란 숱한 사람들의 손길에 닳고 닳아 너덜너덜해져야 한다. ...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 인간의 가슴을 만나고, 여인의 눈을 만나고, 길거리의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또 노을을 쳐다보거나 한밤중에 별을 바라보며 시 한 구절을 읊조리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 우리 시인들은 낯선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낯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낙엽 속에서 문득 시를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262-263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느 에로스, 이것이야말로 혁명의 원동력이다.  263
혁명이 광장에서, 바리케이트 위에서 표현되는 것이라면, 코뮌은 그 혁명의 일상적 형식이다. 일상 속에서 자본과 권력의 코드를 벗어난 새로운 삶의 형식을 만들어 가는 . 그럼. 코뮌과 에로스는 어떻게 연동되는가?  264
사랑의 독점적 지배하에선 우정도 절대 싹을 틔우지 못한다. 
사랑과 우정이 왜 적대적인가? 사랑하는 연인이란 가장 좋은 친구라는 의미도 들어 있지 않은가. 이탁오의 말 가운데 이런 게 있다. "스승이면서 친구가 아니면 스승이라고 할 수 없다. 친구이면서 스승처럼 배울 게 없다면 역시 친구라 할 수 없다."
변주하면.. "연인이면서 우정을 나눌 수 없다면, 연인이 될 수 없다. 친구이면서 사랑보다 뜨거운 열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역시 친구라 할 수 없다."
사랑이 원숙해지면 누구나 친구 같다고 하고, 사랑에 멍든 이들이 하는 말 가운데 친구 같은 연인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결코 헛소리가 아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평소 우정의 지혜를 많이 터득해 두어야 한다.  266
우저에도 많은 학습이 필요하다. 좋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선 자신이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아주 다른 삶, 낯설고 창발적인 사유와 생활을 선물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고 ㅏ우정 사이의 매끄러운 흐름, 그것이 바로 코뮌주의자의 사랑법이다.  267
흔히 도(道)와 에로스느 적대적이라고 간주한다. 에로스적 충동을 억눌러야만, 다시 말해 가능한 한 탈성화되어야만 도를 터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진정 원초적 본능의 한가운데를 통과하지 않고서 어찌 생사를 넘는 해탈이 가능할 것인가? 사랑이 생명의 원초적인 뿌리이자 원동력이라면, 마땅히 인간의 우주적 경지인 도와 이어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름하여, 사랑의 절대적 탈영토화!!!  269
행복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자유와 해방이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낡은 것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우리는 이미 배를 불태워 버리고 말았다. 용감해지는 수밖에 없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랑에 관한 오만과 편견, 자의식을 둘어쌍 망상의 그물망을 벗어나 한걸음, 단 한결음만 내디딜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백척간두진일보다. 
그러므로 사랑하라! 두려움 없이!!!!  271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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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의 반대어.

역()유토피아라고도 한다. 가공의 이상향, 즉 현실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묘사하는 유토피아와는 반대로, 가장 부정적인 암흑세계의 픽션을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문학작품 및 사상을 가리킨다.

대표 작품으로는, A.L.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 G.오웰의 《1984년》(1949) 등이 있다. 이러한 디스토피아는 현대사회 속에 있는 위험한 경향을 미래사회로 확대 투영함으로써 현대인이 무의식중에 받아들이고 있는 위험을 명확히 지적하는 점에서 매우 유효한 방법이다. 미래를 진지하게 논하려면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쌍방의 시점에서 언급해야 한다.


유토피아 [Utopia]
[명사]
1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 =이상향.
2 <문학>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으로, 1515년에서 1516년 사이에 영국의 모어가 지은 공상 사회 소설. 공산주의 경제 체제와 민주주의 정치 체제 및 교육과 종교의 자유가 완벽하게 갖추어진 가상(假想)의 이상국을 그린 작품으로, 유럽 사상사에서 독자적인 계보를 형성하였다.

 

디스토피아 [dystopia]
[명사]
1 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이 극단화한 암울한 미래상. ≒역유토피아.
2 <문학>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허구로 그려 냄으로써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문학 작품. 또는 그 사상. ≒역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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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 dystopia

 

토마스 모어의 '어디에도 없는 나라'인 유토피아(utopia)는 처음 어떤 방식으로 묘사되고 사용되어졌건 간에 지금에 와서는 '이상향'의 전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어디에도 없다라는 말은 이상이라는 것의 성질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할 수 있는데요, 즉 이상이기 때문에 현실엔 없다 정도의 의미로 해석해 된다 할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는 결과적으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아주 이상적인 국가(혹은 사회상)의 모습을 나타내게 되며 우리가 지향해야할 수렴점으로 그 상징적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유토피아가 이상향의 낙원을 묘사하고 있다면 이에 반하여 등장한 디스토피아(dystopia)는 '역(逆)이상향'을 상징합니다.

초기엔 단순한 유토피아의 반대개념으로 사용되던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가 사회적 현상이 된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독자적인 개념의 발전을 이루게됩니다.

현재에 와서는 비록 인지도는 낮지만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의 개념이 더욱 자주 사용되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디스토피아란 무엇일까요?

 

 

디스토피아는 인류가 현재로부터 예측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유토피아가 우리들의 미래에 펼쳐질 낙원이었다면 디스토피아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미래향을 보여줍니다.

재미있게도 근래에 들어서 문학등을 포함한 각종 미디어에 의하여 거의 정형화된 디스토피아의 모델이 있습니다.

 

1. 불타버린 하늘

디스토피아의 세계에선 해가 뜨지 않습니다.

비록 아침이 있다곤 하지만 거의 묘사되지 않고 배경은 주로 밤, 아침이라 하여도 극심한 환경오염으로 인하여 빛은 땅을 어루만지지 못합니다.

 

  Blade runner, 1982 실로 아름다운 하늘이다. 난 푸른색이 좋더라.

 

 

2. 무너진 치안

디스토피아에선 돈이 곧 법이자 정의 입니다.

더욱 강력해진 공권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 힘은 시민들을 위하여 사용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혹은 극단적으로 잔혹하거나 융통성따위는 없어보입니다.

 

Judge Dredd, 1995 좋은 예시 같지는 않지만 이런 경찰은 사양합니다.

 

 

3. 하늘을 불태운 중공업과 경공업에 몰락에 따른 생활 수준 저하

디스토피아의 하늘이 불타고 오염이 극심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중공업이 극단적으로 발달하는 사회기 때문입니다. 기술과학의 광적이고도 집착적인 진보와 탐욕의 끝을 보여주는 자본주의의 결합은 중공업의 발달로 이루어지고 주로 대중의 삶의 질을 결정 짓는 생필품등과 연관된 경공업은 버려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Innocence, 2004 분명 대낮입니다. 아마 상하이 쪽 같은데... 상하이에 땅 사둔거 있으면 지금 다 팔아버리세요.

 

시간이 가속되어 저 먼 미래가 되었지만 디스토피아속 사람들은 하나같이 지금과 비슷한 의식주를 영위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욱 비참해지면 비참해졌지 개선점은 단 한군대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Blade runner, 1982 맛있어 보이긴 하는데... 난 미래엔 좀 더 좋은걸 먹고 싶다.

 

 

4. 사람보단 쥐에게 더욱 적합한 대도시와 위생

디스토피아의 세상엔 목가적 마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땅은 거대하다 못해 그 끝을 알 수 없는 강철의 도시로 덮혀있고 이 강철의 도시는 시도때도 없이 각종 오염물질을 뿜어냅니다.

공권력은 대중의 삶에 관심이 없고 경공업은 무너진 마당에 매일 밤 내리는 오염물질의 비는 도시를 하나의 거대한 쓰래기장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디스토피아 하면 떠오르는 색깔이 카키색이나 갈색, 혹은 회색인것은 이 때문입니다.

사람보다 쥐가 더 많을 것 같은 세상속에서 사람들은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하고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습니다.

 

Innocence 2004, 찌뜬 사람들의 찌든 도시

 

 

5. 앞선 모든 예시들을 무시하는 좀 있는 사람들

여태 묘사한 디스토피아적 즐거운 삶은 모두 대중의 삶입니다. 반면 뿌리깊은 가문들과 세력으로 이루어진 권력층과 경제력을 장악한 사람들은 그들만의 진정한 '유토피아'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계층화를 넘어선 공공연한 계급화가 이루어진 이 세상속에서 공권력은 그들의 수족입니다.

 

Wonderful days. 2003 이 동네 선택받은 계급은 이런 곳에 삽니다.

 

 

6. 문명을 앞서간 과학과 기술이 개인의 삶에 지나치게 파고든 사회

몇몇 디스토피아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우리가 그 본질을 미쳐 이해하기도 전에 과학이 발달하여 우리의 삶 깊숙이 파고 들고 그에 따라 인간이 과학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 인간성을 빼앗겨 버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를테면 급속히 발전한 인공지능이라던가, 지나치게 사용되는 기계들은 인간성의 상실뿐만 아니라 몰인간화를 가속화 시키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이는 종종 인간 사회의 아주 기본적인 원리인 교류 및 유대감을 파괴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디스토피아는 앞선 몇가지 단편적인 예로볼때 결코 바람직한 세상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가 되면 절대로 안되는 세상인 것이죠.

하지만 이런 디스토피아가 지속적으로 제시되고 지금 우리 사회속에서 소모된다는 것은 디스토피아의 어떠한 속성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처음에 언급했지만, 바로 '현재'에 기반을 둔 문제이 모두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았을 때 만날 수 있는 세상이 디스토피아이기 때문입니다.

 

도덕과 윤리의 사망, 근복적인 인간성의 상실, 침범되어져서는 안되는 기본들이 유린되었을때 우리의 세상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갈림길에서 더욱 디스토피아의 결말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디스토피아적 문물은 단순한 재미를 넘어선 일종의 '경고'입니다.

SF문학이 대부분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점은 SF 특유의 비판적 속성과도 무관하지 않지만 그만큼 지금 현실이 부자연스럽고 위태로움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기도합니다.

SF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세상을 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논리적 개연성이라는 기본 원리를 두고 쓰여지는 SF장르에서 유독 디스토피아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은 지금 세상의 모습을 다시 한번 재고하고 반성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더불어 디스토피아의 또하나의 특징은, '현재'에 내재된 모든 문재점들은 외계인의 침략도 아니오 갑작스런 지구의 대격변도 아니오, 다름아닌 모두 '인간'스스로에게서 오는 문제점들이란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분명 수많은 문제점들과 모순들을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그 모든 문제점들을 바로잡을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디스토피아는 단순 흥미유발에서 나아가 우리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에게 유토피아를 제시해줄 것 입니다.

 

결코 지금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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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디즘
성적 대상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인 쾌감을 얻는 이상 성행위.

가학증 또는 학대음란증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문학가 M.de 사드에서 유래된 명칭이며 ‘양성의 앨골래그니어(algolagnia)’라고 부를 때도 있다.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쾌감을 얻게 되는 마조히즘과 대응된다. 심층심리학의 시조인 S.프로이트는 모든 생리적 기능에는 사디즘이 숨어 있으며 마조히즘은 자기자신에게 향하는 사디즘이라고 말했다. 때로는 성목표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공격적이며 고통을 주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경향을 가리킬 때도 있다.

사디즘이라고 최초로 명명한 사람은 R.von 크라프트에빙인데, 사드 이전에도 문학이나 미술 속에서 사디즘의 표현을 볼 수 있다. 플라톤의 《공화국》에 <사형당한 사람의 시체를 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참을 수 없었던 사나이>의 에피소드가 있고, 루크레티우스가 저술한 《만상론()》에는 “죽음과 싸우고 있는 불행한 뱃사람의 조난을 언덕 위에서 구경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라는 글이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든지 성자의 순교나 지옥의 형벌을 그림으로 나타낸 중세의 회화에도 화가의 무의식적인 사디즘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한편 사드를 낭만주의의 원류라고 간주했던 문학사가() M.브라츠는 M.G.루이스의 《몽크》, C.R.매튜린의 《방랑자 멜모스》, C.P.보들레르, G.플로베르, H.스윈번, O.미르보의 《처형의 뜰》 등으로 이어지는 사디즘 문학의 계보를 만들었다. 보들레르는 “잔학성과 향락은 동일한 감각이다”라고 말하였고, 단눈치오는 “양성간의 극단적인 증오야말로 사랑의 기반이다”라고 말하였다. 사르트르의 실존적인 이론의 바탕에도, 초현실주의의 ‘블랙유머’의 기반에도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마조히즘
이성으로부터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학대를 받고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만족을 느끼는 병적인 심리상태.

사디즘(sadism)에 대응하는 뜻을 지녔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L.R.von 자허마조흐가 이와 같은 변태적 성격의 소유자로서 이런 경향의 테마로 작품을 쓴 데서 유래한다.

흔히 남녀간의 성적 행위에서 서로가 가벼운 고통을 주고받거나 함으로써 성적 흥분을 높이는 일이 적지 않으나 마조히즘 ·사디즘의 경우는 정도가 심한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변태성욕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체로 성행위에서 남성이 사디즘의 경향을 나타내고, 여성이 마조히즘의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심한 경우는 매질 또는 흉기나 부젓가락에 의한 폭행 ·상해를 주고받거나, 그 밖에도 상대방에게 노예적으로 굴종()함으로써 성적 쾌감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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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ochism

 

피학 성향, 피학대 성애[性愛]

Flogging demonstration at Folsom Street Fair 2004. 


이성으로부터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학대를 받고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만족을 느끼는 病的인 심리상태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게 하여 성애[性愛]의 충족을 이루고자 하는 성심리 장애이다.

이 용어는 오스트리아 작가 슈발리에 레오폴트 폰 자허 마조흐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는 매를 맞고 굴복당함으로써 얻는 만족감에 대해 광범위한 저술을 펴냈다.
매저키즘과 관련된 고통의 정도는 약간의 폭행을 수반하는 의례적 모욕으로부터
심한 채찍질이나 구타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피학성향자[매저키스트 : Masochist]들은

 어느 정도의 상황통제력이 있기 때문에 학대가 지나쳐 심한 상처를 입는 경우는 드물다.
일반 사람에게도 고통이 어느 정도 성적 흥분을 일으킬 수는 있으나
피학성향자들에게는 고통이 성적 행위의 주된 목표가 된다.
이 용어는 모욕이나 학대상황을 추구하고 즐기는 사람의 행동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sadism[새디즘]에 대응하는 뜻을 지녔다.


Leopold von Sacher-Masoch. An 1860s photo. 

 

오스트리아[Austria]의 작가,

- L.R.von 자허마조흐[Leopold Ritter von Sacher-Masoch, 1836.1.27~1895.3.9]'가

이와 같은 변태적 성격의 소유자로서 이런 경향의 테마로 작품을 쓴 데서 유래한다.

흔히 남녀간의 성적 행위에서

서로가 가벼운 고통을 주고받거나 함으로써 성적 흥분을 높이는 일이 적지 않으나

  마조히즘, 사디즘의 경우는 정도가 심한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변태성욕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체로 성행위에서 남성이 사디즘의 경향을 나타내고,

여성이 마조히즘의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심한 경우는 매질 또는 흉기나 부젖가락'에 의한 폭행 ·상해를 주고받거나,

그 밖에도 상대방에게 노예적으로 굴종[從]함으로써 성적 쾌감을 느끼게 된다.

매저키즘만 독립된 특성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드물고,

보통은 타인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성적 쾌락을 얻는 새디즘'을 결합한 형태로 나타난다.

즉 한 사람이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흥분상태가 되기도 하고,
 역할을 바꾸어서 고통을 가함으로써 흥분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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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우리가 즐겁게 놀기 시작할 때, 비로소 세상은 변하기 시작한다.  7
놀이는 하나으 가치관으로 우리를 줄 세우는 지루한 세계를 바꾸는 것, 단조로운 일상에서 다른 시간을 만드는 것, 그렇게 나와 친구와 세계를 변신시키는 힘이라고 나는 믿는다.  8
정말로 잘 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9

프롤로그
'논다'는 말은 종종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 우울한 무능력이나 게으름을 가리킨다.  15
우리가 무엇엔가 가장 열중하는 순간은 그것이 정말로 즐거울 때이다. 게대가 아무리 재밌는 일이라도 좀더 잘 하기 위해선 고통의 순간이 필요하다.  17


1부 '노동하는 인간'의 세계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33
'끝없는 이윤 추구'라는 자본주의의 정신이 우리 모두를 확실하게 사로잡는 과정.  43
1분 1초까지 아껴 쓰기 위한 이 대대적인 모모가 마음 바꾸기 프로젝트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신경생리학자 스탠리 코렌은 '첨단 기술인 시계가 지배하는 생활방식 덕분에' 우리는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보다 연간 500시간이나 적게 잔다고 한다.
우리는 어느새 시간은 금이라는 명령을 몸과 마음에 새기며 우리의 모든 활동을 노동으로 바꾸기 위해 필샂거으로 노력하고 잇다. 
시간은 금이 아니다. 시간은 내가 살아 있는 매 순간이며 삶 그 자체이다.  45
wn1 - '시간을 관리한다'는 것은 맹복적으로 많이 사용하거나 '알차다'는 표현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다. 즐길 수 있기 위한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최근 20년 동안 1인당 소비는 45% 증가했지만, 사회건강지수에 나타난 삶의 질은 51% 나 감소했다고 한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태껏 해오던 대로 하고 있다.  53
플레이어 라이센스-신용카드 : 어느샌가 노는 것이 소비와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축제에서부터 여행까지 모든 것이 상품인 이 세계에서 우리는 돈 없이 시간을 보내는 법을 알지 못한다. (소비 자본주의의 당당함.)  58
노동은 어차피 해야만 하는 것이니 불만 따위는 접어두고, 대신 자유 시간을 잘 활용하라.  60
돈 없이는 놀지도 못하는 이 비참한 현실이 말해주는 것은 무얼까? '골라 먹는 재미'에 익숙해지면서, 정말로 노는 능력, 재미를 발견하고 만들어내는 능력, 자신으 ㅣ삶을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만 것은 아닐까?  66


2부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의 세계
고대인들에게 지식이란 언제나 우주의 신비에 대한 경이로움이었다. 그들은 지혜를 놀이하고, 철학을 놀이했다. 서로의 지혜를 겨루는 수수께끼 놀이, 존재의 기원을 묻는 수많은 노래, 운(韻)을 던지고 받는 시 짓기 놀이에 관한 동서양의 무수한 기록들, 공놀이가 고문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지식으로 놀 수도 있다!  73
무엇이든 그 자체로 즐기는 태도는 인간의 가장 탁월한 능력이며, 인간은 이를 통해 생각하고 느끼고 반성하고 창조하고 배울 수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무언가를 진심으로 질글 수 있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수적이다. 
사실 무언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즐기는 것은 그 자체로 학습일 수밖에 없다.  75
순수한 즐거움으로 하는 활동, 무엇이건 그 자체를 즐기는 것, 그것이 바로 놀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놀이는 가장 지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이다. 
'만약 필요한 물건을 얻기위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베장이의 놀이, 삶, 유토피아>를 쓴 버나드 슈츠는 만약 우리가 노동이 없는 유토피아에 산다면 노동과 유사한 놀이를 발명했을 거라고 말한다. 
오직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손수 집을 짓고, 향기롭고 신선한 야채를 키우며, 직접 빵을 구워 먹을 것이라고. 그것은 결코 힘든 노동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가즉 찬 창조적인 활동일 것이라고. 
그러나 어떤 목적을 위해 억지로 노동할 때 창조의 즐거움은 사라진다.  76
놀이에 대해 니체는 놀이야말로 '어떤 세계에서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라고 했다.  79
즐거움만이 우리를 놀게 한다. 그러므로 즐거움은 자유의 다른 이름이며 욕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81
입맛을 자극하는 패스트푸드와 콜라,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은 컴퓨터게임처럼, 외부의 자극이 고스란히 몸에 새겨진 욕망과 그 욕망이 원하는 '즐거움'들이 잇다. 
우리들은 그러한 즐거움에 너무나 익숙하다. 그런 즐거움들은 금세 소진되기 마련이지만, 체마파크는 부지런히 새로운 자극들을 제공해준다.  82
중독된 상태를 즐거움이라고 착각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다. 그러나 잊지 말자.
즐거움은 소비되고 소진되는 게 아니라 더 큰 즐거움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놀이는 언제나 더 큰즐거움으로 향하고. 노는 동안 나는 더 건강해지며 더 잘 놀 수 있게 된다.  83
주사위를 공중으로 던지고, 떨어지는 수를 기다리는 주사위 놀이를 생각해보라. 어떤 수가 나올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주사위를 던진 아이들은 하늘을 바라본다. 무엇으로 되돌아올지 예측할 수 없는 주사위으 우연에 흥미진진하게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놀고 있는 아이들을 매혹시키는 건 아무도 알 수 없는 미래와 그 안에 숨은 우연뿐. 그러니 세계의 무한한 변신 가능성을 마음껏 즐기며 놀아라!  
순수한 즐거움, 자발성, 자유만이 놀이를 계속하게 한다.  85
즐거움 만이 우리를 놀게 한다. 그러나 계속해서 놀기 위해선 아주 중요한 능력이 필요하다. 기차에서 무작정 내리기 위해서 창 밖에 펼쳐진 풍경이 아름답다는 걸 발견해야 하듯이, 세상과 놀기 위해서 우리는 견고해 보이는 이 세계에서 무수한 차이들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87
삶을 노는 것은 삶의 규칙을 바꿔내는 것, 규칙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고정된 규칙이 있다고 믿는 순간 놀이는 불가능해진다. 
놀이는 무엇보다도 규칙을 넘나들고 변신시키는 '규칙의 놀이'다.
다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고정되는 순간 다른 틈새를 만들어 돌파하라. 삶의 규칙들을 놀이하는 것은 우리 삶에서 그 어떤 명령도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97
놀이는 리듬을 뒤섞어 파괴하는 게 아니라, 리듬을 변주하고 호흡을 불어넣는 경쾌한 스텝이다.  103
'함께' 논다는 것이 중요하다. 놀이는 언제나 '관계 만들기'이기 때문이다.  107
원주민 마을 - 노동의 필요를 몰랐던 원주민들이 공장에 취직하지 않자. 유럽으 제국주의 자들은 원주민들의 식략인 빵나무를 전부 불태워 버렸다. 공통적인 삶의 기반을 파괴함으로써, 사람들을 노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경제사학자 칼 폴라니가 전하는 무시무시한 일화.  116
혁며이란 일상적이 아닌 것을 일상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 쿠바의 한 건물의 낙서  117
노동의 사회는 베짱이(개미와 베짱이의 그 베짱이)를 추방했다. 베짱이가 게을렀기 때문이라지만, 사실 추방된 것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함께 살던 삶이 아닐까?
미래를 위해서라면 현재를 저당 잡히고, 모두가 똑같은 것을 욕망한다.  117


3부 움츠린 놀이의 날개를 펴라!
wn1 - 리처드 스톨만, 그래피티, 힙합, 랩, 브레이크 댄스, 우드스탁 페스티벌, 광대반란군.. 등이 언급되면서 그들의 새로운 놀리 문화에 대해 말한다.
 
2002년 월드컵이 관정으로 몰려나온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축제였다면, 2006년 월드컵 땐 대기업들이 미리 광정을 점유한 채 축제를 상품으로 만들려 하지 않았던가. 모든 것을 노동으로, 혹은 돈 되는 상품으로 바꿔버리는 소비자본주의의 엄청난 힘.  164
우리는 소비하기 위해 노동한다.  169
빛나느 긴장으로 가득했던 놀이가 일종의 유행, 하나의 상품이 되어 버릴 때, 강렬했던 새로움은 소멸됙 놀이의 재미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173
우리가 사용하는 종잇조각에 신용을 불어넣는 것은 그 조잇조각을 사용하는 우리 자신이다. 모두가 그 종잇조각의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훨씬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를 지배하지 않는 새로운 규칙의 화폐를 사용해보자.  178
학문들 사이에 서열이 생기고, 한편으로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추려져서 목록이 작성된다. 이정의 아이들이 골목에서 놀고 형제들과 다투면서 몸으로 익히던 사회적인 감각이 '도덕'이나 '국민윤리'라는 이름의 교과서로 만들어지고, 부엌과 일터에서 시행착오를 거치며 배웠을 다채로운 삶으 기술들은 '가정'이나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일괄정리되었다. 
달달 외워야만 하는 것들의 목록은 점점 길게 추가된다. 몸 전체로 호흡하며 익혀야 할 인생의 지혜들이 책상에 앉은 채 멍하니 들어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게다가 공부는 시험이라는 확실한 목적을 향한다. 이러니 공부가 지겨운 건 지극히 당연한 일.  공부는 노동이 되어버린 것이다.  188
내가 아무것에도 관심 없고 모든 게 귀찮을 뿐이라면 어디로 간들 뭐가 그리 다를까. 대안은 나의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깨어나는 순간, 친구들의 수많은 개성을 발견하기 시작하는 순간, 언제 제 어디서든 규칙을 바꾸고 놀 수 있는 바로 그 순간 열린다.  194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내는 '문화 생산자' - 단지 보고, 따라하고, 소비하는 대신 직접 만들어내고 뛰어들고 참여하는 거다.  197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놀이이다.  198
제작 메뉴얼대로 반복되는 노동이 아니라 무수한 가능성을 창조해내는 놀이. 지루하게 참고 견디는 현재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즐거움으로 가장 충만한 현재만이 나를, 세상을, 친구를 바꿀 수 있다. 우리의 매일매일은 어느 하루도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는 말라구. 우리는 단지 놀고 있을 뿐인걸.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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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를 말한다.

무정부주의는 개인을 지배하는 국가권력 및 모든 사회적 권력을 부정하고 절대적 자유가 행하여지는 사회를 실현하려고 하는 운동.

정부나 통치의 부재(不在)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an archos'에서 유래한다.

현대의 대표적인 이론가로는 윌리엄 고드윈,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막스 슈티르너, 레오 톨스토이, 폴 굿먼, 허버트 리드, 미하일 바쿠닌, 페테르 크로포트킨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무정부의자로는 신채호와 박열이 있다. 한국의 현대 무정부주의 운동은 3.1운동 후 1920년경부터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한 인사들,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간 유학생과 노동자들 가운데서 싹트기 시작하여 점차 국내로 번져 들어왔다.

중국에서는 신채호(申采浩)의 <조선혁명선언>으로, 일본에서는 박열(朴烈) 등의 이른바 <대역사건(大逆事件;일본 천황 폭살 미수사건)>으로 한국 현대 무정부주의운 동의 막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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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의 대표적 상징인 Circle-A 문양.

아나키즘(Anarchism, 프랑스어: Anarchisme 아나르시슴[*])은 모든 정치적인 조직·권력 따위를 부정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데올로기 또는 이를 전파하고 실현하려는 운동으로, αυ(없는)와 αρχοζ(지도자)가 합성된 고대 그리스어 아나르코스(αυαρχοζ)에서 비롯된 말이다.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라고도 불리지만,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다며 이런 표현을 사용하기 꺼려한다. 대신에 자유연합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출처 필요] 역사에서는 고대의 공동체에서 비롯하여 갖가지 공동체나 고대의 철학, 사상에서도 연원을 찾아 볼 수 있으나 근대에 이르러 자본주의와 권위주의의 폐해에 대한 반발로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함께 발흥하였으며 페미니즘, 펑크 문화 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장점을 포용하는 중용이념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가) 사상

아나키즘은 그 특징때문에 다른 사상들과 달리 정의내리기가 매우 까다롭다. 일반적으로 아나키즘은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을 말하며, 이 외에도 다양한 성향이 있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일어난 만큼 평등을 중요하게 본다. 하지만 현대의 일부 아나키스트들이나 개인주의자들은 평등보다는 자유를 중요시 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국가와 권력에 대한 반대로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기에 공산주의와 대립한다. 이와 같은 평등과 자유를 추구하기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를 반대하고 있다. 19세기 후반에는 공산주의와 세를 다툴 만큼 세계 도처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권력이 부여되는 조직 자체를 부정하는 성향으로 차츰 세력을 잃었지만, 혁명 운동이 일어난 어느 곳에서나 아나키즘은 자유와 평등을 외치면서 살아났다. 대표적인 아나키즘의 투쟁은 파리 코뮌, 에스파냐 내전, 그리고 프랑스 학생혁명이며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에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참가 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발흥한 니힐리즘과의 차이점은 허무주의가 구제도 모두를 부정하고 철저한 파괴를 주장하면서도, 새로운 사회에 대한 대안이 없었으나 이에 반해 아나키즘은 새로운 대안을 공동체 자치에서 찾았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는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파괴나, 몰락후의 계획 경제를 대안으로 하였으나, 아나키즘은 계획 자체를 부정하고 공동체 내의 자립, 자치, 자영 경제를 대안으로 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나) 역사

정치적 아나키즘의 탄생은 윌리엄 고드윈이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받아 저술한 《도덕과 행복에 대한 정치정의의 영향에 대한 연구》가 출판된 1793년으로 간주되며, 고드윈은 이 책에서 모든 형태의 정부를 개인의 개화를 가로막고 부패로 이끌 뿐이라고 비판했다. 막스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은 헤겔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으며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맡았지만 그 당시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아나키사회를 위계질서와 권위가 부재된 것으로 간주했으며, 권위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종교, 국가, 군대 등이 권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개인의 자유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다) 흐름

아나키즘 운동에는 크게 세 조류가 존재하는데,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환경주의적 아나키즘이 있으며 환경주의적 아나키즘은 최근에 생겨난 조류이다. 현재 다양한 아나키즘 이론이 공존하고 있으며, 아나키스트로 자신을 정의하는 집단들 가운데서도 전략, 전술, 조직, 정치철학, 경제학, 사회학적인 면에서 대립하는 경우가 많다.

1)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혹은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는 상호호혜주의, 공산주의, 노동조합주의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유재산의 말소와 생산수단의 공유를 주장한다.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은 프루동에 의해 최초로 시작되었으며 후에 바쿠닌과 그의 추종자들은 제1인터내셔널에서 중요한 세력을 형성했으나 카를 마르크스와의 대립으로 바쿠닌이 국제당에서 축출된 이후 독립된 세력이 되었다.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와 권위주의에 대항하며 공동체주의와 자유지상주의적 연방주의등의 형태로 사회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의 다리 역할로 간주된다.

하위분류로 다음과 같은 분파들이 존재한다.

-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 공산주의적 아나키즘

- 아나코생디칼리즘

- 프루동주의

- 무장아나키즘

- 후기아나키즘

2)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자유지상주의적 개인주의는 사유재산의 소유를 인정한다. 이들에 따르면 권위주의 조직은 민중의 외면 속에서, 혹은 투쟁의 결과로 사라져야 하는 존재이며 이것은 사회에 의해 억압받는 개인의 자유를 위한 중요한 요소로 본다. 국가에 대한 견제 목적으로 개인들 사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중간적 조직들은 군대를 조직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국가적"인 조직이 되지 않는 한 올바른 것으로 본다.

-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 인도주의적 아나키즘

- 에고이스트적 아나키즘

- 자유방임적 아나키즘

- 그리스도교 아나키즘

- 자본주의적 아나키즘

- 시온주의적 아나키즘

3) 환경주의적 아나키즘

환경주의적 아나키즘은 모든 형태의 산업화 경제와 자연의 파괴를 거부하며, 산업화를 주장한 공산주의적 아나키스트들에도 반대한다. 현재 아나키즘의 세번째 극으로 자리 잡혔으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한다. 산업화와 기술의 지배를 거부하며 원시적 사회로의 회귀를 주장하기도 한다.

- 환경주의적 아나키즘

- 원시주의적 아나키즘

- 녹색아나키즘

4) 아나키즘에는 그 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분파들이 존재한다.

- 인식론적 아나키즘

- 아나코페미니즘

- 아나코펑크

- 초월주의적 아나키즘

- 크립토아나키즘

- 국가아나키즘

5) 결론

아나키즘의 다양한 성향들은 개인의 자유가 노동조합, 공동체, 법, 정부를 비롯한 어떤 조직의 권위에도 억압받지 않는 자유지상적인 사회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학, 철학, 문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영감을 얻은 흐름들이 등장했으며, 이들은 때로 고전적 자유지상주의를 전적으로 거부하기도 한다.

아나키즘의 배경이 되는 철학의 다양성은 아나키즘 내의 다양한 흐름의 존재에서 드러나며, 이 때문에 동일한 목적을 가진 아나키스트들이라고 해도 그 강령적인 부분에서 서로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하나의 통일된 운동을 형성하지는 못한다.

(라)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 미하일 바쿠닌

  *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 레프 톨스토이

  * 머레이 북친

  * 엠마 골드만

  * 노암 촘스키

  * 막스 슈티르너

  * 벤자민 터커

  * 윌리엄 고드윈

  * 신채호

  * 박열

  * 이회영

  * 하기락

  * 구승회

  * 박홍규

  * 조약골

(마) 한국의 아나키스트 단체

1) 의열단

의열단(義烈團)은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아나키스트 성격의 무장독립운동단체이다. 이들은 프랑스 조계지역(외국인 치외법권지역)인 중국 상하이에서 폭력항쟁으로 대일본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이 상하이에서 활동한 이유는 프랑스와 일본의 대립으로 인해, 프랑스 경찰이 백범 김구선생을 포함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의열단은 광복을 위해 폭력만을 수단으로, 암살만을 정의로 삼으면서, 5개소의 적 기관 파괴와 7악의 제거를 위해 파괴활동을 벌였다. 이때 5개소의 적 기관은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경찰서·기타 중요 기관이며, 7악은 총독부 고문·군 수뇌·대만 총독·친일파 거물·밀정·반민족적 토호·열신(劣神)이다.[1]

가) 주요 의거

  *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의사가 부산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을 폭사시켰다.

  * 1920년 12월 27일 최수봉의사가 밀양경찰서 소속 모든 경찰이 모인 가운데 폭탄을 투척하였다.

  * 1921년 9월 12일 김익상의사가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폭발로 청사 일부가 부서졌다.

  * 1922년 3월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었다.

  * 1924년 1월 5일 김지섭의사가 도쿄의 궁성 정문 앞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하였다.

  * 1926년 12월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하였다.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김지섭 의사의 도쿄거사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김원봉 단장은 무장투쟁이 단원들만 희생된 채, 큰 성과를 내지 못함에 따라,의열단의 투쟁노선을 재정립하고 방향을 전환할 것을 검토했다. 이후의 활동들은 의열단 지휘부의 체계적인 투쟁이 아닌, 개별적인 투쟁이었다. 1928년 의열단은 '창립 9주년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내고, 향후 대중의 지지에 기반한 투쟁에 역점을 두어 활동하겠다는 점을 밝혔다.

나) 단원

창립단원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 이수택, 이낙준

1923년 상해 일본 총영사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의열단 단원이 천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26년 이후 많은 수의 의열단원들은 중국 국민당정부의 북벌을 위한 학교였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정치교육을 받았다. 이후 이들은 의열단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족혁명당이 각 파벌의 권력투쟁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아 의열단은 조선민족독립당으로 새출발을 하고 11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다) 공약 10조

  *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기로 한다.

  *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몸과 목숨을 희생하기로 한다.

  * 충의(忠義)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으로 한다.

  * 단의 뜻을 우선하고 단원의 뜻을 실행하는데 속히한다.

  * 의백(義伯,올바른 성품을 가진 지도자) 한 사람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하게 한다.

  * 언제 어디서든지 매월 일차씩 상황을 보고한다.

  * 언제 어디서든지 모이도록 요청하면 꼭 응한다.

  * 죽지않고 살아있어 단의 뜻을 이루도록 한다.

  * 한 사람을 다수은 위하여, 다수는 한 사람을 위하여 헌신한다.

  * 단의 뜻에 배반한 자는 처살한다.

라) 의열단 선언

김원봉은 1923년 북경을 방문하여 당시 임시정부의 외교우선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단재신채호선생을 만나 의열단의 정신을 문서화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신채호는 김원봉을 따라 상해로 와서 폭탄 만드는 시설을 살펴보고, 약 한달 동안 여관방에 앉아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의열단선언 즉,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그들은 의열단 선언을 인쇄하여 살포하였고 단원의 필독서로 지정하였다. 의열단원들은 거사 후에 본 선언문을 남겨 거사의 뜻을 전달하였다.

-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파괴·폭동으로써,

-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조선혁명선언 제 5장 마지막 문장>

이 선언에서 신채호는 독립투쟁방법으로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 등을 모두 부차적이라고 설득하였으며, 무장투쟁을 최우선하는 의열단의 뜻을 분명히 밝혀주었다.

마) 임시정부와의 관계

임시정부 초기에 안창호는 부분적인 모험행동을 피하고 적응 시기에 대거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폭탄을 기율없이 단독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임시정부 군사당국에 예속하여 실력을 점축한 뒤 상당한 때에 대거하라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김원봉은 임시정부의 활동을 미온적인 것으로 보았고, 이승만의 신탁통치 제안이나 임정내의 파벌 싸움에 매우 실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자신들의 의열투쟁을 '모험행동'으로 보는 것도 받아 들이기 힘들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개조파는 국민대표회의의 실패 이후에 창조파를 소외시키기 위하여 의열단과 제휴하였다. 이 후 의열단은 임시정부의 한 축이 되었다. 또한 김구선생도 의열단의 활동에 크게 고무되어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이라는 같은 방법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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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멕시코 치아파스주(州)의 마야계 원주민들에 대한 토지분배와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봉기한 반정부 투쟁단체

1994년 멕시코 정부와 기업인·농장주 등이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원유·천연가스·목재 등 남부의 풍부한 자원을 착취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자, 이에 반발해 치아파스주()의 마야계 원주민들에 대한 토지분배와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봉기한 반정부 투쟁단체를 말한다. 스페인어 'Ejército Zapatista de Liberación Nacional'의  머리글자를 따서 'EZLN'으로도 통한다.

이들의 지도자는 프랑스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한 인텔리이자 동화책을 집필하는 등 멕시코의 체 게바라로 평가받는 인물로, 이름은 마르코스(Marcos)이다. 그는 민족해방군의 부사령관을 맡아 1994년부터 밀림을 거점으로 반정부 투쟁을 지휘하고 있다.

1997년 12월, 세디요(Ernesto Zedillo) 정부 당시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45명의 원주민 농부들이 학살되면서 사태가 악화되어 정부군과 이들 반군 사이에 긴장이 감돌았으나, 2000년 비센테 폭스(Vicento Fox)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반군과의 평화협상 방침을 천명함으로써 사태는 진정 국면에 들어섰다.

그러다 2001년 3월, 이탈리아의 인권단체 회원 등 500여 명의 외국인과 함께 멕시코 전역을 순회하며 15일 동안의 평화행진을 한 뒤 수도인 멕시코시티에 입성함으로써 7년여를 끌어 온 내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는데, 멕시코 정부도 수천 명의 연방경찰과 군 병력을 동원해 이들을 보호함으로써 우려할 만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평화행진을 마친 뒤 민족해방군은 원주민 권익보장촉구대회를 열어 원주민 권리보호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산 안드레스 협정'의 의회 비준과 치아파스주에 있는 정부군의 전면 철수, 수감 중인 반군 포로 및 동조자 전원 석방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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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파스는 '사파티스타'라는 정부에 대항하는 반군의 지배 지역이다.

 

우리나라와 경제순위가 비슷한 멕시코의 일부이면서

가난하고 빈곤한 삶속에서도 전혀 정부의 복지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치아파스를 지배하는 사파티스타가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반군처럼 봉기 이유가 특정 이데올로기와 같은 사상,이념에 있지 않다는 것에서

사파티스타는 조금 다르다.

 

커피, 옥수수를 재배하던 깊은 산속 마야인들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강대국 산자유주의의 거대한 물결로 인해 이들이 당할 수 밖에 없던 현실적인 고통은

이들을 마스크와 총을 든 반군으로 만들어 버렸다.

표현하자면 이른바 '생계현 반군'인 것이다.

스페인어 'Ejército Zapatista de Liberación Naciona'의 약자를 따서 EZLN이라고 통하는 사파티스타의

시작은 1992년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부터 시작된다.

 

NAFTA는 미국,캐나다,멕시코 3국이 맺은 자유무역협정이고,

이로 인해 미국의 자본과 기술, 캐나다의 자원, 멕시코의 값싼 노동력이 결합되어

지역경제를 발전시키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치아파스

의 입장에서 보면

수자원, 목재, 목축 커피 옥수수등 풍부한 자연자원을 가진 시골마을은

NAFTA에 가입하면서 옥수수 수입제한, 커피 보조금등의 정책의 폐지를 불러왔고,

이 지역의 주를 이루는 마야 후손들의 취약한 경제 기반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말았다.

삶의 터전을 버리고 농사짓기를 그쳐야 했던, 아이들을 더이상 학교로 보낼 여유조차 가질수 없던 마야인들은

스키마스크와 붉은 마스크를 얼굴에 두르고 총을 들기 시작했다.

한미FTA로 생존권을 위협받는 우리 농민들과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시위가

사파티스타의 봉기와 매우 닮아 있다.

 

그들은 강대국, 다국적기업의 이윤추구 앞에서 처절하게 생존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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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적 의미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철학적 개념.

노마드(nomad)는 '유목민', '유랑자'를 뜻하는 용어로,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가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1968)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현대 철학의 개념으로 자리잡은 용어이다.

노마디즘은 이러한 노마드의 의미를 살려 철학자 이진경이 들뢰즈의 저서 《천()의 고원》(1980)을 강의하면서 남긴 글을 정리하고 보충해서 2002년 출간한 책의 제목으로, 우리말로는 유목주의로 번역된다.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일체의 방식을 의미하며, 철학적 개념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화·심리 현상을 설명하는 말로도 쓰인다.

노마드란 공간적인 이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불모지를 새로운 생성의 땅으로 바꿔 가는 것, 곧 한 자리에 앉아서도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 가는 창조적인 행위를 뜻한다. 철학적으로는 철학·문학·정신분석·신화학·수학·경제학 등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새로운 삶을 탐구하는 사유의 여행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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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 신문에 실린 서면 인터뷰입니다


- 한국에 처음 노마디즘이라는 용어가 전래되고 자리를 잡게 된 과정은?

 노마디즘은 본래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1968)에서 등장한 개념이었습니다. 그것을 고병권, 이진경, 고미숙이 주도하는 ‘수유 너머’와 이정우가 선전하고 전파시킴으로써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노마디즘을 현대 사회를 설명하는 이데올로기, 미래의 대안이 될만한 이데올로기로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노마디즘이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먹히기 시작한 것은 2000년 이후 자크 아탈리의 『21세기 사전』과 『호모 노마드』가 번역 출간되면서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후 ‘수유 너머’와 이정우의 주장에도 더욱 힘이 실리게 됩니다.

 

『21세기 사전』를 보면, 이정우의 추천사가 실려 있습니다. 저는 이정우가 자크 아탈리의 주장이 자신들의 사회적 입지를 확대시켜주는 계기가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노마디즘은 정말 현대사회의 모든 생활과 연관돼 있는 것 같다. 교육, 직업, 쇼핑 등 여러 분야에 적용되는데, 이럴 수 밖에 없는 원인이 있다면? 

교육, 직업, 쇼핑 등 현대인의 생활을 모두 노마디즘적 패턴으로 귀속시키려는 경향이 생겨난 것은 자크 아탈리 때문입니다. 본래 그럴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어서 노마디즘이 모든 생활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자크 아탈리가 그렇게 주장한 것이 원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들뢰즈의 철학적 개념인 노마디즘을 사회문화적 용어로 변환시켰습니다. 그리고 노마디즘이라는 용어를 현재의 모든 패턴을 설명해주고 미래를 예언하는 요술방망이로 사용했습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주효했던 것이지요.

 


- 한국인들은 유목민적인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런 와중에 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 근하게 된 계기는?

저의 문제의식은 진보와 보수(특히 시장만능주의자들) 모두가 노마디즘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진보와 보수가 특정한 사상에 모두 공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노마디즘을 매개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개인적인 계기도 없진 않습니다. 4-5년 전쯤인가요. 당시 조선일보는 몽골 유목민의 수장으로써 세계를 점령한 칭기즈칸을 재조명함으로써 노마디즘 선전의 첨병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친분이 있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노마디즘을 매개로 조선일보와 타협하는 것을 보고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한겨레문화센터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지금도 ‘수유너머’에서 공부하다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개 자신을 진보적인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들도 노마디즘을 진보적인 이데올로기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노마디즘이 진보주의자들의 사회적 비판의식을 불식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마디즘의 기묘한 논리가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드러내고 그것을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 부정적인 측면이 있음에도 사람들이 이를 계속해서 추구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노마디즘은 간단히 말해서 ‘이동의 담론’입니다. 들뢰즈의 노마디즘은 철학적 ․ 정신적 이동에 대한 담론이고, 아탈리의 노마디즘은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의 이동에 대한 담론이죠. 진보주의자들은 노마디즘에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와 생활태도’를 연상하고, 보수주의자들은 노마디즘에서 이동이 갖는 해방성, 창조성, 생산성에서 친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적 요소들을 발견합니다. 그 결과 진보와 보수가 모두 노마디즘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압도적 다수가 노마디즘에 대해 별다른 반감을 갖지 않고 받아들이는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노마디즘의 현실적 기반이 되는 것은 자동차, 비행기, 노트북, 인터넷, MP3, PDA, 디지털 카메라, 텔레비전, 휴대폰, 네비게이션 같은 첨단기술 제품들입니다. 그것들이 현대인의 이동을 가능케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노마디즘은 친기술주의적 경향을 갖습니다. 이러한 첨단 제품은 대개 초국적 자본이나 대자본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노마디즘의 친기술주의적 경향은 자본에 대한 관용 혹은 찬양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그 결과 진보주의자들이 자본의 논리에 자연스럽게 포섭되는 양상이 전개됩니다.


 

- 현 대학생들이 노마디즘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지금의 대학생들은 ‘88만원 세대’라 불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높은 청년 실업의 문제는 비단 우리 사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청년 실업이 이렇게 만연하게 된 데는 자본주의의 경제 구조 자체의 결함 때문입니다. 여기에 모든 것이 자동화 기계화 되는 것도 청년 실업을 높이는 주범입니다. 자본주의와 기술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가 젊은이가 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젊은이들은 친자본주의적 친기술주의적 경향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최전선에 노마디즘이 있습니다. 노마디즘의 시작은 68혁명을 배경으로 들뢰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들뢰즈의 노마디즘은 68혁명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노마디즘이 회자되는 현실은 68혁명 시기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지금의 현실에 고스란히 적용될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지금의 노마디즘은 들뢰즈의 정신보다는 아탈리의 몫이 훨씬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초기에 건강했던 이데올로기가 세월이 흐르면서 건강하지 못한 것으로 변질되는 경우는 많습니다. 나는 대학생들이 자신을 옭죄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기술만능주의의 입지를 넓혀주는 노마디즘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자는 플라톤의 경우처럼 격투기선수일 수도 있고 아우렐리우스에픽테토스처럼 황제나 노예일 수도 있으며, 스피노자처럼 첨단 과학의 기술자일 수도 있고, 라이프니츠처럼 외교관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목동은 될 수 없는가? 양을 치며 유목하는 민족을 통해 한 종교가 탄생한 이후 목자의 이미지는 종종 사상을 지배해왔다. 가령 하이데거는 ‘존재의 목자’라는 인상 깊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목자의 이미지, 즉 지킴이의 이미지와는 다른 목동의 이미지는 없는가? 물론 있다. 그것이 노마드(nomade, 유목민)이다. 땅에 뿌리내리고 토박이로 살며 정체성과 배타성을 지닌 민족을 이루기보다는, 어떤 정해진 형상이나 법칙에 구애받지 않고 바람이나 구름처럼 이동하며 삶을 정주민적인 고정관념과 위계질서로부터 해방시키는 유목인의 사유가 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존 쿠체(John Maxwell Coetzee)의 작품인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야만인이란 바로 유목민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런 인상 깊은 구절을 이 책에서 읽는다. “유목민들은 1년에 한 번씩 우리를 찾아와 교역을 한다오. 내가 지난 20년 동안 치안판사로서 싸워야 했던 문제는 가장 저질적인 마부들이나 농사꾼들이 유목민인 야만인들을 모욕하고 경멸한다는 사실이었소. 특히, 그 경멸이라는 것이 식사예절이 다르고 눈까풀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 말고는 구체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라면, 당신은 그것의 뿌리를 어떻게 뽑을 수 있겠소?”


이 인용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인종주의에 대한 고발만을 부각시키려고 이 구절을 읽은 것은 아니다. 정주민들은 위계적 정체성을 꾸미고 사는 자들이다. 그들의 정주를 가능케 하는 경계(또는 국경)가 이미 배타적 정체성의 표현인 위계를 내포하고 있다. 농사를 짓는 카인이 가축을 치는 아벨에게 그렇게 했듯 이런 정주민들은 유목민들을 증오해왔다. 아마도 근본적으로는 유목민의 도래가 정주민들이 꾸며온 모든 체계와 질서를 와해시킬지도 모르기 때문이리라. 유목민은 정주민들의 전통과 역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는 자들이며 거기에 동화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쿠체는 말한다. “나는 역사의 바깥에서 살고 싶었다. 나는 제국이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아니 행방불명된 백성들에게조차 강요하는 역사의 바깥에 살고 싶었다. 나는 야만인들에게 제국의 역사를 강요하는 걸 원치 않았다.” 노마드에 대해 사유했던 대표적인 철학자 질 들뢰즈 역시 마찬가지로 이야기한다. “노마드에게는 역사가 없다.”


국가와 같은 형식을 통해 거주하는 자들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역사를 가지지 않으므로, 노마드는 정체성 없는 익명의 힘으로 들이닥쳐 정주민을 파괴한다. 정체성 없는 이러한 힘의 침입을, 그 파괴력을 강조하여 ‘전쟁 기계’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전쟁 기계의 기원은 황제의 주둔병이 되기를 거부하고 유목 생활을 하는 양치기한테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노마드의 출현으로 인한 파괴를 들뢰즈는 “탈영토화의 형식으로서 탈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과거 유목민들의 삶이 보여주듯 말이다. 그리고 이런 노마드의 출현은 어쩌면 해묵은 정주민의 삶에 새로운 가치와 법을 도입하는 ‘창조’의 사건이 되기도 할 것이다. “사막에서 이루어지는 히브리인의 원정, 지중해를 횡단하는 반달 부족의 원정, 스텝을 가로질러 가는 유목민의 원정, 중국인의 원정.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곳은 언제나 탈주선 위에서이다”(들뢰즈). 그런데 민족들이 투쟁하는 대륙에서뿐 아니라 철학의 평원에서도 동일하게, 노마드의 침입과 창조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철학에서 주목할 만한 노마드의 발견은 칸트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처음에 형이상학의 통치는 독단론자의 지배 아래서 전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독단론자의 입법에는 예전 야만의 흔적이 있었기 때문에, 입법은 내란으로 인해 점점 무정부상태로 타락했다. 그 다음 회의론자들이 등장했는데, 그들은 정주하여 개간하는 일을 싫어하는 유목민과 같아서 종종 시민적 단합을 파괴했다.” 이 구절은 독단론적 성격을 가지는 합리론과 회의론으로 치달은 경험론의 싸움을 전제국가와 유목민의 극적인 상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대륙의 독단론이 국가를 세우면, 영국 경험론의 노마드는 그것의 전제적 성격을 간파하고서 시민적 단합을 파괴한다.

 

그러니 영토를 닦아 합리론자들 이상의 체계를 세우려는 독일인들에게도 노마드는 하나의 위협일 수밖에 없다. 들뢰즈는 저 칸트의 구절을 염두에 두고서 다음과 같이 노마드의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다.

“독일은 끊임없이 토양을 갈고 다져야 한다. 다시 말해 건립해야만 한다. 건립하고 쟁취하려는 열정이 독일의 철학에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즉 그리스인들이 원주민들을 통해 소유했던 것을 독일은 정복과 창설에 의해 소유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영국은 독일에게 하나의 강박관념이다. 왜냐하면 영국인들은 철학의 내재적인 구도를 이동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는 토양으로 여긴다. 즉 그들은 그 구도를 바다 위의 섬에서 섬으로 옮겨 다니며 천막을 치기만 하면 되는 열도에 둘러싸인 어떤 세계로 취급하는 노마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텐트만 있으면 된다.”


그리스인들이 원주민처럼 그들의 일상적 삶과 일상적 언어를 통해 철학을 생래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면, 독일인들은 그리스인들에겐 생래적이었던 사유를 학문적 개념의 형태로 애써 복원하여 다시 거주지를 형성해야 했다(예컨대 우리가 상실한 그리스 말의 어원적 의미를 애써 일깨우며 사유를 진행한 하이데거에게서 보듯이 말이다). 반면 경험론자들은 유목민들로서, 개념을 텐트에 넣어가지고 다니다가, 오로지 경험에 노출시켜 개념이 작동하는지 않는지 시험해본다. 이러는 사이 비경험적인 체계로 지어진 정주민의 거주지는 무너지는 것이다.

 

결국 노마드는 철학의 경험주의적 성격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는 개념이다. 노마디즘의 한 예를 보도록 하자. 자신의 철학을 경험주의라고 칭하기도 하는 레비나스는 예술 철학의 문제와 관련하여, 정주적 성격을 지니는 하이데거의 철학에 반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유목주의(nomadisme)는 정주 상태로의 다가감이 아니다. 그것은 거주지 없이 체류하는 것이며, 대지로 돌아갈 수 없음을 나타내는 일종의 관계이다.”

‘인간은 시적으로 대지 위에 거주한다’라는 횔덜린의 시구를 내세우며, 하이데거는 예술을 거주함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로 이해했다. 횔덜린의 시 ‘라인 강’은 라인 강이 본래적으로 있어야 할 거주의 자리를 밝혀준다. 예술작품으로서 그리스 신전은 그리스 민족이 본래적으로 거주하며 살아가는 자리를 열어준다. 이에 반해 레비나스는 유목적 삶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말한다. “모든 뿌리내림과 거주함의 바깥, 고향 상실이 본래성이다!” 예술은 우리가 익숙하던 거주의 자리에서 벗어나 우리를 유목민처럼 낯선 지역으로 내몰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레비나스의 노마드적 사유는 매우 흥미로운 것임에 틀림없지만, 노마드라는 말을 통해 중요한 성찰을 진행한 또 다른 철학, 바로 또 다른 경험론자 들뢰즈의 철학을 위해 노마디즘의 정수 자리를 남겨 두어야겠다. 정주민적인 사상가들이 동일성이나 유비 같은 개념의 울타리 속에 가축들을 가두어 놓듯 존재자를 가두었다면, 어떤 개념의 울타리도 없이 존재자들을 방목하고자 했던 것이 들뢰즈의 노마드적 존재론이다. 들뢰즈는 주저 [차이와 반복]에 ‘방목하다’라는 말의 고대적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상 깊은 구절을 남기고 있다.

“방목하다라는 말의 목축적 의미는 나중에서야 토지의 배당을 함축하게 된다. 호메로스 시대의 사회는 방목장의 울타리나 소유지 개념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당시 사회의 관건은 땅을 짐승들에게 분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짐승들 자체를 분배하고 짐승들을 숲이나 산등성이 등의 한정되지 않은 공간 여기저기에 배분하는 데 있다. 노모스는 우선 점유의 장소를 지칭하지만 그 장소는 가령 마을 주변의 평야처럼 명확한 경계가 없는 곳이다. 여기서부터 ‘노마드’라는 주제 역시 탄생한다.”

 

애초에 가축을 가르는 일은 울타리를 치는 목축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명확한 경계가 없는 장소에 가축을 풀어놓는 일, 유목이었다. 방목의 이러한 의미를 존재론의 관점에서 우리는 이렇게 바꾸어 쓸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어떤 개념적 울타리를 통해 존재자에게 존재를 배분했던 것이 아니다. 경계 없는 존재 위에 존재자를 직접 풀어놓는 것이 관건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철학사를 통해 경험론적 사유가 이 과제에 도전해 왔다.


가령 로마 시대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읽어보자. “단일한 것으로 지각된 순간 속에는, 이성이 발견해내는 수많은 순간들이 숨겨져 있다. 이런 까닭에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서 모든 종류의 시뮬라크르들(이미지들, 흔적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평균적 지각이 동일성을 지닌 사물로 보는 것의 배후에는 수많은 지각의 순간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이라면, 이 동일성의 원천으로 저 피안에 있는 이데아를 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에 충실하자면, 동일한 사물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순간의 수많은 다른 지각들이 있을 뿐이다. 이는 동일성의 개념(울타리)에 매개하지 않고 존재자를 직접 존재의 대지 위에 풀어 놓는 존재론적 유목이 아닌가?


이러한 유목적 사유는 계사(繫辭)에 대한 들뢰즈의 다음과 같은 분석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는 보통 계사를 통해, 주어 자리에 오는 동일성을 지닌 실체에 술어 자리에 오는 필연적이거나 우연적인 속성을 귀속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험 안에 있는 것은 동일성 개념이나 그에 부속하는 성질 개념에 매개되지 않는 감각들이 아닐까?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 ‘하늘은(est/is) 푸르다’는 동일성 개념에 매개된 존재자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임’과(et/and) ‘푸름’이라는 두 속성이 이웃하고 있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즉 계사의 정체는 접속사인 것이다). 그야말로 ‘하늘임’과 ‘푸름’의 가변적인 배치(agencement)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랭보의 표현을 빌려 “모든 감각들의 무질서(un dérèglement de tous les sens)”라 일컬을 수 있는 세계이며, 개념의 울타리 없이 존재자를 존재 위에 풀어 놓는 사고이다.


모든 감각들의 무질서로부터 정주민의 도시를 위협하는 유목민의 저 전쟁 기계가 생겨난다. 이것은 재앙인가? 오히려 존재자들을 동일성이나 신학적 질서를 표현하는 유비 같은 개념의 울타리 안에 가두지 않고, 직접 존재 위에 개방하여, 존재자들을 새롭게 배치해보라는 행운이 우리 손에 떨어진 것은 아닐까? 억압적 효과들을 발휘하는 개념의 체계 바깥에서 존재자들을 방목해볼 최초의 행운, 유목적 삶의 행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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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참, 희안하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는데, 어째서 학교는 여전히 전쟁터인가.  6
진정 놀라운 건 그 누구도, 어떤 청소년도 이런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 그게 더 끔찍한 일이다.  6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질문이 없으면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7
공부란 세상을 향해 이런 질문의 그물망을 던지는 것이다.  7
일단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책을 애인보다 더 가까이 끼고 살아야 돼... 책 중에서도, 인류 최고의 고수들이 쓴 고전들을 읽어야 해.  9

대중 지성을 움직이는 힘은 오직 앎에 대한 열정이다. 생명과 존재, 삶과 세계에 대한 끊임업슨 물음들, 그것만이 그들을 지배한다.  26

1부 학교, 공부에 대한 거짓말을 퍼뜨리다.
중요한 건 공교육이냐 사교육이냐가 아니라, 어떤 식의 공부가 실현되느냐는 것.  33
근대적 학교제도의 산물 - 동일한 연령대의 학생들을 같은 장소에 몰아넣고 같은 내용을 주입하는 것.(세대간 균질을 만드는건 학교의 일률적인 쪼개기때문..)  35
공부란 눈앞의 실리를 따라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벡터를 지닌다. 오히려 그런 것들과 과감히 결별하고,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삶을 구성하는것, 삶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는것, 그것이 바로 공부다. - 즉, 공부는 무엇보다 자유에의 도정이어야 한다.  40
세대간 장벽을 허물어 뜨리는 운동이 공부가 되어야 한다.  47
한 사회가 공동체적 리듬을 가지려면, 노인은 청녀노가 함께 섞여야 하고 어린이와 청소년은 노인과 함께 있어야 한다. 
공부란 궁극적으로 자기를 넘어서는 것일진대, 거기에는 우와 열이 있을 수 없다.  49
제갈량, 허생, 정약용, 박지원... 그들은 다만 독서를 했을 뿐이었다.  51-52
논술을 잘 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55
다양한 활동이 신체와 '통'하려면 무엇보다 근기(根器)가 튼실해야 한다. 근기란 쉽게 말하면 그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에너지의 분포도'같은 것이다. 그릇이라고도 하고, 카리스마라고도 한다.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건 성적이나 학벌이 아니라, 바로 이 근기다.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충전할 수 있는 길은 단언컨대 독서밖에 없다!!  57
요즘 대학생들의 지식이란 책을 통해 탐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터넷에 떠다니는 검색 다발일 뿐이다.  58
이반 일리히에 따르면, 학교가 유포한 환상 중에 가장 나쁜 것이 사람들을 제도적 서비스에 길들이는 것이라 한다.
좋은 집에 산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삐까번쩍한 외양이 아니라, 환경과 주체 사이의 능동적 교감이다.  63
진정한 창의성은 폼나는 공간에 들어앉아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그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학습 주체와 공간이 어우러져 전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아주 강도 높은 학습의 장을 연출하는 것.  65
콩도르세는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바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66
자율성과 창의성은 나란히 간다. 자율적이지 못하면서 창의적 사고를 한다는 건 불가능한 까닭이다.  67
토론이건 체험학습이건 그것이 강도 높은 학습의 과정이 되려면 고도의 훈련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토론을 통해 자기 생각을 바꾸겠다는 치열한 의지도 뒤따라야 한다. 
오직 의심해야만 자주 분석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의심을 깨뜨리면 이것이 바로 깨달음인 것이다.  69
우월감과 열등감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진정한 평등이다.  70


2부 고전에서 배우는 '미-래'의 공부법
학벌, 위계, 돈과 명예 따위는 말끔히 잊어버려라! 필요한 건 다만 두려움 없는 용기와 지칠 줄 모르는 끈기뿐. '노하우'는 책과 우정!  75
고전이란 시대의 통념과 억압을 뚫고 삶과 사유의 눈부신 비전을 탐색한 전위적 텍스트를 말한다. 고전이 시대마다 서로 다른 의미망을 구성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전위적 열정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전이야말로 진정, '미-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77
코뮌이란 기성의 권력과 습속으로 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구성하고자 하는 이들의 자유롭고 창발적인 집합체 혹은 네트워크를 말한다.  81
학교는 태생부터 제도로 출현했을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더더욱 그런 속성이 강화되었고, 그래서 지금은 누구도 학교가 배움터 혹은 앎의 코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82
무엇보다 고전의 지혜를 적극 응용해야 한다. 즉, 자기가 선 자리를 제도적 울타리가 아니라, 스승을 만나고 벗을 부르는 매움터로 전환해야 한다.
고전의 시대에 좋은 부모란 자식에게 훌륭한 스승을 찾아주는 존재였다.  83
앎의 코뮌에 접속하고, 암송과 구술을 익히고, 그걸 통해서 리더십을 터득하는, 이 모든 과정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독서다.
다산 정약용이 말했듯이, 독서는 "세상을 경륜하는 것은 물론 귀신과 통하고 우주를 지탱하는" 위대한 공부다.  105
사교육 시장에 내몰리고 싶지 않은 꼬마들, 성적의 위계와 입시의 중압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청소년들, 기성세대의 고루한 관습에 저항하고 싶은 청년들, 시각의 지배에 예속되기를 원치 않는 직장인들, 매너리즘에 찌든 일상의 회로를 벗어나고 싶은 아줌마들, 삶의 비전과 지혜를 통찰하고 싶은 노인들 - 이 모든 '대중지성'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독서뿐이다. '책 속에 길이 있다!'  106
얼굴도 멋있어지고, 몸도 건강해지면서 동시에 삶의 비전이 확 열리는 길은 무엇일까? 바로 독서이다. 
유비는 그냥 한눈에 제갈량의 그릇을 알아봤다. 그의 얼굴과 몸에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흘러넘쳤기 때문이다. 
허생은 다짜고짜 장안 최고의 갑부 변부자를 찾아가 만 냥을 빌려달라고 하자, 변부자는 이름도 묻지 않고 즉석에서 만 냥을 내준다. 허생의 내공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그들은 책을 통해 전혀 다른 종류의 신체가 된 것이다.  108
선비가 하루만 글을 읽지 아니하면 얼굴이 단아하지 못하고, 말씨가 단아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몸을 가누지 못하고 두려워하면서 마음을 붙일 곳이 없게 된다. 장기 두고 바둑 두고 술 마시고 하는 것이 애초에 어찌 즐거워서 했겠는가? - <연암집>  111
어떤 책을 읽어야 하지?  116
일단 나보다 훨씬 폭넓게, 강렬하게 살았던 분들이 쓴 책이어야 할테지? 또 저자는 알 수 없지만, 생명의 역동성이 살아 숨쉬는 책, 생가를 가로지르는 원대한 비전이 담긴 책이어야겠지?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는 책, 한 시대의 통념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한 책, 마주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책 등등. 그런 책들을 우리는 '고전'이라 부른다.  117
독서의 세계에 제대로 발을 들여놓고 싶다면, 먼저 고전을 문학, 그것도 서양 문학 중심으로 사유하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119
<서유기> <수호지> <홍루몽> <옥루몽> 등과 같은 장편을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프루스트나 보르헤스 등 사상적 깊이를 갖춘 서양 소설과 함께 읽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노자오 ㅏ장자, 사서삼경 등 동서양의 사상사를 넘나들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  119
쉽고 재미있는 책, 읽어서 몽땅 이해되는 책은 당장 덮어야 한다. 생각해보라. 그건 저자의 수준이 나랑 똑같다는 뜻인데, 그런 책으로부터 대체 뭘 배울 수 있단 말인가?
10대들이 열광하는 일본의 하이틴 소설, 직장 여성을 겨냥한 삼류 연애담이나 감상적 에세이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탐정소설류, 재테크나 성공의 신화를 적당히 가공한 책들. 이런 건 독서의 범위에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 그건 그야말로 취미 활동에 불과하다. 특히 여기에 몰입해서 다른 장르를 멀리하게 되면 그건 게임 중독이나 다를 바가 없다. 스스로 그런 조짐이 느껴질 경우 당장 멈추어야 한다. 패스트 푸드에 길들여지면 다른 음식을 먹을 능력이 없어지는 것처럼 그런 야들야들한 책에 맛들이다 보면 신체는 한없이 나약해진다.  120-121
'너 자신의 눈으로 자료를 보라.'
'너 자신의 고유한 문제를 설정하라.'  131
배움에 있어 가장 불리한 조건은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 혹은 이미 획득한 지식에 갇혀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직성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양이 많건 적건 '비움'은 배움의 필수적 조건이다. 끊임없이 비울 수 있어야 더 큰 앎이 흘러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135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자신의 문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 거울보다 더 투명하게 자신을 비춰줄 것이다.  139
집단 속에서 신뢰를 확보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약속과 시간을 지킨다. 눈과 귀를 몽땅 열어둔다. 즐겁게 공부한다. 배운 만큼 실천한다.  140


3부 인생의 모든 순간을 학습하라.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문자와 몸과 세계가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 "앎은 행위에서 시작되고, 행위는 앎의 완성"(왕양명)이 되는 '지행합일'의 경지, 이것이 바로 고전의 학인들이 지향했던 공부의 진경이다.  145
먹고 살고 번식하고 하는 일이야, 뭐 박테리아도 하지 않는가. 적어도 공부라고 하면 존재 자체가 특별한 단계에 도달하는 과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145
책을 통해 존재와 세계의 심연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리고 존재와 세계의 모든 것을 책으로 변환 - 책을 읽으면 삶이 보이고, 일상을 잘 관찰하노라면 책의 지혜가 확연해진다.  146
자기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만 있다면, 삼라만상이 다 신비로운 기호로 가득 찬 문장이라는 것을 절로 터득하게 된다.  147
니체는 말했다. "인간은 행복조차도 배워야 하는 존재"라고.  154
요즘 신데대 커플이 100일을 넘기기 어려운 것도 내적 충만감보다는 인정욕망에 휘둘리는 이런 식의 문법을 따르기 때문이다.  156
가장 문제적인 건 서로에 대한 집차고가 소유욕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경향이다.  160
'사이에서 존재하기'랑 고기가 물속을 헤엄치듯 배움과 가르침의 흐름 속을 유영하는 것이 아닐까.  193
공부란 특정한 시공간에 고착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존재로 변이되는 것을 의미한다.  195
무엇을 공부하건 공부는 그 자체로 혁명이다.  196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라고 했듯이, 시간을 견뎌내고, 일상의 변화를 끌어내지 못한다면, 그건 단언컨대 혁명이 아니다! 
혁명이란 억압과 소외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러한 혁명의 시작은 공부로부터 시작한다. 인생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는 공부. 이 공부를 통해 삶의 통찰하는 힘이 생길대 비로소 존재의 근원적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  199
억압과 소외의 사슬을 끊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자기가 발 딛고 있는 곳을 배움터의 배치로 바꾸고, 지식의 향연을 구가하는 학습망을 조직할 것.  201
섹스가 아무리 짜릿하다 해도 그 쾌락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하지만, 공부는 그렇지 않다. 날마다 해도, 평생 해도 행복하고, 또 행복하다. 
누구나 평생 공부해야 한다. 실용적 목적이 없이도 공부할 수 있을 때, 그때 공부는 비로소 최고의 지식이자 사회를 변혁하는 무기이면서 동시에 운명을 통찰하는 지혜의 수행이 된다. 
고로, 공부에 외부는 없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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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 걸까.
나라는 생명이 갈 수 있는 그 끝까지 끝없는 성장을 향해 달리고 싶다.

'한 사람'에 대한 깊고 강렬한 사랑이 가져다 주는 열정으로 많은 사람들과 손잡고 싶다.
'모두를 사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싶다'... 우리는 어쩌면 그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사랑을 아끼고 고독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마음을 넣어 만든 작품에는 하찮은 와인 한 병에도 '혼'이 있다.
혼...마음... 진정성이라 할까... 
마음을 다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것이라도 작품이라 표현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 나는 지금도 작품을 가지고 있는것이다.
지금 바로 현재에.. 

사랑의 표현방법에 규칙은 없다.

자, 이제 슬슬 길 위를 달려보는 게 어때?
느려도 좋아. 지쳐 걸어도 좋아. 꼴찌면 또 어때?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다른 세상을 보게 될 거야. 
제 자리 걸음도 구두 바닥이 닳긴 마찬가진 걸.
'어차피 시간은 가고 있어.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가고 있어.
무언가를 쳐다 보다도 시간은 가고 있어.
어딘가를 다녀도 시간은 가고 있어.
시간은 가고 있어. 
내가 무엇을 해도...'
비교가 낳은 최대의 파괴는 사람이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목적? .........  그저 지구에 태어났으니까 조금이라도 지구가 더 보고 싶어서..

'LifeWork'

직접 와서 보고 만지고 나서야, 벽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슬프다.. 나 자신도 이렇게 하고 있다는 현실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건 자기이기에...
나는 나와 관련 없으면 큰 의미를 두지 않기에.. 
나 역시 직접 보고 만지고서야... 그 아픔을 조금은 이해하는 듯 하다..
이런 것들이 슬프다..시리다.. 내가 불쌍하다..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착색된 안경을 벗어야 한다.
사실..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안경보다 그것을 보는 안목이 필요한것 아닐까..
그런 표현이 더 좋지 않냐는 뜻이다.. 
사실 이면의 진실은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나는 오늘도...

내가 기다리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마음을 나누는 시간.'
내가 여행을 하는 이유는...그리고 좋아하는 이유는.. 갈망하는 이유는..
그들을 보면서 알아가고 경험하고 달리 생각해 나가기 위해서이고... '인정함'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마음을 나누는 시간...즉... 소통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사랑하고 싶은건지도...

너는 무엇을 하고 싶니?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다면 여행을 하지 마라.
어라..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렇지만 여행은 할것이다..왜냐고?
나는 무엇을 더 하고 싶은지를 알아가기 위해서...

마음이 없는 독지가보다 마음이 있는 바텐더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마음이 없는 정치가보다 마음이 있는 청소부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마음이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다.
세상을 떠돌며,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마음'이 뭘까...???

진지하게  내 말을 들어줘서 고마워. 그렇지만 내가 알고 싶었던 건'너의 대답'이 아닌 것 같다. 사실은'내게 필요한 도움'을 받고 싶었을 뿐.....  너의 눈동자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눈에는 그의 마음이 있는것일까...
나는 말을 하고 싶다.. 
나는 듣고 싶다..
나는 그가 필요한 도움을 주고 싶다..
그럼 나는 해결을 하려 하고 있다.. 
나는 듣고만 있고 싶다.. 
나는 들어주고만 있고 싶다.. 
나는 눈을 바라만 봐 주고 싶다..
평온한 표정으로.. 

지브롤터 해협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는 여객선의 갑판,
선원 아저씨가 말했다.
'나는 20년 동안 세계 이곳저곳을 항해했지. 매일 반족되는 일상이 싫어서. 그런데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고 부터 나는 변했어. 지금은 사랑하는 그녀와 아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이 지브롤터 해협을 하루 두 번 왕복하는,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 하지만 하늘에 맹세해도 좋아. 난 지금 제일 행복하다구. 그녀라는 보석을 만난 순간, 내 모험은 끝난 거야.'
아니꼽게 멋있는 이 아저씨는 내게 물었다.
'자넨, 사랑스런 여자라는 보석을 이미 찾았잖나. 그런데 또 무슨 보석을 찾아 여행을 계속하는 건가?'
난 보석을 찾지 못해서 여행을 다니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보석을 찾으면 여행을 다니지 않을 것인가..
모험이 모두 여행이라 할 수 있는가..
당신은 당신의 생각에서 의미를 두었기에 멈추는 것이고..
나는 나의 의미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의 표현은 너무 멋지다..
하지만 나는 나의 보석과 함께 그녀보다 못하지만 또다른 보석을 함께 보며 느끼며 즐기고 싶다...책과 여행.. 

핵(核)
많이 먹을 필요는 없어.
생성 한 마리라도 뼈까지 맛보렴.
그 편이 진짜 '맛'을 느낄 수 있으니까.
많이 읽을 필요는 없어.
한 권의 책이라도 책장이 뚫어질 때까지 읽어보렴. 
그 편이 진자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니까.
많이 살아할 필요는 없어.
한 사람이라도 마음 구석구석 사랑해보렴.
그 편이 진자 '사랑'을 느낄 수 있으니까.
가난한 나라의 넉넉한 사람들이
나에게 살며시 미소짓는다.
아... 우리 엄마...의 말쌈이 머리를 때린다..'사람은 깊어져야 한다.'
아... 우리 아부지의 모습이 떠오른다..무언가를 하시면서도 엄마의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시던 모습이..
어떤 책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난다..
사람은 크든 작든 누구나 시련은 있다. 고독도 있고, 느끼든 못느끼든 아픔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디며 노력하는 사람은 '성취'라는 기쁨을 알게 된다고..
ㅎㅎ...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사람이 아니네...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왜 여행을 하냐고.. 여행을 하면 뭐가 좋으냐고.. 무얼 얻냐고.. 일은 어떻게 하냐고.. 어떻게 하면 여행을 잘 할 수 있냐고.. 여행의 기쁨은 뭐냐고.. 정보는 어디서 얻냐고.. 외국인과 어떻게 소통을 하냐고.. 무섭지 않냐고.. 위험하지 않냐고.. 어떻게 잘 놀고 오냐고.. 무엇을 봐야 되냐고.. 가서 뭘해야 하냐고.. 돈은 얼마나 드냐고.. 이동은 어떻게 하냐고.. 잠은 어디서 자냐고.. 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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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위하여 오늘을 견디는 것이 아니고
미래를 위하여 오늘을 즐기며 사는 것이다.

서로의 몸 안에 있는 
'절대 바뀌지 않는 것'을 서로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정말로 필요한 것을 발견할 때까지, 영혼은 여행을 계속합니다. 막연히 기다리기만 해서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또, 불필요한 것을 버릴 수 없다면,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변화할때는 언제나 힘이 들지만,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는 결단을 내릴 수 없는 사람의 영혼은 결코 충족되지 않습니다.
책을 읽는 것은 채우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버리기 위해서 읽는 것이라 합니다.
여행을 하는 이유는 채우기 위해서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버리기 위해서 읽는 것이라 합니다.
언제부턴가 누군가가 책을 왜 읽느냐고 물으면... 저는 읽을 수록 나의 부족함을 더욱 느끼게 되어 읽는다고 답합니다....ㅋㅋㅋㅋ 
과연 그럴까요?????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
그것은 반드시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것.

자기를 알기 위해서는 
자기와 이야기를 해야 한다.
자기와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에게 질문을 해야 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모든 대답은 반드시 네 안에 있으므로.
맞아맞아...ㅎㅎㅎ
코칭을 받아야해..ㅎㅎㅎ
이 두 페이지의 사진만 다르다..왜...

선택...

내 마음의 소리가 이끄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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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토스 [pathos]

생각/내용 2010. 12. 11. 10:04


철학상의 용어로 정념() ·충동 ·정열 등으로 번역되며 로고스(로고스란건.. 쉽게말해서.... 옳은것을 찾아가는 분별력을 가진 이성을 뜻하고요..파토스란건.. 주위상황에따라 변하는 기분.... 그러니까.. 쾌락이나.. 뭐 그런거요.. 그런걸 뜻해요..)와 상대되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어 paschein(받다)에서 파생된 말로 근본적인 뜻은 ‘받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광의로는 어떤 사물이 ‘받은 변화상태’를 의미하고, 협의로는 특별히 ‘인간의 마음이 받은 상태’를 의미한다. 수동성 ·가변성이 내포되며 그때그때 내외의 상황에 따라 인간의 마음이 받는 기분 ·정서를 총괄하여 표현한 말이다.

이성의 판단과는 다른 원천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쾌()’ ‘고()’의 정()이 기본이 되고 고전윤리학에서는 쾌 ·고의 정을 이성의 판단에 따르도록 하는 것을 ‘덕()’이라고 하였다.

파토스는 종종 이성의 명령에 반항하기 때문에 스토아학파에서는 이것을 병()이라고 하였다.

파토스는 각성적() 의식보다도 의식하()의 근원충동()에 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인간 존재의( 또는 ) 존재상황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인간 존재의 근원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윤리학에서는 대상의 자극을 받아서 생기는 감정을 말하며 특히 현대에는 감정의 격앙 ·격정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1만원을 주웠는데.. 그것을 찾아줘야한다는건 누구나 다 알고있고.. 옳은 것이죠..이것이 로고스죠.. 그렇지만... 그것을 찾아주느냐 않찾아주느냐에 대한 갈등..... 이것이 파토스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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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에 "Children can learn many things on the internet"이라고 인터넷의 유익한 점을 명시해놓고

바로 아래는 곰 인형이 옷을 벗는 사진을 놓아서 앞의 "Children can learn many things on the internet"이 반어적인 문구가 되게 만들었네요.

즉, 애들이 인터넷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데 외설적인 사이트나 야한 동영상 같은 걸 보고 정서상

유해한 것도 배울 수 있다고 한 것이지요.

 

본론으로 들어가서 여기서 페이소스 또는 파토스는 곰 인형이 털가죽을 벗고 있는 데 있네요.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려 보면 인형이 털 껍데기가 벗겨져 있거나 눈알이 없거나 한 것은

아이들이 오래 가지고 놀면서 의도치 않게 훼손시킨 것, 또는 고장낸 것이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어린이의 천진난만함, 순수함을 나타내는 곰 인형의 털가죽이 벗겨져 있는 것은

의도된 것이지요. 외설적인 사이트에서 누드 모델을 흉내낸 것이랄까. 그로 인해

어린이의 천진난만함이 훼손된 것을 보여주네요.

그러니까 곰인형이 환기시키는 어린시절의 순수가 훼손된 모습으로 제시되어

페이소스를 자아낸다고 볼 수 있죠. 게다가 그 위에 "인터넷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는 문구는

그 원인이 인터넷의 유해 사이트에 있다는 것을 반어적으로 표현하여 이 페이소스를 통해 광고의 설득력

을 강화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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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名言)이나 격언(格言), 잠언(箴言)은 어떤 교훈이나 가르침을 주는 말 또는 학문 등의 핵심을 간략하게 외우고 말하기 쉽게 그 내용을 간결하고 짧은 문장으로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 속담과도 비슷한 말이며 보통 속담은 일반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나와 그 작자가 분명하지 않은 것을 가리키고 명언은 저명한 사람의 발언 또는 문장이나, 작자는 불명하나 널리 알려진 고전에서 유래한 것을 가리킨다.


아포리즘에 대한 정의 (모리와 함께  화요일)

 

Aphorism: An aphorism is a short witty sentence which expresses a general truth or comment.

아포리즘은 일반적인 사실이나 의견에 대한 짧은 재치있는 문장을 말한다

- 출처: Collins Cobuild Advanced Learner’s English Dictionary


아포리즘깊은 진리를 간결하며 압축된 형식으로 표현한 짧은  (금언격언잠언경구 )

- 출처민중서림 엣센스 국어사전

 

아포리즘이란 위의 사전적 정의와 같이 짧은 형식으로  금언을 말합니다

아포리즘이란 단어를 처음 접하게  책은

바로 모리와 함께  화요일인데요 (Tuesday with Morrie)

노교수와 제자사이의 대화에서

노교수의 아포리즘을 제자가 경청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모리의 대표적인 아포리즘을 보기로 할까요?

 

Accept what you are able to do and what you are not able to do.

Accept the past as past, without denying it or discarding it.

Learn to forgive yourself and to forgive others.

Don’t assume that’s its too late to get involved.

 

너가 할수 있는 것들과 할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여라

과거는 과거로써 받아들이되 그것을 부정하거나 버리려 하지 말아라

너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남을 용서하라

무엇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었다고 단정하지 말아라

- 출처: Tuesday with Morrie

 

위의 아포리즘을 사랑에 대해 제가 재해석 하자면 이렇습니다

 

사랑에 대해서 너가   있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받아들여라

남을 사랑할 수는 있지만남이 너를 사랑하게  수는 없다

지나간 사랑은 과거로써 받아들이되

그것을 애써 지우려하지말고버리려 하지 말아라

과거는 과거로써 아름다울 뿐이지다만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의 끝에는 당신 그리고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자신의 과오를 돌아보고 나를 용서하고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남을 용서하라

 

사랑이 끝났다고 다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라

네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때다

지금 행동하라





“내가 누구인지 밝혀두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사실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을 수 있다…. 나는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이다. 나는 성인이 되느니 차라리 사티로스이고 싶다.”

 

그는 책의 서문을 그렇게 썼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제자로 규정했다. 그리고 반인반수의 사티로스(Satyros)가 되기를 원했다. 사티로스는 얼굴은 사람이지만 몸은 염소이며, 머리에 작은 뿔이 난 디오니소스의 시종이다. 주신을 모시는 시종답게 술과 여자를 좋아하며, 과장된 표현과 몸짓으로 우스꽝스러움을 자아내는 급이 뚝 떨어지는 잡신이다.




디오니소스의 제자이며 디오니소스의 시종을 희망한 이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그리고 이 책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제목과 서문도 파격이지만, 본문은 한 술 더 뜬다.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네 개의 질문을 던지고 차례로 응답한다.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   

 

세상에! 21세기 오늘을 살아가는 깜찍한 소녀들도 “난 너무 예뻐요”를 노래할 때는 살짝 부끄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콧수염을 기른 근엄한 얼굴의 19세기 철학자가 정색을 하고 “난 왜 이렇게 현명한가”라니!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니체는 도발적으로 글을 썼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글을 물고기를 낚기 위한 낚싯바늘로 표현하기도 했다. 독자를 유혹하기 위한 글이라는 것이다. 요즈음 인터넷 용어로 말하면, 그는 ‘낚시질’의 원조인 셈이다. 그의 낚시질은 다양하다. 예를 들어 그는 [선악의 저편]에서 “진리가 여성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떠한가”는 질문을 던지고, [도덕의 계보]에서는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고 단정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우상의 황혼]에는 ‘망치를 들고 철학 하는 법’이라는 부제를 달았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모두를 위한 책이면서 그 누구도 위한 것이 아닌 책’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개인적으로 니체는 공손한 사람이었다는 게 니체 전기 작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그러나 글로 보는 니체는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거만하고, 무례하며, 위악적이다. 그는 굳이 그 점을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과장한다. 그는 왜 존경 받는 성인이 되기보다 지탄 받는 사티로스가 되기를 희망했을까?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교과서적인 정답을 안다.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도전을 한 무신론자이며, 객관적 진리를 향한 형이상학적 전통에 반기를 든 반형이상학자이고, 보편적 도덕 가치를 정초하는 시도 자체가 무망하다고 본 비도덕주의자다. 그러한 도발적 주장 때문에 니체 철학은 한편으로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비합리적인 철학의 전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 용감한 철학으로 상반되는 평가를 받아왔다.


잠깐! 여기서 짚어보자. 니체는 신을 믿지 않은 최초의 무신론자인가? 아니다. 역사의 시계를 멀리 돌릴 필요도 없다. 니체가 철학의 스승으로 삼았던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도 신을 믿지 않았다. 니체는 형이상학에 반기를 든 최초의 반 형이상학자인가? 아니다. 형이상학을 반대한 근대 철학자는 너

무 많아서 거론하기조차 힘들다. 대체로 근대 경험론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에 반대한다. (David Hume)은 형이상학 책은 불태워버리라고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또 물어보자. 니체는 도덕적 가치의 보편성을 의심한 최초의 인물인가? 아니다. 도덕적 회의주의의 흐름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 이후 도덕적 보편주의를 주장한 철학적 흐름만큼이나 뿌리가 깊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니체 철학은 뜨거운 감자가 되었는가?

 

그 비밀의 열쇠는 니체가 주장한 내용에서 찾지 말고 니체가 주장한 방식에서 찾아야 한다. 니체 철학은 아포리즘(aphorism)의 철학이다. 그가 쓴 글은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경구에서부터 하나의 주제에 대한 비교적 긴 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의 아포리즘이다. 아포리즘은 간결하지만 다의적이다. 쉽게 전달되지만 모호하다. 누구나 쉽게 니체를 읽지만, 니체 철학의 이해가 쉽지 않은 이유다. 그는 왜 이렇게 글을 썼을까? [차라

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피와 아포리즘으로 쓰는 사람은 읽혀지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산과 산 사이를 가장 빨리 가는 길은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긴 다리를 가져야만 한다. 아포리즘은 봉우리들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듣게 된 자들은 키가 크고 높이 솟은 자여야 한다”


단순히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기억되어야 하는 아포리즘은 천천히 음미해 가면서 읽어야 한다. 아포리즘은 사물과 직접적으로 관계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포리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물을 낯설게 제시한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지각 경계를 흔든다.












니체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신은 죽었다”는 말도 그렇다. 이 말은 관찰에서 나온 주장이 아니다. 신의 죽음은 ‘소식’의 형태로 전달된다. 그 소식을 전하는 자는 ‘광인’이다. 1인칭 시점으로 즐겨 글을 쓰는 니체가 이 대목에서는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광인을 등장시켜 그 소식을 전한다. 그런데 그게 묘하다. 광인은 이 소식을 기쁘게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광인은 시장 바닥에서 신을 찾다가 마침내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를 죽였다”고 외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절규한다. 그리고 또 말한다. “어떻게 우리는 모든 살해자 중에서 살해자인 우리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가?”라고. “세상에서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존재가 우리의 칼 아래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며, 이제 누가 우리를 위해 속죄를 해줄 수 있는가 묻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도 신의 죽음이라는 놀라운 소식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니체는 이 광인이 전하는 신의 죽음을 이렇게 맺는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날 광인은 몇몇 교회에 뛰어들어 신의 진혼곡(requiem aeternam deo)을 불렀다고 한다”.     

 

[즐거운 학문]에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 광인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인물로 바꾸어 무덤덤하게 한 마디 한다. “저 사람들은 아직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이지”.

 

니체는 신이 죽었다는 사건을 ‘근래의 최대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이 사건을 극화해서 전한다. 영어권 세계에 니체 철학을 소개한 카우프만(Walter Kaufmann)은 이 극화된 장면이 성가에서 차용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신의 죽음은 과학적 관찰이 아니고, 형이상학적 고찰도 아니며, 19세기 유럽문화에 대한 니체의 상황 진단이다. 이 극화를 통해서 니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주장처럼 신은 원래 없었으며 단지 인간의 속성이 외화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 우화적 표현은 광인이 전하는 신의 죽음이라는 사건보다는 오히려 그 사건을 조롱하고 비웃은 당대 유럽 문화에 대한 고발에 초점을 맞춘다. 신의 죽음을 조롱하는 사람들은 신의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신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신의 죽음 이후에 또 하나의 신을 만들어 그것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신을 죽이고 난 후, 그 신이 남긴 흔적은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새로운 신을 만들어 죽은 신의 자리를 메웠다.      

 

그렇다면 새로운 신은 누구인가? 니체는 그것을 콕 짚어서 주장하지 않는다. 아포리즘을 통해서 기독교 신의 죽음과 새로운 신의 조짐을 경고했을 뿐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새로운 신을 과학으로 읽는다. 종교적 미신이 사라진 자리를 과학적 미신이 차지했다고 바라본다. 어떤 이는 새로운 신을 근대(modernity)로 읽는다. 종교적 신화는 죽었지만, 이성과 계몽을 축으로 하는 근대 신화가 새롭게 생겨났다고 본다.

 

니체는 신이 남긴 유산을 완전히 털어버리기를 원한다. 신의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이 죽었다는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또 다시 아포리즘을 동원한다. 그 아포리즘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때로는 차라투스트라라는 초인을 통해서, 때로는 디오니소스라는 그리스 주신을 통해서, 때로는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라는 한때 그가 숭상했던 인물에 대한 혹독한 실명 비판을 통해서 그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 아포리즘이 궁극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과 예술의 장에서 주로 논의되던 니체를 철학의 장으로 이동한 20세기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그것을 니힐리즘(nihilism)으로 읽는다. 니체는 그의 초기 작품 [비극의 탄생]에서 세계의 근저는 그가 스승으로 삼은 디오니소스적인 심연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 심연을 덮기 위한 인간의 처절한 노력이 영원한 세계를 만들어냈다. 플라톤이 세운 이데아의 왕국은 그런 영원한 세계를 지향한 것이며, 기독교가 만들어낸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를 플라톤 철학을 대중화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세계는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나 플라톤 철학이 말하는 이데아는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감내하지 못하는 인간이 자기 보존을 위해 만든 조건일 따름이다. 삶의 자기 보존을 위해 만든 것을 니체는 ‘가치’라고 부른다. 따라서 모든 가치는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곧 ‘니힐’(nihil)이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의 역사는 디오니소스적 심연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니힐리즘의 역사다.


이런 틀에서 보면 기독교는 니힐리즘이고, 플라톤 이후 지금까지 서양 형이상학도 니힐리즘이며, 도덕의 보편 가치를 주장하는 도덕주의자도 니힐리즘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적 세계와 형이상학적 세계, 그리고 도덕적 세계를 최초로 부정한 철학자도 아닌 니체가 왜 그렇게 위험한 철학자로 취급되었는가 하는 단서를 하나 움켜잡는다. 니체는 지금까지 인류가 세운 모든 가치 체계가 니힐리즘이라는 점을 통찰한 철학자다.

 

니힐리즘은 지금까지 인류가 세운 고귀한 가치를 집어 던진다. 그래서 니체는 고귀한 성인이 되기 보다는 차라리 저속한 사티로스가 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풍자(satire)는 그 어원이 바로 사티로스에서 온 말이다. 니체는 우리가 듣기 싫어하는 독한 말을 내뱉기 위해 사티로스를 희망한 것은 아닐까?

 

지난 세기 후반기에 니체 읽기, 또는 니체 식으로 세상 읽기는 하나의 사조로 퍼져나갔다. 그 불을 지핀 것은 프랑스어권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다원화된 세계를 해석하는 틀로 니체의 아포리즘을 이용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단 하나의 니체 철학이 있다는 점에 반대한다. 니체 철학은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푸코는 니체 철학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고 니체 철학이 우리 삶에 어떤 효용성을 줄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니체 철학이 본질적으로 복수주의(pluralisme)라는 점에 동의하지만, 니체를 니힐리즘이라는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창조적인 생성의 철학자로 적극 해석한다. 생성과 다원성, 그리고 얼핏 보기에 무질서하고 엉뚱해 보이는 우연성이 니체가 제시한 아포리즘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하고 무례한 질문을 던진 니체를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로 니체만큼이나 오만했고, 니체처럼 음울했던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를 떠올린다.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히브리스(hybris)라는 위험한 단어는 모든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의 시금석이다. 바로 거기서 그가 자신의 스승을 이해했는지 또는 오해했는지 드러내 보일 수 있다”.

 

히브리스는 무례하고 거만함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술 마시고 방자한 행동을 하는 것도 히브리스 범주에 들어간다. 타인을 모욕하고 수치심을 주는 행위, 자신을 과시하면서 잘난 체 하는 행동도 모두 히브리스다. 그리스인들은 히브리스를 잘 다스리는 데서 미덕이 나오고, 히브리스가 날뛰는 데서 악덕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비극은 히브리스가 날뛰는 데서 오는 불행을 소재로 한다. 그러나 니체 철학에 따르면, 히브리스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발현이기도 하다. 그것은 삶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나오는 것이다.



결국 니체가 꿈꾸는 미래의 철학이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 하는 여부는 히브리스가 가진 이중성을 이해하는 데 달려있는 셈이다. 물론 니체와 니체주의자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반면 니체에 반대하는 이들은 니체 철학 자체가 히브리스이며 니체의 철학적 사유가 정지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러셀이 니체 철학을 일종의 낭만주의적 흐름으로 보는 이유다. 어원적으로 보면, 니체 철학이 크게 의존하는 아포리즘이라는 말에는 이미 경계를 확정 짓는 지평선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여러분은 니체의 기획이 히브리스의 위험성을 뛰어넘는 생각의 새 지평으로 보는가, 아니면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철학적 히브리스라고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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