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에 해당되는 글 90건

  1. 2015.11.16 오늘이 마지막은 아닐꺼야 - 정도선, 박진희 마음의숲 2015 03810
  2. 2015.11.09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7년 동안 50개국을 홀로 여행하며 깨달은 것들) - 카트린 지타 걷는나무 2015 03850 1
  3. 2015.10.29 리스본행 야간열차 - 파스칼 메르시어(페터 비에리) 들녘 2014 04850
  4. 2015.10.05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 2015 03830
  5. 2015.09.14 내 옆에 있는 사람 - 이병률 달 2015 03810
  6. 2015.09.09 오베라는 남자 - 프레드릭 베크만 다산책방 2015 03850 11
  7. 2015.09.01 작가수업 - 도러시아 브랜디 공존 2010 03840
  8. 2015.07.29 서평 글쓰기 특강(생각 정리의 기술) - 김민영 황선애 북바이북 2015 03800 1
  9. 2015.07.18 작가의 공간 - 에릭 메이젤 심플라이프 2014 03840
  10. 2015.07.15 초인수업(나를 넘어 나를 만나다) - 박찬국 21세기북스 2014 03100
  11. 2015.02.27 여행 정신(현명한 여행자를 위한 삐딱한 안내서 - 장 피에르 나디르, 도미니크 외드 책세상 2013 03800
  12. 2015.02.09 인류학자처럼 여행하기 - 로버트 고든 펜타그램 2014 13980
  13. 2014.12.18 철학자와 하녀(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 고병권 메디치 2014 03100
  14. 2014.12.15 철학에게 미래를 묻다 - 안광복 휴머니스트 2012 03100
  15. 2014.12.11 망각과 자유, 장자 읽기의 즐거움 - 강신주 갈라파고스 2014 03100
  16. 2014.01.24 인문 내공 - 박민영 웅진지식하우스 2012 03000
  17. 2014.01.22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 - 강유원 뿌리와이파리 2006 03300
  18. 2014.01.20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갈라파고스 2011 03300
  19. 2014.01.18 인생사용설명서 - 김홍신 해냄출판사 2009 03810
  20. 2014.01.16 그대와 걷고 싶은 길 - 진동선 예담 2010 03660
  21. 2014.01.09 인생학교[섹스-섹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는 법] - 알랭 드 보통 쌤앤파커스 2013 13840
  22. 2014.01.05 강신주의 다상담2 (일, 정치, 쫄지마) - 강신주 동녘 2013 04100
  23. 2014.01.03 강신주의 다상담1(사랑 몸 고독편) - 강신주 동녘 2013 04100
  24. 2013.08.09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여 배우며 - 정희재 걷는나무 2010 03810
  25. 2013.07.04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 정진홍 문학동네 2012 03320
  26. 2012.12.28 오랜 여행 - 한미옥 북노마드 2010 03980
  27. 2012.12.25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달 2012 03810
  28. 2012.12.14 히피의 여행 바이러스 - 박혜영 넥서스books 2007 03810
  29. 2012.12.13 여행이 답해줄거야 - 박혜영 21세기북스 2010 03400 3
  30. 2012.11.13 여행 탐구 일기 - 이세미 이슈 2012 03810 2


작가의 말

누구나 시간, 돈, 청춘, 열정, 건강 등 많은 것들을 하루하루 잃어가고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어떻게 아낄 수 있는지를 고민할 수 있고,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 수 있다.  4


이제 사라지는 것들에 미련을 두지 않을 생각이다.  6






난 고작 몇 센티미터의 세포덩어리도 이겨내지 못 하는 나약한 인간일 뿐인데, 내가 세상의 정답이라도 되는 것처럼 스스로 판단하고 건방지게 행동했었다. 더 낮아져야겠다고 다짐했다.  32


결혼을 하면 건강은 의무라는 말을 들었다..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단순히 같이 생활한다는 것을 뛰어넘어, 나의 삶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삶까지도 책임을 지겠다는 무언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가족의 삶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38


어느 장소에서 어떤 일을 하든 노동을 하는 것은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일에 치여 지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단 하루만이라도 나처럼 쉬고 싶어 할 것이라 생각하니 나를 처량하다 여겼던 마음이 미안해졌다. 누군가에게는 절실하게 그리운 노동이 어떤이에게는 단 하루만이라도 벗고 싶은 짐이 될 수도 있는것이었다. 

모든 것에는 이중적인 단면이 존재한다.  47


"나는 <Ruby Tuesday> 노랫말처럼 살고 싶어. 가사 중에 '아무것도 얻을 게 없고 잃을 게 없는 세상에 얽매일 수 없어. 허비할 시간이 없어. 꿈이 사라지기 전에 잡아. 항상 죽어 가는데 꿈마저 잃어버리면 미쳐버리게 될 거야' 이런 말이 있어. 나도 내가 원하는 꿈을 향해 나아가는 살을 살고 싶어. 꼭 집을 떠나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살겟다는게 아니야. 남드이 하니까 똑같이 따라서 적당한 집을 사고 적당한 회사를 다니며 살고 싶지는 않다는 거야. 여행을 가고 싶으면 가고 일을 하고, 일을 하고 싶으면 하고, 집을 만들고 싶으면 만들고, 내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있다면 그걸 하며 살고 싶어."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무라카미 류같이 살고 싶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어. 그리고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있으면 좀 힘들어도 가볼 거야. 갔는데 끝에 절벽만 남아있다면 그냥 돌아오면 되니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사람들은 철이 없다고 하더라. 그런 모험은 아주 어릴 때나 꾸는 꿈이라고, 안전한 길로 나아가도 세상은 힘든 곳이라고.."  52


어쩌면 가치에 있어서 옳고 그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는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기 보다 왜 여기까지 나와서 소리를 내는 것인지 그 이유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우선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80


겉핥기로 사물을 바라보고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직접 듣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면 그 가치는 결코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깊이가 있건 없건 하고 싶거나 알고 싶은 것은 부딪쳐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83


외국에서는 친구가 되는 것은 참 쉽다. 지금껏 만난 친구들은 마음을 선뜻 잘 내어주었고 그만큼 나도 내 마음을 잘 내어주었다.  85


소박한 마을 위로 느릿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좋다.  93


우리는 왜 타인의 삶을 구경하려 하는 것일까? 그저 예전 방식 그대로 삼삼오오 모여 사는 사람들이 티비 광고 속의 상품처럼 구경거리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과연 사람이 사람을 구경하는 게 가당키나 한 것일까? 진짜 전통을 배우고 싶고 알고 싶으면 우리는 어떻게 찾아가야 할까?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자 독특한 문화를 상품에 끼워 팔려는 사람들의 욕심보다 돈으로 손쉽게 타인의 삶을 엿보려 했던 내 의식이 문제였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되었다.

낯선 문화를, 우리와 조금 다르게 사는 사람들의 삶을 접할 때는 배우려는 마음과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아마도 편리함을 좇기 위해 모든지 쉽게 버리고 사는 현대인들보다 조금 더 애쓰고 조금 더 부지런히 생활하는 그들에게 경험적인 지혜가 풍부할 것이다. 왜 우리는 세상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까지 도시의 돈문화를 가르치려는 것일까? 여행이 타인의 삶을 망칠 수도 있다면, 우리는 이 여행방법을 버리고 새로운 방법으로 여행을 해야만 할 것이다. 조금 더 대안적인 방법을 찾아보고 싶었다.  106-107


그들의 삶과 비껴선 제3자, 관광객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그 삶의 단면만 보고 그들의 삶을 평가한다는 것은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111


왜 어른들은 아이의 행복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청소년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에 제일 높은 반면 행복률은 제일 낮다는 뉴스가 해가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똑같이 흘러나오는 데, 왜 우린 남의 일처럼 쯧쯧 혀만 차고 방관하고 있을까/ 바로 제 자식이야기인데도 왜 좌시하고만 있을까. 이곳 아이들을 생각하며 난 여전히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생길 우리 아이는 어떻게 자라게 할 것인가에 대해.  112


어쩌면 우리가 흙을 엎어버렸기에 신발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113


"히피들이 시스템이 싫다고 자유를 찾아 떠나왔지. 인도의 고아 주(州 고을주)에서 여기까지 흘러왔어. 여기서는 자유러웠을까? 아니야, 진짜 자유는 시스템을 넘어서는 게 아니라 너와 나, 우리가 융합될 때 느끼는 거야. 여기 모인 사람들도 모두 다 다르다네. 똑같을 수 없지. 다르기 때문에 일치하지 않는 것도 있지.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있어. 그걸 넘어서야 해. 서로 다른 모습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하나될 때 우리는 진짜 자유로울 수 있어."

히피들이 작은 땅을 얻어 전기도, 속세의 더러움도, 부와 배부름도, 그 어떤 것도 들이지 않고 조그맣게 살아가는 곳, 문빌리지. 이곳에서 아이들은 더러운 흙이 온몸에 묻어도 혼나지 않았고 작은 먹거리에도 감사할 줄 알았다. 그리고 어떤 아이들보다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모두 달빛에 반짝이는 별이었다.  114-115


남의 삶을 바라보며 나도 그러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삶은 버거워진다. 내가 타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과 똑같이 살 순없다. 그런데도 나는 바람직하다고 배운 그런 삶을 살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을 하곤 한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진 살의 목표를 십자가처럼 지고 인생의 행로를 이어간다.

버거운 무게에 휘청이는 다리로 인해 몇 번이고 쓰러질 때마다 가슴에서 피눈물이 흐른다. 그런데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산다. 어른들은 자신들 역시 그렇게 살았다며 이 고통을 즐기라고 조언한다. 그래서 그게 마땅한 줄 알았다...

비교를 하지 않으니 남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도, 남보다 더 잘나야 할 이유도 없었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 다른 모습, 서로 다른 생각, 서로 다른 삶, 그것을 잇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무중력의 상태를 느끼는 듯했다. 다시 돌아보니 세상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치열하게 삶을 가꾸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117-118


"장기 여행이 옳다 그르다 할 그런 기준은 없어. 그런데 오래 길 위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것만은 확실히 알더라. 사람 귀한 거 말이야."  121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마음을 통으로 내어주고 있었다.  123


여행은 좀처럼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어쩌면 여행에서는 계획이라는 것 자체가 오류일 수도 있다.  125


언젠가 책에서 '우연은 없고, 언제나 만나야 할 사람만 만나고, 일어나야 할 일들만이 일어난다'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130


독서하는 사람이 줄어든 것은, 서점을 애용하는 사람들이 줄어든것은, 멕시코처럼 다채로운 서점과 서점다운 서점이 대한민국에 없는 것은, 사람들이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삶에 여유가 없는데, 매일매일 삶에 쫓기고 있는데 책이 무슨 소용일까. 그저 순간순간, 하루하루를 이겨내는데 바쁠 것이다.  150-151


어느 곳에서나 화려함 뒤에는 초라함이 숨어있다. 축제를 즐기는 사람과 축제에서 돈을 벌려는 사람, 부모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과 부모님을 기다리느라 외로운 아이들. 어쩔 수 없이 공존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초라함을 불쌍하다거나 불행하다고 여기면 안 된다. 모두가 행복해지려면 이 초라함까지도 같이 수면 위에 올려 함께 누려야 한다. 신영복 선생님의 <함께 맞는 비>를 떠올렸다. 비 오는 날 누군가의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닌 함께 비를 맞으며 동행하고 싶다.  167


어느 도시든 처음 들어섰을 땐 감동받고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곳은 없을 거라며 감탄했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곳은 늘 나타났다. 마치 멕시코의 온 도시들이 미인대회에 나온 미녀들처럼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뽐내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가장 아름다운 곳에 살면서도 땅에 떨어진 먼지만 보며 한숨짓고 살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상 그 어디를 가도 아름다움이 곳곳에 널려 있는데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169


한때는 저것들이 그의 여행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하고 소중한 물건들이었을 것이고, 두고두고 잊지 못할 추억일 텐데 처음 보는 우리들에게 서슴없이 나눠주는 모습이 조금은 비장해 보였다.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이제 여행의 환상은 접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여행자의 마지막 발버둥일까. 예전에 다른 사람을 통해 이런 도움을 받아서일까. 여행 내내 끈질기게 괴롭혔던 비움과 채움, 그 깨달음의 결실일까. 아니면 그냥 짐을 덜어내려는 걸까.

나는 그 이유를 물어보았고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사실 이 물건들은 두세 달 전부터 내게 필요가 없었어요. 당신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배낭은 미련의 무게라는 생각이 들어서 싸그리 버리려고도 했었고요. 근데 있잖아요. 차마 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내가 버리려고 하는 이 물건이 누군가에겐 정말 필요한 물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전 그동안 이 물건들을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배낭에 계속 넣고 다녔어요. 그리고 이제야 당신들을 만나게 된 거예요. 당신들이 남미로 내려가게 되면 제 말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나는 망치로 머리를 두드려 맞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비워내기만 중요하게 생각했던 내가 누군가를 위해 채워 넣고 짊어지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누군가를 위해 짐을 짊어질 수 있다는 것. 그것만큼 숭고한 행위가 또 있을까.  174-175


인간의 욕심이 망가뜨린 건 결국 인간 그 자체였다.  183


자본주의는 경쟁주의 구도를 가져왓고 경쟁은 더 많은 기능을, 더 많은 기능은 시간의 단축을 가져왔지만, 우리는 기계로 인해 줄어든 시간을 인간답게 활용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187


나는 필통 가득 칼로 깎은 연필을 넣어 다니고 싶다.  188


산 페드로에는... 일본인 남편 스스무와 멕시코 산 크리스토발이 고향인 멕시코인 아내 가비...

스스무는 방을 안내하곤 숙소에 대해 소개해줬다. 총 3층으로 된 이 건물은 몇 년째 스스무와 가비가 직접 짓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스스무는 "저희 부모님은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맞벌이를 하셨어요. 처음에는 형편이 어려워서 할 수 없이 맞벌이를 했지만 나중엔 더 좋은 삶을 위해 계속 맞벌이를 하셨죠. 저희 부모님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좋은 동네, 좋은 집, 좋은 차였어요. 그것을 갖추고 유지하면 저도 행복할 거라 굳게 믿으셨죠. 하지만 저는 아니었어요. 워커홀릭인 부모님보다는 제가 커나가는 모습을 옆에서 항상 지켜봐 주는 부모님이 필요했어요. 다함께 아핌을 먹고, 밤에는 키우는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나가고, 가끔 밤하늘의 별을 보며 내 꿈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따뜻한 가정이 필요했어요. 

전 다짐했죠. 제가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우리 부모님과는 다르게 살 거라고. 그리고 전 실천했어요. 물론 아내의 생각도 저와 같아서 가능했지만요. 저흰 아이들이 태어나고 지금까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겪고 지켜봐 왔어요.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부대끼고 살아가는 중에 많은 것들을 배웠답니다. 자연, 생명, 존중, 책임, 배려, 부모이기 전에는 그저 단어로써의 의미만 알았던 것들의 참 의미를 알게 되었어요. 분명 도시에서의 삶 보다는 물질적으로 매우 열악하지만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왜냐면 여기서 누리는 행복이 훨씬 크기 때문이죠. 전 이 생활에 매우 만족합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일테고요."  211-213


갖고 있는 기계가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자꾸만 방 안으로 외로이 기어 들어갔다.  217


우리는 점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 정보가 넘쳐나는 것이 과연 좋은 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매체를 이용해 소통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시대, 시간의 공유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점점 잊게 된 사람들, 공원에 앉아 몇 시간이고 사람들의 웃음을 바라볼 여유를 잊게 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사이버 공간보다 직접 사람을 만나는 광장이, 1초도 안돼 전송되는 메시지보다 몇 번을 구겨버리다 마침내 완성된 편지가, 컴퓨터를 상대로하는 게임보다 다함께 둘러 앉아 하는 놀이가 필요했다. 더 많은 스마트폰을 팔 생각보다 사람과 사람이 더 진실하게 소통할 창구를 만드는 게 시급해 보였다.  245


"요리사는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할 것 같아.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음식과 맛이 존재하는데 많이 맛 보아야 창의적인 메뉴가 나오지 않을까?"

"건축가도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할 것 같아. 동서양의 건축을 합치면 창의적인 건축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사진가도 여행을 많이 다녀야지. 세상엔 담아야 할 것이 아주 많잖아?"

"작가도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하지 않겠어? 세상엔 재미있는 이야기가 너무 많아."

"디자이너도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할 것 같아."

식사를 하다가 멋진 정원을 걷다가 하늘을 보고 사람들을 보며,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음악가도, 공학도도, 예술가도, 회사원도, 부부도 여행을 많이 다녀야할 것 같았다. 학생들도, 청년들도, 꿈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이야기를 하다 보니 모든 사람이 여행을 많이 다녀야만 했다. 여행이 꼭 해외여행이나 장기여행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든 단 몇 시간이든 상관없다. 자신을 둘러싼 주변을 자세히 관찰하고 낯선 환경과 이야기하며 자신만의 시간을 만드는 것이 모든 이에게 필요한 것 같다. 삶이 조그만 움직임에도 창의적으로 변화하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274


여행 후 나는 더 소박한 삶을 살고 싶어졌다.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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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은 자기만의 일과 사랑을 발견하기 위한 여행을 떠나야 한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윤리 규범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탐구하라. 다른 누군가가 당신의 길을 대신 만들도록 허락하지 마라. 이 길은 당신의 길이자 당신 혼자서 가야 하는 길이다. 다른 이와 함께 걸을 수는 있으나, 어느 누구도 당신을 대신하여 걸어 줄 수는 없다."  7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을 맞는다면 그건 뭔가를 얻었을 때가 아니라 잃었을 때일 것이다"라는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우리는 뭔가를 잃었을 때에야 비로소 인생에 대해 절실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23-24


바깥세상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 따윈 무시해 버려. 그건 모두 악마의 장난에 불과해. 진실은 자네 안에 있어. 자네 안에서 답을 찾아, 그리고 자네 영혼에게 영원한 자유를 안겨 주라구! - 호어스트 에버스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26


사람에게는 때때로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내면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의 무싀식은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과 같은 단조로운 일상에서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33


살면서 우리는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경우가 있다.  35


스스로를 제대로 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36


영화 <행복을 찾아서>의 주인공 크리스는 아들에게 말한다. "누군가 너에게 할 수 없다는 말을 하게 하지마. 희망이 있다면 그걸 지켜야 해."  42


대화가 인간의 지적 활동에 묘약인 것처럼 고독은 인간의 정신 활동에 묘약이다. - 에밀 시오랑  51


친구를 얻는 가장 좋은 길은 스스로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73


세상과 떨어져서 자신을 성찰하는 것은 사실 고된 정신 훈련 중 하나다. 혼자 여행을 하면 마음속에 깊이 묻어 두었던 두려움들과 후회들이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몰려올 때가 많다.  74


사회적 통념이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우리를 제약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기존의 문화와 상반되는 문화권으로 떠나 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84


생각할 시간을 가져라. 확신이 설 때까지.  91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겠다, 내 생각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고 말하면서도 한낱 담배에 연연하고 집착하는 나를 보니 한심스러웠다.  102


"즐거운 추억이 많은 아이는 삶이 끝나는 날까지 안전할 것" 이라는 소설가 도스토옙스키의 말처럼, 행복한 여행의 기억이 사람을 지켜주는 것 같았다.  107


한 번 불운한 일이 있었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여행을 통해 배웠다... 

길을 잃으면 길을 찾아주는 사람을 만났고 발을 다치면 걸을 수 있게 붙들어 주는 사람을 만났다...

아프리카나 아니아 또는 남미처럼 언어가 다른 곳을 여행할 때는 말이 아닌 눈빛으로, 마음으로 대화하는 법을 배웠고, '세비야 골목길에서 팔던 그 찻잔을 샀어야 했는데..'하는 후회가 몰려올 때는 원하는 게 있다면 우물쭈물하며 망설이지 말자는 다짐을 한다.  119-120


뜨거운 물에 자꾸만 가까이 가려는 아이를 보호하는 방법은 다치지 않을 정도의 뜨거운 물을 손등에 살짝 찍어 주는 일인 것처럼 인생에 가장 좋은 공부는 직접 경험하는 것이다.  121


17, 18세기 영국의 상류층 자제들에게는 귀족 사회에 입문하기 전 반드시 다녀와야 하는 여행이 있었다. '그랜드 투어'라고 불린 이 여행은 영국에서 시작해 파리, 로마, 피렌체, 나폴리, 폼페이를 거쳐 인스부르크, 베를린, 뮌헨, 암스테르담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코스였다.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이 걸릴 정도로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투자되는 여행이었으나 귀족들은 너도나도 자식들을 떠나보냈다. 그랜드 투어를 하지 않으면 세계의 정치와 사회, 경제를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상식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영국의 젊은 후계자들은 가정 교사와 하인과 통역관까지 실은 대규모 마차 부대를 이끌고 전 유럽을 떠돌며 새로운 문화를 몸소 체험했다. 사교계의 중심이었던 파리에서는 귀족 사회의 예법과 언어를 배우고, 로마와 나폴리, 폼페이에서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역사를 공부했으며, 피렌체에서는 문화와 예술을 익혔다. 이후 철도가 대중화되면서 그랜드 투어는 점차 사라졌지만, 나는 '세계를 여행하며 세상을 직접 배워야 한다'는 가치는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121-122


나는 여행이 인생의 한 시기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늘 새로운 세계를 배울 준비를 해야 하고, 삶의 어느 시점에서도 성장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137-138


프랑스 철학자 미셸 옹프레는 <철학자의 여행법>에서 여행이 실제로 시작되는 지점을 "집을 나서면서 현관문을 닫고 자물쇠에 열쇠를 꽂는 바로 그 순간"이라고 말했다. 여행의 실질적인 첫 단계는 떠나온 장소에 있지 않으며, 우리가 갈망하던 장소에 도착하지도 않은 '사이'의 시간에 시작된다는 것이다.  144


니콜라스 바로우는 소설 <세상 끝에서 나를 만나게 될 거예요>에서 기차 여행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면 옛 시절이 떠오른다. 관광객이 아니라 여행객이라 불리고, 세상이 한없이 크게만 느껴지던 시절. 그 시절 사람들은 기차에 올라 차창밖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시간이 없다고 초조해하지 않으면서 목적지를 향해 평안하게 나아갔다." 기차가 전 세계적으로 낭만적인 여행 수단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146-147


지혜란 받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여행을 한 후, 스스로 지혜를 발견해야 한다 - 마르셀 프루스트  190


내 생각에 여행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쉽게 잊혀지는 것은 일상에서 그와 같은 경험을 다시 반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1


짐을 줄이는 가장 빠른 방법은 공간을 줄이는 것이다.  201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더많이 가질수록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늘어날 뿐이다. 여행지에서처럼 꼭 필요한 것들만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일상에서도 여행자처럼 자유로워질 것이다.  205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과거 어느 때에도 오늘날처럼 인간에 관해 다양하고도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과거 어느 때에도 오늘날 사람들처럼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던 적은 없었다."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인간이나 사회에 대한 지식 외에 별도로 스스로를 탐구하고 존재에 대해 알아가야만 한다.

또 다른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특성을 발휘할 수가 있고, 그래야만 무언가 올바른 것을 이행할 수가 있다." 쇼펜하우어 역시 인간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만, 삶의 여정에서 발전을 이루고자 할 때 자신의 특성과 재능에 적합한 것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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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은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 분노가 일었다. 소리를 질러 가라앉힐 수 있는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꾹 누르며 견디어 온 분노, 내면을 향한 분노였다.  11


거울 앞에 서서 안경의 물기를 닦고, 얼굴도 닦았다. 이마에 적힌 숫자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따뜻한 물에 수건 끝을 적셔 이마를 문지르려다 말고 멈칫했다 몇 시간 후 그날 일어난 일을 다시 떠올려보면서, 거울 앞에 서 있던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되었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수수께끼 같은 여자와 만난 흔적을 지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그 찰나에 들었던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마에 전화번호가 적힌 채 교실로 들어서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는 이 건물, 아니 이 학교가 세워진 이래 가장 믿을 만하고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사람이었다. 30년 이상 일을 해오는 동안 실수한 적도, 비난받을 일을 한 적도 없었다. 약간 지루한 선생일지는 몰라도 학교 제도의 기둥으로 존경받았고, 고전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 때문에 대학에서조차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새 학년이 시작되면 학생들로부터 사랑이 담긴 놀림을 받았다. 학생들은 그를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고문헌 중에서도 거의 읽지 않는 부분만 골라 해석을 묻곤 했다. 하지만 그는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다른 주석까지 곁들여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학생들은 건조하면서도 창조적인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짧게 줄여서 불러야 할 만큼 엄청나게 고루하고 고전적이었다. 그는 고전문헌학으로 세계 전체를 짊어지고 다니는 것 같았다. '문두스'는 이 같은 그의 본질을 강조하는 데 가장 적절한 단어였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뿐 아니라 헤브라이어에도 조예가 깊었다. 구약학 교수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러니 여러 개의 세계를 지고 다녔다고 표현하는 게 옳았다. "진짜 학자를 보고 싶다면 여기 있는 이분이 바로 그분입니다." 교장은 새로운 학급에 그레고리우스를 소개할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13-14


그레고리우스는 학생들을 한 명 한 명 살펴보았다. 그는 지금 학생들을 향한 자기감정이 어떤지 중간 점검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교실의 가운데쯤 왔을 때, 자기가 얼마나 자주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생각했는지 알게 됐다. 이 아이들에게는 아직 남아 있는 날들이 얼마나 많은가. 창창한 미래, 얼마나 많은 일이 생길 것인가. 무수히 많은 일을 경험하게 될 이 아이들!  19


천천히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가 옷걸이에 걸려 있던 젖은 외투를 내린 다음,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교실에서 나왔다.  20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남의 이목을 끌지 않고 하굑를 관찰할 수 있는 어떤 걸물의 모퉁이까지 갔다. 그곳에서 학교를 바라보며 그는 자신이 학교와 관련된 모든 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앞으로 얼마나 그리워할 것인지를 절절하게 느꼈다. 상상하지 못햇던 격렬한 감정이었다.  20-21


그레고리우스가 졸업시험을 치른 이유는 오로지 아내 플로렌스의 강요 때문이었다. 박사 학위를 딸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중요한 것은 아주 단순했다. 문법이든 표현 양식이든 고전의 외진 구석까지 모두 알고 표현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역사를 아는 것, 다른 마롤 하면 자신의 일을 잘하느 ㄴ것이었다. 이것은 겸손함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요구가 많은 사람이었다. 변덕이나 뒤틀린 허영심도 아니었다. 나중에 그는 가끔, 자신의 이런 태도는 잘난 척하는 세상을 향한 조용한 분노, 허풍선이들을 향한 꺾이지 않는 고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레고리우스보다 훨씬 능력이 없던-정말 말도 안 되게 공부를 못하던-사람들도 졸업시험을 시험을 치르고 확실한 직장을 얻었다. 그러나 그에게 이런 사람들은 다른 세상, 견딜 수 없이 천박한 세상, 그가 경멸하는 기준을 지닌 세상에 속해 있었다. 그를 내보내고 대신 졸업장이 있는 교사를 채용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학교에 아무도 없었다. 교장도 고전문헌학을 전공했지만, 그레고리우스가 자기보다 실력이 월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 그를 내보내면 학생들이 폭동을 일으키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21-22


<언어의 연금술사>  27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 관찰의 대상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말은 경험한 것에서 미끄러져 결국 종이 위에서 모순만 가득하게 남는다. 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혼란스러움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익숙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경험들을 이해하기 위한 왕도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이상하고 묘하게 들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서야 깨어 있다는 느낌, 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27-28



-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28



비행기에 올라타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완전히 다른 세상에 도착한다는 사실-그 중간에 놓인 개별적인 모습들을 받아들일 시간도 없이-은 그레고리우스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30


그레고리우스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벨이 울렸다. 학교로군. 벨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그는 전화 옆에 서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오늘 오전부터 제 인생을 조금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문두스 노릇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저도 모릅니다만, 미룰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전에게 주어진 시간은 흘러가 버릴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삶에서 남는 건 별로 없을 테니까요. 그레고리우스는 크게 소리 내어 이렇게 말해보았다. 이 말은 옳았다. 그는 자기 인생에서 이렇듯 옳고 의미 있는 말을 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전화기에 대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3



- 황금 같은 침묵 속의 언어. 신문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카페에 앉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다 보면 쓰인 글과 하는 말에서 보고 듣는 늘 똑같은 언어 때문에-어법이든 말장난이든 은유든- 혐오감과 구역질을  자주 느끼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보면 나 역시 끊임없이 똑같은 말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들은 소름이 끼치도록 낡았고 평번하며, 수백만 번 사용하여 닳고 닳은 것들이다. 이런 말들에도 과연 의미가 있을까? 무론 말은 나누는 기능을 한다. 사람들은 이 말에 따라 행동하고 웃고 울며,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가고, 종업원은 커피나 차를 가지고 온다. 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이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이런 말이란 그저 쓸데없는 수다가 새겨진 흔적으로써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효과음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그럴 때면 나는 해변으로 가서 목을 길게 늘여 바람에 머리를 맡기고, 우리에게 익숙한 것보다 훨씬 더 차가운 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낡은 단어들과 진부한 언어 습관을 내 머릿속에서 날아가게 하고, 늘 똑같은 잡담의 찌꺼기를 묻히고 사는 나를 씻겨 깨끗한 정신으로 돌아오게 해줄 바람. 그러나 그런 다음에도 뭔가 할 말이 생기면,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바 없는 나를 보게 된다. 내가 원하는 정화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난 이를 위해 무엇인가를, 언어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을? 내가 나의 언어에서 탈출하여 다른 언어로 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언어에서 도피하는 게 아니다. 언어를 새로 발명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

난 아마 포르투갈어 단어들을 새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 새로운 문장들은 낡고 진부하다거나 흥분하여 기교를 부린다거나 의도적이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포르투갈어로 된 문장의 중심을 이루는 원형(原形 근원원 형상형)이라서, 에움길이나 오염이 없이 다이아몬드와 같은 투명한 본질에서 바로 나온다는 느낌을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 단어들은 윤을 낸 대리석처럼 흠이 없고,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은 모두 완벽한 침묵으로 변화시키는 바하의 변주곡 음색처럼 맑아야 한다. 가끔 언어의 진흙 구덩이와 타협하려는 마음이 내 안에 약간 남아 있다면, 그 마음은 화기애애한 거실의 부드러운 고요함이나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느긋한 평온함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끈적거리는 언어 습관에 대한 분노가 나를 에워싸면, 그 분노는 빛이 없는 우주의 맑고 서늘한 적막함 이상이어야 한다. 내가 포르투갈어로 말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 소리 없는 열차를 끌고 가는 우주.... 종업원이나 이발사나 승무원은 새로운 조어를 들으면서 그 문장의 빛나는 간결함, 그 아름다움에 놀랄 것이다. 내 생각에 이런 문장들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엄격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청렴하고 확고부동하게 서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신의 말과 비슷하고, 또한 과장이나 격정이 없이 정확하고 간결하여 단 하나의 단어나 쉼표도 뺄 수 없다는 점에서 언어의 연금술사가 엮은 시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38-40



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드는 잔인함이 그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45


오랫동안 외국-다른 대륙, 다른 기후, 다른 언어 환경-에 살다가돌아온 학생들을 만날 때면 마음의 평정을 더 많이 잃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아직 키르헨펠트에 계세요?" 그들은 이렇게 묻고는 가던 발걸으을 재촉했다. 그런 날 밤이면 그레고리우스는 이 질문에 대한 변명거리를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변명을 해야 한다는 느낌조차 견디기 힘들어졌다.  46


무엇인가와 작별을 할 수 있으려면 내적인 거릳기가 선행되어야 했다.  47



-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이런 생각은 술 취한 저널리스트와 요란하게 눈길을 끌려는 영화제작자, 혹은 머리에 황색 기사 정도만 들어 있는 작가들이 만들어낸 유치한 동화일 뿐이다.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안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無音 없을무 소리음)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55



-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60



"아무 때나 전화하세요. 낮이든 밤이든." 독시아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둘이 처음 만났던 20년 전을 떠올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의사는 외국인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는 독특한 억양으로 말했다. 

"눈이 먼다고요? 아닙니다. 그냥 운이 나빴던 거예요. 정기적으로 망막을 검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레이저도 있는걸요.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는 그레고리우스를 문까지 배웅하다가 멈춰 서더니 눈을 깊게 들여다보며 물었다.

"무슨 다른 걱정거리라도?"

그레고리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플로렌스와의 이혼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말은 몇 달이 지난 후에야 할 수 있었다. 그리스 의사는 별로 놀라지 않은 듯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가끔 정말 두려워하는 어떤 것 때문에 다른 무엇인가에 두려움을 갖기도 하지요." 그때 그가 한 말이었다.  62-63


그때 형태가 잡히지 않은 채 우리 앞에 놓여 있던 그 열린 시간에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무엇을 해야 했을까. 자유로워 깃털처럼 가벼웠고, 불확실하여 납처럼 무거웠던 그 시간에.  75


지나온 시간이 괴롭지 않은 사람도 돌아가려고 할까?  77


낯선 사람의 삶을 산다는 게 어떤 것일까 생각하며 남의 뒤를 밟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금 전 그의 마음속에서 터져 나온 감정은 아주 새로운 호기심이었다. 그 호기심은 기차를 타고 오면서 경험했고, 파리 리용 역에 내리면서도-어제였든 아니면 언제였든- 느꼈던 새로운 종류의 각정과 어울릴 만한 것이었다.  80


그레고리우스는 뭘 해야 좋을지 모를 때마다 독서를 하곤 했다. 베른 근처 산간 마을 농부의 딸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책을 읽는 일이 드물었다. 가끔 읽는다고 해도 루트비히 강호퍼(1855~1920, 향토 소설로 유명한 독일 작가)의 향토소설 정도만 읽었는데, 그것조차도 몇 주씩 걸렸다. 아버지는 텅빈 박물관 전시실의 무료함을 잊는 수단으로 독서를 시작했고, 읽는 데 취미를 붙이고부터는 손에 잡히는 책은 무엇이든 읽었다. "이제 너도 책 속으로 도망치는구나." 독서의 기쁨을 발견한 아들에게 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책에 대한 어머니의 이런 생각, 좋은 글이 지닌 마술과 같은 힘이나 광채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는 그를 슬프게 했다. 

그는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 즉 책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독서를 하는지 하지 않는지는 금방 알 수 있으며, 사람 사이에 이보다 더 큰 구별은 없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들으면 놀랐고, 그의 괴상한 성격에 머리를 가로젖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레고리우스는 알고 있었다. 정말 알고 있었다.  101-102


담배를 피우는 이방인이 유리에 비친 나의 모습에서 일그러진 상(像 형상상)을 만들어 내리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고, 내 관념 세계에 관한 그의 공상은 일그러진 채 점점 쌓여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이중으로 이방인이 된다. 우리 사이에는 허위적인 외부세계뿐 아니라 외부세계가 각자의 내부세계에 만드는 망상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106-107


우리는 서로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108


모든 사람이 똑같은 그를 보았지만, 프라두가 말하듯 사람드링 보는 외부세계의 한 부분은 내면세계의 한 부분이기도 하므로 모두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프라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였던 때는 자기 인생에서 단 일 분도 없다고 확신했다.  108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110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레고리우스는 깃털처럼 가벼운 새 안경을 벗고 눈을 문지른 다음, 다시 한 번 썼다. 그런데 사실이었다. 예전 그 어느 때보다 잘 보였다.  114


새 안경으로 세상은 더 넓어졌고, 공간은 실제로 3차원이 되어 사물들이 마음껏 몸을 펼 수 있었다. 전혀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115



-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과 자비심과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  116



- 사람들의 만남이란 한밤중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달려가는 두 기차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는 뿌연 창문 저편의 흐릿한 불빛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시야에서 바로 사라져서 알아볼 시간도 없는 사람들에게 빠르고 덧없는 시선을 던진다. 무(無)에서 나와 아무런 의미나 목적 없이 텅빈 어둠 속에서 조각처럼 빛나던 창틀, 그 창틀에 들어 있는 유령들처럼 스쳐간 것이 정말 한 남자와 여자였던가? 두 사람은 아는 사이였을까? 둘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가? 웃었던가, 울었던가? 사람들은 이런 광경이란 서로 모르는 타인이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날 산책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말할지 모른다. 이 경우에는 그런 비교가 어느 정도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우리는 많은 살마들과 오랫동안 마주보고 앉아 있다. 함께 먹고 일하며 옆 자리에서 잠을 자고, 한 지붕 아래서 산다. 스쳐 지나가는 덧없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속성과 신뢰감과 친밀한 이해심을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속임수는 아닐까? 매순간 견딜 수 없으므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이 덧없음을 은폐하고 없애려는 시도... 다른 사람을 향한 눈빛이나 시선 교환은, 모든 것을 흔들고 덜컹거리게 만드는 엄청난 속도와 기압에 마비된 기차 승객들이 서로 스쳐 지나가며 던지는 지극히 짧은 시선의 만남과 같은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스치며 지나가는 밤의 만남처럼 언제나 서로에게서 벗어나고, 추측과 생각의 단상과 날조된 특성들만 우리에게 남겨두는 건 아닌지. 만나는 게 사실은 사람들이 아니라, 상상이 던지는 그림자들은 아닌지.  122-123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과거로 돌아가 그를 새롭게 아는 것..

자기 삶과는 완전히 달랐고 자기와는 다른 논리를 지녔던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까.  127


'글을 쓰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깨어 있다고 할 수 없어.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 자기가 어떤 사람이 아닌지는 더욱 알지 못하지고.'(아드리아나의 증언 중)  141


(에사)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1952년 가을, 영국에서였소. 런던에서 브라이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였지...

내가 탄 기차 칸의 문이 열리더니 머리카락이 헬멧처럼 반짝이는 그 사람이 들어오더군. 차가우면서도 부드럽고, 우울해 보이는 눈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그는 신부 파치마와 함께 장거리 여행을 하는 중이었소. 그때든 그 후로든, 그 사람에게 돈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소. 난 그가 의사라는 것, 그리고 특히 뇌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리고 원래 사제가 되려고 했지만, 철저한 유물론자라는 것도. 아주 많은 일에 역설적인 견해를 지녔던 사람이었지. 모순적이 아니라 역설적인 견해 말이오."  150-151


".. 의사들은 믿지 않았거든. 의사들을 믿지 않는 의사라.. 그 사람은 그랬고. 아마데우는."  152


그는 저항운동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소. 성격도 맞지 않았지. 저항운동가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꿈꾸는 사람의 감수성 예민한 영혼이 아니라 나처럼 투박한 두개골이 필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너무 위험 부담이 크고 실수도 하게 되어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어버린다오. 그는 만용에 가까운 행동을 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냉혹했지만, 인내심이나 우직함은 없었소.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어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은 없었지.  153


(멜로디) ".. 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자비하고 타협하지 않는 오빠의 비판을 좋아했어요..."

"..오빠는 벌써 네 살 때 글을 읽기 시작해서 손에 잡히는 건 뭐든 읽었다고 해요. 초등학교에서는 지루해서 죽을 정도였고, 중등학교에서도 두 번이나 월반을 했어요. 스무 살 때는 온갖 것들을 모두 알게 됐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스스로에게 묻기에 이르렀어요. 그러느라 공놀이 같은 건 잊은 거지요."  179


"그레고리우스, 그건 글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말하는 건 글이 아니라고요. 그냥 말을 하는 거예요."

그레고리우스가 사람들이 서로 연관이 없고 모순된 말을 한다고, 그리고 말한 것도 금방 잊어버린다고 불평했을 때 한 대답이었다. 독시아데스는 그의 말에 마음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자기처럼 택시 운전, 그것도 테살로니키엣 택시 운전을 해본 경험이 있다면 사람들이 하는 말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주 확실하게-이렇게 확실하게 아는건 인생에서 몇 개 안 될 정도로-안다고 했다. 그냥 말하기 위해 말을 할 뿐이라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다면, 그럼 말로는 도대체 뭘 해야 하느냐고 그레고리우스가 물었다. 독시아데스는 껄껄 웃었다. 

"스스로 말을 하는 계기로 삼아야지요! 그래서 말이 계속 이어지도록."  180-181



- 영혼의 그림자.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처럼 확실한가? 스스로의 말이라는 것이 맞기는 할까?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들은 신빙성이 있을까? 그러나 내가 고민하는 진짜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정말고민스러운 문제는 이런 이야기에 도대체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있기나 할까라는 것. 외모에 관한 이야기에는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183



- ... 지금의 내가 안니,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그 시절로 다시 가고 싶은-꿈과 같이 격정적인 -갈망.... 다시 한 번 손에 모자를 쥐고 따뜻한 이끼 위에 앉아 있고 싶은 것, 이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길 원하면서 그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겪은 나를 이 여행에 끌고 가려고 하는 것, 이는 모순되는 갈망이 아닌가.  184-185



(바르톨로메우 신부) "..아마데우는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앉아 있었소. 그 아인 기억력이 엄청나게 뛰어났지. 검은 눈은 옆에서 아무리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 해도 흔들리지 않는 달관한 시선과 굉장한 집중력으로 두꺼운 책들을 한 줄씩, 한 쪽씩 모두 빨아들였소. 어떤 선생이 이렇게 말하더군. '아마데우가 책을 읽고나면 그 책에는 더 이상 글씨가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아마데우는 책의 의미만 삼키는 게 아니라 잉크까지 먹는다니까요.'.."  193


"..재능이 많았던 아마데우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소. 하지만 못하는 게 한 가지 있었지. 놀고 즐기고 절제 없이 행동하는 거였소. 엄청난 각성과 통찰과 자제를 향한 열정적인 욕구는 자기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지..."  195


"..아마데우는 천박한 허영심을 대하면 잔인해졌소. 아주 심하게...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드는 듯했지. '천박한 허영심은 우둔함의 다른 형태죠.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주 전체로 봤을 때 얼마나 무의미한지 몰라야 천박한 허영심에 빠질 수 있어요. 그건 어리석음이 조야한 형태로 나타난 거예요.' 그는 늘 이렇게 말했소.."  202


아마데우가 졸업식에 낭독한 글..

첫 문장을  들은 직후부터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소. 시간이 지날수록 정적은 더 심해졌지. 이미 인생을 다 산 듯한 열일곱살짜리 우상파괴자의 펜 끝에서 나온 문장은 마치 채찍질과도 같았소...

나중에 선생도 보게 되겠지만, 마지막 문장은 감동적이면서도 겁을 주는 협박이오..

아마데우는 그 문장을 크게 말하지도,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하지도 않았소. 차분하고 거의 부드럽기까지 한 목소리였소.  209


그레고리우스는 대강당으로 가서 코르테스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프라두의 연설을 듣던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책방 봉지에서 바르톨로메우 신부의 서류철을 꺼내 끈을 풀고, 아마데우가 연설을 끝내고 교탁에 선 채 놀란 청중의 침묵 속에서 정리했던 종이뭉치를 꺼냈다..


- 신의 말씀에 대한 경외와 혐오.

난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이 세상의 범속함에 맞설 대성당의 아름다움과 고상함이 필요하니까. 반짝이는 교회의 유리창을 올려다보며 그 천상의 색에 눈이 부시고 싶다. 더러운 제복의 단조로운 색깔에 맞설 광채가 필요하니까. 교회의 혹독한 냉기로 내 몸을 감싸고 싶다. 병영의 단조로운 고함 소리와 들러리 정치인의재기 넘치는 수다네 맞설, 명령을 내리는 듯한 그 정적이 필요하니까. 행진곡의 새된 천박함에 대항할 물 흐르는 듯한 오르간의 울림이, 흘러넘치는 그 숭고한 음색이 듣고 싶다. 난 기도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천박함과 경솔함이라는 치명적인 독에 대항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필요하니까. 난 성서의 강력한 말씀을 읽고 싶다. 언어의 황폐함과 구호의 독재에 맞설, 그 시(詩)가 지닌 비현실적인 힘이 필요하니까. 이런 것들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이 또 하나 있다. 우리 몸과 독자적인 생각에 악마의 낙인을 찍고 우리의 경험 가운데 최고의 것들을 죄로 낙인찍는 세상, 우리에게 독재자와 압제자와 자객을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세상. 마비시킬 듯한 그들의 잔혹한 군화 소리가 골목에서 울려도, 그들이 고양이나 비겁한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거리로 숨어들어 번쩍이는 칼날로 등 뒤에서 희생자의 가슴까지 꿰뚫어도... 설교단에서 이런 무뢰한을 용서하고 더구나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일 가운데 하낟. 설사 누군가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이는 유례가 없는 허구이며 완벽한 불구하는 값을 치러야 하는 무자비한 자기기만이다. 적을 사랑하라는 이 괴상하고도 비상식적인 명령은 사람들의 의지를 꺾고 용기와 자신감을 빼앗아, 필요하다면 무기까지도 들고 독재자에게 대항하여 일어나야 할 힘을 얻지 못하도록, 그들의 손아귀에서 나긋나긋해 지도록 하기에 적합해 보인다.  

난 신의 말씀을 경외한다. 시적인 그 힘을 사랑하므로, 난 신의 말씀을 혐오한다. 그 잔인함을 증오하므로, 이 사랑은 아주 힘든 사랑이다. 말씀의 광채와 자만하는 신이 만드는 엄청난 예속을 끝없이 구분해야 하니까. 이 증오도 아주 힘든 증오다. 이 세상의 멜로디인 말씀을, 우리가 어릴 때부터 경외하라고 배운 말씀을 어떻게 증오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다음부터 우리를 봉화처럼 비추던 말씀을, 우리로 하여금 지금의 존재가 되도록 이끌어준 그 말씀을?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친자식을 동물처럼 도살하라고 요구했음을. 이런 말씀을 읽을 때 느끼는 분노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자신과 논쟁하려 한다고 욥을 비난하는 신은 도대체 어떤 신인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자기가 겪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욥을? 욥을 그렇게 만든 게 누구던가? 신이 아무런 이유 없이 어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이, 평범한 사람이 그러는 것보다 덜 부당할 이유는 뭔가? 욥이 불평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았던가?

신의 말씀이 지닌 시적 분위기는 너무나 대단해서 모든 것을 침묵하게 하고, 모든 저항을 하잘것없는 불만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선포된 요구와 굴종이 너무 심하여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는 성서를 옆에 밀어놓는 정도가 아니라 던져버려야 한다. 성서에서는 생활과 동떨어져 있으며 즐거움이라고는 없는 신이, 자유로워야 묘사할 수 있는 인생의 그 큰 범위를 복종이라는 단 한 가지 영역으로, 꼼짝할 수 없는 영역으로 한정하려 한다. 우리는 죄를 짊어져 꼬부라지고, 품위를 잃게 하는 예속과 고해성사로 위축되어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긋고, 그의 품 안에서 더 나은 인생을 누리기 위해 수천가지 희망을 거부한 채 무덤을 향해 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모든 기쁨과 자유를 빼앗은 그의 품 안에서 어떻게 인생이 더 나아진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에게서 나오고 그를 향해 가는 말씀은 현혹적으로 아름답다. 복사(服事 옷복 일사) 때 난 그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제단의 촛불 속에서 그 말씀은 얼마나 나를 취하게 했던가! 이 말씀이 온갖 일들의 척도임을 얼마나 당연하게 생각했던가! 사람들이 다른 말-혐오스러운 산란함과 본질의 상실을 의미하는 말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또 얼마나 이해할수 없는 일이었던가! 난 지금도 그레고리오 성가를 들으면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예전의 그 심취가 이제 반란에 돌이킬 수 없이 자리를 내준 사실에 잠시 슬픔에 젖는다. '지성의 희생(sacrificium intellectus)'이라는 두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화염처럼 내 안에서 솟구쳤던 반란...

호기심과 질문, 의혹과 논거, 생각하는 즐거움 없이 우리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우리의 목을 치는 칼날과 같은 두 단어는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느끼고 행동하며 살라는 요구이자 광대한 분열을 향한 선동이며, 우리 삶의 내적인 통일과 조화라는 행복의 정수를 희생하라는 명령이다. 갤리선의 노예는 쇠사슬에 묶여 있지만 원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행위를 가슴 깊은 곳에서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 그것도 기쁨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큰 경멸이 있을까?

신은 그 편재함으로 낮이나 밤이나 우리를 관찰하고 매시간, 매분, 매초마다 우리의 행위와 생각을 장부에 기록하며, 온전하게 우리 자신일 수 있는 시간을 단 한순간도 주지 않는다. 비밀이 없는 사람은,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는 생각과 소망이 없는 사람은 과연 어떠한가? 종교재판 때와 현재의 고문 기술자들은 알고 있다. "피의자가 내부로 후퇴할 길을 차단하라, 불을 절대 끄지 마라, 절대 혼자 두지 마라, 그에게서 잠과 평온함을 빼앗으라, 그러면 곧 자백할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훔쳐가는 고문은 호흡하는 데 필요한 공기와도 같은 외로움, 우리가 스스로와 마주 설 수 있는 그 외로움을 파괴한다. 우리의 구주, 우리의 신은 자신의 방종한 호기심과 반감을 일으키는 그 궁금증으로 불멸이어야 할 우리의 영혼을 훔치고 있다는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영원히 죽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이 과연 있으랴? 누가 영원히 살고 싶어할까? 말 그대로 끝없이 많은 날과 달라 해가 앞으로 오므로, 오늘과 이 달과 올해에 일어나는 일이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지루하고 공허한가? 정말 영원히 산다면, 의미가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을까 우리는 시간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고, 놓치는 것도 없으며, 서두를 필요도 없다. 우리가 어떤 일을 오늘 하든 내일 하든 아무런 상관이, 정말 완벽하게 아무런 상관이 없다. 회복할 시간이 얼마든지 있으므로 수없이 많은 실수도 영원 앞에서는 무(無)가 되고, 뭔가 후회한다는 것도 무의미해진다. 하루하루 태평하고 편안하게 느낄 수도 없다. 이러한 행복은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자각을 먹고 살기 때문에, 그리고 게으름뱅이는 죽음과 마주한 모험가요 성급이라는 명령과 싸우는 십자군이므로, 언제 어디든 누구에게든 시간이 한없이 많다면 시간을 낭비하면서 얻는 기쁨이 설 자리가 어디에 있으랴?

두 번째로 오는 느낌은 처음과 같지 않다. 그것은 반복을 의식함으로써 퇴색된다. 너무 자주 오고 오래 지속되는 감정은 우리를 지치고 싫증나게 한다. 불멸하는 우리의 영혼 속에는 이런것들이 결코,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아는 데서 오는 어마어마한 권태감과 절규하는 절망감이 자랄 것이다. 우리도 변화하는 감정과 함께 변하기를 원한다. 감정은 바로 예전의 자신을 떨쳐버리기 때문에, 그리고 스스로 다시 사라질 미래를 향해가기 때문에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의 물결이 영원으로 흐른다면, 조망이 가능한 시간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가 전혀 상살할 수 없는 수천 가지 감정이 마음속에 생겨날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에게 어떤 약속이 주어지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우리가 영원토록 우리여야 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우리인 이 강요된 상황에서 언젠가 벗어난다는 위안은 결코 없다는 뜻인가? 우린 여기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하며 또 영원히 알 수 없을 터인데, 이런 무지는 축복이다. 불멸이라는 이 낙원은 바로 지옥임을, 그 한 가지 사실은 알고 있으므로.

현재에 아름다움과 두려움을 부여하는 것은 죽음이다. 시간은 죽음을 통해서만 살아 있는 시간이 된다. 모든 것을 안다는 신이 왜 이것은 모르는가? 견딜 수 없는 단조로움을 의미하는 무한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난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유리창의 반짝임과 서늘한 고요함과 명령을 내리는 듯한 정적이, 오르간의 물결과 기도하는 사람들의 성스러운 미사가, 말씀의 신성함과 위대한 시의 숭고함이 필요하니까. 나는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자유와 모든 잔혹함에 대항할 적대감도 필요하다.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무의미하다. 아무도 나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말기를.  215-221


글을 세번 읽는 동안 그레고리우스의 놀라움은 점점 커갔다.  211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가 쓴 글을 숨도 쉬지 않고 읽었다.  248



- 난 그를 위해 그랬던가? 살아남는다는 그의 관점에서 내가 행한 일인가? 그게 내 의지였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까? 환자들을 대할 때면 물론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난 그렇게 행동한다. 어쨌든 그랬길 바란다. 내 행동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자신의 의지였다고 알고 있는 동기 외에 완전히 다른 어떤 동기에 영향을 받는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는?

내 손은 자신만의 고유한 기억을 지닌 듯하고, 이 기억은 자기 관찰을 위한 다른 어떤 원천보다도 더 신뢰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멩지스의 심장에 바늘을 찌르던 이 손의 기억. 이 손은 폭군살해자의 손, 그러나 역설적인 행위로 이미 죽은 폭군을 다시 살린 손이었다. (늘 새롭게 경험하는 일이지만, 내 원래 생각과 반대되는 현상은 여기서도 증명된다. 육체가 정신보다 매수되기 어렵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정신은 스스로에 대한 확실한 신뢰와 스스로에게 더 이상 놀라지 않는 인식의 친근함을 우리에게 그럴듯하게 꾸며대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단어들로 엮여 있는 자기기만의 매력적인 활동 무대다. 이렇듯 수월한 자기 확신 속에서 사는 인생은 얼마나 지루한가!)

그러니 사실은 내가 날 위해 그 일을 한 건가? 내가 훌륭한 의사요 증오를 억누를 수 있는 힘을 지닌 용감한 인간임을 나 스스로에게 보이기 위해? 승리를 거둔 극기를 칭찬하고 자기 통제의 기쁨을 즐기기 위해? 그러니까 도덕적인 허영심, 아니 그것보다 더 나쁜 지극히 일상적인 허영심에서? 그러나 그 몇 초 동안의 경험은 결코 향락적인 허영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확실하다. 오히려 나 자신의 뜻과 반대로 행동하고, 끓어오르는 보복과 심술이라는 감정을 눌러야 했던 경험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허영심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허영심, 반대 감정 뒤에 숨어 있는 허영심도 있지 않을까?

'난 의사요.' 흥분한 군중 앞엣 내가 했던 말이다. '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사람이오, 그건 신성한 선서요. 그 선서를 어기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요. 무슨 일이 있어도...'가로 말할 수도 있었겠지. 난 이런 말을 좋아하고, 또 사랑한다. 이런 말은 나를 감동시키고 황홀하게 한다. 사제의 서약처럼 들리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내가 인간백정에게, 그에게 잃어버린 목숨을 돌려준 것은 일종의 종교적인 행위였을까? 더 이상 교조와 예배를 통해 우월감을 느낄 수 없음을 마음속으로 아쉬워하는, 제단 촛불이 지닌 천상의 광채를 아직도 그리워하는 사람의 행위? 다시 말해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행위? 나 스스로도 느끼지 못했지만, 내 영혼 속에서는 예전에 신부님의 귀여움을 받던 제자와 아직 한 번도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은 폭군살해자 사이에 짧고도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던가? 생명을 구하는 '독'이 든 주사바늘을 심자엥 꽂은 것은 사제와 살인자가 함께한, 각자가 원하던 것을 얻은 행위였나? 

나에게 침을 뱉은 사람이 이네스 살루마옹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면, 난 나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우리가 너에게 요구한 건 살인이 아니었다."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었겠지.

"법적이나 도덕적인 의미에서나 그건 범죄가 아니었어. 그가 그냥 죽게 내버려두었더라도 너에게 판결을 내릴 판사도 없었고, '살인하지 말라'는 모세의 십계명을 어겼다고 말할 사람도 없었다. 우리가 원했던 건 아주 단순명료하고 간단한 일이었어. 우리에게 불행과 고무노가 죽음을 불러온 사람의 목숨, 우리를 불쌍히 여긴 하늘이 이제 드디어 없애려고 하던 목숨을 그렇게 온 힘을 다해, 그가 앞으로도 계속 유혈 체제를 유지하도록 붙잡지는 않는 거였다."

난 무슨 말로 나를 변호했을까?

"어떤 사람이든, 무슨 짓을 저질렀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할 권리가 있다. 우리에겐 다른 사람의 생사 여부를 판단하거나 주관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그게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총을 쏘는 누군가를 발견한다면, 그 사람을 쏘지 않는가? 당신이 살인을 저지르는 멩지스를 눈앞에서 본다면 필요한 경우 살인을 해서라도 그의 살인을 막지 않을까? 당신이 했어야 할 일,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것과 비교하면 별것 아니지 않은가?"

그를 죽게 그냥 내버려두었더라면 내 기분은 지금 어떨까? 사람들이 나에게 침을 뱉는 대신 치명적인 나의 방임을 칭송 했더라면? 분노를 뿜어내는 실망 대신 느긋한 안도의 숨소리가 골목에서 들렸더라면? 난 분명 악몽을 꿀 정도로 시달렸을 것이다. 이유가 뭘까? 내가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 있어서? 아니면 그를 죽게 내버려두는 냉혹한 행위는 내가 나 자신에게 낯설어짐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의 나도 그저 우연의 산물일 뿐이 아닌가.

이네스에게 가서 초인종을 누르고, 이렇게 말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어쩔 수 없었어요. 난 원래 그래요. 사정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됐어요. 내가 생긴 게 워낙 그러니, 달리 어떻게 할 수 없었어요."

그러면 그녀는 아마 이렇게 대답하겠지.

"당신 기분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건 정말 하찮은 거니까. 하지만 멩지스가 건강해져서 제복을 다시 입고, 살해 명령을 계속 내린다고 생각해봐요. 아주 자세하게 상상해보라고요. 자, 이제 자기 자신을 판단해보시죠."

내가 그녀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어떻게, 무슨 말을?  248-252



멩지스가 눈앞에 누워 있을 때, 프라두가 본 것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특정한 개인이었다. 오직 그라는 개별적인 한 인간, 프라두는 멩지스의 삶을 다른 사람들과 연관지어, 더 큰 범위 속의 한 요소로 계산할 수 없었다. 프라두의 혼잣말에 등장하는 여자는 바로 이 점을 비난했다. 그가 개별적인 다른 사람들의 목숨과도 똑같이 관련된, 그것도 여러 사람들의 목숨과 관련된 결과를 생각하지 않은 것. 한 사람의 개별적인 목숨을 여러 사람의 개별적인 목숨을 위해 희생하지 않은 것.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가 이런 일을 배우려고 저항운동에 참여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의도는 실패로 끝났다. "한 사람 대 여러 사람의 목숨. 이런 식으로 계산할 수는 없지 않나요?" 몇 년 뒤에 프라두는 바르톨로메우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253



- "그래, 하지만 왜 불안하지? 고통이나 실망이나 슬픔 또는 분노가 아니라 왜 불안일까? 불안은 이제 앞으로 올 일, 일어날 일에 대해 갖는 감정 아닌가? 네가 피아노를 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늘 알고 있었고, 우린 그걸 '현재'로 다퉜잖아. 이 불행은 지속될지는 몰라도, 불안하다는 느낌이 타당할 만큼 커질 수는 없지 않을까? 연주를 할 수 없을 거라는 뚜렷한 인식은 네 기운을 빠지게 하고 답답하게 만들지는 몰라도, 공포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야."

"그건 오해야."

조르지가 반박했다.

"공포는 새로운 인식 때문이 아니야. 무엇에 대한 인식인지가 문제야. 미래의 것이긴 하지만 현재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내 인생의 불완전함, 지금 이미 결핍이라고 느끼는 이 불완전함이지. 이 결핍이 너무 커서 늘 알고 있었던 사실이 내 안에서 공포로 변해."  266



- 인생이 가볍든 힘들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상관없이 더 많은 삶을 원한다. 끝나고 나면 모자라는 인생을 더 이상 그리워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들은 삶이 끝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복잡하고 분석적인 사유는 직관적인 인식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린 둘 중에 어떤 것을 더 신뢰해야 하나?  269



조르지는.. 왜 이 일에 관심이 있는지 물었다...

"제가 그였더라면 어땠을지 알고 싶어서요."

그레고리우스가 대답했다...

"그게 가능할까요?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 '그'가 된다는 것이?"

그레고리우스는 적어도 그라고 상상하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있지는 않느냐고 대답했다.  280


책은 훔쳤소. 책을 읽는 데는 돈이 들지 말아야 한다는 게 당시 내 생각이었는데,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소.  288


둘은 차를 마시며 체스를 두었다. 말을 움직이는 에사의 손이 떨렸다. 말을 새로 놓을 때마다 딱 소리가 났다. 그레고리우스는 에사의 손등에 난 화상 자국에 번번이 놀랐다. 

"끔찍한 건 고통이나 상처가 아니오."

에사가 말했다. 

"가장 끔찍한 건 굴욕이지. 바지에 오줌을 쌌다는 걸 알았을 때의 굴욕감... 석방되고 나서 난 복수심에 불탔소. 고문기술자들이 퇴근하여 나올 때까지 숨어서 기다렸지. 그들은 사무실에 다니는 사람들처럼 뻣뻣한 외투 차림에 서류가방을 들고 나왔소. 난  그들의 뒤를 밟아 집까지 갔지. 눈에는 누, 이에는 이로 보복하기 위해. 내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을 만지는 게 구역질이 났기 때문이었소. 보복을 하려면 어차피 손을 댈 수밖에 없었소. 총을 사용하는 건 그들에겐 너무 관대한 처벌이었을 테니까. 마리아나는 내가 도덕적인 성숙의 과정을 겪은 줄 알아. 그건 전혀 아니었소. 난 언제나 이른바 '성숙'이라는 걸 거부하던 사람이오. 싫어해. 난 사람들이 말하는 성숙이란 걸 낙관주의나 완벽한 권태라고 생각하오."  290-291



- 실망이라는 향유. 실망은 불행이라고 간주되지만, 이는 분별없는 선입견일 뿐이다.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또한 이런 발견없이 자기 인식의 근본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그러니 실망이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함을 어떻게 얻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우리는 실망을, 없으면 우리 인생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한숨을 지으며 할 수 없이 견뎌야 하는 그 무엇이라고 취급해서는 안 된다. 우린 실망을 찾고 추적하며 수집해야 한다. 젊은 시절에 숭배했던 영화배우가 이제 노화와 쇠락의 징후를 보이는 것에 나는 왜 실망하는가? 성공의 가치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에 대한 실망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부모님에 대한 실망을 평생 동안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 사람들에게서 우린 뭘 기대했던가? 무자비하게 고통스러운 통치 아래서 평생 시달려야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고통을 주고 경제적인 도움도 주는 사람들-행동에서 실망을 느낀다. 그들의 행동이나 말이나 감각은 너무나도 미미하다. 

"뭘 기대하는 겁니까?"

내가 묻는다. 그들은 대답하지 못한다. 이들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기대, 실망할 수도 있는 기대를 오랫동안 품고 다녔다는 사실에 놀란다.

자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실망스러운 경험의 수집이란 그에게 중독과도 같을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독. 그에게는 실망이 뜨겁게 파괴하는 독이 아니라 서늘하게 긴장을 풀어주는 향유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의 진정한 윤곽이 무엇인지 눈을 뜨게 해주는 향유...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실망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실망이 스스로를 향한 길잡이라고 인식한 사람은, 없는 용기와 모자라는 성실함 또는 자신의 감각과 행동과 말에서 끔찍하도록 좁은 한계 등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내기 위해 온갖 힘을 쏟는다. 우리가 우리에게서 바라고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우리에게 한계가 없다는 것? 아니면 우리가 사실은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

기대를 줄임으로써 더 현실적이 되고, 단단하고 신뢰할 만한 본질만 남아 실망의 고통에 맞서는 저항력을 지니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포괄적이고 원대한 기대를 금지하고, 버스의 도착 여부와 같은 무의미한 기대만이 존재하는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292-294



"난 아마데우처럼 거리낌 없이 몽상에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소."

에사가 말했다.

"그리고 실망을 그토록 싫어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소. 아마데우의 이 글은 스스로에게 맞서서 쓴 거요. 자주 자신의 뜻에 거스르며 살아야 했던 그의 삶과 마찬가지로..."  294



- 우스꽝스러운 무대. 우리가 중요하고 슬프고 우습고 아무 의미도 없는 드라마를 상연하기를 기다리는 무대로서의 세계. 이런 생각은 얼마나 감동적이고 매혹적인가, 그리고 올마나 불가피한가!  307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를 잊을 수 있을까?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의 드라마를 상연하는 무대 역할을 한다고 해도? 망각이 아니었다면 그건 무엇이었을까?  309



- 내적인 넓이. 우리는 지금 여기서 산다. 예전에 다른 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과거다. 대부분은 잊어버렸고, 남아 있는 작은 부분들도 무질서한 기억의 파편들일 뿐이다. 단편적인 우연 속에서만 빛을 내다 사라지는 기억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습관적으로 이렇게 생각하곤 한다. 우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다른 사람인 경우에도 이는 가장 자연스러운 사유 방식이다. 이 사람들은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가 아니라 정말 지금 여기 우리 눈앞에 있으므로, 기억의 내적인 일화-그 기억의 현실성이 전적으로 그 사건의 현재성에만 있는-라는 형태를 통해서가 아니면, 이들이 과거와 갖는 관계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나 자신의 내부라는 관점에서 보면 상황은 아주 달라진다. 이 경우 우리는 현재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과거로 깊숙이 들어간다. 이런 일은 깊은 감각, 다시 말해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라는 느낌은 어떤 것인지를 결정하는 감각이 누구만 가능하다. 이 감각은 시간을 초월하고, 시간을 인정하지도 안흔다. 내가 지금도 여전히 손에 모자를 들고 학교 계단에 앉아 혹시 마리아 주앙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여학교로 눈길을 보내는 소년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물론 잘못된 주장이다. 30년도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실이기도 하다. 어려운 과제를 앞두고 두근거리는 내 가슴은, 수학을 담당했던 랑송이스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올 때 뛰던 그 가슴이다. 온갖 권위에 직면했을 때 답답해지는 가슴속에서는, 허리를 굽힌 아버지의 호령이 함께 울려 퍼진다. 모르는 여자의 반짝이는 눈빛과 마주칠 때마다, 그 옛날 학교 유리창에서 마리아 주앙의 시선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고 느꼈을 때처럼 숨이 멎는다. 난 늘 그곳에, 먼 시간의 저편에 있다. 결코 그곳을 떠난 적이 없다. 과거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거나, 그곳에서 출발하며 산다. 이 과거는 단순하고 짧은 일화 형태로 반짝이는 기억이 아니라 현재다. 시간이 몰고 온 수천 가지 변화는, 시간을 초월하는 현재의 이 감각과 비교하면 꿈처럼 덧없고 비현실적이며 환영처럼 기만이 심하다. 이 변화들은, 고통과 걱정거리를 안고 나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내가 마치 완벽한 자신감과 용기를 지닌 의사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불안에 떨며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신뢰감은, 그들이 내 앞에 있는 한 나 스스로 이것을 사실로 믿도록 강요한다. 하지만 환자들이 나가자마자 난 그들에게 소리치고 싶다. 난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학교 계단에 앉아 있는 소년일 뿐이라고, 내가 하얀 가운을 입고 이렇게 거대한 책상 앞에 앉아 환자들에게 충고를 하는 것은 정말 하찮은 일이고 사실은 거짓이라고, 우리가 같잖은 천박함으로 현재라고 부르는 현상에 속지 말라고...

우리는 시간상으로만 광범위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공간적으로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훨씬 넘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나면서 우리의 일부분을 남긴다. 떠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 남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단조로운 바퀴 소리가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그 여정이 아무리 짧더라도-장소로 우리를 데리고 가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까이 가고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을 떠난다. 우리가 낯선 정거장의 플랫폼에 두 번째로 발을 디디면, 그래서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다른 곳과 확연히 구별되는 냄새를 맡으면 우리는 외형상으로만 먼 곳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 먼 곳에도 이른 것이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에게서 아주 외딴 구석, 우리가 다른 곳에 있을 때면 무척 어두워 보이지 않았던 곳에... 그렇지 않고서야 승무원이 지명을 크게 외치고 기차가 멈추느라고 내는 끼익 소리를 들으면, 역 건물의 그림자가 우리는 삼키기 시작하면, 왜 그렇게 가슴이 뛰고 숨이 차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왜 우리는 기차가 마지막으로 덜컥이며 완전히 멈추는 순간을 마술적이고 소리 없는 드라마라고 생각하는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플랫폼에 첫 발자국을 디딘 순간부터, 그 옛날 기차의 첫 덜컥임을 느꼈을 때 중단하고 떠났던 삶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중단된 삶, 온갖 약속으로 가득한 그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 또 어디에 있으랴? '지금'과 '여기'가 본질적이라는 확신으로 이것에 집중하는 행위는 오류이며, 또한 불합리한 폭력이다. 중요한 것은 확실하고 느긋하게, 알맞은 유머와 멜랑콜리로 '우리'라는 시간과 공간상의 내적인 경치 속에서 움직이는 일이다. 여행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뭔가? 그들이 외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내적으로도 뻗어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계발할 수 없고, 스스로를 향한 먼 여행을 떠나 지금의 자기가 아닌 누구 또는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 발견할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살아간다.  315-318



"체스는 그렇게 잘 두면서, 왜 인생에서 싸울 줄은 몰라요?" 프롤렌스는 이런 말을 여러 번 했다. 인생에서 싸우는 건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자기 자신과 싸울 일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 그가 했던 대답이었다.  324



- 계획된 것도 아니고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지만,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남기는 불가피하고도 쉴 새 없는 부담의 흔적-절대 없애지 못하는 화상의 흉터처럼-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려, 부모들이 지닌 의도나 불안의 윤곽은, 완벽하게 무기려하고 자기가 어떻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아이들의 영혼에 달군 철필로 쓴 글씨처럼 새겨지지, 우리는 낙인찍힌 글을 착고 해석하기 위해 평생을 보내면서도, 우리가 그걸 정말 이해했는지 결코 확신할 수 없어.  356



내가 아빠의 상상에 대해 아는 게 있던가? 왜 우리는 부모의 상상에 대해 이다지도 모를까? 어떤 사람이 상상을 통해 받는 이미지에 대해 알지 못하면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과연 무엇을 알 수 있을까?  363



-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384



이따금 나는 인가의 약점보다 '생각 없음'이 더 많은 잔인함을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387


그레고리우스는 고통을 겪는 엄한 판사 아버지와 공명심이 강한 어머니-신처럼 떠받드는 아들을 통해 자기 인생을 살았던-아래에서 자랐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410


(아드리아나)"말을 하지 못하는 것. 오빠는 '감정 교육'이 무엇보다도 느낌을 드러내는 기술, 말을 통해 느낌을 풍요롭게 하는 경험을 우리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곤 했어요. 아버지는 그걸 얼마나 못하셧던지!"  415-416


"마지막 해에 오빠는, 우리 모두가 두려워하는 외로움의 본질이 도무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우리는 외로움이라고 말하는 그게 도대체 뭐지? 단순하게 다른 사람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아. 혼자 있으면서도 전혀 외롭지 않을 수도 있고,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외로울 때가 있으니까. 그러니 그게 뭘까? 오빠는 사람드이 온갖 소란 가운데서도 외로울 때가 있다는 생각에 골몰했어요. '좋아. 다른 사람들이 옆에 있다는 것, 내 옆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상황만 말하려는 건 아니야. 함께 파티를 하거나 친근한 분위기 속에서 감정이 이입된 현명한 조언을 할 때도 그래. 그럴 때도 우린 외로움을 느끼지. 그러니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의 존재 여부는 물론, 함께하는 행위와도 상관이 없어. 그러면 도대체, 도대체 무엇과 관련이 있을까?'.."

'경멸에서 오는 외로움'이라는 메모가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존경과 인정을 거두어가면, 왜 우린 그들에게 '그런 건 필요 없소. 나 자신만으로도 충분하니까'라고 말하지 못하나? 이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건, 소름끼치는 속박의 한 형태가 아닐까?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는 건 아닌가? 이런 일을 견디는 댐이나 보루로 어떤 감정을 세워야 하나? 내적인 견실함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그레고리우스는 책상 위로 몸을 굽히고, 벽에 붙은 메모지의 빛바랜 글씨를 읽었다.

신뢰에서 오는 협박.

"환자들은 오빠에게 아주 사적인 일이나 위험한 일들도 이야기 했어요."

아드리아나가 말했다.

"정치적으로 위험한 일들 말이에요. 그런 다음에 그 사람들은, 자기가 벌거벗었다는 느낌을 갖지 않으려고 오빠도 뭔가 고백하기를 기다렸어요. 오빠는 그걸 이루 말할 수 없이 증오했지요. '난 다른 사람들이 내게서 뭔가 기대하는 게 싫다.' 오빠는 발을 구르며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도대체 경계선을 긋는 일이 왜 이렇게 힘드니?' '어머니와 경계선을 긋는 일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어요. '어머니와 말이야.' 하지만 하지 않았어요. 오빠 스스로 알고 있었으니까."

인내라는 위험한 덕목.

"오빠는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인내라는 단어에 지독한 거부 반응을 보였어요. 인내심을 지닌 누군가를 보면 오빠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어요. '잘못을 저지르는 기괴한 방식일 뿐'이라고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했어요. '우리 안에서 솟구치는 분수에 대한 불안이지.' 난 동맥류를 알고 난 뒤에야 이 말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었어요."  417-419


"난 오빠를 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요. 오빠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믿었어요. 몇 년 동안 매일 오빠를 보아왔고, 자기 느낌과 생각과 더구나 꿈에 대해서도 말하는 걸 들어왔으니까요..."  420


'경멸에서 오는 외로움' 프라두가 생의 마지막에 골몰하던 주제였다. 우리가 타인의 존경과 관심에 의지하고, 그것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  431



- 유치함은 모든 감옥 가운데 가장 악질적이다. 창살은 단순하고 비현실적인 감정으로 도금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를 궁전의 기둥으로 착각한다.  434-



(마리아 주앙)".. 그런 일이 있지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없는지 알지 못해요. 그게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그러다가 그게 나타나면 단 한순간에 확실해지지요..."  455


(마리아 주앙)'상상력은 우리의 마지막 성소다.' 그가 늘 했던 말이지요. '상상력과 친근함은 언어 외에 그가 인정한 유일한 성스러움이었으니까요.  462



(마리아 주앙)".. 조르지를 나쁘게 말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를 향한 아마데우의 비판 없는 경탄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난 농부의 딸이라 농부의 아들들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어요. 낭만적이 아니지요. 큰일이 벌어지면 조르지는 일단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할 사람이었어요. 

아마데우를 매혹했던 것, 거의 취하도록 그를 끌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과 스스로의 경계를 지슨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던 조르지의 성격이었어요. 그는 간단하게 '싫어'라고 말하고는, 그 큰 코를 벌쭉이며 웃으면 그만이었으니까요. 그에 비해 아마데우는, 경계를 지으려면 그게 마치 구원의 문제라도 되는 듯 싸워야 했어요."  464


실우베이라가 말했다. "우리가 인생을 조망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앞으로든 뒤로든. 뭔가 일이 잘 풀렸다면 그건 그냥 운이 좋았던 것이겠지요."  471



- 배신적인 언어. 자기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 대해 또는 단순히 어떤 일에 대해 말을 할 때 우리는 말을 통해 스스로를 열어 보이려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타인에게 알리고, 타인에게 우리의 영혼을 잠깐 엿보기를 허용하는 것이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우리 마음의 한 조각을 타인에게 준다라는 뜻이다. 배 난간에 서 있을 때 어떤 영국인이 나에게 한 말이었는데, 새빨간 축구공을 가지고 있던 올소울의 아일랜드 학생에 대한 추억을 제외하면 그 낯선 나라에서 가지고 온 것들 가운데 좋은 거라고는 그 말이 유일하다.)

이런 상화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여는 문제에 관한 한 독자적인 감독이요 결정권을 지닌 극작가다. 하지만 어쩌면 이건 완벽하게 잘못된 생각, 자기기만이 아닐까? 우리는 말을 통해 자기를 드러낼 뿐 아니라 스스로를 배신하기도 한다. 표현하려던 것보다 훨씬 더 심하게 속내를 드러내어 원래 의도했던 바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타인은 우리의 말을 우리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에 대한 증상으로 해석한다. 우리라는 질병에 대한 증상, 타인을 이렇게 관찰하는 일은 흥미로우며 또한 우리를 매우 관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기도 한다. 타인도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똑같이 본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 입을 열려던 순간 말이 목에 걸린다. 그 충격은 우리를 영원히 침묵하게 만들 수도 있다.  476-477



- 분노라는 들끊는 독. 타인 때문에-그들의 뻔뻔함과 부당함,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우리가 화를 낸다면 우리는 그들의 권력 아래에 놓인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고 자란다. 분노는 들끓는 독과 같아서, 부드럽고 우아하며 평화로운 감정들을 파괴하고 우리에게서 잠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불을 켜고, 우리를 빨아먹고 기운을 빼는 기생충처럼 우리 안에 자리를 잡은 분노를 터뜨린다. 우리가 입은 피해에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오로지 우리 안에만 퍼져간다는 사실에도 분노한다. 우리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감싸며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는 동안, 우리를 희생자로 만든 원인 제공자는 분노의 파괴력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있으니까. 번쩍이는 조명이 무언의 분노에 쏟아지는 내부의 무대, 관객이 없는 그 무대에서 우리는 비현실적인 인물과 비현실적인 언어로 비현실적인 적들에게 효과라고는 전혀 없는 분노-우리가 내부에서 차갑게 들끓는 화염으로 인식하는-를 터뜨리며 우리를 위한 드라마를 홀로 상연한다. 이 모든 것이 상상 속의 드라마일 뿐, 타인에게 해를 입히고 번민의 균형을 만들어낼 실제 논쟁이 아니라는 인식을 우리가 확실하게 하면 할수록 유독한 그림자들은 더 사납게 춤추며 악몽의 가장 어두운 지하무덤까지 우리를 쫓아온다. (잔인하게 역습을 하리라고 생각하며, 상대방에게 소이탄과 같은 효력을 발휘할 만한 말을 밤새도록 궁리한다. 그래서 화창한 평화로움 속에서 우리가 커피를 마실 동안, 분노의 불길이 이번에는 그에게서 타오르도록.)

분노를 올바르게 다스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만나도 상관없는 무정한 존재, 차갑고 냉철한 판단만 내리는 존재, 진정으로 신경을 쓰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그 무엇도 흔들어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분노라는 경험을 전혀 알지 못하고, 메마른 무감각과 구별할 수 없는 태연함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기를 진심으로 원할 리는 없다. 분노도 우리가 누구인가에 관해서 어느 정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우리가 분노를 인식했을 때 그 독에 빠지지 않으며 분노가 우리에게 득이 되도록 하려면 우리 자신을 어떻게 교육하고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이다.

이것이 임종 순간에 마지막 대차대조표의 한 부분으로 남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분노에, 그리고 효과가 없는 상상 속의 드라마-쓰러질 정도로 번민하는 우리만 알고 있는 드라마-에서 타인에게 복수하는 데 너무나 많은 것을, 너무 많은 힘과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이 대차대조표는 청산염처럼 쓴맛이 나리라. 이 표를 개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 부모님이나 선생님, 다른 교육자들은 왜 이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을까? 이 엄청난 의미에 대해 왜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을까? 스스로를 파괴하는 분노 때문에 영혼을 낭비하지 않게 도와줄 나침반은 왜 주지 않은 걸까?  496-498



당신 내가 지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네? 문두스,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에요!" 왜 이런 모든 일이 지금까지도 이렇게 아플까? 왜 20년, 30년이 지나도록 이 기억들은 털어내지 못할까?  503


"문두스,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에요!" 플로렌스는 왜 그냥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까. "당신이 지루한 사람이냐고요? 세상에, 절대로 아니에요!"라고.

인간이 상처를 떨어낼 수 있기는 한 걸까? 우리는 과거로 깊숙이 들어간다. 프라두가 남긴 글이었다. 이런 일은 깊은 감각, 다시 말해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라는 느낌은 어떤 것인지를 결정하는 감각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 감각은 시간을 초월하고, 시간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507


그리고리우스는 그들에게 삶이 만족스러운지 물었다. 베른의 고전문헌학자인 문두스가 세상의 끝에서 가릴시아의 어부들에게 삶에 대한 견해를 묻고 있었다.  508


한 명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만족하냐고? 다른 삶은 모르는 걸!"

어부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나중에는 그칠 줄 모르는 웃음바다로 변했다. 그레고리우스도 얼마나 흥겹게 따라 웃었던지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509


친근함, 그것은 신기루처럼 헛되고 변하기 쉽다. 프라두가 쓴 말이었다.  516


덧없음. 프라두가 좋아하던 단어 가운데 하나라고 마리아 주앙이 말해주었다.  519



- 독재적인 친근함. 우리는 친근함 속에서 서로 뒤엉켜 있다. 보이지 않는 끈들은 '자유롭게 하는 사슬'이다. 이 뒤엉킴은 독재적이라, 독점을 요구한다. 나눔은 배반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사람만 좋아하고 사랑하고 접촉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다양한 친근함을 연출하고, 주제와 말과 몸짓과 함께 나눈 지식과 비밀에 관해 옹졸하리만큼 꼼꼼한 장부를 써야 하는가? 이런 친근함은 소리 없이 떨어지는 독이다.  530



타인을 자기 삶의 건축용 석재로, 자기 구원의 경주를 위한 일벌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536


사람의 정체성은 언제 유지되는가. 늘 그래왔던 그 모습일 때? 스스로를 바라보았을 때처럼? 아니면 들끓는 생각과 감정의 용암이 온갖 거짓과 가면과 자기기만을 묻어버릴 때? 달라졌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사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원하는 그 모습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니까 타인의 안녕에 대한 걱정과 염려라는 가면을 썼을 뿐, 결국 익숙한 것이 흔들릴까봐 대항하는 투쟁 문구의 일종인가?  537


그레고리우스는 여행안내 책자를 사서 수도원을 하나씩 차례로 구경했다. 그는 명소를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뭔가에 몰리면 그는 고집스럽게 바깥에 머물러 있었다. 베스트셀러라는 책들을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읽는 것도 이런 성격 때문이었다. 지금 그는 관광객의 호기심으로 명소를 찾아다니는 게 아니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그레고리우스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프라두의 흔적을 찾아다닌 그동안의 시간이 성당과 수도원에 대한 그의 느낌을 바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544


두 사람이 피니스테레 해변에 앉아 있을 때 배 한 척이 지나갔다. 

"아마테우가 배를 타자고 하더군요. '브라질 밸렘이나 마나우스로, 아마존으로 가는 게 제일 좋겠어. 덥고 습기가 많은 곳으로. 색깔과 냄새와 끈적거리는 식물들과 열대우림과 동물들 이야기를 쓰고 싶어. 난 지금까지 언제나 정신에 관한 글만 썼어.' 그가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 오빠가, 그렇게도 현실적이던 우리 오빠가..." 아드리아나의 말이 떠올랐다.

"사춘기 소년의 낭만이나 중년 남성의 유치함이 아니었어요. 그건 현실이었고, 진정이었어요. 하지만 그것 역시 저와는 상관이 없었지요. 그는 오로지 자신만의 여행, 자기 영혼의 억압된 분노를 향한 여행에 제가 동행하기를 원했던 거예요. 저는 아마데우에게 당신은 너무 허기졌다고, 그 여행에 동행할 수 없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어요.

그가 개선문 아래로 끌어당기던 날 밤, 저는 이 세상 끝까지 그를 따라가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그의 무서운 허기를 알지 못했지요.  553


에스테파니아가 그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오후 내내 책을 읽었어요. 처음에는 놀랐지요. 아마데우가 아니라 저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는 생각에 몹시 놀랐어요. 그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깨어 있던 살마인지, 자신에게 얼마나 무자비할 만큼 공정했는지, 거기에 문장력도.. 이런 살마에게 '당신, 너무 허기졌어요'라고 말했던 제가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렇게 말햇던 게 옳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의 글을 예전에 알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554



- 많은 여자들 가운데 당신인 이유는? 어느 순간엔가 모든 살마이 하는 질문이다. 속으로만 내뱉어도 이 질문이 위험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임의성이나 대체 가능성과 똑같지는 않지만 우연이라는 생각, 우연이라고 발음하는 생각이 그토록 소름 끼치는 이유는? 왜 우리는 이러한 우연을 인정하고 웃음으로 넘기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우연이 사랑의 의미를 축소한다고, 우연을 당연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왜 사랑을 폐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556



'우리가 서로 운명적으로 정해진 사이라고 생각해요?'

서로 운명적으로 정해진 사람은 없소. 그런 섭리도 없을 뿐더러 서로의 운명이 맺어지도록 해주는 그 누군가도 없으니까. 우연한 욕구와 습관의 엄청난 힘을 넘어서는 필연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소...

난 완벽하게 우연히 이곳에, 당신은 완벽하게 우연히 그곳에 있었소. 그 사이에는 샴페인 잔들... 그래요. 그랬던 거요. 필연은 없었소.  557



열린 시선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게으른 존재다.  559

그레고리우스는 사진을 다시 훑어보고, 또 한 번 보았다. 과거가 그의 시선 아래에서 얼어붙기 시작했다. 기억은 과거를 고르고, 조절하고, 수정하고 속일 것이다. 기억 말고는 다른 근거가 없으므로, 누락과 비틀기와 거짓을 나중에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이 소름 끼쳤다.  565





작가와의 대담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건가?"

대담자 " 실리야 우케나


우케나 : .. 우리 모두 삶의 일부분밖에 경험할 수 없는 거라면, 우리 안에 있는 나머지들 즉 경험하지 못한 나머지 대다수 부분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비에리 : 남아 있는 부분은 의미가 아주 큽니다.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해도 우리 삶에 색깔을 입혀주고 멜로디를 주는 건 바로 그 부분입니다. 그 나머지 부분이 어떻게 구현되는가에 따라 자기 삶이 만족스럽거나 진실하게 흘러가겠지요. 하지만 한번 규정한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을 관통할 수도 없고 그만큼 실망할 일도 드물지요. 뭔가를 막연히 기다리면서도 입 밖에 내지 못할 수도 있고요. 이것들은 간혹 그들의 인생에서 극적인 형태로 돌출됩니다. 그때 우리는 도망치거나 파멸하거나 생의 위기를 겪게 되죠. 예기치 못했던 파국은 지극히 사소한 일로 시작합니다. 사실 오랫동안 축적되었던 게 드러나는 경우지만요.  572-573


우케나 : 그냥 떠나는 것, 누구에게나 가능할까요?

비에리 : 무엇보다 자기 인식, 즉 깨달음이 절대적이죠.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별해주는 인식작용 말입니다. 자기 앞에 놓인 생을 그대로 살아갈 것인지, 그게 정말 원하는 것인지 자문하는 거요. 오직 우리 인간만이 자기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고, 진실한 자아를 탐구하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어떤 동물도 내 삶이 옳은 것인지, 지금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것인지 질문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그럴 가능성이 열려 있는 셈이지요. 

우케나 :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삶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떠나는 건 아니잖아요?

비에리 : 아니죠. 누구든 자기 삶이 총체적으로 잘못 진행된다 느끼고 지금 상황이 가망 없다고 판단하면 떠날 수 있습니다... "이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야"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규범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아정체성을 확립할 수도 없고요. 그러니까 '불가피한 떠남'이란 다시 말해 나의 어떤 부분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고 싶은 목적이 있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새롭게 도달하고 싶어하는 그 상태도 결국은 의무, 가능성, 불가능성의 경계를 지닙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요.  574-575


우케나 : 결단이 어려운 경우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까요? 

비에리 : 정해진 것은 없어요. 경우마다 다르기 때문에 해결책도 개별적이지요. .. 

의무감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허덕이면서 다른 사람의 생에 좋은 영향을 줄 수는 없습니다...  576


우케나 : 자유를 향한 인간의 욕구는 과연 얼마나 강력한가요? 

비에리 : 현실에서 떠난다고 해서 모두 자유로워지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어요. 자유를 향한 진일보도 되지만 잘못된 길일 수도 있으니까요. 자신의 경우가 어느 쪽에 해당하는지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판타지는 그래서 중요해요. 판타지를 통해 일탈을 시도해볼 수 있으니까요. 친구들과 나누는 이야기도 아주 중요하지요. 우리 인간의 불행은 대개 감정과 판타지를 언어로 잘 다루지 못하거나 그것들을 말로 표현할 용기를 갖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우케나 : 그런 상황에 처한 친구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을까요?

비에리 " 가장 좋은 길은, 우리가 상상력이 풍부하고 용감한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인정받고 즐겁고 재미있는 환경은 이루지 못한 판타지가 좀 있어도 훨씬 자유롭습니다. 우리는 내면에서 요구하는 모든 삶을 다 살아낼 수 없습니다. 누군가, 그렇다면 경험하지 못한 나머지는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머지 부분은 당신의 판타지를 놓아두는 공간이다"라고 대답할 도리밖에 없습니다. 감당해야 했던 소망의 무게가 극치에 이른 때가 언제인지, 또 이런 소망을 드러내야 한다면 어떤 사람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지 등을 정확하게 아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과연 이것을 인식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예견해 줄 수 없고,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알아내야만 합니다. 행여 그렇게 된다면 대단한 행운이지요.  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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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 여행하면서 쓰고, 쓰면서 여행한다


나는 실제로 여행하는 동안에는 별로 세밀하게 글자로 기록을 하지 않는다. 대신 작은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때그때 짤막하게 적어 놓을 뿐이다.

가령 '보자기 아줌마!'라고 적어 놓고, 나중에 수첩을 펼쳐 그것을 보면 '아 그렇지, 터키와 이란의 국경 근처의 그 작은 마을에 그런 이색적인 아줌마가 있었지' 하고 쉽게 생각해낼 수 있게 해놓는 것이다.  7


일시나 장소 이름이나 여러 가지 숫자 같은 것은 잊어버리면 글을 쓸 때 현실적으로 곤란하니까 자료로서 가능한 한 꼼꼼히 메모해두는데, 세밀한 기술이나 묘사는 될 수 있는 대로 기록하지 않는다.  8


여행을 하는 행위의 본질이 여행자의 의식이 바뀌게끔 하는 것이라면, 여행을 묘사하는 작업 역시 그런 것을 반영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 본질은 어느 시대에나 변하지 않는다.  11


재미와 신기함을 나열하듯 죽 늘어놓기만 해서는 사람들이 좀처럼 읽어주지 않는다. '그것이 어떻게 일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면서도 동시에 어느 정도 일상에 인접해 있는가'하는 것을 (차례가 거꾸로 되더라도 좋으니까) 복합적으로 밝혀나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12





한 달 정도 멕시코를 여행하는 동안 그곳에서 만난 몇몇 사람들에게서 "당신은 뭘 하러 다시 멕시코에 오셨나요?"하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면 그때마다 나는 가벼운 혼란을 경험하곤 했다. 그 질문에서는 '다른 나라도 많은데 왜 일부러 멕시코를 여행의 목적지로 정했소?' 하는 뉘앙스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까지 몇몇 나라를 여행했지만, 어떤 의미에선 근원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런 질문을 받은 기억은 거의 없다. 그리스라든가 터키, 독일에 가 있어도 "당신은 왜 또 그리스에 (혹은 터키에, 혹은 독일에) 왔소?"하고 묻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대체로,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에 여행을 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로서는 당연한 생각이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나는 여행자인데, 여행자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남자 혹은 그 여자가 가방을 들고 표를 사서 어딘가로 가는 것, 그것이 여행 아닌가. 그리고 만약 여행자가 어딘가에 가야만 한다고 할 때 그가 터키에, 그리스에, 혹은 독일에, 그리고 혹은 멕시코에 가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는가? 

이런 의미에서 나는 "당신은 어째서 멕시코에 왔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멕시코에 와선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가?"라고 반대로, 어디까지나 담담하게 반문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딱히 뭐라 말할 수 있는 특별한 목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멕시코를 방문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가령 일본을 여행하고 있는 외국인을 향해 "어째서 당신은 일본에 오셨나요?"라고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 아마 갖가지 대답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물론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일본에 와야만 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예외겠지만) 궁극적으로 그에 대한 대답은 한 가지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눈으로 직접 그곳을 보고, 자기 코와 입으로 그곳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자기 발로 그 땅 위에 서서, 자기 손으로 그곳에 있는 물체를 만지고 싶어서 왔던 것이다.  49-51


여행 전에 미국인 저널리스트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내가 "이제부터 4주 정도 멕시코를 여행할 생각입니다"하고 말하자 그는 한 가지 충고를 해주었다. 

"멕시코에 가면 사람들이 반드시 당신에게 질문을 할 겁니다. 무슨 이유로 멕시코를 그토록 오래 여행하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질문해오면 이렇게 대답해주면 됩니다. '나는 멕시코 요리에 관한 책을 쓰려고 해. 알겠어? 멕시코 요리 말이야'라고 말입니다. 아마 이것이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 될 겁니다. 그러면 무사통과지요."

"그럴 듯하군요."

"하지만 그렇게 대답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문제지요?"

"한번 멕시코 요리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들은 한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우리 엄마의 요리 솜씨는 이랬단다. 우리 할머니의 자랑거리 요리는 이랬단다... 라는 식으로요."  52-53


혼자 멕시코를 여행해보고 새삼스레 절실히 느낀 것은, 여행이란 근본적으로 피곤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내가 주자 여행을 해보고 나서 체득한 절대적인 진리다. 여행은 피곤한 것이며, 피곤하지 않은 여행은 여행이 아니다. 비참함이 끝없이 이어지고, 예상했던 일이 빗나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87


인간을 피곤하게 만드는 온갖 것들을 자연스럽게 묵묵히 받아들여가는 단계야말로, 여행의 본질일 것이다.

이 말은 너무 극담적인 말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피곤하다느니 하는 것은 구태여 머나먼 멕시코까지 오지 않더라도 어디서든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90


독일에는 독일 나름대로의 피곤이 있고, 인도에는 인도, 뉴저지에는 뉴저지 나름대로의 피곤이 있다. 하지만 멕시코의 피곤은 멕시코에서밖에 얻을 수 없는 종류의 피곤인 것이다.  91


모르는 지역을 여행할 때는 현지인들의 충고를 들어야 하는건 여행자의 철칙이다.  96


치아파스 주는 원래 그전에 살던 원주민이 아직도 강한 지역 공동체를 유지하고 잇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페인의 콘키스타도르(침략자)가 쳐들어온 것은 1523년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원주민들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그 토지를 몰수해서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려 그 토지를 경작했다. 원주민들은 그때까지 살아왔던 마을로부터 좁은 산지 사이의 정착지로 강제 이주당하고, 거기서 병사들의 엄격한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당하고, 무거운 세금을 물어야 했다. 

원주민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혹사당했는지는 그 인구의 급격한 감소만 보더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스페인인이 땅을 정복했을 때 치아파스에 살던 원주민의 수는 약 35만명이었으니 1600년에는 그 수가 9만 5,000명으로 대폭 줄었다. 스페인인이 구대륙에서 옮겨 온 전염병도 인구 감소의 주된 원인 중 하나이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너무나 극심한 인구 감소였다. 원주민들이 얼마나 '소모품'으로 다루어졌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원주민들의 편을 들어주었던 사람들은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보호하고, 스페인 본국에 그들의 궁핍한 처지를 호소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노예 제도의 폐지를 실현시킬 수 있었다.

이때가 1550년이었다.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긴 이름 이기 때문에 라스 카사스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는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명이다. 

노예 제도는 없어졌지만, 원주민들의 실질적인 예속 상태는 별로 바뀐 것이 없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곤 했다.  101-103


멕시코가 안고 있는 두 가지 큰 문제, 즉 인종 간의 뿌리 깊은 대립과 극심한 빈부격차의 문제.  104



하룻밤 묵을 모텔을 선택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간단한 일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어디든 마찬가지니까 어딜 가도 상관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지만, 막상 구체적으로 어느 한 곳을 선택해야 할 때는 망설여진다.

저녁때만 되면 '이 정도면 괜찮겠지'하며 될 대로 되라는 기분으로 모텔을 선택하게 된다. 매일같이 이런 선택을 계속 하다 보면, 어느새 원래 자신의 내부에 있던 '무엇이 좋고 나쁜가'하는 기본적인 가치 기준이 점점 흐려져간다.  248


나는 여행을 하는 동안 줄곧 여행 일지를 쓰고 있었는데(어떤 여행에서나 반드시 매일 여행 일지를 꼼꼼히 적는다. 나는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을 전혀 믿지 않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 자신의 기억을) ...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 특징이라는 것은 배열이 명확하지 않은 사전과 비슷하다. 아무리 뒤적여봐도 시간만 낭비할 뿐 아무런 소득도 없다.  249



내가 일본을 떠나 미국에서 살고 있는 동안 때마침 한신 대지진이 일어났고, 2개월 후엔 지하철 독극물 사건이 일어났다...

니시노미야에서 고베까지의 길을 혼자 이틀에 걸쳐 묵묵히 걸으며..지진의 그림자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지하철 독극물 사건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하고 줄곧 생각했다. 그 두 사건은 별개가 아니다. 한 가지 사건을 푸는 것은 어쩌면 다른 한 가지 사건을 더욱 명쾌하게 푸는 길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물리적이면서 동시에 심적(心的 마음심 과녁적)인 일이다. 아니 심적이라는 것은 곧 물리적인 것이다. 나는 거기에 나름대로 회랑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리고 다시 덧붙인다면 '나는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더 중대한 명제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그런 명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나는 구체적으로 어디에도 도달해 있지 못하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나의 사고가 (혹은 시선이, 혹은 두 다리가) 더듬어온 현실적인 노정을, 이와 같은 불확실한 산문으로 조금씩 그릇에 퍼 담아서 제시하는 것뿐이다. 

결국 나라는 인간은, 두 다리를 움직이고 신체를 움직이는 과정을 일일이 물리적으로 서툴게 지남으로써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걸린다. 비참할 정도로 시간이 걸린다. 때가 늦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288-289


잊힌 사람들의 잃어버린 이야기들.  292




옮긴이의 말 -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여행


자기 내면의 풍경을 조망하려는 노력,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참다운 여행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 하루키 읽기의 색다른 맛.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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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겉돌지 않겠다는 다짐은 눈빛을 살아 있게 한다

무구한 눈빛은 사람을 사로잡는다. 그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살고 싶어서 일순간 발바닥에 힘이 들어가기도 한다. 그 눈빛이 내가 잃은 지 오래된 것이기도 하고 그 눈빛으로 내가 씻겨지는 기분마저 들기도 해서 마치 좋은 바람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것이다.

커피를 맛있게 내리는 사람은 커피콩을 갈고 뜨거운 물로 커피를 내리는 동안 그 옆을 떠나지 않는다. 좋은 눈빛으로 주시하고 집중한다. 그런 사람이 내주는 커피는 이미 마시기도 전에 맛있다는 생각을 머릿속 가득 채워준다. 어떻게 보면 그 좋은 눈빛이 커피에 닿아서일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음식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좋은 눈빛을 가진 사람은 잘되게 되어 있다. 잘하겟다는 그 마음이 눈빛으로 옮겨가면서 마침내 좋을 수밖에 없는 결과에 힘이 실리는 것이다. 눈빛은 그 사람을 가장 절묘하게 드러내주는 설명서이자 안내서 같다...

좋은 눈빛에 흔들렸으면 한다. 그것이 살아가는 것이다. 쉬지 않는 눈빛과 마주쳤으면 한다. 그것이 다행한 일이다.  




다시는 이런 시간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우리가 한 편의 시를, 한 명의 좋아하는 시인을 가슴 안에 키울 때 얼마나 '사람 냄새 나는 사람'일 수 있는지 절감하게 되기를 바랐다.  




사랑이 여행이랑 닮은 것은

사랑이 여행이랑 닮은 것은 꼭 이십대에 첫 단추를 끼워야 한다는 점이다. 이십대에 사랑을 해보지 않으면 골조가 약한 상태에서 집을 짓는 것처럼 불안한 그 이후를 보내게 될 것이며 살면서 안개를 맞닥뜨리는 일이 잦게 된다. 여행도 마찬가지. 이십대에 혼자 여행을 해보지 않는다면 삼십대에는 자주 허물어질 것이다.

그리고 또 닮은 것은, 사랑도 여행도 하고 나면 서투르게나마 내가 누구인지 보인다는 것이다.

한번 빠지게 되면 중독처럼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도 닮았다.

또 사랑을 하거나 여행을 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많은 사진을 찍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소중한 것을 남기고 간직하고 싶어하는 자연스런 욕구가 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듯 사랑의 대상과 사랑의 순간을 찍는 일이나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순간순간들을 담는 일, 그 둘은 차곡차곡 쌓여간다.

행복에 대한 기준이 높아지며 그 욕구 또한 강렬해지는 것, 그 또한 사랑이 여행이랑 닮은 점이다. 그리고 왜 물질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풍요로워져야 하는지를 절실히 느끼게 해준다.

사랑과 여행이 닮은 또하나는 사랑이 끝나고 나면 여행이 끝나고 나면 다음번엔 장말 제대로 잘하고 싶어진다는 것, 그것이다.  




이 말들은 누구의 가슴에서 시작됐을까

단풍이 말이다, 계속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물들어가는 속도가 사람이 걷는 속도하고 똑같단다. 낮밤으로 사람이 걸어 도착하는 속도와 단풍이 남쪽으로 물들어 내려가는 속도가 일치한단다. 어떻고 어떤 계산법으로 헤어리는 수도 있다는데 도대체 이런 말은 누가 낳아가지고 이 가을, 집 바깥으로 나올 때마다 문득문득 나뭇가지들을 올려보게 한단 말인가. 말과 말 사이에 호흡이 배어 있는 것 같은 이 말은, 이 근거는 누구의 가슴에서 시작됐을까.

또하나의 믿을 수 없는 것은 식물의 이름에 관련되어 있다. 백리향이라는 풀의 이름에도 그만한 쉼표와 호흡이 장치되어 있다. 백리향은 낮게 자라는 나무의 일종으로 주로 높은 산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식물의 향은 가을 풀 향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단지 식물의 냄새만이 아닌 동물적인 냄새까지도 포함하고 있는데다 진하고 또 강렬하여 늦은 밤 책상에 앉은 사람, 마음이 허전한 사람, 종일초록 기력이 없는 사람, 사는 것이 지옥 같아서 자꾸 먼 데만 보는 사람을 자극하는 데 직방이다. 백리향도 발끝에 붙은 향기가 백 리를 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세상에나, 다른 데 넣어둔 향기도 아니고 그저 발끝에 붙은 향기라니, 표현 참 아찔하다. 이름에 과감히 비과학을 이어붙인 것은 또 누구일까, 잘 모르긴 해도 감정의 물결이 꾸미고 벌이는 일일 터.




지금으로부터 우리는 더 멀어져야

불을 켜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거나, 불을 켜지 않은 채 가만히 사위가 어슬해지는 바깥에 눈길을 주고 있으면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다. 알지 못할 것이기도 하려니와 알 것만 같은 그 무언가이기도 한 것이 한순간 몰려온다. 그것으로 인해 그 시간이 채워지기도 하며 비워지기도 하는 그 무언가는 맛이 있지 않은, 퉁퉁 부은 눈가 같은, 처방을 허락하지 않는 시간이면서도 어떤 구체적인 덩어리가 아니어서 달리 설명할 길은 없다. 그럼에도 탁 하고 불을 켜면 이내 사라지고 마는 그것의 정체는 느리고 아주 묽은 것임에는 분명하다. 굳이 덧붙이자면 세상의 가치와 속도와는 전혀 다른 화학물질을 닮았다는 정도밖에는 설명할 능력도 없다.




만약 누군가는 사랑하게 되거든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거든.

많이 먹지 말고 속을 조금 비워두라.

잠깐의 창백한 시간을 두라.

혼자 있고 싶었던 때가 있었음을 분명히 기억하라.

어쩌면 그 사람이 누군가를 마음에 둘 수도 있음을,

그리고 둘 가운데 한 사람이

사랑의 이사를 떠나갈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라.

다 말하지 말고 비밀 하나쯤은 남겨 간직하라.

그가 없는 빈집 앞을 서성거려보라.

우리의 만남을 생의 몇 번 안 되는 짧은 면회라고 생각하라.

그 사람으로 채워진 행복을 

다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함으로써 되갚으라.

외로움은 무게지만 사랑은 부피라는 진실 앞에서 실험을 완성하라.

이 사람이 아니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과 함께 맡아지는 

운명의 냄새를 모른 체하지 마라.

함게 마시는 커피와 함께 먹는 케이크가 

이 사람과 함께가 아니라면 이런 맛이 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만날 때마다 선물 상자를 열 듯 그 사람을 만나라.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거든.




명장면 하나쯤 간직하기 위해 여행을 떠납니다

두 사람은 기차에서 만났습니다. 

여자는 몸이 조금 불편했고 남자는 무심했습니다.

모르는 사이니 괜찮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여자와 남자는 

기차에서 조각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 않았고 기차에서 내릴 때

남자가 여자를 조금 도와준 것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헤어졌습니다.

흐르는 시간도 흐르는 풍경도 여행자라서 괜찮았습니다.


여자와 남자는 숙소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우연이었습니다.

다시 만난 것은 처음과는 달랐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눈 입자만큼 각진 인생 이야기를 들었고

남자는 여자가 만든 뜨거운 감자 수프를 나란히 나눠 먻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들게 했던 시간의 냄새도 떠올렸습니다.


주관적인 모든 것들은 사이를 두고 객관화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기류 속에 있어서 같았고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을 고스란히 담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이 또 달랐습니다.

두 사람은 다시 헤어져야 합니다.

여행자이기에 그쯤이야 괜찮을 것이었습니다.


여자가 가방을 끌고 길을 나섭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남자가 2층 창문을 열고 발코니에 나와 서서 손을 흔듭니다.

여자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남자의 손 흔드는 모습을 찍었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잠깐만 기다리라 햇습니다.

이번에는 남자가 자기 카메라를 가져와

오래 손 흔드는 여자의 모습을 찍었습니다.


우산처럼 기억될 것입니다.

멀어지지만 괜찮을 것이었습니다.




매일 기적을 가르쳐주는 사람에게

사람은 그 자체로 기적이에요.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마음 안에 그 한 사람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더 기적이지요.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 또한 황홀합니다. 혼자서는 결코 그 어떤 꽃도 피울 수 없다는 것도 황홀입니다.

우리가 기대는 것은 왜 사람이어야 할까요. 왜 사람을 거쳐서 성장하고 우리는 완성되어야 할까요. 혼자여서 불안한 것은 마땅히 이해되는 불안이지만 옆에 아무도 없어서 불안한 것은 왜 그토록 무서운가요.

나는 세상 모든 관계를 사랑으로 풀려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밑에 깔려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고, 얼굴 붉힐 일도 마음이 뭉치는 일도 없어지거든요. 일도 사람도 사랑한다고 주문을 걸고 사랑을 앞세우면 일도 사람 관계도 나아지는 것을 수도 없이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지금 당신에게 전달하고픈 마음은 그렇고 그런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 인생에 몇 번 올까 말까 한 감정임을 알아주세요.


가능하면 사람 안에서, 사람 틈에서 살려고 합니다. 사람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아서지요. 선뜻 사랑까지는 바라지 않지요. 사랑은 사람보다 훨씬 불오나전하니까요. 아, 불완전한 것으로도 모자라 안전하지 않기까지 하네요, 사랑은.

사람만 보고 살려고 하는데 그것도 어렵지요. 사람 냄새 참 좋은데, 사람 냄새 때문에 사람답게 살고 있는데 결국은 사람 냄새 때문에 골병이 들지요. 결국 우리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으려 하지만 사람이 없는 곳에서의 삶, 그게 어디 가능하기나 한가요. 우리는 사람이 그리워 사람 없는 그곳을 탈출하고 맙니다.

나는 대중적으로 압도하는 풍경 앞에 서서 사진 찍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한 번 본 것으로 강렬했다면 그것은 사진보다 오래 남는 법이지요. 차라리 그게 영원할 수도 있지요. 마찬가지로 좋은 사람과도 함께 사진 찍고 싶지가 않아요.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불안을 포함하고 있고 나중에라도 그 좋은 사람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는 순간 감정이 그전 같지 않으면 어떡하나 무서워서 그래요. 하지만 이 모든 불안과 실망들이 당신 앞에서는 아무 일도 아닌 게  되었어요. 당신으로 잘 살 수 있고 당신으로 잘 일어날 수 있어요.


사람으로 우리는 집을 지어요. 강렬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가져다 뼈대를 짓고, 품이 넓은 사람에 대한 기억을 가져다 지붕을 올리고, 마음이 따뜻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을 데려다 실내를 데웁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인생의 중심을 받칠 만한 사건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것으로 지은 집은 바람에도 약할뿐더러 곧 녹아내리지요. 

그러니 눈을 감지는 말지요. 그건 세상과 친해지지 않겠다는 이야기니까. 세상은 그런 당신에게 아무것도 보여줄 게 없어요.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고 눈을 감은 당신에게. 세상은 사람한테로 나 있는 계단을 내 줄 수 없어요.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시간은 있습니다.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새에게도 나무에게도. 모두에게 아름다운 시간은 있는 법입니다. 아무리 별것 아닌 풍경이고 시간이라 해도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기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사람이 그래요.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고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그것만으로 아름다운 사람.

나에게 그만큼인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물이 닿은 글씨처럼 번져버릴까. 혹여 인연이 아닐까 나는 목이 마르고 안절부절입니다. 부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되어주세요. 이 간절함으로 그래도 된다면 당신을 세상에 고소할 것이고, 나는 세상이 당신을 가둬놓은 아름다운 감옥으로 이사할 겁니다. 

그러니 내가 밑줄 친 사람이 되어주세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감히 당신에게 그어놓은 그 밑줄을 길게길게 이어갈 것입니다.  




이토록 서서히 퍼지는 광채

처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켜켜이 낱장으로 들어내 펼쳐 놓아보면 일대의 사건이라 할 만한 일들은 모두 처음 일어난 일들이었다.

처음 마셨던 것치고는 잘 마셨다는 생각이다. 처음 저지른 것치고는 그나마 잘한 일이었던 것 같다. 그토록 처음이어서 강렬한 것이, 그만큼 강력한 것이 내 생에서 나를 몇 번 더 뒤흔들 것인지를 너무 이른 그때여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여행은 인생에있어 분명한 태도를 가지게하지

여행을 하지 않아도 살아지는 너와, 여행을 다녀야 살아지는 나 같은 사람의 간극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래, 너는 여행의 조각이 아닌 다른 것들을 맞추면서 살아온 것일 거야.  

알고 있겠지만, 여행은 사람을 혼자이게 해. 모든 관계로부터, 모든 끈으로부터 떨어져 분리되는 순간, 마치 아주 미량의 전류가 몸에 흐르는 것처럼 사람을 흥분시키지. 그러면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겠다는 풍성한 상태로 흡수를 기다리는 마른 종이가 돼.

그렇다면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먼 곳에서, 그 낯선 곳에서. 

무작정 쉬러 떠나는 사람도, 지금이 불안해서 떠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결국 사람이 먼길을 떠나는 건 '도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겠다는 작은 의지와 연결되어 있어. 일상에서는 절대로 만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저기 어느 한켠에 있을 거라고 믿거든.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다보니 내가 최근에 본 어떤 아름다운 풍경 하나가 떠올라. 혼자라서 밋밋하기만 한 밤을 겨우 보내고 아침을 맞았는데 숙소 앞에 누군가 여러 개의 눈사람을 만들어놓은 거야. 나도 모르는 사이 밤 동안 눈이 내린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누군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존재가 아침 일찍 일어나 눈을 굴려 눈사람들을 만들었다는 건, '그냥'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사람의 아름다움이 관여한 '기적'인 거지. 과연 그 사람은 혼자 보려고 눈사람을 만들었을까. 아니지. 단지 그냥 차가운 눈을 굴린 게 아니라 기쁨이며 온기 따위를 굴린 거야. 어쩌면  사람다운 것에 더 가까워지는 연습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 사람은 자기 인생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가진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자기 인생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갖는것, 그건 여행이 사람을 자라게 하기 때문이야.

사람은 원래 약하고 여리고 결핍되게 만들어졌어. 그건 왜 그런가 하면 그 상태로부터 뭐든 하라고, 뭐든 느끼라고 신은 인간을 적당히 만들어놓은 거야. 그러니까 스스로 약한 게 싫거나 힘에 부치는 게 싫은 사람들은 자신을 그렇게 방치하면 안 되는 몇몇 순간을 만나는 거지. 그래서 불완전한 자신을 데리고 먼길을 떠나. 그걸 순례라고 치자구.

나에게 순례는, 내가 나를 데리고 간 그 길에서 나에게 말을 걸고, 나와 화해하며, 나에게 잘해주는 일이야. 

높은 산으로 해 지는 풍경을 보러 올라가 넋을 놓고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알 수 없이 차오르는 마음 안쪽의 부드러움을 대면하는 순간, 맨발로 돌길을 걷고 걷다가 문득 푸른 잔디를 만나 발이 고마워하게 되는 순간, 낯선 방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이 방은 어떤 사람들의 어떤 이야기들이 거쳐갔을까 하고 낭만을 상상해보는 순간, 그 자잘한 순간들은 모이고 모여 한 장의 그림이 돼. 그 그림이 중요한 것을 우리가 안절부절하고 아옹다옹하는 일상하고는 전혀 다른 재료로 그려진 것이라는 것. 

이런 작은 느낌들은 한꺼번에 광채로 다가오지. 아무렇게나 살다가 그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사실까지도 알게 해주지. 그래, 그로 인해 사람이든 풍경이든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사랑이 쓰다듬는 세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해주는 것. 그것이 여행인 거야.

걷지 않고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야. 보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 그러니까 여행을 떠나더라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상태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획득할 수 없게 돼. 여행은 신이 대충 만들어놓은 나 같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야 하는 진실이야. 그 진실이 우리 삶을 뒤엉켜 놓고 말지라도, 그래서 그것이 말짱 소용없는 일이라 대접받을지라도, 그것은 그만큼의 진실인 거야.  




그나저나 당신은 무엇을 좋아했습니까

그나저나 당신은 무엇을 좋아했습니까. 무엇으로 얼굴이 붉어졌습니까. 그런데도 그 좋아했던 것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당신은 얼마나 떳떳할 수 있을지요.

이토록 둔탁하고 뻔뻔해지는 것은 그만큼 대체되는 것들이 많아서겠지요. 이토록 꿈을, 방향을 방해하는 것들의 정체는 무엇일는지요. 이기고자 한다면 좋아하는 것을 늘려야 합니다. 좋아하는 것들과 춤춰야 합니다. 좋아하는 것은 포기해야 하는 것과 밀당하지 않습니다.

잘 사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면 작은 수첩 하나를 구해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채워나가면 됩니다. 수첩에는 <작고 허름한 가게 장부>라는 제목을 달아놓고 말이지요.




사랑은 어디로부터 왔을까

점선처럼 만나 실선처럼 하루를 보냈습니다.




잊지 못한다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방식이란 건 자신이 살아온 범위 안에서지. 자신이 고개 끄덕이고 싶은 방향대로일 걸세. 내가 한 사랑이 어떠했노라고 누구에게 말하려는 순간 나 스스로도 쏟아지는 것들을 다 받아내지 못할까봐 말하지 못한 것도 있지 않겠는가.




겨울나라

겨울만 있는 시간을, 겨울만 있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찬 온도에서 뜨겁게 사는 것, 그것은 두 배로 사는 삶일 거라는 환상이 내겐 있다...

나는 '이 사람은 왜 이토록 나를 도와주고 있지?' '이 사람은 그저 내가 무사히 이 골목을 빠져나가기만을 바라는 사람일까?' 하는 의문의 힘으로 핸들을 돌려야 했다. '이런 일에 이렇게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아무리 내가 이 지경이라도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는 마음으로 후진해 나오던 끝에 삼거리를 만났고 그곳에서 나는 사내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남기고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보탬이 되려고 그랬던 건 아닌데

하는 일이 잘되지 않을 때나 되는 일이 없을 때, 할 일이 없을 때도 마찬가지. 그때 시인이 하는 일은 영감을 부르는 일이다. 영감이라는 것이 불러서 오는 것도 아니고 기다려서 제때 맞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시인이 하는 일이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거나 왜 그래야 하는 지 모르지만 마땅히 그래야겠어서' 영감은 이런저런 일들을 지시하고 시킨다. 

영감이라고 해서 늘 굉장한 확신으로 도착하지는 않는다. 명중은 커녕 꽂히지 못할 때도 많으려니와 뭐라도 잡을 듯이 전속력으로 달려오다가 속도를 잃고 그만 숨이 죽어버리는 경우, 또 매혹적으로 다가오더라도 그걸 제대로 받아낼 수 없는 상태인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도 가만히 기다리는 일이 커다란 일이기도 한 것이 예술하는 사람의 일이다. 무슨 일 하세요, 라고 물으면 절박하게 군색하게 영감의 무엇과 직감의 무엇과 육감의 무엇을 기다리는 일을 합니다, 라고 말해야겠는데 제정신으로는 그 대답을 못하겠으니 직업적 고충이 참 말이 아니다.

그래서 오던 길을 문득 멈춰 서서 한참 뒤를 돌아다보기도 하고, 불쑥 먹던 밥을 중단하고 신발을 신기도 하며, 사람을 앞에 두고 앉아 한없이 아무 말 하지 않기도 하고,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사람처럼 탁자에 얼굴을 묻고 앉아 있기도 하는 것이다.

한 예술가가 이상히도 그러고 있는 것은 급히 바꿔놓거나 정돈해야 할 세계가 있어서 잠시 파도를 맞고 있는 중이라 생각해주시길. 그렇다고 '잠시 파도를 맞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있을 수는 없어서.




오늘 비행기는 전면 결항입니다

제주.. <내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 씌어 있는 카페..




사람이 꽃

"카페 하실 거면 어떤 카페 하실 건데요?"

상인이 나에게 물었다. 두번째 만나던 어느 날 밤, 서로 나눈 이야기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음, 사람이 많이 오지 않는 카페요."

삐딱하게 말했지만 상인에게 삐딱한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네, 이해합니다."

"뭘요?"

"자기 공간을 가졌단느 게 중요한 것이지 수입 올리는 건 부차적이란 말씀이잖아요? 책도 읽으시고 음악도 듣고 싶은 거죠? 혼자사서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죠? 사람 마음을?"

"누구나 그런 커페를 갖고 싶어하죠. 누구나요."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말에 슬쩍 귀가 열렸다. 저렇게 일방적인 말을 하면서도 어쩌면 그렇게 예의를 갖출 수 있는지. 상인은 처음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다. 이번엔 내가 물었다.

"사람을 좋아하나봐요."

"조금 관심만 있어요. 왜 제가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셨어요?"

"사람을 좋아하니 사람을 잘 읽는 거겠다 싶어서요."

"사람을 좋아한 적은 있었어요. 한때는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어쩌면 나는 수도사나 스님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너무 좋아하면 안 되니까, 사람은..."

사람이 아니면 무엇을 좋아해야 할까....


아름다웠던 낮과 밤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 사랑하지 ㅇ낳는 사랑이라면 다른 세계로 옮겨가야 한다. 더이상 감정을 위조할 수 없다면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사람으로부터 새로운 충격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사랑을 사려드는 이는 있지만 이별은 값이 엄청나서 감히 살 수도 없다. 그래서 이별은 사랑보다 한 발자국 더 경이에 가깝다...


땅만 바라보고 살았던 살마에게 어느 밤의 별들은 그 사람을 다른 세계로 이끌어준다. 이 세계가 아니면 다른 세계는 절대 존재하지 않을거라고 믿게 하는 사랑. 그 사랑은 몇 번의 세계를 거치고 훈련하면서 먼 우주로 나아갈 수 있다. 작은 물이 모여 바다로 간다는 그 말처럼 사랑은 고통을 치른 만큼만 사랑이 된다.  




내 옆에 있는 사람

이 사실을 알기까지 오래 걸렸습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절대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요.


내가 사람으로 행복한 적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왜 그 사람이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얼만큼의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라는 것을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나 나는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조만간 다시 보자는 말은 했지만 같이 여행을 가자고 말하기엔 이르다...


정신적인 건강도가 비슷한 사람끼리 서로 강한 호감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 있다.(이 말은 지금의 감정과 그 감정에 따라붙는 불안에 대해 잘 설명해 준다.) 내 정신적인 건강도가 만약 B라면 그 사람 또한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닮은 점이 있다는 것은 좋아하기에 충분하지만 그렇다면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 'B'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완벽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불온에 가깝다는 말을 하려는 것인데 쓸쓸히 여기까지 왔다.

사랑은 0 이다. 사랑은 감정으로 숫자를 늘리는 일이지만 결국엔 0 이 된다. 0 하고는 상관없는 듯 우리는 100처럼 사랑하지만 결국엔 시간에 의해 바람에 의해 요지부동의 0 에 도착하고 만다. 아무 감정이 없는, 아주 무심한 진공의 상태.

지금 그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먼 훗날의 0 에 대해 생각한다. 아픈 0 에 대해 생각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허무에 이르고 마는 그 0 에 대고 얼굴을 부빈다...


사랑은 0 의 그림자다. 사랑 자체로는 그림자를 만들 수 없는데다가 사랑이 0 의 뿌리에 단단히 붙어 있으니 그렇다. 우리가 사랑을 하면서도 끝없이 외로운 것은 0의 그림자를 껴안고 있어서다. 무인도에 같이 가자 해놓고 무인도에 그 사람을 남겨두고 오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랑을 하면서 0 의 그림자를 데리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사랑을 조금만 멀리 두려 한다. 너무 멀리는 두지 말고 가까이 있고 싶을 때, 냄새 맡고 싶을 때 달려가려 한다. 느슨한 감정에 숨겨놓은 긴장이 가져다주는 멀리를 당분간 즐기려 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하지만 나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좋아한다 말하지 못한다. 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랑은 0 이라느니 사랑은 0 의 그림자라느니 또 무엇이라느니 이렇게 멀미를 참지 못하고 허튼소리만 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무엇으로도 침묵하지 않는다

사랑을 통해 성장하는 사람, 사랑을 통해 인간적인 완성을 이루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명백히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랑은 사람의 색깔을 더욱 선명하고 강렬하게 만들어 사람의 결을 더욱 사람답게 한다. 사랑은 인간을 퇴보시킨 적이 없다. 사랑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우리는 사랑에게 엄청난 많은 것을 배웠으므로 그만큼의 빚을 지고 산다. 그것도 갚을 수 없는 아주아주 큰 빚을.




지금 어느 계절을 살고 있습니까

'당신은 지금 어떤 계절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지금 어떤 계절을 어떻게 살고 있다고 술술 답하는 상태에 있으면 좋게싿. 적어도 계절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어디를 살고 있는지를 조금 많이 알게 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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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는 뭐든 간에 발길질을 하면서 물건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남자였다.  15


그는 줄줄이 늘어선, 자기 집과 똑같이 생긴 집들을 따라 차를 몰았다. 그들이 처음 여기 왔을 때 이 동네에 있던 집은 겨우 여섯 채였다. 이제는 수백 체가 있다. 한때 여기에서는 숲이 있었지만 이제는 집들뿐이다. 물론 다 융자를 낀 집들, 그게 오늘날 일을 하는 방식이었다. 신용카드로 쇼핑을 하고 전기차를 몰고 다니며 전구 하나 바꾸려고 수리공을 고용했다. 딸각딸각 맞추는 조립식 마루를 깔고 전기 벽난로를 설치한 뒤 그럭저럭 살아간다. 급박한 상화에도 벽에 못 하나 박지 못하는 사회. 이게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45


오베는 자기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들만 이해했다.  57


아마 그녀(소냐)에게 운명이란 '무언가'였을 텐데, 그건 오베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베에게 운명이란 '누군가'였다.  103


"자기 원칙을 걸고 싸울 준비가 된 사람들이 더 이상 세상에 없는 걸까?" 루네가 물었다.

"하나도 없지." 오베가 대답했다.  117


이 세상은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나기도 전에 그 사람이 구식이 되어버리는 곳이었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무언가를 제대로 해낼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 나라 전체가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범속함을 거리낌 없이 찬양해댔다.

아무도 타이어를 갈아 끼우지 못했다. 전등 스위치 하나 설치 못했다. 바닥에 타일도 못 깔았다. 벽에 회반죽도 못 발랐다. 자기 세금 장부 하나 못 챙겼다. 왜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타당성을 잃어버린 형태의 지식들만 넘쳐났다.  119


오베는 첫 번째 불꽃이 자기 집을 기어오르는 광경을 봤다. 그는 잔디를 가로질러 뛰어갔지만 이내 소방관들에게 제지당했다. 별안간 그들이 사방을 둘러쌌다. 

그리고 오베를 집에 못 들어가게 막았다.

하얀 셔츠를 입은, 오베가 이해한 바로는 일종의 소방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그의 앞에 다리를 쩍 벌리고 서서 오베가 자기 집의 불을 끄도록 놔둘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너무 위험해서라고 그랬다. 그런 뒤 안타깝게도 소방관들 역시 관계당구겡서 적법한 허가가 내려올 때까지는 불을 끌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오베의 집이 정확히 시 경계선 위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지휘 센터에서 무전기로 승인을 해주어야만 그들이 진화 작업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었다. 허가가 나고 서류에 도장이 찍혀야 한다고 했다.

"규칙은 규칙이니까요." 오베가 항의하자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오베는 몸부림을 치며 거기서 벗어난 뒤 분노에 차 호스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헛된 일이었다. 소방관들이 이제 다 끝났다는 신호를 보냈다. 불길이 이미 집을 삼켜버렸다. 

오베는 정원에 서서 무력함과 슬픔에 휩싸인 채 집이 불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134-135


사람들은 오베와 오베의 아내가 밤과 낮 같다고 늘 말했다. 오베는 당연하게도 자기가 밤 쪽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게 그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반면 누군가 그런 말을 할 때 오베의 아내는 항상 재미있어했는데, 왜냐하면 그럴 때마다 낄낄 웃으면서 사람들이 오베를 밤이라고 생각하는 건 그가 태양 쪽으로 가기에는 너무 못돼먹어서라고 지절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가 왜 자기를 택했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음악이나 책이나 이상한 단어 같은 추상적인 것들을 사랑했다. 오베는 손에 쥘 수 있는 것들로만 채워진 남자였다. 그는 드라이버와 기름 여과기를 좋아했다. 그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인생을 살아갔다. 그녀는 춤을 췄다.

"모든 어둠을 쫓아버리는 데는 빛줄기 하나면 돼요." 언젠가 그가 어째서 늘 그렇게 명랑하게 살아가려 하느냐고 그녀에게 물었을 때,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읽는 책 중 하나에 프란체스코인가 하는 수도사가 그렇게 써놓은 게 분명했다.

"날 속이면 안 돼요. 여보." 그녀가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커다란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무도 안 볼 때 당신의 내면은 춤을 추고 있어요, 오베. 그리고 저는 그 점 때문에 언제까지고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당신이 그걸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간에."

오베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결코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그는 춤을 춰본 역사가 없었다. 춤이란 너무 무계획적이고 어지러워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직선과 명료한 결정을 좋아했다. 그게 그가 늘 수학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수학에는 정답 아니면 오답만 있었다. 수업 중에 '네 입장을 토론해보자'며 사기를 치려 드는 히피 같은 과목들과는 달랐다. 마치 누가 긴 단어를 더 많이 아는지 점검하는 게 결론을 내리는 방법이기라도 한 것인양. 오베는 옳은 건 옳은 것이고 틀린 건 틀린 것이길 원했다. 

그는 몇몇 사람들이 자기를 인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심술궂은 영감탱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건 그들이 오베에게 사람을 다른 식으로 볼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살다보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될지 결정을 내릴 때가 오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이 기어오르게 놔두는 사람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때가.  152-154


모든 남자들에게는 자기가 어떤 남자가 되고 싶은지를 선택할 때가 온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없다면, 남자에 대해 모르는 것이다.  159


오베는 그녀를 만나기 전 어떻게 살아왔느냐는 질문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물어봤다면, 그는 살아도 산게 아니었다고 대답했으리라.  182


"당신이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는건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오베가 소냐에게 솔직히 고백하고나서 일어나면서.)  186


그녀는 그저 "다 괜찮을 거예요, 여보"라고 속삭이며 그의 팔에 자기 팔을 기댈 뿐이었다. 그녀는 집게손가락으로 그의 손바닥을 부드럽게 눌렀다. 그리고 눈을 감은 뒤 죽었다.

오베는 그녀의 손을 몇 시간 동안 그대로 잡고 있었다...

누군가 묻는다면, 그는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자기는 결코 살아 있던 게 아니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녀가 죽은 뒤에도.  189


'사람은 자기가 뭘 위해 싸우는지 알아야 한다.'  273


오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고 분노에 찬 엘크처럼 턱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하얀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아니타와 루네의 집으로 들어갔다.  364


오베의 몸에서 모든 힘이 다 빠져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아니타의 기진맥진한 얼굴을 봐서였을 것이다. 더 큰 견지에서 보면 이 단순한 전투에서 이겼다느 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깨달음 때문이었을 것이다.스코다가 갇혀 있건 말건 아무 차이도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돌아온다. 그들이 소냐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조항드로가 서류들을 들고. 하얀 셔츠의 남자들이 언제나 이긴다. 오베 같은 남자는 언제나 소냐 같은 사람을 잃는다. 아무도 그에게 그녀를 되돌려주지 못한다. 

결국 부엌 조리대에 기름칠을 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곤 하지도 않는 하루하루가 길게 이어지는 것 외에 아무것도 남는 게 없었다. 오베는 더는 극복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어느때보다 지금 이 순간 확실히 느꼈다. 그는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다. 더 이상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모든 게 다 멈추기만을 바랐다.

파르바네는 계속 그에게 반박하려 했지만 그는 그냥 문을 닫았다. 그녀가 문을 쾅쾅 두드렸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현관의 의자에 주저앉아 자기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심장이 정말로 세게 뛰는 바람에 귀가 폭발할 것 같았다. 마치 거대한 어둠이 숨틍을 걷어차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의 압박이 20분 넘도록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베는 울기 시작했다.  368-369


"사람들은 모두 품위 있는 삶을 원해요. 품위란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무언가를 뜻하는 거고요." 소냐는 그렇게 말했다. 오베와 루네 같은 남자들에게 품위란, 다 큰 사람은 스스로 자기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뜻했다. 따라서 품위라는 건 어른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는 권리라고 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통제한다는 자부심, 올바르게 산다는 자부심, 어떤 길을 택하고 버려야 하는지 아는 것. 나사를 어떻게 돌리고 돌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안다는 자부심. 오베와 루네 같은 남자들은 인간이 말로 떠드는 게 아니라 행동하는 존재였던 세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물론 소냐는 오베가 자기의 이름 없는 분노를 어떻게 끌어안고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370-371


어떤 남자들이 갑자기 어떤 일을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기란 때로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때가 올 때까지는 늘 낙관적이다. 다른 사람과 무언가를 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대화를 나눌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민원을 제기할 시간도.  387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어렵다. 특히나 무척 오랫동안 틀린 채로 살아왔을 때는.  410


사람들은 늘 오베가 '까칠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빌어먹을 까칠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내내 웃으며 돌아다니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게 누군가가 거친 사람으로 취급당해 싸다는 얘긴가? 오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 남자를 이해했던 유일한 사람을 땅에 묻어야 할 때, 그의 내면에 있던 무언가는 산산조각이 난다. 그런 부상은 치료할 수 없었다.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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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독창성은 새로운 방법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에서 나온다. - 이디스 워턴



추천사

침체의 늪에 빠져 고전 중인 작가든, 아직 시작하지 않은 작가든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과 소통할 수 있는 '비법'이다.  9


그녀는 줄곧 작가의 생각과 마음에 초점을 맞춘다.  12


그녀는 진정한 독창성은 오로지 자기 안에서만 나올 수 있다고 거듭 역설한다.  13

                                  1980년 10월 25일 존 가드너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은 자신의 양식과 지성을 믿는 사람들이 문장과 단락의 구조를 익히도록 하고, 글을 쓰기로 결심한 순간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써야 하는 의무를 독자에게 진다는 점을 깨닫도록 하고, (영어)산문의 거장들을 공부할 기회를 갖도록 하고, 목표 달성을 위해 부단히 매진해 나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기준을 스스로 세우도록 하는 데 있다.  28


글을 잘 쓴다는 것과 작가가 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39


작가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자발성과 아이처럼 예민한 감수성과 화가 못지않게 '순수한 시각'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참신하고 신속하게 반응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환경도 마치 처음 대하는 환경처럼 대한다...

작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2천년 전에 말한 '사물의 연관관계'에 늘 주목한다. 이런 신선한 시각이야말로 작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재능이다.  41


작가가 성공을 거두려면 위에서 말한 특징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가 또 있다. 다름 아니라 어른스러움과 분별력과 절제와 공평함이다.  42


침묵을 현명하게 활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57


오래된 습관일수록 끈질기고 질투가 심하다. 미리 선전포고를 할 경우 오래된 습관은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교묘한 설득력을 앞세워 맞서려 든다. 그런가 하면 너무 철저하게 공격할 경우에는 복수를 해온다. 하루나 이틀쯤 노력이 기가 막히게 먹히고 나서 우리는 새로운 방법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온갖 이유나, 이런저런 오래된 습관과 보조를 맞추면서 변화를 꾀해야 하거나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온갖 이유를 들이댄다. 그러다 결국에는 새로운 충고가 아무 소용이 엇어지게 도니다. 대신 시도는 좋았지만 실패했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그 이유는 계획이 자신에게 맞는지 아닌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기력이고 목적 의식이고 모두 써버리기 때문이다.  70


글을 쓰려면 길들지 않는 근육을 써야 할 뿐만 아니라 고독과 칩거를 감수해야 한다.  78


무의식의 비옥한 자양분이 주는 혜택을 온전히 누리려면 무의식이 기선을 잡았을 때 힘들이지 않고 쉽게 글을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방법을 터득하려면 평소보다 30분이나 한 시간 일찍 일어나는 것이 가장 좋다. 일어나자마자 말을 하거나, 조간 신문을 읽거나, 전날 밤 치워두었던 책을 집어들지 말고 글을 쓰기 시작하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 내용이나 쓰라. 기억할 수 있다면 간밤에 꾼 꿈도 좋고, 전날 했던 활동도 좋고, (실제든 상상의 산물이든) 대화도 좋고, 양심의 성찰도 좋다. 어떤 종류든 상관없으니 이른 아침의 공상을 비판의 시각을 들이대지 않고 빨리 쓰는 것이 관건이다. 글의 우수성이나 궁극적인 가치는 아직 중요하지 않다. 나중에는 이러한 내용 속에서 기대 이상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겠지만 지금 단계에서 일차 목적은 불후의 명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헛소리만 아니면 되는 글을 쓰는 데 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행동을 기록하면서 수면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의 중간 지대에서 쉽게 글을 쓸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 문단이 일정한 틀 없이 중구난방으로 흐르든, 생각이 모호하거나 터무니없든 훈련의 성패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비평 능력일랑 모두 잊어버리라. 일부러 보여주지 않는 이상 무엇을 쓰든 그 글을 볼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에 주목하라. 각자의 편리에 따라 침대에 앉아 공책에 글을 써도 상관없다. 이 기간에 타자기 사용법을 배울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비는 시간만큼, 또는 충분히 썼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가능한 한 오래 쓰는 것이 좋다.  

다음날 아침 전날 써놓은 글을 다시 읽지 말고 시작하라. 글을 다 쓸 때까지는 읽기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훈련의 효과는 나중에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지금은 그저 훈련에만 충실하라.  79-81


마음을 정했으면 하고 싶은 일이 있든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든 상관없이 그 시간은 반드시 비워두어야 한다.  85


4시에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으면 4시에 꼭 글을 써야 한다! 변명은 있을 수 없다. 4시에 대화에 깊이 빠져 있다면 양해를 구하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한다. 자신에게 한 약속도 물릴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아침에 글을 쓸 때처럼 소재는 아무것이든 상관없다. 말이 되든 되지 않든 오행시든 무운시든 무조건 쓰라.  86


이른 아침에 글을 쓰는 훈련과 아무 때고 글을 쓰는 훈련은 글을 자유자재로 거침없이 쓸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88


모방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취향과 장점을 최대한 빨리 찾아내는 것이다. 습관을 들이는 이 기간에 써놓은 글에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실험 재료가 들어 있다. 자리에 앉아 맨 처음 떠오르는 것들을 쓸 때 대체로 무엇을 쓰는가? 이제 자신이 쓴 글을 마치 낯선 사람의 작품을 읽듯 읽어나가면서 이 낯선 작가의 취향과 장점은 무엇인지 살펴보라.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선입견은 모두 한쪽으로 치워두라. 지금까지 붙들고 있었던 야망이나 희망이나 두려움이 있다면 모두 잊고 이 낯선 작가가 조언을 청해온다면 그에게 가장 잘 맞는 분야는 무엇이라고 말해줄지 생각해보라.

그 동안 써둔 그렝서 발견되는 반복, 거듭 나타나는 생각, 자주 나오는 산문 형식이 실마리를 제시해줄 것이다. 그런 요소들은 그대의 타고난 재능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줄 것이다. 그대의 장점을 더욱 갈고 닦는 것은 좋지만 자신은 오로지 한 가지 유형의 글만 쓸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유형의 글은 그만큼 잘 쓰지 못랄 것이라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하지만 이 검토를 통해, 가장 풍성하고 가장 쉽게 흘러나오는 그대의 재능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93-94


의심스러운 점은 뭐든 하나도 빼놓지 말고 따져보아야 한다. 짧은 평서문을 너무 많이 사용하거나 감탄 부호를 남발하지는 않는가? 표현이 미사여구로 흐르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지나치게 간결하지는 않은가? 말을 너무 아껴서 감동적인 장면을 너무 빨리 지나가는 바람에 그대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독자가 놓칠 위험은 없는가? 신빙성이 떨어질 정도로 과장에 치우치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말 수가 적은 작가는 앨저넌 찰스 스윈번(1837~1909, 영국의 시인겸 평론가)이나 토머스 칼라일(1975~1881, 영국의 사상가 겸 작가)처럼 근엄하기보다 화려한 말솜씨를 자랑하는 작가의 작품을 읽는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감정에 지나치게 호소하는 작가에게는 그 반대의 충고가 적용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18세기 영국의 작가들이나 윌리엄 딘 하월스(1837~1920, 미국의 소설가 겸 평론가), 윌라 캐더(1873~1947, 미국 소설가), 아그네스 레플리어(1855~1950, 미국 수필가) 같은 작가를 읽어보라. 단조로운 문체 때문에 고민이라면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1874~1936, 영국의 소설가 겸 평론가)의 소설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제안에는 거의 끝이 없지만 자신의 문제를 정확히 진단해 자신에게 가장 좋은 약을 처방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처방전을 찾았다면 겸허하게 읽으면서 자신과는 정반대의 성향을 보이는 작가들의 장점을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문체를 단련하는 동안에는 스스로에게 사정을 봐주어선 안 된다. 관심이 끌리는 책은 철저히 멀리해야 한다.  105-106


다음으로 전날 저녁의 상황이 아침의 글쓰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봐야 한다. 활동을 많이 한 날 다음에 좋은 글이 나오는가, 아니면 조용하게 지낸 날 다음에 좋은 글이 나오는가? 글이 쉽게 써졌다면 일찍 잠자리에 들고 난 다음인가, 아니면 짧게 자고 난 다음인가? 친구들을 만나는 것과 다음날 아침의 글쓰기가 활기를 띠거나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 사이에 어떤 연관관계가 있지는 않은가? 극장이나 미술 전시회, 무용 발표회에 갔다오고 나서 그 이튿날 아침의 글쓰기는 어땠는가? 이런 점에 유의하면서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도록 노력하라  106


다음으로 일상의 규칙에 주목해야 한다. 대부분의 작가는 기분 전환을 위해 가끔 쉬면서 단순하고도 건강한 일상을 꾸려나갈 때 크게 발전한다. 여기서 다루는 내용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어떤 음식이 자신에게 맞고 어떤 음식을 멀리해야 할지와 같은 사안들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생 글을 쓰며 살 생각이라면 자극제에 계속 기대지 않고도 일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경우에 따라선 적절하게 사용해도 되는 자극제가 있는 반면, 완전히 끊어야 하는 자극제도 있다. 일을 몰아서 하는 습관은 좋지 않다. 꾸준하고 착실하게 흐름을 타면서 생산성을 고르게 유지해야 한다. 그럴 경우 가끔 평균 수준을 훨씬 웃도는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하지만 생산성이 평균 이하로 떨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두세 달에 한 번, 아니면 적어도 일 년에 두 번은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평가해야 한다. 자신의 글쓰기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 풍작을 거두려면 이러한 평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자신을 평가할 때는 기질적인 면이 일상의 행동에 너무 많이 관여하게 내버려두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야 한다. 냉정하고 공정하게 처신해야 하는 상황에서 감정에 치우쳐 제멋대로 굴지는 않는가? 욱하는 기질이나 질투심, 쉽게 낙담하는 성격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지는 않은가? 차분히 생각해보면 문제점이 뚜렷이 보이기 마련이다. 질투, 낙심, 분노는 글이 흘러나오는 샘을 오염시킬 뿐이다. 좋은 글을 쓰려면 한시라도 빨리 오염 요인을 찾아 흔적조차 남지 않게 완전히 없애야 한다.

자신을 평가할 때는 철저해야 한다. 자신을 주도면밀하게 분석하는 작업은 그저 '잘'의 수준이 아니라 '아주 잘' 이루어져야 한다. 스스로 엄격하면서 공정해야 한다. 터무니없는 비난은 근거 없는 자화자찬만큼이나 나쁘다. 자신이 잘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 점을 인정하고 더 잘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격려해야 한다. 잘하는 일을 기준 삼아 다른 데서도 그와 똑같은 수준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107-108


작가가 되는 데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책을 단순히 오락거리가 아니라 본보기로 바라보는 경향이 어느 정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독서를 통해 효과를 얻으려면 자신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데 어떤 부분이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책을 읽어야 한다.  112


작가 입장에서 책을 읽는 법을 터득하려면 처음에는 뭐든 두 번 읽는 길밖에 없다...

다 읽었으면 당분간 책을 한쪽으로 치워두고 연필과 메모장을 꺼내라.  

우선 방금 읽은 책의 개요를 짤막하게 작성하라. 마음에 들었는지 아닌지, 믿음이 갔는지 아닌지, 마음에 들었던 부분과 그렇지 않았던 부분은 무엇인지에 비추어 대강의 판단을 내리라. (나중에는 도덕적 판단도 내릴 수 있겠지만 지금의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진술 내용을 계속 늘려나가라. 책이 마음에 들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이 처음에는 모호하더라도 기죽지 말라. 책을 다시 읽어보면 그러한 반응의 원인을 찾게 될 것이다. 책 내용 가운데 더러는 훌륭해 보였던 반면 나머지는 설득력이 부족해 보였다면 작가가 언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되짚어보라. 등장인물들이 한결같은 솜씨로 그려졌는가, 형편없이 그려졌는가, 아니면 어쩌다 가끔만 일관성 있게 그려졌는가? 이렇게 느낀 이유를 알겠는가?

특별히 마음에 남는 장면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그 이유가 장면 처리가 뛰어났기 때문인가, 아니면 어이없게도 좋은 기회를 놓쳤기 때문인가?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관심을 끌었던 구절이 있는가? 대화가 자연스러운가, 아니면 틀에 박혀 있는가? 만약 후자라면 그런 딱딱한 형식이 작가의 의도 때문인가, 아니면 작가의 능력 부족 때문인가?  113-114


처음부터 다시 천천히 꼼꼼하게 읽어나가면서 분명해 보이는 대답을 찾는 대로 메모장에 기록하라. 특별히 잘 처리된 구절을 발견하거나, 작가는 솜씨 있게 다루고 있지만 자신이 다루기에는 어려울 것 같은 소재가 눈에 띄면 표시해두라. 이렇게 해두면 나중에 다시 읽을 때 그 부분을 좀더 심도 있게 분석해 본보기로 활용할 수 있다.  115


비판 어린 시선으로 책을 읽을 때 얻을 수 있는 자극과 유익함은 끝이 없다. 온 신경을 집중하고 읽어야 한다. 작가가 강조하고자 하는 대목에서 책의 호흡이 빨라지는지 느려지는지에 주목하라. 작가가 버릇처럼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 훈련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아니면 너무나 명백히 그 작가만의 것이라 구조를 배워 봐야 헛수고에 그칠지 결정해야 한다. 장면이 바뀔 경우 등장인물이나 시간의 흐름은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관심의 중심이 어느 한 인물에 이어 다른 인물에게 옮겨 갈 때마다 어휘와 강조점도 달라지는가? 작가가 모든 일에 개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아니면 특정 등장인물의 의식을 따라가는 가운데 그 인물이 보기에 분명한 것만 말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가? 아니면 처음에는 이 사람, 다음에는 저 사람,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글을 쓰는가? 대비는 어떤 식으로 하고 있는가?  116


이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다 보면 배울만한 점들이 눈에 띌 것이다. 다른 작가의 작품을 활용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두 번은 읽어야 한다.  117


기술적 장점은 얼마든지 모방할 수 있으며, 돌아오는 이득도 아주 크다. 단락이 길든 짧든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그 어떤 기술보다 훨씬 더 나아 보이는 기술이 눈에 띈다면 자리에 앉아 그 기술을 배우라. 

기술을 공부할 때는 본보기로 삼은 책이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공부할 때보다 훨씬 더 주의를 기울여아 한다. 단어를 하나하나 찢어발기듯 그 단락을 철저히 분석하라.  121


당연하게만 여기지 않는다면 약국 진열창도, 우리를 일터로 데려다주는 버스도, 북적이는 지하철도 도원경처럼 신기해 보일 수 있다.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거리를 지날 때 15분만 시간을 내서 눈에 띄는 사물 하나하나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듯 자신에게 말해보라. 버스는 겉이 무슨 색깔인가?(단지 녹색이나 빨간색이 아니라 샐비어 색이나 올리브 그린, 자주색이나 주홍색처럼 구체적으로.) 입구는 어디인가? 차장과 운전사가 따로 있는가, 아니면 한 사람이 차장 겸 운전사 역할을 모두 하고 있는가? 버스 내부, 예를 들어 벽, 바닥, 좌석, 광고 포스터는 무슨 색깔인가? 좌석은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가? 맞은편에 누가 앉아 있는가? 옆사람들은 어떤 옷차림을 하고 있는가, 서 있는가, 앉아 있는가, 독서를 하고 있는가, 아니면 졸고 있는가? 어떤 소리가 들리는가, 어떤 냄새가 나는가, 손잡이 가죽이나 스쳐 지나가는 외투 자락의 느낌은 어떤가? 잠시후 집중력이 떨어지겠지만 장면이 바뀔 때마다 집중력을 다시 회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음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을 관찰하라. 어디서 탔으며, 행선지는 어디일 것 같은가? 얼굴, 태도, 옷차림에서 그 사람에 대해 무엇을 짐작할 수 있는가? 고향은 어디일 것 같은가?(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집 <월요일 또는 화요일(Monday or Tuesday)>에 수록된 단편 [쓰지 않은 소설(Unwritten Novel)] 을 참조하라.)  132-133


정말로 글을 쓰고 싶다면 이런 간단하고 사소한 훈련이 크게 도움이 된다...

물론 알맞은 표현이 쉽게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새로운 느낌에 딱 어울리는 단어를 찾는 작업을 포기해선 안 된다. 올바른 표현을 찾으려 끈질기게 노력하다 보면 정말 필요할 때 바로 이거다 싶은 문구가 저절로 생각날 것이다.  134-135


이런 식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곧 아침에 쓰는 글이 전보다 더 원숙하고 수준이 높아졌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매일 새로운 소재를 쉽게 발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숨어 있는 기억을 불러낼 수 있다. 새로운 사실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신의 본성 깊숙이 내려가 감각과 경험, 지나간 기쁨과 슬픔, 자신의 기억 깊은 곳에 자리하는 옛 시절과 완전히 잊고 지냈던 일화를 남김없이 끄집어 낸다.  135


그 동안의 경험을 들어 오늘의 신념이 내일의 신념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확신하며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지길 망설이는 초보 작가가 너무나 흔하다. 이런 초보 작가는 일종의 주문 같은 것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는 궁극적인 지혜가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주길 기다리다가 그 시기가 너무 늦어지면 자신은 글을 쓰긴 글렀나 보다고 지레 판단해버린다. 이러한 기다림이 (가끔 그렇듯이) 단지 글쓰기를 막연히 미루는 신경과민성 핑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어려움으로 작용할 경우 그는 전력투구하지 않고 건성으로 반쯤 이야기를 쓰다가 거기서 그치고 만다.

이런 작가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혼자만 그런 일을 겪는게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143



- 신을 믿는가? 믿는다면 어떤 측면에서?(영국 소설가 토머스 하디(1840~1928)의 '불멸의 수호신'(<테스>중에서)이라는 측면에서, 아니면 H. G. 웰스의 '현현하는 신'이라는 측면에서?)

- 자유 의지를 믿는가, 아니면 결정론자인가?(예술가가 결정론자라는 생각은 너무도 모순이라 상상하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 남자를 좋아하는가? 아니면 여자? 아니면 어린아이?

-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 낭만적인 사랑은 미망이자 올가미라고 생각하는가?

- "백 년이 지나도 모두 똑같을 것이다."라는 말을 심오한 진리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얄팍한 속임수라고 생각하는가?

-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무엇인가? 또 가장 큰 불행은? 


이런 굵직한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목한다면 중요한 사안을 다루는 소설을 쓸 준비가 아직 안 된 상태다.  150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여가 활동을 찾으려면 직접 실험해보는 길밖에 없다. 하지만 끝내야 할 작품이 있을 때는 책이나 연극이나 영화는 되도록 피하는 게 좋다. 책이나 연극의 내용이 좋을수록 정신이 흐트러질 뿐만 아니라 실제로 기분이 변해 생각이 바뀐 상태에서 다시 글을 쓰게 된다.  155


열정이 넘치는 작가만이 '기분 전환'이라는 매혹적인 이름으로 부를 자격이 있다. 그리고 성공한 작가일수록 작가로서 스스로에 대해 말할 때 좋은 책을 들고 구석을 찾는다는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성공한 작가들은 책 읽기를 좋아한다.(사실 모든 작가는 먹는 것보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아무리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은 말 없는 활동이라는 사실을 이미 깨달았다.  156-157


다른 사람의 문체에 얼마나 쉽게 빠질 수 있는지 예를 통해 알아보자. 어조와 문체에서 강한 개성을 자랑하는 작가를 한 명 고르라...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라면 누구든 상관없다. 피로가 약간 느껴지면서 처음의 관심이 시들해질 때까지 그 작가의 작품을 읽어라. 이제 책을 한쪽으로 치워놓고 아무 주제든 글을 몇 쪽 쓰라. 그런 다음 그 글과 아침에 쓴 글을 비교해보라. 필시 그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마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이 고른 작가의 방향대로 강조저모가 어조를 바꾸었을 것이다. 패러디의 의도가 전혀 없었고, 심지어는 되도록 독자적으로 글을 쓰려고 했는데도 너무나 비슷해서 어처구니가 없을 때도 더러 있다.  161-162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문제, 자신만의 주제, 자신만의 어조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162


천재(여기서 '천재'는 '비범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는 의미-옮긴이)의 뿌리는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 안에 있다.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천재를 갈고 닦는다고 해서 위대한 예술 작품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재능은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며, 의식의 영역 바깥에 기원을 두고 있다.  174


무의식을 흐릿학 우중충하고 형체도 없는 개념들이 어지럽게 떠다니는 지옥의 변방쯤으로 여겨선 곤란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무의식은 형식에 민감하다. 뮤의식은 우리의 이성보다 유형, 양상, 목적을 훨씬 더 빨리 포착해낸다. 하지만 무의식의 활동이 너무 왕성할 경우에는 경로에서 이탈할 수도 있으므로 늘 조심해야 한다. 무의식이 제시하는 자료가 감당 못할 정도로 넘쳐나지 않도록 늘 올바른 방향을 잡아주고 통제해야 한다. 하지만 글을 잘 쓰려면 당면한 지식의 문지방 뒤에 자리하는 우리 본성의 거대하고 강력한 이 부분과 타협해야 한다.  176


계획하고 있는 작품의 형식과 주제를 결정하는 것은 무의식이며, 무의식에 의지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면 훨씬 더 훌륭하고 확실한 결실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러려면 무의식의 활동에 시도 때도 없이 간섭해선 안 된다.  177


진정한 천재는 자신이 어떻게 일하는지 미처 깨닫지 못한채로 평생을 살아간다.  177


재능이라는 자원은 그 양이 아무리 미미하다 하더라도 평생을 가도 다 쓸 수 없을 만큼 충만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고난 재능을 더 늘리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시대와 인종을 초월해 위대한 사람들은, 마치 처음부터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그야말로 순수한 재능을 타고나기라도 한 듯 너무나 위대해서 편의상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삶과 예술 작업에서 나머지 인간들보다 그러한 기능을 좀더 자유롭게 발휘했을 뿐이다.  181-182


어떤 면에서 작가는 요행을 통해서든 오랜 모색을 통해서든 가벼운 상태의 최면에 스스로 빠져든다. 최면 상태에서도 관심은 여전히 유지되지만 그저 유지될 뿐이다. 굳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이때 작가는 마음의 수면 저 뒤편에 너무 깊이 가라앉아 있어(스스로에 대한 성찰이 마침내 자신을 일깨우지 않는 한) 뭔가 활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이야기가 하나의 통합된 작업 속으로 녹아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185


집중해서 생각하려면 몸을 움직여선 안 된다. 사람들은 생각을 집중할 때 기껏해야 가볍고 기계적인 일만 한다. 행동에 들어가게 하려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야 한다.

주기성을 띠면서 단조롭고 말 없는 활동이 바로 거기에 해당한다...

몸을 가만히 놔두듯 마음을 가만히 놔두는 법을 익히라.  188-189


이런 방법을 사용해보라. 즉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회색 고무공처럼 단순한 물체를 선택하라.(밝은 색깔의 물체나 눈에 확 띄는 물체는 선택하지 않는 것이 좋다.) 공을 잡고 가만히 들여다보라. 공에 관심을 집중하고 마음이 어지럽게 돌아다닐 때마다 마음을 다독여 차분히 지정시키라. 한동안 그 물체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라. 눈을 감고 계속 공만 생각하라. 그러고 나서는 그 단순한 생각마저 마음에서 빠져나가게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마음이 가는 대로 그저 지켜보면서 거침없이 질주하도록 내러려두라. 머잖아 마음이 점차 차분해질 것이다. 서두르지 말라. 완전히 차분해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아마 충분히 고요한 상태에 이를 것이다.  191




옮긴이의 말

도러시아 브랜디의 <작가 수업>이 처음 출간된 연도는 1934년이다. 그 후 한때 절판됐다가 1981년에 다시 빛을 보게 됐다.  206


브랜디는 그 비결을 터득하려면 먼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참 모습과 마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글쓰기 기교를 둘러싼 잡다한 방법론이나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물론 스스로를 판단하려는 경향도 한동안 멀찍이 치워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안팎을 끊임없이 들락거리며 이런저런 정보를 실어나르는 의식에 연연하지 말고 가공하기전의 다이아몬드 원석처럼 자신의 참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무의식과 친해져야 한다.  

그렇게 자신의 무의식과 친해지면서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속속들이 파악했을 때 비로소 생산성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의지대로 글을 쓸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브랜디도 이 점을 인정한다.  207-208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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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서평, 책을 가장 잘 기억하는 방법

생각이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상태입니다. 글이나 말로 구체화하기 전에는 그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5


서평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읽은 책을 기억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책을 좀 더 깊이 읽게 되고, 나의 생각과 더 가까이 마주하게 됩니다. 이 과정이 개인적인 독후감에 머무르지 않고 독자를 생각하는 서평으로 나아갈 때, 또 하나의 이유가 덧붙여집니다. 바로 소통입니다.  6-7




①어떤 책을 ②어떻게 읽었고, ③왜 처천하는지, 이 세 곡짓점을 정리했다면 서평으로서의 조건을 갖춘 셈입니다.  14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듯 책을 읽는 겁니다. 일종의 훑어보기랄까요. 당연히 읽고 나면 남는 게 적겠지요.  20


한나 아렌트가 말한 '무사유의 죄'  21


주입식 교육, 인터넷에서의 편의적 읽기에 길들여진 성인에게 주체적 공부와 글쓰기는 거쳐야 할 숙제입니다.  22


메이지 대학교 사이토 다카시 교수는 <1분 감각>에서

'세상에는 무리해서 끝가지 책을 읽고도 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출력을 전제로 입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방식이라면 아무리 입력해도 좀처럼 몸에 익지 않을 것이다. 출력을 하려면 입력과 동시에 가공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들을 때도 그것을 제삼자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것을 전제로 듣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키워드와 핵심에 집중해서 들을 수 있다. 입력할 때 어떻게 출력할지도 의식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5


과식하듯 이것저것 들춰보고 다 읽은 듯한 착각에 빠져봤자 3일을 못 갑니다.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화하기 위해서도 토존과 서평은 필수 입니다. 생각을 진지하게 정리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37


<기다림>의 작가 하진은 명문장가로 유명합니다. 중국인임에도 완벽한 영문소설을 쓰는 작가죠. 퓰리처상을 받은 그의 문장은 담백하며 유려합니다. 어느날, 우연히 하진의 작품을 담당했던 편집자를 만났습니다. 그의 팬이라는 제게 편집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문장을 100번쯤 고친다고 합니다." 순간, 아찔했습니다. 하진의 치열한 태도에 반하고 만 것입니다. 타고난 재능이 아닌 꾸준한 퇴고로 완성한 문장이니까요. 마치 수행자처럼 자기 문장을 고치는 작가의 얼굴을 떠올리니 뭉클했습니다.  43






책은 최소 두 번은 정성 들여 읽어야 합니다. 1차 독서 후엔 밑줄과 표시를 따로 빼서 정리합니다. 필사나 발췌 연습이 되겠지요. 

1차 독서 후에는 '조사'단계로 들어갑니다. 무엇을 조사할까요? 그렇죠. 이 작품의 배경, 작가 연구, 작품 해석, 언론이나 일반 독자의 서평을 살펴보는 과정입니다. 물론, 조사 결과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해석해보려 했는데 관련 자료와 리뷰에 휘둘린다면 조사 결과를 생략해도 됩니다. 하지만, 다른 리뷰를 보고 오히려 보는 관점이 넓어졌다면 조사 과정을 거쳐야겠지요. 다른 글을 읽으면서도 나의 감각을 깨워야 합니다. 내 생각을 단단히 곧추세우는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다시 책을 펼 차례입니다. 다시 편 책의 상태는 어떨까요? 1차 독서할 때 밑줄 긋거나 표시하거나 메모한 부분이 있을 수 있겠지요. 자칫 그 부분만 대충 읽게 될 수 있어요. 이땐, 표시한 부분을 다시 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책의 핵심적인 내용인지 집필 의도가 잘 반영된 부분인지, 아니면 내 생각을 잘 표현한 구절인지 객관적으로 봐야 합니다. 또한 표시하지 않은 부분을 더 깊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 밑줄을 치거나 표시를 하지 않은 경우는 공감을 하지 못했거나 어려워서 넘어가게 되니까요. 내가 알지 못하거나 불편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꼼꼼히 2차 독서를 하면서, 빠른 독자는 서평의 얼개를 짜기도 합니다. 그게 어려운 분들은 2차 독서에서 발견한 이 책의 주요 키워드 혹은 내 서평에 담고자 하는 주제 키워드를 찾으시면 됩니다.  46-47



독일에서 아이를 키우며 그곳의 교육 현장을 몸소 경험한 박성숙의 이야기도 귀 기울여 들을 만합니다. <꼴찌도 행복한 교실>을 보면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작문 수업이 이루어지고, 단순한 이야기 짓기에서 시작해 학년이 올라갈수록 작품 분석과 비평까지 수업에서 배운다고 합니다. 교사들은 꼼꼼하게 과제를 첨삭하고 평을 달아주며 채점을 하고, 아이들은 체계적으로 글쓰기를 연습하고 훈련한 후 대학 시험에 임한다고 합니다.  56


독해 능력은 모든 지적 활동의 출발점입니다.  59


일본의 독서가 다치바나 다카시는 객관적인 정보를 주는 것이 서평의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한국의 대표적 인터넷 서평꾼 로쟈 이현우도 책의 핵심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객관적인 서평 쓰기를 지향합니다. 이밖에도 신문 매체에 실리는 저널리즘적 서평도 대체로 객관성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북섹션에서 볼 수 있는 서평은 다양한 형태를 띱니다. 한 문단 내용 요약 소개부터 필자의 생각이나 관점이 드러나는 칼럼형 서평까지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62


서평의 3분의 2는 객관적 정보, 나머지 3분의 1은 주관적 평가가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우선 서평에서는 책에 대한 정보를 스토리텔링하듯 요약 정리하면 되고, 그 다음에 책에 대한 평가를 덧붙이면 됩니다.  

쉽고 명쾌하게 쓰면 됩니다.  63


글쓰기에도 경험과 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줄리아 카메론은 <아티스트 웨이>에서 아침마다 일어나 손이 움직이는 대로 글을 써보라고 권합니다. '모닝 페이지'라고 부르는 이 방법은 글쓰기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자신 속에 잠재된 창의력을 일깨우기도 하지만 글 자체를 더 나아지게 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77


독후 활동이 부재한 상황에서 읽은 책은 자신의 사고와 성찰의 영양분이 되지 못할 채 지식의 창고에 무질서하게 쌓여가기만 한 것입니다.  83


책을 읽는 목적은 다양합니다. 실용적인 목적으로 정보를 취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책을 읽는 목적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사고를 확장시키고,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이같은 목적은 결국 책을 읽고 사유함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유의 순간을 붙잡는 것이 바로 독후 활동입니다.  87


책이나 작가, 독자, 주인공을 데려와 '그들의 언어'로 말을 건네는 것이 바로 서평입니다.  93




서평을 쓰는 이유는 자기 관점을 정리하기 위해서입니다. 보통 서평과 관점의 관계는 세 가지로 추릴 수 있습니다. 첫째, 뚜렷한 관점으로 서평을 쓰는 경우. 둘째, 서평을 쓰면서 관점이 정리되는 경우. 셋째, 모호한 관점으로 마무리하는 경우 등입니다. 셋 다 나름의 소득이 있습니다.  99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저자 최진석 교수는 '인문적 통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도대체 인문적 통찰을 하는 관건은 뭐냐?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는 일'입니다. 이념이나 가치관이나 신념을 뚫고 이 세계가 자기 스스로 우뚝 서는 일, 이것이 바로 인문적 통찰을 얻는 중요한 기반입니다."  102



'나의 서평은 신변잡기적인 내용은 거의 없으며, 책의 내용에 관한 정보만을 채워 넣는다. 쓸데없는 것은 생략하고, 유효한 정보만을 압축하여 넣는다. 그 책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읽을 가치가 있다면 어떤 점에서 가치가 있는가 하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요약과 인용을 통해 책 자체로 말한다. 나는 서평을 쓸 때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의 몇 배나 되는 노력을, 소개하려는 책을 고르고 요약하고 인용하는 과정에 쏟아붓는다. 목표는 그 책을 읽고 싶다는 기분이 들게 하여, 펼쳐보도록 하는 데 있다. 사야겠다는 기분까지는 들게 하지 목하더라도 어떤 책인가를 알려주어, 생각지도 못한 지식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고, 지적 우주를 확대해가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책을 읽는 즐거움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오호라' 하며 마음속에서 놀라움의 탄성을 지를 수 있게 하는 한 구절을 만났을 때의 기쁨이 가장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다치바나 다카시  136-137



서평 쓰기의 팁


① 책 내용을 '전부' 요약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라. 

②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정하라. 할 이야기가 명쾌하지 않은 서평은 단숨에 읽히지 않는다. 책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 '장황한 서평'은 고역이다.

③ 서평 쓰기 전에 밑그림 그리는 작업 즉, 구조 짜는 과정을 거쳐라.

④ 구조를 짜면서 '주제'가 살아 있는지 점검하라. 여기서 말하는 주제는 책의 주제가 아니라 서평의 '주제'다. 왜 이 서평을 쓰는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스스로를 설득시키지 못하면, 독자를 설득하지 못한다.

⑤ 서평의 '제목'에는 하고 싶은 말, 즉 주제가 드러나면 좋다.

⑥ 좋은 글은 고속도로처럼 빠르다. 중간에 '턱턱' 걸리거나, 장황하면 좋은 글이 아니다.  144-145



서평 구조 짜는 법

① 책을 읽은 후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는다.

② 생각의 시간을 통해, 서평에 '무엇을 담고 싶은지' 정리한다.

③ 서평에 담고 싶은 키워드를 백지에 정리해본다.

④ 이 중 가장 하고 싶은 말 '한 가지'를 고른다. 나머지 키워드는 과감하게 '축소'한다.

⑤ 몇 단락으로 쓸 것인지, 단락 구성은 어떤 순서로 할 것인지 계획한다.

⑥ 단락 순서가'유기적으로' '매끄럽게' '단숨에' 연결되는지 살펴본다. 

⑦ 만들어 놓은 '구조'가 서평을 통해 하고 싶은 말, 즉 '주제'를 잘 전달하고 있는지를 점검한다.  145-146



퇴고란 글을 더 좋게 만드는 일입니다. 한 번에 좋은 글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글쟁이들도, 작가들도 초고는 '쓰레기'라고 말할 정도로 퇴고는 필수 불가결합니다.  179


퇴고를 잘하기 위해 중요한 또 한 가지 조건은 글을 보는 안목을 높이는 일입니다.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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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을 집도하는 외과 의사와 마찬가지로 글을 쓰는 사람의 목표는 오로지 '집중'하는 것이다.  17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책은 바로 '단순함(simplicity)'이다. 약간의 고요함과 약간의 체계, 그리고 약간의 경외심이 필요할 뿐이다.  18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언제 어디서건, 아끼는 펜이 있건 없건 글을 쓸 수는 있다. 하지만 다음의 기본적인 조건만큼은 인정하고 넘어가자. 

'의자, 테이블, 닫힌 문, 컴퓨터 혹은 노트, 약간의 경외심, 창문을 가릴 커튼, 가볍게 흥분한 두뇌'  21


적당한 모든 공간에서, 그리고 적당하지 않을 것 같은 공간에서도 글을 써보라.  29



일부 시간은 형편없는 글일지언정 반드시 글을 써라.  43


글쓰기는 생각하기, 느끼기, 그리고 갈겨쓰기에 관한 것이며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서도 충분히 완벽하게 해낼 수 있다.  53


당신은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린다. 하지만 기다리는 건 꽤나 위험할 수 있다.  62


작가에게 기다림이란 위험하고 치명적인 게임이다. 그러나 기다리지 말고 다음과 같은 규칙을 따라보면 어떨까?

네 시간에 한 번씩, 말하자면 약 먹을 시간이 되면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듯이, 오전 8시와 정오와 오후 4시와 저녁 8시에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자.

"지금 내가 처한 바로 이 상황에서, 15분 동안 글을 쓸 수 있을까?"

만약 대답이 "아니오"라면 왜 안된다는 대답을 했는지 자신에게 설명해보라. 만약 대답이 "그렇다"이긴 한데 글쓰기를 시작하고 있지 않다면 왜 글을 쓸 수 있는데도 쓰고 있지 않은지 물어야 한다. 대답이 "그렇다"이고 글을 쓰고 있다면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만약 이런 식의 실험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정말 이 시간에 글을 쓰고 있었을까?"

이 실험을 시도한 사람들은 입을 모아 다음처럼 말한다.

"그렇다고 네 시간에 한 번씩 꼭 글을 쓰지는 않았어요. 솔직히 너무 인위적이고 강압적이잖아요. 제 하루 일과나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이루기 힘든 일이죠. 하지만 글쓰기를 더 많이 의식하긴 했어요. 그래서 이 시간제 글쓰기 활동을 하지 않았던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그 전보다는 더 많이 쓰게 되는것 같아요."  62-63


지금 비록 다리미판을 꺼내고 인터넷 뱅킹으로 고지서들을 처리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항상 글쓰기를 내 마음의 가장 앞이나 중심으로 꺼내놓고 있으면 글을 써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  63


짧지만 규칙적인 글쓰기 시간을 정해놓으면 어찌 되었건 그 시간에는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이 찾아오고 내면과 대화를 하게 된다.

글쓰기에 대해서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는 당연히, 몇 배나 낫다.

소설가인 조안은 말한다. 

"글을 쓰겠다는 목적의식을 계속 품고 있으면 글쓰기가 생활 전면에 더 자주 등장하게 되죠. 하루에도 몇 번씩 다음 문단을 고민하고 틈틈이 머릿속으로 글을 다듬고 내 소설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 생각합니다. 이런 규칙적인 '목적의식 인식하기'는 자유로이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고, 실제로 글을 쓰고, 또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65


우리는 삶이 아무 의미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흘러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스피드가 문제가 아니다. 시간도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삶의 질이다. 

글쓰기 공간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꿈을 꼭 붙잡고 글쓰기에 전념하면 시간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74


스승과 제자가 길을 걷고 있었다. 걸어가다 수심이 깊고 빠른 냇가 앞에 다다랐을 때 한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치마를 적시기 싫어서였는지 오도 가도 못하고 있던 그녀는 스승에게 자신을 안고 냇가를 건너달라고 부탁했다. 제자는 그들의 그욕주의적인 신조에 따라 스승이 당연히 안 된다고 말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스승은 그녀를 안아서 건네주었다. 스승과 제자는 가던 길을 계속 갔고 제자는 스승이 여자를 안았다는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부러움마저 잃었다. 사원에 돌아오고 나서 제자는 스스엥게 따져 물었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지요? 우리는 여자를 만져서도 안 되잖습니까!"

스승은 순진하게 웃어 보였다.

"너는 아직까지 그 여자 생각을 하고 있느냐? 나는 아까 강둑에서 그 여자를 내려주고 왔다. 너는 지금가지 그 여자를 계속 안고 다니고 있구나?"  105


쓸데 없는 잡념에 지배되지 않은 자유로운 뉴런은 차분히 다른 일에 할애할 수 있는 뉴런이다. 모든 뉴런을 다시 돌아오게 하자. 그렇게 하면 우리에겐 침묵의 시간, 실존하는 시간, 상상력이 자유롭게 비상하는 마음의 공간이 생긴다. 

너무 많은 뉴런을 도둑질 당한 사람은 엄밀히 말하면 이곳에 실재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106


창조적 마음챙김.

당신이 케이크를 먹고 있다고 치자. 이때 마음챙김의 목표는 오로지 케이크 먹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반면 창조적 마음챙김의 목표는 케이크 먹는 일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소설을 계속 쓰는 것이다. 케이크 먹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가 아니라는 뜻이다.  120-121


자아는 지속적으로 성숙시키지 않는다면 퇴행하게 되어 있다. 우울증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중독이 승리하기 시작하며 상상력은 시들시들해지고 결과물은 줄어들고 소외감은 커지고 절망이 깊어진다.  157



그곳이 당신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곳에서 머물고, 앉아 있고, 바라보고, 걷고, 글을 쓰는 상상이 당신 마음을 휘젓는다면 그곳이 바로 글을 쓰기 위해서 꼭 가야 하는 장소이다.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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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너의 도시를 세워라"라고 외칩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평온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베수비오 화산처럼 가혹해지기를 바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과 대결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다 강하고 깊은 존재로 고양시킬 수 있습니다.  12


근대는 사람들이 겪어야만 하는 운명의 부담을 가능한 한 줄여 주려는 시대입니다. 자연마저도 과학과 기술을 통해서 인간을 위한것으로 길들이고, 사회도 빈곤과 불평등을 줄여서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안락한 삶을 보장하려는 것이 근대의 경향입니다. 또한 근대는 사람들이 투쟁하지 않고 서로를 동정하고 도우면서 평온하게 사는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라고 여깁니다.  13


장영희씨는 <노인과 바다>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정신을 상기시킵니다. 스스로 위험한 투쟁을 택하기보다는 남의 전리품을 약탈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는 상어 떼의 정신입니다. 상어 떼는 노인이 힘겹게 잡은 대어에 달려들어 수비게 그 고기를 뜯어 먹습니다.... 니체는 이렇게 쉽고 안락하게만 인생을 살려는 정신을 '말세인들의 정신'이라고 일컫습니다.  16


저는 이 책에서 니체라면 우리가 사는 것을 버겁게 느끼면서 던질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질문들에 어떻게 답했을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많은 살마들은 니체가 주창하는 정신을 예수나 부처가 설파하는 사랑과 자비의 정신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또한 헝가리의 철학자 루카치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니체가 주창하는 정신을 약한 자들에 대한 지배와 정복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의 정신으로 해석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저는 니체가 주창하는 정신은 예수나 부처식의 사랑이나 자비의 정신도 아니고 제국주의적인 정신 역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약한 자들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주창하는 근대인들이 망각하고 있는 강건한 정신으로, 고통과 험난한 운명을 자신의 고양과 강화를 위해 오히려 요청하는 패기에 찬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초인(超人 뛰어넘을초 사람인)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



첫 번째 질문 -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할까?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을 경멸하라


초조가 세상을 뒤엎고 있다. 

현대인들은 너나없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20


쇼펜하우어,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22


과학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를 알려줍니다. 

이에 반해 철학은 우리가 이미 삶 속에서 체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고 있는 것을 확실하게 개념화해서 우리 눈앞에 보여줍니다.  27


'아름다움이란 우리 인간이 자신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세계에 나눠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40


우리는 흔히 고난과 고통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고통스럽게하는 고난이 일어나지 않고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이와 함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통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한 인간'은 고난과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 않고, 그런 것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평정과 충일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입니다.  43



두 번째 질문 -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 무엇일 필요합니까?

인생, 의미를 찾지 않을 때 의미 있는 삶이 된다


니체는 '인간의 정신은 낙타의 정신에서 사자의 정신으로, 그리고 사자의 정신에서 ㅇ라이의 정신으로 발전해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47


니체가 말하는 낙타의 정신은 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절대적인 진리로 알면서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정신을 뜻합니다.  48


니체는 '사자의 정신은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는 못한다'라고 이야기했지요. 기존의 가치와 의미가 붕괴된 자리에 남아 있는 가치와 의미의 공백 상태는 정말이지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기존의 가치와 의미가 무너지고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결여된 상태를 두고 니체는 니힐리즘(nihilism, 허무주의)이라 명명.  50-51


아이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말은 곧 인생을 유희처럼 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어떤 재미있는 놀이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왜 이 놀이를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놀이가 재미잇어서 놀 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왜 이 놀이를 해야 하지?'라며 놀이의 의미를 묻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놀이의 재미가 사라졌는데도 계속해서 그 놀이를 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 하나의 재미있는 놀이로 여겨지는 사람은 '이 놀이를 계속해야 하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저 삶이라는 놀이에 빠져서 그것을 즐길 뿐이지요. 우리가 삶의 의미를 묻게 되는 것은 삶이 더 이상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 때입니다.  60


중력의 정신이란 우리를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두려움과 걱정, 시기와 원한과 같은 부정적인 정신을 뜻합니다.  70



세 번째 질문 - 내 맘대로 되는 일은 왜 하나도 없을까?

위험하게 사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운명에 대해서 우리가 취할 수 이쓴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운명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인간이 노력하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극단적인 자유의지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면 된다'는 철학이지요. 

그런데 니체는 이러한 극단적인 자유의지의 철학을 '단죄(斷罪 끊을단 허물죄)의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자유의지의 철학은 사회적으로 실패한 사람을 단죄합니다. '그대가 실패한 것은 그대의 노력 부족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공부 재능이 없다면 아이에게 주어진 다른 운명적 소질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계발시켜줘야 하고, 이렇다 할 아무런 재능도 없으면 평범하게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있는 자세를 키워줘야 하겠지요.  77-80


두 번째 태도는 숙명론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패배주의로서 모든 것을 운명 타승로 돌리는 태도에 해당합니다. 자유의지의 철학은 사람들을 단죄하지만 숙명론은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80


세 번째 태도는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역경을 오히려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면서 험난한 운명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운명애(運命愛 옮길운 목숨명 사랑애)의 철학은 언뜻 보면 자유의지의 철학과 동일한 것 같지만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런 철학은 힘든 운명을 하나의 기회로 승화시키려고 합니다.  81


운명애의 사상에 엄습되었을 때 니체는 그의 책이 거의 팔리지 않을 정도로 전혀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런 자신의 인생에 만족했고 그것을 긍정했습니다.  85



네 번째 질문 -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어떻게 풀 수 있을까? 

당신의 적을 경외하라


적과 대등하다는 것 - 이것이 대개 성실한 결투의 첫째 전제다. 상대방을 얕보고 있는 경우, 전쟁은 할 수 없다.  103


니체는 강간 등 여러 가지 사회악을 만들어낸다고 해서 성욕을 제거하려 하거나, 경쟁심이 인간들 간의 갈등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경쟁심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치통을 막기 위해 치아를 빼버리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위라고 말합니다.  111



다섯 번째 질문 - 신을 믿지 않으면 불행해지는 걸까?

당신을 위한 신은 어디에도 없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 그리고 신을 죽인 자는 바로 우리다! 살해자들 중의 살해자인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위호할 것인가?' 

'신은 죽었다' 니체의 이 말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신이 인간과 달리 신일 수 있는 이유는 죽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이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것은 근대에 들어와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게 되엇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서양의 중세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부딪힌 문제들을 신에 의지하여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와서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은 보통 자연 또는 사회에서 오는 것이지요. 폭우나 가뭄처럼 자연으로부터 오는 재해가 있는가 하면 전쟁이나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고통이 있습니다. 

근대인들은 자연에서 비롯되는 재해에 대해서는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또 잘못된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대해서는 사회구조의 개혁을 통해서 극복하려 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부딪힌 문제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많은 부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고 이에 따라 인간은 신보다는 잣니의 힘을 더 믿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근대에 들어와 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굳이 신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도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벼락을 신의 진노라고 해석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것을 자연법치겡 따라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 인류학이나 민속학 같은 사회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굳이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민족들도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에 따라 그리스도교가 서양 사회에서 갖는 영향력은 중세 시대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두고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119-121


니체는 종교를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죄책감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힘을 강화시키고 고양시키는 종교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 만들어낸 그리스도교처럼 지상의 힘이나 쾌락을 죄악시하고 끊임없는 회개를 강요하는 종교입니다. 

니체는 종교란 결국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135



여섯 번째 질문 - 살아가는 데 신념은 꼭 필요한 걸까? 

신념은 삶을 짓누르는 짐이다


변화하는 세계를 하나의 이론 체계로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니체는 체계를 만들려는 의지는 모두 불성실하다고 보았습니다.  166


확신이란 감옥이다. 

가치와 무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격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아래에 - 그리고 자기 뒤에 - 오백 가지나 되는 확신들을 봐야 한다.  167


인류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것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특정한 종교적 혹은 정치적 이념에 대한 독단적인 확신이 아닌가 합니다.  173


확신은 확신에 사로잡힌 인간을 지탱해주는 기둥이다. 여러 가지 사물들을 보지 않는다는 것, 어떤 점에서도 공평하지 않다는 것, 철저하게 편파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것, 모든 가치를 하나의 엄격하고 필연적인 관점에서 본다는 것 - 이것만이 확신에 사로잡힌 인간이 존속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는 진실한 인간과 진리에 반대하고 그것에 적대하는 자가 된다.  174-175


어떤 독단적인 이념을 확신하는 사람은 자신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이념이 자신의 삶에 확고한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습니다.

어떤 이념을 독단적으로 신봉하는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에게 삶의 위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175


니체가 말하는 자유로운 정신은 곧 독단적인 이념이 우리에게 주는 삶의 위안을 값싼 위안으로 간주하여 거부하면서 세계와 사물을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176



일곱 번째 질문 - 예술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예술은 삶의 위대한 자극제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오래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짧게 살더라도 충만하게 사는 것입니다.  187


'인간은 근본적으로는 사물에 자기 자신을 반영시키며, 자신의 모습을 되비추어주는 모든 것을 아름답다고 여긴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오직 인간만이 아름답다'라고, 이것이야말로 모든 미학의 제1의 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상응하여 제2의 진리에 해당되는 것은 '퇴락한 인간 이외에는 아무것도 추하지 않다'라고 니체는 이야기합니다.  193


니체는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느끼는 기쁨과 분리될 수 없다고 봅니다.  195


그는 예술이 삶의 위대한 자극제라고 생각했습니다.  196



여덟 번째 질문 - 죽는다는 것은 두렵기만 한 일일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절정이다


니체는 삶을 사랑하는 자라면 우연하거나 돌연하게가 아니라 자유로우면서도 의식적으로 죽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129



아홉 번재 질문 - 나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너만의 꽃을 피워라


니체는 우리의 타고난 성격과 소질에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스타일을 부여할 것을 요구합니다.  229


사람들은 틀에 맞추어지지 않는 자신을 악한으로 간주했고 되책감에 시달렸습니다.  

'도덕이 삶에 대한 고려나 배려 그리고 삶의 의도에서 비롯되지 않고 그 자체로 단죄하는 한, 도덕은 동정할 여지가 없는 특수한 오류이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해를 끼친 퇴락한 자들의 특이체질이다.'  233


'우리 다른 사람들, 비도덕주의자들은 정반대로 모든 종류의 이해와 파악 그리고 긍정에 우리의 가슴을 활짝 열어 놓았다. 우리는 쉽게 부정하지 앟으며 긍정하는 자라는 점에서 명예를 찾는다. 우리는 성직자와 성직자의 병든 이성의 거룩한 무지가 배격하는 그 모든 것을 필요로 하며 이용할 줄 아는 경지에 갈수록 더 눈이 열리게 되었다.'

니체는 인간을 교육하는 방법을 길들이는 방식과 길러내는 방식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누고 있습니다. 길들이는 방식은 인간을 특정한 틀에 맞추도록 강요하는 것인데, 이런 방식을 인간을 병들게 만들고 위축되게 합니다. 이에 반해 길러내는 방식은 인간의 타고난 소질과 성향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는 방식입니다.  234-235


니체는 '그대 자신이 되어라'라고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는 주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235



열 번째 질문 -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감정을 다스리는 것을 넘어 몸을 다스려라


우리는 보통의 경우 초인이 아니라 안일을 탐하는 말세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극복을 하려면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 필요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권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승리다... 전쟁을 일으키는 삶을 살도록 하라! 오래 연명하는 삶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는 '모든 위대한 것과 충일한 힘은 끊임없는 자기극복을 통해서 형성된다'라고 말합니다.  250


니체는 자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감정과 생각을 다스리는 것을 넘어서 신체를 다스려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힘들다고 해서 함부로 눕지 말고 그때마다의 상황에서 요구되는 적절한 자세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단순히 감정과 사상을 훈련하는 것으로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 가장 먼저 설득시켜야만 하는 것은 바로 신체다.'  255


신체를 완전히 우리의 지배 아래 둘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본능까지 건강하고 기품 있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본능이 건강한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도 건강하게 만드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건강한 본능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경쾌하고 가벼우며 필연적이고 자유롭게 건강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257


그는 우리가 고귀한 인간이 되려면 보는 법과 생각하는 법 그리고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에 대해서 니체는 '눈에 평정과 인내의 습관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성급하게 속단하지 않고 판단을 유보하면서 하나하나의 경우를 모든 측면에서 검토하고 조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258-259


보는 법을 배우게 되면 사람들은 대체로 서두르지 않게 되고, 쉽게 믿지 않게 되며, 낯설고 새로운 것을 접하더라도 우선을 적의를 품은 평정과 함께 그것을 대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생각하고 쓰는 법인데, 니체는 이것을 '무용을 배우듯'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탁월한 무용수는 섬세하고 우아한 몸짓으로 춤을 춥니다. 그런 몸짓 하나하나를 언어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하지요. 그런에도 우리가 사유하고 글을 쓸 때에는 사물들이 갖는 섬세한 뉘앙스를 느끼면서 그것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259




에필로그

니체의 시각에서 보면 오늘날의 사회는 거대화되고 있는 반면 그 안의 각 개인은 갈수록 왜소해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사회가 잘 굴러가는 데 필요한 나사 부품이 되는 대가로 안락과 향락을 누릴 수 있는 물자를 받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아무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기 바라는 소심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니체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대지는 작아졌고,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말세인'이 그 위에서 날뛰고 있다.   26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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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아무에게도 길을 물어보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길을 잃을 자유조차 잃게 되리라"라고 어느 현자를 말했다. 

남들이 백 번도 더 지나간 길에서, 틀에 박힌 생각에서, 그림엽서처럼 뻔한 풍경과 집단 수용 천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제 '우연'에 진심 어린 존경을 표하고 본래의 권위를 돌려줘야 할 때가 왔다.  9




딴 데 가서 알아봐 - 프랑스인들은 '딴 데 가서 알아봐'라는 말을 자주 한다. 성가신 사람을 멀리 쫓아낼 때 쓰는 이 표현은, 누구라도 들으면 기분이 언짢아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이라면, 이 '딴 데 가서 알아봐'는 여행자의 지상 목표가 된다. 그런데 이곳을 떠나 당신을 둘러싼 환경이 달라졌는데도 정작 당신 자신은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 여행은 망쳤다는 뜻이다.  16-17


은인 - 한 나라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현지인 친구를 사귀는 것만 한 방법이 없다. 이들이 보여주는 일상적인 친절과 배려는 가이드가 늘어놓는 청산유수 같은 설명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나치게 경계심을 품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요컨대 분별이 관건이다.  21


출항 - 프랑스 소설가 폴 니장(Paul Nizan)은 "여행은 돌이킬 없는 상실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26


오지 - 낯선 지역, 어쩌면 덜 알려진 지역을 가리킬 때 쓰는 용어, 이런 지방은 관광지 바깥에 위치한다. 이처럼 가게 뒷방에 깊이 숨겨진 보석 같은 고장에 찾아가 자신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고정관념을 뒤른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26



"여행은 젊은이를 가르치고 노년을 미리 경험하게 한다." - 프랜시스 베이컨(Bacon Francis, 1561~1626)



짐 - 비행기에 탈 때 짐이란 짐은 다 덜어내도 마음의 짐은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니 불행인지도 모르겠지만, 이 짐의 무게는 어느 항공사에서도 재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나 할까?  38



"그러나 진정한 여행자들은 오직 떠나기 위해 떠나는 자들 마음은 풍성처럼 가볍게 숙명은 결코 떨치지 못한 채 그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늘 '가자!라고만 말하네." - 샤를 보들레르(Baudelaire Charles, 1821~1867)



베르베르족 속담 - 여행은 자기 삶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다.  41


지도 -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행자다."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쉬아레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63


기분 전환 - "우리는 장소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 여행한다." 이폴리트 텐(프랑스의 비평가, 역사가)  71


사냥꾼 - 홀로 나와 바람 냄새를 맡으며 우연을 찾아다니는 여행자들은 '즉흥 사냥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길을 가다 자신이 원하는 것뿐 아니라 예상치 못한 만남도 얻는다.  71


길 위에서 - 여행은 삶과 같다. 목적지가 아니라 거기까지 가는 길이 중요하다. 시간에 쫓기며 정해진 목표를 향해 서둘러 갈 권리도 있겠지만, 길가에서 경험하는 경이와 아름다움을 놓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72


중국 속담 - 진정한 여행자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75


세상 끝에 사는 친구 - "여행자란 어떤 사람인가? 세상 끝까지 가서 말 한마디라도 나눠보려고 훌쩍 떠나는 이가 아닌가!" 쥘 바르베 도르비이(프랑스의 소설가)  82


호기심 - 두뇌와 오감을 사용하는 여행이야말로 호기심 많은 사람이 맛보는 최고의 즐거움이다. 경이에 대한 욕구가 없고, 여행자의 시선으로 길가에 널린 놀라움을 거둬들일 줄 모른다면, 자기 방에서 멀리 떠나 모험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87


현지에서 작업 걸기 - 어떤 나라를 속속들이 알기 위해서는 뭐니 뭐니 해도 현지인과 살을 맞대보거나 적어도 감정이 오가는 관계를 만드는 게 최고다. 현지 풍속과 언어를 속속들이 알기 위한 이런 여행 방식이 기혼 여행자의 정조 관념과 갈등을 빚지 않는다면, "항구마다 기다리는 애인 한 명씩은 만들어라"라는 유명한 말은 진정한 탐험가들이 응당 마음에 품을 법한 것이며 앎에 대한 목마름에 훌륭히 부합한다고 하겠다.  106


여행작가 - 여행작가와 글도 쓰는 여행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여행 작가의 시선은 깐깐하다 못해 열정과 비판으로 남들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글도 쓰는 여행자는 보통 타협적이고, 자신이 특별한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최상급 형용사들을 줄줄이 늘어 놓는다...

글쓰기와 여행은 언제나 서로를 사로잡는다. 이 둘은 모두 상상 세계를 향해 떠날 준비를 마쳤거나 모든 가능한 세계를 이미 탐험한 이들, 그러니까 '다른 곳을 열망한 이들'의 부름에 대한 대답인 것이다.  111-112


깨어남 - "자신이 꿈꾸는 여행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다운 여행이 아니다. 이때 말하는 꿈은 정신을 잠재우는 꿈이 아니라, 땀에 흠뻑 젖고 목이 메면서, 수염이 자라 덥수룩해진 채로 몸을 부르르 떨며 깨어나게 되는, 이야기할 수 없는 꿈,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이를 먹는 것조차 멈춰버리는 그런 꿈이다." 다니엘 메르메(프랑스의 언론인, 작가)  120


청년 교육 - "여행은 젊은이들을 가르친다"라고 몽테뉴는 말했다.

현재를 눈부시게 만들고 자기 앞의 생을 환히 밝히기 위해 여행을 하다 보면 내면이 풍요로워진다.  125



"독서가 여행이고, 여행이 독서다." - 빅토르 위고(Hugo Victor, 1802~1885)



"또다시 우리의 울퉁불퉁한 여행 가방이 보도 위에 쌓였다. 우리 앞에는 가야 할 길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길이야말로 삶인 것을." - 잭 케루악(Kerouac Jack, 1922~1969)



"아무리 생각해봐도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집에만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 러디어드 키플링(Kipling Rudyard, 1865~1936)



세계를 읽다 -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 책을 한 쪽밖에 읽지 못한 셈이다." 외젠 다비(프랑스 소설가)  170


거꾸로 여행 - "진정한 여행은 어딘가에 가는 행위 그 자체다. 일단 도착하면 여행은 끝난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끝에서부터 시작한다." 위고 베를롬(프랑스 작가)  171


책 - "모든 책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은 세상에 한 권뿐이며, 세계 모든 나라의 국경을 열어주는 8절판의 작은 책, 바로 내 여권이다." 알랭 보레(프랑스 비평가, 여행 작가)  177



"여행을 많이 하고 자신의 생각과 삶의 형태를 여러 번 바꿔본 사람보다 더 완전한 사람은 없다." - 알퐁스 드 라마르틴(Lamartine Alphonse, 1790~1869)



"여행은 문과 같다. 우리는 이 문을 통해 현시렝서 나와 꿈처럼 보이는 다른 현실, 우리가 아직 탐험하지 않은 다른 현실 속으로 파고들어 가는 것이다." - 기 드 모파상(Maupassant Guy de, 1850~1893)



무어인 속담 - 여행하지 않는 살마은 인간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196


앙리 드 몽프레 - "삶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모험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며, 우연과 행운과 운명을 신뢰하라. 길을 떠나 다른 공간과 다른 희망을 정복하라. 그러면 나머비는 덤으로 주어지리라."  203


테오도르 모노 - "우리는 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는 잘 알지만, 언제, 어떻게, 어떤 길로 그곳에 이르게 될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미리부터 너무 고민할 필요가 없다. 두고 보면 알게 된다."  203


미셸 에켐 드 몽테뉴 - "왜 여행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늘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내가 무엇을 피하는지는 잘 알지만, 내가 무엇을 찾는지는 잘 모른다'라고 말이다. 자신의 생각을 타인의 두뇌에 문질러 다듬기 위해서라도 여행을 해야 한다."  203


베트남의 해변 도시, 나짱 - '삶의 운치'를 즐긴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다른 모험을 향해 전속력으로 당신을 떠밀어대는 안내책자의 프로그램은 그럴 계획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음 기회에... 이런 식의 여행은 '바보 같은 여행'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딱할 뿐이다.  206-207


프랑스 최대 여행사, 누벨 프롱티에르 - 오늘날 고객은 한곳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특별히 피하는 곳도 특별히 가고 싶은 곳도 없이 특정 브랜드를 고수하지도 않고, 그저 일종의 소비요겡 이끌려 '기획 상품'만 찾는 뚜렷한 경향을 보인다.  210


길을 잃을 자유 - "아무에게도 길을 물어보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길을 잃을 자유조차 잃게 되리라" 랍비 나흐만 드 브라트슬라브가 남긴 이 경구는 진정한 여행자, 곧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호기심으로 가슴 설레는 사람에게 마음의 지주가 된다.  232


페르시아 속담 - 우리가 여행에서 가져올 수 있는 최고의 기념품은 건강하고 무사한 자기 자신이다.  234


긴 여정, 짧은 산책 - 한가로이 거닐면서 우리는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우연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여행 그 자체를 만끽하는 방법이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노자는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비행기 덕분에 완전히 거꾸로 여행할 수 있게 된 만큼, 그러니까 한 걸음에 천리 길을 갈 수 있게 된 만큼, 수천 킬로미터 거리를 훌쩍 날아간 뒤에 한 발짝 한 발짝 디딜 때마다 여행의 꽃이 활짝 피어난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235-236


해변 -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임을 내세우는 곳은 수십군데지만, 문제는 그것이 객관적인 평가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42



"무언가를 발견하는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으려는 여행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가지려는 여행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Proust Marcel, 1871~1922)



추구 - "여행은 동기가 없어도 된다. 여행 그 자체만으로 족하다는 것이 이내 입증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여행이 당신을 만들거나 당신을 해체하는 것이다." 니콜라 부비에  252


만남 - "우리는 자신을 피하기 위해서 여행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자신과 만나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이다." 장 그르니에  268


추억 - 여행은 추억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가장 빛나는 추억은 현재에 만들어진다는 것을 때때로 망각할 정도다. 기억은 경험을 자양분으로 삼는 만큼 지금 이 순가에 머물기를 잊고 추억을 모으는 데만 급급해한다면 껍데기만 남는다. 무엇보다도 그토록 먼 곳까지 가서 찾고 느끼려했던 것들을 놓쳐버릴 수 있다. 그러니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야 한다. 받아들일 줄만 안다면 덧없는 한순간보다 더 지속적인 것도 없다.  283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 "나는 어딘가에 가려고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걷기 위해 여행한다. 그러니까 여행하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움직이는 것이고, 삶의 필요서오가 난처함을 더 가까이 느끼는 것이다."  284


여행자의 인사, "스토 칼로" -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건네는 그리스의 인삿말이다. '스토 칼로 나파스(Sto kalo nappas)'의 준말인 이 표현은 선(善)과 아름다움을 향해 가라'라는 뜻이다. 여행자를 올바른 길로 안내해줄 만한 좋은 말이다.  285


티베트 속담 - 여행은 본질로의 회귀다.  296


투아레그족 속담 - 첫 번째 여행에서 우리는 발견을 하고, 두 번째 여행에서 우리는 풍요로워진다.  299


관광객 - '관광객'이라는 말은 이탈리아 산책 수첩에 "어느 관광객의 회상록"이라는 제목을 붙인 스탕달에 의해 처음으로 생겨났다. 이후 그의 뒤를 이어 떠나는 방문객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때로는 이들이 낯선 곳의 '점령자'가 되는 지겨엥 이르렀다. 이 점령자들이 자신이 방문하는 장소를 변화시킬 때 여행자는 새로운 발견의 여지를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다. 이때 여행자는 풍경에 어우러지기보다는 풍경에 거치적거리는 존재가 돼버린다.

여행의 민주화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의미하지만, 이러한 진보의 정점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의 그림을 이루는 온전한 풍경을 더 이상 일그러뜨리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302-303



"여행은 도시와 시간을 이어주는 일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아름답고 철학적인 여행은 그렇게 머무는 사이 생겨나는 틈에 있다." - 폴 발레리(Valery Paul, 1871~1945)



여행필수품 - 스페인의 시인 안토니오 마차도는 이런 말을 남겼다. "행복으로 이끄는 길은 없다. 행복이 바로 길이다.", "여행자여, 길은 바로 그대의 발자취다."  321


잔스카르 속담 - 여행은 그대의 아버지다. 그대는 자기 자신을 찾았을 때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그 땅은 그대의 어머니다.  339


에밀 졸라의 겉치레 말 - "여행만큼 지성을 함양하는 것은 없다"라고 이 작가는 말했다. 관광산업의 유혹에 넘어가 여기저기 우르르 몰려 다니기를 낙으로 삼는 이들이 흡족해할 만한 말이다.  하지만 그저 움직였다고 여행을 한 것일까? 예전에는 어떤 사람의 지성이 그가 주파한 거리와 비례할 수 있었는지 몰라도, 불행히도 이런 시대는 지나가지 않았는가!    341-342




옮긴이의 글

모든 것을 계획하고 떠나며 꿈꾸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는 여행과 정반대의 여행이 있다. 마음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이곳이 아닌 다른 하늘 아래로 몸을 피해야 숨이라도 겨우 쉴 듯한, 그러나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는 여행.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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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며 - 인류학적 관점이 어떻게 해외여행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이 책은 짧은 체류 기간 동안 "문화적 이해"라는 분야를 더 깊이 파고들려는 사람들이나, 해외에서 비교적 장기간 살면서 현지인의 관습과 문화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런 여행자들은 스스로를 청년 배낭여행자 또는 요새 늘어나고 있는 플래시패커(flash-packers)로 정의한다. 플래시패커란 연령대가 조금 높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30대 배낭여행객을 가리킨다. 7


최근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가 "읽은"것의 10%, "들은"것의 20%, "본"것의 30%, "보고 들은"것의 50%, "말한"것의 70%, "하면서 말한"것의 90%를 기억한다고 한다. 다른 연구자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듣고, 보고, 행하고, 냄새 맡고, 느끼고, 맛보고, 들이마시고, 집어넣고, 신용 카드로 산"것의 100%를 생각해 낸다고 한다. 13


현재 대부분의 학습은 수동적으로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에 불과하다. 즉 참여와 활동이라고 오인하곤 하는 정보 접근과 정보 검색인 것이다. 13


기억과 지식을 내면화하지 못하면 보통 너무 피상적이 되고 지적인 허세로 이어지고만다. 14


여행은 관계망을 만들어 내고, 비금융적 자산을 계발해서 귀중한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을 창출할 수 있게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유명한 말처럼 "진정한 발견에 이르는 여정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볼 때 이루어진다."

여행하는 동안 경험과 지식을 축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고 행동하는 방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각"이 더욱 중요하다. 16-17


미국인들은 흔히 다른 사람들의 행동은 천성 탓이라고 보면서, 자신들의 행도은 외부 조건에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여긴다. 17


자기가 내린 판단이 자민족중심주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도, 적어도 현지에 있는 동안만큼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행동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능력을 익혀야 한다. 어쩌면 영원히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말이 쉽지 실천하기 아주 어려운 일이긴하다. 19


이론이나 철학은 실천 속에서 구체화된다. 20


심층 지식을 얻기 위한 최고의 방법 중 하나는 배운 것을 끊임없이 기록하는 것이며, 해외에서 배움을 얻는 비결은 겸손함을 보여 주고 자기 약점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 그러려면 용기를 내서 스스로를 낯선 타인의 친절에 좀 더 맡겨야 할 뿐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해야 한다 운이 좋으면 그렇게 해서 겸손함을 배우게 될 것이다. 21-22



1. 인류학적 관점이라 불리는 괴물

- "우리는 바로 우리라는 적을 만났다." - 포고(Pogo, 미국 만화가 월트 켈리가 그린 만화 주인공)


"문화적 상대주의"는 자기 문화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다른 문화의 행동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자민족 중심주의"와 반대 개념이다. 43


현장에서 중요한 정보는 우연히 등장할 때가 많다. 45



2. 우리는 왜 해외로 나가는가

-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면 절대 살아가지 못하리라."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최근 연구에 따르면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마약 같은 효과를 낳는다고 한다. 중변연계에서 관장하는 보상 체계에서 만족감에 해당하는 신경의 레버를 눌러 화학적 전달 물질인 도파민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57


사람들이 해외에 나가는 이유라고 말하는 것 중 다수는 물론이고, 심지어 실제 해외에서 하는 경험조차 "키치"할 수도 있다. 키치(kitsch)는 진부하고 뻔하고 흔해 빠졌고 보통 싸루려이면서 대체로 악취미적인 무언가를 묘사하는 데 쓰는 용어다. 사실 이런 키치함은 주로 처음에는 물건을, 그러다가 현재는 경험을 대량 생산한 결과고 생겨났다. 도처에 존재하는 키치성은 현대 소비 자본주의 문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다. 키치는 행복이나 지식조차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믿음 아래 번성한다. 키치에는 지적인 수고가 거의 들어가지 않으며, 키치는 지식과 이해를 추구하는 풍토보다는 안락한 소비 지상주의에서 번창한다. 아마 키치가 가진 가장 위험한 측면이라면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보편적 정서와 이해가 존재한다는 착각을 광범위하게 퍼뜨린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키치의 일부가 생활 방식의 정치화다. 62-63


대학들이 여행을 장려하고 있는 상황에서, 해외 유학 프로그램의 ㅅ어장은 단과대학과 종합대학교에서 외국어 프로그램에 등록하는 학생 수가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현상과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이는 어떻게 여행 키치가 조장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한 가지 지표이다. 해외여행이 키치화하고 있다는 또 다른 지표는, 적어도 내가 있는 미국 대학교에서는, 유학 중인 일부 외국인 학생들이 하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미국인 학생들과 때로는 대학 당국까지도 피상적 수준 외에는 그들 조국에 대해 아는 데 그다지 관심이 없다고 불평한다.

사실 정확한 여행 동기는 스스로도 확실하지 않을 게 분명하며, 확실해지는 날도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자아 발견과 다른 요인들이 섞여 있다는 게 다일 것이다. 처음에 나는 키치화한 여행이 가지는 위험성에 대해 불안해하는 게 내 개인적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그런 피상적 동기에 맞서는 게 우리가 "당연시하는" 가정들을 무너뜨리는 방법으로 가치 있는 행위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더 철저하게 파고들수록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 그런 가정들이 더 큰 구조적 문제의 일부라는 것, 또 인류학자들은 학생들이 해외로 나가는 게 지적으로 정말 도움이 되는지, 그리고 해외여행이 학생들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게 사실인지에 때때로 의문을 제기해 왔다는 것이다. 63-64


초보 여행자들이 편향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실용적인 조언. 

데이터 수집에 다각적인 접근법을 이용하고, 큰길을 벗어나 걸어서 다녀 보고, 틈틈이 여기저기 들러 보고, 소탈해지려 노력하고, 비수기에 가 보고, 관광객들이 흔히 찾는 구역을 벗어나서 시간을 보내 보라.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질문을 하고, 귀 기울여 들으로, 늘 똑같은 사람들과 판에 박힌 교류를 하는 데서 벗어나라. 다양한 집단 특히 보통은 의견을 묻지 않는 종류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라. 67


고치에 싸인 채로 여행을 하려는 게 아니라면, 여행 방식을 만들어 내고 결정짓는 광범위한 구조적 요인들을 고려해서 그런 요인들 간에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엄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67-68


플래시패킹(flash-packing, 노트북, 아이팟, 디지털카메라 등 전자 기기를 들고 여행을 다니면서 와이파이 등의 기술을 이용해 여행 경험을 블로그 등의 SNS나 실시간 방송 등으로 공유한다.) 70


관광에는 많은 유형이 있어서 학자들이 명실상부한 유형 분류 체계를 만들어 내기도했다. 에릭 코언(Erik Cohen)이 개발한 첫 번째 유형 분류 체계는 관광이 가진 다양성을 보여주는 데 지금까지도 편리하게 쓰인다. 코언은 참신한 경험을 선호하느냐 아니면 친숙한 경험을 선호하느냐에 따라 네 가지 유형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단체 대중 관광객"이다. 친숙한 것을 선호하고, 투명한 거품 속에 있는 것처럼 "특별 구역" 안을 돌아다니는 유형으로, 기본적으로 최고급 호텔에서 최고급 호텔로 옮겨 다닌다.  

두 번 째 유형은 "독자적인 대중 관광객"으로, 역시나 친숙한것을 고수해서 프랜차이즈 호텔에 묵고 평범한 관광 코스를 다니지만 행동을 독자적으로 한다. 

그 다음은 "탐험가" 유형이다. 참신함과 친숙함을 버무린 여행 방식을 택하고, 현지문화 탐구에 과감히 나서지만 언제든 "특별 구역"으로 돌아올 출구 전략을 갖고 있다.

마지막 유형은 단체 대중 관광객과 정반대 부류로, 일반적인 관광 코스를 피해 가능한 한 현지인과 섞이는 걸 선호한다. 방랑자는 현재 배낭여행객과 플래시패커로 자연스럽게 맥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여행조차도 거의 도처에 손길을 뻗은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과 러프 가이드(Rough Guide) 덕에 제도화되어 있다. 이런 제도화는 현지인과 현지 음식과 관습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하고, 인지된 위험(perceived risk, 구매가 가져오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불안감)을 희석하는 역할을 한다. 어떤 면에서 배낭여행객과 플래시패커는 탐험가와 방랑자를 결합한 형태이다. 이들은 인류학자처럼 해외여행에 도전하고 싶어 하는 종류의 여행자다.  74-75



3. 스스로를 본다는 것

   -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보라" 로버트번스


여행자들은 출신 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무력한 존재일지라도 해외에서는 현지인들보다 부유하지만 하면 그이유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힘 있는 사람으로 봐 줄 때가 많다. 결국 이들은 인기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건 매력적 성격보다는 이런 부유함이다.  87


여행자들은 기동성과 부를 가졌기 때문에 출국이라는 선택권을 발휘해서 마음에 안 드는 곳은 떠나 버린다. 이런 출국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여행자와 현지인 간에 존재하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이다. 이 말을 여행자는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그로 인한 결과 또는 다소 부담스러운 상황들을 반드시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88


배낭여행자들은 현지어를 하나도 못 하면서도 자기가 어떤 환대를 받았는지에 대한 이야기 하나쯤은 누구든 갖고 있었다. 이들에게 "진정한 교류"란 현지에서 베푸는 환대를 받고도 숙박료를 내지 않는 걸 의미했다.  97


여행을 하다 보면 여행자가 피해자가 되는 경우도 흔히 있게 마련이다. 비록 교훈이 뒤따르기는 하지만, 보통 이런 일은 일종의 탁월한 재밋거리로 여길 수도 있다. 여행자가 피해자가 되는 경우는 생명에 위협이 될 만큼 심각한 수준부터 단순히 창피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102


여행자들은 이야기를 할 때 부인하기 일쑤이지만, 봉이 되는 느낌은 뼈저리게 아프다.

사기당하는 것에 대한 공포는 상당히 가지각색이다. 그런 공포를 참고 넘길 만한 여행자들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여행자들은 그러지 못해서 이런 공포가 지나친 경계심으로 바뀐다.사건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돌이켜 보면서 "좀 더 분별 있게 행동했어야 했다"고 반성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교육적이다. 이런 경험들이 새로운 행동, 새로운 자기 탐구, 자기 수양을 하게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위기에 대한 모의실험 같은 것으로, 우리는 천하무적의 존재가 아니라 매우 인간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점을 되새기게 한다.  103



4. 여행 의례와 개인적 변화

   - "사람들은 이런 저런 누구는 아직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할 때가 많다. 그러나 자아는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토머스 사저


배낭여행자들은 사롱을 입거나 머리를 땋는 등 "현지인처럼 살려고"하는 시도는 통하지 않는다.


모험은 비일상적 장소에서 일어나는 게 일반적이다.  118

위험 감수는 모험의 본질이다.  119


알베를 카뮈(Albert Camus)는 "여행을 가치 있게 하는 건 두려움이다. 여행은 일종의 내면 체계를 붕괴시킨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모든 걸 빼앗고, 가면을 벗겨 버린다... 우리는 완전히 껍데기만 남는다."  121


지멜에게 모험은 경험 체계이다. "모험은 특유의 성격과 매력 면에서 볼 때 경험의 한 가지 형태라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경험하는 내용 때문에 모험이 되는 게 아니다."  122


중요한 것은 여행자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그 행동을 현지인들이 어떻게 해석하는가이다. 그렇다면 여행자는 반드시 유연성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일반화도 피할 필요가 있다.  134


여행에 계몽적 영향력이 있다고 덮어놓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겠지만, 여행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외국에 있는 동안 모은 여행 사진, 옷, 공예품을 진열하는 것은 자기 정체성과 여행 경험 간에 확실한 연결 고리를 만든다.  135-136




5. 여행안내 책자를 해석하는 법

   - "진정한 발견에 이르는 여정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볼 때 이루어진다." 마르셀 프루스트


계획에는 상상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장소가 어떤 곳일지 상상해 볼 때 인지적 도식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상상한 목적지와 실제로 체험하는 목적지는 당연히 천양지차다.

여행자는 목적지에 대해 가진 지식이 제한적이다.  142


전해 들어 알게 된 이야기(story)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여행을 한다...

서구 사회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보는 것을 우선시한다...

사진은 암암리로든 노골적으로든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 여겨진다.  144


소비 중심 사회가 시각적 이미지에 지나치게 지배당하면서 때로는 렌즈가 시선을 대체하기도 한다.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여행안내서, 지도와 더불어 문서로된 가장 흔한 정보원 중 하나가 여행안내 소책자(brochures)이다. 여행안내 소책자는 드러내 놓고 특정 여행지로 여행을 떠나도록 유도 하거나 설득한다...

안내 지도는 대체로 현지에서 구해서 여행지를 보다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게 한다.  145


많은 학자들이 주장한 대로, 시각 자료가 얼마나 압도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감안할 때 여행안내 소책자는 분명 행선지에 대한 이미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런 이미지들은 극히 단순화되어 있으며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진다.  146


여행안내 소책자는 평범한 일상을 담은 이미지는 거의 보여 주지 않는다. 대신에 화려한 볼거리와 즐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중점을 둔다. 이때 묵살해 버린 것, 즉 드러내지 않은 것이 중요하다.  147


아래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유학 광고 소책자를 살펴보자.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토 윤곽 안의 합성 사진 사용법에 주목해 보라. 중심에서 약간 비껴나 위치해 있는, 아기에게 뽀뽀하고 있는 젊은 여성 사진이 어떻게 사랑스러운 아프리카를 암시하고 있고 얼마나 눈에 확 들어오는지 눈여겨보자. 야생 동물들과 학생들이 화기애애하게 모여 있는 모습을 강조하고 있는 것에도 주목하자. 아기를 빼면 현지인들과 교류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즉 어린아아와 같은 아프리카는 절대 위협적이지 않다는 메시지다.  151


역사적으로 폭풍우 곶(Cape of Storm)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지만 여기서는 안전한 항구로서, 소비재를 구입하는 주용 관광 명소로 표현하고 있다. 이곳은 폭력도 가난도 없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다. 실업률이 40%에 육박하고, 살인 발생률과 HIV/에이즈 발생률도 세계에서 수위를 다투는 곳 중 하나라는 것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처한 현실인데도 말이다.  152


켈리 케이턴(Kellee Caton)과 칼라 산토스(Carla Santos)는 해상학기 프로그램(a Semeser at Sea program, 1963년에 처음 시작된 해외 유학 프로그램. 학부생들이 전용 유람선을 타고 일정 기간 해외 여러 지역을 방문한다.)동안 학생들이 찍은 사진.

케이턴과 산토스는 유람선에서 열린 학기 말 사진전 출품 사진들이 "식민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인 탐험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관계들"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동의하든 아니든 이러한 이들의 언급은 성찰적인 여행자라면 진지학 고려해 볼 만하다.  155-157




6. 여행을 준비할 때 고려할 문제들

   - "한 나라에 대해서 당신이 그곳에 있는 첫 두 주일 동안 알게 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은 결코 알 수 없다." 아이티 미국 국제개발처 사무소의 간판문구


여행자에게 큰 걱정거리라면 보통 전쟁과 테러로 대표되는 정세 불안, 건강, 범죄다. 세 가지 모두 관련 정보를 얻어 그에 따라 조치를 취하면 상당히 잘 대처할 수 있다.  165


자기가 모은 정보와 자료를 부모와 배우자 또는 연인과 공유하자. 분명히 걱정할 수밖에 없는 그들은 안심시킬 수 있고, 이렇게 정보를 함께 나누면 그들도 여행 과정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166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에 대해 상당히 미신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왠지 모르지만 항공 보험에 들면 비행기 추락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고 믿기라도 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보통 운명을 믿지 않으면서도 운명은 감히 시험하려 들지 않는 게 좋다는 믿음도 갖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 보험을 들면 아플 일이 없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확신으로 스스로를 기만한다. 보험에 마법과 같은 힘이 있다는 이런 믿음은, 재난이 너무 강한 인상을 남겨서 그런 일이 굉장히 자주 일어나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 때문에 생긴다. 보험으로 신들을 달래겠다는 태도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성관계를 피하거나 염소를 제물로 바쳐서 효험을 보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나만 해도 그렇다.  167


의사소통이 얼마나 용이한지가 여행지 결정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지만 보통 여행자들의 현지 언어 구사력은 창피할 정도로 수준이 낮다...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목적을 정하면 좋다. 지역 사회에 잘 녹아들기 위해서라든가, 연구를 위해서라든가 하는 식으로 계획을 세우면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된다. 현지 문화 이해에 대한 순수한 관심도 현지어를 알아듣고 말하려는 시도에 도움이 되고 동기 부여가 된다.  169


마라톤이 그렇듯이 언어를 배우는 데도 많은 훈력과 연습이 필요하다.  171


현지어를 더 쉽게 배우려면 확실히 동행이 있는 것보다 혼자 여행하는 편이 더 유리하다.  173


혼자 들 수 없는 건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 게 원칙이다.  173


프랑스 작가 콜레트(Colette)는 이렇게 썼다. "진정한 여행자는 걸어 다니는 사람이다." 걸을 때 느끼는 행복감과 만족감은 대개 단순함에서 온다.  176


혼자서 여행해야 할까, 아니면 동행이 있는 게 좋을까  178


혼자 여행하면 주변 환경에 대한 인지 능력을 기를 수 있다. 모든 감각이 환기되어 지역 사회와 더 친밀한 교감이 가능ㅎ다.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어떻게든 친구를 만들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 보면 친구 관계를 끊는 것보다 친구를 만드는 것이 더 쉽다는 걸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 혼자라는 조건은 최선을 다해 현지어를 배우려고 노력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된다. 또 혼자 하는 여행은 가장 자유로운 여행 방식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도 맞춰서 움직일 필요가 없고, 그때그때 벌어지는 상황을 형편에 맞게 이용하 수도 있다. 혼자 여행을 다니면 믿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있으므로 계획 수립, 건강과 안전 문제에서 자립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 타인의 호의에 더 많이 기대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친화력은 물론이요, 스트레스를 많이 주는 온갖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자연히 유머 감각도 기를 수밖에 없다.  179


고독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민감해지게 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사무쳐 오는 강렬한 감각은 기억 속에 경험을 아로새기는 역할을 한다. 또 사물과 자기 자신과 관계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된다. 고독은 너무 지나칠 때를 제외하면 소중한 것이다.  179


동행이 있으면 경험의 질이 높아질 수 있다. 친구를 데려가면 일을 분담해서 책임질 수 있고, 좀 더 효율적으로 경비를 절약할 수 있다. 자신감이 커지는 데다, 함께 무언가 독특한 경험을 하면서정과 유대감이 돈독해지는 보상도 뒤따른다. 그러나 여행에는 고생과 스트레스가 반드시 수반되다 보니 우정과 관계도 가혹한 시험을 받게 마련이다. 서로 좋아하는것, 싫어하는것, 공포의 대상, (비)융통성, 낯선 것에 대한 (불)관용, 유머 감각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여행을 같이 하면 친구들끼리 결속력이 강화되든지, 친구 사이가 끊어지거나 멀어지든지 둘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180-181


기대를 안고 해외여행을 준비하는 기간은 아주 신나는 단계이므로 이때 여행 일지를 쓰기 시작하는 게 좋다. 평범하고 세세한 준비 과정과 더불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이 여행에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지도 적어야 한다. 기대감을 묘사하고,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지 밝히고, 나가야 하는 이유를 기록하라. 예상되는 환경, 걱정, 공포를 상상해 보자. 이런 여행 일지에는 외국인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에 대한 느낌과 기대를 기록해도 좋다.  183


해외에서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려면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유머 감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184


적응력이 지나치면 여행이 결코 끝나지 않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 말은 결국 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84



7. 짐을 가볍게 하고 여행하기

   - "행복하게 여행하려면 짐이 가벼워야 한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특별히 혜책 받은 최첨단 세상에서는 경험을 전달하기는 쉽지만 경험을 하기는 어렵다. 현재 온갖 통신 장치 덕분에 사람들은 직접적인 경험은 거의 하지 않지만 세사엥 대한 경험을 경험한다. 실시간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면서 해외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경험보다는 전달로 바뀌고 있다. 즉 전달이 여행의 목적이 되었다.  194


여행은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전자 기기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기회다.  197


지루함은 혼자 힘으로, 자주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자극제가 된다.  197


사진은 기록 장치로서, 비망록으로서, 해외에서 보낸 경험의 산물인 상품이나 에세이나 책의 일부분으로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사진 촬영은 보이는 세계를 보여 주는 중요한 방법으로 여겨진다. 사진은 이야기만으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효과적인 증거가 되며, 말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기록의 진실성을 입증한다.

늘 그렇듯이 사진 기술을 이용하는 것에도 장단점이 있다. 무엇보다 사진이 여행의 주가 되어서는 안 되고, 첫째로 고려하는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되며, 윤리적인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카메라는 여행을 보강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202


가장 중요한 건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이다. 해외에서 자기가 한 경험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경험을 실제로 보여 주기 위해서는 어떤 사진을 써야 할까? 카메라를 이용해서 피사체를 전체적으로 조망한 모습뿐 아니라, 더 중요한 피사체의 세부도 보여 줘야 한다.  204


사진에 이름을 붙이고 목록을 만드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날짜와 장소를 기록한 일지를 작성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사람을 찍은 사진에는 가능하면 그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첨부하는 것이 좋다.  205


사진을 찍을 때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윤리적 문제도 있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다(taking picture)"는 표현을 쓴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수전 손태그(Susan Sontag)는 이런 의견을 제시했다. '사진을 찍는 다는 행위는 어딘지 약탈과 같은 면이 있다. 사람들을 찍는다는 건 그들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행위다. 찍히는 사람들 자신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방식으로 그들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절대 갖지 못한 그들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면서 사람들은 상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대사으로 바뀐다.'  206-207


에드워드 브루너(Edward Bruner)가 말했듯이 카메라는 관광객이 쓰는 가면이다.  207



8. 현지인과 수다 떨기

   -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일단 알지 못하는 것을 대면하고 나면 공포는 아는 것이 된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해외여행은 모르는 사람들이 베푸는 친절을 경험할 수 있는 값진 기회가 된다. 민감한 여행자라면, 해외여행이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잘하면 인생관 및 인생철학까지 바꿔 놓을 수도 있다. 

단체 여행이 아니라면, 여행자는 한 가지 중요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바로 어슬렁거릴 자유이다.  215


해외에서 성공적으로 지낸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들을 많이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들의 선의를 믿고 일단 좋은 ㅉ고으로 해석해야 한다. 히피 방랑객이었던 에드 번(Ed Buryn)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을 갈라놓는 중요한 요소는 두려움이다. 해를 입을까 봐 두려워하고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창피를 당할까 돠 두려워하고 두려워질까봐 두려워한다. 따라서 사람들을 만날 때 지켜야 할 첫 번째 원칙은 그들을 덜 두려워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때로는 퇴짜를 맞을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자. 다만 그런 일이 일어나도 심각하게 우울해 해서는 안 된다.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리면 그뿐이다.'  

두려움은 상상력과 여행의 숨통을 죈다. 사람들은 걱정이 되면 불쾌한 새악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분노가 일면 풍경을 봐도 음미하지 못한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뢰와 친밀감을 쌓아 가는 것이 좋다.  215-216


경계는 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마음을 열라. 두려움에 반드시 굴복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대비책은 항상 세워야 한다.  217


사람들이 해외로 나가는 이유 중에는 낯선 음식을 즐기고 싶다는 것도 있다. 

외국에 가 본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나 자기가 먹은 음식이 얼마나 별나거나 역겨웠는지를 가지고 서로를 이기려 들곤 한다. 일반적으로 요리가 "역겨운" 것이었을수록 우위에 설 수 있다. 음식으로 모험을 해야 하는 경우는 보통 두 가지다. 하나는 여행자가 레스토랑이나 시장에서 그 요리를 우연히 발견한 경우로, 어디까지나 돈을 주고 사 먹는 상황이다 보니 여행자가 그 별미를 먹거나 거부할 선택권을 갖고 있는 경우다. 더 심각하고 중요한 것은 두 번째인데, 여행자가 묵는 곳 주인이 손님을 예우하는 의미에서 특별 대접을 하거나 잔치를 벌이기로 한 경우다. 그런 대접에는 딱정버레 애벌레나 메뚜기에서부터 모파니 애벌레나 쥐나 동물 내장이나 황소 음경 등에 이르는 어떤 진귀한 지역 별미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225-226


사회의 기원은 음식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동반자(companion)"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빵과 함께"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콤 파넴(com panem)"에서 왔다. 먹는다는 것은 굉장히 사회적인 행동이다.  226


만나는 모든 사람이, 겉으로는 따분해 보일지 몰라도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따라서 언제나 귀 기울여 듣고 새로운 뭔가를 알아내려고 노력하자.  245


경청은 아주 중요하다.  249



9. 건강과 안전문제

   - "죽을 가능성이 없다면 모험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라인홀트 메스너


청결에 대한 개념은 문화마다 다르며, 심지어는 한 문화 안에서도 차이가 있다.  259


샤워는 반드시 매일 해야 한다는 개념도 최근에 아서야 생긴 것이다...

세계 많은 곳에서 매일 하는 샤워는 터무니없는 사치다. 

완벽한 청결은 보통 실현 불가능한 목표다. 반면 신체 특정 부분들, 즉 구멍들과 무엇보다 손은 가능하면 깨끗하게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260


소변과 대변에 대한 태도는 세월이 흐르며 변한다. 고대 로마 여성들은 얼굴에 대변을 발랐다. 젊은 피부를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이란 믿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회에서 대변, 구체적으로는 왕과 그 밖의 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의 대변은 약효가 있다고 여겨 다친 상처나 염증 부위에 바른다. 로마 여성들은 소변으로 목욕을 하고 입을 헹구기도 했다. 중세 유렵에서 태피스트리가 인기를 끈 이유는 궁정에서 귀족 남자들이 튀지 않게 소변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변은 커튼과 옷을 빠는 데 사용하는 다목적 액체였다. 지금도 미군 생존 수업에서는 소변을 응급 살균제로 쓰라고 한다. 사실 인도 일부 지역에서는 자기가 눈 소변을 마시는 게 장수 비결로 통하기도 했다.  261


이미 마개를 연 음료수를 받는다면 주인과 바꾼 후에 이게 "우리나라 풍습"이라고 말하라.  275



10. 좋은 여행 이야기 쓰는 능력을 높이는 방법

   - "진정한 여행자는 걸어 다니는 사람이다." 콜레트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를 해외여행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으로 여긴다. 그러나 가치 있는 통찰을 많이 얻을 수 있는 게 바로 글을 쓸 때다...

글을 쓴다는 행위가 더 깊은 성찰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여행 경험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행동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겪은 것을 글로 써서 되돌아보는 것이다.  281


자기 취향과 선호에 상관없이 일지나 기록 작성을 꼬박꼬박 규칙적으로 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좋다.  282


몇 가지 증거에 따르면 단시간씩 몇 번에 나눠서 쓰는 게 오랜 시간 동안 몰아서 쓰는 것보다 더 생산적일 수 있는 것 같다...

경험을 기록하고 작성하는 데 올바르거나 일반적으로 용인된 방식은 없다...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의 인생만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러 가지 단서들을 이용해서, 보통은 이야기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미루어 짐작한다.  283


글 쓰는 재주를 가지려면 대개 연습이 필요하다. 좋은 이야기와 통찰은 빈틈없는 기록에 달려 있다. 기록을 상세히 하면 분석과 분류가 가능하다...

기록이 뛰어나고 철저할수록 더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284


일지는 개인적으로 이용하려고 쓰는 것이다. 보는 사람이 나 혼자뿐이라 맞춤법과 문법에 구애되거나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것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나중의 일로, 명확한 대상을 상정하고 이야기를 쓰거나 말을 할 때다.  287


자기가 한 기록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거나 논문을 쓸 사람에게는 필수적인 작업이다...  288


성찰 과정은 현장 노트를 정서하는 동안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대체 성찰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과연 무엇일까? 사전에서는 보통 성찰을 세심한 고찰의 결과로 나온 이미지나 생각이나 아이디어라 정의한다. 그러나 성찰이 가진 또 다른 의미도 흥미를 자아낸다. 즉 반사면이 되비추는 이미지라는 정의다.  288-289


성찰 대상은 자기 자신부터 타인까지 모든 영역을 아우른다. 개인적으로 어떤 상황을 어떻게 다루는지부터 자기가 방문한 곳과 그곳 사람들에 대해 알아낸 것까지 다양하다. 성찰은 또한 양측이 어떻게 서로 쌍방향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지도 보여 줘야만 한다. 그러려면 이전에 가졌던 기대치와 목표를 검토해서, 그게 얼마나 만족되었는지 또는 아닌지, 그리고 왜 그랬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289


자기가 쓴 기록을 훑어볼 때는 나타나는 패턴과 법칙, 즉 주제에따라 관찰 내용과 데이터를 분류해서 기록을 재구성한다. 그렇게 해서 전후 순서뿐 아니라, 패턴이나 주제와 관찰 내용들 간의 연관성도 반영하도록 노력하라.  290


성찰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궁금하다면 단순한 비교나 대조에서 출발하자. 이런 환경을 고국에서의 환경과 비교하면 어떤가? 이 상황은 아침과 오후, 낮과 밤에 따라 어떻게 달라질까? 관찰자의 성별이 이 상황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291


스토리텔링은 매우 성찰적이고 직관적인 경험이 될 수 있다.  292


스토리텔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저 남을 즐겁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대화를 자극하는 것이기도 하다. 독일 희곡 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잘 표현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 머릿속에서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진정한 사고란 바로 이런 것이다."  293


내 생각엔 글쓰기를 미루는 버릇이 생기는 제일 큰 이유 중 하나는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하면 어떤 게 나올지 알 수가 없어서 막막해지기 때문이다. 많은 작가들이 글쓰기를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의식에 공을 들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글을 쓰기 전에 더블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거나 조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머릿속에 있는 단 하나의 초안을 키보드로 바로 옮긴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보통 이야기나 논문이나 책은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손봐야만 하는 여러 초안이 필요하다. 294




여행을 끝내며 - 인간은 우주 속 티끌 같은 존재

인류학자처럼 여행하면 비판적인 자의식을 갖게 된다.  305


성공적인 해외여행을 위한 중요한 열쇠는 여행자가 자기 자신의 교육과 경험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떠먹여 주기만 바라는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해외로 나간다는 것은 자기가 이미 갖고 있던 것과 곧잘 상반되는 새로운 생각과 감정에 스스로를 노출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때 열쇠는 겸손함이다.

해외여행에 성공하려면 실수를 하고 길을 잃고 헤매는 게 끔찍한 실패가 아니라, 성장을 위한 필수적 단계인 동시에 사실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을 줄 아는 능력이 꼭 필요하다...

여행에는 새로운 생각과 함께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307



역자후기 - 인류학자처럼 여행하라! 여행과 삶에 대한 새로운 눈을 갖게 될 것이다!

현재 한국은 해외여행객 연간 1400만 명 시대다.

전통적인 여행안내서는 여전히 정형화된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데 치중하고 있으며, 책을 통해 전하는 여행지의 문화와 현지인들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피상적이거나 우월주의에 젖어 있다. 아마추어들이 디지털 장비로 올리는 여행기나 에세이식 여행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적 감상 위주로 피상적이고 개인화되어 있거나 전통적인 여행안내서처럼 기존의 정형화된 이미지나 관념을 계속 답습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324-325


인류학자처럼 여행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또 한 가지 뛰어난 장점은 인류학에 기반을 둔 여러 가지 주체적인 여행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로운 여행이라고 착각하고 무턱대고 아무 계획 없이 떠돌이처럼 돌아다니며 뭐든 얻어걸리기만 바라는 또 다른 의미의 수동적인 여행을 경계하고 있다. 저자는 엄밀한 인류학적 방법론에 기초헤서 진정한 자기와 타인에 대한 이해, 의미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꼼꼼한 계획부터 세우라고 강조한다.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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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철학은 다르게 느끼는 것이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며 결국 다르게 사는 것이다.  9


경험이 내게는 철학이다.  11



1장 철학은 지옥에서 하는 것이다. 


철학은 인간 안에 자기 극복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모든 것을 잃은 지옥에서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음을, 아니 모든 것을 잃었기에 오히려 인간이 가진 참된 것이 드러난다는 걸 철학은 말해준다. 깨달음은 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천국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극복의 가능성도 필요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국에는 철학이 없고 신은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은 지옥에서 도망치지 않고 또 거기서 낙담하지 않고, 지옥을 생존조건으로 삼아 거기서도 좋은 삶을 꾸리려는 자의 것이다.  20


스님을 뵐 기회가 있어 꿈 이야기를 했다. "저는 관음보살이 부러워 죽겠는데 지장보살께 잡혀서 한 대 맞았습니다." 그랬더니 스님이 빙긋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관음보살은 오늘날로 따지면 재벌 회장 같은 분입니다. 정말로 가진 게 많지요. 그것을 모두 나눠줍니다. 그 이름만 부르면 누구에게나 줍니다. 그런데 지장보살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줄 게 없지요. 그런데 지장보살은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 곁에 있어 줍니다."

그때는 '그렇구나'하는 정도였는데, 오늘은 문득 '있어준다'는 그 말이 한없이 큰 선물처럼 다가온다. 지장보살, 그는 부처 없는 시대에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한다는 보살로, 모두가 성불할 때까지, 다시 말해 지옥이 텅텅 빌 때까지 자신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묘한 역설이다. 서원대로라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늦게 성불할 존재이다. 하지만 그런 서원을 세운 걸 보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빨리 성불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어떻든 지옥에 단 한 사람도 남겨두지 않고 성불할 때까지 곁에 있겠다는 그 무지막지한 서원 때문에 '업보가 정해져 있다'거나 '해탈 불가능한 존재가 있다'거나 하는 말들은 모두 힘을 잃어버렸다.  24


'있어줌' 이 말에서는 '있음'과 '줌'. 다시 말해 '존재'와 '선물'이 일치한다.  25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초조함이다. 초조함은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게한다. 초조한 자는 문제의 진행을 충분히 지켜볼 수 없기에 어떤 대체물을 문제의 해결책으로 간주하려고 한다. 성급한 해결을 원하는 조바심이 해결책이 아닌 어떤 것을 해결책으로 보이게 맘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사태의 종결은 불가능해진다.  28-29


카프카는 <죄, 고통, 희망 그리고 진실한 길에 관한 성찰>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모든 죄를 낳는 인간의 주된 죄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초조함과 무관심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고 무관심 때문에 거기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주된 죄가 단 한 가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초조함일 것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추방되었고 초조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아마도 그의 문학은 이 초조함을 몰아내려는 치열한 탐구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철학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지름길을 믿지 않는 것이다. 

삶을 다시 씹어보는 것, 말 그대로 반추하는 것이다. 지름길이 아니라 에움길로 걷는 것, 눈을 감고 달리지 않고 충분히 주변을 살펴보는 것, 맹목이 아니라 통찰,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한마디로 초조해하지 않는 것이다.

여담 삼아 말하자면, 고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저질렀던 죄의 정체도 초조함이었다.  29-30


길 위의 존재로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곤란이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길이 갑자기 나뉘어 어느길로 가야 할지 모르게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길이 막다른 곳에 이르러 더는 나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길을 모르거나 길이 없다고 느껴질 때, 내가 떠올리는 글이 하나 있다. 바로 중국 작가 루쉰이 쓴 어느 편지이다.  31


루쉰이 그의 연인 쉬광핑에 보낸 편지. 엄밀히 말하자면 연인에게 보낸 것은 아니고, 이 편지로부터 그들의 연애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루쉰은 1923년 가을에서 1925년 봄까지 북경여자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그의 소설사 수업을 듣던 학생 중의 하나가 쉬광핑이었다. 당시 쉬광핑은 군벌과 결탁해서 학교를 수구적으로 읶르어가던 총장에게 맞서 싸우던 학생들의 대표였다. 

쉬광핑은 당시 교육계의 타락, 그리고 졸업 후 안정된 지위에 연연해서 쉽게 타협하는 학생들의 처신에 울분을 토하며, 평소 누구보다 강직하다고 믿었던 선생 루쉰에게 긴 편지를 썼다. 게다가 모호한 답변은 사양이라며 선생을 꽤나 곤혹스럽게 했다.  32


(루쉰은) 사실은 자기 역시 쓰디쓴 현실을 위로해줄 '설탕'같은 것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백지 답안지를 내는 수밖에 없겠다"고 고백한다. 

'별수 없다'는 답변을 한 뒤 루쉰은 "이제부터는 그럭저럭 세상을 살아가는 나만의 철학에 대해 말하려고 하니 참고"하라고 적었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우리가 쉽게 부딪히는 나노간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갈림길, 즉 기로에 서는 겁니다. 갈림길 앞에서 묵적(묵자) 선생은 슬피 울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라면 결코 울며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우선 갈림길 입구에 앉아 잠시 쉬거나 한잠 자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연후에 내가 갈 길을 정하여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 자비로운 이를 만나면 그의 음식으로 허기를 채울지언정 결코 그에게 길을 묻지는 않겠습니다. 그 역시 앞길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호랑이를 만난다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호랑이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호랑이가 꼼짝 않고 서서 가지 않으면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을 겁니다. 나무에 허리띠로 몸을 묶어서 설령 그대로 죽는다 해도 호랑이가 내 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나무가 없다면? 그러면 별수 없지요. 호랑이에게 통째로 삼켜진다 한들 어쩌겠어요.

두 번째 난관은 '막다른 길'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완적(위나라 시인)은 통곡을 하며 돌아섰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막다른 길 또한 갈림길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헤쳐 나가야지요. 온통 가시덤불로 뒤덮여 도저히 갈 수 없으 ㄹ정도로 험난한 길은 아직 본 적이 없으니까요. 나는 이 세상에 본디 막다른 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게다가 운 좋게도 이제껏 그런 난관은 아직 겪어보지 못했던 것 같군요." 참고로 내가 인용한 문장은 <루쉰의 편지>.  33-34


사실 루쉰은 쉬광핑에게 한마디를 더 건넸다. 쉬광핑에게 그는 '무작정 앞서는 용사들'일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참호 안에서 때로는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며 노래도 부르고 카드놀이도 하다가" "불시에 총성이 울리면 어넺 그랫냐는 듯 즉각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그런 '참호전'이라는 것도 있다고 했다.  35


조금 여유를 갖고 다만 포기하지 않는 것.  36


중국 남송 시대의 선사인 대혜스님은 시끄러운 곳으 ㄹ떠나 고요한 곳에서 공부하려는 이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세간의 번뇌는 활활 타는 불과 같으니, 그 불길이 어느 때 멈추겠습니까. 시끄러운 곳에서 바로 공부하는 일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40


공부하는 이들은 시끄러운 곳을 피해 조용한 곳을 찾지만, 아마도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은 시끄러운 곳에서 고요를 얻는 것에 있을 것이다. 세사오가 거리 두기를 할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거리 두기를 해야 하며, 세상에서 벗어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공부일 것이다.  41




2장 배움 이전에 배움이 일어난다  45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이하 <논고>). 책의 서문에서 그는 철학적 문제들이란,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이 책이 담은 메시지는 다음의 짧은 문장들로 다 표현할 수 있다고 했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52


'비판'을 이해하기 위해 개략적으로 <논고>의 주장을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통상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펼친 주장을 '논리적 그림이론(theory of logical portrayal)'이라고 부른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란 사물들이 아니라 사실들(사태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제가 아니다'). 예컨대 사과라는 사물 자체는 없으며, 세상에는 '빨간 사과' '둥근 사과' '깨진 사과'같은 게 존재한다. 즉 '이 사과는 빨갛다' '이 사과는 둥글다'는 사실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 속에 존재하는 연결('사과'와 '빨강' 연결)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 명제이다. 언어와 사물은 전혀 닮지 않았지만('빨갛다'는 말은 전혀 빨갛지 않다), 사물로서의 '사과'와 '빨강'이 연결되듯 '사과'라는 말과 '빨강'이라는 말도 연결된다. 그러니까 명제('이 사과는 빨갛다)란 현실에 존재하는 '빨간 사과'를 언어로 그린 그림 같은 것이다. 반대로 '노래하는 사과'라는 표현에서 '노래'와 '사과'는 말로서는 연결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연결(입 없는 사과와 입으로 부르는 노래는 불가능한 연결이다)이므로 애당초 명제가 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명제들을 다 모으면 세계에 대한 우리 자신의 명료한 생각, 즉 사고(thought)가 된다고 했다.

연주자가 기호로 표시된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것처럼, 혹은 반대로 연주된 곡을 작곡자가 다시 악보로옮겨놓는 것처럼, 우리의 언어는 세상의 일을 논리적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그 자체로는 소리 나지 않는 악보가 멜로디로 전환될 수 있고, 소리인 멜로디가 그 자체로는 기호에 불과한 악보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표현이긴 하지만 둘 사이에 무언가 공통된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52-53


"우리가 하나의 명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명제가 참일 때 무엇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사용을 명료하게 해주는 활동이라고 했다.

그는 문제를 해결했으므로 불필요한 사다리를 걷어차듯 철학계를 떠났다. 그런데 케임브리지대학교에 다니더 ㄴ프랭크 램지라는 청년이 문제를 제기했다. 

램지와 편지를 몇 차례 교환했다. 그러는 중에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 중대한 오류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54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다시 철학계로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점은 모두가 찬탄했던 그 아름다운 건축물을 부수는 데 있어서 그가 아무런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문제에 대한 자신의 접근법을 통째로 바꾸어 버렸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말하는 '또 하나의 비트겐슈타인', 전기의 입장과는 사실상 정반대 편에서 전기만큼이나 위대한 철학적 입장을 개진한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탄생했다.  55


비트겐슈타인의 일기에는 <논고>의 요류를 지적햇던 갬지에 관한 짦은 메모가 있다. 

"훌륭한 반대는 전진하는 것을 돕지만, 피상적인 반대는 비록 그것이 타당한 것일지라도 사람을 지치게 한다. 램지의 반대 의견은 이런 종류의 것이다. 피상적인 반대는 문제를 그것의 생명이 있는 뿌리부터 파악하지 못하고, 너무 바깥쪽에 있어서, 비록 그 문제가 틀렸더라도 아무것도 고칠 수 없다. 훌륭한 반대는 문제 해결을 향해 나아가게 하지만 피상적인 반대는 일단 극복된 후에는 한쪽으로 치워버릴 수 있다. 마치 나무가 계속 자라기 위해 줄기의 마디에서 구부러지는 것처럼 말이다."  57



데카르트는 진리를 얻기 위해 우리에게는 '모루'와 같은 '사전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므로 그것을 얻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준비 없이 곧바로 진리를 얻는 일에 착수해서는 안된다고.

그에 대해 스피노자는 진리를 얻기 위한 사전 준비는 없다고 말한다. 준비는 그 '준비를 위한 준비'의 문제를 계속 제기할 것이고, 마치 공부를 한다면서 연필만 깎고 있는 학생처럼, 인식은 지연되고 결국에는 회의주의자들처럼 우리에게는 인식할 수 없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62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자면 앎을 생산하기 위한 선행조건 같은 것은 없다. 방법이란 공부의 선행물이 아니라 공부의 결과물이다.  63


내가 가진 것이 자가로가 나뭇가지뿐이어서 아직 공부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공부를 늦추는 핑계일 수는 있어도 공부에 대한 참다운 인식은 아니다. 공부는 언제든 할 수 있고, 당연한 말이지만, 바로 시작함으로써만 시작되는 것이다. 공부란 자신이 가진 미약한 것에서 시작해서 계속해서 앎을 생산하고 더 나아가는 것이지, 어떤 방법을 알아내서 단번에 도달하게 되는 게 아니다. 진리에 이르는 방법은 따로 없고 진리가 가는 길이 진리의 방법이다. 그리고 공부란 그 길을 스스로 내면서 나아가는 일이다.  64


중요한 것은 배움의 과정 중에 스스이 어디쯤에서 어떻게 개입하는가이다.  68


바보는 다만 '욕구가 멈추어버린 자들', '의지가 꺾인 자들'이다. 

'바보'는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겸손한 살마이 아니라, 현실적 차별을 그대로 인정하고 심리적으로 수긍하기 위해 자기 능력을 부인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이다.  69


생애의 모든 순간에 잘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또한 생애의 모든 순간에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할 것이다.  71


칸트는 규모라든가 화려함 같은 것에 속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내가 말하는 사건은 처음에는 작아 보였는데 대단한 것이었다든가, 대단한 것처럼 보였는데 실제로 별 볼 일 없는 것이었다든가 하는 그런 사건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사건, 우리에게 인류의 개선과 미래의 역사에 대해 말해주는 사건은 어찌 보면 너무 조용하게 일어난다. 

칸트는 구경꾼들,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의 맘속에서 일어난 일에 주목한다. "거대한 정치적 변동의 드라마가 일어나는 동안에 그것을 지켜본 사람드르이 태도", 진짜 혁명은 거기서 일어난다.

이해당사자도 아닌 사람들이 어떤 불이익조차 감수하고 나서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니 행도엥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맘속에서 어떤 변화를 겪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내 일이 아니지만 그것을 지켜보며 맘속에 공감이 일어날 때,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인류'를 느끼는 것이다.  74



리영희 선생은 70-80년대 대학을 다닌 많은 이에게 '사상의 은사'라고 불렸고, 검찰 공안부에게는 '의식화의 주범'으로 통했다. 그랬던 그가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과 관련해서 재판정에 서야 했던 적이 있었다. 사건의 주동자들이 그의 책을 읽고 촉발되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선생 자신은 그들의 행도엥 동의하지 않는다고 햇다. 그러니 선생이 동의하지 않는 일이 성생에게 감화를 받아 일어난 셈이다. 

이때 나는 리영희 선생이 사상의 은사로서(혹은 '의식화의 주범'으로서) 한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앗다. 그가 사사으이 은사, 즉 '생각의 스승'이었다면 그것은 자신과 '동일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 아닐까.  80


장애(disability)란, 어떤 본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육이든, 취업이든, 사랑이든, 생활하면서 겪게 되는 어떤 불가능(disability)의 체험이며, 그때 자신에게 생겨나는 '무능'과 '포기'의 정서이다. 어떤 불가능성의 체험, 그리고 그와 함께 일어나는 자기 무능과 자기 포기의 정서를 겪을 때 어떤 사람은 장애인이 된다. 그리고 불가능의 체험과 포기의 정서가 커질수록 그는 중증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불가능의 체험과 포기의 정서를 사실상 방치해왔다.  81




3장 사소한 것은 사소하지 않다


철학자 디오게네스 

"세상의 모든 것은 신의 소유물이다. 그런데 철학자(지혜로운 자)가 된다는 것은 신의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들끼리는 물건을 서로 나워 쓰지 않던가. 그러므로 철학자는 모든 것을 소유한거나 다름없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지혜롭다는 것은 만물과 사귀는 것(만물을 대하는 법을 아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그 자신이 만물인 신과 사귀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신의 친구가 되는 만큼, 다시 말해 내가 만물과 사귀는 만큼, 그만틈이 내 것이고 내 세계이다. 따라서 '만물이 이미 내 것'이라는 말은 극한의 소유가 아니라 소유의 불필요나 불가능을 가리킨다. 

'만물을 소유했다'는 디오게네스의 말이 일종의 '관계 맺음'에 대한 것이라면, 근대 사적소유권의 핵심은 '관계 처분'에 있다. 

만약 처분할 수 없다면 내 소유물이란 기껏해야 내 향유의 한계를 나타낼 뿐이다.  96


카를 마르크스가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했던 경고였다. 그가 사적 소유에 반대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우리를 너무나 둔감하고 일면적인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오직 '가졌다(haben)'는 감각 하나만 남고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관조하고 지각하고 바라고 활동하고 사랑하는 것" 다시 말해 모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감각들이 다 소외될 수 있다는 것이다.  97


내가 무엇을 어떻게 먹고 있는지,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슨 책을 읽고 무슨 음악을 듣는지, 어디가 아픈지, 위생은 어떤지, 기후는 어떤지, 이것들은 우리 삶에 정말 중요한 것들이다. 내 일상을 돌아볼 때 그 일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내 삶에 큰 중요성을 갖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떠받드는 어떤 것 때문에 그것들을 소홀히 한다. 추상적인 인류 평화보다 내가 요즘 듣는 음악이 내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철학이란, 그것들으 다루고 가꾸는 법이라고 할 수 있다.  101-102


니체는 '모든 것의 가치전환'이라는 표현을 종종 썼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이 반대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는 지혜로운 자는 저렴한 비용으로도 잘 살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102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금욕하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내가 고대 금욕주의 를 끌어들인 것은 욕망을 줄이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다른 삶을 욕망하라는 것이었다. 현재의 삶에서 더 많은 것을 욕망하는 것 못지않게, 현재와는 다른 삶을 욕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117


"대답은 이미 다 했소.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이 순간이고, 당신이 할 일이란 바로 저 사람을 보살피는 것이고,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저 사람이요."

톨스토이가 쓴 단편 <세 가지 질문>의 내용.

나는 이 이야기를 함석헌의 글 <이제 여기서 이대로>에서 읽었다. 

무엇을 하든, 모든 때는 똑같이 소중하다. 우리 삶에 '각별한 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각별한 때'는 우리가 모든 순간을 소중히 생각할 때 찾아온다.  119


"정말 믿는 사람에게는 '때가 장차 오지만, 지금도 그때'라는 말이 옳습니다."

'장차의 그때'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나는 아직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 그런 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미래를 준비하는 무척 겸손한 사람일 수 있고, 제 허물을 돌아볼 줄 아는 양심의 인간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겸손과 양심이 종종 행동을 늦추는 핑계, 어떤 소심함을 감추는 위장막이 될 수도 있다. 

양심의 가책은 사람을 창백하게 만든다.  120


함석헌은 이렇게 말했다. "잘못을 좀 잊읍시다. 양심이 둔해져서가 아니라, 날카로우면서도 잊는 겁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말인가. 그런 망각이야말로 건강의 징표이다.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이 있으면 가급적 그때에, 그날에, 그달에, 그해에 결산을 보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자꾸 되돌아보지 않기 위해 과감하게 꺾쇠를 쳐버려라.  121




4장 함부로 모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 제2권의 서문에서 "대 작업의 동기는 아주 간단했다... 그토록 끈질기게 작업에 몰두했던 나의 수고는 단지 호기심, 그렇다. 일종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그런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허용해주는 그런 호기심 말이다. 지식의 습득만을 보장해주고 인식 주체로 하여금 길을 잃고 방황하도록 도와주지 않는 그런 지식욕이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우리 인생에는 '성찰과 관찰을 계속하기 위해서 자기가 현재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으며, 자기가 지금 보고 있는 것과 다르게 지각할 수도 있다'는 의문이 반드시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렇다면 철학(철학적 행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걸 정당화시키는 게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를 알아내려는 노력, 바로 그것이 아닐까."  

교양을 쌓는 호기심이 아니라 '나를 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호기심,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길을 잃고 방황하도록 도와주는' 그런 지식욕.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지, 우리가 어디까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비판적 사유, 푸코는 그것을 철학이라 불렀다.  133


칸트가 '계몽'의 비밀을 지능이 아닌 '용기'에서 찾았듯이, 삶에서 무언가를 배우고자 한다면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것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무릎을 꿇는짓을 해서는 안 된다.  

쉽게 굴복한다는 것은 스스로 따져볼 능력과 의지가 없는 것이니 그에게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 바탕이 없는 것과 같다.  149


(그때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 단어는 진실한 언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네. 바로 그러하기에 우리는 절대로 무릎을 꿇고 굴복하지 않는다네.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네. 그것은 우리보다 먼저 죽은 이들이 우리에게 진실한 언어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들은 세상에서 생명력을 가지지 못하도록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을 내리기 때문이라네."

사령부는 커피를 마실 것인지, 계속 '굴복하다'에 적절한 단어를 진실한 언어에서 찾을 것인지를 이 땅 치아파스의 전통에 따라 표졀에 부친다. 만장일치로 커피를 마시기로 한다. 누구도 굴복하지 않는다.

 - 마르코스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

내가 이 이야기를 정성껏 필사해두고 적어둔 한마디는 이것이었다. '얼마나 위대한 무지인가. 굴복을 모른다는 것. 이 부족에게는 굴복이 없고 커피가 있다.'  152


아무런 저항도 없는 세계. 그것은 모든 권력자가 꿈꾸는 유토피아일 것이다.  153


정신분석에서 저항하지 않는 환자란 말하지 않는 환자와 같다. 그렇게 되면 분석가는 편안하게 자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다.

프로이트.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정신분석학은 남의 말을 들음으로써만 배울 수 있습니다."  154


'저항 없는 세상'을 꿈꾸고 '독백'만을 일삼는 사람들이 무엇을 놓치며, 스스로 어떤 한계에 갇히는지, 그래서 어떤 위험에 빠지게 되는지를 생각 해야 한다. 시끄럽다고 귀를 닫으면, 당연한 말이지만, 이해할 수도 없게 된다. 저항의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편하고 좋겠지만, 그것은 무지의 위험 속에서 누리는 안락이다. 그리고 그 위험은 누구보다도 그 안락을 누리는 자를 향하게 되어 있다. 한마디로 저항을 소중히 생각하고, 저항의 언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155-156




5장 우리는 자본주의 수용소에 살고 있다  159


사회적 약자들은 어떤 상황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기보다 권력을 가진 자의 눈으로 보려고 한다. 어차피 상황은 권력자가 그것을 어ㄸ허게 해석하느냐에 달렸기 때문이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이를 '해석 노동(interpretive labor)'이라고 불렀다(<역순의 혁명>)  160-161


커피 전문점의 아르바이트생은 고객과의 다툼이 생겼을 때 이 다툼이 점장에게 어떻게 비칠지 상상하며, 교실에서 어떤 문제가 터졌을 때 학생들은 그것이 교사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상상한다. 집안이 가부장적이라면 엄마는 오늘 일어난 일을 저녁에 돌아온 아빠가 어떻게 생각할지 온종일 고민할 것이다. 이처럼 타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노동은 그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 준다.  162


제품을 생산할 때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을 높이 치면서, 인간관계를 생산할 때, 즉 사람이 사람을 생산할 때는 낮은 지위의 사람이 상상력을 발휘하게끔 구조적으로 강제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평등한 사회의 특징이다.  


상급자가 하급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점장이 종업원의 마음을 헤아리고, 교사가 학생의 마음을 헤아리고, 부모가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다시 말해 권력자가 인간관계에서 해석학적 노동을 수행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164



고전적 자유주의 이념과 달리 신자유주의 정부는 매우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시장에 대한 개입은 최소화하지만, 시장을 위한 개입은 매우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이다.  181




6장 야만인이 우리를 구한다  197


당신의 놀람과 나의 놀람

2010년 11월 10일, 런던의 트라팔가(Trafalgar) 광장에 5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뛰쳐나와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당국은 물론이고 주최 측도 예측할 수 없었던, 심지어 지난 수십 년간 영국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규모의 시위였다. 광장에 나온 학생들은 곳곳으로 행진해서 몇몇 건물을 점거하기도 했다. 운동가들은 집권 보수당의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플래카드를 펼치기도 했다. 그중에는 휠체어를 탄 젊은이도 있었다. 

시위가 특별한 지도부도 없이 이곳저곳으로 번져나가자 당국은 시위를 무책임한 '난동'으로 몰아갔다. 경찰은 강경 진압에 나섰고 토끼몰이하듯 시위대를 몰아서 9시간 넘게 길거리에 가두어 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학생들은 한 달 내내 대학 강의실을 비롯한 곳곳을 점거했고 블로그, 트윗, 페이스북을 하며 서로의 분노와 아이디어를 엮어갔다. 12월 9일, 등록금 인상과 관련된 의회 표결이 이루어진 날에 시위는 절정에 달했다. 경찰은 삼엄한 경계를 폈지만 수많은 학생이 의회 광장에 모여들었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 매킨타이어(Jody Mcintyre)도 그 광장에 있었다. 조디는 11월 10일 보수당 건물 옥상에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12월 9일 시위대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때가 되면 나오는 그런 '전쟁 반대' 시위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시위라고는 참석해본 적도 없는 열네다섯 살 정도 돼 보이는 그런 살마들도 많았어요. 이 젊은이들의 마음에는 아무런 장벽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모두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려고, 그 목소리가 들리게 하려고 나온겁니다."

조디는 휠체어를 굴리며 동생과 함께 광장에 섰다가 점차 시위대 앞쪽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공격했다. 조디의 표현을 빌리면, 많은 살마들이 '소나기처럼 퍼붓는' 경찰의 곤봉에 두들겨 맞았다. 그리고 네 명의 경관이 조디의 어깨를 잡더니 휠체어에서 길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는 끌고 갔다. 동생과 친구들 역시 구타당하면서 다른 쪽으로 끌려갔다. 얼마간의 폭행이 이어진 후 경찰들은 그들을 놔둔 채 사라졌고 동생과 동료들을 만난 조디는 놀랍게도 다시 의회 광장으로 나아갔다. 거기에는 폭동진압 경찰이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 그들을 뚫고 나가던 조디는 폭동징압 경찰과 기마 경찰 사이에 자신과 동생이 서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앞서 자신을 끌어내리고 폭행을 했던 경관 중 한 명이 그를 보고는 다시 다가왔다. 경찰은 휠체어를 기울여 그를 바닥으로 내리꽂더니 다시 인도까지 끌고 갔다. 그 순간, 그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경찰에 소리를 지르며 항의 했다.

누군가 이일을 찍어 인터넷에 올렸고, 이는 영국 사회의 큰 논쟁 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놀랐던 것은 경찰의 폭력도, 거기에 대한 대중의 반응도 아니었다.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조디의 답변이었다. "그 사건에서 살마들이 정말로 물어야 했던 것은 왜 그 경관이 나를 휠체어에서 끌어냈는가가 아니라, 왜 사람들이 그것에 그렇게 놀랐느냐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정말로 내가 당한 일이, (그날 벌어졌던)바닥에 누워있던 열다섯 살 소녀의 배를 걷어차는 것보다, 아니면 학생들의 머리를 난타해서 응급실로 보내는 것보다, 그러니까 하마터면 뇌출혈로 죽을 뻔했던 그들의 경우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습니까?"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그날 경찰이 보인 행동은 그렇게 놀라운 게 아닙니다. 정부를 지키는 게 그들의 일이죠. 11월 30일에 우리가 본 학생 시위에서는 수천 명의 학생이 경찰의 허가도 받지않고 런던 중심부를 관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폭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지요. 그런 시위보다 이 정부에 더 위협적인 일은 없습니다. 그런 시위가 이 정부에 직접적 위협이 되었고 결국 그들은 거기에 대처하기 위해 경찰을 보낸 것뿐이죠."

참 쿨한 답변이었다. '그는 진짜 장애인이 아닐지 모른다'거나 '왜 하필 위험한 곳에 갔느냐'는 식의 보수 언론의 공격에도 조디는 마찬가지로 쿨하게 답했다. 요컨대 그는 해당 언론들이 경찰과 다를 바 없는 집권세력의 수호자들이기에, 그들에게 자신을 정당하게 다루라고 요청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경찰과 언론을 상대로 법정 싸움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는 경찰과 언론의 폭력이 그다지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는 듯 대했다. 오히려 인터뷰할 때마다 그는 인터뷰어에게 묻곤 했다. "왜 당신은 내가 당한 일에 그렇게 놀랍니까? 왜 영국의 대중은 이런 사건에 놀라는 거죠? 내게 일어난 일보다 더 놀라운 것은 내 일에 놀라는 바로 당신들입니다."

조디의 맘속을 알 수는 없지만, 이번 일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를 문제 삼는다면 두 측면이 있을 것 같다. 첫째, 어떤 점에서 보면 장애인의 삶에서 폭력은 특별하지 않다(특히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 당신이 장애인을 휠체어에서 밀쳐낸 폭력을 보고 경악했다면 당신은 그동안 장애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폭력에 대해 이 정도의 감수성을 가졌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장애인들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더 끔찍한 폭력들에 대해 엄청나게 분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당신이 보여준 분노는 어제까지 당신이 보여준 침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한다. 

둘째, 장애인의 일을 '특별히' 안타까워해 주는 사람들의 분노는 장애인이 제기하는 문제가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일반의 문제라는 걸 가려버린다. 장애인에게 행사된 폭력은 장애인에게만 해당 하는 특수폭력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행사되는 일반적 폭력의 일단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조디는 "길바닥에 끌려간 내 일에는 그렇게 크게 분노하면서, 머리가 깨져서 응급실에 가는 학생들에게 언론은 왜 주목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의 싸움은 장애인만의 특별한 이익과 관심을 요구하는 싸움이 아니라 사회 일반의 해방을 위한 싸움이다. 

조디에게는 아마도 이 두 번째 측면이 중요했던 것 같다. 그가 어느 기자에게 털어놓았듯이 그에게도 "휠체어에서 끌려나간 것은 아주 굴욕적인" 일이었다. 그것은 잔인한 폭력이다. 하지만 그는 엄연한 운동가였다. 어쩌다 시위 현장에서 재수 없게 폭력을 당한 사람이 아니라 거기에 정면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팔레스타인에 갔을 때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이스라엘 병사들이 밤마다 마을을 공격했어요. 실탄을 쏘면서요. 그에 비하면 런던의 경관이 저지른 행동은 내게 겁을 줄 수 있는게 못 됩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열여덟의 낭이에 남미에 갔다고 한다. 체 게바라의 삶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거기서 3개우러을 머문 뒤 전운이 감도는 팔레스타인에 들어갔고, 운동을 벌인 사람이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놀라는 거죠?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시위에서 경찰이 하는 역할을 몰랐던 것처럼, 인생 내내 잠들어 있었던 것처럼 보여요." 사람들은 '장애인' 조디를 걱정하고 '장애인'에 대한 경찰의 폭력을 비난했지만, 사실 그는 전체 대중의 일반적 이해를 위해 나선 투사이다. 그는 다양한 의제들에 개입하면서 여러 시위에 참여해왔다. 그의 블로그 <휠체어 위의 삶(life on Wheels)>의 부제는 한때 "혁명을 향해 걷는 한 사람의 여정(One man's journey on the path to revolution)"이었다.(지금은 "권력은 거기 맞서 요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느다(Power concedes nothing without demand)"는 말이 부제로 적혀 있다)

가장 선두에서 가장 보편적인 요구를 담아 투쟁하는 사람에게 연민을 보이는 것은 일종의 모욕이다. 지금 그는 싸우고 있다. '장애인'에게 어떻게 그런 폭력을 쓰느냐고 경찰을 향해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조디가 의아해하느 ㄴ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조디는 그들에게 놀라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 것 같다. 시위대라 대중의 삶을 파탄 낸 집권 세력과 싸우는 게 이상한 건지, 아니면 그 집권 세력이 보낸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게 이상한 건지, 둘 사이에 충돌이 발생한 게 이상한 건지. 아니면, 정말 그것이 아니면, 시위 중인 한 운동가가, 사회의 변혁을 원하는 한 명의 투사가 휠체어를 타고 있는 게 이상한 건지.  197-202




에필로그

세상에 말들은 부족하지 않다. 누군가는 패스트푸드처럼 빨리 사라지는 말들의 운명을 걱정한다고 하지만, 우리 삶을 가꾸는 데 필요한 좋은 말들은, 인류의 역사가 부지런히 생산해온 위대한 인물들 덕분에, 여전히 정신의 계주를 이어오고 있다. 내가 걱정하는 말의 운명은 다른 것이다. 언어학자의 관심과 철학자의 관심이 여기서 나뉘는 걸까. 말들의 수량과 수명보다 내게 더 중요해 보이는 것은 '말들의 방황'이다. 한마디로 '겉도는 말'의 문제다  247


때로는 무릎을 치게 하고 때로는 가슴에 와 닿아 어딘가에 적어두기까지 한 그 '좋은 말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 안에 잠시 머물기도 했던 것 같기는 한데, 지금은 그것들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

왜 그 '좋은 말씀'들은 순간의 짜릿함만을 안기는 탄산음료처럼 그냥 그때뿐인 걸까?

아마도 우리가 그 좋은 말들을 위장으로 직접 소화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그 말들을 진지하게 믿지 않았다.

구경만 했을 뿐, 그것들을 진지하게 체험하지 않았다.  248


우리는 무소유 정신을 갈파한 어느 스님의 책을 백만 권 넘게 사지만 정작 무소유를 실천하지는 않는다. 

앎은 어떻게 해서 우리의 피가 되는가? 앎은 언제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가?  249


체험해야 한다.

'깨우침' 일반이 그렇다. 과거에 내가 저지른 일을 그대로 떠올리지만, 그것을 달리 느끼고 달리 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뭔가를 깨우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옳은 말은 그저 옳은 말일 뿐이다. 그것이 내 것이 되려면 내 안에서 다시 체험되어야 한다. 내가 내 식으로 체험하지 않는 말이란 한낱 떠다니는 정보에 불과하다.  251


누군가에게 좋은 말을 들었다면 최소한 한 번은 내 목소리로 그것을 다시 들어야 한다.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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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믿고 있을 뿐 진리는 아닌, 상식이라 여겼던 것이 '어리석음'으로 밝혀지는 경우도 많다.  6



옛사람들으 '감정'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감정은 감추고 눌러야 하는 것이었다.  25


'감정 노동'에 바져든다. 속마음을 감춘 채 상냥하고 친절하게 상대를 대한다.  30


잘 모르는 사람들과 계속 마주쳐야 하니, 언제나 '알맞은'감정 상태로 상대를 대하는 것이다.  31



"별로 일하지도 않으면서 음식만 많이 먹으면 욕정만 살아납니다... 농부들은 흑빵과 크바스(호밀로 만든 맥주), 양파를 먹습니다. 이 정도만 먹고도 농부는 생기 넘치게 일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마다 800그램이 넘는 쇠고기와 새고기 그리고 열량 넘치는 음식을 먹어 댑니다. 그게 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정욕만 만들어 내겠지요."

톨스토이의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에 나오는 구절이다.  38


'효과적으로 욕망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가장 근본적인 것들부터 다스려야 한다. 그러니까 복잡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보다 근원적인 욕망부터 다스려야 한다는 뜻이다. 복답한 욕망이란 몸을 꾸미는 것, 스포츠, 오락, 호기심 등등이다. 근본적인 욕망이란 식탐, 게으름 그리고 정욕이다. 지나치게 많이 먹는 인간은 게으름과 싸워 이길 수 없다. 엄청나게 먹어 대면서 게으르기까지 한 사람은 정욕에 맞서지 못한다. 따라서 도덕적이 되려면 식탐부터 이겨 내야 한다. 즉 절식(節食 마디 절, 밥 식)이야말로 절제의 첫걸음이다. - 톨스토이 <첫걸음>에서  38-39


1870년에는 교육법에 의해 의무 교육이 늘어났다. 이때부터 부모에게 자식은 짐이 되었다. 권리는 줄고 의무만 잔뜩 짊어지게 된 것이다. 부모라는 자리가 인생의 무덤처럼 여겨졌다.  44


순결을 강조하는 사회일수록 출산율은 높게 마련이다. 정절 의무에 큰 가치를 두는 이슬람교나 가톨릭 문홪권에서는 다산이 일반적이다.

자유연애를 앞세우는 사회일수록 아이 갖기를 꺼리는 분위기가 널리 퍼진다.  46


왜 가족이 사라지고 있을까? 사회학자 엘리자베스 벡 게른스하임(Elizabeth Beck Gernsheim)은 그 이유를 간단하게 풀어 준다. 가족을 꾸리는 일이 경제적으로 손해인 탓이란다.  53


사람들은 예전엔 가족에게서 얻던 것을 이젠 국가에 바라며, 가족에게 했던 헌신을 사회에 해야 한다고 여긴다.  55


독재자는 결코 국민들을 여유로운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전쟁 준비, 사회 기반 시설 건설 등의 이유로 항상 국가 경제를 쪼들리게 한다. 그러고는 배고픈 시민들에게 큰 시혜라도 베푸는 양 복지 예산을 풀어 놓곤 한다. 자기 말에 꼼짝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57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일단 집중력을 잃고 산만해지면 다시 그 일에 집중하기까지 25분 남짓이 걸린단다.  59


깊은 행복감을 느끼려면 끈기있게 집중할 줄 알아야 한다.

집중력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오랜 노력을 이어 가게 만드는 꿈이 없다.

'프리터(Freeter)'란 '허드렛일로 생활비를 벌고 게임이나 하며 하루를 때우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61




미셸 푸코에 따르면, 감시 기술이 좋아질 때 공개 처형은 줄어든다.  81


권력자들은 사람들을 조금씩 서서히 길들여 나간다.

권력자들은 생활을 잘게 쪼갠다. "무단 횡단하지 말라", "세금을 제때 내라", "아무 데서나 소리 지르지 말라" 등 각각의 규칙에는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 받아야 할 벌칙이 따른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규칙들이 모여 때로는 개인을 옴짝달싹 못하게 묶는다.

지켜야 할 규칙이 세세하게 조개져 있으면 불만을 터뜨리기 어렵다.

보통 사람의 생활을 잘게 쪼개어 길들이려면 감시도 철저해야 한다. 내가 무단 횡단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른다면 어떻게 나를 처벌하겠는가? 그래서 권력자들은 감시 기술을 끊임없이 발전시킨다. 정치학자 렉 휘태커(Reg Whitaker)에 따르면, 감시는 더 철저한 감시를 부르게 마련이다.  82


역사상 우리 시대만큼 감시가 철저한 때는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표정은 그다지 어둡지 않다. 렉 휘태커는 그 까닭을 "우리 스스로 감시당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라는 데서 찾는다. CCTV 카메라는 대부분 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설치된다. 더 안전하게 길거리를 다니고 싶어서다. 돈을 빌리고 갚는 일이 전산으로 처리되면 나의 금융 거래가 모두 기록으로 남는다. 이는 곧 권력자들이 작정만 하면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전산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얻는 편리함이 만만찮은 까닭이다.  83


CCTV 카메라는 권력자들의 자못을 잡아내는 데도 요긴하게 쓰인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리 힘센 사람도 눈치를 보며 살 수밖에 없다...결국 우리는, 권력자들은 시민을 감시하고 시민은 권력자를 감시하는 '거울 같은 세상'에서 사는 셈이다.  85




절대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하나로 통일하는 일이 간단했다.  89


기계는 효율적으로 작동하여 최고의 효과를 내면 그것으로 충분하지만, 인간 사회는 제대로 기능하는 것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합리적 절차는 풍요롭고 투명하며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 준다. 그러나 절대 가치가 제공해 주던 '삶의 의미'는 채워 주지 못하는 듯하다.  93




상업이 지배하는 세상은 '타인 지향형(other directed type)' 사회다.  111


상업이 중시되는 시대에는 모든 것이 흔들리고 변화한다. 이익을 남기려면 세상의 변화를 잘 읽고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시대를 여는 사람의 모습은 오히려 정반대다. 자기만의 소신과 믿음으로 새로운 길을 연다.  112




간디는 공장에서 만든 옷은 일부러 입지 않았다.

공장의 기계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곧이어 자유를 잃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성장을 중시하는 경제는 만족할 줄 모른다.  182




사회학자 이반 일리히(Ivan Illich)는 학교가 필요한 이유를 삐딱하게 일러 준다. 학교는 한마디로 '주제 파악'을 하게 만드는 곳이다. 사회에는 잘나가는 이도 있고,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만약 어떤 이가 잘난 부모 덕분에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면 어떨까? 사람들은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더구나 가난하고 힘없는 부모를 둔 아이들은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하지만 "네가 공부를 못해서 지지리 궁상으로 살게 되었다."라고 하면 어떨까? 경쟁에서 진 겨로가이니 마지못해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학교는 이렇게 세상의 '신분'을 굳혀 나간다. 

학교는 사람들이 차별을 쉽게 받아들이게끔 이끈다.  207


이제 학교는 공부보다 '생활하는 곳'으로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교육 기능은 오히려 학교 밖에서 기대하는 분위기가 널리 퍼졌다. 학원에 기대는 이들도 셀 수 없이 많다. '평생 교육'에 대한 강조도 마찬가지다. 그 이면에는 학교보다는 기업과 사회에서 이뤄지는 교육을 더 중시하는 마음이 숨어 있지 않을까?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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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 "길은 우리가 걸어가는 데서 완성된다."

오직 장자만큼은 길이 미리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길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당돌하게 외쳤습니다.  5


길의 끄트머리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이곳에 우리는 바로 타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장자가 우리에게 만들라고 이야기했던 길은 다른 것이 아닌 타자에게로 향하는길이었던 셈입니다.  6


장자가 매번 망각을 강조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오직 망각만이 우리 삶을 좀먹는 기억들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망각은 하나의 통과의례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인문학의 최종 목적은 사랑과 연대를 가능하도록 하는 새로운 기억들을 구성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7


장자의 망각은 철학사상 가장 긍정적인 개념입니다. 그렇습니다. 망각이란 타자로 비약하기 위한 가벼움과 경쾌함을 얻기 위한 노력입니다. 간혹 장자가 비움을 뜻하는 '허(虛 빌 허)'라는 글자를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8


타자로 비약하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무거운 것들을 비운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우리가 타자에게 건너가는 데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망각과 비움은 타자에게 비약하는 데 있어 필요조건일 뿐 결코 충분조건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9


망각이나 비움이라는 개념.

장자가 문제 삼았던 것은 타자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우리의 판단 혹은 추측이라는 거지요.  23


장자의 소통(疏通 트일 소, 통할 통)이란 개념.

흔히 소통이라는 것은 마음과 뜻이 전해지는 것, 즉 의사소통을 상징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번역어 정도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통이란 개념은 이보다 더 복잡한 것입니다. 이 개념은 '트다'라는 뜻의 '소'와 '연결하다'는 뜻의 '통'이란 글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소'라는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막혔던 것을 터서 물 같은 것이 잘 흐르도록 한다는 작용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제 왜 이 '소'라는 글자를 강조했는지 아시겠지요. '소'라는 개념은 우리 마음에서 건입견을 비운다는 것. 그러니까 장자가 말했던 망각 혹은 비움과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24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타자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그에게 비약하는 것뿐입니다.  26



서양 철학이 망각의 중요성을 발견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닙니다. 망각은 이미 니체(F. W. Nietzsche, 1844~1900)에 의해 진지하게 숙고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는 플라톤으로부터 가장 멀리 벗어났던 철학자로 기억됩니다. 플라톤은 이데아에 대한 '상기'나 '기억'을 그것에 대한 '무지'나 '망각'보다 탁월한 상태라고 이야기 합니다.  36


니체가 이야기하는 망각은 기억을 초월하려는 능동적 힘, 기억을 벗어나려는 치열한 투쟁.  38


"물이 소용돌이쳐서 빨아들이면 저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나를 물속에서 밀어내면 저도 같이 그 물길을 따라 나옵니다. 물의 도를 따라서 그것을 사사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물을 건너는 방법입니다."  49


우리는 물이 빨아들이면 그것에 저항하고, 혹은 물이 밀어내면 그것에 저항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과는 달리 땅은 우리를 빨아들이거나 밀어내지 않습니다.

물의 복잡하고 다양한 흐름들에 맞추어 '감각-운동'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51


땅에서 편안해하던 주체가 물에서도 편안해하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 그는 자신에 대한 기억 혹은 주체의 동일성을 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52


망각은 타자와의 소통을 방해하는 '의식의 자기동일성'만을 잊으려는 것이지, 삶 자체의 능동성을 잊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63


장자느 우리도 일종의 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작동하는 피리라면, 우리는 타자와 마주쳐서 그에 걸맞은 소리를 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그런 소리를 내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소리를 내기에 바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속이 꽉 막힌 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79


남곽자기의 섬세함 묘사.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걱정, 염려, 변덕, 고집, 아첨, 오만, 허세, 가식 등과 같은 사람의 마음은 음악이 비어 있는 곳에서 나오고 버섯이 습한 데서 나오는 것처럼, 밤낮으로 우리 앞에 번갈아 나타나지만, 그것이 어디서부터 싹터서 나오는지 알지 못하겠다!' 세계 모든 것이 그렇듯이, 사람도 하나의 피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피리를 마음이라고 부를 수 있지요. 나무는 바람을 만나서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무가 비어 있는 구멍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79-80


결국 타자와 마주치지 않았는데도 발생한 소리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 소음일 뿐입니다.  80


우리는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소음을 제거해야 합니다.  81


비워질 때에만 나는 마주치는 타자에 걸맞은 소리를 낼 수 있는 피리가 될 수가 있습니다. 내 마음의 피리는 오직 그 경우에만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시작하겠지요.  82


소통(疏通)이란 개념은 '트다'는 뜻의 '소'와 '연결된다'는 뜻의 '통'이라는 글자로 구성되어 있는 말입니다. 막혔던 것이 터서 역동적으로 흘러가는 물길이, 그리고 막힌 구멍을 터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된 피리를 생각해보세요. 남곽 자기의 입을 빌려 장자가 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소통'이란 글자에 응축되어 있던 셈입니다.  83-84


'지인(至人 이를 지, 사람 인)의 마음씀은 거울과 같아 일부러 보내지도 않고 일부러 맞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대로 응할 뿐 저장해 두려 하지도 않는다.' 자신 앞에 사람이 도래했는데도 거울이 직전에 비추고 있던 나무의 상을 지니고 있으려 한다면 어떨까요? 그것은 거울이 아닐 것입니다.  87


거울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갖지 않고, 철저하게 현재 마주친 타자를 지각하는 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장자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가 현재의 지각을 왜곡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88


장자가 이야기하는 '지인(至人)'이란 바로 과거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 기억의 작용에서 가능해지는 미래에 대한 기대를 비워버린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인이란 일체의 허구적 매개 없이 혹은 미리 사변적으로 정립된 본질 없이 직접적으로 타자와 직면해서 조우해야 하는 삶의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89


기존의 생각, 혹은 기존의 의미를 비웠기 때문에 지인은 어떨 수 없이 새로운 의미를 채워야 할 숙명에 놓이게 된다고, 물론 새로운 의미는 타자와 마주쳐서 이 공백을 채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92


'A=-A'는 A라는 규정과 -A라는 규정이 겹쳐지는 공간, 그래서 언어와 그것에 의해 작동하는 사유의 분별작용이 불가능해지는 공간입니다. 장자는 이 공간을 '도추(道樞 길 도, 지도리 추)'의 공간이라고 규정합니다. '도추'란 글자 그대로 '도의 지도리'를 의미합니다. '지도리'란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도록 해주는 문의 회전축을 뜻합니다. 결국'도추'란 도가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는 계기나 조건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장자에게 있어 도란 미리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우리가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장자는 "도는 우리가 걸어 다녀야 이루어지는 것"(도행지이성 道行之而成)이라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115-116


사르트르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항상 내가 아닌 자로 존재하고, 나는 항상 내가 존재하는 자로 존재하지 않는다."  118


'원숭이를 키우는 사람'이 원수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셋, 저녁에 넷 주겠다"고 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고 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명목이나 실질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성을 내다가 기뻐했다. (그 원수이 키우는 사람도) 있는 그대로를 따랐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옳고 그름'(을 자유롭게 사용함)으로써 대립을 조화시키고, '천균'에 편안해 한다. 이를 일러 '양행(兩行 두 양, 다닐 행)'이라고 한다.  143


'알 수 없다'는 경험 혹은 실존의 상태는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판단을 중지하고,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만듭니다. 스스로 판단할 수 없으니, 이제 타자의 거동에 자신을 조율할 수밖에 없게 된 거지요. 장자는 이것을 '인시(因是 인할 인, 바를 시)'라고 부릅니다.  147


'롷고 그름(을 자유롭게 사용함)으로써 대립을 조화시킨다"는 표현이 '타자성의 테마'없이는 이해불가능한 것이라면, "천균(天鈞 하늘 천, 서른근 균)에서 편안해 한다"라는 표현은 '판단중지의 테마'없이는 이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자에게 있어 이 두 가지 테마는 "둘이 함께 가는(兩行)"것입니다. 다시말해 타자성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일종의 판단중지 상태에 이르게 되고, 역으로 일종의 판단중지 상태에 있게 되면 우리는 타자성을 경험하게 된다는 거지요.  151-152


판단중지에 대한 경험을 기술한 후 바로, 장자는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장주일 때 날개를 휘저으며 날갯짓을 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나비일 때 인생에 대해 철학적 성찰을 할 수도 있습니다. 장자에게 어느 경우든 "구분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상태는 타자와의 소통은 커녕 일종의 착각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6-157


우리 자신과 타자 사이에 엄청난 틈을 긍정하고 이 심연을 건너가려고 모색했다는 점에서, 그의 철학이 지니는 깊이와 근본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길은 걸어 다녀서 이루어진다" '길'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걸어감'이 먼저 있습니다. 태초에 '길'이라는 원리가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걸음'이라는 행동이 먼저 있었다는 것입니다.  162


자타(自他) 사이의 심연을 건너기 위해서는 일종의 결단과 비약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비약이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는 충분히 가벼워야만 합니다. 심연을 건너기에 충분히 가볍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을 비워야만 하는 거지요. 타자와의 소통을 가로막는 심연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보물처럼 가지고 있었던 것들(선입견, 오만, 자의식, 사변적 사유 등등)과 경건하게 작별의식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심연을 건너는 데 장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비워야만 우리는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가벼움과 경쾌함, 도약의 힘을 얻을 수 있게 되지요.  163-164


비움의 수양은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일 뿐 결코 타자와의 소통을 필연적으로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164


시간을 '지속'이라는 존재론적 원리로까지 승화시켰던 베르그손의 입장을 살펴보지요.

'모든 의식은 기억이다. 즉 현재 속에서의 과거에 대한 보관과 축적이다...'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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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가벼움이 횡행하는 시대, 인문 내공을 권하다


인문적 마인드를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건이기 때문이다. 인문적 사유 능력은 어떤 문제의 핵심을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인문적 사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주체적이고 지혜롭게 자기 인생을 꾸려갈 수 있다.  8


정직하고 성실하게 노력해서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은 대개 인문적이라는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고, 부단한 노력은 대개 '깊이 있는 탐구'를 동반하게 되는데, 그 탐구가 인문적 사유를 유도하기 때문이다. '깊이 있는 탐구'는 자연스럽게 다양하고도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낳고 그로 인해 사람을 인문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9


지식인들이 제시한 아이디어들 중 무엇이 올바르고 나은 것인가를 검토하고 판단하는 것은 시민들의 몫이어야 한다.

인간의 지력은 읽고, 쓰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 그 중에서도 '인문적으로' 읽고, 쓰고, 생각하는 것은 지력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 책은 그 세 과정에 대한 이해와 그 원칙과 방법, 나아가 태도의 문제까지를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10


일반적으로 지력을 발전시켜나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11




서장 - 삶을 돌파하는 힘, 인문 내공


인문적 가치의 핵심. 인문 정신의 요체 중 하나는 내 삶이 존엄하다는 것, 타자 역시 나만큼 존엄하고 동등한 가치를 가졌다는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17


자기 이익에 반해 보이는 일들을 태연히 일어나게 내버려둔다.  23


나의 어머니는 .. 젊은 시절부터 근 40년 동안 남의 옷을 만들고 수선해주면서 세 남매를 키웠다... 어머니가 하루는 '바느질도 다 같은 것이 아니며, 하는 사람에 따라 격(格)이 다르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다.  23


인문적 사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그는 자기 내부에 일종의 자가발전 시스템을 갖춘 것과 같다. 그는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날마다 조금씩 발전한다.  24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자기 신념을 좇아 사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좋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의 자기 신념대로 사는 것뿐 아니라, 지속적인 노력으로 그것을 갱신해 나갈 필요가 있다.  25


생명이 탄생하기 이전의 무(無), 생명이 소멸한 이후의 무에 대한 호기심이다.

'무'에 대한 관심, 그것은 철학의 시초이고 종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33


인간은 밖으로는 하느르이 별을 보며 우주를 상상한다. 외부 세계에 대해 일정한 형태를 상상한다. 그 일정한 형태를 '범형(凡形)'이라 한다. 또한 인간은 안으로는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그것을 '성찰'이라고 한다.  35


서양에서는 인문을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studia humanitatis)'라고 했다. '인간성에 대한 연구'를 의미한다.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간다운 것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답하는 것이 '인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인류 문화에 대한 '정신과학'이었다. 

동양에서는 인문을 한자로 '人文'이라고 쓴다. '文'을 우리는 '글월 문'이라 읽는다. 그것은 본래 '무늬'를 의미했다. 동양에서 '글'이라 하면 주로 한문을 말한다. 동양에서 라틴어와 같은 지위를 갖고 있는 한문은 잘 알다시피 상형문자다. 상형문자는 사물의 모양을 본떠 만든 글자다. 그것은 말하자면 사물의 실루엣을 그린 것이다. 그렇게 '文'은 '무늬'와 '글자'를 동시에 의미하게 되었다.

'人文'은 직역하면 '사람의 무늬'라는 뜻이다.  37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스스로 생각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내 생각인가?' 하고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그 중 많은 것은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본 것이다. 많은 사람드은 그것을 자기 생각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44


'혼돈의 내면을 가진 현대인들이 아무 맥락 없는 혼돈과 부딪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 [우리 안의 히틀러] 막스 피카르트  48


현대인은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저 단편적인 지식과 정보들이 맥락 없이 머릿속을 부유(浮游)할 뿐이다.  49


인문서를 읽으면 인문적 사유 능력이 생긴다. 인문적 사유 능력이 있으면 대중의 행동, 사회현상, 자연의 변화, 지식과 정보, 예술 작품, 과학기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고,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에 기반해 삶의 지혜가 생긴다. 그로 인해 인문적 사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 현명하게 인생을 살아 나갈 수 있다.  52





1부 공력(功力) - 지성인으로 거듭나는 생각의 내공


"모두가 비슷하게 생각할 때, 아무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 월터 리프먼  54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망연해지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 배우기만 하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그물(罔)'에 걸린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암담해지고, 혼자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자기 생각에 갇혀 편협해지거나 오만해지기 쉽다는 뜻이다.

오늘날에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는 것' 중 무엇이 더 큰 문제인가? 당연히 전자다. 요즘에는 '학력 인플레'라는 말이 나돌 만큼 고학력자가 많다. 유치원에서부터 따지면 많은 사람들이 20~30년 동안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고학력자들이 투자한 시간과 비용, 노력한 만큼 지적 성취나 사고력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른바 '티처 보이(teacher boy)'라는 말이 있다. '맘마 보이(momma boy)'가 엄마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다면, '티처 보이'는 선생이 없으면 공부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왜 그런가? 유치원 시절부터 한 번도 선생 없이 공부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선생이 가르쳐준 것을 그대로 외우는 데는 도사다. 그러나 스스로의 머리로 의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유추해보라고 하면 어려워한다. 그렇게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오늘날의 문제는 너무 적게 배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이 배워서 문제다. 사고 능력에서 중요한 것은 분석과 종합이다. 분석과 종합은 독학(獨學), 즉 혼자서 책을 읽고 이렇게 저럭헤 생각해 볼 때 배양된다.

학력만큼 지력이 발전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평가 중심의 교육제도에 있다. 우리는 국어, 영어, 수학을 배웠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국어, 영어, 수학의 '시험 보는 법'을 배운 것이다. 학생들은 교육 받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있다.  57-58


역사적으로 국가 조도의 근대적 교육의 기원은 19세기 초반 프로이센에서 시작되었다. 프로이센의 교육 목적은 군대에 충성하는 군인, 사용자에 순종하는 노동자,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진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의무교육은 공립학교, 개인 학교, 홈스쿨링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던 교육 형태를 강제로 소멸시켰으며, 국가가 교육을 독점하게 되었다. 의 무교육의 목표는 가정으로부터 아이들을 떼어내어 '부모 없는 사회(학교)'를 구성해 기업이 필요로 하는 훈련된 노동자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그낻 교육 자체가 애초부터 지성인의 양성 같은 고매한 목표와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제도 교육이 목표하는 것은 여러 지식을 하나의 의미 있는 질서로 통합하는 지적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사회가 처방하는 특정 기호와 정보를 얼마나 받아들였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제도 교육은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없애고, 기득권을 향한 개인의 노력을 끊임없이 생산해낸다. 그것은 제도 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비판적 사유 능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도 교육은 교과서나 참고서 같은 교재를 통해 가르친다. 문제는 이 교재들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는 커녕, 오히려 지적 탐구에 대한 열정을 불식시킨다는 점이다. 교재에는 많은 지식들이 무미건조하게 '교양의 차원'에서 개괄되어 있을 뿐이다. 교재에는 여러 지식인들이 애초에 가졌던 문제의식의 심각서오가 진지함, 철받함이 소거되어 있다. 학생들은 지식의 뿌리인 '현실적 문제의식'과 '윤리적 호소'를 실감할 수 없게 된다. 학문에 대한 열정은 학위나 학점에 대한 열정으로 대체될 뿐이다.  59


지성인이 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혼자 탐구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그들은 그냥 많이 배워서 지성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를 바탕으로 '독학 능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지성인이 된 것이다. 지성인의 핵심적 능력은 독학 능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학은 독립적인 사고를 가능케 하고, 다양한 사고를 낳는다.  61


대중매체는 여론을 전달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묘한 현상이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알려줄 때, 대중매체는 대중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거울처럼 비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대중매체는 어떤 방식으로, 어떤 단어를 써서 질문하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통계나 답변에 대한 해석의 권한도 대중매체에게 있다. 그를 통해 대중매체가 자신이 원하는 여론을 형성해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중매체가 여론을 전달하는 것은 단순한 사실 전달 이상이다. 여론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당신도 이렇게 생각하라'는 암묵적인 압력이 존재한다. 특별한 자기 입장이나 자기 확신이 없는 한, 사람들은 이 압력의 영향을 받게 된다.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잘못 판단할 리 없다'고 믿는 것이다. 대중매체도 이런 영향을 알고 있다. 그래서 대중의 생각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여론을 가시화하기도 한다. 그럴 때 여론은 '대중의 생각을 담은 결과들'이 아니라, 반댈 대중의 생각을 낳는 씨앗이다. 대중매체는 단순한 여론의 전달자가 아니다. 여론의 창조자이자 여론 형성의 주체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언론 매체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일은 세상에 없는 일이다. 그만큼 언론의 사회적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언론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활동하는 범위는 좁고 잘 아는 사람도 몇몇에 불과하다. 언론사는 주로 경찰서, 시청, 법원, 청와대, 국회 등 국민과 당국이 접촉을 일으키는 곳에 -주로 권력기관에- 기자들을 배치할 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주로 기사화한다. 언론은 자신들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알고 개괄해줄 수 있음을 암묵적으로 전제하지만, 그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오늘날에는 언론 플레이가 중요하고, 그에 따라 기업이나 관료 집단, 정치 집단은 대개 언론 홍보팀을 운영한다. 언론 홍보팀은 어떤 사안에 대한 보다 자료를 각 언론사에 보낸다. 기자는 보도 자료를 토대로 기사를 작성하게 되는데, 단지 참고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대로 베끼는 경우가 많다. 그런 보다 자료의 재뇽은 객관적이 수 없다. 그것은 해당 기관들이 독자들에게 보이고 싶은 내용과 관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언론사들이 보도 자료를 베낌으로써 독자들은 기억이나 관료 집단, 정치 집단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64-66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절대 진리가 아니다. 근대 학교 교육의 주체는 국가이고, 그런 만큼 거기에는 국가 이데올로기, 국가 이익의 논리가 반영되어 있다. 근대 교육 시스템은 기업이 요구하는 노동자를 길러내는 목적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학교 교육에는 국가의 논리와 더불어 기업의 논리가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66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적 성찰>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상당수의 그릇된 의견들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 그리고 확실하지 않은 원리에 기초를 두고 받아들인 것들은 의심스럽고 불확실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받아들였던 모든 의견을 회의에 부치고 근원적인 것에서 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추론 방식이 바로 '방법적 회의'였다. 그 과정을 통해 마지막으로 남은 명제가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였다.  67


불교 경전 <앙굿타라 니카야(ANgutara Nikaya)>에도 리런 글이 있다. "어느 것이든 계시나 전통이나 보고 같은 것에 근거해서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말고, 또 그것이 단순히 사변의 산물이라거나, 어느 한 입장에서 볼 때 진실되다거나, 사물의 피상적 관찰에 의한 것이거나, 선입견에 맞아덜어진다거나, 권위가 있다거나, 스스의 위신 때문이라거나 하는 등의 이유만으로 받아들이지 말지어다." 지성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상식과 권위에 쉽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 상식과 권위로 무장된 모든 관념을 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안으로는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밖으로는 타인의 의식을 일깨울 수 있다.  68


고대인들은 관계 속에서 만물이 생겨나고, 살아가고, 소멸한다는 것을 이미 알았던 것 같다. 예를들어, 한자 '목숨 명(命)'을 파자(破字)해 보면 '모두 합(合)'과 '나눌 분(分)'으로 나누어진다. 이 한자에는 '합쳐지고 분리되는 과정이 반복됨'을 통해 모든 생명 혹은 생태계가 유지된다는 고대인들의 통찰이 깃들어 있다. 내가 어제 돼지고기와 배추 김치를 먹었다면, 그것은 지금 내 몸의 일부를 이루고 잇다. 남이 나의 일부로 합쳐진 것이다. 화장실에서 우리가 큰일을 보면 그것은 나누어지는 과정이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합쳐진 결과이고, 죽는 것은 그것이 다시 불리되는 과정이다. 사람이 죽어 해체된 원소들은 다시 다른 생명체의 일부가 된다. 이 모든 과정이 합쳐지고 나누어지는 과정의 반복이다.  70-71


관계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불교 철학이다. 불교의 <상응부경전>에는 붓다의 가르침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이것을 '연기(緣起)'라고 한다. 연기란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탄생하고 소멸한다. 나는 타자의 존재 조건이고, 타자는 나의 존재 조건이라는 말이다.  71


흔히 인간은 '지적 존재'로 인식되지만,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 지적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보고 듣는 것이 있어야 지력이 발전한다.

지식이 체감되기 위해서는 현실과의 연관성이 풍부해야 한다.  76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현실적 문제 해결'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잊고 지식 자체에 집착하곤 한다. 심지어 특정 지식을 만고불변의 절대 진리로 믿기도 한다. 그것을 '교조주의(敎條主義)'라고 한다. 교조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 지식과 사상이 현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늘 자문해야 한다.  77


문화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사고는 나의 직업"이라고 했다. 지성인이 되려면 생각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치열하게 사고해야 한다. 그 치열함에는 현실적 맥락 속에서 사고하는 것, 사고 내용을 현실적 맥락 속에서 해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을 도외시하는 것은 지적으로 안이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78


깨어 있는 의식은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계기로 생겨난다.  79


쾌락과 고통의 관계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반대가 아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인간의 대표적인 쾌락인 식욕과 성욕을 보자. 어떤 사람이 배가 몹시 고플 때 산해진미로 가득 찬 식사를 한다면 만족도는 극에 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매 끼니 계속된다면? 만족도는 점차 떨어지다가 나중에는 별 맛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도 계속 먹어댄다면? 과도한 영양 섭취로 각종 질병이 생기고, 그로 인해 오히려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성적 쾌락도 마찬가지다. 성적 쾌락을 과도하게 추구하면 그것은 더 이상 쾌락이 아니다. 만약 극단적으로 추구한다면, 그는 죽음에 이를 것이다.

쾌락은 한계효용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쾌락은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금세 저만치 달아난다. 아무리 좋은 쾌락도 시간이 지나면 일상성이 감각을 무뎌지게 만든다. 그 때문에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계속 강도를 높여가고, 한 욕망으로부터 다른 욕망으로 계속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 쾌락의 극단적인 추구는 불행과 고통을 낳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지속적인 쾌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고통은 지속적이다. 배고픔, 질병, 고문 등으로 인한 고통은 시간이 지난다고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82-83


여행은 현대인들이 대표적인 즐거움으로 꼽는 것이다. 사실 '집 나가면 고생'이다. 그런데도 여행이 즐거움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이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여행은 낯선 곳으로의 탐험이다. 그 과정에서 여행자는 여러 당혹스럽고 불편한 일들과 조우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여행자가 길을 헤매다 더위와 배고픔에 하루 종일 시달렸다 하자. 그러다 어두컴컴한 저역에 겨우 민박을 구해 지친 몸을 쉬게 되었다. 거기서 샤워를 하고, 먹을 것을 구했다. 그럴 때 여행자는 집에서는 쳐다보지도 않을, 보잘것 없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아, 정말 행복하다. 이것이 바로 여행이 주는 기쁨이지!' 하고 여길 수 있다.

그것은 평소보다 무엇이 더 채워지는 데서 오는 행복감이 아니다. 더러워진 몸과 배고픔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결핍감이 사라지는 것에서 오는 행복감이다. 말하자면 무엇이 플러스됨으로 인해 행복한 것이 아니라, 마이너스의 상태가 사라지는 것에서 오는 행복감인 것이다. 그 마이너스는 여행하지 않으면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늘날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인위적으로 결핍의 상황을 만들고, 그 결핍이 제거되는 것에서 쾌감을 맛본다. 이런 여행의 즐거움 역시 고통과 쾌락이 동전의 양면임을 잘 보여준다.  83


인간은 범형의 구성 능력과 성찰 능력을 가진, 그리고 생각한 것을 세계에 구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인간은 분명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는 존재다. 그러나 가능성이 오만함으로 변질될 때 인류는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90


칸트 "인간은 인식된 현상세계만을 알 수 있으며, 인식되기 이전의 세계인 '물자체'는 알 수 없다.  91


세계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감각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그 감각 방식이 달라지면 그에 따른 인식도 달라진다. 그것을 철학적 용어로 '움벨트(Umwelt)'라고 한다. 그것은 감각기관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 세계를 일컫는다. 모든 동물은 '움벨트'가 다르다. 무엇이 우월한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모든 생물은 상이한 움벨트 속에서 살고 있다.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는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우리는 인간 인식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인류는 자신의 지적 능력에 대해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94


모든 대상은 거리르 두고 볼 때 전체가 파악된다. 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거리를 두고 봐야 어디에 어떤 무넺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98


사물을 거리를 두고 봐야 하는 것은 넓게 볼 수 있어서만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래야만 대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거시적으로 보는 것은 시야의 문제를 넘어 사유의 문제다. 거시적으로 봐야 대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철한 판단이 가능해진다. 내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질곡에 빠졌을 때, 내 문제를 남의 문제처럼 거리를 두고 보면 훨씬 지혜로운 판단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조언이 도움이 되는 것도, 그들이 내 문제를 나보다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99


인문적으로 사유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시간적 거리를 두는 것이다.  100


시간적 거리가 가져다주는 지혜를 잘 표현한 유명한 말이 있다. 헤겔이 좋아했던 말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가 그것이다. 미네르바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그리스 신화의 '아테나'와 같은 여신)이고, 올빼미는 철학의 상징이다. 지혜의 여신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올빼미가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비상(飛上)하기 위해, 서서히 날개를 편다는 말이다. 지혜의 여신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철학의 상징인 올빼미, 얼마나 현명하겠는가? 그야말로 '지혜의 정수'다. 그런 올빼미가 왜 다른 때가 아닌 '황혼녘'에 날개를 펴겠는가?

황혼녘이 성찰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하루를 준비하는 아침이나 한창 일하는 낮에는 하루를 돌아볼 수 없다. 사람이 상념에 빠지기 가장 좋은 시간은 저녁이다. 일을 마치고 난 후, 해가 지는 시간, 세상의 온도가 가라앉는 시간이 되어서야 인간은 비로소 하루를 돌아보고 생각할 만한 여유를 갖게 된다. '황혼녘'이란 결국 하루를 돌아볼 만한 시간적 거리가 확보된 때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황혼녘인 노년에 이르러서야 인간은 '나의 삶은 어땠나?'하고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지혜를 얻는다.  101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사는 것은 심리적 정신적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인간은 혼자서는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때에만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를 느낄 수 없다. 아무리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도 어떤 집단에도 속해 있지 않다면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인간이 실존적 의미를 획득하는 것도 사회 속에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번우주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의 존재적 의미는 오로지 사회적으로만 획득될 수 있다. 인간이 실존적 충만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존재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 집단은 그냥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집단의 논리'를 개발한다. 집단의 논리는 집단에게 이익이 되는 노리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집단 전체에게 골고루 이익을 주지 않는다. 집단 논리의 가장 큰 수혜자는 대개 지도칭이다. 그들의 이익이 집단 전체의 이익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집단의 논리는 보다 고차원적인 도덕적 규범으로 포장된다. 예를 들어, 국가의 이익은 애국의 이름으로, 종교 집단의 이익은 순교의 이름으로, 사회의 이익은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된다.

집단의 논리는 공적 이익의 논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사적 이익의 논리보다는 도덕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그러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논리는 범인류적 차원에서 보면 비도덕적으로 보인다. 집단을 위한 헌신과 희생도 범인류적 차원에서 보면 우스워 보이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익의 논리'는 그것이 개인을 위한 것이건 집단을 위한 것이건 아무리 그럴싸히게 포장되어도 그 본질은 유치한 것이다. 남과 우리를 가르고, 그에 따른 차별과 배제의 원리를 기본으로 삼기 때문이다.  104


애개 개인의 가치관은 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이 생산해내는 집단 이익 논리들이 내재적으로 수용된 결과이기 십상이다. 그것은 개인의 자율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특별한 지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많은 파괴와 억압, 폭력적 현상 배후에는 집단의 논리에 기반을 둔 '집단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 개념 중에 (被投)'라는 것이 있다. '내던져짐'이라는 뜻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들이다. 자기 의지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날 국가, 가문,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그 선택은 운명적이다. 그리고 인간은 태어나면서 속하게 된 집단이 생산한 논리를 지속적으로 학습하며 성장한다. 학습된 집단의 논리는 어릴 때부터 익숙하다. 그런 까닭에 그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는 쉽지 않다. 그것을 대상화하고 낯설게 바라보는 것이 훨씬 지성적인 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사회에는 집단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각종 제도적 장치들이 있다. 이 또한 집단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어렵게 만든다. 예를 들어, 국가는 각종 작위와 지위, 메달, 휘장, 훈장 등의 서훈 체계를 통해 청성 경쟁을 유발시킨다. 또한 국기, 국립묘지, 국가 유공자, 국민의례, 기념일, 기념행사, 어용 예술 작품, 동상, 기념관, 박물관, 정부가 발행하는 출판물 등 다양한 명예 상징을 통해 압도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들은 자연스럽게 개인들을 국가 중심의 사고와 감정에 젖게 한다.  105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지적 탁월성의 본래적 의미는 비판 정신이며 지적 독립성이다"라고 말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권력과 지성인>에서 "권력에 흡수되거나 고용디지 않고 언제나 주변에 머물러야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지성인이 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모두 지성인의 독립성을 강조한 말들이다.  106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 의해 생산되는 논리를 자신의 신념으로 알고 산다. 그러나 그것은 난센스다. 왜냐하면 신념이란 자신이 이성적 판단으로 '선택'한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이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해 이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고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릴 때부터 학습된 자기 집단의 논리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 그러니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는 학습된 집단의 논리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보거나 판단해보지 않았다. 결국 그것은 신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107


'깊이 파려면 넓게 파야 한다'

깊이와 넓이는 상반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둘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넓게 파야 깊이 팔 수 있고, 깊이 파기 위해서는 넓게 파야 한다.  108


의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인간의 몸을 공부하면서 인간의 몸 역시 여러 생물의 진화와 그들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파생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다 보면 생물학에 대한 관심이 생길 수 있다. 생물학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의 탄생과 진화는 지구 환경의 변화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 생태학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인간의 몸의 변화가 심리 변화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 심리학으로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심리학에 대한 관심은 인간 심리의 한 양태로서의 종교로 확대될 수 있고, 종교의 탄생과 변화가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한 것으로 건너갈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공부해 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다방면에 걸쳐 많이 아는 사람)가 된다.

인문적 사유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내부에서 생겨나는 지적 호기심을 억제하지 말아야 한다. 궁금증과 지식은 상호 촉진 관계에 있다. 흔히 사람들은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더 이상 궁금한 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반대다. 대개는 아는 것이 많을수록 궁금한 것이 더 많아진다. 인간에게는 '지적 공백을 메우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알기 힘들다. 그래서 궁금증도 잘 생기지 않는다. 반면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아, 내가 이것을 미처 모르고 있었구나!'하고 느끼게 되고, 그 '지적 공백'을 마저 채워 넣으려 한다.  110-111


인간은 제너럴리스트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분업화된 시스템은 인간이 가진 제너럴리스트적 역량을 발휘하기 힘들게 한다. 분업화된 시스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의 기능인으로 존재한다.

많은 현대인들은 자신이 맡은 한 가지 일만 한다. 그러면서 돈만 번다.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나머지 일들은 돈으로 물건을 삼으로써, 혹은 돈을 지불하고 다른 전문가들에게 맡김으로서 해결하려 한다. (심지어 돈만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문제들, 예를 들어 정서적 유대가 핵심인 가정 문제나 양육 문제까지도 그러하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다양한 능력을 이용해 직접 무엇을 하지 않는다. 대신 남에게 맡긴다. 그결과 노동의 기쁨도 상실되고, 주체적 책임도 상실되며, 의존성은 강화된다. 또한 자기 소외가 증대되며, 실존적 무력감도 증대되고, 육체와 정신의 균형 파괴에 따른 건강도 상실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113


틀에 박힌 사고를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는 활력을 잃을 뿐 아니라, 더욱 진보하지 못한다.

진부한 표현이나 사고를 이른바 '클리셰(cliche)'라고 한다. 클리셰가 문제가 되는 것은 식상함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클리셰는 진실을 은폐한다. 그래서 우리는 클리셰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사고를 하는 데는 나름대로 노하우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비단 노하우의 문제만은 아니다. 새로운 사고에는 세상을 바라고는 그 나름의 고유한 시각이 투영되어 있다. 그것은 가치관의 문제다...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갖는 기본적인 특징이 있다. 바로 스스로 '실감'하기 전에는 함부로 믿지 않는 지적 태도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이가 '이 말은 옳다'고 떠들어도 '과연 그럴까?', '왜 그렇게 되었을까?'하고 자문해본다. '과연 그럴까?'는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명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따져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철학적 태도를 갖는 일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는 명제가 옳은 것으로 여겨지는 '현실적인 이유'를 따져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말을 처음 한 사람이 누구이며, 그는 어떤 경로를 통해 지적 권위를 획득했으며, 그 지적 권위가 어떻게 그것을 정당화시켰으며, 어떤 정치 경제적 여건이 그 말을 옳은 것으로 만들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사회과학적 태도다. 창의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태도와 사회과학적 태도가 필요하다.  114-115


브레인스토밍(Brainstoming)기법도 규칙적인 사고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 기법은 '스캠퍼(SCAMPER)'라고 불린다.

대체하기(Substitute), 조합하기(Combine), 적용시키기(Adapt), 변형하기(Modify), 다른 용도로 써보기(Put to order use), 삭제하기(Eliminate), 역발상 해보기(Reverse)의 일곱 가지 단어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115


몸이 아픈 어떤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몸의 병을 알아내기 위해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의사들은 몸에 물리적인 이상이 없어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소견을 보였다. 고통은 있는데 그 원인을 알 수 없다니! 여인은 속을 끓이며 마지막으로 어떤 의사를 찾아갔다. 그 의사 역시 물리적인 원인을 찾아낼 수는 없었지만 대화를 통해 여인에게서 특이한 사항을 발견했다. 여인은 어떠한 삶의 의욕도, 생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의사는 그것을 병의 원인으로 보고 '우울증'이라 이름 붙였다. '우울증'이 탄생하는 순간이엇다. 병명이 생긴 뒤, 의료계는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음을 발견했고, 치료약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던 많은 사람들은 그제야 '가짜 환자'라는 오명을 벗고 비로소 치료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말과 인식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무엇이 실존하더라도 그것을 일컫는 이름이 없으면 우리에게 잘 인식되지 않는다.

말이 우리 인식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말이 있어야 우리는 그것을 인식한다. 말이 갖는 이미지와 상징, 뉘앙스는 대상을 인식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말을 사유의 수단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말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언어 전체 혹은 특정 낱말에 대해 철학적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 말은 우리의 인식을 대상에 이르게 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대상을 인식하게 해주는 매개인 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121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으면, 보이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사과는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햇볕, 바람, 이슬, 안개, 비, 흙의 작용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인식하기는 어렵다. 인문적 사유가 어려운 것도 눈에 보이는 것(현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본질)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사물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영어로 '메타피직스(Metaphysics, 형이상학)'라고 한다. 여기에도 같은 논리가 포함되어 있다. 그 어원은 '메타피지카(Metaphysica)'로서 '뒤, 다음, 배후'라는 뜻을 가진 '메타(meta)'와 '자연'이라는 뜻의 '피지카(physica)'의 합성어다. '피지카'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즉 형체가 있는 것을 말한다. '메타피지카'는 '자연의 배후'라는 뜻이다. '메타피직스'는 자연을 잘 관찰해야 그 뒤에 숨어 있는 본질-형체가 없는-에 대한 이해가 따라온다는 논리를 내포한다.

이러한 논리는 동양에도 있다.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가 그것이다. '격물치지'에서 '격(格)'은 '잣대로 잰다'는 뜻이다. 직역하면 '사물을 잣대로 재면 앎에 이른다'가 된다. '사물을 잣대로잰다'는 말은 '사물을 잘 살펴서 꼼꼼히 따져보고 분석한다'는 의미다. '메타피직스'와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사물을 잘 관찰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지식(앎)으로 나아간다는 논리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서양의 논리가 같은 것이다.  126


문제의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그 과정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127


"물에 대해 가장 잘 모르는 것은 물속에 사는 물고기"라는 말이 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조건을 인식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이다.  131


나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적응'의 문제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매우 뛰어난 동물이다. 그런데 이 '적응'이 묘한 문제를 일으킨다. 의식적인 존재인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합리성을 부여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회 환경에 적응하면 그 환경을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사회나 집단에 '적응'한다는 것은, 그 질서, 논리, 체제, 문화 등을 내면화한다는 것을 말한다. 환경이 불합리하더라도 그것을 내면화하는 데 성공하면 비판적 의식이 줄어든다.

보통, 뛰어난 적응력은 생존에 유리한 장점이라고만 생각된다. 자연 환경에 대한 적응력은 분명 그런 측면이 크다. 그러나 사회 환경에 대한 뛰어난 적응력은 보다 신중하게 생각될 필요가 있다. 자칫 잘못하면 자승자박(自繩自縛)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의 경제 시스템은 전무후무한 규모로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는데, 모든 사람이 이 시스템에 성실히 적응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른 생물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물론 인류의 자멸을 초래할 것이다.

환경은 인간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해 그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환경과 조건 자체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심지어 혁명기에도 마찬가지다. 혁명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폭동이나 봉기에 가담하지만, '환경과 조건 자체를 변화시키겠다'는 명확한 목표 의식을 갖고 행동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현실적 고통, 특히 경제적 고통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혁명에 일조하게 된다.  132


인간은 적응력이 높은 동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는 사회 환경의 진화를 못 따라가고 있다. 생물학적 진화는 점진적이지만 사회 환경의 진화는 급진적이기 때문이다. 그 격차는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134


우리는 누군가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할 때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전에 그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그 환경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그것은 인문적 사유에서 매우 중요하다. 환경과 조건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자기 자신, 인간, 사회의 본질을 비로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과 조건은 현상의 배후이자 토대다. 현상의 본질을 꿰뚫기 위해서는 반드시 환경과 조건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  136




2부 공감(共感) - 남의 글에서 내 생각을 발견하는 독서 내공


'생기'란 '살아 있다는 느낌'이다. 모든 인간은 살아 있는 한 '생기'를 추구한다. 만약 살아 있어도 생기를 하나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생기'는 삶의 필수요소이며 쾌락의 원천이다. 생기를 충족시키는 방식에는 '극단적인 방식'과 '중용적인 방식'이 있다. 극단적인 방식에는 폭식, 과도한 성행위, 음란물 중독, 게임 중독,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도박 중독, 쇼핑 중독, 일중독, 폭력, 살인, 권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 같은 것이 있다. 중용적인 방식에는 적당한 운동과 노동, 음식과 섹스의 절제, 문학 예술을 감상하거나 창조하는 것 등이 있다.

극단적인 방식은 일시적으로 삶에 큰 생기를 부여하지만, 그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사람을 불행과 죽음으로 몰아가곤 한다. 그러나 중용적인 방식은 반대다. 쾌감의 크기는 작지만, 육체와 정신을 풍요롭게 만들고, 삶을 건강하게 유지시켜준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우선 책을 읽어야 하는 개인적 이유를 보자. 개인적인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독서는 경험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다. 중국의 비평가 린위탕은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 독서하지 않는 사람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자기 하나만의 세계에 감금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이라도 손에 책을 들면 별천지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세계에 대한 시야가 넓게 트이지 않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전부인 줄 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무엇을 경험했기 때문에 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험했다고 해서 아는 것은 아니다.  141-142


경험이 곧 앎이 되지 않는 것은, 경험이 해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험이 글이 되기 위해서는, '그 경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것을 어떤 형식으로 써야 메시지가 잘 전달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내 경험을 남의 경험처럼 냉정하게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경험에서 사회적 의미가 생겨나고, 비로소 글이 된다. 경험 자체가 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해석된 경험만이 글이 된다.  144


책을 읽어야 하는 개인적인 이유 두번째는, 독서가 개인을 심미적 존재(아름다운 존재), 철학적 존재(사유하는 존재), 도덕적 존재(양심적인 존재)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145


독서는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실존적 요구를 충족시킨다. 독서는 기본적으로 이 요구에 부합해야 하고, 그래야 열정적인 독서가 지속된다.  146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고요하게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혼자 집에 있을 때에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틀어놓는다. 젊은이들은 컴퓨터나 모바일로 게임에 열중한다. 소음도 중독된다. 그렇게 시끄럽게 있다가 전자제품들을 끄고 책을 읽으려 하면 뭔가 허전하고 막막한 기분이 들면서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람이 고요하게 있는것은 중요하다. 그럴 때 사람은 자신과 대면하고, 타인과 세상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남들이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럴 때 뇌는 활발하게 움직인다.  156


독서를 하기는 쉽지만, 열정적인 독서를 지속하기란 쉽지 않다. 열정적인 독서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지적인 자극을 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책과 연관된 문화생활을 할 필요가 있다.  157


자신의 내적 욕구에 충실한 독서란 우선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책을 보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호기심이 왕성한 동물이다. 자신의 호기심에 맞는 책을 읽으면 누구나 즐겁게 독서할 수 있다. 그래야 열정적인 독서도 가능해진다. 또 하나는 자기 삶의 문제와 연관된 독서를 하는 것이다.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다. 인생은 그 문제들을 해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럴 때 독서를 통해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라. 그러면 자연스럽게 열정적인 독서가 된다. 자기 문제와 관련된 문제를 다룬 책을 읽을 때와 달리 책의 내용들이 머릿속으로 쏙쏙 잘 들어올 것이다. 여기에 열정적인 독서의 열쇠가 있다.  161-162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나'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나는 세상이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다. 내 안에는 나 자신에 대한 이미지와 세상에 대한 이미지가 함께 들어 있다. 그러므로 세상이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인 나 자신에 대한 관심과 성찰은 매우 중요하다.  163


독서는 단지 저자의 생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독서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발견하는 것이다. 진정한 독서가에게 모든 책은 참고 문헌일 뿐이다. 독서의 궁극적인 목적은 책에 있는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자기 내부의 텍스트를 발견하는 데 있다.

우리는 흔히 "몰입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몰입을 '매몰'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진정한 몰입에는 주체의의지가 살아 있다. 그래서 책의 내용에 빠져 들었다가도 자신이 원할 때는 언제든지 그로부터 빠져나와 "이 말이 맞나?"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거나, 내용과 관련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것을 말한다.  164


'매몰의 독서'는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기에만 급급해 아무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165


무릇 책은 평가하고 질문하며 읽어야 한다.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가? 첫째, 저자의 주장이 타당한지를 물으며 읽어야 한다. 그 타당성은 저자의 논리와 근거가 적절한지를 살펴봄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 둘째, 그 반대의 주장은 말이 안 되는지, 혹은 예외는 없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반대의 주장과 예외는 책에 기술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이것은 책에 없는 내용을 생각하고 검토하는 것이 된다. 셋째, 저자의 주장이 우리 사회의 현실, 혹은 나의 현실에 맞는가를 물어봐야 한다. 이 역시 책에 기술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아무리 저자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에 적용될 수 없으면 곤란하다.  165-166


거칠게 구분하자면, 지적 도약은 세 단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첫 번째 단계는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신의 내적 욕구를 잘 들여다보고 그에 맞는 책을 읽을 때다. 이때, 사람들은 독서가 주는 지적 희열을 맛보게 되고, 그에 따라 열정적으로 책을 읽게 됨으로써 최초의 지적 도약을 이루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꾸준한 독서를 통해 주요 고전의 내용을 이해하게 될 때다. 이를 기점으로 지식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논의를 모두 이해하는 지적 도약을 이루게 된다. 세 번째 단계는 독립적인 연구와 조사, 분석과 종합을 통해 여러 지적 논의에 대해 가치판단을 내리 수 있게 될 때다. 이것이 지성인으로 진입하는 단계다.  171-172


좋아하는 작가의 전작을 읽는 것, 좋아하는 작가가 자주 참고하는 저자의 책을 읽는 것, 같은 주제의 책을 잇달아 읽는 것, 이 세 가지 방법이 '네트워크 독서법'이다. 한마디로 '네트워크 독서법'이란 서로 관련 이쓴 책을 잇달아 읽는 것을 말한다.  185




3부 공명(共鳴) - 세상과 나 사이에 울림을 만드는 글쓰기 내공


신중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을 표현해도 좋은가, 어떻게 표현하면 좋은가'하고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글쓰기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오히려 글을 씀으로써 모호하던 생각들이 뚜렷해지고 섬세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글을 쓰는 과정 자체가 치밀한 생각들을 만들어낸다는 말이다.  194


글쓰기와 사유 능력의 발전은 상호 촉진 관계에 잇다. 글쓰기를 하면 사유 능력이 발달하고, 사유 능력이 발달하면 글쓰기를 더 잘할 수 있다.  195


유시민이 한 말로 기억한다. "마당발 치고 지적인 사람이 드물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지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많이 생각하고 읽고 써봐야 하는데. 이 세 가지는 모두 혼자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성인은 늘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저런 사람(집단)들과 친교 맺기를 좋아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을 마음껏 비판할 수 없게 된다.

글쓰기도 어느 정도 고립을 요구한다.  197


지적으로 살려는 사람은 기꺼이 홀로 있을 수 있어야 하고, 홀로 있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지성인이란 스스로를 고립시킴으로써 소통하는 사람이고, 소통하면서도 세상의 모든 것과 거리를 두는 사람이다.  198


롤랑 바르트는 "글쓰기란 하얀 종이 위에 저자의 순수한 의도가 지나가는 길이 아니며, 저자와 독자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정치, 경제적 사건이다.

C. W. 밀즈는 이런 말을 했다. "학자들이 글을 쉽고 명료하게 쓰지 않는 것은 주제의 복잡성이나 사고의 심오함과는 무관하며 자신의 지위를 걱정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학자들이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은 , 그것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높이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물론 주제 중에는 쉽게 쓰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특히 철학적인 주제들이 그렇다. 그러나 학자들이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폼'나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은 정직한 고백에 가까우며, 글쓰기에 대한 신비적 색채를 거두어준다.  199


실제로 자신의 생활 관리에 성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작가의 성공 여부에 결정적인 요소다. 시간 관리에 실패하면 무절제하고 방탕하게 생활하게 된다.

작가로 성공하고 싶다면 시간 관리에 철저해야 하며, 금욕적으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책 읽고, 생각하고, 글 쓰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지적 도약이 이루어지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다. 지적 도약은 흔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거기에도 감수해야 할 것은 있다. 바로 세속적인 즐거움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전에는 재미있고 즐겁게만 생각되던 대화나 오락 거리들이 유치하고 시답잖게 느껴질 수 있다. 지적 발전이 이루어질수록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는 깊어진다. 그러나 그만큼 더 인간과 사회를 거리를 두고 보게 된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보통 사람드로가 더 멀리 떨어진다는 것, 심리적으로는 더 고독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204-205


글이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글이 창의적인 시각을 담고 있는 경우다. 창의적인 시각이란 지배적인 시각, 전통적인 시각과 다른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글을 읽을 때 독자는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의 뿌리, 생각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둘째, 이전의 글들보다 새롭거나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다. 외국의 최신 동향이나 최근의 연구 결과를 빨리 소개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혹은 오래된 정보라도 잘 알렺지 않았던 것이면 가치가 있다.

셋째,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들을 대비시켜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경우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과 오늘날의 사건과 인물을 대비시킴으로써, 외국과 우리 사회를 비교함으로써 일정한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것이다. 혹은 오래된 역사적 사건과 오늘날의 사건을 비교해 이해시키는 것도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이런 방식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일들을 낯설게 보게 하고, 우리 사회의 특징을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시킨다.

넷째, 결과만 알려진 것의 '과정'을 면밀하게 폭로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이미 알려진 사건이 나중에 소설화되고 영화화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새삼스럽게 그 사건에 대해 다른 생각과 느낌을 갖게 된다. 대개 사건의 본질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그러므로 글을 통해서 사건의 과정을 잘 검토하는 것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돕는다.

다섯째,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이나 인물, 주제에 관해 깊이 있게 설명해주는 경우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월터 리프먼은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비슷하게 생각할 때, 아무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만큼 습득한 지식의 양은 적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다 알고 있는 것이라도 '그것이 이런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 독자들은 흥미를 느낀다.

여섯째, 기존의 메시지를 감각적인 글쓰기를 통해 정서적 설득력을 갖게 하는 경우다. 트깋 기존의 글이 이성적 설득을 하는 데 그쳤다면 이러한 전략은 유효할 수 있다. 어렵게 쓰인 인문적 메시지를 수필이나 소설 같은 문학적 글쓰기로 변용시켜 전달한다면 많은 독자들이 재미있고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08-209


처흠은 쉽게 시작해서 나중은 어렵게 끝나야 한다. 이 원칙을 구현하는 전술은 다음과 같다.

첫째, 흥미로운 것에서 따분한 것으로 써 나간다. 글을 흥미로운 것으로 시작하면 독자의 주의를 끌 수 있어 선택 받기 쉽다. 여기서 '따분한 것'이란 식상하거나 고리타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애매모호한 것,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설명하기 까다로운 것을 의미한다.

둘째, 개인적인 것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써 나간다. 개인적인 양상은 사회적인 양상의 일부이며 실례다. 그러나 개인적인 양상은 이야기로 되어 있어서 사회적인 양상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 개인적인 예로 글을 시작하면 독자들의 정서적 공감을 얻기도 쉽다.

셋째,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써 나간다. 구체적인 사회적 사건이나 역사적 사건 혹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 그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철학적 담론 같은 추상적인 내용을 나중에 쓴다. 그러면 역시 독자들이 부담 없이 글을 읽기 시작할 것이다.  210-211


어디서 좋은 글감을 발견할 수 있을까?

첫째, 남에게 받은 질문이나 대화에서 글감을 발견한다. 우리는 늘 타인과 대화하며 산다. 그리고 그러한 대화에는 심리적 사회적 철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말을 하는가?', '나는 왜 이런 주장을 하는가?', '그 말은 어떤 논리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가?', '그 논리는 어떤 권력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가?' 같은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타인들과 대화, 그리고 타인과 나의 대화를 잘 곱씹어보면 많은 글감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 지배적인 견해에 의문을 제기해 본다. 인류의 정신사는 지배적인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 의해 풍부해져왔다. 지배적인 견해는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견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견해를 받아들이게 된 과정의 중심에는 대개 권력의 작용이 있다. 또한 그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렇게 보면 지배적인 견해라는 것도 별것 아니다. 그런 새악을 갖고 늘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셋째, 자신이 갖고 잇는 불만과 바람,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불만과 바람에 귀 기울인다. 예를 들어,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초기 자본주의에 대한 불만과 바람이 글이 된 경우다. 초기 자본주의사회에서 나타난 농민과 노동자의 고통, 그것을 바라보는 모어의 불만, 그리고 그것이 극복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 그 바람은 이상적인 사회상을 통해 제시된다 - 글의 모티프였다. 인문적 글쓰기는 비판적 글쓰기이고, 그것은 사회적 불만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가 갖고 있는 사회적 불만은 인문적 글쓰기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넷째, 자신의 경험에서 글감을 찾을 수 있다. 경험은 가장 기본적인 글감의 원천이다. 자신의 경험 중에서 사회적인 의미를 지닌 것을 찾으면 좋은 글감이 될 수 있다. 경험 중에는 사회적 의미가 본래 강한 것이 있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사회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경험들이 많다.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섬세한 사유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경험을 잘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다섯째, 동서고금의 유명한 일화나 에피소드에서 글감을 찾을 수 있다. 이야기는 대중적 글쓰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쉽고 재미있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은유로 쓰기 쉽다. 그러므로 하나의 이야기로도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이용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나중에 쓰일 법한 이야기를 접하면 평소에 잘 수집해둘 필요가 있다.

여섯째, 시사적인 사건에서 글감을 발견한다. 시사적인 사건들은 사회의 여러 구조적인 문제들이 집약되고 중첩되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그것을 잘 관찰하면 사회의 본질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시사적인 사건은 두 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에피소드와 마찬가지로 대개 스토리를 갖고 있다는 점. 사회적 이슈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일곱째, 개념에서 글감을 찾는다. 항상 말이 중요하다. 개념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다. 하나의 개념은 그 자체로 일정한 관점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경제 분야에서 흔히 쓰이는 '노동의 유연화'를 보자. '노동의 유연화'는 친자본적 친 기업적 관점을 담은 말이다. 실업자, 비정규직, 인턴, 파트타임을 양산하는 '노동의 유연화'는 노동자에게 결코 '부드럽지 않다' 그것은 팍팍한 삶을 의미할 뿐이다.

이렇듯 조금만 신경을 써서 주변을 살펴보면 생각하고 쓸 것들이 널려 있다.

자세히 관찰해야 포착된다.  211-213


글도 자기 취향이나 기질에 맞게 써야 한다. 그래야 글이 잘 써지고 좋은 글도 쓸 수 있다.  215


비평가는 자기 말을 하되, 작품을 매개로 말하는 형식을 취할 뿐이다.  218


비평가는 객관적인 작품 해설이 아니라 독자들이 자신과 같은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 글을 쓴다. 그렇게 비평가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끼어들어 독자의 시선을 조작한다. 한 마디로 '관찰의 조작'이다.  219


서평 쓰기는 습작기에 있는 사람드에게 분명 용이한 측면이 있다.  221


독후감이 개인적인 '감상'을 쓰는 것이라면, 서평은 논리와 근거를 동원한 이성적 글쓰기다.

독후감이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글쓰기라면, 서평은 좀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글쓰기다.  222


서평은 독서하다가 떠오른 문제의식이 있다면 모두 글감이 될 수 있다. 텍스트를 읽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그중에 문제의식이 있으면 그것을 주제로 논리와 근거를 동원해 글을 써내면 좋은 서평이 된다.

서평도 창작이다. 자기 생각을 쓰는 것이다. 책을 매개로 한 자신의 생각과 통찰을 적는 것이다.  223


칼럼을 쓰는 것 외에 시사적 글쓰기를 하는 방법 중 하나는 독립적인 인터뷰어(interviewer, 인터뷰를 하는 사람)가 되는 것이다.  229


'인문적이면서 문학적인 글'인 인포멀 에세이는 작가의 철학과 인격, 정서가 잘 조화된 글이라 할 수 있다.  231


인포멀 에세이를 쓸 때, 중요한 것은 하나의 소재를 붙들고 파고드는 집요함이다.  233


철학적인 글쓰기에서는 암시와 비유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암시나 비유는 메시지를 명료하게 하기보다는 그것을 뭉개면서 의미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235


링컹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게 장작을 패기 위한 여덟 시간이 주어진다면 도끼를 가는 데 여섯 시간을 사용하겠다." <장자>의 [소요유]편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백 리 길으 ㄹ가려는 사람은 하룻밤 양식을 찧으면 되지만, 천 리 길을 가려는 사람은 석 달의 식량을 모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준비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을 잘 쑤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그 준비란 평소 읽은 책을 자료 삼아 정리하는 것이다.  242


자료 정리를 하면 첫째, 백지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다. 습작기에 있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어떻게 쓸까'가 아니라 '무엇을 쓸까'이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절실한데 무엇을 써야 할지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글감이 없다면 무작정 책상에 앉아 글을 쓸 일이 아니라, 자신이 인상적으로 읽은 책들을 자료 삼아 정리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책 내용 중 마음에 드는 글을 베끼고, 그 내용과 관련해 떠오른 자기 생각을 컴퓨터에 옮겨 적어야 한다.

자료 정리하는 시간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이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더 좋은 글을 쓰게 된다.  243-244


둘째, 자료 정리를 하면 자기 세계관이 치밀해진다. 글쓰기가 힘든 것은 단지 표현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거기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거이다. 이 문제 역시 자료 정리를 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어떤 책에서 마음에 드는 글을 컴퓨터에 옮겨 적을 때, 그 글의 내용은 대개 자신이 적극 동의하는 내용인 경우가 많다. (비판하기 위해 베끼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얼마 안 된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정리된 자료는 '자신이 동의하는 내용들'이 거대한 집적물이다. 그 자료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주로 무엇에 관심이 있고, 어떤 주장에 동의하는지가 명확해진다. 내가 내 생각을 명확히 알 수 있다는 말이다.  244-245


셋째, 자료를 정리하면 문장력이 좋아진다. 자료 정리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만 '베껴 쓰는' 과정이다. 베껴 쓴 이후에도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주 그 자료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좋은 문장들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입력된다. 자료 정리를 하다보면 사용하는 단어의 양이 늘고, 어휘의 개녀모가 지시성에 대한 감각이 섬세해지며, 문장과 표현이 정밀해지고, 논리적 사고 및 언어 사용 능력이 생겨난다. 심지어 문장의 리듬감까지 익힐 수 있다. 문장이 좋아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좋은 방법을 놔두고 문장력을 강화하기 위해 문법, 맞춤법을 공부하거나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책을 통째로 베끼는 사람들이 있다. 혹은 '자신의 부족한 어휘량'을 채우기 위해 사전을 외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시간 대비 효과가 낮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자료 정리'만 한 것은 없다.  245


글을 간결하게 쓰라.

첫째, 불필요한 부사를 줄여야 한다. (사실, 일반적으로, 더 이상...)

둘째, 불필요한 '형용사'를 줄여야 한다. (유명한, 오래된, 비참한...)

셋째, 불필요한 지시어를 지워야 한다. (이처럼, 그러한...)

'빼도 말이 되는지'를 본다. '빼도 말이 된다' 싶으면 되도록 빼는 것이 좋다.

넷째, 불필요한 접속사를 최대한 빼야 한다. (즉, 그리고...)  275-277


인생에는 별자리를 보는 것과 눈앞의 파도를 보는 것 둘 다 필요하다. 배가 목적지에 잘 도착하려면 그 두 과제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사회가 자본에 의해 지배 받고, 과학기술이 첨단화될수록 인문적 사유 능력은 더욱 절실해진다. 왜냐하면 자본과 과학기술은 그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방향을 정하는 것은 인문적 사유다.  315


비판적 이성이란 '왜(why)'를 묻고 답하는 이성이다. 

비판적 이성을 사용하지 않으니, 삶에 대한 확신이 없고, 정체성이나 진로 문제 같은 것을 서른 가까운 나이에도 고민하는 일종의 정신 지체 현상이 발생한다.

도구적 이성이란 '어떻게(how)'를 묻고 답하는 이성이다. '어떻게 하면 집값을 더 올릴까?', '어떻게 하면 좋은 직장에 취직할까?', '어떻게 하면 컴퓨터나 영어를 잘할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이 도구적 이성에 속한다. 비교해보면 도구적 이성보다 비판적 이성이 훨씬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비판적 이성을 사용해야 가치 지향적인 삶, 후회 없는 삶, 보람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도구적 이성에 훨씬 경도되어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보다 현대 사회의 성격 자체가 도구적이기 때문이다.  317


경제 발전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느냐'를, 가학기술의 발달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편리함을 누리느냐'를 문제 삼는다. 두 가지 모두 '어떻게'를 문제 삼는다. 거기에는 '왜 더 많은 부를 축적해야 하느냐?' 혹은 '왜 더 많은 편리함이 필요한가?'에 대한 고뇌가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도구적 이성'이다. 경제 발전과 과학기술의 발전의 맹목적 추구는 현대사회에서 압도적인 분위기와 생활 방식, 사고 방식을 만들어낸다. 그런 사회 속에서 사는 개인들 역시 도구적 이성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성의 도구화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지지 않고 곧바로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  318


여기 한 젊은이가 있다. 글에게 환경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오염되어 있었다. 그는 여러 경로를 통해 지금도 환경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는 환경 문제에 대해 별다른 감각이 없다.그는 애초부터 좋은 환경 속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평생 환경의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오염된 환경은 가장 익숙한 환경이다. 그런 그가 환경의 위기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경계하며 살기란 쉽지 않다.

마르크스는 "그들은 자신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환경 문제에 관한 한, 독일의 이론가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말이 더 옳아 보인다. 그는 마르크스의 말을 이렇게 바꾸었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잘 알지만, 여전히 그렇게 행동한다."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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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이 쓰인 1848년, 당시의 세계 자본주의의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영향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해면하고 있다.  9


박종철출판사에서 1998년에 출간된 <공산주의 선언>을 바탕으로.(출판사와 번역자는 다르지만 전문을 참고하길 원하면 클릭)


어떤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사람의 전체적인 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사람의 생애만 알아서는 안 되며, 그 사람이 어떤 시대 속에서 살아갔는지를 알아야 한다.

사회적 객곽적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  19


철학자들은 작가 한 짓을 제3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바라보는 짓을 자주 한다.  21


마르크스는 <공산단 선언>을 쓰면서 결코 시간을 초월한 성스러운 문서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바로 첫 구절은... 이것이 사라질 수 있는 상품이라는 것, 후손을 염두에 두지 않고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구체적 순간에 쓴 것임을 강조한다.

<공산당 선언>은 역사를 전사(前史)와 미래사로 나누엇다는 점에서 역사철학적인 의의가 있다. 또한 그것은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작동 원리와 그것에 연관된 정치적 사태들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현대의 글로벌 자본주의의 맹아를 검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정치경제학적 의미가 두드러진다. 더 나아가 <공산당선언>은 근대의 모더니티가 가진 파편적, 허무적 측면들을 관조함으로써 현대 문화의 여러 측면을 이해하는 기초를 제공한다는 문화이론적 의의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39-40


혁명의 과정에서 마르크스가 보여준 태도는 선동가가 아니었다. 그는 혁명을 위해 노동자를 준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론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40


나는 그를 '진정한 근대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근대인은 어떤 사람을 지칭할까.

'계몽', 독일어로는 Aufklarung('아우프클래롱'이라 읽는다), 영어로는 Enlightement다. 또 하나는 '주관성' 또는 '주체성(Subjectivity)'이다. 이 둘은 매우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계몽은 말 그대로 'Enlightement' 즉 '빛을 비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Aufklarung'은 '명확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서양 사람들은 근대를 이런 시대로 규정한 것이다. 빛을 비추거나 명확하게 했다는 것은 뭔가 어두운 게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게 뭘까? 그건 바로 중세시대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암흑의 중세, 밝은 근대라는 식의 이분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계몽과 주관성에 대립되는 것은 이처럼 중세시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인 단테가 쓴 <신곡>을 예로 들어보자. 르네상스하면 세계사 시간에 '인간의 재발견' 이라고 배웠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면 인간을 재발견하면 신은 완전히 부정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다. <신곡>은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으로 구성된다. <신곡>은 로마 최고의 시인이라 일컬어지는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과 연옥을 여행하다가 베아트리체(단테의 애인었다고 한다)의 인도를 받아 천국에 이르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이 작품이 쓰인 시기가 1300년대라고는 하나 이 서사시 안에는 신이 전면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서양 사람에게 신을 빼놓고 뭔가를 하라는 말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서구화되었다고는 해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전통의 유습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이제는 제사지내지 마세요'라고 말하면 어떻겠는가. 싸대기 맞는다. 이 점을 생각해보면 신을 부인하고 계몽을 내세운 것은 엄청난 단절이다.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신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 이성의 힘으로만 세계를 파악하겟다는 태도다. 어른이 된다는 소리다. 그래서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칸트는 미성년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답한 것이다. 더 이상 신의 피조물로서 신의 은혜를 입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 되어 어른이 되어 살아가고 자신의 의지, 이성에 따라 세계를 파악하고 개조해나가겠다고 자신의 의지, 이성에 따라 세계를 파악하고 개조해나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것이 서양 근대사상의 혁명적 면모다. 인간이 주체적인 존재라는 바로 이 전통 위에 칼 마르크스가 서 있다.

서양 근대인들은 인간의 힘으로 세계를 구축하자는 사람들이엇다. 이들은 왕의 권력을 신이 준 것이라고 하는 왕권신수설을 부정하고 프랑스혁명과 같은 정치적 혁명을 통해 인간 중심의 사회를 으룩하려 하였다. 이들은 인간의 힘에 의해 파악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른바 근대의 교양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부르주아로 불리는 근대의 시민인데 고전적 의미에서의 우파, 즉 오늘날의 의미에서 자유주의자다. 즉, 근대의 지식인이라 하면 일단 누구나 다 우파 수준의 교양을 갖춘 셈이다. 그들은 낡아빠진 편견에서 벗어나 있다. 그 사람들은 지연이니 혈연이니 하는 것들에는 신경 안 쓴다. 그렇게 오랫동안 믿어오던 신도 끊어버린 사람인데 뭘 못 끊겠나. 그냥 인간 중심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 능력을 향상시키고 세상을 인간의 힘으로 고쳐나가겠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48-50


마르크스 사상의 배경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계몽주의와 교양이고 마르크스 자체를 볼때 반드시 기억해두어야 할 키워드는 이성, 역사, 노동이다.  52


나는 내가 감성적인 상태에 빠져 있엉도 내가 감성적인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의 정신 안에서는 이성이 감성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은 다 이런 상태다. 그래서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53


인간의 주체적 이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되, 사태의 기원과 전개를 꼼꼼하게 바라보는 것이 마르크스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태도였다. 

우리들도 이 방법을 많이 사용한다. 가령 어떤 사람을 만났다고 해보자. 그때 우리는 그 사람을 지금 이 순간의 모습만 가지고 판단하지 않는다.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왔고, 그런 과거를 통해서 지금은 어떤 모습이 되었는지를 보고 판단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력서를 통해서 사람을 판단한다. 이것도 일종의 역사적 방법이다. 물론 우리는 그 과정에서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나랑 같은 고향이네, 같은 학교 나왔제, 심지어는 성씨가 같네 하면서 호감을 갖는 경우가 많다. 이런 편견만 벗어던진다면 우리도 제대로 된 역사적 방법을 날마다 훈련할 수 있을 것이다.  54


이성과 역사, 이 둘을 묶으면 역사적 이성주의다. 마르크스는 이성과 역사적 방법론, 이 두 가지 도구로 인류의 역사를 바라본다... 

마르크스는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기반에 놓인 것을 인간의 활동(human activity)으로 파악했다...

역사를 인간 활동의 기록이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신이역사의 주인이 될 수 없으므로, 당연히 인간의 활동이 인류의 역사를 만든 핵심적인 요소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이다.  55


마르크스가 보기에 인간 활동의 구체적인 내용은 뭘까? 그건 바로 노동(Arbeit)이다. 이것 독일어다. '아르바이트'라고 읽는다.

물질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활동이 역사를 움직이는 핵심적인 요인이라 생각했다.

'이성' '역사적 방법' '물질적 활동 중심'이라고 하는 마르크스 사사으이 주요한 세 요소를 묶어 한마디로 역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이라고 할 수 있다.  56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일수록 아주 철저하게 유물론을 실천하고 있다. 뭐든지 물질의 관점에서, 간단히 말해서 돈 중심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돈 벌고 성공하는 거 아닌가. 돈 못 모으는 사람들은 어떤가. 마음약해서 여기저기 좋은 일만 하다가 거덜 나지 않는가. 역사적 유물론이 골수까지 파고든 사람들, 사실 알고 보면 자본가들이다. <공산당선언>을 읽다보면 중세를 깨뜨리고 근대를 열어젖힌 부르주아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들이 바로 자본가들이다. 마르크스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58-59


마르크스의 사상 전개과정을 크게 둘로 나누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철학(특히 역사와 노동으로서의 인간 본성에 대한)에 관한 연구 시기 : 대표적 저서로는 파리시대의 <경제학-철학 초고>가 있다. 이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순수한 의미의 철학적 연구를 정치경제학과 결합시킨 것이다.

2) 1852년부터의 정치경제학 시기 : 자본주의 사회를 어떻게 뒤엎을 것인가에 관한 책이 아니라 자본의 해부학(Anatomy)이라 할 수 있는 <자본>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저서다.  62


데이비드 하비가 쓴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에는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을 쓴 1848년을 전후한 시기의 파리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67


<선언>이 나왔을 때에는, 우리는 그것을 사회주의 선언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1847년에는 사회주의 는 부르주아 운동을 의미했고, 공산주의는 노동자 운동을 의미했다.  75


'전 세계 앞에 공공연하게 표명하여'

1848년이라고 하는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공산주의자임을 공공연히 선언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공산주의자들은 비밀결사의 형태로 활동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공공연하게 활동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77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제1장의 이 첫 문장인 <선언>을 관통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다.  79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서 그는 유물사관이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장 담대히 거짓을 일부러 들고 나온 것"이며 "거기서는 역사의 근본을 아무 목적 없는 우연한 물질에 돌린다. 그러고는 모든 정신적인 가치 관념을 유치한 시대의 공상, 명상에서 나온 곳으노 돌리려 한다."

그런데 이 주장은 유물사관을 무척이나 심하게 오해한 것이다....

유물사관에서 말하는 물질이 뭐겠는가. 그건 바로 경제적인 의미의 물질이다. '황금만능주의', '물질 중심주의' 할때의 물질이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돈 가지고 매사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물질 중심 사고방식이다. 그러니까 유물사관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돈 가지고 매사를 판단하려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크게 오해한 것은 아니다.  84-85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개인은 주관적으로는 어느 정도 관계들을 초월하고 있다 해도 사회적으로는 역시 관계들의 산물"이라고 썼다. 유물사관이란 것은 바로 이런 물질적 관계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따져보자는 것이다. 그러니 불온한 것이 아니다....

'계급'은 그러한 물질적 관계 속에서 사람들을 파악할 때, 비슷한 관계에 놓인 사람들을 묶어서 부르는 것이라 해두자.

첫 번재 문장 아래에 보면 엥겔스가 붙인 각주가 있다. 1888년에 영어판을 내면서 붙인 것이다.

'부르주아지란 현대 자본가 계급, 즉 사회적 생산수단의 소유자이자 임금 노동의 고용자들을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트란 자기 자신의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않아서 살기 위해 부득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현대 임금 노동자 계급을 의미한다.'  86-87


'계급'.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물질적 관계를 기준으로 나눈 다음, 각 부류의 사람들을 묶어서 가리킬 때 쓰는 말일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물질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나누는 게 뭐가 잘못된 것인가 말이다. 그러니 계급이라는 말은 나쁜 말이 아니다.  87


첫 번째 문장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물질적 관계를 기준으로 나뉜 집단끼리 서로 대립하고 싸워온 역사다.  88


부르주아(bourgeois)라는 말이 생겨나서 쓰이게 된 과정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본래 부르주아란 말은 변호사, 법률가, 의사 등 농노도 귀족도 아닌 제3신분의 전문직 종사자들을 뜻했다.

이 용어들이 처음 쓰일 때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속에서의 특정한 계급, 즉 현대 자본가 계급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91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을 설명하기 위해 이전에 등장했던 지배 계급과 그것의 몰락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자유민과 노예, 파트레스와 플래비스, 남작과 농노, 쭌프트 회원과 직인, 요컨대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끊임없는 대립 속에서 맞섰으며... 그러한 투쟁은 빈번히 사회 전체의 혁명적 개조나 투쟁하는 계급들의 공통의 몰락으로 끝났다.'

과거에는 지배 계급을 가리키는 말이 위에서 인용한 마르크스의 설명처럼 이것저것 많았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를 물질적 관계라는 기준에서 보면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눌 수가 있다. 부르주아지는 처음부터 현대 사회의 지배 계급이 아니었고, 그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아주 오랫동안 노력하였다.  93


'봉건사회가 몰락하면서 생겨난 현대 부르주아 사회는 계급 대립을 폐지하지 않앗다. 부르주아 사회는 다만 새로운 계급들, 억압의 새로운 조건들, 투쟁의 새로운 모습들로 낡은 것들을 바꿔놓았을 뿐이다.'

부르주아가 중세에 있던 것을 바꾸어놓은 것은 세 가지다. 낡은 것들을 새로운 계급, 억압의 새로운 조건, 투쟁의 새로운 모습들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이를 설명하자면 봉건사회에도 계급 대립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르주아는 그것을 바꾸었다. 지배하는 방식과 조건 등을 바꾸었다는 말이다. "부르주아지의 시대는 계급 대립을 단순화했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물질적 생산관계만을 가지고 계급을 분류하는 것이 부르주아의 방식이다.

그런 분류 기준에 반대하고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돈 이외의 것을 진정한 인간의 가치라고 추구하며 사는 살마들의 인생은 얼마나 피곤한가.  94


마르크스는 "중세의 농노로부터 최초 도시의 성외(城外) 시민이 생겨났고, 이 성외 시민 층으로부터 부르주아지의 최초의 요소들이 발전하였다"고 써두었다. 다시 말해서 중세의 농노 중에서 경제적 이윤에 눈뜬 사람들이 성외 시민이 되었고, 이들이 오랫동안 고생해서 부르주아가 되었다는 것이다.  95


아메리카의 발견, 콜럼버스에 의한 아메리카의 발견이 1492년의 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딱 백 년 전이다.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한 시기가 1488년이다. 이것이 아프리카의 회항에 해당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 일은 흔히 세계사에서 '지리상의 대 발견'이라 불린다.  96


자본주의는 애초부터 전 세계적인 시장을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자본주의는 초반부터 글로벌 경제였던 것이다.  97


돈이 유럽에 흘러 들어가면서 유럽에서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봉건 사회의 잔재가 무너진다. 그 잔재들이 뭔가.

<선언>에서는 그것을 "봉건적 쭌프트적 공업 경영방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새로운 시장이 생겨남에 따라 이 방식이 증대하는 수요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되자 매뉴팩처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쭌프트 다음이 매뉴팩터다. 그러면 그 다음은 뭘까. <선언>의 구절을 보자.

'시장은 줄곧 성장했고 수요는 줄곧 증가했다. 매뉴팩처로도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앗다. 그때 증기와 기계 장치가 공업 생산에 혁명을 일으켰다. 매뉴팩처의 자리에 현대 대공업이 들어섰고, 공업 중간 신분의 자리에 공업 백만장자들, 공업 군대 전체의 우두머리들, 현대 부르주아들이 들어섰다.'  98-99


이제 부르주아지는 현대 세계의 당당한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대공업이 발전하면서 본격적인 의미의 세계 시장이 열린다. <선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 시장은 상업, 해운, 육운에서 헤아릴 수 없는 발전을 이룩했다. 이러한 발전이 다시 공업의 신장에 영향을 미쳤으며, 부르주아지는 공업, 상업, 해운, 철도 등이 신장되는 것과 같은 정도로 발전햇고, 자신들의 자본을 증식시켰으며, 중세로부터 내려오던 모든 계급들을 뒷전으로 밀어냈다.'

몇 페이지 더 읽으면 나오지만 주르주아는 중세의 계급들을 뒷전으로 밀어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계급들을 자신의 발 아래 부리게 된다.  99-100


공업 경영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자본(Money), 생산수단(Means of production), 노동력(LP:Labor Power)이다.  104


마르크스는 이윤의 원천을 '노동력'이라 말한 것이다. 자본의 순환 고리에 뭔가가 외부에서 들어가는데, 그것이 인간의 본질인 노동으로부터 나오는 노동력이고, 바로 이 노동력이 이윤을 만들어내는 원천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취직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된 사람들이 있어야 공장이 돌아간다고 했다. 이걸 달리 만하면 공장에 투여할 노동력이 잇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건이 16세기와 18세기에 영국에서 일어난 인클로저 운동이다. 지주가 땅을 12개 부분으로 나눈 다음 소작인 12명을 부려서 일을 한다고 치고, 소작인은 각자의 땅에서 농사를 지어 반은 지주에게 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갖는다고 하자. 자기 땅은 아니지만 소작인과 생산수단인 땅은 긴밀하게 붙어 있다. 게다가 농사 짓기는 굉장한 숙련을 요구하는 일이므로 섣불리 소작인을 잘라낼 수도 없다. 그런데 만약 이 땅에서 지주가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고 양을 키우겟다고 하면 소작인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울타리만 쳐서 양을 키우면 된다. 이렇게 인클로저(enclosure. '울타리치기'라는 뜻이다)를 통해 소작인들은 생산수단으로부터 떨어져 자유롭게 되었다. 무지하게 자유로워진 거다. '자유로운'이라는 첫 번째 뜻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다. 그들은 자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다. 말이 자유지 가진 게 몸뚱어리밖에 없다는 뜻이다. 영러 free from이 '~이 없는'이라는 뜻 아닌가.  105-107


'자유로운 계약 노동자'라는 말의 뜻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생산수단을 가지고 잇지 않다는 점, 즉 '~이 없다'는 점에서 자유롭고, 자신의 뜻에 따라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이것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아니다. 자기의 잠재적 능력을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는 아닌 것이다. 

현대의 공업사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생겨났다. ..

자유로운 계약 노동자는 반드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취직해서 월급 받으면서 일하는 사람은 다 여기에 속한다. 

화이트칼라니 블루칼라니 하는 구별은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말도 안되는 것이라는 사실만 분명히 알아두자.  108


'부르주아지의 이러한 각각의 발전 단계들에는 그에 걸맞는 정치적 진보가 수반되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중요한 통찰 중 하나는 경제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이 동시에 맞물려 돈다는 것을 발견한 점이다.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이라는 학문 분야가 있는데, 이게 이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는 맞물려 돌아간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111


'부르주아지는 봉건 영주들의 지배 아래서는 피억압자 신분이었고, 꼬뮌에서는 무장한 자치연합체였으며, 어떤 곳에서는 독립적인 도시 공화국이었고, 다른 곳에서는 군주국의 납세 의무를 지닌 제3신분이었으며, 그 다음에 매뉴팩처 시기에는 신분제 군주국이나 절대 군주국에서 귀족에 대한 평행추였으며, 대군주국 일반의 주요한 토대였다가 마침내 대공업과 세계 시장이 갖추어진 이래로는 현대 대의제 국가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하였다. 현대의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최종적인 결과는 현대 대의제 국가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한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의 일을 처리해주는 위원회인 것이다.

꼬뮌(commune)은 본래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도시 시민들이 자신들의 봉건영주로부터 자치권을 사들이거나 강찰한 뒤에 자신들이 이룩한 도시 공동체를 부르던 명칭이다. 꼬뮌과 관련해서는 1870년대 파리 꼬뮌(노동자들이 봉기한 혁명 정부)을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1871년 3월, 독일군이 파리를 포위한 가운데 일어난 19세기 최대의 노종자 계급 혁명이다.  112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코뮌을 평하여 "그것은 본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정부였다. 그것은 착취 계급에 저항한 생산 계급의 투쟁의 결과이며,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을 이룩할 수 있는 새로 발견된 정치 형태였다"고 말했다. 엥겔스 또한 "꼬뮌은 전 유럽의 노동자들에게 사회 혁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열쇠를 준 것"이라고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한 바 있다.  113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지배권을 얻은 곳에서, 모든 봉건적, 가부장제적, 목가적 관계들을 파괴하였다.'

'파괴'라고 한 단어의 독일어 의미는 '절멸시키다'라는 뜻이다. 완전히 파괴하고 땅에 묻어서 흔적조차 없애버리는 것이다. 완전히 거덜 내는 것이다. 이게 첫 번째 업적이다.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해온 것을 없앴으니 당연히 혁명적인 업적인 거다. 그런 것을 없앤 다음, 그 자리에 세워놓은 것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노골적인 이해관계, 냉혹한 현금 계산이다. 이것 역시 부르주아 계급의 업적이다.  115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인간애가 어떤니, 인간관계가 돈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삭막하다느니 하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르주아의 혁명적 업적인데 그걸 불만이라고 하면 부르주아의 업적이 불만이라는 말이고, 그러면 다연히 빨갱이로 몰리지 않겠는가.  117


'부르주아지는 이제까지 존경받았던, 사람들이 경외하며 바라보앗던 모든 직업에서 그 신성한 후광을 벗겨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 등을 자신들의 유급 임금 노동자로 바꾸어놓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 자신의 진본성이 없어진다. 생명도 복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복제하여 돈을 벌려고 든다. 

부르주아 계급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뭐든 돈 되는 방향으로 바뀌어간다. 오래갈 만한 것이 있을 수 없다. 끊임없이 부수고 새로 지어야 그것으로부터 이윤이 생겨난다.  117-118


모든 것이 돈으로써 측정되므로 존귀한 것이 남아나질 않는다. 

현대 사회의 문화를 논하 ㄹ때 문화만 따로 떼어내서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반드시 경제적 구조부터 이야기해 들어가야 한다.  119


글로벌이니 세계화니 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있어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바탕으로 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요즘 들어서는 그 경향이 더 강해졌을 뿐이다. 

또 하나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 '혁신'이라는 말이다. 

이것 역시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계속해서 자본의 순환 고리를 돌려야 하니까. 그것도 빨리 돌려야 이윤이 빨리 나오니까 혁신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123


'부르주아지는 생산도구들에, 따라서 생산관계뜰에, 따라서 사회관계들 전체에 끊임없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혁명은 때려 엎는다는 의미강 아니다. 계속되는 혁신과 변화를 가리킨다. 그 혁신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일어난다. 먼저 생산도구들을 바꾼다. 공장에 자동화 시스템이 도입되었다면 이건 생산도구가 바뀐 것이다. 그에 따라 그 도구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이 바뀐다. 사람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조직도 변한다. 이건 생산관계가 바뀌는 것이다. 생산관계가 바뀌면 사회관계 전반이 바뀌게 된다.  124


혁신을 하는 궁극적인 이뉴는 '이윤창출'에 있다. 회사에서 아무리 사원들 건강이 최고다. 가족 같은 회사 분위기 만든다. 직원 재교육과 복지를 강화한다고 떠들어대도 그건 궁극적으로 회사의 이윤창출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회사가 성장하지 않는다면, 매출과 영업이익이 올라가지 않는다면 당장 교육과 복지 부문부터 줄인다. 이걸 보면 그런 시책의 근본 목적이 무엇인지 금방 알수 있다.

성장을 하려면 혁신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혁신을 자주 하다 보면 결국에는 사람을 잘라내는 일이 생겨난다.  125


노동의 생산성이 올라가야만 이윤이 증가하니까. 노동 생산성 향상을 위해 기술 혁신을 햇는데 어느 시점에 오면 살아 있는 노동자를 쫓아내게 된다.  127


'물질적 생산에서 그렇듯 정신적 생산에서도 마찬가지다. 개별 국민들의 정신적 창작물은 공동 재산이 된다. 국민적 일면성과 제한성은 더욱더 불가능하게 되고, 많은 국민적, 지방적 문학들로부터 하나의 세계 문학이 형성된다.'

전 세계적인 차원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가 이제 문화도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지배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세계 문학은 획일화된 문화를 뜻한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물질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자본주의 세계에서 정신적인 면도 가지고 잇는 문화가 형성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할리우드 영화가 무역협정과 연골되어 협상된다. 4년마다 한 번씩 사람들이 열광하는 월드컵 축구대회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과 마찬가지 방식을 통해서 그러한 열광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도 1970년대 중반부터다. 이게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의 문화 현실인 것이다.  128-129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인터넷과 매스미디어다. 콘텐츠 산업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산업은 바로 이러한 네트워크가 있었기에 생겨날 수 있었다.

IT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정년은 보통 30대 중반이다. 빠른 속도로 빨아먹다가 더 빨아먹을 게 없으니까 내다버리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생산도구들의 급속한 개선과 한없이 편리해진 교통을 통해 모든 국민들을, 가장 미개한 국민들까지도 문명 속으로 잡아당긴다.'

이걸 읽고서 마르크스가 오늘날의 상황을 예언하듯이 봤다고 생각하면 과잉해석이다. 그딴 식으로 생각하는 건 마르크스를 우상화하는 것이다. 무슨 '빠'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마르크스 당시에 교통이 발전했으면 얼마나 했겠는가. 다만 그 사람이 글로벌한 차원에서 움직이는 자본주의 체제를 보고 이런 판단을 했구나 하는 정도로 보면 된다.  130-131


'부르주아지는 농촌을 도시의 지배 아래 복속시켰다. 부르주아지는 거대한 도시들을 창조했고, 도시 인구의 수를 농촌 인구에 비해 크게 증가시켰으며, 그리하여 인구 중 현저히 많은 부분을 우매한 농촌 생활에서 떼 내었다.'

자본주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도시문명이다.

도시에서는 뭐든 자기 혼자 힘으로 자급자족할 수가 없다. 음식을 먹으려 해도 슈퍼에 가서 공산품을 사다 먹어야 한다.  131


자기 관리를 하려면 생활을 단순하게 만들어야 한다.  136


'부르주아지는 백 년도 채 안 되는 자신들의 계급지배 기간 동안, 과거의 모든 세대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고, 더 거대한 생산력들을 창조하였다. 자연력들의 정복, 기계 장치, 공업과 농경에 대한 화학의 응용, 기선 항해, 철도 전신, 전 대륙의 개간, 하천의 운화화, 땅 및에서 솟아난 듯한 인구 전체, 이와 같은 생산력들이 사회적 노동의 무릎 위에서 졸고 있었다는 것을 이전의 어느 세기가 알아챘을까.'

현대의 대공업이라는, 노동 분업과 효율성을 갖춘 체계 속에서는 사람들이 더 이상 각자 알아서 노동을 해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여럿이 모여서 일해야 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노동이 잉여 가치의 원천이 된다. 자본주의가 이룩한 거대한 생산력들은 사회적 노동을 통해서만 구현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137


'우리는 이리하여 다음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르주아지가 양성된 기초였던 생산수단드로가 교류수단들은 봉건사회 안에서 태어났다... 한마디로 봉건적 소유관계들은 이미 발전한 생산력들에 더 이상 걸맞지 않게 되었다... 그것들의 자리에 자유 경쟁이 들어섰으니, 그에 걸맞는 사회적, 정치적 기구와 함께, 부르주아 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지배와 함께 들어섰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를 극복하기 위해 느닷없이 새로운 것을 외부로부터 가져와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봉건사회 안에 봉건사회를 극복해 낸 자본주의의 씨앗이 들어 있었고 그것이 싹터서 자본주의의 발전이 가능했듯이, 자본주의 사회안에 자본주의를 극복할 씨앗이 들어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 씨앗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 씨앗을 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자본주의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자본>이라는 책을 썼다. <자본>은 자본주의를 뒤엎자는 주장을 담은 책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밝힌 책이다. 뒤집어는 건 밝힌 다음의 일이라는 것이다.  138-139


'우리 눈앞에 이와 비슷한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사회 안에서 시작된 어떤 운동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 운동은, 부르주아가 봉건사회를 무너뜨렸듯이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 사회를 무너뜨리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부르주아의 힘은 놀라운 것이었다. 마법사와 마찬가지였다. 글ㄴ데 이제 그 마법사는 "지하 세계의 힘에 더 이상 군림할 수 없게 된 마법사"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해놓고 보니 감당할 수 없는 힘이었던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첫 번째 힘은 "생산력들의 반란"이다. 생산력의 반란으로 봉건제가 폭발하고 그것으로부터 부르주아 사회가 나왔다면, 부르주아 사회 역시 생산력의 반란 때문에 위기에 놓인 것이다. 이렇게 생산력이 반란을 일으키면 부르주아 사회의 소유관계는 물론이고, 그 소유관계를 규율하는 여러 가지 법적 장치와 같은 사회관계가 폭발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생산력까지도 태반이 벌멸되고 하나의 "사회적 전염병"이 돌발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과잉 생산"이라는 전염병이다.

'사회는 갑자기 순간적인 야만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기아와 전면적인 섬멸전은 사회에 대한 모든 생활수단들의 보급을 차단해버린 것처럼 보인다. 공업과 상업은 절멸된 듯이 보인다. 왜 그런가? 사회가 너무 많은 문명, 어무 많은 생활수단, 너무 많은 공업, 너무 많은 상업 따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장들, 좀 이상하다. 많으면 좋은 거 아닌가. 

문제는 그렇게 많은 것이 아무나 나눠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윤을 남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니 그냥 막 내다팔 수가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창고에 재로고 쌓여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발전하면서 생산성 향상을 위해 자동화를 도입한다. 그러면 노동력이 남게 된다. 그걸 해결하려고 구조조정이란 걸 한다. 말이 그럴싸해 구조조정이지 사실은 사람 자르는 일이다.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그냥 남는다. 노동려깅 너무 많이 남아돌게 된다. '과잉'이 자본주의 위기의 근본적인 요인이다.  141-142


'부르주아지는 무엇을 통해 이 공황들을 극복하는가? 한편으로는 대량의 생산력들을 부득이 절멸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들을 획득하고 옛 시장을 더욱 철저히 착취함으로써.'

마르크스는 두 가지 방안을 발견했다. 첫째가 대량의 생산력들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냥 마구 내다버리는 것이다. 사람도 없애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이다. 전쟁 무기를 한번 생각해보라. 평소에 그게 어디 쓸모가 있는가. 미국에 전쟁 무기가 엄청나게 생산되어 쌓여 있다. 그거 만드느라 돈 엄청 들어갔다. 소비를 해야 또 만들 것 아닌가. 아예 안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공장의 대규모 장치들은 어떻게 할 것이며, 고용되어 일하는 수많은 인력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아예 전쟁을 일으켜서 '미개한' 이라크 사람들 죽이는 게 더 쉬운 것이다.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 더 그럴싸할 테고, 이게 자본주의 국가가 전쟁을 일으키는 근본벅인 이유 중의 하나다. 바로 "절멸"시키는 것이다. 깡그리 없애버리는 것이다.  143


시장 확대는 전쟁을 일으킬 만한 형편이 안 되면 나오는 방안이라 생각해도 좋다. 애초부터 자본주의는 세계 시장을 무대로 성장해왔다. 더 이상 개발할 만한 시장이 없는 것 같아도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그래서 온 세상을 '문명' 국가로 편입시켜야 한다.

그것도 안 되면 기왕에 개발한 시장을 더 철저히 뜯어먹는다. 별로 쓸데없어 보이는 물건까지 만들어 그게 '생활필수품'이라고 광고하면서 팔아치우는 것이다. 이러다 안 되면 자기들끼리 싸운다. 식민지 쟁찰전을 벌이는 것이다. 이렇게 전 세계를 상대로 물건 팔아먹을 시장을 찾아 나서는 것이 제국주의다. 제국주의 국가들끼리 시장 쟁탈전을 벌이다가 급기야는 거대 전쟁까지 이른 것이 제1, 2차 세계대전이다.  144


자본주의의 위기극복전략 예를 다른 사례를 통해 더 살펴보자. 이거 중요하다. 잘 알아두어야 한다. 그래야 세계 시장 진출이니, 국제 자유무역이니 하는 말들이 가진 달콤한 유혹의 뒷면에 놓인 쓰라린 경제논리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야 강대국의 정치적 발언이 사실은 경제적 이익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야 강대국의 경제관련 발언이 사실은 군사력 행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대장 아래서 굴러 간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가장 커다란 환상 중의 하나가 그 체제는 자유경쟁이며, 그에 따라 공정한 기호를 보장하는 효율적 체제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게 현실에서는 정말 그대로 작동할까. 예를 들어보자. A, B, C. 이렇게 세 명의 부르주아가 잇다고 하자. 세 명 모두 두루마리 휴지를 생산한다. 생산한 휴지의 품질이 똑같다 치자. 누가 만든 물건을 살 것인가? 일단 싼 거 살 것이다. 브랜드 이미지가 넣ㄹ리 알려진 물건을 살 수도 있다. 그러면 이들 세 사람이 언제나 공정하게 경쟁하며 그에 따라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넓혀줄까.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결국 시장 독점으로 간다.  144-145


시장의 공급을 지배한다는 것은 가격을 지배한다는 것이요. 이윤을 자기 맘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자본가든 독점 공급을 목표로 한다. 그래야 이윤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146


실업자가 늘어났다는 것은 아주 많은 수의 대중이 가난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건은 넘쳐나는데 가난한 대중은 물건 살 돈이 없다. 

현대의 국가 안에는 다양한 세력들이 공존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는 부르주아와 깊은 관계 속에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반항하는 기미가 보이고 국가를 원망하는 분위기가 고조되면 얼른 나서서 적당한 선에서 당근을 국가를 원망하는 분위기가 고조되면 얼른 나서서 적당한 선에서 당근을 주어 무마하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는 국가 권력이 부르주아 계급의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하로 했던 것이다.  149


'부르주아지, 다시 말해 자본이 발전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프롤레타리아트, 즉 현대 노동자 계급은 발전하는데, 그들은 일자리를 찾는 한에서만 살 수 있고, 자신들의 노동이 자본을 증식시키는 한에서만 일자리를 찾게 된다.'

노동자 계급이 발전한다는 말을 오해하지 말자. 그냥 생겨난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이니 대학마다 취직률을 높이기 위해 기업에서 요구할 만한 인재를 키운다고 난리법석 떠는 거 아닌가. 대학이 학문탐구의 공간이 아니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이것이다.  152


'자신을 조각내어 판매해야만 하는 이 노동자들은 다른 모든 판매품들처럼 하나의 상품이며, 따라서 똑같이 경쟁의 모든 부침(浮沈)들, 시장의 모든 변동들에 내맡겨져 있다.'  

노동자의 특정한 능력을 판다는 뜻이다. 이것을 '노동력'이라 한다. 판매되고 있으니 노동력은 상품(commodity)이 된다.

이것뿐이 아니다. "기계 장치의 확산과 분업" 때문에 노동자는 "가장 간단하고, 가장 단조롭고,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손동작만 요구받는 단순한 기계 부속품이 된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은 자본가를 위해서이며 게다가 그것은 개별 노동자의 불구화를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노동을 지배하는 자본을 위해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사회적 생산력을 높이는 일은 결국 자본가를 위한 것이다. 기술적 역동성에 의해 새로운 생산 설비가 도입되면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졌다고들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것이 자본의 입장에서는 진보로 보일지 언정 노동의 입장에서는 "문명화되고 세련된 착취 수단"인 것이다. 농업을 보면 이것이 더욱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지금의 농촌은 기계화된 농업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얼핏보면 기계화가 농업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한 듯하다. 그러나 기계화된 농업이 도입되면서 더 이상 많은 농업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따라서 많은 농업 노동자가 도시로 갔다. 토지를 비옥하게 하기 위해 수많은 화학비료가 살포된다. 그로 인해 농업 노동은 "토지의 비옥함의 지속 가능한 원천을 파괴"하는 공업적 노동이 된다. 자연의 대 순환의 톱니바퀴를 빼는 공업은 지속 불가능한 산업이다.  154-155


'이 전제 정치는 영리가 그 목적이라고 공공연하게 선포하면 할수록, 더욱 더 좀스럽고 증오스럽고 잔인한 것으로 된다.'

노동자 계급의 성별 차이, 연령 차이는 무의미하다. 노동자는 "기껏해야 연령과 성별에 따라 서로 다른 비용이 드는 노동 도구"일 뿐이다. 인간 취급을 받는 게 아니다. 그냥 도구다. 숙련된 노동자들도 별 볼일 없다. "새로운 생산방식들에 의해 무가치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웬만하면 아무나 충원할 수 있다. 

지식기반 경제라고 해서 극소수의 엘리트만 신경 써서 뽑고 나머지는 죄다 계약직으로 충원한다. 쉽게 충원하고 쉽게 자를 수가 있다. 

'이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계급의 주민들로부터 충원된다.'  156


'이제까지의 소중간 신분들, 즉 소공업가들, 소상인들과 소금리 생활자들, 수공업자들과 농민들 등의 이 모든 계급들이 프롤레타리아트로 추락하는데...'

마르크스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계급의 양극화 현상이다.  157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기를 쓰고 조직화하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들의 계급으로의, 또 따라서 정당으로의 이 조직화는 노동자 자신들 사이의 경쟁 때문에 매번 다시 파괴된다."

마르크스가 <선언>을 쓸 당시의 정당은 오늘날의 정당과 다르다. 구체적인 당 조직을 말하는 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 자신을 프롤레타리아트임을 자각하고, 그에 따라 일정한 정도로 정치적 조직화를 이루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자기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속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를 분명히 아는 것이다. 즉, 조직화는 일정한 현태를 띤 조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급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직화도 매번 다시 파괴된다.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계급을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음이 주된 이유다.

자신을 프롤레타리아인데도 그걸 모르는 사람은 뜻밖에도 많다. 회사에서 가장 얄미운 사람이 누군가. 사장도 아니면서 사장 마인드 가진 팀장, 사장보다 더 사장스러운 사람. 회사에는 사장과 사장 아닌 사람밖에 없는데 사장도 아니면서 회사 입장에서 생각해보자고 하는 사람들이다. 자기의 객관적 위치를 알지 못할 뿐더러 남이 그 위치를 알려줘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답이 없다. 그냥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부르주아는 이런 사람들을 적절히 활용한다.  162-163


'부르주아지는 처음에는 귀족과 대항하는 투쟁 속에 있다가. 이후에는 부르주아지 자체 가운데 공업의 진보와 모순되는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부분들과 대항하는 투쟁 속에 있으며, 항상적으로는 모든 해외의 부르주아지와 대항하는 투쟁 속에 있다.'

처음에는 중세의 귀족들과 투쟁하여 그들의 속박을 벗어던졌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되려 할 때 그것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분쇄하였다. 이렇게 하여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사회가 만들어지자 이번에는 해외의 부르주아지와 대립관계에 놓인다. 이럴 때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호소하고 그들의 도움을 청하며, 그리하여 그들을 정치 운동에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정치 운동"이라는 람은 정치적 공간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그러면 프롤레타리아트의 도움을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이 될까. 바로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가 본질적으로는 계급관계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숨기고 한 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164-165


<선언>에 따르면 "중간신분들, 즉 소공업자, 소상인, 수공업자, 농민 등 이들 모두는 중간신분으로서의 자기의 존재가 몰락하지 ㅇ낳도록 부르주아지와 싸운다." 마르크스가 <선언>을 쓸 당시에는 예상하기 힘들었겠지만, 이 중간신분들이 나중에는 독일의 나치즘이나 이탈리아 파시즘에 적극 가담한다. 자기 입지가 위태로워짐에 따라 배타적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파시스트들의 핵심적 서포터들이 된다. 파시즘은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에서 생겨난다. 그러면서 경제적 불안에 떠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약속한다. 파시즘은 자본주의 체제를 보존하면서도 배타적 민족주의에 호소하여 그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모든 이들이 자신들의 계급을 잊고 '민족'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평등하게 살 날을 기대한다.

파시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이들이 또 있다. 바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이다.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단어다. 이 말을 엥겔스는 <선언> 영어판에서 "위험한 계급", "사회적 찌꺼기"로 번역했다. 그리고 1852년 이후 마르크스 저작에서 룸펨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이 나오면 완전 쓰레기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선언>에서도 이미 경멸당하고 있다. "낡은 사회의 최하층의 이 수동적 부패물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때때로 운동에 끌려드는 일도 있는데, 생활상의 처지 전체로 볼 때 반동적 음모에 매수되는 것에 더 마음이 끌린다"는 것이다.

반동적 음모는 부르주아가 꾸미는 것이다. 자기네 편드는 지식인들이 이 음모에 동원된다. 이를테면 이건희가 대학에 명예철학박사 학위 받으러 왔다가 봉변당한 일로 자기 학교 애들 삼성에 취업 안 되면 어쩌나 걱정해서 사과하는 족속들, 말만 지식인인 자들이 이에 해당한다.  166-167


자본주의의 발전이 절정에 이르면 계급의 양극화가 진행되고 프롤레타리아는 알거지 상태로 전락하기 직전이 된다.

'프롤레타리아는 무소유이다.' 

무소유라는 말에서 법정 스님의 책을 떠올리지 마라. 그런 고상한 뜻이 아니고 진짜로 '가진게 없다'는 뜻이다.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그의 관계는 부르주아적 가족관계와의 공통점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

프롤레타리아 맞벌이 부부와 부르주아 맞벌이 부부가 같은 상황일 리 없다. 프롤레타리아 맞벌이 부부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뭐 있겠나. 육아 문제가 그 중 하나다. 돈이 있어야 해결된다. 애들 방에 두고 밖에서 문잠갔다가 사고 나는 일은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자식을 방에 가둬놓고 집을 비우고 싶은 부모가 세사에 어디 있겠는가. 생존을 위해 맞벅이를 해야 하고 놀이방에 자식을 맡길 여유조차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결국 사회적 소유관계, 평드의 문제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곳간에서 인심 나듯이 기본적으로 갖출 건 갖춘 상태에서 윤리 도덕도 생겨나게 마련이다.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윤리학적 명령이 호소력을 잃은 까닭이 이 때문이다.  167-168


'노동자들에게는 조국이 없다.'

마르크스는 국적을 없애려 한 것이 아니다. 자본과 노동은 무국적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은 이미 국적이 없다.  169


자본주의와 맞서 싸워야 한다고 할때.. <선언>을 읽는 동안에는 왜 맞서 싸워야 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과연 어떤 세상을 만들자고 하는지만 알아보기로 하자.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지배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지배는 사람답게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 일과 같은 의미다.  171


'공산주의를 남김없이 설명하는 것은 소유 일반의 철폐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철폐이다.'

공산주의는 소유라는 것 자체를 아예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가진 물건을 죄다 내놓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시계를 차고 다녀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소유방식, 자본주의 사회의 이윤 획득방식을 철폐한다는 뜻이다. 달리 말해서 생산수단을 사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생산력을 획득"한다고 하는 게 이 말이다.  173


얻어지는 이윤을 몇몇 사람이 독식하는 일은 원천적으로 부당한 것이다. 그러니 거기서 얻어지는 이윤이 가능하면 사회적 노동에 가담한 사람 전체에게 나누어질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정의로운 것이고 공정한 것이다.

'이제까지의 모든 운동들은 소수의 운동들이었거나 소수의 이해관계에 따른 운동들이었다.'

"이해관계"는 손해와 이익이라는 뜻이 아니라 '관점'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이제까지의 모든 운동"이 엥겔스의 영어판에는 "이전의 모든 역사적 운동들"로 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운동들'로 이해하면 된다. 그에 이어지는 구절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엄청난 다수의 이해관계에 따른 엄청난 다수의 자립적 운동이다" <선언>에 나오는 이 구절을 프롤레타리아의 수가 많다. 적다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유심히 보면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엄청난 다수의 이해관계에 따른" 운동이다. 이 점이 중요다하.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엄청난 다수의 관점을 따라간다는 것, 즉 다수의 이익, 다수의 관점을 대변하는 운동이라는 뜻이다.  174


'지금 사회의 최하증인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적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계층들의 상부 구조물 전체를 공중으로 날려버리지 않고서는 몸을 일으킬 수도 없고, 똑바로 설 수도 없다.'

"공적 사회"는 정치적 사회, 법적 장치와 제도적 장치를 형성하는 모든 영역을 의미한다. '공중에 날려버린다'는 흔적도 없이 찢어없앤다는 뜻이다. 이는 사회적 생산물 위에 제도적 법적 장치까지 없애야 프롤레타리아트가 똑바로 설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은 한 나라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적인 프롤레타리아 연대 투쟁으로 이어져야 한다.  175


부르주아지를 전복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바꾼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해야 지배의 기초를 세울 수 있고 그런 다음 다수의 대중으로부터 그 지배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지도가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이미 부르주아의 지배는 물론이고 지도까지 확립된 상태에 있다. 이걸 바꾸는 일이 수월하겠는가. 애써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177




내용들을 정리해보면...

2페이지 첫 문장은 유물론적 역사 이해를 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역사를 물질적 생산활동, 물질화된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활동으로 파악하고 이를 다시 물질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계급 대립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라 인류의 역사를 보려면 계급투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3페이지부터 부르주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이야기한다. 부르주아 성립의 물질적 토대는 세계 시장이었다. 즉, 자본주의는 출발점부터 글로벌했다는 것이다.

4페이지는 봉건사회 안의 혁명적 요소를 언급하고 자본의 원초적 축적을 말한다. 그리고 시장이 성정하고 대공업이 발전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부르주아지는 중세로부터 내려온 모든 계급들을 뒷전으로 몰아내고 사회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5페이지에서 6페이지까지는 부르주아의 발전 단계에 걸맞는 정치적 진보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결과 부르주아의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로서의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또한 부르주아지는 사회의 모든 관계를 냉혹한 이해관계로 바꾸어 놓았다. 그럼으로써 이제 본격적인 자본주의 사회가 세워진 것이다.

7페이지는 부르주아 사회가 세워진 후 세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말한다. 부르주아는 끊임없는 해외 원정에 나서고, 끊임없이 혁명을 일으킨다.

8페이지에서는 끊임없는 혁명과 해외 원정을 통해 부르주아지가 전세계에 걸쳐 세계 시장을 형성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각 지역의 고유한 문화 등 모든 것이 획일적, 자본주의적 문화로 바뀐다. 좋은 점도 있다. 외국 가서 음식이 입에 안 맞으면 맥도날드 가면 되니까. 이 와중에 농촌 생활도 다 없어지고 만다.

9페이지부터 10페이지까지는 자본주의가 진행됨에 따라 사회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세부적으로 언급한다.

11페이지에서는 부르주아 사회가 이런 업적을 거우었음에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힌다. 그 문제점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이 공황이다. 이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는 항상 위태롭고 불안하다.

마지막으로 12페이지부터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안들이 제시된다. 부르주아지는 공간상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확보하려 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이미 확보된 시장에서 더 많은 착취를 행하게 된다. 또한 현대의 대공업 시대에 필연적으로 생겨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들의 삶의 실상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무엇인지가 여기서부터 길게 이야기된다. 부르주아를 때려잡아 잘 살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가진 총제적인 불합리한 점을 걷어내고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도 존중 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진행되어야 하고, 이는 계급투쟁과 정치투쟁을 거치면서 다수의 이해관계에 의거해서 지배권을 세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의 전 영역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관철해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79-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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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에 사람들이 매혹당한 가장 큰 동기는 '가난한 사람들, 배를 곯는 사람들, 수탈당하는 사람들, 사회적인 불의를 견디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양심'입니다.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버젓이 곁에 있는데 자기는 '편하게' 지내고 있다는 불공평함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게 되고, 거기에서 '공정한 사회를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한 사명감이 자라나지요.  10


아마도 마지막으로 일본인에게 '양심의 고통'을 느끼게 한 것은 베트남 전쟁 때 불에 타 죽은 베트남 농민이었을 겁니다. 일본이 베트남 전쟁의 후방 지원 기지로서 그들의 학살에 간접적으로 가담했고, 그 덕분에 일본인은 전쟁 특수로 인한 경제적 풍요를 누린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이지요.

하지만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일본인은 '양심의 고통'을 느낄 만한 상대를 더 이상 찾을 수 없었어요. 그 후 처음에는 다소 미안한 듯 조심스러웠지만 나중에는 여봐란듯이, '우리는 이렇게 잘 살고 있다! 이렇게 풍요를 누리고 있다! 이렇게 쾌적한 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자랑스럽게 떠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누가 마르크스를 읽겠어요?  11


단적으로 말해 돈을 갖는 것,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 호화로운 집에 사는 것, 비싼 옷을 입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능력 있는 인간이 우아하게 살고, 무능하고 힘없는 인간이 길거리에서 굶어 죽는 것을 자기 책임이라고 합니다. 능력 있는 인간이 높은 품격을 인정받고, 무능한 인간이 경멸당하거나 모욕을 받는 것을 매우 적절한 결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회적인 정의(fairness)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오피니언 리더가 된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고방식은 별로 '좋지 않다'고 봅니다.

공동체는, 가장 연약하고 가장 힘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전체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자존감을 갖고 각각의 입장에서 책무를 다할 수 있게 하는 제도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혈연이나 지연으로 엮인 소규모의 공동체든, 국민 국가나 국제 사회 같은 거대한 공동체든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힘없고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 운용해나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어느 정도의 '성숙한 어른'이 꼭 필요하지요. 충분한 능력도 있고, 지혜도 갖추고 있고, 주위에서 모두들 존경과 신뢰를 보내는 사람, 나아가 자신이 갖고 있는 자원을 자기만의 이익이 아니라 주변의 힘엇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성숙한 어른'말입니다.  12


마르크스를 읽고,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 '어린애가 어른이 되는' 방법으로서 가장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마르크스를 읽지 않게 되고 나서부터 눈에 띄게 '성숙한 어른'이 줄었습니다. 나는 이 두가 현상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봅니다.  13




마르크스 수사학의 결정체 <공산당 선언>

                                                                  (공산당 선언 전문 참고 하기 클릭)


초판 책자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라는 저자의 이름도 실려 있지 않았고, 저자를 밝힌 것은 1850년이었다고 합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7년 모스라는 인물의 추천을 받아 이동맹에 가입했습니다. 동맹에서는 그해 6월에 열림 제 1회 대회(엥겔스참석)와 11월에 열린 제2회 대회(마르크스와 엥겔스 참석)-둘다 런던에서 개최-에서 강령 내용에 대해 상당히 오랫동안 논의를 거듭했습니다. 그리하여 제 2회 대회에서는 논의의 결과를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문서로 작성할 임무를 맡기기로 결정하죠. 다만, 당시 마르크스는 브뤼셀에, 엥겔스는 파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대표로 집필하기로 했어요. 마르크스는 그 전에 엥겔스가 집필한 <공산주의의 제 원리>(1847)등을 참조하면서 독일어로 이 글을 써냈습니다.  25-26


이 책은 네 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다.

I. 부르주오와 프롤레타리아 - 부르주아는 자본가,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자를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양자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중심으로 '근대 부르주아 사회'(당시 마르크스는 아직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어요)의 체제나 역사, 또 프롤레타리아 혁면(공산주의 혁명)의 필연성 등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II.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들 - 여기에서는 '공산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 일반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서 시작하여 공산주의 운동의 목적이나 공산주의 사회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III. 사회주의 문헌 및 공산주의 문헌 - 이 부분에서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고 불리는 다양한 조류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본격적으로 논단이나 운동의 세계에 등장하기 이전에도 이미 수많은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은 너무나 많은 얼굴을 한 정체불명의 '유령'으로 취급받았습니다. 

IV. 각종 반정부당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 - 여기에서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반정부당이나 혁명당에 대해 공산주의자의 당이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논합니다.  27


마르크스는 현대 경제나 정치, 여성의 지위나 가족, 저출산 문제 같은 사회적 문제를 생각하는 데 중요한 힌트를 제공해주지요...

마르크스의 유물론 철학에서는 이론을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것으로 파악하는 사고를 신랄하게 비판하고있으니까요.  28


실은 만년의 엥겔스는(<1883년 독일어판 서문>) "<공산당 선언>을 관통하는 기본 사상, 즉 역사의 어느 시대라도 경제적 생산 및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편성이 그 시대의 정치적 및 정신적 역사의 기초를 이룬다는 것, 따라서 (태곳적 토지 공유가 붕괴한 이후)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 즉 사회 발전의 여러 단계에서 착취당하는 계급과 착취하는 계급, 지배당하는 계급과 지배하는 계급 사이의 투쟁의 역사라는 것, 그러나 이 투쟁은 지금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착취와 억압 및 계급투쟁으로부터 사회 전체를 영국적으로 해방하지 않고서는 착취하고 억압하는 계급(부르주아지)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 이 기본 사상은 단 한 사람, 오로지 마르크스에게서 나왔다."  29-30


공산주의 혁명론을 몇 가지 소개하면.

1. 노동자의 정치권력 획득 - '공산주의자의 당면 목적'은 우선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프롤레타리아트(노동자 계급)가 정치권력을 쥐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는 <공산당 선언>의 사상은 매우 독창적이었죠.

2. 정치 혁명과 사회 혁명 - 혁명의 '첫걸음'으로서 정치권력을 획득한 공산주의자는 그 다음 사회의 개혁으로 나아가야 해요.

3. 공산주의 사회란 무엇인가. - 사회를 계급으로 분열시키는 경제적인 기반이 사라진다는 뜻이에요.."계급 및 계급 대립이 있는 낡은 부르주아 사회를 대신하여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나타난다." 공산주의 사회라고 하면, 소수의 엘리트(계급) 혹은 공산당이 국가를 장악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국민 전체를 계획적으로 관리하는 사회라는 이미지를 떠올릴지도 모르겟어요. 하지만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주의는 그러한 사회와 전혀 달랐어요.

4. 혁명의 방법에 대해 - 당시 유렵의 역사적 사정을 생각해볼 때. 겨우 스위스 정도만 국민 다수의 선거를 통해 권한을 가진 의회를 선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해요. 실제로 <공산당 선언>을 발행한 직후 각지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아닌 왕정 타도나 민족 독립을 요구하는 혁명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모두 '강제력'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한편,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6년 노동자 계급의 선거원을 요구한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에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고, 그 후에도 마르크스는 만년에 이르기까지 의회를 통해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방법을 쉬지 않고 탐구했어요.

5. 민주적 개혁과 공산주의 혁명 - 마르크스는 역사를 향해 언제 어디서든 공산주의 혁명을 밀어붙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태도를 취하지 않아요. 우선은 "눈앞에 닥친 목적이나 이익의 달성"을 소중하게 여기고, 부르주아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부르주아와 '공동으로' 싸워나간다고 하지요. 각각의 사회에 대해 각각의 역사적 단계가 필요로 하는 '현재의 운동'을 통해 야무지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운동의 미래', 즉 공산주의 혁명에 접근해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죠. 냉철한 자세를 유지했어요.  31-36


마르크스의 경제 이론이나 정치 이론은 현실 정치에서 이미 '유효 기간이 지났다'고 여겨지고 있어요

만일 마르크스의 이론을 그대로 가져와서 적용하기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이런 기준으로 마르크스를 평가한다면, 마르크스의 '유효 기간은 지났다'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마르크스를 읽음으로써 지적인 활기를 얻고, 자신의 지성을 가두고 있는 '우리'의 구조를 깨달으며, 거기에서 빠져 나오려는 노력에 시동을 거는 사람드에게 마르크스의 유효기간 따위는 없을 거예요.  44




청년 마르크스를 만나다 <유대인 문제>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두 사람이 실제로 처음 맞대면한 것은 1842년 2월, 그러니까 엥겔스가 맨체스터로 가는 도중에 <라인신문> 편집부에 들렸던 때 라고 하는군요. 그러나 이 만남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거기서 나는 마르크스를 만났지요. 당시 우리는 지극히 냉랭한 분위기에서 인사를 했어요. 마르크스는 그때 바우어 형제를 반대하는 입장이었거든요.... 나는 바우어 형제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인지라 그들의 동맹자로 여겨졌고, 한편 마르크스는 그들에게 수상하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던 것 같아요."(<엥겔스가 프란츠 메링에게 보낸 편지> 1895년 4월말)

이 시기 <라인신문>의 주필이던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정부의 검열과 투쟁하는 등 구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벌이는 논전을 중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탁상공론으로 보이는 추상적인 논의만 되풀이하는 청년헤겔학파와 심하게 대립하고 있었어요. 브루노와 에드가 바우어 형제가 대표적인 논자였죠.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 형제와 친하게 보이는 엥겔스에게 경계심을 가졌던 모양이에요.  66


두 사람 관계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독불연감>에 게재한 엥겔스의 논문 <국민경제학 비판 대강>에 마르크스가 강렬한 충격을 받고 나서부터입니다. 두 사람이 평생 변치 않는 교류를 나누며 공동의 역사를 이룩한 것은 그때부터라고 봐야겠죠.  67


<유대인 문제>

바우어의 논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어요. '유대교도의 해방은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하지만, 독일에서 억압받는 이들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인민이다. 따라서 유대인 문제는 모든 독일인의 해방을 둘러싼 문제로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독일인의 해방을 달성하려면 독일 국가가 기독교의 굴레를 버리고 근대 국가가 될 필요가 있으며, 아울러 독일의 인민 스스로 기독교나 유대교 같은 특정한 종교로부터 빠져나와 자유로운 자기 의식을 획득해야만 한다. 

이러한 논지에 대하여 마르크스는 '정치적 해방'과 '인간적 해방'이라는 두 가지를 구분하는 시각과 관련된 시각을 제기해요.

1 "독일의 유대인은 해방을 열망하고 있다. 어떤 해방을 열망하는가? 공민(公民)으로서의 해방, 정치적인 해방이다."(<전집>, 제1권, 384쪽)

2 하지만 "정치적 해방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비로소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비판이 가능하며, 유대인 문제를 '시대의 일반적 문제'의 하나로 진정 해소시킬 수 있다."(앞의 책. 388쪽)

3 그런데 바우어는 "다만 '기독교 국가'만을 비판할 뿐 '국가자체'를 비판하지 않는다", "정치적 해방이 인간적 해방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연구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단지 정치적 해방과 일반적인 해방을 무비판적으로 혼동"하고 있다.(앞의 책 388쪽)  68-69


마르크스는 헤겔을 본받아 '시민사회'를 "욕망과 노동과 사리(私利)와 사적 권리의 세계"(앞의 책 406쪽)라고 불렀는데요. 그는 나중에 이것을 '자본주의 경제'라는 문제 영역으로 정리하고 이해해갔어요. 마르크스는 이 단계에서 근대 사회가 초래한 법적 평등과 경제적 불평등을 구별하고, 이 사회의 중심이 경제 활동의 새로운 주체가 된 부르주아로 옮겨 간 점이 일찍부터 착목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독일인의 '인간적 해방'을 위해서는 '이기적인 정신'으로 가득 찬 시민사회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70-71


기독교가 유대교의 '분파'로서 등장.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모두 유대교에서 파생한 종교이기 때문에 애초의 시발점부터 반유대교적이라는 것은 논리적인 필연인 것입니다.  81


마르크스가 역점을 둔 것은 유대인 해방 '그 자체'가 아니에요. '해방'의 전 단계에 포함되며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은 것. 다시 말해 누구의 해방이며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지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에요...

상상해보면.. 인종 차별이 있는 어떤 나라에서 자유우의 성향의 정치가와 사회 활동가의 노력으로 '인종차별쳘폐법'을 제정했다고요. 의회는 법안을 가결하고 정부는 그 법을 엄숙하게 실행했어요. 자, 이런 경우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차별이 없어진 것 아니야?'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예, 차별이 철폐되었어요. 그뿐입니다. 하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사시에 또 하나의 국민적 합의가 성립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어요. 그것은 "우리 나라의 통치 시스쳄은 참 잘 돌아가고 있구나"라는 합의예요.

바꾸어 말하면, '그게 뭐 잘못인가? 합법적인 수순을 밟아서 차별을 철혜햇드면, 꽤 괜찮은 사호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니야? 그런 정치 시스템이라면 충분히 건전하게 기능하고 있는 것 같은데...'하는 것이죠.

마르크스는 그러한 무언의 동의가 성립되어버리는 것에 대해 강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86


바우어는 '정치적 해방이 인간적 해방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연구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단지 정치적 해방과 일반적인 해방을 무비판적으로 혼동'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이렇게 쓴 것은 곧, "이봐, '정치적 해방'과 '인간적 해방'은 다르단 말이야" 하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죠.

'정치적 해방', 즉 법률에 의해 '인종 차별을 하면 안 됩니다'라고 정하는 것은 물론 '일보 진보'겠지요.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렇게 마랳요. "그건 하나의 '진보'일 뿐 종점은 아니야. 이야기를 거기에서 끝내버리면 안 된다고, 유대인은 정치적으로는 해방되었어도 인간적으로는 아직 해방이 안 되어 있거든."  87


모든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가 인간 해방이 실현된 이상 사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시민 사회에서 시민들이 누리고 있는 것은 '고립의 자유'예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대신 누구도 폐를 끼치지 못하게 할 권리. '고립되어 자기 안에 콕 틀어밖혀 잇는 모나드(단자)로서 누리는 인간의 자유'(앞의 책 43쪽)라고나 할까요. 인간과 인간이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거리를 두는 것에서 더욱 커다란 가치를 찾는 것이 근대 시민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어요. 시민사회의 기초는 "'자신의 재산, 자신의 소득, 자신의 노동 및 노무의 성과를 임의대로 향수하고 처분할' 권리"(앞의 책 44쪽)에 있다고 말이죠.  90


물론 시민사회에서도 시민들은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은 아니에요. 정부에 자신의 권리 일부를 맡기고 법률을 제장하거나 법을 준수하며,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 세금을 내고, 징병령이 떨어지면 무기를 들고 조국을 위해 싸우기도 해요. 이런 시민의 모습을 마르크스는 '공민'이라고 부르지요. 이는 공적인 기능이란 측면에서 규정한 시민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시민을 '속마음에 충실한 시민'이라고 한다면, 공민은 규칙에 따라 의무를 다하는 '원칙에 충실한 시민'이라고 하겠지요. 요컨대 시민은 '사인(私人)'과 '공민'이라는 두 얼굴을 갖게 되지요. 사인으로서는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 공민으로서는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식으로...  91


마르크스의 정의에 따르면 '유적 존재'란 "현실의 개체적 인간이 추상적인 공민을 자기 안에서 되찾은" 상태를 가리켜요. 시민사회에서는 '공사의 혼동'이 어디까지나 '공보다 사는 우선한다'는 것임에 비해, 유적 존재는 공과 사를 문자 그대로 일치시킨 상태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93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행복과 이익에 신경 쓰는 만큼의 열의로 이웃의 행복과 이익에 신경을 쓰는 '유적 존재'가 되는 것을 '인간 해방의 완수'라고 봤어요.  94


마르크스는 사회 전체를 '특별한 의미에서 해방하는 입장'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이 텍스트를 통해 끄집어내려고 해요. 프롤레타리아론은 마르크스의 사회 이론을 뒷받침하는 근간과 관련있는 테제인데요...

마르크스는 스스로를 '족쇄밖에 잃을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라고는 여기지 않았으니까요.(마르크스에게는 족쇄 이외에도 가족이나 친구, 동지 같은 '좋은 것'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에게 모든 권리를!' 같은 테제를 증여의 구문으로 썼어요. 이 테제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마르크스가 '자신의 소유물'을 선물로 내주면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윤리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나는 프롤레타리아'라고 자칭하는 인간이 '프롤레타리아에게 모든 권리를!'하고 주장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어요. 논리적으로는 옳지만 윤리적으로는 옳지 않거든요. 인간은 자기가 손에 넣고 싶다고 바라는 것을 우선 다른 사람에게 증여함으로써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 이것도 내가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확신하게 된 교훈의 하나예요.  102-103




인간에 대한 연민, 그 위대한 시작 <경제학-철학 수고>


'소외된 노동'

"노동자는 자신의 생명을 대상에 쏟아붓는다. 그러나 대상에 쏟아부은 생명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라 대상의 것이다... 그의 노동이 들어간 생산물은 그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생산물이 커지면 커질수록 노동자 자신은 그만큼 가난해진다.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물을 외화한다는 것은 그의 노동이 하나의 대상에, 하나의 외적인 현실 존재가 된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노동이 그의 외부에, 그에게서 독립한 소원한 형태로 존재하며 그에 대해서 자립적인 힘이 되는바, 그가 대상에 부여한 생명이 그에 대해 적대적이고 소원하게 대립한다는 의미이다.  147


마르크스 자신은 부르주아였으니 그가 인용한 가혹한 노동의 경험 같은 것은 안 해봤을 테지요. 하지만 강렬한 공감려고가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148


소외론의 출발점이 '자신의 비참함'이 아니라 '타인의 비참함'을 목도한 경험이었어요. 마르크스는 "우리를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랍니다. "그들을 소외된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우리의 임무"라고 주장한 것이지요.  149


'유적존재'

'나만 좋으면 나머지는 상관없다'는 본심만 내세우며 살아간다면,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도구로 이용하고 수탈할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인간을 바꿀 것인가, '유적 존재'를 지향하면 바뀐다." 이것은 제3초고의 제2장 [사적 재산과 코뮌주의]의 중심논점이에요.

지금 내가 인용하고 있는 책에서는 보통 '공산주의'라고 번역하는 Kommunismus를 '코뮌주의'라고 옮겨놓았어요. '코뮌(Kommune)'이란 공동체를 가리키는데요. 나라나 지방 정부 같은 상명하달 시스템과 달리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범위, 목소리가 들리는 범위 안에서 합의를 통해 제도를 만들고 규정을 정리하며 자치를 행하는 단위예요. 비교적 규모가 작고 중앙 집권적이지 않은 통치 기구를 말하지요. 이러한 조건을 정치 제도의 기본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 '코뮌주의'인데요. 이것을 '공산주의'라고 해버리면 역사적으로 현존했던 '공산당'이나 '국제 공산주의 운동' 같은 것과 어쩔 수 없이 연관시켜 이해하게 되지요. 그래서 그러한 구체적인 역사적 존재가 등장하기 이전에 아직 막연한 관점에 지나지 않았던 시기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굳이 '코뮌주의'라는 번역어를 갖다 쓴 것 같아요.(혼자만의 추측에 부로가하지만)  150-151


마르크스가 지향하는 것은, 가장 인간적이고 훨씬 문명적인 코뮌주의입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적인 본질의 현실적 획득으로서의 코뮌주의(앞의 책 349쪽)"  152





'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 <독일 이데올로기>


<독일 이데올로기>의 구선은 제1권 <최근의 독일 철학 비판>, 제2권 <독일 사회주의 비판>으로 되어 있어요.

제1권에서는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 막스 슈티르너를 검토하고 있지요. 이 세 사람은 모두 청년헤겔학파의 멤버로 한동안 마르크스와 헤겔이 높이 평가했었지요. '헤겔 좌익'이라고도 부르는 청년헤겔학파는 헤겔의 철학을 계승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자 ㅇ혁신적인 흐름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헤겔의 철학에는 '변증법'이라 부르는 변혁의 정신이 내재해 있는데, 현실 세계에 대해 헤겔은 정치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고, 현재 세계의 모습을 훌륭하다고 옹호하는 보수적-현상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어요. 청년헤겔학파는 이른바 헤겔의 언행 불일치에 불만을 품고, 특히 종교 분야에서 낡은 체제에 도전했어요.

그러나 그들도 대부분 자유나 민주주의 문제 같은 것을 당시 독일의 구체적인 정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로지 관념의 세계에서 벌이는 투쟁(공중전)으로 현실의 개혁 문제를 풀어나가려 한 약점을 갖고 있었어요.

이런 대목이 의견의 차이를 낳게 되어 마르크스는 <라인신문>의 편집을 둘러싸고 바우어 형제와 심하게 맞붙었고, 엥겔스와 함께 쓴 <신성 가족>에서 브루노 바우어를 집중적으로 비판하게 되지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우선 문제를 관념의 세계에서 인간이 매일 생활하는 현실 세계로 끌어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2권에서는 당시 독일에서 유행하던 진정한 사회주의라는 사상적 조류를 비판하고 있어요. 프랑스나 영국에서 이러한 조류는 자기 나름대로 현실 세계를 직시한 결과 생겨난 사회주의 사상이었지만, 독일로 수입되면서 독일의 독특한 관념 세계와 결부되어 버린 것이지요.  172-173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야기하는 '이데올로기'에는 처음부터 비판적인 의미가 들어 있었어요. 

"이데올로기는 분명 이른바 사상가가 의식적으로 행하는 과정이지만, 그 의식은 잘못된 의식입니다. 사상가를 움직이는 본래의 추진력을 그 자신은 모르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이데올로기적 과정이 아닐 것입니다."(<엥겔스가 메링에게 보맨 편지> 1893년 7월 14일)  174


"그들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그들의 생산, 즉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고 또 어떻게 생산하는가 하는 것과 일치한다."(<신판 독일 이데올로기> 31쪽)

사적유물론을 '한마디'로 설명하라고 하면(무리한 주문이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만큼 유명한 구절이죠.  211


예를들어 '근본부터 사악한 인간'이 있다고 쳐봐요. 그런데 이놈이 어쩌다가 '선행'을 했어요(전철에서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다든가, 뭐... 이런 일은 엄밀히 말해서 '생산'은 아니지만요). 사적유물론의 견지에서 말하면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에요. 마르크스는 이 사람이 '사실은 어떤 놈인가' 같은 한쪽으로 치우친 이야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아무리 근본이 돼먹지 않았다고 해도 선행을 하면 선인이고 아무리 근본이 선량하다해도 나쁜 짓을 하면 악인이라는 것이죠.  212


마르크스는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인간'이야말로 인간의 본바탕이어야 한다고 말해요. '현실적이고 역사적으로' 변변치 못한 일을 한 인간은 '변변치 못한 인간'이라고 말이에요.

나는 이치의 옳고 그름보다도 윤리적으로 마르크스가 우월하다고 생각했어요.  213


"인간들이 이야기하는 것, 상상하는 것, 표상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또한 이야기하고 사유하고 상상하고 표상하는 대상이 되는 인간들로부터 출발하여, 거기에서 생겨난 진정한 인간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인간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또 그들의 현실적인 생활 과정으로부터 이 생활 과정의 이데올로기적 반영과 반향이 어떻게 발전하는지도 해명할 수 있는 것이다."(앞의 책 42쪽)  216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요약하면, '인간들이 이야기하는 것, 상상하는 것, 표상하는 것'이 적절한가 아닌가는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인간들'에 따라 '그들의 현실적인 생활 과정으로부터' 검증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217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앞의 책 42쪽)

멋진 말 아닌가요? 'A는 B가 아니라 B가 A다'라는 수사법은 마르크스의 십팔번이었어요. 논리학적으로는 무리를 범하는 일도 가끔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런 수사를 애용했어요. 마치 입버릇인 것처럼 말이죠. 아마도 이런 표현이 '자연물처럼 보이는 조작물'의 정체를 폭로하는 데 지극히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마르크스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218


"공산주의 사회에서 각자는 그런 까닭에 고정된 어떤 활동 범위에 갇히지 앟고, 어디라도 좋아하는 분야에서 자신의 기량을 갈고 닦을 수 있도록 사회가 생산 전반을 통제하고 잇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을 하며, 아침에는 사냥하고 낮에는 낚시하며, 저녁에는 가축을 돌보며, 저녁 밥을 먹은 뒤에는 비평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게다가 반드시 사냥꾼, 어부, 목동, 비평가가 되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신판 독일 이데올로기> 67-68쪽)

분업에 의해 인간이 '어떤 특정한 범위에만 머무르는 것'을 강요받고, 특정한 직업에 속박당할 때, 그 노동은 '그에게 소원하고 적대하는 힘'이 된다. 마르크스는 이런 표현을 동원하여 분업을 비판했어요. 동시에 사냥꾼이자 어부이자 목동이자 비평가(이것은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사람, 즉 내가 앞에서 한 이야기에 따르면 '액자를 대는 사람'= 지식은을 가리킵니다)이기도 한 인간을 이상으로 삼은 대목은 아마도 내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가장 감동 받은 부분이 아닐까해요.

마오쩌둥은 힘들고 고된 연안 장정 시기에 홍군 병사들을 향해 동시에 군인이자 농부이자 기술자이자 정치사상가이자 교사가 되라고 요구했겠지요. 그는 '공(工)농(農)상(商)학(學)병(兵)'이 한 사람 안에 통합되어 있는 모습을 인간의 이상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219-220




'지성을 단련하는' 일은 물론 마르크스를 달달 외우거나 옳다고 믿는 것이 아니에요. 마르크스는 도대체 현실 세계-그것은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잇는 자본주의 사회의 초기 단계였어요-의 어디를 보고 무엇을 찾아내려고 했을까? 성장하고 변화해가는 마르크스이 언어를 따라가면서 그 점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그 결과 마르크스가 도달한 지점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이 잡히면 그것이 진정 옳은 것이었는가를 자신의 머리로 판단해가는 일, 그런 훈련을 해나가기 위해서 마르크스를 재료로 활용하는 것이 바로 '지성의 단련'이겠죠.

어찌 된 일인지 마르크스한테는 '벼락치기'가 통하지 않아요.

상대가 마르크스든 아니든, 글을 읽을 때는 거기에 쓰여 있는 내용을 수동적으로 그냥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두뇌를 단련시킬 수 없어요.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말한 마르크스 자신이야말로 항상 그런 자세로 비판적인 정신을 가지고 선배 사상가들의 지적 성과와 씨름하고자 한 사람이었어요.

한편, 이 책을 훑어봤다면 느꼈을 테지만, 마르크스는 글을 쓰면 쓸수록 그 내용이 확확 변해가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내용이 변화하고 탐구의 깊이가 심화되어 갈수록 더욱 사안을 정교하고 치밀하게 파악할 뿐 아니라 이전의 사고 방식을 과감하게 전환시키기도 하고, 과거에 도달한 지점을 가차없이 내던져버리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어요.  222-223



마르크스의 저작 나이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유대인 문제> 25세

<경제학-철학 수고> 26세

<독일 이데올로기> 28세

<공산당 선언> 29세

<프랑스의 계급투쟁> 32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33세

<임금, 가격, 이윤> 47세

<자본론> 제1권 48세

<프랑스 내전> 53세     22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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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가격. 사람들은 흔히 사회적 가격 때문에 열등감에 빠져 주눅이 들거나 자신감을 잃거나 갈등에 시달리곤 합니다. 

열등감이란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들 때문에 스스로 고통을 짊어지고 괴로워하는 갈등입니다.  17


만약 모기가 잠자리만큼 크다면 언제든지 때려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기에게 화를 내는 까닭은 바로 눈에 잘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답답하게 여기는 것은 아마도 우리 안에 모기 같은 존재가 도사리고 있어서 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보달것없어 보이는 우리 마음입니다.  22


스승께서 던지신 말씀

"쥐는 쥐약인 줄 알면 먹지 않는데, 사람은 쥐약인 줄 알면서도 먹는다."

"아주 뜨거운 물잔은 얼른 내려놓으면 되는데, 붙잡고 어쩔 줄 모르니 델 수밖에 없다."  33


세상은 뱃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끌려다니며 산다는것은 바보짓입니다.  35


왜 사십니까?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얹고 차분히 생각해 보십시오.  40


저도 중세 철학자들의 흉내를 내면서 우리 사회의 명망가들을 찾아다니며 인생에 대해 물은 적이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인생을 진지하게 산 어른들은 대부분 '호방하게 살라'고 했습니다. 정말 소문이 날 만큼 인생을 호방하게 산 어른들은 대체로 '진지하게 살라'고 충고했습니다.

저는 진지하게 사는 것과 호방하게 사는 문제를 가지고 다시 한 번 묻고 다녔습니다. 결국 얻어낸 결론은 진지함과 호방함을 함께 선택함이 현명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인생을 진지하고 호방하게 사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지혜입니다.  49-50


자존심은 스스로 존엄하다는 걸 인정하고, 자신이 존귀하듯 나 아닌 다른 모든 것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빈다. 자신만을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은 자만심입니다.  61


내 몸에서 악취가 나면 다른 향을 느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혼을 깨끗이 하지 않으면 다른 영혼의 향기를 맡을 수 없습니다.  102


김수환 추기경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 포용, 자기 낮춤이 성행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  108


덕은 자기 영혼의 생김새를 예측할 수 있는 거울이자 개량기 입니다. 베풂은 자비심뿐 아니라 자신을 어여쁘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나이 들수록 품격이 생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덕을 푼푼히 베풀며 살아왔을 겁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잘 가꾼 표시가 나는 것입니다.  109


세상에 널리 아려진 큰 스승을 만나려면 베움의 자세가 확고하고 모진 가르침을 따를 각오가 남달라야 합니다. 그러나 참 스승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참스승은 도처에 있을 수 있습니다.  121


어느 목사님이 주례사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기에 결혼하지 말고 사랑하기 위해 결혼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134


사랑에 굶주리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넘치는 법이 없습니다. 주는 쪽에서 아무리 지극해도 받는 쪽에선 부족하고 아쉽고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137


화병은 불안, 불신, 공포, 분노, 증오, 답답, 우울 등으로 인해 생기는 병입니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보면 화병은 핑계 때문에 생긴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고 생각하며 분노하고 답답해하기 때문에 울화를 삭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십시오, 아픈 것도, 화난 것도, 분노한 것도, 짜증난 것도 모두 내 탓입니다. 상대방 때문에 화병이 생겼다고 주장하겠지만, 자신의 영혼이 허약하기에 생긴 핑계이기 쉽습니다.  159


성철 대 선사의 말씀은 이랬습니다. "대나무처럼 살라!"

대나무가 가늘고 길면서도 모진 바람에 꺾이지 않는 것은 속이 비었고 마디가 있기 때문입니다. 속이 빈 것은 욕심을 덜어내어 가슴을 비우라는 뜻이었습니다. 또한 사람마다 좌절, 갈등, 실수, 실패, 절망, 아픔, 병고, 이별 같은 마디가 없으면 우뚝 설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166


비워야 채울 수 있고 틈이 잇어야 비집고 들어갈 수 있으며 빈자리가 있어야 누군가 앉을 수 있는 것입니다.  167


어느 대기업 사장이 말했습니다.

"바람을 마주 보고 맞으면 역풍(逆風)이지만 뒤로 돌아서서 맞으면 순풍(順風)이 된다."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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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산다는 것은 

자국을 남기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흔적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다.  26



[사랑해야 길이다]

길은 마음으로 걸어줄 때 살아난다.

온몸으로 속삭일 때 살아난다.

진정 사랑으로 보즘을 때 행복하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지나가도 돌아보지 못했다면

걸었다 할 수 없다.

사랑해야 길이다.  32



[잊어버림]

나를 잊고, 

너를 잊고,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길.

오늘,

이런 길을 달리고 싶다.  42



[여행중독]

여행이 중독이듯 길도 중독이다.

빠지면 헤어날 수 없다.

여행은 나를 찾아가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지독하게 묻고 답하는

나에게로 떠나는 것이 여행이고 길이다.  54



[욕심 없는 길]

마키아벨리가 편지를 쓰고 싶은 이유는

미친 사랑도 아니고 그저 안개 때문이었다.

안개 때문에 젖어들었던 상념이고, 

그 상념의 불꽃과 향기를 보듬었을 뿐이다.

안개의 길은 전부가 아닌 조금만 보개 한다.

눈보다는 마음이 먼저 보게 하는 길이다.

조금씩 천천히 밟아가야 하는 욕심 없는 길이다.  87



둘이 걷는 길은 혼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외로움을 떨쳐낼 수 있고 혼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물리적인 난관들이 극복될 수 있는 길이다. .. 그러나 둘이 걷는 길은 장점과 강점만큼이나 단점도 많고 약점도 많다. 시간이 갈수록 의견 충돌은 피할 수 없고 여독이 쌓일수록 감정의 골은 심연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둘이 걷는 길은 문제와 난관을 전제로 하거나 이미 어느 쪽이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양보와 희생을 대전제로 하고 떠나는 길이다.  99



삶은 여행이다. 스쳐가는 여행이기에 한 번쯤 색다르게 살아보는 삶도 가능하다. 단 한 번뿐이었지만 정말 그때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추억할만큼.  101



[당신 때문에 빛난다]

당신의 눈이 되어 당신의 마음이 되어

당신의 자리를 따라 간다.

당신이 흐르는 대로 나도 따라 흐르고,

당신이 버리는 대로 나도 따라 버린다.

아직 남은 빛처럼 아직 남은 사랑에 행복하고 

아직 남은 온기처럼 아직 남은 시간에 고맙다.

행복은 내일 또다시 떠오른 태양 때문에 빛나고 

내일 또다시 찾아오는 당신 때문에 빛난다.  109



[그립다]

길을 떠나도 길이 그립고 

길을 잊어도 길이 그립다.

혼자 걸어도 길이 그립고

둘이 걸어도 길이 그립다.  119



[길은 이어진다]

생각은 생각으로 이어지고,

마음은 마음으로 이어지고,

고독은 고독으로 이어지고,

사람은 사람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길은 길로 이어진다.  120



[오래 사랑하려면]

오래 사랑하려면

오래 같이 있어야 한다.

오래 사랑하려면

오래 붙어 있어야 한다.

길은 단 한 번도 떨어져 있은 적이 없다.  123



[세상에서 가장..]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사랑을 얻는 일.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사랑을 지키는 일.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

사랑이 식는일(내가 보기에는 '사랑이 식기 직전')  133



[친구]

삶의 친구란

사이좋은 사람이 아니라

어디든 함께 떠날 수 있는 

거울 같은 사람이다.

만날 때마다 항상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먼 길까지 오래

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134



모든 인생도 여행도 공짜는 없다.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무언가를 버렸기에 떠날 수 있고, 무엇 하나를 감내하기에 떠날 수 있다. 인생이나 여행에서 누구나 길을 나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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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섹스'라는 주제에 대해 철학적인 사색을 펴쳐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19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부분은 종족을 발전시킬 특정 요소의 상징에 불과하다.

진화생물학은 섹스의 존재 이유는 잘 설명하고 있지만, 특정한 사람과 섹스를 하고 싶어지는 의식적인 동기에 대해서는 납득할 만한 실마리를 제시하지 못한다.  33


마음속 깊은 곳의 자아는 태어날 때 함께 가지고 나온 원초적인 욕구를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뭔가를 달하건 못하건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 몸을 매개로 사랑받고 싶은 욕구,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고 싶은 욕구, 자신의 살 냄새로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싶은 욕구다. 이 모든 선천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로 인해 이상주의적 열망에 사로잡혀 키스하고 싶고 같이 자고 싶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게 되는 것이다.  37-38


남자가 여자의 몸 위로 살며시 올라타며 여자의 다리 사이로 삽입을 한다. 남자는 여자가 축축이 첮어 있는 것에 격한 환희를 느낀다. 바로 그 순간, 남자에게 팔을 두르고 있던 여자도 남자의 딱딱해진 페니스에 똑같은 만족감을 느낀다.

이와 같은 생리적 반응들에 큰 만족감을 느끼는 이유, 다시 말해 만족스러운 동시에 아주 에로틱하기도 한 이유는 뭘까? 그러한 생리적 반응들은 논리나 이성의 조종능력이 손톱만큼도 미치지 못하는 승낙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48


현실에는 격식을 갖춰야 하는 상황이 많다. 그런데 그런 수많은 격식들은 그 자체로서 자연스럽게 뜻밖의 성적 판타지를 싹틔울 여지를 허락한다. 규칙을 깨는 연상작용에 의해 제목이 성욕을 일으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남드르이 눈에 잘 안 띄는 도서관 구석이나 고급 레스토랑의 화장실, 또는 열차의 객실 안에서 섹스하는 상상 역시 그와 비슷한 이유로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식의 반항적 일탈은 단순히 성적 판타지의 차원을 넘어서서, 어떤 권한을 느끼게 해준다. 비즈니스 승객들로 가득한 비행기 내의 화장실에서 섹스를 한다고 상상해보라. 그런 상상은 이성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통상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위계를 뒤집는다. 그리고 대체로 냉담한 규율이 개인의 소망과 바람을 지배하는 분위기 속으로 열망을 끌어들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고도 1만 600미터 상공의 기내는 사무실처럼 숨 막히는 공간이지만, 그런 성냠갑 같은 곳에서 위계가 아니라 친밀감이 승리했으므로, 그 승리는 더 달콤하고 그만큼 쾌감도 더 짜릿하다. 이와 같은 비행기 화장실 안에서의 시나리오에 대해 흔히 '섹시하다'고들 말하지만, 그 표현에 내포된 진정한 의미는 따로 이싿. 그것은 바로 비행기 안에서 느낀 위압적인 소외감을 극복한 것에 대한 흥분이다. 

성적 판타지나 동경은 격식과 친밀감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51-52


연인 사이의 충성스러운 애착은, 무례함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더 강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거대하고 비판적인 사회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그 무례함이 더 놀랍고 경악스럽게 여겨질수록, 연인들끼리는 두 사람만이 승인한 낙원을 짓는 듯한 기분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이런 무례함은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심리학의 프레임을 통해 들여다봐야만, 따귀를 맞고, 숨이 반쯤 넘어가도록 목이 졸리고, 침대에 묶여 강간당하다시피 다루어지는 그런 행위가 일종의 승낙의 증거라는 사실이 차츰 이해된다.  56-57


섹스는 고통스러운 이분법, 즉 우리 모두가 유년기 이후에 익숙해지는 '불결함'과 '순수함'의 이분법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준다. 섹스는 우리의 자아 중에서 가장 명백하게 더럽혀진 측면을 그 과정에 끌어들이고, 그럼으로써 그 불결한 측면을 가치 있는 것으로 거듭나게 해주며, 결국 우리의 자아를 정화시켜준다. 

그런데 여기서 자아를 정화시켜준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면 이렇다. 얼굴, 그러니까 우리 몸에서 가장 공개적이고 고상한 부분인 얼굴을 연인의 가장 은밀하고 '불결한' 부분에 가져다 대고 열정적으로 키스하고 빨고 혀를 집어넣으면서, 상징적으로 연인의 자아 전체를 받아들여줄 때가 바로 그런 정화의 순간인 셈이다.  57


관계가 끝난 후에는 기분이 다소 가라앉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섹스 후에 비참한 기분에 젖어드는 경우는 꽤 흔한 일이다. 한쪽, 혹은 두 사람 모두 곯아떨어지거나, 신문을 읽거나, 그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 쉽다.

대체로 이럴 때 문제는 섹스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섹스와 일상의 현격한 대비가 문제다. 섹스는 특유의 다정함, 격렬함, 열정, 쾌락이 지배하는 반면, 삶의 일상적인 특면들은 반복, 지루함, 억압, 어려움, 냉담함으로 가득하다. 이 둘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비참한 기분에 젖어드는 것이다.  69


사랑을 나누는 동안 일어나는 이련의 과정은 우리의 마음속 열마오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행위는 서로의 성기를 마찰시키는 행동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우리의 흥분은 천박한 생리학적 반응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특별한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느끼게 되는 엑스터시다.  70


우리 사회는 사람들을 내면과 외면으로 이루어진 존재로 생각하며 내면을 외면보다 더 특별하게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측면, 즉 겉모습이 운명과 욕망에 있어 대단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73 


육체적인 매력이 무의미한 것이라고 덮어놓고 비하하기 전에, 누군가의 외모에 '흥미'가 끌린다고 말할 때 그 말 속에 담긴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를 고찰해보자.  74


한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무작위로 선별된 일단의 사람들에게 여러 남녀의 얼굴이 찍힌 사진들을 보여주며 미모 순위를 정해보라고 했더니, 놀랍게도 일치된 결과가 나타났다고 한다. 사회적 환경이나 문화적 배경이 전부 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떤 얼굴이 가장 매력적인지에 대해 전 지구적으로 의견이 일치한 것이다.

이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진화생물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 남녀 모두 '섹시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기준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얼굴의 좌우가 대칭적으로 일치하고 균형과 비율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용모라는 것이다.  75


대칭과 균형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대칭과 균형이 맞지 않는 경우, 즉 얼굴이 심하게 비대칭이거나 균형이 맞지 않는다면 자궁속에서 혹은 생후 수년 이내에, 즉 자아의 대부분이 아직 형성되지 못한 시기에 병에 걸렸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태아일 때 DNA가 세균에 감염되거나, 임신 초기에 엄마가 극도의 스트레스를 겪으면, 얼굴의 생김새에 이런 불운의 흔적이 그대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외모는 우리의 유전적 운명을 보여주는 지침인 셈이다.  77


어떤 사라에게 육체적으로 ㄱ르려 그 사람과 자고 싶어지는 심리에 대해, 우리가 그 사람의 '본질'을 무시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사람의 입술, 피부, 이마, 눈썹을 통해 정확히 분별해낸 흥미로운 미덕에, 즉 사탕달의 표현을 빌리자면, '행복의 약속'에 흥분을 늒미으로써 더 가까워지고 싶어진 것일 수도 있으니까.  83


어떤 옷차림을 '섹시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 그 옷이 대변하는 그 사람의 인생관과 철학에 흥미가 끌린다고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85


부부 사이에 잠자리가 소원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리고 가장 순수한 관점에서 볼 때, 일상과 성애의 영역 사이를 원만하게 이동하지 못해 애를 먹기 때문이다. 성관계를 할 때 요구되는 자질은, 대다수의 일상적인 활동들을 행할 때 필요한 자질들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결혼을 하고 나면(결혼 직후부터는 아니더라도 수년 내에)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해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시간 관리하기,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자제하기, 말 안 듣는 자녀들에게 권위를 세우고 규율을 부과하기 등등, 가끔은 작은 기업체라도 운영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새악이 들 만큼 관료적이고 절차적인 기술이 필요해진다. 

그런데 섹스는 정반대의 덕목들, 즉 자유로움, 상상력, 유희, 통제력 상실이 중요하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통제와 자기억제를 특징으로 하는 일상생활을 방해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일단 욕망이 자연스레 발산되고 나면 야무지게 살림을 꾸린다거나 아이를 키우는 등의 가정생활 임무를 수행하는 데 부적당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적어도 다시 그런 임무를 재개할 생각이 들지 않을 우려가 있다.

우리가 섹스를 회피하는 이유는 그것이 재미없어서가 아니다. 섹스가 주는 쾌락이, 그 이후에 부과될 가정생활과 일상의 까다로운 요구들을 견뎌낼 인내력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125-126


오래된 연인이나 부부의 침체된 성생활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해결책은 파트너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바라볼 줄 아는 것이다.  133


고의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수많은 성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간 주범이 바로 문명이다. 인권을 중시하고 인간의 친절과 도덕적 교양을 존중하는 우리의 문명 말이다. 이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랑과 상냥함의 능력이 진보할수록, 그것이 도리어 우리를 너무 과민하게 만들어 이성을 유혹하려는 시도를 주저하게 만들 수도 있다니.

문명은 남녀 관계에 있어서 관대함, 세심함, 평등의식, 공평한 가사 분담과 같은 굉장한 미덕을 가져다 주었다. 그 점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문명화가 우리의, 아니 적어도 남자들의 성관계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문명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욕망을 막무가내로 요구하거나 거칠게 밀어붙여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을 단지 우리 자신의 욕구충족과 쾌락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150-151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발기불능은 지나친 존중이 병이 되어 나타나는 증상이다. 파트너에게 자신의 욕망을 강요하는 무례를 범하거나 파트너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해서 불쾌감을 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발기부전 치료제가 잘 팔리는 시대적 현상은 현대사회 남성드르이 집단적 갈망을 대변해준다. 즉, 상대를 실망시키거나 기분 상하게 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그 미묘하고 민감하며 예의 바르고 문명화된 걱정을 무마시켜줄 확실한 메커니즘을 갈망하고 있다는 신호다.  152


우리는 파트터에게 화가 났다는 사실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그 때문에 곧잘 멍하고 우울해져서 잠자리를 피할 때가 많다. 이런 경향이 나타나게 되는 원인은 대체로 두 가지 중 하나다.

첫째, 화가 치밀어 오른 구체적 사건들이 너무 정신없고 어수선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경우다. 화가 났는지 제대로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순식간에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자신이 기분이 상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침식사를 할 때라든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는 와중에, 혹은 점심시간에 시끄러운 쇼핑몰에서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상황을 떠올려보라. 화살이 날아와 우리에게 상처를 입혔는데도, 그 화살이 갑옷의 어느 위치를 어떻게 뚫었는지 정확히 눈치 챌 경황도 여력도 없는 상황이다. 

둘째, 분노를 알아차린 경우 더라도 그 화난 마음을 말로 표현하기 조차 어려울 때가 많다. 말하자면 기분을 상하게 만든 일들이 너무 사소한 일이라면 입 밖에 꺼내어 따져봐야 본전도 못 찾는다. 대부분은 내가 너무 까다롭거나 별나서 그런 것이라는 결론이 나고, 상대방은 어처구니없어한다. 따지고 나서 스스로 생각해봐도 무안하고 머쓱해지는 그런 경우다.

이를테면 헤어스타일을 바꿨는데 파트너가 눈치 채지 못하거나, 바게트를 자를 때 빵 전용 도마를 쓰지 않아서 부스러기를 여기저기 떨어뜨릴 때, 혹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별일 없었는지 묻지도 않고 곧장 텔레비전 앞으로 갈 때 정말 속상하다. 하지만 이런 대수롭지 않은 일들을 건건이 불평하기에는 어쩐지 좀 민망하다.  155


세상의 모든 커플은 객관적으로 보기엔 매우 사소하고 터무니없는 일들을 놓고 비슷비슷한 말다춤을 벌이곤 한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견지에서 본 그 사람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문제(자녀 교육이나 주택 구입에 관한 문제)에서부터 하찮은 문제(소파를 놓는 방향이나, 화요일 저녁의 데이트 계획 같은 문제)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영역에 걸쳐 상대방을 '완벽함의 화신'으로 만들고자 애쓴다. 따라서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자신의 여러 이상들 중 하나가 배신당하는 고통이나 분노를 느낄 가능성이 다분하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게 되면, 더 이상 사소한 일 같은 것은 없어지니까.  156


거의 감지할 수도 없는 그 냉랭함 때문에 한쪽, 혹은 양쪽 모두 상대와의 잠자리를 피하기도 한다. 알다시피 섹스란 일단 화가 나면 건네주기 쉽지 않은 선물이며, 자신이 화가 난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157


왜 화가 난 것인지에 대해서 먼저 차근차근 이해하기만 해도 그들은 다시 예전처럼 알콩달콩 지낼 수 있다.  159


성인기의 사랑에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려면, 어린 시절에 사랑 받던 느낌을 기억하기보다는 부모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데 무엇을 감수했는지, 다시 말해 얼마나 큰 노력을 쏟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에 맞먹는 노력을 쏟아야만, 파트너가 은밀하게 불만의 화살을 쏠 때 그것을 감지하고 그 원인을 해결함으로써 더 행복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또한 애정이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더 자주 성관계를 갖게 되는 것은 여기에 덤으로 따라오는 행운이다.  165-166


중년의 기혼남이 다른 열자를 유혹할 때 내보이는 대범함을 자신감으로 착각해선 안 된다. 그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뿐이다. 무슨 말이냐면, 그 나이가 되어 가끔씩 죽음을 의식하게 되면, '내 인생에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찾아올까?'하는 초조함 때문에 대범해진다는 뜻이다. 젊은 독신 남자였을 때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추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삶이 무한대로 펼쳐져 있을 것 같아서 수줍음과 부끄러움이라는 사치를 부릴 여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197-198


이왕 이렇게 된 것, 과감함 생각도 해보자. 외도에 대한 일반 대중의 견해와는 반대되지만, 진짜 잘못은 그 반대의 경우라고 말이다. 즉 탈선에 대한 어떠한 욕망도 '없는'경우가 더 잘못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탈선에 대한 욕망이 전혀 없다는 것은, 오히려 이치에 어긋나고 부자연스러운 반응이므로, 이상할 뿐만 아니라 심오한 의미에서 볼 때 '잘못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외도의 가능성을 전혀 즐길 줄 모른다면, 그것은 심각한 상상력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우리 인간이 이 지구에서 할당받은 애처롭도록 짧은 시간에 대한 심술궂은 태연함이자, 우리 몸이 가진 영광스러운 육욕적 본성에 대한 푸대잡이나 마찬가지다. 아니면 회의 중에 탁자 밑에서 유혹하듯 손가락을 감거나, 식당에서 식사가 끝나갈 무렵에 은밀하게 무릎을 접촉해오는 식의 에로틱한 도발에 이성적인 자아가 정당하게 지배당해야 할 권리를 부인하는 셈이다.  199-200


사람들은 외도를 저지른 배우자가 무조건 다 잘못했고, 정절을 지킨 배우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너무도 쉽게 단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의 의미를 일부분만 이해한 반쪽짜리 판단이다. 확실히 외도는 조간신문 톱기사감인 것은 맞지만, 배우자를 배신하는 방법으로 말하자면 다른 종류의 배신들도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지만, 외도에 못지 않은 충격과 실망을 주는 배신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를테면 배우자와의 대화에 인색하게 구는 것, 마음이 딴데 가 있는 사람처럼 구는 것, 괜히 성질을 부리는 것, 스스로를 매력적으로 가꾸는 데 노력하지 않는 것 등등.  202


배신당한 것에 분개한 배우자는 본질적이고도 비참한 한 가지 사실을 회피하기 쉽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전부가 될 수는 엇다는 사실이다. '배신당한' 배우자들은 대개 이런 서글프고도 충격적인 사실을 너른 아량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게다가 주위 사람들은 그저 재신자는 비난받아야 마땅하다고 부추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진짜 큰 잘못은 도덕주의적 결혼관습에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모든 욕구에 대해 성적으로, 감정적으로 평생의 해결사가 되어줄 수 있을까? 그러한 마도 안 되는 희망을 품게 하는 결혼제도의 비상식적인 야심과 고집이 진짜 문제다.

과거의 어떤 사회에서도 지금의 우리 사회만큼 결혼제도를 엄중하게 여기거나 희망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결혼에 대한 부지막지한 기대가 없으니, 당연히 그로 인해 엄청난 좌절에 빠지는 일도 없었다.

과거의 사람들은 사랑, 섹스, 가족에 대한 욕구들을 따로따로 구별지을 만큼 현명했다.  203-204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결혼을 사랑, 섹스, 가족이라는 우리의 모든 희망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으로 보는 것이 순진한 착각이라면, 마찬가지로 외도가 결혼 생활의 모든 좌절을 해소해줄 효과적인 해결방법이라는 생각도 순진한 착각이라는 것이다. 

외도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궁극적인 '오류'는, 결혼에 대한 특정 관념가 마찬가지로 '이상주의'다. 언뜻 생각하기에 외도는 비뚤어지고 절망적인 행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비밀스러운 모험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결혼생활의 결핍을 채우려는 시도다, 외도를 하면 그 상대방이 자신의 결핍이나 과잉을 마법처럼 조절해줄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은 삶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조건들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혼외'의 누군가와 성관계를 가지면서 '결혼생활 내부'의 소중한 것들에 타격을 입히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결혼생활을 충실히 지키는 동시에 인생에서 가장 강렬하고 절박한 감각적 쾌락의 기회를 거머쥐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두 마리의 토끼는 언제나 반대 방향으로 뛰어간다.  211


한마디로 결혼생활은 침대 시트와 비슷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네 귀퉁이가 반듯하게 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완벽을 추구하면 곤란하다.  213


결혼생활에 대한 좀 더 현실적인 태도는 무엇일까? 서로 정절을 지키려면 어떤 결혼서약을 주고받아야 될까? 확실한 것은, 흔히 쓰는 상투적인 결혼서약보다 훨씬 더 엄중하고, 비관적인 경고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가령 이런 식이다.

'당신에게, 오직 당신에게만 실망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로 인한 불만도 당신에게만 털어놓고, 이 사람 저 사람과 바람을 피우며 돈후안 같은 호색한으로 살면서 여기저기 그 불만을 퍼뜨리고 다니지는 않겠습니다. 나는 여러 가지 불행의 선택을 검토했고 내 일생을 바칠 사람으로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커플이 결혼식장에서 서로에게 하는 서약 치고는 상당히 비관적이다. 하지만 이런 서약을 한 뒤라면, 외도를 저지르더라도 실망에 대해 서로 서약한 부분만을 배반하는 것이지 비현실적인 희망을 배반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배반당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나와 함께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해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신 정곡을 찌르는 공정한 지적으로 이렇게 큰소리를 치게 될 것이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실망을 느끼더라도 의리를 지켜줄 거라고 믿었어."  213-214


부부가 자신들의 삶이 결혼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외도의 충동에 몸과 마음을 내맡기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것도 두 사람 모두가 날마다 감사해야 할 정도로 엄청난 기적이다.  220



지독한 성적 욕망을 겨냥해 경멸적인(하지만 온당한) 이야기들이 숱하게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그 욕망을 칭송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어쩌면 우리가 실체적인 인간으로서 호르몬에 정직하게 반응하고, 제정신으로 살기 위해서 정말로 필요한 것을 며칠씩이나 잊고 지내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성적 욕망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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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편


왜 속으로는 '노'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예스'라고 할까요? 용기가 없어서 그랬던 겁니다.

용기가 먼저 있어서 '노'라고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노'라고 할 때, 우리에게는 없던 용기가 생기는 겁니다.  18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이 말은 당나라 때의 백장(百丈)이라는 스님의 말입니다.  27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이건 일을 하지 않으면, 혹은 일을 못하면 죽겠다는 이야기예요. 혹은 그만큼 목숨처럼 생명처럼 일이 중요하다는 거지요.

복잡하게 읽을 수도 잇지만 이 이야기는 우선 언제 우리가 눈감아야 할지 가르쳐 주는 이야기예요.

아기 기저귀라도 하나 갈고 마당이라도 빗자루로 쓰는 거예요. 그렇게 움직이면 먹어도 된다는 겁니다.  28


일을 안 하고 먹는다는 건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 먹는 거예요.  29


백장 스님 머리에 '이 일을 해서 돈을 받아야 된다'라는 건 없어요. 일을 하는 게 소중한 거예요.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죠.  32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일을 부정하게 됩니다. 일을 폄하하죠. 이건 어느 순간부터 우리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을 노예로 자처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일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죠.  35


'내가 원하는 일들을 어떻게 찾을까?', 이게 지금 문제인 거예요. 주인으로서의 삶은 여기서 결정되는 거예요. 여러분들 고민의 대부분은 노예의 투정이에요. 대개 노예는 노예인데 일은 안 하고 밥만 먹고 싶다는 내용이에요. 밥을 먹을 수만 있으면 된다는 노예적 절박함이라고 해야 할까요?  37


타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노예라고 부르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주인이라고 부릅니다.

기껏 대학 나와서 됐다는 게 최고급 노예인데, 이제 돈 좀 들어오니까 찝찝한 거예요.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타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 걸 노예라고 부른다고요. 일하는 걸 싫어하는 게 노예의 근성이에요.  38


제 집필실이 광화문에 있는데, 가끔 광화문에서 사람들을 생태학적으로 관찰하면 패턴이 보여요. 광화문에는 직장이 많죠. 오전 8시에서 9시 사이에 사람들이 막 모여들고 우르르 각자 사무실로 들어가요. 그런데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서 11시 30분이 넘으면 사람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해요. 밥을 먹으려고. 그러면 밥을 먹다가 12시 30에서 40분쯤 되면 커피 가게로 막 들어가요. 그리고 1시 좀 넘으면 직장에 들어가서 5시가 넘어가가 시작하면 우르르 나와요. 해맑은 모습으로요. 제가 그래서 어떤 분한테 직장인들은 오후만 일하니 오전에 쉬게 하지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분 이야기가 오전에 불러서 그렇게 뭉그적거리게 해야 오후에 일을 하지. 사람들을 1시에 나오게 하면 일한다고 워밍업하고 인터넷 보고 커피 마시고 어제 포털에 나왔던 거 다 이야기하고 일 시작하면 일하는 시간 달랑 30분밖에 안 된다고요.

우리는 노예로 살죠.  39

영어를 좋아해서 영어 공부하신 분 있어요? 대부분 우리는 영어가 좋아서 공부하는 게 아니죠. 영어 능력을 원하는 자본에 팔려고 영어를 공부하는 거죠. 손님에게 팔리기 이해 화장을 하는 매춘부처럼 말예요. 그래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시대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고 이야기했던 거예요.

재미있지 않아요? 옛날에 노예를 부릴 때는 때리면서 강제로 노예한테 기술을 가르쳤어요. 자본주의 사회는 묘하게 자유롭습니다. 자본주의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가 '자발적 복종'이에요. 한 단계를 건너뛴 거죠. 누가 시키지를 않아요. 옛날엔 노예가 잡혀 와서 일을 제대로 하나 안 하나 감시당했죠. 그리고 능력 있는 노예가 있으면 가령 그 노예가 배를 만드는 게 좋겠다면서 억지로 배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요. 지금은 거꾸고 됐어요. 이게 참 묘하다니까요.  40


옛날의 노예는 탈출을 하려고 했는데, 우리는 나를 써 다라고 해요. 이게 자본주의의 비법이에요.  41


여러분들이 직장 생활을 하더라도 머릿속에 넣어 두셔야 합니다. '난 노예다' 주인 입장에서 생각하지 마세요. '월급을 받으니 이만큼은 일을 해야지'. 절대 이런 이야기는 하시면 안돼요. 버티면 월급은 나와요. 그렇지만 갑자기 해고되면 막막하니까. 일하는 척 잘 버텨야죠. 게으르지만 잘리지 않게! 마르크스의 사위가 하나 있어요. 라파르그라는 사람이 입니다. 기억해 두세요. 이 사람이 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라는 책이 있어요. 두께도 얇야요. 책의 서두에 있는 얇은 논문이 있는데, 읽어보세요. 이 글이 바로 노예의 지침서예요. 월급은 받되, 잘릴 정도로는 게으르지 않기! 역시 마르크스의 사위다운 글입니다.(라파르그는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몸을 잘 움직일 수 없을 때 자살합니다. 백장 스님의 기개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주인 입장에서는 묘한 거예요. 이 노예가 하자는 없는데 일은 진척이 안 되는 거죠. 누구 좋으라고 일을 해요?

때때로 이런 느낌도 들어요. 전시에 포로를 잡아서 포로들에게 땅을 깊게 파라고 해요. 그리고 땅이 다 파지면 포로들을 거기 들어가게 해서 총으로 쏘고 덮어요. 그게 정리해고예요. 일이 다 끝나면 여러분이 회사에서 나가는 논리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요? 삽질하는 척 하기. 너무 노골적이며 죽여요. 그러니까 삽질하는 척은 하는데 땅은 안 파지는 그 묘한 형국을 만드는 거죠. 거기서 살아 있어야지 탈출이라도 하죠. 회사에서 여러분의 에너지를 다 쓰지 마세요. 주인의 일에 에너지를 모두 쓰지 말아요. 회사에서 에너지를 쓰면 여러분이 원하는 일을 찾을 시간과 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직장 다니시는 분들, 반드시 해야 될 일이 뭔지 아시겠죠? 회사에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겁니다. 일이 끝나고 나서 그 모든 에너지를 가족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거예요. 보고 싶은 연극을 보세요. 연극 봐서 피곤하니까 그 다음날 오전에 출근해서 또 잘 쉬어요. 하지만 완전히 들키지는 않게. 할 수 있어요? 그러면 고용도 촉진돼요. 사람을 몇 명 뽑았는데 효율이 안 오르면, 또 사람을 뽑아요.  44-45


여러분의 일을 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부지런해져요.

남이 원하는 일을 할 때는 게을러야 돼요. 게으르되 잘리지 않을 그 미묘한 경계가 있어요.  45


페이비언 소사이어티(Fabian Society). 파비우스 막시무스라는 한니발을 이긴 로마의 장군이 있어요. 파비우스는 한ㄴ발이 워낙 강력하니까 지구전을 사용해요. 그런데 이걸 원로원에서 가만히 두겠어요? 장수로 보내 놨더니 진영은 차지하고 밥만 먹는 것 같잖아요. 로마 대군 5만 명이 매일 밥만 먹어요. 다섯 명도 아니고 5만 명이거든요. 이러니 쇼부를 빨리 쳐야 되잖아요. 그래서 원로원에서 파비우스를 자르고 다른 사람을 장수로 보냈는데, 이 사람은 한니발을 공격하다 박살이 나요. 그래서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또 부르죠. 그랬더니 또 다시 밥만 먹어요. 그리고 나중에 이겨요. 그래서 페이비언이라는 말이 나와요. 

페이비언 소사이어티는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방법으로 사회를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가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자라는 사회로 갈때까지 느리게 천천히 사회를 바꾸자는 것입니다. 급진적인 혁명을 이끌던 지도자가 나중에 일하지 않고 먹으려고만 할 수 있다는 것을 안 거죠.  47


여러분이 즐거워하는 일을 했었을 때 그게 돈벌이가 되면 여러분들은 진짜 제대로 자리를 잡은 거예요.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자신이 하는 일이라는 것, 그게 중요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해서 돈을 벌면 '땡큐'고 아니면 좀 힘들게 사는 겁니다.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것이 바로 주인의 삶이다' 이걸 명심해야죠.  48


여러분들 각자의 삶의 시간은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 이 둘로 할당이 될 거예요. 노동하는 시간은 대부분 그 자체로 목적은 아닙니다.(물론 그 자체가 목적인 사람들이 있어요. 저 같은 사람이요.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거죠. 저는 글을 안 써도 됩니다. 누가 시키는 건 아니에요. 제가 쓰고 싶은 때 쓰는 거예요.) 대개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이 따로 있어요.  54 


여러분께 지혜를 하나 알려 드릴게요. 보통 사람들은 최저임금을 이야기하거나 가급적 많은 임금을 생각합니다. 이제 '최적임금'을 생각할 때입니다. 최저임금이 아니라 최적임금입니다. 나의 최적임금은 얼마인지, 이 정도 벌면 됐다는 걸 정할 수 있어야 해요. 그걸 아는 사람은 내가 돈을 버는 목적이 향유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55


한 사회가 얼마나 나쁜지의 척도는 노동시간의 길이입니다. 노동 시간이 늘어나는 사회는 나쁜 사회예요.  55


모두 먹고사는 고민만 있어요. 생존만 있고, 향유는 없어요. 거기에는 의무만 있어요. 

여기에 무슨 살 이유가 있어요? 즐거운 것이 있어야 된다고요. 노동은 힘들어요. 유사 이래로 인간이면 다 그래요.  56


다음 공식을 머릿속에 넣어 놓으세요. '삶의 행복은 노동하는 시간보다 향유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커진다'라는 공식 말이에요. 여러분이 일하는 시간을 줄여야 행복해져요. 물론 이 시간을 절대적으로 제로로는 만들 수 없어요.  57


가장 행복한 삶은 스스로 하는일, 지금 땀을 흘리고 하는 일이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면서도 즐거운 일이면 됩니다.  59


우리의 가장 큰 착각은 우리가 자본가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84


여러분이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본이 원하지 않아도 내가 행복하다면 기꺼이 그 일을 하고, 내가 행복한 일을 하는 데 돈이 필요하다면 또 사냥을 떠나면 됩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이 향유이자 동시에 노동이기도 한 사람이겠죠. 제작하고 창조하고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이죠. 홀로 하는 직업일 때만 가능해요.  85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가져야 할 지혜는 시간에 대한 것입니다. 삶의 시간은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 둘로 양분됩니다. 우리의 행복은 가급적 노동하는 시간을 줄이는 데 있는 것이죠.(하지만 노동하는 시간을 아예 없애고 향유하는 시간만 있다고 하면, 그건 누군가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다는 걸 의미합니다. 어쨌든 우리의 삶에서 일과 노동은 뺄 수 없어요.) 노동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하면, 우리는 제대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사회철학자나 정치가들도 모두 이 삶의 시간을 기준으로 주어진 사회를 부넉하고 도래할 사회를 꿈꾸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봤을 때 사람들이 노동하느 시간이 너무 많아서 향유하는 시간이 없다고 하면 그 사회는 나쁜 사회인 거예요. 이런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불행이자 남루함이지요.  85-86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인지, 그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다는 것, 아니 생각하지 말아야 했었다는 것. 그것이 박정희 지배가 독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생각은 오직 최고 통치자만 하면 됩니다.  90


분명 우리는 양적으로 원시인들보다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문명의 혜택을 다 누리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불행하기만 합니다. 지금 우리는 향유하는 시간을 위해 일한다는을 까먹고 잇기 때문이지요. 일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것에 젬병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하나에 능숙하다는 것은 다른 것에는 서툴다는 것을 함축하니까요. 그러니 아이들과 노는 것, 아내와 산책을 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 심지어 가족과 함께 공연장에서 연주에 몸을 맡기는 것, 어느 것 하나 피곤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없ㅅ브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한다는 것은 항상 가도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일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다시 일에 몰입하게 됩니다. 잘할 수 있는 것이 일밖에 없고, 그래서 일할 때 편안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식으로 마침내 우리는 구제할 수도 없는 워커홀릭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98


이제 깊게 생각할 때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그리고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는 어떤 덕목이 필요한지. 이제 눈에 들어오시나요?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진정한 덕목이 바로 용기라는 것이. 사랑하고 창조하는 시간, 즉 향유하는 시간을 위해 일하는 시간을 줄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닐 테니 말입니다.  99




정치 편


이론상 차이가 없다고 하더라도 삶에서 50보와 100보는 다릅니다.

중요한 건 정확한 기준을 가지고 잇어야 한다는 거죠. 가령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을 때, 그냥 누구는 좋고 누구는 싫다. 소녀시대가 좋냐 2NE1이 좋냐가 아니라 민주주의 본령과 원칙을 정확히 알고 그 기준을 통해 투표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기준을 두고 누가 50보를 갔고 누가 100보를 갔는지를 보자는 거예요.  122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죠? 그리고 그게 맞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고요. 하지만 실제의 삶은 어떤가요? 국민이 전쟁을 원하지 않아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즉 대표자에게는 교전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잇어요.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전쟁을 원하지 않더라도, 대표자들은 전쟁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어떤 인간은 대통령이 되어서 전쟁을 하려 할 거고, 어떤 인간은 끝내 안 하려고 할 겁니다. 50보와 100보의 차이는 있는 것이죠.  123


유럽 국가 중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가 프랑스죠. 프랑스 사회는 왜 민주적일까요? 왕을 죽였거든요. 왕을 죽인 국민한테는 축복이 있어요. 왕을 죽였으니 내가 왕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이게 프랑스 전통이에요. 우리의 가장 큰 슬픔은 고종을 못 죽인 데 있어요. 우리가 죽였어야 했는데, 일본이 해결을 한 거죠. 그러면 총독이라도 죽였어야 햇는데 그것도 못 했죠. 그 다음에 보니 이승만이나 박정희와 같은 독재자도 죽이지 못했어요. 한 사람은 죽이기 전에 하와이로 도망가서 죽었고, 한 사람은 죽이기 전에 측근에게 먼저 살해당했으니까요. 단 한 번도 독재자를 죽인 경험이 없는 겁니다. 한 명만 죽이면 되거든요. 딱 한 명만, 그 다음부터는 웬만하면 대통령 안 하려고 할 걸요? 잘못하면 훅 가는데 누가 하려고 하겠어요.  130-131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도 말하잖아요. "어떤 인간이 왕이라는 것은 다만 다른 인간이 신하로서 그를 상대해 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신하가 아니면 안 된다고까지 믿고 있다." 완전한 심리적 전도이자 착각이지요. 임제(臨濟)라는 스님이 있어요. 이 스님이 남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야 자유인이 된다는 거죠. 멘토를 만나면 멘토를 죽여야 돼요. 멘토는 무슨 멘토예요? 자신이 어리석고 멍청하다고 생각하니, 자꾸 멘토를 찾아서 지침을 들으려고 해요. 하지만 멘토의 지침을 계속 찾으면 우리는 계속 멍청해지는 거예요. 스스로 당당한 주체가 되기를 비겁하게 회피하는 순간, 우리는 점점 더 우유부단한 사람으로 전락하는 거라고요.  132


좋은 군주, 나뿐 군주를 가르는 건 착각입니다. 중요한 건 군주라는 형식 그 자체니까요. 이 형식을 어떻게 없앨지, 과연 이 형식은 없어진 것인지 이걸 고민해 보시길 바랍니다.  133


한 개인의 독자성 같은 것들은 사람 수가 많아질수록 희생됩니다.  141


보수는 자신을 사랑하고, 진보는 타인을 사랑한다고 정리될 수 있습니다.  147


'인간이 먼저고 이념은 나중'이라는 사람이 진보라면, '이념이 먼저고 사람은 나중'이라는 사람은 보수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보수적인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올라 자신의 이념을 관철하려고 하는 겁니다. 물론 이웃과 후손들을 사랑한다고 이야기는 하겠죠.  148


용서요?

아버지 한테 매 맞는 아이가 아버지를 용서하게 돼요. 심지어 자기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이해한다고요. 어머니가 나갔으니까 나한테 화풀이 한다고 생각하죠. 그게 용서인가요? 용서는요. 그 사람이 완전히 자립하고 당당해졌을 때 힘이 세졌을 때 하는 거예요. 약한 자가 용서를 할 수 밖에 없는 조건에서, 용서한 것을 용서라고 하진 않아요.

강해서 용서했다고 하지 마세요. 예수의 정신, 이런것도 아니에요. 자비, 이런 것도 아니에요. 어떻게 못하니까 그런 거에요. 슬픈 거죠. 그래서 용서하면 안 돼요. 용서하지 맙시다 약한 자는 용서하는 거 아니에요. 자격 없어요. '더럽게 약하다'를 각인하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쟤를 때리지도 못하는구나' 이렇게요. 중간에 용서하고 모든 걸 퉁치려고 그러죠. 그냥 그렇게 살려고요. 그럼 안 되는 거 같아요.

누간가 한 명이 '전두환을 죽이자'고 할 수 있어요. 누가 죽일래요? 우리는 그 회의를 합시다. 누군가 죽일 수 있어요. 누가 광주에서 죽었던 사람들 대신 그 복수를 해 줄 수 있을까요? 민주주의를 외쳤던 사람들을 공수부대로 잔혹하게 도륙했던 그 인간을 그들 대신 누가 죽일까요? 죽일 수 있어요? 역사에 길이 남는데 죽이실래요? 우리는 불행히도, 역사보다 자신을 더 아껴요. 우리는 감옥에 가는 것도 싫고, 그렇게 약하고 비겁하다고요. 내가 당할 불이익들이 있는 거죠. 이것부터 우리가 아프게 자각해야 돼요. 용서하면 죽이러 갈 필요도 없고 편하잖아요. 이것도 가슴 속에 아프게 넣어 놓으셔야 됩니다.  164-165 




쫄지마 편


'쫀다'라는 표현은 무언가 두렵다는 것을 말하죠. 두려움이라는 건 안해 본 것들을 무서워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는 판타지를 가질 수 있거든요.  188


무서운 것이 있어서 쪼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지 못해서 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걸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은 그냥 하는 거예요. 모든 판타지의 특징은 우리가 그곳에 걸음을 훅 내딛었을 때 신기루처럼 없어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혼 무섭죠? 이혼을 한 번 해 보면 더 이상 무섭지 않아요. 해보고 나면 별것 아니란 걸 알게 되죠. 그런데 참 힘든 말이죠? 무서운데 그냥 하라고 하니까요. 사실 하기가 힘들거든요. 그렇지만 뭐든지 한 번의 경험은 필요합니다. 어떤 경험이든 상관없어요. 인생에서 너무나 무서운 것들을 한 번은 눈 질끈 감고, 과감하게 해 보는 경험이 필요해요. 그 경험이 한 번만 잇으면 돼요. 내가 무섭다고 생각하는 걸 한 번 해 보는 거죠. 조금 상처를 받더라도 후유증이 적은 것들을 통해 그런 경험을 조금씩 쌓을 필요가 있스빈다. 쪼는 것이 상당히 줄어들 테니까요.  189-190


너무 많이 안다는게 때로는 축복이기보다는 저주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이 알게 되면 힘들다고요.  191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높은 정상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정상이 어딘지 모르고 무식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다 보면, 정상에 오를 희망이라도 생기는 법이죠. 반면 정상까지 얼마나 힘든 여정인지 정확히 안다면, 우리는 한 걸음을 내딛는 용기마저ㅓ도 포기할지 몰라요. 냉소적으로 변하는 거죠. 그래서일까요? 과거 사회에도 못 배운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지 지식인 계층에서 혁명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사회에 대해 투덜거리지만 바꾸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겁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죠? 이 말은 우리가 "유식해서 비겁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요?  194


쪼는 사람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은 뻔뻔한 사람이에요. 쪼는 것의 반대말은 당당함이 아니에요. 뻔뻔한 사람이 현실적인 힘까지 얻을 때, 오직 그때만 당당해질 수 있어요. 

다음 순서는 성장해야만 해요. '쪼는 나' -> '뻔뻔한 나' -> '당당한 나'. 그러니까 우리는 당당해질 때까지 뻔뻔해지도록 노력해야 해요. 무모함이나 순박함이 아니라 뻔뻔함이라고요.  195


뻔뻔해지기 실천강령(1):우아하게 거짓말하기

미리 말씀을 드리지만 강한 사람만이 거짓말을 해요. 약자는 정직하게 진실만을 얘기하죠.  197


거짓말이 정당화될 때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도 사랑하는 사람은 나보다 강자인 것처럼 느껴질 겁니다. 애인이 만남을 지속할 수도 있고 끊을 수도 있는 역량이 있는 것처럼 다가오는 경험이 사랑이니까요. 자기와 놀아 달라는 애인에게 '친구와 게임을 하기로 했어'라고 하면, 애인은 내게 크게 실망하고 나를 떠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쿨하게 거짓말을 해야죠. '삼촌이 위독해! 미안해. 삼촌만 아니었다면, 너와 놀 수 있을 텐데.'

그리고 사회에서 여러분보다 더 강한 놈이 정직을 강요하고 압력을 가해 올 때, 여러분들은 거짓말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 돼요. 거짓말이 정당화되는 두 번째 경우죠. 강자 앞에서 약자가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쿨하게 거짓말하는 겁니다. 이때 진실을 이야기하면 강자는 우리를 자기 식대로 통제하려고 할 테니까요. 애인이랑 데이트 약속이 정해졌다면, 직장 상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부장님,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 못합니다. 힘 있는 사람이 '너 이거 했지?' 이러면 찔려요. '들킨 거 아니야?' 이런다고요. 그러니 뻔뻔함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연습을 통해서만 경지에 오를 수 있는 덕목입니다.

여러분을 쫄게 만드는 대상들은 대개 뻔뻔해요. 거꾸로 얘기해 보면 여러분들이 '밥'이라는 거예요. 이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보다 더 뻔뻔해지는 겁니다. 싸우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당당해하지 마세요.  200-201


세상은 우리를 다 쫄게 한다고요. 우리가 쪼는 건, 어린애 같고 정직해서 그래요. 일기장 쓰는 사람처럼 산단 말이에요. 이 태도를 가지면 안 돼요. 일기를 쓰는데, 첫 번째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순 거짓말인 일기를 써 보세요. 그리고 그 일기장을 애인한테 주는 거예요. '나의 마음을 받아 줘' 하실 수 있어요? 못하죠? 이게 교육의 병폐에요. 사회화의 목적은 국가나 권력이 힘 있는 사람한테 복종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교육의 목적이 뭐예요? 기성세대가 편한 거예요. 아이가 대소변을 가리면 누가 편해요? 부모가 편하죠. 어머니는 그런다고요. '얘야, 이제 품위 있게 기저귀에 똥을 누니 얼마나 좋니?' 사실은 이런 거죠. '얼마나 좋니? 나한테 안 맞고' 교육의 목적이 뭐라고요? 기성세대들이 편한 거예요. 

여러분들은 교육을 너무 잘 받은 겁니다. 정직학 까놓고 고발하는 사람들, 자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약해요. 자기의 속내를 이야기했다가 부당한 대우를 받지요. 여러분드르이 가장 큰 문제는 너무 정상적으로 중고등학교를 나왔다는 거예요. 중학교 때 본드도 마시고 고등학교 때 애인과 모텔도 가고, 할 거 다 해 본 다음에 개과천선했으면 여기 상당하러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202-203


그러면 이 뻔뻔함을 어떻게 얻어야 돼요? 바깥에 나와 봐야 돼요. 바깥에 나와서 독립적인 생활도 하고 스스로 선택도 해 봐요. 돈이 많이 들죠. 지비에서 나갈 수도 있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뻔뻔스럽게 집에 들어와 사는 사람의 비범함을 아셔야 됩니다. 부모한테도 쫄고 바깥에서도 쫄아서 오갈 데 없이 집에 있는 사람과는 다른 사람인 거예요. 뻔뻔한 사람은 부모님이 더 이상 밥도 안 주고 잠자리도 내주지 않고 구박을 하면, 그때가 되어서야 '음, 이제 떠날 때가 왔네. 지금까지 편했는데. 쩝, 어쩔 수 없지'라고 하면서 자신의 짐과 모아 둔 돈을 챙겨서 집을 나가죠. 

거짓말을 하세요. 거짓말은 뻔뻔하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뻔뻔하기는 해도 쪼는 사람은 아니에요. 편안하게 거짓말을 하세요. 이 능력을 기르면 여러분들은 사회에 물의를 많이 불러일으킬 거예요. 대신 쫄진 않아요. '아, 이 세 치 혀로 인생이 거의 다 해결되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될 거예요. '하루에 세 번씩 거짓말을 안 하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각오로 거짓말을 하면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하나도 쪼는 게 없을 거예요. 거짓말 잘하시는 분? 나는 거의 문학적 수준에 이르렀다? 이런 분 계신가요? 모든 문학은 거짓말이죠. 그들은 당당해요. 문학자들처럼 뻔뻔스러운 사람이 없고 당당한 사람도 없어요. 한국사회에서 민주화운동을 문인들이 끌고 갑니다. 왜죠? 그들은 거짓말쟁이거든요. 거짓말을 한다는 건 우월한 거예요. 이런 세계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뻥을 뻥뻥치면 사람들이 그거에 속아서 또 사회를 만들어요. 미래의 꿈이라는 게 뭐예요? 지금 사회는 우리를 이렇게 착추한다고, 그래서 이렇게 하면 자신이 뻥치고 있는 사회가 가능하다고, 누군가 막 뻥을 치는 거죠. 그 뻥이 긴가민가하다가 사회가 그걸 받아들이면 그 사회는 변화하는 거예요. 거짓말 속에서 새로운 역사가 열리는 겁니다.  204-205


중국 철학자 송견(宋?)의 테마는 견모불욕(見侮不辱). '모욕을 당해도 치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게 또 핵심적이죠. 모욕을 당해도 치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예쁜 사람이고 싶고, 고상하고 싶고, 순수하고 싶고요. 우리는 이런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칭찬해 주면 훅 넘어갈 사람들인 거죠. 그게 거짓된 칭찬이어도요. 이게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문제예요. 그래서 누군가 칭찬해 주면 좋고, 누군가 칭찬 안 할 거 같으면 쫄죠. 인정받고 싶으신 거예요. 

모든 인간관계의 문제는 인정을 받으려고 해서 생겨납니다.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아요. 왜 인정받으려고 그래요? 진짜 위대한 인격은 뻔뻔스러운 거라니까요? 인정받으려는 사람은 항상 정직하려고 한다고요. 많은 우화는 사람들이 거짓말을해서 우울해지고 외로워진다고 그러죠. 사실이에요. 하지만 인정을 받으려는 사람만이 아기처럼 진실을 얘기해요. 그러니까 절대 남한테 인정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이라는 멘트를 하던 개그 프로그램의 코너가 있었는데 기억 나세요? 진짜 좋은 멘트죠. 그 사람이 쫄 거 같아요? 세상에 대해서? 누가 무슨 욕을 하든지 간에 그걸 의식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누군가 욕을 했는데 그걸로 화가 나고 속상하다는 것은 인정받겠다는 걸 드러내는 거거든요. 누가 여러분에게 '야, 이 개새끼야!'라고 욕을 하면, '그래요. 난 개새끼예요. 만세!' 이러면 되는 거예요. 남이 인정하든 안 하든 내가 무슨 상관이에요?  205-206


누군가한테 인정받으려고 그럴 때 또 쫄아요.  207


'거짓말하라' 이후의 두 번째 행동 강령은 '기꺼이 욕을 들으라'는 겁니다. 스스로 내가 어느 정도의 인간인지 시험해 보려면 욕을 들어 봐야 돼요. 남의 험담, 음해를 들어야 돼요. 무슨 소리인지 알죠? 자꾸 남에게 인정받는 이 메커니즘이 우리를 세상에 쫄게 만들어요. 검열하게 만들고요. 예쁜 사람 콤플렉스를 버려야 돼요. 남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 말 것. 어머니의 칭찬 들으려고 하지 말 것. 어머니의 칭찬 들으려면 남자 친구, 여자 친구랑 모텔도 못 가요. 그 칭찬이란 게 나한테 뭔 상관이예요. 여러분들의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오만 가지 욕이 달려도 이렇게 생각하세요. '반응이 좋은걸?' 욕 좀 달렸다고 트위터 끊고 페이스북 끊고 뭣들 하는 거예요? 그게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친구를 만나시면, 서로 계속 욕을 하세요. 칭찬하지 말고 욕을 해요. '오늘 네 옷은 거의 걸레인 걸?' 이렇게요. 무슨 말인지 알죠? 그걸 견디는 거예요. 좋은 친구 사이에서는 서로 칭찬을 하지 않아요. 병신같고 나약하고 여린 애들끼리만 둘이 모여서 서로 '너는 예쁘네, 고상하네, 지적이네' 그러는 거죠. 그렇게 살다 보니까 바깥에 나갔을 때 욕 한 번 듣고서는 상처받고  또 그 친구한테 가요. 이게 뭐예요? 친구들끼리 서로를 강하게 만들어야 되잖아요. 서로를 욕해 줘요. 만나자마자 허점을 찾아야 돼요. 처음엔 힘들지만 그걸 경디면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심지어 그 다음부터는 화장도 안 할 거예요.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친구들끽 만나서 칭찬하고 서로 위로하지 말아요. 아부하는 사람이랑 아첨하는 사람은 군주를 붕괴시켜요. 회사에 갔을 때도 너무 열심히 일해서 인정받지 말아요.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한 달 동안은 사고를 치세요. 복사기에다 커피 쏟고 복사기를 망가트리는 거예요. 온갖 욕을 다 듣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회사에서 안 쫄아요. 자기가 정말 잘못을 할 때도 있을 겁니다. 이 경우 보통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지'라며 자책하죠. 그러면 또 실수할까 봐 쫄게 되어 있어요. 잘못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스스로 검열하지 않는 방법은 누가 나한테 욕을 하거나 뭐라고 할때 그것에 쿨해지는 것입니다. 쿨해지면, 여러분은 세상에 쫄지 않아요. 아시겠죠?  208-209


뻔뻔함의 두 가지 강령, 첫 번째, 거짓말 잘하기. 들키지 않고 부드럽고 우아하게.

두 번째, 기꺼이 욕을 먹기, '하루에 욕을 세 번 안 먹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생각으로 욕듣기. 욕이 부족하면 반드시 나서서 욕먹을 짓을 하기.

뻔뻔스럽고 당당한 사람들, 쫄지 않는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게 아니라 실전무공으로 단련된 거예요.  212


철학자들이나 지식인들 대개는 자기도 경험하지 못했던 얘기를 뻐꾸기처럼 계속 날리는 거예요. 거기에 취어잡히면 안 돼요. 쫄아서는 안 돼요. 지적으로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되죠. 그래서 거기 말리는 거예요. '음,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어요. 선생님' 이렇게 뻔뻔스럽게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해요.  220


진짜 위대한 사람은, 혼자 있는 사람이에요.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누군가를 만나서 주체적으로 사랑할 수도 있어요. 누구든 외로워서 사랑하면 안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도도하게 혼자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성숙한지를 알 수 있죠. 힘들거나 외로울 때 친구한테 전화하지 말아요. 아셨죠? 절대 외롭다고 놀아달라고 하지 말기. 강하게 꿋꿋하게 슈베르트 음악을 들으면서 견디는 거예요. 우아하게.

잊지 마세요. 뻔뻔스럽게 대하고 세계와 단절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계에 쫄지 않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이 뻔뻔스러움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진정한 친구와 애인을 가질 수 있어요. 잊지 마세요. 그때가 되어서야 진짜 만날 수 있는 거예요. 제가 가르쳐 준 대로 하면 왕따 당하고 패가 망신하고 집에서는 쫓겨날 것 같죠? 여러분 주변의 쓰레기 같은 사람들, 내가 결정하지 않은 인간관계들이 다 정리가 되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새로운 관계가 열립니다.  229-230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하나 해 드릴게요. 어느 보살 할머니가 자신이 성불은 안 되니 스님을 한 명 키우기로 하고 10년 동안을 봉양해요. 그러다가 이 할머니가 스님이 깨우침으로 가고 있는지 밥만 처먹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어요. 시험을 해 봐야 되잖아요. 그래서 마을에서 가장 섹시한 기생을 데려다가 안겨 줬어요. 그러고 나서 스님의 반응을 보는 거죠. 스님이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안아 주면서 기생에게 말해요. "나의 마음은 얼음과도 같다." 그 말을 듣고, 그 보살 할머니가 스님이 있는 암자를 불태워 버려요. 왜요? 억지로 하잖아요. '여자를 탐해선 안 된다. 품어선 안 된다 흔들리면 안 된다.' 그 흔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흔들린 거예요. 흔들리지 않는다면, '얼음'이라는 생각조차 안 들었겠죠. 쫄고 잇는 사람만이 '쫄지 말아야지. 쫄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생각해요. '쫀다'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없어져야 되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죠? 그러니 당당해지지 말고, 뻔뻔해지세요. 그게 안 쪼는 거예요.

그리고 비겁한 걸 받아들이세요. 자신이 어디까지 비겁한지만 알면 돼요. 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가 '모 아니면 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중국 한나라에 한신이라는 장수가 있었어요. 한고조 유방을 도와서 한나라를 구축했던 유명한 장수예요. 이 한신이 저잣거리에서 깡패들을 만나요. 칼을 든 깡패 열댓 명을 만난 거예요. 깡패들이 한신에게 자기들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라고 해요. 딱 보니까 게임이 안 돼요. 한신이 어떻게 했게요? 쏘 쿨! 기면 돼요. 뻔뻔하게! 그렇다고 그들에게 굴복하는 건 아니에요. 그게 바로 한신이라는 사람이 가진 능력이라고요. 그리고 나중에 히을 가졌을 때, 나라를 건립한다고요. '완전히 당당해지지 않으면 난 비겁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게 문제거든요. 

여러분 자신을 오버해서 보지 마세요. 여러분이 역사를 바꿀 것 같아요? 집을 바꿀 것 같아요? 어머니를 바꿀 것 같아요? 바꾸지 못해요.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일은 내가 얼마나 무능력한지, 얼마나 비겁한지를 아는 겁니다. 이 말은,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안다는 얘기예요.  255-257


자본에게 쫄지 않는 방법은 뭘까요? 자본이나 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겁니다. 전셋집도 갖지 마세요. 가지고 잇으면 낚이는 거예요. '최적생계비'만 갖고 있어야 해요. 최저생계비가 아니라 최적생계비예요. 그래야 뻔뻔해져요. 그래야 사장한테 뻔뻔해진다고요. 사장이 밤에 일하자 그래도 이래요. '됐어요. 월급 됐어요.' 최적생계비를 계산하는 거예요. 최대생계비는 끝이 없어요.  265


자본주의는 순수한 게임의 세계입니다. 세상이 모조리 다 투자고 '돈 넣고'로 좌지우지도는 리얼리티 없는 세계. 게임가가되면 그 안으로 들어가게 돼요. 도박사, 도박군들이 도박에 빠지는 이유를 야셔야 돼요. 그게 순수한 자본가의 세계예요....

우리가 돈에 쫄지 않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나의 최적 생계비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거예요. 최적생계비만 벌면 되니까 나머비 시간에는 뻔뻔해질 수 있죠.  266


디오게네스가 왜 당당해요? 옷 한 벌, 지팡이 하나, 자루 하나 들고 통에서 살았잖아요. 통! 통 하나밖에 없잔하요. 집을 갖고 있으면 쫓겨나지만, 처음부터 쫓겨날 데가 없는데 쫄 이유가 없죠.  267


'뻔뻔하다'는 말의 긍정성을 아셔야 된다는 거예요. 이건 소중한 거예요. 

죽을 때까지 인정을 받지 않겠다는 각오로 사시면 돼요. 그러다 진실을 얘기해야 될 때가 올 수도 있어요. 어쩌면 그때는 '모 아니면 도'일 거예요. 진실에 대해서 쉽게 얘기하진 말고요. 그 뻔뻔함으로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냈을 때 여러분들은 쫄지 않는 자아. 뻔뻔한 자아로 만들어져요.

앞서 얘기했지만 쫀다는 것과 당당함을 대척되는 것으로 두면 안 돼요. 쫄다가 뻔뻔스러워 졌다가 그 다음에 마지막에 오는 것들이 당당함이에요. 당당함은 그렇게 쉽게 얻을 순 없어요.  267


라캉도 말했던 겁니다. 주체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275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임제어록>에 나오는 말입니다. 물론 진짜 살인을 하라는 것은 아닐겁니다. 위악은 위악일 뿐, 진정한 악을 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빈다. 단지 우리 스스로 주인으로 서는 데 방해되는 일체의 권위를 마음속에서 제거하자는 겁니다.  277




에필로그 - 존 레논의 '이매진'을 읊조리며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 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Imagine no posse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타인이 자신의 삶을 억압할 때는 저항이라도 가능하지만, 자발적으로 타인에게 복종하는 경우에는 답조차 없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깊게 가슴에 아로새겨야만 합니다. 타인의 삶을 흉내 내지 말라는, 그리고 타인에게 내 삶을 흉내 내도록 강요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말입니다. 하긴 다른 팽이의 회전이 멋있다고 해서 그것을 흉내 내는 순간 자신만의 스타일로 돌고 잇는 팽이는 더 이상 돌 수 없을 겁니다. 그 역도 비극으로 끝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억압뿐만 아니라 모방이나 자발적 복종도 철저하게 거부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모방이나 자발적 복종도 철저하게 거부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문정신이 가진 소명입니다. 인문학은 다른 학문과는 달리 '고유명사'를 지향하는 학문입니다.  288-289


"공통된 그 무엇"을 거부해야, 우리는 "스스로 도는 힘"을 지킬 수가 잇습니다. 아니 그 역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스스로 도는 힘"을 강화할 때에만 우리는 "공통된 그 무엇"을 극복할 수 있을 테니까요. '공통된 그 무엇'의 자리에는 그 어떤 것이라도 올 수 있습니다. 자본, 종교, 민족, 인종, 정치권력, 스승, 멘토 등등. 우리만의 스타일로 삶을 살아 내는 힘을 빼앗는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통된 그 무엇"이 들판의 야생화들처럼 단독적인 개인들을 '우리'로 만드는 근본적인 계기로 기능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말장난을 조금하자면, 공통된 그 무엇이 만드는 것이 바로 '울(타리)'. 그러니 '우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공통된 그 무엇이 만든 '우리'에 갇히는 순간, 개인들은 '우리'로 변한다는 겁니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겁니다. '울타리'를 의미하는 '우리'라는 말이 개인들의 단독성을 부정하고서 출현하는 집단적인 '우리'라는 말과 같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공통된 그 무엇의 '우리'에 갇혀 '우리'가 되는 순간, 더 심각한 위기가 먹구름처럼 몰아닥치게 됩니다. 우리와 공통된 것이 없는 타자들을 '적'으로 여기는 후속 사태가 벌어질 테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 순간 개인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슈미트의 말처럼 '정치적인 것'의 범주, 그러니까 '적과 동지'라는 치명적인 범주에 포획되고 맙니다.  290-291


"공통된 그 무엇"을 극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개개인들을 '우리'로 가두는 우리를 부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힘을 내서 스스로 다시 돌아가야만 합니다. "스스로 돌아가는 힘"을 유지하는 단독적인 개인들로 우리가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야만적인 적대와 대립, 그리고 끝내 모두를 절멸시키는 전쟁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존 레논은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모든 종교, 모든 국가, 모든 소유를 철폐하는 꿈을 꾸었던 적이 있습니다. 종교, 국가, 그리고 소유를 통해 적과 동지로 갈라서서 싸우는 인간의 모습이 참담했던 겁니다.  292-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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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여러분 때문에 철학, 즉 필로소피(Philosophy)라는 학문이 앎(Sophos)을 사랑하는(Philo)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사랑해야 그것에 대해 아는 학문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5


사랑편


조르주 캉길렘이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있습니다. 미셸 푸코의 논문 지도 선생이기도 한데, 이 사람이 쓴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이라는 책이 있어요....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정상을 정의하는 것은 비정상을 정의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26


10년 동안 김수영이 계속 김현경을 때리다가 마지막 때린 날 <죄와 벌>이라는 시를 씁니다.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 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진짜 미워하려면, 내가 죽어도 미워하는 거예요.

감옥에 가거나 사형 당할 각오를 한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고요. 진짜 미우니까요. 나 하나의 이익을 생각하면 누구를 미워하지 못해요.  30-31


타인과 관련된 감정 중에 가장 극단적인 감정이면서 가장 강도가 센 게 미움과 사랑이잖아요.

제대로 미워하면 타인의 시선, 돈, 우산이 눈에 들어오면 안 돼요. 사랑도 미움과 똑같은 거예요. 사랑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요.

남에게 충분히 희생을 당하고 돌을 맞아도 할 수 있는 게 사랑이거든요. 스스로 돌아보세요. 이렇게 죽이고 싶도록 누군가를 미워한 적 없었죠? 그러니 사랑도 못 하는 거예요. 사랑과 미움은 같은 감정이니까요.  33


알랭 바디우라는 철학자는 '사랑은 둘의 경험이다.'  33


다른 게 개입이 되면 안 돼요.

둘의 경험을 한다는 건, 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정치적 상황, 경제적 조건, 오만 가지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야 해요.  35


둘의 경험을 유지하는 건 전투고 투쟁이에요. 스스로와도 싸워야 되죠.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인간관계와 다 싸워야 돼요.  39


누군가를 좋아할 때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겁을 집어먹으면 죽었다 깨나도 사랑 못해요.

내가 사랑할 수 있다는 건 고통을 감당한다는 거예요.  47


성적으로 궁합이 안 맞는다고, 나중에 헤어지는 부부들 있죠? 섹스만, 성만 달랑 보고 간 거예요. 오히려 관계에서 성적인 영역이 작아져야 돼요. 이건 다시 말하면 성적으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거예요.  51


일단 사랑이라는 느낌이 들면, 그냥 던져요. 최선을 다해요.  52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우는 요령은 자기감정에 충실한 거예요.  53


우리가 어떤 사람을 갖는다는 건 성적인 소유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모든 면에서 주인공으로 만든다는 거예요. 거기에 성도 포함돼요.  76


우리가 진짜 둘로 섰다는 경험을 하는 순간, 그때 우리는 꽃필 거예요.  78


우리는 헌신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내가 널 주인공으로 만들면 너도 나를 주인공으로 만드니까, 상대방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거예요. 상대방에게 헌신을 해서 나에게 그게 돌아도게 하는 거지요. 잊지 마세요. 행복해 집시다.  79



사랑에는 놀라운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타자를 알아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면서 타자를 알아 가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알아 가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83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규칙이 공유되는 공동체 내부에서는 나와 타자가 대칭적인 관계에 잇고 '교환=커뮤니케이션'은 자기대화(monologue)일 뿐이다. 한편 비대칭적인 관계에서의 '교환=커뮤니케이션'은 끊임없이 '목숨을 건 도약'이 수반된다. 나는 또한 이러한 비대칭적 관계 속의 교통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를 '사회'라 부르고 공통의 규칙을 가진, 따라서 대칭적 관계 속에 있는 세계를 '공동체'라고 불러왔다.' <탐구II>  85


가라타니 고진은 타자와의 대칭적 관계에 있을 때 우리가 공동체에 속해 있고, 반면 타자와 비대칭적 관계에 있을 때 우리가 공동체에 속해 있고, 반면 타자와 비대칭적 관계에 있을 때 우리가 사회에 속해 있다고 말합니다.  86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게 도는 당혹감입니다. '아! 저사람에대해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는 것이 별로 없구나!' 이제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 가야 하는 비대칭적인 관계, 즉 사회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87


타자가 나를 사랑하기로 한 것도, 그리고 나를 버리기로 한 것도 모두 그가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인 것이지요.  88


타자가 자유롭게 나를 사랑하기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는 자유롭게 나를 떠나기로 결정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어느 경우든 그것은 타자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실현한 것이니까요.  89


나를 떠날 수도 있는 자유를 가자고 있음에도 타자가 나의 곁에 머물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불행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타자와의 사랑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법입니다.  91




몸편


몸과 정신은 함께 갑니다. 정신 상태가 상당히 안 좋다면, 몸 상태도 상당히 안 좋은 거예요. 정신적 문제를 몸과 나누어서 생각하면 안 되는 거예요. 사람의 모모가 정신은 하나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거나 무언가를 의심하거나 우울한 증세가 있다면, 일차적으로는 운동을 하면서 해결을 할 수 있어요. 강건하게 운동을 하면 100펴센트 해결이 되죠. 어렵지 않아요. 정신에 문제가 생기면 몸에, 몸에 문제가 생기면 정신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의 실천적인 조언을 드릴게요.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면, 집에 처박혀 잇지 말고 몸을 움직이고 써야 합니다. 그리고 몸에 문제가 있을 때는 몸에 연연하기보다 정신적인 문제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고요.  99


'몸'이라는 건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남자의 몸, 여자의 몸만 존재해요.  100


남자의 몸은 여자의 몸으로, 여자의 몸은 남자의 몸으로 열려 이싿고 해야 할까요? 철학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관계에 열려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이라는 걸, 몸 일반으로 보지 말자고요. 그냥 여자의 몸, 남자의 몸인 거예요. 그리고 지구상에 이게 존재하고, 생명체에게 이게 존재한다는 건 소중한 거계요. 여자 혼자서는 여자의 몸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고, 마찬가지로 남자 혼자서는 남자의 몸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수박에 없는 구조가 바로 우리의 몸이라는 거죠. 흥미로운 일이지요.  101


우리 몸은 기억을 합니다.  108


(제자중에)오케스트라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는 친구인데, 이 친구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악기는 손을 타기 때문에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주고 만져 주지 않으면 마치 남남인 것처럼 초기화되어 버린다"라고요.  110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키스를 나누고 나를 만져 주길 바라죠. 나에게서 날 수 있는 전혀 다른 소리들을 기대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을 하지 않게 되면, 어떤 사람의 몸과 부딪히는 관계를 맺지 않게 되면 여러분들은 끝난 거예요. 살아 있어도 끝난 거예요. 썩어 가는 거예요. 리셋이 되고 있는 거예요...

사람 몸은 다 악기예요. 애완견도 악기고, 심지어 돌도 악기예요.  111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 몸은 악기와 같으니 악기를 어덯게 유지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112


집중력입니다. 최대한 집중해서 확신이 드는 사람과 관계를 지속하려고 할 때, 거기서 환멸을 느끼든 좌절을 느끼든 경험이라는 것이 되는 거예요. 집중을 했을 때 경험이 되는 거죠. 장비를 갖추고 여행을 가서 고생을 하면 경험이 되지만, 그냥 길 가다 폭풍우 쏟아진다고 폭풍우를 경험했다고 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냥 당한 거죠. 그건 경험이 아니에요. 아무것도 못 배워요. 경험은 수동적인 게 아닙니다. 경험에서 배운다는 건, 진지하게 직면하는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말이에요. 진지(眞摯), '참될 진(眞)'자에 '잡을 지(摯)'자예요. 특히 여릭서 중요한 것은 '지'라는 글자입니다. 솔개 같은 맹금류가 토끼 같은 동물을 꽉, 혹은 제대로 잡아챈다는 뉘앙스가 있으니까요.

꽉 잡을 때 그게 뜨거운지 시원한지 알아요. 그때 배우는 거예요. 뜨거운 척 하는 게 아니라 꽉 잡아 봐야 돼요. 이 경험이 쌓여야 된다고요.  142


타인을 위해 자기감정을 억누르는 사람은 대개 노예들이에요...

타인이 정한 행복과 불행이란 기준이 아니라 나만의 행복과 불행이란 기준으로, 일체 검열하지도 않고 쫄지도 말고 당당하게 자신의 감정에 따라 판단하라는 겁니다.  145


오로지 나의 느낌에, 내 감정에 유일하게 집중하고 사랑을 할때만이 우리는 주인이 되는 경험을 해요.  154


직접 대면했을 때 아름다운 풍경은 살아 있는 것 같은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진에 담긴 아름다운 풍경은 그런 생생함이 사라지고, 무엇인가 죽은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사진의 풍경은 '시각'만이 추상화되어 박제된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자신이 직접 본 풍경은 다섯 가지 감각이 모두 살아 움직였던 구체적인 경험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진이 보여 주는 시각적 풍경은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풍경을 추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당시 경험했던 바람의 산들거리던 촉감이나 호수의 달콤하고 씁쓸했던 물비린내 등등은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되겠지요.  164-165




고독편


우리가 제일 슬픈 건, 나를 항상 의식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이렇게 생각해 보면 돼요. 나를 만난 남자가 자꾸 시계를 봐요. 여러분을 만난 어떤 사람이 시계를 자꾸 본다면, 그건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고 객관적 위치가 어디인지를 파악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불쾌하지 않나요? 백화점도 그걸 알아요. 시계 안 갖다 놓죠. 상품에 몰입하라고요. 백화점은 절대로 창문을 만들지 않아요. 비가 쏟아지면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집으로 가니까요. 불문율이죠. 백화점은 그렇게 몰입을 위한 환경을 만들어 놓은 겁니다.  176


몰입은 시간 가는지 모른다는 느낌인 거예요. 시간을 챙긴다는 건 일정을 관리한다는 거잖아요. 

어른이란 게 뭔가요? 내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어른은 몰입을 잘 못해요. 아이들은 좋아하거나 꽂히는 게 있으면 거기에 목숨을 걸잖아요. 고독이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지 아시겠죠? 몰입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176-177


세계와 관련되어 있으면, 내 바깥에 있는 사람, 사물, 사건에 몰입을 하면 고독은 안 느껴져요. 번지점프를 하면서 고독을 느끼지 않잖아요. 절대 안 느껴요. 아주 재밌는 영화를 볼때도 우리는 고독을 느끼지 않죠. 어떤 매력적인 남자를 만나서 그 남자에게 몰입하는 순간 우리에게 고독은 없어요. 내가 몰입할 대상이 존재하면 고독은 없어요. 우리가 느끼는 고독의 정체는 바로 그거예요. 몰입할 게 없는 겁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죠. 사랑하는 게 없다고요. 밤새도록 함께 잇어도 시간이 가는지 모르는, 그런 존재가 없다는 거예요....

세계가 풍겨으로 보일때 우리는 고독한 거예요. 내가 있고, 나머진 다 그림인 거죠.  178


고독을 해소하는 방법, 그러니까 세상을 풍겨으로 보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풍경으로 보이지만 그것들 중 만지고 싶은 것이 있는지, 다시 말해 더 몰입하고 싶고 더 들어가고 싶은 것이 잇는지 살펴보는 거예요. 반드시 있을 겁니다.  179


고독이라는 건 자의식이 강한 상태입니다... 긴장되어 있어 거예요. 이 세계를 풍경으로 보는 겁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해 몰입하지 못해요. 나에게만 몰입해요. 나에 대해서만 몰입하는 겁니다. 그런데 몰입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분열증에 빠져요. 우리의 문제가 그거죠.  180


고독은 일회용 반창고일 때에만 의미가 있다는 사실. 상처가 날까 봐 계속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요.

고독은 병에 비유하자면 자폐증과 같은 겁니다. 자폐 증상이 있는 아이들은 세계가 너무 큰 충격을 줬을 때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요.  182


자본은 우리의 낭만적 삶을 부정할 겁니다. 낭만적인 사람은 세상에 대한 몰입도가 높은 사람이니까요. 그러니 자본의 입장에서는 하나씩 하나씩 몰입도를 줄이려고 할 거예요. 그러니 낭만을 위한 싸움을 시작하려면 우리가 먼저 되새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죠? 고독을, 멋이라고 자랑하지 말자고요. 일차적으로 우리는 상처받았어요. 고독하도록 내밀린 겁니다. 이걸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삶의 행복을 찾으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게 몰입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거예요. 몰입을 못하면 죽은 거니까요.  186


사람은 죽을 때 근육이 이완되죠. 죽고 나서 경직이 됐다가 이틀 정도 염을 하고 경직이 풀리면 사람 몸이 처음으로 다 열려요. 잡아뒀던 게 이완되니까 오만 구멍에서 다 쏟아져 나와요. 산다는 건, 사는 것의 정의는 항문을 조이는 거예요. 몰입과 무어의 육체적인 경험은, 드러나는 건 다 열리는 겁니다. 이 경험이 매력적인 게, 완전히 어떤 것에 몰입한다는 거예요. 나를 떠나는 거죠.

생각을 해 봐야 돼요. 나를 놓을 수 있는 기술이 우리에게 필요한데, 그 방법들은 여러분이 찾아내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어떻게 증진시킬까?'가 다움 문제인 거죠. 이거 굉장히 소중한 거예요.  190


고독을 벗어나는 기술은 '고독의 상태니 여기서 건너뛰자'는 발버둥보다 일단은 '몰입도를 어떻게 높여야 되는데 이 몰입의 방법이 나에게는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해보는 거예요.  191


여러분에게 세계가 힘든가요? 육체적이든 장소적이든 시간적이든 관념적으로라도 거리를 두세요. 세계를 풍경으로 보는 연습을 하세요. 진짜 편해요. 세계에 그냥 노출되서 마구 상처받는 것보다 고독으로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고 세계를 풍경으로 보는 게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어요. 슬픈 전략이죠. 하지만 우리의 보호막은 또한 우리의 감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독은 이중적이에요.  192


행운은 아무에게나 오지는 않지요. 스스로 고독을 깨기 위한 적극적인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춤도 춰 보고 노력은 해 볼 수 있어요. 해보는 데까진 해 봐야 되겠죠. 어쨌든 방법은 알았으니까요. 그렇게 하다 보면 나를 가두고 있는 그 감옥의 두께가 좀 얇아질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런 어머니 같은 존재가 필요하지 않을까'그런 생각이 들어요. 따뜻한 사람이요. 어쨌든 따뜻한 사람이 여러분을 나올 수 있게 괜찮다고, 여기는 괜찮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193


눈치를 보는 건 괜찮아요. 압도적인 힘 앞에서 생존하려면 눈치를 보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197


삶을 잘 살려면 어떤 것을 결정하든 부모님에게 '이기적이다'는 말을 들어야 해요. 부모님이 여러분에게 이기적이라고 말씀하시면 무조건 자신감을 가지면 돼요. '드디어 내 삶을 사는구나'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199


예쁜 사람 콤플렉스가 그거예요. 한 번의 선택으로 완벽한 스토리로 살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 주저하는 겁니다. 지금 선택이 완벽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니까요. 결국 어떤 선택도 할 수 없게 되지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선택하고 행동하세요. 

확신이 아니라 감각만 믿으셔야 해요. 헷갈릴 때 여러분들이 하셔야 될게 감각을 믿는 거예요. 확신이라는 것을, 미래로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감각을 믿으세요  203


독일 관념론이 우리에게 했던 이야기는 타자가 매개되지 않는 자기의식은 없다는 겁니다. 모든 자기의식, 나에 대한 의식은 타자가 매개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쁜 타자를 만나는 게 비극인 거예요. 누군가 나에게 쓰레기라고 비난하면, 스스로를 돌아보게 돼요. 그리고 쓰레기를 찾게 되죠. 좋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이유는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나의 모습을 발견해 주기 때문이에요.  205


자신의 감정을 지켜야만 해요. 그만큼 여러분은 삶의 주인이 될 테니까요. 그게 주인 아닌가요? 내가 행복하면 행복한 거예요. 내가 즐거우면 즐거운 거고요. 내가 불쾌한 건 피해야 되죠. 불쾌한데도 억지로 하고 잇다면, 문제가 있죠. 행복한데도 버려야 된다면,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요? 사실 돌아보면 우리는 너무 비겁하잖아요. 내 감정을 지키면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아서 자신의 감정쯤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자신의 감정이 소중하다고 이야기는 하죠. 이렇게 비겁한 의식들 때문에 우리는 계속 힘들어지는 거예요. 아주 쉬워요. 아주 단순하죠. 제가 왜 단순하게 얘기하는 거 같아요? 별로 타협을 안 보잖아요. 옳은 거는 옳은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더라도 옳은 거는 진짜 똥구먼이 빠져도 옳은 거예요.

사실 저도 그렇게 잘 살지 못하죠. 그런데 제가 철학자니까, 옳은 거는 옳은 거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못 살아도 옳은 것은 옳은 거니까요.  231-232


'왜 사나?'라고 질문하지 말아요... 다 개소리예요.

그 막연한 질문들이 대개는 지금 내가 좋은지 내 느낌이 어떤지를 은폐하기 위해서 던져지는 질문이에요. 그리고 그 막연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내앞에 있는 사람,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무시할 때 써요.  237


자신의 삶을 하나의 축복으로 생각하려면, 여러분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은 고독과 싸우는 것입니다. 고독해지는 내 모습과의 싸움입니다. 세계를 풍경으로 볼 게 아니라 세계에 몰입할 걸 찾아야 해요. 그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건 맞아요.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커다란 행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처를 받았다고 떨어져 나오면 아무것도 못 만지는 세상만 남아요. 그 순간 우리는 제대로 몰입할 대상을 만날 가능성마저도 잃게 되겠지요. 그러니 용기를 내야죠. 제대로 살려면, 행복하게 살려면, 우리에게는 몰입할 대상이 반드시 있어야 하니까요.

고독에는 병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고독은 자기에 대해서 몰입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고독은 타인에 대해서 몰입하지 않기로 작정했을 때 쓰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결국 타인을 사랑할 수 없으니 나만을 사랑하기로 작정하는 것이 고독의 숨겨진 메커니즘입니다.  238




에필로그 - 사랑, 손이 데어도 꽉 잡아야만 하는 것

차이의 긍정, 이것은 바로 상대방을 소유하지 않겠다는, 다시 말해 자유롭게 해 주겠다는 의지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252


니체도 <도덕의 계보학>에서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저지 장치가 파손되거나 기능이 멈춘 인간은 소화 불량 환자에 비교될 수 있다... 이런 망각이 필요한 동물에게 망각이란 하나의 힘, 강건한 건강의 한 형식을 나타낸다."  258


스피노자는 "슬픔은 인간 활동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방해한다. 즉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머물고자 하는 코나투스를 감소시키거나 방해한다. 그러므로 슬픔은 이런 노력에 반대된다. 그리고 슬픔을 느끼는 모든 인간이 노력하느 ㄴ것은 슬픔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러나 슬픔이 크면 클수록 그것은 인간의 활동 능력이 그만큼 큰 부분에 대립한다. 그러므로 스픔이 더 크면 인간은 반대로 그만큼 활동 능력으로써 슬픔을 제거하려고 할 것이다." <에티카>  258-259


스피노자의 말대로 의식적인 노력으로 치유의 시간은 그만큼 단축될 수도 있습니다.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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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도시가 아니었다. 결국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였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행복할 수 없다면 세상 그 어느 곳을 가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과정은 고독하고 피로했다.

헛헛함

행복의 반대말

낯설게 보기

탈도시적

라디오를 들으며 연필을 깎을 때면 참 행복했다.

온기




인생이란 어느 한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다림이며, 가장 나다운 나와 만나는 먼 여정임을 이해했다.  37


자제의 윤리가 깊숙이 내면화된 남자..

"상대의 호의를 잘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봐. 잘 받는 사람이 잘 줄 수도 있는거야."

상대를 위한 배려라고 새악했으나 그건 표면적인 명분일 뿐, 실상은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나 자신에 대한 배려가 더 우선은 아니었을까. 자립심을 바루히해 내 일을 스스로 처리하고 싶어 했으나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타인의 힘을 빌리는 달콤함을 맛본 뒤 의존적이 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그것은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고질병 가운데 하나였다. 아니,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해야 했던 운명의 소유자가 가지게 마련인 방어 심리였을지도.

이 도시에는 그런 믿음을 강화시키기에 충분한 잔혹한 사례들이 얼마나 일상적으로 일어나는가, 안심하고 감사히 호의를 받아들였더니 결국 자신을 이용하기 위한 의도였음을 아게 된다거나, 진심에서 우라넌 도움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그 일로 뒷말을 듣게 된다거나..  42-45


"그거 알아요? 정말 뭔가에 정신을 쏟으면 눈물이 나는 거? 슬퍼서도 아니고 서러워서도 아니고 그냥 눈물이 나요."

나는 다만 한 사람이 뭔가에 몰두한 끝에 흘리는 눈물에 대해서, 그 맑고 투명한 힘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초라한 시작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물 나도록 힘이 솟게 하는 뭔가를 찾는 사람드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었을 뿐이다.  52-54


스승의 죽비가 계속 어깨를 내리친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의식(생각)과 감정(마음)의 모순 때문입니다."

"생각과 마음이 싸우면 대부분 마음이 이깁니다. 승률 90% 이상이죠. 백만 대군과 싸우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바로 자신의 마음과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절에 가면 대웅전이 있죠. 그건 자신의 마음과 싸워 이긴 큰 영웅을 모신 곳이란 뜻입니다. 좋고 싫음에 따라 움직이면서 우린 거기에 온갖 핑계를 다 갖다 붙입니다. 일생이 '핑계 찾아 삼만리'입니다. 해탈이란 좋고 싫음의 놀음에서 벗어나 좋아도 안 할 수 있고, 싫어도 가볍게 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57-60


우리에겐 누구나 사랑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 자체는 탓할 일도, 억지로 가라앉힐 일도 아니고 그저 자연스러운 욕망일 뿐이다. 다만 사랑 받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 '아, 내 마음이 이렇구나'하고 알아채는 일이 중요할 뿐이다. 알아채는 순간, 욕망은 더 이상 강렬하게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나의 스승은 말씀하셨다. 

"사랑 받는 것을 내 삶의 중심으로 두면 힘들어집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사랑 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사랑 받고자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연인 사이에 흔히 '넌 내 거야' 하고 말하죠. 그러면 그 사람이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그 사람 것이 됩니다. 내 행복이 그 사람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죠. 그 사람의 한 마디, 몸짓 하나에 내 행과 불행이 좌우되기에 내가 내 인새으이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널 이렇게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너도 날 사랑해야 돼.' 이건 거래고 흥정이지 진정한 사랑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 받으려 하면 괴로움이 생겨날 뿐입니다. 반면 사랑하려 하면 충만이 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바로 서기 때문이죠."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설레며 사랑에 빠졌던 날들은 진정 천국의 시간일 것이다. 그 사랑이 좌절과 환면, 허망함을 안겨 주었다 하더라도 천국의 시간이 주는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자신을 투명하게 들여다보게 만드는 그 아찔하고 뼈아픈 각성의 순간조차 사랑이 아니라면 체험하기 힘든 소중한 기회이니까.

오직 사랑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힘센 카르마와 에고를 녹일 수 있다. 사랑은 정성이며, 절로 춤추게 하는 리듬, 영혼의 타악기를 울리는 손가락 끝마디이다. 

종교를 가지거나 명상을 하고, 온 세계를 헤매고 다녀도 내려놓기 힘든 것이 인간의 에고이다. 그런데 사랑에 빠진 순간 우린 광복보다 빠른 속도로 자신을 내려놓는다. 누군가를 자신보다 더 아끼고 사랑할 수 있게 되며, 세상을 향해 마음의 빗장을 모두 열어 젖힌다. 사랑이 아니라면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다. 기적이 일어났던 순간, 우린 미이 천국을 맛본 것이다.  68-70


크리스토퍼 듀드니가 쓴 <밤으로의 여행>에 쥐를 세 집단으로 나눠 실험한 얘기가 나와요. 쥐들을 24시간 불을 켜 둔 집단, 낮에만 불을 켜고 밤에는 깜깜한 곳에 둔 집단, 낮에는 불을 켜 두고 밤에는 아주 적은 양의 불빛만 새어 들어오게 한 집단으로 나눠 살게 했대요. 결과가 어땠을까요. 밤 동안 극소량의 빛에 노출된 쥐들과 밤새 환히 켜진 불에 노출된 쥐들의 몸 안에서 똑같은 수준으로 종양이 자랐다고 해요. 요약하자면 어스름한 빛마저 몸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거예요.  83


애초부터 옳고 그름은 없었다. 

'지불책우(智不責愚)' -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꾸짖지 않는다.  101


자발적 빈곤은 한없이 아름다운 말이지만 해가 갈수록 '자발적'이 맞는지 자신이 없어진다. 

도시가 추구하는 욕망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자발적'이라는 청렴한 수식어는 곧바로 무능으로 대치된다.

스승이 답했다.

"청빈과 극빈의 차이가 무엇인지 압니까? 스스로 그 길을 택해 검소하게 살면 청빈입니다. 극빈은 내 욕망은 그렇지 않은데 할 수 없어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조급함에 사로잡히면 반드시 실수를 하게 됩니다. 당장 다음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난하거나 큰 병에 걸렸거나 문맹이 아니라면, 그 이상은 더 잘 먹고, 더 건강하고,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욕심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남과 비교해 얻는 고통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약이 없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악한 생각입니다."  110-111


누가 그랬던가. 여행과 생활은 연애와 결혼의 차이 같다고, 막상 그 나라에 터를 잡고 산다면 다르겠지만 여행이었기에, 여행자였기에 우리는 얻뜻 새로운 세상을 보았거나 봐싿고 생각한다. 그것은 분명 다른 세계였다고 여긴다.  116


엄마가 말했다.

"해가 지면 그날 하루는 무사히 보낸 거다. 엄마, 아버지도 사는 게 무섭던 때가 있었단다. 그래도 서산으로 해만 꼴딱 넘어가면 안심을 했느니라. 아, 오늘도 무사히 넘겼구나 하고. 그러니 해 넘어갈 때까지만 잘 버텨라. 그러면 다 괜찮다."

그 밤에 엄마가 속으로만 삭인 뒷말이 있었다.

'그러다 새벽이 오면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게 몸서리쳐지게 무서웠단다.' 

그 말까지 더해야 진실이 완성되지만 엄마는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새벽이 되면 절로 느낄 것이므로, 당장 그 순간 자식에게 필요한 것은 기운을 북돋아 주는 말이란 걸 알기에.  123


"야야, 눈이 게으른 거란다."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벽에 부딪쳐 그만 포기하고 싶어질 때면 엄마의 어록을 떠올린다.

게으른 눈에 속으면 안 된다는 것을, 사람의 눈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서 해야 할 일 전부를, 인생 전체를 돌아보며 겁먹기 쉽다는 것을, 엄마는 말했다. 오직 지금 내딛는 한걸음, 손에 집히는 잡초 하나부터 시작하면 어느새 넓은 콩밭은 말끔해 진다고 반드시 끝이 있다고.  124


명상이란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일에서 시작된다.

알아 차리는 순간 화는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143


사랑이 무슨 죄니. 사랑이 약한 게 아니라 사람 마음이 약한 거지. 사랑은 있어."

그러니까 애당초 잘못은 우리가 사랑해 대해 품는 수많은 환상과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다. 사랑은 있는데, 사람이 변한다는 거다. 그 동안 애꿎은 '사랑'만 쥐 잡듯 자아 온 셈이다.  155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귀는 아무리 낮은 소리라도 다 알아듣는다. - 셰익스피어

어떻게 딴 생각을 하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상대의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어떻게 모든 것을 내보일수 있었을까?

바로 '처음'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이와 나 사이에는 과거에 쌓아 둔 '인과'가 없었다. 사소한 오해를 빚었던 일도, 기쁨을 나눴던 기억도 없는 백지 상태의 인연. 마음의 열림과 기적 같은 소통이 가능했던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순조로운 의사소통을 막는 첫걸음은 과거의 기억에 있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에서 오랜 시간 동안 봐 온 가족과 오히려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 내가 만나는 모든 인연을 지상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대하기란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과 소통하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마음속에 '내가 옳다'는 생각이 가득 차 있기에 자연스럽게 상대의 말은 내 마음속에 닿기도 전에 부정되고 만다.

스승은 말했다.

"혹시 마음속에 상대를 바꾸고 싶다는 욕심이 있는 건 아닌가요? 자기 자신 이외에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삶은 치유가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내가 문제를 해결해 줘야겠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저 조용히 들어주세요. 그리고 본인이 직접 도움을 요청하면 그때 도와주세요."

내 잣대로 미리 재단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옳다는 생각도 소통을 막지만, 내가 틀렸다는 생각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아니다. 미안해 하는 마음은 오히려 상대르 원망하는 깊은 속내를 감추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나의 옳음을 내려놓으면 가벼워지기에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사라진다. 미안한 마음은 지금 그대로의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이 미처 채우지 못한 욕심일 수 있다.

지혜로운 스승들은 상대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들 때는 진참회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진참회란 '내가 문제였어'라고 건성으로 결론 맺는것이 아니라 세상에 옳고 그른 일이란 없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170-176


누구나 평생에 걸쳐 자기 부모를 넘어서기 위해 애쓰며 살게 마련이다.  193


진정한 부란 죽음이 빼앗아갈 수 없는 것들을 이르는 말이다. 타인에게 베푼 친절, 관대함, 나눔, 용서, 배려... 내가 티베트를 그처럼 좋아하고 그드르이 운명에 아파했던 것도 진정한 성공과 부가 무엇인지 아는 문화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구제프의 수도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불편한 관계가 남아 있다면 돌아가라."  201


살아 보니 행복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것이었다.

행복에 관한 한, 우리는 일용직 신세였다. 비정규직이었다.

내일 몫까지 미리 쌓아 두기 힘든 것, 그게 행복이었다.  203


중독과 몰입의 차이는 무엇일까. 

중독인지 몰입인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안다. 둘 다 엄청난 시간과 사랑을 요구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게 없으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설명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드는 점도 닮았다. 그러나 중독과 몰입의 차이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에 있지 않을까. 어떤 일에 지독하게 빠져 있는 자신이 밉고 죄책감이 든다면 중독이다. 그 일을 함으로써 자신을 더욱 사랑하게 되며 내면의 자부심이 커진다면 몰입니다. 왜냐하면 중독은 결국 자신의 실체를 잊기 위한 몸부림이며, 올바로 사랑을 쏟아야 할 대상에게서 거부당하고 상처 받은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중독이 치명적인 것은 물리적인 파괴의 속성 때문이다. 몸 어디 한 군데가 손상된 뒤에야 간신히 벗어날 수 있는 것, 그게 중독이다.

정말 미스테리하고 약 오르는 진실 하나는 좋은 습관은 쉽게 중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64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심장에서 울리는 소리를 따라 길을 떠난다. 그러나 진정 성숙한 여행자는 돌아와서 자기 발밑의 장미 한 송이를 더욱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보다 멋진 사람은 굳이 떠나지 않고도 일상의 소중함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내면의 여행자이다. 혹여 장미가 아니라 패랭이꽃이나 작은 들풀인들 어떤가.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발밑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이다.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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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도전은 산소다!

마음의 비계


'래디컬'하다고 하면 '급진적'이란 의미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래디컬'의 라틴어적 본래 의미는 '뿌리를 건드린다'는 뜻이다. 뿌리를 건드리면 아프다. 하지만 정신차려서 자신을 직시하고 자기 실존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더 먼 길을 제대로 가려면 오히려 어느 정도의 정지와 멈춤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몸이 먼저 늙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늙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의 건강검진은 받아도 마음의 건강검진은 받아볼 생각조차 안 한다.


인생의 산소는 크고 작은 도전에서 나온다. 도전하면 스스로 삶의 산소를 만들 수 있다. 삶의 산소가 있으면 그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호흡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 걸음으로 갈 수 있고 진짜 자기 삶을 살 수 있다. 그게 애써 도전해야 하는 이유다.


도전하는 만큼 삶은 달라진다. 시들해가던 중년의 사내가 '산티아고 가는 길' 900여 킬로미터를 걷고 와서 다시 도전을 말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5-9



떠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떠날지는 정하지 못했다. 그저 떠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엇다. 이 '무작정'이란 게 무서운거다. 스스로를 백지상태로 만들어놓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후 차츰 무엇을 향해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 문득 떠오른 것이 '산티아고 가는 길'이었다. 언젠가 스쳐지나가듯 본 책을 통해 천 년 넘게 사람들이 걸어간 순례길이라는 것 정도만 알았지 그 길에 대한 정보 역시 말 그대로 백지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그 백지상태라는 것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앞고 가는 길은 재미없다. 모르고 가서 부딪치는 것이 진짜다.

그냥 '뚝' 끊고 떠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18



덜어내고 털어내고 비워낸다 해서 

사람이 가져야 할 멋을 잃게 되거나 

삶의 맛이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의 멋, 삶의 맛은 '채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되레 '비움'에서 오기 때문이다.  21



털어야 할 대목에서 털지 못하면 우리네 인생배낭은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차버린다.

우리 인생길이 힘겨운 진짜 이유는 그런 잡동사니를 버리지 않고 인생배낭에 꾸역꾸역 구겨넣은 채 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미련, 후회, 회한, 미움, 증오, 시기 등의 찌꺼기 같은 잡동사니를 버리고 소망, 꿈, 도전, 화해, 사랑, 모험을 담아 자기의 인생배낭을 다시 꾸려야 하지 않겠나.  23


일단 짐을 덜어내기로 마음을 고쳐먹으면,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가를 치열하리만큼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비로소 깨닫게 된다. 진짜 꼭 필요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24


장 지오노가 <나무를 심은 사람>에서 말했듯이 "사람은 희망을 가져야만 일할 수 있다." 

자기 안의 또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희망이 있을 때 그래서 '어제와 다른 나', '오늘과 다른 내일'을 만들 희망에 차 있을 때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45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가 걸어온 길은 결코 잘 닦인 아스팔트길이 아니었다. 자갈밭 아니면 진창길이었다.  57


인생은 화살표만 따라가는 길이 결코 아니다. 대개의 인생길 위에는 화살표도 없고 그것을 표시해주는 지도도 없다. 오직 내 안의 자기만의 방향감각만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뿐이다. 바로 그 자기만의 방향감각이 곧 내 안의 나침반인 셈이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 돈키호테  87



인생은 때로 미쳐야 해. 우리는 너무 안 미치는 게 탈이야.  89


지미 카터는 "인생이란 점점 확대되는 것이지 축소되는 것이 아니다."  97


내버려둔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쓸데없이 분주한 것은 내버려두기를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쓸데없이 분주한 까닭 뒤에는 어김없이 '불안'이란 것이 도사리고 있다. 자기 안의 불안을 떨치려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경우가 태반니다. 스스로를 내버려둘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그 불안에서 한 발 비켜 있을 때 가능하다. 아니 그 불안에서 벗어나 있을 때 비로소 내버려두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애일(愛日)'이란 말이 머리에 스쳤다. 사랑'애(愛)' 날'일(日)', 말 그대로 '하루하루를 아끼고 사랑하라'는 의미가 담긴 말이다. 본래는 늙은 부모가 오래오래 사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정말이지 남은 하루하루가 아깝다는 뜻을 담아 '애일'이라 한 것이지만 오늘에 와서는 하루 하루 지나는 그 시간이 참으로 아까우니 제대로 시간을 잘 쓰라는 뜻으로 더 많이 통한다.  122


감동은 작은 데서 나오나 세상을 움직일 만큼 커진다.



한쪽에서 또다른 한쪽으로 

기울며 흐르는 게 사랑이다

'기우뚱한 균형'을 잡아가는 것 

그것이 사랑 아닐까 싶다.  137


본래 사랑은 평등하지 않다. 꼭 균형이 맞지도 않다. 왠지 기우뚱한 것처럼 보이기 일수인 것이 사랑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도 밑질 것 없어 보이는 사이는 사랑이 아니다. 그건 자칫 거래다. 둘 사이가 어느 쪽으론가 기울어야 사랑이다. 기우는 쪽으로 사랑은 흐른다. 

살다보면 기우는 방향이 정반대로 바뀌기도 한다. 

그러면서 '기우뚱한 균형'을 잡아가는 것! 그것이 사랑 아닐까 싶다.  139-140


음식은 사람과 사람을 자연스럽게 이이주고 통하게 만든다.  153


우리는 늘 착각한다.  181



인생 레이스는 속도 경재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는 것이다.  


인생 레이스의 7가지 원칙

제1원칙은 '자기 페이스를 잃지 말라'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그 누구나 인생 레이스에 임하는 나름의 주법 혹은 보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떤 이는 보폭을 크게 하며 초반부터 전력 질주를 한다. 옆에 있는 사람들도 덩달이 속도를 낸다. 하지만 그 중 8할은 중도에서 주저앉는다. 자기 페이스를 잃었기 때문이다. 주법 혹은 보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주법 혹은 보법이든 최고의 인생 레이스를 펼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는 것'이다.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는다는 것은 오버 페이스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페이스가 뭔지조차 모르고 인생 레이스에 임하낟. 자기 강점이 무너지, 자신의 최고 속도는 얼마인지, 자신의 지구력은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옆에서 보폭을 넓혀 빨리 달려나가면 엉겹결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죽자살자 따라붙는다. 그러곤 팔진해 풀썩 주저앉기 일쑤다. 그러니 인생 레이스의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는 것이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겆는 것에서도 마찬가지다.

인생 레이스의 제2원칙은 '구간기록을 체크하라'는 것이다. 인생 레이스는 길다. 결코 짧지 않다. 한숨에 달려갈 길이 아니다. 레이스 전체를 머릿속에 큰 그림으로 그릴 필요는 잇지만 정작 뛰거나 걸을때는 전체 구간을 토막내서 한 구간 한 구간씩 차근차근 나아간다는 기분으로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 속에서 지레 주눅 들고 힘겨워하며 또다디 포기하고 싶은 심정에 풀썩 주저앉기 십상히다. 그래서 인생 레이스엔 스스로 구간 설정을 할 필요가 있다. 사람과 형편에 누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그 구간에서 펼친 레이스의 기록을 꼼꼼히 체크해야 한다. 왜 하냐고? 미래를 위해서다! 그 기록에는 성취와 성공만이 아니라 실수와 실패도 담겨 있기 마련이다. 성취와 성공의 기록은 뿌듯한 것이지만 정작 인생 레이스를 펼친 기억이 아니라 실수하고 실패했던 것의 아픈 교훈들이다. 그 실수와 실패의 아픈 경험들을 기억하고 기록해야 미래를 대비하고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 레이스의 제3원칙은 '이미 지난 레이스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생 레이스를 펼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경험하는 것이 있다. 이미 지난 구간의 레이스에 집착하면 지금 하는 레이스를 망친다는 사실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 지금부터가 더 중요하다. 시선은 앞을 보면서 정작 생각은 발뒤꿈치에 잡혀 있다면 제대로 나아갈 수 없다. 앞서 달린 구간기록을 체크하는 것은 과거에 연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늘 그리고 미래에 더 잘 뛰기 위해서다. 그러니 이미 지난 레이스에 집착하지 마라. 지금 하고 있는 레이스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나아갈 수 있고 또 이길 수 있다.

인생 레이스의 제4원칙은 '길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생 레이스를 펼치다보면 연도에 선 사람들의 시선을 벗어나기 어렵다. 다름아닌 내 주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때론 그들의 관심과 격려, 박수와 환호 그리고 미소와 칭찬이 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반대로 손가락질을 받거나 야유와 험담을 들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자칫 길가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다보면 오버 페이스를 하거나 아예 발이 꼬여 넘어지기 쉽다. 그러니 레이스를 펼칠 때는 길가의 시선과 주위의 시선을 넘어서야 한다. 너무 의식하지 마라. 아니 그 시선으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라. 그래야 제대로 뛸 수 있다.

인생 레이스의 제5원칙은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 레이스를 펼치라'는 것이다. 인생 레이스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지금 왜 이렇게 힘들여서 뛰고 걸으며 가고 있는 거지?'하는 회의가 갑자기 봇물 터지듯 몰려올 때가 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때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자신이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 이 인생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는 것이다. 아무리 힘든 레이스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을 생각하면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그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는 인생 레이스를 뛰는 각자의 사람들이 잘 안다. 아니 느낀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다. 가족이다. 아이들과 아내다. 

인생 레이스의 제6원칙은 '상대를 보지 말고 목표를 보고 나아가라'는 것이다. 토끼와 거북이의 레이스를 알 것이다. 빠른 토끼가 느린 거북이에게 진 이유는 간단하다. 거북이는 산등성이의 깃발, 곧 목표만을 보고 나아갔고 토끼는 상대인 거북이만 보고 뛰었기 때문이다. 토끼는 빨리 내달렸지만 어느 지점에 가서 뒤처져 오는 거북이를 보고는 풀섶에 들어가 잤다. 물론 잘 수도 있다. 하지만 토끼는 어디를 가겠다는 목표보다 뒤에 오는 상대인 거북이만 본 것이다. 반면에 거북이는 느렸지만 계속 전진했다. 풀섶에서 자고 있는 토끼도 힐끗 봤다. 하지만 거북이는 상대인 토끼를 보고 멈추지 않았다. 그는 상등성이의 깃발, 곧 목표를 보고 계속 나아갔다. '상대'를 보는 사람이 '목표'를 보는 사람을 이길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인생 레이스에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기는 사람은 목표를 보고 나아가는 사람이지 상대만 보고 멈추는 사람이 아니다.  

인생 레이스의 제7원칙은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달리라'는 것이다. 제아무리 훌륭한 주법과 보법을 구사하고, 구간기록이 좋으지라도 결승점에 골인하지 않으면 모든 게 허사다. 그래서 최고의 인생 레이스는 완주(完走)하는 것이다. 기록이 좀 나빠도 괜찮다. 어차피 빠르나 늦으나 그것은 기록일 뿐이고 인생 대사엔 별 상관 없는 일이다. 기록상 1등이든 꼴등이든 인생의 마지막 종착점에서는 똑같다. 적어도 인생 레이스를 완주한 사람들은 모두 뭔가를 이뤄낸 것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그러니 속도상의 빠름과 느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포기했느냐 오나주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어던 경우에도 포기하지 마라.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끝까지 가라. 그게 인생 레이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인생 레이스는 속도 경쟁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산티아고 가는 길은 인생 레이스를 닮았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생 사에서도 남보다 빨리 가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10년 빨리 출세하면 10년 빨리 놀게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자기 페이스를 알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다. 느리면 어떠하랴. 그것이 자기 걸음이라면 느린 것이 아니라 적당한 거다. 남들이 한 달에 걷는다는 길을 나는 두 달 걸려 걷는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서 나는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행복했다. 그러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닐까. 인생사도 마찬가지다. 애써 서두르지 마라. 자기만의 속도, 자기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라. 그리고 때로 멈출지언정 결코 포기하지는 마라. 그 걸음으로 꾸준히 가는 거다. 그게 자달 중요하고 제일 무서운 거다.  189-193



나는 탭을 열어 글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었다. 얼굴은 탭으로 가렸지만 바닥에 떨어지는 눈물은 가릴 수 없었다. 바닥에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감출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그때였다. 옆 테이블에 있던 알랭이 내게 다가왔다. 그러곤 여전히 울고 있던 나를 한껏 껴안아 주었다. 아무 말없이...

그러면서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누구나 힘든 거야. 하지만 괜찮아. 괜찮다구. 그냥 울고 싶을 때 울어. 남 신경 쓰지 말고." 나는 그때 확실히 느꼈다. 그도 아프다는 것을, 아니 아파봤다는 것을. 아파보지 않고는 그렇게 남의 아픔을 감싸 안을 수 없다. 아마 그도 아파봤고 울어봤기에 나를 감싸 안아 가슴 깊이 포옹해줄 수 있었던 것일 게다. 그의 지중해의 미풍 같은 미소는 그런 아픔을 모두 견뎌낸 삶의 증표였으리라.  240-241



어딘가를 둘러보고 다녀본 것은 여행(旅行)이다. 어딘가를 걸어보고 느겨본 것은 기행(紀行)이다. 하지만 그 여행과 기행을 역사 속에 담그고 시대 속에 아우르며 오늘 나의 현존 가운데 재위치시키는 것은 '생(生)의 철학'이다. 고로 이 책은 나의 철학이다. 길을 걸으며 길 위에서 녹여낸 내 생의 철학이다.  258



"덜 갖고 더 많이 존재하라."는 스콧 니어링의 좌우며도 내려노흔 삶에 걸맞다. 

노자는 그릇을 비워야 쓸모가 있다고 했다. 자고로 비워야 채울 수 있는 법이다.  271



자고로 큰 지혜는 멈춤을 알고, 작은 지식은 계략을 안다 했다.  274


'멈춤을 안다'는 뜻의 한자어 '지지(知止)'  277


'눈물의 무게'가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내 삶의 무게였다.  287


헤르만 헤세의 시 중에 <혼자>라는 시가 있다.

세상에는 

크고 작은 길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도착지는 모두가 같다.

말을 타고 갈 수도 있고, 차로 갈 수도 있고, 

둘이서 아니면 셋이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  291



"근데 왜 아빠는 그 길을 걸으려고 하는 건데?"

"어제와 다른 나를 만나고 또 어제와 다른 나를 새롭게 만들고 싶어서"다. 

'어제와 다른 나'는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그것은 날마다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날마다 차이를 만들면 언젠가는 그것이 진짜 '다름'이 된다. 그 다름은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다.  292



법정스님은 어느 해인가 길상사 봄 법화에서 행한 법문 중에서 "천지간에 꽃이지만 꽃구경만 하지 말고 나 자신은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

꽃을 피운다는 것은 생식과 생명 황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꽃을 피움으로써 식물은 자기 생명의 지속성을 보장할 수 있다. 꽃은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은 생존을 위한 진한 몸부림의 소산이다. 꽃이 피어야 그 안에 있는 암술과 수술의 수정이 가능하고 씨라는 자손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꽃을 피우느냐 못 피우느냐는 멋부리는 감상이 아니라 살아남느냐 죽어 사라지느냐의 절박한 실존의 문제인 셈이다.  



목표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그 궤적 속에서 깊이를 느끼고 그 둘레를 더듬는 의미지향적인 일이어야 마땅하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 위에서 속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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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결과도, 미래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초선의 선택이라는 믿음이 저에겐 있었습니다. 그러니 '미래에 후회하게 도리 것인가'와 상관없이 바로 지금,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 '긴여행'이라는 선택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떠나는 자가 될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15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 피천득 옮김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은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기에 인하여 긑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로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19



"힘들지 않나요?" 그에게 물었다

"이젠 습관이 되어 괜찮아요." 그가 대답했다.

이 험한 길이 습관이 되어 힘들지 않을 정도가 되기까지 그는 얼마나 여러번 이 길을 오르고 올랐을까?  40


세상에는 참으로 멋진 장소가 많다.  멋진 장소를 만나는 것, 여행을 떠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상에는 멋진 장소보다 멋진 사람들이 조금 더 많은 것 같다.  48


하지만 어찌 보면 다행스러워. 쉽게 잊는다는 거, 망각한다는 거. 잊을 수 있으니까 다시 찾을 수 있는 거잖아. 망각했으니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잖아.  85


여행하면서 깨닫게 된 진실 한 가지는 힘든 언덕길을 오르면 멋진 풍경이 보답으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87


"I'm a student od life, Forever."  102


사랑이란 그런 게 아닐까. 나의 무릎 한쪽을 선뜻 내어주는 것. 곁에 있어주는 것. '쉿'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가는 것. 그래서 계속 꿈을 꿀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  112


지금이 아니면 안 되거든.  120


혼자 떠나는 여행. 그것은 혼자만의 여행이자, 동시에 혼자만의 여행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행이란, 여행하는 그 순간으로 끝나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오묘한 시간이다.  187


여행자의 마음을 끄는 곳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곳이다. 물론 여기에는 조건이 있는데, 동네가 작아야 하고, 구름이 예뻐야 하고, 몇 시간씩 앉아 있을 수 있는 카페가 있어야 한다. 중국의 따리가 그랬고, 베트남의 호이안이 그랬고, 라오스의 방비엥이 그랬으며, 여기 태국의 빠이가 그렇다.  197


느림은 좋은 것이다. 별 것 아닌, 반복되는 일상에 행복은 녹아든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느림 앞에서 전전긍긍해한다.  202


느림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불행하게 살기로 선택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203


비록 누군가에겐 별 볼일 없을지라도, 나에겐 '다시 찾고 싶은'곳. 세상에는 분명 그런 곳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내겐 있었다.  223


여행이 보여주는 나.  241


생각해봐. 그들이 타지마할을 완성하고 잘린 손으로 집에 돌아갔을 때, 그들의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의 기분이 어떠했을지를..  249


여행길에선 돈이 있더라도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렇다고 불행하지는 않았다. 올히려 행복한 순간들이 많았다. 다만 약간 불편할 뿐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가지지 못해서가 아니라, 가지지 못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266


여행이란, 이제까지는 당연했던 것들이 오늘은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되는 것, 나와는 다른 낯선 것을 인정하게 하는, 바로 그런 것.  293


"기억할 추억이 잇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309


여행에는 정답이 없다. 아니 모두가 정답이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최고의 장소이고,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이 최고의 사람이라 믿으면 된다. 그럼 나는 지금 최고의 여행을 하고 있는 게 된다. 다른 이의 여행 역시 정답이다. 나와는 다른 스타일의 여행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분명 나름의 이유나 의미가 있을 테니까. 

그래도 누군가 '여행 고수'에 대한 정의를 내려 보라면, 글쎄...  진정한 내 안의 소리를 아는 것, 그 소리를 따라가는 게 아닐까 싶다. 그것이 가능해지는 날, 그때가 비로소 길 위에서의 이 여정을 끝낼 때일 테니 말이다.  322-323


"지루한 것과 평화로운 건 다른 거야. 이곳에서 몇십 년을 살았지만 단 한 번도 지루했던 적은 없었어. 정말이야."  328


마음이 원하는 여행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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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빈 새장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 안에 뭔가를 담게 된다.



내 심장이 끄덕끄덕했다.


일상에서는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게 시간이지만 여행을 떠나서의 시간은 순순히 내 말을 따라준다. 사실 여행을 떠나 있을 때 우리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 쪽이질 않은가.



생각하기만 하여도 저절로 눈이 감겨지는 이 장면들을 나는 어쩌면 끝까지 가지고 가리라. 

그렇게 나는 열일곱과 열덟, 필름 같은 소년의 껍질을 벗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건 사랑이 어디론가 숨어버려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걸 만지고 싶어서일 텐데. 그걸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그냥 만지고 싶은 걸 텐데. 갖자는 것도, 삼켜버리는 것도 아닌, 그냥 만지고 싶은것.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넘쳐 보이지만, 지금 당장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금이 가 보인다. 넘치는 것은 사랑 때문이며 금이 간 것도 사랑 때문일 텐데 그 차이는 적도와 북극 만큼의 거리다.  



할아버지가 사시미를 준비할 때, 할아버지의 손놀림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다소 걱정하는 듯이 또 행복하게 바라보는 할머니의 다소곳하면서도 정중한 모습. 아, 어떻게 저렇게 고요하고도 벅차게 한 사람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나이가 경험을 축적하는 것이듯..



난로에 보리차가 끓고 있는 냄새나 나무 타는 냄새, 아이의 몸에 풍기는 이런저런 냄새나 갑작스런 방문을 의식해 오분 동안 급히 치운 듯한 친구 집엣 나는 생활의 냄개, 게를 찌는 찜통 연기의 냄새나 어느 냉장고에 붙여놓은 오래된 글씨의 냄새,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집 안에 가득한 빈집의 냄새와 트렁크를 열었을 대 어렴풋이 풍기는 그곳의 마루 냄새. 아, 지금과는 다르게 화학적인 것에 얌전하게 반응하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세상 그 어떤 시간보다도,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시간이 좋다.



언젠가는 그 길에서

갔던 길을 다시 가고 싶을 때가 있지.

누가 봐도 그 길은 영 아닌데

다시 가보고 싶은 길.

그 길에서 나는 나를 조금 잃었고

그 길에서 헤맸고 추웠는데, 

긴 한숨 뒤, 얼마 뒤에 결국

그 길을 다시 가고 있는 거지.

아예 길이 아닌 길을 다시 가야 할 때도 있어.

지름길 같아 보이긴 하지만 가시덤불로 빽빽한 길이었고

오히려 돌고 돌아 가야 하는 정반대의 길이었는데

그 길밖엔, 다른 길은 길이 아닌 길.



앞을 볼 수 있다면 뭘 제일 먼저 하고 싶어요?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일일 것만 같은 나는 그에게 서슴없이 묻는다.

"남의 물건을 훔치고 싶어요, 그 기분을 알고 싶어요."

아, 남모르게는 절대 할 수 없는 일. 앞을 볼 수 없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 바로 훔치는 일이겠구나.



아, 이 순간, 나는 이 순간을 가만히 붙들고만 있고 싶다.



나와 상관없는 일은 보이지 않고, 내가 필요로 하는 색만 보인다. 우리가 분홍색을 알아볼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걸 원하고 있을 때만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누구나 살고 있지만 누구나 살아 있다고 느끼기 어려운 것처럼.



문득, 아니 오래전부터 난 참 사랑을 못하는 사람이란 생각을 하곤 한다. 아무리 목숨을 걸어도 걸어지지 않는, 일종의 그런 운명 같다. 이래서 사람이 안 되는 것도 같고 아무도 나를 사랑할 것 같지 않으며 사랑이 와도 바람만큼만 느끼는 것. 그래서 내 사랑은 혼자 하는 사라이다. 사랑은 순례의 길과도 같아서 그 길을 통해 자기가 완성되어야 한다는 이기적인 속성이 있다. 아니 그 속성만 있다. 그 속성으로 구원받고자 함이 사랑이라면, 사랑한다는 말은 대단한 말이 아니라 구원받겠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함께 앉아 김밥을 먹다가 당신이 골라놓은 당근을 먹는 일, 잡채를 먹다가도 당신이 골라놓은 당근을 먹는 일, 그 일은 당신을 구해주는 일 같지만 나 자신을 구원하는 일과도 통한다. 타인을 돕는 것으로도 자신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인류는 오래전부터 믿어왔다.



당신이 좋다, 라는 말은 당신의 색깔이 좋다는 말이며, 당신의 색깔로 옮아가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당신 색깔이 맘에 들지 않는다, 라는 말은 무의식적으로 했을 경우, 당신과 나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지켜야 하는 사이라는 사실과 내 전부를 보이지 않겠다는 결정을 동시에 통보하는 것이다. 색깔이 먼저인 적은 없다. 누군가가 싫어하는 색깔의 옷을 입고 있다고해서 그를 무조건 싫어할 수 없듯이 서로가 서로의 마음에 어떤 색으로 비치느냐에 따라 내가 아무리 싫어하는 색깔의 옷을 입었더라도 그 기준은 희생될 수 있으며 보정될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데는 방향이 문제인 적은 잇어도 색깔이 문제일 수는 없다.(자주 방향과 색깔이 혼동되는 건 사실이다.)

어떤 카페가 좋아 자주 드나들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카페 기둥이 흰색 페인트를, 화장실 문에 흰색 페인트를 칠해놓은 게 마음에 들었던 거다. 사실 그 색이 좋아 카페의 분위기가 좋고 심지어 커피맛도, 주인장의 얼굴까지도 좋다고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아주 사소한 부분들을 쌓아가는 것이다.

고로 당신이 좋다, 라는 말은 당신이 무슨 색인지 알고 싶다는 말이며 그 색깔을 나에게 조금이나마 나눠달라는 말이다. 그 색에 섞이겠다는 말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당신 목에 두른 스카프 색깔이 그게 뭐냐고 말하지 않는다.

한 여자를 알았다. 나는 그녀가 빨간색인 줄 알고 좋아했는데 그녀는 파란색이었다. 정반대의 색을 가지고 있어서 한순간 주춤 물러서기까지 했다. 그럴 경우, 내가 그쪽으로 옮겨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얼마를 더 만났더니 그녀는 차라리 흰색이었다.

나는 그녀를 흰색으로 이해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녀에게 줄 흰 꽃을 준비했다. 흰 이 꽃이 당신을 닮은 거 같아서 샀다고 했다. 초여름날, 보리수꽃을 내밀면서 내가 뱉은 말은 내 감정의 전부이면서 진실이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대상은 색이 없어지고 오히려 지워져 창백해진다.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사랑의 감정으로 대상은 참을 수 없이 완벽해지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불행의 기준은 같지만 행복의 기준은 변질되어 있다. 그저그런 불행에 우린 죽지 않지만 그저그런 행복에조차 도달하지 않으면 우리는 불행하다. 우리는 죽는다.

높은 것, 아름다운 것, 벅찬 것, 기쁜 것, 영원한 것, 그것들을 모른 체하지 않으며, 그 방향으로 조금식 조금식 움직이는 사람에게 바퀴는 굴려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을 놀래키 수는 없다.

아무도 나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없다면 그것은 이미 실패한 삶, 세상이 나를 등졌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충분히 망친 삶.

내가 하지 않았던 일들의 길고 긴 목록을 하나씩 지워나가면서 뭔가를 저지르기 시작한다면 사람들은 나를 향해 돌아설 것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을 걸어올 것이다.



그토록 많은 나라들을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 것은 돌아보면 실로 기적에 가까운 일인 것 같다.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지,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듣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그 어떤 말도 들린다. 겨우 아는 몇 개 안 되는 단어를 동원하거나, 소통이 어려울까 마음을 다해 섬세한 몸짓으로 말을 걸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마치 불꽃이 튀는 것 같다. 절대로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마음의 문이 열리고 마침내 뜻밖의 말들이 섞인다. 우리가 누군가 한 사람을 알고 사랑하게 되는 것도 결국은 이 작은 불꽃에 의해서일 것이다. 그 작은 불꽃을 오래 꺼뜨리지 않는 일일 것이다.

이제 몸짓 언어의 벽은 넘은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다른 나라 말을 잘하고 싶다. 사람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려면 통역 따위의 번거로움은 없어야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



자신이 채워진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공항에 가보면 된다. 공항에 앉아 미소 지을 일들이 떠오르거나 괜히 힘이 차오르는 사람이 있고, 한없이 자신이 초라해 보이거나 마음이 어두워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공항에 가지 않는 나에게 세상은 아무것도 보여줄 게 없다. 세상의 경계에 서보지 않은 나에게, 세상은 아무것도 가져다줄 게 없다.



짐만 가지고 떠남은 떠남이 아니다. 최소한의 감정의 재료를 함께 가져 간다면 그 어느 곳에도 새로운 인생의 조각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휑한 빈자리에 사랑한 존재를 이식해 넣은 것이다.



"진주는 외롭다는데..."

"선생님, 그러면 진주 말고 다른 거 하세요."

당신은 진주를 택했고 나는 가만히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선생님, 그 반지 끼고 외로우면 어쩌시려구요?"

"외로운 게 뭐가 대수라고. 외로우면 좀 어때. 외로워봤자지."

그래, 외로워봤자다. 외로움은 다가 아니더라.

언젠가 당신에게 불쑥 물었다. 그런저런 말들이 지나간 후였다.

"선생님. 어떻게 사셨어요?"

많은 사람들, 당신이 살아온 시간들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 묻고자 했을 그 고통의 날들과 관련하는 당신 남편과 당신의 아들... 당신의 인생 젙체에 대한 안부였다. 

"견뎠지. 뭘 어떻게 살았겠어..."

부러 냉정하게 자신을 누르는 음성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모른다. 쉬운 것은 겨우 알 수 있을지라도 어려운 것은 모른다. 어쩌면 쉬운 것도 어려운 것도 자기 소관이 아니므로, 모르고 있는 것조차 모른다.



마을은 백 년이 지나도 자신들만의 속도와 온도를 유지하면서 살 것만 같은데.



사는 데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것이지만 그것을 알기에 사랑은 얼마나 보이지 않으며 얼마나 만질 수 없으며 또 얼마나 지나치는가.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고 지나치는 한 사랑은 없다. 당장 오지 않는 것은 영원히 오지 않는 이치다. 당장 없는 것은 영원히 없을 수도 있으므로.

그렇더라도 사랑이 없다고 말하지는 말라. 사랑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불안해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믿으려는 것이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걸 못 견뎌하는 것이다. 사랑이 변했다, 고 믿는 건 익숙함조차 오래 유지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사랑은 있다. 사랑이 없다면 세상도 없는 것이며 나도 이 세상에 오지 않은 것이며 결국 살고 있는 것도 아니질 않은가.

그렇다고 사랑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지도 말라. 사랑은 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라 사랑할 때의 행복을 밖으로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상태가 사람을 키운다. 애써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넘치는 상태만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하여금 인간을 어려운 일에 빠지게 하는 일, 그것은 산이 하는 일이다. 그 어려움으로 하여 인간을 자라게 하는 것이 신이 존재하는 구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랑이라는 어려운 고통을 겪어야만 행복으로 건너갈 자격을 얻는다. 

신이 어떤한 장난을 친대도 사랑을 피할 길은 없다. 그냥도 오고 닥치기도 하는 것이고 누구 말대로 교통사고처럼도 오는 것이다. 사랑은, 신이 보내는 신호다. 사람은 떠나도 사랑은 남게 한다. 그것도 신이 하는 일이다. 죽도록 죽을 것 같아도 사랑은 남아 사람을 살게 한다.

그래, 사랑을 하자. 사랑을 하더라도 옆에 없는 사람처럼 사랑하자. 옆에 없는 사람처럼 사랑하는 일, 그것은 사랑의 끝이다. 완성이다. 

인간적으로 우리 사랑을 하자. 인간의 모든 여행은 사랑을 여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 안에서 여행하게 되어 있다. 사랑을 떠났다가 사랑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사랑은 삶도 전부도 아니다. 사랑은 여행이다. 사랑은 여행일 때만 삶에서 유효하다.



하루 한 번쯤

처음 영화관에 가본것처럼 어두워져라. 곯아버린 연필심처럼 하루 한 번쯤 가벼워라. 하루 한 번쯤, 보냈다는데 오지 않은 그 사람의 편지처럼 울어라. 다시 태어난다 해도 당신밖에는 없을 것처럼 좋아해라.

누구도 이기지 마라, 누구도 넘어뜨리지 마라. 하루 한 번 문신을 지워낼 드싱 힘을 들여 안 좋은 일을 지워라. 양팔이 넘칠 것처럼 하루 한 번 다 가져라, 세상 모두 내 것인 양 행동하라.

하루 한 번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앉으라, 내가 못하는 것들을 펼쳐놓아라. 먼지가 되어 바닥에 있어보라. 하루에 한 번 겨울 텐트에서 두 손으로 감싼 국물처럼 따뜻하라.

어머니가 내 뒷모습을 바라보는 만큼 애틋하라. 하루 한 번 내 자신이 귀하다고 느껴라. 좋은 것을 바라지 말고 원하는 것을 바라라. 옆에 없는 것처럼 그 한 사람을 크게 사랑하라.



순간일 수도 있지만 영원일 수도 있는 것이고, 영원도 어느 한순간 토막이 나기도 하려니 그렇게 지금 당장 마음가는 대로만 마음을 다하면 되는 것 아닌가. 말이 안 통하는 거야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과도 마찬가지. 사랑이 삐그덕대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 사랑하는 연인들이 낼 수 있는 불의 밝기를 사랑이라는 집에 잘 사용하는 것, 그것만이 사랑이다.



세상 끝 어딘가에 사랑이 있어 전속력으로 갔다가 사랑을 거두고 다시 세상의 끝으로 돌아오느라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 : 우리는 그것을 이별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하나에 모든 힘을 다 소진했을 때 그것을 또한 사랑이라 부른다.  



사실 나이 든다는 게 괜찮을 때도 있더라구요. 묵직해져서 덜 흔들리고 덜 뒤돌아보고.

아주 오래전 어디선가 읽은 글 같은데 누구의 글인지 기억이 나질 않네요. 나이들어 각자 혼자가 되어 만난 어느 연인의 이야기입니다. 어디선가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조금식 조금씩 좋아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남자의 집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됩니다. 낯선 곳에서 잠을 잔 여자는 아침에 도착한 신문 떨어지는 소리에 잠이 깬 뒤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살며시 일어나 거실에서 신문을 가져다 신문을 보기 시작하는데 신문 넘기는 소리에 남자가 깰까봐 여자가 화분 옆에 놓인 분무기를 가져다가 신문 위에 뿌립니다. 곤히 자고 있는 사람에게 신문 넘기는 소리는 굉장히 크게 들리겠죠. 얼마 후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신문에 물을 뿌리며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보고는 그렇게 묻습니다. 

"당신, 그런 걸 어디에서 배웠소?"

"나이 먹다보니 그냥 알게 되었어요."

알게 되는 것도, 알아가는 것도 나이가 하는 일, 맞습니다.



나이만 잇고, 나이 없는 사람이 되기는 싫다

나이 든다는 것은 넓이를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넓이를 어떻게 채우는 일이냐의 문제일 텐데 나이로 인해 약자가 되거나 나이로 인해 쓸쓸로 몰리기는 싫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어도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문장처럼 늘 이 정도로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



가까이서 보는 환한 달은 참으로 사람 코끝을 시큰하게 한다. 누가 내 감정을 터뜨리기 위해 손을 뻗는 것 같은, 무언가 나를 일으키기 위해 네어지를 보낼 때의 기운 같은 것들.



후배 부부는 파리 근교에 위치한 집에 살면서 맹인안내견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아침과 저녁 두 번의 산책을 시켜야 하는 임무를 맡았다. 

아침이 되면 촬영을 나가기 전에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숲길에 나가 산책을 시켰다. 종일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돌아온 저녁에는 원고를 손보았다. 저녁 싟를 마친 후나 잠들기 전에 개를 데리고 나가 산책을 했다. 이 주일 동안은 거의 이런 일들의 반복이었다.

어느덧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가 되었다. 개와 마지막으로 따뜻한 인사를 나눴다. 주인이 돌아오면 내가 해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보살펴줄 것이었다. 내가 떠난 다음 날인가, 후배 부부는 돌아왔고 며칠 후, 전화 통화를 하면서 개의 안부를 들을 수 있었다.

"그동안 개가 말 잘 들었지요?"

"그럼, 너무 착해서 아무 문제 없었어."

"근데 선배 가고 돌아와 보니 마루에다 먹은 걸 토해놨더라구요. 챙겨준 사료는 건드리지도 않았구요."

"아니, 왜? 나 있을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어디 아픈 거야?"

"아뇨, 선배 여기 올 때 큰 여행가방 가지고 왔을 꺼 아니에요? 떠날 때는 큰 여행가방 들고 나가셨을 거구요. 개가 여행가방에 민감해요. 정들었는데 떠나는 걸 알고 마음이 많이 안 좋았나봐요."

아, 이별이었구나.

나는 돌아와 정신없이 일에 매달리느라 한 번도 뒷일을 생각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별이 아팠구나. 미안하다. 나, 이토록 텁텁하게 살아서, 정말 미안하다. 음식을 만들면서도 음식에다 감정을 담는 것인데 하물며 나라는 사람, 이렇게 모른 척 뻣뻣하게 살아가고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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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여행을 한 뒤 그리운 것은 거대하고 웅장한 유적지가 아니라 뒷골목 어딘가에서 무심코 마주친 소소한 일상들이었다.



자유는 거찰한 게 아니었다. 발길 닿는 대로 어디론가 떠나는 것도 아니었고, 한껏 누린 대가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뚱뚱한 여자도 쫄티를 입을수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손 잡고 연애를 할 수 있는 것, 자유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런 사소한 것들에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책임을 질 필요는 더 더욱 없었다.  15


혼자 여해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얼마나 많은 욕심들을 접어야 했는지를.  18


'안정'만이 최고가 아니라 '모험' 또한 삶의 지표가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도 일깨워 주었다. 이런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여행은 혼자일수록 좋았다.

외롭지 않느냐고? 혼자라고 해서 외로울 이유는 없다. 여행을 할수록 느끼는 건 외로움이란 혼자 일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관계'속에서 생기는 병이라는 것이다. 외로움은 늘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속도로 달리는 사람들 틈에 파묻혀 있을 때 찾아오곤 했다. 혼자 하는 여행은 때때로 쓸쓸할 뿐이다.  20


길은 낯설수록 좋았고 혼자일수록 가슴은 미치도록 뛰었다.  23


여행자 입장에서는 적당히 퇴폐적이고 적당히 자유스런 분위기들이 때론 달가웠지만 그럼에도 관광객들 위주로 재편성되어버린 마을들은 늘 어딘가 2%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럴 때면 관광지의 옆 마을로 들섰다. 역시나 그곳엔 현지인들의 단단한 삶이 있었다. 예정 없이 들렀던 태국의 북부도시 람방도 마찬가지. 관광객이 별로 없다 보니 도시의 주인은 자연히 태국 사람들이었고, 상가가 아닌 주택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도시에는 평화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처마마다 제 나름대로 치장한 목조 주책들이 살가웠고, 그 골목 사이로 들어앉은 구멍가게와 밥직들은 제법 운치가 있었다. 담장 너머론 꽃과 과일로 단장한 여유가 주렁주렁 내걸리고, 골목마다 사람 사는 따뜻한 온기와 함게 작은 공력들이 여실히 묻어나왔다. 그렇게 중심에서 살짝만 비껴나면 늘 뜻박의 풍경들과 에피소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길은 잃어버렸지만 실상 그 길 위에서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차피 내 삶의 터전을 떠나면 세상 어느 곳이든 낯설긴 다 마찬가지. 그래서 때론 길으 ㄹ잃어버려도 좋은 것이다.  47


삶의 속도는 무서운 기세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밀어낸다. 아쉽다. 많은 것들이 너무나 쉽게 빨리 잊혀지기에 늘 그렇게 아쉽고 그립다. 삶의 속도를 딸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도 사람들은 때때로 시계 반대 방향을 따라 걸어보고 싶어한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은 건 비단 연어떼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 가슴 속 한 켠에 돌아갈 곳을 그리는 연어를 키우고 있다. 사람들은 그 진한 그리움을 가슴에 안은 채 삶의 속도를 딸잡지 못해 안달이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 그렇게 바쁘게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던데, 다행히 길 위에도 그리운 것들은 있었다.  111


여행자는 늘 이렇게 관찰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여행의 함정이기도 하고 여행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행자의 눈으로 판단을 할 때는 조금 더 조심스러워져야 함을 느끼곤 하지만 결국 여행이란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스쳐 지나는 것이기에 많은 부분이 생략되고 축약될 수밖에 없는 것. 그게 바로 여행의 본질이 아닐까.  153


영화는 늘 현실을 아름다운 색으로만 채색한다. 그런에도 떠나고 싶고 확인하고 싶다. 설혹 현실이 내 판타지를 탈색시킬지라도 허상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인생이 늘 그렇게 드라마틱할 필요도 없고, 다큐멘터리처럼 마냥 무거울 필요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어쩌면 환상과 현실 사이를 교묘하게 줄타기 하는 묘미 때문에 여행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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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여행을 한다.

자의든 타의든 꺾이는 법부터 배우는 청춘들에게, 얼마든지 즐겁게 살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88만 원 세대로 원한다면 충분히 글로벌 세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단, 자유와 불안은 한 세트라는 것만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내가 나에 대해 명확하게 알고 있던 건 여행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하나 밖에 없었다.  14


자리를 잡고 나면 그때 충분히 할 수 있는 거라고, 돈이 있으면 언제든지 여행은 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럴싸하게 들렸다.  19


정말로 중요한 건, 누구든 원한다면 자신만의 방식으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 여행에 정해진 규칙 같은 건 없다는 것, 누가 뭐래도 여행은 모험이라는 것!  40


똑같은 옷을 맞춰 입고 똑같은 가이드북을 손에 쥐어야 길을 나설 수 있는 건 아니다.  41


젊게 사는 것도 연습이 필요해, 몸이든 마음이든, 그래야 젊게 늙을 수 있는 거야.  58


멋지게 늙는 사람들을 볼 때면 얼굴의 표정이 다르다.  60


다른 누군가가 나의 꿈을 알아줄 리 없다. 어차피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의 세상을 사니까.  81


누구나 페이지를 넘겨야 하는 게 관건은 아니다. 그럼에도 넘길 떼가되면 과감하게 넘긴 사람에게선 일종의 자신감이 묻어나온다.


'a place close to your heart!'

"무슨 뜻이야?"

"누가 뭐래도 너의 심장이 닿는 곳이 최고야. 장소든 사람이든!"

나의 심장이 닿는 곳이라? 따지고 보면 모든 건 내 안에 다 있다. 모른 척하거나 헷갈리는 척하거나, 그렇게 애써 부정하려 해서 그렇지 답은 모두 내 안에 있다.  92


좋은 추억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얼굴에 표정을 심어주는 것.  99


자신만의 속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길 위의 사람들은 모두들 조바심을 냈다. 처음이란 늘 애틋한 법, 순례자들은 처음 함께 걷던 동료들을 잃어버릴까봐 부지런히 재촉한다. 사람들은 실상 지는 것보다 홀로 남겨지는 걸 더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카미노를 찾을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자 한다. 하지만 카미노는 끊임없이 말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속도라고, 한계를 극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처음에는 좀 생뚱하다. 우리는 늘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듣고 자랐으니까, 거기다 우리는 뭉쳐야 산다. 라고 배운 단일민족의 자손들이 아니던가.  125


"우리 여행자들은 인도에서 5루피 10루피 사기 당했다고 난리를 피우지만, 실생활에서는 더 큰 사기를 당하고 있어. 인도 사람들 사기 치는 건 순진해서 금방 눈에 잡히는데 사회가 우리를 조종하는 건 너무 교묘해서 우리가 알아채기 힘들 뿐이야."


시작은 거기부터다. 코카콜라와 펩시를 선택의 자유, 문화의 다양성이라고 빋는 것,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자본은 우리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주는 척 하지만 실상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의식을 소비에 집중시키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현대 사회에서는 광고가 빅브라더의 텔레스크린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끊임없이 노출되는 광고는 우리에게 타인의 욕구를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인간의 욕구는 소비 하나로 통일되고, '소중한 나'를 위해 우리는 우아한 백화점에서 지갑을 연다. 그 대가로 장시간의 노동을 인간의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187-189


'관건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 뛰지 않는 것, 속지 않는 것, 찬찬히 들여다보고, 행동하는 것, 피곤하게 살기는, 놈들도 마찬가지다. 속지 않고 즐겁게 사는 일만이, 우리의 관건이다.'  박인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189


일상의 억숙한 것들은 마치 정답인 척 굴러온다. 그저 익숙하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하지만 실상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사실일 뿐, 진실도 아니고 정답은 더더욱 아니다. 모든 건 그저 하나의 사실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202


실상 프랑스 사람들은 프렌치 키스를 모르고 비엔나에는 비엔나 소시지도, 비엔나 커피도 없다. 꿈꾸는 건 자유지만 거기에 그게 없다고 화내면 곤란하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상대도 나를 사랑해야 하는 게 아닌 것처럼, 누구도 나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는다.

어쩌면 장소는 우리의 영원한 짝사랑인지도 모른다.  223


아무것도 깨달은 게 없어도, 무언가 커다란 교훈을 얻지 않아도, 다행히 여행의 순간은 늘 기억으로 남아준다. 기억으로 남아있는 한 추억은 언제든지 내몫으로 돌아온다. 설혹 불쾌했던 감정일지라도 인간은 지나간 시간에는 관대한 법, 인간은 기억을 추억으로 바꾸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초조해 말라. 그저 기억에 시간을 달라.  254


사진보다 오래 남는 건 몸에 새겨진 여행의 기억이다.  257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이 세상에는 애시 당초 '보통 사람'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세상 사람 모두 저마다 대단하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도 대단하지 않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보는 삶이란, 동그란 지구를 네모난 종이에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누군가 부정한다고, 몰라준다고 해서 없어지는 건 아니다.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밀려날 뿐 엄연히 그곳에 존재한다. 중요하지 않다고 해서 소중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272-273


여행에 매료되었던 건 새로움 때문이었다. 일상의 많은 것들은 원래 그랬다는 이유로 나의 의식을 제한한다. 사람들도 마찬가지, 그저 익숙하다는 이유로 나를 아는 척하고 내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변해주길 기대한다. 여행은 그런 익숙한 관계로부터의 일탈이었다. 똑같은 모습에서 벗어난 해방감, 일탈감이 주는 짜릿함. 그런데 여행도 하다 보니 또다시 의식은 우르르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제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내가 체화하지 못하면 관념에 불과할 뿐이다. 갇혀 있던 한 세상을 깨고 나왔는데 또다시 갖힌 기분이랄까.  287


여행에서 배운 게 아무리 많아도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가는 속도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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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꾸준한 여행 동안 깨달은 것은, 멋있는 풍경을 봤다고 멋있는 사람이 된다거나, 넓은 세상을 봤다고 넓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 건 아니라는 것.



좋은 식당은 고급스럽고 비싼 곳이 아니라(비싸면 오히려 더 경직될 수도 있음) 여행자들이 그 안에서 만큼은 자신의 식사를 편히 즐길 수 있게 해 주는 곳이다.  



두둥실 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내 주위의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

여행자들끼리의 은밀한 눈짓.

나 행복하다고 말해도 될까요...



지나고 보면 시간과 망각이 모든 걸 치유해 주진 않은 것 같다. 단지 익숙해질뿐.



기억을 위한 기록을 하다보면 정작 즐겨야 할 순간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기록과 기억에 대한 강박이 여행을 장식하지 않게 균형을 잡는게 가능할까?



기록이 가장 빛을 발할 때는, 그것이 현재의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순간이 아닐까. 여행의 기록을 통해 확인하고 싶은 것은 사진 혹은 일기 속의 '박제된 나'가 아니라 그 시간을 통과한 '지금의 나' 자신일 테니.

여행의 기록은, 당시의 자신을, 그리고 후에 그 여행을 돌아볼 미래의 자신을 감응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게으르면 게으른 대로 한 줄, 부지런하면 부지런한 대로 여러 장, 번거롭거나 귀찮거나 의미 없다고 생각된다면 굳이 기록의 의미감에 시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많이 안다고 해서 반드시 애정도가 상승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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