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해당되는 글 108건

  1. 2023.02.20 시선으로부터 - 정세랑 문학동네 2020 03810
  2. 2022.05.30 여행 없는 여행 - 마고캐런 가지 2020 03810
  3. 2022.03.21 혼자가 혼자에게 - 이병률 달 2019 e-book
  4. 2022.01.24 여행의 이유 - 김영하 문학동네 e-book
  5. 2022.01.10 나만 알고싶은 유럽 TOP10 - 정여울 e-book
  6. 2022.01.03 잘 지내나요 내 인생 - 최갑수 보다북스 2020 03810
  7. 2021.12.27 밤의 공항에서 - 최갑수 보다북스 2019 03810
  8. 2018.12.19 여행육아의 힘 - 서효봉 카시오페아 2016 03590
  9. 2018.07.19 교사반성문 - 여행은 참교육
  10. 2018.06.20 여행자의 독서 : 두번째이야기 - 이희인 북노마드 2013 03810
  11. 2018.05.16 ​ 여행의 문장들(여행자의 독서, 세번째 이야기) - 이희인 2016 북노마드 03810
  12. 2016.09.29 여행의 심리학 - 김명철 어크로스 2016 03180
  13. 2016.09.22 당신의 여행에게 묻습니다 - 정지우 우연의바다 2015 03190
  14. 2016.09.01 내 방 여행하는 법 -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유유 2016 03860
  15. 2016.06.13 떠나지 않으면 안될것 같아서 - 이애경 북라이프 2015 03810
  16. 2016.06.09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 - 오영욱 예담 2006 03810
  17. 2016.06.06 오기사, 여행을 스케치하다 - 오영욱 예담 2008 03810 1
  18. 2016.03.10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살아보기 - 김남희 웅진지식하우스 2015 03810
  19. 2016.03.07 여행자의 책 - 폴 서루 책읽는수요일 2015 03840 1
  20. 2016.02.18 소소하게, 여행중독 - 문상건 더블:엔 2016 13980
  21. 2015.12.10 모든 요일의 기록 - 김민철 북라이프 2015 03810
  22. 2015.11.26 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야하고 이상한 여행기) - 김얀 달 2013 03810
  23. 2015.11.16 오늘이 마지막은 아닐꺼야 - 정도선, 박진희 마음의숲 2015 03810
  24. 2015.11.09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7년 동안 50개국을 홀로 여행하며 깨달은 것들) - 카트린 지타 걷는나무 2015 03850 1
  25. 2015.10.29 리스본행 야간열차 - 파스칼 메르시어(페터 비에리) 들녘 2014 04850
  26. 2015.10.26 떠나는 이유(가슴 뛰는 여행을 위한 아홉 단어) - 밥장 앨리스 2014 03810
  27. 2015.10.15 헤세의 여행 - 헤르만 헤세 홍성광편역 연암서가 2014 03850
  28. 2015.10.08 헤밍웨이의 작가 수업 - 아널드 새뮤얼슨 문학동네 2015 03840
  29. 2015.10.05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 2015 03830
  30. 2015.09.30 여행자 예찬 - 프란츠 카프카 하늘연못 2011 03850




할머니의 죽음은 화수에게 이상했다. 처음 이 삼 년은 무철 단단하고 확실히 느껴졌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할머니가 계속 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계속된다는 말은 좀 미묘하지만, 육체의 죽음을 받아들이자 육체가 아닌 부분은 지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16

질문자 : 성공적인 결혼의 필수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심시선 : 폭력성이나 비틀린 구석이 없는 상대와 좋은 섹스.
..
질문자 : 선생님도 참. (웃음) 폭력서오가 비틀린 구석이 없다는 건 너무 베이직 아닌가요?
심시선 : 베이직은 갖춘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고 봅니다. 안쪽에 찌그러지고 뾰적한 철사가 있는 사람들. 배우자로든 비즈니스 파트너로든 아무데도 못 갖다 써요. 꼭 누군가를 해치니까.
..
심시선 : .. 대화는 친구들이랑 합니다. 이해도 친구들이랑 합니다.
..
심시선 :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구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을 확률은 아주 낮지 않을까요? 그리고 규칙적인 근사한 섹스의 가치를 너무 박하게 평가하지 마세요.
..
심시선 : 사흘에 한 번씩 섹스를 하고 싶은 사람들 말고는 결혼을 안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19-21

“.. 겉도는 대화는 절대 안 하는 분이었달까.”
“겉도는 대화?”
“보통은 며느리가 뭘 하고 사는지 그렇게까지 궁금해하지 않잖아. 그런데 어머님은 정말로 내가 뭘 하고 지내는지 궁금해했어. 무슨 책을 읽는지, 어떤 내용인지,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22

외국어도 잘하고 욕도 잘하는 사람이었고, 어쩌면 그것은 같은 능력일지도 몰랐다.  27

명혜는 명은더러 다른 모두가 더하기의 인생을 살 때 혼자 빼기의 인생을 산다며 감탄인지 비난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했었다. 명은은 자신이 택한 빼기의 인생이 싫지 않았다.  31

폭력은 사람의 인격을 조각한다. 조각하다가 아예 부숴버리기도 하지만, 폭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폭력의 기미를 감지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얻은 감지력을 유용하게 쓰는 사람도 있고 절망해 방치해버리는 사람도 있어서 한 가지 결로 말할 수는 없다.(심시선)  126

약간의 아슬아슬함을 감수하더라도 지금까지 몰랐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라 여겼다. 사람이 제일 신나는 모험이었다.(우윤)  130

‘에디 우드 고(Eddie would go)’ - 에디 아이카우라는 유명한 서퍼를 기념하는 문장. “구조대원일때 물에 빠진 사람들을 엄청 구했다던데? 수영으로도 구했지만 보드를 손으로 척척 젓고 가서 끌어올렸대.” .. “그리고 사는 게 멋졌던 사람은 죽는 것도 멋졌더라. 고대 항해 기술을 재현하려는 탐사대에 합류했는데, 탐사대 전체가 조난을 당하고 만 거야. 그때 에디가 구조대를 불러오겠다며 혼자 자기 서핑 보드를 타고 바다를 가로질러갔대. 막상 탐사대는 다른 배에 구조되었고, 에디는 실종되고 말았지만……”
..
“데이 우드 고, 라는 말 자체가 서핑 대회 때 어미어마하게 큰 파도가 왔을 때 누가 한 말이라지만 사실 다르게 해석되기도 하겠다.”
“결정적인 순간에 타인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스스로가 다치게 되어도, 그런 의미로?”  139-141

“.. 쓰는 게 뭐 대단한 것 같지? 그건 웬만큼 뻔뻔한 인간이면 다 할 수 있어. 뻔뻔한 것들이 세상에 잔뜩 내놓은 허섭스레기들 사이에서 길을 찾고 진짜 읽을 만한 걸 찾아내는 게 더 어려운 거야.”(난정)  166

“할머니는 할머니의 싸움을 했어. 효율적이지 못했고 이기지 못했을ㅈㅣ 몰라도. 어찌되었든 사람은 시대가 보여주는 데까지만 볼 수 있으니까.” (화수) 182

할머니는 욕도 표현의 일종이라고, 다만 정확하고 폭발력있게 욕을 써야 한다고 말했었다.(화수)  183

“젊어”
걷다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땅이 너무나 젊었다. 걸어도 걸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 평소 명은이 거닐고 파들어가는 땅은 늙고 고정된 땅이었다. 그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기분 전환이 되었다.(명은). 195

매일 비슷한 날들이 지속되면 머릿속에 깃발 같은 것이 남지 않는다. 깃발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단편적인 이미지들만이 종종 떠오른다.(심시선)  201

열려 있는 사람(체이스)  204

“나는 세상에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생각해. 남이 잘못한 것 위주로 기억하는 인간이랑 자신이 잘못한 것 위주로 기억하는 인간. 후자 쪽이 훨씬 낫지.”
“두 종류로 나누는 건 너무 단순화시킨 거 아냐?”
“그러게, 그러면 안 되는데.”(체이스와 지수)  208

어른들은 기대보다 현저히 모르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해림은 인생의 중요한 선택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226-227


예술에 통계 같은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워낙 특수한 사례들이 많아서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은 헐거운 관찰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할 테지만, 지켜본바 작가들이 이십 년에 한 번씩 큰 변곡점을 그리지 않나 생각해왔습니다. .. 농담이 아니라 여든 살에도 변화는 옵니다. .. 일종의 도약 지점 같은 것일까요? ..
이십 년에 한 번 씩 오는 격변은 표현 능력의 도약일 수도 있고, 새로운 주제로의 전환일 수도 있고, 갑자기 마음을 빼앗는 재료일 수도 있고, 그때껏 발견하지 못해ㅐㅆ던 색일 수도 있고, 참선 끝의 득오일 수도 있습니다.(심시선)  228-229

다시 떠올리기 싫은 어설픈 젊음이었다.
그 어설픔이 이제 사라졌는지? .. 모친이 늘 하던 말이 맞았다. 같은 일을 이십 년쯤 하면 계단 턱 같은 것을 만나게 되고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성취감이 있었다.(명준)  231

“빼앗긴 것은 영영 복구되지 않고, 빼앗아간 사람들은 자기가 뭘 했는지도 몰라. 미국을 봐. 2차대전 때 군국주의자들이랑 싸웠다는 것만으로 정의의 편인 것처럼 굴지만 하와이에 한 짓을 봐.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한 짓도. 제국주의자들은 자기가 제국주의자인 걸 몰라. 인정을 안 해.”
..
“.. 특별히 어느 지역 사람들이 더 잔인한 건 아닌 것 같아.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겐 기본적으로 잔인함이 내재되어 있어. 함부로 굴어도 되겠다 싶으면 바로 튀어나오는 거야. 그걸 인정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에 따라 한 집단의 역겨움 농도가 정해지는 거고.”
“역겨움의 농도라니 재밌네.”
“비슷한 일을 겪어놓고 여기 하하호호 하며 관광 오면 안 되었던 것 같아.”
“큰누나한테 그렇게 말해봐.”
“무서워서 못해…… 어쨌든 하와이를 좋아하면 하와이에 오면 안 되는 거였어. 제주도를 아끼면 제주도에 덜 가야 하는 것처럼.”
“오기 전엔 몰랐잖아. 와야 알 수 있는 것들인데.”
“그건 그래.”(명준과 난정)  234-235

“응, 당신은 괜찮은 벽이야.  내가 생각을 던지면 재밌게 튀어 돌아와.”(난정)  237

심시선 : .. 어떤 시대는 지나고 난 다음에야 똑바로 보이는 듯합니다.
..
심시선 : .. 세상은 참 이해할 수 없어요. 여전히 모르겠어요. 조금 알겠다 싶으면 얼굴을 철썩 때리는 것 같아요. 네 녀석은 하나도 모른다고.  256

“여자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큰 거 해야 해요. 좁으면 남들 보고 비키라지. 공간을 크게 크게 쓰고 누가 뭐라든 해결하는 건 남들한테 맡겨버려요. 문제 해결이 직업인 사람들이 따로 있잖습니까? 뻔뻔스럽게,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세요. ..“(심시선)  269

“전형적인 집안에서 태어나 뭔지 알 수 없는 집안으로 장가를 왔지.”(태호)  274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
각자에게 주어진 질문 하나에 온 평생으로 대답하는 것은 질리기 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대가들일수록 질려하지 않았다. 즐거워했다는 게 아니다.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심시선)  288-289


기억하지 않고 나아가는 공도에는 본 적이 없다. ..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손맛이 생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무것도 당연히 솟아나진 않는구나 싶고..  298-299

“.. 사랑은 돌멩이처럼 꼼짝 않고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빵처럼 매일 다시,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거래..”  304

“.. 세상의 일그러지고 오염된 면을 너무 가까이서 보게 되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는 거야. 그걸 설명할 언어를 찾을 때까지는. 어떤 건지 이해가 가?..”  305

결혼을 매 순간 갱신하는 계약으로 생각하는 집안의 딸과 결혼하는 게 아니었어. 알면서도 뛰어들었지. 바보였지……  305

언젠가 시선이 픽션은 존재하는 사람들과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대화라고 했던 것이 생각나 ..  311

경아가 잠든 해림의 티셔츠를 가리키며 “노란색을 입었어, 내가 몰래 넣어놓은 걸 입었어” 하고 기뻐하며 속삭였다. 해림의 티셔츠 색깔 말고도 무언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앞서 짚기보다는 천처니 발견해나가기로 마음먹고 등을 기댔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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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책을 쓰면서 생각했다. 여행을 멈추었을 때도 행복할 수 있는 여행이 진짜 여행이라는 것을.  10

인도에서 여행자로 살면서 고집을 부리거나 욕심을 내는 건 어리석다. 이방인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현지인들의 눈빛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26

내 감정의 온도가 여행의 온도는 아니다.
여행의 속도가 여행의 온도를 달구는 것도 아니다.
이제 나는 이동수단에도 목적지에도 관심이 없다.
그저 내 가슴이 다시 뜨거워지거나 영혼이 치유되는 여행, 느린 여행이라도 진짜 나를 위한 여행을 하고 싶다.  54, 78

가짜인 나를 벗고 진짜인 나를 만나려면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 여행은 떠난다는 의미에서 보면 이동이고, 머문다는 의미에서 보면 공간이다.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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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파도를 만드는 사람은 나 자신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은 마음이 시키는 것이 있을 때에도, 몸이 시키는 일이 있음에도 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마음의 사용법과 몸의 사용법 앞에서 숱하게 주저해왔다. 혼자 헤쳐온 일이 거의 없는 생을 산다면 우리는 자주 난감해할 뿐더러 인생의 그 어떤 무늬도 만들지 못한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살면서 큰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거기서 더욱 성장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아주 작은 일로도 탈진 상태가 된다. 만일 그들 자신에게 의지력이 없거나 자신들의 책임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그들을 쓰러뜨리게 된다
라고.
당신이 혼자 있는 시간은 분명 당신을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어떻게 혼자인 당신에게 위기가 없을 수 있으며, 어떻게 그 막막함으로부터 탈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혼자 시간을 쓰고, 혼자 질문을 하고 혼자 그에 대한 답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닥쳐오는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은 그 외로움 앞에서 의연해지기 위해서라도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면서 써야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을 목숨처럼 써야 한다. 그러면서 쓰러지기도 하고 그러면서 일어서기도 하는 반복만이 당신을 그럴듯한 사람으로 성장시킨다. 비로소 자신의 주인이 되는 과정이다. 물론 자기 안에다 주인을 ‘집사’로 거느리고 사는 사람이다.
오늘밤도 시간이 나에게 의미심장하게 말을 건다. 오늘밤도 성장을 하겠냐고. 아니면 그저 그냥 지나가겠냐고.
인생의 파도를 만드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보통의 사람은 남이 만든 파도에 몸을 싣지만, 특별한 사람은 내가 만든 파도에 다른 많은 사람들을 태운다.

- 이제는 정말로 안녕일까
참 많은 여행을 했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제는 어떻게 어떤 여행을 하는가가 중요한 차례가 되었다.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짧은 여행을 즐기지 않는다. 여행을 하면서도 정주하거나, 여행을 하면서도 그곳 사람들 속에 흠뻑 젖는 것을 선호한다. 거미도 짧게 있으려고 집을 짓지 않는다.

- 나는 능선을 오르는 것이 한 사람을 넘는 것만 같다
누군가에게 산은 무의미일 수 있더라도 나에게는 명백한 의미다. 산을 넘을 때마다 생각한다. 힘겹게 산을 넘을 때마다 힘겹게 한 사람을 여행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산을 넘는 것 같지만 실은 ‘한 사람’을 만나는 과정, 그대로를 따라가보는 것이다. 한 사람을 아느라, 만나느라, 좋아하고 사랑하느라. 그리고 표정이 없어지다가, 멀어지다 놓느라...... 마치 산을 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가졌다는 것은 그 한 사람을 등반하여 끝내 정상을 보겠다는 것, 아닌가. 한 사람의 전부를 머리에 가슴에 이고 지고 오른다.

- 왜 혼자냐고요 괜찮아서요
고독을 모르면서 나이들 수는 없다. 혼자인 채로 태어났으면서 애써 고독을 몰른 체한다면 인생은 더 어렵고 더 꼬이며 점점 비틀린다. 고독의 터널 끝에 가보고 고독의 정점과 한계점을 받고 서서 웃는 자만이 ‘혼자를 경영’할 줄 아는 세련된 사람이 된다. ...
종교가 간절한 시대는 지난 것인지 사람들은 이제야 시간을 믿기 시작했다. 시간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고 시간이 우리에게 보상을 해준다고 믿기로 한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아무렇게나 쓰는 사람 말고 ‘혼자있는 시간’을 잘 쓰는 사람만이 혼자의 품격을 획득한다. ‘혼자의 권력’을 갖게 된다.
혼자 해야 할 것들은 어떤 무엇이 있을지 혼자 가야 할 곳도 어디가 좋을지 정해두자. 혼자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혼자 잘 지내서 가장 기뻐할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것도 알아두자. 이것이 혼자의 권력을 거머쥔 사람이 잘하는 일이다.

- 당신이 나를 따뜻하게 만든이유
어떤 이에게 말을 걸어야 할까. 말을 걸어야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세상엔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만 있다. 많은 사람들은 간단하게 말하는 법, 어떤 상황이 되어도 평균에만 맞춰서 말하는 법, 자기식으로 정리해서 남에게 옮기는 법에만 열심이다.

- 우리 서로가 아주 조금의 빗방울이었다면
‘여행뽕’이라는 말이 있다. 여행중에 우리의 허전함은 어떤 특별한 시간이나 사건을 기대하면서 맥없이 허우적대기도 하는데, 딱히 안 그래도 될 것 같은 상황에서 어느 한 사람(혹은 그곳 분위기)에게 무작정 빠져들고 마는, 그러나 막상 여행지에서 돌아와서는 그 감정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아무래도 약발이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화들짝, 여행뽕이라는 새로 만들어졌다는 그 말 앞에서 나도 모르게 동공이 열리고 마는 것은, 우리가 한때 같이 지낸 사람들과의 좋았던 시절은 그저 여행뽕이거나 ‘사람뽕’에 취한 상태에 불과한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다.

- 매일 밤, 여행을 마친 사람처럼 굿나잇
누군가와 여행을 함께하려고 하지 말라.
큰일난다.
갑자기 나에게 아무 일도 아닌 일로 붉어진 얼굴을 보이거나 어쩌면 짜증 섞인 소리로 다그칠지도 모른다. 그냥,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긋나고 만다.
잠자는 시간도 습관도 다르다. 먹는 시간도 먹는 취향도 다르다.
어떤 분위기를 좋아하고 어떤 분위기에 휩쓸리는지도, 그곳에서 꼭 하고 싶은 한 가지의 목적마저도 다르다. 아무래도 어긋나고 마는 것이다.
혼자는 왜 안된다고 생각하는지ㅡ 혼자여야만 가능한 단 하나가 있는데 그게 바로 여행이다.
그런데도 같이 가겠는가  외로움과 두려움을 조금 해결해보겠다고 나눠보겠다고, 굳이 누구랑 같이 가겠는가. 아니, 말리고만 싶다. 혼자하는 여행의 긴장이 쌓이면 쌓일수록 외로움과 두려움 따윈 집 안에 아무렇게 굴러다니는 고무줄 같은 게 되고 만다.
혼자 여행을 해라. 세상의 모든 나침반과 표지판과 시계들이 내 움직임에 따라 바늘을 움직여준다. 혼자 여행을 해라. 그곳에는 없는 사람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된고, 더군다나 여기에서도 들었던 똑같은 이야기 따위는 듣지 않아도 된다.
혼자 여행을 한다는 건 나를 보호하고 있는 누군가로부터, 내게 애정을 수형해주며 쓸쓸하지 않게 해주는 당장 가까운 이로부터, 더군다가 아주 작게 나를 키워냈던 어머니의 뱃속으로부터 가장 멀리, 멀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자신 만만히 믿었던 것들을 검은색 매직펜으로 지워내는 일이다.
세상 흔한 것을갖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남들 다 하는 것을 하고 싶은게 아니라면 나만 할 수 있고, 나만 가질 수 있는 것들은 오직 혼자여야 가능하다.
혼자 있는 그곳은 속깊은 문장을 알려준다. 내가 숱하게 화를 내야만 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공손하게 손을 모으게 한다.

- 그림으로 사랑의 모양을 그려보세요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사랑의 꼴도 다르다. 누구를 사랑하느냐에따라 내가 얼마만큰의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또한 누구를 어떻게 떠나 보냈는지가 남은 사람을 입체적으로 성장시킨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
....
요즘엔 사랑인지 아닌지 모르는 채 애매한 감정으로 만나고 있는 연인들이 많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그 색이 짙지도 않고 감정이 치열하지도 않은 채로 사랑하는 상태를 그들은 사랑이라 한다. 이 또한 시대의 색깔일까. 차오르는 육체의 감정을 해소시킬 대상을 만나는 것이거나, “사귀는 사람 있어요?” 같은 세상의 잦은 질문들에 대답하기 쉬운 상태에 놓이기를 바라는 것일까. 허전한 공백 상태를 못 견디는 세대의 특성이 시대의 물살을 맹물 같은 사랑으로나마 건너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 관계를 통해 위로는 받을 수 있을지라도 요긴하게 성장을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사랑에 온전히 몸을 박고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 사랑에 몸을 들여놓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줄기가 없으니 사랑의 양분이 가닿을 곳이 없는 형국이다.
사랑을 하느라 아파하는 것은 성장통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많은 질량의 고통을 포함하고 있는데다, 인류가 사랑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헤어나오질 못하는 것은 고통의 바닥에 고여 있는 단물에 빨대를 대고 있어서다. 이건 마치 성장주스와도 같다. 그 한 사람을 사랑했는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그 사랑을 자신이 많이 성장햇는가를 따져보는 것이다. 혼돈의 대륙을 통과하면서 방황하지 않은 사람에게 삶을 읽어내는 능력이란 없다.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성장은 시작된다.  
.....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다른 이름은 ‘생각한다’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이란 ‘생각한다, 생각한다, 생각한다, 생각한다의 연속선’이다. 오죽하면 ‘사랑’이란 말의 어원이 ‘사량’ 즉 ‘생각의 양’이라는 설도 있겠는가. 어떤 경우에도 한 대상이 생각이 나고, 어떤 상황에서도 한 사람을 향한 생각이 불쑥 모든 것을 앞질러 덮는 형편 혹은 경로가 사랑이다. 이 화학 작용 앞에서는 누구도 포로가 된다. 감당이 어렵다. 이런 반복을 통해 대상을 가까이 느끼려 하고 이내 가지려 할 것이므로 결국 ‘생각’은 표적을 거느린 ‘화살’인 것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줄자가 있다. 사랑은 이 줄자를 놓치지 않으려 하면서 좀더 가까운 거리로 당신다. 안간힘으로 당겨보지만 실제 느낌과는 다르게 좀처럼 가까워지지도 않는다. 우리가 사랑을 하고 있는 상태라면 그 거리가 몇 센티인들 적당하다고 믿겠는가.
사랑을 하려는 마음엔느 사랑을 받으려는 넓은 ‘대륙’이 차지하고도 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려니, 자기 자신을 증명해내는 일이 사랑이기도 하려니 그래서 그 욕망의 대륙은 점점 더 손을 쑬 수 없을 정도로 드넓어져 간다. 그러기에 지독히 앓을 뿐이다.
.....
사랑은 ‘정답’과는 거리가 멀다. 차라리 사라은 모든 답을 거부한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가장 유일하 ‘무엇’이 있으니 바로 ‘이것’ 아니겠는가. 사랑.

- 바람이 통하는 상태에 나를 놓아두라
그녀를 안 지 얼마나 됐을 때였을까. L은 독자로 만난 사이였다.
-이병률이 글을 쓰는 것은 뭐 때문일까요?
나는 얼른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글을 쓰는데, 그나마 사람들이 그 글을 읽어주는 건요?
역시 더 어려운 질문이었다. 다시 L이말햇다.
-그건 자기를 지키고 있어서예요. 자기를 어디로든 보내지 않고 묵묵히, 굳건히 자기를 지키고 있어서예요. 그걸 신이 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거고요.
그래서 내가 물었다.
-자기를 지키는 일은 어려운 일인가요?
쉬운 물음 같기도 했으며 물음 같지도 않았지만 나는 어쨌든 물었다. 어쩌면 내가 글이랍시고 쓰는 글을 절대 좋아하지 않기에 나는 물었는지도.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 아닌가요. 어떤 것에 의해 우리는 자신을 쉽게 잃어요. 하늘이 정해준 적당한 범위가 있는데 그걸 자꾸 벗어나려고 하고요. ... 우리 어쩌면 자신을 망치는 일이 더 쉬운지도 몰라요.
내가 숙연해진 것은 그 말이 당연한 말이어서가 아니라 CT 촬영을 해서라도 내가 정녕 그렇게 살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알고 있다. 나를 지키는 삶을 살 수 있을 때 내 머리 위에 늘 나를 지켜주는 새 한마리가 앉아 있을 거라는 걸. 하지만 아직, 내 머리 위에 새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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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travel’이 ‘여행’이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된 것은 14세기 무렵으로, 고대 프랑스 단어인 ‘travail’에서 파생한 것으로 춛정하고 있다. 이 단어에는 현대의 우리가 ‘여행’ 하면 떠올리는 즐거움과 해방감이 거의 들어 있지 않다. 노동과 수고, 고통 같은 의미들이 담겨 있을 뿐이다. 현대 영어에서는 아직도 ‘travail’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고생, 고역 등이며 ‘in travail’이라고 하면 ‘산고로 몸부림치다’같은 의미가 된다. 자기가 태어난 곳에 머물지 못하고 타향을 헤매는 것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행한 운명으로 여겼다. 우리나라에서도 점을 쳐서 ‘객사’라든가 ‘역마살’이 나오면 불길하게 생각했다. 서양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 20세기 이전까지는 재미로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쉽게 상상하지 못했다. 멀리 떠나는 자는 삶의 터전을 빼앗겼거나,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종교적 열정으로 떠나는 순례도 있었지만 험난하고 고생스러웠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편안한 믿음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이상, 여행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게 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정신이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의 믿음에 집착한다면 여행은 재난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예전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성격 차조 워크숍’이라는 수업이 있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를 창조해보는 수업이었다. 학생들이 만들어온 인물들은 대체로 모호하다. 주인공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회사원(대학생, 공무원 등등)이에요.’ 그럴 때 이렇게 맗하는 것이 선생으로서의 나의 역할이었다.
“평범한 회사원? 그런 인물은 없어.”
모든 인간은 다 다르며, 자셋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조금씩은 다 이상하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다름’과 ‘이상함’을 끝까지 추적해 생생한 캐릭터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스프레드시트로 표를 하나 만들어 소설을 쓸 때마다 사용한다. 비중이 있는 인물이면 그의 외모부터 습관, 취향까지 다양한 항목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해본다. 마치 앙케트 조사와 비슷하다. 역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인물의 내면이다. 윤리적 태도, 성(性)에 대한 관념, 정치적 성향 등, 십여 개의 항목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변하다보면 인물에 대해 좀더 또렷한 윤곽이 그려진다. 그런데 인물의 내면 부분에서 내가 제일 고민하게 되는 항목은 ‘프로그램’이다. 노아 루크먼은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인물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념’으로 ‘프로그램’을 설명한다. 인간의 행동은 입버릇처럼 내뱉고 다니는 신념보다 자기도 모르는 믿음에 더 좌우된다.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된다. ‘흑인은 지적으로 열등하다’ 같은 고정관념도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인종차별주의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백인은 어쩌다 뛰어난 지적 성취를 이룬 흑인을 만다면 ‘흑인이지만 정말 대단하다’는 대사를 칭찬이랍시고 치게된다. 작가가 미리 생각해둔 프로그램이 인물의 대사가 되어 배우의 입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는 순간, 관객은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더 넓게 보자면 ‘프로그램’이란, 인물 자신도 잘 모르면서 하게 되는 사고나 행동의 습관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나쁜 일이 일어나면 모두 자기 탓으로 귀인한다(‘내가 손대면 되던 일도 안 돼’). 반대로 어떤 이는 언제나 남 탓으로 돌린다(‘내가 뭐랬어? 도대체 일을 제대로 하는 놈들이 없다니까!’). 어떤 인물은 뭐든지 신중ㅎ하게 조심하는 게 최선이라고 믿기 때문에 새로운 일을 거의 벌이지 않고, 반면 이떤 사람은 무슨 일이든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게 낫다고 확신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한다. 이런 것도 프로그램이다.

생각과 경험의 관계는 산책을 하는 개와 주인의 관계와 비슷하다. 생각을 따라 경험하기도 하고, 경험이 생각을 끌어내기도 한다. 현재의 경험이 미래의 생각으로 정리되고, 그 생각의 결과로 다시 움직이게 된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밤에 하지 말았어야 할 말부터 떠오르고, 밤이 되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뒤척이게 된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를 말아야 하고, 불안한 미래는 피하는게 상책이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미적거리게 된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놓는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인생이 여행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선가 오고, 여러 가지 일을 겪고, 결국은 떠난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지구라는 별에 도착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여해은 먼저 도착한 이들의 어마어마한 환대에 의해서만 겨우 시작될 수 있다. 신생아는 자기가 도착한 나라의 말을 모른다. 부모와 친척들이 참을성을 가지고 몇 년을 도와야 비로소 기초적인 언어를 익힐 수 있다. 부모는 아이가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가 될 때까지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다. 충분히 성장하면 인간은 지구에 새로 도착한 여행자들을 환대함으로써 자신이 받은 것을 갚는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갈 때, 남아 있는 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을 환송한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문명은, 마치 다른 세계로 떠나는 여행자를 배웅하듯이 망자를 대한다. 관 속에 노잣돈이나 길동무 인형을 넣어준다. 철저한 무신론자조차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면 그들이 다음 세상에서 평안하기를 기원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타인의 환대 없이 지구라는 행성을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도 현지인의 도움을 절댇적으로 필요로 한다. 인류는 오랜 세월 서로를 적대하고 살육해왔지만 한편으로 는 낯선 이들을 손님으로 맏아들이고, 그들에게 절실한 것들을 제공하고,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며 떠나보내오기도 했다. 거의 모든 문명에, 특히 이동이 잦은 유목민들에게는 손님을 잘 대접하라는  계율들이 남아 있다.

환대의 관점에서 지난 여행들을 돌아보면,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쑥 튀어나와 아무 대가 없이 도움을 주었다.

철학자 알폰소 링기스는 여행에서 우리가 낯선 이에게 품는 신뢰, 그것의 기묘함에 해대 썼다.
‘고향과 공동체를 떠나 한동안 먼 곳에서 지내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때 우리는 매일 낯선 사람을 신뢰하게 된다. 그 사람과 핏줄로 이어져 있지 않은 것은 물론 신념이나 공동체를 공유하지도 않고 계약으로 묶여 있지도 않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가 어떤 가족이나 부족의 일원인지도 모르며 그가 사는 마을의 위치도, 그가 사회와 자연과 우주속에서 어떤 부문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를 신뢰한다. 그의 말이나 몸짓도 이해 못하고, 목적이나 동기도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그때 발생하는 신뢰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잘 정의돼 있는 행동으로 이루어놓은 공간을 건너뛰어 그 자리에 당신과 함께 있는 진짜 개인과 곧바로 접촉하는 것이다.
일단 누군가를 신뢰하기로 마음먹으면 우리의 정신속으로 평안함뿐 아니라 자극과 흥분이 파고들어 온다. 신뢰란 다른 생명체와 맺어지는 관계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을 준다. (...)
신뢰란 죽음만큼이나 동기를 짐작할 수 없는 어떤 인물에게 의지하게 만드는 힘이다. 낯선 이를 신뢰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
신뢰 안에는 용기뿐 아니라 기쁨과 유쾌함도 들어 있다. 신뢰는 위기가 닥쳤을 때 웃게 해준다. 그리고 성적인 매혹도 신뢰와 아주 흡사하다.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푹 빠지면 한없이 끌려가게 되듯 무조건적인 신뢰로도 마찬가지다. 역으로 신뢰에도 성적인 면이 있다. 왜냐하며 신뢰는 타인의 알 수 없는 핵심에 집착하는 맹목적인 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뢰는 차인의 감정 및 영향력과 연결된다. 스카이다이버가 낙하산을 건네기 위해서 자신의 뒤를 따라 낙하하는 동료에게 보이는 신뢰감에는 어딘가 성적인 면이 있다. 정글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원주민 젊은이에게 보이는 그 신뢰감도 마찬가지다. 신뢰란 대담하면서도 아찔하고 탐욕스럽다.’(알폰소 링기스 <기 ㄹ위에서 만나는 신뢰의 즐거움> 오늘의책, 2014, 10~14쪽).

어떤 도시에서 여행자들은 현지인처럼 보이고 싶어하기도 한다. 여행자의 표지들, 예컨대 커다란 배낭, 편안한 신발, 손에 든 지도, 카메라 등을 숨긴다. 마치 모처럼 휴일을 맞아 산책을 나온 현지인처럼 보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장’은 여행자들이 선망하는 나라와 도시에서만 수행된다. 뉴욕이나 파리, 바르셀로나와 같은 선진국의 매력젖ㄱ인 도시에서는 ‘습격을 감행하는 여행자’가 되어 스테레오타입으로 분류되기보다는 노바디가 되어 가급적 눈에 띄지 않으려 한다.
반면 ‘여기 사시나봐요?’ 같은 말이 별로 달갑지 않은 나라와 도시도 있다. 그때는 여행자로서 현지인과 적극적으로 구별 짓고자 한다. 마치 식민지 인도에 부임했던 대영제국의 관리들이 찌는 듯한 폭염에도 셔치의 단추를 풀지 않고 긴 소매의 재킷을 고집했던 것처럼 여행자의 표지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이렇듯 여행자는 어디로 여행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그 나라와 도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또한 그 도시의 정주민들이 여행자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방식을 적극적으로 조정하고 맞춘다. 때로 우리는 노바디가 되어 현지인 사이에 숨으려 하고, 섬바디로 확연히 구별되고자 한다. 실뱅 테송의 표현대로 여행이 정말 일종이 습격이라면, 여행자들의 이런 선책은 원주민의 힘과 위계에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여행자를 반기지 않고 심지어 공격할 수도 있는 오많한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면, 그리고 그 도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이라면, 여행자는 자신을 최대한 감추며 드러내지 않고자 할 것이다. 베네치아나 바르셀로나, 암스테르담, 교토 같은 도시에서 최근 대두하고 있는 오버투어리즘에 대한 시민들의 적개심을 여행자들도 분명히 알고 있고 때로 현지에서 피부로 느끼기도 한다. 그들은 관광객들이 에어비앤비 같은 숙박공유 서비스를 통해 집세를 폭등시키고, 쓰레기를 마구 버리며, 교통 혼잡을 야기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습격을 당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반면 현지인 상당수가 관광으로 생계를 해결하고, 여행자에게 비굴할 정도로 친절한 도시에서 우리는 굳이 자신을 현지인으로 가장하거나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 도시의 원주민들이 우리가 떠나온 나라에 대해 강력한 호감까지 갖고 있다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 그럴 때면 개별적인 자아 대신 더 매력적인 집단적 페르소나 뒤에 숨고자 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페르소나’는 연극에서 배우가 쓰는 가면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뒤에 그 말은 사람이나 인격, 성격을 가리키는 단어들의 어원이 되었다. 여행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가면을 쓰면서 자신의 모습을 바꾼다. 그러면서 부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고향에서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여행지에서 쓰는 가면이 조금 낯설 뿐이다.

실뱅 테송의 말처럼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하러 그 먼길을 떠나겠는가.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현명한 여행자의 태도는... 스스로를 낮추고 노바디로 움직이는 것이다.

여행이 길어지면 생활처럼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충분한 안정이 담보되지 않으면 생활도 유랑처럼 느껴진다.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젆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 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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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무엇을 수확했는가에 따라 하루하루를 판가름하지 말라.
당신이 어떤 씨앗을 심었는가에 따라 하루하루를 평가하라.’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여행이 저절로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여행을 통해서라도 내 삶을 바꾸겠다는 절실한 의지가 우리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여행은 타인의 삶의 터전을 방문함으로써 내 삶의 터전을 가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행위이기도하다. 결국 내가 사는 장소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일상의 화두로 돌아오지 못하는 여행은 영원한 방랑에 그칠 수 밖에 없다.

나는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누군가의 꿈을 응원해준 적이 있는가. 아무런 조건 없이, 내가 도와줬다는 표시도 없이, 아무도 모르게 그의 꿈을 후원해준 적이 있는가. 물론 더 따뜻하고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우리가 좀 더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더 많이 서로의 꿈에 귀 기울이고, 최선을 다해 서로의 꿈을 응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누구도 내 꿈을 응원하지 않을 때, 우리는 내 생의 가장 멋진 후견인은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끊임없는 비극과 고통 속에서도 풀과 나물들은 비명 한 번 내지르지 않고, 불평 한 번 없이, 절대로 도망치는 법도 없이 묵묵히 새 삶을 준비합니다. 다가오는 비극과 고통이 그들을 오히려 더 강한 존재로 만들어줍니다.’ - 김영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그녀는 ‘나 자신을 찾는다’는 것이 옷가게에서 예쁜 옷을 찾는 것 같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위험천만한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자신을 던져야만 해낼 수 있는 세상과의 싸움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침묵하고, 순응하는 여성들에게 선언한다.
‘아무리 사소하고 아무리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성찰하고, 책을 읽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강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충분한 돈을 여러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 바랍니다.’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나는 믿는다. 시간은 사람을 바꾸지 못하지만, 장소는 사람을 바꾼다는 것을. 여행에 진정으로 중독된 사람들은 특정 장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장소에 가면 그 장소에 맞게 자신도 모르게 놀라운 화학변화를 일으키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물의 ‘결’을 안다는 것은 오랜 시간의 관찰과 기다림과 이해심을 필요로 하는 말이다. 타인의 숨결에 익숙해지는 일이 바로 누군가와 친밀감을 쌓는 일인 것처럼, 바다의 물결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파도를 제 몸처럼 다루며 눈부시게 서핑을 즐길 수 있다. ... 진정 아름다운 공간은 그 공간을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석에 이끌이듯 나 스스로 그 장소에 맞게 나의 모든 것을 맞추게 되는 곳임을. 그 장소를 사랑하기 위해 나를 기꺼이 바꾸는 일, 그것이 바로 여행이 가진 신비한 마력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싫어한다’고 했을 때, 그 대상에 대해 정확히 알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어떤 순간적 인상 때문에, 또는 다른 안 좋은 기억과의 엉뚱한 연결 고리 때문에, 아무 죄 없는 대상이 싫어질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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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여행, 이토록 무의미한 아름다움이여.
여행은 우리 마음속에 아름다움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새벽 안개 가득한 거리, 홀로 걸어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던 비엔나의 11월. 내겐 마음이 아직 남아있구나. 나를 글썽이게 만드는 이토록 무의미한 아름다움이여.
여행을 하며 나는 세상과 상관없는 일이 되어 가고 있다. 폭포는 끝없이 낙하하고 폐허는 점점 아름다워지고 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우린 모두 처음 살고 있으니까요.  5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건
‘잘해 보자’, ‘열심히 해 보자’ 이런 게 아니라
조금만 너그러워 지자.
어제보다 하루만큼 더 살아왔으니까 말이다.  15

파이팅!!! 같은 건 하지 말자.
그런 거 안 했지만 우린 지금까지 열심히 잘 달려왔잖아.
최선을 다하려고도 하지 말자.
그것도 하루 이틀이잖아.
매일매일 죽을 힘을 다해 달리려니까 다리에 쥐 난다.
지친 것 같다.
조금은 적당히.
조금은 대충대충.
좀 걸어 보는 건 어떨까.
걸으며 손도 잡고 주위도 돌아보고 그러자.
오늘부터는 하고 싶은 것들을 조금씩 하면서 갖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가져가면서
생각하고 싶은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하면서.  25

나는 좀 더 외로워져야겠다.
안개 뒤에서
길 위에서
불꺼진 창문 너머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1000번 광역 버스 안에서
더블린, 카이로, 루앙프라방, 도쿄 혹은 사파에서.  75

허물어진 사랑은 허물어진 대로
그대로 두겠다.
어쩌면 그것 또한 보기 좋을 것이니.  76

우리가 경험하는 여행은 논픽션이지만 우리가 추억하는 여행은 픽션이다.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은 멋지게 이륙하는 비행기의 가벼운 각도다.
아쉬운 건 우리가 여행을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여행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수백년 전의 여행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여행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분명 매혹적인 일이다.
여행자는 생의 비밀을 엿보고 싶어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어떤 이즘(ism)을 설득하고 성취하기 보다는 그것을 살아버린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여행과 음식, 숙소, 길, 삶의 태도와 방식에 대한 편견은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그들은 그것을 직접 몸으로 느끼고 스스로 얻어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새로운 좌표를 만들어 왔다. 해안선을 넓히고 고도를 높였다. 시간을 확장하고 공간의 깊은 곳을 탐색했다. 지도를 만든 것을 그들이다.

여행, 그것은 삶과의 달콤한 밀월을 즐기는 일이다.
우리의 여행이 서사를 장착할 필요는 없다. 교훈적일 필요는 더더욱 없다. 그건 각설탕 같은 것이다. 넣어도 그만 안 넣어도 된다. 우리의 여행은 단지 생의 체온을 조금 높이는 정도면 충분하다.
‘즐기고 탐닉하라’ 이것이 여행자의 첫 번째 행동강령이다.
여행은 고백의 한 양식, 익명적 중얼거림, 세상에 대한 깊이 없는, 그래서 가벼운 그렇기에 유쾌한 찰나적인 긍정.
여행이 자신을 위해 많은 일을 해 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그러나 여행만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고 믿어라.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우리는 처음 보는 생의 풍경을 문득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겁먹지도 말고 망설이지도 마라. 그 풍경은 당신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니까. 우리는 단지 설레기만 하면 된다.
누구나 자기만의 환상을 좇아 여행을 떠난다. 어떤 이는 환상을 깨기도 하고 어떤 이는 환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어떤 것이 옳다고는 할 수 없다. 여행은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행은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하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일이다. 그 시간 속에 슬며시 심장을 올려놓는 일이다.

길과 가장 잘 사귀는 방법은 외로움과 친구가 되는 거야.
나이가 든 여행자들을 존경하라. 그들 대부분은 인생의 교훈을 체득한 이들이다.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어, 혹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 여행을 시작한 이들이다. 이들은 낯선 풍물을 보며 신기해하지도 않고, 여행지에서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 따위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여행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은 것이다.  
여행이란 생에 골몰하는 가장 유익하고 헌신적인 방법, 생과의 가장 완벽한 열애.
여행은 언제나 실패다. 성공적인 여행은 없다. 우리는 실패를 경험하기 위해 기꺼이 여행을 떠나고 그 실패는 즐겁다.
이번 여행을 통해 당신이 긍정을 배웠으면 좋겠다.  139-141

여행의 정석
가장 빠른 달팽이처럼.  143

모든 여행은 아름답다. 아름다워야 한다. 현실의 반대말은 비현실이 아니라 여행이다. 여행작가는 그렇게 믿어야 하며 여행작가의 가장 소중한 책무는 여행에 대한 로망을 최선을 다해 보여주는 것이다. 전쟁터 같은 현실에서 독자를 피신시기는 것이다. 세상은 더 이상 외롭지 않고,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지평선 너머에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방법을 찾는 것은 커다란 배낭을 지고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 지평선을 넘어가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사진과 글로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물음 : 여행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나요?
답 : 아, 이건 너무 어려운 질문이네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놓치기 싫어 그토록 손에 꽉 쥐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손에 쥔 모래알처럼 별것 아니었다는 것. 아마도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176

물음 : 훌륭한 여행이란 어떤 것일까요?
답 : 그런게 있을까요? 단지 취향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모험을 하든, 쇼핑을 하든, 미술관을 가든, 하루 종이 ㄹ호텔 수영장에 드러누워 햇빛을 쬐든, 타인의 여행에 대해 왈가왈부하기는 좀 그렇군요. 여행은 그냥 여행이지 ‘훌륭한’ 여행이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하다는 것, 과연 ‘누구’에게 훌륭한 것일까요? 훌륭한 여행보다는 좀 더 사려 깊은 여해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177-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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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들은 대부분 외롭고, 외로운 것들은 대부분 아름답다.
혼자이어야만 닿을 수 있는 곳이 있다.  12

다들 시간이 공평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누구는 열 두 시간 동안 생계를 위해 일하고 여섯 시간 동안 자고 여섯 시간 동안 피곤해서 멍하니 아무것도 못하지만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자기 하고 싶은 일만 한다. 우리에겐 같은 시간이 주어져 있지 않다.
뭔가 잘못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많이 잘못되어 있을 때다. 바로잡기가 힘들다. 니체였던가. “살아야 할 이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살아가는 모든 방식을 견뎌낼 수 있다”는 말을 한 사람이. 그렇지만 우린 너무 많이 견뎌 왔다. ... 남을 견디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것. 어느 것이 더 견딜 만한가.  14

잘못된 길이 지도를 만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행운을 만나는 건 언제나 낯선 길 위에서고 우리를 자라게 하는 것은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실수했다고 다그치지 말아 주세요. 대신 응원해 주시면 안될까요. “괜찮아”하고 말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응원이 실수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들어 주니까요. 낭비라고도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요. 조언은 감사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조용히 지켜봐 주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모른 척 해 주시든지.  27

선인장의 가시는 잎이 변해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사막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죠. 넓은 잎으로는 수분 증발을 막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살다 보니 우리도 점점 선인장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릴 적 환한 햇살을 듬뿍 받아들이던 넓은 잎들은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을 거치면서 어느새 뾰족한 가시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상처받을까 싶어 가까이 가기가 두렵고 가까이 오는 사람도 상처가 될까 마냥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32

더 가지고 싶지만 더 가질 수 없는 하루라는 카드. 하루에 하루만큼씩 꼭 사라지는 하루.
그래서 사랑하는 거다. 시간은 언제나 우리 편이 아니고 우린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으니까. 사라져 가고 있으니까. 사랑이 아니면 이 공허와 허무를 견딜 수 없으니까.  49

우리는 맨발로 해변을 걷는다. 서로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다. 가끔 발걸음을 멈추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어둠 속의 바다를 응시하다 보면 어느 천사가 않아 커다란 눈으로 우리를 바락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들은 손을 꼭 잡고 그렇게 오래도록 잘 살아라.’ 우리를 지켜주는 천사를 만나는 일, 확인하는 일, 그것이 어쩌면 여행이 아닐까.
하루키가 말했다. “작가는 소설을 쓴다-이것이 일이다. 비평가는 그에대해 비평을 쓴다-이것도 일이다. 그리고 하루가 끝난다. 각기 다른 입장에 있는 인간이 각자의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사람과 식사를 하고, 그러고 잔다. 그게 세계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켜야 하고 돌아갈 단 하나의 세계가 있다면 그곳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53

사랑을 더 새롭게 하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아요.
더 많이 사랑하는 것밖에는.
사랑을 배우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하는 것 아닐까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네요.  
그러니 사랑하도록 합시다.
어차피 사랑하는 것이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좋은 거잖아요.
어차피 후회할 거라면 사랑하고 나서 후회하는 게 낫잖아요.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가지면 더 좋잖아요.
당신은 여전히 미지의 방향에 있고.
오늘도 나는 더듬거리며 당신에게로 향합니다.  56

카페에 앉아 물끄러미 내 손을 바라보고 있다. 어느 겨울 당신을, 차가운 손을 덮어 주던 그 손이 지금은 식은 커피잔을 쥐고 있다. 우리는 사랑이 오는 건 보지 못하지만, 가는 건 끝까지 지켜본다.
이별이 슬픈 건 네가 울고 있을 때 내가 그 자리에 없다는 것이다. 빈 자리를 보는 것이 제일 슬프다.
이별 후에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고 이별 후에도 많은 생이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낭비된 시간도 없고, 낭비된 마음도 없다. 모든 인연은 몸속 깊이 새겨진 채 우리의 남은 날들을 작동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 살고 있고 당신은 거기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그게 이별이다.  86-88

다들 젊었을 때 전력 질주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낙오한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 어쩌면 우린 출발선상에서부터 이미 낙오해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전력 질주하고 있는 사람들도 뭐 때문에 전력 질주를 하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생은 길고 지루한 싸움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력 질주할 수는 없는 거죠. 전력 질주해야 할 때가 있고 천천히 걸어야 할 때도 있고 그늘에 앉아 쉬어야 할 때가 있는 겁니다. 지금이 꼭 전력 질주해야 할 때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도끼날 이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하루 종일 나무만 베는 사람보다, 중간중간 쉬면서 날을 가는 사람이 결국 나무를 더 많이 벤다는 것이죠.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아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건 지금하고 있는 일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약간의 각오와 약간의 여유, 그리고 즐겨 보자는. 마음가짐.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인생은 우리 뜻대로 되는 게 아니고 우리에겐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 있으니까요. 길게 보자고요.  94-97


원고지 1,000매를 쓰는 방법은 일단 원고지 1매를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1매를 쓰고 또 1매를 쓰고, 1,000매가 될 때까지 1매씩 쓰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목적지에 닿기 위해서는 왼발 앞에 오른발을 두고 다시 오른발 앞에 왼발을 둬야 합니다. 이걸 무수히 반복하다 보면 결국 목적지에 닿게 되죠.
원고지 1,000매를 쓰기 위해서는 일단 원고지 1매를 써야 합니다. 그리고 또 1매를 쓰고, 또 1매를 쓰고, 또 1매를 쓰고.... 1,000매가 될 때까지 1매씩 쓰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목적지에 닿기 위해서는 왼발 앞에 오른발을 두고 다시 오른발 앞에 왼발을 둬야 합니다. 이걸 무수히 반복하다 보면 결국 목적지에 닿게 되죠.
끊임없이 원고지 1매를 쓰는 일, 매일매일 오른발 앞에 왼발을 두는 일. 그것을 우리는 작업이라고 부릅니다. 작업은 꾸준히 행해져야 합니다. 기계처럼 작업하는 사람을 우리는 작가라고 부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책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쓸 수 있을 때는 그 기세를 몰아 많이 써 버린다. 써지지 않을 때는 ‘쉰다’라는 것으로는 규칙성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임카드를 찍듯이 하루에 거의 정확하게 20매를 씁니다.”
소설가 이언 매큐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사무원처럼 일합니다. 다른 몇몇 작가들은 이런 식의 설명을 모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걸 받아들입니다. 저는 마치 사무원처럼 일해요.”
소설가 필립 로스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하루 종일 글을 씁니다. 아침, 오후, 거의 매일 글을 씁니다. 제가 2년 내지 3년 동안 그렇게 앉아 있으면, 마침내 한 편의 작풉이 완성되지요.”
꾸준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계속하다 보면 내 앞에 뭔가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뭔가가 만들어져 있다는 것. 그것만큼 설레고 근사한 일이 있을까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어느 날 당신 앞에 나타난 ‘작품’은 당신이 지난 3년 동안 만들어 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 앞에 그날, 비로소 등장하는 것이죠.
우리가 작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하루에 100매를 쓰고 열흘을 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3년 동안 매일 10매씩 쓰는 사람을 우리는 작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당신 앞에 불현듯 등장하는 그날까지 당신은 고독할 것입니다. 외로울 것입니다. 때로는 절망 속에 허덕일 것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계속 써가는 수밖에요. 네, 맞습니다. 작가를 그런 직업입니다.
꾸준함이 당신의 실수를 줄여줄 것입니다. 복서는 상대방의 펀치가 날아오면 습관적으로 몸을 비틀어 피합니다. 말벌은 날아오는 곤충에게 기계적으로 침을 쏩니다. 고민하거나 망설이지 않죠. 그래서 실수가 없습니다.
꾸준한 작업을 위해선 컨디션 관리가 기본입니다. 일의 특성상 프리랜서는 생활이 불규칙해지기 쉽습니다. 밤샘하고 다음 날 늦게 일어나거나 아예 밤을 새는 경우가 많죠. 이런 리듬으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아침밥을 먹고 야채와 과일을 섭취하고 날마다 조깅을 해야 하죠. 그리고 정해진 시간 동안 서재에 틀어박혀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야 하죠. 루틴을 만들지 않으면 컨디션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작가는 로망이 아니라 현실이거든요.
우리가 만들어낸 작품이 모두 만족스러울 수는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할 확률도 생각보다 낮아요. 루틴을 만들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의욕도 떨어집니다. 소득면에서도 좋지 않습니다. 내일 작업량을 위해 오늘의 에너지를 아낄 수 있는 사람이 10년이고 20년이고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에게 작품은 ‘해야 할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109-112

우리는 거절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절을 못하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때 거절했어야 했어’ 하며 전전긍긍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제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하고 딱 잘라 거절했어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걱정의 낮, 불면의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거절을 못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착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갈등을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하고요. 이들은 가끔 잠수를 탑니다. 연락이 되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게 할 때가 많죠.
아마 상대방도 무리한 부탁일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당신에게 부탁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시간과 노력을 허비해 가며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어도 당신에게 돌아오는 건 ‘년 역시 좋은 사람’이라는 입에 발린 말뿐일 겁니다. 이들에게 내 사정을 들어가며 거절해 보아도 ‘변했다’는 원망뿐일겁니다. 이런 사람들과는 사이가 틀어져도 괜찮습니다. 그들에게는 차라리 나쁜 사람이 됩시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첫걸음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않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거절은 나를 더 이상 소모시키지 않는 권리이자 최선의 방법입니다. 거절을 잘할수록 인생이 편해집니다. 134-135

여행을 할 때마다 ‘세상에 이런 게 있었다니!’하는 놀라움을 느끼고, 그것이 바로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하는데 ...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했듯, 어딘가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그게 우리가 문을 열고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164

후회할 각오가 되어 있고 견딜 자신이 있다면 저질러 보는 게 낫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엔 분명히 있으니까. 세상은 우리가 다가가지 않으면 진면목을 보여 주지 않는다. 여행이 가르쳐 주는 건 언제나 한 가지다. 저질러라, 그 다음에 생각하라.  177

시간을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과 여행을 떠나는 일이라는 것.  200


여러 지표상으로 부탄은 가난한 나라다. 1인당 국민 소득이 2,800달러 남짓밖에 되지 앟는다. 하지만 하루 이틀만 부탄을 겪어 보면 이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지그재그 이어지는 도로는 포장 상태마저도 엉망이지만 서두르는 법 없는 부탄 사람들은 도로 사정이 나쁘다고 여기지 않는다. 나쁜 도로 사정을 탓하는 건 오직 관광객들뿐이다. 히말라야에서 쏟아져 내리는 풍부한 수력으로 전기를 만들어 인도에 팔고 그 돈으로 모든 공산품을 수입해서 쓴다. 그러니 미세 먼지나 공해 따위를 걱정할 이유가 없다. 관광 산업에서 얻는 수익은 무상 교육과 무상 의료를 실시하는 재원이 된다. 여행하는 외국인들도 똑같은 혜택을 받는다. 1999년 부탄의 국가 행복지수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행복을 보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탄 행복 연구소’도지ㅔㄴ졸 소장은 “부탄은 국민의 행복을 모든 정책의 중심에 놓고 국가를 운영한다”고 말했다. 어떤 정책도 ‘국민 행복’과 부합하지 않으면 시행하지 않는다. 실제로 모든 정책은 10~15명으로 구성된 ‘국민 총행복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데 총점 78점을 얻지 못하면 자동으로 폐기된다. 헌법에 숲 면적을 국토 면적의 60퍼센트 이상 유지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 나라가 부탄이다. 4대 국왕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는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의회 민주주의로의 이양을 선택했다. 그결과 2008년 총선이 실시되고 지금은 총리가 수반이 돼 부탄을 통치하고 있다. 하루 7시간 노동도 철저히 지켜진다. 우리나라와 부탄 중 어느 나라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까.  204-205

다치바나 다카시는 그의 책 <사색기행>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역시 이 세상에는 가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 직접 그 공간에 몸을 두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절실하게 했다. 그런 감동을 맛보기 위해서는 바로 그 순간에 내 육체를 그 공간에 두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206

제 자리가 있다면 어떤 방향일까.  242

여행은 생일 잊는 그리고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 253

운명은 언제나 우리를 괴롭히는 것 같습니다. 괴롭히는 것, 그게 운명의 운명 같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어두운 곳으로 자진해서 걸어 들어갑니다. 무릎을 웅크리고 혼자 있습니다. 어둠을 겪어 보지 않고서는 빛을 알 수 없는 법입니다. 마음속에 어둠이 없는 자는 세상을 건널 수 없습니다. 여행은 내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입니다. 사랑은 내가 가진 어둠을 당신과 나누는 일이구요. 이만큼 살아 보니 알겠습니다. 친구 따윈 필요 없더군요. 책과 음악, 그리고 어둠 한 줌이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265

아그라탈라에서 사흘을 머물고 떠났다. 기차가 출발할 때 이 생소한 도시에 다시 올 일이 있을까. 이곳의 풍경 속에서 다시 차를 마시고 이곳의 사람들과 다시 미소를 나눌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까지 여행하는 인생을 살며 ‘다시 오게 된 이곳’이 얼마나 많았던가. 기나긴 기차의 기적 소리를 들으며 나는 분명 이곳에 다시 오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애초에 떠나가지 않았던 것처럼 보통의 걸음으로, 태연한 미간으로 이 저녁에 다시 앉아 있게 되겠지. 달은 보름에 가까워 똑같은 각도에서 이마를 비추겠지. 그러니까 요행은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만드는 일이고 그래서 여행은 사랑과 비슷한 것 아닐까.
‘다시’라는 말. 다시 오게 될 것이고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예감. 피리 소리처럼 가느다란 그 희망과 예감이 우리를 길 위에 올려놓고 우리는 밤새워 기다리게 한다. 모든 꽃들이 시들고 모든 풍경이 사라져도, 세상의 모든 잠언들이 인생이 덧없다고 속삭여도,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고 나는 인생을 이어갈 것이다.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다.  268-269

결국 공항이다. 어디론가 가기 위해 나는 서 있다. 쓰고, 읽고, 떠나는 일이 내겐 다 참고 견디는 방식이다. 여행은 생을 잊는 가장 쉬운 방법. 나는 무심한 세계에 있고 싶다. 카페와 호텔을 전전하는 삶이고 싶다.  291


여행은 우리 생이 만남보다 작별로 가득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작별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도 더 오래 여행을 하며 늙어갔으면 좋겠다.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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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인생을 뒤바꾼 '여행', 교육의 터닝 포인트 '여행'


이 책은 여행으로 교육하기를 원하는 부모를 위한 책입니다. 6


모든 걸 만족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는 포기해야지요. 바로 우리 머릿속의 생각입니다. .. 너무 많은 것을 미리 걱정하고 불안해하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생각은 모두 잊고 새롭게 시작합시다.  9


부모가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활동은 아마 '교육'일 겁니다. 내 아이를 교육하고 싶다면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 입으로는 아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아이를 위해 시간을 내지 못한다는건 모순입니다.  9-10




Chapter1. 아이교육, 여행이 답이다


경험의 축적은 새로운 인식을 빚어냅니다. 이것이 곧 여행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24


여행 중에 경험하는 관계는 .. 머물러 있는 관계가 아니라, 물 흐르듯 스쳐 지나가며 만나는 관계가 많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상황 속에서 소통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지요. 상점 주인과의 흥정, 기차에서 만난 누군가와의 대화, 길을 가르쳐준 이름 모를고마운 사람과의 만남, 숙소에서 함께한 어떤 여행자와의 노닥거림, 난생처음 보는 외국인과의 인사 등 정말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소통하고 배웁니다. 여기에 보너스로 자신감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만남을 이루어낸 자신의 모습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에 자신감을 얻는 거지요.  29


시냇물과 강물이 바다를 향해 내달리듯 세상을 여행함 낯선 것과 부딪힐 때 비로소 더 큰 생각에 닿을 수 잇습니다. .. 낯선 것을 많이 접해본 사람은 망설이지 않고 용기를 냅니다.  32


당연히 낯선 것들을 찾아다녀야 합니다. 용기내어 낯선 것과 마주하는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 여행은 낯설음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 주변의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을 찾아 나서면 필연적으로 낯선 것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33


여행으로 아이를 변화시키기 위해선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한 번에 오랜 기간 여행하거나 짧더라도 정기적으로 꾸준히 여행해야 합니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특히 아이와의 여행은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아이가 체력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한 번에 오랜 기간 여행하는 게 좋고, 체력이 약한 아이는 정기적으로 꾸준히 여행하는 편이 낫습니다. 

둘째, 아이가 스스로 나설 만큼 여행을 즐겁게 여겨야 합니다. 아무리 시간과 돈을 들여서 여행하더라도 본인이 즐겁지 않다면 말짱 도루묵이지요.

셋째, 여행을 해 아이에게 전해주고 싶은 교육 철학이 명확해야 합니다. 여행으로 아이를 교육하고 싶다면 어른부터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어른이 갈팡질팡하면 아이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넷째,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이와 부모가 함께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행의 결과를 너무 강조하면 과정에서 배우는 것들을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과정을 소중히 여기면 충실한 여행이 되고, 어떤 상황에서도 배울 점을 찾는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건 뻔한 이야기지요. 하지만 그 뻔한 사실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잊지 마세요. 우리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따야 하는 운동선수가 아닙니다. 과정이 중요함을 잊지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 여행해야 할지 당장 답이 나옵니다.  42-43




Chapter2.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의 여섯 가지 원칙


법정 스님이 쓴 <버리고 떠나기>에는 '미련 없이 자신을 떨치고 때가 되면 푸르게 잎을 틔우는 나무를 보라. 찌들고 퇴색해가는 삶에서 뛰쳐나오려면 그런 결단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53


'몸으로 하는 여행'입니다. 우리가 흔히 '관광'이라고 부르는 것과 '여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전적으로 비슷한 뜻입니다. 관광은 '다른 지방이나 나라에 가서 그곳의 풍경, 풍습, 문물 따위를 구경한다'는 뜻이고, 여행은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두 단어가 지닌 이미지는 조금 다릅니다. 대체로 관광은 '나이 드신 분들이 버스 타고 다녀오는 단체 여행'같은 이미지라면, 여행은 '젊은이들이 배낭 메고 떠나는 개별 여행'이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관광의 ... 가장 큰 장점은 준비하는 데 드는 수고를 덜 수 있다는 겁니다. .. 가장 큰 단점은 자유롭게 여행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여행사 패키지 상품을 두고 '주마간산'식 여행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요. 주마간산이란 '말을 타고 달리며 산천을 구경한다'는 뜻인데 자세히 살피지 않고 대충대충 보고 간다는 겁니다.  76


장피에르 나디르와 도미니크 외드가 쓴 책 <여행 정신>에는 '여행은 삶과 같다. 목적지가 아니라 거기까지 가는 길이 중요하다. 시간에 쫓기며 정해진목표를 향해 서둘러 갈 권리도 있겠지만, 길가에서 경험하는 경이와 아름다움을 놓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중략) 이는 즉흥적으로 살고, 예상치 못한 일에 황홀해 하며, 깜짝 놀라기도 할 줄 안다는 의미다. 효율성과 안전, 시장 경제라는 씁쓸한 핑계 아래 여행자들은 점점 더 무리 지어 다니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일에 제약을 받는다. 차라리 이런 시스템에 고장이라도 나서 여행자들을 자유롭게 풀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77


걷기 여행은 계절이나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체력적인 부분까지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여행지를 날 것 그대로 접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가장 오래된 여행 방식입니다. '여행의 원조'라 할 만하지요. ..걷기 여행은 느리게 한발씩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다가가는 여행입니다.  78-79


아이를 무시하는 부모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대체로 아이와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이 때문에 아이의 실패는 곧 나의 실패가 되지요. 아이가 실패하는 모습을 보느니 내가 직접 빠르고 깔끔하게 해결하는 게 속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이 일은 내 아이가 해낼 수 없는 일이야'라고 여기는 부모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아이를 무시하는 태도는 아이의 가능성을 제한합니다.  85


도움을 요청하면 함께 해결하되 여행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것은 분명 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89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에서 가장 주의할 점은 흉내만 내는 여행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귀찮으니까 남들 가는 것처럼 갔다 오면 되겠지 생각하면 아이는 '여행이란 이렇게 지겨운 거구나'하면서 여행 자체를 싫어하게 됩니다.  99


문제를 해결하고 적응해나가는 능력은 경험하지 못했던 일에 도전해 성공하거나 실패하면서 생깁니다. 성공을 통해 성취감과 재미를 얻습니다. 실패를 통해 살아가는 요령을 터득합니다.  110


다케우치 히토시는 "여행을 하는 것이나 병에 걸리는 것, 이 둘의 공통점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본다는 점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병에 걸려 아플 때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듯, 여행을 하면서 겪는 고생스러움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125


약 300년 전 유럽, 특히 영국에서는 잘산다고 자부하는 상류 계층에서 유행하는 여행이 있었습니다. '그랜드 투어'라고 불리던 이 여행은 영국 상류 계층의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한 여행이었지요. 프랑스, 이탈리아 같은 곳을 돌아보며 상류 사회의 각종 예법과 언어,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게 하는 여행이었습니다. 상류층 자녀를 위한 엘리트 교육인 셈이었지요. .. 짧게는 몇 달, 몇 년에 걸쳐 여행했으니까요.

일반적으로 가정교사 2명과 하인 2명 이상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가정교사 1명은 주로 학문을 가르쳤고, 다른 1명은 승마, 펜싱, 춤 같은 활동을 가르쳤습니다. ..

여행 코스는 대체로 프랑스에서 시작해 스위스를 겇 이탈리아로 이어지는 일정이었습니다...

공교육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가득한 분위기에서 영국 상류층 부모들은 자녀를 대학에 입학시키느니 차라리 뛰어난 가정교사와 함께 여행을 보내 교육하는 게 더 낫다고 여겼습니다. 여행이 교육의 새로운 수단으로 떠오른 순간이었지요.  128-129




Chapter3.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을 풍요롭게 하는 약속


아이와의 대화에서 가장 밑바탕이 되어야 하는 마음가짐은 '진정성'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아이가 오롯이 느낄 수 있게 진정성 담긴 이야기를 시작해보세요. .. 그냥 진솔한 이야기를 해보세요. 어린아이들은 이야기가 재미있으면 금방 빠져듭니다. 동화나 옛날이야기도 좋지만 부모의 삶이 담겨 잇는 이야기는 더 좋습니다.  151


실컷 이야기하고 훈계로 끝맺으면 다음엔 부모 이야기를 듣기 싫어할지도 모릅니다.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로 끝내는 게 좋습니다. 대신 이야기를 듣고 아이가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살짝 물어보는 정도는 괜찮지요.

아이에게 부모의 삶이 담긴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이가 부모를 이해할 수있는 좋은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152


중요한 것은 대화할 때 '내가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가?'를 계속 생각해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 그럼 무엇에 집중해야 할까요?

1. 나의 태도, 언어, 모습 : 지금 나는 어떤 태도(아이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는가)로, 어떤 언어(긍정적 언어를 사용하는가)를 사용해서, 어떤 모습(표정, 목소리, 행동)으로 아이에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돌아보세요 아이의 태도, 언어, 모습보다 나의 것에 집중해야 아이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2. 질문의 방향 : 질문은 아이와 나의 관계를 진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질문과 대답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관계 회복이 먼저입니다. 적절한 질문은 아이를 생각하게 하고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도록 이끕니다. 내가 던진 질문, 아이가 나에게 했던 질문의 방향에 집중하고 대화해야 핵심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3. 재미 : 대화가 재미없나요? 재미없는 이유는 뭘까요? 내가 유머감각이 없어서? 아이가 무감각해서?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서? 다 아닙니다. 재미를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재미는 재미를 찾아 나서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이야기하면서 손톱만큼이라도 재미있을 만한 소재가 있다면 그걸 붙잡고 재미를 느껴보세요. 내가 재미를 느껴야 아이도 재미를 느낍니다. 웃긴 이야기, 센스 있는 입담까진 없어도 됩니다. 아이의 작은 말 한마디, 사소한 행동 하나에서 재미를 발굴해보세요. 재미에 집중하면 대화가 쉬워집니다.

4. 아이의 감정 : 어린아이일수록 감정을 읽어주고 공감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이의 감정에 집중하고 그 감정을 존중해주세요. 대화할 때 감정은 생각보다 더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감정 코팅을 잘해주면 아이의 삶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5. 아이의 생각과 의도 : 어른이라면 아이의 생각과 의도를 잘 읽어내야 합니다. 아이와 똑같은 수준에서 이야기하면 다툴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가 지금 어떤 생각과 의도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넓은 시야에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155-156


우리는 대부분 '꿈=직업'이라는 착각을 하며 삽니다. 직업 말고도 다른 많은 것들이 꿈이 될 수 있는데 말이지요. .. 어른들은 아이에게 꿈이 뭐냐고 묻고는 아이가 대답이 없으면 "꿈 없어? 의사, 변호사, 선생님 이런거 말이야"라고 이야기합니다. ...

꿈이 직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른들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꿈을 무엇으로 정할지는 아이가 할 일입니다.  168-169


요즘 아이들이 체험학습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도 제대로 꿈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요? 바로 '생각하는 시간'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체험학습은 그저 체험으로 끝납니다. 그리고는 생각할 여유도 그 어떤 계기도 허용하지 않는 바쁜 생활로 돌아가지요. 체험은 추억으로만 남습니다...

아나톨 프랑스는 "여행이란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꾸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바꾸어주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172


공자는 "시를 읽음으로써 바른 마음이 일어나고, 예의를 지킴으로써 몸을 세우며, 음악을 들음으로써 인격을 완성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생각하는 여행도 음악을 통해 완성될 수 있으니, 아이와 함께 떠나는 여행에 멋진 배경 음악을 한번 깔아보세요.  176


일하는 것의 반대는 노는 것이 아니라 쉬는 것입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일하는 것'의 반대는 '일하지 않고 쉬는 것'입니다. '노는 것'의 반대도 '놀지 않고 쉬는 것'입니다. 일하는 것과 노는 것은 쉬지 않고 행하는 여러 가지 활동입니다.  180-181


7살 정도 된 아이가 집에서 연필을 잃어버렸습니다. 엄마에게 연필을 잃어버렸다고 이야기하겠지요? 엄마는 묻습니다.

"어디서 잃어버렸어?"

"모르겠어요."

"마지막으로 언제 연필 썼는지 기억 안 나?"

"네."

"혹시 거실에 둔 거 아니야? 어제 거실에서 숙제했잖아."

"아, 맞다. 그렇지! 찾았어요."

잃어버린 연필을 찾은 건 아이일까요 엄마일까요? 아이는 혼자 연필을 찾을 수 없어 엄마에게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 연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와 엄마가 함께 찾은 거죠. 아이는 다음에 연필을 잃어버렸을 때 어떻게 할까요? 아마 거실이든 자기 방이든 마지막으로 숙제했던 곳에서 찾아볼 겁니다. 이렇게 아이는 엄마의 도움으로 '잃어버린 연필 찾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고츠키는 <마인드 인 소사이어티>에서 "오늘의 근접발달영역이 내일의 실제적 발달 수준이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즉 오늘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할 수 있었던 일이 내일은 혼자서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지요. 이때 중요한 것은 뭘까요? 바로 엄마의 도움입니다. 교육 심리학에선 이런 도움을 비계(scaffolding)라고 표현합니다. 비계는 원래 건축 공사할 때 높은 곳에서 일할 수 있게 설치한 임시시설을 말하는데, 아이가 과제를 잘 수행하도록 어른이나 또래가 도움을 주는 걸 이르는 말이지요.

비계 설정의 방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1 아이가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적절한 수준으로 '난이도'를 조절하는 것

2 아이의 능력에 따라 '도움의 양'을 조절하는 것

3 아이 앞에서 '시범'을 보이는 것

4 질문을 유도하고 아이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져보는 것 등이 있습니다. 교육심리학에서 제시하는 이런 방안은 아이가 스스로 여행할 수 있게 이끈느 구체적 방안이 될 수 있습니다.  193-194


놀이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놀이의 요소로는 자발성, 재미, 일상에서 벗어난 해방감 같은 것이 있습니다.  196


김정운 교수는 강의에서 "자기 반성과 자기 성찰이 대화와 의사소통의 근본이 되는 능력"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잘 소통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지요.  208


'Cook's Tour'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이 단어를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주마간산 식 단체 관광 여행"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 단어만 보면 언뜻 '쿡은 요리사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 단어의 유래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841년 토머스 국이라는 영국인이 런던에 세계 최초의 여행사를 차렸습니다. 그의 아들 존 메이슨 쿡이 사업을 함께하면 서 여행사 이름을 토머스 쿡 앤드 썬(THomas Cook and Son)으로 바꿉니다. 사람들은 이 여행사에서 개발한 여행 상품을 Cook's Tour라고 불렀습니다. 

이 여행 상품은 여행사에서 모든 일정을 짜고 여행자는 그 일저에 따라 단체로 이동하는 패키지여행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여행이었습니다. 짧은 일정에 여러 장소를 들릴 수 있어서 편하고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일정이 늘면 늘수록 이동하는 차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여행지에서는 잠깐 내려서 둘러보는 식으로 여행했는데, 이 때문에 Cook's Tour는 주마간산 식 여행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패키지여행의 원조라고 할 수 있지요.  212-213


어른들은 여행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더라도 삶 자체를 확연히 변화시키기 어렵습니다. 이미 오랜 시간을 고정된 삶의 패턴 속에서 살아왔거든요. 이 패턴을 통째로 바꾸려면 대단한 결심과 굳은 의지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갓 올라온 새싹처럼 쑥쑥 자라고 있기 때문에 배움이라는 물을 꾸준히 주면 몰라보게 달라집니다. 계속 성장하는 과정이어서 배우면 배울수록 삶이 달라질 가능성도 커지지요.  225


아이와 여행하는 부모는 여행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막연히 여행을 다녀오면 뭐라도 도움이 되겠지 생각하는 것과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아는 것은 다릅니다. 이것을 알아야 여행 중 무엇에 힘써야 할지 알게 되고, 아이의 성장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죠. 물론 배움이 곧 성장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워야 성정할 수 있습니다. 배움은 성장의 기회지요. 여행을 통해 배운다는 것은 성장의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225-226


삶의 실체, 태도, 목적이라고 거창하게 이야기했지만 이것을 배우는 방법은 생각보다 쉽습니다. 여행지에서 뭐든지 자세히 보고, 따라 해보고, 생각해보게 하는 겁니다. 자세히 보면서 삶의 실체를 이해하고 따라하면서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삶의 목적은 고민하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배울 수 있지요.  227


여행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은 '여행을 통해 삶과 친해진다'는 의미입니다.  228


아이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하라는 말이지요. ... 마주 본다는 것은 대화의 기본자세입니다.  232


부모는 아이보다 시간을 짧게 느끼고 항상 시간이 없어 쫓겨 다닙니다. 반면 아이는 부모보다 시간을 길게 느끼고 무한한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가 할 일 없이 빈둥거리거나 느려터진 행동을 보이면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로서는 빨리 끝내고 놀면 될 것을 왜 저러나 싶고, 아이 입장에서는 하고 있는데 왜 저러나 싶지요. 이렇게 입장 차이가 나는 이유는 실제로 같은 시간도 부모와 아이는 서로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234


아무리 많은 교육 서적을 읽고 좋은 강좌를 들어도 소용없습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 아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내 아이를 마주 볼 수 있고 대화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235


지혜는 요령이 아닙니다. 상황을 꿰뚫어보는 눈이며,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가치가 빛나는 생각입니다.  248


오늘날 필요한 교육이란, 아이들을 어딘가에 가둬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껏 길 위를 뛰어다닐 수 있도록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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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반성문> - 여행은 참교육

지봉환 정한책방 2018  03370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 알랭 보통(Aiain de Botton)


교사 : 아이에게 여행을 장려해야 합니다. 여행은 만남입니다.  여행에서는 자신을 만납니다.세상에 홀려 소홀했던 자신에게 눈길을 돌립니다. 자신에게 귀를 기울입니다. 자신을 보고 자신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타인을 만납니다. 타인에게 눈을 돌리고 귀를 엽니다. 다양한 감정 관념들과 만납니다. 다양한 가치와 삶을 만납니다. 다양한 웃음과 눈물을 만납니다. 

만남은 성장입니다. 보고 들음은 성장 에너지가 됩니다. 삶을 다듬기도 합니다. 생활 속에서 쌓인 갈등, 불안, 분노, 질투, 시기, 욕심 부정적인 감정을 깎고 닦고 바르게 합니다. 긍정정인 에너지를 찾는 일입니다. 만남은 성장을 위한 에너지이고 동시에 삶에 놓인 장애요인을 찾는 일이기도 합니다. 자연 또한 중요한 여행의 동반자입니다. 자연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고 답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기쁨을 주고 슬픔을 다독입니다. 울분을 삭혀주고 눈물을 닦아줍니다. 여행은 삶의 영역을 넓혀줍니다. 아집의 껍질을 깨고 타인을 듣도록 합니다. 이기(利己) 버리고 타인을 보도록 합니다. ‘ 있음을 일러줍니다. 


학생 : 여행과 교육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요?


교사 : 여행이 만남과 성장을 위한 행보라면 교육은 만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만남이 교육의 출발점입니다. 만남 없는 교육은 죽은 교육이에요. 생명력이 없는 교육이지요. 만남으로부터 변화는 시작됩니다. 


학생 : 여행이 좋은 학습법이라는 말씀이군요.


교사 : 그렇습니다. 여행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니까요. 많은 것을 만나고 보고 듣고 깨닫고 느낄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인 몽테뉴는 여행과 같은 움직임을 통해서만 개인은 실천적 지혜를 습득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실제가 아닌 문자화된 세계만을 진열해놓은 교과서 이야기는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라는 겁니다. 여행은 공허한 지껄임이 아닌 진정한 것을 학습할 있는 기회라는 것이지요. 세상은 교과서입니다. 그러므로 여행은 교과서와의 만남입니다. 교과서를 펼치는 일이지요. 세상과의 만남에는 누구로부터의 강요도 없어요. 보고 싶은 , 듣고 싶은 , 만지고 싶은 것으로 얼마든지 자유롭게 선택해서 있습니다. 시간 제약도 없어요. 외울 것도 없지요. 무엇을 보고 들어야 한다는 요구도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한다는 규정도 없습니다. 그냥 경험하는 거지요. 아무 거리낌 없이 느끼면 됩니다. 자유로움이 세상이라는 교과서를 사용하는 법입니다. 


학생 : 여행은 자율학습이네요.


교사 : 그렇지요. 누구의 간섭도 없어요. 눈치 일도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의지만이 자신을 이끄는 힘이 됩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의미를 만들면 됩니다. 여행은 속에서, 교실 안에서 만날 없던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일이에요. 교사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세상은 한계를 지니게 마련입니다. 여행은 교실의 한계를 극복할 있는 좋은 방법이에요. 여행은 생명 없는 교재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입니다. 여행은 결국 배움의 영역을 넓히는 이라고 있어요. 


학생 : 여행은 자체로 교육인 셈이네요.


교사 : 그렇지요. 세상이 교실이에요. 세상 모든 것이 교과서이고요. 그리고 세상이라는 교과서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교육인 거지요. 그러므로 세상과의 만남은 소중한 겁니다. 만남은 눈을 열어주고 마음을 열어주거든요.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것을 마음에 담을 있게 합니다. 그리고 가슴을 열고 세상과 소통하게 합니다. 세상이 베푸는 아름다움에 감격해하고 감사함도 배웁니다. 기쁨에 눈물 짓기도 하고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치유받기도 합니다. 


학생 : 새로운 것과 마주할 때의 느낌은 정말 놀랍고 기쁘고 가슴이 벅차요. 특히 자연이 그런 같아요. 자연 앞에 서면 작아지고 겸손해지고 따뜻해지기도 하고 감정이 정화되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그러한 감정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싶어요.


교사 : 그렇지요. 자연만큼 훌륭한 교과서는 없습니다. 자연은 신이 만든 교과서거든요. 자연을 교과서로 생각한 사상가는 프랑스 계몽 사상가인 루소입니다. 루소는 자연을 훌륭한 교과서요, 좋은 교사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을 자연에 의존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연을 도외시한 인간이 만든 교재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이의 자연적 능력의 성장을 방해하는 일입니다. 교과서는 아이가 걸어야 길을 제시합니다. 자연이라는 교과서는 삶의 이정표인 셈이지요. 교과서를 통해 삶을 꿈꾸고 길을 찾습니다. 그리고 교과서가 제시한 길을 따라 걷습니다. 이것이 교과서로서의 자연이 소중한 이유입니다. 


학생 : 아이가 접하는 교과서는 아이의 자연성을 자극하고, 자각하게 하고, 성숙시킬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교사 : 물론입니다. 아이들은 자연을 호흡하고 세상을 호흡할 있어야 해요. 그럴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이를 교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어른의 생각을 나열해놓은 교과서만 바라보면서 생활하도록 하는 것은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을 만날 있는 기회를 빼앗고, 자연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드는 일입니다. 아이들은 자연의 안에서, 자연의 보살핌 속에서 자연을 호흡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아이의 자연성은 꽃을 피웁니다. 


학생 : 종이로 교과서만 보고, 듣고, 냄새 맡게 해서는 된다는 말씀이군요?


교사 : 맞아요. 그렇게 되면 아이들은 교과서만 기억합니다 교과서가 이들 앞에 펼쳐진 유일한 세상이고 이들이 접한 세상의 전부입니다. 교과서 세상은 세상이 아닙니다. 단지 모조품을 뿐입니다. 꾸며진 세상이고 꾸며진 사회이고 만들어진 인간일 뿐입니다. 어른들이 보고, 듣고, 만나고, 느낀 인간과 자연 그리고 세상을 활자화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어른들의 자연이고, 어른의 세상이고, 어른의 인간일 뿐입니다. 

여기에서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e, 1898~1967) 그린 <이미지의 배반>이라는 작품을 생각해볼 있습니다. 작품은 흔히 있는 파이프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림 아래에는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림 파이프는 파이프가 맞지만 그것은 대상의 재현일 대상 자체일 없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림 파이프는 담배를 넣고 불을 붙이면 연기가 피어오르는 진짜 파이프가 아닌 거지요. 단지 물감으로 그려놓은 파이프 그림에 지나지 않은 겁니다. 그림 파이프는 실체와는 엄연히 다른 겁니다. 아이들이 접하는 교과서 세상도 이와 같이 그려지고 만들어진 세상인 겁니다. 세상을 그린 그림인거지요. 세상 속으로 직접 뛰어들 있는 여건과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학생 : 아이를 자연과 직접 만나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교사 : 그렇지요. 어른이 만난 자연을 아이에게 전하는 것은 아이의 성장 기회를 빼앗는 일입니다. 아이가 직접 자연과 만날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연을 직접 만나 호흡하고 냄새 맡고 있게 해야 해요. 자연의 모습을 닮도록 해야 합니다. 자연은 아이들의 삶의 터전입니다. 자연의 법칙이 교육의 법칙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자연은 아이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펼쳐 나아갈 공간이며, 힘의 원천입니다. 자연 속에서 아이들은 삶의 에너지를 얻어요. 자연 속에서 자신을 찾고 자신을 발전시킵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연은 아이들이 읽고 보고 들어야 () 베푼 교과서거든요.


학생 :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자연은 부모님 같다는 느낌도 들어요.


교사 : 그래요. 자연은 아이들의 부모이기도 해요. 아이들은 어머니로부터 삶의 에너지를 얻고, 어머니의 보호 아래 성장하고 개성적 존재가 되어가는 것처럼 자연 역시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에너지원이고 성장의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이들이 자연의 품에서 자라도록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연을 떠난 아이들은 부모를 떠난 아이처럼 성장 동력을 잃기 쉽습니다. 보호자 없는 아이가 바르게 성장하기 어렵듯이 자연을 떠난 아이들 역시 바른 성장 가능성이 적습니다. 아이들을 자연과 어울리도록 하는 것은 부모와 함께 생활하돌고 하는 것처럼 중요한 일입니다. 교실은 아이들을 감금해두는 시설이 아니에요. 이제 교실이라는 좁은 공감에서 해방시켜야 합니다. 자유롭게 자연과 만나고 대화할 있도록 해야 해요. 교과서만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은 아이들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입니다.


학생 : 세상과의 만남을 주선해주라는 말씀이군요. 그리고 아이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교실이고, 아이가 보고 듣는 것이면 무엇이든 교과서라는 말씀이기도 하고요.


교사 : 맞아요. 만남은 자극이에요. 특히 새로운 것은 오감을 춤추게 하지요. 생소한 것과의 만남은 설렘이고, 다른 꿈을 꾸게 합니다.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가르침이고 새로운 배움이에요. 이것은 변화를 촉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주어지는지 살펴야 합니다. 참된 여행의 기회가 주어지는지 자문해야 해요. 그들이 꿈꾸고 바라고 만나고 싶은 곳과의 만남을 주선해야 해요.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마음껏 펼칠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교사에게 얽매인 존재가 아닙니다. 아이의 자유를 교사가 베푸는 자비쯤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학생 : 세상은 자신을 통해 자신을 가르치는 셈이네요. 교사는 세상으로부터의 배움과 세상의 가르침을 방해하지 말라는 말씀이고요. 


교사 : 그렇지요. 따라서 아이를 교실에만 머물도록 요구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학교가 아이를 가두어주는 감옥이어서는 됩니다. 교사는 아이들의 입과 귀를 그리고 행동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억압자가 아닙니다. 어른은 아이들이 세상을 마음껏 만날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과의 만남은 세상을 이해하고 깨달을 있는 기회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지닌 무한한 가치에 대한 이해요, 깨달음입니다. 어른은 스스로 아이와 세상과의 만남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18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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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 여행의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를 여행하는

서슬 퍼런 히틀러 치하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독인 문예이론가 발터 벤야민은 예술과 미디어에 관한 20세기 최고의 논문인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처음으로 ‘아우라’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복제된 이미지들이 난무하는 우리 시대 예술 작품에 사라지거나 빠져 있는 것이 바로 그 ‘아우라’라는 얘기였지요.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세상 유일무이한 진품 <모나리자>를 제외한, 세상 무수한 복제품의 모나리자에는 바로 그 ‘아우라’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비로움, 분위기, 후광 등으로 번역될 만한 ‘아우라’의 부재는 비단 미술작품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 연극이나 영화, 사진 음악 등 모든 예술 장르에 적용될 만하다는 게 논문의 요지였습니다.

얼마전부터 저는 우리 시대의 여행에도 그런 ‘아우라’가 사라져버렸다는 생각을 줄곧 하게 되었습니다. 여행지의 풍광과 풍물을 소개하는 텔레비전이나 책, 넘치는 정보들은 여행자가 품어 마땅할 환상을 퇴식시키는 듯합니다. 돈과 시간만 있으면 세상 어디든, 심지어 에베레스트 정상까지도 오를 수 있는 오늘날 축복받은 환경은, 여행이 힘들고 고단하며 고독과 모험을 즐기는 행위라는 생각을 비웃는 듯합니다. 우리 시대 여행이 18, 19세기 사람들이 누렸던 여행보다 과연 더 행복하고 흥미진진한 것인지도 단언할 수 없습니다. <80일간의 세계일주>나 <여행의 기술>에 서술된 그때의 기록들에는 미지에 대한 호기심, 자신을 과감히 내던지는 용기, 새로운 것을 순전하게 맞닥뜨리는 즐거움과 놀라움이 가득해 보입니다. ‘별을 보고 가야할 길을 찾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던 한 평론가의 탄식은, 지금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누릴 수 있는 여행의 시대에 가슴 절절하게 울려옵니다. 가만 보니 언제부턴가 여행의 빛이 바랜 이유가 이 시대 여행에도 그 ‘아우라’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5-6


땅을 읽는 여행은 저절로 땅의 슬픔을 읽는 일이 되곤 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어떤 여행지에서, 모자를 벗을지언정 머리를 비우며 여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 땅의 내력이 담긴 책들을 가져가야 마땅한 듯합니다. 7


"어째서 경권을 놓아두고 피난갈 수 없다는 거요?"

"우리가 읽은 경권의 수는 뻔하지요. 읽지 못한 경권도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는 읽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 <둔황>에서

다 읽지 못한 책을 놔두고 어디로 도망갈 순 없는 법. 다 읽지 못하고 잠들 수도 없고 읽지 못한 책을 두고 죽을 수도 없다. 세상이 사람으로 하여금 고요히 책을 읽을 수 있게 내버려두면 좋으련만. 28-29


추억을 찾아, 추억이 깃든 장소를 찾아 떠나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한지를. 37


대부분 혼자서 떠다닌 여행들이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때마다 결코 혼자 여행한 게 아니었다. 주위에는 항상 나처럼 낯선 길에 난감해하거나 당황해 하던 외로운 행성 같은 여행자들이 친구가 되어주었고, 따뜻한 마음으로 맞아준 현지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길 위의 가족이었다. 45


여행은 삶의 학교다.

이야기를 찾는 여행이라. 61


하나의 도시, 하나의 장소를 제대로 알려면 도대체 얼마나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까? ... 하나의 도시, 하나의 장소가 가슴에 온전히 안겨오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한 달? 일 년? 그렇게 머문다면 과연 그곳을 완벽하게 알게 될까? 140


전쟁과 폭력, 증오는 언제나 늘 멀지 않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

'여러분은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 모르지만, 전쟁은 여러분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 레온 트로츠키의 말 <사라예보의 첼리스트>에서 167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 <타인의 고통>에서 172


발로 읽는 것 만큼 처음 만나는 도시와 쉽고 완벽하게 친해지는 방법은 달리 없다. 180


유럽 땅들은 거기서 거기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따금 만나는 눈부신 햇살과 한가로운 전원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답고, 교과서를 장식한 예술가들의 자취를 쫓는 일도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지불하는 경비는 너무도 비싼데다 현지인들의 삶 속을 들어가 그들의 삶을 마주할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181


인간이 차마 저지르지 못할 짓은 없구나.

어쩌면 우리는 너무도 많은 아우슈비츠를 이미 보고 겪은 건지도 모르겠다. 사진이나 영화, 책, 텔레비전의 범람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인류에게 닥친 엄청난 폭력을 잘 알고 있다. 자만하면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준 건 아닐까? 202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조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20세기 중반 독일 신학자, 마르틴 211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 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말라, 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는 혁명에 가담하지 마라. 즐겁게 도망치는 당나귀들처럼 뒷발질이나 한 번 하라.(중략)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 '제대로 된 혁명'에서 D.H. 로렌스 231-232


우리가 소설에서 얻을 수 잇고 또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손에 잡히지도 않는 모호하고 거대한 지식, 도덕, 사상보다는 이 황폐한 시대에 어떻게 타인과 만나고 소통해야 하는지에 대한 작은 물음과 해답 정도가 아닐까? 284


'나를 죽이지 못한 시련은 나를 한층 강하게 만들 뿐'이라던 니체의 말은 용기와 객기 사이에 갈 곳을 마련하는 여행자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트래블(Travel)'에 '트러블(trouble)'은 때론 필요악이다'라던 후지와야 신야의 말도 그러하다. 곤란함이 없다면 대체 여행이란 게 뭐란 말인가? 예기치 못한 곤란함과 기꺼이 대면하고 때론 수렁에 빠지다가도 그걸 하나씩 헤쳐 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여행자가 기꺼이 떠안아야할 진짜 여행일 것이다. 312-313


여행은 쓸모없는 짓이다. 그러나 여행에는 진정 의미가 있다. '문학은 써먹을 데가 없어 무용하기 때문에 유용한 것이다. 모든 유용한 것은 그 유용성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만, 문학은 무용하므로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그 대신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라고 했던 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여행 역시 쓸모없는 여행이어야 마땅하다. 쓸모없음이야말로 여행을 떠나는 진정한 의미가 아니겠는가? 우리를 억압하지 않는, 그래서 자유와 부자유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322-323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읶르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때때로 큰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 나간다." - <여행의 기술>에서 323


여행을 하다보면 여행을 하는 것이 내 '몸'이 아니라 내 '생각'이라는 느낌이 종종 든다 그래, 나는 생각하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다. 일상이 강요하는 질서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다른 프레임의 생각을 하기 위해, 생각이 기차를 타고 생각이 물건값을 깎고 생각이 사진을 찍고 생각이 사람들의 땀내를 맡는다. 여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생각'이다. 324


객창감(客窓感 손객 창문창 느낄감). 그렇다. 이 단어다. 내가 여행에서 즐기는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객창감, 그 쓸쓸함의 즐거움이다. 별 까닭도없이 이끌려 젊은 날 많은 시간을 외딴 시골길이나 장터, 비 오는 처마 밑에 서게 했던 감정의 실체. 함께 놀던 친구들이 제 어미들에게 불려들어가 저녁 빈 들판에 혼자 남겨진 아이처럼 홀로 달빛 속으로 유유히 걸어가게 했던 감정. 객창감 속에 떠다닌 여행은 쓸쓸했지만 그 쓸쓸함으로 여행의 시간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희망이나 거짓 행복이 더러 사람을 배신하는 일은 있어도, 쓸쓸하모가 외로움이 사람을 배신하는 일은 드물다. 327


길 가기와 책 읽기에 관해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걸 당신에게만 말해주겠다. 부지런히 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 부지런히 읽는 책이 가장 빨리 읽는 독서다. 어느 날 뒤를 돌아보면 막막했던 길들이 내 등뒤에 납작 엎드려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뒤돌아보면 저걸 언제 읽지 했던 책들이 내 손때를 잔뜩 묻힌 채 서가에 꽂혀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한숨 쉬지 말고 가던 길을 갈 것, 읽던 책을 읽어나갈 것. 329


독일의 문화비평가 발터 벤야민이 언급한 '아우라'라는 개념.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의 산물이 처하게 되는 이러한 상황은 예술작품의 존속에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어쨌든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의 가치를 하락시킨다.(중략)우리는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을 '아우라(Aura, 독특한 분위기)'라는 개념 속에 요약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즉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이다. -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350


20세가 가장 유명한 논문 중 하나인 이 글에서 벤야민은 미술은 물론 사진, 연극, 영화 등을 예로 들어 '아우라'가 상실되는 현상을 고발한다. 나는 여기에 '여행'이란 장르도 포함시킬 수 있지 않을까 종종 생각했다. TV나 사진, 책 등에서 무수히 넘쳐나는 여행의 이미지와 정보들을 통해 우리 시대 여행은 설렘과 기대로 넘쳐나는 '아우라'를 상실한 지 오래다. 비용과 시간만 넉넉하다면 아주 쉽게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여행일뿐더러, 여행사를 통한다면 먹고 자고 보는 것에 대한 일체의 고민이나 수고도 생략된다. 세계 수십 개국의 출입국 스탬프가 찍힌 여권의 소유자는 주변에 흔하디흔하다. 더이상 여행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여행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는 긍정적인 현상의 이면에, 우리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설렘과 두려움, 감동이 가장 희박한 '여행'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포스트모더니즘의 담론들이 흔히 예술에 대해 남발했듯이, 우리 시대에는 '여행'마저도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351-352


어쩌면 읽지 않은 책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책이 아닐까? 어떤 책을 가장 숭고한 채로 남겨두는 방법은 그 책을 읽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궁금함과 호기심, 그 책을 향한 간절함이 있을 때가 책으로서는 가장 숭고한 대접을 받는 때일 터다. 352


아직 읽지 않은 책, 아직 가지 않은 여행을 향한 마음이 간절할 때, 어쩌면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353


여행자는 모름지기 곧잘 감격하고 곧잘 우는 사람이어야 할 터, 기꺼이 손을 내밀거나 내민 손을 맞잡아주는 사람이어야 할 터, 바다를 만나면 바다로 뛰어들고, 산을 만나면 산을 넘는 사람이어야 할 터, 비린내와 땀내를 사랑하고 소낙비레 모처럼 얼굴을 씻는 자여야 할 터, 내 이름은 여행자다.

'바닷가의 모래가 부드럽다는 것을 책에서 읽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맨발로 그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감각으로 먼저 느껴보지못한 일체의 지식이 내겐 무용할 뿐이다. 나다니엘이여! 우리는 언제 이 모든 책들을 다 불태워버리게 될 것인가!'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에서)

기행 혹은 여행의 문학이란 본질적으로 허풍과 과장을 일삼는 문학일지도 모른다. 남들은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얘기를 풀어놓는 순간 이야기꾼으로 변모해버린 여행자에게 과장과 허풍의 유혹을 물리치기란 힘든 일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 여행기들은 과연 그러한 유쾌한 허풍과 과장에서 자유로운가? 여행이 더이상 소수만의 특별한 행위가 아닌 시대에, 여행자의 구라는 여전히 유효한가? 인터넷과 무수한 영상, 책의 팩트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틈에서 여행자는무엇을 보고 무엇을 알고 무엇을 예기할 수 있을까? 여행이 여전히 책상과 서가보다 더 많은 사실과 정보를 제공하는 장소일까? 여행하는 자는 여행하지 않는 자보다 더 많이 아는 자일까? 많은 여행자가 진리에 가까이 갔을지 모르지만 그 반대편으로 멀어져간 이도 틀림없이 있지 않을까? 그러니 여행에 너무 지나친 가치 부여를 삼갈 것. 아, 여행의 구라가 통하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416-417


아름다운 땅일수록 눈물이 많은 따이 아니던가. 풍요로운 땅일수록 굷주림이 많은 땅이고 축복받은 땅일수록 저주받은 땅이지 않던가. 아프리카가 그렇고 아시아가 그랬으며, 라틴 아메리카와 수많은 땅들이 그러했다. 신들이 만들어놓은 축복과 풍요의 땅을 고통과 슬픔의 지옥으로 드라마틱하게 바꾸어 놓은 인간의 이 죄악과 아이러니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423


모든 땅이 그러하듯이, 여행자의 수만큼이나 많은 아프리카가 있을 것이다. 423


다른 사람들은 작품을 발표하거나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오히려 3년 동안이나 여행을 하며 머리로 배운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다. 배운 것을 비워버리는 그러한 작업은 느리고도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강요당했던 모든 배움보다 나에게는 더 유익하였으며, 진실로 교육의 시작이었다. - <지상의 양식>에서 424-425


여행자는 과연 제대로 보는 자인가? 여행자는 깊이 볼 수 있는 자인가? 책 속의 진실과 차창 밖의 진실은 어떻게 만나고 갈등하고 화해하는가? 그것이 어쩌면 세상을 아고 싶은 진지한 여행자의 손에 책이 필요한 까닭이 아닐까?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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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 세상에 책이 아닌 것 어디 있으랴

독서술을 체득하고 있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만물이 변하여 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 책과 역사는 풍경이다. - 런위탕 <생활의 발견>중에서


세상의 길이 어떻게 만나는가를 더듬어 알고 발견하는 일이 여행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4


책장에 연필로 밑줄을 긋듯, 땅 위에 밑줄을 긋는 데에는 낡은 카메라 한 대와 작은 수첩 한 권이면 충분했습니다. .. 가난하면서도 높은 여햊아. 5


여행과 독서는 달려들수록 욕망이 줄기는 커녕 더 많은 갈증이 생긴다는 점에서도 비슷합니다. 7


"걸을 때마다 나 자신과 내가 배워온 세계의 허위가 보였다." - 후지와라 신야 <인도방랑>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 없는 법이야."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미혹함 없이 스스로, 진리의 등불 삼으라.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스스로자 등잔등 밝을명 법법 등잔등 밝을명)' 25


스님은 지나칠 정도로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구도 해위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중략) 누군가 구도를 할 경우에는 그 사람의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ㅕ 자기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은 오로지 항상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까닭이며, 그 사라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까닭이지요.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29


김현의 유고 <행복한 책읽기>에서 "좋은 소설이 때로 지루한 대목을 간직하고 있듯이, 좋은 시는 때로 깜짝 놀랄 만큼 신선한 대목을 간직하고 있다" 86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다. -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128


'모든 것이 스스로 요란한 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확인받으려는'(최승자) 소음의 시대에 침묵을 벗하는 일은 행복하다. 128


바로 보려면 우리는 우리가 보는 사물의 명칭을 잊어야 한다. - 모네


나는 에로틱한 단어도 싫어한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써서 하찮고 진부한 것으로 만들었다. - 사진가 헬무트 뉴튼 135


맑은 책을 읽고 싶다. .. 조금은 느리지만, 슬로 미디어인 책을 통해서도 살아가는 지혜나 힘은 충분히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앉은 자리에서 손가락과 눈으로 하는 여행보다 두 다리로 직접 만나고 가슴으로 느낀느 경험히야말로 여전히 가장 의미 있는 배움과 깨달음이 아닐까. 136-137


여행을 하며 머리로 배운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다. 배운 것을 비워버리는 그러한 작업은 느리고도 어려웠다. .. 진실로 교육의 시작이었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책읽기란, 아무튼 숙제가 아닌 쾌락이어야 마땅할 터. ..

여행은 배움의 공간이지만 비움의 시간이기도 한것.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텅 비우는 것 ㄱ역시 우리가 진정 배워야 할 소양이 아닐까. 212


책의 맛을 충분히 알고 이해하기 위해 고토록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216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면 야만적인 힘을 사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함이다. -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삶이란 무엇일까? 던져진 존재로서 그저 살아지는 것일까?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무엇일까? 일상에서 답을 구할 수 없어 여행을 떠나지만 여행을 떠난다고 답을 얻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여행은 무의미한 일상의 연장일 뿐일까? 246


기억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려봐야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루이스 부뉴엘의 말,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251


일본인들이 쓴 불교 입문서인 <불교가 좋다>. 책을 우연히 뒤적이다가 '불교 경전에는 행복(幸福 다행행 복복)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문장을 읽고 무릎을 친 적이 있다. 뭔가 대단한 통찰력을 얻은 느낌이었다. 영어나 불어, 독어, 라틴어로 된 서양의 사상과 문물을 한자어로 번역하던 일본 메이지시대에 새롭게 만들어진 단어인 '행복'의 어원을 쫓으며, 동양인에게는 없던 '행복'의 개념이 그간 어떻게 작용해왔는지를 추적하는 내용이었다. '애 행복이라는 한자에는 서양의 단어에 들어 있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일본인(동양인)들이 '자신의 독특한 생각을 서양인처럼 '행복'이라는 단어로 대신함으로써,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고를 계속해 왔'다는 것이 책의 설명이다. 255


뉴스를 접하면 언론을 호도하고 본즐을 흐려 진실을 가리려는 파렴치한 시도는 사회 상류층으로부터 난무하고 있다. 262


겨울은 달리 보면 '따뜻한' 계절이다. '따뜻한'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계절은 오로지 겨울밖에 없다. '시원한'이 여흠의 형용사이듯 말이다. 하지만 겨울이 딷스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가 절실하다. 온기가 없는 겨울, 따뜻하게 내민 소노가 마음을 나누지 않는 사람들의 계절은 혹한의 겨울보다 더 춥고 매서울 것이다. 285


모든 길과 길 위의 여행은 어디론가 손을 뻗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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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행을 떠나려 할까? 

"나는 왜 여행을 떠날까?"라는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하려면, 즉 우리의 여행 동기를 정확히 알려면 먼저 여행 동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다음으로는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한 뒤 자신의 여행 동기가 어떤 특징을 띠는지를 파악해봐야 한다. 얼핏 복잡해 보이지만 질문의 구조는 단순하다. 먼저 "사람들은 왜 여행을 떠날까?"라는 질문을 하고 다음으로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고 물은 뒤 "나는 왜 여행을 떠날까?"라고 자문해보는 것이다.  22


메릴랜드 대학의 이소 아홀라(Sepp.o E. Iso-Ahola)는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유래한 접근-회피 동기 개념을 이용해 "사람들은 왜 여행을 떠날까?"라는 질문에 답함으로써 여행 동기 연구에 오랜 기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인간은 무언가를 얻고 무언가를 하려는 '접근 동기'에 따라 행도에 나서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피하고 무언가를 하지 않으려는 '회피동기'에 따라 움직이기도 한다. ..

접근 동기와 회피 동기는 언제나 동시에 나타나서 일정한 비율로 조합된다. 세상 모든 일에는 A를 얻는 것과 B를 회피하는 측면이 전부 있기 때문이다. 

이소 아홀라는 여행도 이와 똑같다고 말한다. 여행은 무엇인가를 피하려는 회피 활동인 동시에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는 접근 활동이다. 여행은 도피이지 탐색이며 탈출이자 추구이다. 따라서 여행을 통해 도피하고 탈출하려는 대상과 여행을 통해 탐색하고 추구하려는 대상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  23


접근 동기와 회피 동기가 각기 어느 정도 비중으로 조합되느냐 하는 것도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두 동기의 조합 양상이 여행의 양상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여행의 양상은 여행자의 성격과 가치, 여행자가 수집한 정보, 여행지의 이미지, 타인의 영향, 여행 기술, 돈, 시간 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 결정되는데, 접근 동기와 회피 동기의 비율도 여기에 고유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24


성격 5요인(또는 '빅 파이브').

성실성이란 계획성과 끈기, 목표 지향성을 뜻하는 성격 특성이다. 성실성이 높은 사람은 항상 시간을 잘 지키고, 꼼꼼하고, 인내심이 강하고, 자기 통제력이 강한 사람이다. 성실성이 낮은 사람은 게으르고 주의가 산만하며 의지가 박약한 사람을 뜻한다.

우호성은 대인 관계 상황에서 어떤 감정과 행동을 나타내는지에 대한 성격 특성이다. 우호성이 높은 사람은 상냥하고 친절하며 스스로 솔직하면서 남을 잘 믿는 사람이다. 우호성이 낮은 사람은 냉소적이고 교활하며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신경증 성향은 정서적 안정성/불안정성을 나타내는 성격 특성이다. 신경증 성향이 높은 사람, 즉 정서적 불안정성이 높은 사람은 매사 자신이 없고 건강염려증이 있으며 항상 불안하고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신경증 성향이 낮은 사람, 즉 정서적 안정성이 높은 사람은 차분하고 강인하며 편안한 사람이자 감정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32


외-내향성은 대인관계나 직장 생활, 여가 활동 등에 폭넓고 강한 영향을 끼치는 성격 특성이고, 당연히 여행의 동기와 여행자의 행동에도 강한 영향을 끼친다. 외향인은 지루한 일상가 답답한 인간관계에서 탈출하여 신나고 자극적인 경험과 강렬한 육체적 활동, 새로운 사람들과의 열렬한 인간관계를 추구하는 여행을 떠난다. 

반면 내향인은 스트레스를 주는 환경과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평온함을 느끼고 자기를 성찰하며 친밀한 살마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여행을 즐긴다. 

개방성은 특히 새로운 시직을 습득하고 다양한 문화와 상호작용하며 미적, 예술적 생활을 즐기는 양상과 큰 관련이 있는 성격 특성이다. 즉 어떤 사람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음악가 또는 미술가를 좋아하거나 베스트셀러가 아닌 책을 읽고 있다면 이 사람이 오타쿠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보다는 이 사람의 개방성이 높을 것이라 짐작하는 편이 낫다. 

개방성은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문화에 접촉하고 새로운 지식과 현상을 탐사하는 특성을 띠는 여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개방성이 높은 사람은 여행을 통해 지적, 예술적 호기심을 충족하려 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과 문화의 틀을 체험하려 한다. 

반면 개방성이 낮은 여행자들은 고향에서 가깝고, 문화적인 차이가 작고, 안전하고 깨끗한 여행지를 찾아내서 그곳을 몇 번이고 다시 방문하며 만족스러운 여행을 즐긴다.  37-38


외-내향성과 개방성에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곧 "나는 왜 여행을 떠날까?"라는 질문에도 답할 수 있게 된다.  38


기대감이란 우리가 어떤 기대를 하고 있든 바로 그 기대가 충족되리라는 희망적인 예측에서 오는 것이다.  45


다양한 긍정 정서와 행복감 체험에서 한발 더 나아가 여행은 우리가 인생의 다양한 부분에서 더 큰 만족감을 경험하게 해준다.  46


관계 강화의 측면은 여행의 큰 매력 중 하나이다. 

여행학 연구가 다루는 중요한 여행 행동 가운데 하나로 '반복 방문'(또는 '재이용')이라는 것이 있다. 반복 방문이란 어떤 사람이 자기가 벌써 가봤던 여행지를 다시 찾는 현상으로, 공급자 처지에서는 그 원인과 촉진 조건이 매우 궁금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47


사람들이 어떤 여행지를 두 번 이상 방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좋았으니까" "한번 가본 곳이라 친숙하고 편하니까" "어려움이 없고 별다른 계획을 짜지 않아도 되니까" "이미 검증되었으니까" "다른 곳은 잘 모르니까" 등등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이유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리처드 기텔슨(Richard J. Gitelson)과 존 크럼프턴(John L. Crompton)은 이런 이유들 외에 한 가지 뜻밖의 요인을 밝혀냈다. 이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그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같은 여행지를 반복해서 방문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정말 좋다고 느꼈던 경치를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 사람 손을 잡아끌고 그곳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은 자기가 마음에 들어했던 음식을 누군가에게 맛보여주기 위해 그곳으로 돌아간다. 혼자서 봤던 멋진 축제를 함께 감상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안겨주고 이를 함께 느끼기 위해 돌아간다. 아름답지 않은가?  48


여행은 우리를 다방면에서 한층 성장하게 한다...

매슈 스톤(Matthew J. Stone)과 제임스 페트릭(James F. Petrick)은 여행이 '경험학습'을 유발하기 때문에 이런 자기 성장의 효과를 가져온다고 설명했다. 경험학습이란 우리가 기존의 지식이나 경험 또는 호기심을 바탕으로 능동적인 실험을 하고, 실험을 통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경험을 하며, 이 경험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곱씹으면서 추상적인 개념을 도출해내는 학습 과정을 뜻한다.  49


여행을 통해 우리의 정서지능이 상승한다.

우리는 각종 정서를 더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고("이게 행복이로구나!") 정서가 발생한 원인을 잘 추론할 수 있으며("날이 더우니까 아무한테나 화를 내게 되네!") 각 정서가 낳는 결과가 무엇인지도 이해하게 된다("아무 데서나 화를 내면 곤란한 상황에 빠지기도 하는구나!"). 마찬가지로 정서를 강렬하게 표현하는 타인을 바라보며 타인의 정서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법을 익힐 수 있다.  50-51


여행은 물론 문화지능의 상승과도 깊은 관계를 맺는다.  51


2011년, 세니자 코셰비치(Senija Causevic)와 폴 린치(Paul Lynch)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여행 산업이 수행하는 역할을 다룬 논문을 발표했다. 연구자들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처럼 전쟁과 학살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지역으로 여행하는 것을 '불사조 여행'이라 정의한다. 여행자들이 여행지의 사회공동체가 잿더미를 딛고 다시 피어나도록 돕기 때문이다.

코셰비치와 린치가 설명하는 불사조 여행의 작동 단계는 다음과 같다. 먼저 전쟁과 학살을 겪은 장소는 여행자들에게 삶과 인간성, 국가와 공동체에 대해 숙고하게끔 하는 고유한 매력을 지니게 된다. 여행자들은 이러한 통찰을 얻는 동시에 전쟁에 지친 여행지 민중에게 도움을 주고자 이와 같은 장소를 여행하기로 마음먹는다.

일단 여행자들이 유입되면 여행지 민중은 여행자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공동체를 재생할 수 있다. 여행자와 상호작용하기전, 즉 여행지 민중이 전쟁의 참상을 자기들끼리만 끌어안고 있는 상태에서는 전쟁의 참상이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로만 남아 있다. 즉 무너진 집은 여전히 '무너져버린 내 집'이고 학살의 희생자들은 여전히 '죽어버린 우리 가족'이다. 반면 전쟁의 폐허와 학살의 장소를 여행자들에게 공개하고 나면 여행지 민중은 이제 전쟁의 희생자들에게 '두 번째 장례'를 치러줄 수 있게 된다. 여행자들과 대화하고, 폐허와 학살지를 관광지로 정비하면서 여행지 민중은 전쟁의 '상처'를 아물어가는 '흉터'로, '살해당한 가족'을 '돌아가신 역사적 인물'로 다시 정의할 수 있다. 즉 여행지 민중은 전쟁과 학살을 비로소 과거의 일로 묻어두고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다. 

따라서 불사조 여행을 하는 여행자는 전쟁과 학살을 겪은 여행지에 경제적 도움과 심리적 지지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여행지 민중이 자기들의 아픈 경험을 객관화하고 역사화할 수 있게끔 돕는다. 전쟁 후 보스니아를 여행한 사람들은 이렇게 보스니아 사람들이 오늘날 다문화주의와 다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화합과 재생을 강조하는 공동체를 수립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54-56


여행의 만족이나 행복은 항상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62


좋은 여행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기가 막힌 궁합만은 아니다. 여행과 관련된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할 필요가 있고, 행복한 여행을 하게 해주는 마음가짐을 체득할 필요가 잇으며, 행복한 여행을 오래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행동 규범을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기술과 심리적인 자질을 갖추고 올바른 규범을 익힌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만족스러운 여행을 하고 여행의 가치과 효과를 최대한 누리며 전파하는 '좋은 여행자'가 될 수 있다. 좋은 여행자가 된다면 우리가 앞서 품었던 마지막 의문인 "여행이 딱히 그런 의미와 가치는 없는 것 같은데?"라는 의구심 또한 자연스럽게 해소될 거싱다.  63




여행은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맞춰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내가 터득한 요령을 세 가지만 적어보고자 한다.  80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그만큼 공동체의 복지를 증진하고 문명의 진화를 촉진할 수 있는 다양한 대안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먼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항상 문화적 접촉과 교류를 통해 다채로운 대안을 섭취하고, 이를 변용하거나 자신의 문화와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발명품, 새로운 지식과 이론, 새로운 사회 제도를 창조해왔다. ..

물론 '선진국'으로 떠나는 여행에서도 다양한 지식을 습들하고 많은 문화적 아이디어를 습득할 수 있다. ..

문화적 교류는 상대적으로 덜 발전한 지역이 더 발전한 지역의 문화를 '공부'해서 일방적으로 수입해 쓰는 식으로만 진행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매우 창조적인 존재이며, 남이 잘 만들어놓은 것을 베껴서 쓰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한테서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서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문화를 만들어낼 줄 안다. 피카소는 아프리카의 공예품에서 문화적 아이디어를 취해 입체파를 개창했고, 이로써 서구의 회화 양식에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현대를 사는 우리도 여전히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한 것들을 얻을 수 있다.

당장 아시아에만 나가보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의 공존이라는 가치를 느낄 수 있고, 인도 펀자브에서는 근면과 봉사의 정신을 몸으로 느낄 수 있으며, 태국에서는 관용과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문활르 경험하고, 일본에서는 철저한 질서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를 목도할 수 있다. 태국과 인도네이사의 색다른 패션, 일본의 아기자기한 공예품, 인도의 색감과 영화, 노래, 춤, 각국의 다양하고 고유한 음식들에 이르기까지 신선한 자극을 주는 문화적 요소들의 목록은 끝이 없다. 심지어 여행지의 문화에서 이런 장점들을 읽을 수 없다면, 적어도 그곳의 문화에서 안타깝다 싶은 점을 반면교사로 삼을 수는 있다.  87-89


문화충격을 완화하여 생경한 문화를 만족스럽게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치료제는 대략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시간, 둘째는 문화 지능, 셋째는 여행자의 성격과 동기이다.

먼저 시간. 고전적인 문화충격 연구자들은 우리의 문화충격 경험이 시간에 따라 4단계로 전개된다고 말한다. 1단계는 새로운 문화에 매력을 느끼는 동시에 다양한 문화적 장벽에 직면하는 단계이다. 이때 우리는 아직 낯설고 이국적인 문화에 호기심과 흥미를 간직하고 있다. 반면 2단계에 접어들면 이제 낯설고 이국적인 문화에서 적대감과 실망을 느끼고 고국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게 된다. 이때 우리 입에서는 "이 사람들 너무 더러워서 안 되겠어. 역시 한국이 위생 면에서는 최고야" "애들이 너무 싸가지가 없네. 이걸 보면 한국이 그래도 교육은 잘 시킨단 밀이야" 등등의 말이 튀어나온다.

여행 기간이 매우 짧을 경우, 우리는 가히 주화입마(走火入魔 달릴주 불화 들입 마귀마)의 단계라 할 수 있는 이 문화충격 2단계에 접어든 채 여행을 마치게 된다. 여행지의 문화에 대한 반감과 여행에 대한 불만족을 품에 안은 채로. 그러나 여행 기간을 조금만 더 길게 가져간다면 우리는 문화적 적응도가 향상되고 긴장감이 감소하는 문화충격의 3단계에 접어들 수 있다. 어떤 지역을 석 달 이상 장기간에 걸쳐 여행한다면 현지 문화를 온전히 이해하고 진정한 다문화주의를 취할 수 있는 문화충격의 4단계(더는 충격이라 표현할 수 없는 상태이다)를 체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때문에 시간은 문화충격의 좋은 치료제 중 하나라는 것이 고전적인 이론가들의 견해이다.  

반면 최근의 심리학자들은 단순한 시간 요인보다 문화지능을 더 중시한다. 문화지능이란 상이한 문화에 접촉했을 때 어떤 지식과 행동이 필요한지 파악해서 이런 지식과 기술을 익히고 실제로 적용하는 정도를 나타낸다. 즉 문화지능이 높은 사람은 "외국에 나가면 인사법이나 예절을 잘 알아야 해. 난 이번에 일본에 가니까 일본식 예절을 좀 연습해야겠어"라고 생각하고 이를 잘 실천해내는 사람이다. 

문화충격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화되듯 문화지능 또한 여행지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쭉쭉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문화지능의 측면에서도 오직 시간이 약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문화지능은 우리가 여행에 나서기 전에 웬만큼 확보할 수 있는 여행 자원이기도 하다. 아주 간단한 현지어 회화를 익히고 현지 역사에 관한 간략한 소개 글을 읽고 친구들의 심플한 조언에 귀 기울이기만 한다면 우리의 문화지능은 향상되고 여행 첫날의 문화충격은 큰 폭으로 감소한다. 여행지에 흥미를 느껴서 공부하면 할수록 실제 여행에 나섰을 때의 문화적 충격이 신선하고 기분 좋은 놀라움으로 바뀔 가능성이 커진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여행을 오래 할 필요도 없고 여행지를 많이 공부할 필요도 없이 이국 타향의 문화를 그저 즐겁게 향휴하기도 한다. 문화충격에 관여하는 마지막 요인인 성격과 동기의 개인차라는 것 때문이다. 이는 바로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끼고 다양성을 중시하며 이질적인 것에 관용을 보이는 특성인 개방성의 차이이다. 개방성이 높은 사람은 이국의 문화와 접촉하는 상황에서 남들보다 훨씬 적은 노력을 기울이고도 훨씬 큰 만족을 느낄 수 있다.  89-92


우리가 역사 유적을 좋아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깊은 심리적 뿌리가 있다...

실제로 우리가 역사 유적과 유물에서 매력을 느끼는 메커니즘은 우리가 마법에 혹하게 되는 메커니즘과 맞닿아 있다. 

제임스 G. 프레이저의 유명한 인류학 시리즈인 <황금가지>는 마법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는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이론서 중 하나이다. 프레이저는 특히 마법의 '유사성 원리(law of similarity)'와 '감염 원리(Law of contagion)'에 주목한다. 

유사상 원리는 비슷한 행동이나 현상이 비슷한 결과를 부른다는 인간의 원초적 믿음에 바탕을 둔다. 일례로 우리나라에서는 가뭄이 들었을 때 땅이나 강에 물을 뿌리는 행동(비가 오는 것과 비슷하다)으로 기우제를 대신하고 부채질(바람만 씽씽 부는 가뭄과 비슷하다)을 금지하기도 했다. 반면 감염 원리란 "한번 접촉한 것은 영원히 접촉된 것이다"라는 믿음을 뜻한다. 즉 세종대왕이 만졌던 물건은 그가 죽고 사라진 뒤 몇백 년의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세종대왕의 손길이 남아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108-110


폴 로진(Paul Rozin)을 비롯한 여러 심리학자는 우리가 여전히 유사성 원리와 감염 원리 같은 미신적인 사고의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빠르게 쑥쑥 자라는 콩나물을 먹으면 우리 키도 쭉쭉 자랄 것이라 생각하고, 인간의 성기를 닮은 음식을 먹거나 정력이 강하다고 알려진 동물으 ㄹ먹으면 정력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험을 보기 전에는 물건이 떨어지는 게 너무 싫고 미끌미끌한 미역국도 먹기가 싫다. 우유로 세수하면 피부가 하얘질 것만 같다. 이처럼 우리는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결과를 낳는다고 여전히 믿고 있는 것이다.  110


이런 생각과 느낌은 모두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인류는 이런 비합리성을 아름다운 문화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작가가 유사성 원리를 잘 활용하면 멋진 복선과 암시, 상징을 만들어낼 수 있다("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은 안개다"). 또한 감염 원리를 문화적으로 승화시키면 위대한 역사 유적과 고귀한 유물을 갖게 된다. 우리는 경주 토함산 석굴암에서 장엄함과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신라 사람들의 숨결과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연결의 느낌을 바탕으로 유저고가 유물에 역사적, 사회적,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이에 따라 석굴암은 시날의 역사와 신라 사람들의 수학적인 능력과 한국인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장소가 된다.  111


결론적으로 말해서 역사 유적은 감염 원리에 따라 강한 힘을 부여받은 여행의 요소이며 시각적 경외감, 판타지 세계에 들어간 듯한 느낌, 역사적 의미, 지적 흥미 등의 다양한 만족감을 두루 제공한다. 그러나 모든 역사 유적이 저마다 다른 매력이 있다는 점은 꼭 기억해두자.  112


여행 중에 산 물건은 실용서오가는 거리가 있다. 대신 그 나라 옷을 사 입고 그 나라를 여행할 때는 자신이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며 다양한 정체성을 한 몸에 수용하는 개방적 여행자임을 표현할 수 있다. 예전 여행에서 산 낡은 티셔츠를 여행 떠날 때마다 꺼내 입는 것은 자신이 모허모가 도전을 좋아하는 장기 여행자라는 신호를 보내는 셈이다. ..

기억을 촉진하는 기능과 정체성을 표현하는 기능은 구입한 물건의 실용서오가는 별 관련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여행 중에 쇼핑하는 사람들은 물건의 질보다는 어떤 물건이 각 여행지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고유한 물건인지에 더 신경 쓰는 경향이 있다.  124




여행의 사회적 효과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여행자들의 행동 또한 여행자 대상 범죄를 낳는 다양한 요인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역설한다. 우리는 여행자가 여행지를 평가하는 것을 당연시하면서 가끔 그 반대도 당연한 일임을 깜빡하곤 한다. 현지인들도 여행자를 평가한다는 사실 말이다.  139


세상에는 두 가지 혐오가 있다.

첫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원초적인 의미의 혐오로, 더러운 것이나 썩은 것이 입에 닿거나 입안에 들어오거나 몸에 닿았을 때, 또는 이런 가능성이 감지될 때 우리가 느끼는 강렬한 불쾌함을 뜻한다. 이런 원초적 혐오는 심리학 용어로 '핵심 혐오(core disgust)'라고 하며, 몸에 좋지 않은 썩은 시체나 독극물을 먹지 않게끔 하여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준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주로 썩거나 맛이 고약한 음식물, 배설물, 사람과 동물이 사체나 장기, 곤충, 쓰레기 등의 모습이나 냄새에서 혐오를 느낀다. ..

핵심 혐오는 공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타고난 본능과 평생 동안의 학습이 조합되어 나타나는 정서이다.  151-152


두 번째 혐오에 대해 알아볼 차례다. 우리는 썩은 음식과 시체, 배설물 외에 또 어떤 것에서 혐오를 느낄까? 살인자, 강간범, 가정폭력범, 아동성추행범, 동물 학대범, 무식을 자랑하는 자, 예의 없고 상스러운 자,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는 자, 무능한 리더, 혹세무민하는 자와 곡학아세하는 자, 모리배, 시정잡배 등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사회공동체에 해로운 사람들이나 이들의 행동을 혐오하는 마음은 썩은 음식물이나 동물의 사체, 배설물을 혐오하는 마음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사회적, 규범적, 인격적 혐오감을 따로 '도덕적 혐오' 또는 '경멸'이라 일컫는다.

대신 경멸의 신체적, 행동적인 반응은 혐오와 똑같다.  154-155




여행을 떠나 최상의 날씨와 만나면, 더는 다른 것이 필요 없을 정도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뜨겁고 습하거나 주야장천 비가 내리는 날씨 등은 여행의 다른 모든 요소를 압도하여 아예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169


좋은 음식은 여행에 만족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음식이 생각나서라도 그걸 먹었던 곳으로 반드시 돌아가게 만들곤 한다. 심지어 오로지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는 목표 하나만으로 미식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도 있다.  182


진짜 경치가 제공하는 원대하고 깊은 입체감과 우리 피부에 와닿는 그곳의 바람, 나무 향기와 풀 냄새, 강과 폭포의 소리, 그리고 이런 다양한 요소들이 한데 어울리며 자아내는 황홀함은 어떻게 달리 재현할 수가 없다. 결국 그곳에 직접 가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단 여행을 떠나기만 하면 우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멋진 경치와 맞닥뜨리게 된다.  192


일단 경치에 이끌려 어떤 여행지에 도착한 뒤에는 이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어떤 행복한 홀동을 할 수 있는지가 경치 자체보다 훨씬 중요해진다. 즉 경치는 다른 활동과 조합됨으로써 여행의 행복을 증폭시키는 '배경'이자, 문화와 음식 및 각종 액티비티 등 각 지역의 다양한 여행 요소들을 결합하여 여기에 통일성과 주제를 부여하는 '틀'이지 여행의 목적 자체는 아니다.  195


여행자는 자신의 성격, 목표, 자원, 각종 여행 요소를 대하는 태도 등을 종합하여 자신에게 딱 맞는 완벽한 숙소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205


여행 동반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동반자들의 성격과 취향의 유사성은 사실 그렇게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동반자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자주 소통하고, 서로의 욕구와 취향과 가치를 절충하거나 공유함으로써 좋은 여행을 만들어나가려는 의지가 있느냐이다.  216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심리학자 중 한 명인 앨버트 밴듀라(Albert Bandura)는 .. 지식과 기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지식과 기술 말고도 뭔가를 '잘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심리적 요인들이 있다고 강조한다.

대표적으로 "이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믿음", 즉 자기 효능감은 공부건 일이건 분야를 막론하고 매우 중요하다.  228


지식과 기술, 자기 효능감 신념, 목표의 특성, 자기 평가 표준을 중시하는 밴듀라의 이론을 사회인지 이론이라고 한다.  229



여행 중의 기술에는 왕도가 따로 없다. 여행자 한 명 한 명이 여행 경험을 통해서 체득하는 고유한 노하우들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주누가 여행 중에 활용하면 좋을 기술도 두 가지 정도는 있다. 하나는 '마음을 챙기며 여행하기'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 정서에 휩쓸리지 않기'이다. ..

'마음 챙김(mindfulness 또는 sati)'이란 원래 불교적 명상 수행과 관련한 개념인데.. 핵심은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집중하며 마음을 열기'라는 점에는 대략적인 동의가 이루어져 있다. ..

여행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마음 챙김이란 여행 중 발생하는 모든 상황에 항상 호기심을 품고, 이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종합하여 능동적인 해석을 내놓는 것이다.  245-246


우리가 외향적이든 내향적이든, 개방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여행 중에는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절대 마음을 닫아서는 안 된다.  247


마르시알 로사다, 바버라 프레드릭슨 같은 연구자는 긍정 정서와 부정 정서의 비율이 최소 3 대 1 정도가 되어야 행복하고 번창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248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다. 부정 정서는 긍정 정서보다 더 강렬하게 체험되고, 더 강렬하게 기억되는 편이라는 사실이다...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부정 정서의 이런 강력한 영향을 최소화하고 긍정 정서 경험을 오래도록 간직할 필요가 있다...

감사 편지 쓰기는 고마운 사람을 날마다 떠올려보며 이들에게 감사 편지를 쓴느 것을 뜻한다.  249


만약 여행 중 부정 정서를 경험하는 날이 생긴다면, 그날이 저물어갈 즈음 하루 동안 있었던 긍정적인 경험을 떠올려보거나 고마운 사람들을 생각해보고 서로의 행복한 여행을 응원해주자.  250


우리는 우리 여행을 여러 편의 재미난 이야기로 만들어야 한다. .. 

우리가 여행 중 겪었던 여러 가지 좋은 일과 여러 가지 나쁜 일의 세세한 의미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이야기 안에 배치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좋았던 일은 강렬한 추억이 되고, 나빴던 일은 귀중한 배움이 된다. ..

어떤 사람의 여행은 아름답고 의미가 있어서 여행기로 쓸 만하고, 다른 사람의 여행은 그럴 가치가 없어서 여행기로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모든 여행은 여행기로 쓰인 뒤에야 아름다워지고 모두와 공유할 만한 의미를 얻는다. 적어도 우리 마음속에서 크고 작은 여행기로 집대성되지 않은 여행이야말로 진정 무가치하고 의미가 없는 여행이다.  251


"여행은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는 여행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판단, 취향, 가치관이 묻어난다. "여행에서는 어떤일이 일어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우리가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지 그렇지 앟은지가 드러나고, 여행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노출된다. 그리고 "나는 여행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서는 우리가 항상 행복한 여행을 하는 좋은 여행자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중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잘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떤 것을 잘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신념과 기대가 바로 이것이다. 앨버트 밴듀라는 이를 '자기 효능감 신념'이라 표현한다.  253-254


자기 효능감 신념을 증진하는 중요한 메커니즘 가운데 하나는 모델링 학습이라고도 하는 '관찰 학습'이다.  255


여행에 나서면 더욱 다양하고 훌륭한 모델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256


자기 효능감을 높이는 또 다른 대표적인 메커니즘은 작은 성공 경험을 스스로 직접 쌓아나가는 것이다. ..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직접적인 여행 경험을 통해 효능감을 높일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바로 무슨 일이든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차근차근 배워나가려 하는 '학습목표'를 가진 사람들이다.  257


어떤 사람이 학습목표를 지향할 것인지 수행목표를 추구할 것인지는 이 사람이 지니고 있는 '능력이라는 것'에 대한 신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즉 사람의 능력이란 유동적이고 경험에 따라 성장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학습목표를 지향하게 된다. 반면 사람의 능력은 고정된 것이고, 세상을 살아가려면 자기가 타고난 능력 한도 내에서 최대한 남들에게 잘 보이며 살아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하는 살마은 수행목표를 취하게 된다. 이런 점을 특히 강조하는 연구자는 심리학의 거장 중 한 명인 캐럴 드웩(Caro; Dweck)이다. 드웩은 능력이 향상한다고 믿는 사람을 능력에 대한 '증진 이론'을 가진 사람이라 정의하고, 반대로 능력이 타고난 상태로 고정된다고 믿은 사람을 능력에 대한 '실체 이론'을 가진 사람이라 정의했다.  258


여행은 우리의 능력을 증명하는 활동이 아니다. 여행의 목표는 행복과 성장이다. ...

또한 여해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은 한국에서 가지고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여행을 떠나 하나하나 시도하고 적용해보면서 몸으로 익혀나가는 것이다.  260


여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지 않은 사람은 평가 표준도 모호해서, 자기가 여행을 잘하고 있는지, 어떤 점을 개선하면 좋을지를 파악하지 못한다. 또한 여행지가 제공하는 다양한 여행 요소와 그 특징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엉뚱한 표준을 엉뚱한 곳에 들이밀 수도 있다. ..

여행에 대한 학습목표가 있는 살마은 늘 "나는 지금 다양한 여행 경험을 통해 여행에 대해 많이 배우고 있나?"라는 기준으로 자기를 평가하는데, 이는 갈수록 좋은 여행을 할 수 있게끔 보장해주는 좋은 평가표준이다.  268


윤리적 여행이란 여행지의 환경을 보호하고 현지의 문화를 존중하며 여행지 경제에 정의로운 기여를 하는 세 가지 요소를 이루어 진다고 볼 수 있다.  269


에밀 저번(Emil Juvan)과 세라 덜니커(Sara Doincar)는 "사람들은 윤리적 여행의 표준을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이를 잘 지키지 않을까?"라는 문제를 분석해 보았다. 저번과 덜니커가 내린 결론은 윤리적 표준을 잘 지키지 못하는 여행자들의 행동 패턴에는 '인지부조화'라는 유명한 심리적 메커니즘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인지부조화란 이런 것이다. 우리가 "현지 아이들에게 적선을 하면 안 된다"는 신념이 강하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어느 날 캄보디아를 여행하던 중 그 많은 아이들의 공세에 시달리다 못해 볼펜 한 자루와 우리나라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주고 아이들이 그린 그림도 3달러어치 사고 말았다. 그러면 우리 머릿속에서 부조화가 발생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적선을 하는 사람이야 안 하는 사람이야?" 

이처럼 우리의 태도 또는 신념과 우리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쪽은 우리의 행동이다. 그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고 원초적이다. 태도와 신념은 바꾸면 되지만 일단 저질러버린 행동은 없었던 것으로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이 때문에 우리는 태도와 행동의 부조화가 발생했을 때 간단히 태도를 수정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곤 한다. 즉 위의 상황에서는 "사실 아이들한테 적선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지. 암, 그렇고 말고"라는 식으로 우리의 윤리적 표준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274


저번과 덜니커는 여행자들이 인지부조화에 따라 태도를 변화시킬 때 전형적으로 보이는 여섯 가지 부조화 해소(즉 변명) 양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는 우리가 기존의 표준에 어긋나는 일을 하긴 했지만, 알고 보면 그게 그렇게 부정적인 결과를 낳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결과의 부정' 패턴이라고 한다. .. 

둘째는 '하향 비교'이다. 우리 자신도 뭔가 잘못을 하긴 했지만 우리보다 훨씬 심한 자들이 있으니, 우리 잘못을 잘못 축에도 못 든다는 식의 변명 양상이다...

셋째는 '책임의 부정'으로, 이는 어떤 행동이 현지인들 때문에 발생했다고 변명하는 것을 뜻한다...

넷째는 "나도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거기에선 꽁초를 거기에 버렸어야 했다고"라는 식으로 말하는 '통제의 부정'이다. 즉 책임의 부정이 현지인 탓을 하는 패턴이라면, 통제의 부정은 상황을 탓하는 패턴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는 "휴가는 예외라고요. 여기 나와서까지 윤리 같은 걸 신경 써야 해요?"라고 말하는 '예외 형성'이다. ..

여섯째 패턴은 "사실 나는 나쁜 일보다는 좋은 일을 더 많이 해요"라고 말하는 '보상'이다. 이는 아주 교묘하고 기가 막히게 잘 먹히는 변명 양상이다.  275-276


우리는 완벽할 수도 없고, 변명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렇지만 위의 여섯 가지 변명은 그저 변명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적어도 좀 더 나은 여행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잘못을 변명하는 것은 괜찮다. 다음에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한다면 말이다.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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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가 인생 최고의 쾌락으로 인정받는 가운데, 여행은 그중에서 가장 값비싸면서도 가치 잇는 소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4


현대인이 소비를 통해 유토피아로 초대된다면, 그 유토피아의 최정상에는 여행의 장소가 있다.  5


아마 현대사회에서 여행 정도의 지위를 부여받고 있는 것은 돈과 사랑 외에는 없을 것이다.  6


이전까지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적 탈출구는 '섹스'라 말해져 왔다. 자유주의, 여권 신장, 자본의 확장은 정확히 섹스 산업의 번성과 맞물렸다. 이제 이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여행이 되어가고 있다.  7

 

사랑이나 여행은 모두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 그것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기 시작하면, 즉 모든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처럼 권유되고 심지어 '강요'되기까지 할 때는 반드시 왜곡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제대로 사랑하고 제대로 여행하려면, 먼저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사랑과 여행을 분명히 보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맹목적으로 요구되는 것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어느덧 자기도 모르게 '욕망'하게 된 것들에 대해 의심해야 한다.  8



나는 여행을 다녀왔다거나 여행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꼭 질문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여행에서 무엇을 얻으셨나요? 여행이 왜 가치 있다고 생각하세요? 여행이 왜 좋으세요? 여행을 다니며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19



현대인에게 권태는 일상이 되었다. 그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쾌락도 일상이 되었다. 도시는 권태를 조장하고, 그것을 잊게 만드는 일시적 향락을 제공한다. 

어느 시점이 되면 우리는 깨닫는다. 내가 이 회색의 도시 한가운데에서 탈색되고 있다는 것을, 색채 없는 무미건조한 도시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21



도시는 우리에게 삶의 형식과 안전망을 제공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삶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완벽함 때문에 우리는 도시에서, 그 도시 속에 붙박인 우리의 현시에서 떠나고 싶어진다. 그 이유는 저 태곳적의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모순적이게도, 변덕스럽게도, 용납하고 싶지 않게도 자유와 안락이라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을 모두 원한다.  22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이러한 '이미지를 향한 갈망'을 인간의 중요한 특성으로 지적한다. 라캉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상상계와 상징계로 뒤덮여 있다. 여기에서 상상계란 이미지의 세계이며, 상징계는 언어적 질서의 세계이다. 우리 머릿속은 늘 이미지와 언어로 뒤얽혀 있으며, 영원히 그 두 가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이미지나 언어가 우리를 '완벽하게 만족시켜 주리라' 믿으며 욕망하고 나아가지만, 실제로는 무한한 욕망의 연쇄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면, 뒤이어 다른 이미지를 욕망한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언어(의미)를 획득하더라도, 곧 욕망해야 할 다른 언어(의미)가 생긴다.

여행에 대한 갈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특정한 여행지에, 정확히 말해 그 '여행지의 이미지'에 완벽한 만족이 있을 거라는 환상을 가진다. 그 이미지에는 자유, 낭만, 쾌락, 꿈, 희망, 관능, 행복, 열정, 성장, 드라마, 성공, 여유, 휴식, 모험과 같은 온갖 언어가 덧씌워진다. 이렇게 이미지와 언어가 결합한 '그곳'은 우리에게 뜨거운 갈마의 대상이 되지만, 정작 그곳에 도착하더라도 우리가 꿈꾸던 완벽한 향락은 존재하지 않느다. 우리는 다시 다른 여행을, 여행의 이미지를, 여행이 줄 어떤 언어(의미)를 꿈꾼다.  26



'여행은 단순히 여해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에 대한 열망들이 집약되어 있다.  27



우리는 자신의 삶에 좀 더 엄밀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욕망, 우리가 선택한 삶의 방식, 결국 우리를 규정하게 되는 존재 방식에 대해 더 엄격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삶은 짧고,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은 지나가고 나서야 후회로 되돌아오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넘쳐나는 가짜 여행들 속에서, 혹은 온갖 욕망으로 점철된 환영들 속에서 '진짜 여행'을 가려내야 한다.  28



'자유'는 모든 조건과 억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어떤 '순수한 상태'라고 오해되곤 한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한계 속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런 자유를 누리는 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자유는 자기가 어떤 현실에 속해 있는지를 아는 것이며, 그러한 현실적 조건들을 어떻게 수정할 수 있는지에 관여하는 것이다. ..

여행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자유는 나를 조건 지어 왔던 수많은 요소들과 의무들에 대해 다시 생각할 최선의 기회를 제공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뭐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재정립하고 새롭게 장악하며 수정할 수 있는 기회와 힘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31



여행에는 우리가 살아온 현실, 앞으로도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의 논리가 아니라 다른 논리로 살아 보고자 하는 욕망이 들어 있다. 특히 배낭여행객의 마음은 이 한 번뿐인 인생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방식의 삶을 체험해 보고자 하는 욕망으로 움직인다. 그 이후에는 다시 이 현실로 돌아올지라도, 조금은 다른 마음으로, 조금은 다른 형태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미한 희망을 가지고 저 '다른 삶'으로 떠나 보는 것이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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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관찰을 통해 나는 인간이 영혼과 동물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둘은 서로 별개일지라도 하나가 다른 하나에 완전히 포섭되거나 딱 겹쳐지기도 한다. 따라서 둘을 확연히 구분 지으려면 영혼이 동물성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

예전에 한 선생이 플라톤은 물질을 타자(他者 다를타 사람자)로 지칭했었다는 얘기를 해 준 적이 있다. 참으로 어울리는 명칭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이 명칭을 영혼과 더불어 인간을 구성하는 동물성에 갖다 쓰기로 한다. 동물성이라는 실체야말로 타자이며, 아주 요상하게 우리 인간을 희롱하기 때문이다.  30


동물성이 영혼에 끌려다니기도 하고, 반대로 영혼이 동물성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원리에 입각해 보면 한쪽은 입법권을, 다른 한쪽은 집행권을 지닌 셈인데, 이 두 권력은 곧잘 충돌한다. 뛰어난 이들은 자신의 동물성을 조련하는 데 가장 신경 쓴다. ..

이 점에 대해서는 예가 필요할 것 같다.

책을 읽다가 갑자기 흥미로운 생각이 뇌리를 스치면 그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기계적으로 글자와 문장을 따라갈 뿐, 이미 책은 안중에도 없을 때가 있다. 무엇을 읽었는지도 모르고 방금 읽은 내용도 기억하지 못한 채 책장만 넘긴다. 당신의 영혼은 자신의 짝인 동물성에게 책을 읽으라고 명령은 해 놓은 채, 정작 자신은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는다. 그러면 타자는 영혼이 더는 귀 기울이지 않는 책 읽기를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31-32


물질에서 벗어나 영혼이 언제든 홀로 여행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람직하고도 유용한 일이다.  37


아, 왜 우리는 근심 걱정과 고통스러운 야망을 타자에게 넘기지 않는 걸까? 가엾은 그대여, 이리 오라. 그대가 지은 감옥의 문을 부숴 버리고 내가 그대를 인도할 천상과 낙원의 저 하늘 위에서 홀로 부와 명예를 좇는, 세상에 던져진 그대의 동물성을 내려다보라. 세상 사람들 속에서 그대가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지 보라. 세상 사람들은 예의상 서로 거리를 두고 있지만, 각자 홀로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 안을 배회하여도 사람들은 그대에게 영혼이 깃들어 있기나 한지 혹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  42


나는 의자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걸친 뒤 벽난로 선반 위에 두 발을 올려놓았다... 참으로 아늑한 자세가 아닐 수 없다. 긴 여행길에서 어쩔 수 없이 한곳에 머물러야 할 때 이보다 더 유용하고 편한 자세가 있을까.  66


독자 여러분은 시시콜콜하다고 나에게 뭐라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여행자들이 좀 그렇지 않은가. 몽블랑을 오르거나 쫙 벌어진 엠페도클레스의 무덤으 오를 때면 소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고 기록할 것이다. 일행은 몇 명이며, 노새는 몇 마리인지, 챙겨 간 음식의 맛은 어떠한지 그리고 일행들은 얼마나 잘 먹었는지부터 노새가 발을 헛디뎌 비틀거린 얘기에 이르기까지 노트에 꼼꼼히 다 기록할 것이다.  69


진솔한 자세로 이론을 개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음과 같이 답할 것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글을 쓸 때는 어조가 단정적이 되곤 하는데, 이는 글쓴이가 제가 회하를 옹호할 때 그랬던 것처럼 겉으론 공정한 척하면서 미리 어떤 암묵적 판단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쓴 길은 반박을 낳을 수밖에 없고, 결론은 미심쩍을 수밖에 없지요.  103


나의 하인과 나의 개에게 철학과 인도주의를 배우고 있다.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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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가두면 공기가 되어버리니까. 

 난 바람이고 싶어.

 그래서 그냥 통과하게 높아두는 거야.

 가두지 않고."



어른이 된다는건, 몸만 뻣뻣하게 굳는것이 아니라 생각이 흘러가는 길까지 굳어지게 되는것.

중요한건 끝까지 유연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마음도, 생각도, 몸도...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

여행지에서 일어난 일들

여행지에서 향유하는 순간들

여행이 가져다주는 깨달음으로 

우리의 일상은 넉넉해진다.

때론 여행지에서 평소 시도하지 못했던 일들을

스스럼없이 해보기도 하며 

그 과정에서 또다른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래서 떠나면 떠날수록 내가 누구인지

더 잘 알게 되고 

길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삶이란 완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를 채워주고 잘 서 있을 수 있도록 서로 지탱해주는 것이다. 내가 힘이 있을 때는 누군가에게 나의 어깨를 빌려주고 내가 힘들때는 누군가에게 기대하고 의지하는 것. 어떠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이런 지혜를 얻기 위해 여행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말할때 우리는 길을 떠난다고 한다. 

'길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길에게' 떠나는 것이 아니라 

'길을' 떠난다고 말한다.

여행은 새로운 길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던 길을 내려놓거나 지금 가고 있던 그 길을 떠나 

잠시 안녕,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게 익숙한 그 길과

다시 돌아왔을대 변한건 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익숙한 길을 걷다 멈출 줄 아는 용기

익숙한 것들을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

그것이 여행이 길을 떠난 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사람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는 것일까.

나는 그 흘러가는 시간의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여행에는 흔적이 남는다. 

잠시 머문곳이든 매일 아침 지나던 길이든 '안녕'하고 눈 인사를 나눴던 사람이든 스쳐간 것들은 그렇게 기억되고 또 추억이 된다.



내가 가는 모든 길이, 선명하게 보여야 안심할 수 있다는 새악도 어쩌면 욕심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길이 더 평화롭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여행하는 방법은 또 달라질 것이다.

삶을 대하는 방법이 달라지듯 떠나는 방법도 달라지고

또 머무는 방법도 달라지겠지.

이렇게 변화할 수 있어서 그렇게 변하는 나를 보게 해주어서 참 고맙다.

여행이라는 친구에게.


내가 하는 일

내가 가는 곳

내가 먹는 것

내가 만나는 사람은 거의 정해져 있다.

그것을 깰 수 있는 건 

여행뿐이다.



여행은 애인처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

남루해진 마음이 쉬고 싶을 때나 삶이 푸석거리고 재미없을때 언제나 달뜬 마음으로 꿈꾸게 되는 것. 자랑하고 싶으면서도 나만의 것으로 남겨 두고 싶은 것.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시간을 보내든 그 자체로만으로도 충분한 것.

아무리 시간을 많이 보내고 머물렀던 곳을 또 지나간다해도 언제나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것.

여행은 애인처럼 친구들은 부러워하지만 엄마 아빠에게는 왠지 미안한 것.



여행은 스스로 써내려가는 옴니버스 영화의 시나리오 일지도 모른다. 

큰 세트는 일단 정해져 있고, 그 공간을 어떻게 꾸밀것인지는 나에게 달려 있다.

혼자 독백하듯 모놀로그 스타일로 이야기를 전개할 것인지, 각각의 등장인물을 적절히 넣어 흥미있는 에피소드로 풀어갈 것인지는 순전히 글을 쓰는 나의 몫이다. 길을 물어보는 짦은 에피소드에 한 명을 등장시키더라도 이야기를 풍성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면 여행이 즐거워 진다.  



'잠시 내 손에 머물다 가는 것들을 잘 놓을 줄 안다면 내가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면 인생을 여행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울 것 같다.' -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인생은 머무르지 않고 흐르는 것.

세월이 흐르듯, 삶이 흘러가듯, 시간도 흐르고 인연도 흐르는 것.

내가 할 일은 애써 잡으려고 발버둥치는게 아니라 그것들이 내게 잠시 머무는 동안 아끼고 사랑해주는 것이다.

함께 흘러갈 수 있도록 기대하며 같이 있는 동안 즐거워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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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남은 도피가 될 수 있었지만

떠나 있음은 또 다른 삶의 연속이었다.  156


기다림은 

어쩌다 저질러버린

키스의 뒷감당 같은것

아쉬움은 인색했던 사랑 고백처럼

멀어져갈 뿐.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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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견의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나역시 지독한 편견에 빠져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  80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것들이 있다.  100


피곤한데 행복하니?

행복한데 피곤하니?  172


희망도 때로는 피곤했다. 지금을 추억하자.  252


Tourist You are the Terrorist.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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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거대한 물음표였고, 나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질문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4


겨울만 되면 따뜻한 곳으로 '피한'을 떠나고 싶었다. 치안이 좋아서 혼자라도 안심하고 지낼 수 있고, 감수성을 자극할 만한 자연이나 전통이 남아 있는 곳이었으면 했다. 사철 꽅이 피는 곳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산책도 하면서 한껏 게을러지고 싶었다. 딱히 만날 사람도 없고, 꼭 사고 싶은 물건도 없고, 꼭 봐야만 하는 것도 없는 곳, 덜 쓰고, 덜 가지고, 덜 만남으로써 느긋해지고 싶었다. 여행이 주는 긴장감은 덜고, 일상이 주는 지루함은 벗어나 여행과 일상 사이에 머무를 수는 없는 걸까.  5


마치 현지인이라도 된 듯 슬렁슬렁 돌아다녔다. 매일 산책을 했고, 책도 많이 읽었고, 제법 글을 쓰기도 했다. 만날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적다 보니 나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8


여행과 일상의 중간지대에 머물며 덜 쓰고 덜 갖되 더 충만한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

자기만의 속도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좇아 떠나는 여해으, 공부하고 준비해서 떠나지만 가이드북에 의지하지 않는 여행, 여행 안에 여백을 두는 여행, 무엇보다 여행지의 삶과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여행..  9




발리


온갖 조건을 따지다 보니 여행을 시작도 하기 전에 피곤해졌다.  20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은 익숙했던 상대를 재발견하게 만든다. 내 안에 단단하게 굳어있던 상대에 대한 이미지를 녹여준다.  29


발리에서는 자식이 태어나면 이름 짓는라 고민할 필요가 없다. 태어난 순서에 따라 이름이 정해져 있으니까. 먼저 남자 이름 앞에는 I를, 여자 이름 앞에는 Ni를 붙인다. 첫째는 발리어로 와얀 혹은 뿌뚜, 둘째는 마데 혹은 까덱, 셋째는 뇨만 혹은 꼬망, 넷째는 끄뜻이 된다. 다섯 번째 후는 어떻게 하느냐고? 그때는 이름 뒤에 발릭(되돌아간다는 뜻)만 붙여 다시 돌아가면 된다. 마데 발릭, 뇨만 발릭 이런 식으로, 사실 이 뒤에 진짜 개인 이름이 하나씩 더 있는데, 이상하게도 다들 저렇게 부르고 소개를 한다.  36-37


돌아가면 입지도 못할 옷을 굳이 사 입는 이유는 뭘까. 현지인 혹은 다른 여행자들과 섞이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조금 더 과감하게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단지 편안해 보여서 일수도 있다. 어쨌든 여행지에서 옷은 나를 좀 더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수단이 되어준다.  52


여행이 우리가 품은 질문에 답을 주진 않지만 어딘가로 나아갈 수 있도록 등을 떠밀어주긴 하지. 일단 나아가면 결국 답도 찾을 수 있으리라. 아니, 평생 답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의 의미는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던져진 질문과 마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74


놀이와 노동이 분리되지 않은 삶..  97


남이 만들어놓은 것을 소비만 하는 삶에서 잠시 벗어나 스스로 창조하는 기쁨을 온전히 누린다. 

내 손으로 만든 무언가를 들고 ..

인간이 정서적으로나 지적으로 충분히 성장하기 위해서는 손을 쓰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헨리 소로가 그랬다. 소박한 삶의 기본 원치기 가운데 하나는 불필요한 것들을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버는 대신, 꼭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조금 버는 대신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 쓰는 일상을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핸드메이드 라이프를 산다는 것은 시간의 주인으로 사는 일의 은유 같기도 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온전히 몰입해본 사람은 안다. 그때 흘러가는 시간의 속도가 얼마나 다른지를.  98


마사지는 자신의 좋은 기운을 상대에게 나눠주는 행위라는 것.  103


자연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들일수록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세탁기, 청소기, 전기밥솥 등등 시간을 벌어주는 온갖 기계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늘 부족하기만 하다. 

생각해보면 시간이란 얼마나 다양한 속도를 가지고 잇는 것인지!  112


발리인들은 보기보다 영리하고 강인하다. 며칠 전 이브의 남동생이 이런 말을 했다. "너희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면 여행 가는 데 쓰지? 우리는 돈만 생기면 종교의식에 다 써. 그래서 어떤 외국인들은 우리를 비웃지. 하지만 이런 걸 하지 않으면 외국인들이 발리에 오겠어? 발리가 다른 나라와 똑같아지면 누가 여기에 오려고 하겠어?"

외국인이 무엇 때문에 발리를 사랑하는지 이곳 사람들은 잘 안다. 그래서 대대로 지켜온 무화를 외국인에게 비싸게 팔아먹는다. 이들은 우붓 중심가에 들어오려던 맥도널드 매장을 막아낸 경험도 있다. 발리에 개발 바람이 불던 1970년대, 발리 사람들이 정부에 요구했다. 야자 나무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도록, 모든 건물은 전통 가옥의 구조를 따르도록 법을 만들어달라고. '5층 이하'라거나 '지상 20미터' 따위가 아닌 '야자나무보다 낮게'라니. 거기 깃든 시적인 마음과 유연함이 사랑스럽다. 그래서 발리에는 3층 이상의 건물이 거의 없어 어디서나 논과 야자나무가 보이고 숲과 계곡이 몸을 드러낸다.

개발과 성장을 추구하다 전통적인 가치를 잃어버린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발리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플란플란'하게 흘러가는 삶의 속도 속에서 지킬 것은 지키는 의연함이 엿보이니. 한마디로 발리는 자연을 파괴하며 돈에 영혼을 판 그런 흔한 휴양지가 아니다. 농지 정리라며 계단식 논을 싹 밀어버리고, 주택 현대화라며 초가집을 죄다 없애고, 무조건 개발만을 외치며 살아온 나라에서 온 나는 발리 사람들이 부럽기만 한다.  113-116





스리랑카


낯선 나라를 여행하다 우리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장면과 마주친다. 내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내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런 순간에 단정적으로 평가하고 불평하는 것은 쉽지만 왜, 어째서라는 질문을 던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감수해야 지금 여기에서 유럽에는 없고 스리랑카에만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좋은 여행자의 기본은 질문하는 능력과 겸허한 태도라는 사실도.  154


그날의 기분에 따라 차와 찻잔을 골라 물을 끓이고, 찻잎을 넣고,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시간. 그 아무것도 아닌 일에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이 나는 좋다. 그렇게 차를 우리다 보면 내가 세상의 속도와는 상관없이 살고 있다는 기분까지 든다.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차우리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162


폐허에 관한 근사한 글을 쓴 영국의 자각 제프 다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무언가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은 그냥 바라보는 것,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뿐이었다."  222





치앙마이


내 몸에 마지막 도시의 바람 냄새가 남아 있고  253


일상처럼 여행에도 지루한 순간, 쓸쓸한 순간이 찾아온다. 그런 순간에 책은 나를 구원한다. ..

생각해보면 여행과 책은 서로 닮아 있다. 질문을 던짐으로써 일상과 그 일상을 둘러싼 세계에 균열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그렇게 가장 온순한 방법으로 자신이 쌓아온 세계를 부수고 더 넓은 세계를 열어 준다는 점에서.  254





라오스


'좋은 여행이란 무엇일까.' '나는 좋은 여행자인가.' 이런 질문에 천착해왔지만 내가 좋은 여행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375-377


한 도시도 생명을 가진 유기체와 같다. 생겨나고, 번성하고, 쇠락하기도 한다. 나는 변해가는 어떤 장소의 짧은 순간을 함께할 뿐이다. 여행지가 보여주는 찰나의 얼굴. 그 얼굴이 때로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민낯이라 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처럼 그렇게 바라보고 싶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까지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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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는 말했다. "고독이 두려우면 결혼하지 마라."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고독이 두려우면 여행하지 마라."  9


이야기꾼의 의도는 언제나 듣는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에 사로 잡히도록 하는 것이며, 그의 눈을 반짝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햄릿>의 서두에서, 햄릿의 아버지 유령이 한 말은 여행 작가의 이런 의도를 이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가볍디가벼운 한마디로 네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젊은 피를 얼게 하며, 

네 두 눈을 궤도 이탈한 별처럼 만들고,

땋아서 묶어놓은 머리채를 풀어놓고,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세울 수 있으리라.'  10-11


여행의 기쁨, 그리고 그것에 대한 글들이 이 모음집의 주제이다. 무론 여행의 고통도 일부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기억 속의 고통은 서정적인 향수를 자아내기도 한다.  12


일단 움직여야하고 또 어디로 갈지를 알아야 한다. - D. H. 로렌스 <바다와 사르디니아>  16


관점은 여행을 떠나야 비로소 변화한다. 길이 아주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하게, 변명의 여지도 없이 아주 단호하게 방향을 틀거나 급경사로 바뀔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 모든 것들을 보게 된다. - 제임스 볼드윈 <산 위에 가서 말하라>


오랫동안 떠난 당신은 다른 사람으로 돌아온다. 당신은 결코 갔던 길을 되돌아오지 않는다. - <아프리카 방랑>  17


여행은 마음의 상태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이국적인 곳에 있는지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여행은 거의 전적으로 내적인 경험이다. - <신선한 공기의 마니아>  18


여행이 무엇이든 그것은 꿈꾸고 기억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낯선 풍경 속에 앉아 있으면, 그동안 무시무시하게 여겨졌던 온갖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다. 때로는 낯선 침대에서 악몽을 꾸기도 하고, 수년 동안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 사건들을 머릿속에 다시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혹은 재스민의 강렬한 향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다시 잊는 것인지도 모른다. - <신선한 공기의 마니아>


인생의 다른 경험들도 그렇듯이, 여행에서도 한 번으로 족할 때가 많다. - 헤라클레스의 원주>


여행을 하다 보면 나를 붙잡으려 하고 부모처럼 굴면서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떠날 수 있는 것은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 <바다에 면한 왕국>  19


모든 여행은 순환적이다.. 장대한 여행이란 영감을 얻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 뿐이다.- <유라시아 횡단 기행>


내가 방금 도착한 장소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것, 바로 이 감정 때문에 나는 여행을 하고 싶어 한다. 이것은 내가 어디론가 떠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다. - <헤라클레스의 원주>  20


여행에는 삶을 바꿔놓는 마술적 가능성이 있다. 어떤 장소에 홀딱 빠져 그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동방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행복은 바람직한 것이지만 여행자에겐 진부한 주제일 뿐이다. - <아프리카 방랑>  21


여행 중에 발명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기쁨]이라는 시에서 아름답게 표현한 견해와도 같다. 우리가 세상과 마주할 때 "모든 것은 처음으로 생겨난다." "여성을 끌어안는 남자는 모두가 아담이며" "어둠 속에서 성냠을 켜는 사람은 모두가 불을 발명하고 있다"라고 한 것처럼, 스핑크스를 처음으로 보는 사람은 모두가 그것을 새롭게 보고 있다. "사막에서 나는 방금 조각된 젊은 스핑크스를 보았다... 모든 것은 처음으로, 그러나 영원히 생겨난다." - <아프리카 방랑>


여행은 살면서 경험하느 가장 슬픈 기쁨 중 하나이다. - 슈타엘 부인 <코린느 혹은 이탈리아>  22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크든 작든 두 힘 사이의 갈등이 존재한다. 하나는 은밀한 자유에 대한 갈망이고 다른 하나는 넓은 장소로 나아가려는 충동이다. 하나는 내향성, 다시 말해 왕성한 사고와 환상의 내면세계로 향한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외향성, 다시 말해 사람들과 구체적인 가치들이 존재하는 바깥 세계로 향한 관심이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러시아 문학 강의>  23


최상의 여행은 혼자 하는 여행이다. 보고 조사하고 평가하기 위해 여행자는 홀로여야 하고 또 홀가분해야 한다. 여행자에게 타인은 방해가 될 수 있다. 타인은 자신의 두서없는 인상들을 여행자에게 밀어 넣기 때문이다. 말동무가 될 만한 사람들은 여행자의 견해에 방해가 될 것이다. 반면에 지루한 사람들은 "이것 봐, 비가 내리네" 또는 "여기 나무가 굉장히 많은데" 같은 허튼소리로 침묵을 망치고 주의를 흩뜨릴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으면 사물을 분명히 보고 똑바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다소 진부하더라도 자신의 감정에 비추어 특별하고 흥미로운 비전을 포착하기 위한 고독의 투명함이다. - <낡은 파타고니아 특급>  23-24


최고의 여해을 위해서는 단절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있는 곳에 집중하라.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하지 마라. 어떤 일거리도 떠맡지 마라. 연락 두절의 상태로 있어라. 떨어져 있어라.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당신과 어떻게 접촉할 수 있는지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당신이 지금 있는 곳만을 생각하라. 이것이 여행의 이론이다. - <동방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24


여행에서 주용한 것은 홀로 도착하는 것, 유령처럼, 해 질 녘 낯선 지방에, 불이 훤한 중심지 대신에 뒷문으로, 대도시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나무가 울창한 시골에, 주민들이 이방인을 본 적이 별로 없지만 친절히 맞이해주는 곳에, 그러나 주민들이 방문객을 다리 달린 돈으로 보지 않는 곳에 도착하는 것이다. - <동방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25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은 날에는 체중이 10킬로그램 이상은 줄어든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틀 연속 말을 하지 않은 날에는 내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빠졌다. 침묵은 나를 투명인간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익명으로 남는 것은, 그런 상태로 흥미로운 장소를 여행하는 것은 떨쳐버릴 수 없는 유혹이다. 그것은 중독된다. - <바다에 면한 왕국>  26


여행자의 또 다른 자만은 자신이 본 것을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지나간 길로 풍경을 대체하고 자신이 겪은 사건만을 중요하다 여긴다. 이 점에서 여행자는 착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착각이 전혀 없다면 여행자는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것이다. - <바다에 면한 왕국>  28


여행이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다. - <동바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29


큰 도시들은 내게 도착지처럼 보인다. 여행자를 벽으로 둘러싸며 멈추게 하는 곳, 거대한 건물들이 여행자에게 "이제 도착했습니다"라고 속삭이는 종점의 의미 외에 아무것도 없는 곳처럼 보인다. - <헤라클레스의 원주>  30


내게 최고의 여행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침범을 포함하고 있다. 위험은 여행자에게 도전이자 초대이다. 모험을 파는 것은 여행 산업의 한 주제가 되었으며, 여행은 전리품이 되었다. - <신선한 공기의 마니아>  31


모든 장소는, 그곳이 어디든 무엇이든 상관없이 방문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방문객이 뜸하고 사람들이 여전히 전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장소가 내게는 가장 가치 있어 보였다. 왜냐하면 이런 곳은 가장 응집된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곳은 해독 가능했고, 거의 언제나 나를 고양시키는 것처럼 느껴졌다. - <헤라클레스의 원주>  32


소설을 쓰는 것과 가장 비슷한 일은 낯선 풍경 속을 여행하는 것이다. - <바다 괴물들을 지닌 일출>  35


보통 여행자들은 대담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의 죄스러운 비밀은 여행이 지상에서 시간을 보내는 가장 게으른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여행은 뼛속까지 게으른 일이며, 교묘하고 빈둥거리는 회피이다.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을 침범하면서 우리의 뚜렷한 부재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방랑하는 식객으로서 아주 불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 <동방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36-37


여행자는 낭만적인 관음증 환자 주에서도 가장 탐욕스러운 사람이다. 그리고 여행자의 인격 속 꼭꼭 숨겨진 부분에는 허영과 건방짐, 거의 병적이라고 할 수 있는 허언증이 있다. 여행자의 최악의 악몽이 비밀경찰이나 주술사, 말라리아가 아니라, 다른 여행자와 만나는 일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호기심도 있다. 심지어 가장 소심한 환상가들도 때때로 그들의 환상을 수행하는 만족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때때로 신속히 떠나야만 한다. 무단침입은 어떤 이들에게는 즐거움이다. 게으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목적 없는 기쁨이야말로 순수한 기쁨이다." - <동방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37


여행은 편견, 완고함, 편협함에 치명타를 날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여행이 몹시 필요하다. 인간과 사물에 대한 광범위하고 건전하며 누그러운 견해를 일생 동안 지구의 한 작은 구석에서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으로는 얻을 수 없다. - 마크 트웨인 <마크 트웨인 여행기>  38


여행자는 사람들의 누넹 그 본연의 모습으로 비쳐야만 한다. 하느님의 천국에 살 가치가 있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종교 없이도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는 닳아빠진 셔츠를 입었지만 순수한 인간의 심장을 가졌으며 오래 고통받는 사람이다. 비록 길이 해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세계의 끝까지 여행할지도 모른다. - C. M. 다우티 <아라비아 사막에서의 여행>  39


여행기와 소설의 차이는 눈에 보이는 것을 기록하는 것과 상상으로 아는 것을 발견하는 것의 차이이다. - <유라시아 횡단 기행>


인간적인 어떤 것이 기록될 때, 훌륭한 여행기가 탄생한다. - <지구의 끝으로>  41


나는 개가 걷는 속도로 여행했을 때 내가 최고의 여행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가드너 맥케이 <지도 없는 여정>  43


모든 진정한 연애가 그 나라 말을 거의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지만, 매혹적인 어둠으로 더 깊이 끄는 외국으로의 여행처럼 느껴진다면, 모든 외국 여행도 연애가 될 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이며 누구와 사랑에 빠졌는지를 골똘히 생각한다.. 모든 훌륭한 여행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옮겨져 공포와 경이의 한가운데에 놓이는 것이다. - 피코 아이어 <우리는 왜 여행하는가>  46


그는 자신을 관광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여행자였다. 그는 그 차이가 부분적으로는 시간의 차이라고 설명하곤 했다. 관광객이 일반적으로 몇 주 후나 몇 달 후에 집으로 서둘러서 되돌아가는 반면, 여행자는 한 장소나 그다음 장소에 똑같이 속해 있다. 여행자는 몇 년에 걸쳐 지구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 폴 볼스 <셸터링 스카이>


관광객은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모르고, 여행자는 자신이 어디로 갈지를 모른다. - <오세아니아의 행복한 섬들>


관광은 진짜 게으른 사람을 즐겁게 하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관광은 고대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엿듣는 학문과 매우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 <유라시아 횡단 기행>  47


여행은 휴가가 아니며, 대개는 휴식의 정반대이다. - <낡은 파타고니아 특급>  48


사치는 관찰의 적이며, 당신이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는다는 좋은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비용이 많이 드는 탐닉이다. 사치는 우리를 망치고 어린애 취급하며 우리가 세계를 아는 것을 막는다. 이것이 사치의 목적이다. 또한 이것은 호화 유람선들이나 값비싼 호텔들이 마치 다른 별에서 온 것 같은 어리석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이유이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부자들은 결코 경청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비싼 생활비에 대해 끊임없이 투덜댄다. 실제로 부자들은 대개 자신이 가난하다고 불평했다. - <동방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48-49


관광은 정적인 사회에서 가장 활발하게 추구되며, 대개 기동력 있는 부자들이 기동력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저지르는 분별없고 서툰 방문이다. - 낡은 파타고니아 특급>


사람이 큰돈을 벌고 나면 좋지 않은 청취자가 되고, 참을성 없는 관광객이 된다. - <헤라클레스의 원주>  49


도보로 아프리카의 국경을 넘은 일이 없는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간 적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도의 공항은 단지 신뢰를 얻기 위한 속임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나라의 가장자리에 있는 먼 국경은 이 나라의 중심을 이루는 현실이다. - <아프리카 방랑>  52


기차를 타고 가는 여정은 여행이다. 그 밖의 탈것들, 특히 비행기를 타고 가는 과정은 그저 이동일 뿐이다. 여행은 비행기가 착륙할 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 <유라시아 횡단 기행>  54


기차만큼 자세한 관찰을 유발하는 운송 수단은 없을 것이다. 비행기 여해에 대한 문학은 존재하지 않으며 버스 여행에 대한 문학도 그리 많지 않다.

기차는 누구든 그 안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자고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글을 쓸 수도 있기 때문에 효율적이다. 지나치는 풍경과 기차 자체가 깊은 인상을 남긴다. 비행기 여행은 늘 똑같지만 기차 여행은 언제나 새롭다.  66


여행에서 해 질녘 기차에 올라 춥고 떠들썩한 도시에서 침대칸 문을 닫고는, 아침에 새로운 위도에 도착하리라는 것을 예감하는 것보다 멋진 일은 없는 것 같다. - <낡은 파타고니아 특급>


재즈의 반은 철도 음악이며, 기차의 운동과 소음은 재즈의 리듬을 갖고 있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재즈의 시대는 또한 철도의 시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음악가들은 기차로 여행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여행을 하지 않았고, 약동하는 템포, 덜컹거리는 소시, 쓸쓸한 휘파람 소리가 노래들 속으로 들어왔다. 노선이 지나가는 철도 주변의 소도시들도 노래들 속으로 들어왔다. - <낡은 파타고니아 특급>  67-68


기차는 운송 수단이 아니라 그 지방의 일부이며 일종의 장소이다. - <중국 기행>


기차는 최소한의 위험으로 최대한의 기회를 제공한다. - <유라시아 횡단 기행>  70


즐거움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 글 중에서 아마도 여행기나 항해기보다 즐겁거나 유익한 것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듯이 그 글이 즐거움과 인류에 대한 정보라는 양 측면을 목적으로 쓰였다면 말이다. 거기에다가 여행자들의 대화가 열렬히 추구된다면, 전반적으로 더 교훈적이고 재미있어질 것이므로, 그들의 책은 훨씬 더 유쾌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 헨리 필딩 <리스본 항해기> 


인간의 관습과 풍속이 모든 곳에서 똑같다면, 언덕과 계곡과 강이 다르다고 해도, 여행만큼 따분한 일은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지구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다양한 시점들은 여행자에게 그의 노동에 걸맞은 만족을 거의 주지 못할 것이다. - 헨리 필딩 <리스본 항해기> 85


내가 여행 생활을 하면서 내내 존경해온 여행가는 작가 더블라 머피이다. ..

그녀는 결혼한 적이 없었지만 레이첼이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는 딸을 홀로 키우면서 인도, 발티스탄, 남미, 마다가스카르 등 어디든지 데리고 다녔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아이와 함께 있다는 것은 당신이 공동체의 선의를 신뢰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88-89


'여행할 나라를 선택하라

여행 안내서를 활용해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지역들을 확인하라

그런 뒤 그 반대 방향으로 가라'

이 조언은 정치적 정당성에 어긋나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여행자와 관광객을 뚜렷하게 구분 짓는 것이 '속물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또한 현실적이기도 하다. 현실 도피적인 여행자는 공간, 고독, 침묵을 필요로 한다. 비극적이게도 나는 길이 나면서 자연 서식자가 사라져가는 것을 수차례 목격해왔다.  90


'역사를 열심히 공부하라'

어떤 종교의 역사에 대해 무지한 채 여행한다면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당신의 여행에 새로운 차원을 더해 주리라고 믿는다 해도, 전문적인 사회학적 혹은 정치적인 연구는 불필요하다. 그러지 않아도 여행을 하다 보면 현 정치 상황이 충분히 드러날 것이다... 여행하기 전에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금기 사항들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배워라. 그런 뒤 이 금기들을 성실하게 존중하라. 선물로 돈을 주는 것이 부적절한 곳에서 어떤 대체물이 그 역할을 행하는지를 알아내라.  91-92


'혼자 여행하거나 사춘기 이전의 아이와 함게 여행하라'

어린이의 존재는 공동체의 선의에 대한 당신의 신뢰를 강조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인종이나 문화적인 차이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92


'주의하되 소심해지지 마라'

단지 용감하거나 무모한 사람들만이 지도에 표기되지 않은 곳을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아무 근거가 없다. 사실 현실도피주의자들은 극도로 주의 깊다. 이것이 그들의 특징이며 생존 메커니즘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이다. 그들은 출발 전에 가능한 위험들을 검토하고, 일어날 법한 위험에 대처할 준비를 한다. 

여기에 기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병이 반쯤 비었는가 혹은 반쯤 찼는가? 왜 집에 편안히 있지 않고 외국에서 당신의 뼈를 부러뜨리려고 하는가? 낙천주의자들은 재앙이 발생할 때까지 믿지 않고, 그래서 두려워하지도 않는데, 이는 용감함의 반대라고 할 수 있다.  96


존 스타인벡 : 여행에 대한 글쓰기는 개미탑을 쌓는 행위이다. 

그것은 형태도, 모양도, 목적도 없고, 심지어 요점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것은 가장 예리한 사실주의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 주위에서 보이는 것은 개미가 파낸 흙이 땅 위에 쌓인 개미탑처럼 목적과 요좀이 없기 때문이다. - 1961년 7월의 편지 <스타인벡:편지 속의 삶>  103


여행할 때, 지식을 집으로 가져오고 싶다면 몸에 지니고 와야 한다. - 새뮤얼 존슨의 말, 제임스 보즈웰의 <존슨의 생애>중에서  149


여행가의 조건 - 당신이 건강하고, 모험심이 강하며, 재산이 적당히 있고, 마음을 특정 대상에 집중할 수 있다면 여행하라. - 프랜시스 골턴  201


강력한 사람이 반드시 가장 뛰어난 여행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일을 최상으로 이루는 데 관심을 갖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여행가가 된다. - 프랜시스 골턴


따분한 여행은 일행을 서로 화나게 하기 쉽다. 그러나 여행가는 힘든 상황에서도 그의 의무에 최선을 다한다. 그는 두 배로 친절하게 대하고, 모욕적인 말을 점잖게 받아들이며, 응수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하는 것을 의무라고 여긴다. 이러한 때에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너무 딱딱하게 구는 것은 과잉일 뿐이다. 왜냐하면 정작 어려운 것은 말다춤을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프랜시스 골턴  202


한두 가지 시련은 대부분의 위대한 여행기들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여행자는 유쾌하고 수월한 여행으로부터 벗어나 운 나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런 뒤 시련은 책에 진지함과 깊이를 더해준다. 그 결과 우리는 여행자를, 자신의 한계를 시험당하는 한 사람의 본성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205


일반적으로 영국인의 여행의 역사는 햇빛을 찾아 떠난 역사이기도 하다.  220


여행자는 이방인이다.  228


이방인이 되는 것은 어렵다. 여행자는 아무 권력도 영향도 알려진 정체성도 없다. 이것은 여행자에게 낙천주의와 가슴이 필요한 이유이다. 왜냐하면 확신 없는 여행은 비참하게 끝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여행자는 익명이고 무지하고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휘둘리거나 속기 쉽다. 여행자는 '미국인' 혹은 '외국인'으로 알려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떠한 권력도 없다.  230


나는 어떤 곳에 가기 위해 여행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여행할 뿐이다. 나는 여행을 위해 여행한다. 중요한 일은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과 장애물을 좀 더 가까이에서 느끼기 위해, 문명의 이 깃털 침대로부터 내려오기 위해, 그리고 잘린 부싯돌들이 뿌려진 지구를 이 발밑에서 느끼기 위해.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당나귀와 함게한 세벤느 여행>


여행은 기껏해야 자서전의 단편일 뿐이다.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세벤느 일기:프랑스 고산 지대 여행에 대한 노트>  239


나는 기차 여행의 주된 매력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차는 우리를 목적지로 데려간다. 기차는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거의 방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그 지방의 차분함과 정적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리고 날듯이 달리는 차량들 안에 우리가 머물러 있는 동안, 사념은 기분이 내키는 대로 인적이 드문 정거장에서 내린다.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질서 잡힌 남쪽>  240


모든 진지한 순례자는 순례의 장소를 발로 여행한다. 걷는다는 것은 정신적인 행위이다. 홀로 걷기는 우리를 명상으로 이끈다. 순례를 가리키는 한자는 '산에게 경의를 표함'이라는 뜻이다.  244


보행자는 사물을 명료하게 본다. 보행자의 머리 위의 태양, 보행자의 얼굴을 스치는 바람, 보행자의 발밑에 있는 땅 등.  253


신성화된 걷기는 육체적인 운동과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걷기는 요가나 정신적인 행위에 더 가깝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말하는 걷기는 병자가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고 아령이나 의자를 드는 운동과 전혀 다르다. 걷기는 하루 일과이며 모험이다." 걷기는 사고의 과정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걸을 때 반추하는 유일한 동물인 낙타처럼 걸어야 한다. 어떤 여행자가 워즈워스가 하인에게 그의 주인의 서재를 보여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가 그의 도서관이에요. 그러나 그의 서재는 야외랍니다.'"  261-262


모트 로젠블룸.. 나는 그가 40년 이상 먼 곳들을 여행할 때 도움이 되었던 몇 가지 여로의 규칙들을 제공해달라고 부탁했다..

셋 - 많은 메모를 하고, 해독할 수 없게 되기 전에 메모들을 재독하라. 아니면 그건 단지 나에게만 해당될지도 모른다. 지금은 녹음기가 신뢰할 만하다. 하나 가지고 다녀라. 당신이 놓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놀랄 것이다. 

열 - 어떤 먼 곳에 도착하자마자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빠져나가는 가장 빠른 길을 알아내는 것이다. 즉 버스나 기차나 비행기 시간표를 체크하라. 어떻게 떠나는지를 미리 알아야 한다.  355-358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여행기인 <슬픈 열대>

그는 철학자로 훈련받았지만, 인류학과 언어학의 탁월한 이론가였다. 그는 또한 신화학의 해설자였고 구조주의의 서술자였다. ..

여행은 보통 공간의 이동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부적절한 개념이다. 여행은 공간, 시간, 사회 계층에서 동시에 발생한다. 각각의 인상은 이 세 개의 축에 공동으로 연관될 때에만 규정될 수 있다. 그리고 공간은 본질적으로 3차원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여행에 대해 적절한 묘사를 하려면 다섯 개의 축이 필요하다. - <슬픈 열대>


여행자가 여행을 통해 자신의 문며오가 근본적으로 다르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문명과 접촉했던 시대가 있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그러한 예는 점점 줄어들었다. 현대의 여행자는 인도를 방문하든 미국을 방문하든, 생각보다 덜 놀란다. - <슬픈 열대>


아마도 그때의 여행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막보단느 내 마음의 사막에 대한 탐험이었다. - <슬픈 열대>  359-360



하나 - 집을 떠나라.

둘 - 혼자 가라.

셋 - 가볍게 여행하라.

넷 - 지도를 가져가라. 

다섯 - 육로로 가라.

여섯 - 국경을 걸어서 넘어라.

일곱 - 일기를 써라.

여덟 - 지금 있는 곳과 아무 관계가 없는 소설을 읽어라.

아홉 - 굳이 휴대전화를 가져가야 한다면 되도록 사용하지 마라.

열 - 친구를 사귀어라.  488-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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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이 여행을 마음먹는 순간, 평범한 사람들이 잊지 못하는 연애, 평범한 사람들의 적당한 자린고비 배낭여행, 평범한 사람들이 바라는 미래라면 쓸 수 있을 거 같았다. ..

나는 길 위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다. 

지치고 고독한 여행이면 더 좋다.  6



잘 살아가기 위한 걱정이 아니라 잘 사는게 무엇인지 고민하고 싶다.

고민하면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고민하는 모습은 불안해 보일 수도 있다.  16



가끔 오지선다형 보기 내에서 해야 할 일을 찾는다. 다른 사람의 드라마틱한 스토리에 환호하지만 평범한 삶의 발버둥에는 핀잔을 보낸다. 결과만 인정한다.  39



여행은 객관식의 삶을 주관식으로 바꾸는 여정이다.  40



행복은 저축되지 않는다...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43



사랑은 이름 붙여 부르지 않아도 사랑이다.  94



가끔 세상에서 혼자 되는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다.  113



여행에서 조심할 필요는 있지만 벽을 두는 것은 좋지 않다. 그 경계를 조율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118



명동의 백화점에서 하지 못할 행동은 외국에 나가서도 하지 말아야 한다.  122



언제 어디서든 스승을 만날 수 있다.  139



정성스레 드라이크리닝 된 정장을 입고 간 결혼식장에서 신랑신부의 이름도 모른 채 뷔페 접시를 나르는 것보다 진실 어린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게 아름다운 것처럼 여행도 마찬가지다.  166



시간이 지나야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내가 더 여물수록 커지는 감동이 있다.  220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가 더 소중해질 수 있는 것.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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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 인생의 기록 


독서 환경에 관해서라면 나는 삼면이 책으로 둘러싸인, 사시사철 넉넉한 읽을거리들이 쏟아지는 천혜의 환경에서 살고 있다. 단언컨대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없다.

집은 거실 한 면이 모두 책장이고, 방 한 칸은 도서관처럼 방을 가로지르며 책장들이 있다. 침대는 옆에 책을 둘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한 것이다.  15


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때의 나는 기억난다.  18


나는 셰익스피어를 읽었다, 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셰익스피어에 대해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읽었다는 사실만 기억한다. 그건 읽은 것일까?  32


모든 독서는 기본적으로 오독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오독의 순간도 나에겐 소중할 수밖에 없다. 그 순간 그 책은 나와 교감했다는 이야기니까. 그 순간 그 책은 나만의 책이 되었다는 이야기니까. 그때 나를 성장시켰든, 나를 위로했든,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든, 그 책의 임무는 그때 끝난 거다.  40


내가 이해할 수 없어도, 내가 껴안을 순 없어도, 각자에겐 각자의 삶이 있는 법이다.  51


'일어날 객관적 사태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은 단지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나의 주관적 태도일 뿐입니다. 나는 다만 내가 어쩔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나 자신의 주관적 태도를 고상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58-59


보고 싶은 책보다는 봐야만 하는 서류 더미에 더 많이 할애된 일상, 좋아하는 사람과의 친밀한 소통보다는 의무적으로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 더 많이 소모되는 일상, 갓 갈아낸 자몽주스보다는 믹스커피에 더 친숙함을 느끼는 것이 어쨌거나 일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상을 살아가야만 한다.  72


나는 다른 일상을 꿈꾼다.

여행이 일상이 되는 것을 꿈꾼다. 아침 바게트가 일상이 되고, 노천 카페가 일상이 되고, 밤새워 쓰는 글이, 퐁피두 센터가, 세비야의 햇살이, 라인강변을 따라 달리는 기차가, 렘브란트의 그림이, 고흐의 그림이 일상이 되는 것을 꿈꾼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모든 하루가 내 손에 고스란히 달려 있으며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생활이 일상이 되길 꿈꾼다. 파리가 일상이 되길 꿈꾼다. 

그러나 나의 일상은, 지금, 이곳에, 있다.  73


이곳에서, 지금,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그곳에서도, 그때,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매일 먹는 바게트가 지겨울 테고, 대화할 상대가 없는 일상의 외로움에 몸서리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그땐 그것이 또, 일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의 의무는, 지금, 이곳이다.  75


때론 책이 우리를 구원한다. 책은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책으로 구원받는다. 드물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곤 한다. 귀하게도. 고맙게도.  75


시지프(카뮈의 <시지프신화>)도 자신의 일상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살았다..  87


산다는 건 어쩔 수 없이 선택의 연속이다. 하나를 선택할 수박에 없기 때문에 결국 모든 선택에는 '만약'이 남는다. ..하지만 '만약'은 어디까지나 '만약'이다. 가보지 않았기에 알지 못하고, 선택하지 않았기에 미련만 가득한 단어이다. 그 모든 '만약'에 대한 답은 하나뿐이다. '나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라는 답.  91





듣다 : 감정의 기록


여행은 감각을 왜곡한다. 귀뿐만 아니라 눈과 입과 모든 감각을 왜곡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꺼이 그 왜곡에 열광한다. 그 왜곡을 찾아 더 새로운 곳으로, 누구도 못 가본 곳으로, 나만 알고 싶은 곳으로 끊임없이 떠난다.  130





배우다 : 몸의 기록


결국은 머리의 말을 몸이 알아들은 거니까. 계속하는 거다. 묵묵히. 계속 가보는 거다.  220





쓰다 : 언어의 기록


나는 읽고서 쓰고, 보고서 쓰고, 듣고서 쓰고, 경험하고서 쓴다.  259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시오. 내가 그 사람을 짝사랑한다는 사실을 아는 친구가 그 편지를 본다면 연애편지로 읽히고,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친구에게 보내는 일상적인 편지처럼 읽히도록 쓰시오.'  269


잘 쓰기 위해서는 좋은 토양을 가꿔야지, 라는 핑계로 수없이 읽고, 듣고, 돌아다녔다. 11년을 그랬다. 그 핑계 덕분에 삶은 더없이 풍성해졌다. 누군가 물은 적이 있다. 지금 그 책을 읽는 게 진짜 카피라이팅에 도움이 되냐고, 어떻게 도움이 되냐고, 나는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나는 그 모든 것을 잘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책과 음악이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경우는 드물었고, 그래서 더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소설책이 지금 내가 맡은 슈퍼마켓 광고에 도대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작년에 다녀온 그 여행이, 그 여행에서 또 작뜩 찍어온 벽 사진들이, 그때 마신 술들이, 석유회사 광고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리가 없다. 도움이 된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닥 말한다면 그 역시 거짓말이다. 토양이 비옥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막연하게, 듬성듬성, 이런저런 방법으로 토양을 가꾸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 어떤 필요의 씨앗이 뿌려지면 그 토양에서 건강한 새싹이 자라길 빌 뿐이다.  276-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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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외국의 낯선 도시를 홀로 걸어본 적 있나요?

종종 모든 것에서 벗어나 

낯선 도시 안에 갇히길 소망합니다. 

나에게 낯선 도시는 만남인 동시에 헤어짐이고, 

피난처인 동시에 탈출구입니다.

때로는 캄캄한 밀실이었다가 눈부신 광장이고, 

눈물인 동시에 환희입니다. 

낯선 언어를 듣고 낯선 공기를 마시며

홀로 걸을 때 가만히 당신들을 생각합니다.

결국,

돌이켜보면 그 낯선 도시에서

나는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식당 주인과 이야기를 하던 남자가 어느새 나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거야? 아님 타투가 하고 싶은 거야?"

남자가 나에게 반말로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우리 만난 적 있나요?'라고 물을 뻔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어깨에 있는 레터링 말이에요."

"데스 쉘 해브 노 도미니언. 무슨 뜻인지 알아?"

"죽음은 우릴 지배하지 못하지. 아니에요?"

"맞아. 스무 살에 처음으로 했던 타투야."

"멋있네요. 근데 왜 자꾸 나한테 반말해요?"

...

And death shall have no dominion. 죽음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이 문장은 진저색 헤어 애인이 가장 사랑하던 딜런 토머스의 시구였다.  21


정말 우리의 이 인생에 정답이 있기나 할까요?

뫼비우스의 띠처럼 모든 생각은 끝없이 또다른 생각으로 이어지고, 다시 처음의 생각으로 돌아와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해지고 말지요.  38


글을 쓰기 위해 여행을 한다는 건 사실 핑계였다. 나는 이제껏 많은 나라와 도시를 떠돌았지만, 한 줄도 쓰지 못했다.  45


낯선 나라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건 자신도 모르게 평생 각인되어 버리는 일이라 신중해야만 한다.  55


너는 나의 자유가 부럽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뭔가를 쓴다는 핑계로 온종일 좁은 방 천장을 보고 누워 너를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네가 말한 '나의 자유'는 정말 나에게도 자유였을까. 나는, 그저 너의 그 바쁜 하루가 부러웠다.  64


누르는 순간 그것은 흘러가는 과거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친절한 카메라의 셔터음.  67


생각 없이 살다가 참외 껍질처럼 영야가 없는 남자를 만나고 염소똥 같은 얘기를 하다가 오슬오슬 추워져 서로를 껴안는 일 따위 역시 나쁘지 않다.  100


사랑은 텅 빈 상자와 같았다. 조심조심 공을 들여 포장을 뜯어보면 그 속은 늘 텅 비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에 또 한번 속느니, 차라리 내가 사랑을 글로 지어내는 게 확실하겠다.  113


몇 시간째 강물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결국 강물이 내게 답을 주었다. 강물을 깊이 들여다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 자신을 너무 들여다보지 말 것. 그러니까 나는 그 동안 나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봤던 것이다.  115


남들과 다르지 않게 살 거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은 편안해졌다. 생각은 생각을 낳는다. 이제 나는 거두기 힘들 정도로 많은 생각을 낳지는 않을 거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들은 지금처럼 끈질기게 내 발목 아래에서 질척일 테니.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메인 로드로 향했다. 그래, 바람에 몸을 맡기고 말없이 흐르는 저 강물처럼 살자.  116


흘러가는 대로 흐르지 말아야겠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밤새 뒤척였다. 그렇게 다시 무서운 밤이 찾아왔다.  117



모아놓은 돈도 없는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글만 쓰는 일이 가능할까?  124



처음 만난 우리는 모든 얘기를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아무런 얘기도 할 수 없는 사이였다. 

함께 있을 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135-136


그날.. 푸근하디 푸근한 일상을 닮은 여행을 했다.  157


눈으로만 익혔던 서로의 입술  158


활주로를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는 비행기처럼 남자가 부드럽게 몸을 움직였다. 그러다 점점 빠르게 움직였고 나도 자연스레 남자의 움직임에 조금씩 몸을 맞췄다. 껴안은 남자의 등이 땀으로 조금씩 젖어왔고 움직임은 더욱 강해지고 빨라졌다. 나 역시 거친 숨소리를 뱉다가 형체 없는 언어를 쏟아냈다. 나와 남자의 알 수 없는 언어가 뒤섞이다가 모든 움직임이 끝났을때, 나는 그 느낌이 정말 비행기가 이륙할 때의 느낌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사랑이, 여행이 '시작돼버렸음을 아는 기분'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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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누구나 시간, 돈, 청춘, 열정, 건강 등 많은 것들을 하루하루 잃어가고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어떻게 아낄 수 있는지를 고민할 수 있고,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 수 있다.  4


이제 사라지는 것들에 미련을 두지 않을 생각이다.  6






난 고작 몇 센티미터의 세포덩어리도 이겨내지 못 하는 나약한 인간일 뿐인데, 내가 세상의 정답이라도 되는 것처럼 스스로 판단하고 건방지게 행동했었다. 더 낮아져야겠다고 다짐했다.  32


결혼을 하면 건강은 의무라는 말을 들었다..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단순히 같이 생활한다는 것을 뛰어넘어, 나의 삶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삶까지도 책임을 지겠다는 무언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가족의 삶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38


어느 장소에서 어떤 일을 하든 노동을 하는 것은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일에 치여 지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단 하루만이라도 나처럼 쉬고 싶어 할 것이라 생각하니 나를 처량하다 여겼던 마음이 미안해졌다. 누군가에게는 절실하게 그리운 노동이 어떤이에게는 단 하루만이라도 벗고 싶은 짐이 될 수도 있는것이었다. 

모든 것에는 이중적인 단면이 존재한다.  47


"나는 <Ruby Tuesday> 노랫말처럼 살고 싶어. 가사 중에 '아무것도 얻을 게 없고 잃을 게 없는 세상에 얽매일 수 없어. 허비할 시간이 없어. 꿈이 사라지기 전에 잡아. 항상 죽어 가는데 꿈마저 잃어버리면 미쳐버리게 될 거야' 이런 말이 있어. 나도 내가 원하는 꿈을 향해 나아가는 살을 살고 싶어. 꼭 집을 떠나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살겟다는게 아니야. 남드이 하니까 똑같이 따라서 적당한 집을 사고 적당한 회사를 다니며 살고 싶지는 않다는 거야. 여행을 가고 싶으면 가고 일을 하고, 일을 하고 싶으면 하고, 집을 만들고 싶으면 만들고, 내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있다면 그걸 하며 살고 싶어."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무라카미 류같이 살고 싶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어. 그리고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있으면 좀 힘들어도 가볼 거야. 갔는데 끝에 절벽만 남아있다면 그냥 돌아오면 되니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사람들은 철이 없다고 하더라. 그런 모험은 아주 어릴 때나 꾸는 꿈이라고, 안전한 길로 나아가도 세상은 힘든 곳이라고.."  52


어쩌면 가치에 있어서 옳고 그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는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기 보다 왜 여기까지 나와서 소리를 내는 것인지 그 이유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우선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80


겉핥기로 사물을 바라보고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직접 듣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면 그 가치는 결코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깊이가 있건 없건 하고 싶거나 알고 싶은 것은 부딪쳐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83


외국에서는 친구가 되는 것은 참 쉽다. 지금껏 만난 친구들은 마음을 선뜻 잘 내어주었고 그만큼 나도 내 마음을 잘 내어주었다.  85


소박한 마을 위로 느릿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좋다.  93


우리는 왜 타인의 삶을 구경하려 하는 것일까? 그저 예전 방식 그대로 삼삼오오 모여 사는 사람들이 티비 광고 속의 상품처럼 구경거리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과연 사람이 사람을 구경하는 게 가당키나 한 것일까? 진짜 전통을 배우고 싶고 알고 싶으면 우리는 어떻게 찾아가야 할까?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자 독특한 문화를 상품에 끼워 팔려는 사람들의 욕심보다 돈으로 손쉽게 타인의 삶을 엿보려 했던 내 의식이 문제였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되었다.

낯선 문화를, 우리와 조금 다르게 사는 사람들의 삶을 접할 때는 배우려는 마음과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아마도 편리함을 좇기 위해 모든지 쉽게 버리고 사는 현대인들보다 조금 더 애쓰고 조금 더 부지런히 생활하는 그들에게 경험적인 지혜가 풍부할 것이다. 왜 우리는 세상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까지 도시의 돈문화를 가르치려는 것일까? 여행이 타인의 삶을 망칠 수도 있다면, 우리는 이 여행방법을 버리고 새로운 방법으로 여행을 해야만 할 것이다. 조금 더 대안적인 방법을 찾아보고 싶었다.  106-107


그들의 삶과 비껴선 제3자, 관광객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그 삶의 단면만 보고 그들의 삶을 평가한다는 것은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111


왜 어른들은 아이의 행복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청소년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에 제일 높은 반면 행복률은 제일 낮다는 뉴스가 해가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똑같이 흘러나오는 데, 왜 우린 남의 일처럼 쯧쯧 혀만 차고 방관하고 있을까/ 바로 제 자식이야기인데도 왜 좌시하고만 있을까. 이곳 아이들을 생각하며 난 여전히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생길 우리 아이는 어떻게 자라게 할 것인가에 대해.  112


어쩌면 우리가 흙을 엎어버렸기에 신발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113


"히피들이 시스템이 싫다고 자유를 찾아 떠나왔지. 인도의 고아 주(州 고을주)에서 여기까지 흘러왔어. 여기서는 자유러웠을까? 아니야, 진짜 자유는 시스템을 넘어서는 게 아니라 너와 나, 우리가 융합될 때 느끼는 거야. 여기 모인 사람들도 모두 다 다르다네. 똑같을 수 없지. 다르기 때문에 일치하지 않는 것도 있지.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있어. 그걸 넘어서야 해. 서로 다른 모습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하나될 때 우리는 진짜 자유로울 수 있어."

히피들이 작은 땅을 얻어 전기도, 속세의 더러움도, 부와 배부름도, 그 어떤 것도 들이지 않고 조그맣게 살아가는 곳, 문빌리지. 이곳에서 아이들은 더러운 흙이 온몸에 묻어도 혼나지 않았고 작은 먹거리에도 감사할 줄 알았다. 그리고 어떤 아이들보다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모두 달빛에 반짝이는 별이었다.  114-115


남의 삶을 바라보며 나도 그러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삶은 버거워진다. 내가 타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과 똑같이 살 순없다. 그런데도 나는 바람직하다고 배운 그런 삶을 살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을 하곤 한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진 살의 목표를 십자가처럼 지고 인생의 행로를 이어간다.

버거운 무게에 휘청이는 다리로 인해 몇 번이고 쓰러질 때마다 가슴에서 피눈물이 흐른다. 그런데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산다. 어른들은 자신들 역시 그렇게 살았다며 이 고통을 즐기라고 조언한다. 그래서 그게 마땅한 줄 알았다...

비교를 하지 않으니 남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도, 남보다 더 잘나야 할 이유도 없었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 다른 모습, 서로 다른 생각, 서로 다른 삶, 그것을 잇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무중력의 상태를 느끼는 듯했다. 다시 돌아보니 세상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치열하게 삶을 가꾸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117-118


"장기 여행이 옳다 그르다 할 그런 기준은 없어. 그런데 오래 길 위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것만은 확실히 알더라. 사람 귀한 거 말이야."  121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마음을 통으로 내어주고 있었다.  123


여행은 좀처럼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어쩌면 여행에서는 계획이라는 것 자체가 오류일 수도 있다.  125


언젠가 책에서 '우연은 없고, 언제나 만나야 할 사람만 만나고, 일어나야 할 일들만이 일어난다'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130


독서하는 사람이 줄어든 것은, 서점을 애용하는 사람들이 줄어든것은, 멕시코처럼 다채로운 서점과 서점다운 서점이 대한민국에 없는 것은, 사람들이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삶에 여유가 없는데, 매일매일 삶에 쫓기고 있는데 책이 무슨 소용일까. 그저 순간순간, 하루하루를 이겨내는데 바쁠 것이다.  150-151


어느 곳에서나 화려함 뒤에는 초라함이 숨어있다. 축제를 즐기는 사람과 축제에서 돈을 벌려는 사람, 부모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과 부모님을 기다리느라 외로운 아이들. 어쩔 수 없이 공존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초라함을 불쌍하다거나 불행하다고 여기면 안 된다. 모두가 행복해지려면 이 초라함까지도 같이 수면 위에 올려 함께 누려야 한다. 신영복 선생님의 <함께 맞는 비>를 떠올렸다. 비 오는 날 누군가의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닌 함께 비를 맞으며 동행하고 싶다.  167


어느 도시든 처음 들어섰을 땐 감동받고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곳은 없을 거라며 감탄했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곳은 늘 나타났다. 마치 멕시코의 온 도시들이 미인대회에 나온 미녀들처럼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뽐내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가장 아름다운 곳에 살면서도 땅에 떨어진 먼지만 보며 한숨짓고 살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상 그 어디를 가도 아름다움이 곳곳에 널려 있는데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169


한때는 저것들이 그의 여행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하고 소중한 물건들이었을 것이고, 두고두고 잊지 못할 추억일 텐데 처음 보는 우리들에게 서슴없이 나눠주는 모습이 조금은 비장해 보였다.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이제 여행의 환상은 접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여행자의 마지막 발버둥일까. 예전에 다른 사람을 통해 이런 도움을 받아서일까. 여행 내내 끈질기게 괴롭혔던 비움과 채움, 그 깨달음의 결실일까. 아니면 그냥 짐을 덜어내려는 걸까.

나는 그 이유를 물어보았고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사실 이 물건들은 두세 달 전부터 내게 필요가 없었어요. 당신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배낭은 미련의 무게라는 생각이 들어서 싸그리 버리려고도 했었고요. 근데 있잖아요. 차마 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내가 버리려고 하는 이 물건이 누군가에겐 정말 필요한 물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전 그동안 이 물건들을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배낭에 계속 넣고 다녔어요. 그리고 이제야 당신들을 만나게 된 거예요. 당신들이 남미로 내려가게 되면 제 말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나는 망치로 머리를 두드려 맞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비워내기만 중요하게 생각했던 내가 누군가를 위해 채워 넣고 짊어지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누군가를 위해 짐을 짊어질 수 있다는 것. 그것만큼 숭고한 행위가 또 있을까.  174-175


인간의 욕심이 망가뜨린 건 결국 인간 그 자체였다.  183


자본주의는 경쟁주의 구도를 가져왓고 경쟁은 더 많은 기능을, 더 많은 기능은 시간의 단축을 가져왔지만, 우리는 기계로 인해 줄어든 시간을 인간답게 활용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187


나는 필통 가득 칼로 깎은 연필을 넣어 다니고 싶다.  188


산 페드로에는... 일본인 남편 스스무와 멕시코 산 크리스토발이 고향인 멕시코인 아내 가비...

스스무는 방을 안내하곤 숙소에 대해 소개해줬다. 총 3층으로 된 이 건물은 몇 년째 스스무와 가비가 직접 짓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스스무는 "저희 부모님은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맞벌이를 하셨어요. 처음에는 형편이 어려워서 할 수 없이 맞벌이를 했지만 나중엔 더 좋은 삶을 위해 계속 맞벌이를 하셨죠. 저희 부모님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좋은 동네, 좋은 집, 좋은 차였어요. 그것을 갖추고 유지하면 저도 행복할 거라 굳게 믿으셨죠. 하지만 저는 아니었어요. 워커홀릭인 부모님보다는 제가 커나가는 모습을 옆에서 항상 지켜봐 주는 부모님이 필요했어요. 다함께 아핌을 먹고, 밤에는 키우는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나가고, 가끔 밤하늘의 별을 보며 내 꿈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따뜻한 가정이 필요했어요. 

전 다짐했죠. 제가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우리 부모님과는 다르게 살 거라고. 그리고 전 실천했어요. 물론 아내의 생각도 저와 같아서 가능했지만요. 저흰 아이들이 태어나고 지금까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겪고 지켜봐 왔어요.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부대끼고 살아가는 중에 많은 것들을 배웠답니다. 자연, 생명, 존중, 책임, 배려, 부모이기 전에는 그저 단어로써의 의미만 알았던 것들의 참 의미를 알게 되었어요. 분명 도시에서의 삶 보다는 물질적으로 매우 열악하지만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왜냐면 여기서 누리는 행복이 훨씬 크기 때문이죠. 전 이 생활에 매우 만족합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일테고요."  211-213


갖고 있는 기계가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자꾸만 방 안으로 외로이 기어 들어갔다.  217


우리는 점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 정보가 넘쳐나는 것이 과연 좋은 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매체를 이용해 소통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시대, 시간의 공유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점점 잊게 된 사람들, 공원에 앉아 몇 시간이고 사람들의 웃음을 바라볼 여유를 잊게 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사이버 공간보다 직접 사람을 만나는 광장이, 1초도 안돼 전송되는 메시지보다 몇 번을 구겨버리다 마침내 완성된 편지가, 컴퓨터를 상대로하는 게임보다 다함께 둘러 앉아 하는 놀이가 필요했다. 더 많은 스마트폰을 팔 생각보다 사람과 사람이 더 진실하게 소통할 창구를 만드는 게 시급해 보였다.  245


"요리사는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할 것 같아.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음식과 맛이 존재하는데 많이 맛 보아야 창의적인 메뉴가 나오지 않을까?"

"건축가도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할 것 같아. 동서양의 건축을 합치면 창의적인 건축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사진가도 여행을 많이 다녀야지. 세상엔 담아야 할 것이 아주 많잖아?"

"작가도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하지 않겠어? 세상엔 재미있는 이야기가 너무 많아."

"디자이너도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할 것 같아."

식사를 하다가 멋진 정원을 걷다가 하늘을 보고 사람들을 보며,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음악가도, 공학도도, 예술가도, 회사원도, 부부도 여행을 많이 다녀야할 것 같았다. 학생들도, 청년들도, 꿈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이야기를 하다 보니 모든 사람이 여행을 많이 다녀야만 했다. 여행이 꼭 해외여행이나 장기여행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든 단 몇 시간이든 상관없다. 자신을 둘러싼 주변을 자세히 관찰하고 낯선 환경과 이야기하며 자신만의 시간을 만드는 것이 모든 이에게 필요한 것 같다. 삶이 조그만 움직임에도 창의적으로 변화하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274


여행 후 나는 더 소박한 삶을 살고 싶어졌다.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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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은 자기만의 일과 사랑을 발견하기 위한 여행을 떠나야 한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윤리 규범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탐구하라. 다른 누군가가 당신의 길을 대신 만들도록 허락하지 마라. 이 길은 당신의 길이자 당신 혼자서 가야 하는 길이다. 다른 이와 함께 걸을 수는 있으나, 어느 누구도 당신을 대신하여 걸어 줄 수는 없다."  7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을 맞는다면 그건 뭔가를 얻었을 때가 아니라 잃었을 때일 것이다"라는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우리는 뭔가를 잃었을 때에야 비로소 인생에 대해 절실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23-24


바깥세상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 따윈 무시해 버려. 그건 모두 악마의 장난에 불과해. 진실은 자네 안에 있어. 자네 안에서 답을 찾아, 그리고 자네 영혼에게 영원한 자유를 안겨 주라구! - 호어스트 에버스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26


사람에게는 때때로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내면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의 무싀식은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과 같은 단조로운 일상에서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33


살면서 우리는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경우가 있다.  35


스스로를 제대로 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36


영화 <행복을 찾아서>의 주인공 크리스는 아들에게 말한다. "누군가 너에게 할 수 없다는 말을 하게 하지마. 희망이 있다면 그걸 지켜야 해."  42


대화가 인간의 지적 활동에 묘약인 것처럼 고독은 인간의 정신 활동에 묘약이다. - 에밀 시오랑  51


친구를 얻는 가장 좋은 길은 스스로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73


세상과 떨어져서 자신을 성찰하는 것은 사실 고된 정신 훈련 중 하나다. 혼자 여행을 하면 마음속에 깊이 묻어 두었던 두려움들과 후회들이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몰려올 때가 많다.  74


사회적 통념이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우리를 제약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기존의 문화와 상반되는 문화권으로 떠나 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84


생각할 시간을 가져라. 확신이 설 때까지.  91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겠다, 내 생각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고 말하면서도 한낱 담배에 연연하고 집착하는 나를 보니 한심스러웠다.  102


"즐거운 추억이 많은 아이는 삶이 끝나는 날까지 안전할 것" 이라는 소설가 도스토옙스키의 말처럼, 행복한 여행의 기억이 사람을 지켜주는 것 같았다.  107


한 번 불운한 일이 있었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여행을 통해 배웠다... 

길을 잃으면 길을 찾아주는 사람을 만났고 발을 다치면 걸을 수 있게 붙들어 주는 사람을 만났다...

아프리카나 아니아 또는 남미처럼 언어가 다른 곳을 여행할 때는 말이 아닌 눈빛으로, 마음으로 대화하는 법을 배웠고, '세비야 골목길에서 팔던 그 찻잔을 샀어야 했는데..'하는 후회가 몰려올 때는 원하는 게 있다면 우물쭈물하며 망설이지 말자는 다짐을 한다.  119-120


뜨거운 물에 자꾸만 가까이 가려는 아이를 보호하는 방법은 다치지 않을 정도의 뜨거운 물을 손등에 살짝 찍어 주는 일인 것처럼 인생에 가장 좋은 공부는 직접 경험하는 것이다.  121


17, 18세기 영국의 상류층 자제들에게는 귀족 사회에 입문하기 전 반드시 다녀와야 하는 여행이 있었다. '그랜드 투어'라고 불린 이 여행은 영국에서 시작해 파리, 로마, 피렌체, 나폴리, 폼페이를 거쳐 인스부르크, 베를린, 뮌헨, 암스테르담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코스였다.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이 걸릴 정도로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투자되는 여행이었으나 귀족들은 너도나도 자식들을 떠나보냈다. 그랜드 투어를 하지 않으면 세계의 정치와 사회, 경제를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상식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영국의 젊은 후계자들은 가정 교사와 하인과 통역관까지 실은 대규모 마차 부대를 이끌고 전 유럽을 떠돌며 새로운 문화를 몸소 체험했다. 사교계의 중심이었던 파리에서는 귀족 사회의 예법과 언어를 배우고, 로마와 나폴리, 폼페이에서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역사를 공부했으며, 피렌체에서는 문화와 예술을 익혔다. 이후 철도가 대중화되면서 그랜드 투어는 점차 사라졌지만, 나는 '세계를 여행하며 세상을 직접 배워야 한다'는 가치는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121-122


나는 여행이 인생의 한 시기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늘 새로운 세계를 배울 준비를 해야 하고, 삶의 어느 시점에서도 성장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137-138


프랑스 철학자 미셸 옹프레는 <철학자의 여행법>에서 여행이 실제로 시작되는 지점을 "집을 나서면서 현관문을 닫고 자물쇠에 열쇠를 꽂는 바로 그 순간"이라고 말했다. 여행의 실질적인 첫 단계는 떠나온 장소에 있지 않으며, 우리가 갈망하던 장소에 도착하지도 않은 '사이'의 시간에 시작된다는 것이다.  144


니콜라스 바로우는 소설 <세상 끝에서 나를 만나게 될 거예요>에서 기차 여행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면 옛 시절이 떠오른다. 관광객이 아니라 여행객이라 불리고, 세상이 한없이 크게만 느껴지던 시절. 그 시절 사람들은 기차에 올라 차창밖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시간이 없다고 초조해하지 않으면서 목적지를 향해 평안하게 나아갔다." 기차가 전 세계적으로 낭만적인 여행 수단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146-147


지혜란 받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여행을 한 후, 스스로 지혜를 발견해야 한다 - 마르셀 프루스트  190


내 생각에 여행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쉽게 잊혀지는 것은 일상에서 그와 같은 경험을 다시 반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1


짐을 줄이는 가장 빠른 방법은 공간을 줄이는 것이다.  201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더많이 가질수록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늘어날 뿐이다. 여행지에서처럼 꼭 필요한 것들만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일상에서도 여행자처럼 자유로워질 것이다.  205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과거 어느 때에도 오늘날처럼 인간에 관해 다양하고도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과거 어느 때에도 오늘날 사람들처럼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던 적은 없었다."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인간이나 사회에 대한 지식 외에 별도로 스스로를 탐구하고 존재에 대해 알아가야만 한다.

또 다른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특성을 발휘할 수가 있고, 그래야만 무언가 올바른 것을 이행할 수가 있다." 쇼펜하우어 역시 인간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만, 삶의 여정에서 발전을 이루고자 할 때 자신의 특성과 재능에 적합한 것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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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은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 분노가 일었다. 소리를 질러 가라앉힐 수 있는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꾹 누르며 견디어 온 분노, 내면을 향한 분노였다.  11


거울 앞에 서서 안경의 물기를 닦고, 얼굴도 닦았다. 이마에 적힌 숫자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따뜻한 물에 수건 끝을 적셔 이마를 문지르려다 말고 멈칫했다 몇 시간 후 그날 일어난 일을 다시 떠올려보면서, 거울 앞에 서 있던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되었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수수께끼 같은 여자와 만난 흔적을 지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그 찰나에 들었던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마에 전화번호가 적힌 채 교실로 들어서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는 이 건물, 아니 이 학교가 세워진 이래 가장 믿을 만하고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사람이었다. 30년 이상 일을 해오는 동안 실수한 적도, 비난받을 일을 한 적도 없었다. 약간 지루한 선생일지는 몰라도 학교 제도의 기둥으로 존경받았고, 고전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 때문에 대학에서조차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새 학년이 시작되면 학생들로부터 사랑이 담긴 놀림을 받았다. 학생들은 그를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고문헌 중에서도 거의 읽지 않는 부분만 골라 해석을 묻곤 했다. 하지만 그는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다른 주석까지 곁들여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학생들은 건조하면서도 창조적인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짧게 줄여서 불러야 할 만큼 엄청나게 고루하고 고전적이었다. 그는 고전문헌학으로 세계 전체를 짊어지고 다니는 것 같았다. '문두스'는 이 같은 그의 본질을 강조하는 데 가장 적절한 단어였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뿐 아니라 헤브라이어에도 조예가 깊었다. 구약학 교수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러니 여러 개의 세계를 지고 다녔다고 표현하는 게 옳았다. "진짜 학자를 보고 싶다면 여기 있는 이분이 바로 그분입니다." 교장은 새로운 학급에 그레고리우스를 소개할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13-14


그레고리우스는 학생들을 한 명 한 명 살펴보았다. 그는 지금 학생들을 향한 자기감정이 어떤지 중간 점검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교실의 가운데쯤 왔을 때, 자기가 얼마나 자주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생각했는지 알게 됐다. 이 아이들에게는 아직 남아 있는 날들이 얼마나 많은가. 창창한 미래, 얼마나 많은 일이 생길 것인가. 무수히 많은 일을 경험하게 될 이 아이들!  19


천천히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가 옷걸이에 걸려 있던 젖은 외투를 내린 다음,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교실에서 나왔다.  20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남의 이목을 끌지 않고 하굑를 관찰할 수 있는 어떤 걸물의 모퉁이까지 갔다. 그곳에서 학교를 바라보며 그는 자신이 학교와 관련된 모든 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앞으로 얼마나 그리워할 것인지를 절절하게 느꼈다. 상상하지 못햇던 격렬한 감정이었다.  20-21


그레고리우스가 졸업시험을 치른 이유는 오로지 아내 플로렌스의 강요 때문이었다. 박사 학위를 딸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중요한 것은 아주 단순했다. 문법이든 표현 양식이든 고전의 외진 구석까지 모두 알고 표현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역사를 아는 것, 다른 마롤 하면 자신의 일을 잘하느 ㄴ것이었다. 이것은 겸손함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요구가 많은 사람이었다. 변덕이나 뒤틀린 허영심도 아니었다. 나중에 그는 가끔, 자신의 이런 태도는 잘난 척하는 세상을 향한 조용한 분노, 허풍선이들을 향한 꺾이지 않는 고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레고리우스보다 훨씬 능력이 없던-정말 말도 안 되게 공부를 못하던-사람들도 졸업시험을 시험을 치르고 확실한 직장을 얻었다. 그러나 그에게 이런 사람들은 다른 세상, 견딜 수 없이 천박한 세상, 그가 경멸하는 기준을 지닌 세상에 속해 있었다. 그를 내보내고 대신 졸업장이 있는 교사를 채용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학교에 아무도 없었다. 교장도 고전문헌학을 전공했지만, 그레고리우스가 자기보다 실력이 월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 그를 내보내면 학생들이 폭동을 일으키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21-22


<언어의 연금술사>  27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 관찰의 대상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말은 경험한 것에서 미끄러져 결국 종이 위에서 모순만 가득하게 남는다. 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혼란스러움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익숙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경험들을 이해하기 위한 왕도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이상하고 묘하게 들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서야 깨어 있다는 느낌, 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27-28



-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28



비행기에 올라타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완전히 다른 세상에 도착한다는 사실-그 중간에 놓인 개별적인 모습들을 받아들일 시간도 없이-은 그레고리우스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30


그레고리우스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벨이 울렸다. 학교로군. 벨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그는 전화 옆에 서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오늘 오전부터 제 인생을 조금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문두스 노릇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저도 모릅니다만, 미룰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전에게 주어진 시간은 흘러가 버릴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삶에서 남는 건 별로 없을 테니까요. 그레고리우스는 크게 소리 내어 이렇게 말해보았다. 이 말은 옳았다. 그는 자기 인생에서 이렇듯 옳고 의미 있는 말을 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전화기에 대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3



- 황금 같은 침묵 속의 언어. 신문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카페에 앉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다 보면 쓰인 글과 하는 말에서 보고 듣는 늘 똑같은 언어 때문에-어법이든 말장난이든 은유든- 혐오감과 구역질을  자주 느끼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보면 나 역시 끊임없이 똑같은 말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들은 소름이 끼치도록 낡았고 평번하며, 수백만 번 사용하여 닳고 닳은 것들이다. 이런 말들에도 과연 의미가 있을까? 무론 말은 나누는 기능을 한다. 사람들은 이 말에 따라 행동하고 웃고 울며,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가고, 종업원은 커피나 차를 가지고 온다. 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이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이런 말이란 그저 쓸데없는 수다가 새겨진 흔적으로써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효과음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그럴 때면 나는 해변으로 가서 목을 길게 늘여 바람에 머리를 맡기고, 우리에게 익숙한 것보다 훨씬 더 차가운 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낡은 단어들과 진부한 언어 습관을 내 머릿속에서 날아가게 하고, 늘 똑같은 잡담의 찌꺼기를 묻히고 사는 나를 씻겨 깨끗한 정신으로 돌아오게 해줄 바람. 그러나 그런 다음에도 뭔가 할 말이 생기면,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바 없는 나를 보게 된다. 내가 원하는 정화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난 이를 위해 무엇인가를, 언어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을? 내가 나의 언어에서 탈출하여 다른 언어로 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언어에서 도피하는 게 아니다. 언어를 새로 발명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

난 아마 포르투갈어 단어들을 새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 새로운 문장들은 낡고 진부하다거나 흥분하여 기교를 부린다거나 의도적이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포르투갈어로 된 문장의 중심을 이루는 원형(原形 근원원 형상형)이라서, 에움길이나 오염이 없이 다이아몬드와 같은 투명한 본질에서 바로 나온다는 느낌을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 단어들은 윤을 낸 대리석처럼 흠이 없고,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은 모두 완벽한 침묵으로 변화시키는 바하의 변주곡 음색처럼 맑아야 한다. 가끔 언어의 진흙 구덩이와 타협하려는 마음이 내 안에 약간 남아 있다면, 그 마음은 화기애애한 거실의 부드러운 고요함이나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느긋한 평온함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끈적거리는 언어 습관에 대한 분노가 나를 에워싸면, 그 분노는 빛이 없는 우주의 맑고 서늘한 적막함 이상이어야 한다. 내가 포르투갈어로 말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 소리 없는 열차를 끌고 가는 우주.... 종업원이나 이발사나 승무원은 새로운 조어를 들으면서 그 문장의 빛나는 간결함, 그 아름다움에 놀랄 것이다. 내 생각에 이런 문장들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엄격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청렴하고 확고부동하게 서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신의 말과 비슷하고, 또한 과장이나 격정이 없이 정확하고 간결하여 단 하나의 단어나 쉼표도 뺄 수 없다는 점에서 언어의 연금술사가 엮은 시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38-40



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드는 잔인함이 그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45


오랫동안 외국-다른 대륙, 다른 기후, 다른 언어 환경-에 살다가돌아온 학생들을 만날 때면 마음의 평정을 더 많이 잃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아직 키르헨펠트에 계세요?" 그들은 이렇게 묻고는 가던 발걸으을 재촉했다. 그런 날 밤이면 그레고리우스는 이 질문에 대한 변명거리를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변명을 해야 한다는 느낌조차 견디기 힘들어졌다.  46


무엇인가와 작별을 할 수 있으려면 내적인 거릳기가 선행되어야 했다.  47



-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이런 생각은 술 취한 저널리스트와 요란하게 눈길을 끌려는 영화제작자, 혹은 머리에 황색 기사 정도만 들어 있는 작가들이 만들어낸 유치한 동화일 뿐이다.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안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無音 없을무 소리음)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55



-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60



"아무 때나 전화하세요. 낮이든 밤이든." 독시아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둘이 처음 만났던 20년 전을 떠올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의사는 외국인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는 독특한 억양으로 말했다. 

"눈이 먼다고요? 아닙니다. 그냥 운이 나빴던 거예요. 정기적으로 망막을 검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레이저도 있는걸요.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는 그레고리우스를 문까지 배웅하다가 멈춰 서더니 눈을 깊게 들여다보며 물었다.

"무슨 다른 걱정거리라도?"

그레고리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플로렌스와의 이혼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말은 몇 달이 지난 후에야 할 수 있었다. 그리스 의사는 별로 놀라지 않은 듯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가끔 정말 두려워하는 어떤 것 때문에 다른 무엇인가에 두려움을 갖기도 하지요." 그때 그가 한 말이었다.  62-63


그때 형태가 잡히지 않은 채 우리 앞에 놓여 있던 그 열린 시간에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무엇을 해야 했을까. 자유로워 깃털처럼 가벼웠고, 불확실하여 납처럼 무거웠던 그 시간에.  75


지나온 시간이 괴롭지 않은 사람도 돌아가려고 할까?  77


낯선 사람의 삶을 산다는 게 어떤 것일까 생각하며 남의 뒤를 밟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금 전 그의 마음속에서 터져 나온 감정은 아주 새로운 호기심이었다. 그 호기심은 기차를 타고 오면서 경험했고, 파리 리용 역에 내리면서도-어제였든 아니면 언제였든- 느꼈던 새로운 종류의 각정과 어울릴 만한 것이었다.  80


그레고리우스는 뭘 해야 좋을지 모를 때마다 독서를 하곤 했다. 베른 근처 산간 마을 농부의 딸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책을 읽는 일이 드물었다. 가끔 읽는다고 해도 루트비히 강호퍼(1855~1920, 향토 소설로 유명한 독일 작가)의 향토소설 정도만 읽었는데, 그것조차도 몇 주씩 걸렸다. 아버지는 텅빈 박물관 전시실의 무료함을 잊는 수단으로 독서를 시작했고, 읽는 데 취미를 붙이고부터는 손에 잡히는 책은 무엇이든 읽었다. "이제 너도 책 속으로 도망치는구나." 독서의 기쁨을 발견한 아들에게 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책에 대한 어머니의 이런 생각, 좋은 글이 지닌 마술과 같은 힘이나 광채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는 그를 슬프게 했다. 

그는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 즉 책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독서를 하는지 하지 않는지는 금방 알 수 있으며, 사람 사이에 이보다 더 큰 구별은 없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들으면 놀랐고, 그의 괴상한 성격에 머리를 가로젖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레고리우스는 알고 있었다. 정말 알고 있었다.  101-102


담배를 피우는 이방인이 유리에 비친 나의 모습에서 일그러진 상(像 형상상)을 만들어 내리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고, 내 관념 세계에 관한 그의 공상은 일그러진 채 점점 쌓여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이중으로 이방인이 된다. 우리 사이에는 허위적인 외부세계뿐 아니라 외부세계가 각자의 내부세계에 만드는 망상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106-107


우리는 서로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108


모든 사람이 똑같은 그를 보았지만, 프라두가 말하듯 사람드링 보는 외부세계의 한 부분은 내면세계의 한 부분이기도 하므로 모두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프라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였던 때는 자기 인생에서 단 일 분도 없다고 확신했다.  108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110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레고리우스는 깃털처럼 가벼운 새 안경을 벗고 눈을 문지른 다음, 다시 한 번 썼다. 그런데 사실이었다. 예전 그 어느 때보다 잘 보였다.  114


새 안경으로 세상은 더 넓어졌고, 공간은 실제로 3차원이 되어 사물들이 마음껏 몸을 펼 수 있었다. 전혀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115



-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과 자비심과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  116



- 사람들의 만남이란 한밤중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달려가는 두 기차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는 뿌연 창문 저편의 흐릿한 불빛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시야에서 바로 사라져서 알아볼 시간도 없는 사람들에게 빠르고 덧없는 시선을 던진다. 무(無)에서 나와 아무런 의미나 목적 없이 텅빈 어둠 속에서 조각처럼 빛나던 창틀, 그 창틀에 들어 있는 유령들처럼 스쳐간 것이 정말 한 남자와 여자였던가? 두 사람은 아는 사이였을까? 둘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가? 웃었던가, 울었던가? 사람들은 이런 광경이란 서로 모르는 타인이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날 산책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말할지 모른다. 이 경우에는 그런 비교가 어느 정도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우리는 많은 살마들과 오랫동안 마주보고 앉아 있다. 함께 먹고 일하며 옆 자리에서 잠을 자고, 한 지붕 아래서 산다. 스쳐 지나가는 덧없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속성과 신뢰감과 친밀한 이해심을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속임수는 아닐까? 매순간 견딜 수 없으므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이 덧없음을 은폐하고 없애려는 시도... 다른 사람을 향한 눈빛이나 시선 교환은, 모든 것을 흔들고 덜컹거리게 만드는 엄청난 속도와 기압에 마비된 기차 승객들이 서로 스쳐 지나가며 던지는 지극히 짧은 시선의 만남과 같은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스치며 지나가는 밤의 만남처럼 언제나 서로에게서 벗어나고, 추측과 생각의 단상과 날조된 특성들만 우리에게 남겨두는 건 아닌지. 만나는 게 사실은 사람들이 아니라, 상상이 던지는 그림자들은 아닌지.  122-123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과거로 돌아가 그를 새롭게 아는 것..

자기 삶과는 완전히 달랐고 자기와는 다른 논리를 지녔던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까.  127


'글을 쓰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깨어 있다고 할 수 없어.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 자기가 어떤 사람이 아닌지는 더욱 알지 못하지고.'(아드리아나의 증언 중)  141


(에사)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1952년 가을, 영국에서였소. 런던에서 브라이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였지...

내가 탄 기차 칸의 문이 열리더니 머리카락이 헬멧처럼 반짝이는 그 사람이 들어오더군. 차가우면서도 부드럽고, 우울해 보이는 눈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그는 신부 파치마와 함께 장거리 여행을 하는 중이었소. 그때든 그 후로든, 그 사람에게 돈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소. 난 그가 의사라는 것, 그리고 특히 뇌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리고 원래 사제가 되려고 했지만, 철저한 유물론자라는 것도. 아주 많은 일에 역설적인 견해를 지녔던 사람이었지. 모순적이 아니라 역설적인 견해 말이오."  150-151


".. 의사들은 믿지 않았거든. 의사들을 믿지 않는 의사라.. 그 사람은 그랬고. 아마데우는."  152


그는 저항운동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소. 성격도 맞지 않았지. 저항운동가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꿈꾸는 사람의 감수성 예민한 영혼이 아니라 나처럼 투박한 두개골이 필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너무 위험 부담이 크고 실수도 하게 되어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어버린다오. 그는 만용에 가까운 행동을 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냉혹했지만, 인내심이나 우직함은 없었소.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어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은 없었지.  153


(멜로디) ".. 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자비하고 타협하지 않는 오빠의 비판을 좋아했어요..."

"..오빠는 벌써 네 살 때 글을 읽기 시작해서 손에 잡히는 건 뭐든 읽었다고 해요. 초등학교에서는 지루해서 죽을 정도였고, 중등학교에서도 두 번이나 월반을 했어요. 스무 살 때는 온갖 것들을 모두 알게 됐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스스로에게 묻기에 이르렀어요. 그러느라 공놀이 같은 건 잊은 거지요."  179


"그레고리우스, 그건 글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말하는 건 글이 아니라고요. 그냥 말을 하는 거예요."

그레고리우스가 사람들이 서로 연관이 없고 모순된 말을 한다고, 그리고 말한 것도 금방 잊어버린다고 불평했을 때 한 대답이었다. 독시아데스는 그의 말에 마음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자기처럼 택시 운전, 그것도 테살로니키엣 택시 운전을 해본 경험이 있다면 사람들이 하는 말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주 확실하게-이렇게 확실하게 아는건 인생에서 몇 개 안 될 정도로-안다고 했다. 그냥 말하기 위해 말을 할 뿐이라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다면, 그럼 말로는 도대체 뭘 해야 하느냐고 그레고리우스가 물었다. 독시아데스는 껄껄 웃었다. 

"스스로 말을 하는 계기로 삼아야지요! 그래서 말이 계속 이어지도록."  180-181



- 영혼의 그림자.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처럼 확실한가? 스스로의 말이라는 것이 맞기는 할까?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들은 신빙성이 있을까? 그러나 내가 고민하는 진짜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정말고민스러운 문제는 이런 이야기에 도대체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있기나 할까라는 것. 외모에 관한 이야기에는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183



- ... 지금의 내가 안니,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그 시절로 다시 가고 싶은-꿈과 같이 격정적인 -갈망.... 다시 한 번 손에 모자를 쥐고 따뜻한 이끼 위에 앉아 있고 싶은 것, 이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길 원하면서 그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겪은 나를 이 여행에 끌고 가려고 하는 것, 이는 모순되는 갈망이 아닌가.  184-185



(바르톨로메우 신부) "..아마데우는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앉아 있었소. 그 아인 기억력이 엄청나게 뛰어났지. 검은 눈은 옆에서 아무리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 해도 흔들리지 않는 달관한 시선과 굉장한 집중력으로 두꺼운 책들을 한 줄씩, 한 쪽씩 모두 빨아들였소. 어떤 선생이 이렇게 말하더군. '아마데우가 책을 읽고나면 그 책에는 더 이상 글씨가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아마데우는 책의 의미만 삼키는 게 아니라 잉크까지 먹는다니까요.'.."  193


"..재능이 많았던 아마데우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소. 하지만 못하는 게 한 가지 있었지. 놀고 즐기고 절제 없이 행동하는 거였소. 엄청난 각성과 통찰과 자제를 향한 열정적인 욕구는 자기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지..."  195


"..아마데우는 천박한 허영심을 대하면 잔인해졌소. 아주 심하게...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드는 듯했지. '천박한 허영심은 우둔함의 다른 형태죠.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주 전체로 봤을 때 얼마나 무의미한지 몰라야 천박한 허영심에 빠질 수 있어요. 그건 어리석음이 조야한 형태로 나타난 거예요.' 그는 늘 이렇게 말했소.."  202


아마데우가 졸업식에 낭독한 글..

첫 문장을  들은 직후부터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소. 시간이 지날수록 정적은 더 심해졌지. 이미 인생을 다 산 듯한 열일곱살짜리 우상파괴자의 펜 끝에서 나온 문장은 마치 채찍질과도 같았소...

나중에 선생도 보게 되겠지만, 마지막 문장은 감동적이면서도 겁을 주는 협박이오..

아마데우는 그 문장을 크게 말하지도,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하지도 않았소. 차분하고 거의 부드럽기까지 한 목소리였소.  209


그레고리우스는 대강당으로 가서 코르테스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프라두의 연설을 듣던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책방 봉지에서 바르톨로메우 신부의 서류철을 꺼내 끈을 풀고, 아마데우가 연설을 끝내고 교탁에 선 채 놀란 청중의 침묵 속에서 정리했던 종이뭉치를 꺼냈다..


- 신의 말씀에 대한 경외와 혐오.

난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이 세상의 범속함에 맞설 대성당의 아름다움과 고상함이 필요하니까. 반짝이는 교회의 유리창을 올려다보며 그 천상의 색에 눈이 부시고 싶다. 더러운 제복의 단조로운 색깔에 맞설 광채가 필요하니까. 교회의 혹독한 냉기로 내 몸을 감싸고 싶다. 병영의 단조로운 고함 소리와 들러리 정치인의재기 넘치는 수다네 맞설, 명령을 내리는 듯한 그 정적이 필요하니까. 행진곡의 새된 천박함에 대항할 물 흐르는 듯한 오르간의 울림이, 흘러넘치는 그 숭고한 음색이 듣고 싶다. 난 기도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천박함과 경솔함이라는 치명적인 독에 대항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필요하니까. 난 성서의 강력한 말씀을 읽고 싶다. 언어의 황폐함과 구호의 독재에 맞설, 그 시(詩)가 지닌 비현실적인 힘이 필요하니까. 이런 것들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이 또 하나 있다. 우리 몸과 독자적인 생각에 악마의 낙인을 찍고 우리의 경험 가운데 최고의 것들을 죄로 낙인찍는 세상, 우리에게 독재자와 압제자와 자객을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세상. 마비시킬 듯한 그들의 잔혹한 군화 소리가 골목에서 울려도, 그들이 고양이나 비겁한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거리로 숨어들어 번쩍이는 칼날로 등 뒤에서 희생자의 가슴까지 꿰뚫어도... 설교단에서 이런 무뢰한을 용서하고 더구나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일 가운데 하낟. 설사 누군가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이는 유례가 없는 허구이며 완벽한 불구하는 값을 치러야 하는 무자비한 자기기만이다. 적을 사랑하라는 이 괴상하고도 비상식적인 명령은 사람들의 의지를 꺾고 용기와 자신감을 빼앗아, 필요하다면 무기까지도 들고 독재자에게 대항하여 일어나야 할 힘을 얻지 못하도록, 그들의 손아귀에서 나긋나긋해 지도록 하기에 적합해 보인다.  

난 신의 말씀을 경외한다. 시적인 그 힘을 사랑하므로, 난 신의 말씀을 혐오한다. 그 잔인함을 증오하므로, 이 사랑은 아주 힘든 사랑이다. 말씀의 광채와 자만하는 신이 만드는 엄청난 예속을 끝없이 구분해야 하니까. 이 증오도 아주 힘든 증오다. 이 세상의 멜로디인 말씀을, 우리가 어릴 때부터 경외하라고 배운 말씀을 어떻게 증오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다음부터 우리를 봉화처럼 비추던 말씀을, 우리로 하여금 지금의 존재가 되도록 이끌어준 그 말씀을?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친자식을 동물처럼 도살하라고 요구했음을. 이런 말씀을 읽을 때 느끼는 분노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자신과 논쟁하려 한다고 욥을 비난하는 신은 도대체 어떤 신인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자기가 겪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욥을? 욥을 그렇게 만든 게 누구던가? 신이 아무런 이유 없이 어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이, 평범한 사람이 그러는 것보다 덜 부당할 이유는 뭔가? 욥이 불평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았던가?

신의 말씀이 지닌 시적 분위기는 너무나 대단해서 모든 것을 침묵하게 하고, 모든 저항을 하잘것없는 불만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선포된 요구와 굴종이 너무 심하여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는 성서를 옆에 밀어놓는 정도가 아니라 던져버려야 한다. 성서에서는 생활과 동떨어져 있으며 즐거움이라고는 없는 신이, 자유로워야 묘사할 수 있는 인생의 그 큰 범위를 복종이라는 단 한 가지 영역으로, 꼼짝할 수 없는 영역으로 한정하려 한다. 우리는 죄를 짊어져 꼬부라지고, 품위를 잃게 하는 예속과 고해성사로 위축되어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긋고, 그의 품 안에서 더 나은 인생을 누리기 위해 수천가지 희망을 거부한 채 무덤을 향해 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모든 기쁨과 자유를 빼앗은 그의 품 안에서 어떻게 인생이 더 나아진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에게서 나오고 그를 향해 가는 말씀은 현혹적으로 아름답다. 복사(服事 옷복 일사) 때 난 그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제단의 촛불 속에서 그 말씀은 얼마나 나를 취하게 했던가! 이 말씀이 온갖 일들의 척도임을 얼마나 당연하게 생각했던가! 사람들이 다른 말-혐오스러운 산란함과 본질의 상실을 의미하는 말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또 얼마나 이해할수 없는 일이었던가! 난 지금도 그레고리오 성가를 들으면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예전의 그 심취가 이제 반란에 돌이킬 수 없이 자리를 내준 사실에 잠시 슬픔에 젖는다. '지성의 희생(sacrificium intellectus)'이라는 두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화염처럼 내 안에서 솟구쳤던 반란...

호기심과 질문, 의혹과 논거, 생각하는 즐거움 없이 우리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우리의 목을 치는 칼날과 같은 두 단어는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느끼고 행동하며 살라는 요구이자 광대한 분열을 향한 선동이며, 우리 삶의 내적인 통일과 조화라는 행복의 정수를 희생하라는 명령이다. 갤리선의 노예는 쇠사슬에 묶여 있지만 원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행위를 가슴 깊은 곳에서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 그것도 기쁨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큰 경멸이 있을까?

신은 그 편재함으로 낮이나 밤이나 우리를 관찰하고 매시간, 매분, 매초마다 우리의 행위와 생각을 장부에 기록하며, 온전하게 우리 자신일 수 있는 시간을 단 한순간도 주지 않는다. 비밀이 없는 사람은,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는 생각과 소망이 없는 사람은 과연 어떠한가? 종교재판 때와 현재의 고문 기술자들은 알고 있다. "피의자가 내부로 후퇴할 길을 차단하라, 불을 절대 끄지 마라, 절대 혼자 두지 마라, 그에게서 잠과 평온함을 빼앗으라, 그러면 곧 자백할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훔쳐가는 고문은 호흡하는 데 필요한 공기와도 같은 외로움, 우리가 스스로와 마주 설 수 있는 그 외로움을 파괴한다. 우리의 구주, 우리의 신은 자신의 방종한 호기심과 반감을 일으키는 그 궁금증으로 불멸이어야 할 우리의 영혼을 훔치고 있다는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영원히 죽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이 과연 있으랴? 누가 영원히 살고 싶어할까? 말 그대로 끝없이 많은 날과 달라 해가 앞으로 오므로, 오늘과 이 달과 올해에 일어나는 일이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지루하고 공허한가? 정말 영원히 산다면, 의미가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을까 우리는 시간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고, 놓치는 것도 없으며, 서두를 필요도 없다. 우리가 어떤 일을 오늘 하든 내일 하든 아무런 상관이, 정말 완벽하게 아무런 상관이 없다. 회복할 시간이 얼마든지 있으므로 수없이 많은 실수도 영원 앞에서는 무(無)가 되고, 뭔가 후회한다는 것도 무의미해진다. 하루하루 태평하고 편안하게 느낄 수도 없다. 이러한 행복은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자각을 먹고 살기 때문에, 그리고 게으름뱅이는 죽음과 마주한 모험가요 성급이라는 명령과 싸우는 십자군이므로, 언제 어디든 누구에게든 시간이 한없이 많다면 시간을 낭비하면서 얻는 기쁨이 설 자리가 어디에 있으랴?

두 번째로 오는 느낌은 처음과 같지 않다. 그것은 반복을 의식함으로써 퇴색된다. 너무 자주 오고 오래 지속되는 감정은 우리를 지치고 싫증나게 한다. 불멸하는 우리의 영혼 속에는 이런것들이 결코,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아는 데서 오는 어마어마한 권태감과 절규하는 절망감이 자랄 것이다. 우리도 변화하는 감정과 함께 변하기를 원한다. 감정은 바로 예전의 자신을 떨쳐버리기 때문에, 그리고 스스로 다시 사라질 미래를 향해가기 때문에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의 물결이 영원으로 흐른다면, 조망이 가능한 시간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가 전혀 상살할 수 없는 수천 가지 감정이 마음속에 생겨날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에게 어떤 약속이 주어지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우리가 영원토록 우리여야 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우리인 이 강요된 상황에서 언젠가 벗어난다는 위안은 결코 없다는 뜻인가? 우린 여기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하며 또 영원히 알 수 없을 터인데, 이런 무지는 축복이다. 불멸이라는 이 낙원은 바로 지옥임을, 그 한 가지 사실은 알고 있으므로.

현재에 아름다움과 두려움을 부여하는 것은 죽음이다. 시간은 죽음을 통해서만 살아 있는 시간이 된다. 모든 것을 안다는 신이 왜 이것은 모르는가? 견딜 수 없는 단조로움을 의미하는 무한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난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유리창의 반짝임과 서늘한 고요함과 명령을 내리는 듯한 정적이, 오르간의 물결과 기도하는 사람들의 성스러운 미사가, 말씀의 신성함과 위대한 시의 숭고함이 필요하니까. 나는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자유와 모든 잔혹함에 대항할 적대감도 필요하다.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무의미하다. 아무도 나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말기를.  215-221


글을 세번 읽는 동안 그레고리우스의 놀라움은 점점 커갔다.  211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가 쓴 글을 숨도 쉬지 않고 읽었다.  248



- 난 그를 위해 그랬던가? 살아남는다는 그의 관점에서 내가 행한 일인가? 그게 내 의지였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까? 환자들을 대할 때면 물론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난 그렇게 행동한다. 어쨌든 그랬길 바란다. 내 행동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자신의 의지였다고 알고 있는 동기 외에 완전히 다른 어떤 동기에 영향을 받는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는?

내 손은 자신만의 고유한 기억을 지닌 듯하고, 이 기억은 자기 관찰을 위한 다른 어떤 원천보다도 더 신뢰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멩지스의 심장에 바늘을 찌르던 이 손의 기억. 이 손은 폭군살해자의 손, 그러나 역설적인 행위로 이미 죽은 폭군을 다시 살린 손이었다. (늘 새롭게 경험하는 일이지만, 내 원래 생각과 반대되는 현상은 여기서도 증명된다. 육체가 정신보다 매수되기 어렵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정신은 스스로에 대한 확실한 신뢰와 스스로에게 더 이상 놀라지 않는 인식의 친근함을 우리에게 그럴듯하게 꾸며대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단어들로 엮여 있는 자기기만의 매력적인 활동 무대다. 이렇듯 수월한 자기 확신 속에서 사는 인생은 얼마나 지루한가!)

그러니 사실은 내가 날 위해 그 일을 한 건가? 내가 훌륭한 의사요 증오를 억누를 수 있는 힘을 지닌 용감한 인간임을 나 스스로에게 보이기 위해? 승리를 거둔 극기를 칭찬하고 자기 통제의 기쁨을 즐기기 위해? 그러니까 도덕적인 허영심, 아니 그것보다 더 나쁜 지극히 일상적인 허영심에서? 그러나 그 몇 초 동안의 경험은 결코 향락적인 허영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확실하다. 오히려 나 자신의 뜻과 반대로 행동하고, 끓어오르는 보복과 심술이라는 감정을 눌러야 했던 경험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허영심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허영심, 반대 감정 뒤에 숨어 있는 허영심도 있지 않을까?

'난 의사요.' 흥분한 군중 앞엣 내가 했던 말이다. '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사람이오, 그건 신성한 선서요. 그 선서를 어기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요. 무슨 일이 있어도...'가로 말할 수도 있었겠지. 난 이런 말을 좋아하고, 또 사랑한다. 이런 말은 나를 감동시키고 황홀하게 한다. 사제의 서약처럼 들리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내가 인간백정에게, 그에게 잃어버린 목숨을 돌려준 것은 일종의 종교적인 행위였을까? 더 이상 교조와 예배를 통해 우월감을 느낄 수 없음을 마음속으로 아쉬워하는, 제단 촛불이 지닌 천상의 광채를 아직도 그리워하는 사람의 행위? 다시 말해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행위? 나 스스로도 느끼지 못했지만, 내 영혼 속에서는 예전에 신부님의 귀여움을 받던 제자와 아직 한 번도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은 폭군살해자 사이에 짧고도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던가? 생명을 구하는 '독'이 든 주사바늘을 심자엥 꽂은 것은 사제와 살인자가 함께한, 각자가 원하던 것을 얻은 행위였나? 

나에게 침을 뱉은 사람이 이네스 살루마옹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면, 난 나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우리가 너에게 요구한 건 살인이 아니었다."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었겠지.

"법적이나 도덕적인 의미에서나 그건 범죄가 아니었어. 그가 그냥 죽게 내버려두었더라도 너에게 판결을 내릴 판사도 없었고, '살인하지 말라'는 모세의 십계명을 어겼다고 말할 사람도 없었다. 우리가 원했던 건 아주 단순명료하고 간단한 일이었어. 우리에게 불행과 고무노가 죽음을 불러온 사람의 목숨, 우리를 불쌍히 여긴 하늘이 이제 드디어 없애려고 하던 목숨을 그렇게 온 힘을 다해, 그가 앞으로도 계속 유혈 체제를 유지하도록 붙잡지는 않는 거였다."

난 무슨 말로 나를 변호했을까?

"어떤 사람이든, 무슨 짓을 저질렀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할 권리가 있다. 우리에겐 다른 사람의 생사 여부를 판단하거나 주관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그게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총을 쏘는 누군가를 발견한다면, 그 사람을 쏘지 않는가? 당신이 살인을 저지르는 멩지스를 눈앞에서 본다면 필요한 경우 살인을 해서라도 그의 살인을 막지 않을까? 당신이 했어야 할 일,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것과 비교하면 별것 아니지 않은가?"

그를 죽게 그냥 내버려두었더라면 내 기분은 지금 어떨까? 사람들이 나에게 침을 뱉는 대신 치명적인 나의 방임을 칭송 했더라면? 분노를 뿜어내는 실망 대신 느긋한 안도의 숨소리가 골목에서 들렸더라면? 난 분명 악몽을 꿀 정도로 시달렸을 것이다. 이유가 뭘까? 내가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 있어서? 아니면 그를 죽게 내버려두는 냉혹한 행위는 내가 나 자신에게 낯설어짐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의 나도 그저 우연의 산물일 뿐이 아닌가.

이네스에게 가서 초인종을 누르고, 이렇게 말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어쩔 수 없었어요. 난 원래 그래요. 사정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됐어요. 내가 생긴 게 워낙 그러니, 달리 어떻게 할 수 없었어요."

그러면 그녀는 아마 이렇게 대답하겠지.

"당신 기분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건 정말 하찮은 거니까. 하지만 멩지스가 건강해져서 제복을 다시 입고, 살해 명령을 계속 내린다고 생각해봐요. 아주 자세하게 상상해보라고요. 자, 이제 자기 자신을 판단해보시죠."

내가 그녀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어떻게, 무슨 말을?  248-252



멩지스가 눈앞에 누워 있을 때, 프라두가 본 것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특정한 개인이었다. 오직 그라는 개별적인 한 인간, 프라두는 멩지스의 삶을 다른 사람들과 연관지어, 더 큰 범위 속의 한 요소로 계산할 수 없었다. 프라두의 혼잣말에 등장하는 여자는 바로 이 점을 비난했다. 그가 개별적인 다른 사람들의 목숨과도 똑같이 관련된, 그것도 여러 사람들의 목숨과 관련된 결과를 생각하지 않은 것. 한 사람의 개별적인 목숨을 여러 사람의 개별적인 목숨을 위해 희생하지 않은 것.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가 이런 일을 배우려고 저항운동에 참여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의도는 실패로 끝났다. "한 사람 대 여러 사람의 목숨. 이런 식으로 계산할 수는 없지 않나요?" 몇 년 뒤에 프라두는 바르톨로메우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253



- "그래, 하지만 왜 불안하지? 고통이나 실망이나 슬픔 또는 분노가 아니라 왜 불안일까? 불안은 이제 앞으로 올 일, 일어날 일에 대해 갖는 감정 아닌가? 네가 피아노를 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늘 알고 있었고, 우린 그걸 '현재'로 다퉜잖아. 이 불행은 지속될지는 몰라도, 불안하다는 느낌이 타당할 만큼 커질 수는 없지 않을까? 연주를 할 수 없을 거라는 뚜렷한 인식은 네 기운을 빠지게 하고 답답하게 만들지는 몰라도, 공포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야."

"그건 오해야."

조르지가 반박했다.

"공포는 새로운 인식 때문이 아니야. 무엇에 대한 인식인지가 문제야. 미래의 것이긴 하지만 현재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내 인생의 불완전함, 지금 이미 결핍이라고 느끼는 이 불완전함이지. 이 결핍이 너무 커서 늘 알고 있었던 사실이 내 안에서 공포로 변해."  266



- 인생이 가볍든 힘들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상관없이 더 많은 삶을 원한다. 끝나고 나면 모자라는 인생을 더 이상 그리워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들은 삶이 끝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복잡하고 분석적인 사유는 직관적인 인식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린 둘 중에 어떤 것을 더 신뢰해야 하나?  269



조르지는.. 왜 이 일에 관심이 있는지 물었다...

"제가 그였더라면 어땠을지 알고 싶어서요."

그레고리우스가 대답했다...

"그게 가능할까요?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 '그'가 된다는 것이?"

그레고리우스는 적어도 그라고 상상하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있지는 않느냐고 대답했다.  280


책은 훔쳤소. 책을 읽는 데는 돈이 들지 말아야 한다는 게 당시 내 생각이었는데,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소.  288


둘은 차를 마시며 체스를 두었다. 말을 움직이는 에사의 손이 떨렸다. 말을 새로 놓을 때마다 딱 소리가 났다. 그레고리우스는 에사의 손등에 난 화상 자국에 번번이 놀랐다. 

"끔찍한 건 고통이나 상처가 아니오."

에사가 말했다. 

"가장 끔찍한 건 굴욕이지. 바지에 오줌을 쌌다는 걸 알았을 때의 굴욕감... 석방되고 나서 난 복수심에 불탔소. 고문기술자들이 퇴근하여 나올 때까지 숨어서 기다렸지. 그들은 사무실에 다니는 사람들처럼 뻣뻣한 외투 차림에 서류가방을 들고 나왔소. 난  그들의 뒤를 밟아 집까지 갔지. 눈에는 누, 이에는 이로 보복하기 위해. 내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을 만지는 게 구역질이 났기 때문이었소. 보복을 하려면 어차피 손을 댈 수밖에 없었소. 총을 사용하는 건 그들에겐 너무 관대한 처벌이었을 테니까. 마리아나는 내가 도덕적인 성숙의 과정을 겪은 줄 알아. 그건 전혀 아니었소. 난 언제나 이른바 '성숙'이라는 걸 거부하던 사람이오. 싫어해. 난 사람들이 말하는 성숙이란 걸 낙관주의나 완벽한 권태라고 생각하오."  290-291



- 실망이라는 향유. 실망은 불행이라고 간주되지만, 이는 분별없는 선입견일 뿐이다.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또한 이런 발견없이 자기 인식의 근본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그러니 실망이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함을 어떻게 얻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우리는 실망을, 없으면 우리 인생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한숨을 지으며 할 수 없이 견뎌야 하는 그 무엇이라고 취급해서는 안 된다. 우린 실망을 찾고 추적하며 수집해야 한다. 젊은 시절에 숭배했던 영화배우가 이제 노화와 쇠락의 징후를 보이는 것에 나는 왜 실망하는가? 성공의 가치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에 대한 실망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부모님에 대한 실망을 평생 동안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 사람들에게서 우린 뭘 기대했던가? 무자비하게 고통스러운 통치 아래서 평생 시달려야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고통을 주고 경제적인 도움도 주는 사람들-행동에서 실망을 느낀다. 그들의 행동이나 말이나 감각은 너무나도 미미하다. 

"뭘 기대하는 겁니까?"

내가 묻는다. 그들은 대답하지 못한다. 이들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기대, 실망할 수도 있는 기대를 오랫동안 품고 다녔다는 사실에 놀란다.

자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실망스러운 경험의 수집이란 그에게 중독과도 같을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독. 그에게는 실망이 뜨겁게 파괴하는 독이 아니라 서늘하게 긴장을 풀어주는 향유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의 진정한 윤곽이 무엇인지 눈을 뜨게 해주는 향유...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실망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실망이 스스로를 향한 길잡이라고 인식한 사람은, 없는 용기와 모자라는 성실함 또는 자신의 감각과 행동과 말에서 끔찍하도록 좁은 한계 등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내기 위해 온갖 힘을 쏟는다. 우리가 우리에게서 바라고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우리에게 한계가 없다는 것? 아니면 우리가 사실은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

기대를 줄임으로써 더 현실적이 되고, 단단하고 신뢰할 만한 본질만 남아 실망의 고통에 맞서는 저항력을 지니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포괄적이고 원대한 기대를 금지하고, 버스의 도착 여부와 같은 무의미한 기대만이 존재하는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292-294



"난 아마데우처럼 거리낌 없이 몽상에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소."

에사가 말했다.

"그리고 실망을 그토록 싫어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소. 아마데우의 이 글은 스스로에게 맞서서 쓴 거요. 자주 자신의 뜻에 거스르며 살아야 했던 그의 삶과 마찬가지로..."  294



- 우스꽝스러운 무대. 우리가 중요하고 슬프고 우습고 아무 의미도 없는 드라마를 상연하기를 기다리는 무대로서의 세계. 이런 생각은 얼마나 감동적이고 매혹적인가, 그리고 올마나 불가피한가!  307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를 잊을 수 있을까?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의 드라마를 상연하는 무대 역할을 한다고 해도? 망각이 아니었다면 그건 무엇이었을까?  309



- 내적인 넓이. 우리는 지금 여기서 산다. 예전에 다른 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과거다. 대부분은 잊어버렸고, 남아 있는 작은 부분들도 무질서한 기억의 파편들일 뿐이다. 단편적인 우연 속에서만 빛을 내다 사라지는 기억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습관적으로 이렇게 생각하곤 한다. 우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다른 사람인 경우에도 이는 가장 자연스러운 사유 방식이다. 이 사람들은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가 아니라 정말 지금 여기 우리 눈앞에 있으므로, 기억의 내적인 일화-그 기억의 현실성이 전적으로 그 사건의 현재성에만 있는-라는 형태를 통해서가 아니면, 이들이 과거와 갖는 관계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나 자신의 내부라는 관점에서 보면 상황은 아주 달라진다. 이 경우 우리는 현재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과거로 깊숙이 들어간다. 이런 일은 깊은 감각, 다시 말해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라는 느낌은 어떤 것인지를 결정하는 감각이 누구만 가능하다. 이 감각은 시간을 초월하고, 시간을 인정하지도 안흔다. 내가 지금도 여전히 손에 모자를 들고 학교 계단에 앉아 혹시 마리아 주앙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여학교로 눈길을 보내는 소년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물론 잘못된 주장이다. 30년도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실이기도 하다. 어려운 과제를 앞두고 두근거리는 내 가슴은, 수학을 담당했던 랑송이스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올 때 뛰던 그 가슴이다. 온갖 권위에 직면했을 때 답답해지는 가슴속에서는, 허리를 굽힌 아버지의 호령이 함께 울려 퍼진다. 모르는 여자의 반짝이는 눈빛과 마주칠 때마다, 그 옛날 학교 유리창에서 마리아 주앙의 시선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고 느꼈을 때처럼 숨이 멎는다. 난 늘 그곳에, 먼 시간의 저편에 있다. 결코 그곳을 떠난 적이 없다. 과거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거나, 그곳에서 출발하며 산다. 이 과거는 단순하고 짧은 일화 형태로 반짝이는 기억이 아니라 현재다. 시간이 몰고 온 수천 가지 변화는, 시간을 초월하는 현재의 이 감각과 비교하면 꿈처럼 덧없고 비현실적이며 환영처럼 기만이 심하다. 이 변화들은, 고통과 걱정거리를 안고 나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내가 마치 완벽한 자신감과 용기를 지닌 의사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불안에 떨며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신뢰감은, 그들이 내 앞에 있는 한 나 스스로 이것을 사실로 믿도록 강요한다. 하지만 환자들이 나가자마자 난 그들에게 소리치고 싶다. 난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학교 계단에 앉아 있는 소년일 뿐이라고, 내가 하얀 가운을 입고 이렇게 거대한 책상 앞에 앉아 환자들에게 충고를 하는 것은 정말 하찮은 일이고 사실은 거짓이라고, 우리가 같잖은 천박함으로 현재라고 부르는 현상에 속지 말라고...

우리는 시간상으로만 광범위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공간적으로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훨씬 넘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나면서 우리의 일부분을 남긴다. 떠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 남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단조로운 바퀴 소리가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그 여정이 아무리 짧더라도-장소로 우리를 데리고 가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까이 가고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을 떠난다. 우리가 낯선 정거장의 플랫폼에 두 번째로 발을 디디면, 그래서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다른 곳과 확연히 구별되는 냄새를 맡으면 우리는 외형상으로만 먼 곳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 먼 곳에도 이른 것이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에게서 아주 외딴 구석, 우리가 다른 곳에 있을 때면 무척 어두워 보이지 않았던 곳에... 그렇지 않고서야 승무원이 지명을 크게 외치고 기차가 멈추느라고 내는 끼익 소리를 들으면, 역 건물의 그림자가 우리는 삼키기 시작하면, 왜 그렇게 가슴이 뛰고 숨이 차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왜 우리는 기차가 마지막으로 덜컥이며 완전히 멈추는 순간을 마술적이고 소리 없는 드라마라고 생각하는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플랫폼에 첫 발자국을 디딘 순간부터, 그 옛날 기차의 첫 덜컥임을 느꼈을 때 중단하고 떠났던 삶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중단된 삶, 온갖 약속으로 가득한 그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 또 어디에 있으랴? '지금'과 '여기'가 본질적이라는 확신으로 이것에 집중하는 행위는 오류이며, 또한 불합리한 폭력이다. 중요한 것은 확실하고 느긋하게, 알맞은 유머와 멜랑콜리로 '우리'라는 시간과 공간상의 내적인 경치 속에서 움직이는 일이다. 여행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뭔가? 그들이 외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내적으로도 뻗어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계발할 수 없고, 스스로를 향한 먼 여행을 떠나 지금의 자기가 아닌 누구 또는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 발견할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살아간다.  315-318



"체스는 그렇게 잘 두면서, 왜 인생에서 싸울 줄은 몰라요?" 프롤렌스는 이런 말을 여러 번 했다. 인생에서 싸우는 건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자기 자신과 싸울 일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 그가 했던 대답이었다.  324



- 계획된 것도 아니고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지만,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남기는 불가피하고도 쉴 새 없는 부담의 흔적-절대 없애지 못하는 화상의 흉터처럼-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려, 부모들이 지닌 의도나 불안의 윤곽은, 완벽하게 무기려하고 자기가 어떻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아이들의 영혼에 달군 철필로 쓴 글씨처럼 새겨지지, 우리는 낙인찍힌 글을 착고 해석하기 위해 평생을 보내면서도, 우리가 그걸 정말 이해했는지 결코 확신할 수 없어.  356



내가 아빠의 상상에 대해 아는 게 있던가? 왜 우리는 부모의 상상에 대해 이다지도 모를까? 어떤 사람이 상상을 통해 받는 이미지에 대해 알지 못하면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과연 무엇을 알 수 있을까?  363



-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384



이따금 나는 인가의 약점보다 '생각 없음'이 더 많은 잔인함을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387


그레고리우스는 고통을 겪는 엄한 판사 아버지와 공명심이 강한 어머니-신처럼 떠받드는 아들을 통해 자기 인생을 살았던-아래에서 자랐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410


(아드리아나)"말을 하지 못하는 것. 오빠는 '감정 교육'이 무엇보다도 느낌을 드러내는 기술, 말을 통해 느낌을 풍요롭게 하는 경험을 우리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곤 했어요. 아버지는 그걸 얼마나 못하셧던지!"  415-416


"마지막 해에 오빠는, 우리 모두가 두려워하는 외로움의 본질이 도무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우리는 외로움이라고 말하는 그게 도대체 뭐지? 단순하게 다른 사람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아. 혼자 있으면서도 전혀 외롭지 않을 수도 있고,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외로울 때가 있으니까. 그러니 그게 뭘까? 오빠는 사람드이 온갖 소란 가운데서도 외로울 때가 있다는 생각에 골몰했어요. '좋아. 다른 사람들이 옆에 있다는 것, 내 옆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상황만 말하려는 건 아니야. 함께 파티를 하거나 친근한 분위기 속에서 감정이 이입된 현명한 조언을 할 때도 그래. 그럴 때도 우린 외로움을 느끼지. 그러니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의 존재 여부는 물론, 함께하는 행위와도 상관이 없어. 그러면 도대체, 도대체 무엇과 관련이 있을까?'.."

'경멸에서 오는 외로움'이라는 메모가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존경과 인정을 거두어가면, 왜 우린 그들에게 '그런 건 필요 없소. 나 자신만으로도 충분하니까'라고 말하지 못하나? 이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건, 소름끼치는 속박의 한 형태가 아닐까?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는 건 아닌가? 이런 일을 견디는 댐이나 보루로 어떤 감정을 세워야 하나? 내적인 견실함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그레고리우스는 책상 위로 몸을 굽히고, 벽에 붙은 메모지의 빛바랜 글씨를 읽었다.

신뢰에서 오는 협박.

"환자들은 오빠에게 아주 사적인 일이나 위험한 일들도 이야기 했어요."

아드리아나가 말했다.

"정치적으로 위험한 일들 말이에요. 그런 다음에 그 사람들은, 자기가 벌거벗었다는 느낌을 갖지 않으려고 오빠도 뭔가 고백하기를 기다렸어요. 오빠는 그걸 이루 말할 수 없이 증오했지요. '난 다른 사람들이 내게서 뭔가 기대하는 게 싫다.' 오빠는 발을 구르며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도대체 경계선을 긋는 일이 왜 이렇게 힘드니?' '어머니와 경계선을 긋는 일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어요. '어머니와 말이야.' 하지만 하지 않았어요. 오빠 스스로 알고 있었으니까."

인내라는 위험한 덕목.

"오빠는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인내라는 단어에 지독한 거부 반응을 보였어요. 인내심을 지닌 누군가를 보면 오빠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어요. '잘못을 저지르는 기괴한 방식일 뿐'이라고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했어요. '우리 안에서 솟구치는 분수에 대한 불안이지.' 난 동맥류를 알고 난 뒤에야 이 말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었어요."  417-419


"난 오빠를 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요. 오빠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믿었어요. 몇 년 동안 매일 오빠를 보아왔고, 자기 느낌과 생각과 더구나 꿈에 대해서도 말하는 걸 들어왔으니까요..."  420


'경멸에서 오는 외로움' 프라두가 생의 마지막에 골몰하던 주제였다. 우리가 타인의 존경과 관심에 의지하고, 그것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  431



- 유치함은 모든 감옥 가운데 가장 악질적이다. 창살은 단순하고 비현실적인 감정으로 도금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를 궁전의 기둥으로 착각한다.  434-



(마리아 주앙)".. 그런 일이 있지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없는지 알지 못해요. 그게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그러다가 그게 나타나면 단 한순간에 확실해지지요..."  455


(마리아 주앙)'상상력은 우리의 마지막 성소다.' 그가 늘 했던 말이지요. '상상력과 친근함은 언어 외에 그가 인정한 유일한 성스러움이었으니까요.  462



(마리아 주앙)".. 조르지를 나쁘게 말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를 향한 아마데우의 비판 없는 경탄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난 농부의 딸이라 농부의 아들들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어요. 낭만적이 아니지요. 큰일이 벌어지면 조르지는 일단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할 사람이었어요. 

아마데우를 매혹했던 것, 거의 취하도록 그를 끌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과 스스로의 경계를 지슨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던 조르지의 성격이었어요. 그는 간단하게 '싫어'라고 말하고는, 그 큰 코를 벌쭉이며 웃으면 그만이었으니까요. 그에 비해 아마데우는, 경계를 지으려면 그게 마치 구원의 문제라도 되는 듯 싸워야 했어요."  464


실우베이라가 말했다. "우리가 인생을 조망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앞으로든 뒤로든. 뭔가 일이 잘 풀렸다면 그건 그냥 운이 좋았던 것이겠지요."  471



- 배신적인 언어. 자기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 대해 또는 단순히 어떤 일에 대해 말을 할 때 우리는 말을 통해 스스로를 열어 보이려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타인에게 알리고, 타인에게 우리의 영혼을 잠깐 엿보기를 허용하는 것이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우리 마음의 한 조각을 타인에게 준다라는 뜻이다. 배 난간에 서 있을 때 어떤 영국인이 나에게 한 말이었는데, 새빨간 축구공을 가지고 있던 올소울의 아일랜드 학생에 대한 추억을 제외하면 그 낯선 나라에서 가지고 온 것들 가운데 좋은 거라고는 그 말이 유일하다.)

이런 상화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여는 문제에 관한 한 독자적인 감독이요 결정권을 지닌 극작가다. 하지만 어쩌면 이건 완벽하게 잘못된 생각, 자기기만이 아닐까? 우리는 말을 통해 자기를 드러낼 뿐 아니라 스스로를 배신하기도 한다. 표현하려던 것보다 훨씬 더 심하게 속내를 드러내어 원래 의도했던 바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타인은 우리의 말을 우리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에 대한 증상으로 해석한다. 우리라는 질병에 대한 증상, 타인을 이렇게 관찰하는 일은 흥미로우며 또한 우리를 매우 관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기도 한다. 타인도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똑같이 본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 입을 열려던 순간 말이 목에 걸린다. 그 충격은 우리를 영원히 침묵하게 만들 수도 있다.  476-477



- 분노라는 들끊는 독. 타인 때문에-그들의 뻔뻔함과 부당함,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우리가 화를 낸다면 우리는 그들의 권력 아래에 놓인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고 자란다. 분노는 들끓는 독과 같아서, 부드럽고 우아하며 평화로운 감정들을 파괴하고 우리에게서 잠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불을 켜고, 우리를 빨아먹고 기운을 빼는 기생충처럼 우리 안에 자리를 잡은 분노를 터뜨린다. 우리가 입은 피해에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오로지 우리 안에만 퍼져간다는 사실에도 분노한다. 우리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감싸며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는 동안, 우리를 희생자로 만든 원인 제공자는 분노의 파괴력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있으니까. 번쩍이는 조명이 무언의 분노에 쏟아지는 내부의 무대, 관객이 없는 그 무대에서 우리는 비현실적인 인물과 비현실적인 언어로 비현실적인 적들에게 효과라고는 전혀 없는 분노-우리가 내부에서 차갑게 들끓는 화염으로 인식하는-를 터뜨리며 우리를 위한 드라마를 홀로 상연한다. 이 모든 것이 상상 속의 드라마일 뿐, 타인에게 해를 입히고 번민의 균형을 만들어낼 실제 논쟁이 아니라는 인식을 우리가 확실하게 하면 할수록 유독한 그림자들은 더 사납게 춤추며 악몽의 가장 어두운 지하무덤까지 우리를 쫓아온다. (잔인하게 역습을 하리라고 생각하며, 상대방에게 소이탄과 같은 효력을 발휘할 만한 말을 밤새도록 궁리한다. 그래서 화창한 평화로움 속에서 우리가 커피를 마실 동안, 분노의 불길이 이번에는 그에게서 타오르도록.)

분노를 올바르게 다스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만나도 상관없는 무정한 존재, 차갑고 냉철한 판단만 내리는 존재, 진정으로 신경을 쓰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그 무엇도 흔들어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분노라는 경험을 전혀 알지 못하고, 메마른 무감각과 구별할 수 없는 태연함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기를 진심으로 원할 리는 없다. 분노도 우리가 누구인가에 관해서 어느 정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우리가 분노를 인식했을 때 그 독에 빠지지 않으며 분노가 우리에게 득이 되도록 하려면 우리 자신을 어떻게 교육하고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이다.

이것이 임종 순간에 마지막 대차대조표의 한 부분으로 남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분노에, 그리고 효과가 없는 상상 속의 드라마-쓰러질 정도로 번민하는 우리만 알고 있는 드라마-에서 타인에게 복수하는 데 너무나 많은 것을, 너무 많은 힘과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이 대차대조표는 청산염처럼 쓴맛이 나리라. 이 표를 개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 부모님이나 선생님, 다른 교육자들은 왜 이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을까? 이 엄청난 의미에 대해 왜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을까? 스스로를 파괴하는 분노 때문에 영혼을 낭비하지 않게 도와줄 나침반은 왜 주지 않은 걸까?  496-498



당신 내가 지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네? 문두스,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에요!" 왜 이런 모든 일이 지금까지도 이렇게 아플까? 왜 20년, 30년이 지나도록 이 기억들은 털어내지 못할까?  503


"문두스,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에요!" 플로렌스는 왜 그냥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까. "당신이 지루한 사람이냐고요? 세상에, 절대로 아니에요!"라고.

인간이 상처를 떨어낼 수 있기는 한 걸까? 우리는 과거로 깊숙이 들어간다. 프라두가 남긴 글이었다. 이런 일은 깊은 감각, 다시 말해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라는 느낌은 어떤 것인지를 결정하는 감각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 감각은 시간을 초월하고, 시간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507


그리고리우스는 그들에게 삶이 만족스러운지 물었다. 베른의 고전문헌학자인 문두스가 세상의 끝에서 가릴시아의 어부들에게 삶에 대한 견해를 묻고 있었다.  508


한 명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만족하냐고? 다른 삶은 모르는 걸!"

어부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나중에는 그칠 줄 모르는 웃음바다로 변했다. 그레고리우스도 얼마나 흥겹게 따라 웃었던지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509


친근함, 그것은 신기루처럼 헛되고 변하기 쉽다. 프라두가 쓴 말이었다.  516


덧없음. 프라두가 좋아하던 단어 가운데 하나라고 마리아 주앙이 말해주었다.  519



- 독재적인 친근함. 우리는 친근함 속에서 서로 뒤엉켜 있다. 보이지 않는 끈들은 '자유롭게 하는 사슬'이다. 이 뒤엉킴은 독재적이라, 독점을 요구한다. 나눔은 배반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사람만 좋아하고 사랑하고 접촉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다양한 친근함을 연출하고, 주제와 말과 몸짓과 함께 나눈 지식과 비밀에 관해 옹졸하리만큼 꼼꼼한 장부를 써야 하는가? 이런 친근함은 소리 없이 떨어지는 독이다.  530



타인을 자기 삶의 건축용 석재로, 자기 구원의 경주를 위한 일벌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536


사람의 정체성은 언제 유지되는가. 늘 그래왔던 그 모습일 때? 스스로를 바라보았을 때처럼? 아니면 들끓는 생각과 감정의 용암이 온갖 거짓과 가면과 자기기만을 묻어버릴 때? 달라졌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사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원하는 그 모습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니까 타인의 안녕에 대한 걱정과 염려라는 가면을 썼을 뿐, 결국 익숙한 것이 흔들릴까봐 대항하는 투쟁 문구의 일종인가?  537


그레고리우스는 여행안내 책자를 사서 수도원을 하나씩 차례로 구경했다. 그는 명소를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뭔가에 몰리면 그는 고집스럽게 바깥에 머물러 있었다. 베스트셀러라는 책들을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읽는 것도 이런 성격 때문이었다. 지금 그는 관광객의 호기심으로 명소를 찾아다니는 게 아니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그레고리우스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프라두의 흔적을 찾아다닌 그동안의 시간이 성당과 수도원에 대한 그의 느낌을 바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544


두 사람이 피니스테레 해변에 앉아 있을 때 배 한 척이 지나갔다. 

"아마테우가 배를 타자고 하더군요. '브라질 밸렘이나 마나우스로, 아마존으로 가는 게 제일 좋겠어. 덥고 습기가 많은 곳으로. 색깔과 냄새와 끈적거리는 식물들과 열대우림과 동물들 이야기를 쓰고 싶어. 난 지금까지 언제나 정신에 관한 글만 썼어.' 그가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 오빠가, 그렇게도 현실적이던 우리 오빠가..." 아드리아나의 말이 떠올랐다.

"사춘기 소년의 낭만이나 중년 남성의 유치함이 아니었어요. 그건 현실이었고, 진정이었어요. 하지만 그것 역시 저와는 상관이 없었지요. 그는 오로지 자신만의 여행, 자기 영혼의 억압된 분노를 향한 여행에 제가 동행하기를 원했던 거예요. 저는 아마데우에게 당신은 너무 허기졌다고, 그 여행에 동행할 수 없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어요.

그가 개선문 아래로 끌어당기던 날 밤, 저는 이 세상 끝까지 그를 따라가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그의 무서운 허기를 알지 못했지요.  553


에스테파니아가 그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오후 내내 책을 읽었어요. 처음에는 놀랐지요. 아마데우가 아니라 저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는 생각에 몹시 놀랐어요. 그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깨어 있던 살마인지, 자신에게 얼마나 무자비할 만큼 공정했는지, 거기에 문장력도.. 이런 살마에게 '당신, 너무 허기졌어요'라고 말했던 제가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렇게 말햇던 게 옳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의 글을 예전에 알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554



- 많은 여자들 가운데 당신인 이유는? 어느 순간엔가 모든 살마이 하는 질문이다. 속으로만 내뱉어도 이 질문이 위험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임의성이나 대체 가능성과 똑같지는 않지만 우연이라는 생각, 우연이라고 발음하는 생각이 그토록 소름 끼치는 이유는? 왜 우리는 이러한 우연을 인정하고 웃음으로 넘기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우연이 사랑의 의미를 축소한다고, 우연을 당연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왜 사랑을 폐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556



'우리가 서로 운명적으로 정해진 사이라고 생각해요?'

서로 운명적으로 정해진 사람은 없소. 그런 섭리도 없을 뿐더러 서로의 운명이 맺어지도록 해주는 그 누군가도 없으니까. 우연한 욕구와 습관의 엄청난 힘을 넘어서는 필연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소...

난 완벽하게 우연히 이곳에, 당신은 완벽하게 우연히 그곳에 있었소. 그 사이에는 샴페인 잔들... 그래요. 그랬던 거요. 필연은 없었소.  557



열린 시선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게으른 존재다.  559

그레고리우스는 사진을 다시 훑어보고, 또 한 번 보았다. 과거가 그의 시선 아래에서 얼어붙기 시작했다. 기억은 과거를 고르고, 조절하고, 수정하고 속일 것이다. 기억 말고는 다른 근거가 없으므로, 누락과 비틀기와 거짓을 나중에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이 소름 끼쳤다.  565





작가와의 대담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건가?"

대담자 " 실리야 우케나


우케나 : .. 우리 모두 삶의 일부분밖에 경험할 수 없는 거라면, 우리 안에 있는 나머지들 즉 경험하지 못한 나머지 대다수 부분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비에리 : 남아 있는 부분은 의미가 아주 큽니다.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해도 우리 삶에 색깔을 입혀주고 멜로디를 주는 건 바로 그 부분입니다. 그 나머지 부분이 어떻게 구현되는가에 따라 자기 삶이 만족스럽거나 진실하게 흘러가겠지요. 하지만 한번 규정한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을 관통할 수도 없고 그만큼 실망할 일도 드물지요. 뭔가를 막연히 기다리면서도 입 밖에 내지 못할 수도 있고요. 이것들은 간혹 그들의 인생에서 극적인 형태로 돌출됩니다. 그때 우리는 도망치거나 파멸하거나 생의 위기를 겪게 되죠. 예기치 못했던 파국은 지극히 사소한 일로 시작합니다. 사실 오랫동안 축적되었던 게 드러나는 경우지만요.  572-573


우케나 : 그냥 떠나는 것, 누구에게나 가능할까요?

비에리 : 무엇보다 자기 인식, 즉 깨달음이 절대적이죠.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별해주는 인식작용 말입니다. 자기 앞에 놓인 생을 그대로 살아갈 것인지, 그게 정말 원하는 것인지 자문하는 거요. 오직 우리 인간만이 자기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고, 진실한 자아를 탐구하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어떤 동물도 내 삶이 옳은 것인지, 지금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것인지 질문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그럴 가능성이 열려 있는 셈이지요. 

우케나 :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삶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떠나는 건 아니잖아요?

비에리 : 아니죠. 누구든 자기 삶이 총체적으로 잘못 진행된다 느끼고 지금 상황이 가망 없다고 판단하면 떠날 수 있습니다... "이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야"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규범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아정체성을 확립할 수도 없고요. 그러니까 '불가피한 떠남'이란 다시 말해 나의 어떤 부분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고 싶은 목적이 있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새롭게 도달하고 싶어하는 그 상태도 결국은 의무, 가능성, 불가능성의 경계를 지닙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요.  574-575


우케나 : 결단이 어려운 경우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까요? 

비에리 : 정해진 것은 없어요. 경우마다 다르기 때문에 해결책도 개별적이지요. .. 

의무감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허덕이면서 다른 사람의 생에 좋은 영향을 줄 수는 없습니다...  576


우케나 : 자유를 향한 인간의 욕구는 과연 얼마나 강력한가요? 

비에리 : 현실에서 떠난다고 해서 모두 자유로워지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어요. 자유를 향한 진일보도 되지만 잘못된 길일 수도 있으니까요. 자신의 경우가 어느 쪽에 해당하는지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판타지는 그래서 중요해요. 판타지를 통해 일탈을 시도해볼 수 있으니까요. 친구들과 나누는 이야기도 아주 중요하지요. 우리 인간의 불행은 대개 감정과 판타지를 언어로 잘 다루지 못하거나 그것들을 말로 표현할 용기를 갖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우케나 : 그런 상황에 처한 친구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을까요?

비에리 " 가장 좋은 길은, 우리가 상상력이 풍부하고 용감한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인정받고 즐겁고 재미있는 환경은 이루지 못한 판타지가 좀 있어도 훨씬 자유롭습니다. 우리는 내면에서 요구하는 모든 삶을 다 살아낼 수 없습니다. 누군가, 그렇다면 경험하지 못한 나머지는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머지 부분은 당신의 판타지를 놓아두는 공간이다"라고 대답할 도리밖에 없습니다. 감당해야 했던 소망의 무게가 극치에 이른 때가 언제인지, 또 이런 소망을 드러내야 한다면 어떤 사람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지 등을 정확하게 아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과연 이것을 인식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예견해 줄 수 없고,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알아내야만 합니다. 행여 그렇게 된다면 대단한 행운이지요.  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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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여행을 떠나며 - 장소보다는 맛과 향에 가까운


인생은 당신이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순간 시작된다. - 닐 도널드 월시  10


소설가 배명훈은 "영화든 술이든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들보다 정교한 눈금으로 대상을 보고 한번 정교해진 눈금은 쉽사리 무뎌지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랍의 어느 격언에 따르면 인간은 '움직일 수 없는 사람'과 '움직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움직이는 사람'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11


무미건조하게 산다는 것은 감방 속의 삶이다. 삶이란 교실이고 권태는 자습 감독관이다. 그가 잠시도 쉬지 않고 우리를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열광할 만한 일에 몰두해 있는 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즉시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뇌수를 삼켜버린다. - 루이 페르디낭 셀린드 <밤 끝으로의 여행>  16


우리네 인생은 시작은 다르지만 끝은 정해져 있습니다. 확실한 건 죽을 때까지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뿐입니다.  18


뉴요커의 입맛을 사로잡은 타바론 차는 티 소믈리에가 여러 가지 차를 섞어 그 손님만의 향을 만들어주는 차라고 합니다. 저도 '장소'라는 재료를 섞어서 저만의 여행을 만들어보았습니다.  21




하나. 행운 - 행운은 길을 벗어나길 바란다


패키지여행이 싫다며 자유여행을 떠나보지만 우린 결국 <론리 플래닛>을 철석같이 믿거나 스마트폰으로 쉼 없이 검색합니다. 뻔한 길을 가면서도 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 여해은 어쨌든 달라야 하기에 허풍만 늘어납니다. 낚시꾼들이 자기가 잡은 물고기가 더 크게 보이게끔 카메라 쪽으로 팔을 쭉 뻗어 사진을 찍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면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훈훈하게 맘리합니다. 하지만 <론리 플래닛>을 버리고 블로그에 소개되지 않은 길로 가야 '초행자의 행운'이 찾아옵니다. 행운은 우리가 길을 벗어나길 바랍니다.  36-37




둘. 기념품 - 기억의 부스러기들이 오래간다


기념품을 뜻하는 Souvenir라는 말은 '특별한 시간과 경험을 불러일으키다'라는 뜻의 라틴어 subvenire를 어원으로 둔다고 합니다.  71




셋. 공항+비행 - 여해의 예고편을 맛보고 문턱을 넘다


일본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의 히어로 블랙잭이 한 말-"몇 번 말해야 알겠어? 과거는 바뀌지 앟아. 포기해. 그렇지만 말이야. 미래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  103


비행기는 허공에 떠 있는 시간의 95퍼센트는 진로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조종사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진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 바바라 애버크롬비 <인생을 글로 치유하는 법>

...

'계획을 세우는 데 온통 힘을 써봐야 네 인생의 5퍼센트밖에 도움이 안 되거든. 그러니 범퍼카처럼 살아. 벗어나면 그때 바로잡아도 늦지 않아. 아니 그 방법밖에 없거든.  105




넷. 자연 - 또다른 빛과 색을 찾아서




다섯. 사람 -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거울


헬렌  니어링도 45년의 연구와 공부 뒤에 당혹스러울 만큼 평범한 결론을 내립니다. 자신이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조언은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하라"는 것이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베푸는 가장 큰 호의는 역시 웃음이었습니다.  172


말이 통하지 않으면 이쪽 사람들은 "배고파?" "목말라?" "어디 가려구?" "아픈 데는 없어?" "기분 괜찮아?" "즐거워?" 처럼 꼭 필요한 것만 묻고 바로 해결해줍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오면 "몇 살이야?" "어디 살아?" "가족은 어떻게 돼?" "무슨 일 해?" 처럼 이른바 호구조사부터 합니다. 타고난 여행자인 어린왕자도 어른들은 나이나 몸무게, 아버지 수입 같은 숫자만 좋아할 뿐 정작 중요한 건 묻지 않는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주위에서 "그 애 목손리는 어때?" "무슨 놀이를 좋아해?" "나비를 수집하니?"라고 묻는 법은 결코 없다는 겁니다.  176


젠틀하다는 건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주는 단 몇 분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189




여섯. 음식 - 씹은 만큼 상상한다네


여행을 무서워하는 사람도 꽤 있습니다. 길을 떠나면 가장 먼저 부딪치는 문제가 물과 음식입니다. 낯선 사람보다 물갈이가 무섭고 절벽 사이에 걸쳐 있는 흔들다리보다 샹차이(香菜 향기향 나물채)에 더 몸서리칩니다. 비위가 약한 사람일수록 뭘 씹고 어디까지 먹을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는 것과냄새도 걱정거리입니다. 뭔가 이상한 걸 보거나 냄새를 맡으면 입맛부터 떨어집니다. 인도네시아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라스틱 봉지와 일회용 그릇 쓰레기를 보며 수책구명속 머리카락이 떠오른다면 그날 점심은 물 건너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행이란 비위와의 끊임없는 투쟁입니다.  199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실제로 살아보는 것. 그 문화 속으로 이사하여, 손님으로 받아달라고 부탁해서 언어를 배운다. 어떤 순가이 되면 이해가 찾아온다. 이해는 언제나 비언어적이다. 무엇이 낯선 것인지 이해하게 되는 순간, 설명하려는 충동을 잃어버린다. -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222




일곱. 방송 - 두 눈으로 경험하고 외눈으로 기록하기


마셜 맥루언은 매체에 빠진 육신 없는 인간들이 등장하리라는 걸 이미 1960년대에 예견하였습니다. '앤젤리즘Angelism'이라는  말로 정의하는데 이런 육체와 분리된 '전자적' 인간은 환상과 꿈 사이 어딘가를 좋아하고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를 넘나든다고 합니다. 앤젤리즘에 빠질수록 페로몬이나 목소리와 몸짓, 인간관계 따위의 직접적인 경험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런데 실제로 떠나 보면 이것들이 가장 필요한 덕목입니다. 사람을 만나 친해지고 목소리와 몸짓으로 이야기 나누고 페로몬으로 보이지 않는 매력을 뿜어내야 합니다.  231-232




여덟. 나눔 - 위아래보다는 양옆으로


수잔 손택도 말했듯 개입하면 기록하지 못하고 기록하면 개입하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276


쇼펜하우어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인간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보다 공평하게 대하는 자세라고 하였습니다.  288


캐나다 서부 해안에 살던 콰키우틀 인디언은 생일, 결혼, 장례에 포틀래치라는 특별한 의식을 벌였습니다. 의식의 주인공은 참가자들에게 선물을 잔뜩 주었습니다. 그들은 빚을 내서라도 옷과 무기, 놋그릇을 최대한 많이 퍼주었습니다. 추장이 되려면 심지어 값비싼 모피를 태우거나 놋그릇을 부수기까지 해야 합니다. 그들은가지려고 하기보다 베풀어야만 자신의 위신이 높아진다고 믿었습니다.  289




아홉. 기록 - 카메라보다 몰스킨을 들고서


이제 '여행=사진 찍기'가 되어 카메라는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아 부지런히 셔터를 누르지만 하드 용량만 축내기 일쑤입니다. 사진가 아라키의 말마따나 이젠 기억을 잃어버리고 싶어서 찍어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98


오PD는 아무리 좋은 경치도 5분 이상 보여주면 시청자들이 채널을 돌린다고 했습니다...

여행은 명사("여기가 바로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야!")로 시작됩니다. 이내 감탄사("우와" "이야" "헐")로 바뀌고 곧이어 형용사("파랗고" "깨끗하고" "시원하고" "상큼하네")가 튀어나옵니다. 마지막엔 동사("하나, 둘, 셋! 물속으로 점프!")로 마무리됩니다. 처음 떠난 관강객일수록 '어디'에 가고 '무엇'을 볼지 집착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어땠는지' 수다를 떨고 고수가 될수록 뭐든 자꾸 '해보려고' 합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홍역을 앓듯 여독을 겪게 됩니다. 명사에서 동사로 옮겨갈수록 여독은 심해지지만 홍역 꽃이 진 뒤 흉터가 남듯 몸에 추억이라는 여행의 흔적이 남습니다.

관광이란 '내 눈으로 직접 보러 가는 것'입니다. 가보았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페이스북에 올려 자랑해야 본전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카메라와 스마트폰을 놓지 않으면 관광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라도 그저 외눈박이일 뿐 두 눈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도 카메라를 놓고 떠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얼마나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데' '다음에 또 못 올지도 모르는데'라며 아쉬운 생각도 듭니다.  299-300


여행이란 창을 뛰어넘어 세상을 만지는 일입니다. 창이 있어 여기와 저기가 구분된 세사에서는 저 너머로 떠나는 여행을 꿈꾸게 됩니다. 창을 뛰어넘으면 나를 둘러싼 벽도 사라집니다.  300


소설가 메셸 투르니에는 일차적 인간과 이차적 인간을 나누었습니다. 이차적 인간은 과거와 미래를 참조하여 현재를 살아갑니다. 언뜻 현명해 보이지만 지나간 일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고 앞으로 벌어질 인들은 반드시 현재를 거칩니다. 반면 일차적 인간은 늘 현재에 머무릅니다. 날마다 아침마다 새로운 과거를 만드는 미래의 첫날을 맞이합니다.  302


여행이란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꿈꾸는 유목민 놀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음껏 돌아다니고 마음껏 그리워하기위해 집을 나와 길을 나서는 순간부터 여행은 시작됩니다. 하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고 여행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마지막 장을 넘겼다고 책을 다 읽은 게 아니듯 말이죠. 책을 읽고 독후감을 남기듯이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고 남겨야 비로소 여행은 끝나게 됩니다. 여행에서 남긴 기록이 여행이 되는 셈입니다.  311-312


여행, 그것은 매우 유익하니 상상에 끊임없는 활기를 주기 때문이다. 여타의 소득이란 실망과 피곤뿐이다. 우리들 각자의 여행은 순전히 상상적일 뿐이다. 그것이 여행의 힘이다. - 루이 페르디낭 셀린느 <밤 끝으로의 여행>  313




도착. 여행을 마치며 - 변명거리는 충분해


영국의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그림 그리는 시간 외에는 서재에 박혀 책을 읽는다고 합니다. 자신은 반사회적인 사람이 아니라 그저 '비사회적'일 뿐이라며 씩 웃습니다.  336

...

이제니 시인은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나를 달리게 하는 것은/ 들판이 아니라 들판에 대한 상상"이라고 하였습니다.  336


되레 집 안에 틀어박혀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을 보며 만족하는 사람이 환경을 지키는 실천가하로도 볼 수 있습니다.  337


처음 해외여행을 떠날 때 가이드의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지금은 꼭 필요할 때만 함께 다닙니다. 때로는 여행 책자 하나 없이 떠날 때도 있습니다. 뭐랄까 적당히 믿고 적당히 의심하면서 여행을 즐깁니다...

세상은 넓고 시간은 없습니다.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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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헤르만 헤세가 들려주는 진정한 여행의 의미


1

유럽에서 최초로 여행 열기가 고조된 시기는 18세기였다.  5


로마를 '세계의 대학'이라고 칭한 빙켈만의 저서 <고대 예술사>(1764)가 오래 전부터 이탈리아 여행을 꿈꾸던 괴테에게 좋은 참고자료가 되었다. 빙켈만의 글에는 자신의 로마 탐구를 토대로 다른 여행자들의 안목을 틔워주려는 의도가 강했다. 그가 중시한 것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닌 "깊은 체험을 통한 변화의 힘"이었다. ...

괴테의 경우 여행의 첫 번재 목표는 인간과 예술가로서의 자기수양이었다. 새로운 세계와 만나 새로운 자연과 문화, 새로운 인간상을 천착해 감으로써 자신의 생각과 삶을 확산 심화 고양시키는 것이었다.  6


젊은 시절 많은 여행을 하고 여행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한 헤세의 글이 우리에게 바람직한 여행에 대한 하나의 지침이 될 수도 있겠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 되어야 하니까.  7



2

토마스 만의 장편 <마의 산>에는 여행에 대한 유명한 글귀가 나온다. "여행을 떠나고 이틀만 지나면 사람, 특히 삶에 아직 굳건히 뿌리박지 않은 젊은이는 자신의 의무, 이해관계, 걱정 및 전망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 즉 일상생활로부터 아련히 멀어지게 된다. 그것도 마차를 타고 역으로 가면서, 어쩌면 자신이 꿈꾸었을지도 모르는 것보다 훨씬 더 멀어지게 도니다. 여행자와 고향 사이에서 구르고 돌며 도피하듯 멀어져 가는 공간에는 보통 시간에만 있다고 생각되는 힘이 깃들어 있다.

공간도 시간과 꼭 마찬가지로 시시각각 내적 변화를 일으킨다. 공간도 시간과 마찬가지로 망각을 낳는다. 공간은 인간을 여러 관계로부터 해방시켜주며, 인간을 원래 그대로의 자유로운 상태로 옮겨놓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 공간은 고루한 사람이나 속물조차도 순식간에 방랑자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걳이다. 시간은 망각의 강이라고 하지만, 여행 중의 공기도 그러한 음료수인 셈이다. 그런데 그 효력은 시간만큼 철저하지 못한 반면 더욱 신속히 나타난다" 이처럼 여행을 통한 공간의 변화는 우리의 정신에 활력을 준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행을 통해 장소가 아닌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을 얻게 된다.

한편 소설도 나름대로 여행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루카치에 따르면, 소설은 '자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누가 자신을 찾아 떠나는가? 바로 근대적인 개인이다. 홀로 남겨진 근대적인 개인이 자신을 찾아 떠나는 모험의 형식이 소설이다. 그러므로 이 여행은 길이 없는 '길 찾기'다. 

"여행이 끝나자 길이 시작되었다." 혹은 "길이 시작되자 여행이 끝났다." 루카치는 이를 '아이러니'라 칭한다. 모든 근대 소설은 아이러니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7-8


헤르만 헤세 소설의 거의 모든 주인공은 현재의 안일한 상황에서 탈피해 방랑과 여행을 통한 자아의 길 찾기를 하고 있다.

헤세의 여행은 속인 내지는 속물로부터의 탈출이다.  9



4

오늘날 사람들이 여행하는 주된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의 친척과 친구, 이웃도 여해을 가는데다, 또 여행을 갔다 와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남들에게 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이 유행이고,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다시 매우 쾌적하고 안락한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헤세의 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가치 있는 여행이 되려면 어떻게 여행해야 할까? 헤세의 말은 음미해볼 만하다. "여행은 언제나 체험을 의미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정신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환경에서만 뭔가 가치 있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가는 즐거운 소풍, 어떤 음식점 정원에서의 유쾌한 저녁, 멋진 호수 위에서의 증기 기선 여해은 그 자체로 체험이 아니고,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지 못하며, 계속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자극이 아니다." 이처럼 제대로 된 여행을 해야 하고 그나마 여행하지 않는 자는 책의 한 페이지만 계속 보는 사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여행은 즐거운 것이 되고 좀 더 깊은 의미에서 하나의 체험이 되려면 확고하고 특정한 내용과 의미를 지녀야 한다. 지루한 나머지 또 김빠진 호기심 때문에 내적 본질에 진정한 관심을 느낄 수 없는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는 것은 잘못되고 우스꽝스런 일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성껏 가꾸거나 희생의 제물이 되기도 하는 우정이나 사랑처럼, 신중하게 고르고 사서 읽는 책처럼 모든 유람여행이나 연구여행은 좋아하기, 배우려고하기, 몰두하기를 의미해야 한다. 여행은 어떤 나라와 민족, 어떤 도시나 풍경을 여행자의 정신적 소유물로 만들려는 목적을 지녀야 한다. 여행자는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낯선 것에 귀 기울여야 하고, 낯선 것에 담긴 본질의 비밀을 끈기 있게 알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자연'가까이에서 자연의 힘과 위안을 맛보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장소로 여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널리 만연한 오류다. 번잡하고 숨 막히는 거리를 피해 달아난 도시민에게 바닷가나 산속의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가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도시민의 그것으로 만족해한다. 그는 더 신선한 기분을 느끼고, 더 심호흡을 하며, 잠을 더 잘 잔다. 그리고 '자연'을 이제 제대로 즐기고 내부에 흡수했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그는 그 자연으로부터 가장 피상적인 것, 가장 비본질적인 것만 받아들이고 이해했으며, 가장 좋은 것은 발견하지 못하고 길가에 놓아두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런 자는 보고 찾아내며 여행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한다. 가만히 앉아서가 아니라 움직이면서 사고할 것을 주장하는 니체는 <인간적인 것, 너무나 인간적인 것>에서 여행자의 등급을 다섯 등급으로 나누고 있다. 그 역시 쥘스 지방을 여행하는 도중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여행자에게는 다섯 단계의 등급이 있다. 가장 낮은 등급은 여행하면서 관찰의 대상이 되는 자들이다. 그들은 본래 여행의 대상이며 흡사 장님과 같다. 다음 등급은 실제로 세상을 구경하는 자들이다. 세 번째 등급의 여행자는 관찰한 결과로 무언가를 체험하는 자이다. 네 번째 등급의 여행자는 체험한 것을 체득해서 몸에 지니고 다닌다.

마지막으로 최고의 능력을 지닌 몇몇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관찰한 것을 모두 체험하고 체득한 뒤 집에 돌아온 즉시, 또한 체험하고 체득한 것을 행동이나 일에서 반드시 실천해 나간다. 

인생의 여로(旅路 나그네여 길로)를 걷는 모든 인간은 이 다섯 종류의 여행자와 같다. 가장 낮은 등급의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으로 살아가고, 가장 높은 등급의 인간ㅇ느 내적으로 체득한 것을 남김없이 실천하며 행동하는 자로 살아간다."

그러면 자연과 풍경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헤세는 이렇게 답한다. 금빛으로 물드느 여름저녁을 한가로이 바라보고, 가볍고 순수한 산악 공기를 느긋하고 기분 좋게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는 아직 크게 부족하다. 양지바른 따스한 초원에 드러누워 한가하게 휴식시간을 보내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그러나 산과 시냇물, 오리나무 숲과 멀리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함께 이 초원에 친숙하고 그것을 잘 아는 자만이 자연과 풍경을 완전하게, 백배는 더 깊고 고상하게 즐길 수 있다. 그러한 조그만 땅에서 그 땅의 법칙을 읽고, 그것의 형성과 식생의 필연성을 꿰뚫어보고, 그 필연성을 역사, 건축 양식, 그곳 주민의 기질이나 말투, 의상과 관련해서 느끼려면 사랑과 헌신, 연습리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할 만한 보람이 있다. 여행자가 열성과 사랑으로 친숙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든 나라의 모든 초원과 암석은 온갖 비밀을 여행자에게 알려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베풀어주지 않는 힘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름을 아는 일이 아니라 느끼는 일이다. 학문적 지식은 아무에게도 축복을 안겨주지 않는다.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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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는 끊임없이 여행과 여행의 의미에 대해 질묺나다. 우리 같은 사람에게 여행을 떠나게 하고, 특히 예술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해마다 여행을 떠나는가? 무엇 때문에 좀 더 풍요로웠던 시대의 건축물과 그림들 앞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거워하는가? 무엇 때문에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낯선 민족들의 삶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지켜보며 흡족해하는가? 무엇 때문에 기차와 배 안에서 낯선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고, 낯선 대도시의 번잡한 거리에 귀 기울이는가? 헤세는 한때 그런 것을 일종의 배움 욕구이자 교양 열기로 여겼다. 여행하면서 그는 옛 교회의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진 벽 위에서 수첩 가득 감상을 적어 넣었고, 식사에서 아낀 돈을 옛 조각품들의 사진을 찍는 데 썼다. 그 후 그런 일에 다시 싫증나게 되었고, 풍경과 낯선 민족성만이 그의 관심을 끄는 좀 더 못사는 나라를 여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그에게 그러한 수수께끼 같은 여행 욕구는 일종의 모험심으로 생각되었다.  17



헤세도 처음에는 다른 여행객과 마찬가지로 이국적인 민족의 살마과 도시를 그냥 신기한 대상으로서만 바라보았고, 무척 재미있지만 기본적으로 자기와 아무 관계없는 동물 곡예단을 바라보듯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입장을 버리고 말레이인, 인도인, 중국인, 일본인을 인간이자 가까운 친척으로 본 시점부터 비로소 그 여행에 가치와 의의를 부여하는 체험이 시작되었다. 헤세는 여행의 체험으로 서양인과 동양인의 영혼이 같고, 아시아인의 영혼도 유럽인의 영혼처럼 온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런 의미에서 "여행이란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바꾸어주는 것이다."는 아나톨 프랑스의 말이 우리의 공감을 얻는다.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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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4세부터 50세까지 헤세가 쓴 여행과 소풍에 대한 에세이와 여러 여행 기록을 엮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여행과 소풍에 대한 에세이 외에 1901년과 1911년, 1913년의 이탈리아 여행, 1904년의 보덴 호 산책, 1911년의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등지의 아시아 여행, 1919년에서 1924년까지 테신 지역 소풍, 1920년 남쪽 지역으로의 방랑, 1927년의 뉘른베르크 등지의 낭송 여행에 대한 소회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21






여행의 노래


태양이 내 마음속 비춰주었네. 

바람이여, 내 걱정과 무거운 마음일랑 날려버리렴!

이 세상을 두루돌아다니는 것보다

더 큰 희열은 없다네.


평지를 향해 서둘러 발걸음 옮기다 보면

햇볕에 몸 그을리고, 바다는 시원하게 해주네.

난 온갖 감각을 활짝 열고

지상에서의 삶을 함께 느끼지.


새날이 올 때마다 

새 친구, 새 형제를 사귀며

온갖 별의 손님이자 친구일지도 모르는 

온갖 힘을 기어코 찬미할 때까지.



누군가가 유람 여행을 계획하고 잇다면 먼저 무엇을 할 것인지, 왜 그 여행을 하는지 아는 것이 좋다. 오늘날 도시에 사는 여행자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도시인이 여행하는 것은 여름에 도시가 너무 덥기 땜ㄴ이다. 그가 여행하는 것은 공기를 바꾸고, 다른 환경과 사람들을 봄으로써 일에 지친 피로를 풀고 푹 쉴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그가 산으로 여행하는 것은 자연과 땅, 식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이해되지 않는 갈망으로 그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그가 로마로 여행하는 것은 그것이 교양 여행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여행하는 주된 이유는 그의 모든 사촌과 이웃도 여행을 가는데다, 또 여행을 갔다 와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하는 것이 유행이고,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다시 무척 쾌적하고 안락한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이해할 만한 정직한 동기이다.  32


여행은 언제나 체험을 의미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정신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환경에서만 뭔가 가치 있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기회 있을때마다 가는 즐거운 소풍, 어느 음식점 정원에서의 유쾌한 저녁, 임의의 호수 위에서의 증기기선 여행은 그 자체로 체험이 아니고,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지 못하며, 계속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자극이 아니다.  33

여행의 시학은 일상적인 단조로움, 일과 분노로부터 휴식을 취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우연히 함께 하고, 다른 광경을 관찰하는 데에 있다. 여행의 시학은 호기심의 충족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체험에, 다시 말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데에, 새로 획득한 것의 유기적인 편입에, 다양성 속의 통일성과 지구와 인류라는 큰 조직에 대한 우리의 이해 증진에, 옛 진리와 법칙을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에서 재발견하는 데에 있다.

내가 특별히 여행의 낭만주의라고 부르고 싶은 것, 다시 말해 인상의 다양성, 명랑하거나 불안한 심정으로 깜짝 놀랄 일을 계속 기다리기,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새롭고 낯선 사람들과의 소중한 교제가 그것에 첨가된다.  36


우연적인 것에 대해 본질적인 것이, 낭만주의에 대해 시학이 망각되어서는 안 된다. 도중에 흘러가는 대로 자신을 맡기고, 우연을 신뢰하는 것은 확실히 좋은 방식이다. 그러나 모든 여행이 즐거운 것이 되고 좀 더 깊은 의미에서 하나의 체험이 되려면 확고하고 특정한 내용과 의미를 지녀야 한다. 지루한 나머지 또 김빠진 호기심 때문에 내적 본질에 진정한 관심을 느낄 수 없는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는 것은 잘못되고 우스꽝스런 일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성껏 가꾸거나 희생의 제물이 되기도 하는 우정이나 사랑처럼, 신중하게 고르고 사서 읽는 책처럼 모든 유람여행이나 연구여행은 스스로 좋아하고, 찾아서 배우려고 하면서, 몰두하는 데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여행은 어떤 나라와 민족, 어떤 도시나 풍경을 여행자의 정신적 소유물로 만들려는 목적을 지녀야 한다. 여행자는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낯선 것에 귀 기울여야 하고, 낯선 것에 담긴 본질의 비밀을 끈기 있게 알아내려 노력해야 한다.  40-41


돈과 시간을 아낄 필요가 없고 여행에서 즐거움을 얻는 자는 눈과 마음으로 탐낼 만한 여러 나라를 하나하나 자기 것으로 만들고, 천천히 배우고 향유하는 중에 세계의 일부를 정복하고, 많은 나라에 뿌리를 내리고, 지구와 지구의 생명체를 폭넓게 이해하는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기 위해 동과 서에서 수석을 수집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될 것이다.  41-42


'자연' 가까이에서 자연의 힘과 위안을 맛보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장소로 여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널리 만연한 오류다. 뜨거운 거리를 피해 달아난 도시인에게 바닷가나 산속의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가 도움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해한다. 그는 더 신선한 기분을 느끼고, 더 심호흡을 하며, 잠을 더 잘 잔다. 그리고 '자연'을 이제 제대로 즐기고 내부에 흡수했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귀향한다. 그런데 그는 그 자연으로부터 가장 피상적인 것, 가장 비본질적인 것만 받아들이고 이해했으며, 가장 좋은 것은 발견하지 못하고 길가에 놓아두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그런 자는 보고 찾아내며 여행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한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영혼이 빈곤해질 것이다.  42-43


여행자는 모든 것을 보거나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스위스 알프스의 두 개의 산과 골짜기를 돌아다니며 철저히 둘러본 자는 같은 시간에 일주 여행 차표로 전 국토를 여행한 자보다 스위스를 더 잘 알게 된다.  44


양지바른 따스한 초원에 드러누워 한가하게 휴식시간을 보내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그러나 산과 시냇물, 오리나무 숲과 멀리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함께 이 초원에 친숙하고 그것을 잘 아는 자만이 자연과 풍경을 완전하게, 백배는 더 깊고 고상하게 즐길 수 있다. 그러한 조그만 땅에서 그 땅의 법칙을 읽고, 그것의 형성과 식생의 필연성을 꿰뚫어보고, 그 필연성을 역사, 건축 양식, 그곳 주민의 기질이나 말투, 의상과 관련해서 느끼려면 사랑과 헌신, 연습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할 만한 보람이 있다.  45-46


중요한 것은 이름을 아는 일이 아니라 느끼는 일이다.  46



익숙해지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가치있는 것의 광채도 떨어지는 법이다.  49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어떻게든 고유한 시학이 있는 법이다.  50



낡은 모자를 쓰고 배낭을 짊어지기 위해 나의 조그만 집, 행복함과 안락을 기꺼이 희생하리라.  74



날이 어두워졌다. 창 앞 골목은 벌써 한 시간 전부터 쥐죽은 듯 고요하다. 높다란 분수만이 꿈꾸며 지치지 않고 계속 재잘거린다. 걸려 있는 놋쇠 등불이 흐릿한 판자벽이 있는 낡은 거실과 벽의 좁은 걸상, 튼튼한 참나무 책상과 벽 가의 희미한 목판화를 비춰준다. 나는 꿈꾸듯 내 집과 내 방의 고요와 정적,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나의 은둔을 즐긴다. 우리는 저녁에 쓸데 없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적에 귀 기울이고 엿듣는 것은 정말 멋지고 놀랍다. 대지는 잠들어 있다. 우물가에 마지막 남은 양동이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호수 저 건너편에선 멀리 마지막 기차가 조용히 기적을 울리며 사라진다.  79


불현듯 비눗방울처럼 마음속에 질문이 떠오른다. 넌 정말 행복한가?

그렇다. 물론이다. 하지만 좀 기다려라. 아니, 그리 행복하지는 않다. 아니, 먼저 곰곰 생각해봐야겠다. 곰곰 생각해보니 행복에 관해선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행복은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의 단어이자 무의미한 것에 불과하다.  82


향유의 힘과 추억의 힘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 향유란 어떤 열매의 단맛을 남김없이 짜내는 것을 뜻한다. 추억이란 한번 향유한 것을 꽉 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점점 순수하게 완성하는 기술을 뜻한다. 우리 각자는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유년 시절을 생각하고, 그러면서 혼란스런 조그만 사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환상이 된 추억이 자기 위의 복된 푸른 하늘을 펼치며 천 가지 아름다운 기억을 단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쾌감과 섞는다. 

이처럼 최고는 멀리 떨어진 날들의 즐거움을 다시 향유할 뿐만 아니라 매일을 행복의 상징이자 동경의 목표이며 천국으로 드높이면서, 자꾸만 새로 향유할 것을 가르친다. 짧은 시간 내에 얼마만큼의 생활감정, 온기와 광채를 짜낼 수 있는지 아는 자는 이제 모든 새날의 선물도 되도록 순수하게 받아들이려 할 것이다. 그러면 그는 고통도 더 공정하게 평가할 것이다. 그는 큰 아픔 역시 큰 소리로 진지하게 맛보려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두운 날들의 기억도 아름답고 신성한 소유물임을 알기 때문이다.  87-88



우리가 모든 아름다운 것 중 한 봉지 가득 보관해서 필요한 시절을 위해 저축할 수 있다면! 물론 그러려면 인공적인 향기를 지닌 인공적인 꽃이라야 되겠다. 날마다 세계의 충만함이 우리 옆을 서둘러 지나간다. 날마다 꽃이 피어나고, 불빛이 반짝이며, 기쁨이 웃음 짓는다. 때로 우리는 그것에 감사하며 실컷 마시고, 때로 우리는 피곤하고 짜증나서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늘 아름다운 것이 넘쳐난다. 모든 기쁨의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점은 그것이 과분하게 오고 결코 돈을 주고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기쁨은 바람에 흩날리는 보리수꽃의 향내처럼 구속을 받지 않고 누구에게나 신의 선물이다. 가지들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보리수꽃을 열심히따는 여자들은 나중에 그것으로 호흡 곤란과 고열에 좋은 차를 만든다. 하지만 그들은 최상의 것과 진정으로 좋은 것은 얻지 못한다. 열므날 저녁 데이트하면서 달콤하고 몽롱한 도취 상태에 있는 한 쌍의 연인들조차 그런 것을 갖지 못한다. 하지만 지나가며 좀 더 깊이 호흡하는 방랑자는 그런 것을 갖는다. 방랑자가 모든 즐거움 중 최상의 것과 가장 좋은 것을 갖는 이유는 그가 맛을 보는 것 외에 모든 기쁨의 덧없음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방랑자는 어떤 샘에서든 물을 마실 수 있으니 걱정할 일이 별로 없다. 그는 과잉에 익숙해져 있다.

반면 그는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도 그다지 개의치 않으며, 한 번 좋았던 곳이라 햇 곧장 뿌리내리려 하지 않는다. 해마다 같은 장소에 가는 행락객들이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곧 다시 오겠다는 결심을 하는 행락객들이 많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일지는 모르나 좋은 방랑자는 아니다. 그들은 사랑에 빠진 남녀의 몽롱하게 취한 상태에 있다. 보리수꽅을 따는 여인들이 조심스럽게 꽃을 따는 심정과 같다. 하지만 그들은 조용하고 진지하게 기뻐하며 늘 떠나려는 방랑자의 마음은 갖고 있지 않다.  101-103


나는 방랑과 외지의 맛이 어떤지 알고 있다. 그 맛은 아주 달콤하다. 향수와 결핍,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103


또 한 번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이로 구속 없이 뻔뻔하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다! 허기지면 길가의 버찌로 식사하고, 네거리가 나오면 상의 단추로 '좌우'를 결정하는 생활을 하고 싶다! 또 한 번 짧고 미지근한 향태 나는 여름밤을 방랑 중 건초 더미 속에서 잠자면서 보내고 싶다! 또 한 번 방랑 시절을 숲의 새들, 도마뱀이나 풍뎅이와 사이좋게 지내며 보내고 싶다! 한 여름이나 한 켤레의 새 신발엔 그것이 가치 있으리라.  104


우리 같은 사람을 여행떠나게 하고, 특히 예술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해바다 여행을 떠나는가? 무엇 때문에 좀 더 풍요로웠던 시대의 건축물과 그림들 앞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거워하는가? 무엇 때문에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낯선 민족들의 삶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지켜보며 흡족해하는가? 무엇 때문에 기차와 배 안에서 낯선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고, 이상하게도 낯선 대도시의 번잡한 거리에 귀 기울이는가? 한대 내게는 그런 것이 배움에 대한 일종의 욕구이자 교양에 대한 열기로 여겨졌다. 당시네 나는 옛 교회의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진 벽 위에서 수첩 가득 적어 넣었고, 식사에서 아낀 돈을 옛 조각품들의 사진을 찍는 데 썼다. 그 후 나는 그런 일에 다시 싫증나게 되었고, 풍경과 낯선 민족성만이 내 관심을 끄는 좀 더 가난한 나라들을 여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내게 이러한 수수께끼 같은 여행 욕구는 일종의 모험심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엄밀히 따져보면 여행 중에 겪는 모험이 아니다. 잘못된 곳으로 가버린 트렁크, 도난당한 외투, 뱀이 나오는 방, 모기가 있는 침대를 모험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그런 것 역시 제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 내게는 지금 교양에 대한 갈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전체 도시와 교회, 대형 박물관을 어슬렁거리며 지나가는 것으로는 지금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면 그러한 사물들에서 발견하고 보는 것을 옛날보다 더 심도 있고 섬세하게 향유하는 지금, 여행에서 모험적이 ㄴ체험을 하게 되리라는 신뢰 역시 내게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나는 15년 전이나 10년 전, 또는 5년 전보다 드물지 않게 여행을 다니고, 여행에 대한 충동과 욕구도 그때보다 줄어들지 않았다.

내 생각에 여행하며 밖으로 돌아다니는 생활은 좀 더 지적으로 된 우리 같은 사람이 더욱 창백하게 체험하는 삶의 한 조각을 일반적으로 대체하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그 생활은 우리 여러 민족들에게 거의 완전히 사라진 순전히 미적인 충동에 의한 활동도 대체하는 것 같다. 위대한 시기의 그리스인이나 독일인, 이탈리아인에겐 그런 미적인 충동이 있었다. 아시아에서도 어디서나 아직 그런 충동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일본에서는 유치하지 않고 현명한 사람들은 목판화, 나무나 암석, 정원이나 하나하나의 꽃을 관찰하면서 우리에겐 흔치 않고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어떤 감각의 훈련, 원숙함과 전문적 지식을 향유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는 것 같다. 순수한 직관, 어떤 목적 추구나 의욕에 의해 흐려지지 않은 관찰, 자체적으로 흡족한 눈과 귀, 코와 촉각의 훈련, 그것은 우리들 중 좀 더 섬세한 사람들이 짙은 향수를 느끼는 하나의 천국인 셈이다. 우리가 여행할 때 가장 잘 또는 가장 순수하게 추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그러한 천국이다. 미적으로 훈련된 사람은 언제나 그러한 집중을 할 수 있지만, 우리 같은 불쌍한 사람들은 적어도 숙박에서 벗어난 이런 날과 순간에나 그것이 가능하다.

고향과 일상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어떠한 걱정도 하지 않고 일에서도 완전히 해방된다. 이러한 여행 분위기에서 우리는 평소에는 하지 못하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몇 개의 훌륭한 그림 앞에서 조용히 감사하며 아무 목적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고, 고귀한 건축물에서 울리는 아름다운 음을 열린 마음으로 황홀하게 들을 수 있으며, 어느 풍경의 선을 진심으로 즐기며 따라갈 수 있다. 그때 평소 단지 우리의 의욕과 관계, 소망의 흐릿한 그물 속에서만 생각되던 것이 우리에게는 그림이 된다. 다시 말해 골목과 시장의 삶, 태양의 유희와 물이나 땅 위 그림자의 유희, 수관(樹冠 나무수 갓관)의 형태, 동물의 외침이나 움직임, 인간의 걸음걸이와 태도 같은 것이, 목적을 추구하는 삶으로부터의 이러한 해방을 마음속으로 추구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는 자는 아무런 결실 없이 빈손으로 돌아오고, 기껏해야 자신의 교양이라는 주머니를 약간 묵직하게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뿐이다.

하지만 순수하게 바라보고 사심 없이 받아들이려는 이런 미적 충동은 더 넓고 높은 관계를 갖지 않는가? 그 충동이 막연한 쾌감에 대한 동경에 불과한 걸까? 그 충동이 단지 소홀히 한 힘과 욕구의 복수하고 경고하는 고통에 불과한 걸까? 은폐된 배고픔과 은폐된 에로틱, 은폐된 분노와 은폐된 약함에 불과한 걸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만테냐의 그림을 보는 것이 멋진 도마뱀을 보는 것보다 내게 더 많은 것을 주는 건 무엇 때문일까? 조토나 시뇨렐리의 그림이 그려진 예배당에서 보내는 한 시간이 해변에서 뒹굴면서 보내는 한 시간보다 더 많은 의미가 있는 것은 결국 무엇 때문일까? 

그렇다. 요컨대 우리는 어디서나 인간적인 것을 추구하고 갈망한다. 내가 어떤 아름다운 산에서 즐기는 것은 우연한 현실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확인한다. 나는 보고 선을 느끼는 능력을 즐긴다. 나는 어느 낯선 아름다운 경치에서 결코 문화로부터 달아나버리지 않고, 경치에서 나의 감각과 사고를 시험해 보면서 순전히 문화를 익히고 사랑하며 즐긴다. 따라서 나는 언제나 다시 감사하며 순순히 예술로 되돌아간다. 따라서 어느 대담한 건축물, 어느 아름답게 그려진 벽, 어느 좋은 음악, 어느 가치 있는 그림은 결국 제어되지 않은 자연을 관찰하는 것보다 더 많은 향유, 막연한 탐색이라는 더 많은 만족을 내게 허용해준다. 내 생각에 미적 충동이 지향하는 바는 가령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나쁜 본능과 습관에서 벗어나 우리 내부의 가장 좋은 것을 확인하고, 인간 정신에 대한 우리의 은밀한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바다에서의 기분 좋은 미역 감기, 즐거운 공놀이, 대담한 눈 속 방랑이 나의 신체적인 자아를 확인해주고, 최상의 욕구와 예감 속에서 자아의 옳음을 인정하며, 별 탈 없는 삶을 통해 자아의 갈망에 답하듯이, 인간 문화와 지적 성과라는 위대한 보물을 순수한 직관으로 인간성 일반에 대한 우리의 강력한 믿음에 답하기 때문이다. 티치아노의 그림들이 내 예감을 실현시켜 주지 않는다면 그의 그림을 보는 즐거움은 무엇 때문에 나의 충동을 확인하고 나의 꿈을 정당화해주겠는가?

그러므로 내 생각에 우리는 깊디깊은 근저에서 인간성의 이상에 대한 구도자로서 외지를 여행하고 바라보며 체험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미켈란젤로라는 인물, 모차르트의 음악, 투스카니아 지방의 성당이나 그리스의 신전이 우리의 생각을 확인하고 굳군하게 해준다. 어떤 감각, 심오한 통일, 인간 문화의 불멸성에 대한 우리의 갈망의 강화와 정당화는 그런 것을 굳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여행하면서 특히 진심으로 향유하는 바로 그것이다.  130-134



저녁이다. 난 호텔 방에 누워 있다. 며칠 전부터 적포도주와 아편으로 살아간다. 장이 형편없이 좋지 않다. 오늘 저녁은 서 있거나 걸어가기에도 용기와 힘이 달린다. 또한 지금은 우기다. 이제 겨우 저녁인데도 바깥은 비에 흥건히 젖어 있고 칠흑같이 캄캄한 밤 같다.  240


지난 몇 달간 받은 무수한 인상들은 나의 젊은 감각을 신선하게 에워싸고 있는 반면 나의 소망과 생각은 벌써 모두 고향에 가 있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아직 아득히 먼 곳에서 반쯤은 비현실적인 상태에 있다. 그 인상들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면 진정으로 '이국적'인 것은 얼마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대부분의 인상은 순전히 인간적인 종류의 것이고, 낯선 의상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과 모든 인간 존재와의 친근성에 의해 중요하고 사랑스럽게 되었다.  251


모든 아름다운 광경들보다 훨씬 기억에 남는 광경은 인간의 수많은 소소한 일들이다.  253


모든 것보다 더 멋진 것은 언제나 우리가 인간에 관해서 본 것이었다. 어느 힌두인의 꿈결 같은 걸음걸이, 얌전한 스리랑카인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노루 같은 부드러운 눈초리, 검은색을 띤 구릿빛의 타밀족 노동자의 새하얀 눈동자, 고상한 중국인의 미소, 낯선 방언으로 중얼거리는 거지의 더듬는 말, 열 개의 상이한 언어를 지닌 민족들의 사람들끼리 말하지 않고도 이해되는 현상,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 우쭐대는 압제자에 대한 조소, 그리고 이들 모두가 우리와 같은 인간이자 형제이며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이라는 독특하게 행복한 감정! 낯선 외모를 지니고 본성과 인종이 약간 은폐된 이들이 우리 곁을 지나갔다. 남인도의 이슬람교도는 도도하고 자의식이 있었고, 의젓하게 걸어가는 중국인은 위엄 있고 명랑했고, 작고 날씬한 스리랑카인은 수줍어하는 소녀 같았고, 아담한 말에이인은 영리하고 부지런했고, 근면한 일본인은 작고 현명했다. 그들 모두는 피부색과 외모는 무척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베를린 출신이든 스톡홀름 출신이든, 취리히나 파리 또는 맨체스터 출신이든 상관없이 우리 외국인이 모두 신비롭지만 아주 명백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속하고 유럽인인 것처럼, 그들 모두는 아시아인이었다. 

이것만 해도 멋지고 때로는 놀랍게 보일 수 있었다. 유럽인과 아시아인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시하긴 하지만, 모든 유럽인에게 뭔가 공통되고 서로를 묶어주는 요소가 있듯이, 모든 아시아인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내게 더 멋지고 엄청나게 더욱 중요한 것은 때때로 온갖 감각 속에서 선명하게 되풀이되는 경험이었다. 그것은 동양과 서양, 즉 유럽과 아시아가 단일체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인류라는 하나의 소속이자 공동체가 있다는 경험이었다. 누구나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사실을 책에서 읽는 것이 아니라 전혀 낯선 민족과 서로 눈을 맞대로 체험하면 그것은 누구에게나 무한히 새롭고 소중하게 된다.  268-269



흰구름


오, 보렴, 다시 두둘실 떠가고 있구나,

잊힌 아름다운 노래들의 

나지막한 선율처럼

푸른 하늘 저쪽으로!


오랫동안 떠돌아다니지 않고

온갖 시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구름을 이해할 수 없지,

방랑의 기쁨을.


해님과 바다와 바람처럼 

난 흰 구름을 사랑하지,

집 없는 사람에겐 

누이이자 천사이기 때문에.



방랑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원시인이다. 유목민이 농부보다 원시적이듯이 말이다. 하지만 정주(定住 정할정 살주)의 극복과 경계의 무시는 그럼에도 나 같은 유형의 사람들을 미래로 향하는 이정표로 만들 것이다. 나처럼 국경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이 많다면 더 이상 전쟁도 봉쇄도 없을 텐데. 경계만큼 보기 싫고 어리석은 것도 없다. 경계는 대포나 장군과 같다. 이성, 인간성과 평화가 지배하는 한 경계에 대해 아무것도 못 느끼고 그것에 대해 비웃는다. 하지만 전쟁과 광기가 발발하자마자 경계는 중요하고 성스러워진다. 전시에는 경계가 우리 같은 방랑자에게 얼마나 고통과 감옥이 되었던가! 그런것은 악마나 잡아 가라지!  281-282


내 눈은 지금있는 것에 만족한다. 그도 그럴 것이 보는 법을 배웠으니까. 세상은 그 이휴로 더 아름다워졌다.

세상은 더 아름다워졌다. 난 혼자지만, 혼자 있는 것에 고통받지는 않는다.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햇볕에 푹 삶아질 용의가 있다. 나는 푹 숙성되기를 갈망한다. 죽을 용의도 있고, 다시 태어날 용의도 있다. 

세상은 더 아름다워졌다.  288



밤길


먼지 덮인 밤길을 걷는다. 

담벼락엔 그림자 비스듬히 떨어지고

포도덩굴 사이로

개천과 길 위의 달빛이 보인다.


한때 불렀던 노래를

나직이 다시 읊조린다.

숱한 방랑의 그림자가

내 앞길을 가로막는다.


여러 해 동안의 바람과 눈, 뙤약볕이

내 귀에 울려온다.

여름밤과 푸른 빛 번개,

폭풍우와 여행의 괴로움이.


갈색으로 그을리고

이 세상의 풍요로움을 흠뻑 마시며

계속 이끌려가는 기분이 든다.

내 오솔길이 어둠에 잠길 때까지.  



배낭족으로 살아가고 너덜너덜한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게 무척 좋다.  290


나는 여자가 아닌 사랑만을 사랑하는 바람둥이에 속한다.

우리 같은 방랑자는 모두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방랑벽과 나그네 생활 자체가 대부분 사랑이자 에로틱이다. 여행의 낭만이란 절반은 다름 아닌 모험에 대한 기대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에로틱한 것을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켜 해소하려는 모의식적 충동이다. 우리 같은 방랑자는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랑의 소망을 가슴에 품고 다니는 데 익숙하다. 또 원래는 여자에게 향했던 그 사랑을 놀이하듯 마을과 산, 호수와 협곡, 길가의 아이들, 다리 밑의 거지, 목초지의 소, 새와 나비에게 나누어주는 데 익숙하다. 우리의 사랑을 그 대상으로부터 떼어낸다. 우리는 사랑 그 자체로 충분하다. 마치 우리가 방랑 중에 목적지를 찾지 않고 단지 방랑 자체의 즐거움과 길 위의 생활을 추구하듯이.  291-292


나무는 내게 언제나 가장 감동적인 설교자였다...

나무는 쉬면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온 힘을 다해 하나만을 얻으려 애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내부에 깃들어 있는 고유한 법칙을 실현하고 자신의 형상을 완성하며 자기 자신을 표현하려 애쓴다. 아름답고 튼튼한 나무보다 더 신성하고 모범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307


나무는 신성한 존재다. 나무와 대화를 나누고, 나무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자는 진리를 알게 된다. 

나무는 개별적인 것은 개의치 않고 삶의 근본 법칙을 설교한다.  308


비 오는 날씨다. 그런 날씨에 나는 생기가 돌고 명랑해진다. 짙은 대기 속에 습기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구름은 끊임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새로운 구름이 계속 나타난다. 우유부단과 언짢은 분위기가 하늘을 지배하고 있다.  312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과 사물은 변하게 마련이다. 그 흐름은 어떤 것도 거스를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몇 십 년 동안 이 몬타뇰라에서 클링조어의 가물거리며 타오르는 열므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좋은 것, 그러니까 놀라운 많은 체험을 했다. 나는 마을과 마을 풍경에 무척 감사해야 한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을 번번이 글로 표현하려고 했다. 나는 산과 숲, 포도밭 언덕과 호수 골짜기를 몇 번이고 시로 노래했다. 또한 클링조어의 거처가 있는 조그만 발코니와 높은 유다나무도 묘사하고 찬미했다.  377


나는 오늘 테신을 떠나 뉘른베르크로 가을 여행을 떠난다. 두달이나 걸리는 여행이다. 그런데 그 여행의 이유가 무엇인지 자문해보자니 무척 당혹스런 기분이 든다. 자세히 살펴볼수록 이유와 동인은 더욱 갈라지고 쪼개지며 나누어져서 결국은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그것들은 단선적인 인과성의 열(列 벌일열)이 아니라 그런 열이 얽히고 설킨 그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결국은 그 자체로 사소하고 우연한 이 여행이 내 이전 삶의 무수한 점들에 의해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그 직물에서 가장 거친 몇 개의 매듭뿐이다.  383



나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며칠 정도나 귀향을 지연시킬 수 있을 것인가? 추측건대 아직도 오랫동안 여행할 것이다. 아마 겨울 내내, 어쩌면 평생 동안, 결국은 곳곳에서 이런저런 친구를 만나 저녁이면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때로는 나의 천사가 어느 어스름한 시간에 다시 내 앞에 나타나리라. 또 내 청춘의 성소(聖所 성스러울성 바소)들이. 그리고 어디서나 내 자유의지로, 차가운 바람을 맞거나 흩날리는 나뭇잎을 보고 단지 슬퍼하지만 않고 웃으리라. 내가 가끔 그렇게 생각했듯이, 아마 내 안에 어떤 해학가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러면 나는 잘 해나갈 것이다. 그 해학가가 아직은 오나전히 발전된 것은 아니지만, 아직은 내가 보기에 완전히 나빠진 것도 아니었다.  47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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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앤 다비의 서문 

"작가에 관해 글을 쓰는 작가는 화가를 그리는 화가만큼이나 흥미롭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마에스트로에게  7



헤밍웨이와 절친한 친구들의 말과 아버지에 관해 내가 아는 것을 종합해보면, 이 두 사나이는 정녕 두려움을 몰랐고 끝없이 관대했으며 엄청난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들은 뭐든 기막히게 빨리 터득했고, 결코 사춘기의 열정을 잃는 법이 없었다. 그 둘은 똑같이 모순적인 행동을 했고, 여자에 관해선 양면적인 태도를 보였고, 친구관계가 변덕스러웠다. 언어를 무기로 사용할 경우에는 무자비하고 심술궂기도 했다. 모든 이에게 그러지는 않았지만 많은 이에게 그랬다.

둘 중 누구도 멍청이, 사기꾼, 지식인, 정치가 혹은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 읊어대는 쓸데없는 장황한 얘기를 쉽사리 용납하지 않았다. 내가 발견한 가장 명백한 그들의 공통적인 기질은 어떤 비평가가 헤밍웨이의 "중대한 결함"이라고 지적한 그 "가학적인 농담"이었다. 이 가혹함의 정도는 대상이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이유에 얼마나 가까운가에 달린 듯했다. [마에스트로를 위한 모놀로그]에 묘사된 아버지만큼 그 지점에 근접한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5년 10월 헤밍웨이가 막상 다음과 같이 썼을 때 아버지는 헤밍웨이가 자기를 알아봐주었다고 기뻐했다.

'그 친구는 뛰어난 파수꾼인데다 선상에서 일할 때나 글을 쓸 때나 열성적이었지만 바다에서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민첩해야 할 때 굼떴고, 이따금 두 발과 두 팔 대신 발만 네 개인 듯했다. 흥분하면 긴장했고, 뱃멀미는 구제불능이었고, 일을 시키면 촌놈 같은 반감을 품었다. 그래도 시간만 넉넉하게 주면 늘 기꺼운 마음으로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바이올린을 켤 줄 알아서 우리는 그를 마에스트로라고 불렀는데, 그 별명은 결국 마이스로 길이가 줄었다. 바람이 한바탕 몰아치기만 해도 그는 사지의 균형을 잃고 버둥거렸기 때문에 한번은 동승한 당신네 통신원이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이스, 자네는 확실히 무지하게 대단한 작가가 될 걸세. 다른 일엔 눈곱만큼도 쓸모가 없으니까."

반면 그 친구의 글쓰기는 착실하게 향상했다. 언젠가는 작가가 될 만한 그릇이었다. 그렇다 해도 고약한 성미가 불끈불끈 삐져나오는 당신네 통신원이 작가 지망생을 일손으로 배에 태우거나, 쿠바고 다른 어떤 해안에서고 글쓰기에 관해 질의응답하면서 또다른 여름을 보내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필라호에 승선하고 싶다는 작가 지망생이 있거든 여자로 해주시길. 아주 예쁘면 좋겠고, 샴페인 챙겨오는걸 잊지 않도록 해주시길.'  13-15


그의 <횡단여행>(<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첫 부분)을 읽은 상태였다. 이 단편소설은 내게 그 작가를 만나기 위해 3200여 킬로미터를 여행해야겠다는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혹 일이 잘 풀리면 그가 몇 분만이라도 틈을 내어 글쓰기에 대해 얘기해줄 수도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은 것이다.  19


목적지에 다가갈수록 헤밍웨이를 만나는 일이 점점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만나면 뭐라고 하지? "저기, 안녕하세요?" 그러면 그가 뭐라고 할까? "썩 꺼져!"? 그는 나 같은 부랑자들을 피해 키웨스트처럼 외딴 곳을 택했을 것이다. 운이 트여 그를 만난다고 해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연기가 펄펄 나는 화차 지붕에 앉아 여행을 하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21-22


"대학은 다녔나?" E.H. 가 물었다.

"미네소타 대학에서 언론학을 전공하긴 했는데 영문학 점수는 늘 형편없었습니다."

"좋은 징조군. 대학에서 학점을 잘 따는 친구들은 대개 흉내쟁이들이지. 자기만의 것을 쓰는 법을 터득하지 못해. 그럴 가망도 없고"  28


"글쓰기에서 내가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절대로 한 번에 너무 많이 쓰지 말라는 걸세."

"절대 샘이 마를 때까지 자기를 펌프질 해서는 안 돼. 내일을 위해 조금은 남겨둬야 하네. 멈춰야 하는 시점을 아는 게 핵심이야. 쓸 말이 바닥날 때까지 버티지 않도록 하게. 글이 술술 풀려 얘기가 재미있는 지점에 이르고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감이 오면 바로 그때 멈춰야 하네. 그러고는 원고를 그냥 놔두고 생각을 끄게나. 나머지는 자네의 잠재의식한테 맡겨둬. 다음날 아침 잠을 푹 자서 기분이 상쾌해지거든 그 전날 쓰던 것을 다시 쓰도록 하게. 그럼 그 재미있는 지점에 다다를 거고 또 다음 장면이 예측되겠지. 그 지점에서 계속 전진해. 그러다가 또다른 재미의 정점에서 멈추는 거야. 그런 식으로 써나가면 탈고했을 때 자네의 글은 재미있는 부분들로 가득할 것이고, 장편을 쓸 때도 절대 막히는 일 없이 얘기를 재미있게 꾸려갈 수 있다네. 매일같이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전부 다시 쓰게. 얘기가 지나치게 길어진다 싶으면 쓰기 전에 바로 앞 두세 장 정도를 되짚어 읽어본 후에 시작하게. 그리고 최소한 1주일에 한 번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야. 이야기는 그런 식으로 한 덩어리가 되는 거라네. 검토할 때 잘라버릴 만한 건 모조리 잘라버리게. 무얼 내팽개쳐야 할 지 아는 게 핵심이야. 잘하고 있는지 여부는 뭘 버리느냐에 달려 있다네. 다른 작가가 쓰더라도 정말 재미있겠구나 싶은 걸 내버릴 수 있다면 잘하고 있는 걸세."

헤밍웨이는 이미 내 작업에 개인적인 관심이 있고 힘껏 돕고 싶다는 듯 힘주어 말했다.

"글을 쓰는 데에 기계적인 부분이 많다고 낙담하지 말게. 원래 그런 거야. 누구도 벗어날 수 없어. <무기여 잘 있거라>의 시작 부분을 적어도 쉰번은 다시 썼다네. 철저하게 손을 보아야 해. 무얼 쓰든 초고는 일고의 가치도 없어. 처음 쓰기 시작할 때 자네는 온통 흥분되겠지만 독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 하지만 작업 요령을 터득하고 난 후에는 독자에게 모든 걸 전달해서 예전에 읽어본 얘기가 아니라 자기에게 실제 일어난 일처럼 기억하게 하는 걸 목표로 삼아야 해. 이게 글쓰기를 평가하는 진정한 시금석이라네. 그리되면 독자는 흥분해도 자넨 아무렇지도 않아. 그저 힘든 일의 연속이야. 잘 쓸수록 힘들어져. 오늘 쓴 이야기는 어제 쓴 것보다 나아야 하니까. 세상에서 가장 고달픈 짓이지. 쓰는 일 말고도 하고 싶고 더 잘할 수 있는 게 수두룩하지만, 펜을 놓고 있을 때는 기분이 더러워져. 내가 가진 재능을 썩힌다는 생각이 들거든."

"그리고 말일세." 그가 말을 이었다. "모르는 건 쓸 수 없어. 순전히 상상에 의존하는 건 시(詩 시시)야. 공간과 인물들을 철저히 파악해야 하네. 그러지 않으면 얘기가 진공 속에서 벌어지게 되지. 창작은 써가면서 하는 걸세. 그날의 글쓰기를 끝낼 즈음에는 그다음 이야기가 어찌 펼쳐질지 알겠지만 그 이야기 다음에 벌어질 일까진 알 수 없기 때문에 이야기가 어찌 끝날지는 끝까지 가봐야 안다네."

"애초에 아무런 플롯도 없이 이야기를 쓴다는 말인가요?"

"최고의 이야기는 그렇게 쓰이는 걸세. 좋은 얘깃거리가 있다면 서슴지 말고 써. 그런 건 앉은자리에서 단숨에 해치우는 거야. 하지만 최고의 이야기는 하루하루를 겪으면서 만들어지는 거라네. 그런 걸 쓰는 건 뼈빠지는 일이지만 그게 쓰는 사람한테나 읽는 사람한테나 훨씬 흥미진진하지. 이야기가 어찌 끝날지 쓰는 사람이 모르는데 독자가 어찌 알수 있겠나?"

"또하나." 그가 말을 이어갔다. "절대로 살아 있는 작가들과 경쟁하지 말게. 그들이 훌륭한 작가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으니까.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죽은 작가들과 겨루게. 그들을 따돌릴 수 있다면 잘하고 있다고 여겨도 무방해. 좋은 작품이란 작품은 몽땅 읽어둬야 해. 그래야 이제껏 어떤것들이 쓰였는지 알 수 있을 테니. 자네의 얘깃거리가 누가 이미 다룬 것이라면 그보다 더 잘 쓰지 않는 한 자네의 이야기는 초라할 뿐이야. 어떤 예술에서고 낫게 만들 수 있다면 뭐든 훔쳐도 괜찮아. 단, 언제나 아래가 아니라 위를 지향해야 해. 그리고 남을 흉내내지 말게. 문체란 망이야, 작가가 어떤 사실을 진술할 때 드러나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어색함이라네. 자기만의 문체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만일 남들처럼 쓰려고 한다면 자기만의 어색함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의 어색함도 아울러 갖게 돼. 즐겨 읽는 작가라도 있나?"  31-33


"말히긴 좀 그러네만, 자넨 진지한 것 같아." 마침내 E.H.가 입을 열었다." 진지함은 작가가 꼭 갖춰야 할 덕목이지. 일류로 쓴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일이고, 상상력을 발휘해 쓴다는 건 예술의 최고봉이라네. 또하나 갖춰야 할 게 있는데 그건 재능일세. 죽었다 깨도 소설을 쓸 수 없는 사람이 있지. 소설에 소질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면 무슨 일을 하겠나?"

"모르겠습니다. 자기한테 소질이 있는지 없는지는 어떻게 아나요?"

"알 수 없지. 몇 해를 써본 후에야 나타나기도 하니까. 여하튼 소질만 있다면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이야. 내가 자네에게 줄 수 있는 딱 한가지 충고는 꾸준히 쓰라는 걸세. 물론 지독하게 고된 짓이지. 내가 글을 써서 돈을 버는 건 펜을 들고 해적질을 일삼기 때문이야. 내 경우 단편 열 개를 써봤자 그중 하나 정도만 쓸 만할 뿐 나머지 아홉은 버린다네. 그런데 편집자들이 내 작품을 원하면 나는 그네들을 그걸 놓고 경매를 벌여야 하는 처지에 몰아넣고는 그 열 개를 모두 살 만한 가격으로 그 하나의 값을 치르겠다고 나올 때까지 양쪽을 부추긴다네. 그럼 그자들은 질투심에 불타 내가 와서 해결해주기만을 바라게 되지. 자네가 글을 쓴다고 하면 너도나도 행운을 빌어주겠지만, 자네가 잘나간다 싶으면 잡아먹지 못해 안달일걸세. 정상에 무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좋은 작품을 쓰는 거야."

"상상력은요?" 내가 물었다. "창작할 수 없을 땐 어떡하죠?"

"창작이란 꾸준히 써나가며 터득하는 거야."

"애초부터 깜깜해도 말입니까?"

"이따금씩은."

"여쭙고 싶은 것이 또 있습니다. 저는 혼자 지내는 걸 무척 좋아해요. 주변에 사람들이 늘 북적대는 걸 못 견딥니다. 그게 작가에게 나쁜 건 아닌지 궁금합니다."

"그렇지 않아. 그래야 사람들을 만났을 때 감수성이 더욱 예민해지지. 나도 지난가을 아프리카로 떠날 무렵엔 인간이라는 족속에 진절머리가나 누구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네. 기억해두게, 자네가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자네가 어떤 일을 하는가가 중요한 거야. 자네 어머니께선 다르겠지만 자네가 죽든 살든 누구도 신경쓰지 않아. 개인으로서 자네는 아무것도 아닌 거야. 자네한테 무슨 일이 생기든 아무도 관심 없어. 자네가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가야 해."

"작년에 몇 달을 서부지역에서 차를 얻어 타고 화물열차를 무임승차하며 보냈습니다. 부랑아처럼 쏘다니는 게 작가에게 유익한 경험이 될까요?" 

"그렇고말고. 나도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내와 가족에 매인 몸이라서, 하지만 자신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사시사철 돌아다닐 필요는 없다네. 한곳에 진득하게 머물면서 그곳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어야 해. 불결한 임시 천막촌에서도 괜찮은 걸 건질 수 있어야 하네. <허클베리 핀>은 읽어봤나?"

"옛날에요."

"다시 한번 꼭 읽어보게. 미국인이 이제껏 쓴 책 중 최고야. 허크가 도둑맞은 검둥이를 되찾는 부분까지는, 미국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지. 스티븐 크레인의 <블루 호텔>은 읽어봤나?"

"아니요."

"모름지기 작가라면 교육의 일부로서 꼭 읽어둬야 할 책들을 적었다네." 그가 아래의 목록을 건네며 말했다.



스티븐 크레인 - 블루 호텔, 오픈 보트


보바리부인 - 귀스타브 플로베르

더블린 사람들 - 제임스 조이스

적과 흑 - 스탕달

(인간의 굴레 - 서머싯 몸)

안나 카레리나 -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 톨스토이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 - 토마스 만

환호와 작별 - 조지 무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 도스토옙스키

옥스퍼드 영시집

거대한 방 - E.E. 커밍스

폭풍의 언덕 - 에밀리 브론테

저 멀리 그 옛날에 - W.H. 허드슨

아메리칸 - 헨리 제임스

                                   어니스트 헤밍웨이.


"이 책들을 읽지 않았다면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없지. 서로 다른 글쓰기의 전형을 대표하는 것들이네. 어떠 ㄴ것은 따분하고, 어떤 것은 영감을 주고, 또 어떤 것은 무척 아름답게 쓰여 글을 쓴다는 게 절망적인 일처럼 여겨질 걸세.  34-37


"바닷물 색깔이 왜 가지각색이죠?"

"바닥 때문이지. 짙은 보랏빛이 도는 부분은 해초가 있어서 그렇다네. 산호초가 자라는 곳은 초록빛이야. 모래가 깔린 드라이록스 근처에서는 누런 빛을 볼 수 있을 걸세. 바다에 나와 있으면 눈 훈련에 좋아."  59


".. 글쓰는 법을 터득해야 해. 처음 써본 이야기가 팔린다는 건 작가에게 벌어질 수 있는 가장 큰 불행이라네. 똥 같은 걸 팔게 되면 똥 같은 걸 계속 쓰게 돼. 행여 글이 나아진다 해도 독자들은 언제나 첫인상으로 그 작가를 기억하지."  71


".. 보낸 원고가 퇴짜를 맞는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려니 하는 거야. 남들과 다르게 쓰면 잡지사 사무실에 있는 친구들은 자네가 훌륭한지 알아보지 못해. 다른 이가 진가를 발견해야 그때서야 비로소 눈을 뜨지. 형편없는 건 아무리 써서 보내봤자 어김없이 되돌아오지만, 제대로 쓴 걸 꾸준히 우편으로 보내다보면 언젠가는 사겠다는 작자가 나타나게 되어 있어. 처음 쓴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야. 그래서 배워야 한다는 걸세..."  72


".. 독자들은 좋은 이야기를 알아보지만 편집자들은 아이냐. 색다른 이야기를 보내면 편집자들은 그 가치를 못 알아봐. 이야기만 훌륭하다면 반송되어 오더라도 거들떠보지 마. 그냥 계속 보내. 좋은 이야기라면 알아보는 편집자가 있을 거야. 한 명이 알아보면 나머지도 알아보기 마련이지.. "  85


".. 어떻게 쓰는지 배우려거든 신문 잡지 쪽 글을 많이 써봐야 해. 머리를 유연하게 하고 언어를 지배하는 힘을 길러주거든. 그러고는 매일 연습하는 거야. 날마다 본 것을 독자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묘사해봐. 그러다보면 그게 종이 위에서 살아 움직일 거야. 플로베르가 모파상한테 그렇게 글쓰기를 가르쳤지. 뭐든 묘사해봐. 선착장에 서 있는 자동차, 만류나 거친 바다에 쏟아지는 스콜도 좋고, 감정을 집중하려고 노력해.. "  87


"하루에 몇 단어나 쓰세요?" 바다로 나간 어느 날 오후 내가 E.H.에게 물었다. 

"대중없다네." 그가 말했다. "많이 쓸 때도 있고 한 자도 못 쓰는 날도 있지."

"버나드 쇼는 작가가 되고 싶다면 적어도 하루에 1000단어는 써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너무 많아. 무지하게 잘 써지는 날에야 1000단어도 쓸 수는 있지. 하지만 그런 식으로 계속 자네를 펌프질 해대면 밑천이 바짝 말라 똥 같은 거나 쓰게 돼. 하루에 500단어를 쓴다고 해도 그걸 전부 실어줄 출판없자는 없어. 1년이면 18만 단어, 소설 두 권 분량이거든. 그리해보려고 시도해본 적 있나?"

"없습니다. 해보곤 싶은데 해보려고 할 때마다 불가능한 일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난 말일세, 글을 쓰려고 앉을 때마다 지독한 무력감에 빠져든다네. 글을 쓰는 건 힘든 일이야.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지. 세상에 못해먹을 짓이야. 쉽다면 개나 소나 다 하겠지. 그냥 앉아서 한편 써 보내면 돈이 굴러들어오는 게 아닐세. 그네들이 거액을 지불하는 이유는 딱 하나야. 그런 고된 짓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지."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뭐죠?"

"신나는 얘깃거리를 갖고 재미있게 만드는 거야 누군들 못하겠나. 비결은 수수한 얘깃거리를 가지고 재미있게 만들 줄 알아야 한다는 거야.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신나는 얘깃거리를 다루는 것은 식은 죽 먹기지."

"최고의 이야기는 개인적인 경험이 바탕이 되나요?"

"아니야, 최고의 이야기는 꾸며내는 거라네. 액션을 꾸며낼 수 있어야 해. 소설이 될 만한 일을 실제 삶에서 벌일 수 있는 사람은 고작 열에 하나 정도야. 자네가 자네를 소재로 쓰면 그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죽는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에 대해 쓰면 천 번을 죽고도 계속 쓸 수 있지. 자네가 아는 사람을 하나 골라 그의 나이와 전력을 바꾸고 그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로 그를 옮겨놓게. 그래도 그는 실존 인물인 거야. 그를 재미있는 상황에 던져놓고 액션을 만들어내, 꾸며내는 요령만 터득하면 소설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네.

좋은 얘깃거리다 싶으면 주저하지 말고 써. 가슴속에 있는 걸 전부 털어놔. 그게 한 번 자리잡고 앉았을 때 쓸 수 있는 분량이야. 그러고 보니 생각나네. 언젠가 하루에 단편 두 개를 쓴 적이 있지. 한 편을 쓰기 시작해 탈고하고 났는데도 여전히 기분이 좋아서 한 편을 더 썼어. 

그렇게 한 편을 쓴 다음에는 원고를 두 주 정도 치워둬. 그러고 나서 다시 읽어보면 독자의 입장에서 보는 눈이 생긴다네. 싹수가 보이지 않는 건 포기해야 해. 쓴 걸 치워두었다가 다시 돌아가 독자의 관점에서 읽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어."  114-116


"지금 자네한테 필요한 건 눈을 이용해서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을 배우는 거야. 그래야 쓸 때 그것들을 고스란히 나타낼 수 있어. 어떤 하나를 다른 것과 비교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네.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지. 모든 것이 고유하다네...

절대적인 글쓰기라는 게 있지. 그걸 가르쳐주면 나주엥 자네 나름의 스타일을 계발할 수 있을 거야."  116-117


짧은 문장을 써야 할 때가 있지만 때를 가려 쓸 줄 알아야 해. 짧은 문장을 빈번하게 사용하는 건 단조로운 기계망치질 같아서 독자를 피곤하게 해...

모름지기 작가는 상이한 두 성격이 있어야 해. 인간으로서 자네는 천하의 개망나니일 수도 있고 사람을 증오하고 비난하고 다음번 만났을 때 놈의 대갈통을 총알로 날려버릴 수 있겠지만, 작가로서 자네는 누구에 대해 쓰기 전에 그 사람을 철저하게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사람의 관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자네의 사사로운 반응을 섞지 않고 그 사람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요령을 터득해야 해.  120


나는 난생처음 도보로 외국 도시를 여행할 때 느끼는 걷잡을 수 없는 흥분에 사로잡혔다.  137


정오쯤 되자 우리는 초록빛 해안을 따라 수킬로미터 내려와 있었고, 모로캐슬의 탑이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아바나의 풍경이 되었다. 코히마르라는 작은 어촌을 지나 아담한 바쿠라나오 만 맞은편에 다다르자 E.H.가 카를로스에게 해변 쪽으로 배를 돌리라고 했다. 

"저기가 되놈들을 내려놓은 만이라네." E.H.가 <횡단여행>과 관련된 이야기를 내게 했다.

그 단편을 읽은 게 아득하게 느껴졌다. 미니애폴리스에서 살던 때였다. 작가가 되어보겠다고 아침에 눈을 뜨고부터 저녁에 녹초가 될 때까지 써댔는데 이야기에서 열기가 빠진 다음 읽어보면 악취가 풍겼다. 우울증이 발작처럼 엄습할 때면 주섬주섬 책을 읽었다. 대부분 성에 차지 않았다. 현대 작가들에게서 뭘 배울 게 있으려나 하고 잡지를 뒤적여 보았지만 그들은 더 형편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이 단편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것과 다른 것들의 차이는 낮과 밤의 차이만큼이나 컸다. 나는 우아한 문구들과 억지로 짜맞춘 플롯에 신물이 나 있었는데, 마침내 억센 고기잡이의 말투로 쓰인, 내가 그때까지 읽어본 것들 중 가장 수긍이 가는 이야기를 발견한 것이다. 뭘 어떻게 했기에 이야기가 그토록 멋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게 바로 내가 쓰고 싶은 방식이었다! 나 말고도 같은 걸 원하는 사람이 수천 명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채 말이다. 나는 그가 현존 작가라는 걸 알았고, 그가 내게 이야기를 쓸 때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귀띔이라도 해주었으면 했다. 만일 그 단편 밑에깔린 예술적인 그 무엇을 그에게서 배워 깨우칠 수만 있다면 내게도 아직 가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불과 석 달 전의 일이었다. 그러던 내가 지금 그의 요트에서 그와 낚시를 하면서 그가 쓴 단편소설 속의 어부가 되놈의 목을 으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졸랐다는 그 작은 만을 향하고 있었다.

"이 해안을 꽤 잘 아시겠어요." 내가 말했다.

"무얼 쓰려거든 사전에 그것에 대해 알아둬야 해." E.H.가 말했다. "이야기를 쓰려면 배경과 등장인물이 있어야 하지. 그것들은 완전히 꿰고 그것들이 벌일 만한 일을 생각해둬야 해. 우선 흥미로운 상황을 설정하고 그런 다음 액션을 만들어내. 그러면 이야기는 저절로 써지게 돼 있어."

"쓰기 시작할 때 플롯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네. 배경과 인물만 있으면 돼."

"아무 플롯이 없는데 쓰는 게 소설이 될지 어떻게 알죠?"

"알다마다. 아는 소재만 있으면 이야기는 나오는 걸세. 하지만 바다는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가장 힘든 곳이지. 10년을 나와 있어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게 바다야. 육지에서 전쟁이 터지면 달라. 전쟁터에 석 달만 나가 있으면 장편소설을 하나 건질 수 있지."  155-157


E.H.는 낚시질 중에는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일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거대한 놈이 나타날 때를 대비해 빈틈없는 준비 태세를 갖추고자 했다.  160


"자네나 나나 또같은 걸 보지. 무엇을 본다는 것과 그것에 대해 쓴다는 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네. 누군들 못 보겠나. 그러나 있는 그대로 보고 벌어진 그대로 쓸 수 있어야 모름지기 작가라고 할 수 있지..."  174


"소설을 쓰기 위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은 무엇이죠?"

"전쟁. 전쟁은 많은 위대한 작가들을 탄생시켰지. 혹은 불행한 유년 시절. 실연. 남에게 벌어지는 나쁜 일이 작가에겐 거반 다 좋은 일이야. 그리고 마흔이면 사람들은 실수하기 시작하지만 작가의 정신은 명료해진다네."  176



"죽도록 하고 싶다면 마음을 굳게 먹어야지."  312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곳에서 살아보는 것이 최선인가요?"

"어떤 자옷에 관해 그곳에서 멀어지기 전에 쓰는 건 금물이야. 떨어져 있어야 균형 잡힌 시각이 생기거든. 무엇을 본 직후에는 그걸 사진처럼 묘사해서 정확하게 드러낼 수 있어. 좋은 훈련이지. 그러나 그건 창작이 아니야."

"써가면서 사건을 만들어내는 게 소설이라면 벌어질 일의 내용은 어떻게 결정하죠?"

"열댓 개의 흥미로운 가능성 중에 필연적인 하나를 골라야지."

"그게 형편없는 것일 수도 있는데 그건 어떻게 알죠?"

"마음속의 어떤 소리가 일러준다네. 판단이 경계선에 걸리면 다른 사람한테 보여줄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구분할 수 있어."  313-314


"소박한 낱말이 언제나 최선이라네."  314


"쓰고 싶은 마음은 정말 굴뚝같아요. 노력도 하고요. 그런데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정말 고된 짓이지. 자네는 그걸 이제 막 발견하기 시작한 거야. 글이 나아질수록 더 힘겨워져. 자네에게 필요한 건 매일 조금씩 연습하는 거야. 하루에 적어도 250단어는 쓸 수 있어야 해. 그 정도면 충분해. 그렇게만 써도 1년이면 소설 두 권 분량이야. 중요한 건 지속적으로 눈과 귀를 사용 하는 거야. 부두 위에 보이는 사람들을 전부 관찰하게나. 요트들이 들어온거든 그 소유주들과 승무원들도 관찰하고, 그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해서 그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지 파악하게.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사용하는 단어 하나하나뿐만 아니라 각 단어를 어떻게 말하는지 기억해두게. 자네는 자아에 대해 감수성이 예민해. 그건 꼭 피요한 자질 중 하나지. 그러나 타인에 대해서도 감수성이 예민해야 하네.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방식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을 알 수 있어야 해. 계속 노력하면 계발되는 능력이라네. 누구도 자네가 겪는 고난 따위엔 관심 없어. 자신이 겪은 고생담을 늘어놓는다면 지독하게 따분한 놈으로 전락하고 말아. 자네가 누구고, 어떤 사람이고, 자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든 사람들은 눈곱만큼도 신경쓰지 않아. 자네 자신은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살피게."

"쿠바를 소재로 소설을 쓸 수 없다면 제가 쓸 만한 것은 뭐죠?"

"내 장사 구역이니 넘보지 말라는 게 아닐세. 그저 자네가 소설을 쓸 만큼 쿠바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야. 소설에서는 뭘 쓰지 않고 내버려두느냐가 중요하다네. 10분의 9는 수면 밑에 있어야 해. 그게 이야기에 품격을 주는 거야.."  314-315



"자네가 꼭 극복해야 하는 건 낙심하는 일이야." 그가 말했다. "자네에겐 육체적인 담력이 있어. 하지만 그건 겁먹기 전까지 누구나 있는 거지. 자네한테 필요한 건 정신적인 담력을 키우는 일이야. 훨씬 어려워. 하늘이 무너져도 낙심하지 말게! 산문을 쓰는 건 세사에서 가장 힘든 일이야...

한 번에 몇 주 동안 써지지 않을 때가 있을 거야.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낙심하지 말게. 세상 그 어떤 작가라도 써지지 않을 때가 있어. 자연스러운 일이야. 그러려니 하게. 기력이 빠지거든 자네가 본 것들을 빈틈없이 써보게나. 그것들이 종이 위에서 꿈틀거려 독자들이 그것들을 볼 수 있도록. 사람들이 으레 하는 말이 아니라,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떻게 말하는지, 목소리의 높낮이, 말하는 표정, 두드러진 이목구비 등에 주목하게. 그런 것들이 글을 생동감 있게 하는 거라네. 그러니 독자가 정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쓰는 연습을 하게. 그러고는 독자가 공감하길 바라는 감정이 무언지 파악하려고 힘쓰는 거야. 난 그런 식으로 글 쓰는 법을 터득했다네.

자네가 쓴 기사류 글들은 눈에 좋은 훈련이었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게 글쓰기에 대한 참된 시각을 자네한테 선사한 거라네. 이제 이 여행길로 북쪽으로 올라가다보면 쓰고 싶은 이야기에 대한 어떤 실마리가 떠오를 수도 있을 걸세. 전에 떠돌이 생활 때 본걸 전부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걸 보게 될 거야. 지벵 도착하고 나서 소설이 써지지 않거든 밖으로 나가 뭐든 보고 그걸 종이 위에 살아 움직이게 만들어. 사람들한테 말을 걸어서 그들이 말하는 걸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써. 그러면 자네의 마음도 자동으로 대화를 들으려고 집중할 걸세. 귀를 잘 발달시키면 마음이 체를 치듯 움직여 써먹지 못할 것은 잊어버리게 되어 있어. 좋은 글을 읽어서 좋은 감식력을 키우게.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라네...

하늘이 무너져도 낙심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게. 자네 글에 대해 절대 걱정하지 말게. 그러면 진이 빠지고 무기력해져. 운동을 많이 하면서 건강을 유지하게. 그게 제일 중요해."  318-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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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 여행하면서 쓰고, 쓰면서 여행한다


나는 실제로 여행하는 동안에는 별로 세밀하게 글자로 기록을 하지 않는다. 대신 작은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때그때 짤막하게 적어 놓을 뿐이다.

가령 '보자기 아줌마!'라고 적어 놓고, 나중에 수첩을 펼쳐 그것을 보면 '아 그렇지, 터키와 이란의 국경 근처의 그 작은 마을에 그런 이색적인 아줌마가 있었지' 하고 쉽게 생각해낼 수 있게 해놓는 것이다.  7


일시나 장소 이름이나 여러 가지 숫자 같은 것은 잊어버리면 글을 쓸 때 현실적으로 곤란하니까 자료로서 가능한 한 꼼꼼히 메모해두는데, 세밀한 기술이나 묘사는 될 수 있는 대로 기록하지 않는다.  8


여행을 하는 행위의 본질이 여행자의 의식이 바뀌게끔 하는 것이라면, 여행을 묘사하는 작업 역시 그런 것을 반영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 본질은 어느 시대에나 변하지 않는다.  11


재미와 신기함을 나열하듯 죽 늘어놓기만 해서는 사람들이 좀처럼 읽어주지 않는다. '그것이 어떻게 일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면서도 동시에 어느 정도 일상에 인접해 있는가'하는 것을 (차례가 거꾸로 되더라도 좋으니까) 복합적으로 밝혀나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12





한 달 정도 멕시코를 여행하는 동안 그곳에서 만난 몇몇 사람들에게서 "당신은 뭘 하러 다시 멕시코에 오셨나요?"하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면 그때마다 나는 가벼운 혼란을 경험하곤 했다. 그 질문에서는 '다른 나라도 많은데 왜 일부러 멕시코를 여행의 목적지로 정했소?' 하는 뉘앙스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까지 몇몇 나라를 여행했지만, 어떤 의미에선 근원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런 질문을 받은 기억은 거의 없다. 그리스라든가 터키, 독일에 가 있어도 "당신은 왜 또 그리스에 (혹은 터키에, 혹은 독일에) 왔소?"하고 묻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대체로,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에 여행을 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로서는 당연한 생각이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나는 여행자인데, 여행자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남자 혹은 그 여자가 가방을 들고 표를 사서 어딘가로 가는 것, 그것이 여행 아닌가. 그리고 만약 여행자가 어딘가에 가야만 한다고 할 때 그가 터키에, 그리스에, 혹은 독일에, 그리고 혹은 멕시코에 가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는가? 

이런 의미에서 나는 "당신은 어째서 멕시코에 왔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멕시코에 와선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가?"라고 반대로, 어디까지나 담담하게 반문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딱히 뭐라 말할 수 있는 특별한 목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멕시코를 방문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가령 일본을 여행하고 있는 외국인을 향해 "어째서 당신은 일본에 오셨나요?"라고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 아마 갖가지 대답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물론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일본에 와야만 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예외겠지만) 궁극적으로 그에 대한 대답은 한 가지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눈으로 직접 그곳을 보고, 자기 코와 입으로 그곳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자기 발로 그 땅 위에 서서, 자기 손으로 그곳에 있는 물체를 만지고 싶어서 왔던 것이다.  49-51


여행 전에 미국인 저널리스트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내가 "이제부터 4주 정도 멕시코를 여행할 생각입니다"하고 말하자 그는 한 가지 충고를 해주었다. 

"멕시코에 가면 사람들이 반드시 당신에게 질문을 할 겁니다. 무슨 이유로 멕시코를 그토록 오래 여행하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질문해오면 이렇게 대답해주면 됩니다. '나는 멕시코 요리에 관한 책을 쓰려고 해. 알겠어? 멕시코 요리 말이야'라고 말입니다. 아마 이것이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 될 겁니다. 그러면 무사통과지요."

"그럴 듯하군요."

"하지만 그렇게 대답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문제지요?"

"한번 멕시코 요리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들은 한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우리 엄마의 요리 솜씨는 이랬단다. 우리 할머니의 자랑거리 요리는 이랬단다... 라는 식으로요."  52-53


혼자 멕시코를 여행해보고 새삼스레 절실히 느낀 것은, 여행이란 근본적으로 피곤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내가 주자 여행을 해보고 나서 체득한 절대적인 진리다. 여행은 피곤한 것이며, 피곤하지 않은 여행은 여행이 아니다. 비참함이 끝없이 이어지고, 예상했던 일이 빗나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87


인간을 피곤하게 만드는 온갖 것들을 자연스럽게 묵묵히 받아들여가는 단계야말로, 여행의 본질일 것이다.

이 말은 너무 극담적인 말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피곤하다느니 하는 것은 구태여 머나먼 멕시코까지 오지 않더라도 어디서든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90


독일에는 독일 나름대로의 피곤이 있고, 인도에는 인도, 뉴저지에는 뉴저지 나름대로의 피곤이 있다. 하지만 멕시코의 피곤은 멕시코에서밖에 얻을 수 없는 종류의 피곤인 것이다.  91


모르는 지역을 여행할 때는 현지인들의 충고를 들어야 하는건 여행자의 철칙이다.  96


치아파스 주는 원래 그전에 살던 원주민이 아직도 강한 지역 공동체를 유지하고 잇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페인의 콘키스타도르(침략자)가 쳐들어온 것은 1523년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원주민들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그 토지를 몰수해서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려 그 토지를 경작했다. 원주민들은 그때까지 살아왔던 마을로부터 좁은 산지 사이의 정착지로 강제 이주당하고, 거기서 병사들의 엄격한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당하고, 무거운 세금을 물어야 했다. 

원주민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혹사당했는지는 그 인구의 급격한 감소만 보더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스페인인이 땅을 정복했을 때 치아파스에 살던 원주민의 수는 약 35만명이었으니 1600년에는 그 수가 9만 5,000명으로 대폭 줄었다. 스페인인이 구대륙에서 옮겨 온 전염병도 인구 감소의 주된 원인 중 하나이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너무나 극심한 인구 감소였다. 원주민들이 얼마나 '소모품'으로 다루어졌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원주민들의 편을 들어주었던 사람들은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보호하고, 스페인 본국에 그들의 궁핍한 처지를 호소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노예 제도의 폐지를 실현시킬 수 있었다.

이때가 1550년이었다.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긴 이름 이기 때문에 라스 카사스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는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명이다. 

노예 제도는 없어졌지만, 원주민들의 실질적인 예속 상태는 별로 바뀐 것이 없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곤 했다.  101-103


멕시코가 안고 있는 두 가지 큰 문제, 즉 인종 간의 뿌리 깊은 대립과 극심한 빈부격차의 문제.  104



하룻밤 묵을 모텔을 선택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간단한 일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어디든 마찬가지니까 어딜 가도 상관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지만, 막상 구체적으로 어느 한 곳을 선택해야 할 때는 망설여진다.

저녁때만 되면 '이 정도면 괜찮겠지'하며 될 대로 되라는 기분으로 모텔을 선택하게 된다. 매일같이 이런 선택을 계속 하다 보면, 어느새 원래 자신의 내부에 있던 '무엇이 좋고 나쁜가'하는 기본적인 가치 기준이 점점 흐려져간다.  248


나는 여행을 하는 동안 줄곧 여행 일지를 쓰고 있었는데(어떤 여행에서나 반드시 매일 여행 일지를 꼼꼼히 적는다. 나는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을 전혀 믿지 않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 자신의 기억을) ...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 특징이라는 것은 배열이 명확하지 않은 사전과 비슷하다. 아무리 뒤적여봐도 시간만 낭비할 뿐 아무런 소득도 없다.  249



내가 일본을 떠나 미국에서 살고 있는 동안 때마침 한신 대지진이 일어났고, 2개월 후엔 지하철 독극물 사건이 일어났다...

니시노미야에서 고베까지의 길을 혼자 이틀에 걸쳐 묵묵히 걸으며..지진의 그림자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지하철 독극물 사건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하고 줄곧 생각했다. 그 두 사건은 별개가 아니다. 한 가지 사건을 푸는 것은 어쩌면 다른 한 가지 사건을 더욱 명쾌하게 푸는 길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물리적이면서 동시에 심적(心的 마음심 과녁적)인 일이다. 아니 심적이라는 것은 곧 물리적인 것이다. 나는 거기에 나름대로 회랑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리고 다시 덧붙인다면 '나는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더 중대한 명제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그런 명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나는 구체적으로 어디에도 도달해 있지 못하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나의 사고가 (혹은 시선이, 혹은 두 다리가) 더듬어온 현실적인 노정을, 이와 같은 불확실한 산문으로 조금씩 그릇에 퍼 담아서 제시하는 것뿐이다. 

결국 나라는 인간은, 두 다리를 움직이고 신체를 움직이는 과정을 일일이 물리적으로 서툴게 지남으로써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걸린다. 비참할 정도로 시간이 걸린다. 때가 늦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288-289


잊힌 사람들의 잃어버린 이야기들.  292




옮긴이의 말 -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여행


자기 내면의 풍경을 조망하려는 노력,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참다운 여행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 하루키 읽기의 색다른 맛.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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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이른 아침이었다. 거리는 깨끗했고 텅 비어 이었다. 나는 역으로 갔다. 시계탑의 시곗바늘과 내 시계를 비교해보고 이미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늦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급히 서둘러야만 했다. 늦었다는 사실에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길에 대한 확신을 잃게 되었고, 게다가 아직 이 도시에 대해 썩 잘 알고 있지도 않았다. 다행히도 근처에 결찰관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그에게 달려가 급히 길을 물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서 길을 알고 싶은가?"

"네." 나는 말했다. "혼자서는 길을 찾을 수가 없어서요."

"포기해, 포기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몸을 홱 돌려 나를 외면했다.

마치 웃으면서 혼자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처럼.  49-50



인디언이 되고 싶은 소망

내가 인디언이라면, 즉시 채비를 갖추고, 달리는 말 위에 올라, 허공에서 몸을 비스듬히 젖히고, 짧은 전율을 느끼고 또 느끼며 진동하는 대지 위를 내달리리라. 박차를 잃어버릴 때까지. 사실 박차는 애당초 없었다. 고삐를 내던져 버릴 때까지. 사실 고삐도 애당초 없었다. 눈앞에 매끄럽게 풀이 깎인 황야가 펼쳐진 순간, 말의 목도 말의 머리도 이미 흔적이 없었다.  87



여행자 예찬 

열차 안에 앉는다. 신경 쓸 것이 없다. 마치 집에 있는 것처럼 시간을 보낸다. 갑자기 기억들이 떠오른다. 출발하는 열차의 잡아태는 힘이 몸에 느껴진다. 이제 여행자가 되는 것이다. 가방에서 모자를 꺼낸다.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더 자유분방하게, 더 많은 인정을 베풀며, 더 간절하게 대한다. 열차는 공치사 하나없이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것이다. 이런 점을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느낀다. 여인들의 애인이 된다. 창문이 보여주는 끊임없는 매력에 이끌리며, 언제나 최소한 한 손이라도 쭉 뻗어서 창문턱에 올려놓은 채 그대로 둔다. 조금 더 주의 깊게 상황을 보자면, 사람들은 단 한 번의 충격으로 섬광 같은 열차 안에서 혼자 여행하는 아이가 되고, 그 아이 주변에서는 조급함에 몸을 떠는 객차가 마치 요술쟁이의 손에서 튀어나오는 것처럼 놀라울 정도로 너무나도 아주 가볍게 생겨나고 출발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잊고 있었고, 더 심한 것은 자신들이 잊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88-89



골목길 창문

고독하게 살고 있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어딘가에 연결되고 싶어 하는 남자, 낮 동안의 시간의 변화들, 날씨의 변화들, 직업 상태에 따른 변화들과 그와 같은 것을 고려하면서 자신이 의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임의의 힘을 당장 보고 싶어 하는 남자-그 남자는 골목길 창문이 없다면 그것을 아마 오래 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골목길 창문은 그와 그런 사이라서, 그는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친 남자같이 겨우 눈만 관객과 하늘 사이에서 아래위로 움직이며 자신의 창문턱 쪽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원하지 않으면서도 머리를 뒤쪽으로 조금 젖히고 창문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아래에서 마차의 수행원과 소음 속에 있는 말들이 역시 그를 감동시키고 마침매 그럼으로써 인간적인 융화가 되었다.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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