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원래 대학에서 강의 했던 교양강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 진 것이다. 9
내가 가르치는 것과 똑같은 강좌를 2~3년 정도 담당했던 한 여자 제자와 사석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강의는 할 만한가? 어렵진 않나?"
"별로 어렵진 않은데, 재미가 없어요."
"재미가 없다? 왜?"
"성이라는 게.. 뭐랄까, 너무 뻔한 내용이잖아요. 1~2년 강의하고 나면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없어요. 새로 연구하거나 고민해야 할 내용도 없고..."
... 난 물론 그녀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한 가지는 인정해야만 했다. 성이라는 것이 이제는 대학에서조차 조금은 식상하고 진부한 주제가 되었다는 것 말이다. 18
바야흐로 성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두(話頭 말할화 머리두)가 된 느낌마저 든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창녀인 소냐에게 "여자의 몸에는 평생 파먹어도 마르지 않는 광산이 숨겨져 있지"라고 빈정거렸지만, 어쨌든 우리는 드디어 성이라는 보물단지를 찾아낸 셈이다. 아무리 파내더라도 마르지 않는 샘, 진지한 성찰의 가능성과 통속적 흥미를 동시에 충족시켜줄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20
'성의 과잉'이라고 부를 만한 요즘의 추세 속에서, 또 이론적, 실천적 혼란과 갈등 속에서 성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이나 학문적 관심까지도 시중에 넘쳐나는 수많은 '섹스 이야기'중 하나로 취급될 위험이 있다. 22
"이 책은 해답을 주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 고민을 주기 위해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23
'우리들은 성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사실 시시껄렁한 음담패설 말고는 성에 대한 이야기를진지하게 나눠본 적도 없지 않는가? 사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자유로이 대화하거나 배울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지성인으로서 교양을 쌓아야 한다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자 삶의 일부인 성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지 자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24세, 남학생) 26
성 그 자체가 원래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이라면, 왜 우리는 성에 대해 그토록 부끄러워하는가? 왜 우리는 성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진실을 계속 감추고 부인하는가? 왜 우리는 생명의 원천인 성을 때로는 숭배하고 칭송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더럽고 불결하다 욕하고 또 철저한 금기의 대상으로 삼는가? 아니, 인간의 성에 대한 '단 하나의 객관적 진실'이라는 게 도대체 있기는 한 건가? 28-29
성에 대한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성찰이나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성이 너무나 일상적이고 낯익은 대상이라는 데 있다. 33
육체 없는 성이 있을 수 없는 한 성에 대한 관심은 곧 육체에 대한 관심 아닌가? 물렁거리는 살덩어리와 끈적거리는 액체로 이루어진 육체, 끊임없는 욕망으로 우리를 들뜨게 하고 우리의 고귀한 영혼을 부패시키는 육체, 언젠가는 사멸해버릴 그 저주스러운 육체 말이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는 플라톤의 경구가 잘 말해주듯, 성에 대한 관심을 갖는 순간 우리는 육체에 붙들려 영혼의 순수함과 완전한 앎을 포기해야 한다는 공포가 철학자들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욕망의 힘이 두려워 자신의 성기를 잘라버렸던 초기 교회의 금욕적 수도사들처럼 육체의 성을 부정했던 것이 아닐까?
고대 그리스 이래로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로고스(Logos), 즉 이성과 논리와 언어를 진리 탐구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로고스=진리'라는 등식에 입각해서 피와 살을 지닌 인간의 육체, 아무리 애를 써도 순수하게 논리화될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거의 본능적으로 혐오했는지도 모른다. 46-47
프로이트는 이 주제를 탐구하면서 '성보다는 좀 더 부드러운 '사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사랑이란 기본적으로 성기의 결합이었으니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성적인 사랑'과 다른 종류의 사랑을 구별할 수 없다. 50
우리는 성이라고 하면 단순히 생물학적인 성의 구별이나 직접적인 성행위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의미의 성을 영어로 보통 '섹스(sex)'라고 한다. 서구에서 1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 말은 사실'(둘로) 나뉜 것'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의 'sextum'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말이 처음에는 주로 생식기관의 차이로 구분되는 '생물학적 성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다가, 19세기부터 남녀 양성 사이의 성 관계나 성적 결합을 뜻하는 말로 그 의미가 확대된 것이다. 51
예컨대 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도덕, 성과 관련된 제도나 관습, 이데올로기, 다양한 성 심리나 문화, 성욕, 성적 정체성 등을 모두 살펴봐야 하는데, 이런 넓은 의미의 성을 단순한 '섹스'와 구분하여 학계에서는 보통 '섹슈얼리티(sexuality)라고 부른다. 52
일반적으로 서구 언어에서는 어휘가 형태적으로 확장될 때 '1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명사'가 '2 형용사'로 바뀐 뒤에 다시 '3 그 형용사의 명사형'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살펴보자면, 'unverse(우주)'라는 낱말이 'unversal(우주의, 보편적인)'로 바뀐 뒤 여기에 추상명사를 만드는 어니 '~ity'가 붙어서 'universality(보편성)'라는 새로운 명사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때 'unverse' 와 'universality'를 비교해보면, 전자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사물인 반면에 후자는 추상적 성질임을 알 수 있다. 물론 'universality'는 'unverse'가 갖고 있는 특성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두 명사의 존재론적 차원은 매우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cause(개별사건의 원인)'가 ''causai(원인의)'이 된 뒤 다시 'causality(인과성, 인과관계)'로 바뀌면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의 새로운 명사가 탄생한다. 따라서 sex(구체적인 성행위, 성별) -> sexual(성의, 성적인) -> sexuality(성욕, 성과 관련된 태도, 성적 정체성 등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추상적 성)라는 형태적 어휘 변환 과정을 거칠 때에도 그 의미에 심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52
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성을 '자연적으로 주어진 사실'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구성물'로서 파악하게 되고, 또 그 속에 담겨 있는 사회적, 정치적 의미들까지 탐구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53
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적어도 아래와 같은 세 가지의 접근법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첫 번째로 가능한, 그리고 다른 모든 방법의 기초가 되는 것은 역사적 접근법이다. ..
역사적 접근의 진정한 의의는 현재의 성 관념 및 제도들의 기원과 변천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가운데 "성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
당연히 "더 적은 사변과 더 많은 증거"라는 원리가 지배한다. 따라서 성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라는 애초의 취지가 무색해지기 쉽지만, 성에 관해 쓸 만한 조감도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이 고달픈 과정을 가능한 한 성실히 밟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아마 이론적, 과학적 접근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건축물에 비유해보곤 하는데, 그 토대가 생물학적 측면이라면 기둥들은 인류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측면들을 가리키고 지붕은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성의 각 측면을 분해하여 그 각각을 해당 실증과학의 연구 성과에 따라 고찰하고, 다시 밝혀진 사실들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종합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세 번째 방법은 실천적 문제 중심의 접근법이다...
성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이나 태도는 급변하고 있으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조건들도 실존한다. 단지 사태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만이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53-57
비판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려서 판단하거나 밝히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기묘하게도 비판이라는 말을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남의 잘못을 들춰내어 따지고 공격하는 것"을 가리킬 때 쓰는 경우가 많다. 58
철학은 경험적으로 주어진 사실들을 기술하거나 설명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성찰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그 이면과 전체적 연관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려고 애쓴다. 58-59
철학은 어떤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며, 성과 관련된 사실들을 실증적으로 직접 탐구하기보다는 그러한 사실들의 의미와 근거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철학이 대상으로 삼는 성은 개별과학자들이 탐구하는 대상과 같은 하나의 사물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진 것, 즉 우리의 언어와 의식 속에 녹아들어 있고 우리 자신의 실천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그 무엇이다. ..
담론(discours)이란 "특정한 목적에 따라 특정한 주체에 의해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된 이야기"를 가리킨다. 59
삶 속에서 성은 언제나 일정한 담론으로서 위세를 떨치고 있으므로 성에 대한 철학의 비판 작업 또한 바로 이러한 '담론으로서의 성'을 분석하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 스스로 새로운 성 담론을 구축해나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60
사람들에게 섹스와 연결되는 낱말들을 적어보라고 하면, "사랑, 결혼, 쾌락, 생식, 욕망, 금기, 남녀의 성기, 지배, 도덕, 성범죄, 변태, 누드, 포르노, 임신, 자위, 신비(스러움), 정력, 매춘, 생리..."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답이 두서없이 튀어나온다. 이처럼 다양하고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이미지와 개념들은 사실상 섹스라는 말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 정말 복합적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63
성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이처럼 담론화된 성 또는 성 담론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 있다면, 이제 그것은 단순히 "무엇이 진리인가?"를 찾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이 진리라고 할 때 그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는 "왜 그것이 진리라고 여겨지는가?" 등등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69
인간의 성에서 본능적이고 생물학적/생리(학)적인 요소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요소가 더 중요한가를 둘러싼 논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진실은 두 요소의 결합에 의해 인간의 성이 만들어졌다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시선, 우리의 태도, 우리의 평가가 아닐까? 어떤 의도에 따라, 어느 쪽에 더 가중치를 두고, 어떤 요소에 더 주목하며, 어떤 사실들을 더 소리 높이 외치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결국 이러한 '본느의 담론' 자체가 우리의 특정한 인식과 실천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또 거꾸로 이 담론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 성에 대한 인식과 실천이 달라진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74-75
우리는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과 본능들이 동물과 어떻게 다르며, 또 그것이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요인들과 뒤얽히면서 어떻게 우리의 성을 창출해냈는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75
"나는 언제 누구와 섹스해도 괜찮은가?" ...
인간도 동물처럼 오직 생식만을 위해 일정 기간에만 섹스를 했다면 아마도 성에 관한 규제 같은 것은 불 필요했을 것이다. 76
성에 대한 현대의 과학적 연구들은 무지에서 비롯된 수많은 오해를 바로잡고 성 연구에 큰 기여를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바로 통계의 신화와 오르가슴의 신화다. 83
성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단순히 더 많은 쾌락을 가져다주는 기교를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쾌락의 담론 자체를 해부하고 그 속에 들어있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함으로써 성적 쾌락과 이를 둘러싼 논의들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는 데 있다. 84
도덕의 담론. 사실 도덕의 담론은 성과 관련하여 가장 흔하고 표준적인 담론이며 또 빛나는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의 담론이기도 하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성은 무엇보다 먼저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다. 85
우리 사회에서는 평소 그다지 도덕적으로 살지도 않으면서 성에 관해서만큼은 겉으로만 도덕적인 척하거나, 타인의 심각한 공적인 비행(非行 아닐비 다닐행)에 대해서는 지극히 관대하면서도 성에 관련된 문제라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다. 86
이러한 불균형과 자기모순은 성에 관한 '도덕의 담론'과 뿌리 깊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담론의 핵심은 "육체에 기반을 둔 성은 우리를 파멸시킬 수 있는 유혹이므로, 윤리만이 우리를 파멸로부터 구해준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의 밑바닥에는 다시 "섹스란 원래 동물적이고 더럽고 천박한 것인데, 도덕과 제도의 통제를 받을 때에만 인간적인 행위로 승화되고 용인될 수 있다"는 입장이 깔려 있다. 87
'인간의 성에 대한 철학적 고찰'의 핵심은 .. "우리는 생물학적/생리(학)적 본능이라는 말로써 무엇을 생각하고 실천하려 하는가?"를 비판적으로 분석해보는 데 있다. 독자들 스스로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한 번 물어보기 바란다.
"생물학적/생리(학)적 본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나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사용하는가? 생물학적/생리(학)적 본능에 대한 이해가 나의 성적 실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101-102
인간은 성과 무관한 영역, 아니 오히려 성을 부정하거나 억압하는 영역을 지니고 있기에 인간다워질 수 있다고 보는 견해야말로 인간의 성을 이해하기 위해 버려야 할 첫 번째 오해인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도덕이나 종교, 예술에서 올 뿐, 벌거벗고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을 때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똑같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렇다면 인간은 왜 벌거벗고 뒹구는 걸로 만족하지 않고 포르노를 만드는지, 또 때로는 벌거벗고 뒹구는 대신에 속된 말로 '변태'라고 불리는 엉뚱한 행위 따위에 집착하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
난잡하고 무분별하게 섹스를 즐기는 것을 '동물적' 이라고 비난하는 우리의 언어습관이 얼마나 부당한지. 106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진화생물학의 풍부한 연구 성과는... 더 폭넓은 이해를 위한 발판 노릇을 할 때에만 의의를 갖게 될 것이다. 107
도대체 왜 인간의 성은 생식이라는 자연적 울타리를 넘어서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러한 이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인간의 암컷, 즉 여자에겐 발정기가 없다. 인류의 선조들이 협동노동에 의해 사시사철 먹이를 구할 수 있게 됨으로써 영양 상태가 좋아졌고, 그 결과 특정 시기에만 번식을 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일 년 열두 달 임신이 가능하다는 점 하나만 봐도 다른 동물과 비교하면 엄청난 진보를 한 셈이지만... 108
여성의 배란이 감춰져 있어서 심지어 본인 자신도 알 수 없다..
'성 전략(sexual strategies)'을 낳았다. 인간의 선조들은 언제 섹스를 해야 임신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상대를 유혹하고 섹스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복잡다단한 '성 전략'을 발전시켜야 했던 것이다. 110
컴포트(Alex Comfort)가 <섹스의 즐거움(The Joy of Sex)>에서 지적한 대로, "과거에는 성행위의 윤리성에 대해 왈가왈부했지만, 요즘에는 성행위에서 어떻게 만족을 얻을 것인가에 신경을 쏟고 있는" 것이다... 더 많은 쾌락을 얻기 위한 무의식적 노력이 인간의 성 행동과 의식을 규정해왔다고 볼 수 있다. 111
성적 쾌락의 중요성은 인간의 몸 구조에서도 확인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더 많은 쾌락을 얻을 수 있도록 꾸준히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몸 크기와 비교할 때 엄청나게 큰 남자의 성기, 엄청난 양의 신경망이 밀집되어 민감하기 짝이 없는 여성의 클리토리스, 매끄러운 피부와 온몸에 퍼져 있는 성감대, 다양한 성적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신체적 특징들, 예컨대 유난히 발달한 여성의 젖가슴이나 엉덩이, 높은 목소리, 성기 주변에만 남아 있는 털, 붉은 입술, 애교웃음, 예민하게 변하는 눈동자 등등이 이를 증명한다. 또 직립보행에 의해 자유로워진 손과 변화된 성기 위치는 효과적인 애무 동작과 다양한 성교 체위(體位 몸체 벼슬위)를 가능하게 해주었으며, 두뇌의 발달에 따라 사고 능력과 감정도 풍부해졌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성행위를 좀 더 풍요롭고 즐겁게 만든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쾌락의 중요성은 섹스에 소요되는 시간에서도 잘 드러난다. 짧게 끝나는 섹스를 가리켜 속된 말로 '토끼씹'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실제로 토끼의 교미는 10초 이내에 끝나며, 그 밖의 대부분의 동물들, 심지어 정력의 상징인 말이나 백수의 왕이라는 사자의 경우에도 길어야 30초를 넘기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인간의 성교 시간은 수 분, 때로는 수십 분까지 늘어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 시간을 더 늘리기 위해 무진 애를 쓰기도 한다... 동물들은 단지 쾌감을 증대시키기 위해 인간처럼 길고 복잡한 전희(前戱 앞전 놀희)를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상적인 인간 남녀는 성교를 하기 전에 꽤 오랫동안 서로의 몸을 공들여 애무한다. ..
여성의 경우에는 성교를 통해 오르가슴을 얻는 게 쉽지만은 않으며,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남자는 사정이라는 생리적 매커니즘 때문에 비교적 쉽게 오르가슴을 경험하고 확인할 수있지만, 사정 그 자체가 최고의 성적 만족을 자동적으로 보장해주지 않는 한 결국은 마찬가지다. 112-113
'강한 성적 쾌감'은 인류의 생존에 어떤 도움을 준 것일까? 115
인간이 섹스를 통해 추구하는 쾌락은 자극에 대한 단순한 육체적 반응만은 아니다. 물론 강렬한 생리적 반응이 우리의 뇌리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러한 쾌감 속에서 확읺되는 총체적 만족감, 즉 '상대와 하나가 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섹스할 때의 자세에서도 확인된다.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얼굴을 마주보고, 즉 서로의 감저오가 반응을 확인하면서 성행위를 한다. ...
얼굴을 마주보는 체위는 우리의 신체구조, 성기의 위치와 잘 맞기 때문에 좀 더 편할 뿐만 아니라, 서로 마주봄으로써 강한 심리적, 정서적 유대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 유대감은 더 나아가 사회적 교류와 관계를 강화시키는 역할도 하며, 바로 이런 측면을 고려할 때만 인류의 정적 진화가 좀 더 효과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116
헬렌 피셔는 <성의 계약(The Sex Contract)>에서 아주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하고 있는데, .."성은 인간 생활의 모든 것을 작동하게 하는 점화장치의 불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 새끼의 양육에 성공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문제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생존을 결정짓는 중대 사항이므로, 인류의 선조들이 번식의 안전을 위해 좀 더 강력하고 지속적인 유대를 발전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피셔에 따르면 이처럼 새끼의 공동 양육과 지속적인 섹스를 통해 형성된 강한 정서적, 사회적 유대를 기초로 최초의 가족과 공동체가 생겨났으며, 이와 더불어 협동심, 애타심, 의무감, 수치심, 정의감,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공포, 성적 질투 등의 기본적 감정들과 갖가지 의사소통 수단, 규칙, 친족 체계, 도덕, 복잡한 사고, 여러 가지 관념들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117-118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람피우기'가 일부 부도덕한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일탈행위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119
생식 결과의 다양성, 다산성(多産性 많을다 낳을산 성품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한 명의 상대하고만 섹스하는 것보다 여러 명의 상대와 섹스하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 120
여자들의 바람기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 학자들에 따라서는 여자 또한 자신의 자손에게 더 나은 유전자를 물려주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남자들, 그것도 괜찮은 남자들을 골라 성 관계를 가지려는 심리를 발전시켜왔다고 대답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양이 아닌 질적인 측면에서 더 나은 생식 결과를 얻기 위해 바람을 피운다는 것이다. 121
우리는 바람기의 원인에 대한 두 번째 답을 찾아봐야 한다... 사람들이 바람을 피우는 좀 더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쾌락과 연관이 잇을 것이다. 인간의 성이 단순한 생식의 효율성을 넘어서 쾌락 그 자체를 지향하게 됨에 따라 섹스에서 다양성과 변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인간 본성의 일부가 되었으며, 이것은 남녀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성향을 잘 보여주는 용어 중에 '쿨리지 효과(Coolidge effect)'라는 게 있다. 미국 대통령이던 쿨리지가 어느 날 부인과 함께 어떤 농장을 방문했는데, 마침 수탉이 암탉과 교미를 하고 있었다. 이를 본 부인이 안내인에게 물었다. "저 수탉은 하루에 몇 번이나 저짓을 하나요?" 안내인이 대답하기를 "수도 없이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독기 어린 목소리로 "그 사실을 대통령께 좀 전해주세요"라고 했다. 부인의 말을 전해들은 대통령이 물었다. "그런데 그 수탉은 늘 같은 암탉과 관계를 하나?" 안내인 왈 "아닙니다. 매번 다른 암탉과 하지요". 이에 대통령은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 사실을 영부인께 전해주게." 우스갯소리 같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이 상대가 바뀔 때마다 더 큰 흥분과 만족을 느끼며, 이를 가리켜 '쿨리지 효과'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런 현상은 여자에게도 해당된다. <킨제이 보고서>에 따르면 "언제 성적 흥분을 가장 크게 느끼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남녀의 대답이 크게 달랐지만, 양쪽 모두 1위를 차지한 답은 "새로운 상대와 섹스를 할 때"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바람기는 우리가 처해 있는 또 다른 모순을 보여준다. 강력하고 지속적인 유대를 추구하는 본성과 다양하고 변화 있는 쾌락을 추구하는 본성이 우리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면 인간의 성이 단순하게 결정되지 않으며 근본적인 모순 속에서 정말 다양한 스펙트럼을 만들어낸다는 점이야말로 신비에 싸여 있는 진화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인지도 모른다. 122-123
옛날 아라비아의 속담처럼 "사람이란 그들의 부모보다는 그들의 시대를 더 많이 닮는다." 124
* 엘리아스(Nobert Elias)는 <문명의 역사>에서 성적 수치심이나 충동의 조절 또한 문명의 진보와 함께 발달한 심리적 메커니즘이기 때문에, 야만적이거나 원시적인 사회에서는 알몸이나 성행위 등에 대해 문명인들과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엘리아스의 이런 주장은 최근 몇몇 학자들에 의해 근거 없는 편견과 독단이라고 비판받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한스 페터 뒤르(Hans Peter Durr)의 <나체와 수치의 역사>를 보라. 뒤르에 따르면 알몸과 성에 대한 수치심은 문명의 발달 정도와 관계없이 모든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 129
좀 엉뚱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여자들이 여름에 소매 없는 옷을 입을 때 겨드랑이 털을 없애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대개 "보기 흉하기 때문"이라거나 "지저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정답일까? 우리들이 심리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든 간에, 사실 겨드랑이 털을 없애는 진짜 이유는 미적 감각이나 위생 문제와는 거의 무관한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성들이 겨드랑이 털을 없애는 이유는 여성들이 다리를 벌리고 앉지 않는 이유와 동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겨드랑이 털이란 무엇인가? 겨드랑이 털은 사춘기 이후에 나기 시작하며, 성기 주변의 털과 더불어 성적 성숙을 상징하는 우리 몸의 대표적 신호다. 게다가 그 털은 성기 주변의 털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기 때문에 너무 자극적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겨드랑이 털 자체가 강한 성적 자극을 보내는 신호이기 때문에 남에게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서양의 고전 회화에서 알몸을 그리면서도 음모만은 그리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비록 알몸이라 하더라도 음모가 없다면 성적인 의미가 제거되어 외설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마치 여성이 다리를 벌리는 자세가 성교 자세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금기사항인 것처럼 말이다. 130
고대 중국에서는 여자를 '적(赤=불꽃)', 남자를 '백(白=흙)'으로 상징했는데, '적'은 전통적으로 창조력, 성적 능력, 생명, 빛, 갓 태어난 아이, 알몸의 색깔 등을 나타내는 반면 '백'은 죽음이나 소극성, 성적 무기력 등을 뜻했다. 이 점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성적으로 우위에 있었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또 고대 중국의 신화나 전설에서 여자는 특히 성(=우주적 자기재생산)에 관한 한 신비한 마력을 가진 존재였다. 유명한 <소녀경>을 비롯한 각종 '성 교본'에서도 여자는 완벽한 성 지식을 가지고 성을 수호하는 위대한 스승으로, 남자는 무지한 제자로 그려져 있다. 여자는 교접을 통해 자신의 무한한 기를 남자에게 공급하는 '태모(太母 클태 어미모)'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주나라 이후 가부장제가 확립되면서 음과 양 중 양을 더 중시하게 되고 태초의 여성숭배는 변질되어 '성적 흡혈주의(sexual vampirism)', 즉 여성에 대한 착취로 타락했지만, 어쨌든 음을 중시하는 흐름은 도가나 신비사상, 샤머니즘 등을 통해 민중신앙 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132-133
남성들은 늘 여성의 우월한 성적 능력을 숭배하면서도, 때론 그것을 두려워하고 힘으로 통제하려 애써왔던 것이다. 어쨌든 경배와 공포가 뒤얽힌 지점에서 이제 성 자체가 신비스러운 베일에 가려진 보편적 금기대상이 되며, 그 금단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어떤 신성한 힘에 의해 그 자격과 절차, 구체적인 방법 등을 허락받아야 한다. 한마디로 자연 상태에서는 '보편적 허용과 특수한 금지'가 기본 규율이었던 반면, 이제 반대로 '보편적 금지와 특수한 허용'이라는 원칙이 성의 질서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135-136권력의 이동은 늘 체제의 근본적 전환을 가져오는데.. 남근숭배가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면서 원시사회의 성 관념 및 성 풍속들이 서서히 제거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여성에 대한 숭배는 멸시와 경계로 바뀌고, 종종 종교의식이나 주술과 연관되어 남녀 모두에게 생식과 쾌락의 결합 또는 쾌락의 자유로운 추구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원시적인 성 풍속들은 좀 더 엄격한 도덕적 통제에 묶이게 된다. 145
남성의 입장에서는 자기 자식을 낳아서 대르 잇고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므로, 이제 여성의 불임은 큰 죄가 되었다. 불임을 막는 풍속들이 생겨났고, 임신중절이나 자위행위, 남색(男色 사내남 빛색) 등은 엄하게 처벌되었다. 과거에 공동체 전체에 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찬미되던 여성의 생식력은 이제 한 남자의 값진 재산이 되었으며, 매매혼이나 약탈혼이 보편화되었다. 147
어차피 우리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내고, 우리가 만든 신화 속에 갇혀서 산다. 신화에 대한 비판과 분석까지도 그러한 순환의 고리를 완전히 잘라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151
15~16세기에 시작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 육체와 욕마의 해방을 주장함과 동시에 성대 대해서도 좀 더 긍정적인 사고를 제공하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르네상스 초기 처음에는 '성의 해방'이 주로 예쑬의 에로티시즘을 통해 표현되었지만, 사실상 이것은 중세 말 십자군 전쟁, 페스트 등으로 인구가 격감하고 생산력이 정체함에 따라 전면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결혼과 출산이 최고의 미덕으로 칭송되기 시작했던 사회경제적 배경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 이후 노동력과 군대의 필요 때문에 더욱 가속화되었다. 167-168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루터(M. Luther)는 가톨릭교회의 극단적 금욕주의와 위선적인 행태들을 비판하면서도 부부간의 성애를 긍정하고 인간 육체의 불완전함을 인정했다. 또 칼뱅(J. Calvin)은 성행위는 성스러운 것이며, 모든 성인은 가정을 가져야 하며 가정 안에서 삶을 공유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가정을 공동체의 주춧돌로 파악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주장은 가족을 중심으로 새로운 생산양식의 주체가 되어야 할 초기 부르주아 계급의 입장(가족의 노동력을 중심으로 하는 소상품생산은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학을 했다)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이는 그들이 이제 성 문제를 종교적 문제나 단순한 도덕의 문제가 아닌, 사적 생산과 결부된 개인의 문제로 파악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근대 초기는 부르주아사회의 성 윤리가 만들어지고 정착되는 시기이기도 했는데, 개인들 간의 계약으로서 결혼, 일부일처제 등이 확고한 원칙이 됨에 따라 역설적으로 그 보완물로서 성 매매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168-169
18세기에 들어서서 이른바 절대주의 시대가 되자 육체는 더욱더 성적 도구가 되었고, 몰락해가고 부패한 기생계급이 되어버린 귀족들의 성 관념과 성적 유희는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성을 단순한 쾌락의 수단, 유희의 도구로만 파악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여성의 육체도 파편화되어 관능적 쾌락의 도구로만 평가되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여성의 가슴이나 다리를 노출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심지어 젖가슴이나 허리, 허벅지, 엉덩이, 생식기 등을 각각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풍습까지 생겨났던 것이다.(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자신의 젖가슴을 석고로 모형을 떠서 과일 그릇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풍속의 역사> 제3권 까치, 1987. 43쪽) 170
이 시기에는 육체적 쾌락을 위한 연애기술이 숭배되었으며, 연애란 '두 피부의 접촉'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만연하여 성의 쾌락만이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연애를 위한 성교육, 그러니까 상대를 유혹하고 즐거움을 누리는 기술에 대한 교육이 성행했으며, 상류사회에서는 외설적인 농담을 주고받는 기술이 품위 있는 풍류로 취급되기도 했다. ..
성적 타락이 심해지면서, 지배계급 안에서는 극단적이고 심지어 변태적인 성욕을 추구하는 경향이 생겨났고, 반대로 중간계급 사이에서는 감상적 연애나 지나치게 관념화된 정신적 사랑 등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처럼 연애풍속은 거의 문란하다 할 정도로 자유분방해졌지만, 결혼은 여전히 인습에 묶여 있었다. 귀족들에게 아내나 애인의 아름다움은 단지 과시의 수단이었고, 결혼과 연애는 완전히 분리된 채 혼인은 철저한 거래가 되었다. 특히 귀족과 대부르주아지 사이의 정략결혼이 많았는데, 그것은 돈을 벌어서 성공한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딸을 귀족에게 갖다 바침으로써 사회적 명예를 구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하층 부르주아지들 사이에서는 '첫눈에 반한 사랑'이 경멸받았다. 왜냐하면 사회적 권력이나 지위도, 커다란 재산도 없었던 사람들은 배우자를 고를 때 서로를 관찰하고 시험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근검절약하는 생활태도와 성실성이었기 때문이다. 171-172
육체적 쾌락을 탐하는 시대 분위기에 어울리게 절대주의 시대는 성 매매가 대호황을 누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18세기 말 유럽 최대의 도시였던 파리의 인구 60만 중 4만 명이 성 매매 여성이었으며, 오스트리아의 빈에는 1만 4천 명, 런던의 경우에는 첩 말고도 5만 명 이상의 성 매매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도시의 하층계급에 속하는 젊은 여자들은 대부분이 매춘부가 되었고, 르네상스 시대처럼 성 매매 여성이 특별한 복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소도시나 농촌에서도 은밀한 방법으로 성 매매가 지속되었다. ..
여관, 온천, 카페, 식당, 주점 등이 모두 성 매매에 이용되고 뚜쟁이들에 의해 시골 처녀들이 도시로 팔려가는 일도 흔했는데, 성 매매의 성행은 필연적으로 성병의 확산을 가져왔고 결국 19세기까지 매독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이 시기의 성 풍속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방탕하기 그지없는 '성적 향연(Orgie)'이 성행했다는 점일 것이다. 예컨대 일부 귀족들 사이에서는 축제에서 여자 파트너를 서로 바꾼다든지, 넷 또는 여섯이 참여하는 섹스 파티를 연다든지, 채찍이나 물리적 도구, 여러 가지 향료와 최음제 등을 사용한다든지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는데, 악명 높은 사드 후작의 기행(奇行 기이할기 다닐행) 또한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전제로 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프랑스혁명 후 절대주의가 종말을 맞이하고 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노동하고 활동하는 인간, 감정, 이성, 육첵 통합된 새로운 인간"이라는 새로운 미의 이상이 생겨났다. 퇴폐적인 것보다는 건강한 아름다움이 중시되기 시작했고, 복장에서도 민주화가 이루어져 여성들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활동적이며 자연스러운 복장, 다시 말해 "옷을 입고도 벗은 것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복장을 수용하게 되었다. ..
이제 계급과 무관하게 모든 여성은 아주 억압적인 청교도 윤리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중매와 구혼 광고가 일반화되면서 결혼 또한 철저한 계산임이 백일하게 드러났는데, 이러한 추세는 부르주아지의 경우에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
성에 대한 억압적인 청교도 윤리에도 불구하고, 모든 계급에서 혼전 성 관계는 점점 늘어나 일종의 보편적 현상이 되었으며, 자본에 의한 임금 통제와 빈곤 때문에 일찍 결혼할 수 없었던 젊은 독신 노동자들은 자유연애를 통해서 욕망을 해소하려고 하게 되었다. 또 이들의 성에 대한 무지는 미혼모, 낙태 등의 심각한 사회문제를 낳았고, 결국 부르주아사회가 그토록 신성시하던 '가족의 가치와 구속력' 마저 약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172-174
('자유연애'란 문자 그대로 독립된 개인들이 자신의 욕망과 필요에 따라 사랑하는 상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것을 가리킨다.) 175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현대 부르주아사회가 이룩해낸 하나의 공로는 성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이해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음탕한 사색과 무지로부터 성을 해방시키는 첫걸음은 바로 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
형대 사회에서 일어난 성의 혁명적 변화 중 하나는 아마도 산아제한과 임신중절, 피임법 등의 발전으로 인해 점차 생식과 성애가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점일 것이다. 177
산업화된 현대사회가 인간의 성을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변화시킨 것은 물론 아니다. ..
생활고에 지친 노동자계급의 경우에는 남녀 사이에 강력한 정신적 유대를 바탕으로 하는 성애를 만들어내고 실천하기가 어렵다. 결국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찰나적인 쾌락과 육체적 욕망의 충족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만들어지며, 이는 다시 사회 전반의 성적 타락, 야수화, 성폭력 등등의 문제를 낳는다. 또 근래에는 포르노, 마약 등과 함께 변태적 성욕과 성범죄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데, 어찌 보면 문명화된 사회의 억압적 분위기와 변화 없는 일상 생활이 거꾸로 성범죄와 포르노산업을 확산시키는 주범이라고 볼 수도 있다. 179
인간의 노동력 자체가 상품화되고 이를 기초로 팔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상품이 되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이ㅔ서 유독 성의 상품화에 대해서만 울분을 떠뜨리는 것은 위선적인 태도일 수도 있다...
이미 거대한 산업이 되어 부르주아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현대의 성 산업은 도덕적 분노만으로 상대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상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매매의 부정적 효과는 너무도 분명하다. 성 매매는 사회 전체를 눈에 보이지 않게 타락시켜 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끊임없이 왜곡하고, 세상 모든 여자들을 성 매매 종사자들과 성적으로 경쟁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권력구조를 재생산하고 은폐하고 강화하는 데에도 간접적으로 이바지하는 것이다. 180
이미 18세기부터 본격화된 생물학 연구는 성에 관한 과학적 탐구의 토대를 마련해놓고 있었지만 ...
성에 대한 좀 더 체계적이고 실증적인 탐구는 19세기 후반에서부터 20세기 초까지 주로 의사들에 의해 '비정상적인' 성욕이나 성행동을 다룬 수많은 저작들.. 등이 나오면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이때부터 좀 더 엄밀한 의미의 현대적 성과학(sexology)이 시작된 것이다. ..
성 충동은 "본능적이고 자연발생적이며 절실하기 때문에 억제하기 힘든" 욕망의 힘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185-187
성과학은 성에 대한 기존의 무지와 미신을 폭로했다는 점에서, 또 성을 전통 종굔나 윤리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진지한 학문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초기의 성을 연구한 사람들은 대부분 의사들이었기 때문에, 성 연구 또한 의학적, 생리학적 관점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았다. 189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다형도착증(polymorphous perversion)이 있으며 유아에게는 양성애적(兩性愛的 두양 성품성 사랑애 과녁적) 기질이 나타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건강한 사람들도 누구나 (정상적인) 성 목적에 덧붙여 성도착으로 간주할 수 있는 행위를 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사례가 보편적으로 발견된다는 사실은 성도착이라는 말에 비난의 뜻을 포함시켜 쓰는 것이 어람나 부적절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191
현대 성 연구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변곡점을 만들어낸 것은 인간의 직접적인 성행위에 대한 실험적이고 실증적인 연구였다.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인간 성행위의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려는 의도로 시작된 이 연구들은 생식으로부터 쾌락이 분리되고, 생식보다는 쾌락이 우선시되는 세태와 맞물리면서 새로운 성 담론과 성 관념들을 만ㄷ르어내는 데 일조했다. 201
매스터스(W. Masters)와 심리학자인 그의 아내 존슨(E. Johnson) .. 1954년부터 1965년 사이에 700명이 넘는 지원자들을 실험실에 집어넣고 실제로 섹스를 하게 한 뒤, 성행위를 하는 동안 그들의 몸에 나타나는 생리적 반응들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핵심은 우리가 흔히 오르가슴이라고 부르는 현상에 대한 해명이었다. 잘 알려져있듯이 오르가슴이란 성행위를 할 때 신체적, 심리적 흥분과 쾌감이 절정에 이르는 것을 가리키는데, 매스터스와 존슨의 연구에 따르면 오르가슴은 생리적 측면에서는 척수와 성감대 주변의 신경망을 잇는 신경계의 작용, 근육의 운동, 혈류의 운동 등으로 확인될 수 있다. 두 사람은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인간의 성 반응을 다음과 같은 네 개의 단계로 구분했다. 첫 번째 단계는 흥분기로서 근육이 긴장되기 시작하고 맥박 및 호흡수가 증가하며, 남성 성기의 발기가 시작된다. 또 여성의 질 안에 분비물이 많아지고 질 안쪽의 3분의 2가 넓어지며, 음핵과 젖꼭지가 팽창하기 시작하는 반응이 일어난다. 두 번째 단계는 고조기인데, 남녀 모두 근육의 긴장이 강화되고 맥박 및 호흡이 더욱 빨라지며, 피부에는 붉은 반점이 나타나고 남성의 성기는 딱딱해진다. 또 질 바깥쪽의 3분의 1이 부풀면서 질구가 수축되고, 여성의 외부 성기는 팽창할 뿐만 아니라 색깔도 변화하며, 젖꼭지 주위와 유방 또한 커진다. 세 번째 단계로 절정기에 이르면 수 초 동안 짧고 빠르게 지속되는 리드미컬한 근육의 수축이 일어나는데, 이때 뇌파에도 변화가 오고 심지어 몇 초 동안 의식을 잃기도 한다. 또 무의식적인 표정의 변화와 함게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게 되며, 성기에 집결해 있던 피가 순간적으로 빠져나가면서 쾌감이 성기 주변으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물론 남성의 사정이 이루어지는 것도 바로 이때이다. 마지막으로 쇠퇴기 또는 회복기에서는 신체의 모든 변화가 평소와 같은 상태로 되돌아오면서 땀을 흘리게 되고, 특히 남성에게는 일정 시간 동안 성적 자극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무반응기'가 나타난다. 203-204
그렇다고 해서 오르가슴을 둘러싼 모든 논란이 종식된 것은 아니다. 오르가슴을 둘러싼 다양하고도 세세한 논점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연구가 진행 중이며, 특히 여성의 오르가슴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해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204-205
성에 대한 미셸 푸코의 연구는 그 기본성격과 방향에서 이전의 다른 어떤 성 연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새롭고 획기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전의 성 연구들은 인간의 성 자체를 직접적 탐구대상으로 삼아 소위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진행하거나, 그게 아니면 일정한 가설과 이론적, 이데올로기적 틀을 전제로 성에 대해 상당히 규범적이고 선언적인 담론들을 생산해내는 작업이었던 반면, 푸코는 그러한 연구 자체를 가능하도록 해주는 '권력의 의지'에 초점을 맞추고 연구를 통해 생산된 성 담론들에 대한 메타비판(meta는 '~다음에, ~을 넘어서서'라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메타비판이라고 하면 어떤 대상에 대한 직접적이고 1차적인 비판이 아니라, 그 대상을 설명하는 이론이나 개념들에 대한 2차적 비판, 즉 '비판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207
푸코는 죽기 직전에 쓴 세 권짜리 저작 <성의 역사>를 통해서 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
그가 사용하는 '권력'이라는 개념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푸코는 전통적인 권력 이론을 비판하면서, 과거의 권력 이론을 크게 둘로 나눴다. 그 하나는 권력을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 상품처럼 보는 '경제적 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가 여기에 속한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권력을 물질적 생산영역에 근거를 둔 계급지배의 도구로 보며, 자유주의는 권력을 상호계약에 따라 법적 효력을 갖는 권리와 의무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비경제적 이론'으로서 권력을 경제와는 무관한 억압으로 보는 입장인데, 푸코는 프로이트나 빌헬름 라이히, 마르쿠제 등이 제시했던 '성욕의 억압'이라는 가설이 그 대표적 사례라고 보았다. 그러나 푸코는 기존의 두 입장과는 달리 권력을 '힘을 향한 의지'가 서로 충돌하는 일종의 싸움으로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권력은 위에서부터 작동하는 단 하나의 단일한 힘이 아니라, 수많은 권력관계들의 그물망을 통해 아래로부터 구성되고 자기검열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수단들에 의해 지속되는 '비밀스러운 전쟁'이다. 208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것만을 뜻하지 않고, 개인의 일상과 신체에까지 스며드는 '미시권력(micropouvoir)'이기도 하다. 개개인은 언제나 권력의 억압에 의해 핍박받고 희생될 뿐이라는 소박한 '억압가설'은 힘을 잃게 된다. 209
한마디로 권력은 우리의 일상 속에 파고들어와 우리의 신체에 작용을 가하고, 또 그를 통해 우리의 주체를 구성하는 힘이다. 그리고 권력은 자신을 관철시키기 위해 진리 또는 지식을 자신의 전략에 이용하는데, 이때 권력의 전략적 행위는 일정한 담론으로서 수행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권력의 작용을 이해하기 위해 "누가 권력으 갖고 있는가?"라든가 "권력자의의도가 무엇인가?"라는 물음보다는 권력에 의해 지속적으로 우리의 언어, 신체, 행동이 예속되고, 또 주체 또한 그것에 따라 구성되는 과정에 주목해야 하며, 다양한 담론들 안에서 진리의 효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역사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210
'섹스'라는 의미에서 인간의 성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중 하나가 '남자와 여자'라는 주제인지도 모르겠다. ..
서구 언어의 섹스라는 말 또한 기본적으로는 그런 뜻이다. 우리는 섹스라고 하면 성행위를 먼저 떠올리지만, 이 낱말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의 'setum'은 '나뉜/쪼개진 것'이라는 뜻. 218
남자는 '인간의 수컷+α'이고, 반대로 여자는 '인간의 암컷+β'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일정한 생식기능에 초점을 맞춘 '암수'의 구분만으로는 인간 '남녀' 사이의 구별을 다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α'와 'β'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게 정확하게 무엇이든 간에 그 'α'와 'β'야말로 인간 남녀 사이의 경계르 가르는 기준이며, 그 경계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기보다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219
남성성이든 여성성이든 우리가 성에 부여한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역할과 특성들은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특정한 목적과 사회경제적 지배구조에 따라 사회 속에서 만들어지며 역사적으로도 끊임없이 변천한다. 226
수많은 사회적 학습과 시험을 거쳐.. 우리가 수용해온 '바람직하고 정상적인' 남성성 또는 여성성의 틀은 사실 사회적 필요에 의해서 주조되고 고안된 것이다. 227
남녀평등을 위한 수많은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고 성 차별이 하나의 사회적 죄악으로서 단죄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삶의 미시적인 영역을 세밀히 들여다보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들 또한 갓난 아이가 사내아이면 파란색 이불을 덮어주고 여자아이면 분홍색 옷을 입혀주며, 사내아이에게는 장난감 자동차와 총을 사주고 여자아이에게는 인형을 선물하는 게 보통이니까 말이다. 228
잘못된 통념과 왜곡된 교육 때문에 여성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의 일부분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여성들의 성기를 처음으로 제대로 보고 만지는 사람이 당사자가 아니라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남성인 경우가 많다는 현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99%의 남성은 자위를 하고 1%의 남성은 거짓말을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듯이 거의 대부분의 남성이 자위를 경험하는 반면, 자위를 해본 여성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게다가 남성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자위 경험을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개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을 그런 사실을 쉽게 발설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단지 남녀의 신체구조상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결과는 아니다. 이쯤에서 단지 남녀의 신체구조상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결과는 아니다. 이쯤에서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자위를 옹호하고 심지어 권장하기까지 하는 이유를 한번 생각해보자. 그들의 진정한 목표는 단순한 '성의 해방', '쾌락의 해방'에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오도된 인식과 억압된 실천을 넘어서서 자시늬 신체에 대한 자율적 통제권을 되찾는 것, 자신의 서오가 욕망과 쾌락에 대한 긍정적이고 주체적인 시각을 되찾는 것, 그것이 없이는 남성과 대등한 인격체로서의 여성 해방은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
이른바 '정상인'으로서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으며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모두 다 죽는 날까지 매일 매 순간 자신이 남자 또는 여자임을 의식하면서 거기에 맞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느껴야만 한다. 229-230
남자라고 인정받기 위해서, 사회 속에서 남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아니요, 나는 여짜 계집애'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데 왜 우리는 '진짜 사나이'라는 말에 그토록 열광하는 걸까? .. 왜 우리는 거기다 굳이 '진짜'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걸까? 생각해보라! "이거 진짜 루이뷔통 가방입니다"라는 말은 전혀 어색하지 않지만, "이거 진짜 개미입니다"는 이상하지 않은가? 진짜를 강조한다는 건 그 반대편에 가짜도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고, 그 진짜와 가짜 사이를 가로지르는 경계선들은 자연적이지 않고 인위적임을 함축하는 것이다. 233-234
남자든 여자든 개인에 따라 다양한 기질과 성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왜 남자는 반드시 이러해야 하고 여자는 저러해야 한다는 틀을 고수하려고 그토록 애쓰는 걸까?
그동안 별생각 없이 당연하게 여겨왔던 성 역할의 틀에 대해서 비판적 고찰을 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성 정체성의 탐구가 그러한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작동시키는 사회구조와 권력에 대한 탐구이며,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왜 어떤 시대에는, 또 어떤 곳에서는 이러저러한 행동이나 특성들이 남자다운 것으로 여겨지고, 또 다른 시대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특수한 방식으로 규정된 성 저체성들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그 뒤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권력이 숨어 있는가? 성 정체성을 '고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양분된 틀 속에 가둬두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이런 물음들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성 정체성의 숨겨진 의미가 무엇인지 비판적으로 숙고하도록 만들어줄 것이며,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234-235
남자와 여자는 다르며, 우리는 누구나 그 차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현상적 차이가 곧 영원불변한 본질적 차이라고 단정해버리는 태도이다. 236
동성애는 있어도 그 반대개념으로서의 이성애는 없다. 있다면 그냥 '정상적인 사람들의 사랑'이 있을 뿐! 대부분의 이성애자들은 자신들을 이성애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인간'이라고만 생각한다. 뒤집어 말해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동성애가 이성애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거울이라는 사실조차 부정하고 있다. 246
각자의 구체적인 실천적 노력이 없는 한, 번듯하고 빛나는 논리만으로 쌓아올린 이론의 탑은 현실 앞에서 사상누각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론이 무용한 것은 아니다. 기존의 틀을 깨고 바꾸는 힘은 비판적 사고에서 시작하며, 철학의 역할 또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259
속마음이야 어떠하든, 또 개인적 경험이야 어떠하든 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공식적인 담론은 이렇다.
"성욕이나 성행위는 사랑에 기반을 둬야만 하며 - 그렇지 않으면 부도덕하거나 나쁜 게 된다 - 사랑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265
몸에 대한 관점은 크게 자연주의(naturalism)와 사회구성주의(social sonstructionism)로 나눠서 생각해볼 수 있는데, 우선 자연주의는 주로 생물학과 진화론의 영향 아래서 발전해왔으며, 18세기 이후 서구의 근대 부르주아사회를 대표하는 이론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점은 기본적으로 몸이 자아와 사회를 구성하는 물질적 토대라고 본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지만, 인체의 능력과 한계까 개인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삶의 양식을 특징짓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관계까지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생물학적 결정론에 치우쳐 있다. 또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경제적 불평등 또한 생물학적인 몸에 의해 결정되거나 최소한 몸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자연주의적 관점은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자들, 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극우파,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크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반면 사회구성주의의 관점은 몸을 순전히 생물학적 현상으로서만 분석할 수 있다고 보지 않고, 몸에 부여되는 구체적인 특성과 의미, 상이한 집단들의 몸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 등이 모두 다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관점은 그동안 첨예한 대립을 보여왔고, 둘 모두 일정한 과학적 근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줄 수는 없다. 270-271
몸이 중요해지면 질수록, 또 몸이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이 되면 될수록, 몸이 지니고 있는 성적 의미의 의의도 그만큼 커지게 된다.
'몸의 혁명'이 반드시 성적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몸에 대한 생각과 태도의 변화는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성에 대한 생각과 태도의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74
우리는 무엇이 섹시하고 에로틱한가, 또는 조금 속된 표현으로 무엇이 야한가라는 물음에 별 고민 없이 대답하곤 한다. 벌거벗은 육체, 노출된 성기, 정사 장면, 한마디로 음란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미지들, 뭐 이런 것들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많은 사람들을 성적으로 자극하고 흥분시키기 때문에 분명 에로틱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들은 성적 자극을 느끼지 않으며, 또 동일한 사람이라도 경우에 따라서 자극을 받기도 하고 안 받기도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
정답은 육체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육체를 바라보는, 그리고 평가하는 우리 자신의 시선에 있다. 276
몸과 마음의 전통적 이분법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을 정당하게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큰 장애가 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육체를 기반으로 하는 성을 올바르게 성찰하는 데에도 악영향을 미쳐왔다. 우리는 육체 없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한, 육체 없는 성도 육체 없는 사랑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생물학/생리학의 한계에 갇힌 좁은 의미의 육체가 아니라, 사회적 만남을 통해서 다양한 의미를 구성해내는 육체, 그러한 만남을 통해서 친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내는 사회문화적 의미의 육체를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육체를 통해서만 고결하고 기품 잇는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들도 현실적 의의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체와 육체의 욕망을 추잡하고 음탕하며 동물적인 본느에 의해 지배되는 어떤 것, 따라서 통제하고 억압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만 보는 한, 인간의 성에 대한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성찰 또한 요원하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83
어떤 것이 사랑이고 어떤 것은 아닌지 구별할 수 있을까?
첫째, 15세의 여중생이 이웃집에 사는 20대 초반의 대학생 오빠를 짝사랑한다고 가정하자. 그 오빠는 소녀의 존재조차 잘 모르지만, 소녀는 먼발치에서 그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오빠 생각에 밤잠을 설칠 정도이다. 둘째, 바람난 유부녀가 연하의 건달에게 반한다. 두 사람은 육체적으로도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럴수록 그녀는 남편에게서는 얻지 못했던 관능적 충족을 느끼면서 더욱더 상대ㅔ게 빠져든다. 셋째, 20대의 대학생 남녀가 서로 사귄다. 주위에서도 모두들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하고,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은 평범하지만 행복한 연애를 하고 있다. 넷째, 결혼해서 20년쯤 된 부부가 있다. 솔직히 두 사람 사이에는 예전과 같은 열정이 없으며, 상대에 대한 성적 관심이나 욕망은 거의 사라졌고 성 관계도 거의 하지 않지만 그래도 친밀한 가족으로서 서로를 아끼고 필요로 한ㄷ. 다섯째,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40대의 이혼남과 남몰래 만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무척 사랑하지만,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서 자신들의 관계를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
위에 든 예 중에서 사랑인 것은, 또 사랑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것이 사랑이라면, 또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
자신으 어떤 이유를 내세워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의 경계를 나누었는가? 자신이 내세웠던 이유들을 잘 살펴본다면, 아마도 자신은 사랑에 대해 평소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다시 말해 자신이 무의식중에 믿고 받아들여왔던 사랑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드러날 것이다. 290-291
내가 진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랑을 정의하는 게, 그리고 그 정의를 실제 사례에 적용하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292
'좋은 사랑/나쁜 사랑'에 대한 가치판단은 분명 필요하고 '더 좋은 사랑'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사랑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불완전하고 부도덕한 것들까지 포함하는 현실 속의 수많은 사랑들을 잇는 그대로 고찰해야 하지 않을까? 292
우리는 평범하지만 심오한 진리에 마주치게 된다. 그건 바로 단 하나의 사랑, 즉 영어로 표현하자면 'The Love;가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종류의 사랑들, 즉 'many kinds of love'가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랑에 대해 "그건 사랑이 아니야"라든지 "그 사람은 날 진짜 사랑한 게 아니었어"라고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그건 내가 원하던 사랑 방식이 아니었어" 라든가 "그때 우리의 사랑에는 이런 점들이 부족했어"라고 반성하는 게 훨씬 더 유익하고 객관적인 판단이 아닐까? 우리는 좋은 사랑과 나쁜 사랑, 자신에게 맞는 사랑과 맞지 않는 사랑을 구별할 수도 있고, 또 실생활에서는 그런 구별이 꼭 필요하기도 하겠지만, 몇 가지 기준만으로 모든 사랑을 다 설명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 299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사랑의 유형, 또 반대로 자신이 원하는 사랑의 유형을 파악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을 위해 매우 중요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사랑 스타일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하기도 할 것이다. 302
사랑의 개념이나 유형에 대한 이론적 분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현실속의 사랑이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조건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끝없이 변해왔다는 사실이다. 302-303
"진리는 중간이 아니라 극단 속에 있는"(<풍속의 역사> 제1권 1988 10쪽. 전체 문장은 "진리는 중간이 아니라 극단 속에 있다. 사물이나 인간은 극단으로까지 과장됨으로써 클로즈업된다. 그러므로 과장이란 그 과장된 것이 좋은 면이든 나쁜 면이든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며, 각 시대의 기록인 경우 문제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요소다.")지도 모른다. 일상생활에서야 대개 극단을 피하고 중용을 취하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어떤 문제의 논리적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때때로 극단까지 밀고 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모든 것이 두루뭉술해져서, 상식적으로야 수긍할 수 있는 답이 나올지 몰라도 날카로운 논증이나 심오한 통찰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312
프로이트는 성욕의 메커니즘에 대해서도 좀 더 상세한 분석을 시도하는데,..
그에 따르면 쾌락의 목적과 생식의 목적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며, 따라서 '성적인 것'과 '생식적인 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성적 쾌감은 신체의 어떤 부분에서도, 즉 생식기가 아닌 곳에서도 느낄 수 있으며, 인간의 성욕에는 성기를 사용한 행위와 무관한 충동들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입으로 빨거나 손으로 더듬는 등의 애무행위도 성욕을 구성하는 정상적인 본능이라는 것이다. 319
우리는 성을 언제나 생식과 연결시키는 생물학주의의 고정관념 때문에, 생식능력과 무관한 성욕을 은연중에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 문제는 어디까지나 왕성한 생식능력을 갖춘 젊은이들의 문제이며, 어린아이나 노인들의 성욕, 신체적인 장애인들의 성욕, 그리고 동성애자들의 성욕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망측한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육체적인 노화가 성에 대한 욕망까지 자동으로 제거해주는 것은 아니다....
성이 모든 인간 존재의 보편적 근거이자 욕망과 행복이 기반이기도 하다면, 소외된 노인들의 성을 언제까지나 외면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권과 복지의 사각지대를 또 하나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321
"억압된 욕망과 충동이 무의식의 근원이라면 억압은 도대체 왜 일어나는가?"
자아는 자신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욕망, 충동)들을 의식으로부터 몰아내 무의식의 세계에 가둠으로써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하려고 하는데, 바로 여기서 억압이 발생한다. 따라서 억압이란 결국 자아가 성숙해지기 위해 갖가지 장애로부터 자신을 총체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방어하는 하나의 메커니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326
인간 욕망의 특성은 늘 완벽하게 충족될 수 없고, 끊임없이 변형된다는 데 있다. 349
아동심리학자들이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넓은 운동장 한편에 모여 놀고 있는 유아들의 주위에 금을 그어 표시한 뒤, "이 금 안에서만 놀고, 금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지시를 했다는 것이다. 학자들이 숨어서 지켜보니까, 몇몇 아이들이 금 주위에서 두려운 듯 눈치를 살피다가 살ㅉ가 한 발을 금 밖으로 내딛어보더란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씩 그애들을 따라 금을 넘어가게 되고, 시간이 지나자 더 멀리 밖르오 나가는 아이들도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뒤에 학자들이 되돌아와 금을 지워버리고 나서 "이제 아무 데서나 맘대로 놀아도 좋다"고 하자, 아이들은 다시 원래 놀던 운동장 한편 구석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들로 하여금 조심조심 금 밖을 넘보게 만든 욕망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 그런 욕망의 불을 지펴놓은 것일까? 운동장은 원래 유아들이 전체를 다 쓰기에는 너무 넓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한쪽 구석에서 노는 걸로도 충분했다. 쉽게 말해 객관적으로만 보면 아이들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운동장 한가운데로 나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비밀은 바로 금에 있는 게 아닐까? 움직임을 제한하는 금이 그어지는 순간, 거꾸로 그 제한을 깨뜨리려는 욕망이 생긴 게 아닐까?
우리는 흔히 금기가 욕망을 제한하고 억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욕망이 원래 있고, 그 욕망이 너무 크거나 지나쳐서 문제가 될 때, 그것을 통제하는 금기가 생겨난다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지만 할까? 350-351
프랑스의 현대사상가 조르주 바타유는 <에로티즘>에서 .. 인간 성욕의 본질은 고립된 개인들이 합리적 일상의 세계를 벗어나 어떤 신비스러운 체험을 통해 존재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얻으려는 데 있다. 그는 규율(=금기)이야말로 동물과 인간을 구별해주는 문명의 상징이며 폭력과 무질서에 반대하는 이성의 산물이지만, 거꾸로 이 규율을 의식하면서도 의도적으로 깨뜨리는 폭력만이 가장 높고 강렬한 욕망을 충족시켜준다고 주장한다. 생식이란 본래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고 낡은 세대가 죽음으로써 개체성이 부정되고 연속이 실현되는 과정인데, 이런 점에서 생식과 연결된 성은 늘 규율 위반, 폭력, 죽음, 전쟁(살해), 광란의 축제, 주연(酒宴 술주 잔치연), 희생물을 바치는 종교적 의식 등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 인간에게 공포와 경배의 대상이듯이 성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숭배와 공포, 신성함과 폭력, 욕망과 금기의 이 같은 모순적 결합은 아마도 월경, 처녀막의 파열(출혈), 출산 등과 관련된 피와 고통의 이미지, '작은 죽음'(프랑스어로 오르가슴을 '작은 죽음'이라고 부른다)이라고 불릴 만큼 합리적 일상과는 철저히 단절되는 느낌을 주는 절정의 쾌락(=오르가슴)의 이미지, 성기와 성행위에 대한 혐오감(성기는 배설기관이기도 하며 성행위 그 자체는 아주 동물적이다) 등이 복합적으로 뒤섞임으로써 생겨났을 것이다. 아무튼 바타유에 따르면 노동(=규율), 자의식(=전체로부터 분리된 개체), 수치심(=성과 관련된 자의식),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은 모두 인간만이 갖는 특성이며 사실상 같은 계기의 다른 측면들인데,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바로 그 경계선에 이런 계기가 놓여 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스스로 이 계기를 부정함으로써 더 높은 도약을 꾀하며, 이것이 바로 '에로티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354-355
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상식적 시각은 자연주의적이고 본질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관점에 매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자연주의가 뭔가? 성은 자연적인 것, 본능적인 것, 생리적인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또 본질주의 역시 성에 '고정된 불변의 본질'이 미리 주어져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럼 환원주의는 뭘까? 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어떤 '기본 요소'로 환원하여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을 말한다. 그리고 그 '기본 요소'란 결국 생물학적/생리(학)적인 메커니즘, 그러니까 생식을 위한 메커니즘을 가리킬 것이다. 이처럼 단순하게 도식화되어 있는 성 관념이 우리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한, 어떤 이론이나 과학적 발견으로도 우리의 성 의식을 업그레이드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의 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니, 진지한 성찰의 대상으로 삼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이러한 자연주의적, 본질주의적, 환원주의적 접근에서 비롯된 고정관념의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럼 우리는 왜 그토록 성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일까?..
성은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하고 중요한 문제이기에 오히려 한 발 물러서서 비판적으로 성찰하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 359-360
서구에서 '섹스'라는 말이 16세기에 처음 사용되었을 때는 단지 남녀의 성별 구분을 뜻했지만, 19세기 초부터 일련의 의미변화를 겪고 난 뒤 이 단어가 마침내 '양성 사이의 육체적 성 관계'를 뜻하게 되었다는 데에서 출발하는 게 좋겠다. 이러한 어의변화 속에는 우선 양성, 즉 남녀의 명백한 구분, 심지어 대립과 적대가 전제되어 있는데, 사실 이것이 자연주의적 오류의 첫 번째 내용이다.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일 뿐이며 그 구분은 자연에 의해 정해진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 사회적, 문화적으로 구성되는 성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다음으로 '성'이란 저항할 수 없는 본능적, 파괴적 힘이며, 특히 남성의 성기 속에서 꿈틀거리는 '생물학적 명령'이라는 가정이 있다. 현대의 성 이론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킨 프로이트마저 이런 가정을 받아들일 정도였으니, 그 위력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아무튼 우리 사회의 수많은 남성들, 아니, 심지어 여성들까지도 이런 생각에 동조하고 있으며, 그래서 예컨대 "남자는 다 늑대다"라는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남자는 늑대"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애먼 늑대들, 인간의 핍박으로 지구상에서 멸종해가는 가여운 늑대들에 대한 부당한 비난일 뿐만 아니라, 남성 전체에 대한 모욕인 동시에 거꾸로 일부 남성들에게는 면죄부를 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늑대들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끝으로 자연주의적 관점은 '피라미드처럼 위계서열을 가진 성 모델'을 만들어내며, 그 속에서 '남성이 주도하는 이성애적 삽입성교'라는 이상적 성 모델로부터 속된 말로 여러 가지 '변태'에 이르기까지 그 가치와 정당성에 따라 수직적인 성의 위계질서가 등장한다. 그리고 기존의 성과학 이론들이 많건 적건 이러한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음은 앞에서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아무튼 이러한 자연주의적 오류를 통해서, 또 그것에 의해 만들어진 위계질서를 통해서 '자연적 성'이라는 허구의 실체가 마치 하나의 객관적 대상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질서가 다 그렇듯이, 이 위계질서를 유지하고 정다화하려는 지배 권력의 개입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이는 물리적인 힘으로서 직접 작동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의식과 실천을 남몰래 조종하고 통제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이 용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지만, 가장 폭넓게 본다면 "무의식중에 형성되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적 의식"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361-362
현대에 들어와서는 성에 대한 자연주의적, 본질주의적 관점 대신에 '성정치(학)(sexual politics)'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된다. ..
쉽게 얘기해서 성을 정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며, 이 용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정치'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부터 고칠 필요가 있다. 365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잘 보여주듯이, 잘못된 정치는 때때로 평범한 개인들의 삶을 파멸시킬 수도 있고 어찌 보면 우리 일상의 모든 행복이 정치에 의해서 좌우될 수도 있는데, 우리가 정치를 향해 더럽다고 침 뱉고 돌아서면 그걸로 끝인가? 물론 정치의 문제는 현실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정치란 소수 권력자들과 관계된 일'이라는 일상적 인식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를 뜻하는 영어의 'politics' 라는 말은 본래 그리스어의 'politikos'에서 온 말이고, 이 말은 다시 도시국가나 공동체를 뜻하는 '폴리스(polis)'의 형용사형이다. 아마 독자 여러분도 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에 배웠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스파르타 같은 도시국가를 폴리스라고 불렀다는 것을! 다시 말해 '정치' 또는 '정치적'이라는 말은 본래 '국가, 공동체, 사회'와 연관되는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규정했을 때에도 그 의미는 "인간의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동물"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말한 것이지, 인간은 본래 "권력 다툼을 좋아하고 음모나 술수를 부리며 남을 지배하는 것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은 절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어떤 인간도 정치와 무관할 수 없으며, 정치적인 것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이해관계에 따라 집단을 이루어 복잡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는 늘 타인에 대한 지배와 힘의 행사, 즉 권력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은 직접적인 물리력을 통해서 관철되기도 하지마ㄴ, 대개는 제도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즉 일정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사람들의 의식을 남몰래 지배함으로써 실현된다. 367-368
지배와 이데올로기에 의한 '성의 사회적 구성'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알기 위해 여러 가지 요소들을 면밀하게 살펴봐야 하는데, 대체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영역이 고려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친족 및 가족제도다. 이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성의 가장 '자연적인 축'으로서 강조되어 왔다. 예컨대 친족 내의 '근친상간 금지'는 보편적 법칙으로 간주되어왔으며, 자연 상태에서 사회(=문화)로 이행하는 징표로 인정되어왔다. 그러나 '근친상간 금지'가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는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전혀 다르다. 또 '혈연관계'라는 것도 문화라는 틀을 통해 재해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친족이라는 개념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기보다는 경제적 요인과 사회적, 문화적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
친족 및 가족제도는 경제적 요인, 가족법, 결혼 및 이혼에 대한 규제, 사회복지와 조세정책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국가 개입에 의해 부단히 재구성되며, 이것들 모두가 성에 대한 인식과 실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개인들은 가족 안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최초로 이해하게 되며, 또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가족이야말로 성장 과정에서 우리의 성적 욕망이 최초로 조직되는 영역이기도 하므로, 친족 및 가족제도는 성의 사회적 구성에서 매우 중요한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조직들이다. 경제적 변화와 새로운 계급구조의 출현 또한 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서구에서 근대 부르주아사회가 형성된 후 새로운 연애형태와 가족형태, 성도덕 등이 등장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 산업혁명 후 사생아의 출산이 크게 늘어 났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여성이 공장에 취업함으로써 산아제한이 보편화되었으며, 1950~60년대 이후에는 기혼여성의 취업이 늘어나는 등 시대에 따라 수많은 경제적, 사회적 변화들이 일어났는데, 이 또한 사람들의 성 관념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 역시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적 토대가 성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기본적 전제와 한계만을 제공한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물학적/생리(학)적 결정론 못지 않게 위험한 경제 결정론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사회적 규제들이 있다. 사회나 문화에 따라 성생활에 대한 구체적 규제는 실제로 아주 다양한데, 그 자체가 상당한 자율성을 갖는다. 예컨대 종교, 국가의 역할, 결혼 유형을 결정하는 도덕적 규준, 이혼율과 성적 일탈의 범위등이 성에 대한 규제에 영향을 미친다. 종교적인 이유로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과 규제가 심한 이슬람권 국가에서의 성과 이혼이 매우 자유롭고 이혼율 또한 높은 서구 사회에서의 성이 같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서구 사회를 기준으로 볼 때 근대 이후의 특징적인 현상은 성에 대한 규제가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규제로부터 점차 의학, 교육, 심리학, 사회사업 및 복지 등에 의한 세속적 규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근대 이전까지는 자위를 금지하고 죄악시하는 이유가 <구약성서>에 있었지만, 19세기가 되자 의사들이 앞장서서 "자위는 건강에 해로우며 청소년들의 성장 발달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자위를 금지시킨다. 그러나 20세기가 되면 다시 건강을 들먹이는 의학적 담론이 사라지고, 그 대신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자위에 몰두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식의 새로운 이유가 제시된다. 결국 자위를 금지하고 성을 통제하려는 권력의 의지에는 변함이 없지만, 시대 변화와 과학적 지식의 발전에 따라 담론의 형식만이 바뀌었던 셈이다. 사실 사회적 규제는 일률적으로 관철되지 않는다. 예컨대 음란물에 관한 규제는 거꾸로 음란물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며, 동성애에 대한 규제는 동성애자들의 단결을 촉진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형식적 방법이 아닌 비공식적인 규제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다. ..
넷째로는 직접적인 정치적, 법적 규제들도 중요하다. 비공시적이고 관습적이던 갖가지 사회적 규제들도 특정 시기의 정치적 세력관계에 의해 정치적 의미가 강화될 때는 법률적 규제에 관한 논쟁을 낳는다. 예컨대 낙태나 동성동본 결혼, 간통죄 폐지 등을 둘러싼 논란은 단순히 성 문제에 대한 논란으로 그치는 게 아니고, 언제나 진보와 보수가 대립하는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된다. 또 서구에서 1980년대 이후 신보수주의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페미니즘이나 반(反 되돌릴반)인종주의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반격이 활발해지는 것을 보면, 성을 둘러싼 정치적 투쟁의 가능성을 잘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이 성 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태도를 취하기 어려운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
마지막으로 지적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실천이다. 사실 지배와 통제가 있는 곳에는 늘 저항도 있게 마련이므로 기존의 성 관념에 맞서는 저항문화와 저항이데올로기 또한 성의 사회적 구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려사항인 것이다. 그동안 저항문화나 저항이데올로기는 대개 공식적인 역사서술에서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여성들은 오랫동안 낙태의 권리를 위해 투쟁해왔고 동성애자들 또한 자신들의 사랑을 정당하게 인정받기 위해서 싸워왔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이러한 저항운동을 극적으로 표면화시킨 대표주자가 현대의 페미니즘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사실 노인이나 청소년, 소수민족, 유색인종 등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은 언제든 성 정치에서도 억압되고 배제되는 타자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실천적 운동 또한 앞으로의 성 관념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369-373
굳이 어려운 역사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성생활의 유형은 계급에 따라 아주 상이하다. 예컨대 킨제이의 조사에 따르면 남자들의 성 행동은 계급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또 우리나라의 몇몇 조사에서도 소득 수준이 높고 학력이 높은 계층일수록 좀 더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성적 쾌락을 추구하며 성행위 방식도 더 다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현실을 고려해볼 때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성욕이나 성 행동이 계급이나 권력과 얽혀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도 결코 우연이나 허구가 아니다. 성을 노골적으로 묘사해서 유명해진 로렌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도 상류계급의 여성이 비천한 하층 계급의 남성과 욕정을 불태우는 내용 때문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던가.
계급과 더불어 남녀의 성별 또한 오랫동안 지배와 이데올로기의 원천이었다. 굳이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남녀관계는 기본적으로 권력관계였으며, 성 차별이 많이 사라진 오늘날에도 그러하다. 남성지배 사회에서 여성의 성 정체성은 남성 권력의 산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의 성은 남성의 시각과 틀에 의해 좌우되어 왔고,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난 여성의 성에 대해서는 남성 권력의 폭력이 정당화되어왔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와 그릇은 밖으로 내돌리면 깨진다", "여자는 사흘만 패지 않으면 여우가 된다"라든가 "북어와 여자는 두들길수록 맛이 좋아진다" 등등! 375
성과 관련하여 우리가 놓치기 쉬운 또 하나의 전선은 나이에 따라 형성된다. ..
일상의 성 관념 속에 파고들어 중대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차별 중에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나이 차별(ageism)이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ageism'이라는 용어를 처음 들어볼 것이다. 그건 그만큼 우리 사회가 이러한 차별에 둔감하다는 뜻이리라. ..
우리가 차별을 차별로 의식하지 못한다는 건 차별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차별이 보편화, 일상화되어 있음을 가리킬 뿐이다. ..
내가 지금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일상의 나이 차별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서오가 관련된 나이 차별은 일상의 나이 차별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
젊을수록 더 많은 권력을 갖게 되며, 따라서 젊은이들은 성에 관한 한 당연히 더 많은 특권을 누려야 하고, 그러한 세태에 눈살을 찌푸리며 뒤에서 투덜댈지언정 나이든 기성세대 또한 그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지는 못한다. 아니, 도전하기는 커녕 어떻게 해서든 젊은이들 틈에 끼여 그 권력의 혜택을 조금이라도 나눠가지려고 발버등을 치기도 한다. ..
법으로 정해졌든 사회통념으로 정해졌든 간에 일정한 나이에 도달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성 정치의 전선에서 철저하게 배제되는 또 다른 타자일 뿐이다. ..
우리는 이런 식의 나이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근대의 성 담론은 결국 아동 학대의 사회, 노인 유기의 사회로서의 자본주의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근대 이후 아동기, 사춘기 등등의 발견을 통해 나이별로 위계서열화된 성의 질서는 이제 급기야 결혼적령기, 가임기, 갱년기, 폐경기 등등의 사회학적, 생리학적 용어들을 통해 더욱 세분화되었으며, 인간의 생애 전체와 성생활 자체가 바로 이러한 분할 선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376-378
마지막으로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하지만 인종 또한 중요한 전선이다.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성 모델은 "백인=문명인/유색인=야만인"이라는 도식에 기초해 있다. 유색인종(=비유럽인들)은 아직 덜 진화된 인간들로 그만큼 자연에 가깝고, 따라서 그들의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성은 더 위험하고 파괴적이라는 것이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논리였다. 378
한국에서 일하는 수많은 제3세계 빈국 출신의 노동자들이 엄청난 차별과 박해를 받고 있는데도, 정작 우리 사회의 주류 언론은 무슨 사건 하나만 터지면 그들을 잠재적으로 위험한 성폭력 범죄자들로 매도하지 않는가? 이처럼 유색인종의 외국인이라면 질색을 하는 한국의 젊은 여성들도 백인남성들에게는 영어로 말 한마디 붙여보려고 온갖 아양을 다 떨며, 또 그걸 잘 알고 악용하는 일부 건달 같은 백인남성들은 "한국이야말로 백인남자를 위한 성의 천국"이라고 떠벌인다 하지 않는가? 379-380
사실 성정치는 근대 세계가 안고 있는 사회적 적대와 모순의 그물망 전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을 하나의 단일한 실체로 보려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늘 상기해야 한다. 성의 사회적 구성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이며, 우리는 지금도 계속 상연되고 있는 무대의 배우이자 관객이며 주체이자 대상인 것이다. 381
에필로그
일상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건 결국 공염불 아니면 기껏해야 지적 유희로 끝날 것.
어찌 보면 실천을 통해서 뒷받침되지 않는 한, 이 책의 내용을 진실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성에 관해서 어떤 것을 용인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의 생각(또는 태도)은 대체로 그것에 대한 자신의 실천적 경험 여부와 비례한다." 387
실천을 많이 해야 하는 셈이다.
물론 실천이 중요하다고 해서 돈키호테 식으로 일단 뭐든지 저질러놓고 나중에 생각해도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성을 둘러싼 새로운 실천에 시동을 걸려면, 먼저 새로운 '성 담론'이라는 연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선인식->후실천'이라는 기계적 도식이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삶의 모든 과정이 그렇듯이 여기서도 진정한 변화는 '인식과 실천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실현되기 때문이다. 388-389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이라고 해서 다 자기 생각이 아니며,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해서 다 자기 말이 아니라는 것을! 대지를 적시는 빗방울처럼 어느샌가 내 의식 속으로 스며들어와 나를 지배하게 된 수많은 관념과 이데올로기들은 마치 복화술사가 인형을 이용해 자기 목소리를 전달하듯이 나의 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주체성과 나의 생각과 나의 말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
진정한 주체성은 비판적 성찰을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것은 소크라테스 이래로 철학의 상식이다. 개개인 모두가 어떻게든 남들과 다르게 튀어보려고 앴는 현실, 하지만 개성 있는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에는 목을 매면서도 개성의 바탕이 되어야 할 진정한 주체성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오늘날의 현실은 역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슬픈 회화가 아닐까?
이처럼 기존의 성 담론들이 우리 자신의 혼과 정성이 담긴 창작품이 아니라 사회가 우리 머릿속에 심어놓은 칩이라고 해도, 어쨌든 개인의 성적 실천은 그 담론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391-392
우리는 기존의 성 윤리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재고해봐야 한다. 철학자들의 이상에 따르자면 본래 윤리라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함을 향해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일 뿐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 속에서 윤리는 반드시 그런 긍정적 기능만을 해온 것은 아니다. 윤리는 때때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면서 기존의 지배질서만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393
기존 성 문화의 문제점부터 짚어봐야 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현재 우리 사회의 성 문화에서 가장 큰 문제는 첫째로, 관능성 즉 단순한 감각적 쾌락과 넓은 의미의 섹슈얼리티를 혼동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라는 점 아닐까? 남녀관계에 대해 미국 학자들은 이른바 "find(상대를 찾고), feel(상대와 정서적 교감을 나누고), fuck(상대와 섹스하고) & forget(상대와 헤어진다)"이라는 도식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쉽게 말해 여기서 'feel'이 생략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둘째로, 성을 남성 중심적, 이성애 중심적, 성기 중심적, 성교 중심적으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섹스란 남자가 자신의 성기를 여성 성기 안에 삽입하여 사정에 이르는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인 셈이다. 이런 시각은 예컨대 성폭행을 다룰 때에도 나타나며, 또 포르노에서는 한층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강간사건의 경우 현행 형법은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질 속에 들어갔느냐 들어가지 않았느냐를 기준으로 범죄 여부를 가리기 때문이다. 또 포르노의 경우는 어떤가? 여성을 위한 포르노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이론적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포르노는 남성의 시각에서 남성의 관행적인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포르노에서는 대개 남성의 행위와 욕망과 시선이 성 전체를 지배하는 힘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컨대 대부분의 포르노에서는 카메라의 시선이 철저하게 여배우에게 맞춰져 있어서 여배우의 얼굴, 몸, 성기는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상대인 남성의 모습은 발기된 성기를 제외하면 그다지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또 포르노의 끝부분에서는 남성이 여성의 몸(안이든 밖이든) 또는 얼굴이나 입 안에 사정함으로써 성행위가 종료되었음을 보여주는데, 이 또한 '남성의 사정=만족=섹스의 목표 달성'이라는 도식을 시각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포르노의 내용은 대개 남성의 발기로 시작하여 성기의 삽입과 더불어 이어지는 끝없는 동작에서 남성의 질외 사정으로 끝이 난다. 남성이 쾌감에 도달하면 성행위는 종료된다. 여성의 오르가슴은 가장되고 은폐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여성의 쾌락을 무시하는 것이며, 남성의 관점에서 재현된 성행위 과정일 뿐이다.'(이나영 <포르노, 섹슈얼리티, 그리고 페미니즘> 1999 148쪽) ...
셋째로, 우리 사회에서는 앞서 말한 성의 다양한 기능들을 대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을 생식수단으로만 보거나 단순한 관능적 쾌락의 수단으로만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남성의 경우에는 관능적 쾌락으로서의 성이 당연한 것이지만, 아직도 여성이 적극적으로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여성의 성이나 소수자들의 성에 대한 무지가 널리 퍼져 있으며, 이것은 두 번째로 지적한 남성 중심적, 이성애 중심적, 성교 중심적 성의 이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 예로 여성이 성적 쾌감을 느끼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신체기관은 음핵인데도 불구하고, "섹스란 성기의 삽입"이라는 고정관념에 매달리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여성의 질을 음핵보다 더 중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또 동성애자라면 무조건 항문성교를 할 것이라는 편견도 '섹스=삽입'이라는 도식에 매달리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398-401
성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 즉 성을 '신비하고 성스러운 것'과 '더럽고 범죄적인 것'으로 나누는 사고방식을 극복해야 한다.
둘째로, 모든 윤리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상대적임을 인정해야 하며, 성을 윤리적 차원에서만 보는 편헙한 시각도 지양해야 한다. 셋째로, 어떤 행위를 판단할 때 그 행위의 관습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 법적 측면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구체적인 규범의 목록들은 개인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인간 해방을 지향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위와 같은 변화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베리오티는 성도덕을 반드시 피해야 할 오류들로서 환원주의의 오류, 추상의 오류, 초역사주의의 오류, 고립주의의 오류, 경직성의 오류 등을 거론하고 있다.) 405
어른들이여! 당신의 첫 섹스는 어땠나? 그렇게 심사숙고하고, 그렇게 또렷또렷 맨 정신에, 그렇게 이성적으로, 그렇게 자율적 판단과 엄밀한 계산에 따라서 이루어졌나? 그렇게 도덕적으로도 완벽했고, 마른 대낮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하루 온종일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올 만큼 당당하고 깨끗했나? 그게 아니라면 제발 철딱서니 없는 어린것들이 뭘 알아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비난부터 하지는 마라. 나이가 스물이 됐든 스물다섯이 됐든 실제로 첫 섹스를 하기 전까지는 그 민망한 문제에 관한한 우리 모두 철딱서니 없고 경험도 없는 무지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실제 경험이 없는데 나이만 먹으면 저절로 섹스에 관해 철이 드나? 아마 사람 보는 눈이나 계산하는 능력은 좀 나아질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 괜히 나이 가지고 폼 잡을 필요는 없다. 오케이?
그럼 다시 물어보자.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합의하에 하는 섹스가 범죄인가? 그래서 그 오린 나이에 감히 섹스를 한 발랑 까진 년들은 마치 성범죄자에게 중형을 내리듯이 배움의 터전으로부터도 가차 없이 추방해야만 하는가? 아니, 범죄가 아니라면 섹스는 부도덕한 행위인가? ..
분명히 말하거니와 도덕이라 이름 붙여진 갖가지 사회적 편견과 시대착오적인 관행, 기성세대의 협박 때문에 생겨난 공포 등등을 제거하고 나면, 섹스 그 자체는 범죄도 아니고 부도덕도 아니다. 409-410
지금 우리가 청소년들의 섹스를 금하는 이유는 그야말로 실용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적, 경제적 이유로 인해 사랑해도 함께 살 수 없고 애를 낳아 키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기성세대는 서로 사랑하는 10대 후반의 젊은이들이 자유롭고 섹스하면서 살아갈 수 없도록 제도적,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존재들이기도 하다. 왜 이기적이냐고? 입만 열면 윤리 타령을 늘어놓는 그들은 그 섹스를 맘껏(때로는 과도하게!) 즐기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사실 그들이 섹스를 즐길 수 있는 권리는 그들의 도덕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권력에서 나올 뿐이다. 411
이슬람교에서는 인간의 행위를 크게 다섯 가지 범주로 나눠서 설명한다고 한다.
첫째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즉 절대적 의무다. 예컨대 신자라면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둘째는, 하면 좋지만 안 해도 죄가 되지는 않는 것, 즉 권장사항이지만 의무는 아닌 것들이다. 예컨대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셋째는,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해야 하는 것도 아닌 일들, 다시 말해 의무나 금지와는 무관한 일들이다. 아마 밥 먹고 잠자는 등 우리 일상생활의 대부분의 행위들이 그렇지 않을까?
넷째는, 안 하는 게 더 좋지만, 한다고 해서 죄가 되지는 않는 것들이다. 예컨대 담배를 푸이는 일 등등.
마지막 다섯째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예컨대 부녀자를 폭행하는 일 등이 이에 속한다.
난 이 구분법이 진정한 의미에서 상당히 '실용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구분법을 빌려다 쓰자면, 몸과 마음이 어느 정도 성숙한 10대 후반 청소년들의 섹스는 "권장할 일은 아니지만, 또는 안 하는 게 더 낫겠지만, 한다고 해서 죄가 되지는 않는 일"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사회적, 경제적 여건들을 고려해볼 때, 현재의 한국 사회는 분명 10대 청소년들에게 자유로운 섹스를 권장할 만한 사회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섹스를 범죄나 부도덕으로 여겨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도 않는다. 412
"성에 대해 좀 더 당당하면서도 동시에 담담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