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에 해당되는 글 40건

  1. 2019.04.03 임박한 파국 - 슬라보예 지젝 꾸리에 2012 03300
  2. 2019.03.27 멈춰라, 생각하라 - 슬라보예 지젝 와이즈베리 2012 03330
  3. 2018.09.05 지역을 살리는 협동조합 만들기 7단계 - 그레그 맥레오드 한살림 2012 03300
  4. 2016.10.27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 인디고연구소 궁리 2012 03300
  5. 2015.11.30 피로사회 -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2012 03100 2
  6. 2015.11.19 단순한 열정 - 아니 에르노 문학동네 2012 04860
  7. 2015.11.05 남자의 자리 - 아니 에르노 열린책들 2012 03860 2
  8. 2015.11.02 한 여자 - 아니 에르노 열린책들 2012 03860 1
  9. 2015.03.09 유토피아 - 토머스 모어 열린책들 2012
  10. 2015.03.06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다산책방 2012 03840
  11. 2015.01.02 아빠 양육2 - 강현식 youRBook 2012 13590
  12. 2014.12.27 지랄발랄 하은맘의 불량육아 - 김선미 무한 2012 13370
  13. 2014.12.26 태평육아의 탄생 - 김연희 양철북 2012 03810
  14. 2014.12.23 분노한 사람들에게 - 스테판 에셀 뜨인돌 2012 03340
  15. 2014.12.19 마흔의 서재 - 장석주 한빛비즈 2012 13320
  16. 2014.12.15 철학에게 미래를 묻다 - 안광복 휴머니스트 2012 03100
  17. 2014.06.08 정신의 진보를 위하여 - 달라이 라마, 스테판 에셀 돌베개 2012 03340
  18. 2014.06.07 참여하라 - 스테판 에셀 이루 2012 03340 1
  19. 2014.02.12 7년후(7ans apres..) - 기욤 뮈소 밝은세상 2012 03860 1
  20. 2014.01.24 인문 내공 - 박민영 웅진지식하우스 2012 03000
  21. 2013.07.04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 정진홍 문학동네 2012 03320
  22. 2013.01.19 2012년 독서목록 정리
  23. 2013.01.01 2012년 읽은 책제목 정리 1
  24. 2012.12.31 2012년 12월에 읽은 책
  25. 2012.12.30 (이외수의 사랑법) 사랑외전 - 이외수 해냄 2012 5
  26. 2012.12.25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달 2012 03810
  27. 2012.12.06 청춘의 고전(삐딱한 철학자들의 위험한 영화 보기) - 김성우외9 알렙 2012 03100 1
  28. 2012.12.04 카우치서핑으로 여행하기 - 김은지 김종현 이야기나무 2012 03810
  29. 2012.11.30 2012년 11월에 읽은 책
  30. 2012.11.19 동화독법 - 김민웅 이봄 2012 03810


책을 내며 - 이택광

낡은 것이 사라졌는데, 새것이 출현하지 않는 상황이야말로 위기 자체이다.  7


인류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해왔다는 마르크스의 말은 ‘문제의 발견’이야말로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정확한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대답인 것이다.  7


자본주의가 끝난 뒤에 올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만, 지금 여기에서 노력할 수 있는 것은 공산주의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국 사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주장은 너무 이상론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자본주의를 고쳐서 쓰면 인간적인 자본주의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니까 밀이다.  8



1부 임박한 파국, 어떻게 맞설 것인가 - 하얏트 호텔 2012. 6. 25.


일부 좌파들처럼 은행가들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부패했는지 불평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은 항상 탐욕스럽고 부패했기 때문이죠. 문제는 왜 금융자본이 오늘날의 이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는가 하는 겁니다.  20


중국이나 싱가포르를 민주적이라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는 극도로 역동적이고 생산적이며 동시에 파괴적이지만, 더 이상 민주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 비록 우리가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에 있다하더라도 근본적으로 경제 등등은 기술관료들이 모든 결정을 내리고 있는데, 이 상황은 위험천만하죠. ..

저는 서유럽과 미국 등을 포함하여 전 지구적으로 실업의 양상이 마르크스가 ‘노동예비군’(reserve army of labour)이라고 지칭한 그룹(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상대적으로 줄어들며, 잉여 노동인구는 이른바 노동 예지군으로 전락해 생산과정에서 추방당한다고 마르크스는 설명한다_편집자)의 형성과 깊은 연관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점점 더 급진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고 봅니다.

첫째, 산업의 광대한 현대화와 디지털화는 전형적으로 비 고용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영구적으로 비고용의 상태에 있게 만들었습니다.  21-22


또 다른 면으로, 하나의 국가 전체를 서계공동체(world community)에서 배제하는 일도 있습니다. 미국이 콩고를 불량 국가(rogue country)로 지목하여 무역을 규제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 이런 국가들은 내란으로 엄청난 혼란 속에 있으며,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에 단지 허술하게만 묶여져 있을 뿐입니다. 하나의 국가 전체가 실직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육받은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 교육받은 학생들은 동시에 엄청난 불만을 품고 있죠. ... 유럽공동체에서도 흥미롭게 벌어지고 있는 현상으로서, 자본주의의 세 번째 특징입니다.  23


노동문제에서도 이것은 매우 복잡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슬로베니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으로 안타까운 현상을 봅시다. 그들에게는 단체행동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감히 파업을 하지 못합니다. 일자리를 잃어서는 안 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용감하게 파업을 단행하는 유일한 그룹은 변호사나 의사처럼 특권을 가진 샐러리 부르주아들입니다. 그들은 파업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잇습니다. 하지만 다른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파업을 하지는 않습니다. 자신들의 특권을 위해 파업을 하죠. 글자 그대로 부르주아인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파업을 하지만 프롤레타리아이기엔 너무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습니다.  24-25


좌파의 위기...  오늘날 자본주의는 우리가 더 이상 단순한 소비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인도주의자가 되어 소말리아의 굶주린 아이들을 도와주라는 식으로 호소합니다. 소비를 잘하면 인도주의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원리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공적으로 잘 작동되고 있습니다.  27


신자유주의란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이말은 무슨 말인가? 오늘날의 미국을 보면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대통령 - 레이건과 부시 - 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무슨 일을 했는지 보십시오. 이들은 정확히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와는 정반대의 일을 했습니다. 레이건은 가장 원시적인 케인지언(keynesian) 방식으로 수출 지향의 방어적 무역을 내세웠습니다. 미국은 더욱더 강력한 나라가 되었죠. 알다시피 신자유주의는 실천 가능한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가장 중요하다고 할 경제 영역에서 신자유주의는 국가에 반대하면서 국가를 강화했습니다. 교육이나 기타 공공 영역은 민영화하면서 경제 영역은 국가 주도로 바꾸었습니다. 일보노가 중국 또한 마찬가지로 모든 경제 영역이 국가에 의해 신중하게 기획되었습니다. 미국은 강대국이 되면 될수록 신자유주의로 인해 국가의 영향력이 감소되고 기업화되었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전혀 반대였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가장 성공적인 공식은 국가에 의해 매우 치밀하게 계획된다는 것이빈다. 일본도 마찬가지이고 싱가포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싱가포르 국가만큼 치밀한 계획에 의해 집행되는 나라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28-29


좌파는 자본주의를 비판해왔지만, 위기가 닥치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좌파도 해결책을 제시할 수가 없었지요. 최근 대안으로 떠오른 최저소득제(기본소득제) 도입 문제도 자본주의를 지속시킨다는 관점에서 이루어진다면 근본적인 대안일 수 없습니다. 

좌파의 위기는 여기에 있습니다. 좌파도 주도해온 모든 비판적 운동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 그들이 요구한 것은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것들이었습니다.  29


자본주의를 종식시키는 것인가? 규제를 강화하는 것인가? 서로 다른 논의의 장들을 하나로 합치는 것인가? 의회민주주의 국가를 고수하는 것인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인 제안을 할 수가 없습니다.  30-31


오늘날 좌파는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좌파가 된다는 것은, 매우 단순합니다. 비판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32


파국을 인정하면서, 과거의 사안에서 해결책을 가져와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을 피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문제에 공동체주의를 다시 도입해서 대처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코뮌정신 같은 것에 희망을 거는 것 말입니다. 과거에 대한 어떤 노스탤지어도 거부해야 합니다. 

오늘날 좌파는 어려운 문제에 대해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좌파는 훨씬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합니다. 사물이 예상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자각해야 합니다. .. 반동이 아니라 보수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반동은 멍청할 뿐입니다. .. 보수는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해도 난국을 정확하게 인지합니다.  33


홍세화 : <The Idea of Communism>에 실은 글 ‘How to begin from the beginning’(2009. 6. 23)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대의 프롤레타리아는 세 집단으로 분열돼 있다. 하나는 육체 노동자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지닌 지식 노동자들이고, 또 하나는 지식 노동자들과 배제된 자들에 대한 포퓰리스트적 증오를 보이는 노동자들이며, 마지막은 이러한 사회 전체에 적대적인 배제된 자들이다.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외침은 이제 유례없이 어려운 과제가 되어 있다. 이러한 현대 자본주의의 조건 아래서는 노동계급의 이 세 부분이 단결하기만 하면 이것으로 곧 승리다.” 말하자면 이들 세 그룹의 노동자들이 서로 단결하긴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인데, 과연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렸을까요? 그리고 이런 조건에서 좌파의 전망을 재구성한다면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요?  36


저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공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 연대하자고 도덕적 호소를 한다? 결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정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위해 오랫동안 헌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

여기서 저는 염세적인 측면을 고수하고자 합니다. 저는 더 이상 단순한 마르크스주의적 논리를 믿지 않습니다. 위기가 고조되어 사람들이 가난한 상태로 전락ㅎ하게 되면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공감하게 된다는 식으로 쉽게 생각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훈을 언어야 합니다. 지난 위기가 우리에게 준 슬픈 교훈이 이것입니다. 연대감보다는 상대적 부를 통한 분리가 더 강했다는 것이죠. 사회적 약자나 외국인이 손쉬운 배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럽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주민들이 손쉬운 희생양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하층계급들이 이런 외국인에 대한 폭력에 훨씬 잘 동원됩니다, 오히려 부르주아가 관용의 자세를 갖고 있기 일쑤입니다.  38-39


직접 민주주의나 자기 조식화 같은 새로운 정치모델들이 있지만 제대로 작동할 거라 보기 어렵습니다. ..

거리의 민주주의가 문제라기보다, 어떻게 부ㅐ를 없애고 강력한 금융자본을 규제할 것인지 따위의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

많은 좌파들은 오만한 경향이 있습니다, 멍청한 대중이 자기 이익만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번한 대중은 훨씬 개방적이고, 대안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40-41


모든 운동은 다수가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10%만 운동에 참여합니다. 언제나 소수가 중심입니다. 소수에 대해 다수가 공감하는 거죠. .. 이러게 소수이긴 하지만 사회적인 조직화가 필요합니다. ...

수백만이 광장에 모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뒤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변화를 어떻게 느끼는지 그것이 핵심이죠. 이 지점에서 좌파의 고민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조직해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는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사람들의 견해나 일상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43


오늘날 정치의 기술이라는 것은 비록 우리가 체제 자체를 바꿀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현재의 체제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체제란 것은 획일적으로 똑같을 수 없습니다.  44-45


유럽은 유럽의 전통에서 나오고, 남미는 남미의 모색 속에서 나오고, 한국은 한국의 토양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다분히 우리는 실용주의적인 입장을 취해야할 것입니다. 그리스가 훌륭한 교훈이 될 수 있겠죠. 위기의 순간에는 아무리 작은 당일라고 할지라도 갑자기 폭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보더라도 우리는 실용주의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배우는 것이 실용주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진정으로 ‘흥미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46




2부 지금, 여기,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 - 경희대 평화의 전당 2012. 6. 27.


1930년대 말 할리우드 코미디 영화에 나온 유머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지요. 주인공이 카페에 가서 크림 없는 커피를 주문합니다. 웨이터는 “죄송합니다만 크림이 다 떨어지고 우유만 있습니다. 크림 없는 커피는 없고 우유 없는 커피만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웃음)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없는 것, 즉 부정이 바로 그 정체성의 일부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변증법의 기본적 메시지의 일부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는 것, 물리적으로 봤을 때 우유 없는 커피는 크림 없는 커피와 같이 그냥 커피일 뿐인데, 그러나 둘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이 없는 커피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56


오늘날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 직설적인 거짓말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사실이다 혹은 아니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함축적으로 거짓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함축적인 의미를 주면서 정반대의 의미를 전달하는 식이죠. 커피의 예가 적절할 것 같습니다. 우유가 없는 커피를 말하지만 결국은 크림 없는 커피를 준다는 것이빈다. 따라서 함축적 의미에 주목해야 합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그 메시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57


이렇게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

헤겔의 담론에서는 이것을 총체성(Totality)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실재하는 것의 총체성, 그리고 실재하지 않는 것의 총체성 등등이 포함됩니다. 실제 변증법적 분석을 해보면 핵심은 특정 사건을 조화로운 총체성에 넣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말고 총체적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특정 개념 속에 다양한 부정과 실패를 포함시켜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의 자본주의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자본주의 총체성으로 바라보려면 '이것이 이상적으로 좋은 시스템이다'라고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만을 언급할 것이 아니라 다른 측면까지 포함하여 총체적으로 보아야 하고 또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실패하는 지점도 살펴봐야 합니다. 나아가 국내외적으로도 총체적으로 바라봐야 하지요.  58


이쯤에서 변증법적인 분석을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자본주의 혹은 공산주의에 관한 읿ㄴ적으로 보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에도 각 체제들의 실패 사례들, 또는 의도치 않았던 개념의 부산물드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변증법에서는 이런 실패들이 단지 운이 없어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의 개념 안에 포함된느 것들입니다. 이러한 실수들, 대립의 과정과 끔찍한 파생물들 역시도 그러한 보편적인 개념에 포함된느 것들이란 거지요.  60


우리는 왜 이와같은 협상을 명확하게 예측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지배하는 헤게모니 이데올로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61


자본주의에서 탐욕이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지만, 우리가 자본주의에 대해서 반대한다고 이야기할 때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탓하고 탐욕과 부패로 원인을 돌리는 것은 중요한 분석을 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분석은 시스템 자체에 관한 분석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논의는 시스템 자체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분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62


유럽에는 산타클로스가 있습니다. 빨간 옷을 입고 어린아이들에게 선물을 갖다 주는 존재, 완벽한 구조 아닙니까? 어른들에게 "산타클로스를 믿으세요?"라고 물어보면 "내가 바보냐?"라며 비웃겠죠. 그럼에도 오른들은 선물을 삽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를 믿니?"라고 물으면 "저도 바보가 아녜요. 부모님이 실망할까 봐 믿는 척하는 거예요."라고 답합니다. 이러한 신념이 하나의 사회적인 연결고리로 작동하지만 실제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어야 하는 이 대상이 상상의 존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68


19세기 중반에 독일인 인류학자와 탐험대가 기니에 있는 한 부족을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춤'을 추는 부족으로 아려져 있습니다. 인류학자는 춤을 보고 싶다고 요청했고, 하룻밤을 보내고 난 그 다음날 부족은 그 춤을 보여줬습니다. 인류학자는 상당히 만족스러워하며 원시 부족의 춤에 대한 보고서를 썼습니다. '이 춤은 죽음에 대한 춤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몇 년 후 또 다른 탐험대가 그 부족을 방문해서 예전에 만났던 인류학자와의 만남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두 번째 탐험대는 그 부족의 언어를 미리 배우고 갔기 때문에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부족은 첫 번째 탐험대가 자신들에게 무너가를 요구했고 자신들도 그들이 무엇을 원한느지 간파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족에게서 죽음의 춤을 보기를 원한 것으로 이해하고는 그들에게 최대한 친절을 베풀기 위해 죽음을 형상화하는 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원시적인 고유성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70


'전통의 약', '고유의 약'과 같은 것들을 파는 상점들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아마 한국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뉴질랜드에는 토착민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뉴욕에서 가서 패션이 어떤지를 살펴보고 돌아와서는 토착민들의 의상을 그에 맞게 바꾼다고 합니다. 여기서의 역설이 무엇이냐면, 우리들이 고유성 또는 진품이라는 것에 너무 집착을 함으로서 오히려 그 고유성을 훼손한다는 것입니다.  71


여러분이 탄산음료 캔과 신문지 재활용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이런 행동의 80% 정도는 미신적인 신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의 근본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는 거죠. 쓰레기 분리수거가 지구 환경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산에서부터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지요. 어쨌든 이러한 기이한 현상을 여러분, 깨닫고 있습니까?  74


스타벅스의 출발점은 소비자들에게 어떤 죄책감 같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스타벅스는 사회적으로 굉장히 의식 있는 회사라는 광고를 합니다. '여러분이 카푸치노를 한 잔 마실 때마다 2%씩 소말리아 아동에게 전달되고 열대우립 보존에 사용됩니다'라는 식의 자본주의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광고를 합니다. 소비 뒤의 가격을 상품 속에 포함시키는 것이죠. '너무 소비해서 죄책감을 느끼는가? 괜찮다. 조금만 더 소비하면 죄책감을 해소할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식의 신념과 그것이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현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기를 이해하려면, 그리고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지금까지의 모든 예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74-75


이데올로기가 반드시 커다란 신념이나 교육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우리의 지적공간의 구조를 뜻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가능케 하는가', 또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가'라고 생각하는 구조적인 틀이 이데올로기입니다.  79


기성세대는 여러분이 사고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 전문가와 지식은은 다릅니다.

전문가는 남들이 규정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 해결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 지식인이란 것은 전문가를 넘어선 것입니다. 단순히 남이 규정한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문제 자체에 대한 하나의 법칙을 규명하고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정립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인들은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고 사람들로 하여금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도록 하는 사람들입니다.  88


시스템에 많은 도전을 가함으로서 자유로운 사고를 창출해야 합니다. '이론 공부만 하는데 어떻게 시간과 돈을 투자할 수 있을까? 아프리카 아이들은 굶어 죽고 있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조작입니다. 사고의 흐름을 막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현 상황은 절박하겠지만 바로 그런 상황이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한걸음 물러서서 사고를 해야 합니다.  89




3 청중과의 대화 - 경희대 평화의 전당 2012. 6. 27.


라캉적인 입장.. 원하는 것(want)과 욕망하는 것(desire)을 구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이 두 가지를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여러분도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입장을 견지한다면 이해할 것입니다. 저는 '사랆들이 공산주의를 욕망하지 않는다'라고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욕망하지만 원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열망하지만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정신분석학의 가장 기초인데요. 우리는 때로 무엇인가를 욕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에 가까워 졌을 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가장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차라리 그것을 얻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욕망하지만 원하지는 않는 것이죠.  95

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라는 단어는 20세기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바보 같은 용어를 계속 사용하는 이유가 뭘까요? 새로운 이름을 붙일 수도 있을 텐데요. 여기에 대한 이유를 네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공산주의는 '공동(common)'의 문제를 건드린다는 점에서 우리가 계속 공산주의라고 지칭하는 것입니다. 세계 자본주의 속에서 잘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지요. 주 번째로는, 공산주의라는 명칭은 쉽게 회복할 수 없는 명칭입니다. 예를 들어 자유라든가 사회주의 등과 같은 다른 용어를 사용하면 결국에는 지금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잠식돼버릴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공산주의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어느 곳에서나 있어 왔습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농노의 반란이나 평등주의 등은 고대에서부터 있어 왔는데 이러한 전토엥 입각해서 우리가 계속 공산주의라고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냉소적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정치적인 프로젝트, 즉 기획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잇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10월 혁명을 예로 들어볼까요? 모든 위대한 것을 꿈꾸며 시작되었지만, 악몽으로 끝이 났지요. 또 스탈린주의, 북녘에 있는 여러분의 동포들, 이러한 모든 것이 어쩌면 파시즘보다도 더 끔찍한 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급진적 운동을 원한다면 항상 그 위험을 알리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불과 장난을 치는 것이라면 굉장히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겠지요. 저는 지나치게 희망적이거나 믿음이 가지 않는 '공산주의'라는 용어가 좋습니다. 이 용어는 언제나 저에게 '이것이 정말 가능한 것인가? 의도치 않은 새로운 대재앙을 낳게 되지 않을까?'하고 되물을 것입니다.  96-97





4부 일하는 사람들의 공동선을 위한 소명(Possibility of Common Good) - 건국대학교 새천년기념관 2012. 6. 28.


진실은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는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며 싸워야 합니다.  120


'물신적 분열(Fetishist Split)' '저는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정말 그걸 믿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분열은 우리가 보고 아는 바를 거부하도록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실체적 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런 태도도 있습니다. '나는 이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설사 효과가 없을지라도 나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요...' 여하튼 뭔가를 함으로써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일종의 미신인 것입니다. '나는 신문지나 콜라 캔을 잘 재활용하고 있을까?' 이런것들은 그저 쉬운 탈출구일 뿐입니다. 이 방법으로는 마음은 편해지지만 본질적인 문제를 직시하지 않게 되지요.  121


인도의 인류학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tty)를 인용하고 싶습니다. 그는 '우리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인간은 그 압도적 숫자와 화석연료의 연소와 다른 관련 활동 덕택에 지구상의 지질학적 매개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라고 부르는데, 이는 인류 자체가 지질학적 요소가 되는 시대지요. 인류가 단지 당장의 환겨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지구 생명 활동과 생명 순환의 양시겡 직접 영햐을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처음 중국을 방문했을 때 들은 얘기였는데, 정부가 싼샤댐을 건설하기로 결정했을 때 많은 지질학자들이 경고했었다고 하더군요. 댐으로 형성된 거대한 인공호수가 지진을 일으킨 지하 단층 바로 위에 있게 도니다는 것이 그 이유였지요. 이 거대한 인공호수는 강력한 지진의 가능성을 크게 높였습니다. 그리고 기억하시는 것처럼, 정확하게 이것이 수년 전의 쓰촨대지진을 유발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 좋은 징조겠지만, 중국 정부조차도 수십만 명이 사망한 거대한 쓰촨대지진이 우리 인간의 활동에 의해 부분적으로라도 촉발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이처럼 인류가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지질학적 요소가 되었다는 주장인 '인류세'의 또 다른 측면은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상상하기 두려운 일이지만 현재 정부, 위원회 등 권력자들에 의해 '지오 엔지니어링'(지구공학, Geo Engineering)이라는 것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이 가설은 지구온난화를 막기에는 화석연료 규제 등 원칙적 방법으로는 이미 늦었다는 것입니다. 훨씬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그들은 이미 거대한 계획을 논의 중입니다. 예를 들어 수백만 톤의 물이나 바닷물 등으로 된 미세입자를 방사해 이것으로 태양광선을 막는다는 것 등입니다. 이렇게 대기의 조성에 직접 간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상상해보십시오. 지구공학을 통해 인공적으로 바꿨을 때 따라올 부수적인 피해, 의도치 않은 부작용에 대해 그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124-125


생태학의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아는 것이나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데에 있습니다. 자연은 여전히 아름답고 범접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131


인류에게는 다시 일종의 공산주의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어째서 공산주의(코뮤니즘) 재실현이 오늘날 그렇게 상상하기 힘든 것입니까? 지난 세기에 공산주의의 꿈은 비참하게 실패하여 경제적, 미놎ㄱ-정치적, 마지막으로 중요하게 생태적으로도 재앙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꿈을 꾸게 만들었던 문제는 현재도 진행 중이며, 시장과 국가를 넘어선 새로운 형태의 집단 활동이 재창출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불가능과 가능한 것은 이상한 방식으로 분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등위 관계를 넘어서고, 전능한 불멸이 불간으함을 현명하게 받아들이고, 급격한  사회 변화를 위한 공간을 열어, 모든 형태의 근본주의적인 운명론을 어떻게든 피해야 한느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환에는 고매한 윤리가 필요치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장 자크 루소가 말한 '자기애(amour-de-soi)',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진정한 이기주의'를 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기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치 않다. 다른 이들이 져야 한다.' 미국의 작가인 고어 비달(Gore Vidal)의 이 말은 진정한 자기애와 목표 성취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에 대한 장애물을 파괴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형태의 왜곡된 형태의 타인 대비 자아선호인 자기 편에(amour-propre)를 구분한 루소의 논지와 잘 들어맞습니다. 악마적인 인간은 따라서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가 아닙니다. 진정한 이기주의자는 스스로의 선을 챙기느라 너무 바빠 다른 이들에게 불행을 야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악인의 가장 주된 악덕은 바로 그가 자신보다 다른 이들의 생각에 더 정신이 팔려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의 향락적 이기주의 사회에서는 진정한 가치가 상실되었다'고 말하는 비평가들은 완전히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기적 자기애의 진정한 반대는 이타주의나 공동선에 관한 관심이나 나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질투와 원한입니다. 니체와 프로이트가 공유했던 것은 평등으로서의 정의가 질투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그걸 누리는 '타자'에 대한 질투입니다. 정의의 요구에 숨겨진 것은 따라서 '타자'의 과도한 향유를 줄여 모두가 주이상스(jouissance, 언어화된 쾌락이나 사회적으로 용인된 쾌락 등 우리가 경험하는 불충분한 쾌락의 너머에 있는, 우리를 만족시키고 채우는 그 이상의 어떤 것_편집자)에 대한 접근이 동등해지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의 결과는 물론 금욕주의입니다. 동등한 주이상스를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대신 금지(prohibition)를 동등하게 누리도록 강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대한 것으로 알려진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이러한 금욕주의는 그 반대의 형태를 띱니다. 일반화된 초자아의 강제명령(injunction), 혹은 "즐겨라!"라는 명령의 형태를 띠는 것입니다. 나르시시스트적 '자아실현'과 조깅, 건강식 등의 온전한 금욕과 극기를 조합하는 여피족을 보십시오. 어쩌면 이것이 니체가 '최후의 인가(Last Man)'의 개념을 말할 때 마음에 두고 잇어썬 것인지도 모릅니다. 비록 여피의 쾌락적 금욕주의라는 외양에 숨은 그(최후의 인간)의 윤곽을 진정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오늘에 와서이지만 말입니다.  139-141


지금 우리는 비판적으로 사유해야 합니다.  145




5부 청중과의 대화 - 건국대 새천년기념관 2012.06.028.


저는 순진한 마르크스주의나 휴머니즘에 대한 낙관주의를 펴지 않습니다. .. 제 유일한 역설은,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주 열심히 노력해야만 하는, 정말로 스스로에게 좋은 것을 추구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149


저는 상당한 비관론자입니다. 다만 저는 위험한 상황이 어쩌면 늘 희망적인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린 상황인 것이죠. 어쩌면 더 좋지 않은 상황으로 흘러갈 수도 있고, 조금 나아질 수도 있습니다. 미래는 열려있습니다. 제말은, 진정한 유토피아는 우리가 이것저것 조금씩 고통 받으며 지금처럼 항구적으로 나아간다면 맞이하게 될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150


저는 공산주의를 찬양하지 않습니다.  152


혁명의 폭력은 당신이 의미하는 혁명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

내가 지지하는 폭력은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대화와 사회활동을 중단시키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인민들이 한 것은 수도의 중심 광장을 점거하고 나라 전체를 마비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 이제는 협상할 때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인 무바라크가 말했지요. "당신들의 요구를 들었으니 이제 대화를 하자." 거기에 인민들은 "아니, 토론은 없다. 당신이 떠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내게는 이것이 벤야민이 말한 신성한(신적)폭력입니다. 진짜 폭력은 무바라크의 사람들이 행했고, 인민으 그것은 명확하게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려는 폭력이었습니다. '혼란은 이제 충분하다,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죠. 이것이 제 관점이빈다.

사람들은 제가 "간디가 히틀러보다 더 폭력적이었다"고 하니까 미쳤다고 여겼죠. 히틀러가 수백만 명을 죽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정작 두려워했던 것은 사회구조를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자본주의의 도입을 막기 위해 수백만을 죽였지요. 지나치게 단순화된 마르크스주의식 표현이긴 하지만요. 간디가 인도에서 원했던 것을 히틀러는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간디는 영국 정부가 그곳에서 기능하는 것을 중단시키려 했습니다. 히틀러가 원했던 것은 독일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수백만 명을 죽일 준비가 되어 있었지요. 이것이 저의 폭력관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폭력이 있는지, 어떤 형태의 폭력인지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요지는, 사람들이 폭력을 이야기할 때 어디서 폭력을 보느냐는 점입니다.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우리는 오직 일상생활이 방해받는 지점에서만 폭력을 봅니다. 혼란이 생기고 혁명이 일어나면 "맙소사, 폭력이다!"라고 하지만, 단지 우리가 익숙해졌거나 무시하는데 익숙해진 상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폭력들은 어떤가요? 예컨대 콩고공화국에서 리비아나 이집트 등을 모두 포함한 것보다 매주 더 많은 폭력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저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은 알고 있지요. 확인해 보세요. 1990년대 중반 <타임>지는 지난 10년 동안 콩고에서 400만 명 이상이 자연적이지 않은 이유로 사망한 사건을 커버스토리로 다뤘습니다. 당시 저는 뉴욕에서 열린 어떤 토론회에서 <타임>지의 편집장을 만났습니다. 그는 방향이 클 거라고 예상했는데 겨우 독자 한두 명이 편지를 보낸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무척 놀랐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의 관시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저는 폭력을 지지하지 않지만, 어떤 반항적인 자들이 사람 한두 명을 죽이며 "끔찍하다, 야만적이다!"하면서, 지금 현재 많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들에 무관심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이런! 우리가 단지 모든 것을 일상적으로 움직여가기 위해 얼마나 엄청난 양의 폭력이 필요한지 인지하고 있습니까? 내게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명확하게 하기 위해 부연하자면, 저는 아랍이나 기타 근본주의자들의 테러를 끔찍하다고 여깁니다.저는 아랍이나 팔레스타인이 고통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테러를 좀 해도 된다거나 반유대주의적인 생각들을 용인해도 된다는 멍청한 좌파가 아닙니다. 안 됩니다. 저는 절대로 이런 것을 요인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이 폭력을 보라는 것입니다. 특히 보이지 않는 폭력들을 말입니다.

짐바브웨를 예로 들까요. 짐바브웨가 공포에 휩싸이게 된게 언제부터입니까? 저는 무가베(1970년대 소수 백인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쳐 독립을 일궈낸 투사로, 1987년부터 총리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이 되면서 현재까지 계속 집권해온 아프리카의 최장수 집권자이다. 2000년 토지 재분배 계획을 강제하면서 백인 농장주가 소유한 토지를 몰수, 백인 주미노가 서방 국가와 마찰을 빚어왔다. 경제난과 국제 사회와의 불화가 계속되면서 무가베는 서방 언론들로부터 아프리카의 민족주의 지도자라는 평판보다는 장기 독재자란 칭호가 따라붙었으며 국내 반정 세력의 불만도 증폭되기 시작했다)를 전적으로 반대합니다만, 그의 집권당이 백인 농부들을 몰아내기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하지만 짐바브웨에는 이미 그전부터 흑인 그룹들 간에 극심한 테러가 있었습니다. 1980년대 말 무가베가 정권을 잡은 직후, 그는 도시 전체에 해당하는 인구인 반대파 1만 명을 죽였습니다. 서구 사회는 여기에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100~200명 정도의 백인 농장주들을 - 심지어 죽인 것도 아니고 - 몰아내기 시작하자 큰 반향이 있었지요. 그런 행위에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폭력을 보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153-156


더욱 의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처럼 '이건 심각하고, 이건 이렇게 가야 하고...' 운운하는 사람만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지루하고 과학적인 책들이 허풍을 더 떨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안착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161


당신이 가진 유일한 것은 당신 자신의 정신입니다. 여기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162


지름길은 없습니다. 이것이 철학의 좋은 점입니다. 무엇이 좋고 아닌지를 말해줄 사람을 구할 방법은 없습니다. 당시은 길을 모릅니다. 당신은 혼자입니다.  162




7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 대한문 쌍용자동차 희생자 합동분향소 2012. 6. 29.


사람들은 보통 "우리는 너무 이기주의자이다"라고 비판하곤 합니다. 남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너무 많이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틀렸습니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면, 그런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사 운영자들을 살펴보면, 이들이 결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많이 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지요. 이들은 하루에 15시간 이상 일하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건강한 이기주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엄청난 관념들을 빌려올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정말 우리 자신을 위해, 또는 아이들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할 것인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결코 이기주의적인 체계가 아닙니다.  178-179


제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나르시시즘에 빠지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계발은 오늘날 우리 문화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해서 더 나은 개인으로 발전하라는 것인데, 이런 자기계발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문명의 특징적 일부이기도 합니다. 이론적으로 훨씬 복잡한 부장이긴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자기를 돌보는 것, 예를 들어 내가 어떻게 나메엑 보일지 신경 쓴느 것이라드가, 매일 조깅을 하면서 체력을 단련한다든가 등등, 이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강제된 모델을 따르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자기계발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멋있게 보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가 너 자신을 버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일정하게 동의합니다. 너 자신에 대해 잊어버리라는 것은 사회에서 만들어진 자기 자신을 버리라는 것이니까.  179-180


연대와 관련해서는, 당신을 위해 너무 많이 희생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주의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진정한 연대라는 것은 남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연대라는 것은 당신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그 하나가 되는 연결된 감정에서 가능한 것이죠. 오늘날 미디어가 말하는 연대라는 것은 돈을 기부하라거나, 아프리카에 있는 굶주리는 아이들을 도와달라는 식의 사이비 연대입니다. 이런 사이비 연대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다만 우리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우안을 줄 뿐이죠. 이것이 바로 스타벅스 커피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커피 한 잔을 사면 그 이윤의 1%가 소말리아에 있는 배고픈 아이들에게 간다는 식으로 광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180


먼저, 자살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다양한 종류의 자살이 있을 수 있겠죠. 하나의 자살이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절망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자살하는 경우가 있을 텐데, 이런 경우는 자신의 환경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기에 절망적인 상태에서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깨우는 메시지를 포함한 자살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전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분신한느 자살이 여기에 해당하죠. 또한 남에게 죄책감을 주기 위해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자살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해서 자신의 즐거움을 취한다는 점에서 위선적입니다.  181-182


어떤 이가 나무를 깎아서 무엇인가 만드는 일에 열중하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가 자신이 하는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누가 그것으 ㄹ과소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꿈을 추구하고 그것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좋은 이기주의이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좋은 사회 입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없어 고통받는 사회라면 정말 끔찍 할 것입니다. 

좋은 이기주의는 나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을 하는 것이지 남이 하라고 하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182-183


예술가는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입니다. 그 예술작품은 직접적인 행복감을 부여하죠.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술적 퍼포먼스는 기적과 같은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을 사는 이들에게 당신의 작품은 '오 세상에, 이런 것이 있었다니!'라는 자각을 환기시킵니다. 이런 방식으로 예술은 '깨어남'을 선사하죠.  184


고전주의적인 관점에서 어떤 작품이 훨씬 낫다거나, 더 나은 작품을 소유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예술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예술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물론 내가 테러리즘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을 독점하고 있는 갤러리들을 불태우버리는 것입니다.  185


사람들이 선택의 동기를 가지 못할 때 자살하는 것이라는 말은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마치 엄청난 선택의 기회가 있는 사회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 우리는 코카콜라나 펩시콜라 중에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선택만이 허락된느 사회인 것입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선택의 기회는 널려 있지만, 근본적인 선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삶을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선택 같은 것을 할 수가 없어요. 무수한 선택의 기회는 사실 우리가 정말 중요한 것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고 있는 허위입니다.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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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월가점령시위 연설 -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마라"

서구 사회의 우리는 금지가 필요 없다. 이미 지배체제가 우리가 꿈꿀 능력마저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보는 영화를 생각해보라. 세상의 종말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종말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7

기억하라.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다. 체제 그 자체가 문제다. 그것은 사람들을 부패하게 만든다. 적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위에 물타기를 하기 위해 행동에 돌입한 가짜 친구들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카페인 없는 커피, 알코올 없는 맥주, 지방 없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투쟁을 무해한 도덕적 저항으로 만들고자 할 것이다. .. 노동과 고문을 아웃소싱하고 결혼정보업체가 우리의 사랑을 아웃소싱하게 된 이후, 우리는 오랫동안 정치적 참여 역시 아웃소싱 되도록 내버려뒀다. 이제는 되찾아야 한다.  9

사람들은 종종 무언가를 갈망하지만 진정으로 원하지는 않는다. 갈망하는 것을 진정으로 추구하길 두려워하지 마라.  11

2011년 10월 9일 뉴욕 주코티 공원



감수의 글 - '로쟈' 이현우

현재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거스르며 맞서는 행위  15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이라는 게 철학에 대한 그의 정의.  15

왜 모든 문제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늘날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손쉬워진 만큼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15

2012년 초 슬라보예 지젝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달라는 주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사유를 시작하라. 단순한 호기심에 그치지 말고 전 생애에 대해 고민을 해야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을 시작해야 한다."  16




1 와 남 니하단 Wat Nam nihadan


페르시아어에는 '와 남 니하단'이라는 멋진 표현이 있다. "누군가를 살해하려면, 시체를 묻은 다음 그 위에 꽃을 심어 시체를 숨기라."  19

지배이데올로기의 일차적 과제는 이러한 사건들의 진정한 중요성을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언론의 지배적인 반응이야말로 정확히 '와 남 니하단'이 아니었던가?  20

(지젝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핵심 적대'는 크게 네 가지다.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소위 '지적 재산권'과 관련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새로운 기술과학의 발전의 사회 윤리적함의, 새로운 장벽과 빈민가 등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의 생성"(<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창비 2010 p182)  20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결정적인 역사적 순간에는 대다수의 예술적 양식이나 이론적 주장이 모두 합쳐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경향으로 정리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0

현실이 우리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으면, 현실은 그만큼 더 악화될 것이다. 반면 우리의 체계가 적합하다면, (불완전하게나마) 현실에 들어맞는 형식적 틀을 구축하게 된다. 마르크스가 이미 인지했듯이, 사회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규정은 곧 현실에 얽매인 주체들의 '주관적인' 생각, 규정이고, (우리 사고의 한계, 즉 사고의 교착상태와 모순이 곧 객관적인 사회 현실의 적대가 되는)이 구별 불가능한 지점에서는 "진단이 그 자체의 증상"이 된다. 우리의 진단(우리의 행동 범위를 규정하는 모든 가능한 입장들의 체계에 대한 '객관적' 해석)은 그 자체가 '주관적'이다. 진단은 우리가 실천하면서 맞닥뜨리는 교착상태에 대한 주관적인 반응 체계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 해결되지 않는 교착상태 자체의 증상을 나타낸다.  21-22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말했던 "이성의 공적인 사용"이다. 오늘날의 공산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성의 공적인 사용'과 평등주의적 보편적 사유로, 생각하면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칸트에게 '세계시민사회'의 공적 공간이란 보편적 단독성(unversal singularity)의 역설, 즉 일종의 단락(short-circuit)으로 특수성의 매개 없이 곧바로 보편성에 참여하는 단독적 주체의 역설을 가리킨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What is Enlightenment)?>의 그 유명한 구절에서 '사적'에 대립되는 '공적'이라는 표현으로 의미했던 바다. 여기서 '사적'이란 공동적 연대에 반대되는 개인적 유대가 아니라, 한 사람이 특별히 동일시하는 공동적 제도적 질서를 말한다. 이에 반해, '공적'이란 이성의 행사의 초국가적인 보편성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는 이러한 이분법은 좀더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이성의 공적 사용이 지닌 상징적 효능(또는 수행 능력)을 유보하는 데 의존한 것이 아닐까? 칸트는 "생각하지 말고 복종하라!"라는 복종의 일반적인 공식을 거부하지도 않았고, 이와는 '혁명적인' 대척점에 있는 "(남이 시키는 대로) 복종하지 말고 (스스로 머리를 써서) 생각하라!"라는 말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그의 공식은 차라리 "생각하고 복종하라!"였다. (이성을 자유롭게 사용하여)공적으로 생각하고 (권력의 위계 조직의 일부로서) 사적으로 복종하라는 말이다. 

요컨대,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공적 사용'을 통해 기존 질서의 약점과 불의를 목격하게 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통치자에게 개혁을 호소하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G. K. 체스터턴(G. K. Chesterton)처럼 능동적으로 생각하거나 의심할 수 있는 추상적 자유가 실질적 자유를 제한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우리는 대체로 자유사상이 자유를 방지하는 안전 장치 중에서 으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현대적인 예로 다시 표현하면, 노예의 정신적 해방이야말로 노예 해방을 막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의미다. 노예로 하여금 자신이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에 관해 고민하도록 가르쳐라. 그러면 그는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23-25

'이성의 공적 사용'의 보편성과 참여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을 접목시킨 접근만이 우리가 처한 상항에 대한 '인식적 지도'를 제공할 수 있다. 레닌의 말처럼 "우리는 '사실만을 말해야 하고', 어떤 경향이 있다는 진실을 인정해야 한다."  26




2 지배에서 착취와 저항으로(From Domination to Exploitation and Revolt)


현대 자본주의의 세 가지 특징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이윤 추구에서 지대(rent)(주로 사유화된 '공유 지식'과 천연자원에 기초한 두 가지 형태) 추구로 전환되는 장기적 추세다. 둘째, 더 오랜 기간 '착취'당하는 일이 오히려 특권으로 인식되면서 실업의 구조적 역할이 한층 더 강화되는 현상이다. 그리고 마지막 특징은 장 클로드 밀네(Jean-Claude Milner)가 '봉급 부르주아(salaried bourgeoisie)라고 부른 새로운 계급의 부상이다.  29

밀네의 표현에 따르면, 잉여급여의 필요성은 경제적 의미보다 정치적 의미가 더 강하다. 즉 사회적 안정을 위해 '중간계급'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사회적 위계질서의 자의성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핵심인데, 평가의 자의성이 시장 내 성공의 자의성과 유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폭력은 너무 많은 우연성이 존재할 때가 아니라 그 우연성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 폭발할 위험이 있다.  34

소설 <아틀라스 : 지구를 떠받치기를 거부한 신>에서 에인랜드(Ayn Rand)가 즐겨 쓰던 이데올로기적 환상, 즉 파업에 나선 ('창의적') 자본가의 환상을 떠올려보자. 특권을 누리던 '봉급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의 특권(최저임금 이상의 잉여가치)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이는 오늘날의 수많은 파업에서도 이러한 환상이 도착적인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들의 시위는 프롤레타리아적 시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전락할 위험에 저항하는 시위다. 달리 말하면, 정규직을 얻는 것 자체가 특권인 요즘 상황에서 감히 시위를 벌일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는가? (사양 산업인) 섬유업 등에 종사하는 저임금 노동자가 아니라, (주로 경찰, 사법 관계자, 교사, 대중교통 근로자 등 주로 공무원직에 근무하여) 직업이 보장된 특권층 노동자일 것이다. 학생시위의 새로운 흐름도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이들이 시위를 벌이는 주된 동기는 고등교육을 받아도 졸업 후 잉여급여를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인 것이 틀림없다. 

물론 아랍권에서 서유럽까지, 월스트리트에서 중국까지, 스페인에서 그리스까지 번져간 대규모 시위의 부활을 단순한 봉급 부르주아 계급의 봉기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36

진행중인 경제 위기를 한 측면에 함몰되지 않고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  37

오늘날 우리는 생태자본주의(eco-capitalism)부터 기본소득자본주의(Basic Income capitalism)까지 자본주의를 순치하려는 수많은 공세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시도의 배후에는 다음과 같은 추론이 존재한다. 자본주의가 현재로서는 부를 창출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지만, 동시에 이대로 방치될 경우 자본조의의 재생산 과정에서 착취, 천연자원의 파괴, 집단 고통, 불의, 전쟁 등이 수반된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이윤을 추구하는 재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기본 틀은 유지하되, 글로벌 복지와 사회 정의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자본주의를 조정하고 규제해나가는 것이다. 또 시장에는 그 나름의 수요가 있음을 존중하고, 시장 메커니즘을 직접적으로 교란시키면 대재앙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자본주의라는 짐승이 제 기능을 다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 짐승을 길들이는 일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실용주의적 현실주의와 정의를 고수하는 원칙주의를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보통 그러하듯, 선의로 시작하여 조만간 두 가지 차원의 적대라는 실재(the Real)에 직면하게 된다. 자본주의라는 짐승이 자애로운 사회적 규제로부터 도망치는 일이 거듭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시점엔가 우리는 숙명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정말로 자본주의라는 짐승과 함께 가는 것만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방법일까? 아무리 자본주의가 생산적이라고 해도,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커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일 우리가 계속 이 질문을 회피한 채 자본주의를 길들인다면,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힘을 실어주는 꼴밖에 안 될 것이다.  43-44




3 정치적 대표의 꿈 작업(The 'Dream-Work' of Political Representation)


마르크스는 1848년 프랑스 혁명과 그 여파에 대해 분석한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사회적 대표(경제적 계급과 세력을 대표하는 정치적 행위주체(agent))의 논리를 정확히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복잡화(complicate)'했다.  49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줘야 하므로 공공사업에 착수한다. 그러나 공공사업은 국민의 조세 부담을 가중시킨다. 따라서 종래 5부 이자를 4부5리 이자의 공채로 전화하여 금리생활자를 공격함으로써 세금을 낮춘다. 그러나 중간계급에게도 떡고물이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술을 소매로 구입하는 인민에게는 주세를 배로 인상하고, 도매로 사는 중간계급에게는 주세를 반으로 인하한다. 또 현실의 노동자 조합은 해체하면서, 앞으로 꿈같은 조직을 만들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농민도 원조해줘야 한다. 저당은행들 때문에 농민의 부채가 급증하고 부의 편중이 가속화된다. 그러나 이 은행들은 오를레앙가에서 몰수한 영지를 현금화하는 데 이용되어야 한다. 법령에도 나와 있지 않은 이런 조건에 동의할 자본가는 아무도 없고, 그래서 저당은행은 단지 법령으로 남는다, 등.

한마디로 보나파르트는 모든 계급에게 가부장적 은인으로 비쳐지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한 계급을 착취하지 않고서는 그 어느 계급에게도 은혜를 베풀 수 없다.  52-53

스스로 대표하지 못하여 누군가에 의해 대표될 수밖에 없는 계급이란 당연히 분할지 소농 계급을 말한다.  54

모든 계급 위에 군림하고, 모든 계급 사이를 오가며, 모든 계급의 비천한 잔여물에 직접적인 기반을 두면서도, 아울러 스스로 정치적 대표를 요구하는 집단적 행위주체가 될 수 없는 계급을 궁극적으로 대표해야 한다. 이 역설이 의미하는 바는 순수한 대표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라캉 식으로 표현하자면, 계급 적대는 그러한 전체 대표가 실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게 만든다. 계급 적대는 결국 한 사회의 중립적인 '전체'란 없고, 모든 '전체'는 특정 계급에 은밀하게 특권을 부여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55

오늘날 대부분의 '전문가'와 정치가가 따르는 공리를 떠올려보자. 누누이 들어왔듯이, 우리는 적자와 부채로 점철된 위태로운 시대에 살고 있기에, 모두가 고통을 분담하며 생활수준의 저하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니까. (최고) 부유층을 제외한 모두가 말이다. 부유층에 대한 증세는 절대적인 금기사항이다. 세금이 늘면 그들의 투자 의욕이 꺾여 신규 고용 창출이 줄어들므로 우리 모두가 고통받게 된다는 논리다. 결국 이 힘든 시절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빈자는 더욱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부자들의 부가 조금이라도 상실될 위험에 처하면 사회가 나서서 막아줘야 한다. 금융 위기가 과도한 정부 차입과 지출에서 비롯되었다는 금융 위기에 대한 지배적인 시각은 아이슬란드에서 미국까지 위기의 궁극적인 책임이 대규모 민간은행들에 잇다는 사실과 노골적으로 배치된다. 그 은행들의 도산을 막기 위해 정부는 납세자의 엄청난 혈세를 투입하며 개입했던 것이다. 

계급 적대를 부인하고 전체를 대표한다는 입장을 내세우는 전형적인 방법은, 그 적대의 원인을 그 자체로 사회를 위협하는 반사회적 요인이자 사회에서 배설된 과잉의 상징인 외국인 불청객들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유대주의는 단지 수많은 이데올로기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자체로 본원적인 이데올로기다. 반유대주의는 기본 좌표를 설정하는 영도(zero-lenel)(또는 순수한 형태)의 이데올로기를 구현한다. 이로써 사회적 적대('곅,ㅂ투쟁')는 신비화되거나 전치되어 그 원인을 외부 침입자에게 투영할 수 있게 된다. 라캉의 '1+1+a'의 공식의 가장 좋은 예가 이러한 계급투쟁이다. 두 개의 계급에 '유대인'이라는 과잉, 대상a(object), 대립쌍의 보충물이 덧붙는 것이다. 이 보충적 요소의 기능은 이중적이다. 계급투쟁에 대한 물신주의적 부인(fetishistic disavowal)인 동시에, 바로 그 자체가 '계급 평화'를 영원히 가로막는 이 적대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 만약 보충물없이 '1+1' 상태로 두 계급만 존재했다면, '순수한' 계급 적대 대신 두 계급이 상호 보완하여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는 계급 평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계급투쟁의 '순수성'을 흐리거나 전치하는 요인이 바로 계급 투쟁의 원동력이라는 데 역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현실 세계에서 적대적인 두 계급만 존재하는 경우는 절대 없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 비판자들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 바로 그러헥 적대적인 두 계급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계급투쟁이 존속하는 것이다.  55-57

소농은 오늘날 악명 높은 중간계급이 되었다. .. 중간계급은 정치화에 반대한다. 이들은 그저 자신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 간섭 없이 일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사회의 광적이 ㄴ정치적 동원을 종식시켜 모두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겠다고 약속하는 독재 쿠데타를 지지하는 성향을 보인다.  58

주인 담론에서 대학담론으로 바뀌는 전 세계적 추세의 일환으로 새로운 집단이 등장했다. 특정한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않고 중립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으로 상황을 지배(또는 차라리 '관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기술, 금융) 전문가 집단이다.  58

문화 전쟁이 곧 전치된 양식의 계급 전쟁이라는 뜻이다.  69

모든 이데올로기 체계는 연쇄적인 등가물을 정립하거나 부여하려는 헤게모니 투쟁의 산물이자, '객관적인 사회경제적 입장'등 외재적 참조점으로는 결코 보장되지 않는 철저히 우연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투쟁의 산물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답변에서 이 수수께끼는 간단히 자취를 감춘다.

여기서 첫 번째로 주목할 것은 일단 문화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양 진영이 있어야 하고, 문화는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근본주의에 저항하고 다문화적 관용을 옹호하는 데 정치를 집중하는 '계몽된'자유주의자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주제라는 점이다. 핵심 질문은 이렇다. 왜 '문화'가 우리 생활의 중심 영역으로 등장했는가? 종교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실제로 믿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속한 공동사회의 '생활양식'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일부) 종교 의식과 관습에 따를 뿐이다. '전통에 대한 존중심'으로 코셔(kosher-유대인의 율법을 따르는 정결한 음식) 원칙을 지키는 비신도 유대인 등이 그런 예다. "실제로 그것을 믿지는 않아. 그냥 내 문화의 일부일 뿐이야."라는 말이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거부되거나 전치된 신앙의 두드러진 양식인 듯하다. 이렇듯 '실제' 종교, 예술 등과는 구별되는 '문화'의 '비근본주의적' 개념이야말로 버려지거나 특정 개인과 무관해진 신앙의 영역을 보여주는 핵심일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믿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키는 '문화' 말이다.

두번째로 주목할 점은 자유주의자들이 가난한 자와의 연대를 주장하는 한편, 대립적인 계급 메시지로 문화 전쟁을 코드화하는 방식이다. 다문화적 관용과 여성의권리를 지지하는 이들의 싸움은 '하층계급'의 이른 바 비관용, 근본주의, 가부장적 성차별주의와 대척점에 설 때가 많다. 이 혼란을 해소하는 한 가지 방법은 진정한 구분선을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 중재적인 용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최근 이데올로기적 공세에서 '현대화'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방식이 그러한 예다. 우선 '현대화주의자'(경제부터 문화까지 모든 측면에서 글로벌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와 '전통주의자(세계화를 반대하는 사람)' 사이에는 추상적인 대립관계가 형성된다. 그러고 나면 전통적 보수주의자와 포퓰리스트에서 '구좌파(복지국가, 노동조합 등을 계속 지지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전부 이 세계화에 반대하는 사람의 범주로 분류된다. 이러한 범주와는 분명히 사회적 현실의 일면을 포착한다. 2003년 초반에 독일에서 교회와 노동조합이 연대를 통해 상점들의 일요일 영업 법제활르 막았던 일을 떠올려보라. 그러나 이 '문화적 차이'가 다양한 계층과 계급을 아우르는 전반적인 사회적 장을 가로지른다고 말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또 다른 대립관계와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될(그래서 글로벌 자본주의의 '현대화'에 저항하는 보수주의의 '전통적 가치'나 자본주의적 세계화를 완전히 지지하는 도덕적 보수주의자가 나올)수 있다는 말도 부적절하다. 요컨대 이러한 '문화적 차이'가 현대 사회적 과정에서 작동하는 일련의 적대 중 하나라고 주장해봐야 별 소요이 없다.  70-72

세번째로 주목할 것은 페미니스트, 반인종차별주의자, 반성차별주의자 등의 투쟁과 계급투쟁 간의 근본적 차이다. 다른 투쟁의 목적은 적대를 차이로 변화하는 것(다양한 성, 종교, 민족 집단의 평화로운 공존)이지만, 계급투쟁의 목적은 정반대로 차이를 계급 적대로 바꾸는 것이다. '빼기'의 요지는 전체적으로 복잡한 구조를 그 적대적인 극호한 차이로 환원하는 것이다. 인종, 성, 계급의 연쇄는 계급의 경우 정치적 입장에 대한 논리가 다르다는 점을 모호하게 만든다. 반인종차별주의자와 반성차별주의자의 투쟁은 상대를 충분히 인정하려는 노력을 지향하지만, 계급투쟁은 서로를 극복하고 진압하며 심지어 근절하는 데 목표를 둔다. 직접적인 물리적 전멸은 아니더라도, 상대의 사회경제적 역할과 기능을 말살하는 것이 목표다. 다시 말해, 반인종차별주의자가 모든 인종이 저마다의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입장을 자유롭게 주장하고 깨닫기 바란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되어도,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목표가 부르주아 계급이 그 정체성을 충분히 주장하고 목적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전자의 경우에는 다양한 정체성을 인정하는 수평적 논리가 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적과의 투쟁이라는 논리가 존재한다.  73-74




4 사악한 민족주의의 귀환(The Return of the Evil Ethnic Thing)


중동 협상 역시 평화의 문제가 관건이 아니다. '평화협상'이라는 명칭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점령을 기정사실화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인 사라들의 손을 들어주는 셈이다.  80

반유대주의는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동성애반대주의 드오가 같은 연장선상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82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는 노골적인 암시인 것이다. 

우리는 이 논리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는 서로 독립적일 뿐 아니라, 현재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중립적'이고 비정치적인 테크노크라시의 경제 정책에 대한 대중의 반대 속에서 진정한 민주 정치가 표출된다.  89

지금 단계의 우리는 당연히 충분히 관용적이지 못하거나, 아니면 이미 너무 지나치제 관용적이어서 여성권 등을 방치하고 있다.  94

우리의 과제는 단지 타인에 대한 관용을 넘어 진정한 공존과 다양한 문화의 혼합을 영속시킬 수 있는 적극저깅고 해방적인 지배문화를 추구하는 것이고, 그 지배 문화를 위한 다가올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다. 단순히 타인을 존중하지 말고, 그들에게 공동의 투쟁을 제안하자. 오늘날 우리를 가장 크게 압박하는 문제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문제이니 말이다.  95




5 탈이데올로기의 사막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Desert of Post-Ideology)


최근 캘리포니아를 방문한 동안, 나는 어떤 교수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슬로베니아인 친구 한 명과 함께 참석했다. 이 친구는 골초였다. 늦은 저녁, 담배 생각이 간절해진 친구는 집주인에게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워도 되는지 정중히 물엇다. (그에 못지않게) 정중한 태도로 주인이 안 된다고 말하자 친구는 집밖으로 나가서 피우겠다고 말했지만, 그조차도 안 된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이면, 이웃들에게 자기 평판이 떨어진다는 것이 주인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놀란 것은 저녁식사가 끝나고 집주인이 우리에게 가벼운 마약을 권했을 때였다. 이러한 종류의 흡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마치 마약이 담배보다 훨씬 덜 위험하기라도 한 듯이.96-97

라캉이 말하는 '향락(jouissance)'(주이상스)은 치며억인 과잉의 쾌락으로, 쾌락원칙(pleasure principle) 너머에 위치한다. ...

한쪽은 즐거움을 연장시키고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피하기 위해 쾌락을 신중히 계산하는 계몽된 쾌락주의자이고, 다른 한쪽은 치명적으로 과도한 향락 속에서 존재의 절정에 도달하려는 향락주의자(jouisseur)다.  97

계몽된 소비주의적 쾌락주의는 기본적으로 향락에서 그 과잉의 차원, 불온한 잉여, 그리고 아무데도 도움이 안 되는 측면을 박탈하는 기능이 있다. 향락은 용인되고 심지어 권유되지만, 우리의 정신적, 생물학적 안정성을 위협하지 않고 건전해야 한다는 단서조항이 붙는다.  98

예카테리나 대제(Catherine the Grest)의 일화. 그녀는 노예들이 뒤에서 술과 음식을 훔치고 심지어 자신을 조롱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그저 미소만 지었다. 가끔씩 향락의 부스러기를 떨어뜨려줘야 그들이 계속 노예 자리를 지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00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선택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부르짖지만 강요된 민주주의적 합의의 대안이라곤 맹목적인 실력행사뿐인 이 사회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우주인가? .. 유일한 선택이라곤 규칙에 따르는 것과 (자기)파괴적인 폭력 사이 중 하나뿐일 때, 우리가 그토록 찬양하는 선택의 자유란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우리가 점점 더 "세계 없음(Worldless)"으로 경험되는 사회적 공간에 살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공간에서 저항이 취할 수 유일한 형식은 의미 없는 폭력뿐이다.  108-109

영국 폭동이 안고 있는 문제는 폭력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진정한 자기주장이 없었다는 것이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능동적이지 않고 반동적인, 무력한 분노이자 무력(武力 굳셀무 힘력)의 탈을 쓴 절망이었고, 승리의 카니발의 가면을 쓴 질투였다.  120




6 아랍의 겨울, 봄, 여름, 가을(The Arab Winter, Spring, Summer, and Fall)


도하(Doha)의 이슬람미술관(Museum of Islamic Art)의 PO24.1999번 소장품. 

10세기의 단순한 원형 토기접시로, 직경 42센티미터의 매끄러운 흰색 바탕에는 검은색 글씨로 야히아 이븐 지야드(Yahya ibon Ziyad)가 말했다는 속담이 새겨져 있다. "어리석은 자는 기회를 놓치고 나중에 운명을 탓한다."  122

중앙부의 그림. 자기 꼬리를 먹고있는 유명한 뱀 그림과 유사하다.  124

이 말을 뒤집어 보자. "어리석은 자는 기회를 놓치고도 자신의 실패가 운명의 조화임을 알지 못한다." 이것은 세상에 우연이란 없고 모든 것은 불가해한 운명으로 결정된다는 진부한 종교적 문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접시의 속담을 곰곰이 되씹어보면, 이러한 상투적 문구의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다시 한 번 이 접시를 사용하는 시간적 차원을 고려해보자. 저녁 식사가 시작될 때 손님은 음식이 가득 담긴 접시의 가장자리에 새겨진 글귀를 처음 보고 기회를 붙잡으라는 기회주의에 관란 교훈 정도로 일축해버린다. 그러나 음식을 다 먹은 후 접시 밑에 숨어 있던 진짜 메시지가 상투적 상징임을 알고 나면, 처음 본 글귀에 숨어 있던 진실을 놓쳤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 문구로 되돌아가 다시 읽어본 후에야 그것이 기회와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하고 흥미로운 이야기, 즉 운명을 선택하는 것은 그들의 소관이라는 메시지임을 알게 된다.  125-126

독재정권이 최후의 위기에 다다를 때 보통 그 붕괴는 두 단계를 거친다. 실제 무너지기 전에 불가사의한 파열이 생긴다. 어느날 문득 사람들은 이미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깯다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130




7 월가점령시위, 또는 새로운 시작을 부르는 폭력적 침묵(Occupy Wall Street, or The Violent Silence of a New Beginning)


축제를 즐기기는 쉽다. 그러나 그 진정한 가치는 축제 다음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의 일상생활이 어떻게 바뀌었고 또 바뀔 것인지에 달려 있다. 여기에는 힘들고 끈질긴 노력이 요구되며, 시위는 그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시위의 기본 메시지는 이 정도다. "금기는 깨졌다. 우리는 실현 가능한 최선의 세계에 살지 않는다. 고로 우리는 대안을 생각해볼 수 있고, 또 생각해봐야만 한다."  146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식 모티프 - <최악을 향하여>에 나오는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를 의미한다 - 의 이러한 변주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실패 뒤에 남은 결과에 집중해야 한다.  147

시위대는 적뿐 아니라 가짜 친구들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시위대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시위를 무해한 도덕적 저항으로 바꾸어 그 의미를 희석시키고자 갖은 애를 쓴다. 복싱에서 '클린치(clinch)'란 상대방의 펀치를 막거나 방해하기 위해 한 팔이나 양 팔로 상대방의 몸을 붙잡는 행위다 월가점령시위에 대한 빌 클린턴의 대응은 정치적 클린치의 완벽한 사례다. 그는 시위가 "종합적으로 볼 때 긍정적인 일"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대의 모호함에 대해 우려는 표했다. "어떤 일에 반대만 하다 보면 우리가 만든 이 진공을 다른 사람이 채우게 될 테니, 그저 반대만 하지 말고 특정한 어떤 것을 지지해야 한다." 그러면서 클린턴은 "1년 6개월 안에 일자리 200만 개"를 창출하겠다고 주장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일자리 정책을 지지하라고 시위대에 제안했다. 그러나 시위대가 거리로 뛰쳐나온 것은 콜라 캔을 재활용하고, 자선단체에 푼돈을 기부하며, 스타벅스 카푸치노를 구매하여 가격의 1%를 제3세계로 보내는 것마능로 만족하는 세계에 질릴 만큼 질렸기 때문이다.  155-156

민주주의는 법치주의에 기반을 둔다.  158

마르크스는 자유의 문제를 고유의 정치적 영역에서 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국가에서 자유선거가 실시되는가? 사법부가 독립적인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가? 인권이 존중되는가? 등). 실제 자유의 핵심은 오히려 시장에서 가족에 이르는 사회적 관계들의 그물망에 있고, 이 영역을 진정으로 개선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정치적 개혁이 아니라 '비정치적'인 사회적 생산 관계의 변혁이다.  161-162

민주주의 기제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자본주의 재생산의 원활한 가동을 보장하는 '부르주아' 국가 장치의 일부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적은 제국이나 자본이 아니라 민주주의라고 불린다."라는 알랭 바디우의 언뜻 의아하게 들리는 주장은 정곡을 찌른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관계의 모든 급진적 변화를 가로막는 주범은 민주주의적 절차 내에서만 모든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민주주의적 환상'인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구체적 강령을 만들어내기 어려운 데는 이처럼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162

월가점령시위의 수많은 (종종 혼란스런) 발언들 기저에는 두 가지 기본적 통찰이 깔려 있다. 첫째, 현재 대중의 불만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대한 것이다. 문제는 시스템 자체이지 그 특정한 부폐 사례가 아니다. 둘째, 현재와 같은 다당제 형태의 대의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해결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는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월가점령시위의 가장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경제생활의 파괴적 결과 앞에서 속수무책임이 입증된 현행 정치형태를 벗어나 민주주의를 어떻게 확장해 나갈 것인가? 다당제 대의민주주의를 뛰어넘어 이렇게 재발명된 민주주의에 과연 이름이 있을까? 있다.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163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어떻게 민주적 다당제 체계를 넘어 집단적 의사결정을 제도화할 수 있을까? 또 누가 이 재발명이 주역이 될 것인가? 잔인하게 말하자면, 당장 오늘 무엇을 해야할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지식인이든 일반인이든 그것을 아는 주체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은 장님이 장님에게 길을 안내하는, 좀 더 정확히는 장님끼리 길을 안내하면ㅅ 서로 상대방은 볼 수 있다고 믿는 교착상태인 것일까? 아니다. 각자 모르는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중은 답을 가지고 있다. 다만 자신들이 답을 가진(혹은 스스로가 답인) 질문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존 버거(John Berger)는 내부인과 외부인을 가르는 벽의 잘못된 쪽에 서있는 '대중(multitude)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대중은 아직 제기되지 않은 질문의 답을 알고 있고 벽보다 오래 살아남을 능력이 있다. 질문이 아직 제기되지 않은 것은, 그러자면 진심으로 와닿는 용어와 개념이 필요한데 민주주의, 자유, 생산성 등 현재 사건드을 명명할 때 사용되는 용어와 개념은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곧 새로운 개념과 더불어 새로운 질문이 대두할 것이다. 역사는 바로 그러한 질문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니까. '곧'이라면 언제? 한 세대 내에.'165-166




8 <더 와이어>, 이 아무 일 없는 시대에 해야 할일(The Wire, or What to Do in non-Evental Times)


-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허위적인 종언 이후의 '그저 그런 삶(mere life)'과 '진정한 삶(real life)'을 대비시킨다. '그저 그런 삶'은 자신의 삶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삶이고, 자신의 기득권이 아무 탈 없이 그대로 대대손손 보존되기를 매일 기도하는 삶이다. 그것의 정치적 버전이 자유민주주의다. 지젝이 보기에 자유 민주주의의 최대 관심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마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자유민주주의는 무사건의 당(party of non-party)이다."(이현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자음과 모음 2011 p72, 슬라보예 지젝,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자음과 모음 2011 p210 참조  167

금기어를 사용하여 금기를 깨는 효과.  169

'와이어(wire)'에는 다양한 함의가 있지만(철조망을 따라 걷는다거나 도청장치를 착용하는 등) 사이먼에 따르면 이 제목은 주로 "두 개의 미국 사이의 거의 가상적이지만 침범 할 수 없는 경계", 즉 아메리칸 드림에 동참한 사람들과 낙오된 사람들 사이의 경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더 와이어>의 주제는 한마디로 계급투쟁이자 그 문화적 결과를 포함한 우리 시대의 실재다.  170

사이먼은 이 급진적인 분열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매우 명료하게 설명한다. 

'우리는 마약에 대해 전쟁을 벌이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단지 더이상 노동공급원으로 필요가 없어진 도시 최하층계급을 짐승 취급하며 인간성을 말살하고 있을 뿐이다. (중략) <더 와이어>는 미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낙오된 미국에 대한 이야기다. (중략) 마약 전쟁은 현재 최하층계급이 벌이는 전쟁이다. 그것이 전부다. 다른 의미는 없다.'  170-171

운명이 어떻게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승리를 거두는지에 대해 <더 와이어>는 체계적으로, 이어지는 각 시즌마다 한 단계씩 분석을 진행해 나간다.

시즌1은 마약상 대 경찰이라는 갈등을 제시하고, 시즌2는 노동 계급의 붕괴라는 갈등의 궁극적인 원인을 파해치며, 시즌3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 전략 및 경찰과 그 실패를 다룬다. 시즌4는 왜(흑인 노동계급 청소년의) 교육만으로는 불충분한지를 보여주고, 마지막 시즌5는 언론의 역할, 즉 일반 대중이 이 문제의 실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유에 초점을 맞춘다.  173

핵심은 그들 모두 어떤 식으로든 법을 위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178

마르크스도 비록 한정된 주관적 입장에서는 생산의 목적이 생산물, 즉 사람들의 (가상적 또는 현실적) 수요를 충족시킬 물건이고, 다른 말로는 사용 가치지만, 이 시스템 전체라는 '절대적 관점'에서 보자면, 개인의 수요의 충족은 단지 자본주의적 (재)생산 지게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일 뿐이라 말한다.  183

제임슨이 말한 대로 <더 와이어>는 범인이 일개 번죄자(나 범되 단체)가 아니라 사회 전체이자 전체 시스템인 탐정물이다.  183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실재가 추사적이고, 자본의 추상적 가상적 운동이며, 실재와 현실의 라캉식 차이를 동원하자면, 현실이 실재를 가린다는 것이다. '실재의 사막'은 자본의 추상적인 움직임이고, 마르크스가 말한 '실재적 추상(real abstraction)'도 같은 맥락이다.  183

마르크스는 자본의 광포한 자기 증식적 순환을 묘사했고, 자본의 유아론적인 자기 수태적 행보는 오늘날 메타 반영적인 선물 투기에서 절정에 이른다. 아무런 인간적, 환경적 고려 없이 자기 갈 길만 추구하며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는 이 괴물의 유령이란 이데올로기적 추상성에 불과하고, 그 뒤에는 거대한 기생동물 같은 자본적 순환의 토대가 되는 생산력과 자원을 제공하는 실제 사람들과 자연물이 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문제는 그 이데올로기적 추상성이 금융 투기자의 사회 현실에 대한 오해의 일부일 뿐 아니라, 물질적 사회 과정의 구조를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정확히 실재라는 것이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때로는 모든 국가의 운명이 자본의 유아ㅇ론적이고 투기적인 춤사위에 따라 결정되는 판국에, 정작 자본은 자신의 운동이 사회 현실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전혀 무관심한 채 수익성이라는 목표만 추구한다.  183-184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체계적 폭력.

이 폭력은 더 이상 개인이나 그들의 '사악한' 의도에 책임을 물을 수 없이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체계적이며 익명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reality)과 실재(the real)에 대한 라캉식 구분과 마주하게 된다. 현실은 실제 인간들이 상호작용과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사회 현실인 반면, 실재는 사회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결정하는 자본의 냉혹하고 '추상적'이며 유령 같은 논리다. 이 간극은 생태적 파괴나 인간의 고통으로 얼룩져 생활이 분명 혼란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경제 보고서상으로는 '재정적으로 건전한'국가로 발표되는 어떤 국가를 방문해 보면 실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자본의 상황인 것이다.  185

마르크스도 <자본론>의 유명한 구절에서 상품의 교환과 순환으 감춰진 논리를 끄집어내기 위해 의인법에 의존한다. "만약 상품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의 사용가치는 인간들에게 관심사일지는 몰라도 물적 존재로서의 우리에게는 속하지 않는 것이다. 물적 존재로서 우리에게 속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다. 상품으로서 우리가 교환되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단지 교환가치로서만 서로 관계를 맺는다.  187

<더 와이어>는 종종 권력과 저항, 또는 법과 그 위반 사이의 관계에 대한 푸코식 주제(topos)의 관점에서 해석된다. 순응을 요구하는 규제 과정이 오히려 '억압'하고 규제하려는 대상을 낳는다.  192

주변부의 주관적 입장에서 지배적인 장치에 '저항'하는 식의 전략을 확산하고자 애쓸 것이 아니라 지배적인 장치 자체 내에서 가능한 파열 양상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저항의 현장'에 대한 모든 이야기에서, 비록 당장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때로는 우리가 저항하는 장치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193-194

삶은 거대한 순환이고, 우리는 기린을 먹고, 기린은 풀을 먹는다. 그러나 그 후 우리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풀에게 먹혀 순환이 종료된다. 이것이 가장 꼭대기에 있는 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메시지다. 결정적인 것은 우리가 이러한 '지혜'에 부여하는 정치적 해석이다. 이것은 단순한 철수의 문제일까, 아니면 급진적 행동 조건으로서 철수의 문제일까? 다시 말해, 삶은 항상 원을 이루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 위계질서를 오르내릴 뿐 아니라 원 자체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199-200

운명에 저항하는 (그래서 운명의 실현을 돕는, 마치 오이디푸스(Oedipus)의 부모나 바그다드에서 사마라로 도주했던 하인처럼) 것이 아니라, 운명 자체, 그 기본 좌표를 바꾸는 것이다.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는 "무엇인가를 바꾸어야만 모든 것이 그대로 남는다."라는 말을 뒤집어 언젠가 "아무것도 바꾸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이 달라지게 하자."는 의견을 제안했다.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 혁명화가 요구되는 후기 자본주의의 역동성 같은 일부 정치적 성좌에서는, 어떤 것도 바꾸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오히려 진정한 변화의 주체다. 변화의 원리 자체의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00

우리는 오늘날 '전면적인 경제 불황'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전망이 진정한 집단적인 반체제주의를 야기할까? 결과가 어떻든 간에,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사이먼의 비극적인 비관주의를 오나전히 수용하고 (시스템 내에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1-202




9 시기와 분노를 넘어서(Beyond Envy and Resentment)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가 이른바 '복지 국가의 이율배반'이란 문제에 대해 해법으로 제시하는, 단순한 시장 교환을 넘어서는 '기부의 윤리학(ethics of gift-giving)'.  203


그가 말하는 변화를 달성하려면, 민주주의 시대에 이상하게 살아남은 전제정치의 잔재인 국가주의(etatisme)를 탈피해야 한다. 전통 좌파조차 놀랄 만큼 강한 이 개념은 국가가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필요시) 그들의 생산물 일부를 법적 강제력을 동원해 몰수 및 결정할 수 있는 명백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것이다. 시민은 자신의 소득 일부를 국가에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날 때부터 국가에 빚을 진 존재처럼 취급받는다.  204

첫 번째 단계는 납세 의무자에서 자원자로의 변경이다. 부자에게 과중한 세금을 매기는 대신, 자발적으로 자신의 부를 어느 정도나 공공복지에 기부할 지 결정할 (법적) 권한을 제공해야 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세금을 급격히 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기부자가 스스로 어디에 얼마를 기부할지 결정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작은 여지라도 열어놓아야 한다는 뜻이다.이러한 시작은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점차 사회 결속력의 근간이 되는 사회 전체의 윤리를 변화시킬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상화이야 어째됐든 결국 해야만 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게 된다는 오랜 역석레 빠지는 것은 아닐까? 선택의 자유가 실은 강요된 선택에 기초하는 거짓 자유가 아닐까?  205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에서 실시된 연구에 대한 보고 내용.

'... 일정 수준이 충족되면, 사람들은 돈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일에 대해 생각한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을 기꺼이 무료로 하거나 일주일에 20시간, 때로는 30시간을 자원 봉사하는 살마도 대단히 많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것을 팔지 않고 그냥 나눠준다. 대부분 고도의 전문 기술을 보유하고 직업도 있는 이들이 왜 회사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무료로, 때로는 업무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일하는 것일까? 참으로 이상한 경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 '이상한 행동'은 마르크스의 유명한 구호인 '능력에 따른 노동과 필요에 따른 분배'를 좇는 공산주의자의 행동이다. 이것암ㄴ이 진정한 유토피아적 차원을 갖는 유일한 기부의 윤리학이다.  210

MIT 실험에 어떠한 문제가 있든 간에, 자본주의적 경쟁과 이익 극대화가 전혀 '천성적'이지 않다는 점만은 분명히 입증된다. 기본적 욕구가 일정 수준 이상 충족되면, 사람들은 금전적 보수가 아닌 능력에 따라 사회에 기부해가며 '공산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212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건 힘겨운 투쟁을 통해 쟁취하는 것이다. 스파르타인의 가혹한 군사적 규율은 아테네인의 '자유민주주의'와 외적으로 대립하는 동시에 그것의 근간을 이루는 내적 조건이다. 이성이 있는 자유로운 주체는 오로지 혹독한 자기 규율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진정한 자유는 딸기 케이크와 초코 게이크 중 하나를 고르듯이, 안전한 거리를 두고 행해지는 선택의 자유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필연성과 겹쳐진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걸 때에만,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때에만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 조국이 다른 나라에 점령당했을 때 맞서 싸우는 것은 '선택할 자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존엄을 지키고 싶다면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219




10 미래가 보내는 징후(Signs From the Future)


꿈이 사라져버린 듯한 이 우울한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열정이 넘치던 숭고한 순간을 회상하며 향수와 자아도취에 빠지거나,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이러한 시도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냉소적이고 현실적으로 설명하는 것 외에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가장 먼저 언급할 것은 수면 아래에서 여전히 불만이 들끓고 있다는 사실이다. 분노가 계속 쌓여가고 있으니 새로운 저항의 물결이 뒤따를 것이다. .. 확실한 돌파구가 없는데다, 지배 엘리트는 명백히 통치력을 상실하고 있다. 더욱 불안한 것은 민주주의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228

월가점령시위, 아랍의 봄, 그리스와 스페인에서의 시위 같은 사건들은 그렇게 미래에서 보내온 징후로 읽어야 한다. 바꿔 말하자면, 맥락과 기원을 바탕으로 사건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역사주의적 관점을 뒤집어야 한다.  229

우리는 공간상으로는 여기에 위치하고 있지만 시간상으로는 공산주의 사상의 미래, 즉 해방된 미래에 위치한 요소를 적극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에서 인식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징후를 포착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한편, 현재 우리의 행동도 미래가 되어야 온전히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오늘날의 사회에서 '공산주의의 싹'을 필사적으로 찾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허비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가설상 공산주의의) 미래에서 오는 징후를 읽는 이과 그 미래의 근본적인 개방성을 유지하는 일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잡는 일이다. ..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그 균형은 양 극단을 핗는 일종의 현명한 '중도(中道)'와는 무관하다.  229-230

칸트의 이성과 직관의 관계 도식 (-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233

오늘날 공산주의자를 규정짓는 특성은 (현대식 버전의) '기적', 즉 타흐리르 광자의 시위와 같은 예상치 못한 사건 속에서 공산주의적 요소를 찾아내고, 그것을 (공산주의적) 미래에서 온 징후로 읽어내게 해주는 '독트린(이론)'이다.  234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미래는 '객관적'이지 않다. 그 미래를 지탱하는 주관적 참여를 통해서만 현실이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비난을 되돌아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적어도 장기적으로는)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원하지 않는 것, 즉 현재 누리는 '자유' 중에서 포기할 각오가 된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을까? 우리는 커피를 원하지만, 우유나 크림이 없는 커피를 원할까? (국가가 없는 자유? 사유재산이 없는 자유? 등)  235

우리에게 위기가 임박했다고 설득하려는 생태학자에 대한 유일하게 적잘한 답변은 그의 필사적인 설득의 진짜 타깃은 자신의 비(非)신념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대답은 이것이다. "걱정 마, 재앙은 반드시 닥칠 거야! 불가능한 일이 이미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어. 하지마 인내심을 가고 지켜봐. 성급한 추측에 굴복하지도 말고, '지금이야! 두려운 순간이 다가왔어!'라고 생각하며 도착적인 기쁨에 빠지지도 마." 생태학에서 이런 종말론적 환상은 다양한 형태를 띤다. 예를 들어, 지구 온난화로 수십 년 내에 모두 물에 잠길 것이라거나, 유전자공학이 인간의 윤리와 책임의식의 종말을 의미한다거나, 벌들이 곧 멸종하고 전 세계적인 기아가 뒤따를 것이라는 등. 물론 이 모든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이러한 주장에 현혹되거나 거짓된 죄책감과 정의감("우리가 만물의 어머니인 대지를 노하게 했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다!")에 빠져서는 안 된다. 대신 냉정한 상태를 유지한 채 '지켜보자.'

'그러나 지켜보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하모가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3:33~37)

계속 깨어 있으면서 무엇을 지켜보라는 걸까?  236-238

프랑스어에는 영어로 정확히 옮기기 힘든, '미래'를 뜻하는 두 단어가 있다. '퓌뛰흐(futur, 미래)'와 '아브니흐(avenir, 장래)'다. '퓌뛰흐'는 현재의 연속선상으 미래로, 이미 존재하는 경향성이 완전히 실현된 것을 나타낸다. 반면 '아브니흐'는 보다 급진적인 중단, 현재와의 단절을 가리킨다. 단순히 '앞으로 될 것(hwat will be'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 것(what to come)'을 의미한다.  240

파국에 맞서 싸우는 방법은 파국적인 '고정점'으로 치닫는 이 표류를 중단시키고, '도래할' 급진적 타자성(Otherness)을 야기할 위험을 스스로 떠안는 것이다. 여기서 "미래가 없다(no future)"는 슬로건이 얼마나 모호한지를 알 수 있다. 좀더 깊이 파고들면, 이 슬로건은 종결 혹은 변화의 불가능성을 의미하기보다, 우리가 쟁취해야 할 것, 즉 파국적 '미래'의 영향을 중단시키고 이로써 '다가올' 새로운 것을 위한 공간을 여는 일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분에 기초하면, 마르크스(와 20세기 좌파)의 문제를 알 수 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너무 이상적인 꿈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미래적'이어서 문제였다. 마르크스가 플라톤에 대해 썼던 말(플라톤의 <국가>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기존 고대 그리스 사회의 이상적 이미지였다)은 그대로 본인에게 적용된다. 마르크스가 구상했던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이상화된 이미지, 자본주의 없는 자본주의, 즉 이익과 착취가 없는 확대 재생산으로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르크스에서 헤겔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를 인도하는 어떠한 숨은 목적론도 없고, 모든 개입이 곧 미지의 세계로의 도약이며, 따라서 결과가 언제나 우리 기대를 좌절시키는 그러한 사회적 과정에 대한 '비관적' 견해로 말이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기존 체계의 무한한 재생산은 불가능하다는 사실뿐이다. .. 중동의 새로운 전쟁이나 경제적 혼란, 이례적인 환경 참사는 우리 곤경의 기본 좌표를 순식간에 바꿔놓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열린 가능성을 충분히 수용하면서, 미래가 보내는 모호한 징후에 의거하여 스스로를 익르어가야 한다.  24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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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자들에게

 

이 책은 공산주의나 자본주의와 다른 접근방법을 찾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과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다. ..

이 책의 기본 견해는 훌륭한 사업이란 우정이 있는 관계를 통해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6

 

1. 3~4명의 소규모 모임부터 시작한다

2. 목표와 가치에 합의한다

3. 기존 사업체를 통해 성공과 실패 요인을 찾는다

4. 무엇을 할 것인지 선택한다

5. 필요한 자원을 발굴한다

6. 사업체의 법인 형태를 선택한다

7. 사업을 시작한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잇다. 기능에 관계 없이 도덕적 헌신성만을 기준으로 지역사회 공동체 사업 모임(community business team)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흔히 나타나는 실수이다. ..

지역사회 공동체들은 여러 유형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상인도 있고, 전문가도 있고, 실업자도 있고, 생활복지 대상자도 있으며, 학생도 있다. 여기에 그물을 던져서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하나의 일관되고 통일된 집단을 영입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15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해야 하기 때문에 일을한다. 사람들은 주로 돈벌이가 되는 일을 하지만 좋아서 하기보다 그 일이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최선의 것이기 때문에 한다. 16

자원활동(volunteering)은 여가 활동의 일종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여가 활동을 한다. 의무감에서 일하는 자원봉사자는 그것이 비록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여도 크게 효과적인 일꾼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17

 

열정적인 태도는 위험할 수 있다.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도록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23

 

유명한 학계의 인물들은 이제 지역에 근거를 두는개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은 다음의 발상과 똑같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있는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더 보편적인 수준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출발점이 다를 뿐이다. 24

 

모임들은 공유할 수 있는 조직의 비전(미래상)을 먼저 발전시키지 못하면 재대로 가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토론은 그때그때 이루어질 수 있다. ..

지역 사회 공동체 기업을 설립하는 맥락에서 공유할 수 있는 비전이란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들을 총합하여 정리한 것이다. .. 일상생활의 행동 유형을 관찰하면 사람들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행동에서 자주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다. 27-28

 

의미 있는 사상을 공유하지 않고는 어떤 의미 있는 행동도 함께하지 못할 것이다. 28

 

기본가치는 다음 5가지 정도다.

첫째, 돈은 수단이다. 돈은 인간의 발전을 위해 쓰여야 하며 그 반대로 쓰이면 안 된다. 지역사회 공동체의 사업은 인간적이고 지역사회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수단이며,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둘째, 개인의 헌신이 기본 요건이다. 이는 신념에 따라 참여한 자원봉사자에게서 나타난다. 금전적 보상에 대한 관심이 아니다.

셋째, 민주주의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이는 투입한 자금의 규모에 관계없이 개인이 각각 동등한 의결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가정하는 것이다. 이 가치는 투표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계속해서 이루어 나가야 하는 과정으로서 경영과 자문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

넷째, 경영 직무는 훈련되어야 하고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 이는 이사회의 구성과 간부의 발탁에 반영된다.

다섯째, 지방의 지역사회 공동체와 연대 관계를 유지한다. 만약 실업이 있을 때는 일자리 창출 기업체들을 만들어 내도록 인격적 투자를 앞서서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28-29

 

최선의 접근방법은 조직 자체를 학습하는 기회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29

 

합의는 행동에 대한 약속까지 포함해야 한다. 32

 

이제는 주위를 살펴볼 차례다. 여러분은 행동을 시작하기 전에 생각이 비슷한 다른 단체들이 하고 있는 일을 분석해야 한다. 그들이 어떤 영역에서 실패했고 어떤 분야에서 성공했는가? 무엇이 잘 작동하였고 무엇이 그렇지 못했는가?

실패 사례에 대해 반드시 던져야 하는 질문은 그 원인이 내부에 있는가, 아니면 외부에 있는가이다. 내부에 원인이 있다면 그 실패가 운영체계의 결과인지 사람의 문제인지 파악해야 한다. 내부적인 요소는 통제할 수 있고 치유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러나 외부적인 요소는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는 경우가 많다. 실수를 범했다고 인정하려는 단체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평가는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하다.

실패 또는 성공 요인을 찾아내는 작업은 어려울 수 있다. 33

 

자치권(autonomy)’은 실패한 지역사회 공동체 사업체들이 주장해 온 가장 공통된 가치 중 하나였다. ..

실패한 지역사회 공동체 사업체들이 언급하는 다른 형태의 공통된 가치는 전통이다. 40

 

성공적인 사업들은 유용한 자원을 발견함으로써 가능하다. .. 자연상태의 물질은 사람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통해서만 자원이 된다는 점 역시 명심해야 한다. 53

 

자원으로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는 상당 부분 선택하는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다. 두 세대 전에만 하더라도 바닷가재는 먹을 수 없는 청소동물(동물 사체를 먹는 동물 종류)로 간주되어싸다. 해덕(Haddock : 대구와 비슷하나 그보다 작은 바닷 고기)이 헐씬 값비싼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의 취향이 뒤바뀌었다. 바닷가재가 해덕보다 훨씬 값비싼 것이 되었다. 54

 

우리의 전통 경제에서 자원으로 인식되어 온 것은 석유, 석탄, 광물 등과 같은 물질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더 복잡하다. 미국의 한 회사에는 밤하늘을 밝히고 있는 수십억 개의 별이 가치 있는 자원이 되었다. 국제별등록회사가 설립되어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별에 요금을 받고 신청자의 이름을 붙여준다. 이 회사는 새롭게 명명된 별의 우주 내 위치가 표시된 증명서를 제공하고 국제등록소에 그 이름을 올려준다. 이제 미국의 젊은이들은 여자 친구에게 다이아몬드를 선물하는 대신 별에 이름을 붙이고 있다. 55

 

성공 여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인적, 금전적 자원과 정부의 자원에 얼마나 잘 접근할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55

 

문제에 대해 고도로 조직화된 대응 체계가 없을 때에는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참여가 중요한 자원이 된다. 56

 

핵심은 지도자의 높은 수준의 정신과 헌신이다...

어떤 지역의 독특한 문화와 역사야말로 핵심 자원들이다. 59

 

지역사회 공동체가 목표인 곳에서는 주주들이(주식회사의) 소유하고 있는 주식의 수에 관계없이 1표씩의 의결권만을 가지도록 제한하는 법률적 합의를 체결해 둔다. 사실상 주식회사도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할 수 있다. 69

 

지역사회 공동체 기업의 더욱 전형적인 형태는 협동조합의 법률적 구조다. 69

 

건실한 사업이라도 무엇이든 성공을 하려면 지방의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 88

 

어떤 유형의 사업이든 경영자가 참석하지 않는 이사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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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선 총서를 기획하며 


혁명의 시대는 과거에 종속되고 미래의 혁명은 메시아적 기다림만을 강요한 지 오래다. 혁명의 불가능한 도래는 기원에 찬 세계의 손아귀를 차갑게 결빙시켰다. 21세기 자본주의의 찬란한 풍요와 자유의 바깥에 거주하는 존재들의 입마저 얼어붙게 했다.  4


혁명은 공동선을 향한 투쟁이다. 차별과 배제으 높은 장벽을 넘어 서로의 손을 맞잡는 공동선을 향한 투쟁. 이 공동투쟁은 잔혹한 자본의 횡포와 불평등을 넘어선 진정한 공동선의 세계를 향해 있다.  5




서문 - 자본의 육체를 절개하는 공동선의 투쟁


지젝은 우리가 자명하다고 믿는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질문을 통해 의미 있는 파열음을 남긴다. ..

도저히 변화가 불가능할 것 같은 이 세계는 지젝의 통찰력 앞에서 맥없이 주자앉고 말며, 지젝의 철학적 메스에 맨몸을 부끄럽게 드러내고 만다. ..

지젝의 이론과 철학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육체에 가해진 메스의 절개 자국에 다름 아니다. 그 절개 자국을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그 흉측한 세계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이 지젝의 책을 읽는 목적이다.  8


지젝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Walls)이다. 

자본가의 착취 방식이 공적 영역(재산)을 사유화함으로써 그 지대(rent)를 물리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 자본가들의 이윤을 남기는 방식이 지적 재산권을 경유함으로써 보다 세련되고 뻔번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자본가들의 지배체제야말로 민주주의를 거스르고 있으며 오히려 여론 독점과 이윤 독식이라는 경제적 독재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9


지젝은 매우 급진적인 반자본주의자이다. 지젝이 가장 위험한 철학자로 불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9


오늘날 새롭게 생성된 아파르트헤이트인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를 가르는 장벽을 부수는 일이야말로 지젝 철학이 향하는 궁극지점이다. 지젝은 오늘날 가장 가난한 살마들은 일을 하는 계층이 아니라 실업자나 배제된 자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노동자 계급이 곧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전통적 좌파의 고정관념을 파괴하기도 한다.  10


유전공학의 발달로 인한 급격한 상황의 변화가 이전의 윤리적 기준을 무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주목한다. 이러한 변화의 중요성은 우리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직까지 잘 모른다는 데서 비롯된다. 이것이 바로 이론과 철학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까닭이다.  10-11


우리가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폭력은 여기에 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라는 것. ..

상존하는 폭력에 노출된 대상은 배제된 자들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이론과 철학의 부재는 포함된 자는 물론이고 심지어 배제된 자들조차 이 세계에 상존하는 폭력의 현실에 대해 인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한다. 이것이야말로 이 세계의 진정한 문제이다.

폭력이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를 가르는 장벽의 원인이자 결과라면, 이것은 필연적으로 공동선의 문제로 귀결된다. 지젝은 공동선을 '공동'가 '선'으로 분리해서 접근한다. '공동'은 보편성의 문제를 함축하는데, 보편성이야말로 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를 가르는 장벽을 허물 수 있는 진정한 해방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11


선과 악을 초월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보편성의 세계가 아니라, '선'의 규준을 투쟁으로써 쟁취하는 '구체적 보편성(concrete universality)'의 세계야말로 좌파에게 주어진 또 다른 실천적 과제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젝은 '선'이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자연보다 앞서서 존재하는 공동선이란 원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12


'선'은 점유, 혹은 투쟁과 쟁취의 대상이 된다. "공동선은 단순히 전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성질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궁극적 '선'은 무엇인가? 이는 물론 배제된 자들의 정치-사회적 침입과 복원이다...

자본주의적 삶에서 최상의 '선'은 물질적 삶의 안정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표면적인 정치적 담론은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은 손대지도 못하고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는 투쟁 정도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어설프게 소비할 뿐이라고 지젝은 비판한다. 그렇기에 지젝은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통해서 진정한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할 수 있으며, 그것을 시도하는 정치-사회적 행위야말로 새로운 '선'의 범주를 형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젝은 1990년 이휴의 모든 것은 새롭게 사유되어야 하며, 대의(cause)를 잃어버린 세계 속에서 새로운 '선'. 다시 말해 새로운 대의를 찾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과업이라고 말한다.  13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지젝은 '빼기'의 폭력으로 귀결되는 첨예한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이 불가능한 것의 장벽을 허무는 이론과 철학의 최전선에 서 있다. ..

바로 공동(the common)의 세계이다. 자본주의 이후의 공동의 세계를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상징계적 억압의 사슬을 끊기 위해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고 재사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계 흐리기는 '가능한 것'의 영역을 보다 확장시킨다.  13-14


지젝은 대타자를 소거한 '빈 공간'을 비록 실패할지라도 반복적으로 점유할 수 있는 윤리적 주체에 대한 뛰어난 정치적 영감을 준다. 이 영감 속에서 쟁취할 수 있는 공동선의 주체야말로 민주주의와 혁명의 실패를 극복하고 자본주의 이후의 공동선을 과감하게 쟁취할 수 있는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지닌 정치적 주체이다.  15


지젝을 알든 모륻든 이 책을 읽어야 하는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했던 이 세계를 철저하게 그 바닥에서부터 다시 사유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15-16






인디고 : 공동선은 개인의 주관적 가치가 보편적인 윤리적 질서와 만나는 지점, 즉 나의 좋음이 세상의 옳음과 맞닿는 곳에서 창조되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공동선은 무엇이며, 이 문제의식의 의의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25


* 지젝은 오늘날 세계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우리가 공통으로 당면한 긴박한 문제(적대)로 아래의 네 가지를 꼽는다.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소위 '지적 재산권'과 관련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특히 유전자공학에 있어서의) 새로운 기술-과학적 발전의 사회, 윤리적 함의, 마지막으로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것으로, 새로운 장벅(Walls, 월가)과 빈민가의 , 즉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의 생성"이 그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창비 2010, 182쪽)  26


지젝 : 우리가 어떤 고차원적인 공동선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우리의 은밀한 목적에 의해 정의된다는 점입니다. ..

태양열을 이용한 작은 자가 발전식 집에서 사는 생태적이 ㄴ아이디어를 볼까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다면, 이러한 집은 더욱 많아질 것이고 실질적으로 숲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생태학적 경향에 대한 저의 불신입니다...

저의 기본적인 입장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대로 저속한 조작이나 부패, 권력 싸움 등을 의미하는 정치가 아니라, 지구에 대한 근본적인 결정을 공동으로 내리는 것과 그에 대해 완전한 책임을 지는 삶으로서의 정치 말입니다. 그렇기에 공동선을 '발견'한다고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모든 조화는 부분적인 조화입니다.  27-29


* 지젝은 모순된 양 극단을 '조화'를 이룸으로써 해소할 수 있다는 관념을 거부한다. 한 극에서 반대 극으로의 직접적인 이행은 우리가 '동일화하려는 강박'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 동일성의 틀 자체를 철회함으로써 두 극단의 차이를 구해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도서출판b 2007 238~240쪽)  29


첫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두 개의 극단이 있을 때, 그 둘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조화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개의 극단은 이미 서로의 일부분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30


저에게 있어 진정한 혁명이란, 균형을 맞출 때 그 기준 자체를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31-32


혁명이란 사회의 근본 법칙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32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에도 이러한 비판적 지성인들이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많이 있었지요. 하지만 저는 그들의 방법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지혜에 현대적인 색깔을 입히는 방식을 택했지요. 일본과 중국의 근대화 모델은 아주 흡사합니다. 저는 한국이 이보다는 더 나은 방향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하자면 중국의 온건한 파시즘의 형태, 즉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전통적인 조화와 균형의 개념을 덧붙이면서 지배하는 방식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근대적 교착 상태를 보다 현명한 방식으로 해결하기를 바랍니다. 그저 "조화를 이루는 사회로 돌아가자!"는 식의 구호를 내세우지 않고 말입니다.  34-35


자연보다 앞서 존재하는 공동선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자연은 종잡을 수 없습니다. 자연에는 언제나 재앙이 있습니다. .. 지금의 우리는 사하라 사막이 언젠가는 물로 가득 찬 바다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자연은 결코 균형 잡혀 있지 않습니다.  35


저는 자연적 질서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연적 질서란 재앙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자연적 질서를 따르면 모든 것은 언젠가 폭발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가 윤리의 정치화(politicization of ethics)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단순히 '선'을 향한 의무를 다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이 무엇인지에 대해 답을 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37


* 정신분석학 용어인 대타자(the big Other)는 주체에게 상징적 체계를 강요하는 어떤 질서로서, "대타자는 없다(il n'y a pas de grand Autre)"라는 라캉의 말은 상징적 질서 자체 역시 근본적인 불가능한/외상적인 중핵, 즉 그것이 하나의 허구적 질서라는 사실("오늘날 신이 죽은 것이 아니다. 신은 처음부터 죽어 있었다. 단지 그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 뿐...")을 폭로하는 것이다...(주디스 버틀러외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도서출판b 2009 418쪽 참고, 지젝 <까다로운 주체> 도서출판b 2005 519~520쪽, 또는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한나래 1997 123쪽)  39


* 인터뷰는 슬로베니아의 슬라보예 지젝의 자택에서 2011년 2월 2일과 4일, 이틀에 걸쳐 진행되었다.  40


저에게 정치란 .. 진정한 정치란 종교적, 사회적, 윤리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찾은 후에 이를 정치적으로 구현하는 순서를 따르지 않습니다. 정치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수단과 목적을 구별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제가 말하는 정치란 정확히 말해 의사 결정의 과정에서 모든 것을 문제 삼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41


제가 오래전에 저의 책에서 언급했던 예를 들어보죠. 두 명의 학생이 있습니다. 한 명은 게으른 반면 다른 한 명은 아주 성실합니다. 일반적인 윤리관으로 보자면, 성실한 학생이 게으른 학생을 이길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게으른 학생이 능력을 엄청나게 향상시키는 약을 먹고 조금 공부한 후 성실한 학생을 이긴다면, 당신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약을 금지할 것입니까?

윤리적 기준은 이렇게 바뀌고 있습니다. 비록 저는 하버마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는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바로 약을 복용하지 않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그의 답변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러한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제가 게으른 학생이고 당신이 성실한 학생이라고 가정해보죠. 당신은 열심히 일하지만 저는 약을 하나 먹고 별 노력 없이 당신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낸다고 합시다. 당신은 스스로를 멍청이처럼 느낄 이유가 충분합니다. 약을 먹기만 하면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제가 그 모든 윤리적인 요청을 떠맡으려 하겠습니까? 우리의 근원적 윤리 의식은 이렇게 말하고는 하지요. "자유는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뒤따라온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단련하며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화학적 물질뿐만 아니라 유전자 조작 등을 통해 이 모든 규버모가 윤리가 영향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렇듯 모든 것은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엄청나게 다른 새로운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43-44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공동선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변화된 시대에 맞는 공동선에 대한 정의를 먼저 정립해야 합니다... 오늘날 인류가 처한 상황과 관련하여 혼란으로부터 안정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식의 유교적인 패러다임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어떤 안정의 상태를 원하는지 스스로결정해야 합니다. 어떤 것도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45


저는 우리가 다중심적인(multicentric) 세계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47


* 철학자로서의 제 직감은 사실상 우리가 다중심적 세계로 진입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질문이, 그리고 전통적인 좌파들에게는 불쾌할 수 있는 질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Sean O'Hagan, "Slavoj Zizek: interview" 2010)  48



인디고 :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공산주의란 어떤 의미입니까?  51


지젝 : 스탈린의 끔찍한 말이 생각납니다. "만약 당신이 열 명의 삶을 살해한다면 당신은 살인자이지만, 수백만 명을 죽인다면 당신은 역사적인 영웅이다"라는 패러독스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경제적 범죄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10만 달러를 훔친다면 당신은 도둑이지만, 당신이 수십억 달러를 훔치거나 탕진하면, 분명 정부나 은해잉 나서서 도와줄 것입니다.  52


저에게 공산주의는 해답이 아닙니다. .. 여러분이 공동선이라는 개념을 통해 포착해야 한느 것은 그것이 해답이 아니라 문제의 다른 이름이라는 점입니다. 즉,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이 우리 모두의 '공동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레닌주의적 방식이 아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공산주의입니다. 문제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53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믿기지 않을 만큼 부패한 정권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존재하는 역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곳에서는 부패가 실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스템 자체가 이미 부패했기 때문이죠. 다른 나라의 경우, 정치인들이 국가로부터 자본이나 권력을 훔치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왕이 곧 국가이기 때문에 어떤 것도 훔칠 필요가 없습니다. 끔찍한 시스템인 셈이지요.  54


카타르.

하루는 박물관의 큐레이터인 한 여성이 저와 제 아들을 '산업 도시'라 불리는 한 외곽의 지역으로 데리고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마치 강제 수용소와도 같았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군사용 막사가 있었고,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노예로 팔아버린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필리핀, 네팔,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온 이들은 4년 동안 여권을 빼앗긴 채, 마음대로 그곳을 떠날 수초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섭씨 57도까지 오르는 폭염 속에서도 냉방기구 없이 일만 하는 겁니다. 그들이 말하길, 이러한 경우는 아주 일상적인 것이고, 일하고 있지 않을 때 바깥으로 나가면 정말 달걀이 그대로 익어버릴 정도라고 농담을 하더군요. 이렇게 일하고 그들이 받는 봉급은 한 달에 150달러 정도인데, 그들은 식비를 따로 지불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모든 상황을 차치하고 핵심이 되는 건 다름 아니라, 사람들은 이 노동자들이 보이지 않게(invisible) 존재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단 금요일 하루 동안 그들은 나름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금요일이 그들의 유일한 휴일인 것이죠. 그렇다면 고용주들은 그들을 어떻게 가두어둘까요? 아주 기발한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카타르의 권력자들이 담합하여 오늘날 가족이 붕괴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묭일을 순수하게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가족의 날로, 선포하여, 결혼을 하지 않은 미혼남들은 금요일에 그 어떤 가게도 가서는 안 되고, 쇼핑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제한 겁니다. 당연히 그곳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은 미혼남들이니, 신성한 가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이 유일하게 쇼핑을 할 수 있는 금요일을 외출 금지의 날로 만들어버린 것이지요. 이러한 모든 조치들이 바로 사회적 폭발을 축적시키고 있는 행태들입니다. 카타르, 아부다비, 두바이 등지에서 나타나고 있는 시스템은 결국 하나의 노예 제도와 같고, 이것들은 결국 폭발하고 말 것입니다.  55-56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매 경우 파시즘의 발흥은 실패한 혁명을 증언한다"고 말이지요. 이 말은 오늘날의 상황에서 완벽하게 옳고 또 적실한 진술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중도 자유주의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세속적 좌파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혁명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제가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을 주깅는 그러한 혁명이 아닙니다. 심지어 자유와 같은 자유주의의 유산을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은 오히려 급진적 수단을 갖는 혁명적 좌파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59


새로운 형태의 독재는 예전처럼 규율과 질서가 지배하는 모습일 수 없습니다. 이상하게 보이는 이 사회에서는 소비주의와 사적 영역이 보장되면서, 성적 자유뿐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어요. .. 

저는 여성을 강간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에 대해 논쟁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논쟁해야 하는 사회는 도대체 어떤 사회입니까? 저는 강간이 역겹고 정신 나간 짓이라고 여겨지는 그러한 사회에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오, 강간은 안 돼요"라고 순진하게 말만 하는 그러한 사회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건 가당찮은 것입니다. 이 같은 논의는 인종주의, 파시즘 등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62


한 사회의 윤리적 수준을 측정하는 척도는 이러한 것들이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문화될 필요도 없는 원칙들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인가 아니가 하는 것입니다. ..

저에게 있어 정상적인 사회란 누군가가 "강간을 하고 싶어"라고 말했을 때 이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정신 나갔어?"라며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는 그런 사회입니다.

유럽 사회를 보면 이러한 윤리적 표준은 급속도로 저하되고 있습니다. 20~30년 전에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던 것들이 현대에는 점차 수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20~30년 전에는 극우파의 경우 권력의 장에서 완전히 축출당했습니다. 그들은 혐오의 대상으로 여겨졌죠.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의 외르크 하이더, 프랑스의 르 펜 등으로 대표되는 모든 작은 신파시즘 정당들과 우리는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고, 그들은 관용으로 받아들이긴 하지만 그들이 권력을 잡는 것은 아예 생각할 가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러한 표준이 점점 낮아지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유럽의 대다수는 파시즘이 나쁜 것이라는 데에 이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제 이러한 구분은 적용되지 않고 있어요.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곳곳에서 그들은 갑자기 인정받고 있습니다.  64


저는 진정 우리가 잠재적 위험으로 가득 찬 혼동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주목하는 것은 파시즘과는 다른 새로운 것입니다. 새로운 형태의 독재 사회 말입니다.  65


어떤 좌파들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고, 단지 사람들을 어떻게 동원할지를 모를 뿐이다"라고 말하지만, 제가 보기에 우리는 정말 알지 못합니다. ..

우리느 이론과 철학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진정 그렇습니다.  67


오늘날은 이론의 시대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68


우리가 포스트모던 사회라는 근사한 말로 표현하는 이 시대의 장점 중 하나는 더 이상 해묵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ㅇ낳는다는 것입니다. 이전 시대에는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시기를 거쳐야 돼"라고 하면서 묵묵히 하나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지름길이 가능해졌습니다.  69


포스트모던화된 자본주의의 긍정적인 결과입니다.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지요. ..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심지어 작은 국가의 국민들도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70


우리는 이렇게 변화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주목해야만 하는 시대를 맞이한 것입니다.  78


거시적인 시각에서 볼 때, 세계화는 우리 모두가 햄버거를 머겍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계화는 진정한 전 지구적 영토가 탄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79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실제로는 그렇지 ㅇ낳다고 하더라도 믿음의 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중요한 사안입니다.  90


왜 다른 이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들에 그토록 신경을 쓰는 걸까요? 진정 자존감이 강하고 독립적인 사람은 그런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지요.

예를 들어 우리 안에 반역자들이 있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비밀 경찰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도청 당하고 있을지도 몰라. 공개적으로 토론해도 될까?" 따위의 걱정을 하는 겁니다. 이러한 사람드에게 제가 제안하는 모델은 이렇습니다. 물론 이건 다소 지나치게 인종주의적인 예시입니다만, 미국 남북 전쟁이 있기 전, 1850년대에는 인종차별주의가 아주 극심했습니다. 예를 들어 보죠. 사창가에서 백인 매춘부와 남성 고객이 섹스를 하는 중에, 흑인 노예가 음식과 차를 들고 방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들은 섹스를 멈추지도 않았고, 그의 존재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어요. 백인들은 흑인 노예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자신들의 성행위를 쳐다보아도 멈추지 앟은 것이고, 또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백인들이 흑인들을 이렇게 바보라고 생각한 것과 같이, 우리도 비밀경찰을 마치 흑인 노예와 같이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밀경찰이 우리의 이야기를 훔쳐 듣고 있다고 한들, 신경 쓰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무슨 상관입니까?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무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밀경찰의 가장 큰 실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겁니다. 비밀 따위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에게 숨겨진 계획이나 음모가 있는지 찾아내려 하고, 그러면서 에너지를 낭비하고 앉아 있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공개되어 있는데 왜 이러한 짓을 하는 겁니까? 이것이 좌파의 은밀한 저항 방법이 되어야 합니다. 즉, 어떤 것을 숨기는 방식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숨기지 않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마치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처럼 혼란을 주는 방식 말입니다.  92-93



사실 학생들에게 직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글쎄요. 대다수는 어떻게든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아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학생들에게 말해주어야 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이것이 문제가 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점을 두고 생각하는 바는 이 모든 것을 겸비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런저런 연구원이나 과학자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곳에서 무언가 좋은 일을 할 수 있을것인가가 중요하지요.  97


* 볼로냐 개혁은 유럽 29개국 교육부 장관들이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확립한 유럽대학들의 대학교육 개혁을 뜻한다. 이 개혁의 핵심에는 대학이 경쟁력 있고 쓸모 있는 전문가들을 양성하여 사회으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지젝에 따르면 이러한 시도는 '사유'의 진정한 임무를 상실한 처사이다. 진정한 사유란 사회가 던진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를 인식하는 고유의 방식을 '재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고등교육의 목적을 사회적으로 쓸모 잇는 전문가의 생산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이러한 행위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내에서 칸트가 말한 "이성의 사적 사용"과 관련한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98


진정한 사유란 무엇입니까? 사유라는 것의 일차적인 단계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진정 문제 상황인가", "이것이 문제를 드러내는 올바른 방법인가",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는가" 등의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

사유한다는 것은 그 이상의 것들, 즉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문제를 그저 표면적으로 받아들여서 해석하고자 하는 전문가들이 아니라, 각각의 영역에서 문제를 근본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98-99


사람들 곳에서의 어떤 양극단, 즉, 이러한 사안들에 관심을 갖고 의식적으로 개입하는 소수의 사람들과, 자신의 일에 치여 그저 타인의 의견을 따르는 대다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100


'새로운 노동자 계급'과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혁명의 주체는 제가 '프롤레타리아적 입장(Proletarian Position)' 이라고 부르는 위치를 스스로 점유하고 체현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101


제가 지적하는 바는 가능한 프롤레타리아적 입장들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프롤레타리아적 입장이라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103


마르크스의 시대에는 프롤레타리아가 아주 진중한 성격들로 특징지어졌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가장 가난한 계층이자,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사람들로서 부를 창출하는 계층 등으로 규정되었죠. 오늘날에도 그들은 이러한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더 이상 하나의 주체로 수렴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일을 하는 계층이 아닙니다. 실업자나 배제된 자 등이 가장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의 주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지요. 우리는 다양한 프롤레타리아적 입장에 처한 사람들로 이들을 봐야만 합니다.  107


저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즉 노동 착취등의 오래된 관념에 대해 재고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완전히 새로운 지평에서 다시 사유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09


배제(exclusion)의 문제를 발견합니다. 여기에서 배제의 문제는 오래된 노동자-자본가 사이의 계급 구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공적인 영역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문제를 의미합니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가 쓴 책을 보면, 여전히 10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슬럼 지역에 살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중국의 경우 이러한 슬럼가가 점점 더 빠르게 늘어나고 있죠. 슬럼이라는 것은 흥미로운 사회적 현상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통제와 관리가 이루어지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한 국가각 영토의 꽤 큰 부분을 통제 바깥의 출입금지 영역으로 두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110-111


제가 믿지 않는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이 최악의 환경에 처할 때, 분노가 폭발할 것이라는 단순한 인과관계입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것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입니다. 모든 성공한 혁명을 보면, 권력이 힘을 잃게 될 때 일어납니다. ..

혁명이 일어나는 경우는 첫째, 사람들이 빈곤 상태에 있을 때, 그리고 둘째로는 사람들이 부정의한 상황을 경험할 때 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부정의하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적 자유라는 최소한의 공간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유가 작동한다는 것은 부정의한 상황에 대한 지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122


사회적 안전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최소한의 안전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분노를 폭발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변화는 최악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124


사람들은 대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않습니다.

제 비전은 주권 국가 없이 존재하는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권력을 갖고 이를 분해하는 기구나 집단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127


저는 제 친구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입자엥 동의합니다. 바디우가 레닌의 말을 인용하며 말했죠.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 말은 20세기 이래 지속되어온 자퐈가 비록 영광스러운 순간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와는 절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130


1990년도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모든 사회적 모델들, 즉 공산주의 국가 형태, 조금 완화된 사회민주주의 형태, 직접 민주주의 모델 등은 모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 모든 것을 새롭게 사유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변하는, 완전히 새로운 자본주의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131


제가 보기에 서구 사회는 현재 지나치게 나르시시즘적인 사회가 되어가고 있고, 자신의 정체성을 안전 속에 가두려고 하며, 심지어 이러한 열정적인 섹스, 사랑을 동반한 섹스, 자신을 상대에게 내어주는 이러한 행위들로부터 멀어지려 하고 있습니다. 섹스는 좋지만, 적절히 조절을 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위대하며 동시에 가장 추악한 것임을 알고 있죠.  135-136



희망이란 모든 가능성들에 열려 있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지를 모르는 겨웅 정권은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희망과 혼란이 공존하는 시점에서 더 나쁜 정권이 자리 잡을 수도 있지요.  147


항상 희망 뒤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상황은 매우 복잡하죠. 그 어떠한 정치적 운동도 간단하게 재단해버릴 수 없습니다.  148


만약 당신이 변화가 실호다고 한다면 혼란이 야기됨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결국 상황은 궁극에 가서 폭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위험이라는 좁다란 길을 걷지 않으려 할 때 발생하는 더욱 위험한 상황입니다. 큰 위험이 따르긴 하지만 바로 그곳에 희망이 있는 것이지요. 저에게 진정한 희망이란 위험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

역사는 희망과 위험을 동반한 상황을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이며, 무엇을 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151


신적인 차원의 기적이 아니라, 난데 없이 불쑥 무언가가 벌어지고 새롭게 나타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의 기적 말입니다. 그 어떤 것도 예견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에게 정치적인 기적을 선사할 것이고, 저는 여기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155


폴란드의 솔리다르노시치(폴란드의 노동조합으로 1980년 9월 레흐 바웬사가 창설한 단체. 독립자유 노동조합 연대라고도 불린다. 옛 공산국가에서 일반적으로 노조는 국가에 속해 있던 것과 달리, 노동자들이 운영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주장했다. 또한 솔리다르노시치는 공산주의 국가에 자리 잡은 첫 비공산주의 노동조합으로서, 1980년대에 광범위한 반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솔리다르노시치는 전통적인 노조로서의 위치를 지켜왔으나 현재는 정치적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한 상태이다.)에 대항하여 일어난 쿠데타를 기억하시죠? 폴란드의 제 친구가 말하길, 이것은 단순한 공산주의자들의 폭압이 아니었습니다.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폴란드의 군인, 정치인이자, 전 대통령. 1980년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 노조 총파업에 대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다수의 지도자를 구속하는 등의 강경책을 펼쳤다. 1988년 치솟는 인플레이션으로 폴란드의 경제가 흔들리자 그동안 불법단체로 규정했던 자유 노조와의 협상을 받아들여 이를 합법화하고 솔리다르노시치 연합 정부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의 쿠데타 이후에 공산주의자들은 힘을 얻게 되었죠. 물론 쿠데타는 원시적인 성격을 띠긴 했지만 효과적이었습니다. 정치적인 활동은 억압받았지만 마약과 포르노그래피는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죠. 그들은 심지어 불교 명상 수련을 하는 곳까지 지원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젊은이들로 하여금 정치적인 이슈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 겁니다. 단적으로 종교, 마약, 섹스는 많은 이들을 탈정치화(depoliticize)하는 데 아주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지요.  159


* 탈정치란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후, 더 이상 좌파와 우파 사이의 정치적 투쟁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고, 실제적인 행정과 경제 논리에 의해 정치가 대체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을 가리킨다.(이현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2011 204쪽 참고)  159


관념적인 불만을 갖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입니다... 최소한의 유토피아적인 계획이나 목적 없이 순전한 폭력의 분출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것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징후라 할 수 있습니다.  162


제가 생각하는 논리는 이러합니다. 첫째, 보이지 않는 폭력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납니다.  167


두 번재 지점은 바로 이것이 진정한 혁명이 발발하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킬 때, 그들은 대개 폭력적입니다. 물론 과잉 폭력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극히 주변부의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168


상황을 상상해보십시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나 여인이 갑자기 죽거나, 한순간 사라지는 것을 상상할 수는 있습니다. 이는 물론 충분히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죠. 하지만 나에게 절대적으로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이 어딘가로 끌려가서 강간이나 고문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당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낄 때, 이는 더없이 견디기 힘든 끔찍한 고통입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최악의 끔찍한 고통입니다. 그러한 상황이라면 당신은 맞서 싸워야만 합니다. 시위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외신 기자들까지 모두 부르는 등 효과적인 방법으로 싸워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간수를 거리에서 알아볼 수 있다면 즉각적인 대응을 해야만 합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제가 보기에 이러한 대응은 사실 충분히 적법한 것이라고도 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폭려겡 관한 두 가지 결정적 지점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첫째, 폭력은 이미 여기에 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 폭력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폭력이 언제나 있으며, 이를 내재한 그 자체의 방식으로 평화롭게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둘째, 시민불복종과 같은 형태의 폭력과 잔혹한 물리적 폭력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즉, 자신들의 권리를 구현하고 사회적 요구를 관철시키는 방식으로써 권력을 무시하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아주 확실한 무기이며, 점점 더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나아가 국가는 결코 상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국가란 그 작동이 위협받거나 기능하고 있다고 인식될때에만 제 구실을 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결국 많은 이들이 권력을 무시하기 위해 스스로 조직을 구성할 때, 사람들은 엄청난 힘을 갖게 될 것이고 국가는 변화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173-176


권력을 무시하고 혹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덤덤한 행위를 통해 불가능한 혁명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180


때때로 방어적 폭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꼭 기억해야 하는것은 폭력을 사용할 때 그것이 좋은 의도에서 대응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기본 입장이어야 하고, 이 지점에서 진정한 좌파를 해방적 반란군과 동일시 할 수 있게 됩니다.  185-186


탁월한 투쟁 방식의 기획이 진정한 좌파에게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설령 갈등이 있다고 하여도 배제적인 방식을 결코 택하지 않는 것이지요. 대의나 소명 의식하에, 함께 같은 길을 가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우리'에 속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함께 가자"고 외치는 방식. 이것이 진정한 좌파의 기획이 되어야 합니다.  187


* "루소는 이기주의를 자기애(amour-de-soi)와 자존심(amour-propre)으로 구분했는데, 전자는 있는 그대로의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인데 반해, 후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을 도착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후자가 강한 사람들은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데 장애물이 될 법한 것들을 제거하는 데 집중한다. 따라서 악한 살마은 이기주의자(egoist)가 아니다. 이기주의자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이기주의자는 자기 이익에 신경 쓰기도 너무 바빠서 남들에게 불행을 일으킬 만한 여유가 없다. 나쁜 사람의 가장 중요한 악덕은 바로 그가 자기 자신보다 남들에게 더 몰두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루소가 묘사하는 것은 바로 리비도의 메커니즘이다. 리비도의 투여 대상이 목표물에서 장애물 그 자체로 바뀌는 전도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근본주의자들의 폭력에도 아주 잘 들어맞는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136-137쪽)  188


우리는 도덕화(moralization)의 방식이 아니라 구조를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190


헤겔이 '구체적 보편성(concrete universality)'(헤겔의 '구체적 보편성'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는 일련의 추상적이고 중립적인 특성이 아닌, 매번 새로운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재정의되어야 하는 '편파적' 보편성을 의미한다. 즉, 지젝이 말하는 특이성(singularity)을 포함한 보편성이 곧 구체적 보편성이다.)이라고 부른 교훈을 적용해 보고 싶습니다. 여기에서의 보편성이란 결코 중립적이지 않은 어떤 것입니다.  191


저는 보편성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192


양쪽의 시각 모두에서 자기비판을 하는 것이야말로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다문화주의적 소통입니다...

정반대의 사유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통합하고 싸워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비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편향된 사고방식인 겁니다.  194


공동선은 저에게 '자유를 향한 공동 투쟁'을 의미합니다. 약자를 배제하거나, 상대를 죽이는 방식의 투쟁이 아닙니다. 혹은 총격을 가하는 식의 폭력도 아닙니다.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의 허약한 지점을 뚫고 가는 것이죠. 제가 해답을 제시할 수는 없겠지만, 이 주제는 매우 중대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조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5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비판을 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를 비판할 수 있다는 조건하에서 말이죠. ..

우리는 모두를 비판해야하고, 저는 당신의 사회를 비판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당신 또한 그러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매우 생산적이기 때문입니다.  196


우리는 서로를 무작정 존중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을 바로 그 논의의 장 속에 위치시키는 것입니다. ..

오래되었지만 제가 좋아하는 문장은 이렇습니다. "보편적 선(좋음)을 향한 유일하게 훌륭한 길은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바라볼 때, 이방인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보고 또 상상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인류에게 가장 훌륭한 사유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결코 자신만의 관점에 스스로를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그릇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에 기반한 문화다원주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197-198


우리 스스로가 이방인이 되어봄으로써 어떻게 공동선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 

저는 미국이나 UN의 접근 방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문화, 인류, 역사 등의 이름을 달고 출판하는 책들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지요. "세계 곳곳에 얼마나 아름다운 문명이 꽃피우고 있는가?" 따위를 말할 뿐이죠.   201


인디고 : 지금 이 시대가 '이론의 시대'라고 한다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이론적 질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젝 : 우선 사회적 맥락의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실천을 위한 질문입니다. 두 종류의 질문이 가능합니다. 첫 번째는 실천적 질문입니다. 사회민주주의는 딱히 실패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공산주의의 실패 혹은 지방자치에 기반한 직접민주주의 등이 실패한 지금, 우리는 어떤 진정한 대안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202


우리는 진정 어떠한 정치적 모델이 이를 대체할 수 있을지 명확히 알지 못합니다. ..

오늘날 '인간됨(Being Human)'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앞서 언급하였듯이, 유전자 조작이나 생태계 파괴 등은 인간됨에 대한 근본 개념을 바꾸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인간됨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게 할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당신의 물리적. 정신적 속성을 변화시키고 조작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죠. 이렇게 되면 우리는 한계를 넘어선 큰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보다 더 종속적인 존재가 되고, 더 취약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메도 우리는 이에 대한 그 어떠한 윤리적 규준 혹은 지침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문제가 연결되어 있는 상황이 제가 생각하는 중요한 문제 지점입니다.  205-206


우리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둘은 아주 이상한 구분에 의해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오늘날 인간 사유의 궁극적인 과제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한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

'불가능한 것'들이 분명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종교적인 기적과도 같은 불가능성이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과 사회 조직 내에서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러한 불가능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206-207


우리는 분명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경계를 흐려버리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를 재정의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생각하는 가장 중대한 과제입니다. 사유의 방식을 재정의하는 것(redefine), 그리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재사유(rethink)하는 것 말입니다.  209




기고문 - 상황은 파국적이지만, 심각하지는 않다.(슬라보예 지젝)

 

우리 모두는 곧 닥칠 생태적, 사회적 파국에 대해 알고 있지만, 이를 짐짓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물신주의적 분열(fetishst split)(혹은 물신주의적 부인(Verleugnung))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나는 잘 알고 있어, 하지만...(나는 사실 그것을 믿지 않아)"와 같은 반응이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은 우리가 보고 아는 것들을 부정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힘에 관한 확실한 징표이다.  219


1922년, 온갖 난관을 뚫고 내전에서 승리한 후, 볼셰비키가 시장 경제와 사유재산을 한층 더 폭넓게 허용하는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으로 후퇴를 감행해야 했을 때, 레닌은 [고산등반(高山登攀 높을고 뫼산 오를등 더위잡을반)에 관하여]라는 짧은 글을 썼다. 그는 혁명의 과정에서 후퇴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산 정상에 오르려는 첫 시도가 실패하여 골짜기로 후퇴해야만 하는 등산가의 비유를 사용한다. ..

레닌은 소비에트 국가의 성취와 실패들을 열거한 후에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환상을 품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극도로 힘든 과업에 다가서면서 몇 번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to begin from the beginning)' 힘과 유연성을 유지하는 공산주의자는 운이 다하지 않는다(그리고 십중팔구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

베케트의 <최악을 향하여(Worstward Ho)>에 나오는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는 구절의 울림을 지닌다. 레닌의 결론 - "몇 번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라" - 은 그가 말하는 바가 단지 진보의 ..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즉, 우리는 지난번 시도에서 도달하는 데 성공했던 지점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용어에 따르면, 혁명적 과정은 점진적인 진보가 아니라, 반복적인 운동, 몇 번이고 다시 시작을 반복하는 운동이다.  219-221


알랭 바디우는 혁명적 - 즉, 급진적인 해방적 - 운동이 실패하기 위한 세 가지 분명한 길을 지적한다. 첫째, 당연히 직접적인 패배가 그것이다. 즉, 적군의 힘에 의해 그야말로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다. 둘째, 승리 자체에 내재한 패배가 있다. 적의 주요 권력 의제를 점령함으로써 (최소한 일시적으로라도) 적을 포섭하는 것이다. (의회-민주적인 방법이나 정당과 국가를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는 방법을 통해 국가 권력을 쟁취하느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길 위에, 아마도 가장 확실한 그러나 가장 공포스러운 형태의 실패가 있다. 즉, 새로운 국가 권력의 형태로 혁명을 경화(硬化 굳을경 될화)하려는 모든 시도는 혁명의 배반과 같고, 진정으로 대안적인 사회 질서를 발명하지도, 또 사회 현실에 이를 적용하지도 못한다는 올바른 직관에 따라, 혁명적 운동은 전적으로 파괴적인 테러에 의존하는 극좌(ultra-lefttist)에 의해 자신의 순수성을 보호하려는 필사적인 전략에 열중하는 것이다. 바디우는 적절하게도 이 마지막 형태를 "공백의 제의적 유혹(sacrificial temptation of the void)"이라고 부른다.  222


바디우가 사실상 말하고 있는 것은 .. 우리는 이기는 것(권력을 갖고, 새로운 사회정치적 현실을 건설하는 것)을 두려워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224


오늘날의 과제는 국가 권력의 영역 밖으로 물러나서 그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빼내고, 권력의 통제 바깥에 새로운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국가 권력에 대항하는 것이다.  224-225


20세가 공산주의의 결정적 특징으로 여겨지는 정당-국가의 공식을 보다 복합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정당과 국가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있어왔다. 정당은 국가 구조를 더욱 강화하는 반쯤 가려진 외설적인 그림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국가에 거리를 두는 새로운 정치를 요구할 필요는 없다. 정당이 바로 이 거리이다. 정당 조직은 국가와 그것의 기구 및 작동 기제 등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불신을 구체화하고, 마치 그것들이 통제될 필요가 있다는 듯 항상 감시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20세기 공산주의자는 결코 국가를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에겐 언제나 (국가) 법의 통제로부터 벗어나서, 국가에 개입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감시 기구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225


좌파는 다른 전략을, 즉 겉으로는 보다 온건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훨씬 더 급진적인 전략을 채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전략이란 국가 권력으로부터 독립하고, 사회 구조 전체를 지탱하는 일상의 실천들인 사회적 삶의 고유한 구조 자체를 직접적으로 변형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존 홀러웨이(John Holloway)에 의해 아주 정교한 형태로 제시되는데, 그가 던진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하면 권력을 쟁취하지 않고 혁명할 수 있는가?"  226


독재 정권이 최후의 위기에 직면하게 될 때, 정권의 몰락은 대체로 두 단계를 거친다. 먼저 실질적인 붕괴에 앞서, 설명하기 어려운 파열이 생겨난다. 갑자기 사람들은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것을 감지하고, 이제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이는 정권이 합법성을 잃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의 권력 행사 자체도 무력한 공황 반응 정도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242


오늘날 유일하게 진정한 질문은 이것이다. 자본주의의 압도적 자연화를 승인할 것인가? 오늘날의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그것의 무한정한 재생산을 막기에 충분히 강력한 적대를 내포하고 있는가? 내가 보기에 그러한 적대에는 네 가지가 있다. 1)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2) 소위 '지적 재산권'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사유 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3) 새로운 기술 과학의 발전(특히 유전자공학)이 갖는 사회, 윤리적 함의, 4) 마지막으로 그러나 앞의 것과 같이 중요한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 새로운 '장벽들'과 슬럼의 생성이 그것이다. 마지막 특징 - '포함된 자'로부터 '배제된 자'를 분리하는 간극 - 과 앞의 세 가지 특징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 세 가지 특징은 네그리와 하트가 '공통적인 것'이라고 부른 영역 - 우리 사회적 존재의 공유된 실체로서 그것의 사유화는 필요시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저항해야 할 폭력적인 행위를 포함하는 - 을 나타낸다.

 - 문화의 공통적인 것. '인지적' 자본의 즉각적인 사회적 형태, 기본적으로 언어, 소통과 교육의 수단, 하지만 또한 공공 교통, 전기, 우편 등의 공유된 사회기반시설. (만약 빌 게이츠에게 독점이 허용되었다면, 사적인 개인이 우리의 기본적인 소통망의 소프트웨어 기반을 말 그대로 소유하는 부조리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 오염과 착취에 의해 위협받는 (석유에서부터 열대우림과 자연의 서식지 자체들까지) 외적 자연의 공통적인 것.

 - 내적 자연의 공통적인 것(인류의 유전공학적 계승)-새로운 유전공학 기술과 함께, 인간 본성을 바꾼다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갖는 '새로운 인간'의 창조가 현실적인 전망이 된다.  252-254


공산주의라는 관념의 소생이 정당화되는 것은 '공통적인 것'에 관련해서다. ..

오늘날의 역사적 상황은 프롤레타리아나 프롤레타리아적 입장과 같은 개념을 폐기할 것을 강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 개념을 마르크스의 상상력 훨씬 너머 실존의 차원으로 급진화할 것을 강요한다. 프롤레타리아적 주체에 관한 보다 급진적인 개념이 필요하다 ..

이러한 이류로 새러운 해방적 정치는 더 이상 하나의 특정한 사회적 주체의 행위가 아니라, 다양한 행위자들의 폭발적 결합이 될 것이다. 우리를 결속시키는 것은 "잃을 것이라고는 족쇄밖에 없는" 고전적인 프롤레타리아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우리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모든 실체적 내용을 박탈당하고, 상징적 실체를 빼앗기고, 유전자적 토대는 조작당하고, 그리하여 생존 불가능한 환경 속에서 연명하듯 살아가는 텅 빈 추상적 데카르트적 주체로 전락하리라는 것이다.  254-255


"현실주의자가 되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오늘날 진정한 유토피아는 현존하는 체계의 신중한 전환을 통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현실주의자의 유일한 선택지는 이 체계 내에서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을 실천하는 것뿐이다.  256


* "'현실주의자가 되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는 68년의 낡은 구호는 여전히 유효하다는게 나의 굳은 확신이자 정치적-실존적 전제다. 진정한 유토피안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우리에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가져다 줄 성형 수술 이상의 어떤 것에 이를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지평 내에서의 변화와 재의미화를 옹호하는 이들이다." ([자리를 점유하기] ,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441쪽 참고)  256


우리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하는 것은 정치를 모든 긍정적인 기획을 포기하면서, 단지 최악의 선택을 피하고 차악을 선택하는 것으로 전락시키는 피해의식(victimhood)에 가득 찬 자유주의적 이데올리기이다. 만약 우리가 이를 거부하지 못한다면, 빈 출신의 유대인 작가 아서 펠트만(Arthur Feldmann)이 통렬하게 지적했듯이, 우리가 생존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우리의 삶이 될 것이다.  257




슬라보예 지젝 전화 인터뷰 - 2012. 2. 3.


월가점령 운동이나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위, 그리고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는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제 기본적인 입장은 다소 부정적입니다.

첫째, 여러 움직임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는 하였지만, 많은 대중적 운동들은 여전히 단일한 사안을 목적으로 삼은 운동들이었습니다. 심지어 급진적인 좌파들의 경우에도, 이라크 반전 시위, 반인종주의, 여성 인권 운동 등과 같이 기존의 구조 안에서 혁명을 외치는 것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움직임들은 근대 역사상 최초로 총체적인 대상, 즉 구조 자체를 문제 삼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

근본적인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구조 자체에 결함이 있다는 지적이지요. 이러한 통찰은 이론적인 이유에서도 아주 결정적인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아마 이것이 더 중요한 지점일 텐데요. 지금 윌가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시스템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에) 불충분하다는 점입니다. 현재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못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제어하기에는 그 힘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260-261


이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문제 상황은 끊임없이 반복될 것입니다. 어찌보면 이러한 상황에 우리가 익숙해져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위기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말이지요. 옐르 들어, 글로벌 시장의 구조를 재구축한다는 명목하에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내고, 아웃소싱을 도입하는 등의 노력을 아무리 하더라도, 미국이나 유럽의 실업 문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은 결코 충분치 않아요.

결국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대한 완전한 해결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저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러한 문제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느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분명 급진적인 변화는 가능할 것이라 봅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단순히 새로운 정부를 선출하기 위한 참여 따위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제가 목격하고 있는 비극이란, 이 모든 위기의 원인을 제공하였던 바로 그 인물들을 우리가 여전히 믿고 있다는 점입니다...제가 보기에 우리는 아직 이 위기의 해방구 근처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262-263


우선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에게 시위나 행동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제대로 사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잇는지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현재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적과도 같은 대중들의 폭발적 운동이 단숨에 사라지지 않을 근본 토대를 탄탄하게 구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구체적인 사안들을 골라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항하여 싸울지를 결정한 후에 대중적인 운동을 조직하는 겁니다. 이것이 훨씬 현실적인 변화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263-264


파국적인 사건들과 관련하여 늘 우리가 듣는 종말론적 이야기들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넘쳐나는 파국론(catastrophism)의 근본적인 역설은 여기에 있습니다. 즉, 진짜 위기에 대한 인식을 흐리게 하면서, 정작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65



저는 혼자 지내는 것이 좋아요. 혼자 있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세계 여행을 다니면서 어느 순간 제가 혼자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입니다.  270


철학자가 되고 싶다면 밤을 지새우면서 일을 하고 또 이것을 즐길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271


이 길이 옳다는 생각이 들면 철저히 그 길에 몰두해야 합니다. 

열심히, 열심히, 또 열심히 해야 합니다.  272





인터뷰 - 보편을 향한 해방 (알렌카 주판치치)


어떤의미에서든 공동선을 재정의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시도해야 합니다. 공동선은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고, 때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공동선은 두말 할 것 없이 굉장히 복잡한 개념이죠.  278


'선'에는 두 가지 층위가 있습니다. 먼저 식량이나 사회보장제도와 같이 매우 실제적이고 우리 삶에 필수적인 '선'의 형태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 우리가 '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은 엄밀히 말해 그것이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것일 때에만 가능한 것들입니다. 말하자면 이는 앞서 언급한 필수적인 요소들을 소유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공유하고자 하는 해방적 사유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선' 이라고 하는 것은 '공동적인 보편성(common universality)'이라는 패러다임에 속하는 것이며, 해방정치학과 같은 담론의 영역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279


이미 정립된 선의 개념을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향하고 있는 보편적인 운동 자체에 내포된 '선'의 개념을 도출하는 겁니다.   280


깨어 있는 의식을 갖는 것 말입니다.  282


공동선은 정치적인 실천입니다... 해방적, 참여적 실천인 정치 없이 윤리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

실천은 근본적으로 구체적인 것이며, 이 세계 내에서의 존재 방식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286


실천을 정치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실천을 하는 사람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외면하면서 "나는 세계를 위해 나름대로 좋은 일을 실천하고 있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실천한다는 것에는 두 가지 층위가 있는 것이지요. 우선 세상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듣고 경험하고 또 생각해야 하며, 그리고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생겨나는지 알아야 하는 겁니다. 물론 결과를 통제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이렇게 결과에 책임을 지는 방식의 정치적인 의지를 바탕으로 사회를 조직하고자 할 때, 실천적 참여는 가능해지며 최소한 그로 인한 결과물들은 풍성해질 것입니다. ..

그리고 윤리로부터 정치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집단(the collective)'이라는 개념입니다. '집단'이라는 개념은 윤리에서 다루어지는 개념은 아니지요.  .. 윤리의 영여겡서도 집단으로 향하는 통로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의 실천이 진정한 실천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집단적 실천의 지점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단, 여기에서의 실천이란, 단지 타인을 위하고 돕는 통상적인 의미의 윤리적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천을 통해 우리 스스로 서 있는 지평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을 뜻합니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근본 법칙을 문제 삼는다는 것이죠. ..

타인과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우리의 행동 양식을 변화시키는 것, 그래서 궁극적으로 사회의 행동 양태 자체를 바꾸는 집단적인 노력 그 자체입니다.  287-288


저에게 있어 윤리란, 우리 행동의 근거가 되는 정치적인 기반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어떤 것들은 이미 정립된 것들이고, 이는 옳은 것이거나, 최소한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주장하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고자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92


중요한 것은 윤리적 표준을 고양하기 위한 혁명의 과정이 스스로 윤리적 주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하는 겁니다. 주체는 유동적인 것이고 언제든 새로운 것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93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실천이란 강한 신념을 갖고, 그 신념을 세계 속에 구체화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윤리적 차원에서도, 정치적 차원에서도-우리가 무언가 개선을 원하고 또 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묻기 전에, 현재 상황을 직시하고 지금-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피터 홀워드(Peter Hallward)의 의견에 동의하는데요. 유럽은 세계의 중심도 아니며 사실 따분하기 그지없는 조용한 곳입니다. 하지만 세계의 곳곳이 다 이와 같지는 않으며, 실제로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진단과 질문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위해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스스로를 잊고, 실제 이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깨어있는 눈을 갖는 것. 이 지점에서부터 보다 많은 변화는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세상을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보다 확실한 방법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298-299


윤리란 영웅적인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바디우의 '충실성(fidelity)'의 윤리에 동의하는데요. 윤리는 대개 공동의 일이나 작업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범한 것을 향해 나아가고, 또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애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자신의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지위나 명예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도 끈덕지게 무언가를 실천해나가는 행위라는 측면에서 충실성의 윤리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302






혁명이 태어나는 새로운 분할선


환경 문제나 기아, 그리고 청년 실업과 같은 문제가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사방에 펼쳐져 있다. 그럼에도 문제는 이 총체적 난국에 대한 구조적인 해법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레닌의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야 하며, 다시 정의내려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의 근본 구조를 재건해줄 이론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이론은 정치를 향한다. 정치의 영토에서 다시 우리는 삶의 기반을 이루는 기술(art)을 재조직할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될 때 정치는 우리 삶의 양식을 재건할 수 있다. 우리 삶의 양식을 바꾸는 것, 윤리의 작동 구조를 바꾸는 것, 이것이 혁명이다.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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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

한국 사회 역시 성과사회이고 그에 따른 사회적 폐해와 정신 질환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적어도 그 점에서는 서구 사회와 전혀 다르지 않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6-7




신경성 폭력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연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11-12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전 사회를 장악한 이러한 면역학적 장치의 본질 속에는 어떤 맹목성이 있다.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면역 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자체이다.

아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12


어떤 패러다임 자체가 반성의 대상으로 부상한다는 것은 그 패러다임이 몰락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인 경우가 많다... 냉전의 종식 역시 바로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13


오늘날 이질성은 아무런 명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되었다. 면역학 이후 시대의 차이, 후기근대적 차이는 더이상 병을 유발하지 않는다. 명역학적 차원에서 차이란같은것이나 마찬가지다. 차이에는 말하자면 격렬한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가시가 빠져 있다. 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한다. 낯선 것은 이국적인것으로 변질되며, 여행하는 관광객의 향유 대상이 된다. 관광객, 또는 소비자는 더 이상 면역학적 주체가 아니다.  13-14


보드리야르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 죽는다", "현존하는 모든 시스템의 비만 상태"를 지적하기도 한다.  17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  18-19


보드리야르 "네트워크와 가상세계의 폭력은 바이러스성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은 정면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전염, 연쇄 반응, 모든 면역성의 제거 등과 같은 수단을 통해 작동한다는 점에서 바이러스적이다. 또한 전통적인 부정적 폭력과 반대로 긍정성의 과잉을 통해 작동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끝없는 증식과 비대화, 변이를 통해 몸을 잠식해 들어오는 암세포처럼, 가상성과 바이러스성 사이에는 은밀한 친족성이 있다."

보드리야르가 구성한 적(敵 원수적)의 계보학에 따르면 최초 단계의 적은 늑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늑대는 외부의 적으로서 사람들은 이러한 적을 막기 위해 요새를 짓고 성벽을 쌓는다." 다음 단계에서 적은 쥐의 형태를 취한다. 이 적은 지하에서 활동하며 위생학적 수단으로 퇴치할 수 있다. 그다음 단계인 해충의 단계를 거치고 나면 마지막으로 바이러스적 형태의 적이 출현한다. "네번째 단계는 바이러스이다. 바이러스는 사실상 사차원에서 활동한다. 바이러스는 시스템의 심장부에 들어와 있는 까닭에, 바이러스에 대한 방어는 훨씬 더 까다로운 과제가 된다." "전 지구에 퍼져 있는 적, 하나의 바이러스처럼 도처에 스며들고 권력의 모든 틈새로 파고드는 유령 같은 적"이 출현한다. 바이러스성 폭력은 시스템 속에 테러리즘의 비밀 세포로 자리를 잡고 시스템을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키려 하는 개별자들에게서 나온다.  19-20


신경성 폭력은 어떤 면역학적 시각에도 포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부정성이 없기 때문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  21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노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24


알랭 에랭베르(Alain Ehrenberg)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

우울증을 초래하는 요인 가운데는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도 있다. 우울증의 이러한 측면은 에랭베르의 논의에서 빠져 있다. 그는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이러한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26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28




깊은 심심함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 야생에서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기법이 멀티태스킹인 것이다.

먹이를 먹는 동물은 이와 동시에 다른 과업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를테면 경쟁자가 먹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먹는 중에 도리어 잡아먹히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하며, 동시에 새끼들도 감시하고, 또 짝짓기 상대도 시야에서 놓치지 않아야 한다. 수렵자유구역에 사는 동물은 주의를 다양한 활동에 분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까닭에 깊은 사색에 잠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먹이를 먹을 때도, 짝짓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동물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 사색적으로 몰입할 수 없다. 언제나 그 배경의 사태도 계속 정신적으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멀티태스킹뿐만 아니라 컴퓨터게임과 같은 활동 역시 야생동물의 경계 태세와도 크게 다르지 않는 주의구조, 넓지만 평면적인 주의구조를 생산한다.  30-31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hyperattention)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벤야민은 꿈의 새가 깃드는 이완과 시간의 둥지가 현대에 와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탄한다.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런 것을 "짜지도, 잣지도" 않는다. 심심함이란 "속에 가장 열정적이고 화려한 안감을 댄 따뜻한 잿빛 수건이다." 그리고 "우리는 꿈꿀 때 이 수건으로 몸을 감싼다." 우리는 "수건 안감의 아라베스크 무늬 속에서 안식한다." 이완의 소멸과 더불어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이 소실되고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도 사라진다. 이 공동체의 정반대편에 있는 것이 우리의 활동 공동체이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둔다.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걸으면서 심심해하고 그런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잃고 안절부절못하며 돌아다니거나 이런저런 다른 활동을 해볼 것이다. 하지만 심심한 것을 좀더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어쩌면 걷는 것 자체가 심심함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그로 하여금 완전히 새로운 움직임을 고안하도록 몰아갈 것이다. 달리기, 또는 뜁박질은 새로운 움직임의 방식이라기보다 그저 걷기의 속도를 높인 것일 뿐이다. 이를테면 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움직임이다. 오직 인간만이 춤을 출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걷다가 깊은 심심함에 사로잡혔고 그래서 이런 심심함의 발작 때문에 걷기에서 춤추기로 넘어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걷기가 그저 하나의 선을 따라가는 직선적 운동이라면 장식적 동작들도 이루어진 춤은 성과의 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사치이다.  32-34


떠다니는 것, 잘 눈에 띄지 않는 것,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이야말로 오직 깊은 사색적 주의 앞에서만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긴 것, 느린 것에 대한 접근 역시 오랫동안 머무를 줄 아는 사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지속의 형식 또는 지속의 상태는 과잉활동성 속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34





보는 법의 교육


사색적 삶은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전제한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 과업을 거론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보는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배움의 목표는 니체에 따르면 "고상한 문화"이다.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눈을 평온과 인내, '자기에게 다가오게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눈으로 하여금 깊고 사색적인 주의의 능력, 오래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정신성을 갖추기 위한 최초의 예비 교육"이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의 부재 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여기서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바로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이는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저 긍정하는 수동적인 자기 개방이 아니다. 사색적 삶은 오히려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실상 활동과잉은 다름 아닌 정신적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  47-48


활동성이 첨예화되어 활동과잉으로 치달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성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활동성의 변증법이다. 그것은 자유 대신 새로운 구속을 낳는다. 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48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못하는 과잉활동적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이다. 순수한 활동성은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연장할 뿐이다. 진정 다른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려면 중단의 부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행동의 주체는 오직 잠시 멈춘다는 부정적 계기를 매개로 해서만 단순한 활동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우연의 공간 전체를 가로질러 볼 수 있다. 머뭇거림은 긍정적 태도는 아니지만,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오늘날 우리는 중단, 막간, 막간의 시간이 아주 적은 시대를 살고 있다. [활동적 인간의 주된 결함]이라는 아포리즘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쓴다. "활동적인 사람들은 보통 고차적 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 [..] 이런 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 돌이 구르듯이 활동적인 사람들도 기계적인 어리석게 계속되는 활동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가속화와 활동과잉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분노하는 법도 잊어가고 있다. 분노는 특별한 시간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전반적인 가속화 및 활동과잉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가속화와 활동과잉은 넓은 시간적 지평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때 미래는 현재의 연장시킨 것 정도로 축소되고, 다른 것에 시선을 던질 수 있는 부정적 태도가 싹틀 여지는 전혀 없다. 반면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제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부논의 전제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선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분노는 짜증과 구별된다. 오늘의 사회를 특징짓는 전반적인 산만함은 강렬하고 정력적인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렸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사람들은 불가피한 일에 대해서도 짜증을 내곤 한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불안은 현존재 전체를 붙들고 흔들어댄다. 분노 역시 하나하나의 사태에 관한 것이 아니다. 분노는 전체를 부정한다. 분노가 보여주는 부정성의 에너지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분노는 예외적 상태이다. 세계가 점점 더 긍정적으로 되어가면서 예외적 상태도 더 줄어든다. 아감벤은 이처럼 긍정성이 확대되고 있는 현실을 간과한다. 예외 상태가 한계를 이탈하여 정상 상태가 되어간다는 그의 진단과는 반대로, 오늘날 사회의 전반적인 긍정화는 모든 예외 상태를 흡수해버린다. 그리하여 정상 상태가 전체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증대되는 세계의 긍정성이야말로 "예외 상태"나 "면역성"과 같은 개념에 대해 사람들이 주목하게 된 이유이다. 하지만 그렇게 주목받는다고 해서 이런 개념들이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이들이 소멸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49-51


사회의 긍정성이 증가하면서 불안이나 슬픔처럼 부정성에 바탕을 둔 감정, 즉 부정적 감정도 약화된다. 사유 자체가 "항체와 자연적 면역성으로 이루어진 그물"이라면, 부정성의 부재는 사유를 계산으로 변질시킬 것이다. 컴퓨터가 인간의 뇌보다 더 빨리 계산할 수 있고 엄청난 데이터를 조금도 토해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컴퓨터에 어떤 종류의 이질성도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컴퓨터는 긍정기계이다. 천재 백치가 보통은 계산기 밖에 해낼 수 없는 과제를 척척 해내는 것은 바로 부정성의 부재와 자폐적 자기 관련성 덕택이다. 세계가 전반적으로 긍정화되는 추세 속에서 개인도 사회도 자폐적 성과기계로 변신한다. 또는 성과를 극대화하려는 과도한 노력이 가속화 과정에 방해가 되는 부정성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인간이 부정의 존재라고 한다면, 세계의 전면적 긍정화는 무시할 수 없는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헤겔에 따르면 부정성이야말로 인간 존재를 생동하는 상태로 지탱해주는 것이다.  51-52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니체의 말을 빌린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다. 이러한 부정적 힘은 단순한 무력함, 무언가를 할 능력의 부재와는 다른 것이다. 무력함은 단순히 긍정적인 힘의 대립항일 뿐이다. 무력함은 무언가를 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결국 그 무언가에 대한 종속이며 그 점에서 긍정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부정적 힘은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는 이런 긍정성을 넘어선다. 그것은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지각하지 않을 수 있는 부정적 힘 없이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처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어떤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을 거이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무언가 생각할 힘밖에 없다면 사유는 일련의 무한한 대상들 속으로 흩어질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긍정적 힘, 긍정성의 과잉은 오직 계속 생각해나가기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52-53


무위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예컨대 참선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들이닥쳐 오는 것에서 스스로 해방함으로써 무위의 순수한 부정성, 즉 공(空 빌공)에 도달하려 한다. 그것은 극도로 능동적인 과정이며 수동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참선은 자기 안에서 어떤 주권적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연습이다. 이에 반해 긍정적 힘만을 지닌 사람은 대상에 완전히 내맡겨진 신세가 된다. 역설적이게도 활동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것은 긍정적 힘의 일방적 절대화가 낳은 결과이다.  53-54





피로 사회 

피로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모리스 블랑쇼


활동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성과사회는 서서히 도핑사회로 발전해간다..도핑은 말하자면 성능 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한다. 최근에는 어엿한 과학자들조차 그런 약물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무책임한 태도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외과의사가 신경향상제의 도움으로 좀더 정신을 집중하면서 수술할 수 있다면 실수도 줄어들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신경향상제를 복용하는 것도 별 문제가 아니다.  65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66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72






역자후기


한병철은 긍정성의 과잉이 자아를 새로운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마치 늘어나는 자기 자신의 지방질에 병들어가는 사람처럼,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마모시켜간다. 그 결과 스스로를 낙오자로 느끼는 우울증 환자가 넘쳐나고, 성과를 위해 약물을 불사하는 도핑주체도 증가하고 있다. 이는 금지, 강제, 억압의 철폐, 타자에 대한 관용의 확대가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유토피아로 이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오늘의 주체는 오히려 자유의 무게에 짓눌려 소진되고 있는 것이다. 피로는 성과주체의 만성질환이다.  120-121


한병철이 이야기하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 부정성의 패러다임에서 긍정성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생산적인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학교 교육과 관련하여 체벌이나 학생 인권 조례 등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논쟁은 우리 역시 그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과정 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일 것이다. 의무 과목의 축소 및 철폐, 자기 주도 학습의 강조, 학생 개개인의 창의성과 개별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입시 전형 방식의 도입(예컨대 입학사정관제)은 학생들을 입시 지옥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주체로 길러내기보다는 더욱더 복잡하고 불투명한 경쟁, 한병철이 말하는 "절대적인 경쟁"(남과의 상대적 경쟁이 아니라 스스로를 끝없이 뛰어넘어야 하는 자기 자신과의 경쟁)의 무대로 몰아가고 있다. 입시 지옥에서의 해방을 약속한 최초의 교육부 장관이 내세운 구호가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갈 수 있다'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20개에 가까운 교과목의 무게에 신음하던 학생들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들렸을 이 구호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며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주체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 아니었을까?  122-123


한병철은 성과사회와 성과주체의 이상이 오늘의 세계에서 전일적 지배를 확립한 자본주의의 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더욱 생산적으로 될 것'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본적 요구라면, 이 요구가 관철되는 방식이 후기 자본주의에 이르러 지배와 강제에 의한 타자 착취에서 성공적 인간이 되기 위한 자기 착취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한병철은 그것을 착취의 진화로 파악한다. 타자 착취에 의한 생산성의 향상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더욱 효율적인 방법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바로 자기 착취라는 것이다.  126-127


성공적 인간이라는 이상에 유혹당한 사람들의 열망과 실천이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확대 재생산에 기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작 인간 자신은 소진되고 마모된다...

한 병철은 시스템이 이상적인 자아가 되고자 하는 개인들의 욕망으로 지탱되고 있다면, 개개인이 그러한 욕망의 허구성에 대해 각성하는 데서 비로소 시스템의 변화도 시작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는 우울증을 이 시대의 핵심적 질병으로 지목하고, 그 배후에 성과사회의 압력이 놓여 있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병의 진단은 나왔지만 그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타자의 강제가 인간을 옥죄고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그런 타자에 대한 폭력적 저항을 통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마르크스주의의 모델이다. 그러나 우울증의 배후에 놓인 성과사회의 압력은 단순한 외적 강제가 아니라 유혹의 형태를 취하며, 오직 인간 자신의 욕망을 매개로 해서만 관철된다. 따라서 성과사회의 압력은 끝없는 성공을 향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 12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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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슈퍼마켓에 가고, 영화를 보고, 세탁소에 옷을 맡기러 가고, 책을 읽고, 원고를 손보기도 하며서 저노가 다름없이 생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몸에 밴 급곤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끔찍스럽게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상마저 내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11


신문에서 그 사람의 나라에 관한 기사를 읽는다.  12


책을 읽을 때 나의 마음을 휘어잡는 문장은 남녀관계를 묘사한 대목이었다. 그런 내용은 내게 A에 관한 무언가를 가르쳐주었고, 사실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들에 확신을 주었다. 가령,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에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포옹할 때 눈을 지그시 감는다"라는 구절을 읽으면, A가 나를 안을 때 그렇게 하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 씌어 있는 그 밖의 다른 내용들은 그 사람과 다시 만날 때까지의 빈 시간을 메워주는 수단일 뿐이었다.

약속 시간을 알려올 그사람의 전화 외에 다른 미래란 내게 없었다. 내가 없을 때 그의 전화가 올까봐 그가 알고 있는 일정에 한해서, 일에 관계된 어쩔 수 없는 용건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외출을 하지 않았다. 또 행여 전화벨 소리를 못 들을가 진공청소기나 헤어드라이어를 사용하는 일조차 피했다.  13


그 사람을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해서 우리의 약속이 깨지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에 시달렸다.  15


나는 이 남자와 함께 침대에서 보낸 오후 한나절의 뜨거운 순간이, 아이를 갖는 일이나 대회에서 입상하는 일, 혹은 멀리 여행을 떠나는 일보다 내 인새에서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음을 가지러 부엌에 들어가서 문 위에 걸려 있는 벽시계를 쳐다보며 "두 시간밖에 남지 않았어" "이제 한 시간..." 혹은 "한 시간 후면 저 사람은 가고 나만 혼자 남게 되겠지"하는 말들을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도대체 현재란 어디에 있는 걸까?"하고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16


나는 그 사람이 내게 남겨놓은 정액을 하루라도 더 품고 있기 위해 다음 날까지 샤워를 하지 않았다.  17


그날 밤을 나는 그 사람의 품 안에 잠들어 있는 듯한 반수(半睡 반반 잘수) 상태로 지냈다. 날이 밝자 그 사람이 내게 해준 말과 애무를 한없이 되새기면서 마비 상태로 또 하루를 보냈다...PER(파리와 외곽을 잇는 고속 전철) 안에서나 슈퍼마켓에서도 그 사람이 "당신 입으로 거길 애무해줘"하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런 몽롱한 상태에서 서서히 벗어나면, 나는 다시 전화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날짜에서 멀어질수록 고통과 불안은 점점 커졌다... 그의 전화를 받지 못한 채로 여러 날이 지나면 그 사람이 나를 떠난 게 틀림없다고 단정 짓곤 했다.  18


가끔, 이러한 열저을 누리는 일은 한 권의 책을 써내는 것과 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완성해야 하는 필요성, 세세한 것까지 정성을 다한다는 점이 그랬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서 글을 완성한 후에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이 열정이 끝까지 다하고 나면-'다하다'라는 표현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겠다-죽게 되더라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19-20


그 사람과 사귀는 동안에는 클래식 음악을 한 번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가요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예전 같으면 관심도 갖지 않았을 감상적인 곡조와 가사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23


일상생활에서 가끔 일어나는 귀찮고 짜증스러운 일에도 나는 무덤덤했다...

나는 도로가 막히거나 은행 창구가 붐벼도 조용히 기다렸고, 직원들이 불친절해도 화는 내지 않았다.  24


요즈음 나는 내가 매우 소설적인 형태의 열정을 지닌 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25


그 사람의 전화만 기다리며 고통을 겪는 일이 너무 끔찍해서 그와 헤어지기를 원했던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럴 때면 나는 그 사람과 헤어지는 순간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사는 나날들이 되풀이되겠지. 나는 결국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사람에게 다른 여자, 아니 여러 여자가 있다고 하더라도(그의 곁에 있는 여자가 한 명일 경우 내 고통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 사람과의 만남을 계속하기로 했다.  39


그 사람은 6개월 전 프랑스를 떠나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다시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45


몇 주 동안,

나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나 아침까지 깨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생각을 할 수도 없는 몽롱한 상태로 있곤 했다. 푹 자고 싶었지만 그가 계속 내 몸 아래에 있는 듯한 느낌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47


A가 떠난 지 두 달쯤 지난 후부터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A와의 관계에 관련된 것들은 무엇이든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다....

글을 쓰는 시간은 열정의 시간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립스틱을 고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 페이지부터 계속해서 반과거 시제를 쓴 이유는, 끝내고 싶지 않았던 '삶이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영원한 반복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52


글에는 자신이 남겨놓고자 하는 것만 남는 법이다....

써 놓은 글을 찬찬히 읽어보니,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59


그 사람이 돌아와주기를 간절히 기원했었다.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65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663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66




해설 - 지난 세기말부터 현재까지 프랑스 문학의 흐름을 정리한 문학사는 이 시기의 주도적 현상을 '자아의 글쓰기'라는 용어로 요약했다.  69


문학사에 따르면 자전적 예술이 이토록 확대된 것은 두 가지 현상이 맞물려 작동한 결과이다. 우선 소위 거대 담론의 붕괴로 인해 작가의 시선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구조에서 주체로 이동한 것이 그 첫번째 현상이라면, 이와 더불어 그간 예술적 관심사에서 외면당했던 평범한 개인의 낮은 목소리와 사소한 몸짓이 부각되면서 일상의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는 현상이 그 두번째일 것이다.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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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필요에 얽매였던 삶을 그리려고 할 때, 내겐 예술의 편을 들 권리도, 무언가 [굉장히 재미있다]거나 [감동적인]것을 만들 권리도 없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말과 행동과 취향, 그의 생애의 주요 사건들, 나도 함께한 바 있는 그 삶의 모든 객관적 표징을 모아 볼 것이다.

추억을 시적으로 꾸미는 일도, 내 행복에 들떠 그의 삶을 비웃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단순하고도 꾸밈없는 글이다.  21


그는 내가 온종일 책에 파묻혀 있다가, 그들에겐 딱딱한 얼굴로 신경질만 내는 모습을 보면서 몹시 답답해했다. 저녁마다 내 침실 문 아래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고 내가 건강을 망쳐 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공부는 좋은 신분을 얻고, 직공과 결혼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고통이었다. 하지만 내가 머리를 쥐어짜는 공부를 좋아한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고 여겼다. 꽃다운 나이에 인생을 즐기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가끔 그는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89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 할 말이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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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어머니는 이야깃 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머니는 늘 거기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여는 첫 행위는 시간의 관념에서 벗어난 이미지들 속에 어머니를 고정시키는 것.  18


나는 어머니의 폭력, 애정 과잉, 꾸지람을 성격의 개인적 특색으로 보지 않고 어머니의 개인사, 사회적 신분과 연결해 보려고 한다. 그러한 글쓰기 방식은 내보기에 진실을 향해 다가서는 것이며, 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발견을 통해 개인적 기억의 고독과 어둠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돕는 것이다.  51


(어머니는) 가끔씩 인식했다. '내 상태가 돌이킬 수 없게 될까봐 두렵구나.' 혹은 기억했다. '나는 내 딸리 행복해지라고 뭐든지 했어.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걔가 더 행복한 건 아니었지.'  102


그들은 그녀를 보러 오지 않았고, 그들에게 그녀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본인은 살고 싶어 했다. 끊임없이 성한 한쪽 다리에 의지해 일어서려고 애를 썼고, 자신을 붙잡아 맨 띠를 떼어 내버리려고 했다. 자신의 손이 미치는 범위 안에 들어온 모든 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늘 배고픔을 느꼈고, 갖고 있는 에너지는 온통 입에 집중되었다. 키스를 받기 좋아했고, 자신도 그러려고 입술을 내밀었다. 그녀는 어린 계집아이였고, 결코 자라지 않을 터였다.  104


이 글을 써내려간 10개월 동안 나는 거의 밤마다 어머니 꿈을 꾸었다. 한번은 내가 강 한가운데에 누워 있었고, 내 양옆으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 배에서부터, 그리고 계집아이의 성기처럼 다시 매끈해진 내 성기에서부터 식물들이 구불구불 자라나 흐느적흐느적 떠다녔다. 그것은 단지 나의 성기만이 아니었고, 내 어머니의 성기이기도 했다.  108


그녀는 받기보다는 아무에게나 주기를 좋아했다. 

글쓰기도 남에게 주는 하나의 방식이 아닐까.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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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인들이 사는 섬은, 중앙이 너비 2백 마일로 가장 넓고, 양쪽 끝 부분이 가장 좁습니다. 섬 전체가 5백 마일의 곡선을 그리며, 양쪽 끝이 서로 가까이 마주하고 있어서 초승달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11마일쯤 서로 떨어져 있는 초승달의 양쪽 끝 부분 사이로 바닷물이 들어와서 넓은 만이 형성되어 있지요.  81


이 섬에는 규모가 크고 웅장한 도시가 모두 쉰네 개가 있는데, 언어와 관습과 제도와 법이 모두 동일합니다. 지리적인 여견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모든 도시들이 동일한 설계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외양도 동일합니다.  83


10년마다 추첨을 통해서 집을 바꿉니다.  89


이 나라 사람들이 입는 옷은, 남녀의 차이와 기혼과 미혼의 차이를 제외하면 수백 년이 지나오도록 스타일이 같습니다. 옷이 멋있으면서도 몸동작에 방해가 되지 않고 날씨가 덥거나 춥거나 입을 수 있는, 각자 집에서 만드어 입을 수 있다는 좋은 점도 있습니다.  92-93


유토피아 사람들은 하루 스물네 시간 중 여섯 시간만 일을 합니다.  93


유토피아 사람들은 단 한 벌의 망토로 만족해하며, 그걸로 대개 2년 동안 입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유용한 직종에서 일을 하고 아무도 과소비를 하지 않아서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99


모든 피조물이 탐욕스러워지는 것은 결핍에 대한 공포 때문입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자만심 때문에, 소유의 과시로 타인을 제압하는 것에서 승리를 맛보는 자만심 때문에 탐욕스러워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악덕은 유토피아의 생활 양식에서는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습니다.  102


뉴토피아인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별도 볼 수 있고 태양도 볼 수 있는데 어찌하여 작은 보석이나 밝은 돌조각이 발하는 약한 광채를 보고 기뻐하는지 불가사의해합니다. 특별히 좋은 양모로 만든 옷을 입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이 남들보다 더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어리석음에는 경악합니다. 양모가 아무리 곱다고 해도 한때는 양이 걸쳤던 것이고 지금도 여전히 무용한 물품인 금은 어디에서나 하도 높은 가치를 부여받아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금에 이러한 가치를 부여한 인간 자신은 이제 금보다 가치가 훨씬 적다는 사실에 이 사람들은 놀라워합니다. 어리석은 것에 못지않게 부정직한 데다 나무토막 같은 두뇌를 가진 멍청이가 어쩌다가 막대한 양의 금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현자와 선인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이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만약 이 멍청이가(뜻밖에 당하거나 혹은, 법이란 운과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반전을 초래할 수 있으니까, 법적인 사기에 휘말려) 문중에서 가장 비열한 악당에게 전 재산을 빼앗기게 되면,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이 금전에 부착되어 있었고 금전을 따라 움직이는 부속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즉시 악당의 하인들중의 하나가 된다니요. 이보다 더욱 유토피아인들을 경악시키는 것은 부자에게 빚을 진것도 없고 아무런 의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자를 거의 숭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숭배자들이 감격해하는 것은 단순히 상대가 부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부자란 지독히 인색하고 욕심이 많아서 살아생전에는 자신이 쌓아 놓은 돈더미에서 단돈 한 푼도 절대로 남의 손에 들어가게 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유토피아인들의 사고방식과 태도는 그러한 어리석음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사회제도 내에서의 성정과 교육과 좋은 독서를 통하여 얻어진 것입니다. 각 도시에서 노동을 면제받고 학문에만 몰두하도록 지정되는 사람들의 수효는 비록 많지 않지만(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두뇌와 학문에의 헌신을 보여 준 사람들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모든 아이드이 좋은 책을 접할 기회를 가지며,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녀 모두 일생 동안 여가 시간을 독서로 보냅니다.  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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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11


에이드리언..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에서 그는 검시관에게 자신의 자살 이유를 설명해놓았다. 그는 삶이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88


에이드리언.. 그는 논리적으로 사고했고, 논리적 사고로 도출한 결론에 따라 행동했다. 반면 우리 대부분은, 정반대로 행동하는 것 같다. 우리는 충동적으로 결정한 다음, 그 결정을 정당화할 논거의 하부구조를 세운다. 그런후,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를 상식이라고 말한다.  95


에이드리언이 줄곧 인용했던 말이 무엇이었나? '역사는 ㅂ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106


어쩌면 나는 대략 합의하에 결정된 역사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전과 똑같은 역설이거나. 즉, 바로 우리 코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가 가장 분명해야 함에도 그와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라는 것.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그것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정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측량하게 돼 있다. 안 그런가? 그러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도와 진전에 깃든 수수께끼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역사를 어찌 파악한단 말인가. 심지어 우리 자신의 소소하고 사적이고 기록되지 않은 것이 태반인 그 단편들을.  106-107


살아갈 날이 줄어들수록 헛되이 살고 싶지 않게 된다.  120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165


'축적의 문제'라고 에이드리언은 썼었다. 축적의 문제. 어떤 말에 돈을 걸고, 그 말이 이기면, 그 상금을 다음번 경기의 다음번 말에게 건다. 이런 식으로 승리는 축적된다. 그렇다면 패배도 축적되는 걸까? 경마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저 첫 번째 노름 밑천을 잃을 뿐이다. 그렇다면 인생에서는? 다른 법칙을 적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 관계에 승부를 걸었으나 실패로 끝난다. 계속해서 다음번 관계에서도 실패하고 만다. 이때 잃는 건 단순히 두 번 뺄셈을 하고 난 값이 아니라, 우리가 내걸었던 것의 배수이다. 아무튼 그런 기분일 것이다. 인생은 단순히 더하고 빼는 문제가 아니다. 상실의, 혹은 실패의 축적과 곱셈이다.  180-181



옮긴이의 말 - 예감하지 못하는 모든 평범한 이들을 위한 서글픈 면죄부


왜곡이 본질인 기억과 우연과 무상성이 본질인 시간의 담합이 만들어낸 파국이 아닐 수 없다.  264


젊은 시절, 토니는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 했지만, 노년에 이르러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고 번복한다.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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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들은 알고 있다. 자신이 부모로부터 양육받은 대로 자식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9


아빠가 되기 위해 애쓰고 노력했다기보다는, 갑작스럽게 아빠라는 역할이 덜컥 주어졌다...

기쁨과 두려움, 탄식과 환호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나보다는 아내의 적응이 훨씬 빨랐다.  14


나는 아빠로 태어났다.  15


아빠 효과(father effect)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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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논문 보다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형성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세상에서의 경험이 없는 아이가 경험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엄마는 좋은 선생이다. 그렇다면 그만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아빠 역시 선생이 아니겠는가. 아이의 주위가 모두 경험치 증가 요인인데 왜 논문이 필요할까. 아빠 효과는 아이의 중요한 2대 요인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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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1. 자녀에 대한 아빠의 무관심은 인류 역사에서 보편 현상이다?

아니다. 아빠가 경제활동에만 전념하고 육아를 아내의 몫으로 떠넘긴 계기는 산업혁명이었다. 산업화 이전에 부부는 공동 작업자이자 공동 양육자였다. 조선시대에만 해도 명문가일수록 자녀의 학업과 진로 결정은 아빠의 몫이었다. 조선시대의 가부장제는 아빠의 무관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빠가 자녀양육과 집안일에 중심이 된다는 의미였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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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자로서의 아빠는 가장 중요한 것이 돈이라는 개념이 일반적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오늘날 보편적인 생각일 뿐 진실은 아니다. 진실은 '시간'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활동하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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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5. 아이에게 좋은 아빠는 가능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아빠다?

아니다. 무조건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능사는 아니다. 짧은 시간이라도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면 된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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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이해력이 필요한 부분아닐까. '짧은 시간'이란 개념의 문제이다. 정말 짧은 시간으로도 가능할까? 아이와 아빠의 교감상태가 있을 때. 아니 충실할 때 가능한 것이다. 

부부나 연인이 짧은 시간만으로 질적인 것을 추구하면 문제 없이 이어져 갈까? 아니다. 인간의 욕심은 질투를 한다. 성인도 그러한데 아이가 가능하다고 본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질적으로 가능할 만큼 많은 시간을 두고 공감력을 높여야만 가능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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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원하는 시간은 불과 10년 남짓일 텐데...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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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권의 책에서 아이와의 시간은 불과 짧은 시간이란 표현이 나온다. 5년이건, 10년이건. 

우리가 아이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아이가 태어난 날부터 내가 죽는날까지이다. 중간에 변수가 없을때겠지만 말이다.

아이들이 부모를 원하는 시간은 그 기간보다 더 길어야 정상아닐까. 내가 없어도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아 힘들때 의지가 되어주는 존재. 기쁠때 한켠에 떠올릴 수 있는 존재.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부모가 없을 때 힘들어 자살을 하고 싶어지더라도 추억을 가지고 있기에 살아갈 수 있는 끈을 잡는것. 주위의 다른 어떤것도 힘디 되지 않을 때 힘이되어 주는 것. 나는 아이와 그런 관계를 유지해 가고 싶다. 

그러면서도 내가 좋아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아이와의 시간을 보상받을 생각은 없다. 어차피 모험이다. 잘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아이는 아이의 세계가 있을 것이다. 그것에 빠져 찾지 않게 될 수도 있지만,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그것이 끈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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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직업은 아빠!!!!!!  28


아이들을 종일반에 맡기고 벌 수 있을 때 더 벌라고 말한다.  30



"나중에 좀 크면 그렇게 하고, 지금은 우리가 골라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많은 부모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 그러다가 결국 고등학생이 되어도 아이가 원하는 책보다는 부모가 원하는 책을 사주더라고. 그러니까 우리는 처음부터...."

"말이 되는 소리르 한다고 생각해? 자기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을 집어도 사주자는 거야?"

"물론 처음에는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이런 식으로 해야 아이도 점차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게 된다니까!"

"지금 시기에 읽어야 할 책이 있다고!"  .....  34


아이들은 '자기중심성'이 강해서 모든 사건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부모의 갈등(싸움, 이혼 등)은 말할 것도 없었다.  36


큰틀에서.. 아빠건 엄마건 자녀가 잘 되고 행복하길 바라지 않겠는가. 따지고 보면 엄마와 아빠의 차이는 본질적이라기보다는 방법에 국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7


서로가 가지고 있는 '부모상'이 다를 뿐더러, 게다가 실현 불가능할 정도로 '이상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갈등을 피하기 어렵다. 따라서 모든 부부는 머리를 맞대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  38


평소 친하게 지내던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내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다 보니까 아아의 환경은 엄마, 엄마의 환견은 아빠더라. 무엇보다 아내에게 잘 해야 해. 그래야 아이도 행복하지."  39


양가만 가면 우리 부부의 양육 원칙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46


지금 조부모님들 중에는 예전 자녀를 키울 때 먹고 사는 일로 바빠 제대로 사랑해주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시는 분들이 많다.  47


가장 좋다면 양가 부모님들을 만나 부부의 양육원칙을 설명 드리고 도와주십사 요청하는 것이 좋다...

우리 부부역기 부모님에게 양육 원칙을 여러 차례 말씀드렸다.  48


자녀에게 미치는 아빠의 영향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다 .중립은 없다.  55


연구 결과 아빠가 행복하게 자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적응 능력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빠와 많은 시간을 보내길 했지만, 아빠로부터 따뜻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자녀의 적응 능력이 가장 낮게 나왔다. 

이에 대해 연구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아빠가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나 자신들에게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보고한 남자 대학생들은 스스로를 믿지 못했고 불안정하다고 인색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녀를 따뜻하게 대하지 않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고 할 수 있죠."  56


엄마는 언어, 아빠는 행동을 통해 주고 아이와 상호작용한다.  64


상황에 따라 유연할 필요는 있지만, 원칙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68


부모들은 처음부터 '아이에게 좋은' 양육법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에게 편한' 양육법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계속 고민해야 한다. 부부가 함께 논의하고 실천해야 한다.  84


행동수정 - 강화(reinforcement), 처벌(punishment), 소거(extinction)

비록 심리학자들이 강화와 처벌, 소거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햇지만, 이 방법은 아주 오래전부터 부모들이 사용해 온 것들이다. 자녀가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한다면 칭찬이나 선물을 주면서 또 그런 행동을 하기를 기대한다. 강화를 사용하는 것이다. 강화란 이처럼 어떤 행동을 더 자주 하게 만들기 위해 어떤 자극을 제시하거나 제거한다. 

처벌과 소거는 이와 반대로 어떤 행동을 없애거나 빈도를 낮추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처벌과 소거의 목적은 같지만 방법이 다르다. 처벌은 어떤 자극을 제시하거나 제거하는 보다 적극적 방법이라면, 소거는 의도적으로 관심이나 반응을 보이지 않는 수동적 방법이다. 만약 자녀가 잘못했다면 부모들은 야단을 치거나 매를 든다. 자녀가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처벌을 사용하는 것이다. 어떤 부모들은 자녀가 보기 싫은 행동을 하면 의도적으로 무시하는데, 이는 소거를 사용하는 것이다. 

세 가지 중에 부모들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무엇일까? 바로 처벌이다. 처벌은 시공간을 초월한 대표적인 행동 통제 방법이다.  93


심리학자들은 처벌보다는 강화와 소거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나쁜 행동을 없애기보다는(처벌), 나쁜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서(소거) 그 행동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좋은 행동을 키워주라는 것이다(강화).  94


아이가 좋지 앟은 행동을 할 때 처벌이 아니라 소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부모가 그 행동에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는 가정이다.  95


인지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아이들은 왜 혼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101


처벌은 너무 약하면 강화로 작용하고, 너무 강하면 마음의 상처가 남는다.  109


언어적 설명  111


"책에서 읽었는데, 아기들은 30분 이상 못 운데, 우리 힘들어도 조금만 참자"... 그렇게 30분쯤 흘렀을까. 정말 아기는 울다가 지쳤는지 소리가 잠잠해 지더니 이내 잠들었다.  122


자기 자식이 바로 앞에서 울거나 때를 쓰거나 무언가를 요구할 때, 이를 무시하는 것은 부모에게 고역과도 같다.  123


엄마는 놀이를 통해서도 아이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하며 일정한 규칙이나 틀에 얽매이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언어를 통해 아이와 상호작용을 한다. 반면 아빠는 일정한 규칙이나 특 없이 마구잡이 놓이를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언어보다는 몸으로 아이와 상호작용한다. 이 같은 아빠의 놀이방식이 아이 수준에 딱 맞기 때문에 아이들은 놀이 대상으로 아빠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210


끈기란 즐겁게 포기하지 않는 것이지, 억지로 견디는 것이 아니다.  222


여러 중독분야에서 일하고 관련 논문을 읽으면서 알게된 놀라운 사실이 있다. 바로 중독을 잘 예측하는 변인 중 하나는 시작연령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술을 먹어도, 게임을 해도 중독자가 되지 않는 사람과 쉽게 중독에 빠지는 사람의 차이 중 하나는 언제부터 그것을 시작했느냐였다.  234


가급적 아이들 앞에서는 스마트 기기로 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보는 것이 배우는 것이다.  236


집안일은 아이들의 두뇌를 자극시키는 훌륭한 교육이자 놀이다.

몸을 사용해야 한다.  244


여행은 한편으로 자신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이다.  255


좋은 아빠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콤플렉스를 버리고, 사실적으로 좋은 아빠가 되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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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맘 육아의 기본 철칙 7계명

1. 내 아이는 정답이다. 아이의 모든 행동엔 이유가 있다.

2. 책은 밥! DVD는 반찬! 나들이, 목적 잇는 놀이는 사랑이다.

3. 영어 포함 사교육 전혀 필요 없다.

4. 한 달에 전집 한 질만 들이기.

5. 내 책 1년 50권 이상 읽기!

6. 엄청난 칭찬과 무한 감탄의 생활화!

7. 아이의 삶보다 엄마의 삶이 더 중요하다.



녀석의 삶은 거의 모든 게 중고였다.  19


내 승질머리가 못되 처먹어서 그러는 줄만 알았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애미가 잠을 안 자서! 잠 안자고 뻘짓 해서!'

물론 애 꽥 잠들고 나면 그 새벽에 그 여유가 너무너무 귀하고 아까워서 

졸린 눈 까뒤집어가며 머라도 하고 싶지. 나도 그 마음 잘 안다.

쥐시장이라도 뒤적거리고, 케이블 틀고 드라마라도 내리 봐줘야 

낮 시간 젖소, 식고, 도우미로 전락했던

내 자신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거 같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잠만 푹~ 자도 육아가 쉽다.  26


애 DVD 틀어주고 드러누워 육아서 한 페이지라도 보다 쪽잠을 자는게 애 잘 키우겠다고 밤새 인터넷 파도타기 하는 것보다 백배는 낫다.  27


애를 낳았으면 잘 키워야한다.  28 


초등학교 입한 전에 아이가 갖춰주어야 할 진정한 사회성은 애미와 자식, 단 둘만의 긴밀한 애착! 그거면 땡이다. 습자지 한 장 통과하지 못할 정도의 빡빡한 애착이 둘 사이에 맺어져 있지 않는 한 죽었다 깨나도 온전한 사회성은 심어줄 수 없다!  33


쉽지 않은 길, 너무 쉽게만 가려하면 결국엔 쉽게 무너진다.

녀석이 널뛰는 감성과 고집에 맞춰 미친뇬 칼춤추듯 같이 너울대면 되는거다.  35


나랑 애랑만 갔어야 되는 거였다. 나도 체력 되고, 애도 몸 상태 괜찮은 날. 그냥 즉흥적으로! 37


나들이의 본질을 깨닫자.  40


육아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수행이 고행이 또 있을까?  45


이 땅에 투하된 특수공작원과도 같은 내 자식과 겨루는 치열한 게릴라전에서 서로 피 철철~ 흘리지 않고, 어떻게 하면 무난하게 서로를 인정하며 잘 살아갈 수 있는지를 고민해가는 과정이다. 결국 내 아이를 양육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양육되어지지 않은 바로 나 자신을 약육해가는 과정'이 육아다.

'노력은 성취와 변화를 위한 필수과정이지만,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한다.' - 박경철의 <자기혁명> 중  47


애미가 읽고 앉아 있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아이는 큰다.  48


노력없이 날로 먹으려 하면 결국 무너지는 게 애 키우기다.  51


생각이 많아지고 깊어지면 실행으로 가는 길이 너무 오래 걸린다. 

해보지 않고 고민해봤자 해결되는 거 아무것도 없다.  52



엄마표 영어란?

엄마가 집에서 자연스럽게 영어노출 환경을 만들어주고 뒤로 살짝 빠져 있는 거다.  62


엄마는 절대적으로 '영어 노출'만 해주면 된다.

이 땅에 엄마표 영어 성공하는 집안은 별로 읍다. 이유가 뭔지 아나?

'영어 노출 환경의 부재!' 이거 하나다.  82


애가 원하는 건 정확한 해석이 아니라, 엄마의 기민하고 감격적인 반응이다.

영어의 첫 단추는 그렇게 따뜻해야 한다.  92


영어는 귀가 먼저 뚫리면 눈이 뚫리고, 입이 트이면, 쓰기는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93


영어책은 영어공부 교재가 아니라 책 자체라는 진리의 깨달음이 있어야 할 뿐.  98


동선의 최소화, 행동의 간소화!  104  ---- simple is power.


육아는 '환경의 게임'이다. 얼마나 편한 환경을 구성해 놓느냐!  106


애보다도 책을 많이 읽어야하는 사람이 애미라는 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애가 커 가면 커갈수록 핏줄을 타고 느껴진다. 그래야 자연스레 애도 책을 잡는다는 걸.  108


책육아와 일반육아의 차이는 말하자면 '종교의 차이'와 맞먹는다!

완전히 다른 길을 가는 것이고, 완전히 다른 마인드로 사는 것이다...  121


멍 때리는 시간도, 빈둥거리고 뻘짓하는 시간도 많아야..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며들게 하려고 엄마의 사회성, 욕구, 소비, 유흥 등을 잠시 유예시키고 끼고 앉았던 거였다.  121


뭐 하지 말라는 표시에 유난해 환장을 해서 그런 표시만 나오면 그대로 멈춰서 한참을 머리 처박고 읽고 쪼매난 글씨까지 다 읽을 때까지 움직일 수 없었다. 애미는 기미 생성해가며 그지같이 기다려줘야 했다.  126


짜장면집 전단지 떼와 애랑 같이 오리고 놀란 말이다.

애가 먹다 놔둔 칸쵸 상자에도 한글나라 수업 1년 치를 뻥 까는 아이디어가 얼마나 많이 숨어 있는지 오려서 스케치북에 붙이다 보면 마구 떠오를 테니..  128


아이가 어렸을 때 엄마가 읽어주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어야지...

하은이는 친구들이 집에 놀러와 난리블루스를 피며 같이 놀다가도 책 보고 싶으면 풀썩 주저앉아 책을 읽었다. 폭풍속에 고요를 찾아낼 줄 안다.  131


부지런해지지 말고 지혜로워져라!

독서는 아이의 '내면의 힘'을 길러주는 게 목적.  137


누차 강조하지만 애가 책을 월할 때 모든 걸 멈추고 읽어주면 된다. 걱정과 불안을 내려놓으면 된다. 

아이들은 부족한 수면, 체력, 식욕 지들이 다 알아서 보충한다.  140


아무 책이나 사서 읽어 달라고 할 때까지 읽어주면 된다.  149


실컷 놀아본 놈이, 질리도록 놀이에 몰입해 본 놈이 학업에도 삶에도 인간관계에도 놀라운 재능과 집중력을 발휘한다.  150


아이는 엄마의 인내를 먹고 자란다.

책과 함께 놀고 느끼고 생각하고 깨달아가는...  157


책에 빠져들게 하기 위해 녀석이 아침잠이나 낮잠에서 깼을 땐 항상 누운 채로 내 무릎에 슬쩍 눕듯이 앉혀 책을 읽어줬다.  159


가랑비에 옷 젖는지 몰라야 한다.

빗물이 바위를 뚫는 걸 바위는 모르는 게 맞다.

천천히 가되 뜨겁게 가야 한다. 

많이 놀아주자.  160


많은 책장 덕분에 집에 화장대도 없고, 서랍장, 콘솔, 장식장 아무것도 없다.  166


18개월에서 36개우러까지의 제1 반항기 때는 그 어떤 아이들도 이전의 모습과는 달리 말 안 듣고 떼쓰고 변덕이 죽 끓듯한다는 사실.  175


여유란 읍다. 안 생긴다. 왜냐, 소비를 줄이지 못하는 당신이 그 시기가 지나도 그만큼 또 쓰거든요.  181


정말 진도 쫙쫙~ 나가며 눈에 띄게 잘하고 있는 친구들의 공통점이 바로 컴퓨터와 멀다는 거다.

책과 내 자식의 눈빛!

그 딱 2가지에만 내 시선을 내 시간을 내 열정을 집중할 때다. 그러기에도 시간이 짧다.  204


애들은 좀 읍씨 키워야 잘 큰다.  209


모든 걸 빠르게 접하게 해줘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한 요즘. 

절대적으로다가 유아유치 시절에 충분히 가해져야 할 노출은 책과 놀이밖에 없다.  211


책육아.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책의 바다는 커녕 책과 친숙해지지도 못한 채 평생 이어질 사회 생활을 시작해버리는 거다.  218


'책육아' 그리 만만한 거 아니다.  222


'내는 니 자식 절대 못 본다'며 없는 동창모임에 복지관 노래교실까지 개근하겠다는 열의를 불태우시는 것도 애 보는게 힘든 걸 알아서 그러시는 거다.  223


육아라는 거 절대 쉬울 수만은 없다.

무한 반복일지라도 아이와 함게 부둥켜안고 참고 노력하며 이겨내야 한다. 

육아에 지름길 따위는 없다.  224


내 아이를 알기 위해 밤이 지새도록 책을 읽고 2살이든 4살이든 7살이든 내 자식의 눈을 바라보면서 대화하고, 사과하고 니 마음 어떤지 얘기해달라고 묻고,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왜 그렇게 징징대는지

옆집 엄마가 아니라, 컴퓨터 속 유명 블로그가 아니라 육아서와 내 아이의 눈빛 속에서 해답을 찾아갔으면 좋겠다.  225


육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애미의 체력'이다.  228


어디서 힘을 주고 어디서 힘을 빼야하는지 강약조절을 배워가는 과정이 바로 육아다.  230


전문가의 손길이 꼭 필요해서 보내는 거라구?

안 보내면 안 부르면 내 자식만 뒤떨어질 거 같아서? 웃기고들 있네!

놀아주기 싫으니까 귀찮으니까 힘드니까 그런 거 모르는 줄 알아? 귀신을 속여...  234


'청결'을 조금만 포기하면,

'생활습관'을 조금만 내려놓으면,

'기본, 단계, 남의 시선' 이런 말을 잊어버리고 내려만 놓으면 녀석을 붙들고 악을 쓸 일도 자근자근 씹을 일도 불안과 공포가 뒤엉킨 시선으로 녀석을 두려움에 떨게 할 일도 없었을 텐데...  249


애를 낳고 누구나 미친 듯이 뛴다. 전력을 다해.

헌데 뛰는 방향이 'Go to the 낭떠러지'다.  265


책육아 10년을 지나오니 그 책이 '엄마의 책'이라는 것과 책보다도 중요한 게 '엄마의 행복' 이라는 걸 온몸으로 느끼며 그 본질을 깨닫게 하고 싶은 열정으로 하루하루를 산다.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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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돈 안 쓰고도 신나고 재미있게 아이를 키울 수 있다'는 명체는 지금과 가은 사회적 불임시대에 누군가는 증명할 중차대한 사회적 과제라며, 혼자만의 사명감으로 불타고 있었다.  7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결코 많은 투입이 많은 산출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많은 보시가 많은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느 사실을... 알면서도 다른 대안이 없어서, 나모가 다르게 살 용기가 없어서 못할 뿐이다.  8


소비를 줄이면 관계도 증폭된다. 예를들어 대물림과 같은 비자본 공동체 경제에 접속하면 그동안 말로만 하던 '더불어 살기'를 쉽고 우아하게 실천할 수 있다. 물건을 물려받는 과정을 통해서 관계는 더 돈독해지고, 이 작은 행동으로부터 협동과 연대라는 공동체 의식이 싹트게 된다. 뭐든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뭔가 부족하면 불편하기 마련인데, 그 불편함 속에 꺄알 같은 재미가 가득하다. 돈을 안 쓰다 보면 궁색해지기 쉬운데, 점점 풍요로워진다.  9


나는 농사에서 육아의 지혜를 많이 얻는 편이다. 

"농사는 누가 짓죠?"

"네?"

"농사는 하늘이 짓는 겁니다."

선문답 같지만 진리다.

'작물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처럼 늘 관심과 애정은 가지되, 최대한 자연의 순리대로, 인위적인 투입은 줄이고, 욕심과 기대는 버려야 한다. 태평육아의 탄생이다.  10


사고도 쳐야 변화가 생긴다.

그냥 어쩌다 임신, 출산, 육아의 세계를 여행하다가 쓴 육아견문록일 뿐이다.

발품 팔아서 골목골목 누벼서, 숨겨진 재미를 발견한 배낭여행기라고나 할까?  11



"어떻게 하면 돈 안 쓰고 애를 키울 수 있을까?"  14


'적극적인 피드백'은 추가 기부를 부르는 기술이다. 물건을 불려받았다면, 기회가 날 때마다 물려받은 물건을 얼마나 잘 쓰고 있는지 보여주면 추가 기부 가능성이 한결 높아진다.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 보답을 물질로만 생각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사례가 벌어질 수 있다. 비 물질적인 립서비스, 식사 초대, 시기적절한 품앗이 등은 좋은 보답이 된다.  16


이게 바로 물려 쓰는 재비다. 물건만 물려받는 게 아니라 이야기, 관계도 함께 물려받는다. 헌 물건은 사연이 있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한다.  17


부부 사이의 대화는 아이 얘기로만 가득 차게 된다. 어떤 때는 아기 얘기를 빼면 둘이 딱히 할 이야기가 없는 순간도 있다. 그런데 텔레비전을 같이 보면서는 서로 이렇게 애틋할 수가 없다.  24



나의 통제가 적어지는 만큼 아이도 자유롭고 신난다.  30


젊은 한의사였는데, 상담과 처방이 참 엉뚱(!)했다.

아이를 어떻게 가지게 됐고, 어떤 환경에서 키우고, 부부관계는 어떻고, 주 양육자는 누구고, 아이는 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뭘 먹고, 주말은 어덯게 보내는지 등등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꺼내놓게 했다. 내 이야기만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애 키우는 이야기까지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첫날 상담을 거의 두 시간이나 했다.

증상만을 없애기 위해 치료하는대증치료가 아니라, 삶 전체를 살피고 그 원인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33


두 돌배기 우리 아기의 하루 일과는 책으로 시작하여 책으로 끝난다. 엄청난 책벌레 납신 것 같지만, 실상은 집에 놀거리가 궁하니 벌어진 일이다.  39



회를 거듭할수록 정다운 부녀놀이. 아빠와 딸이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면서 책을 꽂는데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다.   41


농사는 육아의 원형이고, 육아에 상당한 지혜를 공급한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인간의 생산능력을 회복하고 기본에 충실한 삶을 살겟다는 선언이다. 또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철 따라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농사를 짓게 되면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협동하고 어울려 살 수밖에 없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하나씩 회복하는 삶을 살다 보니 마치 다른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는 세계로 이동해온 것 같다. 다 아기 때문이다. 아기라는 무게 중심이 생겼고, 아기는 각자의 삶을 살던 남편과 나의 생활을 묶어주는 공통의 지반이 되어주었다. 그동안 잃어버렷던 본능을 되찾아주고, 무너졌던 삶의 균형을 바로 잡아주었다. 육아는 아기를 키우는 과정이 아니라 나를 키우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46



옛날식 기저귀.

내가 이 기저귀를 택한 이유는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기저귀를 빨랫줄에 걸어놓으면 시각적으로 보기가 좋다. 새하얀 기저귀가 바람에 팔랑거리는 걸 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두 번째는, 빨리 마르기 때문이다. 소창 기저귀는 얇아서 널어놓으면 한 두 시간 만에 바싹 마르기 때문에 회전이 빠른 편이다. 똥 기저귀는 삶아야 하지만, 오줌 기저귀는 나올 때마다 흔들어 빨어서 널어놓으면 자주 삶을 필요도 없다. 세 번째는, 빳빳하게 마른 기저귀를 갤때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네 번째, 기저귀는 다용도다. 베개로도 쓰이고, 여름에 배 덮는 이불로도 쓸 수 있고, 급할 땐 수건이나 아기를 엎는 보대기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나중에는 잘라서 행주나 걸레로도 사용이 가능하고, 손바느질해서 면생리대로도 사용할 수 있다.  47-48


조산원에서 애 낳고, 늦도록 젖 먹이고, 천 기저귀 쓰고, 포대기로 업는 등. 내가 애 키우는 걸 보고 '전통 방식으로 키운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전통을 고수하고 지키는 수구보수적인 인간이 아니다. 전통적이라서 그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니라, 본능에 충실한 방법을 택하다 보니 그게 전통 육아방식이었을 뿐이다.  50


본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51


내가 고안한 방법이 아예 젖가슴을 풀어놓고 자는 거다. 수유복 지퍼만 열어두면, 아기가 스스로 젖을 찾아 물었다. 수유복 지퍼만 열어두면, 아기가 스스로 젖을 찾아 물었다.  53


모유수유. 하지만 단점이 하나 있다. 도 닦은 것도 아닌데 무성욕의 경지에 이른다는 거다. 모유수유를 (오래)하면 성용기 감퇴된다는 말이 잇는데, 내 경우 실제로 그랬다.  56


우리나라 임산부들의 초음파 촬영 횟수는 평균 10.7회 정도 되는데, 이는 주요 선진국에 비해 3배 이상 높은 편이라고 한다. 다른 건 선진국, 선진국 하면서 이건 왜 안 따라 하는 걸까? 외국에서 출산한 친구들에게 얘기를 들어보니, 많이 해야 세 번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과다한 초음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 일부 의사들이 모인 협회 같은 데서 성명을 낸다. 초음파는 전반적으로(?) 태아에게 위해하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상태이고, 미국 같은 나라에서 적게 하는 것은 많이 하고 싶어도 비싼 의료 수가 때문에 많이 못하는 거란다. 바꿔 말하면, 그렇게 많이 할 필요가 없다는 거고, 태아에게 완전히(!) 무해하다는 증거도 없다는 이야기 아닌가? 똑똑한 분들이 왜 그러시는지... 심지어 몇 해 전 식약청까지 나서서, 초음파 검사가 유해하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반복적인 검사가 태아에 미치는 영향이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진단 목적이 아닌 기념영상을 만들거나 호기심에서 하는 검사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권고하기도 했다. 하긴 요즘에는 초음파 사진을 모아서 앨범이나 동영상을 만들어주고, 심지어 입체 초음파 사진을 잘 나오게 하기 위해 자는 아기를 자극해서 깨우기도 한다고 한다.  72


우리는 보이는 것에만 의존하지 않는가? 사실 다달이 일어나는 내 몸의 변화, 아기의 움직임 등 보이지 않는 사인들이 더 중요할 수도...


<만들어진 모성>이라는 책을 쓴 프랑스 학자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는 당초 모성애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린다. 모성애는 본능이 아니라 학습된 것인데, 이 이데올로기는 19세기 들어 중상주의 정책에 따른 노동력 수요 증가로 국가가 여성들에게 모성애를 강요한 데서 나왔다고 분석한다. 이후 사회적 학습ㅇㄹ 통해 점차 강화된 모성애는 오늘날 모든 어머니의 본능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83


'안전한 예방접종을 위한 모임'이라는 사이트가 있다.  86


예방접종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신경써야 하는 문제는 면역력, 자기치유력을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88


이유식을 생략하면서 딱 한 가지 단점이라면, 유동식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무른 음식, 특히 죽은 잘 먹지 않는다는 거다. 하지만 죽이야 잘 안 먹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97


집안마다 음식문화가 다르고 아이들마다 발달이나 소화 능력이 다르니, 거기에 따라 이유식도 자연스럽게 하면 되는 게 아닐까? 어찌 보면 '이유식'이라는 또 하나의 시장 창출을 위해서 많은 부분들이 조장되고 만들어진 게 아닐까?  98


장난감은 많되 놀이는 없는 경우가 많다. 물질은 풍요로울지 모르나 아이들의 마음은 점점 가난해지고 있다.  102


요즘 아기들은 태어나자마자 탯줄을 자르고 돈줄을 붙이고 산다.  105


한계에 괴로워하지 말고, 한계를 즐기는 '효연지기'가 필요하다. 

세상이 강요하는 대로 살면 베이비 푸어가 되지만, 내 잘난 맛에 내 방식대로 살면 누가 뭐래도 내가 세상의 중심이다.  106


아기의 관점에서 아기의 세계를 탐구하고, 아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117


(반항기)

부정어가 는다는 것은 자기 생각, 자기 의지, 곧 자아가 강해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맘때 아이들의 부정어와 긍정어의 비율이 14대 1이라고 한다.  165


몸으로 하는 생활공부는 욕심이 난다. 모든 걸 소비에만 의존하며 돈 버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공부가 아니라, 자기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은 생산할 줄 아는 생활 균형감이 있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169


작은 손놀림, 말투, 무의식적인 표정까지, 아이들은 부모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배우고 모두 따라 하고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결론은, 내가 키우고 싶은 대로 나부터 그렇게 사는 게 우선이다. 반대로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면, 아이에게도 바라지 않기!  170


가만 생각해보니,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계속'떼는' 과정이다.  179

탯줄, 젖, 기저귀, ...


시공간을 초월한 상상도 허락한다. 특히 생활 속의 물건의 힘이 강력하다. 골동품처럼 너무 귀한 것이라서 장롱 깊숙이 보관해두고 가끔 존재와 가치만 확인하는 물건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막 사용하면서 언제든지 추억을 불러오는 그런 일상의 물건들이 훨씬 강력하다.  213


아이들은 고립되기 시작했고, 함께 해야만 하는 놀이 문화도 사라졌다. 고립은 소비문화와 짝이다.  221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그 철학에 기초한다.  224


올더스 헉슬리의 유토피아 소설 <아일랜드>에는 '상호입양모임'이라는 게 나온다.  225


돈에 의존하지 말고, 체면, 자격지심, 고정관념 따위 던져보리고, 조금 다르게 살면 된다. 없으면 없는 대로, 좀 못해도 태평하게, 좀 못 벌어도 당당하게! 기존에 살던 방식은 개나 주고, 조금 다르게 살아보는 거다. 아주 신난다.  231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어린 시절의 5분은 어른이 되었을 때 5년과 같다. 인생에서 어린 시절은 짧고 어른으로 살아야 할 시간은 길다"라는 말에 공감한다.  239


남편의 옆구리를 계속 찔렀다. 그래도 남편이 망설여서 더 강하게 설득했다. 언제까지 입으로 하는 일(컨설팅)만 할 거냐. 망하더라도 손과 발로 하는 일을 시작해보자.  244




끝맺으며 - 엄마에게 용기를!

엄마 노릇을 하면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은 철저히 자기의 몫이다. 국가가 아이 키우는 데 돈은 조금 보태줄 수는 있엉도 어떻게 하면 행복할지는 고민해주지는 못한다.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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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를 묶어 주는 것은 인권의 보편적 실현, 민주적 참여, 모두를 위한 복지의 원칙에 부합하는 전 지구적 평화라기보다는 악(惡)과 고통.  5


모든 지구민들은 자신의 행동을 책임져야 합니다.  10


이 시대의 정점에서 의식 있게 살기! 그것이 스페탄 에셀의 요구다.  14


바뀌어야 할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유토피아에 대한 관심을 키우고! 우리는 꿈꿀 수 있고 꿈꾸어야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우리가 실패한 것은 꿈꾸기를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했어요. 멋진 말이죠. 우리는 꿈꾸어야 하고, 또한 우리의 꿈이 우리가 바라는 만큼 실행되지 않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스로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이룬 것으로 살아가고, 그로써 충분하다고 생각하죠.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하고 참여하는 소수를 필요로 합니다. 역사의 시기 시기마다 그런 소수가 있었어요.  50


오늘날 참여할 수 있는 방버은 최소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는 비정부기구, 즉 NGO에 참여하는 방법이죠.  54


지정부기구에 참여하는 것으로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정당으로 들어가 정부에 더 효과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 합니다.  55


나는 요즘 지구상에 곡물과 식수가 부족해지면 얼마나 위험해지는지, 기후 변동이 심해지면 어떻게 되는지를 다루는 책들을 많이 읽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이슈에 관심을 갖게 하는 책들을 더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깨어나게 될 겁니다.  74





분노하라


참여하라 


정신의 진보를 위하여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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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책을 읽는 행위는 인풋(input)이고, 책을 써내는 ㅇ리은 아웃풋(output)이다. 인풋의 밀도가 촘촘해야만 아웃풋도 좋아 진다. 당연한 일이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선생님의 말처럼 "인생은 뒤돌아볼 대 비로소 이해되지만, 우리는 앞을 향해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바로 그런 까닭에서 나이가 들수록 서재는 인생에서 중요성이 더 커진다. 책은 인생을 돌아보고 곰곰이 씹어보는 데 유용하지만, 그보다 앞을 향해 살아가는 지침을 구하고 예지력을 키우는 데 더 쓸모가 있다.  


더 자주 책을 읽어라. 더 자주 웃어라. 더 자주 사랑하라.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 남아 있다는 것, 아직 삶에 채워넣어야 할 것이 존재한다는 건 스트레스가 아니라 축복이다... 중요한 건 살아야 할 이유와 보람이다.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와 보람을 찾는 일에 노력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늙을 시간이 없다.  - 가와기타 요시노리 <마흔 살의 철학>  15-16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결정해야 한다. 그것 없이는 도무지 살 수 없는 것들. 그게 남겨야 할 짐들이다. 짐을 가볍게 하라!

'짐을 가볍게 한다는 것은 제 손으로 삶을 정돈한다는 것, 외적 혼란으로부터 탈출한다는 것, 삶의 주된 목저고가 무관한 많은 소유물을 포기하는 것'(<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깨닫게 되는 것들>)이다.

"여행의 이익은 단지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을 처음 보는 데 있는 게 아니고 오히려 평소 낯익은 것,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던 것에 경이를 느끼고 새롭게 다시 보는 데 있다... 여행하는 사람은 행하는 자가 아니라 보는 사람인 것이다. 이와 같이 순수하게 관상적으로 됨으로써 평소 이미 알고 있는 것, 자명한 것이라고 전제하던 것에 대해서 우리는 새롭게 경이감을 느끼거나 호기심을 느낀다. 여행이 경험이며, 교육인 것도 이 때문이다.  - 미키 키요시 <어느 철학자가 보낸 편지>  19


오로지 사람만이 경이를 느낀다. 더 많은 경이를 느끼는 사람이 더 풍요롭게 사는 사람이다. 경이는 예민한 감응력이 있을 때 일어나는 마음의 파동이다.  20


공자는 네 가지를 끊었다고 했다. 억측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고루하지 않고, 아집을 버렸다.  26


청나라 초기의 문장가 장조(張潮)는 "하루의 계획으로 파초를 심고, 한 해의 계획으로 대나무를 심고, 십 년의 계획으로 버들을 심고, 백 년의 계획으로 소나무를 심는다."고 햇다. 시 쓰기는 파초를 심는 것이고, 책 읽기는 백 년의 계획으로 소나무를 심는 것에 견줄 수 있겠다.  34


지켜지지 않은 것, 수정해야 하는 것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과감하게 인생의 초안을 수정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마음 안에 새 꿈을 써 붙여야 한다.

비움은 마음에 채운 욕심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36


인류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다 이기주의가 숨어 있다. 나와 남은 불이(不二)이다.

비우려는 자는 먼저 맹목적인 탐욕을 버려야 하고 자발적 가는에 처하는 실천이 따라야 한다.  37


즐거움은 물질에 있지 않고 우리 마음에 있다.  39


쉼은 빈둥거림이 아니다. 자신의 내면과 만나는 바쁜 시간이다.  41


오스트리아 사회학자 헬가 노보트니는 "휴식은 나와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 사이의 일치를 뜻한다"라고 말한다. 덜 바빠야 더 행복하다.  42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 한병철 <피로사회>


'많은 사람이 물질적인 부를 자기 인생의 반영이자 자신이 존재하는 증거라고 여긴다. 이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의 정체서오가 이미지를 자기가 소유한 것과 연결짓는다. 더 많이 소유할수록 더 안심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게 탐욕의 대상이 된다.'  - 도미니크 로로 <심플하게 산다>  55


'삶의 본질은 물건을 통해 구현되지 않는다. 필요 이상의 것을 절제하는 미니멀리스트(Minimalist)가 되려면 정신적이고 지적인 짐 가방을 꾸릴 줄 알아야 한다. 많이 소유하지 않으면 실제로 삶의 질이 개선된다.'  - 도미니크 로로 <심플하게 산다>  58


시골에 들어온 첫 해에 나는 마당에서 내려다보이는 금광호수의 물을 날마다 바라보았다. 물은 언제나 물로써 변화가 없었다. 나는 그 변화 없음을 지루함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변화 없음 속에서 번득이는 변화들을 보았다. 바람이 부는 날에는 바람이 물을 밀면서 나아가고, 바람이 없는 날에 물은 잔잔했다. 물을 바라보면서 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내 마음을 들여다 보았다. 마음 안에 있는 마음을 분별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있는 그대로 보라! 무분별의 분별 속에 있을 때 내려다보는 물은 평화롭고 고요했다. 마찬가지로 마음도 커다란 모름 속의 앎으로 오롯할 때 평화롭고 고요했다.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지도 않고 더 나쁜 사람이 되고자 하지도 않았다. 본디 그러함 속에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두고자 애썼을 뿐이다.  76


더러는 읽은 것들이 걸을 때 새로워진다. 사유와 산책은 한짝이다. 걷는 사람은 대개는 사유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사람의 걷는 모습에서도 마음은 작열한다.  77


시골집에서 혼자 밥을 끓이고 사는 내게 사람들은 외롭지 않은가라는 물음을 자주 던진다. 외롭지는 않다. 읽어야 할 많은 책들, 듣고 싶은 음악들, 산책한느 길들, 그리고 숙고해야 할 인생의 후반부가 오롯하게 남아 있다.  79


시인 릴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다. 고독, 위대한 내면의 고독 말이다. 몇 시간이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자신 속에 머무를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혼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일이다.  82


자발적으로 선택한 고독은 일상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심리적 피난처"를 찾는 일이다. 대개 작가나 예술가들이 창작을 위해 스스로 고립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내 고독을 추구한다. 이때 고독은 "위안과 새로운 활력, 내적 평온"이라는 선물을 준다. 명상, 휴식, 기도와 같은 황동도 고독을 동반한다. 이때 고독은 일상의 번잡함에 매여 지친 영혼을 다래고 내적인 여유와 평화를 가져다준다.

또 다른 고독으로 사회적 고독과 감정적 고독이 있다. 고독은 사회적 고립과 정서적 고립이 합쳐져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83-84


고독은 그 본질에서 혼자 있는 능력이다. 혼자 있는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혼자 있는 능력은 귀중한 자원이다. 혼자 있을 때 사람들은 내면 가장 깊은 곳의 느낌과 접촉하고, 상실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정리하고, 태도를 바꾼다."(<고독의 위로>) 창의성의 발현과 개인 자아의 발달은 자기 내면을 돌아보는 혼자 있는 능력 속에서 길러진다.

자발적 고독은 욕망과 두려움의 지배에서 벗어나 심ㄹ리적 평형 속에서 안정된 인격을 갖춘 사람들의 태도이다.  85


"고독을 회피하는 것은 나 자신을 회피하는 것"(<고독의 심리학>?. 차라리 고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기는 태도를 배우라. 고독을 즐기고 그것을 긍정적 에너지로 바꾸려면 먼저 있는 그대로의 고독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질 것, 타인에게 의존하지 말 것,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낼 것,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 될 것 등이 필요하다.

고독은 질병이 아니다. 고독은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적 시간을 선물로 마련한다.  86



잘 살기 위한 바탕은 끊임없이 '생각함'이다. 늘 새롭게 생각함 속에서 좋은 삶이 나온다.  101


양적 조건이 충족된 다음에야 질적 전환이 일어난다.  102


'융통성, 판단력, 비전이 탁월한 학습 주도형 인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첫 번째, 지식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베이스캠프가 낮으면 산 정상에 도달하는 게 더 힘들죠. 집효한 학습으로 지식의 총량이 많아지면, 즉 판단력의 기준 바탕이 높아지면 삶의 예측은 더 정확해집니다.

두 번째, 질문을 품어서 성장시켜야 합니다. 질문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죠. 예부터 선사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도를 깨치기 위해서는 의심 덩어리가 커야 하고, 강렬한 내적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의심 덩어리를 함부로 노출한다든지 간단히 해결했을 때는 공부, 학습의 동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런 질문은 만들기도 어려우며 한번 얻은 질문은 적어도 5년, 10년 이상 내적으로 질문의 강도를 높여서 학습의 추진력으로 삼아야 합니다. 질문의 힘으로 대상을 보기 시작하면 결국 그 질문이 스스로 답을 찾죠.

세 번째, 학문에 미쳐야 합니다. 어느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는 미친 듯이 몰아붙여야 하는 겁니다. 보통은 5년, 좀 더 어려운 분야는 10년 단위로 계획하여 스스로 각 분야를 조망할 만큼 학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술이 되었든 철학이 되었든 자연과학이 되었든 어떤 분야를 5년, 10년씩 완결하여 50년 공부할 것 같으면 적어도 다섯 가지 이상의 다른 분야를 섭렵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가 중요합니다. 학습의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자연과학 대 인문과학의 비율을 7 대 3 정도로 만들어야 합니다. 자연과학은 수학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입니다. 수학이라는 것은 숫자를 헤아리는 데서 출발하죠. 우리는 수 개념을 본능적으로 파악합니다. 뇌의 진화 덕분이죠. 자연과학은 40대가 되기 전에 공부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시작할 수 없습니다. 철학이나 문학 같은 분야는 나이가 들어서도 등단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미분, 적분, 일반상대성이론을 6, 70 먹은 노인이 취미로 공부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을 겁니다.

다섯 번째, 목표량이 중요합니다. 임계치를 넘어서면 양은 질로 바뀝니다. 그 임계치를 책으로 치면 3천 권 정도 될 것입니다. 자연과학 대 인문과학, 7 대 3으로 해서요. 50대가 될 때까지 3천 권 정도 집요하게 읽다보면 정보가 서로 링크 되면서 정보들 사이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양이 질로 바뀌는 거죠. 그리고 좋은 정보와 좋은 책을 구별할 수 있을 때부터 학습에 가속이 붙습니다.' - 박문호 <뇌, 생각의 출현>  103-104


책을 읽는 행위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프로세스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후천적인 학습과 훈련의 결과로 이루어진다. 책을 읽으려면 "주의와 기억 그리고 시각, 청각, 언어 프로세스"(<책 읽는 뇌>)를 작동하면서, '나'라는 존재 지평을 넘어가야 한다.  117-118


책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주의, 지각, 개념, 언어 및 운동의 프로세스로 이루어진" 인지 수준(cognitive level)에서 "언어 정보와 개념 정보를 모두 연결한 뒤 당신은 각자의 배경 지식과 관여(engagement)에 기반을 두고 나름대로 고유한 추론과 가설을 생성"(<책 읽는 뇌>)해야만 한다. 뇌의 뉴런 회로들을 책을 읽기에 필요한 수준으로 최적화시켜야만 한다. 한 마디로 책 읽는 뇌로 포맷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한 쪽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118


반가통(半可通 반 반, 옳을 가, 통할 통)이 사물의 이치를 어렴풋하게 깨닫는 세계라면, 전가통(全可通 온전할 전)은 사람이 깨치고 알아야 할 사물의 이치와 앎들을 분명하게 추구하는 세계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는 반가통만으로 통용되는 사회이다.  125


비움은 내 안의 것을 덜어냄이지만, 덜어낸 것을 남에게 베풀 때 더욱 빛난다. 비움의 능동적 실천이야말로 저를 고귀하게 한다.  163



천재란 뇌 속에 보다 많은 지식이 아니라 보다 큰 느낌의 세계를 갖고 있는 살마을 가리킨다.  174


깊이 생각함 없이 사는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문자를 모른체 사는 것과 같다. 생각의 문맹자들은 의외로 많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즉물적인 삶을 산다. 그들은 먹고 사는 것이나 돈되는 것의 밖에 있는 일들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모란과 작약은 왜 봄마다 꽃을 피우는 것인지, 파도는 왜 왔다가 돌아가는지, 달은 왜 커졌다가 다시 작아지는지, 지구의 자전축은 왜 항상 태양계의 공전 궤도면에 대해 23.5도의 각도를 유지하는지에 대해 무관심하고 냉담하다. 그들은 오로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 즉 주식, 부동산, 음식, 쾌락에 함몰되어 있다. 왜 그럴까. 미래가 중요하지 않기 땜누이 아니라 미래를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일이 지나치게 버겁거나 영혼에 음악이 없을 때 우리는 미래를 회피한다.  175


우리는 사색 속에 자신을 누일 수 있어야 한다. 사색은 삶의 수평을 맞추며 우리를 내적 평형으로 이끌고 우리 안에서 새로운 것이 태어나게 한다.  176


사색이란 마음, 의식, 생각의 작동이다.

사색의 기반은 고요함. 177


정말 게으름이 나쁘기만 한 것일까? 나는 이런 생각들이 공리주의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퍼뜨린 게으름에 대한 일종의 편견이라고 여긴다....

게으름에도 분명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부분이 있다. 게으름은 일손을 놓고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게으름은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무(無) 속에 방임하는 시간이다. 

우리가 타고난 바 자유를 누리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천천히 되새겨보는 느림 속의 자기 방기가 바로 게으름이다.  202


'말하자면, 게으르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내버려둔다는 것이다. 그것은 슬기로움이나 너그러움의 한 형태다. 물러났다가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이렇나 삶의 방식은 한가로이 거닐기, 남의 말 들어주기, 꿈꾸기, 글쓰기 따위처럼 사람들이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버려진 순간에 깃들어 있다.  - 피에르 쌍소 외 <게으름의 즐거움>  203


쓰기 위해 일하고 일하다 보니 쓰지 못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라.

일하지 않는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의 가치를 발견하라.  205



나날의 욕구와 필요에만 갇혀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에게 고립되어 있는 사람이다. 대개는 편협한 세계관에 갇힌 사람들이고 그들의 자아는 단단하게 개별적인 껍데기 속에 웅크리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에너지를 다만 성욕과 식욕과 사치스런 생활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데 써버린다. 금욕과 고행의 가치에 대해 전혀 모르며 그렇기 때문에 탐욕에 쉽게 빠지는데, 그것은 곧 자아가 타락했다는 증거이다.

나와 너는 연결된 존대이다. 더불어 소통하고 함게 살도록 태어난 존재들이기 때문에 나와 네가 마음을 닫고 불통한다면, 그런 세계가 잇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다. 나의 행복이 너의 불행을 담보해야만 한다면 나는타자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 아니 소규모의 끔찍한 재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재앙이 되지 않으려면, 한 시인의 어법을 빌려 나는 너에게 가서 꽃이 되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꽃이 되려면 마음을 열고 소통해야 한다. 마음을 열지 않고, 손을 잡고 나란이 걷지 않는다면, 우리는 겨울의 추위와 잿빛 하늘 아래서 저마나 신음하다가 죽을 것이다. 우리가 마음을 열ㄹ고 손을 잡아야만 비로소, 봄은 온다.  240


사람은 낱낱으로 분리되어 '자기성'에 갇힌 섬이 아니다. 살마은 '자기성'에 갇힌 존재이면서 동시에 숱한 타자들과 연루되고 그 연관성에 놓인 맥락에서 산다. 산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으로 연결된 이 세계 안에서 산다는 뜻이다.

나 아닌 타인을 향해, 세계를 향해 열린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한다. 어떻게?

타인을 '영접'하고 '환대'함으로써. 타자의 필요와 욕망에 반응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감응할 수 있는 능력이 좋은 사람됨의 증표이다.  241


''배움'은 외면을 가리키며 사물을 알아가는 것을 뜻한다. 반면 '생각'은 내면을 말하며 이치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밖으로는 배움을 추구하고 안으로는 성창하는 것, 인생의 길을 걸을 때도 이 두 가지가 반드시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 동리자 엮음 <논어의 인생박물지>  256


진실이란 무엇인가? 진실이란 잇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이다.  261



즐풍목우 -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빗물로 목욕한다는 말.  273


장자는 칠원리(漆園吏 옻 칠, 동산 원, 아전 리)라는 말단 관식에 종사하면서 초야에 은둔하여 가는을 낙으로 삼고 살았던 철학자이다.  275


'잔꾀를 부리는 사람은 불성실하게 되고 모든 일에서 지름길을 찾고자 하며 그 어떤 고생도 하려 하지 않는다. 어떤 일을 끝까지 견지하지 못하는 사람도 이와 비슷하다. 그들은 의지가 박약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 한편으로는 향락을 누리고자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를 닦고자 하며 본인은 두 가지 모두 잘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결국은 향락도 도 닦기도 모두 실패한다.  - 자오유얼 <인생사계>  301


'과대망상에 빠진 만물박사, 거드름쟁이, 헛똑똑이, 이것이 인간의 현 모습이다. 우리는 이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살마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지만 도시에 외톨이이기도 하다. 전쟁꾼이면서 평화중재자이고, 베풀면서 빼앗아 가고, 파괴하면서 재건하고, 풍요 속에 있으면서 빈곤하고, 행복하면서도 절망하고, 구도자이면서 찾기를 단념한 이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또 호기심이 많지만 발견의 기쁨을 상실한 자, 단 몇 시간 내에 아름다운 지구 전체를 활활 타오르며 폭발하는 지옥의 불덩어리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지구를 살아 있게 하고 삶에 필수적인 것들을 지구로부터 야금야금 빼앗아 가는 유일한 존재가 우리 인간이다.'  - 게랄트 휘터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30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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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믿고 있을 뿐 진리는 아닌, 상식이라 여겼던 것이 '어리석음'으로 밝혀지는 경우도 많다.  6



옛사람들으 '감정'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감정은 감추고 눌러야 하는 것이었다.  25


'감정 노동'에 바져든다. 속마음을 감춘 채 상냥하고 친절하게 상대를 대한다.  30


잘 모르는 사람들과 계속 마주쳐야 하니, 언제나 '알맞은'감정 상태로 상대를 대하는 것이다.  31



"별로 일하지도 않으면서 음식만 많이 먹으면 욕정만 살아납니다... 농부들은 흑빵과 크바스(호밀로 만든 맥주), 양파를 먹습니다. 이 정도만 먹고도 농부는 생기 넘치게 일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마다 800그램이 넘는 쇠고기와 새고기 그리고 열량 넘치는 음식을 먹어 댑니다. 그게 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정욕만 만들어 내겠지요."

톨스토이의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에 나오는 구절이다.  38


'효과적으로 욕망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가장 근본적인 것들부터 다스려야 한다. 그러니까 복잡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보다 근원적인 욕망부터 다스려야 한다는 뜻이다. 복답한 욕망이란 몸을 꾸미는 것, 스포츠, 오락, 호기심 등등이다. 근본적인 욕망이란 식탐, 게으름 그리고 정욕이다. 지나치게 많이 먹는 인간은 게으름과 싸워 이길 수 없다. 엄청나게 먹어 대면서 게으르기까지 한 사람은 정욕에 맞서지 못한다. 따라서 도덕적이 되려면 식탐부터 이겨 내야 한다. 즉 절식(節食 마디 절, 밥 식)이야말로 절제의 첫걸음이다. - 톨스토이 <첫걸음>에서  38-39


1870년에는 교육법에 의해 의무 교육이 늘어났다. 이때부터 부모에게 자식은 짐이 되었다. 권리는 줄고 의무만 잔뜩 짊어지게 된 것이다. 부모라는 자리가 인생의 무덤처럼 여겨졌다.  44


순결을 강조하는 사회일수록 출산율은 높게 마련이다. 정절 의무에 큰 가치를 두는 이슬람교나 가톨릭 문홪권에서는 다산이 일반적이다.

자유연애를 앞세우는 사회일수록 아이 갖기를 꺼리는 분위기가 널리 퍼진다.  46


왜 가족이 사라지고 있을까? 사회학자 엘리자베스 벡 게른스하임(Elizabeth Beck Gernsheim)은 그 이유를 간단하게 풀어 준다. 가족을 꾸리는 일이 경제적으로 손해인 탓이란다.  53


사람들은 예전엔 가족에게서 얻던 것을 이젠 국가에 바라며, 가족에게 했던 헌신을 사회에 해야 한다고 여긴다.  55


독재자는 결코 국민들을 여유로운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전쟁 준비, 사회 기반 시설 건설 등의 이유로 항상 국가 경제를 쪼들리게 한다. 그러고는 배고픈 시민들에게 큰 시혜라도 베푸는 양 복지 예산을 풀어 놓곤 한다. 자기 말에 꼼짝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57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일단 집중력을 잃고 산만해지면 다시 그 일에 집중하기까지 25분 남짓이 걸린단다.  59


깊은 행복감을 느끼려면 끈기있게 집중할 줄 알아야 한다.

집중력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오랜 노력을 이어 가게 만드는 꿈이 없다.

'프리터(Freeter)'란 '허드렛일로 생활비를 벌고 게임이나 하며 하루를 때우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61




미셸 푸코에 따르면, 감시 기술이 좋아질 때 공개 처형은 줄어든다.  81


권력자들은 사람들을 조금씩 서서히 길들여 나간다.

권력자들은 생활을 잘게 쪼갠다. "무단 횡단하지 말라", "세금을 제때 내라", "아무 데서나 소리 지르지 말라" 등 각각의 규칙에는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 받아야 할 벌칙이 따른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규칙들이 모여 때로는 개인을 옴짝달싹 못하게 묶는다.

지켜야 할 규칙이 세세하게 조개져 있으면 불만을 터뜨리기 어렵다.

보통 사람의 생활을 잘게 쪼개어 길들이려면 감시도 철저해야 한다. 내가 무단 횡단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른다면 어떻게 나를 처벌하겠는가? 그래서 권력자들은 감시 기술을 끊임없이 발전시킨다. 정치학자 렉 휘태커(Reg Whitaker)에 따르면, 감시는 더 철저한 감시를 부르게 마련이다.  82


역사상 우리 시대만큼 감시가 철저한 때는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표정은 그다지 어둡지 않다. 렉 휘태커는 그 까닭을 "우리 스스로 감시당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라는 데서 찾는다. CCTV 카메라는 대부분 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설치된다. 더 안전하게 길거리를 다니고 싶어서다. 돈을 빌리고 갚는 일이 전산으로 처리되면 나의 금융 거래가 모두 기록으로 남는다. 이는 곧 권력자들이 작정만 하면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전산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얻는 편리함이 만만찮은 까닭이다.  83


CCTV 카메라는 권력자들의 자못을 잡아내는 데도 요긴하게 쓰인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리 힘센 사람도 눈치를 보며 살 수밖에 없다...결국 우리는, 권력자들은 시민을 감시하고 시민은 권력자를 감시하는 '거울 같은 세상'에서 사는 셈이다.  85




절대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하나로 통일하는 일이 간단했다.  89


기계는 효율적으로 작동하여 최고의 효과를 내면 그것으로 충분하지만, 인간 사회는 제대로 기능하는 것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합리적 절차는 풍요롭고 투명하며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 준다. 그러나 절대 가치가 제공해 주던 '삶의 의미'는 채워 주지 못하는 듯하다.  93




상업이 지배하는 세상은 '타인 지향형(other directed type)' 사회다.  111


상업이 중시되는 시대에는 모든 것이 흔들리고 변화한다. 이익을 남기려면 세상의 변화를 잘 읽고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시대를 여는 사람의 모습은 오히려 정반대다. 자기만의 소신과 믿음으로 새로운 길을 연다.  112




간디는 공장에서 만든 옷은 일부러 입지 않았다.

공장의 기계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곧이어 자유를 잃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성장을 중시하는 경제는 만족할 줄 모른다.  182




사회학자 이반 일리히(Ivan Illich)는 학교가 필요한 이유를 삐딱하게 일러 준다. 학교는 한마디로 '주제 파악'을 하게 만드는 곳이다. 사회에는 잘나가는 이도 있고,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만약 어떤 이가 잘난 부모 덕분에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면 어떨까? 사람들은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더구나 가난하고 힘없는 부모를 둔 아이들은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하지만 "네가 공부를 못해서 지지리 궁상으로 살게 되었다."라고 하면 어떨까? 경쟁에서 진 겨로가이니 마지못해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학교는 이렇게 세상의 '신분'을 굳혀 나간다. 

학교는 사람들이 차별을 쉽게 받아들이게끔 이끈다.  207


이제 학교는 공부보다 '생활하는 곳'으로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교육 기능은 오히려 학교 밖에서 기대하는 분위기가 널리 퍼졌다. 학원에 기대는 이들도 셀 수 없이 많다. '평생 교육'에 대한 강조도 마찬가지다. 그 이면에는 학교보다는 기업과 사회에서 이뤄지는 교육을 더 중시하는 마음이 숨어 있지 않을까?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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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15일 스테판 에셀과 텐진갸초(16세기 중앙아시아에서 비롯된 달라이 라마 계보의 제14대 계승자)의 대화.


달라이 라마 : 현재 경제위기 때문에 엄청나게 큰 대가를 치르고 있는 국가 지도자급 정치가들에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 그들 대부분이 인정하더군요. 앞으로 10~20년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 쓰지 못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22


스테판 에셀 : 우리는 머리로 생각만 해서는 안 되고, 동시에 연민심으로 행동을 해야 합니다.  26

달라이 라마 : 연민, 그렇습니다. 그건 책임감이기도 합니다... 만약 누가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가고자 한다면, 지도를 길잡이 삼는 것이 당연지사겠지요. 마음의 일부인 연민, 용서 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정신의 지도를 지녀야 합니다.  26-27


달라이 라마 : 통제와 말살의 의도에서 자행되는 검열은 비도덕적입니다.  32


달라이 라마 : 저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 자신의 지성을 올바로 쓰라고 합니다. 어떤 상황이든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제 경우를 생각햅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요. "나는 조국을 잃었고, 인생의 대부분을 타지에서 망명객 신세로 보냈다." 그러나 또 한편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덕분에 나는 온 세상을 알게 되엇고, 특별한 의전(儀典)없이도 다른 사람들과 직접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내가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궁에 그대로 살았더라면, 현실적으로 별 소용 없는 번거로운 의식 속에 매몰된 삶이었겠지."

둘째,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마음의 따스한 온기입니다. 지금 우리는 여전히 '우리'와 '그들'의 이분법이 지배하는 체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구분선은 항상 우리 마음속에 각인되어, 우리를 보편적 박애 정신과 갈라놓습니다.  39


달라이 라마 : 명상은 종교적이 어떤 의례가 아니라, 마음을 관찰하고 계발하는 치밀한 연습인 것입니다.  41


달라이 라마 : 일단 마음의 풍경이 명료하게 밝혀지고 통제되면 우리는 연민, 용서 같은 긍정적 감정들까지도 키워갈 수 있고, 그래서 분노, 멸시, 두려움, 증오 같은 파괴적 감정을 줄일 수 있습니다. 즉 기질을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41


달라이 라마 : 존엄성을 잃지 앟고 당당히 생존하신 것이지요... '적(敵)이 최고의 스승이다'라는 말을 거듭 외는 방법도 있습니다. 결연함을 잃지 않는 데에 아주 유용한 품성인 관용과 인내, 그것을 실천하는 법을 적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44


달라이 라마 : 만약 상황이 너무 심각하여 거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라면, 그 어떤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다면, 그때는 설령 이런 행동들이 외관상 폭력적으로 보인다 해도 그 본질은 비폭력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폭력과 비폭력을 나누는 구분으로 유일하게 가능한 것이 '동기'입니다.  49


앵디젠 : 간디는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나는 비겁과 폭력 사이에 반드시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면, 폭력 쪽을 권하겠다"라고, 예를 들어 간디의 장남이 어느 날 그에게 물었습니다. 1908년 아버지가 암살당할 뻔했을 때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했어야 하느냐고, "나는 아들에게 대답했습니다. '너의 의무는 설령 폭력을 써서라도 나를 지키는 것이었어야 했다'"라고 간디는 말했습니다.


달라이 라마 : 불교에 이와 통하는 비유담이 있습니다. 붓다는 여러 전생 중 한 생에 어느 배의 선장이었는데, 그 배에는 선원이 500명이나 있었습니다. 선장은 선원 중 한 사람이 나머지 499명을 죽이고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으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장은 세 차례나 그러지 말라고 그 선원을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그 선원은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선장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만약 내가 저 선원을 죽이지 않으면 다른 499명이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죽이면 나는 499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또한 그가 499명을 죽이는 죄를 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사람을 죽인 죄에 따른 악업(惡業)의 결과를 그대로 받게 된다. 게다가 만약 내가 음모를 꾸미는 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면, 나는 499명의 죽음에 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다.' 그래서 선장은 무기를 들고 그 선원을 죽입니다(이 글의 출처는 대승불교 경전인 '대방편경(大方便經)'의 티베트 역(譯)에 나오는 '대비(大悲) 선장 이야기로, 갈등 상황에서 방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다-옮긴이).  51-52


스테판 에셀 : 제 생각에 한편으로는 비폭력, 다른 한편으로는 단호함, 이 두 가지를 잘 구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완벽히 자신을 신뢰하고 용감하게 행동하면서도 폭력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분노한' 이들의 움직임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에겐 지키려는 가치들이 있다. 그 가치에 관한 한 우리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단호하다. 그러나 폭력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57


스테판 에셀 : 제 생각도 성하의 의견과 같습니다. 이제는 권좌에서 놓여나 오직 인류의 안녕에만 관심을 두는 고르바초프 같은 인물들로 구성된 '현자(賢者)위원회', 그런 것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유엔 사무총장에게 "거부권을 없애시오. 사람들을 모으시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현명한 분들로 구성된 위원회 말입니다. 하지만 또 한편 우리에겐 젊은 세대도 필요합니다. 곳곳에서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이런 식으로 통치받는 것을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우리는 진정으로 민주 정부를 원한다"라고 말하는 젊은 세대 말입니다. 그런 젊은이들이 거리에 많이 모인다면, 구제야 비로소 정부들은 현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든가 아니면 젊은이들을 억압해야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71




옮긴이의 말 - 두 그루 거목과 만나다


원제는 '평화를 선언하자!'이고 부제가 '정신의 진보를 위하여'로 2012년 5월에 프랑스 앵디젠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91


"피곤하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한은 할 것입니다."  94


"'분노하라'의 참뜻은 레지스탕스의 정신과 세계인권선언에 명시된 가치들을 정부나 기업들이 침해할 때 이에 분노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분노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다음엔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96-97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뭔가를 진보시킨다는 것은 아주 경탄스러운 일입니다."  98


마음의 '진보'에도 반드시 지도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지도에는 감정, 정서, 그리고 그 감정과 정서를 비폭력적으로 지켜내는 방법들이 입력되어야 한다는 것. 이러한 요체를 두'어른'이 공유했다.  102


바로'연민(compassion)'이다. 'compassion'의 어원은 '괴로움을 함께함'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측은지심. 심리학에서 말하는 공감. 기실 '정신의 지도'란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니다. "부디 남이 잘됐으면 하는 배려로 우리 모두가 연결된다면 그때 우리는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109


자기부터 바꿀 수 있어야 세상을 바꾼다.  111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내용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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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


우리 인간은 기능적으로 가장 탁월한 두뇌를 지닌 것은 분명하지만 현명하다는 데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 최재천(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8



저자 소개 - 스테판 에셀은 누구인가?

'세계시민주의'를 온몸으로 실천한 인물이다. 세계시민주의 정신으로 무장하여 인권, 불법 체류자와 노숙자 문제, 불평등 문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등에 맞서 뜨겁게 투쟁해왔다.  14


질문자 : 질 방데르푸텐

답변자 : 스테판 에셀


그 옛날 우리가 제안했던 개혁안들을 지금도 그대로 적용할 수는 물론 없지요. 또한 그 시절을 맹목적으로 따르자는 식으로 추진해서도 결코 안 됩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가 추구했던 가치들은 아직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는 그 가치들을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공화국의 가치, 민주주의의 가치들이기 때문입니다.  23


저항이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우리 주위에 터무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에 강력히 맞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인 줄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단정하고 체념하는것, 그것을 거부해야 하는 것이지요.  24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면 주로 어떤 것을 꼽을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경제적인 것들이겠지요. 사회적 불평등 말입니다. 즉 상호연결된 지구촌 안에 극단적인 빈부의 형태가 공존한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단지 부자 나라, 가난한 나라가 있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진다는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불의에 저항하는 일...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성적으로 상황을 개선하려면 깊은 성찰이 필요하고 설득력 있는 글을 써야 합니다. 또한 현명한 정치인이 당선되기를 바라며 민주적으로 선거에 참여해야 합니다. 요컨대 이 시대의 레지스탕스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말이지요.  25


인생에 대해 중대한 결저을 앞둔 청소년들을 만나면 저는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무엇이 너희를 분노케 하는지, 무엇이 참을 수 없는 일인지 스스로 한번 물어보라. 그리고 그 답을 찾았다면, 그에 맞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싸울 것인지를 알려고 노력해보라."고 말이지요.  26-27


질 : 저항은 단지 지성(知性)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실천이 있어야 하고,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에셀 : 저항이란 단지 문제를 깊이 생각하거나 상항을 조리 있게 서술하는 데서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행동이든 실천으로써 보여주어야 합니다.  27


질 : 명확안 입장을 취하고 참여한다 함은 필연적으로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선택인가요? 때로는 표현의 자유마저 포기해야만 하는 것인지요?

에셀 : 위험을 무릅쓸 수밖에 없다면 그건 그만큼 참여하는 여러분의 뜻이 결연하다는 징표일 뿐이지요.  29


진보란 현재 실제로 존재하는 여러 힘드르이 협력에 의해 가능하다고 확신합니다.  30


전 지구적인 시민정신이 필요한 때입니다.  32


지구와 환경의 파괴는 지금 세계 어디에서나 부딪히는 두 번째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33


에너지나 자원의 과소비를 줄이는 일에 젊은 세대가 참여하는 것 역시 구체적인 참여 행위에 해당합니다.  34


질 : '발전' 개념에 있어서는 미국이 주도해온 자유주의 사고방식이 아주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해왔는데요.

에셀 : 진정 사람을 잘 살게 하는 발전이란 국민총생산(GNP)의 수치로는 측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경제 발전보다는 우리 스스로 좀 더 나아졌음을 의식할 때 비로소 발전했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게 되지요. 다시 말해 교육, 건강, 개인의 문화나 정체성 보호 면에서 나아졌음을 경험할 때만이 진정 행복한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36


빈곤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들 빈국을 상업적인 다국적 기업의 침탈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그리고 발전의 토대가 되는 요소들을 육성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해야 하지요. 

학교 교육과 문맹 퇴치, 혹은 건강 보장에 주력해야 합니다. 또한 농업처럼 땅과 가장 가까운 생산을 장려해 최대한 자급자족을 실현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부자 나라들이 대폭 지원하는 과잉 수입에 대한 의존성을 줄임과 동시에, 자국의 고유한 자원을 개발하고 지켜내는 데 주력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이 차츰차츰 실행되어야 합니다. 그 길만이 빈국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됩니다.  37


저는 '지속가능한(durable)' 발전이라기보다는 '지탱가능한(soutenable)' 발전이라 해야 타당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지속가능한'이라 할 때 그 지속 기간이란 대체 무엇이지요? 

발전의 토대는 천연자원입니다. 그런데 지구가 점점 훼손되고 있으니, 우리는 개발에 필요한 자원들을 더 이상 지구로부터 공급받을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탱가능한 발전이라 한것은 야만적인 방법으로 단기간에 자원을 착취애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쓴 말입니다. 

계속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39


질 :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논의 대상 아닌가요?

에셀 : 발전이 기술과 에너지에만 국한된 의미라면  현실적으로 우리는 더 많은 부존자원을 보유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을 뿐더러, 발전 또한 보유한 자원에만 기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우리의 자우너들은 생태적 균형과 양립하여 개발되어야 합니다.

좀 더 지구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부유해진다는 것은 사용 에너지의 양이나 금전적 수이그이 증가처럼 단지 양적(量的)인 결과로 드러나는 풍요로움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문화, 정신, 윤리 등이 풍부해져야 합니다. '항상 더 많이'라는 말로 촉발되는 생산 위주의 생각은 이제 끊어버려야 합니다.  43-44


생태주의자로 산다는 것은,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단지 자연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기능에 대해 진일보한 배움을 통해 꺄들은 인간이 진정 새로운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47


질 : 문화를 완전히 개방했을 때의 역효과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서구 문화와 본질적으로 매우 다른 문화 전통을 지닌 나라들이 서구 발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소비지상주의 이데올로기에 그냥 침탈당하고만 잇다는 사실을 어떻게 분석하시나요?

에셀 :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문화의 행복한 다양성을 수호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 있습니다. 특히 농업에서 그런 목표가 필요합니다. 유전자 변형 식품(GMO)과 그것을 유통시키는 다국적 기업들은 정말 위험 요소입니다. 이는 문화의 다양성을 제한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문화의 다양성을 보호할 뿐 아니라 모두가 서로 다른 문화를 존중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저마다 자기 문화를 누릴 권리,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자기 문화를 존중받고 인정받을 권리, 이런 권리가 보장될 때 다양한 문화가 공존할 수 있고, 더불어 대결이 아닌 다른 가치가 창출될 수 있습니다.  62


질 : 경제 위기에 대해 사람들은 규제 부족을 원인으로 지목하는데요.

에셀 : 세계적인 위기기 휩쓸고 간 뒤 우리가 사는 이곳은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고달픈 세상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금융화된 세계 경제에서 막대한 이득을 취하는 자들에 의해 이렇게 된 것입니다.  66


클로드 알팡데리는 사회적 , 연대적 경제를 진흥시키려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에 의하면, 이윤 개념에 갇혀 있는 자본 경제 말고도 다른 경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형태 말고도 연대적 경제의 여러 형태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70


우리에겐 레지스탕스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저 저항만 한다고 해서 레지스탕스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항 그것은 창조요, 창조 그것은 저항이다"라고. 

항상 긴장해야 하고 항상 창조적이어야 합니다. 저항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무엇이든 단순화하려는 시도는 굉장히 위험한 사고입니다. 지혜롭게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지혜로운 사고는 지성이나 창의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균형 감각에서만 나옵니다.  73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일보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편이 훨씬 쉬운 법이지요. 전략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리하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곧 맞닥뜨릴 문제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전략은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수립될 수 있습니다.  74


엔지오들은 국제사회에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아햐 합니다. 

엔지오의 권한이 팽창된다고 위협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국가는 엔지오가 가져온 성과 중에서 자국의 이익이 될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76


사르트르의 말.. "사람은 진정으로 참여할 때, 그리고 자신의 책임을 느낄 때 비로소 참된 사람이다."  85


우리가 수많은 장애물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덜 폭력적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떠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86


이제는 혁신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지나친 전통 존중이나 노인들의 권위 때문에 젊은이들의 창의성이 위축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활발한 세대간 교류는 매우 바람직합니다. 노인들은 젊은이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잘 배워야 하며, 젊은이들 역시 노인들의 축적된 경험에서 뭔가 배우는 게 있어야 합니다. 

잠재된 여러 뷔험을 결코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위험이든 모두 우리가 맞설 수 있고 뛰어넘을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 됩니다.  92



세계 인권 선언 내용




해제 - 분노하고 참여하라(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스테판 에셀은 무관심은 최악의 태도라고 얘기한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요소 중 하나인 분노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여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스테판 에셀은 "무엇이 너를 분노케 하는지, 무엇이 참을 수 없는 일인지 스스로 한번 물어보라. 그리고 그 답을 찾았다면, 그에 맞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싸울 것인지를 알려고 노력해 보라"고 말한다. 사실 분노라는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참여할 수 있다. 나의 문제, 주위에 있는 사람의 문제, 사회의 문제에 대해 내가 느낀 분노를 드러내는 방법이 바로 참여이기 때문이다.  114-115


에셀이 분노하는 중요한 문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극단적으로 심각해지는 불평등의 문제이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불평등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아프리카 등에서는 5초마다 열 살 미만의 어린이 한 명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고 있는 반면, 선진국이라고 하는 국가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서 각종 성인병이 늘어나고 잇다. 기막힌 일이다. 한 국가 내에서도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빈곤이 대물림되는 현상 또한 날로 심각해지고 잇다. 15세 때 가난하면, 그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확률이 지극히 높다. 비싼 집값, 점점 벌어지는 임금격차, 점점 줄어드는 일자리... 이런 것들은 많은 청년들에게 절망을 안겨 주고 있다., 이런 현실에 대해 스테판 에셀은 분노한다.

둘째, 지구환경이 위기에 처해 있다. 핵(원자력)발전의 위험, 날로 심각해지는 기후변화, 식량위기, 자원고갈... 이런 문제들이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잇다. 스리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로 이어지는 대형 핵발전소 사고는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켰을 뿐 아니라, 넓은 땅 덩어리를 수백 년 이상 오염시키고 있다. 그리고 누출된 방사능이 세계 곳곳으로 퍼져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후변화 또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지구의 온도가 0.8도 올랐을 뿐인데, 전 세계가 홍수와 가뭄, 해수면 상승 등의 피해에 시달리고 있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앞으로 더 빨리, 그리고 더 높이 온도가 올라갈 것이다. '유엔 정부 간 기후변화위원회(IPCC)'에 따르면 이번 세기말까지 최대 6.4도의 온도상승이 예상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1~2도만 올라도 재앙이 올 것이고, 3.5~4.5도가 오르면 생물종의 40~70%가 멸종할 상황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홍수와 가뭄, 사막화가 식량위기를 가속화시킬 것이다. 이미 세계의 곡물가격은 널뛰기를 하고 있고 식량위기가 현실화되고 있다.

이것은 물질과 성장만 추구해 온 선진국들이, 그리고 그동안 물질적 풍요를 누려온 세대가 초래한 사태다. 그 결과 이 사태에 대해 아무 책임 없는 어린이, 청소년들 및 미래세대가 이 모든 문제로 인한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스테판 에셀 역시 이런 현실에 분노하는 것이다.  115-117


기후변화의 가장 큰 희생자 역시 가난한 국가, 가난한 사람들이 될 가능성이 높다.  117


에셀은 생태위기를 보면서, 환경문제도 인권문제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의 권리와 자연의 권리를 동등하게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생태주의자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도 자연의 하나라는 점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118


문제는 정치에 있다.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대안에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119


구체적으로 에셀은 경제, 사회분야의 안전보장이사회를 만들 것과 세계환경기구(WEO:World Environment Organization)를 만들것을 제안한다.  120


스테판 에셀은 이 시대의 레지스탕스는 기차를 폭파할 것이 아니라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설득력 잇는 글을 가지고 투쟁'하고, '현명한 정치인이 당선되기를 바라며 민주적으로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121-122


우리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은 바로 절망이다. "손을 쓰기엔 너무 때늦은 게 아닐까요? 이젠 틀렸습니다. 더 이상 아무 대책도 없어요. 우린 다 끝난 것입니다."

이런 절망이 우리를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좌졸과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절망하는 대신 분노하고 참여해야 한다.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행복과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다. 그것이 95세의 깨어 있는 한 노인이 지구 위에 사는 청년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다.  122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내용보기 


스테판 에셀의 <정신의 진보를 위하여> 내용


스테판 에셀의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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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나가는 여자들을 쳐다보는 법이 없다. 맨해튼에는 여신처럼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지만 내 눈은 그녀들의 얼굴에 가닿지 않는다. 난 '첫눈에 반한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그런 내가 이번에는 좀 이상하다. 살아가면서 적어도 한 번쯤은 체험하는 기이한 순간이다. 마침내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났다는 느낌, 그 낯설면서도 분명한 인식...

나에게 기회를 잡을 시간은 단 3초만이 주어진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순간이다. 난 무턱대로 입을 연다.  129


인생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순간은 우리가 기억하는 순간들이다. - 장 르누아르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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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가벼움이 횡행하는 시대, 인문 내공을 권하다


인문적 마인드를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건이기 때문이다. 인문적 사유 능력은 어떤 문제의 핵심을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인문적 사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주체적이고 지혜롭게 자기 인생을 꾸려갈 수 있다.  8


정직하고 성실하게 노력해서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은 대개 인문적이라는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고, 부단한 노력은 대개 '깊이 있는 탐구'를 동반하게 되는데, 그 탐구가 인문적 사유를 유도하기 때문이다. '깊이 있는 탐구'는 자연스럽게 다양하고도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낳고 그로 인해 사람을 인문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9


지식인들이 제시한 아이디어들 중 무엇이 올바르고 나은 것인가를 검토하고 판단하는 것은 시민들의 몫이어야 한다.

인간의 지력은 읽고, 쓰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 그 중에서도 '인문적으로' 읽고, 쓰고, 생각하는 것은 지력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 책은 그 세 과정에 대한 이해와 그 원칙과 방법, 나아가 태도의 문제까지를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10


일반적으로 지력을 발전시켜나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11




서장 - 삶을 돌파하는 힘, 인문 내공


인문적 가치의 핵심. 인문 정신의 요체 중 하나는 내 삶이 존엄하다는 것, 타자 역시 나만큼 존엄하고 동등한 가치를 가졌다는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17


자기 이익에 반해 보이는 일들을 태연히 일어나게 내버려둔다.  23


나의 어머니는 .. 젊은 시절부터 근 40년 동안 남의 옷을 만들고 수선해주면서 세 남매를 키웠다... 어머니가 하루는 '바느질도 다 같은 것이 아니며, 하는 사람에 따라 격(格)이 다르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다.  23


인문적 사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그는 자기 내부에 일종의 자가발전 시스템을 갖춘 것과 같다. 그는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날마다 조금씩 발전한다.  24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자기 신념을 좇아 사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좋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의 자기 신념대로 사는 것뿐 아니라, 지속적인 노력으로 그것을 갱신해 나갈 필요가 있다.  25


생명이 탄생하기 이전의 무(無), 생명이 소멸한 이후의 무에 대한 호기심이다.

'무'에 대한 관심, 그것은 철학의 시초이고 종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33


인간은 밖으로는 하느르이 별을 보며 우주를 상상한다. 외부 세계에 대해 일정한 형태를 상상한다. 그 일정한 형태를 '범형(凡形)'이라 한다. 또한 인간은 안으로는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그것을 '성찰'이라고 한다.  35


서양에서는 인문을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studia humanitatis)'라고 했다. '인간성에 대한 연구'를 의미한다.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간다운 것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답하는 것이 '인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인류 문화에 대한 '정신과학'이었다. 

동양에서는 인문을 한자로 '人文'이라고 쓴다. '文'을 우리는 '글월 문'이라 읽는다. 그것은 본래 '무늬'를 의미했다. 동양에서 '글'이라 하면 주로 한문을 말한다. 동양에서 라틴어와 같은 지위를 갖고 있는 한문은 잘 알다시피 상형문자다. 상형문자는 사물의 모양을 본떠 만든 글자다. 그것은 말하자면 사물의 실루엣을 그린 것이다. 그렇게 '文'은 '무늬'와 '글자'를 동시에 의미하게 되었다.

'人文'은 직역하면 '사람의 무늬'라는 뜻이다.  37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스스로 생각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내 생각인가?' 하고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그 중 많은 것은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본 것이다. 많은 사람드은 그것을 자기 생각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44


'혼돈의 내면을 가진 현대인들이 아무 맥락 없는 혼돈과 부딪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 [우리 안의 히틀러] 막스 피카르트  48


현대인은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저 단편적인 지식과 정보들이 맥락 없이 머릿속을 부유(浮游)할 뿐이다.  49


인문서를 읽으면 인문적 사유 능력이 생긴다. 인문적 사유 능력이 있으면 대중의 행동, 사회현상, 자연의 변화, 지식과 정보, 예술 작품, 과학기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고,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에 기반해 삶의 지혜가 생긴다. 그로 인해 인문적 사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 현명하게 인생을 살아 나갈 수 있다.  52





1부 공력(功力) - 지성인으로 거듭나는 생각의 내공


"모두가 비슷하게 생각할 때, 아무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 월터 리프먼  54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망연해지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 배우기만 하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그물(罔)'에 걸린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암담해지고, 혼자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자기 생각에 갇혀 편협해지거나 오만해지기 쉽다는 뜻이다.

오늘날에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는 것' 중 무엇이 더 큰 문제인가? 당연히 전자다. 요즘에는 '학력 인플레'라는 말이 나돌 만큼 고학력자가 많다. 유치원에서부터 따지면 많은 사람들이 20~30년 동안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고학력자들이 투자한 시간과 비용, 노력한 만큼 지적 성취나 사고력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른바 '티처 보이(teacher boy)'라는 말이 있다. '맘마 보이(momma boy)'가 엄마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다면, '티처 보이'는 선생이 없으면 공부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왜 그런가? 유치원 시절부터 한 번도 선생 없이 공부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선생이 가르쳐준 것을 그대로 외우는 데는 도사다. 그러나 스스로의 머리로 의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유추해보라고 하면 어려워한다. 그렇게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오늘날의 문제는 너무 적게 배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이 배워서 문제다. 사고 능력에서 중요한 것은 분석과 종합이다. 분석과 종합은 독학(獨學), 즉 혼자서 책을 읽고 이렇게 저럭헤 생각해 볼 때 배양된다.

학력만큼 지력이 발전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평가 중심의 교육제도에 있다. 우리는 국어, 영어, 수학을 배웠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국어, 영어, 수학의 '시험 보는 법'을 배운 것이다. 학생들은 교육 받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있다.  57-58


역사적으로 국가 조도의 근대적 교육의 기원은 19세기 초반 프로이센에서 시작되었다. 프로이센의 교육 목적은 군대에 충성하는 군인, 사용자에 순종하는 노동자,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진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의무교육은 공립학교, 개인 학교, 홈스쿨링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던 교육 형태를 강제로 소멸시켰으며, 국가가 교육을 독점하게 되었다. 의 무교육의 목표는 가정으로부터 아이들을 떼어내어 '부모 없는 사회(학교)'를 구성해 기업이 필요로 하는 훈련된 노동자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그낻 교육 자체가 애초부터 지성인의 양성 같은 고매한 목표와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제도 교육이 목표하는 것은 여러 지식을 하나의 의미 있는 질서로 통합하는 지적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사회가 처방하는 특정 기호와 정보를 얼마나 받아들였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제도 교육은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없애고, 기득권을 향한 개인의 노력을 끊임없이 생산해낸다. 그것은 제도 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비판적 사유 능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도 교육은 교과서나 참고서 같은 교재를 통해 가르친다. 문제는 이 교재들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는 커녕, 오히려 지적 탐구에 대한 열정을 불식시킨다는 점이다. 교재에는 많은 지식들이 무미건조하게 '교양의 차원'에서 개괄되어 있을 뿐이다. 교재에는 여러 지식인들이 애초에 가졌던 문제의식의 심각서오가 진지함, 철받함이 소거되어 있다. 학생들은 지식의 뿌리인 '현실적 문제의식'과 '윤리적 호소'를 실감할 수 없게 된다. 학문에 대한 열정은 학위나 학점에 대한 열정으로 대체될 뿐이다.  59


지성인이 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혼자 탐구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그들은 그냥 많이 배워서 지성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를 바탕으로 '독학 능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지성인이 된 것이다. 지성인의 핵심적 능력은 독학 능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학은 독립적인 사고를 가능케 하고, 다양한 사고를 낳는다.  61


대중매체는 여론을 전달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묘한 현상이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알려줄 때, 대중매체는 대중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거울처럼 비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대중매체는 어떤 방식으로, 어떤 단어를 써서 질문하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통계나 답변에 대한 해석의 권한도 대중매체에게 있다. 그를 통해 대중매체가 자신이 원하는 여론을 형성해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중매체가 여론을 전달하는 것은 단순한 사실 전달 이상이다. 여론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당신도 이렇게 생각하라'는 암묵적인 압력이 존재한다. 특별한 자기 입장이나 자기 확신이 없는 한, 사람들은 이 압력의 영향을 받게 된다.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잘못 판단할 리 없다'고 믿는 것이다. 대중매체도 이런 영향을 알고 있다. 그래서 대중의 생각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여론을 가시화하기도 한다. 그럴 때 여론은 '대중의 생각을 담은 결과들'이 아니라, 반댈 대중의 생각을 낳는 씨앗이다. 대중매체는 단순한 여론의 전달자가 아니다. 여론의 창조자이자 여론 형성의 주체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언론 매체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일은 세상에 없는 일이다. 그만큼 언론의 사회적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언론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활동하는 범위는 좁고 잘 아는 사람도 몇몇에 불과하다. 언론사는 주로 경찰서, 시청, 법원, 청와대, 국회 등 국민과 당국이 접촉을 일으키는 곳에 -주로 권력기관에- 기자들을 배치할 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주로 기사화한다. 언론은 자신들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알고 개괄해줄 수 있음을 암묵적으로 전제하지만, 그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오늘날에는 언론 플레이가 중요하고, 그에 따라 기업이나 관료 집단, 정치 집단은 대개 언론 홍보팀을 운영한다. 언론 홍보팀은 어떤 사안에 대한 보다 자료를 각 언론사에 보낸다. 기자는 보도 자료를 토대로 기사를 작성하게 되는데, 단지 참고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대로 베끼는 경우가 많다. 그런 보다 자료의 재뇽은 객관적이 수 없다. 그것은 해당 기관들이 독자들에게 보이고 싶은 내용과 관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언론사들이 보도 자료를 베낌으로써 독자들은 기억이나 관료 집단, 정치 집단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64-66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절대 진리가 아니다. 근대 학교 교육의 주체는 국가이고, 그런 만큼 거기에는 국가 이데올로기, 국가 이익의 논리가 반영되어 있다. 근대 교육 시스템은 기업이 요구하는 노동자를 길러내는 목적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학교 교육에는 국가의 논리와 더불어 기업의 논리가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66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적 성찰>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상당수의 그릇된 의견들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 그리고 확실하지 않은 원리에 기초를 두고 받아들인 것들은 의심스럽고 불확실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받아들였던 모든 의견을 회의에 부치고 근원적인 것에서 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추론 방식이 바로 '방법적 회의'였다. 그 과정을 통해 마지막으로 남은 명제가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였다.  67


불교 경전 <앙굿타라 니카야(ANgutara Nikaya)>에도 리런 글이 있다. "어느 것이든 계시나 전통이나 보고 같은 것에 근거해서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말고, 또 그것이 단순히 사변의 산물이라거나, 어느 한 입장에서 볼 때 진실되다거나, 사물의 피상적 관찰에 의한 것이거나, 선입견에 맞아덜어진다거나, 권위가 있다거나, 스스의 위신 때문이라거나 하는 등의 이유만으로 받아들이지 말지어다." 지성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상식과 권위에 쉽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 상식과 권위로 무장된 모든 관념을 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안으로는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밖으로는 타인의 의식을 일깨울 수 있다.  68


고대인들은 관계 속에서 만물이 생겨나고, 살아가고, 소멸한다는 것을 이미 알았던 것 같다. 예를들어, 한자 '목숨 명(命)'을 파자(破字)해 보면 '모두 합(合)'과 '나눌 분(分)'으로 나누어진다. 이 한자에는 '합쳐지고 분리되는 과정이 반복됨'을 통해 모든 생명 혹은 생태계가 유지된다는 고대인들의 통찰이 깃들어 있다. 내가 어제 돼지고기와 배추 김치를 먹었다면, 그것은 지금 내 몸의 일부를 이루고 잇다. 남이 나의 일부로 합쳐진 것이다. 화장실에서 우리가 큰일을 보면 그것은 나누어지는 과정이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합쳐진 결과이고, 죽는 것은 그것이 다시 불리되는 과정이다. 사람이 죽어 해체된 원소들은 다시 다른 생명체의 일부가 된다. 이 모든 과정이 합쳐지고 나누어지는 과정의 반복이다.  70-71


관계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불교 철학이다. 불교의 <상응부경전>에는 붓다의 가르침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이것을 '연기(緣起)'라고 한다. 연기란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탄생하고 소멸한다. 나는 타자의 존재 조건이고, 타자는 나의 존재 조건이라는 말이다.  71


흔히 인간은 '지적 존재'로 인식되지만,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 지적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보고 듣는 것이 있어야 지력이 발전한다.

지식이 체감되기 위해서는 현실과의 연관성이 풍부해야 한다.  76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현실적 문제 해결'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잊고 지식 자체에 집착하곤 한다. 심지어 특정 지식을 만고불변의 절대 진리로 믿기도 한다. 그것을 '교조주의(敎條主義)'라고 한다. 교조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 지식과 사상이 현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늘 자문해야 한다.  77


문화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사고는 나의 직업"이라고 했다. 지성인이 되려면 생각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치열하게 사고해야 한다. 그 치열함에는 현실적 맥락 속에서 사고하는 것, 사고 내용을 현실적 맥락 속에서 해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을 도외시하는 것은 지적으로 안이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78


깨어 있는 의식은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계기로 생겨난다.  79


쾌락과 고통의 관계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반대가 아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인간의 대표적인 쾌락인 식욕과 성욕을 보자. 어떤 사람이 배가 몹시 고플 때 산해진미로 가득 찬 식사를 한다면 만족도는 극에 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매 끼니 계속된다면? 만족도는 점차 떨어지다가 나중에는 별 맛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도 계속 먹어댄다면? 과도한 영양 섭취로 각종 질병이 생기고, 그로 인해 오히려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성적 쾌락도 마찬가지다. 성적 쾌락을 과도하게 추구하면 그것은 더 이상 쾌락이 아니다. 만약 극단적으로 추구한다면, 그는 죽음에 이를 것이다.

쾌락은 한계효용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쾌락은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금세 저만치 달아난다. 아무리 좋은 쾌락도 시간이 지나면 일상성이 감각을 무뎌지게 만든다. 그 때문에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계속 강도를 높여가고, 한 욕망으로부터 다른 욕망으로 계속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 쾌락의 극단적인 추구는 불행과 고통을 낳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지속적인 쾌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고통은 지속적이다. 배고픔, 질병, 고문 등으로 인한 고통은 시간이 지난다고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82-83


여행은 현대인들이 대표적인 즐거움으로 꼽는 것이다. 사실 '집 나가면 고생'이다. 그런데도 여행이 즐거움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이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여행은 낯선 곳으로의 탐험이다. 그 과정에서 여행자는 여러 당혹스럽고 불편한 일들과 조우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여행자가 길을 헤매다 더위와 배고픔에 하루 종일 시달렸다 하자. 그러다 어두컴컴한 저역에 겨우 민박을 구해 지친 몸을 쉬게 되었다. 거기서 샤워를 하고, 먹을 것을 구했다. 그럴 때 여행자는 집에서는 쳐다보지도 않을, 보잘것 없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아, 정말 행복하다. 이것이 바로 여행이 주는 기쁨이지!' 하고 여길 수 있다.

그것은 평소보다 무엇이 더 채워지는 데서 오는 행복감이 아니다. 더러워진 몸과 배고픔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결핍감이 사라지는 것에서 오는 행복감이다. 말하자면 무엇이 플러스됨으로 인해 행복한 것이 아니라, 마이너스의 상태가 사라지는 것에서 오는 행복감인 것이다. 그 마이너스는 여행하지 않으면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늘날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인위적으로 결핍의 상황을 만들고, 그 결핍이 제거되는 것에서 쾌감을 맛본다. 이런 여행의 즐거움 역시 고통과 쾌락이 동전의 양면임을 잘 보여준다.  83


인간은 범형의 구성 능력과 성찰 능력을 가진, 그리고 생각한 것을 세계에 구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인간은 분명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는 존재다. 그러나 가능성이 오만함으로 변질될 때 인류는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90


칸트 "인간은 인식된 현상세계만을 알 수 있으며, 인식되기 이전의 세계인 '물자체'는 알 수 없다.  91


세계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감각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그 감각 방식이 달라지면 그에 따른 인식도 달라진다. 그것을 철학적 용어로 '움벨트(Umwelt)'라고 한다. 그것은 감각기관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 세계를 일컫는다. 모든 동물은 '움벨트'가 다르다. 무엇이 우월한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모든 생물은 상이한 움벨트 속에서 살고 있다.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는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우리는 인간 인식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인류는 자신의 지적 능력에 대해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94


모든 대상은 거리르 두고 볼 때 전체가 파악된다. 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거리를 두고 봐야 어디에 어떤 무넺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98


사물을 거리를 두고 봐야 하는 것은 넓게 볼 수 있어서만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래야만 대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거시적으로 보는 것은 시야의 문제를 넘어 사유의 문제다. 거시적으로 봐야 대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철한 판단이 가능해진다. 내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질곡에 빠졌을 때, 내 문제를 남의 문제처럼 거리를 두고 보면 훨씬 지혜로운 판단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조언이 도움이 되는 것도, 그들이 내 문제를 나보다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99


인문적으로 사유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시간적 거리를 두는 것이다.  100


시간적 거리가 가져다주는 지혜를 잘 표현한 유명한 말이 있다. 헤겔이 좋아했던 말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가 그것이다. 미네르바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그리스 신화의 '아테나'와 같은 여신)이고, 올빼미는 철학의 상징이다. 지혜의 여신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올빼미가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비상(飛上)하기 위해, 서서히 날개를 편다는 말이다. 지혜의 여신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철학의 상징인 올빼미, 얼마나 현명하겠는가? 그야말로 '지혜의 정수'다. 그런 올빼미가 왜 다른 때가 아닌 '황혼녘'에 날개를 펴겠는가?

황혼녘이 성찰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하루를 준비하는 아침이나 한창 일하는 낮에는 하루를 돌아볼 수 없다. 사람이 상념에 빠지기 가장 좋은 시간은 저녁이다. 일을 마치고 난 후, 해가 지는 시간, 세상의 온도가 가라앉는 시간이 되어서야 인간은 비로소 하루를 돌아보고 생각할 만한 여유를 갖게 된다. '황혼녘'이란 결국 하루를 돌아볼 만한 시간적 거리가 확보된 때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황혼녘인 노년에 이르러서야 인간은 '나의 삶은 어땠나?'하고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지혜를 얻는다.  101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사는 것은 심리적 정신적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인간은 혼자서는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때에만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를 느낄 수 없다. 아무리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도 어떤 집단에도 속해 있지 않다면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인간이 실존적 의미를 획득하는 것도 사회 속에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번우주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의 존재적 의미는 오로지 사회적으로만 획득될 수 있다. 인간이 실존적 충만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존재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 집단은 그냥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집단의 논리'를 개발한다. 집단의 논리는 집단에게 이익이 되는 노리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집단 전체에게 골고루 이익을 주지 않는다. 집단 논리의 가장 큰 수혜자는 대개 지도칭이다. 그들의 이익이 집단 전체의 이익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집단의 논리는 보다 고차원적인 도덕적 규범으로 포장된다. 예를 들어, 국가의 이익은 애국의 이름으로, 종교 집단의 이익은 순교의 이름으로, 사회의 이익은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된다.

집단의 논리는 공적 이익의 논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사적 이익의 논리보다는 도덕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그러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논리는 범인류적 차원에서 보면 비도덕적으로 보인다. 집단을 위한 헌신과 희생도 범인류적 차원에서 보면 우스워 보이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익의 논리'는 그것이 개인을 위한 것이건 집단을 위한 것이건 아무리 그럴싸히게 포장되어도 그 본질은 유치한 것이다. 남과 우리를 가르고, 그에 따른 차별과 배제의 원리를 기본으로 삼기 때문이다.  104


애개 개인의 가치관은 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이 생산해내는 집단 이익 논리들이 내재적으로 수용된 결과이기 십상이다. 그것은 개인의 자율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특별한 지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많은 파괴와 억압, 폭력적 현상 배후에는 집단의 논리에 기반을 둔 '집단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 개념 중에 (被投)'라는 것이 있다. '내던져짐'이라는 뜻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들이다. 자기 의지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날 국가, 가문,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그 선택은 운명적이다. 그리고 인간은 태어나면서 속하게 된 집단이 생산한 논리를 지속적으로 학습하며 성장한다. 학습된 집단의 논리는 어릴 때부터 익숙하다. 그런 까닭에 그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는 쉽지 않다. 그것을 대상화하고 낯설게 바라보는 것이 훨씬 지성적인 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사회에는 집단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각종 제도적 장치들이 있다. 이 또한 집단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어렵게 만든다. 예를 들어, 국가는 각종 작위와 지위, 메달, 휘장, 훈장 등의 서훈 체계를 통해 청성 경쟁을 유발시킨다. 또한 국기, 국립묘지, 국가 유공자, 국민의례, 기념일, 기념행사, 어용 예술 작품, 동상, 기념관, 박물관, 정부가 발행하는 출판물 등 다양한 명예 상징을 통해 압도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들은 자연스럽게 개인들을 국가 중심의 사고와 감정에 젖게 한다.  105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지적 탁월성의 본래적 의미는 비판 정신이며 지적 독립성이다"라고 말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권력과 지성인>에서 "권력에 흡수되거나 고용디지 않고 언제나 주변에 머물러야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지성인이 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모두 지성인의 독립성을 강조한 말들이다.  106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 의해 생산되는 논리를 자신의 신념으로 알고 산다. 그러나 그것은 난센스다. 왜냐하면 신념이란 자신이 이성적 판단으로 '선택'한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이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해 이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고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릴 때부터 학습된 자기 집단의 논리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 그러니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는 학습된 집단의 논리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보거나 판단해보지 않았다. 결국 그것은 신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107


'깊이 파려면 넓게 파야 한다'

깊이와 넓이는 상반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둘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넓게 파야 깊이 팔 수 있고, 깊이 파기 위해서는 넓게 파야 한다.  108


의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인간의 몸을 공부하면서 인간의 몸 역시 여러 생물의 진화와 그들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파생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다 보면 생물학에 대한 관심이 생길 수 있다. 생물학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의 탄생과 진화는 지구 환경의 변화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 생태학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인간의 몸의 변화가 심리 변화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 심리학으로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심리학에 대한 관심은 인간 심리의 한 양태로서의 종교로 확대될 수 있고, 종교의 탄생과 변화가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한 것으로 건너갈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공부해 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다방면에 걸쳐 많이 아는 사람)가 된다.

인문적 사유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내부에서 생겨나는 지적 호기심을 억제하지 말아야 한다. 궁금증과 지식은 상호 촉진 관계에 있다. 흔히 사람들은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더 이상 궁금한 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반대다. 대개는 아는 것이 많을수록 궁금한 것이 더 많아진다. 인간에게는 '지적 공백을 메우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알기 힘들다. 그래서 궁금증도 잘 생기지 않는다. 반면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아, 내가 이것을 미처 모르고 있었구나!'하고 느끼게 되고, 그 '지적 공백'을 마저 채워 넣으려 한다.  110-111


인간은 제너럴리스트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분업화된 시스템은 인간이 가진 제너럴리스트적 역량을 발휘하기 힘들게 한다. 분업화된 시스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의 기능인으로 존재한다.

많은 현대인들은 자신이 맡은 한 가지 일만 한다. 그러면서 돈만 번다.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나머지 일들은 돈으로 물건을 삼으로써, 혹은 돈을 지불하고 다른 전문가들에게 맡김으로서 해결하려 한다. (심지어 돈만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문제들, 예를 들어 정서적 유대가 핵심인 가정 문제나 양육 문제까지도 그러하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다양한 능력을 이용해 직접 무엇을 하지 않는다. 대신 남에게 맡긴다. 그결과 노동의 기쁨도 상실되고, 주체적 책임도 상실되며, 의존성은 강화된다. 또한 자기 소외가 증대되며, 실존적 무력감도 증대되고, 육체와 정신의 균형 파괴에 따른 건강도 상실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113


틀에 박힌 사고를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는 활력을 잃을 뿐 아니라, 더욱 진보하지 못한다.

진부한 표현이나 사고를 이른바 '클리셰(cliche)'라고 한다. 클리셰가 문제가 되는 것은 식상함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클리셰는 진실을 은폐한다. 그래서 우리는 클리셰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사고를 하는 데는 나름대로 노하우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비단 노하우의 문제만은 아니다. 새로운 사고에는 세상을 바라고는 그 나름의 고유한 시각이 투영되어 있다. 그것은 가치관의 문제다...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갖는 기본적인 특징이 있다. 바로 스스로 '실감'하기 전에는 함부로 믿지 않는 지적 태도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이가 '이 말은 옳다'고 떠들어도 '과연 그럴까?', '왜 그렇게 되었을까?'하고 자문해본다. '과연 그럴까?'는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명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따져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철학적 태도를 갖는 일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는 명제가 옳은 것으로 여겨지는 '현실적인 이유'를 따져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말을 처음 한 사람이 누구이며, 그는 어떤 경로를 통해 지적 권위를 획득했으며, 그 지적 권위가 어떻게 그것을 정당화시켰으며, 어떤 정치 경제적 여건이 그 말을 옳은 것으로 만들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사회과학적 태도다. 창의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태도와 사회과학적 태도가 필요하다.  114-115


브레인스토밍(Brainstoming)기법도 규칙적인 사고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 기법은 '스캠퍼(SCAMPER)'라고 불린다.

대체하기(Substitute), 조합하기(Combine), 적용시키기(Adapt), 변형하기(Modify), 다른 용도로 써보기(Put to order use), 삭제하기(Eliminate), 역발상 해보기(Reverse)의 일곱 가지 단어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115


몸이 아픈 어떤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몸의 병을 알아내기 위해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의사들은 몸에 물리적인 이상이 없어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소견을 보였다. 고통은 있는데 그 원인을 알 수 없다니! 여인은 속을 끓이며 마지막으로 어떤 의사를 찾아갔다. 그 의사 역시 물리적인 원인을 찾아낼 수는 없었지만 대화를 통해 여인에게서 특이한 사항을 발견했다. 여인은 어떠한 삶의 의욕도, 생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의사는 그것을 병의 원인으로 보고 '우울증'이라 이름 붙였다. '우울증'이 탄생하는 순간이엇다. 병명이 생긴 뒤, 의료계는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음을 발견했고, 치료약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던 많은 사람들은 그제야 '가짜 환자'라는 오명을 벗고 비로소 치료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말과 인식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무엇이 실존하더라도 그것을 일컫는 이름이 없으면 우리에게 잘 인식되지 않는다.

말이 우리 인식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말이 있어야 우리는 그것을 인식한다. 말이 갖는 이미지와 상징, 뉘앙스는 대상을 인식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말을 사유의 수단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말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언어 전체 혹은 특정 낱말에 대해 철학적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 말은 우리의 인식을 대상에 이르게 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대상을 인식하게 해주는 매개인 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121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으면, 보이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사과는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햇볕, 바람, 이슬, 안개, 비, 흙의 작용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인식하기는 어렵다. 인문적 사유가 어려운 것도 눈에 보이는 것(현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본질)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사물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영어로 '메타피직스(Metaphysics, 형이상학)'라고 한다. 여기에도 같은 논리가 포함되어 있다. 그 어원은 '메타피지카(Metaphysica)'로서 '뒤, 다음, 배후'라는 뜻을 가진 '메타(meta)'와 '자연'이라는 뜻의 '피지카(physica)'의 합성어다. '피지카'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즉 형체가 있는 것을 말한다. '메타피지카'는 '자연의 배후'라는 뜻이다. '메타피직스'는 자연을 잘 관찰해야 그 뒤에 숨어 있는 본질-형체가 없는-에 대한 이해가 따라온다는 논리를 내포한다.

이러한 논리는 동양에도 있다.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가 그것이다. '격물치지'에서 '격(格)'은 '잣대로 잰다'는 뜻이다. 직역하면 '사물을 잣대로 재면 앎에 이른다'가 된다. '사물을 잣대로잰다'는 말은 '사물을 잘 살펴서 꼼꼼히 따져보고 분석한다'는 의미다. '메타피직스'와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사물을 잘 관찰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지식(앎)으로 나아간다는 논리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서양의 논리가 같은 것이다.  126


문제의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그 과정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127


"물에 대해 가장 잘 모르는 것은 물속에 사는 물고기"라는 말이 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조건을 인식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이다.  131


나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적응'의 문제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매우 뛰어난 동물이다. 그런데 이 '적응'이 묘한 문제를 일으킨다. 의식적인 존재인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합리성을 부여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회 환경에 적응하면 그 환경을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사회나 집단에 '적응'한다는 것은, 그 질서, 논리, 체제, 문화 등을 내면화한다는 것을 말한다. 환경이 불합리하더라도 그것을 내면화하는 데 성공하면 비판적 의식이 줄어든다.

보통, 뛰어난 적응력은 생존에 유리한 장점이라고만 생각된다. 자연 환경에 대한 적응력은 분명 그런 측면이 크다. 그러나 사회 환경에 대한 뛰어난 적응력은 보다 신중하게 생각될 필요가 있다. 자칫 잘못하면 자승자박(自繩自縛)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의 경제 시스템은 전무후무한 규모로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는데, 모든 사람이 이 시스템에 성실히 적응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른 생물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물론 인류의 자멸을 초래할 것이다.

환경은 인간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해 그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환경과 조건 자체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심지어 혁명기에도 마찬가지다. 혁명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폭동이나 봉기에 가담하지만, '환경과 조건 자체를 변화시키겠다'는 명확한 목표 의식을 갖고 행동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현실적 고통, 특히 경제적 고통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혁명에 일조하게 된다.  132


인간은 적응력이 높은 동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는 사회 환경의 진화를 못 따라가고 있다. 생물학적 진화는 점진적이지만 사회 환경의 진화는 급진적이기 때문이다. 그 격차는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134


우리는 누군가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할 때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전에 그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그 환경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그것은 인문적 사유에서 매우 중요하다. 환경과 조건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자기 자신, 인간, 사회의 본질을 비로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과 조건은 현상의 배후이자 토대다. 현상의 본질을 꿰뚫기 위해서는 반드시 환경과 조건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  136




2부 공감(共感) - 남의 글에서 내 생각을 발견하는 독서 내공


'생기'란 '살아 있다는 느낌'이다. 모든 인간은 살아 있는 한 '생기'를 추구한다. 만약 살아 있어도 생기를 하나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생기'는 삶의 필수요소이며 쾌락의 원천이다. 생기를 충족시키는 방식에는 '극단적인 방식'과 '중용적인 방식'이 있다. 극단적인 방식에는 폭식, 과도한 성행위, 음란물 중독, 게임 중독,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도박 중독, 쇼핑 중독, 일중독, 폭력, 살인, 권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 같은 것이 있다. 중용적인 방식에는 적당한 운동과 노동, 음식과 섹스의 절제, 문학 예술을 감상하거나 창조하는 것 등이 있다.

극단적인 방식은 일시적으로 삶에 큰 생기를 부여하지만, 그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사람을 불행과 죽음으로 몰아가곤 한다. 그러나 중용적인 방식은 반대다. 쾌감의 크기는 작지만, 육체와 정신을 풍요롭게 만들고, 삶을 건강하게 유지시켜준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우선 책을 읽어야 하는 개인적 이유를 보자. 개인적인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독서는 경험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다. 중국의 비평가 린위탕은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 독서하지 않는 사람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자기 하나만의 세계에 감금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이라도 손에 책을 들면 별천지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세계에 대한 시야가 넓게 트이지 않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전부인 줄 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무엇을 경험했기 때문에 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험했다고 해서 아는 것은 아니다.  141-142


경험이 곧 앎이 되지 않는 것은, 경험이 해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험이 글이 되기 위해서는, '그 경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것을 어떤 형식으로 써야 메시지가 잘 전달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내 경험을 남의 경험처럼 냉정하게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경험에서 사회적 의미가 생겨나고, 비로소 글이 된다. 경험 자체가 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해석된 경험만이 글이 된다.  144


책을 읽어야 하는 개인적인 이유 두번째는, 독서가 개인을 심미적 존재(아름다운 존재), 철학적 존재(사유하는 존재), 도덕적 존재(양심적인 존재)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145


독서는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실존적 요구를 충족시킨다. 독서는 기본적으로 이 요구에 부합해야 하고, 그래야 열정적인 독서가 지속된다.  146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고요하게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혼자 집에 있을 때에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틀어놓는다. 젊은이들은 컴퓨터나 모바일로 게임에 열중한다. 소음도 중독된다. 그렇게 시끄럽게 있다가 전자제품들을 끄고 책을 읽으려 하면 뭔가 허전하고 막막한 기분이 들면서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람이 고요하게 있는것은 중요하다. 그럴 때 사람은 자신과 대면하고, 타인과 세상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남들이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럴 때 뇌는 활발하게 움직인다.  156


독서를 하기는 쉽지만, 열정적인 독서를 지속하기란 쉽지 않다. 열정적인 독서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지적인 자극을 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책과 연관된 문화생활을 할 필요가 있다.  157


자신의 내적 욕구에 충실한 독서란 우선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책을 보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호기심이 왕성한 동물이다. 자신의 호기심에 맞는 책을 읽으면 누구나 즐겁게 독서할 수 있다. 그래야 열정적인 독서도 가능해진다. 또 하나는 자기 삶의 문제와 연관된 독서를 하는 것이다.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다. 인생은 그 문제들을 해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럴 때 독서를 통해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라. 그러면 자연스럽게 열정적인 독서가 된다. 자기 문제와 관련된 문제를 다룬 책을 읽을 때와 달리 책의 내용들이 머릿속으로 쏙쏙 잘 들어올 것이다. 여기에 열정적인 독서의 열쇠가 있다.  161-162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나'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나는 세상이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다. 내 안에는 나 자신에 대한 이미지와 세상에 대한 이미지가 함께 들어 있다. 그러므로 세상이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인 나 자신에 대한 관심과 성찰은 매우 중요하다.  163


독서는 단지 저자의 생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독서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발견하는 것이다. 진정한 독서가에게 모든 책은 참고 문헌일 뿐이다. 독서의 궁극적인 목적은 책에 있는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자기 내부의 텍스트를 발견하는 데 있다.

우리는 흔히 "몰입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몰입을 '매몰'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진정한 몰입에는 주체의의지가 살아 있다. 그래서 책의 내용에 빠져 들었다가도 자신이 원할 때는 언제든지 그로부터 빠져나와 "이 말이 맞나?"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거나, 내용과 관련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것을 말한다.  164


'매몰의 독서'는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기에만 급급해 아무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165


무릇 책은 평가하고 질문하며 읽어야 한다.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가? 첫째, 저자의 주장이 타당한지를 물으며 읽어야 한다. 그 타당성은 저자의 논리와 근거가 적절한지를 살펴봄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 둘째, 그 반대의 주장은 말이 안 되는지, 혹은 예외는 없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반대의 주장과 예외는 책에 기술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이것은 책에 없는 내용을 생각하고 검토하는 것이 된다. 셋째, 저자의 주장이 우리 사회의 현실, 혹은 나의 현실에 맞는가를 물어봐야 한다. 이 역시 책에 기술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아무리 저자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에 적용될 수 없으면 곤란하다.  165-166


거칠게 구분하자면, 지적 도약은 세 단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첫 번째 단계는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신의 내적 욕구를 잘 들여다보고 그에 맞는 책을 읽을 때다. 이때, 사람들은 독서가 주는 지적 희열을 맛보게 되고, 그에 따라 열정적으로 책을 읽게 됨으로써 최초의 지적 도약을 이루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꾸준한 독서를 통해 주요 고전의 내용을 이해하게 될 때다. 이를 기점으로 지식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논의를 모두 이해하는 지적 도약을 이루게 된다. 세 번째 단계는 독립적인 연구와 조사, 분석과 종합을 통해 여러 지적 논의에 대해 가치판단을 내리 수 있게 될 때다. 이것이 지성인으로 진입하는 단계다.  171-172


좋아하는 작가의 전작을 읽는 것, 좋아하는 작가가 자주 참고하는 저자의 책을 읽는 것, 같은 주제의 책을 잇달아 읽는 것, 이 세 가지 방법이 '네트워크 독서법'이다. 한마디로 '네트워크 독서법'이란 서로 관련 이쓴 책을 잇달아 읽는 것을 말한다.  185




3부 공명(共鳴) - 세상과 나 사이에 울림을 만드는 글쓰기 내공


신중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을 표현해도 좋은가, 어떻게 표현하면 좋은가'하고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글쓰기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오히려 글을 씀으로써 모호하던 생각들이 뚜렷해지고 섬세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글을 쓰는 과정 자체가 치밀한 생각들을 만들어낸다는 말이다.  194


글쓰기와 사유 능력의 발전은 상호 촉진 관계에 잇다. 글쓰기를 하면 사유 능력이 발달하고, 사유 능력이 발달하면 글쓰기를 더 잘할 수 있다.  195


유시민이 한 말로 기억한다. "마당발 치고 지적인 사람이 드물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지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많이 생각하고 읽고 써봐야 하는데. 이 세 가지는 모두 혼자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성인은 늘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저런 사람(집단)들과 친교 맺기를 좋아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을 마음껏 비판할 수 없게 된다.

글쓰기도 어느 정도 고립을 요구한다.  197


지적으로 살려는 사람은 기꺼이 홀로 있을 수 있어야 하고, 홀로 있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지성인이란 스스로를 고립시킴으로써 소통하는 사람이고, 소통하면서도 세상의 모든 것과 거리를 두는 사람이다.  198


롤랑 바르트는 "글쓰기란 하얀 종이 위에 저자의 순수한 의도가 지나가는 길이 아니며, 저자와 독자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정치, 경제적 사건이다.

C. W. 밀즈는 이런 말을 했다. "학자들이 글을 쉽고 명료하게 쓰지 않는 것은 주제의 복잡성이나 사고의 심오함과는 무관하며 자신의 지위를 걱정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학자들이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은 , 그것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높이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물론 주제 중에는 쉽게 쓰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특히 철학적인 주제들이 그렇다. 그러나 학자들이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폼'나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은 정직한 고백에 가까우며, 글쓰기에 대한 신비적 색채를 거두어준다.  199


실제로 자신의 생활 관리에 성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작가의 성공 여부에 결정적인 요소다. 시간 관리에 실패하면 무절제하고 방탕하게 생활하게 된다.

작가로 성공하고 싶다면 시간 관리에 철저해야 하며, 금욕적으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책 읽고, 생각하고, 글 쓰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지적 도약이 이루어지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다. 지적 도약은 흔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거기에도 감수해야 할 것은 있다. 바로 세속적인 즐거움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전에는 재미있고 즐겁게만 생각되던 대화나 오락 거리들이 유치하고 시답잖게 느껴질 수 있다. 지적 발전이 이루어질수록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는 깊어진다. 그러나 그만큼 더 인간과 사회를 거리를 두고 보게 된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보통 사람드로가 더 멀리 떨어진다는 것, 심리적으로는 더 고독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204-205


글이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글이 창의적인 시각을 담고 있는 경우다. 창의적인 시각이란 지배적인 시각, 전통적인 시각과 다른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글을 읽을 때 독자는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의 뿌리, 생각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둘째, 이전의 글들보다 새롭거나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다. 외국의 최신 동향이나 최근의 연구 결과를 빨리 소개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혹은 오래된 정보라도 잘 알렺지 않았던 것이면 가치가 있다.

셋째,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들을 대비시켜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경우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과 오늘날의 사건과 인물을 대비시킴으로써, 외국과 우리 사회를 비교함으로써 일정한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것이다. 혹은 오래된 역사적 사건과 오늘날의 사건을 비교해 이해시키는 것도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이런 방식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일들을 낯설게 보게 하고, 우리 사회의 특징을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시킨다.

넷째, 결과만 알려진 것의 '과정'을 면밀하게 폭로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이미 알려진 사건이 나중에 소설화되고 영화화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새삼스럽게 그 사건에 대해 다른 생각과 느낌을 갖게 된다. 대개 사건의 본질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그러므로 글을 통해서 사건의 과정을 잘 검토하는 것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돕는다.

다섯째,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이나 인물, 주제에 관해 깊이 있게 설명해주는 경우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월터 리프먼은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비슷하게 생각할 때, 아무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만큼 습득한 지식의 양은 적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다 알고 있는 것이라도 '그것이 이런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 독자들은 흥미를 느낀다.

여섯째, 기존의 메시지를 감각적인 글쓰기를 통해 정서적 설득력을 갖게 하는 경우다. 트깋 기존의 글이 이성적 설득을 하는 데 그쳤다면 이러한 전략은 유효할 수 있다. 어렵게 쓰인 인문적 메시지를 수필이나 소설 같은 문학적 글쓰기로 변용시켜 전달한다면 많은 독자들이 재미있고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08-209


처흠은 쉽게 시작해서 나중은 어렵게 끝나야 한다. 이 원칙을 구현하는 전술은 다음과 같다.

첫째, 흥미로운 것에서 따분한 것으로 써 나간다. 글을 흥미로운 것으로 시작하면 독자의 주의를 끌 수 있어 선택 받기 쉽다. 여기서 '따분한 것'이란 식상하거나 고리타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애매모호한 것,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설명하기 까다로운 것을 의미한다.

둘째, 개인적인 것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써 나간다. 개인적인 양상은 사회적인 양상의 일부이며 실례다. 그러나 개인적인 양상은 이야기로 되어 있어서 사회적인 양상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 개인적인 예로 글을 시작하면 독자들의 정서적 공감을 얻기도 쉽다.

셋째,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써 나간다. 구체적인 사회적 사건이나 역사적 사건 혹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 그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철학적 담론 같은 추상적인 내용을 나중에 쓴다. 그러면 역시 독자들이 부담 없이 글을 읽기 시작할 것이다.  210-211


어디서 좋은 글감을 발견할 수 있을까?

첫째, 남에게 받은 질문이나 대화에서 글감을 발견한다. 우리는 늘 타인과 대화하며 산다. 그리고 그러한 대화에는 심리적 사회적 철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말을 하는가?', '나는 왜 이런 주장을 하는가?', '그 말은 어떤 논리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가?', '그 논리는 어떤 권력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가?' 같은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타인들과 대화, 그리고 타인과 나의 대화를 잘 곱씹어보면 많은 글감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 지배적인 견해에 의문을 제기해 본다. 인류의 정신사는 지배적인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 의해 풍부해져왔다. 지배적인 견해는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견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견해를 받아들이게 된 과정의 중심에는 대개 권력의 작용이 있다. 또한 그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렇게 보면 지배적인 견해라는 것도 별것 아니다. 그런 새악을 갖고 늘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셋째, 자신이 갖고 잇는 불만과 바람,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불만과 바람에 귀 기울인다. 예를 들어,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초기 자본주의에 대한 불만과 바람이 글이 된 경우다. 초기 자본주의사회에서 나타난 농민과 노동자의 고통, 그것을 바라보는 모어의 불만, 그리고 그것이 극복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 그 바람은 이상적인 사회상을 통해 제시된다 - 글의 모티프였다. 인문적 글쓰기는 비판적 글쓰기이고, 그것은 사회적 불만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가 갖고 있는 사회적 불만은 인문적 글쓰기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넷째, 자신의 경험에서 글감을 찾을 수 있다. 경험은 가장 기본적인 글감의 원천이다. 자신의 경험 중에서 사회적인 의미를 지닌 것을 찾으면 좋은 글감이 될 수 있다. 경험 중에는 사회적 의미가 본래 강한 것이 있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사회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경험들이 많다.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섬세한 사유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경험을 잘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다섯째, 동서고금의 유명한 일화나 에피소드에서 글감을 찾을 수 있다. 이야기는 대중적 글쓰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쉽고 재미있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은유로 쓰기 쉽다. 그러므로 하나의 이야기로도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이용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나중에 쓰일 법한 이야기를 접하면 평소에 잘 수집해둘 필요가 있다.

여섯째, 시사적인 사건에서 글감을 발견한다. 시사적인 사건들은 사회의 여러 구조적인 문제들이 집약되고 중첩되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그것을 잘 관찰하면 사회의 본질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시사적인 사건은 두 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에피소드와 마찬가지로 대개 스토리를 갖고 있다는 점. 사회적 이슈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일곱째, 개념에서 글감을 찾는다. 항상 말이 중요하다. 개념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다. 하나의 개념은 그 자체로 일정한 관점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경제 분야에서 흔히 쓰이는 '노동의 유연화'를 보자. '노동의 유연화'는 친자본적 친 기업적 관점을 담은 말이다. 실업자, 비정규직, 인턴, 파트타임을 양산하는 '노동의 유연화'는 노동자에게 결코 '부드럽지 않다' 그것은 팍팍한 삶을 의미할 뿐이다.

이렇듯 조금만 신경을 써서 주변을 살펴보면 생각하고 쓸 것들이 널려 있다.

자세히 관찰해야 포착된다.  211-213


글도 자기 취향이나 기질에 맞게 써야 한다. 그래야 글이 잘 써지고 좋은 글도 쓸 수 있다.  215


비평가는 자기 말을 하되, 작품을 매개로 말하는 형식을 취할 뿐이다.  218


비평가는 객관적인 작품 해설이 아니라 독자들이 자신과 같은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 글을 쓴다. 그렇게 비평가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끼어들어 독자의 시선을 조작한다. 한 마디로 '관찰의 조작'이다.  219


서평 쓰기는 습작기에 있는 사람드에게 분명 용이한 측면이 있다.  221


독후감이 개인적인 '감상'을 쓰는 것이라면, 서평은 논리와 근거를 동원한 이성적 글쓰기다.

독후감이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글쓰기라면, 서평은 좀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글쓰기다.  222


서평은 독서하다가 떠오른 문제의식이 있다면 모두 글감이 될 수 있다. 텍스트를 읽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그중에 문제의식이 있으면 그것을 주제로 논리와 근거를 동원해 글을 써내면 좋은 서평이 된다.

서평도 창작이다. 자기 생각을 쓰는 것이다. 책을 매개로 한 자신의 생각과 통찰을 적는 것이다.  223


칼럼을 쓰는 것 외에 시사적 글쓰기를 하는 방법 중 하나는 독립적인 인터뷰어(interviewer, 인터뷰를 하는 사람)가 되는 것이다.  229


'인문적이면서 문학적인 글'인 인포멀 에세이는 작가의 철학과 인격, 정서가 잘 조화된 글이라 할 수 있다.  231


인포멀 에세이를 쓸 때, 중요한 것은 하나의 소재를 붙들고 파고드는 집요함이다.  233


철학적인 글쓰기에서는 암시와 비유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암시나 비유는 메시지를 명료하게 하기보다는 그것을 뭉개면서 의미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235


링컹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게 장작을 패기 위한 여덟 시간이 주어진다면 도끼를 가는 데 여섯 시간을 사용하겠다." <장자>의 [소요유]편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백 리 길으 ㄹ가려는 사람은 하룻밤 양식을 찧으면 되지만, 천 리 길을 가려는 사람은 석 달의 식량을 모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준비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을 잘 쑤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그 준비란 평소 읽은 책을 자료 삼아 정리하는 것이다.  242


자료 정리를 하면 첫째, 백지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다. 습작기에 있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어떻게 쓸까'가 아니라 '무엇을 쓸까'이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절실한데 무엇을 써야 할지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글감이 없다면 무작정 책상에 앉아 글을 쓸 일이 아니라, 자신이 인상적으로 읽은 책들을 자료 삼아 정리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책 내용 중 마음에 드는 글을 베끼고, 그 내용과 관련해 떠오른 자기 생각을 컴퓨터에 옮겨 적어야 한다.

자료 정리하는 시간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이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더 좋은 글을 쓰게 된다.  243-244


둘째, 자료 정리를 하면 자기 세계관이 치밀해진다. 글쓰기가 힘든 것은 단지 표현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거기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거이다. 이 문제 역시 자료 정리를 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어떤 책에서 마음에 드는 글을 컴퓨터에 옮겨 적을 때, 그 글의 내용은 대개 자신이 적극 동의하는 내용인 경우가 많다. (비판하기 위해 베끼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얼마 안 된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정리된 자료는 '자신이 동의하는 내용들'이 거대한 집적물이다. 그 자료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주로 무엇에 관심이 있고, 어떤 주장에 동의하는지가 명확해진다. 내가 내 생각을 명확히 알 수 있다는 말이다.  244-245


셋째, 자료를 정리하면 문장력이 좋아진다. 자료 정리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만 '베껴 쓰는' 과정이다. 베껴 쓴 이후에도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주 그 자료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좋은 문장들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입력된다. 자료 정리를 하다보면 사용하는 단어의 양이 늘고, 어휘의 개녀모가 지시성에 대한 감각이 섬세해지며, 문장과 표현이 정밀해지고, 논리적 사고 및 언어 사용 능력이 생겨난다. 심지어 문장의 리듬감까지 익힐 수 있다. 문장이 좋아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좋은 방법을 놔두고 문장력을 강화하기 위해 문법, 맞춤법을 공부하거나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책을 통째로 베끼는 사람들이 있다. 혹은 '자신의 부족한 어휘량'을 채우기 위해 사전을 외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시간 대비 효과가 낮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자료 정리'만 한 것은 없다.  245


글을 간결하게 쓰라.

첫째, 불필요한 부사를 줄여야 한다. (사실, 일반적으로, 더 이상...)

둘째, 불필요한 '형용사'를 줄여야 한다. (유명한, 오래된, 비참한...)

셋째, 불필요한 지시어를 지워야 한다. (이처럼, 그러한...)

'빼도 말이 되는지'를 본다. '빼도 말이 된다' 싶으면 되도록 빼는 것이 좋다.

넷째, 불필요한 접속사를 최대한 빼야 한다. (즉, 그리고...)  275-277


인생에는 별자리를 보는 것과 눈앞의 파도를 보는 것 둘 다 필요하다. 배가 목적지에 잘 도착하려면 그 두 과제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사회가 자본에 의해 지배 받고, 과학기술이 첨단화될수록 인문적 사유 능력은 더욱 절실해진다. 왜냐하면 자본과 과학기술은 그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방향을 정하는 것은 인문적 사유다.  315


비판적 이성이란 '왜(why)'를 묻고 답하는 이성이다. 

비판적 이성을 사용하지 않으니, 삶에 대한 확신이 없고, 정체성이나 진로 문제 같은 것을 서른 가까운 나이에도 고민하는 일종의 정신 지체 현상이 발생한다.

도구적 이성이란 '어떻게(how)'를 묻고 답하는 이성이다. '어떻게 하면 집값을 더 올릴까?', '어떻게 하면 좋은 직장에 취직할까?', '어떻게 하면 컴퓨터나 영어를 잘할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이 도구적 이성에 속한다. 비교해보면 도구적 이성보다 비판적 이성이 훨씬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비판적 이성을 사용해야 가치 지향적인 삶, 후회 없는 삶, 보람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도구적 이성에 훨씬 경도되어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보다 현대 사회의 성격 자체가 도구적이기 때문이다.  317


경제 발전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느냐'를, 가학기술의 발달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편리함을 누리느냐'를 문제 삼는다. 두 가지 모두 '어떻게'를 문제 삼는다. 거기에는 '왜 더 많은 부를 축적해야 하느냐?' 혹은 '왜 더 많은 편리함이 필요한가?'에 대한 고뇌가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도구적 이성'이다. 경제 발전과 과학기술의 발전의 맹목적 추구는 현대사회에서 압도적인 분위기와 생활 방식, 사고 방식을 만들어낸다. 그런 사회 속에서 사는 개인들 역시 도구적 이성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성의 도구화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지지 않고 곧바로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  318


여기 한 젊은이가 있다. 글에게 환경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오염되어 있었다. 그는 여러 경로를 통해 지금도 환경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는 환경 문제에 대해 별다른 감각이 없다.그는 애초부터 좋은 환경 속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평생 환경의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오염된 환경은 가장 익숙한 환경이다. 그런 그가 환경의 위기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경계하며 살기란 쉽지 않다.

마르크스는 "그들은 자신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환경 문제에 관한 한, 독일의 이론가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말이 더 옳아 보인다. 그는 마르크스의 말을 이렇게 바꾸었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잘 알지만, 여전히 그렇게 행동한다."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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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도전은 산소다!

마음의 비계


'래디컬'하다고 하면 '급진적'이란 의미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래디컬'의 라틴어적 본래 의미는 '뿌리를 건드린다'는 뜻이다. 뿌리를 건드리면 아프다. 하지만 정신차려서 자신을 직시하고 자기 실존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더 먼 길을 제대로 가려면 오히려 어느 정도의 정지와 멈춤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몸이 먼저 늙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늙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의 건강검진은 받아도 마음의 건강검진은 받아볼 생각조차 안 한다.


인생의 산소는 크고 작은 도전에서 나온다. 도전하면 스스로 삶의 산소를 만들 수 있다. 삶의 산소가 있으면 그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호흡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 걸음으로 갈 수 있고 진짜 자기 삶을 살 수 있다. 그게 애써 도전해야 하는 이유다.


도전하는 만큼 삶은 달라진다. 시들해가던 중년의 사내가 '산티아고 가는 길' 900여 킬로미터를 걷고 와서 다시 도전을 말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5-9



떠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떠날지는 정하지 못했다. 그저 떠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엇다. 이 '무작정'이란 게 무서운거다. 스스로를 백지상태로 만들어놓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후 차츰 무엇을 향해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 문득 떠오른 것이 '산티아고 가는 길'이었다. 언젠가 스쳐지나가듯 본 책을 통해 천 년 넘게 사람들이 걸어간 순례길이라는 것 정도만 알았지 그 길에 대한 정보 역시 말 그대로 백지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그 백지상태라는 것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앞고 가는 길은 재미없다. 모르고 가서 부딪치는 것이 진짜다.

그냥 '뚝' 끊고 떠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18



덜어내고 털어내고 비워낸다 해서 

사람이 가져야 할 멋을 잃게 되거나 

삶의 맛이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의 멋, 삶의 맛은 '채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되레 '비움'에서 오기 때문이다.  21



털어야 할 대목에서 털지 못하면 우리네 인생배낭은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차버린다.

우리 인생길이 힘겨운 진짜 이유는 그런 잡동사니를 버리지 않고 인생배낭에 꾸역꾸역 구겨넣은 채 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미련, 후회, 회한, 미움, 증오, 시기 등의 찌꺼기 같은 잡동사니를 버리고 소망, 꿈, 도전, 화해, 사랑, 모험을 담아 자기의 인생배낭을 다시 꾸려야 하지 않겠나.  23


일단 짐을 덜어내기로 마음을 고쳐먹으면,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가를 치열하리만큼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비로소 깨닫게 된다. 진짜 꼭 필요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24


장 지오노가 <나무를 심은 사람>에서 말했듯이 "사람은 희망을 가져야만 일할 수 있다." 

자기 안의 또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희망이 있을 때 그래서 '어제와 다른 나', '오늘과 다른 내일'을 만들 희망에 차 있을 때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45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가 걸어온 길은 결코 잘 닦인 아스팔트길이 아니었다. 자갈밭 아니면 진창길이었다.  57


인생은 화살표만 따라가는 길이 결코 아니다. 대개의 인생길 위에는 화살표도 없고 그것을 표시해주는 지도도 없다. 오직 내 안의 자기만의 방향감각만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뿐이다. 바로 그 자기만의 방향감각이 곧 내 안의 나침반인 셈이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 돈키호테  87



인생은 때로 미쳐야 해. 우리는 너무 안 미치는 게 탈이야.  89


지미 카터는 "인생이란 점점 확대되는 것이지 축소되는 것이 아니다."  97


내버려둔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쓸데없이 분주한 것은 내버려두기를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쓸데없이 분주한 까닭 뒤에는 어김없이 '불안'이란 것이 도사리고 있다. 자기 안의 불안을 떨치려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경우가 태반니다. 스스로를 내버려둘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그 불안에서 한 발 비켜 있을 때 가능하다. 아니 그 불안에서 벗어나 있을 때 비로소 내버려두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애일(愛日)'이란 말이 머리에 스쳤다. 사랑'애(愛)' 날'일(日)', 말 그대로 '하루하루를 아끼고 사랑하라'는 의미가 담긴 말이다. 본래는 늙은 부모가 오래오래 사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정말이지 남은 하루하루가 아깝다는 뜻을 담아 '애일'이라 한 것이지만 오늘에 와서는 하루 하루 지나는 그 시간이 참으로 아까우니 제대로 시간을 잘 쓰라는 뜻으로 더 많이 통한다.  122


감동은 작은 데서 나오나 세상을 움직일 만큼 커진다.



한쪽에서 또다른 한쪽으로 

기울며 흐르는 게 사랑이다

'기우뚱한 균형'을 잡아가는 것 

그것이 사랑 아닐까 싶다.  137


본래 사랑은 평등하지 않다. 꼭 균형이 맞지도 않다. 왠지 기우뚱한 것처럼 보이기 일수인 것이 사랑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도 밑질 것 없어 보이는 사이는 사랑이 아니다. 그건 자칫 거래다. 둘 사이가 어느 쪽으론가 기울어야 사랑이다. 기우는 쪽으로 사랑은 흐른다. 

살다보면 기우는 방향이 정반대로 바뀌기도 한다. 

그러면서 '기우뚱한 균형'을 잡아가는 것! 그것이 사랑 아닐까 싶다.  139-140


음식은 사람과 사람을 자연스럽게 이이주고 통하게 만든다.  153


우리는 늘 착각한다.  181



인생 레이스는 속도 경재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는 것이다.  


인생 레이스의 7가지 원칙

제1원칙은 '자기 페이스를 잃지 말라'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그 누구나 인생 레이스에 임하는 나름의 주법 혹은 보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떤 이는 보폭을 크게 하며 초반부터 전력 질주를 한다. 옆에 있는 사람들도 덩달이 속도를 낸다. 하지만 그 중 8할은 중도에서 주저앉는다. 자기 페이스를 잃었기 때문이다. 주법 혹은 보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주법 혹은 보법이든 최고의 인생 레이스를 펼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는 것'이다.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는다는 것은 오버 페이스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페이스가 뭔지조차 모르고 인생 레이스에 임하낟. 자기 강점이 무너지, 자신의 최고 속도는 얼마인지, 자신의 지구력은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옆에서 보폭을 넓혀 빨리 달려나가면 엉겹결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죽자살자 따라붙는다. 그러곤 팔진해 풀썩 주저앉기 일쑤다. 그러니 인생 레이스의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는 것이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겆는 것에서도 마찬가지다.

인생 레이스의 제2원칙은 '구간기록을 체크하라'는 것이다. 인생 레이스는 길다. 결코 짧지 않다. 한숨에 달려갈 길이 아니다. 레이스 전체를 머릿속에 큰 그림으로 그릴 필요는 잇지만 정작 뛰거나 걸을때는 전체 구간을 토막내서 한 구간 한 구간씩 차근차근 나아간다는 기분으로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 속에서 지레 주눅 들고 힘겨워하며 또다디 포기하고 싶은 심정에 풀썩 주저앉기 십상히다. 그래서 인생 레이스엔 스스로 구간 설정을 할 필요가 있다. 사람과 형편에 누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그 구간에서 펼친 레이스의 기록을 꼼꼼히 체크해야 한다. 왜 하냐고? 미래를 위해서다! 그 기록에는 성취와 성공만이 아니라 실수와 실패도 담겨 있기 마련이다. 성취와 성공의 기록은 뿌듯한 것이지만 정작 인생 레이스를 펼친 기억이 아니라 실수하고 실패했던 것의 아픈 교훈들이다. 그 실수와 실패의 아픈 경험들을 기억하고 기록해야 미래를 대비하고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 레이스의 제3원칙은 '이미 지난 레이스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생 레이스를 펼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경험하는 것이 있다. 이미 지난 구간의 레이스에 집착하면 지금 하는 레이스를 망친다는 사실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 지금부터가 더 중요하다. 시선은 앞을 보면서 정작 생각은 발뒤꿈치에 잡혀 있다면 제대로 나아갈 수 없다. 앞서 달린 구간기록을 체크하는 것은 과거에 연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늘 그리고 미래에 더 잘 뛰기 위해서다. 그러니 이미 지난 레이스에 집착하지 마라. 지금 하고 있는 레이스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나아갈 수 있고 또 이길 수 있다.

인생 레이스의 제4원칙은 '길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생 레이스를 펼치다보면 연도에 선 사람들의 시선을 벗어나기 어렵다. 다름아닌 내 주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때론 그들의 관심과 격려, 박수와 환호 그리고 미소와 칭찬이 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반대로 손가락질을 받거나 야유와 험담을 들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자칫 길가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다보면 오버 페이스를 하거나 아예 발이 꼬여 넘어지기 쉽다. 그러니 레이스를 펼칠 때는 길가의 시선과 주위의 시선을 넘어서야 한다. 너무 의식하지 마라. 아니 그 시선으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라. 그래야 제대로 뛸 수 있다.

인생 레이스의 제5원칙은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 레이스를 펼치라'는 것이다. 인생 레이스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지금 왜 이렇게 힘들여서 뛰고 걸으며 가고 있는 거지?'하는 회의가 갑자기 봇물 터지듯 몰려올 때가 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때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자신이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 이 인생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는 것이다. 아무리 힘든 레이스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을 생각하면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그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는 인생 레이스를 뛰는 각자의 사람들이 잘 안다. 아니 느낀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다. 가족이다. 아이들과 아내다. 

인생 레이스의 제6원칙은 '상대를 보지 말고 목표를 보고 나아가라'는 것이다. 토끼와 거북이의 레이스를 알 것이다. 빠른 토끼가 느린 거북이에게 진 이유는 간단하다. 거북이는 산등성이의 깃발, 곧 목표만을 보고 나아갔고 토끼는 상대인 거북이만 보고 뛰었기 때문이다. 토끼는 빨리 내달렸지만 어느 지점에 가서 뒤처져 오는 거북이를 보고는 풀섶에 들어가 잤다. 물론 잘 수도 있다. 하지만 토끼는 어디를 가겠다는 목표보다 뒤에 오는 상대인 거북이만 본 것이다. 반면에 거북이는 느렸지만 계속 전진했다. 풀섶에서 자고 있는 토끼도 힐끗 봤다. 하지만 거북이는 상대인 토끼를 보고 멈추지 않았다. 그는 상등성이의 깃발, 곧 목표를 보고 계속 나아갔다. '상대'를 보는 사람이 '목표'를 보는 사람을 이길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인생 레이스에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기는 사람은 목표를 보고 나아가는 사람이지 상대만 보고 멈추는 사람이 아니다.  

인생 레이스의 제7원칙은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달리라'는 것이다. 제아무리 훌륭한 주법과 보법을 구사하고, 구간기록이 좋으지라도 결승점에 골인하지 않으면 모든 게 허사다. 그래서 최고의 인생 레이스는 완주(完走)하는 것이다. 기록이 좀 나빠도 괜찮다. 어차피 빠르나 늦으나 그것은 기록일 뿐이고 인생 대사엔 별 상관 없는 일이다. 기록상 1등이든 꼴등이든 인생의 마지막 종착점에서는 똑같다. 적어도 인생 레이스를 완주한 사람들은 모두 뭔가를 이뤄낸 것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그러니 속도상의 빠름과 느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포기했느냐 오나주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어던 경우에도 포기하지 마라.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끝까지 가라. 그게 인생 레이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인생 레이스는 속도 경쟁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산티아고 가는 길은 인생 레이스를 닮았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생 사에서도 남보다 빨리 가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10년 빨리 출세하면 10년 빨리 놀게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자기 페이스를 알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다. 느리면 어떠하랴. 그것이 자기 걸음이라면 느린 것이 아니라 적당한 거다. 남들이 한 달에 걷는다는 길을 나는 두 달 걸려 걷는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서 나는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행복했다. 그러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닐까. 인생사도 마찬가지다. 애써 서두르지 마라. 자기만의 속도, 자기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라. 그리고 때로 멈출지언정 결코 포기하지는 마라. 그 걸음으로 꾸준히 가는 거다. 그게 자달 중요하고 제일 무서운 거다.  189-193



나는 탭을 열어 글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었다. 얼굴은 탭으로 가렸지만 바닥에 떨어지는 눈물은 가릴 수 없었다. 바닥에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감출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그때였다. 옆 테이블에 있던 알랭이 내게 다가왔다. 그러곤 여전히 울고 있던 나를 한껏 껴안아 주었다. 아무 말없이...

그러면서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누구나 힘든 거야. 하지만 괜찮아. 괜찮다구. 그냥 울고 싶을 때 울어. 남 신경 쓰지 말고." 나는 그때 확실히 느꼈다. 그도 아프다는 것을, 아니 아파봤다는 것을. 아파보지 않고는 그렇게 남의 아픔을 감싸 안을 수 없다. 아마 그도 아파봤고 울어봤기에 나를 감싸 안아 가슴 깊이 포옹해줄 수 있었던 것일 게다. 그의 지중해의 미풍 같은 미소는 그런 아픔을 모두 견뎌낸 삶의 증표였으리라.  240-241



어딘가를 둘러보고 다녀본 것은 여행(旅行)이다. 어딘가를 걸어보고 느겨본 것은 기행(紀行)이다. 하지만 그 여행과 기행을 역사 속에 담그고 시대 속에 아우르며 오늘 나의 현존 가운데 재위치시키는 것은 '생(生)의 철학'이다. 고로 이 책은 나의 철학이다. 길을 걸으며 길 위에서 녹여낸 내 생의 철학이다.  258



"덜 갖고 더 많이 존재하라."는 스콧 니어링의 좌우며도 내려노흔 삶에 걸맞다. 

노자는 그릇을 비워야 쓸모가 있다고 했다. 자고로 비워야 채울 수 있는 법이다.  271



자고로 큰 지혜는 멈춤을 알고, 작은 지식은 계략을 안다 했다.  274


'멈춤을 안다'는 뜻의 한자어 '지지(知止)'  277


'눈물의 무게'가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내 삶의 무게였다.  287


헤르만 헤세의 시 중에 <혼자>라는 시가 있다.

세상에는 

크고 작은 길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도착지는 모두가 같다.

말을 타고 갈 수도 있고, 차로 갈 수도 있고, 

둘이서 아니면 셋이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  291



"근데 왜 아빠는 그 길을 걸으려고 하는 건데?"

"어제와 다른 나를 만나고 또 어제와 다른 나를 새롭게 만들고 싶어서"다. 

'어제와 다른 나'는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그것은 날마다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날마다 차이를 만들면 언젠가는 그것이 진짜 '다름'이 된다. 그 다름은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다.  292



법정스님은 어느 해인가 길상사 봄 법화에서 행한 법문 중에서 "천지간에 꽃이지만 꽃구경만 하지 말고 나 자신은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

꽃을 피운다는 것은 생식과 생명 황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꽃을 피움으로써 식물은 자기 생명의 지속성을 보장할 수 있다. 꽃은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은 생존을 위한 진한 몸부림의 소산이다. 꽃이 피어야 그 안에 있는 암술과 수술의 수정이 가능하고 씨라는 자손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꽃을 피우느냐 못 피우느냐는 멋부리는 감상이 아니라 살아남느냐 죽어 사라지느냐의 절박한 실존의 문제인 셈이다.  



목표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그 궤적 속에서 깊이를 느끼고 그 둘레를 더듬는 의미지향적인 일이어야 마땅하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 위에서 속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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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독서목록 정리

2013. 1. 19.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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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1.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2. 조선 명문가 독서 교육법
 3. 신데렐라 맨
 4.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5. 사기1
 6. 사기2
 7. 사기3
 8. 누구나 10초 안에 살인자가 될 수 있다
 9. 정조 치세어록
10. 사기 중국을 읽는 첫 번째 코드
11. 사기 본기
12. 철학이 필요한 시간
13.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
14. 인문 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누적 14


2012년 2월

1.  (영상소설) 세 얼간이 - 라지쿠마르히라니 
 2. (나의동양고전독법) 강의 - 신영복
 3. 흑산 - 김훈
 4. 새로운기아 - 크리스티앙 
 5. 불안 - 알랭 드 보통
 6. 마음의 해부학 - 토머스 해리스 
 7. 세 얼간이 - 체탄 바갓
 8. 너를 사랑한다는 건 - 알랭 드 보통 
 9. 분노하라 - 스테판 에셀
10. 일의 기쁨과 슬픔 - 알랭 드 보통 
11. 공항에서 일주일을:히드로 다이어리 - 알랭 드 보통 
12.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 알랭 드 보통 

누적 26


2012년 3월

1. 동물원에 가기 -  알랭 드 보통

2. 읽기의 힘 듣기의 힘 - 다치바나 다카시외

3. 부자들의 대통령 - 미셀, 모니크 팽송

4. 우리는 사랑일까 - 알랭 드 보통

5. 소셜애니멀 - 데이비드 브룩스

6.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포리스트 카터

7. 청춘 표류 - 다치바나 다카시외

8. 취서만필 - 장석주

누적 34


2012년 4월

 1. 스콧 니어링 자서전 - 스콧 니어링

 2. 지식의 단련법 - 다치바나 다카시 

 3. 부메랑 - 마이클 루이스 

 4.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 다치바나 다카시 

 5. 노 임팩트 맨 - 콜린 베번

 6. 연금술사 - 파울로 코엘료 

 7. 브리다 - 파울로 코엘료 

 8. 머니볼 - 마이클 루이스 

 9. 순례자 - 파울로 코엘료 

10. 11분 - 파울로 코엘료 

11. 수레바퀴 아래서 - 헤르만 헤세

12.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 파울로 코엘료 

13. 흐르는 강물처럼 - 파울로 코엘료 

14.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공부 - 하승창외 

15. 칼의 노래1 - 김훈 

누적 49


2012년 5월

1. 칼의 노래2 - 김훈 

2. 책 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 2.0 - 이권우외

3.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 라우라 에스키벨 

4. 악마와 미스프랭 - 파울로 코엘료

5. 원전을 멈춰라 - 히로세 다카시 

6. 두근두근 내인생 - 김애란 

7. 남자들에게 - 시오노 나나미 

8.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 - 웨델베리 

누적 57


2012년 6월

1. 인간실격 - 다자이 오사무

 2. 첫사랑 - 투르게네프

 3. 떠나는 자만이 인도를 꿈꿀수 있다 - 임헌갑

 4. 인도기행 - 법정

 5.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고진하의 우파니샤드기행) - 고진하

 6. 노임팩트맨 - 콜린 베번

 7. 인도, 그 아름다운 거짓말 - 인도를 생각하는 예술인 모임

 8. 인도 신화 기행 - 차창룡

 9. 신들의 땅에서 찾은 행복한 줌 - 문윤정

10. 차도 대신 인도로 간 열여덟살 미니 - 추훈민

11. 헬로 인도(Hello India) - 강래우

12.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 - 이옥순

누적 69


2012년 7월

1. 인도이야기 - 마이클 우드

2. 이야기 인도사 - 김형준

3. 인도민화로떠나는 신화여행 - 하진희

4. 인도인과 인도문화 - 김도영

5. 내가 만난 인도인 - 김도영

6. 인도 바로보기 - 고홍근 최종찬

7. 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

8. 로맨틱 인디아 - 채유희

9.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 에크하르트 툴레

10. 천축으로 가는 좁은길 - 시미즈 잇테키

11. 인도 건축 기행 - 안영배

12. 아름다운 파괴 - 이거룡

13. 떠나라, 외로움도 그리움도 어쩔 수 없다면 - 이하람

14. 라다크의 미소를 찾아서 - 여채동

15.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 이옥순

16. 살아 있는 인도 - 아마티아 센

누적 85


2012년 8월

1. 인도에 미치다 - 이옥순

2. 2시간만에 이해하는 인도 - 시마다 다카시

3. 영혼의 순례자 - 조연현

4. 사리 속치마를 벗기다 - 오화석

5. 사랑을 알때까지 걸어가라 - 최갑수

6. 슬럼독 미리어네어 - 비카스 스와루프

7. 당분간은 나를 위해서만 - 최갑수

8. 구름 그림자와 함께 시속 3km - 최갑수

9. 잘 지내나요, 내 인생 - 최갑수

10. 인도 방랑 - 후지와라 신야

11. 불온한 신화읽기 - 박효엽

12. 인도에 관한 열일곱가지 루머 - 이상문

13. 화이트 타이거 - 아라빈드 아디가

14. 우주날개 인도에서 행복을 꿈꾸다 - 정미자

15. 행복이 오지 않으면 만나러 가야지 - 최갑수

16. 파이 이야기 - 얀 마텔

17. 맛살라 인디아 - 김승호

18. 사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 배성아

19. 복을 부르는 풍수기행 - 김두규

20. 한권으로 만나는 인도 - 이병욱

21. 인도사 108장면 - 박금표

22. 다르게 시작하고픈 욕망 서른여행 - 한지은

23. 신곡:지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

24. 여행탐구일기 - 이세미

25. 길은 학교다 - 이보라

26. 신곡:연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

27. 나한테 미안해서 비행기를 탔다 - 오영욱

28. 적절한 균형 - 로힌턴 미스트리

29. 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 - 오소희

누적 114


2012년 9월

1. 여행의 목적 - 배성아 김경민

2. 생활여행자 - 유성용

3. 황홀한 자유 - 이지상

4.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 파울로 코엘료

5. 혼자 책 읽는 시간 - 니나 상코비치

6. 신도 버린 사람들 - 나렌드라 자다브

7. 오 자히르 - 파울로 코엘료

8. 청춘의 고전 - 김성우외 9명

9. 동화독법 - 김민웅

10. 단테의 신곡 - 단테(다니구치 에리야엮음)

11. 철학의 위안 - 알랭 드 보통

누적 125


2012년 10월

1. 사바이 인도차이나 - 정숙영 

2. 사랑의기초_한남자 - 알랭 드 보통 

3. 사랑의기초_연인들 - 정이현 

4. 본성과 양육 - 매트 리들리 

5. 사랑 후에 오는 것들 - 츠지 히토나리 

6. 사랑 후에 오는 것들 - 공지영 

7. 거장처럼 써라 - 윌리엄 케인 

8. 트래블게릴라의 구석구석 Asia - 트래블게릴라 

9. 슈퍼라이터 - 이지상외 

10. 1만 시간 동안의 아시아II - 박민우

11. 굿빠이 여행자 마을 - 이민우 

누적 136


2012년 11월

1. 여행, 혹은 여행처럼 - 정혜윤 

2. 세계사를 바꾼 철학의 구라들 - 폴커 슈피어링 

3. 필사의 탐독 - 정성일 

4. 저가 항공 세계일주 - 강지준

5. 카우치 서핑으로 여행하기 - 김은지 김종현

6. 글쓰기 만보 - 안정효 

7. 원미동 사람들 - 양귀자 

8. 특별한 해외여행백서 - 정상구

9. 여행이 답해줄거야 - 박혜영

10. 히피의 여행 바이러스 - 박혜영

누적 146


2012년 12월

1. (김진애가쓰는) 인간의 조건 - 김진애

2. 연쇄 살인범의 고백 - 마르크 베네케

3.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4. 끌림 - 이병률

5. (이외수의 사랑법) 사랑외전 - 이외수

6. 나만 위로할 것 - 김동영

7. 여행의 순간 - 윤경희

8. 오랜 여행 - 한미옥

9.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거야 - 김동영

10.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 - 변종모

누적 156


2012년 완독 도서 15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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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진애가쓰는) 인간의 조건 - 김진애

2. 연쇄 살인범의 고백 - 마르크 베네케

3.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4. 끌림 - 이병률

5. (이외수의 사랑법) 사랑외전 - 이외수

6. 나만 위로할 것 - 김동영

7. 여행의 순간 - 윤경희

8. 오랜 여행 - 한미옥

9.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거야 - 김동영

10.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 - 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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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오늘 사랑을 굶지는 않으셨나요



다른 건 몰라도 사랑만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입니다.

진심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아프지도 않게 하고 슬프지도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로부터 비롯되는 생로병사, 희로애락 모두를 아무 불평 없이 굳게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대가 아침 잠에서 깨었을 때, 그대를 버리고 멀리 떠나간 사람이 다시 돌아와 그윽한 눈길로 그대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무슨 말을 하실 건가요.  14


진실로 사랑을 아는 자가 되고 싶다면 버림받은 것들에게 간직되어 있는 아름다움부터 눈여겨볼 줄 알아야 합니다.  17


그대 가슴에 꽃이 피지 않았다면 온 세상에 꽃이 핀다고 해도 아직 진정한 봄은 아닙니다.  25


비록 입에 풀칠을 못 하는 한이 있더라고, 남에게 웃음을 주는 인생이 되어야지, 남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인생이 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오래 머물러 있어야 할 것들은 일직 우리 곁을 떠나버리고, 일찍 우리 곁을 떠나버려야 할 것들은 오래 우리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 싫다고 다 버릴 수도 없고 좋다고 다 가질 수도 없겠지요. 그저 존버정신 하나로 이 겨울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겠습니다.  27


오솔길이 굽었다고 길옆에서 자라는 전나무까지 굽었던가요. 세상이 썩어 문드러졌다고 그대까지 썩어 문드러질 수는 없지요. 흐린 세상도 한순간이요 쓰린 인생도 한순간, 결국 언젠가는 평온하고 맑은 세상이 오고야 말겠지요. 그때까지 우리 함께 굳세게 존버.  30


집중력은 체내에 축적된 지방질을 분해하는 효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일에 몰두해 있는 인간의 모습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길쌈이나 가사에 몰두해 있는 여자의 모습, 노동이나 사무에 몰두해 있는 남자의 모습이 사랑을 촉발시킵니다.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가족과의 약속을 잘 지키고 가족과의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세상과의 약속도 잘 지킵니다. 사정이 어떠하더라도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상대편에게는 결례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가급적이면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

먼지는 날개가 없어도 어디든 자유롭게 날아다닙니다. 어쩌면 한 점의 먼지가 수십억 년 전에는 태산보다 큰 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먼지는 일체를 버리고 오직 한 점 먼지로만 남아 있습니다. 살다 보면 가벼움이 거룩함이 될 때도 있습니다.  37-38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랫말을 믿지 말라. 그대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사랑 주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랫말에 수없이 배신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41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놀고 싶을 때 놉니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들이지요. 잊고 싶을 때 잊고 보고 죽고 싶을 때 죽지는 못합니다. 혼자서도 할 수 없는 일들이지요.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여, 사랑하며 삽시다.  49


물속에서 피는 수련은, 한자로 물 수 자를 써서 수련(水蓮)이라고 쓰지 않고 졸음 수 자를 써서 수련(睡蓮)이라고 씁니다. 의외지요. 동틀 무렵에 피어서 해질 무렵에 잠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미녀는 잠꾸러기라는 말은 수련을 보고 지어낸 말이 아닐까요. 영어로는 물백합(water lily). 꽃말은 청순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울적해질 때마다 거울을 보세요. 그리고 거울 속에 있는 자기에게 다정한 목소리를 속삭여주세요. 아직 절망할때는 아니다. 존버.  53


미혼남녀의 사랑을 위한 힌트-여자는 자기를 예뻐해 주는 남자에게 목숨을 바치고 남자는 자기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여자에게 목숨을 바친다.

그대가 남자라면, 여자와 사진을 찍을 때, 한 족장 정도 카메라 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찍는 센스를 발휘합시다. 혹시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는 남자분 계신가요.

그대가 여자일 경우에는 명심하십시오. 사랑은 반드시 백마 탄 왕자와 함께 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말을 끄는 마부와 함께 오기도 합니다. 오, 알흠다운 사랑!  59-60


남자들이 어망에 들어 있는 물고기에게는 떡밥을 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여자들에게 묻겠습니다. 남편 집에 놔둔 채 요란하게 치장한 모습으로 외출하는 건 어망에 들어 있는 물고기에게 떡밥 안 주는 심리와 어떻게 다른가요.

사랑은 김태희하고 나하고 누가 더 예쁘냐고 물어보지 않는 것. 하지만 열 번을 물어도 그때마다, 니가 더 예뻐, 라고 대답해 주는 것.

꿈속에서 당신의 애인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잠을 깨니, 당신의 애인이 머리맡에 앉아 근심어린 표정으로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사랑해"라는 말을 제외하고 제일 먼저 해주고 싶은 말은?

권장 답안 - 이 개새퀴.  63


흙 한 사발과 금 한 사발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가치가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흙 한 줌이 더 가치가 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을 가지겠느냐고 물으신다면 당연히 금 한 사발을 가지겠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64


진실로 위장이 허기진 사람은 먹이를 대상으로 초근목피를 가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진실로 영혼이 허기진 사람은 사랑을 대상으로 우수마발을 가리지 않습니다.  66


2교시 수업 끝나자마자 도시락을 까먹는 녀석을, 참을성 없는 놈이라고 욕하지 마십시오. 녀석이 아침을 거르고 등교를 했다면 욕한 그대가 나쁜 놈이 되고 맙니다. 언제나 속단은 금물입니다. 급히 먹는 밥이 대개 소화불량을 초래해서 복통을 일으키는 법입니다.  73


그대 안에 천사가 거하지 않는데 어디 가서 천사를 찾겠습니까.  74


일어서십시오. 태어나자마자 헤엄치는 물고기를 있어도 태어나자마나 걷는 인간은 없습니다. 걷기를 배울 때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이 넘어져야 했던가요. 실패의 아픔을 모르는 자 성공의 기쁨도 모르나니, 오늘의 실패를 디딤돌로 내일 기필코 성공에 이르도록 힘쓰십시오.

비관론자들은 또 하루가 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또 하루가 가는 것이 아니라 또 하루가 오는 것입니다. 모든 하루는 그대를 위해 부여되는 하루라는 이름의 희망이요 기회입니다. 제가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만 부디 아름답고 요긴하게 쓰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아무리 썩어 문드러져도, 양심을 더럽히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가시는 당신을 끝까지 응원하겠습니다.  80


불행을 예약한 여자-자기를 죽도록 좋아하는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가 죽도록 좋아하는 남자에게만 목을 매는 여자.

가문, 학벌, 직업, 외모, 연봉-그런 것들 때문에 결혼을 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랑을 느끼는 사람들은 드물다.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짝퉁이다.  84


예술을 모른다고 크게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모르면서 비난하는 것은 분명 꼴불견에 해당합니다. 물론 예술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라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요.  89


당신이 투명인간으로 변했습니다.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이외수의 지극히 현실적인 답안-거울 보기.  94


가슴에도 씨앗을 뿌립시다. 꿈이 될 수 있는 씨앗, 꽃이 될 수 있는 씨앗, 열매가 될 수 있는 씨앗, 그런 씨앗들을 뿌립시다. 하지만 가슴이 척박하면 어떤 씨앗도 발아하지 않습니다. 가슴을 적시기에는 사랑이 제일, 받기만 하지 말고 주기도 합시다.  96


지갑에 돈 마르는 것 걱정하는 사람은 많아도 가슴에 정 마르는 것 걱정하는 사람은 드물지요. 그럴수록 인생은 삭막해집니다. 가슴에 꽃밭이 있어도 수시로 물을 주지 않으면 꽃들이 말라 죽고 말지요. 작고 하찮은 것들에게도 사랑의 눈길을 보내면서 삽시다.  99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속에 자리하지 머릿속에 자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떤 대상을 소유하고 싶을 때 머리가 앞서지요. 하지만 내가 대상을 소유하고 싶도록 만들지 말고 대상이 나를 소유하고 싶도록 만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세상만사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육체적인 사랑이 아니라 정신적인 사랑이라면 편애를 제외한 모든 사랑은 무죄입니다.  100


제도적 교육을 통해서 가르치는 정답들은 대부분 남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험과 연구를 거쳐 얻어낸 성과들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당신 소유의 진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경험과 연구를 거쳐 체득 산출한 당신 소유의 진리를 제시하는 일이다.  105


나태는 무능을 부르고 무능은 빈곤을 부릅니다. 무능과 나태와 빈곤을 모두 겸비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기와 불평과 욕설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는 거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사코 남의 결점만 물고 늘어집니다.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가족이 나를 적으로 대할 때, 또는 내가 가족의 적이 되어 있음을 자각할 때, 인생이 외롭고 슬퍼집니다.  107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얻기 위해 살아갑니다. 하지만 행복의 주체인 마음은 등한시하고 행복의 걸림돌인 물질에만 천착하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인 의식주만 해결되면 그다음부터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지요.  108


저는 곱하기, 더하기, 나누기, 빼기만 아는 정도로도 평생을 불편 없이 살았습니다. 심지어는 그것들조차 계산이 틀릴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가끔 계산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계산하고 사는 사람보다 편하고 행복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른다는 사실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죄를 불러오는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제게 너무 많은 재능을 주셨다고 부러워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재능은 가난과 열등, 두 가지뿐입니다. 저는 그 두 가지를 극복하기 위해 날마다 진저리처지는 노력을 거듭했지만, 그분들 눈에는 결과만 보였겠지요.  110


날개를 움직이지 않고 멀리까지 날아갈 수 있는 새가 어디 있으며 지느러미를 움직이지 않고 멀리까지 헤엄칠 수 있는 물고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수로하지 않고 얻으려는 자 도둑의 심보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 끼니를 거르고 살더라도 불로소득을 꿈꾸지는 않겠습니다.  111


당신도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축복으로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재앙으로 생각하시나요. 축복으로 생각하신다면 그 대표적인 이유는 무엇이며 재앙으로 생각하신다면 그 대표적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114


작가가 되려면 먼저 잠부터 극복하라. 하다못해 좀도둑도 투철한 직업정신 하나로 날밤을 하얗게 세우는데 명색이 작가지망생이라는 작자가 초저녁부터 꾸벅꾸벅 졸고 잇다니, 좀도둑 보기가 부끄럽지 않은가.  115


일부 작가지망생들은 괜찮은 소재 하나를 붙잡게 되면 처음에는 열정과 의욕이 넘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무력감에 빠져버린다. 예술이 뛰어난 재능의 소산이 아니라 뛰어난 정신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겪게 되는 현상이다.  

철저하게 미쳐라. 내가 쓰면서 감동받지 못한 부분은 독자들은 읽으면서 감동받지 못한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친놈 소리를 들을 때까지 미쳐라.  116


감성마을 밤하늘에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별이 총총합니다. 바람이 심하게 불면 마당 가득 떨어지기도 합니다. 가끔 주워서 목걸이를 만들어 아내에게 걸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이아를 좋아하는 아내의 눈에는 안 보인답니다. 뭐, 어쩔 수가 없지요.

아내가 하늘의 별을 따달라고 하면, 닥쳐, 니가 따, 이 따위 소리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 지금 사다리를 구해 보고 있는 중이야, 정도의 성의라도 보여야 합니다. 가정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전적으로 남편에게 있습니다. 물론 아내들의 주장에 의하면.  117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마이 있지요. 하지만 남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존재들은 대개 남다른 열정과 노력을 쏟아붓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러우면 지는 게 아니라 따라 하지 못하면 지는 게 아닐까요.  121


육신의 양식인 밥은 먹으면서 정신의 양식인 책은 안 읽는 분들이 많습니다. 밥은 안 먹으면 죽습니다. 그러나 책을 안 읽는다고 죽지는 않습니다. 살기는 삽니다. 다만 영혼이 죽은 채로 살아갈 뿐이지요.  122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규칙과 어떤 경우에도 주인의 명령을 어기면 안 된다는 규칙을 프로그램으로 간직하고 있는 로봇에게 주인이 한 사람을 지목해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로봇의 예상행동은?  125


음식의 차이는 문화의 차이로 보아야 합니다. 어떤 나라 사람에게는 구토감을 불러일으키는 음식이 어떤 나라에서는 귀한 손님께 대접하는 특별음식이 되기도 합니다. 그 나라의 역사와 전통과 자연을 모르면서 음식을 비난하는 것은 몰지각한 소치입니다. 

음식에 정성이 들어가지 않으면 맛이 나지 않습니다.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성이 들어가지 않으면 아무런 감동이나 의미를 맛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정성은 잘 만들겠다거나 잘 쓰겠다는 욕심이 아닙니다. 바로 먹는 이와 읽는 이에 대한 사랑입니다.  128


향기 있는 미끼 아래 반드시 죽는 고기가 있다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얻어지는 재물이나 영달은 모두 향기 있는 미끼일 가능성이 큽니다. 덥석 물었다가는 어망 속으로 직행할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그대의 행복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  133


익명으로 글을 쓸 때,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마음은 보입니다. 얼굴이 못생긴 건 성격으로 얼마든지 가릴 수 있지만, 마음 비뚤어진 건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습니다. 마음이 더러운데 인생인들 깨끗하겠습니까. 그래서 공부 중에 가장 큰 공부가 마음공부지요.

뛰면 벼룩이요 날면 파리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호감이 안 가는 사람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뛰면 우사인 볼트요 날면 이신바예바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뛰면 벼룩이요 날면 파리는 되지 않도록 마음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135


공처럼 둥근 물체가 아니면 보는 각도에 따라 형태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며 물체가 아닌 이념이라면 더욱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저도 다양성은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곧 다양성이 정당성은 아니라는 견해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137


대부분의 기계는 쇳덩어리입니다. 하지만 인도 출신의 과학자 찬드라 보스에 의하면 쇳덩어리도 기억과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다정다감하게 대해 주세요. 그러면 말썽을 잘 일으키지 않습니다. 하물며 사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143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자신의 비굴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는 사람은 정의를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불의에 대한 침묵에 불의에 대한 동조에 가깝습니다. 반성치 않는 불의에 용서나 자비를 남용하는 것은 불의를 부채질하는 소치가 다름이 없습니다.  145


아는 것이 힘이라는 속담이 있는가 하면,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도 있다. 어느 한쪽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느 한쪽도 영원불변하는 진리는 아니다. 한세상 살다 보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으니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써먹으라는 조상들의 배려.  149


경험이 모두 지혜가 되지는 않습니다. 잘못에 대한 반성과 개선에 대한 의지가 지혜를 숙성시킵니다. 자기 점검이 없는 경험은 두뇌 속에 그저 단순한 기억으로 축적될 뿐이지요.  151


사람의 가치를 잴 수 있는 계측기는 아직 발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서푼어치도 못 되는 안목으로 뻑하면 남을 재단하고 비난을 일삼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자기들이 저급하고 무가치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려서 어떤 이득을 얻어내겠다는 뜻일까요.  155


세속적인 잣대와 안목을 버리지 못하는 살마들은 흔히 진짜에게는 경계심을 보내고 가짜에게는 신뢰감을 보내는 오류를 범합니다. 당신이 만약 진짜라면 이런 경우 어떤 태도를 보이시겠습니까.  157


글에 담긴 메시지나 행간에 담긴 상징적 의미, 함축선 따위는 등한시하고 말꼬리나 잡고 늘어지는 마구간 출신 논객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의 논조는 언제나 조소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조소에 어설픈 애국심까지 처발라져 있으면 주접이 솜털까지 오그라들게 만들지요.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면서 쾌감을 얻는 행위를 영웅심리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분들이 계시지요. 하지만 그건 영웅심리가 아니라 졸개 심리입니다. 약자를 괴롭히는 영웅은 없습니다. 진정한 영웅은 약자를 구하는 일에 자신의 힘을 씁니다.  158-159


야외에서 가마솥 걸어놓고 돼지고기에 시래기국 끓여 먹던 맛과 운치를, 어찌 휴대용 가스버너와 코펠 따위로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에 이르러 편리함은 얻었으되 정겨움을 잃었으니, 세상이 마냥 좋아졌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서양은 철학이든 예술이든 옛 사조의 반동에 의해 새 사조가 탄생합니다. 하지만 동양은 온고이지신에 의해서 새 사조가 태어납니다. 별다른 숙고 없이 서양의 풍조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미풍양속까지를 사라져버리게 만드는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161


진정한 종교는 사랑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실천할 수 없는 사랑은 때로 방관보다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종교든 사랑을 실천한답시고 전쟁을 불사하기도 합니다. 나의 희생은 꺼리면서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종교는 지구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165


세상을 다 버린다 해도 너를 버릴 수는 없어. 막장 드라마에나 등장할 법한 대사이지요. 하지만 내가 말하는 쪽이라면 닭살이 돋아도, 내가 듣는 쪽이라면 새살이 돋을 것 같은 대사입니다. 그래서 특히 아줌마들이 채녈을 못 바꾸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진심으로 사랑을 하는데 유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까.  169


물질적으로는 풍족한데 정신적으로는 빈곤하다면 그것은 불행입니다. 단지 그대의 가치관을 수정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인생에도 온실형과 잡초형이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밑바닥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온실형보다는 잡초형에 가깝습니다. 물론 빛깔도 향기도 잡초형이 강하지요. 벌나비가 많이 날아오는 것은 당연지사. 플라스틱 가화(假花)와는 비교치 마시기를.

지금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미래가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와 똑같이 살지만 않는다면, 내일은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대의 내일이 아름답기를 빕니다. 그대의 내일이 행복하기를 빕니다.  172


내게 만약 딸이 있었다면, 금고를 못 가진 남자에게는 시집을 가더라도, 서재를 못 가진 남자에게는 시집을 가지 말라고 조언했을 것이다.

사랑에 조건이 붙는 순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다.

인생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인생은 밥을 굶는 인생과 사랑을 굶는 인생이다.  175


젊은이들은 대개 자기가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삽니다. 그들은 때로 자신의 천금 겉은 시간들을 허영이나 쾌락으로 낭비해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젊어서 실력 연마를 게을리하면 늙어서 행인 1, 2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때는 역전도 없습니다.  187-188


집필실에 습도계를 비치하지 않았을때는, 건조하면 건조한 대로, 눅눅하면 눅눅한 대로 불평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습도계를 비치한 뒤로 목구멍이 칼칼하다. 콧구멍이 당긴다. 유난을 떨어대는 상황들이 발생합니다. 하나의 물건에는 하나의 근심도 따라옵니다.  201


돈보다 중요한 것이 앎이고 앎보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입니다.  216


시간이 달콤합니다.  220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대 기도하겠습니다. 노력도 하지 않고 모든 일상을 '해주십시오'로 일관한다면, 인생을 통째로 거저 먹겠다는 심보 같아서 왠지 저 자신이 한심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하기 전에 피눈물 나게 노력하는 모습부터 보여드리겠습니다.  228


아주 가끔은 제 공식 홈페이지 대문에 큼지막한 글씨로 '애인구함'이라는 팻말을 내걸고 싶습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습니다. 그냥 지독하게 외롭다는 뜻입니다. 

무심코 차를 마셨는데 써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맛대가리 없다는 생각보다 울컥 외로움이 먼저 사무쳤습니다. 혀로부터 느끼는 외로움이라니, 참 지랄 같지 않습니까.  235


예전에 나는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랭이가 찢어진다'라는 속담의 모순에 대해 지적한 적이 있다. 가랭이가 찢어진다니 웃기지 마라. 뱁새도 명색이 새다. 날개가 있다. 왜 걸어서 황새를 따라가냐. 푸헐, 뱁새 너무 깔보기 어어없기.

인생은 창조다. 그래서 매뉴얼이 존재하지 않는다.  239


정신적 빈곤도 우울증을 부르는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정신적 빈곤을 물질적 풍요로 해소하려는 분들이 계십니다. 명품 핸드백을 걸친다고 텅빈 영혼의 허기가 충족될까요. 자연과 예술과 사랑을 강추합니다. 가끔은 이외수의 책들도 읽어주소서.  252


무가치한 일에 목숨을 걸고 부모와 가족까지 곤궁에 몰아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책을 많이 읽지 않았거나 읽었더라도 건성으로 읽은 사람들입니다. 이 말에 발끈하시는 분들도 역시 마찬가지.

나쁜 짓을 하고 자기 혼자 욕먹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대개 주변 사람들 역시 도매금으로 욕을 먹게 됩니다. 세상을 망치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배려를 모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니 사랑인들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을 해본 적인 없는 사람은 시간의 실체를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누군가에게 가위나 칼 따위를 건넬 때 자루가 자기 쪽을 향하게 하고 날이 상대편을 향하게 하는 사람이라면 배려 따위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 정도는 굳이 교육을 받거나 수행을 거치지 않아도 터득되는 소양이 아니겠습니까.

나 때문에 남이 수고하면 미안해지는 것이 당연지사입니다. 그런데 전혀 미안해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른바 '나뿐인 사람들'이지요.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남을 사랑할 줄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설마 당신의 애인이 그렇지는 않겠지요.  259


평생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에게는 늙어 죽을 때까지 만족이 오지 않습니다. 평생 타인을 위해 헌신하며 사는 사람은 늙어 죽을 때까지 크게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나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260

 

글쓰기에 필요한 그대의 감정지수와 문장력, 그리고 집중력을 높이고 싶다면 날마다 연애편지를 쓰세요. 반드시 이성에게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 은백양나무나 며느리밥풀꽃, 모두 괜찮습니다. 사랑은 글을 숙성시키는 특급 발효제입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다. 일흔 즈음에 들어도 가슴이 아릴 것 같은 노래입니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끝 소절을 '매일 사랑하며 살고 있구나'로 개사해 부를 수 있는 인생이기를 빌어봅니다.  265-266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열받았을 때는 웃지 말아야 합니다. 열받았을 때 웃으면 비웃음으로 보일 가능성이 짙기 때문입니다. 교훈도 때와 장소에 따라 이용가치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살면서 수시로 자각하게 됩니다. 나는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주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구나. 저만 그건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 사실을 망각하고 삽니다. 그래서 불평불만, 근심걱정이 끊이지 않는 거지요.

어릴 때는 아무도 사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불혹의 나이로 접어들면서 더러 세상에는 무시해야 할 살마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순을 넘긴 지금은 비로소 통감합니다. 무시하는 놈도 무시당하는 놈도 결국은 외로울 뿐이라는 사실을.  269


그대가 미신처럼 신봉했던 사랑이 한낱 발정에 근거한 육체적 목마름이 아님을 명확하게 증명할 방법이 있는가. 없다. 그것은 인생을 처참하게 말아먹은 다음에야 명확하게 증명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271


저는 나이 들수록 시름시름 기력이 떨어지는데 고독은 아무리 나이 들어도 독야청청합니다.  277


당신은 나이만큼의 글자수로 자신의 심경을 토로할 수가 있습니다.  279


수험생들은 대개 시험 보는 날 아침 죽을 먹지 않습니다. 죽을 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 차남은 수능 보는 날 죽을 먹고 시험장으로 갔습니다. 식은 죽 먹듯이 쉽게 치르겠다는 의도였습니다. 물론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매사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282


누나가 의상실을 차렸습니다. 상호는 '희망 의상실'. 그런데 장난기가 발동해서 간판의 글자들을 그대로 두고 띄어쓰기만 바꾸어보았습니다. '희망의 상실.' 띄어쓰기가 왜 중요한지 이제 아셨지요. 눈치 못 채셨으면 난독증입니다.  283


어떤 분이 제게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여러 책에서 같은 소리를 반복하시나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반복합니다. 그가 다시 반문했습니다. 당신이 술 마시고 같은 소리 하시는 것도 중요해서인가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그건 제가 실성했다는 뜻입니다.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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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빈 새장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 안에 뭔가를 담게 된다.



내 심장이 끄덕끄덕했다.


일상에서는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게 시간이지만 여행을 떠나서의 시간은 순순히 내 말을 따라준다. 사실 여행을 떠나 있을 때 우리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 쪽이질 않은가.



생각하기만 하여도 저절로 눈이 감겨지는 이 장면들을 나는 어쩌면 끝까지 가지고 가리라. 

그렇게 나는 열일곱과 열덟, 필름 같은 소년의 껍질을 벗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건 사랑이 어디론가 숨어버려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걸 만지고 싶어서일 텐데. 그걸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그냥 만지고 싶은 걸 텐데. 갖자는 것도, 삼켜버리는 것도 아닌, 그냥 만지고 싶은것.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넘쳐 보이지만, 지금 당장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금이 가 보인다. 넘치는 것은 사랑 때문이며 금이 간 것도 사랑 때문일 텐데 그 차이는 적도와 북극 만큼의 거리다.  



할아버지가 사시미를 준비할 때, 할아버지의 손놀림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다소 걱정하는 듯이 또 행복하게 바라보는 할머니의 다소곳하면서도 정중한 모습. 아, 어떻게 저렇게 고요하고도 벅차게 한 사람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나이가 경험을 축적하는 것이듯..



난로에 보리차가 끓고 있는 냄새나 나무 타는 냄새, 아이의 몸에 풍기는 이런저런 냄새나 갑작스런 방문을 의식해 오분 동안 급히 치운 듯한 친구 집엣 나는 생활의 냄개, 게를 찌는 찜통 연기의 냄새나 어느 냉장고에 붙여놓은 오래된 글씨의 냄새,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집 안에 가득한 빈집의 냄새와 트렁크를 열었을 대 어렴풋이 풍기는 그곳의 마루 냄새. 아, 지금과는 다르게 화학적인 것에 얌전하게 반응하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세상 그 어떤 시간보다도,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시간이 좋다.



언젠가는 그 길에서

갔던 길을 다시 가고 싶을 때가 있지.

누가 봐도 그 길은 영 아닌데

다시 가보고 싶은 길.

그 길에서 나는 나를 조금 잃었고

그 길에서 헤맸고 추웠는데, 

긴 한숨 뒤, 얼마 뒤에 결국

그 길을 다시 가고 있는 거지.

아예 길이 아닌 길을 다시 가야 할 때도 있어.

지름길 같아 보이긴 하지만 가시덤불로 빽빽한 길이었고

오히려 돌고 돌아 가야 하는 정반대의 길이었는데

그 길밖엔, 다른 길은 길이 아닌 길.



앞을 볼 수 있다면 뭘 제일 먼저 하고 싶어요?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일일 것만 같은 나는 그에게 서슴없이 묻는다.

"남의 물건을 훔치고 싶어요, 그 기분을 알고 싶어요."

아, 남모르게는 절대 할 수 없는 일. 앞을 볼 수 없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 바로 훔치는 일이겠구나.



아, 이 순간, 나는 이 순간을 가만히 붙들고만 있고 싶다.



나와 상관없는 일은 보이지 않고, 내가 필요로 하는 색만 보인다. 우리가 분홍색을 알아볼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걸 원하고 있을 때만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누구나 살고 있지만 누구나 살아 있다고 느끼기 어려운 것처럼.



문득, 아니 오래전부터 난 참 사랑을 못하는 사람이란 생각을 하곤 한다. 아무리 목숨을 걸어도 걸어지지 않는, 일종의 그런 운명 같다. 이래서 사람이 안 되는 것도 같고 아무도 나를 사랑할 것 같지 않으며 사랑이 와도 바람만큼만 느끼는 것. 그래서 내 사랑은 혼자 하는 사라이다. 사랑은 순례의 길과도 같아서 그 길을 통해 자기가 완성되어야 한다는 이기적인 속성이 있다. 아니 그 속성만 있다. 그 속성으로 구원받고자 함이 사랑이라면, 사랑한다는 말은 대단한 말이 아니라 구원받겠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함께 앉아 김밥을 먹다가 당신이 골라놓은 당근을 먹는 일, 잡채를 먹다가도 당신이 골라놓은 당근을 먹는 일, 그 일은 당신을 구해주는 일 같지만 나 자신을 구원하는 일과도 통한다. 타인을 돕는 것으로도 자신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인류는 오래전부터 믿어왔다.



당신이 좋다, 라는 말은 당신의 색깔이 좋다는 말이며, 당신의 색깔로 옮아가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당신 색깔이 맘에 들지 않는다, 라는 말은 무의식적으로 했을 경우, 당신과 나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지켜야 하는 사이라는 사실과 내 전부를 보이지 않겠다는 결정을 동시에 통보하는 것이다. 색깔이 먼저인 적은 없다. 누군가가 싫어하는 색깔의 옷을 입고 있다고해서 그를 무조건 싫어할 수 없듯이 서로가 서로의 마음에 어떤 색으로 비치느냐에 따라 내가 아무리 싫어하는 색깔의 옷을 입었더라도 그 기준은 희생될 수 있으며 보정될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데는 방향이 문제인 적은 잇어도 색깔이 문제일 수는 없다.(자주 방향과 색깔이 혼동되는 건 사실이다.)

어떤 카페가 좋아 자주 드나들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카페 기둥이 흰색 페인트를, 화장실 문에 흰색 페인트를 칠해놓은 게 마음에 들었던 거다. 사실 그 색이 좋아 카페의 분위기가 좋고 심지어 커피맛도, 주인장의 얼굴까지도 좋다고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아주 사소한 부분들을 쌓아가는 것이다.

고로 당신이 좋다, 라는 말은 당신이 무슨 색인지 알고 싶다는 말이며 그 색깔을 나에게 조금이나마 나눠달라는 말이다. 그 색에 섞이겠다는 말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당신 목에 두른 스카프 색깔이 그게 뭐냐고 말하지 않는다.

한 여자를 알았다. 나는 그녀가 빨간색인 줄 알고 좋아했는데 그녀는 파란색이었다. 정반대의 색을 가지고 있어서 한순간 주춤 물러서기까지 했다. 그럴 경우, 내가 그쪽으로 옮겨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얼마를 더 만났더니 그녀는 차라리 흰색이었다.

나는 그녀를 흰색으로 이해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녀에게 줄 흰 꽃을 준비했다. 흰 이 꽃이 당신을 닮은 거 같아서 샀다고 했다. 초여름날, 보리수꽃을 내밀면서 내가 뱉은 말은 내 감정의 전부이면서 진실이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대상은 색이 없어지고 오히려 지워져 창백해진다.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사랑의 감정으로 대상은 참을 수 없이 완벽해지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불행의 기준은 같지만 행복의 기준은 변질되어 있다. 그저그런 불행에 우린 죽지 않지만 그저그런 행복에조차 도달하지 않으면 우리는 불행하다. 우리는 죽는다.

높은 것, 아름다운 것, 벅찬 것, 기쁜 것, 영원한 것, 그것들을 모른 체하지 않으며, 그 방향으로 조금식 조금식 움직이는 사람에게 바퀴는 굴려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을 놀래키 수는 없다.

아무도 나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없다면 그것은 이미 실패한 삶, 세상이 나를 등졌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충분히 망친 삶.

내가 하지 않았던 일들의 길고 긴 목록을 하나씩 지워나가면서 뭔가를 저지르기 시작한다면 사람들은 나를 향해 돌아설 것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을 걸어올 것이다.



그토록 많은 나라들을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 것은 돌아보면 실로 기적에 가까운 일인 것 같다.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지,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듣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그 어떤 말도 들린다. 겨우 아는 몇 개 안 되는 단어를 동원하거나, 소통이 어려울까 마음을 다해 섬세한 몸짓으로 말을 걸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마치 불꽃이 튀는 것 같다. 절대로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마음의 문이 열리고 마침내 뜻밖의 말들이 섞인다. 우리가 누군가 한 사람을 알고 사랑하게 되는 것도 결국은 이 작은 불꽃에 의해서일 것이다. 그 작은 불꽃을 오래 꺼뜨리지 않는 일일 것이다.

이제 몸짓 언어의 벽은 넘은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다른 나라 말을 잘하고 싶다. 사람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려면 통역 따위의 번거로움은 없어야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



자신이 채워진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공항에 가보면 된다. 공항에 앉아 미소 지을 일들이 떠오르거나 괜히 힘이 차오르는 사람이 있고, 한없이 자신이 초라해 보이거나 마음이 어두워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공항에 가지 않는 나에게 세상은 아무것도 보여줄 게 없다. 세상의 경계에 서보지 않은 나에게, 세상은 아무것도 가져다줄 게 없다.



짐만 가지고 떠남은 떠남이 아니다. 최소한의 감정의 재료를 함께 가져 간다면 그 어느 곳에도 새로운 인생의 조각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휑한 빈자리에 사랑한 존재를 이식해 넣은 것이다.



"진주는 외롭다는데..."

"선생님, 그러면 진주 말고 다른 거 하세요."

당신은 진주를 택했고 나는 가만히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선생님, 그 반지 끼고 외로우면 어쩌시려구요?"

"외로운 게 뭐가 대수라고. 외로우면 좀 어때. 외로워봤자지."

그래, 외로워봤자다. 외로움은 다가 아니더라.

언젠가 당신에게 불쑥 물었다. 그런저런 말들이 지나간 후였다.

"선생님. 어떻게 사셨어요?"

많은 사람들, 당신이 살아온 시간들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 묻고자 했을 그 고통의 날들과 관련하는 당신 남편과 당신의 아들... 당신의 인생 젙체에 대한 안부였다. 

"견뎠지. 뭘 어떻게 살았겠어..."

부러 냉정하게 자신을 누르는 음성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모른다. 쉬운 것은 겨우 알 수 있을지라도 어려운 것은 모른다. 어쩌면 쉬운 것도 어려운 것도 자기 소관이 아니므로, 모르고 있는 것조차 모른다.



마을은 백 년이 지나도 자신들만의 속도와 온도를 유지하면서 살 것만 같은데.



사는 데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것이지만 그것을 알기에 사랑은 얼마나 보이지 않으며 얼마나 만질 수 없으며 또 얼마나 지나치는가.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고 지나치는 한 사랑은 없다. 당장 오지 않는 것은 영원히 오지 않는 이치다. 당장 없는 것은 영원히 없을 수도 있으므로.

그렇더라도 사랑이 없다고 말하지는 말라. 사랑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불안해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믿으려는 것이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걸 못 견뎌하는 것이다. 사랑이 변했다, 고 믿는 건 익숙함조차 오래 유지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사랑은 있다. 사랑이 없다면 세상도 없는 것이며 나도 이 세상에 오지 않은 것이며 결국 살고 있는 것도 아니질 않은가.

그렇다고 사랑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지도 말라. 사랑은 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라 사랑할 때의 행복을 밖으로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상태가 사람을 키운다. 애써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넘치는 상태만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하여금 인간을 어려운 일에 빠지게 하는 일, 그것은 산이 하는 일이다. 그 어려움으로 하여 인간을 자라게 하는 것이 신이 존재하는 구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랑이라는 어려운 고통을 겪어야만 행복으로 건너갈 자격을 얻는다. 

신이 어떤한 장난을 친대도 사랑을 피할 길은 없다. 그냥도 오고 닥치기도 하는 것이고 누구 말대로 교통사고처럼도 오는 것이다. 사랑은, 신이 보내는 신호다. 사람은 떠나도 사랑은 남게 한다. 그것도 신이 하는 일이다. 죽도록 죽을 것 같아도 사랑은 남아 사람을 살게 한다.

그래, 사랑을 하자. 사랑을 하더라도 옆에 없는 사람처럼 사랑하자. 옆에 없는 사람처럼 사랑하는 일, 그것은 사랑의 끝이다. 완성이다. 

인간적으로 우리 사랑을 하자. 인간의 모든 여행은 사랑을 여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 안에서 여행하게 되어 있다. 사랑을 떠났다가 사랑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사랑은 삶도 전부도 아니다. 사랑은 여행이다. 사랑은 여행일 때만 삶에서 유효하다.



하루 한 번쯤

처음 영화관에 가본것처럼 어두워져라. 곯아버린 연필심처럼 하루 한 번쯤 가벼워라. 하루 한 번쯤, 보냈다는데 오지 않은 그 사람의 편지처럼 울어라. 다시 태어난다 해도 당신밖에는 없을 것처럼 좋아해라.

누구도 이기지 마라, 누구도 넘어뜨리지 마라. 하루 한 번 문신을 지워낼 드싱 힘을 들여 안 좋은 일을 지워라. 양팔이 넘칠 것처럼 하루 한 번 다 가져라, 세상 모두 내 것인 양 행동하라.

하루 한 번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앉으라, 내가 못하는 것들을 펼쳐놓아라. 먼지가 되어 바닥에 있어보라. 하루에 한 번 겨울 텐트에서 두 손으로 감싼 국물처럼 따뜻하라.

어머니가 내 뒷모습을 바라보는 만큼 애틋하라. 하루 한 번 내 자신이 귀하다고 느껴라. 좋은 것을 바라지 말고 원하는 것을 바라라. 옆에 없는 것처럼 그 한 사람을 크게 사랑하라.



순간일 수도 있지만 영원일 수도 있는 것이고, 영원도 어느 한순간 토막이 나기도 하려니 그렇게 지금 당장 마음가는 대로만 마음을 다하면 되는 것 아닌가. 말이 안 통하는 거야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과도 마찬가지. 사랑이 삐그덕대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 사랑하는 연인들이 낼 수 있는 불의 밝기를 사랑이라는 집에 잘 사용하는 것, 그것만이 사랑이다.



세상 끝 어딘가에 사랑이 있어 전속력으로 갔다가 사랑을 거두고 다시 세상의 끝으로 돌아오느라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 : 우리는 그것을 이별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하나에 모든 힘을 다 소진했을 때 그것을 또한 사랑이라 부른다.  



사실 나이 든다는 게 괜찮을 때도 있더라구요. 묵직해져서 덜 흔들리고 덜 뒤돌아보고.

아주 오래전 어디선가 읽은 글 같은데 누구의 글인지 기억이 나질 않네요. 나이들어 각자 혼자가 되어 만난 어느 연인의 이야기입니다. 어디선가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조금식 조금씩 좋아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남자의 집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됩니다. 낯선 곳에서 잠을 잔 여자는 아침에 도착한 신문 떨어지는 소리에 잠이 깬 뒤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살며시 일어나 거실에서 신문을 가져다 신문을 보기 시작하는데 신문 넘기는 소리에 남자가 깰까봐 여자가 화분 옆에 놓인 분무기를 가져다가 신문 위에 뿌립니다. 곤히 자고 있는 사람에게 신문 넘기는 소리는 굉장히 크게 들리겠죠. 얼마 후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신문에 물을 뿌리며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보고는 그렇게 묻습니다. 

"당신, 그런 걸 어디에서 배웠소?"

"나이 먹다보니 그냥 알게 되었어요."

알게 되는 것도, 알아가는 것도 나이가 하는 일, 맞습니다.



나이만 잇고, 나이 없는 사람이 되기는 싫다

나이 든다는 것은 넓이를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넓이를 어떻게 채우는 일이냐의 문제일 텐데 나이로 인해 약자가 되거나 나이로 인해 쓸쓸로 몰리기는 싫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어도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문장처럼 늘 이 정도로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



가까이서 보는 환한 달은 참으로 사람 코끝을 시큰하게 한다. 누가 내 감정을 터뜨리기 위해 손을 뻗는 것 같은, 무언가 나를 일으키기 위해 네어지를 보낼 때의 기운 같은 것들.



후배 부부는 파리 근교에 위치한 집에 살면서 맹인안내견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아침과 저녁 두 번의 산책을 시켜야 하는 임무를 맡았다. 

아침이 되면 촬영을 나가기 전에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숲길에 나가 산책을 시켰다. 종일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돌아온 저녁에는 원고를 손보았다. 저녁 싟를 마친 후나 잠들기 전에 개를 데리고 나가 산책을 했다. 이 주일 동안은 거의 이런 일들의 반복이었다.

어느덧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가 되었다. 개와 마지막으로 따뜻한 인사를 나눴다. 주인이 돌아오면 내가 해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보살펴줄 것이었다. 내가 떠난 다음 날인가, 후배 부부는 돌아왔고 며칠 후, 전화 통화를 하면서 개의 안부를 들을 수 있었다.

"그동안 개가 말 잘 들었지요?"

"그럼, 너무 착해서 아무 문제 없었어."

"근데 선배 가고 돌아와 보니 마루에다 먹은 걸 토해놨더라구요. 챙겨준 사료는 건드리지도 않았구요."

"아니, 왜? 나 있을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어디 아픈 거야?"

"아뇨, 선배 여기 올 때 큰 여행가방 가지고 왔을 꺼 아니에요? 떠날 때는 큰 여행가방 들고 나가셨을 거구요. 개가 여행가방에 민감해요. 정들었는데 떠나는 걸 알고 마음이 많이 안 좋았나봐요."

아, 이별이었구나.

나는 돌아와 정신없이 일에 매달리느라 한 번도 뒷일을 생각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별이 아팠구나. 미안하다. 나, 이토록 텁텁하게 살아서, 정말 미안하다. 음식을 만들면서도 음식에다 감정을 담는 것인데 하물며 나라는 사람, 이렇게 모른 척 뻣뻣하게 살아가고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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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외로운 존재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롭고 혼자 있어도 외롭다. 그래서 사람들은 게임, 무협지, 만화, 드라마, 페이스북에 빠지거나 심지어 마약을 찾기도 하는 것 같다. '철학'은 외로운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유수현)  6


새로운 해석은 언제나 처음에는 이단이 된다.  9


고전을 읽는 것은 늘 어렵다. 기존의 시각을 도그마처럼 따르면, 오히려 쉬워진다. 고전은 어렵게 읽어야 한다. 또 인문 고전 독법에는 따로 왕도가 없다. 늘 새로운 해석을 찾아 읽는 게 최선이다.  10


보원이덕(報怨以德) - 원한을 갚되 은혜로 하라.

<노자> 63장 입니다. 거기보면 "위무위(爲無爲)" 즉 무위를 행하고, "사무사(事無事)", 즉 일삼음이 없음을 일삼아라. 그리고 "보원이덕(報怨以德)", 원한을 갚되 은혜로 하라. 이렇게 나옵니다.  24


공자가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은혜를 갚겠는가?" 먼저 당신이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는 무엇으로 어떻게 갚겠는가? 당연히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는 은혜를 갚는 것이 맞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원수를 은혜로 갚는다면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는 무엇으로 갚느냐는 거죠. 공자의 답은 이렇습니다. "곧음"으로 원한을 갚고 은혜로 은혜를 갚아야 한다." 아주 단순한 말이지만, 이런 방식이라면 제가 충분히 따라서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아요.  25


<한시외전(韓詩外傳)>이란 책에는 공자의 제자 수제자 세 사람이 등장. "당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이 있고 당신에게 잘 대해 주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당신들은 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대하겠느냐?" 하니까.

자로(子路, 기원전 543~480년경-말보다주먹, 반란에 연루되 갓끈을 다시묶고 앉은채로 죽어감)는 "남이 나를 잘 대해 주면 나도 잘 대해 줄 것이고, 남이 나를 잘 대해 주지 않으면 나도 잘 대해 주지 않을 것이다."  26


자공(子貢, 기원전 520~456년경-현실수완이 뛰어나 공자학단의 재정 문제 실질해결자)은 "남이 나를 잘 대해 주면 나도 잘 대해 줄 것이고, 남이 나를 잘 대해 주지 앟으면 나는 그와 함께 상황에 따라서 잘해 줄 만하면 잘해 주고 잘해 줄 만하지 못하면 나도 잘해 주지 못한다."

안회(顔回, 기원전 521년경~?)는 "남이 나를 잘 대해 주면 나도 잘 대해 줄 것이고, 남이 나를 잘 대해 주지 않아도 나는 잘 대해 줄 것이다."

이 말은 일단 해석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 말은,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살겠느냐를 묻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논어> 의 어떤 구절이 나온다로 할 때에, 그 말의 객관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의미를 당신은 어떤 삶의 원리로 받아들여서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겠는가를 포함한 물음들입니다.  27


공자는 이 세 사람의 대답을 듣고서 어떻게 말했을까요?

"자로의 주장은 야만인들의 주장이다. 자공의 말은 친구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말이고, 안회의 말은 가족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말이다."

이 가운데 객관적인 해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동일한 두 눈이 분명이 힜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그 일들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눈의 깊이가 다를 뿐이죠. 


보원이덕, 원한을 갚되 은혜로 하라. 공자의 말씀은, 측별히 그렇게 하는 거는 불가능하다. 쉽지 않으니, 직(直곧을직), 다시말해 내 마음이 원하는 바대로 가라. 그런 뜻입니다. 즉 정직하다는 말은 '자기의 마음이 명령'하는 대로 , '자기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서 행하라는 뜻입니다.  29


'보원이덕' 이말에 대해서 하상공은 이렇게 처방을 제시합니다. "재앙이 생겨나기 전에 미리 싹수부터 끊어 놓는다." 이 말은 조금 더 쉽게 풀면 이런 뜻입니다. "평소, 천하에 두루 행할 만한 도를 닦고 백성들을 위해서 선을 행하라. 그러나 너에게 반역하는자, 황제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일을 행하였거나 행하려는 자. 그런 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천하의 안녕을 위해서 재앙이 생겨나기 전에 미리 끊어버려라."  34-35


유학자 왕필은 보원이덕에 관해 "작은 원한의 경우에는 보복하고 말 것이 없다. 그러나 큰 원한의 경우에는 천하 모든 사람들이 죽이고 싶어하므로 모두 똑같이 생각하는바, 그것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덕이다."

작은 원한이라고 하는 것은 '사적'인 원한이라고 할 수 있어요.  36


작은 원한(小怨)의 경우 사적인 것이므로, 공적인 일을 처리할 때 개입시킬 여지가 없는 거다. 그런 거 하지 말라는 겁니다.  37


왕필의 해석은... 철저하게 유가의 정신이지 '노자'의 사상에서 나올 수 있는 논리가 아닙니다.  38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고전 속에 원하는 진리가 있어서 그것을 우리가 해석하거나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가치, 그 가치를 고전에 새겨 넣는 작업, 그것이 바로 고전을 읽는 방법일 것 같습니다.  46



루소의 자유개념이 칸트의 자유 개념으로 발전하고 더 나아가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자유 개념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52


니체는 "우리의 살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술작품을 만드는 태도로 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죠. 이게 바로 푸코가 말한 실존의 미학이고, 이게 루소가 몸소 보여준 자유의 정신을 이해하기 위한 첫 출발점입니다.  63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유와 반대가 되는 단어, 즉 '지배'와의 대조부터 출발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델1은 '지배를 간섭으로 해석할 것인가?'에 관해서입니다. 이때, 자유는 '선택'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지상)주의 모델입니다. 모델2는 '지배를 강제로 해석할 것인가?'입니다. 이때, 자유는 '자율'이 되죠. 자유는 도덕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을 하게 되어 자율적인 인간드링 서로의 인권을 존중하는 모델입니다. 모델3은 '지배를 예속으로 해석할 것인가?'입니다. 이때, 자유는 '해방'이 될 것입니다. 이 모델은 자유가 단순히 개인적인 추상적 차원이 아니라 좋은 사회를 통해 실현될 가치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65


자유주의라는 단어. '리버테어리언(libertarian)'같은 단어들은 '진보적'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는 단어였어요. 지금은 자유지상주의자로 알고 있는데요. 원래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최초로 썼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자유라는 단어의 원초적이 ㄴ의미는 바로 무정부주의죠. 모든 지배를 거부하는 것이비니다. 지배 없는 삶, 이게 무정부주의자들의 꿈입니다. 자유주의의 두 가지 의미도 이로부터 출발합니다.

첫 번째, 조지 부시 미국 전 대통령과 MB를 대표로 하는 주유주의가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그 주제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애덤스므스류 혹은 신자유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개인을 '이기적'이라고 합니다.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는 심지어 유전자까지도 이기적(selfish gene)이라고 했지요. 개인의 '이기심'이 사회를 구성해 나가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들은 협력이나 이타심마저도 어떻게 이기심으로 환원해서 설명할지를 많이 고민합니다. 또, 게임이론을 가지고 정교하게 수리적으로 분석해서 겉보기에는 이타적이고 협조적인 행위들이 어떻게 이기심으로부터 출발하는지를 보여주려고 무지 애를 씁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시장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로 등장한 겁니다. 이게 극단적인 보수적 자유주의죠. 

그런데, 자유주의를 도덕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루소를 이어받은 칸트와 롤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개인을 이기적 존재나 욕망의 존재가 아니라, 선의지가 있는 '도덕적 개인'으로 봅니다.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한데, 도덕적 개인이라고 해서 남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도 인간이기 때문에 나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그의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그런 태도입니다. 이게 자유주의의 도덕화이고, 이것이 오늘날 복지자유주의 곧 복지국가의 모델이 됩니다.

자. '이기적 개인'을 근대 용어로 말하면, 바로 부르주아지입니다. 부르주아지는 오늘날 (사적인) 시민계급이라고 얘기하는데 현대의 자본가로 발전하게 됩니다. 여기서 잘 구분하셔야 할 것은, 부르주아지를 의미하는 '사적인 시민'과 루소가 말하는 '공적인 시민' 입니다.  65-67



'인륜'은 독일어에서는 원래 'Sitte'에서 유래하는데, 관습이나 습관을 뜻합니다.

법을 안 지키면 처벌을 받지만, 관습을 안 지킨다고 해서 감옥에 가거나 하진 않아요. 그냥 비난을 받을 뿐이죠. 어쨌든 공동체는 각기 그 나름대로 관습이 있고, 그 속에서 사는 나는 나도 모르게 그 관습이 몸에 배어서 따라가게 되지요.  122


상호의존... 내가 상대방의 인질이 되면, 자기중심적, 이기적 태도를 바꾸는 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북한도 남한의 인질이 되어야 하지요. '상호 인질'이 되는 것이지요.  133


우리말로 '성(性)'이라고 번역되는 말은 섹스(sex), 젠더(gender), 섹슈얼리티(sexuality), 이렇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섹스와 젠더, 많이 들어보셨죠? 섹스는 생물학적인 성입니다. 젠더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길러진 성이죠. 그래서, '여성답다' , '여성스럽다' , '여자가 재수 없게...' 할 때의 성이 젠더이고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저 여자(sex)는 남자(gender)같애"나 "저 남자는 여자 같애."라고 말할 때, 앞의 여자(혹은 남자)는 섹스, 즉 생물학적 성이죠. 젠더는, '여자 같아' , '여성성' , 

여자로 길러짐' , '여자로 길러짐', 이런 얘기고요. 역시 "저 여자는 남자 같애"라고 할 때에, 뒤에 나오는 남자의 의미는 젠더로 사용된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섹스나 젠더 이외에 섹슈얼리티(성을 사회적으로 논의하기 위해서 대두. 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의 필요성. 성적 욕망이나 정서, 판타지, 성적 매력, 성 정체성 등을 의미하고, 신체적 영역을 넘어서 정서, 심리, 무의식 차우너의 심층적 의미구조들로 성의 범위를 확대시킨다.)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한국어로 성(性), 성성(性性)이라고 번역하는 이 말에 담겨 있는 의미는 굉장히 커요. 우리가 성관계라고 하는 것을 섹스가 아니라 섹슈얼리티라는 새로운 용어로 부르기로 한 이유가 있어요. 해부학적인 성, 생물학적인 성을 일컫는 개념인 섹스를 성관계의 의미로 사용하게 되면 성기 삽입이라는 점에만 초점을 두어서 이야기하게 되죠. 그래서 성행위, 성관계 등을 사회적인 문제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적인 문제로만 남겨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섹슈얼리티라는 개념을 창출하게 된 데에는 성적 욕망이나, 성적인 정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환상, 성적 매력, 성 정체성, 의미 등등, 이런 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굉장히 큰 의미로 사용해야 된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성기 삽입 차원의 성관계에만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고, 어떤 친밀한 행위들, 어떤 친밀한 정서까지도 우리는 포괄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차원이죠.  143-144


차별이 '다르기 때문에...'라면, 차이는 '다르지만...'을 전제한다.  150


평등, 공평함이란 단지 동일한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특수성, 차이, 경험, 맥락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화장실과 남자화장실이 ㄸ고같이 세 개여서, 차별이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개별적인 특성, 경험, 다양성 등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차이가 아닌 차별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151


음양의 특성... 음양에 대한 초기의 생각은 주나라 때 생겨났는데요. 이 때에는 햇볕의 있고 없음에 따른 단순한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었습니다.

춘추 시대의 음양 개념의 특징은 음양이 독립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춘추 시대에는 음(陰), 양(陽), 풍(風), 우(雨), 회(晦), 명(明) 등의 여섯 가지 기 개념으로 셜명되었습니다. 풍은 바람이고요, 우는 비, 회는 어두움, 명은 밝음입니다. 하지만 이 여섯개의 기운 중에 풍, 우, 회, 명은 음양의 개념으로 포섭이 되었습니다. 풍은 바람이니까 건조함이죠? 건조함은 어디에 배속될까요? 양이겠지요. 비는 음에, 어두움은 음에, 밝음은 양에 배속이 되겠지요?

이렇게 되니 음양 두 기만으로도 다른 네 개의 기를 설명할 수 있으므로 음양을 제외한 네 개의 기는 점차 사라지고 음양 두 기만 남게 되었습니다.  154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이 과연 명쾌하게 설명 가능할까요? 오히려 애매함, 모호함을 통해서 더 잘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요?  165


<계몽의 변증법>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왜 인간은 진정 인간적 상태로 진입하지 못하고 새로운 야만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177

이에 대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계몽의 방향을 잘못 설정했다는 것입니다. 걔몽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 얘기하겠지만, 동일성 사유에 기초한 계몽을 부정하는 것이고, 자기 유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자기의 체계에 꿰맞추는 자기 유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지요. 타자를 부정하는 자기 유지는 역설적으로 자기 유지에 실패할 운명에 처한다는 거죠. 체계의 틀을 맞추느라 놓쳐버린 자신의 본능, 감성, 개성, 인간성 등을 잃게 된다는 거예요.  179



시푸 : 사부님, 아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대사부 : 시푸, 그냥 소식이 있을 뿐일세, 좋고 나쁜 것이란 없어.

....

대사부 : 이 나무를 보게, 내가 원하지 않아도 복숭아씨는 복숭아 나무가 돼.

시푸 : 하지만 복숭아로는 타이렁을 물리칠 수는 없어요.

대사부 : 가능할지도 몰라, 자네가 포를 이끌어주고 믿어만 준다면.

시푸 : 도와주세요, 사부님.

대사부 : 아니야, 그냥 믿는 수밖에. 약속해줘, 시푸. 그 아이를 믿겠다고...     <쿵푸팬더> 중에서  249


(시푸가 용의 전사로 포를 받아들이고 훈련시키기 시작하면서)

시푸 : 쿵푸는 수련할 때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필요한데 너는 꽝이야. 그런데 그건 내 잘못이었어. 너를 5인방과 같은 방법으로 가르치려고 했으니까.                        <쿵푸팬더>중에서  258


적어도 자신의 옳음이 다른 사람에게도 옳음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했죠.  259


수영을 시작할 때 물에 뜨기 어려운 것처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거나 관계를 맺기 어려운 것은 그 이전의 익숙함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몸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인 것이죠. 여기서 필요한 것은 과거의 경험이나 지식이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266


(용의 전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의기소침해 있는 포에게)

대사부 : 국수냐 쿵푸냐? 너는 과거와 미래에 대해 너무 집착하고 있구나. 이런 말이 있어. 어제는 역사고 내일은 아무도 모르지, 그러나 오늘은 선물이지. 그 선물을 소중하게 다루렴.    <쿵푸팬더> 중에서  267


나의 경험과 생각의 한계를 인식하고, 나를 둘러싼 것들을 하나씩 비워나가는 과정을 통하여 세상 속의 내가 아닌 진정한 나에 이르게 되고, 이를 통해 나는 세상의 길, 세상의 결을 따라 '노닐 듯'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나도 타인에게, 타인도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으며,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소요유(逍遙遊 거닐소 멀요 놀유)' 입니다.  270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의 생각과 가치를 비판하고 그것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자유롭고자 하는 장자의 철학.  271


Kritik'(비판)과 'Krisis'(위기)의 어원이 똑같더군요. 'Krise'에서 나온 말이랍니다.

철학과 철학함은 차이가 있습니다. 사상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철학이며 그 사상의 힘을 현실의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사고하는 것은 철학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77


마키아벨리즘이 일반적으로 이해되듯이 기만과 위선을 의미한다면, 마키아벨리는 마키아벨리주의자기 아니었습니다.

"책의 운명은 그 독자들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웃지 않고, 슬퍼하지도 저주하지도 않고, 오직 이해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오직 그를 '이해하기'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281


그는 '현실 정치학'을 만들어낸 최초의 사람이라고 평가받는데요.

마키아벨리는 현실주의 정치사상을 주장하지요. 즉 <군주론>은 정치적 현실에 대한 기술의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저작은 사실판단이지 도적, 윤리가 개입하는 가치판단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봅니다.  286


당시 이탈리아는 다섯 개 국가로 분열돼 있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고민했던 것, 그가 꿈꾸었던 것은 국가의 통일이었죠. 그래서 책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이 군대예요. 마키아벨리가 제일 싫어하는 군대는 외국 군대입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인민의 군대를 주장합니다.  287


마키아벨리는 소위 중세적 위계질서를 깨려고 합니다.  288



'던바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회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원 수는 150여명이며, 강도 높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핵심 친구 관계는 12명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죠.  319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자신의 생명이 말하는 욕망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자기 밖의 것들에 눈을 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왜 내 삶은 공허하지' , '왜 나는 열심히 사는데 안 되지'라고 자꾸만 자신을 닦달합니다.  322


'네가 트루먼을 아느냐? 뭐가 옳은지 안다고 생각하나? 나는 트루먼에게 특별한 삶(normal life)을 살 기회를 줬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역겨운(sick) 곳이야. 시헤이븐(seahaven)은 천국이지. 트루먼은 언제나 떠날 수 있지만 그러려고 하지 않았어. 마음만 먹으면 진실을 알 수 있는데, 시도하지도 않았지. 자네가 괴로운 건 트루먼이 그런 세상에 익숙하기 때문이야.'  <트루먼 쇼> 중에서  363


진실을 향해 나간다는 것은 대단히 큰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366


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는 나라는 세금이 높다고 하지요. 수입의 50% 이상을 세금으로 낸다고 하잖아요. '네가 번 돈은 다 네 것이 아니다. 반 이상 내놔'하면서 이런저런 정책을 펼치는데 쓰겠죠. 개인의 수입을 사회로 완원시키는 것인데, 이런 것도 사회주의입니다. 사실 내 것이 온전히 내 것인 것은 아닙니다. 내가 수입을 많이 올려 부자가 되었다고 했을 때, 그건 내가 누군가와 관계를 맺었지 때문이고,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혔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금을 많이 내게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데 있습니다. 그리고 걷은 세금이 투명하고도 적절하게 잘 쓰이고 있다고 믿으면 세금 저항이 크지 않겠죠. 믿지 못하겠으면 어떻게든 세금을 안 내려고 할 거고요.  386


저는 얼마 전에 한 학술 발표회에서 우리나라를 아류제국주의 국가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제국주의 국가의 대외 정책에 합류하면서 또 그들의 요구를 잘 들어주면서, 현실에 안주하는 피지배 계급을 양산하는 거죠.  388


강자는 현실에 안주하려 하고 약자는 현실을 변화시키려 합니다. 따라서 미래는 약자에게 있습니다. 위로가 되나요?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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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치 서핑 사이트 이용 방법 2-1


카우치 서핑 사이트 이용 방법 2-2



평범한 사람들도 여행자라는 이름의 페르소나를 만나면 조금 더 인생의 본질에 집중하게 된다.

여행자는 삶의 순간순간을 완전 연소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한 번쯤은 여행자가 되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7


카우치서핑(CouchSurfing)은 오픈 마인드로 시작한 범세꼐적인 여행 공동체이자, 새로운 형식의 사회 운동이다. 카우치서핑이란 영어의 소파(Couch)와 서핑하기(Surfing)의 합성어로, 소파에서 소파로 이동하며 지속하는 여행을 의미한다. 1999년, 한 미국인 청년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새로운 개념의 여행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 25여 개국 450만 명 이상의 회원을 갖춘 비영리 커뮤니티로 성장했다.(2012년 6월 기준)  41


카우치서핑은 여행자들이 현지인과 여행지를 제대로 체험하고 공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세계를 하나로, 모두를 친구로 연결하는 공동체를 만들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 바로 카우치서핑의 비전이다.  43



카우치서핑의 첫 단추는 전 세계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카우치서핑 사이트에 회원으로 가입하는 것이다. 카우치서핑에 이름을 올리는 순간, 우리는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카우치서퍼들과 친구가 된다.  44



Ezabel Siek 이자벨(싱가폴) - 카우치서퍼ID : xezabelx , SNS : www.facebook.com/xezabelx

'세상이 한 권의 책이라면 여행을 하지 않은 사람은 그 책의 단 한 페이지만 읽은 것과 같다.'  68



몇 해 전 혼자 인도 배낭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게스트 하우스 옥상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주인이 와서 말을 걸었다. "너 한국인이지? 근데 왜 혼자 왔어?"

이유인즉 오랫동안 한국 여행객을 봐 왔는데 항상 여럿이 몰려와서 자기들끼리 얘기하고 가더란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여럿이 모여서만 여행을 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지금은 혼자서 떠나는 여행이 흔해졌지만, 여전히 우리는 여행을 준비할 때 강박적일 만큼 동행을 찾는다. 같이 갈 친구를 찾아 가이드북을 함께 뒤적이거나, 호텔 패키지라는 명목으로 기어이 단체 여행을 예약하고야 만다. 그도 아니면 여행자 카페 게시판에 '함께 여행하실 분'을 찾는 글을 올린다. 그것도 모자라 한국인이 하는 현지 민박을 찾아 픽업 서비스까지 부탁하며 한민족의 뜨거운 피를 느끼고 싶어한다. 어찌 보면 국외로 떠나는 여행이 '한국인 찾아 삼만리'같다는 느낌도 든다. 물론 낯선 외지에서 같은 언어를 쓰고, 피부색이 같은 사람을 만나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현지 문화를 체험하고 현지 친구를 사귈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73-74



Michelle Inge 미셸(독일) - inge , BLOG : from-seoul-to-tokyo.tumblr.com

"카우치서핑은 어딘가 불확실한 면이 있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집에 들이고, 열쇠를 주고, 나를 호스팅하는 사람들 역시 내가 나쁜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 확실하게 모르는 상태에서 나에게 잠잘 곳을 제공해 주고 현관 비밀번호를 기꺼이 알려주는 거잖아. 이건 일종의 인류애에 대한 테스트인 것 같아. 나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신회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고,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을 이렇게 믿을 수 잇다는 것에 놀라곤 해."  80



카우치서핑으로 온 게스트에게 친절하게 해 주는 것은 좋지만, 과도한 친절은 오히려 게스트와 호스트 모두 불편하게 만들 수 있거든요. 게스트를 위해 특별한 식사, 거창한 선물, 관광 가이드를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어요.  89


여행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이다. 무조건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여행은 어떻게든 시작되기 마련이다.  95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런데 도와달라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도움을 받을 가능성조차 없어져. 즉,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매일매일 누군가로부터 도움받을 기회를 날려 버리는 것이지. 그래서 나는 도움 요청하는 것을 꺼리지 않아."

"두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에 거침이 없었어요. 길을 물어보는 것도, 잠을 재워 달라는 것도, 히치하이킹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죠. 이것저것 재보지 않고 일단 부딪혀 보는 삶의 방식을 배울 수 있었어요. 곤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받을 수도, 받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도움을 받으려면 반드시 시도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어요."  100-101



"여행을 왜 좋아하느냐고? 순간을 즐길 수 있거든. 아마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일 거야. 여행하고 새로운 도시에 가게 되면 순간에 충실하게 돼. 누구를 만날지, 어디를 갈지, 뭘 먹을지, 어디서 잠을 잘지 같이 일상적인 일들이 여행할 때에는 특별해져. 모든 상황은 늘 변하고 그런 변화들을 받아들이는게 재미있어."(브루노, 아르헨티나)  119



덤스터 다이빙(Dumpster diving) : 유럽에서는 식료품점이 문을 닫기 전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버린다. 물론 유통기한이 막 지난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유럽에서는 소비에 대한 신념으로 덤스터 다이빙으로 먹을거리를 해결하는 '유프리건족'도 있다.  124


"살아가는데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카우치서핑으로 통해 만난 친구들을 통해 배웠어. 사람들은 돈을 버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돈을 쓰고, 다시 돈을 쓰기 위해 돈을 벌잖아. 그럴 바에는 그냥 돈을 벌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해."(브루노, 아르헨티나)  126



카우치서핑을 하기로 결심했다면 사람에 대해 일단 믿어 보자.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참 많다! 그리고 자신도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 보자. 어쩌면 이것이 카우치서핑의 모든 것일지도 모른다.  138



"마케팅 1.0, 2.0, 3.0이라는 개념들이 있잖아요. 여행도 비슷하게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여행 1.0은 패키지 투어라고 생각해요. 여행사가 준비한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여행사가 계약한 숙소에 묵으며, 계획된 인원수의 사람들과 여행하는 거죠. 편리하지만 일방적이고, 개개인의 성향에 안 맞는 여행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다 점차 여행 2.0이라고 할 수 있는 배낭여행이 유행하게 되었죠. 배낭여행은 개인이 여행 서적, 웹사이트 정보 등을 참고해 가고 싶은 곳과 숙소, 음식점을 자유롭게 정하면서 원하는 여행을 직접 설계할 수 있어요. 하지만 여행2.0은 배낭여행의 대표 서적인 <론리플래닛>이란 이름처럼 외로울 수 있고, '여행객' 그 이상이 되기는 어려워요. 그래서 저는 카우치서핑을 통해서 현지 친구들과 교류할 수 있는 여행을 여행 3.0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현지인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삶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카우치서핑 여행법의 가장 상위에는 '공유'와 '나눔'이라는 큰 공통의 가치가 있어요. 이것이 3.0 정시노가 닮았죠. 물론 또 다른 여행 방식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분명 여행 3.0은 가치 있는 여행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이동익)  170



누군가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은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겪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같은 맥락에서 다른 나라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카우치서핑이에요. 사실 싸움이나 분쟁은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고 이해가 부족해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잖아요. 가끔 생각해요. 세상 사람 모두가 카우치서핑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그 나라의 문화를 잘 알게 된다면 전 세계에 평화가 깃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요."(이동익)  174


인생의 본질에 집중하면 적은 돈으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유럽에는 카우치서핑 히피가 있어요. 인생 대부분을 카우치서핑을 하면서 사는 친구들이죠. 스페인에서 카우치서핑을 할 때 만난 이스라엘 친구가 있었는데 안 가 본 나라가 없었어요. 오직 카우치서핑으로만 세계를 여행하며 살아가는 친구였어요. 맛있는 것이 먹고 싶고, 좋은 곳에서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돈이 많이 들잖아요. 그런데 인생의 본질에 집중하면 오히려 아주 적은 돈으로 풍요롭게 살 수 있어요. 그런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껍데기가 아닌 본질에 집중해야 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돼요. 물론 왜 두렵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카우치서핑을 하며 만났던 친구들을 떠올리면 힘이 돼요. 한 번밖에 없는 인생, 좀 더 강렬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죠."(박인)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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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행, 혹은 여행처럼 정혜윤 난다 2011 03810

2. 세계사를 바꾼 철학의 구라들 폴커 슈피어링 이룸 2007 03100

3. 필사의 탐독 정성일 바다출판사 2010 03680

4. 저가 항공 세계일주 강지준 중앙books 2012 13980

5. 카우치 서핑으로 여행하기 김은지 김종현 이야기나무 2012 03810

6. 글쓰기 만보 안정효 모멘트 2006 03810

7. 원미동 사람들 양귀자 살림 2004 03810

8. 특별한 해외여행백서 정상구 나무자전거 2010 13980

9. 여행이 답해줄거야 박혜영 21세기북스 2010 03400

10. 히피의 여행 바이러스 박혜영 넥서스books 2007 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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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며

아침이 서서히 깨어나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꽃들이 노래하는 계절의 아름다움도 자칫 놓치고, 속도의 원리에만 몸을 맡기며 주마간산(走馬看山)의 경험에 만족하고 마는 현실이 되었어요. 보다 정밀해진 액정화면에 고정시킨 시선으로 세상의 정보를 모두 알았다고 착각하는 기술사회의 우화가 우리의 머리를 녹슬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9



<미운 오리 새끼> - 미운 오리 새끼의 자존감 회복을 위하여


"아, 이런 저기 가장 큰 알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구나. 도대체 얼마나 걸려야 되는 거지? 다시 알을 품는 건 너무 지쳐."

마침 그곳에 들른 어느 읅은 오리가 "잘 되가나?"하고 물었습니다.

"한 녀석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도대체가 알에서 깨어 나오질 않네요...."

오리보다 큰 존재는 오리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려야 알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세상에 대한 풍자죠.  20


"이거 아무래도 칠면조 알 같지 않아? 나도 예전에 한번 속은적 있지. 알에서 깨어 나온 뒤, 물속에 들어가질 못하더라고. 이거, 이거 칠면조 알 확실히 맞아. 이 알은 그냥 내버려 두고 다른 오리 새끼들 헤엄이나 가르치는 게 낫지. 쯧쯧."

출생 이전부터 미운 오리 새끼는 세상의 편견과 몰이해의 시선에 놓여 있는 겁니다. 살기도 더 오래 살고 경험도 많은 늙은 오리가 아직 깨지 않은 알을 칠면조 알이라고 단정한 것은 잘못이지만 오리 알이 아니라고 본 것은 결국 맞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이 늙은 오리가 알고 있는 큰 알은 칠면조 알 외에는 없군요. 자기가 알고 있는 경험만이 답입니다. 오리들의 세계에서 제 아무리 노련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넘지 못하고 있는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21-22


"야, 이게 뭐야? 형편없이 못생긴 녀석이잖아. 이거 참을 수가 없군."

"그만 둬! 이 애를 좀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어? 남들에게 어떤 짓도 하지 않았잖아?"

"무슨 소리야? 이 녀석은 오리치고는 너무 크잖아? 게다가 괴상하게 생겼고 말이야. 그러니까 혼 좀 나봐야 해."

"다른 오리 새끼들은 참 예쁘더군, 그런데 저 녀석은 영 틀렸어. 아예 다시 좀 제대로 만들어 낳아 보지 그래."

마침내 미운 오리 새끼에 대한 집단적인 따돌림과 괴롭힘이 시작된 것이지요. 생긴 모습이 다르다는 거시 하나로 내몰릴 지경이 된 것인데, 오리 공동체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늙은 오리마저도 미운 오리 새끼의 존재를 정면으로 부인합니다. 오리 세계에서 오리라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된 데에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핍박의 대상이 된 거예요.  26


"다른 오리 새끼들이 더 예뻐. 그냥 집에나 잘 가시게. 그리고 가다가 혹시 뱀장어 머리라도 보거든 내게로 가져와."

이 늙은 오리가 권위를 독점하고 있는 오리 세계는 앍은 생각에 사로잡힌 노욕에 빠진 자들이 지배하는 현실을 상징하는 거죠. 낡고 욕심 많은 자들이 기존질서를 움켜쥐고 있는 겁니다. 이런 곳이 스스로 변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듭니다.  27


애초에 백조로 태어난 것을 몰랐고, 세상 또한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시골 농장에서만 지냈다면 미운 오리 새끼는 계속 그 좁은 세계에 갇혀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농장을 감연힌 탈출햇씁니다.

수많은 위기의 순간을 통과하면서 미운 오리 새끼는 어느새 훌륭한 백조로 성장해 있었던 겁니다. 

안데르센은 우리에게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고 내면의 백조를 떠올리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뭐라던 자신이 백조임을 발견하라고 응원합니다.  49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에는 몇 가지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오리와 백조에게 신분차이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자기와 다르게 생긴 오리를 못살게 구는 오리드의 고정관념이 가한 폭력과 배타의식을 분명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백조의 특권적 위상을 설정해놓은 거예요.

이는 백조로 태어나지 못한 존재에게 본질적 절망과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백조의 세계에서 환영받는 것 외에는 행복한 길이 없다는 식의 결론은 승자 위주의 논리이자, 자칫 오리들에게는 제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한 패배가 있을 뿐이라는 판결을 내리는 셈이됩니다.  

둘째, 엄마 오리에 대해서. 미운 오리 새끼를 알에서 깨어나게 해주고 세상에 대한 첫 가르침을 주었으며, 나중에야 결국 손을 놓아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남들의 비난과 공격 앞에서 자신을 강력하게 엄호해준 엄마 오리 아니었나요?

자신이 백조라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렸어야 할 존재는 이 엄마 오리가 아니었을까요?

셋째, 자신이 백조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그저 행복합니다. 그간의 고생을 떠올려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그가 백조가 되었다 해도 뱀장어 머리를 놓고 싸움 박질하는 닭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고루한 사고방식에 매여 자기와 조금 다르다 싶으면 배타적으로 대하는 집단들이 아직도 누군가를 괴롭히고 있으며, 사냥꾼의 총과 사냥개는 늘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 대해 미운 오리 새끼는 자신이 겪었던 일들이 다른 누구에게도 더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하게 열망되면 좋았을 텐데, 자기가 백조인 것을 확인한 것으로 이런 문제들은 모두 다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넷째, 성장과정에는 의식의 발전이 어느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관심 갖는 것은 오직 하나, 자기가 못생긴 오리라는 낙인에서 벗어나는 일뿐입니다. 도망나올때 그는 깊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상태였습니다.

이 피해의식은 나중에도 지속되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가운데 극복되기보다는 사실상 더욱 예민해 지고 말앗습니다.  50-54



<솔로몬의 지혜> - 솔로몬의 지혜가 생명의 정치로이어지기 위해


솔로몬은 "이 아이는 저 여자의 아이다."라고 하지 않았스니다. 누구의 아아인가가 초점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속하는 소유권인가의 차원에서 접근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저 여자의 아이다."라는 말 속에는 여자가 중심이 되고 아이는 그 소유물이 되는 관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에요.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했던 걸 떠올리면 솔로몬은 이러한 논리를 깨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대신 솔로몬은 "저 여자가 그 아이의 어머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가 과연 누구인가각 초점입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엄마에 대한 아이의 소유권을 확정짓는 어법이 아니지요. '그 아이의 어머니'라는 말은, 그 아이에게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는 의미입니다.

여자들은 애초에 아이에 대한 소유권의 문제를 들고 나왔는데 솔로몬은 생명의 문제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 겁니다. 이는 소유와 생명이 댈힙하는 상황에서, 생명을 선택하는 이에게 소유가 저절로 따라붙게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사건의 진상을 놓고 추리로 현장을 재구성해서 진상을 밝힘으로써 최종 판결을 내릴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설사 아이가 친엄마가 아닌 여인에게 돌아간다 하더라도 생명의 가치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여인이 엄마가 되는 쪽이 그렇지 않은 쪽보다 당연히 낫다는 것은 달리 거론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겠지요.

그래서 솔로몬이 그의 법정에 등장시킨 칼은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려내기 위한 수단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칼은 사용하기에 따라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니, 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칼의 주인이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인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 이 사건의 결정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솔로몬 체제의 전격적인 변화가 이 사건을 통해 예고된 것이었고, 이제 사람들은 창녀처럼 신분이 미천한 존재의 문제조차도 생명의 원리에 의해 해결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이 재판은 신분이 무엇이든 간에 상관없이 최고 권력자에게 하소연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해결의 기준도 '생명'임을 말해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 지금까지 칼로 피를 흘리며 권력을 잡앗던 솔로몬의 과거와 결별하는 이정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솔로몬 체제가 무엇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고 어떻게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인 겁니다.  107-109


거울은 단지 유리로 만든 거울만 있지 않습니다. 진짜 거울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있답니다. 자기만이 볼 수 있는 거울이죠. 그래서 그건 깨지지 않는 거울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바로 이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투명하게 보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생명의 가치를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지혜 말이지요.  117



<인어공주> - 인어공주여, 공기의 딸로 태어나라


인어공주가 두 다리를 억기 위해 마녀를 찾아갔다고 할 때 이 '다리'는 남자의 다리와는 달리 여성의 '바기나(vagina, 질)'에 대한 대체어입니다. 그런데 이런 단어를 여성이 이야기하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고 불순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여자로서 언급하기 부끄러운 단어이고 음탕한 것으로 오인되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인어공주>의 작가 안데르센은 그 단어를 마녀가 먼저 꺼내도록 합니다. 인어공주 자신이 바라는 것을 스스로 말하지 않도록 해준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두 다리가 합쳐 만들어지는 중심에 존재하는 '바기나'에 대해 적극성을 보이는 것은 자칫 '마녀'로 지탄받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헤어나올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뛰어드는 것이며 물뱀으로 상징되는 악과 두꺼비로 상징되는 저주를 온몸으로 받아 살아야 하는 고통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건 지옥인 거지요.

실제 역사에서 무수한 여성들이 그런 마녀사냥의 지옥 같은 화염에 희생당했습니다. 뛰어난 미모의 여성들은 그 미 자체가 악마의 유혹이라고 지목받아 불태우지기도 했어요. 남자들이 집중하는 욕망의 대상을 제거함으로써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잔혹한 일이었지요.  158-159


인어공주의 내면을 더듬어 내려가보면 당대의 종교관, 성에 대한 인식, 여성의 주체성 등 여러 가지 주제와 만나게 됩니다. 자신의 성적 생명력에 충실한 여성이 되려면 마치 마녀의 문을 통과하는 것 같은 공포와 고통을 이겨내는 용기가 요구되었던 것이지요.  160


이웃나라 공주에게...

'아, 당신이군요! 내가 해안가에서 죽은 시체처럼 누워 있을 때 나를 구해준 사람이!'

바닷가에 왕자가 쓰러져 있었을 때 한 무리의 소녀들이 나왔던 장소를 '교회인지 수도원인지 확실하지 않은 건물'이라고 표현했던 까닭을 이제 여기서 알게 됩니다. 교회인지 수도원인지 구체적으로 지목하지 않고 성전까지 추가해서 작가는 인어공주의 사랑을 빼앗아가는 여인과 그 여인을 길러낸 질서를 언급햇던 것이죠. 그것이 <인어공주> 이야기에 교회나 성전, 수도원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에로스적 생명력에 대한 교회 또는 종교의 억압 또는 엄격한 기준으로 말미암아 그걸 내놓고 표현할 수 있는 목소리를 잃은 존재들에 대한 작가의 공감과 동정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거지요.  171


'자신의 생명이 끝나는 마지막 날 밤을 생각했습니다. 지상의 인간 세계에 와 살면서 자신이 잃어버린 많은 것들이 하나씩 둘 씩 마음을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성숙한 여인으로서 사랑하는 남자와 하나가 되어 기쁨을 느끼려 했던 그녀는 자신의 사랑에 목숨까지 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시도는 당대의 종교와 관념에서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사랑과 성의 욕망을 표현하는 목소리는 여자로서 내면 안 되는 것이었어요. 그건 침묵해야 할 것이었지요. 아니 침묵 당했습니다. 더군다가 나살ㅇ하는 상대는 눈동자로 말하는 진실의 목소리는 들을 줄 몰랐습니다. 이런 현실의 거대한 벽 앞에서 인어공주의 사랑은 좌절당합니다. 

왕자는 결국 이웃나라의 권력과 동맹을 맺었고 동일한 계급과 결혼했으며 바로 자기 눈앞에 있는 사랑의 진실보다는 잘못된 자기 기준을 고집하고 말았습니다.  174


이야기는 결혼에 대한 당시 기득권 질서의 위선과 기만을 폭로하고 있기도 합니다. 말로는 사랑한다면서 정작 결혼은 다른 기준을 세워 선택해버리는 현실에 대한 분노도 드러내고 있습니다.  175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고 여겼을 때, 그래서 울며 슬퍼하는 일에 몰두해버릴 때 우리가 바라는 변화의 시간은 더 연장된답니다. 그런 때일지라도 미소로 기쁨을 만들어내는 노력을 기울이면 '그날'은 속히 온다는군요. 300년에서 1년씩 빠지면서 말이지요.

진정한 사랑, 지고한 사랑,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은 결코 물거품이 되지 않습니다. 소리 없는 소리를 알아듣는 우리의 귀가 열리는 날, 사랑의 눈빛을 알아보는 우리 눈이 뜨이는 날, 대지에 차오른 공기 방울들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환히 보게 될 것입니다. 늘 행복한 기운과 선한 미소로 마음을 채워 가노라면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된다고...  187



<토끼전> - 간을 놓고 다녀야 하는 토끼들을 위하여


여기서 동해 용왕은 누굴 빗대고 있는 걸까요? 동쪽 나라는 조선이라는 걸 알기 어렵지 않고, 그에 더해 왕이 불치의 병석에 있는 것은 조선이 깊은 병에 걸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토끼전>은 용을 상징으로 삼는 당대 최고 권력자를 처음부터 조롱하는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지요. 다른 나라드에 비해 혼자 뒤쳐져 있는 것입니다.  193-194


'나 같은 미력한 자를 좋은 곳에 천거하니 감격이 이루 말할 데가 없으나 수궁에 들어가서 벼슬이 그리 쉽겠소이까?'

토끼는 아무것도 모르는 산간의 힘없는 민초가 아니라, 세상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 출세하지 못한 초라한 서생(書生)입니다.   208-209


''요놈 인제야 속았구나,' 하고 흔쾌히 대답하기를... 밝은 임금이 신하를 가리고 어진 신하가 임금을 가리나니 우리 대왕께서는 마음이 성실하시고 문무를 겸비하셨는데 한 가지 능력과 한 가지 재주가 있는 선비라도 벼슬직책을 맡기시고 닭처럼 울고 개처럼 도적질 하는 자라도 버리지 않으시니 나처럼 재주 없는 인물도 벼슬이 주부 일품 자링 외람되게 있거늘, 하물며 그대같이 고명한 자격이야 들어가면 수군절도사는 떼놓은 당상(堂上)이지 어디 가겠나? 토끼 가문에 중시조 되기는 염려가 조금도 없을 터라.'  209


토끼는 용궁의 안락과 권세에 취해 제 간을 내주는 줄도 모르고 사는 자드로가 구별되는 존재입니다. 의식의 각성이 있는 거지요. 그래서 그는 이 모든 욕망과 허세와 권력에 줄을 대고 있는 대열에서 과감히 이탈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자 용궁은 자기 간이라도 내놓을 자를 모아들이는 일에 실패하고 맙니다.

토끼처럼 이탈하는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래서 용궁의 실패가 쌓이면 쌓일수록 세상은 좋아집니다. 병든 권력이 스스로 그렇게 병들다가 무너지면 민초들의 삶은 희망을 얻게 될 테니까요. 토끼전은 그런 사대부 지식인들의 용궁 이탈을 촉구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가 토끼를 살린 것에는 바로 그 탈출의 길을 여는 시나리오가 깔려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215


용궁으로부터 토끼가 생환(生還)해온 것만으로 이 <토끼전>의 이야기가 막을 내리지 않는 점에 <토끼전>의 의미가 주목됩니다. 생환은 새로운 시작의 조건일 뿐이지요. 그가 돌아온 현실에서 다시 마주할 새로운 도전 역시 이겨내야, 살아 돌아온 것이 비로소 가치를 갖게 될 겁니다. 

험난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바위 틈 하나 정도만 있으면 됩니다. 포기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면 되는 거지요. 아무것도 아닌 듯해도 '조금씩' 밀고 나가면 그 바위틈은 어느새 난공불락(難攻不落)의 견고한 요새가 될 수 있습니다.  225



<이솝우화>

'우화'는 듣는 사람이 그 뜻을 바로 다 알게 하지 않습니다. 말하고 싶은 걸 슬쩍 돌려 표현하지요. 이야기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는 겁니다. 대체 뭘 이야기하려는 거야? 하는 궁금증을 품게 해서 추리와 상상력을 자극하니 재미도 있고, 그러는 가운데 교묘하게 풍자하고 비판합니다. 

그런 까닭에 우화는 다양한 해석의 문을 열어놓지요.  229-230


우선 이솝에 대해 잠시 살펴보지요. 그는 기원전 620년경에 그리스의 어느 도시 국가, 또는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230


우리는 이솝이 노예로 팔려 다니느라 본의 아니게 많은 여행을 했고 그런 경험으로 인해 여러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풍부하게 접할 수 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솝에 대해서는 역사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헤로도토스가 기원전 425년경에 저술한 <역사>라는 책을 통해 거론할 정도였으니, 그는 이미 고대 문명 세계에서 유명세를 떨친 존재였다고 하겠습니다.  231


[개미와 베짱이]

'개미와 베짱이' 개인적인 성실과 게으름의 대조하는 주제 이전에 일하는 자들의 권리를 엄호하는 내용이 될 수 있습니다.  235


'일에 몰두하고 있던 개미들은 '원칙적으로는 이러면 안 되는데..'하면서 잠시 일손을 멈추고는 베짱이에게 물었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합니다. '중단 없는 노동'이지요. 이 중단 할 수 없는 노동이 강제화된 것이어도, 자발적인 의지가 작용한 것이어도 문제입니다. 휴식의 가치나 타인의 호소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인 거지요.  236


이곳은 누군가의 빈궁한 사정에 대해 눈을 돌릴 겨를이 없는 사회입니다. 원칙이 이렇게 정해진 곳에서는 아무리 사정이 딱해도 인정이라는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일에만 미쳐서 사랑, 관심, 동정 같은 영혼의 힘을 잃어버리고 만 사회인 거예요.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걸 멈춘 곳입니다. 이런 데서 살면 기쁠 것 같은가요?

오늘날 자본주의가 치닫고 있는 현실을 이 우화와 대조해서 읽어나가면,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어느새 우리 모두 일개미로 변해 있지는 않은지요.  237


[양치기 소년과 늑대]

만일 이 이야기의 적용 범위를 넓혀 본다면 어떨까요? 양들을 돌보는 책임, 즉 그 국가나 사회 구성원의 안전을 책임진 권력자들이 하는 거짓말의 경우말이지요. 

그러면 이 이야기는 권력자가, 있지도 않은 늑대의 출몰과 같이 적의 공격이 임박했다면서 공포를 조장해 사람들의 충성심을 시험한다든지 자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비상체제를 가동시키려 들면 결국 실패한다는 경고로 읽힐 수 있습니다. 처음 몇 차례는 거짓말에 속을 수 있지만, 정작 위기가 왔을 때에는 더 큰 문제가 생기고 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요?  246


이 우화는 권력의 거짓말이 공동체 내부의 신뢰와 결속을 붕괴시키고 권력 자체에 대한 민심의 이반과 함께, 결과적으로 늑대에 의한 양들의 희생을 마을이 황폐해지는 것을 무섭게 보여줍니다.

공포를 꾸며 기존의 권력을 강화하고 유지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한 조롱과 경고입니다.  247


양치기 소년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네, 양을 잘 지키고 돌보는 것입니다. 

사태가 다급해서 어쩔 수 없다면 모르겠지만, 어른도 상대하기 힘든 늑대를 소년 혼자서 물리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248


늑대와 관련해서 이 소년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그렇지요. 양치기 소년은 일종의 경보장치입니다. 경보가 울리면 그 다음 행동은 마을사람들의 몫입니다. 그렇다면 소년이 두 번째 거짓말을 했을 때, 마을사람들은 무엇을 알게 되었을까요? 소년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 양들은 여전히 안전하다는 것, 자기들이 속았다는 것 등등이겠지요. 그런데 아까 소년의 역할은 경보장치라고 했으니, 이 점을 주목한다면 마을 사람들은 무엇을 알아차렸어야 했을까요? 당연히 경보장치가 고장났다는 사실이겠지요. 

말하자면 들판의 양들에게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그 상황을 인지할 수 있는 방법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이건 매우 심각한 사태입니다. 늑대가 정말 나타났을 때, 경보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 양들의 희생은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했나요? '뭐야, 저 녀석'하고 소년의 거짓말만 문제 삼고 다들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뭐가 해결되지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났잖아? 에잇. 저 녀석, 나쁜 놈이로구나, 어디 두 번 다시 우리가 속나봐라.' 이러면서 욕하고 끝낼 일이냐는 겁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경보장치가 작동하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것입니다. 소년의 거짓말이 두 번째 확인됐을 때, 무슨 일이 이루어져야 했나요? 마을의 공동 대책이 숙외되고, 구체적인 방법이 준비되어야 하는 거지요. 그래야만 양들을 지켜낼 수 있는 겁니다. '경보 장치 작동+마을의 대응=양들의 안전'. 이런 공식이 성립해야 하는 것이예요. 그러니 경보장치 작동에 문제가 생긴 걸 알았다면 그 다음엔 마응ㄹ 사람들의 판단과 대응이 보다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늑대가 나타났을 때 이를 퇴치하는 것은 소년이 아니라 결국 마을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화 속의 마을 사람들은 아무런 논의도 하지 않았습니다. 경보장치 작동 이상에 대한 대응책 마련이 전혀 없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양들의 생명에 최우선의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관심이 있었다면, 모두 모여 '이거 어떻게 해야하지?' 하고 회의를 하고 결론을 내렸을 겁니다. 따라서 양들의 비극에는 양치기 소년의 책임이 분명하게 있지만, 마을 사람들도 책임에서 완전히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했던 겁니까?

적어도 마을사람들은 망가진 경보장치를 고치든지 아니면 다른 것으로 바꾸든지 또는 갈아치운다고 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니까,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제3의 대안을 마련해야지요. 이른바 '플랜B'라는 것 말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 대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해석에는 마을 공동체의 책임을 묻는 질문이 빠져 있습니다. 그저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만 비난하고 나면 '상황종료!'되는 식입니다. 늑대에게 죽임을 당하고 있던 양들은 피를 흘리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양치기 소년만 문제냐? 그럼 마을사람들아, 당신들은 뭐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뭔가 조처를 미리 취해놓았더라면, 양치기 소년의 입 하나에 양들의 운명이 좌우되진 않았을 거예요.

양치기 소년 한 명에게 늑대의 출현에 대한 정보가 독점되는 것도 매우 취약한 구조입니다. 한 사람 또는 소수에 의존하느 체제는 위기관리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공동체 전체의 감시, 견제, 또는 대안 마련이 없으면, 소수가 쥐고 있는 정보에 마을 전체가 휘둘릴 수 있는 겁니다. 소년이 늑대야 하고 외치니까 온 마을이 소동에 휩싸였잖아요. 정보의 정확도를 점검할 수 있는 장치가 없는 거예요. 따라서 마을 전체의 자발적이고도 주체적인 논의와 대응책 강구가 양들의 생명을 지키는 일에 근본입니다. 

소년의 거짓말이 드러나고 양들의 안전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게 된 바로 그 시점은 정치사회적으로 보자면, 이 마을의 참여 민주주의가 바로 서고, 마을 주민 각자가 모두 책임 있는 주체로 나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늑대에 의한 양들의 희생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생각과 의지가 있는 마을과 없는 마을에서의 양들의 운명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이 차이를 제대로만 파악하면, 반복되는 기만에 맞서 대책 마련에 나서는 마을 공동체가 시작될 수 있을 겁니다. '양치기 소년과 늑대'가 바로 이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우화로 읽힌다면, 마을사람들이 책임 있는 주인으로 나서는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 권력은 이 우화를 금서 목록에 집어넣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는 고장 난 경보장치를 고치는 것을 개혁이라 하고, 교체하거나 제3의 대안을 실현하는 것을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마을 주민들의 주체적인 각성이 그런 변화르 가져오지요. 늑대로부터 힘없는 양들을 지켜내는 근본은 그로써 이루어집니다. 

'목동의 거짓을 알았으니 이제 우리는 양들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바로 이 질문을 던질 때 이 우화는 우리에게 보다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을까요?  249-254


[사자 가죽을 쓴 당나귀]

'그렇게 하고 돌아다니니 사람들이나 동물들 모두가 다 사자인 줄로 알고 벌벌 떨었어요. 멀리서 나타나기만 해도 줄행랑을 치기에 바빴습니다.'  262


예상대로, 속은 당나귀인데도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두 다 사자의 겉가죽만 보고 공포에 질려 죽자 살자 도망했습니다. 살아있을 때 사자가 준 그 정신적 충격과 상처가 이리도 큰 것입니다. 살았느닞 죽었는지 분간을 못하는 거지요. 그 움직임이 사자인지 당나귀인지조차 구별하지 못하잖아요. 사자 가죽을 뒤집어 썼다고 당나귀가 사자 걸음을 하기란 쉽지 않았겠지요? 

그런데도 모두가 이 허위를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사자가 통치했던 시대의 공포와 사유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은 이리도 간단치 않습니다. 껍데기와 진실이 분명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사자가 죽어 그 가죽이 길에 떨어진 상황은 사자의 폭력이 모든 것을 결정했던 시대가 이제 사라졌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도 동물들과 사람들은 여전히 그 시대의 그림자 안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폭력의 트라우마입니다. 걸핏하면 사자 밥이었던 자가 사자 행세를 해도 그걸 알아보지 못하는 현실이 이 우화에서 가감 없이 드러나는 거지요. 

사자 가죽을 쓴 당나귀를 사자로 여기는 시대는 진실에 눈멀어 있습니다. 역사는 이미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는데오, 여전히 과거의 잔상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빈다. 당나귀의 정체를 대뜸 알아보고, '아니 요놈이!'하고 통찰해내는 시대야말로 제대로 된 시대입니다. 그렇지 않았기이ㅔ 당나귀는 위장술의 위력을 알게 됩니다.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263-264


'"이런 이런, 이거 나제 아닌가? 당나귀 친구, 방금 그 소리를 못들었다면 나도 깜빡 속아 자네를 무서워했겠는걸?" 

당나귀가 여우의 말에 흠칫 놀라서 아차!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당나귀는 여우를 보고 히죽 웃었습니다. 민망하고 겸연쩍었던 거지요. 눈치빠른 여우가 당나귀는 잽싸게 한눈을 찡긋 감아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손을 내밀어 여우와 당나귀는 손뼉을 짝! 소리나게 마주쳤습니다. 하이 파이브!

그러자 둘이는 이내 허리를 부여잡고 함께 껄껄 거렸습니다. 그 바람에 뒤집어쓰고 있던 사자가죽이 훌렁 뒤로 벗겨지면서 당나귀 머리가 불쑥, 하고 튀어나오지 않았겠어요.

지나가던 다람쥐가 깜짝 놀란 눈으로 이 광경을 쳐다보다가 하도 우스워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다음날 아침, 사자 가죽을 쓴 당나귀 등에는 여우와 다람쥐가 올라타고 숲 속으로 행차했습니다. 모든 동물들이 여우와 다람쥐에게도 머리를 조아리며 벌벌 떨었답니다.'  265-266



<헨젤과 그레텔> - 인생의 숲에서 실종당한 헬젤과 그레텔을 위해


그림 형제는 나무꾼의 아내를 아이들의 친엄마라고 했다가 판본을 바꾸면서 새엄마로 수정합니다.  275


이는 중세 유럽의 민중들이 겪었던 절박한 현실이었습니다. 친부모가 먹고 살 길이 없어 자기 아이들을 내다버리는 것은 그다지 예외적인 일은 아니었던 거지요.  276


'일어나, 이 뼛속까지 게으른 것들아, 이제 우리는 나무하러 숲에 갈 거다.'(꼭두새벽에..)

그 시간에 깨우면서 게으르다는 말도 안 되는 비난을 쏟아내는군요. 강자들의 논리입니다.  280


'오리야, 오리야, 작고 귀여운 오리야.

여기 그레텔과 헨젤이 있단다.

강을 건너갈 쪽배도 없고 다리도 없어.

여기 와서 우리를 태워주지 않을래?'

그러자 놀랍게도 오리가 반응을 보입니다. 그레텔은 '너 이리 와!;가 아니라, 오리의 주체적 판단과 선택방식을 존중합니다. 그레텔은 정신적 교감을 우선시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오리를 타고 강을 건너는 과정엣 두남매가 사뭇 차이를 보입니다.

'헨젤은 오리 등에 올라타고는 그레텔에게 자기 뒤에 타라고 손짓 합니다.'  

말하자면, '야, 타!' 한 거죠. 이에 그레텔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아냐, 오빠. 그렇게 하면 오리에게는 너무 힘겨워, 오리가 우리를 한 번에 한 사람씩 태워 강을 건너게 해.'

그토록 위급하고 험한 상황을 겪었는데도 그레텔의 마음은 거칠어지지 않았습니다. 상대의 처지를 먼저 생각하는 거죠. 상대를 도구화하거나 이용하는 데 익숙한 이에게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한 사려 깊음입니다.

그레텔은 위기를 이겨낸 지혜와 용기만이 아니라, 공감의 능력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공감'이란 상대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 마음을 함께 느끼고 나누는 정신적 광채라고 할 수 있어요.

오늘날 이 공감 능력은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자기 잘난 척하고 똑똑한 척 하는 세상에서 다른 존재의 마음과 만날 수 있는 사람만이 세사으이 희망이 되기 때문이지요. 만사에 남을 이용하려 들기만 하는 시대에 이런 공감 능력은 우리의 인간성을 회복시켜주는 바탕입니다.  299-300




<바보 이반> - 땀 흘려 일한 자, 손에 물집 잡힌 자의 우선적 권리


원래는 '바보 이반과 그의 두 형인 무사 세묜, 배불뚝이 타라스 그리고 벙어리 누이 말라니야, 그리고 늙은 악마와 세 새끼 마귀이야기'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요. 

첫 대목은 이반의 집안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옛날 어느 왕국에 부유한 농부가 살 고 있었는데 세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무사 세묜은 황제에 충성하러 전쟁에 나갔고 배불뚝이 타라스는 장사하러 도시로 상인을 찾아갔습니다. 바보 이반은 누이와 함께 집에 남아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있었지요.'  310


세묜과 타라스는 각기 푸념합니다.

'"난 왕국을 얻어 잘 살고 있다. 다만 문제는 병사들을 먹일 돈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나는 돈은 산더미처럼 벌어요. 걱정거리 하나는 돈을 지킥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사실 이들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넘쳐나서 문제였던 것이지요. 그 넘쳐나는 것을 감당하려면 더 많은 군사와 더 많은 자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국가는 이런 과정을 거쳐 군사력과 재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킵니다. 약한 나라를 짓밟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논리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323


세묜이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 이렇게 하자. 넌 내게 병사들을 먹일 돈을 줘. 그러면 네게 왕국의 반과 네 돈을 지킬 병사들을 줄게."'

타라스가 동의했습니다. 그리하여 둘은 왕국과 돈, 병사를 나눠 갖고 둘 다 부유한 황제가 되었답니다. 

한낱 무사였던 세묜과 배불뚝이 장사꾼이엇던 타라스는 모두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권력과 재력이 동맹을 맺고 거대한 제국이 된 거죠. 인류의 역사에서는 바로 이러한 제국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약한 나라들을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런 제국의 폭력과 탐욕에 평생 반대했던 것입니다.  325-326


이반은 병에 걸려 아픈 사람을 신분이나 계급으로 분류하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이반은 아픈 현실 그 자체에 마음을 쏟았던 것.  328


'"폐하는 황제이십니다!" 라고 했더니 이반은 "그래서? 황제도 먹고 살아야 해."라고 딱 부러지게 말했더랍니다.'

이반의 나라는 자신이 먹을 것을 자신이 일해서 만들어내는 노동의 가치가 존귀하게 여겨지는 사회입니다.  331


노동하는 이의 권리가 우선으로 보장되는 나라인 거지요. 이 작품을 쓴 톨스토이는 성서에서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고백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린도 전서 1:27-28)  341




<심청전> -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를 돌려보내노라


심청의 아버지, 봉사 심학규는 '본래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집안 '잠영거족(簪纓巨族)' 출신으로...'

'잠영거족'이란 여자는 머리에 단정하게 비녀를 꽂고(비녀 잠 簪) 남자는 갓을 쓴(갓끈 영 纓) 그럴 듯한 양반집을 말합니다.  408


심청이가 한 말을 다시 주목해봅시다.

'"내 과연 물에 빠진 청이오. 청이 살았으니 어서 눈을 뜨시고 딸의 얼굴을 보옵소서."'

심청이는 자기가 다름 아닌 심봉사의 딸이라는 것만 알린 것이 아닙니다. 물에 빠졌던 자기가 살아 있으니 어서 눈을 뜨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그 얼굴을 보라 합니다. 오랜 세월 감겨 있던, 또는 감고 있던 눈을 똑ㄸ고히 뜨고 마주하라는 것입니다.

뭘 마주하라는 거지요? 자기 이득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현실, 그리고 그 현실에 얽혀 희생당했던 목숨, 그 목숨이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났음을 똑똑히 보라는 것 아닙니까?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세상은 결코 하늘의 뜻이 아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는 지금 아버지 앞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희생의 악순환이 멈춘 놀라운 현실에 눈뜨라는 겁니다.  439




에필로그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에 담겨 있을지 모를 고정관념을 교정해보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고정관념은 때로 폭력이 되어, 세상을 공평하고 따뜻하게 만드는 일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함석헌 선생님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나라가 산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언제나 옳다고 여겨집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갖지 못하면 그런 사회와 나라는 편견과 선입견 또는 세뇌된 지식으로 가득차, 자신의 진정한 발전을 위한 길을 모색하고 선택하는 일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하고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들 속에서도 새로운 생각의 단서를 발견하는 것은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사유의 촛대"에 불을 켜는 일입니다.  447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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