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에 해당되는 글 45건

  1. 2019.01.09 욕망의 아내 - 데이비드 J. 레이 황소걸음 2011 03180
  2. 2016.10.20 폭력이란 무엇인가(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 슬라보예 지젝 난장이 2011 03100
  3. 2016.09.08 왜 결혼과 섹스는 충돌할까 - 크리스토퍼 라이언 카실다 제타 행복포럼 2011 03180
  4. 2016.08.25 책은 도끼다 - 박웅현 북하우스 2011 03810
  5. 2016.08.04 7년의 밤 - 정유정 은행나무 2011 03810
  6. 2016.07.04 상처 떠나보내기 - 이승욱 예담 2011 03180
  7. 2016.04.14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한길사 (and 펭귄클래식) 2011 94160
  8. 2016.02.22 니체(건강한 삶을 위한 긍정의 철학을 기획하다) - 백승영 한길사 2011 04100
  9. 2015.11.12 소송 - 프란츠 카프카 열린책들 2011 03850
  10. 2015.09.30 여행자 예찬 - 프란츠 카프카 하늘연못 2011 03850
  11. 2015.07.06 책과 집 - 데이미언 톰슨 오브제 2011 13980
  12. 2014.01.20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갈라파고스 2011 03300
  13. 2013.01.02 거장처럼 써라 (下) - 윌리엄 케인 이론과실천 2011 03800
  14. 2012.12.26 거장처럼 써라 (上) - 윌리엄 케인 이론과실천 2011 03800
  15. 2012.12.21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여행의 기술 - 카트린 파시히, 알렉스 숄츠 김영사 2011 03800
  16. 2012.12.02 여행, 혹은 여행처럼 - 정혜윤 난다 2011 03810
  17. 2012.11.29 하버드 글쓰기 강의(下) - 바버라 베이그 에쎄 2011 03800
  18. 2012.11.23 굿빠이 여행자 마을(GoodPAI Traveler's Village) - 이민우 북노마드 2011 03810
  19. 2012.11.20 나한테 미안해서 비행기를 탔다 - 오영욱 달 2011 03810 1
  20. 2012.11.17 1만 시간 동안의 아시아II - 박민우 플럼북스 2011 04810
  21. 2012.10.24 사바이 인도차이나 - 정숙영 부키 2011 03810
  22. 2012.10.09 인도에 관한 열일곱가지 루머 - 이상문 도서출판사람들 2011 03810
  23. 2012.10.08 한권으로 만나는 인도 - 이병욱 너울북 2011 03910
  24. 2012.09.12 불온한 신화읽기 - 박효엽 글항아리 2011 03100
  25. 2012.09.03 떠나라, 외로움도 그리움도 어쩔 수 없다면 - 이하람 중앙books 2011 13910
  26. 2012.07.12 두근 두근 내인생 - 김애란 창비 2011 03810
  27. 2012.03.28 소셜 애니멀 - 데이비드 브룩스
  28. 2012.03.27 소셜 애니멀(Social Animal) - 데이비드 브룩스 흐름출판 2011 03320
  29. 2012.02.23 분노하라(INDIGNEZ-VOUS!) - 스테판 에셀 돌베개 2011 03340 1
  30. 2012.02.22 너를 사랑한다는 건(Kiss & Tell) -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2011 03840 1

머리말


나는 어디서, 어떻게, 왜 여자의 성이 우리 사회와 역사에서 제약 받기 시작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14


나는 '막간 이야기1'에 소개한 앤드루의 선택을 따르기로 햇다. 그는 자기와 아내의 행위를 '나누기(sharing)'라고 정의했다. 스윙어들은 '아내 교환하기(wife swapping)'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내가 물건처럼 다른 남자와 바꿔 쓸 수 있는 교환물이라는 암시 때문이다. 이런 대상화의 요소는 '나누기'라는 말에도 있지만, 이 말에는 협조, 연합, 관계, 의사소통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고 핵심적이다.  17



1 새와 뿔


오늘날 점점 더 많은 부부들이 아내가 다른 남자들과 성관계를 탐하는 것을 부부의 성 활동의 중심에 두는 핫와이핑(hotwifing:남편의 허락 하에 아내가 다른 남자들과 성관계하는 일)이나 쿠콜드리(cuckoldry:유부녀의 서방질) 생활 방식을 추구한다.  25


'오쟁이 진 남자'란 뜻이 있는 쿠콜드(cuckold)는 뻐꾸기의 습성에서 유래한 말이다. 일부 뻐꾸기류 새들은 암컷이 몰래 다른 새 둥지에 알을 낳는 생식 전략을 발전시켰고, 이런 일을 당한 새는 자기도 모르게 뻐꾸기 새끼를 제 자식으로 알고 키워야 했다.  26


뻐꾸기류가 모두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탁란'을 하는 것은 아니고, 일부 종만 자기 알을 알이 비슷하게 생긴 다른 둥지에 낳는 속임수를 쓴다. 뻐꾸기는 상당히 간교한 새로, 자기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는 습성이 있다. 기묘하게도 꺼꾸기는 일자일웅이며, 장기간 한짝과 살아간다.  27


많은 문화와 언어에서 자신도 모르게 다른 남자의 자식을 키우는 불행한 남자를 묘사하는 말을 찾을 수 있다. 영어에서는 '쿠콜드'고, 이는 뻐꾸기 울음소리 '쿠쿠'에서 유래했다. 중국어로는 그런 남자를 '따이 뤼마오즈'라 하고, 이는 '초록색 모자를 쓰다'라는 뜻이다. ..

스페인어로는 '카브론(cabron)'이 사내다움을 잃은 염소 같은 남자를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은 자기 아내가 부정을 저지른 것을 알지만 그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남자, 그러니까 남자답지 못한 남자, 고환이 없는 남자를 일컫는다. 중세 영어 '위톨(witol)'이란 말도 이와 비슷한 의미로, 아내의 부정을 알면서도 내버려두는 오쟁이 진 남자를 나타낸다. 이 말은 자기가 오쟁이 진 남자라는 사실을 안다는 '위팅 쿠콜드(witting cuckold)'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31-32


쿠콜드와 핫와이프 사회에서 현재 쓰이는 쿠콜드의 의미는 '아내가 혼외정사 하는 것을 알고, 사실상 그런 일을 환영하는 남자'를 뜻한다.  32


브라지 ㄹ연구자 클라우디아 폰세카(Claudia Fonseca)는 라틴아메리카의 특징적인 남성 우월주의 마치스모(machismo)가 오쟁이 진 남자가 된느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를 만든다는 생각은 사실과 크게 다르다고 했다. 브라질 문화에서는 여성의 원형이 두 가지 이미지로 나뉘는 경우가 많다. 훌륭한 어머니이자 아내 '산타(santa)'와 난잡하고 성적으로 탐욕스러운 여자 '피라니아(piranha)'다. 그러나 폰세카는 노동자 계층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불륜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살아가는' 여자한테 다른 이름도 붙는다는 것을 알았다. 교활한 여자라는 의미의 '말란드라(malandra)'다. 이런 여자들은 자기 남편을 순종하는 오쟁이 진 남자 '코르노 만수(corno manso)'로 만든다.  32-33



막간 이야기1 앤드루와 마리


내가 만나고 인터뷰한 모든 부부들이 나를 놀라게 했고, 그 놀라움은 유쾌한 것인 경우가 많다... 나는 광란, 통제 불능의 성행위, 난교와 같은 '극단적인 성행위'를 발견할 것이라 믿으면서 이런 생활 방식에 접근했다. 그러나 내가 반복해서 본 것은 자기의 삶을 세심하고 사려 깊게 성찰하고, 사회에서 어떻게 하라고 정해준 방식이 아니라 자기들이 찾아낸 방식에 따라 행동하기로 선택하고, 그것을 자기의 결혼 생활과 성에 적용한 부부들이다.  55




2 일부일처제와 결혼


일부 인류학자들은 결혼과 일부일처제가 인간 진화의 역사와 인간 사회에 매우 유용하고 보호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말한다. 한 남자에 한 여자씩, 한 쌍의 결합이 없었다면 남자들이 여자를 놓고 싸워대면서 폭력적이고 목숨을 건 갈등이 끊이지 않았으리라는 얘기다. 경제적으로 더 성공적이고 권력과 자원을 더 많이 쥔 남자들 사이에서 일부다처제가 현저히 많았다는 근거로 볼 때 일부다처제의 기원도 분명 여기에 있었다. 사회가 일부일처의 한 쌍을 지향하면서 부족 간의 싸움은 물론 부족 내부의 갈등이 줄었고, 여자를 놓고 벌이는 쌍무도 줄었으며, 반면 부족들과 부족 내의 부부들이 자원을 공평하게 나누는 일은 늘었다. 여자를 놓고 싸우는 시간이 줄면서 부족은 더 많은 시간을 협동해서 농사짓고 사냥하는 데 쓸 수 있었다. 여자들도 다른 남자들에게 강간이나 공격을 당하는 일이 줄고, 안전뿐만 아니라 음식과 자원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일부일처제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60


1878년 미국 대법원은 일부다처제를 금지하는 법이 합헌이라고 판결했고, 더 나아가 일부일처제는 민주주의를 보전하는 데 중대한 문제라고 했다.  83


배우자가 결혼에 따르는 성적인 기대를 위반하지 않았어도 이혼율이 60&가 넘는 경우가 있어 일부일처제는 전보다 그 의미가 훨씬 덜해졌다. 이제 일정 기간마다 배우자를 바꾸는 결혼 형태인 연속 단혼(serial monogamy)이 더 적당한 용어일지도 모른다. 이 결혼 형태에서는 주어진 관계에 있는 동안은 일부일처를 유지하되, 그 관계가 끝나면 성적인 것이든 다른 것이든 다른 사람과 관계로 옮겨간다.  84-85


겉보기에는 일부일처 관계가 효과적인데도 역사는 성적이고 정서적인 정절을 지켜야 한느 일부일처제의 이상이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

일부일처제는 원래 한 번에 한 사람과 결혼하는 데 쓰이는 말이었지만, 독점적으로 성관계하는 커플에게 적용되면서 지속적으로 잘못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인류학자 헬렌 피셔(Helen Fisher)가 주장한 것으로, 두 사람 사이의 성적인 정절은 일부일처제의 정의에 필요한 사항이 아니다... 일부일처제의 기대나 요구 사항을 진정으로 위반하는 것은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집단 결혼뿐이다.  85-86




3 여자, 아내 그리고 여자의 성


그리스 신화를 보면 제우스와 헤라가 남자와 여자 중에 누가 더 성적인 쾌감을 많이 얻는지 말다툼을 벌인다. 둘은 그 답을 알아내기 위해 신의 벌을 받아 7년 동안 여자로 산 티레시아스를 찾아간다. 그는 여자로 사는 동안 매우 유명한 창녀로 난잡한 생활을 했다. 티레시아스는 그 질문에 "사랑의 쾌감의 합을 10이라고 치면 여자가 9를 갖고, 남자는 1만 갖는다"고 대답했다. 이슬람교 시아파 창시자도 "성적인 쾌감의 9는 여자에게 돌아가고, 나머지 1만 남자 몫이다"라고 티레시아스와 비슷한 말을 했다. 힌두교 전설에서는 어느 왕이 신의 분노를 사 여자로 변했다. 마침내 용서를 받은 왕은 남자로 돌아갈 기회를 얻었지만, 여자로 살면서 더 큰 쾌감을 맛본 왕은 여왕으로, 적어도 여자로 남겠다고 선택했다. 이슬람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하고, 구약성경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하는 고대의 경구에서는 이 세상에 탐욕스러운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했다. 땅(혹은 사막), 무덤(혹은 지옥), 여자의 음문이다.  110-111


역사적으로 성은 남자들이 원하는 것이자, 여자가 통제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상품'이었으므로 여자들은 성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여자를 벌하기 시작했다.  117


앨프리드 킨제이(Alfred Kinsey)는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성 연구자로, 자기 침실을 비롯하여 미국 전역의 침실에 성탐색의 문을 열게 했다. 워내 곤충학자였던 킨제이는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으로 성에 관심이 많았다. 킨제이는 성과학에 관심을 쏟기 전에도 노출증이 있었고, 나체주의 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고 자서전에 썼다. 그의 대학원생들은 성 경험과 자위행위 습관에 관해 킨제이와 긴 대화를 했고, 그런 대화에서 킨제이는 다른 사람들과 자기의 개인적인 경험도 공공연히 나누었다.

킨제이가 수행한 성 연구는 그가 아내 맥과 함께 한 성의 탐색으로 이어졌다. 전기 작가 제임스 존스(James Jones)에 따르면 킨제이는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자신의 동성애적인 충동과 마조히즘적이고 노출증적인 충동도 탐구했다. 킨제이는 자기 주변에서 모은 연구원들에게 성적으로 자유로운 환경을 허용했고, 사실상 이런 관행을 격려했다. 킨제이는 자기 연구원들과 친구들 범주에서는 성행위가 자유롭고, 남성 동성애도 허용되며, 아내들도 나눌 수 있다고 선포했다. 아내들 역시 자기만의 성적인 탐색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추구할 수 있었다. 킨제이의 성 유토피아는 남성 우월주의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성의 자유와 선택을 여자에게도 확대했다. 그러나 외도 문제가 생길 때는 그런 관계가 용납되거나 허용될 수 있는 문제인지 결정하기 위해 조언을 구하도록 했다.

직원의 성관계가 다른 연구원의 부부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킨제이가 그 직원에게 다른 사람의 아내와 성관계를 중지하도록 지시할 때는 명백하게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킨제이가 아내 맥을 수많은 남자들과 기꺼이 나눌 때는 부정적인 영향이 없어 보였다. 많은 연구원과 가족, 친구들이 킨제이의 아내와 섹스 했다고 말했고, 킨제이도 그 자리에 함게 하기도 했으며, 맥 혼자만 있는 경우도 있었다. 킨제이의 제자이자 가끔씩 동성연애 상대가 되기도 했던 클라이드 마틴(Clyde Martin)이 킨제이에게 맥과 섹스 해도 되는지 물었을 때도 킨제이는 그런 일은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거리끼거나 마다할 일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킨제이의 42세 된 아내는 남편의 격려 아래 젊은 클라이드의 성교육 임무를 지고, 자기가 킨제이와 함께 탐색해서 얻은 성적인 레퍼토리를 전수했다. 존스에 따르면 킨제이가 기꺼이 아내를 나누고자 한 이유는 남자들, 특히 클라이드에게 성적으로 끌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킨제이는 다락방에 있는 개인 스튜디오에서 맥이 다른 남자들과 섹스 하는 장면을 필름에 담기도 했다. 맥은 킨제이의 지휘 아래 많은 자원자와 동료 연구자들과 섹스 했다. 맥과 다른 사람들(킨제이 자신을 포함하여)의 자위행위를 필름에 담기도 했고, 킨제이의 지시 아래 집단 성행위뿐만 아니라 이성 커플과 동성 커플의 성행위도 필름에 담았다. 킨제이는 생리적인 문제로 발기부전을 겪어 그가 등장하는 필름은 거의 없다고 한다(나주엥 킨제이 내부자 가운데 한 남자는 킨제이에게 이런 생리적인 문제가 있어 아내의 욕구를 만족시필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섹스 파트너를 주선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 맥은 다락방의 성적인 만남에 행위자로 참여하지 않을 때도 안주인으로서 음료수를 대접하며 남편의 연구를 도왔다.

여자들과 성에 관해 면담한 결과를 보고하는 글을 보면 킨제이는 여성의 성에 대한 개인적이고 직업적인 개념화에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자의 성적 능력이 남자보다 덜하다는 빅토리아시대적인 사고를 했다. 연구 과정에서 그는 여자의 성에 관한 연구는 여성의 전면적인 노출에 대한 사회적인 압력으로 방해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연구와 면담 절차에 이런 어려움을 반영했다. 킨제이는 분명 성의 해방과 간련하여 사회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의도가 있었다. 여자의 성욕이 '덜하다'는 견해는 킨제이가 저작과 연구에서 변혁을 이루고자 노력한 견해와 대조적이다. 그러나 킨제이는 여자들이 엄청난 성적 능력과 욕구가 있다는 보고를 접해도 남자의 성과 비교해 여자의 성이 억제되었다는 견해를 바꾸지 않았다. 킨제이는 자기 표본 내의 여자들은 결혼 전후에 남자보다 오르가슴이나 성적인 생활과 성관계에도 오르가슴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보고했다.

킨제이는 남자의 성과 함께 여자의 혼외정사에 관해서도 광범위하게 보고했다. 그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혼외 성관계에 연루되는 일이 많다고 보았다. 킨제이에 따르면, 많은 경우 혼외정사가 부정적인 결과에 이르지 않았다. 키넺이는 외도가 갈등과 문제를 야기하더라도 그런 결과를 피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여자가 혼외의 성적 교류를 추구하는 이유가 애정 문제뿐만 아니라 결혼 생활의 권태와 성적 불만족, 친밀한 우정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자의 혼외정사가 가끔 결혼 내의 성관계를 개선하거나 증가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킨제이는 내적으로 강인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부부 관계를 지키기 위해 혼외정사는 비밀에 부치는 것이 좋다고 했다.

킨제이는 부부가 모두 내적으로 강인하고, 아내가 남편의 전적인 동의와 인지 아래 혼외정서를 한 부부들과 면담했다. 그 결과 킨제이는 일부 남자들이 아내에게 밖으로 나가 섹스하라고 격려했고, 남편들도 혼외의 성행위(가끔은 동성애)를 탐했으며, 많은 남자들이 아내에게 성적인 만족을 맛볼 기회를 주기 위해 이런 일을 했다고 답했다. 존스는 킨제이가 허용된 여자의 혼외정사에 관해 설명할 때 그의 묘사와 설명을 인용하면서, 킨제이가 아내 맥을 다른 남자들과 나누는 것을 좋아한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고 했다.

따라서 아내 나누기에 대한 킨제이의 설명에는 자기 자신의 동기가 명백하게 반영되었다. 그 하나는 아내가 성적 만족감을 누릴 범위가 남편인 자신에게 제한되지 않도록 하자는 이타적인 요구고, 다른 동기는 자신이 혼외의 성적 교류를 하는 데, 특히 다른 남자들과 성적 교류에 제약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킨제이가 관음증을 통해, 자기 아내를 함께 나누는 남자들과 직접적인 성행위를 통해 자신의 동성애적인 성향을 탐색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기도 했다. 아내 나누기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은 무익하다고 한 킨제이의 주장에는 나도 같은 생각이다. 킨제이 부부의 경우에서 보듯 한 부부 내에서도 다른 남자와 아내의 성을 나누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129-134


1960년대, 성 연구자 윌리엄 마스터스(William Masters)와 버지니아 존슨(Virginia Johnson)은 킨제이가 남긴 것을 취해 미주리 세인트루이스에서 선도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이들은 성행위의 기교에 관해서 많은 매춘부들과 면담한 뒤 단순한 인터뷰를 넘어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 대상자로 남자와 여자를 보집하여 성적인 자극, 삽입, 오르가슴의 생리학적인 요소를 측정하고 분석하고 기록했다. 연구 결과 여자가 오르가슴을 느끼기 위해서는 음핵을 자극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이 연구는 남자와 여자의 성적인 반응의 핵심적인 차이를 처음 경험적으로 기록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마스터스와 존슨의 연구에서 남자는 오르가슴 후에 신체적으로 다시 발기나 오르가슴을 성취할 수 없는 불응기를 보인 반면, 여자는 그런 제한을 보이지 않았다. 셔피(Sherfey)는 여기서 더 나아가 여자는 성적인 자극이 지속되면 오르가슴도 증가되는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생리적인 수주에서 여자의 성적 능력이 남자보다 높고, 이런 능력은 자연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기나긴 천년 왕국 동안 여자의 성적 능력을 두려워하고 거부한 것과 대조적으로 셔피는 여자의 성적인 반응을 천부적으로 지칠 줄 모르는 것으로 보고, 그 한없는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  135-136


마스터스와 존슨의 연구 덕분에 음핵, 음핵 오르가슴, 멀티오르가슴을 느끼는 여자가 모두 건강한 것으로 수용되지는 못한다 해도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38


성 혁명의 파고는 1960년대에 여성용 피임약이 나오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

많은 여자들이 사랑이나 일부일처, 혼약에 대한 요구 없이 성을 즐기려는 욕망을 인정하고, 임신에서 안전해지면서 병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여자의 성에 대한 정의도 다시 한번 바뀌었다.  139-140


<성의 침묵(The erotic silence american wife)>의 저자 델마 헤인(Dalma Heyn)은 남자의 외도는 보통 충동으로 촉발된 생물학적이고 긴급한 욕구인 반면, 여자의 부정은 더 계산되고 더 정서적인 원인에서 나오며, 여자 본인에게나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음을 암시한다고 했다. ..

헤인은 여자가 성적인 이유와 신체적인 친밀함에서 오는 자극적인 기분을 위해 외도한다는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으며, 일부일처제만 중요한 여성의 자질인 듯 다뤄졌다고 한다.  147-148


최근 연구는 여자들이 혼외의 섹스 파트너를 두는 빈도가 젊은 여성들 사이에 높아지고 있고, 그 정도에 있어서도 남녀 간의 차이가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고 했다.  148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더 성적으로 분방할 역량이 잇다. 킨제이, 피셔 그리고 다른 유명한 인류학자와 성 연구자들이 사회가 여자의 난교를 처벌하거나 금하지 않았다면 여자가 남자보다 성적으로 훨씬 더 문란하고 섹스 파트너가 많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자는 사정 후 불응기가 있어 성적 활동 능력을 잃는다. 하지만 여자에게는 그런 휴지기가 없고 오르가슴을 여러 차례 느낄 수 있으며, 성적 수용력이 거의 무한정하다. 마스터스와 존슨의 주장에 따르면 여자는 한 번에 50번까지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다. .. 전문가들은 남자의 사정이 언제나 오르가슴을 의미하지 않고 일부 남자들은 사정 없이도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다는 데 주목한다. 그런데도 여자들이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다는 데 주목한다. 그런데도 여자들이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남자를 훨씬 능가해서 모터스쿠터가 페라리를 쫓는 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153


역사적으로 부인에게 성의 자유가 허락된 경우는 부를 통제할 수 있거나, 정치적인 권력이 있거나, 경제적으로 독립했을 때다.  155



막간 이야기3 미셸과 크리스


나는 프린세스라는 별명을 사용하는 텍사스 의사와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그녀도 핫와이프다. 프린세스는 10대 시절에 부모님이 다른 사람들과 섹스 하는 사진과 비디오를 보았다. 그녀는 비디오 화면에 어머니가 다른 남자들과 섹스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고 섹스는 결혼할 때까지 기다려야하는 것이라거나 사랑할 때만 하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쓰레기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몇 주 후 프린세스는 이웃 소년과 처음으로 섹스를 했다. 그 경험은 영 실망스러웠지만, 그 소년의 형과 했을 때는 다른 느낌이었다. 프린세스가 이 소년들 중 하나와 있는 것을 어머니가 본 이후 모녀 관계는 영원히 변했다.

'내가 브라우스는 벌린 채로 서 있는데, 어머니가 나를 보고 비명을 질렀어요. 그런 다음 조용히 나를 바라보더군요. 내가 말했어요. 내가 매트와 섹스 하는 것을 보고 소리 지르다니 어머니는 참 뻔뻔한 사람이라고요. 어머니에게 사진과 비디오 본 것을 모두 말했어요. 어머니는 할 말을 잃었고, 우리는 곧 같은 입장이 되었지요. 어머니와 앉아서 처음으로 진짜 어른다운 성에 관한 대화를 시작했고, 어머니는 자신과 양아버지가 스윙어라고 하면서 스윙잉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었어요. 서로 질투심을 느끼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그렇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섹스 하는 모습을 보거나 그런 사실을 아는 것이 성적인 흥분을 일으킨다고 했어요. 그날 이후로 저는 성적으로 매우 적극적이 되었고, 그 일을 어머니와 양아버지에게 숨길 필요도 전혀 없었어요.'  171-172


사회학자 린 애트워터(Lynn Atwater)는 어머니와 아내인 여자라도 자기의 성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성적인 존재로서 유용성이 증가되면 딸에게 성교육을 더 잘할 수 있다고 했다.  173




4 일부일처제의 대안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거의 모든 사회가 다양한 결혼 제도를 두었고, 그중에서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가 가장 흔하지만, 의무적으로 일부일처제를 강요한 사회는 드물다. 현재 전 세계에서 일부일처제를 요구하는 문화는 20%도 안 되며, 대다수 문화가 일부다처제를 허용한다. 드물지만 일처다부제 사회도 잇다(전 세계 1% 이하에서 발견된다). 일부 인류학적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 40%에 해당하는 사회에서 혼외 성행위를 금지한지 않았고, 사회 규칙과 규범이 이러 ㄴ일을 부추기기도 했다. 일부 문화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다른 남자와 나누는 것을 정중한 예의로 여겼고, 어느 문화에서는 일정 사람들 혹은 명절이나 다산 의식(fertility rite)같은 일정 시기에 혼외정사를 격려했다.  177-178


아내를 손님과 '나누는 영광'은 이뉴이트와 마찬가지로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 아시아, 인도, 아프리카, 호주 원주민 등 다른 문화에서도 볼 수 있었다. 사우스샌드위치제도에서는 손님이 주인의 아내나 심지어 딸과 동침하는 기회를 비롯해 주인이 제공하는 모든 환대를 누릴 수 있었다.  182


경제적인 자원을 상당 부분 남자가 통제하는 사회에서는 일부다처제가 보편적이었고, 여자가 부를 쥔 사회에서는 일처다부제가 흔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형제처럼 유전적인 연관성이 있는 남자들이 여자를 나누는 관습 가운데 주된 형태는 형제다부혼이다.  184


스윙어들은 스윙 문화가 '생활 방식(lifestyle)'이라고 한다. ..

1960년대의 키 파티(key party)에서 유래한 것이라고도 한다. 키 파티는 남자들이 그릇에 자동차 키를 담으면 부인들이 아무 키나 집어 그 자동차 키 임자를 섹스 파트너로 집에 데려가는 섹스 파티를 말한다. 스윙잉에 관한 글에 따르면 이런 문화는 1970년대에 급격하게 늘었다가 1980년대에는 HIV가 퍼지면서 급감했으며, 지난 10년 동안 다시 점차 상승하고 있다.  193


폴리아모리(polyamory:비독점적 다자 연애)  197


폴리아모리는 1990년대에 '책임 있는 비일부일처제'에 대한 인터넷 논의에서 발전해 정의된 개념으로 개방 결혼과 공동생활, 성의 자유 개념을 포함한다.  199


폴리아모리는 '많은 사랑'을 의미하고, 진정한 사랑은 한 번에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이는 여러 다른 관계 형태와 접근을 포괄하는 폭넓은 개념으로 개방 결혼, 집단 결혼, 과거 수십 년 동안 계속된 성적인 탐색에서 발전한 것이다. 폴리아모리 운동은 일부일처제 안에서건 밖에서건 사람들이 관계에 책임지고 정직하기를 기대하는 것 외에는 별 제한이 없다. 폴리아모리 관계와 성적 교류는 스윙잉이나 집단 결혼에서와 같이 부부의 양 배우자를 다 포함하지만, 한 배우자나 둘 모두 혼외 관계를 하는 개방 결혼과 더 유사하다.  201


스윙어 연구에 포함된 것이나 동성애 커플에서 폴리아모리를 살펴본 것을 제외하면 이 관계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 많은 포리아모리스트들이 스윙잉이 성적인 것에 중점을 두는 것에 비해 자기들은 사랑, 관계, 정직성에 중점을 둔다고 강조하면서 스윙잉과 구별하고자 한다.

스윙어들은 파트너들과 친밀한 우정을 오래 지속하는 반면, 폴리아모리스트는 성적인 모험에 자주 나서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한다고 말한다.  201-202


위키피디아에는 핫와이프가 스윙잉의 하부 문화라고 정의되었다. 

'핫와이프는 남편의 동의 아래 자기 배우자가 아닌 다른 남자들과 섹스 하는 여자를 지칭한다. 대부분 남편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즐기는 것을 보고 대리 만족하거나, 아내의 모험을 지켜보고 듣고 아는 것을 즐긴다. 남편도 같이 스리섬에 참여하거나 아내를 위해 데이트를 알선하기도 한다.'

위키피디아는 핫와이프에 속ㅎ사는 다른 하부 집단을 찾아내는 데까지 나아갔다. "아내 나누기의 독특한 하부 문화인 쿠콜딩은 뒤바뀐 역할에 따르는 성적인 수치심을 강조한다. 아내는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반면 남편은 수동적이고 종속적인 역할로 제한되며, 에로틱한 성행위를 거부하는 것까지 포함될 수 있다."

쿠콜드는 아내의 바람에 따라 오로지 아내하고 섹스 한다는 면에서 자기들은 핫와이프의 남편과 다르다고 한다. 쿠콜드 관계에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섹스를 허락하지 않기도 하고, 남편가 섹스 하는 것보다 연인과 하는 것이 훨씬 좋다는 말을 남편에게 하기도 한다. 아내가 남편 앞에서 다른 남자와 성행위를 하며 남편을 조롱하고 모욕하기도 하는데, 이런 아내들은 '휴밀리아트릭스(humiliatrix)'라는 이름을 얻었다.  203-204


스윙어가 스윙잉에 나서는 일차적인 이유는 성적 모험을 위해서다. 스윙어를 대상으로 한 연구들은 스윙잉을 하는 동기가 다양한 성적 경험, 금지된 성적 만남, 노출증과 관음증으로 얻는 스릴이라고 했다. 그러나 스윙어들이 드는 다른 이유는 새로운 친구를 만들고, 가치와 관심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교류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스윙어들은 일부일처제에 만족하는 척하지 않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즐겁다고 말한다. 스윙잉 활동을 즐기는 동안 윤리적인 원칙을 지키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 생활 방식에 참여하는 데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다. '안 돼요'는 스윙잉에서 큰 효과를 발휘하는 말이고, 다른 사람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배척되며, 스윙어 클럽에서 거부 당하는 일도 종종 있다. 폴리아모리 관계에서는 '안 돼요'라는 말이 여러 가지 수준으로 받아들여진다. 공통의 동의로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이기도 하고, 자기 파트너의 다른 관계를 막거나 끊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스윙어의 삶은 전적으로 왜곡되었을 거라는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스윙어도 평범한 사람들과 비슷한 가치를 가지고 산다. 이들이 사회적인 가치보다는 개인적인 발전에 좀더 가치를 두는 것은 사실이다.  211


많은 개인과 커플, 가족에게 비일부일처 관계는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지만, '평생' 비일부일처 관계를 살펴보았거나, 자녀들과 가족 전반에 미치는 전체적인 영향을 탐구했거나, 이 관계를 일부일처 관계와 비교한 연구는 거의 없다. 일반 대중에 비해 합의한 비일부일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나 혼외정사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신장애, 성폭력, 성 기능장애 발생 비율이 높지도 않았다. 연구 결과들을 보면 비일부일처로 사는 사람들이 부부간의 외도 문제를 겪는 커플보다 긍정적인 관게를 경험하고, 일부일처를 유지하는 보통 부부보다 개인적인 욕구와 성적인 욕구에 대해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현재 존재하는 연구와 그 결과를 근거로 보았을 때 그런 관계가 역기능적이고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보는 믿음은 비일부일처 관계의 진정한 영향에서 근거한 것이기보다는 문화적인 기대에 어긋나는 비일부일처 관계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인 듯하다.  213-214


지금까지 진행된 연구들은 연구 문제와관련해 시대에 뒤떨어졌거나 제한점이 있지만, 비일부일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매우 활기넘치는 성격 양상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일반 대중에 비해 정서적인 문제나 정신 질환을 많이 겪는다는 근거는 없다. 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성격 유형과 정서와 관계 면에서 기능 상태는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에따라 차이가 많은 곳으로 보이며, 비일부일처 생활 방식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빈약한 정신 건강과 기능 상태를 보인다는 믿음을 지지할 근거는 없다. 스윙잉을 하는 여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이 남자만큼 자기의 성 활동과 살메 행복하고 만족하는 것으로 보이며, 남자들에게 성적으로 이용 당한다는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상 일부 비일부일처 관계는 전적으로 여자의 욕구에 중심을 두고 있다. 폴리아모리보다는 스윙잉이 여성 험오증에서 나온 관계라고 인식되지만, 폴리아모리 활동에 관해서는 정보가 거의 없다. 그러나 폴리아모리 사회에서 여자의 강력한 지도력을 고려한다면 폴리아모리 생활 방식 전반에서 여자가 희샹한다는 근거는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214-215


인간이 자연적으로 일부일처에 적합한 존재인지 아닌지는 인간의 행위와 별 관계가 없다... 인간은 일부일처를 유지할지 말지 선택할 수 있지만 연구는 많은 사람들이 일부일처를 선택하지 않고, 결혼이나 현재 관계에서 벗어나 성적 교류를 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 그런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병 발생률이 높지도 않고, 정서적이고 성적으로 불안하다는 근거도 없으며, 규범에서 벗어난 성 활동이 관계를 해친다는 근거도 없다.  215-216


어느 하나의 비일부일처 관계가 사회와 법적인 수용을 얻어 궁극적으로 승리를 쟁취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친밀한 관계에 대한 사회의 시각이 더 융통성 있게 바뀌어 개개인의 욕구를 충족할 유연한 관계를 허용할 가능성은 있다.  218




5 역사를 통해 본 욕망의 아내들


<유혹의 기술2:세상을 매혹했던 여자들>의 저자 벳시 프리올뢰(Betsy Prioleau)... 에 따르면 여자는 자연적으로 다혼(多婚 많을다 혼인할혼)성이고, 오르가슴을 여러 차례 맛볼 수 있으며, 남자들은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성적 능력이 있다. 프리올뢰는 태초 이래 핫와이프와 다른 유혹녀들의 삶과 역사를 검토하면서 남자의 넋을 흐려놓은 여자의 성적 원동력에 찬사를 보냈다. 이런 일은 남편의 동의 아래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241-242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 243

칼리굴라 치세 동안 클라우디우스는 그의 사촌 메살리나와 결혼했다.  344

역사상 악명 높은 쿠콜드 이야기 가운데 캐슬마인의 로서팔머(Roger Palmer) 백작  246

보르자 가문의 수장 로드리고 보르자(나중에 교황 알렉산데르6세)의 딸 루크레치아  248

샤틀레 후작 부인으로 불린 에밀리 뒤 샤틀레  250

제인 엘리자베스 디그비(Jane Elizabeth Digby)  257

빅토리아 우드헐(Victoria Woodhull)은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던 욕망의 아내다  261

20세기 초 위대한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인 바이올렛 고든 우드하우스(Violet Gordon Woodhouse)  265

안느 루이즈 제르맨 네케르  267

요크셔 가문의 후손인 검은 눈의 미녀 엘리자베스밀뱅크  271


역사에 걸쳐 많은 아내들과 여자들이 일부일처제의 구속과 침대를 한 남자와 나눠야 한다는 제한을 거부했다.  279


성적으로 힘 있고 부정한 많은 여자들이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성공적으로 이런 생활을 이끌어갔다. 이런 성적 관행이 상류층에 제한되지 않았다는 근거는 있지만,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경우는 지식인 계급과 문인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다.  280




6 문학과 영화 속의 아내 나누기


에리카 종은 소설 <날기가 두렵다>엣 여자의 성을 탐색했다.  296


케이트 쇼팽의 소설 <각성(The Awakening)>  297


2002년, 카트린 밀레(Catherin Millet)는 '여자가 쓴 가장 노골적인 섹스 관련 책'이라는 말을 듣는 <카트린 M의 성생활>을 내놓았다.  298


아이작 싱어의 <하우스 프렌드>  300


로렌스 블록의 Small Town(작은 마을)

영국 소설가 하워드 제이콥슨의 Act of love(사랑의 행위)  302


<펜트하우스 레터스>의 편집장 캐시 카바노프는 지난 몇 년 동안 잡지사에서 받은 편지 중 가장 인기 있는 주제는 아내를 다른 남자와 나누는 경험이나,아내가 다른 남자(아니면 남자들)와 함께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말했다.  306


제22권 처음 몇 페이지에는 편집자가 이렇게 언급했다. "우리가 받는 편지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주제는 관음증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내를 지켜보는 것이다. 이런 남편들에게는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 어느 경우에는 여러 남자들과 정열을 불태우는 것을 지켜보는 일보다 흥분되는 일은 없는 듯하다. 다른 남자가 제공하는 봉사와 기교로 아내가 몸을 흐느적거리고, 땀을 쏟으며 오르가슴으로 몸을 떠는 것을 지켜보는 남편의 마음은 에로틱한 몽상으로 들끓는다."  307


니 잡지에 실린 편지들... '그 이야기에 댛나 기억이 상당히 흐릿하긴 하지만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남자들이 보통은 여자 친구나 아내가 그런 일을 한다면 처음에는 충격이고 상처를 받겠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 일로 성적 자극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는 점이다.'  308


영화 <사이드웨이>

덴마트 영화 제작자 라스 폰 트리에가 만든 <브레이킹 더 웨이브>

카트린 브레야가 감독한 독립 영화 <로망스>

카드린 드뇌브가 주연한 1967년 영화 <세브린느>

데미 무어와 로버트 레드포드가 출연한 영화 <은밀한 유혹>




7 페티시와 판타지


상당히 많은 연구들이 정신 건강 전문가 대부분이 비일부일처 관계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을 정신 질병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단느 것을 보여주었다. 아내 나누기에서 이런 가정은 수많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째, 아내 나누기가 보통 '페티시'라고 부르는 성도착이 있음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둘째, 아내 나누기에 관심이 있는 것은 정신 질병과 성격장애가 있음을 나타낸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 아내 나누기에 대한 욕구, 흥미, 실행이 정신장애와 정서장애의 증상이라고 믿는 것이다. 

성 장애와 정신장애를 연구한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정신 건강에 관한 연구는 상당 부분이 주로 사회적인 편견과 비과학적인 판단에 근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 다시 말해 흔하지 않은 행위는 정상이 아닌 것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치유와 회복 과정의 일부일 수 있다.  325-326


성 연구자와 임상의는 성 장애 가운데 관음증과 노출증을 배우자가 다른 사라모가 섹스 하는 것을 지켜보는 순전한 판타지와 구별한다. 이런 판타지에서 나온 행위는 임상적으로 관음증과 노출증으로 진단된(가끔 기소 당하기도 하는) 사람들이 흔히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행동을 한다고 보고되는 것과 다르게 안정적인 관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 관음증 환자들은 발각될지 모르는 두려움이라는 스릴을 맛보기 위해 그런 일을 한다지만, 서로 합의하여 배우자의 성행위를 지켜보는 판타지에서 그런 두려움은 찾을 수 없다.  330


헤로도토스(herodotos)는 헤라클레스의 후손인 리디아의 왕 칸다울레스(Candaules)의 이야기를 했다. 칸다울레스는 자기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믿었고, 아내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칸다울레스의 시종 가운데 기게스(Gyges)라는 경호원이 있었다. 그는 칸다울레스의 조언자면서, 왕이 자기 아내의 아름다움을 찬미할 때는 경청자 역할을 했다. 어느 날 칸다울레스가 기게스에게 왕비의 아름다움을 확실하게 믿으려면 왕비의 벗은 모습을 봐야 한다고 고집했다. 기게스는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거절했지만, 왕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칸다울레스는 기게스를 침실에 몰래 들여서 왕비가 잠자리에 들기 전 옷 벗는 것을 지켜볼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기게스가 침실에서 빠져나올 때 왕비가 그를 보았고, 그와 남편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아챘다. 다음 날 왕비는 기게스를 불러 그의 행동에 대한 벌로 죽음을 택하거나, 칸다울레스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뒤 자기와 결혼하라고 명했다. 그날 밤 왕은 전날 밤과 같이 기게스를 침실에 들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게스가 칼로 무장하고 있다가 왕이 잠든 틈을 타 심장을 찔렀다. 기게스는 왕위를 빼앗고 왕비와 결혼했다.

다양한 자료에 따르면 칸달리즘(candaulism)이란 다른 남자들에게 아내의 누드 사진이나 이미지를 보여주는 행위 혹은 아내의 동의 없이 다른 남자에게 아내의 벗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일을 말한다.  336


스윙어들이 정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이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만, 이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이런 인식과 다른 결과를 보인다. 1970~1980년대에 연구자들은 스윙어 집단을 대상으로 다양한 성격검사와 심리검사를 한 결과, 이들이 적그적이고 자발적인 생활 태도를 보인다고 했다.  338


이 책에서 본 부부들이 의도적으로 행위하는 것과 같이 쿠콜드 관계에서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훨씬 명백하고 조심스런 협상이 진행된다. 남편은 결혼 관계에서 아내에게 행사하는 성의 주도권을 포기하고 복종적인 역할을 수용한 채 자기의 욕망과 흥미를 조심스럽게 펼쳐야 한다.  351


바우마이스터는 여자가 남자 파트너의 부정함을 즐기는 '반대 쿠콜드리'는 거의 들어본 일이 없다면서 이는 핵심적인 성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352


내가 기술한 부부들의 성행위는 조증 증상이 있는 기간이나 다른 심각한 정신병 증상가 함께 나타나지 않았다. 경계성인격장애와 같은 성격장애로 진단된 사람들은 격렬한 자극에 대한 갈망, 정서장애와 성격장애가 결합되어 거칠고 경계를 파괴하는 성행위를 자주 보인다. 그러나 강박성 성행위, 정신 질병과 성격장애가 있는 경우라면 이 부부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긍정적 생활 기능 수준을 보이지 못하도록 방해할 만큼 증상이 심각했을 것이다.  356-357


아내의 난교와 쿠콜드 남편의 복종적이고 양성애적이며 자기 패배적인 행위가 아동기에 당한 성폭력이 어른이 되어서까지 영향을 미친 탓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원인과 결과라는 실타래를 풀기는 쉬운 일이 아니고, 비일부일처 관계가 건강하지 못한 것이라는 핵심적인 가정은 연구 결과가 아니라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금지에서 나온 것이다.  357-358


핫와이프 현상을 병적이고 건강하지 못하며 부정적인 감정이나 경험에 뿌리를 둔 것이라는 가정으로 접근하는 것은 사회적인 금지와 도덕적 판단, 여자의 성에 대한 두려움의 결과이자 영향이다. 내 표본은 광범위하지도 과학적이지도 못하지만, 내가 이 조사를 하면서 인터뷰하고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감정, 성격 문제, 정서 문제의 증상을 보이거나 보고하지 않았다.  358-359


스웨덴의 국민건강과 복지위원회(National Board of Health and Welfare)는 2008년 11월에 사도마조히즘, 페티시즘, 복장도착증과 관련한 행위들은 더 이상 정신 건강 문제가 아니라고 결정했다. 라스 에릭 홈(Lars-Frik Holm) 위원장은 "이런 진단은 이성애 선교사 체위가 아닌 것은 모두 성적 이상이라고 여기던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이들의 성적 취향은 사회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선언했다. 미국정신과학협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APA)도 정신장애 진단에 대한 미국의 접근 방식을 최신화하면서 비슷한 논의를 했다.

성해방연맹(Thw National Coalition for Sexual Freedom)은 특히 사디즘, 마조히즘, 복장도착증의 경우, 성도착에 대한 APA의 진단 기준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APA의 진단 기준에 있는 많은 진술들이 모순된 연구를 인용하면서 진단 기준이 과학적이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나온 것이라고 했다.  360




8 쉬운 일은 아니다


에리카 종은 <날기가 두렵다>를 쓸 때 아내가 혼외의 성적 모험을 한 뒤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것으로 책을 끝내고 싶은 욕구에 저항하느라 갈등을 겪었다고 했다. 나도 이런 생활 방식으로 부정적인 결말에 이르는 경우도 보여주어 이 책의 시각에 균형을 잡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생활 방식을 추구하면서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많은 사람들과 부부를 만났다. 그러나 이 책을 위한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성적 판타지를 좇던 많은 이들이 예상치 못한 이유로 파경에 이르거나, 다른 불행한 결과를 겪은 이들도 만났다. 이 생활 방식 역시 인간의 다른 시도들과 마찬가지로 동전의 양면 같은 면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388-389


역사를 통틀어 그리고 현시대에도 아내 나누기가 만연하지만, 이런 생활 방식이 보편화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사회가 이런 행위를 금지한 길고 긴 역사가 사라지지 않았을 뿐더러, 오늘날이라고 해서 훨씬 누그러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비일부일처는 관계에 무엇을 의미인가? 서구 사회에서 혼인 관계 외에 다른 사람과 섹스 하는 것은 엄청난 기만과 경멸, 정직하지 못한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며, 규범을 위반하는 행동으로 인지된다. 그러나 부정과 결혼에 관한 수많은 책들이 혼외정사가 자동적으로 결혼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다는 생각하는 반기를 들고 있다. 부정이 조용히 수용되는 서구 문화에서도 이런 일은 은밀하게 해야지, 공개적으로 그런 관계를 했다가는 명예와 존중에 도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믿음의 근원은 일부일처 관계를 사랑의 가장 순수한 형태로 인지하는 데 있을 것이다. 혼외 관계를 하고,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다면 당사자나 관계에 잘못된 점이 있는 것이라는 믿음도 한몫한다. 부부와 개인을 상담하면 나는 이런 믿음을 '디즈니 신화'라고 이름 붙였다. 자기의 천생연분을 만나면 행복하게 사는 일만 남았다고 믿는 것이다.  397-398


스위어를 대상으로 한 많은 연구에서 이들의 결혼 생활 만족도는 다른 과계와 비교햇을 때 별 차이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스윙잉이 관계를 파괴한다고 믿지만, 연구 결과에 따르면 스우이어들은 자기들의 생활 방식이 관계에 긍정적이고 이로운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399


스윙어와 폴리아모리스트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이 대부분 이혼 경험이 있고, 일부일처 관계에서 갈등을 겪었으며, 현재의 비일부일처 관계에서 이전 관계보다 훨씬 만족감과 충족감을 얻는다고 했다. 스윙잉과 비일부일처 커플들이 자기들의 관계에 만족하고 행복을 느낀다는 결과를 도출한 연구는 이런 관계에 대한 연구자들의 긍정적인 편향이 개입된 것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399-400


대다수 스윙어 커플은 각자 활동해도 보통 배우자에게 자기가 경험한 일을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감정을 배우자에게 감추기는 커녕 자세히 들려주어 성적 흥분을 자극하고, 부부의 성생활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비일부일처 관계의 동성애와 양성애 커플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대다수 커플이 혼외 관계의 자세한 사항을 배우자와 이야기하지만, 그 정도와 내용은 개인이나 커플마다 달랐다.  401-402


'컴퍼션'은 폴리아모리 관계에서 정의된 개념으로, 자기 파트너가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이다. 따라서 컴퍼션을 느끼는 남편과 아내는 파트너가 다른 사람과 정서적이고 신체적인 사랑을 나누면서 얻는 쾌감을 경험하는 것에서 대리적인 감각보다 깊은 기쁨을 얻는다.  403


다양한 비일부일처 생활 방식 전반에 걸쳐 가장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문제가 질투심이다. 이런 커플들은 질투심이란 문제를 놓고 끝없이 논의하고 논쟁을 벌인다. 

연구와 일화적인 보고에 따르면, 여자가 남자보다 자기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신체적으로 친밀하거나 관계하는 것에 질투심이 심하다고 한다.  404-405




9 아내 나누기의 거침없는 신세계


이 세상 거의 모든 것처럼 아내 나느기도 기술을 받아들이고 바꿨으며, 기술에 의해 변했다.  429


자신을 '킹불(Kingbull)'이라고 부르는 한 사업가는 아내가 자신을 쿠콜드로 만들어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남편들을 돕기 위해 나섰다. 그는 자기 웹사이트에서 '최상의 쿠콜드 지침서(Ultimate Cuckold Manual)'라는 전자책을 판매한다.  434


어쩌다 만난 사람과 하는 성행위나 핫와이핑의 그룹 섹스와 유사한 것으로 영국에는 '도깅(Dogging)'이 있다. BBC의 보도에 따르면 도깅은 커플들이 외진 곳에서 카섹스를 하는 동안 차 밖에 있는 남자들이 구경하거나 자위를 하고, 사진을 찍거나 섹스에 함께 참여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런 행태는 커플이나 청소년이 차 안에서 성행위하는 것을 남자 청소년이 몰래 구경하던 데서 나온 것으로, 10~15년 전부터 성행했다. 일부 커플은 구경꾼드의 즐거움을 높이기 위해 차 안에 조명을 켜고 일을 벌인다. 차창이나 문을 열어놓고 구경꾼의 참여를 부추기는 커플도 있다. 가까이 다가와서 혹은 차안으로 들어와 구경하게 하거나, 섹스에 동참하도록 하기도 한다. 도깅 장소는 경찰이나 이웃의 분노를 피할 수 있는 다양한 장소를 찾을 수 있다.(일설에 따르면 이런 커플들을 달아나게 만들기 위해 경찰 사이렌을 구입해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현재 영국 법에 따르면 쌍방이 합의한 일이고, 성인이라면 그리고 분노한 이웃만 없으면 도깅이 위법 행위는 아니다.  440-441




10 수태를 위한 액체


여자의 사정에 관한 이야긴느 질 오르가슴이 우위냐, 음핵 오르가슴이 우위냐를 놓고 벌이는 일진일퇴의 논쟁까지 얽히면서 복잡하게 돌아갔다.  469


고대 그리스인은 여자의 성액을 성적인 쾌감뿐만 아니라 생명 창조와도 관련된 일로 여기고, '생산' 능력이 있다 하여 예찬했다. 히브리인은 여자의 성액을 '깨끗하지 않은' 월경혈과 다르게 여겼다.  470


힌두와 탄트라 경정에서도 여자의 사정이 여자의 '커다란 쾌감'과 관련 있고, 여자가 사정하려면 남자의 사정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자극이 필요하다고 했다.

의사가 여자 환자의 '히스테리성 발작'을 멎게 하기 위해 손으로 자극하거나 기계적인 마사지를 하던 시절에는 여자의 '씨앗 방출'을 야기하는 것이 윤리적이고 건강한 일인지 논쟁이 많았다. 그러나 일부 의사들은 여자가 씨앗을 보유하는 것이 질병과 광기를 일으킨다면서 이런 상태를 해소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의사의 의무라고 했다.

킨제이는 여자의 사저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것을 오르가슴과 연결하지 않았다. 마스터스와 존슨도 킨제이와 마찬가지로 여자의 오르가슴이 남자와 다를 것 없지만 사정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 

여자의 사정을 둘러싼 논란은 대부분 사정액의 성분에 대한 우려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 액체는 소변인가, 아닌가? 사정하는 여자들은 케이의 10대 시절 연인이 케이가 침대에 오줌을 누엇다고 몰아붙인 것처럼 단순히 소변을 배출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생물학적인 과정으로 나오는 액체인가? 이 문제에는 과학적인 논란이 있고, 연구자마다 의견이 달랐다... 

여자의 사정액은 요도 안에 있는 여러 관을 통해 배출되는데, 액체가 솟구치거나 분사된다.  471-472


지금은 스킨샘(Skene's Gland)이라고 부르는 비뇨생식기계에 있는 샘이 '여자의 전립샘'으로 작용하고, 남자의 전립샘이 정자를 전달하는 정액을 만드는 방식으로 여자의 성과 관련된 액체를 생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472


독일 산부인과 의사 에른스트 그뢰펜베르크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스팟(G-spot)에 대한 설명은 1980년대에 나왔다. 대중과 성 전문가들이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과학계에서는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되는 개념이다.  473


성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심리치료사 리사 로리스(Lisa Lawless)는 여자의 사정을 가르치는 일을 전문으로 한다. 그녀는 모든 여자들이 사정을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비디오와 책을 냈고, 사정을 경험하지 못하는 여자는 특별한 경험을 놓치는 것이라고 했다.  473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사정을 경험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앗다.(이 비율이 약 40%라고 한 조사 결과도 있기는 하다). .. 대다수 여자는 한 번이나 두 번 정상적인 오르가슴 후에 사정한다.  474


남자의 전립샘액은 정자가 살아갈 양분과 환경을 제공한다. 여자의 몸에서는 이 액체가 죽은 세포를 제거하는 것을 도와 질을 청소하고, 질에 필요한 산성도 균형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연구자들은 여자의 사정이 종종 오르가스모가 연관되지만 이것이 보편적으로 오르가슴과 연결되지는 않고, 가끔 오르가슴과 동시 혹은 전과후에 독립적으로 일어난다고 했다. 여자의 사정은 질에 잇는 정액을 청소하고 배출하므로, 진화 과정에도 하는 역할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474-475


질이 해부학적 구조를 보면 오르가슴과 상관없이 삽입후 정자를 보유하도록 되어 있다. 성교 후 여자의 질에서 정액과 액체가 흘러나오지만, 삽입 후 30분까지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정자가 모이는 자궁 경부 근처 질에서 풀 혹은 컵을 이루기 때문이다. 정자가 즉시 배출되는 일도 있지만(얼룩말은 암컷이 질에서 정자를 즉시, 극적으로 뿜어낸다) 정액은 상당 부분 이 풀에 고여 있고, 질과 자궁 경부의 해부학적 구조에 따라 여기서 자궁으로 이동한다.  478-479


연구 결과를 보면 여자가 피임하지 않고 오르가슴을 느낄 때 정자의 70%가 질과 자궁 경부에 남았다. 반대로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했을 때는 30%만 남았다. 이는 부분적으로 여자의 오르가슴이 자궁 경부의 점액 필터를 약하게 함으로써 정자가 자궁에 도달할 길을 더 많이 만들어주고, 오르가슴을 느낄 때 질의 근육이 수축되어 자궁 경부로 정자를 더 많이 흡입하기 때문이다.  479


갤럽과 레베카 버치가 정액이 신체의 생리와 인간 행위에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연구는 더욱 광범위해졌다.(나는 여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구강이나 항문 성교 중에 받아들인 정액이 남자에게 미치는 효과도 포함했다.)  481


1970년대 <코스모폴리탄>과 <플레이보이>는 독자들에게 혼외정사가 결혼 생활에 다시 정열의 불꽃을 피우게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501




11 성녀인가, 창녀인가?


증명할 수는 없더라도 나는 미국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현재의 미국 중산층 남편들이 결혼 당시 아내가 처녀가 아니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아내에게 혼전 관계가 있었거나, 현재 그런 관계라는 사실을 가장 잘 받아들인다고 생각한다. 남편들이 그 사실을 알고도 마음이 전혀 불편하지 앟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현시대 남편들은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와 달리 그런 소식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삶이 조각날 일로 여기지 않고, 여자를 성적인 존재로 더 잘 받아들이며, 극단적인 경우 부정한 아내나 경쟁자 남자에게 폭력으로 복수한다고 말하는 정도다. - 게이 탈레스  506


한 부부가 내게 말한 것처럼, 더 중요한 문제는 상대 남자의 성격이다. "그 남자를 믿을 수 있어야 해요. 그 남자를 집으로, 우리 삶으로, 내 아내의 침대로 불러들이는 일이잖아요. 그런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해요."  513


영국에서 수행한 연구들을 보면 외도하는 여자들은 남편보다 성공적이고 사회적인 지위도 높은 남자를 선택했다. 여자들이 자기 남편보다 낮은 계층의 남자를 애인으로 선택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516


스윙잉, 핫와이핑, 폴리아모리 그리고 다른 형태의 비일부일처 생활 방식은 내면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으며, 사회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특혜를 누리는 삶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들은 역사를 통해 왕과 여왕, 대통령, 지배자, 최고경영자, 백만장자에게만 허락되던 일부일처제 법칙의 예외를 자기도 실현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517


쿠콜드리가 드물고, 아내의 성적인 부정이 인정되는 일은 더더욱 드물다는 일반적인 믿음과 다르게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아내에게 다른 애인을 두도록 허용한 남편들의 역사는 길고도 길다. 역사를 보면 이런 사건이 예술, 문학, 지식인 사회에서 많이 일어나긴 했지만, 이런 생활 방시고가 성적 관행이 사회 계층 전반에 걸쳐 보편적으로 존재하던 일임을 알 수 있는 기록도 있다. 이런 행위를 탐하지 못하게 한 사회의 금기가 이런 일이 만연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현재 이런 생활 방식이 퍼진 것은 사회적 금기의 변화를 반영하는 일인지도 모르며, 단순히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공개 토론장을 통해 이런 행위를 표현하는 것이 자유로워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내 나누기, 핫와이핑, 쿠콜드리는 본질적으로 병적이거나 파괴적인 행위가 아니다. 이런 생할 ㅂ아식을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추구해온 부부들은 지극히 건강한 관계고, 부부간의 의사소통 방식이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인 경향이 있다. 이런 생활 방식이 정서장애나 관계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그런 문제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오히려 개인과 부부에게 적응적인 기능도 있다. 두려움, 힘과 주도권 문제, 자유와 독립에 대한 요구 같은 문제를 극복하고, 권위를 포기하고 사회의 기대에 부합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내려놓기 위한 방식이다.

이런 생활 방식을 추구하는 아내들은 일부일처제와 결혼의 복잡한 기대뿐만 아니라 1000년 동안 여자에게 내려진 사회의 기대와 명령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이런 생활 방식에는 단순한 성을 넘어 여성주의의 복잡하고 강력한 메시지와 여성에게 부여된 힘이 놀라운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 문화에서 여자들은 착한 여자가 되라고 하면서도 착하지 않게 살라고 하고, 섹시하게 행동하라도 하면서도 그런 행동은 안 된다고 하는 이중성을 갖고 살도록 압박 받는다. 아내 나누기를 받아들이는 아내는 그 안에서 힘을 발견했다. 사회가 그들에게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지시하고 자신을 정의하게 만든 것, 선택하게 한 것을 거부할 힘이다.  522-523


내가 흥미로운 연구 결과와 인터뷰한 내용을 이야기해주었을 때 놀랍다는 반응과 호기심을 보인 사람도 있었다. 그 가운데 우리 아버지의 반응이 가장 재미있었다. 아버지는 "뭐에 관해 쓴다고? 네가 미친거 아니냐? 그런 것을 쓰고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게다. 세상의 모든 남편들이 네 멀를 베어버리려고 할 거야. 모든 아내들이 자기도 그런 걸 원한다고 할 테니까!"하고 말했다.  527-528


쿠콜드리나 핫와이핑을 통해 혼외의 성을 탐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이런 부부들도 부단히 움직이면서 의사소통하고,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고, 질투심과 시기심의 불꽃을 장애가 아닌 암시와 신호로 받아들이면 성공할 수 있다. 이것도 다른 관계와 다르지 않다. 이런 부부들이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할 일은 다른 부부에게도 똑같이 필요한 일이다. 건강한 관계는 부부가 함께 하는 일이 무엇이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서로 어떻게 의사소통하느냐, 서로 어떻게 대하느냐, 제대로 기능하고 상대에게 도움이 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달렸다. 모든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는 성행위와 상관없이 의사소통, 자유, 지지, 상호 존중이다.  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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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읽기 위한 우회로, 이현우(로쟈)

자신의 주저를 몇 권 꼽아놓은 적이 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외에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까다로운 주체> 그리고 <시차적 관점>까지 네 권의 책이 그것이다... 지젝이 말하는 '시차'란 과학용어로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른 곳에서 보았을 때 서로 다른 위치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을 말한다. ..

지젝은 이러한 두 층위 사이에 어떠한 곸통 언어나 기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변증법적으로 매개, 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시차로 재정의한다. 그리고 철학과 과학, 정치라는 세 가지 주요 양식에 나타나는 시차적 간극에 개념적 질서를 부여하고자 한다.  8-9


그가 보기에 시차란 개념은 변증법적 사유의 장애물이 아니라 그 전복적인 핵심을 간파하도록 해주는 열쇠다. 이 열쇠는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까. 가령 '저항'의 교착상태에 대해 생각해보자. 지젝은 알랭 바디우를 따라서 시스템이 더욱 부드럽게 작동하게끔 만들어주는 국지적 행동에 참여하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진정한 위협은 수동성이 아니라 유사행동이며, '능동적'이고 '참여적'이 되려는 이 충동은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9-10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다원적 경합을 허용하며 그것에 의해서 유지되는 체제이지만, 지젝이 말하는 레닌주의적 제스처는 어떤 근본주의적 태도를 가리킨다. 오늘날 재발명되어야 할 레닌의 유산은 '진리의 정치'라고 그는 주장하며, 근본적 좌파의 목표는 '원칙 없는 관용적 다원주의'와는 정반대라고 선을 긋는다.  12


지젝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을 경제와 정치 사이의 시차(視差 볼시 어긋날차)에 대한 고려라고 본다. 예컨대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두 옆얼굴이냐 꽃병이냐'라는 시각적 패러독스와 유사하다. 즉, 정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격하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는 한갓 기술 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된다.  12-13


지젝은 이렇게 주장한다. "따라서 두 겹의 싸움을 해야 한다. 첫째는, 그래, 반자본주의이다. 그러니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자유주의적 의회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반자본주의는 아무리 '급진적'이라 해도 충분하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유산을 실제로 문제로 삼지 않고도 자본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오늘날의 핵심적인 유혹이다."

가령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나 <인사이더>처럼 무자비한 이윤추구에 몰두하는 대기업에 대한 비판을 다룬 영화들이 아무리 '반자본주의'를 표면상 내세우더라도 "대기업의 음모를 무너뜨리는 정직한 미국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는 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 세계의 견고한 중핵(민주주의)자체는 제거할 수 없다.  14


파리코뮌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독재였다는 것이 엥겔스의 주장인데, 지젝은 영겔스의 말을 받아서 1892-94년의 혁명적 폭력 또한 프롤레타리아독재와 함께 '신적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즉 여기서 '신적 폭력 = 비인간적 폭력 = 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등가관계가 성립한다. 이때 '신적 폭력'이란 말의 해석은 정확히 '백성의 소리는 신의 소리'라는 고대 로마의 격언을 따른 것이다.  15


그가 도출해내는 결론은 "민주주의적 절차보다 상위에 있는 이런 과잉의 평등-민주주의는 오직 자기 대립물로서 혁명적-민주주의의 테러의 형태로만 '제도화되'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진정한 혁명적 과정은 두 가지 계기를 구성소로 갖는다. 프레드릭 제임슨을 따라서 지젝은 그것을 첫째, '극단적인 부정의 제스처', 그리고 둘째 '새로운 삶의 창안'이라고 말한다. "근본적인 혁명 속에서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오래된 꿈을 실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꿈꾸는 방식 자체를 다시 창안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의 꿈을 위해 현실을 변화시키기만 하고 이런 꿈들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조만간 우리는 과거의 현실로 다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이 요점이다.  16


지젝은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이 주장한 교훈을 상기시켜준다. 혁명적 폭력의 목표는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방식과 토대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는 교훈 말이다. 그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이 거기에 있다.  17


지젝이 자신의 핵심적인 테제를 끌어내고 있는 농담 한 가지를 음미해보는 것도 좋겠다. 몽골 지배하에 있던 15세기 러시아가 농감의 배경이다. 한 농군이 아내와 함께 시골길을 걸어가다 말을 타고 오던 몽골의 전사를 만나게 됐다. 이 전사는 농군의 아내를 강간하겠다고 이르고는 "땅에 흙먼지가 많으니 내가 네 아내를 강간할 동안 네놈이 내 고환을 받치고 있어야겠다. 거기가 더러워지면 안되니까!"라고 덧붙였다. 몽골군이 일을 마치고 떠나자 농군은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다. 아내가 어이없어 하며 뭐가 기뻐서 난리냐고 묻자 농군은 이렇게 답했다. "그놈한테 한방 먹였다고! 그놈 불알이 먼지로 뒤덮였단 말이야!"  ...

포이어바흐에 관한 제11테제를 그는 이렇게 비튼다. "우리의 사회들에서 비판적 좌파는 지금까지 권력자들에게 때를 묻히는 데에 성공했을 뿐이나, 진정 중요한 것은 그들을 거세하는 것이다." 그 '거세'는 어떻게 가능한가? 일단 '20세기 좌파정치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지젝이 베케트의 말을 인용하며 다시 강조하는 그 교훈이란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이다. 혁명의 과정이란 점진적 진보가 아니라 몇 번이고 시작을 반복하는 운동이다.  17-18


현재의 세계자본주의 체제에는 어떤 적대가 내재해 있는가. 지젝은 네 가지를 꼽는다.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소위 '지적 재산권'과 관련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새로운 과학기술 발전의 사회, 윤리적 함의, 새로운 장벽(Walls)과 빈민가라는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생성. 이러한 파국적 위협과 불평등, 그리고 분리에 맞선 투쟁이 공유하는 것은 '공통적인 것(the comons)'을 둘러막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인류가 파멸해 봉착할 수 있다는 자각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시장의 실패"로도 불리는 기후위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때문에 '세계시민성'과 '공통관심'을 바탕으로 "시장메커니즘을 조절하고 제압하면서 엄밀하게 공산주의적인 관점을 표현하는 세계적 정치조직을 창설할 필요"가  제기된다. 그것이 '세계의 종말"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다.  

지젝의 공산주의론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구별이다. ..

지젝이 보기에, 세계자본주의 체제가 내속적인 장기적 적대를 넘어 존속하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적 해결책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모종의 사회주의를 재발명하는 것뿐이다. ..

"미국은 더욱더 프랑스처럼 될 것"이라는 일종의 '유러피언 드림'이 그것이다. 또는 빌 클린턴이 추천사를 쓰기도 한 <박애자본주의>같은 책을 그 징후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이 내세운 모토가 "승자만을 위한 자본주의에서 모두를 위한 자본주의로"이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핵심적 적대를 다루지 않는다.  19-20

.

사실 책의 전체적인 ..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폭력에 대한 관심이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 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 즉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에 두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폭력이란 말이 즉각적으로 떠올려주는 상투적 '이미지'에서 한걸음 물러날 때만, 우리는 폭력에 대해 본격적으로 사유,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제안이다.  20





서문 


폭력이라고 하면 우리는 즉각, 범죄와 테러 행위, 사회 폭동, 국제 분쟁 같은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는 한 걸음 물러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직접적이며 가시적인 '주관적(subjective)'폭력, 즉 명확히 식별 가능한 행위자가 저지르는 폭력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폭력의 분출이 대체로 어떤 배경 속에서 발생하는 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

주관적 폭력은 세 가지 폭력 가운데 가장 가시적인 일부에 불과하다. 이 세 가지 폭력 중 나머지 둘은 객관적(objective)폭력인데, 그 첫 번째는 하이데거가 '존재의 집' 이라고 칭한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symbilic)'폭력이다. ..

폭력이 언어 자체에 들어 있으며, 언어가 의미 세계를 대상에 부과할 때 따라붙는다. 

두 번째로, 내가 '구조적systemic)'폭력이라 부르고자 하는 폭력이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 우리의 경제 체계와 정치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파국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

주관적 폭력은 '정상적'이고 평온한 상태를 혼란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객관적 폭력은 바로 이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

구조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폭력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고려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폭력은 단지 주관적 폭력의 '비이성적' 폭발로만 보일 것이다.  23-24


폭력에 대한 자유주의적 좌파 담론에 만연하는 가짜 급박감에 대해 생각해 보자. 가령 이들의 담론에서 여성, 흑인, 노숙자, 동성애자 등이 당하는 폭력의 장면을 거론할 때에는, 대개 추상적 개념과 사실적인 (거짓)구체성이 공존한다. "이 나라에서는 6초마다 한 여성이 강간당합니다"라는 진술과 "당신이 이 문단을 읽는 동안, 열 명의 어린이가 굶어 죽을 것입니다"라는 경고는 그저 두 가지 사례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의 뒤에는 도덕적으로 분개하고 있다는 위선적 감정이 깔려 있다. 스타벅스는 바로 몇 년 전에 이런 종류의 거짓 급박감을 써먹은 것이다. 매장 입구에 스타벅스 체인의 이윤 거의 절반이 커피 원산지인 과테말라의 어린이들을 위한 의료시설로 간다는 내용의 포스터를 붙여 놓아,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마다 한 어린이의 생명을 살리게 된다는 의미를 은연중에 풍겼던 것이다.

이런 긴급 지령들에는 근본적으로 반(反 되돌릴반)이론주의적 강렬함이 있다. "생각에 잠길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행동해야 합니다." 이런 거짓 급박감을 통해, 탈산업화 시대의 부자들은 그들끼리 격리된 가상 세계에서 살아가면서도 자기 세계 외부의 혹독한 현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줄곧 적극적으로 떠들어댄다. ..

"그럼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가요? 그냥 손 놓고 기다리라고요?"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대답해야 한다. 

"예, 바로 그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즉각 참여하고자 하는 충동에 저항하는 것, 끈기 있고 비판적인 분석을 사용하여 '일단 기다리면서 두고보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진정으로 '실제적인' 일일 때도 있다. 현실참여는 모든 방향에서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는 듯하다.  29-31 





1. SOS폭력


1922년 소비에트 정부는 철학자와 신학자에서 경제학자와 역사학자 등 주요 반공산주의 지식인들을 강제 추방했다. ...

니콜라이 로스키는 추방당하기 전까지 가족과 함께 하인과 유모들의 시중을 받아가며 상층 부르주아지의 안락한 삶을 누려왔다. ...

구조적 폭력 ..

"아무런 나쁜 일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에 주관적인 악행은 잔혀 없었다. 다만 이런 구조적 폭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배경이 있었을 뿐이다.  35-37


오늘날 지배적인, 관용적 자유주의자들이 가진 주된 관심사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대량 학살, 테러)에서 이데올로기적 폭력(인종주의, 선동, 성차별)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폭력에 반대하는 것인 듯하다. ..

다른 형태들의 폭력을 시야에서 지우고, 따라서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우리가 문제의 진정한 중심에 주의를 돌리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방해하고 있지 않은가?  37


어느 남편이 일터에서 평소보다 일찍 돌아왔다가 아내가 다른 남자와 침대에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깜짝 놀란 아내는 소리쳤다.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온 거야?" 남편은 화가 잔뜩 나서 맞받아쳤다. "딴 놈이랑 누워서 뭐하고 있는 짓이야?" 아내는 태연히 대답했다. "내가 당신한테 먼저 질문했잖아. 주제를 바꾸면서 내 질문에서 빠져나가려 하지 마!" 이런 농담은 폭력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니까 우리의 과제는 바로 '주제를 바꾸는 것', 폭력을 멈추자는 필사적인 인도주의적 SOS 외침에서 벗어나, 다른 SOS에 대한 분석, 즉 주관적 객관적, 상징적이라는 세 가지 방식의 폭력이 복잡하게 벌이는 상호 작요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38


객관적 폭력이라는 개념은 철저히 역사회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주의와 더불어 새로운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자기 증식적 순환을 광적인 것이라고 묘사했다.  39


자본은 자신의 운동이 사회적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무관심하며, 오로지 수익성이라는 목표만을 추구한다.  39


라캉이 말하는 현실과 실재의 차이를 볼 수 있다. '현실(reality)'은 부단한 상호작용과 생산과정을 행하는 실제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적 현실을 말하며, 실재(the Real)'는 사회적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결정하는, 냉혹하고 '추상적인', 유령과 같은 자본의 논리이다. 생활 상태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나라를 방문하면 누구든 이런 격차를 분명하게 체험할 수 있다. 우리 눈에는 파괴된 환경과 비참한 인간들로 가득찬 광경이 들어온다. 그러나 이후에 경제학자가 쓴 보고서를 읽어보면 그 나라의 경제적 상황은 '재정적으로 견실하다'고 알려 준다. 현실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자본의 상황인 셈이다...  40


16세기 멕시코의 비극에서 한 세기 전 벨기에가 콩고에서 저지른 대학살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세계화의 결과로 죽어간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주의를 돌릴 때면 이에 대한 책임은 대부분 부인된다. 그 모든 일은 그저 '객관적인' 과정의 결과물로서 일어났을 뿐이며, 누구도 계획하고 실행한 적이 없었고, '자본주의 선언' 같은 것도 없다.(그나마 '자본주의 선언'에 가장 근접한 걸 쓴 인물은 아인 랜드(Ayn Rand)이다.) 콩고 대학살의 주범인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는 대단한 인도주의자였으며 교황에 의해 성인칭호까지 받았던 사람이었다. ...

가장 커다란 아이러니는 이런 노력에서 얻은 이윤 대부분이 벨기에 국민들의 복지, 공공사업, 박물관 등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레오폴드 왕은 오늘날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 들의 선구자였던 것이 분명하다.  41-42


올리비에 말뉘(Olivier Malnuit)는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하여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십계명을 꼽은 바 있다.

1. 모든 것을 공짜로 줘버려라(저작권이 없는 자유로운 접근...). 단, 부가서비스에만 요금을 받으라. 그러면 부자가 될 수 있다.

2. 물건만 팔게 아니라 세상을 바꾸라. 세계혁명과 사회의 변화를 통해 물건의 품질도 나아질 것이다.

3. 나눔에 신경 쓰고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라.

4. 창조적이 되어라. 디자인과 신기술, 그리고 과학에 초점을 맞추라.

5. 모든 것을 말하라, 비밀이란 없어야 한다. 일처리의 투명함과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을 지지하고 실천하라. 전 인류가 협력하고 소통해야 한다. 

6. 정시 출퇴근하는 직업을 갖지 말고, 노동하지 말라. 다만 스마트하고, 역동적이고, 유연한 즉석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하라. 

7. 학교로 돌아가 평생교육에 참여하라.

8. 효소처럼 행동하라. 시장만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사회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일하라.

9. 가난하게 죽으라. 결코 다 쓰지 못할 만큼 가졌으니 재산을 필요한 자들에게 환원하라.

10. 국가가 되라. 기업과 국가의 협력 관계를 맺으라.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실용주의적이다. ..

실제로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인도주의의 위기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그들의 가장 선한 면을 드러내 보일 기회니까!  46-47


몇몇 거대 다국적 기업이 자사의 남아공 지점에서 모든 인종분리정책을 철폐하고 흑인과 백인에게 동일 직업에 대해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는 등 인종차별 법규를 무시하는 결정을 내렸는데,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결정이 직접적인 정치 투쟁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과 기업의 이익이 맞아 떨어지는 완벽한 사례 아닌가? 그 회사들은 이제 인종차별정책이 사라진 남아공에서 번창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47-48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진정한 세계 시민이다. 그들은 이런저런 것들에 대해 걱정이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포퓰리즘적 근본주의와 무책임하고 탐욕스러운 자본주의 기업들에 대해 걱정한다. ..

그들의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그 과정의 부산물로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는 건 사실이지만, 누가 그걸 불평하겠는가!  48


속지 말아야 할 점은, 기부하려면 일단 돈을 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49


유명한 앤드류 카네기는 사병(私兵 사사로울사 군사병)을 고용해 자신의 철강소에서 노동자 단결을 잔혹하게 억누르면서도, 많은 재산을 교육, 예술, 인도주의적 대의를 위해 내놓았다. 철강왕으로 알려진 그는 마음만은 황금으로 되어 있음을 입증해 보인 셈이다. 같은 식으로 오늘날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한 손으로 일단 벌어들였던 것을 다른 한 손으로 내놓는다.  50-51


빌 게이츠.. 지독한 사업가로서의 그는 실질적 독점을 노리며 경쟁사들을 파산시키거나 사들이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치사한 거래 수법을 동원한다. 반면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규모의 자선가이기도 한 그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지 못하고 이질로 죽어간다면 컴퓨터를 가진다는 게 무슨 소용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윤리로는, 자선을 베풀면 무자비한 이윤 추구 행위도 상쇄된다.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  52


진심이든 위선이든 자선행위는 자본주의적 순환이 논리적으로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는 철저하게 경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연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선 행위는 진정으로 곤궁에 처한 이들에게 부를 나눠준다는 일종의 재분배를 통해 균형을 재확립하며, 치명적인 덫을 피해간다.  53-54


오늘날 악을 대표하는 좋은 예는 평범한 소비자들이 아니다. 그런 전반적 파괴와 오염을 조성하는 데 전적으로 관여했으면서, 돈을 써서 자기 자신이 저지른 결과로부터 쏙 빠져나오는 자들, 빗장 공동체에 살면서, 유기농 식품을 사다 먹으며, 자연 보호 구역에서 휴가를 즐기는 자들이 바로 악이다.  58-59


니체는 서양 문명이 말인(末人 끝말 사람인, the Last Man), 즉 어떤 열정도 헌신도 없는 무심한 인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말인은 꿈꿀 줄 모르고, 삶에 지쳐 있으며, 어떤 위험도 감수하려 하지 않고 오직 안락함과 안정성만을, 그리고 서로에 대한 관용의 표현만을 추구한다. "이따금 약간의 독을 마시고 유쾌한 꿈을 꾼다. 그리고 최후에는 많은 독을 마시고 유쾌한 죽음을 맞는다. 그들에게는 낮의 쾌락과 밤의 쾌락이 따로 있지만, 건강은 챙긴다. '우리는 행복을 발견해 냈어.' 말인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깜빡인다."  59-61


알랭 바디우는 '무조(無調 없을무 고를조)'의 세계(Monde atone)라는 개념을 전개한다. 이는 주인기표(Master-Signifier, 라캉은 우연적인 표상체계를 단일한 의미의 체계로 만들어낼 수 있는 특권적인 중심기표를 주인기표라 부른다)의 개입이 결여된 까닭에 다양성을 가진 혼란스러운 현실에 어떤 의미 있는 질서도 부여하지 못하는 세상을 뜻한다.  67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던 세계의 근본적 특성은 명령(order)을 내리는 주인기표의 이런 작용을 없애려 든다는 점이다. 세계의 복잡성은 무조건적으로 확고히 인정받아야 한다. 그 복잡성에 어떤 질서(order)를 부과하려 드는 주인기표는 모두 해체되고 흩어져야 하는 것이다. "근대는 세계의 '복잡성'을 위해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놓는데, 그것은 정말 무조(無調 없을무 고를조)에 대한 욕마을 일반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68 


주관적 폭력과 싸우는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구조적 폭력의 행위자가 되는데, 이 구조적 폭력이야말로 주관적 폭력을 낳는 원인이다. 관용의 정신으로 에이즈 치료나 교육에 수백만 달러를 내놓는 자선가는 그 자신이 금융 투기로 수많은 이의 삶을 파괴했던 장본인이며, 그리하여 자신이 타파하고자 하는 불관용 그 자체의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

환상은 금물이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오늘날 모든 진보적 투쟁의 적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원인 중 부차적인 것만을 해결하고자 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체제 자체의 잘못된 점을 직접 구현하는 화신이다. 인종주의, 성차별, 종교적 반계몽주의 등과 싸우느라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과 전략적 동맹을 맺고 타협해야 할 때에는 이 점을 반드시 새겨야 한다.

그렇다면, 으리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물론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좋은 사람이고 세계의 빈곤과 폭력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이런 걱정을 할 만한 능력도 되는 사람이다. 사실 그런 사람에게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

또 그는 빈곤과 싸워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건 그가 그 신념을 바타응로 돈을 벌어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70-71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선한 자에 대한 심문]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 준다.


앞으로 나오라, 우리는

그대가 좋은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대는 매수되지 않지만,

집을 내려치는 번개 또한

매수되지 않는다.

그대는 그대가 했던 말을 지켰다.

그러나 어떤 말을 했는가?

그대는 정직하고, 자기 의견을 말한다.

어떤 의견인가?

그대는 용감하다.

누구에게 대항하는 용기인가?

그대는 현명하다.

누구를 위한 현명함인가?

그대는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돌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대는 누구의 이익을 돌보는가?

그대는 좋은 친구이다.

그대는 좋은 사람들에게도 좋은 친구인가?


이제 우리의 말을 들으라, 우리는

그대가 우리의 적임을 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제 그대를 벽 앞에 세우리라. 그러나 그대의 미덕과 장점들을 고려하여 

우리는 그대를 좋은 벽 앞에 세우고 그대를

좋은 총의 좋은 탄환으로 쏠 것이며 그대를 

좋은 삽으로 좋은 땅에 묻어 주리라.  71-72





2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두려워하라!


오늘날은 탈정치적 생명정치(post-political bio-politics)라는 정치 형태가 지배하고 있다. 

'탈정치'란 낡은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벗어나, 대신 전문적인 운영과 관리에 초점을 맞춘다고 주장하는 정치이다. 그리고 '생명정치'란 인간 생활의 안전과 복지를 제도화하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는 정치를 가리킨다. 이 두 영역이 어떻게 겹쳐지는가는 자명하다. ..

탈정치화되고, 사회적으로 객관적이 관리와 이해 조정을 정치의 기본적 차원으로 삼게 된 이상, 사람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적극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포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생명정치란 궁극적으로 공포의 정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부당하게 희생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혹은 괴롭힘을 당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막아내는 것을 중요시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보편적인 공리를 기초로 한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본질적인 부분을 포기해버리는 정치 사이의 차이다. 왜냐하면 후자의 정치는 다음과 같은 온갖 원리들을 동원하면서 공포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민자들에 대한 공포, 범죄에 대한 공포, 성적인 타락에 대한 공포, 많은 세금을 물릴지도 모른다는, 지나치게 개입하는 국가 자체에 대한 공포, 생태적 파국에 대한 공포, 괴롭힘에 대한 공포 등이다... 이러한 (탈)정치는 언제나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우중(ochlos) 혹은 다중(multitude)을 조종하는 수법에 의존한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무섭게 몰아대는 것이다.  73-74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점차 괴롭힘 당하지 않을 권리가 중요한 인권으로 부상하고 있는데, 이는 타인과 안전 거리르 유지할 권리이다.

게다가 탈정치적 생명정치에는 두 가지 측면.. 하나는 인간을 '벌거벗은 생명', 즉 호모 사케르(Homo sacer)로 환원해 버린다는 면이다. 이른바 신성한 존재라고 불리는 호모 사케르란, 전문지식에 기초하여 관리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관타나모의 죄수들이나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처럼 모든 권리가 배제된 이들을 일컫는다. 이와 같은 극단화는 자신이 취약한 존재이며, 항상 다중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지도 모르는 존재라는 식으로 경험하는 자기애적 태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75


우리는 모두, 지각의 착각(perceptual illusion)과 비슷한 일종의 윤리적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셈이다. 우리가 이런 착각에 빠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추상적으로 추론하는 능력이 엄청나게 발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서적-윤리적 대응은 아주 오래된 본능적 반응에 길들여져서 고통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면 동정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대부분은 버튼 하나를 눌러 눈에 보이지 않는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 총으로 누군가를 직접 겨냥해 쏘는 일에 대해 더 큰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76-77


똑같은 사람이 어떻게 적들을 향해서는 끔찍한 폭력 행위를 저지르면서 자기 집단에 속한 이들에게는 따뜻한 인간애와 친절을 베풀 수 있는가,...

자신의 윤리적 고려의 범위를 모든 곳에 적용하는 이들은 깊은 모순, 심지어 '위선'에까지 빠진다. 하버마스의 용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그들은 화용적 모순(pragmatic contradiction)에 휘말린다. 자기 자신이 속한 언어 집단을 지탱하는 윤리적 규범들을 위반하기 때문이다. 우리 공동체의 내부에 속한 사람들에게 부여하는 기초적인 윤리적 권리를 그 외부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부여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83


기독교 윤리를 생각해 보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는 성 바울의 유명한 말처럼 기독교 윤리는 전 인류를 포용한다는 자세를 취하지만, 그럼으로써 동시에 공동체 안에 포함되려 하지 않는 이들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

"모든 인간은 형제"라는 기독교의 금언은 동시에 형제애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

기독교도들은 늘 자신들이 '선택받은 민족' 이라는 유대인의 배타적 신앙관을 극복하고 전 인류를 포용했다고 자화자찬한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신과의 직접연결이라는 특별한 은혜를 받은 선민(選民 가릴선 백성민)이라 여기면서, 사신(邪神 간사할사 귀신신)을 숭배하는 다른 민족도 인간이기는 하다고 인정한다. 반면 기독교가 가진 보편주의의 편향적 태도는 비기독교도를 인류의 보편성 그 자체로부터 배제해 버린다.  91-92


프로이트와 라캉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기본 가르침인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는 본성적으로 문제적인 데가 있다고 주장한다.  ..

이웃이 가진 비인간적 특징으로 인해 이웃은 보편성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입장에 선다는 것은 매우 폭력적인 것이며, 심지어 상처를 받는 것이기도 하다.  93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말처럼 "만약 당신이 타인의 꿈속에 갇힌다면, 끝장이다!"인 셈이다.  94


정중함이라는 방어벽의 붕괴가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서로 다른 문화들이 충돌할 때이다.  96



* 주이상스(Jouissance). 쾌락이 고통을 줄이고 쾌감은 늘리려고 하는 쾌락원칙을 따르는 반면에, 주이상스는 고통마저도 감수하는, 혹은 고통 속에서 느끼는 쾌감을 가리킨다. 따라서 주이상스는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즐김이다.  96



오래 전 프로이트가 이미 간파한 바와 같이, 이웃이란 본래 하나의 사물이고, 충격을 안겨주는 침입자이며, 우리와 다른 생활방식을 지니고 있어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웃은 저 나름의 사회적 관습과 의식에 따라 구체화된, 주이상스를 추구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를 불안케 하는 자이고, 우리 생활방식의 균형을 깨뜨리는 자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이 너무 가까워질 경우 우리는 이 거슬리는 침입자를 없애기 위해 공격적인 반응을 하게 될 수 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더 많은 의사소통이란, 무엇보다도 우선 더 많은 갈등을 뜻한다"고 했다. 그런 이유에서, '서로를 이해하기'라는 태도에 더해 '서로 비켜서기'라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옳다. 적절한 간격을 유지하고, 새로운 '재량 규범'을 도입함으로써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98


뮐레르는 '좋은' 폭력과 '나쁜' 폭력을 구분하려는 시도를 완전히 거부해 버리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폭력을 정의할 때 필수적인 것은 '좋은' 폭력이란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좋은' 폭력과 '나쁜' 폭력을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순간, 우리는 폭력이라는 단어의 고유한 용법을 잃고 혼란에 빠져든다. 무엇보다도, '좋은' 폭력이란 무엇인지를 정의하기 위한 기준을 만들어내는 순간, 우리는 모두 그 기준을 매우 손쉽게 이용하여 우리 자신의 폭력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투쟁과 공격이 삶의 일부인데 어떻게 폭력을 완전히 거부할 수 있겠는가? 쉬운 해결책은 '공격(aggression)과 '폭력'은 '죽음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폭력'이란, 공격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공격이 과도해져 점점 더 많은 것을 욕망하면서 사태의 정상적 흐름을 교란시키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이 과도함을 제거해 버려야 한다.  102


처음에,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 권력을 추구한다. 그러나 주의하지 않으면, 곧 한계를 넘어 남들을 지배하려 들게 될 것이다... 시몬 베유는 "한계가 분명한 욕망은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만, 무한한 욕망은 그렇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103





3 '피로 물든 조수가 범람하다'


2005년 가을, 프랑스 파리 교외에서 폭동이 일어나 수천 대의 차가 불타고 대규모 군중 폭력이 발생했다. 흔히 2005년 8월 29일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덮치고 간 뒤에 발발한 약탈과 1968년 5월 파리의 68혁명을 이 사건과 비교하곤 한다.  115


알랭 바디우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적 공간이 점차적으로, '세계 없음(Worldless)'의 공간(space)으로 경험된다고 했다. 이런 공간에서, '의미없는' 폭력 말고 달리 취할 수 있는 저항의 수단이 있을 수는 없다.  122



* 세계없음(Worlsless). 우리가 예전에는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 '세계(world)'에 살고 있었는데, 유토피아적 전망 자체가 사라져버린 이곳은 이제 세계가 아니라 단순한 장소(place)에 불과하다는, 바디우의 독특한 조어.  122



자본주의는 전지구적이며 전 세계를 포괄하지만, 동시에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없는' 이데올로기적 상황을 유지시키며,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의 인식론적 지도를 그릴 기회가 박탈된 상태로 있다.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는 역사상 최초로 의미를 와해시키는(detotalised meaning) 사회경제 질서다.  123



* 대학담론(university discourse). 라캉에 따르면 의미활동이 시작되는 담론의 행위자가 누구냐에 따라 담롬의 성격이 달라진다. 라캉은 이를 주인담론, 대학담론, 히스테리담론, 분석가담론 등 4가지로 도식화했는데, 대학담론은 탄탄한 지식체계로 무장한 교수들의 '지적' 담론을 순진한 학생들이 전수받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125



이기주의(Egotism), 즉 자신의 안녕에 대한 관심은 공익 대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기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이타적인 규범을 도출해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개인주의 대 공동체주의, 공리주의 대 보편적 규범에 대한 고집이라는 이항대립은 그릇된 것이다. 두 대립항이 결과적으로는 결국 같아지기 때문이다. 쾌락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오늘날의 사회에서 진정한 가치들이 없어지고 있다고 한탄하는 비평가들은 완전히 요점을 놓치고 있는 셈이다. 이기주의적이 자기애의 진짜 반대말은 이타주의, 즉 공익에 대한 고려가 아니라 부러움과 원한이고, 바로 이 부러움과 원한이라는 감정으로 인해 나는 나의 이익에 반(反 되돌린반)하여 행동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죽음 충동은 현실원칙만큼이나 쾌락원칙과도 대립한다.(프로이트의 현실원칙과 쾌락원칙. 프로이트는 모든 본능적 충동이 쾌락을 추구하고 쾌락원칙을 따른다고 봤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아가 그렇게만 행동하면 정상적 인간이 될 수 없으니, 그래서 현실원칙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현실원틱은 쾌락원칙의 반대라기보다는 그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쾌락을 포기했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 모종의 보상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쾌락은 현실적으로 양보된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악, 즉 죽음 충동은 자기파괴를 수반한다. 죽음충동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익에 반(反 되돌리반)하여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캉이 설명했듯, 인간의 욕망이 가진 문제점은 그것이 언제나 '타자의 욕망' 이라는 데 있다. 이때 '타자의 욕망' 이란 타자를 향한 욕망과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특히 타자가 욕망하는 것에 대한 욕망, 이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바로 이 '타자가 욕망하는 것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질시가 발생하며, 부러움이라는 감정 속에는 원한의 감정도 들어 있는데, 이는 인간 욕망을 이루는 근본 요소들이다.  131-132


* 프로이트의 현실원칙과 쾌락원칙. 프로이트는 모든 본능적 충동이 쾌락을 추구하고 쾌락원틱을 따른다고 봤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아가 그렇게만 행동하면 정상적 인간이 될 수 없으니, 그래서 현실원칙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현실원칙은 쾌락원칙의 반대라기보다는 그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쾌락을 포기햇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 모종의 보상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쾌락은 현실적으로 양보된 것이기 때문이다.  132


부러움/원한에 대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런 감정을 갖는다는 것이 단지 내가 이기면 다른 사람은 지게 되는 제로섬 게임의 원칙을 지지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부러움/원한에는 양자 간에 격차가 있다는 점이 함축돼 있는데, 이 격차는 긍정적인 것(아무도 지는 일 없이 모두가 이길 수도 있다)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이다. 내가 얻느냐 내 적이 잃느냐를 두고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내 적이 잃는 편을 택한다. 심지어 그것이 나에게 손해가 될지라도 말이다. 마치 내 적의 손해에서 오는 나의 결과적인 이득이 내 승리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병적인 요소가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불평등이 비인격적이고 보이지 않는 힘으로 인해 발생한다면, 그 불평등을 받아들이기가 훨씬 더 쉽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자본주의 내에서 시장은 '비합리적'으로 돌아가고, 성공과 실패 역시 '비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바로 이게 시장의 장점이다. 내 성공이나 실패를 '내 책임이 아닌 것', 혹은 우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시장에 대한 오래된 모티프가 '예측 불가능한 운명'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라. 이 점을 감안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만하다고 여기는 가장 큰 이유는 자본주의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있다. 사람들은 내가 실패한 것이 나의 열등한 자질 때문이 아니라 우연으로 인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실패를 훨씬 견딜 수 있다는 얘기다.  133-134


루소는 이기주의를 자기애(amour-de-soi)와 자존심(amour-propre)으로 구분했는데, 전자는 있는 그대로의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인데 반해, 후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을 도착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후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을 도착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후자가 강한 사람들은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데 장애물이 될 법한 것들을 제거하는 데 집중한다.

'이 원초적 정념, 즉 자기애(amour-de-soi)는 그 본질이 사랑스럽고 다정다감한 것이다. 이는 오직 우리의 행복만을 생각하며, 또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행복과 관련되는 것들만 대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대하는 것이 목표물에서 장애물로 바뀌게 되면 그들은 대상에 닿고자 하는 노력보다 그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온 마음이 사로잡히게 된다. 이제 그들의 본성은 바뀌어 성마르고 증오에 차게 된다. 고결하고 순수한 마음인 자기애가 자존심(amour-propre)으로 바뀌게 되는건 이런 식이다. 여기서 자존심이란 남과 비교를 위해 동원되는 상대적인 감정이고, 편애를 요구하는 감정이다. 그리고 자존심을 향유한다는 것은 순전히 부정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의 행복에서 만족을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불행에서 만족을 찾게 된다.'

따라서 악한 사람은 이기주의자(egoist)가 아니다. 이기주의자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이기주의자는 자기 이익에 신경 쓰기도 너무 바빠서 남들에게 불행을 일으킬 만한 여유가 없다.  136-137


널리 알려진 인류학적 일화에 따르면, 우리는 '미개인'들이 모종의 미신적 믿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예를 들어 그들이 물고기나 새 등의 후손이라는 믿음), 이런 믿음에 대해 직접 물어 보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당연히 안 믿죠, 우린 바보가 아니라고요! 그런데 우리 조상 중에는 정말 그 얘기를 믿었던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한 마디로,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남에게 전가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대할 때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 가령 우리는 매년 산타클로스 행사를 여는데, 그것은 우리가 아이들은 산타클로스를 믿을 것 같다고 여기고, 따라서 아이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그리고 아이들이 천진난만하다는 우리의 믿음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그리고 물론, 선물을 받으려고)산타클로스를 믿는 척한다. 또 이는 모종의 비리에 연루된 정치인들이 정직한 척 하면서 말하는 흔해빠진 변명과 뭐가 다른가? "저는 그 사실을(혹은 저를) 믿는 평범한 사람들을 실망시켜드릴 수 없습니다"  143


어떤 높은 차원의 정치적 진리를 위해서 거짓말을 해서도 안 되고, 왜곡해서도 안 되며, 혹은 사실을 묵살해서도 안 된다. 요점은 어떤 높은 차원의 정치적 진리를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시실을 왜곡 혹은 묵살하라는게 아니다. 주관적 입장을 바꾸어 실제 사실을 말하는 행동에 발화 행위의 주관적 입장에서 나오는 거짓말을 포함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게 아주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기준이 가진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147


2005년 10월 초, 아프리카 이민들이 계속해서 아프리카 모로코 리프 해안의 스페인령 소도시 멜리야로 필사적 잠입을 시도하자, 이들의 유입을 어떻게 막을까 궁리하던 스페인 경찰은 스페인 영토와 모로코 사이에 장벽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표명했다. 이 장벽의 이미지, 전기 시설로 빈틈없이 무장한 복잡한 구조물의 이미지는 베를린 장벽과 섬뜩하리만치 닮았다. 다만 그 기능이 정반대일 뿐이다. 이 벽의 목적은 사람들이 나가지 못하게 하는게 아니라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분리 조치를 강행해야만 했던 스페인의 호세 사파테로 정부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반인종주의적이고 관용적이라 평가받던 정권이었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잔인한 역설이라 할 수 있다. 유럽의 국가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분리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151





4 관용적 이성의 이율배반


2006년 가을, 오스트레일리아 최고의 무슬림 성직자, 셰이크 타즈 딘 알-힐랄리의 발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은 격분했다. 무슬림 남성들이 집단 강간을 저질렀다가 수감된 사건을 두고,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만일 고기를 포장도 하지 않고 길거리에 내놓았다가..고양이들이 그 고기를 먹었다면.. 누구의 잘못인가, 고양이들인가 고기인가? 포장되지 않은 고기가 문제다." 베일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을 포장하지 않은 날고기에 비유한 자체가 엄청나게 도발적인 것이었기에, 알-힐랄리의 주장에 훨씬 더 놀라운 전제가 숨어 있었음에도, 이 전제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남성의 성적 행위는 여성의 책임인데, 그렇다면 성적 유혹이라 인식하는 것을 잡했을 때 남성들은 완전히 무력하고, 그 유혹에 전혀 저항할 수 없으며, 날고기를 본 한마리 고양이와 똑같이 완전히 성적 욕구의 노예가 된다는 말인가? 남성은 자기 자신의 성적 행동에 책임이 전혀 없다고 가정하는 이런 태도와 대조적으로, 서구에서는 여성의 에로티시즘을 대놓고 강조하는데, 이는 남성이 성욕을 자제할 수 있으며, 성적 충동의 맹목적인 노예가 아니라는 전제에 기초한다.  155-156


홀로코스트는 비판이 금기시되는 성역이 아닌가?  157


어떤 때에는 범죄를 직접 인정하는 것이 그 책임을 회피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서구의 법률만능주의적 위선..  158


칸트의 논의 속에서 이성개념을 부정적인 용법으로 사용할때는 예지계적 대상(poumenal objects)에 한정되며, 우리 또한 이성 개념을 부정어법으로만 사용해야만 한다. 홀로코스트도 마찬가지다. 이는 반드시 부정어법으로만 언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끌어들임으로써 어떤 정치적 수단을 정당화/합법화하고자 하면 안 된다. 반대로 그것은 오직 그 정치적 수단을 비합법화하기 위한, 즉 우리의 정치적 행위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기 위한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홀로코스트와 같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오만한 행동을 비난할 수 있는 것이다.  163


법을 위반하는 강도짓과 법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강도짓은 뭐가 다르냐는 말이다. 이 교훈을 살짝 변형시키면 이렇게 된다. 즉, 국가권력이 벌이는 대테러 전쟁에 비하면 테러 행위는 뭐가 대수인가?  168-170


우리는 불관용에 대해 얼마나 더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가?  184


이브 르 브르통은 루이 9세의 십자군 원정에서 어느 늙은 여인을 만났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여인은 오른손에는 불이 담긴 그릇을, 왼손에는 물이 담긴 사발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무엇을 하는 거냐고 묻자, 여인은 불로는 천국을 불살라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하고, 물로는 지옥의 불을 모조리 끌 거라 대답했다. 여인은 이어서 말했다.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보상을 받기 위해, 혹은 지옥에 떨어진다는 공포 때문에 선행을 하는 이가 아무도 없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직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선행을 베풀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덧붙일 것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하느님도 지워 버리고 그냥 선행 그 자체를 위해 선행을 하면 안 될까? 온전히 기독교적인 이 윤리적 자세가 오늘날 대부분 무신론에만 남아 있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196


타인의 믿음에 대한 존중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는 것은 결국 두 가지 의미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타자를 어린애 대하듯 다루며 그의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상처주지 않는 편을 택하는 태도이거나, '진리 체계들' 이 복수로 존재한다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면서 진리를 명백하게 주장하는 행위는 모두 폭력적인 강요라고 깎아내리는 태도이거나, 이렇게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하지만(다른 모든 종교도 마찬가지지만) 이슬람을 존중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엄격한 태도로 비판적 분석을 해보면 어떨까? 이것이, 그리고 이것만이, 무슬림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들을 자기 믿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진지한 성인들로 대접해야 하는 것이다.  198






5 관용은 이데올로기다


진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으려면 아미시 청소년들은 모든 선택사항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그런 선택사항들 속에서 교육받아야 한다.  205


'관용적인' 서구의 다문화주의적 관점 속에서 말하는 '자유로운 선택의 주체'는 이들이 속한 특정한 생활세계에서 찢겨지고 그 뿌리에서 절단되는 극심한 폭력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얘기다.  207


나아가 타자의 문화를 두고 관용의 태도가 결여돼 있다거나 야만적이라는 둥 치부해버리는 태도의 대척점에는 타자의 문화가 가진 우수성을 너무도 쉽게 인정해버리는 태도가 있다. 가령 인도에 주둔하던 영국 식민 관리들 중 인도의 심오한 영성을 찬양하던 이가 얼마나 많았던가. 서구에서는 합리성과 물질적 부에 대한 집착 때문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며 말이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타자가, 남을 지배하기보다는 조화를 추구하고, 유기적 존재이고자 하며, 덜 경쟁적이고 또 협력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찬양하는 것도 서구 자유주의가 가진 진부한 주제의 목록에 들어가는 것 아닌가? 서구의 자유주의가 타자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미명하에 억압을 못 본 체 하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 심지어는 선택의 자유를 도착적인 방식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가령 과부를 불태워 죽이는 짓을 한다 해도, 그 사람들은 자기의 생활방식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그것이 우리 눈에 비참하고 불쾌해 보인다 해도 우리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209


전체주의 체제가 즐겨 사용하는 전략 중 하나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모두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극도로 엄격한 법적 규제(형법)를 부과하는 수법이다. 다만 그 엄격한 법을 완전히 집행하지는 않는다. 이런 전략을 통해 체제는 자비로운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알겠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너희 전부를 체포해 유죄 판결을 내리는 건 일도 아냐. 하지만 무서워 하지마, 우린 관대하니까.." 이와 동시에 체제는 계속적인 위협으로 기강을 잡으며 체제에 종속된 이들을 길들인다. "너무 기어오르면 안 좋아. 잊지 마, 우리는 언제라도 너희들을.."  222


전체주의 체제는 법의 위반에 대해 관용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전체주의 체제라는 틀 속의 사회적 삶에서는 법을 위반하고, 뇌물을 주고, 부정한 짓을 하는 것이 생존의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223


만일 내가 내 가장 친한 친구와 승진을 두고 경쟁하는 상황에 처했다가 내가 이긴다면, 내가 취해야 할 합당한 행동은 친구가 승진할 수 있도록 내가 물러나겠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모두 우정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 바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상징적 교환, 즉 '거절이 기대되는 제스처'이다. 상징적 교환의 불가사의한 마력은, 결과적으로 양자가 모두 교환이 이루어지기 전과 똑같은 지점에 있지만, 그들이 맺은 단결하자는 약속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양자 모두 분명히 무언가를 얻게 된다는 데 있다. 사과를 주고받는 과정 역시 유사한 논리를 따른다. 만일 무례한 말로 누군가를 불쾌하게 했다면 내가 취해야 할 합당한 행동은 그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고, 한편 그는 "고맙네, 하지만 난 기분 상하지 않았어. 자네가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전혀 사과할 필요 없다네!" 정도의 말로 답하는 것이 도리다. 물론 여기서 요점은, 결국에는 사과할 필요 없다는 결말이 났지만, 그에 앞서 먼저 사과의 말을 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과할 필요 없다'는 말은 오직 내가 사과를 한 이후에만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아무 일 아닌 상황이고 사과가 필요 없다고 분명히 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런 사과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만 얻는 것이 생기고, 우정도 깨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거절해야 하는 제안을 받은 사람이 실제로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내가 친구와의 승진 경쟁에서 진 뒤에 자기 대신 그 지위에 올라가라는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어떨까? 이는 그야말로 파국적인 상황이다. 그런 상황으로 인해 사회질서의 중핵을 이루는 형식적 자유가 붕괴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실체 그 자체의 붕괴, 사회적 유대의 해체나 다름없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로베스피에르에서 존 브라운에 이르는 혁명적 평등주의자들은,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습관을 무시하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보편적 규칙이 작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습관 덕분인데, 말하자면 이들은 습관에 대한 고려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225-226


193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조지 오웨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계급 구분이 사라져야 한다는 바람은 필요하지만, 그럴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한 그런 바람은 전혀 효력이 없다. 우리가 여기서 맞닥뜨려야 하는 사실은 계급 구분을 철폐한다는 것은 곧 당신 자신의 일부를 없앤다는 의미라는 사실이다. 전형적인 중간계급의 일원으로서의 '나'가 있다고 치자. 내가 '계급 구분을 없애고 싶다'고 말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내가 생각화고 말하는 것은 거의 모두가 계급 구분 덕분에 형성된 결과물이다. (..) 나는 나 자신을 완전히 뒤바꾸어, 결국에는 이전의 내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229-230


오웰은 이데올로기적 일상 속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배적 태도는 우리가 진심으로 믿고 있지만 조롱하는 척 거리를 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개이 '지식인'들이 내놓는 좌파적 의견은 대부분 거짓이다. 그는 조롱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대상을 진정으로 믿고 있으며, 단지 조롱하는 척만 할 뿐이다. 여러 가지 예가 있지만 하나만 꼽아 보자면, 명문 사립학교에서 강조하는 명예에 대한 예법. '단체 정신', '쓰러진 사람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 등등의 헛소리를 들 수 있다. 이런 예법을 비웃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지식인'을 자처하는 이라면 그 누가 이를 비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외부에서 이를 비웃는 이를 만난다면 문제가 조금 달라진다. 마치 우리가 일상 속에서는 늘 우리 잉글랜드를 욕하지만, 외국인이 똑같은 욕을 하면 크게 분개하는 것과 같다. (..) 당신과는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을 만났을 때에야, 당신은 당신이 실제로 믿고 있는 게 뭔지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웰이 전제하는 이 진정한 미데올로기적 정체성에는 '내면적인' 면이라곤 전혀 없다. 내면 깊숙한 믿음은 전적으로 '외부에'있으며, 내 몸이라는 육신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관습 속에 체현돼 있다.  231


아랍 문명과 미국 문명의 충돌은 야만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 사이의 충돌이 아니라, 익명으로 행해지는 잔혹한 고문과 미디어의 구경거리가 된 고문, 피해자의 육체가 고문의 가해자인 '무고한 미국인' 의 미소 짓는 얼굴을 돋보이게 하는 무명의 재경 역할을 고문 사이의 충돌이다.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자면, 문명의 충돌은 모두 그 밑에 잠재한 야만끼리의 충돌인 듯하다.  244






6 신적 폭력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에서 탐정 아보가스트가 계단에서 살해당하는 장면은 '신의 시점에서 바라본' 히치콕적인 장면이다. 우리는 1층 복도와 계단에서 이루어지는 전체 장면을 위에서 내려다본다. 한 인물이 괴성을 지르며 화면 속으로 들어와 아보가스트를 난도질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인물의 주관적 시점으로 이동한다. 계단으로 추락하는 아보가스트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잡힌다. 마치 객관적 장면에서 주관적 장면으로의 이동을 통해서, 신 자신이 중립적 위치를 버리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난폭하게 개입하면서 지상에 '강림'한 것처럼 보인다. '신적 폭력'은 이와 같은 난폭한 개입처럼 법을 넘어선 정의를 가리키는 것이다.  245


진정한 원한과 처벌(복수), 용서, 그리고 망각이라는 3항조와 같은, 범죄행위에 대한 일반적 대응방식은 어떻게 연관되는가? 우리가 여기서 첫째로 해야 할 일은 정당한 복수(처벌)라는 유대교적 원칙('눈에는 눈' 이라는 원칙)이 "우리는 당신의 범죄는 용서하겠지만 그것을 잊지는 않겠다"라는 일반적인 정식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용서하면서 동시에 망각하는 유일한 방법은 복수 혹은 정당한 처벌을 하는 것이다. 범죄에 대한 합당한 처벌이 이루어진 후 나는 앞으로 나갈 수 있으며 과거의 일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범죄를 합당하게 처벌하는 일에는 뭔가 해방적인 요소가 있다. 나는 사회에 빚을 갚고 다시 자유로워지며, 과거는 더 이상 나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는 '자비'의 논리는 반대로 훨씬 더 억압적이다. (용서받은 범죄자로서) 나는 영원히 내가 저지른 범죄이ㅔ 시달림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그 범죄는 '무효화' 되지 않았고, 소급해서 취소되지 않았으며, 지워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것이 헤겔이 말하는 처벌의 의미인데 말이다.  262


벤야민의 <폭력비판에 대하여> 마지막 몇 문단.

'모든 영역에서 신화에 대해 신이 맞서듯이 신화적 폭력에도 신적인 폭력이 맞선다. 그리고 신적인 폭력은 모든 면에서 신화적 폭력과 반대다. 신화적 폭력이 법 제정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를 파괴하며, 신화적 폭력이 죄를 부과하면서 동시에 속죄를 시킨다면 신적 폭력은 죄를 면해주고, 신화적 폭력이 위협하는 폭력이라면 신적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죽음을 가져온다. (..) 왜냐하면 피는 단순한 생명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법적 폭력이 소멸된다는 것은 자연적 생명체에 불과한 자들이 지은 죄에서 생겨난 것이다. 결백하고 불행한 생명체였던 이 자연적 생명체는 단지 죄지은 생명체로서 '속죄'해야 하는 징벌을 받은 존재다. 그리고 이 때 죄를 사하여 준다는 것이 죄 자체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사면해준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법의 지배는 단순한 생명체에서 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적 폭력은 폭력 그 자체를 위해 단순한 생명체에 가해지는 유혈의 힘이고, 신적 폭력은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 모든 생명체에 가해지는 순수한 힘이다. 신화적 폭력은 희생을 요구하며, 신적 폭력은 그 희생을 받아들인다.

(..) "죽여도 됩니까?" 란 물음에 대한 답변은 십계명의 "너희는 살인하지 말지어다" 말고는 달리 없다. 이 계명은 마치 신이 어떤 행위를 '가로막는' 것처럼 행위 앞에 버티고 서 있다. 그러나 그 계명은 그것을 따르도록 강제하는 처벌에 대한 공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이미 이루어진 행위에 대해 명령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다. 이미 이루어진 행위에 대해서는 그 계명을 바탕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미 이루어진 행위에 대한 신적 판단이나 그 판단의 근거가 됐던 것 모두는 예단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폭력적으로 살해하는 행위는 그 계명을 근거로 정죄하는 사람들은 잘못이다. 그 계명은 판단의 척도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인격체 또는 공동체에 대해 행도으이 지침으로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하는 인격체나 공동체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그 계명과 대결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그 계명을 도외시한 책임을 스스로 떠안아야 한다.'  271-273


신적 폭력에 의해 제거되는 자들은 명백하게 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희생자(제물)가 아니다.

그들은 희생 없이 죽임을 당하는 셈이다.  273


벤야민은 <폭력비판을 위하여>의 결론부에서 "혁명적 폭력은 인간이 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순수한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274


어떤 폭력이 신적 폭력인지 식별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  275


신적 폭력은 신(대타자) 자신의 무능을 보여주는 징표다.  276





7 에필로그


우리의 탐구는 한 바퀴를 돌았다. 폭력에 반대한다는 거짓 주장을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해방적 폭력을 승인하는 데 이르는 여정이었다. 우리는 주관적 폭력과 싸운다고 하면서 구조적 폭ㅍ력에 가담하는 자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283


이 책의 교훈은 무엇인가?

세 가지다.

첫째, 폭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쁜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하나의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조작이자, 사회적 폭력이 가진 근본형식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일종의 신비화라는 점이다. 다른 형식의 폭력적 학대에 대해서는 그토록 예민한 서양 사회가 우리로 하여금 가장 잔혹한 형식의 폭력에 대해선 무감각하게 만드는 다양한 메커니즘을 동시에 동원해 올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은 대단히 징후적인 일이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런 일은 종종 희생자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동정의 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두 번째 교훈, 진정으로 폭력적이 되는 것, 사회적 삶의 기본  변수를 폭력적으로 뒤흔드는 행위를 감행하는 것은 어렵다.  284


끝으로(세 번째), 주체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말해주는 교훈은 폭력이 어떤 행위의 직접적인 속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폭력은 행위와 그 행위가 이루어진 맥락 사이에, 그리고 어떤 행동이 활동적인 것과 비활동적인 것 사이에도 퍼져 있다. 동일한 행위일지라도 그 맥락에 따라 폭력으로 간주될 수도 있고 비폭력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때로는 공손한 미소도 야수적인 감정의 폭발보다 더 폭력적일 수 있다.  293


오늘날 진짜 위협적인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유사 능동성이다. 곧 '행동하라'는 요구, '참여하라'는 요구, 현재 현재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걸 감추라는 요구다. 사람들은 늘 개입하면서, '뭔가를 한다'. 학자들은 학자들대로 무의미한 논쟁에 참여한다. 진정 어려운 일은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고 철회하는 것이다. 권력을 쥔 자들은 설사 그것이 '비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침묵 보다는 참여와 대화를 더 좋아한다. 우리를 대화에 끌어 들여서 우리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길한 수동성을 깨뜨려버리기 위해서다. 그런 면에서 유권자들의 기권은 진정한 정치적 행위인 셈이다. 바로 그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가 오늘날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공허함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폭력이란 말을 기본적 사회관계를 발본적으로 뒤집어버리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면, 몰지각하고 정신나간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수백 만 명을 학살한 역사상의 '괴물'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이 괴물들이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폭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다고 지젝이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와 관련해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부추기고 있는 게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해다.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우리가 항상 선거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이콧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급진적인 행동을 조직해야 할 상황도 있고 아무 것도 하지 안흔 것이 가장 좋을 때도 있어서, 이는 실용적으로 접근돼야 한다. 모든 것은 상황에 달려있는 것이다."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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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우리는 앞으로 이 책에서 1만 년 전에 시작된 거대한 문화적 격변이, 어떻게 인간 성생활에 관한 진실을 파괴적이며 위협적인 것으로 만들었는가를 설명할 것이다. 그 결과 그 진실이 어떻게 종교적 권위에 의해 침묵을 강효당했는가, 어떻게 의사에 의해 병적인 것으로 취급받았는가, 어떻게 과학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무시당했는가, 어떻게 도덕적 훈계를 일삼는 치료사에 의해 감춰졌는가를 설명할 것이다.

길들여진 우리의 무지(無知 없을무 알지)는 파괴적이다. ..

긴 여정을 함께 해 온 부부들 중 얼마나 많은 쌍들이 대체할 수 없는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 - 가족의 안정성, 동료애, 비록 성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감정적인 친밀감 - 의 제단(祭壇 제사제 제터단)에 기꺼이 자신들의 에로티시즘을 희생했을까?  11


우리는 성적 자유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게끔 유도되고 있다. 하지만 이 시대 인간 성생활은 큰 소리로 말해서는 안 되는, 명백하지만 고통스러운 진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가 '느낀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느끼는 것' 사이에 충돌은 이 시대의 혼란, 불만족, 불필요한 고통의 가장 큰 근원인것 같다.  13-14


인간이 진화해 온 수렵채집인 사회들은 거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고도로 평등한 소규모 집단들이었다. ..

보츠나와의 꿍산족은 호주 오지 원주민들, 아마존 우림 오지의 부족들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인류학자들은 '극단적 평등주의'에는 즉각 보상의 수렵채집인 사회가 거의 보편적이라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공유는 단순한 권장사항이 아니라 의무이다.  22


우리는 이 공유 행위가 섹스에도 마찬가지로 확대됐다고 믿는다. 영장류학, 인류학, 해부학, 심리학의 많은 연구들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23


계절마다 같은 땅에서 농사를 짓게 되자, 대부분의 사회에서 작동 방식이 공동 소유에서 사유재산으로 재빨리 대체됐다. ..

농업공동체 정착생활을 시작했을 때, 사회적 현실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뿌리 깊이 변화했다.  24


농업 혁명의 가장 큰 패배자 - 아마도 노예는 제외하고 - 가 여성이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여성은 수렵채집인 사회의 중심이며 존경받는 위치에서 집, 노예, 가축과 마찬가지로 남성이 얻고 지켜야 할 또 하나의 소유물로 전락했다...

<섹스의 선사시대>의 저자인 고고학자 티모시 테일러는, 관련 고고학적 증거에 고나한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수렵채집인의 섹스는 공유와 상보성(相補性 서로상 도울보 성품성) 개념의 모델이 된 반면, 초기 농업사회의 섹스는 관음증 성향에다 억압적이고 동성애를 혐오하며 생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는 "농부들은 야생(野生 들야 날생)이 두려워 그것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라고 말한다.  25


초기에 호주를 여행한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만난 원주민들이 비참하게 살고 있으며 만성적 기근에 시달린다고 보고했다. 원주민들은 대부분의 수렵채집인과 마찬가지로 보고하면서도 원주민들이 전혀 수척하지 않다는 사실에 당혹했다.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이 굶주려 죽을 정도라고 확신했다. 왜? 왜냐하면 그들은 원주민들이 최후의 수단 - 곤충, 위체티 그럽, 쥐를 먹는 것 - 에 의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것들은 굶주리지 않는다면 아무도 먹지 않을 생물들이다. 그 음식들이 영양가가 높고, 풍부하며, 호두 향을 곁들인 으깬 계란과 부드러운 모차렐라 치즈 멋을 낼 수 있다는 생각을 영국인들은 하지 못했다.  31


어떤 것이 자연스럽다 혹은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지는' 것은 실제로 그렇다는 의미가 아니다. .. 특별히 우리는 식생활이나 섹스처럼 친숙하고, 개인적이며, 생물학적인 경험에 관해 이야기 할 때, 문화적으로 친숙한 것이 마음속 깊이 파고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초기 유럽인들처럼, 우리는 무엇이 정상이며 자연스러운 것인가에 관한 인식의 제약을 받는다.  32


인간 성생활의 기원과 본성에 관한 표준적 담화는, 기만적이며 꺼림칙한 성적 일부일처제의 발전을 설명한다고 주장한다. ..

남성은 싸고 풍부한 씨앗을 멀리 널리 퍼뜨리려고 앴느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부성(父性 아비부 성품성) 확실성을 높이기 위해 한 명 혹은 소수의 여성을 통제하려고 노력한다. 반면 여성은 공급이 제한된, 신진대사 상으로 비싼 알들을 가치 없는 구혼자들로부터 보호한다. 그러나 일단 한 부양자(남편)에게 역이면, 배란기에 재빨리 치마를 끌어올린다. 유전적 우월성이 확실한, 턱이 네모진 남성과의 신속하고 더럽고 은밀한 짝짓기를 위해서이다.  35


찰스 다윈은 진화론적 변화가 발생하는 두 가지 기본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잘 알려진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 이다.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이 아직도 '자연 선택'을 선호한다. 하지만 경제철학자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는 훗날 이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적자 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진화란 개선의 과정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히 종(種 씨종)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함으로써 변화한다고 자연 선택은 주장한다.  48


다윈은 특별히 갈라파고스 군도(群島 무리군 섬도)의 여러 섬에서 본 핀치 새들의 미묘한 차이에 끌렸다. 이런 통찰력을 통해 다윈은 환경이 분화 과정에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49


진화적인 변화에 대한 두 번째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그것은 성적 선택이다. 성적 선택의 중심 전제는 대부분의 포유류에서 암컷이 수컷보다 자식에게 훤씬 더 많은 투자를 한다는 것이다. 암컷은 임신, 수유, 연장된 새끼 양육에 매인다. 피할 수 없는 희생이라는 이 불평등 때문에 암컷은 더 주저하는 참여자가 되며, 그 희생이 좋은 생각이라는 확신을 필요로 한다고 다윈은 추론했다. 반면 수컷은 생식에 고나해 암컷에게 크게 감사함으로써 그런 확신을 주기를 열망한다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은 짝짓기에 대한 암수의접근법이 본질적으로 충돌하는 의제라는 믿음 위에서 성립한다.  55-56


우리는 누구이고, 어떻게 오늘에 이르렀으며, 이와 관련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우리의 진화된 성적 성향을 인정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현재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 '호모사피엔스'만큼 조급히, 창조적으로, 부단히 성적인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61


인류학자 헬렌 피셔(Helen Fisher)가 '고전적 설명'이라고 부른 것. 은폐된 배란과 확장된(더 정확히 말하면 끊임없는)성적 수용성은 초기의 인간 여성들에게서 지화했다. 늘 성적으로 흥분해 있는 남자짝의 관심을 잡아둠으로써 짝 유대를 발전시키고 굳건히 하기 위한 방법으로 진화햇다는 것이다. 이 능력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했다고 추정된다. 첫째, 여성은 언제든(배란기가 아닐 때에도) 섹스가 가능했기 때문에 짝이 성적 쾌락을 위해 다른 여자를 찾을 이유가 없었다. 둘재, 여성의 생식력은 숨겨저 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자기 자녀의 피임 가능성을 증대시키면서 언제든(짧은 발정기뿐만 아니라) 그녀와 짝짓기를 한 다른 남자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위해 늘 그녀 주변에 붙어 있게 됐다. 피셔는 "소리 없는 배란은 특별한 친구가 늘 가까이에서 그녀에게 소중한 보호와 음식을 제공하도록 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과학자들에게 '짝 보호 행동'으로 알려졌지만, 현대 여성들은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 몹시 불안하고 성가신 사람'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75




농경사회로의 이행은 그것을 감내하는 대부분의 개인에게 사실상 재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것이 위대한 진보로 묘사되는가를 설명하는 데에 개인과 집단 이익의 불일치는 도움이 된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수집한, 수렵채집 생황에서 노업으로의 이행기 무렵의 유골들을 살펴보면, 모두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기근의 증대, 비타민 결핍, 성장 저해, 수명의 대폭적인 감소, 폭력의 증가.. 축하해야 할 이유는 거의 없었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수렵채집 생활에서 농업으로의 이행은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서 묘사도니 대로 대재앙이었다는 것을, 미래를 향한 거대한 도약이라기보다 은총을 상실한 아찔한 추방이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100


평균적인 침팬지는 우리 몸무게의 절반이 안 되지만 콧수염 난 소방대원 4, 5명의 힘을 가지고 있다. 많은 동물들이 인간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으며, 더 깊이 다이빙할 수 있고, 더 잘 싸울 수 있으며, 더 멀리 볼 수 있고, 더 희미한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인간에게는 침묵처럼 들리는 미묘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파티에 무엇을 가지고 갈까? 인간에게 특별한 것은 무엇인가?  101


큰 두뇌. 맞다. 그러나 우리의 독특한 두뇌는 수다스러운 사회성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정확히 왜 인간 두뇌가 그렇게 빨리, 그렇게 커졌는가에 대해서는 열띤 논쟁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인류학자 테렌스 디컨(Terrence W. Deacon)이 쓴 글에 동의할 것이다. "인간 두뇌는 단지 더 나은 지능에 대한 일반적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어에 필요한 능력을 정교하게 발전시킨 진화 과정에 의해 형성됐다." ..

불균형적으로 큰 두뇌 그리고 언어와 관련된 능력 외에도, 우리는 특별히 인간적인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  .. 

우리의 과장된 성(性)이 그것이다. 

어떤 동물도 지구상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시간을 호모사피엔스보다 더 많이 섹스에 호들갑스럽게 쓰지 않는다.  102


(남미의) 아체(Ache)족 실험대상자들에게 그들의 아버지를 밝혀 보라고 요청했다. .. 321명의 아체족이 600명이 넘는 아버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누가 당신의 아버지들인가? 

아체족은 아버지를 네 종류로 구분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인류학자 킴 힌(Kim Hill)에 따르면, 네 가지 유형의 아버지는 다음과 같다.

 - 미아레(Miare) : 그것을 주입한 아버지

 - 페로아레(Peroare) : 그것을 혼합한 아버지들

 - 몸보아레(Momboare) :  그것을 넘치게 한 아버지들

 - 바쿠아레(Bykuare) : 아이의 본질을 제공한 아버지들  109


<어머니들과 타인들(mothers and Others)>의 저자 사라 블래퍼 흐르디(sarah Blaffer Hrdy)는 "다른 영장류와 다양한 부족사회에서의 자녀 공유 이야기는 인류학 문헌의 중심에 서 본적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엄마와 자녀의 생존과 생물학적 건강의 측면에서, 공동 보육의 결과는 모두에게 좋은 것으로 판명된다." 라면서 한탄한다.  125


데스몬드 모리스(Desmond Morris)는 폴리네시아에서 한 여성 트럭운전사와 함께 보낸 오후를 기억한다. 그녀는 자신이 9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 2명은 불임인 친구에게 주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 자녀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모리스가 묻자, 그녀는 "우리 모두가 모든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아이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128


많은 사회에서 처녀성은 그 개념을 의미하는 단어 조차 없을 정도로 전혀 중요하지 않다.  141


결혼 자체는 어떤 종류의 의식이나 종교의식 없이 이루어진다. 재물이나 서약의 교환도 없으며 심지어 잔치도 하지 않는다. 단지 당신의 해먹을 여성의 해먹 옆에 걸기만 하라. 그러면 당신은 결혼한 것이다.  142


오토 키퍼(Otto Kiefer)는 1934년 <고대 로마의 성생활(Sexual Life in Ancient Rome)>에서, 로마인의 관점에서 "자연법칙과 물리학 법칙들은 결혼의 유대와 무관하며 심지어 상반된다. 따라서 결혼하려는 여성은 자신을 훼손시키는 데 대해 대자연에 속죄해야만 하고, 사전 음란으로 결혼의 순결을 사기 위한 자유로운 매춘의 시기를 거쳐야 한다." 라고 설명한다.  146


여자와 남자는 결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랑은 계절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고 간다. - 양 에르체 나무(모수오족 여성)  148


'결혼' '짝짓기' '사랑'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현상들이며, 특정 문화의 외부에서는 그 의미가 거의 혹은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 걷잡을 수 없이 일상화된 그룹섹스, 스와핑, 억제되지 않는 가벼운 정사, 사회적으로 허가된 순차적 섹스에 관해 우리가 언급한 사례들이 인류학자들이 '일부일처제'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회에서 보고됐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결혼'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곳에서도 일어난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결혼, 일부일처제, 핵가족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그 같은 개념 해석으로는, '누구와도 동침하는' 초원들쥐조차 일부일처제의 자격을 얻을 것이다.  161


침으로 발효시킨 맥주와 암소의 피로 만든 밀크셰이크를 맛보는 것에서부터 샌들을 신은 채 양말을 신는 것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거의 무엇이든 간에 자신들의 사회가 그것이 정상적이라는 확신을 그들에게 준다면, 기꺼이 그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입고 행동하고 믿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사람들이 파열점(破裂點 깨뜨릴파 찢을열 점찍일점)을 넘어서도록 자신들의 목을 늘이고, 자신들의 갓난아기들의 머리를 조이거나, 자신들의 딸들을 신전(神殿 귀신신 대궐전) 매춘에 팔아넘기게끔 확신을 주는 사회적 힘들은, 성적 질투를 바고 같고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적 질투를 새롭게 조형하거나 중성화시킬 힘을 충분히 가진다. 성적 질투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164-165


인간은 암을 치료하고 화성에 가고 인종적 편견을 없애고 이리호(Lake Erie)에 물을 채울 때가 아니라, 원시적인 공동체에서 다시 살 수 있는 방법들을 발견할 때 더욱 행복해질 것이다. 그것이 나의 유토피아이다. - 쿠르트 폰네구트 주니어  175


프리드만은 "이스라엘인들 사이의 신성한 맹세는 남성의 음겨엥 손을 올려놓음으로써 성립됐다"라고 썼다. 자신의 고환에 손을 얹고 맹세하는 행위는 증명하다(testify)라는 단어 속에 살아남아 있다.  280


생식 생물학자 로저 쇼트(Roser Short)는 "발기한 인간의 커다란 음경은 유인원들의 음경과는 극적인 대조를 보이는데 거기에 어떤 특수한 진화적 힘들이 작용해 왔는지를 궁금하게 만든다." 라고 썼다. 제프리 밀러가 막 나타나서는 "성인 남성은 생존해 있는 모든 영장류 중에서도 가장 길고, 가장 두꺼우며, 가장 탄력있는 음경을 갖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됐다. 

호모 사피엔스, 위대한 음경을 가진 위대한 유인원!  281





남성들이 받는 모든 나쁜 압력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은 평균 4분에서 7분 사이의 시간을 기록함으로써 보노보(15초), 침팬지(7초), 또는 고릴라(6초)보다 훨씬 더 오래 성교를 지속한다.  283


게다가 인간이 한 번 사정할 때 평균 정액략은 침팬지의 약4배인데, 사정당 전체 정자 세포의 수는 침팬지의 사정 범위 내에 머문다.  284


인간의 정자 생산량과 고환의 용적이 최근에 극적으로 감소했음을 시사하는, 설득력 있는 증거가 존재한다. 연구자들은 생존하는 정자의 활성의 감소뿐 아니라 평균 정자 수의 우려스러운 감소를 입증했다. 한 연구자는 덴마크 남성의 평균 정자 수가 1940년의 113 * 10의 6승 개에서 1990년에는 약 절반(66 * 10의6승)으로 급락했다고 시사한다. 폭락의 잠재적 원인들의 목록은 대두(大豆 큰대 콩두)와 임신한 젖소의 우유 속에 있는 에스트로겐 같은 화합물에서부터 살충제, 비료, 가축의 성장 호르몬, 그리고 플라스틱에 사용된 화학물질에 이르기까지 매우 많다. 최근의 연구는 광범위하게 처방되는 우울증 치료제 파록세틴(paroxetine) - 세록새트(Seroxat)와 팍실(Paxil)이란 이름으로 팔린다 - 이 정자 세포 속의 DNA에 손상을 가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한다. 로체스터대학교의 인간 생식 연구는 임신 기간 중 1주일에 일곱 번 이상 소고기를 먹은 어머니가 낳은 남성들은 수정능력 부족(subfertile) - 정액 1ml당 정자 수 2,000만 개 미만 - 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3배 이상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처럼 소고기를 먹은 사람들의 아들들 가운데 수정능력 부족으로 분류된 사람의 비율은 17.7%인 것에 비해, 소고기를 덜 먹은 어머니들의 아들들 가운데 수정능력 부족으로 분류된 사람의 비율은 5.7%였다.

인간은 일부일처제적인 또는 일부다처제적인 어떤 영장류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정자 생산 조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85


사용하지 않으면 잃는다(use it or lose it)는 격언은 자연 선택의 기본적인 교의(敎義 가르칠교 옳을의)중의 하나이다. 가차 없는 절약 원칙을 통해, 진화는 수행되지 않는 과업을 위해 유기체에게 어떤 기관을 좀처럼 갖추어 주지 않는다.  286


섹스에 관한 이 책 전체를 쓰면서, 우리는 우리 대부분이 섹스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다소 혼란스럽게 시사하고 싶었다.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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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 울림의 공유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개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 1904년 1월, 카프카, [저자의 말] <변신> 중에서 


인간에게는 공유의 본능이 있다. 울림을 공유하고 싶다.



1강 시작은 울림이다


- 이철수 <산벚나무, 꽃피었는데-이철수 신작 판과 100선전>

  이철수 <마른풀의 노래>

  이철수 <이렇게 좋은 날>

  최인훈 전집 1

  이오덕 <나도 쓸모 있을걸>



저는 여느 독서가들과 비교했을 때 독서량이 평균에 미치지 못할 겁니다. 매번 읽은 책들을 메모해놓는데, 통계를 내보면 일 년에 읽는 책이 서른 권에서 마흔 권 사이입니다. 한 달에 세 권 정도 읽는 건데 독서량이 많은 건 절대 아니죠. 대신 저는 책을 깊이 읽는 편입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꼭꼭 눌러 읽습니다. 여기 제가 써놓은 것들을 프린트해왔습니다. 

우선 저는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좋은 부분들, 감동받은 부분들에 줄을 치고, 한 권의 책 읽기가 끝나면 따로 옮겨놓는 작업을 합니다. 이 강의의 목표는 이런 방식의 책 읽기를 통해 제가 느낀 '울림'을 여러분께 전달하는 것입니다.  14


'땅콩을 거두었다

덜 익은 놈일수록 줄기를 놓지 않는다

덜된 놈! 덜떨어진 놈!'


이 한 줄만으로도 덜된다는 게 이런 얘기구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익으면 떨어지는데, 익지 않아 '덜 떨어진다'는 겁니다. 이 한 줄이 자연 현상이 인간사로 넘어오는 순간입니다. 현기증 나는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그냥 자연현상인데 순식간에 사람의 것으로 이입이 됩니다.

이철수는 또 저에게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동양의 삶의 태도와 서양의 삶의 태도를 가장 극명하게 비교하게 해주었는데요, 그것은 역시 판화 [가을사과]에 쓴 한 줄의 글이었습니다.


'사과가 떨어졌다

만유인력 때문이란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과가 떨어진 걸 만유인력 때문이라고 기거이 과학적으로 밝혀내고야 마는 것은 서양의 장점입니다. 그리고 동양의 장점은 때가 되어서 떨어지는 걸 왜 안달복달 난리들이야 하며 자연을 아우르는 철학입니다... 서양의 장점이 가져다준 문명적인 혜택, 충분히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자연적 재앙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연현상을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파악하는 동양의 지예가 다시 힘을 발휘해야 할 때가 되었구나 생각합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런 것이 통찰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창의력이 무엇이냐고 자주 묻는데, 저는 이런 통찰이 창의력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사과를 많이 봤지만, 뉴턴이나 이철수와 같은 생각은 한 번도 못해봤습니다. 같은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이 사람의 힘인 것이죠.  22-23


소설가 김훈에 따르면 글쓰기는 자연현상에 대한 인문적인 말 걸기라고 합니다. 자연은 자연이고 인간의 글은 인문(人文)이잖아요. 그런데 자연을 해석하려고 인문이 노력을 하는 겁니다. 쉽지 않죠? 조금 설명을 덧붙인다면, 

'산에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예전에는 김소월의 [산유화]라는 시를 좋은 줄 모르고 들었습니다. '그게 뭐야, 당연히 산에 꽃이 피지 뭐'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김훈이 이렇게 안내해줬습니다. "이 노래는 말을 걸수 없는 자연을 향해 기어이 말을 걸어야 하는 인간의 슬픔과 그리움의 노래로 나는 들린다"라고 말이죠. 멋진 걸 보고 '우와'라는 표현밖에 못 하는 사람과 다르게 그들은 기어이 말을 걸고 싶은 인문적인 갈증이 있는 것입니다.  25


'깊은데 

 마음을 열고 들으면

 개가 짖어도 

 법문이다' - [개소리] 전문 26


어른들은 .. '지식'으로 세상을 봅니다.

아이들이 .. '감성'으로 본 겁니다.  36


'시골집 선반 위에

 메주가 달렸다.

 메주는 간장, 된장이 되려고

 몸에 곰팡이가 

 피어도 가만히 있는데,

 우리 사람들은

 메주의 고마움도 모르고

 못난 사람들만 보면

 메주라고 한다.' - 부산 감전국교 6년 이경애, [메주]


'껌은 빳빳하지요.

 그러나 입속에 넣으면

 사르르 녹지요.

 아무리 나쁜 사람도

 껌과 같지요.


 모두가 나쁜 사람이라고 

 팽개쳐버려도

 누군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싸 주면

 껌과 같이 사르르 녹겠지요.

 딱딱한 마음이

 껌과 같이 되겠지요.' - 부산 감전국교 6년 김경숙 [껌 같은 사람]  39-40


사람은 물입니다. 조용한 데 이르면 조용히 흐르고, 돌을 만나면 피해가고, 폭포를 만나면 떨어지고, 규정된 성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톨스토이 소설에 악당이 없다..  40


창의성과 아이디어의 바탕이 되는 것은 '일상'입니다. 일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고, 대처 능력이 커지는 것이죠. 

요즘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고수들이 일상의 중요성에 대해 깨달았구나 싶습니다. 박재삼이, 존 러스킨이, 헬렌 켈러가 같은 생각을 했어요. 사과가 떨어져 있는 걸 본 최초의 사람이 뉴턴이 아니잖아요. 사과는 늘 떨어져 있지만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은 겁니다. 상황에 대한 다른 시선, 절박함이 사과를 보고 이론을 정리하게 했죠. 답은 일상 속에 있습니다. 나한테 모든 것들이 말을 걸고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 들을 마음이 없죠. 그런데 들을 마음이 생겼다면, 그 사람은 창의적인 사람입니다.  45



행복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삶은 순간의 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을 레이스로 생각합니다.  46


레이스가 된 삶은 피폐하기 이를 데 없죠.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그래서 저는 순간순간 행복을 찾아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행복은 삶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그러나 풍요롭기 위해서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같은 것을 보고 얼마만큼 감상할 수 있느냐에 따라 풍요와 빈곤이 나뉩니다. 그러니까 삶의 풍요는 감상의 폭이지요.  47


중요한 것은 휘슬러의 <화가의 어머니>를 보면서 소름이 돋으려면 훈련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이 "문화미와 예술미는 훈련한 만큼 보인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47-49


시이불견 청이불문(視而不見 聽而不聞 볼시 말이을이 아닐불 볼견 들을청 말이을이 아닐불 들을문). 제가 좋아하는 말입니다. 시청은 흘려 보고 듣는 것이고 견문은 깊이 보고 듣는 거죠.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면서 그저 지겹다고 하는 것은 시청을 하는 것이고요, 사계의 한 대목에서 소름이 돋는 건 견문이 된 거죠. [모나리자] 앞에서 '얼른 사진 찍고 가자'는 시청이 된 거고요, 휘슬러 [화가의 어머니]에 얼어붙은 건 견문을 한 거죠. 어떻게 하면 흘려보지 않고 제대로 볼 수 있는가가 저에게는 풍요로운 삶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겁니다. 존 러스킨은 "당신이 보고 난 것을 말로 다 표현해보라"라고 했습니다. 나뭇잎을 봤다면, 나뭇잎의 균형감각이 어떻게 되어 있고, 앞뒷면의 촉감이 어떻게 다르고, 끝부분은 어떤 모양이고, 햇살이 떨어진 각도에 따라 나뭇잎의 색깔이 어떻게 다른지 볼 줄 알면 창의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49-50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51





2강 김훈의 힘, 들여다보기


- <자전거 여행>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자전거 여행2>

  <개-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화장]<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바다의 기별>


구어가 곧 문어(文語 글월문 말씀어)라는 겁니다. 말로 나오는 문장을 그냥 받아적으면 글로 쓸 수 있는 정도입니다.

김훈의 특징은 사실적인 글쓰기를 한다는 겁니다.  59


'탐사취재' 

정밀탐사 ...

김훈의 글은 형용사나 부사를 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사실만 불러내서 정서를 전달하는데, 생각보다 그 힘이 굉장히 큽니다.  60


김훈은 무엇을 보든 천천히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64


'디자인은 단순한 멋 부리기가 아니다.

 디자인은 깊은 생각의 반영이고

 공간에 대한 배려다.'  68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인 조르바를 통해 "그에게 두려웟던 것은 낯선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이었다"라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습니다. 익숙한 것 속에 정말 좋은 것들이 주변에 있고, 끊임없이 말을 거는데 듣지 못한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90


'식물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나무밑동에서 살아 있는 부분은 지름의 10분의 1정도에 해당하느 바깥쪽이고, 그 안쪽은 대부분 생명의 기능을 소멸한 상태라고 한다. 동심원의 중심부는 물기가 닿지 않아 무기물로 변해 있고, 이 중심부는 나무가 사는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 이 중심부는 무위와 적막의 나라인데 이 무위의 중심이 나무의 전 존재를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버티어준다.'

지금 생명활동에는 아무런 관여를 하고 있지 않지만, 중심부가 있지 않으면 나무가 서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92


<바다의 기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쓴 장편소설 <칼의 노래> 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입니다. (...) 나는 처음에 이것을 "꽃은 피었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있다가 담배를 한 갑 피면서 고민고민 끝에 "꽃이 피었다"라고 고쳐놨어요. 그러면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하늘과 당의 차이가 있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입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입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나의 문장과 서술은 몽매해집니다.'  93


'보편적 죽음이 개별적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하지는 못한다.'

왜군들은 군인으로 오지만 죽을 때는 개인으로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군들이 올 때는 군인이라는 집단명사로 옵니다. 나라를 위해서, 국가의 명예를 위해서 오는데 죽을 때는 일본 군인으로 죽는 게 아니라 가족과 헤어져 외롭고 고통스러운 슬픈 개인으로 죽습니다. 죽음은 전부 개별적이라는 이야기죠. 보편적 죽음이 개별적 죽음을 설명할 수 없어요. 그리고 위로할 수도 없고요. 그래서

'인간은 보편적 죽음 속에서, 그 보편서오가는 사소한 관련도 없이 혼자서 죽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끝끝태 개별적이다.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이다.'

맞아요. [화장]에 아무리 사랑을 해도 아픔은 전이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픔도 개별적이에요. 냉정하지만 사실이죠. 아무리 자식이 아프다고 해도, 아파하는 걸 보면서 마음이 아플 뿐이지 그 아픔을 진짜 느낄 수는 없어요. 철저히 개별적인 객체입니다. 평소에 너무 아프거나 추해서 의도적으로 보려 하지 않는 것들을 김훈은 날것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렇게 각성과 새로운 시선을 전져주죠. 김훈은 말합니다.

'나는 사실만을 가지런하게 챙기는 문장이 마음에 듭니다.'  96-97





3강 알랭 드 보통의 사랑에 대한 통찰


- <불안>

  <우리는 사랑일까>

  <동물원에 가기>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개정판으로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우리 모두는 불충분한 자료에 기초해서 사랑에 빠지며, 우리의 무지를 욕망으로 보충한다.'

사실 상대에 대한 전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 사랑에 빠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대상이 있으면 그 사람의 어떤 한 면을 봅니다. 말 한마디의 한 컷, 그 사람이 나에게 얘기했던 한순간만 보고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예쁘다, 멋지다. 매력적이고 좋다고 생각한 뒤 나머지 부분은 다 상상으로 채우죠. 그 상상은 나의 욕망으로 채워집니다.  105


우리는 워홀이 통조림에 했던 발견을 자신에게 해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아마 통조림은 워홀을 사랑하고 평생의 연인으로 삼을 겁니다. 눈물을 흘릴지도 몰라요. 자기를 그렇게 아름답게 봐준 사람이 처음이니까요. 아무도 자기를 중요하게 혹은 예쁘게 안 봐줬어요. 그런데 워홀은 '너 대단히 예쁘다'라고 끌어서 액자 속에 걸어놓아줬어요. 사랑의 감정이 싹트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얘기예요.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상대가 다른 누구도 주목해주지 않았던 어떤 부분을 주목해주거나 다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진가를 알아줬을 때 사랑에 빠진다는 거죠. 그걸 연결해서 알랭 드 보통은 워홀이 물감으로 한 일과 사라의 유사점에 대해 또 하나의 이야기를 합니다.

'워홀이 물감으로 한 일과, 오랫동안 있는 줄도 몰랐던, 

코나 손의 점들을 애인이 칭찬해주는 일은 비슷하지 않을까?

애인이 "당신처럼 사랑스런 손목/사마귀/속눈썹/발톱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거 알아? 라고 속삭이는 것과 예술가가 

수프 통조림이나 세제 상자의 미적인 성질을 드러내는 것은 구조적으로 같은 과정이 아닐까?'

대단한 통찰이죠? 우리가 사람에게 하는 것이나 예술가들이 사물에 하는 것이 같은 과정이라는 메시지가 이 소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또 공감할 만한 건 사랑이라는 게임에서 드러나는 '권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보통 권력이라는 건 '뭔가 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란 게임에서만큼은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것', 그게 권력입니다. 만약에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데, 둘 중 영화를 보고 싶거나 여행을 가고 싶거나 뭘 더 하고 싶은 쪽이 상대를 더 사랑한다는 겁니다. 사실 덜 사랑하는 쪽은 상관이 없는 거죠. "하고 싶은 거 해, 뭘 하든 상관 없어"라고 적당히 무관심한 듯 물러서서 아무 의견을 내지 않아요. 그래서 사랑에서의 권력은 무엇을 할 수 있는 느엵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것이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영역에서와는 달리,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115-116


옛날에는 시인을 볼 견(見 볼견)자를 써서 견자(見者 볼견 사람자)라고 했다죠. 들여다보는 사람, 삶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들이 못보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라는 뜻일 겁니다.  123


카프카가 한 말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냐.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  129


책을 많이 읽고 인문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들은 촉수가 민감해지죠.  130


<인문학으로 광고하다>에 존 러스킨의 "말로 그림을 그려보라"라는 말을 인용했는데요. 그런 것이죠. 말로 그림을 그리듯 자세히 볼 줄 알아야 합니다.  134





5강 햇살의 철학, 지중해의 문학


- 김화영 <행복의 충격-지중해, 내 푸른 영혼> <바람을 담는 집>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김화영 예술기행>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천상의 두 나라>

  로버트 카플란 <지중해 오디세이>

  알베르 카뮈 <이방인>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장 그르니에 <섬>

  릴케 <말테의 수기>


영혼을 구원한다는 이유로 신부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다고 하자 뫼르소는 처음으로 불같이 화를 내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너에게는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217





6강 결코 가볍지 않은 사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키치의 세계는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보기 때문이죠. 체제가 다를 뿐 모든 세계에 키치가 존재하는 겁니다. 작가는 키치에 의해 유발된 느낌은 가장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감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과감한 짓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

'그녀는 일생 동안 자신의 적은 키치라고 단언했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조차도 자신의 존재 깊숙한 곳에 키치를 품고 살았던 것을 아닐까? (...) 텔레비전의 멜로드라마 속에서 배은망덕한 딸이 버림받은 아버지를 품 안에 껴안는 모습이나 행복한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의 창문이 황혼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면, 그녀는 두 눈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266





7강 불안과 외로움에서 당신을 지켜주리니, 안나 카레니나


-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1,2,3


'기계적 인문'. 기계적 인문은 제가 만든 말인데, 땅에 발을 디딘 현실적인 인문학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이론만 가지고 사회를 파악하려고 하는 인문을 말합니다. 기계적인 인문을 하는 사람들은 현실과 부딪혀 문제를 풀지 않아요. 책으로만 배운 인문은 민중의 해방을 위해 민중을 교육시켜야해요. 그런데 민중이 일을 해야 하니 일을 하게 둬요. 그리고 밤늦게 일이 다 끝난 후 학습을 시켜요. 그 학습은 민중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시간 투자이기 때문에 절대 빠져서도 안 돼요. 그러니까 잠을 못 자게 하고, 술 한 잔도 정신이 흐트러져 안 된다고 금지하는 거예요. 민중은 그게 싫어요. 사실 그들은 대단한 미래를 바라지도 않아요. 현재도 충분히 행복하니까요.  286






8강 삶의 속도를 늦추고 바라보다


- 법정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손철주 <인생이 그림 같다-미술에 홀리느 손철주 미셀러니>(<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 재출간)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미술이야기>

  오주석 <한국의 미 특강> ㅡ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2 권 <그림 속에 노닐다>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한형조 <붓다의 치명적 농담>



'뼈빠지는 수고를 감당하는 나의 삶도 남이 보면 풍경이다.'

모든 삶이 그 사람한테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지만 멀리서 보면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죠. 그러고 보니까 모든 근경은 전쟁이고, 모든 원경은 풍경 같습니다.  322-323


벗나무 아래 엄숙할 것 없는 문명사. 자연사보다 결코 대단할 것 없는 문명사. 예술을 한 번도 동경한 적 없는 자연.  327


'형상이 드러나지 않은 여백을 바라보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거기에는 마치 위대한 음악의 중간에 침묵의 몇 초를 기다리는 순간과 같은 마음 졸임이 있는 까닭이다.'

'침묵의 위대함은 앞뒤의 음향이 만든다. 그림 속 여백의 의미심장함은 주위의 형상이 조성한다.'  329


'예술의 격조란 정확히 감상자의 수준과 자세만큼 올라간다.'  334


우리는 책에 대한 긍정적인 편견이 있습니다. 책이면 다 좋다는 편견이죠. 하지만 읽는 시간이 아까운 글들도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점수의 삶의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돈오하려면 깨달음을 줄 만한 좋은 책들을 찾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45


호학심사 심지기의(好學深思 心知基意 좋을호 배울학 깊을심 생각할사 마음심 알지 터기 뜻의), 즐겨 배우고 깊이 생각해서 마음으로 그 뜻을 안다는 뜻입니다. 비단 책뿐 아니라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촉수를 모두 열어놓으면 풍요롭고 행복한 인생을 즐기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행복은 선택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잔디이론으로 봅니다. 저쪽 잔디가 더 푸르네, 저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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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모르는 자가 바다를 얕본다. 바다를 얕보는 자, 바다에 데기 마련이었다.  31


은주는 해질녘 놀이터에 익숙한 아이였다. 아이들과 그들의 활기가 빠져나간 자리에도 익숙했다. 어두운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등에 업은 막냇동생을 재우는 일이 갓 여덟 살이 된 그녀의 일상이었으므로, 다섯 살배기 여동생 영주는 가로등 밑에서 혼자 소꿉놀이를 하고, 두 살 배기 기주는 별사탕 같은 손으로 은주의 머리칼을 마구 잡아당기곤 했다. 은주는 그 따분하고 쓸쓸한 시간을 간절한 기도로 보냈다. 시간이 마구 점프하기를, 하루빨리 어른이 되기를, 그리하여 이 지겨운 집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폐차버스를 개조해서 탁자 몇 개 놓고 막걸리를 파는 왕대폿집도 '집'이라 부를 수 있다면.

'지니네 왕대포'의 여주인 지니는 젓가락장단의 고수였다. '목포의 눈물'을 이난영보다 더 간드러지게 부르는 여자였다. 불망 한복저로기 깃이 다 들릴 만큼 젖가슴이 큰 여자였다. 가슴골로 손이 들어오든, 돈이 들어오든 사내의 것이라면 사양하지 않는 여자였다. 코를 찡긋거리며 잇몸까지 드러내고 웃어주는 여자였다. 엉덩이를 뒤로 빼고 오리처럼 둥싯둥싯 걷는 여자였다.  18


제 몸 간수도 제대로 못하는 어린 딸에게 제각각 씨가 다른 여동생과 갓난쟁이 남동생을 떠안긴 여자였다. 은주를 낳은 여자였다.

은주는 막내인 기주가 잠들어야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은주는 지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아마도 도덕시간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자유의지'라는 단어를 칠판에 적더니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는 자기 삶을 지킬 수 있다."

그날 은주는 자신을 꼼꼼하게 평가해봤다. 가진 밑천이 무언지, 잘할 수 있거나, 그럭저럭 해낼 수 있는 일이 뭔지, 무엇을 갖춰야 하고 갖출수 있는지. 손바닥만 한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녀는 자신이 배우가 될 재목이 아님을 인정했다. 귀여운 구석이야 있었지만 지나가는 남자를 기절시킬 만큼 예쁘지는 않았다. 수재가 아니라는 건 성적표를 통해 확인했다. 예술이나 운동에도 재능이 없다는 걸, 수업을 통해 깨우쳤다. 그녀는 음치였고, 몸치였고, 일기 한 줄 그럴싸하게 쓰지 못했다. 그러나 왜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지니처럼 살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타고난 근성이 있었다.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는 자존심이 있었다. 그 정도면 자신의 미래를 믿을 근거로 충분한 것 같았다.은주는 계획을 세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열여덟 살까지 지니네 왕대폿집에 붙어 있을 것. 지니의 빨강 브래지어를 훔쳐다 팔아서라도 고교졸업장을 손에 쥘 것. 취직에 필요한 자격증을 모두 따둘 것. 취직하면 바로 튈 것. 3년 안에 전세방을 얻을 것. 폐차버스를 돌아보지 말 것.  131-132



그의 손은 은주의 뺨으로 날았다. 은주는 이삿짐 사이로 날아가 떨어졌다. ...

그는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자신이 뭔 짓을 저지를지 몰라 두려웠다. 무작정 걷다가 도착한 곳이 동네 소줏집이었다. 술이 들어가자 한 남자가 기억났다. 술만 마시면 살림을 뒤엎고 처자식을 죽사발로 만들던 구척 거한. 월남에서 돌아온 용감한 '최상상'. ..

은주 표현에 의하면, 통제가 안 되는 그의 왼손은 힘이 남아돌아 어쩔 줄 모르는 '오랑우탄'이었다. 최상사가 그의 몸에 남긴 유전자였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최상사의 아들임을 상기시키는 저주의 징표였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최상사처럼 살지 않았다. 다르게 살아왔다고 믿었다.  142-143



아이들 말로, 세령은 '전교생의 왕따'였다. 5년째 다니는 미술학원에서도 외톨이기는 마찬가지였다. ..

그의 세계에 속한 세령과 세상에 속한 세령의 모습이 딴판으로 다르다는 것. 그가 아는 세령은 제 엄마 축소판이었다. 고집 세고, 영악하며, 당돌한 계집애. 세상 속 세령은 지나치게 내성적인 아이였다.  147



난 말이지, 그때나 지금이나 참는 게 제일 싫은 사람이야. 내 맘대로 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고.  289-290



한 집안의 가장 노릇하는 미래가 제 앞에 있었어요. 그것이 삶이긴 하겠지만 과연 나 자신일까, 싶었던 거죠. 나와 내 인생은 일치해야 하는 거라고 믿었거든요.

현수는 자신의 손끝에서 깜박거리는 담뱃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인생과 그 자신이 일치하는 자가 얼마나 될까. 삶 따로, 사람 따로, 운명 따로, 대부분은 그렇게 산다.  323


몇 달 전, 유럽여행을 다녀온 처제부부가 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 선물이라고 사온 것이 칼바도스였다. 한국에선 흔하지 않은 술이라 형부 생각이 나서 샀다고 했다. 그는 고마운 마음으로 받았다. 처제부부가 돌아간 뒤, 은주는 있는 대로 성미를 부렸다. 분노의 몸통은 아니꼬움이었다. '집도 없는 것들이 유럽씩이나 나다니는 정신 나간 행태'에 속이 뒤집혀 있었다.  328



그 시절엔 집안일이 다 내 몫이었어. 동생들 치다꺼리에 집안 청소, 아버지 식사 차려드리는 일. 어머니가 퇴근을 해야 비로소 거기서 해방이 되는 거지. 문제는 내가 야구를 시작하면서 집에 오는 시간이 늦어지고, 그러다 보니 아버지 일상이 불편해졌다는 거야. 운동을 하고 집에 가는 날마다 죽도록 매를 맞았어.  372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총을 가지면 누군가를 쏘게 되어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인간의 천성이라고.  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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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자기와 마주하는 시간 


상담을 잘 견뎌낸 사람들은 삶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자기 자신에게 더 솔직해지고, 자신을 더 수용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덜 보게 되고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헛된 노력을 멈춘다.

어찌 보면 정신분석이란 자기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아는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여기 다섯 사람의 그러한 과정이 있다. 남편으로 인해 우울한 채영씨, 느닷없는 사고로 절망에 빠진 은철씨, 관계에 대한 집착으로 언제나 목마른 제니스. 주변사람들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괴로워하는 미영씨,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고 낙담한 어느 성직자.  7


깊은 우울, 극심한 좌절, 사랑에 대한 집착, 타인을 향한 분노, 자신의 무가치함으로 인한 주눅 듦. 이 다섯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8




레슬러의 사랑


 - 관계란 손안에 든 물과 같다. 놓치지 않으려 주먹을 꼭 쥘수록 물은 더 빨리 손에서 빠져 나간다. 그렇게 관계를 잃고 나면 필사적으로 잡으려 했던 힘보다 더한 분노가 찾아온다. 그러나 사실 그 분노는 관계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지 못한 자신을 향한 책망이다. 


관꼐의 경계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해야 할 분석가들도 종종 경계선 성격장애라는 명명에 한 인간의 모든 삶을 밀어 넣음으로써 또 다른 경계를 지어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16


처음의 조용하고도 서로에게 예의 바른 그 시기를 우리는 '신혼(Honeymoon period)'이라고 불렀다.  24


나는 내가 '정상'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34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제 전부를 주려고 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제 의도를 모르는 것 같아요.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요."(제니스)  39


내가 완전히 받아들여져 본 적이 있던가, 누군가 내게 100%를 주는 경험은 고사하고 아무런 사심 없이, 편견 없이, 의도 없이 온전하게 나를 받아들여준 사람이 있던가, 결국 나는 누군가의 목적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졌구나 하는 생각이요. 그러니 제겐 100%를 줄 기회도 없었던 거예요."(제니스)  39-40


정신분석적 이론에서는 초기 애착관계에서 형성된 불안정 애착, 양가감정형 애착을 경계선 성격장애의 주원인으로 설명한다.  43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계가 아니라 공간이 아닐까요? 경계는 오직 하나의 선이어서 바로 눈앞에 두고도 넘어갈 수 없게 하는 장벽, (투명한) 차단막입니다. 따라서 경계는 관계의 균열입니다. 하지만 관계 사이의 공간은 공명을 가능하게 하죠. 공간은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때로는 물리적인) 영역이고, 그것은 사생활의 존중이라는 방식으로, 또는 정서적 여유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적, 또는 특수한 환경으로서 공간의 제공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46


우리는 어떻게 관계의 공간을 마련할 것인가?  47


단정적인 말투는 갈등을 불러온다. 단정적인 태도 역시 갈등을 일으킨다.

자녀나 배우자나 친구들을 대하는 자신의 말투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지면 좋겠다.  47


그가 내게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그의 감정이 자유롭게 전해질 수 있도록 채근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가 내 기분대로 해주지 앟아도 나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을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상대가 내 뜻대로 해주지 않을 때, 사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자기 실망감 때문에 좌절한다. 그래서 좌절감을 느끼게 만든 그 사람을 증오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심리적 기제를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왜 화가 나는지 알지 못한다.  48


사실 증상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통로인 것이다.  49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경계선 성격장애는 완전한 사랑르 받지 못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사랑을 받지 못해 생겨난다고 말이다.  54





스스로를 없앤 청년


- 걸려 넘어진 돌을 딛고 일어서 오히려 디딤돌로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넘어지던 바로 그 순간에 어떤 실수를 했는가, 다시 잘 돌이켜본다. 실수에 대한 수치심을 무릅쓰고서라도.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많은 것들 중 잃어버린 그 하나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할 때가 너무나 많다.  60


'난 장애에 대해 아무런 편견도 없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사실은 '난 장애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어'.'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86


그는 태어나서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에 소아마비를 앓았다.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으세요?"

"한 번도 달려본 적이 없어서 달린다는 것이 어떤 감각인지 알지 못해요. 그러니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죠."

달리는 감각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사람과 달리는 감각을 또렷이 기억하는 사람이 달리지 못할 때, 그 고통은 어느 쪽이 더 클까?  90

'내담자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그들이 진정으로 변해야겠다고 결심하게 하는 것이 어렵다.'

심지어 라캉은 "내담자들은 변화하기 위해 분석을 받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유지할 방법을 찾기 위해 분석가에게 온다."고까지 말한다.  103





구원받기를 원하는 여자


- 분노가 자신을 향할 때 우울이 된다. 우울한 사람은 사실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왜, 누구에게 분노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납득하지 못한다면 우울은 해결되지 않는다.



가족들은 자신들이 만든 과거의 고통에 매몰되어 있었다.  113


얼마나 많은 부부들이 사실은 애정 없이 사는지, 놀라울 일도 아니다.  117


처음에는 공감능력이 없는 남편들을 원망하다가 남편에게 없는 것을(공감능력) 달라고 징징대는 아내들에게 더 공감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120


"교활한 거죠. 채영  씨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교활하다고 느껴질 만큼 교묘하고 복잡합니다. 그렇게 복잡하게 얽어놓아야 자기 치부가 쉽게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131


화를 내는 궁극적인 목적은 화나게 한 이유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많은 사람들이 화에 대해 잘못된 생가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화를 내면 자신이 화난 이유가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화의 뜨거움만큼 화난 이유가 강력하게 전달될 것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그 뜨거움만큼 상대의 방어벽도 강력해진다....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날것의 감정 그대로를 드러내기보다는 그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합시다.."  141


우리는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농담', 그런 건 없다. 농담이야말로 가식 없는 진심이다. 정신분석은 농담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그것만이 진심이라고 확정한다.  147





누락된 자의 슬픔 


- 외로움으로 인한 상처는 대화할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로부터도 말 걸어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체험에서 비롯된다.



남자 분석가들조차도 자신의 아내를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고, 친밀한 정서적 관계를 맺지 못해 발생하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을 가지고 있다.  197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경험을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괴로움의 원인으로 돌아가, 그 자리에 붙박여 있던 자기 자신을 만나고 미뤄왔던 삶의 과정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205


많은 사람들이 외롭다고 느낀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외로운 것이 아니라 심심한 것이다. 그 심심함이 반복되면 불만이 쌓인다. 그래서 남편에게, 자녀들에게 놀아달라고 요구한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좀 더 멀리 있는 관계를 찾는다. 친구나 이웃, 동호회 사람들과 만나 심심함을 달랜다. 그 순간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깊은 외로움은 이런 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그들과 아무리 수다를 떨어도 오히려 헛헛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외로움은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심심함과 외로움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외로움이란, 내가 말할 대상이 없는 데서 비롯된 상처가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도 말 걸어지는 대상이 아니라는 데서 비롯도니 것이고 했다. 말 걸어지는 대상이라는 것은, 존재감의 확인이다. 우리에게는 말 걸어주기를 진정 원하는 사람, 오직 한 사람, 또는 소수의 몇 명이 있다. 그들은 대체로 부모들이다. 그들의 말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수용적이어야 한다. 어루만지는 말이어야 한다. 그것이 최선이다.  217-218





마음이 가난한 자


-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가난이다. 가난을 가장 소중한 재산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신은 주저함 없이 그를 참된 아들로 삼을 것이다.



부모는 우리를 살리기도 하지만, 그들만큼 우리를 금지하고 명령하고 체벌하는 사람도 없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들을 생각해보라. "하지마!", "만지지 마!", "울지마!", "가만히 있어!", "뚝!", "혼난다!", "맞는다!", 납득할 수 없는 체벌을 누구로부터 가장 많이 받았는지 생각해보라.  222-223


사랑하지만 무엇을 주어야 할지 모르거나 자식에 대해 아예 고민을 하지 않기도 한다.  223


후회는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미래를 실패로부터 구원한다. 그런 후회의 경험은 성찰로 승화된다. 하지만 상습적인 후회는 변화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다.  229


무의식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고 사는지 우리는 잘 인식하지 못한다.  252


우리는 대체로 가능하면 고통을 빨리 잘라내고 싶어 한다. 어떤 고통들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삶의 핵심과 관련된 고통일수록 단박에 잘라내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고통을 친구로 삼아야 한다.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의 삶이 불행하다는 반증이다. 고통을 없애려는 노력보다 고통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장악하고, 고통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마음의 품격이 고매한 사람일수록,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안다. 그들은 삶과 고통은 한 몸이라는 것을 알고 받아들인 이들이다.  264





맺음말 - 자신을 안다는 것


성찰이란, 어떤 상황이나 원칙에 자신의 삶과 경험을 대입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더 나은 자신으로 변화하기 위해, 어떤 배움을 얻기 위해 적극적인 사유 활동을 할 때 가능하다.  269


더 이상 교활해지지 말고, 자신에게 있는 그대로 솔직해져야 한다.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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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초인철학 - 강대석(전 대구효성여대 교수)

니체의 아버지는 개신교 목사였으며 니체의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도 다 같이 목사였다.  13


아폴로는 가상, 조형, 절제, 겸손, 이성 등을 상징하는 신이고 디오니소스는 정열, 도취, 오만, 불손, 반항 등을 상징하는 술의 신...

니체는 한 시대의 정신문화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주도할 때에 발전하고 아폴로적인 것이 주도할 때에 쇠퇴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니체의 모든 철학은 이 원리를 조명하는 데 집중되었다.  14


니체 철학이 지니는 일곱 가지 특징

1 반주지주의 - 주지주의란 삶의 가치를 지식에 두는 철학사조이다. 주지주의는 '지=덕=행복'.

니체에 의하면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 철학은 제자들을 망쳤을 뿐만 아니라 2000년에 걸쳐 내려오는 서구 허무주의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2 반도덕주의 - 니체는 도덕을 '군주도덕'과 '노예도덕'으로 구분한다. 군주는 고귀하고 힘센 인간 혹은 집단을 대표하는 자로서, 이러한 강자들은 항상 스스로와 합치되는 것을 '좋은 것'으로 보고 그들보다 약하고 못한 사람들의 도덕을 '나쁜 것'으로 보았다.

선이란 군주도덕에서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인하고 고귀함을 나타내는 특성이다. 이에 반하여 허역, 비겁, 공포, 아부, 저속, 위선 등은 약한 자의 덕이다.  

약자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약자들은 군주도덕을 노예도덕으로 바꾸어 버렸다.

종래의 노예도덕을 다시 군주도덕으로 복귀시키려는 도덕혁명가였다. 


3 반기독교주의 - 모든 종교는 결국 허무주의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니체의 결론이다.


4 반염세주의

쇼펜하우어에서는 세계의 본질이 맹목적 의지이고 그러한 의지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비극이다. 삶은 결코 살 만한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본능적인 욕망을 억누르는 금욕을 통해 해탈의 길을 찾아야 한다.

니체는.. 삶의 비참함에서 도피하려는 쇼펜하우어의 허무주의가 소극적 허무주의라면 삶의 무가치성을 부정하고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스스로의 철학은 적극적인 허무주의이다. 니체는 철저하게 현세의 삶을 긍정하려 한다.


5 반여성주의 - 약자의 천한 도덕인 복수심에 불타 있는 여자들은 이기적이고 폭군적이며 교묘하고 잔꾀를 발휘하여 강한 남자를 유혹하므로 여성적인것이 우세할 때 인류는 점차 허무주의에 빠져 퇴폐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강인한 의지를 가진 남자들은 여성들을 무자비하게 다루어 부엌일이나 시키면서 남자에게 봉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니체의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6 반민주주의 - 니체는 보통사람을 '어중이떠중이'라 부르며 모멸했다. 인류는 강인한 지배자에 의하여 초인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니체는 '평등'이라는 말을 '동정'이라는 말과 함께 너무 싫어했다.

니체으 이상은 귀족주의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해야 한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은 많은 부분 니체 철학을 답습하고 있다.


7 반사회주의 - 시민민주주의가 정치적 평등을 목표로 했다면 사회주의는 여기에 경제적 평등까지 덧붙이려 한다.  15-22


니체는 이 작품을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이 자신을 덮쳤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며 ㄴ계시받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에게도 차라투스트라를 읽는 대신 체험하라고 권한다.  23


이 책이 제시하는 핵심사상은 무엇인가?

권력의지(힘에의의지), 초인(위버멘쉬), 영겁회귀라는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이상은 니체가 망치를 들고 종래의 가치를 모조리 파괴한 후에 내세우는 긍정적인 것들이다.  25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  39


나는 자기 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신을 징벌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는 자기 신의 분노 때문에 파멸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

나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모든 것이 자기 안에 들어올 정도로 영혼이 넘쳐나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렇게 하여 모든 사물은 그가 몰락하게 하는 것이다.  44


인간은 춤추는 별을 탄생시킬 수 있기 위해 자신의 내부에 혼돈(Chaos)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45


세 단계의 변화

잘 견디는 정신은 가장 무거운 것들을 모두 짊어진다. 짐을 지고 사막으로 서둘러 가는 낙타처럼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간다. 

그러나 가장 외로운 이 사막에서 두 번째의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정신은 사자가 되고,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려 하며, 자신의 사막에서 주인이 되려 한다.

정신은 최후의 주인, 최후의 신에 대적하려 하며, 승리를 위해 거대한 용(독창적인 개인을 집어삼키려는 도덕을 상징한다)과 싸우려 한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이나 신으로 부르려 하지 않는 그 거대한 용이란 무엇인가? 거대한 용의 이름은 "너는 해야 한다"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겠다"라고 말한다.

"너는 해야만 한다"는 황금빛을 내면서 정신의 길을 막고 있다. 그것은 비늘 달린 하나의 짐승이며 그 비늘 하나하나에서 "너는 해야만 한다!" 가 황금빛으로 반짝거린다.

천년 묵은 가치가 그 비늘들 위에서 반짝거리고, 모든 용 중에서 가장 힘센 용이 이렇게 말한다. "만물의 모든 가치, 그것이 내 몸에서 빛난다."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고, 창조된 모든 가치는 바로 나다. 진실로 '나는 하겠다'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용은 그렇게 말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무엇을 위해 정신 속에 사자가 필요하겠는가? 왜 체념과 경외심으로 가득 찬 짐 싣는 짐승으로 만족하지 않는 것인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것, 그것은 사자도 아직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를 창출해내는 것, 그것은 사자의 힘이 할 수 있다.

자유를 창조하고 의무 앞에서도 신성한 부정을 말하는 것, 그것을 위해 형제들이여, 사자가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가치에 대한 권리를 획득하는 것, 그것은 잘 견디고 경외심으로 가득 찬 정신에게 가장 두려운 획득이다. 

이 정신은 일찍이 '너는 해야 한다'를 자신의 가장 신성한 것으로서 사랑했다. 그러나 이제 이 정신은 가장 신성한 것 속에서도 환상과 자의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자기가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를 약탈한다. 그러한 약탈을 위하여 사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말해보라. 형제들이여, 사자도 할 수 없는 무엇을 어린아이가 할 수 있겠는가? 어째서 약탈하는 사자가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며 망각이다. 새로운 시작이며 유희이다.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고 하나의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의 유희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잃어버린 자는 자신의 세계를 얻는다.  58-59


잠을 잘 자기 위해 깨어 있어라. 그리고 실제로 삶이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내가 무의미를 택할 수밖에 없다면, 잠은 내가 선택할 만한 가장 가치 있는 무의미가 될 것이다.

이제야 분명히 알겠다. 일찍이 사람들이 덕의 스승을 구할 때 그들이 제일 먼저 구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은 좋은 잠과 그것을 위한 마취제와도 같은 덕을 구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찬양받는 강단의 현자들에게는 지혜란 꿈 없는 잠이었다. 그들은 삶의 더 깊은 의미를 알지 못했다.  63


육체와 대지를 경멸하고, 천상적인 것들과 구원의 핏방울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병들어 죽어가는 자들이었다...

허루를 만들어내고 신에 매달리는 자들 가운데는 항상 병든 사람들이 많았다.  66


형제들이여, 오히려 건강한 육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그것이 더 정직하고 더 순수한 목소리이다.  67


인간은 극복되어야만 할 그 무엇이다. 그 때문에 그대는 그대의 덕을 사랑해야만 한다. 그대는 그 덕으로 인하여 파멸하게 도리 것이기 때문이다.  72


쓰인 모든 것들 가운데에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곧 정신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타인의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한가한 독서가들을 증오한다.  76


산과 산 사이에서 가장 가까운 길은 봉우리에서 봉우리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그대는 긴 다리를 갖고 있어야 한다. 잠언은 산봉우리여야 한다. 그리고 잠언을 들으려면 키가 크고 몸집이 거대해야 한다. 희박하고 맑은 공기, 가까이 있는 위험, 즐거운 악의로 가득찬 정신, 이들은 서로 잘 어울린다...

지혜는 우리가 용기 있고 태연하고 조소하고 난폭하게 굴기를 원한다. 지혜는 여자로서 항상 투사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77


진실로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인생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광기가 들어 있다. 그러나 광기에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이성이 들어 있는 것이다...

내가 신을 믿게 된다면 춤출 줄 아는 신만을 믿으리라.

그리고 내가 나의 악마를 보았을 때 나는 그가 신중하고 철저하고 심오하고 엄숙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무거운 정신이었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낙하하고 만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웃음이다. 자, 무거운 정신을 죽이도록 하자!

나는 걷는 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나는 달렸다. 나는 나는 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나는 움직이기 위해 누군가에 의해서 밀쳐지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나는 가볍고, 이제 나는 날고 있다. 이제 나는 내 자신을 내려다 본다. 이제 어떤 신이 나를 통해 춤을 추고 있다.  78


차라투스트라는 젊은이가 앉아 있는 옆의 나무를 붙잡고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나무를 내 손으로 흔들려 해도 나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바람은 이 나무를 괴롭히고, 이 나무를 그것이 원하는 쪽으로 굽어지게 한다. 우리를 가장 심하게 구부러뜨리고 괴롭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

인간도 나무와 다를 것이 없다. 

높고 밝은 곳으로 올라가려 하면 할수록 뿌리는 더욱더 강하게 땅 속으로, 밑으로, 어둠 속으로, 심연 속으로, 악 속으로 뻗어가는 것이다."..

"많은 영혼은 우리가 먼저 창조하지 않는 한 결코 벗겨지지 않는 것이다."  79


정신의 자유를 얻은 자라고 할지라도 자신을 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내부에는 아직도 많은 감옥과 부패물들이 남아 있다. 그들의 눈이 한층 더 맑아져야만 한다...

그대를 악의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들도 그대가 고귀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고귀한 자는 모든 사람드에게 방해물이 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고귀한 자는 새로운 것을, 새로운 덕을 창조하려 한다.  81


국가란 모든 냉혹한 괴물 중에서 가장 냉혹한 괴물이다. 그것은 냉혹하게 거짓말도 한다. 다음 같은 거짓말이 그 입으로부터 새어나온다. "나 곧 국가가 민족이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민족을 창조하고 민족의 머리 위에 믿음과 사랑을 걸어놓은 것은 창조자들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삶에 봉사했다.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덫을 설치해 놓고 그것을 국가라 부른 것은 파괴자들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머리 위에 한 자루의 칼과 백 가지의 욕망을 걸어놓았다. ..

국가는 선과 악에 대한 모든 언어를 동원하여 거짓말을 한다. 국가각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며,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훔친 것이다. 

국각의 모든 것이 가짜이다. 물어뜯기를 잘하는 국가는 훔쳐낸 이빨로 물어뜯는다. 국가의 내장까지도 가짜이다. ..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자들이 태어났다. 이 잉여인간들을 위해 국가가 만들어진 것이다. 

보라, 국가가 어떻게 그들을, 어중이 떠중이들을 유인하는가를! 국가가 어떻게 그들을 삼키고, 씹고 또 씹는가를!

"지상에서 나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는 신의 손가락이다"-이 괴물은 이렇게 외친다. 그러면 긴 귀를 가진 자나 눈이 어두운 자만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이 아니다!

아, 그대 위대한 영혼들이여, 그대들의 귀에도 국가는 음침한 거짓말을 속삭인다! 아, 국가는 자신을 아끼지 않는 풍요로운 마음들을 쉽게 알아낸다!

그렇다. 그대 낡은 신을 이겨낸 자들이여, 국가는 그대들의 마음까지도 알아낸다! 그대들은 전쟁에 지쳤고 지친 나머지 이제 새로운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이 새로운 우상은 영웅과 영예로운 자들을 주위에 거느리고 싶어한다! 이 냉혹한 괴물은 양심의 햇빛을 쬐고 싶은 것이다!

그대들이 이 새로운 우상인 국가를 숭배하기만 한다면 국가는 그대들에게 모든 것을 주려 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국가는 그대들의 빛나는 덕과 자랑스러운 눈빛을 매수하는 것이다.

국가는 그대들을 이용하려 어중이떠중이들을 유혹하려 한다! 그렇다. 여기서 지옥의 요술이 고안되었으니 그것은 신성한 명예로 장식되어 방울소리를 내는 죽음의 말(馬 말마)과 같다!

그렇다, 여기서 삶으로 찬미되는 만인을 위한 죽음이 고안되었으니. 그것은 진실로 모든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봉사인 것이다!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가 독을 마시게 되는 곳을 나는 국가라 부른다.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곳을 나는 국가라 부른다. 모든 사람의 만성적인 자살이 '삶'이라고 불리는 곳을 나는 국가라 부른다!

보라, 이 잉여인간들을~ 그들은 발명가들의 작품과 현자들의 보물을 훔쳐낸다. 그들은 자기들의 도둑질을 교양이라 부른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병이 되고 재앙이 된다!

보라, 이 잉여인간들을! 그들은 항상 병들어 있고, 자기들의 담즙을 토해내며, 그것을 신문이라 부른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삼켜버리지만 소화하지 못한다.

보라, 이 잉여인간들을! 그들은 부를 손에 넣지만 그로 인해 더욱더 가난해진다. 그들은 권력을 원하며, 무엇보다도 권력의 지렛대인 많은 돈을 원한다. 이 무능한 자들은!

보라, 기어 올라가는 이 약삭빠른 원숭이들을!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기어오르며 싸우다 진흙과 심연 속으로 떨어져버린다.

그들 모두가 왕좌에 오르려 한다. 마치 행복이 왕좌 위에 앉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은 그들의 광기이다. 그러나 대부분 왕좌 위에는 진흙이 있고 또한 와좌는 진흙 위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미치광이들이며, 기어오르는 원숭이들이며, 열병환자들이다. 그들의 우상인 저 냉혹한 괴물은 악취를 풍기며 우상숭배자들 또한 모두 악취를 풍긴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저들의 입과 욕망이 풍기는 악취 속에서 질식 하기를 원하는가? 차라리 창문을 깨고 바깥 공기 속으로 뒤어나가라!

악취를 피하라! 잉여인간들의 우상숭배를 멀리하라!

악취를 피하라! 사람을 제물로 만드는 독기를 벗어나라!

위대한 영혼들을 위해 아직도 대지는 열려 있다. 홀로 있는 자들과 둘이서 있는 자들을 위해 아직도 많은 빈자리가 남아 있고, 그 주위로 고요한 바다 냄새가 불어온다.

위대한 영혼들을 위해 아직도 자유로운 삶이 열려 있다. 진실로 적게 소유한 자는 그만큼 소유하는 것도 적다. 적당한 가난이여, 찬미받을지어다!

국가가 끝나는 곳, 그곳에서 비로소 잉여인간들이 아닌 인간이 시작된다. 그곳에서 비로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의 노래가, 독특하고 대치 될 수 없는 가락이 시작된다.

국가가 끝나는 곳, 형제들이여, 그곳을 보라! 그대들에게는 보이지 않는가, 무지개와 초인(위버멘쉬)으로 나아가는 다리가?  88-91


고독이 끝나는 곳, 그곳에서 시장이 시작된다. 그리고 시장이 시작되는 곳에서 위대한 배우들의 소으모가 독파리들의 윙윙거림이 시작된다.  91


만일 그대가 친구를 갖고자 한다면 그대 또한 그 친구를 위해 싸울 각오를 해야 한다. 싸우기 위해서는 적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친구 속에 들어 있는 적까지도 존경해야 한다. 그대는 몸을 던지지 않고서도 그대의 친구에게 접근할 수 있는가?  98


그대는 그대의 친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그가 잠들어 있는 것을 살펴본 적이 있는가? 친구의 얼굴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면이 고르지 못한 불완전한 거울에 비친 그대 자신의 모습이다.

그대는 그대의 친구가 잠들어 있는 것을 살펴본 적이 있는가? 친구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어 놀라지 않았는가? 오, 친구여.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친구는 추측과 침묵의 대가여야 한다. 그대는 모든 것을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대는 그대의 친구가 깨어 있을 때 하는 일을 그대의 꿈을 통해 알아내야 한다. 

그대의 동정은 추측이어야 한다. 그대의 친구가 동정을 원하는지 아닌지를 우선 알아보기 위해서. 어쩌면 그가 사랑하는 것을 그대의 맑은 눈과 영원한 눈초리일지도 모른다.

친구에 대한 동정은 단단한 껍질 속에 숨겨져 있어야 한다. 그것을 깨뜨리려다 이빨 한 대쯤 부러져야 한다. 그렇게 하면 동정은 비로소 달콤한 맛이 날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친구에 대하여 맑은 공기이며 고독이며 빵이며 약인가? 자기 자신의 쇠사슬은 풀지 못하면서 친구에게는 구제자인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대는 노예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대는 폭군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친구를 가질 ㅅ 없다.

여자 내부에는 너무나 오랫동안 노예와 폭군이 숨어 있었다. 그 때문에 여자는 우정을 맺을 수 없는 것이다. 여자는 사랑만 알고 있을 뿐이다.

여자의 사랑 속에는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한 불의와 무분별이 들어 있다. 심지어 여자의 지적인 사랑 속에도 빛과 함께 갑작스러운 공격과 번개와 밤이 들어 있다. 아직도 여자는 우정을 맺을 능력이 없다. 여자들은 여전히 고양이요, 새이다. 아니면 고작해야 암소이다.

아직도 여자는 우정을 맺을 능력이 없다. 그러나 말해보라, 그대 남자들이여, 그대들 가운데 누가 우정을 맺을 능력을 갖고 있는가?

오, 그대 남자들이여. 그대들의 영혼은 얼마나 가난하고 초라한가! 그대들이 그대들의 친구에게 주는 것만큼 나는 나의 적에게까지도 주려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때문에 내가 더 가난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동료의식이라는 게 있다. 그러나 우정이 있기를!  99-100


차라투스트라는 지상에서 선과 악보다 더 강한 임을 발견하지 못했다. 

평가하지 않는 민족은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민족이 스스로 보존하려면, 이웃 민족이 평가하는 것과 똑같이 평가해서는 안 된다. 

어떤 민족에게는 선으로 간주되는 많은 것들이 다른 민족에게는 조소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어떤 곳에서는 악이라고 불리는 많은 것들이 다른 곳에서는 화려한 영예로 장식되어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100


사랑하는 자는 경멸하기 때문에 창조하려 한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경멸한 적이 없는 자가 사랑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형제여. 사랑과 함께, 창조와 함께 그대의 고독으로 가라. 그러면 정의가 절름거리며 그대의 뒤를 따라갈 것이다.

형제여, 눈물과 함께 그대의 고독으로 가라.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기를 원하며 그리하여 멸망해가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  109


여자에게는 남자가 하나의 수단이며, 그 목적은 언제나 아기이다. 그런데 남자에게는 여자가 무엇인가?

진정한 남자는 두 가지를 원한다. 위험과 유희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남자는 가장 위험한 장난감으로서 여자를 원한다.

남자는 전쟁을 위해 훈련을 받아야 하며, 여자는 전사의 휴식을 위해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어리석은 짓이다.

전사는 지나치게 달콤한 과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사는 여자를 좋아한다. 아무리 달콤한 여자라 할지라도 씁쓸하기 때문이다.  110


그대는 자식을 원해도 될 사람인가?  ..

무엇보다도 먼저 그대는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바로 세워야 한다.  115


어떤 남자는 진리를 찾으려 영웅처럼 떠났으나, 결국 치장된 보잘것 없는 거짓을 손에 넣었다. 그는 그것을 자기의 결혼이라고 부른다.  116


언젠가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을 넘어 사랑해야 한다! 그러므로 먼저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그러기 위해 그대들은 사랑의 쓴 잔을 마셔야 했다.  117


진실로 나누어 주는 사랑은 이처럼 모든 가치의 강탈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탐욕이 있다. 그것은 너무나 가난한 탐욕, 굶주려 있기 때문에 항상 훔치려 하는 탐욕, 병든 자들의 탐욕, 병든 탐욕이다. 

이 탐욕은 모든 빛나는 것들을 도둑의 눈으로 바라본다. 이 탐욕은 먹을 것을 풍부하게 갖고 있는 자를 굶주림의 탐욕으로 헤아리고, 나누어주는 자들의 식탁 주위를 항상 어슬렁거린다.

이러한 탐욕은 질병과 눈에 보이지 않는 퇴화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 도둑 같은 탐욕은 육체가 병들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23


나는 그대드에게 나를 버리고 자신을 찾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대들이 모두 나를 부인했을 때, 비로소 나는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127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꿰뚫어보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완전히 이해된 것은 아니다.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침묵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141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는 덕을 갖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자기는 '선'과 '악'에 정통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 모든 거짓말쟁이와 바보들에게 "도대체 그대들이 덕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대들의 덕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대들로 하여금 바보와 거짓말쟁이들에게서 배운 낡은 말에 싫증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온 것이다.  149


그대들은 미지근한 자들이다. 그러나 모든 깊은 인식은 차갑게 흐르는 것이다. 정신의 가장 깊은 샘물은 얼음처럼 차다. 그것은 뜨거운 손과 열정의 행동가에게 청량제이다.  161


영원히 변치 않는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176


선과 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하는 자는 진실로 먼저 파괴자가 되어야하며 가치를 깨뜨려야 한다.  177


한 가지만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으며 그 밖의 것들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는 인간들 - 하나의 커다란 눈, 하나의 커다란 입, 하나의 커다란 배 혹은 하나의 커다란 그 무엇에 불과한 인간들 - 나는 그들을 거꾸로 된 불구자라고 부른다.  206


순종을 가르치는 이 교사들! ..

나는 무신론자인 차라투스트라이다. 무신론자인 나는 묻는다. "나보다 더 신을 믿지 않는 자는 누구인가? 그의 가르침을 기꺼이 받겠다."

나는 무신론자인 차라투스트라이다. 나는 나와 동등한 자를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자신에게 자신의 의지를 부여하며 모든 순종을 거부하는 자들은 모두 나와 동등하다. 

나는 무신론자인 차라투스트라이다. 나는 어떤 우연도 모두 나의 솥에 넣어서 삶는다. 그리하여 우연이 그 속에서 잘 삶아졌을 때, 비로소 나는 그것을 나의 음식으로서 환영한다.

실로 많은 우연이 나에게 주인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나의 의지는 우연에게 더 높은 주인처럼 말했다. 그러자 우연은 애원하며 무릎을 꿇고 말했다. 

내게서 머물 곳을 찾고 사랑을 얻고자 애원하면서 "보라, 오 차라투스트라여. 친구만이 친구에게 찾아오는 것을!" 하고 아부하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그러나 아무도 내 말을 알아들을 귀를 갖고 있지 않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불어오는 바람에게 이렇게 외치련다.

그대 소인들이여! 그대들은 점점 더 왜소해질 것이다. 그대들은 부서져 사라질 것이다. 그대 안일한 자들이여! 그대들은 곧 멸망할 것이다.

- 그대들의 왜소한 덕으로 인해, 그대들의 온갖 체념으로 인해, 그대들의 온갖 바보 같은 복종으로 인해!

너무나 관대하고 너무나 연약하다. 이것이 그대들의 대지 모습이다! 그러나 한 그루의 나무가 크게 자라기 위해 그 나무는 단단한 바위 속에 강한 뿌리를 내려야 한다!

하찮은 것이라 하여 그대들이 제쳐놓은 것까지도 인류의 미래라는 옷감으로 짜이며, 그대들의 허루(Nichts)까지도 하나의 거미줄이고, 미래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한 마리의 거미인 것이다.

그대들 왜소한 덕을 가진 자들이여, 그대들이 무엇인가 받을 때, 마치 훔치는 것과 흡사한 모습이다. 그러나 악한 사이에서조차도 명예심이라는 것이 있어 이렇게 말한다. "강탈할 수 없을 경우에만 훔쳐내야 한다."

"기다리면 주어진다." - 이것 또한 순종이 가르치는 것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대 안일한 자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말한다. 빼앗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더욱더 많은 것을 빼앗길 것이다!

아, 그대들이 어중간한 의욕을 다 버리고, 행동할 때나 나태할 때나 항상 단호해지기를!

아, 그대들이 다음과 같은 나의 말을 이해하기를! "항상 그대들이 의욕하는 것을 행하라. 그러나 먼저 의욕할 수 있는 자가 되어라!"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항상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나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라.

큰 사랑으로써 사랑하고 큰 경멸로써 사랑하라!" 신을 믿지 않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248-249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창조자 이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창조자란 인간의 목표를 창조하고 대지에 그 의미와 그 미래를 부여하는 자이다. 이 사람이 비로소 선과 악이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것이다.  282


자기 자신에게 명령하지 못하는 자는 복종해야 한다.  285


고귀한 영혼을 지닌 자들은 무엇이든 공짜로 소유하기를 원치 않는다. 특히 삶을.

천민의 근성을 가진 자는 공짜로 살고자 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삶을 선물로 부여받은 우리는 그에 대해 가장 잘 보답하기 위해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를 항상 생각한다.

"삶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을 우리는 삶을 위해 지켜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다.

우리는 즐거움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곳에서 즐기려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 즐기려 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즐거움과 순결은 가장 부끄러움을 잘 타는 것들이다. 이 둘은 추구의대상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소유해야 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죄아 고통이어야 한다.  286


진실해지는 것,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는 드물다! 그리고 진실할 수 있는 자들도 아직 그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선한 자들이 가장 진실해 질 수 없는 자들이다. 

오, 이 선한 자들! 선한 자들은 결코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한 선은 정신에 대해 일종의 병인 것이다.

이러한 선한 자들은 양보하고 복종한다. 그들의 가슴은 흉내 내고, 그들은 마음으로 부터 복종한다. 그러나 복종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법이다!

하나의 진리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선한 자들이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함께 모여야 한다. 오, 형제들이여. 그대들 또한 이러한 진리에 어울릴 정도로 악한가?

대담한 시도, 오랜 불신, 잔혹한 부정, 혐오, 살아 있는 것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 - 이러한 것들이 함께 모이기란 얼마나 드문 일인가! 그러나 진리는 그러한 씨앗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이제까지 모든 인싱은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성장해왔다! 부숴버려랴, 그대 인식하는 자들이여. 부숴버려라. 낡은 가치표를!  287


선과 악이라고 불리는 낡은 망상이 있다. 지금까지 이 망상의 수레바퀴는 예언자들과 점서악들 주위를 돌았다.

일찍이 사람들은 예언자들과 점성가들을 믿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모든 것은 운명이다. 그대는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해야 한다!"라고 믿었다...

별들과 미래에 관해서는 이제까지 인식이 아니라 망상만 존재해왔다! 그러므로 선악에 관해서도 이제까지 인식이 아니라 망상만 존재해왔다!  288-289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일찍이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신성하게 생각해왔다. 사람들은 이러한 말들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 신발을 벗었다. ..

부숴버려라 부숴버려라, 낡은 가치표를!  289


나는 그대들을 새로운 귀족으로 임명하고 그 길을 제시한다. 그대들은 미래를 잉태하는 자, 미래를 가꾸는 자, 미래의 씨를 뿌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대들이 어디서 왔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가고 있느냐가 앞으로 그대들의 명예가 되게 하라!  290-291


오, 형제들이여. 잘 먹고 잘 마시는 것, 그것은 실로 헛된 일이 아니다! 부숴버려라 부숴버려라, 결코 즐거워할 줄 모르는 자들의 가치표를!  292


가장 훌륭한 자에서도 구역질 나는 그 무엇이 있다. 그리하여 가장 훌륭한 자들까지도 극복되어야 할 존재인 것이다!  293


부숴버려라, 형제들이여. 이 새로운 가치표를 부숴버려라!.. 예속을 권장하는 설교이기 때문이다!  294


그대들은 오직 창조하기 위해 배워야 한다!  295


그대들의 결혼이 나쁜 결합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대들은 너무 빨리 결합한다. 그 때문에 결혼의 파탄이 뒤따르는 것이다...

"나는 결혼을 파괴했어요. 그러나 그보다 먼저 결혼이 나를 파괴했어요!"

잘못 결합된 부부는 최악의 복수심으로 가득 찬 자가 된다는 것을 나는 항상 보아왔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 사랑하도록 노력하자! 아니면 우리의 언약은 실수가 아니었을까?" ..

"..항상 둘이 함께 지낸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니!"  301


"선이란 무엇이며 의로움이란 무엇인지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 아직도 그것을 찾고 있는 자들에게 화 있으라!"라고 말하며 마음속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는 자들에게!

악인들이 어떠한 해악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선한 자들이 저지르는 해악이야말로 가장 해로운 것이다!  302-303


선한 자들은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다. 그들은 항상 종말의 시작인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가치표에 새로운 가치들을 써넣는 자를 십자가에 못박고, 자기 자신들을 위해 미래를 희생한다. 그들은 전 인류의 미래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303


모든 것이 선한 자들에 의해 뒤틀리고 철저하게 왜곡되어왔다.  304






서문 - 레지널드 홀리데일


니체는 '진리'라는 게 발견될 수 있기나 헌 것인지, 또는 오류는 인류에게 부득이한 것은 아닌지 하는 문제를 더 당당하게 직시하고 더 절박하게 논의한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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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 오늘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


근대의 '철학적 다이너마이트'였던 니체 철학은 현대라는 시점에서 '토대학으로서의 철학'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14


니체가 보여준 현대성의 길은 다방면에서 확인된다. 먼저 철학 영역에서 그가 제시했던 탈형이상학적 전환, 이성중심주의 모델과 절대주의 모델의 파기, 실체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의 전환, 다원주의 모델을 통한 일원론 극복 프로그램 등은 서양 철학에서 지각변동을 일으켜, 근대적 패러다임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것은 곧 현대 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변동이었다. 니체 철학의 현대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또 다른 영역은 예술이다. 이성적 경험과 심미적 경험 사이에 놓여 있던 경계를 파기해버리고, 예술의 '탈미메시스'를 감행했던 니체에게서 예술가들은 다양한 꽅을 피울 수 있는 씨앗을 찾아냈다. 음악, 회화, 건축, 무용, 조각 등의 넓은 영역에서 그 씨앗들은 예술의 현대성이라는 아우라를 피워냇다고 할 수 있다. 문학 영역 또한 예외는 아니다. 언어에 대한 회의, 문학과 역사의 관계, 예술과 실제의 관계, 심리 현상과 글쓰기의 관계에 대한 니체의 질문들은 현대 문학이 주목할 만한 소재를 제공했으며, 니체 작품 자체가 문학적 찬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외에도 신의 죽음에 대한 니체의 선언을 둘러싼 신학담론들, 스스로를 철학적 심리학자로 자화자찬할 정도로 예리하게 세공된 심리분석의 내용을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에서 눈여겨본 것은 이미 오래되었으며, 근대 사회의 허무적 요소에 대한 통찰이나 권력국가와 법률국가에 대한 니체의 신랄한 비판은 사회학, 정치학을 넘어 이제는 법학 영역에서도 문제해결 과정에 영감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듯 니체 철학은 현대를 종횡무진 누비는 철학이 되었다.

하지만 니체의 철학은 미래에도 여전히 고전일 것이다. 철학의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철학 자신의 수단인 비판을 통해 보여준 모범으로서, 철학이 삶의 창조적 가능성을 고취시켜야 하고 늘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 보여준 모범으로서,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정신의 높이를 자랑스러워하는, 거리의 파토스가 깃든 자유정신의 모범으로서, 삶을 사랑하고 세계를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적 영혼의 모범으로서... 무엇보다도 인간과 사회의 건강성을 염려하고 그것의 확보를 과제로 삼는, 철학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모범으로서...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 우리는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될 것이다.  15-16




니체는 어떤 사상가인가 - 니체의 철학적 실존과 자화상


철학자들의 글과 삶은 어느 정도 관계가 있을까?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은 그들의 삶에 대한 지식이 없이도 글을 읽는 것만으로 그들의 사유를 이해하기에 충분한 경우다. 글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철학자들은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홉스, 루소 등이 있다. 그런데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삶을 꼭 들여다보아야 하는 철학자들도 있다. 소크라테스, 파스칼, 키르케고르, 비트겐슈타인이 그러하고, 니체 역시 여기에 속하며 그 전형적인 경우다.  21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읽기와 쓰기에 관하여]  22


삶과 철학의 통일적 관계를 보여준 니체에게서 철학은 인식적 차원의 지혜를 찾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철학은 이제 삶의 지혜를 찾는 실존적 행위가 된다. 그 지혜는 바로 디오니소스적 지혜다. 즉 건강한 삶의 본능에서 나오고 건강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혜, 파괴와 창조라는 두 계기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생명성 자체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아는 지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거대한 관계세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깨닫는 지혜, 그 속에서 모든 것이 의미 잇고 모든 것이 필연적이어서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통찰하는 지혜다.  25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며,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었을까? 

(1) 예술가-철학자, 니체 : 문헌학 교수였던 니체가 <비극의 탄생>이라는 철학적 저술을 집필할 때부터 이미 그는 자신을 예술가-철학자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의 예술가는 그림을 그리거나 곡을 짓는 예술가적 실천을 하는, 좁은 의미의 예술가를 넘어서는 개념이다. '철학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철학적 예술가는 '위대하고도 고귀한 목표'를, 즉 위대한 문화와 위대한 인간과 위대한 미래를 '창조'해내려는 '과제'를 지니고, 그 과제를 건강성 회복을 수단으로 실제로 수행하는 존재다.  26


(2) 계몽가와 교육자, 니체 : 니체는 19세기 당대를 총체적으로 진단하고 치료하고자 했던 시대진단가이자 계몽가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살던 시대를 총체적인 의미 상실과 목표 상실의 시대, 인간의 생명력이 퇴화되어 병들어 있는 시대, 철학과 문화와 정신이 방황하는 시대로 진단한다.

시대와 인간과 문화가 앓고 있는 병증을 인간과 사회의 '건강성' 회복의 길을 제공하면서 치유하는 것이다.  28


(3) 자유정신, 니체 : 자유정신은 말 그대로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다시 소유하는, 자유롭게 된 정신"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자유정신을 위한 책]으로 이해하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자유정신은 단순히 이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삶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도 니체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유정신은 여러 가지 덕목을 갖추어야 한다. 지적 성실성과 정직성, 비판의 힘과 새로운 대안 제시의 힘,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자기 자신을 믿는 '용기', 자신에 대한 '긍지' 등 수많은 덕목들이 거기에 속한다.  29-30


(4) 철학적 심리학자, 니체 : 니체는 자신을 '타고난 심리학자' 혹은 '영혼의 분석가'로 이해하기도 한다. 실제로 아들러나 융 등의 정신분석학자들이 프로이트보다 한 수 위라고 찬탄할 정도로.  30


니체 철학은 낭만적 시기(<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실증적 시기(<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즐거운학문>), 창조적 시기(<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후)로 구분될 수 있다.  31


1881년을 기점으로 니체의 철학이 변모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생성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 프로그램이 본격화됨.  31-32




1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라는 실험철학의 과제


실험철학은 몇 가지 측면에서 실험적이다. 첫째, '지금까지의 철학의 주체'를 '새로운 척도와 새로운 방식'을 사용하여 해명한다. 새로운 척도는 바로 '건강한 삶'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세계를 긍정하는 삶으로, 오로지 이 척도에 의해 모든 것이 재평가된다. 이때 실험철학은 둘재, 질문의 방식을 변경한다. 평가대상 '그 자체'에 대해 묻지 않고, 평가대상의 '가치'에 대해 묻는다. 즉 그것이 갖고 있는 의미와 기능을 점검한다. 그래서 실험철학의 질문방식은 '그것은 무엇인가?'가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삶을 위해 그것은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가?'이다. 평가척도와 질문방식을 변경하여 실험철학은 셋째, 기존의 자명성의 '토대'를 점검하는 실험을 시작한다. 서양의 온갖 자명성의 토대가 될 정도로 가치 있다고 여겨졌던 것들의 '가치'를 의문시한다. 그런데 그 실험적 이문은 매우 부정적인 답변을 듣게 된다. 그 가치들이 삶에 대한 부정의식에서 출발했고 삶의 건강성을 해치고 있는 실상이 목격된 것이다. 그래서 실험철학은 '기존 가치의 탈가치화(Entwertung)를 수행하는, 파괴와 해체의 망치를 든다. 여기서 실험철학의 네 번째 실험적 성격이 확보된다. 기존 가치의 탈가치화가 심리적 공황 상태를 발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즉 토대의 상실은 곧 의미근거와 가치근거의 상실이며, 이것은 다시 '왜?'. '무슨 목적으로?'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실험을 두고 위 인용문에서의 '부정의 말에, 부정에, 부정에의 의지'에 머무르는 '허무주의의 가능성을 선취'한 것으로 표현한다. 결국 실험철학 스스로 망치를 들어 기존 가치들을 탈가치화시키면서 허무주의라는 장을 시험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하지만 실험철학은 다섯째, 그런 허무적 상태를 넘어서는 또 한 번의 실험을 한다. 새로운 의미근거와 가치의 토대를 제공하게 만드는 실험을, 그것은 인용문이 말하듯 '정시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뎌내는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감행하는가?'를 척도로 진행되는 실험이다. 그것은 곧 '인간이 얼마나 건강한가?'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건강한 인간은 진리를 수없이 감행하고, 수많은 진리를 견뎌낸다. 정확히 말하면 그 스스로 건강한 삶을 위해 진리들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다시 건강한 삶의 조건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는 삶의 건강성을 척도로 새로운 가치체계를 구성해낼 수 있다.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의 힘이 강하다. 결국 허무적 상태를 넘어서게 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건강한 디오니소스적 인간'을 창출해내는 것이며, 이것이 실험철학이 감행하는 '가치의 척도(Umwertung)라는 실험의 목적이다.  41-42


자기 삶에 대한 사랑을 니체는 운명애라고 부른다. 운명애는 이미 결정되어 주어져 있는 삶에 대한 숙명적 체념과는 다르다. 오히려 운명애는 자신이 창조적 주체로서 구성해가는 삶에 대한, 스스로 구성해가는 운명에 대한 그야말로 운명적인 필연성을 지닌 사랑이다.  45


디오니소스적으로 삶을 마주한다는 것,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니체 자신의 해명을 들어보자.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들에 직면해서도 삶 자체를 긍정한다 ; 자신의 최상의 모습을 희생시키면서 제 고유의 무한성에 환희를 느끼는 삶에의 의지-이것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다." -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46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첫째, 창조와 파괴, 대립과 싸움을 통해 형성되고, 그 어떤 계기라도 불필요하지 않으며, 그런 것으로서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성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생명은 매순간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파괴가 일어나는 과정이다. 생명은 즉 파괴와 창조라는 모순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모순성은 생명의 생성적 성격을 보증해준다. 그런데 니체는 생명의 이런 모순성을 삶에의 의지에 의한 것으로 생각한다. 즉(힘에의 의지로서의) 삶에의 의지가 매순간 자신이 구현해놓은 '최상의 모습'을 스스로 파괴하고, 삶에의 의지의 파괴작용은 곧 삶에의 의지의 새로운 창조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생명의 지속은 곧 삶에의 의지의 무한성 및 영원성에 대한 증거가 된다. 이렇게 해서 니체는 생명 그 자체의 모순성 및 모순적 생명의 무한서오가 영원성을 각각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생명은 모순적이기에 디오니소스적이며, 모순으로서 무한하고 영원하기에 디오니소스적이다...

둘째, 디오니소소즉인 것은 기쁨과 환희로 전환된 고통을 의미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고통에서 발생한 환희"다. '자신이 구현해놓은 최상의 모습'을 파괴해야만 하는 생명은 파괴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니체는 생며을 가능하게 하는 삶에의 의지는 파괴의 고통을 피해야 할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오히려 기쁨이다. 생명의 모순적 구조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셋째, 디오니소스적인 것은-수사적 표현이기는 하지만-"넘쳐흐르는 살모가 힘의 느낌"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생명의 모순성과 지속은 생명력(삶에의 의지)이 결여되거나 결핍 상태에 있을 때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것이 계속 유지되고 고갈되지 않고 풍요로워야 가능하다...

넷째,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최고의 긍정 양식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니체는 이 점을 "디오니소스적 상징 안에는 긍정이 그 궁극적인 지점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긍정의 여러 양식 중에서 최고의 긍정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성이 보여주는 모든 계기에 대한 조건 없고 유보 없고 예외 없는 긍정을 하기 때문이다.  47-50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개념이 갖는 의미는 힘에의 의지를 방법적 개념으로 삼은 니체의 후기 사유에서도 여전히 지속된다. 이제 그것은 힘에의 의지와 동의어가 된다. 힘에의 의지의 복수(plural)적-상승적-관계적 수행은 영원히 지속되는 모순적 생명성, 그 과정이 보여주는 고통의 기쁨으로의 전환, 생명력의 지속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63


후기 사유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그것이 갖는 긍정의 함의다... 디오니소스적 인간이야말로 '고통 자체와 삶 자체의 모든 의문스럽고도 낯선 것들에 대한 아무런 유보 없는 긍정'의 전제인 것이다. 긍정의 철학은 그래서 '긍정하는 인간'에 대한 철학이 된다. 니체가 그런 인간을 육성하는 과제를 절실한 철학적 과제로 상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후기 사유 전체는 바로 그런 '긍저하는 인간'을 어떻게 육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라고도 할 수 있다.  64




2 '신의 죽음에 대한 선언'은 '신의 죽음에 대한 고발'


<즐거운 학문>에서 미친 사람의 입을 빌려 처음 고지된 신의 죽음은 니체의 그리스도교 비판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방향타 역할을 한다. '인간이 신을 죽게 한 장본인이라는 것, 그리스도교 교회는 살아 있는 신의 집이 아니라, 죽어버린 신의 무덤과 묘비에 불과하다는 것'.  69


사제들의 권력추구 욕망 때문...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사랑하지 못할 때, 그리스도교가 제시한 신 개념은 전략적으로 인간에 의해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고백을 듣게 된다.  70


인간이 태양을 잃은 세계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 스스로 신의 '역할'을 대신하여 존재와 의미와 가치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럴 정도로 강해져야 하고, 그럴 수 있는 자신의 힘을 긍정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자시을 건강한-디오니소스적 인간으로, 위버멘쉬로 고양시켜야 한다.  7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4부 [나귀의 축제]에서 재등장하는 더없이 추악한 자는 '신을 다시 믿는 자'로 설정되어 있다. 물론 그가 믿는 신은 옛 신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신의 '나귀'를 섬긴다. 이것은 최악으로 뒤틀린 심사에서 나온, 신에게 보내는 비웃음이자 신엑 최대의 모욕을 안겨주는 방식이다. 그러면서 그는 신을 '철저히' 살해한다. '나귀'는 이제 그가 찾아낸 새로운, 지상에 있는-국가든, 돈이든, 과학이든-우상이다. 이것을 그는 다시 신격화한다. 병리적 인간인 그가 자기부정이라는 병리적 상태를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형하고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창조적 주체로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지도,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갖지도 못한다.  76-77




4 건강한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대명사, 위버멘쉬


인간을 '우연과 사제'의 손에서 해방시키고, 인간이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을 사랑하고 긍정하는 길을 철학적으로 확보한다. 니체의 철학적 야심은 이것이었다. ..

'누가 있어 긍정의 노래를 함께 부를 것인가?' 니체의 눈에 비친 사람들은 하나같이 방황하는 정신을 지닌 무기력한 "인간 말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I [머리말]  133


위버멘쉬는 오로지 인간이기 때문에, 오로지 인간만이 획득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134


위버멘쉬는 기본적이면서도 일차적인 의미의 항상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인간이다. 즉 자신의 현 상태를 늘 넘어서는 '자기극복'의 노력을 의식적-의지적으로 기울이는 인간이다.  135


인간존재의 의미이자 이상적인 실존의 모습인 위버멘쉬, 그것의 의미는 먼저 '자유정신'이라는 개념으로부터 획득된다. 자유정신은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파토스를 지니고 가치의 새로운 중심을 제시할 수 있는 정신의 자유로운 상태를 말한다.  136


자유정신은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고 획득할 수 있는 자다...

"..평가라는 것을 통하여 비로소 가치가 존재하게 된다. 귀담아듣도록 하여라. 창조하는 자들이여! 가치의 변천, 그것은 곧 창조하는 자들의 변천이기도 하다. 창조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자는 끊임없이 파괴를 하게 마련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I [천개의 목표와 하나의 목표에 대하여]  137


여기서 창조는 가치평가작용 혹은 의미창조작용, 즉 '해석(Interpretation)'을 말한다.  138


인간이 '그의 세계'를 더 이상 구성하지 않는 경우는, 다으모가 같은 경우들일 것이다. 그의 창조력이 무기력해졌을 경우, 혹은 자신이 구성해낸 세계를 세계 그 자체와 동일시하여 절대화시켜버리는 경우,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구성된 가치와 의미의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여버리는 경우. 이 경우들이 모두 '크나큰 피로'의 증후이며, 그것은 삶의 지속적인 창조를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반면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고,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인간, 니체가 '해석자'라고도 부르는 그가 자신의 삶의 상승을 위해 해석을 할 때, 그는 이제 위버멘쉬의 조건 하나를 갖춘 것이다.  139


도대체 이성활동과 지각활동, 그리고 의식층은 어느 정도로 관계적이며, 어느 정도로 힘에의 의지의 규제를 받는 '도구'인 것인가? ..

니체는 이것에 대한 전통철학의 논의가 형이상학적으로만 진행되어 왔으며, 그래서 매우 제한적이면서도 비과학적이었다고 비난한다. 의식이나 정신은 신체의 특수한 기능에 대한 명칭이며, 신체는 육체성과 심리성의 구분 자체가 어려운 '관계적 유기체'다. 그래서 의식과 정신에 대한 물음은 곧 인간 유기체 전체에 대한 물음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철학적-생물학적-생리학적-심리학적 등 개별적 탐구방식이 모두 동원되어야 한다. 그런 총체적인 탐구에 의해서도 완전한 파악으ㄴ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형이상학적의식 탐구의 결과가 "정신과 의식을 과대평가"하는 "엄청난 실책"에 불과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경험성과 육체성을 무시하고 간과하는 "반과학적 정신"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신경계와 세포와 혈행과 근육계 등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모든 기관과 기능과 현상 전체를 고려해보면, 의식이라고 불리는 것은 첫째, 단일체가 아닌 흐름이고, 둘째, 그 과정은 우리에게 의식디는 부분과 의식되지 못하는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잇지만, 셋째, 그 구분은 고정되거나 확정된 불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의식되지 못하는 부분들이 의식되는 부분들로 이행하는 것이고, 그것도 경우에 따라 달리 진행된다는 것 등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의식과 의식 이전의 층은 진행의 정도에 따른 구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의식되는 부분을 '의식-이라는 명사형으로 이해한다. 마치 의식이 단일한 어떤 것처럼, 의식 이전적 현상과 분리 가능한 어떤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 그렇게 사용하는 언어적 표현방식일 뿐이다.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익숙해져 '생각행위와 느끼는 행위와 욕구행위의 담지자'로서의 의식, '정신적 원인'으로서의 의식이라는 생각을 도출시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언어적 표현에 불과할 뿐, 사실은 아니다.  143-144


창조자이자 해석자이며 신체적 존재라는 자의식의 소유자, 삶의 창조적 구현을 매순간 이루어내는 존재, 파괴와 창조를 하는 자유정신의 눈, 이성의 수단적 성격 및 의식의 기호적 속성과 한계를 인지하는 인간, 그러면서 자기극복의 과정을 이어가는 인간.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위버멘쉬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음 장들에서 추가될 위버멘쉬의 다른 특징들-주권성, 귀족성, 주인의식, 책임과 자유 등-을 부가하지 않아도, 이미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렵고도 고단하다. 도대체 왜 이런 쉽지 않은 일을 니체는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일까? 그래야 비로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다고, 인간의 존재의미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그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147-148


위버멘쉬적 삶을 사는 것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고단함과 어려움은 어느 순간 위버멘쉬로의 노력을 중단하게 할 수 있다. 니체도 그런 위험을 잘 알고 있다. 그가 우리에게 실존적 결단을 내리라고, 온전한 의미에서의 실존적 결단을 내리라고 강요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148




5 관점주의라는 인식 모델 : 절대적 진리? 해석적 진리!


니체는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만드는' 작용이라고 부른다. 영원한 흐름 속에 있는 생성세계를 포착해내고 파악해내고 붙잡아내어 한 가지 면으로 고정시키는 것, 여러 경험들 중에서 특정한 것만 받아들이는 것, 비교하고 도식화하고 예속시키고 범주화하고 일반화하는 것, 그래서 특수성과 개별성보다는 범주성과 일반성에 주목하는 것, 이런 모든 일들이 지성뿐만 아니라 감각기관을 포함한 우리 신체 전체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 싶은 것만 안다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고 친숙한 형태의 것으로 포섭시켜 유형화해서 말이다. 그래야 우리가 낯설고 친밀하지 않은 새로운것들 속에서 생기는 불안감과 공포를 떨치고 삶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만드는 일'은 그 자체로 삶을 위한 전략적 행위다. 우리 인식이 이런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치기에, 해석은 대상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묘사나 기술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주관적 필요에 의해, 우리에게 이해 가능한 형태로 구조조정되어 있다. 그것은 결국 삶의 상승이라는 우리의 실천적 욕구들이 반영된 오류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오류들을 통해서만 세계와 소통하고, 이런 오류들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 결국 삶에 대한 유용성 전략은 해석의 필연적 오류성을 이미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65




6 자유와 평등을 원하는가? 먼주 주권적 존재가 되어라


니체는 .. '인간은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

'오로지 주권적 존재만이 약속도 할 수 있고, 책임도 질 수 있다. 따라서 오로지 주권적 개인만이 자유와 평등을 요구할 수 있다. 약속과 책임과 자유와 평등이라는 것은 이렇듯 주권적 개인만이 획득 가능한 특권이다.'  177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조건이 바로 약속권리에 있다고 니체가 생각.  178


기억은 앞으로의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산정하고, 그것을 규칙적인 것으로 만들며, 그것을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만드는 인간의 능력이다. 이 능력에 의해서 약속도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렇기에 기억은 약속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려는 인간의 (망각보다) 고급한 기능일 수 있는 것이다. 기억능력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에게 보증할 수 있다. 그런데 니체는 이런 기억을 '의지'의 능력으로 이해한다. 

"일단 의욕한 것을 계속하려는 의욕, 즉 본래적인 의지의 기억인 것이다." - <도덕의 계보>  180


누구나 다 자신의 해위와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책임질 수 있음은 그래서 특권이다.  183





맺음말


그는 인간과 세계의 병증을 진단하고 치유하는의사, 건강하게 살기를 가르치고 권유하는 교육자이자 계몽가다. 

먼저 네 자신을 창조할 수 있어야, 세계가 네 작품이 된다. 네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세계도 지배할 수 있다. 네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할 줄 알아야, 세계가 너의 화원이 된다. 네 자신에 대한 긍지를 지녀야, 세계도 경외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 먼저 네 자신이 되어라!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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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그저 당신 자신에 대해서나 생각하라는 거요. 괜히 자신이 결백하니 뭐니 하며 소란을 떨지 말시오.  그래 봤자 그리 나쁘지 않은 당신 인상마저 망칠 뿐이니까. 그리고 말도 자제하는 편이 좋겠소. 비록 몇 마디밖에 하진 않았지만 당신이 방금 한 모든 말은 당신 ㅎ애동에서 다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었소. 그런 말을 지껄여 봤자 당신한테 크게 이로울 것도 없소.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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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

꽤 이른 아침이었다. 거리는 깨끗했고 텅 비어 이었다. 나는 역으로 갔다. 시계탑의 시곗바늘과 내 시계를 비교해보고 이미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늦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급히 서둘러야만 했다. 늦었다는 사실에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길에 대한 확신을 잃게 되었고, 게다가 아직 이 도시에 대해 썩 잘 알고 있지도 않았다. 다행히도 근처에 결찰관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그에게 달려가 급히 길을 물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서 길을 알고 싶은가?"

"네." 나는 말했다. "혼자서는 길을 찾을 수가 없어서요."

"포기해, 포기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몸을 홱 돌려 나를 외면했다.

마치 웃으면서 혼자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처럼.  49-50



인디언이 되고 싶은 소망

내가 인디언이라면, 즉시 채비를 갖추고, 달리는 말 위에 올라, 허공에서 몸을 비스듬히 젖히고, 짧은 전율을 느끼고 또 느끼며 진동하는 대지 위를 내달리리라. 박차를 잃어버릴 때까지. 사실 박차는 애당초 없었다. 고삐를 내던져 버릴 때까지. 사실 고삐도 애당초 없었다. 눈앞에 매끄럽게 풀이 깎인 황야가 펼쳐진 순간, 말의 목도 말의 머리도 이미 흔적이 없었다.  87



여행자 예찬 

열차 안에 앉는다. 신경 쓸 것이 없다. 마치 집에 있는 것처럼 시간을 보낸다. 갑자기 기억들이 떠오른다. 출발하는 열차의 잡아태는 힘이 몸에 느껴진다. 이제 여행자가 되는 것이다. 가방에서 모자를 꺼낸다.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더 자유분방하게, 더 많은 인정을 베풀며, 더 간절하게 대한다. 열차는 공치사 하나없이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것이다. 이런 점을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느낀다. 여인들의 애인이 된다. 창문이 보여주는 끊임없는 매력에 이끌리며, 언제나 최소한 한 손이라도 쭉 뻗어서 창문턱에 올려놓은 채 그대로 둔다. 조금 더 주의 깊게 상황을 보자면, 사람들은 단 한 번의 충격으로 섬광 같은 열차 안에서 혼자 여행하는 아이가 되고, 그 아이 주변에서는 조급함에 몸을 떠는 객차가 마치 요술쟁이의 손에서 튀어나오는 것처럼 놀라울 정도로 너무나도 아주 가볍게 생겨나고 출발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잊고 있었고, 더 심한 것은 자신들이 잊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88-89



골목길 창문

고독하게 살고 있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어딘가에 연결되고 싶어 하는 남자, 낮 동안의 시간의 변화들, 날씨의 변화들, 직업 상태에 따른 변화들과 그와 같은 것을 고려하면서 자신이 의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임의의 힘을 당장 보고 싶어 하는 남자-그 남자는 골목길 창문이 없다면 그것을 아마 오래 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골목길 창문은 그와 그런 사이라서, 그는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친 남자같이 겨우 눈만 관객과 하늘 사이에서 아래위로 움직이며 자신의 창문턱 쪽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원하지 않으면서도 머리를 뒤쪽으로 조금 젖히고 창문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아래에서 마차의 수행원과 소음 속에 있는 말들이 역시 그를 감동시키고 마침매 그럼으로써 인간적인 융화가 되었다.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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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서가를 들여다보면 주인의 흥미와 성격이 보인다. 

캐나다 소설가 로버트슨 데이비스는 말했다. "진정 위대한 책은 어려서 읽고, 커서 다시 읽고, 점심 때 보고, 달빛 아래 다시 봐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아이들이 집안 장식은 필요한 만큼의 책꽂이를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어른으로 자라면 좋겠다." 작가 애나 퀸들러(Aanna Quindle)



"책은 가구가 아니지만 그만큼 집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것은 없다." 19세기 중반 성직자 헨리 워드 비처의 말이다.  



"책이란 무엇인가? 전부이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보는 눈이다." 에머슨



우리가 평생 동안 읽은 책들은 우리의 취향, 관심사, 과거사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는데, 그런것을 내보이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비평가 애너톨 브로야드의 말, "나는 책을 빌려줄 때, 결혼하지 않고 남자와 동거하는 딸을 보는 아버지의 심정이 된다."



"책을 친구 삼으라. 그대의 책꽂이가 유원지가 될게 하라." 12세기 유대인 철학자 유다 이븐 티본



미국 성직자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슨은 <읽지 않은 책들> 에서 책꽂이가 부족해 목수를 불렀을 때의 일을 이야기한다. 목수가 그에게 "정말 이 책들을 다 읽으셨어요?" 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도구 상자에 있는 도구들을 다 쓰시오?" 물론 아니다. 도구란 나중에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재는 읽은 책을 보관해두는 곳이 아니라 필요할 때를 대비하는 공구상자에 가깝다.  



서적광-그는 독서광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은 서재를 채우기 위한 사냥을 포기하지 못한다. 책에 대한 열망은 가려운데도 긁을 수 없는 부위와도 같다. 작가 발터 베냐민이 보았듯 "어떤 사람들은 책을 잃어버렸을 때 환자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책에 대한 욕망 때문에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 정신적으로 좀 더 균형 잡힌 수집가들은 관심사를 중심으로 책을 수집한다.  



100여년 전 하버드 대학 총장 찰스 W. 엘리엇은 정전의 개념을 한층 다듬었다. 그는 하루 15분 동안 정선된 책 50권을 읽으면 누구나 훌륭한 '교양 교육'을 받은 수준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그 50권의 책은 이후 하버드 클래식 '5피트짜리 책꽂이' 시리즈로 거듭났다. 여기에는 플라톤, 밀튼, 벤저민 프랭클린, 다윈, 단테, 애덤 스미스, 셰익스피어 등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앤 패디먼은 매력적인 에세이 <서재 결혼 시키기>에서 자신과 남편의 책 정리법이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한다. "남편의 책은 문학이라는 지나치게 포괄적인 깃발 아래 자유롭게 뒤섞여 있다. 수직으로 세워진 것도 있고 수평으로 뉘어진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다른 책 뒤에 들어가 있기도 하다. 내 책은 국적과 주제별로 발칸 반도처럼 분열되어 있다."

이런 문제에 간단히 해결책을 제시하자면, 가장 일반적인 해결책은 장르별(예를 들면, 예술, 여행, 과학, 디자인)로 책을 나누고, 같은 장르 내에서 다시 작가명 순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다시 (보기 좋은 쪽이 사용하기 좋은 쪽보다 중요하다면) 새뮤얼 피프스가 자신의 책 3천 권을 정리했던 방법대로 크기별 혹은 색깔별로 정리한다.



독자가 음식을 먹는 사람이라면, 책은 영혼의 음식이다. 

1980녀대 말 이탈리아에서 맥도날드의 확산을 반대하며 슬로푸드 운동을 시작한 카를로 페트리니는 자신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내가 아르마니 바지를 입는다 해도 바지가 내 일부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햄 한 조각을 먹으면 햄이 내가 된다. 그것이 내가 음식에 돈을 쓰는 이유다," 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사무실에서 힘든 한 주를 보낸 뒤, 멍청한 텔레비전 앞에 앉아 괴상한 즉석식품을 먹으며 쉰다. 하지만 이들의 귓가에 들려오는 전자레인지의 '띵'하는 소리, 미리 녹음된 TV의 웃음소리는 정성껏 조리된 찜요리와 잘 쓰인 소설 한 편이 주는 심오한 만족감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소설가 해럴드 브로드키는 좋은 책에 빠지는 것을 연애에 비유하면서, 책 읽기란 "그 경험 안에 파묻혀 있고, 곧 다시 태어난다는 점"에서 임신과도 비슷하다고 햇다. 한 세기 전에 랠프 월도 에머슨은 "책은 치료 효과가 좋고, 가혹하고, 혁명적이고, 믿을 만하다는 점에서 인생으로 치면 부모와 애인, 연애 경험들과 나란히 놓을 수 있다"고 썼다.  



"책이 없는 집은 창이 없는 방과 같다. 책을 살 돈이 있는데도 아이들 주변에 책을 두지 않고 아이들을 키울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청소년기에는 감수성이 예민하기 때문에 책이 인생의 진로뿐만 아니라 인성에도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다. 이탈로 칼비노가 썼듯이, "그것은 미래의 경험에 하나의 츨을 제공하여 하나의 모범, 비교의 대상, 분류의 틀, 가치 척도, 미의 전형을 마련해 준다." 그리고 어린 시절 읽은 책은 내용을 잊어버려도 영향력이 오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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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에 사람들이 매혹당한 가장 큰 동기는 '가난한 사람들, 배를 곯는 사람들, 수탈당하는 사람들, 사회적인 불의를 견디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양심'입니다.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버젓이 곁에 있는데 자기는 '편하게' 지내고 있다는 불공평함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게 되고, 거기에서 '공정한 사회를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한 사명감이 자라나지요.  10


아마도 마지막으로 일본인에게 '양심의 고통'을 느끼게 한 것은 베트남 전쟁 때 불에 타 죽은 베트남 농민이었을 겁니다. 일본이 베트남 전쟁의 후방 지원 기지로서 그들의 학살에 간접적으로 가담했고, 그 덕분에 일본인은 전쟁 특수로 인한 경제적 풍요를 누린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이지요.

하지만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일본인은 '양심의 고통'을 느낄 만한 상대를 더 이상 찾을 수 없었어요. 그 후 처음에는 다소 미안한 듯 조심스러웠지만 나중에는 여봐란듯이, '우리는 이렇게 잘 살고 있다! 이렇게 풍요를 누리고 있다! 이렇게 쾌적한 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자랑스럽게 떠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누가 마르크스를 읽겠어요?  11


단적으로 말해 돈을 갖는 것,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 호화로운 집에 사는 것, 비싼 옷을 입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능력 있는 인간이 우아하게 살고, 무능하고 힘없는 인간이 길거리에서 굶어 죽는 것을 자기 책임이라고 합니다. 능력 있는 인간이 높은 품격을 인정받고, 무능한 인간이 경멸당하거나 모욕을 받는 것을 매우 적절한 결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회적인 정의(fairness)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오피니언 리더가 된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고방식은 별로 '좋지 않다'고 봅니다.

공동체는, 가장 연약하고 가장 힘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전체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자존감을 갖고 각각의 입장에서 책무를 다할 수 있게 하는 제도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혈연이나 지연으로 엮인 소규모의 공동체든, 국민 국가나 국제 사회 같은 거대한 공동체든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힘없고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 운용해나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어느 정도의 '성숙한 어른'이 꼭 필요하지요. 충분한 능력도 있고, 지혜도 갖추고 있고, 주위에서 모두들 존경과 신뢰를 보내는 사람, 나아가 자신이 갖고 있는 자원을 자기만의 이익이 아니라 주변의 힘엇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성숙한 어른'말입니다.  12


마르크스를 읽고,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 '어린애가 어른이 되는' 방법으로서 가장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마르크스를 읽지 않게 되고 나서부터 눈에 띄게 '성숙한 어른'이 줄었습니다. 나는 이 두가 현상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봅니다.  13




마르크스 수사학의 결정체 <공산당 선언>

                                                                  (공산당 선언 전문 참고 하기 클릭)


초판 책자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라는 저자의 이름도 실려 있지 않았고, 저자를 밝힌 것은 1850년이었다고 합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7년 모스라는 인물의 추천을 받아 이동맹에 가입했습니다. 동맹에서는 그해 6월에 열림 제 1회 대회(엥겔스참석)와 11월에 열린 제2회 대회(마르크스와 엥겔스 참석)-둘다 런던에서 개최-에서 강령 내용에 대해 상당히 오랫동안 논의를 거듭했습니다. 그리하여 제 2회 대회에서는 논의의 결과를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문서로 작성할 임무를 맡기기로 결정하죠. 다만, 당시 마르크스는 브뤼셀에, 엥겔스는 파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대표로 집필하기로 했어요. 마르크스는 그 전에 엥겔스가 집필한 <공산주의의 제 원리>(1847)등을 참조하면서 독일어로 이 글을 써냈습니다.  25-26


이 책은 네 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다.

I. 부르주오와 프롤레타리아 - 부르주아는 자본가,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자를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양자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중심으로 '근대 부르주아 사회'(당시 마르크스는 아직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어요)의 체제나 역사, 또 프롤레타리아 혁면(공산주의 혁명)의 필연성 등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II.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들 - 여기에서는 '공산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 일반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서 시작하여 공산주의 운동의 목적이나 공산주의 사회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III. 사회주의 문헌 및 공산주의 문헌 - 이 부분에서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고 불리는 다양한 조류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본격적으로 논단이나 운동의 세계에 등장하기 이전에도 이미 수많은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은 너무나 많은 얼굴을 한 정체불명의 '유령'으로 취급받았습니다. 

IV. 각종 반정부당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 - 여기에서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반정부당이나 혁명당에 대해 공산주의자의 당이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논합니다.  27


마르크스는 현대 경제나 정치, 여성의 지위나 가족, 저출산 문제 같은 사회적 문제를 생각하는 데 중요한 힌트를 제공해주지요...

마르크스의 유물론 철학에서는 이론을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것으로 파악하는 사고를 신랄하게 비판하고있으니까요.  28


실은 만년의 엥겔스는(<1883년 독일어판 서문>) "<공산당 선언>을 관통하는 기본 사상, 즉 역사의 어느 시대라도 경제적 생산 및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편성이 그 시대의 정치적 및 정신적 역사의 기초를 이룬다는 것, 따라서 (태곳적 토지 공유가 붕괴한 이후)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 즉 사회 발전의 여러 단계에서 착취당하는 계급과 착취하는 계급, 지배당하는 계급과 지배하는 계급 사이의 투쟁의 역사라는 것, 그러나 이 투쟁은 지금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착취와 억압 및 계급투쟁으로부터 사회 전체를 영국적으로 해방하지 않고서는 착취하고 억압하는 계급(부르주아지)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 이 기본 사상은 단 한 사람, 오로지 마르크스에게서 나왔다."  29-30


공산주의 혁명론을 몇 가지 소개하면.

1. 노동자의 정치권력 획득 - '공산주의자의 당면 목적'은 우선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프롤레타리아트(노동자 계급)가 정치권력을 쥐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는 <공산당 선언>의 사상은 매우 독창적이었죠.

2. 정치 혁명과 사회 혁명 - 혁명의 '첫걸음'으로서 정치권력을 획득한 공산주의자는 그 다음 사회의 개혁으로 나아가야 해요.

3. 공산주의 사회란 무엇인가. - 사회를 계급으로 분열시키는 경제적인 기반이 사라진다는 뜻이에요.."계급 및 계급 대립이 있는 낡은 부르주아 사회를 대신하여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나타난다." 공산주의 사회라고 하면, 소수의 엘리트(계급) 혹은 공산당이 국가를 장악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국민 전체를 계획적으로 관리하는 사회라는 이미지를 떠올릴지도 모르겟어요. 하지만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주의는 그러한 사회와 전혀 달랐어요.

4. 혁명의 방법에 대해 - 당시 유렵의 역사적 사정을 생각해볼 때. 겨우 스위스 정도만 국민 다수의 선거를 통해 권한을 가진 의회를 선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해요. 실제로 <공산당 선언>을 발행한 직후 각지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아닌 왕정 타도나 민족 독립을 요구하는 혁명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모두 '강제력'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한편,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6년 노동자 계급의 선거원을 요구한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에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고, 그 후에도 마르크스는 만년에 이르기까지 의회를 통해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방법을 쉬지 않고 탐구했어요.

5. 민주적 개혁과 공산주의 혁명 - 마르크스는 역사를 향해 언제 어디서든 공산주의 혁명을 밀어붙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태도를 취하지 않아요. 우선은 "눈앞에 닥친 목적이나 이익의 달성"을 소중하게 여기고, 부르주아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부르주아와 '공동으로' 싸워나간다고 하지요. 각각의 사회에 대해 각각의 역사적 단계가 필요로 하는 '현재의 운동'을 통해 야무지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운동의 미래', 즉 공산주의 혁명에 접근해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죠. 냉철한 자세를 유지했어요.  31-36


마르크스의 경제 이론이나 정치 이론은 현실 정치에서 이미 '유효 기간이 지났다'고 여겨지고 있어요

만일 마르크스의 이론을 그대로 가져와서 적용하기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이런 기준으로 마르크스를 평가한다면, 마르크스의 '유효 기간은 지났다'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마르크스를 읽음으로써 지적인 활기를 얻고, 자신의 지성을 가두고 있는 '우리'의 구조를 깨달으며, 거기에서 빠져 나오려는 노력에 시동을 거는 사람드에게 마르크스의 유효기간 따위는 없을 거예요.  44




청년 마르크스를 만나다 <유대인 문제>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두 사람이 실제로 처음 맞대면한 것은 1842년 2월, 그러니까 엥겔스가 맨체스터로 가는 도중에 <라인신문> 편집부에 들렸던 때 라고 하는군요. 그러나 이 만남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거기서 나는 마르크스를 만났지요. 당시 우리는 지극히 냉랭한 분위기에서 인사를 했어요. 마르크스는 그때 바우어 형제를 반대하는 입장이었거든요.... 나는 바우어 형제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인지라 그들의 동맹자로 여겨졌고, 한편 마르크스는 그들에게 수상하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던 것 같아요."(<엥겔스가 프란츠 메링에게 보낸 편지> 1895년 4월말)

이 시기 <라인신문>의 주필이던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정부의 검열과 투쟁하는 등 구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벌이는 논전을 중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탁상공론으로 보이는 추상적인 논의만 되풀이하는 청년헤겔학파와 심하게 대립하고 있었어요. 브루노와 에드가 바우어 형제가 대표적인 논자였죠.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 형제와 친하게 보이는 엥겔스에게 경계심을 가졌던 모양이에요.  66


두 사람 관계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독불연감>에 게재한 엥겔스의 논문 <국민경제학 비판 대강>에 마르크스가 강렬한 충격을 받고 나서부터입니다. 두 사람이 평생 변치 않는 교류를 나누며 공동의 역사를 이룩한 것은 그때부터라고 봐야겠죠.  67


<유대인 문제>

바우어의 논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어요. '유대교도의 해방은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하지만, 독일에서 억압받는 이들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인민이다. 따라서 유대인 문제는 모든 독일인의 해방을 둘러싼 문제로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독일인의 해방을 달성하려면 독일 국가가 기독교의 굴레를 버리고 근대 국가가 될 필요가 있으며, 아울러 독일의 인민 스스로 기독교나 유대교 같은 특정한 종교로부터 빠져나와 자유로운 자기 의식을 획득해야만 한다. 

이러한 논지에 대하여 마르크스는 '정치적 해방'과 '인간적 해방'이라는 두 가지를 구분하는 시각과 관련된 시각을 제기해요.

1 "독일의 유대인은 해방을 열망하고 있다. 어떤 해방을 열망하는가? 공민(公民)으로서의 해방, 정치적인 해방이다."(<전집>, 제1권, 384쪽)

2 하지만 "정치적 해방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비로소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비판이 가능하며, 유대인 문제를 '시대의 일반적 문제'의 하나로 진정 해소시킬 수 있다."(앞의 책. 388쪽)

3 그런데 바우어는 "다만 '기독교 국가'만을 비판할 뿐 '국가자체'를 비판하지 않는다", "정치적 해방이 인간적 해방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연구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단지 정치적 해방과 일반적인 해방을 무비판적으로 혼동"하고 있다.(앞의 책 388쪽)  68-69


마르크스는 헤겔을 본받아 '시민사회'를 "욕망과 노동과 사리(私利)와 사적 권리의 세계"(앞의 책 406쪽)라고 불렀는데요. 그는 나중에 이것을 '자본주의 경제'라는 문제 영역으로 정리하고 이해해갔어요. 마르크스는 이 단계에서 근대 사회가 초래한 법적 평등과 경제적 불평등을 구별하고, 이 사회의 중심이 경제 활동의 새로운 주체가 된 부르주아로 옮겨 간 점이 일찍부터 착목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독일인의 '인간적 해방'을 위해서는 '이기적인 정신'으로 가득 찬 시민사회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70-71


기독교가 유대교의 '분파'로서 등장.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모두 유대교에서 파생한 종교이기 때문에 애초의 시발점부터 반유대교적이라는 것은 논리적인 필연인 것입니다.  81


마르크스가 역점을 둔 것은 유대인 해방 '그 자체'가 아니에요. '해방'의 전 단계에 포함되며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은 것. 다시 말해 누구의 해방이며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지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에요...

상상해보면.. 인종 차별이 있는 어떤 나라에서 자유우의 성향의 정치가와 사회 활동가의 노력으로 '인종차별쳘폐법'을 제정했다고요. 의회는 법안을 가결하고 정부는 그 법을 엄숙하게 실행했어요. 자, 이런 경우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차별이 없어진 것 아니야?'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예, 차별이 철폐되었어요. 그뿐입니다. 하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사시에 또 하나의 국민적 합의가 성립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어요. 그것은 "우리 나라의 통치 시스쳄은 참 잘 돌아가고 있구나"라는 합의예요.

바꾸어 말하면, '그게 뭐 잘못인가? 합법적인 수순을 밟아서 차별을 철혜햇드면, 꽤 괜찮은 사호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니야? 그런 정치 시스템이라면 충분히 건전하게 기능하고 있는 것 같은데...'하는 것이죠.

마르크스는 그러한 무언의 동의가 성립되어버리는 것에 대해 강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86


바우어는 '정치적 해방이 인간적 해방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연구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단지 정치적 해방과 일반적인 해방을 무비판적으로 혼동'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이렇게 쓴 것은 곧, "이봐, '정치적 해방'과 '인간적 해방'은 다르단 말이야" 하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죠.

'정치적 해방', 즉 법률에 의해 '인종 차별을 하면 안 됩니다'라고 정하는 것은 물론 '일보 진보'겠지요.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렇게 마랳요. "그건 하나의 '진보'일 뿐 종점은 아니야. 이야기를 거기에서 끝내버리면 안 된다고, 유대인은 정치적으로는 해방되었어도 인간적으로는 아직 해방이 안 되어 있거든."  87


모든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가 인간 해방이 실현된 이상 사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시민 사회에서 시민들이 누리고 있는 것은 '고립의 자유'예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대신 누구도 폐를 끼치지 못하게 할 권리. '고립되어 자기 안에 콕 틀어밖혀 잇는 모나드(단자)로서 누리는 인간의 자유'(앞의 책 43쪽)라고나 할까요. 인간과 인간이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거리를 두는 것에서 더욱 커다란 가치를 찾는 것이 근대 시민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어요. 시민사회의 기초는 "'자신의 재산, 자신의 소득, 자신의 노동 및 노무의 성과를 임의대로 향수하고 처분할' 권리"(앞의 책 44쪽)에 있다고 말이죠.  90


물론 시민사회에서도 시민들은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은 아니에요. 정부에 자신의 권리 일부를 맡기고 법률을 제장하거나 법을 준수하며,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 세금을 내고, 징병령이 떨어지면 무기를 들고 조국을 위해 싸우기도 해요. 이런 시민의 모습을 마르크스는 '공민'이라고 부르지요. 이는 공적인 기능이란 측면에서 규정한 시민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시민을 '속마음에 충실한 시민'이라고 한다면, 공민은 규칙에 따라 의무를 다하는 '원칙에 충실한 시민'이라고 하겠지요. 요컨대 시민은 '사인(私人)'과 '공민'이라는 두 얼굴을 갖게 되지요. 사인으로서는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 공민으로서는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식으로...  91


마르크스의 정의에 따르면 '유적 존재'란 "현실의 개체적 인간이 추상적인 공민을 자기 안에서 되찾은" 상태를 가리켜요. 시민사회에서는 '공사의 혼동'이 어디까지나 '공보다 사는 우선한다'는 것임에 비해, 유적 존재는 공과 사를 문자 그대로 일치시킨 상태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93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행복과 이익에 신경 쓰는 만큼의 열의로 이웃의 행복과 이익에 신경을 쓰는 '유적 존재'가 되는 것을 '인간 해방의 완수'라고 봤어요.  94


마르크스는 사회 전체를 '특별한 의미에서 해방하는 입장'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이 텍스트를 통해 끄집어내려고 해요. 프롤레타리아론은 마르크스의 사회 이론을 뒷받침하는 근간과 관련있는 테제인데요...

마르크스는 스스로를 '족쇄밖에 잃을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라고는 여기지 않았으니까요.(마르크스에게는 족쇄 이외에도 가족이나 친구, 동지 같은 '좋은 것'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에게 모든 권리를!' 같은 테제를 증여의 구문으로 썼어요. 이 테제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마르크스가 '자신의 소유물'을 선물로 내주면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윤리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나는 프롤레타리아'라고 자칭하는 인간이 '프롤레타리아에게 모든 권리를!'하고 주장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어요. 논리적으로는 옳지만 윤리적으로는 옳지 않거든요. 인간은 자기가 손에 넣고 싶다고 바라는 것을 우선 다른 사람에게 증여함으로써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 이것도 내가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확신하게 된 교훈의 하나예요.  102-103




인간에 대한 연민, 그 위대한 시작 <경제학-철학 수고>


'소외된 노동'

"노동자는 자신의 생명을 대상에 쏟아붓는다. 그러나 대상에 쏟아부은 생명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라 대상의 것이다... 그의 노동이 들어간 생산물은 그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생산물이 커지면 커질수록 노동자 자신은 그만큼 가난해진다.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물을 외화한다는 것은 그의 노동이 하나의 대상에, 하나의 외적인 현실 존재가 된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노동이 그의 외부에, 그에게서 독립한 소원한 형태로 존재하며 그에 대해서 자립적인 힘이 되는바, 그가 대상에 부여한 생명이 그에 대해 적대적이고 소원하게 대립한다는 의미이다.  147


마르크스 자신은 부르주아였으니 그가 인용한 가혹한 노동의 경험 같은 것은 안 해봤을 테지요. 하지만 강렬한 공감려고가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148


소외론의 출발점이 '자신의 비참함'이 아니라 '타인의 비참함'을 목도한 경험이었어요. 마르크스는 "우리를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랍니다. "그들을 소외된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우리의 임무"라고 주장한 것이지요.  149


'유적존재'

'나만 좋으면 나머지는 상관없다'는 본심만 내세우며 살아간다면,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도구로 이용하고 수탈할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인간을 바꿀 것인가, '유적 존재'를 지향하면 바뀐다." 이것은 제3초고의 제2장 [사적 재산과 코뮌주의]의 중심논점이에요.

지금 내가 인용하고 있는 책에서는 보통 '공산주의'라고 번역하는 Kommunismus를 '코뮌주의'라고 옮겨놓았어요. '코뮌(Kommune)'이란 공동체를 가리키는데요. 나라나 지방 정부 같은 상명하달 시스템과 달리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범위, 목소리가 들리는 범위 안에서 합의를 통해 제도를 만들고 규정을 정리하며 자치를 행하는 단위예요. 비교적 규모가 작고 중앙 집권적이지 않은 통치 기구를 말하지요. 이러한 조건을 정치 제도의 기본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 '코뮌주의'인데요. 이것을 '공산주의'라고 해버리면 역사적으로 현존했던 '공산당'이나 '국제 공산주의 운동' 같은 것과 어쩔 수 없이 연관시켜 이해하게 되지요. 그래서 그러한 구체적인 역사적 존재가 등장하기 이전에 아직 막연한 관점에 지나지 않았던 시기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굳이 '코뮌주의'라는 번역어를 갖다 쓴 것 같아요.(혼자만의 추측에 부로가하지만)  150-151


마르크스가 지향하는 것은, 가장 인간적이고 훨씬 문명적인 코뮌주의입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적인 본질의 현실적 획득으로서의 코뮌주의(앞의 책 349쪽)"  152





'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 <독일 이데올로기>


<독일 이데올로기>의 구선은 제1권 <최근의 독일 철학 비판>, 제2권 <독일 사회주의 비판>으로 되어 있어요.

제1권에서는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 막스 슈티르너를 검토하고 있지요. 이 세 사람은 모두 청년헤겔학파의 멤버로 한동안 마르크스와 헤겔이 높이 평가했었지요. '헤겔 좌익'이라고도 부르는 청년헤겔학파는 헤겔의 철학을 계승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자 ㅇ혁신적인 흐름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헤겔의 철학에는 '변증법'이라 부르는 변혁의 정신이 내재해 있는데, 현실 세계에 대해 헤겔은 정치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고, 현재 세계의 모습을 훌륭하다고 옹호하는 보수적-현상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어요. 청년헤겔학파는 이른바 헤겔의 언행 불일치에 불만을 품고, 특히 종교 분야에서 낡은 체제에 도전했어요.

그러나 그들도 대부분 자유나 민주주의 문제 같은 것을 당시 독일의 구체적인 정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로지 관념의 세계에서 벌이는 투쟁(공중전)으로 현실의 개혁 문제를 풀어나가려 한 약점을 갖고 있었어요.

이런 대목이 의견의 차이를 낳게 되어 마르크스는 <라인신문>의 편집을 둘러싸고 바우어 형제와 심하게 맞붙었고, 엥겔스와 함께 쓴 <신성 가족>에서 브루노 바우어를 집중적으로 비판하게 되지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우선 문제를 관념의 세계에서 인간이 매일 생활하는 현실 세계로 끌어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2권에서는 당시 독일에서 유행하던 진정한 사회주의라는 사상적 조류를 비판하고 있어요. 프랑스나 영국에서 이러한 조류는 자기 나름대로 현실 세계를 직시한 결과 생겨난 사회주의 사상이었지만, 독일로 수입되면서 독일의 독특한 관념 세계와 결부되어 버린 것이지요.  172-173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야기하는 '이데올로기'에는 처음부터 비판적인 의미가 들어 있었어요. 

"이데올로기는 분명 이른바 사상가가 의식적으로 행하는 과정이지만, 그 의식은 잘못된 의식입니다. 사상가를 움직이는 본래의 추진력을 그 자신은 모르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이데올로기적 과정이 아닐 것입니다."(<엥겔스가 메링에게 보맨 편지> 1893년 7월 14일)  174


"그들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그들의 생산, 즉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고 또 어떻게 생산하는가 하는 것과 일치한다."(<신판 독일 이데올로기> 31쪽)

사적유물론을 '한마디'로 설명하라고 하면(무리한 주문이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만큼 유명한 구절이죠.  211


예를들어 '근본부터 사악한 인간'이 있다고 쳐봐요. 그런데 이놈이 어쩌다가 '선행'을 했어요(전철에서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다든가, 뭐... 이런 일은 엄밀히 말해서 '생산'은 아니지만요). 사적유물론의 견지에서 말하면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에요. 마르크스는 이 사람이 '사실은 어떤 놈인가' 같은 한쪽으로 치우친 이야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아무리 근본이 돼먹지 않았다고 해도 선행을 하면 선인이고 아무리 근본이 선량하다해도 나쁜 짓을 하면 악인이라는 것이죠.  212


마르크스는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인간'이야말로 인간의 본바탕이어야 한다고 말해요. '현실적이고 역사적으로' 변변치 못한 일을 한 인간은 '변변치 못한 인간'이라고 말이에요.

나는 이치의 옳고 그름보다도 윤리적으로 마르크스가 우월하다고 생각했어요.  213


"인간들이 이야기하는 것, 상상하는 것, 표상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또한 이야기하고 사유하고 상상하고 표상하는 대상이 되는 인간들로부터 출발하여, 거기에서 생겨난 진정한 인간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인간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또 그들의 현실적인 생활 과정으로부터 이 생활 과정의 이데올로기적 반영과 반향이 어떻게 발전하는지도 해명할 수 있는 것이다."(앞의 책 42쪽)  216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요약하면, '인간들이 이야기하는 것, 상상하는 것, 표상하는 것'이 적절한가 아닌가는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인간들'에 따라 '그들의 현실적인 생활 과정으로부터' 검증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217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앞의 책 42쪽)

멋진 말 아닌가요? 'A는 B가 아니라 B가 A다'라는 수사법은 마르크스의 십팔번이었어요. 논리학적으로는 무리를 범하는 일도 가끔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런 수사를 애용했어요. 마치 입버릇인 것처럼 말이죠. 아마도 이런 표현이 '자연물처럼 보이는 조작물'의 정체를 폭로하는 데 지극히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마르크스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218


"공산주의 사회에서 각자는 그런 까닭에 고정된 어떤 활동 범위에 갇히지 앟고, 어디라도 좋아하는 분야에서 자신의 기량을 갈고 닦을 수 있도록 사회가 생산 전반을 통제하고 잇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을 하며, 아침에는 사냥하고 낮에는 낚시하며, 저녁에는 가축을 돌보며, 저녁 밥을 먹은 뒤에는 비평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게다가 반드시 사냥꾼, 어부, 목동, 비평가가 되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신판 독일 이데올로기> 67-68쪽)

분업에 의해 인간이 '어떤 특정한 범위에만 머무르는 것'을 강요받고, 특정한 직업에 속박당할 때, 그 노동은 '그에게 소원하고 적대하는 힘'이 된다. 마르크스는 이런 표현을 동원하여 분업을 비판했어요. 동시에 사냥꾼이자 어부이자 목동이자 비평가(이것은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사람, 즉 내가 앞에서 한 이야기에 따르면 '액자를 대는 사람'= 지식은을 가리킵니다)이기도 한 인간을 이상으로 삼은 대목은 아마도 내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가장 감동 받은 부분이 아닐까해요.

마오쩌둥은 힘들고 고된 연안 장정 시기에 홍군 병사들을 향해 동시에 군인이자 농부이자 기술자이자 정치사상가이자 교사가 되라고 요구했겠지요. 그는 '공(工)농(農)상(商)학(學)병(兵)'이 한 사람 안에 통합되어 있는 모습을 인간의 이상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219-220




'지성을 단련하는' 일은 물론 마르크스를 달달 외우거나 옳다고 믿는 것이 아니에요. 마르크스는 도대체 현실 세계-그것은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잇는 자본주의 사회의 초기 단계였어요-의 어디를 보고 무엇을 찾아내려고 했을까? 성장하고 변화해가는 마르크스이 언어를 따라가면서 그 점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그 결과 마르크스가 도달한 지점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이 잡히면 그것이 진정 옳은 것이었는가를 자신의 머리로 판단해가는 일, 그런 훈련을 해나가기 위해서 마르크스를 재료로 활용하는 것이 바로 '지성의 단련'이겠죠.

어찌 된 일인지 마르크스한테는 '벼락치기'가 통하지 않아요.

상대가 마르크스든 아니든, 글을 읽을 때는 거기에 쓰여 있는 내용을 수동적으로 그냥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두뇌를 단련시킬 수 없어요.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말한 마르크스 자신이야말로 항상 그런 자세로 비판적인 정신을 가지고 선배 사상가들의 지적 성과와 씨름하고자 한 사람이었어요.

한편, 이 책을 훑어봤다면 느꼈을 테지만, 마르크스는 글을 쓰면 쓸수록 그 내용이 확확 변해가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내용이 변화하고 탐구의 깊이가 심화되어 갈수록 더욱 사안을 정교하고 치밀하게 파악할 뿐 아니라 이전의 사고 방식을 과감하게 전환시키기도 하고, 과거에 도달한 지점을 가차없이 내던져버리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어요.  222-223



마르크스의 저작 나이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유대인 문제> 25세

<경제학-철학 수고> 26세

<독일 이데올로기> 28세

<공산당 선언> 29세

<프랑스의 계급투쟁> 32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33세

<임금, 가격, 이윤> 47세

<자본론> 제1권 48세

<프랑스 내전> 53세     22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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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포크너 - <성역><음향과 분노><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포크너는 모든 이야기꾼들에게 도움이 될 세 가지 황금률을 제시한다.

첫째, 등장인물 창조를 하나의 장사 수단으로 생각해야 한다. 작가는 등장인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이야기 전개에 따라 인문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등장인물에 대한 윤곽이 머릿속에 대충 잡힌 다음에는 그들 스스로 나아가도록 내버려둘 필요도 있다. 포크터는 "일단 등장인물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들은... 순식간에 튀어나간다. 작가는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제때 받아 적기 위해 전력으로 질주해 그들을 뒤쫓는다... 이야기의 주도권은 그들이 쥐고 잇다... 작가는 그저 그들을 따라 다니며 받아 적을 뿐이다." 라고 말했다.

둘째, 관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훌륭한 등장인물은 입체적이고 진짜 살아 있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들은 스스로 일어서서 영향력을 발휘한 수 있다."라고 포크너는 말했다. 그런 인물을 만들려면 사람을 관찰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서로 어울리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포크너가 말했듯이 "대화를 쓰는 법을 배우는 길은 딱 한 가지뿐이다.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귀를 기울여라."

마지막으로, 상상력과 함께 자신의 영감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상상력에 관한 포크너의 조언은 뇌의 시각적 본질과 이미지가 무의식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현대의 우뇌식 사고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내 경우, 이야기는 하나의 아이디어나 기억 혹은 머릿속에 떠오른 하나의 그림에서 출발한다.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사실 별것 아니다. 그런 아이디어나 기억, 그림이 떠오르는 순간까지 나아갈 수 잇는지, 왜 그런 생각이 떠올랐고 그로 인해 어떤 사건이 뒤따라올지 설명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다 쓴 것이나 마찬가지다."  219


포크너는 등장인물과 더불어 주제도 작가의 또 다른 '장사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포크너는 버지니아 대학에서 두 학기 동안 교내 상주 작가로 머물렀다. 수업 시간 도중 포크너는 주제와 관련하여 한 학생의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메시지는 결국 장인이 사용하는 도구 가운데 하나입니다. 미사여구나 구두점, 그런 것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종종 자신을 목수에, 그리고 작가라는 직업은 닭장을 만드는 일에 비유하며 자신을 낮췄다. 목수처럼 기술을 익히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일정 기간 동안 도제 생활을 거쳐야 하며, 장사 수단을 터득하려면 수많은 공부와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작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220




어니스트 헤밍웨이 - <노인과 바다><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헤밍웽이가 미국 산문체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작가.

대부분의 비평가가 동의하는 헤밍웨이 문체의 특징은 네 가지다. 짧은 문장, 종속절을 거의 보기 힘든 문장, 형용사나 부사 대신 명사와 동사에 의존하는 문장, (일부에서는 남용이라고 부를 만큼) '그리고(and)'라는 단어의 지나친 사용.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빠진게 있다. 헤밍웨이는 전통적인 구조적 요소들과 등장인물 개발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226


헤밍웨이는 문장을 짧게 썼다. 

가장 큰 이유는 표현의 정확함 때문이다.  228

문장을 짧게 썼던 또 다른 이유는 극적 효과를 위해서였다.  229


헤밍웨이 문체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빠른 문장의 속도다. 문장의 속도란 소리를 내어 읽든 속으로 읽든 문장이 읽히는 속도를 말한다. 

헤밍웨이가 문장의 속도를 끌어올리는 방법은 무엇인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더 쉽게 읽히기 위해 더 짧은 단어를 사용했다. 둘째, 쉼표를 생략했다.  230


헤밍웨이는 단순한 앵글로 색슨 계열의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물론 필요한 경우에는 전문 용어나 일반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단어도 거리낌 없이 사용하지만 대개는 구어(口語)중에서 가장 쉬운 단어를 선택한다.  233


단순한 어휘를 사용하면 가독성이 크게 높아진다.  234


세부묘사나 색깔을 사용할 때는 사람의 머리가 동시에 여러 가지에 집중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라. 한 장면을 생동감 넘치게 만들 때 집중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라. 한 장면을 생동감 넘치게 만들 때 세부묘사는 서너 가지로 제한하는 게 좋다. 나머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겨라.가끔은 주저하지 말고 특정 분야의 전문 용어를 사용하라.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단어라도 상관없다. 끝으로 색깔을 자유롭게 사용해보라. 한 가지 색깔을 반복하거나 서로 다른 두 가지 색깔을 대비시키면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  236


글을 쓰다 말고 한 발 물러서서 자신이 써놓은 글을 바라 본 적이 있는가? 얼마나 자주 그래봤는가? 실제로 물리적 거리를 두고 자신이 써놓은 글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묻고 있다.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왜 그래야 하죠? 그렇게 떨어져서 보면 글씨가 너무 작아서 제대로 읽을 수도 없지 않나요?"

페이지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헤밍웨이의 작업 비밀 중 하나였다. 그는 빼곡하게 글이 들어찬 문단을 싫어했다. 그래서 문단이 옆으로 퍼지면서 뚱뚱해진다. 싶으면 슬쩍 대화를 끼워 넣어 여백을 만들었다. 그가 특히 즐겨 쓴 방법은 두 인물이 짧은 대화를 주고받게 한 것이다.  240


의식적으로 페이지 모습을 다듬어라. 비교적 쉽게 활용할 수 있는 기법이다.  242


우선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야기에 어울릴 만한 인물을 몇 명 떠올린다. 그 다음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그들의 특징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보라. 목소리의 특징이라든가 눈썹의 모양이라든가 친구와 대화를 나눌 대 의자에 파묻혀 이쓴 독특한 자세 같은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제 그 인물이 이야기와 어떻게 섞일지, 이야기 속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묘사해보라. 인물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장면이라면 당신의 모델이 실제 생활에서는 그런 일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기억을 떠올려보라. 이런 과정을 통해 등장인물을 생생함과 생명력을 얻게 될 것이다. 오로지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캐릭터는 절대로 그런 생명력을 내뿜을 수 없다. 

오로지 상상으로만 만들어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쓰기 마라. 현실에서 알고 있는 사람들을 토대로 인물을 만들어라. 그렇게하면 현실과 멀리 떨어진 곳을 흐르고 있던 당신의 이야기가 마침내 살아 솟구쳐 오를 것이다. 

때로는 하나의 등장인물을 만드릭 위해 두 사람 이상을 모델로 삼을 수도 있다. 헤밍웨이가 즐겨 사용하 방법이기도 하다.  245-246


헤밍웨이의 소설은 도입부보다 결말이 훨씬 인상적이다.  

소설의 성공 여부는 무엇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가? 결말이다. 대개의 경우 결말이 소설의 성패를 좌우한다. 헤밍웨이 소설의 결말은 거의 항상 중요한 의미로 가득 차 있다.  247


마지막 장면을 상징적 의미로 채우고 최후의 사건에 대한 전조를 미리 깔아놓는다면 당신도 헤밍웨이와 같은 결말을 얻을 수 있다. 독자에게 미묘한 암시를 흘려 결말을 예고하라. 최후의 사건에 대해 주변 인물의 반응을 보여주고 중심 인물에게 깨달음을 주어 결말을 강조하라. 보편적이거나 영적인 표현을 통해 인생의 깊은 의미를 찾아내어 결론을 강화하라. 상징을 사용할 수도 있다. 상징을 사용할 때는 처음부터 심어두거나 <킬리만자로의 눈>의 하이애나처럼 결말에 이르기 전 여러 차례 언급하는 것이 좋다. 이런 장치를 통해 결말은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니고 독자에게는 더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될 것이다.  248-249




마거릿 미첼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줄거리는 비틀기와 반전의 연속이다. 비틀기와 반전은 독자가 이야기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만든다.

줄거리가 비틀린 첫 번째 이유는 미첼이 만든 등장인물들이 예측 불허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줄거리 비틀기는 제법 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극적 긴장감을 상승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256


그녀는 어떤 방법으로 독자를 매혹할 수 있었을까?

첫째, 심리적 거리를 조절하낟. 미첼은 심리적 거리를 좁히며 여주인공에게 가까이 다가갈 때 강렬한 느낌이 실린 언어를 사용한다. 이 언어가 독자의 가슴에 울려 퍼진다. 둘째, 자신의 작품이 독자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킬지 생각하면서 장면을 구성한다. 이는 심리적으로 독자의 감성에 호소한다.  259


천천히, 단계적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느낌표와 함께 등장인물에 다가감으로써 치밀한 계산 아래 심리적 거리를 조절한다. 서두르거나 갑작스럽지 않다.  262


독자를 매혹시키는 미첼의 또 다른 방법은 독자로 하여금 앞으로 벌어질 사건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263


미첼은 설득력 있는 소설의 배경을 만드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발을 다쳐 꼼짝 못하는 동안 미첼은 남북전쟁과 관련되 자료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덕분에 미첼은 마치 직접 그곳에서 전쟁의 황폐함을 겪는 사람처럼 생생하게 조지아 주를 묘사할 수 있었다. 미첼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화폭 위에 인간 드라마와 사랑, 결혼과 아이 양육 같은 문제를 펼쳐 보인다. 이는 전쟁 자체보다 더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우선 전쟁 장면을 묘사한 뒤 등장인물을 그 그림 속에 집어넣는다. 그런 다음 화가처럼 인물을 풍경의 전경(全景)에 놓고 묘사한다.  266


소설 작업의 많은 부분은 언어가 아니라 시각적인 특성에 의존한다. 글쓰기는 그림 그리는 작업과 비슷하다.  268




이언 플레밍 - <카지노로얄><죽느냐 사느냐>등 제임스본드 시리즈 12권

플레밍의 소설이 성공을 거둔 비결 가운데 서스펜스와 흥미진진한 소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흔히 무시되고 넘어가지만 그의 천재성이 발휘된 또 다른 분야가 있다. 바로 호화로운 삶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능력이다. 플레밍은 정확한 세부묘사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세부묘사를 통해 감각적 쾌락만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인간 군상과 세상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한마디로 그는 사치와 향락을 추구하는 작가였다.  292


기교를 적절히 활용하면 당신도 플레밍처럼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작가가 될 수 있다. 

 - 음식을 자세하게 묘사하라. 단, '고급' 음식이어야 한다.

 - 등장인물에게 많은 술을 마시게 하라. 단, '고급' 술이어야 한다.

 - 멋있는 옷에 대해 감각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하라.

 - 등장인물이 편안하게 쉬면서 마음것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줘라.

 - 간간이 성적인 것을 빗대어 묘사하거나 언급하라.

 - 특정 브랜드나 고급 차량, 이국적 장소를 언급하라.  295




J.D. 샐린저 - <호밀밭의 파수꾼><프래니와 주이>

샐린저는 글을 쓰는 분명한 '목적'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318


샐린저의 작품에서는 등장인물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샐린저처럼 캐릭터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필수적이다. 첫째, 샐린저의 등장인물들처럼 유별난 구석을 가진 인물이어야 하고 검증을 거친 인물이어야 한다. 둘째, 그들이 누구이고 소설 속에 있는 그들의 모습을 떠올려보기 위해 등장인물의 정체성과 성격,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자료 조사가 필요하다.  321-322


호젓함과 고립은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허락해준다.  327


놀라움은 신중하게 계획되고 전체 이야기와 적절하게 통합되었을 때 최고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놀라움을 통해 효과를 제대로 거둘 수 있느냐 없느냐는 '씨뿌리기(planting)'에 달려 있다. '씨뿌리기'는 나중에 벌어질 행동이나 사건으로 인한 결과를 이야기의 초반부에 의도적으로 흘려놓는 것을 가리킨다.  330


의미 있는 충격이야말로 좋은 문학작품을 읽는 기쁨 중 하나이다.  331




레이 브래드버리 - <무언가 위험한 것이 다가오고 있다><화씨451>

브래드버리는 시를 읽고 직접 써보는 것이 더 나은 문장가가 되는데 도움이 된다 믿는다.  334


"매일 시를 읽어라. 시는 속이 꽉 찬 은유이며 직유다. 은유는 일본의 종이꽃처럼 활짝 피어오르며 거대한 형태를 드러낸다."고 브래드 버리는 조언한다.  335


브래드버리도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초고를 쓸 때는 머리에서 나오는 것을 걸러내지 않고 최대한 빨리 쓰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겹쳐 쓰기를 한다. 나중에 수정할 때 자랄내고 편집할 요량으로 문장이나 대화마다 다양한 대안을 적어놓는 것이다.  337


소설 한 권 분량의 원고를 1년 동안 묵혀 두고 쳐다보지 않는 것이다. 1년 후 다시 꺼내서 읽어보면 마치 다른 사람이 쓴 글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이런 과정은 작품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이 방법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특히 여러 개의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는 작가에겐 가장 적합한 방법이다. 한 작품이 완성되면 다른 작품으로 바꾸고, 그 작품이 완성되면 책상에 넣어두었던 첫 번째 작품으로 돌아가 작업을 하라.

그는 수정을 할 때 한 페이지에서 적어도 한 단어는 바꾸겠다는 의도로 원고를 훑어본다. "내 최종 원고는 항상 수정 작업에서 트집 잡을 것들이 있는지 없는지 꼼꼼히 살펴본 결과물이다. 나는 한 페이지에서 적어도 한 단어는 바꾸려고 한다. 그렇게 원고를 훑어본 다음 모든 단어가 완벽하다고 생각되면 비로소 출판사에 보낸다."  339-340


단짝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첫 번째 이유는 두 인물을 비교하여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한 소년만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할 때보다 더 심보 깊은 인물 묘사가 가능해진다.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 이유와 정반대다. 매우 미세한 두 인물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등장인물의 미세한 심리적 차이를 드러낼 수 있다.  343




스티븐 킹 - <샤이닝><미저리><쿠조>

아주 간단히 말하면 서스펜스란 독자가 미래에 벌어질 어떤 사건을 기대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독자가 불안감을 갖게 하려고 애쓴다. 때로는 단순히 독자가 간절한 기대와 호기심을 갖고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학수고대하게끔 만드는 것을 서스펜스라 부르기도 한다. 의미상으로는 그렇겠지만, 스티븐 킹의 서스펜스는 약간 다르다. 킹의 서스펜스는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독자가 '걱정'하게 만드는 데서 형성된다. 말하자면 킹의 서스펜스는 누넹 잘 띄는 송곳 같다.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단순한 호기심도 아니고 제인 오스틴의 기대감과도 다르다. 키의 서스펜스에 빠져든 독자는 손톱을 물어뜯고 식은땀을 흘리며 가슴이 쿵쾅거릴 정도로 심한 근심에 휩싸인다.

이야기에서 서스펜스의 중요성은 백번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거의 모든 독자들이 서스펜스를 '즐기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410


서스펜스는 잠재적으로 위험에 처한 등장인물에게 독자의 고나심을 유도하는 기능도 한다.  413


스티븐 킹의 작푸을 분석해보면 서스펜스를 만들 때 항상 세 단계로 구성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에서 킹은 독자가 궁금해 하거나 염려하는 일이 조만간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언급이나 단서를 흘린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그 일'을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세 번째 단계에 이르면 킹은 이야기의 전개상 공포가 최고조에 달하는 지점에서 서스펜스를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킹의 소설에서 서스펜스는 주로 독자들을 걱정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기억해두기 바란다. 쉽게 말해 킹은 등장인물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지리라는 예감 때문에 독자가 불안해하길 원한다  414




글을 마치며

모방은 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기법이었다. 실제로 고대 로마나 그리스의 거의 모든 작가들은 글을 쓸 때 공공연히 이전의 작품을 모방했다. 로마의 가장 대표적인 수사학자였던 퀸틸리아누스는 진심으로 모방을 장려했다. 현대의 어느 역사가는 모방에 대한 퀸틸리아누스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이 가르침은 오늘날의 작가들이 뒤 기울여야 한다. 

'진정한 모방이란 단순한 베끼기가 아니다. 훌륭한 모방은 원작의 정신적 밑바탕에서부터 단어, 편집, 태도, 주제 선택에 이르기까지 앞선 세대의 작가들이 지닌 훌륭한 점을 통틀어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단 하나의 작품을 모델로 삼아 글자 하나, 표현 하나까지 똑같이 흉내 내는 것은 창조적 모방이 아니라 표절이며 맹종이다. 작가는 다른 방식으로 무언가 더 나은 것을 보여주거나 더 낫진 않더라도 나름 훌륭한 결과물을 보여주기 위해, 모델로 삼고 있는 작품의 정신을 내 것으로 만들어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야 한다.'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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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것도 모방이다.  13

이들이 위대해질 수 있었던 비결을 배우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독창적인 문체와 목소리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15




오노레 드 발자크처럼 써라 - <고리오 영감><외제니 그랑데>

글이 어떤 리듬을 타고 흘러갈 수 있도록 작가가 할 수 잇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당신의 글이 독자의 귀에 음악처럼 들릴 수 있을 때까지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  19


때로는 서툰 문체도 시간이 지나며넛 나아진다. 많이 쓸수록 잘 쓰게 되는 것은 명백한 진리다. 

뭐든지 블로그에 올려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런 방법으로도 글쓰기 실력은 분명히 향상된다.

우리가 발자크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가능한 한 많이 써라.  22


글에 힘을 싣고 싶다면 발자크처럼 감정을 표현하는 수식어구를 집어넣어라.  23


발자크의 첫 번째 조언은 수식어구는 반드시 감정을 묘사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감정의 격해질수록 수식어구의 효과도 더욱 강력해진다.  26


등장인물이 강렬한 감정에 휩싸일 때 수식어구는 생기를 불어넣고 잔잔하던 이야기에 확실한 재미를 준다. 

이야기에 속도가 붙고 등장인물이 분노, 교만, 자만, 갈망, 사랑, 시기, 증오와 그 밖의 중요하고 강렬한 감정에 휩싸이기 시작하는 순간이 오면 잠잠하던 이야기의 돛을 뒤집을 바람과 독자를 위한 수식어구를 아끼지 말고 사용해야 한다.

스스로 독창적인 수식어구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27


발자크는 자신을 외부세계와 격리시키고 창작에만 전념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블라인드를 친 방에서 살았던 것이고, 또 하나는 모두 잠든 한밤중에 작업을 한 것이다.  28


요컨대 작가로 성공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 바로 사람들로부터의 격리와 집중이다.  29


오늘날 대부분의 편집자들은 작가들에게 자세한 설명보다는 날카로운 직관과 통찰을 기대한다.  37




찰스 디킨스처럼 써라 - <황폐한 집><돔비와 아들><데이비드 코퍼필드><위대한 유산>

셰익스피어 이래 디킨스만큼 많은 캐릭터를 창조한 작가는 없다. 

셰익스피어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음악을 연상시키는 리드미컬한 언어로 독자를 사로잡았다.  40


디킨스는 인물을 다채롭게 묘사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람들을 관찰햇다.  41


식상한 것에 안주하지 마라. 상상력을 끝까지 밀고 나가라. 특히 유머를 잃지 말고 터무니없는 상상과 풍자를 활용하라. 자신이 만든 인물을 조롱하고 익살맞으며 아이러니한 별칭을 붙여라. 그들을 엉뚱한 방식으로 묘사하라. 그러면 독자도 당신의 장난에 맞장구를 치며 즐길 것이다.  42


갈등하는 캐릭터를 만드는 디킨스의 비결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풍자와 외양 묘사, 그 밖의 다른 점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인물을 그려낸다. 

인물 묘사는 짧을수록 좋다.  44


머릿속에 떠오르는 엉뚱한 단상들을 끝까지 발전시켜 보는 방법이있다. 등장인물을 과장해보고 풍자적인 말투를 사용해보라.  46


등장인물의 감정을 만들려면 작가 자신이 먼저 그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주저 말고 자신의 추억을 이용하라.  48


주류 소설에서 미스터리 기법을 활용하려면 작가는 이야기의 일부를 독자가 모르게 숨겨두어야 한다. 그런 다음 작가는 전지전능한 신이 되어 정보를 찔끔찔끔 흘려야 한다. 꼭 필요한 만큼만 조금씩.  50




허먼 멜빌처럼 써라 - <모비딕><타이피족><마디>

시처럼 아름다운 소설을 쓰고 싶다면 멜빌의 소설보다 훌륭한 스승은 없다.  53


멜빌과 같은 시적 문체를 쓰려면 우선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인가? 물론 아니다. 소리와 감각에 반응하는 어느 정도의 예술적 감성만 있으면 충분하다.  58


멜빌은 상징을 사용하는 법을 공부하기에 좋은 작가다.  61


작가라면 독창성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기초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6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 <백치><죄와벌><카라마조프가의형제들><지하로부터의수기>

구체적으로 그가 사용하는 방법은, 우선 장면을 설정하고 A라는 인물의 마음속으로 침투한 다음 B라는 인물의 마음속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72


전환은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라면 누구나 터득해야 하는 필수적 기교다.  76


'나는 내가 가장 먼저 도착하리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먼저 도착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도착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나는 파티가 열리는 방을 찾지도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장면 전환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어느새 앞 장의 마지막 장면과는 다른 장소에 와 있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가 화자의 의식을 통해 우리를 새로운 장소로 데려왔음에 주목하자. 이로써 독자는 물리적 묘사와 사실상 최소한으로 사용되고 그보다는 주인공의 감정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세련된 테크닉)  77


명심할 것. 장면 전환은 빨라야 한다. 그리고 단순히 장소를 이동하는 데 그치지 말고 정서적 요소를 보태가. 기왕이면 주인공이나 주요 등장인물의 정서적 요소를 보태라. 기왕이면 주인공이나 주요 등장인물의 정서적 요소가 좋다.  79


그는 1인칭 화자가 등장할 때 종종 화자 스스로 자신의 병약함이나 노쇠함, 나약함 등을 인정하게 한다. 

'나는 병자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는 남의 호감을 사지 못하는 인간이다. 이것은 아무래도 간장이 나쁘기 때문인 것 같다. 하기는 나 자신의 병에 관해선 아무것도 아는 게 없을 뿐 아니라 내 몸의 어디가 나쁜지 그것조차 확실히는 모르고 있다. 나는 의학이나 의사를 존경하고는 있지만 치료라는 걸 받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여태까지 받아본 적도 없다. 게다가 나는 극단적인 미신가이다. 여태까지 받아본 적도 없다. 게다가 나는 극단적인 미신가이다. 이를테면 의학 따위를 존경할 만큼 미신가란 말이다.(나는 미신가가 되지 않아도 될 만큼은 충분한 교육을 받았지만 그래도 역시 미신가이다.) 좋다. 오기로라도 의사의 치료 같은 건 받지 않을 작정이다.'

스스로 문제가 많은 인간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는 이 인물에 대해 거부감보다 호기심이 더 커진다.  80-81


깔끔하게 정돈도니 산문이 아니라 실제로 말을 하는 듯한 글을 통해 독자와 자연스럽게 친해진다. 한 평론가는 '화자의 태도는 독자와 직접 대화를 주고받는 느낌까지 주고, 화자가 사용하는 단어와 문법에서는 문어(文語)보다는 즉흥적인 구어(口語)가 더 쉽게 연상된다. 문장과 단락은 제대로 된 문법을 비켜가기 일쑤며 균형 감각도 찾아보기 힘들다.'  82


도스토예프스키는 등장인물을 묘사할 때 인물의 개성을 확실히 드러낸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는 보통 키에 호감이 가는 용모를 지닌 스물여덟 살의 청년이었지만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83


도스토예프스키는 좀 더 효과적이고 감동적인 인물 묘사를 위해 묘사에 감정을 집어넣었다. 

외모와 인물의 의미도 연결시킨다. "외모상의 자세한 특징 하나하나가 단지 그 인물의 외형 묘사를 위해서만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외모는 은연중에 드러나는 내적, 정신적 세계를 상징한다."  86


외모를 묘사할 때 감정과 상징적 의미를 첨가하는 그의 방법을 모방하라.  88




이디스 워튼 - <이선 프롬><순수의 시대><아이들>

크리스토퍼 릭스도 지적했지만 밥 딜런 콘서트에 갈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은 밥 딜런뿐이다. 그가 객석에 앉아 있다면 콘서트는 열릴 수 없을 테니까. 마찬가지로(그리고 슬프게도) 작가는 순수하게 독서를 즐길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비평가 해럴드 블룸이 한 말을 바꿔 말하자면, 모든 위대한 작가는 오직 자기 자신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작가는 무언가를 읽을 때 항상 작가로서 읽는다는 이야기다. 분석하고 조사하고 당신의 배를 아프게 만든 다른 작가의 비밀을 파헤치느라 순수한 독서의 기쁨을 누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작가가 짊어진 이러한 저주는 반대로 작가의 가장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다.  124




서머싯 몸 - <인간의 굴레><달과 6펜스><면도날>

등장인물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서로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을 균형 있게 등장시키는 것이다.  132


가장 소홀히 다뤄지고 있는 기교 중의 하나가 빠르고 느린 장의 교차 편집이다.

극적인 행동이 중심이 되는 장과 설명이 중심이 되는 장을 번갈아 배치할 때 독자의 즐거움은 두세 배 늘어난다.  134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 속으로 등장인물을 밀어 넣는 방법이 이야기를 진전시키는 한 방법이라면, 미래에 벌어질 사건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광고'하여 독자의 기대를 부풀리는 것은 이야기를 속도감 있게 진행시킬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다.  138


몸의 두 가지 기법은 독자의 관심을 붙잡아두면서 이야기를 전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첫 번째 기법, 등장인물을 난처한 상황에 몰아 넣고 어려운 결정을 요구하면서 등장인물에게 두 가지 선택 중 하나를 고르게 해야 한다. 그 결정은 등장인물의 인생을 바꾸어놓을 만큼 까다롭고 힘든 결정이어야 한다.  139


등장인물이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은 무의미하다. 그들의 어깨 위에 선택이라는 무거운 짐을 올려놓고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는 결정을 요구하라.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서 비롯된 새로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독자는 흥미롭게 지켜볼 것이다.  140


당연한 얘기지만 개인의 경험을 작품에 이용할 때 그 경험과 관련된 실존 인물이 글 속에 묘사된 인물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면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어올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그들의 눈을 속이려면 두 명의 실제 인물을 한 사람의 가상의 인물 속에 섞어놓거나 직업이나 장소를 바꿔줄 수도 있다.  145


언젠가 몸은 젊은 작가들에게 이런 충고를 했다. "작가가 되고 싶다면 인생의 모든 우여곡절을 겪어 봐야 한다. 우여곡절은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찾아오지 않는다. 밖으로 나가서 찾아라. 때로 정강이가 까질 수도 있지만, 밖으로 나가서 찾아라. 때로 정강이가 까질 수도 있지만, 그런 경험을 언젠가는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몸이 서른 편의 편의 희곡을 포함하여 엄청난 분량의 작품을 쏟아낼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수 많은 인생 경험과 매일매일의 규칙적인 글쓰기가 있었다.  146


자각로서 몸의 생활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르침은 두 가지다. 첫째, 규칙적으로 글을 써야 한다. 그것이 더 많은 글과 더 성공적인 작품을 쓸 수 있는 지름길이다. 둘째, 개인의 경험을 작품 속에 녹여야 한다. 그러려면 피상적인 인생을 뛰어넘어 다양한 인간관계를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한 경험을 해본 것만으로도 당신의 작품에 그 경험들이 반영될 수 있다.  147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 - <유인원 타잔><화성의 공주><금성의 해적>

버로스는 최대한의 재미를 주기 위해 이야기의 완급을 조절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완급 조절을 하려 버로스의 방법을 귀담아 둘 만하다.

첫째, 서머싯 몸을 이야기할 때 이미 살펴봤듯이 버로스도 빠르게 전개되는 장면이 끝난 후 잠시 한숨을 돌리며 극적인 휴식을 취했다. '극적인 휴식 혹은 극적 대비'는 효과적인 완급 조절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과의 차이점이라면 버로스는 속도를 줄이는 대신 지금까지 진행하던 줄거리에서 그에 못지않게 흥미진진한 새로운 줄거리로 이동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장면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다. 이 방법이 가장 효과를 볼 수 있는 시점은 장과 장이 바뀔 때다  155


두 번째 방법은 문학작품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방법으로 어떤 특정 부분에서 행동의 속도를 올렸다가 그 다음에 속도를 늦추고 숨을 고르는 방법이다.  156


갈등은 이야기를 진전시키는 엔진이다.  160




프란츠 카프카 - <심판><성><변신>

애초에 카프카가 <변신>을 쓴 의도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66


다른 작가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모방을 통해 다른 작가로부터 '한 가지 좋은 점'을 배울 수 있고, 나머지는 자신에게 맞게 변형시키고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의 수사학자들이 항상 최고를 모방해야 한다고 믿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모방은 위대한 작가보다 나아지고 마침내 그를 뛰어넘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져야 한다.  183




D.H. 로렌스 - <채털리 부인의 연인><사랑에 빠진 여인들><아들과 연인>

로렌스는 '올바른 형식이란 게 뭔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사람에 대해 직관적으로 파악한 것을 글로 옮길 줄 아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 이 두 가지 조건, 즉 정확한 형식과 날카로운 직관은 좋은 대화를 쓰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로렌스의 방법을 이해하면 초보 작가들조차도 생생하고 지적인 대화를 쓰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가장 먼저 익혀야 할 것은 물론 정확한 형식이다.  187


'그는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꽃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벌거벗은 눈동자 속에 그 남자가 담겨 있었다. 그 눈동자는 보는 각도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무지개 같았다. 마치 찢어진 필름처럼, 그러나 왠지 침울해 보이기도 했다. 물에 뜬 기름처럼.'

로렌스는 눈종자와 얼굴과 감정을 묘사하는 적절한 단어를 기가 막히게 찾아낼 줄 안다.  189


작가는 자신의 상징을 찾아내야 한다.  199


상징이란 사람이나 장소, 사건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 이상을 지니는 것을 말한다. 상징은 더 큰 개념과 가치를 가리킨다. 따라서 작품에 무게를 더하고 더 풍부하고 진지한 느낌을 준다. 독자는 종종 상징이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주제를 구현하는 도구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상징이 주제와 잘 섞인 작품은 독자를 더 만족시키며 더 문학적인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자연의 삶을 상징하는 사냥터 관리인의 숲과 무기력한 삶을 상징하는 대저택이 없었어도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그토록 강렬한 인상을 주는 소설이 되었을지 의문이다. 이 작품에서는 산업화하는 세계도 훌륭한 상징이다. 상징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을 때 로렌스는 독자에게 직접 메시지를 주입한다. 채털리 부인은 남편의 '추악하로 산업적인' 탄광 때문에 세상이 망가졌다고 비난한다. "사람들한테서 자연의 삶과 인간다움을 빼앗아간 게 누군데요? 사람들에게 이 산업사회의 공포를 가져다준 게 누구죠?"

주저 말고 가끔은 독자의 옆구리를 쿡 찔러라. 그렇게 해서라도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등장인물이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놓게 하라. 작품에 등장하는 상징을 그 열변 속에 포함시켜라.  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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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는 것쯤 아무 문제가 아니다

빌터너: 고장난 나침반을 가지고 도대체 어떻게 항해를 한단 말이야?

깁  스: 그래. 이 나침반은 북쪽을 가리키지 않아. 그런데 우리가 북쪽을 찾는 것도 아니잖아?   -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중  9



사람들은 '길 잃기'를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아직도 여행을 떠나기 전 '길 잃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어떻게 하면 이를 피할 수 있는지 정보를 교환한다. 사람들은 '길을 잃는 것'에 대해 긴장하고 두려워한다.

길을 잃었다는 상황 때문에 생긴 결과는 아니다. 길을 잃은 상황을 스스로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10


- 길을 잃는 것은 시간을 절약해준다


- 길을 잃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현대인에게 모험을 즐긴다는 것은 값비싼 취미다. 그리고 세계화로 인해 이제 세계 어느 나라로 여행을 가든 ... 자기 나라와 다를 것이 없다. 게다가 인터넷을 통해 낯선 여행지에서 필요한 모든 정보들을 미리 찾아보고 정리할 수 있다. 모험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피해 모험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오지로 떠나는 것이다.  12

다른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모험을 하고 싶은 순가, 지도나 여행 안내 책자, 그 밖에 어떤 사전 정보도 없이 길을 나서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과 돈을 절약하면서도 제대로 된 모험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13


- 길을 잃는 것은 휴가다

사람들이 휴가 주에도 왜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지에 대한 연구 결과는 분분하다. 1년 중 비록 며칠일지라도 시간이라는 코르셋을 벗어던지는 것은 힘들다. 갑자기 주어진 자유에 겁을 먹게 되는 걸까? 여행사의 문제일까?  14


- 길을 잃어야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지도를 들고 여행하는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을 지도를 보는 데 쏟는다. 하지만 지도 없이 여행을 떠난 사람은 주변 풍경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진귀한 동물도 더 자주 만날 것이고, 오래된 성곽의 흔적도, 수정처럼 맑은 못하는 주변 지역을 확대경으로 살피듯, 세밀화를 보듯 관찰하게 된다.  15


- 내비게이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길을 잃더라도 '패닉에 빠지지 않을까'이다.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미 그 해결책을 알고 있다

격투기를 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낙법, 바로 넘어지기 기술이다. 카약을 타는 사람은 거친 물살을 헤쳐 나가거나 피하는 방법 대신, 카약이 뒤집어졌을 때 몸의 균형을 바로 잡는 기술을 제일 먼저 연습한다. 같은 이유로 방향 감각을 잃었을 때는 당황하지 않고 방향 감각을 찾는 법을 연습하면 된다.  17-18


길을 잃어서 죽는 일은 없다.  18


본능을 믿고 몸을 맡기면,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감각적이어서, 위기의 상황에 맞닥뜨리면 숨겨두었던 구체적이고 세세한 방향 찾기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다. 이런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겸손해지고 현실적이며 독단적이지 않는 세계상을 열게 된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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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장소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모든 목소리와 기억과 영혼들은 그 자신이 머무를 육체를 동경하는 것처럼 모든 이야기는 그 자신이 머무를 장소를 동경한다고, 우리가 사로잡힌 어떤 여행지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 그 시절 우리의 정신 상태와 우리가 빠져 있던 고미노가 관심사에 대해 말해주는 우회로일 거라고, 그래서 세상천지 어디를 가더라도 결국은 장소가 아니라 그 자신이 세상에 유일한 여행지인 순간이 우리에겐 있을 거라고.

해바라기 한 송이를 들고 갈 여행지가 내겐 있는가? 나의 여행은 내 인생의 어떤 점을 닮았는가? 그리고 우리 인간들은 왜 모두 여행자라 불리는가? 인생은 왜 여행이라 불리는가? 인생은 왜 '관광'이라고 불리지 않고 '여행'이라 불리는가?

나의 여행과 나의 인생은, 나의 삶은 어떤 관계일까? 나는 여행을 일상의 탈출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니, 여행을 일상의 탈출로 보는 의견에 반대한다. 그보단 차라리 매 순간 여행자의 태도로 살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여행지에서 기꺼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삶 속에서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3


'나는 군가가 나 대신 여행을 하는 것을 상상도 못 한다. 그런데 삶 속에선 누군가 나 대신 뭐라도 해주길 꿈꾼다.

여행지에서 나는 누군가 나 대신 내 짐을 드는 것을 상상도 못 한다. 그런데 삶 속에선 누군가 나 대신 내 짐을 들어주길 원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길을 잃어도 당황하지 않는다. 그런데 삶 속에선 길을 잃으면 낙담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세상 만물을, 차창 밖을 지나가는 여인의 뒷모습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삶 속에선 많은 것에 애써 눈감으려 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곧 다시 만나요, 손을 흔들고 헤어질 때 슬픔을 느낀다. 그런데 삶 속에선 작별 인사를 나눌 때 내가 예의에 어긋나 보이지 않았나를 생각한다.

여행지에선 내가 누구인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삶 속에선 제발 나 좀 알아봐달라고 부질없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여행지에서 나는 그 고장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찾아낼 줄 안다. 그런데 삶 속에선 내 고장에서 가장 좋은 것을 눈앞에 두고도 몰라본다.

여행지에서 나는 나 자신이 이방인임을 당연시한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행여라도 이방인이 될까봐 두려워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낯선 사람에게 포기하지 않고 친절을 베푼다. 여행지에서 나는 거리의 악사들과 가장 자유로운 이들과 가장 슬퍼보이는 이들과 이제 막 도시에 도착한 여행객들과 같은 소망을 갖는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친절함을 기대하는 손길을 뿌리치고 타인과 소망을 나누지 않는다.

여행지에서 나는 내가 걷고 있는 길을 오래전 누군가 걸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앉았던 식당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커피를 마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나의 존재와 남의 존재가 연결됨을 느낀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연결이 아니라 나와 남의 분리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목표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더 알고  더 느끼는 데서 단순한 기쁨을 느낀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수많은 것들을 오로지 수단으로 삼는다. 

여행지에서 나는 확실한 길만 찾아가지는 않는다. 불확실함이 많은 데 불평하지 않는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확실한 것만 찾는다. 

여행지에서 나는 가장 용기 있는 자들과 가장 말이 잘 통하는 자들과 가장 정이 많은 자들과 가장 고통 받는 자들과 친구가 된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가장 득이 되는 자들과 친구가 된다.

여행지에서 나는 외로울 때 해나 달이나 한 점 불빛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외로울 까봐 자주 타협을 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쉼 없이 많은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곧잘 지루한 답변만 늘어놓는다. 

여행지에서 나는 얼마나 자주 설레고 얼마나 자주 탄성을 지르던가?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기쁜에도 슬픔에도 고통에도 얼마나 자주 무감각하던가?

여행지에서 나는 해의 뜨고 짐 같은 가장 단순한 풍경에서도 위대한 지구의 운동 법칙을 느낀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눈앞의  일에 급급하느라 어떤 법칙에도 진리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14-16


그러니 나는 이제 여행에서 삶을 배우고 싶다. 여행자의 태도로 살아보고 싶다.  17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두려움을 갖지 않고 이미 일어난 일을 절망이나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근본적인 불행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하나의 '조건'정도로만 받아들인다. 그들은 영감으로 가득 찬 신묘한 말을 하는 현인이 아니라 자신의 손과 발과 눈과 머리를,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18


여행이 끝이 있듯이 인생도 끝이 있다. 끝이 있기 때문에 한 번뿐인 이 인생 여행은 너무나 소중하다.  20


"쓸데 없는 짓이란 없다."  72


"자유인은 결코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지혜로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을 연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스피노자  73


질문하는 자리. 새로 알게 된 것들의 자리에서 나는 그만큼 예전의 나에게서 멀어지고 새러워진다. 나는 새로운 나로 대체된다.  74


어떤 일이 내게 기쁨이 될지 알 수 없으니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수밖에,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말이야.  76



임종진(전 한겨레신문 사진기자였다. 이후 국내외 곳곳을 오가며 사람을 만났고 그들을 찍었다. 2008년 한 구호기관의 자원활동가로 캄보디아에서 1년 반 정도를 머물렀다 돌아와 개인전 <캄보디아-흙, 물, 바람>(2010)을 열기도 했다. 책으로<천만 개의 사람꽅>, <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등이 있다.) - 사진을 찍거든 이미지를 찍지 마십시오. 이야기를 찍으십시오. 그 사람이 되어 봅시다. 우리는 누구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낮추어보는 것을 원치 않을 겁니다. 그러니 사진을 찍기 전에 그 사람이 되어봅시다.  112-113


우리가 만약 '무엇'에만 집착한다면 우리는 앙코르와트를 신기한 돌무더기로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앙코르와트에 와서 소원을 비는 캄보디아 사람들을 궁금해하며 본다며 앙코르와트의 의미는 달라질 것이다. 인생이 여행에게 만약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를 배울 수만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덜 과시적이고 덜 속물적이고 덜 불행할 것이다.  114



소모뚜(버마에서 온 이주노동자다. 1995년 여행 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그는 미등록 이주 노동자로 지내다가 지난 2004년 난민 신청을 했고, 패소와 항소를 거즙한 끝에 2010년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 인권은 나도 당신보다 못나지 않다. 그렇다고 잘 나지도 않았다. 다만 나도 당신과 같은 인간이다.  135

그는 말했다. 가장 곤궁한 자들의 외침에 귀를 막는다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또다른 의미로 친구 만들기에 열정을 쏟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혹 배신할까봐 마음을 놓을 수 없고,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더 넓은 친구와 동지관계의 네트워크 형성에 급급해한다. 저마다 휴대폰의 주소록에 갈수록 더 많은 네트워크를 구축해나가려 하기에, 새 휴대폰 모델이 나올 때마다 전보다 커진 주소록 공간을 갖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저마다 배신에 대비해 '양다리를 걸치는 수법'으로 리스크를 줄이려 하는데, 그것은 결국 리스크를 더욱 키우며 배신을 평범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 지그문트 바우만, <유동하는 공포>  139


우리가 접속하려고 애를 쓰면 그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와 왜 친구가 되려고 하는가? 우리는 엄밀히 말하면 불안 때문에 더 많은 친구를 가지려 한다. 바우만은 유동하는 공포, 현대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통제 불가능의 불안과 무력감 때문에 사람들이 더 많은 친구를 필요로 한다고 본다.  140


우리가 출발점으로 절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는 딱 한 경우뿐이다. 우리가 지금 있는 이 자리를 결코 떠나려 하지 않는 경우, 안주할 경우.

우리도 여행지에서 수많은 선택과 포기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해볼 수도 없고 다 가질 수도 없다. 여행지에서 선택을 한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 선택과 포기 '뒤'에, 선택과 포기를 '통해'서만 우리는 모두 출발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나는 그의 고유한 여행에서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누구도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다. 누구나 선택과 포기를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지나온 길이다. 모든 것을 다 갖지 못한다고 슬퍼하면 안 된다.  141


인도의 용감한 여성들은 대규모 벌목에 반대해 나무 위에 올라가 시위를 벌이는 칩코운동.  150



강판권(계명대 사학과 교수다. 오랫동안 나무 공부에 몰두해왔으며 나무로 역사를 해석하는 데 필요한 건축, 조경, 미술, 사진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로 <세상을 바꾼 나무> <미술관에 사는 나무들> <은행나무> <역사와 문화로 읽는 나무사전> <중국을 낳은 뽕나무> <어느 인문학자의 나무세기> <청대 강남의 농업경제> <공자가 사랑한 나무 장자가 사랑한 나무> <차 한잔에 담은 중국의 역사> <최치원, 젓나무로 다시 태어나다>가 있다.) - 10년 동안 도시락 두 개 싸가지고 하루 열두 시간씩 공부했습니다. 아침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요.  157

<대학>에는 격물치지란 말이 나옵니다. 삼라만상이 다 공부의 대상이란 말입니다. 위기지학과 위인지학의 뜻이 크게 와닿았습니다. 위기(爲己) 학문은 자기를 찾고 자기를 이루어가는 공부로 자기와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반면에, 위인(爲人) 공부는 남ㅇ게 보이기 위한 공부로 공부를 출세수단으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느티나무 뿌리가 땅 위로 노출되어 있는 것을 보셨어요? 그건 그 느티나무가 비탈에 서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런데 그 노출된 뿌리가 뽑혀나가지 않게 보호하려고 느티나무가 그 위에 잔뿌리를 얹어서 동여매고 있는 것도 보셨는지요? 곧 봄이 와서 나무에 새순이 올러오려고 하면 그때 모과나무 한번 만져보세요. 몸통부터 촉촉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나무는 치열합니다. 나는 나무처럼 나 자신부터 온전해지고 치열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59-160

또 하나 나무에게 배운것은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철저한 이기주의자에게 이기와 이타는 아예 분리가 안 됩니다. 어떤 경우든 자신을 완성해야 남에게 어떤 역할인가를 할 수 있습니다. 나뭇가지가 우리보고 와서 쉬라고 그늘을 만들었을까요? 우리보고 와서 감탄하라고 단풍이 들까요? 자기를 위해서 충분히 애써야 합니다. 그것이 나무의 이기주의입니다. 그렇게 치열할 때만 존재는 다른 존재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섣불리 내가 널 위해서 그랬다. 이렇게 말할 것도 없고 치열하게 살지도 않으면서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품어선 안 됩니다.  162

우리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 무지무지 끝까지 애써보지도 않고 대체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164



김효중(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에서 한국의 진딧물을 분류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우리가 도전이란 걸 할 때 뭘 이미 많이 알아서 도전하는 게 아니고 에러를 경험하며 에러를 줄여가면서 도전한다는 거죠.'  179

우리는 여행지에서 가끔 이런 절박함을 갖는다. 내가 언제 또 이 도시를 찾을 것인가? 그 여행은 단 한번 주어진 기회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내가 언제 또 이 모습으로 이 삶을 살아볼 것인가? 그 질문 속에서 우리 인생은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다.  192

여행중에 우린 수많은 여행자들에게 질문을 하곤 한다. "당신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요?"  193



송경동(2001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꿀잠> <사소한 물음에 답함>이 있다.) - 나는 내가 감정이 약하다고 느낄 때마다 내가 감상적이기만 한 것은 아닌지, 내 감정의 결과에 대한 성찰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우리의 감정 이입에는 뭔가 기형적인 요소가 있다. 우리는 너무나 속속들이 알아서 오히려 감정을 배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감정 이입은 '...척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이 상처 입는 게 싫어서, 좋은 사람이란 말을 듣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서, 다춤과 분쟁이 싫어서, 어떤 정체성을 원해서, 안주하고 싶어서, 행동보다는 말을 선호해서,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감정 이입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것은 내용 없는 감정 이입이고 감정 없는 감정 이입이고 감정이 있다고 해도 오히려 자기 자신의 감정에 이입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감정 이입은 동정심과 달라야 하고 둘 사이의 평등한 감정이어야 한다.  203

'감정 이입에 대해서 물었죠. 기억들, 기억들이 다 남아 있어요.'  213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은 내 가슴을 치는 것, 나를 울게 하는 것, 내 가슴에 너무나 깊숙이 남아 있는 것, 낭게 시와 삶은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215

돌아가면 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가? 버려야 할 것들과 이루고 싶은 것을 나누고 일치시키는 기준점은 사랑이었다. 사랑 때문에 우리는 이룰 수 없어도 버리지 않고, 버리라 하는 것을 이루고 싶어한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가 싸우는 것이 무슨 소용이랴.  219



송규봉(미국 펜실베니아대 환경학 석사과정에서 GIS(지리정보시스템)를 전공했다. 필라델피아 소재 GIS 연구소에서 CML 연구원으로, 하버드대에서 GIS 컨설턴트로, 와튼경영대학 부설 Wharton GIS Lab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현재 연세대에서 GIS 분석에 기초한 건축기획과 디자인정보분석을 강의하고 있으며 (주)GIS 유나이티드의 대표를 맡아 GIS 분석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비즈니스 GIS> <미국 인터넷산업의 지도> <지도, 세상을 읽는 생각의 프레임> 등이 있다.) - '지도는 혼자 힘으로 결과를 낼 수 없는 것을 위해 주변의 도움을 얻어 만들어서 공동으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저에게 대동여지도는 그 정확도 때문이 아니라 그 마음 때문에 더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235

'세상이 어떤 보통 명사도 사람과 결부되면 고유명사가 됩니다.'  236

우리는 여행지에거 자기만의 지도를 그리고 그것을 소중한 자랑거리로 여기지만 정작 삶에선 내가 그리는 지도란 없다는 듯이 군다

저마다의 지도가 인간성의 지도, 내면의 지도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지도는 내가 살아온 날에 살아갈 날을 덧붙이면서, 살아갈 날이 지나온 날의 의미를 끝없이 수정하면서 완성되어갈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선의 끝부분은 아직 미지의 고장에 있다.  241



안재원(서울대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대학원에서 서양고전학을 전공했다. 이후 독일 괴팅겐대로 유학, 서양고전문헌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서로 <수사학> 등이 있다. 현재 서울대 인문학 연구소 HK연구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라틴어의 '카르페 디엠', 그날 그날 즐겁게 살라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카르페 디엠의 철학적 의미는 매 순간 매 순간이 축적되어 역사가 된단 것입니다. 그 순간들이 모여 나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을 크게 보면 하나의 순간에 모든 것을 걸 수도 있더는 말입니다.  263


Amor vincet omnia 사랑이 모든 것을 극복하리라.  264



여행을 기억함이란 무엇일까? 그건 사진을 들여다보기, 지나간 일정을 회고하기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건 그 여행이 이미 내 영혼의 일부가 되었단 뜻이다.  271


여행자가 마주하는 필연성은 무엇인가? 세상 모든 곳을 돌아다녀도, 그곳이 어디라도, 사람들은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미소를 짓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새로운 날을 맞이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 아닐까? 그 와중에 나는 세상이 아무리 참혹하고 불친절해도 눈물 흘리는 자가 있고 올바른 행동을 하려는 자가 있음에 번번이 놀란ㄷ. 아무리 어려운 곳에서도 이렇게 외치는 자들이 있음에 놀란다. "우리는 이렇게 살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이쯤에 머물며 포기하려고 여기까지 살아온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친구여!"

인간 영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고 그 아름다움을 본 자들은 지혜로워진다. 그렇지만 반대로 여행자에서 돌아와서는 인간 영혼을 까맣게 잊고 있음에 또 번번이 놀란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행자의 태도로 사는 동안 우리는 마치 여행지에서와 같은 필연성을 마주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렇게 사는 동안 우리 또한 다른 여행자의 눈에 들어온 하나의 풍경, 하나의 낯선 여행자가 아닐까?  280-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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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독자 생각하기

  11장 재료 개발을 위한 도구 .. 210

  12장 독자와의 관계 .. 232

  13장 이야기 들려주기 .. 259

  14장 목소리 .. 281

  15장 말에 관한 몇 가지 생각 .. 293

4부 의무적 글쓰기

  16장 그것을 써야 하나요? .. 302

  17장 글로 옮기기 .. 312

5부 궤도 유지

  18장 작가의 길을 따라가기 .. 360



정보 조각이나 관찰한 것, 상상한 것, 아이디어 등등 내가 노트에 모은 재료라면 무엇이든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즐긴다. 마치 땅에 뿌린 씨를 생각하는 농부의 심정과 같다. 하지만 모든 씨가 싹이 트는 것은 아니므로 많은 씨를 뿌릴 필요가 있다. 싹이 튼다고 모두가 완전한 열매로 잘 자라는 것 또한 아니다. 아주 작은 식물도 자라기 위해서는 햇빛과 물을 필요로 하듯이. 이 훈련 역시 가볍게 출발할 때라도 능력 개발을 위해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법이다.  211


글쓰기는 한꺼번에 모든 것을 해치우는 작업이 아니라 단계저긍로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 직업 작가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만족할 만한 글을 얻기 전에 많은 초고를 쓰는 것이 보통이다.  212


자료를 모은 다음 해야 할 단계는 수집한 자료 전체에서 필요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며-사용하고 싶은 특정 자료를 결정하는 것- 그밖에 생각나는 것이 또 없는지 살피는 것이다. 바로 이때가 선택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기능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단계에서 계속 내용을 발전시키면서 자신의 아이디어나 정보, 이미지 같은 자료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213


다음 훈련은 여러분이 모은 재료와 구조적인 관계를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라 할 수 있다. 전체를 연습해보고 자신에게 잘 들어맞는 것이 있으면 계속 활용하라.

1. 선택

수집한 자료를 판단을 배제하고 읽을 때는 다음 두 가지를 한다. 첫째, 단어나 구절, 아이디어, 이미지, 정보 조각 등 어떤 것이든 눈에 띄는 것에 표시를 한다. 뭔가 힘이 담긴 것으로 보이거나 자신을 향해 "나야 나! 나를 써먹어!" 하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찾아라. 둘째, 자신이 쓴것을 읽을 때 마음에 떠오르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이미지를 주목하고 그것을 적는다.(원한다면 노트의 여백이나 다음 페이지에 적어도 좋다.) 이어 2~3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이 연습을 하면서 무엇을 주목했는가? 이 재료를 발전시키기 위해 어떤 아이디어가 있는가?

2. 질문 

수집한 재료에 호기심을 갖고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주제에 관해 모은 것은 모두 읽어본다. 선택 연습을 했다면 추가한 새 자료도 읽어본다. 이번에는 재료를 호기심과 연관시켜본다. 이때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질문의 목록을 작성한다. 이 질문은 재료 자체와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할머니의 눈은 무슨 색깔이었지?' '왜 앨버트 삼ㅌ촌은 고양이를 호수에 던졌을까?'하는 것들이다. 또 이런 질문은 재료를 발전시키고 싶은 방법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호수를 더 자세하게 묘사할 필요가 있을까?' 라든가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할까?' 하는 것들이다. 어쨌든 계속 펜을 놀린다. 질문을 제기하기 위해 자신의 호기심과 작가로서의 직관을 믿어라.

질문 목록을 작성했다면 잠시 긴장을 풀고 휴식한 다음 다시 목록으로 눈을 돌려 재미잇어 보이거나 도움이 될 것 같은 질문에 표시를 한다. 그런 다음 그중 한두 개를 골라 프리라이팅 기술을 활요해 대답을 시도한다.

3. 초점찾기

이 훈련을 하다 보면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쓰고 있는지 깨닫기도 한다. 작가들이 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의 초점을 발견한다는 말이다. 때로 초점을 깨닫는 순간은 한 가지 주제를 너무 광범위하게 다룰 때 찾아오기도 한다. 이때 여러분은 그 주제의 특정 부분을 중점적으로 탐험하고 싶어질 것이다. 때로는 자신이 쓴 글이 원하는 주제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초점을 깨닫기도 한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어린 시절의 승마 경험에 대해 쓰고 있는데 실제로 쓰고자 했던 것은 승마를 가르쳐준 여자에 관한 글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말이다. 

자신의 재료에 대해 '틀'을 짜는 것도 초점을 발견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를테면 어떤 그림에 대한 틀이 떠올랐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그틀 속에 들어갈 재료를 선택해야 한다. 그 틀에 어울리지 않는 재료는 버려야 한다. 초점을 발견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글을 쓰면서 자신을 향해 초점을 말하는 것이 있다. 가령 '내가 여기서 실제로 쓰고자 하는 것은...'이라는 말을 마친 다음. '이 글은 내가 실제로 초점을 맞추려고 하는 내용인가? 이 주제는 내 준비 상태에 비춰볼 때 지나치게 폭이 넓거나 좁은 것은 아닌가?'하고 자신에게 물어본다. 어떤 주제라도 다양한 재료가 수없이 나올 수 있고 각각의 초점도 다를 수 있다.

4. 그림 그리기 

수집한 재료에 상상력을 불러올 수도 있다. 작업할 일정한 재료를 선택한 다음 자신이 모아둔 서로 다른 재료에 대해 마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마음속에서 그것들을 가공할 수 있는지 확인한다. 그 재료가 사람이든 장소든 어떤 사건이든 아마 상상력은 그것에 대해 좀더 자세한 그림을 그려줄 수 있을 것이다. 또 실험 삼아 순서를 바꿔가며 주변의 이미지들을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옮길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씨앗'이 되는 이미지나 정보 조각을 하나 골라, 마음속에서 거기에 더 많은 그림을 입히고 때로는 완전한 이야기로 꾸미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전체적인 글을 그려보기 위해 마음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능력을 활용할 수도 있다. 어쩌면 작가로서의 직관이 현재 글쓰기의 시작이나 끝에 와 있다고 말해주는 핵심 이미지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또 자신의 글이 취하고 싶은 일정한 현태를 마음속에서 보게 될 것이다. 시각적인 상상이 뛰어나다면 글이 완성되었을 때 취하고 싶은 형태를 미리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그림 훈련을 마친 뒤에는 발견한 것을 기록한다.

5. 장르에 관한 고려

재료를 골라 이것을 장르라고 하는 다양한 현태의 글에 활용할 수 있다. 장르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픽션과 논픽션으로 대별된다. 모든 장르에는 하위 장르가 있다. 예를 들면 애정물과 추리물은 픽션의 하위 장르다. 재료를 어떤 장르에 사용할지 아는 것은 자신의 글에 초점을 맞추고 그 글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따라서 자신에게 물어보라. '내가 모은 이 재료로 무엇을 쓰고 싶은가? 시(詩)인가, 기사(記事)인가 아니면 소설인가?' 

필요하다면 재료에 대고 직접 물어볼 수도 있다. 노트에 프리라이팅을 활용해 이 물음에 대답해보라. '이 재료는 어떤 글이 되고 싶어할까?' 이에 대한 정답은 따로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닌 작가로서의 직관을 믿어야 한다. 아니면 재료 스스로 '나는 ...이 되고 싶다'는 식으로 물음에 답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재료가 여러분에게 낯선 장르의 형태를 취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는 해당 장르에 대해 더 학습할 필요가 있다. 장르에 대한 책을 읽어보라. 특정 장르에 대한 방법을 가르쳐주는 책을 찾거나 좋은 교사를 찾으면 된다. 그리고 언제나 여러분은 작가로서 수업 중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재료가 단편소설이 되고 싶어하는데 단편소설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면 망설이지 말고 단편소설을 써보라. 이것이 배우는 최선의 방법이다. 좋은 소설을 쓰려고 고생하는 대신, 소설 장르에 대해 또 작가로서의 자신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나쁜 소설을 쓰는 기회를 스스로 허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6. 학습

아마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게(또는 재료에 대고) '이 글을 쓰기 위해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하고 묻고 싶을지 모른다. 다른 질문으로는 '이 글은 내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는가?' 하는 물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 다음 다시 몇 분간 시간을 들여 프리라이팅으로 답변을 해본다. 그러면 아마 외부 모으기의 형태로 정보를 추가로 모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자신이 쓴 것에 대해 상상력을 동원해 더 많은 그림을 그리게 할 수도 있다. 어쩌면 대화를 쓰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앉아서 초고를 쓸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7. 계획

꼐획을 짜느냐 안 짜느냐가 문제다. 일부 작가는 글쓰기의 계획을 세우는 것을 싫어한다. 이들은 인물이나 배경에 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 자리에 앉아서 쓰기 시작한다. 또 다른 작가는 자신이 쓰는 모든 글마다 계획을 세우기 때문에 글의 방향이 어디로 향할지 정확히 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방법을 절충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를테면 전체적인 계획을 세운 다음 각각의 장은 나름대로의 방향을 향하도록 하거나, 글의 방향이 어디로 향할지에 대해 아무런 생각 없이 시작했다가 일단 형태가 눈에 들어오면 틀을 짜는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글에 어떤 방법이 더 적합한지 알아보기 위해 계획 있는 글쓰기 종류에 따라서는 글의 '지도 그리기' 기술이 유용할 때가 많다. 또 '단계2 :과제의 계획을 짜라'를 참고할 수도 있다.

8. 시간의 투자

글쓰기에 관한 아이디어를 얻는 것은 매우 쉽지만-작가의 능력을 활용하는 훈련을 하다 보면 어디서나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그렇다고 이 모든 아이디어를 글로 쓸 준비가 된 것은 아니다. 

일정한 재료를 발전시키는 데 평생의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재료를 모으고 상호작용하고 선택하는 과정은 수없이 반복할 수 있고 또 이따금 반복해야 하는 과정이다. 그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의 재료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는 일이야말로 글쓰기 과정의 중심을 차지하며, 사실상 글쓰기 작업의 핵심에 대해당하기 때문이다.

나는 영감이란 그것을 위한 준비가 갖추어졌을 때 찾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준비를 위한 방법의 하나가 자신의 재료를 철저히 아는 것이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위한 준비를 하고 생각날 때 적어야 한다. 항상 조그만 수첩을 휴대하고 방마다 펜과 메모지를 비치해두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

9. 재료의 체계화

체계화를 위한 이 일이 글쓰기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말을 종이로 옮기는 것이 아니므로-사실 이 작업은 작가가 하는 일 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10. 연결 

한 편의 글을 발전시키는 과정에는 세 가지 주된 행동이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모은 자료를 한곳으로 취합하는 과정(이후에도 계속 모으기를 할 가능성이 높다). 자료를 선택하는 과정, 성택한 자료를 서로 연결하는 과정이 그것이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서로 조화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할 필요가 있다.

어떤 점에서 글쓰기는 조각 깁기(sewing patchwork)와 같다. 다양한 곳에서 재료 조각을 모으고 이것들을 전체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11. 제로 드래프트 써보기

모으기를 중지하고 초안을 쓸 준비가 되는 시점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문제에 관한 한 자신이 지닌 작가의 직관을 믿어라.

제로 드래프트 쓰기는 수집한 재료에서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선택한 모든 것을 단일한 글로 옮기는 과정이다. 

제로 드래프트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예를 들면 수집한 모든 재료를 인쇄한 다음 가위로 간직하고 싶은 부분을 오려내어 종이 여백에 테이프로 붙인다.(노트를 사용하는 경우 해당 부분을 찢어내고 싶지 않다면 복사를 하면 된다.) 오리고 붙이는 과정을 컴퓨터의 새문서에서 할 수도 있으며 가위질과 컴퓨터를 함께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런 다음 선택한 모든 재료를 검토화하면서 제로 드래프트 재료를 모아 자리에 앉아 프리라이팅으로 초안을 쓴다. 이때 글의 구성이나 어휘 선택에 고심할 필요는 없다. 오려내고 붙인 다음 원한다면 나머지 부분을 프리라이팅 해도 된다.

제로 드래프트를 시작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지만 목표는 단 한 가지, 한 공간에서 사용하고 싶은 모든 재료를 모아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214-224



연습 : 자기 자신의 제로 드래프트를 만들어라

위에서 대강 윤곽이 잡힌 초안(밑그림) 기술을 활용해서(또는 여러분 자신이 선택해서) 모으기와 발전 훈련으로 수집한 모든 자료를 자세히 읽어본 다음 제로 드래프트로 사용한다. 어휘가 아니라 내용에 집중하라.

이것을 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눈에 띄는가? 잘 진행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적어본다. 이 기술을 다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225



연습 : 초안을 시도하라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만큼 초안에서 잠시 물러나 있다가 다시 보면 신성한 시각으로 초안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볼 때 그 글이 최종적인 초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제로 드래프트는 자신이 어떤 자료를 모았고 그 자료에 무엇이 빠졌는지 확인하는데 도움을 주는 단순한 도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어휘를 선택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다. 대신 편안한 마음으로 단순하게 자료를 활용할 수 있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어휘를 통해서 어휘가 제공하는 이미지와 정보, 아이디어를 살표본다. 나처럼 자료 조각을 블록쌓기로 생각하고 선택과 정리를 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의 초안을 읽을 때(이것을 한 번 이상 할 수 있다) 거기 그대로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주목한다. 이 말은 '그래, 호수에 대한 이 묘사가 필요해'라든가 '맞아! 이것이 요점이야'하는 식으로 작가의 직과닝 말하도록 한다. 그리고 무엇이 빠져쓴지, 어떤 정보를 더 모아야 할지 주목하라. 또는 상상하거나 생각을 모아보라. 제로 드래프트처럼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다른 훈련을 한두 번 시도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생각을 마치면 잠시 시간을 들여 이 재료로 다음에 무엇을 할 필요가 있는지 적어본다. 그런 다음 휴식을 취하거나 산택을 나가 잠재의식이 이 초안에 대한 활동을 할 시간을 준다. 다음에 무엇을 할지에 대해 잠재의식에서 새로운 재료와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을 알면 여러분은 놀랄 것이다. 잊지 않고 그것을 적는다.  226


진정한 선택은 글의 통일성을 유지하게 하는 핵심 부분이다. 

글쓰기의 실질적인 핵심은 글을 쓰는 과정의 단계마다 선택을 하는 일이다.  228


두 가지 핵심 질문에 답해보라. 

'이 글은 실제로 무엇에 관한 것인가?'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이 물음이 중요한 이유는 어떤 장르의 글이든(아마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글은 제외도리지도 모른다) 통일성과 일관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재료는 여러분이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서로 조화되어야 한다.  229


'한 편의 글을 창작하는 데 좌절하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은 배운다고 볼 수 없다.' 글쓰기의 상당 부분은 문제 해결의 과정이다. 그리고 이 해결 방법을 익히는 유일한 길은 훈련뿐이다. 무넺 해결을 시도해보고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다른 방법으로 시도해보라. 자주 휴식을 취함으로써 잠재 읫기이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부여하라.  231


'언제쯤이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글을 읽을 것으로 예상하는가?' '그때의 기분은 어떨 것 같은가?'

우리가 독자에 대해 갖는 느낌은 복합적일 수 있다. 독자는 우리에게 한편으로는 위협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공포감을 주기도 한다. 우리는 독자의 경멸이나 판단, 비평을 두려워하맂 모른다. 우리의 글에 대한 것뿐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인갅거인 평가까지도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는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이야깃거리가 있다.  233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공적인 글쓰기란 우리가 다른 사람과 공유하려고 하는 글쓰기이며, 우리 자신의 눈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읽히게 될 글을 쓰는 것을 말한다.  235


독자가 작가로서의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는 두 가지를 생각 할 수 있다. 하나는 우리가 글을 쓸 때 독자(청중)가 우리에게 주는 효과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독자에게 글로 주고 싶어하는 효과가 있다.  236


독자에 대한 권리 되찾기

다음에 예시한 재료가 이 훈련에 대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공할 것이며 동시에 자신의 글을 발전시키는 데 다른 사람을 활용하는 법도 보여줄 것이다.

1. 시간을 들여라

작가-독자의 관계는 다른 관계와 다를 것이 없으며 여기서 자신이 힘이 없다고 느끼면 제대로 소통할 수가 없다. 

훌륭한 작가가 되려면 소유권 의식이 필요하다. 훌륭한 작가는 독자와의 관계에서 권리를 느낀다. 훌륭한 작가는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그 말을 전달해서 독자의 마음에 그 말이 살아 움직이게 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런 자신감을 얻으려면 많은 학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여러분도 시간을 투자해서 필요로 하는 자신감을 확보해야 한다.

2. 작가의 능력을 개발하라

상상력, 호기심, 관찰력이 강화될수록 쓸 거리도 더 많아지고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할 말도 더 많아질 것이다. 

3. 자신의 글을 공유하라

4. 독자와 자연스러운 관꼐를 확립하라

독자를 위하는 것보다 독자를 향한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때로 자기 자신을 재교육할 필요가 있다.  

'독자는 당신의 머릿속을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독자는 세상 밖 어딘가에 있는 별개의 사람이다. 작가-독자의 자연스러운 관계를 되살리기 위해 여러분이 먼저 해야 할 일은 독자가 자기 자신과 분리된 존재라는 느낌을 발전시키는 일이다. 한편으로 자기 자신을 독자로 생각할 필요도 있다. 여러분은 채을 읽을 때 작가가 여러분에게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할 가능성이 많다. 작가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고서도 쉽게 전달되기를 바랄 것이다. 바로 이런 태도가 정확하게 독자가 여러분의 글을 읽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독자는 평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힘들이지 않고도 여러분의 말을 이해하기를 바란다. 

자신이 할 말을 소통시키는 것, 다른 사람에게 명쾌하게 전달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쉬운 일은 아니다. 자신은 분명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하는데도 독자는 혼란을 느끼거나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할 수 있다. 독자를 분명하게 이해시키는 법을 배우는 것이 작가가되는 또는 훌륭한 작가가 되는 중요한 비결이며 글쓰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5. 독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독자를 향해 써라

실제로 독자를 향해 말을 한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 사적인 글쓰기와 초점화된 프리라이팅이 '종이에 대고 생각하기'와 같은 것이라면 이 새로운 훈련은 '종이에 대고 말하기'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이 그 사람이라고 상상하라. 자신이 쓴 것을 들고 마치 전혀 보지 못한 것처럼 천천히 읽어본다.

자신의 글을 읽을 때 나올 수 있는 생각은 '이 글은 잘 쓴 거야? 못 쓴 거야?'가 아니라 '내가 하는 말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까? 내 생각을 분명히 밝혔나?'하는 것이다.

6. 글쓰기 실력을 키우는 데 실제 독자를 활용하라

독자에게 구체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 좋다. 질문의 예를 들어보면

 - 이 글에게 당신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인가?(단어나 이미지 느낌, 아이디어가 이에 해당될 수 있다.)

 - 내가 하는 말에서 무엇을 들었는가?(여러분이 전달하려고 하는 것에서 독자는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말하게 한다.)

 - 아직 질문할 것이 남았는가?

 - 더 필요한 것(또는 필요 없는 것)이 있는가?

 - 혼란스러운 곳이 있는가?

 - 이 글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독자가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들을 때 자신이 의도한 것을 설명하거나 자신이 쓴 말을 옹호하지 않는 것이 필수적이다.

설명이나 옹호를 하면 독자는 입을 다물 것이다.

독자는 단순하게 '이것이 내가 받은 느낌이다. 이 대목이 나는 혼란스럽다;고 말할 뿐이다.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그저 들어보는 것이다.

7. 자신의 목표를 생각하라

좋은 글은 독자의 내면에서 살아 움직인다.

종이를 보면서 다으므이 질문에 대해 성찰할 시간을 갖는다. 여러분은 이 글로 독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싶은가? 이 글을 읽은 독자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가?(독자를 웃기고 싶은가? 울리고 싶은가? 아니면 공포를 떨게 하고 싶은가?) 이런 효과를 자아내기 위해 자신의 글에 어떤 것을 포함시킬 필요가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글을 쓸 때 목표를 염두에 둔다.  241-258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제공하는 법

1. 다른 살마과 공유하고 싶은 글이 있을 때 이 글을 선물로 생각하라. 다른 사람에게 제공할 것이 있다고 할 때 정확하게 그것은 무엇인가? 박진감 넘치는 줄거리 인가? 일정한 주제에 대한 통찰인가? 특정 시간과 공간을 환기시키는 것인가? 자신의 소설이나 시, 수필이 다른 사람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2. 이 선물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나 생일선물을 줄 때 받는 사람의 기호를 생각하듯이-93세가 된 메리 할머니가 정말 비디오게임을 좋아할까?-이 특별한 글을 좋아할 사람을 생각할 수 있다.

3. 이런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어린이를 위한 글을 쓰고 있다면 아마 동네 초등학교를 찾아가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글을 읽어줄 수 있을 것이다. 추리소설을 쓰고 있다면 추리소설 애독자 중에서 기꺼이 자신의 글을 읽어줄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정한 주제에 대한 글을 쓴다면 해당 주제에 대한 온라인 동호회를 찾아 회원 중에 자신의 글을 기꺼이 읽어줄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4. 이들 독자가 그 많은 질문에 대답할 시간이 없다면 단순하게 한 가지만 물어보라. "이 글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는가?"  256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어하는 자연스러운 욕구를 해소하면서 글쓰기 연습을 하게 된다.  259


종이 위에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자신의 독자와 더불어 편안한 상태에서 훈련을 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독자를 위해서보다는 독자를 향해서 글쓰기 연습을 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훈련은 자신의 재료를 정리하는 데도 도움을 줌으로써 독자는 이야기를 이해하게 되고 여러분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독자에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  260


제시하는 여섯 가지 접근 방법으로 이야기를 찾아내 들려주는 실험을 해보라. 

1. 구전되는 이야기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찾고 샅샅이 안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반복해서 읽는다. 이제 마음속으로 이야기의 내용을 상상하면서 일어난 사건을 그려보라. 준비가 되었으면 열심히 귀 기울여 듣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전한다고 상상하면서 자리에 앉아 자신의 말로 이야기를 종이에 옮긴다. 어휘가 아니라 이야기의 내용에 집중하라.(어디까지나 이것은 훈련이다.)

2. 구술역사 자료

구술역사는 실제로 역사 현장에 있었거나 그 사실을 증언하는 사람들이 다시 자세하게 들려주는 것이다.

구술역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여러분 자신의 말로 다시 들려줘보라.

이야기 중에 몇 가지 재료를 선택해 그것을 새로이 조합해 독립된 이야기로 꾸밀 수 있을 것이다.

3.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

작가 중에는 이야기를 위한 아이디어나 재료를 뉴스보도에서 얻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눈길을 끄는 이야기나 에피소드를 찾아보라.

4. 잡담과 흘려들은 이야기

모은 재료를 점검하고 마음에 끌리는 것이 있으면 자세한 내용을 기록한다. 그리고 이 내용들을 한데 모아서 하나의 이야기로 꾸미고 가상의 청취자를 향해 노트에 옮기는 것이다.

5. 장소와 사물

사람만 이야기를 지닌 것은 아니다. 자연현상에 관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6. 내면의 이야기

'나는 ~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로 시작되는 문장을 가능한 한 많이 써본다.

원한다면 내부의 이야기 재료를 모으기 위해 다음의 훈련을 활용할 수 있다. 편안한 마음으로 이에 대한 답을 적어보라.

 - 여러분이 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을 때 누가 머리에 떠오르는가? 실제 사람인가? 좋아하는 사람인가? 미워하는 사람인가? 상상 속의 사람인가? 누구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 어떤 장소가 생각나는가? 실제의 장소인가? 상상 속의 장소인가? 시골인가? 풍경인가? 집인가? 거리인가? 밤인가?

 - 어떤 물건이 떠오르는가? 좋아하는 장난감인가? 오랫동안 함께 지낸 물건인가? 자연 속의 사물인가? 가상의 대상인가?

 - 어떤 장면, 어떤 순간이 머리에 떠오르는가?

 -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는가?

 - 들어본 이야기 중에 애착이 가는 것이 있는가?  261-266


 

연습 : 이야기를 듣기 위해 계속 귀기울이기

직업적인 작가는 일종의 이야기 본능을 발달시켰기 때문에 이야기를 위한 아이디어가 바닥나는 법이 없다. 이들은 자신에 관한 것만을 쓰는 것이 아니다. 사실 평범한 한 개인의 삶이 재미있으면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직업적인 작가는 주변 세상에 긑없이 관심을 돌린다. 이들은 마주치는 사물에 주목하고 누군가가 하는 말에 늘 귀를 기울인다. 이드르이 이야기 본능은 '흠, 여기 이야깃거리가 있군' 하고 중얼거린다.

구전된 이야기든 마주치는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든 이야깃거리를 들으려고 바깥세상을 향해 귀를 활짝 열수록 여러분의 이야기 본능은 힘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노트에 이야깃거리나 아이디어를 적는 습관을 들인다면 여러분도 머지않아 쓰고 싶은 이야기에 활용할 수 있는 다채로운 재료창고를 갖게 될 것이다.  267



연습 : 다듬는 과정

이야기를 위한 아이디어 몇 가지를 브레인스토밍한다. 또는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노트를 훑어본다. 그 가운데 하나를 고른다. 이야기를 위한 재료를 모으기 시작한다. 내부 모으기로 시작하라. 여기에는 자신이 기억하거나 만들어낸 모든 세부 내용이 포함된다. 그런 다음(원한다면 나중에) 이 목록을 두 차례 정밀하게 점검한다. 첫 번째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사용하고 싶은 항목에 표시를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적는다. 두 번째는 목록을 쭉 훑어보면서 호기심이 이는 항목이 있는지 확인하고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적는다. 그런 다음 생각해보라. 여러분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에 의 의문에 대한 답을 원하는가?(선택한 이야기가 아주 단순하다면 의문은 없을 수도 있다.) 외부 모으기를 할 필요가 있다면 - 관찰이나 조사 - 그렇게 하라.

재료 검토를 위해 상상력과 잠재의식을 활용하라. 이야기를 쓰기 전에 잠시 재료를 맛있게 끓이고 싶을지도 모른다.

이제 다음의 물음들을 생각해본다.

누가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자신일 수도 잇고 다른 사람일 수도 있으며 자신이 창작한 인물일 수도 있다.

누구에게 들려주는가? 실제 인물(친구 또는 자녀 중에서)을 고를 수도 있고 안전한 가상의 독자를 상상하면서 인물을 창작해낼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이 인물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한다.

왜 들려주는가? 특정 인물을 상대로 이야기를 할 때 이야기꾼의 목표는 무엇인가? 청취자의 마음속에 어떤 현상을 불러일으키고 싶은가?

이제 상상으로 이야기꾼이 되어본다. 자신이 선택한 잴로 돌아가 들려줄 이야기로 유용해 보이는 것을 무엇이든 선택하라.(이 훈련을 하면서 '사실'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사실을 바꿔가며 자신이 원하는대로 꾸며도 상관없다) 쓸모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새 재료로 추가한다. 이 재료를 활용할 때 원하는 순서를 작은 목록으로 만들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그런 다음 자신이 선택한 청취자와 함께 있다고 상상하며 계속 이야기꾼의 역할을 유지한다. 될 수 있는 대로 계속 펜을 놀리면서 종이에 대고 청취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똑같은 이야기라도 다른 사람을 이야기꾼으로 등장시킬 수도 있고 청취자를 바꿀 수도 있다. 또 이 두가지를 동시에 하면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할 수 있다. 이렇게 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주목하라. 다양한 관점을 시도하면서 이야기를 즐기고 싶다면 제임스 모쳇의 탁월한 평론집 <관점(Point of View:An Anthology of Short Stories)>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 책은 이미 출판된 단편소설을 조명하며 관점에 여러 변화를 주는 기법을 분석하고 있다.  269-270


작가 제인 욜런은 "무엇보다 독자의 관심을 끝까지 잡아끄는 것은 해피엔딩에 대한 기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야기 자체의 해결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여행의 과정이지 목적지가 아니다."  271



연습 : 이야기의 이동

자신이 읽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을 빌려오든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낼 인물이든 한 인물을 골라서 이 사람을 위해 간단한 이야기 상활을 써보낟. 상황을 묘사하는 데 두게 개의 문장만 사용하라. 이제 이 인물에게 일어나는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이 인물이 일으키는 사건을 적어보라. 이때도 두 세 개의 문장만을 사용한다. 이어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본다. 필요하다면 이야기가 멈출 때까지 이 문답을 계속한다.  273



연습 : 계획을 짜고 싶다면

이야기를 정의하자면 일련의 사건이 연결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건을 조심스럽게 계획하고 싶다면 여기 한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1. 이야기에 관한 자신의 아이디어 중 하나를 고른다. 될 수 있는 대로 계속 펜을 놀리면서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사건의 목록을 작성한다. 각각의 사건을 현재시제를 사용해 짤막한 문장으로 써본다. 아직 순서를 정할 필요는 없다. 단어 선택에 고심할 필요도 없다. 사건 하나하나를 새 줄에 쓰되 사건 사이는 한 줄씩 건너뛴다. 이야기에 들어가야 할 사건에 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고쳐 쓴다. 

2. 이제 사건의 목록을 쭉 읽어보고 포함하고 싶은 것을 선택한다. 사건이 너무 많은가? 아니면 너무 적은가?

3. 이제 이 사건들을 이해하기 쉽도록 순서를 정리해서 이야기를 쓰기 위한 계획을 짠다.  275



연습 : 이야기의 전개

다음으로 이야기 계획에 대한 대안을 하나 소개한다. 

1. 한 명 이상의 인물을 선택해서 상황 속에 투입시킨다.

2. 다음에 일어날 일은 무엇인가? 인물이 결정을 하거나 행동을 하든가 아니면 외부의 사건이나 강제적인 방해 세력이 등장한다.

3. 그 결과 인물은 새로운 상황을 맞는다. 그 인물은 그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4.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5. 이런 움직임이 상황에서 사건으로 또는 새로운 상황에 대한 반으응로 계속 유지된다. 줄거리가 궤도를 찾았는가? 줄거리가 끝나는 지점은 어디인가?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쓸 때 무엇이 눈에 띄는가?  276


'다음에 이어질 내용을 이앻하려면 독자에게 먼저 무엇을 제공할 필요가 있을까? 두 번째는 무엇을 제공해야 할까? 세번째는?  278


독자에게 정보를 명확하게 전달하고 자신의 의도대로 독자의 마음이 움직이도록 재료의 순서를 정하는 일에 익숙해지려면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는 이런 기술을 어떻게 발휘하는지 연구해보라.  279


'말하고자 하는 것'과 말은 실제로 글 쓰기에서 음과 양의 양면성을 지닌다. 글쓰기란 내용과 말 사이에서 추는 춤과 같다. 하고 싶은 말이 이끌때도 있고 말이 이끌 때도 있다. 진정한 글쓰기의 기교는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배울 때는 두 가지 분리해서 연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295


사실 창조적 기능은 적용 번위가 굉장히 넓다. 창조적 기능은 여러분이 어떤 주제에 관심을 갖든 그에 관한 아이디어를 기꺼이 제공할 것이다.  306



글로 옮기기 - 글쓰기 과정에 관한 단계적 안내

새로 소개하는 7단계의 접근 방법은 습관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인내가 필요하다.

이 접근 방법을 시도할 때는 하나하나 노트에 적거나 메모하며 천천히 해야 한다. 시간을 두고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확인하라. 

그리고 어떤 부분은 당장 잘될 수도 있지만 또 어떤 부분은 습관을 들이는 데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이 책이 제공하는 것은 도구이지 규칙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라.  314


단계1 : 자신의 과제를 파악하라

의무적 글쓰기는 다른 누군가가 요구한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작하기 전에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완벽하게 파악해야 한다.  

여러분은 무엇에 대해 쓸 것인지, 주제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주제를 선택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는 논스톱 쓰기를 활용해서 마음속에 떠오르는 주제에 관한 모든 아이디어 목록을 작성하라. 검열하지 마라. 적어도 10분간은 펜을 계속 놀린다. 그런 다음 다시 목록을 읽어보고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주제에 표시를 한다.(생각난 주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이 연습을 반복한다.)

가능한 주제를 결정할 때 자신이 고른 것이 쓸 수 있는 것인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첫째, 자신이 흥미를 느낄 수 잇는 주제라야 한다. 흥미가 없다면 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에너지를 쏟는 것이 어려워진다. 

  둘째, 주제의 범위가 넓지 않아야 적당한 지면에 지적 능력을 집중할 수가 있다. 경험이 없는 사람은 주제의 범위를 너무 넓게 잡을 때가 있다. 때로는 15쪽도 채우려면 너무 많아 보일 때가 있지만 글쓰기 과정이 수월해진다면 이 정도 지면에 할 말을 찾아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셋째, 주어진 기간에 주제에 대한 재료를 충분히 찾아야 한다. 

  넷째,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러분의 주제가 과제를 충족시켜야 한다.  316-318


단계2 : 과제의 계획을 짜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해야 할 모든 것을 목록으로 작성한다. 모든 행위나 단계는 이 과제에 부합되어야 한다. 가능하면 특수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며 항목별 순수는 걱정할 것이 없다. 생각이 막히면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 과제의 원활한 진행을 상상해본다. 또는 목록에 적힌 각 항목을 보면서 자신에게 '이 부분을 좀더 세분화할 수 있을까?'하고 물어본다.


글쓰기 과제의 시작을 미루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필요호 하는 모든 자료를 읽고 조사를 마칠 때까지는 아무것도 쓸 수 없다는 신화에 사로잡혀 있다. 이들은 글쓰기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고 있다. 말하자면 글쓰기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찾게 해주고, 하고 싶은 말을 발견하는데 도움을 주는 매우 고귀한 도구의 하나라는 사실이다.  318-321


단계3 : 내용을 발전시켜라

내부모으기 -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초점화된 프리라이팅 - 초점화된 프리라이팅을 활용해서(주제에 관심을 집중하는 동안 계속 펜을 놀리면서) 주제와 관련 있는 것은 머릿속에서 모두 끄집어내어 적어본다. 이 주제와 관련해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관해 어떤 정보를 갖고 있는가? 조사를 하면서 찾아낸 것에 어떤 기대를 하는가? 주제에 관해 어떤 의문이 드는가? 이 주제를 쓰고 싶게 하는 경험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목록작성 - 단어 한 마디든 완전한 생각이든 각 항목은 계속 새 줄에 써야 한다.

지도 그리기 - 한가운데 작은 원을 그리고 원 안에 주제를 적어본다. 그리고 중심 원에서 한 줄 씩 가지를 쳐서 모으기를 할 때마다 각 줄에 새 항목을 기입한다. 

이미 적은 것과 관련돼 보이는 것이 새로 생각나면 기존의 줄에 새로 가지를 쳐서 거기에 새로운 생각을 적는다.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직관에 따라 가지를 친다.

지도 그리기가 특별히 도움이 되는 까닭은 이 방법으로 전체 과제의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주제를 너무 넓게 잡아서 초점을 좀더 좁힐 필요는 없는지 확인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또 서로 다른 부분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 확인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상호작용 - 잠시 다음 질문에 잡을 적어본다. '이 과제의 다음 단계를 위해 무엇을 할 필요가 있는가?'

외부모으기 - 외부모으기를 할 때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수집한 자료가 자신의 일부가 되도록 시간과 정력을 쏟아야 한다는 점이다. 의무적 글쓰기으 제1규칙이 '자신의 과제를 안다'는 것이라면 이어 제2규칙은 '자신의 재료를 안다'는 것이 될 것이다. 내 경험으로 보면 사람들이 흔히 학술논문을 작성하거나 직장에서 복잡한 글쓰기 과제가 주어질 때 걱정하는 것은 글을 조합할 능력이 없어서라기보다 재료 관리에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료의 소화 - 재료를 소화하는 데 도움을 받으려면 기사나 책 한 장(章)을 읽고난 다음 이에 대해 프리라이팅을 하라. 프리라이팅은 별개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야 한다. 첫째 부분에서는 그 부분에서 얻은 중요한 정보 또는 작가가 하는 말을 적는다. 명확하게 이해한 것을 적고 이해하지 못한 것도 적는다. 질문도 적는다. 둘째 부분에서는 작가가 한 말에 대한 자신의 지적 반응을 적는다. 이를테면 여러분은 작가의 아이디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말에 동의하는가? 동의하지 않는가?(자신의 감정적인 반응도 같이 적을 수 있다. 이런 반응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찾는 데 도우밍 된다.) 읽을 필요가 있는 장이나 부분에서 이 연습을 반복한다.

이 프리라이팅 연습의 두 부분을 따로따로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돌아보기 - 돌아볼 때는 평범한 언어를 사용하라. 

잠재의식을 활용하라 - 시간을 들여 잠재의식이 자신의 재료에 대한 활동을 하도록 계획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상호작용 - 지금까지 자신이 쓴 것을 전부 읽어보고 다음 두 가지를 하라.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인든 표시를 한다. 그리고 머릿속에 아이디어나 질문이 새로 떠오르면 무엇이든 적는다. 이것을 할 때 자신의 글을 고치거나 편집하지 않는 것이 필수적이다. 

쭉 읽어보고 자신이 쓴 것과 교감을 하면서 상호작용을 한 뒤 '여기서 내가 실제로 하려고 하는 말은..'이라는 글을 쓰고 이 문장을 완성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온다면 궤도를 벗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321-335


단계4 : 제로 드래프트를 써라

제로 드래프트는 초고를 작성하기 전에 쓰는 초안이다.

제로 드래프트의 주목적은 이미 확보한 자료는 무엇이고 더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확인하는 데 도움을 받는 것이다.

제로 드래프트의 구성을 마치면 프린트를 해서 읽어본다. 이 글이 이해가 되는가? 포함할 것과 뺄 것을 결정한 선택이 마음에 드는가? 그리고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적어보라. '내가 하려고 하는 말은 무엇인가?' 과제의 다음 단계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이 물음에 대해 잠재의식이 활동하게 하려면 잠시 쉴 필요가 있다. 산책을 나가거나 휴식을 취하라.  336-339


단계5 : 청중과 목표를 고려하라

 - 여러분은 누구를 상대로 글을 쓰는가? 될 수 있는 한 자세하게 자신의 독자에 대해 진술해보라.

 - 독자는 여러분의 주제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 독자는 여러분의 주제에 대해 무엇을 알기 원하는가? 또 무엇을 알 필요가 있는가?

 - 독자의 의문은 무엇일 것 같은가?

 -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글에 포함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독자에게 제공할 필요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  340-343


단계6 : 전달하라

단계7 : 명확하게 하라

글쓰기 과정 자체와 마찬가지로 교정은 한꺼번에 하는 것보다 단계적으로 할 때 훨씬 더 능률이 오르는 법이다. 

교정할 때 큰 도움이 되는 방법 한 가지는 자신의 글과 얼마 동안 거리를 둔 다음 다시 들여다보는 것이다.

자신의 글로 돌아올 때는 새로운 눈으로 검토할 수 있는 상상의 안경을 써라.

자신을 향해 '이 글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있는가? 혹시 빠트린 것은 없는가?'라고 물어보라.  350-351



글쓰기 과정에 대한 이 유형이 복잡해서 약간 겁이 날 수도 있겠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 방법을 택하기 바란다. 

특정 글쓰기에 모든 단계를 적용할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 접근 방법을 고정된 규칙이 아니라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 도구 모음으로 보기 바란다.  356



작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이 책에서 내가 분명히 밝혔기를 바라지만, 배우는 사림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두 가지, 글을 쓰려는 욕구와 기꺼이 자신의 기술을 익히고 개발하는 과정에 시간과 정력을 쏟으려는 자세만 있으면 된다.  362


현실적인 문제는 간단하다.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소비하고 싶은가에 달린 것이다. 자신이 글쓰기 연습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면 그대로 시행하라.  364


훈련을 하다 보면 뒤에 가서 달라질 수도 있다. 현실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물음은 '글쓰기가 여러분의 인생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기 바라는가?' 일 것이다.

시작은 소박하게 하라. 일주일에 한 두 번, 한 번에 10분 정도 글쓰기 연습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글쓰기를 소화하는 데 전적으로 매달려야 한다.  367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여행 그 자체다.  368


완전한 글을 쓰는 데 집착하지 마라. 자신이 쓴 글이 만족스럽지 못해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 이때는 자신에게 '여기서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 여기서 배운 것을 다른 글쓰기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라. '지금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주기적으로 던지면서 작가로서의 직관을 연마해야 한다. 글쓰기는 복합적인 기술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배울 것이 너무도 많다. 서두르지 말고 자신의 속도를 유지하라.  369


습작에 매진한다는 것은 훈련과 학습에 자아를 아낌없이 던지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사랑이다.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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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마을. 여행이라는 말은 어딘가로 이동하며 산다는 의미이다. 반면 마을은 한곳에 정착해서 산다는 뜻을 내포한다. 그런데 나는 항상 영어의 Leave(떠나다) 와 Live(살다)가 같은 소리로 들리곤 했다. 그건 마치 '떠나야 산다!'는 말처럼 들렸다.  14


안도현의 <몽유도원도>

두꺼비가 바위틈에 숨어 혼자 책읽는 소리

복사꽃들이 가지에 입술 대고 젖을 빠는 소리

버드나무 잎사귀는 물을 밟을까 잠방잠방 떠가고

골짜기는 물에 연둣빛 묻을까봐 허리를 좁히네

눈썹 언저리가 돌처럼 무거운 사람들아

이 세상 밖에서 아프다, 아프다 하지 마라

신은 높아지려 하지 않아도 위로 솟아오르고

물은 깊어지려 하지 않아도 아래로 흘러내리네.  18


여행은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는 마법을 갖고 있다. 여행하는 이라면 누구나 낯선 이에게도 기꺼이 자신의 마음을 여는 법이다.  21


구상의 <꽃자리>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고은의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26-27


김춘수의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그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30


마음의 꽃술까지 와 닿지 않을 때가 있다. 언어가 같아도, 서로 들으려고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기 마련이다. 서로가 가진 생각의 잣대, 문법의 틀 때문이리라. 그것만 잊어버리면 콩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서 듣게 된다.  38


지구촌 어디를 가나 지명의 유례를 알면, 여러 겹으로 덧발라진 현재의 풍경 밑바탕에 있는 맨 얼굴을 어렴풋이 더듬어 볼 수 있다. 


빠이. 이고의 이름의 유래를 놓고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중에서도 세 가지가 사람들 사이에 자주 회자되고 있다. 하나,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이 지방에 번성했던 '야생 수컷 코끼리'를 뜻하는 '창 쁠라이(Chang Plai)'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이 점점 사투리와 섞이고 사람드르이 입을 거치면서 '빠이'로 굳어졌다. 둘,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곳에 정착해 이 지역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샨 족이 이곳을 '빠이'라 이름 붙엿다. 샨 족은 버마의 동부 고원 지대인 샨주 지역과 타이를 북부 산간 일대를 거주지로 삼고 있는 버마 족과 더불어 버마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셋, 샨 족이 이 지역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을 '빠이'라 불렀다. 이 말의 뜻은 '똑바로 앞만 보며 곧장 가지 않는 곳.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여기저기로 가는 곳'이다. 마을 이름이 강 이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물 따라 마을이 형성되었으니 그럴 듯하다.  50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전부 모아서 무게를 달면 얼마나 될까?

가끔 배낭을 꾸리며 이런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우리 중에서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라는 말에 켕기지 않을 이가 있을까? 집안의 살림살이를 둘러보면 그동안 온통 더하기와 곱하기만 한 듯해 부끄러워진다 아둔한 인생, 때론 빼기와 나누기가 행복에 다다르는 가장 빠른 지름길일 수도 있는데...  102


그 일을 그만두면 알게 되지. 아, 그 일이 내게 도움이 되었구나.  146


'어떻게 할까'가 아니야, '무엇을 할까'지.

나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여행 에세이가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나는 소중하니까. 한때 세인들의 입에 즐겨 오르내리던 카피다. 카피라이터로 세상을 바라보던 시절. 나는 세상 모든 광고가, 아니 세상 모든 것이 결국 '나를 사랑하는 법'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류가 지금처럼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을 사랑했던 적이 또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우리는 온통 '자기애(自己愛)'에 빠져 있다. 일찍이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외쳤던 어느 사상가의 선언처럼 이념과 철학 같은 거대담론이 소멸된 지금,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나(我)'에게로 향하고 잇고, 그 속도 또한 나날이 빨라지고 잇다.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 오늘날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는 메가 히트 상품들 역시 결국 '개인주의'를 완벽하게 이루어 주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기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개인주의와 디지털 시대의 궁합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어 보인다.  150


이상한 노릇이다. 모두들 '나'를 중시하고, '나의 행복'을 부르짖건만 정작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않으니 말이다.  151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친다는 한 독일 여행자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문득 그의 말이 생각난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세상이 아름답다고, 그런데 세상이 아름답게 다가올수록 사는게 겁이 난다는 그의 고백이 머리를 스친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 짐이 되지는 않는지, 이 아름다운 세상을 덟히는 게 바로 나라는 존재가 아닐지 고민하는 그의 모습은 실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내 가슴을 청렁이게 한 그의 말은 따로 있었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일상이라는 현실로 돌아가는 순간이 가장 두렵다고 고백한 그의 마지막 말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이상하지, 여행을 마치고 일상에 복귀해 다시 만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무서운지. 가족, 친구, 동료... 지금까지 잘 아는 사람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없이 두려운 거야. 오로지 자기만 아는 사람들, 자기가 최고라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 인새으이 주인공은 바로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데 정작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그들이 무섭게 다가오는 거지. 난 여행을 할 때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외로움'이 보여. 그래서 너무 힘들어.'  152-153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여행을 통해 나는 내가 아닌 타인과의 '관계'를 제대로 볼수 있었다.  153


'난 이제 삶이 두렵지 않아. 지난 10년간 많은 걸 배웠거든. 광고 일을 계속 했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세상에 얼마나 많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지 몰랐을 거야. 알았더라도 그저 머리로만 알고 가슴 깊이 느끼진 못했을 거야. 물론 경제적으로 어려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하지만 그러면서 난 인생을 배워나갔어. 언제든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 이게 내 재산 목록 1호야.'

'왜, 라는 질문만 하니까 그러는 거야. 질문만 하지 말고 뭐든지 시도하면 되는데. 인생은 '어떻게 할까?' 가 아니라 '무엇을 할까?'에 달려 있어. 무엇을 할지를 결정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면 돼. 광고도 마찬가지야. 처음에는 콘셉트를 잡는 것도 어렵고 완성된 광고를 만들기까지 시간이 많이 결리지. 그런데 돌아보면 그 콘셉트가 광고의 전부나 다름없어. How가 아니라 What이 크리에이티브의 모든 것이지.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야.'  156


'터닝 포인트라. 걷다가 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 그곳이 터닝 포인트가 아닐까. 그런 곳이 나타나면 멈춰야 해. 그리고 생각해봐. 무엇이 너를 멈추게 했는지. 물론 그곳에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동시에 있을 거야.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어. 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더 많은 곳에 머무르면 돼. 그게 네 삶을 행복하게 만들 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면 돼. 걷다 보면 네 삶에 영감을 주는 멈춤이 있을 거야.'  157


'우리가 처음 빠이에 올 때 스스로에게 다짐한 게 있어. 빠이에서 너무 많은 비즈니스를 벌이지 말자. 너무 많은 일들을 하다 보면 삶이 피곤해진다. 인생이 심각해진다!'  183



빠이의 예술가들은 서로 잘난 척, 아는 척, 있는 척하지 않고 어울려 사는 법을 알고 있다.  195


천지를 창조했다는 신(神)도 하루쯤 쉬었는데, 사람이 뭐 그리 위대한 일을 한다고!  232


'사실 진정한 개발이란 개발하지 않는 건데.'  239


'삶의 가장 큰 적이 뭔줄 알아? 두려움이야. 모두들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알면서도 자신감이 없어.'  244


'지구의 시민'


상처는 아물고 나면 더 이상 아프지 않다. 그러나 흉터는 들끓는 운명에 데인 흔적처럼 오래도록 남는다.  258


행복이라는 녀석과 만나려면 우선 머릿속에서 요란스레 굴러다니는 많은 생각들을 정지시켜야 한다. 우리는 항상 그 생각들 때문에 제풀에 먼저 지쳐서 넘어진다. 마법은 언제나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 생각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318


'미치지 않으면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不狂不及)'  349


여행은, 계속된다.

내가 정말 그곳에 있었던 걸까?

내가 정말 그들을 만났던 걸까?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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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좋아하는 일을 맘껏 하라고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게다가 좋아하는 일 역시 나름대로의 고통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세상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길을 잃은 사람들이 거리를 점령한 채 방향 없이 걸었다.

나이든 사람들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공허한 조언들을 허공에 대고 읊었다.

도시에는 간혹 우울함이 몰려왔다.

마치 표지판들이 모둥 증발해버린 고속도로처럼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얼마만큼 왔는지 전혀 모르는 채

모두들 그저 달리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을 옥죄는 고통의 실체를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곳은 마치 유토피아의 정반대에 위치한 세상 같았다.

주말에 티브이를 시청할 때만 제외하곤 모두들 웃지 않았다.




욕망(欲望) -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


그녀가 말했었다. "너는 사람을 외롭게 만들어."

잠자코 있었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외로움은 기대의 불균형에서 오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즐거웠는데 사실 딱 그만큼 힘들어하고 있었다. 원인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나는 원하는 일을 하고 살았지만 그동안 내가 욕망하는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냉정하게 보면 그 욕망은 나의 역량을 어느 정도 넘어선 곳에 위치해 있었다. 기대치를 줄이고 실력을 늘리면 고통을 줄일 수 있었다. 물론 기대는 쉽사리 접을 수 없고, 실력은 늘리기가 더더욱 힘들다.

내 욕망은 스스로를 외롭게 했다. 그런 나에게 라스베이거스는 이런 위로를 던져줄 것 같았다. "솔직한 게 제일 좋아. 그걸 남드링 싫어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환상은 대개 진부하지만 세상은 보다 진부하다. 그러니까 쿨하지 않게 보일까봐 걱정하면서 살 필요는 없다.



욕망의 크기는 문제가 아니다. 그냥 각자의 욕망이 다르기에 종종 서로 충돌하게 되는 것이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사라진 시대에 누군가가 의지할 것은 결국 자신의 욕망밖에 없었다. 



일탈(逸脫) - 정하여진 영역, 또는 본디의 목적이나 길, 사상, 규범, 조직 따위로부터 빠져 벗어남.

             사회적인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일탈은 자기애에서 비롯된다. 일상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거나 혹은 목표를 향해가는 길을 잃고 잠시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면 일탈의 감행을 고려해볼 만하다. 자기애가 결핍된 돌출행동은 단지 현재의 부정일 뿐이다. 일탈은 나름대로 미래지향적 자의식 발현이다.  



사고도 기왕이면 제대로 쳐야 한다.



짧은 여행이 해결해주는 건 많지 않다. 추억이 남는다고는 하지만 일상의 힘이 너무 강하기에 곧 묻혀버린다. 여행 중의 단상들은 마치 지난밤 꾸었던 두 번째 꿈처럼 희미한 기억으로 흩뿌려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짧았던 일탈이 좋았던 것은 여전히 나를 떨리게 만드는 것들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점이다.



위안(慰安) - 위로하여 마음을 편하게 함, 또는 그렇게 하여 주는 대상




벌어지는 사건의 종유만 다를 뿐 나를 비롯한 또래들의 삶은 비슷한 편이었다. 

기쁜 순간이 잠시 있고, 슬픔 순간은 가끔 있고, 우울한 순간은 자주 있고, 힘든 순간은.. 순간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다른 단어가 필요할 것 같은, 가령 '날'이나 '시기'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은 그런 시간들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삼십 대 중반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위로라는 게 그리 필요가 없었는데 위로를 받는다고 상황이 괜찮아질 리가 전혀 없다는 게 한 가지 이유였고, 사실 위로를 한답시고 말을 꺼내는 사람이 실은 더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던 경우가 많았던 게 또 다른 이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서로를 위로했다.



애석하게도 인생의 진부한 교훈들은 대개 맞아떨어졌다.



나는 '도시'라는 단어가 좋았다...

내게 모든 도시는 마치 여자 같았다. 귀여운 여자, 얼굴만 예쁜 여자,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 존경스러운 여자, 세심한 여자, 섹시한 여자, 터프한 여자, 여자를 좋아할 것 같은 여자, 남자 하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여자 등등.

그렇기 때문에 도시로의 여행은 종종 짝사랑이 되기 일쑤였다. 머리가 큰 이방인 남자를 단번에 좋아할 수 있는 여자는 세상에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마음을 뺏기 위해선 난 보다 오랫동안 그녀 주위에 머물러야 했다. 이십 대의 나였다면 분명 그녀들을 소유하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삼십 대 중반의 나이가 되자 세상과 공존하는 법을  보다 잘 알게 되었다. 

나는 음흉한 눈길의 아저씨처럼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신사동 거리의 아름다운 여인들도, 유라시아 대륙의 아름다운 도시들도 굳디 내가 소유할 필요가 없었다. 같이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

보통 여자들은 어른스럽다. 내가 조금 보채고 어리광을 피어도 묵묵히 바라볼 줄 알았다. 도시들 역시 내 치기 어린 행동들에 대해 관용적이었다. 그리고선 이렇게 말하는것 같았다. "너 같은 녀석들을 예전부터 많이 봐왔지."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세상을 여유롭게 사는 방법을 깨달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닥친 현실은 적잖이 쓰라렸고, 오히려 난 과거에 비해 작은 상처에도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사실 이를 극복할 교훈들은 충분히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누군가의 삶을 바꿔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교훈들이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이미 우리 사회는 성공한 사람들과 행복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아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과 불행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많은 이들을 그들의 남루한 인생에서 탈출하기 위해 줄곧 새로운 교훈들을 찾았다. 물론 잠시 감동하고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다.

교훈을 머리에만 새긴 채 재워지지 않는 마음과 함께 나는 잠시 내가 좋아하는 도시들로 여행을 떠났다. 잊지 못할 스승처럼, 영원히 기억에 남는 은인처럼, 내겐 고마운 도시들이 존재했다. 도시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뛰고, 그 속에 담긴 역사적, 도시적 이야기들이 나를 설레게 했다.



지난 일년 사이에 찾아갔던 라스베이거스와 찬디가르는 십여 년 이상을 줄곧 그리면서 좋아해왔던 곳이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새로인 알게 된 도시였다.

그곳들로 찾아가 도시가 나긋이 전해주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나는 복잡했던 마음을 잠시나마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래, 나 같은 녀석은 이미 세상에 많았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도시들 역시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물이었다. 지나간 시간의 흔적과 상처들이 도시의 구석구석에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덧 사랑하게 된 사람의 오랜 습관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 나름대로의 모습들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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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같이 어려운 거 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톡 까놓고 물어보는 거야.
뭐가 불만이야?
뭐가 그렇게 힘들어?
너만 고생해?
묻는다고, 답이 들리기야 하겠어?
그래도 몽글몽글, 울컥울컥
꿈틀거리는 게 느껴질 거야.
물어봐 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큰 거 바란 적 없다고
착한 마음이 작게 울기 시작할 거야.
나는 그런 착한 나를 위해 짐을 싸고, 길을 떠났지.
착한 마음이
고맙다고, 많이 고맙다고
그만 좀 하랄 때까지 입에 달고 살더군.
고마워.
정말 정말
고마워.


감정을 나누는 즐거움은 표현이 안 될 만큼 크고, 깊다. 독자는 각각의 창의력으로 장면을 상상하고, 상황을 이해한다.
여행 이상으로 놀라운 인연이다. 게으르고, 변덕 심한 나에게 이런 즐거움이 글을 쓰게 한다.  9


나는 5천 원을 냈고, 현지인들은 1천 원을 냈다. 그깟 몇천 원으로 이성을 잃는다면 그건 내공이 얕은 여행자다. 바가지로 점철된 삶이 여행자의 몫이다.  28

비가 추적인다. 나는 오토바이를 반납하러 갔다. 더 이상은 오토바이를 탈 수도 없을뿐더러 오토바이를 타기도 무서웠다. 직접 숙소까지 와서 오토바이를 수거해 가면 몇만 원의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착한 숙소 주인장의 소개로 1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오토바이를 실을 수 있었다. 비를 맞으면서 망가진 오토바이를 타고, 오토바이를 배달해 준다는 집을 찾아나섰다. 아주 캄캄한 밤이었고, 붕대 사이로 또 상처가 번지는 것이 보였다. 몇만 원 아껴 보겠다고 그 몸으로, 골목골목을 휘저었다. 그러고는 혼자 피식 웃었다. 참 열심히 사는구나! 참 구차한데, 그래도 그 구차함을 열심히 뒤쫓는 내가 싫지 않았다.
뜨뜻미지근한 내가 맘에 들지 않았더랬다. 열정도 없이 여기저기를 떠 다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었다. 하지마 ㄴ열정은 그렇게 쉬 없어지지 않음을 알았다. 열정은 사그러지는 것이 아니라 성장해가는 것이다. 단지 그 모양이 달라 보일 뿐이다. 달라질 때마다 우린 초심을 잃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비 않는다.
초심은 씨앗이다. 그 씨앗이 자라는 동안, 수많은 굴곡을 겪는다. 그때마다 갈등하고, 의심한다. 하지만 초심은 열심히 발화하고, 물을 빨아들인다. 그 씨앗은 꽃을 피울 수도 있다. 그러면 새로운 초심을 찾으면된다. 새로운 초심, 새로운 씨앗이 우리의 열정과 함께 싹을 틔울 것이다. 이제 나는 새로운 용기를 얻었다.  10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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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는 실감이 나질 않아."  9


여행할 때, 배낭을 메고 길 위에 섰을 때, 낯선 것들과 조우할 때, 그 설렘. 아무래도 그것이 내게는 '살아 있는 실감'에 가장 가까운 감각이었다.  10


'생활인'인 나에게 충실하기 위해서는 내 방식의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많이 온다. 그리고 나이를 먹을 수록, 현실에 대한 내 책임이 더 늘어날수록 그 순간은 더 자주 찾아올 터였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현실과 꿈이 공존하는 방법을, 핏줄에 부는 바람을 안고 생활인으로 사는 방법을, 먹고사니즘과 '내 방식의 행복'이 함께 손잡고 이인삼각으로 비틀거리며 걷는 방법을.  14


여행과 일상의 중간.  21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마흔이 되고 싶다.  37


"평범하게 사는 게 어떤 건데? 먹을 것, 잠잘 곳, 놀 곳, 섹스 상대. 이거 말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뭐가 더 필요한데?"  111


"한국 사람들 늘 그러잖아. 뭐하지? 뭐해야 되지? 안절부절."

왜 시비냐고 버럭 하려다가 참았다. 저날 밤 톰과의 대화에서도 느꼈듯, '인생'이라는 마라톤 경기에 대한 한국 사람들과 빠이 사람들의 태도 차이가 너무도 극명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구간 내내 전력 질주를 한다. 빠이 사람들은 경주에 아예 관심이 없어 보인다. 트랙 근처 나무에 해먹 매달아놓고 낮잠 자는 모습이다.

과연 삶이라는 마라톤은 어떻게 달려야 할까. 가장 좋은 건 적당히 속도안배를 하면서 달리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건 반드시 사회 시스템이 받쳐줘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구간마다 물컵이 달리는 사람 수만큼 놓여 있어야 할 거고, 어떤 출발점이나 환경에서 시작하더라도 불이익을 겪지 않도록 규칙과 트랙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아예 중간에 트랙에서 내리는 방법도 있을 거다. 조기 은퇴나 조기 퇴직 같은 것. 그러나 그러려면, 달리는 동안은 얼마나 치열하게 달려야 하는 것일까.  113-114


"속 터져요, 한국 같으면 벌써 다 지었어. 진짜 태국 애들 일 못하는 거 상상 초월이야."

"학비는 받나요?"

"아니, 기숙사까지 전액무료."

"학교 다 지으시면 교장선생님 되시는 거예요?"

"아니, 애들이랑 선생님한테 줄 거야. 나는 다시 딴 거 해야지. 여행 가든가. 내가 건물만 올려 주ㄴ면 그담엔 자기들이 지지고 볶고 만들어 나가야지. 밥도 해먹고, 농사도 지으면서."

"그럼 이 건물을 짓는 특별한 이유라도..."

"놀이."  128


난 그냥 내 고산족 친구들한테 해줄 게 없을까 하다 한번 만들어 보는 거예요. 아, 재미있잖아. 일 잘 안 풀리면 홧술도 한잔씩 마셔가며."

"살아 있다는 실감은 제대로 느끼고 사시겠네요."

도인 아저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129


차가 읍내로 들어서자 기분이 복잡해졌다. 온천이나 폭포 같은 곳은 갈 생각 없다. 그것은 내게 그저 빠이라는 동네의 장식에 불과 했다. 나는 그냥 좁은 타운 안에서도 충분히 행복했고, 만족했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몸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좁은 타운 안에서 한 발짝 나각자, 내가 몸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왼쪽 겨드랑이나 허릿살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보였다. 빠이에 좀더 머무르고 싶어졌다. 좀 더 머무르며, 속속들이 이곳을 느끼고 싶어졌다.

"저 며칠 있다가 방비엥 가는 표 끊었거든요. 이거 찢을까요?"

아저씨는 느릿느릿 대답했다. "빠이, 블랙홀이야. 한번 빠지면 나가기 힘들어. 그래서 바람 불었을 때 얼른 떠야 돼요. 여기가 바람이 잘 부는 데가 아니거든."  130


나이가 먹을수록 설레는 일이 줄어간다. '그런 거 예전에도 봤어.' , '다 아는 거야.' 같은 허세와 교만은 조금씩 느는 것 같은데 새로운 것에 대한 발견과 깨달음의 설렘은 나날이 줄어간다. 나는 돈 뎃의 노을 앞에서 너무도 설레었다. 노을 겉은 거 보고 설렐 줄은 나도 몰랐다. 다시 한 번 그 처음 본 붉은 빛을 보고 싶었다. 한 번쯤 더 설레 보고 싶었다.  216


라오스에서 필요한 것은 '비움'이다.  231


누군가 '라오스에서 뭘 하셨어요?'라고 물으면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다. '기다렸어요.' 내가 기억하는 라오스 여행의 절반 이상은 기다림이다. 그것도 확실치 않은 기다림.  237


지금까지 나 자신을, 특히 여행할 때의 나 자신을 돌이켜 보고 얻은 결론인데, 나는 고생을 싫어하지 않는다. 내 몸과 내 예금계좌와 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히지 않는 한도 내어ㅔ서의 고생이나 소동은 오히려 좋아한다. 무탈하고, 평온하고, 고요한 나날이 계속되면, 재미없다. 나이를 먹고 많은 상황에 익숙해져 갈수록 실수할 일도 잘못될 일도 줄지만, 그만큼 흥분하고 떨리고 가슴 졸일 일도 줄어든다. 그러고 보니 마흔은 '불혹'이했지, 흔들리지 않는 나이. 그 나이에 대해, 하나만 소박하게 바란다. 나는 흔들리지 말고, 내 주위의 공기를 조금씩 흔들려주기를,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을 때는 나 스스로 흔들 수 있는 자유를 잃지 않기를.  264


지금까지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사실 그것들이 알고 보니 내게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었던 거다. 적어도 '행복'을 위해서는 말이다. 그렇다면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언제 어디서나 나다운 행복을 느끼기 위한 최소공약수는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그렇다. 세상을 삼십 년도 넘게 살아왔건만, 나는 단 한 번도 '행복해지는 법'에 대해 배워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모두들 주변에서 '잘살아야 한다'라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잘산다'는 것은 경제적인 안정과 풍요, 그리고 남들 보기에 번듯한 외적 조건을 갖추는 것. 잘 사는 거, 좋지. 그렇게 살면 참 편할 거다. 거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을 거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했을 때 기억과 마음에 남는 건 잘살았던 것보다는 행복했던 것들 쪽인 거 같다.  275


호수를 빙 둘러싸고 울창한 열대 밀림이 우거져 있었다. 날이 흐린데도 물에서는 불쾌한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지독하게 맑은 공기 위로 축축한 밀림의 향기가 가득했다. 아이들은 외국인인 나를 보고 쑥스럽게 웃음을 지어 주었다. 

자, 이제 돌아가자. 어차피 호수에서 굳이 뭘 하겠다고 온 것은 아니니까. 그저 남아도는 한나절과 매너리즘을 쓰임새 있게 버릴 곳이 호수였을 뿐이다.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시간은 자주 버리잖아. 만화책으로, 게임으로, 트위터로, 메신저 수다로. 다만 이번 땡땡이에는 동그란 물, 붉은 진창, 울창한 밀림과 낯선 풀 냄새, 그리고 애물단지 같은 자전거가 하나 있는 거다. 라따나끼리에서 땡땡이는 이런 식으로 치는 거다.  287-288


내가 사는 나라, 얼마 전까지 변두리였다가 신도시가 된 우리 동네에서는 로스(스위스인)의 동네가 꽤나 행복해 보인다고 말한다. 더이상 바랄 것이 없어 보이는 그 부티와 안정감, 우리는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오늘도 그토록 치열하고 시끄럽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막상 그런 '행복'을 손에 넣은 것처럼 보이는 동네 주민은 정작 자기들이 행복을 잃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 땅, 인도차이나의 사람들은 정작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정말 그렇게 마냥 행복할까? 저 부유한 나라에서 온 친구의 말뜻은 결국 이건데, 행복과 소유는 그다지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까 결국 행복은 마음의 문제라는 것, 적어도 인도차이나 사람들은 그 '행복'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것 같다. 낙천적이고, 여유롭다. 정확성이니 효율성 따위에 집착하지 않고 좋은 게 좋은 대로 살아간다. 불교라는 사상적 배경 때문에 현세의 괴로움에 너그럽다. 게다가 최소한의 의식주도 해결하지 쉽다. 밖에서 자도 얼어 죽을 일 없고, 바나나며 망고스틴 같은 과일이 지천이니 굶어 죽을 일도 없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땅의 곳곳에서 욕망의 냄새를 맡는다. 생존과 생리에 대한 기본적인 욕망이 아닌, '소유'를 향한 자본주의적 욕망 말이다. 이런 욕망은 아주 쉽게 부도덕 및 몰양심과 결합한다. 나는 그것을 내 나라에서 징그럽게 많이도 보아왔다. 그리고 불행히도, 나는 이 땅에서 그런 '징후'를 몇 차례나 보고 말았다.  297-298


욕망을 가진 자에게는 그 욕망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와 장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좀더 노동과 대가의 의미를 제대로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착취당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저 얻는 것도 아닌 제대로 된 대가.  298


솔직히, 도시는 편하다. 나는 도시의 그 컵라면 같은 편리함이 그리웠던 거다. 오지에서 그렇게 행복하다고 느꼈으면서도 말이다.  318


미인이란 상대적 희소성에 대한 동경의 산물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거 참 허무한 건데.  364


만일 한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아마 물이 넘칠 기미가 보이는즉시 동네 사람들과 애꿏은 군인들이 총동원되어 물을 퍼내고 둑을 쌓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달랐다. 세계적인 유산 앙코르와트 해자의 물이 불자, 씨엠립 주민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곳에서 뜰채와 어망과 낚싯대를 들고 고기를 잡고 계셨다. 

같은 지구, 같은 아시아인데도 이드로가 우리는 삶의 속도와 리듬이 달라도 많이 다르다. 우리는 내일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둑을 쌓는데, 이들은 오늘의 만복과 행복을 위해 고기를 잡는다. 왜냐고? 우리는 내일의 행복을 대비하지 않으면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수 있다. 이들은 그냥 살아가도 먹을 것, 잘 자리는 생긴다. 우리는 죽어라 쉴 새 없이 손을 놀려야 겨우 1년에 한 번 추수하는 쌀, 이들은 두 번도 거두고 세 번도 거둔다. 당연히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는것 아닐까. '저러고 사니까 이렇게 못살지'도, '아, 왜 우리는 이렇게 찌들고 각박하게 살아야 하나'도 아닌 거다. 그녕, 다른 거다. 틀린게 아니라, 다른 거. 게다가 이들은 윤회를 믿는다. 이들에게 진짜 미래란 10년 뒤, 20년 뒤 따위가 아니라 다음 세상일지도 모른다. 하루하루를 착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어쩌면 이들에게 진자 미래를 대비하는 방식일 수도 있는 거다. 

그러나 이 '다름'에 조금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정말 그것으로 족하냐고, 그래도 되는 거냐고. 아이들을 보았을 때였다. 현실의 언저리만을 맴돌며 '썸말로이'를 외치는 씨엠립의 아이들을 말이다.  403-405


이 영악하기 짝이 없는 꼬마 사업가들은 과연 어떤 배경으로 탄생하게 되었을까? 이런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킬링필드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어요. 그 당시에 가장 먼저 숙청당한 사람들이 바로 지식인이랑 자산가였거든요. 캄보디아 사람들 아직 은행 잘 안 믿어요. 은행에 저축하는 대신 금을 사서 집에다가 묻어두죠. 그러니까 아이들 학교 보낼 필요성도 못 느끼는 거죠. 가르쳐 봐야 잡혀가서 죽기나 할 테니까요. 그냥 돈이나 버는 게 훨씬 낫다는 거예요. 게다가 애들이 좀 잘 버나요. 그래서 애들 내보내서 돈 벌어오라고 시킨 다음에 부모들이 도박이나 술로 탕진하는 경우도 많아요."  411


장기 여행자들을 보면 두 종류다.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나온 사람들, 아예 처음부터 안정된 생활 같은 게 없는 사람들, 카오산에서도 두 종류로 보인다. 처음부터 안정된 생활 같은 게 없는 사람, 또는 카오산에서만큼은 안정이고 나발이고 버리고 싶어 보이는 사람.  425


시간은 유한한데 지구는 너무 넓다. 그리고 갈 데가 너무 많다.  429


서른다섯,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 치열한 나이의 한여름, 그해의 여름, 나는 행복해지겠다며 조금은 억지를 섞어 이렇게 뛰쳐나왔고, 그렇게 긴 여름을 보내며 많이 행복했으며, 몰랐던 것 한 가지를 배웠다. 자잘한 불편과 결핍은 사실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 세상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최소 공약수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을 찾아내고 실천할 수 있는 한,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이 최소 공약수들이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것이 덧없고 시시해지고, 무언가에 구속당하고 싶고, 낯익고 좁은 것들 사이에 있고 싶어질 때가, 언젠가는 올지도 모른다. 그날이 올 때를 나는 꿈꾸려 한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성숙한 내가, 세상의 한 구석에 정착하여 그곳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모습을. 씨엠립에서 꿈꾸었던 모습일 수도 있고, 다른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냥 아줌마가 되어 가정에서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 사람 앞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어쨌든, 내 인생의 가을은 그런 모습으로 찾아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나는 열심히 행복하려 한다.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더 많은 여행을 다니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책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욕망을 '성취'라는 이름으로 풀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행복하게, 내 인생의 남은 여름을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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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자 기야스 벡은 페르시아의 귀족이었다. 왕의 명을 어긴 죄로 불같은 미움을 사게 된 그는, 어느날 가족들을 대동한 채 야반도주를 시도했다. 목적지는 인도였다. 그런데 그에게는 메흐루니샤라는 어린 딸이 있었다. 길고 험한 여정속에 딸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짐이었다. 라자스탄의 사막에 다다랐을 때 닥쳐온 기갈과 추위는 그에게 독한 맘을 품게 했다. 새벽녘, 잠이 든 어린 딸에게 모래를 이불삼아 덮어준 채 식솔을 다그쳐 길을 떠났다. 수시로 늑대와 전갈이 출몰하는 모래언덕 위로 집채만한 태양이 솟아오를 때 그는 가족들 몰래 아침 노을보다도 더 붉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메흐루니샤의 생명은 질겼다. 아이는 미르자 기야스 벡의 뒤를 따르던 상인들에 의해 모래더미 속에서 발견됐다. 상인들은 자신이 섬기던 귀족의 딸을 비단에 감싸서 아그라로 데려왔다. 이 장면은 그들 부녀의 인생은 물론 무굴제국의 흥망까지 엇갈리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미르자 기야스 벡은 무굴제국의 아크바르 황제의 마음에 들어 새로운 영화를 누리게 되고, 그의 딸은 아름답게 자라 페르시아 소속의 장군에게 출가를 한다. 하지만 사막의 굶주린 늑대에게 먹이가 될 뻔했다가 살아난 그녀의 인생이 그렇게 한갓지게 막을 내리지는 않았다.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서른의 청상이 된 기구한 팔자의 그녀는 아버지가 살고 있는 인도의 아그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아크바르 황제의 후궁 중 한 살마의 시녀가 되어 아그라 성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그녀는 극적인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바로 아크바르의 뒤를 이은 제항기르 황제의 넋을 빼앗고 만 것이다. 풍류남아였던 제항기르는 수많은 여인들 중에서도 범상치 않은 과거를 지닌 페르시아 출신의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단숨에 제국의 왕비가 된 그녀는 누르자한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천성적으로 호방한 성격이고 놀기를 좋아했던 제항기르는 인도 대륙의 북서부에 있는 카시미르 지역을 좋아해 재임 중에 그 지역의 대표 도시인 스리나가르를 자주 방문했다. 스리나가르에 '살리마르 박'이라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누르자한에게 바칠 정도였으니까 제항기르의 인생에 있어 카시미르와 누르자한은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실제로 제항기르는 카시미르에 빠져 영리하고 아름다운 아내 누르자한에게 정치를 맡겨버렸다. 미르자 기야스 벡을 비롯한 페르시아 출신의 와척들이 득세하자 제국의 문화는 급속하게 페르시아 풍으로 변모한다. 힌두문화에 비해 비교적 앞서 있고 세련됐던 이슬람 문명은 누르자한에 의해 대폭 수용되고 심지어는 궁중에서 페르시아어가 통용되기도 했다. 미술과 건툭, 문학과 의상, 음악 등 문화 전반에 걸쳐 아라비아 반도와 인도대륙이 조화를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생겨난 문화는 인도 역사상 가장 독특한 문화로 평가받는다.

누르자한은 자신의 아버지가 죽자 야무나강 북쪽에 이슬람 양식의 무덤을 축조한다. '이티마드 우드 다울라'라는 이 무덤은 훗날 타지마할 죽조의 교과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무덤을 '리틀 타지마할'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완벽한 사각대칭의 건축 양식은 물론이며, 대리석 바탕에 밑그림을 그리고 선을 따라 구멍을 뚫어 각기 다른 색깔의 돌을 끼워 넣어 그림을 완성하는 일종의 상감기법인 '피에트라 두라'는 원래 페르시아의 장식기법인데 이 무덤을 축조할 때 인도에서 처음 사용하였고, 나중에 타지마할을 건설할 때도 중요하게 사용된다.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은 이 기법이 핵심적 역할을 한다.

무굴제국에 누르자한의 그림자는 계속 이어진다. 제항기르를 이은 샤자한 황제의 왕비인 뭄타지마할이 바로 누르자한의 조카였기 때문이다. 샤자한은 왕비를 끔찍하게 사랑했다. 17년의 결혼생활 중 열네 명의 아이를 낳앗다고 한다. 물론 자녀의 숫자가 금슬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엔나 소시지처럼 주렁주렁 아이를 낳을 정도였으니 그들의 사랑이 가볍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고 심지어 전장에도 대동하고 다닐 정도였으니 샤자한이 왕비에게 쏟은 열정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왕비가 열다섯 번째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버렸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자 애통함을 참지 못한 샤자한의 머리카락은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105-108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사원으로 다가간 나는, 맙소사,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사원의 외벽에 새겨진 조각들이 나를 까무러치게 만들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신들을 모신 사원의 외벽에는 온갖 난해한 체위를 한 성애상이 난무했다. 서양화가 임영재 형이 먼저 이곳을 다녀와서 내게 일러준 적이 있어 선지식은 있었지만, 차마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나는 우선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한국에서 온 젊은 대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 없는가 하고, 그들과 함께 이 조각들을 본다면 체면이 말이 아닐 것 같아서 헛기침을 하면서 주위를 살폈지만,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동양인 처녀는 보이지 않았다. 상투만 틀지 않앗을 분이지 마지막 유생임을 자처하셨던 아버지의 정신이 순간적으로 내 피에도 흘렀는가 보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사실은, 세상에 이렇게 노골적일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의 각종 체위가 등장하는 이들 성애상들이 천박하거나 상스럽게 여겨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슴과 둔부가 지나치게 발달해서 상대적으로 허리가 가늘어 보이는 여인이 한쪽 다리로 사내의 허리를 감고 두 팔로 목을 휘감은 채 눈을 허공에 매달고 있었다. 사내 또한 한 쪽 다리를 들어 여인의 가녀린 허리를 감은 채 이 농염한 여인의 도발을 어떻게 감당할까 난감해 하는 표정이고, 마치 기계체조 선수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고난도의 체위를 돕기라도 하려는 듯 좌우에 하녀들이 이들의 교합을 거들고 있었다. 하지만 한 하녀는 고개를 외면한 채 얼굴을 붉히고 있었고, 한 여인은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이 장면은 바로 카마수트라에 나오는 '쟈타베슈티타카'라는 체위다.

그 뿐인가, 오랜 병영생활에 지친 병사가 자신의 말을 상대로 수간을 벌이고 있었고, 그 뒤에서 다른 병사가 하품을 하고 있었다. 다음 순번을 기다리는 그 병사는 기다림에 지친 듯했다. 그 앞을 지나는 여인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가리고 그 광경을 외면하고 있었다.

외벽은 그렇다 치저라도 사원 안의 제단에는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곳에는 시바의 거대한 성기인 링가를 모신 제단이 있고 그 주위로 36가지의 성애 기교를 묘사한 조각상이 있었다. 링가상 앞에는 작은 제단이 또 하나 놓여있는데 그 제단은 젊은 여사제가 올라와 완전 나체로 춤을 추던 곳이라고 한다.

천 년 전 이 제단에서는 성(聖)스러운 성(性)의식이 행해졌다. 승려들은 북을 치고 신자들은 횃불을 밝혔다. 북장단에 춤을 추던 여사제의 춤사위가 절정에 이르면 승려들은 북채를 던지고 차례로 제단으로 올라와 여사제와 정사를 벌였다. 오랜 수도 생활로 다져온 요가 자세로 고난도의 체위를 구사하며 이루어지는 교합에서 승려들은 번번이 패하고 말았다. 여사제의 관능을 극복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였던 것이다. 이 교합에서 사정을 해버린 승려는 다시 수도의 길을 걸어야 하고, 여사제의 온갖 기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텨 그녀를 녹초로 만들어 놓고도 사정을 하지 않은 승려는 드디어 득도의 세계로 접어든다는 것이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찬츠라 수행의 한 방법이다. 힌두에서 생각하는 바에 의하면 인간의 정액은 머리에서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뇌하수체의 자극에 의해 정액이 생성되기 때문에 이 말이 영판 거짓은 아니다. 머리에서 생겨난 정액은 밑으로 내려와 배꼽 아래에 모여 있다가 남녀의 교합에 의해 성기를 통해 바깥으로 배출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힌두에서는 이 정액을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에너지로 본다. 이 에너지가 고갈되면 결국 인간은 죽고 마는 것이다. 일종의 엔트로피 개념이다. 그런데 이 에너지를 사정하여 허비하지 않고 다시 머릿속으로 되돌려 보내면 그 때 비로소 해탈의 순간을 맞는다는 것이다. 자아를 극복하는 것이 깨달음의 첫 번째 문이라면, 탄트라 수행은 득도를 위한 가장 극단적 수행법임이 확실하다. 

나는 카주라호의 사우너에서 카마수트라가 종교 속에서 어떻게 승화되었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인도에서는 이처럼 사원에서도 성(性)을 가르친다. 성은 인간이 사는 세상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므로 성(聖)과 속(俗)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힌두 세계에서는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144-147


테레사 수녀님은 콜카타 빈민촌에 있는 '사랑의 집'에 살면서 가난과 질병, 그리고 기아 속에서 죽어가는 인도인과 평생을 함께 보냈다.

하루는 영국의 한 여기자가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그녀에게 물었다.

"사랑이란 콜카타의 한 소년이 들고 온 사흘 분의 설탕입니다."라고 테레사 수녀님이 선문답처럼 대답했다. 어느날 사랑의 집에 설탕이 떨어졌다는 소문이 있었고, 콜카타의 모든 시민들이 그 소문을 들었다. 그날 저녁 한 소년이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오늘부터 사흔 동안 저는 사탕을 먹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제가 먹지 않은 그 사흘 분의 사탕을 제게 주십시오." 사흘 후 이 소년은 자신이 아낀 사흘 분의 사탕을 들고 사랑의 집에 찾아왔다. 콜카타의 모든 시민이 사랑의 집에 대한 소문을 들었지만, 남에게 걸식조차 할 수 없는 절대 고통의 행려병자들에게 자기 몫의 설탕을 가지고 간 사람은 오직 어린 소년 한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테레사 수녀님이 강조한 사랑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소박한 사랑, 작은 일에도 비분강개하여 정의를 세우고자 하고, 옆집 개가 고뿔에 걸려도 호들갑스럽게 침소봉대하여 박애를 강조하는 사랑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실천할 수 있고, 타인을 위해 작은 희생을 할 수 있는 사랑을 강조한 것이다.  244


인도에서는 항상 갈증을 느낀다. 더운 날씨 탓도 있겠지만 모든 것들에서 욕구불만을 느끼기 때문에 그 갈증은 끝도 없이 반복한다. 마셔도 마셔도 풀리지 않는 갈증을 달래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느 하나 수월한 것이 있다면 인도 여행의 매력은 반으로 뚝 떨어진다. 고통과의 정면승부, 그것은 인도 여행만이 주는 매력일 것이다.  325


만사가 여유롭고 유머러스하며 넉넉하고 망상적이다. 다중적 특성을 가진 것이 인도인의 캐릭터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 닥쳐도 서두르지 않고 아무리 난처한 입장이어도 익살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이해관계에 맞닥뜨리면 절대로 양보하지 않다가도 상대가 곤경에 처하면 발 벗고 나서 도와준다. 참으로 묘한 민족이다.  334


내가 아는 인도와 인도인들은 세간이 평가하는 만큼 그렇게 지리멸렬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일부 호사가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내는 것처럼 신비와 명상으로 치장된 나라도 아니다.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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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독립 이후에 언어 분포를 조사하였는데, 인도 국민이 사용하는 언어가 179개이고, 방언도 544개나 존재한다고 한다. 현재 인도 정부가 공용어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 산스크리트어(Sanskrit, 범어梵語)를 포함해서 18개에 이른다.

이 많은 언어를 크게 구분하면, 북부의 인도아리아 어군(語群)과 남부의 드라비다 어군으로 나눌 수 있다. '인도아리아어'는 인도 인구의 70퍼센트가 넘는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고, 이는 산스크리트에서 파생된 것이다. 인도 아리아어도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누어진다.

1. 힌디(Hindi)는 인도의 북부 지방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언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체 인구의 40.22%가 사용하는 언어다. 수도 뉴델리(주민의 81.6%)를 비롯해서 하리아나(91%), 우타르프라데시(90.1%), 라자스탄(89.6%), 히마찰프라데시(88.9%), 비하르(80.9%), 마디아프라데시(85.6%), 찬디가르(61.1%) 등에서 주(州)의 제1공식어로 사용하고 있다. 또 네팔에서도 800만 명이 힌디를 사용한다.

2. 벵갈리(Bengali, 벵골어)는 캘커타(현재의 콜카타)를 중심으로 한 벵골 지방과 방글라데시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인도 전체 인구의 8.3%가 사용한다. 웨스트벵골 주의 공식어로서 이 주의 주민 86%가 벵갈리를 사용한다. 

3. 우르두(Urdu)는 펀자브 지방과 파키스탄에서 사용하는 이슬람교도(모슬렘) 언어로, 이 언어의 문자와 말은 아라비아어와 비슷하다. 인도 전체 인구의 5.18%가 이 언어를 사용한다.

4. 구자라티(Gujarati, 구자라트어)는 서해안 지방에서 사용되는 언어로, 구자라트 주민 91.5%가 사용한다. 그래서 구자라티는 '인도의 비즈니스맨의 언어'라고도 불린다. 구자라티는 인도 전체 인구의 4.85%가 사용하는데, 전 세계적으로 이 언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6,0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5. 마라티(Marathi, 마라티어)는 인도의 경제 수도 봄베이(지금의 뭄바이)를 중심으로 한 마하라슈트라 지방의 언어로, 이 주의 주민 73.3%가 이 언어를 사용한다. 인도 중부의 데칸 지역에서도 이 언어가 많이 쓰인다. 인도 전체 인구의 7.45%가 이 언어를 사용한다. 

6. 오리야(Oriya)는 동해안 지방에서 사용되는 언어다. 이는 오리사 주민 82.8%가 사용하며, 많은 방언과 지방 사투리가 있는 것이 이 언어의 특징이다. 

인도이ㅡ 남부 지역에서 주로 사용하는 드라비다어는 인도 인구의 30% 정도가 사용하는 언어다. 드라비다어도 몇 가지로 구분된다. 

7. 텔루구(Telugu)는 동부 지방의 안드라프라데시 주민의 84.8%가 사용하는 언어이고, 또한 인도 제2의 실리콘밸리로 통하는 하이데라바드 사람이 주로 사용하는 언어다. 이는 인도 전체 인구의 7.89%가 사용한다.

8. 타밀(Tamil)은 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는 언어다. 또한 타밀나두 주민의 86.7%가 사용하는 언어이고, 인도 전체 인구의 6.32%가 사용하는 언어다. 

9. 칸나다(kannada)s는 남서부의 마이소르(카르나타카 주) 지방에서 사용되는 언어로, 이는 인도 시리콘밸리 방갈로르에서 사용되며, 인도 전체 인구의 3.91%가 사용한다. 

10. 말라야람(Malayaram)은 인도의 가장 남쪽 케랄라 지방에서 쓰이는 언어로, 이는 인도 전체 인구의 3.62%가 사용한다.

그 밖에도 11. 펀자비(Punjabi)는 펀자브 주민의 92.2%가 사용하고, 인도 전체 인구의 2.79%가 사용하는 언어다.

12. 아싸미스(Assamese)는 아삼 주민의 57.8%가 사용하는 언어로, 인도 전체 인구의 1.56%가 사용한다.

13. 신디(Sindhi)는 구자라트 주 등, 인도와 파키스탄의 접경 지역에 사는 주민이 사용하는 언어로, 이는 인도 전체 인구의 0.25%가 사용한다.

14. 네팔리(Nepali)는 네팔의 국어다. 이는 네팔 인구의 90%가 사용하는 언어이며, 인도 전체 인구의 0.25%가 사용하는 언어다.

15. 콘카니는 고아 주민의 51.5%가 사용하는 언어로, 인도 전체 인구의 0.21%가 사용한다. 

16. 마니푸리는 보석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마니푸르에서 사용되는 언어다. 이는 이 지역 주민의 60.4%가 사용하는 언어로, 인도 전체 인구의 0.15%가 사용한다. 

17. 사큐미리(Kashmiri)는 잠무카슈미르 주에서 주민의 55%가 사용하는 언어로, 인도 전체 인구의 0.01%가 사용하는 언어이다.  32-35


2001년 발표된 인구 조사를 보면 인도의 주택 수는 모두 1억 7,900만 개이다. 평군 잡아 한 집에 6명이 사는 셈이다.  35


4만 루피의 연봉을 받는 사람은 한국의 화폐로 약 100만원 정도를 받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5~10배의 소득 효과가 잇다.

최근 인도인은 부수입을 올리기 위해서 상당히 노력하고 있다. 이는 경제에 눈을 뜬 것이고, 그래야 자식 교육과 자신의 노후가 보장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9


1999년 현재, 350만의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 감염자가 있다고 하고, 일부 비정부 기구에서는 800만의 감염자가 있다고 주장한다.  42


웬만한 중산층 가정의 경우 제대로 된 집안에 딸을 시집보내려면 신랑에게 '산트로(현대자동차)'정도는 지참금으로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도의 여성은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낼 수도 없다. 인도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성이 결혼하지 않는 것을 큰 수치로 받아들이고 있고, 독신 여성을 사회적으로 천시하고 있다.  48


사트푸라 마을에서는 차란 부인의 '사티'를 포함해서 지난 50여 년동안 4건의 '사티'가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이 사티 기록을 대단한 자랑과 명예로 여기고 있다.  50


미망인이 끝까지 자결하는 것을 거부할 경우에는 천한 사람으로 낙인찍혀서 집안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 버림을 받았다. 버림받은 미망인은 죽을 때까지 힌두교 사원에 가서 가장 천한 막일을 하거나 심지어 창녀로 일해야 하며, 이렇게 해서 번 돈은 힌두교 사원에 바쳐야 했다.  51


인도에는 "과부가 먹다 남긴 음식은 개도 먹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과부가 다시 시집가는 것도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다. 과부는 시집에서만 아니라 친정에서도 배척을 받는다.

과부들이 브린다반의 사원에 모여들게 된 것은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자신의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이다. 실제로는 남편이 죽자 집안에서 버림을 받고 브린다반으로 쫓겨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52


인구 비례로 따지자면, 영어를 읽고 쓸 수 있는 인구는 4!10%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간단한 영어회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70%는 될 것으로 추정된다.  76



인도 역사를 크게 4시기로 구분하는 견해가 있다. 힌두시대, 이슬람시대, 영국식민지시대, 오느르이 독립국가시대이다.

인도의 한 소설가가 4가지 시대에 대해 재미있는 비유를 들어서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이 소설가는 인도 민중을 참새 부부에 비유한다. 각 시대를 연대순으로 힌두 시대를 '금으로 만든 새장'으로 비유하고, 이슬람 시대를 '은으로 만든 새장', 영국의 식민지 시대를 '알루미늄으로 만든 새장', 오늘날의 독립국가 시대를 '삼색기(三色旗)로 만든 새장'으로 비유하였다.

필자는 '힌두시대'를 4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1시기는 아리아인이 인도에 정착한 시기인 '베다시대'이고, 2시기는 '도시국가'와 '영역국가'가 서로 경합을 벌이던 시대이며, 3시기는 '마우리아 왕조'에 의해서 통일을 이룬 때이고, 4시기는 '굽타 왕조'에 의해서 고전적 힌두 문화가 어느 정도 완성된 시대이다.  81-82


힌두교의 성격으로는 대체로 다음의 6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베다 종교를 계승한 힌두교는 기본적으로 다신교(多神敎)이다. 둘째, 힌두교는 다신교이지만, 여러 신의 배후에 최고신(最高神)을 설정한다. 이것이 브라흐마 비슈누 쉬바의 삼신일체(三神一體)로 나타난다고 한다. 셋째, 힌두교에서 아바타라(avatare, 化身)의 관념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이는 비슈누가 여러 신 인간 동물로 나타난다는 것인데, 이것을 통해서 여러 지방 부족 카스트의 신들을 통일할 수 있었다. 넷째,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특징이 있다. 힌두교에서는 이슬람교나 유대교에 비해서 신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적다. 이는 '아바타라'의 관념에서 파생한 것이다. 다섯째, 힌두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단(異端)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정통과 이단의 대립을 거의 볼 수 없다. 여섯째, 힌두교에 이단이 없다는 점은 힌두교가 다른 종교, 사상과 접촉하는 점에서 관용을 발휘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힌두교에서는 대립하는 모든 종교, 사상에 대해서 정면으로 대결하기보다는 자기영역에 있으면서 대항하지 않거나, 자신의 울타리 안으로 흡수하였다. 예컨대 사회적 신분제도에 저항했던 '불교'도 힌두교의 한 파(派)로 간주되어, 불타(佛陀)는 비슈누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렇지만 불교 자이나교 이슬람교 시타 토착적 요소가 어울려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보면 힌두교도로서 그 주체성을 잃지 않았다.

또한 힌두교에서는 4가지 생활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카마(kama)는 적당한 감각적 쾌락과 성적 향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애정의 기술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한 것이 <카마수트라>이다. 둘째, 아르타(artha)는 재물과 재산의 향유와 이득을 뜻한다. 이는 인생에서 부(富)의 추구가 인간의 정당한 행위라는 것이다. 셋째, 다르마(dharma)는 사회적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 이는 <마누 법전>과 여러 법률서에 나와 있는 내용을 실천하는 것이다. 넷째, 해탈(moksa)은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열반에 들어가서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4가지 생활 목표와 상응해서 인새으이 4주기도 제시하고 있다.

첫째, 범행기는 스승의 지도 아래 <베다>등의 학문을 배우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시기다. 둘째, 가주기는 결혼해서 가정을 돌보는 시기다. 이때 자식을 낳고 부를 추구하는 생활을 하면서 가장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 <마누법전>에 따르면 결혼한 남자에게 주어진 의무는 신, 브라만, 조상 등에게 제사를 성대하게 치르는 것이다. 셋째, 임주기는 재가자의 삶을 마치고 숲속으로 들어가서 은거하고 명상과 금욕생활을 하는 시기다. 이는 세속을 떠나 청정한 종교생활을 하는 시기다. 넷째, 유행기는 숲속에서 수행이 끝난 뒤에 탁발(걸식)하며 돌아다니는 시기다. 이때에는 모든 사회적 유대관계를 끊고 오로지 해탈의 세계만을 추구한다.  140-142


힌두교(브라만교)의 흐름은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에서 6파 철학으로 이어진다. 그 내용을 순서대로 살펴본다.

1. 우파니샤드(Upanisad)는 '가까이 앉는다'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이는 스승과 제자가 가까이 앉아 대화로 비밀스런 지식을 전수한다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사상은 다양해서 일률적으로 개괄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우주의 근원인 '브라흐만(brahman)'과 진정한 자아인 '아트만(atman)'이 같다는 것(梵我一如)이 <우파니샤드> 사상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타이티리야 우파니샤드>에서는 5단계의 아트만을 주장한다. 첫째, 물질로 이루어진 자아인데, 이는 음식을 가리킨다. 둘째, 동물과 식물로 이루어진 자아인데, 이는 식물과 동물에 공통된 생명으로 이루어진 자아이다. 셋째, 동물에만 공통된 지각 활동으로 이루어진 자아이다. 넷째, 인간만이 소유하고 있는 인식활동으로 된 자아이다. 다섯째, 희열로 이루어진 자아인데, 이는 인간의 깊은 곳에있는 브라흐만 그 자체이다. 이것은 인간 내면 깊은 곳에 간직되어 있는 희열이야말로 자신의 참 자아이며 우주의 근원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같다는 주장이 의미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2. <바가바드기타>은 힌두교의 바이블로 불릴 만큼 중요한 문헌이다. <바가바드기타>는 바수데바(Vasudeva)를 신봉하는 종파에서 작성한 시편(詩篇)인데 나중에 <마하바라타>에 편입되었다. '바가바드기타'는 '숭배할 만한 자' 혹은 '지극히 존귀한 자'라는 의미이고, '기타'는 '노래' 혹은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바가바드기타>는 체계적인 철학을 담고 있는 저술이라기보다는 실천적 성격이 강한 종교적 작품이고, 또한 요가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바가바드기타>에서는 3가지 요가를 말하고 있다. 첫째, 지(知)의 요가(jnana-yoga)이다. 이는 뒤에 소개할 상키야학파처럼 영원한 정신으로서 '참 자아'와 '물질적 현상적 자아'를 구분하는 것이고, 또는 <우파니샤드>에서 주장한 것처럼 범아일여(梵我一如)와 신을 아는 지혜를 의미하기도 한다. 둘째, 신애(信愛)의 요가(bhakti-yoga)이다. 이는 신에게, 특히 비슈누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고 그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헌신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셋째, 행(行)의 요가(karma-yoga)이다. 이는 윤리와 해탈 간의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참다운 체념은 '행위를 전혀 하지 않는 체념'이 아니라 '행위 하는 가운데 체념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행위를 하지만 욕망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행위하는 한, 업보(業報)를 부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3. 상키야(Samkhya)학파에서는 2원론을 주장하낟. 이 학파에서는 진정한 자아 푸루샤(purusa)와 현상적인 자아 물직적 근원인 프라크리티(prakrti)를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평범한 사람은 프라크리티를 진정한 자아라고 생각하고 잇다. 이것은 잘못이고 진정한 자아는 푸루샤라는 것이 이 학파의 주장이다. 이 학파에서는 프라크리티에서 육체와 세계가 전개되는 것을 설명한다.

4. 요가(Yoga)학파에서는 상키야학파와 형이상학을 같이하지만 두가지 점에서 다르다. 그것은 마음의 잠재적인 힘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무지(無知)를 주장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 학파에서는 구체적 수행 방법으로 요가를 제시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유신론적(有神論的)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5. 바이셰쉬카(Vaisesika)학파는 다원론의 입장에 선다. 이 학파에서는 6범주 또는 7범주를 말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 항목인 실체이다. 이 학파에서는 실체에 9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지, 수, 화, 풍, 공, 시간, 공간, 의근, 자아이다.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고, '허공'은 소릴는 성질이 어딘가에 있어야 하므로 이 점에 근거해서 추론되는 것이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와 젊음과 늙음을 인식하는 근거로서 추리되는 것이며, '공간'은 여기, 저기, 가깝다, 멀다 등을 인식할 수 있는 근거로서 추론되는 것이다. 의근(意根)은 내적 감각기관이다. 눈과 코 등의 외적 감각기관이 바깥 대상을 인식하듯이, 의근은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는 것이다. 지각은 의근이 작동해야 이루어진다. 자아(영혼)는 인식현상의 밑바닥을 이루는 실체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개인 영혼인데, 이는 의지 욕망 기쁨 아픔 등의 여러 가지 정신적 상태에 근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안다"와 "나는 아프다"라는 말을 통해서 자아가 의식에 속하는 실체임을 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최고 영혼으로서 신이다. 이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영혼으로서 모든 고통과 욕망에서 벗어난 존재이고 세계의 창조자라고 추리되는 존재이다.

6. 니야야(Nyaya)학파에서는 바이셰쉬카학파와 형이상학의 내용은 거의 같이한다. 이 학파에서는 괴로움의 근원이 그릇된 지식에 있다고 보고 올바른 지식을 얻기 위한 인식 방법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래서 이 학파에서는 논리학이 발달하였다.

7. 미맘사(Mimamsa) 학파에서는 <베다>에서 명령하는 행위를 왜 실천해야 하는지 그 의무에 대해 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 학파에서는 무전력(無前力, apurva)을 주장한다. 베다에서 말하는 제사의 행위는 잠깐 동안 이루어지고 이내 끝나기 때문에 제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이에 이 학파에서는 가설로서 '무전력'을 인정하면 제사의 행위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증명할 수 있다고 한다. 제사 지내는 행위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인 '무전력'을 생기게하고, 이 힘이 제사 드리는 주체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서 그 업에 해당하는 과보를 반드시 받게 한다는 것이다. 인도에서는 일반적으로 베다 성전을 '제사부'와 '지식부'로 구분하고 있다. '제사부'는 브라만교의 제사를 설명하는 부분인데, 이것을 중시한 학파가 미맘사학파이다. 뒤에 소개할 베단타 학파는 베다 성전의 '지식부', 곧 <우파니샤드>를 중시하는 학파이다.

8. 베단타(Vedanta) 학파는 힌두교(브라만교)의 사상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있는 것이다. 이 학파는 과거 1,000년 동안 다른 학파의 활동을 누르고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베단타라는 말은 본래 베다의 '끝' 혹은 '목적'을 의미하는 것이엇는데, 이는 <우파니샤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베단타'라는 말이 <우파니샤드>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해석하고 발전시킨 사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베단타학파는  샹카라, 비슈누파, 쉬바파로 구분된다.

이 학파의 근본경전은 <브라흐마 수트라>이다. 이 경전에서 말하는 내용은 브라흐만과 합일하여 해탈하는 것이다. 해탈을 얻는 방법으로, 명상을 통해서 브라흐만을 알게 되는 지(知)를 얻고, 이 '지'를 얻은 사람은 죽은 뒤에 신의 길을 따라 최후에 브라흐만에 이르러 브라흐만과 합일한다는 것이다.

이 <브라흐마 수트라>는 문구가 대단히 간결해서 그 의미를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여러 주석서가 나왔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샹카라, 라마누자, 마드바이다. 샹카라는 가현설(假現說)을 주장했는데, 이는 영혼과 물질세계는 브라흐만이 나타난 것이어서 영혼과 물질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현설'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는 일원론에 속한다. 라마누자는 전변설(轉變說)을 통해서 영혼과 물질세계가 신에 의존해 있는 것이지만, 영혼과 물질세계에는 독자적 성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라마누자는 영혼과 미세한 물질은 실재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이 점에서 라마누자의 주장은 2원론에 속한다. 마드바(Madhva)는 '가현설'과 '전변설'을 부정하고 현실의 차별적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자 하였다. 이 점에서 마드바는 다원론을 주장하였다. 라마누자와 마드바는 비슈누파에 속한다.  143-148


자이나교의 사상

초기 자이나교의 가르침은 7체(諦)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영혼(jiva)은 모든 만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이 영혼은 청정하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청정한 영혼이 업(業)에 의해서 속박당해 자신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둘째, 영혼에 반대되는 비영혼(非靈魂, ajiva)을 설명한다. '비영혼'에는 5가지가 있다. 그것은 물질, 법, 비법, 허공, 시간이다. 물질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법(法)은 원자가 움직이게 하는 원리이며, 비법(非法)은 원자가 정지하게 하는 원리이고, '허공'은 우너자가 놓여 있는 공간이다. '시간'은 초기 자이나교에서 조금 뒤에 추가된 것인데, 원자가 시간 속에서 작용한다는 의미다. 셋째, 유입(流入, asrava)은 몸, 이브 마음의 업으로 미세한 물질인 비영혼이 영혼을 둘러싸는 것이다. 넷째, 계박(繫縛, bandha)은 영혼을 둘러싼 미세한 물질이 미세한 신체를 이루어서 영혼을 속박하는 것이다. 다섯째, 제어(制御, samvara)는 영혼이 속박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새로운 업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이미 들어온 업은 없애는 것이다. 과거의 업을 없애기 위해서는 고행이 필요하다. 새로운 업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기 위해서는 '5대서(五大誓)'를 지켜야 한다. 그것은 살생하지 않는 것, 진실한 말을 하는 것, 도둑질하지 않는 것. 음행하지 않는 것, 무소유이다.

여섯째, 지멸(止滅, nirjara)은 수행이 완성되어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일곱째, 해탈(解脫, moksa)은 업의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은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다.  156-157


자이나교단은 뒤에 백의파와 공의파로 나뉘어졌다. 백의파(白衣派)는 흰옷을 걸치는 종파이고, 공의파(空衣派)는 옷을 걸치지 않는 종파이다.  157


불교는 한국인에게 친밀한 종교이지만, 인도의 불교에 대해서 한국인이 잘 알지는 못한다. 한국인에게 친숙한 불교는 중국불교와 한국불교이다. 물론 중국불교와 한국불교는 인도불교를 근간으로 한 것이므로 크게 보아서 인도불교와 중국불교, 한국불교는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분명히 인도불교와 중국불교, 한국불교에는 다른 측면이 있다. 그 핵심적 내용은 인도 불교에서 논리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또한 카스트제도를 비판하는 진보적 성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161


불교사상의 전개 과정

1. 초기불교의 사상은 3가지 내용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첫째는 사성제(四聖諦)이다. 이는 4가지 성스러운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고(苦)'는 인생의 현실은 고통스럽다는 것이고, '집(集)'은 인생이 고통스러운 원인은 잘못된 욕망에 있다는 것이며, '멸(滅)'은 인생의 고통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고, '도(道)'는 인생의 고통을 없애는 길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도'는 팔정도(八正道)로 구성된다.

둘째는 삼법인(三法印) 또는 사법인(四法印)이다. '법인'은 불교의 징표, 불교의 증거라는 의미다. 이는 제행무상 등의 3가지 또는 4가지 조건이 갖추어지면 그 가르침을 올바른 불교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라는 도장을 찍는다는 의미이므로 그만큼 이 명제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삼법인 또는 사법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고, 모든 것은 고통스럽다는 것이며, 모든 존재는 무아(無我)라는 것이고, 열반(涅槃)의 경지는 고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연결해서 보면, 모든 것은 변하는데 그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집착하면 고통스럽다는 것이고, 이처럼 고통스러운 것에는 진정한 자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모든 것이 변하고 고통스럽고 무아임을 자각할 때, 진정한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삼법인 또는 사법인의 내용이다.

셋째는 연기설(緣起說)이다. 이는 사물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상호 의존성'을 말하는 것인데, 경전에서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기며, 이것이 멸(滅)하기 때문에 저것이 멸(滅)한다"라고 한다. 이는 이 세상 어떤 사물도 서로 관련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일상의 삶이 가능한 것은 누군가가 농사를 짓고 옷을 만들고 기름을 만들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 물건들은 내가 돈을 주고 사용하는 것이지만, 누군가가 만들지 않았다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이것들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에 철저히 기대어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상호의존성이다. 초기 불교에서는 이 연기설을 더욱 발전시켜 12항목의 연기설을 주장한다. 그 요점은 중생이 고통을 겪고 윤회하는 원인은 지혜가 없는 무명(無明)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불교의 경전은 <아함경(阿含經)>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역본과 팔리어본이 있다. 팔리어본은 '니카야(Nikaya)'라고 한다.

2. 불교 고단은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누어진다. 이는 계율문제를 두고 보수파와 진보파로 나누어진 것이다. 상좌부(上座部)는 보수파인데 불타가 정한 율(律)을 그대로 지키자는 쪽이고, 대중부(大衆部)는 진보파로서 불타가 정한 율이라고 할지라도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다. 상좌부와 대중부는 10가지 문제를 놓고 대립을 하였는데, 그 중에 핵심적 사항은 금은을 보시(기증) 받을 것인지 하는 문제였다. 상좌부는 금은을 보시 받아서는 안 된다는 쪽이고, 대중부는 시대가 바뀌었으므로 금은을 보시 받아도 된다는 쪽이다. 이렇게 2개의 부파로 나누어진 다음에 18개 부파로 나누어져 모두 20개 부파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상좌부 불교가 동남아로 전파되었다. 

3. 대승(大乘)불교는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경, 활발한 힌두교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새롭게 출현한 불교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普薩)을 강조하였는데 여기에 2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범부(凡夫)보살인데 대승불교경전에 나오는 미륵, 관세음, 문수, 보현보살 등을 말하는 것이다. 이 대보살은 이미 수행을 완성한 존재이고 한편으로 중생을 교화하고 있는 존재이다. 이 대보살은 힌두교에서 토착신앙을 포섭하고 대중성을 확보한 것에 대항하기 위해서 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존재를 제시한 것이다. 미륵(彌勒)은 미래에 태어난다는 부처님인데, 다음 생(生)에 부처가 되는 것이 결정되어 있고, 현재는 보살로서 도솔천(兜率天)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자비(慈悲)를 상징하는 존재이고, 문수보살(文殊菩薩)은 지혜를, 보현보살(普賢菩薩)은 실천행(實踐行)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또한 대승불교에서는 불타관(佛陀觀)에도 변화가 있었다. 대승불교에서는 불타의 개념이 일반화하였고, 구제자로서 뛰어난 능력을 불타가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중에서도 아촉불(阿?佛), 아미타불(阿彌陀佛), 약사여래(藥師如來)는 많은 사람이 귀의하는 대상이었다. 이는 불교의 대중화를 위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대승불교에서는 ,많은 경전을 제작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화엄경>, <법화경>, <무량수전>, 반야경전 계열, <유마경>, <승만경>, <해심밀경>, <열반경>이다. <화엄경(華嚴經)>은 불타가 되는 수행단계를 50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는 경전으로, 중국에 전해져서 화엄종(華嚴宗)의 근본경전이 되었다. <법화경(法華經)>은 소승(상좌부)불교와 대승불교의 조화를 말하는 경전으로, 중국에 전해져서 천태종(天台宗)의 근본경전이 되었다. <무량수경(無量壽經)>은 중생을 극락정토에 태어나게 한다는 내용의 경전으로, 중국에 전해져서 정토종(淨土宗)의 근본경전의 하나가 되었다.

반야(般若)경전 계열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공(空)의 가르침을 강조하는 경전이다. <유마경(維摩經)>은 출가하지 않는 재가 거사 유마힐(維摩詰)이 등장해서 불교이 가르침을 말하는 경전이다. 이는 재가 중심의 대승불교 정신을 잘 보여주는 경전인데, 중국에서는 <유마경>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승만경(勝?經)>은 출가하지 않은 재가의 여인 승만(勝?) 부인이 부처님을 대신해서 가르침을 말한 경전이다. 이것도 재가 중심의 대승불교 정신을 잘 보여주는 것이고,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성향이 강한 인도에서 매우 이례적인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열반경(涅槃經)>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경전이다. <열반경>은 경전이지만 논서의 치밀함을 보이는 경전이다. <해심밀경(解深密經)>은 인도 대승불교의 유식학파에서 중시하는 경전으로 심층무의식으로서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하고 있다. <능가경(楞伽經)>은 모든 중생이 여래(부처)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여래장사상과 유식학파의 사상을 결합한 경전이다. 이 <능가경>은 중국에 전해져 초기 선종(禪宗)에서 중요시하는 경전이 되었다.

또한 대승불교에서는 2대 학파가 있다. 그것은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이다. 중관(中觀)학파에서는 공(空)사상을 강조하고 범부의 집착을 논리적으로 깨뜨리려고 하였다. 그 대표적 저술이 용수의 <중론(中論)>이다. 유식(唯識)학파에서는 범부의 마음에 주목해서 8식설을 주장하였다. 세친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이 유식학파를 대표하는 저술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승불교가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에 전파되었다.

4. 기원후 7세기와 8세기에 접어들어 힌두교가 인도에서 완전히 주류 문화가 되자 이에 대응하고자 나타난 불교의 흐름이 밀교(密敎)이다. 대승불교도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밀교는 힌두교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이다. 밀교를 대표하는 경전은 <대일경>과 <금강정경>이다. <대일경(大日經)>은 중관사상의 영향을 받은 밀교경전이고, <금강정경(金剛頂經)>은 유식사상의 영향을 받은 밀교경전이다. 그 뒤를 이어서 무상유가(無上瑜伽) 탄트라가 등장했는데, 이는 인도의 탄트라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 밀교 계열의 가르침이 티베트에 전래되었다.  161-166


불교와 힌두교의 차이점

불교는 인도의 문화 토양에서 자라났지만, 힌두교(브라만교)와는 4가지 점에서 구분된다. 첫째, 불교는 힌두교의 카스트제도와 남녀차별을 부정하고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힌두교는 기본적으로 인도의 문화와 토양에 국한되는 '인도의 종교'로 머물렀지만, 불교는 인도의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는 세계 종교로서 보편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국제적인 포교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는 점이다. 셋째, 힌두교에서는 통일된 교리가 없고 믿음의 체계가 여러 가지라고 한다면, 불교는 가르침이 명료하고(철학적 내용은 복잡하지만) 교리체계도 일관성이 있다는 점이다. 넷째, 힌두교는 통일된 조직이 없는 느슨한 종교이지만, 불교는 교단을 구성하고 불교대학을 설립하여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종교활동과 포교활동에 나선다는 점이다.  166


시크교

시크교는 힌두교에 기초를 두고 이슬람교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이 두 가지 사상을 결합시킨 개혁종교이다. 이 종교를 처음 일으켜 세운 사람은 나나크(Nanak, 1469~1539)이다. 그는 카비르(Kabir, 1440~1518)의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았고, 이슬람교 신비주의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나나크는 진정한 종교는 내면성에 있고 또한 진정한 종교는 신을 만나기 위한 심성의 준비라고 보았다. 이 때문에 그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형식적인 의례를 부정하고 우상숭배를 금지하며 고행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나크는 만물은 신의 피조물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카스트와 성적 차별도 부정하였다. 그래서 시크교에서는 어떠한 카스트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함께 동일한 음식물을 먹고 음식물에 관한 금지조항을 만들지 않았다.

또한 나나크는 내면적 청정의 중요성, 곧 종교의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였는데, 그래서 술, 마약, 담배를 금지하였고, 보통의 직업에 종사해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것을 권장하였다. 이것이 바로 자기중심성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자기중심성이 강한 사람은 자아에 결사적으로 집착하여 탐욕과 분노와 집착과 자만에 지배당하고 언제나 불안하고 두려워한다. 따라서 수행자는 이러한 자기중심성을 극복할때 평호를 얻어 자기 자신의 본래적 원만함에 돌아오게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신(神)과 하나가 되는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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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기본적으로 <바가바드기타>의 해설서이다. 해설서이긴하되 일반적으로 알려진 해설을 되짚어보고 또 뒤집어보려 한다.

재해설서이기도 하다.  17


<기타>가 인도와 힌두교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힌두교의 전형적인 신학자가 알려주는 다음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베다(Veda)>는 히말라야 설산의 정상과 같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순백(純白)의 정상은 마치 신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장소와 같습니다. '앎'을 뜻하는 베다란 곧 계시입니다. 여러 <우파니샤드>는 그 정상의 백설이 녹아 흐르는 실개천들과 같스비낟. 눈의 결정(結晶)과 같은 계시의 말씀을 인간이 이해하고 체험하면 그 눈이 녹아 인간의 마음에 흐르는 지혜가 될 것입니다. '우파니샤드'라는 말의 뜻처럼 '가까이 내려 앉아' 겸손하게 그 말씀의 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타>는 그 여러 실개천이 모여서 이루어진 산정호수와 같습니다. 인간이 경험한 가지각색의 지혜는 흐르고 흘러 결국 하나의 진리로 수렴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 실개천이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모습과 같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기타(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진리의 기타는 하나뿐이랍니다. 진리는 하나인데 시인들이 여러 방식으로 노래를 부른다고 <베다>에서도 말하지 않습니까.'

<베다>라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 가운데 하나이고, <우파니샤드>라는 것은 <베다>의 끝부분을 형성하는 문헌이다.

<기타>는 이 두 문헌의 위대한 지혜를 모아 보다 대중적인 목소리로 재현한 작품이다.  27-28


호수로 강물이 흘러들어오고 흘러나가듯이 <기타>는 그 이전에 나타난 사고체계의 종착역이요, 그 이후에 등장하는 사고체계의 출발점이다.  29


<기타>를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많다면(실제로 매우 많을 것이다.), 다음의 세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기타>는 본래 누구든지 이해하기 어렵다.

<기타>가 불가해(不可解)하거나 난해(難解)하다는 점이다.

둘째, <기타>는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지만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이해가 불가능하다.

<기타>를 탓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탓하라는 것이다.

셋째, <기타>는 읽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이해의 폭이 천차만별이다.

자기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만큼 <기타>를 이해할 수 잇다는 현실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32-33


<기타>를 향한 맹목적인 숭배는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이분법적 견해와도 관련이 있다.

동도서기는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동양을 정신문명으로, 서양을 물질문명으로 나누면서 동양의 정신문명이 더 우월하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 사상이다.

진정 동양은 정신문명이고 성양은 물질문명인지 묻지 않은 채 동양의 어떤 정신문명이 구체적으로 더 우월한지 찾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아울러 진정 동양의 정신문명이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지와 구호만 있는 곳에는 내용이 빈약하다.  35


무작정 <기타>의 위대함조차 식민지 시대의 통치 전략으로 조작된 것일 수 있으니 그 위대함을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찾아보자는 것이 포함된다.  39


<기타>를 읽을 때는 무엇보다 역사적 배경을 충분히 숙지해야 한다.

<마하바라타>와 이 서사시의 0.7%를 차지하는 <기타>.  40


<기타>의 특징을 말하면

첫째, <마하바라타>의 주인공은 왕족이지만 이 서사시가 '민중의 베다'(민중을 위해 민중의 삶을 녹여서 만든 마치 계시와도 같은 앎)라고 불리듯이 대부분의 가르침은 민중을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타>의 주인공도 왕족이지만 신의 노래(가르침)는 민중을 위한 것이다. <베다>는 인도에 본래 살고 있던 토착민의 사상, 종교, 신화, 전설, 제도, 풍습 등이 반영되고 종합된 문헌이다.

둘째, <마하바라타>에는 고대 인도를 좌지우지하던 여러 사유체계가 절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기타>도 여러 상반된 사상과 사고 방식이 잘 반죽된 채 다양성의 통일을 보여준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 반죽이 너무 성급해서인지 서로 다른 사유 체계 간의 관계를 그려내는 것이 고르지 않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 때문에 <기타>를 읽기가 쉽지 않다.

셋째, <마하바라타>는 근본적으로 인도 또는 힌두의 영웅 이야기이고 이 영웅을 중심으로 인도의 민족 정체성과 힌두의 종교 정체성을 은연중에 강화한다. <기타>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넷째, <마하바라타>는 고대 인도에 힌두교 식의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시키기 위해 힌두교 방식의 도덕을 곳곳에 담고 있다. <기타>는 드러내놓고 그러한 도덕을 강력하게 설파한다.

<마하바라타>가 성립한 시기는 불교가 융성한 시기와 겹친다. 당시 불교의 확산에 두려움을 느낀 힌두교의 지배층은 민중을 힌두교에 단단히 붗들어놓기 위해 민중의 삶을 <마하바라타>로 끌어들였다.  41-42


<기타>를 신비화하는 나쁜 사례들이다.  

첫째, <기타>를 깨달은 사람의 전유물로 간주한다.

둘째, <기타>의 모든 가르침을 영적인 것으로 만든다.

셋째, <기타>의 문제를 독자의 문제로 돌린다.

넷째, <기타>에 대한 파격적인 해석을 깔본다.  45-46


역사적 배경을 짚어가면서 <기타>에 접근하는 것도 왕도는 아니다. 그래도 이 접근이 중요한 이유는 균형감가 때문이다. <기타>를 신비화하는 쪽으로 지나치게 평행저울이 기울어 있어서 그 반대쪽에 무게를 더해주기 위해서다.  47


이 책의 중요한 목적은 <기타>에 대해 새로운 읽기가 지속적으로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데 있다.  48


마하트마 간디의 해석.. 기본적으로 그는 <마하바라타>의 전쟁 자체를 육신의 싸움이 아닌 정신의 싸움으로 보며, 정신의 싸움 중에서도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사이의 싸움으로 본다.  58


아르주나와 크리슈나의 대화는 명상에 비유되기도 한다.

결론은? <기타>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최고의 영적인 스승이 인도하는 가운데 삶의 길을 잃은 듯한 어두운 영혼의 제자가 내면의 명상을 통해 기쁨의 빛이 충만한 경지를 체험하는 과정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발생하고 또 마음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기타>의 숨은 가르침이다.  60


흑백 논리를 거부한다면 그 대척점에 회색 논리가 있다.  61

높은 품격의 회색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극단적이고 극성스런 흑백 논리를 물리치는 회색이다. 세상의 모든 일을 선과 악으로 확실히 나눌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 회색의 임무이다 회색은 흑백을 나누는 기준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63


<마하바라타>는 10만여 편의 시가 얽히고 설키면서 무수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만 이야기의 종착역은 그저 삶의 덧없음이다.  65


아르주나가 누구인가? 

그는 판다바의 다섯 형제 가운데 셋째로서 왕자의 신분이었고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대단한 장수였다. 특히 활에 관하여 그 어떤 적수도 없는 신궁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무사의 의무인 싸움을 철저하게 수행했으며 모든 왕자 가운데 가장 정의롭다고 알려졌다. 고귀한 신분인 데다 자신의 의무에 늘 충설하며 균형 잡힌 정의감을 가진, 한마디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아르주나 "우리가 이기든 저들이 우리를 이기든 어느 쪽이 우리에게 더 좋은지 우리는 그점을 알지 못합니다. 바로 저들을 죽이고서는 우리가 살고 싶지 않은데 저 드리타라슈트라(백부님)의 아들들이 반대편에 정렬해 있습니다. 연민이라는 해악으로 말미암아 제 본성이 뒤흔들리고 정의(의무)에 대한 제 생각이 혼란스러우니 당신께 여쭙니다...."(2.6~2.8)

여태껏 자신이 굳건하게 올바르다고 믿던 것들이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않은 것을 나름대로 확실히 구분하면서 잘 살아왔는데 전쟁을 앞두고 머릿속이 새까맣게 변하면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 고백은 그가 철처하게 회색의 인간으로 서 있음을 암시한다.  71-73

"크리슈나여 양 군대 사이에 저의 마차를 세워주십시오. 싸우기를 원하여 정렬된 저들을 제가 관찰하는 데까지, 시작되려는 전쟁에서 누가 저와 더불어 싸워야만 하는가를 제가 관찰하는 데까지..."(1.20~1.23)  75


아르주나가 그 사이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굳건한 기준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으리라. (양 군대 사이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적군으로 진열해 있는 친족들을 가까이서 보지 못했을 것이다. 친족들을 가까이서 보지 못했다면 아마도 그는 동요되지 않았을 것이다.)  76


요점은 이거예요. 언제든지 우리 삶은 회색의 현실감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거예요. 음, 물론 출발점이 그렇다는 거고 도착점이 그래서는 안 되겠죠. 회색의 현실감을 인정하되 항상 그 회색에서 빠져 나오도록 애써야 한다는 거예요. 회색에서는 도통 의지할 게 없으니 보통 사람이 계속 회색으로 살아가기는 힘들어요. 빠져나와야 하죠.  80


하나, 크리슈나는 고통에 빠져 있는 아르주나의 마음에 커다란 충격을 던지는 말을 한다. 매우 당혹스러운 조언의 요점은 이러하다. '전쟁터에서 육신을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을 죽일 수는 없다. 육신과 달리 영혼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둘, 아르주나는 최후에 크리슈나의 가르침을 다 듣고서 자신의 모든 미혹이 사라졌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잘못된 생각들이 사라졌고 올바른 생각들로 채워졋다는 것이다. 생각이 바뀌면서 난제가 다 해결되엇다면 그것이 마음의 ㅣ문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애초에 아르주나는 스스로 자신의 어리석음과 혼란을 고백한다. 크리슈나 역시 첫 가르침에서 아르주나더러 지혜로운 척하지 말라고 하낟. 이처럼 모든 것은 어리석은 생각 때문이다.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기타>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셋, 아르주나가 고통을 겪는 큰 이유는 너무 많은 생각 때문이므로 키리슈나는 내내 그것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생각을 넘어선 상상이고 상상을 넘어선 망상이다. 그래서 크리슈나는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 행동의 결과를 미리 생각하면서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89-90


<기타>에서 아르주나는 정의롭지 못한 적군에 대비하여 자신의 정의로움에 자부심을 가져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고 있다. 아르주나는 자신의 본성에 맞게 전쟁터에서 진실하게 행동해야 함에도 자신을 속이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크리슈나가 '싸우라!'고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너 자신과 싸우라'고 하는 뜻이다. 자신 안에 놓여 있는 유약함과 거짓됨을 물리치기 위해 그렇게 만든 원인을 찾아 당당하게 대면하고 싸우라는 뜻이다. 따라서 싸우라는 가르침은 폭력의 가르침이 아니다. 도리어 자신과 싸워 이김으로써 진리에 도달하게 만드는 가혹하고 냉철한 비폭력의 가르침이다.  116


라즈니쉬의 <기타> 해석은 간디보다도 한발 더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일단 제가 주목한 부분은 이 구절입니다. <기타>에서 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가치한 자신의 의무가 잘 실행된 타인의 의무보다 낫다오. 자신의 의무 속에서 죽는 것이 낫다오. 타이느이 의무는 두려움을 초래한다오"(3.35) 여기서 자신의 의무와 타인의 의무가 나옵니다. 타인의 의무가 아무리 좋다 한들 초라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아르주나는 무사이기 때문에 무사로서의 자기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조언인 셈이지요. 아르주나가 누굽니까? 천하에 둘도 없는 장수입니다. 장수면 장수답게 전쟁에서 싸워야지 자기가 마치 승려인 양 이상한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117


아르주나에게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라고 조언한 것은 자기 본성에 충실하라고 조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을 왜곡해서 보지 말고 제대로 보라는 것이지요.  118


<기타>에서 비폭력주의를 이끌어낸 것은 언제부터일까?  '비폭력'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아힘사'에서 기원한다. 이 단어는 불살생 즉 살생하지 않음을 뜻한다. 

<기타>에서 요가란 정신을 수련하여 보다 더 잘 살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삶의 길을 가리킨다.

인도인이 따르는 가장 전형적인 세 가지 좋은 삶의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 잘 살기 위한 세 가지 길을 뜻하는 그 세 가지 요가는 주로 지혜(지식)의 요가, 행위의 요가, 사랑(신애, 헌신)의 요가로 불린다.

이런 큰 츨 아래 이 세상에서 세 유형의 인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유형은 앎을 좋아하고 둘째 유형은 행동을 좋아하고 셋째 유형은 감정을 좋아한다. 첫째는 머리로 살고 둘째는 팔과 다리로 살며 셋째는 심장으로 산다. 이 세 유형이 각각 차례대로 지혜, 행위, 사랑의 요가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왜 <기타>의 크리슈나는 세 가지 요가를 가르칠까? 이유는 꽤 분명하다. 전쟁에서 싸우지 않으려는 아르주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다.  144

 

지혜의 요가 - 지혜의 요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는 우리의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보지요. 이 무지를 없애기 위해서 지혜의 길을 내세우는 거예요.

지혜란 뭘까요?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을 구별해서 아는 힘을 가리키지요.

불변하는 것을 그 누구도 소멸시킬 수는 없다오. 이 유한한 육신들이란 영원하고 불멸하며 불가사의한 영혼의 것이라고 말해진다오. 육신은 영원하지 않은 반면 영혼은 영원한 것이라는 가르침이죠.

행위의 요가 - 크리슈나는 행위를 탁월하게 잘하는 것이 행위의 요가라고 말해요. 크리슈나는 '행위에 대해서도 깨달아야만 하고 그릇된 행위에 대해서도 깨달아야만 하며 행위를 하지 않음에 대해서도 깨달아야만 하기 때문이오. 행위의 길은 심오하다오'(4.17)

행위의 요가란 행위를 하되 행위의 결과에 신경쓰지 말고 행위 자체에 몰두하라는 거예요. 

사랑의 요가 - '나에게 모든 행위를 바치고서 나를 지고한 자로 여기며 오로지 전념하는 요가로써 나를 명상하면서 숭배하는 자들에게, 나에게 마음이 몰입된 자들에게, 머지않아 나는 죽음과 윤회의 바다로부터 구해주는 구세주가 된다오. 아르주나여, 바로 나에게 마음을 고정하시오. 나에게 생각을 고정하시오. 그 결과로부터 그대는 의심 없이 바로 나에게 머물 것이오.'(12.6~12.8)

어떤 행위를 하든지 마치 신의 행위인 양 항상 조심스럽게 하라는 거니까요.  177-180


<기타>에서 크리슈나의 모든 설교는 어김없이 이 세가지 요가로 분류된다.  181


각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이 어떤 모습으로 얽히고설켜 있는지 <기타>는 광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상상의 최고 정점에서의 대답은 이것이다. '얽히고 설켜 있는 모양새가 어떠하든지 모든 요가가 하나고 모든 길이 하나다.'  183


행위의 방법, 행위의 본성, 행위의 근거를 죄다 탐구해야만 보다 성공적인 행위가 나온다는 거지요. 그리고 행위의 방법은 행위의 요가이고 행위의 본성은 지혜의 요가이고 행위의 근거는 사랑의 요가.  197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욕망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욕망이 없으면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이 없으면 욕망이 없다.' 이것은 <우파니샤드>의 가르침과도 흡사하다. 두려움이 없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자유이다.  201


작은 것과 큰 것, 작은 결과와 큰 결과, 작은 행복과 큰 행복, 이것은 인도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이층의 사유이다. 일틍은 작운 것의 공간이고 이층은 큰 것의 공간이다. 일층은 시간이 흐르는 무상한 공간이고 이층은 시간이 멈춘 영원한 공간이다. 보통 사람들은 일층에서 살지만 가끔 이층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다.  218


'왜냐하면 태어난 것은 명백하게 죽고 죽은 것은 명백하게 태어나기 때문이라오.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그대는 슬퍼하지 않아야 하오.'(2.27)


제어할 수 없는 것은 제어할 수 없고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제어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둘을 뒤 섞는다. 제어할 수 없는 것을 제어하려고 하고, 제어할 수 있는것을 제어하지 않으려고 한다. 즉 운명을 제어하려고 하고 욕망을 제어하지 않으려고 한다. 즉 운명을 제어하려고 하고 욕망을 제어하지 않으려고 한다.

<기타>의 결론은 이 둘을 뒤섞지 말라는 것이다. 제어할 수 없는것과 제어할 수 있는 것을 분명하게 구별하면서 사는 지혜를 가지라는 말이다.  245


힌두교 연구자를 만난다면 그는 업 이론의 기원과 내용을 다름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해 주리라.

"업 이론이라는 건 쉽게 생각해서 '뿌린 대로 거둔다'는 내용이죠. 사실 굉장히 합리적인 이론이에요. 이 이론은 세 가지 이유에서 만들어졌어요. 첫째는 이 세계가 우연적이지 않고 뭔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제시하기 위해서예요. 콩 심은 대는 콩이 나야지 팥이 나면 안 되잖아요. 둘째는 이 세상의불공평함을 설명하기 위해서예요. 누구는 부자로 태어나고 누구는 가난뱅이로 태어나는 그러한 차별을 설명하고 싶은 거죠. 셋째는 숙명이 아닌 자유의지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확인시키기 위해서예요.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죠. 연재의 삶이 과거에 뿌린 것 때문에 결정된다면 그건 숙명론이에요. 하지만 현재에 무엇을 뿌리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면 이건 자유의지잖아요. 그래요. 업 이론은 확정된 운명을 조금은 받아들이되 자유의지로써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가기 위해 처음 창안된 건데 어쩌다 보니 운명에 순종하는 이론으로만 잘못 알려지고 말았어요."


애당초 업 이론은 숙명론적인 사고방식보다 운명을 개척하는 사고방식에 더 가까웠다. 새로운 씨앗을 잘 뿌리기만 하면 언젠가 훨씬 나은 열매를 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점차 두 가지 특면에서 숙명론이 되었다. 하나는 현재의 고통을 참으면 그 결과로 더 좋은 세상이 오므로 현재의 고통을 숙명인 양 여기면서 인내하라는 것. 다른 하나는 현재의 모든 삶은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고 가치가 있으므로 현재의 위치를 숙명인 듯 수용한 채 만족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매우 적극적으로 운명에 도전하던 인생관은 사라지고 그 운명에 대해 체념하는 인생관이 나타난다. 업은 반드시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 된다. 업은 굴레가 되고 속박이 된다. 자우의 반대말이 되는 것이다. 급기야 업 자체가 고통이다.  246-248


어쩌면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자유를 외치는 목소리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구속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을 가능성도 더 높아지요. 더 강하게 구속하기 위해서는 자유의 달콤함을 담은 희망의 찬가를 계속 틀어주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기타>는 자유의 창문을 열어놓고 잇는 듯하지만 좁은 창문으로 빠져나가려는 사람을 열심히 다시 불러들이죠. 그를 운명의 하수인으로 만들고 순응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예요.'  248-249


"법전의 명령(가르침)을 내버린 채 욕망에 따라 행하는 자는 완성에 도달하지 못하고 행복이나 지고한 목적지에도 도달하지 못한다오."(16.23)

크리슈나의 이 말은 다음의 두 가지를 암시한다. 하나,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행위 이외에 다른 행위들을 결코 행해서는 안 된다. 둘,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행복이나 지고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250


<기타>는 힌두교의 최고신이 인간에게 들려주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노래이다. <기타>는 많은 사람이 귀 기울여 들을 만한 가르침을 담은 지혜서이다. 

어렵지 않게 실행할 수 있는 방법들로 다음 몇 가지를 제시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생명력 있는 내용을 구하기 위한 방법들이다.

첫째, 과대평가와 과소평가를 하지 않도록 한다. <기타>를 신비주의나 영성주의의 시각에서 접근할 때 주로 과대평가에 빠진다. 또 <기타>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지혜를 담고 있다거나 인류에게 가장 보편적인 지혜를 담고 있다고 여기는 것도 엉성한 과대평가이다.

인도인이 <기타>를 과대평가하는 간접적인 예가 있다. 조금만 가방끈이 긴 사람이라면 <기타>의 어느 한 구절을 암송하면서 삶에서 대면하는 이런 저런 문제에 관해 그 구절로써 평가하거나 적용하려는 태도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는 <기타>를 인용하기 위한 인용일 뿐 거의 설득력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은 것처럼 우스꽝스럽다. <기타> 만능주의에 빠진 듯한 사람은 <기타>를 경외하기만 할 뿐 이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른다.

과소평가는 어쩌면 더 위험할 수 있다. 이성과 합리성의 시대에 어찌 미개한 인도의 고대 문헌을 가져와서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바탕 난잡한 말들을 풀어놓느냐, 하는 그런태도다. 눈이 있어도 읽으려 하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오나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서구적인 생각의 틀에 인도의 <기타>가 끼어드는 것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밀어내고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타>에 익숙한 사람조차도 종종 과소평가에 가담하곤 한다. 하지만 과대평가에 적절한 근거를 내세우는 경우가 매우 드문 것처럼 과소평가에도 그런 경우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이 신념과 정서와 감정을 앞세운 채 <기타>를 거부하거나 폄하한다.

둘째, 전후좌우로 종횡무진하며 읽어보도록 한다. 전후라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가리키고 좌우라는 것은 저곳과 이곳을 가리킨다. 그러니 전후좌우란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종횡무진이란 거침없이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기타>를 과거의 유산으로만 여기지 않고 <기타>를 인도만의 문화적 틀에 한정시키지 않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횡성수설하며 함께 더들도록 한다.

넷째, 해석과 체험을 끝없이 순환시키도록 한다.  316-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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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한 적이 있는가.

실패에 좌졸하고 몇 날 며칠을 서럽게 울어본 적 있는가.

사랑에 절만하고, 사랑에 절실해 본 적이 있는가.

상처를 받는다는 것.

그것은 청춘이 누릴 수 있는 행복한 비명이다.

더 아파하고 더 슬퍼하기. 

우리는 그만큼 단단해지고 평온해질 것이다.  37


가난은 발버둥 쳐도 헤어나올 수 없는 굴레이고, 그 굴레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도라는 나라의 법칙.  61

인도 여행을 하면서 내가 외면했던 그들의 가난. 엄마의 품에 안겨 3등석에 탄 아기는 어른이 되어서도 3등석을 타야 하는 정해진 인생.  66


우리는 둘 다 모서리였다. 누구 하나는 사포가 되어 상대방의 날선 모서리를 문질러줘야 했지만 나만큼 그도 예민한 직업이었고, 오히려 나보다 더 날이 선 하루하루를, 절벽 끝에 매달린 심정으로 살아가고있었다. 둘 다 모서리라 서로 부딪히며 흠집만 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번 부딪혀 보지도 않고 우리는 너무도 일찍 서로를 포기해 버렸다.  94-95


인도 대륙을 돌며 새로운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전혀 다른 세상에 떨어진 기분이다. 사람들의 옷차림과 표정도, 공기의 감촉과 냄새도 기차와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낯설다. 새로운 지역데 도착할 때마다 나는 수없이 인도에 대한 정의를 다시 써내려갔다. 도무지 이 나라는 각 도시들 사이의 닮은꼴이 없다. 그것이 나를 계속 긴장하게 만들었다.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첫인상이 거의 모든 것을 좌우하듯이,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시간과 돈을 들여 애써 떠나왔다는 이유 때문에 여행자들은 웬만하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한다. 거리의 소음에도 '이거 익사이팅할걸?' 맛없는 음식에도 '참 흥미로운 맛인걸?' 사기를 당해도 '참 좋은 경험하는구먼'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정도로 온화한 여행자의 마음이건만, 첫 느낌부터 잘못 왔다 느끼게 만드는 장소라면, 그곳은 마른 하늘에 쌍무지개가 뜨고 우중충한 밤 하늘에 별똥별이 떨어진다고 해도 여행자의 마음을 되돌리기 힘들다.  121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금을 소비하는 국가는 언제나 인도이고, 명품보다 보석으로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유일한 나라가 바로 인도이다. 세계 명품시장이 유독 인도를 뚫지 못하는 이유는 인도인들이 자국의 역사가 담긴 보석과 자수, 수공예품에 더 큰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니 나는 인도의 뭄바이나 방갈로르의 소위 잘나가는 부자 거리에서도 루이뷔통이나 에르메스, 베르사체 같은 명품 간판을 본 적이 없다.  138-139


인도에서 일주일만 보내도, 굳이 극장에 가서 인도 영화를 보지 않아도 당신은 인도 영화에 흠뻑 빠지고 이들의 팬이 될 것이다. 호텔이나 식당의 TV에서는 언제나 지나간 옛 인도 영화가 나오고 있고, 영화의 하이라니트는 잘 편집된 뮤직비디오로 상영된다. 인도의 인기 배우들은 길거리 광고 전광판에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고 TV광고에서도 철철 넘치는 매력을 발휘한다. 우리는 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인도 영화가 흡수되고 말아 어린 시절 유덕화와 주윤발에 빠졌던 것처럼 인도 배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152


인도는 여행하기 쉽지 않은 나라이다.

하지만 인도 여행의 매력은 예상할 수 없는 행복이 찾아왔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 법정 스님은 저서 <인도기행>을 통해 인도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건이 넘쳐나지만, 어느 한순간 다시 눌러앉게 만드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나라라고 말씀하신다.  162


상상할 수 없는 날들의 연속.

3일 고생하면 하루는 반드시 보상이 뒤따른다. 이를테면 온통 채식뿐인 도시에서 고기냄새가 절실해질 때쯤, 내일은 먹음직스러운 양고기와 치킨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비족고 불편한 숙소에서 디스크에 걸릴 정도로 불편한 잠자리에 뒤척였다면, 다음날은 흰 모래사장에 놓인 방갈로와 바람 솔솔 맞으며 몸을 뉘일 수 있는 해먹이 짠하고 등장한다. 숙소를 못 찾아 무거운 배낭을 이고 한 시간 넘게 땀을 뻘뻘 흘리고 헤매면, 그곳엔 기다렸다는 듯 얼음통에 한가득 시원한 맥주를 팔고 있다. 

인도 특유의 향신료 마살라가 지긋지긋해질 때쯤, 어느새 나는 바닷가 마을에 도착해 그릴에 구운 생선요리를 먹고 있었다. 인도는 이렇듯,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을 때마다 놀라운 반전을 선물하는 것이다.  162-163


이별을 해도 더 이상 심장을 쿵쿵 찧는 고통이 없어요. 이별을 할수록 머리만 지끈거려요. 머리만 쥐어뜯을 뿐 더 이상 아프려하지 않아요. 자존심인가봐요.  196


많은 인연을 거치고 이별을 할수록 깨달음은 많아지는데 그렇다고 안목이 높아지는 것 같지는 않아요. 당신도 그런가요? 더 형편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러다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나도 당신처럼 내 나이에 맞는 고민을 해요.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사랑은 사치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그럼에도 펄펄 끓는 사랑을 해야 해요. 그러니 더 이상 사랑에 고개 돌리지 말아요. 지난 사랑에 얽매이지도 말고요.  197


난 내가 그토록 끔찍이 여겼던 맨 바닥에 철퍼덕 앉아버렸다.

그 순간 내게 평온이 찾아왔다. 나도 그들처럼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풀썩 앉아버리니 그보다 편하고 행복할 수 없었다. 어깨를 누르던 걱정도,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슬픔도 아물어가고 있었다.  203


당신이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면 온 마음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철퍼덕 앉길 바란다.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쉽게 풀리기도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단순하고 명쾌하다. 기다림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진다면 기다린 후의 행복도 오지 않는 것이다.

불편하고 괴롭고 힘들기만 했던 인도가 그렇게 내 품에 들어와 살포시 앉았다.  205


여행과 음악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잠깐 외출할 때도 음악을 챙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유독 여행을 할때만 음악을 듣는 사람도 있다.  209


여행은 단순해지려고 떠나는 것이다. 열심히 일한 그대들이 몇 달을 기다리고, 몇 주일을 계획해서 떠나는 것이 진짜 여행이다. 

그런데 나는 글만 쓰는 단조로운 일상을 피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떠날 때만 마음 구석구석이 복잡해지고 심란해진다. 잡다한 생각들은 한국으로 돌아와 소재가 되어 낱장의 글이 되고 책이 된다.  213


인도에서 친절은 돈에 비례하지 않는다.

인도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게 화두를 던진다. 모든 게 뒤엉킨 실타래 같지만, 실 하나만 잘 잡으면 모든 게 스르륵 풀리는 나라.  225


평상시에 수다를 즐겨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 혼자 잘 논다는 뜻이다. 이것이야말로 혼자 여행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된다. 혼자 있어도 지루하지 않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지 않아도 시간은 참 잘도 간다.  244


여행을 하면 진짜 어른이 된다는 말.

세상을 넓게 보고 성숙해진다는 말.

그게 사실이라면 난 지금쯤 세상만사에 도가 터 있겠죠.

그런더ㅔ 나는 돌아오면 똑같은 이유로 고민을 하고, 똑같은 일들에 부딪혀요.

유치한 문제로 친구와 다투고, 엄마의 잔소리에 까칠하게 맞서고, 친구들의 고민에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죠.

인도에서 간 감기약은 인도에서만 낫는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오면 여기에 맞는 처방전은 따로 있나 봐요.

그래도 확실한 건 떠나기 전과 후가 조금은 달라져 있다는 거.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라 나만 알고 있긴 하지만요.  285


꼭 멀리 떠나지 않아도 여행을 할 수 있어요. 

아는 후배는 얼마 전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다녀왔대요. 그곳 제주도의 풍경을, 처음으로 혼자 길을 찾아 나섰던 그 설렘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고.

내 친구는 여름휴가를 아껴뒀다 추석연휴까지 합쳐서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왔어요.

이미 20개국은 여행해 본 그녀에게 이제 진짜 여행은 자신의 체력과 한계에 도전해 보는 일이 된 거예요.

열 여덟 살 소녀에게는 공항에 가는 것만으로도 여행이 될 수 있어요. 

소녀에게는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을 테니까요.

내게는 인도가 가장 먼 나라였어요.

서른에 떠나는 여행은 유럽도 일본도 아닌 꼭 인도여야만 했거든요. 가장 멀리 왔다고 생각하면 그게 여행이에요.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도 내 주변도 그대로라고 느껴져도 실망하지 말아요.

말했잖아요. 누구나 아주 조금은 달라져 있어요.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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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오지 않은 미래와 겪지 못한 과거가 마주본다. 그리고 서로에게 묻는다. 

열일곱은 부모가 되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서른넷은 자식을 잃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아버지가 묻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나는 큰 소리로 답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가 묻는다.

더 나은 것이 많은데, 왜 당신이냐고.

나는 수줍어 조그맣게 말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로 태어나, 다시 나를 낳은 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요.

아버지가 운다.

이것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다.  7


지금도 드센 성격이 남아 있긴 하지만, 어머니의 말씨가 풀죽은 듯 순해진 건 세상이 남아 있긴 하지만, 어머니의 말씨가 풀죽은 듯 순해진 건 세상이 '시발'로만 해결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은 순간부인 듯하다.  13


아버지는 숙맥이 맞았지만 무모하고 모험심 강한 숙맥, 말하지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숙맥이었다.  15


책은.... 읽으려다 이내 때려치웠다. 어떤 상황에서건 태아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된다는 거였다.  35


"어... 나는. 애가 꿈이 있는 아이였음 좋겠어. 너는?"

어머니가 서글서글한 눈망울에 기대를 한껏 담아 말했다.

"음.... 나는 얘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아이였으면 좋겠어."

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어머니를 나무랐다. 

"야, 그거 쉬운일 아니다."

어머니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왜? 아기들한테는 그것만큼 쉬운 일이 없을걸? 그리고 우기가 그렇게 만들면 되잖아."  36


"생각해보니까 말이야."

"응."

"뭘 잘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말이야."

"응."

"건강하지만 했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잠시 눈을 굴렸다. 그러곤 너무 차분해서 어딘가 슬프게 들리기까지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거면 되겠다."  37


나의 늙음은 텅 빈 노화였다.  53


두 사람은 배워야 할 게 많았다. 한 존재를 먹이는 법, 재우는 법, 씻기는 법, 그리고 이해하는 법까지 ... 마치 내가 아닌 자기들이 태어난 양, 처음부터 모든 것을 하나하나 깨우쳐가야했다.  60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

자기가 보지 못하 ㄴ자기를 다시 보는 것, 부모가 됨으로써 한번 더 자식이 되는것. 사람들이 자식을 낳는 이유는 그 때문이지 않을까?  79-80


"이런 말 하긴 좀 뭣한데, 세상엔 자기 부모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효도하는 살마들도 많아."  90


"그럼 얼마 동안 아팠던 거지?' 

"음, 십사년요."

"그래, 십사년."

"......."

"근데 그동안 씩씩하게 정말 잘 견뎌왔지? 지금도 포기 않고 이렇게 검사받고 있지? 다른 사람들은 편도선 하나만 부어도 얼마나 지랄발광을 하는데. 매일매일, 십사년. 우린 대단한 일을 한 거야. 그러니까...."

"네"

어머니가 목소리를 낮추며 부드럽게 말했다.

"천천히 걸어도 돼."  101


내가 새끼 노릇 하느라 티를 안 내서 그렇지, 내 어휘가 얼마나 풍부하고 내 문장이 얼마나 유려한지 알면 두 분 모두 깜짝 놀랄 터였다.  107


'데인 것처럼...' 맞아. '늙음'에 데인 것처럼 놀랐다고 했어요.

"저는 잘 이해가 안돼요."

"뭐가?"

"나이 든 사람 피부에 탄력이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잖아요."

"그렇지."

"머리가 세는 것도, 이가 빠지고, 눈이 나빠지고, 주름이 느는것도,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잖아요."

"그래."

"그런데 그렇게 좋아했다면서, 그 짧은 접촉 한번에, 마치 늙음이 자기에게 옮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정색하고 돌아설 정도면, 그 여자가 상상한 늙음이란 대체 어떤 거였을까요?"  134-135


너무 빨리 먹은 시간들이 네 속에 가득 구겨져 있다고.  183


"제가 저번에 물어봤거든요? 형! 형은 오토바이 탈 때 무슨 생각해요?하고."

"어."

"그랬더니 '아무생각안해' 그러더라고요."

"거봐라! 쯧쯧..."

"그래서 왜요? 하고 물었더니, 그 형이 비장하게 답하더라고요."

"뭐라고?"

"생각하면 죽으니까....하고."

"허, 참!"  206-207


궁금한 게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물어보는 습관이 든 거였다. 지금이 아니면 다신 물어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조금 더 성급해지고 경솔해져도 좋을 것 같았다. 특히 상대가 장씨 할아버지 같은 분이라면 더할나위없이 좋았다. 그게 정답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대답 속엔 누군가의 삶이 배어 있게 마련이고, 단지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당신들의 시간을 조금 나눠갖는 기분이었다.  208


'죽음'보다 나쁜 건 '늙음'이다.  211


둘 중 하나를 선택했으면서 아무것도 안 가진 척하는 것도 기만일 수 있다고..  215


엄마와 밥을 먹으며 티브이를 보던 일상적인 풍경이야. 그때 우리는 '이웃에게 희망을'이란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어. 근데 엄마가 숟가락으로 국을 뜨다 말고 갑자기 그런말을 하더라?

저 사람들이 저렇게 된 데는 아무 이유도 없는 것 같지 않으냐고. 나는 영문을 모른채 가만 고개를 끄덕였지. 그랬더니 엄마가 그렇다면 우리 식구한테도 아무 이유 없이. 또 근거없이 저런 일이 생길 수도 있는거 아니냐고 하더라. 자긴 그게 너무 불안하다고.  216


어쨌든 내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게 나를 두근대게 해.  272


"그럼 현미경으로 찍은 눈 결정 모양도 봤어요?"

"그럼."

"나는 그게 참 이상했는데."

"뭐가?"

"뭐하러 그렇게 아름답나."

"...."

"어차피 눈에 보이지도 않고 땅에 닿자마자 금방 사라질 텐데."  287


"넌 입버릇처럼 항상 네가 늙었다고 말하지. 그렇지만 그걸 선택 할 수 있다고 믿는 거, 그게 바로 네 나이야. 질문 자체를 잘못하는 나이, 나는 아무것도 안 고를 거야. 세상에 그럴 수 있는 부모는 없어."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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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애니멀

저자
데이비드 브룩스 지음
출판사
흐름출판 | 2011-12-15 출간
카테고리
자기계발
책소개
관계가 사람을 창조한다!사랑과 성공, 성격을 결정짓는 관계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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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 기록 보기


아마존 42주 연속 베스트 셀러인 책이라 한다. 10년쯤 전에 한국에서도 반향을 일으킨 '보보스'라는 표현으로 책을 내었던 저자이다.

지인의 추천을 통해 접하게 되고, 책을 읽었다.

첫 번째 눈에 띈것은 앞서 언급한 '보보스'의 저자이라는 점과 심리학적인 접근을 통해 일생을 관찰해 본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두 번째로는 책의 두께이다. 

세 번째는 책의 색이다. 무슨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표지의 색이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나의 무의식속에 색이 긍정적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책은 '무의식'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지에 대해 책 전체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무의식은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데, 우리는 학교에서 배운 첫 번째 교육기관인 가정내에서 형성된 관계를 통해 어린시절의 무의식 생성과, 성장해 가면서 두 번째의 교육기관인 학교를 통해 배움과 소통으로 형성된 무의식이 사람의 일생을 통해 나타나게 되고, 성인기의 생활속에서 추구하는 대부분의 생각을 좌우하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점을 방대한 심리학적 자료와 소설적인 전개 방식으로 서술하였다.

에리카와 해럴드라는 두 주인공이 태어나면서 부터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서의 환경과 교육이 성인이되어 가는 그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사회 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나게 되며, 그들의 자의식이 어떤 작용을 통해 전개되어가는지에 많은 심리학자와 철학자들의 표현을 통해 서술한다.

또한 그들이 서로다른 환경과 가치관속에서 일을 통해 만나게 되고 사랑하고 결혼하게 되는 과정에서 사람의 사랑이 어떤 작용들을 해 주는지.

사회생활에서 열정이 나타나는 방식, 노인기에 그들의 심리적인 상태와 해럴드의 죽음까지를 그려내면서 인간이 무의식을 통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으며, 관계의 소통이 사람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다.


개인적으로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 일일이 수를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심리학 서적들을 꽤나 읽었다.  

이 책은 방대한 자료를 통해 서술하였기에 낯 익은 표현들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을 꾸미면서 소설형식을 빌리지 않았다면 매우 딱딱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인데 그렇더라도 내용은 매우 흥미로웠을 거라 생각된다. 책의 판매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다소 딱딱한 내용을 소설형식으로 인생전체를 다루어 줌으로 독자에게 가까이 그리고 따라가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해 주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이성을 보려할 때 그의 부모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사랑에 눈이 멀면 잘 보이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부모를 만나고 그들의 생활을 보게 되면 이성이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지 짐작할 수 있고, 실제로 그 범주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이 점을 보더라도 어린 시절의 환경은 한 사람의 거의 모든 일생을 통해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학자들의 표현에 의하면 어린아이들은 4살 이전에 태도를 거의 습득하게 되고, 초등학교 입학전에 부모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해 줄때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두뇌의 발달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 말을 들어서 일까 .. 관찰해 보면 분명 틀리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태도를 보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어린시절에 그들이 부모와의 교류가 많았는지 적었는지는 알 수 있다.

책의 내용에서도 해럴드는 여유있는 집안에서 부모와의 소중한 관계를 형성해 나가고 그들의 관심과 보살핌이 훌륭한 교육이 되었던 시절을 보낸다. 

그에 반해 에리카는 관심과 돌봄을 거의 받지 못한 유년시절을 가졌다.

누가 옳고 그른가의 판단은 뒤로하고, 그들의 성인기의 전반에서 심리적 안정감과 평정은 틀리게 작동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해럴드는 학교에서 좋은 교사를 만나게 됨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체계적인 방법을 알게 되지만, 에리카는 반대였다.

물론 에리카가 무기력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여기서 생각해 볼 점이.. 우리의 현실에서 에리카와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자라온 사람들의 대다수는 무력감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기대하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스스로 삶을 꾸려가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성공에의 열망이 있었다.


성인이 된 그들이 에리카의 사업아이템으로 만나고 사랑을 하게 되고 함께 하면서 사업을 운영하고 환경의 변화로 사업을 접게 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우리가 사랑을 하게 되는 부면에서 생각하게 될 점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들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만나 살아가게 되면서 공통된 목표가 있음으로 크게 틀어지지 않았던것 같다. 또한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다.

에리카는 사업을 접고, 회사를 들어가면서 회사의 엘리트들의 사고와 생활에서 잘 못된 부면들을 관찰하게 되는 점들은 책에서 언급되지는 않지만 해럴드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을거라는 생각을 한다.

책에서는 도덕관념은 교육이 아니라 사람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다고 하였지만, 개인적으론 그렇기도 하지만 해럴드와의 생활에서 해럴드를 통해 자연스럽게 배운 부면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무의식의 장점과 단점을 언급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작용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부면들이 많이 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스스로가 장점을 극대화하기위해 조심해야할 부면들을 점검하고 성장시켜 나갈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학자들에 따르면 어린 시절 좋지 않은 영향을 많이 받고 자라 성인이 되어도 많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좋은 스승관계를 통해 그는 발전하고 안정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스승의 관계로는 친구도 있으며 선생도 있고, 선배나 이성일 수 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자녀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다시말해 인간의 본성이 좋고 나쁨을 떠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인생의 어느 시점이든 성장 발전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누구나 좋은 삶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계몽주의와 영국 계몽주의의 차이를 언급하면서 우리에게 이성과 열정이 있으며 그것을 변화 발전하려는 의지는 무의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저자는 전반적으로 교육을 통해 인간은 발전 가능하다는 심리학자들의 의견에 동의 한다.

물론 자신이 본성이 정해져 있기에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이 책의 내용들이 꽤나 불편해 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본성이 있는 반면에 교육을 통해 변화 발전의 가능성도 열어둔다면, 적어도 50:50정도의 비중을 둔다면 이 책은 심리학적인 관점에서의 인간의 환경과 교육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해럴드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 전에 해럴드는 삶을 마무리하면서 4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다.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들이며,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만 하는 것들이다.

자신의 깊이, 무엇을 남기는지, 세상을 초월해보았는지, 그리고 깊은 사랑을 해보았는지..

인생을 마감하는 나이가 아니라 이런 질문들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진지하게 늘 고민해 보아야 할 부면이라 생각이 든다.


책의 내용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가공의 인물이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많은 것들이 내면에 남아 어떻게 작용하게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공감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그들의 희로애락을 통해 과학적으로 밝혀진 내용들의 작용을 관찰해 보라고는 하지만 결코 쉽게만 생각하고 넘어갈 부면들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삶은 진지하고 충실하기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즐거움과 행복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럴때 무엇이 나에게 영향을 행사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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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쏟아진 찬사

이 책은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류가 공존하기 위한 대안으로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제안한다.' - 이어령(전 문화부장관, 중앙일보 고문)

인간의 다양한 삶의 패턴과 그것에 내재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 황상민(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무의식이 우리 인생에 끼치는 영향을 다룬 매혹적인 보고서 - 이코노미스트  4-5


서문 - 무엇이 우리를 비범한 성취와 행복으로 이끄는가?

'비인지적 기술(noncognitive skill)'이란 감추어진 자질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로, 쉽게 계량하거나 측정할 수는 없지만 행복과 성취를 얻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7

이 책에서 다루는 성공 스토리는 내면의식(즉 감정, 직관, 편견, 동경, 유전적 특성, 사회적 규범등 무의식적 영역)이 수행하는 역할을 강조한다.  8

무의식의 영역은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원시적인 영역이 아니다. 성적 충동을 억압하는 어두컴컴한 동굴이 아니다. 무의식의 영역은 정신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9

일상생활에서 온갖 감정을 적절하게 교육할 때 우리의 무의식 체계는 달라질 수 있다.  10

뇌 연구가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기존의 철학이 옳음을 입증할 수는 있다.  11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존 티어니는 배우자 없이 혼자 사는 사람은 이성에게서 끊임없는 단점을 찾아내는 내면의 무의식 장치인 '습관성 결점 찾기(flae-o-matic)'에 시달린다고 주장했다.  27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사는 삶이 다른 사람들의 삶과 매우 다르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동일한 경험은 마치 기적처럼 보인다. 동일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은 두 사람의 관계에 운명이라는 화려한 꽃가루를 뿌려준다.  29

감정 전달의 90퍼센트는 비언어가 담당한다. 몸짓은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감정을 조직하는 무의식적인 언어이다. 몸짓을 하면서 내적인 상태가 만들어진다.  31

여자나 남자나 성적인 관계를 나누는 상대방에게 바라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친절이다.  33

이성은 감정에 둥지를 틀고 감정에 의존한다. 감정은 사물이나 상황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성은 이렇게 형성된 가치를 바탕으로 선택을 할 뿐이다. 인간의 마음은 낭만적이기 때문에 실용적일 수 있다.  43

케네스 도지 박사는 "처리되는 모든 정보는 감정적이다. 감정은 인식 활동을 추동하고 조직하고 증폭하거나 약화시키는 에너지이며, 거꾸로 감정이 인식 활동의 경험이자 표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44



상대적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여자는 그렇지 않은 여자에 비해서 오럴섹스를 훨씬 더 많이 하는 경향이 있고, 동성애 행위를 더 많이 하는 경향이 있으며, 다양한 섹스 행위를 실험하는 경향이 있다. 신앙심이 돈독한 여자는 그렇지 않은 여자보다 모험을 덜 즐긴다. 그러나 남자의 경우 성적인 모험심이 신앙 여부와 그다지 관련이 없다.  54



이탈리아의 신경과학자 마르코 야코보니가 말했듯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일을 자신에게 직접 일어난 일처럼 느낄 수있다.  71

듀크대학교의 심리학 교수인 캐럴 애커먼은 실험을 통해서 아기가 흉내 내기 놀이를 많이 하면 할수록 일찍 말을 배운다고 주장했다. 

타냐 차트란드와 존 바흐 연구팀은 두 사람이 서로의 동작을 더 많이 모방하면 할수록 서로를 더 많이 좋아하게 되며, 서로를 더 많이 좋아할수록 더 많이 모방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많은 학자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무의식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능력은 감정이입과 도덕성을 쌓아나가는 벽돌이라고 믿는다.  72

사람들은 서로 돈독한 유대감을 나눌 때 웃음은 자연스럽게 흘러넘친다. 또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듣고 있는 사람보다 46% 더 많이 웃는 경향이 있다. 

웃음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감정적으로 우호적인 환경에 자기가 긍정적으로 대응한다고 느낄 때 저절로 나오는 것 같다.  74



발달심리학자들이 확인한 사실 중에 뛰어난 심리학자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훌륭한 부모가 될 수 있다는 항목이 있다. 

대부분의 부모는 낱말카드나 스티커 따위를 이용해 훌륭하게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런 부모들이 갖추고 있는 조건이 하나 있다. 너그럽고 착하다는 점이다. 아이에게 편안하고 예측 가능한 안정된 리듬을 주어야 한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애정과 엄격함을 조화롭게 결합해야 한다.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정서적인 유대감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세상이 던지는 어려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생생한 사례를 얼른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마음속에 실행 모델을 설정하고 그 모델을 모방할 수 있다.  101-102

영국의 심리학자 존 보울비는 아이들은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필요가 있다. 동시에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돌볼 필요도 있다. 이런 두 가지 필요성은 때로는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102

보울비는 한 아이가 장차 자신과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 결정하는 중대한 요소는, 아이와 엄마(혹은 가장 중요한 양육자) 사이의 관계라고 주장했다.  103

전반적으로 아기를 돌보는 태도가 믿음직하다면, 아기들은 부모가 곁에 있을 때 안전하다고 느낀다. 또한 절대적으로 옳은 양육 유형이란 없다. 아이는 부모가 일관성이 있고 예측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안정된 애착을 형성할 수 있다.  105

안정적인 애착관계를 형성한 아이는 스트레스를 잘 극복하는 경향이 있다.  106

회피적인 애착관계를 가진 아이는 논리적인 토론에는 뛰어날 수 있어도 대화가 정서적인 방면으로 흐르거나 자기 속내를 드러내라는 요구를 받으면 무척 불편해 한다. 이 사람들은 평소 느끼는 감정의 폭이 매우 좁고, 혼자 있을 때 가장 편하다.  107

많은 학자들이 초기 애착 양상이 그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추적하고 밝혀냈다.  109



아무리 무작위로 구성원을 설정한다 해도 사람들은 집단을 형성하며, 집단이 서로 인접해 있으면 갈등이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120


지식습득 1단계

교육심리 학자인 벤저민 블룸은 "학습의 첫 번째 단계의 효과는 학습자가 관련 주제에 빠져들어 매력을 느끼고 전문적인 정보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스스로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136

수많은 실험 결과를 놓고 보면, 책 읽는 장소를 이리저리 바꿀 때 습득한 정보를 더 적게 잊어먹는다. 바뀐 환경이 정신을 자극해서 기억의 거미줄을 더 촘촘하게 만들어준다.  137

지식습득 2단계

스탠퍼드대학교의 심리학 교수 캐롤 드웩은, 열심히 공부한 학생을 칭찬하면, 그 학생의 정체성을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으로 규정하며 이 정체성을 더욱 강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식 자동화하기... 자동화는 반복을 통해서 획득된다.  138

<스마트 월드>의 저자이며 언어학자이자 경영 컨설턴트인 리처드 오글이 '뻗어나감과 동질성(reach and reciprocity)'이라고 부른 과정.

어떤 분야의 핵심 지식에서 출발해서 과감하게 밖으로 나가 새로운 것을 배운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 새로 확보한 것을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 통합한다. 그런 다음 다시 나가 모험을 하고, 돌아온다. 나갔다가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한다. 오글이 주장하듯이, 한 집단의 순결성을 지나치게 주장하면 폐쇄적인 공간에 갇혀서 편협해진다. 지나치게 밖으로만 돌면 노력에 따르는 성과가 축적되지 않는다. - 확장과 통합의 리듬  139

학습은 전적으로 선형적이지 않다는 사실. 어떤 분야를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지점이 질적인 변화의 돌파구가 열리는 순간이다.  140

지식습득 3단계

테일러 선생이 헤럴드가 일기를 쓰기를 바란 이유는, 내면에 묻혀 있는 지식을 될 수 있으면 저항 없이 끄집어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헤럴드가 공상에 빠져 있기를 바랐다. 공상을 통해서 개발해 둔 직관을 언어로 전환시키기를 바랐다.  142

스탠퍼드대학교의 로버트 온스타인 교수는 "정신은 수레처럼 빙글빙글 돌아간다. 조건에서 조건으로 돌아가고, 나타남에서 정지로 돌아가고, 행복에서 걱정으로 돌아간다. 정신은 여러가지 다른 상태 사이에서 돌아가고, 행복에서 걱정으로 돌아간다. 정신은 여러 가지 다른 상태 사이에서 돌아가기 때문에 어떤 상태에서 정신이 작동하려면 거기에 맞는 다양한 구성요소를 선택한다."  144

지식습득 4단계

최고의 학습자는 논문 집필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따로 시간을 들여서 정보를 암호화한다.  145 

(헤럴드는 사이버 자료를 차단하고, 자신의 자료들에 빠져서 목적성을 분명히 하며 깊이 생각하면서 고대의 자료들이 오늘날에 어떤 사실들과 접하는지에 대해 찾아내고 정리하면서 생활한다.)


테일러 선생은 해럴드가 무의식을 넘나들고, 의식적인 과정과 무의식적인 과정을 토업하는 방식으로 논문을 쓰도록 안내했다. 처음에는 핵심 지식을 숙지하고, 그다음에는 그 지식이 머릿속에서 즐겁게 숙성되고, 지식에 질서를 부여하고, 관련되 자료를 한데 녹여 통합하고, 마법과도 같이 통찰이 의식에 튀어나올 때까지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고, 마침내 떠오른 통찰을 가지고 논문을 완성하게 한 것이다.  153



해럴드는 부모에게 열광적인 찬사를 들었다. "너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구나!"

이에 비해 에리카는 칭찬을 듣는 횟수에 버금갈 정도로 기를 꺾어놓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해럴드의 부모는 해럴드에게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이 가족은 사소한 게임을 많이 했으며 가짜로 모욕을 주고받는 정교한 대결도 자주 펼쳤다. 부모는 해럴드에게 자기들이 내린 결정과 특정한 제한사항에 대해 끊임없이 설명했으며, 해럴드는 부모와 자유롭게 토론하고 부모가 설정한 제한사항이 왜 잘못되었는지 말했다. 해럴드의 부모는 문법적인 오류를 바로잡아주었고, 덕분에 해럴드는 문법 교육을 따로 받지 않고도 문법을 뗄 수 있었다. 그래서 해럴드는 상대방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대답만 햇다. 언어 환경의 차이는 지능지수 및 학업 성적과도 연결되었다. 

간단히 말해 해럴드의 부모는 해럴드에게 돈만 물려준게 아니었다. 습관과 지식, 자기 계층의 인지적 특성까지 함께 물려주었다.

에리카는 이런 보이지 않느 강점을 대부분 손에 넣지 못했다. 그녀는 한층 더 찢어지고 갈라진 세상에 살았다. 펜실베니아대학교의 신경학자 마사 파라에 따르면, 중산층 아이에 비해서 빈민층 아이의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더 높다. 이런 차이는 기억력, 특정 모형에 대한 인식, 인지적 통계, 언어 능력 등을 아우르는 인식 체계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소형 포유류를 대상으로 한 실허머에서도 아빠 없이 성장한 동물이 아빠와 함께 성정한 동물에 비해 신경연결망 형성이 늦고, 그 결과 충동 제어 능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것은 돈이나 기회가 부족하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가 아니다. 가난과 가정불화는 개인의 무의식, 즉 자기 미래와 자기가 사는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바꾸어놓을 수 있다. 이런 차이가 쌓이 쌓여 누구나 금방 알아볼 수잇는 차이를 만들어낸다.  176

에리카는 한 가지 결정을 할 수 있었다. 환경을 바꾸는 것이엇다. 만일 환경을 바꿀 수만 있다면 완전히 다른 신호와 무의식적인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내면을 바꾸는 것보다 환경을 바꾸는 것이 더 쉽다. 환경을 바꾼 다음 새로운 신호가 작동해서 효과를 발휘하도록 맡기자, 에리카는 그렇생각을 했다.  175



칼럼니스트 월터 리프만은 "인간 본성이 필요로 하는것보다 우선하는것, 배고픔이나 사랑이나 즐거움이나 명성, 심지어 목숨 그 자체보다 우선하는 것, 인간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자기가 어떤 질서 정연한 규율 속에 놓여 있다는 확신이다."  183

아이는 태어나면서 이미 특정한 기질을 타고난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기질인 인생을 특정한 틀 안에 가두어두지는 않는다. 곤충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이 주장한 것처럼 이것은 하나의 사슬일 뿐이다. 예민한 반응력을 가지고 태어났을 수도 있고, 둔감한 반응력을 가지고 태어났을 수도 있으며, 천성적으로 쾌활활 수도 있고 천성적으로 우울할 수도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경험이 뇌를 자극하느냐에 따라서 진화한다. 그러나 진화의 범위는 한정되어 있다. 처음 태어났을 때는 고반응 집단으로 분류되었다가 나중에 중간 집단으로 분류될 수는 있지만,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단 기본적인 상태가 되고 나면, 그 기본 상태의 평균값을 중심으로 해서 좌우로 진동하는 양태를 보인다.  188

충동을 통제하는 능력을 가진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잘 조직된 가정에서 성장했다. 성장 과정에서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배워서 그 행동에 따른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은 자기가 어떤 것을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마시멜로의 유혹을 참지 못한 아이들 가운데 다수는 잘 조직되지 않은 가정에서 성장했다. 이 아이들은 행동과 결과 사이의 연관성을 잘 파악하지 못했으며, 눈앞의 유혹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전략 학습이 부족한 경향을 보였다.  191-192

충동을 통제할 수 있었던 아이들은 마시멜로를 냉정하게 인식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192

인격은 수백만 개의 작고 선한 영향력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신비로운 과정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형성된다. 인격 형성에는 공동체가 수행하는 역할이 중요하다.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고 자기를 통제하는 능력을 배양하기란 매우 힘들다. (뚱뚱보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에서 마른 체형을 유지하는 것도 매우 힘들다.) 또한 근본적인 매커니즘에 영향을 미치는 작고 반복적인 행동이 중요하다. 작은 습관과 적절한 예의 세상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방식을 강화한다. 선한 행동은 특정한 네트워크를 강화한다. '우리는 어떤 덕목을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그 행동을 획득한다'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발언은 옳다.  197


모방 본능을 점화시키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 몇 년 전 제프 코헨과 그레그 월튼이라는 두 연구자가 예일대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실험을 했다. 두 사람은 우선 학생들에게 수학자로 성공한 네이선잭슨의 인생을 짧게 소개했다. 그런데 잭슨의 전기에서 세부적인(하지만 실험에서는 핵심적인) 사실 하나를 바꾸었다. 학생들 가운데 절반에게 잭슨의 생일이 학생의 생일과 같다고 말한 것이다. 그 다음 전체 학생들에게 굉장히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게 했다. 자기 생일이 잭슨의 생일과 같다고 믿는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65%나 더 오래 수학 문제에 매달렸다. 이 학생들은 잭슨과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서 잭슨이 거둔 성공을 모방하려는 심리가 동기를 자극한 것이다. 

야망에 불타는 사람은 흔히 어린 시절에 재능을 보이고, 이 재능 덕분에 자기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생각을 갖는다. 

그저 어떤 성취가 정체성의 핵심이 되기만 하면 충분했다.  205

평범함과 비범함을 가르는 단 하나! -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심리학자 안데르스 에릭손이 보였주었듯이, 그것은 신중한 연습이다. 최고의 연주자들은 솜씨를 갈고 닦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훨씬 많은!) 시간을 들인다. 에릭손도 말했지만, 최고의 연주자들은 평균적인 연주자들보다 5배나 더 많은 시간 동안 연습했다. 

단지 연습에 들인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이류 수준의 업적을 남긴 사람은 즐겁게 연습했다. 반면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가장 신중하고 자기비판적으로 연습했다. 이런 사람들은 흔히 전체를 가장 작은 요소로 해체한 다음 작은 요소를 계속 반복해서 연습했다.  208

기억이라는 내적인 구조물을 쌓는 데는 힘든 연습과 투쟁이 필요하다.  209

터프츠대학교 경제학자 로렌스 해리슨 교수가 쓴 <자유주의 진실의 핵심>에 따르면, 진취적인 문화권 혹은 (해리슨의 표현을 빌자면) '성장 경향이 있는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 운명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장에 저항하는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은 숙명론에 더 많이 빠져 있다. 또 성장 경향이 있는 문화권 사람들은 재산은 창의성의 산물이며 얼마든지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성장에 저항하는 문화권 사람들은 재산과 관련해 제로섬이라고 가정한다. 

또 진취적인 문화권 사람들은 일하기 위해서 사는 데 비해 비진취적인 문화권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일을 한다. 진취적인 문화권, 즉 성장 지향이 있는 문화권 사람들은 다른 문화권의 가치관을 받아들인다. 이들은 더 경쟁을 즐기고 더 낙관적이다. 깔끔함과 정확성을 소중한 가치로 평가한다. 교육을 강조하며, 가정을 적대적인 세상에 놓인 자기만의 성채라 여기지 않고 더 넓은 사회로 나아가는 출구라 여긴다. 잘못된 일이 벌어지면 자기 탓으로 여기며, 모든 일에 책임을 진다. 남 탓을 하지 않는다.  233



돈과 행복 사이의 상관성은 복잡하지만, 사회적인 유대와 행복 사이의 상관성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인간관계가 깊으면 깊을수록 사람은 더 행복하게 산다. 결혼 생활을 오랜 세월 지속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결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한 해에 10만 달러를 버는 것과 심리적 이득 면에서 동일하다. 또 다른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한 달에 한 차례 만나는 모임에 회원이 되는 것은 소득이 두 배로 오를 때와 동일한 행복을 가져다준다.

1년 동안 한 사람과 섹스를 하는 사람은 같은 기간 동안에 여러 명과 번갈아가며 섹스를 하는 사람보다 행복하다. 친구가 많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스트레스 지수가 낮으며 더 오래 산다. 

여러 사람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행복과 가장 연관이 많은 일상 활동(섹스, 퇴근 후에 사람들과 어울리기, 친구들과 식사하기 등)은 사회적인 활동인데 비해, 행복에 가장 해로운 일상 활동은 출퇴근처럼 혼자서 하는 활동이다.  295



친밀함에 대한 갈망이 완벽한 로맨스나 지구의 조화를 자동으로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모형을 받아들이라고 설명하면서 정신적 헤게모니를 유지하려고 애를 많이 쓴다. 더 넓은 차원에서 말하자면, 사람들은 그냥 친해지지 않는다. 친해지려고 경쟁을 한다. 다른 사람과 친해지는 데 도움이 되는 특권과 존경과 관심을 먼저 많이 차지하려고 경쟁한다. 서로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서로를 추월하려고 기를 쓴다. 그게 바로 우리가 벌이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게임의 논리이다.  320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사람의 마음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일을 할 수 있기를 끊임없이 갈망한다. 이 욕망은 우리가 갖고 있는 열정과 추진력의 기초인 것 같다."  325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해럴드의 머릿속에는,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았다. 이에 비해 에리카는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가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해럴드 주변에는 온갖 흥밋거리가 언제나 널려 있었다. 해럴드는 처음 몇 주 동안 독서에 몰두했다. 이에 비해 에리카에게는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 즉 임무가 필요했다. 해럴드는 흥미로운 구석이 있을 만한 일은 무엇이든 기꺼이 했다. 오랜 세간이 지나지 않아 역사 관련 단체에 프로그램 담당자로 취업했다. 하지만 에리카에게는 지배자의 권위를 누릴 수 있는 자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스타벅스에 죽치고 앉아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서 부사장급이나 그 이상의 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대부분 신통찮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녀의 기대 수준은 몇 단계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는 창업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327

인간의 마음은 자만을 만들어내는 기계이다. 인간의 의식은, 본인이 실제로 어떤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했다면서 허위로 공로를 인정한다. 또 실제로는 아무런 권한이나 결정을 하지 않는데도 어떤 것을 제어한다는 환상을 조장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328

자만은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무의식을 제어하는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 스스로를 이해하는 정도에 대해서도 과대평가한다.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 재학생 가운데 절반은 누군가 자기 앞에서 성 차별 발언을 하면 참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험을 통해서 확인한 결과, 참지 못한 학생의 비율은 16%밖에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또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과대평가한다. 폴 슈메이커와 에드워드 루소는 기업의 이사들을 상대로 자기 분야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측정하는 질문을 던졌다. 또 자기가 한 대답이 맞는다고 얼마나 확신하는지 물었다. 광고업계 관리자들은 자신이 90%를 맞췄을 것이라고 대답했지만, 정답률은 39%밖에 되지 않았다. 컴퓨터업계 관리자들은 오답률이 5%일 것이라고 대답했지만 실제로 오답률은 무려 80%였다. 루소와 슈메이커는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 실험을 했고, 이들 가운데 99%가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것으로 분류되었다.  329

사람들은 자기가 현재 아는 것뿐만 아니라 장차 알 수 있는 것도 과대평가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결정을 한 이유를 이해하는 능력도 과대평가한다. 이들은 자기가 하는 행동을 설명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심지어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감도 잡지 못하면서도 그렇게 한다.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

하버드대학교 심리학자인 대니얼 길버트 교수는 사람에게는 심리학적 면역체계가 있는데, 이 면역체계는 긍정적인 측면을 지지하는 정보를 과장하고 부정적인 의심을 하게 만드는 정보를 무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330

흥미로운 사실은 자신감은 실제 능력과 거의 관계가 없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무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331

미국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라이오넬 트릴링은 저서 <자유로운 상상력>에서 "정치나 상업이 조직화를 지향할 때 조직에 가장 민감한 정서와 속성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정치나 상업이 역동적이고 긍정적인 목표를 수행할 때, 세계관을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제한하며, 특히 인간 정신의 특성과 관련해서 이론과 원칙을 무의식적으로 개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정치나 상업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서와 상상력을 무시하는 쪽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이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겠다는 데만 사로잡혀서, 인간 정신에 대한 개념을 압축하고 기계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339



프랑스 계몽주의와 영국 계몽주의의 차이

프랑스 계몽주의는 데카르트, 루소, 볼테르, 콩도르세가 이끌었다. 이들은 미신과 봉건주의 세상에 맞선 철학자들로 미신의 세상을 이성의 선명한 빛으로 생생하게 까발리고자 했다. 과학 혁명에 고무된 이들은, 이성의 힘으로 실수를 파악하고 우주적인 진리에 논리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영국 계몽주의의 지도자들은 이성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이들은 합리주의자이긴 했지만, 개인의 이성은 한계가 있으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고 믿었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흄은 이렇게 썼다. "이성은 열정의 노예이며 또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성은 열정에 복무하는 일 이상을 시도할 수 없다."

에드먼드 버크도 "보통 우리는 자연스럽게 터득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런 감정을 배제하고) 자기 자신의 이성에만 의존해서 살고 서로의 이성을 거래하게 될까 봐 두렵다. 왜냐하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이성의 양은 애석하게도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 계몽주의 지도자들은 논리, 과학, 우주적인 법칙을 이야기한 반면에, 영국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의 행동은 무의식적인 1차적 인식에 의해 전체적으로 형태가 결정된다는 생각에 입각해서 인간의 특성을 바라보았다.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자율적인 개인들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사회적인 계약을 맺는 인간의 특성을 상상했다. 반면 영국 계몽주의자들은, 사람은 사회적 감각을 갖고 태어나며, 이 감각은 의식보다 더 아래 차원에서 작동한다고 강조했다. 사람은 타인의 고통과 즐거움에 대해서 태생적으로 공감하는 이른바 '동류의식(fellow feeling)'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은 존경받고 싶어 하며 그만한 자격을 갖추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도덕성은 추상적인 법칙에서 추론된 논리가 아니라 반(半)의식적 상태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추종자들이 사회와 제도를 언제나 분해해서 다시 조직할 수 있는 기계 장치로 바라본 반면, 영국 계몽주의의 추종자들은 하나의 유기체, 즉 살아 있는 인간관계가 무한하게 복잡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바라보았다. 후자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문제를 여러 부분으로 분해하는 것은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었다. 진실이란 개별 사이에 존쟇는 연관성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게 기본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맥락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추상적인 보편성은 당연히 신뢰할 수 없었다. 이들의 눈으로 보자면 보편적인 원칙보다는 역사적인 선례가 더 유용하다.

영국 계몽주의 구성원들은 변화와 개혁을 뚜렷하게 구분했다. 변화는 제도의 근본적인 성격을 바꾸는 재조직 과정이다. 이에 비해 개혁은 제도의 본질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결함을 보수해서 본질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치료 과정이다.  350-352

무의식은 주관적이다.

무의식은 전체적인 맥락에 극단적으로 민감하다.

무의식은 모형을 찾는다.

무의식은 수학에는 무척 약하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무의식은 올바른 판단을 하는 데 심각한 약점을 보이기도 한다.  354-357

무의식이 날마다 수행하는 어려운 과제에 대해 알고 싶다면, 몇 가지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무의식은 고유수용성감각(proprioception)이라 불리는 육감을 이용해서 몸의 움직임, 자세나 운동 상태, 근육 수축 정도를 감지하여 신체 부위, 동작 범위와 속도를 조절한다.  359

무의식은 또한 의식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도 복잡한 과제를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다. 운전하는 법을 배우는 데는 의식적인 주의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 번 숙달되도 나면 운전법에 관한 지식은 무의식 깊은 곳에 저장되어, 음악을 듣거나 옆자기에 앉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거나 커피를 마시면서도 얼마든지 운전을 할 수 있다. 또 의식적을 판단을 하지 않고도 낯선 사람에게는 정중하게 대하고, 필요 없는 갈등을 피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는 고통을 느낀다.  359-360

무의식의 또 다른 위대한 면모는 암묵적 믿음(implicit belief)을 구축하는 능력이다.  362

암묵적 발견법(implicit heuristics)

암묵적 믿음과 고정관념은 그 사람의 세계를 조직하는데, 이것은 인생을 살면서 정상적인 활동을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의식은 일반화를 조직함으로써 세상을 이해한다.  363

지식은 다양한 역학을 통합하고 합성해야 얻을 수 있다. 이 지식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 속에서 조화와 리듬을 찾아내기 위해 정밀하게 관찰하고, 느슨하게 상상하며, 비슷한 것과 비슷하지 않을 것을 비교하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만들어진다.

겸손한 사람은 두 가지 방법론을 모두 사용한다. 그 밖에도 더 많은 것을 사용한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의 패러다임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대부분 오랜 시간에 걸쳐 힘들고 끈질기게 헤매는 과정에서 죽적된 것이다.

겸손한 사람은 끈기가 있다. 이 사람의 방법론은 작은 물고기의 행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물고기는 얕은 물에서 산다. 썰물로 물이 빠지면 서식지에는 작은 웅덩이만 남는다. 물고기는 바위나 물기가 없는 높은 곳을 훌쩍 뛰어넘어 정확하게 다른 물웅덩이로 이동한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물고기는 뛰어오르기 전에 어디가 마른 땅이고 어디가 물웅덩이인지 볼 수도 없다. 그런데 이 물고기를 원래 살던 곳이 아니라 낯선 곳에 두면, 이 녀석은 전혀 뛰어오르지 못한다. 

물고기의 비밀은 이렇다. 물이 차 있을 때 녀석은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지형을 머리에 입력한다. 물이 빠진 뒤에는 머릿속 지도를 이용해서 어디가 움푹 꺼져 물이 있고 어디가 솟아올라 물기가 없는지 무의식적으로 파악하고, 물웅덩이를 찾아서 뛰어오른다.

인간 역시 이 물고기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지식을 축적하는 데 솜씨가 있다.  368-369

끈기 있게 헤매는 사람은 불확실성을 견딘다. 현명한 방랑자는 '사실과 이성을 초조하게 좇지 않고 불확실성과 수수께끼와 의심'속에서 견디는 바로 그 능력으로 참고 기다린다.  370

20세기 영국의 철학자 이사야 벌린은 "지혜는 과학적인 지식이 아니라 우리가 어쩌다 놓이게 된 환경을 파악하는 특별한 민감성이다. 또 지혜는 영원한 조건 혹은 바꾸거나 온전하게 묘사하고 계산 할 수 없는 요인과 충돌하는 일 없이 살아가는 능력이다. 지혜는 경험 법칙(대충이지만 실제에 근거한 방법)의 안내를 받는 능력이다. 경험 법칙은 '기념비적인 지혜'로 농부를 비롯해서 평범한 민초들에게 녹아 있는데, 여기서 가학의 법칙은 기본적으로 통용되지 않는다. 우주적 적응에 관한 광대한 이 감각은 '실체감'이고 세상을 사는 '지식'이다."  373-374



레이먼드는 툭 하면 앞서 했던 자기 발언까지 뒤집으면서 모두가 합의한 결론가 전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그 바람에 논의가 원점으로 돌아가곤 했다. 이럴 때면 에리카는 화가 나서 고함을 질렀다. "조금 전에는 반대로 말씀하셨잖아요."

"나도 압니다. 나의 한 부분이 그렇게 믿었죠. 하지만 나의 또 다른 부분이 이렇게 믿는 걸 어떡합니까. 난 그저 분열된 내 자아가 모두 자기 의견을 하나씩 낼 수 있게 해주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이런 식으로 레이먼드는 농담을 했다.

실제로 학자들은 내면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두 개의 충동이 싸우는 상태인 이른바 '변증법적 부츠트래핑(dialectical bootstrapping)'에 빠져 잇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생각을 더 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380

레이먼드가 설명했다. "경영학의 위대한 현인인 피터 드러커는, 경영과 관련된 전체 의사결정 가운데 3분의 1은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고, 3분의 1은 최소한의 성과만 낸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나머지 3분의 1은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내린 결정의 3분의 2는 아주 잘못되었거나 상당히 잘못되었다는 뜻이지요. 우리는 자기가 내린 결론을 굉장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굉장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자신의 에고를 보존해 자신을 계속 밀고나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인생이란 실패를 만들어 내는 과정 아닙니까? 우리는 그저 잘 조직된 실수를 통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움직임, 모든 행보는 부분적으로 실패입니다. 다음 차례의 움직임, 다음 ㅊ례의 행보로 올바르게 교정되어야 하는 실패 말입니다.  381



만약 2차적인 도덕적 추론을 강조하는 이성주의적인 이론이 옳다면, 하루 종일 도덕적인 추론을 하는 사람이 더 도덕적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학자들은 여기에 대해서도 물론 연구를 했다. 그리고 도덕적인 이론과 고상한 행동 사이에 상관성이 거의 없음을 밝혀냈다. 예컨대 캘리포니아대학교 심리학자인 마이클 가자니가 교수는 저서 <인간(Human)>에서 "도덕적인 추론과 순리에 맞는 도덕적 행동사에어서 상관성을 발견하기란 무척 힘들었다. 사실 거의 모든 연구에서 상관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만일 도덕적 추론이 도덕적인 행동을 낳는다고 하면, 덜 감정적인 사람이더 도덕적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보자면, 그렇지 않다. 그것과 반대다. 작가 조나 레러가 지적했듯이, 누군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거나 살인이나 강간을 묘사한 글을 읽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본능적으로 감정적 반응을 경험한다. 손바닥에 땀이 나서 축축해지고 혈압이 올라간다.  423

1950년대 학자들이 쥐를 대상으로 한 가지 실험을 했다. 음식을 먹으려면 레버를 눌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훈련시킨 것이다. 그리고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다음에는 새로운 장치를 첨가했다. 레버를 누르면 어떤 때는 음식이 나오지만 어떤 때는 옆 칸에 있는 다른 쥐가 전기 충격을 받도록 한 것이다. 그러자 실험쥐들은 자기들이 먹으면 옆 칸에 있는 쥐들이 고통 받는 것을 알고는 옆 칸 쥐들이 받는 고통을 줄여주려고 될 수 있으면 적게 먹는 쪽으로 습관을 바꾸었다. 네덜란드의 동물행동학자 프란스 드 발은 영장류의 행동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정교한 감정이입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작업을 오랫동안 해왔다. 침팬지는 서로 위로해주고, 다친 동료가 있으면 간호해주며 함께 나누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이런 특징은 동물이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도덕성에 필요한 심리학적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426-427

예일대학교 심리학자인 폴 블룸 교수 팀은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한 가지 실험을 했다. 연구 팀은 아이들에게 어떤 장면을 보여주었다. 한 인형이 언덕에 올라가려고 애를 쓰고 있고 다른 인형이 그 인형을 도와주는데, 세 번째 인형이 나타나서 방해하는 장면이었다. 태어난 지 여섯 달밖에 되지 않은 갓난아이들이, 방해하는 인형보다 도와주는 인형을 더 좋아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실험은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방해하는 인형에게 벌을 주는 인형과 상을 주는 인형 가운데 어느 인형을 더 좋아하는지 알아보았는데, 아이들은 벌을 주는 인형을 더 좋아했다. 갓난 아이들의 이런 반응은, 인간은 아주 어릴 때부터 기본적인 정의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블룸은 말한다.

어린이에게 공정하게 판단하라고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 어린이는 불공정에 대해서 격렬하게 저항하며, 될 수 있으면 서로 의사소통을 하려고 한다. 사회를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한 사람을 존경하라고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 친구를 배반하거나 가족이나 부족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을 경멸하라고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 '친구를 때리지 마라.' 라는 도덕적인 규칙과 '학교에서 껌을 씹지 마라.'라는 도덕적이지 않은 규칙의 차이점을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 그 차이점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나온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데 도움이 되는 일련의 감정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책임을 내팽개치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고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을 인정하는 도덕적 감정 역시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다. 조직사회의 운명이 걸린 전쟁이 났을 때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는 행위를 칭찬하는 사회는 지구상에 하나도 없다. 

부모나 학교가 도덕적인 이해를 강화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학자 제임스 윌슨은 저서 <도덕감성>에서 이런 가르침은 이미 준비된 바탕에서 진행된다고 주장한다. 아이들이 말을 배울 준비가 되어 있고 엄마 아빠에게 애착을 보일 준비가 되어 있듯이, 특정한 도덕적 편견을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다는 것이다. 도덕적 편견은 더욱 증진되고 개발 될 수는 있지만 전혀 없던 것이 새로 주입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427-429

더 도덕적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성주의 관점은 철학적으로 사색하라고 충고하고, 직관주의 관점은 상호작용을 하라고 충고한다. 혼자 있을 경우에 더 도덕적이 되기는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수백 년에 걸쳐 우리 조상들은 최고의 직관을 발휘하고 또 도덕적 습관을 가르칠 수 있는 관행과 습관을 고안했다. 얘를 들어보자. 건상한 사회에서 일상생활은 작은 예절로 조직되어 있다. 엘리베이터에서는 여자가 먼저 내린다. 포크는 왼손에 쥔다, 따위가 그런 것들이다. 정중함을 요구하는 이런 규칙은 사소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것이 사소한 자기 통제를 실행할 수 있도록 최면을 건다. 뇌에 이쓴 신경망을 자극하고 강화한다는 말이다. 

또, 대화가 있다. 우리는 심지어 소소한 한담을 나눌 때조차 도덕적 직관에 맞게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따뜻하게 말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냉담하게 말한다. 우리는 어떤 행동이 바람직하고 추구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행동을 피해야 하는지 구분하는 수백만 가지 기준을 수시로 들이댄다. 집단의 규칙을 어긴 사람들에 대해 늘 이야기한다. 서로에 대한 연결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이기도 하고, 자신에게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기준을 상기시키려는 목적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제도에 의해 전달되는 마음의 습관이 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제도를 경험하고 통과한다. 제도는 처음 가족에서 출발해서 학교, 직장으로 확장된다. 특정한 규칙과 의무를 갖추고 있는 가가 제도는 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 가르친다. 제도는 말하자면 궁극적으로 내면 깊은 곳으로 침투하는, 외부에 설치된 (공사중인 건물의) 비계인 셈이다. 언론계는 정신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취재하는 습관이 몸에 배도록 기자들을 가르친다.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연구자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의무 규정이 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여러 제도의 규칙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현재의 우리가 된다.  433-434

무의식적인 감정은 한층 우월하지만 독재를 행사하지는 않는다. 이성은 저 혼자서 춤을 출 수 없지만, 그래도 꾸준하고 미묘한 영향력을 발휘해서 슬쩍슬쩍 옆구리를 찌를 수는 있다. 사람들이 농담으로 말하듯이, 우리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지 않을 의지는 가지고 있다. 우리는 도덕적인 행동을 할 수는 없어도 충동은 억누를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충동은 완전히 뒤집을 수도 있다.  438

늘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자기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 유리한 지점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440



어떤 사람들은 인식사의 결함은 교육을 통해 교정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스토니브룩대학교 찰수 태버와 밀턴 로지가 수행한 리서치에 따르면, 고등교육을 받은 유권자는 대체로 사실에 더 가깝게 인식하지만, 상당 기간 동안 실제와 다르게 인식한다. 이들은 교육을 덜 받은 유권자에 비해서 자신의 잘못된 의견을 수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매사 자기 생각이 옳다고 강력하게 믿기 때문이다.  458

흥미로운 것은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생활양식은 지지 정당 선택과 연결되었고, 지지 정당은 철학적 태도와 연결되었으며, 철학적 태도는 다시 종교적, 도덕적 태도와 연결되었다. 선거 운동은 유권자의 신경망을 직접 건드리지 않았지만, 유권자의 정신적인 네트워크를 자극하는 자잘한 단서를 끊임없이 뿌려댔다.  465



영국의 철학자 필립 블론드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떻게 변해 있는지 보라. 양극화 사회이다. 점점 더 파편화되고 권한이 축소되고 고립되어 가는 시민 계틍을 중앙집권화된 관료 국가가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건강한 사회 조직이 없음으로 해서 정치는 양극화되었다.  478

사회적으로 파편화된 국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정당 주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로서는 이것 말고는 매달릴 게 없었다. 정치가와 언론인들은 이 심리적 진공 상태를 이용해 정당을 종교 집단으로 변질시켜 완벽한 충성을 요구하고 또 거기에 대해서 보상을 해준다. 

정치가 시민을 상대로 정체성 집단을 서로 많이 획득하려는 경쟁에 나서면 이제 타협의 가능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내 편과 네 편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이 되고 만다. 심지어 아주 작은 양보조차 도덕적인 항복처럼 비친다. 정당과 정당의 경계선을 넘어 인간관계를 형성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은 추방당한다. 정치인들 상이에서도 정다에 대한 충성심이 하원이나 상원과 같은 제도에 대한 충성심을 압도한다. 정치는 이제 더 이상 협상이 아니다. 명예 혹은 집단의 우월성을 다투는 경연일 뿐이다. 당파적인 추악암 속에서 정부에 대한 대중의 신뢰와 정치 제도는 붕괴했다.  479

누가 내 뒤통수를 치기 전에 내가 먼저 남의 뒤통수를 쳐야 한다는 냉소적인 정신세계가 만연한다.  

해럴드는 인식 혁명이 개인주의적인 정치 철학 및 여기서 비롯된 정책을 뒤집어엎을 잠재력을 가지고 잇다고 믿었다. 인식 혁명은, 인간은 인간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으로 성립함을 증명했다. 한 사회의 건강성은 인간관계의 건강성에 따라 결정되지 개인적인 선택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480

변화의 진짜 엔진은 인지 부하(cognitive load, 어떤 과제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정신적 노력의 양)의 변화라고 해럴드는 믿었다.

인지부하의 변화는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여성의 역할을 바꾸어 놓아 여성도 이제는 정신적 숙련도 영역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결혼의 성격이 바뀌어 서로 잘 맞고 서로의 정신적인 능력을 보완해줄 수 있는 배우자를 찾는다. 따라서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끼리 또 교육을 덜 받은 사람들끼리 배우자를 찾는 선택 결혼이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인지 부하의 변화로 불평등의 격차가 점점 벌어져서, 한 사회는 두 나라로 쪼개진다. 효과적으로 항해할 수 있는 무의식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나라와 기술을 습득할 기회가 없는 사람들의 나라가 있는 것이다.  489

정신적인 능력은 대물림되는 경향이 있다.

한 래 가계 소득이 9만 달러인 가정에 태어난 아이가 스물네 살까지 전문대학교 이상을 졸업할 확률은 50%이다. 한 해 가계 소득이 7만 달러인 가정에 태어난 아이에게 이 확률은 25%로 줄어든다. 또 가계소득이 4만 5,000달러인 가정에 태어난 아이의 경우 확률이 10%이고, 가계소득이 3만 달러인 가정에 태어난 아이에게 이 확률은 6%도 되지 않는다.  490

건강한 사회는 사회적 계층 이동이 쉬운 사회이다. 모든 사람이 다 좋은 삶을 살 수 있고 모든 사람이 다 열심히 노력할 이유가 있는 사회, 다시 말해서 자기가 기울인 노력에 따라서 보상을 받는 사회이다. 인지 시대(cognitive age, 저자가 고인한 용어이다. 저자는 2008년 5월에 <뉴요타임스> 칼럼에서 '지금 시대는 세계화 시대가 아니라 인지 시대다.'라고 천명하였다.)의 사회는 불평등을 생산한다. 불평등은 시민의 뇌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으며, 고대나 중세 계급사회의 불평등보다 훨씬 미묘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완고하고 불공정하다. 

돈이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돈이 이 문제의 결정적인 원천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평등 문제는 의식적, 무의식적 발달 영역에 놓여 있다. 이런 사실을 해럴드는 자신의 성장 과정과 에리카의 성장 과정만 비교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인적 자본 개발을 장려하는 분위기, 즉 책, 토론, 독서, 질문, 장래 희망 토론을 장려하는 분위기에서 자란다. 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산만한 환경에서 자란다. 부유층이 사는 동네의 유치원에서 어떤 이야기의 일부를 들려주면, 아이들 가운데 절반이 다음에 어떤 내용이 전개될지 예측한다. 그러나 똑같은 내용을 가난한 동네 어린이들에게 들려줄 때 그 다음에 이어질 내용을 예측하는 어린이는 약 10%밖에 되지 않는다.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은 미래의 성공에 결정적일 정도로 중요하다.  491

태도에서 드러나는 계층별 격차 역시 크게 벌어졌다.  492

가난과 가정 붕괴를 비롯해 사회적 유동성과 관련 있는 주제를 연구하면서 해럴드는 사람들에게 정신 똑바로 챙기라고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한 개인이 잘살고 못살고는 의식적인 성취를 거두는데 반드시 필요한 무의식적인 기술에 달려 있다. 무의식적인 기술을 습득하지 못한 사람들은 날마나 반복되는 일을 하면서 좋든 싫든 아침이면 일터로 나가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운명은 자기가 개척할 수 있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갖지 못한다. 또 굉장한 결과를 안겨줄 수 있는 제안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갖지 못하며, 지금 희생하면 나중에 좋은 결과가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  493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강도가 높은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심장병이나 위장병 등에 더 많이 노출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강도가 낮은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질병에 더 많이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낮은 지위가 그만큼 심리적인 비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론 해스킨스와 이자벨 소힐은 공저 <기회를 열어주는 사회 만들기(Creating an Opportunity Society)>에서 "건강한 음식을 먹는 문제든 노후 자금을 마련하는 문제든 간에, 장기적인 복지를 개선해줄 일을 하도록 누구나 자극받을 필요가 있다. 저소득 가정의 구성원도 마찬가지다."  494

해럴드는 정치에 관해 생각하면서 정부의 통치 철학을 연구했다. 이 연구에 몰두할수록 위대한 사회를 만들겟다는 포부의 핵심 과제가 바로 개인의 발달과 사회적 유동성 문제임이 점점 더 명확해졌다. 사람들이 폭넓은 기회와 다양한 삶의 방식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을 때, 사회적 유동성은 수평선처럼 드넓게 활짝 열린다. 사회적 유동성은 계층 간의 갈등을 붙여준다. 아무리 막장 인생을 사는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자기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사회의 상층부까지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유동성은 창조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또한 고정적인 것이 없기 때문에 불평등도 줄어든다.

해럴드는 문득 두 개의 지배적인 정치 운동이 존재하는 나라에 살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나는 정부를 이용해서 평등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믿는 자유주의 운동이고, 또 하나는 정부의 기능을 제한해서 자유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믿는 보수주의 운동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또 하나의 운동이 더 있었다. 정부의 기능을 제한하면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게 해서 사회적 유동성을 높여야 한다는 운동이었다.  496-497

"삶의 가치란 자기가 놓인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1861년 이민자들 앞에서 링컨이 했던 말이다.  499

정력적인 정부의 전통을 되살릴 때가 되었다고 해럴드는 믿었다. 다만 조건이 있었다. 두 가지를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첫째, 해밀턴 시대는 인식 시대의 새벽이 열리기 전이었다. 분투하는 청년층에 가해지는 정신적인 요구량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으니 사회적 유동성을 높이려는 운동은 과거와 다르게 더 복잡한 사회적 환경, 정보 관련 환경을 다루어야만 한다. 

둘째, 해밀턴과 링컨, 루즈벨트는 일정한 수준의 사회적 및 도덕적 자본을 전제로 삼을 수 있었다. 모든 시민이 이해하는 규범, 도덕적 합의, 엄격한 관습 등으로 규정된 빡빡한 공동체 안에서 사는 것이 당연한 전제조건이었다. 그러나 오늘나르이 지도자들은 이런 가정을 당연한 것으로 설정할 수 없다. 과거의 도덕적, 사회적 자본은 이미 잠식당했으며, 새로 축적해야 한다.


세상은 이제 잠재적인 기능이 보이지 않게 수없이 많이 들어 있는, 너무도 거대하고 복잡한 기관으로 변해버려서, 아무리 자신감이 철철 넘치는 정부라 하더라도 조립식 계획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게 되었다.

영국의 철학자 마이클 오크쇼트는 "정치활동이란 바닥도 없고 경계도 없는 드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다. 쉴 수 있는 항구도 없고 닻을 내릴 수심 낮은 해상도 없다. 출발점도 없고 정해진 목적지도 없다. 평형 상태를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떠다녀야 한다. 바다는 친구이기도 하고 적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배를 조종하는 기술이란, 적대적인 모든 경우를 친구로 삼기 위해 모든 자원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의 문제이다."  500



창의성이 그 사람의 수명을 연장시킬까? 조금은 그렇다. 정신적인 자극이 수명 연장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증거는 상당히 많이 있다. 다른 요인을 모두 제어한 상태에서 볼 때,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오래 산다. 간호사는 모두 똑같은 생활 패턴으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대학 졸업장을 가지고 있는 간호사는 그렇지 않은 간호사에 비해서 오래 산다. 청년기에 더 많은 어휘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노년기에 치매에 덜 걸리는 경향이 있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예술 관련 프로그램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성인은 그렇지 않은 성인에 비해서 병원에 가거나 약을 복용하는 횟수가 적으며 일반적으로 건강 상태가 더 낫다.

그러나 실제 보상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다. 사람들이 정신치료를 받으로 가는 이유는, 자기 행동이 너무 불규칙해서 규칙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거나 아니면 너무 억압되어 있어서 긴장을 풀 필요가 있어서라고 한다. 에리카의 경우는 긴장을 풀 필요가 있었다. 시를 읽고 미술관에 가고 조각을 하는 것이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긴장을 풀면 에리카는 더 침착해 졌다. 여기저기 다니는 탐험가의 모습에 더 가까워졌다.  529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젊어지려고 혹은 날씬해지려고 노력하는 일을 포기할 때 하루하루가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  550

빅터 프랭클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서 <삶의 의미를 찾아서>에서 "인간이 의미를 찾는 것은 그 사람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동기부여이다."  551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는 "나 자신에 대해서 내가 아는 지식이라는 게, 그러니까 내 방에 대해서 내가 아는 지식과 비교할 때 얼마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모자라는 수준인지 모른다. 외면세계에 대한 관찰이라는 말은 있어도 내면세계에 대한 관찰이라는 말 따위는 없다."  554


4가지 인생에서 중대한 질문

"나는 나 자신을 깊이 있는 존재로 만들었는가? 피상적으로만 살기 쉬운 즉각적인 의사소통 문화에서, 나의 가장 본질적인 재능을 개발하면서 중요한 일에 시간을 썼는가?"

"나는 지식의 강물에 보탬이 되었는가? 미래 세대를 위해서 어떤 유산을 남겼는가?"

"나는 이 세속적인 세상을 초월했는가?"

"나는 사랑했는가?"




옮긴이의 말 - 그 남자 그 여자의 일생을 따라 떠난 여행

에리카와 해럴드의 인생 여정을 따라 가면서 두 사람의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고 감동할 부분이 있으면 감동하면 된다. 이것이 저자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비록 광범위한 분야에서 학자들이 무의식이라는 동굴을 여기저기 비추며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밝혀내기는 했지만, 이들의 작업이 주로 학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있다. 나는 이들이 밝혀낸 과학적인 사실을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내고자 한다.(본문중에서)'  562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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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우리가 분노를 해야 하는 시대에 있다는것이 가슴아픈 일이다. 94세의 할아버지가 현재를 사는 젊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젊은 시절 사르트르를 선배로 만났고 독일인으로서 자신의 신념으로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고 유대계 독일인이라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은 사람. 
전쟁이 끝나고는 외교관으로 대사로 인권위원회 대표로 다방면에서 활동하면서 쌓아온 자신의 열정과 경험으로 세상에서의 삶을 정리하는 그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인권과 환경문제에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일까. 이정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열정이 살아 숨쉬는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은..
저자는 '분노'라고 표현한다. 막연하게 분노를 느끼고 원초적인 방식의 폭력적 분노가 아니라, 삶을 올바로 바라보고 배우고 관찰하여 마땅히 분노해야 하는것에 인도적인 분노를 나타내라는 것이다. 
2차 대전때 레지스탕스는 분노때문에 일어난것이라 한다. 자유를 위한 동력으로 분노를 일으키고 투쟁을 한것. 지금의 시대에 총대를 넘겨 받아. 정치 경제 지성계에서의 사명을 다 해나가는 면에서 부당함이 있을때, 인류가 아닌 개인의 이기심을 볼 때...마땅한 분노는 역사의 흐름을 올바르게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지금 분노할 것은 있는가? 있다면 얼마나 있는가? 
사실 우리는 잘 모른다. 
이유는 가리워져 있어서이다. 알아도 생활에 끌려가고 있어서 신경쓸 여유가 없다. 
'나'만 생각하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기득권의 노림수에 빠져 있어서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우리의 눈은 가리워져 있고, 귀는 닫혀져 있으며, 그도 아니면 삶에 치이게 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떻든 사실이 아닌 진실은 분명히 존재한다. 
어쩌면 실제 아픔을 느끼지 않으려 고통을 피해 아름다운 것만 보려고 하는 안타까운 현실일지도 모른다.

프랑스에서 200만부가 넘게 읽히고 많은 유럽으로 그리고 세계속으로 번역되어 가고 있는 이 책이 한국 사람들에게 얼마나 읽힐것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읽혀 그들이 곧 기득권이 되어 세상이 아닌 그들만이 변화되어 간다면 소용이 있는것일까..
뜬금없을지도 모를 이런 생각이 든다.

특히나 동양 문화권에서 참을성을 배워온 우리들은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 이러한 문제를 받아들이는것이 쉽지 않을지 모른다. 사실은 생각하면 어렵지 않지만 생각하기 전이 문제이다. 매우 어려울것처럼만 보이는 두려움과 무력감이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책의 표현에도 나왔듯이 짧지만 강력한 내용(한국어판으로 40여 페이지에 불과하다)을 전달하는 이 책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생각할 계기를, 생각하면서 살아가지만 행동은 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행동의 계기를, 행동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여러가지 방법의 길이 있음을 깨우치는 계기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방법으로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음을 알아채는 계기를, 여러가지 이 시대에 필요한 것들이 드러나 보이게 할 수 있는 계기들을 주는 원동력이 된다면 아주아주아주 조금은 더 나은 내가 그리고 내 주위가 그리고 나라가 그리고 세계가 되지 않을까.
너무 과한 표현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가 사는 그 지점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내용의 책을 읽어서 이런 표현을 막 내뱉고 잇는지도 모른다. '그래 그래야지. 그럼그럼 그렇게 되어야해. 시대를 거꾸로 가는 이 나라를 보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것이야.'
이러한 생각이 들어 내뱉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실제 돌아보면 나보다 못한 사람들은 많이도 있다. 내것도 없는데 그런것까지 신경쓸 수는 없다고 볼 수 도 있지만, 환경 파괴가 결국은 우리에게 아니 우리의 자손에게 돌아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 사실 하나를 다시금 떠올려 한 번 더 생각하고 조심해 나가는 과정이 어쩌면 소시민이 할 수 있는 조그만 분노일지 몰라도 그것은 '나비효과'처럼 커져서 돌아온다. 
진정 불쌍한 사람들에게 말이 아니라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작은 도움을 베풀때 돌아오는 내 마음속의 편안함과 뿌듯함, 그것에 더해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미래에 어떤식으로라도 다시 돌아오는 고마움이 될 것이다.
사소하면서도 작은 따뜻한 분노부터, 인도적인 큰 분노까지 우리의 삶에 조금씩 자라 잡아가는 그러한 생각은 각박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 아닐까.
나 자신이 둘러볼 수 있는 여유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





프랑스 해방 이래로 창출되는 부의 양은 괄목할 만큼 증가했는데...
이제 민영화된 은행들은 우선 자기들의 이익배당과 경영진의 고액 연봉 액수에나 관심을 보일 뿐, 일반 대중의 이익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극빈 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사람들이 이토록 부추긴 적도 일찍이 없었다.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자유란 닭장 속의 여우가 제멋대로 누리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다. 1948년 세계 인권 선언이 구체적으로 실천방안까지 명시한 이 권리는 보편적인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어느 누구라도 이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거든, 부디 그의 편을 들어주고, 그가 그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  14-16

어떤 권력에도, 어떤 신에게도 굴복할 수 없는 인간의 책임. 권력이나 신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라는 이름을 걸고 참여해야 한다.  19

맞다. 분노의 이유가 오늘날에는 예전보다 덜 확실해 보일 수도 있다. 아니면 세상이 너무 복잡해진 것일 수도 있다.
이제 우리의 상대는 광활한 세계이며, 그 세계가 상호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절감하고 있다. 그 세계가 상호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절감하고 있다.
그것이 무슨 일인지 알려면, 제대로 들여다 보고 제대로 찾아야 한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제발 좀 찾아보시오. 그러면 찾아질 것이오."라고,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고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미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커다란 도전이 두 가지이다.
첫째,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 사이에 가로놓인, 점점 더 커져만 가는 격차.
둘째, 인권, 그리고 지구의 현재 상태.  21-22
나는 젊은이드에게 말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 -이민자, 불법체류자,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 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  26

'도에 넘치게 분노'해서는 안되며, 어쨌든 희망을 가져야 한다. 격분이란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다. 격분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당연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납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희망이 긍정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경우에, 격분 탓으로 그것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31

폭력은 희망에 등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폭력보다는 희망을, 비폭력의 희망을 택해야 한다. 우리는 그 길을 따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인권을 침해하는 주체는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의 분노를 촉발해 마땅하다.  34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輕視),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고.  38-39




편집자 후기
그는 이렇게 단언했다.
"나는 언제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편에 서왔다."  50


저자와의 인터뷰
도덕이란 타인들과 사회가 만들고 우리에게 강요하는 규범에 순응하는 것일 터입니다. 또 윤리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만들어가야 할 것, 즉 발명이며 창조(말하자면 결국 각자 자기만의 자유를 얻어내는 일)일 테니까요.
아주 일찍부터 어머니는 나에게 어떤 의무라도 지우듯이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네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법이야. 그러니 항상 행복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행복 해지려고 참으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언젠가는 정신분석 전문가한테서 이런 말까지 들었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신인 줄 아시나 보내요." 물론 이건 농담이겠고..  54
나의 비결, 그것은 물론 '분노할 일에 분노하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의 비결은 '기쁨'입니다.
따로 또 같이, 정의롭지 못한 일이 자행되는 곳에 압박을 가하는것이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하고 이해하려 애쓰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55
어쨌든 내 인생은 긍정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다고 봅니다.
당시에야 끔찍했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긍정적이라는 것이죠.
굉장한 연애도 해 보았고.. 남에게 베풀고 싶은 마음과 베푸는 기쁨을, 남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책임을 감수하는 것. 어떤 경우에도 나에게 베풁고 싶다는 마음, 이 마음을 북돋워야 합니다. 사람을 책임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성과 감성을 키워주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56
이 책은 프랑스에서만 200만 부 가까이 팔렸고,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번역본이 나왔거나 현재 준비 중입니다. 유럽 이외의 국가로는 한국, 일본, 브라질, 미국 등이 있고, 심지어 중국에서도 올해 6월에 이 책의 번역본이 나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59
우리는 시민 대중이 보기에도 매우 불안해진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59
바로 이 시점에 시민 대중은 묻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게 닥치는 일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겨우 본문 20쪽밖에 안 되는 제 책이 이렇게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둔것은 전 세계 시민들이 광범위하게 절감하고 있는 문제제기에 화답을 했기 때문입니다.  60
이 책을 잘 표현한 글이 최근 <르몽드> 지 서평 머리기사로 게재된 다으모가 같은 제목의 글입니다. "레지스탕스, 현재를 감전시키다 - '분노하라!' 는 현재의 우리들이 적절히 포착해 이용할 대상으로서, 전달의 몸짓으로서 더욱더 관심을 모으는 책이다." 왕년에 레지스탕스에 뛰어들었던 한 노인이 역사에, '그들의'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기위해 노심초사하는 젊은이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61
잘 되어가는 사회란 무엇입니까? 모든 시민에게 생존의 방편이 보장되는 사회, 특정 개인의 이익보다 일반의 이익이 우선하는 사회, 금권에 휘둘리지 않고 부가 정의롭게 분배되는 사회입니다.
세 단어로 짧게 줄이면 여전히 이것입니다. '자유, 평등, 박애'!
그런데 역사의 어느 시기에는 이 가치들이 다른 때보다 더욱 심각하게 문제시됩니다. 지금의 현실이 그러합니다. 
유명한 작가이자 경제학자인 호세 루이스 삼페드로는 '설령 다시 살 수 있다 해도 나는 지금 여기서, 당신 앞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일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자기 나름으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 광고 메시지나 언론이 전하는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유로운 사고를 해야만 자유롭게, 양심에 입각해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옛날 레지스탕스 당시에 우리가 했던 것처럼 네트워크를 이용해야 합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등 인터넷상의 각종 네트워크(SNS)를 자유 자재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62-63
나는 호소합니다. 우리의 정신을 완전히 개혁하자고, 폭력은 거부해야 합니다. 우선, 효과가 없기 때문에 그래야 합니다. 
폭력은 폭력의 악순환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미래로, 희망으로 향한 문을 닫아 버리게 합니다. 
비폭력이란 손 놓고 팔짱 끼고, 속수무책으로 따귀 때리는 자에게 빰이나 내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 그다음에 타인들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65
참여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정당..
어떤 특별한 대의를 위해 활동하는 기구, 협회, 운동 등에도 참여를 해야 합니다. 예컨대 세계인권연맹,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또 그린피스 같은 환경운동 단체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조합(組合) 활동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일반인들이 항상 잘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육이 부족해서 그럴까요? 교육도 부족하지만 정치적 창의성도 부족합니다.  66
극도의 빈곤 문제가 생태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 테러리즘 문제와도 연관됩니다.  68


'분노'와 '평화적 봉기'가 세상을 바꾼다(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분노는 삭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삶의 지혜가 널리 퍼져 있는 한국 사회에서 "분노하라!"라는 직설적, 선동적 메시지는 생경하게 들릴 수 있다.
'마음공부'를 통하여 수시로 일어나는 심화(心火)를 직시하고 가라앉히는 것의 중요함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마음공부'가 '공분(公憤)'과 '의분(義憤)'의 불씨를 마음속에서 꺼버리는 것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화의 뿌리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일 때는 그 공적인 원인을 해결할 때만 화는 사라진다.  71
1970~1980년대 우리는 군사독재에 맞서 '군사적'으로 싸웠다. 거칠었다고, 과격했다고 비난해도 좋다. 폭압적 정치권력과 천민 자본주의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화운동의 기본 동기는 실로 분노였다. 수많은 열사와 투사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처참하고 비통했다. 그리하여 각자가 방식으로 "인간의 책임이라는 이름을 걸고 참여"했다. '국가폭력'에 맞서 화염병을 던지고 짱돌을 던지는 등 '폭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그 '대항폭력'의 행사는 '사회적 정당방위'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로 인해 사람이 다칠 때는 몹시 자괴하고 고민했다.
당시 우리는 무엇을 꿈꾸었는가.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대통령,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등 대표자를 직선으로 뽑는것, 시민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 야당과 자유로운 언론의 존재가 보장되는 것, 국가권력이 시민의 인권을 자의적으로 박탈, 제약하지 못하게 하는 것 등이 당시 우리들의 절박한 꿈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 덕분에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이후 이꿈의 상당 부분은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대거 그리고 급속히 후퇴하고 있기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네티즌을 감옥에 넣고, 정부 통상정책의 문제점과 광우병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한 작가, 기자, 피디와 G20 정상회의 홍보포스터에 쥐를 그려 놓은 대학강사를 처벌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과잉범죄화'의 칼을 휘두르는 것은 검찰이다. 한편 정부는 정보기관의 불법적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대표적 시민운동가에게 거액의 손해배상소송을 걸고, 국방부의 '불온문서' 지정에 의문을 품고 헌법재판소로 달려간 군법무관을 파면한다. 참으로 천박하고 한심하다. 권위주의가 좀비가 되고 유령이 되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정치적 민주주의 근본은 무너지지 않고 있다. 민주화를 이끈 대중의 분노와 그에 기초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정치적 민주화로 대의민주주의가 확립되었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떠한가. 대의제 민주주의 안에 자신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없는 약자와 소수자 집단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만, 현재의 대의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잇다. 몇 년에 한 번씩 투표자를 뽑는 기회를 가졌다고 민주주의 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의제가 엘리트나 강자가 자신의 지배를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정당화하는 장치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한편 "이제 국가의 최고 영역까지 금권의 충복들이 장악한 상태"에서 "금권이 전에 없이 이기적이고 거대하고 오만방자"하게 위세를 부리고 있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인지 '삼성왕국'인지 헷갈리는 현실! 생물학적 기준에 따라 세세손손 시장권력을 대물림하면서도 견제와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재벌의 모습은 '맘몬'(mammon)에 다름 아니다. "은행들은 우선 자기 들의 이익배당과 경영진의 고액 연봉 액수에나 관심을 보일 뿐, 일반 대중의 이익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은행 문턱은 서민에게 그 얼마나 높은가. 그런데 은행은 고객의 예금을 어디에 쓰고 있는가. 은행은 재벌의 사금고가 되어버리지는 않았는가.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 최저 임금 상태를 표시하는 '빅맥지수'를 사용하자면, OECD 최저 수준의 한국 최저 임금 시급 4,320원으로는 맥도널드 빅맥세트를 사 먹을 수조차 없다. 정규직과 동일한 양과 질의 노동을 해도 임금은 반 토막을 받는 비정규직이 무한정 양산되고 있음에도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상위 20%가 부의 80%를 소유한다는 빌프레도 파레토의 '20대 80 법칙'은 확고히 자리를 잡앗다. 아니 한국 사회에서는 '10대 90 법칙' 또는 '5대 95 법칙'으로 변화하여 관철되고 있을지 모른다. 자산, 소득, 교육, 건강 등 여러 측ㅂ면에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논리가 기승을 부리는 정글이 되었다. 돌아보건대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사람들이 이토록 부추긴 적도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진보건 보수건 간에 민주공화국의 원칙과 가치에 입각한다면 이러한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의 민주공화국이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고소영' 및 '강부자'만을 위한 정책을 실현하는 데 여념이 없고, 이 정책을 비판하면 '좌파'라고 몰아세우기에 바쁘다. 이러하니 진보주의자 외에 합리적인 보수주의자, 상식을 존중하면서 성실히 살고 있는 중산층도 이명박 정권에 대하여 실망을 넘어 개탄을 표하고 있다. 이제 대중은 민주화운동의 후예들에게 시선을 옮기며 다시 기대를 걸고 있다.
과거 민주화운동 세력은 정치적 민주화를 위하여 싸우면서도, 동시에 "경제계, 금융계의 대재벌들이 경제 전체를 주도하지 못하게 하는 일까지 포함하는 진정한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 정립" , "특정인의 이익보다 전체의 이익을 우선"하고 "노동계가 창출한 부를 정당하게 분배하는 일을 금권보다 중시"하는 체제의 수립을 꿈꾸었다. "모든 시민에게, 그들이 노동을 통해 스스로 살길을 확보할 수 없는 어떤 경우에도 생존방도를 보장해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회보장제도의 완벽한 구축, 늙고 병든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삶을 마칠 수 있게 해주는 퇴직연금제도" 역시 꿈꾸었다.
당시 권위주의 정권은 이러한 꿈에 대해 '급진좌경' , '친북좌빨' 등의 딱지를 붙이고 처벌했지만, 이 꿈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꿈은 다 어떻게 되었는가? 자유로운 투표권이 확보되면 민주주의는 그냥 완성되는 것이던가. 진보의 본역은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추구하는 데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 잊혀버린 꿈을 되살릴 때다. 사실 노동의 양과 질에 따른 정당한 대가의 확보, 부의 세습 방지, 일자리 주거 노후문제의 해결 등은 진보와 보수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던가.
한편 이러한 사회경제적 민주화 외에 어떠한 과제가 놓여 있는가. 수많은 과제가 있겠지만, 적어도 에셀이 언급한 세 가지는 해결해야 한다. 먼저 언론개혁이다. 현재 :언론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되어 있다고 하면 과장인가. 신문은 물론 종합편성 태널까지 확보한 주류 언론은 사주와 광고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급급하면서 빈자와 약자의 꿈과 고통을 외면하고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 공평무사한 정론직필을 스스로 포기하고 특정 당파의 선전도구 역할을 하고 있다. "국가, 금권, 외세로부터 언론의 독립"은 어느정도 수준인가. 독립은 커녕 정치권력, 시장권력 및 외세와의 공모와 공생을 질기고 있지는 않은가.
둘째, 교육개혁이다. 현재 교육체제는 "'학교'의 이상과 너무 거리가 멀며, 부유층만을 위한 것으로 더 이상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정신을 충분히 계발시킬 수 없"음은 대다수의 시민이 공감하고 있지 않은가.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입시경쟁에 내몰려 이 학원, 저 학원을 뺑뺑이 돌아야 하는 현실은 참담하다. 이는 교육이 아니라 사육(飼育)이며 제도적 학대다. 학생이 성적에 따라 차별받고 '알짜-예비-잉여'로 등급화되는 학교 현실은 그 자체로 인권침해이며, 이러한 현실 속에서 자긍심과 연대의식이 키워질 리 없다. 그리고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방향으로 고착되고 있는 교육체제는 사회통합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셋째, 소수자의 인권 보장 수준을 높여야 한다 OECD 가입국이자 G20에 속하느 ㄴ나라임을 자랑하짐나, 한국 사회의 다수자의 마음에는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소수자에는 여러 집단이 있지만, 여기서는 외국인 노동자만 언급하기로 하자. 올챙이 시절을 까맣게 잊어버린 개구리처럼, 한국은 "'불법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값싼 노동력이 다량 필요하기에 불법체류 여부를 가리지 않고 이주 노동자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거칠게 말해 단물을 빼먹은 후 추방하고 있는 것이 한국 경제체제 아닌가.
이러한 진보와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 첫 번째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즉, "'항상 더 많이'라고 외치며 앞으로만 질주하는 태도와 과감히 결별해야 한다." 과속경쟁 사회는 구성원을 항상 불안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구성원 다수를 패배자로 만드는 사회는 부정의한 사회다. 이제 '앞'만 아니라 '옆'과 '뒤'도 보는 사회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이때 "윤리, 정의, 지속가능한 균형의 문제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한다.
그렇다. 이제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에 맞서서 "평화적 봉기"를 일으킬 때다. 이 '평화적 봉기'의 수단은 다름 아니라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각종 기본권이다.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자. 온라인에서 그리고 오프라인에서,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의 오만과 횡포, 불법과 탈법을 감시하고 비판하자. 단호하게 그리고 발랄하게, 또한 무조건 투표하자. 투포하지 않는 자는 "암묵적인 찬동자"다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무관심은 현재의 상태를 묵인, 방조하겠다는 의사의 다른 표현이다.
어떤 이는 '중용'과 '중도'를 조언한다. 자신의 사유와 행동을 성찰하고 반대편과 소통하고 그 입장을 존중하고 공유점을 확보하는 것은 진리를 찾아가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사람의 삶과 직결되는 가치와 정책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기계적 중립은 없다. 하워드 진은 말한다. "달리는 기차위에 중립은 없다" 존 F. 케네디 역시 단테의 <신곡>을 재해석하며 말한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기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 현실에 대한 냉소, 무관심, 거리두기만으로는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의 정당한 분노와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 바꾸기에 나서자.  72-79


옮긴이의 말 - 어느 행복한 투사의 분노
100세를 바라보는 노인의 목소리다.
기본이 존중되는 사회가 되도록 부디 분노하라고.  81
'레지스탕스(resistance)'는 동사 '저항하다(resister)'의 명사형이다. 분노할 실마리를 잡아서 분노할 줄 알고 정의롭지 못한 것에 저항할 줄 안되, 마음속에는 비폭력의 심지를 곧게 세우고 참여하여 새로운 현재와 미래를 창조하라는 것이다.  82
왜 하필 '분노'인가? 분노(憤努)란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여 벌컥 성냄이 아닌가? 여기에 번역의 어려움이 있었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인 명령문 '앵디녜부(Indignez-vous)!'를 처음에는 '분개하라!'로 번역하고자 했다. 프랑스어에서 '분노하다'를 의미하는 동사는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 's'indigner'라는 동사의 뜻은 평정을 잃지 않은 채 '분개'하는 쪽에 가깝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정의에 어긋난 일에 비분강개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적인 원한에 복받쳐 욱하는 것이 아니라 옳지 못한 일에 '의분'을 표출하는 것이다. 
다만 상황과 맞물리는 호소력이 적잖이 축소된다고 보아 분노하라고 하게 되었다.  84





아래는 2014년 5월에 이 책을 다시 읽고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가 자랑스러운 사회일 수 있도록 그 원칙과 가치들을 다 같이 지켜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잉다. 이른바 '불법체류자' 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 삼는 사회, 언론 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 결코 이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10

특정인의 이익보다 전체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며, 노동계가 창출한 부를 정당하게 분배하는 일을 금권(金權)보다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레지스탕스가 제안한 것은 '파시스트 국가들의 모습을 본떠 구축된 전문적 독재에서 놓여난, 일반의 이익을 특정인의 이익보다 확실히 존중할 합리적인 경제조직'이었다.  11

진정한 민주주의에 필요한 것은 독립된 언론이다.
모든 어린아이가 가장 발전된 교육의 혜택을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12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사람 한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업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15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거든, 부디 그의 편을 들어주고, 그가 그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  16

무엇이 파시즘을 초래했는지, 프랑스가 무엇 때문에 파시즘의 침탈을 받았고 비시 정권이라는 괴뢰 정권이 세워졌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이렇게 혼잣말을 하게 된다. '가진 자들은 이기적인지라 볼셰비키 혁명을 지독히 두려워했다'고. 그들은 그 두려움이 이끄는 대로 생각없이 행동했다. 그러나 만약 그때처럼 오늘날 행동하는 소수가 일어선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17

분노의 이유들은 어떤 감정에서라기보다는 참여의 의지로부터 생겨났다. 
사르트르의 저서 <구토> <벽> <존재와 무(無)>는 나의 사상 형성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르트르는 우리에게, 스스로를 향해 이렇게 말하라고 가르쳐주었다. "당신은 개인으로서 책임이 있다"고. 이것은 절대자유주의의 메시지였다. 어떤 권력에도, 어떤 신에게도 굴복할 수 없는 인간의 책임. 권력이나 신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라는 이름을 걸고 참여해야 한다.  18-19

헤겔 철학은 인류의 기나긴 역사를 의미 있는 어떤 과정이라고 해석한다. 그 의미란 인간의 자유가 한 단계 한 단계씩 진보한다는 것이다. 역사가 연이은 충격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수많은 도전을 염두에 둔 생각이다. 수많은 사회들의 역사는 좀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하여 종국에는 인간이 완전한 자유에 이르게 됨으로써 이상적인 형태의 민주국가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역사를 이와 다르게 보는 관점도 있다. 자유, 경쟁, '언제나 더 많이' 갖기 위한 질주.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진보란 마치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폭풍처럼 체험될 수도 있다.  19-20

분노의 이유가 오늘날에는 예전보다 덜 확실해 보일 수도 있다. 아니면 세상이 너무 복잡해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도 참아낼 수 없는 일들은 있다. 그것이 무슨 일인지 알려면, 제대로 들여다보고 제대로 찾아야 한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제발 좀 찾아보시오. 그러면 찾아질 것이오"라고.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21-22

세계 인권 선언에 영어권 국가의 대표들이 제안한 '국제적(international)'이라는 말 대신 '보편적'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르네 카생 덕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이 당시에는, 인류를 겁박하던 전체주의의 위협에서 해방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 위협에서 해방되려면 유엔 회원국들로부터 이 선언에 나오는 보편적 권리들을 존중하겠다는 서약을 받아내야 했다. 한 국가가 자국 영토에서 반인륜적 범죄를 자행하면서도 버젓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강변을 깨부수는 하나의 방법이 바로 이 인권 선언이었던 것이다.  24

겉으로는 동참한다고 공온하면서 실제로는 약소국 정복을 일삼는 국가들의 위선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되며, 신속히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것을 나는 절감하고 있었다.  25

어떤 민족이 자신의 역사에서 교휸을 얻은 예는 지금까지 찾아보기 힘들다.  30

분노가 끓어 넘치는 상태를 '격분'이라고 한다면, 폭력이란 도저히 용납 못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내린 유감스러운 결론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이해한다면, 테러리즘이 격분을 표출하는 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격분은 부정적 표현이다. '도에 넘치게 분노'해서는 안 되며, 어쨌든 희망을 가져야 한다. 격분이란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다. 격북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당연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납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희망이 긍정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경우에, 격분 탓으로 그것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31

우리는 여전히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輕視),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21세기를 만들어갈 당신들에게 우리는 애정을 다해 말한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고.  39



저자와의 인터뷰

우리 집안의 분위기는 관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53

도덕이란 타인들과 사회가 만들고 우리에게 강요하는 규범에 순응하는 것일 터입니다. 또 윤리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만들어가야 할 것, 즉 발명이며 창조(말하자면 결국 각자 자기만의 자유를 얻어내는 일)일 테니까요....

어머니는 나에게 어떤 의무라도 지우듯이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네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법이야. 그러니 항상 행복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행복해지려고 참으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언젠가는 정신분석 전문가한테서 이런 말까지 들었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신인줄 아시나 보네요라고.  54

인간의 핵심을 이루는 성품 중 하나가 '분노'입니다. 분노할 일에 분노하기를 결코 단념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지킬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습니다. 따로 또 같이, 정의롭지 못한 일이 자행되는 곳에 압박을 가하는 것이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55

"나 나름으로 어떻게 문제해결에 참여할 것인가" 이 참여가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삶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남에게 베풀고 싶은 마음과 베푸는 기쁨을, 남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책임을 감수하는 것. 어떤 경우에도 남에게 베풀고 싶다는 마음, 이 마음을 북돋워야 합니다. 사람을 책임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성과 감성을 키워주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교육을 통해 계발해야 하며, 마음 교육을 위해서는 상상력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  56

이미 10여 년 전부터 우리는 세계화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더 이상 개개인의 노력에 응분의 보답을 해주지 않는 사회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진정으로 신뢰하지도 않는 체계 속에 어느새 편입되어버렸습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우리의 관심을 끌고 우리의 믿음을 자아내는 시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에는 사람들이 기꺼이 참여를 하고, 일들도 순조롭게 이루어져 갑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시기도 있습니다. 그런 시기에는 사람들이 이런 독백을 합니다. '아니 도대체 어디로 가자는 거야?'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기가 바로 이런 시기입니다.  59-60

자기 나름으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 광고 메시지나 언론이 전하는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유로운 사고를 해야만 자유롭게, 양심에 입각해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3

튀니지아 이집트의 문제들은 바로 이런 문제들입니다. 사람들은 압제 속에 산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히 행동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튀니지의 젊은이들, 이집트의 젊은이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압박을 받으면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 이슬람 문명이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문명이라면, 그 문명 속에 갇힌 채 무력하게만 있어서는 안 된다."  64

제 이야기는 혁명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혁명은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고, 그 혁명들은 대개 안 좋은 방향으로 귀결되곤 했습니다. 
나는 호소합니다. 우리의 정신을 완전히 개혁하자고, 폭력은 거부해야 합니다. 우선, 효과가 없기 때문에 그래야 합니다. 폭력 행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증오만이 더욱 깊이 뿌리내리며 복수심이 더욱 불타오를 뿐입니다. 폭력은 폭력의 악순환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미래로, 희망으로 향한 문을 닫아 버리게 합니다. 그래서 책에도 썼듯이 제가 보기엔, 혹시 폭력적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희망뿐입니다.
하지만 꼭 알아두십시오! 비폭력이란 손 놓고 팔짱 끼고, 속수무책으로 따귀 때리는 자에게 뺨이나 내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 그 다음에 타인들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참 어려운 구축(構築)작업입니다. 이 점, 우리 서양인들은 아시아 사회에서 배울 점이 많습니다.  65

'창조적 저항의식'으로 무장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방법이 있을까요?
참여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중에 간단한 방법은 어느 한 정당을 지지함으로 확실히 참여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투표를 통해 지지를 표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형태의 참여 입니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어떤 특별한 대의를 위해 활동하는 기구, 협회, 운동 등에도 참여를 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실은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들이 숱하게 존재하는 시대입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투표하지 않고 기권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 봅니다.
제도들이 민주적으로 잘 돌아가게 되기까지 시민들의 참여가 얼마나 절대적으로 필요한지를 일반인들이 항상 잘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육이 부족해서 그럴까요? 교육도 부족하지만 정치적 창의성도 부족합니다.  66-67



추천사 - '분노'와 '평화적 봉기'가 세상을 바꾼다.(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분노는 삭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삶의 지혜가 널리 퍼져 있는 한국 사회에서 "분노하라!"라는 직설적, 선동적 메시지는 생경하게 들릴 수 있다. '마음공부'를 통하여 수시로 일어나는 심화(心火)를 직시하고 가라앉히는 것의 중요함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마음공부'가 '공분(公憤)'과 '의분(義憤)'의 불씨를 마음속에서 꺼버리는 것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화의 뿌리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일 때는 그 공적인 원인을 해결할 때만 화는 사라진다.  71

적어도 에셀이 언급한 세 가지는 해결해야 한다. 먼저 언론개혁이다. 현재 "언론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되어 있다고 하면 과장인가. 신문은 물론 종합편성 채널까지 확보한 주류 언론은 사주와 광고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급급하면서 빈자와 약자의 꿈과 고통을 외면하고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잇다. 공평무사한 정론직필을 스스로 포기하고 특정 당파의 선전도구 역할을 하고 있다. "국가, 금권, 외세로부터 언론의 독립"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 독립은 커녕 정치권력, 시장권력 및 외세와의 공모와 공생을 즐기고 있지는 않은가.
둘째, 교육개혁이다. 현재 교육체제는 "'학교'의 이상과 너무 거리가 멀며, 부유층만을 위한 것으로 더 이상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정신을 충분히 계발시킬 수 없"음은 대다수의 시민이 공감하고 있지 않은가.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입시경쟁에 내몰려 이 학원, 저 학원을 뺑뺑이 돌아야 하는 현실은 참담하다. 이는 교육이 아니라 사육(飼育)이며 제도적 학대다. 학생이 성적에 따라 차별박고 '알짜-예비-잉여'로 등급화되는 학교 현실은 그 자체로 인권침해이며, 이러한 현실 속에서 자긍심과 연대의식이 키워질리 없다. 그리고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방향으로 고착되고 있는 교육체제는 사회통합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셋째, 소수자의 인권 보장 수준을 옾여야 한다. OECD 가입국이자 G20에 속하는 나라임을 자랑하지만, 한국 사회의 다수자의 마음에는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소수자에는 여러 집단이 있지만, 여기서는 외국인 노동자만 언급하기로 하자. 올챙이 시절을 까맟게 잊어버린 개구리처럼, 한국은 "'불법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가 되고 잇다 값싼 노동력이 다량 필요하기에 불법체류 여부를 가리지 앟고 이주 노동자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드르이 인권을 침해하고, 거칠게 말해 단물을 빼먹은 후 추방하고 잇는 것이 한국 경제체제 아닌가.
이러한 진보와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 첫 번째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즉, "'항상 더 많이'라고 외치며 앞으로만 질주하는 태도와 과감히 결별해야 한다." 과속경쟁 사회는 구성원을 항상 불안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구성원 다수를 패배자로 만드는 사회는 부정의한 사회다. 이제 '앞'만 아니라 '옆'과 '뒤'도 보는 사회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이때 "윤리, 정의, 지속가능한 균형의 문제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 이제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輕視),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에 맞서서 "평화적 봉기"를 일으킬 때다. 이 '평화적 봉기'의 수단은 다름 아니라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각종 기본권이다.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자. 온라인에서 그리고 오프라인에서,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의 오만과 횡포, 불법과 탈법을 감시하고 비판하자. 단호하게 그리고 발랄하게, 또한 무조건 투표하자.  77-79

사람의 삶과 직결되는 가치와 정책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기계적 중립은 없다. 
하워드 진은 말한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존 F. 케네디 역시 단테의 <신곡>을 재해석하며 말한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기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 현실에 대한 냉소, 무관심, 거리두기만으로는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의 정당한 분노와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  79 



옮긴이의 말 - 어느 행복한 투사의 분노

"분노할 일을 넘겨버리지 말라. 찾아서 분노하고 참여하여. 반죽을 부풀리는 누룩이 되라"고, "어느 누구라도 인간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거든, 부디 그의 편을 들어주고, 그가 그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고...
보편적인 권리, 기본이 존중되는 사회가 되도록 부디 분노하라고, 감정적인 외침이 아니라 '참여의 의지'로부터 자연스레 우러나는 결기 어린 외침이다....
재앙의 화근에 분노하라는 것이다.  81

레지스탕스 정신은... 분노할 실마리를 잡아서 분노할 줄 알고 정의롭지 못한 것에 저항할 줄 알되, 마음속에는 비폭력의 심지를 곧게 세우고 참여하여 새로운 현재와 미래를 창조하라는 것이다.  82

'앵디네부(Indignezvous)!'를 처음에는 '분개하라!'로 번역하고자 했다. 프랑스어에서 '분노하다'를 의미하는 동사는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 's'indigner'라는 동사의 뜻은 평정을 잃지 않은 채 '분개'하는 쪽에 가깝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정의에 어긋난 일에 비분강개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적인 원한에 북받쳐 욱하는 것이 아니라 옳지 못한 일에 '의분'을 표출하는 것이다.  84


스테판 에셀의 <참여하라> 내용

스테판 에셀의 <정신의 진보를 위하여> 내용

스테판 에셀의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내용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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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작품 몇 권을 읽고 그 중에 <불안(Status Anwiety)>이란 책을 읽으며 저자에게 매력을 느꼈다. 그 후에 저자의 작품들을 검색하여 여러권을 더 읽고 있다.
물론 한꺼번에 읽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여건상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ㅈ자의 작품중에 한국에 번역되어 들어온 모든 작품에 대한 검색과 도서관에 책 내용들을 훑는 작업은 하였다.
저자의 사랑에 관한 소설형식의 3부작중 첫 번째 작품인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Essays in Love)>를 읽었었고, 두번째 작품(우리는 사랑일까-The romantic movement)이 아닌 세번째 작품인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여러 책들을 살펴보면서 이 책을 먼저 들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책 내용에 대해 소개 내용을 읽은 것도 아니다. 다만 중간쯤에 실제 인물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막연한 생각으로 지금의 부인과의 사랑에 대한 관찰과 생각을 담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일 먼저 읽었다.
물론 이때까지는 한국말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그러했었다.

시간이 지나며 원서의 제목을 보고는 한국엔 제목부터가 역시 다르구나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목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기대치와 기대방향에 대해 혼란을 주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을 한다. 물론 내생각 뿐일지는 모르나..
원제는 <Kiss & Tell>이다. 언뜻보면 키스와 대화정도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폭로한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헤어진 연인의 과거를 공개함'이라고 표현할 수 도 있을 듯하다. 직역을 하는것보다는 사람들에게(여기서 독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음을 주의하기 바람) 먹히는 제목이 들어와야 하는건 당연한것일 지도 모르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불안>에서 원제를 먼저 확인하고 책을 보았기에 기대치의 방향이 달라지지 않았었는데, 이 번 책은 그러지 못했다. 이건 분명 나의 잘못이다.
저자의 내용에 매력을 느꼈고, 사진을 먼저 보면서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으니..^^

저자의 개인사를 모르기에 지금의 책이 가족인지 아니면 정말 지나간 연인과의 내용인지를 잘 모르겠으나, 실제 사진이 들어가 있기에 놀랍다.
한국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출판이 가능했을까.. 상대에게 동의를 구할때 동의해 줄까.. 아니 실제 지금의 가족이라 하더라도 쉽게 동의를 할 수 있을까..
우여곡절 끝에 출판이 되었다고 해도 사회적인 파장이 꽤나 클것이란 생각이 든다.

저자는 헤어진 이전 연인에게서 '너를 파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 사람이 그렇게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자신에게 강박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말이야. 너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나르시시스트는 자기밖에 사랑할 수 없어. 나도 남자들이 대부분 소통의 실마리를 잘 찾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너의 무능력은 짜증날 정도로 특별했어. 너는 내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떤 것이든 전혀 존중하지 않았어. 모든 것에 늘 고압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로 접근했지. 나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이기주의자, 자기 귓불보다 멀리 있는 어떤 것에도 공감을 하기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나는 너무 긴 시간을 낭비했어...'(11)이란 내용의 편지를 통해 여성에게 더욱 다가가기 위해 '이사벨'과의 시간들을 통해 관찰해가면서 알아가려 많은 대화와 자신의 생각들을 서술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전기 작품의 형식을 빌어와 그 작품들에 들어갈 내용들과 저자들의 생각들을 이사벨의 전기형식 작품으로 변환해 나가면서 서술하고 있다. 
저자의 많은 지식과 사유는 즐거움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즐거우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주고 있는것이 저자의 매력이란 생각이 든다.

읽으면서 정말 저정도 까지 연인에게 질문들을 해도 괜찮은걸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알아가려면 차라리 저정도의 질문을 자신의 의도에 대한 설명과 함께 던지는 것이 더 좋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읽어 나간다.
나 또한 남자 이기에 여성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다고 생각을 한다. 관련책들도 여러권 읽어보았으나 그것만으로 나와 다른 구조를 가진 부류를 이해한다는건 거의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을 한다. 직접 겪어봐도 아직 그들에 관해 30%도 알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하다.
언제쯤 70%까지 갈 수 있을까.. 그 정도면 그들과 큰 마찰 없이 긴 시간을 즐거움으로 채워나갈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 헤어짐을 예시하면서 끝난다. 완전 공감한다. 
저정도까지 질문하는 건 넘어선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맞은건지, 아니면 이사벨이 다른 복합적인 이유들을 더 많이 가진건지 모르지만 헤어짐을 마주하면서 내용이 끝이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고서도 여자에 대해 지식이나 지혜가 크게 늘어난것 같지는 않다. 책의 원제처럼 폭로를 통해 저자는 어떠한 생각들을 하였으며 그 생각의 부분 부분 들이 마음에 닿았기는 했다.
부러운것은 이들의 사고방식이 우리내 보다는 많이 열려 있다는 것이고, 이것을 배워나가는데는 도움을 많이 받은 느낌이 든다.

이렇게 표현을 하면 여성들이 한숨을 쉬지 않을까..하는 갑작스러운 의문이 든다.
'이런 내용을 보고도 여자에 대해 모르다니'하면서 한 숨을 쉬는 그림이 그려지는건 혼자만의 우려일까..??
꽤나 많은 사람들에게 '무디다' , '눈치없다' , '너무 모른다' 이러한 표현들을 많이 들어서 그런생각이 드는걸까.. 어쩌면 앞서 언급한 저자의 옛 연인이 보낸 편지의 내용이 나에게 적용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더욱 열심히 보려 한 것일지도.. 나의 무의식이 이 책을 먼저 읽게 한 건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나의 무의식은 다 읽고 난 지금 나에게 어느 정도나 실망하고 있을까..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이해해보고, 나 자신을 내 삶이 아닌 다른 삶에 푹 담가보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고, 어린 시절과 꿈을 통해 어떤 사람을 따라가보고, 라파엘전파에서부터 과일 맛이 나는 셔벗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취향을 추적해본다는 생각. 나 스스로 전기를 써보면 어떨까?  18
오직 위인만이 전기의 적합한 소재가 될 수 잇다는 가정은 그대로 유지된다.
200년 전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이 곤혹스러운 만장일치를 잠깐 흔들었지만 이내 무시되고 말았다. 존슨 박사는 '적절하고 충실한 이야기에 담아낼 가치가 없는 삶이란 없다. 모든 사라에게는 그 자신과 똑같은 조건에 잇는 사람이 아주 많으며, 그들에게 자신과 비슷한 사람의 실수와 실패, 회피와 임기응변은 직접적이고 확실한 쓸모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상태란 장식과 위장을 떼어내고 생각하면 매우 균일하여, 인류에게 공통된 것을 제외할 경우 좋든 나쁘든 다른 자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20

나는 유년기를 선형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전기를 시작하는 방법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내 전기가 철저하기를 바랐지만, 그럼에도 여기에는 과거만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와 공존하고 또 현재로부터 나타나는 특정한 방식이 드러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3
절대 인생에 대한 관점(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에번스턴에서 멀리 떨어진 땅에 오래전 살았던 한 아일랜드인을 보는 관점) 자체를 쓰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고, 오히려 편견이나 엉성한 학식에서 나온 관점으로 인한 왜곡으로부터 가능한 한 자유로운 상태에서 삶 자체를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단지 하나의 삶만 있다면, 저닉 작가들이 그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신의 에고와 미뢰의 쓸데없는 간섭에서 멀리 떨어져, 그 삶이 조심스럽게 편견 없이 재구축되도록 하는것이 핵심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삶이 있다.  39
전기의 고상함을 인간적 애착이라는 저열한 영역과 절대 뒤섞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응을 해야 한다면, 애착과 전기를 쓰고자 하는 충동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즉 다른 사람을 완벽히 알고 싶은 충동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애착이 전기를 써나가는 다소간 의식적인 과정(날짜, 특징, 좋아하는 세탁 주기와 간식 등을 파악해 나아가는 것)을 포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전기는 작가와 대상 사이의 다소간 의식적인 감정적 관계를 요구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책을 마무리하는데 필요한 엄청난 에너지를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프로이트는 '전기 작가들은 그들의 주인공에게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고착되어 있다. 많은 경우 그들이 연구의 대상으로 그 주인공을 선택한 것은-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이유로-처음부터 그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뒤에 그들으 ㄴ이상화라는 과제에 에너지를 쏟아, 주인공의 인상에서 개별적인 특징들을 지워버린다. 그 주인공이 평생에 걸쳐 내적이고 외적인 저항들과 싸워온 흔적들을 매끄럽게 다듬어버리고, 그에게 인간적 약점이나 불완전성의 자취를 용납하지 않는다.'  65-66

특정한 벽장이나 다락방 때문에 예정된 경로에서 벗어나 옆길로 새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도대체 그녀의 어머니가 어떤 식으로 바람을 피웠냐고 이사벨에게 물을 때 옆길로 새는 것과 비슷하다. 나의 그런 호기심은 (흔히 그렇듯이, 또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듯이) 나 자신의 삶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내고, 남들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더 선명하게 도드라질 어떤 정체성을 찾아나가려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느 ㄴ사람이나 전기에 대한 관심 가운데 그 근본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친구나 나폴레옹이나 베르디나 W.H. 오든과 얼마나 다를까?' 하는 문제, 따라서 간접적으로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하는 문제의 답을 찾아내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난 부분이 얼마나 될까?  89
자, 그럼 댁의 인생을 갖고 뭘 하고 계시는지 자세히 이야기 좀 해주실래요?  92

누군가에게 과거를 기억하라고 재촉하는 것은 총을 들이대고 재채기를 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진정한 기억은 재채기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25
실제로 과거를 기억할 때는 그런 것들과는 달리 손에 분명히 잡히지 않는 이미지들이 우리를 쫓아다닌다. 심지어 어떤 사건 같은 확실한 것은 전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잇다. 이야기는 쏙 빠져버리고, 기분과 분위기만 기억할 수도 있다. 따라서 과거에 푹 빠져 있으면서도 자신은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일이 흔히 일어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이사벨과 내가 목요일 퇴근 후 파링던 로드 근처 커피숍에 있을 때 그녀는 바로 그런 예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둘 다 사무실에서 종일 수다를 떨고 난 날이면 찾아오곤 하는 침묵의 분위기에 싸여 있있지만, 나는 그녀의 침묵의 길이가 문제의 신호일 수도 잇다는 느낌이 들어 그녀에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가 대답하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어. 있잖아, 이런저런 것들. 사실 아무것도 아니야."
"됐어."
실제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생각하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 아마 잠 다음으로 그것이 가장 인기 있는 소일거리일 것이다.  132
우리는 이야기를 할 때 상대가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여, 한 두 가지 사항을 분명하게 전달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의 의식에서 전개되는 혼란스러운 과정을 공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133
".. 지금 나는 사실 별 생각을 하지 않았어. 그냥 구름 속에 파뭇혀 있었을 뿐이야."  136

남들에 대한 호기심은 자기 성찰을 피해가고자 할 때 애용하는 방법이다. 내적인 투쟁을 덮어버리고 인용을 할 권리나 편지 내용을 사용할 허가를 얻기 위한 싸움을 앞세울 수 있는 것이다.  150
섹스가 친밀성의 상징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두 사람이 친밀해질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상징은 오히려 자신이 상징하는 상태의 실현을 방해할 수도 있었다. 서로 알아가는 더 힘든 과정을 피하는 방법으로 상대와 잘 수도 있으니까. 마치 책을 읽는 일을 면하기 위해 책을 사는 것처럼.
"그럼 행복해지려면 뭔 해야 한다는거야?"
"나도전문가는 아니야. 그냥 상대와 미리 친밀한 경험을 해보지 않고 같이 자버리는 게 반드시 좋은 생각은 아니라는 얘기일 뿐이야."
"예를 들어 어떤 경험?"
"있잖아, 질투를 하고, 욕을 하고, 교활한 면을 보여주고, 토하고, 코를 풀고, 발톱을 깎고."
내가 둔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네 발가락에 무슨...?"
"아냐, 아무 문제 없어."
"그런데?"
"뭐, 발톱을 깎는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건 좀 사적인 거니까. 발톱이 발에 붙어 있으면 그건 괜찮아. 하지만 일단 떨어져 나가면 그건 쓰레기잖아. 예를 들어, 사람 머리에 난 머리카락을 보는 것하고 욕조에 붙어 잇는 머맅카락을 보는 건 다르잖아."
"그런데 왜 발톱을 깎는 게 섹스를 하는 것보다 더 친밀한 거야?"
"섹스를 하는 상대는 그 앞에서 발톱을 깎아도 창피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얘기일 뿐이야."  153
삶의 사적인 부분은 사람을 이해하는 문제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실제 이상으로 과시하려고 한다.  155
하지 못하는 키스가 하는 키스보다 더 흥미로울 수도 있는 것이다.  190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생각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자체의 특질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의 마음 상태와 더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94

공감의 핵심은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능력이라고 한다. 이 행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은 비뚤어진 시각 때문에 대체로 왜곡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운이 좋고 민첩하면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특권을 누릴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적어도 잠시라도 우리의 상대성을 넘어설 수 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197

이사벨은 그 무렵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를 다 읽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걸작이 매우 감동적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교환했다. 나는 어떤 책도 이 책만큼 죽음이라는 현실에 가까이 다가가게 해준 적이 없다는 그녀의 의견에 공감했지만, 그럼에도 나느 ㄴ그녀가 이반 일리치를, 그리고 그가 살았던 집과 그의 부인이나 가족의 얼굴을 어떻게 상상했느냐 하는 괴상한 질문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반적인 문학적 토론을 넘어, 단지 도덕성, 상징, 파국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과 사람들, 또 방을 어떻게 보았느냐, 그런 무대용 소도구들이 너의 삶의 어디에서 유래했느냐 하는 지점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206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주파수가 다르고, 주어진 환경에서 눈여겨보는 것도 다르다.  208
사람들이 상황을 다양하게 해석하고, 그런 뒤에 해석보다는 상황을 놓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는 방식을 증후적으로 보여 주기도 한다. '이성적(rational)'이라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이 말은 이사벨의 사전에서는 이런 뜻이고 내 사전에서는 저런 뜻이기 때문에, 내가 그녀를 매우 '이성적'이라고 칭찬하면 그녀는 그 말이 욕이 아닌가 의심한다.
그녀의 사전에는
'형용사 
1. 따분하고 현학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2. 감정에 대립되며, 전통적인 가족의 이분법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의 여동생은 감정적인 사람이고, 그녀는 이성적인 사람이다.
3. 가이가 그녀에게 한 적이 있는 욕이다.'
그러나 내가 전달하고자 한 것은 내 사전에서 정의된 항목이다.
'형용사
1. 고귀한 정신에게 바치는 찬사.
2. 조지 엘리엇, 마리퀴리, 버지니아 울프는 이성적이다.
3. 감정과 양립하고, 감정을 고양할 수 있다.'
이런 차이에서 발생한 작은 갈등은 하나의 사건이 서로 다른 설명을 낳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209-210

존슨박사는 '우리 모두 똑같은 동기에 자극을 받고, 똑같은 오류에 속고 희망에 힘을 얻고, 위험에 막히고, 욕망에 휩쓸리고, 쾌락의 유혹을 받는다.'
존슨은 사람들이 서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똑같은 단일한 가족에 속해 있으며, 따라서 인간 공동체로 가는 여권을 기초로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당신의 동기를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내 베개 밑에서 비슷한 동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 안에서 똑같은 경험을 발견하여 당신의 경험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이 사랑 때문에 얼마아 괴로웠는지 안다. 나 또한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 저녁을 견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의 질투를 인정한다. 나 또한 나의 부족한 면으로 인해 겪은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232-233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을 직접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비슷한 상황에서 느낄 만한 것을 생각하여 그들이 영향을 받는 방식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 형제가 고문을 받고 있다 해도, 우리 자신이 편안하다면 우리는 그가 겪는 고통을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오직 상상에 의해서만 그가 느끼는 고통에 대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상상에 의해 우리 자신을 그의 상황에 집어넣고 우리 자신이 똑같은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상상으로 남들과 함게 고통을 겪는 것의 미덕에도 불구하고, 베개 이론의 우울한 전제는 남들의 경험을 진정으로 상상하려면 충분한 경험이 축적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축적된 경험만으로는 절대 우리 자신을 넘어선 곳에서 만나는 감정들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전제는 우울할 수밖에 없다.  233
사람들은 자신이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도 우리가 그들의 경험이 어떤 것이지 알아야 한다는 가정 때문에 자기 경험의 본질에 관해 입도 뻥긋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삐치기 잘하는 사람은 말을 하거나 비유를 들거나 설명을 하지 않아도 자신이 남들에게 이해받을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기 쉽다. 말을 한다는 것은 말 이전의 더 친밀한 수준의 소통이 좌절되었다는 증거일 뿐이라는 것이다. 직관이 고장이 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목청으 ㄹ가다듬어야 하며, 따라서 우리의 목소리는 우리의 외로움을 일깨울 위험이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직접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235

누구나 감추는 것이 있다. 누구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어떤면을 알면 그 후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욕구 뒤에는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이 알려지면 우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놓여 있다. 그래서 속임수를 쓰는 바람에 이따금씩 비밀이 드러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기게 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게 되면 부모 앞에 선 아이처럼 열등한 위치에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투명성에 대한 공포, 다른 사람이 선태긔 여지를 주지 않고 우리의 비밀을 알아낼 것이라는 공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공개를 좌우하는 주인이라는 생각, 우리가 남들보다 우리 자신을 잘 안다는 생각 때무넹 점차 줄어들게 된다.  240-241

어떤 사람의 행동이 중요할수록 그 사람의 하찮은 것들도 흥미를 자아낸다.  301
인간은 세 가지 전기적 범주로 나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부터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i] 특별하지만 평범한 일(의자에 앉거나, 자식을 낳거나)을 하는 것.
[ii] 평범하지만 특별한 일(살인을 하거나, 복권에 당첨되거나)을 하는 것.
[iii] 평범하면서 평범한 일(포테이토칩을 먹거나 우표를 사거나)을 하는 것.  302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두 노부인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한쪽 여자의 남편에게 줄 생일 선물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래리한테 뭘 해줄 거야?"
"모르겠어. 올해는 아무 생각이 안 떠오르네."
"책을 사주는 게 어때?"
"그럼 무슨 얘기가 나올지 뻔해."
"뭐라고 하는데?"
"이럴거야. '내가 장님이고 귀머거리인 것도 모자라, 술꾼으로 까지 만들려는 거야?'"
굳이 가서 확인할 필요도 없이,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어떻게 반응할지 정확하게 아는 것. 이것이 어떤 사람을 충분히 잘 안다는 완벽한 상징 아닐까? 가끔 오랜 결혼 생활의 우울한 특징으로, 바람을 피우거나 도예 강좌에 등록하기 직전에 나타나는 조짐으로 간주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이 시작한 말을 정확하게 마무리하는 드문 기술에는 큰 지혜가 담겨 있다.  316

"나도 왜 내가 머리를 올리지 않는지 모르겠어. 어쩌면 올려야 할지도 몰라. 어쩌면 그게 더 나을지도 몰라, 그건 내가 왜 치즈를 정육면체로 자르는지, 내 우편번호의 끝자리가 무엇인지, 나무 빗을 어디서 샀는지, 직장까지 거리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내 자명종에 어떤 배터리가 들어가는지, 왜 나는 화장실에서 뭘 못 읽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야. 낳산테는 나도 이해 못하는 게 많아. 솔직히 말하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도 많고. 왜 너한테는 모든 게 그렇게 분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마치 사람들의 삶이 그 말도 안 되는 전기 안에 요약 정리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나한테는 나 자신도 납득할 수 없고 당연히 너한테도 납득이 안 될 괴상한 것들이 가득해. 나도 독서를 더 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TV 보는 게 더 편해. 나한테 잘 대해주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툴툴거리는 사람들이 한번 달려들어보고 싶다는 의욕을 더 자극해. 나는 동정심을 발휘하고 싶지만, 행복이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는 걸 알아.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싶지만, 차가 더 편해. 아기를 낳고 싶지만, 어머니가 되는 게 무서워. 내 인생에서 무너가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8시 15분이 지났기 때문에 이러다 지하철을 놓치는 게 아닌가 안달하고 있을 뿐이야."  330-331


옮기고 나서
사람들을 알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공감하게 되고, 공감하면 사랑하게 되느 ㄴ것일까? 다시 말해서, 아는 만큼 공감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 그관계를 떠나, 이 가정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사람을 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332
'내 글은 모두 일종의 자서전이죠. 나는 늘 독자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관련을 맺는 것, 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아시아나 기내지 2010년 4월 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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