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머리에 - 내가 겪은 시를 엮으며 시를 있는 일에는 이론의 넓이보다 경험에 깊이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8
세상은 ‘자식 잃은 엄마‘를 “슬픔의 상징”으로 생각하나, 정작 그녀는 충격과 분노,무력감과 굴욕 감 등에 시달리며 네네 울었을 뿐, 그런 감정과는 다른 ’슬픔‘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48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 ‘강간’
타인을 ’안다고 여기는‘ 태도는 언제나 위험한 곳이지만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는 완전한 동력이다. 이런 폭력은 ’말 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에게 권력이 있을 때 발생한다. 59
’모든 강간은 두 번 일어날 수 있다‘ 육체적 강력한과 정신적 건강, 혹은 개인적 안가는 거야 사회적 강간. 61
한 시인의 삶이 객관적으로 보기에 불행한 편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다행이 주관적으로 학원 하는 말을 하는 것은 부주의한 일이다. 당사자가 ‘나는 불행하다’고 말한다 해서 타인이 아무 때나 ‘그는 불행하다’라고 말할 자격은 얻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당사자가 그 말을 할 때는 설사 신세 한탄의 형식을 취 한다 해도 그것이 자기 직시의 효과를 발휘해 자신의 현재를 극복하는 첫걸음이 될 수도 있겠으나, 타인이 그런 말을, 그것도 그를 그 불행에서 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의사도 없이 할 때는, 그런 말이야말로 그가 미래의 다른 자신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꺾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67
늙는 것은 나나 그대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 그 자체라는 뜻이 아닌가. 80
누구도 힘들 만큼 잘 묻기는 어렵다. … 인생은 질문 하는 만큼만 사라지기 때문이다. 87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8 8
단지 사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진실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 천사가 학교 않으면 쓰러질 뿐인 우리 불안전한 인간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그를 ‘살며시 어루만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90
시인 랭보는 10대 후반에 짓이기듯이 선언했다. “사랑은 제발명 되어야 한다” ([착란1]) 이 선언에 담긴 취지를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 시대 사랑은 부르주아적 놀리 와 관습에 오염 되어 단지 이익의 거래가 되었을 뿐이며, 사랑의 아름다운 귀결로 간주 되는 결혼이라는 것은 차가운 멸시를 먹고 사는 괴물 일 뿐이다.’ 랭보가 말한 것은 팔 명이 아니라 재발명이다. 어떤 가치 혹은 제도의 재발명을 요청 하는 사람은 혁명적이다. 기존의 것은 가짜라고, 진짜는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93
메리 올리버 의 <기러기> 착한 사람이 될 필요 없어요. 사막을 가로지르는 백 마일의 길을 무릎으로 기어가며 참회할 필요도 없어요. 그저 당신 몸의 부드러운 동물이 사랑하는 것을 계속 사랑하게 두어요. 절망에 대해 말해보세요. 당신의 절망ㅇ을, 그러면 나의 절망을 말해줄게요. 그러는 동안 세상은 돌아가죠. 그러는 동안 태양과 맑은 조약돌 같은 빗방을은 풍경을 가로질러나아가요. 넓은 초원과 깊은 나무들을 넘고 산과 상을 넣어서. 그러는 동안 맑고 푸른 하늘 높은 곳에서 기러기들은 다시 집을 향해날아갑니다. 당신이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당신의 상상력에 자기를 내맡기고 기러기처럼 그대에게 소맃쳐요, 격하고 또 뜨겁게 세상 만물이 이루는 가족 속에서 그대의 자리를 되풀이 알려주며. 108-109
자신이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고 자책ㅎ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고질적 습관이 아닌가. 이 시의 ㅣ도입부는 바로 그런 대다수 독자의 자학적 자의식을 바로 옆에서 들리는 음성처럼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112
“그저 당신의 몸의 부드러운 동물이 사랑하는 것을 계속 사랑하게 두어요,. 인간성(정신성)을 내려놓고 우리안의 동물성(육체성)이 이끈느 길로 가라는 것. 물론 그 동물성은 인간이 극복해야 할 폭력적 동물성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극복해야 도달할 수 있는 “부드러운 동물성”이다. 112-113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건 일어났다’가 맞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다음 말.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나악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 132
인정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 즉 외로울 때, 그것은 고통이자위험이 된다. 그것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찬미하는 '고독'과는 얼마나 다른가.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위대한 일은 한결같이 시장터와 명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진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I-12) 그렇다면 차라리 '외로움(loneliness)'과 '고독(solitude)'을 분리하는 것이 나아 보인다. 한나 아렌트처럼 말이다. "고독 속에서 나는, 나 자신과 함께 있는, '홀로'이다. 그러므로 하나-속의 둘(two-in-one)이다. 반면 외로움 속에서 나는, 모든 타인들에 의해 버려진, 그야말로 하나 one다." (『전체주의의 기원) 요컨대 외로움과 달리 고독은 나를 둘로나누어 대화하게 만든다는 것. 고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어려운 문장도 읽어볼 필요가 있다. 한 인간이 '개별화' 되려면 '고독화'라는 이상한 말로옮길 수밖에 없다)를 겪어야 한다는 것. “개별화, 그것은 인간이자신의 약하고 보잘것없는 자아를 완강하게 주장하여 그가 세계라여기는 바로 이런저런 것에다 자신을 펼쳐나가는 것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다. 개별화란, 오히려 개개의 인간이 그 속에서 비로소처음으로 모든 사물의 본질적인 것에 가까이 이르게 되는, 즉 세계의 가까이에 이르게 되는 그런 고독화이다.”(『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그러니까 고독 속에서만 "처음으로" 사물과 세계의 본질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한편 알랭 바디우는 기존의 지식과 언어로는 설명될 수 없는 ‘사건'을 경험하고 그 '진리'에 관통당한 자가 그것에 충실하기를 고집하면 고독에 처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내용을 설명하는이지에서 백상현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장을 덧붙였다. “누구도 금지된사랑에 매달린 두 사람을 동정하지 않는다. 누구도 도청을 사수했던 그들의 죽음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누구도 갈릴레이의 미친 지동설을 믿지 않는다. 귀를 자른 화가의 작품을 아무도사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독 속의 그들은 당신들의 평범함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미래는 그들의 것이었기 때문에."(고독의매뉴얼』) 138-139
서시 - 한강 어느날 운명이 찾아와 나엑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 150
“애국심은 사악한 자들이 내세우는 미덕이다(Patriotism is a virtue of the vicious.)” - 오스카 와일드 164
우리에게 필요하고도 가능한 일은, ‘평상시에’ 누군가의 사랑이 다른 누군가의 사랑보다 덜 고귀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유사시에’돈도 힘도 없는 이들의 사랑이 돈 많고 힘있는 이들의 사랑을 지키는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그리하여 ‘언젠’ 우리 각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그러니까 평화를 함께 지켜내는 일일 것이다. 이런 것도 애국이라면, 애국자가 될 용의가 있다. 168
”조금 아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깊이 마시지 않을 거라면 피에리아의 샘물을 맛보지 말라.“ 알렉산더 포프의 장시<비평론(An Essay on Critisism)>의 215~~216행이다. 조금 아는 사람이 위험한 것은 그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이 아는 사람은 자신이 알아야 할 것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음을 안다. 이어지는 대목이 이렇다. ”얕은 한 모금은 뇌를 취하게 만들지만, 많이 마시면 다시 명철해지리라.“ 그러니까 이런 말이다. 이젠 좀 알겠다 싶으면 당신은 아직 모르는 것이고, 어쩐지 점점 더 모르겠다 싶으면 당신은 좀 알게 된 것이다. 172
5월 17일 인간이란 어디서나 다 마찬가지니까 말야. 사람들은 대개 오로지 생계를 위새서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다가 약간 남아 돌아가는 자유시간이라도 생기면, 도리어 마음이 불안해져서 거기서 벗어나려고 온갖 수단을 다 쓴단 말이다. 아아, 이것도 인간의 운명이라고 할 것인가! 18
5월 22일 어린애처럼 아무 분별도 없이 그저 빈둥거리면서 하루를보내는 것, 인형이나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부질없이 옷을 벗겼다 입혔다 하는가 하면, 엄마가 과자를 넣고 잠가둔 서랍 근처를 자못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돌아다니는 것, 그러다가 갈망하던 물건을 손아귀에 넣으면 볼이 뿌듯하게 그것을 입에 쑤셔넣고 먹으면서 <더 먹을래!> 하고 졸라대는 것, 이런 생활이야말로 누구보다도 행복한 생활이라는 것이지. 한편 자기들의 하잘것없는 사업이나 정열에 대해서까지도 화려한 이름을 붙여놓고, 그것이 마치 인류의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한 어마어마한사업이나 되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사람들도 행복하다고 하겠지.그렇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네들에게 복이 있을진저! 그러나 그 모든 일이 어떻게 끝날 것이며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겸허한 마음으로 인식한 사람, 여유 있게 사는 시민 하나하나가 그들의 조그마한 정원을 손질하여 낙원으로 꾸밀 줄 알고, 불행한 사람마저 그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거리면서도 끈기 있게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이 햇빛을 다만 1분 간이라도 더 오래 쳐다보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그렇지. 그런 사람은 말없이 자기 자신 속에서 스스로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고그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리 제약을 받고 있더라도, 항상 마음속에서도 자유라는즐거운 감정을 간직하고 있다. 자기가 원하면 언제라도 감옥 같은 이 세상을 벗어날 수 있다는 그런 자유의 감각 말이다. 22
5월 26일 나는 앞으로는 그저 자연에만 의지하자는 생각을 더욱 굳혔다. .. 반면에 뭐니뭐니 해도 모든 규칙은 자연의 진실한 감정과 자연의 정다운 표현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 말은 너무 심해. 규칙이란 단지 제한을 하고 쓸데없는 덩굴을 베어낼 따름인데〉라고자네는 말하겠지. 이것 보게! 내가 자네에게 비유를 하나 들어주지. 그것은 사랑의 경우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청년이어떤 아가씨에게 연정을 품고, 날이면 날마다 아침 일찍부터밤늦게까지 그녀를 따라다니며, 모든 정력과 재산을 쏟아부으면서, 자기가 그녀를 위해 온몸을 바치고 있음을 줄곧 나타내려고 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때 속물 하나가, 즉 어떤 공직에 종사하는 남자가 나타나서 그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여보시오, 젊은 양반, 내 말 좀 들어봐요! 사랑을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단 인간다운 사랑을 해야돼요. 자기의 시간을 둘로 나눠서 한쪽은 일하는 데 쓰고, 다른한쪽, 즉 쉬는 시간을 여자에게 바치도록 해야지요. 당신의 재산을 헤아려보고 꼭 필요한 경비를 뺀 다음, 나머지를 가지고여자에게 선물을 하는 것쯤은 나도 말리지 않아요. 그것도 너무자주 해서는 못쓰고 여자의 생일이라든가 세례일 같은 날에만해야지요. > 만약에 그 젊은이가 그런 충고에 따른다면 그는 쓸만한 인물은 될 것이다. 나도 그런 젊은이라면 어떤 영주에게나직원으로 채용해 달라고 추천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애인으로서의 그는 그것으로 끝장이다. 만일 그가 예술가라면 그의 예술마지막이지. 아아, 나의 벗들이여, 무엇 때문에, 천재의 물결이둑을 뚫고 터져나와 큰 홍수를 이루며 콸콸 쏟아져 내려와서,그대들의 영혼을 뒤흔들어놓는 일이 이렇게도 드물단 말인가!사랑하는 벗들이여, 천재의 흐름 양쪽 기슭에는 태연자약한 신사들이 산다. 그들은 자기들의 정자(亭子)나 튤립 꽃밭,채소밭등이 혹시나 못 쓰게 될까 봐, 서둘러 둑을 쌓고 토목 공사를하는 등, 앞으로 닥쳐올 위험을 미리 방지하고 있다. 24-26
8월 15일 정말이지 이 세상에서 사랑만큼 인간에게 없어서 안 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84
8월 18일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동시에 불행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과연 변할 수 없는 것일까? 85
형제여, 그때를 회상하는 것만이 내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것이다. 그때의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다시 불러내어,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보려고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내 정신은 이렇게높이 복돋워진다. 그리고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불안한 상태야말로 한층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이다.내 영혼을 가리고 있던 장막이 걷혀지는 것 같다. 그리고 무한한 생명의 무대는, 내 앞에서 영원히 벌리고 있는 묘지의 심연으로 변하고 말았다. 세상만사는 모두 사라져가는데 자네는 <이것이 존재한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만물은 번갯불처럼 빠르게 지나가 버리며, 그 존재의 완전한 힘이 지속되는 일은 지극히 드물고, 아아! 거센 물결에 휘말려 들어가서 바닥에 가라앉고, 바위에 부딪혀서 깨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닌가. 자네 자신과 자네 주위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을 좀먹어 들어가지 않는 순간이란 하나도 없으며또한 자네가 파괴자가 아니거나 파괴자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는 시간이란 한순간도 없다. 지극히 무심한 산책조차, 수많은 불쌍한 벌레의 삶을 희생시키고 있다. 그저 단 한번 발을 디딘 것이 개미들이 공들여 쌓아올린 탑을 짓밟아 없애고 그 조그만 세계를 무참한 무덤으로 만들어버린다. 아니다, 이 세상에서 좀처럼 잘 일어나지 않는 천재지변, 자네들의 마을을 휩쓸어버리는 홍수나 자네들의 도시를 삼켜버리는 지진 따위가 내 마음을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을 허물어뜨리는 것은, 대자연 속에 숨겨져 있는 그 침식의 힘, 그것이다. 바로 그 힘이 만들어낸 것은 그 사람의 이웃과 그 사람 자신을 파괴하고 만다. 그것을 생각하며, 하늘과 땅과, 그리고 그곳에서 작용하는 온갖 힘에 둘러싸여, 나는 불안스레 비틀거리는 것이다. 나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영원히 집어삼키고, 영원히 되새김질하는 괴물뿐이다. 87-88
8월 22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거나 마찬가지다. 89
12월 24일 물론 나도 매일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 터이지만, 자기 자신의 표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108
1772년 1월 8일 형식적인 의례에만 모든 관심과 주의를 다 쏟고, 자나깨나 염두에 두는 일이라곤 어떻게 하면 식탁의 서열에서 한 자리라도 상좌에 끼여 들어갈 수 있는지, 몇 해를 두고 오직 그것만을 노려보고 있다니, 도대체 어떤 인간들이 그런 꼴이란 말인가! .. 원래 지위라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며 가장 상석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은 아주 드물게나 있는 일인데,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다니, 정말로 어리석은 친구들이다! 얼마나 많은 제왕들이 장관에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장관들이 비서에게 지배되고 있는가! 그렇다면 제일 상위를 차지하는 자는 과연 누구일까? 그것은 남들보다 뛰어나게 통찰을 하고 남들을 손아귀에 장악하여 스스로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힘과 정열을 집중시킬 수 있을 만한 수완과 지략을 갖춘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10
9월 3일 때때로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이다지도 외곬으로 그녀만은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지,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그녀 외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모르고, 또 그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133-134
10월 26일 인간이란 이다지도 허무한 것인가, 자기의 존재를 참으로 확신할 수 있는 곳에서도, 자기의 존재를 정말로 깊이 새겨놓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 자기가 사랑하는 연인의 추억이나 마음속에서까지도 인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것도 순식간에 말이다! 146
11월 3일 과거에 모든 행복의 원천이 내 가슴속에 깃들여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결국 모든 불행의 원인이 내 마음속에서 잠겨 있다. 전 같으면, 넘쳐흐르는 감저으이 소용돌이 속에서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천국이 뒤따르고 세계 전체를 사랑스럽게 껴안는 마음을 가졌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인물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마음은 이제 죽어버렸고, 어떤 감격도 거기서 흘러나오지 않으며, 이미 눈물마저 말라버렸다. 그리고 이제 나의 감각은 상쾌한 눈물 덕에 생기를 되찾을 때가 없을 뿐 아니라, 나의 이마에는 불안에 겨워 주름이 잡힌다. 내 삶에서 단 하나의 기쁨이었던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한없이 괴로워하고 있다. 내 주위의 온갖 세계를 만들어냈던 그 생명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147-148
12월 1일 빌렐름! 내가 자네에게 편지로 그의 이야기를 써 보냈던 남자, 행복하고도 불행한 그 난ㅁ자는 로테의 아버지 밑에서 서기로 있었다. 그는 남몰래 노테를 사모하다가 마침내 사랑을 고백했고 그 때문에 파면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미쳐버렸다. 158
12월 14일 확실한 것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곧바로 혼란과 암흑이 있다ㅏ고 짐작하는 법이지. 그것이 우리 인간 정신의 특징이란 말이다! 172
12월 20일 로테는 이제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의 동생들은 아무도 곁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남편과 영원한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인식하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사랑과성실성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마음속으로 남편을 좋아하고있었습니다. 남편의 침착성과 그 믿음직함은 좋은 아내로서 평생의 행복을 그 위에다 쌓도록 하늘이 정해 주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남편의 존재가 자기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낳은 아이들에게도 얼마나 귀중한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한편 그녀에게는 베르테르의 존재도 퍽 소중한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서로알게 된 당초부터 두 사람의 마음은 그처럼 아름답게 일치하고 조화를 이루었던 겁니다. 오랫동안 계속된 교제와 이제까지 겪어온 여러 가지 일들은 지울 수 없는 인상을 그녀의 마음속에아로새겼습니다. 그녀가 흥미로워했던 것은 무엇이든 그와 함께 나누었기 때문에, 만일 그가 떠난다면 그녀의 마음속에는 다시 메울 수 없는 공허가 생길 것만 같았습니다. 아아, 이럴때 베르테르를 그녀의 형제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녀는 얼마나행복할 것인가! 그를 그녀의 친구 가운데 한 사람과 결혼시킬수만 있다면, 베르테르와 알베르트의 관계를 완전히 전과 같이회복시킬 희망을 가져볼 텐데! 로테는 자기 여자 친구들을 차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나 예외없이 어디엔가 난점이 있어서 베르테르의 배필로서 어울릴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깊은 생각에 잠기는 동안, 그녀는 또렷하게 의식한것은 아니었지만, 베르테르를 자기 곁에 머무르게 하고 싶은것이 자기 마음속의 은근한 소원임을 지금 처음으로 깊이 느꼈던 것입니다. 동시에 그녀는 그를 자기 곁에 붙잡아두는 일이사실상 가능하지도 않고 또 허용될 수도 없음을 스스로에게 타일렀습니다. 그렇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늘 쾌활하고거리낌없었던 그녀가 이제는 행복에 대한 희망을 잃고 우수와비애에 짓눌려서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녀의 가슴은무겁게 조여들었으며 먹구름의 기운이 그녀의 눈 위에 어른거렸습니다. 181-182
로테는 간밤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전부터두려워해 왔던 일이 드디어 결판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짐작도 못하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던 뜻밖의 방향으로 판가름이 나고 만 것입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깨끗하고 가볍게 흐르던 그녀의 피가 열병에 걸린 것처럼 들끓고 갖가지 감정이 아름다운 그녀의 마음을 극도로 뒤흔들어놓았습니다. 그녀가 가슴속에 느낀 것은 베르테르의 포옹에서 생겨난 불길이었던가? 아니면 그의 불손한 태도에 대한 불쾌감이었던가? 그렇지 않으면, 지난날의 거리낌없던 천진성과 근심 걱정 없던 자신에 비해 현재의상태가 불만스러워서일까? 남편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고백을 해도 마음속에 거리낄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고백할 만한 용기도 나지 않는 그런 장면을 그에게 어떻게 고백할것인가? 이미 상당히 오랫동안 두 사람은 서로 침묵을 지켜왔다. 그런데 이제, 자기 쪽에서 이 침묵을 깨뜨리고, 하필이면지금 이 적당치 못한 시기에 뜻하지 않았던 사건에 관해서 남편에게 고백해야만 될 것인가? 베르테르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그에게 전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인상을 주지 않을까 염려되는데 하물며 이와 같이 뜻하지 않던 불상사에 관해서 어떻게 말할수 있을 것인가? 거기다가 남편이 자기를 어디까지나 공정한 눈으로 보고, 아무 편견 없이 받아들일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또 자기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보고 이해해 주기를 바랄 수 있을까? 지금까지 자기는 언제나 남편에게 투명한 수정처럼 숨김없이솔직하게 털어놓았으며 자기의 어떤 기분이나 감정도 숨긴 일이없고 또 숨길 수도 없었는데, 이제 남편 앞에서 자기 기만을 할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차례로 그녀를 괴롭혔고 당황 속으로몰아넣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녀의 생각은 끊임없이 베르테르에게로 되돌아왔는데 그녀에게는 그가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는존재였습니다. 그녀로서는 그를 버린다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를 내버려두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르테르는 로테를 잃어버린다면, 이세상에서 그에게 남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로테가 그 순간 뚜렷하게 자각은 못했지만, 베르테르와 남편과의 사이에 뿌리 깊은 위화감이 얼마나 무겁게 그녀의 마음을억눌렀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이해심이 많고 그렇게 착한 마음씨를 가진 두 사람이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의견차로 말미암아, 서로 침묵을 지키게 되었고, 각자가 자신의 정당성과 상대방의 부당성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태는 더욱 얽히고 악화되어 마침내 모든 운명이 걸려 있는 위기일발의 순간에 가서도 그 매듭을 풀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태에 이르기 전에 좀더 일찍이 두 사람이 지난날처럼 행복한 친밀감으로 가깝게 지냈더라면, 사랑과 관용이 번갈아서 그들의 마음을발랄하게 하였더라면, 그리하여 서로 흉금을 털어놓았더라면, 아마도 우리의 친구는 구원되었을는지도 모릅니다. 201-202
로테! 될 수만 있다면 당신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싶었습니다. 당신을 위ㅐ서 이 몸을 바치는 행복을 누려봤으면 했던것입니다! 당신의 생활에 평화와 기쁨을 다시 찾게 해드릴 수만 있다면 나는 아무 미련도 없이 기꺼이 용감하게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아, 가까운 사람을 위하여 스스로 피를 흘리고 죽음으로써 친구들에게 백 배의 새로운 생을 북돋아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소수의 숭고한 사람에게만 부여된 일입니다. 210
작품해설 대체로 괴테의 여성에 대한 사랑은 헌신적이었으며, 사랑을 할 때면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열렬히 사랑하는 것이 상례였다. 221
괴테의 사랑은 결코 고답적이거나 자기 중심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작가 들에게서는 보기 드문, 진지하고 헌신적인 사랑이었으며, 그 하나하나의 여성에게 적어도 그 순간만은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겸허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230-231
브라운슈바이크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있던 예루살렘이, 친구의 부인에게 연저을 품고 자살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것은 괴테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라이프치 대학 시절부터 괴테와는 잘 아는 사이였다. 특히 상관과 원만히 지내지 못한 그의 성격, 유부녀를 사랑하여 생긴 괴로운 관계 등이 괴테에게 실감을 준 것이다. 더욱이 자살한 권총이 케스트너가 예루살렘에게 빌려준 것이었다는 이야기는 더욱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들이 괴테 자신의 체험과 연결되어 이 작품으로 결정을 이룬 것이다. 233
머리말 사람들이 역사를 궁금해하는 까닭은 현재를 더 잘 알고 싶어서다. 과거를 살펴 현재와 비교하고 현재를 추적하는 것은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려는 노력이다. .. 역사를 공부하는 궁극적 목적은 결국 미래를 바꾸려면 현재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려는 데 있다. 9 구체적 조건에 조응하거나 반발하는 인간의 의식적 활동을 배제하는 역사 서술은 사실상 역사를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역사 서술은 읽지 않아도 내용을 알 수 있다. 그런 역사 서술에는 그저 변치 않는 인간 본성과 유전자적 본능만이 있을 뿐이고, 역사의 구체적 맥락들이 변화를 설명하는 데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10 오늘의 세계에 강한 불만을 느끼는 이들은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11 미국과 소련의 경재잉 세계를 각자의 세력권으로 분할하는 과정(위로부터 부과된 조건)에서 치러진 전쟁을 거치며 수백만 명이 죽었다. 한반도의 남과 북에 서로 증오하며 적대하는 체제가 수립됐다. 전쟁 없이 분단된 독일과 달리, 한반도에서는 냉전 질서가 끝났는데도 분단 체제가 유지되는 배경이다. 국토의 90%가 전쟁의 화염 속에 들어가면서 전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망도 함께 파괴됐다. 한국 자본주의가 낡은 속박에 얽매이지 않고 발전할 토대를 전쟁 통에 마련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전에만 해도 통치 정당성이 결핍돼 태어나자마자 위기에 빠진 신생국가 대한민국은 전쟁 수행을 위해 또는 그것을 명분으로 자원과인력과 통치권을 집중시키는 과정에서 영토와 국민에 대한 진정한주권(통치 권력을 확립했다. 좌파와 노동운동은 궤멸됐다. 그렇게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한 대한민국은 노동계급의 자주적 활동에 적대적인 권위주의 국가로 성장했다. 한·미·일 삼각무역과 장시간·저임금 노동을 기초로 해서 시장경제적이고 수출지향적인 국가자본주의 노선을 걸은 한국은 마침내 경제 발전자립)을 이뤘다. 한국 지배자들은 냉전이 끝난 뒤에도 세계적 패권 국가인 미국중심의 질서 안에서 번영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다고 봤다.사실 중국조차도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 중심의 세계화 질서에편입해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그러나 역동적인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변화·발전이 이런 국가간 관계들도 비틀고 있다. 세계적 세력균형의 변화는 한국의 정치와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13-14 돌아보며느 역대 한국 정부는 거의 모두 역사를 정치에 활용했다. 역사 해석을 독저하려 한 권위주의 정권들은 물론이고, 민주화 이후의 정부들도 역사 재평가를 지지율을 만회하고 정적을 공격하고 자신을 방어할 우회로로 삼았다.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독립운동 · 민주화운동 재평가 시도와 과거사 진상 규명, 이명박 정부의 건국절 제정 논란과 금성 역사교과서 탄압,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기원설 설파 등. 민주당 정부들이 정부 차원의 행사와 지원을 통해 형성해 온 서사는 민주주의자들이 민주공화국을 설계하고 이끌어 경제 번영에 성공한 스토리다. 이 서사에서 한국 국가의 뿌리는 1948년이 아니라 1919년이다. 친민주당 진영은 3·1운동을 혁명이라고 부른다. 부르주아(자본주의적) 혁명이었던 프랑스대혁명이 연상된다. 이것은 3·1운동의 여러 산물 중 하나인 상해임시정부를 대한민국 국가의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시도다. 민주당 계보의 위인들이 서구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서사의 주인공처럼 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다. 우파에 대한 반감은 큰데 제대로 된 대안적 해석이 없으므로, 친민주당적 역사 해석은 진보 진영에서도 많이 차용된다. 그러나 친민주당 진영은 역사적으로 봐도 반제국주의적 민중봉기인 3.1운동의 정통을 계승하는 세력이 전혀 아니다. 15-16
2장 한국전쟁, 제국주의 경쟁이 낳은 비극
미국은 단지 북한을 상대하기 위해 북한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특히 중국)과의 경쟁에서 자신의 우위를 지키는 것이 주된 고려 사항이다. 즉,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남북 관계나 북미 관계에 한정해서 바라보면 안 되고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경쟁이라는 더 큰 틀에서 바라봐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도 남북 사이의 충돌이라는 좁은 시야가 아니라 더 큰 맥락에서 봐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제국주의 경쟁의 주된 대립 구도였던 미국과 소련 사이의 경쟁 말이다. 73
미국은 한국전쟁 동안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다. 그 결과 북한 지역은 “달 표면처럼” 변했다고 할만큼 파괴됐고 대량 학살이라 불릴 일이 벌어졌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태평양전쟁 구역 전체에 투하된 폭탄의 총량이 50만 3000톤 이상의 네이팜탄(광범위한 지역을 불태울 목적으로 사용된다. 네이팜탄에 들어간 물질은 인체나 목재에 닿으면 떨어지지 앟고 계속해서 불탄다)이 더해져야 한다. .. 예컨대 1950년 11월 8일 B-29 폭격기 70대가 신의주에 네이팜탄 550톤을 투하했다. 도시가 지도에서 지워졌다고 표현할 만큼 잿더미가 됐다. 550톤으로 한 도시를 지도에서 지워버릴 정도였다면 3만 2000톤이면 얼마나 파괴적이었을까? .. 북한의 주요 도시 22곳 중 18곳은 최소한 50% 파괴됐다. 1953년 5월에는 식량 생산에 타격을 가하고 기아를 유발하기 위해서 댐. 여러 개가 파괴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74-75
미국은 한국전쟁을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해 왔다. 한국의 지뱆들도 마찬가지다. 76
한국전쟁 연구자 브루스 커밍스가 잘 지적했듯이, 누구도 미국 내전에서 남부군이 섬터 요새에 먼저 총을 쐈다는 사실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체로는 그 전쟁이 노예제도와 인종차별 정책을 둘러싼 전쟁이었다는 점에 관심을 둔다. .. ‘누가 먽저 총을 쏘았는가’에 초점을 맞추면 전쟁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취할 수 없다. ..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전쟁 발발 이전에 형성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쟁, 제국주의 국가가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상황, 노동계급 운도엥 대한 공격 등 정치적 맥락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76-77
한국전쟁도 제대로 이해하려면 미국과 소련 두 제국주의 사이의 경쟁이라는 맥락을 봐야한다. .. 소련은 제2차세계대전을 거치며 중부, 동부 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해서 유라시아 대륙의 최강대국으로 부상했다.(2차세계대전 종전 후 소련은 폴란드, 불가링, 체코스로바키아, 루마니아, 헝가리, 동독을 위성국가로 삼으며 세력권을 확장했다) 미국은 소련의 세력 확장을 자신이 관리하는 국제 질서에 대한 주된 위협으로 여겼다. 미국과 소련 두 제국주의의 경쟁은 점점 가열돼, 1947년 3월 트루먼트린의 발표로, 이미 형성되고 있던 냉전이 공식화했다. 미국은 소련 세력권과 접한 서유럽과 일본이 무너지면 소련이 정치적 팽창의 기회를 얻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서유럽에서는 마셜플랜(유럽부흥계획)을, 일본에서는 '역코스' 정책을 추진했다. 미국이 일본에서 시행한 코스 정책은 패전 전 일본의 지배계급과 국가 관료들의 권력을 유지케 하는 정책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의 미군정은 전범을 처벌하고 전쟁을 후원했던 독과점 기업들을 해체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뒤집는다는 의미에서 '역코스인 것이다. 그 일환으로 전범인 일왕도 처벌받지 않았다. 소련도 동유럽 나라들을 위성국으로 삼으며 세력권을 구축해 나갔다. 제국주의 경쟁이 두 진영으로 예리하게 나뉘어 다투는 냉전이라는 형태로 바뀌면서 어떤 면에서는 경쟁이 더 격렬했다. 날카로운 이데올로기 경쟁도 수반했기 때문이다. 냉전에서 각 진영을 대표한 미국과 소련은 각자의 점령지역에서 자신의 이익에 복무하며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탑재한 체제를 만들려고 애썼다. 한반도의 남과 북 국가는 그렇게 탄생했다. 남과 북의 충돌은 이런 세계적 쟁투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미국과 소련은 유럽 등지에서 각자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충돌했고, 특히 독일 '베를린 봉쇄'라고 불린 충돌에서는 핵무기의 동원도 심각하게 고려됐다. 이런 경쟁적 쟁투들이 실제 열전으로 벌어진 것이 바로 한국전쟁이다. 78-79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국이 한반도의 남쪽을 점령해서 친일 지주 세력을 지지하고 그에 반대하는 세력을 탄압하면서 많은 충돌과 학살이 벌어졌고, 그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모순이 증폭했다.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는 진정한 독립과 해방을 원하는 아래로부터의 열망이 분출했다. 노동자들의 공장자주관리운동이나 각 지역 인민위원회들의 등장이 그 사례다. 미군정은 이런 대중운동과 조직을 파괴하려고 온 힘을 기울였다.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항쟁에 대한 폭력적 진압이 대표적 사례다. 1948년 2월부터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10만 명 이상이 학살됐다. 제주4.3 항쟁에 대한 잔인한 진압이 이 기간에 벌어진 일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등장한 남쪽 정부는 진정한 해방과 독립을 원하는 대중의 열망에 적대적이었을 뿐아닐 소련이 점령해 북쪽에 수립한 정부에도 적대적이었다. 커밍스는 북쪽에서는 남쪽과 달리 항일 세력이 권력을 잡앗고 토지개혁도 이뤘다고 봤다. 그리고 남쪽에서 벌어진 지주와 농민, 친일 세력과 항일 세력의 대립과 투쟁(커밍스는 이를 “작은 전쟁”이라고 불렀다)이 남북 사이의 전쟁(“큰 전쟁”)으로 확대됐다고 봤다. 그래서 한국전쟁은 내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미국이 개입하면서 전쟁을 더욱 끔찍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커밍스의 주장은 명백히 장점이 있다. 한국전쟁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 낸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는 미국과 남한 지배자들의 주장에 대한 분명한 반박이기 때문이다. 81-82
커밍스는 김일성이 소련의 계획하에 북한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스탈린과 면담한 후에 북한에 들어왔고 소련군의 적극적 협력을 받으면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1945년 10월 이승만이 미군정 사령관 하지가 옆에 앉아 있는 가운데 남한 대중에게 소개된 것처럼 김일성은 소련 관려들이 뒤에 서 있는 가운데 북한 대중에게 항일 영웅으로 소개됐다. 이렇게 소련군의 후원 속에 수립된 북한 정부는 대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데서 남한과 다를 바가 없었다. 82-83
소련은 돼 김일성을 잡고 있던 목줄을 먼저 놓았을까? .. 스탈린의 전후 아시아 전략에서 중국과 관련된 것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몽골을 중국으로부터 분맇해 소련의 안전을 보장하는 완충지대로 삼는 것이었다. 다른 ㅎ나는 태평양으로의 진출 거점과 부동항(바다가 얼지 않는 항구) 확보를 위해 중국 동북 지역에 대한 옛 러시아 제국의 권익을 모두 회복하는 것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중국 동북 지역의 이권을 포기해야 했다. 스탈린은 옛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고 싶어 했다. 스탈린은 태평양전쟁에 참전하면서 1945년 8월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와 ‘중소 우호 동맹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소련은 국공내전에 개입하지 않고 중국 국민당과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그대가로 소련은 다롄항에서 소련의 우월적 이권을 보장받았고, 뤼순 해군기지 조차권을 회복했으며, 만주 철도. 공동 경영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의 의사와 달리 중국혁명이 성공하면서, 소련은 마오쩌둥이 집권한 중국과 새로 조약을 맺어야 했다(‘중소 우호 동맹 상호 원조 조약’). 이 새 조약에 따라 소련은 태평양으로 진출할 연결로인 만주의 창춘철도와 부동항인 뤼순항과 다롄항을 중국에 조기 반환하기로 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에 긴장이 조성되면 중국은 소련 군대가 뤼순과 다롄에 계속 주둔하기를 요철할 것이고, 새 조약에는 “전쟁 혹은 위기 국면이 발생하면, 소련 군대는 창춘철도를 사용할 수 있다”고 돼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중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유지할 방법이기도 했다. 84-85
반면, 마오쩌둥은 중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최대한 차단하면서도 소련에게 될수록 많은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얻어 내고 싶어 했다. 중국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복구하고 대만을 정복하기 위해 소련의 공군 지원을 상당히 중시했다. 그러면 미국과는 적대 관계(직접 충돌을 포함해)가 되겠지만, 당시 중국의 처지에서는 냉전이 본격화하는 와중에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불가피해 보였다. 86
김일성과 이승만은 세계적 차원의 제국주의 경쟁이라는 큰 장기판에서 하나의 말에 지나지 않았다. 86
한국전쟁의 전개 과정을 간략히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전쟁 초기(1950년 6월 말에서 7월)에는 북한군이 밀고 내려와 8월에는 낙동강 부근에서 참호전 양상을 보였다.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며 미군이 압록강 부근까지 밀고 올라갔지만 10월 25일 중국군의 참전으로 다시 전선이 내려와 38선 부근에서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 상태가 2년을 더 지속하다가 1953년 7월 정전에 이르렀다. 87
미국 공군의 제공권 장악으로 북한군의 전진이 상당히 더뎌졌다. 개전한 지 두 달도 안 지난 시점인 8월 15일 이전에 북한군 내부에서는 병사들의 도주와 명령없는 퇴각이 벌어지고 있었다. 9월 1일이 되면, 미군이 주도한 유엔군의 규모가 북한군 병력(9만 8000명)의 두 배에 이르게 됐다. 그러니까, 인천 상륙 작전 이전에 이미 전세는 어느 정도 뒤집혀 있던 것이다. 87
미군은 흰 옷을 입은 민간인 무리를 겨냥해 무차별적 기총소사를 가하곤 했다. 노근리 학살 등 민간인 학살이 그 과정에서 벌어졌다. 민간인 학살이 보편적 현상이었다고 할 정도로 미군은 민간인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했다. 88
중국은 미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면 산업 중심지의 하나이고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한 중국 동북 지역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중국군은 10월 25일 미군과 첫 교전을 벌였고 11월 1일에는 중국군으로 위장한 소련 공군이 처음으로 압록강 상공 교전에 참가했다. 이때부터 한국전쟁의 주된 양상은 미국군(과 유엔군) 대 중국군(과 소련군)의 대결이었다. 소련군 참전이 아주 작은 규모였던 것은 아니다. 1950년 11월 1일부터 1951년 12월 6일까지 소련군은 전투기와 대공포로 미군 비행기 569대를 파괴했다. 1951년 10월 한 달간미국 공군은 소련군 미그-15 전투기의 출현을 2573회 목격했고 소련 준투기와 2166회 교전했다. 소련군의 공격으로 미국 공군의 주력 폭격기 B-29 5대가 상실되고 8대가 손상돼, 미군은 소련군의 공격을 피해 야간 공습을 벌여야 했다. .. 양쪽 모두 적을 완전히 제압해 한반도를 통일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전쟁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서로 조금일도 우월한 입장에서 전쟁을 끝내길 바랐기 때문에 전쟁은 지속됐다. 88-89
한국 전쟁의 결과 한반도 인구의 10분의 1이 희생됐고 1000만 명이 가족과 헤어졌고 500만 명이 난민이 됐다. 89-90
해방 직후 강력했던 좌파와 노동자 운동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붕괴됐다. 92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은 미군들이 피난을 시켜 준다며 충청북도 영동읍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들을 부산 방면으로 끌고 가다가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4일간 노근리 철로변과 굴다리에서 무참하게 살해한 사건이다. 7월 25일 해질 무렵, 한 패의 미군이 들이닥쳐 “대구, 부산 방면으로 피난을 시켜주겠다“면서 마을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집합시켰다. 남아 있으려는 사람들까지 강제로 모이게 했다. 약 500명이 미군의 인솔로 국도를 걸어서 남쪽으로 향했다 남쪽으로 향하던 피난민은 26일 정오경 미군의 명령을 받고 영동읍 노근리 도로변의 경부선 철로로 올라갔다. 미군은 피난민의 몸과 짐을 검사한 다음 그들이 무장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도 미군 비행기를 무전으로 불러 기총소사를 해댔다. 이것이 1차 학살이다. 살아남은 피난민이 경부선 철로 밑과 터널 밑으로 들어가자 2차, 3차 학살이 벌어졌다. .. 충북 영춘 곡계골, 경남 마산 곡안리, 경남 사천 조장리, 황해남도 신천리 등지에서도 미군의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98
북한 징역의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북한이 제시한 자료를 보면, 북한군이 유연군에 밀려 퇴각하던 1950년 10월 17일, 신천 지역을 점령한 미군은 50여 일간 신천군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 5383명을 학살했다. 황해남도 은률군에서 1만 3000여 명, 평안북도 정주군 창도에서 580명의 섬 주민 모두를 학살했다. 평양에서 1만 5000명, 황해남도 안악군에서 1만 9072명 등 미군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99
1945년 9월 미군이 처음 한반도 땅에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 한국 노동자, 민중을 위해 한 좋은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국은 계속 독재 정권들을 후원했고, 남한 노동자, 민중은 그 밑에서 쥐어짜이고 짓눌려 살아야 했다. 분단 고착화에 항의한 제주 4.3항쟁은 미국의 후원하에 야만적으로 진압됐다. 미국은 1980년 광주항쟁을 진압하러 가는 한국군 이동을 승인했고, 부산에 항공모함을 배치해 학살을 엄호했다. 주한미군이 상시 주둔하면서 주한미군 범죄도 심각했다… 이처럼 한미동맹은 미국 제국주의와 한구구 자본주의, 그리고 이 체제에서 혜택을 얻는 미국과 한국의 권력자들을 위해 필요했고, 지금도 그렇다. 105-106
리영희 : 소위 베트남전쟁이라는 것은, 그 원인과 역사적인 배경이 굉장히 복잡하비다. 한국인들이 그 전모를 이해하기란 참 어려워요. .. 불란서와 베트남 인민의 전쟁이었던 1946년부터 54년까지의 ‘제1차 베트남전쟁;이 종결되면서 제네바 휴전협정이 체결돼요. 그 뒤에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해서 확대된 전쟁이 말하자면 ’제2차 베트남전쟁‘이라고 할 수 있지요. 54년 휴전협정은 북위 17도를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남북베트남으로 잠정적 행정 관할구역을 정한 뒤에, 2년 후인 1956년에 남북 베트남을 통틀어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한다. 이것이 1954년 정전협정합의의 핵심이었어요. 그런데 휴전성립 1년이 지난 1955년에 미국이 총선실시를 거부한 것이 제2차 베트남전쟁의 결정적인 원인이에요. .. 베트남 인민들이 30년 동안 불란서 식민제국과의 피어린 투쟁 결과로 획득한 통일의 기대가 미국의 이 정책으로 수포로 돌아갔지. 독립과 통일에 대한 베트남 인민들의 염원을 짓밟은 미국은 베트남민족과 국토의 영구한 분단을 획책하여 1955년 10월에 미국이 오랫동안 꼭두각시로 키워왓던 고 딘 디엠이라는 가톨릭주교를 사이공에 데려다가 남베트남 국가와 정부의 수립을 선언케 했어. .. 미국의 약소국 지배 술책이었어. .. 미국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였는데, 남북베트남 내부 정세와 남북 베트남의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에 관한 여론조사를 미국정부의 각 기관으로 하여금 실시하게 했어요. 미국인이나 아이젠하워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온거요. 여론 조사 결과가, 1956년 그 시점에서 남북 베트남을 통튼 총선을 실시하면 베트남 인민의 83%가 호지명에게 투표할 것이라는 여론이었어. .. 그래서 미국정부는 제네바 휴전협정의 공약인 남북통일 총선 실시를 폐기하기로 결심해요. .. 이 새로운 사태에 직면해서 북베트남 인민은 물론, 남베트남의 대중들까지도 미국의 괴뢰정권인 고 딘 디엠 사이공정권 소위 ’자유베트남 정부‘에 대한 전면적 투쟁을 개시하게 돼, 인민대주으이 지지를 전혀 못 받는 사이공정권이 위기에 처하자, 미국은 본격적인 군사개입을 시작해서 베트남 인민과 미국과의 전면전, 즉 ’제2차 베트남 전쟁‘이 10년 동안 계속되는 거예요. 341-343
리영희 : 한국 국민들만이 미국의 전쟁주의자들에게 속아넘어간 것이 아니에요. 미국 국민들도 그렇고, 전 세계가 미국의 엄청난 기만, 사기, 허위, 날조, 또는 과장된 선전에 속았던 거예요. ..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국 정부의 베트남전쟁에 관련된 허위 사실들을 들러낸 유명한 ’미국 상원외교위원회의 베트남 전쟁 공청회 의사록‘이에요. 베트남전쟁의 전체 과정을 통해서 미국 군부와 정부와 정보 당국자들이 미국 국민에게 제시하고 전 세계에 주장했던 베트남전쟁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거의 완전하게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한 유명한 ’펜타곤 페이퍼‘(베트남전쟁에 관한 미국 정책기관의 최고 극비문서 모음집)입니다. .. 1964년 8월 2일에 일어난 소위 ’통킹만 사건‘… 월맹 수도인 하노이의 외항인 통킹만에서 미국 해군 구축함 매덕스호와 터너 조이호가 공해상에서 어느날 순찰을 하고 있는데, 월맹 어뢰정이 야밤에 그 공해상에서 그 구축함에게 어뢰 공격을 가했다는 거요. .. 이것을 구실로 삼앙서 미국 군부와 전쟁주의 세력은 의회 상하 양원에서 월맹에 대한 ’대통령의 무제한의 전쟁수행권한’(Presidential War Power Act)을 부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어. 이 권한을 거머쥔 전쟁주의 세력과 미국 군부가 월맹에 대한 소위 북폭이라는 무제한의 전면폭격 전쟁을 개시함으로써 남베트남에서만 진행되던 미국의 전쟁을 북베트남까지 확대하는 거야. 소위 월맹 어뢰정의 미국 구축함 공격이라는 것은, 그 시건 1개월 전부터 미국 해군과 최고 전쟁기획 당국에서 만들어낸 완전한 가공의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지. .. 1972년에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에 의해 폭로되어 전 세계에 보도된 이 ‘펜타곤 페이어’에 낱낱이 기록돼 있어요. .. 다니엘 엘스버그라는 젊은 학자인데, 그는 열두 사람의 동료와 함께 맥나마라 구구방장관의 지휘로 미국의 베트남사태, 전쟁개입의 역사를 서류로 정리하는 임무를 맡았어. 그 작업을 하는 동안 미국이 베튼ㅁ전쟁 과정에서 발표한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 날조, 확대, 축소, 조작된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돼요. 엘스버그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지금까지 수많은 전쟁에서 젊은이의 목숨을 볼모로, 오로지 미국 소수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각종 거짓말을 종합해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는 이 문서를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에 복사를 해서 누설합니다. 타임스의 첫날 보도가 나니까 미국정부가 즉시 보도금지 가처분 신청을 해서 일단 보도 정지됐어. 신문이 이의를 제기해서 1, 2심을 거쳐 끝내 대법원은 “국가의 위신과 이해관계와 국민의 생명이 더 심각하게 위험에 처해질수록 그 전쟁의 진실을 국민이 더 잘 알아야 한다”고 판결했어요. .. ‘국민의 알 권리’를 보호한 판결로 전세계의 박수를 받았고 다방면에 걸친 교훈을 남겼어요. 343-346
리영희 : 미국과 한국정부나 국민들이 소위 ‘자유민주주의 반공국가‘라며 어떤 동질감으로 군대를 파견했던 사이공정권의 모든 분야의 지배세력과 개인들은, 100년에 걸쳤던 불란서 식민지 시기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지배 아래에 있던 4년동안, 그리고 그 후 미국의 반식민지가 된 시기에, 거의 예외없이 불란서 식민당국과 일본 식민당국에 빌붙었던, 한국식으로 말하면 ’친일파 반민족행위자‘들이었어. .. 이와는 반대로 .. ‘민족해방전선’(FLN)군과 호지명 휘하 베트공 세력의 중추 지휘부인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회 31명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과거에 항불, 항일 그리고 물론 현재의 항미 독립투사였어! 그 인적 구성을 보면, 정통적인 독립운동가들이 있는가 하면, 대학교수, 여성운동가, 간호사,각급학교 교사등 지난날의 민족해방투사들뿐이에요. 그들 31명의 경력을 보면 한 사람도 식민지시대에 형무소를 가지 앟은 사람이 없어! 349-350
임헌영 : 이라크전재잉 석유를 탐낸 것이라면 베트남전쟁의 경우는 뭘 봤겠습니까? 리영희 : 아시아에 또 하나의 ‘반공군사 저초기지’를 만들려는 것이지. 남한과 꼭 같은 성격과 기능이지. 1948년부터 미국은 중공과 소련, 동유럽 사회주의권을 섬멸하는 계획으로 유럽에서는 북대서양동맹기구(NATO)를, 이슬람 국가들을 포함시킨 아랍세계에는 중부방위조약기구(CENTO)를,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는 소련과 북한, 중공을 조이기 위한 동남아방위조약기구(SEATO)라는 것을 구축했어. 그러면서 남한과 일본을 거쳐 알래스카까지 연결하는 아시아 ’대(對)공산 군사 포위망‘을 구축하는데, 그때 동아시아의 ㅇ약한 고리가 베트남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베트남을 놓치면 버마(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가 공산권으로 넘어간다는 논리였어요. 351
리영희 : <과거를 돌아보며: 베트남전쟁의 비극과 교훈>(In Retrospect: The Tragedy and Lessons of Vietnam)이야. .. 맥나마라라는 인간은 무소불위하고 만능적 능력자로 정평이 났었어요. 그런 사람이 베트남전쟁에서 패망하고 20년 동안 자기반성을 한 결과를 이 책에 담았어. 특히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어째서 미국이 원시적 농업부족 집단과 같앗던 베트남 인민들에게 패배했냐 하는 14가지 항목의 자기비판을 열거한 장이 ‘제11장 베트남의 교훈’이에요. 이것을 요약해서 한 마디씩으로 줄이면 다음과 같아요. 1 전쟁 상대방의 성격과 능력에 대한 중대한 오판 2 소위 베트공과 월맹의 지도자와 세력에 대한 인식 부족 3 지나친 미국이익을 추구한 정책의 오류 4 미국이 지원한 '반공적' 사이공정권 지도자들의 반민중성 5 오랜 식민지 지배에 시달린 베트남 인민의 외세에 대한 반감과 해방 독립을 위한 강력한 의지에 대한 몰지각 6 베트남 민족의 역사·문화·종교·정치·생활 · 관습 등에 대한 무지 7 미국식 자본주의와 정치제도를 유일무이한 인류적 생존 양식으로 착각한 미국의 오만과 무지 8 현대적 무기와 군사력 등 물질적 전쟁수단에 대한 과신 9 무지하지만 자주독립의 민족적 미래에 대해서 '의식화된 인민의 원초적 역량'을 과소평가 10 세계 인민들과 국제적 협조 · 호응을 획득하는 데 실패한 고립된 전쟁 11 미국 국민에게조차 베트남전쟁의 의의와 필요성과 정당성을이해시킬 수 없었던 정책적 실패 12 미국정부와 군부, 각 분야의 지도자들의 전지전능을 과신 13 전쟁수행 예측이 빗나갔을 때에 정부 내 각 분야의 협동 능력의 상실과 정책적 혼동 14 미국 건국 이후 불패의 군사적 역사에 도취하여 그 밖의 모든 요소들을 무시했던 힘의 오만 352-354
리영희 : 해방 이후 반세기 동안을 오로지 미구그이 사고방식에 길들여져버린 한국인들은 진저응로 강력한 인간의 사상과 힘을 모르고 있어! 이것이 한국인들 모릿속에 긴 세월에 걸쳐서 주입된 미국식 사고방식의 해독이라고! 355
리영희 : 베트남전쟁에 반대해서 미국 역사상 최초로 반전운동이 일어났거든. 한 예로, 미국 전체 대학생의 25%가 베트남전쟁 소집장을 거부했어. 게다가 베트남전쟁 기간 중에 27만 명의 미국인 청년과 대학생들이 징집을 피해서 국내에 잠적했건 외국으로 일시 망명했어요. 이런 사실을 한국인들은 그 당시에 전혀 몰랐어. 그 27만 명 가운데 훗날의 빌클린턴 대통령이 들어 있었어. 그 중에 21만 명이 훗날 기소를 당했지. .. 기록에 의하면 베트남전쟁 기간에 무단 탈영, 도주한 병사가 자그마치 8만 4천 명이오. 베트남전쟁이 끝난 뒤에 그런 이유로 군법재판에 회부된 수만도 3만 4천 명이나 되고, 그밖의 여러 군법 위반 행위로 불명예 제대한 수가 9만 7천 명이나 돼. 이런 숫자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 군인, 청년, 학생들은 자기네 국가 위정자들의 범죄행위에 대해서 눈물겨울 만큼 투쟁했다고!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걸쳐 미국 국민의 전국적이고 대대적인 반전 평화운동이 전개됐어.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지구상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남한의 청년들이 돈벌이를 위해서 미국의 용병으로 파견되었을때에, 한국정부와 극우 반공주의 언론들은 마치 전 세계 국가와 민족들이 베트남전애에서 미국을 지원하는 줄로 착각했어. 미국의 압력에 못이겨 군대를 파견해, 그 따위의 범죄적인 전쟁에 협력한 나라는 남한 이외에 필리핀, 타일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세 나라밖에 없어요. 한국에서 상시 5만 명의 분투부대를 보낸 것과 달리, 이들 나라에서 보낸 병력은 포병, 공병, 병참 등, 천 명 내지는 최고 3천 명 정도였어요. 그밖의 ㄷ른 국가들은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파병을 거절했어. 영국은 혈연적으론 인종저긍로나 역사적으로 미국으이 전쟁협력자가 아닐 수 없는 처지인데도, 마지못해 ’유니온 잭‘(영국 국기)을 앞세운 의장대 6명 만을 파견했어. 600명도 6천 명도 아닌 단 6명이오! 사이공 공하아에서 외국 귀빈을 맞이하는 의장대요. 356-357
리영희 : 나는 베트남전쟁 끝에 하나의 확고한 의견을 갖게 됩니다. 미국 자본주의는 그 본성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잔인무도할 수밖에 없다. 약소민족에 대한 전쟁 없이는 그 제국주의적 경제 · 정치 · 군사 · 과학기술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확신이에요. 베트남전쟁이 그 노골적인 본보기이지만, 이미 그때에는 라틴아메리카의 10여 개 약소국을 잇달아 군사적으로 침범 · 점령했고, 약소후진국들이 조금이라도 민주적 복지와 자립적 경제정의를 추구하려고 하면 그런 정권들은 미국이 뒷받침하는 반동적이며 미국에 예속된 군부로 하여금 쿠데타를 일으켜서 전복시켜 왔어요. 그 대표적인 예가 쿠바와 카스트로 정권타도 공격이고, 니카라과에서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부패 · 타락한 미국 예속정권을 혁명으로 쓰러뜨리고 참신한 민중적 정치혁신을 하려던 산디니스타 정권을 그런 방식으로 타도했어요(1979),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깨끗하고, 공정하고,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서 사회주의정권을 세운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 정권에 대해 미국은 역시 같은 음모적 수법으로 대통령을 사살하고 미국 예속 군부쿠데타를 조장하여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킵니다(1973). 아르헨티나 군부쿠데타(1976), 볼리비아(1980), 과테말라(1983), 아이티(1988), 파나마(1989), 콜롬비아(1989)등 열거하면 끝이없어. 이것이 민주주의, 정의, 자유를 내세우는 ‘미국이라는 나라’요. 361-362
임헌영 : 조선일보사에 계시면서 '북괴'를 '북한’ 으로 표기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리영희 : 그랬지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모두 당연한 듯 사용하던 것이 '북괴' 라는 단어였는데, 1967년에 내가 '북한'으로 고쳐 쓰기 시작했지. 그후 다른 신문들이 따르게 되었어요. 한 10년 후에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따르게 됐고, 나는 여러 정보로, 북한이 결코 소련이나 중공의 괴뢰가 아니라고 믿을 만한 많은 증거를 갖고 있었어요. 오히려 1960년대에 중공에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북한과 중공 사이에 대립적인 관계가 형성되거든요. 소련이 제일 미워하는 국가도 북한이었어요. 한국사람들은 북한이 처음부터 중공이나 소련의 괴뢰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고, 또 그러기를 바라는 심정이었어. 남한 극우 · 반공주의의 선전이나 미국의 선전공작이 그랬으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것과는 정반대였다구. 방금 말한 것처럼 공산세계의 패권자인 소련이 그 당시에 제일 미워했던 정권과 당과 국가가 미국이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는 것을 한국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이해를 못했던 것이오. 북한의 당과 군대와 정부, 그리고 지도자들이 중공이나 소련의 괴뢰가 아니라 그 두 강대국과 당당히 맞서는, 극히 자주적 존재였다는 것은 소위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으로 전 세계에 너무나도 분명하게 밝혀졌었어. 푸에블로호 피랍사건(1968. 1. 23)은, 북한의 중요 해군항인 원산항에 바짝 붙어서 정찰중인 미국 전자첩보함을 영해를 침범했다는 이유로 북한이 나포한 사건이지요. 미국이 두 척밖에 갖고 있지 않았던 전자통신 인터셉트 기능을 탑재한 세계 최첨단 첩보함 중 하나인 푸에블로호를 북한 해안선 부근에 상시적으로 배치해, 북한의 군사적 정보를 빼내려 하고 있었어요. 함장은 부커라는 소령이었어. 부커 이하 36명의 최고 전파스파이 기술요원들이 배와 함께 다끌려갔어요. 북한군은 이때에 몇 차례에 걸쳐서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 안으로 침범했다고 경고했어요. 그런 사태가 계속될 때에는 나포하겠다고. 미국은 그때 푸에블로호가 영해를 침범하지 않았고 공해상에 있었다며 항의했지. 당시의 국제해양법에 따르면, 영해를 최저기저선(간조시에 드러나는 육지의 선)을 기준으로 설정했어요. 이것이 영해에 대한 첫 번째 원칙인데, 미국 같은 강대국들은 최저기저선에서부터 6마일까지를 영해라고 주장한 반면, 북한 등 제3세계의 약소국들은 전부 최저기저선에서부터 12 마일까지를 영해라고 주장했지. 그런데 두 번째원칙이 뭐냐 하면, 그 안에 섬이 있을 때에는 그 섬에서부터 다시계산해야 된다는 것이오. 원산만 앞바다의 경우, 만의 입구 남북으로 웅도(熊島), 려도(麗島), 신도(薪島), 모도(茅島) 등의 작은 섬들이있는데, 이게 영해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 섬에서부터 다시 바깥으로 영해를 그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영해에 대한 두 번째 원칙인데, 미국은 이 두 번째 원칙은 무시하고, 푸에블로호가 원산만의 최저기저선에서부터 6마일 선 밖 공해에 있었다고 주장한 거지.그러나 섬들을 연결한 선을 기준으로 영해를 계산하지 않고, 설사 미국측의 주장대로 6마일을 기준으로 한다고 해도, 푸에블로호는 영해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오. 미국의 주장을 따르더라도 푸에블로호가 북한 육지에 얼마나 가까이 바짝 붙어 있었는가를 알 수있지. 어떤 적성국이 미국 허드슨만이나 어떤 중요해군기지 항구에 그런 영해이론으로 들어와서 군사작전통신을 도청한다면, 미국은아마 경고도 없이 격침시켰을지도 모르지, 선전포고감이지. 이런경위로 북한 해군이 몇 번의 '영해침입경고' 끝에 푸에블로호를 원산항으로 나포한 사건이 일어났지. 이에 미국이 북한이 공해에 있던 미국의 군함을 불법으로 나포해갔다'며 석방 압력을 가했어. 핵항공모함 두 척을 포함해서, 합계 25척의 군함으로 구성된 제77기동함대를 원산만 앞바다에 배치시킨 겁니다. 전쟁 직전의 위기사태가 조성됐어요. 미국이 푸에블로호를 구출하기 위해서 시도해보지 않은 방법이없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은 소련과 '밀월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막강한 제77기동함대를 원산 앞바다에 배치시켜놓고 군사적 위협을 가하는 한편, 소련정부로 하여금 북한에 압력을 가해 푸에블로호를 반환하고 선원을 석방토록 하라고 한 거예요. 미국은 북한을 소련의 '꼭두각시' '괴뢰' 국가 정도로 보고,'대소련'의 압력이라면 한마디로 굴복할 것으로 기대했던 거야. 만약 상황을 거꾸로 설정해서, 남한의 인천 앞바다에 들어온 소련 ‘푸에블로호'를 남한이 나포했을 때, 소련이 미국정부에 남한정부에력을 넣어 선원을 석방토록 했다고 상정해봅시다. 남한정부나 군이감히 워싱턴의 명령에 거역할 수 있었겠는가! 이 비유를 생각해 보면, 북한과 소련 사이의 관계와 남한과 미국과의 관계에 차이가 어떻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미국은 소련뿐만 아니라, 미국과 우호관계에 있던 공산국가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과 루마니아의 체아우셰스쿠 대통령을 평양까지 가게 해서 김일성을 설득했어. 티토는 “미국이 정말 북한에대한 전쟁을 할 결심이다. 원자탄을 사용할 용의가 돼 있는 것으로본다. 그러니 약한 북한으로서는 미국의 요구를 듣는 것이 안전할것이다”라고 설득했어. 이러한 미국의 직·간접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10개월 동안 북한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어. "영해를 침범했으니까 침범 사실을 시인하라. 시인만 하면 석방하겠다"고 했지. 결국10개월 동안의 온갖 전쟁 위협과 외교적 수단으로도 뜻을 이루지못한 미국이 소련을 통해 북한 영해를 침범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문서에 서명을 하고야 36명이 석방되어 휴전선을 넘었어요. 367-370
리영희 : 공자의 <논어>에 [정언(正言)>편이 있어. 제자가 공자에게 “정치의 요체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데 대해, 공자는 “사물의 이름(명칭 또는 명분)을 정확하게 쓰는 것이다”라고 답했어요. 다시 말하면, 검은 것은 희다고 할 것이 아니라 검다고 해야 하고, 악은 선이 아니라 악이라고 칭해야 하고, … 잉처럼 모든 형태나 관곈 성격이나 형상의 본질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실체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인간 상호간의 생존에서 혼란을 예방할 수 있고, 또한 그 사고의 주체인 개인의 의식과 행위에 괴리가 생기지 않는 것이에요. ..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제반 속성을 진실되고 정확하게 표현해야만 인식하는 주체의 사고가 정ㅎ확할 수 가 있다는 교훈이지요. 374
베트남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베트남인의 싸움은 미국 정부가 선전하고 우리 정부가 주장했던 그와 같은 소위 ‘반공 성전’도 아니었고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의 대결도 아니었다. 미국이 베트남인의 내전을 ‘미국의 전쟁’으로 만들기 위해서 정당화의 이론으로 내세웠던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이 허구 논리임은 그 당시 웬만한 지식인에게는 분명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전체 아시아 국가도 도미노 패가 쓰러지듯이 차례차례로 쓰러지고 공산화된다.” 이것이 미국이 작은 베트남 사태를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확대한 전쟁논리였다. .. 사회와 국민을 계몽해야 할 나라의 소위 ‘언론기관’들과 ‘언론인’들이 앞다투어 ‘도미노 이론’의 나팔수가 되었다. 278
1966년 한 해동안에 미국은 미국식 자유와 민주주의의 축복을 “미개한” 베트남인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폭탄 63만 8,000톤, 야포탄 50만 톤, 합계 113만 8,000톤의 불덩이로 세례를 주었다. 이것은 미국이 태평양전쟁 전체 기간에 막강한 일본군을 상대로 사용한 65만 6,000톤의 거의 두 배에 해당한다. 한국전쟁 38개월 동안에 미국이 한반도(주로 북한)에서 사용한 폭탄과 포탄이 49만 5,000톤이니까 연평군으로 쳐서 약 17만 톤, 그러니까 베트남에서는 이 해에 한국전쟁에서보다 6.5배의 ‘초토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 이 기간 동안 미국은 베트남전쟁(라오스와 캄보디아 전선 포함)에서 약 800만 톤의 폭탄을 투하하고 약 700만 톤의 각종 포탄과 로켓탄을 발사했다. 1,500만 톤의 이 폭탄과 포탄은 일본을 굴복시키기 위해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의 700발 분량에 해당한다. 278-279
1966년 3월 20일 국회가 한국군 파병을 결의했을 때, 두 사람의 국회의원이나마 반대표를 던진 것이 나에게는 한가닥 위안이었다. .. 1966년에서 67년 사이에 국방부는 언론기관의 각부 부장들을 번갈아 사이공에 모셔다가 융숭한 대접을 했다. 국군 파월의 ‘영광’을 현장에서 확인케 하고, “베트남인들이 한국군 파병을 환영하고 한국군인을 사랑한다”는 국내 여론을 만들기 위한 행사였다. 281
뒤늦게 외신 부장들의 차례가 왔다. 1967년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82
또 한 차례 전국 신문의 다른 부의 부장단의 행차 뒤에 외신부장단의 “국비시찰” 여행이 제공되었으나, 그때도 마찬가지로 나의 태도를 전달했다. 이보다 앞서 중앙정보부가 나에게 한 달 정도 사이공 주재 특파원으로 가라고 제의해왔다. 베트남전쟁에 비판적인 내가 “베트남인들이 한국군을 좋아한다”라고 써주면 독자들이 모두 믿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 결국 나는 베트남 땅을 밟지 않았다. 282
1954년 7월,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인민이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승리함으로써 체결된 제네바협정에는 2년 후에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을 통틀어 통일선거를 실시해 통일국가를 건설한다는 합의조항이 있었다. 그러나 2년이 지나갈 무렵, 남베트남 주민들까지도 철저하게 부패한 남베트남 정권을 버리고 호치민과 베트남 공산당에 투표할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1956년 영국 수상 이든에게 보낸 서한에서 “제네바 휴전협정대로 지금 베트남에서 선거를 실시하면 베트남인의 80퍼센트가 호치민에게 투표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프랑스와 미국은 제네바 휴전협정을 파기했고, 약속된 베트남 통일은 백지화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군대 대신 미국 군대가 들어갔다. 인민은 분노했고 휴전협정 준수와 통일선거를 요구하는 대중적 반란이 일어났다. 이것이 이른바 "베트남 사태"의 발단이다.이 사실을 아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미국정부, 특히 군부는 프랑스를 대신하여 남베트남을 지배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정부와 군부는 물론 '반공성전'의 국군 파병을 부추겼던 언론은 “6·25전쟁의 미국 참전에 대한 보답"을 강조했다. 동양적 윤리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 주장은 수긍할 만했다. 그런데 미국 덕택으로 나치 히틀러의 침공, 점령, 국가 파멸의 위기에서 살아난 가장 큰 수혜자인 영국은 미국의 끈질긴 압력에도 불구하고 전투병력을 단 한 명도 보내지 않았다. 영국 국민과 정부는 미국의 파병 요구를 끝까지 거부했다. 베트남전쟁은 '반공성전'도 아니었고 정의의 전쟁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282-283
여기까지 쓰고 있는데, 베트남전쟁을 주도했던 당시의 '천재 국방장관 맥나마라가 방금 출판된 자서전에서 미국은 "베트남 사태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전쟁 정책은 전적으로 잘못이었다"는 취지의 고백을 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그리고 얼마나 야만적인 '미국식 기독교적 양심' 인가! 베트남 정부는 지난해 6월 22일 베트남전쟁에서 100만 명의 옛 월맹(북베트남) 군인이 전사하고 200만 명의 민간인이 죽었다고 처음으로 공식 통계를 발표했다. 미국의 고엽제 등 화학무기로 200만 명의 불구자가 생겼다고도 밝혔다. 베트남 인민의 이 고통을 누가 보상할 수 있는가? 20년간의 전쟁의 한 책임자가 전쟁이 끝난 20년 뒤에 미국과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는 보도를 들으면서 나는 더욱 마음이 무거워진다. 맥나마라는 베트남전쟁 중 '걸어다니는 전자 계산기'(Walking Computer) 니 면도날 두뇌'니 '천재 전략가니, 그야말로 전지전능하다는 찬사와 아부를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사실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베트남전쟁의 세 당사자 중 하나인 북베트남 공산당의 지도부는 차치하고라도, 미국인과 한국인이 '베트콩'이라고 멸시하고 엄청난 폭탄세례를 퍼부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최고 지도부 중앙위원 39명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프랑스와 일본의 지배에 항거해서 총을 들고 싸웠거나, 제국주의, 식민지 권력하에서 형무소를 자기 집처럼 드나든 경력이 있는 베트남의 애국자들이었다. 반면, 우리가 '자유 베트남'이니, '반공주의 사이공 정부'니, '민주주의 방패'니 하면서 미국인 전사자 5만 8,002 명 한국군을 포함한 '반공 동맹군 전사자 5,221명의 목숨과 피로써 도와주려고 했던 남베트남 정부의 100만 군대에는 반불·반일 항쟁의 경력자가 육군중령 단 1명뿐이었다. 대통령 구엔 반 티우는 프랑스 식민지 육군의 중위였고, 수상 구엔 카오키는 프랑스 식민지 공군의 소위였다. 말하자면 베트남 민족을 배반한 베트남판 '친일파'였다. 우리는 베트남의 반민족 분자들을 도왔던 것이다. 이 사실을 전쟁의 천재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몰랐던 것이다. 슬픈 일이다. 미국인과 한국인은 아마 지금도 이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이것이 '베트남 시대' 이고 '베트남전쟁'이다. •『한겨레 21』, 1995.5.4 284-285
진실을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 오랫동안 주입되고, 키워지고, 굳어진 신념체계와 가치관이 자신의 내부에서 무너져가는 괴로움의 고백이었다. 19
4 베트남 35년 전쟁의 총평가
베트남 사태는 그 긴 과정과 종결 형식에서 많은 ‘교훈’을 준다. 그러나 그 교훈을 올라르게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식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 평가와 판단의 토대가 되는 베트남 사태에 관한 편견과 선입관의 배제다. .. 베트남 사태에 관한 보도가 너무도 많앗다는 사실과 너무도 일방적으로 각색되어 전달되었다는 두 사실은 오히려 우리의 판단을 어렵게 한다. .. 둘째, 평가와 판단의 입장이다. 기본적으로 베트남 국민의 역사와 현실적 입장과 이해가 판단의 입장을 결정하는 조건이어야 할 것이다. .. 한국전쟁의 정전(停戰) 방식이나 전쟁 해결 및 한반도 정세에 대한 최종적 판단자는 우리 자신이어야 하는 것과 같다. .. 셋째는, 베트남전쟁의 현대적 성격을 규정하는 노력이다. 그 본질적 성격의 규정이 가능하면, 그 토대 위에서 전쟁의 전체 과정, 각 국면, 그 종합적 종결의 형태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세가 바로 세워질 수 있다. 238-239
제네바협정은 프랑스와 베트남 인민의 ‘적대행위’(전쟁)를 끝맺는 단순한 휴전 절차적 성격이었다. 241
휴전협정의 골격으로 내세운 쌍방의 기본적 해결안을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사이공 정부 입장 ① 북베트남과의 대등한 직접 협상 ② 비무장지대의 복원, 남베트남의 영토보유, 남베트남의 불간섭. ③ 북베트남군과 파괴분자(민족해방전선을 가리킴-필자)의북베트남으로의 철수 및 효과적 국제감시. ④ 북베트남군의 철수 후, 그리고 무력활동이 저하한 연후에, 미국과 동맹국 군대의 남베트남 철수. ⑤ 평화 회복 후 남북 베트남 재통일을 위한 남북 베트남의 협의. (1968.9.4, 사이공 정부가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낸 정치해결에 관한 입장)
민족해방전선의 입장 ① 조국독립 · 민주평화·번영 및 궁극적 평화적 통일의 신성한 권리. ② 미국 침략전쟁의 정지, 모든 미국 군대와 그 위성국가 군대의 철수, 군사기지의 철거. ③ 외부 간섭 없는 남베트남 인민 자신에 의한 민족·민주연합정권의 수립과 자유선거를 통한 해결. ④ 외부 간섭 없이 평화적 수단에 의한 남베트남의 협의와 협정을 토대로 한 단계적 재통일의 실현. ⑤ 남베트남이 여하한 군사동맹에도 가입하지 않는다는 보장.(1968.11.3,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회의 남베트남의 정치해결에 관한 성명」) 249-250
베트남 전쟁은 압도적으로 강대한 군사력과 보잘것없이 약한 인간집단의 싸움이었다. 세계 제1의 군사, 경제, 과학의 총력을 동원한 국까와 그 지원하에 세계 제4위의 군사력을 가진 현지 집단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패배를 당한 전쟁의 최초의 예로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것이다. 263
‘역대의 남베트남 정권은 그 어느 것이건 자발적인 민중의 가치를 못 받고 대중적 정치 토대가 없는 권력이었다. 사이공 정권은 과거에는 프랑스 식민지체제의 계승자였다. 미국의 개입 이후에는 시급히 필욯ㄴ 사회개력은 모두 민족해방전선이 실시했고, 베트남 사회에서 그 사회개혁은 정당ㅎ화될 수 있는 것들이다. 소위 ‘베트남 정부(govermeent og Vietnam)’는 민족해방전선과 도저히 정치적으로 경쟁할 수 없는 성격이었다. 이 사실은 사이공 정부 지도자들 자신이 자인하고 있다. 티우, 키, 키엠 등 남베트남군 최고의 사령관급은 모조리 자기 민족, 국가의 해방, 독립에 반대해서 식민지국가 프랑스 군대의 장교로 싸운 사람이다(노엄 촘스키 교수 증언, ‘베트남 사태의원인, 과정, 교훈에 관한 청문회’ 의사록 p82).’ 264-265
사이공 정권과 미국이 남베트남에서 ‘공산주의’라고 단정한 민족해방전선에게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장기적으로 농민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베트남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의 속성은 바로 그 반대 방향을 치달은 것 같다.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그런대로 베트남 인민의 전통을 존중했다. 프랑스에 비해서 미국은 베트남 민족의 전통을 무시했다. 프랑스는 미국보다 가난했다. 미국의 경쟁력이 프랑스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강대할수록 그 물량적 중압과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눌려 베트남 사회의 고유 윤리는 붕괴해버렸다. 미국인은 동양인 특히 그들의 문화와 이질적인 베트남의 불교적 생활양식, 가치관을 멸시했다. 베트남의 불교도에게는 독재, 탄압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미국이 베트남의 파괴자로 비친 것이다(트리 쾅 僧, War, Crimes and the American Conscience, Erwin Knoll엮음. p133~134).’ 277-278
네덜란드의 저명한 외과의사인 아르츠(Harold Arts) 붜의 남북 베트남 방문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1972년 8월 북베트남 방문과 73년 초의 남베트남 방문 기간중 의료 관계 사업과 지방을 조사한 결과 남베트남 정부는 국민의 의료복지에 대해서 북베트남 정부보다 훨씬 성의도 관심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북베트남에서는 인구 7,000명에 유자격 의사 1인꼴인데, 남베트남에서는 인구 5만 명에 1인꼴이다. 그나마 돈입 없는 사람은 혜택조차 받기 어렵다. 남베트남에서는 전쟁 그 자체로 인한 희생자 수보다 사이공 정부와 미국 정부의 민중의료 복지에 대한 무관심 탓으로 인해 생기는 환자 쪽이 더 많다는, 남베트남 근무 6년 경력의 미국 정부 파견 의사의 결론에 동의한다.’ 282
베트남 정전협정의 음미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조인된 베트남전쟁 정전협정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기본적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 첫째는, 협정의 내용 검토와 소위 ‘성패’의 평가는, 기본적으로는 베트남 인민의 입장과 이해의 토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 모든 발표와 보도와 견해가 미국의 그것으로 편향해 있는 우리나라에서 이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 둘째의 인식은, 이 협정으로 끝맺은 전쟁이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 베트남전쟁은 본질적으로 식민지 민족의 해방, 독립투쟁이라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이 기본적 사실의 인식을 거부하거나 고의적으로 왜곡해서 반공 이데올로기에 뜯어맞춘 결과가 베트남 민족 자체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국제전쟁으로 만들어버린 비극화의 원인이다. 이 인식의 결여는 우리에게 가장 위험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에 관해서도 정확한 판단을 그르치게 한 주요한 원인임을 늘 다짐해야 한다. 셋째의 인식은, 베트남전쟁의 역사적 파악이다. .. 이 협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30년전쟁’이라고 하는 베트남 인민과 외세와의 관계와 그 성격을 인식의 바탕에 깔아야 한다. 베트남 인민은 제2차 대전이 끝나자 식민지 재정복을 위해서 되돌아온 프랑스의 40만 대군과 만10년간의 민족해방 독립전쟁을 계속해 승리했다. 이것이 1954년의 제네바정전협정으로 끝맺어지는 독립전쟁이다. 식민지 민족의 염원을 이해하지 못한 미국은 베트남 인민의 승리를 원치 않고 50년 1월에 이미 프랑스 베트남군에 대한 군사지원을 시작했다. 이유는 베트남 인민(당시는 북도 남도 없었다)의 해방 · 독립운동 지도자가 호치민이라는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제네바협정 체결 이전에 미국이 프랑스에 제공한 군사·경제원조는 30억 달러에 달했다. 뿐만 아니라 반공 이데올로기밖에 없던 덜레스 미국무장관이 이끄는 미국 정부는 프랑스가 베트남 인민과 정전을 맺는 것을 방해했다. 하지만 이에 실패한 미국은 제네바협정의 수락을 거부하고, 협정 조인 2년 후인 1956년 7월로 규정한 남북 베트남 총선거 실시를 유산시켰다. 제네바협정은 전쟁행위를 끝내기 위한 방법으로서'일시적인 군사분계선을 설치했다. 이 17도선을 항구적인 국경선으로 베트남의 분할을 고정화하는 데 미국은 큰 역할을 했다. 베트남 인민의 대불(佛) 식민지전 승리의 결과로 획득한 통일총선거가 미국과 그 후견을 받은 고딘 디엠 정권에 의해서 거부되고 국토 분할이 항구화함으로써 세 가지 사태가 생겨났다. 첫째는, 통일이 거부된 베트남인의 미국에 대한 증오감이 조성되고, 둘째, 미국에 의해서 반공만을 명분으로 하는 정권이 세워지고, 셋째, 탄압·부패와 봉건적 사회제도에 항거하는 민중반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미국 군부는 이 단계에서, 1965년 2월 5일 통킹만 사건이라는 것을 조작해 소극적 개입에서 전면적 군사개입을 개시했다. 남베트남의 모든 문제가 북베트남의 침략에 의한 것이라는 선전과 함께 통킹만 사건과 미국 군사개입 이후의 베트남전쟁 8년사의 진상은 1971년 봄에 이르러 세계에 폭로된 이름바 ‘미국 국방성 베트남전쟁 관계 비밀문서’가 밝혀준 그대로다. 284-287
재귀열의 희생자들은 도당 전체 병력의 4할 정도로 추산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에 8천여 명이 죽어간 것이었다. 28
15 사형 대신 써야 하는 수기
경찰들의 경우 토벌대 참가는 의무적 윤번제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토벌대에 나가기를 꺼려 꽁무니를 빼려고 했고, 그 윤번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슨 수를 써서든 뒤빠져 책상을 붙들고 앉아 있으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지만, 토벌대에 나갔다 하면 어느 산골짜기에 처박혀 죽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경찰들은 경력이 오래된 사람들일수록 어김없이 친일경력의 소유자들이었고, 세상의 물결을 요령 좋게 타고 넘는 기회주의를 이미 몸에 익힌 그들로서는 목숨을 내거는 일에 서로 몸을 사리고 뒤꽁무니를 빼려고 급급했다. 그러다 보니 남모르게 뒷손을 쓰고, 서로간에 모함을 해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자기네의 생존보호를 위해 이승만 정권을 떠받치며 반공세력으로 똘똘 뭉쳤던 그들의 집단기회주의는 정작 전쟁이 벌어진 다음부터는 개개인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각자가 개체기회주의를 발동시켜 내부혼란이 야기되고 있었다. 뒷손을 쓰자니 돈이 필요하고, 돈을 마련하자니 부정을 저질러야 하고, 부정을 저지르다 보니 턱없이 민간인들을 괴롭히고, 그런 것을 노려 옆사람이 밀고하게 되고…………. 돈 없고 빽 없는 놈만 토벌대에 나가 개죽음한다는 말은 경찰 내부를 벗어나 세상이다 아는 일이기도 했다. 그것은 경찰의 부패를 조장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113-114
16 항미소년돌격대
화순군당의 '항미소년돌격대'는 30여 명으로, 모두가 열네다섯살에서 열여섯 살의 소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광부의 아들들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한 덩어리로 뭉쳐지게 된 사연은 해방 다음 해인 1946년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했다. 그건 다름 아닌 화순탄광 광부들이 일으킨 생존권투쟁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해방 1주년 기념식을 겸해 3천여 명의 광부들이 1차로 일어났고, 10월 30일 2차로 일어나면서 미군정의 거듭된 무력진압으로 광부들이 피를 뿌리며 죽어가게 되었다. 저공비행으로 위협하고, 탱크의 직사포로 위협사격을 가하며 몰아붙이고, 총을 갈겨대서 광주진입을 막아낸 그 사태에서 공식화된 사상자는 세 명에서 다섯 명이었다. 그러나 집계되지 않은 총 맞은 부상자들은 수십 명을 헤아렸다. 그런데 미군의 엄호를 받으며 경찰들이 주모자 색출을 벌이는 바람에 그 부상자들은 치료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을 숨기기에 급급해야 했다. 병원의 치료를 받아도 문제가 생길 총상을 숨어서 민간요법에 의지했으니 치료가 될 리 없었어떻게 경찰들의 눈을 피해 환자들을 다른 지방 병원다. 그렇다고 으로 옮길 형편도 못 되었다. 그들은 끼니를 끓일 수가 없어 생존권투쟁에 나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부상자들은 하나씩 둘씩 죽어갔다. 날이 갈수록 그 수는 늘어나고 있었다. 그 수가 얼마인지는 정확하지 않은 채 조심스러운 소문으로만 떠돌았다. 그러나 해가 바뀌고 또 바뀌면서 그 소문마저 안개로 스러지고, 바람에 밀려갔다. 세상을 흔드는 큰일들이 연이어 터지는 데다, 제 살기에 바쁜 세상사람들이 그 일을 잊어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일을 가슴에 한으로 심고, 그 한을 한숨으로 토해내며 씹고 또 씹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남편의 부상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애간장 태우며 남편들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여인네들이었다. 그 여인네들은 자식들, 특히 아들들을 붙들어앉혀놓고 시시때때로 한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느그 아부지럴 죽인 것은 양코배기 미국놈덜이여, 미국놈덜언 우리 웬순께, 니가 후제 커서 아부지 웬수 기엉코 갚아야 써." 여인네들은 그 말을 곱씹으면서 사무치는 한을 달래고, 서러운 신세를 이기려 했는지 모르지만 자라나는 소년들의 가슴에는 원한과 복수심이 벽돌로 차곡차곡 쌓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인공이 되자 그 소년들은 모두가 소년선봉대로 나섰다. 그리고 후퇴길을 따라 입산하게 되었다. 여인네들은 그 길을 막을 수 없었다. 130-131
광부들의 아들이 30여 명 입산하게 됨으로써 총상을 입고 죽어간 사람들의 수가 몇 년이 지나서야 그 윤곽이나마 드러나게 되었다. 도당에서는 그 소년들에게 옷을 잘 해입혔고, 나이를 감안해 모두들 가벼운 칼빈총으로 무장시켰다. 그리고 급 대 이름을 ‘항미소년돌격대’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132
17 장마와 함께 온 휴전회담 소식
강동기의 중대도 보리베기를 하려고 조를 짜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문화부 중대장 한상근이 갑자기 말했다. “그런 일은 남선 동무들이래 다 맡아서 하라요.” "허먼, 북선 동무덜언 밥 안 묵고 살라요?" 강동기는 농담인 줄 알고 이렇게 말을 받았다. "그케 말하다 말라요. 그런 따위 일까지 하자고 인민군 전사들이 예까지 와서 고생하는 기 아니니끼니." 한상근의 목소리가 달라졌고, 강동기는 그때서야 농담이 아닌 것을 알았다. 순간적으로 속이 꿈틀 꼬였다. 그러나 그는 꾹 눌렀다. "허먼, 멀라고 왔습니여?" 강동기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몰라서 묻는 기요! 남선 동무들이래 해방군을 해방군으로 대접할 줄 알아야디, 이시따위일까지 하라니, 해방군을 뭘로 아는 기요, 이거!" 이새끼, 우리가 느그덜 종이냐! 상전 애겼다고 요 고상 사서허는디 인자 느그가 상전이여! 강동기의 감정은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야이 개새끼야!…………” 강동기는 나무에 세워둔 총을 순식간에 낚아잡고 한상근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오랜 동안 참아왔던 감정들이 겹으로 터져오르고 있었다. “두 동무 들으씨요. 요 일언 나혼자 알아서 덮고 말고 헐 문제가아닌 것 겉으요. 동무덜도 중간간부니께 그만한 것이야 다 알 것인다. 본 눈이 수십인디다가, 말썽 일어난 문제가 당에서 금하고 있는중대헌 것이고, 거그다가 말쌈이 아니고 총까지 들이댔이니 천상상부에 보고럴 혀야 되겠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하대치가 착잡한 어조로 차분하게 한 말이었다. 두 사람은 머리만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하대치는 문제의 심각성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먼저, 이북 출신과 이남 출신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의 문제였다. 그문제는 인공이 시작되면서부터 드러났고, 당에서는 그 바람직하지못한 문제를 근절시키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당의 선전에 의한 인민군의 또다른 이름은 해방군이었고, 전시하의 당과행정조직을 원활하게 운용하기 위해서 많은 요원들이 북쪽에서 파견되었다. 사실 남쪽에서는 오랜 지하투쟁을 하는 동안에 수많은사람이 희생되어 버려 행정을 중심으로 한 모든 분야를 장악해야하는 당조직을 구축하는 데도 일꾼들이 모자라는 실정이었다. 그러니 이승만 정권의 반동공무원들을 그대로 쓸 수 없는 행정조직의 공백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런 필요에 따라서 북쪽에서 파견된 요원들은 자연스럽게 당과 행정조직의 중간간부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파견은 물론 해방이 완료되고 남쪽 요원들이 확충될 때까지라는 시한부였다. 대학생들이 한두 달 시한부로 남쪽전역에 교양지도원으로 파견된 것도 같은 계획의 하나였다. 면단위 이하까지 인민을 상대로 사상을 조직하고, 당사업을 제대로 선전 선동할 수 있는 일꾼들이 부족한 실정이라서 대학생들까지 동원된 것이었다. 형편이 그렇게 되고 보니 거의 모든 좋은 자리는 이북사람들이 차지한 형국이 되었고, 그런 분위기는 이남사람들에게 상대적 소외감이나 반발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데다가, 북쪽에서 파견된 요원들은 일관된 당의 지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이란 각양각색이어서 더러 당의 지시에 어긋나게 '남조선을 해방시켜 주었다'는 우월감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그 우월감은 상대적으로 열등감을 구체화시켰고, 그 열등감은 반발로, 적대감으로 발전하는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런데 전세가 역전되면서 당이나 행정직 요원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대학생들도 북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입산하게 되었다. 입산을 하면서 그런 갈등은 현저하게 줄어들었지만 그러나 말끔하게 가신 것은 아니었다. 남과 북의 사람들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입장이 달라진 데서 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당에서는 학습을 통해서 그런 감정의 일소를 강조하고 있었지만 실생활의 국면국면에서는 미묘한 감정들이 순간적으로 부딪치고는 했다. 극한적인 입산투쟁이 전개되면서 이남 출신들은 대부분의 이북 출신들을 겁쟁이로 비웃고 있었고, 이북 출신들은 또한 이남의 농민이나 기본출들의 사상적 무지에 대해서 경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간격은 당이론이나 학습이 좁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다음으로 하대치가 중요하게 짚은 것이 중간간부들로서 부하들 앞에서 총을 들이대며 다투었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뒤따르는것이 정치일꾼에게 군사일꾼이 총으로 위협을 가했다는 점이다. 첫 번째 문제는 한상근의 잘못이었고, 두 번째 문제는 강동기의잘못이었다. 잘못은 명백하게 드러났지만 그 일의 중대성이 연대단위의 자기비판토론으로 끝낼 성질이 아니어서 하대치는 상부보고를 결정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대치는 두 사람에게 행동통제명령을 내려 따로따로 돌려보낸다음 사태가 그 상태에서 끝난 것을 큰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그 결기 승한 강동기가 삽으로 지주의 등을 찍어버린 것처럼 방아쇠를 당겨버렸다면 어찌했을 것인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얼어붙는 일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 잘못했더라면 소중한 두 일꾼이 순식간에 없어질 뻔했던 일이었다. 그려, 참을 인자가 셋이먼 살인도 면헌다고 혔어. 잘 참었구먼, 잘 참았어. 하대치는 담배를 빨며 강동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강동기가 그래도 방아쇠를 당기지않은 것은 상대방이 지주가 아니라 동지였기 때문이라고 하대치는생각했다. 한상근은 교양지도원으로 파견되었던 대학생인데, 특히 당이론에 밝았다. 그는 언제나 차가운 인상이었고, 비판적인 말을 잘하면서, 다른 이북 출신들에 비해 우월감이 좀 많은 편이었다. 그런 눈치를 진작 알았으면서도 강동기와 그냥 붙여두었던 것을 하대치는뒤늦게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아무 탈 없이 서로 헤어지게 된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했다. 지구사령부에서 두 사람에게 어떤 처벌을 내릴지 모르지만, 그 결과와는 상관없이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같은 부대에서 투쟁사업을 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하대치는 지체하지 않고 지구사령부에 사건보고를 했다.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그거참 큰일날 뻔 했군요. 내일 오후에 회의를 열도록 하지요.” 181-185
“.. 한상근 정치지도원에게 ‘엄중경고’를, 강동기 중대장에게 ‘경고’ 처분을 결정하는 바이오. 아울러 두 동무는 연대원들 앞에서 자기비판을 실시할 것이며, 인사조처는 추후에 통고될 것이오. 이상으로써 당무회의를 마치고자 합니다.” 빨치산의 당적 처벌은 다섯 가지였다. 주의, 견책, 경고, 엄중경고, 출당이 그것이었다. 주의, 견책까지는 반성을 통한 재범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행해지는 훈계 정도였다. 그러나 경고나 엄중 경고는 당원에게 출당을 전제로 한 ‘경고’였고, 같은 비중의 과오를 다시 저지르는 경우 출당을 면할 수가 없는 엄벌이었다. 물론 그 경고처분은 앞으로의 당생활에 장애요인이 되는 기록성을 갖고 있었다. 끝으로, 출당은 당원에게 가해지는 마지막 선고였다. 당은 당원을 그 어떠한 경우에도 당원의 상태로 처단하는 일이 없었다. 일단 출당처분을 내려 당적을 박탈한 다음에 처단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출당처분은 곧 ‘사형선고’였다. 이틀 뒤에 문화부 중대장의 자리바꿈이 있었다. “강 동지, 미안하게 됐어요. 잘 있으라요.” 한상근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한 동지, 내가 미안시럽소. 암 디서나 몸 성허씨요이.” 강동기가 웃으며 한상근의 손을 맞잡았다. 187-188
18 새로 생겨나는 반공세력
"그런데 말씀입니다, 의사들 중에도 좌익사상을 갖고 있다가 입산한사람들이 적지않은데요, 저처럼 아무 편도들지 않고 이렇게 사는게 혹시 잘못된 일은 아닌가요?" "글쎄요, 그렇게 살기는 나도 마찬가지지요. 허나 그렇게 사는 것을 옳다 그르다 하고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전쟁에서는 특히 그렇지요. 무슨 말인가 하면, 전쟁이란 대개 국가 대 국가가 싸우는 것이고, 그럴 때는 적과 아군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치르고 있는 전쟁은 이념이 작용하고 있는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이면서, 또 남과 북이 똑같이 외국군대가 개입된 국제전이거든요. 이런 복잡한 양상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도 여러 갈래로 얽힐 수밖에 없는 거지요. 전쟁은 편을 갈라 싸우는 것이고, 이번 전쟁에서도 그 편갈이는 표나게 나타났지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전 원장님이나 나 같은 사람들이 적잖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건 그게 이념적 민족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친일반민족세력으로 이루어진 이승만 정권이야 절대로 옳을 수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공산주의를 지지할 수도 없고, 그런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한 묶음으로 정치적으로는 중도파라고 부르는데, 그런 사람들은 결국 양쪽에서 다 환영받을 수가 없지요. 그런데 이번 전쟁을 계기로 그런 사람들도 많이 양쪽으로 갈라지게 되고, 전쟁 전에 있었던 중도파란 이제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봐야죠.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어느 편도 안 들었다고 해서 죄가 될 것은 없다고 봅니다. 얼마나 바른 생각을 가지고 사느냐가 문제지요.” 226-227
19 어차피 한 번 죽는다
빨치산들은 겨울에 고대했던 여름산의 행복감을 만끽하지 못하고 있었다. 휴전소식은 비밀일 수 없었고, 거기서 비롯되는 불안감이 빨치산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던 것이다. 물론 도당에서도 민주원칙에 따라 그 사실을 공개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학습을 강화시켜 나갔다. 그러나 학습만으로 대원들이 서로 다른 입장에 따라 갖게 되는 불안감을 일소시킬 수는 없었다. 휴전을 받아들이는 감도는 우선 이북 출신과 이남 출신이 달랐고, 이남 출신 중에서도 지식계급과 농민, 기본출이 달랐다. 작년 후퇴 때, 그랬듯이 이북 출신들이 가장 심하게 불안감을 드러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상의 빈약도 아니었고 특별히 겁이 많아서도 아니었다. 그건조직원의 이성이기 이전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본능적 반응이었다. 학습에서도 이 점을 지적하여 이북 출신들의 이성회복을 촉구했다. 그 다음으로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 이남의 지식계급 출신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두 가지 양상을 드러냈다. 전혀 끄떡도 않는 축과, 불안을 느끼는 축이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쪽보다는 불안을 느끼는 쪽이 한결 많았는데, 그불안의 원인은 그들이 머리를 굴려가며 휴전 다음의 상황을 꼬치꼬치 따지는 데 있었다. 지식계급에 비해 농업인민이나 기본출들은 꽤나 태평한 편이었다. 이래 살다 죽으나 저래 살다 죽으나 어차피 한세상인데, 바라는 세상 못 볼 바에는 실컷 싸움이나 하다 죽겠다는 태도였다. 그런 의연함은 기본출일수록 많이 나타났다. 그런 분석은 각 지구의 정치위원회가 일치하고 있었다. 246-247
혁명은 대가를 예약해 주지도, 보장해 주지도 않는다. 혁명은 역사를 발전시키는 동력이고 과정이며, 혁명에 가담하는 자는 그 연료로써 타오르기를 각오하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혁명에서 대가를 바랄 때 목숨에 연연하게 되고, 목숨에 연엲며 투쟁력이 약화되면서 기회주의가 싹트게 된다. 248
혁명투쟁에 나선 자의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은 적과 싸우다가 동지들의 가슴에 영원한 추앙의 괴로움을 남기고 죽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확고하게 믿는 자만이 역사를 짊어질 수 있었다. 249
사상이 말을 통한 논리의 구체성이듯이 사랑도 말을 통한 마음의 구체성이었다. 271
20 포로의 섬, 거제도
미군들은 거제도에 철조망을 치면서 250만 평에 이르는 농토와 임야에 쇠말뚝을 박았고, 자그만치 3천여 채의 집들을 강제로 허물어버렸던 것이다. 물론 미리 통고한 일도 없었고, 단 한 푼의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한 모든 행위는 ‘공산당을 무찌르기 위해서’ 정당화되었고, ‘작전권 이양에 따른 징발’로 합법화되었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집을 잃고 농토를 빼앗긴 수많은 양민들은 얼업죽고 굶어죽어도 어디사서 배상을 요구하기는 커녕 하소연할데 한 곳없었다. 김범우 자신이 물건도 아니면서 징발당하며 속수무책이었듯이. 도처에서 자행된 강간이 아무 문제가 안 되듯이, 과잉된 파괴와 바오하로 저질러지는 초토화도 아무런 시비가 되지 않았듯이. 김범우는 외로운 분노의 불을 끌 수 없어 혼자 지팡이를 짚고 서서 분노를 깨물었다. 304
22 호산댁
"인생이 도대체 뭐요. 짧은 인생 허망하고 허무한 것 아닌가요? 허무하게 살다 가는 건데 사상이고 이념이고 따져서 뭘 하자는 겁니까. 그런 걸 따지나, 안 따지나 인생이 죽음 앞에서 허무한 빈손이기는 매일반 아닌가요. 인생 육십 공수래공수거고, 더욱이 김미선 씨는 애들이 둘씩이나 딸린 여자의 몸 아닌가요. 그저 애들 생각만 하면서 겪었던 대로만 어서어서 쓰세요. 빨리 써버리고 자유의 몸이 되어 아이들 데리고, 어머님 모시고 사는 게 젤이지 그까짓 사상이란 게 다 뭐 말라빠진 겁니까? 더구나 그 사상이 현실로이뤄질 가망은 전혀 없는 판에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협박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기다리는 것도 한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날짜를 연기하는건 내 능력이나 권한이 아닙니다.” 김미선은 그의 어떠한 말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내세우는 인생허무주의는 철저한 봉건적 지배논리였으며, 전형적인 기득권 세력의 옹호논리였고, 표본적인 반인민·비역사성을 내세우는 문학논리였다. 어차피 허무한 인생이니 그저 그렇게 한평생 살아가자는 그 말은 무척 초연한 것 같고, 달관한 것 같지만 사실 그 속에는 간교하고 음흉한 함정이 수없이 파여 있었다. 인생은 어차피 허무한 빈손인 공수래공수거가 아니더냐……. 아주 감상적이기도 하고 철학적이기도 한 이 읊조림이 사람들의 의식을 최면시켜 나가면서 깊이 심는 것은 체념과 패배주의였다. 그 대중최면의 체념과 패배주의를 짓밟고 올라서 지배계급은 맘껏 권력을 휘둘러대고, 그와 야합하는 기득권세력은 마음대로 착취를 일삼는 것이며, 이아무개같은 부류의 문학을 한다는 자들은 그런 권력과 세력에 기생하면서 대중을 더욱 눈멀게 하는 체념을 조장하고, 대중을 갈수록 허무주의에 빠지게 하는 글줄을 써대 힘을 빼는 것이었다. 그 반인민적·반역사적 복무의 작태가 사랑을 터무니없이 확대해서 비련의 자살극을 조작하는 삼류 연애소설이었고, 허무가 인생 극치의 멋인 양 과장해 대면서 매일 술 취해 허무타령이나 하는 사내를 미화시키는 퇴폐소설을 써대는 일이었다. 이아무개는 바로 술주정뱅이들이 게걸거리는 꼴들을 낭만적 허무니, 고독한 인생이니 미화시켜 가면서 소설이라고 맡아놓고 써대는 자였다. 360-362
23 지리산
"손 동무, 전에 지리산에 와본 일이 없더라도 혹시한 글을 읽어본 적은 있습니까?” 박두병이 담배연기를 시원하게 내뿜고 나서 물었다. “아 예, 기행문을 그저 몇 편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게 기억이 납니까?" “글쎄요………… 다 예찬이었는데 특별한 기억은 없고, 최남선의 글이 제일 낫지 않나 하는 정도의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 친일파!" 박두병이 내쏜 소리였다. 그 소리는 전혀 크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가슴에 쿵 부딪혀오는 것을 손승호는 느꼈다. 그건 갑작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박두병의 단호함 때문인 것 같았다. 450
“손 동무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엔 최남선의 친일은 계급적 기회주의의 표본이오. 그는 돈 많은 중인 집안의 자식이었는데, 그 중인계급의 생리란 게 아주 묘하고도 고약합니다. 중인계급은 지배계급과 기본계급 사이에 끼여 중간착취를 일삼는게 그 계급적 특성 아닙니까. 그 중간착취계급의 대표적인 게 관리로서는 아전 부류고, 도시사회에서는 상인이고, 농촌사회에서는 마름인 건 다 아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그들의 공통점은 지배계급에게는 열등감과, 기본계급에게는 우월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 이중성은 위로는 계급상승욕구로 나타나고, 아래로는 지배확대욕구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를 향해서는 간사한 아부와 아첨을 일삼고,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악랄한 횡포와 억압을 자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직접생산을 위해 땀 흘리는 노력을 하지 않고도 두 계급 사이에서 정치적 지위와 경제적 안정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철저한 보수집단인 반면에 정치세력의 변동에 따라 언제나 민감하게 변신하는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중성은 민첩한 현실주의와 교활한 기회주의를 낳게 됩니다. 그들의 그런 기생충과 같은 생리는 일제치하에서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제치하까지 거슬러올라갈 것도 없이 지금 우리들 주변을 유심히 살펴봐요. 중간계급출신이 얼마나 있는가. 내가 살펴본 바로는 거의 없어요. 농민들이 그렇게 많은 데 비해 마름이나 그 자식들은 찾기가 어렵다 그 말입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아무런 기대도 걸 수 없는 속물적 집단이고 반역사적 집단입니다. 얘기가 좀 길어졌는데, 내 생각이 어떻습니까?" 박두병은 입을 훔치며 큰 코를 씰룩했다. “예, 저도 중간계급에 대해선 좋지 않게 생각해 오긴 했습니다만, 그렇게까지 논리적으로 정리를 하진 못하고 있습니다. 아주 정확한 파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451-452
우화 옷을 입지 않은 임금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한 소년의 우화는 그 소년의 순진함이나 용기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진실은 반드시 진실대로 밝혀지게 마련이라는 인간생활의 진리를말하려는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이 우화의 해석은 대체로 그 우화를 구성하는 일련의 인과적 요인들이 엮어내는 '과정'에 대해서는 깊게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그 보이지 않는 비단옷이라는 것을 팔러 온 형제 상인은 어째서 그토록 맹랑한 술책이 먹혀들어갈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임금에게 있지도 않은 옷을 입혀놓고아름답다고 한 임금 측근자들의 이해관계는 어디를 향해 있던 것일까. 임금이란 으레 아첨배에 속게 마련인 것일까. 그리고 옷을걸치지 않고도 입었다고 우기는 '통치자의 진리와 권위'는 임금의것인가 측근 아첨배의 것인가. 이와 같은 '허구와 허위'는 통치자들의 속성이어야 하는가. 허위가 진리의 가면을 쓰고 나타날 수있는 그 사회의 제도와 풍토는 어떤 것일까. 그 많은 백성들 가운데 임금의 알몸뚱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도 많았을 텐데모두들 입을 다물고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또는 못 했을까. 가장 어리석은 소년에 의해 온 사회의 허위가 벗겨지기까지 그임금과 재상들과 어른들과 학자들과 백성들은 타락과 자기부정속에서 산 셈이다. 마침내 한 어린이가 나타나서 보다 현명한 어른들을 타락에서 구하기는 했지만, 그동안 이 왕국을 지배한 타락과 비인간화와 비굴과 자기모독, 그리고 지적 암흑상태가 결과한인간파괴와 사회적 해독은 무엇으로 측량할 것인가. 인간해방과 사상의 자유의 역사는 어차피 독선에 대해 회의疑)가, 권위에 대해 이성(理性)이 승리를 거두는 긴 투쟁의 되풀이임이 틀림없다. 우화도 그렇고 현실도 그렇고 역사는 한 단계의투쟁이 끝나면 으레 '임금은 알몸이다' 라고 폭로한 소년의 용기에열중한 나머지, 힘없는 소년에게 그런 엄청난 임무를 떠맡기게 된그 사회의 실태에 대해서는 눈이 미치질 않는다. 문제시해야 할중요한 것은 그 영광(또는 해결)까지의 과정에 얼마나 많은 인간적 타락과 사회적 암흑과 지적 후퇴가 강요되었느냐 하는 사실을인식하는 일이겠다. 17-18
오늘의 사실을 오늘에 규명하지 않고 먼 훗날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바화나 읽을거리의 자료로 생각하는 한, 통치계급의 횡포는 계속되고 대중은 암흑을 더듬는 상태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 27
베트남전쟁 비밀문서 .. 첫 줄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국가정책 수립 과정에 참여한 행정부 관료기구 속의 지성인들이 베트남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제각기 성격배우로서 파트를 연출한다. 정부가 민주적 성격을 띠는 한 원칙적으로 지성인과 관료 사이에 모순이나 대립 개념은 서 있지 않다. 그러나 형식은 어떻든 본질적으로 비민주적이고 소수 이익의 위탁자 역할을 하거나 부패한 정권을 돕는 지식인은 반지성적이고 따라서 반국민(민중)적일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를 일단 민주적으로 보고 또 직업군인, 관료를 제외하면 월트 로스토, 로버트 맥나마라, 조지 볼, 다니엘 엘스버그의 4인으로 특색 있는 주역이 두드러진다. 국가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인 월트 로스토는 전(全) 문서를 통해서 미국의 국가이념을 반공과 군사적 대국주의(大國主義, 국제 관계에서 큰 나라가 자국의 힘을 바탕으로 약소국을 억누르는 태도) 및 대국에고이즘에 입각한 팍스 아메리카나로 믿는 광신적 지식인의 면모를 여실히 나타낸다. 27-28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는 인간의 최고의 자질, 즉 이성과 의지와 가치관과 희생심마저도 전자계산기로 산출할 수 있다고 믿는 현대의 과학, 기계만능주의적 지식인을 대표한다. 29
진실을 외면하면서 눈앞의 체면만을 고집하는 군부장성들과 많은 민간 엘리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조지 볼은 자세를 끝내 굽히지 않았다. 30
다니엘 엘스버그는 햄릿적인 과정을 밟아 하나의 진리를 실천한 독특한 지성인이다. 그의 행동에 대해 우익적 여론과 군부에서는 비난과 인신공격, 중상이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진실과 이성이 작용하지 않는 매머드화한 관료기구 속에서 자기의 임무와 정부의 정책이 부정이며 불의임을 깨달았을 때 진정한 국가이익을 위해 진실을 밝힌 용기는 고민하는 지성인의 최고의 자세인 듯하다. 30
진실을 따지고 보면 국가이익이나 국가안보라는 것은 즉각적인 피해가 예상되는 군 이동이나 작전계획 등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실이 진실대로 밝혀짐으로써 가장 잘 보호될 수 있다. 해롤드 라스키가 “권력자란 자기의 부정과 과오를 은폐할 수만 있다면 그 목적을 위해서는 언제나 국민의 자유를 부정하려 한다. 그리고 권력자에 의한 이 자유의 부정이 성공할 때마다 다음 번에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그만큼 쉬워진다.”(<현대국가에서의 자유>) 라고 말한 것은 통치 세력의 논리를 정확히 표현한 것이다. 33-34
무력의 논리밖에 모르는 군인들이 국가기능의 종합적 서열을 무시하고 군사의 상위에 서는 정치정책에 도전할 때 국가는 그 이성을 상실하게 마련이다. 일본의 예는 우리에게 가장 실감나는 비극이다. 36
국민을 납득시킬 수 없는 베트남전쟁의 장기화는 미국 사회를 병들게 햇다. 장기화가 문제가 아니다. 그 전쟁 자체가 미국의 숭고한 건국정신과 정의를 사랑하는 미국의 국가이념과 상용될 수 없다는 것이 미국 국민 자신들에 의해서 인정되었다. 그런데 이토록 미국인의 정신과 사회를 병들게 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현실주의자’들이다. 37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국민은 정부의 기만적 선전과 사과(史觀)의 미숙 때문에, 정부가 꾸며나가는 기정사실화를 그대로 역사로 시인하는 편이었다. 그 결과는 현실주의의 파탄으로 나타났다. 제임스 레스턴은 “정책수립의 전 과정을 통해서 정책의 윤리성을 생각하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했다. 통킹 만에서 월맹 어뢰정이 불법으로 미국 순양함을 공격했다는 조작으로 의회로부터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탈취하는데 성공한 정부와 군부는 의회 결의와 흥분으로 도착된 미국인의 감정을 ‘현실’로 하여 다음은 대규모 폭격을 ‘현실화’한다. 이 현실이라는 것이 역대 행정부와 군부에 의한 조작과 허구의 ‘연속의 단면’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의회 결의에 반대한 상원의원은 100명의 의원 가운데 모스와 구루닝 두 사람 뿐이었다. 풀브라이트 같은 의원조차 ‘현실적 대응책’이니 할 수 없다고 찬설표를 던졌다. 37-38
군부 같은 것이 국민을 구렁텅이로 끌고 가는 수법이 이 현실주의다. 오늘의 현실을 수정하지 않으면 내일의 현실이 우리를 구속할 것이라는 지성인들의 사관만이 이런 불행을 예방할 수 있다. 미국의 지성인들은 역사의 ‘현실’을 수락할 뿐 역사에 ‘작용’하려 하지 않았다. 38
풀브라이트, 한스 모겐소 등 소수의 지성인은 매카시즘의 ‘빨갱이 잡이’(witch hunting)의 시련에 굴복하지 않은 진정 용기 있는 지성인이고 애국자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성인은 50년대와 60년대 초에 이 파괴적인 사상통제의 압력으로 공직을 떠났거나 침묵을 선택했다. 39
‘빨갱이 잡이’가 절정에 달했을 때 미국 법조계에서 가장 존경받던 라네트 핸드 판사는 “시민이 그 이웃을 적이나 간첩이라는 생각으로 살피도록 명령받는 사회는 이미 분해의 과정을 걷고 있다”고 미국 국민이 영원히 기억하는 날카로운 경고를 했다. 39
한 소년이 왕의 알몸을 폭로할 때까지 오랫동안 온 지식인과 백성들이 입을 열지 못하고, 사회는 공포와 타락과 암흑 속에 침체해야 했던 그 엄청난 인간적, 사회적 소모가 있었다는 사실을 거듭 중요시해야 할 것이다. 남의 나라의 불행한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국가나 국민에게는 영원히 한 살마의 소년도 나타나지 않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41
미국은 창조력을 가진 대국가이면서도 자기 제도와 이념의 자유로운 창조적 발전을 목표로 하지 않고 세계의 작은 국가와 인민의 솟아오르는 목표와 염원과 해결을 까부수는 데 전력을 동원했던 것이다. .. 미국의 예에서 우리는 부정적인 가치관이나 태도에서는 건설적인 것은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 비창조적인 사고방식이 극단에 이르면 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주위에 온갖 명분의 높은 장벽을 쌓고,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시민은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때로는 생물학적으로 배제해버리는 공포사회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바로 부정하려는 제도나 사고방식에 자기가 변질해버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수단으로서 구체적으로 죄목 규정도 하지 않은 귀걸이 코걸이식의, 집권자의 뜻대로 자유자재로 해석될 수 있는 금지법률이 잇달아 제정돼야 하고, 모든 교육은 그 목적을 위해서만 알맞게 개편돼야 한다. 널리 생각할 줄 모르는 인간 또는 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이런 식의 교육처럼 자기기만적인 것은 없다. 43
진실 또는 진리에 반대하는 힘 또는 세력은 대중이 진리를 배우도록 훈련, 교육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가르치는 대로 믿을 것을 강요하고, 가르치는 것은 흑백뿐이다. .. “오늘날 교육(직접, 간접)이라는 것은 문자를 통해서 기만당하는 것을 가르치는 기술이라고 정의해도 결코 부당한 말은 아니다. 이와 같은 기만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현재로는 사회의 지배자들이다”라고 갈파한 서양의 유명한 석학의 말은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 47
4
베트남 전쟁 I (1945~56)
냉전용어의 관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섹의 모든 정치적, 사회과학적 사상을 흑과 백, 천사와 악마, 죽일놈과 살릴 놈, 악과 선의 이치적(二値的) 가치관으로만 판단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것ㅊ처럼 지성을 마비시키고 격변하는 세계에서 자기의 생존을 위태롭게 만든 요소도 드물다. 369-370
베트남 사태는 크게 나누어 4단계의 정세발전을 거쳐 현재에이르렀다. ①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화(1863.5) 부터 제2차 세계대전종전까지 근 100년에 걸친 베트남 인민의 식민지민족 항불(抗佛) 해방투쟁. ② 전(全)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 (1945.9)부터 전후 베트남민족해방 항불전쟁의 승리를 고한 인도차이나 휴전협정 성립(1954.7) 까지의 투쟁. ③ 남베트남공화국 수립 (1955.10)과, 그것으로 베트남의 통일을 위한 제네바협정의 총선거 실시 협약이 사실상 일방적으로 폐지되고 베트남의 반영구적 분단이 고정된 사태. ④ 그 이후 남베트남(越南)에 내란이 일어나고 미국과 북베트남(越盟)이 개입함으로써 미국과의 전쟁으로 변모, 확대된 현상태. 이중 ③의 단계는 기간은 짧지만 그 후 베트남 사태의 발전에가장 중대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정치적 사실 때문에 역사적 의의가 크다. 373
프랑스는 사실 유럽전쟁이 끝남과 때를 같이하여 1945년 3월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합친 인도차이나 불령 식민지 5개 지역을 연방화해, 연방의 실권을 1명의 총독에게 주고, 형식상의 원주민 자문회의를 설치해 인도차이나를 재지배하는 정책을 선포했다. 민족해방과 독립을 요구하고 있던 인도차이나의 민족주의자들은 일제히 이를 반대했다. 1946년 2월, 16도선 이북에 진주했던 중국 군대가 철수하자 프랑스총독부는 프랑스 군대를 앞세우고 북부지역으로 들어갔다.베트남민주공화국은 프랑스군의 진주를 반대하지 않는 대신, 프랑스 정부는 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프랑스의 일원으로서 정부 · 군대 · 재정 ·외교의 모든 분야에서 독립적인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② 안남(중부)과 교지지나(支那, 남부)를 병합해서 단일 통일국가로 할 것인지의 여부는 국민투표로 결정하기로 하고③ 프랑스 군대는 5년간에 걸쳐 베트남 군대로 교체되며 ④ 그 이상의 세부문제는 앞으로 계속 협상해서 해결한다는 협정에 동의했다(1946.3.6, 협정). 그러나 프랑스는 이 협정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20일 후에남부에 '교지지나공화국' 임시정부라는 것을 수립했다고 발표했다. 379
프랑스는 베트남을 재지배하기 위해 중국 군대의 북부 철수를중국 내 프랑스의 이권을 포기한다는 것과 교환조건으로 장개석정부를 유화했다. 그 조건이란 ① 중국 내 프랑스 치외법권의 포기 ② 프랑스 자본으로 건설한 하이퐁에서 곤명(昆明)까지의 철도에 대한 중국 권리 인정 ③ 중국의 하이퐁 항 및 그 주변지대의 출입권 승인이다. 베트남을 희생으로 하는 강대국 이익 위주의 해결형식은 이때 이미 시작되었다. 380
나치 독일에 의해 일패도지(一敗塗地)되어 사실상 전후의 강대국 대열에서 탈락해버린 프랑스는 ‘위대한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서도 식민시장을 버릴 수 없다는 결심이었다. 380-381
12월 19일 베트남 정부에 베트남 군대의 자발적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들이댔다. .. 3일 후 프랑스 공군은 하노이, 하이퐁 등 대도시에 대한 전면폭격을 감행하는 동시에 육군은 하노이 시를 점령ㅎ고 베트남 군대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하노이 시 폭격으로 죽은 베트남인만도 단 두 시간에 6,000명을 헤아렸다. .. 베트남 인민과 제국주의 프랑스군 40만은 이로부터 1954년 5월 7일, 디엔 비엔 푸 결전에서 프랑스군이 항복하기까지 실로 7년반의 혈투를 전개한 것이다. 그것은 베트남뿐 아니라 인도차이나 전역에 걸친 전쟁이었다. 미·영·불 등의 공식문서들은 이 처절한 전쟁을 '내란'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베트남전쟁을 식민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는 성격 규정과 식민지 인민의 입장에서 보는 민족해방전쟁의 성격규정을 단적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내란'이란 합법적 통치권력에 대한 민중의 정권전복 반란의 뜻을 띤 정치적 용어다. 종전 이후에도 프랑스를 베트남의 합법적 통치의 주체로 간주하는 것은 1946년 3월 6일 협정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 독립을 승인한 사실을 백지화하는 견해다. 식민주의자의 가장 큰 배신은 인도차이나전쟁을 종결지은 제네바 휴전협정 (1954.7.21, 조인)에서 합의한, 2년 후 즉 1956년 7월에 베트남 독립 ·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조약의무를 프랑스가 포기한 것이다. 프랑스는 제네바 휴전협정에 의해 휴전선 이남지역에서 휴전과 관련된 군사적·행정적 업무를 담당하고 총선거 실시를 위한 협의를 하며, 1956년 7월에는 전 지역을 통틀어 총선거를 실시하는 일방(一方)주체로서의 의무(최종선언 제7항)를 서약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합의된 선거날짜를 3개월 앞두고 프랑스 군대를 철수해버렸다. 그러고는 휴전협정을 이행할 조인 당사자인 주베트남 프랑스군 최고사령부를 해체함으로써 휴전협정의 이행은 물론 총선거 실시의 책임도 기피해버렸다. 이것은 식민주의자의 네 번째 그리고 가장 중대한 베트남 인민에 대한 배신으로 지탄받게 되었다. 그 후 오늘에 이르는 베트남 사태 발전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총선실시 합의의 유산을 꼽는데 미국 정부를 제외하고는 대개의 전문가와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돼 있다. 381-382
프랑스가 식민통치하의 호치민 세력을 끝까지 거부한 것이나 현재 미국이 북베트남과의 전쟁에 개입하게 된 하나의 중요한 동기는, 민족주의자는 베트남의 독립과 양립할 수 있으나 공산주의자는 베트남의 주권, 독립을 국제공산주의에 예속시킨다는 견해를 토대로 하고 있다. 383
외세에 대한 투쟁 과정에서는 전부가 민족주의자라는 데 더 큰 중요성이 있다. 그러기에 차이점은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인가, 아니면 자본부의적 민족주의자인가다. 이것은 베트남의 경우도 그렇지만, 모든 전전(戰前)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자본주의였다는 역사적 사실로 말미암아 같은 민족주의자이면서 자본주의와 이해관계가 밀착해 있는 세력은 민족해방운동에서 소극적이었고,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는 반식민지투쟁에서 적극적이었다는 차이를 낳게 한다. 384
바오 다이 황제가 전형적인 경우이겠다. 1945년 3월 일본군이 베트남 전역의 군사적 점령을 완료하자, 일본은 안남왕국의 과거 프랑스 식민지하의 명목상의 황제에 대해서 북부와 남부를 합친 통일왕국의 독립선언을 요구했다. 이것은 백인 제국, 식민주의 세력을 추방하려는 황색인 제국, 식민주의의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바오 다이는 이에 응했다. 그것이 백인 프랑스 제국, 식민주의의 괴뢰에서 다만 일본 황색인 제국, 식민주의의 괴뢰로 탈바꿈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나 명백한 사실이었다. 형식상으로는 이것이 프랑스 식민지가 된 후 최초의 베트남 통일, 독립이다. 그 후 베트남 인민과 영토의 완전한 통일, 독립을 요구한 베트민(베트남민주광화국)을 말살하기 위해 협정을 폐기하고 식민지 전쟁을 개시한 프랑스는 홍콩에 '망명' 중이던 바오 다이를 다시 불러들여 1949년 6월, 프랑스연방 내의 베트남왕국 원수로 추대했다. 이 프랑스연방 내의 베트남왕국이란 베트남의 중부와 남부를 끝까지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꾸며낸 흉계였다. 그것은 베트남의 일부에 독립의 허울을 씌우는 정치극이었다. 벵상 오리올 프랑스 대통령과 바오 다이 '황제' 사이에 체결된 이 협정은 '엘리제협정' 이라고 불린다. 엘리제협정은 바오 다이 황제의 베트남에 대한 독립을 인정하되 "국방과 외교권은 프랑스 정부가 장악하고, 프랑스 군대는 베트남에 기지를 영원히 보유하며 그 통행권은 무제한으로 보장되며, 재정 및 기타 국정의 주요부문에서 프랑스 정부의 자문과 지도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낯익은 정치극이다(엘리제협정과 같은 것이 프랑스와 라오스 및 캄보디아 사이에도 거의 동시에 체결되었다). 384-385
민주주의냐 아니냐의 기준은 그 국가사회의 정치적 권리뿐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권리와 기회가 민중, 인민, 시민 또는 국민(명칭이야 어떻든)에게 얼마나 균등하게 배분되고 보장되어 있느냐에 따라 평가되어야 할 문제다. 386-387
바오 다이 정권에 완전히 실망한 미국은 고 딘 디엠을 새로운 ‘위대한 민족주의자’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가 소수 지배층의 정치, 경제, 권력 독점과 베트남 사회의 원리가 되어버린 부패를 도려내고 진정 민중(국민)의 지지를 받는 국가를 만들 것으로 기대했다. 389
존슨 미국 대통령이 부통령 당시 ‘동양의 처질’이라 불렀고 케네디를 비롯한 미국의 친베트남파 거물급 인사들이 ‘베트남의 이승만’으로 불러온 이 ‘위대한 민족주의자’는 결국 민족주의나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입증하고 군부쿠데타에 의해 1963년 11월 2일 살해되고 만다. 392
1947년 트루만 대통령의 이른바 ‘트루만 독트린’의 제기로 시작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선언한 미국은 모든 식민지해방 민족투쟁도 공산주의로 간주하게 되었다. 407
1950년 10월 10일, 최초의 미국 군사 사절단이 사이공에 도착했다. 이때까지, 즉 1950년에서 54년까지 4년 동안 미국은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전쟁 지우너으로 22억 8,500만 달러를 제공했다(D.F. Fleming, The cold War and Its Origin). 이때 미국의 인도차이나전 개입을 반대한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은 “인민의 공공엲ㄴ 동정과 지지를 받고 있는 이 전쟁에는 아무리 미구그이 군사력을 투입해도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고 나는 솔직히 생각한다.”고 말했다. 409
총선거 실시가 예정된 1956년이 지나면서 남베트남에서는 심각한 내란이 일어났다. 어느 한 시기를 기준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1957년경부터 전구구 지방에서 정부에 대한 폭동과 테러 형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베트콩으로 불리는 민족해방전선의 출발이다. 411
20년에 걸친 남베트남 사회의 혹심한 정치, 경제, 사회의 부패에 곁들인 이 정치적 탄압이 반란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데는 온건한 중간적 견해를 가진 논자들이 일치한다. 그 대표적인 것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고 딘 디엠은 이미 1956년 1월 탄압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1월 11일 디엠은 강제집단수용소 설치령을 내려 그와 정부에 반대하는 자에 대해 거의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 혹독함에 놀란 미국 정부는 마침내 66년 5월 사이공 주재의 미국 정부 대표기관으로 하여금 베트남 사회에서는 처음부터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즉 초기의 ㅣ반정부세력은 공산주의자이기보다는 정치, 종교적 소수파들이라는 사실을 사실대로 발표하게 했다. 413
베트남 전쟁II(1956~72)
미국의 전면적인 지지와 뒷받침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오히려 바로 그 때문에, 고 딘 디엠 정권의 독재, 폭정, 부패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상태가 되었고, 그로 인해서남베트남의 민중은 앉아서 죽기보다는 총을 들지 않을 수 없는 상태로 몰렸다. 여기에 베트남의 역사적 배경이 작용한 것이다. 미국 정부 지도자들에 의해서 ‘베트남의 이승만’이라고 평가받은 남베트남의 통치자 고 딘 디엠은 바로 그 이름대로 이승만과 같은 운명을 밟았다. 이승만보다 더 철저했던 탓에 더 철저하게 나라를 망치고 더 처참한 죽음을 당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416-417
디엠 정권은 디엠이 대통ㅇ령에 취임하기 훨씬 전인 제네바협정 체결 직후 194년 7월 부터 57년 6월 사이에 전국의 반정부적 세력 및 개인에 대한 조직적 테러를 단행했다. 이 조직적 테러의 주대상은 제네바협정에 의해 남부 잔류를 희망하여 무기를 반환하고 농업으로 돌아간 농민이었다. 418
독재, 탄압통치가 있는 곳에 인민의 반항이 싹트기 시작했다. 1959년 총선거에서 민중의 이반(離反)을 분명히 깨달은 디엠 정권은 민간인도 특별군법회의에서 재판할 수 있는 법령 59-10 ‘치안유지법’을 제정했다. 이 법령과 군사재판은 그때부터 모든 반정부적 행동을 ‘베트콩’이라는 이름으로 무차별적으로 탄압하는 도구가 되었다. 419
‘한국전쟁 이후부터 비공산주의적 남베트남이라는 고정목표를 설정한 미국에게 남베트남은 온갖 두통거리가 되었다. 처음 우리(미국) 지도자들은 프랑스가 베트남인에게 독립을 주지 않고서는 베트민을 이길 기회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남베트남인에게 독립을 허용하면 프랑스는 그곳에 남지 않을 것이며 전쟁도 계속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말하자면 프랑스와 더불어서도 전쟁에 이길 수 없고 프랑스 없이도 전쟁에 이길 수 없는 꼴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디엠에게 정권을 쥐어준것이다. 그런데 우리 지도자들은 얼마 안 가서 디엠이 절망적일 정도로 인민의 지지를 상실하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장래의 정치적 안정을 대표하는 것이 디엠뿐이라는 생각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또 우리는 디엠이 없어도 싸움을 계속할 수 없고, 디엠과 손잡고는 싸움을 이길 수 없게 되었다. 얼마뒤에는 우리 지도자들은 미국의 전면적인 지원 없이는 남베트남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과 북베트남인들의 노력은 우리의방해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거두고 있는 듯 보인다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또 한 번 베트남에서의 싸움은 미국의 뒷받침 없이도 이기지 못하지만 미국이 관여해서도 이기지 못한다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이와 같은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을 잘 알면서도,우리 지도자들은 베트남에 대한 간섭을 고집했다. 우리 정부의 역대 지도자 집단은 제각기 앞서의 정부가 실패한 것을 자기들은 성공으로 전환시킬 수 있거나, 적어도 실패를 예방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역대 정권(미국)은 앞의 정권 밑에서 그 무효성이 입증된 온갖 이론과 논리를 토대로 잇따라 실패 속으로 뛰어들었다’(Brookings Institution 소속 Dr. Leslie H.Gelb, Hearings before the Committee on Foreign Relations, United States Senate on Causes, Origin, and Lessons of the Vietnam War, 1972.5, p.2). (앞으로 편의상 1966년 1~2월에 있은 미국 상원외교위원회 베트남전쟁에 관한 청문회 의사록을 ‘제1회 청문회 의사록’ 1972년 5월에 있은 같은 목적의 청문회 의사록을 ‘제2회 청문회 의사록’으로 약기한다. 이 글의 모든 근거와 자료는 서방세계, 특히 미국 정부 자신의 각종 대소 공시눈서 약 30종을 토대로 했음을 밝혀둔다.) 419-421
50년대는 미국의 ‘간섭의 시대’였다. 422
베트남에서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군사적으로 승리한다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전쟁의 위험성은 엄청나게 커질 것이다. 반대로 공산침약이 베트남에서 실패한다면 다른 지역에서도 남의 나라를 침략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될 것이며 평화가 깃들 가능성은 즐가할 것이다(닉슨, 베트남에 고나해 전 국민에게 한 연설, 1972. 4. 26.) 423-424
선거 때마다 도미노 이론은 미국의 베트남정책의 지도이념으로 등장했다. 중국의 장개석 패망으로 공화당에 정권을 뺏긴 민주당은 선거 때마다 강경론적 우파의 표와 군부 및 경제계의 지지를 얻기 위해 도미노 이론을 원용했다. 424
‘자유세계’의 안전이라는 명분은 도미노 이론에 이의를 제기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도미노 이론은 마술적 힘을 발휘했다. 고 딘 디엠 정권하의 남베트남이 자유국가냐 하는 문제, 선거로 선출됐다는 그 정부가 실시하는 선거가 자유, 민주주의적이냐 하는 문제, 남베트남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정치적 성격이냐 군사적이냐 하는 문제, 소수의 폭정과 소수에 의한 착취제도가 강요되고 있는 사회에서 민중의 반항의 권리는 없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미국 지도자들에게는 고려의 대상 가운데 들지 않았다. 425
착실히 정치·경제·사회의 토대를 구축한 북베트남 정부는 통일총선거가 거부된 뒤인 1958년 3월과 12월 사이에 남부의 고딘디엠 정권에 대해 ① 남북의 병력삭감 ② 남북 간 경제무역을 위한 협상 ③ 군사예산의 상호감축 ④ 군사기지의 확장 및 신설 금지⑤ 남북 간 정상관계 수립을 위한 협상을 거듭 제의했다. 그러나 그 모든 제의는 남베트남 정권에 의해서 그때마다 거부당했다. 427
1955~57년의 경제회복 3개년 계획이 순조로이 진행되자, 북베트남 정권은 1958~60년의 경제, 문화발전 3개년 계획으로 경제, 사회, 문화면의 안정과 발전을 계속했다. 이 발전은 1965년 미국의 본격적이고 지속적인 북폭으로 다시 잿더미가 되기까지 착실하게 추진되었다. 428
해방전선이 북쪽에서 남파된 침투세력이냐 아니냐가 미국 내에서 논의되고 있던 그 당시, 주월미국경제협조처(USOM)의 책임 관리인 밴(John Paul Vann)은 다음과 같은 보고를 제출했다. 밴은 또한 이른바 ‘평정계획’의 미국인 수석고문관이었다. ‘남페트남 정부는 정치적으로 민중의 지지를 못 받고 있다. 남베트남 정부는 지방농민과 도시의 하층민중에 대해 착취 지향적이며, 실질적으로 베트남 인민의 정부가 아니라 프랑스 식민기구의 후신이다. 사회혁명은 거의가 민족해방전선의 이름 아래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은 인정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제2회 청문회 의사록, 81쪽) 435
‘남베트남 정부’의 구성을 살펴본다면, 어째서 그것이 정치적으로 오늘에 이르러서조차 민족해방전선과 겨룰 수 없는가의 이유를 알 수 있다. .. 정부 지도자들은 모두가 자기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억압하는 프랑스 식민국과 베트남 인민의 전쟁에서 식민국 프랑스를 위해 싸운 자들이다. 남베트남 정부란 부(富)한 자와 부패한 자를 위한 정권이다. 그것을 위해서 누가 목숨 바쳐 싸우려 하겠는가(노엄 촘스키 교수, 제2청문회 의사록, 81쪽). 436
1964년 8월 4일 오후11시 36분(와싱톤 시간), 세계는 다음과 같은 미국 대통령의 엄숙한 발표문을 들었다. ‘북베트남의 통킹 만 밖 공해상을 순찰중이던 미국 구축함 매독스 호는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의 공격을 받았다. 매독스 호는 항공모함 타이 콘테로가 호에 지원을 요청, 함재(艦載) 전투기의 긴급지원을 얻어 이에 반격을 가했다. 8월 4일, 같은 통킹 만에서 미국 구축함 매독스와 터너 조이, 두 함은 다시 북베트남 어뢰함의 공격을 받고 이에 응수, 어뢰정 3척을 격침했다. 8월 5일, 미국 공군은 연 64회 출격, 북베트남 어뢰정 기지, 석유 저장소 등 4개소를 공격하고 어뢰정 및 그밖의 함정 25척을 격침 또는 격파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이 사실을 밝힌 존슨 대통령은 “이것은 한정된 그리고 적절한 보복공격”이며 “아직도 우리는 전쟁확대를 바라지 않고 있다”고 말을 끝맺었다. 439-440
존슨은 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북베트남의 “어뢰정에 의한 도발·불법공격"을 제기하고, 미국의 북폭은 유엔 헌장 제51조의 '집단자위권'에 의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정부는 또 “북폭은 엄격히 제한된 것" 임을 세계에 약속했다. 남베트남 사태는 이제 '남'자를 빼고 '베트남' 사태로 불리게 된 것이다. 존슨은 때를 잃지 않고 즉시 (7월) 의회에 대한 전쟁정책의 법적 뒷받침을 요청했다. 미국 상·하 양원은 “대통령이 침략저지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소위 '전쟁권 부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뒤에 미국 의회의 권위와 기능을 거의 박탈해버리게 되는 이 의결은 압도적인 지지로 채택되었다(하원 416 대 0, 상원 88 대 2). "선전포고 없는 전쟁은 시작된 것이다"(카첸바트 국무차관 의회 증언). 그것이 미국의 주요신문들에 공표됨으로써 비로소 뒤늦게나마 베트남전쟁에 관한 미국 전쟁·전략 및 음모와 조작의 전모를 세계에 폭로한 소위 미국 국방성 비밀문서' (The Pentagon Papers)에 의하면 통킹 만 사건은 다음과 같은 진상을 숨기고 있다. 미국 군부는 통킹 만 사건을 1964년 2월, 즉 실제로 단행하기에 앞서 7개월 전부터 북폭을 정당화할 수 있는 모든 세밀한 상황조작을 추진했다. 고딘디엠 정권의 내부적 몰락 직후인 이 시기. 미국 정부는 민족해방전선과 민중의 반란이 그 세력을 증대함에 따라, 남베트남에서의 반란 진압작전을 보완하는 수단으로서, 그리고 가능하면 약체의 남베트남 정권의 사기를 높여주는 한 방법으로서 북베트남을 공격할 필요가 있다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미국 정부는 북베트남과 남부 반란세력의 무전연락을 방수한 결과, 소위 베트콩에 지령을 내리고 있는 것은 북베트남이라고 확신한 듯하다. 그러나 당시의 미국 중앙정보국(CIA) 종합보고서는 "남베트남의 공산주의 세력의 힘의 원천은 남베트남 자체 내에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적 성격(미국적 사고방식에 의하면)을 띤 민족해방전선의 사회혁명 목적과 목표는 1950년대의 항불독립전쟁 시기에 민족주의자들이 내건 목표와 일치할 정도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미루어 미국 정부의 일부에서는 남베트남 사태는 어디까지나 남베트남 내부문제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남베트남 사태가 남베트남 역대정권의 무능 부패로 걷잡을 수 없게 되자, 미국 정부와 군부 내에는 이것을 북베트남과 관련시켜 해결을 강요해보려는 이론이 강력한 동조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 중심인물이 군인이 아닌 민간인 학자라는 것은 베트남전쟁이 증거하는 하나의 아이러니다. 441-443
‘국방성 비밀문서’에 의하면 ‘북베트남에 대한 정교하고 은밀한 군사 작전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계획은 1964년 2월 1일, ‘34 알파 작전계획’이한 암호명으로 개시되었다. 이것이 사실은 미국과 남베트남군에 의한 최초의 (1954년 제네바협장 이후의 작전으로서는) 군사개입이다. '34 알파 작전'은 ① U-2 정찰기에 의한 북베트남 공역(空域) 침입 및 정찰 강행 ② 북베트남 내부 정보수집을 위한 심리작전, 특수요원(스파이)의 투하 ③ 정보수집을 위한 북베트남인의 납치와 유괴 ④ 북베트남 오지 중요시설 파괴를 위한 파괴반 투입 ⑤철도·교량 파괴를 위한 해상으로부터의 남베트남 군부대의 기습공격 ⑥ 소형 고속정에 의한 북베트남 연안시설의 포격 ……등으로 되어 있다(국방성 비밀문서). 북베트남 정부는 이에 해당하는 시기에 북베트남 영토 내에서이루어지는 이와 같은 종류의 도발 및 공격을 비난하는 발표를 했다. 그러나 당시 이 발표는 미국 정부, 남베트남, MACV, 남베트남 군사령부 들에 의해서 '허위조작 비난'이라고 묵살되어왔다. 이 '은밀작전'은 미국 대통령 명에 의해 맥나마라 국방장관 책임하에, 연합참모부에 설치된 '반란진압· 특수활동 담당 특별보좌관실'이 지휘했다. 맥나마라 장관은 이 특별보좌관실의 초대실장인 클라크 소장, 그리고 1964년 2월에 교체 임명된 안지스 공군소장으로부터 그 공격작전의 실시결과에 대해서 정기적으로 보고받고 있었다. 연합참모부도 정기적으로 작전평가를 대통령에게 제출하고 있었다. 북베트남에 대한 은밀작전의 제2 병행작전은 라오스에 대한 공중작전이었다. 444-445
통킹 만의 구축함대에 의한 무력시위는 이상의 두 측면에서의 비밀작전에 대한 제3의 기둥으로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통킹 만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7월 30일 심야, 주(駐)남베트남 미국 주둔군 사령관 웨스트 모얼랜드 대장 지휘하에 있는 남베트남 해군 기습부대가 멀리 통킹 만까지 침투해(미국 구축함대에서 출발), 총킹 만 내 북베트남령의 두 개의 섬(홍메 와 홍게)에 대해 기습상륙 작전을 감행했다. 북베트남 정부는 이 기습 공격, 상륙작전 사실을 발표하고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미국과 남베트남 측은 역시 조작이라고 응수했다. 이 사건이 있은 지 3일 후인 8월 2일 밤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이 미국 구축함을 통킹 만상에서 공격하게 된 것은 이상과 같은 사실 위에서였다. 446
북폭은 1965년 6월 전략폭격기 B-52의 참가로, 남·북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는 미국 군부의 결의를 행동화했다.문명을 석기시대화하는 작업은 1965년 5월과 12월, 68년 10월,지상전투와 국제정세, 휴전협상의 진전 과정 등에 따라 일시적으로 중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닉슨이 재선되고 중·소와의 화해 · 접근 정책이 다분히 주효한 1972년 4월과 5월 이후 마침내 10여 년동안 논의되어온 북베트남에 대한 해안 기뢰봉쇄와 무제한 폭격이 실시됨으로써 간헐적인 중지의 효과는 일시에 상쇄되었다. 460
미국의 지상병력이 1967년 11월, 마침내 한국전쟁 당시의 미군 최고 수준인 47만 2,800을 넘어 54만 9,000에 달하자, 전쟁은 베트남의 국경을 넘어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확대됐다. 전쟁은 진정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이 되었다. 통킹 만 사건 직후, 미국의 강력한 요청으로 한국·필리핀·호주·뉴질랜드가 병력을 파견하고, 1970년 캄보디아정변으로 미국의 뒷받침을 받은 우파권력과 좌파세력이 민족상잔을 전개하게 되면서부터 인도차이나 대륙은 국경없는 하나의 전장으로 화했다. 미국의 압도적인 물량과 과학무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물질적 위력이 강해질수록 인도차이나 민족의 민족해방세력은 강대해지기만 했다. 인도차이나 전역에 대한 비치사성 각종 독가스와 식물 고사용의 화학무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됨으로써, 인도차이나전은 처음으로 생태학적 대량파괴의 문제를 인류에게 제기했다. 해방전선 측을 돕는 소련과 중공은 서로 대립관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공화국을 통한 현대무기 원조의 필요성으로 미국과의 전쟁일보전 상태로까지 깊이 관련되었다. 쌍방 전쟁 방법의 잔인성은 세계의 양심과 국제여론을 자극하여 미국에게 날로 불리한 국제적 조건으로 굳어져갔다. 미국 내의 국론분열과 반전세력은 내부에서 국가적 일체성을 파괴하는 작용을 해, 미국은 마침내 닉슨의로 하여금 1970년, “미국의 국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선언과 함께 20년에 걸쳤던 정치·군사 간섭정책에서 물러나기 시작하게 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으로 무장한 거인은 만신창이가 되어 일개 후진 약소민족과 협정을 맺고 1973년 2월 27년 만에 이 파란 많은 땅에서 물러서기를 약속했다. 460-461
미국 정부 공식문서도 이를 입증한 바 있다 미국의 베트남 개입의 목적 (1) ① 반침략의 보호자로서 명성을 지킨다. ② 동남아시아에서의 도미노 효과를 저지하기 위해. ③ 남베트남을 '붉은' 손에서 지키기 위해 (국가안전보장회의의결 「동남아 행동각서」, 1964년 11월 29일, 국방성 비밀문서 자료 제27). 미국의 베트남전쟁 목적(2) 70퍼센트: 미국의 굴욕적인 패배를 저지하기 위해. 20퍼센트: 남베트남(및 이웃 여러 나라)의 영토를 중공의 손에서 지키기 위해. 10퍼센트: 남베트남의 국민에게 보다 나은, 자유스러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그리고 수락 불가능한 폐해가 남지 않도록 하면서 위기에서빠져나간다. 그러나 만일 미군의 철수를 요청받을 경우에는 그대로 남아있기는 어렵지만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벗을 돕는 것이 아니다" (맥노튼 국방차관보가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보낸 남베트남을 위한 행동계획」, 1965.3.24). 목적도 변했거니와 미국의 체면유지가 70퍼센트, 베트남 국민을 위한 것은 10퍼센트로 그 순위도 변했다. 베트남전쟁에 군대를 파견해서 미국을 도운 몇몇 국가의 정부지도자들도 미국 정부 지도자들의 이론과 근거를 그대로 원용했다. 한 예로 김성은(金) 국방장관은 한국군 전투사단 파견 결의를 국회에서 요구하는 제안설명에서 '도미노 이론'을 한국까지연장 확대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베트남이라는 친구가 모진 병에 걸려서 아무리 약을 쓰고 세상 의사란 의사는 다 모여서 처방을 다 써보아도 뾰족한 수가나오지 않고 병세가 악화되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은 그렇다고 해서 내버려두면 죽을 것이 뻔한데, 베트남이 죽으면 귀신이 되어 미국이나 자유방을 물고 늘어질 테니 그것을어떻게 하든지 죽이지 않고 고쳐보려고 하는 데 난점이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베트남에 파병한다고 하는 것이 죽어가는 환자가 호전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보내지 않고는 우방이 죽기 때문에 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한국일보』,'주월한국군' 특집 제18, 국회의사록 인용, 1971.7.27) 그런데 미국 정부는 그보다 앞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6. 정세해결의 가능성 a. (생략) b. (생략) c. 만일 최악의 경우에 이르러 남베트남이 붕괴하든가, 그 행동에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어 남베트남을 버리기로 결정할 경우, 이때에는 “우수한 의사가 최선의 치료와 노력을 다했는데도 환자는 죽고 말았다"는 인상을 대외적으로 주도록 노력한다(맥노튼 국방차관보 작성, 남베트남에서의 행동계획」최종각서, 국방 비밀문서 자료 제19, 1964.9.3). 미국의 베트남전쟁의 목적은 동맹국가들의 생각은 어떻든 이렇게 이미 전쟁 초기부터 딴 곳에 있었다. 베트남전쟁은 이런 목적으로 시작되어 이런 기만으로 끝난 이런 성격의 전쟁이다. •『창작과비평』, 1973년 여름호 467-469
서문 - 위험한 현대사 모든 역사는 ‘주관적 기록’이다. 역사는 과거를 ‘실제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방송뉴스와 신문보도가 현재를 ‘실재 그러한 그대로’ 전해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가들이 일하는 방식도 언론인과 다르지 않다. 역사가도 각자 나름의 개성과 취향이 있고 서로 다른 욕망과 감정에 끌리며 저마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과거의 사실 가운데 자신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을 선택해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한다. 사실의 선택과 선택한 사실의 해석, 역사 서술의 핵심인 두 가지가 모두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역사를 둘러싼 다툼이 생기는 것이다.
현대사를 이야기하는 데는 위험이 따른다. 다수 대중의 판단과 정서에 어긋나게 말하면 험악한 구설에 휘말린다.
없는 것을 지어내거나 사실을 왜곡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들을 선택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로 묶어 해석할 권리는 만인에게 주어져 있다.
역사를 정직하게 대면하려면 당위(當爲, 마땅히 해야하거나 되어야 할 것)로 현실을 재단하려는 집착을 버려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훌륭한 이상국가 또는 그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외국에 견주어 우리의 현대사를 본다. 더 훌륭한 대상을 보고 배우려는 자세는 바람직하다. 하지만 남과 비교하는 데 너무 집착하면 우리 역사의 어둡고 수치스러운 장면만 주로 보이기 때문에 자칫 ‘자학적 역사 인식’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 반면 어떤 사람들은 우리 역사가 반드시 훌륭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현대사의 밝고 자랑스러운 장면만을 보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너무 집착하면 객관적인 사실을 부정하고 명백한 불의까지도 합리화하는 ‘자아도취적 역사인식’에 빠질 수 있다.
프롤로그 : 프티부르주아 리버럴의 역사체험
흐름 속에 있는 것은 사건만이 아니다. 역사가 자신도 그 속에 있다. 어떤 역사책을 집어들 때, 책 표지에 있는 저자의 이름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출간 일자나 집필 일자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것이 때로 훨씬 많은 것을 누설한다. - 에드워드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책을 읽을 때는 글쓴이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살피는 게 좋다.
*이 책에서 인용하는 인구통계는 모두 국가통계포털(kosis.kr)에서 가져온 통계철의 데이터.
내가 이 책에서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감정과 느낌이다.
역사는 주관적인 기록이다. 누가 쓴 어떤 역사도 과거를 ‘원래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들의 지속적 상호작용이다.
“당신, 가치관이 문제가 있어. 인생 잘못 사는 거야!” 이런 말을 듣고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다. 그런데 같은 말을 해도 역사를 가지고 하면 부담이 덜하다. “당신, 역사를 잘못 아는 거야!” 이것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에 대한 인식과 견해를 비판하는게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한 비난일 수 있다.
제1장 역사의 지층을 가로지르다 : 1959년과 2014년의 대한민국
우리를 압살하고 지나가는 근대화와 자본의 맹목적이고 무서운 속도를 일시 정지시키고 ‘이것이 과연 인간다운 것인가’ 물었던 것, 그것이 1980년에서 내가 가져온 작은 불꽃이다. 나는 이 불꽃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그러나 아주 작은 것들 하나하나를 비추어 보려 한다. 1980년대 내내 나는 얼마간 비관주의자였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나는 고통스러운 자기응시를 통해 작지만 단단한 희망을 말하고 싶다.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는 나의 고통스러운 자기응시에 붙여진 이름이다. - 김진경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
우리 역사에서 모든 청년에게 ‘제대로 된 일자리’가 주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북진통일’, ‘멸공통일’을 외쳤지만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않았으며 헌법이 명시한 민주주의를 실현하지도 않았다. 국민을 빈곤에서 구해내는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다. 국부(國父)를 자처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무능하고 이기적인 ‘폭력가장’이었을 뿐이다. 국민의 삶은 불안하고 비참했다.
당시 정부는 국민을 보호할 최소한의 능력도 없었다.
무엇이 역사의 지층을 가로지른 것 같은 대한민국의 변화를 일으켰는가. 흔히들 위대한 국민의 힘이나 지도자의 뛰어난 리더십을 거론한다. 하지만 우리가 남달리 위대한 국민이라는 증거는 없다. 정말 위대한 국민이라면 지난날 나라를 빼앗기지도, 동족상잔의 내전을 벌이지도, 남의 원조를 받으며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권력자들이 특별히 대단했다고 주장할 근거 역시 희박하다. 이승만에서 박근혜까지 저마다 좋아하는 대통령과 싫어하는 대통령이 있겠지만, 누구도 ‘위대한 지도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의 과제라고 믿은 일들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하려 했을 뿐이다.
1959년 국민의 가장 강력한 욕망은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 북한의 위협과 사회 내부의 혼란에서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문제였다. 사람들은 이 욕망을 충족할 수 있게 해주기만 한다면 어떤 사람이나 집단에게도 복종할 뜻이 있었다. 4.19에서 5.16까지 1년을 제외하면, 국민들은 정부 수립 이후 1987년까지 40년 동안 권력에 굴종하며 살았다. 이승만 정부는 ‘멸공통일’을,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는 그와 더불어 ‘경제발전’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힘으로 대중을 억눌렀다. 격렬하게 저항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자유과 인권,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을 기꺼이 받아들이거나 어쩔 수없이 굴복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에 근접해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자원을 어느 정도 확보한 다음에야 대중은 분명한 태도로 자유와 민주주의, 사회정의와 인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그렇게 해서 일어났다.
제헌국회는 계급제도를 부정하는 민주공화제 헌법을 채택했지만 우리 국민은 그때까지 민주공화국이 무엇인지 듣지도 배우지도 겪지도 못했다. 큰 틀에서 볼 때 제헌헌법은 유럽과 미국의 헌법을 복사한 것이었다. .. 민주광화국은 사유재산제도와 법치주의의 토대 위에서 개인의 인권과 자유, 창의성과 경쟁을 북돋우는 체제이며, 정부와 의회 지도자를 선출하고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을 분산해 서로 견제하게 함으로써 국가가 시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분권적 정치 시스템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삼는다.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 한 욕망을 표출하고 추구할 자유를 무제한 인정한다. ..제도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배적 사고방식의 산물이지만, 외부에서 어떤 제도가 ‘이식’(移植)되는 경우에는 거꾸로 제도가 그에 맞는 사고방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는 권력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제2장 4.19와 5.16 : 난민촌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
사고하는 역사가는 엄밀하게 말하면 과거의 문제를 풀고 잇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긴급하게 해결을 요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의 역사성에 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책임감 있게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역사를 회피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해야만 하는 긴장관계를 견뎌 내야만 한다. - 한스 위르겐 괴르츠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프랑스 정치가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805~1859)이 한 말로 알려져 있다.
토크빌이 전적으로 옳다. ‘국민의 수준’에는 훌륭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능력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분단을 막으려고 38선을 넘나들며 협상을 벌이는 동안 이승만 박사는 차근차근 분단국가의 권력을 장악할 준비를 했다.
정치인 이승만은 한반도에 지구촌 냉전체제의 모델하우스를 세웠다. 제주4.3사건을 비롯해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일어났지만, 1948년 5월 10일 한반도의 북위 38도 이남지역에서는 유엔 감독 아래 국회의원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승만은 제헌의회 의장이 되었다. 제헌의회는 대한민국 헌법을 채택했고 7월 20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1948년 8월 25일 우리의 국회의원 총선과 비슷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유권자 대부분이 투표했고 단독후보에 대한 찬성률도 거의 100%였다. 최고인민회의는 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했으며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했다.
포병 소위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삼팔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민족의 분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
역사에는 가정이 필요 없다고 하지만, 때로 가정은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공산화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통일국가로 가는 결과 북한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고 남한에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길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분단을 거부한 민족주의자는 전자를 선택했지만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은 차라리 후자가 낫다고 판단했다. 그 대표자가 바로 이승만 박사였다.
이승만 대통령 .. 그는 민주공화국이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은 너무 많이 했다. 국가의 정통성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 국가의 정통성은 특정한 이념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 국가의 정통성은 내부에서 형성된다. 내세우는 이념이 무엇이든 국민이, 민중이, 인민이, 또는 대중이 그 나라의 국민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국가의 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복종할 때,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무질서에 대항해 공동체를 지키려고 헌신하려는 태도를 보일 때, 그 국가는 정통성 있는 국가가 되며 자연스럽게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다. 식민지에서 풀려나 만든 신생국가는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정통성을 가질 수 있다. 첫째는 역사적 대의명분이다. 신생 대한민국의 긴급과제는 일제 잔재를 청산해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우는 일이었다. .. 둘째는 경제적 효율성이다. 민중을 빈곤에서 해방하고 물질적 삶을 개선해야 국민이 최소한의 기대를 품고 국가에 복종 협력하게 된다. 셋째는 민주적 정당성이다. 헌법에 따라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고 주권재민 또는 인민주권의 원리를 실현해 정치적 정당성을 지닌 정부를 세워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과 집권세력은 오로지 권력의 단맛을 누리는 데만 몰두했을 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정치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손을 잡았다.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했다가 광복 후 ‘친미’, ‘반공’의 깃발을 들고 살아남은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일본군 장교는 국군 장교가 되었으며 조선총독부를 위해 일했던 특고형사는 경찰 간부가 되었다. 판사, 검사, 공무워, 교사, 지식인, 경제인도 모두 독립국가의 지배층이 되어 예전보다 더 큰소리치며 살게 되었다.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와 특별경찰, 특별검찰, 특별재판소를 설치했다.
반민특위는 일단 6682명을 조사해 559명을 특별검찰에 송치했다. 특별검찰이 그중 일부를 기소하자 특별재판소가 재판을 열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가 헌법의 삼권분립 정신을 해친다면서 반민특위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 절정은 1949년 1월 반민특위가 노덕술을 체포한 사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을 즉각 석방하고 반민특위 관계자를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그에게 노덕술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해 악랄하게 고문했던 일제 특고형사가 아니라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공산당을 때려잡는 대한민국의 경찰관이었다. 노덕술이 국회보다 더 중요했다. 이때 살아남은 노덕술은 후일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고문해 반국가 인사 또는 간첩으로 조작하는 고문수사와 노하우를 대한민국 경찰과 정보기관에 전수했다. 1985년 민주화운동 청년연합 김근태 의장을 참혹하게 고문한 이근안과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 씨를 죽인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형사들은 모두 노덕술의 후예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반민특위 해체와 정부요인 암살 음모를 꾸몄다가 실패하자 반민특위법 제정과 특위활동에 앞정선 젊은 국회의원들을 간첩으로 몰아 구속했다. 소위 ‘국회프락치 사건’이다.
경찰이 특별조사위원과 특별검찰관의 집을 수색하고 사무국과 재판부의 서류를 탈취했다. 겁을 먹고 굴복하는 국회의원이 늘어났다. 결국 국회는 공소시효를 단축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일을 할 수 없게 된 김상덕 반민특위 조사위원장과 특별조사위원 전원, 일부 특별검찰관과 특별재판관들이 사표를 냈다. 국회는 친일파 비호세력을 주축으로 새로운 특위를 구성했다. 반민특위는 이렇게 막을 내렸고, 국회는 1951년 반민법을 폐지했다. 처벌받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이 민족사적 정통성을 결여한 채 출발한 이유와 과정을 엄정하게 평가하고 철학적으로 소화하는 것뿐이다.
미완의 혁명 4.19
국가가 민중에게 지속적인 승인과 복종을 요구하려면 잘살게 해주어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발전계획을 세워 생산력을 높이고 국민의 생활을 개선하는 정책을 거부했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주권재민’의 원리와 합법적 절차에 따라 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정부는 헌법과 법률에 의거해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다수 국민들이 원할 때는 평화적 합법적으로 정부를 교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럴 때 국가는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을 짓밟고 국회와 법률을 무시했으면 부정선거를 일삼았다.
민족사적 정통성도 없고, 경제적 효율성도 없으며, 민주적 정당성마저 없는 정부가 들어선 나라는 정통성있는 국가일 수 없다. 결국 국민들이 저항권을 행사하기로 결심했다. .. 그것이 4.19혁명이었다.
혁명의 첫 징후가 나타난 곳은 대구였다. 1960년 2월 28일 일요일에 수성천변에서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 연설회가 열렸다. 그런데 대구의 국공립고등학교에 등교령이 내렸다. 영화 관람이나 토끼 사냥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일요일 등교령의 목적은 학생들이 장면 후보 연설회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대구상고 등 시내 거의 모든 고등학교 학생들이 교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독재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함성을 내지르면서 대구 중심가를 달렸다. 이것이 대구 시민들이 자랑하는 ‘2.28학생의거’다.
4.19혁명의 불길을 피워 올린 것은 고등학생들이었다. 대학생들은 수많은 중고등학생이 체포되고 맞고 다치고 죽은 다음에야 집단으로 투쟁에 참여했다.
4워 19일 아침 이승만 대통령 과저 경무대ㅐ와 서대문 이기붕이 집 앞에 중학생과 초등학생을 포함해 수만 명이 시민이 모였다. 시위대는 대통령 면담과 김주열 사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경무대 정문을 밀고 들어가려 했다. 서대문 이기붕 집의 상황도 비슷했다. 경찰이 총을 쐈다. 두 곳에서 21명이 죽고 172명이 총상을 입었다. 이렇게 되자 시위는 단순한 부정선거 규탄을 넘어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정치혁명으로 치달았다. 오후 3시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시민들은 경찰 총기를 빼앗아 곳곳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날이 저물자 서울 시내에 계엄군이 진입했다. 그런데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이 군의 선제발포를 공개적으로 금지했다. 이승만 정권을 지켜줄 의사가 없다는 뜻을 밝힌 셈이다. 시민들은 두 팔을 벌려 계엄군을 환영했고 탱크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었다.
4월 25일에는 대학교수들이 거리로 나왔다.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하야를 권고했다. 법무장관 권승려르 외무부장관 허정도 하야를 요청했다. 4월 26일 오후, 마침내 대통령 담화가 나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1960년 4월 29일 국회는 만장일치로 내각책임제 개헌을 결의했다. 4.19혁명 와중에 직을 사임한 장면 부통령 대신 수석 국무위원이었던 허정 외무부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국회는 내각제 개헌안을 처리하고 총선을 실시해 새로운 양원제 국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대통령에는 윤보선 총리에는 장면을 선출해 제2공화국을 출범시켰다.
4.19는 미완(未完)의 혁명이었다. 부정선거 규탄으로 시작해 민중의 힘으로 독재자를 축출하고 새 정부를 세웠다는 점에서는 분명 성공한 정치혁명이었지만 그 혁명을 완성할 능력과 의지를 가진 주체가 없었기에 혁명의 정치적 결과는 기존 정치세력 민주당의 집권으로 귀착되었다.
성공한 쿠데타 5.16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이 3,500여 명의 무장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와 정부청사와 언론기과 등 주요 시설을 점령했다. 대통령과 정부, 국회 등 모든 국가기관의 헌법적 권한과 기능을 폭력으로 정지시키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반공, 한미동맹, 사회적 부패와 정치적 구악(舊惡) 일소 등을 열거한 혁명공약의 핵심은 두 가지 였다. 국가 자립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여 기아선상에 방황하는 민생고를 해결함으로써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4항), 혁명의 과업을 이루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학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6항)는 것이다. ‘민생고 해결’을 내세운 것은 아마도 박정희 소장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병영복귀’ 약속은 의도적인 거짓말이었다. .. 혁명에 성공하려면 적을 최소화하고 대중의 신뢰를 얻을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래서 마치 순수한 애국심에서 거사한 것처럼 보이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박정희 소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꾼 다음 장도영 장군을 밀어내고 스스로 의장이 되었으며 군부의 반대파를 차례차례 제거했다.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정보공장정치를 할 태세를 갖추고 국회에서 자신을 보위할 민주공화당을 창당한 다음 헌법을 바꾸어 의워낸각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중심제를 도입했다. 그런 다음 병영으로 복귀한다는 혁명공약 제6조를 폐기하고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제5대 대통령이 되었다. .. 그는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윤보선을 꺾고 재선했다.
헌법의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폐지하고 1971년 금권, 관권을 동원한 부정선거로 제7대 대통령이 되었다. 1972년 10월에는 또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시대 왕보다 더 강한 권력을 수중에 넣은 다음 대통령 긴급조치를 아홉 번이나 발동해 야당과 비판세력을 목 졸랐으며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납치해 죽이려 했다. 자신의 추종자들만 체육관에 모아놓고 혼자 출마해 100% 찬성으로 제8대와 제9대 대통령이 되었다. 5.16은 단순히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4.19가 만든 모든 것을 파괴해버렸다.
혁명인지 쿠데타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쿠데타는 혁명과 달리 민중의 동의와 지지와 참여가 없이 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다. 군대를 동원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군사쿠데타다. ..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운영을 잘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도 5.16이 군사쿠데타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제3장 경제발전의 빛과 그늘 : 절대빈곤, 고도성장, 양극화
‘여가가 없는 시민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는 아무 의미가 없다. 90% 사람들은 항상 일만 하고 여가가 없는 반면 10% 사람들은 늘 놀면서 전혀 또는 거의 일하지 않는다면 자유란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 ..’ - 버나드 쇼, <쇼에게 세상을 묻다>
박정희 정부는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토대를 구축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지배한 것은 기회균등과 공정경쟁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었다. 이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대한민국은 박정희 정부 이래 개발독재와 재벌 중심의 자본 축적, 수출주도형 산업화의 길을 걸었다.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낡은 경제 구조를 혁신하지 못했으며, IMF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과거와는 양상이 다른 정글법칙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한국 경제는 1970년대에 ‘이륙(離陸, take-off)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저 사실일 뿐이다. 그 사실을 곧바로 특정한 가치판단과 규범적 평가로 바꿀 수는 없다. “산업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독재를 해야 했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동시에 이룰 수 없다.”, “독재를 해서 경제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민주화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산업ㅎ호하를 함께 추진해볼 기회를 자기 손으로 봉쇄했다.
나는 인간 박정희가 아무 ‘주의자’도 아니었다고 본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반공주의, 군국주의, 자유주의, 그 어떤 이념도 그를 온전하게 사로잡지는 못했다. 생애 전체를 볼 때 그가 일관성 있게 추구한 것은 권력 하나뿐이었다.
박정희 시대 한국 경제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자본주의 선진국과 제국주의 일본,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을 절반씩 닮은 체제였다. 다시 말해서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기본질서에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를 결합한 혼합형 경제체제였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경제체제도 그와 비슷하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가동하는 데 필요한 최초의 자본을 형성하는 것을 ‘자보의 원시적 축적’이라고 했다. 영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 과제를 해결했다. 첫째는 봉건적 특권을 자본화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귖족들은 중세 이래 농민들이 가지고 있던 경작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함으로써 토지에 대한 봉건적 특권을 자본주의적 소유권으로 전환했다. .. 둘째는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수탈이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등 모든 산업국이 군사력으로 다른 전통사회를 정복해 부와 노동력과 자원을 약탈함으로써 자본을 축적했다. 소련과 중국은 다른 방식으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이루었다. 그들은 봉건적 특권을 사유재산이 아닌 국가자본으로 전환했다.
대한민국은 서유럽 국가와 달랐으며 사회주의 국가도 아니었다. 자본화할 수 있는 중세적 특권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다른 나라를 수탈할 능력도 없었으며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실정에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했으며 자본을 해회에서 차입하고 기업으로 하여금 폭리를 취하게 함으로써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이룬 것이다. 최초 해외자본 차입의 줓체는 정부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업의 해외 차입을 조금씩 열어주었다. 정부는 독점기업들이 시장지배력을 이용해 폭리를 얻도록 했으며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소비자와 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 기업들은 짧은 기간에 막대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정부는 한일국교 정상화와 베트남전쟁 파병 등을 계기로 일보노가 미국 자본을 들여와 중화학공업 건설작업에 시동을 걸었고 제3차 5개년 계획 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얻었다.
예나 지금이나 성매매는 엄연한 불법이다. 하지만 정부는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소위 ‘기생관광’을 공공연하게 허용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로 일본인 관광객이 급증했다. 1973년 외국인 관광객 68만 명 중 80%가 일본인이었는데, 그 대부분이 기생관광을 즐기러 온 일본의 하위 소득계층 남자들이었다. ‘외화벌이’를 한다면 안 될 일이 없었다. 종로 10곳을 비롯해 서울에만 14곳, 부산에 7곳, 경주에 4곳, 제주도에 2곳의 관광요정이 있었다. 가장 규모가 컸던 삼청각과 대원각에는 ‘관광기생’ 수가 800명이나 되었다. 여행사와 관광요정, 호텔이 삼각 동맹을 맺은 이 국제적 성매매상업은 1973년 한 해에만 2억 달러의 관광수입을 안겨준 것으로 추정된다.
박정희 정부는 <공산당 선언>에서 “현대 국가는 부르주아지의 일상사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한 마르크스의 견해가 최소한 진실의 일면을 포착한 것임을 증명해 보였다.
한국 경제는 시장경제체제가 아니었다. 시장의 원리에 따르면 자본은 저절로 수익성 높은 투자 프로젝트를 가진 산업과 기업으로 흘러간다. 그런데 산업화 이전의 대한민국에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시장과 금융시자이 존재하지 않는다. 외국이나 한국 은행에서 돈을 빌려 만든 투자재원을 정부가 기업에 직접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정부의 실체는 박정희 대통령과 특근 참모들이었다. 아무리 수익성 있는 투자 프로젝트를 가진 사람이라도 정부에 줄을 대지 못하면 자금을 받을 수 없었다. 특혜가 있는 곳에는 정경유착과 부패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재벌체제가 탄생했다. 대통령과 참모들의 신임을 받은 기업인들은 물가인상률보다 훨씬 낮은 이자를 내는 정책자금을 받았다. 각종 특혜와 행정편의를 제공받으면서 국내시장의 독과점 공급자가 되어 소비자인 국민을 착취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여러 산업 분야에 진출해 거대한 기업집단을 형성했다. 삼성그룹 이병철, 현대그룹 정주영, 선경그룹 최종현 등 거대 기업집단을 만든 재벌 창업자들은 그런 일에 빼어난 능력을 발휘한 사람들이었다. 정부는 재벌 대기업이 수출을 해서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도록 자금과 세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재벌 총수들은 대통ㄹㅇ과 권력실세들에게 ‘통치자금’ 명목의 뇌물을 넉넉하게 바쳤다.
한국 경제의 성장은 생산기술 향상을 동반했다. 노동자를 생산에 투입하려면 기술교육을 해야 한다. 봉제, 섬유, 합판, 식품, 전자조립 등 산업화 초기의 단순 제조업 분야에서는 기업이 스스로문제를 해결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도 채 마치지 못한 어린 노동자들을 ‘시다’로 채용해 급여를 적게 주고 일을 시켰다.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책자를 껴안은 채 분신했던 청계천 옷 공장이나 지금은 가산디지털단지로 변모한 구로공단 봉제공장들이다 그랬다. 하지만 금속, 전자, 전기, 자동차, 조선, 철강 등 부가가치가 높은 제조업과 중화학공업 분야에서는 더 높은 수준의 지식과 기술을 지닌 노동자가 필요했다. 정부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지원하는 한편 전국 각지에 직업훈련원을 만들었다. 고등학교를 마친 청년들이 여기서 2년 정도 교도소 수용자들보다 적은 급식예산으로 제공하는 밥을 먹고 군대와 비슷한 집단생활을 하며 기술교육을 받은 다음 울산과 창원 등의 대공장에 집단적으로 투입되었다. 이 직업훈련원들은 오늘날 평생교육을 담당하는 폴리텍대학이 되어 있다. 대학과 전문대학들은 새로운 산업과 관련된 학과를 신설했다. 정부는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국가연구소를 만들고 민간기업도 연구소를 만들도록 독려했다. 한국의 산업화는 전쟁과 비슷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채택한 북한이 혁명이념을 주입해 ‘천리마운동’과 ‘새벽별 보기운동’에 노동자를 동원하던 그 기간에 자본주의 계획경제를 선택한 대한민국에서는 더 나은 물질적 삶을 바라는 욕망과 자본가들의 이윤추구 욕망이 노동자들을 ‘만리마운동’과 ‘별도 보지 않고 밤새 일하기 운동’으로 몰아넣었다. 노동자들은 잠을 쫓기 위해 ‘타이밍’이라는 이름의 알약을 먹으면서 철야작업을 했고 공장 관들은 옷핀으로 팔을 찔러 피로에 지쳐 조는 여성 노동자를 깨웠다. 이것은 자본의 원시적 축적과 생산능력의 확대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 정부는 극단적인 수출장려와 수입억제 정책을 채택하고 ‘애국적 소비’를 권하는 대규모 캠페인을 전개했다.
소비재 수입을 사실상 금지한 대한민국에서 시장을 독식한 재벌 대깅업들은 마음껏 독점시윤을 얻었다.
무역정책과 산업정책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19세기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애국지사였던 프리드리히 리스트(Friedrich List, 1789~1846)의 충실한 제자였다고 할 수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풍미했던 19세기 중반, 리스트를 자신이 독일인이기 때문에 자유무역론을 거부한다고 말했다. 그는 산업기반이 약한 독일이 자유무역을 하면 경제적으로 영국의 패권 아래 편이뵈어 별 볼일 없는 산업을 가진 2등 국가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래서 먼저 높은 무역장벽을 치고 자국의 산업을 육성한 다음, 충분한 실력을 갖추었을 때 국내시자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스트를 독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 공산품에 높은 관세를 매겨야 한다고 제안했으며, 그런 목적으로 부과하는 관세에 ‘보육관세(保育關稅, Erziehungszoll)라는 멋진 이름을 붙였다. 대한민국의 무역정책은 뒤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나라에는 보호무역주의자 리스트의 전략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리스트의 이론을 212세기 버전으로 감상하고 싶은 독자들은 보호무역주의와 국가산업 정책을 옹호하는 장하준 교수의 책들을 보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국 경제는 19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세계사에서 보기 힘든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성장 속도에서 한국을 추월한 나라는 중국뿐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것을 이루기 위해 18년 동안 철권통치를 했다. .. 그래서 그는 교육과 언론을 통제하고 여론을 조작함으로써 국민을 세뇌하려고 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는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를 불러들인다.
부당한 권력 행사를 비판하고 싸우는 사람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람이 그에 적응하거나 편승해 자기의 이익을 도모한다.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남들이 그렇게하기 때문에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한다. 그것이 산업화시대 대한민국의 현실이었으며 그런 현실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건설사가 중동 국가를 비롯한 외국에서 지은 건물과 교량이 무너진 일은 없었다. 그런데 나라 안에서 지은 것은 종종 무너졌다. 여러 원인이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부정부패였다. 우리나라 재벌그룹은 대부분 건설사를 계열사로 보유하고 있다. 없으면 만들었고, 만들지 못하면 인수합병이라도 했다. 그 목적이 불법 비자금 조성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 모두가 재벌 탓은 아니겠지만, 부패문화의 진원지가 재벌과 정치권력의 유착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재벌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으며, 어쩌면 우리의 미래마저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 재벌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헌법 위에 군림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국가 권력을 통한 정치적 민주적 개입과 통제뿐이다. 나는 이것이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라고 본다.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모든 면에서 유신체제의 불필요한 연장이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승리와 더불어 국내 경제환경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자들이 노조활동 자유 보장과 임금,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7~8월 대투쟁을 일으켰다.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12.12와 5.18의 주동자였던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36% 득표율로 당선하긴 했지만, 1988년 4월 국회의원 총선에서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가 출현해 민주화는 더욱 진전되었다.
1990년대 중반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민간소비와 기업의 설비투자가 활발했다. .. 냉전시대에 구축한 ‘자본주의적 계획경제’를 ‘개방적 시장경제’로 전환하기 위해 정부는 외국환 거래와 민간기업의 해외 금융채무 취득 등을 비롯한 금융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외환위기의 원인은 기체결함과 조종밈숙 둘 다 였다. 김영삼 정부는 국내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와 민간기업의 자본수입 규제를 대폭 완화하면 한국은행의 통화관리 능력이 크게 위착된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재벌그룹의 연쇄부도로 금융기업들은 막대한 부실채권을 떠안게 되었다. 금융기업의 재무 건전성이 악화되자 한국 경제 전체의 신뢰가 하락했다. 외국 금융기업들이 단기채 채무상환기간 연장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 당시 맹위를 떨치던 국제투기자본이 한국 경제를 멋잇감으로 지목하고 원호와 원화표시 자산을 투매했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 공급이 끊기가 기업과 금융기관들은 해외결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 1997년 11월 21일, 한국 경제는 기초가 튼튼해서 외호나위기는 없을 것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던 정부는 국제투자기금(IMF)에 자금지원을 요청했고 11월 29일 IMF는 구제금융을 제공한다고 발표했다. .. 캉드쉬 총재는 협약을 충실하게 이행하겠다는 서약서에 김대중, 이회장, 이인제 등 유력 대통령 후보들의 서명을 받았다. IMF 의 ‘경제신탁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IMF가 추구한 목표는 명확했다. 박정희 정부 이래 남아 있던 중앙통제식 계획경제 요소를 완전히 없애고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을 이식하는 한편 IMF의 구제금융 자금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일본의 금융기관이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에 제공한 대출금과 이자를 완벽하게 회수하는 것이었다.
수익성 낮은 부실 기업을 정리하기 위해 금리를 대폭 높이고 정부의 재정지출을 축소했다.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라는 명분으로 노동자를 대량 해고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 모든 것은 IMF가 중남미와 동남아시아 등 구제금융을 받은 모든 나라에 내린 표준처방이었다.
이름난 재벌그룹들이 부도를 맞거나 대규모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구조조정은 대량해고와 같은 말이었다. 정부는 철도, 통신, 전력 등 국가기간산업의 공기업을 민영화 또는 사유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정부는 IMF의 긴축재정 요구에 굴복해 사회간접자본을 해외투기자본에 개방했다. 엉터리 교통량 예측을 토대로 사업을 발주하고 높은 수익률을 보장한 민자 고속도로 외국투기자본의 먹이가 되었다. 부실 생명보험사 네 곳이 알리안츠생명, 삼성생명, 대한생명, 교보생명으로 넘어갔다. 부실금융기관과 부실기업을 회생시키기 위해 막대한 규모의 공적 자금을 투입한 탓에 국가채무가 급증했다. 그런 혼란과 고통을 겪은 끝에 대한민국은 2001년 구제금융 전액을 상환함으로써 IMF경제신탁통치를 마감했다. 한국 경제의 기체결함은 ‘죽기에는 너무 큰(too big todie) 재벌이 국민경제의 중심이라는 것이었다. 삼성, 현대, LG, 대우, SK 같은 대형 재벌그룹이 망하면 수많은 협력업체와 자금을. 대출한 금융 기관이 망하고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는 실업자가 된다. 재벌 총수들이 회사를 잘못 운영해 망할 위기에 빠져도 국민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정부가 회사를 살려주어야 한다. 재벌 입장에서는 위험한 투자를 해서 돈을 벌면 자기 것이 되고 방만한 경영을 해서 문제가 생기면 국가와 국민에게 짐을 떠넘길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이익을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행동을 경제학 전문용어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라고 한다.
외환위기의 두 번째 원인은 정부의 환율고나리 실패였다. .. 환율은 세 가지 요인으로 인해 변화한다. 첫째, 장기적으로 환율은 물가인상률에 좌우된다. 물가인상률이 높으면 그 나라 화폐는 값이 떨어진다. 1980~1990년대 한국의 물가인상률은 미국, 유럽, 일본보다 높았다. 장기적으로 달러 환율은 오르는 게 정상이었다. 둘째, 단기적으로 환율은 경상수지에 좌우된다. 지속적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보는 나라의 환폐는 가치가 떨어진다. 그렇게 해서 수입가격은 오르고 수출가격이 떨어져야 경상수지 적자가 해소된다. 199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는 지속적으로 경상주시 적자를 기록했다. 그런데도 1997년 여름까지 몇 년 간 달러 환율이 점진적으로 하락했다. .. 이렇게 된 것은 환율변동의 초단기 요인인 자본수지가 흑자였기 때문이다. .. 서울 외환시장의 달러 공급이 늘어났기 때문에 환율이 낮게 유지된 것이다.
신 자유주의에 입각한 IMF의 표준 처방전은 심한 부작용을 야기했다. ..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이름 아래 기업이 노동자를 사실상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게 허용하는 정리해고제를 도입했고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연봉제와 성과급 제도를 확산시켰다. 노동조합은 야과되었고 실질임금이 하락했으며 고용불안은 높아졌다.
구제금융을 상환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던 제도들이 시자유주의로 표현되는 국제 경제환겨으이 변화와 맞물리면서 사회경제적 양극화라는 사회악을 키웠다.
기업이 정리해고를 사실상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고, 파견과 사내하청 등 간접고용이 널리 퍼진 결과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이 되었고 임금노동자 내부의 임금격차는 크게 확대되었다.
IMF 경제위기에서 탈출하고 새로운 발전전략을 찾기 위해 정부는 두 갈래로 노력했다. 첫째는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대세를 형성한 세계 경제환경을 받아들이면서 기회균등과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경제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해 복지 정책 또는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민주정부 10년 동안 둘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소득불평등 또는 소득불균등을 측정하는 지표로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지니계수와 소득 5분위 배율이다. 지니계수는 모든 국민이 완전하게 균등한 소득을 얻으면 0이 되며 한 사람이 모든 소득을 독점하면 1이 된다. 지니계수가 0.3미만이면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0.4를 넘어가면 사회적 불안이 야기될 가능성이 높다. 소득 5분위 배율은 최고 소득계층 20%의 평균소득을 최저 소득계층 20%의 평균소득으로 나눈 값이다. 소득격차가 커질수록 소득 5분위 배율은 높아진다.
예컨대 지니계수는 여러 종류가 있다. 전국 모든 가구를 대상으로 한 것이 있고 2인 이상 도시근로자 가구만을 대상으로 한 것도 있다. 시장소득 지니계수가 있는가 하면 납부한 세금을 제외하고 국가보조금을 더해 산출한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도 있다.
통계청이 전국 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 소득분배지표를 발표한 것은 2006년이 처음이었다. 2006년도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전국가구 0.330, 2인 이상 비농가 0.312, 2인 이상 도시가구 0.305였다.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는 각각 0.306, 0.291, 0.285였다. 가처분소득 지니계수와 시장소득 지니계수의 격차가 0.02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은 조세와 복지제도를 통한 국가의 재분배기능이 매우 약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2006년 시장소득 5분위배율은 전국가구 6.65, 2인 이상 비농가 5.74, 2인 이상 도시가구 5.39였다. 가처분소득 5분위 배율은 각각 5.38, 4.83, 4.62였다. 시장소득 5분위 배율과 가처분소득 5분위 배율의 격차 역시 그리 크지 않았다. 전국가구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2008년과 2009년 0.314로 최고점을 찍었고 2012년에는 0.307로 조금 하락했다. 전국가구 시장소득 5분위 배율은 계속 상승해 2011년 7.86으로 최고점을 찍었고 2012년에는 7.51로 조금 하락했다. 전국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모든 소득분배지표가 2006년 이후 지속적 악화 추세를 보인 것이다. 조사방법이 달라지면 지니계수도 달라진다. 통계청과 금융감독원, 한국은행이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산출한 2012년 전국가구 지니계수는 0.357로 예전 방법으로 조사한 0.307보다 훨씬 높았다.** **『한겨레」, 2013년 11월 20일자 보도. 기존의 지니계수는 도시와 농촌을 섞은 1만2,000 표본가구를 대상으로 하며 재투자와 저축 등 유보분을 제외한다. 새로운 지니계수는 2만 가구를 표본으로 가구의 유보분을 포함한 • 기준으로 산출한 것이다 재투자와 저축 등 유보분이 많은 고소득층의 소득이 더 높게 잡히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으로 통계를 산출하면 지니계수와 소득 5분위 배율 등 모든 분배지표에서 소득격차가 더 크게 벌어진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부자감세다. 이명박 대통령은 법인세와 소득세율을 인하함으로써 재임 중 누적효과가 100조 원에 육박하는 감세를 했고 혜택은 대부분 대기업 주식 소유자와 고소득층의 몫이었다. 자영업자와 임금근로자 절반이 소득세 면세점보다 낮은 소득을 얻기 때문에 직접세 감세는 중간소득 이하 계층의 국민들에게는 단 한 푼의 혜택도 주지 않는다. 대기업의 투자와 부유층의 소비를 유도한다는 목적을 내세웠지만 감세의 투자촉진 효과는 별로 없었다. 둘째는 부동산 거래 규제완화로 단기적 경기부양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동산 가격은 오히려 하락했다. 부동산 투기 시대의 거품이 덜걷힌 상황에서는 규제완화로 부동산 경기를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셋째는 4대강 사업이다. 초대형 토목공사를 벌려 경기를 부양하려 했지만 환경을 파괴하고 국가의 돈을 건설회사 금고로 이전시켰을 뿐 고용증대와 경기진작 효과는 거의없었다. 넷째는 수출을 증진하기 위해 환율을 인위적으로 올린 정책이다. 이 정책은 미국의 리먼 브러더스 파산사태와 맞물려 환율폭등을 일으킴으로써 달러로 표시한 1인당 국민소득의 대폭 하락을 불렀다. 양극화의 원인이었던 경제력 집중과 오남용,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확산, 낙수효과 감소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는 부자감세 정책을 철회하지 않았다.박근혜 정부가 처음 편성한 2014년도 정부 예산안에는 기초노령연금 수급액을 두 배로 올리는 것 이외에 복지지출을 크게 확대하는 정책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철도 민영화 정지작업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수서발 KTX 자회사를 설립했고 비영리 의료법인이 영리 자회사를 세울 수 있게 하는 의료법 개정을 추진했다. 공공부문의 사유화 또는 시장화 정책을 강행한 것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입법과 정책은 전무했고 재벌 경제력집중의 폐해를 시정하는 경제민주화 공약도 완전히 실종되었다. 2014년 들어서는 규제를 ‘암 덩어리’, ‘쳐부숴야 할 원수’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규제철폐 작업을 시작했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2012년 이명박 후보와의 후보경선 때 내세웠던 ‘줄푸세' 공약, 다시 말해서 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서 4대강 사업하나를 빼면 곧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이 된다. 소득분배의 개선과 양극화 해소에 관한 한 특별한 기대를 할 수 있는 근거는 찾을수가 없다.
제4장 한국형 민주화 :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한 민주주의 정치혁명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한 전제정치에서 폭력 행사는 정당하다. 그런데 그 목적은 오직 폭력을 쓰지 않고도 개혁을 할 수 있는 민주정치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민주 헌법과 민주주의적 방법을 파괴하려는 안팎의 공격에 대항하는 폭력 행사 역시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시민의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민주주의의 요체는 무엇인가. 첫째, 주권재민(主權在民)이다. 권력의 정당성 또는 정통성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다수 국민의 동의를 받지 않고 성립된 권력은 인정할 수 없다. 둘째는 국가권력의 제한과 분산, 상호견제다. 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의 오남용을 막기 위해 입법권과 사법권, 행정권을 분리하고 선출 공직자의 임기를 제한하며 권력기관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게 한다. 셋째는 법치주의다. 시민의 자유와 권리는 오로지 법률로만 제한할 수 있으며, 정부는 헌법이 부여한 권한의 범위 내에서 법률에 따라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
20세기의 대표적 자유주의 철학자 칼 포퍼(Karl R. Popper, 190~1994)의 정치이론을 활용할 수 있다. 포퍼는 어떤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인지 전제정치 체제인지 가리는 기준을 하나로 정리했다. 다수 국민이 마음을 먹었을 때 정권을 평화적으로 교체할 수 있으면 그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다. 그게 불가능한 나라는 독재국가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하는 법률과 제도가 아예 없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 제도가 있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서 평화적 정권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면 그 역시 민주주의가 아니다.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I> 민음사 2006, 209쪽)
1959년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할 수 있는 제도는 있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좋은 헌법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집권세력 또는 통치자가 헌법과ㅏ 민주주의 기본원리를 존중해야 하며 시민들이 자기의 권리를 제대로 알고 행사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최선의 인물이 권력을 장ㅇ악해 최대의 선을 실현하도록 하는 제도가 아니다.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악을 마음껏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민주주의는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악을 최소화함으로써 사회를 지속적으로 개량해나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전제정치를 타도하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유일한 방법은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궐기해 경찰과 군대, 사법기관과 정보기관을 동원한 권력집단의 폭력을 힘으로 제압해야 정치혁명을 할 수 있다.
전국적, 동시다발적, 연속적 도시봉기를 일으키려면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데 테러는 이에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들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였다.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대의를 알리고 대중의 관심과 각성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테러와 암살이 아니라 분신과 투신을 선택한 투쟁방식은 세계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한 최초의 사례는 3.1운동이다. .. 두 번째 사례는 4.19혁명이다. .. 세 번째 사례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가 엮은 <한국민주화운동사 1, 2, 3>를 권한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한 경험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과거와는 성격이 다른 도전에도 예전에 성공했던 방식으로 응전하는 경향이 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어울리는 새로운 전략과 행동양식이 등장하는 무척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모든 권력은 집중과 확대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진보든 보수든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감시와 견제가 느슨해지면 누구나 권력을 오남용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 집권세력의 반민주적 행태는 대통령과 여당 정치인들의 교만과 성숙하지 않은 시민의식을 반영한다.
1965년 2월 한일 양국 정부 회담 실무자들이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했고 양국 외무부장관은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과 네 건의 협정문에 정식 서명했다. [한일기본조약]은 한일강제병합조약을 포함해 대한제국와 일본제국이 체결한 모든 조약과 협정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일본이 대한민국 정부를 유엔결의 제195호에 따른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바탕 외에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했다. 일부 약탈 문화재 반환을 합의한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연안 기점 12해리 수역이 배타적 관할권을 인정한 [어업협정], 해방 이전 일본 거주 대한민국 국민과 가족의 영주허가를 규정한 [재일교포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무상 3억 달러와 장기저리 차관 2억 달러로 양국 국민간의 청구권 문제를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확인한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었다. 바로 이 협정을 근거로 오늘날까지 일본 정부는 징용, 징병, 정신대,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들ㅇ의 개별적 청구권이 모두 소멸되었다고 주장해왔다. (<실록 박정희와 한일회담 : 5.16에서 조인까지> 이도성 편저 한송 1995, 32~34쪽)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결국 그렇게 끝이 났다. 무려 1,000여 명이 넘게 체포되고 350여명이 내란죄와 소요죄로 구속당하면서 박정희 정부와 2년 넘게 투쟁을 벌였던 청년들은 ‘6.3세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당시 학생 운동 리더로 명성이 높았거나 정계, 학계, 언론계에서 활약을 펼친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중태, 손학규, 이재오, 김덕룡, 현승일, 이명박, 정대철, 이부영, 서청원, 박관용, 하순봉, 김경재 등이 있다. 그런데 그때 거리시위에 참여했던 20대 청년들이 지금은 70대 고령층이 되어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철옹성처럼 지키고 있다.
권력형 부정부패 사건에 대해 국민들은 그때가 지금보다 더 예민했던 것 같다.
1960년대 후반 유럽과 미국은 베트남전 반대와 사회문화 개혁요구가 뒤범벅된 청년세대의 ‘68혁명’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반공주의라는 이념의 벽에 갇혀 있었다. 1968년 1.21사태와 북한의 미국 푸에블로 호 납치사건, 울진 삼척 무장 공비사건이 일어나자 반공, 반북 정서가 하늘을 찔렀고 전국에서 관제 규탄대회가 벌어졌다. 7월 20일 중앙정보주는 ‘통일혁명당 사건’을 발표하고 158명을 체포해 96명을 기소했다. 이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병영국가’ 북한에 맞서기 위해 대한미국 역시 ‘병영국가’로 개조하기로 결심한 듯 보인다. 병영의 기본은 인원 점검이다. 정부는 국민 전체를 조직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주민등록제도를 도입했다. 향토예비군을 만들어 군복무를 마친 남자 250만 명을 정기적으로 병영에 소환했고 대학입시에 반공도덕을 포함시켰다. 초중고 학생과 교사에게 반공교육을 실시했으며 전국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군사교육을 받도록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초부터 3선 개헌 작업에 착수했다. 기술적으로는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고 규정한 헌법조항의 ‘1차’를 ‘2차’로 고치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 신민당과 재야인사들이 반대투쟁에 나섰고 사태는 한일협정 반대투쟁이나 6.8부정선거 규탄투쟁과 마찬가지로 대학생 교내집회, 거리시우, 중고등학생 가세, 휴교령 발동으로 이어졌다.
일부 대학생들이 전기와 수돗물 공급이 끊기 학교 도서관을 점거해 장기농성을 벌였다. 학생들은 시 낭송, 노래 부르기, 마당극과 연극 공연을 하면서 농성대오를 유지했는데, 이 새로운 투쟁 방식이 세월을 거치면서 시민문화행사와 춧불문화제로 발전했다. 공화당은 1969년 9월 9일 새벽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이 아닌 별관에서 개헌안과 국민투표법을 날치기 의결했다.
‘40대 기수’ 김대중 후보는 미,일,중,소 4대국의 한반도 평화보장론, 3단계 통일론, 자립경제와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대중경제론으로 의제를 선점했으며 향토예비군과 학생 군사 교육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책 선거를 보여주었다.
김대중 후보는 득표율 8%, 90만 표 차이로 졌다. 공무원을 동원한 관권선거와 금품 살포, 군 부재자 부정투표, 야당 참관인 매수와 부정 투개표 등 만만치 않은 부정선거를 한 사실을 고려하면 사실상 김대중 후보가 이긴 선거라고 할 수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을 하면 선거제도를 없애 총통이 될 것이라고 한 김대중 후보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박정희 정부는 거칠 것 없는 독재의 길을 갔다. 무엇보다도 언론에 대한 겸열과 언론인에 대한 탄압을 대폭 강화했다.
검찰이 공안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린 현직 판사들에 대해 수뢰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판사들의 잡단사표 제출과 법관 독립선언이 이어졌다. 하지만 판사들은 결국 중앙정보부 통제 아래 들어갔고 헌법의 3권 분립 조항은 효력을 잃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 책동 강화’를 이유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안보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서 날치기 처맇해 대총령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노동 3권 등 헌법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게 했다. 1972년 유신쿠데타 예행연습을 한 것이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두 번의 극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첫번째는 7월 4일 남북한 당국이 동시에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이다. ..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입각해 통일을 추진하기로 한 이 성명이 나오자 국민들은 20년에 걸친 군사적, 이념적 대결이 끝나고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에 들떴다. 두 번째 사건은 그로부터 석 달 후에 일어났다. 10월 17일 밤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특별선언을 발표했ㄷ. 그는 남북대화와 통일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려면 냉전시대에 만든 헌법을 고쳐 새로운 정치체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화문에 탱크를 세우고 정부기관과 언론사 등 민간 주요 시설에 군을 퉁입했다.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했으며 헌법 효력을 정지시키고 비상국무회의가 국회 기능을 대신하게 했다.
닷새가 지난 11월 21일 계엄령하에서 국민 투표를 실시했다. 토론이나 찬반운동은 완전하게 봉쇄한 가운데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91.9%가 투표했고 91.5%가 찬성했다ㅏ. .. 절반의 반혁명이었던 5.16과 달리, 10월 유신은 평화적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완벽하게 차단한 완성형 반혁명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반쪽 민주주의 국가에서 완전한 독재국가로 전락했다.
유신헌법의 핵심은 몇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국민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뽑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대통령을 뽑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야당 성향 인사의 출마를 막고 지지자들만 대의원이 되게 함으로써 영구집권의 꿈을 이루었다. 둘째,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하고 국회의원을 한 선거구에서 둘씩 뽑도록 선거법을 고쳤다. 여당의원과 대통령이 임명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합치면 의원 정수의 3분의 2가 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국정감사권마저 폐지함으로써 국회를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법률을 통과시키는 ‘통법부’로 전락하게 했다. 셋째,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과 헌법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부여했다. 대통령이 무제한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유신헌법 초안을 만든인물은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파견 근무를 했던 김기춘 검사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그는 공무원과 공공기관장들을 모아놓고 화끈한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한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켰다.* 다시 20여 년이 지난 2013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어 국정운영을 전횡함으로써‘기춘 대원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1992년 12월 11일,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은 부산에 있는 '초원복집'에서 김영환 부산시장, 박일용 부산경찰청장, 김대규 부산 기무부대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우명수 부산교육감, 정경식 부산지검장 등 공무원들을 상대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민간에서 지역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말했다.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 진영에서 이대화를 도청·폭로해 큰 파문이 일었지만 위기감을 느낀 부산·경남 유권자들은 김영삼 후보에게 몰표를 던졌다. 이 사건은 국가기관의 불법 선거개입, 지역감정 조장, 유권자들의 비이성적 투표행태 등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며, 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현재까지 우리 국민은 그 후진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학교든 사회든, 오로지 복종할 자유만 있었다. 유신 이후 1979년 19월의 ‘부마항쟁’까지 7년 동안, 대중적인 반정부투쟁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로지 야단, 재야인사, 지식인, 대학생들이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지키려고 저항했다가 구속되고 박해받은 사건들이 있었을 뿐이다. .. 중앙정보부는 ‘예방적 목적’에 입각한 조직사건을 연달아 터뜨렸다. 국민 대중의 불만이 팽배해도 뇌관을 제거하면 화약고가 폭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973년 8월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다.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을 죽이지 못하고 자택 근처에 내려주었다. ..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시작된 교내시위가 경북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으로 번져나갔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는 10우러 25일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 11월 들어 대학생들의 동맹휴학과 교내시위가 전국 대학ㅇ으로 번졌으며 경기고, 대광고, 광주일고 등 고등학교까지 확산되었다.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 결의대회를 열었고 재야인사들의 시국 선언도 줄을 이었다. .. 박정희 대통령은 마침내 유신헌법이 부여한 비상대권을 휘둘렀다. 19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한 것이다. .. 1974년 3월 개학과 동시에 여러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민청학련(민주청년학생연맹)이라는 이름을 기재한 유인물이 뿌려졌다. 4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민청학련이라는 반국가단체’를 뿌리 뽑기 위한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75년 2월 석방된 김지하 시인은 [동아일보]에 연재한 옥중수기 <고행1974>에서 하재완과 이수병 등 인혁당 사건 구속자들에게 들은 중앙정보부의 잔혹한 고문과 허위조작 실상을 폭로했다. 이 수기는 김지하 시인의 재구속,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기자 대량해고 사태로 이어졌다. 정부의 압력을 받은 기업들이 광고를 취소해 [동아일보] 광고 지면이 백지로 나왔다. 그러자 시민들이 돈을 보내 [동아일보]를 격려하는 광고를 실었다.
민청학련 사건은 반정부투쟁을 뿌리 뽑으려고 한 정부의 의도와 달리 민주화운동을 대중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1974년 12월 25일 민주화세력은 ‘민주회복국민회의’를 창립했다. .. 저명한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이 중심이었다. 김영삼 씨를 총재로 선출한 신민당은 적극적인 개헌투쟁에 나섰다. 박정희 대통령이 곧바로 역공을 취했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의 신임을 묻기 위해 국민투표를 하겠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 야당이 거부의사를 밝혔지만 1975년 2월 13일 국민투표를 밀어붙였다. 투표율 79.8%에 찬성률 73.1%가 나왔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재판장 민복기)은 서도원, 김용원, 이수병,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하재완, 도예종 등 대학생이 아닌 인혁당 관련 피고인 여덟 명의 항소를 기각해 사형을 확정했고, 다음 날 새벽 정부는 그들을 지체없이 사형해버렸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국제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 민청학련과 인혁당 관련자들은 민주화 이후 열린 재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재심 판결을 하면서 사법부의 잘못을 사과했고 국가가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1975년 봄 베트남에 사회주의 통일정부가 들어섰다ㅏ. 5월 13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해 유언비어 날조 유포, 헌법에 대한 부정, 반대, 왜곡, 비방, 헌법개정 청원 선전, 선동, 긴급조치에 대한 비방을 모두 처벌대상으로 규정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살지 않으면 누구든 범죄자가 될 수 있었다. 1979년 10월까지 4년 반 동안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은 1,400여 명이었고, 그중 1,000여 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민주화 이후 헌법재판소는 1호부터 9호까지 모든 긴급조치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부마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였다. 부마항쟁의 충격은 집권세력의 내분을 부추겨 유신체제를 무너뜨렸다. 1979년 10월 26일 밤, 서울 궁정동 안전가옥 만찬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쏜 것이다. 김재규 부장의 군법회의 진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됐지 내가 발포 명령을 하는데 누가 날 총살 하겠느냐.”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에서 200만 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가 문제냐”고 맞장구쳤다. 김재규는 ‘각하;와 ‘자유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10.26은 민주혁명이며, 5.16이 정당하다면 10.26도 정당하다고 주장했던 그는 1980년 5월 24일 교수대에 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생물학적 생명을 빼앗은 것은 총탄이었지만 정치적 생명을 앗아간것은 그 자신이 이룬 성공이었다. 그는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대중의 욕망을 무제한 분출시키고 그 탁류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했다. 그런데 산업화의 성공으로 절대빈곤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대중은 다른 욕망에 끌리기 시작했다. 자유, 정의, 민주주의, 인간적 존엄성을 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욕망을 존중하지 않자 많은 국민이 마음으로 그를 버렸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은 그와 같은 민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10.26사건을 그렇게 이해한다.
인류 역사는 숱한 반란, 봉기, 내전, 혁명,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사태의 원인과 계기, 전개과정과 결과는 저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같은 게 있었다.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을 덮친 것이 혼돈이었다는 사실이다. 무리를 지어 폭력으로 부딪치는 격동의 순간에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동기와 지향에 따라 제각기 활동한다. 모두에게 익숙한 일상의 소통방식이 무너진 상황에서는 냉철한 논리와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충동이 행동을 지배한다. 어디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누구도 전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끝나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역사가들이 사태의 전모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해석한다. 그때에야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 대한민국현대사도 예외가 아니다. 제주 4.3사건, 6.25전쟁, 4.19혁명, 5.16쿠데타, 5.18광주민중항쟁, 6.10민주항쟁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들이 본 것은 혼돈이었다.
5월 18일 오전부터 전남대 앞에서 학생과 계엄군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계엄군이 학교 밖으로 나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것을 본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하면서 도시 전체가 궐기했다. 여기까지는 부마항쟁과 같았다. 그런데 광주 시민들은 부산·마산 시민들보다 더 절박했고 더 용감했다. 공수부대는 시내곳곳에서 대검을 장착한 소총과 '충정봉’(忠淸棒)이라는 박달나무 몽둥이로 마구잡이 폭력을 휘둘렀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자시위는 더 확산되었다. 계엄사는 더 많은 특전사 병력을 광주로 보냈다. 비무장 시위가 무장투쟁으로 번진 것은 계엄군이 발포를 했기때문이다.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정문 앞에 진 치고 있던제11공수여단 병력이 갑자기 흘러나온 애국가 연주에 맞추어 일제히 M16소총과 M60기관총을 공중으로 발포했다. 그래도 시위대가 흩어지지 않자 곧바로 사람을 향해 총을 쏘았다. 전일빌딩,상무관, 수협 전남지부 건물 옥상에서는 저격수들이 조준사격을가했다. 그것은 명령에 따른 조직적·계획적 집단발포였다. 5월19일과 20일에도 제11공수여단과 제3공수여단 병력이 권총과M16을 발포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그것은 산발적·돌발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도청 앞 발포는 달랐다. 거리는 순식간에피바다로 변했다. 분개한 시민들은 광주 시내뿐만 아니라 나주, 화순, 장성, 영광,담양 등 인근지역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카빈소총과M1소총을 확보했고 화순탄광의 다이너마이트를 반입했다. 시민들이 먼저 총을 쏘았기 때문에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했다는 신군부의 주장은 거짓이었다. 군의 모든 기록 가운데 최초로 등장하는무기탈취 사례는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상 일지」에5월 21일 오후 1시 35분 전남 화순파출소 무기 피탈' 사건이었다.* 특전사가 전남도청 앞에서 발포를 할 때에는 시민들에게 총이 없었다. 시민들이 무장항쟁을 시작하자 경찰관들이 사복으로 갈아입고 광주를 빠져나갔고 특전사 병력은 외곽으로 이동해 광주의 교통과 통신을 차단했다. 그들은 인근 도시로 가는 국도에서광주를 빠져나가는 민간차량을 저격하고 주둔지 인근의 민가에총을 쏘았다.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해 많은 시민이 죽었다. 다른도시에서는 대중투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군부는 모든화력을 광주에 집중했다. 특전사 3개 여단 3,500명, 보병 20사단 5,000명,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소속 병력 1만 2,000명 등 무려 2만이 넘는 병력을 광주시 일원에 투입한 것이다. 도청을 점령한 시민군은 부대를 편성하고 치안질서를 유지했으며 시민들은 그들에게 음식과 물을 제공했다. 시민자치에 들어간 광주 시내는 평온했으며 범죄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병원에는 헌혈 신청자들이 줄을 섰고 도청 공무원들이 다시 출근했다. 지역사회 원로들이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광주 상무대에 있던 전남북 계엄분소를 방문했다. 그러나 계엄사는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광주항쟁에 대한 소식은 닷새째인 5월 22일에 가서야 석간 『동아일보』가 처음으로 보도했다. 그 닷새 동안 광주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으며 국민들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신군부는 광주 시민을 폭도로 규정했고 계엄군은 광주시를 포위했다. 5월 27일 새벽 계엄사는 6,0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해 광주를 탈환하는 ‘상무충정작전'을 전개했다. 도청을 중심으로 최후의 항전을 준비한 시민군은 카빈총과 M1소총을 든 157명뿐이었다.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윤상원 씨를 비롯한 열세 명을 사살하고 100여 명을 체포했다. 또 다른 거점이었던 광주공원과 전일빌딩도 손쉽게 점령했다. 그들은 도청 앞 상무관에 있던 광주 희생자들의 시신 129구를 덤프트럭에 싣고 가서 망월동 산비탈에 묻었다. 5·18유족회의 집계에 따르면 항쟁 당시 사망자는 166명, 행방불명 65명이었다. 부상 후 사망자는 400명이 넘는다. 군경 사망자는 27명이었는데 군인들끼리 벌인 오인전투 사망자가 많았다. 계엄사는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무려 2,500명이 넘는 시민과 대학생을 체포해 600명 이상을 검찰에 송치했다. 정동년, 배용주, 박남서는 군법회의와 대법원 최종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홍남순, 정상용, 허규정, 윤석루 등 일곱 명은 무기징역, 김상윤, 김성용, 명노근, 전옥주, 윤강옥 등 열한 명은 징역 20년에서 10년, 152명은 징역 10년에서 5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모두 풀려났다. 광주민중항쟁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가능성과 당시 민주화운동의 현주소를 명료하게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전제정치를 타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속적·동시다발적·전국적 도시봉기라는 것, 그리고 아직 대한민국 국민은 그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참혹한 패배로 막을 내린 광주민중항쟁은 많은 국민의 가슴에 깊은 죄책감을 남겼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를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역 시민들이 계엄군의 폭력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87년 6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어느 지역도 고립되지 않는 전국적 도시봉기를 정밀하게 기획하고 준비했다. 광주 시민들만 홀로 고립의 아픔을 겪게만든 1980년 5월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6월 민주항쟁은 사실상 광주민중항쟁의 전국적 확대판이었다.
신군부는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을 내쫓았다. 그는 유신헌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대통령이 되었지만 퇴진 요구를 받자 군소리 없이 물러났다. 전두환은 곧바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소집해 100퍼센트 찬성으로 제11대 대통령이 되었다. 모든 신문·방송이 그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특집보도와 특집기사를 내보냈다정부는 지체 없이 헌법개정안을 만들었다. 1980년 9월 29일 공고한 '제5공화국' 헌법안은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제로 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이름을 대통령 선거인단으로 바꾸었다. 대통령이국회의원 3분의 1을 임명하는 제도를 없애는 대신 비례대표를 의원 정수의 3분의 1로 하고 제1당에 비례의석 3분의 2를 배분하는 괴상한 제도를 도입했다. 10월 22일 실시한 국민투표에 95.5퍼센트의 유권자가 투표했고 91.6퍼센트가 찬성했다. 유신헌법국민투표 때와 비슷한 결과였다. 국민들이 다시 한 번 폭력의 공포에 굴복한 것이다.
1987년이 되자 국민의정치적 관심은 헌법 개정 여부에 집중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의임기가 1년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헌법을 바꾸지 않으면 또 5,000명의 선거인단이 차기 대통령을 뽑게되고, 그렇게 되면 정권교체도 민주화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민주화세력은 민주화를 위한 최소 요구이자 절대적 조건인 대통령직선제 회복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1월 14일, 어찌 보면 필연적이고 달리 보면 우발적인 사건이 터졌고 이 운명적인 사건이 대한민국의 진로를 바꾸었다. 서울대학교 언어확과 3학년 박종철 씨가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 것이다. <중앙일보>가 대학생 사망 사실을 최초 보도했고 <동아일보>가 더 많은 사실을 취재해 더 크게 보도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수사관이 범죄사실을 추궁하면서 주먹으로 책상을 ‘탁’ 치자 박종철 군이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 초기 <동아일보> 기자들의 활약은 역사적으로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 <동아일보>는 시신에 피멍자국이 있었다는 부검 관련 소식에 이어 쇼크로 인한 심장마비가 아니라 물고문으로 인한 사망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의사의 검안소견서를 보도했다. 그때의 <동아일보>는 오늘의 <동아일보>와 전혀 다른 신문이었다. 비난 여론이 끓어오르자 검찰이 경찰관 두 사람을 구속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유감을 표명하고 치안본부장과 내무부장관을 경질했다.
2월 7일 서울 명동성당을 비롯해 전국에서 열린 추도대회가 거리시위로 번졌을 때 5.18 이후 처음으로 일반 시민들이 반정부시위에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4월 13일에 전두환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한 그는 개헌을 하지 않을 것이며 계속 개헌을 주장하면서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을 엄단하겠다고 말했다. .. 호헌선언은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뿌린 행위였다. .. 바로 그날부터 국민적인 ‘호헌철폐투쟁’이 불붙었다.
다시 5월이 오자 전국 62개 대학에서 광주항쟁 추모집회가 열렸고 명동성당에서는 ‘광주민중항쟁 제7주기 미사’가 열렸다. 그런데 이곳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핵폭탄급 진실을 폭로했다. 이미 구속된 경찰관 두 사람 이외에도 박종철씨를 죽인 범인이 더 있다는 것이었다. 김승훈 신부는 고문살인범 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사, 이정오 경장이 현직에 그대로 근무하고 있고 치안본부의 전석린 경무관과 유정방 경정이 사건을 조작했으며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사건은폐와 번인조작에 개입했다고 폭로했다. 사흘이 지난 후 검찰은 고문경관이 셋 더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동아일보>는 김성기 법무부장관과 서동권 검찰총장이 범인 축소, 은폐 사실을 석 달 동안이나 알면서 감추었다고 보도했다. 정부는 임시국무회의를 열어 내각 총사퇴를 결정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대규모 개각을 단행했다. 검찰은 공안수사의 대부로 통하던 치안본부의 박처원 치안감을 구속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6월 민주항쟁 후에 구속되었다. 그러나 분노의 불길은 잦아들지 않았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에서 더 큰 민심이 파도가 밀어닥쳤다. 전국 16개 도시에서 150만 명이 참여한 이날 시위의 하이라이트는 서울이 아니라 30만 명이 시위를 벌인 부산이었다. 부산 시민들은 거리에서 교대로 잠을 자면서 밤샘시위를 벌였다.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세 번째 파도는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이었다.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80만 명이 거리시위에 나왔다. 맨손으로 시위를 한 6.10대회와 달리 시민들은 도처에서 투석전을 벌였으며 대학생들이 던지는 화염병에도 큰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전국 거의 모든 도시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를 10만여 명의 경찰력으로 진압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8개 항으로 이루어진 시국수습 특별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소위 ‘6.29선언’이다. 대통령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과 정치범 석방, 국민 기본권과 언론 자유 보장, 지방자치제 실시와 교육자율과, 자유로운 정당활동 보장 등을 담은 이 선언으로 전국적 도시봉기는 막을 내렸다.
7월 5일 이한열 씨가 끝내 숨을 거두었다. 7월 9일 서울역 관장에서 100만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영결식이 열렸다. 이 행사는 6월 민주항쟁의 에필로그였다. 영결식이 끝나고 경찰이 해산을 종용하면서 페퍼포그와 최루탄을 쏘자 100만 시민은 조용히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헌법을 고치고 선거를 하면 정권을 바꾸고 민주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그들의 희망은 다섯 달 뒤에 물거품이 되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1987년 이후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 하지만 아직 성숙하지는 않았다.
민주적 제도가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에 맞는 생각을 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성숙한 민주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민주주의는 제도와 행태, 의식의 복합물이다. 물론 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장기적으로 보면 모든 제도가 의식과 행태의 산물이지만, 단기적으로는 특정한 제도가 그에 맞는 의식과 행태를 북돋우기 때문이다.
1987년 체제는 현행 헌법과 선거제도를 만든 정치 지도가 ‘1노 3김’의 동상이몽(同床異夢)과 이해타산이 만든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 5년만 하고 나가는 데 합의했다. .. 확실하게 하기 위해 헌법 제128조 2항에 임기를 늘리거나 중임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을 할 경우 개정 조항은 현직 대통령에게 적용하지 않는다는 안정장치까지 넣어두었다.
우리 헌법은 국민의 저항권을 인정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명시했다. 제10조부터 37조까지 신체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노동 3권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비롯한 시민의 기본권을 명확하게 보장했다.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국회와 사법부의 권한을 대폭 확대해 권력의 분산과 상호견제를 강화했다.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부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높였으며 헌법재판소를 설치했다. 최저임금제를 명시하고 성장, 안정, 적정한 소득분재, 독과점 폐해 방지, 경제민주화를 위해 국가가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었다. 시각에 따라 비판할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헌법은 민주주의 선지국의 헌법에 견주어 크게 손색이 없는 훌륭한 헌법이 되었다. 나는 이것이 바로 헌법에 투영된 6월 민주항쟁의 성과라고 본다.
1987년 10월 27일의 헌법 개정 국민투표에 78%의 유권자가 투표했고 93%가 찬성했다.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유효표의 36.6%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 엄청난 희생을 츠르면서 민주화를 이루어놓고서는 결국 12.12군사반란과 광주학살, 제5공화국 강권통치와 권력형 부정부패의 제2인자를 대통령으로 뽑았으니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민주화운동의 전위였던 재야와 학생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농민운동, 각계각층 지식인운동에 변화를 요구했다. 그들은 정치, 민중운동, 시민운동으로 갈라져 점차 1987년 체제에 통합되었다.
누가 하는 어떤 것이든, 민주주의와 관련한 헌법의 규정을 실현하려는 활동은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대통령에 대해서든, 정치에 대해서든, 통일문제에 대해서든, 혁명에 대해서든, 그 무엇에 대해서든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 헌법이 우리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정부가, 또는 압도적 다수의 국민이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위한 것이 아니다. 대다수 국민이 터무니없다고 판단하는 견해까지도 제한없이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 비록 진리가 아닌 견해라 할지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그것을 제약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헌법의 정신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다. 노태우 정부는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에 대한 대학생과 시민들의 의사표현을 탄압했다.
김영삼 정부는 노동법을 날치기했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 소속 의원 154명이 야당에 회의 개최 사실도 통보하지 않은 채 버스를 대절해 국회 본회의장에 몰래 들어가 파견근무제, 정리해고제, 파트타임근로제와 변형시간근로제 등 노동자의 지위에 엄청난 악영향을 주는 조항이 담긴 노동관계법을 의결했다.
한 달 가까이 이어진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 투쟁 분위기는 마치 6월 민주항쟁 전야 같았다. 개정 노동법의 내용도 문제가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정부가 국회법의 의결 절차를 지키지 않았고 헌법이 보장한 노동 3권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이 날치기 행위에 대해 사과했고 국회는 임시국회를 열어 노동법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1997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룸으로써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성숙해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공안통치를 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어 정부와 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부당하게 억압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견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김대중 대통령이 정리해고제를 도입하는 등 노동법을 개정함으로써 노동자의 지위를 현저히 약화시켰다. .. 대규모 파업이나 시민사회의 연대투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구제금융을 제공한 IMF가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리해고제 도입을 강요했다. 둘째, 김대중 대통령은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노동계와 합의하려고 노력했으며 고용을 유지하는 기업을 지원하는 등 정리해고의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국민들이 벼랑 끝에 몰려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심정에 공감하면서도 정부를 심하게 비난하지 않은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권력의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
2004년 봄의 탄핵규탄 촛불집회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시민들이 현직 대통령의 편이 되어 자발적으로 전국적, 동시다발적, 연속적 집회시위를 벌인 적은 그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탄핵규탄 촛불집회의 투쟁대상은 야당이었다. 임기가 넉 달밖에 남지 않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뽑은 임기 5년 대통령의 직무를 겨우 1년 만에 정지시킨 사건에 대해 국민들은 분개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 미국산 쇠고기로 인한 광우병 발병 확률은 매우 낮았다. 문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을 완화하는 결정을 내린 과정이었다. 아무 예고도 하지 않고 최소한의 공론화 과정도 없이, 국민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대통령과 정부가 그런 결정을 한 것이다. .. 물대포와 최루액을 동원한 경찰의 진압과 ‘명박산성’이라고 불린 경찰차벽에도 굴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거짓 사과 말고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지만, 촛불집회는 자발적으로 행동하면서 수평적으로 연대할줄 아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을 예고했다.
2013년 시민들은 다시 촛불을 들었다. 이번에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 국정원과 기무사,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이 불법 개입한 것을 규탄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국미사를 열었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가기관을 정치적으로 사유화해서 같은 당의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키기 이해 국민을 상대로 온라인 심리전을 벌인 조직범죄였다.
제5장 사회문화의 급진적 변화 : 단색의 병영에서 다양성의 광장으로
인간이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이 유익하듯이, 삶의 실험도 다양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한, 각자의 개성을 다양하게 꽃피울 수 있어야 한다. 각자의 고유한 개성이 아니라 전통이나 관습에 따라 행동하게 되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자 개인과 사회 발전의 불가결한 요소인 개별성을 잃게 된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반공 난민촌’이었던 대한민국은 사회 전체가 ‘병영’과 비슷했던 산업화시대를 통과해 각자의 개성과 문화적 다양성이 발현되는 민주화시대의 ‘광장’으로 바뀌었다. 지난 55년 동안 대한민국이 겪은 사회문화적 변화는 그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반도국가가 아니라 삼면이 바라로 막히고 북쪽은 철조망으로 차단된 섬나라다.
돈이 많고 자손이 귀하면 당연히 사람을 귀하게 여기게 된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수록 사람들은 부, 명예, 지위, 쾌락의 추구를 넘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욕망에 더 끌리게 된다. 자신의 존엄을 깨달은 사람이 타인의 존엄성도 존중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귀하게 여기는 곳에서는 다양한 개성을 존중한다. 출산율 저하 현상은 대한민국이 다양성의 광장으로 진화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 것이다.
난민촌을 병영으로 개조한 수단은 군사쿠데타와 공안통치, 독재와 같은 폭력이었다. 그러나 폭력만 가지고 나라를 병영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그 병영은 적어도 난민촌보다는 살기가 나았다. 국가를 병영처럼 만들려면 국민들의 기본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어야 한다.
병영에는 군기가 있어야 한다. 국민들이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조국 근대화라는 국가 목표를 개인적 인생 목표와 일치시키도록 ‘건전한 가치관’을 심어주고 사상과 이념을 통일해야 한다.
우리 정부가 출산율을 억제한 것은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1인당 국민소득을 신속하게 높이기 위해서였다. .. 1961년 장면 정부가 세운 최초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 목표가 바로 ‘빈곤의 악순환을 타파’라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선택한 방법은 일단 외국에서 차입한 자본을 지렛대 삼아 산업을 육성하고, 기업이 돈을 벌어 국적자본을 축적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숙련된 기술을 가진 노동력을 자본과 결합해야 했다. 숙련된 노동자를 얻으려면 교육과 훈련을 시켜야 한다.
밥을 먹게 해주고 겁을 주어 국민을 복종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장기간 권력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국민이 스스로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다. 그렇게 하려면 교육과 미디어를 장악해 대중을 세뇌함으로써 사상을 통일하고 가치관을 통제해야 한다. 국가의 목표와 자기 인생의 목표를 일치시킨 사람은 겁을 주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협력하고 복종한다. 이일을 누구보다 잘해낸 것이 바로 북한이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교육과 언론을 장악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똑같은 시도를 했다. 그러나 겨우 절번쯤, 그것도 잠시만 성공했을 뿐이다.
국민을 학살하고 집권한 전두환 정부는 콤플렉스 때문인지 국민을 즐겁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 전두환 정부는 스포츠, 스크린, 섹스를 부추기는 3S정책을 썼다. 정부가 참혹한 인권유린과 공안통치를 저지르는 동안 <애마부인> 시리즈를 위시한 에로영화 개봉이 봇물을 이루었다. 1980년 컬러 방송을 시작한 텔레비전에는 쇼 프로와 드라마가 넘쳐났고 2년 뒤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1983년 박종환 감독의 청소년 축구 대표팀이 멕시코 세계대회에서 4강에 진출해 국민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야간통금을 해제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표면적 계기는 서울올림픽이었다. 우리나라는 1981년 88올림픽 유치권을 획득했다. 뒤이어 86아시안게임 유치권도 따냈다. .. 정부는 대한민국이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임을 과시하려고 1982년 1월 5일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통금을 해제했다.
병영의 기본은 피아(彼我) 구분이다. 그래서 정부는 온 국민이 주민등록증을 만들게 했다. .. 최초의 주민등록제도는 1942년 조선총독북 도입했다. 일본 호적법에 바탕을 둔 ‘조선기류령’을 제정해 징용과 징병 등 식민지 수탈을 효율화했다. 1962년 국가 재건최고회의가 제정한 ‘주민등록법’의 목적도 일제의 기류령과 거의 같았다. 현행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번호가 생긴 것은 1968년 가을이었다.
시행 초기 주민등록번호는 열두 자리였지만 1975년부터 생년월일 여섯 자리+숫자 일곱 자리로 변경되었다. 뒷자리 첫 번째는 성별(남자1, 여자2)을 구분한다. 그다음 다섯 자리는 출생신고를 한 동사무소의 고유번호와 그 동사무소에서 그날 한 출생신고 순서를 나타낸다. 마지막 숫자는 기술적인 오류 검증에 필요해서 붙인 번호다. 재외동포는 뒷자리가 다 0으로 통일된다. 남자는 1000000(혹은 3000000), 여자는 2000000(혹은 4000000)이다.
주민등록번호 덕분에 국가는 편리하게 국민을 관리할 수 있다. .. 우리는 평생 이 번호를 벗어나지 못한다. 주민등록번호만 보면 그 사람의 나이와 출생지, 성별을 바로 알 수 있다.
지구촌 문명국가들 가운데 우리와 같은 주민등록제도를 가진 나라는 거의 없다. 주민등록번호는 대한민국의 진화과정에 병영국가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화석이라 할 수 있다.
병영국까의 최대 피해자는 노동자였다.
보수 성향의 한국노총 말고는 자주적인 연맹을 만들 수 없게 한 것이다. 한국노총은 해방 직후 사회주의 노선읭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에 대항하기 위해 하향식으로 급조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을 모태로 한 조직이다. 오랜 세월 관변 또는 어용노조 역할을 했으며 1960년 한국노총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 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한국노총은 정부와 손잡고 자주적인 노동조합을 탄압했고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선언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으며 1987년 노동자투쟁 때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 선거 때는 편의에 따라 여당과도 연합했고 야당과도 연합했다. 자주적인 노동조합연합체는 광장의 시대가 열린 후에야 비로소 탄생했다. 1995년 11월에 출범한 민주노총이 그것이다. .. 민주노총은 1997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 이후 10여 년 동안 조직적,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민주노동당의 국회 진줄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만성적인 정파갈등과 대기업 노동조합의 자기중심적 행태 등으로 대중의 신망이 크게 하락했으며 2008년 이후에는 정부의 노골적이고 일상적인 탄압에 직면했다.
1970년대 이후 노동운동, 노학연대와 천년지식인들의 노동현장 투신, 노동운동의 정치적 진출, 민주노총의 탄생은 모두 전태일의 분신에서 시작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생산적 복지’라는 구호를 내걸고 복지국가로 가는 첫걸음을 떼었다 사회보험이 작동하지 않는 사각지대에 햇빛을 비추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전동휠체어를 지원해 고방에 유폐되어 살던 중증장애인들을 사회로 불러냈다. 시민운동가와 자원봉사자들이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돌보던 공부방을 국가정책으로 품어 지역 아동센터로 발전시켰다. 노무현 정부는 그 연장선에서 노인장기요양보험을 새로 도입해 5대 사회보험체제를 완성했고 보육에 대한 대규모 국가 재정지원을 시작했다. 중증장애인 활동보조인 제도를 도입하고 장애수당을 크게 인상했으며 자활사업을 키우고 시설아동과 가정위탁아동에게 아이들과 국가가 함께 저축하는 예금계좌를 만들어주었다. .. 이 모든 것은 이명박 정부를 거쳐 박근혜 정부까지, 예산 부족으로 진통을 겪으면서도 큰 틀에서는 흔들리지 않고 성장해왔다.
제6장 남북관계 70년 : 거짓 혁명과 거짓 공포의 적대적 공존
역사에 대한 지식은 어떤 유형의 정부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으며 또한 어떤 유형의 정부가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가에 대해서도 실마리를 제공한다. - 버넌 보그다너, <역사, 시민이 묻고 역사가가 답하고 저널리스트가 논하다> 리처드 에번스
들어가는 말 - 출발 정보는 사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이고, 지식은 뒤죽박죽 섞인 사실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지혜는 뒤얽힌 사실들을 풀어내어 이해하고, 결정적으로 그 사실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 지식은 안다. 지혜는 이해한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종류의 차이이지 정도의 차이가 아니다. ..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다. 지혜는 실천하는 것이다. 6-7
철학은 새로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도와주고, 바로 거기에 큰 가치가 있다. 11
우리에겐 느 ㄹ지혜가 필요하지만 삶의 단계마다 필요한 지혜가 다르다. 열다섯 살에게 중요한 ‘어떻게’ 질문과 서른다섯 살, 또는 일흔다섯 살에게 중요한 질문은 같지 않다. 철학은 각 단계에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14
1부 새벽
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오는 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망각이었다. 그는 온전한 삶을 살라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독촉했다. 31-32
마르쿠스는 스스로에게 생각을 그만두고 행동에 나서라고 누차 촉구한다. 32
2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감정도 열차처럼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주기적으로 한바탕 찾아오는 나의 우울은 난데없이 나타난 것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멈춰 서서 그 근원을 잘 살펴보면 숨은 원인을 찾게된다. 나의 슬픔은 바로 앞의 생각이나 감정에 원인이 있고, 이 생각이나 감정은 그 이전의 것에, 그 이전의 것은 1982년에 어머니가 한 말에 원인이 있다. 생각이 그렇듯이 감정도 결코 느닷없이 나타나지 않는다. 열차처럼 앞에서 감정을 끌어당기는 힘이 늘 존재한다. 41-42
사람들은 질문을 물어봅니다. 가끔은 질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질문과 씨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경험하지는 않습니다. 43
소크라테스에게 가장 최악위 무지는 지식의 가면을 쓴 무지였다. 48-49
우리는 종종 궁금해하는 것과 호기심을 같은 것으로 여긴다. 물론 두 가지 다 무관심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 방식은 서로가 다르다. 궁금해하는 것은 호기심과 달리 본인과 매우 밀접하게 엮여 있다. 우리는 냉철한 호기심을 가질 수 있다. 냉철하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냉철하게 궁금해할 순 없다. 호기심은 가만히 있질 못하고 늘 눈앞에 나타나는 다른 반짝이는 대상을 쫓아가겠다며 위협한다. 궁금해하는 마음은 그렇지 않다. 그 마음은 오래도록 머문다. 호기심이 한 손에 음료를 들고 안락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발을 올려둔 것이 바로 궁금해하는 마음이다. 궁금해하는 마음은 절대로 반짝이는 대상을 쫓지 않는다. 절대로 고양이를 죽이지 않는다. 궁금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좋은 식산 좋은 섹스처럼 절대 서두를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소크라테스도 절대로 대화를 재촉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상대가 점점 지치고 분노할 때초자 인내심을 갖고 대화에 임했다. 55-56
좋은 철학은 느린 철학이다. 57
멈춤은 텅 빈 것이 아니라 잠시 유예된 상황이다. 생각의 씨앗이다. 모든 멈춤은 인식의 가능성, 그리고 궁금해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57
문제를 경험하기 전에 해결하는 것은 식재료를 구매하기 전에 요리를 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너무 자주 우리는 가장 빠른 해결책, 또는 가장 편리한 즐거움에 손을 뻗는다. 63
내 견해가 어떻게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다른 모든 교활한 지배자처럼 나의 의견 역시 내가 자기들을 불러들였ㄷ고 믿게 한다. 정말 내가 그랬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생각이 말도 없이 나타나서 멋대로 내 옷을 걸쳐 입은 걸까? .. 깊이 있는 질문은 느리고 더 깊이 침잠한다. 68
철학은 말뿐이야. 질문만 끝없이 늘어놓고 대답은 없어. 언젠 떠나기만 하고 도착하지는 않는 기차야. .. 철학도 분명 도착지에 관심이 있지만, 여행을 서두르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그저 똑똑한 대답이 아닌 ‘마음의 대답’에 도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69
좋은 질문은 그렇다. 사람을 단단히 붙잡고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프레임을 다시 짜서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해답을 찾게 할 뿐만 아니라 해답을 찾는 행위 그 자체를 재평가하게 만든다. 좋은 질문은 똑똑한 대답을 끌어내기도 하지만 침묵을 끌어내기도 한다. 71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는 내가 문학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들어 있다. .. ‘이제 나는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잠시 멈추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성공은 어떤 모습이지? 솔직히 말하면 아직 이 질문의 답을 찾지 못했고, 어쩌면 영원히 못 찾을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안경의 도수를 다시 맞추었고, 이제 앞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72-73
3 루소처럼 걷는 법
철학자이자 황제인 마르쿠스가 대답을 해준다. ‘상상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역경을 만나면 자기 연민이나 절망에 빠지지 말고 그저 다시 시작하라.’ 이런 식으로 바라보면 삶은 더 이상 실패한 서사나 망쳐버린 결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진실이 아니다. 결말 같은 건 없다. 무한한 시작의 사슬만이 있을 뿐. 99
4 소로처럼 보는 법
소로가 동양으로 눈을 돌린 이유는 평범했다. 인생의 위기, 1837년이었다. 소로는 당시 관습이었던 체벌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콩코드 학교의 교사직에서 막 해고된 참이었다. 무일푼에 갈곳도 없었다. 그때 우연히 책 한 권을 만났다. 1000페이지에 달하는, 무려 “영국령 인도에 관한 역사적 기술적 해설”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소로는 묵묵히 책을 읽어내며 보석을 캐냈다. 책 속에 잇는 생경하고도 친숙한 아이디어들이 천천히 소로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소로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어느 정도는, 아주 가끔이지만, 나 또한 요가 수행자다.” 내 생각에 소로는 요가 수행자보다는 산야시(sannyasi)에 더 가깝다. 힌두교 전통에서 산야시는 가족으로서의 의무를 내던진 사람으로, 모든 재화를 포기하고 오로지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 숲에 틀어박힌다. 113-114
<월든>의 영웅이자 미국 설화의 사랑받는 아이콘, 환경주의의 주창자, 문학의 거성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개자식이었다. 소로를 아는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너새니얼 호손은 소로에게 “무쇠로 만든 부지깽이처럼 뻣뻣한 완고함”이 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호손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소설가 헨리 제임스와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아버지인 헨리 제임스 시니어는 “소로는 평생 내가 만난 그 누구보다도 유치하고 개념 없고 뻔뻔한 이기주의자"라고 했다. 소로가 받는 혹독한 비난은 주로 위선에 관한 것이다. 소로는 숲속에서 홀로 자족하는 척하면서 몰래 엄마 집에 들러 파이를 먹고 빨래를 맡겼다. 그건 사실이다. 소로는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만큼 월든에 고립되어 살지 않았다. 엄마의 요리를 먹으려고, 또한 우체국과 카페에 들르려고 종종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마을로 향했다. 그렇다면 《월든》은 사기인가? 미국 전역의 중학교 3학년생은 그동안 기만당한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로는 사회와의 끈을 전부 끊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 <월든>은 숲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 관한 책이 아니다. <월든>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관한 책이다. 115-116
가끔 우리는 의미를 너무 빨리 창출한다. .. 물건과 사람을 너무 빨리 정의 내리면 그것들의 유일무이함을 보지 못할 위험이 있다. 소로는 그러한 경향을 경계했다. “보편 법칙을 너무 성급하게 끌어내지 말 것.” 소로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특수한 사례를 더 명확하게 들여다 볼 것.” 눈앞에 보이는 것을 바로 규정하지 않고 기다리면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120
소로는 말한다. “어떤 대상을 이해하는 것을 멈출 때에야 나는 비로소 그 대상을 보기 시작한다.” .. 소크라테스처럼 소로도 철저하게 의식적인 무지를 중요하게 여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유용한 무지를 전파하는 모임”을 만들겠다고 했다. 128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본질적인 실상에 직면하고 싶어서, 그것들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죽음을 맞이 했을 때 내가 제대로 살지 않았음을 깨닫고 싶지 않아서였다.” 132
관점을 바꾸면 어떻게 보느냐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도 바뀐다. “제대로 된 관점에서 보면 모든 폭풍과 그 안에 든 모든 빗방울이 무지개다.” 133
매일 틀에 박힌 것만 보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소로는 자신의 관점을 바꾸었다. 133
“무엇이든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 143
5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그의 저서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전부 제시되어 있다. .. 20대 때 완성한 이 작품을, 쇼펜하우어는 “한 가지 생각의 산물”이라고 칭했다. 153
책만 열면 바로 해답이 있는데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쇼펜하우어는 대답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생각해서 해답을 내놓는 것이 100배는 더 가치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함께 머무르지 않고 너무 자주 책 앞으로 달려간다고 말했다. “책은 자기생각이 고갈되었을 때만 읽어야 한다.” ‘읽다’를 ‘클릭하다’로 바꾸면 현재 우리가 겪는 고충이 된다. 우리는 데어터를 정보로 착각하고,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착각한다. ..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다. “정보는 그저 통찰로 향하는 수단일 뿐이며 정보 그 자체에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런 과도한 양의 데어터(사실상 소음)는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이며, 통찰의 가능성을 없앤다. 소음에 정신이 팔린 사람은 음악을 듣지 못한다. 179
2부 정오
6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삶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마라. 만약 그 성취가 네 이웃에게 알려진다면 그 때문에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명령에 언짢아하는 추종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이들에겐 감출 것이 하나도 없었다. 194
에피쿠로스는 경험론자였다. 그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 오로지 우리의 감각만을 통해 세상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194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주요 원칙은 “네 가지 치료법”이라는 뜻의 테트라파르마코스(tetrapharmakos)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약처럼 철학도 일정 간격을 두고 처방된 양을 섭취해야 한다. 약처럼 철학에도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어지러움, 방향 감각 상실, 그리고 때때로 조증 삽화까지. 194-195
진정해. 에피쿠로스가 말한다. 그리고 즐기라고. 그는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끝”인 쾌락을 옹호했다. 그리고 도발적으로 덧붙였다. “만약 내게서 맛의 쾌락을 빼앗는다면, 성적 쾌락을 빼앗는다면, 듣는 쾌락을 빼앗는다면, 아름다운 형태를 보았을 때 느끼는 달콤한 감정을 빼앗는다면, 선을 어떻세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196
“나는 명예가 있는 자와 헛되이 그들을 찬양하는 자에게 침을 뱉는다.” 쾌락은 우리가 그 자체로서 욕망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 밖의 모든 것, 심지어 철학까지도, 쾌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한 수단이다. .. 어린아이는 무엇에 반응하는가? 쾌락과 고통이다. ..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규정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를 만족으로 이끄는 것은 어떤 것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불안의 부재다.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平靜)주의자’ 였다. 197
현재 우리는 쾌락의 황금시대를 살고 있다. 클릭 한 번이면 우리를 애태우는 수많은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고급 요리, 메모리폼 매트리스, 변태 같은 섹스, 다양한 종류의 기기들, 에피쿠로스라면 이 모든 것이 다 우리를 유인하는 가짜 쾌락이라고 말할 것이다. 201-202
에피쿠로스와 부처의 가르침은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두 사람 다 욕망을 고통의 근원으로 보았다. 두 사람 다 평정을 수행의 궁극적 목표로 보앗다. 두 사람 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에피쿠로스에겐 정원이, 부처에겐 수행공동체인 승가가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숫자 4를 좋아했던 것 같다. 부처에겐 사성제(四聖諦)가, 에피쿠로스에겐 네 가지 치료법이 있었다. 205
7 시몬 베유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법
관심에 대해 깊이 고민한 이 철학자는 자신에게 관심이 쏟아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보고 싶어 했으나 보이는 것은 원치 않았다. 기차를 타거나 공장에서 일을 할 때 자신의 목표는 익명성,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가서 사라지는 것”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221
관심은 중요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더, 관심은 우리의 삶을 형성한다.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지금 당장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인 것만이 우리 앞에 존재한다. .. 관심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어디에 관심을 기울이기로 결정했느냐, 더 중요하게는 어떻게 관심을 기울이느냐가 곧 그 사람을 보여준다. 222
가장 강렬하고 너그러운 형태의 관심에는 다른 이름이 있다. 바로 사랑이다. 관심은 사랑이다. 사랑은 관심이다.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이다. “불행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시네게 관심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베유는 말한다. 보답에 대한 기대 없이 타인에게 온전한 관심을 쏟을 때에만 우리는 이 “가장 희소하고 순수한 형태의 너그러움”을 베풀게 된다. 227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일 수 있는 능력은 매우 희귀하고 갖기 어려운 능력이다. 그건 거의 기적에 갂바다. 아니, 그것이 바로 기적이다.” 228
베유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진 않다고 말한다. 짧은 질문 한마디가 마음을 녹이고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지금 무슨 일을 겪고 계신가요?” 베유는 이 질문이 강력한 힘을 지닌 이유가 고통 받는 사람을 “집합체의 한 단위, 또는 ‘불행하다’라는 딱지가 붙은 사회 범주의 한 표본으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그저 어느 날 고통이 특별한 흔적을 남겼을 뿐인 한 명의 인간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228-229
관심은 집중이 아니다. 집중은 강제할 수 있다. 얘들아, 잘 좀 들어! 하지만 관심은 강제할 수 없다. 집중할 때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해보라. .. 집중은 수축한다. 관심은 확장한다. 집중은 사람을 피로하게 한다. 관심은 피로를 회복시켜준다. 집중은 생각을 한곳에 모으는 것이다. 관심은 생각을 유보하는 것이다. 베유는 이렇게 쓰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생각은 텅 빈 채로 기다려야 하고 그 무엇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저 자신의 생각에 침투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이 문장에 그리 당혹스럽지 않다면, 베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문제는 수동성의 결여에서 생겨난다.”라고 선언한다. 233
관심은 우리가 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동의하는 것이다. 헬스보다는 요가에 더 가깝다 베유는 이를 “소극적인 노력”이라고 불렀다. 베유는 진정한 관심이란 일종의 기다림과 같다고 믿었다. 베유에게 이 두 가지는 사실상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가장 귀중한 선물을 얻는 것은 그것을 찾아 나설 때가 아니라 그것을 기다릴 때다.” 관심의 반대말은 산만함이 아니라 조급함이다. 234
우리가 종종 너무 서둘러 판단을 내리듯이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는 데도 너무 성급하다. 어떤 대상이나 생각에 너무 빨리 혹하고, 그 대가를 치른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아름다움이나 친절한 행동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유는 알지 못하는 상태,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최대한 오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234-235
지적 조급함은 물에 빠진 사람이 칼이라도 붙잡으려 하는 것처럼 나쁜 아이디어라도 붙잡으려고 한다. 베유는 우리의 모든 실수가 “생각이 아이디어를 너무 성급하게 붙잡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며, 이렇게 일찍 차단되면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238
8 간디처럼 싸우는 법
간디는 폭력을 혐오했지만 그가 폭력보다 더 싫어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비겁함이다. 둘 사이에서 골라야 한다면 간디는 폭력을 선택했다. “비겁한 사람은 남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간디의 진정한 목표는 인도의 잃어버린 남성적 힘을, 인도만의 방식으로 되찾는 것이었다. 간디는 그렇게 하면 자유가 자연히 따라오리라 믿었다. 275
간디는 새로운 형태의 비폭력 저항에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사티아그라하. 사티아(satya)는 산스크리트어로 '진실'이라는뜻이고, 아그라하(agraha)는 '결의' 또는 '단호히 하다'라는 뜻이다. 진리의 힘('영혼의 힘'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이다. 이것이 바로 간디가 품고 있던 것이었다. 여기에는 수동적이거나 물렁한 면이 전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능동적인 힘이다. 사티아그라히, 즉 비폭력 저항가는 무장한 병사보다도 더 능동적이며,더 용감하다. 간디는 방아쇠를 당기는 데에는 그 어떤 위대한 용기도, 지능도 필요치 않다고 말했다. 오직 진정으로 용감한 사람만이 인간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자발적으로 고통을 겪는다. 간디의 병사들은 다른 병사들처럼 대의명분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했다. 하지만 다른 병사들과는 달리 대의명분을 위해 다른 사람을 기꺼이 죽이려 하지는 않았다. “혁명을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생깁니다." 레닌은 자신의 집단학살 명령을 변호하며 이렇게 말했다. 간디의 혁명은 그렇지 않았다. 간디는 피비린내 나는 수단을 이용해 인도의 독립을 쟁취하느니 계속 영국의 속박을 받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간디는 "구덩이 안으로 내려가지 않고 구덩이를 팔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다. 다른 이를 잔인하게 대하는 사람은 곧 스스로를 잔인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혁명이 결국 실패로 끝나는 것이다. 수단과 목적을 혼동한 사람은 스스로를 집어삼킨다. 간디가 보기에 목적은 절대로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했다. 수단이 곧 목적이었다. “불순한 수단은 불순한 결과를 낳는다. 정확히 뿌린 대로 거두게 되는 법이다." 유독한 땅에서 장미나무를 키울 수 없듯이, 피 묻은 땅에서는 평화로운 국가를 세울 수 없다. 284-285
간디는 절대로 비폭력을 하나의 전략으로, “마음대로 걸쳤다 벗었다 하는 옷”으로 여기지 않았다. 비폭력은 하나의 원칙이며, 중력의 법칙처럼 침범할 수 없는 법칙이다. 287
1959년, 마틴 루서 킹 주니어는 인도에서 간디의 가족을 포함한 간디의 추종자들을 만났다. 킹은 이 여행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고, 몇 년 후 흑인 인권운동에서 비폭력 저항의 “단호한 사랑”을 활용했다. 비폭력은 1980년대의 필리핀, 1990년대 초의 동유럽처럼 다른 곳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약 300건의 비폭력 운동을 종합적으로 살핀 연구에서 연구원 에리카 테노웨스와 마리아 슈테판은 이 전략이 절반 이상의 사례에서 효과를 나타냈음을 발견했다(또한 비폭력 전략은 이들이 연구한 사례의 4분의 1에서 부분적 성공을 거두었다). 287-288
간디는 폭력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상대편을 친구로 바꿀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대부분의 폭력은 부도덕ㅎㄴ 충동이 아닌 상상력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폭력적인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힘들게 노력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주먹을 날리거나 총에 손을 뻗는다. 너무나도 빤한 반응이다. 290
간디가 말한 깨끗한 생각은 “베일을 쓴 폭력”에서 자유로운 사고를 의미했다. 어떤 사람 앞에서 평화롭게 행동하더라도 그 밑에 폭력적인 생각이 깔려 있으면 그것은 깨끗한 게 아니다. 간디는 추종자들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창피한 줄 알라”고 소리치는 것을 금지한 적이 있다. 오늘날 자기가 싫어하는 정치인의 식사를 방해하는 사람들을 간디는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시위자들은 신체적으로는 그 누구도 해치지 않을지 몰라도 사실은 그저 “비폭력의 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다. 292
자기 원칙을 타협하는 것은 곧 굴복하는 것, “모두 주고 하나도 얻지 못하는 것”이라고, 간디는 말했다. 더 나은, 더 창의적인 해결책은 양측이 자신이 원하는 줄도 몰랐던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295
3부 황혼
11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는 법
“모든 진실은 구불구불하다.” 니체가 말했다. 모든 삶도 맟찬가지다. 우리는 모든 것이 지난 후에야 과거를 돌이켜보며 서사를 매끄럽게 다듬고 패턴과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지그재그다. 여백도 있다. 과거의 자신을 막 모습을 드러낸 미래의 자신과 갈라주는 텍스트 사이의 빈 공간. 이 여백은 무언가가 누락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백은 무언의 과도기이며, 우리 삶의 흐름이 방향을 바꾸는 지점이다. 372
니체는 읽기 즐거우면서 동시에 읽기 버겁다. 니체가 읽기 즐거운 것은 문자으이 명료함과 상쾌한 단순함이 쇼펜하우어에 맞먹기 때문이다. .. 니체는 철학이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장난기 넘치고, 통렳게 웃기다. 니체는 모든 진실에는 최소한 한 번의 웃음이 따라와야 한다고 말했다. .. 니체가 읽기 버거운 것은 소크라테스처럼 니체도 확고한 신념에 의문을 품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375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는 법 …… 다르게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376
어떤 철학자는 충격을 준다. 많은 철학자는 논증을 한다. 일부 철학자는 영감을 준다. 오직 니체만이 춤을 춘다. 니체에게 패기와 아모르파티, 즉 운명애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었다. “나는 춤추는 법을 아는 신만을 믿을 것이다.” 니체는 말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미친 것처럼 열렬히, 일말의 자의식도 느끼지 않고 춤을 춘다. 377
니체는 영원한 지옥이라는 기독교 개념을 들며 “어떤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부서지고 변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옥은 실재하지 않을 수 있지만 지옥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의 행동 동기가 된다. 영원회귀를 증명하지 않아도 마치 진짜인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는 것이다. 380
영원회귀는 사고실험이다. .. 영원회귀는 .. 전부냐 전무냐, 둘 중 하나다. 인생이 하나의 패키지다. 당신의 삶은 정확히 똑같이 반복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하나도 없다.” 편집은 불가능하다. 모든 결함과 지루한 대화가 그대로 들어 있는 이 삶을 다시 살아야만 한다. 감독판이다. 니체는 이 시나리오가 당신을 당황시키고 부끄럽게 하리란 걸 안다. 당신이 몇 개 장면은 삭제하고, 다른 장면을 집어넣고, 컴퓨터로 몇 가지 더 바꾸고, 몸매 좋은 대ㅐ역배우를 써서 삶을 수정하고 싶어 하리란 걸 안다. 381
니체는 말했다. “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법을 앞으로 더욱더 배우고 싶다. 그렇게 나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될 것이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사랑하지 말라고, 바로 그 고통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사랑하라고, 니체는 말한다. 385
12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매가 난파 됐을 때 난 정말 좋은 항해를 했어.” 이 말은 훗날 스토아학파의 핵심 주제가 된다. 바로 고난을 통해 강해지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 로마의 정치가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던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바람에 수없이 시달리지 않은 나무는 땅에 튼튼하게 뿌리박히지 못한다. 바람에 흔들려야 땅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고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 고난은 덕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다.” 400-401
스토아학파는 유리잔에 물이 반이나 차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에게 유리잔이 있다는 사실을 기적으로 여긴다. .. 애초에 유리잔을 가져본 적 없는 삶을 상상한다. 친구의 부서진 유리잔과 그때 자신이 줄 수 있는 위로를 상상한다. .. 라이트 주립대학의 철학 교수ㅜ이자 스토아철학을 실천하는 윌리엄 어빈이 말한다. “스토아철학을 실천하면 작은 기쁨을 더 섬세하게 느끼게 된다. 우리는 뜬금없이 우리가 우리라서, 우리가 우연히 살게 된 이 우주 안에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을 살고 있어서 기쁨을 느낀다.” 402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몸이 아픈데도 행복하고, 위험에 처했는데도 행복하고, 죽어가고 있는데도 행복하고, 나쁜 평판을 듣는데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내게 보여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내게 데려오라! 신들의 이름으로, 그렇다면 나는 스토아 철학자를 보게 될 것이다!” 404-405
에픽테토스는 기원후 55년에 오늘날 터키 지역에서 노예로 태어났다. 로마 황제의 고문이었던 에픽테토스의 주인은 그를 때렸다. 에픽테토스는 태연하게 고통을 참았다. 406
에픽테토스는 소크라테스를 존경했고, 많은 면에서 그를 모방했다. 소크라테스처럼 에픽테토스도 작은 오두막에 매트리스 한 장만 놓고 간소하게 살았다. 소크라테스처럼 에픽테토스도 형이상학에는 관심이 없었다. 에픽테토스의 철학은 철저하게 실용적이었다. 소크라테스처럼 에픽테토스도 무지를 진정한 지혜로 향하는 길에 반드시 필요한 단계로 여겼다. 철학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의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에픽테토스는 말했다. 삶의 많은 것들이 우리의 통제 바깥에 있지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지배할 수 있다. 바로 우리의 생각과 충동, 욕망, 혐오감, 즉 우리의 정신적 감정적 삶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헤라클레스의 기운과 슈퍼히어로의 파워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내면세계만을 제어할 수 있다. 내면세계를 지배하라, 그러면 “천하무적”이 될 것이라고, 스토아철학은 말한다. 407-408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스스로를 바꾸는 것이 훨씬 쉽다. 408
스토아철학은 이렇게 말한다.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리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두라.” 408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 스토아학파는 우리의 감정이 이성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믿지만 그 사고에는 결함이 있다고 본다. 사고방식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느낌도 바꿀 수 있다. 스토아철학의 목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느끼는 것이다. 409
고전 연구자 A. A. 롱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보통 아무 이유 없이 화가 나거나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나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내 것이어야 할 성취를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낀다.” 우리 생각과 해애동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듯 우리 감정에 대한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 감정은 우리가 내리는 판단의 결과이며, 이 판단은 틀린 경우가 많다. 우리가 잘못 이해했거나 갈피를 못 잡는다는 뜻이 아니다. 스토아학파는 그런 판단이 말 그대로 실제 경험과 다르다고 말한다. 410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한 장면에서 피터 오툴이 연기한 로렌스는 엄지와 검지로 태연하게 성냥불을 끈다. 동료 장굑 똑같이 하려다 고통에 소리를 지른다. “아야, 이거 엄청 뜨거운데요.” 동료가 말한다. “물론 뜨겁지.” 로렌스가 대답한다. “어떻게 한 거예요?” 로렌스가 말한다. “비결은 뜨겁다는 데 마음을 쓰지 않는 거야.” 로렌스의 대답은 스토아철학을 잘 보여준다. 당연히 로렌스는 고통을 느꼈지만 그 고통은 날것의 감각, 반사적 반응에 그쳤다. 이 반응은 본격적인 감정으로 발달하지 않았다. 로렌스는 말 그대로 고통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몸이 경험한 것을 마음이 경험하고 증폭시키도록 두지 않았다. 412
에픽테토스는 조언한다. 만약 공중목욕탕에 간다면 “그곳에는 물을 튀기는 사람들, 거칠게 떠미는 사람들, 욕을 하는 사람들,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몸이 물에 젖는다고, 누가 물건을 훔쳤다고 놀라선 안 된다. 416
스토아 진료실에서 놔주는 또 다른 백신은 프리메디타치오 말로룸(premeditatio malorum), 즉 ‘최악의 상황에 대한 예상’이다. 417
13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프랑스의 자랑스러운 지식인인 보부아르는 ‘잘 늙어갈 수 있는 열 가지 방법’같은 목록은 절대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자랑스러운 사람도 아니고 프랑스인도 아닌 나에게는 그런 거리낌이 없다. 1. 과거를 받아들일 것 2. 친구를 사귈 것 3. 타인의 생각을 신경 쓰지 말 것 4. 호기심을 잃지 말 것 5. 프로젝트를 추구할 것 6. 습관의 시인이 될 것 7. 아무것도 하지 말 것 8. 보조리를 받아들일 것 9. 건설적으로 물러날 것 10.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넘겨줄 것
14 몽테뉴처럼 죽는 법
내가 여행에서 만난 철학자들은 전부 내게 말을 건다. 481
죽음은 우리 모두를 철학자로 만든다. ..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죽음은 두려워할 일인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지? 죽음은 진정한 철학을 가리는 테스트다. ..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 모든 지혜와 이론의 핵심은 결국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 482
크세주(Que sais-je). ‘나는무엇을 아는가?’ 486
몽테뉴는 죽음을, 자기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직면하지 않고선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없다고 말한다. “죽음에서 낯선 느낌을 제거하고, 죽음을 알고, 죽음에 익숙해지자. 다른 무엇도 죽음만큼 자주 생각하지 말자. 매 순간 죽음의 모든 양상을 상상하자. 말에서 떨어질 때, 건물 타일이 떨어질 때, 아주 살짝 바늘에 찔릴 때, 즉시 이렇게 생각하자. 지금 내가 죽는다면?” 489
“죽음은 우리가 타고난 조건이다. 우리의 일부다. 죽음에서 도망치는 건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 쪽으로 방향을 재설정해야 한다. 죽음은 우리 밖에 있는 ‘무엇’이 아니며 우리는 죽음의 희생자가 아니다. 493
죽음의 해결책은 더 긴 삶이 아니다. 절망의 해결책이 희망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죽음과 절망 모두 같은 약을 필요로 한다. 수용이다. 보부아르처럼 몽테뉴도 결국 받아들였다. 마지못한 수용이 아니라 완전하고 관대한 수용이었다. 죽음에 대한 수용이기도 했지만 삶에 대한 수용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수용이기도 했다. 자신의 긍정적 성격에 대한 수용이자(“자신을 실제보다 낮추어 말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어리석은 짓이다”) 자신의 결점에 대한 수용이었다. 497
장르소설과 순문학소설의 가장 큰 차이는 장르소설은 단 한 권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 물론 탐정추리소설을 단 한 권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마 탐정추리소설의 재미는 각 소설 간의 호응과 간섭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탐정추리소설도 무협소설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작품이 상호 연결되는 장르의 기반을 따르는데, 그 상호 연결 기반은 크고 복잡하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이 분야의 전통은 벨기에, 프랑스, 미국, 일본, 이탈리아, 스웨덴 등으로 이어졌지만 모두 다른 흐름을 형성했다. 신기한 것은 각각의 흐름이 결국 원래의 기반을 따르고, 서로를 증명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는 점이다.
코넌 도일
‘추리소설’이라는 표현은 일본에서 수입되었다. 일본에서도 원래는 없던 표현으로,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이런 유형의 소설을 ‘탐정소설’과 ‘미스테리’라고 불렀다. ‘탐정소설’과 ‘미스테리’는 모두 서양에서 왔다. ‘미스테리’는 영어의 ‘mystery’ 를 가타가나로 적은 것이고, ‘탐정소설은 영어 ‘detective story’를 일본어로 옮긴 말이다.
‘추리’라는 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 유행한 새로운 이름으로 영문으로는 적절한 표현이 없으며, 이 점 역시 일본인이 이룬 중요한 공헌이다. 일본인은 미스터리 작품에서 얻은 새로운 결론을 ‘추리’정신에 결합시켰다.
‘탐정’같은 말은 추리 소설이 기본적으로 범죄와 관련된 소재를 다루지만, 범죄를 조사하는 사람과 범죄를 조사하는 행위를 통해 범죄에 접근한다는 점을 알려 준다. 추리소설은 범죄소설이 아니다. 그러나 범죄라는 요소가 없으면 추리소설은 성립하기 어렵다. 추리 소설은 보통 하나의 범죄에서 시작된다. 추리 소설의 기원은 어째서 19세기일까? 이 시기의 유럽에서 범죄는 더 이상 개인의 일이 아닌 사회 현상이 되었기 때무닝다. 이 시기에 사람들의 시선은 ‘sin’(죄악)에서 ‘guilt(죄악감)로 옮겨 갔다. 이전에는 ‘죄’에 대한 징벌이 인간 세상의 법률이 아닌, 죽은 뒤에 하느님과 마주했을 때 받는 것이었다. 이는 기독교 전통의 핵심 개념과 근본 가치인 동시에 교회를 없어서는 안 되는 기구로 존재하게 하는 토대였다.
‘이 세상’에 있으며, 현실 세계에서 사회의 수단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인식이 바뀐 것이 19세기에 완성된 거대한 변화였다. 또한 19세기의 유렵에는 도시화가 폭넓게 일어났다.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이 친족이나 이룻과 단단한 유대를 맺지 않는 생활로 들어서면서 범죄가 발생할 여지도 늘었다. .. 도시 이주가 시작된 후 누구도 나를 모르고, 누구도 내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는 상황은 죄를 저지르고 처벌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미스터리’는 추리 소설이 성립하는 다른 조건인 ‘there is something mysterious’(뭔가 이상하다)를 알려 준다. 추리 용어로 말하자면, 소설에느 반드시 ‘수수께끼’가 있어야 한다. 소설이 시작되면 이상한 일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희귀한 일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다. 사건의 전체 혹은 일부가 일반 상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탐정’, ‘미스터리’, ‘추리’가 가리키는 세 가지 조건은 우리에게 추리소설이 무엇인지, 추리소설을 읽을 때 무엇에 신경을 써야 하는지, 나아가 추리소설을 읽기 전에 어떤 준비, 즉 ‘독자의 약속’을 해야 하는지 알려 준다.
‘장르’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해 장르소설에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와 작품을 읽는 독자 사이에 이미 약속된 특수한 사항이 있다. 장르가 만들어지면 작가와 독자는 장르의 관습에 딸 무엇을 써야 할지 무엇을 읽을지 예상한다.
소설을 읽기 전에 이런 소설에는 무엇을 읽게 되리라는 점을 알고 있는가에 있다. 그리고 작가는 소설을 쓸 때 자신의 소설을 읽을 사람이 어떤 예상과 기대를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고 가늠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장르에 초점을 맞춰 만들어진 작가와 독자 사이의 묵계다.
코넌 도일은 세심하게도 전지적 시점과 일인칭 시점 사이, 객관과 주관 사이에 놓이는 신선한 서사 방법을 발명했다. 소설의 문자오가 사건 기록은 모두 왓슨의 시점을 거친 것으로 주관적 판단과 강한 호불호가 뒤섞인 그의 정서가 독자에게 전달되어 독자의 마음에 스며든다. 이를 통해 우리는 홈스의 시건 조사와 모험 과정을 알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왓슨과 함께 경험한다. 왓슨은 우리에 가깝고, 우리처럼 평범하다. 적어도 홈스처럼 비범하지는 않다.
코넌 도일의 최대 공헌은 추리소설과 독자 사이에 합리적이고 안정된 관계 형태를 만들어 낸 데 있다. 사실이라는 환상은 소설을 둘러싸고 틀을 만들어 독자가 비정상적인 범죄와 극적인 플롯에 의심을 품거나 거부하지 못하도록 한다.
코넌 도일은 기이한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고 믿고자하는 기이한 이야기를 지어냈다.
레이먼드 챈들러
‘뽐내지 않음’의 가치관은 ‘하드보일드 맨’의 특질 가운데 하나이며, 우리가 ‘하드보일드 탐정’을 이해하고자 할 때 명심해야 할 기본이다.
‘Hard-boiled’는 보통 달걀을 익힐 때 쓰는 말로, 미국인은 이 단어를 보면 자연스럽게 아침 식사에 나오는 ‘hard-boiled egg’를 연상한다.
벽과 비교하면 ‘hard-boiled egg’는 여전히 약한 달걀일 뿐이다. 다른 점이라면 그렇게 약해 보이지 않는 척한다는 것이다. 날달걀과도 다르고 다른 일과도 다르다. ‘Hardboiled egg’는 벽에 부딪힌 순간 흰자위와 노른자위를 쏟아내 참담하게 패배한 불쌍한 모습을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벽에 대항할 수 있고 벽을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알과 비교해 ‘hard-boiled egg’는 단단하다. .. 스스로 꽤 단단하다고 여겨 이따금 벽처럼 단단한 상대에도 대항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벽 앞에서 ‘hard-boiled egg’는 여차하면 강한 척하는 달걀로 돌아갈 뿐이다.
우리가 소설의 인물이고 업무 통지를 받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에 갔는데 웬 엘리베이터의 문 앞에 안내되었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거대한 거실 같은 내부가 펼쳐진다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우리는 놀라고 당황하고 비명을 지를지도 모른다. 그러고는 당장 어떻게든 그곳을 빠져나가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달걀이지 ‘hard-boiled egg’는 아니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은 난생처음 보는 엘리베이터를 보고 몹시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어쨌든 이 세상에 거실처럼 생긴 엘리베이터도 있을 수 있다며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다른 사람은 큰 소리로 떠들 만한 일을 놀라지 않고 조용히 받아들이는 이런 태도는 ‘하드보일드 탐정’의 전통.
‘하드보일드 맨’의 인물 형상을 구축하는 데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준 인물이 잇으니 바로 헤밍웨이다. 헤밍웨이-해밋-챈들러는 명백하고도 공공연한 문학 계보를 이룬다. (새뮤얼 대실 해밋(1894~1961)은 미국 작가로 냉혹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창시자)
헤밍웨이의 독특한 소설 스타일을 가리켜 ‘빙산 이론’이라고 한다. 얼음의 질량은 물보다 가벼워 얼음덩어리를 물에 넣으면 십분의 구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십분의 일만 수면 위로 드러난다.
우리가 있는 세계, 특히 사람이 구성하는 범위는 이처럼 복잡해서 겉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안에 숨겨져 드러나지 않는 것에 비해 훨씬 적다. 비유해 보자면, 소설가 프루스트는 잠수부다. 그는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특이한 잠수 실력으로 깊은 바다까지 잠수해 여기저기를 탐색하여 구십 퍼센트의 빙산이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고, 뭍으로 올라와 우리에게 묘사해 준다.
헤밍웨이의 작품은 ‘빙산’을 형용된다. 그가 오로지 수면에 드러나 보이는 부분만을 썼기 때문이다.
헤밍웨이의 대단한 성취는 모더니즘 소설의 세례를 거친 시대에도 겉으로 보이는 행위만 쓰고, 복잡한 표현 없이, 심리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으면소도 독자를 끌어들이고 비평가를 설득하는 소설 작품을 썼다는 데 있다. 헤밍웨이는 독자에게 이 사람이 무엇을 했다고만 알려줄 뿐 왜 그렇게 했는지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서사와 대구(對句)를 골라 내용을 한정하는 독특한 재능이 있어서, 독자가 ‘이 일은 이게 다가 아닐 거야, 그저 이렇지만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 점이 중요하다.
그는 독자에게 무엇을 알려 주기보다 독자 스스로 추측하고 보충하도록 자극한다. 헤밍웨이가 어떤 현상의 일부를 설명하면, 그 뒤에 그가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고 느낀 독자가 흥미로운 눈빛을 하며 내용을 상상해 채운다. 그렇다고 해서 헤밍웨이의 소설이 조이스나 프루스트의 소설보다 쓰기 쉽다는 말은 아니다.
헤밍웨이의 화자는 보통 ‘말수가 적다’ 우리는 그들이 말하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렬히 느끼게 된다. 그들은 말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차라리 숨기려고 한다. 우리나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비밀을 가진 사람이다. 소설을 읽어 나가면서 우리는 그의 비밀에 호기심을 느끼는 한편, 그가 말한 내용에 자연스레 의심을 품게 된다.
헤밍웨이는 ‘빙산’ 유형의 화자, 즉 ‘하드보일드 맨’에게 그가 본 세계를 말하게 하고, 자연스럽게 독자의 마음에 낯선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헤밍웨이의 펜 아래에서 만들어진 ‘하드보일드 맨’의 형상은 훗날 해밋과 챈들러에게 영향을 주었고, 두 사람은 거드름을 피우지 않으며 무슨 일에든 놀라지 않는 캐릭터를 그렸다. 이 캐릭터들에게는 항상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그는 놀라는 일이 없다. 우리라면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칠 법한 일이 일어나도, 심지어 자기가 얻어맞아 쓰러지는 일이 있어도 그의 반응은 한결같다. ‘세상은 늘 그렇지 항상 그래. 이런 일이 터지는 걸 피할 수 없어.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면 호들갑을 떨어도 소용없잖아.’ 언제나 이런 태도와 말투다. 그들은 뽐내지도 않는다.
챈들러는 말로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일곱 권 썼는데, 이 일곱 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말로의 말투와 그가 사건을 설명하는 습관에 익숙해지지만 그의 삶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일을 자세히 알기는 꽤 어렵다.
그는 분명히 다양한 사건과 풍랑을 거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하고 싶어 하지 않고, 아무리 이상하고 곤란한 일을 마나도 늘 ‘이게 뭐 말할 만한 가치가 있어?’ 하는 태도를 유지한다.
‘하드보일드 탐정’을 이해하는 방식 가운데 한 가지는 셜록 홈스와 비교하는 것이다. 첫째, 하드보일드 탐정은 홈스처럼 똑똑하지 않다. .. 홈스는 우리가 모르는 일을 과학적으로 일사불란하고 의심의 여지없이 풀어 보여 준다. .. 홈스는 과학의 이데아를 대표하며, 과학 추리의 능력으로 안개 속을 헤치고 진상을 드러낸다. .. 홈스는 완벽하며, 사실을 복원해 드러낼 수 있다. 그는 19세기 과학의 꿈을 대표한다. 하드보일드 탐정은 이런 조건이 없다. 조금도 과학적이지 않다. 우리는 그들이 물증을 수집하고 물건을 검사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한다. 그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관찰하고 조사하면서 수수께끼를 풀고자 동분서주한다. 둘째, 그들은 홈스처럼 범죄자보다 위에, 심지어 영국 경찰청의 경감 위에 있지 않다. 난제에 부딪힌 영국 경찰청의 경감이 막다른 길에 이르러 공손히 협조를 청하고, 홈스는 그들을 도와 답을 찾아낸다. 하지만 챈들러가 그리는 세계에서 경찰은 사립탄정을 막고 오도하며 이용하기도 한다. .. 챈들러의 말로는 운이 없다. 미녀를 정복하는 것도 아니면서 매번 미녀를 만나면 일이 꼬인다. 셋째, 하드보일드 탐정 곁에는 숭배하는 마음으로 사건 해결 과정을 하나하나 기록하는 왓슨이 없다. 챈들러가 쓴 말로 시리지는 모두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된다. 홈스는 하나의 현상이고 놀라운 광경이다. 우리는 왓슨의 눈을 통해 이 놀라운 광경을 우러러본다. 왓슨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특수한 관점을 제공하는. .. 말로의 일인칭 서술을 읽으면서 우리는 말로의 주관과 편견을 피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챈들러가 강조하려는 내용은 이렇다. 상상의 문학, 고상한 문학은 인간 세상에서 벗어난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쓸 수 있지만 만약 실제 거리, 실제 세상을 쓰려고 한다면 다른 전략을 써야 하고 다른 주인공을 써야 한다. 이 주인공은 평범하되 평범하지 않아야 하며, 진실한 동시에 이상적이어야 한다.
헤밍웨이에서 해밋과 챈들러까지, 그들은 ‘영웅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고민했다. 챈들러는 특히 진지하게 탐색했다. ‘지금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영웅이란 무엇인가?’
말로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반드시 평범한 사람이어야 우리와의 선명한 연결이 끊어지지 않아 그에게 이렁난 일을 어떤 머나먼 허구의 동화나 환상으로 보지 않을 수 있다.
홈스는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탐정이다. 범인이나 사건을 일으킨 사람과 섞여 들어가는 일이 없다. 말로 같은 하드보일드 탐정은 그렇지 않다. 그가 사건을 조사하면서 보고 만나는 용의자는 그 자신과 절대적인 차이가 없다. 말로는 그들과 함께 할리우드 거리에 살고 있고, 그들과 밀접한 상호 관계를 반복해 맺으며 사건을 조사한다. 그가 특히 똑똑해서 범인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와 범인, 범인일지도 모르는 모든 사람 사이에 ‘지대지(地對地, 땅 위에서 땅 위로 향함)’의 가까움과 익숙함이 있기 때문이다.
말로의 이야기는 범인을 잡아서 해결되는 내용이 적다. 전체 사건의 맥락을 분명히 하고, 사건의 자초지종을 밝히는 일이 나쁜 일을 벌인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챈들러는 말로가 ‘평범하게 좋은 사람’이기를 바랐을 뿐이다. 말로에게는 좋은 사람이 보통 갖고 있는 기질이 없다. 그는 사람을 해치지 않고, 일부러 남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것을 갖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가 가진 원칙의 마지노선은 상황이 다르다고 바뀌지 않는다.
사립 탐정인 말로는 사건이 얼마나 위험하든 조사가 얼마나 어렵든 사건에 얼마나 많은 이익이 걸려 있든 언제나 고객에게 하루에 이십오 달러를 지급하라고, 추가로 필요한 금액은 결산 때 보고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하는 동안 그의 손에서 얼마가 나가든 일당 이십오 달러만 받는다. 사건을 맡기로 하면, 그는 나주엥 어떤 변수가 나타나도 포기하지 않는다. 의뢰인이 죽어서 일당 이십오 달러는 받을 수 없을 것 같더라도 일을 완수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시 ㄴ카카가 바로 우리 이웃에 산다. 그녀의 차는 매일 우리 집 앞으로 지나간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본래 이런 반응을 보일 법한 우리는 말로의 눈을 거침으로써 냉정해질 수밖에 없다. 그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매일 지나가야 하는 길을 오가며, 이웃집 문 앞을 지날 뿐이다. 놀랄 일이 뭐가 있는가. ‘그럴 줄 알았어.’ ‘그렇군. 이제 잘 알겠다.’ 더욱 이상한 일은 하드보일드 맨은 대단히 좋은 일과 대단히 나쁜 일을 한결같이 이런 태도로 대한다는 점이다.
추리소설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범죄 행위를 추리하여 누가 어떤 방법으로 어떤 나쁜 행동을 했는지 밝히는 종류, 다른 하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범죄 행위 뒤에 있는 동기를 추리하고 누군가가 무엇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범죄를 저질렀는가 묻는 종류다. 챈들러의 말로 시리즈는 분명 후자에 속한다. 소설은 말로의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지만 말로가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에 대한 정보는 한정된다. 말로는 자신의 추리를 거의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대부분 조사 행위, 그러니까 어떤 곳으로 달려가 이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다거나 저기로 가서 저 사람에게 얻어맞아 기절했다거나 이상한 곳에서 아름다운 여자에게 끌렸다는 정도로, 이런 조사가 그에게 어떤 단서나 답을 주었는지는 마음속에 숨긴 채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말로 곁에는 그에게 따져 묻거나 설명을 기다리는 왓슨이 없다.
그는 말로가 만나는 일들을 독자가 따라가다 마지막에 스스로 단서를 이어 추리 과정을 풀길 기대한다. 이는 어쩌면 다른 각도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런 글쓰기는 챈들러의 소설에서 사건을 어떻게 저지르고 숨겼는지 같은 경과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할리우드 감독이 챈들러의 소설을 영화화허려고 시나리오 작가를 찾아 각색하면서 챈들러에게 협조를 구했다. 시나리오 작업이 절반 정도 이르렀을 때 작가가챈들러를 찾아와 난처해하며 물었다. “차 안에서 죽은 인물을 도대체 누가 죽인 건지 아무래도 알 수가 없습니다.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챈들러가 딱 잘라 대답했다. “못합니다. 저도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움베르토 에코
에코의 출판계 친구는 ‘아마추어 탐정소설’ 시리즈를 출판해 이탈리아 독자에게 불붙은 추리 호기심을 만족시켜 줄 계획이었다. ‘아마추어’는 소설의 탐정이 아마추어라는 뜻이 아니라 소설을 쓴 저자가 아마추어라는 뜻이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에코가 말했듯 이탈리아에 거론할 만한 탐정소설 전문 작가가 애초에 없기 때문.
그들이 에코를 찾아간 이유는 그가 평소 탐정소설을 즐겨 읽어 자기 나름의 생각과 의견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제안을 들은 에코의 첫 반응은 이랬다. 작고 얇은 탐정소설 같은 걸 어디다 쓰게? 탐정소설을 쓰려면 오백 쪽은 써야지, 작고 얇은 양에 탐정추리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 에코의 말에 출판계 친구는 재미있는 여극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에코를 부추겼다. 그럼 어디 한번 오백 쪽짜리 탐정추리소설을 써봐! 그리하여 ‘살해된 교황’ 붐위기에 고무된 에코는 정말로 썼고, 정말로 오백 쪽을 썼고, 아니 오백 쪽으로도 다 담지 못한 대작을 썼다.
<장미의 이름>을 쓰기 전에 에코는 서구 학계와 문화계에 약간 이름 있는 기호학자이자 중세사가였다.
탐정추리소설을 14세기인 1320년대로 설정했다. 이 시기는 기독교회 역사상 ‘대분열’이 재난이 일어났던 시기다. 로마와 아비뇽에 각각 교황이 나타나 서로 싸우는 기괴한 상황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대였다.
에코는 자신의 풍부한 중세사 지식을 소설 속에 한껏 써먹을 수 있었다.
에코는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확실히 과시할 만한 재료가 들어 있다. 에코는 우리가 책을 읽는 동안 그의 박학을 알아주길 바란다.
우리는 책을 읽는 내내 에코가 ‘이거 압니까? 이거 모르지요?’하고 말하는 걸 분명하게 느낀다. .. 이러한 박학이 중세 역사의 세세한 요소를 쌓아 우리의 눈을 어지럽히는 드러난 과시라면, 숨은 과시도 있다. 그는 드러내지 않은 채 추리소설 전통의 ‘상호 텍스트’(intertextual)를 암시하는 내용을 엮었다. .. 숨은 과시는, 잊지 마시라, 그가 열정적인 미스터리 팬이라는 사실이다.
<장미의 이름>을 쓸 무렵 기호학은 서구 학계에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기호학과 밀접하게 호응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도 나타났다. 기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연결점은 기표와 기의의 경계를 새롭게 정의하여, 기표와 기의를 우연하고 인위적이며 사회적으로 약속된 관계로 환원하는 데 있다.
빈 것은 채우고 찬 것은 비워, 우리가 기호에 대해 당연히 연상하는 것을 부수고 뒤집기.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 사고다.
에코는 난이도가 높은 소설 내용을 설정했다. 그는 지금 우리 시대의 이런 환경에서는 절대 발생할 리 없는 살인 사건을 쓰고자 했고, 그러면서도 우리를 충분히 이해시키고자 했다. .. 그 시대의 신앙 분위기와 조직 구조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장미의 이름>은 역사가 들어간 추리소설도 아니고, 추리가 들어간 역사소설도 아닌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역사추리소설이다. 그 추리는 특수한 역사 배경 아래에서만 성립되는데, 뒤집어 말하면 시대의 특수한 믿음과 풍습이 살인 사건과 추리를 통해 입체적으로 드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는 인상을 남긴다.
미야베 미유키
독자는 소설의 등장인물을 통해 이런 사람은 이렇게 살아가고,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그의 생활에서는 이런 정류의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다가가서 보고 느끼고 싶어 한다.
진정한 허구란 거짓의,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내 머리로 조종하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신으로 변신해 현실에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완전한 이해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본격파 추리소설.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를 설정하고 모든 단서를 펼쳐 독자에게 자신의 추리 능력을 시험하게 한다는 본격파의 가정은 게임 혹은 시합의 개념에 가깝다. .. 마지막에 수수께끼를 풀고 사건을 해결하는 명탐정은? 그의 기능은 참고서 뒷면에 붙어 있는 해답에 비교적 가깝다. 독자가 자신이 추리한 결과가 맞았는지 틀렸는지 확인하도록 해 주고 틀렸다면 어디가 틀렸는지 알려 준다.
추리소설의 스펙트럼에는 본격파와 정반대의 자리에선 사회파가 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 사회파 추리의 개조(開祖)이자 일본 사회파 추리에서 오늘날까지 추격당해 본 적이 없는 이정표이기도 하다. .. 마쓰모토 세이토는 전쟁(2차대전) 후 일본의 혼란과 모색 사이에서 일어난 사람으로 그것을 깊이 관찰하고 느꼈으며, 사회파 추리소설을 창조해 시대가 그에게 준 것에 구체적으로 보답했다. .. 그는 추리를 미끼로 삼아 이후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엄숙한 사회 메시지를 전하고, 독자에게 ‘정의’란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고 사고하도록 요청하고 심지어 강요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펜 한 자루에 의지ㅣ해 홀로 매일 성실하게 평균 구천 자의 원고를 써 소설로 내며 독자에게 반복해 물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동기로 이런 죄를 지었다면, 당신은 어떻세 보시겠으며 어떻게 판단하시겠습니까?’
본격파에서 범인을 찾으면 범인은 그저 범인일 뿐이지만, 마쓰모토 세이초에게 범인을 찾는 일은 ‘이 사람은 어떻게 범인이 되었는가?’라는 또 다른 의혹의 시작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 문제에 관심이 없을 수 있으며, 어떻게 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모방범>(미야베 미유키)의 서사 구조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제1부에는 범인과 경ㅊ찰과 사회의 수수께끼(mystery)가 완전하게 펼쳐진다. .. 제2부의 시작에서 그는 추리소설의 의혹을 다루는 방식을 철저하게 위반하는 글쓰기로, 범인을 등장시키고 범인의 자리에 서서 전지적 시점으로 다시 한 번 사건을 말한다. 그러니까 미야베 미유키는 제1부에서 경찰, 피해자, 방관자 들이 모르고, 그래서 간절히 간구하던 정보인 범인은 누구인가, 어떻게 사건을 저질렀는가, 왜 사건을 일으켰는가 그리고 그 과정엣ㅓ 그들은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빠짐없이 우리에게 알려 준다. .. 제2부에서 다시 말하는 것은 그저 ‘어떻게’를 설명할 뿐이다. 왜 방송국에 전화를 했을까? 왜 먼저 건 전화와 나중에 건 전화의 말투가 달랐을까? 제1부에 나타났던 일들이 제2부에서 반복되면서 ‘왜’를 설명한다.
추리소설을 소개할 때 가장 어렵고 금기시되는 점은 절대로 핵심이 되는 사건을 알리지 않는 것인데, 독자가 수수께끼를 풀 재미를 부숴서는 안 되지 때문이다. 그러나 <모방범>에는 이런 문제가 없다.
<모방범>에서는 도리어 탐ㅈ덩이 오리무중에 있고, 독자는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뿐 아니라 그들이 사건을 저질렀을 때부터 연막 작전을 쓰기까지 모든 단계를 하나하나 알고 있다.
다카이 가즈아키라는 등장인물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해 이야기 속에 배치했다. 다카이 가즈아키가 있어 <모방범>은 단순히 추리소설에 그치지 않고 심리소설이자 나아가 사회소설이 될 수 있었다.
제3부의 의혹은 우리의 독서에 던지는 시험이다. 즉 정의에 대한 의혹이다.
우리는 나중에 정의가 실현되는지에 관심이 있다.
제2부에서 구리하시 히로미와 함께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줄곧 구리하시 히로미가 어릴 때 지어 준 별명 ‘피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제3부에 이르러서야 아미카와 고이치라는 본명이 나온다.
수수께끼를 푸는 의혹과 정의에 대한 의혹은 여기에서 하나가 된다. (우리 독자가 아니라)오로지 그들이 진상에 다가가고 드러낼 방법을 찾아야만 다카이 가즈아키의 누명과 억울함을 벗길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43명의 등장인물 가운데 보조인물이 없다. .. 독자는 43명의 등장인물의 주관적인 시야로 거의 들어가다시피 하며, 소설은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두려워하는지, 무엇에 분노하는지, 또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고 분노하는지 보여 준다.
미야베 미유키는 소설에 추리가 아닌 주제를 더해 죄와 벌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이해와 소통을 탐구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모방범>의 놀라운 특색은 이 작품이 주인공 없는 소설, 특히 추리하는 주인공이 없는 소설이라는 점이다.
초기에는 홈스처럼 우리보다 백배는 똑똑한 사람이 주인공을 맡았다. 나중에는 말로처럼 우리보다 백배는 운이 없고 백배는 고통스러운 사람이 주인공을 맡았다. 또는 달리 선택의 여지없이 사건 조사와 추리가 자신의 일인 형사, 검사 혹은 검시관이 주인공을 맡기도 한다. .. <모방범>에는 이런 주인공이 없다.
‘절대악’을 대표하는 아미카와 고이치에 대해 미야베 미유키는 그가 대체 어떻게 자랐는지, 성장하면서 어떤 일을 당했기에 ‘절대악’을 믿고 추구하게 되었는지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소설의 기교는 표현이나 묘사뿐 아니라 독자의 반응, 즉 독자가 누구에게 이입할지, 누구를 반대할지, 누구를 탓하고 이해할지를 예상하고 조종한다. 소설 기법에서 오랜 세워에 걸쳐 검증된 하나의 원칙은 한 사람의 어린 시절에 대해 쓰면, 그 사람은 용서할 수 없는 나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어린 시절, 아이였을 때에는 누구나 천진하고 스스로를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은 한 사람의 나쁜 성향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때이고, 천진이 악으로 변하는 이유와 요소가 나타나는 때이다. 이러한 이유와 요소가 그의 책임에 한계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그의 나쁜 행동이 그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이해하고 나면 그를 멸시하고 미워할 수 없게 된다. 미야베 미유키는 일부러 독자가 아미카와 고이치의 어린 시절을 이해하도록 두지 않았다. 어떤 악은 일정 정도에 이르고, 일정 정도를 넘어서면 이런 방식으로 해설될 수 없다. 해석할 수 없는게 아니라 도덕적으로 해석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해석하지 않음은 하나의 가치 태도다. 악에는 반드시 인과관계가 있지만 어떤 행위의 한계선은 해석과 합리화가 섞이는 것을 절대 거부하도록 한다. 우리가 해석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란 해석을 하면 이 사건 나름의 논리가 가진 의미를 따라갈 수밖에 없고, 악에 대한 우리의 절대적인 경아고가 혐오와 비난 또한 감소하게 된다. 소설에는 도덕적 책임이 있고, 적어도 소설가로서 미야베 미유키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런 도덕적 입장을 선택했다.
자유로운 독서토론 모임처럼 효율적인 지식축적방법은 없다. 특히 권위 있으면서도 개방적인 중심축이 있을 때는 그런 모임은 아름답게 효율적으로 굴러가게 마련이다. 18
현대사의 많은 난제들을 풀어낼 수 있는 시각을 갖지 못한 자는 사상을 구성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45
여순민중항쟁은 1948년 10월 19일 밤부터 시작하여 10월 27일, 그러니까 8일만에 여수시가 불타면서 일단 진압되었으나, 여수 제14연대 군인들을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이 지리산 등지로 피신하여 저항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공비”니 “빨갱이”이 “빨치산”이니 “반란군”이니 하는 말로 불렀다. 따라서 지ㅣ리산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단지 큰 산 아래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80살 생일기념으로 지리산입산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6년 6개월 동안(정확하게는 1948. 10. 19. ~ 1955. 4. 1. 총 6년 5개월 13일) 쌩피를 보고 살아야만 했다. 낮에는 토벌군의 총에 죽고 밤에는 산사람의 위협에 시달리고 …… 106
제3장 해방정국의 이해
역사는 이중주로 읽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해방을 기뻐한 사람이 더 많았을까? 좆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았을까? 민중 대다수는 물론 기뻐했다 그러나 민중을 지배하고 살았던 지배계급 중에는 해방을 기뻐한 사람보다 해방을 저주한 사람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상기해야 한다. .. 해방을 저주한 사람들! 해방을 슬퍼한 사람들! 해방 때문에 좆됐다고, 패가망신했다고 통곡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역사가 진정 이 민족의 역사였고, 해방 후 오늘까지 진행되어온 불행한 역사를 야기시킨 주체세력이었다. 114
해방의 아이러니 .. 첫째는 "해방(Emancipation)"이 우리 민족에게 "독립(Independence)"을 선물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는 해방 그 자체가 불행하게도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량에 의하여 독자적으로 수행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 셋째로, 해방은 갑작스러운 "권력의 공백"을 초래하였고, 이 공백을 메워가는 세력들의 새로운 전쟁을 야기시켰다. 넷째로, 해방은 이념적인 주체가 확실치 않았기 때문에, 우리 민족에게 이념의 갈등과 혼란을 선물했다. 114-115
여운형을 알아야, "인민위원회"가 이해된다. 나의 친구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추구하면서 결론적으로 이런 말을 했다 : "한국전쟁의 기원은 결국 미군정의 인민위원회의 탄압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126
일제 강점기의 문헌에 거의 "빨갱이"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김득중이라는 사학자(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가 <빨갱이의 찬생 - 여순사건과 반공국가의 형성>이라는 사건의 추이를 상세히 보고한 좋은 책을 썼는데, 책제목이 말하고 있는 것은 결국 "빨갱이"라는 말 자체가 여순민중항쟁을 계기로 국민의 심상에 공포스럽고 저주스러운 그 무엇으로 박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매우 중요한 인식론적 과제상황을 토축시킨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상당부분의 보캐블러리(vocabulary)(어휘, 용어)가 이미 국가 권력에 의하여 왜곡된 형태로 의미부여가 된 그인식체계 속에서 활용되고 있고, 그것이 마치 보편주의적 정론인 것처럼 과거사의 인식을 도배질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개념의 오염, 그리고 그 오염의 확산, 그것은 진정코 우리가 역사인식에 있어서 매우 조심해야 할 과제상황이다. 128
"개념의 오염"이라고 부르는 인식론적 편견에 관한 것이다. "빨갱이"라는 말처럼, "인민(人民)"이라는 말만 붙게 되면 우리는 "좌빨"이니 "좌익"이니 "공산주의자"니 하는 터무니없는 망념, 온갖 부정적인 의미규정을 부여하게 된다. 그러나 해방 후 공간에서 "인민(因民)"이라는 말은 전혀 그러한 색조를 가진 말이 아니었다. "인민"은 조선시대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장 흔한 일상적 개념에 불과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대한민국 헌법의 원조, 1919년 4월 11일에 제정)에도 제3조는 이렇게 되어 있다. :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급(及)빈부의 계급이 무(無)하고 일체 평등임." "인민"이라는 말이 계속 쓰였다. 130
"인민위원회"는 이념적 색깔을 가진 특별한 조직체가 아니라 자생적인 그래스루츠의 "보통사람위원회"였을 뿐이다. 이 인민위원회를 빨갱이들로 규정하 것은 "한민당"의 수구꼴통들이었다. 131
이승만은 누구인가? 젊은 날의 그는 외모가 멋이 있었고 영어를 잘했다. 이승만이 외교활동노선의 명분을 견지하면서도 실제적으로 독립운동이나 여하한 진실한 투쟁과 무관한 인간이 된 것은, 일차적으로 상해임시정부 인간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아니, 상해임정뿐이 아니었다. 3.1독립만세의거 이후에 사방에서 성립한 임시정부들이 모두 이승만을 국무총리, 국방총리, 집정관총재 등의 이름으로 추대하엿던 것이다. 이에 재빠르게 이승만은 미국 워싱턴D.C.에서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의 사무실으 열고, 남이 믿거나 말거나, "대한공화국"의 "대통령"이라는 이름을 마구사용한다. 영어로는 "Dr. Syngman Rhee, The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라고 했는데. 사실 그때 ㅇ모든 임시정부에는 대통령제가 없었고, 정부는 어디까지나 임시정부였으아 이미 "임시"라는 말을 떼어버리고 "대한공화국의 대통령"이라는 칭호로서 세계 국가원수들과 파리강화회담의 장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을 발송했다.(시카고 한인교포들이 만들어 유포시킨 홍보용 컬러우편엽서에는 그의 한성감옥 죄수사진과 박사학위 수여모를 쓴 두 개의 사진을 걸어놓고 그 사이에 간단한 이력을 써놓았다 : 1894년 투옥됨, 1904년 석방됨, 1905년 미국에 옴, 1909년 하바드에서 석사 받음, 1910년 프린스턴에서 박사 받음, 1919년 대통령에 당선됨(Elected President). 틀린 것은 없다 하겠으나 이승만의 교활성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 유물이라 할 것이다.) 133-134
상해에서 이승만의 여러 가지 행태를 분석하고 분개한 단재 신채호의 일갈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이는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 이놈은 아직 우리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단재는 이승만의 외교노선이 아무런 진실성이 없는 방편주의에 불과한 장난임을 깨닫고 임정 자체를 포기하고 북경으로 고고하게 떠나가고 만다. 이승만은 실제로 독립이 아닌 “위임통치”를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134-135
142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이승만을 “평생을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운 조선인”이라 소개했고, 또 “위대한 조선의 지도자”라고 명명했다. 하지의 찬사를 받으며 무대에 오른 70살의 노인이 바로 이승만이었다. “이번에 내가 매국에서 온 것은 한 시민으로, 한 평민으로 온 것입니다. 나는 한 평민의 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정부의 책임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며, 높은 지위와 권세있는 자리보다는 자유를 나는 더 사랑합니다. ..” 진실로 이승만은 “거룩한 사기꾼(a holy impostor)”이다. 전혀 자기 마음에 없는 이야기를 방편에 따라 마구 뇌까리는 데 아무런 죄의식이 없다. 150-151
권력의 자리를 전혀 탐내지 않겠다고 공언의 첫 성을 발한 이승만처럼 권좌를 탐하여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인 자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 151
여운형은 해방 1년 전부터 건국동맹을 만들고 해방의 그날 건준을 만들었다. .. 통 크기로 유명하고 호쾌한 성품의 몽양은 미군이 이 땅의 주권자로서 입성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미군정이 시작되기 전에 그들을 맞이하는 민족주체가 정부형태(a gonernment form)로 있어야만 하겠다고 생각하여, 미군 도착 이틀 전인 1945년 9월 6일 서울 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소집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해체하고 그것을 모태 삼아 “조선인민공화국”(빨갱이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조선사람공화국의 한문표기일 뿐이다)을 선포한다. 154-155
자생적으로 발전한 전국의 인민위원회는 “건준”과 연계되어 있었고, 여운형이라는 인물의 애국심, 사상적 포용성, 사심 없는 헌신, 기민한 대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따라서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일시에 전국의 인민위원회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지방정부조직으로 승격되고, 보다 조직적으로 세련화된다. 바로 이 시점이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의 출발점이다. 155
건준을 인공으로 바꾼 것은 민족주체적 시각, 애국주의적,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매우 정당한 행동이다. 그러나 정치역학이나 현실적 프래그머티즘의 득실로 논하자면 그것은 몽양의 큰 실수였다. “준비위원회(Preparation Committee)”는 미군정 하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지만,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은 살아남을 수 없다.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할 수 없다. 156
미군정은 10월 10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정부로서 부정하고 불법단체로 규정해버렸다. .. 여운형의 영향력이 갑자기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존재감마저 하락한다. 해방정국에서 하락의 끝은 “죽음”이다. 승만 리는 정적에 대한 처리방법으로 “죽음”이 가장 완벽한 묘방이라는 것을 터득해 가고 있었다. 여운형의 혜화동로타리 피습은 12번째 테러였다. 여운형은 12번째의 테러를 피하지 못했다. 1947년 8월 3일, 여운형의 영결식에는 60만 명의 추모인파가 몰렸다. 광복 이후 최다인파였다. 157
여운형의 몰락은 궁극적으로 4.3, 여순과 관련되는데 그 인과관계를 우리는 명료히 알아야만 한다. 조선인민공화국의 불법화는 결국 그 지방조직이 되어버린 “인민위원회”의 불법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민위원회는 본시 자생적인 민중의 요구가 결집된 것이고, 운영도 민주적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그것이 하루아침에 불법단체가 된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려운 일이 뿐아니라, 해방의 기쁨에 도취되어 새로운 나라의 건설에 희망을 품었던 지방의 민중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좌절이었다. 더군 한 나라 이북에서는 인민위원회가 격려되고 발전되어 갔을 뿐 아니라, 1946년 2월에는 최고권력기관으로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되어 모든 지방 인민위원회가 힘차게 사회개혁을 주도해 나가고 있는 그 정황과 비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57-158
백범과 몽양이 합칠 수 없었던 가장 단순한 이유는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의 모습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요즘의 언어로 말하면 백범은 우편향이었고, 몽양은 좌편향이었다. 백범은 별다른 이론이 없이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라는 외형을 동경하였고, 몽양은 평등한 인민(사람)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이념이나 사회주의이념이나 다양한 종교적 신념을 포섭하는 보다 열린 생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도 확고한 정치철학이론의 체계를 구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백범은 실제로 요즈음 말로 하면 “우익꼴통”에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우리가 그를 “국부(國父)”로서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평생을 조선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하자 없이 헌신했기 때문이고, 연세대 총장 안세희의 사촌 형인 안두희에 의하여 암살될 때까지 오로지 남한과 북한의 분열, 즉 단독정부수립의 저지를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민족주의적 행동가로서의 그의 위상에는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맹목적인 “우파성향”은 “신탁통치”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가짜뉴스쇼”를 국민들이 받아들이게 만들고, 우리 역사의 진로를 혼탁하게 만든 죄업을 낳았다. 164
신탁통치와 관련하여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찬탁 반탁의 문제가 우리ㄴ라 이념적 갈등의 알파 포인트가 되었으며, 좌우라는 의시경태의 원형이 되었다는 데 있다. 찬탁이 곧 좌익을 의미했고, 반탁이 곧 우익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서 좌익 우익이 우리나라에서는 사상신념구조에 대한 상이점으로 생격난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신탁통치를 둘러싼 의견대립의 문제로써 형성된 관념이었다는 것이다. 166
166
“신탁(信託)”이란 문자 그대로는 “믿고 맡긴다”는 뜻이다. 167
171
모스크바삼상회의가 계속되고 있던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는 제1면 제목을 이와 같이 뽑았다. “소련은 신탁통치주장 소련의 구실은 삼팔선분할점령 미국은 즉시독립주장” 이것은 이 자체만으로 분석해도 엄중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이 헤드라인은 마치 문제의 핵심이 “신탁통치안”이며, 이 신탁통치안의 실내용은38선 중심의 분할점령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문제의핵심인 남·북이단 "하나의” “임시조선민주정부"를 설립한다는 테제를완전히 빼버린 것이다. 그리고 마치 신탁통치안을 놓고 미국과 소련이대립하고 있는 인상을 주고있는 것이다. 소련이 신탁통치안을 제시했고,미국은 그러한 신탁통치안을 반대했으며 그 대신 "즉시독립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소에게 조선의 "즉시독립"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있는 카드가 아니었다. 삼상회의에서 얘기된 적도 없는 내용이었다. 완벽한오보였다. 아니 “오보”라기보다는 의도된 대중선동이었다. “신탁통치안”은 오히려 미국이 제시한 것이다. 소련은 본시 조선에 대하여 "직접통치"라는 발상을 근원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토지개혁이나 계급혁명을 통한 사회주의적 유대감을 더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따위 신탁통치라는 발상에 관심이 없었다. 소련은 신탁에 관한 미국의 제안에 대해 신탁이 빨리 종결될수록 좋으며, 최장 5년을 넘어서는아니 된다는 한도를 제시했다. 그러니까 『동아일보』의 보도는 외신의 오보에 의거했다고는 하나(외신 그 자체가 불확실한 것으로 판정되었다) 실상을완전히 반대로 전환시켜 국민들에게 반소 · 반공의 분위기를 조성하려는의도에서 선동적으로 1면에 등장시킨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동아일보가 한민당의 기관지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171-172
인공의 성립 때문에 평소에 함께 할 수 없었던 모든 우파세력들이 광범위하게 연합하여 최대규모의 연합보수우익정당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민주당, 즉 한민당이었다. .. 한민당의 창당목표 그자체가 “조선인민공화국의 타도”였다. 그런데 한민당은 겉으로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지주와 친일파세력이 그 근본기층세력이었기 때문에 민중들로부터 지지기반이 거의 전무했다. 발기인들이 모여 장구 치고 성대한 척 한들 그것은 민초 위를 스치를 구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이 고육지책으로 내건 또 하나의 행동 강령이 “중경임시정부의 적통성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한민당은 이로써 민족주의진영의 적통성을 부여받으려 했던 것이다. 본시 우파라는 것은 민족주의와 결합하여야만 그 존재성을 보장 받는다. 현재 대한민국의 우파들은 민족주의조차 없다. 174
179
제4장 제주 4.3
폭력은 국가폭력보다 더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고 처절한 것은 없다. 인간은 모여 살면서 결국 국가를 만들었고 국가에 일단 소속된 국민들은 끊임없이 국가의 폭력화의위험성에 시달린다. 결국 민주(Democracy)라는 것도 알고 보면 얼마나 국민들이 효율적으로 국가폭력을 방지할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이다. 복지라는 것은 코스메틱이고 더 본질적인 국가의 속성은 폭력이다. 이 폭력의 다양한 형태를 우리는 제주도라는 무대 위에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201
제주사람들은 일제강점기로부터 “키미가요마루”라 부르지 않고 “군대환”이라고 불렀다 한다. 군대환은 그야말로 제주도 사람들에 새로운 코스모스(cosmos)를 선사한 레바이아탄(Leviathan, 거대한 것)이었다. 205
군대환의 정원은 36명이었는데, 항시 정원의 2배 가까이 탔다고 한다. 그리고 매달 2번 항해했으니 상당한 인구가 이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6
일본은 이미 19세기 말엽 “자유민권운동”이 발발하여 민주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각종의 민권의식이 조직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제주도민은 오오사카 지역에서 살면서 이러한 선진문명의 훈도를 받았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 정국에 있어서 가장 선진적 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가장 단합된 조직적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역사적 지정학적 조건을 갖춘 민중이 바로 제주민중이었다는 것이다ㅏ. 그런데 이쪽 대륙에서는 제주도를 외딴 섬으로, 문화의식이 낮은 곳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제주도는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도 유족하며, 교육적으로도 선진문물을 흡수하여 깨어 있었고, 국제적 감각이 있는 문화를 유지했다. 209
해방 후 갑자기 외부에서 6만 명의 인구가 제주도로 유입되었는데, 일본에서 이미 조직적인 조합운동을 해본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을 “좌익”이라는 이름으로만 부를 수는 없다. 군정의 정보요원으로 근무했던 그랜트 미드(grant Meade)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제주도인민위원회는 모든 면에서 제주도에서의 유일한 당이었고 유일한 정부였다.” .. 미드는 또 이런 말을 했다. “양자간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화합이나 타협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지역의 공적인 평화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인민위원회의 모든 요구를 받아ㅏ들이거나, 강력하게 그들을 거부하고 모든 래디칼 분자들을 분쇄시키는 방법밖에는 없다. 중간의 어설픈 길은 없다.” 210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제주시 북국민학교에서 열렸다. 이날 제주 북국민학교에는 제주읍 애월면 조천면에서 주민 3만 명이 모임.. 새나라, 새세상, 새질서를 꿈꾸었던 사람들, 환희와 희망 속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에게 들이닥친 미군정이라는 전혀 이질적인 외재적 통치체계는 그들에게 절망감만 안겨주었던 것이다. 211
오후2시에 관덕정 뒤편에 위치한 북국민학교에서는 식이 끝나자 가두 시위로 연결되었다. 시위대가 관덕정 서쪽으로 빠져나갈 즈음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어 다치는 사태가 발생했다. .. 다친 어린애에게 사과하는 제스쳐라도 하기는 커녕, 몰려드는 사람들을 짓밟을 듯이 말 위에서 거만하게 거동하는 꼬라지를 본 민중은 성이났다. 흥분한 관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자 관덕정 광장 앞에 있던 제주경찰서 망루에서 미군정경찰(당시는 대한민국 수립 전이다)이 관중들을 향해 총을 쏜것이다. 212
순식간에 민간인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당했다. 이들 가운데는 15세 국민학생과 젖먹이 아이를 가슴에 안은 채 피살된 여인도 있었는데, 더욱 가슴 아픈 사실은 죽은 이들이 모두 등에 총을 맞았다는 사실읻. 항의하는 군중이 아니라 도망가는 군중을 향해 등뒤에서 고의적인 “살인”을 한 것이다. 213
조선경비대 제 9연대는 제주도의 독자적인 연대로서 도로 승격된 후 3개월여 만에 대정면 모슬포에 창설된다(1946년 11월 16일) 214
어떠한 흑막이 내재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3.1절발포야말로 6명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한라산금족령이 해제되기까지(1954. 9.21.) 7년 7개월 동안, 인류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제노사이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을 넘는 3만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그 참혹한 드라마의 효종(曉鐘, 새벽에 치는 종)이요 조종(弔鐘, 애도의 종)이었다. 215
사람을 죽이는 사태에 이르렀는데도 공권력이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시위주동자를 검거하는 일에 주력하자. 제주도는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발로 총파업에 돌입한다. .. 도청, 관공서는 물론, 은행, 회사, 학교, 운수업체(제주도는 철도가 없었다), 통신기관 등 도내 156개 단체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현직 경찰관까지 파업에 동참했다. 당시 우리나라사람으로서 경찰의 총대빵이었던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이, 1947년 3월 14일 제주도에 온다. .. 경찰통수권자로서 친일파경찰을 대거 다시 기용하는 것을 애국의 길로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이승만, 장택상과 더불어 극우반공주의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는 일제강점기 경찰을 프로잽(pro-jap, 친일)이 아닌 프로잡(pro-job, 전문가집단)이라고 찬양했다. 그리고 그는 철저하게 미군정의 권익을 보호하는 주구 노릇을 기쁘게 했다. 220-221
조병옥은 총파업을 경기도 응원경찰 99명을 새롭게 동원하여 강경히 대응, 분쇄해 나간다. 그리고 3월 19일 담화문을 발표하고 경찰의 발포는 “정당방위”였다고 항변하고, 북조선과의 통모로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쌩거짓말로 포장하면서, 제줃도를 “빨갱이섬”으로 규정한다. .. 조병옥은 제주도민은 이미 70%가 좌익정당에 동저적이거나 가입되어 있다고 선전하면서, 제주도는 “좌익의 본거지”라고 규정했다. 222
당시 도지사 박경훈은 모든 사태의 책임을 지겠다며 항의성 사직서를 제출한다. 222
미군정청 안재홍 민정장관은 박경훈을 해임시키고, 아주 극우파의 또라이 같은 인물 유해진을 후임으로 부임시킨다. 유해진의 부임과 더불어 제주도에 부임한 거대한 새로운 세력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세칭 서청, 서북청년단(본명은 서북청년회이지만 깡패단체 같은 악랄한 성격의 것이라 조선의 민중은 서북청년단이라 불렀지 서북청년회라 부르지 않았다)이라는 것이다. 223
1946년 초부터 최고의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은 사회주의개혁의 맹렬한 드라이브에 열을 올렸고, 이러한 개혁드라이브는 남한의 민중이 억압과 부조리와 억울함과 기아에 시달리는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북한민중의 열렬한 환영과 지지를 받았다. 제일 먼저 그는 토지개혁에 착수했다. 해방이 되자마자, 자체적으로 조직된 인민위원회는 소작제의 비율을 3.7제로 바꾸었다. 이것만 해도 농민들에게는 더없는 축복이었다. 김일성은 1946년 3월 5일, "북조선토지개혁에 관한 법령" 17개조를 발표했다: “토지는 밭갈이 하는 농민에게!" 조준이나 정도전이 꿈꾸었던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이상, 그들 신진유생들이 끝내 이루지 못했던 그 꿈을 공산당과 인민위원회의 힘으로 단숨에 해결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1 가호 당 평균 15마지기의 땅이 골고루 배분되었다. 그리고 5 정보(50마지기 정도) 이상의 땅을 지닌 자는 부농으로 간주되며, 부농은 땅을 뺏기는 것은 물론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후 꼭 타지로 이주되어야만 했다. 종교단체, 교회나 절, 모두 5정보 이상의 토지는 다 몰수되었다. 대지주들을 타지로 이주시키는 것은 소작농들과의 분쟁을 피하기 위한 당연한 시책이었다. 노동법이 새로 제정되고 8시간노동제가 확립되는가하면, 임신여성은 해산 전 35일, 해산 후 42일간의 휴가가 보장되었다. 남녀평등법이 제정되어, 첩, 성차별, 매춘, 유아살해가 엄금되었다. 친일파, 일본인기업 등 중요산업시설이 조직적으로 국유화되어 남한에서 보여지는 적산가옥 거저 처먹기 식의 혼란은 없었다. 문맹퇴치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국가예산 17%가 교육비에 투입되었다. 불과 1년 만에 1,110개의 6년제 인민학교가 새로 세워졌으며, 1946년에는 2,482개의 인민학교에서 118만 3천 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46년에 이미 중앙당교, 평양학원(군 사관학교에 해당), 김일성종합대학(1946. 10. 1.개교), 만경대혁명학원(지도자 양성기관)등이 창립되었다. 226-227
1946년 1년 동안에 약 48만 명이 남하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228
공산당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대체로 서북지역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제일 먼저 모이는 곳이 교회였다. 우리나라 해방 후 대형교회문화가 생겨나는 현상도 이러한 분단현실 속에서 잘 설명된다. 영락교회는 서북지역사람들의 집결지였다.(한경직 1903~2000 목사는 평안남도 평원사람이다. 월남하여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 후에 영락교회로 개명) 기실 서북청년단은 영락교회 청년조직으로부터 발전하였다. .. 공식적인 사무실은 한민당본부가 있었던 동아일보 사옥의 한 귀퉁이를 썼다. 서북청년단은 이승만, 김구, 한민당의 재정지원을 받았다. 김구가 서북청년단을 적극 지원한 것만 보아도 김구의 정치적 이념의 한계를 잘 말해주고 있다. .. 서북청년단의 특징은 반공정신의 맹렬성과 맹목성에 있다. 북한에서 당한 저주를 풀기 위해 “빨갱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무조건 폭력과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228-229
이승만은 이 서북청년단의 인력을 남한사회의 반공화를 위한 프론티어로 활용했다. 며칠간의 훈련만 받으면 곧바로 경찰과 군인의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겉으로 보면, 버젓한 군인이고 경찰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월급이 지급되질 않았다. 마음대로 약탈하고 겁탈하고 죽이고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다. 서북청년단에 관한 한, 아무런 룰이 없었다. 이 서북청년단의 아버지가 바로 조병옥이고, 장택상이었다. .. 이들은 대체로 반공의 투사들이었고, 열렬한 에수쟁이였고, 인간평등관을 거부하는 서북의 지주자제들이었다. 오늘날까지도 “기독교인=반공투사=반북반통일=우익승미”의 정서가 우리사회의 저류를 흐르고 있는 현실은, 소수정객의 탐욕에서 비롯된 그릇된 역사인식이 보정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1948년 4월 3일 전까지 제주도에는 서청경찰 760명이 투입되었고, 조선경비대 옷을 입은 서청 1,700명이 추가 투입된다. 이들의 만행은 너무도 끔찍했다. 47년 1년 동안에 2,500명의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검속되었고, 1948년 3월 6일 조천지서에서는 어린 조천중학생 김용철 군이, 14일에는 모슬포지서에서 청년 양은하가 고문치사 당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230
결사항쟁이다! “탄압이면 항쟁이다!”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민위원회 비밀회의에서 무장투쟁이 12:7로 가결되었다. 공격은 경찰과 서청으로 한정되었고, 다가오는 남한만의 5.10단독선거반대는 봉기결행의 주요명분이 되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4.3민중항쟁은 시작되었다. 230-231
4.3은 남로당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4.3의 경찰서습격사던은 남로당에서 지시한 것도 아니고, 중앙당과 조직적인 연계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233
미군정은 4월 17일, 모슬포 주둔 국방 경비대 9연대에게 사태진압을 명령한다. 그러나 당시 9연대 연대장을 맡고 있던 김익렬(1921~1988)은 도덕성을 갖춘 정통적 군인이었고(경남하동 출신), 활달한 성격에, 불교도였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이념적 편견이 없었다. 친일잔존세력이었던 경찰에 비해 민족적인 성향이 강했던 제주9연대는 이 사건을 경찰 및 서청 같은 극우세력의 횡포로 인해 야기된 것으로 판단하여 “선선무 후토벌”의 원칙을 정하고,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이 결과 1948년 4월 28일(최근 발굴된 사료에 의하면 이들이 만난 것은 30일로 간주됨),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연대 정보참모 이윤락 중위, 그리고 무장대측 군사총책 김달삼(1923~1950, 제주인. 본명 이승진. 오오사카 성봉중학교, 도쿄 중앙대학에서 수학. 이본 후쿠찌야마 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와 소위 임관.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등이 만나, “72시간 안의 전투중지, 무장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평화협상을 성사시켰다. 234
5월 5일, 미군정 수뇌부가 참석한 가운데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미 군정장관인 딘(William Frishe Dean, 1899~1981)소장(군정장관은 하지 총독 다음의 제2인자. 아놀드, 러치에 이어 제3대 군정장관. 1947. 10. 30.~1948.8. 15. 까지 근무. 6.25전쟁 때 대전 부근에서 부하들과 같이 싸우다가 북한군에게 포로가 되고 전쟁 내내 평양 부근 감옥에 머물렀다. 1953년 9월 4일 판문점에서 귀환)이 소집한 것인데,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군정 하의 경찰수장이며 미국의 앞잡이 노릇에 열심이던 조병옥, 당시 미군정청 내 한국인 최고끗발이었던 민정장관 안재홍(1891~1965), 당시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1889~1959, 광복군 지대장 출신. 만주군관학교 출신들과는 계보가 다르다), 제주도 경찰국장 최천(1900~1967, 통영사람), 도지사 유해진, 그리고 김익렬 연대장, 그리고 딘 장군 전속통역관, 모두 9명이 참석했다. 김익렬은 이 자리에서 딘 소장을 설득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자리는 이미 평화협정을 묵살시키고 대대적인 무력진압을 강행하기로 결의한 사람들의 자리였다. 235-236
김익렬은 이후에도 한국전쟁에서 많은 군공을 세웠다. 제1.2군단장, 국방대학 원장을 역임하고 1969년 1월 중장으로 예편하였ㄷ. 김익렬 중령은 다음날(5월 6일)로 9연대장 자리에서 전격 해임된다. 후임으로 박진경(1920~1948)중령이라는 문제아가 뒤를 잇는다. 그의 취임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237
박진경이 국방경비대 사령부의 인사부에서 일하다가 9연대장으로 임명된 이유는 일제시대 일본군으로서 제주도에 복뭄한 경험이 있어 섬의 지형과 산악요새에 관해 많은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 박진경은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강력한 “초토화진압작전”을 수행하였는데 중산간 마을을 누비고 다니면서 마구잡이식으로 주민을 잡아들였다. 5월 27일까지 포로의 수비는 3,126명에 달했고 6월 중순에는 6,000여 명에 달했다. 박 중령의 무자비한 토벌작전을 말해주는 손선호(후술)하사의 진술이 있다. “박 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공격은 전 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선무작전에 비해 대원들의 불만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그릇된 결과로 다음과 같은 사태가 빚어졌다. 우리가 화북이란 부락을 갔을 때 15세 가량 되는 아이가 그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도 무조건 사살해야 했다.” 불과 27일 만에 초토화진압작전의 성공적 추진을 인정받은 박진경은 1948년 6월 1일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한다(딘이 직접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1948년 6월 17일, 박진경의 대령승진 축하연이 요정 옥성정에서 차려졌고, 미군장교와 11연대(박 중령 부임 후 9연대는 11연대로 개편된다. 제주도 향토 연대의 성격을 해체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참모들이 동석하였다. 박진경은 6월 18일 새벽 1시에 귀가하여 부대숙소에서 잠이 들었다. 새벽 3시 15분 단 한 방의 M1 소총 총성이 울렸다. 박진경의 도민학살을 견디다 못해 그의 암살을 기획한 것은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였다. 238-239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군정장관인 딘 장군의 총애를 받던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사람들로써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해서는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 때문에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이하 모든 사람들도 저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239-240
문상길의 나이 불과 22세였다. 총살형집행장이 낭독되고 마지막 유연의 기회가 주어진다. “스물두 살의 나이를 마지막으로 나 문상길은 저세상으로 떠나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하에 한국민족을 학살하는 한국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이제 여러부노가 헤어져 떠나갈 사람의 마지맘ㄱ 바람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240
손선호는 이와 같이 진술했다. “박 대령을 암살하고 도망갈 기회도 있었으나,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므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 하나의 생명이 30만 도민을 위한 것이며 3천만 민족을 위한 것인만큼 달게 처벌을 받겠다.” 손선호의 나이는 당시 20세였다. 241
4.3 바로 한 달 후 이승만의 꿈인 단선(단독선거)의 실현, 즉 5.10제헌국회의원선거가 이루어진다. 241
제주도민은 이 선거를 보이콧해버렸다. 2개의 선거구가 근원적으로 투표율미달로 무효처리 된 것이다. .. 이승만이 택한 길은 “민중학살”이었다. 대규모 학살을 통하여 국민에게 국가권력의 가증스러운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242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런데 박진경 대령은 이승만에 의하여 준장으로 추서되었고, 박진경의 장례식은 대한민국육군장 제1호로 기록되었다. 242
제5장 여순민중항쟁
1개의 연대는 3개의 대대로 구성되고, 1개의 대대는 4개의 중대로, 1개의 중대는 4개의 소대로, 1개의 소대는 4개의 분대로 구성되었다. 14연대는 3개대대, 12개 중대, 48개 소대와 192개 분대로 구성되었다. 당시 1개 분대의 병력은 12명이었다. 248
여순민중항쟁 당시 1개 중대 병력은 순천에 파견되어 있었으며, 보성에 터널경비로 5중대(중대장 박윤민)의 일부 병력도 파견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주도로 출항하는 수송준비로 300명 정도의 병력이 여수신항에서 연대장 지휘 아래 있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부대에 남아 있었던 14연대의 병력은 1,700~2,000명 정도였다. 249
내가 어렸을 때 “여순반란”이라고 들은 것은,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의 군인들이 지창수 상사등의 빨갱이 선동으로 반란을 일으켜 양민을 학살한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대학교 때 현대사에 대한 의식이 생기면서, 그것은 반란이 아니고, 제주에서 서청과 경찰이 양민을 학살하는데 힘이 모자라 여수에 있는 군대까지 동원하여 제주도로 가라고 국가에서 명령하니까 지창수 등 14연대의 의식 잇는 군인들이 그 명령에 불복하고 일어나서 시가전을 감행하다가 결국 쫓기어 지리산으로 들엉가게 된 사건 정도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는 여순반란이 아니고, “여순항명사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요즈음에나 와서, 독립운동사 공부를 마치고 해방정국을 치밀하게 공부하면서 그것은 “항명”이 아니라 반드시 “민중항쟁”으로서 인식되고 명명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역사는 사건의 객관적 기술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어떠한 해프닝이 “사건”이 되려면 반드시 그 사건이 역사적 의미(historical significance)를 갖는 것으로서 해석되어야 한다. 249-250
250
동일한 사건사태가 반란으로도, 항명으로도, 민중의거로도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해석의 차이는 인식의 차이이며, 그 인식의 변화를 가능케 하려면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시각의 변화는 근인(近姻)과 동시에 모든 원인(遠因)을 밝혀야만 달성케 되는 것이다. 250-251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포괄적으로 역사를 이해하게 되면 완벽하게 단절된 우연이라는 것은 성립하기 어렵다. 255
사실 내가 이 원고를 쓰게 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여순민중항쟁을 널리 알려서 “여순민중항쟁특별법”을 국회에 통과시킴으로써 여순민중항쟁으로 당한 사람들을 신원해주기 위한 것이다. .. 이 책은 사상이 아니라 운동이다. 이 책은 역사서술이 아니라 우리의식에 던져지는 방할이다. 가치를 추구하는 자라면 이 책을 읽은 후 얻는 깨달음을 만세 만민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272
4.3과 여순을 연결 짓는 최초의 고리는 바로 김익렬 중령이다. 9연대 연대자ㅏㅇ인 그가 민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의 멱살을 잡고 항의한 그 다음날, 5월 6일자로 제주 제9연대장에서 해임된다. 김익렬 중령은 군인으로서 매우 당당한 경력의 보유자이고 유능한 지도자였기 때문에 군에서 축출되지는 않았다. 대신 전출되었는데, 전출된 곳이 바로 여수 제14연대였다. 273
박진경의 암살사건은 전국에 배치되어 있는 군대의 분위기를 엄청 변화시켰다. 박진경의 암살로 군대 내에 “빨갱이들”이 엄청 포진되어 있다는 근거 없는 선입견이 이승만 이하 지배층의 조선경비대인식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내쫓는 것은 보통 전문용어로 “숙군(肅軍)”이라 부른다. 275
박진경 암살사건은 전군 차원의 사상검열(screening)을 불러일으켰고, 숙군작업에 합법성과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신임 국방장관에 취임한 철기 이범석(1900~1972, 독립운동가이며 대한광복군의 대표적 인물이지만 해방 후 그의 행적은 이승만과 미군정의 철저한 앞잡이로서 우파적 만행을 끊임없이 저질렀다)은 이승만의 신임을 얻기 위해 강력하고도 조직적인 숙군을 전개한다. 279
군대가 경찰을 습격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1948년 8월 15일대한민국(제1공화국)이 수립되기 이전까지는 "국군"이라는 것이 없었다. 미군정 하에서는 아직 나라가 성립되기 이전이었으므로 명목상 "국군Republic of Korea Armed Forces" 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군이 창설한 것이 “남조선국방경비대”였는데 미소공위에서 소련이 "국방"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고 항의하는 바람에 “국방"을 빼고 “조선경비대”로 했던 것이다. 북한도 “보안대”라는 말을 썼고, 군간부양성기관도 그냥 “평양학원”(사관학교에 해당)이라 불렀던 것이다(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 창설).“조선경비대”는 영어로 “Korean Constabulary Reserve”라 했는데, 그 뜻을 짚어 번역하자면 “조선경찰예비대”라는 뜻이다. “Constabulary”라는말자체가 "경찰체제 내에 속한" 의 뜻이다. 그러니까 조선경비대는 경찰의 입장에서는 경찰명령계통 내에 속하는 일종의 예비대이며 항구적인 조직체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조선경비대에 속한 사람들도 확고한 군인비젼을 갖기에는 자신들이 너무도 어정쩡한 조직에 속해 있다는 자괴감, 불안감이 있었다. 그리고 경찰 입장에서는 조선경비대원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찰예비대라는 경찰체계 내의 하급기관일 뿐이었으며, 사상적으로 불순하고 향토적 색채를 띠는 오합지졸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정치범, 일반범죄자, 깡패, 실업자들의 입대도 허락되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경찰에 비해 무기지급, 보급, 복장, 계급장, 급식문제에 있어서 열악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군대에 들어간 사람 중에는 새롭게 탄생하는 국가의 보위를 책임지는 군인으로서 프라이드를 지니고 입대한 이상주의자들이 많았으며, 이들의 입장에서는 과거"일제의 주구"였던 자들이 자신들보다 높은 대우를 받고 있으면서 자신들을 멸시하는 경찰이야말로 증오와 경멸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경찰은 지나가는 군인을 불러 자기들 구두를 닦게 하는가 하면, 말 안 들으면 조인트를 까고 하는 말도 안되는 모욕적인 언행을 공공연히 자행했다. 지금 우리 감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당시에는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은 조선경비대를 빨갱이소굴이라 비난하였고, 조선경비대는 경찰을 일본놈 앞잡이 하던 친일파 꼴통 새끼들로 규정했다. 경찰은 미군정에 조선경비대를 비방하는 보고서를 끊임없이 제출하고 있었다. 미군정 하에서 경찰복장은 미군복장과 같게 하고 무기도 미제 M1소총으로 무자앟게 하였으나 국방경비대는 일본군복을 입히고 무기는 일제 38식이나 99식 소총으로 무장하였다. 계급장도 경찰계급장을 뒤집어서 사용하게 하였다고 한다. 281-283
283
미군정의 가장 큰 문제는 앞서 지적한 바대로 미국인들의 순전한 무지에 있었다. 그 무지가 야기한 최대의 실책은 경제정책에 있었다. 미군정이 경제만 안정시켰다 할지라도 해방 후 정국에서 보여지는 그러한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건준은 해방의 날로부터 이미 식량문제가 해방정국을 이끌어나가는 데 가장 긴요한 과제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3개월간의 식량을 확보할 것을 조선총독부에 요청하고, 산하에 양정부(糧政部)와 식량대책위원회를 두어 식량의 수집과 운송, 분배, 모리배 감시에 주력했다. 이러한 활동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식량이 시장에 유출되거나 모리배가 사재기를 하는 현상이 없었다. 미군정은 사회주의자들의 통제정책에 반발하고 건준의 식량관리계획을 부정했다. 건준에게 식량운영권을 넘길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곡을 자유시장에 내맡겨 버리는데 그것은 결국 쌀의 매점매석, 그리고 과대소비로 이어지면서 쌀값 폭등을 야기시켰다. 그러자 미군정은 도시민에 대한 식량배급을 명분으로 1946년 1월 25일 "미곡수집령"을 공포하고 식량공출을 단행하는데, 결국 미곡 자유시장을 포기하고 과거 일제 강점기의 공출보다 더 잔인한 강제수거를 단행했다. 미군정의 배급정책은 농촌에까지 적용되었는데, 그 결과 곡물섭취량은 오히려 식민지시대보다도 못한 처지가 되었다. 힘없는 농민은 쌀을 시장가격의 5분의 1에 불과한, 실제 생산비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강탈당했다. 그리고 쌀을 사기 위해서는 수집가격의 5배나 높은 가격에 사야 했다. 할당량을 못 채우면 투옥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경무부 수사국장 최능진이 1946년 말 한·미회의the Korean-American Conference에서 한 말은 당시 상황을 리얼하게 전해준다: “나는 농촌을 돌아보았는데 그들로부터 여름에 경찰들이 공출할당량이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농가로 찾아가 농민들에게 쌀을 내놓으라고 강요한다는 말을 들었다. 쌀을 내놓지 못하면 경찰은 그들에게 수갑을 채워 경찰서로 데려가 음식도 주지 않고 하루종일 가두어둔다고 한다.”(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p.206). 한국경찰과 공무원은 미군의 권세 하에서 “탈취대"라고 불리는 쌀 수집반을 구성하였다. 이 미군정의 미곡수집령이야말로 1946년 전국적인 10월봉기의 주요 원인이었으며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의 가장 근원적인 요인이다. 이것은 남로당의 정치적 공작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남로당은 그러한 대중동원조직체계나 지지기반을 갖지 못했다. 그것은 몇몇 지식인들이나 지식인 반열에 들고 싶어하는 허영끼 있는 인간들의 픽션에 불과했다. 민중에게 절실한 것은 오직 "쌀"이지 공산이념이 아니었다. 293-294
297
“토벌”이라는 것은 “진압”보다도 더 심각한 단계의 작전이다. 제주인민을 토벌하기 위하여 출동하라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거부”는 “항명”이 아니다. .. “출동거부”는 “항명”일 수가 없다. “항명”은 그 명이 “정당한 명령”일 때만이 성립하는 것이다. 298
반란이 되기 위해서는 주도세력이 정부요직에 있거나 대병력의 동원이 가능한 군사지휘자들을 포섭하고 있어야 한다. 반란은 물리적인 힘이 있어야 하며, 오랜 기간의 철저한 계획 하에 진행되어야 하며, ㅈㅇ기항전의 계책도 있어야 한다. 여수 14연대의 항거는 부당한 명령에 대한 거부일 뿐이며, 사회사적, 정치사적으로 보더라도, 그것은 가벼운 “소요”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든지 정상적 궤도로 컴백될 수 있고, 다스려질 수 있는 요소였다. 이것을 댁모 국민학살극으로 확대시킨 것은 오로지 국가 폭력의 업이었다. 여순민중항쟁은 14연대 사람들의 합리적 판단에 여순 지역 인민 전체가 호응한 결과의 산물일 뿐이다. 302
이승만의 명령 : 어린아이들까지 다 죽여라!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팔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될 것” 303
여순민중항쟁으로 이승만은 강고한 우익체제를 구축했다. 예비검속, 연좌제를 실시했고, 보도연맹을 창설했다(30만 이상을 죽임). 군대로부터 완벽히 좌익세력을 청산하는 숙군사업을 완성했으며, 반민특위활동에 밀린 친일경찰까지도 대거 군대로 들어갔다. 향토연대의 특성은 해체되었으며, 여순민중항쟁으로 손실된 병력공백에 우익청년단체 사람들이 대거 입대하였다. 군대가 체제수호의 수단적 기구로 변모하여 부패하였다(박정희는 이러한 군대의 부패를 청산하는 정풍운동의 리더로서 결국 쿠데타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대학에는 학도호국단이 창설되었고, 주한미군철수가 6개월 정도 연기되었고, 국가보안법이 통과되었다. 경찰병력이 확대되면서 서북청년단원들을 대거 정규경찰화 시켰다. 그리고 국민의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고 감시체계를 강화하는 유숙계제도를 만들었다. 이러한 모든 변화를 구축하는 계기가 바로 여순민중항쟁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민중항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공권력에 대한 공포감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불신감만 키웠다. 우리는 너무 몰랐다. 우리는 너무 조용했다. 304-305
역사는 당장 손에 잡히는 실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존재한다. 역사가 지금 당장 한 벌의 솜옷을 당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건 이런 시련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그것의 존재를 믿을 때, 그리고 행동할 때 그것의 실체는 드러난다. 37-38
기차 안에는 민간인보다 군인들이 더 많았다. 중공군 특유의 누비솜옷을 입은 군인들은 태평스럽게 트럼프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저기 좀 보십시오. 공산혁명을 이룩한 중공군들이 제국주의자들의 놀이인 트럼프를 치고 있습니다.” 이학송이 건너편을 눈짓했다. “네에, 아까부터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뭔가 안 어울리는 게, 모순적으로 보여요.” 김미선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 동무가 보는 건 표피모순입니다.” .. “아 네, 겉보기에 불과한 모순이란 뜻입니다. 그냥 제 맘대로 지어붙인 말인데, 말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학송은 약간 멋쩍게 웃고는, “김 동무가 저걸 모순된 행동이 아닌가 하고 이상하게 보는 건 김 동무 생각이 어느 면에서 경직되고 획일화되어 있다는 증거지요.” .. “그럼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저 군인들은 누굽니까? 장개석 군대를 몰아내고 거대한 중국혁명을 성취시킨 사람들입니다. 그 모태는 물론 모택동 주석이 이끌고 대장정을 마친 홍군이었죠. 10여 만 명이 출발해서 장정을 마치고 나자 홍군은 8천여 명 정도밖에 안 되었고, 공산당은 중국의 공동의 적인 일본놈들을 무찌르자는 명분으로 장개석과 화해를 했습니다. 그리고 홍군은 깃발을 내리고 장개석 군대의 제8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그 명분은 당당하고 떳떳한 것이었습니다만, 세상은 그 사실을 어떻게 보았겠습니까? 장개석이 승리감에 도취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인들이나 세계의 눈은 마침내 중국공산당이 종말을 고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표피관찰이었죠." 김미선이 재빠르게 말을 끼워넣었다. “아이쿠, 이런 제가 한방 먹었군요." 이학송이 고개를 젖히며 웃었고, 김미선은 장난기 어린 눈으로 웃었다. “맞습니다. 그게 완전히 빗나간 표피관찰 아니었습니까. 그 소수의 홍군은 팔로군이 되어 국민당군과 힘을 합쳐 일본군과 싸우는 한편, 국민당군을 아래로부터 붕괴시켜 나갔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일본놈들을 막아내고, 장개석 정부를 몰아내는 이중목적을 달성시키면서, 20세기 정치의 기적이라고 하는 중국혁명을 성취시켰습니다. 도대체 그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건 너무 간단하게도, 혁명이념을 투철하게 지키면서, 그것을 지속적으로 실천에 옮기는데 충실했던 것입니다. 레닌 동지의 그 기본적인 지도이념을 바탕으로 홍군 전체가 모주석에 대한 신뢰로 한 덩어리가 된 결과가 중국혁명 아닙니까. 그 강철같이 강한 정신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바로 저 군인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트럼프 놀이를 한다고 해서 그 정신에 제국주의적 훼손을 입거나 무슨 병이 들겠습니까? 저사람들에게 트럼프라는 건 그저 오락의 재미를 주는 단순한 도구일 뿐입니다. 저것보다 더 여러 가지 묘미를 주는 어떤 도구가 생기면 그들은 트럼프를 미련 없이 팽개쳐버릴 겁니다. 그런데 겉에 드러난 그런 하찮은 현상을 가지고 그들의 기본적인 정신상태나 의식문제 같은 걸 판단하려고 의미확대를 하는 건 위험천만한 병적 경직이고, 편벽된 아집이라 그겁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우리 조선사람들이 화투를 즐기는 것을 보고, 조선사람들은 일본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느니, 식민지시대를 그리워한다느니, 하는 식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우를 범하는 일입니다. 우리 조선사람들이 화투를 친다고 해서 어디일본놈들에 대한 증오나 원한이약해집니까?" 44-47
2 아시아인은 미국인과 동등하지 않다 아시아인은 인간이 아니며, 인간 이하의 존재다
주리안 토스들, 영국 병사 “빌어먹을! 작전권을 외국군에게 넘겨주다니, 그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유일한 넌센스고, 코메디요. 물론 맥아더가 요구했다는 말도 있고, 이 대통령이 넘겼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거나 요구했다고 넘겨준 사람이나, 넘겨준다고 받은 사람이나, 둘 다 똑가티 미친 사람들이오. 그럼 당신도 그 미친 사람들의 가엾은 피해자로군요.” 75
“지금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모든 미군들에게는 적을 증오하게 하는 생각을 고취시키고 있소. 적을 증오하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서 먼저 이렇게 가르칩니다. ‘아시아인은 미국인과 동등하지 않다. 아시아인은 인간이 아니며, 인간 이하의 존재다. 이런 정의를 내려놓고, 그러므로 아시아인은 물건과 같으 취급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동물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동물을 쥭이는 것과 같은 이유로 그들은 동물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동물을 죽이는 것과 같은 이유로 그들을 죽이는 것이며, 우리는 동물을 죽일 때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는 논리를 주입시킵니다. ..” 76
4 죽음의 대열, 해골의 대열
“.. 우리는 앞으로 적들보다 더 큰 힘을 길러야만 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힘은 무엇일까요? 적보다 좋은 무기를 갖는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힘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정신적인 힘과 물질적인 힘이 그것입니다. 정신적인 힘이란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 하나 죽더라도 혁명을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돌처럼 단단한 마음, 강철같이 굳은 결심이 먼저 갖추어져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에 물질적인 힘인 무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강한 결심 없이는 아무리 좋은 무기를 가져도 싸움에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신무장’이라는 말도 생긴 것이고, ‘사상무장’이라는 말도 생긴 것이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도 매일 실시되는 학습을 통해서 사상무장을 철저히 해야만 여러분이 바라는 세상을 만들수 있고, 용맹스러운 혁명 전사인 빨치산도 될 수 있습니다. ..” 129
빨치산은 .. 러시아의 말입니다. 러시아는 지금의 쏘련으로, 바로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레닌 동지의 지도 아래 인민혁명을 성취시키게 되자 망하고 만, 왕이 다스리던 나라였습니다. 그 말을 우리말로 바꾸면 유격대가 됩니다. .. 유격대란 간단한 뜻은, 우리 편의 군대를 도와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적의 배후 곧 뒤나, 측면 곧 옆을 쳐서 적진을 어지럽히고 적군을 무찌르는 군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한 가지를 더 보태, 인민을 상대로 한 당의 정치 활동, 즉 혁명사상의 선전과 선동까지 받는 것이 빨치산이 할 일입니다. 그러니까 빨치산은 싸우면서 당의 선전활동과 선동활동까지 겸하는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치산을 당의’정치군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학습을 하는 것은 첫째, 여러분들 자신의 마음을 혁명하기 위해서이고, 둘째, 당이 내린 임무를 충실히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130-131
인민군이 전선에서 적과 정면으로 맞서서 싸우는 군대라면, 빨치산은 전선이 없이 이곳저곳에서 싸우는 군대입니다. 인민군이 싸우는 것을 전적으로 하는 것에 비해 빨치산은 당활동을 앞세우면서 싸움도 하는 군댑니다. .. 적을 쳐서 적의 무기로 무장해야 하고, 그 무기로 다시 적을 무찌르는 것이 빨치산입니다. 그리고 식량이나 옷 같은 것은 인민들의 지원과 협조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인민과 빨치산의 관계는 물과 고기와의 관계와 같습니다. 인민은 물이고, 빨치산은 고기라는 말입니다. 131
‘자유주의 배격 11훈’ 이라고도 하며, ‘자기비판 지침 11가지’ 첫째, 동창·친지·부하· 동료의 잘못을 알면서도 책하지 않고 화평의 수단으로 방임해서는 안 된다. 둘째, 전면에서 말하지 않고 배면에서, 회의에서 말하지 않고 회의 후에 이러쿵저러쿵 시비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셋째, 타인을 책하지 않고,말하지 않는 것을 명석한 보신술이라고 치고 침묵하는 것은 잘못이다. 넷째, 간부라고 해서 자기 의견만 고집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다섯째, 개인 공격을 일삼아 보복하려는 태도는 좋지 않다. 여섯째, 반혁명분자의 말을 듣고도 당 기구에 보고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일곱째, 선전·선동하지 않고 당원의 임무를 망각하는 것은잘못이다. 여덟째, 군중의 이익에 해독이 되는 행동을 보고도 격분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하다. 아홉째, 자기가 맡은 바 일에 충실하지 않고 하루를 되는대로 지내는 것은 좋지 않다. 열째, 선배연하여 큰일을 할 능력은 없으면서 작은 일을 하기 싫어하는 태도는 좋지 않다. 열한 번째, 자기의 잘못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것, 또는 자기를 반성하되 비관과 실망으로써 그치고 마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이상과 같이 11가지입니다. 134-135
6 거창, 그 오지의 낮과 밤
국방군 제11사단은 후방 즉 추풍령 이남의 공비섬멸이라는 분명한 작전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 작전 명령 연대작전명령부록의 지시사항은 세 가지였다. 첫째, 작전지역 내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 둘째, 공비의 근거지가 되는 가옥은 전부 소각하라. 셋째, 식량은 안전지역으로 운반하여 확보하라. 212-213
7 빨치산, 그 이름 없는 사람들의 진정성
미군 .. 그들은 다시 서울을 무자비하게 쑥밭을 만들어대고 있었다. 적이고 민간인이고를 가리지 않는 그들의 무차별한 폭격은 그야말로 자기네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제국주의적 잔학이고, 발악이었다. 다만, 그들의 무자비한 초토화작전에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는 인간들은 이미 서울을 떠나 이승만 정권을 에워싼 채 덕을 보고 있는 친일반민족세력들과 새롭게 생겨난 기회주의자들뿐이었다. 248
국민방위군 교육대는 훈련소가 아니었다. 난민수용소거나 병자수용소라는 것이 옳았다. 모두가 영양실조 상태인 데다가, 반 이상이 동상환자였다. 그런데 세끼 밥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고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급식이 해결되지 않고 있는 형편이었으니 다른 것들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피복 지급이 될 리가 없었으며, 추위를 막을 잠자리가 제대로 갖추어졌을 리가 없었고,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의무시설이 규모 있게 꾸며질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전시라고는 하지만 무계획과 우격다짐 앞에서 시재모는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그가 해야 할 급선무는 교육대장의 임무가 아니라 난민수용소장의 임무였다. 251
방위군교육대라는 울타리는 생사람들을 몰아넣고 서서히 굶겨죽이고, 병들여죽이고 있는 살인장에 지나지 않았다. 252
할머니의 죽음은 화수에게 이상했다. 처음 이 삼 년은 무철 단단하고 확실히 느껴졌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할머니가 계속 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계속된다는 말은 좀 미묘하지만, 육체의 죽음을 받아들이자 육체가 아닌 부분은 지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16
질문자 : 성공적인 결혼의 필수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심시선 : 폭력성이나 비틀린 구석이 없는 상대와 좋은 섹스. .. 질문자 : 선생님도 참. (웃음) 폭력서오가 비틀린 구석이 없다는 건 너무 베이직 아닌가요? 심시선 : 베이직은 갖춘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고 봅니다. 안쪽에 찌그러지고 뾰적한 철사가 있는 사람들. 배우자로든 비즈니스 파트너로든 아무데도 못 갖다 써요. 꼭 누군가를 해치니까. .. 심시선 : .. 대화는 친구들이랑 합니다. 이해도 친구들이랑 합니다. .. 심시선 :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구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을 확률은 아주 낮지 않을까요? 그리고 규칙적인 근사한 섹스의 가치를 너무 박하게 평가하지 마세요. .. 심시선 : 사흘에 한 번씩 섹스를 하고 싶은 사람들 말고는 결혼을 안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19-21
“.. 겉도는 대화는 절대 안 하는 분이었달까.” “겉도는 대화?” “보통은 며느리가 뭘 하고 사는지 그렇게까지 궁금해하지 않잖아. 그런데 어머님은 정말로 내가 뭘 하고 지내는지 궁금해했어. 무슨 책을 읽는지, 어떤 내용인지,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22
외국어도 잘하고 욕도 잘하는 사람이었고, 어쩌면 그것은 같은 능력일지도 몰랐다. 27
명혜는 명은더러 다른 모두가 더하기의 인생을 살 때 혼자 빼기의 인생을 산다며 감탄인지 비난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했었다. 명은은 자신이 택한 빼기의 인생이 싫지 않았다. 31
폭력은 사람의 인격을 조각한다. 조각하다가 아예 부숴버리기도 하지만, 폭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폭력의 기미를 감지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얻은 감지력을 유용하게 쓰는 사람도 있고 절망해 방치해버리는 사람도 있어서 한 가지 결로 말할 수는 없다.(심시선) 126
약간의 아슬아슬함을 감수하더라도 지금까지 몰랐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라 여겼다. 사람이 제일 신나는 모험이었다.(우윤) 130
‘에디 우드 고(Eddie would go)’ - 에디 아이카우라는 유명한 서퍼를 기념하는 문장. “구조대원일때 물에 빠진 사람들을 엄청 구했다던데? 수영으로도 구했지만 보드를 손으로 척척 젓고 가서 끌어올렸대.” .. “그리고 사는 게 멋졌던 사람은 죽는 것도 멋졌더라. 고대 항해 기술을 재현하려는 탐사대에 합류했는데, 탐사대 전체가 조난을 당하고 만 거야. 그때 에디가 구조대를 불러오겠다며 혼자 자기 서핑 보드를 타고 바다를 가로질러갔대. 막상 탐사대는 다른 배에 구조되었고, 에디는 실종되고 말았지만……” .. “데이 우드 고, 라는 말 자체가 서핑 대회 때 어미어마하게 큰 파도가 왔을 때 누가 한 말이라지만 사실 다르게 해석되기도 하겠다.” “결정적인 순간에 타인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스스로가 다치게 되어도, 그런 의미로?” 139-141
“.. 쓰는 게 뭐 대단한 것 같지? 그건 웬만큼 뻔뻔한 인간이면 다 할 수 있어. 뻔뻔한 것들이 세상에 잔뜩 내놓은 허섭스레기들 사이에서 길을 찾고 진짜 읽을 만한 걸 찾아내는 게 더 어려운 거야.”(난정) 166
“할머니는 할머니의 싸움을 했어. 효율적이지 못했고 이기지 못했을ㅈㅣ 몰라도. 어찌되었든 사람은 시대가 보여주는 데까지만 볼 수 있으니까.” (화수) 182
할머니는 욕도 표현의 일종이라고, 다만 정확하고 폭발력있게 욕을 써야 한다고 말했었다.(화수) 183
“젊어” 걷다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땅이 너무나 젊었다. 걸어도 걸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 평소 명은이 거닐고 파들어가는 땅은 늙고 고정된 땅이었다. 그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기분 전환이 되었다.(명은). 195
매일 비슷한 날들이 지속되면 머릿속에 깃발 같은 것이 남지 않는다. 깃발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단편적인 이미지들만이 종종 떠오른다.(심시선) 201
열려 있는 사람(체이스) 204
“나는 세상에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생각해. 남이 잘못한 것 위주로 기억하는 인간이랑 자신이 잘못한 것 위주로 기억하는 인간. 후자 쪽이 훨씬 낫지.” “두 종류로 나누는 건 너무 단순화시킨 거 아냐?” “그러게, 그러면 안 되는데.”(체이스와 지수) 208
어른들은 기대보다 현저히 모르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해림은 인생의 중요한 선택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226-227
예술에 통계 같은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워낙 특수한 사례들이 많아서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은 헐거운 관찰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할 테지만, 지켜본바 작가들이 이십 년에 한 번씩 큰 변곡점을 그리지 않나 생각해왔습니다. .. 농담이 아니라 여든 살에도 변화는 옵니다. .. 일종의 도약 지점 같은 것일까요? .. 이십 년에 한 번 씩 오는 격변은 표현 능력의 도약일 수도 있고, 새로운 주제로의 전환일 수도 있고, 갑자기 마음을 빼앗는 재료일 수도 있고, 그때껏 발견하지 못해ㅐㅆ던 색일 수도 있고, 참선 끝의 득오일 수도 있습니다.(심시선) 228-229
다시 떠올리기 싫은 어설픈 젊음이었다. 그 어설픔이 이제 사라졌는지? .. 모친이 늘 하던 말이 맞았다. 같은 일을 이십 년쯤 하면 계단 턱 같은 것을 만나게 되고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성취감이 있었다.(명준) 231
“빼앗긴 것은 영영 복구되지 않고, 빼앗아간 사람들은 자기가 뭘 했는지도 몰라. 미국을 봐. 2차대전 때 군국주의자들이랑 싸웠다는 것만으로 정의의 편인 것처럼 굴지만 하와이에 한 짓을 봐.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한 짓도. 제국주의자들은 자기가 제국주의자인 걸 몰라. 인정을 안 해.” .. “.. 특별히 어느 지역 사람들이 더 잔인한 건 아닌 것 같아.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겐 기본적으로 잔인함이 내재되어 있어. 함부로 굴어도 되겠다 싶으면 바로 튀어나오는 거야. 그걸 인정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에 따라 한 집단의 역겨움 농도가 정해지는 거고.” “역겨움의 농도라니 재밌네.” “비슷한 일을 겪어놓고 여기 하하호호 하며 관광 오면 안 되었던 것 같아.” “큰누나한테 그렇게 말해봐.” “무서워서 못해…… 어쨌든 하와이를 좋아하면 하와이에 오면 안 되는 거였어. 제주도를 아끼면 제주도에 덜 가야 하는 것처럼.” “오기 전엔 몰랐잖아. 와야 알 수 있는 것들인데.” “그건 그래.”(명준과 난정) 234-235
“응, 당신은 괜찮은 벽이야. 내가 생각을 던지면 재밌게 튀어 돌아와.”(난정) 237
심시선 : .. 어떤 시대는 지나고 난 다음에야 똑바로 보이는 듯합니다. .. 심시선 : .. 세상은 참 이해할 수 없어요. 여전히 모르겠어요. 조금 알겠다 싶으면 얼굴을 철썩 때리는 것 같아요. 네 녀석은 하나도 모른다고. 256
“여자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큰 거 해야 해요. 좁으면 남들 보고 비키라지. 공간을 크게 크게 쓰고 누가 뭐라든 해결하는 건 남들한테 맡겨버려요. 문제 해결이 직업인 사람들이 따로 있잖습니까? 뻔뻔스럽게,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세요. ..“(심시선) 269
“전형적인 집안에서 태어나 뭔지 알 수 없는 집안으로 장가를 왔지.”(태호) 274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 각자에게 주어진 질문 하나에 온 평생으로 대답하는 것은 질리기 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대가들일수록 질려하지 않았다. 즐거워했다는 게 아니다.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심시선) 288-289
기억하지 않고 나아가는 공도에는 본 적이 없다. ..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손맛이 생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무것도 당연히 솟아나진 않는구나 싶고.. 298-299
“.. 사랑은 돌멩이처럼 꼼짝 않고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빵처럼 매일 다시,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거래..” 304
“.. 세상의 일그러지고 오염된 면을 너무 가까이서 보게 되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는 거야. 그걸 설명할 언어를 찾을 때까지는. 어떤 건지 이해가 가?..” 305
결혼을 매 순간 갱신하는 계약으로 생각하는 집안의 딸과 결혼하는 게 아니었어. 알면서도 뛰어들었지. 바보였지…… 305
언젠가 시선이 픽션은 존재하는 사람들과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대화라고 했던 것이 생각나 .. 311
경아가 잠든 해림의 티셔츠를 가리키며 “노란색을 입었어, 내가 몰래 넣어놓은 걸 입었어” 하고 기뻐하며 속삭였다. 해림의 티셔츠 색깔 말고도 무언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앞서 짚기보다는 천처니 발견해나가기로 마음먹고 등을 기댔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331
추천하는 말 - 나는 ‘4.3’을 알지 못한다 (서경식, 도쿄 케이자이대학교 현대법학부 교수) ‘4.3’이라는 사건. .. 그것을 ‘알지 못한다.’라는 것 자체가 무섭고 부끄러운 그런 사건인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이 무엇을 알지 못하는가를 알아야만 한다. 평화와 사람다움을 위하여. 9
피살 “박재옥 여인은 젖먹이 아기를 안은 채 식산 은행 철문 앞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병원에 옮겨 온 후에도 몇 시간 동안 목숨이 붙어 있었습니다만 끝내 운명하고 말았지요. 총알은 그 여인의 오른족 옆구리를 관통, 왼쪽 둔부 쪽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망루처럼 높은 곳에서 쏜 총탄에 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젖먹이 어깨에도 총알이 지나갔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하두용, 1994년 67세. 제주시 삼도1동, 당시 제주 도립 병원 경리 주임. 56
고문 “둘째 오빠가 행방불명되어 버리자 우리는 졸지에 ‘폭도 집안’으로 몰렸어요.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당시 열세 살이던 나까지도 서북청년회에 끌려가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옷을 모두 벗긴 채 고문을 했는데, 거꾸로 매달아 몽둥이로 때리거나 고춧가루 탄 물을 코와 입에 부어 댔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입을 다무니까 쇠붙이를 사용해 이빨 사이를 억지로 벌리는 바람에 이가 다 부러졌어요. 전기 고문을 받은 곳은 살이 썩어 갔어요. 토벌대는 우리가 오빠를 숨긴 채 밥을 날라주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며 윽박질렀습니다. 기절하면 물 뿌려 깨운 뒤에 또 고문했어요. 결국 서청은 도피자 가족이라며 어머니를 총살했습니다. 그때 언니랑 나도 함께 끌려갔는데 서청은 우리한테 ‘어머니가 죽는 것을 잘 구경하라.’고 하면서 총을 쏘았어요. 난 그때의 충격으로 성장이 멈춰, 다 자란 후에도 몸무게가 30킬로그램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쳐집니다.” - 정순희. 2007년 72세. 서귀포시 강정동. 64
약탈 “난 본래부터 우익 활동을 했어요. 그리고 사태 때에는 중문면 면사무소 산업계 서기적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북 청년회가 문제였어요. 서청은 무전취식하며 민폐를 심하게 끼쳤습니다. 돈을 갈취하기 위해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주민들에게 강매했습니다. 처음엔 오백 원에 팔다가 곧 천 원으로 올렸어요. 당시 천 원은 큰 돈이었습니다. 서청은 면사무솎가지 찾아와 행패를 부렸습니다. 면 회계원에게 돈을 요구하는가 하면, 나한테는 쌀을 강요했어요. 난 우익이라고 해서 매일 아침 담벼락에 날 숙청하라는 좌익 삐라가 나붙어 위험을 느끼던 터였는데, 이번엔 서북 청년회에게 밉보인 겁니다. 그래서 급히 경찰에 투신했습니다. 그 직후 사태가 악화되면서 서청에 의한 대대적인 학살이 있었습니다. 전에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을 사지 않은 사람, 그리고 면사무소 직원으로 서청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개 총살당했습니다. 아마 내가 그 직전에 경찰에 투신하지 않았다면 나도 서청한테 죽었을 겁니다.” - 이기호. 1997년 80세. 서귀포시 중문동. 66
겁간 “서북 청년회 단장 김재능은 여자들을 많이 괴롭혔습니다. 김재능이 양 아무개를 범했지만 그 여자는 죽을 위기에 놓인 남동생을 살리기 위해 감수할 수밖에 없었지요. ‘토벌대에게 누가 당했다더라.’는 소문이 퍼지면 우린 전전긍긍했습니다. 당시 멋쟁이 여성들도 많았지만 무서워서 가급적 바깥나들이를 삼갔고 일부러 바보처럼 꾸미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 강소희. 1997년 78세. 제주시 도평동. 당시 분 동맹 집행위원. 68
신촌 회의 “무장봉기가 결정된 것은 1948년 2월 그믐에서 3월 초 즈음의 일이다. 신촌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도당 책임자와 각 면당 책임자 등 19명이 신촌의 한 민가에 모였다. 참석자는 조몽구, 이종우, 강대석, 김달삼, 나(이삼룡), 김두봉, 고칠종, 김양근 등 19명이다. 이덕구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김달삼이 봉기 문제를 제기했다. 감달삼이 앞장선 것은 그의 성격이 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경파와 신중파로 갈렸다. 신중파로는 조몽구와 성산포 사람 7명인데, 그들은 ‘우린 가진것도 없는데, 더 지켜보자.’고 했다. 강경파는 나와 이종우, 김달삼 등 12명이다. 당시 중앙당의 지령은 없었고, 제주도 자체에서 결정한 것이다. 오르그(조직원을 뜻하는 러시아어. 여기서는 당 정책이나 조직을 집행하기 위해서 파견되는 책임 있는 지도원을 뜻함)는 늘 왔으며, 김두봉의 집이 본거지였다. 해방 후 강문석은 한 번도 제주에 오지 않았다. 김달삼은 20대의 나이이지만 조직부장이라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장년파는 이미 징역살이를 하거나 피신한 상태였다. 안세후느 오대진, 강규찬, 김택수 등 장년파는 이미 제주를 떠난 뒤였다. 그런데 우린 당초 악질 경찰과 서청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지 경비대는 아니었다. 미군에게도 맞대응할 생각이 없었다. 미군에 대해 다소 감정이 있었지만 그들은 신종 무기가 많은데 …… 우리가 공격한 후 미군이 대응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우선 시위를 하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장기전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익렬(9연대 연대장)과도 회담한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지식과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가 정세 파악을 못하고 신중하지 못한채 김달삼의 바람에 휩쓸린 것이다. 그러나 봉기가 결정된 후,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니까 ‘우리의 결정이 정당한 거 아닌가.’하는 분위기였다.” - 이삼룡. 2002년 78세. 일본. 당시 대정면 모슬포. 76
망보는 소년들 5.10선거가 파탄나자 미군 함정이 해안을 봉쇄한 가운데 군(국방 경비대)이 본격 투입되어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시작되었다. 소년들은 마을 동산 위에서 깃대를 세우고 망을 보았다. 멀리 토벌대가 출현하며 깃대를 눕혀 마을에 알리고, 군인이면 ‘노랑개 온다’ 경찰이면’검은개 온다’하고 하였다.
“청년들은 3.1 사건 이후 계속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고민에 빠진 어른들은 마을을 살리기 위해 양면 작전을 썼습니다. 즉 산 쪽에 협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찰의 요구도 잘 들어줘서 어느 쪽으로부터도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요. 그러나 토벌대가 마을에 오면 아무래도 피해가 생기니까 빗개(보초)를 서면서 토벌대가 오면 호각으로 신호를 보내 청년들이 피하도록 했습니다. 어린 우리들도 수신호를 배워 연락을 했지요. 그러나 북촌 대학살 때에는 마구 불을 지르고 죽였으니까. 그런것도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 신수교. 1998년 62세. 조천읍 북촌리. 92
부모들 젊은이를 둔 부모들은 도피 입산한 자식을 대신하여 추궁당한 끝에 죽임을 당했다.
“경찰은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먼저 한 부인을 끌어내더니 옷을 홀딱 벗겼습니다. 배가 많이 나온 임산부였습니다. 남편이 산에 오른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경찿ㄹ은 그 부인의 겨드랑이에 밧줄을 묶어 팽나무에 매달아 놓고 대검으로 마구 찔렀습니다. 이어 토벌대는 주민들을 선별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폭도 가족’을 가리는 것인데 우리는 아버지가 앞서 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는 이유로 끌려 나오게 됐습니다. 우린 4형제였는데 열세 살이던 내가 장남이고 밑으로 열한 살, 일곱 살, 그리고 젖먹이 동생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호소로 동생들은 풀려났지만 나는 ‘눈망울이 둥글둥글한 게 폭도들에게 연락함직한 놈’이라며 풀어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13명이 인근 밭으로 끌려가게 됐는데, 경찰들은 ‘칼로 찔러 죽이자.’ ‘시간이 없으니 총으로 쏘자.’며 자기들끼리 잠시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그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칼에 찔리면 고통이 오랠 것이니 총에 맞는 게 낫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순간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어머니가 나를 덮치며 쓰러졌습니다. 총에 맞은 어머니의 몸이 요동치자 내 몸은 온통 어머니의 피로 범벅이 됐습니다. 난 경찰이 떠날 때까지 어머니 밑에 깔려 있어서 무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졸지에 고아가 됐는데 일곱 살 난 동생은 홍역으로, 젖먹이 막내는 젖을 못 먹어 곧 죽었습니다. 만일 영화나 연극으로 만든다면 난 그날의 모습들을 똑같이 재연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도 눈에 선합니다.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 안인행. 1999년 4세. 애월읍 장전리. 100
붉은 바다 “1948년 12월 14일 오후 5시쯤 갑자기 군인과 경찰이 마을에 들이닥쳐 한 사람도 빠짐없이 향사로 집결시켰습니다. 그들은 열여덟 살에서 마흔 살 사이의 남자들과 얼굴이 고운 처녀만을 골라 밧줄로 묶어 표선리로 끌고 갔습니다. 그 후 남자는 12월 18일과 19일 양일에 걸쳐 표선 백사장에서 학살당했고, 여자는 군인들의 노리갯감이 되다가 군대가 이동하게 되자 최종적으로 12월 27일에 표선 백사장에서 총에 맞은 후에 또 칼로 찔려 죽었습니다.” - 김양학. 1998년 58세. 표선면 토산1리. 113
젖먹이 “우리 마을 북촌리에 대학살이 벌어지던 그날, 아침부터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군인들이 마을 동쪽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연설이 있으니 학교 운동장으로 집합하라 했습니다. 군인들은 우선 경찰 가족, 군인 가족을 따로 분리시키더군요. 낌새가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은 사돈의 팔촌이라도 경찰이 있으면 경찰 가족 쪽으로 줄을 섰습니다. 군인은 우선 민보단 간부를 불러 내 바로 총살했습니다. 사람들이 동요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 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댓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업혀 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 - 김석보 1998년 63세. 조천읍 북촌리. 118
십자가 “제주 출신 재일 동포 중에는 자신이 마치 4.3 사건 때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런 말하는 사람에게 반감을 갖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당신이 진정으로 투쟁을 했다면 제주도에서 죽었어야지, 어떻게 지금 살아 있는가? 불만 질러 놓고 떠난 것은 무책임한 것 아닌가?’ 라고 반박합니다. 또한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나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 선생처럼 끝까지 제주도에 남아 있던 분을 존경합니다. 내가 산을 올라 보니 ‘이덕구 노래’가 있을 정도로 선생은 신망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소련의 소년단 노래에 가사를 붙인 것입니다.” ‘머리에 쓴 것은 도리구치로구나. 손에다 권총 쥐고서 싸움을 나가네. 누구냐 그 이름 무섭다고 박박 얽은 그 얼굴 이- 이- 이덕구!’ - 김민주. 1994년 63세. 일본. 당시 조천 중학교 학생. 126
빌레못굴의 유골 “토벌대는 마구잡이로 청년들을 죽였습니다. 난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순 없었기에 도망쳤습니다. 그 무렵 알게 된 빌레못굴로 숨어들었는데 그곳에는 남읍리 주민 28명이 있었고, 우리 마을 사람으로는 강규남의 가족 5명(어머니, 아내, 아들, 딸, 누이), 송시영과 그의 처, 양신하 등이 있었습니다. 입구가 좁고 은밀한 곳이라 모두들 안심했지만 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여차하면 숨을 만한 곳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요. 결국 굴이 발각됐습니다. 겨울철이라 온도 차이로 인해 굴 밖에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김 때문인 것 같습니다. 군경 토벌대와 민보단원들이 굴 안으로 들어오자 급히 숨었지요. 그런데 토벌대가 ‘살려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고 유혹을 하자 대부분 나갔습니다. 굴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의 신원을 파악한 토벌대는 붙잡은 사람을 통해 내 이름을 부름 나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난 끝까지 버티며 나가지 않았어요. 토벌대는 사람들이 굴 밖으로 나가자마자 굴 입구에서 바로 학살했습니다. 강규남의 아내는 두어 살 난 딸을 업은 채 도망쳤는데, 나처럼 인근에 숨지 않고 더 깊숙이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 빠져나오지 못한 채 굶어 죽었습니다. 굴이 너무나 크고 복잡해 길을 잃은 겁니다. 모녀의 유골은 나중에 굴 탐사팀에 의해 발굴되었습니다.” - 양태병. 1998년 71세. 애월읍 어음리. 134
자료1 제주 4.3 항쟁의 역사적 의미 -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위원
2000년 1월 공포된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주4·3특별법)에 의해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 (제주 4·3 위원회)가 설치되었는데, 이 '제주4·3 위원회'에 2001년 5월까지 신고된 4·3 관련 피해자는 사망 10,715명, 행방불명 3,171명, 후유 장애 142명 등 총 14,028명이었다. 이들 중 20세 미만이 3,840명이고, 60세 이상이 860명이었다. 피해자 중 여자는 2,875명이었다. 제주도 마을마다 피해자들이 있었다. 4백 명 이상 희생된 것으로 신고된 마을만 3곳이고, 1백 명 이상신고된 마을은 무려 45곳이었다. 2003년에 통과된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진상 조사 보고서)에서는 인구 감소같은 여러 가지 근거를 통해, 신고된 피해자의 두 배쯤 되는 2만 5천 명에서 3만 명이 4·3 때 희생된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제주도 주민이 약 30만 명이었으니까 10분의 1정도가 희생된 것이다. 제주도에서의 희생은 우리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임진왜란(1592~1598) 때나병자호란(1636년) 때도 한 지역에서 그렇게 많은 민간인 희생이 나지는 않았다. 그 점은 주민 집단 학살이 몇 차례 있었던 일제 강점기 때도 마찬가지다. 한국 전쟁(1950~1953) 때도 많은 주민 집단 학살이 있었고, 전쟁이 시작된 직후 군경이 저지른 '보도 연맹원 대량 학살'은 제주도에서의 희생보다도 규모가 컸지만, 그것은 남한 지역 전체에서 저질러진 것이었다. .. 제주도를 온전히 느끼려면 빼어난 풍경과 함께 젲 4.3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48-149
남로당 제주 도당의 무장봉기는 제주 도민이 가세하여 항쟁으로 변모하였다. 제주 4.3 사건을 연구한 미국 정치학자 존 메릴(John Merril)은 “2차 세계 대전(1939~1945) 후 점령군에 대항하여 이처럼 치열한 민중 반란이 분출된 곳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었다.”라고 기술 했다. 149
4·3 사태는 꼭 유혈 참극을 빚어야 했을까? 4·3 사건이 경찰의 탄압과 서청단원의 빈번한 불법 행위로 일어났다고 판단한 연대 연대장 김익렬은, 이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그리하여 제주 군정장관 맨스필드(John S. Mansfield) 중령의 승인하에 4월28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평화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는 72시간 안에 전투를 중지하고, 무장은 점차로 해제하며, 무장 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김달삼이 진심으로 평화적 해결을 원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김익렬이 한 것처럼 그 뒤로도 사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선무 공작을 벌였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왔을 것이고 당국을 신뢰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4.28 평화 회담 직후의 도민 반응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5월 1일 '오라리 방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경찰은 이 사건을 무장대 소행으로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우익청년단체에서 평화를 깨기 위해 일부러 저지른 짓이었다. 미군은 이 오라리 방화 사건'을 입체적으로 촬영해 무장대의 폭력성을 알리는 선전용으로 써먹었다. 강경 진압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였다. 1948년 5월 3일, 미군은 무장대 총공격을 지시했다. 9연대 연대장은 김익렬에서 박진경으로 바뀌었다. 154
미군은 이미 김익렬에게 초토화 작전을 지시한 바 있었다. 5.10 선거가 무효화된 후에 제주 지구 미군 사령관으로 온 브라운 대령 (Rothwell H. Brown)은 "사건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고 공공연히 강경 일변도의 발언을 했다. 9연대가 11연대로 재편되어 11연대장이 된 박진경은 무자비한 강공 작전을 폈다. 무장대가 5백 명 안팎이었는데도, 정부는 5월 27일까지 3,126명을 잡았다고 발표했고, 6월 12일 <조선일보>는 체포된 자가 약 6천 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155
1948년 10월 17일, 새로 재편된 9연대 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의 지점과 산악 지대를 허가 없이 통행하는 자는 총살에 처하겠다는 포고를 발표했다. 초토화작전이 임박했음을 말해 주는 포고였다. 다음날인 10월 18일, 제주 해안이 봉쇄되었다. 유일한 지역 언론사인 <제주신보> 사장이끌려가고 편집국장은 총살되었다. <경향신문>과 <서울신문> 지사장도 끌려가 총살되었다.초토화 작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철저히 제거되었다.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정부는 아무런 법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때부터 다음 해 3월까지 어린아이부터 70, 80대 노인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주민들이 집단으로 학살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곳곳에서 주민 집단 학살을 불러온 초토화 작전은 1차적으로는 9연대(연대장 송요찬)와1948년 12월 29일, 9연대와 교체되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2연대(연대장 합병선)에 있다.그렇지만 최고 책임은 1948년 12월 서청 총회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제주도에 내려온 한 서청 단원이 "이 대통령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 라고 증언한 바가 시사하듯, 이승만 대통령한테 있다.이 대통령은 1948년 늦가을에 서청 단원을 대거 제주도에 투입해 섬을 초긴장 상태에 몰아넣었고, 1949년 4월 9일 제주도를 방문해 잔존 폭도들을 완전히 소탕하라고 지시했다. 주민 집단 학살은 국제적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제주도에서는 작전의일환으로 버젓이 자행되었다. 1948년 12월 14일, 중산간 마을에서 옮겨 온 표선면 토산리주민 157 명이 9연대 병력에 의해 포박당한 채 표선 백사장으로 끌려가 집단 학살되었다. 또1949년 1월 17일에는 군인들이 조천면 북촌 마을을 포위한 채 4백여 채의 집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 천여 명을 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그중 약 3백 명을 인근 밭에서 학살하였고, 다음날에는 함덕 해수욕장으로 끌고 가 약 1백 명 정도를 학살했다. 이러한 주민 집단 학살로 1백 명 이상 희생된 마을이 45곳이나 된다는 것은 맨 앞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많든 적든 150곳이 넘는 마을에서 이와 같은 희생자가 나왔다. 인간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일도 버젓이 저질러졌다. 토벌 작전을 펴면서 13명의 목을 잘라서 시내를 두루 다니며 구경시키기도 하고, 서북청년회에서 주민들을 모아 놓고 서로 뺨을 때리게 했는데,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도 이런 짓을 하게 했다. 토벌대가 주민들을 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놓고 발가벗긴 채 매질을 하고, 남녀를 지목하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하게 했다. 또 자식을 맨 앞줄에 세워 놓고 부모가 총살당할 때 손뼉을 치고 만세를 부르게 했다. 잔혹 행위는 끝이 없었다. 과거 나치나 일본군이 저질렀던 '살도 빈번히 발생했다. 남편이 산에 올라갔다고 아내를 죽이고 자식이 입산자라고 부모를 죽였다. 도피자 가족으로 여자나 노인, 어린아이 같은 주로 노약자들이 끌려가 살해되었다. 1948년 12월 10일 개수동에서는 도피자 가족과 외지인 36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이곳에서는 1949년 1월 24일에도 한 여인이 세 살 난 아이와 함께 총살당한 것을 비롯해 8명이 남편 또는 자식이 피신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학살은 무장대에 의해서도 저질러졌다. 4·3 초기,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 단원 같은 우익 청년 단체 소속원, 그리고 토벌대에 협조한 우익 인사와 그 가족들을 살해했다. 그러다 토벌대의 진압으로 곤경에 빠지게 되자, 토벌대 편이라고 생각한 마을들을 덮쳐 주민들을 집단으로 학살했으며, 어린아이와 여자, 노인도 살해했다. 제주 4·3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중 78.1%는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지만, 12.6%인 1.764 명은 무장대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나타났다. 주민 집단 학살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일어났다. 제주도도 육지와 마찬가지로 보도연맹원과 요시찰 대상자를 예비검속해 살해했다. 제주의 경우 첫 번째 학살은 1950년 8월 4일 일어났다. 이날 예비검속자 수백 명이 해군 경비정에 실려 바다에 수장되었다. 또 8월 19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수백 명이 현재의 제주 비행장에서 총살당해 암매장되었다. 서귀포에서는 7월 29일에 150명 정도가 살해되었고, 8월 12일에도 학살이 있었다. 모슬포 경찰서 관할 지역에서는 1950년 8월 20일에 집단 학살이 있었다. 이때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던 한림 지역 주민들은 1956년에 몰래 61구의 시신을 수습해 안장했다. 모슬포절간고구마 창고에 수감되었다가 희생된 사람들의 유족들도 같은 해 당국의 허가를 받아 132구의 시신을 거두어 한 자리에 묻고, 그곳을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의 땅'이라는 뜻으로 '백조일손지지'라고 이름 붙였다. 155-157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내기 어려운 선택들을 척척 저지르고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이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행로를 밟아간다 해도 더이상 주변에서 놀라게 되지 않는 사람들. 33
집이 싫었어. 외딴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삼식 분 넘게 걸어야 하는 길도 싫고, 버스에 실려 도착하는 학교도 싫었어. 수업 시작을 알리는 <엘리제를 위하여>가 싫었어. 수업시간이 싫고, 아무것도 그리 싫어하지 않는 것 같은 아이들이 싫고, 주말마다 빨아서 다려 입어야 하는 교복이 싫었어. 그러던 언젠가부터 엄마가 싫어지기 시작했어. 그냥, 이 세상이 역겨운 것처럼 엄마가 역겨웠어. 나 자신이 혐오스러운 것과 똑같이 엄마가 혐오스러웠어 엄마가 해주는 음식이 지긋지긋하고, 흠집투성이 밥상을 꼼꼼히 행주질하는 뒷모습이 끔찍하고, 옛날식으로 틀어올린 하얗게 센 머리가 싫고, 무슨 벌을 받는 사람처럼 구부정한 걸음걸이가 답답했어. 점점 미움이 커져서 나중에는 숨도 잘 쉴 수 없었어. 무슨 불덩이 같은 게 쉬지 않고 명치께에서 끓어오르는 것 같았어. 결국 집을 나온 건 살고 싶어서였어. 77
엄마가 어렸을 때 군경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그때 국민학교 졸업반이던 엄마랑 열일곱 살 이모만 당숙네에 심부름을 가 있어서 그 일을 피했다고 엄마는 말했어. 다음날 소식을 들은 자매 둘이 마을로 돌아와, 오후 내내 국민학교 운동장을 헤매다녔대.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여덟 살 여동생 시신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포개지고 쓰러진 사람들을 확인하는데, 간밤부터 내린 눈이 얼굴마다 얇게 덮여서 얼어 있었대. 눈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니까, 이모가 차마 맨손으론 못하고 손수건으로 일일이 눈송이를 닦아내 확인을 했대. 내가 닦을 테니까 너는 잘 봐, 라고 이모가 말했다고 했어. 죽은 얼굴들을 만지는 걸 동생한테 시키지 않으려고 그랬을 텐데, 잘 보라는 그 말이 이상하게 무서워서 엄마는 이모 소맷자락을 붙잡고, 질끈 눈을 감고서 매달리다 시피 걸었대. 보라고, 네가 잘 보고 얘기해주라고 이모가 말할 때마다 눈을 뜨고 억지로 봤대.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84
엄마는 말했어. 내가,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86
이상하다, 살아 있는 것과 닿았던 감각은. 불에 데었던 것도,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 살갗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109
건강해 보여도 방심할 수 없어. 아무리 아파도 새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횃대에 앉아 있대. 포식자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견디는 거야. 그러다 횃대에서 떨어지면 이미 늦은 거래. 112
속솜허라. 동굴에서 아버지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에요. .. 숨을 죽이라는 뜻이에요. 움직이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거예요. 159
2부 밤
제목이 뭐야? ..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 작별하지 않는다. .. 작별인사만 하지 않는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거야? .. 완성되지 않는 거야, 작별이? .. 미루는 거야, 작별을? 기한 없이? 191-193
정말 헤어진 건 아니야, 아직은. 197
…… 누군가 더 있는 것 같을 때가 있어. .. 뭔가가 더 남아 있어. .. 너도 그럴때가 있어? .. 언제부터 그랬어? .. 뼈들을 본 뒤부터야. .. 그 가을에 유골들이 발굴됐어. 어디에서? 제주공항 …… 활주로 아래에서. 208-209
산 위 무장대 삼백 명과 내통할 수 있다고 군경에게 의심받을 나이의 남자는 맏아들뿐이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ㅇ직 아버지만 걱정했어. 이북 사투리를 쓰는 경찰들이 마을마다 들이닥쳐서 젊은 남자들을 잡아가 실적을 올린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니까. 일제 때 부역하던 고등계 형사들이 그대로 남아 해방 전에 하던대로 고문을 한다고, 그렇게 읍내 경찰서에서 죽은 고등학생이 있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가 듣고 온 뒤로는 아버지 혼자 동굴에 숨어 지내게 했대. 동굴에서 아버지는 낮엔 호롱불을 켜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시국이 지나가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시험을 쳐보고 싶다고 생각했대, 해가 지면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불을 끄고 앉아 있었어. 자정 녘에야 집에 들러 식은밥을 먹고 눈을 붙이고, 찐 감자 서너 알이랑 종이에 싼 소금 한 첩을 동트기 전에 싸 들고 다시 동굴로 올라갔대. 216-217
그 11월 밤에도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동굴을 나와 집으로 오는 길이었어. 건천을 건너는데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며 별안간 사위가 밝아졌다. 집들이 불타기 시작한 거야. 어디로도 움직여선 안 된다는 걸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알았어. 건천 기슭 대숲에 몸을 숨기고 있는데 마을 공터 쪽에서 일곱 발총성이 울렸다. 뒤이어 군인들이 호각을 불며 사람들을 이동시키는 걸 아버지는 숲 사이로 지켜봤어. 먼 거리였지만 손을 잡고 걷는 두 동생을 알아보았다. 더 어린 아이들을 앞세워 걸리거나 아기를 업은 여자들, 허리가 굽은 노인들이 넘어지거나 빨리 걷지 못해 자꾸 행렬이 지체됐는데, 그때마다 군인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개머리판을 휘둘렀대. 더이상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아버지는 마을로 달렸어. 뒤돌아보자 가호 수가 더 많은 아랫마을에서도 불길이 타오르는 게 보였대. 불꽃이 얼마나 크고 밝은지, 연기가 솟아 닿는 구름의 흰빛이 보였대. 집담과 밭담들, 돌로 된 집들의 벽체들만 남기고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어. 아버지가 집에 들어서자 마당 가득 붉은 게 흩어져있어서 놀랐는데, 달아오른 고추장 장독이 터진 거였어. 집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총소리가 들렸던 팽나무 아래로 달려가보니 일곱 명이 죽어 있었대. 그중 한 사람이 할아버지였어. 가호마다 주민 명부를 대조한 군인들이, 집에없는 남자는 무장대에 들어간 걸로 간주하고 남은 가족을 살 거야. 집까지 시신을 업고 가서 마당 가운데 뉘어놓고, 아버지는 닥치는 대로 댓잎 한아름을 끊어왔다. 헝겊 대신 그걸로 얼굴과 몸을덮고, 아직 잔불이 타고 있는 창고 자리에서 자루가 타버린 삽을끌어냈다. 달궈진 쇠가 식기를 기다려 댓잎 위로 흙을 덮었대. 217-218
군이 데려간 사람들은? P읍에 있는 국민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12월에 모두 총살됐어. ..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220
보이기사 우리집서 제일 잘 보였주. 저디 보라. 이디 마루에만 앉앙 이서도 바당이랑 모살왓이랑 훤하게 보염시네. 그날도 안방에서 봤주게. 문 열기 겁이 나난 창호지에 손가락 구멍을 뚫어그네.
어두운데다 본문의 활자들이 작아, 촛불 바로 아래 책을 놓고 얼굴을 가까이해야만 읽어갈 수 있다. 수년 동안 우기에 물기를 먹었다 마르길 반복하며 배었을 헌책 냄새가 난다.
해거름에 트럭으로 두 대 가득 사름들이 실려와서. 못해도 백명은 되실 거라. 군인들이 저 모살왓에 총검으로 네모지게 금을 그어놔그네, 사름들신디 그 안에다서 이시랜 하데. 똑바로 서라. 앉지 마라, 줄 맞추라 허고 군인들이 소리를 울르는 거 같긴 헌디 바람이 바당 쪽으로 불어난 잘 안 들려서. 호루라기 소리가 계속 들렴신디, 나중에 사름들이 차분히 줄 서그네 금 안에 이시난더이상 안 불어서. 높은 사름 같은 군인이 무신 명령을 울르난, 금 안에 있던 사름들 열 명이 앞으로 나 반듯이 바당을 보고 서서, 무신 벌을 줄라는가 가만 보고 이시난, 군인들이 뒤에서 총을 쏴그네 몬딱 앞으로 넘어지는 거라. 다음 열 명을 또 나오렌 하난 서로 안 나가줄이 흐트러져서. 군인들이 총신을 휘두르멍 똑바로 서라 울르는디, 뒤쪽에 이시던 여남은 명이 금 밖으로 튀어그네 우리집 쪽으로 막 도망 오는 거라. 내가 스물두 살, 우리 큰아들이 백일되실 때라. 우리집 쪽으로 군인들이 총을 막 쏴댐시난 울 애기를 보듬고 솜이불을 뒤집어썼주. 애기 아방은 그때 막 민보단 들어가그네, 매일 경찰서에 일 보레 댕기멍 밤까지 집에 안들어와서. 허이고, 애기랑 나랑 둘밖에 어신디……… 그추룩 총소리를 하영 들은 거는 그때 첨이고 마지막이라. 한참 지낭 잠잠해져그네 벌벌 떨멍 문구멍을 내당보난, 그추룩 하영이시던 사름들이 모살왓에 자빠져 이서서. 군인들이 둘씩 짝을 지어그네 한 사름씩 바당에다 데껴넣어신디, 꼭 옷들이 물우에 둥둥 떠다니는 것추룩 보여서. 223-224
방으로 총알이 들어올까봐 이불을 쓰고 총소리를 듣는데, 아이들이 있었던 게 자꾸 생각나서 가슴이 떨렸습니다. 우리 아들만한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들도 봤고, 산달인지 배가 불러 허리를 짚고서 있는 여자도 있었어요. 어둑어둑해지는데 총소리가 멈춰서 문구멍으로 내다봤더니, 피투성이로 모래밭에 엎어져 있는 사람들을군인들이 바다에 던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옷가지들이 바다에 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다 죽은사람들이었어요. 다음날 새벽에 내가 우리 아기를 업고 아기 아빠 몰래 바닷가로 갔습니다. 떠밀려온 젖먹이가 꼭 있을 것 같아서 샅샅이 찾았는데 안보였어요.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옷가지 한 장 신발 한짝도 없었어요. 총살했던 자리는 밤사이 썰물에 쓸려가서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습니다. 이렇게 하려고 모래밭에서 죽였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225-226
우리 서방은 시국 때 피해 본 거 어서. 육이오 참전용사라 전쟁 나강 죽을 고비 넘긴 게 전부라. 그때 제주 사름들이 해군에 많이 가서, 섬에 이서봤자 군경한테 끌려 죽든가, 민보단이라고 군경 따라댕기멍 못 볼 것 보든가 둘 중 하나 아니라? 섬만 떠나민 하루라도 발뻗엉 잘 거렌, 우리 서방은 제주도에서 제일 먼저 자진 입대해서 살아신지 죽어신지 삼 년 소식도 엇다가 돌아와신디, 이녁은 운이 좋아신디 제주 사름들이 하영 전사했다주게. 제주도 사름들 다 빨갱이라고 수군대는 것 들어난 몸사리기가 어려웠다곡. 전쟁 전에 우리 서방이 군경 따라댕기 무신 일 해신지는 나한테 안 고랐으니 어떵알크냐? 서방이 원해서 따라댕긴 건 아니메 사름들하고 울력 나강 성 쌓고 이신디 경찰이 와그네 몇 명 뽑아간 거라. 그때는 요즘 같은 세상이 아니메하라민해야 되는 세상이라. 서청-서북청년단-사름들이 잔인해그네, 내내 같이 댕기던 민보단원들도 수틀리민 죽여분다는 소문이 이시난 나는 걱정되었주게. 파출소 마당에다 산사름 각시를 총검으로 찔렁 눕혀놔그네민보단 사름들헌티도 다 한 번씩 죽창으로 찌르렌 했다는 이야기도 들어난, 아무헌티도 원수 살 일 하민 안 된다고 내가 거념허민우리 서방은 항상 그래서. 이녁은 통역 일만 한다곡, 서청이 제주말을 못 알아듣곡 제주사름들은 서청 말을 못 알아들으난 소까이-소개-때 중산간에 불 놓으렁 댕길 때도 우리 서방은 문 두드렁 나옵서, 인제 불나난 혼저 나옵서, 고라주멍 다닌 게 다라고 그래서, 경헌디 이상해신 건 그때부텅 입대할 때까지 우리 아기를 안지 않은 거라. 이녁헌티 닿으면 부정 탄덴, 눈도 마주치민 안된덴 하고 정말 눈길도 안 줘서. 죽는 날까지 우리 서방은 군경 욕을 안 해서. 좋다 나쁘다 아예 입에 담질 않아서. 대신 빨갱이라 허멍 질색을 주게. 무장대 그 사람들이 한 거 무신거 있느냐고. 경찰 멫 명 죽이고 죄 어신 가족헌티 복수하고 산에 도망가불민 그 마을에서만 이백 명 삼백 명이 보복으로 떼죽음 당햄신디, 지상낙원 만든다 허멍 그거 지옥이주게 어떵 낙원이냐곡.
경 하난 나는 그 일이섰던날 서방헌티도 말 안해서. 한밤에 발소리도 어시 들어왕 등 돌리곡 웃목에서 쪼그려 자는 사헌티무신 말을 하냐. 딱 한 번뿐이여, 연구소 사름들 오기 전에 누구헌티 고랐던 거는 그 시국 때 젖 먹던 우리 아들이 중학교 댕길 적이그네, 한 십오년 지나실 때.
아침저녁 찬보름은 났어도 볕이 뜨거울 때여서. 대문 앞에 홍고추 널엉 말리고 이신디 몰르는 남자가 찾아와서 물어볼 말씀이 있던 공손하게 말을 꺼내신디, 전쟁 나기 전에도 우리가 이 집에 살아냐는거라. 그때는 군사혁명 때라, 그 시국 일이라민 아무도 입도 벙긋 안할 때여. 다른 데 살당 이사왔다고 하민 잘도 좋은 대답이어실 건디, 내가 원래 요령이 엇고 그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라. 관에서 나온 사름같이 안 보이곡, 눈이나 음성이나 꼭 버렝이도 못 죽일 것추룩 생긴 사람이 일단 들어오라 주게. 댓돌에 앉혀, 내외한다고 대문은 열어, 누가 들으카덴 가만가만 물어봤주게. 무신거 궁금하난 왔느냐곡. 경 하난 그 사이 우물쭈물하멍 사과를 하는 거라. 난데없이 이디 찾아와 미안하다곡, 폐를 끼치령 허는 것은 아니렌 허멍. 허이고, 내가 한건 못 참는 성미라. 괜찮다고, 어서 물어 가시렌 재촉을 해서. 경 하난 그 사름이 입을 떼신디, 그날 모래밭에서 아이들을 봤느냐곡.
그 말을 막 들어신디 명치 이신데 이디, 오목가심 이디, 무쇠다리미가 올라앉은 것추룩 숨이 막혀서. 내가 죄지은 것도 어디 무사 눈이 흐리곡 침이 말라신디 모르주. 몰른다고 내보내야 하는 것을 알멍도 이상하게 대답을 하고 싶었져. 꼭 내가 그 사람을 기다렸던 것추룩. 누게가 이걸 물어봐주기만 기다리멍 십오 년을 살았던 것추룩. 그래 사실대로 대답을 했져. 아이들이 이서나긴 했다고. 심장이 벌어질 것추룩 뛰멍 말이 더듬더듬 나와신디, 정작 그 사름은 도근하게 한참 가만히 있당 또 물어봐서 혹시 갓난아기 울음소리도 들었느냐곡. 처음 보는 사름인디, 우리 서방이 알민 큰일이 날 건디, 내가 넋이 나간 것추룩 또 대답을 해서. 울음소리는 못 들었지마는 애기를 안고서 이신 여자들을 봤다고. 정말로 내가 봐서난 모래에다그어는 금 바로 안쪽이서 여자 셋이 젖먹이를 보듬곡 붙어서 이 서서. 네 살, 일곱 살, 많으멍 열 살 먹은 거 같은 아이들 일고여덟이 그디 모여 이서서. 아이들이 그 여자들헌티 고개를 쳐들곡 가끔씩 입을 벌리는디, 뭐렌 고르는 건지 울르는 건지 보름이 바당쪽으로 불어난 안 들려서. 그 사름이 꼼짝 안 허곡 앉아만 이시난, 이제는 더 물을 말이어신가보다 생각해서. 경헌디 그 사름이 다시 묻는 말이, 바닷갓에 떠밀려온 아기가 있었느냐고. 그날 아니라 담날이라도, 담달에라도.
내가 더 고라줄 힘이 없었져………… 무사 십 년이나 지낭 나헌티 와그네 이러는곡 묻고 싶어나신디 그 말은 입에서 안 떨어졌주. 아무도 안 떠내려왔다고 겨우 가만가만 고라신다. 그 사름샤쓰가 목깃부터 등짝까지 몬딱 땀에 젖은 게 그제사 눈에 들어오는 거라. 그래 내가 부엌에 들어강 물 한 대접 떠와서. 경헌디 그 사람이 그걸 안 받아서. 두 손을 떨멍 무릎우에 올려놓고 있는 것이, 겨우 그릇을 받아 해도 마시기도 전에 엎엉벌를 것 같았다. 그걸 이녁도 알아크네 못 받곡, 인제는 그걸 나도 알아 해도 매정허게 그릇을 물려갈 수도 엇어그네 그추룩한참 서 있어서. 금방 아이들이 학교서 돌아올 건디 어서 가시 해서. 우리 서방이 알면 난리가 날 건디 제발 그전에, 도로 부엌으로 들어강물그릇을 내려놓고, 몇 번 오목가심을 문지르당 나왕보난 그 사름이안보여서. 아무 흔적도 어신 댓돌에 내가 앉아 시퍼런 바당을 내당봐서. 꼭 그 사름 발소리가 다시 들릴 거 같아신디, 그걸 내가 기들리는 것인지 겁내는 것인지 알 수가 어섰주게. 227-232
아버지 손이 물그릇을 받을 수 없을 만큼 떨렸던 건 그 순간의 감정 때문이 아니야. 심장 자리에 주먹을 얹으며 인선이 말한다. 이것보다 조금 넓은 돌을 데워서 여기 얹고 안방 벽에 기대앉아 계시곤 했어. 눕는 것보다 그 자세가 숨이 잘 나온다고 했어. .. 돌이 식으면 아버지가 나를 불렀어. 미지근해진 그걸 들고 내가 부엌으로 가면, 엄마가 받아서 냅비에 넣고 끓였어. 까만 돌에 숭숭 뚫린 구멍에서 거품이 일 때까지 지켜봤던 기억이 나, 뜨거운 물을 엄마가 따라 버리고 행주에 돌을 싸서 주면 받아들고 아버지에게 갔어. .. 심장이 아프셨어? 협심증 약을 드셨어. 결국 심근경색이 왔어. 손이 떨리던 것도 고문 후유증이었어. 234-235
개가열람실 창문의 블라인드 틈으로 들어오던 육 년전 겨울햇빛이 그때 내 눈앞에 떠오른다. 이 섬의 마을 단위 구술 증언들을 과감히 건너뛴 날, 두 권의 책을 골라 들고 복도 끝 간이 책상에 앉아 본 빛이었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석 달 동안 중산간이 불타고 민간인 삼만 명이 살해된 과정을 그 오후에 읽었다. 무장대 백여 명의 은거지를 알아내지 못한 채 초토화작전이 일단락된 1949년 봄, 이만 명가량의 민간인들이 한라산에 가족 단위로 숨어 있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즉결심판이 이뤄지는 해안으로 내려가는 것이 굶주림과 추위보다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3월에 임명된 사령관은 빗질하듯 한라산을 쓸어 공비를 소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효율적인 작전 수행을 위해 먼저 민간인들이 내려오도록 삐라를 뿌렸다. 아이들과 노인을 등뒤로 숨기고, 총에 맞지 않기 위해 흰 수건을 나뭇가지에 묶어 들고 내려오는 깡마른 남녀들의 행렬이 자료 사진으로 실려 있었다. 처벌하지 않겠다던 약속과 달리 수천 명이 체포. 262-263
1948년 정부가 세워지며 좌익으로 분류돼 교육 대상이 된 사람들이 가입된 그 조직에 대해 나는 알고 있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정치적인 강연에 청중으로 참석한 것도 가입 사유가 되었다. 정부에서 내려온 할당 인원을 채우느라 이장과 통장이 임의로 적어 올린 사람들, 쌀과 비료를 준다는 말에 자발적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들도 다수였다. 가족 단위로도 가입되어 여자들과 아이들과 노인들이 포함되었고, 1950년 여름 전쟁이 터지자 명단대로 예비검속되어 총살됐다. 전국에 암매장된 숫자를 이십만에서 삼십만 명까지 추정한다고 했다. 273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런 지옥에서 살아난 뒤에도 우리가 상상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291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굴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 있어.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318
혁명이 인간생존을 위한 미덕이라면, 효도는 인간윤리를 위한 미덕입니다. .. 혁명사회도 인간다운 윤리의 바탕 위에서 존재합니다. 26
15 김범준의 귀향
돠익이나 그 동조자들에게는 의용군은 ‘모집’이었고, 우익이나 그 동조자들에게는 ‘강제징집’이었다. 하나의 사실이 서는 입장에 따라 판이라헤 달라지는 현실을 보며 김범우는 제 3의 입장이 있을 수 없다는 이학송의 말을 되짚고 는 했다. 27-28
남다른 선민의식과 우월의식을 가진 그로서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논리 자체를 도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거부하고 혐오했다. 겨울이면 으레 머슴이 학교까지 업고 다녔고, 공부는 줄곧 1등만 해온 그로서는 인간은 평등하며, 평등해야 한다는 논리가 도대체 허무맹랑하고 가당찮았던 것이다 그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바로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 종류가 다르고, 그러므로 능력도 달라 절대로 평등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최서학) 40
최서학은 변소에 앉았거나 잠자리에 누워서는 이 세상이 어찌될 것인가를 심각하게 걱정했다. .. 아버지를 죽였다는 감정을 냉정하게 배제하더라도, 사람 같지 않은 무식한 노동자나 농민이란 것들이 꺼떡대고 설쳐대는 세상이 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따위 세상에서 사는 것은 차라리 죽느니만 하는 노동자가 우쭐거리고, 땅이나 파먹는 농사꾼들이 나대는 것인가. .. 서울만 보더라도 사대문 밖에 사는 것들이 어디 사람인가. 안국동까지를 경계로 해서 종로로만 나가도 벌써 사람의 격과 질이 달라지는데, 사대문 밖에 사는 것들이야 짐승이나 다를 게 무엇인가. .. 괴로군놈들이나 내무서놈들.. 반동 착취계급들의 동네라고 떠들어 대면서. 불한당 강도 같은 놈들, 능력 있는 사람들이 능력 있는 만큼 당연히 누리는 것이지 그게 어디 착취란 말이냐. 이번 전쟁은 귀한 피와 천한 피의 싸움이었고, 양반과 상것들과의 싸움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지면 양반들은 상것들의 발밑에 깔려야 한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한다. 42-43
“앞뒤가 없는 정치적 악순환이 무고한 대중들만 제물로 삼아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말로는 대중을 위한다는 정치가, 참으로 큰일은 큰일입니다.” 서민영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 미국식 정권, 쏘련식 정권을 하나씩 쥐고 서로 자기 주장만 옳다고 내세우며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나 전쟁에 끌어내다 죽이고 있는 두 사람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요즘 같아서는 도무지 살맛이 나지 않습니다.”(전원장) 50-51
16 양쪽을 다 미워하는 아이 (법일 스님 아들 석구의 표현)
"그래, 양키들은 반동첩자들을 사방에 깔아놓고 추접하고 비열하게 전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손승호) “추접하고 비열하게 전쟁을 한다고? 그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린가? 추접하고 비열하지 않으면, 청결하고 품위 있는 전쟁이라도 있단 말인가? 전쟁이 도대체 뭔가? 일단 일어났다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무찔러 이기는 게 그 목적 아닌가? 목적이 그런데 추접하지 않고, 비열하지 않고, 잔인하지 않고, 악독하지않은 전쟁이 어디 있겠나. 전쟁에 이긴 쪽일수록 그만큼 추접하고비열하고 잔인하고 악독한 짓 많이 했다는 거 아니겠나. 다만 인간이 교활함으로 그런 추악한 것들을 승리라는 포장지로 싸서 은폐시키고, 또 반대로 미화시키고 하는 거 아닌가. 자네 입장에서는내 말을 거부하겠지만 말이네. 후퇴를 하면서 적지에 첩자들을 뿌리는 첩보전은 이미 오래된 작전 중의 하나고, 그걸 가지고 상대방을 평가한다는 건 그 기준부터가 잘못되었네. 만약에 말이네, 인민군이 밀리게 되면 적지에 첩자들을 안 박을까? 안 박을 리가 없고, 만약 안 박는다면 그건 양심적이고 신사적인 게 아니라 바보나 천치 같은 짓이 되겠지. 그때 적지에서 활약하는 첩자들을 자넨 뭐라고 부를 건가? 추접하고 비열한 짓을 하는 자들이라고 하겠나? 아니겠지, 사지에서 열렬한 혁명투쟁을 전개하는 영웅적 전사들이라고 할 거 아닌가. 마찬가지로 자네가 추접하고 비열하다고 매도하는 첩자들도 상대방에서는, 북한괴뢰집단을 쳐부수기 위해 용감무쌍하게 싸우는 용사들이 되는 거네. 전쟁을 놓고 내리는 판단이라는 건 다 그 모양으로 일방적인 감정의 노출이고, 그래서 아무 의미가 없는 모략 중상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역사상 뛰어나다는명장들의 작전이라는 것도 자기들 편에서 보니까 위대한 거지 상대방 입장에서 보면 속임수가 대부분 아니던가. 전쟁 자체가 지탄되고 부정되는 것도 다 그 피할 수 없는 전쟁의 속성 때문이 아니겠어?"(김범우) 92-93
‘“.. 마음에 불심을 지니고 살면 세상이 제아무리 바뀌어도 다 아무 탈 없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법일) 100
17 무상몰수 무상분배
어떤 기술이고 제대로 습득되려면 한 치 길이의 이론에다가 한 자 길이의 실습이 합해져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한 치의 이론마저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전쟁터로 떠나가고 있었다. 그건 몸뚱이로 적을 막게 하는 무모하고도 무책임한 살인 작전이었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다 해도 그런 소모전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생명을 군인이란 이름을 붙여 전쟁터에 내보낼때는 최소한 자기방어는 할 수 있도록 총기조작기술을 습득시켜 주어야 할 책임이 상부에는 있었다. 적이 기습을 감행했으므로 어쩔 수 없다, 그건 책임전가의 변명이고, 책임회피의 기만에 지나지 않았다. 적의 기습에 대비하지 못한 것부터 책임으로 따져져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도발되고 나서 즉각적으로 대비하지 못해서 훈련기간을 다 까먹어버린 책임도 추궁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이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르는 학생들은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목청을 뽑아가며 전쟁터로 실려가고 있었다.(심재모 생각) 114
19 고구마똥
남원으로 출장을 나온 것은 재산조사에 따른 농민들의 불만실태를 도당이 직접 직접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세금징수를 위한 재산조사와 그것에 전면적으로 불만을 나타낸 농민들과의 문제는 하나의 새로운 정ㅊ책을 시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였다. 당은 인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데 있어서 주먹 구구식으로 재산조사를 해서 인민에게 피해를 입혀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나라 재정에 피해가 생기게 해서도 안되기 때문에 세금원을 정확하게 파악할 목적으로 과학적인 조사방법을 동원한 것이 낟알세기였다.(김범우) 188
".. 뭔가 좀 생각할 줄 안다는 사람들이 우리 민족문제를 생각하면서 미국이란 존재를 너무 가볍게, 너무 소홀하게 취급하는 걸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미국이란 존재의 속성과 그 영향력을 조금만 관심 있게 살펴보면 내 생각이나 태도가 금방 이해될 거네. 미국은 절대 간단한 나라가 아니고, 이학송선배 말을 흉내내자면, 미국은 우리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두고두고 풀어야 할 숙제가 될걸세." "그래, 반민특위의 불법해체를 놓고 이 선배가 그런 식으로 말했었지." "역시 기억력 좋군.” "중요한 말이었으니까. 헌데, 미국이 그렇게도 문젤까? 자네가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네만 그렇지가 않으니 문제네. 미군과 쏘련군이 이 땅에서 철군을 했는데 그 차이가 뭔 줄 아나? 쏘련군은 그냥 다 물러갔는데 미군은 500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겼다는 사실이네. 그거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는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흐지부지 잊어버리게 되지 않았나. 그런데 그 군사고문단의 구성이나 의미는 무엇인가. 그들은 거의가 장교들로 이루어졌고, 미국은 남쪽땅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표시였네. 유사시에 그 장교들 밑에 사병들만 갖다붙이면 그대로 전투병력이 되는 것 아니겠나? 그리고 실제로, 미국은 며칠 만에 전쟁에 개입했었지? 문제는, 미국을 과대평가가 아니라 과소평가한 데 있는 것이네. 적을 과대평가해서 패하는 것이나 과소평가해서 패하는 것이나 똑같은어리석음이라고 케케묵은 손자병법에서 말하고 있지 않던가? 보게, 며칠 전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에서 유엔을 상대로 조선인민의 성명서를 냈는데, 열다섯 살 이상의 조선인민 중에서 1,330만 명이 서명한 압도적 다수의 인민의 의지를 중시하고 유엔은 그 현장에 입각해서 조선에 대한 미국의 무력간섭을 즉각 중지하고 조선으로부터 외국군대를 철거시킬 방안을 강구하라는 게그 내용인데, 자네 생각엔 그게 실현될 것 같은가?" “글쎄…….” “이제 와서 그런 소리 해봤자 어림도 없는 소리네. 미국이란 나라가 그런 성명서 하나로 물러날 것 같았으면 애초에 전쟁에 뛰어들지 않았을 거네. 그리고 유엔이라는 것이 미국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미국의 힘으로 만들어져 미국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이야 세상이 다 아는 일 아닌가. 물론 당에서 그런 성명서를 낸 건미국이 물러갈 것을 기대해서라기보다 남의 민족문제에 무력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미국의 만행을 세계여론에 알리자는 목적이 더크겠지만 말야."(손승호와 김범우 대화) 191-192
전쟁은 명분으로 시작되어 광적인 살인과 파괴를 거친 다음 잿더미로 끝난다. 이학송의 머리에 모아진 생각이었다. 214
그(현오봉)는 언제부턴가 전쟁터에 대한 공포감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해서 이제는 부하들에게 정신교육을 시킬 때도 자신감에 차서 말을 하게 되었다. 그는 시체 썩는 냄새에 속이 뒤집히지 않았고, 두 눈알이 없어져버린 채 입에 구더기를 가득 물고 썩어가는 시체를 예사로 보아넘겼으며, 폭탄이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속에서도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216
선임하사는 예의 바른 태도를 취해 보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하 드런 놈, 외다리 게다짝 하나 붙였다고 나이도 새파란 새끼 좆같이 놀고 있네. 이 새끼야, 사람 무더기로 죽이자고 폭탄 저리 쏟아붓는게 뭐가 그리 근사하고 재미난 구경거리냐. 네놈이 저쪽에 있다고 생각해 봐, 참 근사하기도 하겠다. 그러고 말야, 저 폭탄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게 따지고 보면 다 우리 동포야, 동포. 원 개새끼, 드러워서 못 참겠네. 그는 되는대로 욕질을 해대고 있었다. 218
20 소용돌이
“박 대위, 내 말 똑똑히 들으시오. 지금 우리가 전쟁을 하는 통에 전쟁물자 대면서 신바람나게 재미보고 있는 놈들이 누군지 알지요?” “일본놈들 아닙니까?” “그거요. 일본놈들은 지금 미국에서 미리 주는 딸라를 받아가면서 문 닫아걸었던 군수물자공장들을 돌리기 시작했고, 소고기다, 닭이다, 밀가루다, 하다못해 계란까지, 미군식당에서 쓰는 물건들을 다 팔아먹고 있소. ..”(박대위와 최익승의 대화) 220
“.. 자네한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해 둘 게 있네. 내가 전부터 계속 말해 온 것인데 말야, 이 전쟁의 상호항판단을 할 때는 언제나 미국을 중심에 놓고 하라는 것이네. 미국이 전쟁을 도맡고 나선 순간부터 계급혁명도 민족해방도 다 없어지고 미국과의 싸움판으로 변하고 말았으니까. 지금까지는 그래도 덜했지만 앞으론 그 양상이 본격화될 거네.” 233
21 구빨치 그리고 신빨치
핏빛으로 붉은 그 완장은 어디서나 눈에 잘 띄었다. .. 그걸 남자가 차면 금방 기운 세게 보였고, 여자가 차면 갑자기 야무지게 보였다. 그런 분명히 붉은 물 들인 손바닥 넓이의 헝겊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헝겊조각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본헌병이 찬 완잔에서 대일본제국의 권위와 위압을 보았듯이 그 붉은 완장에서는 공산주의의 혁명과 투쟁을 보았다. 273
불교에는 엄연히 내세관이 있었지만 그건 영혼의 존재문제에 대한 답이 아니었고, 모든 종교가 갖게 마련인 현실세계의 질서나 안녕을 유지시키기 위한 종교적 윤리도덕률일 뿐이었다. 어느종교나 사이비 종교인들은 그 내세관을 신도들에게 협박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종교를 돈에 팔아넘겨 타락시켰고, 신도들은 신도들대로 거기에 집착함으로써 돈으로 종교를 거래하는 이기적 맹신을낳았던 것이다. 종교 중에서 신화적 부분이 없는 종교가 없는데,그 부분을 확대하고 강조하는 종교일수록 야만적이고 비이성적 종교이며, 내세관을 과장하고 과신하게 하는 종교일수록 그만큼 부패하고 타락해 있었다. 모든 종교의 필요는 첫째 자아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둘째 동물적 탐욕을 없애기 위해서, 셋째 경전의 올바른 가르침을 실행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내세관은 그 세 가지를 지키게 하는 보조장치에 불과했다. 저 우주적 시야에서 바라보면 인간은 분명 티끌이고, 일생 또한 찰나였다. 더욱이 목숨이 끊겨 흙 속에 묻히면 그것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티끌이었다. 거기에서 영혼이 따로 분리되는가? 분리되어 그 가는 곳이 어디인가? 헤쳐도 헤쳐도 헤쳐지지 않는 그 안개밭. 거기를 헤치려함이 어쩌면 부질없는 짓일지도 몰랐다. 법일은 이런 생각을 이어가며 불경 중의 불경인 『반야심경』을 되풀이 독경하고 있었다. 바로 『반야심경』에 그 의문과 해답이 고스란히 담긴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278-279
22 너희들을 위한 전쟁
그는 인간의 집단의식과 거기서 비롯되는 집단행동을 무엇보다 싫어하고 불신했다. 그래서 그는 그 대표적인 본보기인 정치조직을 경원했고, 정치행위를 멸시했다. 그 어떤 정치조직이든 대중선동적이고 대중 최면적인 휘황찬란한 용어들을 내걸어 명분으로 삼게 마련이었고, 그것을 실천한다는 정치행위는 결국 자기네들의 지배욕구를 달성시키기 위한 사기성으로 변질하고 말았다. 그는 체질적으로집단행동의 획일성이나 광분성을 싫어하는 데다가, 사회부 기자활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목격하게 된 정치행위의 허위성과 기만성에 넌덜머리가 나고 말았다. 복잡미묘한 구조로 얽혀 있는 사회와대중이라는 것은 정치권력이 미화시키는 찬란한 명분과는 별도로 나날의 삶의 필요에 따라 자생적인 힘으로 꿈틀거리며 움직여가고 있는 면적과 층이 의외로 넓고 두꺼웠던 것이다. 정치가 모든것을 결정하고 해결하는 것처럼 과장하고 허풍 떠는 정치적 인간들을 경멸하는 것도 그 까닭이었다. 세계4대성인이니, 세계 4대종교니,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니 해서 온갖 것을 세계적인 단위로분류 정리해 가며 밥 빌어먹고 사는 인간들 중에서 또 누군가 인간의 3대발명을 종교 · 정치 · 언어라고 한 모양이었지만 그는 그 분류 자체를 우습게 생각했다. 정치라는 것이 인간의 지배욕구의 산물인 것이 분명한데 발명일 수가 없는 것이고, 어떤 형태의 정치든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허위조작이 필수적으로 따르게 되어있는 한 정치는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없는 추악한 것이었다. 그 분류자야말로 정치제도가 인간의 행복과 사회의 번성을 전적으로 창조해 낼 수 있다고 맹신하는 단견의 소유자였다. 정치는 필요악이라고 그는 규정하고 있었다. 경제라고 통칭되는장사라는 것이 그러하듯이. 장사라는 것은 이윤추구를 정당한 윤리로 내세워놓고 끝없이 거짓말과 속임수를 쓰는 것이었고, 정치라는 것은 정의실현을 정당한 목표로 내걸어놓고 끝없이 정적을살해하고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합리화의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그래서 '정상배'라는 말은 필연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는지도 모를일이었다. 그는 종교의 기능은 어느 정도 믿었으되 정치의 효능은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이기적 속성을 사고의 출발점으로 잡고 있었다. 그래서 현실의 모순이나 문제점들을 논리화된 역사구조로 파악해 내고, 그 해결방법을 정치형태의 변화에서 찾아내려는 당위성 앞에서 그는 공허를 느낄 뿐이었다. 이학송이나 김범우 같은 사람들의 인식이나 논리에 부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자주 만나는 것을 피하게 된 것도 그 공허감을 처리할 수 없어서였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무엇은 무엇이다 하는 직설적 속단이었다. 인간은 정치적 존재다. 이것이 포괄적 정의가 아니라 단편적속단인 것은 인간은 그 외에도 더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자 하는다면적이고 복합적인 존재인 까닭이었다. 그래서 그는 공산주의 논리에 부분적으로는 동의할 수 있어도 전적인 찬동을 보낼 수는 없었다. .. 구조가 다른 두 정치체제가 맞서고 있는 싸움판은 철저한 편갈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싸움판에 어느 편에든 솔선해서 뛰어드느냐, 강제로 끌려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두 가지 다를 거부했다. 그래서 토굴속에 스스로를 가둘 수밖에 없었다.(민기홍) 294-297
여순사건을 계기로 반공이 강화되었던 것처럼 이번 전쟁을 계기로 반공은 더욱더 강화될 것이 틀림없었다. 인공 3개월을 토애서 공산주의 의식은 급속하게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그 일소를 위해서도 부역자 처벌은 가차 없을 것이고, 반공의 강화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악순환이었다. 삶의 악순환이고 역사의 악순환이었다. 지긋지긋한 일제치하의 기억이 생생한 채로 다시 이념의 격랑에 정신없이 휘말리며 부서지고 깨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민중들이었다. 313-314
구름이 1년에 200일 이상 끼어 햇볕을 제대로 못 받아 허옇게 설익은 피부, 긴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열량 높은 육식만을 해서 비대해진 체구, 얼어붙은 땅에서 살기에 치져 얼어붙지 않는 땅을 빼앗으러 나선 식민주의자들의 후손, 엄연히 주인이 있는 땅을 침략하고 강탈하면서 ‘발견’이니 ‘개척’이니 하는 말로 인류사를 왜곡한 자들, 아프리카, 아시아, 남북아메리카를 강탈하며 짐승을 사냥하던 총으로 원주민들을 무차별 사냥하면서 백인우월주의를 만들어내고 다시 그것을 자기들의 종교인 얘수교로 합리화한 교활한 자들, 그러면서도 비지배민족들의 단합을 교란하고 해체시키기 위해 ‘인류의 자유와 평등, 평화’라는 그럴듯하고도 혼란스러운 제국주의적 논리를 만들어낸 겹겹으로 교활한 자들 …… 김범우는 살집 좋은 소령을 물끄러미 보며 쓰게 웃었다. 325-326
23 몸씻기 마을굿
전쟁의 후퇴는 침묵을 낳았고, 후퇴의 침묵은 민첩성을 낳았다. 329
땅덩이의 7할이 산이라는 교과서적인 사실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산 부자인 땅, 산 부자인 사람들. 넓지도 않은 땅에 산만 그리 많고, 나머지 3할인 평지에서 나는 곡식마저 고루 나눠진 게 아니라 세습지주들의 착복이 계속되었다. 그러니 이 땅의 서민들의 삶이 얼마나 배고프고 고달팠으랴. 1할도 못 되는 소수의 삶을 호화롭고 기름지게 하기 위하여 9할이 넘는 절대다수가 굶주리고 헐벗어야 하는 사회구조, 그게 어지 인간세상일 수 있는가. 그 구조는 마땅히 뒤바꿔야 하고, 그런 계급은 마땅히 척결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아니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329
“.. 정신이란 형체가 있는 것입니까? 또 사상이란 형체가 있는 것입니까? 그런 것들은 다만 우리가 형체가 있다고 믿자고 약속함으로써 형체가 있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약속에 따라 사상이라는 체계를 만들어 먼저 정신적으로 결속하고, 다음으로 행동으로 실천에 옮기면그때 사상은 구체적 형태를 드러내는 것 아닙니까? 한이란 무엇입니까? 아까 김 동무가 말한 대로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한 감정들이 쌓이고 쌓인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핍박받고 착취당하고 살아온 계급들의 체험이 응축된 수난사인 동시에 정신의 응결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지배받은 계급들끼리 통하는 사상입니다. 다만 그것이 정치 이데올로기와 다른 점은 분석적 이론화와 실천적 논리화가 안 되었다는 점입니다. 체험적 사상의 덩어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혁명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인민을 주체로 삼고, 특히 기본계급을 중시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바로 그 체험적 사상의 덩어리에 분석적 이론화를 가하고, 실천적논리화를 가하면 그들이 누구보다도 투철하고 열렬한 혁명세력이되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것이 바로 응축된 한의 폭발력입니다. 그러니까 한은 역사전환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그 증거로 갑오년 농민봉기는 동학사상을 불씨로 일어났고, 쏘련과 중국의 혁명성취도그 불씨만 다를 뿐 같은 맥락으로 파악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을 단순하게 '정서'라고 파악하고 정의해 버리는 게 소위 지식인들입니다. 그건 지식인들이 한의 생성과정과 그 본질을 모르고 그저 '감정적 문제로만 피상적으로 보기 때문에 저지르는 오륩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오류를 범하는 데는 그들 거의가 지배계급 출신이라는 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이학송) 331-333
명분과는 별개로 빚어지고 있는 전쟁이 가진 광포성의 가속화였다. 343
26 압록강의 물을 마시며
그(양효석)는 사병들 사이에서 ‘전독’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건 ‘전라도 독사’라는 줄임말이었다. .. 대령이 소령의 철모를 지휘봉으로 내려갈기고, 대위가 소위의 장딴지뼈를 연거푸 걷엋차는 것이 예사로운 군대에서 장교가 사병들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폭력이 아니라 규율이었다. 그건 일본제국 군대의 ‘잔재’가 아니라 일본제국 군대 자체가 ‘생존’하고 있는 모습이었고, 일본 군대의 물이라고는 먹어본 일이 없으면서도 양효석은 선배장교들의 경력을 순식간에 전수한 모범이었다. 444
“.. 한 가지 의문이 있어요. 이 동무는 너무 이론이 정연하고, 당사업에도 아주 열성인데 왜 당원이 아니시죠?” .. “글쎄요…… 전쟁 전까지는 뭐랄까, 중도는 아니고, 이런 말이 통용될지 모르겠는데 굳이 이름 붙여보자면, 민족적 사회주의자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까요. 민족을 앞세웠던 건, 어떻게 해서든 외세에 의한 민족분단은 막아야 한다는 의미였고, 계급의 문제는 사회주의에 이미 포함된 것이었으니까요. 그런 상태에서 전쟁이 일어났으니까 선택은 간단했던 거죠.” 463-464
27 똥냄새 김치냄새의 나라
황국신민 · 내선일체를 선봉장으로 부르짖어 댄 소설가 이광수라는 자가 뻔질나게 글로 써댄 내용들이었다. 민족계몽이라는 미명을 내걸고 이광수가 저지른 그런 작태는 악의적으로 민족비하의 조항들을 나열한 것이었고, 상대적으로 일본놈들은 우리와 정반대라고 칭송하는 것이었으며, 그리하여 일본놈들이 전보다 더 우월감과 자만감을 갖게 하는 전기를 마련했고, 일본놈들이 우리 민족을 더욱더 맘 놓고 멸시하고 짓밟을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일본놈들이 폭력적 관권을 행사하면서 끝없이 되풀이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기죽고 주눅 든 조선인들의 의식 속에 자학적 자기비하가 뿌리박히게 했다. 그것은 개인적 열등감과 자신감 상실을 조성했으며, 전체적으로는 민족적 패배감과 민족의식 분열을 초래했다. 더구나 친일분자들이 일본놈들과 똑같이 '역시 조선놈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하는 식의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해댐으로써 자기비하는 대중최면현상을 일으키며 사회적 고정관념이 되어갔다. 이광수는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젊은이가 일본놈의 호의로 가정교사가 되는 것으로 소설 줄거리를 의도적으로 꾸며놓고는 그 일본놈 집안을 그려나가는데, 일본인들은 가족끼리도 인격적 예절을 빈틈없이 갖추고, 서로가 큰 소리로 떠드는 일이 없어 언제나 정숙을 유지하며, 집안이 항상 청결하고, 부모가 자식들을 나무랄 때도 욕을 하는 일 없이 품격을 지키고, 온 식구들의 기상과 취침시간이 어김없이 잘 지켜지고, 음식을 위생적이고 영양가 있게 만들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까지도 조선사람에게 예의 바른 친절을 잊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이광수는 또, 일본여자에 대해서는 '얼굴'이라고 쓰고, 조선여자에 대해서는 '낮바닥'이라고 구분해서 쓸 정도로 열렬한 친일을 솔선수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사회적으로 친일파들을 처단해야 된다는 여론이 비등해지자 그는 '아직 독립도 되기 전에 남의 군정하에서 어떻게 친일파 숙청을 하느냐. 우리 정부가 선 후에 논의될 문제'라고 반대하는 글을 썼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국회에서 정식으로 반민법제정이 논의되니까 '해방이 된 지 4년이나 흘렀는데 이제 뒤늦게 무슨 놈의 친일파 숙청이냐'는 글을 썼다. 그리고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조선인이 영생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글을 쓴 사람이, 반민특위에 잡혀가서는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 했던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저는 천황폐하의 적자입니다' 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는 그는, 단독정부 수립에 앞서 '7월 17일 헌법 공포식/중계방송 듣고 흘린 감격의 눈물로 먹을 갈아/사는 날까지 조국 찬양의 노래를 쓰련다/그리고 독립국 자유민으로 눈감으련다' 하는 시를 썼다. 그런 이광수라는 자의 망령이 일본놈들이 아닌 국놈들을 통해 또 나타나는 것을 김범우는 견딜 수가 없었다. 479-481
가드너가 불쑥 말했다. "비결 하나 알려주리다. 좋은 공연을 할 수 있는 작은 비결이라오. 한 사람의 프로가 또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이오. 아주 간단한 거요. 좋은 연주를하기 위해서는 그 음악을 들을 청중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오. 그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소. 다만 마음속에서 전날 만났던 청중과 현재의 청중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오. 당신이 밀워키에서 연주를 한다고 해 봅시다. 당신은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하오. 밀워키의 청중은 무엇이 다른가, 어떤 점에서 특별한가? 메디슨의 청중과 밀워키의 청중은 어떻게 다른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생각날때까지 노력해야 한다오. 밀워키, 밀워키라고 말이오. 밀워키 사람들은 맛있는 포크톱을 먹는 사람들이오. 그것도 의미가 있소. 그곳에서 연주를 시작할 때 바로 그 점을 떠올리는 거요. 그것에 대해 그들에게 한 마디도 할 필요가 없소. 그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 그저 그 점을 마음에 새기는 것으로 충분하다오. 당신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맛있는 포크촙을 먹는 사람들이라고 말이오. 포크에 있어서 그들은 기준이 높다오. 내 말 이해할 수 있겠소? 그렇게 되면 그 청중은 당신이 아는 누군가 당신이 제대로 된 연주를 들려줄 수 있는 특별한 대상이 되는 거요. 이게 바로 나의 비결이라오. 한 사람의 프로가 또 한 사람에게 해 주는 말이오." 31-32
[녹턴] 177
젊은 색소폰 연주자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선배 연주자들의 연주를 들어 보라고 한답니다. .. 옛날 연주자들은 그렇게 획기적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어떻게 연주하면 되는지는 잘 알고 있다고요. 197
‘위대함’이란 정확하게 무엇인가? 그것은 대체 어디에, 혹은 무엇에 존재하는가? .. 내게 위험을 무릅쓰고 추측해 보라고 한다면, 명백한 극적 효과나 화려함의 ‘결핍’, 바로 그 점이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39
집사 직에 악착같이 매달리는 불한당들이 종종 있다. 바로 이런 작자들이, 우리가 따라해야 할 인물은 이 사람이라느니 저 사람이라느니 항상 우겨 대고, 직업상의 문제에 관해 모 영웅이 표명했다고 전해지는 견해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42
“켄턴 양, 부친께서 방금 작고하셨는데도 올라가 뵙지 않는다고 막돼먹은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말아 주시오. 당신도 짐작하겠지만, 아버님도 이 순간 내가 이렇게 처신하기를 바라셨을 거요.” “물론입니다. 스티븐스 씨.” “내가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분을 실망시키는 게 될 거요.” “압니다, 스티븐스 씨.” 139
그 어떤 것도 진실보다 깊을 수는 없는 법이다. 160
나는 달링턴 경에게 35년을 바쳤다. 161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집사의 의무는 훌륭하게 봉사를 하는 것이지 중대한 나랏일에 끼어드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249
진정항 야망을 품은 집사라면 끊임없이 자신의 주인을 재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리 업계의 한 분파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은 주인의 동기를 엄미랗게 검토하고 그의 견해에 담긴 포괄적인 내용들을 분석ㅎ해야 하며 오직 그러한 방법으로 통해서만 자신의 기능이 바람직한 목적에 사용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이 이상주의는, 나도 공감하는 부분이 물론 없지는 않지만, 오늘 밤 스미스 씨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오도된 사고의 결과물일 뿐이다. 그러한 접근법을 실천에 옮기고자 햇던 집사들의 말로를 보면, 그 직접적인 결과로 그들이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음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그들 중에는 전도양양한 경력의 소유자들도 있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만 해도 최소한 둘이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데, 두 사람 다 능력이 있는 전문가들이었으나 주인에게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결국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다. 사실 놀라울 것도 없는 결과이다. 주인을 그처럼 비판적인 태도로 댛하면서 훌륭하게 봉사한다는 자체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250
혁명은 조직 없이는 성취되지 않고, 간부가 우선 보호되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겠소. 어느 불가피한 상황 아래서 조직이 와해되었다가 그걸 다시 일으키는 데도 간부가 없어서는 불가능한 일 아니오? 17
3 두 형제의 야행
“정치하는 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아닙니다. 알면서도 억눌러대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한 도리 없는 일입니다. 전국적으로 소작인들 난리가 일어나고, 정부가 엎어져야만 해결될 일입니다. 내란은 괜히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정치하는 꼴은 내란을 조장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전원장과의 대화에서 김범우가 한 말중에) 87
“종교가 타락하면 자체의 자율적인 법을 버리고 세간법을 이용하거나 의탁하게 되는 법입니다. ..”(법일스님의 말중에) 110
4 태백산맥에 내린 소개령
좌익. 무장병들을 섬멸하는 것은 조흥나 수많은 양민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을 저지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여론이 전국화되었고, 결국 그 문제는 국회의 안건으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 국회에서는 투표를 통해 소개령의 발동이 타당하다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그런 결정을 내렸으면 의당 뒤따라야 할 소개당한 사람들의 주거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세워지지 않았다. 국민의 손으로 뽑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국회에서 그 지경을 하는 것을 보며 심재모는 어지러운 가치 혼란과 함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다시금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21
8 어떤 여자 빨치산의 죽음
빨치산은 세 번 죽는다고 했다. 얼어죽고, 굶어죽고, 총 맞아 죽는 것이 그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투쟁의 긍지로 삼고 있었다. 254
‘공산비적’을 줄인 ‘공비’라는 말은 지난 1월 초순에 강원도 경찰책임자가 신문지가를 상대로 쓰게 되면서 ‘빨갱이’란 말을 제치고 급속히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공식용어화하고 있었다. 따라서 ‘반란도배’라는 말의 준말인 ‘반도도’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267
9 민중의 승리, 2대 국회의원 선거
농지를 분배받은 소작인들은 농지값으로 평년작 생산량의 한배 반을 5년간 분할상황하고, 정부는 지주들에게도 같은 조건을 지가 증권을 교부해 주기로 한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농지개혁은 대다수 소작인들의 불만과 실망을 그대로 남겨둔 채 그 막을 내려가고 있었다. 298
신문들은 전국의 선거결과를 보도했다. 먼저 돌출된 것이 여당인 대한국민당의 참패였다. 국민당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 한민당에 등을 돌려버린 이승만을 옹립하여 결성된 의석 70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여당이었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는 겨우 22명의 당선자를 냈을 뿐이다. 그 다음으로 주목을 끄는 것이 한민당계였다. 절대다수 대중들에게 배척을 당하는 가운데 이승ㅇ만한테까지 버림을 받게 된 한민당은 궁여지책으로 민주국민당으로 변신을 꾀했다. 그런데 선거결과는 고작 23명의 당선이었다. 거기에 맞서서 무소속의 당선자는 자그마치 126명이나 되었다. 선거결과는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불신과 친일지주 중심인 한민당 계열의 배척을 분명하고도 선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324-325
10 아,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일말의 양심을 가진 지식인치고 해방 이후의 현실에 대해 환멸하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환멸은 환멸일 뿐이지 무슨 방도가 되겠소? 김 형이나 나나, 월 좀 배우고 생각할 줄 안다는 식자층들은 현실 속에서 이미 허수아비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이분론적 선택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식인들이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소. 혼자 고민해 봤자 공염불이고, 서젓이 모여앉아 고민해 봐도 공염불이오. 양심상 현실세력에 가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항하자니 좌익으로 몰아치는 정치적 올가미가 목을 낚아채고, 이런 상황 속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지식인적 고민은 할 필요가 없소 다만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대중의 한 존재로서 현실을 올바로 지켜보는 일밖에 없다는 생각이오.” .. “내 생각으로는 이놈의 세상이 달라지는 데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을 것 같소. 그게 뭔가 하면, 기왕 썩은 세상이니까 한 이삼년 더 푹푹 썩게 내버려두는 거요. 권력이 썩을 대로 썩다 보면 제물에 무너지게 될 거고, 그러는 동안에 대중들의 불만과 불신은 쌓일 대로 쌓여 폭발하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세상이 뒤집어질 것 아니겠소. 종기야 곪을 대로 곪아야 뿌리가 빠지는 법이니까요.” .. 민기홍의 말은 막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또. 틀린 말도 아니었다. 328-329
11 1950년 6월 25일
권 서장은 라디오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무리시간이 지나도 똑같은 내용만 되풀이하고 있는 보도를 그대로 놓고 보자면, 전쟁은 북쪽에서 먼저 도발한 것이고, 그 양상은 전면적이고, 상황은 이쪽이 불리하다는 인상이었다. 그가 의문을 갖지않을 수 없는 것은, 대통령이 멸공통일·북진통일을 당당하게 내세운 것이 언제부터였으며, 대통령의 그 힘찬 주장에 발맞추어 국방장관이고 참모총장이 입을 모아, 한시라도 명령만 내리시면 점심밥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밥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가 다 갖추어져 있다는 호언장담을 그 얼마나 자주 했던 것인가. 그 장담은 마치 무슨 노랫가락처럼 유행된 말이 아니던가. 그런데 북쪽한테 먼저 공격을 당하는 것은 뭐며, 상황이 불리해진 것은 또 뭐란 말인가. 국방장관이고 참모총장이고 정작 별다른 실속도 없으면서 대통령이 듣기 좋도록 허풍만 떨어댔단 말인가. 알 수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북쪽의 행위를놓고 '불법남침' 운운하는 점이었다. 주의를 달리하는 두 정권 사이에 상호협약한 무슨 법이라도 있었던 것인가. 그런 법이란 애초에 없었던 상태로 이쪽에서는 멸공북진통일을 내세우며 남쪽의 빨갱이들을 소탕해 왔고, 저쪽에서는 공산혁명통일을 내세우며 남쪽의 자기편을 지원하는 상태로 싸움은 벌써 몇 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불법'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소린가. 상황이 불리해지니까 다급해서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이쪽의 멸공북진통일은 '합법'이고저쪽의 공산혁명통일은 '불법'이라는 것인가. 도대체가 모를 소리다. 불법을 따지자면 2차대전 때 일본이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을 폭격한 경우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 쪽에서는 저쪽 공산정권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한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러면서 무엇을 근거로 해서 따지고 있는 불법인가. 이쪽의 정권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저쪽에서도 이쪽이 북진통일을 감행하는 경우 불법을 따질 근거가 없기는 매일반 아닌가. 그동안 공산혁명을 하겠다고 태백산맥을 통해 지속적으로 남파시킨 빨치산과 이번의 도발과는 뭐가 다른가. 수의 많고 적음이 다를 뿐이 아닌가. 싸움의 규모가 크고 작음이 다를 뿐이 아닌가. 그런데 왜 그때는 불법이라고 하지 않고 이제 와서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인가. 도대체 앞뒤가 안 맞는 소리다. 싸움이 크게 벌어졌으면 그에 맞서 싸우는 일만 있지 않은가. 잠꼬대 같은 엉뚱한 소리 지껄여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싸움은 총으로 하는 것이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니잖은가. 빌어먹을…… 권 서장은 울화가 치미는 걸 느끼며 라디오 앞에서 돌아섰다. 374-375
그러니까 보는 각도에 따라, 관점의 차이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게 되어 있소. 그러나 보다 올바른 판단은 있게 마련이고, 착오를 줄이고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사건의 주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소. 먼저, 우리를 분단시키고 오늘의 대립상황을 주도한 미쏘를 주체로 하는 시각인데, 상반된 이데올로기로 대립하고 있는 두 강대국이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서 전쟁을 일으키게 하고, 우리는 그들의 냉전을 실전으로 대신 싸울, 왈 이데올로기 대리전쟁이라는 판단이오. 미쏘의 관계와 우리의 분단현상과의 관계에서 볼 때 아주 그럴듯한 판단이 아닐 수 없소. 그러나 그 판단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아무 뜻도 생각도 없는 바보나 천치로, 그야말로 괴뢰 노릇이나 했다는 뜻이 되오. 물론 그 판단에는 두 나라에게 이 땅의 강점과 분단의 책임을 따져야 한다는 뜻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우리 민족을 스스로 비하시키고 모멸하고, 민족의 삶이나 존재를 부정하는 허점을 가지고 있소. 그와는 달리 우리 자신을 주체로 하는 시각인데, 그러자면 해방의 시점을 연장해서 우리를 보아야 할 것이오. 해방은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커다란 역사변동의 계기나 전환점인 것이 분명했는데, 미쏘가 강점하지 않고 해방을 맞이했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했을 것이냐 하는 점이요. 사회혁명이나 사회개혁은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것이었소. 그것은 계급적으로 지주제도를 척결하는 것이었고, 민족적으로 친일반민족세력들을 처단하는 것 아니었겠소. 그런 역사적 욕구 앞에서 이데올로기라는 건 그것이 무엇이건 상관이 없소. 그 욕구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데올로기로 채택되고, 빛을 내게 되어 있소. 그런데 그 욕구가 강대국 점령하에서 중단되고 좌절된 것이 바로 남쪽 땅이오. 그 욕구는 어쩔 수 없는 폭력 앞에서 숨을 죽인 것이지 소멸되거나 해소된 것이 아니고, 자유민주주의가 설득력을 잃고 불신의 대상이 된 것에 반해 사회주의는 상대적으로 빛을 발하게 되었소. 그런 상태로 두 정권은 대치하면서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실현을 위해 '통일'을 우선과제로 내세우게 되었소. 한쪽은 무조건 공산주의를 없애자는 통일이고, 다른 쪽은 사회혁명을 이루자는 통일인데, 어느 쪽이나 그 방법으로는 전쟁을 전제로 한 것이었소. 바로 이 대목에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죄를 다시 거론하지 않을 수 없소. 미국이 아니었으면 해방이 되고 깨끗하게 처단당했을 자들에게 미국이 국가정치권력을 만들어주고, 무장을 시켜주고 해서 이제 그 반민족세력들이 제놈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오히려 민족을 강제동원해서 제물로 써먹게 되었다 그것이오. 그리고 그놈들의 권력을 무너뜨리기까지 무고한 민중들이 수없이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소. 이것이 다 미국이 저지른 죄요. 그러나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한 피를 흘리더라도 역사는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오. 이번 전쟁은 우리 민족의 삶에 박힌 모든 갈등과 모순을 일소시키기 위해서 외세와 반민족세력을 동시에 척결하는 계기가 될 것이오." 김범우는 이학송을 그저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학송은 손승호보다 한술 더 뜨고 있었던 것이다. 398-400
이 전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손승호의 말도 맞다. 이학송의 말도 맞다. 올바른 의식으로 역사를 본 판단이다. 그러나 전쟁은 그것만으로 이겨지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정의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지 모르지만 전쟁 자체가 정의는 아니다. 전쟁은 정의도 사상도 아니다. 윤리나 도덕은 더구나 아니다. 전쟁은 오로지 힘일 뿐이다. 철저한 폭력으로 결판나는 약육강식이다. 411
김범우는 한 팔을 베개로 그녀에게 내준 채 못 견디게 담배가 피우고 싶은 것을 견디며 모래바닥에 누워 있었다. 아,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한테서도 성욕을 느끼고, 관계를 통햏 희열을 느끼는 수컷의 야비하고 무분별한 본능이여. 415
12 산골짜기를 울리는 한밤중의 총소리들
연대장은 바로 일본 만군출신이었고, 그 경력을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오힣려 그때의 경험들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랑처럼 입에 올리는 위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군수뇌부에 속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들먹여가며 만군시절부터의 관계를 강조해 자기과시를 즐기는 인물이었다. 저런 것들이 장교의 7할을 차지하고 앉았으니…… 심재모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로 참모실 문을 열었다. 423
13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국의 참전, 한국군의 유엔 편입, 미국ㄴ에게 넘어간 통수권, 미군의 제공권 장악, 그런 숨가쁜 상황의 변화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런 바로 이번 전쟁이 조선 인민과 미국과의 전쟁이 된 것을 의미했다. .. “두고 보십시요. 미국이 전쟁에 개입한 이상 피를 흘리고 손해를 보는 건 우리 민족일 뿐입니다. 인민해방은 수포로 돌아가고, 민족좌절만 남게 될 겁니다. 미국은 인디언을 멸종시키다시피 했고, 흑인을 노예로 짓밟아 오늘을 이룩한 역사를 가진 나라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말입니다.” 김범우의 말이 들리고 있었다. 이학송은 눈을 더 크게 열어 어둠 속을 응시했다. 463
“미국을 과대평가하자는 게 절대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자는 겁니다. 이념의 실천이 현실이라는 말, 좋습니다. 그럼 그것을 저지하려는 미군의 세력도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 끼여 희생당하고 있는 대중들도 현실입니다. 이념의 실천이 확고한 보장이 없을 때 대중들의 희생은 무엇으로 보상되고, 어떻게 설명되는 겁니까.” 다시 들리는 김범우의 말이었다. 466
“.. 여순 사건이 좌절되고 나서 어떻게 됐는지 자네도 잘 알잖나. 미군무기로 군겨으이 무장이 강화되었고, 정부는 반공을 정책으로 내세웠고, 좌익은 괴멸상태로 치닫고, 미쏘가 갈라놓은 분단은 민족의 이념적 분단으로 변모되지 않았나 말야. 그때의 상태가 몇십 배로 팽창해서 작용할 것이 이번 전쟁이 좌절한 다음에 초래될 상황이란 말일세. ..” .. “승호 자넨 근본적으로 내 말을 이해하려고 하질 않는군. 자네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난 민족제일주의자야. 그래서 민족보다 먼저 이념을 내세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튼튼한 민족의 생존을 위해선 그 어떤 이념도 상관하지 않네. 그런 입장에서 민족이 상하기만 하고, 목적 달성이 어려울 이번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게 내 괴로움이란 말일세. 그럼 도대체 어쩌겠다는 거냐고 자넨 묻겠나? 당분간 이 괴로움이 계속되겠지.” 469
"비겁도 좋고 비굴도 좋네. 나야 안목도 짧고 정치권력도 갖고 있지 않으니까 구체적 대안을 낼 수가 없네. 그러나 근대사회의 구성이 철저하게 민중 중심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고, 그 바탕 위에서만 민족의 주체형성이 가능하고, 민주주의도 가능하며, 역사발전도 도모된다는 것을 알고 있네. 그런 최소한의 인식으로 우리의 문제를 볼 때 한 가지 명백한 것은 있네. 미쏘가 우리를 어떤 형태로든 제약하고 있고, 우리가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이념을 하나씩 나눠갖고 사회문제나 민족문제를 해결하려 든다면 그것이야말로 환상이네. 미쏘 두 나라가 맞서 있기 때문에 우리의 어느 쪽 시도든 무위로 끝나는 환상이 될 수밖에 없고, 만에 하나 미쏘 어느 한쪽이 양보를 하거나 포기를 해서 그런 문제를 해결했다 해도 나머지 한 나라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는 한, 민족은 노예적 속박에서도 벗어날 수 없을 거네. 내가 파악하는 건 지금 우리 민족이 처한 상황은 볼셰비키의 혁명상황도 아니고, 중공의 혁명상황도 아니라는 점이네. 로서아에도 중국에도 그들을 제약하거나 속박하는 막강한 두 외국세력은 없었다는 사실이네. 그들이 지금 우리와 같은 상황에 처했어도 혁명을 성취시킬 수 있고, 민족의 문제를 생각대로 해결할 수 있었겠나를 묻고 싶네. 그래서 난 외국세력의 배격이 급선무라고 생각하는 거네." 470-471
"이 동지의 그 솔직함이 좋소. 기사는 죽은 애를 어머니가 안고 통곡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그건 기사란 있는 그대로를 옮겨놓는다는 원칙에 아주 충실해 있소. 그러나 그건 제국주의적 시대착오적 기사작성법이오. 우리는 지금 사회주의 혁명을 실천하고 있으며, 인민해방전쟁을 수행하고 있소. 모든 인민이 노력을 바치는 모든 분야의 일들은 그 두 가지를 성취시키기 위해 복무해야 하며집중되어야 하오. 혁명의식을 고취시키고, 인민선동을 고무시키는문화선전사업의 선봉에 서 있는 신문은 더 말할 것이 없는 것이오.따라서 기사작성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해서 그 두 가지 사실의 실현을 위해 충실한 복무가 되도록 씌어져야 하오. 그러니까이 동지가 쓴 기사가 어떻게 끝나야 하겠소? 애어머니가 애를 끌어안고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마는 것, 그건 전시대적 패배주의고 체념주의며, 그것은 또한 반혁명적이며 반해방적인 꼴일 뿐이오. 우리는 그 시점에서 혁명적인 인간상을 창조해 내야 하며, 해방을 갈구하는 인민상을 창조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오.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되겠소? 이 동지, 주저앉아 통곡하는 어머니를 일으켜세우는 것이오. 그것이 1단계요. 그 다음에 어머니가 안고 있는 죽은자식에게, 너를 이렇게 죽인 미제국주의자들을 쳐부셔 너의 원수를 갚을 때까지 이 에미는 끝까지 싸우겠다. 하는 결의를 소리 높이 외치게 하는 것이오. 어떻소, 이 동지, 이게 조작으로 느껴지오?사실의 왜곡이라고 생각되오? 어디 말해 보시오." “예, 솔직히 말씀드려서 지금까지 기사를 써온 습관 때문에 익숙하지는 못합니다." “당연한 일이요. 중요한 건 기자로서의 그러한 기사작성이 사실의 조작이나 왜곡이 아니라 혁명의식의 실천이라는 것을 강요 없이 이해 납득하는 것이고, 그리고 진정한 필요에 의해서 기사가 그런 방향으로 씌어져야 하는 것이오. 자아, 그런 식의 기사작성이사실의 왜곡이나 조작이라는 거부감을 가질까 봐 하는 말인데, 사실의 왜곡이나 조작은 남조선 신문들이 반민특위를 좌익집단으로매도하거나, 좌익을 매국노로 몰아세우거나, 김구 선생을 민족반역자라고 쓰거나, 민족반역자들을 오히려 민족주의자나 애국자로 둔갑시키는 짓들이 아니겠소? 사실의 조작이나 왜곡이란 반역사·반사회·반인민적인 기록일 때를 가리키는 것이오. 애어머니를 일으켜세우고, 그런 결의를 다짐하게 하는 데 반역사·반사회 · 반인민적인 요소가 어디 있소. 그렇게 기사를 써서 인민들의 혁명의식이 고취되고, 해방의지를 고무받게 되면 그 가엾은 어린아이의 죽음은헛되지 않게 되는 것이며, 이 동지는 기자로서 혁명과 해방에 훌륭한 복무자가 되는 것이오. 어떻소, 내 말이 납득이 되오?" 이원조(해방일보 편집국장)는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477-479
“.. 속이 차야 볼 것도 바르게 보는 눈이 생기고, 듣는 것도 바르게 듣는 귀가 생기는 법이다. …”(김사용이 아들 김범우에게 한 말 중에) 23
현시점에서 분단상황을 완화시키는 것은 사상대립을 완화시키는 일이고, 사상대립을 완화시키는 것은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일이고,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방법을 택하는 일이고,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법을 채택하는 것은 지주계층의 와해와 함께 사회경제의 새 구조를 탄생시키는 일이고, 사회경제의 새 구조가 탄생되는 것은 민권회복과 인권회복을 동시에 이룩하는 일이고, 민권회복과 인권회복을 이룩하는 것은 절대다수의 의사로 좌우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탄생시키는 일이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탄생되는 것은 민족통일에 이르는 첩경이라고 서민영 선생은 말했다. "그러나 이게 다 잠꼬대 같은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내가 모르지 않으니 비애가 아니겠나. 현 상황으로 내가 한 말의 반대방향으로 내닫고 있으니 암담할 뿐이네." 서민영 선생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는 분단상황의 경직화를 심히 우려했다. 현 정권의 주도세력인 친일 지주계층과 그 하수인 격인 민족반역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경찰과 군대의 기존 조직에다가, 50만을 넘는 월남자 태반이 그 조직에 분산 가세했고, 그와는 반대로 농민들의 원한에 찬 생존욕구가 팽배해 있는 상태에 200만을 넘는 귀환동포가 거기에 흡수 가세한 점을 지적했다. "귀환동포라는 사람들은 그 의식이나 식견이 토착농민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네. 그들도 물론 고향을 떠나기 전에는 대체로 농민들이었는데, 고향을 떠나서는 여러 가지 직종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네. 도시 막노동자, 공장이나 광산·부두 등의 하급노동자로 말이네. 물론 계속 농민생활을 한 사람들도 많은데, 문제는 그들의 생활환경이 우리나라와는 판이했다는 점이지. 우리땅이 폐쇄적이고 통제적이었던 데 반해 그 사람들이 산 일본이나 간도 만주 등지는 훨씬 개방적이고 자율적이었던 게야. 그들은 직종과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라 의식이나 식견이 달라지게 되었네. 경제에 대한 인식은 물론 사회주의나 자유주의 같은 사상적 영향도 많이 받게 된 거지. 그런 그들이 막상 고향에 어찌 되었지? 먹고살 땅이 있나, 잠을 잘 집이 있나. 의식이나 식견이 이미 달라져 있는 그들은 타관생활보다 더 나쁜 생계위협을 당하게 된 게 아닌가. 그들이 자구수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나. 월남한 숫자에 못지않게 월북한 사람들 대부분이 그들이고, 회정리 2구처럼 그들 중에 좌익 가담자가 월등히 많은 것 등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우리 사회의 이 대립적 갈등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란, 내가 보기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른 농지개혁 단행밖에는 없네. 보게, 지금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농토문제만 해결된다면 그 어떤 주의든 지지하고 따르게 되어 있는 상황이네. 이건 바로 갑오란 때와 똑같은 상황이란 말일세.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동학이라는 종교사상이 갑오란을 일으켰느냐, 농민들이 그 종교사상을 행동의 계기로 삼았느냐가 문제인 것이네. 다시 말해, 어떤 사상이 다수의 사람을 의식화로 무장을 시키는 것이냐, 아니면, 다수의 사람이 공동으로 처한 생활의 악조건을 타개하기 위해 어떤 사상을 필요로 하느냐 하는점일세. 그건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상호작용의 관계를 유지하는게 보통이지만, 갑오년 농민항쟁의 경우에 있어서나 지금 우리의상황에 있어서는 후자의 경우가 분명하네. 그 근거는 중국을 보면확실해지네. 모택동의 공산당 정부가 지난 2월 북경으로 옮기지 않았나. 그건 중국대륙의 공산화 성공을 뜻하는 것인데, 그게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의 능력이나, 아니면 봉건사회의 변혁을 원하는 절대다수 민중들의 수용이냐, 하는 점인데, 그건 먼저 후자의 작용인 것이네." 25-27
인생은 여행이고, 여행은 인생이다. 여행은 새로운 체험의 보고이며, 아름다운 추억의 산실이다. 여행은 삶을 풍요롭게 하며, 영혼을 살찌운다. 여행을 이런 식으로 호들갑스럽게 미화하고 과장한 글들에 김범우는 아무런 실감도 동감도 느끼지 못했다. 여행이 새로운 곳, 미지의 세계를 보고 느끼는 것이므로 그렇게들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자신은 단연코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이었다. 지구를 완전히 한 바퀴 돌았으니 말이다. 그 교통수단도 다양해서 배와 비행기까지 다 동원된 것이다. 그런데도 여행에 대한 보드라운 감상이나 낭만적 정서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아마 자의적 선택이 아니라 타의적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행위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일본에서 동지나해를 횡단해 버마에 이른 뱃길, 버마에서 이집트를 경유해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의 비행깃길,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 거기서 다시 인천까지 태평양을 횡단한 뱃길, 이렇게 따지고 보면 자신은 정작 가장 손쉬운 기차를 제일 짧게 탄 셈이었다. 중학 5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통학한 거리를 다 합친다 해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기차와 기찻길은 일본놈들이 시도때도 없이 입에 올리던 자랑거리였다. “우리는 미개한 조선 전역에 기찻길을 놓아주었다. 그 편리한 시설로 걸어다니는 미개생활을 면하게 하고, 타고 다니는 문화생활을 하게 해준 그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조센징은 천황폐하와 대일본제국에 대대로 감사해야 한다." 일본놈들이 뻔뻔스럽고도 자신만만하게 지껄여댄 소리였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서구라파 제국이 이룩한 산업혁명을 선망과 동시에 열등감으로 바라본 유일한 나라가 일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이 부러움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산업혁명의 성취가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이루어진 과학문명의 발달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차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지칠 줄 모르고 달리는 검은 철마, 그 신기한 기계에 대한 일본인들의 끈질긴 관심은 마침내 그들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만들어내게까지 되었다. 그들은 그 신기한 기계를 자신들이 소유한 모든 영토에 미친 듯이 설치해 나가기 시작했다. 본토와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대륙에까지 일본인이 가설한 철도는 끝없이 뻗어나갔다. 결국 서구라파 제국이 산업혁명의 결과로서 발전시켜 온 기차와 철도를 일본인들은 1차적으로 효과적인 식민지 수탈의 수단으로 이용했고, 2차적으로 대륙침략의 무기로 활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였고, 2차대전이 일어나게 되자 그 순서는 완전히 뒤바뀌어, 기차는 중국대륙을 본격적으로 침략하는 전투무기가 되었다. 일본은 본래 섬나라이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에 수많은 항구를 개발해 해상교통을 극대화시켰지만, 만약 철도시설이 없었거나 빈약했더라면 조선의 수탈을 그렇게 잔인할 만큼 철저하고도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었을 것인가는 결코 상상만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일본이 그 짧은 기간 동안에 그렇게 중국대륙 깊숙이 침략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철도시설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는 사실이다. 28-30
농민들은 인생살이의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세상판세 돌아가는 잘잘못이 무엇인지 환히들 알고 있어. 그러면서도 식자라는 것들처럼 소리 내서 말하지 않을 뿐이야. 말을 해도 그들끼리만 낮게 말하고, 그들끼리만 몸으로 하는 말이 있지. 배웠다는 자들은 그것도 모르고 거지 동냥주는 식으로 한다는 짓이 ‘농촌계몽’이야. 그거야말로 식자층이 일방적으로 농민들을 무시하고 멸시한 결과로 나타난 대표적인 행위지. 도대체 삶의 진정한 아픔이나 괴로움을 모르는 자들이 그것을 뼈저리게 체득하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무엇을 계몽한다는 것인가. 글자 몇 자 가르치고, 허황한 소리나 지껄이다 마는 것이 계몽인 줄 아는 모양인데, 내가 알아본 바로는 그 계몽을 고마워하는 농민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네. 고달픈 삶을 온몸으로 겪고, 온몸으로 부대끼고, 온몸으로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따위 어설픈 짓들 하다가 언젠가는 크게 당하게 될 거네. 그런데 말이야, 농민들이 온몸으로 하는 말, 그것을 딱 한마디로 줄일 수 있는 말이 없을까? 나도 생각해 볼 테니, 자네도 한번 생각해 보게.” 김범우는 하룻밤을 생각한 끝에 두 개의 단어를 조립해 낼 수 있었다. “이봐 전신언어나 생체언어가 어떤가?” “전신언어, 생체언어……? 응, 생체언어가 힘도 느껴지고 실감이 나서 더 좋은데. 그래, 생체언어, 그거 좋은 말이야. 농민은 생체언어로 사회에 발언하고, 생체언어로 삶의 진실을 표현하며, 생체언어로 역사에 참여한다. 됐어, 됐어, 아주 잘 어울리는 군.” 박두병은 소년처럼 기뻐했다. 33-34
14 물과 기름
반란군이나 야산대의 소탕이 지지부진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산을 발판으로 삼고 있는 그들이 전진, 후퇴를 신속하게 했고, 민간인들이 그들에게 음성적인 협조를 계속하고 있는 점이었다. 그런 상황에 대처하고 있는 이쪽에도 물론 문제점이 없는 게 아니었다. 먼저, 반란군이나 야산대를 일거에 소탕할 만한 병력 거의가자신처럼 마지못해 총을 잡고 있는 형편이었다. 4·3사건의 진압을 위해 제주도에 집중되었던 군대병력이 여순반란의 돌발로 분산된 채 제주도는 제주도대로 전투가 계속 중인 데다가, 여순반란을계기로 수많은 지역에서 공산당 지하세력이 노출되어 그대로 전투병력화하게 되자 갑자기 팽창된 전투지역을 충분한 군병력으로 채우기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군병력이 그러할 때 지역단위 치안유지 조직인 경찰병력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군의 단위부대 증원은 기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사병력의 충원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 원인은 병역 의무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 대우에 있어서 군대 사병이 경찰하급자와 다른 데다가, 현직 경찰마저 기회만 있으면 이직을 하려는 판에 제발로 군대에 걸어들어올 놈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군인 모집은 모집이아니라 강제적으로 시행된 것이 벌써 오래전부터였다. 지역별 할당에 맞춰 청년단이 앞장서고 경찰이 엄포를 놓아가며 만만한 젊은이들에게 그물을 씌웠다. 만만하다는 것은 으레 가난하고 관에 아무 연줄 없는 사람들이었다. 도둑으로 몰아 감옥살이를 면하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군대에 밀어넣었고, 사촌이나 육촌이 입산한 것을 트집 잡아 군대로 내몰기도 했고, 별의별 방법이 다 동원되었다. 그렇게 억지춘향으로 군복을 입은 자들이 사기가 있을 리 만무했고, 원래 사상이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오기나 반발로 그러는것인지는 모르나 작전 중에 입산해 버리는 자도 적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강압적인 방법은 경찰이나 청년단을 불신하고 경원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일제시대의 경력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똥 묻은 것들'로 불신당해 온 경찰은 계속 악명만을 덧붙여가는 꼴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런 강압적인 편법을 쓰지않으면서 사회적으로 불평 불만을 없애는 길은 병역을 의무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법을 만든다는 게 언제인데 그것은 통과되지 않고 엉뚱하게 반민특위법이 통과되어 그러잖아도 경찰 알기를우습게 아는 사람들의 기를 더욱 세워주는 반면 경찰들은 일할 맛이 싹 떨어지게 기를 꺾고 말았다. 반민특위법이 전국적으로 엄하게 실시되는 한 현직 경찰치고 그 법에 안 걸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콩밥을 먹이게 만든 위치에서 콩밥을 먹어야 하는 신세가 된다.는 사실은 생각만으로도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국회의원이란 놈들은 도대체가 믿을 수가 없는 놈들이었다. 제놈들 국회의원에 당선시켜 주기 위해서 경찰들이 얼마나 애를 썼는가 말이다. 그런데 고작 한다는 짓이 경찰 때려잡는 법이나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놈들이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들이었다. 그런 배신감은 자신만가진 것이 아니었다. 조용히 모여앉은 자리에서는 으레 그 법의 시행에 공동의 관심이 모아지고는 했다. 그 법만 생각하면 그는 전출운동이고 뭐고 사지에 맥이 빠져버렸다. 63-65
‘반란군의 완전소탕’ ‘지역폭도 완전제거’ ‘민간세포조직 완전근절’. 그런 지시 앞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용맹스러운 활동을 전개한 것은 군대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고 서북청년단이었다. 명칭 그대로 이북 청년들로 구성된 그들은 여순반란사건이 이렁나기 전에 이미 제주도의 4.3사건 진압대의 일부로 투입되어 그 용맹을 떨친 바 있었다. 그들이 가는 곳에는 그야말로 공산당의 씨가 마른다는 소문이 일찍부터 바다를 건너와 뭍에까지 퍼졌던 것이다. 공산당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삼팔선을 넘어온 그들은 이남의 공산당을 뿌리 뽑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 용감무쌍하게 싸우는 반공투사들이었다. 그들은 공산주의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치를 떨었고, 공산주의자는 더 말할 것 없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의 혐의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가차 없을 정도로 냉정하게 행동했다. 67
민간인들의 원성이 후유증으로 남게 되었다. 그들에 대해 민간인들 사이에서 ‘악독한 이북내기들’이라거나, ‘이북에서 내려온 악질들’이라는 욕이나 비난이 떠돌았고, 사실 어느 면에서는 억울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68
옷이라는 것이 참 묘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똑같은 천에 색깔이나 모양이 다를 뿐인데 어느 것을 몸에 걸치느냐에 따라 마음이 생판 달라지고 말았다. 제복을 입으면 무언가에 억눌리는 것 같은 압박감과 함께 알 수 없는 힘이 전신을 버팅기고 있는 기분이었고, 사복을 입으면 무슨 짓이든 해도 좋을 것 같은 한없는 자유스러움을 느끼는 반면 어딘가 허전하고 힘이 빠져버릴는 기분이었다. 71
상대방과의 힘의 관계에 있어 언제든지 상황이 나아질 전망은 희박한 데 반해 저쪽은 체계적인 무장화 작업을 꾀해나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우울한 소식은 제주도 항쟁이 거의 막바지로 몰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어진 줄기라고는 없는 외따로 떨어진 하나의 산이면서 섬인 그곳에서 벌써 만 1년 동안 투쟁을 벌여왔는데 그 결과는 절망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런 결과는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구구법 산수처럼 간단명료하게도 힘의 약세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승리를 위한 투쟁이었는가, 투쟁을 위한 투쟁이었는가. 염상진은 언제나 그벽에 막혔고, 그 벽을 허물어뜨리지도 뛰어넘지도 못했다. 다만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생각을 단순화시키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보다 적극적인 투쟁이었다. 79-80
15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여러 말 헐 것 없이 문제는 말이여, 쥔어런 잘못 모시는 종놈은 삭신 녹아내리게 매질당허고 내쫓기는 것이 법칙이다 그것이요. 가끔 보자먼 대체 이 나라 쥔이 누구요? 바로 여그 앉은 우리 겉은 사람덜 아니오. 워째 그냐. 나라 쥔이 한민당잉께 한민당얼 떠받치고 있는 우리덜이 쥔이고, 더 세세허게 따지자먼 여그 읍내 쥔이 바로 우리덜이다 그것이요. 허먼, 심가놈이 헐 일언 무엇이냐. 쥔인 우리럴 편안허게, 안전허게 받들어 뫼시는 것이요. 근디, 그 자석이 쥔이 위험허게 불편허게 잘못 뫼셨응께 잡아다가 매타작부텀 혀얄 것이요.” 107
“.. 심재모, 그 사람은 마땅히 책임져야 하고, 우리는 또 책임을 추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방법이 문제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하신 말씀은 다 옳으나, 그러나 정말로 그 사람을 여기에 끌어다가 목을 비틀거나, 무릎을 꿇리거나, 매질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나 우리끼리 한바탕 욕을 해대는 것으로 기분을 풀고 끝낼 겁니까? 그럴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감정을 누르고 냉정하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숨을 돌릴 겸 뜸을 들이기 위해 유주상은 한 숨길 정도 말을 멈추었다. "에에,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우리의 그런 뜻을 말로 할 것이 아니라 문서로 꾸미자는 겁니다. 말로 하면 감정이 들어가기 쉽고, 또 날아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문서로 꾸미면 감정이 안 들어가 점잖고 확실해지고, 날아가지 않고 언제까지나 남습니다. 제 생각이 어떻습니까?" 여기저기서, 좋소, 좋소, 하는 찬동이 나왔다. “에에, 그 다음이 일을 처리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모여앉기는 했지만 개인에 불과합니다. 이런 일은 개인들의 힘으로는 효과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갑자기 무슨 단체를 만들 수도 없는 일이고 한데, 마침 우리는 지난번에 결성한 좌익척결위원회라는 좋은 단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단체의 이름으로 일을 처리하게 되면 효과가 아주 크리라 믿습니다. 그 단체에서 일을 처리하도록 일임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유주상이 여기서 말을 끝냈다. 108-109
심재모는 언제나 그 대목에서 혼란과 회의를 느꼈다. 군대는 무엇을 하는 조직인가, 나는 누구를 위한 군인인가. 군대는 돈과 힘을 가진 소수를 위해 존재하는가, 나는 그들이 생명과 재산을 무조건 지켜주어야 하는 종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 으레 떠오르는 것이 손승호의 말이었다. "심 사령관이 기왕 이곳에 근무하게 된 입장이고, 이렇게 마주앉게 됐으니 하는 말입니다만, 이데올로기니 사상이니 하는 것들이 뭐 별겁니까. 식자나 좀 들었다는 사람들은 그걸 자기네들만 아는 무슨 거창한 이론이나 되는 것처럼 어렵게 말하려 하고, 그런 것은 그런 것대로 따로 있고, 생활은 생활대로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들이 심한데, 결국 그런 것이 필요하게 된 건 사람의 목숨이 살아가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 그 자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데올로기나 사상이란 것이 유식한 사람들이나 입에 올릴 수 있는 전유물도 아니고, 책상 앞에서 따지는 연구물도 아니라는 겁니다. 배우지는 못했을망정 기본생활조건의 모순 속에서 끝없는 고통을 겪으며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왜 그런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고, 그 잘못은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무슨 방법으로든 그것은 바뀌어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하나의 이데올로기고 사상입니다. 식자가 든 사람들은 거기에 논리와 이론이 없으니 이데올로기나 사상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그건 식자층의 상투적인 용입니다. 그건 불교나 예수교는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경전을 가졌으니 종교, 무속은 그런 것을 갖추지 못했으니 미신이다. 하는 식과 똑같은 발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절대적인 삶이 생활로 살아가는 것이지 어디 이론으로 살아가는 겁니까. 제가 왜 이런 말을 길게 늘어놓느냐 하면, 이 지방에 사는 절대다수의 가난한 농민들은 자기들이 왜 가난한지, 가난을 면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고, 더구나 해방이 되는 것을 계기로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길을 뚫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일정시대의 억압 속에서도 끊임없이 소작쟁의를 벌여 그 길을 뚫으려 했고, 해방이 되자 이제야 때가 왔다 생각한 그들은 다 같이 힘을 모아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아시다시피 그게 바로 1946년 10월에 전국 규모로 일어난 농민항쟁 아닙니까. 그 항쟁은 결국 폭력 앞에 피만 뿌리고 좌절되었습니다만, 지금 그들은 침묵하고 있을 뿐 그들의 욕구를 포기하거나 망각한 게 아닙니다. 그들은 행동하는 이데올로기의 덩어리고, 사상의 덩어리인겁니다. 그런 그들은 자기네들이 원하는 길을 뚫을 수 있는 그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그들은 그것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삶을 찾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환영하고, 선택합니다. 그들의 그런 행위를 우익적 식자들은 또 부화뇌동이니 비이성적 감정주의니 하는 유식한 문자를 써가며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일축하려 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삶의 절박함과 절실함 속에서 나오는 가장 이성적이고 현명하고 순수한 판단이고, 그들이 행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생존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정치상황은 그들이 원하는 바와는 정반대로 치닫고 있습니다. 심 사령관은 바로 그 틈바구니에 끼여 있습니다. 사람들이 군인이나 경찰을 경원하는 것 같다고 아까 말씀하셨는데, 그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한 현상이 이 지방만의 특성은 물론 아닙니다. 지역적으로 다소의 차이가 있을 뿐 그건 남한 전역에 걸친 문제점입니다. 전 정치는 잘 모릅니다만, 옛날 봉건 왕조 때에도 잘하는 정치는 백성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 했고, 다수의 백성이 원하는 바를 실천하는 임금을 현군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봉건시대가 아니라 명색이 민주주의를 내세운 시댑니다. 그러니 정치가 어때야 하는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어차피 군인이 되신 거, 현명한 군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손승호의 말을 되새길 때마다 자신의 군인으로서의 출발이 너무 순진하고 단순했다는 사실을 심재모는 돌이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된 땅에서 무언가 바르게 한몫을 해보고자 하는 마음을 정했을 때는 이렇듯 복잡미묘한 사회구조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113-116
16 당신을 용공행위로 체포하겠소!
지금 우리 사회에선 공산주의가 무서운 게 아니요. 그런 무지막지한 극우세혁의 폭력이 무서운거요. 144
“그려, 우리가 각단지게 동기맹키로 독헌 맘 묵고 일시에 들고일어나뿔먼 지주놈덜 쳐읎애기야 간딴헌 일인디. 우리 수가 열 배는 더 많음스롱도 그 일얼 못해내는 건 다 우리가 빙신이라서 그런겨.” 마삼수의 침통한 말이었다. 153
17 새로 부는 바람
옳지 않은 건, 그런 순수한 일을 자기네 이익을 위해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부류들이야. 이런 현상은 왈, 이데올로기의 정치종속이고 수단화지. 중요한 건, 지금 우리가 그것과의 싸움에 맞닥뜨려 있다는 사실이네. 이런 싸움은 진작부터 이 나라 도처에서 일어났고, 앞으로는 더 심해질 거라는 사실이지. 그 결과는 이성적이거나 양심적인 비판세력의 말살로 나타날 것이고, 모든 국민은 정치지배의 수단이 된 이데올로기의 울타리 안에 갇혀 순종하는 가축이 돼야 하겠지. 166-167
18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습격
사바사바는 ‘통역정치’ 또는 ‘요정정치’라고 불리었던 미군정의 음성적 정치로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말이었고, 빽은 이승만 정권이 세워지면서 연줄과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풍조 속에서 생겨난 유행어였다. 221
19 그리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승리
습격을 직접 지휘한 중부서장 윤기병, 그 위에서 명령을 내린 시경찰국장 김태선이 일제의 특별고등경ㅇ찰 출신이며, 그보다 더 위인 치안국장 이호와 내무부 차관 장경근은 친일 공무원이었고, 현장에서 난동을 부린 60여 명의 경찰들 모두가 친일경력자들이라는 사실이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238
민기홍이 술을 찔끔 마셨다. “세상을 살아갈수록, 어떤 일을 성사시키는 덴 적기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되는데, 큰일일수록 더 그렇지. 반민특위는 그 적기를 찾지 못했네. 특위를 발족시킨 뜻이야 백 번 천 번 좋았지만, 뜻만 가지고 일이 되나. 특위 활동이란 애초부터 흉기 든 강도 맨손으로 잡겠다는 식이었고, 토끼가 호랑이한테 덤비는 격이었지 뭔가. 한민당을 중심으로 해서 정치권력이, 경찰을 중심으로 해서 무장세력이 확고하게 조직된 현실에서 글쎄, 무슨 수로 그들을 처단한단 말인가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여 민족정기를 세우고 민족정의를 살리자, 이 얼마나 당연한 일인가. 그러나 백번 당연한 명분만으로 일이 되는가. 특위 활동이란 무슨 계몽운동이나 순화운동이 아니라, 죽이고 죽는 목숨을 내건 싸움이었단 말이네. 특위 활동을 시작하면 친일반역자들이 꼼짝을 못할 줄 알았다면 그거야말로 어리석도록 순진한 감상이지. 그들이 그 정도 양심을 가졌다면 아예 친일도 반역도 하지 않았겠지. 그 목숨을 내건 싸움의 폭발이 이번 사태고, 특위는 당연한 패배를 한 셈이지. 물론 그전에도 도전이야무수히 많았잖았는가. 노덕술이 지휘한 특위위원암살음모, 전화나 편지질의 공갈 협박, 친일파들에게 돈을 받고 동원된 사람들이 하필이면 파고다공원에서 매일 특위해체를 외친 데모, 그런 것들이 효과가 없으니까 이번엔 경찰이 직접 나선 것 아닌가. 군정의 비호아래 이승만 한민당 ·경찰이 상호 협력관계를 긴밀히 유지하며 만들어낸 첫 번째 작품이 단정수립이고, 그 두 번째 작품이 이번 사건인 특위박멸이겠지. 그리고 사실 이번 사건이 터지기 전에 이미 특위는 유명무실해지지 않았나. 박흥식이가 103일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버리고, 재판 결과는 무죄 아니었나 특위가 죽을 고생해가며 잡아들이면 뭘 해. 재판에서 다 그 지경 만들면 도로아미타불이지. 그런데도 특위는 역시 그들 세 세력한테는 마땅찮은 존재였던 거지. 민중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여론이 조성되는 곳이었으니까 편안한 권력유지를 위해서 그들은 마땅히 특위를 깨부숴야 했던 거야." 이학송은 목이 마른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기자로 썩기 아깝게 언변 한번 좋네마는, 그럼 자네 말은 뭐야. 그러니까 특위는 애당초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건가?" 민기홍의 눈이 안경 속에서 예리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니야, 그 반대지." 이학송은 허리를 곧바로 세우며 고개를 단호하게 젓고는, “아까 적기라는 말을 했는데, 우리에겐 그 기회가 딱 한 번 있었네. 친일반역자들의 처단은 해방이 된 그날부터 민중들의 손에 의해서 감행됐어야 했던 거야. 그자들은 거의 몸을 숨겨 스스로의 죄를 입증했으니까 골라내고 말고 할 것도 없었지. 미군이 점령하기 전까지 우리 민중들에겐 20일이 넘는 절호의 시간이 주어져 있었어. 거기다가 건준이 신속하게 조직구성을 했지. 그런데 민중들도 그 아까운 시간을 허송했고, 건준도 전국 방방곡곡에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민중조직을 결속시켜 그 일을 단행하는데 소홀히 하고 말았어. 그나마 나라나 민족을 생각한다는 사람들이, 친일세력을 제거하지 못한 것이 미군의 비호 때문이라고 쉽게 말해 버리는데, 물론 미군이 우리 민족문제에 개입해 저지른 범죄야 엄연하고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에 앞서 우리들 스스로는 그 기막힌 20일 동안을 뭘 했느냐고 냉정하게 우리 스스로를 비판해야 한다 그거네. 난 그때를 계기로 우리 민족이나 민중들의 의식과 역량을 새삼스럽게 회의하게 됐고, 여운형을 근본적으로 불신하게 됐지. 만약 불란서 국민들이 우리 같은 상황이었으면 그 20일을 우리처럼 허송했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과연 우리 민족에게 혁명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가를 회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민 형 자넨 극단론이다 논리주의다 하고 공박하겠지만, 난 그때 20일을 잘못 살아 영원히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됐다네." 248-251
“물론, 예기치 못했던 해방이 너무 갑자기와 민중들은 얼떨떨한 상태에서 우왕좌왕하며 그 중요한 시간을 놓쳐버렸고, 일본 경찰은 계속 무장상태에 있었으며, 건준에서는 미군점령에 대비한 국가기구를 만드느라고 그 문제를 처리할 시간이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또 어떤 창백한 인도주의자는 법적 처벌기준도 없이 그 짧은 기간에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하라는 거냐고 공박하고 들 수도 있겠지. 그럼, 일본놈들이 우리 민족을 살해하고 착취할 때 어떤 법적 기준을 가지고 했던가? 제멋대로 아니었는가 말야. 그런 일본놈들에게 붙어서 그놈들과 똑같은 만행을 자행한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는 데 무슨 법이 필요하단 말인가. 우리에게 해방의 의미는 외적으로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내적으로 민족혁명의 시작이었던 것이네. 민족혁명이란, 민족반역자들을 남김없이 처단하는 인간혁명과 사회제도 전반을 뒤엎어 새로 창출하는 정치혁명, 그 두 가지가 평행적으로 완성되는 걸 말하는 것이지, 혁명은 개조도, 개선도, 변모도, 변화도 아니야. 완전한 새로움의 탄생이야. 그러므로 혁명은 혁명 그 자체가 법이야. 그러나 민족반역자들을 극형처단해야 하는 근거가 꼭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댈 수 있지. 일본놈들이 36년에 걸쳐 직접 살해한 우리 동포의 수가 얼마며, 착취를 해서 굶어죽게 한 간접살해는 또 얼만가를 따져 보세. 수백만 명 아닌가. 민족반역자들을 대략 150만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일제치하에서 죽어간 동포의 수를 300만으로 줄여 잡더라도 그놈들은 하나 앞에 두 사람씩을 죽인 게 아닌가 말야. 그런 살인자들을 어찌 그냥 살려둘 수가 있겠나. 그런데 우린 그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고, 미군에게 점령당했고, 오늘날과 같은 엉망진창의 꼴이 되고 말았지. 그리고 '혁명'이라는 말만 써도 좌익으로 몰아붙이는 우습지도 않은 상황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특위까지 저리 되고 말았으니 이제 끝장난 나라 아닌가" 이 말을 하는 동안 이학송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가시고 짙은 눈썹은 심하게 꿈틀거렸다. 252-254
한 번 배신한 자 두 번 배신하고, 한 번 거짓말한 자 두 번 거짓말하는 법이다. 그건 습관성이 아니라 자기 방어와 자기 합리화를 위한 필수행위다. 256
2차대전이 끝나고 그들도 우리와 비슷한 상황 아니었나. 나치스 협조자, 레지스탕스 밀고자부터 처단하지 않았나. 그들은 우리와 달라, 인종에 우열이 있는 게 아니라 역사가 달라, 그들은 인간의 삶이 바로 역사고, 역사는 인간의 힘으로 뒤바뀌고 창조된다는 것을 알고 믿어, 그런 체험을 했으니까, 혁명을 일으켰고, 성공시켰거든. 우린 그런 역사적 경험이 없어, 그러니 역사에 대한 존엄도, 신뢰도, 책임도, 냉엄도, 두려움도, 아무것도 없어. 256-257
20 백범 김구를 죽인 네 발의 총알
유상몰수, 유상분배 - 지주에게는 돈을 주고 농지를 몰수하며, 소작인은 돈을 내고 농지를 분배받는다는 그 첫 번째 방법에 대해 모든 소작인들은 일제히 반발의 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번 정해진 법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실망과 불만을 동시에 품게 되었다. 그들의 의식 속에 분명하고 확실하게 판박혀 있는 농지개혁이란 무상몰수 무상분배였던 것이다. 해방을 맞이한 뒤로 그리도 목마르게 농지개혁이 되기를 바라고 기다려왔던 것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농지를 갖게 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말은 그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것이고, 농지개혁에는 그 방법바께 없다고 믿어왔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오래전에 그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했으므로 이남에서도 당연히 그러리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280-281
손톱을 일부러 깎아야 하는 것이 그렇게 신기하고도 이상한 기분일 수가 없었다.(들몰댁) 309
21 거꾸로 흐르기 시작한 역사의 물줄기
백범 김구의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고, 백범은 효창공원에 영원히 잠자리를 마련하였다. 316
사실 죽음 그것이 문제이지 장례식이라는 것은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살아 있는 자들 위주로 벌이는 죽은 자에 대한 잔치가 장례식이라는 것이었다. 김범우는 그 요식행위를 보려 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이미 누구보다도 백범의 죽음을 슬퍼하고 아파해온 것이다. 요식행위에 불과한 장례행렬을 보려 하지 않는 그의 마음이 어쩌면 진정한 조의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317-318
“우리의 해방상황을 해방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식민지체제로 파악하고, 외세배격을 위한 제2의 독립투쟁 전개를 내세운 것은 백범다운 용기고, 그 누구도 흉내 못 낸 탁월함이었소. 이승만은미국에 치우치고, 여운형과 박헌영은 소련에 치우쳐 그런 공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엄두도 못 냈으니 말이오. 그러한 선명성을 내세웠을 때 백범은 새로운 민족의 개념을 정립하고, 그것을 정치이데올로기로 실천할 수 있는 민중조직을 구성하고 확대해야 했던 거요. 다시 말해, 백범은 민족주의를 정치이념으로 부르짖었으되 민중을 동감으로 자각시키고, 그 자각으로 민족이 동질의 연대감을갖게 하고, 그 연대감으로 자발적 실천력을 갖게 하는 민중조직으로서의 민족을 창출해내지못했단 말이오. 김형, 함께 생각해 봅시다. 백범의 민족주의가 '민족'이라는 추상명사가 갖는 막연함과흐릿함과 구분되는 그 어떤 구체성이나 명확성이 있소? 좋은 예로,장례식날 그 많이 모인 사람들에게, 백범이 누구냐 물었을 때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소? 하나같이 임시정부주석이라고 대답했을 거요. 그 다음에, 백범의 민족주의가 뭘 말하는 것이냐, 물으면 다 눈만 껌벅거렸을 거요. 그런데 똑같은 사람들에게, 좌익은 자기네들 세상이 되면 뭘 한다더냐, 고 물으면 무슨 대답이 나올 것 같소? 최소한의 대답이 누구나 공평하게 사는 세상을 만든다더라, 아니겠소? 아까 김 형이 말한 대로 백범의 건국강령이 '토지개혁 단행'과 '친일반역자 척결'이었으니, 그 훌륭한 강령을 위로는 깃발로 세우고, 아래로는 민중을 상대로 조직적 선전을 펼쳐, 사람들의 입에서 좌익에 대한 최소한의 대답이 나오듯이 그렇게 만들어야 했다 그 말이오. 그 민중조직을 이끄는 민족주의도 그냥 '민족주의'라고 할 것이 아니라, '민중민족주의'라거나 '혁신민족주의'라거나, 하다못해 '신민족주의'라고 해서라도 그전의 혈연 일체감만을 나타내는 비논리적이고 감상적인 민족주의와 확실하게 구분해야 했던 거요. 그렇게 됐더라면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이 임시정부주석이라고 했겠소? 백범은 해방 아닌 해방의 상황 속에서 그 누구보다 분투했소. 그러나 그 분투가 상부에서만 맴돌았을 뿐 하부로부터의 호응이 전혀 없었소. 민중이라는 존재와 그 힘을 근원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게 백범의 한계였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소.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이 있소. 백범이 좌익만큼의 민중조직을 가지고 남북협상에 임했더라면 김일성에게 그런 식의 푸대접은 받지 않았을 거요. 겉으로 드러난 형식적인 환영이 백 번이면 무슨 소용이 있소. 김일성은 절차상 당연히 있어야 할 연설도 시키지 않았고, 환영과는 반대로 대중들에게, 김구가 항복하려고 도장 가지고 왔다고 선전해 대지 않았소? 백범이 좌익이데올로기에 맞설 수 있는 의식으로 뭉쳐진 민중조직을 가지고 있었다면 감히 김일성이 그런 짓은 못했을 것이오. 김일성은 백범을 종이호랑이로 취급한 거요. 백범의 그점은 참 아쉽고 안타까운 대목이오. 명정에 씌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주석백범김구지구’라는 글자가 상징적으로 모든 걸 설명하고 있소. 내 생각이 어떻소?” 이학송은 목울대가 울리도록 벌컥거리며 술을 들이켰다. “그 점에 대해선 별로 할 말이 없군요.” 침울한 기색의 김범우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320-322
“물총이란 것이 말이시, 우선에 그 생김생김이 문젠디, 을매나 질고 토실토실허냐 허는 것이시. 그 생김에 따라서 물질이 멀리꺼정 뻗치냐 아니냐 허는 심이 정해진로 질기만 허고 홀쪽허니 가늘어서도 틀린 것이고, 짧음시로 퉁퉁허기만 혀도 틀린 것이시. 긍께로 물질이 씨게 나가는 존 연장일라면 질이가 짐스롱도 몸체가 통통혀야 한다 그 말이시. 그 이치란 것이 아그덜이 갖고 노는 실지 물총을 봐도 그렇고, 우리가 갖고 있는 권총허고 장총허고 비혀도 그렇단 말시. 긍께 자네 연장이 워쩌크름 생겼냐 허는 것이 문제고, 그 담에, 연장이 겉보기에는 길쭉하고 토실토실허니 잘생겼드라도 고것이 찌릿찌릿하고 후끈후끈허고 어질어질하고 옴죽음죽헌 그 요상시런 구녕 속에서 을매나 오래 젼디냐 허는 것이네. 거 문전객사란 말 안 있드라고? 동백지름 잘못 묵고 설사하는 놈맹키로, 들어가는갑다 험시로 싸질르는 연장임사 속곳만 더럽히제 다 틀려묵은 것잉께. 방구도 꽁꽁 참았다가 뀌어야 소리가 크고, 널도 많이 굴러야 높이 솟기대끼 고것도 오래 견디는 심이 있어야 씨게 나가제, 허고, 연장이 오래 견딤스로 그 구녕이 지대로 열을 받게 맹글어야 허는 것이네. 그 씨라는 것이 냉기럴 싫어허니께. .. 긍께로 무신 말인고 허니, 질고 토실토실허니 잘생긴 연장으로 그 구녕에서 오래 젼딤스로, 그 구녕이 씨럴 잘 보전허게 열받게 맹글어갖고 물총질얼 딱 허는 디꺼지가 사람이 맡어 헐 일인 것이고, 그 담에 아덜이냐 딸이냐 정허는 것이 삼신할매가 허는 일이란 말시…” 331-332
22 8월의 들녘
23 자유민주주의라는 허울
“.. 다아는 사실이지만, 그들 두 강대국은 고맙고도 황송하게도, 우리한테 자치능력이 없으니까 자기네들이 신탁통치를 해주겠다고 나섰잖소? 그게 침략을 합리화하는 일방적인 강대국 논린데, 그럼, 과연 우리에게 자치능력이 없었던가? 천만에, 우린 1차로 건국준비위원회를 통해서, 2차로 조선인민공화국을 통해서 완전한 자치능력을 확보하지 않았는가 말이오. 먼저, 건준이나 인공의 구성원을 보면 친일세력을 완전 배제한 상태에서, 어떤 이념에 구애되거나 편중되지 않고 양심적 민족세력으로서 자유민주주의 세력, 공산주의 세력, 중도우파 세력, 중도좌파 세력을 망라해서 민족적 민주세력의 연합체를 만들었었소. 그리고 이런 상부조직에 호응해서 전국에 걸쳐 지방조직이 자발적으로 구성되었지. 이 두 가지의 엄연한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거요? 상부조직은 해방조국 앞에 사욕없는 정치양심을 나타냄과 동시에 화합하는 정치능력을 보인 것이오. 그리고 하부조직은 우리 민족이 새로운 나라 건설을 얼마나 원하고 있으며, 그 능력이 얼마나 확고한지를 증명한 것이었소. 그런데 미군정이 한 짓은 뭐였나. 바로 그 인공을 부인하지 않았소. 그 행위는 바로 우리 민족 전체를 부인하는 만행이었소. 그럼, 상황을바꿔서 생각해 보세. 미국과 쏘련이 바뀌어서, 아니 그렇게 하면 복잡하니까, 인공이 서울이 아닌 평양에서 구성되었다면 쏘련은 어땠을 것 같소! 인정일까, 부정일까? 그들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부인했소. 그들도 미국처럼 자기네한테 필요한 정권을 세워야 하는데인공은 민족주체적 정치조직이고, 따라서 외세배격적 민족세력이었기 때문이오. 우리는 우리의 훌륭한 자치능력을 새로운 침략자들의 폭력으로 파괴당했소. 이렇게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에서 하나로 합쳐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를 내 나름대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인공과 같은 구성, 그 이상은 없소. 모든이념을 가진 조직이 한 테두리 안에 모이고, 그 속에서 각기 정치 활동을 전개하고, 그리고 선택은 오로지 국민전체에게 맡기는 거요. 그 결과로 권력을 맡은 세력이란 그것이 어떤 이념을 표방하는민주제일의 정신에 입각해 있는 민주주의 정권이기 때문이오. 우리가 잃어버린 그 기회의 회복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민족적 과제가 아닐까 싶소."(이학송) 416-417
“.. 더 큰 문제는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의 앞으로의 문제일 거요. 정치만을 반민족세력들이 장악한 게 아니라 경제까지 반민족세력들이 장악하고 말았기 때문이오. 군정은 정치와 경제 양면 모두를 반민족세력에게 떠넘겨줌으로써 이 땅의 남쪽을 명실공히 속국화시켜 버린 것이오. 미곡수집정책으로 쌀값을 500배까지 올려 인플레와 함게 대중경제를 파탄에 몰아넣고는, 미국의 각종 잉여상품과 잉여농산물을 풀어놓지 않았소? 점령지를 자기네 경제에 예속시킴과 동시에 자기네 시장으로 확보한 것이오. 그리고 그들은 그 많은 귀속재산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 기업이윤을 빼먹을 만큼 빼먹고 나서 그것을 또 반민족세력들한테 넘겨주고 말았소. 군정은 정치도 경제도 다 자기네 뜻대로 재편성핳고 조직했소. 그러니 앞으로 대중생활이 어떤 꼴이 되겠소. 해방은 되나마나고, 사회모순은 새롭게 야기되고, 그 결과로 민족모순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오. 그게 다 군정 3년이 남긴 것들이오. 미군은 철수했지만 군정은 끝난 것이 아니라 형태를 다맇해서 계속되도록 되어 있는 게 우리의 실정이오.”(이학송) 422-423
공산주의에 비해 자유민주주의가 정치이념으로서 하등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공산주의와 대등하게 되려면 순수한 대중의 손에 의해 생겨나야 하고, 그 정권은 절대적 대중이 원하는 바에 따라, 절대적 대중을 위해 정치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처한 자유민주주의는 그 과정을 일체생략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허울뿐이고, 대중들의 배척을 받고, 현재로서 북쪽의 체제와는 대적이 안 되는 겁니다. 다알다시피 북쪽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친일반역세력을 일소해 민족감정을 해결했고, 농민을 위해 토지개혁을 했으며, 노동자를 위해서는 노동법을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남로당 지하조직을 통해서 끊임없이 정치선전을 해왔으니 남쪽 체제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과 반감은 날이 갈수록 커갈 수밖에 없습니다. 남쪽이 이 지경이 된건 미국 군인들이 강압적으로 세워놓은 군사정권이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떳떳하게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할 수 있게 되려면 아까 말한 그 과정을 거쳐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건 이미 틀린 일입니다. 그러니까 심중위님 같은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설자리를 찾지 못해 두리번거려야 하고, 혼자 괴로워야 하고, 대중들로부터 오해 받아야 하고, 배척당해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죠. 미국은 남쪽 정책에 있어서 대중들 입장에서는 물론이고 양심적 지식인들 입장에서도 매도를 당할 수밖에 없이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미국은 그 과오에 대해서 앞으로 두고두고 우리한테 비판당하고 매도당하게 될 겁니다. 말씀드린 대로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니 심 중위님은 현재의 위치에서 좋은 쪽으로 그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시킬 날이 올 거라는 걸 믿으면서 말입니다."(이학송, 심재모에게 한 말) 426-427
4 각자도생을 택한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의 수교 범이슬람주의는 20세기 초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면서 끝났다. 1960년대 석유수출국기구(OPEC) 결성으로 위력을 발휘했던 아랍 민족주의도 수명을 다했다. 1949년 터키를 필두로 이집트, 요르단 등 이슬람 국가가 오랜 적국인 이스라엘을 승인하고 수교를 감행함으로써 ‘움마툴 이슬람(이슬람 공동체)’이나 무슬림 형재에를 내세우던 느슨한 연대도 빛을 잃었다. 이런 결과는 아랍 각국의 각자도생으로 연결됐다. 이란과 이라크가 같은 시아파 국가이면서도 8년 전쟁(1980~1988)을 치렀고, 1990년에는 이라크가 이웃 아랍 형제국인 쿠웨이트를 점령했다. 곧이어 벌어진 제1차 걸프 전쟁 때는 다국적군을 도와 아랍 국가들이 앞다투어 이라크 공격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또 2017년 6월에는 같은 걸프 형제 국가인 카타르를 상대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등이 단교를 선언함으로써 이제 중동은 종교 대신 실리를, 형제애 대신 왕정 이익을 선택하는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다만 무슬림의 심장에 각인된 팔레스타인 문제만은 별개였다.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긴 팔레스타인의 비극과 1967년 3차 중동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아랍 영토 불법 점령에 대해서는 누구도 양보하지 않았다. 이것은 인류의 보편 가치에 대한 도전이고 유엔 안보리 만장일치 결의안이나 국제법의 위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수교는 무슬림 공통의 연대 가치였던 팔레스타인 묹2ㅔ조차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내팽개칠 수 있다는 우려와 위기의식을 이슬람 세계에 강하게 던져 주었다. 팔레스타인 정부 재정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던 사우디 왕정이 이스라엘과 협력 체제를 구축하면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재정 지원을 대폭 삭감했다. 더구나 걸프 산유국들이 묵시적 동조로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강하게 밀어붙인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지 정착촌에 대한 실효적 지배도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물론 아랍에미리트 측에서는 양국 수교 조건에 이스라엘의 서안 지구 정착촌 병합을 포기해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하지만 지난 50여년간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점령하면서 그들이 이주시킨 60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는 기존 정착촌을 강제 철거하는 문제는 해결될 수가 없는 상황이다. 31-32
5 시리아 내전의 원인과 현황 시리아 내전은 10년(2011~2021)간 계속되더니 일단 유혈 충돌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철군을 선언한 이후 사실상 내전 개입을 포기했고,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지지하던 러시아가 사실상 시리아 통제권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아사드 대통령의 정치 권력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동안 아사드 정권의 뒤에는 러시아와 이란이 버티고 있었고, 반군은 미국, EU,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지원을 받았다. 전형적인 국제 대리전 양상을 띤다. 그 과정에서 2천만 명 국민 중에 약 1,300만 명이 난민이 되어 고향을 등졌고, 50만 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이 영문도 모른 채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가족 곁을 떠나간 정확한 생명의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제2ㅊ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참극이다. 양측의 목표는 정권 획득이지만, 그 과정과 결과는 자국민의 살상과 초토화된 삶의 기반이다. 시리아 내전이 안고 있는 악마 같은 모습이다. 시리아 내전의 도화선은 2011년 아랍 세계를 뒤흔든 재스민 혁명이었다. 튀지니, 이집트 예멘의 독재자들을 끌어내린 분노의 함성은 시리아 독재자 아사드에게로 향했다. 시리아는 구조적으로 국민의 70%를 차지하는 이슬람 수니파가 정권에서 소외돼 억압받는 처지에 있었고, 15% 정도에 불과한 소수 종파인 시아파 계열 알라위 그룹이 국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리아 시위는 비무장으로 출발한 다른 아랍 국가들의 민주화 시쉬와는 달리 애초부터 하마시를 중심으로 한 무장 투쟁으로 시작됐다. 그것은 1982년 하마 대학살의 악몽으로 인한 후유증이었다. 당시 바샤르의 부친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이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던 하마시를 봉쇄하고 정규군을 파견해 약 3만 명의 무고한 시민을 무차별 학살했던 끔찍한 사태였다. 시리아 사태가 2011년 아랍 민주화 물결의 영향을 받아 반정부 시위로 촉발됐으나 비무장 민중 항쟁이 아닌 반군의 무장과 함께 곧바로 내전으로 변질한 배경이다. 러시아는 시리아가 위치한 동부 지중해 타르투스 항구에 군사 거점을 확보하고 미국 독무대인 중동에 진출하려는 강력한 욕구 때문에, 중국은 중동에서의 에너지 협력 체제를 지키고자 반미 전초 기지인 시리아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이란은 이라크-시리아-헤지볼라-하마스로 이어지는 반이스라엘 사아파 벨트의 전략적 이익 때문에 가장 적극적으로 시리아 정권을 지원하고 있다. 더욱이 미국의 극심한 경제 제재와 핵 포기 압박으로 사면초가 상태인 이란이 이웃의 동맹 시리아까지 잃는다면 자국 안보 전략과 중동 패권 구도에 결정적 허점을 안게 되기 때문이다. 터키는 물 문제와 쿠르드 반군 문제로 오랫동안 시리아와 반목해 왔다. 유프라테스강 상수원을 장악하고 있는 터키가 22개의 대형 댐을 조성해 시리아로 흘러 들어가는 방류량을 조절하고 있고, 이에 맞서 시리아는 터키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쿠르드 반군들을 지원하거나 훈련 캠프를 제공해 왔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하는 아랍 걸프 국가들은 시리아가 소수 시아파 정권으로 친이란 노선을 걸어왔던 점 때문에 불편한 관계였고, 시아파 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수파 수니 정권으로 환원한다는 의미에서 아사드 정권 붕괴를 내심 부추기고 있다. 이처럼 상충하는 이해관계 때문에 시리아는 이미 민주 항쟁을 통한 독재 정권 타도 시기를 놓치고 무고한 민간인 인명 피해만 자초했다. 40여 개에 달하는 야권 그룹의 분열, 서방과 아랍의 지원을 받는 다양한 반군 무장 그룹의 게릴라식 분산 투쟁도 아사드의 정치 생명을 연장해 주고 말았다. 이슬람 국가(ISIL)와 급진 이슬람 무장 세력인 알누스라 전선도 한때 반군 세력의 주축을 이루었을 정도로 반아사드 세력은 오합지졸의 대연합이었다. 그 결과 시리아 내전은 러시아와 이란이 지원하는 정부군의 우세로 이미 결정이 난 상황이다. ISIL 궤멸 이후 나토(NATO)의 맹방인 터키마저 시리아 전선에서 러시아와 보조를 맞추으로써 미국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9.11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이 중동에 개입한 이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이어 세 번째 맛보는 처절한 실패다. 그동안 러시아와 시리아 정권은 반군 세력과의 전쟁을 ‘대테러전쟁’으로 규정하면서 서방의 비도덕성과 테러 집단과의 야합을 부각해 왔다. 이는 시리아 반군 핵심에 국제 테러 조직인 ISIL과 알누스라 전선 같은 강경 테러 세력이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리아 내전이 아랍 민주화 시위의 연장선이나 독재 정권 제거를 위한 민주화 투쟁이 아니라 치졸하고 복잡한 강대국의 이권과 경쟁의 플랫폼으로 변질해 버린 슬픈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따라서 미국이 빠지고 러시아와 독재 정권이 주도권을 잡는 시리아의 미래는 더욱 아담해 보인다. 34-37
6 왜 시리아 난민을 국제 사회가 책임져야 하나? 시리아 내전은 더는 시리아 국민 간의 전쟁이아니다. 자국 이익 확보에 혈안이 된 국제사회가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집요하고 무분별하게 개입해 벌이는 국제 살육전쟁이다. 러시아와 미국의 일차적 책임이 훨씬 무겁다는 이야기이다. 정부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삶의 기반을 잃은 자들이 떠나면, 이번에는 반군이 공격해 다마스쿠스와 다른 도시를 초토화한다. 더욱 무서운 것은 화학무기를 포함해서 가공할 첨단 무기를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는 점이다. 가족과 이웃을 잃고 폐허가 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폭격의 위험이 덜한 곳을 향해 죽기살기식 이주를 하면서 난민이 된다. 시리아의 남쪽 국경은 요르단, 북쪽 국경이 터키, 서쪽 국경레바논과 이스라엘이고, 동쪽은 이라크다. 그 국경을 막으면 눈앞에서 수백만 명의 난민들이 그냥 죽어 나간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짓이고 인간의 이름으로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된다. 그래서요르단은 국경을 열고 100만에 가까운 시리아 난민을 수용했다. 요르단에는 이미 70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유입돼 있고, 요르단 전체 인구 950만 명 중 팔레스타인 사람이 요르단 토착 인구보다 더 많은, 난민 수용 국가가 된 지 오래다. 1인당 국민 소득 5천 달러 수준으로 그렇게 잘 살지도 못하는 나라지만 이웃 형제들을 외면할 수 없는일이다. 현재 준전시 상황으로 혼란스러운 동쪽의 이라크에서도 시리아 난민 30만 명 정도가 생명을 부지하고 있다. 시리아 땅인 골란고원과 베카 계곡을 강제 점령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시리아 난민을받아줄 리 없다. 정정이 혼란스럽고 경제적 파탄 상태에 있는 레바논조차 100만 명 이상의 시리아 난민 이웃을 받아들였다. 문제는 북쪽국경이다. 비교적 경제적 여유가 있고 정치적으로 안정됐으며, 무엇보다 유럽으로 향하는 관문인 터키 국경으로 수많은 시리아 난민이몰려들고 있다. 공식 통계로는 360만명 정도, 실제로는 400만 명이상의 시리아 난민이 터키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시리아 난민들은 국내 다른 도시나 이웃 중동 국가에 둥지를 틀었지만, 일부는목숨을 걸고 그래도 삶의 질이 보장된 유럽으로 향하고 있다. 유럽연합과 터키가 '난민 유입 금지 협약'을 맺어 터키를 통한 유럽 유입이힘들어지자 시리아 서부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작은 배에 목숨을 걸고 유럽행을 감행하고 있다. 소위 보트 피플이다. 구조 장비도 제대로 없는 작은 보트에 과잉 승선으로 중간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도 천신만고 끝에 유럽 땅을 밟은 사람이 120만 명이나된다. 독일이 그중에서 80만 명 정도를 선제적으로 받아 주었다. 이처럼 시리아 내전은 이미 미국, 유럽, 러시아는 물론 이웃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이란 등 중동 국가들이 개입하는 그야말로 국제대리전의 양상을 띤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물론이고, 무엇보다 당장 목숨 부지가 어려운 난민을 이웃 국가와 국제 사회가 책임져야 하는 이유다. 여기서 독일이 선뜻 왜 그 많은 시리아 난민을 수용했는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엄청난 여론의 반대와 정치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내린 결정이다. 태생적으로 유럽은 근대 200년간 식민 통치를 하면서 피식민지 이민자들을 국가 발전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받아들인 다문화사회였다.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피식민 국가들의 노동력 덕분에 많은 유럽 국가가 기본 노동력 인구를 유지하면서도 나라가 발전하는셈이다. 앞으로도 이런 구도는 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이민을 받아들이려면 인도적인 입장에서 시간을 끌다가 마지못해 숫자 채우듯이 받아들이는 것보다 선제적으로 선별해 능력과 실력을 갖춘 전문 인력을 우선 받는 것이 훨씬 유리할 것이다. 이것이독일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범죄자가 섞여 들어오고 불순분자나 급진 테러 조직이 유입된다면 사회 불안 요인이 커진다. 더구나 이슬람문화라는 이질적인 문화가 확산되면 사회에 불협화음이 생기고 유럽 주류 문화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 난민 수용 반대론자들이 우려하는 핵심 이유이며, 물론 정당한 걱정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회적 역동성을 유지하는 데 이민이 필수적이라면, 극소수가 저지르는 범죄나 테러 가능성보다 역동성과 노동력 기여 등 순기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에 난민 수용 결정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 인구 절벽의 다문화 시대에 이민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에게도 좋은 시사점이 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1,200명가량의 시리아 사람들이 내전을 피해 입국해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주로 서울 장안동 일대에 집단 거주하면서 중고 자동차나 자동차 부품을 시리아로 수출해서 상당한 경제적 부를 쌓고 있다. 우리나라와 수도 맺지 않고 아직도내전 중이라 위험한 시장을 그들은 고향처럼 활용하며 돈을 벌고 가족을 보살피면서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후일 내전이 끝나고 그들대부분은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가족들이 시리아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려울 때 자신들을 거두어 준 한국을 잊지 못하고,한국에서 배운 우리말과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도 경제 활동을 하고두 나라 사이에 문화적 가교가 될 것이다. 항상 역기능과 함께 순기능도 생각하면서, 국제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글로벌 시민 의식을 동시에 고취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38-42
7 예맨 내전과 난민 문제의 핵심은? 2014년 시작된 예멘 내전은 6년을 넘기고 있다. 본질은 국내 네 파벌의 알력다툼과 권력 투쟁이다. 수도 사나를 중심으로 서부 해안 지대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무함마드 후티 세력, 동부 일부를 장악하고 있는 만수르 하디 대통령세력, 남부과도위원회 세력, 알카에다 잔존 세력 등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각자도생을 위해 갈등하고 있다. 이런 구도에서 사우디가만수르 하디 정권을, 이란이 후티 연합 세력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면서 사실상 양국 대리전 양상을 띠고 있다. 여기에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의회의 반대에도 사우디에 군사를 지원하고 있고, 아랍에미리트가 예멘 남부과도위원회를 지원함으로써 아랍 국가 간 분쟁으로도 확산하고 있다. 예멘은 196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남과 북 두 나라로 쪼개졌다. 지금 후티가 장악한 북부는 자본주의 체제가 들어섰고, 구소련이 통제한 남예멘은 사회주의로 출발했다. 1990년 북예멘이 남쪽을 병합하면서 명목상 통일이 이루어졌지만, 통합은 요원했고 압둘라 살레 대통령의 일인 독재와 부패는 갈수록 민심을 잃어 갔다.2004년 최초의 조직적인 반정부 저항이 일어났다. 후세인 바드레틴후티가 이끄는 북부 시아파 지역이 시작이었다. 오랜 차별과 박해에시달려 온 후티 세력은 수많은 희생을 딛고도 복수와 독재 타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2011년, 아랍 민주화 운동은 예멘에 봄바람 같은 희망이고 도전이었다. 분노한 시민은 포악한 독재자 살레 대통령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성난 민심을 피해 사우디로 도망갔다. 대혼란과 정치적 우여곡절 끝에 당시 부통령이었던 만수르 하디가 2년간 대통령을 맡기로 했지만,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계속 집권했다. 공정한 선거를 통해 민의를 수렴할 여건도, 바닥에 떨어진 삶의 형편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2014년 후티 세력이 등장해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다. 새로운 헌법을 만들고 정부와 의회를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사우디로 쫓겨난 살레 전 대통령이 후퇴를 강력하게 지원했다. 참으로 아이러니다. 후티는 사우디와 북쪽 국경을 맞대면서 정적 하디 대통령을 지원하는 사우디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후티 정권은 곧바로 서방에서 반군으로 지칭되기 시작했다. 이를 놓칠세라 같은 시아파인 이란이 개입해 고립무원인 후티의 최대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다. 위기를 느낀 사우디는 2017년부터 내전에 직접 개입하면서 후티에 대한 군사 공격을 사실상 주도하고 있다. 이제 예멘 내전은 후티와 사우디의 전쟁이 됐고, 미국과 이란이 각각 후원자 역할을 하는 구도가 됐다. 사우디의 무차별 미사일 공격으로 예멘의 민간인 수만 명이 희생됐고, 홍해 연안의 유일한 보급인 후다이바항을 봉쇄하면서 수십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 사회 기반 시설이 붕괴한 상황에서 콜레라까지 창궐해 세계보건기구 보고서에 따르면 엄청난 참극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 후티의 반격 대상은 당연히 사우디아라비아다. 이제까지 수십 차례의 드론 공격으로 사우디에 크고 작은 타격을 주었지만, 군사적 열세로 번번이 한계를 절감해 왔다. 극단적인 보복의한 형태가 2019년 9월 14일 벌어진 사우디 동부 아람코 탈황 시설에대한 드론 공격이었다. 현재로서는 공격 주체가 이란이라기보다는이란의 기술적 지원을 받은 남부의 이라크 민병대인 것으로 보인다.예멘 내전이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기 전에 국제 사회가 적극적으로개입해야 하는 이유다. 세계 경제의 급소를 공격하는 무모하고 비열한 공격을 결코 용서할 수 없지만, 드론 공격의 빌미가 된 건 무고한예멘 민간인을 무차별 공격하고 있는 사우디의 군사 행태다. 여기에는 국제 사회가 강한 제동을 걸어야 한다. 예멘 내전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탈중동 외교정책에 따라 후티 반군 소탕을 위한 군사지원 중단을 선언함으로써 사우디와 후티 간에 타협의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다. 43-45
9 수니파 벨트와 시아파 벨트, 종파 구도인가 이해 판도인가? 이슬람교는 크게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뉜다. 중동 내 여러 이슬람 국가도 종파에 따라 뭉치고 헤어지는 양상을 보인다. 과연 그럴까? 표피적으로 보면 그럴듯하지만 조금만 심층으로 들어가면 종파보다는 또 다른 국익과 이해관계가 본질을 이룬다. 현재 수니파 국민이 다수인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정점으로 쿠웨이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예멘, 오만 등 걸프 국가, 요르단, 레바논,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 지중해 국가, 이집트, 튀니지, 모로코, 알제리, 수단, 소말리아,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국가들이 포함된다. 동남아시아나 터키와 중앙아시아 튀르크 공화국 등 아시아 국가도 대부분 수니파이다. 시아파 국민이 다수인 나라는 이란을 필두로 이라크, 바레인, 아제르바이잔 정도이다. 수니파가 이슬람 세계의약 90%를 차지하기 때문에 그런 구도가 형성된다. 그중에서 주민 다수가 수니파이지만 시아파 소수 정권이 지배하는 이슬람 국가가 시리아이고, 수니파가 다수이지만 시아파 소수왕정이 다스리는 나라가 바레인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권력 구도의 모순으로 정치적 투쟁과 종파적 시위가 그치지 않는다. 이라크도 오랫동안 시아파 다수 주민을 소수 수니파 사담 후세인 정권이 독재하면서 문제가 됐다. 사담 후세인 몰락 이후 권력이 뒤바뀌어 일부 수니파 기득권 세력과 군벌들이 이라크의 알카에다 잔존 세력이 되었다가 2014년 ISIL 출현에 직접적인 토양이 됐다. 그러나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 소수인 시아파가 수니파와 공존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 공존과 화합이 가장 잘 이루어지는 모범적인나라 중 하나가 아제르바이잔이다. 아제르바이잔에는 종파적 개념이거의 없고 서로가 협력하며 아제르바이잔이라는 민족 정체성이 훨씬강하다. 두 종파는 자연스럽게 결혼하고 서로 긴밀하게 사업도 한다.무엇보다 수니파와 시아파가 한 모스크에서 자연스럽게 함께 예배를본다. 수니파 중심 국가지만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예멘,쿠웨이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타지키스탄 등에서는 상당한 비율로 시아파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소수파에 대한 차별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커다란 마찰 없이 공존과 협력 속에 살아가고 있다. 아예 법으로 권력 분점을 정하는 나라도 있다. 대표적인 다종교-다 종파 국가인 레바논에서는 기독교 마론파가 대통령, 수니파가 총리를, 시아파가 국회의장을, 드루즈가 국방부 장관을 맡도록제도화해 종파 간 갈등을 피해 가고 있다. ISIL는 급진 수니파 이념에투철하지만, 사우디나 다른 수니파 국가들은 ISIL의 적극적인 퇴치에앞장섰고, 팔레스타인 하마스는 수니파지만 사우디아라비아보다 오히려 이란과의 협력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레바논도 시아파가 전체인구의 약 25%에 불과하지만, 시아파 헤지불라가 정권을 잡고 그 정권을 유지하려고 이란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다. 예멘도 수니시아파 대결이라기보다는 이란이 시아파인 후티를 전격 지원하고사우디가 수니파 정치 세력을 보호하면서 종파 간 내전으로 보이는것이다. 즉 사실은 철저하게 사우디-이란의 국익 대리전 성격일 지닐 뿐이다. 초기 이슬람 정권의 후계자 계승 방식에서 마지막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통을 중시하는 집단이 시아파이고, 혈통보다는 공동체 합의 방식을 채택한 정치 집단이 후일 수니파로 불리게 됐다. 두 종파의 차이와 특징은 앞으로 자세히 다루겠지만, 꾸란과 하디스라는 기본 성서를 받아들이는 방식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시아파에서는 이맘이라는 최고 종교 지도자를 인정하고 성직 계층을 강조하는 반면, 수니파에서 20세 이상 성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이맘이 될수 있고, 이맘은 예배를 인도하는 기능적 역할을 할 뿐이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예배 방식이나 신비적인 종교 관행에서도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종교적 분파라기보다는 정파적 성격을 띠고 발전했다. 53-55
11 미국은 왜 그토록 이란을 싫어하는가? 모함마드 모사데크(1882~1967)는 스위스 로잔에서 법학을 공부한 엘리트 민족주의 정치가다. 1951년 이란 총리로 취임한 그는 석유라는 엄청난 부를 가졌음에도 국민은 가난하고 미국의 석유 재벌들만배를 불리는 구조를 개선하고자 석유 국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이에 자국 이익을 지키려고 했던 미국은 1953년 8월 미국 중앙정보국이 직접 개입해 군사 쿠데타를 통해 모사데크 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시 성공했다. 이 사건은 이란 국민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이란인에게 미국이라는 거대한 악의 실체를 깊이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동시에 주변 중동 국가들이 미국에 깊은 불신과 가까이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게 된 계기였다. 오랫동안 고통에 빠진 이란 국민이 친미 팔레비 왕정을 몰아내고 1979년 2월 이슬람 시민 혁명으로 새로운 이란을 만들었을 때 당연히 반미 노선을 추구했다. 그 과정에서 일부 과격분자들이 테헤란주재 미국 대사관을 공격해 대사와 외교관들을 인질로 붙잡고 무려444 일 동안 감금한 사건이 발생한다. 여러 차례 구출 작전에 실패하면서 미 대사관 인질 사건은 당시 세계 최강국 미국에 지울 수 없는수치와 모욕감을 안겨 주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란과의 외교를단절하고, 곧 경제 제재를 단행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이란 이슬람 신정 정권을 붕괴시키고자 미국은 1980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부추겨 무려 이란-이라크 8년 전쟁을 획책한다. 이번에는 거꾸로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해 한때 동지였던 사담 후세인정권을 무너뜨리고, 이웃 이란을 압박하려 했으나 이마저 실패했다.그것은 이라크 전쟁으로 사담 후세인이 사라진 이후 미국이 앉혀 놓았던 이라크 시아파 정권이 오히려 강력한 반미를 외치며 같은 시아파인 이웃 이란과 협력 관계를 강화하면서 이라크 내 미군을 공격하는 역설이 벌어졌다. 이에 정책 노선을 바꾼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5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및 독일과 공동으로(p+1) 이란과의 핵 평화 협상을 전격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극단적 대결 구도에서 중동 최대 시장인 이란을 끌어들여 서로 '윈윈'하면서 메가 시너지를 얻겠다는 과감한 발상의 전환을 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자의 평화 협상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초강경 이란 압박 정책으로 회귀하면서 중동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 긴장을또다시 고조시켰다. 2020년 1월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직접 명령으로 이란 혁명수비대 총사령관이자 권력 서열 2위인 반미 선봉장 거넴 슐레이마니 장군을 이란 공식방문중 표적 살해했다. 이로써 국제 사회가 경악했음은 물론, 미국과 이란 관계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연이어 2020년 3월부터 활성화된 이란 내 코로나-19 바이러스위기 상황에서 인도적 기초 의약품 수출마저 미국에 의해 봉쇄됨으로써 이란인의 미국을 향한 불신과 적대감은 더욱 깊어졌다. 미국과의 실패한 핵 협상 결과, 협상 당사자였던 이란의 온건파대통령 하산 로하니는 쓸쓸하게 물러났다. 대신에 2021년 6월 대선에서는 대법원장 출신의 강경파 신학자 에브라힘 라이시가 새 대통령이 되었다. 미국에서도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서 파기됐던 핵협상(JCPOA, 포괄적 공동행동계획)을 재개하면서 이란과의 화해 접점을 찾으려 하고 있다. 64-66
12 이슬람 세계는 왜 그토록 미국을 싫어하는가? 유럽은 많은 것을 이슬람으로부터 배웠다. 그 첫 단추는 십자군 전쟁이었다. 물론 문화 전파에서 가장 획기적인 계기는 항상 전쟁과 교역이었지만, 십자군 전쟁이 유럽에 가져온 변화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들은 동방의 우수한 문화에 압도됐고,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닥치는 대로 죽이고 약탈하고 파괴하면서 이슬람 문화를 배우고 터득했다.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의 예루살렘 침공은 역사상 길이 기억될 치욕이었다. 40일간의 포위 끝에 함락한 예루살렘 성안에서 유대인과 무슬림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성안의 이슬람 사원과 유대 전통 등 소중한 문화유산은 철저히 파괴됐다. 몇년뒤 아랍 장군 살라딘이 다시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때, 그곳에 있던 기독교인에게 손 하나다치지 않도록 관용을 베풀었던 광경과 비교하면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69
이스라엘의 건국과 미국의 일방적 친이스라엘 정책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주도해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분할된 유대 국가 창설을 통과시키고, 1948년 5월 14일 아랍 영토에서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다. 이때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는 끊임없는 전쟁과 갈등, 테러의 연속이었고,기나긴 60여 년의 세월 동안 미국은 거의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두둔해왔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한 다음 날 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압도적으로 승리했고, 그 후 발생한 네 차례 전쟁에서 아랍 진영은 모두 패했다. 아랍인은 자신들의 패배가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일방적인 원조 때문이라고 여기며 두 나라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그 후에도 지금까지 미국은 팔레스타인 평화 협상에서 한 번도 국제 사회의 책임 있는 국가로서 버림받은 약자의 편을 들어준 적이 없다.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로도 용인될 수 없는 노골적인 이스라엘 편애에 많은 무슬림이 인내를 상실해 갔다. 국제법을 위반하고 아랍을 겨냥한 수백 기의 핵탄두를 갖고 있음에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은커녕 핵확산금지조약(NPT)에도 가입하고 있지 않은 이스라엘을 미국은 무조건 감싸고 예외로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이슬람권에서는 그 누구도 산업용 프로그램조차 갖지 못하게 하는 미국의 극단적 이중 잣대(double standard)가 이슬람 세계에 좌절과 분노를 확산시키고 있다. 더욱이 미국은 시온주의 (Zionism,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 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주의 운동)를 인종 차별 이념으로 비난하고자 하는 국제 사회의 열의를 무시하고 2001년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인종 회의에 불참함으로써 이슬람 세계에 극도의 불신감과 배신감을 안겨 주었다.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고자 국제형사재판소 협약과 대인지뢰금지조약의 비준도 반대했다. 터키 총리 레젭 타입 에르도안의 최근 성명을 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유엔이 설립된 이후 이스라엘의 국제법 위반에 대한 89차례의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결행된 적이 없었다. 상대방인 아랍 국가에 대해서는 그렇게 손쉽게 제재를 가하면서도…………. 만약 유엔 안보리 결의안이 제대로 지켜지기만 했어도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은 오래전에 해결됐을 것이다.’ <타임(TIME)> 2011년 10월 10일자, 64쪽. 70-71
문제는 과거의 응어리가 너무 커서 서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급진 이슬람 그룹이다. 알카에다나 이슬람국가(ISIL) 같은 반이슬람적 무장 테러 조직이 대표적이다. 그들을 급진적으로 만든 것은 이슬람의 원리적인 해석보다는 비열한 서구의음모와 불공정한 국제 정책이었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불씨가 되었지만, 걸프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보스니아, 코소보, 체첸, 카슈미르, 아제르바이잔, 필리핀 남부모로와 동티모르 등지에서 보여 준 노골적인 '이슬람 죽이기 정책'에 더는 앉아서 당할 수 없다는 절박감이 일부 급진주의자들을 테러로 내몰았다. 지금도 미국은 아프간을 공격해 앙갚음하고, 이라크를 희생양으로 삼아 점령해 주둔하고 있다. 테러의 진정한 배경인 역사성은 덮고 지금 이 시점에 인류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문명적 범죄 집단의 응징'으로 테러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미국은 현실 중심적인 수평적 사고가 강하고, 배경과 심층적 원인이 되는 역사성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혹은 무지하다. 그런데 무슬림은 억눌린 근대 100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과거 고통의 역사를 잊지 못한다는 것이 그들이 처한 또 다른 고통인지도 모른다. 9.11 테러 후 20년, 지구촌은 테러와의 전쟁으로 모두가 고통받았다. 알카에다를 비호했다는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적 공격과 점령이 이루어졌다. 심지어 9·11 테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라크를 온갖 거짓 정보와 명분을 내세워 침략해 점령했다. 이 기회를 틈타 급진 세력들이 다시 활개 치기 시작했고, 테러와의 전쟁이 진행될수록 미국과 그 협력자들을 겨냥한 지구촌의 테러는 점점 늘어만 갔다. 알카에다 지휘부는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로 와해됐지만, 2014년 6월 29일에는 알카에다의 이라크 지부가 중심이 된 ISIL이 공식 국가를 선포하고 더욱 잔혹한 방식으로 지구촌 곳곳에 살육과 테러를 저질렀다. 이 ISIL이 사라지면서 대규모 테러 조직은 일단 궤멸됐지만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지역 테러 군벌들은 아직도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크고 작은 테러는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예멘, 리비아, 체첸 등지에서 서구의 개입이나 직접 공격으로 이유 없이 목숨을 잃은 무슬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을 향한 지원과 진정한 사과가 따르지 않고 어떻게 그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겠는가? 국제 사회가 안고 있는 큰 숙제다. 72-73
17 중동에서 미국의 과오와 해야 할 일 중동 민주화에 가장 큰 걸림돌은 사실상 미국의 잘못된 중동 정책이다. 미국은 오로지 자구그이 이익을 지키려는 일념으로 튀니지, 이집트, 예멘, 이라크, 리비아 등의 권위주의 장기 독재 정권과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폭압적 왕정을 비호하고 지원해 왔다. .. 국제법이나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마구잡이로 무시하면서 남의 주권 영토를 점령해 영구화하려는 이스라엘의 시도에 미국이 견제하고 비난하기 보다 동조하고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의 중동 분쟁이 안고 있는 아픔이다. 87-88
19 재스민 혁명은 왜 실패했나? 아랍 민주화가 성공하기 위한 선결 조건은 무엇인가? 쉽지는 않겠지만, 첫째로 국제 사회의 개입과 대리전쟁을 막아야 한다. 리비아, 예멘, 시리아, 이라크 등에서 외국 세력들이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내저너에 깊숙이 개입해 갈등 조장자 역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아랍 각국이 정파나 부족 잡단의 단편적 이해 관계보다 국익이나 미래 세대를 위한 양보와 대타협을 우선해야 한다. 마지마긍로 경제 원조나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압박을 통해 민주화가 안착될 수 있도록, 국제 사회가 평화적 중재자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이희수, <21세기 아라비안 나이트> 103
21 알카에다의 등장과 9.11테러 그리고 대테러 전쟁 알카에다는 원래 사우디의 재벌 2세 오사마 빈라덴이 주도해서 세운 국제 구호 협력 단체였다. 1979년 크리스마스 직후 소련이 기습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소련의 팽창과 남하를 막으려고 이슬람권과 미국이 소련에 맞서는 무자히딘 군벌들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10년 장기전에 돌입했다. 이때 알카에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아프가니스탄 이익 대표부 성격을 띠면서 무자히딘을 지원하는 가장 강력한 지원 조직이었다. 당연히 알카에다는 소련의 침공을 결사적으로 저지해야 하는 미국과의 협력 속에서 함께 전쟁하는 동지 관계였다. 그러나 1990년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1차 걸프 전쟁 직후, 사우디 왕정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이례적으로 미군 기지 설치와 미군 주둔을 허용하면서 왕실과의 관계가 틀어졌다. 사우디와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서 본격적인 대미 무장 공격을 개시했다. 그동안 아프리카와 중동 여러 곳에서 수십 차례 미국 시설에 대한 군사 공격을 감행하던 중, 결국 2001년 9·11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워싱턴의 국방성 펜타곤, 대통령 집무실 백악관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는 9.11 테러를 일으킨다. 9.11 테러는 그동안 이슬람 세계의 급진주의자들이 가져 왔던 불만과 경제적 박탈 논리의 극단적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석유가 개발되기 시작한 1900년대 초부터 오일 쇼크가 발발한 1970년대 초까지 국제 유가는 배럴당 2달러 수준이었다. 석유 1배럴이 약 159리터이므로 1리터에 15원 정도였다. 그것도 70년간이나 지금 휘발유의 최종 소비자 가격이 1리터에 2천원 정도임을 고려한다면, 당시 유통 구조의 왜곡과 서구 석유회사들의 자원 착취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생산원가나 개발비가 턱없이 낮은 중동 석유를 거의 헐값으로 가져가 오늘날 서구는 선진 공업국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는 사이 아랍 국가 대부분은 서구의 가혹한 수탈과 민족적 모멸을 경험했다. 이러한 무슬림의 울분은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빈 라덴의 정치적 선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국은 아랍 석유의 판매를 대행함으로써 노골적으로 그 수익을 도둑질하고 있다. 지난 25년 동안 석유 1배럴이 팔릴 때마다 미국은 135달러를 챙겼다. 이렇게 해서 중동이 도둑맞은 금액은 무려 일일 40억 5천만 달러로 추산된다. 이것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도둑질인 것이다. 이런 대규모의 사기에 대해 세계의 12억 무슬림 인구는 1인당 3천만 달러(약 330억 원)씩 보상해 달라고 미국에 요구할 권리가 있다. - 로레타 나폴레오니, (모던 지하드> 343쪽 106-108
22 대테러 전쟁 20년, 인류에게 무엇을 남겼나? 일반적으로 테러는 '정치, 종교, 사상적 목적을 위해 폭력적 방법과 수단으로 민간인이나 비무장 개인, 단체, 국가를 상대로 위협이나 위해를 가하는 일체의 행동'을 일컫는다. 그러나 테러의 정의나 규정은 관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미국 조지타운대의 저명한 테러 이론가 월터 라쿠어 교수는 테러 개념을 100개 이상으로 정의했다. 미국 테러 전문가들의 한계는 테러 개념을 이슬람 정치 집단에 초점을 맞추고, 공권력 남용이나 국가 테러에 대해 비교적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다. 동시에 그들은 끔찍한 테러 결과에 집착해 이를 궤멸하는 데 관심을 집중하지만, 테러의 근원적 발생 원인과 역사성, 서구의 과오에는 거의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이를테면 9·11 테러로 인류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알카에다는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인도양 진출을 막기 위해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협력 관계를 강화하면서 급성장한 테러 조직이었다. 미국의 군사 지원과 사우디 왕정의 든든한 재정 후원으로 소련의 남하를 막아 걸프만 석유라는 미국의 핵심 이익을 지켰지만, 적대 관계로 돌아서면서 미국에 부메랑이 된 것이다. ISIL이라는 조직도 따지고 보면 부시 미국 대통령의 잘못된 이라크 전쟁이 배태한 악의 씨앗이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몰락한 사담 후세인 잔당이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를 만들었는데, 이들이 ISIL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지구촌은 테러라는 괴물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미국 메릴랜드대 테러연구소가 발행하는 《글로벌 테러통계(GID)》에 따르면, 1970년부터 2017년까지 지구촌에선 18만 건 이상의 테러가 발생했다. 여기에는 8만 8천 건의 폭탄 테러와 1만 9천 명의 암살, 1만 1천의 납치가 포함돼있다. 알카에다와 ISIL이 궤멸된 이후인 2017년만해도 비공식 통계로 1,465건의 테러가 일어났고 7,775명의 무고한인명이 희생됐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주도의 대테러전쟁 결과, 지구촌 테러가 적어도 10배 이상 증가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테러분자를 궤멸하기 위한 작전이란 이름의 무차별 공격으로 또 다른 무고한무슬림 시민이 죽어 나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112-113
29 중동의 여성 파워, 여성 시대가 가능할까? 사실상 중동의 여성 문제 이해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우리의 무지에 있었다. '아랍=이슬람'이라는 인식의 등식 구도로 이슬람과 아랍의 전통 관습을 전혀 구분하지 못했다. 무엇이 이슬람의 종교적 가르침이고, 무엇이 가부장적 아랍 사회의 토착적 악습인지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오류였다. 일부다처, 가부장적, 부계 중심, 남아 선호 등은 인류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사회-문화적 현상이다. 여성 할례, 명예살인 악습 등은 이슬람 율법에서도 권장하지 않거나 심지어 범죄로 다루고 있는 일부 유목 중동 사회의 사회적 관습이다. 이슬람은 특수한 상황에서 공동체 절멸을 막기 위해 유효한 삶의 전략으로 일부다처를 허용하고는 있지만, 일부일처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꾸란에서 남녀 창조의 동등성을 강조하고 있고, 일부 꾸란의 남성 중심 표현들도 7세기 시대적 상황에서 벗어나 21세기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절대적 견해다. 이런 논지라면 앞으로 이슬람권 여성들도 서구에 못지않은 자율적인 삶의 향유와 경제적, 정치적 참여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업그레이드시켜 나아가리라는 것이 명백하다. 136-137
CHAPTER 1 잊힌 이슬람 역사와 문명의 복원
그리스 문명은 크레타에서 출발했다. 크레타 문명은 한 축으로는 이집트 문명, 다른 한 축으로는 오리엔트 문명의 지적 성취를 온몸으로 받아들여 꽃피운 종합 해양 문명이었다. 크레타 문명이 그리스 본토로 흘러 들어가 미케네 문명을 잉태하고, 끊임없는 자기화 과정을 거쳐 기원전 6세기 드디어 화려한 그리스 문화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 로마가 덧세워졌다. 건축과 예술, 신화적 구조 종교관, 과학과 철학 등 어느 하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오리엔트 문명의 지적 신세를 지지 않는 분야가 없다. 그럼에도 고대 오리엔트 문명의 실체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제대로 관심을 유발하지도 못했다. .. 서양이 공격하면 정복이나 위대한 승리지만, 동양이 공격하면 찬탈이고 파괴가 되는 우리 세계사 교과서의 서술적인 문제도 역사 왜곡에 큰 몫을 하고 있다. 146
무함마드는 서아시아의 정통적이고 오랜 사상적 기반을 가진 유일신 사상을 다시 한번 설파하면서, 혼란한 당시 사회를 정신적으로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토착 종교와 기존 구조에 대한 포용 정책, 역동적인 유목 군사 시스템을 통해 정복 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슬람 군대는 합리적인 조세 제도와 토착 주민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인정함으로써 전쟁다운 전정을 치르지 않고도 주변 지역을 쉽게 복속할 수 있었다. 이슬람 제국의 시대는 아라비아반도에서 출발해 북아프리카 모로코와 스페인 남부,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인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이슬람 종교와 문화적 유산을 남겼고, 1천 년의 대제국 시대를 거치면서 인류 문명의 성숙에 크게 공헌했다. 중세 유럽이 침체 시기에 잠들고 있을 때 그리스-로마의 지적 유산을 번역하고 재해석해 유럽에 전해 주었으며, 이를 토대로 유럽의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결정적 모티브를 제공했다. 1천 년의 이슬람 제국 시대 모두가 아랍인 중심은 아니었다. 1258년 몽골에 의해 압바스 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은 튀르크인 중심의 오스만 제국으로 이동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세계의 정교 일치적 통치권인 칼리파권을 행사했고, 192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왕정이 무너지고 터키 공화국으로 독립하면서 이슬람 세계의 명목상 통합마저 깨졌다. 오스만 제국의 멸망과 와해는 그 치하에 있던 여러 소수 민족이 독립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었다. 하지만 곧바로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 열강들이 중동 일대를 식민 통치함으로써 오늘날 중동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과 갈등의원인이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분쟁 지역인 팔레스타인만 하더라도 영국과 프랑스가 이 지역을 나눠서 차지하려고 만든 삼중의 상호 모순된 비밀 조약이 빌미가 됐으며, 국제법과 유연. 안전보장잉사회 결의안, 쌍방 간의 평화 협정 등이 지켜지지 않고 미국 등 강대국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두둔하면서 사태가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147-148
기원전 3000년경 유프라테스으 티그리스강 유역의 범람에 대비한 대규모 치수(治水) 사업을 통ㅎ해ㅐ 도시 국가를 형성하고 최초의 문명 생활을 시작한 민족은 수메르인이었다. 수메르인은 쐐기문자를 만들어 점토판에 그들의 삶을 기록해 보존했으며, 보리빵에 맥주를 즐겨 마시기도 했다. 수메르인에 의해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야말로 이후 전개되는 중동 5천 년 역사의 굳건한 모태가 되었다. 149
기원전 2350년경 셈족 계통의 아카드인이 처음 통일 국가를 세운 이후, 중동에서는 줄곧 셈계 민족들이 흥망성쇠의 역사를 주도했다. 특히 바빌로니앙 왕국은 기원전 18세기경 함무라비 왕 때 전성기를 이루어 유명한 성문법전을 남겨 놓았다. 기원전 16세기 후반에는 철기 문화를 일으킨 히타이트(Hitite)가 등장해 바빌로니아를 멸하고 세력을 떨쳤다. 기원전 15세기부터는 메소포타미아는 물론, 동부 지중해 연안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중심으로 광대한 제국들이 수시로 등장하면서 기술과 문명 전파에 가속도가 붙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 2세가 시리아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했고, 기원전 1280년 양국 간에 카데시 펴오하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단락됐다. 시리아를 평화적으로 분활한 카데시 조약은 역사상 세계 최초의 국제 조약으로 알려져 잇다. 또한 히트이트는 처음으로 철제품을 소개해 오리엔트 전 지역에 군사와 농업에서 철기 문화 시대를 열었다. 150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헤브라이 왕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한 유목민인 헤브라이인에 의해 성립되었다. 헤브라이인은 기원전 1500년경 팔레스타인 가나안에 정착했다가 심각한 기근으로 이집트로 이주했다. 파라오의 압제를 피해 모세의 인도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기원전 11세기 말에 헤브라이 왕국을 세웠다. 다비드와 솔로몬 왕 때 전성기를 누린 헤브라이 왕국은 곧 이스라엘과 유대,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 제국에 멸망당했고, 유대 왕국은 기원전 6세기 아시리아 제국에 멸망당했고, 유대 왕국은 기원전 6세기 신바빌로니아 왕국에 정복됐다. 유대교를 성립한 헤브라이인의 유일신 사상은 후일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성립과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고, 서양 문화의 바탕이 되었다. 헤브라이인의 민족사는 구약 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기원전 12세기경부터 약 300년 동안 필리스티아인(Phiistines), 아람인 (Arameans), 헤브라이인(Hebrews)이 팔레스타인-시리아 지역에서 각각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이란과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인도-유럽어계의 메디아인(Medians)과 셈계의 칼데아인(Chaldeans)이 침투해 혼란 속에서 교류와 쟁패를 거듭했다. 이러한 혼란과 분열 상태를 종식한 세력은 아시리아(Assyria)였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1300년경부터 메소파탬아 북부 지방에서 팽창했고, 기원전 8세기경 최초로 오리엔트 전 지역을 통일했다. 아시리아는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왕 때 전성기를 맞았는데, 그는 옛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쐐기문자로 기록된 방대한 점토판을 수집했다. 고대 ㅁ소포타미아의 신화와 서사시, 영웅시 등은 이 점토판 덕택에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졌다. 그러나 아시리아는 정복 일변도 정책을 펼친 결과 아슈르바니팔 왕 사후에 쇠약해졌고, 메디아를 비롯한 소수 민족의 반란으로 기원전 612년 멸망했다.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으로 오리엔트는 다시 메디아(Media), 리디아(Lydia), 이집트, 신바빌로니아의 네 나라로 분열됐다. 그중 칼데아라고도 불리는 신바빌로니아 왕국(기원전 612~538)이 가장 번영했는데, 그 중신지인 바빌론은 세계의 수도로 불릴 만큼 번창했다. 이 왕국은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 기원전 605~562) 왕 때 전성기를 맞았는데,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시리아를 확보한 후 기원전 586년에는 유대 왕국의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이때 많은 유대인이 전쟁 포로로 바빌론으로 끌려간 것을 바빌론 유수라 한다. 이 사건은 유대 문화의 오레인트의 다양한 유산이 이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151-152
이집트를 정복하고 분열된 중동을 재통일한 세력은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 기원전 338년경 그리스 도시 국가를 통일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왕에 의해 페르시아 제국은 기원전 331년 종말을 맞았다. ..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 서쪽을 지배하면서 그리스-로마 문화가 소개됐고, 이슬람이 등장하는 7세기 초까지 거의 1천 년간 동서문화의 교류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헬레니즘이라 불리는 새로운 문화 현상은 그리스 문화의 일방적 전파라기보다는 오리엔트의 오랜 문화적 토양에 그리스적인 요소가 첨가되어 독특하게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그의 제국은 네 개 국가로 분할됐다. 이집트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Ptolemaeos, 기원전 305~30), 중동에 시리아를 중심으로 셀레우코스 왕조(Seleucid, 기원전 312~64)가 성립됐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제6대 안티오코스 3세(Antidchus III) 때 국력이 절정에 도달했으나, 내부 반란으로 급격히 쇠퇴했다. 동부 지역에는 그리스계의 박트리아(Bactria)와 이란계의 파르티아(Parthia)가 독립했으며, 나머지 영토는 결국 1세기 로마에 병합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후 중동 지역은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와 3세기경 파르티아를 멸하고 이란 지방에 새로 등장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오랜 격돌장으로 변모했다. 153-154
7세기 초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오랜 전쟁으로 마비된 육,해상 실크로드를 대신한 우회 루트가 아라비아 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상로였다. 메카와 메디나는 바로 그 중심 도시였다. 이 시기에 이슬람교를 완성한 무함마드가 등장했다. 그는 메카의 명문 쿠레이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일찍 부모를 여의고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등지에서 대상 활동을 하면서 당시 혼란한 사회상에 깊이 회의했고, 기독교와 유대교 사상에도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를 고용한 여주인 카디자와 결혼한 무함마드는 사업보다는 명상 생활을 통해 병든 인간 사회의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구했다. 오랜 명상 끝에 그의 나이 40세 되던 610년 드디어 하느님(알라)으로부터 첫 계시를 받아 우상 숭배 타파, 평등과 평화르 강조하는 범세계적인 이스람 종교를 완성했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이슬람이 처음부터 주변의 호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유일신 사상은 당시 우상 숭배자들인 메카 상류층의 종교적 권위와 상업적 질서를 위협하였기 때문에 메카에서 극심한 배척을 당했다. 그래서 622년 무함마드와 그 추종자들은 메디나로 이주하여 새로운 이슬람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것을 헤지라라 하여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메디나에서 굳간한 이슬람 공동체를 형성한 무함마드는 세 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630년 메카를 무혈 재정복함으로써 획기적인 교세 확장에 성공했다. 154-155
이슬람 공동체는 632년 무함마드가 타계함으로써 후계자 선출ㄹ 문제에 부닥쳤다. 그러나 슈라(shura)라 불리는 부족 합의제 방식으로 후계자인 칼리파를 뽑아 이슬람식 민주주의 전형을 마련했다. 칼리파는 정ㅊ치와 종교를 동시에 관정하는 이슬람 공동체의 최고 통치자였다. 아부 바크르(Abu Bakr, 632~634), 우마르(Umar, 634~644), 우스만(Usman, 644~656), 알리(Ali, 656~661)에 이르는 네 명의 칼리파가 통치하는 시기를 이슬라믜 가르침에 충실한 정통 칼리파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부터 적극적인 대외 정복이 이루어졌다. .. 불과 10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이집트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 당시 비잔틴 및 페르시아의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던 시대적 상황이 이슬람의 진출을 오히려 환영했고, 이슬람 정복 과정에서 강제 게종은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 알리가 암살당하자 이슬람 제국은 다시 무아위야에 의해 우마이야 왕조로 통일되었다. 그러자 알리의 추종 세력들이 이탈해 시아파라는 이슬람의 새로운 이념 아래 결집했다. 155-156
우마이야 시기에 이르러 이슬람은 발생한 지 100년도 안 된 짧은 시간 동안 지금의 아라비아 반도를 비롯해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중국, 스페인을 위시한 유럽까지 점령했다. .. 이슬람교는 새 정복지에서 살육과 직접 통치보다 공납과 간접 통치를 선호했는데, 이 정책은 정복 주민의 환영을 받았고 이로써 무혈의 정복 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또 다른 이슬람 문화의 전파 이유는 특유의 융화력이라 할 수 있다. 아랍인은 정복을 통해 역사상 최초로 오늘날의 인도와 중국의 경계 지역, 그리스, 이탈리아 및 프랑스의 변경 지역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통합했다. 157-158
무슬림은 이교도의 종교를 인정하고 그들의 종교 생활을 보장했다. 전쟁에서 패하면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여자들은 노예로 팔려 가던 시절에 이러한 조치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다만 무슬림은 비무슬림에게 사회적, 법적인 차등 정책을 실시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무슬림보다 비무슬림에게 세금을 조금 더 많이 부과하는 인두세였다. 인두세 역시 당시 비잔틴 제국이나 페르시아 제국에 내던 고율의 세금보다 적었기 때문에 일반 국민의 부담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158-159
압바스 왕조(Abbasids, 750~1258)의 등장 배경은 단순한 군사적 음모나 쿠데타가 아니라 강력한 하부 조직과 선전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왕조의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기고, 압바스 지배층은 인종과 민족을 초월한 범이슬람 제국을 지향했다. 이리하여 후대 역사가들은 압바스 왕조를 진정한 ‘이슬람 제국’이라 부른다. 159
압바스 왕조는 5대 칼리파 하룬 알라시드(Harun al-Rashid, 786~809)와 그의 아들 마문(Ma’mun, 813~832)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때 바그다드는 당나라 장안과 함께 세계 교역과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했고, 활발한 육, 해상 실크로드의 개척으로 동서 문물이 물밀 듯이 유입했다. 측히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제지술이 종이 혁명을 불러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이 번역, 재해석되고, 학문이 꽃을 피워 이슬람의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제지술의 도입은 751년 압바스 군대의 이븐 살리히(Ibn Salih)장군과 당나라의 고선지 장군이 벌인 탈라스 전투의 결과이다. 이 전투에서 중국이 이슬람군에 패했고, 포로로 잡힌 중국 제지 기술자에 의해 종이가 이슬람 세계 전역으로 확산됐다. 더욱이 이 시기에 저술된 많은 아랍 사료에서 신라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발견할 수 있어, 우리나라와 아랍 세계와의 긴밀한 교류와 역사적 접촉을 확인할 수 있다. .. 우마이야 왕조가 망한 뒤 그 일파가 스페인에 후우마이야 왕조를 세우고 통치자가 됭어 969년 스스로 칼리파를 자칭하며 바그다드에 맞섰다. 이집트에서는 시아파에 의한 새로운 이슬람 국가가 독립해 파타마조를 열었다. 또한 바그다드의 약화는 중앙아시아에 퍼져 있던 소규모 국가들의 성장을 자극했다. .. 튀르크계로서는 카라한조와 가즈나조가 특히 중요한데, 이 왕조가 이슬람화됨으로써 중앙아시아 튀르크계 종족의 이슬람과하 가속화 됐다. 160-161
압바스 시기에 세 대륙에 걸쳐 형성된 이스람 제국은 아랍의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오리엔트, 그리스, 로마, 이란 및 인도 문화를 흡수해 독창적인 이슬람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슬람 문화의 특징은 이처럼 광대한 정복지의 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받아들여 국제적이고 종합적인 문화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161
이슬람 세계의 학문과 문화적 성취는 후일 유럽의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164
시간이 지나면서 세금도 적게 내고 더 많은 자유와 평등이 주어지는 이슬람으로의 대량 개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슬람 정부는 세금 감면을 노리는 대량 개종을 막으려고 오히려 개종 금지 백서를 발효했다. 국가 수입의 증대를 위해 피정복민의 개종보다 공납을 요구한 것이다. 이럼 점에 비추어 보면, 무력에 의한 이슬람 전파는 근거가 희박하다. 165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 자신의 고유한 문화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허용된 이교도를 ‘딤미’, 혹은 ’아홀 알딤마(계약의 백성)’라 불렀다. 딤미는 무슬림 국가에 의해 허용되고 보호받는 비무슬림 시민을 일컫는 법률적 용어였다. 실제로 그들은 기독교인, 유대인, 동부 지역의 조로아스터교인을 의미했다. 딤미의 지위는 무슬림 통치자와 비무슬림 공동체 간의 계약으로 결정됐다. 계약의 기본 골격은 딤미가 이슬람의 우위와 이슬람 국가의 지배를 인정하고, 나아가 일정한 사회적 제약이나 지즈야라고 불리는 인두세 납부를 통해 딤미의 종속적 지위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물론 무슬림에게 인두세 납부는 면제됐다. 인두세에 대한 대가로 딤미는 생명과 재산의 안전, 외적의 침입 시 보호, 신앙의 자유, 자신들의 문제에서 광범위한 내적 자치 등을 보장받았다. 한편 무슬림은 1년 소득의 40분의 1을 세금으로 납부해야 하는데, 이것이 종교세의 자카트이다. 따라서 딤미는 노예보다는 훨씬 유리한 상황에 있었지만, 자유 무슬림보다는 불리한 처지였다. 그러나 딤미는 무슬림보다 열등하고 그 숫자가 미미하다 해도 거대한 부를 축적해 경제력을 행사하고, 심지어 정치적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167
오늘날 스페인 땅은 711년부터 1492년까지 거의 800년 가까이 이슬람 세계에 속하면서 중세 최고 수준의 학문, 과학, 예술, 문화 등의 결실을 유럽에 전해 주는 지적 창구 역할을 했다.(중세 ‘아랍의 르네상스’는 유럽보다 500년이나 앞섰다. 이슬람 세계의 학문적 성취는 스페인 톨레도에 설치된 번역속에서 라틴어로 번역돼 유럽에 전해짐으로써 유럽의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지적 원동력이 됐다. 169
이슬람 치하의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는 무슬림과 유대인, 기독교인이 함께 조화롭게 살던 사회였다. 공존은 800년(8세기 초 ~ 15세기 말)가까이 지속됐다. .. 떠나는 사람은 적고 몰려드는 사람은 많았다. .. 학문과 문학에서 아랍인은 고전 아랍어, 기독교인은 대부분 라틴어, 유대인은 히브리어와 아랍어를 함께 사용하면서 문호하의 혁신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170
안달루시아의 기녀비적인 건축물인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도 문화의 섞임과 조화가 만들어 낸 걸작품이다. 171
기독교 안달루시아가 가톨릭 이외의 모든 종교를 배척하자 문화 다양성의 용광로는 더 가동되지 않았으니, 이는 17세기 이후 스페인이 문화가 정체되는 이유중 하나가 되었다. 172
분열됐던 이슬람 세계는 11세기 투그릴 베이가 이끄는 셀주크 튀르크조에 의해 재통일됐다. .. 1071년 셀주크가 비잔틴군을 격퇴하고 아나톨리아와 소아시아 지역에 진출함으로써 이 지역이 이슬람화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셀주크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비잔틴 제국에 대한 압박은 십자군 전쟁을 유발하는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세력과의 격돌이라기보다는 기독교 내부의 이권 다춤과 물자 약탈이 주가 되었다. 셀주크조는 1157년 술탄 산자르(Sanjar)의 사후 여러 공국(公國)으로 분할됐다가 몽골의 침략으로 종말을 고했다. 나아가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몽골 제국의 대칸인 몽케의 동생 훌라구가 사마르큰트 총독으로 부임한 후, 1258년 2월 대규모 군대로 바그다드를 함락했다. 이로써 500년 역사의 압바스 제국이 멸망했다. 172-173
오스만 제국의 건설자인 오스만 베이(Osman Bey)는 원래 셀주크 튀르크 시대의 한 부족장이었다. 1299년부터 오스만 베이는 정복 사업을 펼쳐 주로 비잔틴 영토를 잠식했고, 그의 아들 오르한(Orhan) 시대에 이미 발칸반도에 진출해 비잔틴의 존재를 위협했다. 1361년 아드리아노플 정복으로 시작된 발칸 공략은 1389년 코소보 전투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것은 1453년이었다. 술탄 메멭트 2세(mehmet II)에 의해 점령된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뀌었다. ..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오스만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한 획을 긋는 큰 사건이었다. 이제 중세가 종식되고 근대가 시작되는 기점이 되었다. 유럽은 오스만 제국이라는 동방 문화권과 직접 접촉함으로써 동방의 새로운 기운과 문명을 급속도로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곧바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인이 스스로 ‘지리상의 발견’이라 불렀던 대항해시대가 도래했다. 174
제국의 영토는 북으로 헝가리에서 남러시아, 남으로는 북아프리카 알제리에서 걸프해에 이르기까지 과거 이슬람 세력권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오스만 제국의 확장과 번영에는 예니체리, 밀레트 등 여러 가지 특징적인 제도가 뒷받침되었다. 우선 귀족 세력의 견제를 통한 술탄의 중앙 집권화와 효과적인 전투력 배양을 위해 예니체리(Janissary)군대가 결성됐다. 예니체리는 술탄의 근위 보병 부대로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또 술탄은 예니체리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데브쉬를메(Devshirme)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데브쉬르메는 주로 발칸 반도의 기독교 소년들을 징집해 엄격한 훈련과 튀르크화 교육을 통해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예니체리에 배속시키는 제도였다. 한편 이슬람 사회 초기의 소수 민족 정책 딤미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 시대에 밀레트(Millet)라는 독측한 체제로 되살아난다. 밀레트는 크게 지배 집단과 종속 집단으로 나누어졌다. 지배 집단은 튀르크족 이외에도 아랍인, 페르시아인, 보스니아인, 알바니아인과 같은 무슬림이었고, 종속 집단에는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이, 유대인, 루마니아인, 슬라브인과 같은 소수 민족이 포함됐다. 밀레트 체제에서 가장 큰 종속 집단은 그리스 정교 공동체였다. .. 두 번째 소수 민족 밀레트응 아르메이나 정교 그룹이었다. .. 세 번째 소수 민족 밀레트는 유대인 집단이었다. 175-176
오스만 제국 내의 소수 집단은 밀레트 내에서 자신들의 산앙과 종교 의례는 물론, 고유한 관습과 언어, 문화적 전통 등을 향휴할 수 있었다. 또한 튀르크인과의 마찰과 갈등으로 인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들의 공동체 내규에 따라 분쟁을 조정하고 해결했다. 176
오스만 제국 치하에 있던 아랍 세계에서는 18세기 중엽 이슬람교의 요람인 아라비아반도를 중심으로 자주를 표방한 민족 운동이 태동했다.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것이 와하비(Wahhabi) 운동으로, 원래는 이슬람교의 변질과 개혁주의에 반대하여 꾸란의 순수한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종교적 열정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오스만의 지배에 저항하는 사우드 가문의 호응을 받아 와하비 왕국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와하비 운동은 아랍인의 각성을 촉구하여 후일 아랍. 여러 나라의 독립에 정신적 바탕을 제공했다. 이집트에서도 18세기 말 나폴레옹의 원정으로 유럽 문화의 영향을 받아 민족적 자각이 촉진되었다. 이집트의 근대화를 추진한 이는 총독 무함마드 알리였다. 그는 아라비아반도로 출병하고 수단을 정복하는 한편, 이집트의 근대화를 위해 나일강을 대대적으로 개발해 경제적 부흥을 이루었다. 그 후 이스마일의 통치기에는 수에즈 운하를 완공하고, 산업, 교통, 교육의 혁신을 가져왔다. 그러나 지나친 재정 기출이 경제를 파탄시켰고, 이 때문에 수에즈 운하의 실권이 영국으로 이관되었다. 결국 1882년 이집트는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79-180
독일 편에 가담했던 오스만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제국이 와해되는 운명을 맞았다. 거의 모든 제국 영토를 뺏기고 터키 본토까지 점령당하자,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독립 전쟁을 수행했다. 그 결과 1923년 로잔 조약에서 최종적인 영토 조정이 이루어졌고,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한 무스타파 케말은 칼리파제와 왕정을 폐하고 터키 공화국을 창설했다. 이로써 1299년 이래 600년 이상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으로 존속해 왔던 오스만 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181
아랍어, 이슬람교, 아랍인이라는 공통분모로 단일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던 아랍은 20개국이 넘는 개별 국가로 분할됐으며, 상충하는 이해관계로 협력과 분쟁을 거듭하고 있다. 181-182
근대 이후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복을 전후로 18세기부터 서구에 의한 이슬람 세계 식민지화가 가속화되면서 ‘지배와 피지배’라는 숙명적 관계를 역전됐다. 162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호히사 설립을 계기로 인도 무굴 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남부의 동남아 이슬람 지역들이 차례로 서구 열강의 식민 상태로 전락했다. 중앙아시아에서도 서투르키스탄과 위구르 지역인 동투르키스탄이 각각 러시아와 중국의 지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 제 1, 2차 세계대전 전후로 탈식민 시대가 시작되면서 이슬람 지역 대부분이 쪼개져 57개 개별 국가로 독립했지만, 서구의 ‘이슬람 편견’은 오늘날까지도 크게 바뀌지 않은 채 ‘이슬라포비아(이슬람 혐오증)’로 이어지고 있다. 183
정치적 목적을 위해 테러라는 도구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슬람권내 정치 세력은 극소수이고, 대중적 지지 기반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이슬람=테러리즘’이라는 만들어진 공식으로 지금 서구와 이슬람 세계는 어느 때보다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다. 183-184
ISIL(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은 원래 알카에다의 이라크 지부로 출발한 AQI가 전신이다. 그들은 시리아 내전을 틈타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정부군을 전복 시키려는 반군 군사 조직에 참여했고, 2014년 6월 29일에 스스로 IS(Islamic State), 곧 ‘이슬람 국가’를 선포했다. ISIL은 시리아 라카를 수도로 삼고, 거점을 확보하면서 서방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2015년 11월에는 파리 시내 레스토랑과 경기장 등 일곱 군데의 다중 시설을 공격하고, 무차별 사격으로 민간인 사망자 130여 명, 부상자 수백 명을 발생시켰다. .. 결국 시리아 쿠르드 민병대가 2017년 지상군을 투입해 미군과 합동으로 ISIL의 마지막 거점이자 수도인 라카를 점령함으로서 일단락되었다. 알카에다와 ISIL의 궤멸로 당분간 대규모 조직적인 민간인 테러는 줄어들겠지만,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팔레스타인 박해, 시리아 내전, 리비아 내전, 예멘 내전 등에서 서방의 개입으로 가족을 잃은 극단적 분노가 뿌리내리고 있다. 이들에 대한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치유 프로그램 가동과 지원책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상식을 뛰어넘는 테러는 줄어들기 어렵다. 이것이야말로 중동-이슬람 세계가 안고 있는 불편한 현실이기도 하다. 193-194
CHAPTER 2 이슬람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지키는가
이슬람교는 기독교, 유대교와 함께 3대 유일신 종교다. 아랍어로 하느님을 알라(ALLAh)라고 하니 하느님의 아랍어 표기가 바로 알라이다. .. 유대인이 믿는 유대교, 예수에서 예수교, 부처에서 불교, 조로아스터에서 조로아스터교 등이다. 그런데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영어로 마호메트)를 믿지 않는다. 따라서 마호메트교는 잘못된 표현이다. 199
이슬람은 종교와 문화를 포괄한 개념이며, 종교를 구분해서 사용할 때는 이슬람교, 여타의 경우에는 이슬람으로 폭넓게 사용한다. 이슬람의 언어학적인 어원은 ‘평화’이고, 신학적인 의미는 ‘복종’이다. 따라서 이슬람 사상의 핵심은 알라(유일신)에게 절대복종하여 내면의 평화를 얻는 것이다. 각 종교 사상의 핵심에서 기독교가 사랑, 불교가 자비, 유교가 인(仁)이라고 한다면, 이슬람 사상의 중심은 평화와 평등이이다. 199
이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중잰자나 대속자 없이 신과 인간의 직접 교통과 직접 구원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누구도 알라에게 대적할 수 없고 대신할 수도 없다. 유일신 알라자식을 두지 않았으며 자식을 낳지도 않았다. 200
구원 방식도 아주 간결하여 현세에서의 선악의 경중에 따라 회후이 날 신의 심판을 받아 천국의 구원과 지옥의 응징으로 나뉜다는 내세관을 갖고 있다. 200
이슬람은 구체적 실천을 위해 다섯 가지 기본적인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첫째, 알라의 유일성과 무함마드가 그분의 예언자임을 믿는다’라는 신앙 고백(Shahada), 둘째 하루 다섯 번의 예배(Salat), 셋째 이슬람력 9월인 라마단 달 한달간 해 있는 동안의 단식(Ramadhan), 넷째 자신의 순수입 2.5%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세금을 내는 자카트(Zakat), 다섯째 평생에 한 번 권장되는 메카 성지 순례(Hajj)등이다. 이를 이슬람의 다섯 기둥, 오주(五柱)라고 한다. 201
“라 일랄라 일라하(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 202
이슬람의 모든 가르침은 무함마드의 계시 내용을 담은 꾸란에 집대성되어 있다. 또한 꾸란과 함께 그의 선별된 언행록인 하디스가 또 다른 경전으로 무슬림에게 삶의 지침이 되고 있다. 꾸란과 하디스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아니한 사항에 대해서는 이슬람 학자들의 유권 해석이나 합의를 통해 해결해 나갔다. 204-205
무함마드는 570년경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쿠레이시라는 명문 귀족의 가난한 유복자로 태어나, 마흔 살이 되던 해인 610년경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 그의 가족사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를 보지 못했던 그는 여섯 살 때 어머니마저 병으로 잃으면서 고아가 되었다. 당시 아랍 유목 주복의 관습에 따라 할아버지 압둘 무탈립의 양육을 받았고, 그의 사후에는 숙부인 아부 탈립의 보호를 받았다. 고아로서 일찍부터 독립한 무함마드는 당시 밑천 없이 뛰어들 수 있었던 험난한 대상 교역의 낙타 몰이꾼으로 인생을 시작했다. 동서양 기록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점은 그는 성실하고 정직했으며 탁월한 협상가이자 중재자였다는 것이다. 그의 정직성과 약육강식의 사막 교역에서 분쟁을 조정하는 놀라는 능력은 모든 자본가의 관심을 끌었고, 당시 메카의 상인이었던 카디자의 피고용인이 되었다. 미망인이었던 여주인 카디자는 무함마드의 성실함과 매력에 끌려 그에게 청혼했고, 두 가문의 합의 아래 결혼했다. 이때 무함마드의 나이는 25세, 카디자는 15세 연상인 40세였다. 무함마드는 결혼 후 여유로운 생활 환경에서 그동안 품어 왔던 사회적 악습과 모순에 대해 15년간 깊은 고뇌와 명상을 시작했고, 40세 되던 610년 메카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인도로 알라의 첫 계시를 받았다. 알라가 글자와 학문을 몰랐던 무함마드를 선택하여 22년에 걸쳐 내린 계시는 꾸란이라는 무슬림의 성스러운 경전으로 집대성됐다. .. 이슬람을 완성한 무함마드는 632년 아내 아이샤(Aisha)의 팦베개를 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208-209
첫째, 그는 아무런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 임종 시 아내 아이샤에게 집안의 모든 재산을 정리하라 이르고, 전 재산 7디나르의 돈을 가난한 자에게 모두 나누어 주도록 했다. 이는 이슬람 사회에서 유산 대부분을 국가와 가난한 이웃에게 환원하고 최대 3분의 1 이하만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는 무슬림 유산 상속의 근간이 되었다. 둘째, 그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혈통보다 능력과 공동체를 지휘하는 지도력으로 높이 평가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후계자는 ‘슈라’라는 부족 공동체 대표자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추대되었다. 그래서 혈통 중심의 아랍 왕정들은 순수 이슬람 전통에 위배되는 정치 형태인 셈이다. 셋째, 무엇보다 무함마드는 순수한 인간이었다. 그는 어떠한 기적도 행하지 않았으며, 결단코 신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의 사후 많은 추종자가 그의 신격화를 꾀했을 때, 후계자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뜻에 따라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무함마드를 섬기고 경배하지 말라. 그는 죽어 없어졌다. 하느님을 섬기고 복종하라, 그분은 영원히 살아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 넷째, 무함마드는 적에 대한 관용과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에 대한 한없는 낮춤의 자세르 가졌다. 아무리 치명적인 손해를 낓친 적이라도 그에게 복종하고 용서를 비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철저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으며, 전쟁에서 전사한 동료 가족은 물론, 적들의 가족까지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그를 택하고 그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최초의 추종자들이 오늘날 세계 최대의 가장 견고한 종교 공동체를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섯째, 그는 종교적 열정과 온화함의 조화를 행동으로 보인 지도자였다. 나아가 모든 어려움을 앞장서 막아 내는 불굴의 정치 지도자였다. 종교 창시자 대부분이 자신의 근거지를 떠나 새로운 세상에서 그 뜻을 펼쳤지만, 무함마드만은 박해의 진원지였던 고향 메카를 설득과 용서를 통해 재정복했다. 그리하여 메카는 무함마드에게 가장 든든한 지지 기반이 되었다. 여섯째, 여성들에 대한 지위와 인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준 이슬람 페미니스트였다. 남성이 여성을 노예로 매매하고 자기 장식물로 여기던 무지의 시대에 무함마드는 여성들을 완전한 인격체로 존중할 것을 명했으며, 여성에 대한 상속을 법제화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가 누구냐는 제자들의 물음에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어머니’라고 대답했으며, 미래의 어머니인 여성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설파했다. 오늘날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낙후된 일부 아랍 국가들을 보면 어쩌면 무함마드의 시대의 가르침보다 더 퇴보한 듯한 생각도 든다. 209-211
무함마드는 생전에 열 두 명의 여성과 결혼을 했다. 211
꾸란은 무함마드가 서기 610년에서 632년까지 23년간 예언자로서 알라로부터 받은 계시 내용을 담은 이슬람 최고의 경전이다. 215
일반적으로 꾸란 내용을 인용할때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문구를 사용하는 반면, 예언자의 말, 즉 하디스를 인용할 때는 “예언자가 말하기를”이라는 문구를 사용한다. 216
구전으로 내려오던 꾸란이 책으로 편찬된 것은 무함마드 사후 10여 년이 지난 3대 칼리파 우스만 시대(644~656)로 알려져 있다. 정복 전쟁을 통해 이슬람의 영토가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등 비아랍어권으로 확대되어 감에 따라 하느님의 말씀인 꾸란이 달리 읽히고 발음되기 시작했다. 어떠한 왜곡이나 의미의 변화를 막기 위해 구전 전통이던 꾸란이 책으로 편찬됐고, 정확한 발음의 통일ㅇㄹ 위해 점차 모음 부호를 붙이게 되었다. 꾸란은 전체가 30파트(Juz)이며, 114개의 장(Surah), 6,236개의 절(Ayat)로 구성되어 있다. 단어 수는 약 8만여 개다. 114개 장 중 86개는 메가에서 계시되었고, 28개 장은 메디나에서 계시되었다. 216-217
모든 무슬림은 매일 다섯 번의 예배를 드리고, 매년 라마단 한 달 동안 단식을 한다. 이 기간에는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서 자신을 인내하고 정화한다. 해가 있는 낮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으며 철저히 금식하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음식을 만들어 먹고 해가 진 뒤에는 충분한 식사를 할 수 있다. 219
이슬람의 단식은 사움(Saum)이라고 부르지만, 단식하는 달 이름을 그대로 따서 라마단이라고도 한다. 220
종교적으로도 단식은 무슬림에게 도덕적 절제와 과욕을 다스리는 훈련의 장이다. 그래서 무슬림은 라마단 기간이 아니더라도 부정이나 유혹에 흔들릴 때 단식을 곧잘 한다. 특히 단식을 제대로 하면 잃어버린 건강을 되찾는 소중한 기회로도 활용할 수 있다. 220
이슬람 종교 의례는 태음력인 이슬람력에 따라 정해지는데, 아홉 번재 달인 라마단은 1년 내내 찾아온다. 서양력의 1년 길이가 365일인데 비해 태음력인 이슬람력의 1년은 354일 정도이니, 매년 이슬람력은 11일 정도씩 짧아진다. 2020년에는 4월 23일부터 시작했고, 2021년에는 4우러 12일경 시작했다. 33년이 자나면 사계절을 돌아 제자리로 오게 된다. 221
하즈(Hajj)라 불리는 성지 순례는 무슬림의 마지막 의무이며, 평생에 한 번 이슬람력 12월 첫 주에 메카를 방문하는 것을 의미한다. 메카는 이슬람이 완성된 곳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집(Bait-al Allah)이 있는 곳이다. 성지 순례의 종교적 관행은 예언자 아브라함(이슬람에서는 이브라힘)이 하느님의 명을 받아 건설한 메카의 카바 신전을 일곱 차례 돌고(타와프),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일이 어머니 하갈과 함께 물을 찾아 뛰어다녔다는 고사가 남아 있는 마르완과 사파 동산을 일곱 차례 뛰면서 왕복하는 것(싸이)에서 연유한다.(이슬람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아내 하갈(Hagar)과 어린 아들 이스마일(Ismail)을 사막에 내버려두고 떠났다. 하갈은 아브라함에게 몇 번이나 자신들을 버리는 이유를 물었다. 아브라함은 신의 뜻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하갈은 겸허하게 신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분이 자신들을 보호해 주시 ㄹ거라고 믿으며 광야로 나아갔다. 배고픔과 목마름에 지친 그들은 고통 속에서 물을 찾았다. 하갈은 이스마일에게 먹일 물을 찾아 이 언덕, 저 언덕을 올랐다. 두 언덕 사이를 일곱 차례나 왕복한 끝에 드디어 물이 솟아나는 곳을 찾았으니, 이 샘은 잠잠이라 불린다. 이곳에 사람들이 터를 잡고 형성된 도시가 바로 오늘날의 메카다. 두 언덕이 바로 메카에 있는 사파(Safa)와 마르완(Marwan)이며, 성지 순례를 할때 순례객들은 이 고사를 떠올리며 사파와 마르완 두 언덕 사이를 일곱 차례 왕복한다.) .. 순례는 다른 절대 의무와는 달리 재정이나 건강이 허락되지 않을 때 다른 선행으로 대체할 수 있는 상대적인 의무라 할 수 있다. 222-223
순례 마지막 날 그들은 이들 아드하라는 희생제를 치르고 예언자 무함마드의 유해가 안치된 메디나를 순례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순례를 마친 사람들에게는 하지(haji)라는 존칭이 따라다닌다. 224
이슬람교에는 성직자 제도가 없다. 이슬람 정신인 평등을 실천하는 가장 확실하고 구체적인 사회적 약속이다. .. 신에게만 책임을 지기 때문에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한 종교 의례나 불필요한 형식이 과감하게 생략된다. .. 통상적으로 성직자들이 주관하는 예배 인도, 모스크 관리, 꾸란 편찬, 종교적 유권 해석, 영적 지침 같은 공동체의 종교적 활동은 누가 맡아서 하는가?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이맘이다. 즉 예배 인도자인 셈이다. 모든 성인 무슬림은 예배를 인도하는 이맘이 될 수 있다. 225
수니파 이맘 대부분은 자신의 고유한 직업을 가진 채, 예배 시간이 되면 모스크에 와서 이맘으로서 예배를 집전하고 다시 자신의 생업으로 되돌아간다. .. 시아파 이맘은 자격과 의미가 수니파와 매우 다르다. 시아파에서 이맘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 신의 대리인으로 간주돼 특별한 위치가 부여된다. 226
세속적인 최고 통치권과 종교적 카리스마를 모두 가진 칼리파조차 신 앞에서는 평신도일 뿐이다. 226-227
학문적 길잡이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울라마이다. 이들은 종교 법학자이자 신학자이고 이슬람학을 전공한 이슬람 학자들이다. .. 울라마와는 별도로 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파생하는 버빌 공방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이슬람 법정이 설치됐다. 이곳의 최고 법학자들을 파끼흐(Fakih)라고 부른다. 동시에 재판관인 까디(Qadi)가 있으며, 이슬람 공동체 최고의 법률 전문가로 대법원장 격인 무프티(Mufti)가 있다. 이들 중 파끼흐는 학자이며, 까디와 무프티는 국가에 의해 공식 임명되는 법조인이다. 227
이슬람의 기본 교리와 관행에서 대부분의 이슬람 공동체는 단합과 통합을 이루고 있으나, 사상이나 종교 의례, 율법적 해석에서 차이를 보이며 여러 분파가 생겨났다. 대표적인 차이가 바로 수니파와 시아파이다 무함마드는 632년에 타계하면서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아랍 무슬림은 아랍 부족의 오랜 대의 정치 전통에 따라 민주적인 만자일치 제도로 후계자를 선출했다. .. 무함마드의 유일한 부계 혈통인 그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 알리는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 .. 656년, 알리가 드디어 네 번째 칼리파가 되었으나 661년에 그만 살해되고 만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유일한 직계 혈통이 겨우 네 번째 칼리파가 된 것은 수긍하기 어려운데, 그의 죽음까지 더해지자 극단적 분노와 적개심이 표출됐다. 바로 ㅇ라리의 추종자들이 시아파가 되었다. ‘시아’란 떨어져 나간 무리’라는 뜻이다. 자연히 남아 있는 무린 수니가 되었다. .. 시아파는 이란을 중심으로 전체 이슬람 세계의 약 10%를 차지한다. 이슬람 세계의 약 90%를 차지하는 수니파는 믿음과 관행에서 시아파와 거의 차이가 없다. 꾸란과 하디스라는 기본적인 경전을 받아들이는 종교적 신념에도 큰 차이가 없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부르고 자유롭게 결혼한다. 상대방의 모스크에 가서 함께 예배도 본다. 그렇지만 신학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별개의 모스크와 종교 의식의 차이, 이맘 직위에 대한 관점의 차이 등에서 분명히 다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수니의 샤하다는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다’로 끝나지만, 시아는 그 뒤에 ‘알리는 신의 사랑을 받은 자이며, 신자들의 사령관이고, 신의 친구이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 또한 수니파는 시아파가 주장하는 알리와 그의 자손 중심의 이맘 제도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러한 차이점도 수니와 시아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킨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233-236
이슬람법의 원천은 무엇인가? 모두가 공감하는 네 개의 신학적 원천이 가장 중요하다. 신의 말씀 그 자체인 꾸란(Qur’an), 오류를 범하지 않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순나(Sunnah), 해당 적용 법규를 꾸란과 하디스(Hadith)에서 유추해 적용하는 끼야스(Qiyas, 유추), 이슬람 율법학자 울라마들의 전원 합의인 이즈마(Ijma, 합의)가 그것이다. 무슬림의 신앙생활에서 절대성을 갖는 꾸란과 순나가 이슬람법의 법원(法源)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끼야스나 이즈마는 상당한 설명이 필요하다. 세 번째 법원인 끼야스는 유추이다. 현대적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사건 사고의 정황들이 모두 구체적으로 꾸란과 순나에서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울라마들은 한 사건에 적용할 수 잇는 가장 유사한 사례들을 꾸란이나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에서 찾아서 유추하여 법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방식이다. 물론 끼야스에는 인간의 이성적 잣대가 개입할 여지가 있으므로 학자 간의 완전하 ㄴ합의와 엄격한 적용 방식이 요구된다. 네 번째 이즈마는 인간 사회의 범죄나 다춤에서 꾸란이나 순나에서 유추해 결정할 수 있는 근거나 합리적 조항을 찾지 못할 때, 당대 울라마들의 심사숙고와 전원 합의를 거쳐 이슬람법으로 규정하는 방식이다. 이는 비슷한 사례를 찾아 유추하는 끼야스보다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 더 강하게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매우 신중한 절차를 따르며, 그 결정에 대해서도 정통파 사이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학자들이 개별적 해석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이즈티하드(Ijtihad)라고 하고, 유권 해석의 권한을 지닌 학자들을 무즈티하드(Mujtihad)라고 부른다. 이슬람법 해석에서 이즈티하드가 갖는 위험성을 간파한 많은 정통 울라마들은 이즈티하드의 문은 닫혔다고 주장하면서 더이상의 무즈티하드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242-243
이슬람법 해석과 법 적용의 규범과 범위 문제를 둘러싸고 학파가 갈렸다. .. 하나피학파 - 이라크 학파를 대표하는 하나피 학파는 4대 학파 중 가장 온건하고 자유로운 성향을 띄며, 무엇보다 이성(ra’y)과 개인의 견해를 이슬람법 해석에서 폭넓게 인정한다. 오늘날 가장 많은 지역에 분포하며, 터키,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 일대의 주된 흐름이다. 튀니지, 이집트 등지에도 분포하고 있다. 말리키학파 - 이슬람 초기 메디나에서 통용되돈 관습법에 근거하기 때문에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보인다. 현재 북아프리카의 대표적인 학파이며, 이집트 북부, 나이지리아, 수단, 걸프해 연안 국가들에 분포되어 있다. 샤피이학파 - 엄격한 메디나 학파의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하나피 학파의 이성적 판단에 의한 유추를 폭넓게 수용하는 절충적 법학파이다. 오늘날 이집트와 인도네시아 중심의 동남아시아에 널리 분포되어 있고, 그 외 사우디아라비아 일부, 인도에도 샤피이 학파 방식이 적용되고 있다. 한발리학파 -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강력한 호응을 받으면서 단단한 뿌리를 내렸다. 가장 보수적인 율법 해석과 메디나 시기의 교저적인 이슬람 정신을 계승하려는 성향을 강하게 보이며, 시대적 상황에 맞는 재해석의 문호를 인정한 다른 학파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한발리 학파의 정통주의와 보수성은 18세기 말 아라비아반도 중심부에서 와하비즘(Wahhabism)으로 부활했고,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의 중심적이 학파가 되었다. 현재는 사우디아라비아 이외에도 시리아, 이라크 등지에 널리 퍼져 있다. 245-247
이슬람을 경전 중심의 이론과 교리로만 해석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영적 본질에 다가가려는 종교적 신비주의를 수피즘(Sufism)이라 한다. 247
CHAPTER 3 이슬람 문화의 향기
새벽 4시가 넘어 서서히 여명이 밝아 오는 이슬람 도시들은 언제나 아잔(Azan) 소리로 하루를 열어 간다. 아잔은 예배 시각을 알리고 예배를 보러 오라고 칭하는 낭송의 소리다. .. 모스크 옆에는 반드시 미나레트(Minaret)라고 하는 높고 뾰족한 첨탑이 있는데, 그 첨탑 위에서 무아진(Muazzin)이라 부르는 독경사가 아잔을 낭송한다. 255
이슬람 건축의 핵심은 모스크, 마드라사(신학교), 궁정, 묘당 등이다. 모스크(mMosque)는 아랍어 마스지드(masjid)가 스페인어 메스키타(Meszquita), 프랑스어 모스캐(Mosquee)를 거쳐 영어로 변한 것이다. 마스지드는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는 곳’을 뜻한다. .. 삶의 중심 공간으로서 모스크는 그리스 시대의 아고라(Agora)나 로마 시대 포럼(Forum)의 성격과도 닮았다. 모스크 옆의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미나레트는 어디서나 보이는 방향키이다. 257
모스크의 건축 구성은 3M(Masjid-Minbar, Mihrab, Minaret)으로 표현한다. 모스크 내부에서 예배 방향인 메카를 표시해 주는 미흐랍(Mihrab)과 금요일 합동 예배의 설교대인 민바르(Minbar), 모스크 바깥의 높은 첨탑인 미나레트(Minaret)가 그것이다. 260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 미흐랍이다. 미흐랍은 예배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내부 공간에 메카 방향을 표시하고자 벽면을 움푹 들어가게 깎아 낸 곳이다. .. 두 번째 구성 요소는 설교를 위한 계단식 연단인 민바르이다. .. 민바르에서의 설교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미가 있다. 신의 말씀을 깨우치는 고유한 종교적 역할 외에도 국가의 주요 정책을 공표하고 왕의 임명과 퇴위를 알리는 공식적인 홍보 창구가 된다. .. 세 번째 요소는 미나레트이다. 261
모스크는 나그네를 위한 쉼터이다. 단순히 신에게 경배를 올리는 예배 공간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가장 역동적인 삶이 펼쳐지는 생활 공간이다. 그래서 모스크를 중심으로 생활 편의와 중심 기능을 담당하는 목욕탕, 여관, 식당, 병원, 시장에 이어 도서관과 학교까지 갖추어져 있다. 가난한 사람과 경비가 떨어져 오갈 데 없는 나그네들을 위한 숙소와 먹을 것이 준비된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함께 예배를 보고, 낮에는 카펫이 깔린 폭신한 모스크 바닥에 항상 흐르는 깨끗한 물로 몸을 청결하게 유지할 수도 있다. 262=263
모스크는 또한 무덤 공간이다. 통치자나 고매한 고승들은 죽어 모스크 뜨락에 묻힌다. 그래서 이슬람 세계의 큰 모스크에는 거의 반드시 주변에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264
아랍안나이트는 아랍어로 기술된 대중 설화 문학의 집대성이다. 1880편으 큰 줄거리와 100여 편의 소주제가 1,001일에 걸친 밤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잡품의 모태는 6세기 페르시아의 설화집인 <하자르 아프사나<천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아랍어로 번역되어 구전된 시기는 840년경으로 추정되며, 10세기ㅣ 중엽 아랍 작가인 마수디와 이븐 나짐이 그들의 작품에서 페르시아어 <하자르 아프사나>를 ‘천일 밤의 이야기’로 번역, 소개함으로써 아라비안나이트가 구전 문학에서 아랍의 기록 문학 속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아라비안나이트는 인도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페르시아를 거치며 많은 이야기가 변형, 첨가, 삭제된 채 아랍으로 전달됐다. 아랍은 여기에 아랍적인 요소를 첨가함으로써 결국 아랍화된 문학으로 자리매김했다. 265-266
아라비안나이트는 정작 본고장인 아랍-이슬람 문하권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는 표준어와 정형화된 문체에 의존한 식자층의 아랍 문화만이 중시되고, 과장과 무한한 상상력으로 포장되고 대담한 성적 표현으로 더덕의 틀을 뛰어넘는 대중 설화 문학을 교양 없는 것으로 비하하는 풍조 때문이었다. 267
아라비안나이트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1886년, 이야기의 첫날밤만을 떼어 <유옥역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했으니 벌써 125년 전이다. 이 제목은 여주인공 샤프라자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268
아라베스크(arabeque)는 .. 대안 예술이자 새로운 문화였다. 사람과 동물 대신 꽃과 나무, 식물과 자연 현상을 아랍어 서체와 결합해 기하학적으로 배치해 예술성을 표현했다. 아라베스크는 반복과 대칭이 특징이며, 꾸란 구절을 아랍어 서체로 장식했다. 모든 예술은 결국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는 의미를 담았고, 시작도 끝도 없는 반복과 대칭 구도 자체가 바로 오묘한 신의 예술이었다. 272
우리나라에서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당초문(唐草紋)으로 알려졌다. 꽃과 식물을 기본 모티브로 사용한 디자인이 당나라를 통ㅎ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처마의 와당 장식, 불교 사찰의 단청, 청자나 백자에 그려진 문양, 전통 가옥의 문살 등에서 흔히 보이는 당초문은 아라베스크를 그 원형으로 한다. 273
이슬람 생활 예술의 꽅으 ㄹ들라면 단여 ㄴ카펫이다. 이슬람의 긴 역사와 삶의 애환, 무슬림의 예술성과 기술, 진한 일상의 시간이 축적된 종합 예술품이다. .. 카펫은 이슬람의 역사이고 작품이다. .. 구도의 기본 디자인을 형성하는 것도 아라베스크 문양이다. 274
인류가 카펫을 사용한 기간은 2,500년이 넘는다. .. 카펫은 처음 중앙아시아의 유목 민족이 만들기 시작했다. .. 첸트를 가리는 스크린이자 바닥 깔개이고, 벽을 가리는 커튼, 말안장 등 포기할 수 없는 실용품이었다. .. 역사적으로 카펫 산업이 가장 발달한 곳은 터키와 페르시아이다. 274-275
카펫은 디자인 예술이다. 디자인만 보고도 그것이 어느 시대에 어디에서 생산됐는지 알 수 있을 정도이다. .. 꽃무늬 양식과 기하학적 양식이 주류를 이룬다. 꽃무늬 양식은 주로 페르시아와 인도에서 사용했고, 캅카스 및 중앙아시아의 투르코만은 기하학적 무늬를 선호했다. 터키에서는 기하학적 무늬가 더 많이 사용됐지만, 두 가지 양식이 모두 애용되었다. .. 같은 디자인이라도 무노하권에 따라 그 해석ㄱ은 각기 다르다. 중국에서 용은 황제의 의미를 내포하지만, 페르시아에서는 악마이며, 인도에서는 죽음을 의미한다. 276-277
초기에 커피는 음식의 일종으로 먹었던 것 같다. 자생하는 커피의 효능을 일찍부터 알고 있던 동부 아프리카나 아라비아 남주 주민은 분쇄된 원두를 동물의 기름과 섞어 응고시켜 오랜 행군이나 전쟁중에 힘을 보충하기 위한 목적으로 복용했을 것이다. 전쟁 필수 에너지바였던 셈이다. 이처럼 커피의 전파와 효능의 확산은 많은 문명 전파 과정이 그러했듯이 어쩌면 전재으이 산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커피를 일상적 음료로 널리 마시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이후 예멘 지방이었던 것 같다. 주로 이슬람 신비주의자나 종교 지도자 사이에 먼저 유행했다. 오랜 명상과 기도를 해야 했던 그들에게 커피는 최상의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279
예멘이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으며 커피는 이슬람 세계를 뛰어넘어 국제화의 길을 걷는다. 커피가 예멘을 대표하는 특산물로 오스만 궁장이 있는 이스탄불에 진상됐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1554년에는 세계 최초의 카페인 차이하네(Chayhane)가 이스탄불에 문을 열었다. 280
밤의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웠던 이스탄불 궁정에서 커피는 최고의 인기 음료였다. 밤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유럽 외교관들은 잠을 쫓기 위해 커피를 거의 매일 밤 상용했다. 그들은 점차 커피 중독자가 되었다. 임기를 마치고 유럽으로 돌아갈 때쯤이면 이미 커피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곤 했다. 외교관들은 오스만 당구그이 커피 유출 금지에도 외교 행랑을 이용해 원두를 자국으로 빼돌렸으니, 이것이 유럽에서 커피를 마시게 된 배경이다. 유럽 최초의 커피 하우슨 ㄴ1652년 영국 런던에 문을 연 파스카 로제 하우스였다. 280
1683년경에는 런던에만 3천 개의 커피 하우스가 생겼다. 281
커피가 순조롭게 그 사회에 정착한 것은 아니었다. 격렬한 종교 논쟁과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고통과 시련의 과정을 거친 이후에 얻어진 영광이었다. 처음 중세 가톨릭교회에서는 시커먼 커피를 보고 이교도가 개발해 마시던 음료라고 하여 악마의 음료로 간주했다. ..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직접 커피를 마신 후 하나의 기호식품으로 인정했다. 커피에 세례를 준 셈이다. 281
근대 유럽인을 매료시켰던 가루째 끓이는 방식의 커피는 지금 터키 커피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터키 커피는 원두와 불의 성질, 끓이는 순간의 기술이 어루러져 만들어 낸 하나의 새로운 문화였다. 커피를 긇이는 것은 새 신부의 가장 중요한 거치가 되었다. 좋은 원두를 골라 잘 볶아내고 애를 갈아 향과 맛이 살아 있는 커피를 끓이는 것은 터키인의 일상적인 문화가 되었다. 자그만 구리 잔에 원두 가루를 넣고 찬물을 부은 다음 약한 불에서 커피를 끓인다. 거품이 일어 커피포트 위로 넘치려는 순간 불에서 멀리해 커피 향이 새 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비법이다. 기호에 따라 설탕을 넣고 끓이기도 한다. 작고 앙증맞은 도자기 커피잔에 따르면 3분의 2가량의 커피 원두가 진흙처럼 가라앉고, 그 위쪽의 맑은 커피 물을 음미한다. 진한 터키 커피는 빈속에 마시면 머리가 핑 돌 정도로 강하다 그러나 양고기를 먹고 기름진 식사 후에 마시는 커피 커피 한 잔으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깔끔한 맛을 느낄 수 있다. 284
세밀화는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을 아주 작게 그려 역사적 이야기나 삶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하고자 하는 이슬람 문화권의 특징적인 예술이다. .. 이슬람은 아랍의 종교로 출발했다. 새롭게 이슬람의 영역으로 드렁온 이란이나 중앙아시아 튀르크족, 인도 등지에서 아랍어는 너무나 어려운 외국어일 뿐이다. 이슬람은 글자를 아는 1%도 안 되는 지적 엘리트 곛층만이 독점하는 폐쇄적 종교로 변질되고 있었다. 여기서 이슬람 사회는 심각한 전환기를 맞았고, 두 가지의 변신을 가져왔다. 종교적으로는 수피 사상이고, 예술적으로는 세밀화(미니어추어)가 발달한 것이 그것이다. 이슬람 신비주의로 번역되는 수피 사상은 꾸란의 언어적 해석을 깨치지 못하더라도 누구든지 하느님을 만나고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잇는 새로운 방식의 길을 열어 주었다. 노래와 춤, 끊이없는 염원과 명상을 통해 일반 신자에게 또 다른 대중적 이슬람의 길을 제시했다. 세밀화의 수용과 성행은 곧 글자를 모르는 신자를 위한 종교 교육을 그리믕로 대신하는 우회적인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인물이나 동물을 묘사하는 것이 우상 숭배라는 전통 가르침의 규율을 뛰어넘기는 절대 만만치 않았다. 여기서 종교와 예술의 절충이 시도된다. 될 수 있으면 그림을 작게 그려 실제적인 이미지를 최소화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원근법과 입체감을 사용하지 않고 생동감을 줄이는 방식으로 우상 숭배의 위험성을 회피하려고 시도했고, 이것이 세밀화로 나타났다. 287-288
CHAPTER 4 무슬림은 어떻게 살아가나
이슬람의 음식 문화는 허용된 것(할랄, halal)과 금지(하람, haram)돼야 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예언자 무함마드도 그의 하디스에서 “할랄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하람은 금지하신 것이나 꾸란에 아무런 언급이 없는 사항은 모두 너희에게 허락되어 있느니라.”라고 대답했다. 따라서 몇 가지 금기 사항만 유의하면 모든 것이 허용된 것이 이슬람 음식의 특징이다. 298
일반적으로 지역의 생태 환경과 문화적 특성에 따라 동물 사육의 선호도가 달라진다. 중국 남부에서는 돼지, 몽골 초원에서는 말, 안데스 고원 지방에서는 라마, 티베트 고산 지방에서는 야크, 툰드라 동토 지방에서는 순록, 아프리카에서는 소, 중앙아시아 대초원 지대에서는 양을 많이 사육한다. 그리고 오아시스에서는 낙타와 양이 주목을 받는다. 301
낙타는 300킬로그램 이상의 짐을 질 수 있고 물이나 식량의 보급 없이 400킬로미터를 이동하는 놀라운 수송력을 지니고 있다. 무려 17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않고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있다. .. 낙타 한 마리를 잡으면 적어도 200킬로그램 정도의 고기가 나온다. 5인 가족이 2킬로그램(3근 반)의 고기를 소비한다 해도 3~4개월을 견딜 수 있는 양이다. 302
우선 낙타는 인간에게 풍부한 젖을 제공해 준다. .. 처음 먹는 사람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기름진 낙타 젖을 그냥 마시면 십중팔구는 설사와 배탈이 난다. 마시고 남은 젖으로는 겔 상태의 응고된 요구르트를 만들고, 다시 발효시켜 졸 상태의 뻑뻑한 막걸리 같은 라반(마시는 요구르트)으로 만들어 먹는다. 또한 수백 종류의 치즈를 만들기도 한다. 일주일 정도 먹을 수 있는 두부 같은 치즈부터 몇 년을 두어도 변하지 않는 바위처럼 딱딱한 치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치즈로 만들어 먹는다. 윗부분에 응고된 지방 성분으로 버터를 만들고 락토스라는 유당을 추출해 당분을 해결한다. 말려서 분유나 전지분으로 보관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정 발효시켜 술을 빚는 일이다. .. 이슬람을 받아들인 이후에 술은 금기시되었지만, 낙유주는 인간이 애환을 달래고 낭만을 노래하게 한 유목 생활의 청량제였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낙타는 젖을 통해 완벽한 유제품 문화를 만들어 주었다. 302-303
이슬람 세계의 축제 -이들 피트르 모든 무슬림은 이슬람력으로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 한 달 동안 단식을 한다. 305
단식이 끝나면 약 5일간의 축제를 즐긴다. 이들 피트르 축제다. 터키에서는 세케르 바이람(Sheker Bayram), 말레이시아 등지에서는 하리 라야(Hari Raya)라 불린다. 아침 일찍 일어나 깨끗하게 목욕한 다음, 전통 의복으로 갈아입고 식사 전에 모스크로 향한다. 함께 모여 축제 예배를 드리고 이맘의 설교와 덕담을 듣는다. 서로 껴안고 단식을 무사히 마친 것을 축하하고, 그동안 서먹했던 사람끼리도 화해하고 용서하는 감동적인 만남의 장이 펼쳐진다. 그러고는 피트라라고 하는 일종의 종교세를 낸다. .. 모스크에서의 만남과 인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가족들이 모여 앉아 맛있는 축제 음식을 든다. 306
가족끼리 축제 음식을 들고 나서는 가깡운 어른에게 인사를 다니고 친지를 만나러 간다. 307
-이들 아드하 두 번째 큰 축제인 이들 아드하는 이슬람력 12월(Dhul al -Hijja) 처서 주에 행하는 성지 순례를 마감하면서 벌이는 이슬람력 전체의 축제이다. 이 순례를 하즈라고 한다. 하즈는 하느님의 집이 있는 성지 메카를 순례하는 무슬림의 5대 의무 중 하나이다. 307
카바 신전을 일곱 바퀴 돌면서 신을 염원하고 생각한다. 신전에 있는 흑석에 입 맞추고, 아라파트 동산에 오르고 미나 평원에서 야영하며 정해진 순례 의식을 마친다. 사파와 마르완이라고 불리는 두 언덕 사이를 일곱 차례 오가기도 한다. 마지막에는 사탄의 기둥을 향해 돌을 던지며 자신의 신앙을 정화한다. 이 순례가 끝날 무렵, 둘 히자달 10일째에 희생제를 치른다. 바로 이들 아드하이다. 가족 단위로 소나 낙타를 잡기도 하지만, 대부분 양을 희생한다. 희생제는 아브라함의 고사에서 연유한다. 308
재미있는 사실은 구약에서는 번제에 올려진 아들이 본처 사라에게서 태어난 이삭이고, 꾸란에서는 하갈의 몸에서 난 이스마일로 바뀌어 있는 점이다. 이슬람에서는 당연히 처음 낳은 이스마일을 장자로 보는 것이다. .. 축제를 즐기는 방식은 이들 피트르와 거의 유사하지만, 양을 잡는 의식이 장관이다. 하루에 수천만 마리의 양이 도살되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309
할랄은 도살 방식에서 생명 존중이라는 영성 의례 과정을 거친다. 첫째, 동물을 도살할 때 한 생명을 앗아가는 일이기 때문에 신의 허락을 받아 신의 이름으로 잡는다. “비쓰밀라(신의 이름으로)”를 세 번 외치면서 인간을 위한 탐욕의 대상으로 한 생명을 의미 없이 죽이지 않도록 한다. 둘째는 고통을 가장 적게 하는 방식으로 도살한다. 목의 경동맥을 칼로 잘라 가장 빠른 순간에 가장 적은 고통으로 생명을 앗아가는 배려를 한다. 셋째, 피는 부패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생명의 상징이기 때문에 먹지 않는다. 도살한 이후에는 몸속의 피를 되도록 많이 뽑아내고 고기만 취한다. 당연히 선지도 먹지 않는다. 넷째, 고기와 가죽, 털을 깔끔하게 해체하고 정리하여 완전한 순환을 이룬다. 털과 가죽도 손상 없이 잘 수습하여 자선단체에 희사해 힘들고 버림받은 약자의 삶에 도움을 준다. 생명을 희생시킨 대가로 사회적 소득 재분배에 기여하게 한다. 다섯째, 판매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축제 때 잡은 고기는 삼등분하여 함께 나누는 미덕을 강좋나다. 종교적 축일에는 보통 3분의 1은 가난한 이웃에게, 3분의 1은 공공단체에, 3분의 1은 가족들이 먹는다. 또한 아주 어린 생명이나 사고로 죽은 동물은 팔거나 취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우리에 가두어 고통을 주면서 키운 동물도 할랄에서 멀어진다. 방목을 장려하는 해피 애니멀(Happy animal)을 추구한다. 한마디로 할랄 식품은 청정과 영성을 준 신뢰의 식품이라는 강점이 있다. 311
작명에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알라의 이름인 99가지 덕목을 따는 것이다. 알라는 친절하고 아름답고 신실하고 정직하고 지혜롭고 전지전능하고 위대하고 등등 99가지 덕목을 이름으로 따오는 방식이다. 그 덕목들은 알라에게 속한 것이므로 이름 앞에 ‘종’이란 의미로 압둘(Abdul-)을 붙인다. 즉 알라의 종인 압둘라(Abdullah), 압둘 라흐만(자비), 압둘 라힘(자애), 압둘 알림(지혜, 압둘 카림(위대함), 압둘 자밀(아름다움)등이다. 둘째는 성서에 나오는 예언자의 이름을 따는 방식이다. 놀라운 것은 마리아, 예수, 솔로몬, 요셉, 요한, 아담 같은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름이 그대로 무슬림의 이름을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아인 경우 마리아에서 마리얌(Mariam), 예언자 무함마드의 부인이었던 카디자, 하프사, 할리마, 살라마, 자이납, 아이샤, 그의 외동딸 파티마등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가장 많은 무슬림 이름은 이슬람의 마지막 예언자인 무함마드이다. 초기 세 명의 정통 칼리파를 찬탈자로 보고 인정하지 않는 시아파에서는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등의 이름을 피한다. 4대 칼리파 알리에 맞섰던 무함마드의 아내 아이샤도 시아파에서는 싫어하는 여성 이름이다. 따라서 시아파에서는 알리, 후세인, 하산, 파티마 등의 이름을 더 선호한다. 셋째는 다른 문화권에서도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지명이나 고향, 행복, 사랑, 자연물(바다, 장미, 바위등)등을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다. 유목 생활을 하던 아랍인은 ‘성’이란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이름과 아버지 이름 사이에 빈(bin)이나 빈트(bint)를 붙여 부자, 부녀간을 표시해 가계를 나타냈다. 예를 들면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은 ‘Abdullah bin Abdul Aziz Al-Saud(알사우드의 아들, 압둘 아지즈의 아들인 압둘라)’로 표시된다. 딸은 아버지 이름 앞에 bin 대신 bint를 붙이면 된다. 현재는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 성을 만들어 쓰고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성이 없던 터키가 1928년 성씨법을 통해 모든 국민에게 갑자기 성을 만들어 사용하게 하면서 여러 많은 부작용과 급격한 전통 의식의 변화가 생겨나기도 했다. 326-327
-아끼까(희생의식) 생후 7일째 작명하는 날, 아기의 머리털을 정수리만 남기고 자르고 그 머리털의 무게에 해당하는 금이나 은을 가난한 사람에게 희사한다. .. 그 다음 주인은 손님을 초대해 동물들을 희생한다. 보통 남아인 경우에는 양 두 마리, 여아인 경우에는 양 한마리를 잡는다. 아끼까(Aqiqah) 의식은 생후 7일째뿐만 아니라, 지방에 따라서는 14일째와 21일째에도 행한다. 328
할례(진정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한다) 남설 할례는 이슬람의 전통이자 관습이다. .. 할례의 시기는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아랍 사회에서는 작명 의례를 행한 직후인 생후 8일째에 할례를 행한다. 그러나 아랍권 일부에서와 비아랍권에서는 생후 40일째 또는 아이가 좀 더 성장한 후인 5~7세 때 할례를 행한다. 상류층 자제가 할례를 할 때는 가진 자가 비용을 대 수십 명의 고아와 가난한 자이 자식들이 함께 할례를 행하는 것이 미덕이다. .. 할례일에는 많은 친지가 지켜보고 축송을 하는 가운데 마취 없이 간단한 수술을 행한다. 어린 나이에도 절대 울지 않는 강건함을 보여 줌으로써 남성의 세계에 입문할 자격을 인정받는다. .. 여아 할례는 이슬람에서 규정된 관습이나 권고 사항이 아니며, 이슬람 이전 아프리카 풍급의 잔재다. 여아 할례는 지역에 따라 적용되는 방법과 정도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수단과 이집트에서는 아직도 여아 할례가 매우 보편적인 데 반해,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하는 사우디아라비아, 북아프리카,터키, 파키스탄 등지에서는 거의 소멸해 가고 있다. 할례 방식도 수단에서는 소음순과 음핵의 돌출 부분을 포함한 광범위한 부위를 제거하는 데 비해, 대부분 지역에서는 음핵의 일부(1~3밀리미터)를 예리한 칼로 제거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현대의 이슬람 학자 대ㅜ분은 여아 할례를 이슬람 이전 시대의 비종교적 의미로 배척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일부 아랍인은 이를 관습적으로 행하고 있다. 그들은 여성 할례가 여성의 성적 기능과 충동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행해진다고 알고 있다. 329-330
할례 이후부터는 아버지에게 절대적 복종과 존경심의 바탕에서 예절, 사회 관습과 관례, 종교 지식 등의 엄격한 가정 교육을 받는다. ‘셰이크’라는 가정 교사를 고용하기도 한다. .. 7세가 되면 남녀가 유별해 하렘에 함부로 왕래할 수 없으며, 여아는 바깥출입시 베일을 쓴다. 331
이슬람 전통 사회에서 결혼은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가족이나 혈연 공동체 모두에게 관련되는 공통의 관심사이다. 따라서 자유 연애결혼은 상상할 수도 없다. .. 요즘은 아랍 사회에서도 결혼 연령이 상당히 늦춰졌다. 나라별로 혹은 도시와 지방 간에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남자는 25~30세, 여자는 22~27세가 새로운 결혼 적령기가 되었다. 332
시아파와 달리 수니파에서는 남자는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속한 가문의 여자와 결혼할 수 있으나, 여자의 경우에는 자신보다 비천한 가문의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333
여자는 부모가 선택해 준 신랑 후보를 거절할 수 있으나 본인이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할 권리를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결혼 후보자는 부모나 후견인과 함께 신랑 혹은 신부를 볼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지만, 혼례일까지 상대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결혼이 금지되는 근친의 범위는 어머니, 딸, 여자 형제, 배다른 누이, 숙모, 고모, 이모, 외숙모, 조카, 질녀, 장모, 의붓딸, 아버지의 다른 부인들, 며느리 등이며, 두 자매와의 동시 결혼, 같은 유모의 젖을 공유했던 사람, 노예와의 결혼도 금지된다. 또한 남녀 모두 부부 생활을 위협하는 지병이나 신체적 결함이 없어야 하고, 남자는 네 명의 아내를 갖지 않은 상태, 여자는 이혼한 후 전 남편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재혼 금지 기간을 충족한 상태여야 한다. 부족에 따라서는 처가 사망한 경우 처제나 처형과의 결혼이 보편적이고, 형제가 사망하는 경우 형수나 제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수계혼(嫂繼婚) 제도가 성행하기도 한다. 333-334
아랍 사회에서 권장된 결혼 관습 중 하나는 사촌 결혼이다. 335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는 대가로 신부 측에 일정한 재화를 지불하는 마흐르 제도는 이슬람 이전 아랍 사회에서도 잔존하던 유습이다. 335
일반적으로 부모의 도움 없이 독신 남성이 준비하기에는 매우 벅찬 금액이다. 따라서 나이 든 노총각과 이혼녀의 결혼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편견 없이 행해진다. 초혼과 재혼에 따라 그 비율도 달라 처녀일 경우를 100으로 할 때, 이혼녀는 75, 미망인은 50에 해당하는 마흐르를 받을 수 있다. .. 최근에는 가난한 총각들을 위해 아랍 은행이 마흐르 금액을 장기 융자해 주기도 한다. 336
이슬람 사회에서의 장례는 빠른 매장(보통 24시간 이내), 간단하고 엄숙한 상례, 내세에 대한 강한 믿음 등의 특징으로 규정된다. 337
미망인은 4개월 10일간 외간 남자와의 접촉을 피하며 집에서 지낸다. 이는 재혼 금지 기간인 잇다(iddah)를 지켜 자유로운 재혼권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미망인은 1년 후 재혼이 허용된다. 342
CHAPTER 5 이슬람 여성, 억압과 현실
이슬람 사회는 종잡을 수 없고 이슬람 여성관도 나라마다 다양하다. 350
우선 여성에 대한 꾸란의 기본 가르침을 살펴보자. 첫째, 꾸란은 남녀 모두 알라의 피조물이며, 동등한 가치와 존엄을 가진 존재로 규정한다. .. 꾸란은 흔히 구약에서 가르치는 여성의 창조 기원설을 배격한다. 둘째, 꾸란에서는 종교적 의무 수행과 보상은 물론, 허용과 금기에서도 조금의 차등 없는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과한다. 셋째, 남녀가 동등하게 교육받을 기회에 대해서도 꾸란은 물론,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에서 많은 예를 찾을 수 있다. 넷째, 꾸란에는 법적 측면에서 여성을 보호하는 장치가 언급돼있다. 다섯째, 꾸란은 양성 사회를 지향한다. 352-355
놀랍게도 이슬람의 기본 결혼 제도는 일부일처이다. 다만 전쟁이나 기근과 같은 특수한 조건에서는 일부다처의 문을 열어 놓고 있다. 358
‘만일 너희가 고아들을 공평하게 대해 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결혼을 할 것이니 너희가 마음에 드는 여인으로 둘, 셋, 또는 넷을 취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을 공평하게 대해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한 여인이나 아니면 너희 오른손이 소유한 것(노비)을 취할 것이다. 그것이 너희가 부정을 범하지 아니할 최선의 길이다. -꾸란 4장 3절’ 359
탈라끄, 남성의 일방적 이혼 통고 이슬람 관행에서 남편이 다처를 두고 싶은데 첫 번째 아니가 동의하지 않으면 남성은 탈라끄(Talaq)라 부르는 일방적인 이혼 통고 제도를 활용한다. ‘나는 당신과 살기 싫다’라는 표현인 탈라끄를 석 달의 시차를 두고 세 번만 하면 이혼이 성립되는 제도다. 361
쿨, 여성의 이혼 청구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예속돼 살 수 없다면 남편의 동의 없이도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 길이 이슬람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이를 쿨(Khul)이라고 한다. 이혼 청구 사유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잘 모아야 하며, 이때 여성은 결혼 시 받았거나 약속받은 지참금의 일부 혹은 전부를 포기해야 한다. 362
역사적으로 히잡 착용의 관습은 이슬람 이전 시대부터 존재해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명시된 것은 꾸란에서였다. ‘밖으로 나타내는 것 이외에는 유혹하는 어떤 것도 보여서는 아니 되니라. 즉 가삼을 가리는 수건을 써서 남편과 그의 부모, 자기 부모, 자기 자식, 자기 형제, 형제의 자식, 소유하고 있는 하녀, 성욕을 갖지 못하는 하인, 성에 대해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어린이 이외의 자에게는 아름다운 곳을 드러내지 않도록 해야 하느니라.’ -꾸란 224장 31절 이 구절을 보면 ‘유혹하는 것’과 가슴이라고 언급했을 뿐 무슬림 여성이 가려야 할 신체 부위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다만 이슬람 법학자들의 해석에 따라 가려야 할 부위가 결정되었다. 365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히잡 착용의 상징성이 변했다. 즉 지배 계층의 하렘에서 여성 격리가 성행하자 히잡은 지배 계층 여성의 경제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표시가 되었다. 한편 히잡은 여성의 순결성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을 유혹의 원천으로 간주했던 보수적 시각에 기인했다. 이로써 히잡 착용 여부가 남성의 성적 욕구를 자극해 남성을 타락하게 하는 기준으로 간주됐고, 히잡은 여성의 순결성과 가문의 명예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고 말았다. 365-366
명예를 위한 살인, 소위 명예살인(honor killing)이다. 일반적으로 가족 중 아버지나 남자 형제가 간통이나 성적 부정을 저지른 여성을 살해함으로써 공동체 내에서 불명예스러운 집안이란 낙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극단적 범죄 행위다. 이토록 잔혹한 살인 게임을 주로 남성 중심의 부족 공동체에 잔존하는 유목 사회의 악습이다. 남성이 생산자와 전사의 역할을 독점하는 혈연 중심의 부족 공동체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소유 의식과 성적 독점욕이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나아가 여성의 성적 정절이 아주 중시된다. 적령기에 도달한 여성이 다른 부족과 족외혼을 하려면 신랑은 신붓집에 상당한 액수의 신부 지참금을 지불해야 한다. 신부 지참금 관습은 이스람 시대에 들어서 여성을 위한 노후 보장책으로 그 성격이 바뀌지만, 관습적 맥락에서는 여전히 빼앗긴 노동력에 대한 일종의 보상인 셈이다. 이런 사회적 구도에서 여성은 중요한 재산이자 상품인 셈이다. 그런데 간통이나 부정행위가 밝혀졌을 경우 정상적인 결혼의 길이 막히고, 그 여성이 헤쳐나갈 수 있는 길은 거의 없다. 명예살인이 직계 가족에 의해 처단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배경이다. 명예살인은 대부분 국가에서 살인죄보다는 관행으로 다루어져 1년 미만의 가벼운 형벌에 처했다. 368-369
명예살인은 수니파, 시아파 할 것 없이 꾸란이나 이슬람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반하는 배교 행위이다. 그런데도 명예살인이 종교적 배결을 가진 것처럼 이해되는 것은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 일어나는 토착적인 악습과 이슬람 율법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이다. 370
아프리카 일부 사회를 제외하고 여성 할례를 강요하는 이슬람 사회는 거의 없다. 371
CHAPTER 6 이슬람 경제와 비즈니스 관행
“인샬라(Inshallah)”, 신의 뜻대로! 375
씨를 뿌리고 땅을 가꾸고 수확했다가 비축하며 1년을 계획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순환 경제 형태를 보인 농경 정주 사회와는 달리 전쟁과 교역이 주된 삶의 방편인 아랍 유목 사회의 전통적 삶은 온통 불확실하다. 모든 성패를 알라에 거는 심성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러다 보니 두터운 신뢰가 축적되지 않은 외부인이나 이방인에 대한 불신이 무엇보다 강하다. 그들과 거래할 때는 신뢰가 필요하다. 시간을 두고 관찰하면서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 인샬라라고 할 수 있다. 375
인샬라는 기다림의 미학이다. 반드시 성사되는 비즈니스 노하우다. 신의 뜻을 건 이상 함부로 일을 내팽개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인샬라에 익숙하고 인샬라를 아름다운 인사로 받아들이면 아랍인의 심성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 일상 대화에서 인샬라 외에도 “말리쉬(Maalesh)”나 “마피쉬 마쉬킬라(mafishi mushikillah)”를 입에 달고 산다. ‘문제없어! 다 잘될 거야!’란 의미다. 동부 아프리카인이 자주 쓰는 스와힐리어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와 정확하게 같은 의미다. .. 실제 상황에서 ‘말리쉬’는 결코 ‘괜찮다’, ‘걱정하지 마 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의 희망이고 책임 회피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지 말고 철저히 따지고 점검해 미리 문제를 막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377
“앗쌀라무 알라이쿰(알라의 평화가 당신에게)!” 무슬림이 첫 만남에서 나누는 첫 인사말이다. “마 쌀라마(평화가)!” 헤어지 ㄹ때도 평화다. 378
이슬람 은행은 이자 없이 운영된다. 이슬람 경제에서 고리대금은 철저하게 금기이다. 꾸란에서도 돈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것을 강하게 비난한다. 사악한 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대신 이윤은 철저히 보장된다. 자신의 노동이나 노력, 투자와 지식을 통해 얻는 이익은 신성한 것으로 폭넓게 인정한다. 이자는 금지지만 이윤은 인정하는 것이 이슬람 경제의 골격이다. 386
실제로는 이슬람 사회의 많은 시민이 확정 이자도 없는 이슬람 은행에 예금하고, 일반 서구식 은행보다 더 많은 예금을 예치한다. 그것은 신앙의 문제만은 아니다. 저축에ㅔ 대한 이슬람 은행의 연말 배당이 서구식 시중 은행보다 높기 때문에 이슬람 은행으로 몰리는 것이다. 388
정상적인 상거래는 이슬람에서도 가장 축복받는 삶의 형태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 이런 경우 은행은 투자에 실패하여 오히려 고객 예금에 손해를 끼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슬람 은행은 확실하고 건강한 기업에 투자하기 때문에 실제로 손해를 보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이 점이 바로 무슬림 고객들이 이자도 없는 이슬람 은행에 돈을 맡기는 이윧다. 389
CHAPTER 7 이슬람을 빛낸 문화 예술인
이슬람 신학 내에서도 종파 갈등과 이론 논쟁들이 가열되면서 이슬람의 분파 그룹이 생겨났다. 이슬람의 순수성과 정통적인 모습이 변지로디고 이슬람 내부의 분파적 모습과 현학적인 논쟁에 염증을 느낀 많은 뜻있는 무슬림은 아예 현실을 회피하면서 칩거를 선호했다. 그들은 ‘적게 먹고 적게 마시며 아무렇게나 옷을 걸치고’ 기존의 권윙와 형식에 맞섰다. 그들은 ‘수피(Sufi)’라 불렸으며, 명상과 기도를 통한 다양한 방식으로 이슬람의 가르침에 다가가려 했다. 메블라나 시대인 13세기에는 이미 수많은 수피 종단들이 생겨났고, 이슬람 신비주의자들로 알려진 수피는 나름의 방식으로 종교 공동체를 이루고 신앙생활을 지속했다. 409
메블라나 루미는 꾸란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도 누구나 일정한 영적인 수련을 통해 신의 영역에 들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았다. 바로 메블라나 종단이다. 세마(sema)라는 독특한 회전 춤을 통해 신의 의지를 경험하고, 궁극적으로는 신과 일체감을 이루면서 이슬람의 오묘한 진리를 체득하게 된다는 믿음이었다. 410
루미는 1273년 콘야에서 사망했다. 메블라나 종단은 지금도 콘야에 본부가 있다. .. 메블라나의 수피 사상은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일부, 터키를 중심으로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 전역에 널리 퍼졌다. 이슬람이란 종교가 전파 과정에서 아랍이라는 민족적 옷을 벗고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토착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포용력을 갖추고 이슬람을 퍼트린 수피주의가 중심에 있었다. 413
<나스레딘 호자이야기>는 <아라비안나이트>와 함께 이슬람 세계의 삶과 관습을 알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아라비안나이트의 무대가 궁정이라면 호자이야기는 우리 주변의 서민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416
CHAPTER 8 한국과 이슬람, 1200년의 만남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한국인 무슬림이 많이 살고 있다. 대부분 개종자인 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기존 종교를 버리고 이슬람을 택했으며,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자기 신앙을 지켜 가고 있다. 한국인 무슬림 숫자는 약 4만 명에 이르며, 모스크는 한국 이슬람교 자료에 따르면 전국에 25개(서울, 부산, 경기광주, 전주, 대구, 울산, 제주, 안양, 안산 등)가 있다. 외국인 무슬림 노동자들이 몰려오면서 그들만의 예배와 모임 공간인 무살라(Musallah)의 숫자도 전국적으로 150여 개에 달한다. 472
1976년에는 서울 한남동에 한국 최초의 중앙 모스크가 문을 열었다. 이어 1980년에 리비아의 지원으로 부산 모스크, 1981년 쿠웨이트의 지원으로 경기도 광주 모스크, 1986년 이집트 독지가의 지원으로 전주 모스크가 차례로 문을 열면서 한국에 본격적으로 이슬람 공동체가 형성됐다. 473
CHAPTER 9 끝나지 않은 전쟁
지하드(Jihad)는 이슬람의 성전(聖殿)이다. 그러나 지하드의 원래 의미는 단순히 성스러운 전쟁을 수행한다는 외적 개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하드 개념을 혼동하면서 오히려 왜곡된 의미가 본질을 덮는 현상이 팽배할 정도다. .. 이슬람권이나 유럽에서 무슬림과 관련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거의 모든 무력 투쟁과 자살 폭탄 테러를 무조건 지하드라고 부른다. .. 아랍어 지하드의 언어적 의미는 ‘분투하다, 노력하다, 힘쓰다’이다. 지하드는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개인의 진지하고 성실한 분투를 의미하며, 사회에서 선을 행하고 부정과 불법, 압제, 악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이다. .. 지하드라는 단어는 꾸란에서도 33번이나 언급된다. 대부분이 폭력보다는 믿음, 참회, 선행, 의무, 윤리와 같은 이슬람의 기본 개념과 함께 사용된다. 이처럼 지하드는 하느님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자신과의 내적 투쟁이 본질이다. 나아가 지하드는 적들의 부당한 압제로부터 인권과 믿음을 보호하기 위한 정의이며, 적들의 잘못은 변화시키고 올바른 개혁으로 유도하기 위한 비폭력적 양식인 것이다. 477-478
이슬람에서 전쟁 지하드는 대화, 협상, 조약 등과 같은 평화적 방법이 실패했을 경우만 허용되는 마지막 투쟁 방식이다. 전쟁 지하드의 목적도 인간들을 강제로 개종시키거나 식민 지배, 또는 영토와 부, 자신의 영광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생명, 재산, 영토, 명예 그리고 자유를 압제자와 불법으로부터 지키기 위함이다. 현재 이슬람 세계가 처해 있는 부당한 현실과 좌절의 응어이, 일상으로 반복되는 가족과 형제들의 희생 등이 원래의 지하드 정신을 닫아버리고 폭력적 지하드를 조장하는 근본 원인이다. 479
‘너희를 상대하여 싸우는 자에 대하여 하느님의 이름으로 싸우라. 그러나 침략하지 마라. 하느님은 침략자를 사랑하지 않으신다.’ - 꾸란 2장 190절 480
전쟁 지하드는 첫째 올바른 하느님의 길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둘째 적이 먼저 무기를 들고 무슬림을 공격할 때, 셋째 적이 싸움을 중지하면 무슬림도 곧 무기를 놓아야 한다 등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원칙에 따라 이스랆 율법은 더욱 세부적으로 지하드 전쟁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첫째, 지하드는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오직 국가만이 선포 할 수 있다. 둘째, 지하드 수행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해서는 안 된다. 셋째, 지하드 수행 과정에서 어떤 명분으로도 무슬림을 살해해서는 안 된다. 넷째, 무슬림의 권익과 자유로운 종교 생활이 보장되는 나라에 지하드를 선포하고 싸울 수 없다. 480
기원전 1천 년경에 유대 민족은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며 살고 있다가 기원전 7세기에 아시리아에 빼앗겼다. 그러다 또다시 국가를 세우지만, 기원후 1세기에 유대 왕국은 로마에 멸망했다.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하면서 건국할 때까지 2천 년간 유대 민족은 국가 없는 유랑생활(diaspora)을 해왔다. 처절한 유랑의 무대는 유럽이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이 아닌 유럽에서 박해와 고문과 민족적인 차별을 당하면서 살아왔다.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된 이래, 적어도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유대인은 악마와 동일시되었다. 기독교 입장에서 유대 민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먹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저주받은 민족이었다. 종교개혁 시기에 유대인의 위상은 크게 향상돼 악마의 지위에서 탈피했다. 그러나 유럽인의 반유대 감정은 너무나 뿌리 깊어서 16세기 종교개혁의 선봉자였던 마르틴 루터조차 그의 저서 《악마론》 서문에서 '악마를 제외하고 가장 흉측하고 광포한 우리의 적은 유대인이다'라고 서슴지 않고 단언할 정도였다. 어찌 되었든 20세기 초까지 유럽인은 유대인을 악마와 동일시했다. 14세기 유럽에 페스트가 번져 2천만 명 이상이 죽었을 때도 교황청에서는 페스트가 하느님의 저주라면서 악마를 제거하여 하느님의 노여움을 풀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래서 페스트로 희생된 사람도 많지만, 유대인은 또한 악마라는 이유로 대거 학살당했다. 한때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유행했는데, 이 사냥의 1차 희생자도 유대인이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인의 유대인에 대한 편견은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로 이어졌지만, 19세기 말에도 조직적인 유대인 제거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1880년경에 러시아 황제가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어떤 청년이 던진 폭탄에 맞아 폭사한 일이 있었다. 암살범은 현장에서 잡혔는데, 조사 결과 할례 의식을 치렀던 유대인이었다. 유럽 사람들은 이를 러시아 황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유대인의 음모로 몰아갔고, 다음 해인 1881년 5월법을 비밀리에 제정해 러시아에 있는 수백만의 유대인을 삼등분해서 제거할 정책을 세웠다. 그 결과 수많은 유대인이 학살당하거나 체포, 구금당했고, 또 수많은 유대인이 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 불가리아,체코 등 동유럽으로 대량 이주했다. 1894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드레퓌스 대위 사건도 유대인 편견과 관련한 파문이었다. 프랑스에 있는 독일 대사관으로 프랑스의 고급 군사기밀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 정부는 그 문건을 프랑스 고위 장교가 넘겨주었을 것으로 판단했고, 문건의 암호명을 드레퓌스 대위의 것이라고 단정하여 그를 범인으로 몰았다. 결국 드레퓌스 대위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악마섬에 유배당했다. 그가 유대인이며 더러운 악마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였다. 당시 에밀 졸라를 비롯해 아나톨 프랑스, 앙리 푸앵카레, 장 조레스 등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아무리 유대인이더라도 그렇게 사건을 꿰맞추는 것은 프랑스 지성에 대한 모독이라며 강력하게 항의하고 정부를 비판했다. 사회적인 파장이 확산되자 프랑스군 당국은 재수사하여 에스테라지 소령을 진범으로 밝혀내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드레퓌스 대위는 우여곡절 끝에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482-484
영국 외상 밸푸어는 1917년 영국의 은행 재벌 로스차일드와 비밀리에회동, 소위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이라는 비밀 조약을 체결했다.이 조약에서 유대인의 전쟁 참여를 대가로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 국가 창설을 약속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이 한참 진행중이었던 1916년 5월 16일, 아랍과 유대인과 맺은 두 비밀 조약 사이에 또 다른 비밀 조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영국 대표 사이크스와 프랑스 대표 피코 사이에 비밀리에 체결된 사이크스-피코협정(Sykes-Picot Agreement)의 골자는 전후 중동 지역의 분할에 관한 것이었다. 이 비밀 협정에 따르면, 프랑스는 시리아의 해안 지대와 그 북부,영국은 팔레스타인과 바그다드를 점령하기로 했다. 다시 말해 팔레스타인이라는 한 지역에 아랍인에게는 아랍 국가의 독립을, 유대인에게는 유대 민족 국가의 창설을 약속해 주고,실상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미 그곳을 점령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처럼 상호 모순된 삼중의 비밀 조약과 강대국의 비도덕적 정치 음모가 오늘날 팔레스타인 분쟁의 불씨를 지핀 근원적인 배경이다. 그들이 저질러 놓은 비도덕적이고 무책임한 영토 분할 구상으로 지금 두 민족이 역사적으로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엄청난 희생과 보복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당사자인 영국과 프랑스, 미국은 평화의 화신임을 가장하며 인류의 공존과 평화를 들먹이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전후 처리를 위한 국제회의가 1919년 파리에서 개최됐다.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 원칙을 제창한 이 회의에서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안이 동시에 채택됐다. 즉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밸푸어선언의 이행을 위해 국제 사회가 노력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의하면, 팔레스타인 땅에서 2천여 년간 주인으로 살아온 아랍인에게 국가 건설의 자결권이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유대인은 당연히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반대했다. 국제 사회의 여론이 유대 국가 창설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영국은 유대인의 지지를 얻어 1920년 산레모 회의에서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안을 통과시켰다. 1922년에는 국제연맹에서 이를 추인받았다. 영국에 배반당한 것을 안 아랍인은 끈질긴 국가 독립운동과 격렬한 반영(反) 투쟁을 시작했다. 흔히 1920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일련의 피나는 투쟁의 시기를 '아랍의 분노 시대'라 한다. 이즈음 팔레스타인 지역에 동구와 유럽에서의 유대인 이민이 늘어나자 자연히 토착 아랍인과 이주 유대인 간 갈등과 대립이 증폭했다. 1920년 1만 6,500명이 이주한 것을 시작으로 팔레스타인에서의 인구 불균형과 사회 질서 파괴는 점차 심각한 양상을 띠었다. 더욱이 1933년 이후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들어서고,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가중되자 유대인 불법 이민이 급증했다. 1936년에는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인 이주민 비율이 8%에서 30%로 급증하면서 생존 공간을 빼앗긴 현지 아랍인과의 갈등은 극에 달한다. 이때부터 두 민족 간의 대결 양상은 점차 복수전의 성격을 띠면서 처절한 피의 악순환을 되풀이했다. 영국 당국은 민족 분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는 기색이었다. 1937년에는 아랍인의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고, 1939년에는 유대인 불법 이민에 대한 행정력을 상실할 상태에 직면했다. 그러자 영국은 유대인의 이민을 제한하는 백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혼란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전세계가 전쟁에 휘말리자 소강 국면에 들어서 잠시 망각됐다. 비열하게도 영국은 1939년 전쟁에서 아랍계의 지원을 얻기 위해 '유대 독립 국가 건설'을 유보한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485-487
이스라엘의 탄생과 고토 회복 전쟁 그리고 반미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장은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역사적 순간을 맞았다. 그날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리해 아랍과 유대, 두 개의 독립 국가로 분할하자는 안이 통과되었다. 찬성 33표, 반대 13표였다. 당초 아랍인이 중심이 되는 팔레스타인 연방안이 우세했으나 미국의 집요한 제3 세계 회유 작전으로 결국 연방안 대신 분할안이 통과되었다. 그 내용은 당시 인구가 아랍인의 3분의 1에 불과하고, 전체 면적의 7퍼센트만을 소유하고 있던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 전역의 56퍼센트를 분할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지역 생계 기반인 올리브 농장과 곡창지대의 80퍼센트, 아랍인 공장의 40퍼센트가 유대인에게 배정되었다. 경작 가능한 대부분의 비옥한 땅은 유대인 차지가 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분노와 좌절은 극에 달했다. 2천 년 동안 그 땅의 주인으로 살아온 아랍인에게는 이주해 온 유대인을 받아들이라는 연방안 자체도 수용하기 힘든 상황이었으며, 더구나 분할안은 불공정한 결의안이었다. 유대인 입장을 보호해 준 미국의 유엔 결의안 주도가 후일 반미의 기점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1947년 그날, 아랍인의 운명을 결정짓는 유엔 표결 현장에 영국은 없었다. 이 표결에서 영국은 기권을 택했다. 유엔으로부터 국가 창설을 인정받은 유대인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으로 구체적인 건국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 땅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 토착 아랍인의 저항이 워낙 완강하여 크게 차질을 빚었다. 이때 유명한 유대 테러 조직이 맹활약한 치욕적인 데일 야신촌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유대 지하 테러 조직인 이르군은 1948년 4월 9일, 예루살렘 서쪽의 조그만 마을인 데일 야신촌을 야밤에 습격하여 254명의 주민을 잔인하게 무차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 이스라엘 수상인 메나헴 베긴이 진두지휘한 이 사건은 문명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제2의 나치 학살 사건으로 불릴 정도였다. 이러한 기습 만행은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자행되었으며, 비무장의 아랍 주민들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심어 주었다. 불과 1달여 만에 100만 가까운 아랍인이 서둘러 인근 국가로 도피하면서 소위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가 생겨났다. 이로부터 한 달쯤 지난 1948년 5월 14일, 유대인은 아랍인을 몰아낸 곳에 이스라엘 국가를 건국했다. 아랍 국가와 제3세계의 반대 속에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아랍인의 심장부에 유대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이스라엘에게는 2천년 만에 탄생한 위대한 국가였겠지만,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는 불운과 재앙의 날이었다. 그들은 이날을 '알나크바(대재앙)'의 날로 기념한다. 세계는 2천 년 유랑생활을 마무리하고 역경을 딛고 일어선 유대인의 승리에 동정과 축하의 눈길을 보냈다. 바로 그날 자신의 고향에서 쫓겨난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은 조국 탈환을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분노했다. 그동안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이 아닌 유럽에서 온갖 민족적 차별과 종교적 박해를 감수하면서 굳건하게 터전을 다졌다. 유대인 박해와 나치 학살로 이어지는 유대인 말살 정책은 유럽인의 죄과였다. 왜 유럽인이 희생시켰던 유대인에 대한 책임을 아무런 역사적 인과가 없는 아랍인에게 전가해야 하나? 팔레스타인 지역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됐다. 힘없는 팔레스타인 아랍인은 오히려 자신들이 난민이 되어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오직 한 가지 고향에 돌아가는 꿈을 꾸면서 그러나 그 꿈은 산산이 조각났다.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아랍 국가들의 즉각적인 저항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1948년에 제1차 중동 전쟁이 일어났고, 1956년에는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한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의 지도 아래 제2차 중동 전쟁이 벌어졌다. 결과는 모두 비참한 패배였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1964년에는 아랍 연맹의 지원으로 야세르 아라파트가 지휘하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가 탄생했다. 그러나 곧이어 소위 '6일 전쟁'으로 알려진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으로 고토 회복은 커녕, 기존 아랍 영토까지 이스라엘에 점령당했다. 지중해 지역의 가자 지구, 요르단강 서안, 시리아 골란고원, 이집트 시나이반도 등이 그곳이다. 유엔은 안보리 결의안 242호, 338호 등을 통해 점령지의 즉각적인 반환을 촉구했지만, 그 결의안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미국이 거부권 행사를 남발하면서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비호했기 때문이다. 좌절한 팔레스타인 극단주의 저항 세력들은 결국 '검은 9월단'이라는 게릴라 조직을 결성하고, 1972년 뮌헨 올림픽 기간 중 이스라엘 선수의 숙소를 테러 공격해 선수들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세계를 경악시켰고,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에 부정적 이미지를 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73년 석유 무기화 조치로 제1차 오일 쇼크로 이어진 제4차 중동 전쟁에서는 처음으로 이슬람 진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부터는 무모한 무력 투쟁보다 현실적인 협상이 병행됐다. 그 결과 1978년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이 중재한 캠프 데이비드 협상을 통해 전쟁 당사자인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양국 사이에 외교 관계와 불가침 조약이 이루어지고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양도했다.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는 그해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팔레스타인의 평화는 멀어만 보였다. 1982년 9월에는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를 침공해서 팔레스타인 난민촌 사브라-샤틸라 학살 사건을 저질러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87년부터는소위 돌멩이로 이스라엘 탱크에 맞서는 비폭력 평화 시위인 인티파다(Intifada, 민중봉기)가 시작되었다. 곧이어 가자 지구를 사실상 통치하는 저항 조직 하마스(Hamas)가 셰이크 아흐마드 야신의 지도로 탄생했다. 그리고 1988년 11월에 팔레스타인은 독립 국가를 선포한다.미국과 이스라엘이 강하게 반대하고 있어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빼앗긴 보금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아랍인의 투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487-491
팔레스타인 문제의 갈등과 비극은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시작됐다. 그해 8월 29일 제1차 세계시온주의자 대회가 바젤에서 열렸고, 테오도어 헤르츨이 주도해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창설한다는 비밀 강령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망령처럼 확산되는 유럽의 반유대주의 물결 속에서 공동체 절멸 위기를 이겨 내고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의 비극을 온몸으로 감내한 유대인의 생존 노력은 그 자체로 존중받고 지지받아야 한다. 그런데 왜 2천 년 동안 평화롭게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땅이 유럽에서 유럽인에 의해 박해받았던 유대인의 영토가 되어야 했나. 강대국의 책임 회피이자 역사의 후퇴다. 496-497
2001년 10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20년(2001~2021) 만에 탈레반의 승리로 끝이 났다. 9.11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알카에다를 비호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프가니스탄의 합법적 집권 세력인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고자 전쟁을 시작했다. 527
현재 아프가니스탄은 많은 종족과 부족 집단 중 일곱 개 부족이 주축을 이룬다. 파슈툰(Pashtun), 타직(Tajik), 우즈벡(Uzbek), 하자라(Hazara), 아이마크(Aimaq), 투르크멘(Turkmen), 발루치(Baluchi) 등을 중심으로 약 3천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 종족별로 뚜렷한 전통과 토착 관습을 보이지만, 종족 사이는 그렇게 배타적이거나 폐쇄적이지 않다. 이해관계가 침해당했을 때 주저 없이 서로 갈등하고 투쟁하지만, 얼마든지 협상을 통한 권력 분점과 통혼이 가능하며, 외부의 적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단합하는 경향을 보인다. 가장 주요한 종족은 파슈툰으로, 인구의 40~45%를 차지하며 파키스탄과의 국경 지대인 남쪽 지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 타직은 서쪽과 북동 지방, 하자라는 중앙부, 우즈벡은 북서부 지방에서 강력한 연고를 유지하고 있다. 아무래도 주력 종족인 파슈툰의 영향력이 가장 클 수밖에 없다. 현재 탈레반 주축 세력이 파슈툰이다. 528-529
1990년대 들어 남부 파키스탄 국경 부근에서 파슈툰족이 주축을 이룬 탈레반 그룹이 갑자기 나타나면서 내전 양상은 새 국면을 맞았다. 1994년 가을, 그들은 스스로 ‘이슬람을 진정으로 공부하는 학생들’, 곧 탈레반이라고 자처하며, 서로 적대 관계에 놓여 있는 군벌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이슬람법에 근거한 이슬람 정부의 탄생을 표방했다. 그들은 전쟁 직후 무정부 상태에서 폭력과 납치, 강간과 약탈이 성행하던 사회를 바로잡기 위한 자경단으로 출발해, 강한 이슬람 율법의 시행만이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진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조직적이고 훈련된 탈레반 그룹들은 1996년 9월 카불을 점령했으며,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을 제외한 아프가니스탄 대부분 지역을 장악해 사실상 집권 세력이 되었다. 531-532
통치 경험이 부족한 탈레반 정부는 극단적 이슬람 원리만 고집하는 무리한 정책을 펴 국민의 지지는 물론, 국제 사회의 신뢰까지 상실했다.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가무와 오락이 금지됐으며, 이슬람을 주제로 하지 않은 영화 및 비디오 상영이 금지되었다. 또한 여성에게는 얼굴까지 가리는 부르카를 강요했으며, 여성의 취업을 불법화해 가정으로 돌려보냈다. 심지어 여성은 흰 양말 착용, 화장과 립스틱, 교육 기회, 꾸란 공부 등이 모두 금지되면서 완전한 차별 정책에 시달렸다. .. 탈레반 정권은 9.11 테러가 일어나자 테러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을 보호하며 끝까지 신병 인도를 거부했고, 이것이 미국의 부당한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일차적인 빌미가 되었다. 탈레반은 구소련을 막아 내기 위한 항쟁의 동료였던 오사마 빈 라덴을 버릴 수 없었다. 9.11 테러 훨씬 이전부터 탈레반이 장악하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의 공격 목표였다. 카스피해 원유를 인도양으로 연결하는 핵심 루트일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이란, 파키스탄과 인도를 사이에 둔 전략적 요충지로서 미국의 세계 전략에 곡 필요한 나라였다. 이처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명분과 실리가 따로 있는 전쟁이었다. 탈레반 정권은 전쟁 즉시 붕괴했고, 미국의 조정을 받는 카르자이 정권이 아프가니스탄의 새 정부를 구성하고 있다. .. 탈레반은 게릴라전을 펴며 미국과 친미 아프간 정부군을 괴롭혔다. 533-534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미국의 대테러 전쟁 20년은 탈레반과의 전쟁이었다. 9.11 테러의 주적인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가 탈레반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년간 알카에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거의 매일 탈레반과의 전쟁이 중심을. 차지했다. 탈레반은 본질적으로 자생적 풀뿌리 민중 조직이다. 따라서 탈레반을 궤멸시킨다는 것은 다른 말로 아프가니스탄. 국민 대다수를 없애겠다는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535
미국 국방부와 브라운 대학교의 ‘전쟁 비용 프로젝트’ 등 전쟁비용을 계산하는 여러 연구 단체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 지난 20년 동안 벌인 ‘테러와의 전쟁’에서 지출한 비용만 6조 4천억 달러에 달한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비용 지출만 약 2조 3천억 달러로 잡고 있다. 상상하기 힘든 천문학적인 숫자다 그런데 이 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사람과 재산의 초토화, 더 큰 분노와 복수의 응어리만 잔뜩 키워 놓았다. 이 비용의 5%만이라도 전쟁 피해 복구나 전쟁 희생자 지원 프로그램, 난민이나 소외 계층의 삶의 질 개선에 사용했더라면 테러는 지금보다 현저하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이는 거의 모든 연구 기관이 내놓는 공통된 결과이다. 지난 4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읽는 코드는 파괴와 살육 그리고 절망이었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980년대 10년 동안은 옛 소련군이 이곳에서 전쟁을 벌였고, 소련이 물러난 뒤인 1990년대 전반기에는 지방 군벌끼리 수도 카불을 차지하려고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그 내전의 최종 승자가 바로 탈레반이었다. 2001년 9.11 테러를 빌미로 최근 20년 동안은 미국과 전쟁을 벌였다. 이제 미국과 탈레반의 평화 협상으로 모든 것이 종식되고 다시 평화의 실마리를 얻었지만, 40년 폐허와 피폐의 깊은 골을 하나씩 메꾸는 데 또 다른 40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536-537
영국의 오랜 식민 통치가 끝나고 1947년 인도 대륙이 무슬림 지역인 파키스탄과 힌두 지역인 인도로 각각 분리 독립했다. 이때 무슬림이 대다수인 지역은 파키스탄, 힌두교도가 대다수인 지역은 인도에 귀속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당시 카슈미르 지역은 전체 인구의 60% 이상이 무슬림이었음에도 힌두 마하라자(토후, 왕) 하리 싱이 주민 의사에 상관없이 카슈미르를 인도에 귀속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무슬림은 즉각 파키스탄으로의 귀속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파키스탄이 동족 보호를 내세우며 군대를 파견했다. 이로써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카슈미를 비극의 시작이다. 카슈미르 문제는 지난 70여년간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 간 분쟁의 핵심 사인이 되었으며, 상황의 지속적인 악화로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더욱이 인도와 파키스탄이 1998년 핵 보유를 공식화하면서 인구 15억을 헤아리는 이 지역의 위험 수위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카슈미르 문제는 영토 분쟁과 함께 무슬림 파키스탄과 힌두 인도 간 종교적 갈등을 내포하고 있어 해결의 실마리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538-539
CHAPTER 10 서구의 이슬람 그리고 공존의 미래
이슬람 원리주의란 무엇인가 서구에서 주장하고 서구 언론에서 일반화한 이슬람 원리주의는 꾸란과 하디스 같은 이슬람 경전의 구절과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면서 타락한 서구 사회는 물론, 변질된 무슬림 사회를 뒤엎거나 변화시키려는 급진적 사상운동을 일컫는다. 동시에 현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시대착오적인 돌출 행동과 과격한 무장 투쟁등으로 지구촌 평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고정 관념을 양산한다. 이는 극히 일부의 극단적 행위를 일반화시키는 고도의 전략적 시나리오이다. 573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모사하는 자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랑은 더욱더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 파라켈수스
1 사랑은 기술인가?
‘사랑은 기술이다’라는 견해를 전재로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물론 사랑은 즐거운 감정이라고 믿고 있다. ..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특별한 태도는 며 가지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13-14
사랑에 대해서 배울 필요가 없다는 태도의 배경이 되는 두 번째 전제는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정(假定)이다. 14
남자에게 매력있는 여자 그리고 여자에게는 매력있는 남자는 탐나는 경품이다. ‘매력’은 보통 인기 있고 퍼스낼리티(Personality) 시장에서 잘 팔리는 품질 좋고 멋진 포장을 의미한다. 15-16
사랑에 대해서는 배울 필요가 없다는 가정에 이르게 하는 세 번째 오류는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 혹은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사랑에 ‘머물러’있는 상태를 혼동하는 것이다. 17
최초의 조치는 삶이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18
우리 문화권의 사람들은 사랑의 경우 명백히 실패하고 있으면서도 왜 사랑의 기술은 도무지 배우려고 하지 않는가? 19
2 사랑의 이론
1. 사랑,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 성적 오르가슴은 황홀경에 의해 발생하는 상태 또는 마약의 효과와 비슷한 상태를 가져올 수 있다. 공동체의 성적 난행 의식은 여러 원시 의식의 일부였다. 도취 경험을 한 사람들은 얼마 동안은 분리감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다. .. 도취 상태가 부족 내의 공통된 관습으로 행해지는 한, 불안감이나 죄책감은 생기지 않는다. 28
비도취적 무노하군에 살고 있는 개인이 선택하는 형태는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이다. 사회적으로 정형화된 해결에 참여하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은 죄책감과 후회로 괴로워한다. 알코올이나 마약에 피난함으로써 분리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도취 상태가 지나가버리고 나면 그들은 더욱 심한 분리감을 느끼며, 더욱 자주, 더욱 강렬하게 알코올이나 마약에 의존하게 된다. 성적 도취를 해결책으로 삼는 경우는 이와는 약간 다르다. 성적 도취는 어느 정도 분리감을 극복하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형태이며 고립 문제에 대한 부분적 해답이 된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분리 상태를 해결하지 못하는 많은 개인의 경우, 성적 오르가슴 추구는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과 별로 다를 바없는 기능을 떠맡게 된다. 이것은 분리에 의해 생긴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절망적 노력이며, 결과적으로 분리감을 더욱 증대한다.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한순간을 제외하고는, 두 인간 사이의 간격을 좁혀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29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등의 의미는 달라졌다. 이 사회에서 평등이라는 말은 자동 인형의 평등, 개성을 상실한 인간들의 평등을 말한다. 오늘날 평등은 인체성보다는 오히려 동일성을 의미한다. .. 평등을 추구하는 이러한 경향에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해서 기만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차이를 제거하려는 경향의 일부이다. 33
현대 사회는 인간에게 대집단 속에서 마찰 없이 원활하게 일하도록 서로 동일한 원자적(原子的) 인간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몯두 동일한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각기 자신의 욕망에 따르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현대의 대량 생산이 상품의 규격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사회적 과정은 인간의 표준화를 요구하고 이러한 표준화를 ‘평등’이라고 한다. 일치에 의한 합일은 강렬하지도 않고 난폭하지도 않다. 이러한 합일은 냉정하고 관례에 따라 지시되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때로는 분리 상태에서 생기는 불안을 진정시키기에 불충분하다. 34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어떤 종류의 합일에 대해 말하는지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존의 문제에 대한 신중한 해답으로서 사랑을 말하고 있는가, 또는 ‘공서적(共棲的) 합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랑의 미숙한 형태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앞으로 나는 전자의 의미로만 사랑이라는 말을 쓰겠다. 37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는 복종, 또는 임상적 용어를 사용한다면 피학대 음란증(마조히즘, masochism)이다. .. 공서적 융합의 ‘능동적’ 형태는 지배, 혹은 피학대 음란증에 대응되는 심리학적 용어를 사용하면 가학성 음란증(사디즘, sadism)이다. 38-39
공서적 합일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 우리가 사랑을 활동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활동’이라는 말의 애매한 의미 때문에 난점에 봉착한다. 이 말의 현대적 용법에서 ‘활동’이라는 말은 에너지를 소비하여 기존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행위를 의미한다. 40
활동에 대한 또 하나의 개념은 외부적 변화가 일어났든, 일어나지 않았든 인간의 타고난 힘을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41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42
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 남성 성 기능의 절정은 준다는 데 있다. 남성은 자기 자신을, 자신의 성기를 여자에게 준다. 오르가슴은 순간에 남자는 정액을 여자에게 준다. 그는 능력이 있는 한, 정액을 주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여자의 경우, 비록 약간 더 복잡하기는 하지만, 사정은 다르지 않다. 여자는 그녀의 여성으로서의 중심을 향해 문을 열어준다. 받아들이는 행위에서 그녀는 주고 있는 것이다. 주는 행위가 불가능하다면, 받기만 한다면, 그녀는 불감증이다. 42-44
준다고 하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 영역이 아니라 이간적인 영역에 있다. 44-45
마르크스는 ..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은 사랑으로만, 신뢰는 신뢰로만 교환하게 될 것이다. 예술을 감상하려 한다면 당신은 예술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을 갖고 싶다면, 당신은 실제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발전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신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관계를 당신의 의지의 대상에 대응하는, 당신의 ‘현실적이고 개별적인’ 생명의 분명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사랑을 일깨우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곧 당신의 사랑이 사랑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만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생명의 표현’에 의해서 당신 자신을 ‘사랑받는 자’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능한 사랑이고 불행이 아닐 수 없다.” 46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 여자를 본다면, 우리는 그녀가 꽃을 ‘사랑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이다.” 이러한 적극적 관심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 47
보호와 관심에는 사랑의 또 하나의 측면, 곧 ‘책임’이라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49
만일 사랑의 세 번째 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할 것이다. 존경은 이 말의 어원(repicere=바라보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49-50
어떤 사람을 존경하려면 그를 잘 ‘알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50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침투하는 것이고, 이러한 침투를 통해 알려고 하는 나의 욕망은 합일에 의해 만족을 얻는다. 융합하는 행위를 통해 나는 당신을 알고 나 자신을 알고 모든 사람을 안다. .. 우리의 사고(思考)가 제시하는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합일의 경험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을. .. 사랑은 지식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며, 사랑은 합일의 행위를 통해 나의 물음에 대답한다. 사랑하는, 곧 나 자신을 주는 행위에서, 다른 사람에게 침투하는 행위에서 나는 나 자신을 찾아내고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는 우리 두 사람을 발견하고 인간을 발견한다. 53-54
나는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아야 한다. 인간을 객관적으로 알게 될 때에만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인간의 궁극적 본질을 알 수 있다. 54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성숙한 인간, 곧 자신의 힘을 생산적으로 발휘하고 스스로 일한 결과만을 차지하려고 하고, 전지전능이라는 자아 도취적 꿈을 포기하고, 오직 순수한 생산적 활동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내적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이다. 지금까지 나는 인간의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 사랑, 합일에의 열망을 실현하는 사랑에 대해 말했다. 55-56
2.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무조건적이다. 67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이 있는 사랑이다. 69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성숙한 사람은 외부에 잇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으로부터 해방되어 내면에 그 모습을 간직한 사람이다. 71
정신적 건강과 성숙의 기반은 어머니 중심의 애착에서 아버지 중심의 애착으로의 발달, 그리고 이러한 애착의 궁극적 종합에 있다. 72
3. 사랑의 대상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포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다. 74
사랑은 활동이며 영혼의 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단지 올바른 대상을 찾아내는 것만이 필요하며, 그렇게 되면 그 밖의 일은 모두 저절로 될 것이라고 믿는다. 74-75
- 형제애 형제애는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의 특색은 배타성이 없다는 것이다. 76
형제애는 동등한 자 사이의 사랑이다. 77
무력한 인간에 대한 사랑, 가난한 자와 이방인에 대한 사랑은 형제애의 시작이다. 77
- 모성애 모성애는 어린아이에게 살려고 하는 소망뿐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을 천천히 길러준다. 이러한 사상은 성서의 다른 이야기에서도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약속된 땅(땅은 언제나 어머니의 상징이다)은 ‘젖과 꿀이 넘쳐흐른다’고 묘사되고 있다. 젖은 사랑의 첫 번째 측면, 곧 보호와 긍정적 측면의 상징이다. 꿀은 삶의 달콤함, 삶에 대한 사랑, 살아 있다는 행복감을 상징한다. .. 꿀을 줄 수 있으려면 어머니는 ‘좋은 어머니’일 뿐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어야 한다. .. 이 두 태도는 어린아이의 퍼스낼리티 전체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실제로 어린 아이-그리고 어른- 사이에서 ‘젖’만 먹은 자와 ‘젖’과 ‘꿀’을 먹은 자를 가려낼 수 있다. 78-79
- 성애 성애는 완전한 융하브 곧 다른 한 사람과 결합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성애는 본질적으로 배타적이며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성애는 아마도 현존하는 사랑의 형태 중 가장 기만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83
- 자기애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은 양자택일적인 것이 아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될 것이다. 91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고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원하며, 주는 데서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받는 데서만 기쁨을 느낀다. 그는 거기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만 외부 세계를 본다. 그는 다른 사람의 욕구에는 흥미가 없고 다른 사람의 존엄성과 통합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유용성을 기준으르 모든 사람과 사물을 판단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랑할 줄 모른다. 92-93
자기애에 대한 이러한 사상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다음과 같은 말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며,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96
- 신에 대한 사랑 신이 아버지인 한, 나는 어린아이다. 나는 전지전능에 대한 자폐적 욕마응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나는 아직도 인간으로서의 나의 한계, 무지, 무력함을 깨닫는 객관성을 획득하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나를 구해주고 지켜주고 나에게 벌을 주는 아버지, 내가 복종할 때 나를 좋아하고, 내가 찬미하면 기뻐하고, 내가 복종하지 않으면 화를 내는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인적 발달에서 이러한 유아적 단계를극복하지 못한 것은 매우 분명한 이라며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신에 대한 신앙은 도움을 주는 아버지에 대한 신앙-유치한 환상-이다. 몇몇ㅊ 위대한 인류의 스승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종교의 개념을 극복했어도 이것은 아직도 종교의 지배적 형태이다. 105-106
인류 역사에서 우리는 동일한 발달을 보고 또 예상할 수 있다. 곧 어머니인 여신(女神)에 대한 무력한 애착으로서의 신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여, 아버지인 남신(男神)에 대한 순종적인 애착을 거쳐, 신이 이미 외부적 힘이 아니고 인간이 사랑과 정의의 원리를 자기 자신 속에 흡수하여 인간과 신이 일체가 되는 성숙한 단계에 이르고, 마침내 시적, 상징적 의미로서만 신에 대해 말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찰에서 신에 대한 사랑과 어버이에 대한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떤 사람이 어머니나 집단이나 민족에 대한 근친애적 애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또는 상을 주고 벌을 주는 아버지, 또는 어떤 다른 권위에 대한 유치한 의존 상태를 유지한다면, 그는 신에 대한, 더욱 성숙한 사랑을 발달시킬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종교는 신을 모든 일로부터 보호해주는 어머니 또는 상벌을 주는 아버지로서 경험하는 초기 단계의 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 종교에서 우리는 초기이 가장 원시적인 발달 단계에서 최고의 발달 단계에 이르리까지 모든 단계가 현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18-119
3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
서양 생활에 대한 객관적 관찰자들은 누구든지 사랑-형제애, 모성애, 성애(性愛)-이 비교적 희귀한 현상이며 여러 가지 형태의 사이비 사랑-이것은 사랑의 붕괴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형태다-이 사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123
자본은 노동력을 지배한다. 생명이 없는 축적된 물품이 살아 있는 인간의 힘, 곧 노동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시작된 아래로 자본주의의 기본 구조다. .. 자본주의가 발달한 결과, 우리는 자본이 점점 더 중앙집권화하고 직중화하는 가정을 목격하고 있다. 1244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은 노동의 조직화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방법에 있다. 노도잉 철저하게 분업화되고 광범하게 집중화된 기업에서 노동은 조직화되고, 개인은 개성을 잃고 소모적인 기계의 톱니바퀴가 된다. 125
근대 자본주의는 원활하게 집단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 더욱 많이 소비하는 사람들, 그 취미가 표주노하되고 쉽게 영향받고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근대 자본주의는 권위나 원리, 또는 양심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즐거이 명령에 따르고 그들에게 기대되는 일을 하고 마찰 없이 사회 기구에 순응하는 사람들, 폭력 없이 관리되고 지도자 없이 인도 되고 목적 없이 - 좋은 것을 만들어내고 계속 움직이고 기능을 다하고 곧바로 나간다는 목적 이외에는 -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현대인은 자기 자신, 동료,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는 상품으로 변하고, 현재의 시잘 조건 아래서 최대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투자로서 자신의 생명력을 경험한다. 인간 관계는 근본적으로 소외된 자동 기계 같은 관계가 되고, 각자는 군중과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따라서 사상이나 감동이나 행동에서 각자의 차이가 없다. 모든 사람이 되도록이면 타인들과 함께 있으려고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아주 고독하며, 분리 상태가 극복되지 못했을 때 필연적 결과로 생기는 깊은 불확실성과 불안, 죄책감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 문화는 사람들이 이러한 고독을 의식하고 깨닫지 않게끔 도와주는 여러 가지 완화제를 제공한다. 우선 제도화된 기계적 작업의 엄밀한 규격화,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 곧 초월과 합일에 대한 갈망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노동의 규격화만으로는 이러한 일에 성공하지 못하므로, 인간은 오락의 규격화에 의해, 곧 오락산업에 의해 제공되는 음향이나 구경거리를 수동적으로 소비함으로써, 더 나아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사고 이것을 곧 다른 것과 교환하는 데 만족함으로서 자신의 의식되지 않는 정말을 극복한다. 현대인은 사실상 올더스 레너드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그려놓은 상(像)에 가깝다. 곧 잘 먹고 잘 입고 성적으로도 만족하지만 자아가 없고 가장 피상적인 접촉을 제외하고는 동료들과 어떠한 접촉도 없는, 그들은 헉슬리가 다음과 같은 말로 간결하게 표현한 슬로건에 의해 지도되고 있다. “개인이 감정을 가질 때, 공동체는 비틀거린다.” 또는 “오늘 즐길 수 있는 일을 내일로 연기한지 말라.” 또는 절정에 달한 선언이지만 “오늘날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 오늘날 인간의 행복은 ‘즐기는 데’ 있다. 즐긴다는 것은 ‘만족스러운 소비’를 말하고 상품, 구경거리, 음식, 술, 담배, 사람들, 강의, 책, 영화 등을 ‘입수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이 소비되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것이다. 세계는 우리의 식욕에 대한 하나의 커다란 대상으로서 커다란 사과, 커다란 병, 커다란 유방이 된다. 우리는 젖을 빠는 자이고, 영원히 기대하는 자이고, 희망에 가득 찬 자이다. 그리고 영원히 실망하는 자이다. 우리의 성격은 교환하고 받아들이고 싸게 팔아버리고 소비하는 데 적합하다. 모든 것은, 물질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대상도, 교환과 소비의 대상이 된다. 사랑에 관한 한 상황은, 당연한 일이지만, 현대인의 이러한 사회적 성격과 대응된다. 126-128
사랑은 성적 만족의 결과가 아니며, 성적 행복은 오히려-심지어 이른바 성의 기교에 대한 지식조차도-사랑의 결과다. 130
자본주의 정신은 절약을 강조하는 데서 낭비의 강조로, 경제적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자기 억제로부터 끊임없이 확대되는 시장을 바탕으로, 그리고 불안해하고 자동 기계화한 개인을 위한 주된 만족으로서의 소비로 변했다. 어떠한 욕망이든 충족을 지연하지 말라는 것이 모든 물질적 소비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적 분야에서도 주류가 되었다. 134
두 사람이 서로 그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위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 147
현대인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동료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현대인의 주요 목표는 자신의 기술, 지식 그리고 자기 자신 곧 ‘인격의 패키지 상품’을 다른 사람-역시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과 공정하고 유익하게 교환하는 것이다. 150
4 사랑의 실천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든지 자기 혼자서 몸소 겪어야 하는 개인의 경험이다. 155
기술의 실용에는 ‘훈련’이 요구된다. 훈련된 방식으로 이 기술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 기술에 숙달되지 못할 것이다. 156
사실 현대인은 일을 떠나서는 자기훈련의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하고 있다. 156-157
‘정신 집중’이 어떤 기술을 습득하는 데 필수조건이라는 것은 거의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자기훈련 이상으로, 정신 집중도 우리 문화에는 드물다. 157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자기 홀로 있기 어렵다는 점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세 번째 요소는 ‘인내’이다. .. 빠른 결과만을 바란다면, 우리는 결코 기술을 배우지 못한다. 158
끝으로, 어떤 기술을 배우는 조건은 기술 습득에 대한 ‘최고의 관심’이다. .. 이술을 배우는 일반적 조건에 대해서 한 가지를 더 보충해야겠다. 우리는 말하자면 기술을 직접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기 전에 다른 많은 일들 - 때로는 일견 관계없는 듯한 일들-을 배워야 한다. 목공 기술을 배우는 자는 나무를 깎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피아노 연주를 배우는 자는 음계 연습부터 시작해야 한다. .. 우리가 어떤 기술에 숙달하려면 삶 전체를 이 기술에 바치거나 적어도 이 기술과 관련시켜야 한다. 자기 자신이 기술 훈련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159-160
정신 집중을 배우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독서를 하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않고 홀로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사실상 정신을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사랑의 능력의 불가결한 조건이다. 161
정신 집중이 되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일이나 중요하지 않은 일이나, 우리의 충분한 주목을 받게 되기 때문에 새로운 차원의 현실성을 갖게 된다. 162-163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신을 집중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한다는 뜻이다. .. 정신을 집중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현재에,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 따라서 지금 무엇인가 하고 있으면서 다음에 해야 할일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할 것도 없이 정신 집중은 서로 사랑하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실행해야 한다. 164-165
모든 일에는 (이루어지는) 때가 있다.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하고) 억지로 할 필요가 있다. 165
우리는 ‘자기 자신에 민감하지’ 못하면 정신 집중도 배우지 못한다. 165
우리는 피곤하다는 느낌, 또는 우울하다는 느낌을 알고 피로감에 젖거나 언제나 신변에 따르기 마련인 우울한 생각으로 우울감을 부채질하는 대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왜 나는 우울한가?’라고 묻는다. 조바심이 난다거나 화가 난다거나 백일몽에 잠긴다거나, 그밖의 도피적 행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 자기 자신의 내면으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는-흔히 오히려 직접적으로-왜 내가 불안하고 우울하고 조바심내는가를 말해줄 것이다. 166-167
내가 앞에서 말한 사랑의 본성에 따르면, 사랑을 성취하는 중요한 조건은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아도취적 방향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만을 현실로서 경험하는 방향이다. .. 자아도취의 반대 극은 객관성이다. 이것은 사람들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이고, 이러한 객관적 대상을 자신의 욕망과 공포에 의해 형성된 상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이다. 169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이다. 이성의 배후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겸손한 태도이다. 객관적이라는 것, 곧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한 태도를 갖게 되었을 때, 어린아이로서 꿈꾸고 있던 전지전능의 꿈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사랑은 자아도취의 상대적 결여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사랑은 겸손, 객관성, 이서으이 발달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에 전 생애를 바쳐야 한다. ..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고 한다면, 나는 모든 상황에 객과적이기 위해 노력해야하고 내가 객관성을 잃고 잇는 상황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172
탈피, 탄생, 각성의 이러한 과정은 필수적 조건으로서 한 가지 성질, 곧 ‘신앙’을 요구한다. 사랑의 기술의 실용은 신앙의 실천을 요구한다. .. 합리적 신앙은 근본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확신이 갖고 있는 확실성과 견고성이다. 신앙은 특벼란 믿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퍼스낼리티 전체에 고루 퍼져 있는 성격상의 특징이다. 173
비합리적 신앙은 오직 어떤 귄위자나 대다수의 사람이 그와 같이 말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합리적 사고는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생산적 관찰과 사고에 기초를 둔 독립된 확신에 뿌리박고 있다. 175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성실할 수 있다. .. 사람에 대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의 또 한 가지 의미는 다른 사람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관계된다. 176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교육과 조작이 갈라진다. 교육은 아동이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도와준다. 교육과 빤대되는 것이 조작이며, 조작은 이러한 가능성의 성장에 대한 믿음의 결여, 그리고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억압해야만 비로소 어린아이가 올바르게 되리라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177
합리적 신앙은 우리 자신의 관찰과 사고의 소산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상을 믿고 있다. .. 합리적 신앙의 기반은 ‘생산성’이다. 곧 신앙에 의거해서 산다는 것은 생산적으로 산다는 뜻이다. 178
신앙을 가지려면, ‘용기’, 곧 위험을 무릅쓰는 능력, 고통과 실망조차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필요하다. 179
여론이나 예측하지 못한 몇 가지 사실이 자신의 판단을 무효화하더라도 타인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고수하는 것, 자신의 확신이 인기가 없더라도 자신의 확신을 고수하는 것, 이러한 모든 일에는 신앙과 용기가 필요하다. 180
사랑은 활동이다.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나는 그나 그녀만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적극적 관심을 갖는 상태에 놓여 있다. .. 잠자는 것만이 비활동에 적합한 상태이다. 각성 상태는 게으름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상태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놓여 있는 역설적 상태는 깨어 있을 때도 반쯤 잘들어 있고, 잠잘 때 또는 잠들고 싶어할 때도 반쯤 깨어 있다는 것이다. 182
모든 활동은 경제적 목적에 종속하고, 수단은 목적이 되었다. 인간은 잘 먹고 잘 입고 있지만 각별히 인간적인 자신의 자질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조금도 궁극적 관심을 갖지 못한 자동 인형이다. 187
인간이 경제적 기구에 이바지하지 않고 경제적 기구가 인간에게 이바지해야 한다. 인간은 기껏해야 이익을 나누어 갖는 데 그치지 말고 경험을 나누고, 일을 나누어 가질 수 있어야 한다. 188
옮긴이의 말
우리는 사랑의 고갈 현상을 야기한 외부적 원인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에 앞서 우리의 내면에서 사라져버린 것,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226
프롬이 지적하고 있듯이 현대 사회가 시장의 교환 원칙에 지배받고 있고, 따라서 인간의 가치도 결국 경제적 교환 가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평가받지 못하고 그 사람의 이용 가치에 따라 평가되는 현실은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지혜도 ‘돈’으로 사고팔 수 있고, 더구나 ‘사랑’ 따위는 이제 감각적 쾌락 내지는 매음(賣淫])으로 전락해버린 현실은 개탄의 영역을 넘어서 있지 않은가. 단적으로 이것이 인간의 사랑을 고갈시킨 외부적 원인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사랑의 알리바이는 되지 못한다. 227
우리가 사랑하려고 애쓰면서도, 참으로 나를 주는 사랑을 하고 싶으면서도 이러한 사랑에 실패하는 원인은 기술의 미숙성에 있다. 229
나라 잃어버린 남자들의 빙충맞음으로 여자들이 당한 수난이었다. 그렇게 고통받은 여자이 도대체 몇 명일까? .. 3만…..아니 5만, …… 7만 ….. 그 전선이 얼마나 넓은데, 10만 …… 심재모는 더 이상의 수를 헤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다 어찌 된 것일까. 분명 해방이 되었는데도 그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한번도 거론된 일이 없지 않았는가. 심재모로서도 그건 너무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임시정부가 귀국해 대대적인 환영식을 벌이고, 광복군이 의기양양하게 귀국해서 기세를 올리고, 죽음을 면한 학도병들은 끌려갈 때와는 정반대의 당당함으로 개선 아닌 개선을 앞세우고 돌아와 조직체를 만들고 법석이었는데, 위안부라는 존재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회는 여자들이 당한 일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겨 잊어버리고 말았을까. 위안부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면 나라 체면을 깎고 위신을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의도적으로 엎어버리고 만 것일까. 여자들 스스로가 창피스럽고 부끄러워 남모르게 꼭꼭 숨어버린 것이었을까. 28-29
무신 바람이 그리 빨를 것이며, 무신 불길이 그리 빨를 것잉가. 고것이야 다 서로 서로 맘이 통혀서 지절로 되는 기맥힌 일 아니겄능가? 근디 말이시, 이 시상 일얼 내다보는 디는 그 눈이 볽아야 써. 둠벙물에도 다 그 줄기가 있디끼, 이 시상 일에도 그 뿌랑구나 맥이 있는 법이시. 무신 일이고 뜸금없이 터지고 맥히는 것이 아니라 다 연관이 있는 법잉께, 그 뿌랑구럴 찾아내고 맥얼 짚을 줄 알어야 시상 일이 지대로 뵈는 법이시. 요분에 터진 일도 그냥 터진 것이 아니라 제주도서 일어난 쌈허고 연관되고, 제주도의 쌈언 단독선거허고 연관되고, 단독선거 반대허고 일어난 것은 재작년 일허고 연관되고, 재작년 일은 해방되고 나라가 반으로 갈라진 디로 연관되는 것 아니겄능가? 나 말 알아묵겄능가? 75
“.. 우리가 사는 것이 혼자서만 살아지는 것이 아니고 서로서로가 서리서리 얼크러지고 설크러져 사는 것인디, 갑오난 때나 지끔이나 앞으로 나서서 싸우고, 죽어가고 헌 사람덜이 워디 자기 혼자 잘살겄다고 그리 혔간디? 잘못된 시상 바로잡아 모다 잘살아보자고 헌 일이제, 앞으로 나슨 사람덜이 믿을 것이 머시겄능가? 자기덜 몸띵이겠는가, 손에 든 총이겄는가? 아니여, 아니여, 고런 것덜 아무것도 아니고, 뒤에 남은 사람덜 맘얼 믿는 것이여. 뒤에 있는 수수많은 사람덜 맘이 자기덜허고 똑같다고 믿는 그 맘으로 쌈도 허고, 죽기도 허는 것이여. 그 믿음이 읎음사 무신 기운으로 싸와지고, 무신 강단으로 죽어가겄어. 지 목심 아껍덜 않은 사람이 워디 있냐고.” 77
문상길 중위의 마지막 유언 “스물 두 살의 나이를 마지막으로 나 문상길은 저세상으로 떠나 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하에 한국 민족을 학살하는 한국 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헤어져 떠나갈 사람의 마지막 바람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81
찬 바람이 일면서 쫄깃서리는 제맛이 나기 때문에 천생 뻘일은 겨울이 제철이었다. 꼬막은 뻘밭이 깊을수록 알이 굵었다. 뻘밭이 깊으면 발이 그만큼 깊이 빠지는 걸 알면서도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건 용기가 아니었고 무모함은 더구나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생계였다. 꼬막을 잡아야만 하루 목숨을 잇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인네들은 살을 찢는 겨울 바닷바람에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어올려 맨살을 드러낸 채 뻘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 앞이 흰 널빤지 위에 왼쪽 다리를 무릎 꿇어 몸을 싯고, 왼손으로 단지와 흰 널빤지끝을 함께 잡고, 오른발로 뻘을 밀며 오른손으로 꼬막을 더듬어 찾는 겨울바람 속의 여인네 모습은 그대로 극한에 달한 빈궁의 표본이었고, 모진 목숨의 상징이었으며, 끈질긴 생명력의 표상이었다. 아니 그것은 눈물이고, 아픔이고, 한이었다. 108-109
가난이란 육신을 배고프게 할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배고프게 만드는 것이다. 최소한의 굶주림을 모면할 길이 없는 빈한 속에서 배움을 얻을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봉건사회의 착취계층은 그 상관관계를 교활하게 이용함으로써 지배계층으로서의 지위까지 대대로 향유할 수 있었다. 대중착취로 부를 축적함과 아울러 대중무지화로 사회 의식이 잉태될 씨부터 말살해 나갔다. 대중의 무지는 개별적인 굴종과 기회주의만을 낳을 뿐이었다. 그 토양 위에 착취계급의 영속적 지배가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무지한 대중은 응집력이 없는 모래와 같다. 모래밭을 응집력을 가진 흙으로 변화시키려면 끊임없이 물길을 대야 하는 것이다. 그 물길이 바로 가르침이고 일깨움이었다. 사회의식을 획득해 가고, 확대해 가는 대중의 응집력-그것은 혁명의 무한한 잠재력인 동시에 원동력이었다. 일제치하를 겇치며 대중들은 일단 왕권의 절대신성이라는 허위를 깨닫고, 더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게끔 되었다. 그런 의식의 변화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대중이 깨닫게 된 인식의 발전이었다.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봉건사회의 거부, 그 인식은 바로 그와 반대되는 정치, 사회구조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것은 모래가 흙으로 변해가는 대중 응집력의 싹틈이었다. 그 상태에서 대중들이 맞이한 것이 해방이었다. 해방은 대중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세상의 실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들의 순박하고 단순한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대중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살기 좋은 세상’이 반봉건적 정치, 사회적 혁명을 거쳐야만 이룩될 수 있다는 필연적 사실까지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대중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일제치하의 극렬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싹터오르는 대주으이 응집력을 혁명의 원동력으로 바꿀 기회를 잃었던 것이고, 해방이 되자마자 그 기회를 잃었던 것만큼 더 열정적으로 대중의 힘을 혁명의 힘으로 불붙여나아가는 과정에서 미제국주의와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134-135
의식화의 필연적 요인 발견, 인간적 신회의 바탕 마련, 점진적인 의식화 작업 착수, 이 세 단계를 거쳐서야 비로소 조직화에 이르게 되는 과정은 최소한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211
단기 4282년 새해는 1월 1일부터가 아니라 2월 11일부터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그 날은 바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본격적 활동이 공개된 날이었다. 301
“.. 일본놈덜헌테 붙어묵은 놈덜이 한둘이 아니고 천지에 쫘악 깔렸는디, 고것덜얼 싹 다 벌헐 수 있을랑가 몰라?” .. “관공서고 워디고 간에 심쓰는 자리넌 다 그 똥 묻은 잡것덜이 차지허고 앉었는디, 고것덜얼 몽땅 콩밥 믹이자고 하먼 나랏일이 워찌 되겄냐 그것이여. 우리 벌교바닥만 해도 읍사무소고, 경찰서고 싹 다 문 닫아뿌러야 헐 것 아니냐 그 말이시.” .. “근디 말이여, 친일파 때레잡는 법얼 맹근 것도 중허고 존 일인디, 토지개혁인가 농지개혁인가 허는 법 맹근다는 소식은 신문에 읎능가?” “고것은 읎는디.” “참말로 사람 환장허겄네웨. 친일파 때레잡는 법보담 그 법이 먼첨 맹글어져야 지대로 되는 순서 아니겄어?” 306-307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인간은 교육으로 재창조죌 수 있으며, 그건 소년기 교육으로 결정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317
청소도 교육이라고 강조한 일본교육의 모습이 변질 없이 그대로 시행되어 어린것들에게 불필요한 노동을 강요한 결과가 바로 그 복도의 반들거림이었다. 320
1946년과 1947년, 2년 동안 무슨 유행처럼 일어났던 교회짓기는 바로 월남한 목사들의 터잡기였다. 350
“.. 참 자네 혹시 해방. 직후에 대표적이 ㄴ정객들이 내세운 정치관을 비교해 본 적이 있는가?” “글쎄에, 어떤 식으로 말인가?” “응, 해방이 되자마ㅏ 새 나라 건설을 전제로 제각기 내놓은 그 사람들의 정치설계를 비교 대조해 보는 거지. 그걸 해보면 현 정권의 문제점이 환하게 드러나네. 해방 직후에 서로 나 잘났다는 정객들이야 부지기수였지만, 그 조직이나 세력으로 보아 네 사람으로 좁힐 수 있잖겠나. 건준을 대표하는 여운형, 임정을 대표하는 김구, 한민당과 손잡은 이승만, 공산당의 박헌영, 그렇겠지. 그런데 해방이 되자마자 김구는 중국땅 중경에서, 여운형과 박헌영은 각각 서울에서 건국강령이라든가 또다른 이름으로 정치설계를 공개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말이네, 세 사람이 제각기 다른 장소에서, 각자의 판단으로 작성한 그것들이 기막힌 일치점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네. 세 사람 모두 토지개혁 단행과 친일파나 민족반역자 처단을 내세운 것이 그것인데, 그것도 각각 열 가지 정도씩이 되는 항목 중에서 그 두 가지를 맨 앞으로 내세워 첫 번째 두 번째 항목으로 잡은 것까지 똑같아. 공통점은 그것뿐만이 아니네. 그 두 가지를 실행하려는 방법까지 똑같에.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하고,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들은 엄중처단하여 일체의 정치참여를 못하게 한다는 것 말이네. 물론 어느 사람은 거기다가 더 강경하게, 평생 동안 투표권도 박탈하겠다고 했지. 그 세 사람이 보인 일치점은 무엇일까. 우연의 일치일까? 그건 절대로 우연의 일치가 아니네. 그거야말로 현실을 직시한 필연의 결과였지. 세 사람의 정치의식이 뛰어나서 그런 일치를 보인 게 아니고, 그 두 가지 문젤 해결하지 않고선 저이가로서 대중들에게 지지나 인정을 받을 수 없게끔 현실상황은 분명했던 거지. 그런데 말야, 그런 확실하고 분명한 정치태도를 표명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바로 이승만이야. 그 무정견한 약삭빠른 기회주의가 미군정과 한민당에 이중으로 업혀 결국 정권을 탈취하게 되었으니, 뭘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 영감탱이야말로 가짜 중에 가짜지.” 손승호는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빈 잔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네. 내가 거기서 등을 돌린 건 그와 반대로 자본주의를 선택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더군다나 무조건적인 반공주의에 협력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결국 상황이 이따위로 획일화되고 말았으니, 결과는 그 꼴을 면할 수 없게 되었거든. 이 직장에 계속 붙어 있으면 앞으로는 더욱더 의무화된 강요를 받아 반공교육을 시키며 적극적인 협력자로 타라갷 갈 거고. 내가 설 자리가 없어. 최소한 날 지키려고, 강요당하는 억지의 삶을 살지 않는 방법은 …… 우선 이 직장을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네.” 그는 침통하게 말했다. .. “그래, 생계 해결이라는 문제와 구분될 수만 있다면 그게 좋은 방법인지도 모르지. 앞으로의 교육은 자넨 물론이고, 의식 면에서 평범한 교사들도 견디기 어려울 만큼 반공체제로 개편될 테니까. 그건,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스스로는 대통령이 아닌 국부로 추앙받기를 원하는 시대착오적인 본건주의자 이승만이 가장 중대하게 생각하는 정책이니까.” 손승호는 쓰디쓰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릴 뿐 더 말이 없었다. 364-367
심재모는 의식적으로 유주상을 ‘유 단장’이라 불렀던 것이다. .. 그 혈색 좋은 허연 얼굴에는 교활과 간사함이 언제나 감돌고 있었다. 그의 교활기는 염상구의 교환과는 사뭇 다른 냄새를 풍겼다. 염상구의 교활은 단순하면서도 썩는 냄새는 나지 않는데, 그의 교활은 복잡하면서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염상구에게는 주먹패의 의리나마 있지만 그에게는 돈과 권력만을 좇는 파렴치함밖에는 없는 것으로 보였다. 382
21 탈주 제보 “어이구, 이거 뉘신가 했드만 김 선생 아니시요?” .. 상업학교에서 무슨 주임인가를 맡고 있는 조한규였다. 김범우는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는 눈길을 돌렸다. 교육자라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간교한 인상을 풍기는 조한규의 얼굴을 마주대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 그가 조한규를 싫어하는 것은 인상 때문만이 아니었다. 일제말엽에 조한규가 자행했던 일련의 행위를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40여 명이 전부인 학생들을 줄을 세우고 구령을 붙여가며 신사참배를 다닌 그 유별난 열성은 접어둔다 하더라도 그는 두 학생을 가미카제 특공대로 설득, 자원시킨 공로로 서장의 표창을 받은 위인이었다. 27-28
무질서하고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모략이 진실을 살해할 수도 있었고, 중상이 순수를 파괴할 수도 있었고, 허위가 진실로 둔갑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34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정당한 사회개혁의 절차를 거쳐 지주계급도 한 사람의 시민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주계급을 보호하고 있는 이남의 체제는 민주주의라는 허울뿐 봉건사회의 답습이고 연장일 뿐입니다. 과감한 사회개혁 없이 이런 식으로 계속되게 되면 사회혼란은 점점 더 심해질 것입니다. 41
괜한 말을 했다는 후회와 불필요하게 긴말을 한 다음의 허탈이 무겁게 밀려왔다. 의식이나 인식의 차이는 어찌할 수 없는 평행선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고 있었다.(선우진 선생과의 대화 후) 42
24 분노의 소작인
정 사장은 .. 법이고 질서라는 것이야말로 돈과 힘의 편이라는 사실을 그는 확고부동하게 믿었다. 왜냐하면 법이나 질서라는 것은 언제 어느때나 돈과 힘이 있는 사람들이 만들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170
25 농민, 그 사무치는 설움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땅이 촉촉하게 젖을 만큼 하염없이 내리는 세우였다. 하늘이 낮았다. 제석산 중턱이 묻히고 선수머리까지의 포구가 반나마 가릴 정도로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큰비라도 쏟아낼 것처럼 험상궂어 보였다. 바람기는 없었다. 어디서 행보를 시작했는지 모를 가랑잎들이 갈 길을 멈춘 채 함초롬히 몸을 적시고 있었다. 그러나 기온은 싸늘했다. 냉기 서린 실비게 읍내가 스사하게 젖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행인이 드물었다. 187
화순탄광의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사람들은 마을마다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뭉쳐졌다. 미군정의 미곡수매에 반감이 쌓일대로 쌓이고, 그 정책을 강압적으로 수행하는 경찰들의 횡포에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사람들에게 화순탄광의 사건은 큰 충격인 동시에 행동에 불을 붙이게 하는 더없는 계기였다. 거기다가 인민위원회가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결속시켰다. 인민위원회에서는 전단을 뿌렸고, 농민들은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구호를 외치며 대열을 이루었다. “공출제도 쳐 없애고 토지개혁 단행하라!" "이북식 토지개혁 그것만이 살길이다!" 이런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각 마을사람들은 읍내로 몰려갔다. 이 마을, 저 마을 사람들은 큰길에서 합류했고, 그 구호는 더 한층 어기차게 11월의 하늘로 퍼져올랐다. 그들의 목소리에 기운이 오른 만큼 징소리 북소리도 크고 빠르게 울렸다. 농민들만이 나선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도 머리띠를 두르고 대열을 꾸몄다. 학생들은 팔을 치뻗어 주먹으로 하늘을 치며 외쳤다. "미군정은 각성하라. 조선은 식민지가 아니다!" "경찰은 각성하라. 어느 나라 사람이냐!" "민족을 살해하는 경찰을 타도하자!" 학생들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영세 상인들도 하나로 뭉쳐졌다.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된 사람들은 경찰서로, 읍사무소로 몰려갔다. 징소리에 맞추어 구호를 외치고, 북소리에 맞추어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의 얼굴은 오랜 굶주림으로 광대뼈가 불거져나오고 볼들이 패어 있었다. 광목 일색이다시피 한 입성들도 궁기가 흘렀다. 그러나 소리를 합친 구호는 힘이 넘쳐났고, 메마른 얼굴얼굴에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지잉, 지잉, 지잉, 징징징...……… 징! "공출제도 쳐 없애고 토지개혁 단행하라!" “민족을 살해하는 경찰을 타도하자!" 둥둥둥둥.....… 두둥둥! "이북식 토지개혁 그것만이 살길이다!" "미군정은 각성하라. 조선은 식민지가 아니다!" 분위기는 갈수록 고조되었다. 그러나 경찰서나 읍사무소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해결 방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총구멍이었다. 대기하고 있던 경찰·소방관·청년단원 들은 시위대가 가까이 가자 총을 쏘아댔다. 시위대의 전진이 멈춰지며 대열이 헝클어졌다. "모두 진정하시오. 저건 공포요!" 빠지고 남자들이 앞으로 나오시오!""겁먹을 것 하나도 없어요. 우린 당당하게 우리 권리를 주장하는 겁니다." "여자들은 모두 뒤로 빠지고 남자들이 앞으로 나오시오!” 인민위원회 청년들과 학생들이 대열을 정비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묶고 있었다. 남자들이 앞으로 나서고 여자들이 뒤로 물러나면서 대열은 곧 정비되었다. 사람들의 굳어진 얼굴에는 더 강한 결의가 드러나고 있었다. "우리는 이 기회에 기필코 우리의 권리를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다 같이 찰떡처럼 뭉쳐지면 틀림없이 우리의 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똘똘 뭉칩시다. 구호도 더 크게 외칩시다. 그리고 정당한 우리의 권리를 찾도록 합시다. 갑시다. 경찰서로!" 경찰은 공포를 쏘아 시위대를 저지할 수 없게 되자 마침내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피를 쏟으며 퍽퍽 쓰러졌다. 시위대에서는 비명과 아우성이 터져올랐다. 대열도 헝클어지고 흩어졌다. 대열은 다시 정비되지 않았다. 총 맞은 사람들을 수습하느라고 아까처럼 앞에 나서는 청년도 학생도 없었다. 대열은 흩어지고, 사람들은 총소리에 계속 쫓겼다. 경찰들은 공포를 쏘아대며 뒤쫓고 있었고, 사람들은 자기네 동네 쪽으로 각기 밀려가고 있었다. 총에 맞은 사람들에 대한 불안과 경찰에 대한 분노를 안고 사람들은 동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총 앞에서 맨주먹으로 버틸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경찰은 그날 밤 총을 꼬나들고 각 마을을 덮쳤다. 주모자들을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기습은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런 수법을 일정 때부터 겪어온 데다가, 특히 화순에서 경찰이 저지른 행투를 알고 있는 인민위원회 사람들이나 학생들은 미리 피해버렸던 것이다. 경찰들이 집집마다 뒤지고 다니며 폭행을 가하고 협박을 하고 해서 사람들의 분노는 더 뜨거워졌다. 다음날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 내내 내는 조용했다. 그리고 모든 마을도 평온할 뿐이었다. 그런데 밤이 깊어지자 제석산에 봉화가 타올랐다. 그 봉홧불을 따라 마을마다 둥둥둥 두둥 둥둥 두둥 두둥 두둥.....…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어둠을 헤치고 마을 당산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각기 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 무기는 각양각색이었다. 대창이 제일 많았고, 쇠스랑·괭이낫 같은 농기구를 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이 그런 무기들 말고 공통적으로 지닌 무기가 있었다. 그건 허리에 찬 망태기나 보자기에 담은 감자 크기만큼씩 한 돌들이었다. 경찰의 총알에 맞서는 그들의 총알이었다. 구호를 외치지 않고 어둠에 몸을 감추고 읍내로 밀려든 그들에게 경찰서와 읍사무소는 삽시간에 장악당하고 말았다. 경찰은 미처 몇 방의 총을 쏘아보지도 못하고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낮의 조용함에 방심한 경찰에서는 서너 명만을 숙직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들은 누구인지 모를 많은 발에 채이며 쏟아지는 욕들을 고스란히 먹어야 했다. 그러나 경찰이 두 명을 죽이고, 여섯 명을 부상 입힌 것처럼 그들은 경찰을 죽이거나, 죽게 패지는 않았다. 그들은 경찰서와 읍사무소를 뒤져 미곡수집대장을 찾아내서 불 질러버렸다. 다음날부터 싸움은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다른 지방에서 경찰병력이 밀려들었고, 그 뒤를 기관총을 단 미군 지프차들이 따랐다. 동네마다 들이닥친 경찰들이 젊은 남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갔다. 집집마다 남자들은 뒷산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경찰은 그들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그날 밤 다시 봉화가 오르고, 북소리에 징소리까지 울리면서 남자들은 모여들었다. 그들은 또 어둠에 몸을 감추며 읍내로 나아갔다. 읍내에서는 오래도록 총소리와 사람들의 외침이 뒤섞여 울리고 있었다. 양쪽이 서로 죽고 다친 그날 밤의 싸움을 고비로 농민과 학생들의 기세는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경찰이 인민위원회 사람들을 잡아내려고 혈안이 된 데다가, 젊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갔고, 읍내 안통으로 이어지는 길목길목에다가 모래가마니를 쌓아올리고 언제라도 총을 갈겨댈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싸움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힘을 합쳐 경찰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피했을 뿐 한두 마을씩이 합쳐져 여기저기서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 싸움이야말로 경찰들을 더 신경질나게 만들었고, 괴롭히는 방법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공격표적을 친일파나 악질지주로 바꾸었기 때문에 경찰은 피해를 입은 그들에게 항의를 받고 시달림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친일파들은 나무에 거꾸로 매달리기가 예사였고, 눈치 없이 불호령을 놓다가 대창이나 쇠스랑에 찔려 죽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악질지주들의 쌀창고는 문이 박살나 속이 텅 비어버리기 일쑤였다. 악이 받칠 대로 받친 경찰들은 장터거리에서든 마을 고샅에서든 개머리판으로 사람을 개 패듯 했고, 청년단원들은 제철을 만난듯 몽둥이며 자전거 체인을 말아들고 다니며 닥치는 대로 폭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들도 혼자서는 어느 마을에도 접근할 수가 없었다. 혼자 나돌며 그런 짓을 했다가는 누구의 손에 당했는지 모르게 목숨이 끊어져 철둑에 버려지거나, 농가의 커다란 똥구덩이에 처박혔다. 처음에 그런 꼴을 당한 경찰이나 청년단원이 네댓이었다. 그 뒤부터 그들은 대여섯씩 패를 짜게 되었다. 젊은 남자들이 당하는 수난은 말이 아니었다. 젊은이들은 무조건 잡혀 들어갔고, 뼈가 부러지는 매타작을 당하며 주모자로 몰렸고, 결국에는 빨갱이가 되어 죽거나 감옥살이로 넘어갔다. 젊은이들은 경찰과 청년단의 무자비한 손길을 피해 도망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 군대였다. 새로 조직을 만들어놓고 자원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군대는 그들에게 더없는 좋은 은신처였다. 그리고 그들도 무장을 갖출 수 있는기회이기도 했다. 날이 날마다 들려오는 것이 소문이었다. 나주에서 수천 명이 일어났다고 하는가 하면, 다음날이면 해남에서 또 수천 명이 일어났다고 했고, 그 다음날이면 영산포에서 일어나 얼마가 죽었다고 하고, 또 그 다음날에는 무안에서 얼마가 일어나 얼마가 죽었다는소문이 잇따라 들려왔다. 11월이 저물어갈 때까지 그런 소문이 빠진 날이 거의 없었고, 소문의 반만 잡는다고 하더라도 한 달 동안에 죽어간 사람들의 수는 수천을 헤아렸다.결국 농민들만 수없이 죽어간 채로 11월의 커다란 싸움은 끝났다. 미곡수매는 더 강력하게 시행되었고, 경찰들은 더욱 인정사정없이 몰아쳐댔다. 기가 꺾일 대로 꺾여버린 농민들은 당장 끓일 쌀이 없어도 할당량을 채우기에 숨을 헐떡거려야 했다. 사람은 죽었으되 시체도 찾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한은 그 밑에 깔려 또 한 겹의 켜를 이루었다. "그려라, 요리 말얼 혀바도 결국에는 천불만 끓어올께 말얼 허덜 말아야제라. 참말로 나넌 해방만 되면 배 안 곯고 사는 존 시상이 올 줄 알았는디………….” 목골댁이 어깨를 부리며 말끝을 흐렸다. "염상진이 그 사람, 딱 한 가지 잘못한 것이 있구만." 남양댁이 느닷없이 말이었다. "그 사람이 멀?" 조성댁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고, 장흥댁과 목골댁도 의문스럽게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들 체면 보지 말고 술도가놈얼 그때 죽였어야 허는겨!"남양댁은 야멸치게 내쏘았다. “워메, 저 뜸금없는 소리 허는 것 잠 보소. 겁나게 징허시"장흥댁이 놀란 얼굴로 어이없어했고, 조성댁은 기가 질린 표정으로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고, 목골댁은 아랫입술을 문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못쓰겠다. 요리 앉었다가 집안 망칠 중죄인 되었다. 싸게 파허자." 장흥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망칠 집안이나 머 있고라?" 목골댁이 말을 받으며 따라 일어섰다. "워따, 염병한다.” 조성댁이 목골댁의 어깻죽지를 치며 눈을 흘겼다. 202-209
27 우리의 국토를 양단시킴으로써 민족을 분열시키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하려 한다 - 백범 김구
“하늘이 세상만물을 창조하실 ㄸ 상호간에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생존해 나갈 수 있는 질서와 지혜를 주셨지. 그 질서를 인간의 말로 하자면 먹이사슬이고 지혜는 동면을 위한 영양섭취나 갈무리가 되겠지. 그런데, 만물 중에서 유일하게 하늘의 뜻을 거역한 존재가 일찍부터 있었어. 그게 바로 인간이야. 하늘이 내린 지혜를 활용하되 탐욕적 이기(利己)를 채우는 무기로 악용하기 시작한 거야. 인간의 역사란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지혜를 악용해 가며 인간끼리 살육을 되풀이해 온 기록에 불과해. 뱀이나 개구리가 동면을 위한 영양섭취를 하나 다음 해 봄까지 빈사상태로 견딜 수 있을 정도만 하는 것이고, 개미나 벌이 겨우살이 갈무리를 하지만 마찬가지로 해동이 될 때까지 필요한 최소량의 먹이만을 보관해. 그런데 인간은 어떤가. 다음 해 봄까지가 아니라 자신의 평생을 위해,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자손대대로 이어질 갈무리를 하고자 탐욕한 것이야. 그 탐욕의 부가 상대적인 빈을 낳게 되고, 더 큰 탐욕을 채우고 지키기 위해 필연적인 폭력이 조직화되고, 그 폭력에 대항하고자 하는 또다른 힘이 결속됨으로써 필연적으로 살육이 자행되는 것 아닌가. 먹이다툼을 해서 동류끼리 살육을 자행하는 것도 인간뿐이야. 동물끼리 상대방의 생활터전이나 사냥터를 침범하지 않는 것은 모든 동물들의 불문율이네. 동물들이 동류끼리 싸우는 경우가 있긴 하지. 그러나 그건 먹이 때문이 아니라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수컷들의 힘겨룸이지. 힘세고 건강한 수컷이 암컷을 차지함으로써 우량한 새끼를 낳게 하려는 것, 그것이야말로 싸움이 아니라 종족보존을 위한 신성한 의식 아닌가. 그런데 인간들이 스스로를 일컬어 뭐라고 했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건 신의 섭리를 거역한 존재로서 당연히 저지르게 된 자만이야. 탐욕과 자만으로 가득 찬 인간사회는 착취를 위한 폭력이 조직화되고 상대적으로 인간의 노예화와 굶주림이 상습화되었네. 모든 만물은 신의 섭리에 따라 골고루 나눠 먹고 겨울을 무사히 넘기는데 인간만은 헐벗고 굶주려 죽어갈 수밖에 없게 된 거야. 그건 인간들 스스로가 만든 지옥이지. 그 지옥 다음에 올 것이 무엇이겠나. 파멸이지. 그 극점에 이르러 하나님은 인간들을 일깨우고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를 보내신 거야.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하신 말씀이 '서로 사랑하며 고루 나누어 먹으라는 것이었네. 곧, '박애의 실천'으로 스스로 만든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을 얻게 되리라는 일깨움이었지. 그러나 인간들은 그 일깨움을 알아듣지 못했어.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천한다는 성직자들까지 인간의 탐욕과 자만을 키워 하나님을 욕되게 했네. 중세 암흑시대가 그 좋은 증거 아닌가. 성직자들까지 그 모양이었으니, 인간이란 과연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 존재인지 회의로워. 나 스스로부터 말이야. 그런 회의를 바탕으로 하여 보자면 인간의 역사는 끝없이 발전한다는 변증법적 논리나, 물질중심의 가치체계로 인간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드는 유물론이나 다 동의할 수가 없어 난 크리스천 입장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유물사관이나 마르크시즘을 상대적 감정으로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야. 지배와 피지배로 얼룩져온 인간사의 과정을 통해 볼 때 그런 것들의 발생은 충분한 당위성을 가지고 있어. 또, 인간사의 모순을 해결하고 불합리를 개혁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그런 것은 소중하고 값진 거지.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내는 그 어떤 새로운 주의나 주장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고, 인간의 행복을 절대적으로 보장할 수가 없네. 왜냐하면 인간이란 탐욕과 자만을 근본적으로 버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야. 인간이 탐욕과 자만을 버리지 못하는 한 제아무리 새로운 주의나 사상을 내세워도 거기에는 또다른 모순과 불합리를 내포하게 마련이야. 마르크시즘은 핍박받는 민중을 혁명세력으로 응집시킴으로써 최초의 불꽃이 되었고, 혁명을 성취시킴으로써 최후의 불꽃이 되었네. 공산주의 정치체제를 수립함으로써 마르크시즘은 정작 살해당하기 시작한 거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내세움으로써 새로운 지배계층이 형성되었고, 그에 따라 공산주의적 계급사회가 이루어지면서 공산주의적 귀족이 생겨나게 되었지. 그리고 전인류적 인민해방이라는 미명하에 코민테른이란 국제조직을 만들어 세력 팽창을 꾀했는데, 소련의 그 팽창주의가 황금만능이란 자본주의를 앞세운 미국의 패권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나로선 구분이 안 되는구먼.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근본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고, 그 어떤 것도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네." 그래서 그분은 기독교사회주의의 실천이 그 길이라 믿고, 자신의 농토를 공동소유화해서 몸소 농사를 짓는 생활을 한다는 결론이었다. 그분을 교장 자리에 끌어내고자 했던 자신의 의도가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나를 생각하며 손승호는 그분이 전에 했던 말을 새롭게 되새기고 있었다. 319-322
29 대나무 전설
“우리가 이렇게 양쪽으로 갈라져 싸우는 것은, 아니, 싸운다고하는 것이 말이 될지 모르겠는데, 이게 대체 누구 잘못인가요? 꼭 미국이나 쏘련의 잘못일까요?” … “원장님 말씀은 …… 바로, 분단의 책임은 누구한테 있느냐 하는 것인데요. 글쎄요. 그게 한마디로 하기는 불가능한 일일 것 같습니다. 지금 원장님께서 의문을 표시한 대목만 잡아 말하자면, 물론 미국과 쏘련만의 책임일 수 없습니다. 각 개인의 집에 주인이 있듯이 한 나라에도 분명 주인이 있스빈다 어느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도둑이 든 것까지는 주인의 책임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들어온 또둑에게 어떻게 대처하고, 무슨 방법으로 몰아낼 것이냐 하는 것은 주인의 책임입니다. 도둑을 맞아 한 집안이 망하게 되었을 때, 도둑은 그 집안을 망하게 한 원인일 뿐이지, 책임을 물을 대상은 아닙니다. 도둑은 직업상 책임을 지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다만 그 집안 사람들이 비겁하고 빙충맞아 자신들이 져야 할 책임을 도둑에게 전가시킬 수는 있겠지요. 아니면, 무식하고 아둔해서 원인과 책임을 구분조차 못하고 있거나 말입니다.” “.. 그런데 도둑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들었는데 어째서 힘을 합쳐 도둑들을 몰아낼 생각은 안 하고 양쪽으로 갈랒 도둑들 편을 드나요?” … “먼저 외적인 원인과 내적인 원으로 대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적인 원인을 다시 열강들의 국제정치 역학과 이데올로기의 상충으로 나눕니다. 국제정치 역학은 세계 2차대전 전과 후로, 이데올로기의 상충은 미쏘의 냉전상황으로 세분합니다. 그리고 내적인 원인은 사회적인 측면과 정치적인 측면으로 구분합니다. 사회적 측면은 다시 전통적 인습사회와 서구적 개조사회로, 정치적 측면은 식민지시대와 해방후 시대로 나눕니다. 또한 서구적 개조사회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로, 식민지시대 저치는 보수적 독립운동과 진보적 독립운도으로, 해방후 시대 정치는 식민지시대 정치세력과친일세력으로 세분됩니다. 대충 이렇게 갈라놓고 보면 외적인 원인은 수평적이고 횡적이 되며, 내적인 원인은 수직적이고 종적이 되어 상호 교차하게 됩니다. 위에서 구분한 항목들을 따라 세밀하게 조사하고, 그것들의 상관관계를 따져가며 종합하게 되면 원인이 규명되지 않을까 생가하고 있습니다. ..” 391-393
있는 집 자식으로 아무런 고생을 모르고 자라 영문학을 전공했고, 지주의 기득권을 천부적 절대권인 것처럼 믿어 그 부(富)가 형성된 과정의 모순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하거나 회의해 본 적이 없는 사나이. 그러므로 시대의 흐름이나 사회의식의 변화를 이해하거나 수용하지 못한 채 스스로의 우리에 갇혀 불행을 키워가는 연약한 사나아. 가문의 재산이나마 보호되어 있으면 모르되 빈손에 혈혈단신이 되어버린 처지에 세파를 헤쳐나가기에는 부적격한 사나이. 김범우가 긴 복도를 걸어나오며 정리하고 있는 선우진이었다. 399
30 전라도
부처님이야 부부는 3천 년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이라고 하셨지만, 모자라는 소견으로 보면 제비뽑기 요행수 같은 것이 남녀의 만남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447
“남 서장,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오. 김범우 그놈이 나한테 뭐랬는지 한마디만 해주겠소. 아무리 공산주의 활동을 한 자라도 재판을 거치지 않은 처형은 있을 수 없고, 피해자 가족의 감정이 개입된 보복행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떠들었소. 용공주의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함부로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소. ..”(국회의원 최익승이 남인태서장에게 한 말) 14
해방이라는 것은 참으로 느닷없이 떨어진 벼락이었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불길이었다. 대일본제국이 망하다니…… 그건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세상 판세 돌아가는 것을 빈틈없이 읽어낸다는 소위 지식인이란 사람들은 일본이 적어도 200년 동안은 조선땅을 지배하게 될 거라고 했고, 그 사실을 의심 없이 믿지 않았던가. .. 200년은 곧 영원이었고, 조선이란 나라는 없어지게 되어 있는 운명에서 고작 육심 평생을 살다 가는 인생 설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너무나 자명한 결론이었다. 내선일체에 앞정서며 살아온 인생에 예고 없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죽음과 맞닥뜨리는 절망이었다. 그러나 그 암담한 절망은 결ㅋ 오래가지 않았다. 해방이 몰아온 그 거센 바람을 요령껏 피하고, 그 성난 물결을 눈치껏 타넘을 수 있는 기회가 뒤따라왔던 것이다. 그 결과 어둠으로 앞을 가로막았던 해방이라는 흉물은 정반대의 광명을 가져다준 보물로 둔갑했다. 일정시대의 사업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이란 권력까지 손에 쥐게 해주었던 것이다. .. 군정이 베풀어준 두 가지 은혜에 대해서 그는 그저 감읍하고 감읍할 따름이었다. 미군은 군정을 실시하자마자 민심을 선동해 대고 있던 공산당을 외면하고 한민당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일본식의 통제방법을 전면 폐지하고 미국식의 ‘자유시장’체제를 실시했던 것이다. 그는 재빨리 기부금을 내고 한민당원이 됨으로써 정치적 신분보장을 확보했고, 자유시장체제의 허점을 신속히 파악함으로써 경제적 이익의 확대를 꾀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나갔다. 보성군 일대를 정치발판으로 삼아 한민당 조직을 지주 중심으로 짜나가는 한편, 그 조직을 이용해서 무작정 쌀을 사들였다. .. 일정시대부터 사업을 해온 손 큰 사람들은 뒤늦게 자유시장체제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서로 다투어 매점매석에 뛰어들게 되었다. 다만 그는 남들보다 서너 달이 빨랐을 뿐이다. 시장마다 쌀이 동났고, 쌀값은 날이면 날마나 치솟기 시작했다. 한 달 사이에 세 배로 오르다가, 두 달 사이에 여덟 배로 뛰어올랐다. 쌀을 창고에서 잠을 재울수록 돈은 불어나고 있었다. 19-21
군정은 6개월 만인 147년 2월에 쌀의 자유거래를 중단시키게 되었다. 걷잡을 수 없는 쌀값의 폭등과 품귀현상을 막기 위해 내려진 조처였다. 그 대안으로 군정은 배급제를 내놓았다. 그건 일정말기 방법으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 한민당의 조직을 통해서 그런 조처가 내려지리라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고, 그동안 재산을 막대하게 불려놓았던 것이다. 23
쌀값은 9월까지 줄기차게 올라 자유거래를 실시할 당시보다 300배가 넘어 있었다. .. 해방 직후 한 달 가까운 동안 풍전등화 같던 신세가 가장 위력 있는 정당인 한민당의 지구당위원장으로 발판이 확고해졌고, 거기다가 재산까지 어마어마하게 느렁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미군정이 아니었으면 이룰 수가 없는 은혜로움이었고, 보살핌이었다. 미국이야말로 생광의 나라요, 은혜의 나라요, 부모의 나라가 아닐 수 없었다. 24
“곧 군부대가 주둔하게 될 모양입니다.” .. “별로 많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 “글쎄요, 벌교까지 군대가 주둔할 필요가 있을까요?” “작전상 그런 모양이라 하더군요. 벌교 자체의 문제보다도 전체적 소탕계획에 따라 이뤄지는 일이라고 해요.”(김범우의말) 전 원장은 간접화법을 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 원장도 그 소식을 들으며 읍내의 군대 주둔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는 반증이었다. 38
김씨 문중은 일본 서장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걸찍한 집안이었다. 43
12 구만리 장천을 떠도는 구름
누가 좌익이 되고 잡아 좌익이 되간디? 옳은 소리 혀도 좌익, 바른 소리 혀도 좌익, 다 좌익으로 몰아쳐서 꼼지락달싹 못허게 맹그는 판잉께, 좌익질도 한분 똑바라지게 못혀보고 경찰이 맹근 대로 좌익죄 받느니 진짜배기 좌익질이나 한판 해뿔고 보자 허고 남정네덜 맘이 서로 통헌 것 아니겄능가. 고런 속사정 다 암스롱도 자네가 외서댁 볼 때마동 그리 에맨소리 해싸먼 서로 졸 것이 머시가 있능가.” 왕주댁은 샘골댁을 달래는 듯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외서댁은 왕주댁에게 더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57
미곡수매라는 억지법이 생기면서 입 달린 사람이면 누구나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미군정을 욕했고, 한민당을 욕했고, 경찰들을 욕했다. 그런데 경ㅊ찰에서는 그런 욕을 하는 사람들을 무더기로 잡아들여 몽둥이찜질을 해대며 좌익으로 몰아붙였다. 그래도 욕하는 사람들은 늘어만 가고, 손이 모자라게 된 경찰에서는 소방관들과 청년단까지 동원했다. 그렇게 되니 사람들은 소방서나 청년단에 끌려가서 매타작을 당했다. 갑자기 경찰서가 셋으로 불어난 셈이었다. 사람들의 원성이 더 커지는 가운데 좌익으로 생각을 돌리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즈음에 남편이 숨죽여가며 마을사람들에게 열성으로 손을 뻗친 것을 외서댁은 잘 알고 있었다. 59
마침내 고대하고 고대하던 세상이 왔다고 남편은 있는 대로 활갯짓을 쳤지만 그녀는 좀처럼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건 시아버지 때문인지도 몰랐다. 시아버지는 남편이나 그 사람들이 하는 일을 마땅찮아했다. 지주들이 아무리 못된 짓을 했고 부자들이 아무리 미운 짓을 했어도 그렇게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들몰댁의 생각) 71
말이 좋아 농지분배였지 진작에 부자나 지주들과 한패거리가 되어버린 군정이 한 일은 배부른 놈 더 배불려주는 것일 뿐이었다. 소작인들은 벌써부터 군정을 믿지도 않았고, 신용하지도 않았지만 그 일로 더욱 그들이 꼴사나운 ‘양코배기’고 ‘양귀신들’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 군정은 그보다 몇 달 앞서서는 소작료를 삼칠제로 내린다고 했었다. 반타작 오오제에서 삼칠제가 된다는 것은 눈이 번쩍 띄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추수를 하게 되자 지주들은 누넹 불을 달고 호령을 해댔던 것이다. “누구 맘대로 삼칠제여, 삼칠제가! 삼ㅊ칠제 주장허는 놈덜언 당장나서봐. 영영 소작 띠고 말 것잉께. 땅임자는 나고, 억울허먼 군정에 가서 남치지 물어도라고 혀!” 그 서슬 앞에서 고개 들고 입 놀릴 작인은 없었다. 지주들은 반타작을 밀고 나갔고, 군정에서는 지주들이 하는 일을 모른 척하고 말았다. 73-74
“양코배기도 양코배기제만 그 앞장서서 설레발치는 관공서놈덜이고 순사놈덜이 더 문제시.” “금메 말이여, 고 잡녀러새끼덜언 일정 때넌 왜놈덜 앞잽이로 그리 날치등마 인자 양코배기덜 앞잽이로 또 그리 날쳐대니 오것이 무신 염병헐 놈에 일이당가.” “긍께 쳐죽일 놈덜이제.” 사람들은 모여앉기만 하면 분을 끓였다. 75
“이 사람아, 내 죄럴 이리 키워놓을 수가 있는가. 자네의 깊은 속어찌 모르리. 내 무슨 말을 더 할까.” 정 참봉은 월녀를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월녀는 그 품에서 비로소 쏟아지기 시작하는 눈물을 흘렸다. 정 참봉이 조끼주머니에서 꺼낸 한지에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素花’였다. “고맙구만이라, 고맙구만이라.” 월녀는 방바닥에 엎드리며 흐느꼈다. 108
13 냉철한 비판을 생리로 가진 역사의 정체는 무엇인가
해방의 소식과 더불어 지리산을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자 자신을 맞이한 것은 기쁨에 넘쳐 있는 읍민들이었다. 못 먹어 메마르고 억눌림에 찌들었던 얼굴들에 밝은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그 밝게피어난 얼굴 얼굴에 어울리게 활갯짓도 시원스러웠다. 자신을 대하는 어떤 사람의 눈길에서나 신뢰와 반가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무슨 일인가를 어서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그들 자신이 벌써 그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친일파나 일본에 붙어먹은 것들은 모두 몰아내고 새 사람들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일치를 보이고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자신은 안창민과 손승호 등을 규합해서 민중들의 그런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군단위 조직을 서둘렀다. 그 조직을 통해 동네마다 이장이 바뀌면서 동시에 건준지부가 결성되었고, 전국 형무소에서 2만여 명의 독립투쟁자들이 석방되었다는 소식을 뒤따라 김태규 선배를 맞이했고, 읍민들은 열렬한 환영을 보냄으로써 독립투쟁자가 겪은 고통을 영광으로 바꿔주었고, 그 아낌없는 박수가 과거의 노고에 보내는 것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라는 것을 민중들은 일깨우고 있었고, 조선인민공화국 선포에 따라 건준지부는 인민위원회로 바뀌면서 새 나라 세우기는 거침없이 이루어져갔다. 일체의 친일반민족세력이 제거된 상태에서 민중들은 인민위원회에 적극적으로 호응했고, 인민위원회를 맡은 책임자들은 민중들을 위해 헌신했다. 지주나 유지가 인민위원회에 개입한 경우는 김사용 같은 양심적이고 신망 있는 사람에 한했다. 읍이나 면단위에서 그들의 죄상 유무를 가려내는 데는 새로운 심사나 기준이 하등 필요하지 않았다. 읍민이나 면민들이 먼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거침없고 막힘 없던 새 나라 세우기는 미군의 점령과 함께 실시된 군정의 조선인민공화국 부정으로부터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군정의 인공 부정은 혁명적 인민의 나라를 파괴하는 1단계 공작이었다. 그리고 미군정은 연속적으로 파괴공작을 펴나갔다. 각 지역으로 군정중대를 파견한 것이 2단계 공작이었고, 그 조직을 이용해 반민족세력인 경찰과 관리를 재등장시킨 것이 3단계 공작이었다. 그리고 경찰을 무장시킨 다음 모든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를 강압적으로 해체시켜 나간 것이 4단계 공작이었다. 따라서 인민위원회 해체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공산당 활동 불법화와 동시에 체포를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 5단계 공작이었다. 공산당의 합법활동은 지하활동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고, 인민위원회 조직이 다 깨어진 상태에서 대부분의 간부들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자신도 예외일 수 없었고, 감옥에 가서 보니 해방이 되고 풀려난 독립투쟁자 3분의 2가 다시 잡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정치하에서 경찰질을 해먹었던 자들의 손에 다시 잡혀 들어온 그들의 죄목은, 일본이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인 것처럼 ‘독립투쟁자’에서 '공산주의자'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자신들의 조직이 지하화되자 군정의 폭력적 파괴공작은 가속화되었고, 그에 맞서기 위해 자신들도 무장투쟁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정은 남쪽에 미국식 정권을 세우기 위해 혁명세력의 말살을 추진하는 한편으로 강제적 경제정책인 미곡수매로 인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강제로 시행된 미곡수매와, 관리들의 부정으로 균형을 상실한 배급제도 때문에 인민은 굶주림에 시달리며 군정에 대한 불만을 키워갔다. 그 불만이 최초로 폭발한 것이 화순에서였다. 첫 번째 맞이한 해방기념일에 광부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시위를 벌였고,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광주를 향해나아갔다. 광부들의 생활 대책을 해결하라는 그 경제성 시위는 군정에 대한 인민들의 최초의 도전인 동시에 군정의 경제정책 실패를 입증하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 중대성을 인식했던 것인지 군정은 그들의 관례를 깨고 미군들을 직접 내세워 시위진압에 나섰다. 미군들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자동차들을 동원해 시위자들을 위협하는 한편 설득작전을 폈다. 곧 요구조건을 들어 해결해 주겠으니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시위대는 그 말을 믿고 화순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것이 시위를 막으려는 미봉책이고 기만이었다는 것은 얼마 가지 않아 드러났다. 군정은 한 달이 지나고, 다시 한 달이지나도 아무런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다. 굶주림에 지친 광부들은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고 다시 들고일어났다. 그 시위는 전보다 사람 수도 많았고, 움직임도 더 격렬했다. 미군들의 대응도 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그들은 탱크를 동원했던 것이다. 10월이 끝나는 날 시작된 미군의 폭력진압은 그들의 잔인성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들은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맨몸의 시위 군중을 탱크로 밀어붙이며 총격을 가해 사람들을 죽였던 것이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쌀 배급이 중단되면서 터지기 시작한 민중항쟁은 경상남도 전역으로 불붙어내려와 마침내 섬진강을 건너 전남으로 그 불길을 옮기게 되었다. 동학농민봉기가 전북에서 일어나 그 불길이 삽시간에 전남을 뒤덮고 섬진강을 건너 경남으로 옮겨붙은 것과는 반대의 경로를 밟은 것이었다. 서로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산맥으로 막혀 있는 두 지역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가 섬진강이었다. 10·1항쟁의 불씨를 품은 바람이 섬진강을 건너와 전남에서 제일 먼저 불꽃을 피운 곳은 화순이었다. 화순은 삼팔 이남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의 탄광지대였기 때문에 일제시대부터 주된 경제권은 다른 지방과는 달리 농토를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탄광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따라서 사회변혁세력도 3천여 명을 헤아리는 광부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일제 때부터 철도청이 있었던 순천의 철도 노동자, 항구로서 일본과의 뱃길이 열려 있었던 여수의 부두 노동자와 함께 지방적 특성을 강하게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해방이 되면서 화순에는 예기치 못한 이변이 밀어닥쳤다. 일본이 물러가면서 사회변동이 생긴데다가 삼팔선이 그어짐에 따라 석탄 소비량이 격감되어 생산이 반으로 줄어버리자 광부들은 날로 심해지는 생활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더구나 쌀을 공출하고 배급을 타먹도록 통제된 군정의 미곡정책 아래서 쌀을 공출한 실적이 없는 그들은 쌀배급마저 제대로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날로 심해만 가는 굶주림 속에서 그들이 살아날 가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마침내 지난 8월의 시위에서 속은 분노와 경상도에서 번져온 불길과 함께 일제히 들고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이 10월 끝날이었다. 그들은 다시 도청소재지인 광주를 향해 나아갔다. 이번에도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미군들이었다. 언제나 경찰을 앞세우고 자신들은 뒤에서 조정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는 그들이 두 번째로 그 원칙을 깬 것이다. "우리는 굶어죽을 수 없다. 채탄작업을 정상화하라!" “석탄생산 복구시켜 우리 생계 해결하라!" 3천여 명의 광부들이 미군의 저지에 맞서며 구호를 부르짖었다. 그 대열 속에는 광부만이 아니라 때 묻은 머릿수건을 쓴 아낙네들과 굶주림으로 비쩍 마른 아이들도 끼여 있었다. 미군은 또 설득을 하고 나섰다. 그러나 시위대는 그 말을 듣지않았다. 지난번에 한 번 속은 것으로 족했던 것이다. 설득작전이 먹혀들지 않자 미군 대령이 나섰다. 자기를 믿으라고, 틀림없다고, 요구사항을 금방 해결하겠다고 미군 대령은 자기의 계급을 내세우며 믿어달라고 했다. 전과 다른 높은 사람이라서 광부들은 믿기로 했다. 그래서 시위행진을 중지하고 대열을 다시 화순으로 돌렸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경찰력이 투입되어 주모자 색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자신들을 똑같은 거짓말로 속이고, 보복행위까지 가하게되자 광부들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그들은 총을 가진경찰들에게 맨주먹으로 맞붙었다. 광부들의 기세에 경찰들은 총을 쏘아댔다. 경찰의 총알에 광부들이 무기로 하여 맞선 것은 채탄작업에서 캐낸 돌멩이들이었다. 아무리 총을 가졌다고 하지만 오랜 굶주림에다가 분노까지 겹친 수많은 사람들의 결사적 대항을 이겨내지 못하고 경찰들은 쫓겨갔다. 경찰의 총에 부상당한 동료들의 피를 보자 분노가 더욱 거세어진 광부들은 또다시 광주를 향해 성난 물결이 되어 밀려갔다. 그러나 그들은 광주에 다다르지 못하고 미군에게 앞을 가로막혔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밀고나갔다. 미군들은 그들을 향해 총을 갈겨댔다. 그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변했다. 사방으로 흩어진 그들은 돌팔매질을 퍼부으며 미군들에게 맞섰다. 그리고 돌격대를 만들어 미군 지프차를 공격했다. 여러 사람이 통나무를 지프차 밑에 밀어넣었다. 그리고 지프차를 엎어버렸다. 그들은 매일같이 갱도를 뚫어나가는 생활 속에서 통나무다루기는 그 누구보다 익숙했던 것이다. 막장의 삶을 살아온 고통스러운 인내를 목숨을 내건 살기로 바꾼 광부들의 대항은 악착스럽고 처절했다. 그들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미군들은 도망쳤다. 그러나 미군들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들 또한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글이글 불붙은 석탄덩어리가 된 그들이 광주로 치달아갈 때 그 앞을 차단한 것은 미군의 탱크였다. 탱크는 그들의 머리 위에다 불을 토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공포라고 하지만 소총에 비해 그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차량도 미군들도 몇 갑절 늘어나 있었다. 기동성이 빠른 미군들이 인접 지역에서 동원된 것이었다. 아무리 기를 쓰고 돌멩이를 던져도 쇳덩어리인 탱크는 끄떡도 하지 않고 불을 토하는 괴물로 그들을 밀어붙였다.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건 탱크포만이 아니었다. 탱크포와는 달리 소총은 그들의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광부들은 허기진 피를 토하며 땅바닥에 죽어넘어졌고, 부상을 당해 쓰러졌다. 그들은 동료들을 떠메고 쫓길 수밖에 없었다. 쫓기는 그들을 향해 쇳덩어리 괴물은 계속 불을 토하며 육박해 오고 있었다. 누가 죽고, 누가 다쳤는지를 알 수도 없이 제자리로 쫓겨온 그들을 에워싼 것은 미군들과 경찰이었다. 경찰들은 미군 덕에 되살아나 미군을 위해 충성했던 것처럼 다시 미군들의 엄중한 보호를 받아가며 주모자 색출을 하기 시작했다. 세 명이 즉사했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미군들은 사망자는 물론 부상자들마저 아랑곳하지 않은 채 50여 명을 주모자로 체포해 갔다. 그러나 광부들의 저항은 끝나지 않았다. 처음처럼 전체가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산으로 숨어든 사람들이 여러 개의 조를 만들어 산발적이고 다각적인 공격으로 미군과 경찰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러는 동안에 병원치료를 받을 도리가 없는 부상자들은 호박속이나 찧어 붙이고, 쑥가루를 밀가루에 이겨 붙이면서 하나씩, 둘씩 죽어가고 있었다. 화순탄광사건의 소문은 삽시간에 번져나가는 들불이 되어 산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폭력을 불사하는 강압적인 미곡수집에 불만이 쌓일 대로 쌓여 있던 농민들에게 탄광사건은 행동을 충동질하는 도화선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미군들이 탱크로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밀어붙여 죽였다는 것은 민족감정을 예리하게 자극시켰고, 경찰들이 또 그 앞잡이놀이를 했다는 것은 그동안 누적되어온 적개심을 폭발시키게 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농민들은 벌써부터 경상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서, 이북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단행했다는 소식을 알고 있는 것처럼 환히 듣고 있는 터였다. 미군정의 파괴공작에도 불구하고 인민위원회 조직은 그들을 결속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다! 미군은 물러가라!" “공출제도 쳐없애고 토지개혁 단행하라!" 이런 구호들이 터져나오며 곳곳에서 민중들이 들고일어났다. 10·1항쟁은 마침내 전라도땅에서 바람 탄 불길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염상진의 생각을 통해 역사 서술) 124-131
14 까마귀떼
소문이란 으레 그렇듯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채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소문들을 믿게 마련이었고, 끝내는 그 소문들에 휘둘리게 되었다. 정부는 ‘여순반란사건 관련자 8명이 11월 1일 사형을 당했다’는 사실을 신문에 보도했다. 168
여수와 순천의 소식들은 끔찍스러웠다. 여수읍민들이고 순천읍민들이고, 표나는 우익들을 빼놓고는 모두가 동네별로 학교 운동장에 끌려나가 심사를 받는다고 했다. 눈이 감겨진 채 실시되는 그 심사는 손가락질로 좌익을 가려내는 것이었고, 거기서 지목당한 사람들은 다시 몇 마디씩의 조사를 받았다. 그 간단간단한 조사에서 생사가 결판나는 것이었다. 손가락질은 이장이나 피해자 가족들이 맡았다. 그러나 간단한 조사마저 필요 없이 확실한 좌익으로 지목된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대창으로 난자해서 죽였다. 조사를 거쳐 좌익 혐의를 받은 사람들은 삼사십 명씩 차에 실려 가까운 산골짜기나 해변으로 끌려나가 무더기로 총살당해 죽었다. 순천에서 죽어간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지만 특히 여수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그 수를 알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 했다. 특히 여수에서는 학생들이 많이 죽어갔다. 14연대 주력은 후퇴를 하면서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동조자들에게 일단 동행을권유했다. 운신이 어렵게 된 일반인들은 상당수 따라나섰지만 학생들은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학생들이 따라나서려고 해도 부모네들이 만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까짓 만세 좀 부른 걸 어쩌겠느냐, 그까짓 삐라 좀 뿌린 게 무슨 큰 죄겠느냐, 하며 자식들을 붙들어앉힌 것이다. 핏줄을 귀히 여기는 마음이 그런 일들을 설마 하고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한 학생이 한둘이 아닌 데다가, '학생'이라는 신분에 대한 믿음도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경의 처벌은 학생이라고 해서 예외를 두지 않았다. 만성리해수욕장뒤 터널의 골짜기로 끌려간 학생들은 줄줄이 총살을 당해갔다. 기관총의 난사 앞에서 시체들은 차곡차곡 쌓였고, 그 수는 수백을 헤아렸다. 물론 거기에는 학생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장소도 그곳만이 아니었다. 허리에 맷돌이며 돌을 매달고 배에 실려나가 바다로 떠밀려 들어가 죽어갔고, 심사를 받는 학교 운동장에서도 죽어갔다. 특히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에 대한 소문은 사람들 속에 찬바람을 일으키며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는 시범을 보이기 위해 사람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공개처형을 했는데, 좌익들을 줄지어 세워 손수 닛뽄도를 휘둘러 목을 쳐죽였다. 그가 닛뽄도를 단 한 번 내려치는 것으로 목 하나씩이 뎅겅뎅겅 잘려 땅바닥에 굴러떨어졌고, 피와 모래가 범벅된 그 두상들은 가족이 손도 못 대고 가마니에 쓸어넣어져 동네마다 전시되었다. 그러나 피해자 가족들은 그 누구도 원망할 사람이 없었다. 강압으로 그 일에 동조한 것이 아니었고, 인민위원장은 14연대가 자원자들을 이끌고 후퇴하던 날 그 대열을 산마루에서 지켜보다가 목매달아 자살을 했던 것이다. 그 책임에 대해서 더 할 말이 있을 수 없었다. 169-171
하댗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걷다가 무심결에 샅을 걷어올렸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마누라 들몰댁의 얼굴이었다. 하대치의 머릿속에서는 퍼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건 마누라와 밥집 여자의 차이였다. 마누라와 밤일을 치르고 나면 지금 같은 기분이 아니었다. 어딘가 편안하고 흡족하고 맺힌 데 없이 확 풀린 기분이었다. 목까지 잠기는 뜨거운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은 시원함이나, 땀 뻘뻘 흘린 들일 중간에 점심 배불리 먹고 그늘에서 낮잠을 자고 난 다음의 개운함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간밤의 일은 전혀 그런 맛이 없었다. 발목까지밖에 차지 않는 찬 개울물을 첨벙댄 것 같은 석연찮음과 미흡함이 남아 있었다. 미지근한 된장국에 식은 밥덩이를 급히 먹었을 때처럼 영 속이 거북스럽고 허했다. 횟수만 거듭하다 보니 샅이 뻐근하고 당겨올리는 것도 과히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 짓거리는 짚은 정 있고서야 지맛이 나는 모냥인갑구만. 하대치는 밤일의 오묘함을 깨닫고 있었다. 비록 마누라는 무덤덤하고 무심한 듯 자신을 받아들였어도 따ㄸ스하고 깊은 물이었고, 장터댁은 활짝활짝 웃고 간드러지는 꽃이었지만 결국은 차갑고 얕은 개울물이었다. 그러니 마누라가 만들어준 쌈지와 장터댁이 사다 준 궐련갑의 감촉이 같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179-180
15 기습이다!
(경찰서장) 남인태의 고향은 담양 옆에 있는 장성이었다. 그는 아홉 살 때부터 주재소의 소사 노릇을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반농사꾼에 반노동자였다. 그래서 집안 형편은 소작인보다 더 쪼들렸다. 그 대신 그의 아버지는 땅밖에 모르는 농사꾼에 비해 세상 보는 눈치는 빨랐다. 읍내 중심가에서 품을 팔며 귀동냥 눈동냥 한 것들이 밑천이었다. “주걱 든 년이 한술 더 뜨고, 정재 파고드는 쥐가 더 기름도는 법잉께, 앞으로 시상에 그래도 배 안 곯고 살자먼 일본사람헌테 붙어야 써. 시상이 일본 시상인디 뒷전에서 일본놈, 일본놈 욕험시로 정작 딱 맞닥뜨리먼 꼼지락도 못 허는 고런 인종덜언 빙신중에 상빙신이여.” 그의 아버지의 지론이었고, 그에 따라 그는 보수없는 소사 노릇을 해야 했다. 그를 하루빨리 일본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아버지의 욕구는 거의 광적이었다. 일본말 일본글을 제대로 익힐 때까지 그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회초리질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의 그런 광적인 욕구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는 갈수록 일본 순사들의 사랑과 신임을 받았고, 독학으로 계속 검정고시를 치러 학력을 쌓아갔다. 그는 결국 아버지가 열망한 대로 일본 순사제복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아홉 살 때부터 주재소의 공기를 마시고 산 그는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고 뛰어난 일본 순사였다. 권력의 맛을 만끽하고, 권력이 당연히 배당하는 부의 맛까지 즐기다가 별안간 해방을 맞게 되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진 것같은 절망감과, 공로가 죄로 뒤바뀌는 공포감에 안절부절을 못했다. 몰매를 맞아 죽을 위기를 서너 차례 모면하며 한 달을 조금 넘게 전전긍긍하다 보니 뜻밖에도 광명이 찾아들었다. 과거 경력자를 주축으로 해서 경찰조직이 재구성된 것이었다. 그에게 해방이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캄캄한 밤이었다면 그 조직이야말로 또 갑작스럽게 열린 눈부신 광명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돌변에 그는 잠시 어리둥절했고, 그리고 이내 당당해졌다. 경찰제복이 그의 과거를 말끔히 가려주었고, 서장이라는 계급이 그의 권력을 떠받들고 있었다. 222-223
“빨갱이 사상으로 말하자면 이북은 복숭아고 이남은 수박이요. 이남 주에서도 여기 전라도하고 경상도는 아주 특제 수박이요.” 이북에서 월남해 순천경찰서에 간부로 있는 어느 경찰이 한 말이었다. 공산주의자를 내세우고 있는 이북은 겉이 붉고 속은 흰데,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이남은 겉은 푸르고 속은 붉다는 뜻이었다. 223
안창민은, 어서 기운을 모아 병원으로 가야 된다고 스스로를 일깨웠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언제까지나 이대로 있고 싶은 나른함에 이끌리고 있었다. 그 나른함은 이상스럽게 혼미한 편안함이었다. 양쪽 어깨를 그 어딘가 든든한 곳에 눕히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견디기 어려운 상처의 통증과는 또 다르게 일어나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안창민은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때 의식의 어느 구석에선가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동맥을 자르는 로마 귀족들의 처형방법이었다. 피가 흘러나옴에 따라 서서히 죽어가는 그 방법은 아무런 고통이 없이 황홀경에 젖어들며 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의식이 흐려지기 전까지 유언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있다고 그 글은 적고 있었다. 235
“도대체 이념이 인간의 뭘 해결한다는 거야." 자신의 부르짖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건 손승호의 말이었다. 한때 누구 못지않게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었던 손승호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렇게 외쳤다. 그건 분명 외침이었다. 손승호는 낮은 목소리로 냉정하게 말했지만 그건 분명 외침이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자기의 생각하는 바를 굽히지 않은 그 말이 바로 외침이 아니고 무엇일 것인가. 염상진이 그의 이마에 권총을 겨누고서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까닭도 그 외침의 무게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념이라는 것이 정치지향적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소. 변증법도, 유물론도, 봉건주의도,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모두 정치지향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기적인 지배도구일 뿐이오. 봉건 왕조를 타도하고 세운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사회가 도대체 절대다수 인간의 삶을 위해 한 것이 뭐가 있소. 그것들은 새로운 구속일 뿐이고 인간의 본질적 문제는 하나도 해결한 것이 없소.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는 20세기의 인간들이, 지배본능이 강한 인간들이 윤색해 낸 정치연극의 각본일 뿐이오. 그것들은 절대적일 수가 없소. 왜냐하면 모순투성이고 부정확한 존재들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오. 그것들은 인간이 갖고 있는 만큼의 모순과 부정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하오. 그러므로 그것들은 절대적일 수가 없고, 신봉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오. 그런데 그것들을 절대적 존재로 신봉하게 되면 그만큼 인간들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오. 인간은 인간이 만든 기계가 아니오. 인간이 인간을 장담하는 것처럼 어리석음을 범하는 일은 없소. 나는 다만 인간이고 싶을 뿐이오." 손승호는 완전무결하게 사회주의를 버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상진은 손승호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며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그가 사회주의를 버린 대신 자본주의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정말 그가 다시 사회주의로 전향할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논리의 타당성을 인정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옛정을 생각했기 때문일까. 안창민은 손승호의 생각을 이해해 주고 싶었다. 그의 말대로 인간은 인간이 만든 기계가 아니었고, 그가 파악하고자 하는 인간에 대한 인식 또한 하나의 가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손승호에게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역사현실을 외면하고 있었고, 인간의 본질적 문제가 삶 자체라는 인식을 결여하고 있었다. 그런 추상적 관념에 지배되고 있는 손승호가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땅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기를 선택하지 않는 한, 그러나 그 생각을 염상진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238-240
16 감꽃은 먹을 수 있는 꽃
“이 해당분자!” 염상진은 차려자세를 취하고 있는 강동식을 후려쳤다. 강동식은 비척비척하다가 곧 똑바로 섰다. 그런데 코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 내렸다. .. “하 동무, 이자를 끌어다가 저 나무에 묶으시오!” 염상진은 숨을 몰아쉬었다. 피를 보자 더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 감정을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손찌검은 하지 말아야 된다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말했다. 그건 나이의 고하간에 낮춤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과 함께 엄연한 당의 규율이었다. .. 생사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안창민에 대한 초조와 염려가 뒤바뀌어 표출된 것이었다. 피를 보자 염상진의 감정은 일순간에 싸늘하게 식어들었다. 동지의 피는 한 방울이라도 소중한 것이었다. 그건 혁명의 원동력이었다.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굶주리며 핍박받으며 생성시킨 생명의 원천이었다. 피를 흘리고 있는 동지에게 또 손찌검을 해서 더 많은 피를 흘리게 할 권리는 자신에게 없었다. 이미 피를 흘리게 한 것도 반혁명적 행위였다. 262-263
염상진은 안창민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나약한 체구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를 노출시켰던 것이 또 후회로 씹혀졌다. 그것이 부질없는 생각인 줄 알지만 그 후회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이번에 일으킨 혁명사업에 대한 미심쩍음과 연관된 문제였다. 아무리 당중앙이 지하로 잠적해야 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이번 사업의 허망한 실패에 대해서는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제일 납득이 안 되는 것이 당조직의 분열현상이었다. 각 도마다 지방당조직이 엄연한데 어찌하여 일제봉기가 이뤄지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당조직에 이상이 없다면, 그럼 이번 사업은 당중앙의 계획거사가 아니고 지엽적인 것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치밀하고 구체적인 사전계획 없이 충동적이고 순간적으로 일으킨 사업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반혁명적인 행위인가. 공산주의를 적으로 삼는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마당에 부분적이고 산발적으로 일으키는 사업은 힘의 소모만 자초하고 상대적으로 적의힘만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뿐이었다. 그런데 사업확대지령은 엄연히 당으로부터 하달되지 않았던가. 다시 혼란의 미궁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가정은 금물이었지만, 사태 전반을 놓고 가정을 한다면, 당의 그 지령은 여수, 순천지구에서 사업을 일으킨 다음 뒤늦게 내려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지극히 반당적인 회의적 추리르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실패를 의식할 때마다 머리를 드는 생각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263-264
이상한 우수가 뭉클 가슴에 괴어왔다. 나무에 묶인 강동식 탓이고 총상을 입고 혼자 버려진 안창민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가슴에 괸 우수가 설명되지 않았다. 아내의 안부가 염려스러워 조직의 명령도 어기고, 위험도 불사하고 행동한 강동식이 과연 나쁘기만 한 것인가 하는 자문이 무슨 앙금처럼 우수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었다. 부모에 대해서, 자식에 대해서, 배우자에 대해서 마음이 쏠려가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 인간의 삶을 가장 비인간적으로 만든 악조건들을 척결해야 하는 마당에 그 기본조건에 대한 충족은 당분간 유보시켜야 한다. 그런 인내의 고통 업이 혁명의 성취는 얻을 수 없고, 혁명의 성취 없이는 그 기본조건마저 파괴되는 것이다. 265
17 배고픔과 동물과 인간
“.. 공산당은 너나읎이 공평하게 사는 시상 맹근다는 말얼 두고 허는 소리요. 그런 시상이 꿈속에서나 있고, 말로나 있는 것이제 사람이 사는 시상에 워디 있을랍디여. 우리 냄편 따라 공산당 허는 농꾼들도 다 그말만 믿고 나선 것이제라. 대대로 물림허는 가난에 한이 맺히고, 배운 것 읎이 무식헌 농꾼덜이 고런 조청맹키로 달디단 말에 워찌 귀 솔깃혀지지 않컸소. 우리 남편맹키로 식자깨나 들었다는 사람덜이 가난허고 불쌍헌 사람덜헌테 죄 많이 짓고 있는 것이제라. 그라고 워디 빨갱이 된 사람덜만 귀 솔깃혔을랍디여. 쌔고 쌘 가난헌 사람덜언 나라가 금허고 순사가 겁난께 표식 안 내서 그렇제 다 귀 솔깃해 있구……”(죽산댁(염상진 부인)이 토벌대장 인만수에게 조사받으면서 했던 표현) 299-300
“무릇 정치라는 것은 명분이나 합법으로 가장된 인간의 탐욕과 이기의 절정의 표현이지요. 하므로, 그 탐욕이나 이기를 채우는 데 반하는 모든 요소는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시키는 것이 정치새리지요.”(스님과 김범우의 대화중 스님의 말) 314
“절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선생님의 말씀대로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개혁 없이는 사람 사는 세상이 될 수 없지요.” 김범우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선생도 그런 생각을 지녔으니 여기 오실밖에요.” 그분은 나직한 소리로 웃는 듯하더니, “세존께서 일찍이 인생 사고(四苦)를 생(生) 노(老) 병(病) 사(死)라 설파하셨는데, 내 주제넘은 소견으로는 ‘주릴 아(餓)’ 아고를 하나 더 첨가시키고 싶습니다. 굶주리는 고통,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부처님께서도 인간의 몸을 타고 나이서 판단을 하시는 데 환경젹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던게 아닌가 합니다. 인도는 열대에 속하는 땅이라서 최소의 노동을 바치면 절대적 아(餓)는 벗어날 수가 있지요. 땅도 무한히 넓고. 그 대신 기후에 따른 병마는 인간이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병고(病苦))는 있으나 아고(餓苦)는 없는 게 아닌가 합니다. ㄸ고같은 사람끼리 짧은 한평생 살다 가면서 누구는 기름지게 먹고 누구는 굶주림에 허덕여야 합니까. 배부른 자에게 이승은 극락일지 몰라도 굶주림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이승은 지옥입니다. 그리고 굶주리는 자들이 절대다수를 이룰 때 그 세상은 바로 지옥인 것이지요. 이건 인간사의 끝없는 숙제일 것입니다.” 316
18 수혈
19 새가 창공에 그 발자국을 새기지 못하듯이 인간사 그 무엇이 영겁 속에 남음이 있으랴
성일(죽임당한 금융조합장의 아들)이 방에만. 틀어박히게 된 것은 하판석 영감의 사망 소식을 듣고부터였다. “너 생각대로 하판석인가 뭔가 하는 영감탱이가 죽었다.” 윤태주가 이 말을 하는 순간 성일이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야, 정신 차려 임마. 정신 차리라구.” 381
그날 밤부터 성일은 하판석 영감을 꿈에서 만나야 했다. 몰매질을 가했던 그날 밤의 일이 생생하게 재현되기도 했고, 죽어 있던 영감이 벌떡 되살아나기도 했고,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쫓아 오기도 했고, 영감과 낯 모르는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아 자신이 죽어가곧 했고, 붉은 완정을 찬 영감의 아들에게 붙들려 대창에 전신을 찔려 죽기도 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아버지일 뿐이라고, 아버지는 마흔일곱에 돌아가셨는데, 그 영감은 예순도 더 넘었다고, 아버지는 금융조합장이었는데 그 영감은 농사꾼일 뿐이었다고, 그 어떤 합리화 앞에서도 자신이 그 영감을 죽였다는 죄의식에서는 벗어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382-383
“.. 그래도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현실쯤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것이 신문을 열심히 읽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무언가 전체적인 맥을 잡을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할 터인데, .. 김 선생은 전공이 역사시니 그런 눈을 가지셨으리라 믿는데, 저도 좀 맥을 잡을 수 있도록 해주시지요.”(자애병원 전원장의 말) 399
"역사학자들이 대체로 규정한 통설에 의하면 역사적인 한 사건에 대한 객관적 비판이나 정당한 평가는 100년 후에나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발생하기 시작한 모든 사건들은 2045년쯤에나 가서 냉엄한 역사의 심판대 위에 올려질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전제로 하면 제 이야기가 얼마나 주관적인 것이 될 거며 불확실한 것인지는 상상할 수 있으시지요? 그래도 들으시겠어요?" 입을 꼭 다문 전 원장은 고개만 끄덕였다.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제가 파악하고 있는 대로 대충만 얘기하죠. 그러니까, 2차대전 종전 무렵의 세계적 정치상황은 윌슨이 위장적이나마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던 시대는 이미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의 주역이 식민주의의 대표적 국가인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이었다면 2차대전 종전 무렵에는 그 주역이 미국과 소련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항쟁을 계속해서 벌인 데다, 독일의 침략을 받음으로써 식민주의 국가들은 협공을 당하는 이중적 상황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의 한편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소련이 그 세력을 팽창시켜 나가고 있었고, 자본주의 국가 형성을 완성시킨 신생 미국은 그 힘이 갈수록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미국은 2차대전에 참전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궁지에 몰리고 지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자연스럽게 연합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소련도 뒤늦게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상반된 이념을 추구하면서도 그들이 동지가될 수 있었던 것은 독일과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서로를 방어하고자 하는 공동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실리적인 결합이었고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계를 무대로 삼아 자신들의 이념을 확장시키려는 서로 다른 꿈을 속으로 감추고 있었습니다. 2차대전 종전 전에 그들은 이미 그 준비를 했던 것이고, 종전과 동시에 그들은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들의 이념 팽창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분할점령입니다. 우리나라의 분할점령은 독일의 분할점령과는 전혀 그 성격이나 의미가 다릅니다. 미국과 소련이 전범국인 독일을 분할점령한 것은 승전국으로서 전리품을 처리하는 당연한 권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그런 권한은 또 하나의 전범국인 일본에게 행사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들은 우리나라를 분할점령하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팽창주의는 소련의 팽창주의가 일본에까지 미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연합국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미국은 특히 일본 문제에 있어서는 발언권이 절대적이었지요. 일본을 도맡다시피 해서 싸운 것이 바로 미국이니까요. 그래서 미국은 일본 열도를 독일식으로 나눠먹지 않고 독식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건 태평양으로 뻗치는 소련의 힘을 견제하는 동시에 태평양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의 세력권을 형성하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그 계획에따라 당연히 한반도 분할이 필요했고, 독일에서와는 달리 일본 쪽에 전적이 미미한 소련은 한반도의 반이나마 차지하는 데 동의한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에 일본 지상군의 항복을 받기 위해 한반도에 진주하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고, 뒤이어 '통치능력이 생길동안 신탁통치'를 해주겠다는 일방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해방을 갈망해 왔고, 독립국가 건설을 열망하는 우리 민족의 뜻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두 나라의 점령군을 맞으며 우리는새로운 역사의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첫째, 두 강대국이 내세운 명분을 무산시킬 수 있도록 일사불란한 민족적 단합을 보여야 했습니다. 둘째로, 그들의 정치적 도구가 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며 제2의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첫째도 실패, 둘째도 실패함으로써 식민지 상황보다 나을 것 없는 분단국가를 만드는 데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늘과 같은 정치·사회적 혼란과 자체분열을 일으키는 민족적 희생이 야기되게 되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떠나기 전 그의 앞을 가로막는 군중들에게 ‘여러분, 나에게 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주시오' 한 말은 우리 민족의 행동방향을 단적으로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해방은 식민지 시대의 종식이 아니라 새로운 식민지 시대의 개막이었습니다. 전 시대에는 일본을 공동의 적으로 삼는 민족적 명제나 자존이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백인들이 만들어낸 이즘이라는 것에 최면이 걸리고 마취되어 우리끼리 적을 삼아 살육을 자행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즘을 일단 정치도구화한 이상 상호 양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 실현을 위한 상호 상승작용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정치생리이며 힘의 역학입니다. 벌써 서로를 괴뢰라고 공공연하게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유치하고 졸렬하고 파렴치한 짓들입니까. 그러나 그 뻔뻔스러움과 무모함과 이율배반이 곧 우리의 정치현실입니다. 비판이나 선택이 용납되지 않는 획일적 모순의 질서에 줄을 맞춰야 하는 것이 앞으로의 우리의 길입니다. 그 줄에서 이탈하는 자는 적이고, 적은 처단하는 논리만이 절대적일 뿐입니다. 이 현실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다만 시작이라는 것뿐입니다. 미·소의 세력에 우리가 아무리 민족적으로 단결해서 대항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부류들이 서로 양쪽의 정치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 편가름은 앞으로도 무수한 인명의 희생을 요구할 것입니다. 100년 후의 역사는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비판하고 판정 내리게 될지 모릅니다. 지금, 남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혼란은 원장님도 다 아시는 바대로 그런 정치적 대결로부터 파생되는 피할 수 없는 현상들입니다. 아주 복잡한 문제들입니다." 400-404
20 토벌대 물러가라!
“과거란 망각이 아니라 현재의 축적이라는 말이 맞군.” 김범우는 손승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무슨 소린가?” “왕년의 마르크시스트다워.” 손승호가 고개를 저었다. 444
"자넨 아까부터 날 자꾸만 놀리는군." 손승호가 지친 듯한 표정으로 김범우를 건너보았다. "놀리는 게 아니라 너무 경이로워서 그러네. 이제 치료도 끝났으니 경위나 간단히 듣세." 그때 간호원이 차를 날라왔다. 무쇠로 만든 찻주전자의 무게감이 고풍스러움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장좌리에 가정방문을 나갔었지. 마침 토벌대가 빨갱이 색출을 나왔는데, 동네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한쪽은 잔치 준비라도 하는 것처럼 음식냄새 풍기며 소란스러웠고, 다른 한쪽은 금방 누구라도 죽일 것처럼 살벌한 분위기였지. 남자들은 모조리 모아 세워놓고 사상조사를 하는 거였네. 장만하고 있는 음식은 그 조사를 적당히 잘해달라는 뜻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거야 이미 동네마다 행해진 일이니까 그러려니 외면을 했지. 그런데 술에 밥에 배 터지게 먹은 그들이 휴식이랍시고 낮잠을 자기 시작했는데, 글쎄 한 놈이 빠져나와 처녀 혼자 있는 집으로 뛰어든 거야. 그래 어찌 됐겠나. 처녀는 반항을 하고 그놈은 덤벼들고 하는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는데 밖에 나갔던 처녀 오빠가 돌아온 거네. 상황이 어찌 됐겠어. 다급해진 그놈이 총을 갈겨댄 거야. 마당에 죽어 넘어진 그 참혹한 꼴이라니. 그 집이 내가 몇 시간 전에 들른 학생 집이었고, 그때 만났던 사람을 피 흘리는 시체로 보아야 했지. 이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총 든 자들 앞에 인명이 파리 목숨이야. 그런데 나를 더 미치게 만들어버린 건 그 부모들의 체념이야. 분하고 원통하지만 자기네처럼 힘없는 사람이 어쩔 수 있느냐는 것이었네.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었네. 나는 그 시체와 절망적 체념에 빠진 부모의 슬픔을 외면하고 돌아설 수가 없었어. 그런 비굴과 비겁을 저지를 용기가 없었던 거야. 그렇다고 내가 그들보다 나은 힘을 가진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또한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네. 그 순간 나는 내가 한 마리 작고 하잘것없는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어.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 인간인가, 이런 집중적인 회의 앞에서 나는 완전히 해체되고 있었어. 그 장소를 외면할 비굴한 용기도 없고, 그렇다고 폭력에 대항할 당당한 용기도 없는 나는 이미 내 눈앞의 시체와 다를 것이 없었지. 그 순간 난 각오했어. 인위적인 힘을 만들자고, 그들에게도 힘이 있음을, 관권의 폭력을 쳐부술 수 있음을 실증시켜 주고 싶었어. 그때의 절망스러움은 나를 내 정신이 아니게 만들었어. 나는 선생이란 무기를 최대한 이용해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했지. 그 시체까지 동원한 선동은 30분도 안 걸려 완료됐지. 줄을 세우고, 구호를 몇 번 연습시키고, 그리고 토벌대놈들이 뺑소니쳐버린 읍내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한 거야." 446-447
2판 서문(1995) 사람이 살면서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겠지만 궂은일들이 남기는 상처는 시간낭비와 함께 정신적 육체적인 손상까지 입힌다. 사람에 대한 실망과 사람에 대한 회의, 그러나 그것마저 삶의 피할 수 없는 내용으로 받아들이며 소설의 자양으로 소화하려고 애썼다. 인간의 역사 위에 분명 훌륭한 사람들은 존재했었고, 소설은 어찌할 수 없이 인간 긍정의 작업이니까. 6
최근 사오 년 동안에 터무니없이 범람하고 남용되는 단어가 ‘문화’와 ‘철학’이다. 그 두 단어는 아무 말에나 붙어 복합면ㅇ사를 이루면서 허위성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모호성을 가중시켜 혼란을 일으키게 한다. .. 그런 모호한 치장을 즐기는 사회심리는 무엇일까. 7
1 일출 없는 새벽
“나 대물림굿 하는 것 봤소.” “야아?” 자신은 너무 놀라 얼결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바로 눈앞에 정하섭의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이 있었고, 그 눈이 불이라도 붙은 듯한 뜨거움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길을 받아낼 수가 없어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왜 무당이 됐소?” “……” “엄니가 시켜서 그랬소?” “……” “되고 싶어서 그랬소?” “……” 눈물을 참느라고 목에 메었다. 정하섭은 또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자신은 눈물을 넘기고 또 넘기며 ‘니같이 이뿐 애가 워째무당딸이 됐는지 몰르겄다’ 했던 어린 날의 정하섭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답답하게 그러고 있지 말고 왜 무당이 됐는지 대답 좀 해보시오.” 정하섭이야말로 정말 답답한 말을 묻고 있었다. 그럼 나더러 어찌하란 말인가 …… 자신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것이 지 운명이구만요.” “운명 …… 운명 …… 운명 ……” 정하섭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바람에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은 새로운 눈물로 젖고 있었다. “소화ㅏ가 무당딸만 아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하섭은 그런 말과 함께 자신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빼려 했지만 빠지지 않았다. 자신이 또 한 가지 놀란 것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은 이름만 가졌지 그건 좀체로 누가 불러주지 않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그저 ‘무당딸’이었을 뿐이다. 29-30
그가 첫 수음을 했던 중학 3학년 때, 죄의식과 부끄러움과 전신 마디마디가 시리도록 저릿거리며 퍼지는 어지러운 자극의 쾌감에 신음하며 보았던 두 여자. 하나는 책방집 딸 정님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소화였다. 32
“임무수행 중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소. 술과 여자요. 그건 둘 다 독이오. 술은 감정을 해이하게 만드는 독이고, 여자는 의지를 약화시키는 독이오. 철저히 경계하라. 단, 냉철한 당원의 이성으로 판단했을 때 사업에 절대이익을 줄 수 있는 여자까지 포함시키는 건 아니오. 그 판단기준은 당원의 이성에 맡기겠소.” 서울에서 세뇌교육을 받을 때 임철수라는 중간간부가 전혀 감정이 섞이지 않은 낮고도 일정한 음향의 목소리로 한 말이었다. 36
“버마 전선에서 꼬박 나흘을 자지도 먹지도 못하면서 싸웠네. 모두 지쳐 쓰러져 있는데 소대장이 한다는 소리가, 지금 밥을 먹겠느냐 여자를 갖겠느냐, 하고 묻는 것이야. 그런데 다 여자를 갖겠다고 했네. 그게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인간의 기묘한 심리네. 인간이란 그렇게 복잡미묘한 것인데 어찌……” 김범우 선생의 말이었다. 37
2 가슴으로 이어진 물 줄기
그려, 다 이 못난 애비 죄여. 이 애비 원망을 속 풀릴 때꺼정 혀. 근디, 불쌍헌 내 새끼야, 니 팔자는 애비를 원망헌다고 풀리는 것이 아녀. 피 타고남스로 매듭매듭맺힌 한(恨)인디, 고걸 워째야 쓸끄나, 한은 맺히기만 혔지 풀리는 것이 아닝께 한인 법인디, 고건 풀라고 발싸심허먼 헐수록 헝클어진 실꾸리맨치로 얽히고 설키다가 종당에는 지 명(命)꺼정 끊어묵는 법인디……(판석 영감, 하대치 아버지) 42
나라가 금하는 일을, 그것이 제아무리 옳고 바르다고 해도 나라와 맞서 이기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건 판석 영감이 칠십 평생을 통해서 겪어온 경험이었다. 동학란이 그러했고 일정 때의 독립운동이 그러했다. “니넌 이름땜 허니라고 그리 드세게 사는갑다. 큰 대(大)에, 다스릴 치(治), 애시당초 가당찮은 이름이었제. 느그 할아부지의 택읎는 욕심이었는디, 고 이름을 그대로 붙인 나가 더 큰 잘못을 저질른 것이여……” 43-44
하대치의 아내 들몰댁. 44
“요것은 니 애비가 동학 따라 집 떠남스로 이 할애비헌테 냄긴겨. 나가 살아서 니 아들헌테 붙여줬어야 헐 이름인디, 앞자가 큰 대자, 뒷자가 다스릴 치자라고 혔다. 고것이 느그 애비가 생전에 품은 한스런 맴이었는디…..”(판석 영감의 할아버지의 생전 마지막 말) 49
나날의 생활이 아무리 고되어도 세월은 흘러가는 맛이 있어 살아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52
학식을 깨우친다는 것이 병이 되는 것일까. 54
아들놈은 저희들이 하는 일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것을 알지만, 하고 또 해야 된다고 했었다. 아버지도 그런 마음으로 동학에 가담한 것일까. 판석 영감은 확연히 잡히지 않는 그런 어릿거림 속에서도 결코 아들을 원망하거나 서운해하지는 않았다. 55
하대치가 오늘에 이른 것은 모두 염상진이 끼친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관계를 맺어온 것도 10년 세월이 넘어 있었다. 사범학교까지 나온 염상진은 하대치의 여백 많은 머릿속에다가 많은 모종으 ㄹ이식시켰다. 기질적으로 피의 농도가 짙고, 환경적으로 불만요인이 많고, 태생적으로 자학성이 강한 하대치는 그런 나무가 자랄 수 있는 최적의 기름진 토양이었는지 모른다. 58
마누라였다. 들몰은 마누라의 친정이었다. 그래서 순심이라는 이름이 분명히 있는데도 사람들은 마누라를 들몰댁이라 불렀다. 68
경찰들이 그렇게 허망하게 도망할 줄은 몰랐고, 경찰이 없는 세상에 지주며 유지라는 것들이 또 그렇게 맥을 못 쓸 줄을 몰랐었다. 71
3 민족의 발견
아버지(김사용)가 읍내에서 손꼽히는 지주 중의 한 사람인 것은 강아지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그건 인민이 정하는 기준이니까. 김범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인민이 정하는 기준, 그건 넘어설 수 없는 난해한 벽이었다. 77
김범우는 아버지가 염상진을 마치 자식 이름 부르듯 하는 것을 듣자 가슴이 먹먹해오는 감정의 굴절을 느꼈다. 아버지는 염상진이 타고난 낮은 신분의 피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의 총명함과 사리분명함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기 자식이 염상진과 호형호제하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 서로 다른 입장에서 마음의 진부(眞否)를 놓고 머뭇거리세 된 것이다. “아무래도 아부님도 떠나셔야 헐 것 같습니다.” “어허, 쓰잘디읎는 소리. 상진이 지를 못 믿겄으먼 이 애비도 피허라고 허드람서. 그 말이 무슨 뜻이냐. 상대방이 내보인 진심을 믿지 않는 것만치 큰 죄가 읎는 법이여. 그때부터 생사람 잡는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가그라, 싸게 떠나.” 78
김범우는 하나의 악마를 보고 있었다. .. 전혀 다른 두 모습의 문 서방, 그 어느 쪽이 진짜인가. 어떻게 한 사람이 그렇게 표변할 수 있는가. 그 어느 쪽이 진실인가.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이중적일 수 있을까. 그때 퍼뜩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있는 자들은 자기들만 사람인 줄 알지. 더러 그렇지 않은 우등생도 있지만 말야. 난 그 단순한 자만을 고맙게 생각하네. 거기에 우리가 설 자리가 있고, 그게 그들 스스로가 빠져들어갈 함정이니까.” 염상진의 말이었다. 그렇다, 인간은 복합적 사고와 다양한 감정의 줄기를 소유한 동물이다. 문 서방의 전혀 다른 두 모습은 그런 인간의 속성이 표출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두 가지 모습은 다 문 서방의 참모습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외부의 영향과 상황에 따라 그것은 반응하는 것이다. 문 서방은 아버지에게는 선한 인간으로 반응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악한 인간으로 반응한 것뿐이다. 만약 아버지가 악한 지주였다면 문 서방은 여지없이 악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 서바으이 악은 악이 아니라 선인 것이었다. 88-89
그들이 무장투쟁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미군정의 무력탄압에 그 명백한 원인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행위를 ‘폭력’으로 간주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방어적 폭력’이었고 ‘상대적 폭력’이었다. 미군정은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 부인, 친일파 핵심세력인 한민당의 옹호, 민족반역세력인 군 경찰 출신들의 재등용 비호, 공산당 활동 불법화, 청년단 구성과 백색테러 감행, 공산당원들의 무차별 체포와 조직 파괴공작,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폭력행위를 조직적이고 단계적으로 시행해 왔던 것이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남로당은 지하활동 속에서도 수난과 피해로 얼룩진 세월을 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차별한 폭력 앞에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방법, 그것은 또다른 폭력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제국주의적 지배술수에 말려든 것일 수 있었고, 군정이 더 가혹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타당성과 근거를 만들어 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쪽의 폭력이 상대의 폭력을 이기지 못할 때 그건 자멸의 길을 재촉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게 폭력의 생리이고 법칙이었다. 90
김범우는 그 ‘방어적 폭력’의 외로움과 한계성이 너무 답답할 뿐이었다.
“.. 나는 이제 OSS 첩보훈련원 톰슨이 아니라 조선인 김범우라는 사람인 것을 확실히 구분해 주기 바랍니다.”(김범우가 미군정 화이트 대위와 만나 대화중일부) 103
“사회주의 건설만이 그 길이야.”(염상진) .. “좋아요, 어떤 주의를 따르든 그건 개인의 자유지요. 그러나, 그것이 곧 민족 전체를 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성급한 판단은 금물입니다. 미국이다, 소련이다, 민주주의다, 공산주의다, 자본주의다, 사회주의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그런 정치적 택일이 아닙니다. 그건 한 민족이 국가를 세운 다음에나 필요한 생활의 방편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민족의 발견입니다. 그 단합이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해요.”(김범우) .. “자네 말은 아주 그럴듯해 보여. 그러나 그건 부르주아적 환상이야.”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미국과 소련에 점령당한 상태에서 그들이 내세우는 이데올로긴가 이념인가 하는 것에 놀아나 민족이 서로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뜻인데, 그게 부르주아적 환상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요?” “우리에게 해방은 곧 인민혁명이야. 해방은 곧 새 역사의 시작을 의미하고, 그 시작은 인민혁명을 통한 새 나라의 건설부터네. 그런데 자넨 시대역행적으로 케케묵은 민족이나 찾고 잇지 않느냔 말야.” “그렇게 속단하지 마세요. 민족이라고 하니까 핏줄만을 중시해서 어중이떠중이 다 싸잡아서 말하는 민족인 줄 압니까? 현시점에서 친일반역세력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어요. 그런 부류들을 완전히 제거한 상태에서 절대다수의 민중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집단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굳이 ‘민족의 발견’이라고 했어요. 형은 그게 바로 인민혁명세력의 규합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건 아닙니다. 그 민족에는 일체의 정치성이 배제되어야 합니다. 아니, 더 확실하게 말해 그 민족 아래 모든 정치이념들은 단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국과 쏘련에 점령당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소련은 자기네들 이익추구를 위해 우리의 앞길을 방해하는 훼방꾼들일 뿐이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갈려 이념을 먼저 선택하면 우리 민족은 결국 분열밖에 할게 없다 그겁니다.” .. “그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린가! 일정 때부터 쏘련만큼 우리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관심 쓰고 도와준 나라가 도대체 어디 있는가?” “과연 그럴까요? 내가 두 가지 사실만 지적해 볼게요. 첫째는 신탁통치 결의고, 둘째는 미군정이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탁통치라는 건 미국이 혼자서 결정한 일입니까? 그건 엄연히 쏘련이 두 개의 제국주의국가와 나란히 앉아 작당하고 야합해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장소까지 모스크바에서. 우리나라를 먹이로 놓고, 제국주의자들과 서로 이익을 분배하고 있는 쏘련의 처사가 과연 옳은 것입니까? 그런 쏘련이 어찌 우리 편일 수 있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자네가 상상할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쏘련의 전략전술이야.” “그래요? 철저한 그들의 대변자로군요. 그들의 입장에서 우리를 보지 말고, 우리의 입장에서 그들을 보려고 노력해 보세요. 그럼 그 모순과 허위가 보일 겁니다.” .. “.. 둘째로 미군정이 인공을 부인했는데, 그게 미국이 현실적으로 힘을 쓰지 못해서 취한 처삽니까. 그건 곧 자기네 점령지구에서 공산주의를 부정한 것이고, 혁명을 부정한 것입니다. 이래도 미국이 힘을 못 쓰는 겁니까?” ..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행동통제를 받지 않는 포로로 특별취급을 받으며 수용소에서 내가 한 일이 뭔지 압니까? 미국과 쏘련의 세계전략에 관한 책들과 논평들을 읽는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얻어진 것은, 미국은 제국주의적 팽창주의고, 쏘련은 그에 못지않은 공산주의적 패권주의라는 사실입니다. 그 두 개의 어마어마하게 큰 발에 짓밟히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땅과 우리 민족입니다. ..” “지름길을 두고 돌아갈 건 뭔가. 오늘 얘기로 자네가 사회주의를 버렸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확인했네. 자네 생각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허황한 것인가는 곧 알게 될 거네. ..” 염상진은 일어섰다. 김범우는 염상진을 올려다보았다. 염상진의 얼굴에는 노기가 서린 것 같았고, 김범우의 얼굴에는 쓸쓸함만이 머물러 있었다. .. 그의 머릿속에는 염상진과 함께 사회주의를 논했던 먼 기억이 가득 차 있었다. .. “범우 자네 맘 내가 다 알어. 허나, 나는 자네하고는 피가 다르네.” 110-115
4 소화, 하얀 꽃이라는 이름의 무당
그녀는 미약한 한줄기 바람의 힘에 순종하여 떨어짐을 짓는 꽃잎처럼 요 위로 무너져내렸다. 120
“이 말은 자네(정하섭)가 제일 싫어하는 말일지 모르겠네만, 자넨 아마 광적인 사회주의자는 못 될 거야. 자네가 부잣집 아들로서 출신성분이 부적합하다는 말이 아냐. 부디 공부에 충실하고, 하나의 행동을 선택하기 전에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생각이 앞서야 하네. 지금은 진정 어려운 시대야. 자네 같은 젊은 피들한테는 말이야……” 작별인사를 하러 갔을 때 김범우 선생이 자신의 마음을 환희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눈길을 보내며 한 말이었다. 150
염상진 위원장은 .. “김범우 선생은 참 좋은 분이다. 마음이 바르고, 인정이 있고, 학식이 풍부하다. 그런데, 생각하는 것이 환상적인 게 흠이지. 좋게 말해서 꿈속에 사는 이상주의자야.”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정하섭은 인간 김범우와 염상진을 저울질해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저울눈금은 언제나 수평이었다. 비슷하게 큰 키에 염상진의 인물도 기울지 않았다. 염상진도 마음씀이 컸고, 치밀하고 침착했고, 아는 것이 많으면서도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었다. 그런데 표나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분위기였다. 김범우가 사색적이고 지성적이라면 염사진은 야성적이고 행동적이었다. 152-153
정하섭이 마른 볏단에 불붙듯 사회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염상진에 의해서였다. 좀더 순서를 잡아 말하자면, 염상진을 접하기 저넹 벌써 당의정을 빨듯 책방주인 문기수를 통해서 초벌구이는 되어 있었다. 정하섭은 책방집 딸 정님이에게 정신이 팔려 뻔질나게 책방을 드나들었고,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책을 사들고 나오고는 했다. 주인 문기수는 그 눈치를 어렵지 않게 챌 수가 있었다. 한다하는 부잣집 아들이 자기 딸을 좋아한다는 것이 문기수로서는 기분 괜찮은 일이었고, 족보로나 재력으로나 비교도 안 되는 처지였지만 그물에 제 발로 든 고기를 놓치기는 아깝다는 욕심이 동했고, 목적을 당성하자면 있는 집 자식의 장난기일지도 모르니까 정신부터 뜯어고치자 작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과 다른 친절을 보이고 관심을 쓰면서 서서히 사회주의의 분말을 딸년의 눈웃음에 버무려 먹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기수는 자기의 힘으로는 벅찬 단계에 이르자 사상적 연관을 맺고 있는 염상진에게 넘긴 것이다. 153
족보와 더불어 세습되는 혜택 속에서 평생을 편안하게 사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154-155
5 조계산 숯막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북조선의 힘은 막강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해방과 더불어 혁명의 붉은 깃발을 세웠고, 이듬해에 지주와 부르주아 계급 말살과 함께 토지개혁을 완료한 북조선의 조직화된 공산주의의 힘은 경이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미군정하에서 시작된 남조선은 어떠했는가. 친일파와 지주계급이 군정과 어울려 득세를 했고, 새 시대의 국민을 위해 실시한다는 토지개혁은 해방 3년이 지나도록 단행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건 오합지졸이 모인 힘의 비조직화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힘은 조직화될수록 강해지고, 그 힘은 공격을 감행할 때 더 강해지고, 그리고 승리를 쟁취했을 때 그 힘은 절정의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그건 힘의 법칙이고, 힘의 미학이었다. 163
힘은 힘 앞에서만 굴복한다. 163-164
염상진은 깊이를 더해가는 회의를 떠쳐내려고 괴로운 신음을 물었다. 164
안창민은 염상진의 사범학교 후배이기도 했다. 염상진에게 3년이, 김범우에게 1년이 아래인 안창민은 두 사람을 형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그들 셋은 사회주의 이념에 마음을 하나로 뭉친 때가 있었다. 169
안창민은 고읍들의 지주 안재윤의 하나뿐인 손자였다. 한말(韓末)까지 행정의 중심을 이루었던 낙안 고을에 대대로 뿌리를 내려온 안 씨 문중은 그 뼈대로나 재력으로나 넉넉히 큰기침할 만했다. .. 말년에 망나니 아들로 속을 썩일 대로 썩이다가 화병을 얻어 제명을 다 못 살고 죽었다. 그때 벌써 아들 안수규는 투전판을 들락거리고 주색에 빠져 재산의 반 이상을 날린 상태였다. 안재윤이 죽고 나자 가세는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졌다. 안서규는 방탕한 생활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마침내 전답 거의를 헐값에 팔아치워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것으로 안재윤의 집안은 겨우 논 30여 마지기를 가진 소지주로전락. .. 종적을 감춘 안서규는 3년이 미처 못 되어 남원에서 객사했다는 소식이 바람에 묻어 왔다. 안창민의 나이 열세 살 때였다. 171-172
염상진 .. “이눔아, 사람 한시상 사는 것이 똑 갱물 흐르디끼 허는겨. 큰 물줄기 따라감스로 지 몫아치 딱 잡고 앞만 보고 애써 살아가자먼 시나브로 풀리게 돼 있는겨. 무식헌 애비 말이라고 뒷등으로 듣지 말고 얼렁 맘 고쳐묵어. 이 애비야 암시랑 않다만 처자석 생각혀서 맘 고쳐묵고 선상질이나 열심히 허란 말이다. 이눔아, 선상님 지체먼 하늘에 별 딴 것이지 멀 더 바래는겨. 애비 말듣고 있는겨?” .. 그러나 길이 잘못 잡힌 큰 물줄기를 따라 흐르는 한 방울의 물이기를 거부하는 그의 마음은 아버지를 이해하는 마음보다 우선했다. 174
염상진의 아버지 염무칠이 지주 최씨네에서 꼴머슴살이를 벗어나 읍내의 숯가게에 취직한 것이 열여섯 살 때였다. 염무칠의 아버지는 낙안벌의 토호 최씨네의 가복이었다. 국법에 의해 노비제도가 폐지됨과 동시에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땡전 한 닢 없는 신세로 어디로 거주를 옮길 것이며, 이미 소작을 부치고 사는 작인들도 농지가 줄어들까 봐 급급하는 판에 소작인들 어디서 구할 것인가. 천생 소작을 얻게 되는 경우는, 주인이 그동안의 노고와 종리를 생각해서 소작 나가 있는 농토를 재조정해서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어느 만큼 마음을 쓰는 지주들은 다 그런 방법으로 거느렸던 가복들의 생활 대책을 세워주었다. 그런데 염뭋칠의 아버지는 불행하게도 그런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 .. 도리 없이 최씨네에 눌러앉아 문서 없는 가복 노릇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175-176
“날로 달로 개명혀 가는 시상이니께 농새만 짓고 한평생 살라고 허덜 말어. 이 애비가 산 시상허고 니가 살 시상허고는 생판 달블 것잉께.” 눈을 감기 전날 염뭋칠ㄹ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염무칠이 숯가게 배달원으로 취직을 한 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그 말을 좇아서였다. 176
본건사회의 세습제와 유교전통의 불문율인 장자(長子)제일주의 인습을 염무칠은 미련하도록 철저하게 지켰던 것이다. 두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염무칠은 장남과 차남의 위치를 엄격하게 구분했다. 모든 것이 장남 본위, 장남 우선이었다. 181
염무칠이 세상을 떠난 것은 큰아들이 사범학교를 졸업한 그 다음해였다. .. 사람들은 두 아들놈이 불쌍한 염 서방을 잡아먹은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큰 아들은 사범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나오고도 선생을 마다하고 농사일을 시작했고, 완전히 주먹패가 되어버린 작은 아들은 철교 아래 선창에서 칼부림을 해 일본 선원을 찔러죽이고 도망친 사건이 터진 것이다. 182
김범우의 아버지 김사용을 찾아가기로 했다. 염상진은 일본군국주의 정신을 주입하는 선생 노릇을 차마 할 수 없어 농사를 짓기로 결심했다는 요지의 말을 김사용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정연하게 해나갔다. “저에게 농사지을 땅을 좀 빌려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농사를 짓고 있는 전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그런 땅을 얻고자 하면 다른 소작인들이 피해를 보게 됩니다. 개간을 해서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빌려주시가는 겁니다.” 183
“잔네의 그런 큰 결단 앞에 내 어찌 땅뙈기 내놓기를 주저허겄는가. 자네가 필요헌 만큼, 개간을 헐 수 있는 만큼 쓰도록 해줌세.” .. “외레 내가 고마우네. 농담으로 묻는 말인디, 그래, 땅을 빌려 쓰면 사용료는 얼마를 어떤 방법으로 낼 심산인가?” 김사용이, 어디 보자, 하는 애정이 넘친 표정으로 염상진을 쓰다듬듯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어르신의 소작인이 되기는 싫습니다. 그러니 사용료 같은 것은 없이 일정 기간 동안 빌려 쓴 다음 반환하기로 하겠습니다. 반환받으실 때는 박토가 옥토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184-185
상진이가 두 학년이나 차이가 나는 번우와 가까이 지내게 된 것은 바로 ‘김범준’ 때문이었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그 사람, 그건 꼭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그런 형을 가진 범우가 너무나 부럽고, 범우와 가까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웠다. 188
염상진, 김범우 .. 그들은 러시아 혁명에 관한 책들을 거의 빼놓지 않고 탐독했던 것이고, 거기서 잃어버린 나라의 독립의 길을 찾으려고 했다. .. 사회주의 서적을 접하는 데 있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어찌 할 수 없는 인식의 차이가 내재해 있었다. 김범우는 지주의 아들로서 소작농들의 헐벗고 굶주리는 비참한 생활에 대하여 자책과 죄의식을 느끼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이상적 평등사회를 이룩하려면 필연적으로 봉건계급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인식의 기둥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염상진에게는 그런 자책과 죄의식의 과정은 아예 생략되었고, 이상세계의 빠른 실현을 위해 지주계급이나 경제적 지배세력을 타도할 수 있는 무산자들의 힘의 조직화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김범우가 인간생존의 양심을 밝히는 불씨를 얻었다고 한다면, 염상진은 인간생존의 방법을 뒤바꾸는 부기를 얻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3-194
염상진이 김범우를 동지일 수 없다고 판단 내린 것은 범우가 하병에서 돌아온 다음부터였다. 김범우도 똑같은 시기에 염상진의 극렬적 좌경을 체념해 버렸다. 염상진은 한때 김범우를 완전한 적으로 속단할 뻔했다. 김범우가 교직에 몸담으면서 좌익학생조직을 와해시키는 행동을 시작해서였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태워올리고 있는 불길에 찬물을 끼얹는 결정적 행위였다. 그건 재고의 여지가 없는 정면도전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의 깃발 아래 감상적인 옛우정이란 한갓 두엄더미 옆에 구르는 똥덩어리 같은 것이었다. 염상진이 김범우를 혁명의 적으로 단정하려 할 즈음에 김범우의 실체가 드러났다. 백범 김구식의 민족주의 통일노선을 김범우는 실현시키고자 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범우는 경찰서고 군정청이고 드나들며 좌익계 학생들을 석방시키기에 바쁘고, 한편으로는 좌익 학생들을 설득시키느라고 진땀을 빼는 것이었다. 194-195
그가 지향하는 바나 행동하는 것은 그 나름으로 일관성과 순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의 동지도 아니었고 적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동지도 아니고 적도 아니었다. ‘민족’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었지만 그건 또다른 ‘주의’는 될 수 없었다. 195
읍내를 점령하기 전날 밤 굳이 김범우를 찾아가 피신하라고 일렀던 것도 그의 ‘민족 발견’을 위한 행위 때문이었다. .. 미리 피신시키는 것이 우정 때문이 아니라는 말을 김범우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했지만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김사용 어른을 인민재판의 단상에 세웠던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먼저, 지주인 그분을 보호하는 데 떳떳한 명분을 세우고자 함이었고, 다음은, 다른 지주들을 처단하는 데 확실한 기준을 세우고자 함이었다. 196-197
6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
김범우는 깊이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느리게 뿜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또 염상진이 생각났다. 김범우는 그의 생각을 떼쳐내려고 했다. 6일째 꼼짝없이 갇혀 지내는 동안 신물이 나도록 그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끝까지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투철한 의식의 사회주의자가 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그토록 성급한 공산주의자로 변할 줄은 몰랐었다. 그의 지성은 어디고 증발했기에 인민재판을 주도할 수 있었으며, 공개처형을 감행할 수 있었을까. 죄지은 자의 죽음은 마땅하다 하더라도 그 즉흥적인 방법과 감정적 행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202
이념의 현수막을 내건 정치적 전쟁은 바야흐로 그 수레바퀴를 본격적으로 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어느 쪽에서나 민족은 내세워졌으나, 정작 수레바퀴 아래 깔려야 하는 건 민족이었다. 203
벌교와 낙안에 걸쳐 뼈대나 재산을 자랑할 수 있는 집안들은 꽤나 있었지만 그 자식들이 독립운동에 몸 바치고 있는 경우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경사났다고 벌이는 잔치는 법관시험에 합격했다거나 은행원이 되었다거나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204
벌교는 한마디로 일인(日人)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 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던 갯가 빈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킨 것이었다. 205
“문 서방, 문 서방은 문 서방 이름으로 된 땅을 갖고 싶지요?” “하먼이라, 살아생전에 안 되먼 저승에 가서라도 풀고 잡은 소원인디요.” “그럴 테지요. 만약 그 소원이 풀려 열 마지기쯤 논이 생겨 농사를 지었는데 그 쌀을 몽땅 빼앗긴다면 어떻게 되겠소?” “워따 워따, 그럴라면 염병헌다고 농새를 지어라?” 문 서방은 눈까지 부릅뜨며 소리쳤다. “그렇지요, 농사지을 필요가 없지요. 그럼, 쌀을 그냥 빼앗긴 것이 아니라 다 나라에 내놓고 매달 배급을 타다 먹으면 어떻겠소?” ‘미쳤간디요? 지가 진 농새 죽이 끓든 밥이 끓든 지 손으로 간수허는 맛에 살제 무신 초친맛이라고 배급을 타다 묵어라, 닌장맞을. 동냥아치도 아니겄고, 고런 농새도 안 지어라.” “그런 농사도 안 짓겠다면, 그럼 이런 것은 어떻겠소? 그 누구의 명의도 아닌 수백 마지기 논에 공동으로 동네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정해진 양을 배급 타먹는 것 말이요.” “어허, 갈수록 태산이시웨. 아, 니 것도 내 것도 아닌 논에 그눔에 농새 아조 자알 되야묵겄소. 지 농새 짓대끼 쎄 빠지게 일헐 놈 하나또 읎을 것잉께 가실허고 나먼 쭉징이만 수불헐 농새 지나마나 아니겄소?” “문 서방, 염상진이가 논을 분배한다는 것이 바로 그 방법이오.” .. “.. 고것도 말이라고 헌당가? 그려서다 항꾼에 잘살게 된다고 떠들어쌓는감구만. 근디 고건 공염불이여. 시상 사는 이치를 몰라서 허는 소리제, 내 텃밭 배추가 쥔네 밭 배추보다 속살이 더 여물게 차는 이치가 먼지도 몰르고.” 209-210
농지개혁에 대비해서 지주들은 자기네 농토를 가난한 친척들 앞으로 명의변경을 해서 은폐시키거나, 타인에게 매도하거나 하는 일들을 벌이고 있었다. .. “참말로 순사가 들었다 허먼 몽딩이찜질당헐 소리제만 서방님 앞이니께 허는 소린디, 사람덜이 워째서 공산당 허는지 아시요? 나라에서는 농지개혁헌다고 말대포만 펑펑 쏴질렀지 차일피일 밀치기만 허지, 지주는 지주대로 고런 짓거리덜 해대제, 가난허고 무식헌 것덜이 워디 믿고 의지헐 디 읎는 판에 빨갱이 시상 되먼 지주다 쳐읎애고 그 전답 노놔준다는디 공산당 안 헐 사람이 워디 있겄능가요. 못헐 말로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덜이 빨갱이 맹근당께요!” 212
지난 4월 19일 김구가 김규식과 함께 남북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있는 열성을 다 바쳤었다. 제발 서로가 정치적 욕심을 앞세우지도 말고, 강대국이 내세우는 이념에 얹혀 춤추는 꼭두각시 노릇도 하지 말고, 나라 잃어버리고 산 36년의 굴욕과 슬픔을 먼저 생각하며 민족이 똘똘 뭉쳐 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222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약소민족들의 자존이나 독립을 철저하게 우롱하고 기만하며 강대국들의 상호 이익 보호를 위한 연극적 대사였듯 연합국이라는 존재들이 해방된 한반도를 위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깊이 회의하게 만들었다. 민족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공동의 살을 방어하고 옹호하는 집단이어야 한다는 구체적 개념으로 바뀌어 있었다. .. 해방된 땅의 정치적 혼돈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백범 김구가 바로 자신과 똑같은 주장을 내세우고 있었다. 아, 백범! 김범우는 그 옛날부터 지녀왔던 그분에 대한 신뢰감 위에 감동의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후로 김범우는 백범에게 모든 기대를 걸게 되었다. 그분이 2월 10일에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다하는 성명으로 발표한 <3천만 동포에 읍고함>이란 글은 민족의 현실과 장래를 진정으로 염려하고 사랑하는 피가 통하는 진실의 기록이었다. ‘마음속에 삼팔선이 무너지고야 땅위에 삼팔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내가 불초하나 일생을 독립 운동에 희생하였다. 나의 연령이 이제 칠심 유 삼인바, 나에게 남은 것은 금일 금일 하는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재화를 탐내며 명예를 탐낼 것이랴! 더구나 외국 군정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랴!’ 하는 대목에서 그분의 인간적 진실을 보았고,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하는 대목에서도 지도자로서의 외로움을 보았다. 그러나, 김범우가 소망했던 남북협상은, 5월 10일 남한에서 유엔 한국위원단 감시하에 첫 번째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고, 5월 14일 북한에서는 남한에 대한 송전을 중단함으로써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남한에서는 8우러 15일에 대한민국 수립을 선포했고, 북한에서는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하게 되었다. 그로써 김범우의 소망은 그야말로 환상이나 망상이 되고 말았다. 40여 년 만에 가까스로 찾은 선택의 기회를 그처럼 망가뜨려버리는 현실 앞에서 그는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그의 망막 속에서 백범의 초상은 하얗게 표백되고 말았다. 그는 교단에서도 그저 지식을 전달하는 기계로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했고, 그 죄책감으로 학교를 떠나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인가 되풀이했던 것이다. 223-224
자기 나름대로 억울하게 죽은 자가 남긴 피는 단순한 액체가 아니라 저주하는 영혼인 것이다. 염상진은 코웃음치며 이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 경찰서뿐만이 아니라 읍사무소고 세무서고 우체국이고 다 불 질렀다 한들 어떠랴. 인명을 어떤 객관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그리 성급하게 살상하지 말고 그런 것들이나 다 태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 핏자국이 나타날 때마다 김범우의 흔들리는 의식 속에서 염상진은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가 소화다리를 다 건넜을 때는, 한 개의 작은 점으로 변해있던 염상진은 그의 의식 밖으로 사라져 갔다. 226
김범우는 염상구의 뒷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찝쩝 입맛을 다시고는 발을 떼어놓았다. 그는 염상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것도 그의 가슴을 덮는 우울이었다. 무슨 견원지간이라고 염상구는 또 형 염상진과 반대 입장에 서 있게 됐을까……. 230
염상구는 작년 9월에 결성된 대동청년단의 열성단원으로 좌익 지하조직을 파내는 데 적잖은 공을 세웠을 것이다. 그건 형 염상진이와 맞서 싸우는 일이었고, 그래서 염상구는 그 일에 더 신바람이 났을지도 모른다. 232
손승호 .. 그는 작년 6월까지만 해도 좌익에 발을 넣고 있었다. 그런데 우익의 탄압에 맞선 좌익 테러가 속출하면서부터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고, 국제공산주의라는 것이 결국은 지역을 불문한 세력확장의 도구고 사용되는 허구성을 발견하고는 사상적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를 버렸을 뿐 그 반대개념의 사상을 취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사상적 ‘전향’을 한 것이 아니라 사상의 공백상태에 있었다. 그가 괴로워한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주의든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그 사상의 실현을 위해서 인간을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 점이었다. 인간을 위한 주의가 아니라 어떤 주의를 위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변질을 그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설득과 이해의 균형이 없이 폭력을 수단으로 하는 그 어떤 주의나 사상보다는 차라리 원시상태가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손승호의 생각은 김범우의 생각과도 거리가 있었다. 김범우가 관심하는 ‘민족’이라는 자리에 손승호는 ‘인간’을 놓고 있는 셈이었다. 238-239
“아까 자네가 오기 직전에 무슨 말 했는지 아는가? 손승호 그 사람이 자네 형한테 붙들려 죽을 뻔했던 이야기를 하던 참이야. 자네 형은 다시 전향하라고 했고, 끝까지 말을 안 들으니까 총까지 들이대더라는 거야.” “그 말을 워처케 믿냐니께요.” 염상구는 교활하게 느껴지는 웃음을 입가에 바르고 있었다. 형의 이야기에 조금도 감정변화를 보이지 않는 차가움이었다. “이 사람아, 그런 식으로 의심하자면 나는 어떻게 믿나?” 김범우는 두려운 벽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집단화된 의식의 단면이었던 것이다. 240-241
7 그리고 청년단
다 식어빠진 고구마 위에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그 투명하고도 섬세한 무늬의 날개를 늘어뜨리고 앉아 있었다. 싸리나무의 명주실보다 가는 끝가지에 살폿 앉아 네 개의 투명하게 붉은 날개를 비스듬히 치켜세우고 허공에 미세한 율동이 파문을 일구던 여름의 생명력을 고추잠자리는 이미 잃고 있었다. 10월이 저물어가는 찬기운 서린 대기 속에서 고추잠자리는 한 생애를 살아낸 고단한 육신을 싸늘하게 식은 고구마 위에 부려놓고 있었다. 여자가 파리를 쫓듯 손부채를 부쳤지만 고추잠자리는 날아갈 줄을 몰랐다. 손바람에 늘어뜨린 날개가 둔하게 흔들렸을 뿐이다. “무신 놈에 잠자리가……” 여자가 중얼거리며 마디 굵은 손가락으로 고추잠자리를 잡아 무심하게 허공으로 던져버렸다. 허공에 떠오른 고추잠자리는 본능적인 날갯짓을 했지만 몸은 비상을 하지 못하고 아래로 아래로만 떨어져내렸다. 푸른 음향이 맑게 흐를 것 같은 10월의 깊은 하늘만이 한 마리 고추잠자리의 임종을 침묵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253
철교 아래 선창에서 일본 선원을 찔러죽이고 도망쳤던 염상구가 읍내에 다시 나타난 것은 해방과 함께였다. 그는 이미 쫓김을 당하는 살인자가 아니었다. 일본놈을 용감하게 처치한 당당한 독립투사로 변해 있었다. 그가 물건 훔쳐내다가 들켜 살인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254
염상구의 가슴을 뿌듯하게 했던 것은 읍내 치안대의 장악에 있었다. 그것은 해방과 동시에 여운형(呂運亨)이 발족시킨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벌교지부에 소속되기를 바라며 자생적으로 생겨난 조직이었다. .. 염상구로서는 여운형이고 건준(建準)(미군정이 시작되면서 해체됨)이고 알 바 아니었고, 지부에 소속이 안 되어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목전에 펼쳐져 있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만이 중요한 현실이었다. 지안대의 실권자로서 염상구가 제일 먼저 내세운 것이 자신의 이력 변조였다. 257
이유야 어찌 되었건 40년에 이르는 일제의 지배를 받는 동안 벌교읍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근동에서도 일인을 살해한 것으로는 염상구가 유일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258
그는 치안대가 해산되자 전국청년단체총동맹의 지부 실권자가 되었고, 1947년에 이르러서는 정치 발판을 굳힌 이승만이 결성한 대동청년단의 지부 실권직인 감찰부장 자리에 앉았다. 그의 이러한 권력지향성은 어찌할 수 없이 형 염상진과 대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258-259
아버지의 구박과 편애, 형의 자만과 무시 속에서 그나마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다독거림이 있어서였다. 어머니가 아무도 몰래 건네주던 콩누룽지를 받아들고 뒷산 팽나무 아래서 얼마나 목메어 울었던가. 콩누룽지 한 덩어리가 고마워서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형만이 아니라 자신도 사랑하고 있다는, 어머니의 정이 고마워 목이 메었던 것이다. 259
염상구가 형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 것은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공산당의 모든 조직이 지하로 잠적하면서부터였다. 염상구로서는 공산당이나 사회주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를 아예 느끼지 않았다. 그건 적이었다. 경찰에서 그렇게 단정했으니까 적이었고, 형이 가담해 있으니까 더욱 적이었다. 260
“머시냐, 아무리 무당딸이라도 이름은 있을 것인디, 이름이 머시요?” “소화구만요.” “소화? 소화? 밥 묵고 소화시킨다는 소화는 아닐 것이고, 무신 뜻이요?” “흰 꽃이라는 뜻인디요.” “흰 꽃? 허어, 참말로 누가 진 이름인지 생김허고 딱 맞아떨어지는 기맥힌 이름이시.” 얼결에 말을 해놓고 염상구는 그만 스스로 민망해졌다. .. 염상구는 서둘러 돌아섰다. 그러나 되돌아서 멀어져가는 소화라는 무당딸의 뒷모습을 음탕한 눈길로 지켜보고 서 있었다. 저, 저 살랑살랑 흔드는 방댕이 잠 보소. 무당춤 폴짝폴짝 얼싸얼싸 잘 춰대는 아랫심 씬 것 보먼 저년 니노지가 아매 낯짝 이쁘게 생긴 거맨치로 쫄깃쫄깃허고 옴죽옴죽헌 것이 꼭 겨울꼬막 맛일 거이다. 헌디, 신 내린 무당 잘못 건디렸다가는 급살을 맞등가 빙신이 된다니께 말이여. 화아, 저것 한번 조지고 급살을 맞을 수도 읎고, 운 좋아 급살을 면해야 빙신이 되는 건디, 와따메 참마로 사람 환장허겄네잉. 269-270
한 팔로 그녀의 목을 감으며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등을 더듬어내리고, 허리에 잠시 머무른 손은 둔부를 지나 허벅지까지 내려갔다. 그는 애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을 기억해 두고 싶은 욕구가 성욕에 앞서 있었다. 그의 손은 다시 그녀의 어깨로 올라왔다. 그녀를 끌어안았다. 꼭꼭 끌어안으면서,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자 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그건, 내가 가고 있는 길이 과연 옳은 길인가, 하는 평소의 자문(自問)이었다. 286
정하섭은 돌아섰다. 그리고 뒷산 쪽을 향하여 날쌔게 뛰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은 이내 어둠에 묻혔고, 눈을 부릅뜨다시피 한 소화의 시야에서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소화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의 가슴에서는 실타래가 풀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끝은 정하섭에게 묶여 있었다. 아무리 험한 길을 아무리 멀리 가도 끊어지지도 동이 나지도 않을 실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가슴에서 끝도 한도 없이 만들어지는 인연의 실이었던 것이다. 289-290
8 이념 이전의 인간
재판소의 이 판사. .. 일제치하에서 고등고시라는 것을 거쳐 판검사가 된 거의 모든 인간들이 그렇듯 그도 철저한 일제의 주구 노릇을 감행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친일한 거의 모든 인간들이 그러했듯 그도 아무런 속죄의 표현도 없이 군정과 함께 다시 그 뻔뻔스러운 얼굴을 들고 판사 노릇을 해먹고 있었다. 더 한심스러운 것은 지난 5월에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애국을 부르짖은 것이었다. 일제치하에서 자신이 소작인의 권익옹호를 위해 분투한 것이 얼마며, 피해 받는 동포의 인권옹호를 위해 헌신한 것이 얼마인지 아느냐고 목청을 돋우었다. 그건 친일지주 계급들이 자위책으로 한민당을 결성하여 신속하게 미군정을 등에 업었고, 그것도 불안하여 민중의 지지를 쉽게 받을 수 있는 인물로 이승만을 골라 당수에 앉히고자 했고, 민족개념이나 통일조국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집권욕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이승만은 굴러들어온 떡을 마다할 리가 없었고, 그리하여 그 힘이 전국적인 정치세력으로 확장되면서 그드르이 정치형태는 시궁창보다 더 더럽게 변해갔고, 마침내 이 판사 같은 인물이 애국자로 둔갑해 국회의원에 출마할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293-294
처남 신석주와 좌익과 …… 그건 아무래도 걸맞지 않았다. 좌익을 하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만큼 체질적인 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주의’나 ‘사상’이라는 말이 붙어 있는 한 그건 이미 ‘감상’이나 ‘환상’이 아닌 것이다. 그 어떤 주의나 사상이든 그 최종목표는 실천에 있었다. 첫째가 의식의 실천인 것이며, 둘째가 행동의 실천인 것이다. 특히 사회주의라는 것은 그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처남은 그런 조건에 전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298
“노상에서 이리 서 있지 말고 어디 다방에라도 좀 들어갑시다. 이렇게 얼굴 대하게 된 것마도 천행 아닙니까.” 선우진이 김범우의 팔을 끌었다. 그의 예사로운 것 같은 말이 김범우의 가슴에 찡한 파문을 일구었다. 그는 1946년 상반기에 황해도에서 월남한 사람이었다. 토지개혁 실시로 지주였던 그의 집안은 파탄을 맞아야 했고, 그는 삼팔선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토지는 말할 것도 없고 값나가는 살림살이까지 몰수를 당하는 바람에 대학졸업장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어 졸업앨범 하나만을 달랑 가지고 내려온 그의 일화는 선생들의 우스갯감이 되고는 했다. 감정 같아서는 다른 월남민들처럼 경찰에 투신해서 남한에 박힌 빨갱이들을 잡아내는 족족 쏴죽이고 싶다고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데 그는 총구멍만 보면 사지가 오그라붙는 것 같아 경찰에 투신을 못하고 졸업앨범을 졸업장 대신 내밀어 선생이 된 것이다. 토지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는 총구멍에 어지간히 혼쭐이 난 모양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그의 공산당에 대한 증오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봉건적 사회체제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극복되어야 하고, 친일반민족세력을 냉정하고 엄정하게 처벌해서 민족단위의 국가를 만든 다음 모든 일에 앞서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은 농민이 8할을 점하고 있는 현실에서 농지개혁은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김범우와는 논리적 대화가 성립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타향살이의 외로움 탓인지 김범우에게 계속적인 호감을 표시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300-301
“.. 선우 선생이 사회주의 사상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것이나, 그들이 자본주의 사상을 적대시하는 것이나 결국 확일주의이기는 마찬 가지니까요. 내가 놀라는 건 그들이 총살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봐요, 주의를 앞세워 서로가 서로를 원수 삼아야 하는 이 땅의 비극이 무엇을 위하는 것인지 말이오.” 303
“.. 선우 선생이 그냥 평범한 직업인이 아니고 ‘선생’인 한 그건 좀 곤란한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선생은 더 말할 것 없이 학생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최소한 객관적 판단을 견지하면서, 정치적 견해도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런데 선우 선생은 너무나 한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교육자 입장에서, 그리고 객관적 판단력을 가진 지식인 입장엥서 서청을 보아야 하고, 이번 사태도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서청의 행위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비난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제주도에서 4.3 사건이 발생한 금년부텁니다. 반공을 앞세운 그들의 잔혹행위가 사회적 말썽을 일으킨 것은 그들이 확실한 공산주의자만을 처단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에 대한 개인적 감정에 휩쓸려 무고한 양민들까지 무분별하게 살상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다 아는 그런 잘못을 저지른 서청을 선우 선생이 무조건 지지하고 두둔한다면 학생들이 선우 선생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건 선우 선생의 사상 문제 이전에 인격 자체를 불신당하는 계기가 될 겁니다.” 304-305
“..선우 선생은 역사 앞에서 최소한이나마 냉정을 회복한 다음,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월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가를, 왜 그들이 경찰, 군인이 되고 또 서청 같은 단체를 조직했는가를, 그리고 왜 그들에 대해서 사회의 일반적 인식이 나쁜가를 따져볼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모두 너무 자명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를 선우 선생이 찾아내지 못하면 선우 선생은 계속 불행할 겁니다. 내가 끝으로 한다미만 하겠습니다. 해방이 되고, 그게 공산주의 체제가 아니었더라도 선우 선생은 지금과 똑같은 형편에 처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지주계급의 몰락, 그것은 올바른 역사의 흐름입니다. 친일반역세력의 척격, 그것 또한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입니다. 선생으로서 그 사실을 납득해야만 합니다.” “그건 바로 공산주의자들의 주장 그대로요. 김 선생, 도대체 당신 정체는 뭐요!” 선우진이 느닷없이 소리 지르는 바람에 김범우는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가 그만 성냥을 도로 놓았다. “알겠소, 그만 일어납시다. 난 아직 바쁜 일이 남아 있소.” 김범우는 체념적인 얼굴로 담뱃갑을 챙겨들었다. 선우진은 의혹스러운 눈으로 김범우를 쳐다보며 무겁게 따라 일어섰다. 306
“셰익스피어는 역시 인도하도고 안 바꿀 만큼 위대한 모양이네, 자네의 시간 때움을. 해줄 수 있으니 말야. 그 잡품이 어던 것이었나.” 김범우는 친근한 웃음을 띠어 보였다. “햄릿을 그냥 뒤적이던 중이네.” 손승호는 무언가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라도 있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그런 자신의 태도가 상대방에게 어떻게 보일지 또 신경에 거실리기라도 한 듯, “셰익스피어가 위대한지는 몰라도 그런 비유법을 쓴 영국인들은 한심한 종자들이야. 그 과장의 정도야 아무래도 상관할 게 없지만, 비유의 대상을 한 나라로 잡았다는 건 용서할 수가 없는 일이야. 셰익스피어가 제아무리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한들 어찌 인도보다 더 위대할 수 있느냔 말야. 인도라는 거대한 땅덩어리는 차치하고라도 거기엔 4억을 헤아리는 인간들이 엄영히 생존하고 있어. 그 생명들의 존엄성보다 셰익스피어가 더 위대하다니, 그따위 발상법을 가진 영국인들은 일본놈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식민주의자들이야. 물론 어떠 ㄴ유식한 자가 무심코 쓴 비유법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무심코’ 만족을 느낀 것이고, 자기네 민족의 우월감을 과시하는 한 방법으로 계익스피어를 세계호ㅘ시키면서 또 그 비유를 ‘무심코’ 써먹은 거야. 셰익스피어가 분명 봉건 왕조시대의 작가지만 자기의 작가정신이 그처럼 수없이 많은 인간들의 존엄성을 짓밟는 것으로 비유되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을 거야. 오히려 그 반대였겠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아예 그런 좋은 작품들을 써내지 못했을 테니까. 셰익스피어는 후대를 잘못 둔 셈이지.” 손승호는 경멸적인 웃음을 입가에 물고 있었다. 김범우는 놀라운 눈으로 손승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그야말로 무심코 던진, 그 예사가 된 한마리를 붙들고 그처럼 긴 이야기를 하는 데 놀랐고, 자신으로서는 및치지 못했던 그 논리추출의 예리한 시각과 논리개진의 완벽한 방법에 놀랐다. 손승오희 그런 논리는 그가 왜 좌익의 테러화와 함께 사상적 전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건 문학적 인도주의를 사고의 바탕으로 마련하고 있는 손승호의 필연적 귀결인지도 몰랐다. 318-320
어떤 사실의 모순이나 왜곡에 대해서 아무리 논리적 비판을 가하고 이론적 규명을 한다 한들 현실적으로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없을 때 허망감에 빠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었다. 그 논리가 명징하면 할수록, 그 이론이 명확하면 할수록 그 정도는 심해질 터였다. 320
“.. 그 누가 감히 그 현실적 삶을 거부하거나 기피할 수 있겠는가. 역사 비판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겠나. 다 지나가버린 세월, 아무리 열 올리며 비판한다고 해봤자 이미 그르쳐진 일이 바로잡힐 리가 있겠나. 그런데도 그게 계속이거든. 왜 그러겠는가. 인간은 현실을 살 수밖에 없는 동물이고, 그 과거적 삶 속에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비워주는 거울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나. 자네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소릴 나야말로 부질없이 지껄여대고 있구먼.” 김범우는 담배를 빼들었다. “사람 참, 별소릴……” 손승호는 김범우 앞으로 통성냥을 밀어놓으며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이고 있었다. 321
“자네도 알겠지만, 핵심 좌익들은 벌써 다 도망을 쳐버렸네. 물론 붙들려온 사람들 중에는 및처 피하지 못한 자들도 있긴 있을 것이고, 세포들도 끼여 있겠지. 그런 것을 가려내는 거야 경찰의 업무니까 말할 바 못 되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 가족 등의 감정이 개입돼 무고한 사람들이 다칠 염려가 있네. 그 피해를 최소한 막아보자는 거네.” 322
“범우, 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고, 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네. 허나, 자네가 그런 제안을 했으니 내 생각을 마하려네. .. 자네나 나나 염상진 선배가 애초에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던 것은 오늘 같은 날을 위해서는 아니잖은가. 그런데 해방이 되면서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것도 변질되기 시작했네. 금년에 남북 양쪽에서 서로 다른 주의를 앞세워 서로 다른 이름의 나라를 세우면서 우리 모두는 인간적으로 민족적으로 우리 스스로를 살해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죄를 저질렀네. 그리고 나타난 현상이 뭐였나. 서로의 사상을 정치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해 인간을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 극렬적 충돌이었네. 그런 야만적 행위가 또 어디 있겠나. 난 완전히 환멸하고 절망했네. .. 범우 자네의 뜻을 이해하면서도 행동적 동의를 할 수 없는 것은, 그런 경직된 상황 속에서 자네와 같은 뜻이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고, 자칫 잘못하다간 그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실수를 범할 것이기 때문이네. 날 비겁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네. 난 모든 것에 선행해 인간이고 싶네. 난 그걸 지키기 위해서 사회주의를 버렸고, 총을 들이댄 염상진의 위협에도 굽히지 않았네. 자네의 뜻이 바로 순수한 인간적인 것임을 아네만 현실은 그걸 순수하게 받아들여주지 않을 것이네. 자네가 좌익학생들을 위해 분투했던 때와는 상황이 너무나 다르네. 협조를 할 수 없어 미안하네.” 323-324
그는 인간의 인간다운 삶의 길을 위하여 사회주의를 택했었다. 그런데 결국 그가 만난 것은 인간부재의 현실일 뿐이었다.(손승호) 328
김범우는 그 어스름 속을 걸어가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손승호의 말이 새로울 것은 없었다. 주의가 정치적 대결자으이 무기로 변한 것도, 그 속에서 한 인간의 힘이 얼마나 미약한가 하는 것도, 터무니없는 오해를 야기시킬 위험성도, 김범우는 이미 생각했던 바였다. 그러나 김범우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엇던 것은 주의가 정치 폭력화햇다는 점이었다. 미군정이 공산당 활동의 불법화 조치를 취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폭력대결은 정부수립을 기점으로 남쪽에서 공산주의라는 것은 절대 용납이 안 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북쪽에서의 자본주의라는 것은 절대 용납불가가 된 것이다. 그 결과의 표현이 바로 이번 사건이었다. 염상진이 겨우 5일 동안에 100명 이상의 인명 살상을 자행할 줄 상상이나 했던가. 그건 염상진이라는 개인의 뜻이 아니라 정치 폭력화한 주의의 충돌이었던 것이다. 염상진은 이미 주의를 지배하는 이성적 인간이 아니라 주의의 정치적 실현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변신한 것이었다. 정치라는 것만큼 본질을 전도하는 것도 없을 것이고, 염상진은 그 전도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100명쯤은 의당 죽일 수 있는 타당성을 마련했을 것이다. 그러나 염상진이 그러했다면, 그 상대적인 힘은 두 배 이상의 가격을 할 권리르 얻게 되는 것이다. 정치 폭력의 역학이라는 것은 별것이 아닌 것이다. 일본 교사들이 조선인 학생들에게 즐겨 써먹었던 ‘서로 따귀 갈기기’의 처벌법이 갖는 가해성과 마찬가지였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점점더 상대방을 세게 갈길 수밖에 없는 가해성, 그때 내가 때리고 있는 것이 내 친구라는 사실은 이미 망각해 버린다. 상대는 오직 나를 아프게 하는 적일 뿐이고, 내가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공격성만 가속화하는 것이다. 김범우는 그 정치적 가해성은 외면하고 있었다. 그건 비탈길을 굴러내리기 시작한 수레바퀴의 불가항력적인 힘이었기 때문이다. 김범우의 관심은 그 수레바퀴 아래 멋모르고 깔려 압사해야 하는 민중들의 억울에만 쏠려 있었던 것이다. 328-330
사람의 운명이란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354
9 문딩이 가시내, 팔자도 참 험허게 변했다
“문딩이 가시내, 팔자도 참 험허게 변했다.” 점례는 멀어져가는 옛 친구 순심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360
방죽 위에는 관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관들의 수효만큼 여러 음색이 곡성이 뒤엉키고 있었다. 들몰댁은 숨을 헐떡이며 질린 눈으로 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소스라쳐 놀라 돌아섰다. 들목댁은 방죽의 비탈을 구르듯이 내려갔다. 갈숲은 흰 꽃술을 달고 무성했다. 들몰댁은 갈숲을 휘젖기 시작했다. .. “저 여자 왜 저러는겨?” “보면 모르남? 뻔허제.” “몰라서가 아니라 갈밭에는 인자 시체가 하나또 읎다는 말이시.” “냅두소. 말해 줘도 소양읎을 것잉께. 지 눈으로 읎다는 것을 확인헐 때꺼정 저러고 댕겨야 허네.” 방죽 위에서 두 남자가 들몰댁을 내려다보며 하는 말이었다. 378-379
들몰댁은 경찰서를 찾아갔다. .. 그녀는 북국민학교를 찾아갔다. 거기서도 마찬가지로 그녀를 떠밀어냈다. .. 다시 방죽을 향해 걸었다. .. 갈숲을 헤치자 헤치다 들몰댁이 방죽의 비탈에 지쳐 쓰러졌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했다. .. 고구마 두 개씩으로 점심을 때운 새끼들이 배가 고파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거였다. .. 들몰댁이 동구에 들어선 것은 어둑어둑해서였다. 그녀는 비척거리며 고샅을 돌았다. “엄니이!” 소리치며 뛰어오는 것은 길남이었다. .. “엄니, 워디 갔다 인자 와. 할아부지가 오셨는디.” “머시여?” .. “참말이여? 은제여?” 그녀는 목멘 소리로 외쳤다. “아까 점심때 지내서.” “워메, 내년이 넋 빠진 년이다, 넋 빠진 년.” .. 들몰댁은 다급함 속에서도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시아버지는 아랫목에 반듯이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 들몰댁은 서둘러 보리쌀을 안치고 불을 지피면서야 맘 놓고 눈물을 흘렸다. 380-382
며칠 만에 되찾은 잠자리였다. 들몰댁은 이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처음 그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을 때는 꿈인가 했다. 그러나 두번째 그 소리를 듣고 들몰댁은 번쩍 잠이 깼다. “이봐, 문 열어, 문!” 382
어둠 속에서 남자가 아이들에게 소리치며 들몰댁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들몰댁은 끄는 대로 끌려 마루로 나왔고, 토방으로 굴러떨어졌다. 눈에서 불꽃이 번쩍 하며 가슴이 컥 막혔다. “경찰에서 풀려났다고 너희들 죄가 다 끝난 줄 알았다감 천만의 말씀이야. 우리가 누군 줄 알어? 하대치, 바로 그 악질 빨갱이새끼한테 아버지를 잃은 사람들이다. 지금부턴 우리가 내리는 벌을 받아야 된다 그런 말씀ㅇ야. 알아들어?” 마당에 버티고 섰던 다섯 개의 그림자가 몽둥이를 치켜들며 일제히 몰려왔다. 들몰댁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려박았다. 몽둥이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들몰댁은 이빨을 뿌득뿌득 갈다가 결국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애들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를 아슴푸레하게 들으며 끝내 까무러치고 말았다. 들몰댁이 깨어났을 때는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엄니, 엄니, 항아부지가 죽었어.” .. “아부님, 아부님……” 들몰댁은 넋 나간 얼굴로 시아버지를 흔들었다. “집집마다 댕김서 우리 할아부지, 엄니 잠 살려도라고 사정사정 했는디도 아무도 안 왔어.” 길남이가 울음을 추스르며 말했고, 비로소 들몰댁은 ‘아부님’을 섧게 부르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384-385
그들의 보복행위는 벌써 사흘 밤째 감행된 것이었다. 처형을 당한 집들을 제외한 나머지 집들이 보복대상이었다. 그 정보는 쉽게 그들의 손에 들어왔다. 윤태주가 청년단장 아들 현오봉을 앞세워 염상구를 만났던 것이다. “죽이지는 않겄다 그 말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염상구가 다짐하듯이 물었다. .. “그렇구만요.” 윤태주가 분명하게 대답했다. “고것덜이 이뻐서가 아니고 다 쓸 디가 있어서 그냥 내보낸 것잉께 만약 죽으먼 느그덜이 당혀. 그 약속만 지킨다먼 나가 도와줄껴.” 염상구는 독기 서린 찬 웃음을 입가에 물었다. “저어…… 염상진은 감찰부장님 형님 아니십니까.” “근디?” .. “그 집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 “요것 잠 보드라고 대학상 양반, 워째 하나는 알고 둘은 몰르는가 그래.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고런 말씸이시. 알아들으시겄능가?” .. “나 바쁜게 그만들 가보드락. 죽이지만 말고.” 염상구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염상진의 집부터 시작해서 오늘 밤 하대치의 집까지, 사흘 밤 동안 일곱 집을 쓸었다. 밤마다 일을 마치고는 윤태주의 집에 모여 밤참을 먹고 다음날 일을 계획하고는 했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그들의 젊은 핏속에는 쾌락적인 승리감과 함께 보복감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395-396
10 암약(暗躍)
“.. 투쟁은 무기로만 하는 게 아닌 것 또한 사실이오. 무기에 앞서 정신력, 여건, 환경 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투쟁결과는 나타나게 되어 있소. 그 좋은 예가 바로 제주도에서 전개되고 있는 투쟁이오. 그들은 골비된 섬인데도 불구하고 벌써 7개월째 투쟁을 계속하고 있소. 양키들이 발악적으로 비행기며 군함을 동원해 최신무기를 사용하고, 서청이고 군,경을 그렇게 토입해 무자비한 학살을 감행해도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 말이오. ..”(염상진과 안창민의 대화중 염상민) 434
사람들은 스스로 한 덩어리가 되어 해방의 기쁨을 나누었던 힘으 ㄹ그냥 사장ㅇ시키지 않고 새 세상 만들기오아 새 나라 만들기의 힘으로 바꾼 것이었다. .. 민중들은 압제 속에 살면서 이미 그런 준비를 해왔음을 깨달아야 했다. 사람들의 그런 자발성에 따라 건준지부와 치안대가 탄생했다. 그리고 건준지부는 곧 인민위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인민위워노히의 여러 기구에 친일반역자들이 얼씬도 하지 못한 것은 더 말할 껏도 없었다. 5만을 헤아리는 읍민들 중에 9할이 농민이고, 그 농민들 중에서 8할이 넘게 소작인인 그들이 인민위원회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는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했다. 신속한 토지문제의 해결이었다. 그 요구와 공산주이 혁명과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맞아떨어졌다. 해방된 땅의 전체 분위기는 똑같았고, 그건 곧 혁명으로 치달아가는 길이었다. 인민은 곧 혁명 이데올로기의 거대한 연료로서 불꽃이 당겨지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팔선 이남을 미군들이 점령했고, 그들은 군정을 선포하면서 마침내 10월 10일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하고 나섰다. 그때부터 인민들의 욕구는 깨져나가기 시작했고, 공산당은 피나는 투쟁 속에서 세력의 약화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440-441
강동식은 하대치와 함께 그 투쟁경력이 화려한, 염상진 휘하조직의 중추이며 골수분자였다. 그는 벌교 토박이로 회정리에서만 대대로 살아온 소작인 집안 자식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하대치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중도의 간척논 소작인이었다. 그런데 그가 소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논에서 발을 찔렸는데 그것이 덧나기 시작해서 반년이 넘게 고생고생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5학년에서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일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꿈을 버릴 수가 없어서 혼자 힘으로 나머지 소학교 과정의 공부를 마쳤다. 하대치보다 두 살이 많은 그는 하대치와 같은 시기에 염상진과 인연을 맺었다. 그래서 징용을 끌려갔다왔고, 바로 사회주의에 빠져들었다. 444
하대치가 뜨거운 기질이라면 그는 끈질긴 기질이었다. 445
배성오는 칠동리에서 부자 축에 드는 과수원집 아들이었다. 그는 순천농업학교 출신이었다. 순천농업은 순천에 있는 학교들 중에서 좌익세가 제일 강한 학교였다. 공부가 별로 마음에 없었던 그는 운동에 열중하는 한편으로 좌익에 기울어졌다. 타고난 뼈대가 굵은 그는 유도에 남다른 솜씨를 보이면서 좌익학생세력의 중심부에서 움직였다. .. 그는 정하섭의 소학교 1년 후배였다. 그리고 같은 좌익활동을 할 뿐 아니라 염상진의 영향 아래 있었다. .. 정하섭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배성오는 정하섭을 적대시하고 있었다. 책방집 딸 문정님 때문이었다. 그는 문정님에게 눈독을 들인 채 기회만 엿보며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는데 정하섭과 그 여자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나돌게 되었다. 정하섭을 기운으로 해치울 수도 없는 일이었고, 그의 피해의식은 적대감으로 바뀌어갔다. 446-447
전쟁 전날 밤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아이들이 잠든 후 남편과 나는 오랜만에 둘이서 오붓하게 대화할 시간을 가졌다. 남편은 수제 햄버거를 만들고 차를 끓여주었다. 늦은 저녁을 먹으며 우리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새로 구입한 아파트 수리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상상과 함께 아이들이 즐겁게 학원 생활을 해나가는 것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우리에게는 천 개의 계획들과 꿈이 있었다. 그렇게 우린 배부르고 행복한 채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 5시.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처음에는 폭죽 소리인 줄 알았는데, 사방에서 폭격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완전히 파악하지도 못한 채 나는 미친듯이 서류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들 페자(표도르의 애칭)가 잠에서 깨어났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이에게 설명해주어야만 했다. …… 그다음 딸 베라가 깼다. 나는 바로 아이들의 팔에 이름, 생년월일과 연락처를 적어 주었다. 7-8
우리는 지하실에서 여덟 밤을 보냈다. 조용할 때는 아파트에 올라가서 집안일을 했지만, 폭격 소리가 들리면 곧장 아이들을 대피시킬 준비를 하고 지하실로 뛰쳐내려갔다. 그 기간 우리 아파트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창문에는 종이테이프를 X자로 붙였다. 이내 모든 유리창과 유리문을 떼어내 구석방 바닥에 쌓아두었다. 복도에는 비상 상황에 대비해 챙겨둔 백팩과 캐리어를 두었다. 9
난 아이들을 데리고 바르샤바로 떠나야만 했다. 아이들을 위해 그런 결정을 내렸다. 우크라이나에 내려진 계엄령으로 인해 남편은 나라를 떠날 수 없었다. 전쟁 9일 만에 그들은 나를 집, 엄마, 그리고 남편으로 부터 ‘해방(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를 나치즘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정화’하기 위해 침공했다고 주장한다. 2022년 3월 25일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난 시점까지도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전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시켜주었다. 나에게 남은 건 아이들, 강아지, 등뒤의 백팩 하나와 그림 그릴 수 있는 재능뿐이었다. 11
옮긴이의 말 ‘어딘가 먼 곳’이 아닌 ‘지금 여기’의 고통으로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먼 곳’에서 전쟁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똑같은 지극히 작고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부디 인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134
레이먼드 챈들러를 기리며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찍이 “챈들러는 나의 영웅”이라 말했으며, 최근까지도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와 챈들러를 한 권에 담는 것”이라고 밝혔다. 스티븐 킹은 자신의 저서에서 챈들러를 읽으며 문체를 공부했다고 언급했다. 그 외 폴 오스터, 마이클 코널리, 하라 료 등 수많은 작가들과 마틴 스콜세지, 코언 형제 등 유명 감독들이 챈들러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공언한 바 있다. 국내에서도 다르지 않아서, 정유정 작가는 문체나 문장에서 챈들러를 스승으로 삼았다고 했고, 정이현 작가는 “가장 내 타입인 탐정은 필립 말로”라고 했으며, 류승완 감독은 평소 챈들러의 소설을 즐겨 읽는다고 말했다. 10
이 책은 레이먼드 챈들러가 자유롭게 쓴 편지를 발췌, 편집한 서간집이다. 10
이야기라는 방패를 집어던진 있는 그대로의 챈들러는 신랄하지만 정의롭고, 까다롭지만 합리적이며, 지적이지만 낭만적인 사람이고, 그런 챈들러는, 자신이 창조한 탐정 필립 말로보다 더 매력적이라 단언하겠다. 11
챈들러가 남긴 수많은 어록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문구를 인용하며, ‘그러나 이 비열한 거리로 한 남자는 걸어가야 한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도 않고, 타락하지도 않으며, 두려움도 없는 채로, (……) 마일 그 같은 사람이 많다면, 이 세계는 지나치게 따분하지 않으면서도 살아가기에 아주 안전한 공간이 되리라.” - <심플 아트 오브 머더>중에서
챈들러의 이상은 바로 이 말에서 드러난다. 아무리 사회가 타락한다 한들, 누군가는 그 안에서 개인적인 양심을 수호하며 살아야만 한다. 그런 인물이 있는 한 어쩌면 세상에는 일말의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는, 그 이상적인 인물은 얼핏 챈들러 자신과도 닮았다. 17
제1장 작품론
등장인물의 감정을 배체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사실을 묘사하는 방식은 하드보일드 스타일이라 불리며, 문학적으로는 헤밍웨이가 구축했고, 대실 해밋을 통해 추리소설에 접목되면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라는 새로운 유형을 낳게 된다. 23
펄프 소설 - 1920년대 말부터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펄프 잡지(Pulp Magazine)에 실린 소설들을 말한다. 저렴한 펄프지에 인쇄한 이 잡지들은 하드보일드 탐정소설들의 모태가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잡지는 챈들러의 데뷔작을 게재하기도 한 <블랙 마스크>로, 편집장 조셉 쇼(혹은 조 쇼)는 특히 대실 해밋을 아꼈으며, 이후 챈들러를 비롯한 펄프 작가들에게 해밋의 스타일을 모방하여 모든 수사를 재베하고 ‘행동’만을 우선하는 글쓰기를 요구했다. 40
저명한 시인이자 평론가인 위스턴 오든(Wystan Auden, 1907~1973)이 <하퍼스 매거진> 1948년 5월호에 발표한 에세이.. 이 글에서 오든은 탐정소설에 대한 챈들러의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았지만, 챈들러의 작품에 대해서는 “내가 볼 때 챈들러는 탐정소설이 아니라 범죄 환경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쓰는 데 관심이 있다. 강렬하지만 극도로 우울한 그의 작품들은 도피 문학이 아니라 예술 작품으로 읽혀야만 한다”고 평했다. 43
하드보일드 소설은 내가 고안한 게 아닙니다. 해밋이 공(公)의 대부분, 혹은 전부를 가져가야 한다는 내 생각을 숨긴 적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시작할 때는 모방을 하죠. 스티븐슨이 말하길, “노력하는 유인원”(<지킬 작사와 하이드 씨>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자신의 에세이에서 “수많은 위대한 작가들의 스타일을 모방하려고 노력하는 유인원 행위(Ssdulous ape)를 통해 글을 배웠다”고 쓴 이후 이 표현 자체가 ‘모방하다’는 의미로 굳어졌다.)이라고 했지요. 나는 개인적으로, 작가가 개인적인 기교, 자신의 글쓰는 수완, 자기만의 표현 수법, 소재에 대한 접근 방식을 향상시키려는 시도가 지나치게 멀리 나아가다 보면 표절이라는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45
추리소설에는 아주 강한 환상적 요소가 있죠. 어떤 종류의 글이든 그 안에는 적절한 공식 내에서 움직이는 요소가 있어요. 추리소설가의 재료는 멜로드라마입니다. 사람이 실제 삶에서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폭력과 두려움을 과장하는 겁니다. (나는 일반적이라고 했습니다. 나치 강제수용소에서의 삶을 일반화하는 작가는 없습니다.) 52-53
매일 무얼하며 지내냐고요? 쓸 수 있을 때는 쓰고, 쓸 수 없을 때는 안 쓰죠. 대개 아침이나 이른 오후 무렵에 글을 씁니다. 밤이면 무척 현란한 생각들이 떠오르는데 지속은 안 돼요. 오래 전에 그 사실을 깨달았죠. 55
나로 말하자면, 나는 영감을 기다리는 편입니다. 굳이 영감이라고 명명할 필요는 없지만요. 생명력을 지닌 글은 모두 가슴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대단히 피곤하고 지칠 수도 있는 고된 일이지요. 의도적인 노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전혀 일이 아니지만, 중요한 건, 전업 작가라면 적어도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일정한 시간을 두고, 그 시간에는 글쓰기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꼭 글을 써야 할 필요는 없어요. 내키지 않으면 굳이 애쓰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물구나무를 서거나 바닥에서 뒹굴어도 좋아요. 다만 바람직하다 싶은 다른 어떤 일도 하면 안 됩니다. 글을 읽거나, 편지를 쓰거나, 잡지를 훑어보거나, 수표를 쓰는 것도 안 돼요. 글을 쓰거나 아니면 아무 일도 하지 말 것. 학교에서 규칙을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 원칙입니다. 학생들에게 얌전히 있으라고 하면 심심해서라도 무언가를 배우려 하죠. 이게 효과가 있답니다. 아주 간단한 두 가지 규칙이에요. 첫째, 글을 안 써도 된다. 둘째, 대신 다른 일을 하면 안 된다.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55-57
탐정은 완전한 존재로 어떤 사건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탐정은 탐정으로서 이야기 밖에, 이야기 너머에 있고 언제나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먹고 자고 자기 옷을 보관할 장소를 소유하는 것 외에, 탐정은 연애를 하지도 않고, 결혼을 하지도 않고, 어떤 사생활을 누리지도 못하는 겁니다. 탐정의 도덕적이고 지적인 힘은 보수 외에는 얻는 게 없는데도,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무고한 자들을 보호하고, 약자를 수호하며 악당을 쳐부술 것이라는데서 나옵니다. .. 프로는 도시 문명이 가하는 모든 압박을 받으면서도 그 모든 압박을 딛고 일어나 자신의 일을 해야만 합니다. 법이 아니라 정의를 대변하기 때문에 때로는 법을 무시하거나 어겨야만 하지요. 사람이기 때문에 상처를 입거나 기만당하거나 속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필요하다면 죽음을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탐정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물론 이런 탐정이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죠. .. 탐정소설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탐정에 대한 소설은 아닐 겁니다. 탐정은 오로지 촉매제로 이야기에 첨가될 뿐입니다. 58-59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내 경험을 바탕으로 경고하자면 스스로 터득할 수 없는 작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배움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 분석하고 모방해 봐요. 다른 교육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도움이 된다는 건 인정해요. 때로는 필수적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걸 위해 돈을 내야 한다면 대체로 수상쩍은 겁니다. .. 글을 쓰기 전에 아주 세세하게 플롯을 구상하는 작가들이 있지요. 하지만 나는 그런 작가가 아닙니다. 70
<기나긴 이별>이라고 이름 붙인 소설. .. 구만이천 단어 정도예요. .. 어쨌거나 이번 이야기는 쓰고 싶었던 대로 썼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쓸 수 있으니까요. 미스터리가 선명하게 드러나는가 하는 점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람들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상하고 부조리한 세계에 신경을 썼지요. 그리고 정직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결국에는 어떻게 감상적으로, 내지는 더 없는 바보로 보이게 되는가 하는 문제에도. 72-73
우리 중 최고의 작가들도 새 책을 쓸 때 매번 바닥부터 시작해요. 돈벌이로 글을 쓰는 작가란 자신이 하는 일이 가치 없는 줄 알면서도 돈을 벌기 위해 기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이죠. 내가 만난 어떤 추리소설가도 자신이 하는 일이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좀 더 잘 쓸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죠. 나는 어쩌다 운이 좋은 사람들 쪽에 서게 되었는데, 정말이라니까요, 이 일에는 운이 필요하답니다. 76
과거에 이룬 성과가 무엇이든, 작가는 지금 현재 하려고 하는 일 앞에서 다시 아이가 됩니다. 아무리 상투적인 기교를 많이 익혔다 한들, 작가에게 지금 도움이 되는 것은 열정과 겸손함뿐입니다. 78
페리 메이슨 시리즈로 큰 인기를 누렸던 얼 스탠리 가드너(Earl Stanley Gardner, 1889~1970)는 당시 작품량이나 판매량에서 해밋이나 챈들러를 압도하는 작가엿다. 챈들러는 가드너의 소설을 읽으며 글 쓰는 법을 연구했다고 여러 번 언급했으며, 가드너에게 직접 “나는 당신 이야기의 시놉시스를 아주 세밀하게 정리해서 그걸 다시 글로 쓰고, 그런 다음 내가 쓴 것과 당신 작품을 비교해 보고 고치고 다시 좀 더 쓰고 그렇게 계속 반복했습니다”라고 쓰기도 했다.(1939. 5. 5.)
제4장 필립 말로
필립 말로에게 사회적 양심이라고는 말(馬)이 가진 것만큼이나 없어요. 다만 개인적 양심이 있을 뿐이죠. .. 필립 말로는 대통령이 누군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요. .. 필립 말로와 나는 상류층 사람들이 욕조에 몸을 담그고 돈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경멸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그 사람들을 경멸하는 이유는 그들이 위선적이기 때문입니다. 168-169
그에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많은 기회가 마땅히 있다고 가정할 때, 그는 왜 턱없이 적은 돈을 받으면서 일을 하는가, 그에 대한 답이 이 전체 이야기입니다. .. 정직한 사람이 타락한 사회에서 괜찮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투쟁하는 이야기입니다. 불가능한 싸움이죠. 이길 수는 없어요. 그는 가난하고 고통스러워지고, 농담과 사소한 불법으로 무마해 가며 살거나, 혹은 할리우드 제작자처럼 타락하고 사교적이며 무례해질 수 있겠지요. 오랜 시간 준비해야 하는 전문직 두세 종을 제외하면, 이 시대에 한 남자가 어느 정도 타락하지 않고, 성공이란 언제 어디서나 부정한 돈벌이이게 마련이라는 냉혹하고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삶에서 적절한 풍족함을 누릴 방법이 전혀 없다는 씁쓸한 현실 때문이죠. 170-171
말로는 커피를 잘 끓이죠. 이 나라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커피를 잘 끓입니다. .. 그는 자기 커피에 크림과 설탕을 넣지만 우유는 넣지 않아요. 때로는 설탕 없이 블랙으로 마시기도 하죠. 아침 식사는 스스로 만들어 먹지만 다른 끼니는 직접 하지 않습니다. 늦잠을 자는 편이지만, 필요할 때면 일찍 일어나기도 하지요. 우리 모두 그렇잖아요? 175
타락한 사회에 반항하는 것이 미숙한 것이라면, 필립 말로는 극단적으로 미성숙하지요. 더러운 면을 더럽다고 보는 것이 사회적 부적응이라면, 필립 말로는 사회 부적응자입니다. 물론 말로는 실패자이고 본인도 그 점을 알고 있어요. 그가 실패자인 이유는 가진 돈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장애가 없는데도 괜찮은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실패자이기 마련이고 대개는 도덕적인 실패자이죠. 하지만 아주 훌륭한 사람들도 실패자가 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들이 지닌 특별한 능력이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자옷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길게 보자면 우리는 모두 실패자일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가 이런 식이 되지는 않았겠죠. 182-183
제5장 일상
(여기서 조금 냉정해지자면) 결혼이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야만 하는 것임을 알기를. 결혼 생황에는 언제나 훈련이 필요함을 알기를. 신혼 생활이 아무리 완벽해도, 언제든 그런 때가 올 것이니, 아내가 계단에서 굴러 다리가 부러졌으면 좋겠다고 바랄 날이 올 것임을 알기를, 아내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시간만 준다면 그런 감정도 지나가는 법. 237
사랑해야만 하는, 혹은 증오해야만 하는, 혹은 그 둘 다 번갈아 해야 하는 장소에 대해 쓴다는 것은 대개는 마치 한 여성을 사랑하는 것 같죠. 240-241
여자를 사랑하는 법 나는 항상 그녀를 위해 차 문을 열어 주고, 타에 타도록 도왔지요. 한 버ㄴ도 그녀에게 무얼 가져오라고 한 적이 없어요. 항상 내가 가져다주었죠. 나는 한 번도 그녀보다 먼저 문을 나서거나 안으로 들어간 적이 없어요. 노크 없이 그녀의 침실에 들어간 적도 없고. 이런 일들은 다 사소한 일들이라고 생각해요. 꽃을 계속 보내거나, 그녀의 생일엔 항상 일곱 가지 다른 선물들을 준비하고, 기념일에는 항상 샴페인을 마시는 것처럼, 그런 것들은 한편으론 작은 일이지만, 여자란 아주 부드럽고 사려 깊게 대해야만 하지요. 왜냐하면 여자니까요. 245
알베르 카뮈(Albert Camus)가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에서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인 <이방인>의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을 만큼 케인은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미국 작가 중 하나였다. <오디세이>나 <천일야화>도 당대의 싸구려 통속소설(pulp fiction)이었다. 하지만 근대적 학교 제도의 확립과 문맹률 감소로 인한 독자 대중의 확대, 윤전 인쇄기와 제본기의 발명으로 인한 서적과 신문의 대량생산, 여기에 우편 서비스와 철로를 통한 보급 체제의 확대로 인쇄 분야에 산업 자본이 유입됐고 그로 인해 서적의 각격이 적당하게 저렴해진 것은 19세기였다. <포스트맨>은 실존주의의 대표작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칠 만큼 심미적 깊이가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하드보일드(hard boiled) 소설이다. 하드보일드 계열의 문학에 관한 비평문을 처음 쓴 에드먼드 윌슨(Edmund Wilson)은 1930년대와 1940년대 미국의 선정(煽情) 소설은 “전부 헤밍웨이에게서 유래했다.”고 말한다. 헤밍웨이는 1차 세계대전 중 또는 그 직후 성년이 되어, 전쟁 체험과 당시의 사회적 격변의 결과로 문화적 정서적 안정을 잃어버리고 가치관을 상실한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대표 작가다. 젊은 시절 케인의 위악적(僞惡的) 삶도 이런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1923년 귀국한 케인은 유년 시절부터 애인이던 메리 클라우와 결혼하고 1924년까지 세인트존스 대학의 언론학과 교수로 일한다. 1924년이 되자 케인은 월터 리프먼을 위해 <뉴욕 월드>의 편집부 기자로 비판적 칼럼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아내를 아나폴리스에 남겨 두고 혼자 뉴욕으로 이주한다. 뉴욕에서 그는 엘리나 티즈제카와 동거하면서 대여섯 명의 여자와 데이트한다. 후원자인 H. L. 멘켄의 “사랑은 여자들이 서로 다르다는 환상이다.”라는 주장에 대해 케인이 “사랑은 여자들이 정말로 서로 다르다는 발견이다.” 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냉소적 인생관이 당대의 주류였고 <포스트맨>의 정서적 배경이다. <포스트맨>은 미국 출판업계 최초의 베스트셀러로 양장본, 문고판, 희곡, 영화와 오페라로 현재까지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세인트루이스 오페라 극장의 위탁에 따라 콜린 그레이엄이 대본을 쓰고 스티븐 파울루스가 작곡하여 1982년 6월 17일 초연된 120분짜리 오페라에서 프랭크는 바리톤, 닉 파파다키스는 테너, 코라는 소프라노, 새킷은 베이스, 카츠는 테어였다. 171-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