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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1.25 아스라이 쌓여있는 낙엽위에
  2. 2011.11.24 신문사와 인터뷰 하다.
  3. 2011.11.24 상처 받지 않을 권리-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프로네시스 2009 03100
  4. 2011.11.22 올더스 헉슬리, 오만한 문명과 멋진 신세계 - 김효원 살림 2006 04080
  5. 2011.11.16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새움 2003 04840
  6. 2011.11.10 철학, 삶을 만나다 - 강신주 이학사 2006 03100
  7. 2011.11.08 2011년 10월에 참석한 인문강좌
  8. 2011.11.07 2011년 10월에 참석한 7번의 독모
  9. 2011.11.05 2011년 10월에 읽은 책 2
  10. 2011.10.28 여행의 기술 - 알랭 드 보통 도서출판이레 2004 03840
  11. 2011.10.25 세상에서 가장 쉬운 철학책 - 우에무라 미츠오 비룡소 2009 44160 1
  12. 2011.10.21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 설흔,박현찬 예담 2007 03800 1
  13. 2011.10.19 내가 접었지만 내가 접지 않은
  14. 2011.10.19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 배병삼풀어씀 사계절 2005 43150
  15. 2011.10.18 지름길
  16. 2011.10.18 20111018 다음..
  17. 2011.10.18 20111018 다음.
  18. 2011.10.16 내 머리 사용법 - 정철 리더스북 2009 03810
  19. 2011.10.13 20111013 네이버.
  20. 2011.10.12 <점성술 살인사건> 과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시마다 소지 1
  21. 2011.10.08 2011107 네이버
  22. 2011.10.03 '신선함'이란 주제의 번개
  23. 2011.09.30 2011년 9월에 읽은 책
  24. 2011.09.25 모임 후기
  25. 2011.09.23 전방위 글쓰기 - 김봉석 바다출판사 2008 03810
  26. 2011.09.22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장 지글러 갈라파고스 2007 03300
  27. 2011.09.21 리딩으로 리드하라 - 이지성 문학동네 2010 03320 1
  28. 2011.09.19 나를 사랑하게 하는 자존감 - 이무석 비전과리더십 2009 03320 1
  29. 2011.09.13 행복에 목숨 걸지마라(What about the big stuff?) - 리처드 칼슨 한국경제신문 2010 03840
  30. 2011.09.12 나를 행복하게 하는 친밀함 - 이무석 비전과리더십 2007 03320 2

아스라이 쌓여있는 낙엽위에 누워 본다.

"거기 포근하니?"

"응"

"너는 그것을 느낄 수 있구나."

"검거나 회색보다 훨씬 푹신하고 따스하네!"

"그렇구나. 니가 좋다고 하니 나도 기분이 좋은데, 난 니가 늘 거기에 있어서 마음이 불편했거든. 차가울텐데.. 불편할텐데."

"ㅎ 너의 표현으로라면 바닥이지만, 여긴 내가 늘 살아가는 공간이야. 걱정마 넌 늘 움직이지만 난 낮에만 있잖아!"

"굳이 따스한 것도 아니면서 날 위해 따뜻하다고 해 주는 구나.. 고맙다 친구야~"


내 입장에서만 생각한 바닥이 바닥이 아니었다. 

늘 추울거란 아련함은 나만의 걱정이었다. 

그래도 난 내 그림자에게 좀더 포근한 낙엽위를 드러누워 보게 한다. 






 

Posted by WN1
,

신문사와 인터뷰 하다.

2011. 11. 24.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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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심리학 책이나 계발서로 오인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부제를 보면 더 이해가 잘 되는 것 같다.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문학자 네 사람과 철학자 네 사람의 직관과 이성, 혹은 문학과 철학으로 서로를 비추어가면서 이해를 시킨다. 
그러면서 저자의 철학적 견지와 그들의 견지의 조합과 조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가 시대를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유혹, 그로인해 생기는 욕망 책의 표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도시, 돈, 유행, 망상, 불안, 허영 도박, 매춘.. 이러한 욕망에 대한 보고서이다. 우리는 왜 그러한 욕망을 가지게 되었는지 왜 그렇게 유지하면서도 빠져 나오기 힘든것인지, 과연 우리가 가진 욕망에 자신의 욕망인지 아니면 타인의 욕망인지... 드에 대한 고민과 통찰을 가져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고 있다. 
라캉의 말처럼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
우리는 냉정하게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얼마전 여러명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다시금 마음 아픈 표현을 들었다.
"삶이 바빠 사회현상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것이 맞는건지 아닌지에대해 생각해볼 겨를이 없다. 그것은 삶이 바빠서가 아니라 세상의 달콤한 유혹과 바빠야 한다는 세뇌에 의한 것은 아닐까..

저자는 책에서 그러한 부면에 대해 문학과 철학을 결합하여 설명해 나가고 있다. 지금 우리가 당연시 하는 것들이 정말 당연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짐으로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의 다양성이 필요함을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생활들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과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자세로써 무엇이 있는지에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이 시대의 젊은 철학자인 저자는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인문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것으로 우리는 생각의 빌미를 가지고 그것을 확장해 나가는 시간이 된다면 정말 우리는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






머리말 - 자본주의적 삶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친숙하다는 거스 그것은 무엇인가에 길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친숙한 삶을 낯설게 성찰하는 일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의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집어등(集魚燈)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물고기(魚)를 모으는(集) 등불(燈)이란 뜻입니다.  5
자본주의의 집어등은 어선의 집어등보다 더 큰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를 끊임없는 노동의 현장으로 다시 내몰기 때문입니다.  6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 그는 우리 욕망의 대부분이 자신의 욕망이라기보다 타자의 욕망익라고 냉정하게 진단했던 것입니다.  7

프롤로그
우리 스스로 일상의 모습을 성찰하지 못하고 있다.  14
자본주의는 각자의 노동을 통해서 살아가고 유지되는 체계입니다. 
자본주의는 우리를 노동으로 계속 내몰기 위해 지속적으로 돈을 쓰도록 유혹하는 장치를 함께 고안했습니다. 끊임없이 화폐를 소비하게 하려면 유혹의 장치는 그만큼 강력할 수밖에 없겠지요.  19
자본주의의 진정한 목적은 또 다른 소비를 위해 다시 노동하게 하는 데 있지요.  21
자본주의적 삶은 너무나 친숙하고 평범해서 우리 삶이 얼마나 자본주의에 길들어 있고, 그로부터 상처 받는지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22

I. 무의식의 트라우마를 찾아서 - 이상 vs 짐멜
1. 돈, 내 것이 아닌 욕망의 분열
화페경제가 바꾼 우리 정신세계 

마르트스 이후 가장 철저하게 돈의 논리를 성찰햇던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1918).  35
그의 작품은 대부분 돈 유행 감각 장신구 등 대도시의 사소한 것들에 대한 에세이 풀의 글입니다.  37
짐멜이 "화폐경제는 개인과 소유 사이의 관계를 일종의 매개된 관계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이 둘 사이에 거리가 생기도록 만든다."라고 지적.  29
화폐경제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이루어졌던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와해시키고, 오직 돈으로만 개인들이 서로 연결되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짐멜은 개인주의의 진정한 기원을 엿봅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인격적 관계가 단절된 이러한 물질적 조건에서만 개인주의의발로가 가능했다고 판단했지요.  43
화폐경제가 낳은 개인주의가 얼마만큼 우리 삶을 지배하는지 다음 사례.
나는 담배를 사러 편의점에 들릅니다. 편의점 점원은 아르바이트로 임시 취업한 나이든 아저씨였지요. 그런데 이 점원이 점잖은 말투로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면 해롭다고 충고합니다. 이때 나는 매우 불쾌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이 든 점원의 충고는 나를 하나의 인격으로, 혹은 자기보다 미성숙한 인격으로 대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지요. 만약 그가 삼촌이라면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이므로 충고를 받아도 그리 불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나이 든 점원과 나는 상품 판매자와 구매자라는 관계, 즉 비인격적 관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경우 우월한 것은 점원이 아니라 구매자인 나입니다. 나는 돈이라는 화폐를 가졌고 반면 그는 상품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달리 말해 나는 이곳에서 담배 사기를 그만두고 다른 편의점으로 갈 수 있는 '독립성'과 '자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 불리한 입장은 내가 아니라 나이 든 점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개인주의로 무장한 젊은 손님의 내면을, 마치 잔소리 많은 어머니처럼 간섭해 상처를 주었지요. 만일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면 결국 이 상점에 젊은 손님들은 발길을 끊겠지요. 그리고 그 나이 든 점원 역시 해고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불쌍한 점원은 왜 해고되었는지 끝내 모를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것을 알았다면, 다시 말해 돈이 가진 힘과 그것을 가능케 한 개인주의의 위력을 이해했다면, 그는 젊은 손님에게 어른스런 충고를 하지 않았겠지요. 화폐경제에서 중요한 사실은 누가 돈을 가지고, 누가 상품을 가지는자라는 문제일 뿐입니다.  45
내가 종교적 안식을 주리라!
과거의 초월 종교는 신이라는 초월자가 인간에게 닥친 무든 난제를 해결할 만능열쇠라고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초월 종교는 현실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관념적 해법만을 신도들에게 제안했을 뿐입니다. 대부분 초월 종교는 마음의평정을 되찾으라고 하지요.  47
현실적으로 돈을 사용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해버립니다.  50
돈이라는 신의 지배에 빠진 현대인들을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짐멜은 과연 어떤 방법을 제안했을까요? 아쉽게도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자본주의를 일종의 세속종교로 규정했던 마르크스를 통해 궁금증을 해소할 실마리 하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서의 그대의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대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자신을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것이요 하나의 불행일 뿐이다.' 51-52
마르크스가 꿈꾼 인간의 삶은 "사랑을 사랑으로서만, 신뢰를 신뢰로서만 교환할 수 있는" 것이었다.  52
타자의 타자의 타자의 ..... 욕망
화폐 그 자체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적응된 우리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만 원짜리 식사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54
구두쇠는 축적한 화폐를 통해 실질적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오히려 관념적 행복에 빠지기를 더 좋아합니다. 그것은 구두쇠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가진 자만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경험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유년 시절의 경제적 트라우마로부터 구두쇠는 돈이야말로 절대적 힘이 있음을 체득합니다. 돈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떠나는 순간, 그에게는 유년 시절에 각인된 경제적 트라우마, 즉 경제적 공포가 다시 찾아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행한 구두쇠와는 완전히 다른 합리적인 사람들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 또한 구두쇠와 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 학자 오사와 마사치는 '사랆들의 일상적 관념 속에서 화폐는 사회적 산물의 일정 부분에 대한 청구권을 표시하는 기호에 불과하고, 완전히 편의상의 물건일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 그럼에도 상품의 물신성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55
마르크스는 '화폐퇴장자는 얼빠진 자본가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자본가는 합리적인 화폐퇴장자이다.'  56
구두쇠는 신념이나 행동에서 일관되게 화폐를 물신숭배합니다 반면 평범한 우리는 신념으로는 화폐에 대한 물신숭배를 부정하지만, 행동으로는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화폐에 대한 물신숭배를 수행하지요. 이 점에서 보면 평범한 우리가 오히려 구두쇠보다 더 무지한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본인의 생각과 다르게 자신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59
모든 타자가 내가 가진 화폐를 욕망한다고 맹목적으로 믿기 때문에 나는 화폐를 욕망합니다. 오사와 마사치는 이것이 바로 화폐에 대한 물신숭배, 혹은 화폐의 물신성의 기원이라고 주장합니다.  60

2. 도시, 즐거운 지옥의 현기증
공간과 일상의 관계
공간은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 배경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간에는 인간을 길들여서 그에 맞는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공간의 지배력은 거대한 자연적 공간과 공간을 분할하여 만든 건축물과 같은 인공적 공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공간이 지닌 지배력을 성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상의 '권태'가 지닌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77
짐멜은 "인간은 차이를 본질로 하는 존재이다. 즉 그의 의식은 그때그때의 인상이 선행하는 인상과 구분되는 차이에 의해 촉발된다." 만약 새로운 인상이 이전의 인상보다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인상에 대해 별로 의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행하는 인상과 뒤따르는 인상의 차이가 클때 발생합니다. 이 경우 우리는 새로운 인상을 강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겠지요. 물론 이 새로운 인상은 우리 삶에 '부담'으로 인식됩니다.  80
해외여행, 시골과 도시..
우리가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에 대해 일일이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시골이나 소도시 사람은 정서적인 반면 대도시 사람은 지적일 수박에 없다는 짐멜의 다음과 같은 견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분이나 정서적 관계에 더 의존하는 소도시적 삶에 비해 대도시의 정신적 삶이 어떻게 해서 지적 성격을 더 강하게 띠게 되는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소도시의 정서적 관계들이 정신의 더 무의식적인 층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단절되지 앟은 지속적인 습관화 과정을 통해서 가장 잘 발전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우리의 지성(intellect)은 우리 정신에서도 가장 투명하고 의식적인 상층에 자리를 잡고 있다. 지성은 우리의 내적인 힘들 중 가장 적응력이 탁원한 것이다. 자신 앞에 펼쳐진 다양한 현상들의 현저한 차이점들과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지성은 어떤 충격이나 내적인 동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도시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의 리듬에 적응하기 위해서 훨씬 더 보수적인 사람들만이 외적 충격이나 내적인 동요를 겪게 된다. 물론 수펀 가지의 개별적 경우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전형적인 대도시인은 자신의 삶을 뿌리째 위협하는 외부 환경의 흐름이나 그 모순들을 방어할 수 있는 기관(=지성)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대도시인은 급변하는 외부 환경에 대해 심장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머리로 반응하게 된다.'  81-82
시골에서의 단조로운 삶의 환경과는 현격히 구별되는 이런 자극적이고 복잡한 도시의 사건들에 일일이 반응하면, 우리는 대도시에서 하루도 견딜 수 없습니다. 자신과 무관한 모든 일은 그저 냉담히 남의 일로 간주해야 합니다.  85
예외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날지라도 신속히 그 원인을 지적으로 파악하여 그 사건으로부터 받게 될 정서적 충격을 원천적으로 봉쇄해야만 합니다. 대도시에 적응한 도시인들이 짐멜의 표현처럼 "급변하는 외부 환경에 대해 심장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머리로 반응하게 된"셈입니다. 도시인들이 자신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전략이지요.  86
자유로움의 빛과 그림자
짐멜 '... 오늘날에도 대도시인은 소도시에 가면 적어도 비슷한 종류의 답답함(restriction)에도 대도시인은 소도시에 가면 적어도 비슷한 종류의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소속되어 살고 있는 집단의 크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그래서 타인들과의 관계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 잡단은 더욱더 쉽게 개인의 업적들, 생활양식 및 사고들을 감시하게 되며, 어떤 양적 질적 변종도 전체의 틀을 깨뜨리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87
도시인이 시골이란 공간 속에서 느끼는 '답답함'의 감정 이면에는 도시라는 공간이 만들어준 '자유'의 감정이 전제되어 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88
짐멜 '... 대도시의 우글거리는 군중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가장 잘 느끼게 마련이다. 이것은 자유의 이면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대도시만큼 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반드시 그의 정서적 안정으로 나타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가장 달 드러내주는 곳도 없기 때문이다.'  89
비록 거리에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더라도, 그것은 영화 속의 풍경처럼 나의 배후에 소리 없니 펼쳐져 있을 뿐입니다.
신경과민을 피하기 위한 이런 거리두기라는 도시인 특유의 삶의 태도가 바로 '자유'라는 감정의 중요한 기초가 됩니다.
서로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한, 다른 이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바로 도시의 암묵적 윤리라고 봅니다.
자유로움의 감정은 사람들을 원치 않는 고독에 빠지게 하기도 합니다.
가끔 도시인들은 가족을 통해서 자신드르이 고독을 치유하려고 합니다.  90
도시인들에게 가족이란, 도시의 삶 속에 관념으로 존재하는 시골과도 같은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골과 마찬가지로 가족도 자시의 속내를 모두 드러내는 인격적인 관계가 가능한 공간입니다. 그렇다면 도시생활과 가정 생활은 미묘한 긴장관계와 보완관계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짐멜, 질적 개인주의를 말하다
소극적 자유를 특징으로 하는 개인주의가 칸트를 대표로 하는 '양적 개인주의'의 입장이라면, 적그적 자유를 표방하는 개인주의는 니체를 대표로 하는 '질적 개인주의'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양적 개인주의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비록 수적으로는 구분되지만 동일한 인간성을 보편적으로 공유한 존재가 됩니다.
칸트의 정언명령(Kategorische Imperativ), 무조건적인 도덕명령이 가능했습니다.  94
니체에게 모든 개인은 타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단독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니체가 말한 '본성'이나 '본능'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진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마다 가진 고유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니체가 볼 때 이런 개인의 고유한 본성과 욕망르 부정한다는 것은, 개인의 삶 자체를 범죄적으로 매도하는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짐멜은 칸트나 니체의 사례를 언급하며 대도시가 인간에게 두 종류의 자유, 즉 두 종류의 개인주의를 가능하게 했다고 지적합니다.  96
짐멜의 논의를 역사적 순서로 정리하면, 산업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이전 그러나까 대도시가 형성되기 이전에 인간은 '공동체주의'에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산업 자본주의와 대도시가 점차 발달하자 사람들은 비로소 '양적 개인주의'에 입각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상호 불간섭으로 규정되는 소극적 의미의 자유가 도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소극적 의미의 자유라는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고, 이에 따라 서서히 자신만이 가진 단독성(singularity)을 깨닫게 됩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표현하려는 욕망이 이전시대보다 더욱 강해집니다. 짐멜은 이것이 바로 '질적 개인주의'의 기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가 명확하게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만의 특이성 혹은 질적 고유성을 표현하려는 욕망은 사실 도시적 삶이 가져다주는 고독을 극복하려는 데서 작동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97



II. 화려한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 - 보들레르 vs 벤야민
3. 유행,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강박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보들레르는 19세기 파리를 상징하는 대표 시인입니다.
보들레르를 통해서 우리는 자본주의가 인간의 내면에 남긴 원형적 트라우마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114
보들레르에게 파리가 매춘부로 느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매춘부는 돈을 가지고 오는 손님이라면 그가 누구든 관계없이 자신의 치마를 걷어 올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보들레르에게 파리는 고혹적인 여인처럼 사랑스러운 곳입니다. 둘째, 파리라는 곳을 향유하려면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합쳐지면서 결국 보들레르에게 파리는 매춘부와 같은 존재로 묘사됩니다.  116
산업자본은 필요이상으로 상품들을 사들일 만큼 소비자들을 끊임없이 유혹해야만 합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새로운 상품'을 계속해서 시장에 내놓는 것입니다. '새로운 상품'이 아케이드에 들어오면, 기존 상품들은 '낡은 상품'이 되어버리고 결국 아케이드에서 추방되고 말지요. 바로 여기서 '유행(fashion)'이 가능해졌습니다.  119
벤야민, 미완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벤야민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찰을 인정한 철학자입니다.  124
저급한 수준의 마르므스주의는 문화와 같은 상부구조가 경제라는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합니다. 문화를 별도로 연구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셈입니다. 경제 운동이나 경제 관계를 알면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벤야민은 문화와 같은 상부구조가 나름대로 독자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비록 경제가 문화를 결정할 수도 있지만, 경제가 표현되는 문법과 문화가 표현되는 문법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고 본 것이지요.  125
19세가 자본주의의 수도 파리를 연구함으로써, 벤야민은 진정한 자본주의의 기워노가 역사를 복원하려 했습니다.  126
벤야민에 따르면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역사는 전혀 진보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억압하는 자들만이 진보를 주장해왔습니다. 이것은 당시 독일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벤야민의 경험과 성찰로부터 유래했습니다. 파시즘이 강하게 등장했을 때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했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파시즘의 경향에 대해 강ㄺ하게 저항했지만 그들의 저항은 도리어 무기력해지고 말았습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무기력함은 그들이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진보라는 이념을 신봉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에는 결국 해결된다고 보는 진보에 대한 맹신은 현재 우리가 당면한 억압적 상태, 즉 '비상 상태'를 도리어 은폐시켜버립니다.  129
백화점 혹은 욕망과 허영의 각축장
벤야민은 아케이드를 통해서 백화점이란 제도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그리고 그 제도가 어떤 방식으로 패션에 대한 욕망을 우리에게 각인시켰는지 보여줍니다.  130
팔레 우아얄(Palais-Royal)은 19세기 파리에 있던 아케이드들 가운데 한곳입니다. 초창기 아케이드에는 창녀들과 노숙자들이 더 많았지만, 부르주아 사회가 발달하자 경제적 부를 소비하는 실제 걔층으로서 부르주아 가정의 여성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이 때문에 창녀들과 노숙자들은 아케이드로부터 점점 추방당하지요. 
처음에는 민중적 요소도 지녔던 아케이드가 이제 부르주아 여성들의 과시욕의 전시장이 되면서, 서서히 백화점의 형태로 탈바꿈했습니다.  131
당시 파리 상점들은 눈부실 만큼 화려한 장식들로 매우 유명했습니다. 이것은 상품의 교환가치를 높이려는 미적 전략입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남자 종업원들이 대거 채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당시 파리에서의 소비 행위가 주로 부르주아 여성들이 주도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정찰제 판매와 정가 판매도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것은 아케이드가 스스로 고급 이미지로 포장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32
자신이 남보다 두드러진다는 의식은 명품 매장에 들어서는 여성을 보면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은 결국 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백화점은 고가의 상품을 사는 사람과 그것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공존하는 공간입니다. 그런 이유로 자본주의적 욕망을 휸련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주목받는다는 도취감, 그리고 주목받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겟다는의지가 암묵적으로 교차하는 공간이 바로 백화점입니다.  134
벤야민이 백화점을 종교적 도취에 바쳐딘 사원이라고 이야기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필요해서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유함과 허영을 과시하기 위해서 고가의 상품들을 구입합니다.  135
예링(Rudolf von Jhering 1818~1892)은 <법의 목적>에서 '오늘날의 의미에서 패션은 개인적인 동기가 아니라 사회적 동기를 갖고 있으며, 이를 올바로 인식하지 않고서는 패션의 본질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패션에는 어떤 사람이 상류사회에 속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외적인 기준이 포함되어 잇다. 이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 사람은 설령 ... 새롭게 유행하고 있는 패션이 아무리 싫더라도 그런 유행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136-137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기보다 오히려 탐욕스럽고 잔인할 뿐만 아니라 질투심으로 가득 찬 허영의 존재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많은 철학자가 인간이 평화스럽고 인자하며 합리적이기를 꿈꾸었습니다.  137
예링에 따르면 인간은 합리적이기는 커녕 오히려 "변화욕, 미적 감각, 겉치레를 좋아하는 것, 모방본능"을 특징으로 하는 존재입니다.  138
패션의 소멸은 중간계급이 삶의 주체로서 "자신의 존엄에 눈을 뜨고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을" 때나 가능한 일이겟지요. 그러나 예링은 상황이 그렇게 되도록 산업자본이 인간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습니다.  139
패션의 에로티시즘
벤야민은 에두라르트 푹스(Eduard Fuchs 1870~?) 인용 '예링의 패션론에 대한 푹스의 견해. "반복해서 말하는 부분이지만 패션이 빈번하게 변화하는 것은 계급적인 구별을 두고자 하는 관심에 의한 것이라고는 해도 그것은 몇 가지 이유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두 번째 이유로서는 이익률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매출을 향상시켜야 하는 사유재산제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을 들 수 있는데 이것도 ...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이 두 번째 이유를 예링은 완전히 무시했다. 세 번째 이유도 그는 간과했다. 즉 패션이 에로틱한 자극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신 유행하는옷을 입은 남자 혹은 여자의 에로틱한 자극이 그때까지와는 다른 형태로 떠오를 때 그런 목적은 보다 효과적을 달성될 수 있다.'
푹스에 딸면 패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햇다. 상류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해 걔급적인 구별을 두려는 욕망이 있기에 가능했다. 다음으로 패션은 계속 매출을 올려야만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패션은 인간에게 에로티시즘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140-141
옷은 분명 성교와 관련된 직접적인 성적욕구의 충족에는 도리어 방해가 되는 물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옷은 성적 욕망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지요. 성적 욕구의 단순한 충족을 뒤로 미루고 더욱 강한 욕망을 발산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옷이 이런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옷은 아예 성적 욕구, 즉 성적 결핍감을 전혀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패션과 관련된 산업자본이 우리에게 개입하는 결정적 대목입니다.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옷을 만든다면, 그것은 곧바로 매출로 이어지겠지요.  145
무기적 존재인 옷에서 사람들이 성적 어필을 느끼는 일종의 물신숭배 현상이야말로 벤야민이 보기에 패션이 유지되는 근본 조건이었습니다.  146
보들레르의 충족되지 않는 갈망
우리는 매혹적인 상품 앞에서 강력한 구매 욕구를 느낍니다. 그러나 막상 그것을 구매해서 소유하게 되면 예전의 그 강렬했던 욕망은 곧 사라져버립니다. 구매욕은 구매가 실제로 이루어지면 동시에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나를 흥분하게 하는 구매욕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실제로 구매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매혹적인 상품을 관음증적으로 주시하기만 하면 됩니다.  151
벤야민의 연구물을 보관했던 조르주 바타유, 그의 생각은 "금지된 것은 인간에게 강력한 욕망을 부여한다"는 통찰을 전제로 해서 전개됩니다. 
경제 사정으로 지금 당장 구매할 수 없는 상품이 더욱 강렬한 구매욕을 느끼게 하듯이 가질 수 없는 존재는 인간에게 도리어 강렬한 소유 열망을 심어주게 마련입니다. 이런 금지와 금기의 대상이 성적 대상에 적용될 때 우리가 품는 열망을 에로티시즘이라고 부릅니다.  154-155
이런 우리의 욕망 구조를 가장 잘 포착한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바로 산업자본주의의 시선이었습니다.  155

4. 도박과 매춘, 명멸하는 망상
보편적 도박장으로서의 사회
대부분 자신이 가진 가치, 예를 들어 학점 토익점수 대화술 미모 지식등을 팔아서 취업을 해야만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고 지적하기도 했지요.  167
신의 주사위, 우연성의 경이로움
이제 종교의 자유를 얻은 대신 자본주의 사회에 편입된 모든 인간은 돈이라는 새로운 신을 믿고 그것에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돈은 기독교의 신과는 다르게 매우 세속적입니다.  173
기독교의 신이 '초월적(transcendent)'이라고 정의된다면 자본주의의 신은 '내재적(immanent)이며 동시에 초월적'입니다.
기독교의 신은 내세에서 그 존재 여부를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는 반면 돈은 현세에서 가장 확실하게 그 전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돈은 더 강하게 우리를 지배합니다.  174
매춘에서 사랑을 꿈꾸다!
매춘부는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매춘부의 탄생이라는 문제 역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있습니다. 매춘부는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수중에 돈이 별로 없는 존재입니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매춘부나 노동자는 자신의 육체, 혹은 자신의 능력을 팔아야 합니다.  184
벤야민은 '파리의 많은 젊은 여성의 미덕에 위기가 닥치는 시기가, 연중 특정한 시기가 있다.... 새해 공현제(1월 6일), 성모와 관련된 축일이 다가오면 소녀들은 선물을 주거나 받고, 아름다운 꽃다발을 보내고 싶어 한다. 또 새로운 드레스나 유행하는 모자를 갖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금전적인 수단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 며칠간 매춘에 종사해서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특정한 시기나 특정한 축제일에 즈음하여 방탕한 행동이 증가하는 이유이다.'  184-185
주목할 점은 파리의 젊은 여성들이 몸을 팔아 번 그 돈이 어디로 흘러들어가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선물, 옷이나 모자 등을 만들어 파는 산업자본입니다.  186
과거 아케이드나 백화점이 여성들의 허영심을 증폭시키고 과소비를 부추겼듯이 당시의 산업자본은 기념일 드을 이용하여 파리의 젊은 소녀들이 몸을 팔도록 부축겼습니다.  187
매춘이란 결국 사랑이 자본주의에 지배될 때 파생되는 현상입니다. 우리 자시의 인격이 아니라 내가 가진 돈으로 사랑을 사는 행위이니까요. 매춘부는 그녀를 안고 잇는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가 가진 돈을 사라합니다. 
매춘부가 사랑을 통해서 매춘부로서 수명을 다한다는 사실. 벤야민은 왜 이 사실에 주목했을까요? 그것은 자본주의가 사랑을 아무리 자본의 논리로 포섭하려고 할지라도, 사랑은 자본의 한계를 돌파할 어떤 힘이 있음을 알아본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해피엔딩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이 자본을 영속적으로 압도하는 일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191
지금은 배우자의 조건 중 경제 능력이 가장 중요한 시대입니다. 나에게 돈을 많이 가져다주는 사람을 남편으로 사랑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표현은 그럴듯하지만 사실 이것이야말로 매춘의 논리에 가장 가깝습니다. 상대에게 자신을 허락하는 첫 번째 조건이 돈 문제라면 누구도 이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사랑이 찾아들면 더는 매춘 행위를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벤야민이 사랑과 매춘 사이의 비극, 그리고 이 사이에 개입되는 자본주의의 문제에 관심을 두었던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벤야민은 사랑이 자본주의와 결합되면 결국 매춘으로 변질된다는 점을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192-193



III. 매트릭스는 우리 내면에 있다 - 투르니에 vs 부르디외
5. 불안, 가난한 이웃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
로빈스 크루소와 타자의 발견
현대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차이'라는 개념을 철학적으로 가장 정교하게 사유했다는 데 있습니다. 들뢰즈 이전까지 서양철학에서 '차이'는 '동일성(identity)'이라는 개념과 짝으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동일성'의 지배를 받는 개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 동창을 우연히 길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전에 알던 모습과 '차이'가 나 보입니다. 외모도 이전과 다르게 몹시 호리호리해졌고, 생각도 무척 냉소적으로 변한 듯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그 친구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그 친구에게 변하지 않은 측면, 즉 동일성의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내가 알던 친구의 모습이 먼저 전제되어 있지 않는 한, 지금 변한 친구의 모습을 간파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동일성을 우위에 두는 사고의 한 가지 전형입니다. 만약 그 친구가 예전에 내가 알던 모습과 완전히 달라졌다면, 우리는 그 친구를 알아볼 수조차 없었겠지요.
그런데 들뢰즈는 이와 다르게 생각합니다. 동일성보다 차이가 먼저 라고 주장합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그 친구의 모습은 수많은 타자 그리고 수많은 사건과 마주치고 그로부터 영향을 주고받아 형성된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겟지요. 그런데 만약 그 친구가 당시에 자신이 마주쳤던 것과는 다른 타자 및 사건들을 조우했다면, 아마도 그는 무척이나 다른 모습이지 ㅇ낳았을까요. 그렇다면 오늘 우연히 길에서 만난 친구가 왜 이전과 모습이 달라 보일까요? 그것은 서로 보지 못한 사이에 그 친구가 수많은 차이를 겪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변형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동일성이란 다양한 타자 그리고 사건들과의 우발적 마주침으로 형성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동일성이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효과일 뿐입니다.  206
들뢰즈가 중시했던 차이라는 개념은 타자와의 마주침으로만 경험되는 것입니다.  207
무엇인가 모아둔다는 것은 곧 미래에 대한 염려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일종의 자본주의적 시간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수중에 있는 돈을 무도 사용해버린다면,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필요한 무엇인가를 구매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상품으로든 교환 가능한 잠재적 돈을 모두 소비한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미래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자신의 손 안에 두기 위해 돈을 비축하려고 합니다. 비축해둔 돈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무한한 미래의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13
구조화된 구조이자 구조화하는 구조
부르디외는 <자본주의의 아비투스>에서 '미래에 대해 행위자가 가지는 행위의 성향은 특정한 물질적 존재 조건 하에서 만들어지며, 특정한 객관적 기회의 구조 -하나의 객관적인 미래- 라는 형태로 파악된다. 구조화된 구조(structures structurees)라고 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성향은 구조화하는 구조(structures structurantes)처럼 작동한다.'
'습관(Habit)'의 어원인 라틴어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부르디외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로서, 그는 아비투스를 '구조화된 구조이자 동시에 구조화하는 구조'라고 설명합니다. 행위자의 내면에 만들어진 습관적 구조로서의 아비투스가 '구조화된 구조'인 이유는 그의 말대로 그것이 '특정한 물질적 존재 조건'에서 형성되고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217
아비투스가 '구조화된 구조'일 뿐만 아니라 '구조화하는 구조'이기도 한 이유는 이것이 세계에 대한 행위자의 실천을 낳는 능동적 힘으로서도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두 종류의 아비투스가 있다. 
하나는 '미래가 있는 사람'의 아비투스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가 없는 사람'의 아비투스입니다. '미래가 잇는 사람'의 아비투스란 자본주의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이 가지는 아비투스입니다. 반대로 '미래가 없는 사람'의 아비투스는 전자본주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아비투스를 의미합니다.  219
부르디외에 따르면 전자본주의적 인간과 자본주의적 인간 사이의 결정적 차이점은 '미래'와 관련된 시간의식에 있습니다.  220
미래란 자본주의적 인간의 내면에서는 '가능성의 장'으로서 이해됩니다. 이에 반해 미래는 전자본주의적 인간의 경우에는 '잠재적으로 올 것'으로서 표상됩니다.
'가능성의 장'으로서 미래란 다양한 경우의 수들 가운데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잠재적으로 올 것'으로서의 미래는 이전에도 왔던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올 것입니다.  221
전자본조의적 인간 vs 자본주의적 인간
자본주의적 아비투스와 전자본주의적 아비투스가 서로 유사해 보이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바슐라르(Gaxton Bachelard 1884~1962)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자본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 사이에는 건널 수없는 인식론적 단절(rupture epistemologique)이 있는 샘입니다.  226
전자본주의적 아비투스의 특성을 파악하다 보면, 그와는 구별되는 우리 내면의 자본주의적 아비투스 또한 명료하게 부각시킬 수 있다.  227
농민들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증여의 논리로 사유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유는 결국 인간과 자연을 한 가족이나 혈족 혹은 공동체의 하나로 간주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증여란 기본적으로 가족이나 공동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230
마치 신과 같은 존재로 자연이 표상되기 때문에, 농민들의 노동은 강박적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농부들은 만약 자신들이 끊임없이 공물을 바치지 않는다면, 신이 어김없이 분노를 드러내리라고 믿습니다.
전자본주의 촌락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쉬지 않고 일합니다.
'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이란 구별이나 '수익성이 있는 노동'과 '수익성이 없는 노동'이란 구별도 부차적 차원으로 물러나게 된다.'  232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혹은 수익성 있는 노동과 그렇지 않은 노도으이 구별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중요한 것입니다. 
전자본주의 사회의 사람들에게 노동은 그 자체로서 수단이며 목적이기도 합니다. 단지 수익을 올리려는 목적으로 그드르이 노동이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 어떤 해에 수확량이 증가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부지런한 노동에 대한 자연의 선물, 혹은 자연이 내린 보답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자신의 재주와 능력으로 수익을 올린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았지요.  233
이런 이유로 과거 전통 공동체에서 가장 비난받았던 행위는 다름 아닌 무위도식이었습니다.  234
지금은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한 가지 대안으로, 동양의 전통 사유가 각광을 받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산업자본이 일으킨 환경 파괴의 대안으로 생태철학이 강조되는 것과 거의 동일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는 동양철학이나 생태철학이 기본적으로 전자본주의적 삶과 사유 형식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237
혁명의 최소조건
<세계의 비참>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들을 진단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그는 이 사회를 어떻게 극복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물론 부르디외는 성급하게 자신의 전마을 내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부분 사람드르이 환상, 즉 진보와 번영을 약속한다는 장밋빛 전망을 산산이 부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습니다.  238
부르디외는 "미래를 가능성으로서 가지지 않는 사람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미래를 계획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  239
그가 보기에 알제리 사람들이 혁명을 꿈꿀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가능성으로 가지지 않았기"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미래를 잠재성으로만 간주한 전자본주의적 아비투스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셈이지요.  241
전자본주의 시대의 알제리 농민들은 노동을 통해 자연을 겁탈하지만,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연의 복수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노동을 자연에 대한 능동적 조작이 아니라 주어진 의무를 수행하는 수동적 태도로 간주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노동은 자연이라는 신에게 바치는 공물이 의미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농민들은 자연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노동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응시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자연이 자신들의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겠지요. 그런데 이러한 농민들의 태도와 매우 유사하게, 자본주의 사회에 속하는 실업자들 또한 실업과 실업의 문제가 항상 내재하는 자본주의 체계를 직시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혁명의 주체나 능동적 주체가 되기보다는 몽상으로 도피하거나 운명론적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농민들이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자연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만큼 경제적 여력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그럴 경우 그들은 자신의 노동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직시하겠지요. 마찬가지로 도시 실업자들의 경우에도 자본주의 체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만큼 최소한의 생계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이때 비로소 그들은 자신의 실업 문제와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를 직시할 여유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243
"미래의 현실주의적인 전망은 실제로 현재에 직면할 수단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접근 가능한 것이다." 라는 부르디외의 지적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를 영속적으로 유지하려는 기득권자들이 '현재에 직면할 수단'을 프롤레타리아로부터 박탈하려고 지속적으로 시도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244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병을 정확히 진단하고 직시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웃들을 보십시오. 아니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부모님을 한번 살펴보세요. 그들은 병원에 가기를 두려워합니다. 병이 있음을 짐작하지만 치료할 여윳돈이 없어서 걱정만 할 뿐입니다. 의사의 냉정한 진단은 그들에게 절망을 안겨주겠지요. 가족이 짊어질 부담이 그들에게는 더 큰 부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웃들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며 자신의 병을 키우지요. 마침내 말기 암과 같은 치명적 병으로 판명되고서야, 그들은 부르디외가 말했듯이 '자기포기'나 아니면 종교에서 치유를 구하는 '마술적 조급함'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우리 이웃들 가운데는 마치 말기 암을 선고받은 가난한 자들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들은 생계의 어려움이나 실직의 고통이라는 문제를 자본주의 체계와 관련해 정면으로 직시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취하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245
<자본주의의 아비투스>에서 '우리는 계급의식 속에서, 경제적 필연성의 압력이나 사회체계의 모든 객관적 결정에 반하여,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갖춘 주체의 성찰적 행위를 볼 수 있어야만 한다. 현재 상황에 대한 반란은 다으모가 같은 경우에만 합리적이고 명시적인 목적으로 지향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런 목적에 대한 합리적 의식의 구성을 위한 경제적 조건이 주어질 경우, 다시 말해 현재의 질서가 그 자체의 소멸 가능성을 포함하며 동시에 이 사실로 인해 그 질서의 소멸을 기도할 수 있는 행위자를 생산하는 경우에만 반란은 혁명으로 전환도리 수 있을 것이다.'  246
아비투스의 대결
어느 곳에 갔을 때 자신의 아비투스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아비투스가 그곳에서 별다른 문제없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아비투스를 의식했다면, 이것은 새로운 환경이 자신의 아비투스와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환원할 수 없는 외부, 혹은 타자를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254

6. 허영, 내면 깊숙한 소외의 논리
판단력 비판 vs 판단에 대한 사회적 비판
칸트는 매우 규칙적으로 자기 삶의 규율을 준수했던 인물로 이미 당시에도 유명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대목에서 칸트의 유명한 정언명령, 즉 무조건적 도덕명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는 너 자신의 인격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266
내가 타인을 목적으로 대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타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자유를 가진 존재로 대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이것이 자본주의하에서 가능할까요?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최종 목적이고 인간은 언제든 수단으로 전락하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인간을 최고의 목적으로 간주한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붕괴되겠지요.  267
연구자들은 칸트의 철학적 위대함을 그가 진(眞), 선(善), 미(美) 세 영역을 구별했다는 데서 찾았습니다. 칸트로부터 우리는 동일한 대상이라도 최소한 세 가지 영역으로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점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산 백운대에 올라가서 서울이라는 메트로폴리탄을 내려다보면, 두터운 스모그 층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해가 질 무렵 서울은 휘황한 보라색 아우라를 띤 도시가 됩니다. 그런데 만약 '이론적 관심'을 두고 바라본다면, 스모그가 보라색을 띠는 이유를 대기에 섞인 오염물질 그리고 석양의 태양광선의 파장이 가진 특징 등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요. 이것이 바로 진리(眞)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보라색의 스모그를 진리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실천적 관심' 혹은 '윤리적 관심'을 통해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경우 우리는 사리사욕을 위해서 매연을 배출하는 인간의 비윤리성을 탓하지요. 이것이 바로 윤리(善)의 영역입니다. 한편 '이론적 관심'이나 '실천적 관심'을 포함한 일체의 관심을 배제하고, 다시 말해 시종일관 '무관심'으로 보라색 스모그를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보라색으로 뒤덮인 서울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겠지요. 이것이 아름다움(美)의 영역입니다.  269
분별력이 있는 사람, 혹은 배운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칸트에 따르면 동일한 대상이나 사건을 필요에 따라 이론적 관심으로, 실천적 관심으로, 혹은 무관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270
취향, 분별하기와 구별짓기
칸트의 미학, 혹은 상류계급의 미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무관심하게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가겠지요.  276
가라타니 고진은 영화나 소설을 미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은 문화적 학습 덕분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무관심'하게 보는 능력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학습되어야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78
<이솝우화>에는 포도를 먹고 싶었던 여우 이야기가 나옵니다. 포도가 손에 닿지 않자, 여우는 그 자리르 떠나며 말합니다. "흥! 저 포도는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 어떤 것을 가지고 싶지만 가질 수 없을 때 인간은 그것의 가치를 폄하함으로써 자신을 위로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신포도 이야기는 이런 인간의 특징을 잘 보여주지요.  282
허영의 뿌리
<구별짓기>에서 부르디외는 경제적 자본 이외에 최소한 다음과 같은 세 종류의 자본을 더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첫째가 문화자본(capital culturel)입니다. 이것은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미적 감각 그리고 사람들이 소장한 작품들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학력자본(capital scolaire)입니다. 이것은 명문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장을 따거나 국가고시와 같은 시험제도를 통과해 얻는 자격 혹은 지위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사회관계자본(capital de relation social)입니다. 이것은 문화자본과 학력자본을 얻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인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르디외가 주목하는 세 가지 자본들은 모두 경제적 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세 가지 자본들은 지속적인 시간과 여유가 있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세 가지 자본들은 하류계층에서 상류계층으로 직접 진입하려는 벼락부자들을 막는 방어막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84-285
경제적 자본은 상류사회와 비교해볼 때 결코 뒤지지 않았지만, 신흥 부자들은 상류사회가 가지는 아비투스, 특히 미적 취향을 함께 공유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자식 교육에 열을 올리게 되고, 자식들을 명문 대학에 보낼 수만 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재력을 투입합니다. 
그렇다면 하류계급의 사람들이나 벼락부자들이 왜 상류사회에 편입되려고 할까요? 그것은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허영(vanity)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인간은 본성이 선하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들조차 인간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등장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286
독재자도 훌륭한 통치자라는 칭찬을 듣고 싶어하고, 바람을 피우는 사람도 지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도둑도 정직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행복을 느끼겠지요. 이것이 바로 사람의 허영입니다. 허영(虛榮)이란 한자는 '비어 있다'라는 의미의 '허(虛)'라는 글자와 '꽃이 화려하게 핀다'는 의미의 '영(榮)'이란 글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내실은 비어 있지만 겉은 매우 화려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찬양하고 칭찬해주는 특성을 자신들의 본성이라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영혼의 특성이라고 믿어버립니다.  287
인간은 자신이나 남들이 부정하고 싫어하는 특성들을 단지 우연적인 것 혹은 외적인 것으로 애써 폄하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288
허영심이란 모든 인간이 가진 것입니다. 따라서 '성적=칭찬'의 도식만을 강요한 사회 구조에 여학생 개인보다 더 큰 책임이 있음을 우리는 통감해야 할 것입니다.  289
산업자본주의는 상류계급의 구별짓기의 욕망 혹은 허영의 논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전자본주의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 시대가 신분사회엿다는 점입니다. 신분에 따라 옷도 다르게 입고 집도 다르게 지었습니다. 물론 미적 감상을 포함한 여가 생활도 확연히 구분되었겠지요. 이미 사회 곳곳에서 신분에 따른 확연한 구별이 이루어졌기에 사람들이 소비를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낼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본 주의 사회가 도래하면서 상황은 이전과 달라집니다. 이제는 주어진 선천적 신분이 아니라 경제적 자본을 확보해야 존경받을 수 있는 사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경제적 자본이 있다는것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행위가 별도로 필요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틈을 파고들면서 산업자본주의는 화려한 소비사회를 만듭니다. 경제적 자본을 확보한 부르주아 계급은 소비라는 과시 행위로 자신들이 남보다 훨씬 많은 돈이 있음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지요.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지금 우리 사회의 상류계급이 미적으로 선호하는 모든 아이콘은 사실 19세기 산업자본을 상품화한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292
타자의 힘, 혹은 인간의 진정한 빛
노동의 세계, 즉 자본주의 세계에서 미래란 가장 중요한 시간이자 동시에 가장 불명확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월급이 제대로 나오면 여러분은 무한한 교환 가능성으로서의 화폐를 얻겠지요. 동시에 회사가 부도나서 월급을 받을 수 없는 가능성도 병존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걱정에 시달리며 여러분의 의식은 항상 불안한 미래를 향해 있고, 현재는 미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괴로운 순간쯤으로 억누릅니다.  300
자본주의와 기독교는 미래의 좋은 삶, 장밋빛 삶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고된 노동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각자의 삶을 경건하게 검열할 것을 요구합니다. 자본주의나 기독교가 제공하는 달콤한 미끼를 덥석 무는 순간, 우리의 현재와 삶은 깊은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현재의 순간이란 있을 수 없게 되지요.
자신의 삶이 초월적 목적이 아니라 내재적 목적이 있다는 것, 삶은 놀이의 주체이지 결코 노동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 나아가 오직 현재만이 긍정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삶의 철학자 니체라면 놀이의 아비투스를 획득한 로빈슨을 초인, 즉 위버멘쉬라고 불렀을 테지요.
'보라, 나는 너희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위버멘쉬가 이 대지의 뜻이다. 너희들의 의지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라.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 되어야 한다고! 형제들이여, 맹세코 이 대지에 충실하라.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설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그런 자들은 스스로가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독을 타 사람들에게 화를 입히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생명을 경멸하는 자들이요, 소멸해가는 자들이며, 이미 독에 중독된 자들인바, 이 대지는 그런 자들에게 지쳐 있다.'
니체는 현재라는 시간 그리고 내재적 삶을 부정하는 모든 초월주의를 허무주의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말한 초인은 바로 이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데 성공한 인간입니다.  303-304
그것은 자기 삶 자체를 수단이자 나아가 목적 그 자체로 보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그는 모든 초월적 가치나 목적에 현혹되지 않는 삶, 그 자체로 긍정적인 삶을 되찾습니다.  304



IV. 건강한 노동을 선물하기 - 유하 vs 보드리야르
7. 쇼퍼홀릭과 워커홀릭, 금단의 무기력 너머 
바람부는 압구정동의 불빛
1980년대는 산업자봅눚의가 우리에게 발전과 번영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점을 서서히 깨닫게 된 시대입니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첨예한 갈등이 표면화되었고, 그것이 곧바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하는 지성계의 화두가 되었으니까요. 당시의 지성계가 극복해야 할 화두는 다음의 두 가지 문제 였습니다. 그 한 가지는 민주주의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던 당시 전두환 군부독재의 철권통치였다면, 다른 한 가지는 노동자와 도시 빈민 그리고 농민들의 척박한 삶을 초래한 자본주의의 모순이라는 문제였습니다. 물론 대학생들은 이 두가지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고, 그러한 고민은 시위의 형식으로 표출되었습니다.  311-312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청각의 시대는 지나고 화려한 영상을 자랑하는 시각의 시대가 열립니다. 이것은 매혹적인 소비문화에 물들게 하여 비판적 감각을 무디게 하려는 정부의 정책과도 맞물렸습니다. 
1980년대 대학생들은 낮에는 정치와 경제 문제로 격렬한 시위에 참여했고, 밤에는 화려한 시각 문화의 세계에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지성계는 사회참여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부르디외가 이야기 했듯이 취업 걱정이 전혀 없었던 당시의 대학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312
당시의 대학생들은 상당히 사변적이고 이념 지향적이기도 했습니다.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몽환적인 유흥문화, 네온사인, 백화점 그리고 칼라 텔레비전의 시각적 화려함과 현란함 등이 자신의 주머니를 열도록 고안된 못된 장치들이라는 사실을 그들도 모리로는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각적 말초신경은 냉철한 머리와는 반대로 그 화려한 욕망의 집어등을 은밀히 더듬고 있었지요.
바로 이때 소비문화에 대해 매우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본 한 명의 시인이 바로 유하입니다.  313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오징어]
오징어들은 화려한 불빝, 즉 어선의 집어등이 뿜어내는 '찬란한 빛'에 포획되어 죽어갑니다. 유하는 우리의 신세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314
유하는 소비문화의 폐단을 모조리 산업자본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았습니다. 산업자본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가장 잘 파악하고, 그것을 집요하게 이용했을 뿐입니다.  320
낡은 것은 폐기하고 새로운 것을 소비하라
자본주의 역사에 대해..
서양에서는 절대왕조와 함께 발전햇던 상업자본의 황금기가 있었지요. 17세기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이끌었던 대항해의 시대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18세기말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산업자본주의의 힘이 상업자본주의 시대에 막을 고하게 됩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이 이윤을 획득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상업자본은 공간의 차이, 다시 말해서 가격의 차이가 나는 서로 다른 두 공간에서 이윤을 획득합니다. 가령 동해에 위치한 강릉에서는 오징어 가격이 서울보다 쌉니다. 만약 강릉에서 오징어 가격이 1000원이라면, 서울에서는 오징어가 가격 2000원에 팔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인은 강릉에서 오징어를 1000원에 사서, 서울에서는 2000원에 팝니다. 결국 그에게는 1000원의 이윤이 남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상업자본이 항상 각양 각종의 신기한 특산물이 나는곳, 다시말해 가격 차이가 나는 곳을 찾아서 멀리 나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17세기와 18세기 초까지 영국과 네덜란드가 경쟁적으로 동인도 회사를 세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도를 포함한 아시아에는 유럽에 없는 진귀한 특산물들, 다시 말해서 엄청난 가격 차이를 보이는 상품들이 많았습니다. 
반면 산업자본은 상업자본과는 다르게 시간의 차이를 이용해서 이윤을 남깁니다. 예를 들어 MP3를 만드는 산업자본은 계속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여 기존 제품들이 유행에 뒤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소비자들에게 기존 제품을 버리고 계속 새로운 제품을 사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존에 구입한 제품과 새로운 제품 사이에는 시간 차이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공간의 차이처럼 시간의 차이가 원래부터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행위, 다시 말해 새로운 유행을 만드는 산업자본의 행위 자체가 시간 차이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327-328
유행은 소비자들이 아니라 산업자본에 의해 우선적으로 창출되는 것입니다.
산업자본이 창출하는 유행은 대중매체의 발달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대중매체는 대가로 제공되는 산업자본의 광고료를 통해서 유지됩니다.  328
구독률, 시청류르 그리고 조회 수가 높을수록 대중매체는 산업자본으로 부터 광고비를 더 많이 받아낼 수 있다.
보드리야르는 "객관적 기능의 영역 안에서 사물들은 교환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이런 명시적 의미의 영역 밖에서 어떤 사물이라도 무제약적인 방식으로 대체 가능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객관적 기능의 영역이란 구체적 사용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사람들의 이동을 편하게 하는 객관적 기능이 있으며, 아파트는 사람들의 주거를 편하게 해주는 객관적 기능이 있습니다. 객관적 기능의 영역에서 자동차는 아파트를 대신할 수 없겠지요. 
반면 객관적 기능의 영역을 넘어서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329
현재 산업자본은 광고를 통해서 우리가 가진 '낡은'것을 폐기하고 '새로운'것을 구매하도록 유혹합니다.
광고에서 소개되는 새로운 세탁기에는 보드리야르가 이야기한 에로틱함, 새로움, 행복함이란 '기호가치'가 강하게 부여된 것입니다.  331
여러분 집 안이 사용하지 않는 상품들로 가득 차 있다면, 이것은 이미 산업자본주의가 열어놓은 소비사회의 유혹에 포획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타인으로부터 주목과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과 허영 같은 감정이 있기에 산업자본의 기호가치가 작동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소비사회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통찰이 중요한 이유도 그가 인간에게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려는 욕망 혹은 허영이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333
금욕은 어떻게 사치가 되었나
근대사회란 산업자본 주의에 입각해 새롭게 구성된 사회, 그러니까 18세기의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으로 시작되어 19세기에 거의 완전한 모습을 갖춘 사회를 말합니다.  334
좀바르트는 '어떤 시대라도 사치가 일단 존재하면, 사치를 더욱 증대시키는 그 밖의 동기들 역시 활기를 띠게 된다. 즉 명예욕, 화려함을 좋아하는 것, 뽐내기, 권력욕, 한마디로 말해서 남보다 뛰어나려고 하는 충동이 중요한 동기로서 등장한다.... 그렇지만 사치가 개인적이며 물질주의적인 사치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감각적인 향락이 확기를 띠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에로티시즘이 생활양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우리가 논의하는 시대에 적용해보자. 거대한 사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다. 즉 부(富)도 있고, 사랑의 생활도 자유로운 상태였고, 다른 집단을 압도하려고 하는 몇몇 집단의 시도도 있었으며, 또한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19세기 이전에는 전적으로 향락의 중심지였던 대도시에서의 생활도 있었다.'  340-341
좀바르트에게 사치란 특정 시대만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본성에 가까운 것으로 사유되었습니다.
좀바르트는 사치가 인간이 가진 허영이라는 욕망, 즉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으려는 욕망에서 기원한다고 보았습니다. 스스로를 화려하게 꾸밈으로써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구별하려는 욕망에서 사치가 발생했다고 본 것입니다.
좀바르트는 <사치과 자본주의>에서 '부(富)가 축적되고 성생활이 자연스럽게 또 자유스럽게 혹은 대담하게 표현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사치도 함께 유행한다.'  341
소비, 자본주의 생산성의 비밀
소비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과 개성을 자유롭게 분출하고, 그래서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다는 일종의 환각을 갖습니다. 그렇지만 보드리야르는 냉정하게 지적합니다. 우리가 가진 '욕구와 그 (욕구의) 충족은 오늘날에는 다른 생산력(노동력 등)과 마찬가지로 강요되고 합리화된 생산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349
산업자본주의에서 자유란 분명 소비의 자유입니다. 돈이 부족하거나 아예 돈이 없을 경우 우리가 부자유의 느낌, 심지어는 심각한 우울증을 느끼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자신을 타인과 구별해줄 수 있다고 믿는 상품들을 구매하지 못할 때 우리는 우울증을 겪습니다.
돈이 없으면 우울하고, 돈이 있으면 명랑해진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산업자본이 우리의 욕망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는 분명한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자유와 부자유의 느낌을 자신만의 고유한 느낌이라고 믿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자신이 산업자본에 길들어 그런 자유 혹은 부자유의 느낌을 가진다는 사실을 또한 망각하기 쉽습니다.  350
수족관에 갇힌 낙지의 삶
노동자가 동시에 소비자라는 너무도 자명한 사실,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물건을 자신의 임금 가치보다 훨씬 더 비싸게 소비한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멈추지 않고 작동하는 핵심 비밀이자 신비입니다.  362
자본가로부터 주어지는 임금은 더 큰 자본의 형태로 다시 회수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제공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본가가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주는 이유는 노동자들의 윤택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노동자가 다시금 소비자가 되어서 자본가의 상품을 구매해주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결코 잉여가치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잉여가치를 남기기 위해서라도 자본주의는 반드시 이러한 메커니즘을 거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63

8. 교환, 대가 없는 나눔의 마법
문명의 빛 반대편에 서려는 시인의 의지
만약 돈이 없다면, 우리가 소망하는 자유로운 욕망의 실현은 불가능해질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사회에 사는 셈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우리 삶은 분열될 수밖에 없습니다. 상품과의 관계에서는 주인으로서 자유를 만끽하지만, 그 이면의 돈과의 관계에서는 무기력한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가니까요.  367
사랑이란 아무런 대가 없이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감정을 말합니다. 이 때문에 사랑이란 감정은 자본주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소망스러운 감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자본주의는 늘 인간의 무한한 진보와 변영을 약속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곧바로 정면에서 거부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인간의 노쇠함과 그에 이어지는 필연적 죽음입니다.  375
'공산당 선언'에서 '생산의 거울'까지
베버 역시 생산중심주의에 입각해서 사유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바르트나 보드리야르는 산업자본의 잉여가치가 오직 유통과정에서만, 다시 말해 한때 노동자였던 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하는 경우에만 획득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베버와 달리 이들 후자의 견해는 소비중심주의라고 부릅니다. 보드리야르가 생산중심주의를 비판했던 이유도, 노동자가 동시에 소비자라는 자본조의 현실을 보지 못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377
보드리야르는 아직까지도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생산중심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오래된 사유의 관행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378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다면 그 누구도 마르크스의 사유를 피해갈 수 없지요. 그렇지만 보드리야르는 마르크스를 배신하려고 합니다. 그는 마르크스 역시 생산중심주의라는 거울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았습니다.  379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는 어떠한 억압이라도 감당해야 했지만, 유통과정에서 노동자는 곧 소비자로 바뀝니다. 소비자라느 ㄴ위치에 있을 때에만, 노동자는 산업자본에 대해 나름대로 자율성을 얻지요.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유통과정, 혹은 소비의 영역을 중시했던 것입니다.
소비 영역은 소비자가 노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산업자본의 음모, 나아가 소비자의 허영을 부추겨 소비를 촉진하려는 산업자본의 전략이 관철되는 매우 중요한 공간입니다. 소비 영역에서 전개되는 이 같은 산업자본의 음모와 전략을 폭로하는 것, 바로 이것이 보드리야르의 평생 숙원 사업이었습니다. 그 일환으로 그는 사물이 가진 서로 다른 네 가지 차원의 논리를 해명합니다.  381
'기호와 차이의 논리라고 할 수 있는 소비의 논리를, 그 논리에 얽혀 있는 여러 가지 다른 논리로부터 구별해낼 필요가 있다. 네 가지 논리가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①사용가치(use value)라는 기능적 논리, ②교환가치(exchange value)라는 경제적 논리, ③상징적 교환(symbolic exchange)의 논리, ④가치(value)/기호(sign)의 논리. 첫 번째는 실제적인 작용의 논리이다. 두 번째는 등가(equivalence)의 논리이다. 세 번째는 애매성(ambivalence)의 논리이다. 네 번째는 차이의 논리이다. 또한 유용성의 논리, 거래의 논리, 증여의 논리, 신분의 논리. 물건은 이 가운데 어느 하나에 입각하여 정돈됨에 따라 각각 '도구' , '상품' , '상징' 또는 '기호'의 지위를 취하게 된다. 그런데 마지막 것만이 소비라는 측수한 영역을 규정짓는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가 하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다이아몬드는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도구'일 수도 있고, '상품'일 수도 있고, '상징'일 수도 잇고, 아니면 '기호'일 수도 있습니다. 먼저 '도구'의 측면에서 바라본 다이아몬드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이 경우 다이아몬드는 가장 견도한 광물이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자르거나 부술 때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 도구로서의 다이아몬드는 '사용하기'라는 기능적 논리를 따르게 됩니다. 하지만 아름답기만 할 뿐 무엇인가르 자를 때 사용하기가 불편하다면 이것은 결국 사용가치가 별로 없는 다이아몬드에 불과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드리야르는 '사용가치의 기능적 논리'를 '실제적 작용의 논리' 혹은 '유용성의 논리'라고 설명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다이아몬드는 '상품'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다이아몬드는 1억 원으로 구매하거나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이 됩니다. 이때 상품으로서의 다이아몬드는 '교환가치'라는 경제적 논리를 따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 한 개는 자동차 5ㄷ개가 컴퓨터 100대와 바꿀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이아몬드 한개의 교환가치는 자동차의 5배, 혹은 컴퓨터의 100배라고 할 수 있겠지요. 화폐는 바로 이런 다이아몬드의 교환가치를 가장 편리하게 수량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이아몬드 한 개의 교환가치는 현재 1억 원으로 매겨진 것입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가 너무 많이 채굴되거나 혹은 소비자의 구매가 별로 없다면, 다이아몬드의 교환가치는 1억 원 아래로 다시 떨어지겠지요. 이 때문에 보드리야르는 '교환가치라는 경제적 논리'를 '등가의 논리'나 '거래의 논리'에 딸느 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세 번째로 다이아몬드는 '상징'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는 사랑하는 딸의 결혼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상품으로서의 다이아몬드를 살 수 있는 1억 원으로 다른 것을 살 수도 있겠지요. 혹은 1억 원 상당의 다른 상품과 다이아몬드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물로서의 교환은 앞서 말한 등가 교환과는 다릅니다. 내가 다이아몬드 하나를 선물받았다고 하더라도, 나느 ㄴ상대방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선물로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징적 교환'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선물로서의 다이아몬드는 '양면성의 논리'나 '증여의 논리'를 따른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애매성으로 번역된 'ambivalence'라는 단어는 가치가 애매하다는 뜻입니다. 기존 등가교환에서 본다면, 다이아몬드 한 개와 장미꽃 한 송이 사이의 교환이란 매우 애매하겠지요.
마지막으로 다이아몬드는 '기호'의 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사회>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한 것도 바로 이 네 번째 측면입니다. 다이아몬드는 상류계층에 속하므로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을 나타내는 기호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다이아몬드는 보드리야르가 말했듯이 '신분의 논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기호'의 측면이 앞서 말한 '상품'의 측면과 그 의미가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교환가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다시 말해 구입한 상품이 고가일수록 그것은 구매자의 더 높은 사회적 위상과 신분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상류계급은 고가의 제품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구매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는 고가의 제품을 아무나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과시하려는 허영심으로부터 나온 결과입니다.  382-384
   도구 상품  상징 기호 
 가치 사용가치 교환가치 상징가치 기호가치 
 작동 논리 작용성  등가성  애매성  차이성 
 적용 영역 유용성의 차원  거래의 차원  증여의 차원  신분의 차원 

생산중심주의에서 살펴본다면,, 인간의 노동력을 중여주거나 아니면 확장 시켜준다는 측면에서 보면 첫 번째 '도구'로서의 사물이란 개념은 샌상중심주의에 잘 부합됩니다. 또 '상품'으로서의 사물도 당연히 생산에 도움이 됩니다. 높은 교환가치에 상품이 팔리면, 그만큼 산업자본은 생산력을 좀 더 확장할 수 있는 자본력을 갖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기호'로서의 사물도 생산중심주의에 잘 부합됩니다. 인간이 가진 허영심과 욕망을 증폭시켜서 당장 필요하지 않은 상품이라ㅗ 고가에 사들이게 한다면, 산업자본은 막대한 잉여 가치를 남길 수 있겠지요.
보드리야르는 생산의 거울을 깨고자 했던 철학자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도구', '상품', '기호'라는 세 가지 사물의 측면을 부정ㅎ적으로 생각했으리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측면들은 모두 생산 중심주의와 직접 관련 있기 때문ㅇ입니다. 이제 그에게는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한 가지 관점만 남은 셈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물이 가진 '상징'으로서의 측면입니다. 어떤 대가도 없이 어떤 교환도 기대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증여의 논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385
보드리야르는 '상징'으로서 사물이 가진 측면이 사물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산업자본주의의 마수로부터 구원해줄 유일한 희망이라고 보았습니다.  386
불가능한 교환을 꿈꾸며!
모스(Marcel Mauss 1872~1950)가 1925년 발표한 <증여론(Essai sur le don)>.
모스의 연구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가 부의 축적을 제일의 목적으로 간주하는 사회인데 반해, 증여의 사회에서는 부의 축적이 아니라 오히려 부의 지출이나 베풀기를 가장 중요한 덕목 혹은 가치로 믿는 사회였습니다. 모스는 증여의 사회에서 무엇인가를 증여하는 사람이 지출이나 베풀기를 통해 얻는 것, 즉 증여가 대가로 얻는 것은 위신이나 명예라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증여는 결국 이 사회에서 위신이나 명예와 대등하게 교환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타유가 강조한 것은 증여의 핵심이 교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증여 자체가 함축하는 과잉 및 그로부터 이어지는 손실이란 논리엿습니다.  396
보드리야르는 뇌물은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사용가치나 교환가치, 혹은 기호가치로 드러납니다. 그렇지만 선물에는 사용가치, 교환가치 그리고 기호가치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사랑이나 애정의 표시,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가치, 즉 '상징적(교환)가치'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398
<암호>에서 말년의 보드리야르는 자신이 바타유의 충실한 제자였음을 시인합니다. 바타유는 생산중심주의가 종국에는 파국을 낳을 것이라고 지적했지요. 하지만 그는 유리가 '불유쾌한 파멸'보다는 '유쾌한 파멸' 즉 선물의 놀리를 선택할 가능성을 강조했습니다. 
산업자본주의의 집어등에 걸려 있는 우리에게는 바타유와 보드리야르의 이야기가 언뜻 보아서는 이해되기 어려운 주장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단적으로 말해 하나의 고유한 선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산업자본은 생산력의 증가, 다시 말해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서 심지어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일종의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 역시 어떤 면에서는 산업자본이 설치해놓은 집어등에 사로잡혀 스스로 교환 가능한 존재라고 받아들이며 체념합니다.  403
자전거로 달리는 영원회귀의 길
교환에서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은 장미와 와인에 교환될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교환을 하면, 장미가 가진 고유성과 와인이 가진 고유성을 부정해야만 합니다. 만약 부정하지 않는다면 교환이 이루어질 수 없겠지요. 무엇이든 서로 교환되려면 그것이 가진 생생한 질들을 추상해야 합니다. 이 점을 가장 잘 부여준 것이 바로 '돈' 입니다. 장미는 1만 5000원의 가치가 있고, 와인도 1만 5000원의 가치가 있으므로 서로 바꿔도 된다는 논리를 가능케 한 것이 돈입니다.
그런데 만약 교환만을 염두에 둔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향유할 수가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오직 교환 가치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이지요.  404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니체의 영원회귀가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실천적 명령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에 따르면 니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네가 무엇을 의지하든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지하는 그런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하라."
니체는 미래의 목적을 위해 현재의 삶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기독교를 허무주의라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니체는 이 순간의 삶과 현재의 절대적인 것으로 긍정할 필요를 느낍니다. 이 대목에서 영원회귀라는 니체의 주장이 출현했습니다. 바로 지금 그리고 이곳의 삶, 그리고 이 속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선택은 영원히 반복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논리에 따라 만약 현재 사니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면, 이 행복하지 않은 삶이 어떤 주기를 가지고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 순간 현재의 삶 속에서 자신의 선택과 행위가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심사숙고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411
니체가 제안한 영원회귀의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세속적 형태의 염세주의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 또한 심각한 타격을 받습니다. 자본주의 논리를 신봉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현재의 고된 노동을 참고 견디면 언젠가 그 대가로 큰돈을 벌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오로지 돈을 목적으로 삼아 자신의 삶을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버리지요.  412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사실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것은 현재 우리 삶이 다른 어떤 시간의 삶으로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들뢰즈, 그러니까 니체 자신이 말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413
유하와 보드리야르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두 사람은 자본주의에 의해 포획된 우리 삶이 얼마나 우울하고 초라해졌는지 잘 보여줍니다.
부르디외는 자본주의적 아비투스와는 분명 다르지만 전자본주의적 아비투스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어떠한 힘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414
우리는 후손들이 자본주의로부터 상처받지 않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사회를 꿈꾸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후손들을 위한 앞 세대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겠지요. 물론 그런 사회가 가능해진다면, 미래에 도래할 인간들은 매 순간 펼쳐지는 자신들의 삶을 단순한 수단으로 생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그 자체로 향유되는 영원한 현재가 되겠지요.  415

에필로그
자본주의 사회는 피상적으로 보면 이전 사회보다 더 자유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자유란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닙니다. 자본주의에서 자유는 돈을 가진 자의 자유, 소비의 자유에 불과할 뿐입니다. 소비의 자유란 결국 돈에 대한 복종의 이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비의 자유를 위새서 돈의 노예가 된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한 번 되돌아보세요. 수중에 돈이 없을 때 얼마나 갑갑하고 부자유스럽다고 느끼는지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향유하는 자유가 돈이 있을 때만 가능한 그런 성격의 것이라면, 그것은 돈의 자유이지 우리 삶의 자유일 수는 없습니다.  423
자본주의로부터 자신의 자유를 회복하려면 여기에서 다룬 인문학자 여덟 명의 사유 또한 곰곰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날개옷과 같은 역할을 해줄 것입니다. 그들의 사유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자본주의에 길들어왔으며, 또한 진정한 자유를 얼마나 오랫동안 잃고 살아왔는지 자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424
"선생님, 그렇다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선생님 말씀대로 취업은 자본주의에 포획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느 ㄴ취업을 해서는 안 되는 건가요? 취업을 하지 않고 우리는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나요?"
이것은 무척 심각하고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 좋은 성적, 좋은 영어 점수. 지금까지 그들의 삶은 모두 자본주의가 내세운 기준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에 입각한 이 같은 삶의 원칙을 직접 심어준 것은 바로 그들의 부모입니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다른 동물들보다 인간은 훨씬 더 사랑과 관심을 받으려고 합니다.
독립하기 전까지 인간은 주위의 절대적 보살핌에 의존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유아 시절에 필요한 사랑과 관심은 단순한 허영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생존과 결부된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아 시절부터 인간은 자신을 돌보는 사람, 이 가운데 특히 어머니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노력합니다. 좋은 성적을 받아올 때 어머니가 기뻐한다면, 아이들은 가능한 한 성적을 올리려고 애쓸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공부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지속적인 애정과 관심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우리의 욕망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인 셈입니다.  425
정신분석학은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욕망이란 단지 부모의 욕망이 내면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이 점에서 보면 젊은 학생들이 자본주의 논리에 의구심과 회의를 품을 수 있다는 점은 무척 소중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회의는 그들이 이제 부모의 절대적 영향으로부터 구성된 욕망이 아닌 자신만의 욕망을 꿈꾼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취업을 하지 않고 우리는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나요?" 라는 그들의 질문 이면에는 생황의 절박함과 불안감이 숨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426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품은 상처의 심각함을 뼈저리게 자각하면, 우리 실천도 그만큼 치열하고 집요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이 책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이상적인 대안이나 구체적인 해법들을 제안하기보다, 우선 자본주의에 의해 상처받은 삶을 묘사하려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구보다 예민하게 상처를 감지한 문학가들 그리고 누구보다 치밀하게 상처를 해부한 사상가들의 시건을 빌린 것도 이 때문이지요.
상처를 상처로서 제대로 느낄 수 있을 때, 상처를 치유하려는 우리의 의지와 노력 또한 새롭게 싹틀 수 있을 겁니다. 간정히 소망해 봅니다. 더이상 상처가 깊어지기 전에,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들이 치료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떠안기전에, 치유의 노력이 곧 시작될 수 있기를 말입니다.  43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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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나온 결론으로 제시된 '공동체'에 대해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러한 공동체는 결국 공동체의 규범과 규율이 필요하게 된다.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 양산의 계기가 될 수 있기에 해결책이라 보기 어렵다. 시도는 좋으나 이것이 '동물농장'이 되지 않는다고 보장 할 수 없다.
미시적으로 볼 때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큰 문제 양산이 될 것이다.
어쩌면 유지하기 위해 '멋진신세계'로 변형되어야 할지도 모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손쉬운 대답은 종교에 의지하는것으로 가게 될지 모른다. 책에서 말하는것 처럼 이것 역시 대안이 되기에는 힘들다.
인간은 절대적 불변이 있다. 바로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 하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답이 존재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은 확실하다.
어렵다. 어렵고도 답이 없다. 그렇기에 변화의 과정들을 겪으면서 우리는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끝없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기력하게 하긴 하지만, 지금 보다 더 나은 시대를 만들기 위해 변화를 하고, 그것이 병이 될 때 아니 병이되려할 때 또 다른 대안의 변화가 이루어져 나가는 것만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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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더스 헉슬리에 대한 내용이 있어서 간단히 읽었고, 일부를 발췌해 놓는다.





올더스 헉슬리만큼 20세기 영미문학에서 문학과 철학, 과학 그리고 심리학의 문제를 포괄적이고 깊이 있게 다룬 작가는 드물다. 그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끊임없는 구도자적 자세로 어마어마한 지식을 동원, 삶의 의미를 본질적으로 규명하려는 작가적 임무에 평생 동안 충실하였다. 현대문명이 지나친 과학기술의 발달로 균형을 잃어버릴 때 어떤 비인간적 세계가 벌어지는지 천재적 예언가의 눈을 가지고 진단하였고 서양의 사상과 기계 문명 중심 사상은 결국 인류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는 엄중한 경고를 하면서 동양의 사상과 전통적 지혜에서 대칭적 치유책을 찾아야 한다고 그는 역설한다. 시대정신을 올바르게 읽어 대안을 제공하는 그의 예언자적 혜안과 통찰력은 학문과 인간사에 대한 절차탁마의 탐구정신과 실험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충격을 이겨내면서 성숙하는 올더스 헉슬리는 인간성의 부정적 측면을 긍정적으로 변모시키고 동물의 차원에서 신의 차원으로의 승화 속에서 참다운 인간모습을 찾는다. 인간이 원숭이 같은 동물의 차원에서 서로 살육하며 세계를 황폐화시키느냐 아니면 인간이 인간다운 제 위치를 잘 지키며 조상이 남긴 아름다운 유산을 잘 보존하고 이율배반적 요소를 어떻게 조화, 절충, 통합하여 상생원리를 실천하느냐 하는 것을 그의 문학적 과제로 여긴 올더스 헉슬리는 풍자와 철학적 사유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융합하여 그의 모든 작품을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의 수단으로 삼고 위기의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생애
 저명한 영국의 과학자 가문과 문학가 가문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토마스 헨리 헉슬리는 다윈의 진화론을 발전시킨 저명한 과학자였고, 형 줄리안 헉슬리는 생물학자로서 과학적 인문주의를 신봉하였고 초대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복동생 앤드류 헉슬리는 노벨상을 수상한 유명한 생리학자였다. 19세기 시인 중 하나인 그의 어머니는 옥스퍼드 대학의 시학교수인 매슈 아놀드의 질녀로서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재원이었다. 이렇듯 헉슬리의 친가와 외가 쪽 모두 인간과 세계의 커다란 근원적인 문제를 고민하고, 그것을 풀고자 애쓴 가문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는 원래 의학을 공부하려고 옥스퍼드 의대에 진학했으나, 눈이 나빠(점상 망막염을 앓고 3년간 사실상 맹인으로 지낸 후에) 도중에 영문학과로 전과해서 공부하고 오랫동안 신문 언론계에서 문예비평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그의 출생배경은 과학뿐 아니라 예술, 문학, 종교등의 문학세계를 한층 심하시키고 다양하게 만들었다. 그는 평소 예술, 문학, 과학은 모두가 하나라는 통합주의적 일원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1825년 태어난 올더스의 할아버지 토마스 헉슬리는 매우 탐험심이 많아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아 지역에서 수중탐험을 하면서 생물학을 연구하였고 외과 조수로도 일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세계를 여행하며 겪은 경험을 일기와 전기에 기록하는 문학적 기질을 보여주었다. 그의 과학자적 정신과 문학적 성향이 그의 후손 특히 손자들에게 영향을 끼쳐 더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였다. 그는 단테를 원어로 읽기 위해 이태리어를 배울 정도의 학구열이 있었으며 독일 시와 춤에도 흥미를 가졌고 호주 원주민들에게 인류학적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의 동생 제임스 헉슬리는 의사이자 정신병리학자로 성공하였다. 원기 왕성하고 학문과 매사에 적극적이고 열성적이었던 토마스 헉슬리는 자연사 교수가 된다. 병약해진 아내 때문에 호주에서 영국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는 잠이 오지 않아 칸트와 헤겔을 독파하였고, 바닷가에서 생물표본을 수집, 해부하여 그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다윈의 혁명적 진화론을 지지하는 과학자와 철학자들의 지도자적 위치에 오른다. 
 올더스 헉슬리에게서도 이런 그의 할아버지의 열성적인 기질, 일과 사교활동을 조화롭고 강렬하게 병행시키는 성향을 엿볼 수 있다. 헉슬리 가문의 가훈은 올바르면서 알기 쉽게 였다. 토마스는 대학에서 일반 자연사 과목을 맡아 비교해부학과 고생물학을 강의하면서 과학계의 거두들과 격렬한 논쟁을 통해 자신이 연구한 바를 논리적으로 이해시키고자 했으며 강연과 저작활동에서 열심이었다.
 1859년에 출간된 다윈의 <종의 기원>은 20세기의 핵에너지 개발과 유사한 충격적인 이론이었는데, 비등하는 논란의 가운데에서 토마스 헉슬리는 다윈의 진화론을 적극적으로 옹호, 지지하면서 그것을 대중화하는 데 앞정섰으며 점점 설득력을 얻어 승기를 잡아간다. 인간의 조상이 동물에까지 서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해부학생리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증명한 그의 대표작이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이다. 후세의 헉슬리 가문을 관통하는 중요 연구 관심사가 된 이 문제는 정신과 물체의 연관성에 대한 탐구로 그 영역이 확대되면서 올더스 헉슬리의 세계관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토마스 헉슬리는 다윈 학설을 뒷받침하는 저술과 강연을 이곳저곳에서 계속하며 단순한 과학자 이상의 사상가, 교육자로서 활약했다. 창조론을 주장하는 교회와의 논쟁을 조직화시키는 데 앞장섰고 형제자매의 가정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일곱명의 자식들을 화목한 가정환경에서 양육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등산과 여행, 격한 운동을 즐겼고 인생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교육과 윤리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그는 영국 학술원의 서기 겸 회장직과 오웬 대학교, 이튼 학교의 교장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대영 박물관의 이사추밀원의 고문관직과 선출직인 런던 교육위원, 국립 과학대학의 학장을 역임했고 <기초생물학>을 저술하였으며 1870년에는 새로운 교육제도 수립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교양교육과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장소>라는 글은 그의 교육철학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그는 여러 다른 견해를 중재하고 조정하는 능력이 매우 탁월했고 여러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원융(圓融)통합하는 기술 또한 뛰어났다. 그는 <타임머신>등의 과학 미래 상상소설을 쓴 H.G.웰즈 같은 저명한 인사를 가르쳤다. 건강이 나빠지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는 가운데서도 다윈의 친구들로부터 도움을 받아가면서 1873년 <척추 없는 동물 해부학 편람>을 써내기도 했다.
 애버딘 대학의 총장으로 선출되었고 러스킨, 틴덜, 매수 아놀드, 칼라일 같은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1876년 미국에서 초청장을 받고 아내와 힘께 미국을 방문했던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직을 제안받지만 아내의 건강과 자녀들을 이유로 거절한다. 헉슬리 가문의 전통은 진리와 선의 궁극적 가치를 최고로 인식하여, 고차원적인 사유 속에서 검소하지만 정열을 가지고 살면서 넓은 지적 관심, 끊임없는 절차탁마, 격물치지의 정신으로 지적인 업적을 쌓고 솔직하면서 도덕적 용기를 가지고 살자는 것이었다.
 올더스의 아버지 레오나드 헉슬리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대학 재학 중 부인 줄리아 아놀드를 만난다. 줄리아의 아버지는 목사 출신의 토마스 아놀드로 올더스 헉슬리는 외할아버지가 되는 그를 닮게 된다. 종교적, 지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올더스의 어머니 줄리아는 영국 국교 교리를 초월하여 인간의 서로 통합할 수있는 더 넓은 세계관을 추구하였다. 옥스퍼드대학 영문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855년에 레오나드 헉슬리와 결혼, 1913년에 시집을 출간하여 시인이자 옥스퍼드 대학교수인 삼촌, 매슈 아놀드로부터 찬사를 듣는다. 레오나드는 학교 교감으로 시골에 가서 가정을 꾸미고 토마스 헉슬리는 60세가 되어 은퇴 후 연금생활을 하게 되지만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공방에는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과학과 종교의 근본적 차이점을 거론하면서 종교적 교리를 대체할 새로운 윤리체계의 수립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런 그의 인생관, 세계관이 그의 손자들에게도 전수되어 줄리언은 인본주의적 과학을 탐구하게 되고 올더스는 과학과 문학의 융합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많은 자녀를 두었던 토마스 헉슬리는 손자, 외손자, 외손녀들을 거느리는 대가문의 중추로서, 은퇴하고 시골로 내려간 후 건강을 보살피다가죽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담대하고 낙관적이며 긍정적인 인생에 대한 태도를 유지했던 그는 35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첫째 아들 노엘의 무덤 옆에 묻힌다. 사후 5년 뒤인 1900년, 과학과 인문학, 또 과학과 종교 사이의 갈등과 지적 도전을 지혜롭게 극복, 화합과 균형의 미를 실천한 그를 기념해 구립 역사박물관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1894년 유명한 과학자적 전통의 아버지 집안과 문학적 전통의 어머니 집안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 올더스는 어려서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큰 형 줄리언은 옥스퍼드에, 둘재 형 트레브는 이튼 학교에 다녔으며 올더스는 유명한 공립학교 힐 사이드 부설 유아원, 유치원을 다닌다. 그의 아버지 레오나드는 5년간의 교직 생활을 그만두고 그의 부친 토마스 헉슬리에 관한 두 권짜리 전기 집필에 착수한다. 어머니 줄리아는 여학교를 설립하여 학구적 태도와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관심을 가지고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을 교육하다가 1908년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난다. 그때 올더스는 14세였고 그의 아버지는 53세였다.
 세 아들은 어머니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평생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운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첫째 줄리안은 옥스퍼드를 졸업하고 생물학을 가르치기 시작하고 장학금을 받고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다. 둘째 트레브는 과학과 형이상학적 사고의 접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셋째 올더스는 옥스퍼드에 들어갔으나 거의 실명위기에 빠지고, 외동딸 마가렛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홉 살에 불과했다. 
 어머니와 외가 쪽을 닮은 올더스에게 그의 어머니의 죽음은 아주 큰 충격을 주었고 감수성이 예민한 그는 언어와 문학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1911년 각막염 수술을 받고 거의 장님이 된 그는 이튼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형 줄리안은 미국 라이스 연구소에서 초청을 받아 휴스턴에 도착, 첫 번째 저서로 <동물왕국에서의 개성>을 출판하고 신경쇠약증과 약혼 파기 등 고통스런 위기상황을 극복한다.  올더스는 1913년 옥스퍼드에서 다시 학업을 계속하고 둘째 트레브는 우울증으로 요양소 신세를 지다가 결국 목매어 자살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레오나드는 로자린느 부르스와 1912년 재혼하고, 눈이 좋지 않은 올더스는 밀튼처럼 외부세계보다 인간의 내면세계를 더 파고든다. 대학 시절부터 신비주의에 관심을 갖고 본질적 존재의 총제적 성격을 규명코자 했던 그는 대학 졸업 후 공무원으로 잠시 근무하다가 영국 최고 명문 중고교인 이튼 학교에 교사로 취직한다. 과학의 효율성과 미학적 쾌락 양면세계의 결합을 추구하는 줄리언은 <어느 인물주의자의 수필>을 써서 과학자적 인문주의의 가치관을 피력한다.
 토마스 헉슬리의 과학주의적 세계관과 아놀드 매슈의 문학주의적 세계관이 줄리언과 올더스 두 형제에게서 대위법적으로 더 발전되는 양상을 띤다. 아버지 레오나드는 콘힐 이라는 잡지의 편집장이 되고 자기 부친에 대한 전기를 쓴 뒤에 19세기 영국 과학계의 삼총사 헉슬리 후커, 틴달 중 후커와 틴달의 전기를 집필하는 등 왕성한 작품 활동을 전개한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둘째 형의 자살 그리고 시력상실의 충격을 극복, 다시 일어서는 올더스는 이율배반적 삶의 모습을 상상력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길로 들어선다. 벨기에 출신의 마리아 니스와 결혼하고 과학문명의 횡포에 공포감과 혼돈감을 느끼면서 연극, 예술 비평가로 성장한다. 1930년대에 <옵저버>지에 실린 글에서 그는 “내가 글을 쓰는 주요동기는 하나의 어떤 관점을 표현코자 하는 욕망이었다. 아니, 차라리 분명하게 하고 싶은 욕망이었다. 나는 나의 독자를 위해 쓰지 않는다. 사실 나는 나의 독자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나는 글 자체를 위해 글을 '쓰기를 좋아한다. 나는 내가 어떤 재능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내 스스로에게 단지 문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것을 행사하기를 원한다. (중략) 나는 인생에 대한 어떤 안목을 분명히 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작가로 서의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그는 자신의 작품 활동의 근거를 어떤 하나의 관점을 표현하는 데서 찾았다. 독자를 의식해서 쓰는 게 아니라 자신이 제기하는 인생이나 문학에 대한 문제의 해답을 찾아 하나의 관점을 명백하게 하기 위해 글을 쓴다는 약간 유아독존적인 제임스 조이스의 예술관을 보인다.
 사물의 궁극적인 실체를 이해하려는 올더스 헉슬러의 격물치지의 인생관은 어려서부터 난해한 주제에 대한 엄청난 백과 사전적 지식을 습득하게 했고, 다양하고 복잡한 인생에 대한 태도와 본질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진보는 <대위법>이라든가 <목적과 수단> <크롬 엘로우> 같은 작품 속에서 여러 주인공들의 토론과 반론을 통해 잘 대변된다. 문명 비판적인 내용들이 많기 때문에 때로는 인간 혐오자 혹은 비관주의자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올더스 헉슬리는 과학이 사회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집요하게 파헤치려고 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수많은 예술가, 과학자, 작가, 사상가 등의 지식층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들은 모두 다양한 그의 사상을 대변하는 역할 분담자로 여겨진다. 그는 동양의 신비주의에도 관심을 가지고 인도를 여행하였고, 여행을 통해 인간 세상의 다양성과 또 공포성을 본다. 1920년대는 아내와 함께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생활했던 그는 문명비판적 자연주의자였던 D.H.로렌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기도 했다. 프랑스 방스에서 로렌스가 임종할 때는 가까운 호텔에서 머무르며 그를 보살피면서 두 작가의 어떤 강력한 동기감응의 극적인 순간을 체험했다.
 세계와 그 속의 문제들에 대한 포괄적이며 객관적인 접근방식을 희극적인 시각과 비극적인 시각의 양면적 시각을 취하고 있는데, 그것은 과학과 문학에 대한 그의 이중적인관점과 통한다. 인생 후반기에는 첫째 부인 마리의 죽음, 자신의 구강암, 문명비판의 동조자로서 그에게 영향을 준 D.H.로렌스의 죽음이 준 정신적 충격이 전반기의 고난과 겹쳐 그로 하여금 인생에 대한 허무주의적 관점으로 그의 작품 속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고, 인생 혐오자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의 양면적 모습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서로가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로서의 예술과 과학의 상호연관성, 또 물질과 정신 사이의 애매모호하면서 신비스러운 관계에 대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탐색이 역설과 예언의 문학적 업적을 이루어 20세기 지성의 양심을 대변케 하고 있다.
 1929년에 H.G.웰즈, 아놀드 베네트 그리고 줄리언 헉슬리와 함께 올더스는 문학잡지 <리얼리스트>를 창간하였다. 그는 인간의 역경,인간 상황의 변화, 과학이 제기하는 위험성과 가능성, 환경에 대한 인간의 통제, 모든 문제는 인간의 정신적 직관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는 투철한 믿음 그리고 그런 직관은 한 세기 전 그의 할아버지가 관심을 가졌던 정신과 물질의 경계지대에서 발생한다는 생각을 정리하면서 주지주의적 태도에서 신비주의 태도로 전환한다.
 1936년에 나온 <조이스 예술가적 장인>이라는 글을 쓰기까지 올더스는 1927년부터 9년에 걸쳐 18권의 책을 써내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그는 인도인들의 인과업보에 대한 불교적 힌두교적 관점에 공감하면서 이성과 논리가 아니라 어떤 초월적이고 환상적인 것이 있어 그것에 의해 인각사가 벌어진다는 견해를 밝혔다. 또한 반유토피아적 소설인 <멋진 신세계>를 발표하여 과학의 오용과 남용으로 비인간화된 세계의 참혹상을 제시하였던 그는 30년이 흐른 후 죽기 몇 달 전 자신의 예언이 오늘날 현실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올더스 헉슬리의 문학작품에는 희극적인 시각과 비극적인 시각이 공존하고 있는데, 특히 이념에 대한 비판이 주조를 이루고 있고 히틀러 집권체제에 대해서도 비판적 태토를 견지하였다. 정치와 현실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으나 철학자 러셀 등과 같이 평화 운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다가 1937년 거의 실명상태에서 미국으로 떠나간다.
 조부에게서 이어받은 학문과 진리에 대한 헌신적 탐구, 세계의 문제점들에 대한 포괄적이며 객관적인 안목을 가문의 전통으로 이어나간 올더스는 인간의 각 영역, 육체와 정신세계의 특징, 기의 움직임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그의 이복동생 앤드류는 생리학자로 노벨상을 타고 그의 두 고모와 결혼한 에케슬리 가문은 점차 번창하여 토마스 헉슬리의 퇴조와 함께 사교의 중심지가 되어갔다. 뿐만 아니라 토마스 헉슬리의 외손자인 토마스 에커슬리는 그의 형제들과 라디오 개발에 심혈을 기울여 영국 BBC방송의 최고 기술자가 된다.
 열정적인 탐구와 지속적인 거경궁리의 학문적 자세는 자손들에게 유전되어 다방면의 인재들을 배출해냈다. 줄리언 헉슬리는 동물학회의 비서직을 맡게 되고 그의 아을 앤소니 헉슬리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활동하였다. 교회의 과학에 대한 폐쇄적 관점에 반기를 들고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새로운 진리를 전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라디오 대담 및 토론 사회자로 적극적인 과학 홍보활동에 나섰고 1942년부터 꾸준히 저술활동을 병행해서 <필연의 자유> <인간의 독특성> <혁명 속의 삶> 그리고 방대한 <진보 현대적 통합>등을 발표하여 할아버지 토마스 헉슬리의 초인적인 지적 정력을 과시하였다.
 그들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인간의 이 우주 속에서의 위치는 무엇이며 그것에 대해 인간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줄리언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문명은 자유방임주의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여 자유와 책임의 균형을 이루게 해야 한다면서 원자폭탄을 유엔 감시하에 둘 것을 제안하였다. 그의 과학 철학적 안목에 영향을 받아 학자들이 인간과 환경의 연구자로 배출되기 시작했다.
 전쟁을 피해서 미국으로 도망쳤다는 영국인들의 오해와 비난 속에서 1937년 올더스 헉슬리는 아내 마리, 열일곱 살 된 아들 매슈와 함께 노르만디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 D.H. 로렌스와 같이 차를 타고 서부로 출발, 뉴 멕시코주 인디언 원주민들이 사는 타오스 지역을 방문한다. 동양의 신비주의에 심취하기 시작하면서 국내 및 국제 정치, 전쟁과 경제, 교육, 종교, 윤리 등의 문제를 궁극적인 실재의 본성론에 융합시키고자 시도하고 자신의 윤리적 원칙을 천명하는 <목적과 수단>을 완성한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보여주는 어떤 희망에 애착을 느껴1938년 로스엔젤레스에 정착하여 처음으로 선과 악, 환상과 실재,그리고 회춘의 문제를 다룬 소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간 뒤 백조는 죽다>를 써낸다. 나빠졌던 시력도 바스트 방법과 훈련을 통해 조금이나마 회복한 그는 신비주의자들의 삶을 분석하기 시작한다. 가톨릭 신비주의와 불교, 힌두교의 종교적 체험에 몰두하면서 1944년 현재 이승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비리에 대한 불교적 해결을 모색한 <시간은 멈추어야 한다>를 발표한다. LA근교에 목장을 사서 평화와 침묵의 분위기 속에서 신비주의에 더욱 몰두하며 친구 제랄드 허드와 같이 트라버코 대학을 설립하기도 한다. 그는 자기가 쓴 책 중에서 어떤 것을 제일 잘 된 것으로 여기냐는 질문에 <시간은 멈추어야한다>라고 답하면서 “그 책은 나의 가장 많은 감정을 이입시켰다. 때문에 내가 성취하지 못한 어떤힘이 작품속에 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만년 철학>은 요가 또는 다른 신비주의 예를 들면 세례 요한, 중국 도가 사상가들, 불교와 힌두교의 경전 저자들, 모하메드 신봉자 등 세계의 성인이나 예언자들의 명언들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면서 형성되었다.그의 <만년 철학> 개념은 신성한 실재를 인정하는 형이상학으로서 영혼 속에서 신성한 실재와 비슷한 어떤 것을 찾는 심리학이며 인간의 마지막 목표를 모든 존재의 내재적이고 초월적 근거에 대한 깨달음 속에서 찾는 윤리의식이다. 
 과학의 대중화에 힘쓴 형 줄리언에 반해 동생 올더스는 정신적,문화적 현상에 집중한다. 전쟁 후 우울한 침체상황 속에있는 유럽의 모습을 아내와 같이 이탈리아를 방문해 목격한 뒤, 캘리포니아 산림지대인 라이트우드에서 은거생활에 들어가 타고난 그의 기질 중의 하나인 비관론적 관점으로 과학과 전쟁에 의해 황폐해진 인간세계를 동물세계에 빗대며 풍자적인 글을 쓴다. 그것이 <원숭이와 본질>이다.
 좋지 않은 시력 때문에 날카로워진 청력의 힘으로 기억에 의해 산을 오르내리는 일과 속에서 그는 하루에 500단어씩 글을 쓰는 데 몰두하여 요셉 신부의 생애를 다룬 예전의 글 막후의 실력자를 확대해 <루던의 악마들>을 써낸다. 이후 올더스는 인류학 분야에도 관심을 가져 멕시코 경계 지대의 원주민들의 생활상을 알아보게 된다. 그는 원주민들이 선인장으로 만든 메스칼린주를 마시면서 환각상태에 빠져드는 심리적 과정을 아주 면밀하게 분석하고 신비주의자들이 겪는 육체이탈과 같은 것에 대해 체험한다. 감각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미학적 탐색을 계속하고 마약도 실험삼아 복용하며 요가도 실천하여 핏속의 이산화탄소가 어떻게 화학적 변화를 통해 분해 되는지를 과학자적 명증성과 정밀성으로 조사 분석하여 그것을 <감각의 문>과 <하늘과 지옥>이라는 책속에서 밝혀낸다. 그는 메스칼린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우주를 확대시키는 신비의 약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올더스가 그의 일생에서 겪은 세 가지 충격이 있다면 그것은 어려서의 어머니의 죽음, 시력상실, 그리고 형의 자살이었다. 그리고 존경했던 D.H.로렌스의 죽음 및 아내의 암 등으로 계속된 정신적 황폐함 속에서 1953년에는 죽은 로렌스의 동반자 프리다와 죽음의 예술에 대하여 토론하였고, 대승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는 아내가 죽자 1956년 이태리의 바이올린 연주자, 로라 아처와 교제하고 아들 매슈는 의학 공부를 시작하다가 1961년부터 인류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페루의 아마존 원주민들을 연구하여 <에덴이여 안녕>이라는 책을 펴낸다.
 올더스는 1960년 캔사스주 토페카에 있는 메닌저 재단에서 방문 교수로 6주간의 강의를 하는데 그 주제는 ‘우리는 누구인가?’ ‘심령적 혹은 환상적 체험’ ‘역사 속의 개인’ ‘인간의 가능성’ 등이었다. 그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에 인문학 방문 교수로 있으면서 <섬>이라는 작품을 쓰는데, 이 작품은 동양과 서양의 조화로운 화합을 통해 개인의 잠재능력이 실현되는 이상사회를 그린 소설이다. 1961년 5월12일에는 살던 집에 화재가 일어나 할아버지가 물려준 볼테르의 <깡디드> 원판을 위시해 책 3천권과 원고와 편지들을 거의 잃어버리고 자신의 삶 중 1/4이 사라져 버렸다며 한탄해 마지않았다. 이후 그는 혀에 종양이 생긴 구강암 진단을 받았지만 기적적으로 침술에 의해 치료되고 1961년 유럽을 여행하면서 심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국제회의에 참석한다.
 올더스는 암울한 인간 미래상을 그린 <멋진 신세계>나 <원숭이와 본질>과는 다르게 그가 동경해 마지않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회를 <섬>속에 투영시켜낸다. 그 작품에 대해서 올더스 스스로는 “위대한 역사, 폴리네시아 인류학, 산스크리트어와 중국어로 된 서적, 그리고 불교 경전, 약리학, 신경생리학, 심리학, 교육에 관한 논문들, 더불어 소설, 시, 비평, 기행문, 정치 논평, 철학자에서부터 배우, 정신병원의 환자로부터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니는 재벌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람들과의 대화, 이 모든 것이 나의 유토피아적 방앗간의 깔때기 속으로 곡물이 되어 들어가 이 작품이 되었다.”고 논평하였는데, 이것에서 알 수 있듯 <섬>은 그의 인생 말기에 집필한 야심찬 작품이었다. 구강암이 재발되면서 육체의 저항력과 어느 것이 승리하느냐 하는 소통 속에서도 예술과 문학과 과학은 하나다 라는 할아버지 토마스 헉슬리에게서 배운 위대한 진리를 <문학과 과학> 속에 총정리 하였다. 또한 올더스의 부인이 된 로라 헉슬리는 심리치료사가 되어 <당신은 표적이 아니다>라는 책을 써서 성공을 거둔다.
 이후 그는 <멋진 신세계>에서 천진무구한 야만인, 존의 고향으로 묘사되었던 뉴멕시코주의 고원지대로 아내와 여행하고 로스앨라머스 과학실험소에서 1,100명의 청중 앞에서 강연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환상적 체험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상황의 정치적 양상에 대해 생물학적 양상으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생태학의 정치학 - 생존의 문제> 라는 논문 속에서는 형 줄리언과 비슷한 견해를 피력하였는데 인종 전체의 생존과 가능한 한 많은 개개인의 남자와 여자의 선의, 지성 그리고 창의력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좋은 현실적인 정치로서 생태정치학을 제창하였다.
 1963년 마지막으로 유럽을 방문하고 마지막 글로 <셰익스피어와 수필>을 썼다. 육체와 영혼의 경계상에서 특이한 체험으로 불교의 선(禪)에 관심을 갖고 멕시코의 버섯에서 채취하여 합성한 환각제의 일종인 사이러시빈과 영매로서의 무당, 사후의 세계와 텔레파시 등의 초월심리학에 마지막 열정을 기울이다가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던 날인 1963년11월 22일, 케네디보다 몇 시간 후에 숨을 거둔다.
 인간의 우주만물, 자연 속에서의 위치에 대한 토마스 헉슬리의 질문은, ‘과학과 예술은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이라는 입장 속에서 정신 그리고 꿈에 대한 부단한 천착으로 20세기 거대한 문학의 금자탑을 세운 그의 손자, 올더스 헉슬리에서 명백한 대답을 얻지 못했지만 그 애매모호한 정신과 물질의 상관관계에 대해 적지 않은 빛을 던져 주었다.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가 예견하고 있는 미래는 과학기술의 지나친 남용으로 인해 인간성이 파괴되는 끔찍스러운 세계이다. 그것은 결코 멋진 세계도 아니고 용기 있는 세계도 아니다. 한 난자에서 180가지의 인간을 생산해내는 공장과 그 아이들을 타율과 강제에 의해 주어진 조건 속에서 교육, 훈련시키는 장면으로 <멋진 신세계>는 시작된다.
실험용 병 속에서 태아가 자라나고 267일 만에 기계적으로 대량생산되는 태아들은 햇볕이 드는 방으로 옮겨져 병마개가 따진 후 유아실로 들어간다. 그 인간 생산 공장의 모든 작업자들은 소장의 명령에 복종하는 개성 없는 간호원들로서 8개월된 아이를 꽃과 책으로 향하게 하는 조건부여 작업을 시행한다. 저능의 아이들이 책과 꽃을 미워하게 함으로써 능률과 효과를 극대화시키겠다는 것이 포드라는 절대적인 인물의 철학이다.
총 관리인인 머스타파 몬드는 독재자 포드의 하수인이고, 그 밑에 공장장 헨리 포스터라는 자가 있다. 몬드는 전 세계를 총괄하는 관리인들 중 하나로서 유럽을 담당하고 있다. 이 시대는 포드가 절대자로 취급되어 연도의 지칭도 ‘포드 탄생 후 몇 년’으로 명명된다. 이런 전체주의적 계급사회에서 가정생활이라는 것은 위험시된다. 또한 인간감정을 최소화시키고 안정적 세계질서를 최고 가치로 여기는 사회윤리 속에서 진정한 사랑은 싹트지 못하고 왜곡되고 금기시된다. 두뇌가 우수한 최면교육 전문가로 등장하는 인물인 버나드 맑스는 이러한 병적인 인간관계를 보여준다.
올더스 헉슬리는 이 작품 속에서 ‘비인간적 기계문명의 횡포에 맞설 수 있는 셰익스피어로 대변되는 인문학정신’이라는 점을 나타내고자 했다. 비록 인간성의 유지와 회복이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적 상황을 맞고 있지만, 문학으로 이 끔찍한 기계문명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작가적 소명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몇 십 년 후에 닥쳐올지 모르는 이 사회의 주요 지배 원리는 ‘공공성’ ‘단일성’ 그리고 ‘안정성’이다. 이런 통치이념에 반하는 것은 모두 금지되고 과거의 인간사회의 흔적도 소멸되며 과거의 모든 책들은 금기시된다.
등장인물 중 하나인 레니나의 애정행각은 여러 남자와 번갈아가며 벌어진다. 그녀는 태아였을 당시 병에 알코올이 실수로 떨어져 생김새가 찌그러지고 우울하며 감성이 없고 소심한 성격인 버나드 맑스, 낙천적이고 쾌활하지만 지성만 발달된 오만한 성품의 베니토 후버 ,인간 생산 공장의 공장장 헨리 포스터, 그리고 감정공학 대학의 감성교육 엔지니어이자 글쓰기를 가르치는 알파 프러스의 엘리트인 헬름홀즈 왓슨 등과 수시로 접촉한다.
인간 생산 공장에서는 인간의 계급이 알파, 베타, 감마, 델타 등으로 정해져 필요한 인간유형이 결정, 생산되는데, 이 신세계의 통치체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반감과 혐오를 가지는 자들은 알파의 계층, 맑스와 왓슨과 같은 두뇌작업자들이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과잉상태에 있으며 개성의식이 있고 신세대의 온갖 기상천외한 오락에 취미를 느끼지 못하여 통치체계의 구호와 선전을 만들어 내면서도 그것에 스스로 동화되지 못하는 소외된 유형의 인물들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문학은 풍자와 역설의 문학이다. 이런 현대 문명의 첨단과 종착이 비인간적으로 병적인 도착상태임을 천명하면서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서 어떠한 집착과 강박관념으로부터도 자유롭고 해탈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불교적 동양사상을 제시하는 넓은 세계관을 보이는 데서 그의 문학세계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레니나는 내성적이며 사교성이 없는 버나드 맑스를 꺼려한다. 그 이유는 전체주의적 사회에서는 체제에 순응하는 것이 행복인데 그러지 못하고 자신의 자유를 추구하는 버나드의 자기모순에 대해 그녀는 부자연스러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버나드 맑스는 런던 신생아 부화조절 센터의 소장인 포스터에게 도전하고 저항하며 지적 우월감과 육체에 대한 열등의식의 이중적 갈등 속에서 벽지 아이슬란드로 전출을 당할 위기에 봉착한다. 포스터는 25년 전 뉴멕시코로 여행을 갔을 때 그곳에서 애인을 잃어버린 일이 있었음이 드러나는데 그 사건이 작품 뒷부분에 나오는 린다라는 여인과 그녀의 아들 존에 관한 이야기로 전환되면서 작가가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밝혀진다.

버나드 맑스는 레니나를 데리고 뉴멕시코의 인디언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여행을 간다. 그곳에서 기괴한 장면에 혐오감을 느끼는 레니나에게 버나드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이에게 젖을 주는 모습, 소년을 채찍으로 때려 피를 흘리게 해서 뱀에게 뿌리는 노인, 풍년을 위해 기우제를 올리는 원시 신앙의 축제행사 등을 목격하는 중에 그들은 아주 늙어 흉한 모습을 하고 있는, 25년 전에 포스터의 애인이었던 린다과 그녀의 아들 존을 만난다. 이 부분에서 비안간화된 기계문명적 전체주의적 세계에 대한 대칭으로 인디언 원시인들의 가치윤리관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베타계급의 여인이었던 린다로부터 과거 지나온 인생의 역경과 고난을 듣고, 존으로부터 원주민인 포페가 자기 어머니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어머니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타당하고 고생하는 것에서 애증의 갈등을 체험한 이야기를 듣는다. 어머니가 자기의 고향의 아름답고 행복한 문명세계에 대해 말할 때마다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존은 어머니가 글을 가르쳐주어 서구 문명세계의 책과 셰익스피어 전집을 읽는다.
인디언들의 생식능력과 불임이 문명으로 여겨지는 서구 문명사회의 갈등구조가 대비되어 존을 혼란시키기도 한다. 어머니에게서 들은 ‘멋진 신세계’의 서구 기계문명에 대한 동경과 인디언들의 종교, 신화가 가지는 자연적 은밀한 가치의 두 세계관 속에서 존은 성장한다. 그는 셰익스피어 전집을 읽으면서 말이 가지는 어떤 마력을 느끼며 어머니와 성관계를 가지고 있는 포페를 살해하려고도 하고 어느 노파에게 질그릇을 만드는 법도 배우면서 행복을 느낀다. 인디언들의 성인 의식에 참여했다가 백인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며 벼랑 끝에서 피를 흘리며 서 있다가 달빛 속에서 시간, 죽음 그리고 신에 대한 어떤 커다란 깨달음에 도달한다.
어려서부터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셰익스피어 작품은 과학기술의 비정상적 과잉발달로 인한 인간성 상실의 비극적 상황을 치유할 수 있는 대칭적 처방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올더스 헉슬리의 인간의 상상력과 예술적 직관에 대한 철저한 믿음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차단되고 따돌림 받으면서 살아온 존은 버나드 맑스와 비슷한 소외의식의 인물로 그려지기도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 빗대어지기도 하는데 런던으로 가겠느냐는 질문에 "오, 멋진 신세계!"라며 경탄하고 레니나에게 어떤 연정을 느끼기도 한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작품 속에서 나오는 남녀간의 욕정과 본능을 연상하면서 누워 잠들어 있는 레니나에게 성적 흥분을 느끼기도 한다. 린다와 존을 런던으로 데리고 온 버나드 맑스는 소장 포스터의 과거 비밀을 폭로하여 자기를 벽지로 전출시키려는 소장에게 복수 하고자 한다.
포스터는 존이 아버지라고 부르자 당황해하며 어쩔 줄을 모르고 사실관계를 부인하다 다른 사람들의 조소를 받으며 소장직을 사퇴한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린다와 포스터의 자연스런 성관계에 의해 태어난 존재라는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는 인조인간들에게 유명한 존재가 되지만 린다는 오히려 처량한 신세가 되어 소마를 과잉복용하면서 환각상태에 빠진다. 존을 데리고 와 그를 이용하여 기세를 얻는 버나드 맑스는 존이 문명세계에 대해 경외감이나 존경심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영혼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고 지역 총 지배자인 머스타파 몬드에게 보고한다.
학교를 방문하는 존은 셰익스피어 대신 감정공학이나 죽음 예비교육, 혹은 후각, 시각, 촉각을 살린 음악 교육이 시행되는 것을 본다. 야만인으로 취급되는 존은 레니나에게 연정을 느끼지만 그녀가 육체적으로 접근하면 오히려 피하고 셰익스피어 작품 속에서 위안을 느낀다. 버나드 맑스가 제멋대로 사람들을 초대하여 자기를 구경시키려고 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존에게 레니나는 후각, 촉각, 시각의 효과가 생생하게 연출되는 영상물과 감성공학의 연회장에서 사랑을 고백하려고 하지만, 대중들에게 막강한 호소력을 지닌 인기가수에게 레니나가 끌려 나가자 버나드 맑스는 낙심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고 자기가 로미오이고 레니나가 줄리엣이라고 여기면서 자기 위안을 얻는 존은 왓슨과 친해진다. 왓슨도 <로미오와 줄리엣>이야말로 탁월한 감성공학의 산물이라고 공감을 표시하는데, 이는 셰익스피어로 대변되는 문학의 본연적 가치와 힘이 첨단생명공학에 비해 얼마나 더 큰 것인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레니나는 또 소장 포스터와 대화를 가지면서 존을 생각하다가 어느 병 속에 태아에게 주사약을 주는 것을 잊어버려 결국 그 아이가 22년 8개월 4일 후 어떤 질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게 한다.
여러 남자들과 관계를 갖지만 만족을 얻지 못하고 원시인인 존만을 애타게 원하는 레니나는 결국 그를 찾아가 구애하고, 존은 남자가 결혼하려면 사자나 늑대의 가죽을 여자에게 주고 관계를 갖는다는 인디언 관습을 말하면서 그녀의 육체적 접근은 거부하면서 셰익스피어의 싯귀절을 읊어대며 자신을 잔인하게 때려 상처를 입히는 광란적인 심리상태를 보인다. 이는 자기 어머니의 성관계를 목격한 뒤 생긴 성혐오증에 따른 심리적 자학증세인지도 모른다. 그는 44세의 나이로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는 어머니 린다를 찾아가 옛날 일을 회상한다.
그의 뇌리에는 어머니가 들려주던 문명화된 저 다른 세계의 아름다운 공상의 이미지가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었지만 어느새 포페와의 추악한 장면들이 대신 자리를 차지하는 모순적 애증의 심리상태에 빠진다. 포페에 대한 질투심에 린다를 마구 흔들어 숨을 못 쉬어 죽게 만든 후 존의 울부짖는 통곡이 병원에서 평안한 죽음의 현장 교육을 받으러 온 아이들과 간호원들을 놀라게 만든다.
어머니가 죽은 뒤 일과를 끝마치고 소마를 배급받기 위해 병원 현관에 모여 웅성대는 똑같은 모습의 인조인간 162명에게 존은 소마는 행복을 주는 약이 아니라 독약이라고 외쳐댄다. 그는 자기가 그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기 위해 왔다며 노예가 되기 싫으면 인간성을 회복하고 진정으로 멋진 신세계를 건설해야 한다고 부르짖다가 대중의 분노를 사 공격을 받고 폭동진압 경찰에 체포되어 맑스, 왓슨과 함께 서유럽 통치자몬드에게 끌려간다.
몬드와의 대화에서 존은 문명이 좋은 점도 있고 아름다운 점도 있지만 자신은 그것이 싫다면서 셰익스피어의 시가 감정공학의 어느 첨단 예술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한다. 그에 대해 몬드는 행복은 안정 속에서 찾을 수 있다면서 하층 계급일수록 만족해하고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자기가 시행한 두 실험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하나는 사이프러스 섬에서 22,000명의 최고급 부류의 알파형들을 정착시켜 농업과 기타 산업에 종사시켰으나 결과는 실패였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아일랜드에서 150년 전에 행한 실험으로 노동시간이 짧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에게는 너무 많은 여가는 소요와 불안을 야기시켜 해롭고 과학이나 예술은 행복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됐다며 독재자적인 가치관을 표명한다.
그의 논리에 의할 것 같으면 행복이란 진리보다 더 다루기 어려운 것이고, 지식과 진리가 최고의 선으로 여겨졌던 과거와 달리 새로운 세계의 통치철학은 진리나 미로부터 안락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는 행복이 우선하는 통치질서의 기본이념은 무한한 과학탐구의 자유가 통제되어 유토피아의 세계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탄저병 폭탄이 나왔던9년 전쟁 후 행복을 위해 예술, 과학, 종교가 희생되었으며 이제 모든 것은 쾌락을 주는 인기가수의 위력에 달려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존은 사람이 늙어갈수록 종교적 감정이 더해지고 종교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항상 젊음의 욕망이 좌절되지 않고 오락의 대체물이 있으며 소마에 의한 쾌락이 보장된 현대의 사회질서 속에서 신이 있겠느냐는 몬드의 질문에 아마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존은 인디언 원주민의 마을에서 공동 사회로부터 차단되는 고독한 생활을 했지만 런던에 와서부터는 공동생활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고독해질 수 없는 역전된 상황에서 이중의 고통을 겪는다. 그는 <리어왕>을 인용하면서 “문명인은 불쾌한 것을 참을 필요가 있으며 자기 부정과 순결을 중요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존은 불편한 삶을 원하고 신과 시를 원하며 자유와 선과 죄 그리고 위험을 원한다면서 문명사회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한다.
맑스와 왓슨, 그리고 존은 개인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말하며 이 문명세계를 떠나게 해달라고 몬드에게 청원한다. 더이상 뭇사람들의 노리개나 실험대상이 되지 않고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존은 언덕 위의 등대 옆에 숨어, 잠도 자지 않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인디언 원주민의 수호신들과 예수에게 기도하면서 자기수련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고독한 상태에서 행복을 느끼면서 문명생활에 오염되지 않고 숲 속에서 자급자족 생활을 하면서 그는 기쁨을 얻는다. 불쌍했던 어머니도 생각하고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뉘우치면서 자신을 마구 채찍질하면서 참회의 시간을 갖는다.
사흘째 되는 날, 어떻게 알았는지 기자들이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한다. 어머니의 모습과 겹쳐 그의 머릿속에는 그가 매춘부라고 욕을 했던 레니나의 모습이 떠오르고, 그것에 고통을 느낀 그는 가시덤불에 넘어져 허우적대면서 실성한 것처럼 자신을 마구 때린다. 망원렌즈로 촬영된 이 광경이 ‘서레이의 야만인’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흥행에 성공을 거두자, 사람들은 떼를 지어 그에게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들로부터 온갖 야유와 조롱을 받으면서 존이 원숭이 취급을 받는 중에, 레니나가 헬리콥터를 타고 와서 애원하듯 그에게 접근하지만 그는 채찍을 휘두르며 거절하고 자신을 마구 후려친다. 그러자 그곳에 있는 모든 군중들이 그를 따라 서로를 때리면서 야단법석의 노래와 난장판을 치른다. 자정이 넘어 모두가 떠나간 뒤 소마를 먹고 관능의 발작상태에 지쳐 잠들어 있던 존은 깨어나 “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을 외치다가 그날 저녁 천장에 목매어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멋진 신세계>에는 문학과 과학의 화합적 절충과 조화를 작가 정신으로 하고 있는 올더스 헉슬리의 문학관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몬드가 작가의 한 측면을 대변하고 있다면 존도 다른 대칭적 측면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인디언의 자연 환경 속에서 셰익스피어의 정신을 교육받은 존은 예술의 순수성을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상상력의 자의적 파괴를 상징하는 자살을 기도하는데, 그의 자살은 기계문명과 인간성 보존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점을 나타낸다. 이 작품의 내용은 작가가 600년 뒤를 예견하고 쓴 것이지만 실은 100년 뒤에도 가능한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는 자신의 외증조부인 매슈 아놀드의 주장, 즉 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상상력, 그의 본연성과 가능성을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문학적으로 실현시킨 것이다. 이것은 과학이 모든 것의 만병통치약이라 주장했던, 올더스 헉슬리의 할아버지인 토마스 헉슬리의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철학자는 통치자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플라톤이 주장한 것에 대해 올더스 헉슬리는 예술가, 특히 문학가가 새로운 세계 질서의 주동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작가정신을 이 작품 속에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는 1963년 69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소설, 시, 단편집, 심리학, 철학, 과학, 사회비평, 문명비평 등 무려 30권의 책을 내면서 백과사전적 박학다식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독설가적인 매서운 비판의 날을 세우는가 하면 장난기 있는 위트와 유머의 대가이기도 하였으며, 진리는 시궁창 바닥에 있다는 아주 서민의식적인 인생관과 문학관, 용기 있는 실험정신을 가지고 인간을 탐구한 인간학의 거두었다. 때로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간의 오만함 때문에 미래인류의 파멸을 예고하는 어두운 예언자적 작품을 많이 남겼지만 그는 그 대안을 인간성의 회복, 동양정신, 그리고 이율배반적 상대요소를 아우르는 포용적 만년철학의 개념으로 완성하여 제시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풍자, 이념과 사상의 매체로서 문학을 구사하여 기술발달과 과학의 지나친 남용으로 인한 서구문명의 몰락과 파괴상을 적나라하게 그려 우리에게 깊은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는 중용의 가치를 통해 모든 모순적 대칭 관계를 지양하여 조화 있는 질서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했다. 극단적 행태를 벌이고 있는 팽창주의적 세력에 의한 오만과 압력 앞에 깜빡거리는 오늘날 서구문명의 위기적 상황을 생각할 때 올더스 헉슬리가 던지는 예언자적 메시지는 우리가 21세기를 살며 커다란 지표와 귀감으로 삼아야 될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가 서구문명의 몰락에 대한 치유책을 찾고자 했던 동양적 가치관과 신비주의적 정신세계의 오묘함에 대한 우리 자신의 새로운 일깨움과 본연의 자세로 되돌아오는 원시반본(原始返本)의 필연적 사유가 여기에 있다.
과학기술 중심의 오만한 문명은 결국 인간파멸의 재앙을 불러온다는 그의 문명사적 시각은, 서구문명과 사상에 대한 비판에 있어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의 견해와 상통하고 있다. 프롬은 그의 <사랑의 예술>이라는 저서에서, 서구 현대 문명은 시장경제의 원리와 소비지향의 대량생산으로 인해 인간이 규격화된 상품처럼 취급되어 소외감, 불안, 노이로제등의 병적 상태를 야기시켜 놓았고, 그 단절감의 병적 상태가 극복될 수 없을 때 기계 같은 자동인형의 존재로 전락한다고 주장한다. 정서적, 감정적으로 미성숙되어 사랑할 줄 모르는 현대인이 생성되고 신뿐만 아니라 인간 스스로에 대한 사랑의 해체는 지나친 자기도취적 성향을 유발하여 사물의 실체에 대해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합리성이 결여되어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여 본절을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의 실천으로 프롬이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자발적인 자아의식 개발, 참선과 단전호흡 등의 명상법을 통한 정신집중 훈련, 교육제도의 개선 등은 헉슬리의 주장과 흡사하다. 프롬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 세계와 인류에 대한 믿음을 개발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생산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라고 강조한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이 기반을 둔 합리적 신뢰로서 <사랑의 예술>에서 현대문명의 위기에 대한 처방을 찾고 있는 프롬은 또 한편으로 셰익스피어 같은 예술가들의 상징언어가 현대인에 의해 잊혀진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 점에 있어서도 헉슬리와 유사하다. 꿈, 신화, 동화에서 사용되는 상징언어는 영혼과 정신의 내적 경험을 감각체험처럼 외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시간과 문화의 벽을 초월하는 인간의 심오한 보편적 공통어라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축적된 난해하고 신비스러운 주제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이용, 사물의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인생과 우주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 올더스 헉슬리의 문학적 목표였다. 현대 문명을 비판한 그의 작품 <멋진 신세계>에서 몬드와 존으로 각각 대변되고 있는 과학 기계주의에 입각한 물질문명과 인간의 예술적 직관과 상상력에 입각한 인간성 회복이 조화로운 화합과 중용을 이루어야 한다는 철학이 깔려있다. 과학이 잘못된 방향으로 남용될 때 발생하는 부작용에 대한 과학이 잘못된 방향으로 남용될 때 발생하는 부작용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멋진 신세계>는 기술 발달에 의한 이상국가 건설은 하나의 허구이며 정반대의 파국적 결과를 몰고 온다는 역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발전에 대한 몇 가지 논고>에서 헉슬리는 자연을 정복하려는 노력의 결과가 저능아와 기형아의 출산으로 나타남을 지적하면서 그것은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천벌이며 유린당한 자연이 가져다주는 복수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 개개인의 품성과 타고난 소질이 희생되는 생물학적 진보는 인간이하의 저차원으로의 후퇴이며 과학기술의 발전이 바로 인간 발전은 아니며 오히려 원시적 인간이 더 행복하고 덕이 있으며 창조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특유의 백과사전적 지식 가운데 과학지식을 동원하여 기계 문명이 가져올 끔직한 미래상을 그려 서구문명의 인간성 말살을 예언한 헉슬리는 차츰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인간존재의 본질과 인간의 본연성에 대한 철학적 탐색을 시도하면서 동양의 심오한 정신문화로 방향을 돌렸다. 헉슬리는 <지식과 깨달음>이라는 글에서 지식보다 깨달음을 더 우선적으로 치면서, 깨달음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개념체계인 지식의 축적에서 오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경험에 대한 자발적이며 직접적인 통찰력이라고 말함으로써 서양철학보다도 동양철학에 더 근접하는 사상의 면모를 보인다. 인간의 커다란 유산이면서도 한편으로 치명적인 해가 될 수 있는 말에 의존한 지식교육은 인간의 자아실현을 방해한다면서 언어의 횡포와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해방될 때에만 직관적인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노장사상이나 우파니샤드 같은 힌두교 사상, 불립문자의 선불교사상, 에크하르트 같은 신비주의자들의 역설의 논리를 자주 예로 들면서 스스로를 안다는 것은 총체적 인식이며 진리는 가르쳐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쾌락적 주지주의 입장에서 신비주의 입장으로 바꾸면서 정신세계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 헉슬리는 인도를 방문하여 불교나 힌두교의 교리들을 섭렵하고 가톨릭교의 신비주의자들에게도 심취한다. 동서양의 역사적 성인, 예언가들의 명언을 수집하고, 그들의 다양한 관점을 총망라, 절충하여 그의 만년철학의 개념을 창조하여, 인간의 신에로의 보편적 접근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그의 이론 탐구는 모든 주요 종교의 공통적인 원리, 즉 진리는 보편적이며 신은 하나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초심령 과학에까지 미치고 있다. 특히 인도의 요가사상과 중국의 대승불교, 선사상에 몰입하여 그들의 본질적 자연관과 우주관을 여러 논문 속에서 해명했고 소설 속에서 구체화시켜 묘사했다. 이런 그의 신비주의 사상 속에는 존재와 부재, 말과 침묵, 빈 것과 가득 찬 것 등의 모순 사이에서 역설적 진리를 깨닫는 불교적 인식론이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잭크린 브리쥐먼이 편집한 헉슬리의 신에 대한 수필 모음집인 <헉슬리와 신>이라는 책은 헉슬리의 여러 종교에 대한 비교 연구, 특히 동양철학과 신비주의 그리고 종교와 다른 여러 제반 문제와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깊이 있는가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달마의 선사상을 이은 육조선사 혜능에 대한 일화라든가 선에 대한 글들은 서구인으로서 동양사상에 깊은 이해를 가진 그의 철학적 경지를 잘 드러낸다. 올더스 헉슬리의 문학정신은 후기에 신비주의적 경향으로 기울지만 전반적으로는 과학적 인도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이율배반적 모순적인 인간 존재에 대한 아주 노골적인 분석으로 인간이 신의 경지와 동물의 차원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부각시킨다. 헉슬리는 인간 존재의 본질은 사랑에 있음을 그의 모든 작품 도처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 사랑은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의 양분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육체적 관능적 사랑에 대한 주인공들의 집요한 추구는 때때로 비정상적이기까지 하다. 지나친 관능의 포로가 되어 애욕에 집착할 경우 나타나는 비인간성을 폭로하기도 하고 그 유혹에 넘어가는 인간의 연약함도 부각시켜 인간 조건의 부조리성을 주제로 삼는 것이다.
60세인 억만장자 스토이트가 22세의 버지니아에게 느끼는 육체적 집착, 버지니아를 둘러싼 오비스포와 그의 조수피트의 경쟁의식, 유스타스의 관능적 애정행각과 세바스천의 젊었을 때 가정부와의 정산, 수녀 같은 금욕주의적 아내에게 만족을 못 느끼는 월이 성욕의 노예자가 되어버린 바브스와 벌리는 외도 등은 부정적으로 다루어지지만 존과 릴리안, 풀과 룰라의 관계는 긍정적으로 묘사되어 그것과 대조를 이룬다. 특히 38세인 대학교수 풀은 어머니의 과잉보호 때문에 여성에 대한 복합심리를 보여오다가 죽음의 위기에 몰리를 룰라를 만나 신성한 사랑의 감정을 느껴 새로운 인간으로 변신, 용감히 감시망을 뚫고 자유를 찾아 도피함으로써 사랑의 위대한 힘을 실증한다.
헉슬리는 D.H. 로렌스의 성 해방과 인간 본연성 회복에 깊이 공명하여 그와 가까이 교류했고 로렌스의 모든 편지들을 모아 편집했으며 로렌스가 죽을 때에는 임종을 지켜보고 로렌스의 여인, 프리다와 많은 대화를 가졌다. 시간이라든가 욕망, 증오, 개인의 제한된 성품으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하는 그의 초월주의적 사상은 로렌스의 문학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면을 가지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문학정신은 양면적 시각의 견지 속에서 반대적 두 요소를 중용으로 화합시켜, 인간이 동물과 신의 간극 속에서, 그 본연성을 지키면서 자멸하지 않고 인간의 유산인 언어를 통하여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동양의 신비주의가, 서양의 과학이 적절히 사용되게 보장하고 동양의 삶의 예술이 서양의 에너지를 순화시키고, 서양의 개인주의가 동양의 전체주의를 완화시키는 것을 작가인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여겼다. 올더스 헉슬리는 동양과 서양의 상호보완적 화합에 의해 현대문명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야 한다는 자연친화적 인본주의 사상을 시종일관 실천한 작가였다.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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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유명한 책이다. 영화로도 드라마로도 뮤지컬로도 연극으로도 ...
참 많이 공연되는 작품중의 하나이다.
책을 보지 않았어도 이야기는 들어본 이름이다.
그리고 인간의 내면속의 선과 악에 대한 묵직한 주제를 간단하게 다루면서도 철학적이고 종교적이기까지한 책.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서 예전과는 또 다른 생각들을 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시대적 상황에서 읽을 수도 있고, 현대 개개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심리적인 요소, 계층화 되어가는 그 시대와 지금의 시대에 공통적으로 적용해 볼 만한 것도 있고....

나는 18XX년에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태어난데다 근면함과 지혜로움, 그리고 선함까지 갖추고 있었기에 언제나 주위 사람들의 칭ㅊ찬을 들으며 성장했다. 따라서 내가 모든 면에서 명예롭고 선택된 미래를 보장받았으리라는 걸 미우러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나였지만 내게는 큰 결점이 있었다. 나는 때로 퇘락의 유혹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내 경우에는 그렇게 쉽사리 유혹에 빠져들 수 있다는 사실이 남들 앞에서 내 자신을 내세우고 싶어하는 오만함과 상충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과도 어울릴 수 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그때부터 나는 내 욕망을 숨기기 시작했다.  97

난 철저한 이중인격자였지만, 절대 위선자는 아니었다. 난 내 안에 있는 두 가지 인격 모두에 대해 철저하게 충실했다.  98

난 궁극적으로 인간의 내면에는 각양각색의 서로 다른 독립된 자아들이 서로 다투며 공존하고 있다고 믿는다.
나는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도덕성으로부터 인간의 근본적이고 철저한 이중성을 깨달았다. 내 의식세계에서 두 가지 본성이 다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둘 중 어느 하나가 더 나다운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사실 그런 다춤이 있었던 이유는 내가 두 가지 본성을 다 극단적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과학적 발견을 통해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생길 수 있는 진지한 가능성이 제기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 요소들을 분리한다는 생각을 자주 떠올리며 재미있어했다. 만약 각각의 자아를 서로 다른 육체에 거하게 할 수 있다면, 인생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악한 자아는 자신의 짝인 선한 자아의 이상이나 후회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길을 갈 것이고, 선한 자아는 옳은 길을 끈기있고 안전하게 걸어갈 것이다. 선한 자아는 착한 일을 하며 즐거움을 느낄 것이고, 더 이상 이질적인 악의 유혹을 받아 부끄럽고 후회되는 일을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런 극단적이고 이질적인 이란성 쌍둥이가 의식 세계라는 고통스런 자궁 안에서 끊임없는 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인류에게 있어서 저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둘을 분리시킬 것인가?  99

사람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육체라는 요새를 뒤른들고 지배할 수 있는 약이라면, 극소량이라도 더 복용하거나 약을 적절한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먹지 않는다면,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불안정한 육체가 형테도 알아볼 수 없이 파괴될 수도 있다.  101

내가 에드워드 하이드의 육체를 하고 있을 때, 나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항상 눈에 띌 정도로 육체의 괴로움을 느끼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인간은 선과 악이 뒤섞인 존재인 데 반해 오직 에드워드 하이드만이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백퍼센트 순수한 악으로만 된 존재여서 그럴 것이다.  103

때때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몸과 평판에는 피해가 가지 않게 하면서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서 불한당들을 고용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스스로의 쾌락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경우는 내가 처음일 것이다. 사람들의 진심 어린 존경을 받으며 공인으로 살면서 순식간에 학교 갔다 온 아이처럼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바다같이 넓은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철저하게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기에 안전하게 그걸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간전히 바라는 쾌락은 이미 말한 것처럼 고상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106

내 영혼에서 비롯된 이 대리인이 자신의 맘대로 쾌락을 추구하도록 내버려둬보니 그자는 말할 수 없이 사악했고 극악부도했다. 그의 모든 행동과 생각은 지극히 이기적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면 할수록, 그는 짐슨 같은 탐욕을 더욱 크게 드러내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돌로 만들어진 자처럼 무모했다. 헨리 지킬은 에드워드 하이드의 행동에 여러번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지만, 처한 상황이 일반적인 법칙을 가지고 말할 문제가 아니었기에, 점차 양심의 가책이 무뎌졌다. 무엇보다 죄를 짓는 것은 지킬이 아닌 하이드인 것이다. 지킬운 전혀 악해지지 않앗다. 그가 다시 지킬이 되었을 때, 그의 선한 성품은 전혀 손상되지 않은 것 같았다. 지킬은 심지어, 가능한 경우에는, 하이드가 저지른 악행들을 바로잡으려고 분주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지킬은 점점 죄의식이 없어졌고, 그의 양심은 마비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107

어제밤 분명 헨리 지킬의 몸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에드워드 하이드의 모습으로 깬 것이다.  109

분명하게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전이해가는 문제를 만난 것이다.  111

지킬은 뜨거운 화로를 머리에 이고 있는 것 같은 금욕이라는 괴로움을 겪어내야 하지만, 하이드는 자신이 뭘 잃엇다는 것조차 인식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의 경우도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더 선량한 측면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지켜내는 내면의 힘이 부족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난 나이들고 불만도 많지만, 친구들에 둘러싸여 선량한 희망을 가슴에 품는 의사를 선택했다. 그리고 내가 하이드의 가면을 쓰고 즐긴 자유, 상대적인 젊음, 가벼운 발걸음, 뛰는 맥박과 은밀한 쾌락 같은 것들에 단호한 작별을 고했다. 이렇게 결정은 했지만, 아마 무의식중에는 어느 정도 미련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난 소호에 있는 집을 포기하지도 않았고, 에드워드 하이드의 옷들도 내 밀실 안에 그대로 남겨뒀기 때문이다.  112

시나브로 처음 가졌던 경계심이 흐릿해져갔다. 양심적인 삶에 대한 칭찬도 차차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하이드가 자유를 갈망하며 몸부림치는 것처럼, 나도 주체할 수 없이 왔다갔다하는 마음과 갈망 때문에 괴로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 도덕심이 약해진 때를 틈타, 난 다시 변신하는 약을 만들어서 삼키게 되었다.

약을 들이켜는 순간, 난 완전히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악을 향해서 더더욱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내 불행한 피해자가 정중하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에도, 나는 참을 수 없는 조급함에 사로잡혀 영혼이 송두리째 뒤흔들렸던 것이라 생각한다.  113

난 스스로 약을 마심으로써 내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본성을 다 벗겨버렸다.

자신의 범죄에 흡족해하는 마음으로 앞으로도 저지를 또다른 범죄를 가벼운 마음으로 궁리하는 한편, 누가 복수하러 따라오고 있는 건 아닌지 귀를 기울이며 긴장하는 등 마음이 분열되어 거리르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114

이제부터 하이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난 이제 내 존재의 좀더 나은 자아가 되어 사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맘을 정하고 나니까 기쁨이 밀려왔다!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새로운 삶에 대한 제약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결심을 굳게하고, 지금까지 자주 드나들던 문을 잠그고, 그 열쇠까지 구두 뒤축으로 밟아버렸다!  115

참회하는 예리한 양심의 날이 무뎌지자, 오랫동안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지내다가 최근에야 겨우 묶어 놓은 내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저질이 자유를 부르짖기 시작했다.  116

난 아주 자연스럽게 타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117

날 괴롭히는 것은 교수대에 서는 공포가 아니라 하이드가 돼버리는 것이었다.  120

난 다시 한번 하이드의 격정에 사로잡혀 마음껏 농락당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 자신으로 돌아오는 데 이전에 마신 양의 두 배가 필요했다.  121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건 바로 다른 자아에 대한 공포엿다

하이드의 힘은 지킬이 약해져 있을 때, 더욱 강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지킬과 하이드를 갈라놓는 증오도 지금은 확실히 양쪽에 같은 정도로 있었다.  122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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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단어는 참 어려워 보인다. 실제로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사람은 철학적인 생각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한다. 물론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야기가 틀려 지겠지만...

누구나 공감을 하면서도 쉽게 접근하지는 못하는, 뭔가 벽이 있는 느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지 않을까.
성찰하는 삶.. 대체 성찰하는 삶은 어떠한 삶인가... 막연하게 느낌은 오지만 뚜렷하게 무엇이라 표현하기 힘든..
사유.. 깊은 생각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 가야하는지..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막막함.

절대 철학은 우리에게서 가깝지 않다.
허나 철학은 우리에게서 매우 가깝게 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하나하나의 모습에서 무언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부터가 철학이 아닐까... 우리는 선택의 결정의 순간에 고민을 하게 된다.
특히나 자신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선택이라면 고민을 깊이 하게 된다.
고민... 고민이 생각이고 인생을 위한 고민이라면 지나온 과거와 가까운 미래에서 먼 미래까지의 고민을 한다는 것..이것은 성찰이기도 하고 사유이기도 한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 생활에 밀접히 가까이 있는것이 철학인 것이다.
물론 그런면에서의 철학은 자주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에 문제가 될지는 몰라도..

저자는 철학적 사유에 대해 자신의 지식과 사유를 통해 설명해 나간다. 그리고 우리가 주변에서 친숙하기에 별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들 몇가지를 통해 철학적인 생각을 해볼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있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만나보는 시간을 마련해 주고 있다.
여러 철학자들의 말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챕터의 말미에는 독자가 더 읽어봄직한 책들까지 소개해 주고 있다.

철학 .. 이것에 조금은 더 다가서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책을 시작하며
제 이야기가 농담이 되느냐 진담이 되느냐는 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입니다.  5
철학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으려면, 한대 그랫던 것처럼 그것은 삼에 대한 성찰이자 기록이어야만 합니다.
이 책이 무엇보다도 만남에 대한, 그리고 만남을 위한 것이라고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이 책을 통해 저는 철학과 삶이 만나는 오작교를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6

프롤로그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음미하고 싶을 뿐입니다.  12
철학적 사유란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삶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자명한 것들을 낯설게 만드는 것.  13
음미되지 않은 삶은 맹목적인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14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후 회한에 가득 차서 사랑에 대해 반문해보는 것은 너무 때늦은 일이 아닐까요? 우리는 사랑의 가치와 그 의미에 대해 한번쯤 반문해보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점이 바로 우리에게 철학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15
철학은 우리에게 '내가 나중에 알게 될 것을 지금 알 수 있게' 해주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철학적 사유가 우리에게 불편함과 당혹감을 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불편함을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16
칸트(I. Kant 1724~1804)의 용어를 빌려서 말해봅시다. 
철학이 없는 삶이 맹목이라면 삶이 없는 철학은 공허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17

제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
1. 사유를 발생시키는 조건들
사실 우리는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22
생각은 오직 기대하지 앟았던 사건(event)과 조우할 때에만 발생하는 것입니다.  23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낯섦이 찾아오는 바로 그 순간이 우리의 생각이 깨어나 활동하기 시작하는 시점.  25
'인간이란, 설령 순수하다고 가정된 정신이라 할지라도, 참된 것에 대한 욕망, 진실에 대한 의지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진실을 찾지 않을 수 없을 때에만, 그리고 우리를 이 진실 찾기로 몰고 가는 어떤 폭력을 겪을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진실을 찾아 나선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들뢰즈(G. Deleuze 1925~1995)  28
생각이 어떻게 우리 자신에게 찾아오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예외적인 '사건'의 발생, 그 사건과의 우연한 '마주침' 그리고 그 사건의 기호에 대한 '해석'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진정한 생각..  29
들뢰즈는 이런 낯섦의 의미를 찾는 것을 '생각'이라고 여겼습니다.
불편함을 해소하려는 어쩔 수 없는 의지... '생각'이란 것은 낯섦과 불편함을 친숙함과 편안함으로 바꾸려는 자기 배려라는 것이죠.  30
죽음은 크게 세 종류로 우리게게 경험됩니다. 첫째는 '1인칭적 죽음'으로서, 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2인칭적 죽음'으로서, 너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3인칭적 죽음'으로서, 익명적인 그들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 죽음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불편하고 낯설게 느껴집니까? 즉 어느 죽음이 가장 여러분에게 고통을 줍니까?  32
왜 아내의 밤늦은 귀가는 하나의 사건이 되어 나의 뇌리를 지배하는데, 옆집 아주머니의 행실은 그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까요? 다시 질문해본다면, 왜 어떤 경우에 나는 사건의 의미를 찾는 사람, 즉 기호의 해석자가 되지만 다른 경우에는 그렇지 않고 단순히 무관심한 방관자가 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타자를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6
'특수성(particularity)' 과 '단독성(singularity)'.
어떤 책 한 권이 눈앞에 있다고 합시다. 그것은 인쇄소에서 찍은 많은 책 중의 하나입니다. 만약 이 책을 보다가 인쇄가 정확히 되어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우리는 당장 책을 구입한 서점에 가서 '동일하지만 다른' 책과 바꿀 것입니다. 이 경우 우리는 이 한 권의 책을 '특수한'것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특수한(particular)'이라는 표현은 바로 '동일하지만 다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책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첫 선물로 받은 것이라면 어떨까요? 책의 첫 번째 면에는 그 사람이 자신의 사랑을 표현한 글이 적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절대적으로 다른'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책을 보다가 앞서와 마찬가지로 책이 파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면, 우리는 서점에 가서 이 책을 다른 것으로 바꾸려고 할까요? 아마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바로 이 책을 '단독적singular)'인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39
타인을 사랑하는 데도 바로 이 두가지 태도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타인을 단독적인 존재로 사랑할 수도 있고, 아니면 특수한 대상으로 사랑할 수도 있으니까요.
어떤 것을 단독적인 것으로 만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사건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호'를 감지라혀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40

사건이 분출하는 기호는 분명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기호가 어느 한 방향의 의미만을 강제하지 앟고, 오히려 모순되어 보이는 여러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모순율(law of contradiction)  43
우리가 기호를 해독하려고 하는 것은, 그 기호가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내용을 동시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45
만약 어떤 기호에 하나의 의미만이 있다면 그것은 습관적으로 이해되는 것이지, 결코 우리의 생각을 강제하지는 못합니다. 사실 하나의 의미로 확정된 것은 더 이상 '기호'라고 부를 수도 없겠지요.  46
무의미는 바로 우리의 생각을 끌어당기는, 사건이 분출하는 기호가 가진 힘.
무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의미를 채우도록 강제하는 힘, 즉 생각하도록 만드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47

2. 철학적 사유와 인문학적 경험
삼단논법(Syllogism)
대전제 : 모든 인간은 죽는다.
소전제 :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결   론 :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51
삼단논법은 '철학이 무엇인지?' 혹은 '철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삼단논법의 순서대로 대전제가 먼저 떠오르고, 그 다음에 소전제가 떠로르고, 마지막으로 결론이 머릿속에 떠오르나요?  52
'질문자(puestioner)'의 마음속에서 삼단논법을 발견하려는 사유의 방향은, 전제와 결론이라는 순서와는 사실 대립되는 것이다.....다시 말해 질문자는 자신의 사유를 전제로부터 결론에 이르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결론으로부터 전제에 이르는 방향으로 진행시키기 때문이다.' <전통적 논리학의 그리스적 기초> 에른스트 갑(Ernst Kapp 1808~1896)  
캅의 주장에 따르면 삼단논법의 순서는 우리의 사유 순서와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54
삼단논법에서 중요한 것은 논증이 구성되는 순서, 즉 대전제→소전제→결론이라는 순서가 우리가 생각하는 순서와는 반대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55

철학적 사유란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선 어떤 것에 대해 의미 있는 주장을 내세웁니다. 만약 이것으로 그친다면, 우리는 철학적 사유를 했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주장을 지지해줄 수 있는 어떤 근거를 찾는 것이니까요.  56
'참된 철학자는 시대에 내재하는 불만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고, 사유와 생활에서 단순하고 정직하며, 따라서 이 말의 가장 깊은 의미로서 이해된 '반시대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다시금 가르쳐줄 수 있는 자이다.' <반시대적 고찰> 니체(F. W. Nietzsche 1844~1900)  62
철학은 '우리'라는 특정한 공동체에서는 수용되지 않더라도 앞으로 도래할 세계의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새로운 주장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철학은 진정한 철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참된 철학자'를 '반시대적'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65
철학이 지향하는 새로움은 한때의 일회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대에 내재하는 불만'을 예민하게 포착하여, 이 불만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향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65-66
'철학은 반시대적이며, 언제나 그리고 오로지 반시대적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바라는 것은 이 시대에 반하는, 도래할 시대를 위한' 철학이다.' <차이와 반복> 들뢰즈  67
반시대적인 철학은 끝없는 운동과 생성을 긍정하는 철학입니다. 생성이란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생성되기 이전의 상태나 생성된 뒤의 상태가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70
철학은 '지금-여기'를 비판적으로 다루지만, 또한 동시에 '아직은 없는' 세계를 꿈꾸는 학문입니다.  71
플라톤을 아리스토텔레스로 설명하거나, 데카르트를 스피노자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한 작업입니다. 이런 시도는 단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반복하거나 스피노자 철학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철학자를 고유명에 입각해서 사유하는 것,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철학 책을 읽어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73
참된 철학은 'now-here' 와 'no-where'의 사이에 있으려고 하는 의지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no-where'가 의미 있는 이유는, 그것이 'now-here' 를 반성하고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거리감, 혹은 낯섦을 우리에게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이 주는 조망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철학자들을 온전히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이 올랐던 봉우리에 직접 올라가 보아야만 합니다. 그들이 만들어준 조망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의 삶과 사유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주위에서 칭송이 자자한 철학자도 분명 있습니다. 이 철학자를 제대로 알면 우리의 삶을 잘 조망할 수 있는 시선을 얻게 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가 그 성장에 오를 수 있도록 그를 직접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철학자가 보았던 것을 직접 한번 살펴보기 바랍니다. 만약 그의 조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서둘러 내려오면 됩니다. 이런 과정을 몇 번 거치면 여러분 앞의 선배 철학자들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두 종류로 구분될 것입니다. 자주 올라가고 싶은 봉우리 같은 철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다시는 올라가고 싶지 않은 전망을 가진 철학자들도 있겠지요.  75-76
이런 훈련도 결국 여러분만의 산봉우리를 찾기 위한 연습에 불과하다는 점을 말입니다.  76

3. 철학의 은밀한 두 가지 흐름
'우발성(contingency)' 과 '필연성(necessity)'
일체의 다른 목적이나 필연성 없이 두 가지 사건이 만났을 때, 우리는 이런 사태를 '우발적이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필연성'은 이렇게 두 가지 사건이 만났을 때, 비록 겉으로는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어떤 모종의 질서나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80
서양철학사에 면면히 흐르는 상반되는 두 가지 사유 경향이 필연성의 철학과 우발성의 철학.  96
앞으로 과거의 철학자들을 읽어나갈 때, 혹은 여러분의 삶을 철작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할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할 사항입니다.  106
우리의 존재한 확고 불변한 필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여러분, 그리고 저 자신은 무한한 우발적인 만남의 결과, '....와.....와....'로 설명될 수 잇는 우연한 만남의효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결코 불안해하지는 말기 바랍니다. 이것은 괴로운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지금과는 또 다른 사람, 혹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생성될 수 있다는 축복 말입니다.  109


제2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4. 사랑 그리고 가족 이데올로기

"도대체 '사랑'이나 '가족'은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을까?" 이렇게 묻고 숙고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사랑과 가족을 우리에게서 낯선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어려운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가족'을 낯설게 만드는 작업이 우리의 일상적인 의지에 반한다는 사실입니다.  117
헤겔은 말합니다. 사랑은 두 사람의 통일이자, 그것에 대한 의식이라고 말입니다. 사랑 속에서 나는 타자와 '하나'라는 전체를 이룹니다. 그리고 나는 그 전체 속의 한 부분으로서의 나 자신을 의식하게 됩니다. 결국 헤겔의 말에 따르면 사랑은 기본적으로 '하나'에 대한 경험이자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9
'부부 사이에서의 사랑의 관계는 아직 객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사라의 감정(Empfindung)이 실체적 통일을 이룬다고는 하지만 이 통일은 아직 아무런 객관성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법철학 강요> 헤겔
헤겔의 말처럼 내가 하나라는 감정을 느낀다고 해서, 이것이 상대반으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이 점에서 헤겔은 결국 사랑이 유아론적일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잇다는 것을 은연중에 시인하고 있는 셈입니다.  120
결국 그의 사랑, 즉 '하나'로의 열망과 열정은 쉽게 성공할 수 없는 시도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122
'그는 감동과 애정을 갖고 집안 식구의 일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아마도 누이동생보다 그 자신에게 훨씬 더 강했을 것이다. 이처럼 공허하고 편안한 명상 상태에 있는 그의 귀에 새벽 세 시를 치는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그의 머리가 저절로 밑으로 푹 수그러졌다. 그리고 콧구멍으로부터 마지막 숨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변신> 카프카  125
카프카에게 가족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며, 오히려 가족이란 유기체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랑을 생산해낸다는 것입니다. 
카프카의 말대로 가족이 사랑을 만드는 걸까요? 아니면 헤겔의 말대로 사랑이 가족을 만드는 걸까요?  127
현대 프랑스 철학자 바디우(Alain Badiou 1937~ )는 '하나'라는 헤겔적 이념을 거부하면서, 사랑을 '둘'로 사유하려고 했던 중요한 철학자이다.
'사랑이란, 그 자체가 비-관계, 탈-결합의 요소 속에 존재하는 이 역설적 둘의 실재성이다. 사랑이란 그런 둘에의 '접근'이다... 사랑이란 것은 만남의 사건에 대한 충실성 속에서, 둘에 대한 진리의 생산이다.' <철학을 위한 선언>
바디우에 따르면 '둘'일 수밖에 없는 사랑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가족 논리에 포획되었거나 아니면 상대반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유아론적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따라서 바디우가 강조한 '둘'이란 진정한 사랑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종의 공리와도 같은 것입니다.  130
우리는 계속 그(녀)의 심연을, 그 무한성을 더듬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둘'이 아닌 '하나'라는 착각에 일순간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오만이지요. '아! 그(녀)는 키스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133
방법론적 고독이란 우리가 나의 '바깥'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침묵 속에서 나의 외부에 있다는 사실, 그래서 만약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자 은총이라는 사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진리이자 '둘'의 진리인 것입니다.  
바디우의 지적이 옳다면 우리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에서도,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사랑에서도, 그리고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사랑에서도 여전히 '둘'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남편과 아내는 자식을 독립된 개체로, 즉 '둘'의 요소로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단지 그들은 자식으로부터 자신들 혹은 자신들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봅니다. 이것은 결국 나르시시즘(narcissism), 즉 전형적인 유아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라는 나르시시즘에 빠지면 우리는 남편으로서 아내를, 아내로서 남편을, 어머니로서 자식을, 아버지로서 자식을 진정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둘'이라는 사랑의 진리를 반드시 배우고 몸에 익혀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느 ㄴ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또 그들로부터 사랑받기는 원한다면 말이죠.  136

5. 국가라는 가장 오래된 신화
'스톡홀름 증후군'의 메커니즘은 세 단계로 진행됩니다. 우선 인질들은 자신들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인질범들이 자신들을 해치지 않는 것을 고마워하며, 결국 그들에게 온정을 느끼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인질들은 자신들을 구출하려고 하는 경찰들에게 오히려 반감을 느끼게 됩니다. 경찰들이 자신들과 인질범들 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파괴함으로써 오히려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마지막으로 인질범들도 인질드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역류시킨 인질들이 자신들이 아니라 오히려 경찰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인질들과 인질범들 사이에 '우리'라는 기묘한 믿음의 공간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139
현재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인질들처럼 박정희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자행했던 억압과 탄압의 요소들을 대부분 잊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를 보릿고개를 없애준 사람,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우리 민족을 고질적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사람으로 기억하려고만 합니다.  141
박정희가 우리에게 각인시킨 국가주의라는 망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혹은 국가에 대한 스톡홀름 증후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국가를 사유할 때 발생하는 불쾌함을 견딜 필요가 있습니다.  143
'국가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며, 개인에 선행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국가는 전체이며 개인은 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국가만이 자족적인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144
'교환하기보다는 강탈하는 편이 빠른 길이다. 지속적으로 강탈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다른 적으로부터 보호한다거나 산업을 육성해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국가의 원형이다. 국가는 더 많이 그리고 계속해서 수탈하기 위해 재분배해줌으로써 토지나 노동력의 재생산을 보장하고 관개 등 공공사업을 통해 농업생산력을 높이려고 한다...그러므로 강탈과 재분배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교환'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일본정신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1941~ )  146
가라타니 고진의 분석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국가를 하나의 신적인 실체가 아니라 교환관계로 숙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47
'주종 관계란 사람들의 상호 의존과 그들을 결합시키는 서로의 욕구가 있기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은, 미리 그를 다른 사람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두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 루소  148
통치자가 이미 피통치자가 자신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우월한 힘을 가진 통치자와 그렇지 못한 피통치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부등가교환이 됩니다. 다만 '국가는 더 많이 그리고 계속해서 수탈하기 위해 재분배하는 것일 뿐입니다.'  148
피톤치자는 국가가 자신을 위해 여러가지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국가를 위해 세금을 내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바로 여기에 피통치자가 부등가교환을 등가교환으로 착각하게 되는 이유가 있지요. 
고진의 분석이 옳다면, 박정희는 자신의 독재 통치를 영구히 하기 위해 경제개발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49
국각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위해 존재할 뿐이라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국가와 국민 간의 관계는 마치 출산업자와 소 사이의 관계와도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49
'오므라들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퍼주어야만 한다.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주어야만 한다. 제거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높여주어야만 한다. 빼앗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만 한다. 이것을 '은미한 밝음'이라고 말한다. 유연하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법이다.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되고, 국가의 이로운 도구는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도덕경>  151
국가는 기본적으로 약탈의 역사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약탈만으로는 효과적으로 이윤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곧 자각하게 됩니다.  이제 피약탈자는 국민으로 변하게 된 것이지요.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이전에는 국가가 보호하는 일차적인 대상이 농민이었습니다. 국가의 힘과 부는 무엇보다도 농민의 농업생산력과 농민이 구성하는 무력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156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와 이제 국가의 논리는 자본의 논리와 결합됩니다. 국가가 수탈과 재분재의 대상을 농민이 아닌 자본가와 노동자로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57
다국적기억(multi-national enterprise)이 많은 미국의 경우 이들의 세계화로의 충동을 막을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권장해야만 합니다. 그들로부터 미국은 막대한 세금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지요.  161
세계화의 시대에 국가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자신의 모습을 더 효율적으로 바꾸고 있을 뿐이지요.  162

국가는 수탈과 재분재라는 역동적 교환관계로 유지되는 기구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핵심은 재분배라기보다 압도적 폭력을 바탕으로 하는 수탈이라고 말해야겠지요. 문제는 이렇게 수탈되고 있는 대다수 국민이 스스로 국가 없는 사회를 꿈꾸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나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162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스스로 강해져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자유를 양도해버리고 국가권력에 복종하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그런 메커니즘에 완전히 적응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자유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될 겁니다.  163
약육강식의 논리는 동물의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인간이 다른 동물과 차이가 나는 이유는 그럼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강한 사람에게 복종하지도 않고 약한 사람을 지배하려고도 하지 않는 자유인의 의지일 것입니다. 자신을 죽일 수는 있어도 자신의 자유를 빼앗지는 못할 것이라는 용기와 확고한 자유정신 말입니다.  166
약자 앞에서는 한없이 강해지고,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아직 많은 사람이 이런 야만의 상태를 문명의 상태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익숙한 것이라고 해서 항상 올바른 것은 결코 아니겠지요.  167

6. 살아 있는 형이상학으로서의 자본주의
화폐는 우리에게 교환의 수단인 것처럼 보이지만, 또한 교환의 목적이기도 하다. 돈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사려는 사람에게 화폐는 교환의 수단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품을 가지고 돈을 벌려는 사람에게는 분명 화폐가 교환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화폐는 단순한 교환 수단 그 이상의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화폐가 나의 손을 떠나는 순간 나는 무한한 가능성을 상실하고 이제 상품이라는 유한한 가능성만을 소유한 사람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제 화폐를 가진 사람이 주인 행세를 하게 되고, 상품을 가지게 된 사람은 상대적으로 노예의 자리에 위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아니라 자본이 주인 노릇을 하는 자본주의사회의 실제 모습입니다.  171
'화폐는 무엇이 자신으로 바뀌었는지를 노출하지 않기 때문에, 상품이든 상품이 아니든 간에 모든 것이 다 화폐로 전환 가능하게 된다.' <자본론> 맑스  172
화폐가 신성한 왕좌에 오르게 되자, 역으로 화폐가 아닌 모든 것은 이제 상품의 자리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맑스는 '인간의 상거래에서 제외되고 있는 성스러운 물건들' 마저도 이제 화폐에 의해 상품으로 전락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 성스러운 물건들에는 인간 자신도 예외 없이 포함됩니다.  173
자본주의 경제학 책을 본 분은 알겠지만, 여러분은 질적으로 차이 나는 독립적인 인격체, 즉 고유한 삶의 가치를 갖는 자유로운 주체로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구매자가 요구하는 상품으로 팔려야만 하는 '노동력'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애석하게도 여러분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대로 규격화되고 만들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하에서 여러분은 자신이 잘 팔릴 수 있도록 가꿔야만 합니다.
자본가의 구미에 맞도록 여러분의 상품 가치를 높이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174
그래서 맑스는 자본주의 시대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고 정의 했던 것입니다.  175

한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화폐를 편집증적으로 소유하려고 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굶어 죽어도 화폐를 쓰지 않고 오로지 화폐를 소유하려고만 하는 구두쇠, 즉 맑스가 이야기한 '화폐퇴장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176
'...자본의 운동에는 한계가 없다... 사용가치는 결코 자본가의 진정한 목적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이며, 어떤 하나의 거래에서의 이윤 역시 그러한 목적이 될 수 없고, 다만 이윤을 추구하는 끊임없는 운동 자체만이 자본가의 진정한 목적이 될 수 있다. 이 절대적인 치부에의 충동, 이 정열적인 가치 추구는 자본가와 화폐퇴장자(구두쇠)에게 공통된 현상이지만, 화폐퇴장자는 얼빠진 자본가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자본가는 합리적인 화폐퇴장자이다. 화폐퇴장자는 화폐를 유통에서 끌어내버림으로써 가치의 쉴 새없는 증식을 추구하지만, 보다 영리한 자본가는 화폐를 끊임없이 유통에 재투입함으로써 가치 증식을 달성하기 때문이다.' <자본론> 맑스  176-177 
왜 구두쇠는 얼빠진 자본가에 지나지 않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두 번째 비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본의 증식이 단지 유통 과정을 통해서만 유지된다는 사실입니다.  177
결국 자신이 가진 우월한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화폐를 가진 사람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암초를 오디세우스처럼 지혜롭게 잘 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 암초는 화폐를 유통 과정에서 빼내어 금고에 담아두려고 하는 '얼빠진' 생각이겠지요. 반면 두 번째 암초는 유통 과정에서 볼 수도 있는 손해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 암초를 현명하게 잘 피했다면, 여러분은 '영리한 자본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79

더 이상 잉여가치가 생기지 않는다면 산업자본은 마치 게걸스런 괴물처럼 다른 곳으로 먹이감을 찾아 이동해야만 합니다. 
저렴한 원료가 있고 값싼 노동력을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곳, 그리고 자신들의 제품에 대한 수요가 높은 곳이 있다면 산업자본은 그곳이 어디든 주저 없이 찾아갈 겁니다. 그래야 잉여가치가 발생할 수 있고, 따라서 생존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윌리엄 탭은 이런 게걸스러운 산업자본의 운동을 '부도덕한 코끼리'라고 비유했던 것입니다.  188
윌리엄 탭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이념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다음과 같이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계 상류층의 20%가 세계 GDP의 86%를 얻고 있고, 하위 20%는 고작 1%를 얻으며, 중간의 60%는 겨우 13%만을 얻는다. 전 세계 200대 부자들의 수입은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수조 달러나 늘어 두 배가 되었다. 세계 3대 부자의 자산은 가난한 48개국의 모든 소득을 합한 것보다도 더 많아 졌다.' <부도덕한 코끼리>  191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상품으로 그리고 화폐를 신으로 만드는 체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돈을 벌기 위해서 고단하게 보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언제 올지 모를 먼 훗날의 행복을 기대하면서 말이죠. 
우리 대부분은 돈을 벌기 위해서 더 힘든 일에 종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행복은 우리로부터 더 멀어지겠지요. 그러나 사실 자본주의 속에는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애초에 없었습니다. 단지 소비의 행복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애초에 없었습니다. 단지 소비의 행복, 소비의 자유만이 존재했을 뿐이니까요. 우리는 자신만의 삶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못합니다. 아니 그런 방법마저도 완전히 잊었다고 말해야 옳을 겁니다.  197
가난한 자를 보호하면 가난을 지속시킬 뿐이라는 궤변으로 그들은 자유주의 원칙을 고수하려고 합니다.  198
'새로운 봉건주의를 만들어내려는 자본의 뻔뻔함이 극도에 달한 이 시대에 세계적 금융기관, 초국적 기업 그리고 정부가 우리로부터 무엇을 약탈해가려고 하는지 잊지 않기 위해서 세계인권선언의 내용을 명심해야만 한다. 자본의 권리보다 인권이 더 중요한 것이다.' <부도덕한 코끼리>  199
자본주의에 맞선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맞서는 것과 같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용기 이전에 우리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지켜내야 하는 우리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우리의 후손까지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00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7.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
부처라는 말은 인도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의 '붓다(Buddha)'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영어로 '부디즘(Buddhism)'이라 불린다.
'붓다'라느 말은 '깨달은 자'를 의미한다.
"성불(成佛)하십시오!"라며 합장할때, 성불은 '부처(佛)가 된다(成)'는 뜻.  206-207
싯다르타가 깨달은 것은 유명한 사성제(四聖諦)입니다. '사성제'는 글자 그대로 '네 가지(四) 성스러운(聖) 진리(諦)'를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것은 '고통' , '집착' , '소멸' , '방법' 즉 '고집멸도(苦集滅道)'로 정리될 수 있는 네 가르침입니다.
네 가지는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불가치하게 '고통'이 찾아오는데, 그 고통의 원인은 바로 '집착'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의 고통은 결과이고, 집착이 그 원인이라는 것이죠. 마음의 집착만 제거하면 고통이 사라지는 것 바로 '소멸'입니다.
집착을 어떻게 제가해야 할까요? 바로 '방법'이란 것이 집착을 제거하는 가정을 말해주는데, 싯다르타는 집착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여덟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을 팔정도(
八正道)라고 하는데,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동(正業), 올바른 생활(正命),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집중(正念), 올바른 참선(正定)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209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된 대상의 관념 속에는, 같은 대상이 '존재한다'고 생각되었을 때의 관념보다 더 적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대상의 관념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의 관념에 더하여, 다른 것에 의해 그 대상이 없어졌다는 표상까지 합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적 진화> 베르그손  215
베르그손은 '집착'이란 현상이 인간에게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을 가지고 있고, 또 그 기억에 따라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15
'나의 기억이나 기대에 따르면 그 친구는 지금 카페에 있어야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이곳에 없네.'
'친구가 없네'라는 생각은 결국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지금 없네'라는 생각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니까요. 베르그손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마음속에 있다'는 사태와 '마음 바깥에 있다'는 사태 사이의 차이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친구가 없네'라는 생각은 결국 내 마음속에서는 그가 있어야 하지만, 내 마음 바깥에서는 그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16
불교는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항상 불교는 마음이 왜 고통에 사로잡히는지 진지하게 숙고합니다.  217
집착을 제거하려면 우리는 초인적인 의지를 가져야만 합니다.  218
'원효법사는 '나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단지 나의 마음이고, 모든 대상이 단지 나의 의식이다라고 하셨던 것을 들었다. 그러기에 아름다움과 추함은 나에게 있지, 실제로 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겠구나.' <종경록> 연수(延壽 904~975)  219

큰 스님이 몽둥이를 들고 제자의 머리 위로 흔들며 말했다. "이 몽둥이가 잇다고 해도 너는 맞을 것이고, 이 몽둥이가 없다고 해도 너는 맞을 것이다. 만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너는 맞을 것이다. 이 몽둥이가 있느냐, 없느냐?"
'몽둥이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있다는 것은 없는 것이고, 없다는 것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에 등장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
이런 대답을 한다면 여섯 대나 맏을 것이다. 몽둥이에 대해 '있다'는 말을 3번, '없다'는 말을 이미 3번이나 말했기 때문이다.  230
위의 화두의 대답은 하나가 아니다.
'바람이 시원합니다' , '새가 울고 있습니다' , '하늘이 푸릅니다' , '개울 소리가 맑습니다'...
핵심은 우리가 몽둥이에 집착하느냐, 집착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겠죠.
몽둥이에 집착했기 때문에, 우리는 몽둥이가 아닌 너무나 많은 소중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231
원효 스님의 말처럼 집착이란 결국 여러분이 자신의 마음속에 갇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집착은 여러분의 삶을 유아론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232

8.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어떤 구체적인 외적 강요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미 과거에 이루어진 간섭과 강요의 흔적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주체가 되려고 할 때, 외적인 간섭을 단순히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체란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 즉 초자아를 거부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50
니체 만의 고유한 사유 방식, 즉 '계보학적인(genealogical)'사유.
계보학적인 사유는 어떤 주어진 것을 정당화하기보다 그것의 기원이나 발생 과정을 추적하는 사유 방식입니다.
'도덕의 계보학'이란 인간이 도덕적 존재라는 현실을 정당화하는 작업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이 어떤 발생 과정을 거쳐서 생기게 되었는지를 해명하는 작업입니다.  252
길에 떨어진 지갑을 주웠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 우리의 내면에서는 두 가디 욕구가 꿈틀거립니다. "어차피 다른 사람이 주웠다고 해도 지갑을 돌려주지는 않을 거야. 애초에 잃어버린 사람의 잘못이지 뭐"라고 속삭이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으로는 "만약 누군가가 너의 지갑을 땅에서 주워서 너에게 돌려 주지 않는다면, 너는 그 사람을 원망하지 않겠니?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이나 너나 모두 지갑을 돌려받기를 원하지 않을까? 그러니 너는 주운 지갑을 주인에게 돌려줘야 해"라고 말하는 욕구도 있습니다. 바로 이 후자가 보편적 입법자의 목소리입니다.
칸트도 이런 양심의 명령을 실천이성의 자율적인 목소리라고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니체는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정당화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이런 양심의 목소리는 훈육의 결과로 인간에게 내면화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253
흥미로운 것은 칸트의 도덕법칙, 즉 양심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하나의 숭고한 '목적'으로 드러나자마자, 우리의 구체적인 삶은 그 목적에 종사해야만 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된다는 점입니다.  255
'도덕이 본래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을 갖추게 되는가'이다. 우리는 자신이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며, 미래의 어느 순간에는 어느 정도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희망하지만, 이런 희망은 오직 도덕에 종교가 첨가되는 경우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순수이성비판> 칸트  
카늩는 자신의 윤리학이 결국 행복의 윤리학이 아니라고 자백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윤리학을 흔히 의무의 윤리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56
그에게 있어서는 우리의 구체적 삶이 '수단'아라면, 내면에 있는 보편적 입법자가 곧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행복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보편적 입법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합니다. 그의 욕구야 말로 나의 숭고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편적 입법자의 욕구를 총족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나의 삶 전체를 '수단'으로 삼아야만 하는 것 아닐까요?  257
칸트의 말대로 자신의 행위를 자유롭게 숙고해서 결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자유로운 주체는 반드시 행복해지려는 주체 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259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 고등학교 생활 자체를 수단으로 만드는 고등학생들이 있습니다. 또 취업이란 숭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대학 생활 자체를 수단으로 만드는 대학생들이 있습니다. 또 월급을 받기 위해서 한 달의 삶을 수단으로 만들고 마는 직장인들이 있습니다. 물고기 한 마리를 얻기 위해 물 위로 솟구치는 놀이 공원의 돌고래처럼 살아간다면 과연 우리의 삶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목적이 달성되는 아주 짧은 순간에는 일말의 행복과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지속적인 즐거움과 행복의 상태에 있으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방법은 바로 수단과 목적의 일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60 
'놀이는 임무가 전혀 아니다.' <호모 루덴스> 호이징하(Huizing 1872~1945)
'수단'과 '목적'이 분리된 행동을 '노동'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는 행동을 '놀이'라고 부릅니다.  261
니체가 제안하는 참된 주체, 즉 즐거운 주체가 되는 방법을 엿볼 필요가 있습니다.
'법칙에 대한 증오와 운명애, 공격성과 동의는 차라투스트라의 두 얼굴이다. 성서에 호의적이고 다시 성서를 적대시하는 차라투스트라, 그는 여전히 특정한 방식으로 칸트와 싸우고 있다. 도덕법칙 안에 있는 반복의 시험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외귀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무엇을 의지하든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지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하라." 이것은 칸트류의 형식주의이지만, 칸트를 그의 고유한 영토에서 존복해버리는 형식주의이다. 여기에 (칸트의 명령법이 함축하는 시험보다) 더 멀리에까지 이르는 시험이 있다. 이는 미리 가정된 더떤 도덕법칙에 반복을 결부시키는 대신, 도덕을 넘어서는 어떤 법칙에 반복을 결부시키기 때문이다.' <차이와 반복> 니체  263
니체는 '법칙에 대한 증오'를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운명애'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264
영원회귀라는 말은 말 그대로 영원히 반복되는 세계와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만약 영원회귀가 옳다면 여러분은 과연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우울하고 불행한 일들, 어쩔 수 없이 의무적으로해야만 하는 행동을 하겠습니까?
1000년 뒤에도, 2000년 뒤에도 똑같이 반복될 것인데도요? 아마 여러분은 가장 자유로운 행동, 가장 즐거운 행동, 가장 행복한 행동을 하려고 애쓸 겁니다. 그런 행동은 앞으로 영원히, 다른 삶에서도 반복될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네가 무엇을 의지하든 그것의 영워회귀를 의지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하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265

9.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고독하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 나선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사랑이 찾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고독에 빠지게 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분명 어떤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로 하여금 내가 하듯이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사랑의 고독을 안겨다줍니다.  268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잔 하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 <장자> [지략(至樂)]편  271
우리가 자신과 타자와의 차이를 긍정하지 못한다면, 혹은 사랑이 언제나 '하나'가 아니라 '둘'의 진리라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우리의 사랑 역시 이런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73
타자의 외모를 보고서 우리는 그가 어떤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와 만나서 부딪히는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 사람이 나와 다르구나'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타자성을 다 알수 있게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 이 점에서 그 사람은 나와 같지 않구나.'라고 부정적인 방식으로 상대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니까요.  274
내가 타자의 삶의 규칙을 받아들였거나 아니면 타자가 나의 삶의 규칙을 받아들인 경우에만, 우리에게는 낯선 타자란 것이 소멸하게 됩니다.  275
협소한 유아론은 우리를 고독한 주체로 만들어 타자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하도록 만들지만, 타자에게 극심한 폭력을 가하지는 않습니다. 반면 확장된 유아론은 자신이 믿고 있는 삶의 규칙을 타자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함으로써 결국 폭력과 억압을 낳을 수 있습니다.  278
자신의 문명이 지닌 의미 체계를 일방적으로 다른 문명에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내가 가진 의미 체계를 다른 사람도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식의 유아론은 표면적으로는 유아론인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고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바로 이런 착각 때문에 확장된 유아론이 타자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279

타자는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친숙하고 편안한 세게에 낯섦과 불편함을 가지고 오는 무엇입니다. 타자가 규칙적이고 편안한 나의 삶을 불규칙적이고 불편한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이유는, 그 타자가 나와는 다른 삼의 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의 삶을 가장 낯설게 만드는 사건은 바로 타자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도대체 그가 어떤 삶의 규칙을 따르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니까요.  279

'선물이 존재하려면, 어떤 상호 관계, 반환, 교환, 대응선물, 부채의식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만약 타인이 내가 그에게 주었던 것을 내게 다시 돌려주거나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거나, 또 반드시 돌려주어야만 한다면, 나와 타인사이에는 어떤 선물도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이런 반환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든 아니면 상당히 긴 유예 조건들을 계산하여 이루어지든 간에 관계없이 말이다. 특히 타인이 내게 동일한 것을 직접 되돌려주는 경우에 이점은 훨씬 더 분명해진다.' <주어진시간1> 데리다  286
'반드시 돌려 주어야만 한다면' 그것 역시 선물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지는군요. 과연 여러분은 데리다가 말한 의미의 선물을 건넨 적이 있습니까?  287
역으로 말해 우리가 교환관계에 빠져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타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89
대가를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사실 타자와의 사랑르 회복하겟다는 의지와 동일한 것입니다.
결혼한 신혼부부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침에 아내가 차려주는 정성스런 식사를 남편은 하나의 선물로 받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위해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식사를 차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남편이 갖는 행복의 비밀이 있습니다. 이제 월급날 남편이 가져다준 월급봉투를 아내는 선물로 받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해준 식사의 대가로 남편이 월급을 건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의 궐급봉투를 받고서 행복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도 이 부부느 여전히 서로에게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부부는 그렇게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월급날이 가까워지면 아내의 식단이 좀 더 나아집니다. 월급을 받고 아내는 남편의 수고를 떠올리기보다는 오히려 그 돈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기에 바쁩니다. 그녀는 남편이 남편으로서 당연히 돈을 벌어와야 한닥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쩌다 아내가 저녁에 늦게 들어와 저녁식사라도 차려주지 않으면, 남편은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 집에서 밥도 하지 않는다고 구박합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식사를 차리는 것이 아내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선물의 관계가 뇌물의 관계로 변질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292-293
우리는 선물의 논리 이면에 타자와의 사랑이란 심오한 진리가 있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해야만, 우리는 아무런 대가 없이 선물을 건넬 수 있습니다.  294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반드시 망각해야만 하는 것이 기도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물으 주는 지혜와 방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295

에필로그
연꽃은 깨끗하고 맑은 물에서는 향내를 풍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직 썩어가는 시궁창 같은 물에서 피어날 때에만 그윽한 향기를 낸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낯설게 보아야만 하는 이유는, 자신이 지금 넘어져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자신이 넘어져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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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논어(홍익출, 김형찬)
논어(동학사, 윤재근) 
주희가 집주한 논어(장락, 정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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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책은 국내에서 매우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책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의 문체는 좋아하는 편이다.
아주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이 책을 잡았다.
이전에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책의 제목은 책의 호기심을 가지기에는 좋지만 분명 그의 책내용과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은 여전하였다.
물론 책의 내용에 따라 저자가 여행을 해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안내자로 삼은 사람들의 여행기를 통해 소통해 나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그런것이 저자의 여행의 기술이라고 한다면 제목이 이해를 할 수는 있으나, 보통의 사람들이 제목을 보면서 기대하는 것은 여행을 해 나가는 좋은 기술쯤일것이란 점을 고려해 본다면 제목은 분명히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책 내용을 보면서 자신의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는 내용에 실망하게 되는 역효과가 나게 될 것이란 생각은 변함이 없다.
원제는 'The Art of Traver'이다. 초등학생도 해석을 할 수 있는 제목이다. 
직역하면 독자를 유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분명 원제에 충실하다.
제목만으로 내용을 짐작하는 사람이라면 원제를 보고 책의 내용을 짐작, 기대하고 접한다면 더 재미있게 읽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여행은 그 일의 역동성을 그 열의에서부터 역설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활동보다 풍부하게 드러내준다. 여행은 비록 모호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일과 생존 투쟁의 제약을 받지 안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여행에서 철학적 문제들, 즉 시리용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사고를 요구하는 쟁점들이 제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하지만 실제로 여행의 기술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사소하지도 않은 수많은 문제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또 여행을 연구하게 되면 그리스 철학자들이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렀던 것, 즉 '인간적 번영'을 이해하는 데도 대단치는 않지만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18-19

우리는 세상에 우리가 기대하는 것 외에도 많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흔히 잊곤 한다.  25

인간은 호텔을 건축하고, 만을 준설하는 등 엄청난 프로젝트들을 이루어내면서도, 기본적인 심리적 매듭 몇 개로 그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 울화가 치밀 때면 문명의 이점들이란 것이 얼마나 하찮게 여겨지는지! 이런 정신적 매듭들이 얼마나 처치 곤란인지 생각하다 보면, 고대 철학자들의 준엄하면서도 비꼬는 식의 지혜가 떠오른다. 그들은 번영과 세련으로부터 물러나 통이나 진흙 오두막 속에 살면서, 행보그이 핵심적 요소는 물질적인 것이나 미학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만 심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42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숩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관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나간다.  83

모든 운송 수단 가운데 생각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아마 기차일 것이다. 배나 비행기이ㅔ서 보는 풍경은 단조로워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만, 열차에서 보는 풍경은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 열차 밖의 풍경은 안달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러면서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인다. 이 풍경을 통해 우리는 잠깐 사적인 영역들을 보고 영감을 얻기도 한다. 기차는 여떤 여자가 부엌 찬장에서 컵을 꺼내는 순간을 보여주었다가, 이어 테라스에서 어떤 남자가 자고 있는 모습을 구경시켜주었다가, 공원에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인물이 던진 공을 잡으려는 아이의 움직임을 드러내기도 한다. 
평야를 가로질러 여행하면서 나는 모처럼 아무런 억제 없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고, 집필 중인 스탕달론에 대하여 생각하고, 나의 두 친구 사이에 형성된 불신 관계에 대하여 생각한다. 내 정신이 어려운 관념에 부딪혀 텅 비어버릴 때마다 의식의 흐름은 ㅈ창밖의 대상에 고정되어 몇 초 동안 그것을 따라간다. 그러다 보면 또 새로운 생각의 똬리가 형성 되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술술 풀려나가곤 한다.  84

18세기 말부터는 공동체의 관행이 아니라 방랑자가 되는 것에서 동료 의식이 생긴다. 따라서 자연과 공동체의 매개는 일반적인 사회의 엄격함, 냉혹한 금욕, 이기적인 편안함이 아니라 본질적인 고립과 침묵과 외로움에 맡겨지게 된다.  - 레이먼드 윌리엄스,<시골과 도시(The Country and the City)>
우리가 휴게소와 모텔에서 시를 발견한다면, 공항이나 열차에 끌린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 건축학적인 불안전함과 불편에도 불구하고, 그 야한 색깔과 피로한 조명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립된 장소에서는 이미 터가 잡힌 일반적인 세상의 이기적인 편안함이나 습관이나 제약과는 다른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은연중에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86-87

플러그 소켓, 욕실의 수도꼭지, 잼을 담는 병, 공항의 안내판은 디자이너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줄 수 있다. 심지어 그것을 만든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수도 있다.  96

왜 다른 나라에서 현관문 같은 사소한 것에 유혹을 느낄까? 왜 전차가 있고 사람들이 집에 커튼을 달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떤 장소에 사랑을 느낄까? 그런 사소한 (또 말 없는) 외국적 요소들이 강렬한 반응을 일으킨다는 걳이 터무니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다른 삶에서도 비슷한 반응 양식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의 감정이 상대가 빵에 버터를 바르는 방식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하고, 또 상대가 구두를 고르는 취향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기도 한다. 이런 자잘한 일에 영향을 받는다고 우리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세밀한 것들도 그 속에 풍부한 의미를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107-108

우리가 외국에서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109

호기심은 몇 가지 크게 뭉뚱그려진 질문듥로 이루어진 중추로부터 밖으로, 때로는 아주 먼 곳까지 확장되는 작은 질문들의 사슬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왜 선과 악이 있을까?' , '자연은 어떻게 움직일까?' , '나는 왜 나일까?' 상황과 기질이 허락한다면,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질문들을 중심에 놓고 살아간다. 우리는 호기심은 세계의 점점 더 많은 부분들 포괄하다가,  마침내 어느 지점에서는 어떤 것에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오묘한 경지에 이를 수도 있다. 뭉뚱그려진 커다란 질문들은 어뜻 보기에는 남의 관심을 끌 수 없을 것 같은 작은 질문들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산속에서 파리에 대해 궁금해하기도 하고, 16세기 궁전의 벽에 그려진 특정한 벽화에 대해 궁금해하기도 한다. 우리는 오래전에 사라진 이베리아 군주의 외교 정책이나 30년 전쟁에호 토탄(土炭)의 역할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165 

여행자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부분의 사물을 볼 때는 질문이 떠오르지 않으며, 질문이 없으므로 흥분도 일어나지 않는다. 보통은 질문만이 아니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뭔가가 떠오를 때는, 엉뚱한 것이 떠오르는 경향이 있다.  169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잇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사슬이 없는 목걸링 구슬처럼 쓸모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  172

여행은 피상적인 지리적 논리에 따라 우리의 호기심을 왜곡한다. 이것은 대학 강좌에서 주제가 아닌 크기에 따라 책을 권하는 것만큼이나 피상적이다.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의미가 있었노라"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우리가 결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곳에서만 자주 나타나곤 한다. 사진이 방법이 될 수 있다.  296

러스킨은 여행을 하면서 스케치를 하라고 권했을 뿐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인상을 굳히려면 글을 써야 한다고, 그의 말로 하자면 "말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전에 그가 데생으로 아무리 존경을 받았다 하더라도,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것, 그리고 그가 빅토리아 여왕 시대 말기에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그의 '말 그림'때문이었다.  313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 - 하찮고 일상적인 경험 - 을 잘 관리함으로써 그것을 경작 가능한 땅으로 만들어 1년에 세 번 열매를 맺게 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 - 그 숫자는 얼마나 많은지! - 은 운명의 솟구치는 파도에 휩쓸리거나 시대와 나라가 만들어내는 혼란스러운 물줄기 속으로 밀려들어가면서도 늘 그 위에 코르크처럼 까닥거리며 떠 있다. 이런 것을 관찰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인류를 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 즉 적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아는 소수(극소수)와 많은 것을 가지고 적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아는 다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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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도서이다.
간결하고 입문서로서 출간된것같다.
그렇지만 생각해야 할 것들에 대한 핵심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깊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우리에게 생각의 깊이를 더하게 하는 것은 책에서 말하고 있듯이 '철학은 대답이기 전에 물음이다.(9)' 바로 물음즉 질문이다. 스스로 질문들을 해 나갈 때 의문점과 미심쩍은 것들이 해소되면서 하나의 깊은 생각이 나오게 된다. 
이 책은 청소년에게 뿐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생각하고 고민해 볼 점을 시사하고 있다.
책은 서양 철학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철학자 5명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핵심적인 사유거리를 지적해주고 있다.
매우 짧은 내용의 책이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핵심을 말한다.








1. 플라톤 할아버지의 이데아
플라톤 
진정한 존재는 이 세상 너머에 있다는 이데아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이데아는 서양 철학에
서 생각의 기본이 되었습니다.할아버지는 지금으로부터 약2,400년 전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입니다. 





어험, 안녕한가. 내가 플라톤이라네.
이데아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제부터 여기에 도형을 몇 개 그려 볼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게.
자, 어느 것이 삼각형인가?
물론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네.
그렇지만 사실 이것은 삼각현이 아니라네.
삼각현은 내각의 합이 180도여야 하거든.
그런데 이것은 그렇지 않지. 살짝 일그러져 있으니까 말이네.
그래도 우리는 삼각형을 원이나 사각형과 구별할 수 있다네. 

전부 지워 버렸네.
좀 전까지 있었던 삼각형, 원, 사각형은 인간의 역사에서 아니, 
우주의 역사에서 사라졌다네.
두 번 다시 똑같은 것은 그릴 수 없지.
다시 한 번 삼각형을 그리겠네.
아까의 삼각형과는 상당히 다르지.
게다가 이것도 정확히는 삼각형이 아니라네.
그래도 역시 이것은 원이 아니라 삼각형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왜 아까 전의 그림도 이 그림도 삼각형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지 알겠나?

그 이유는 우리가 삼각형이란 무엇인지, 원이란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네.
우리가 알고 있는 진정한 삼각형의 모습, 그것이 이데아라네.
아까 그렸던 삼각형이나 원이 이제는 어디에도 없듯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은 언젠가는 없어진다네. 
그래도 이데아는 없어지지 않지.
그래서 이데아야말로,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라네.  










































2. 데카르트 아저씨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 아저씨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까지 살았던 프랑스의 철학자입니다.
무엇이든 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던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벗어나 새로운 철학의 출발점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원리를 찾았습니다.

안녕? 침대에서 인사해서 미안. 나는 데카르트란다.
잠꾸러기로 보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어.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무엇일까? ...
그래! 의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되겠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의심하고 의심스러운 것들을 자꾸자꾸 없애 나가면 돼.
그럼 의심스럽지 않은 것, 확실한 것만 남을 테니까.

먼저 인간의 감각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오해나 착각을 잘하지. 
물이 든 컵에 넣은 빨대는 꺽어져 보이지만 사실은 꺾어진 것이 아니야. 먼 곳에 있는 것은 작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작지 않아.
인간의 감각이란 참으로 신기하네!
우리 주변의 세상은 어떨까?
이 세상이 만약 꿈이라고 친다면 역시 신기하지.
왜냐하면 꿈이란 것은 깨어난 다음에야 비로소 꿈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니까.
나는 지금 침대 위에서 이것저것 헤아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쟁터에서 잠을 자고 있는지도 몰라.

그럼 수학은 어떨까?
나는 수학이야말로 학문의 기본이라고 생각해ㅐ.
왜냐하면 정말 확실한 답을 알 수 있기 때문이지.
1 더하기 1은 2.  정확히 맞잖아.
그런데 어쩌면 전지전능한 신이 인간을 속여서 
1 더하기 1이 사실은 3인데 2라고 생각하게끔 한 것은 아닐까?
아니, 물론 신은 그런 일을 하지 않으리라고 믿지만....
그래도 의심해 볼 수는 없겠지.
아, 모든 것이 다 불확실하군. 완벽하게 확실한 것은 없을까?
그런데....
모든 것이 다 불확실한 이유는 내가 의심하기 때문이지.
여기서 내가 의심한다는 사실만은 틀림없어. 
그렇다면 의심하는 나는 분명히 존재하는 거야.
나는 의심한다.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3. 칸트 선생님의 자유
칸트 선생님은 200년쯤 전에 살았던 독일의 철학자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비판 철학을 내놓았습니다. 
나아가 인간이 도덕적 행동을 할 때 자유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했습니다. 

처음뵙겠습니다. 제가 칸트입니다.
아! 5시입니다. 일을 마쳐야겠습니다. 
저의 좌우명은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것이랍니다.
제가 살던 마을의 사람들은 제가 딱딱 시간 맞춰 산책하는 모습을 보고 몇 시인지 알았을 정도입니다. 
오늘은 버스 안에 사람이 참 많습니다. 
경우 앉았습니다. 휴우.
아! 할머니 한 분이 오십니다. 자리를 양보해야겠습니다.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승객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제발 발을 밟지 말아 주.... 아야야야!
휴, 겨우 도착했습니다. 완전히 녹초가 되었습니다. 만약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면 앉아서 올 수 있었을 텐데...
그래요, 그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양보했습니다. 
제가 자리를 양보한 까닭은 '자리를 양보하시오.'라는 소리가 드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귀로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그 소리는 '... 하다면 ... 하시오.'처럼 조건이 붙어서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면 자리를 양보하시오.'라고 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리를 양보하시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대꾸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저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명령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는 스스로에게 명령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욕망과 감정에 지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참아야만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유입니다.
















4. 마르크스 선배의 노동의 소외
마르크스 선배는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입니다.
이제까지 다른 철학자들은 세상이 이렇다 저렇다 해석만 했는데 마르크스 선배는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확신했습니다. 
노동은 사람의 본질을 표현하는 창조적인 과정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노동을 하고도 자신이 생산한 것을 갖지 못합니다. 즉,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 선배는 노동자가 노동의 소외를 겪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안녕. 내가 바로 마르크스야. 
오늘 나는 일하러 왔어.
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네. 슬슬 일을 시작해야 겠다. 상품을 진열하자. 부지런히 부지런히.
"어서 오십시오." 돈도 받아야 해. "고맙습니다. 또 오십시오."
일한 대가로 돈을 받았다.
시간당 4,000원이고 여덟 시간 일했으니 32,000원이야. 
자, 이제야 비로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응? 뭔가 이상하다.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니었던가?
그래도 일을 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중요한 문제잖아. 
알았다!
내가 일을 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나의 본질을 조금 잘라서 파는 거야.
그래서 일을 하면 싫증이 나고, 일을 마치면 나 자신을 되찾는 이런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지.
이런 사회는 반드시 바꿔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더 공부해야겠다. 자, 힘내자!






5. 사르트르 형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사르트르 형은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은 현대에 사르트르 형은 지금까지의 철학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질이 똑같다고 보는 시각을 버렸습니다.
사르트르 형은 인간의 본질보다도 실존, 즉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되찾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생각했습니다.

이야, 반가워요. 제가 사르트르예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드리지요.
여기 연필 한 자루 있어요. 연필은 무엇을 쓰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졌지요. 이것이 연필의 본질이에요.
쓰기 위한 도구로 길이와 굵기와 무게와 재질이 정해졌어요.
그리고 그와 같은 종류의 연필이 많이 만들어져서 그중 하나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만약 이 연필이 초콜릿으로 만들어졌다면 어떨까요?
먹으면 맛있기야 하겠지만 쓰기 위한 도구로는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음, 역시 맛있네요. 
연필의 크기가 이렇게나 거대하다면 쓰기 위한 도구로는 역시 도움이 되지 않지요. 
만약 신이 있어서 이러저러한 존재라고 본질을 미리 정해 놓았다면 인간도 연필과 다를 바 없겠지요.
하지만 신은 어디에도 없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태어난 의미는 없는 것일까요?
그래요. 우리는 아무 의미도 없이 태어나 버렸어요. 
태어난 의미가 없다면 스스로 만들면 돼요.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어요. 먼저 나 자신이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있지요.
그 다음에 우리는 날마다 여러 가지를 결정하고 선택함으로써 스스로를 만들어 가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신존 자체가 의미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이제 이해가 되나요? 그렇다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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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에게 공부법을 배우다>를 매우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공부에 대한 생각들을 다시금 정리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퇴계공부법을 읽을 당시 이 책을 알게되고 매우 빨리 읽었었다.
당시 이 책도 매우 재밌게 읽었었다. 상황상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지금까지 생각만하고 있었던 것 같다.
도서관에서 배회하다가 갑자기 이 책이 생각이 났고, 마침 도서관에 책이 비치되어 있었다.
반갑게 책을 들었다. 그리고 지난번 보다 더 재미있게 글을 읽었다.

근래 논어 해설서를 다시금 보아서 인지 내용들이 매치되면서 더 다양한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밑줄그은 내용들은 그러한 생각들을 담고 있는듯하다.
줄을 그으면서 좀 많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글을 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도일 것이다.
정도의 개념을 정리하기가 쉽지는 않은데, 책을 통해 오늘날에 필요한 글쓰기의 개념을 정리할 수 있었다.
오늘날은 누구나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해 졌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정연하면서도 보고싶은 글이 될 수 있게, 그에 더불어 울림이 있는 글이 될 수 있게 한다는 것에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기교가 우선이 아니다. 미사여구가 우선이 아니다. 글쓰는 이의 자세로 시작하여 내용이 합리적이어야 할 것이다.
...
 




"... 이인로(李仁老)가 이런 말을 했다. '이 세상 모든 사물 가운데 귀천과 빈부를 기준으로 높낮이를 정하지 않은 것은 오직 문장뿐이다.' 문장의 미래를 정확히 예견한 말이지."(김향서가 아들 지문에게 자신이 과거를 보지 않은 이유는 어머니때문이라고 말을 하는 중에 했던 말)
"믿기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다. 네가 멸시하는 소설이나 소품 같은 살아 있는 글들을 사람들이 앞다퉈 찾게 될 날이 머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거든. 저마다의 가슴속에 묻어둔 사연들을 너무도 생생히 그려내고 있단 말이지. 지금은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곧 그리될 것이다. 이것만큼은 내가 장담한다."  46

지문의 글 '글이란 뜻을 그려내는 데 그칠 따름이다. 저와 같이 글제를 앞에 놓고 붓을 쥐고서 갑자기 저잣거리에서 오가는 말을 그대로 받아 적을 생각만 하거나, 억지로 경서의 뜻을 무시하고 일부러 경박한 척하여 글자마다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것은, 비유하자면 화공(畵工)을 불러 초상을 그리게 할 적에 용모를 가다듬고 그 앞에 나서는 것과 같다. 시선은 쉴새없이 움직이고, 옷은 주름이 가득 져서 본래 모습을 잃어버린다면, 아무리 훌륭한 화공이라 하더라도 참모습을 그려내기 어려울 것이다. 글을 짓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됐다. 그만하면 됐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구나."
연암은 중현에게 "책장에서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를 가져오너라."
'글이란 뜻을 그려내는 데 그칠 따름이다. 저와 같이 글제를 앞에 놓고 붓을 쥐고서 갑자기 옛말을 생각하거나, 억지로 경서의 뜻을 찾아내어 일부러 근엄한 척하고 글자마다 정중하게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화공(畵工)을 불러 초상을 그리게 할 적에 용모를 가다듬고 그 앞에 나서는 것과 같다. 시선은 움직이지 않고, 옷은 주름 하나 없이 펴져서 본래 모습을 잃어버린다면, 아무리 훌륭한 화공이라 하더라도 참모습을 그려내기 어려울 것이다. 글을 짓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
연암은 글에서 무조건 옛것을 따르는 추세를 비판했지만, 지문은 몇 구절을 바꾸어 무조건 새것을 추구하는 추세를 비판했던 것이다.  58-59

"자네는 몇 자나 아는고?"
"네?"
"몇 자나 아느냐고 물었느니라."
...
"아는 글자가 없습니다."
"허허, 십 년 넘게 글을 읽었다면서 아는 글자가 없다니 말이 되느냐?"
"부끄럽습니다. 생각해보니 제대로 아는 글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읽고 외웠을 뿐 글자의 참 의미를 깨닫진느 못했습니다."  63-64

"과거를 보는 데는 경전을 외우고 과문을 익히기만 하면 되네. 하지만 경전은 음미하는 것이지 달달 외우는 것이 아니야..."  65

"많이 읽고 외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야. 하나를 알더라도 제대로 음미하고 자세히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네. 알아듣겠는가?"
"네."
"우선 <논어(論語)>를 천천히 읽게. 할 수 있는 한 천천히 읽어야 하네. 그저 읽고 외우려 들지 말고 음미하고 생각하면서 읽게. 잘 아는 글자라고 해서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네. 반드시 한 음 한 음을 바르게 읽게."  67

지문은 <논어>의 주요 구절들을 이미 다 외우고 있었던지라 다시 소리 내어 천천히 읽으려니 답답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읽다가는 평생토록 읽어도 몇 권 못 보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연암이 그렇게 읽으라고 한 데는 다 이유가 있을 터였다. 지문은 책을 덮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아가며 느릿느릿 읽어 나갔다...
차츰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꼼꼼하게 읽다 보니 예전에는 별 의심 없이 지나쳤던 구절들이 하나하나 걸렸다.  68
한 달여 시간이 지났다.
지문은 질문을 빼곡히 적은 찌들이 가득한 <논어>를 들고 연암을 찾아갔다.  69

"이유당(怡愉堂) 이덕수(李德壽) 선생은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독서는 푹 젖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푹 젖어야 책과 내가 서로 어울려 하나가 된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주는 첫 번째 가르침이다."  70

문자는 다 같이 쓰는 것이지만 문장에는 쓰는 사람의 개성이 드러나는 법이야.  96

'다섯 자 글귀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일생의 정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시구(詩句)가 있다. 글쓰기는 그렇듯 전심전력을 해야 하는 법.  107

'약(約)'과 '오(悟)'의 이치.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는 거리를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네가 이리저리 걸으며 까마귀를 본 것이 그 방법이었다. 그럴 때 비로소 문제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것을 일컬어 약의 이치라고 하느니라.
문제를 인식하고 나면 언젠가는 문제의 본질을 깨닫는 통잘의 순간이 오는 법. 네가 갑자기 깨달았다고 한 그 순간이니라. 통찰은 결코 저절로 오지 않는다. 반드시 넓게 보고 깊게 파헤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을 일컬어 오의 이치라고 하느니라.  110

연암은 박제가의 마음을 묘사하면서 우우량량(踽踽凉凉)이라고 썼다. 우우량량은 원래 홀로 터벅터벅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형용하는 말이다.  147

"변할 '변(變)'자 정도를 겨우 알게 된 듯 싶습니다."
"그렇네. 의고주의자(擬古主義者, 고대의 것을 표본으로 삼아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폐단이 임시변통으로 전통을 답습하는데 있으니, '변'이라 함은 지금 현실에 맞게 대응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일세. 옛것을 모범으로 삼되 변통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지. 바로 '법고이지변(法古而知變)'의 이치인 것이야."
"또 하나, 더불어 잊어서는 안 되네. 변통하되 법도를 지켜야 한다는 것, 바로 '창신이능전(創新而能典)'의 이치야."
"연암이 늘 내게 당부한 것이 하나 있었네. 옛 글의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좋으나 너무 새것만 추구한 나머지 가끔 황당한 길로 가는 경향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이야. '전(典)'이라 함은 현실에 대응하여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지만 바른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지."(박제가와의 대화)  148

글이 잘 되고 못 되고는 내게 달려 있고, 비방과 칭찬은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귀가 울리고 코를 고는 것과 같다. 
한 아이가 뜰에서 놀다가 제 귀가 갑자기 울리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기뻐하며 가만히 이웃집 아이더러 말하기를, "너 이 소리 좀 들어봐라. 내 귀에서 앵앵 하며 피리 불고 생황부는 소리가 나는데 별같이 동글동글하다!" 하였다. 이웃집 아이가 귀를 맞대어 들어보려 애썼으나 끝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러자 아이는 안타깝게 소리치며 남이 몰라주는 것을 한스러워했다.
일찍이 한 촌사람과 동숙한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어찌나 우람하게 코를 고는지 그 소리가 마치 토하는 듯도 하고, 휘파람을 부는 듯도 하고, 한탄하는 듯도 하고, 숨을 크게 내쉬는 듯도 하고, 후후 불을 부는 듯도 하고, 솔에서 물이 끓는 듯도 하고, 빈 수레가 덜커덩거리며 구르는 듯도 했으며, 들이쉴 땐 톱질하는 듯하고 내뿜을 땐 씩씩대는 것이 마치 돼지 같았다. 그러다가 남이 일개워주자 그는 "난 그런 일 없고"하며 발끈 성을 내었다.
아, 자기만 홀로 아는 사람은 남이 몰라줄 것을 항상 근심하고, 자기가 깨닫지 못한 사람은 남이 먼저 깨닫는 것을 싫어 하나니, 어찌 코와 귀에만 이런 병이 있겠는가. 문장에도 병이 있으니, 덕욱 심하다. 귀가 울리는 것은 병인데도 남이 몰라 줄까 봐 걱정하는데, 하물며 병이 아닌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코 고는 것은 병이 아닌데도 남이 일깨워주면 성을 내는데, 하물며 병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무슨 의미인지 알겠느냐?"
"글쎄요..."
"그럼 잘 듣거라. 귀가 울리는 이명(耳鳴)은 당사자만 알수 있다. 하지만 코골이는 어떠한가?"
"당사자는 모르고 다른 사람만 압니다."
"이명을 가진 이나 코를 고는 이나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 문장도 마찬가지지. 열심히 썼는데 아무도 몰라준다면 그것은 바로 귀가 울리는 자가 자기 입장만 생각해서 썼기 때문이고, 자기 글을 남들이 이러쿵저러쿵 비평하는 데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슨 소리일 줄도 모르고 글을 썼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귀가 울리고 코를 고는 병폐를 깨달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자신의 글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옳거니, 글을 아무리 잘 썼다 해도 그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글을 쓸 때는 내 생각을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하네, 법고 창신의 정신이 중요한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야."  149-151

"자네가 꼭 내 제자 같아 잔소리 삼아 한마디만 더 하겟네. 기왕 시작햇으니 붓 끝을 도끼 삼아 거짓된 것들을 찍어버릴 각오로 글을 쓰게나. 알겠나?"  155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던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 때마다 우리 형님 쳐다봤지.
이제 형님 그리우면 어드메서 본단말고
두건 쓰고 도포 입고 가서
냇물에 비친 나를 보아야겠네.  163

화의 정승이 조정에서 돌아오자 딸이 물었다. 
"아버지, 이가 어디에서 생기나요? 옷에서 생기지요?"
"그럼"
딸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겼다!"
이번에는 며느리가 물었다.
"아버님, 이는 살에서 생기지요?"
"그럼."
며느리가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께서 제 말이 옳다고 하시네요!"
그러자 부인이 정스을 나무라며 말했다.
"누가 대감더러 지혜롭다 하는지 모르겠군요. 옳고 그름을 다투는데 양쪽 모두 옳다니요!"
황희 정승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둘 다 이리 와보렴. 무릇 이는 살이 없으면 생길 수 없고, 옷이 없으면 붙어 있지 못하는 법이니, 이를 통해 보면 두 사람 말이 모두 옳은 게야. 그렇기는 하나 농 안의 옷에도 이는 있으며, 너희들이 옷을 벗고 있다 할지라도 가려움은 여전할 테니, 이로 보면 이란 놈은 땀내가 푹푹 찌는 살과 풀기가 물씬한 옷, 이 둘을 떠나 있는 것도 아니고, 꼭 이 둘에 붙어 있는 것도 아니거늘, 바로 살과 옷의 사이에서 생긴다고 해야겠지."
사이의 묘..
"그저 양쪽의 입장을 모두 고려하라는 식의 역지사지(易地思之) 정도로 들어서는 안 되느니라. 보다 중요한 것은 양쪽의 입장을 고려해 무엇을 얻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양쪽을 고려하되 반드시 새롭고 유용한 시각을 창출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내가 서 있는 자리와 사유의 틀을 깨고 나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이로써 한 자를 더 익혔구나."
"네, 사이 간(間) 자를 비로소 알았습니다."  182-184

"진정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은, 바로 네가 스스로를 잊는 것이다."(아버지가 아들 지문에게 한 말)  196

천하에서 가장 친밀한 벗으로는 곤궁할 때 사귄 벗이고, 우정의 깊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으로는 가난을 상의한 일을 꼽습니다. 아! 청운에 높이 오른 선비가 가난한 선비의 집을 수레 타고 찾은 일도 잇고, 포의(抱義)의 선비가 고관대작의 집을 소맷자락 끌며 드나든 일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렇듯 절실하게 벗을 찾아다니지만 마음 맞는 친구를 얻기는 어려우니,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벗이란 술잔을 건네며 도타운 정을 나누는 사람이나 손을 부여잡고 모릎을 가까이하여 앉은 자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벗이 있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으나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벗이 있습니다. 이 두 부류의 벗에서 우정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박제가의 문생 연수의 글)  202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싶었다. 벼슬을 얻어 내 재주를 좋은 일에 사용하고 싶었다. 부질없는 욕심 때문에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만거야.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말이다. 그때 나는 나를 잊었던 거야. 내가 잔재주만 가진 위인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던 게지. 지문아, 나 하나로 족하지 않겠니.."(형암 이덕무의 제자였던 아버지는 과거시험에 스승을 글로 응시했었음)  216

글을 잘 짓는 자는 아마 병법을 잘 알 것이다. 비유컨대 글자는 군사요, 글 뜻은 장수요, 제목을 적국이요, 고사(故事)의 인용은 전장의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요, 글자를 묶어서 구(句)를 만들고 구를 모아서 장(章)을 이루는 것은 대오(隊伍)를 이루어진을 치는 것과 같다.
운(韻)에 맞추어 읊고 멋진 표현으로써 빛을 내는 것은 징과 북을 울리고 깃발을 휘날리는 것과 같으며, 앞뒤의 조응(照應)이란 봉화요, 비유란 유격(遊擊)이요, 억양 반복(抑揚反覆)이란 맞붙어 싸워 서로 죽이는 것이요, 파제(破題)한 다음 마무리하는 것은 먼저 성벽에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요, 함축(含蓄)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요, 여운(餘韻)을 남기는 것은 군대를 정돈하여 개선하는 것이다.(지문이 과거 시험장에서 쓴 글, 제출하지 않고 버렸으나 연암의 지인이 시험관이라 주워서 연암에게 줌)  228

"하나만 물어보자. 어떻게 글을 병법에 비유할 생각을 하였느냐?"
"과장에 들어가기 전 병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구령에 맞추어 대오를 만들고 흩어지고, 그러기를 반복하더군요. 처음에는 병사들의 움직임이 어설프다 싶었는데, 연습이 거듭될수록 일사불란해졌습니다. 그걸보고 있노라니 문득 글도 병볍과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병법을 잘 하는 자는 버릴 만한 병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자는 가릴 만한 글자가 없다. 말이 간단하더라도 요령만 잡으면 되고, 토막말이라도 핵심을 놓치지 않으면 험한 성이라도 정복할 수 있는 법이지. 그러므로 글쓰기는 곧 병법이니라."
잠시 지문을 노려보뎐 연암이 말을 덧붙였다.

"네가 허투루 배우지는 않은 듯하구나. 가르친 것들을 제법 나름대로 체득한 듯 여겨진다 그래, 글자는 군사요 글 뜻은 장수라 했는데, 그건 무슨 의미더냐?"
"군대는 지휘하느 ㄴ장수가 있어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군사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지휘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제대로 운용되지 않습니다. 글도 마찬가지라 생각 했습니다. 글자만 늘어놓는다고 해서 글이 되지는 않습니다. 명확한 주제를 가지고 글을 전개해야 제대로 된 글이 완성됩니다."

"제목을 왜 적국(敵國)이라 했느냐?"
"전쟁을 하는 목적이 적국에게 승리하기 위해서이듯 글을 쓰는 것 역시 결국 제목, 즉 문제와의 대결이라 생각했습니다. 문제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한 뒤에 공략할 방략을 연구해야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고사의 인용을 전장의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한 뜻은?"
"진지를 구축하는 목적은 보루를 만들어 안정적으로 싸우기 위함입니다. 고사란 이미 역사적으로 드러난 사실들입니다. 그런 만큼 고사를 사용하면 사람들의 신뢰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사마천이 즐겨 썼던 방법이기도 하다. 좋다. 그럼, 글자를 묶어서 구를 만들고, 구를 모아서 장을 이루는 것은 대로를 이루어 진을 치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질서 정연한 군대가 전쟁에서 이기는 법입니다. 논리 정연한 글, 글자 한 자 핝 자가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할대 그 글로써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운에 맞추어 읊고 멋진 표현으로써 빛을 내는 것은 징과 북을 울리고 깃발을 휘날리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징과 북, 그리고 깃발은 군사들을 독려하는 데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운율과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짐짓 무시하기 쉬운 요소들이지만 제대로 사용하면 글에 빛을 더해줍니다."

"앞뒤의 조응이란 봉화라, 이것은 또 무슨 의미인고?"
"봉화는 봉우리와 봉우리를 불빛으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조응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의 앞에서 슬쩍 제시한 것을 뒤에서 다시 잘 설명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면 읽는 사람은 궁금증을 가지고 글을 읽기 시작했다가 다 읽을 무렵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비유를 유격이라 한 것은?"
"유격은 적이 알아채지 못하게 공격하는 전술입니다. 준비를 못 했으니 상대방은 당하게 마련이지요.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된 비유를 접했을 때 글을 읽는 사람은 감탄하게 됩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참신한 비유를 읽었을 때는 더욱 그렇지요."

"억양 반복이란 맞붙어 싸워 서로 죽이는 것이라는 의미는 무엇이냐?"
"전장에서 상대방과 맞닥뜨리게 되면 어느 한 쪽은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지 않으려면 상대방을 완전히 죽여야 하지요. 억양이란 처음에 눌렀다가 나중에는 놔주는 기법입니다. 즉, 반복하되 효과를 달리하여 반복해 읽는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이지요. 읽는 사람은 그 반전의 묘미에 끌려 완전히 글에 제압되는 것입니다."

"파제한 다음 마무리하는 것은 먼저 성벽에 올라가 적으 사로잡는 것, 이것의 의미는?"
"전쟁을 시작햇으면 반드시 성벽에 올라가 적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파제는 글의 서두를 말하는 것입니다. 시선을 끄는 문구로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을 잡는 것, 즉 글의 마무리도 중요하지요."

"함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 이것은 무슨 뜻이냐?"
"전쟁터에서 노인을 잡는 것은 번거로운 일입니다. 오히려 노인을 놓아줌으로써 상대반을 교란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함축이란 그런 것입니다. 별 의미 없어 보이나 실상은 대단한 의미가 숨어 있지요. 그냥 읽으면 모르되 자세히 읽으면 의미를 파악하고 '이것이로구나!' 무릎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운을 남기느 것은 군대를 정돈하여 개선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냐?"
"군대의 개선은 사실 의미없는 절차입니다. 전쟁은 이미 끝이 났으니까요. 하지만 개선을 통해 승리를 되새김질하게 되는 장점이 있지요. 여운도 그렇습니다. 글이 끝난 뒤에도 읽은 사람이 아쉬워하며 다시 보게 되는 것, 두 번 세 번 즐기는 것, 그것이 바로 여운입니다."

"훌륭하구나. 그런데 네가 지금 말한 것들은 다시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이를테면, 이치(理致)와 혜경(蹊逕)과 요령(要領)밑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지문은 연암의 말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이치는 전체 틀을 말하는 것이리라. 또한 혜경은 지름길이니 구성 장식을, 요령은 세부 표현을 일컫는 것이리라.  229-233



여기서부터는 연암의 아들 종채가 단락의 끝에서 늘 정리하던 부분을 모았다.


정밀(精密)하게 독서하라.  73
관찰(觀察)하고 통찰(通察)하라.
어항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려면 어항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러나 물고기에게 어항밖으로 나오는 일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그래도 나와야지."  115
어항은 곧 책이다. 책을 꼼꼼하게 읽었다면 다음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관찰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책이 말하는 의미를 명확하게 짚어낼 수 있다.
세상이라는 책도 마찬가지다. 그게 바로 약의 원리다. 약을 알고 난 뒤 넓고 깊게 반복하다 보면 불현듯 통찰의 순간이 온다. 개인의 좁은 안목과 시야가 확장되면서 보편적인 사물의 이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게 오의 단계에 이르면 비로소 그 사물에 대한 글을 쓸 수 있다. 관찰과 통찰이 글을 쓰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사물에 대한 새로운 통찰 없이는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없다.  116
원칙을 따르되 적절(適切)하게 변통(變通)하라.  의중(意中)을 정확히 전달(傳達)하라.
독서란 책을 읽는 것이다. 그런데 증자의 제자인 공명선은 책을 읽는 대신 스스의 행동을 보고 배우는 길을 택했다. 결국 스승이란 책을 읽은 공명선은 넓은 의미의 독서를 한 셈이었다. 공명선이 택한 길이야말로 독서를 창조적으로 변통한 것이었다. 
한신도 마찬가지였다. 배수진은 병볍에서 금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신은 무턱대고 병볍을 따르는 대신 병볍의 참의미를 읽어냈다. 이것 또한 창조적인 변통의 좋은 사례다. 
글도 마찬가지리라. 남의 읜견을 아무 생각 없이 답습해서는 좋은 글을 남길 수 없다.  158
종채는 아버지의 말 하나를 어렵사리 기억해 냈다.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결코 그들을 배우지 않으리라."
사마천과 반고를 배우되, 지금 여기에 맞는 글을 써야 한다는 아버지의 다짐이 담겨 있는 말씀이었다는 것을 종채는 이제야 깨달았다.
쓰는 사람이 자신의 의중을 읽는 사람에게 정확히 전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좋은 글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집과 독선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정밀한 글을 써야 한다.  159
관점과 관점 사이를 꿰뚫는 '사이'의 통합적(統合的) 관점(觀點)을 만들라.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것에도 제각기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글을 쓸때는 그런 측면들을 빠짐없이 다루어야 한다. 그래야 글을 읽는 사람이 편견에 빠지지 않고 의미를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잇다.
여러 측면들을 늘어 놓았으면 이제 그것들 사이를 꿰뚫는 새 관점을 만들어야 한다. 
대립되느 시각과 관점을 아우르면서도 둘 사이를 꿰뚫는 새로운 제3의 시각을 제시하는 것, 그것이 바로 통합의 논리다.  188
종체는 붓을 들어 여태까지 썼던 내용을 모두 지웠다. 한참을 생각한 뒤 표를 하나 그리고 깨달은 바를 써넣었다.

첫 번째 원리는 '법고의 묘'다. 그것은 처음 글을 쓰고자 할 때 명심해야 하는 원리일 것이다. 기초가 튼튼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듯이 법고의 묘를 익히지 않으면 진전된 글쓰기를 할 수 없다. 책을 정밀하게 읽고 대상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관찰하는 것은 법고의 묘를 익히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다.
두 번째 원리는 '법고창신의 묘'다. 법고의 묘를 익혔으면 다음으로 법고창신의 묘를 익혀야 한다. 법고창신은 법고, 즉 옛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과 창신, 즉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의 조화를 의미한다. 옛것을 따르되 변화를 수용하고, 새것을 받아들이되 옛것의 법도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만 고루하지 않으면서도 참신한 글을 쓸 수 있다.
세 번째 원리는 '사이의 묘'다. 글쓰기 원리 중 가장 중요한 원리라 할 수 있다. 법고와 창신의 대립 및 조화는 다른 이들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대립을 극복하는 방책으로 사이에 대해 주목한 이는 흔치 않다. 이가 옷과 살 사이에서 생기듯, 두 사람으 ㅣ시선이 사이의 지점에서 교차하듯 글도 법고와 창신 사이에 자리해야 한다. 물론 어설픈 타협으로 만들어지는 중간 자리는 옳지 않다. 구별과 대립을 포섭하는 동시에 그 단계를 넘어서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양분(兩分)의 논리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새로운 글쓰기가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이는 법고와 창신을 넘어서는 새로운 논리가 될 수 있다.  190-191

실전에 적용할 수 있는 글쓰기 수칙 11가지  238-239
 이치 : 전체 틀   1. 명확한 주제 의식을 가져라.
  2. 제목의 의도를 파악하라. 
 혜경 : 구성 방식    3. 단락 간 일관된 논리를 유지하라.
  4. 인과관계에 유의하라.
  5. 시작과 마무리를 잘하라. 
 요령 : 세부 표현   6. 사례를 적절히 인용하라.
  7. 운율과 표현을 활용하여 흥미를 더하라.
  8.참신한 비유를 사용하라.
  9. 반전의 묘미를 살려라.
 10. 함축의 묘미를 살려라.
 11. 여운을 남겨라. 

'인순고식 구차미봉(因循姑息 苟且彌縫)'
"아버지께서 만년에 가장 사랑하시던 글귀일세."
"낡은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눈앞의 편안함만 좇으며 임시로 변통하려 하는구나."  262
사마천의 마음에 대한 연암의 제시문에 대해 지문이 쓴글
어린아이들이 나비 잡는 모습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간파해낼 수 있다. 앞다리를 반쯤 꿇고, 뒷다리는 비스듬히 발꿈치를 들고서 두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만들어 다가가는데, 잡을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나비는 그만 날아가버린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기에 어이없이 웃다가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성을 내기고 한다. 이것이 바로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할 때의 마음이다.
"역시 기대했던 대로일세. 참으로 훌륭한 글이네. 글을 쓰는 사마천의 미묘한 마음, 그 분발심(奮發心)을 이보다 잘 표현할 글이 또 있을까 싶으이."
"과찬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정말 기뻐하시겠네."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글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왜 글을 쓰게 되었는지 잊지 않고 모든 기쁨과 분노와 슬픔을 글에 쏟아 붓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없이 쓴 글은 모두 헛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한순간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되지요."  270


연암은 글 쓰는 사람의 자세를 알려주려 했던 것이다. 세속의 명예나 이익이 아닌 순정한 마음으로 쓴 글, 거짓된 소리가 아닌 진심으로 쓰는 글, 거짓된 소리가 아닌 진심으로 쓰는 글만이 세상과 맞설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가르쳐 주려 했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연암이 과거를 포기하고 평생토록 글을 쓰고 살면서 얻고자 바랐던 가치일 터였다.  279
 
사마천의 분발심(奮發心)을 잊지 말라.
여러 글쓰기 법칙 중에서도 이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글에 힘을 쏟지 않고 다른 것에 기대는 순간 글은 그 즉시 가치를 일고 만다.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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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접었지만 내가 접지 않은
 

종이학을 접었다. 날씬하게 잘 접었다. 그런데 누가 접은 거냐고 묻는다면 내가 접었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내가 접은 것은 없다. 내가 접은 종이학도 나 혼자 접은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무를 심었을 것이고, 누군가가 그 나무에 물을 뿌렸을 것이고, 누군가가 그 나무를 베었을 것이고, 누군가가 그 나무로 종이를 만들었을 것이고, 누군가가 그 종이를 나에게 가져다 줬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나에게 종이학 접는 법을 가르쳐 줬을 것이고, 누군가는 낭게 종이학 접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을 소개해 줬을 것이고, 누군가는 나에게 종이학 접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을 소개해 준 사람을 소개해 줬을 것이다. 천 번을 접는다 해도 나 혼자 접은 종이학은 없다. 내 손을 잠시 만난 종이학이 있을 뿐.



내가 하였지만 따지고 보면 내가 한것만은 아니다.
난 단지 마지막에 작업을 한것일 뿐. 
우리는 관계라는 것을 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예전처럼 자급자족의 시대도 아니지만, 인구의 증가로 인해 관계라는 소통이 없으면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과학문명의 발전은 우리에게 소통을 제품으로만 하도록 조장하고 있다.
아니 과학의 발전이라기 보다는 좋은 의도의 발전에 인간의 이기심은 조장이라는 결과를 양산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무섭게 시대를 조장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면서 조종 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소외현상은 매우 발전하였으며 사회현상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왕따, 은따 부터 시작하여 '나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이 만연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 중의 큰 것 하나는 '관계'라는 것의 깊은 생각이 우선일 것이다.
우리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여 협력하지 않으면 경쟁은 커녕 시도조차 해보기 힘들다. 경쟁또한 조장의 영향이긴 하다.
하지만 협력하는 경쟁이라면 어느정도는 용납될 것이다. 

어느 교수의 말처럼 우리는 협력이 필요한 시대에 협력을 하면 안되는 교육을 하고 있다.
협력은 커녕 선의의경쟁이 아닌 짓밟고 올라서야 하는 환경속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없지 않을까. 

관계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겸허를 받아들이게 한다.
관계는 사랑과 신의를 경험하게 한다.
관계는 우리의 삶을 고찰해 보게 하는 좋은 선생인 것이다.
그런 관계의 의식을 가질때 우리의 삶이 한결 밝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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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삼 교수의 강의를 몇 번 들을 기회가 있었다.
강의가 일단은 재미있게 진행된다. 강의에서 청중을 재밌게 하는것이 일단은 성공의 시작이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강의는 즐거움을 주었다. 또한 강의 내용에서 많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열의가 있었다. 그래서 듣는이로 하여금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하였다.

이 책은 그런 저자의 성향을 반영하고 있기라도 하듯 내용이 재밌게 풀어 쓰여 있다.
출판사의 주니러 클래식 시리즈로 나온것을 보면 청소년들에게 풀어쓴 논어를 보며 한 걸음 다가올 수 있게 하는 취지지만, 성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주는 책이란 생각이 든다.
저자의 풀어씀 즉, 가능하면 객관적으로 풀어쓰려 하지만 주관적인 해석을 담고 있기에 자칫 주견이 없다면 따라 가야만 할지라도 주견을 세우기 위한 학습적인 측면에서 충분한 논어의 즐거움을 준다는 생각을 한다.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저자는 비뚤어진 유교 사상에 반대하며 논어야 말로 깨어있는 내용이고 융통성 있는 글이라고 말한다.
물론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을 한다. 우리의 역사속에서 조선의 멸망은 당시 유교의 비뚤어진 해석으로 오만하고 편협한 사회였기에 그러하였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잘 읽지 않는 책' 이라 표현하였다. 논하고 말한다는 뜻을 가진 논어에 대한 고리타분함을 가진 사람에게도 좋을 듯 싶다. 재밌게 읽히고 시대에 비출 수 있게 하고 있기에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논어(論語)>란 '논하고 말하다.'라는 뜻이다. 
'진리를 논하시고 말씀하신 책, 즉 <논어>가 된 것이다.
노자가 잘 지적했듯, 원래 '진리는 이름을 갖는다면 참된 진리가 아닌 것이요, 이름 붙일 수 있다면, 그건 영원한 이름이 아닌 법'이다.(<도덕경>)  17

공자는 현대적으로 말하면 '운전기사'로 부터 '공장 기술자', 그리고 '목장 관리인' 같은 육체 노동을 두루 경험했던 것 같다. 그러면 서 철저한 자기 점검의 미덕을 갖추었던 그였기에 점차 주변의 인정을 받아 더 큰 임무를 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23

1. 학이(學而)편 - 배워야 사람이다.
배움과 익힘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보통 여섯 가지 기술, 곧 육예(六藝). 즉 예(예절)와 악(노래와 춤), 홨기, 마차몰기, 글쓰기, 셈하기등이 그것이다. 예와 악은 사람과의 관계 맺기에 요구되는것이고, 활쏘기와 마차몰기는 국토 방위에 필요한 기술이며, 글쓰기와 셈하기는 관리나 지식인으로서 업무를 처리하는 데 쓰이는 것이니, 모두 고대에 지식인이자 무예를 겸비한 성인 남자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 기예들이다. 
한편 텍스트 중심으로 육예를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첫째 중국 고대의 시집인 <시경(詩經)>, 둘째 중국 고대의 정치와 역사를 서술한 <서경(書經)>, 셋째 국가와 계급 간에 지켜야 할 예의범절을 규정한 <예기(禮記)>, 넷째 음악에 대한 이론서인 <악기(樂記)>, 다섯째 점치는 책인 <역경(易經)>, 그리고 공자의 조국인 노나라 역사책인 <춘추(春秋)>를 꼽는 경우도 있다.  32

공자 말씀하시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며,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느니라."(6:18)
... 우리는 배움의 성취가 단지 '알고/모르고'사이의 이분법이 아니라 좀더 깊은 차우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34

벗이란 배움과 익힘을 함께 하는 사람이다.  35
단 한 번 만나도 속을 드러내어 함께 흐느낄 수 있는 살마, 그 사람이 벗이다.  36

제대로 사는 삶이란, 배우고 익히는 길을 가는 도중에 속에서 터져 나오는 희열에 몸을 떨기도 하고, 또 어느 순간 나의 길을 이해하고 옹호하는 참된 벗을 만나 흔쾌한 즐거움을 나누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배우고 익히며 '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인생에서 얻는 기쁨이요 즐거움이다.  
그대가 확고하게 '나의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걸을 적에야 참된 친구, 진정한 벗이 생겨남을 잊지 말하는 것이 공자가 내리는 가름침이다.  37

세속적 욕망의 성취에 인생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과 남의 비평(인정, 비난, 칭찬)조차 말갛게 벗어나 내 속에 깃들인 진리를 확인하고 또 즐기며 사는 담담하고 고요한 상태, 이것이 인생의 목표 즉 '배우고 익히는 삶'의 궁극처라는 것이다.  38

나의 길은 남의 칭찬이나 비평에도 상관하지 않고, 또 배움의 기쁨으로부터도 벗어난 탈아(脫我)의 세계로 난 길을 걷는 것이다.  39

주변의 시비와 관계없이, 또 물질적 곤궁과도 관계없이 자신 앞에 놓인 그 길을 확고하고 확신에 찬 걸음으로 내딛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 길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길이 아니라, 내가 걷지 않을 수 없는 길이 된다. 그럴진대 남이 알아주든 않든 성낼 까닭이 없는 것이니, 그제야 군자(君子)라는 이름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41

2. 위정(爲政)편 - 나는 이렇게 살았노라
육예(六藝)라고 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법학, 의학, 정치학, 경영학, 공학 등등이 두루 다 배움의 대상에 속할 것이다.  44

공자 말씀하시다. "힘이 부족하다는 건, 힘껏 달리다가 지쳐 쓰러지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지. 한데 지금 자넨 옳게 한 번 달려 보지도 않은 채, 못한다고 지레 선을 긋는구먼."(6:10)
'하지 않는 것'과 '못하는 것'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47

공자 말씀하시다. "지위가 없다고 근심할 것이 아니요, 전문가가 되지 못함을 근심할 일이다. 요컨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근심할 까닭이 없고, 오로지 내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찾을 일이다."(4:14)
내가 세운 '나의 길'에 매진하여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되면 그에 합당한 자리가 자연히 생겨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전문가가 되지 위해 필요한 지식과 정보가 무엇인지를 찾아 가는 주체적인 인간, 내 인생을 내가 주도하는 인간이 되기를 권하는 것이다.  47

'귀가 순해졌다.' - 보통 우리는 '남의 말을 듣는다'고 하지만 실은 '내 식'대로 이해하는 데 불과하다. 문제는 '나'에게 있다. 내 속엔 내 과거와 미래, 욕심과 계획들이 엉켜 있어서 남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고, 왜곡되거나 퉁겨 나가 버린다. 남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 식대로 '오해'한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인간이란 '오해 하는 동물'일지 모를 정도이다. 게다가 오해를 바탕으로 '말하기'에 나서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분란과 다툼이 발생한다.  53

이렇게 귀가 순해진다는 것은 '말하는 나' 또는 '보는 것을 진리로 삼는' 에고(ego)가 사라진 상태를 뜻한다... 달리 말하자면 사회와 자연에 대해 평가하던 내가 사라지고, 그 평가하는 '나'조차 남을 대하듯 지긋이 살펴보는 그런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한다.  54

3. 팔일(八佾)편 - 문명은 숨을 쉰다.
공자는 예의 참된 의미는 예식 순서에 따라 절하고 분향하고 하는 형식이 아니라, 도리어 그 형식 속에 깃든 '공경하는 마음'을 실천하는 데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64

공자 말씀하시다. "사람으로서 사람답지 못하다면 예는 어디다 쓸것이며, 악(樂)은 또 무슨 소용이 있으랴."(3:3)
어떤 젊은이가 '예의 근본'을 여쭙자, 공자는 '위대한 질문'이라고 무릎을 치면서 참다운 예는 형식이 아니라, 그 형식 속에 깃든 '예의 정신'에 있노라고 천명한다.
임방이라는 젊은이가 예의 근본을 여쭈었다. 
공자, 무릎을 치며 외쳤다. "기막히구나. 이 질문! 예는 사치하기 쉬운 경향이 있는데 실은 검소한 것이 예의 근본이요. 장례식은 남의 눈을 의식해 호화롭게 하기 쉬운데 실은 슬픔에 겨워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 장례의 본다 정신에 합당하니라."(3:4)  66

인간은 악(樂)을 통해 사회적 관계 속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자유 의지를 발휘한다. 인간은 피치 못해 더불어 사는 존재이긴 하지만, 개미처럼 사는 동물은 아니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고 자기 세계를 만들고 표현함으로써 인간다움을 획득한다. 아니 더불어 살아가는 이유가 어쩌면 자기 세계를 창조하고 표현하는 악(樂), 예술의 건설을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본다면 공자느 ㄴ예술의 가능성을 누구보다도 긍정하고 또 중시했던 사람이다. 
공자 말씀하시다. "시에서 흥취를 얻어, 예의 뜻을 알고, 악에서 성취하리라."(8:8)  67

"사람에게 먼 계책이 없으면 언제나 가까운 데서 근심걱정이 생긴다."(15:11)
유자가 말했다. "예(禮)의 용도는 화목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옛 임금님들이 하신 정치는 다 화목을 아름답게 여겼으니, 작고 큰 정책들이 화목을 성취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리너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화목함이 좋다고 하여 여기에 빠지는 경우가 그렇다. 그러니 엄정한 예로써 뼈대를 세워 주지 않으면 화목함은 오래 유지되지 못하는 법이다."(1:12)  70

공자는 두 방면에서 덮치는 야만의 사태를 두려워하였다. 사회를 버리고 자기 몸의 안전만 취하는 이기주의가 그 하나요, 또 하나는 국가(또는 집단)가 개인을 위협하는 폭력을 발휘(전체주의)였다.  
이 두 방향 사이에서공자는 전통문화를 지키고자 하였다. 자칫 이 전통문화가 사라지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으리라고 몹시 절박해 하였다. 이에 그는 예와 악을 통해 '전체에 기울지도 않으면서, 개인에 머물지도 않는' 중용의 길을 보존하려고 내내 애를 썼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와 악의 내부조차도 염려하였다. 예도 고이면 썩고(형식주의), 악도 넘치면 줄줄 흘러내린다(매너리즘). 예와 악은 서로 긴장하면서 보존되어야 했던 것인데, 인간의 문명을 안팎으로 유지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공자는 깊이깊이 깨달았던 것이다. 공자는 바람 앞에 등불처럼 흔들리는 인간다운 삶을 지켜 내려고 예와 악의 변주를 내내 주장하고 또 연주한 것이었다. 그 척박하고 어려운 시대에!  71

4. 이인(里人)편 - 사랑의 길.
공자 말씀하시다. "... 군자란.. 황당하고 당혹한 때에도 인을 실천하느니."(4:5)  79
물질적 욕망과 명예에 대한 집착, 곧 부귀나 빈천에서 벗어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그가 군자다.

공자 말씀하시다. "군자란 어느 곳에서든 무슨 일을 하든, 꼭 해야만 하는 일도 없고, 꼭 하지 말아야 하는 일도 없어서 다만 적잘함에 따를 뿐."(4:10)

공자 말씀하시다. "군자란 남에게 베풀 것(德)을 생각하고 소인은 이익을 생각하며, 군자는 제 잘못을 생각하고 소인은 남을 탓하니라."(4:11)

공자 말씀하시다. " 옛사람들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자칫 몸이 그 말을 따르지 못할까 염려해서였다."(4:22)

공자 말씀하시다. " 아껴서 실수할 일이 적은 법."(4:23)

"군자란 말은 더듬거려도 실천은 민첩하게 해 내려는 존재."(4:24)
이렇게 보면 은을 체득한 군자의 몸짓은 우선 과묵하게 실천하는 사람이며, 둘째 자기 책임을 앞세우는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며, 셋째 물욕과 명예욕 같은 세속적 가치를 벗어나 남을 배려하고 사양하는 살마이니 '세속 속의 성인'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겠다.  80-81

공자 말씀하시다. "인이 어디 먼 고셍 있으랴. 내가 인을 실천하고자 하면 곧 인이 이르는 것을."(7:29)
인은 멀리 있지 않다. 도리어 내 주변, 내 곁에 있을 따름이다. "자기 주변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 바로 이것이 인을 찾는 방법"(6:28)이다.  82

번지가 인을 여쭈었다. 공자 말씀하시다. "사람을 아낌이지!"(12:22)
상대가 아까워서 손을 갖다 대기조차 어려운 마음, 이것이 '사람을 아낌(愛人)'이요. 곧 인이다. 상대방을 내 몸보다 귀하게 여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부족한 것은 메줘 주고 넘치는 것은 걷어 내어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인(仁)인 것이다.
그러니 집안에서 효를 통해 익힌 상대(부모)에 대한 사랑을 사회로, 국가로, 천하로 점차 베풀어 나가는 것이 인의 길이다. 그 상대방은 이제 친구, 동료, 연인, 회사, 국가가 될 참이다. 아니 시인 윤동주가 <서시(序詩)>에서 읊었듯,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함. 이 것이 인이다. 애틋하지 않은가, 사랑하는 마음이. 또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인의 실천이란.

5. 공야장(公冶長)편 - '자공'이라는 제자
스스로를 철저하게 객관적을 성찰할 수 있는 눈.
자기 성찰의 눈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사소한 것 같지만 그 끝은 하늘과 땅의 차이를 가르게 되는 법이다. 소인배는 이런 성찰의 자세가 없기 때문에 남의 잘된 것을 보면 꼭 나븐 점을 찾아 비난하고, 자기가 한 일은 훌륭하다고 잘못 자부하는 것이다.  89-90

"가난한데도 즐길 줄 하는 삶"
가난을 즐겨하는 미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가난을 가난으로 여길 겨를이 없음, 또는 물질적 조건이 나의 일상 생활을 침해하지 못하는 그런 '경지'를 이른다. 이미 가난은 내 마음속에 찌꺼기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가난의 콤플렉스를 벗어던진 말간 평화의 자리다. 그러므로 공자가 제시한 새로운 삶, "가난한데도 즐기고, 넉넉한데도 예를 좋아하는 삶"은 '가난/부유함'과 같은 물질적 조건, 또는 욕망에서 벗어나 ㄴ곳이다. 이제야 하치 한여름의 태풍이 지나간 해맑은 하늘처럼, 티 없고 왜곡 없이 사물을 바로 볼 수있는 세계가 열린다.  92

물질에 대한 욕망 또는 결핍의 그늘을 벗어 버린 자리에 참된 인간의 삶(일상)이 존재하며, 그 일상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궁극적 가치를 뜻한다는 깨우침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자면 문제의 핵심은 물질적 욕망이지, 물질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  94

6. 옹야(擁也)편 - 멋진 녀석들
공자가 맹지반을 칭찬한 것은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지 않음'. 즉 겸손함 때문이다. 용기는 육신의 힘 자랑이 아니라 그 힘으로 얻은 공을 뻐기지 아니할 때에야 얻어지는 것이다. 쉽게 오해하듯 용기는 센 주먹이나 날랜 발길질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낮추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용기의 집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 그러므로 용기는 정의, 덕성 같은 말과 깊이 관련된다. "정의를 보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용기 없는 짓이다."(2:24)라는 지적은 이 대목에서 유용하다.  103

용기란 힘을 발휘하는 것, 즉 '몸의 윤리'가 아니다. 용기는 벌써 겸손과 겸양이라는 '마음의 윤리'인 것이다. 이렇게 용기는 덕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공자가 전쟁터에서 얻는 요익 가운데, 공로를 뻐기지 않고 사양하며, 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특별히 중시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발전하면 유교에서 숭상하는 덕으로 승화된다는 점도 짐작할 수 있다. 공자가 맹지반을 크게 칭찬한 까닭이 이 지점에 있으며, 또 수천 년을 흐른 오늘날 우리들 눈에조차 그가 멋있게 보이는 것도 그의 '용기-덕-사양하는 마음'이 가진 보편적 호감 때문일 것이다.  105-106

공자가 제자 칠조개에게 벼슬자리를 알선해 주었다.
그는 "저는 아직 그 자리를 맡을 만한 깜냥이 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자가 이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5:5)  106

차가운 자기 성찰과 더불어 가난과 부유함이라는 물질적 조건 너머에 인간다움이 있다는 가르침의 핵심을 파악한 제자에게서 큰 기쁨을 느낀 것이다.   107

<논어>에는 "민자건이 스승을 모실 때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였다"(11:12)는 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평소에 무척 과묵한 살마이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집에서는 효도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니, 공자가 그리워하던 군자의 상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공자가 "군자란 말은 어눌하면서 행동은 민첩한 사람"(4:24)이라 고 정의한 대목이나 "사람됨이 강직하고 굳세고 소박하고 말은 어눌할 때 인(仁)한 경우가 많더구나."(13:27)라는 경험론을 편 것도 민자건의 경우에 들어 맞는다.  111

7. 술이(述而)편 - 공자의 학교
"배우고 싶은 자는 누구든 와라!" 이것이 공자 학교가 갖춘 가장 큰 특징이었다.  116

배우려는 이에게는 다 열려 있는 문, 그러나 옳게 배우려 들지 않는 이는 남겨 두지 않는 엄격함. 이것이 공자 학교의 모습이었다.  118

'묻지 않으면 답하지 않는다'는 원칙.  119
요컨대 질문할 줄 아는 자가 제자이며, 그 질문에 정답을 내릴 수 있는 자가 스승이다.  120

8. 태백(泰伯)편 - 성왕의 계보

9. 자한(子罕)편 - 공자의 사생활
위대함이란 저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어떤 신비가 아닌 일상생활 주변에서 빚어지는 중용적 삶에서 드러나는 것임을 알아채야 한다.  142

중용이란 한 사안이 가진 둘 이상의 의미를 이해하면서 그 당시에 합당한 이치를 찾는 것이지. 결코 '이것도 흥, 저것도 흥'하는 식의 포용주의가 아니다.  145

매일매일 삶을 산책하듯, 관찰하고 느끼면서 살아가는 삶. 이것이 공자의 일상생활이었던 것이다.  150

내로라고 뻐기지도 않고, 남을 시기하지도 않으면서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모습, 이것이 공자의 진면목일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느 눈 밝은 제자는 공자를 모순된 단어로 묘사하였으니, 나는 이 역설적인 표현 속에 공자의 참된 모습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공자께서는 따뜻하면서도 엄격하였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무섭지는 않았고, 공손하시면서도 태연자약하셨다.(7:37)  151

10. 향당(鄕黨)편 - 공자의 웰빙
함부로 먹지 않고 함부로 입지 않음, 처한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행동하고 선택하는 섬세한 대응, 이것이 유교에서 꿈꾸는 인간다움의 틀, 곧 문명성이다.  160

웰빙이란 비싼 음식과 신선한 공기가 아니라 섬세한 미적 감각을 일상생활 속에서 관철할 때 빚어지는 아름다움이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에서부터, 그리고 주변의 사소한 사물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에서 웰빙이 이뤄지는 것이다.  165

11. 선진(先進)편 - 사제 : 안연과 스승

12. 안연(顔淵)편 - 진리 또는 '매트릭스'
안연이 여쭈었다. "인(仁)이란 무엇입니까?"
공자 말씀하시다. "'내'가 실체라는 생각을 넘어 관계라는 각성에 이르면 '인'이 되지. 단 하루라도 '내'가 실체가 아니라 관계라는 진리를 깨닫기만 한다면, 온 세상이 본래부터 사랑으로 충만한 것임을 환히알게 되리라. 무론 이런 진리는 스스로 깨닫는 거지 결코 남이 해 줄 수는 없는 거야."
안연이 그 길을 물었다. 공자 말씀하시다. "눈에 보이는 게 독립된 개체라는 생각을 버려. 둘째, 세상이 관계가 아닌 개체로 이뤄졌다는 말은 믿지 마. 셋째, '나를 알아 달라'는 소릴 하지 마. 넷째, 이기적인 행동은 하지 마(나를 남에게 접속해!)."
안연이 흐느끼며 말했다. "제가 비록 명민한 녀석은 아닙니다만 죽는 날까지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잡겟나이다."(12:1)  179-181

인간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은 잠잘 때나 의식이 없을 때도 스스로 움직이는 심장 박동을 갖고 있다. 이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제 스스로 그렇게(自然)' 변화하는 자연의 리듬과 동질적이다. 인간과 자연은 본래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또 사람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간다. 사람은 '본래적으로 사회적 동물'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관계적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관계 맺는 존재다. 복례란 이런 인간의 본래적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질리고 환원되기의 뜻이다.  183
요컨대 극기복례란 나를 개체로 인식하려는 눈(시각)과 귀(청각)의 편견에서 해방되어 내가 원래 남(바깥)과 '관계'를 맺을 때에야 참된 나를 이룰 수 있다는 진실을 제대로 알고 또 올바르게 회복해가는 실천을 의미한다.  184

눈에 보이는, 거울에 비치는 개체도 이뤄진 세계는 진실이 아니라 도리어 환상(매트릭스)이다.  185

요컨대 개체로서의 내가 환상(매트릭스)임을 깨닫는 순간 세계는 하나의 꽃으로 피어남을 알게 되리라는 전망이다. 이것이 진리요 인이다.  187

진리로 가는 네 가지 길을 정리하자면 '제반 행동, 즉 듣고, 보고, 말하고, 행동하는 데서 두루 에고를 벗어라'는 것이다. 관게 맺기, 곧 예(禮) 속에 진리가 깃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러므로 관계를 순조롭게 만드는, 남과의 접속을 원활하게 하는 접대와 응대의 기술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소학(小學)>에서 교육을 바로 관계 맺지 훈련, 이른바 "응대하고. 대접하며, 빗질하고, 청소하느 ㄴ방법", 곧 응대소쇄(應對掃灑)로부터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윤리란 실은 사람 사이의 관꼐를 적절하게 이해하고, 접속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189

공자 말씀하시다. "... 인이란 내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 주고, 내가 갖고 싶으면 남도 갖게 해 주는 실천이지. 우리 일상의 주변에서 사랑의 길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게 인을 실천하는 법이지."(6:28)
인을 실천하기 위해 유엔 사무총장이 될 필요가 없고 대통령이 될 필요가 없다. 살아가는 "일상의 주변에서" 그저 내가 갖고 싶은 것은 남들도 갖고 싶겠거니"하면서 '미루어 헤아리는 마음가짐', 바로 여기서 피러나는 것이 인이라고 가르친다.  191

13. 자로(子路)편 - 정치란 무엇인가
공자는 인(仁)을 설명하면서 '정치란 곧 소통'임을 강조한 바 있다.  193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면 곧 나와 남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지고 그렇지 못할 경우 원망이 생긴다. 여기 원망이란 요즘 말로 하자면 커뮤니케이션 부재로 인해 쌓인 화병, 그것이 곪아 터져 나온 정쟁이 될 것이다.  194

즉 공자에겐 '말이 서로 통하는 상태'가 정치의 원형이다. 공자가 꿈꾼 좋은 정치는 '말이 통하는 문명 사회'라는 점을, 말의 소통은 한마디로 '신뢰'로 개념화된다.  
공자가 꿈꾼 문명 세계란 마의 소통, 곧 약속과 실천이 살아 있는 곳임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195

공자는 관계의 직분, 즉 명분(名分)을 어김은 곧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까지 경고하는 것이다.(3:13, 9:11)
따라서 야만 상태에는 정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가 언어와 약소긍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정치학은 정명론(正名論)으로 귀결되는데,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명분에 합당한 '정당성'에 따라 정치적 힘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196

공자의 위대한 점은 폭력을 정치의 전모로 이해하는 당시 정치가들에게, '좋은 정치란 폭력이 아니라 언어로 형성되는 신뢰의 힘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데 있다. 이 점은 동양의 정치사상 발전사에서 분수령에 해당하는 것이다. 공자는 그 이전까지 샤먼의 힘(신화)과 폭력의 힘(무력)에 의해 주도되었던 정치 세계를, 말과 약속이 실천되는 인간 세계로 전환시킨 최초의 사상가였다.  197

유능한 경영인은 직원들의 나쁜 점을 들추면서 이것 고쳐라 저것 고쳐라 하지 않는다고 한다. 회사의 큰 목표를 제시하고 그쪽으로 분위기를 잡아나가면 장점들은 모이고 단점은 묻히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을 옳게 알아서 제자리에 맞게 쓰는 것은 인정(仁政)의 승패가 달려 있는 것이다.  208

14. 헌문(憲問)편 - 선비가 걸어온 길
요컨대 수기치인이란 선비가 공직에 취임하여 남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도덕적 훈련이 심화되어 자립하게 됨에 따라, 거기서 번져 나오는 에너지(aura)에 주변이 끌려드는 것이다.  215

공자는 선비를 두 유형으로 나눠보고 있다. 
하나는 달사(達士)요, 또 하나는 문사(聞士)다.
달사의 요건으로서 그는, "정직한 인격성과 정의를 좋아하며 남의 말을 잘 들을 것, 또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이에 반해 사이비 선비, 즉 문사란 겉으로는 도덕적인 선비 같지만 실제로는 업무 처리에나 능한 '기술적 지식인'에 불과하다고 평한다.  218

15. 위령공(衛靈公)편 - 평천하의 길 : 공자대 자로
공자는 힘이 아니라 덕으로 정치를 행하는 것만이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유일한, 그리고 올바른 길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225

군자란 "가난한데도 (자기 길을) 즐길 줄 아는"(1:15) 존재여야 했다. 그러니 군자를 '짐짓 곤공할 줄 아는 존재'로 본 것은 내력 있는 방응인 것이다.  228

공자가 가르치고자 한 미덕은 무턱대고 힘을 발휘하는 거이 아니라 '무엇이 정의인가'를 판단하고, 또 '올바른 시대정신'을 찾는, 즉 '정의를 찾는 노력'이었다.  231

공자는 지금 당장은 비현실적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문명을 옳게 되살리려면, 군자란 '문화 시대의 지도자'로 새롭게 개념 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그 새 시대를 준비하는 군자의 키워드가 '수기이경(修己以敬)'이라는 언어였다. 이를 통해 자기 책임성, 성찰성 그리고 내향성을 갖춘 존재가 군자이며, 또 그가 발휘하는 힘이 폭력이 아닌 '매력'으로 전환될 때에야 인간다운 사회, 문명적 질서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235

둘러 가는 것 같지만 '덕성을 통해 주변이 끌려드는' 매력의 힘, 이것만이 천하를 평화롭게 이끌 동력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235

16. 계씨(季氏)편 - 공자의 정치경제학 : 분배냐 성장이냐
계씨는 주나라 재상보다 더 부유하였다. 그런더ㅔ도 염유가 그를 위해 세금을 수탈하여 더욱 부유하게 만들었다.
공자 말씀하시다. "저 놈은 우리 학생이 아니다. 얘들아! 북을 울려서 성토하여도 좋으니라."(11:16)
아무리 탁월한 기예와 지식을 갖고 있어도, 도덕적 판단이 배제된 기술 만능의 사고 방식은 재난을 부르게 된다는 공자의 도덕주의적, 또는 성찰적 가치관을 여실히 볼 수 있는 대목. 
이거을 오늘날로 끌로와 해석하자면, (정치) 기술의 사회적 의미, 수단이나 방법의 도덕성에 주의해야 한다는 공자의 경고로 볼 수 있다. 공자 가르침의 핵심은 용맹이나 지혜에 있다기보다는 이러한 재능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도덕적 성찰에 있음을 이 대목에서 다시금 느낄 수 있다.  246-247

도덕적 가치 판단...

공자의 정치 경제학은 빵을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재화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정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자에게 정치란 부의 축적을 꾀하는 경제에 종속된 기술적 행위가 아니라, 부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하는 사회 정의의 수립에 핵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균등한 분배, 서로 다름에 대한 인정, 그리고 안정된 생활, 이 세 가지가 국가를 경영하는 요체라는 것이다.(즉 "대개 고르면 가난하지 않고, 화목하면 모자라지 않고, 평안하면 기울지 않기 때문이다.")  250

17. 양화(陽貨)편 - 공자가 미워한 것들
양화 편은 특별히 인간 공자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253

이 편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부분은 쿠데타 세력의 초청에 마음 흔들려 하는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공자 모습이 현실감 있게 그려진다.
그리고 뒷부분에는 공자의 분노와 증오를 많이 기록해 놓았다. 제자인 안연조차 "화난 마음을 다른 데서 풀지 않고, 두 번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6:2)의 경지를 얻었다고 한 점을 염두에 두면, 분노해야 할 대상에게는 뜨겁게 분노하는 것이 곧 성인의 풍모임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 역시 유고의 한 특징이다. 
분노해야 할때 분노하지 못하는 것은 참된 용기가 아니다. 이 편의 후반부 핵심은 "정의를 보고도 실천하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다."(2:24) 라는 구절로 대변할 수 있으리라.  254

공자 말씀하시다. "천한 놈드로가 국가 대사를 함께 할 수 있겠더냐? 그 놈들은 자리를 얻지 못하면 얻으려고 전전긍긍하다가, 일단 얻고 나면 잃을까 전전긍긍한다. 정녕코 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들 땐, 못하는 일이 없는 놈들이다."(17:15)
자리나 지위란, 스스로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면 얻게 되는 것이다(4:14)  257

사람이 참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미덕을 필요로 할까. <대학(大學)>의 가르침을 받들자면, "멈춰야 하는 곳에선 멈출줄 아는 것(知止)"이 그것이리라. 
처한 곳이 추운 데라면 추위에 멈추고, 더운 곳이라면 더위와 더불어 버티는 것. 추위에 떨면서도 따뜻함을 구걸하지 않고, 더위 속에서는 또 뜨거움을 버텨나가는 것, 이것이 사이비가 아닌 '참'으로 가는 길이다.  262

자공이 말하였다. "선생님도 미워하는 것이 있는지요?"
공자 말씀하시다. "미워하는 게 있지. 남의 잘못을 떠벌리는 것을 미워하고, 낮은 데 있으면서 윗사람 헐뜨든 것을 미워하고, 용맹스럽기만하고 예가 없는 것을 미워하며, 과감하기만 하고 꽉 막힌 것을 미워한다네."
공자가 물었다. "자네도 미워하는 것이 있는가?"
"주워들은 걸로 자기 지식인 양 여기는 짓, 불손함을 용기로 아는 짓, 그리고 고자질을 정직으로 여기는 것으 미워합니다."(17:24)  263

18. 미자(微子)편 - 나의 길을 가련다
공자가 위나라에서 경쇠라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삼태기를 짊어진 사람이 지나다 듣고는 말했다. "쓸쓸한 마음이 소리에 들어 있군."
다 듣고 나서 또 말했다. "흠! 천박한데, 그 소리가. 세상이 날 알아주지 않으면 또 그뿐. '물이 깊으면 옷을 입고 건너고, 물이 얕으면 걷고 건너라'했거늘."
공자가 그 말을 듣고 말했다. "깔끔하구먼. 하나 그게 어려운 건 아니지!"(14:42)  268
은둔자의 비판은 '시대에 맞춰 그에 걸맞게 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이렇게 물이 깊은 때(곧 암흑 시대)에는 은둔하는 것이 옳은데, 뭐 그렇게 미련이 남아 사회에 개입하려 하는 것이요!"라는 질타가 된다.
이에 대해 공자는 "깔끔하구먼. 하나 그게 어려운 건 아니지!"라는 날렵한 뒷발차기로 응대한다. 곤자는 은둔자드르이 뜻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한 몸 보전하려고 세상사에 깨끗이 미련 버리는 일, 그깟 것이야 나도 하려 들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어려운 것은, 더럽고 추악하지만 '그럼에도', 아니 더럽고 추악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더욱 세상사 속으로 참여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길"에 있다는 것이다.  269-270

공자는 은둔자들이 사회적 예의(손님을 접대하고, 자식들을 소개하는 행동)는 실천하면서도 막상 정치적 재난을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행위는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즉 '벼슬 살지 않는 것', 다른 말로 하자면 '정치적 무관심'은 지식인으로서는 옳지 않은 행동이다.  272

그는 시대의 혼란과 소통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라고 보았던 것이다.  273

19. 자장(子張)편 - 우정이란 무엇인가
공자 말씀하시다. "도움이 되는 벗이 세 종류요, 손해를 끼치는 벗도 세 종류가 있다. 정직한 벗이 도움이 되는 첫 번째요, 약속을 꼭 지키는 벗이 두 번째요, 견문이 넓은 벗이 세 번째다. 손해를 끼치는 벗으로는 꽉 막혀 세상 넓은 줄 모르는 녀석이 첫 번째요, 알랑방귀 뀌는 녀석이 두 번째요, 간사한 녀석이 세 번째다."(16:4)

친구는 친구요, 형제는 형제다.(형제는 한 핏줄로 태어난 동기同氣이니 하늘이 맺어준 자연적 관계, 즉 천륜天倫이요, 친구는 의義, 즉 뜻이 맞아서 맺어진 사회적 관계, 즉 인륜人倫이니 차이가 있다.)
친구를 사귀는 데는 나름대로 '거리'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서로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래 사귄 친구 사이에도 공경하는 자세를 잃지 않은 안평중에게 공자는 '친구를 참 잘 사귀는 사람'이라고 평한 것"(5:16)이리라.
그러니 친구가 잘못한다고 지나치게 끌어안고서 안달복달할 것은 없다. 몇 번 충고해 보다가 고치지 않으면 그냥 '이제부터 나와는 길을 달리 하니 친구가 아니다'라고 절교하면 그만이다. 구태여 친구의 소맷자락을 부여잡고 '의리가 어쩌고, 우정이 어쩌고' 해가면서 나서다간, 괜한 봉변을 당하는 수가 있다. 그렇게 봉변을 당한 다음에야 '넌 내 친구가 아니다'고 절교해 본들 맞은 뺨만 더 아플 뿐이다.  284

자유가 말했다. "임금을 섬긴답시고 자주 '아니 되옵니다'라고 간하다간 공욕을 치르는 경우가 생기고, 친구 사이라고 지나치게 조언하다가는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4:26)

자공이 우정을 여쭈었다.
공자 말씀하시다. "충고를 해서 좋은 방향으로 이끌되, '아니다'싶으면 그만두어야 한다. 스스로 욕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12:23)  285

진정한 벗은 나와 같은 존재거나 '또 다른 나'이다.  286

20. 요왈(堯曰)편 - 진리의 계보학
중용이란 무엇인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지나치지 않고 모자라지도 않음을 뜻하는 최적의 상태, 곧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용의 관건이다. 이것은 건강의 의미와도 직통한다. 말하자면 비만도 아니요 영양실조도 아닌 한 중간, 이것이 건강이요 또 그것이 '몸의 중용 상태'다. 따라서 중용이 지향하는 좋은 정치는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290

"좋고 나쁜 것의 두 끝을 잡아서 그 가운데 가장 적절한 것을 백성에게 베풀었다"는 말은, 중용 정치학이 최적의 상태를 찾는 과정이지 이것과 저것을 섞은 회색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잘 말해 준다. 중용은 차라리 극단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291


<논어>의 인생이란 '내내 배우고 또 익히며 살다가 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298


에필로그

인간을 인간답게 대접하기, 이것이 <논어>의 중요한 주제다.
나아가 배움과 가르침이 <논어>의 중요한 주제인 바, 그 요체는 '짐승 같은 인간을 어떻게 하면 사람다운 인간으로 만들 것인가', 또는 '야만의 세계를 어떻게 문명의 세계로 전환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그 과제의 초점에 효(孝)가 존재한다.  303

맹자는 인간을 둘러싼 관계망이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고 본다
오륜(五倫)이다.
(1)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2) 남편과 아내의 관계
(3) 국가와 국민으로서의 관계
(4) 형과 아우의 관계
(5) 동료 또는 친구 관계

유교의 학문이란, 이 다섯 가지 네트워크의 의미를 배우고 실천하는 학문인 것이다. 유교에서 최고 대학이 성균관이요, 그 성균관의 본관이 명륜당(明倫堂)이다. 명륜당이란 곧 '네트워크(倫)를 환하게 익히는(明) 교실(堂)'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유교 학문이란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다섯 가지 관계(네트워크)를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는 것일 따름이다.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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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 

A지점에서 B지점을 거치지 않고 C지점으로 곧바로 가는 길.
B지점에서만 만날 수 있는 Bird(자유로운 새), Beach(탁 트인 해변), Bread(맛있는 빵), Beauty(아름다운 여인) 모두 다 포기해야 하는 길. 즉, 빠르다는 것은 놓치는 게 있음을 알려주는 길.


 

성공의 지름길, 창업의 지름길, 합격의 지름길, 공부의 지름길, 운동의 지름길, 다이어트의 지름길, 행복의 지름길, 건강의 지름길, 부자의 지름길

오토바이를 타면 시원하고 빠릅니다. 자동차를 타면 안락하고 빠릅니다. 기차를 타면 차분한 정이 있으면서 빠릅니다. 비행기를 타면 엄청 빨리 날아 갑니다.... 걷는것을 기준으로 했을때 그렇습니다.
공통적으로 빠르다는 것은 같습니다. 공통점이 하나더 있습니다. 그것은 빠른 만큼 보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빨리빨리를 외치거나.. 때로는 속으로 많이 외치고 있을지 모릅니다.

조성모라는 가수의 노래 중에 <가시나무새>라는 곡이 있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노랫말로 시작합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도가니'에서 교장이 교장실에서 장애아에게 해를 입힐 때 이 음악을 틀어놓습니다.
어찌 보면 이 실화의 악을 담당하는 사람들도 가사처럼 자기밖에 모르기에 자기가 편한 지름길을 택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그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의미의 놓치는 것이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생활속에서 빨리 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과학의 발전은 우리에게 시간을 많이 만들어 줬습니다. 그래서 예전보다 무엇이든 빨리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남는 시간 무료하게 보내지 말라고 과학은 또 다른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빠르게 처리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영상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의 흐름속에 무언가 꽉차있지만, 늘 허전함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요?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요?

이처럼 빨리 가는 것은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여러가지 과정들의 과외활동으로 공부의 속도를 빨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시간이 없어졌습니다.
대신 진정한 학습(
)을 놓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무엇을 더 놓치고 있는 것일까요?
 
놓쳐도 되는것을 놓치는 것은 이해되지만, 지금 우리가 놓치면 안되는 것을 놓치면서까지 지름길을 찾는다면 우리가 사는 이유에 합당하게 선택하는 것일까요...???
놓쳐도 되는것과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지름길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기회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뺏어가는 것은 아닐까요..!!







 
지름길의 결과는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 인생에 중요한 것이 될 수 있을까요?


물론 지름길에서는 보지 못할 수 있는 것을 볼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명에 크나큰 위협을 주기도 합니다.
인생은 모험의 연속이라지만, 이러한 것이 모험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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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8 다음..

2011. 10. 18.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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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8 다음.

2011. 10. 18.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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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정확히 보여주는 책이란 생각이 든다.
카피라이터 답다고 해야 할까.. 
생각을 뒤집게도 생각을 해보게도 생각을 깊게도 한다.
저자는 책을 '한 번에 다 읽지 말라.'고 한다.
이유는 재밌기에 재미에만 빠져 의미를 놓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자의 말대로 재밌다. 글이 심플하면서도 깊이도 있고 사고의 전환도 되면서 읽혀 내려간다.
한 번에 다 읽지 말라는 그 말은 자신감에서 나온것이라 느껴진다.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하는 책이다.
내용은 짧지만 긴 여운.. 그리고 긴 생각을 하게만드는 마력도 있는듯 하다.

혹자는 재미는 있지만 다 아는 이야기를 다른 예를 든 것 뿐이라 생각할 지 모르나... 결코 쉽게 나오는 표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카피라이터니까' 란 생각이 들 수 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고 그의 생각의 방식을 따라가다보면 누구나 독특한 발상이 나오게 되고 공감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이 된다.



인생을 조금 다르게 만져보고, 조금 다르게 뜯어 보고, 조금 다르게 굴려보고, 조금 더 깊이 가슴에 넣어보고, 조금 더 멀리 떨어져 다시 보고 하면서 신나게 노는 책입니다.
재미에만 빠지지 마시고 의미에도 빠져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4


ONE.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지름길 
A지점에서 B지점을 거치지 않고 C지점으로 곧바로 가는 길.
B지점에서만 만날 수 있는 Bird(자유로운 새), Beach(탁 트인 해변), Bread(맛있는 빵), Beauty(아름다운 여인) 모두 다 포기해야 하는 길. 즉, 빠르다는 것은 놓치는 게 있음을 알려주는 길.  12

내가 접었지만 내가 접지 않은
종이학을 접었다. 날씬하게 잘 접었다. 그런데 누가 접은 거냐고 묻는다면 내가 접었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내가 접은 것은 없다. 내가 접은 종이학도 나 혼자 접은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무를 심었을 것이고, 누군가가 그 나무에 물을 뿌렸을 것이고, 누군가가 그 나무를 베었을 것이고, 누군가가 그 나무로 종이를 만들었을 것이고, 누군가가 그 종이를 나에게 가져다 줬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나에게 종이학 접는 법을 가르쳐 줬을 것이고, 누군가는 나에게 종이학 접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을 소개해 줬을 것이고, 누군가는 나에게 종이학 접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을 소개해 준 사람을 소개해 줬을 것이다. 천 번을 접는다 해도 나 혼자 접은 종이학은 없다. 내 손을 잠시 만난 종이학이 있을 뿐.  15

몸이 마음에게
나는 조금 더 움직일 테니...... 너는 그만 좀 움직여.  23

문제와 답
열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이중 나머지 단어와 관련 없는 단어 하나를 찾아보세요. 
치과, 이빨, 잇몸, 스케일링, 충치, 치약, 서울역, 칫솔, 사랑니, 틀니 이상입니다. 어려운가요? 어렵지 는 않지만 왜지 당신이 생각한 답이 정답은 아닐 것 같은가요? 그게 정답이라면 이런 문제를 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정답은 서울역입니다.
당신이 생각한 답과 같은 서울역입니다.
세상 모든 문제는 답을 몰라서 못 푸는 게 아니라, 자신 없어 하거나 주저하다가 못 푸는 것이지요. 지금 당신이 안고 있는 크고 작은 문제들, 당신이 알고 있는 답 그대로 행동하시면 다 풀 수 있습니다. 돌아가거나 비켜가려 하지만 않는다면.  24

서산에지는 해를 끄집어 올리는 방법
조용히 앉아 열 시간을 기다린다. 
그리고 동족으로 돌아앉는다.  29

입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
택시 운잔사에게 기사님 운전 참 잘하시네요. 라고 말하면, 그때부터 그 기사는 운전을 잘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빠르고 편안하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입에게 나를 자랑하는 일을 시키지 마시고 남을 칭찬하는 일을 시키십시오. 그것이 입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입니다. 내 자랑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면 어떻게 하느냐고요? 근질거리면 그냥 긁어주십시오. 내 자랑은 남의 입이 해줄 것입니다.  31

경력의 반대말
경력을 거꾸로 읽어 보세요.
그냥 얻어지는 경력은 없습니다.  34

진자 불쌍한 사람
못 먹는 사람, 못 입는 사람, 못 자는 사람, 못 보는 사람 그리고 못 잊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그렇게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 불쌍한 사람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더 먹으려는 사람, 더 입으려는 사람, 더 자려는 사람, 더 보려는 사람 그리고 잊을 추억도 없는 사람.  36

글자 하나의 요술
구두는 그냥 구두입니다. 빨간 구두, 노란 구두 다 그냥 구두입니다. 굽이 높은 구두, 낮은 구두 다 그냥 구두입니다. 그러나 구두 앞에 새 라는 글자 하나가 붙으면 그것은 더 이상 구두가 아닙니다. 설렘입니다. 새집, 새차, 새옷... 어떤 물건도 새 라는 글자 하나만 붙이면 요술처럼 설렘으로 바뀌고 맙니다.
헌 구두에 설렘이 없듯 헌 생각에도 설렘이 없습니다. 설렘이 없다는 것은 의욕도 희망도 미래도 없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생각 앞에도 새 라는 글자 하나를 붙여 요술을 부려 보세요. 무겁던 생각이 새처럼 가볍게 날아오를지도 모릅니다.  38

답다
조용필답다. 열정적이라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서태지답다. 새로움이라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신해철답다. 날카로움이라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윤도현답다. 믿음직이라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김장훈답다. 따뜻함이라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당신의 이름 뒤에도 답다를 붙여보세요. 떠오르는 그림이 있나요?  없다면 다행입니다.
지우고 그리는 것보다 백지 위에 그리는 것이 훨씬 쉬우니까요. 
자, 오늘부터 세상에 하나뿐인 그림을 그려가는 겁니다. 
당신답게.  41


TWO. 그래도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
유효기간
빵이나 우유는 물론 운전면허증에도 유효기간이 있다. 
신용카드나 할인쿠폰에도 유효기간이 있다.
그러나 지갑 속 주민등록증에는 유효기간이 없다.
유효기간이 지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뜻이다.  45

사랑의 모순
사랑에 눈을 뜨면 
사랑에 눈이 먼다.  51

외로움
외로운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외로움을 들키는 것이다.  55

가까워 진다는 것
산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산에 올라 산을 다시 보면 아름답지 않은 많은 것들이 보입니다.
예전에는 아름다웠던 사람이 더 이상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과 그 사람의 거리가 그만큼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가까워지면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기 대문입니다.
가끔은 몇 걸음 물러나 그 사람을 다시 보십시오.
처음 그 사람을 만나 눈을 떼지 못했던 그 만큼의 거리에서.  57

뒷모습
뒷모습이 슬퍼 보이는 사람은 슬픈 거다.
뒷모습은 거짓말을 못한다.  60

이혼하는 사람들을 위한 변명
이혼으로 갈라서는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뚜렷한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성격문제, 아니었습니다.
경제문제, 아니었습니다.
자녀문제,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결혼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결혼이 만듭니다. 이혼만 야단치지 마십시오.  66

마음
사람에서 몸을 뺀 나머지.
몸보다 가벼워 자주 흔들리고, 몸보다 약해서 병치레도 잦다.
그러나 몸은 일생 동안 마음을 부러워한다.
몸이 할 수 있는 사랑은 마음이 할 수 있는 사랑의 1%도 안 되니까.  69

카사노바의 실수
카사노바의 실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74

사과를 깎을 때
칼을 든 손의 손놀림도 중요하지만 사과를 든 손의 손놀림도 똑같이 중요하다. 
사랑은 이렇게 오른손과 왼손이 조화롭게 움직이며 사과를 깎는 것과 같다.
어느 한 손이라도 엇박자로 움직이면 칼에 손을 베어 사과에 피멍이 들고 만다.
피를 본 후에 사과하는 것은 사과에 대한 예의도 사랑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76

사랑이 뒤집히는 이유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함께 가는 길에는 과속방지용 턱이 없다.  77

뱃살 빼는 법
뱃살이 잡히면? 키스를 하세요. 숨이 막힐 때까지 뜨거운 키스를 하세요. 키스를 하는 동안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으니까요.
미성년자가 뱃살이 잡히면? 라면, 떡볶이, 순대 먹지 말고 나이를 먹으세요. 하루 빨리 어른이 되어 뜨거운 키스를 하세요.
키스를 했는데도 뱃살이 잡히면?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사랑하며 살 수만 있다면 뱃살 따위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78

사람과 산의 대화
사람이 산에게 말했습니다. 
늘 그자리에 있어줘서 고마워, 다 받아줘서 고마워. 묵묵히 내 얘기를 들어줘서 고마워.
산이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찾아와줘서 고마워. 외로움에 떨지 않게 해줘서 고마워. 솔직한 얘기를 들려줘서 고마워.
고마움은 전염됩니다.  83


THREE.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
없음과 있음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는 위험하지 않다.
달릴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위험한 건 브레이크를 믿는 자동차.
있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문제를 만든다.  92

은행을 터는 또 하나의 방법
용기 없는 은행 강도는 은행 문을 과감하게 열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가 영원히 은행을 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용기 있는 은행 강도가 은행을 털고 나오는 순간 그를 털면 된다.
물론 용기 있는 강도가 언제 은행을 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밤낮 없이 은행 문 앞에 서있을 수 있는 끈기만 있다면 
은행을 털지 않고도 은행을 털 수 있는 것이다.
용기 있는 자만이 세상을 얻는다는 가르침은 틀렸다. 끈기가 용기를 이길 수도 있다.  93

썩지 않기
땀에는 소금기가 있다. 그래서 땀은 썩지 않는다. 
그래서 땀을 흘리는 사람은 썩지 않는다.
그러나 남이 흘린 땀을 가로채려고 
침만 흘리는 사람은 결국 썩고 만다.
침에는 소금기가 없다.  96

깨끗한 손톰을 갖는법
손톰에게 힘든 일을 시키지 않고 피아노 치고 기타 치며 빈둥빈둥 놀게 한다.
틀렸습니다.
하루에 한 번씩 네일아트 찾아가
매니큐어 칠해주면 왕비마마 모시듯 관리한다.
역시 틀렸습니다.
깨끗한 손톱을 갖고 싶으면 손톰에게 일을 시키십시오.
머리를 감으면 손톱은 저절로 깨끗해집니다.
설거지를 하면 손톱은 저절로 깨끗해집니다.
깨끗한 손톱을 갖는 법과 깨끗한 정신을 갖는 법은 같습니다.  97

문제를 미리 가르쳐 주는 시험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면 하느님이 뭐라고 묻는지 아십니까.
후회없이 살았는가?
문제를 알았다면 지금부터라도 모범답안을 만들어 보십시오.  98

우산이 허락한 자유
우산을 들면 손 하나가 사라진다.
우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가방도 들어야 하고 
뒷주머니에서 지갑도 꺼내야 하고
길을 묻는 사람에게 길도 가르쳐주어야 한다.
하지만 우산을 던져버리면
자유롭던 나머지 손 하나까지 사라진다.
두 손을 모두 비를 막는 데 써야 한다.
느긋하던 두 발까지 분주하게 움직여야 한다.
인생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불편들이 
어쩌면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는지도 모른다.  100

술자리에서 손해보지 않는 법
남들이 술 집을 고를 때 그냥 씩 웃는다. 둘러보면 대한민국 순집들 다 거기서 거기다.
남들이 안주를 고르면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내 입에 꼭 맞는 안주는 그 집에 없다.
남들이 원 샷 할 때 잔을 꺾어 마신다. 용감하다고 술이 더 맛있어지는건 아니다.
남들이 안주 두 점 집을 때 한 점 집는다. 뱃살에게 물어보면 오히려 칭찬 받을 일이다.
남들이 꺼낸 화제를 거부하지 않는다. 이유 없이 술자리에 끼어드는 화제는 없다.
남들이 두 마디 할 때 한 마디 한다. 입이 하는 실수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
남들이 구두끈을 맬 때 먼저 계산한다. 다음엔 그들이 알아서 계산하게 되어 있다.  102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것
놀이터의 아이들은 그냥 노는 게 아니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인생을 배운다.
그네에 홀로 앉아 독립을 배운다.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며 겸손을 배운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용기를 배운다.
모래로 지은 밥을 나눠먹으며 믿음을 배운다.
놀이터는 어른들에게도 개방되어야 한다.  103

로또의 가르침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이 로또 사러가다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다는 것을 아십니까? 압니다. 
그런데 왜 로또를 사십니까? 제 인생에 실패를 몰랐습니다. 그게 오히려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패배하는 법, 좌절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걸 돈을 버려가면서까지 꼭 배워햐 합니까? 돈을 버려 인생을 배울 수 있다면 그걸로 그 돈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생을 대하는 겸손하고 진지한 자세에 고개가 숙여지는군요. 그래서 패배하는 법, 좌절하는 법을 다 배우셨습니까? 다 배웠습니다.
그런데 왜 또 로또를 사십니까? 패배와 좌절도 습관이 된다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104

직업병을 예방하려면
+를 보여줬습니다.
수학자는 덧셈이라고 했습니다. 목사는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교통경찰은 사거리라고 했습니다. 산부인과 의사는 배꼽이라고 했습니다. 총잡이는 가늠자라고 했습니다. 김밥 아줌마는 나무젓가락이라고 했습니다. 농부는 허수아비라고 했습니다. 스위스 대통령은 국기라고 했습니다. 간호사는 적십자라고 했고, 약사는 녹십자라고 했습니다.
직업이 편견을 만듭니다. 편견이라는 직업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마음은 집에 두고 몸만 출근하십시오.  107

지갑과 인생
용돈에는 두 종류가 있다.
주는 것과 드리는 것.
주는 것은 갈수록 늘어나고
드리는 것은 갈수록 줄어든다.
지갑 속에 인생이 있다.  108

후회를 허락하지 않는 행위
도둑질을 했다. 후회했다.
싸움을 했다. 후회했다.
과음을 했다. 후회했다.
이혼을 했다. 후회했다.
친구를 버렸다. 후회했다.
선생님을 속였다. 후회했다.
그럴 수 있는 일들입니다.
후회하면 용서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후회를 허락하지 않는 단 하나의 행위가 있습니다.
자살했다. 후회했다.... 아직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111

옐로 카드 쓰는 법
심판은 스포츠에만 있는게 아닙니다.
인생이라는 경기에도 심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수 따로 심판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 자신이 선수 겸 심판입니다.
이기기 위해서 반칙을 하는 나를 발견한다면
내가 나에게 옐로카드를 꺼낼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옐로카드를 꺼낼 줄 아는 사람은
죽는 날까지 레드카드를 받지 않습니다.  113

헤어질 준비
아들이 엄마의 등을 밀어줄 만큼 자라면 더 이상 여탕에 데려갈 수 없습니다.
아들의 손을 너무 꽉 쥐지 마세요.  114

숲을 보라
빨주노초파남보를 확인하려 하는 사람은 
무지개를 보지 못한다.
도레미파솔라시를 구분하려 하는 사람은 
음악에 빠지지 못한다.
태정태세문단세만 외우려고 하는 사람은 
역사를 만나지 못한다.  116

세상에서 가장 서툰 꼼수
꼼수를 써서 이겼다. 이런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나 꼼수를 써서 이기고 또 이기고 또 이기도 또 이기고 또 이겼다.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이겼노라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서툰 꼼수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 세 번 통하는 꼼수는 없습니다.  117

9회말
당신은 9회 말 투아웃에 역전홈런을 꿈꾼다.
그래서 9회가 오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래야 9회 말에 모든 힘을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야 9회 말에 모든 힘을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야 9회 말이 더 짜릿하고 통쾌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말이다.
야구도 인생도 7회 콜드게임으로 끝날 수 있거든. 지금 서 있는 타석에서 최선을 다해보는 게 어때?  119

인생 한 그릇
국 따로 밥 따로 따로국밥.
말아먹으면 그냥 먹는 사람이 부럽고. 그냥 먹으면 말아먹는 사람이 부럽고.
그러나 한 그릇 다 비우고 나면 똑같고.
인생이라는 식당은 다 그런 것을. 사람이라는 손님은 다 그런 것을.
국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퇴장하는 것을.
앞에 앉은 사람 부러워하지도 말고 옆에 앉은 사람 간섭하지도 말고
여유 있거든 그 사람 국밥 값이나 계산해주게.  120


FOUR.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어라.
여행
빈틈없는 계획이 섰니?
그럼 가지마.
여행은 틈을 만나러 가는 거야.  125

시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두 가지
되돌리고 싶다.
되돌릴 수 없다.  130

오늘 할일은 내일로 미루어라
성공하면 싶다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어라.
오늘은 어제 매듭짓지 못한 일을 하라.
성공하고 싶다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어라.
오늘은 어제 대충 매듭지은 일을 다시 하라.
성공하고 싶다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어라.
그러나 모레로 미루지는 마라.  131

당신곁에 자판이 있다면
'행'이라는 글자를 영문 자판으로 놓고 쳐보세요.
god
행복도 행운도 불행도 다행도 모두 신의 뜻이랍니다.
행복을 능력이라며 너무 크게 웃지도 말고 
불행을 무능이라며 너무 슬피 울지도 마세요.
차분하게 신의 다음 뜻을 기다려 보세요.  134

두 번 읽어야 하는 글
물은 한 곳에만 머물지 않는다. 쉬지 않고 흐른다.
내가 상류에 있든 하류에 있든 언젠가는 내게도 물에 적실 기회가 온다.
흐르는 물을 쫓아 다니지 말고 지금 그 자리에서 물이 내게 흘러올 때를 기다려라. 
그리고 내게 도착한 물이 나를 떠날 때는 붙잡으려 하지 마라.
물은 붙잡는다고 붙잡아지는 게 아니다.
바다로 가고,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비가 되어 다시 내게 온다.
여기까지, 물을 돈으로 바꿔 다시 읽어 보십시오.  135

인생 9단이 되는 법
1. 던지지 않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순간에도 돌을 던지지 마세요. 인생이라는 바둑판은 한없이 넓어, 돌을 아무리 멀리 던져도 바둑판 위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 돌 하나가 인생을 그르치는 돌이킬 수 없는 악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2. 느리게 놓는다.
돌을 들기 전에 차 한잔 마시고, 돌을 놓기 전에 차 한잔 더 마시고, 돌을 놓은 후에 차 한잔 더 마시세요. 인생이라는 바둑은 한 수 놓는데 1년 걸린다 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습니다. 인생엔 초읽기가 없으니 시간패도 없습니다.  137

책을 제대로 읽는방법
책을 읽다 잠시 읽기를 멈춰야 할 때, 당신은 어디까지 읽었는지 어떻게 표시합니까. 책갈피를 끼워둡니까, 책장을 접어둡니까. 아니면 책을 편친 상태로 뒤집어둡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고 그냥 책을 덮는 것입니다.
책을 끝까지 다 읽었을 때처럼.
얼마 후 당신은 다시 책을 펼칩니다. 어디까지 읽었더라 하면서 뒤적거리다보면 읽기 싫어도 읽었던 부분을 다시 읽어야 합니다. 다시 읽다보면 내가 얼마나 건성으로 책을 읽었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전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내 인생을 바꿔줄 문장 하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한 번 쓱 읽으면 그날로 책장이라는 무덤에 묻히는책, 다시 꺼내들기 어렵다면 한 번 읽을 때 두 번 읽으십시오.  142

더치페이
더치페이는 사람 냄새가 나지 않아서 싫은가?
그럼 자네가 계산하게.  143

올림픽 후유증
올림픽 수영 종목은 금메달이 무려 마흔네 개다.
수영 하나만 잘하면 44관왕이 될 수도 있다.
몇 종목 더 만들어 아예 100관왕을 채우지 그랬을까.
바닷물 100미터도 만들고, 얕은 물 100미터도 만들고, 빗속에서 100미터도 만들고, 얼음 깨며 100미터도 만들고, 심야 100미터도 만들고, 식후 100미터도 만들고, 두 팔 묶고 100미터도 만들고, 정장차림 100미터도 만들고, 다 벗고 100미터도 만들고,....
웃지 마라 육상, 너도 마찬가지다. 단지 남보다 조금 빠르다는 이유로 금메달을 수십 개씩 모겡 걸어주는 수영과 육상. 너희 둘 때문에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다니는 조급증 환자들이 병원을 나와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것이다.  146

건강에도 도움을 주는 대답
아무거나 먹겠습니다.
아무거나 보겠습니다.
아무거나 읽겠습니다.
아무거나 입겠습니다.
아무거나 듣겠습니다.
인생에서 꼭 이게 아니면 안 되는 게 있을까요? 아무거나 라고 하면 안 되는 게 과연 있을까요?
있다면 아무거나 말을 해보세요. 금방 떠오르지는 않지만 아무거나 라는 말은 왜지 무책임해 보인다고요?
혹시 여유 있고 넉넉해 보이지는 않나요?
혹시 자유롭고 편안해 보이지는 않나요?
오늘 하루 딱 세 번만 아무거나 라고 대답해 보세요.
내일부턴 혈압약을 끊게 될지도 모릅니다.  147

여유
숭늉에는 있고 생수에는 없는 것.
연극에는 있고 영화에는 없는 것.
편지에는 있고 전화에는 없는 것.
달력에는 있고 시계에는 없는 것.
바다에는 있고 강물에는 없는 것.
내가 숭늉인지 생수인지 잠시 생각해 보는 사람에겐 있고
쫓기듯 다음 글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에겐 없는 것.  149

삶의 속도
속도를 너무 늦춘 독수리는 먹이에게 피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 사흘도 못가 굶어죽고 만다.
속도를 너무 높인 모기는 먹이를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어 사흘도 못 가 굶어죽고 만다.
독수리는 독수리의 속도.
모기는 모기의 속도.
나는 내 속도.  151

억지로는 배려가 아닙니다. 책에게도 사람에게도.  152


FIVE. 4인용 식탁에서 다섯 사람이 밥 먹는 법.
우리
'나'가 모이면 우리가 되는 게 아니라
'나'를 버려야 우리가 된다.  156

권투가 인생에게
권투는 외로운 게임.
비상구 없는 네모난 공간 위에 두 사람만 뎅그러니 놓여있는 외로운 게임.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고 있어 이제 그만하자고 말할 수도 없는 지독하게 외로운 게임.
외로움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상대를 껴안는 것.
주먹을 날려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던져 상대를 껴안는 것.
상대를 쓰러뜨리면 혼자 남게 되니까.
더 외로워지니까.  162

초등학생에게 맨 먼저 가르쳐야 할 것
덧셈은 욕심.
뺄셈은 낭비.
곱셈은 과욕.
나눗셈은 사랑.
초등학생에게 맨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덧셈이 아니라 나눗셈이다.
나눗셈은 어려워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많이 해보지 않아서 어려운 것이다.  164

모나리자의 슬픔
다빈치 선생님. 선생님은 왜 제게 다리를 그려주지 않으셨나요? 걸을 수 없는 저는 무려 500년을 차디찬 벽에 붙어 움직일 수 없었답니다. 사람의 따뜻한 체온이 그리웠습니다. 하지만 제 몸에 닿는 건 늘 싸늘한 벽의 체온 뿐이었답니다.
다리를 주셨다면 저는 지금 매달려 있는 벽에서 딱 한 두 걸음만 앞으로 걸어 나갔을 겁니다. 그리고 '손대지 마시오'라고 적힌 글씨들을 깨끗이 지워버렸을 겁니다. 사람의 체온이, 사람의 손길이 그리운 저에게 '손대지 마시오'는 세상 어떤 형벌보다 가혹한 한 마디 였으니까요.  166

섬에게 배우는 사랑법
섬은 외롭지 않습니다.
조용한 사랑을 하고 있어 외로워 보이는 것입니다.
파도가 철썩철썩 그의 몸을 때려도 
갈매기가 끼룩끼룩 그의 마음을 흔들어도 섬은 수면 아래에서 건너편 섬의 손을 꼭 잡고 있습니다.
사람도 한 점 섬입니다. 손이 둘씩이나 있는.  168

나이를 먹지 않는 동물
나이를 먹지 않는 유일한 동물.
그의 이름은 친구다.  169

혼자 놀기의 달인에게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만화를 본다.
휴대폰을 열고 게임기능을 찾아 버튼을 눌러댄다.
거울을 보며 1초에 한 번씩 표정을 바꿔본다.
혼자 노는 방법으로 흔히 선택되는 이런 것들은 엄격한 의미로는 혼자 놀기가 아닙니다. 
만화책과 놀기, 휴대폰과 놀기, 거울과 놀기입니다.
하루 종일 고개 들고 하늘만 바라본다. 구름과 놀기.
눈감고 잘 나가던 시절을 회상한다. 과거와 놀기.
누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방바닥과 놀기.
완벽한 의미의 혼자 놀기란 없어 보입니다.
혼자 놀기가 없다면 혼자 살기는 더욱 없겠지요.  170

말이 안 되는 말
어제는 강남에서 새로운 엄마를 사귀었고, 오늘은 신촌에서 새로운 아들을 사귀었다.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가족은 너무 너무 너무 소중합니다.  172

눈물을 흘리는 사람에게
눈물을 흘리는 사람에게 손수건을 건네는 것은 바보짓이다.
눈물은 눈이 흘리는 게 아니라 가슴이 흘리는 것이다.
가슴 속을 닦아주는 손수건이 없다면 말없이 꼭 안아줘야 한다.
그 사람의 가슴이 따뜻해질 때까지 내 가슴을 빌려줘야 한다.  175

몸이 곡선인 이유
오른손으로 왼손등에서부터 왼팔, 어깨, 가슴, 허리, 허벅지, 무릎, 종아리, 발뒤꿈치까지 긴 선을 긋듯 만져 내려가 보게요.
천천히 만져 내려가다 어느 한 부분이라도 날카로운 곳이 만져진다면 그곳에서 손을 멈추세요. 당신의 오른손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발뒤꿈치까지 내려가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의 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부드러운 곡선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아무리 꽉 껴안아도 찔리거나 아프거나 상처가 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176

사람인의 다른 뜻
사람 인은 참을 인입니다. 고통을 인내(忍耐)할 줄 알아야 사람입니다.
사람 인은 인할 인입니다. 인연(因緣)을 쉽게 버리지 않아야 사람입니다.
사람 인은 어질 인입니다. 약자에게 인자(仁慈)한 사람이 사람입니다.
사람 인은 알 인입니다. 상대를 인정(認定)할 줄 알아야 사람입니다.  177

박지성이 가르쳐 준것
영국에게 박지성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아주 일부.
우리에게 박지성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거의 전부.
둘 사이엔 큰 차이가 있지만 경기가 시작되면 한 목소리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응원한다.
박지성이라는 작은 공감 때문이다. 작은 공감이 큰 차이를 축구공 차듯 차버렸기 때문이다. 박지성이 가르쳐 준 것은 축구가 아니라, 공감이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180

제목
당신의 글 읽는 습관을 저는 잘 압니다. 제목 먼저 힐끗 보고 끌리면 그 글을 읽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버리시죠? 책을 고를 때도 제목에 끌려다니시죠?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제목이 그저 그런 글은 그냥 건너뛰셨죠? 이 글은 제목이 제목인지라 무슨 얘기일까 해서 여기까지 읽어 내려오고 있죠?
아니, 제가 당신의 글 읽는 취향 가지고 간섭하거나 시비 걸 생각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 신린 글, 교과서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줘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래 왔던 것처럼 제목부터 살피고 읽고 싶은 글만 읽어주시면 됩니다. 사실 제목이 중요하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거든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사람은 그렇게 읽지 마라는 겁니다. 사람의 제목인 이름이나 사람의 부제인 하는 일과 사는 곳만 보고 그 사람의 내용은 대략 이러겠지 하고 추측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람의 제목과 부제는 그 사람의 껍질이니까요. 귤껍질 한 입 씹어보고 귤 맛이 거칠다고 말하면 안 되니까요.  180

사람으로 산다는 것
물은 0도에서 100도까지 물이다.
사람은 36도에서 37도까지만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으로 사는 것은 물로 사는 것보다 백배쯤 어렵다. 물처럼 차가워졌다 뜨거워졌다. 체온의 변화가 심한 사람은, 물처럼 담는 그릇에 따라 그때그때 모습이 달라지는 사람은, 사람으로 사는 게 아니라 물로 사는 것이다. 언젠가는 수증기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185

4인용 식탁에서 다섯사람이 밥먹는 법
1. 한 사람은 서서 먹는다.
2. 네 사람이 먹고 난 후에 한 사람이 먹는다.
3. 4인용 식탁을 5인용 식탁으로 교체한 후에 다 같이 먹는다.
4. 다섯 사람 다 바닥에 내려와 먹는다.
5. 다 굶는다.
제가 추천하는 방법은 4번과 5번입니다.
먼저 4번. 식탁의 자존심이 상할지 모르지만 식탁을 포기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다리가 튼튼한 사람이나 조금 덜 배고픈 사람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방법, 즉 시간을 놓치는 방법 역시 찬성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놓쳐서도 안 되고 시간을 놓쳐서도 안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약간의편안함이나 약간의 우월감을 놓지 않으려다 더 중요한 것들을 놓아버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5번. 이 방법은 다섯 사람을 따끔하게 꾸짖는 방법입니다. 그들은 생각없이 쌀을 씻었고, 생각 없이 불을 피웠고, 생각 없이 국을 끓였습니다. 밥 하는 시간 다음에 운명적으로 닥치게 될 밥 먹는 시간에 대해 모두가 모른 척 한 것입니다. 어떻게든 먹게 되겠지. 이런 안이한 생각이 이런 난처한 상황으로 이어진것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5인용 식탁이 있는 집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한 사람을 초대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않는 사람들은 한끼쯤 굶어도 됩니다.  187


SIX. 터널 속에 홀로 선 당신에게
웃는다
거칠고 어둡고 답답한 이 세상에서 밀려 나지도 상처 받지도 쓰러지지도 않고 꿋꿋하게 내길을 걸으며 살아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

달과 손가락
달을 보라는데 손가락을 왜 보십니까?
손가락을 보지 않고는 손가락 끝에 붙어있는 달을 볼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목표는 달인데 손가락을 너무 오래 보고 있으니 답답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정확하게 읽지 않으면 달이 아니라 별을 보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달이라는 목표보다 손가락이라는 방향이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194

사람과 동물의 차이
생각할 줄 알고,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줄 알고, 이런 저런사회를 만들 줄 안다는것마으로 사람과 동물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기 않다. 사람과 동물의 진짜 차이는 하하하 그리고 라라라. 웃을 줄 안다는 것과 노래할 줄 안다는 것. 사람답게 살고 싶으면 웃자. 웃으며 노래하자. 이런 노래는 어떤가. 사랑과 믿음과 소망과 웃음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웃음이라.  197

주인공이 아닐지라도
별책부록을 보려고 잡지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디처트를 맛보려고 코스요리를 시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치어리더를 보려고 야구장을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이들을 만나려고 서태지를 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보다 조금 뒤에 서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조금식 앞으로 옮기는 기쁨은 뒤에 선 사람들의 몫입니다.  200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세상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한 가지만 찾아보세요.
답을 찾지 못했다면 그것이 정답입니다.
당신이라면 쓸모없는 것을 만들었겠습니까?
이제 조금 더 쉬운 문제입니다.
세상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을 한 사람만 찾아보세요.
그렇습니다. 당신은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205

종점에서 울고 있는 사람에게
내리면 종점이지만 내리지 않으면 출발 점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206

당신의 두번째 이름
김광훈, 임정화, 김나영, 이현일. 누군지 아세요? 
올림필 역도와 유도, 배드민턴에서 아깝게 4위를 한 사람들입니다.
메달 권 진입에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봅시다. 세계에서 4위. 60억 중에 네 번째.
기억해줄만 하지 않습니까?
박수쳐줄만 하지 않습니까?
조금 전에 한 말을 정정합니다.
이들은 메달 권 진입에 실패한 사람들이 아니라 세계 4강 진입에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당시느이 손바닥을 그토록 아프게 했던 2002년 히딩크처럼.
인생이라는 경기에서 메달을 목에 걸지 못한 당신.
당신의 두 번째 이름도 김광훈, 임정화, 김나영, 이현일 중 하나입니다.  207

모기의 무게
모기가 저울 위에 앉으면 저울은 아는 척도 하지 않는다.
저울에게 모기의 무게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모기가 역기 위에 앉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천하의 장미란도 역기의 무게에 더해진 모기의 무게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무게란 그런 것이다. 짐이란 그런 것이다.
당신이라는 짐은 누구를 짓누르고 있는지 내려다보라.
가벼운 짐은 없다.  208

하늘을 보는 사람들
한 살마이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본다. 마주오던 사람이 따라서 하늘을 본다. 또 한사람이 하늘을 본다. 또 한사람이 하늘을 본다. 길을 가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본다. 맨 처음 하늘을 본 사람은 이미 그곳에 없다.
우리는 가끔 왜 하늘을 봐야하는지도 모르면서 하늘을 본다. 남들이 다 보니까. 동전은 땅에 떨어져 있는데.  209

벼룩에게 해서는 안되는말
높이뛰기는 그만하면 됐다.
이제부터 투포환 연습이다.
불가능은 없다는 나폴레옹의 말을 빌려 벼룩을 곤란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벼룩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면 사람에게도 하지 마십시오. 세상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사람보다 나폴레옹을 흉내 내다 쓰러진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212

8자의 의미
가로로 자르면 0.
타고난 팔자란 없다는 뜻.
세로로 자르면 3.
누구에게나 세 번의 기회는 온다는 뜻.
눕히면 무한대. 
그래서 당신의 성공 가능성은 무한하다는 뜻.  213

만리 장성의 과거
중국이 자랑하는 만리장성도 한때는 돌멩이였다.
당신이 지금 발끝에 차이는 돌멩이 신세라면 당신은 말리장성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216

흐린날의 끝말잇기
끝말잇기 해볼까요?
위기! 기권! 죄송합니다. 빵점입니다.
위기! 기회! 잘했습니다. 만점입니다.  217

될 수 있는가? 되고 깊은가?
원고지 앞에서 글에 취해 담배 대신 연필을 입에 문 적이 있으세요?
입에 문 연필에 라이터를 갖다 대고 불을 켜본 적 있으세요?
이싿면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작가가 될 자질이 너무 충분합니다.
축구경기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혼자말로 중계를 한 적 있으세요?
옆 사람을 해설자로 착각해 느닷없는 질문을 던진 적 있으세요?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캐스터가 될 자질이 너무 충분합니다.
될 수 있는가? 라고 묻기 전에 되고 싶은가? 라고 먼저 물어보세요.
되고 싶은 사람은, 간절히 되고 싶은 사람은, 됩니다.  218


SEVEN. 우리의 머리가 아픈이유
불면증에 시달리지 않는법
잠이 올 때 잔다.  223

지는 꽃이 슬픈게 아니라
꽃이 졌다.
바람이 이겼다. 계절이 이겼다. 중력이 이겼다. 나의 무관심이 이겼다.
진 것은 꽃 한 송이인데, 이긴 자는 늘 이렇게 많다.
진 꽃을 다시 짓밟는 세상이 슬프다. 
이긴 자들이 다 갖는 세상이 슬프다.  225

뇌진탕
우리는 배고픈 줄은 알아도 뇌고픈 줄은 잘 모른다. 그래서 밥에 수입의 9할을 쓰고 책에는 1할도 쓰지 않는다. 
그러다 뇌가 허기를 견디지 못해 뇌진탕을 일으키면, 그제야 부랴부랴 지출습관을 바꾼다. 그렇다고 수입의 9할을 책에 쓰는 것은 아니다. 약에 쓴다.  226

짜장면과 자장면
짜장면이 아니라 자장면이 맞답니다. 그런데 자장면 하면 짜장면 맛이 나지 않습니다.
짜, 라는 경음을 동원해야 제 맛이 납니다. 그래도 자장면이 맞다면 그렇게 불러야겠지요. 입맛과 말맛을 다 포기해야 겠지요.
문제는 짜장면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짜파게티도 자파게티로 바뀌어야 합니다. 짜짜로니도 자자로니로 바뀌어야 합니다. 짜장밥도 힘 빼고 자장밥이라 불러줘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이처럼 얼키설키 얽혀있어서 나 하나 바뀌는 걸로 끝나는 일은 없습니다.
세상이 너무 복잡해졌다고 짜증내지 마십시오.
짜증이란 말도 곧 자증으로 바뀔지 모르니까요.  228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라고 툭 던지는 질문에, 지난주에 동대문에 갔던 일이 잘 안 풀려서 오늘 오후 세 시쯤 다시 가야하는데 요즘 관절이 좋지 않아 2호선에서 1호선으로 바꿔 타는 일이 걱정입니다 라고 대답한다면, 대답을 듣는 상대의 표정은 일그러진다.
표정이 일그러진 이유는 안녕하세요? 에 붙은 물음표가 가짜이기 때문이다. 궁금해 하지 않는 안녕하세요?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안녕하세요? 에 너무 적극적이나 당신의 관절에 관심이 없다. 안녕하세요? 라고 물으면 그냥 안녕하세요? 라고 받은 질문을 되돌려주며 스쳐 지나가야 한다. 그것이 오늘의 인사법이다.
대신,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를 앞세우며 지독한 외로움이 찾아올 테니, 외로울 준비는 미리 해두는 게 좋다.  230

호랑이에게 물려가면서 하는 공부
호랑이게게 물려갈 때, 우리 엄마가 기다린다고 애원하지 마세요.
호랑이는 눈빛 한 번 흔들리지 않고 이렇게 대답할 테니까요.
배고픈 우리 아이도 기다린단다.
내겐 더 없이 절절한 얘기도 상대의 가슴을 흔들지 않으면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불과합니다. 차라리 나는 불량식품입니다 라고 말을 하거나, 크게 키우려면 어릴 때부터 자립심을 길러줘야 한다고 말을 하세요. 내 입이 하고 싶은 얘기가 아니라 상대의 귀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해야 들립니다. 호랑이게게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는 말은 호랑이 측에서 흘린 말입니다.  231

책을 읽는 첫번째 이유
말이 많은 사람의 장점은 아는 것이 많다는 것을 세상에 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이 많은 사람의 단점은 아는 것은 많은 데 정확히 아는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을 세상에 들키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그토록 책을 읽으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책 속에 엄청난 지혜가 들어있어서가 아닙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말을 내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지금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232

눈이 하는 짓
먼지떨리로 먼지를 털면 먼지가 사라집니까?
아닙니다.
먼지는 공기 속에 숨어 있다 입을 통해 우리 몸속으로 들어갑니다.
눈은 조금 편안해지겠지만 폐는 많이 불편해지고 맙니다.
눈이 하는 짓이란 게 늘 이렇습니다.
보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더 큰 문제를 만들고 맙니다.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은 보지 않겠다는 뜻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235

정리와 정돈
정신없이어질러놓은방을방주인이아닌사람이치우는것은잘정돈된방을정신없이뒤집어놓는것과같다아무리쓰레기같은방일지라도방주인은무질서속에나름의질서를만들어둔다당신의눈에그질서가보이지않는다고해서그것을무질서라고결론짓는것은정말무질서한생각이다남의방함부로정돈해주지말고남의생각함부로정리해주지마라.  239

붙어 있어야 할 것과 붙지 말아야 할 것
치마와 바람이 붙으면 한 아이의 교육이 무너지고 만다.
결혼과 조건이 붙으면 한 연인의 사랑이 무너지고 만다.
음주와 운전이 붙으면 한 가족의 행복이 무너지고 만다.
정치와 경제가 붙으면 한 나라의 미래가 무너지고 만다.
사랑과 한다가 붙어 있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지고 만다.  245

끝까지 가 봤더니
죽어라 공부시켜서? 특목고 보냈지. 
그래서 보내면? 축하인사 받지. 
그래서 받으면? 우쭐해지지. 
그래서 우쭐해지면? 더 죽어라 시켜야 겠다는 다짐을 하지.
그래서 하면? 서울대 보내지.
그래서 보내면? 축하인사 받지.
그래서 받으면? 출세 길이 열리지. 
그래서 열리면? 좋은 직장 잡지.
그래서 잡으면? 예쁜 신부, 똑똑한 신랑 얻지.
그래서 얻으면? 머리 좋고 예쁜 아이 낳지. 
그래서 낳으면? 공부시키지. 
그래? 결국 공부시키기 위해서 공부시키는 거였구나. 끝까지 가 봤더니 아무것도 없구나.  248

오늘 지구에 종말이 온다면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온다 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그에게 오늘이 지구의 종말이라고 알려주며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어제 심은 사과나무에게 무책임을 사과하고 싶습니다.  249

정년퇴직때까지 살아남는 법
책상서랍에 숨어 있는 편지봉투를 모조리 쓸어다 휴지통에 던져버리십시오. 직장인은 누구나 편지봉투만 보면 사표 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답니다. 이건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강물만 보면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던져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존심. 편지봉투를 휴지통에 던질 때 자존심이라는 놈도 잘 구겨서 던져버리십시오. 휴지통이 차 넘칠수록 당신의 정년퇴직은 안전하게 보장될 것입니다.
물론 한 가지 작은 문제는 있습니다. 그건 자존심 다 던져버린 사람들만 우글대는 당신의 회사가 당신의 정년까지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251

바보들의 공통점
낙서 한 줄 없는 깨끗한 담벼락에 낙서를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담벼락 주인이 낙서금지라고 쓰고 나면, 그때부터 담벼락은 온 동네 낙서판이 되고 만다.
바보들의 공통점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문제에 대해 너무 진지하게 고민한다는 것이다.  253

욕심많은 타잔이야기
타잔은 정글 속에서 선악과를 발견했고 이를 원숭이 몰래 혼자 먹어치운 것이 분명해. 그게 아니라면 혼자만 팬티라는 문명을 두르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가 없어.
그리고 혼자 먹어치운 그 선악과 때문에 동물들에게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해. 그게 아니라면 동물의 왕국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어.
문제는 따돌림을 견디지 못한 타잔이 정글을 탈출했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뭐든 혼자 먹어치우려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갑자기 늘어난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어.  257

수건 출신의 성직자
걸레. 자신의 몸을 더렵혀 가며 세상을 깨끗하게 만드는 수건 출신의 성직자. 한 때는 귀부인의 얼굴 근처에서 놀았지만 '내가 왕년에'라는 말을 결코 입에 담지 않는 겸손함이 고개를 숙이게 한다. 특히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는 격언은 쉽게 별절하지 않는 그의 인격을 잘 말해 준다.
그러나 사람들은 흠 잡을 데 없는 그의 인격에 존경 대신 질투를 표한다. 몸 한 구석에 남아 있는 속리산 관광기념이라는 문신을 지적하며, 주위에 혐오감을 준다는 구실로 대중목욕탕 출입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결례다.  258

하느님이 내려 보낸 천사
주는 대로 받아먹고, 아무 곳에서나 누워 자고, 더럽다고 욕해도 화내지 않고, 죽어서도 온몸을 다 바치고, 이빨 발톱 다 뜯어봐도 다른 동물에게 위협을 주는 날카로운 무기는 찾아볼 수 없고....
돼지는 하느님이 땅에 내려 보낸 천사임에 틀림없다. 천사가 아니라면 사람들이 꿈속에서까지 그토록 그를 만나고 싶어 할 리가 없다. 천사가 아니라면 사람들이 그를 닮은 저금통을 신앙처럼 모시고 살 리가 없다. 더 이상 사람 어깨에 날래 두 장 붙여놓고 천사하고 우기지 말자. 그건 우기는 게 아니라 웃기는 거다. 우리 사람들, 그동안 하느님을 충분히 웃겼다.  260

다름을 만났을 때
파리에겐 똥이 향기롭다. 왜냐고 묻지 마라. 그게 파리다.
파리는 똥보다 꽃이 향기롭다고 주장하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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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3 네이버.

2011. 10. 13.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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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0여일 동안 일본 작가들의 추리소설과 제일교포 작가들의 책을 몇 권 읽었다.
일본은 출판 강국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장르문학까지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은 분명 배워야 할것이 많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된다.
특히나 한국에서는 전문적인 추리소설 분야는 없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이 분야의 소설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물론 이 책들을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본격 추리소설(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탐정처럼 풀어나가서 결과를 만들어 내는)물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만 존재하는 사회파 추리소설(사회적인 문제점들을 꼬집으면서 추리소설을 진행함으로 사건에 대한 조사를 차호 찾아다니면서 서서히 실체를 풀어나가는)은 사회의 문제점을 적확하게 꼬집어 냄으로 생각해야만 함을 강조하고 있다.
몇 권을 소개하면 


시미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은 일본에서 신본격파 추리소설 장르를 일으켜 내었던 책이다.
미라타와가 냉소적으로 사건을 추리하고 유추하여 사건을 해결하는데, 다섯 명으로 여섯 시체를 만들어낸 기발한 내용은 '소년탐정 김전일'의 육각촌 살인사건에서 패러디를 할 정도였다.














시마다 소지의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는 요시키 시리즈 중에 한 권인데, 사회파 소설로 일본이 묵과하고 있는 일제강점기에 고통받은 한인들을 생각해보지 않고서 미래만 바라보는 것은 문제를 감추는 것일뿐 진정한 해결이 아니라는 메세지를 던지고 있다.
노인이 기발한 발상을 한것이라기 보다는 그의 한이 발상으로 연결되어 하늘을 움직였으리라 짐작해 보게 된다.
작가는 마지막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던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당신은 양초를 많이 갖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왜였지?"
"노숙할 때 제일 필요한 것은 불이니까...전부터 모으고 있었습니다."
"노숙을 하면서 동생과 함께 한국에 돌아가기 위해서였나?"
그가 천천히 끄덕였다.
"한국에, 고향에 돌아가고 싶나?"
그러자 노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눈물이 후드득 흘러넘치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격렬하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게 돌아가고 싶나....."
요시키는 가슴이 무척 아렸다. 그러나 동생의 원한을 풀기 위해 그는 지금까지 일본에 머물렀던 것이다.
"고향에는 .... 아내가 있습니다."
속삭이듯이 그는 말을 계속했다. 아내가 있던 것인가! 요시키는 다시 충격을 느꼈다.
"저는 이제 됐습니다..... 하지만 사할린에 저 같은 사람이 아직 많이 있습니다."
.
.

요시키는 유치장을 나가 담당자에게 잠금장치를 걸게 하고 의자를 3층 복도 구석에 돌려 놓았다. 그리고 철창 너머러 여태영을 바라보았다. 여태영은 얼굴을 들지 않은 채 가만히 바닥을 보고 있었다. 요시키는 그가 얼굴을 들기를 잠시 기다렸지만 그럴 것 같지 않아서 이렇게 말했다.
"지독한 꼴을 당하게 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리고 유치장 앞에서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노인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보이지는 않았다.  506-507


"세상은 너 따위가 머릿속에서 짜 맞추는 스토리대로 돌아가지 않아. 바보는 바보, 범죄자는 범죄자다. 쓰레기는 쓰레기라고. 이번 일로 잘 알았겠지?"
요시키는 주임을 쫓아가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어깨를 잡아 자신 쪽으로 돌려 멱살을 잡고 주임의 등을 시멘트벽에 확 밀쳤다. 계단 전체가 쿵 하고 진동했다.
주임의 겁먹은 눈이 요시키를 째려보고 있었다. 그는 몸을 허우적거리며 외쳤다. 
"이 자식, 평생 형사 짓이나 해먹고 살아라!"
"상관없어."
요시키는 나직이 대답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으스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어떤 깡패 자식에게 평생 존댓말을 해도 상관없고,  권력지향 따위 요만큼도 없는 평화주의자다. 하지만 이렇게 온순한 나를 때때로 당신같은 남자가 광포하게 만들어. 당신은 이 사건이 문지 알고 있나? 이 사건이 일본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나 있느냔 말이다! 아직도 치매 걸린 노인이 소비세의 의미를 몰라서 발작적으로 여주인을 죽인 사건이라 생각하겠지."
요시키는 입술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노인에 대한 자신의 무력함이 사무쳐 있었던 것이다.
"공부하지 않고, 일하려고 하지 않고, 추적하려고 하지 않는 그런 놈드링 꼭 우쭐거리며 타인을 경멸하려 들지,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서. 하고 싶으면 해라, 나는 상관없으니까. 그러나 그 처사만은 참을 수 없어! 나를 바보라 부르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그 노인을 쓰레기라 부르며 이 이상 힘들게 하는건 참을 수 없어. 가만히 놔둘 수 없단 말이다!"
주임을 노려보니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바보겠지. 언제나 돈 한 푼 되지 않는 일에 힘이나 쓰고, 뻐겨도 되는 녀석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가장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인간에게 호통을 치지. 그러나 이 성격은 고칠 수 없어. 틀렸다고 생각하면 경시총감에게라도 확실하게 말해준다. 아무리 나쁜 패를 뽑아도 내 신념대로 갈 수밖에 없어. 당신에게 알아달라고는 안해. 그러나 그냥 놔둬. 내 바람은 단하나, 내 보잘 것 없는 인생에서 만나는 일에 대해 백은 백이고 흑은 흑이라고 말하며 죽어가고 싶어. 다만 그뿐이다. 방해하지마."  509-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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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7 네이버

2011. 10. 8.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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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범 김별아 이룸 2008 810 287
2. 경성트로이카 안재성 사회평론 2004 810 380
3. 어른으로 산다는 것 김혜남 갤리온 2006 810 259
4.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류시화 엮음 오래된미래 2005 810 158
5. 나를 행복하게 하는 친밀함 이무석 비전과 리더십 2007 320 316
6. 행복에 목숨 걸지마라 리처드칼슨 한국경제신문사 2010 840 275
7.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이덕일 김병기 역사의 아침 2006 900 304
8. 나를 사랑하게 하는 자존감 이무석 비전과 리더십 2009 320 279
9.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갈라파고스 2007 300 201
10. 리딩으로 리드하라 이지성 문학동네 2010 320 367
11. 전방위 글쓰기 김봉석 바다출판사 2008 810 215
12.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 김혜남 중앙 M&E 2002 810 270
13. 점성술 살인사건 시마다 소지 시공사 2006 830 567
14. 난민과 국민사이 서경식 돌베개 2006 910 327
15. 화차 미야베 미유키 시아출판사 2000 830 461  


그 외
가네코 후미코
소년의 눈물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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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후기

2011. 9. 25.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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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위'라는 표현에 호기심이 생겼다. 
글을 쓰는데 전방위적으로 쓸 수 있다는것은 그만큼 많이 알고 더 많이 조사하고 공부할 때나 가능할 텐데, 저자는 얼마나 다방면에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표지의 날개에 제일먼저 눈이 간다.(개인적으로 보통은 목차를 먼저 본다.)
대중문화 평론, 영화 평론, 만화 평론, 신문잡지사 기자, 칼럼연재.. 상상마당 '전방위 글쓰기' 강의..등
다방면에서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듯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 강의를 하는 사람이니 혹 내용이 관념적이지는 않을까?
딱딱하게 원론적인 내용을 나열한건 아닐까?
강의를 하고 있으니 생색을 내기 위한 교재로써의 출판을 한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내용을 읽으면서 그런 의구심들은 사라져 갔다.
우리가 글을 쓰는 써야 하는 이유들 부터 시작하여 글쓰기의 기본기에 충실할 것 또한 기본적으로 일반인들이 글을 쓰는데 있어서 어떻게 배열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들을 예시로써 설명으로써 전개해 나갔다. 
뒤로 갈수록 압축해서 써내려가면서 밑줄그을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물론 좋은 의미로써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의미로써도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든 글을 쓰게 되어 있고, 써나가고 있다.
예전에는 특정 사람들만이 글을 게시하였으나 지금은 매체의 발전으로 누구나 쉽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의 질은 높아지기는 커녕, 더 낮아진 듯한 느낌을 받는것은 왜 일까?
저자도 언급한 기본적인 글쓰기를 모르기 때문이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볼 수 있다. 
글이란 것은 주관적이지 않을수 없지만, 좀더 객관적으로 좀더 정의롭게 좀더 올바르게 쓴다면 그 글은 호소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왕 글을 쓴다면 좀더 확고한 내용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것이 좋지 않을까...!!
(ㅎ 물론 이 블로그도 소통이라는 면에서는 멀지만... 그렇다고 소통을 배제한 것은 아니다.)

내용에서 다치바나 다카시에 대한 내용들이 여러번 언급되는 게 그의 놀라운 글쓰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책을 몇 권을 읽어보았긴 하지만.. 매우 다방면의 글을 쓴 사람이었다.
그가 새로운 분야의 글을 쓸 때, 관련 자료들의 방대한 양을 섭렵하고 정리하여 준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글을 쓰는 모습에 본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우리가 보이는 것을 넘어서 이면의 본질을 꿰뚫기 위해서 해야하는 노력은 분명 필요할 것이다.


글쓰기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다.  12
글쓰기를 통해서 모든 이가 창작자인 동시에 주체적인 소비자, 대중이 되는 창조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13

우리가 글을 쓰는 몇 가지 이유
 - 글쓰기는 소통이다. 
 - 글쓰기는 세계의 재창조이다.
 - 글쓰기는 노동이다. 

글쓰기의 필수 교양 세 가지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본이다.
첫째, 철학적 사고는 글쓰기의 토대다.
이 세상에서 보편적이고 타당한 진리란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35
     경험적 사고 -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서 보편적인 진리를 깨닫는 과정.
     연역적 사고 - 보편적인 진리를 탐구하면서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것도 문제지만, 숲의 전체적인 모양만 보고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는 것 역시 잘못이다. 일반적인 사고의 소유자라면 경험과 논리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철학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도 결국은 자기 나름의 보편타당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37
즉 자신의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하여 철학 공부를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필요한 것은, 일상생활에서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38
철학을 공부하고 자신의 세계관을 만드는것이 필요한 이유는 각각의 개인이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행동과 글 자체가 바뀌기 때문이다.  39

둘째, 경제를 알아야 리얼한 글쓰기가 가능하다.
현실을 똑바로 보기 위해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것이 바로 철학과 경제학이었다. 
작가들은 세상이 요동치는 현장에서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물적 구조를 이루는 경제를 보는 눈도 있어야 한다.  42
모든 것에는 경제가 개입되어 있다.  43
기본적인 경제학 지식을 쌓아 두고, 평소 경제 뉴스를 귀담아듣거나 신문의 국제정치면을 꼼꼼하게 읽는 것 정도로 충분하다.  44

셋째,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덤은 글쓰기의 자양분이다.
역사는 언제나 현재에 의해 재해석되기 마련이다. E. H. 카가 말한 것처럼 역사는 현재와의 대화다. 즉 현재의 관점이나 시대정신에 따라 과거의 역사가 재해석되거나 새로벡 조명된다.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현재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과거를 통해서 현재가 만들어진 것이고, 과거의 일들은 현재와 미래에 계속해서 반복된다.  45
현재를 아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역사를 통해서 현재를 반추하는 것이다.
자기 나름의 시각을 갖고 역사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이해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46
중요한 것은 자신의 관점에 따라 역사를 해석하더라도, 사실 그 자체를 존중하는 것이다.  47

창조적 글쓰기의 원동력, 나만의 세계관
첫째, 내가 바라보는 세계가 곧 나다.
글쓰기는 남의 생각이나 행동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행동에 따라 창조되는 것이다. 나의 세계관, 나의 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글이 나올 수 없다.  51
인간은 필연적을 환경의 산물이고 주변에서 영향을 받는다. 즉 이 세계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어디에도 없다. 무엇인가를 배우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세계관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만의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된다. 내가 바라보는 세계가 있어야만, 또 그것이 절실해야만 나의 글쓰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57

둘째, 모든 것은 변한다. 세계관도 변한다.
자신의 세계관을 확립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한 번 완성한 세계관을 바꾸지 않고 일생을 살아가는 것은 대개 미련한 사람이 할 짓이다. 
정말로 인생관이 확 바뀔 정도로 거대한 경험을 하지 않는 이상, 성인이 된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방식이 완전히 바뀌는 일이란 많지 않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58
세계관이 변화하는 것은 결코 창피하거나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 바뀐 세상을 분석하고 자신의 찰학을 정립하는 것은,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62

셋째, 나의 세계를 표현하는 글쓰기
 - 일기 쓰기
일기의 역할은 매일같이 반복되는 하루에서 나에게 의미있는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 그리고 나의 하루 행동에서 되짚어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떠올리는 것.  64
 - 목적이 분명한 편지 쓰기
일기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라면 편지는 '타인에게 나를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66
일기를 제외한 모든 글은 대상이 누구이고 그들에게 무엇을 알리거나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쓰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일기가 글쓰기의 기본을 다져 준다면, 편지는 글쓰기의 모든 것을 알려 준다고 할 수 있다.  67

아는 만큼 쓴다, 풍요로운 글씨를 위한 다독(
多讀)첫째, 다치바나 다카시에게 배우는 독서 훈련
다치바나 다카시의 어떤 책을 읽든, 그 안에서 엄청난 양의 정보는 물론이고 그것들을 통해서 사회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혜안을 발견할 수 있다. 
다카시는 어떤 분야에 대한 취재나 대담을 요청받았을 때 그 분야에 관한 책을 적어도 열 권 이상은 읽는다고, 그리고 책을 써야 한다면 대형 책꽂이 한 개 반의 부피와 맞먹는 양의 책을 읽는다고. 그렇게 해서 읽은 책과 나오는 책의 비율을 따진다면 약 100 대 1 정도라고 한다.  69
1인 미디어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주관에 따라 세계를 해석하여 전달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주장만 있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뒷받침할 수많은 정보가 있어야만 한다. 올바른 입장만으로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법에서 배워야 할것은 엄청난 정보량이다. 어떤 분야에 대해 관심이 생긴다면 그 분야에 대해 파고들어야 한다. 시작은 언제나 독서다.  71

둘째, 글쓰기는 독서에서 시작된다.
책을 읽는 주된 이유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다. 
독서는 좋아하는 작가를 따라 글쓰기를 배우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73
교양만 갖고 모든 것을 이해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되도록 많이 읽고 즐기는 것이 필요하다.  76

생각이 담긴 글쓰기
첫째, 문장은 육하원칙의 기본부터 시작하라.
글을 잘 쓰고 싶다면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다.  98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기사를 쓰는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보통 사람들이 쓴 글을 보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육하원칙이다.
머릿속의 이야기를 옮기는 데만 급급하여, 자신의 글이 독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는 별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99

둘째, 모든 것은 인상에서 시작한다.
내면의 분석 없이 단지 표피만을 놓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 
인상이란 것은 무엇일까? 나는 내가 본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할 때,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나 느낌을 먼저 말한다.  102
인상비편은 아니지만 '인상'이 중요한 이유는, 어떤 작품이나 대상, 사건을 접했을 때 가장 큰 울림을 던져 주기 때문이다.
인상을 받는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자신이 받은 인상에서 출발해 다양한 것을 채워 가는 과정이 바로 글쓰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103

셋째, 인상적인 무엇인가를 발견하면 글을 쓰기 위한 테마와 아이디어가 나온다.

넷째, 인상을 논리적으로 풀어낸다. 


비평이란 사실 별것 아니다. 어떤 작품, 어떤 대상의 속성을 따지고 가리는 것이 바로 비평인 것이다.  113

글을 쓰는 사람은 세상의 변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글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깨달을 수 있다.  125

문학 작품을 분석할 때 가장 쉽게 쓰이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다. 
내용은 이야기와 주제이고, 형식을 플롯이나 문제로 볼 수있다.  131

영화 비평을 잘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영화를 들여다보는 자신만의 눈이다.
약간의 통찰력과 지식만 있다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읽어 내려면 작품 내면을 파고 들어야 한다.  146

대중문화는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다. 그에 대한 글을 쓰려면 사람들이 어떤 대중문화에 매혹되는지, 어떤 대중문화가 그들을 사로잡는지 살펴봐야 하낟. 그것이 곧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가장 노골적인 무의식일 수 있다. 어쨌거나 문화상품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그 의미를 분석해야 한다.  161

TV에는 저속한 개그 프로와 버라이어티 쇼도 있지만 동시에 다양한 다큐멘터리와 토론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편견만 없애면 개그와 버라이어티 쇼에서도 얼마든지 요긴한 내용을 배울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일방적인 배척이 아니라 적절한 분석을 통해 그 의미를 읽어 내는 일이다.  162

에세이는 누구나 쓸 수 있는 가장 쉬운 글인 동시에 가장 위험한 글이기도 하다. 흔히 에세이를 작가의 영혼이 그대로 내비치는 글이라고 한다. 아무리 포장하고 감추려고 애를 써도 에세이에는 모든 것이 내비친다. 안이 텅 빈 사람이 쓴 에세이는 공허해 질 수밖에 없다. '내'가 흔들리면 에세이도 흔들린다. 그러니 에세이는 가장 신중하게 써야 할 글이다.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나'를 반성하는 마음가짐으로 써야 할 글이다.
에세이는 쉬운 글이기도 하다. 그냥 진솔하게 쓰기만 하면 안에 있는 것들이 투영된다. 차분하게, 정직하게 글을 쓴 사람에게 에세이는 출발점이자 끝이 되는 글이다.  203


지속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단지 자리에 앉아서 글을 쓰는 것만이 아니라 제대로 글을 쓰기 위해서는 평소에 많은 것을 경험하고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것에는 동인이 필요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든가, 장기적인 목적으로 글쓰기를 지향한다든가 등의 목적 말이다. 혹은 단지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다든가, 뭔가 상업적인 목적이 있다든가 등의 부정적인 욕망일지라도 상관없다. 글을 쓰기 위해 투자해야 할 에너지와 시간 등을 생각한다면, 어떤 식으로건 동인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저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동인을 찾는 것이다.
가볍게 동인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즐거운 취미생활이나 오락도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211
중요한 것은 쓰는 일을 취미로 삼는 일이다. 글쓰기가 취미로 정착되기만 한다면 그 다음은 느긋하게 생각해도 된다.
누구나 시작은 비슷하지만, 꾸준하게 글을 쓴다는 것은 의외로 쉬운 일이 아니다. 
글을 쓰겠다고 생각했다면, 글로 세상에 무엇을 알리거나 소통하겠다고 생각했다면 일관성이 필요하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읽고 그리고 꾸준하게 쓰는 것, 그것이야말로 글쓰기의 정도다.  212




일상에서 철학을 다듬어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것을 회의(懷疑)하는 것이다. 일본의 작가 기리노 나쓰오가 대학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회의하라'였다고 한다. 세상의 일반적인 상식을 의심해 보고, 공식적으로 발표된 모든 것을 뒤집어 보고, 두 눈에 보이는 것의이면을 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남이 보여 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뒤집어 보고 파고들어 집적 확인해 보는 것. 그것이 세상의 본질을 보는 유일한 방법이다.  41

비슷한 관련서를 몇 권씩 읽으면서 하나의 주장에만 빠지지 말고,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을 무리해서 읽지 말고, 메모를 하고 싶다면 일단 다 읽은 다음에 시도하고, 주석과 색인도 주의 깊게 읽고, 책을 읽으면서 그 정보와 논리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라.  77

가장 쉬운 방법은 내 기억에 강하게 남은 무엇인가에 대해, 쓰는 것이다. 왜 기억에 남게 되었는지 그 이유만 찾아가도 한 편의 글이 나온다. 제일 좋은 방법은 메모다. 뭔가가 떠오를 때마다 메모하는 것이다.  101

중요한 것은 새롭게 발굴하는 일 이상으로 기존의 것들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일이다. 
남들이 아직 이야기하지 않은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이디어이고, 그것이 바로 좋은 글의 요건이다.  109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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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아메리카에서 생산되는 곡식만으로도 세계가 다 먹고 남는다는데, 왜 이토록 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있어야 하는가... 마음을 아프게 하는 내용이다.
책 내용은 결코 누군가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기심과 이윤추구를 위해서라고 한다.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 이라는 부제로 그의 경험을 통해 바라본 세계의 실태와 오만한 그들의 실상을 밝히고자 했다.

국내에 이 책이 번역되어 들어오기까지 만 7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왜 그럴까...생각해 본다..
이유야 정확히 알 수 없을지 몰라도.. 대충의 짐작은 책 내용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한국... 대한민국.. 이란 나라는 참 독특한 나라이다. 
930여회의 외세의 침략을 받고도 결국은 버티어 낸 나라.
긴 세월동안 (물론 동남아시아에 비하면 많이 짧긴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황폐되었고,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졌음에도 굳건히 버티고 ..
급속한 발전으로 지금 세계경제 10위권에 머물르게 된 나라이다.
정말 대단한 나라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

불과 몇 십년전 외국에서 원조를 받아야만 했던 나라였지만, 지금은 원조를 해주는 나라가 되었다.
전 세계를 보더라도 원조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나라에서 원조를 해주는 나라가 된건 한국이 처음일것이다.
그만큼 대한민국 사람들은 대단하다.

그런데 한국은 절대 행복하지 않은 나라이다.
최근 뉴스에 의하면 한국은 돈은 가졌으나 행복은 가지지 않은 나라라고 표현된다. 
우리의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수긍되고 인정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세계의 약자들을 바라보며 좀더 올바른것은 무엇인지 .. 말로만 교육하는 것으로 넘어가지 않고, 실제로 바라보고 경험하고 같이 아파하며 우리 선조들이 가졌던 '인의예지' ... 우리에게는 좀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런 굶주림은 거대한 횡포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이들의 아픔은 우리의 아픔이 아니다.'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분명 돌아올 수 있는 아픔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조금더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돌보며, 의식을 성장시켜 나갈때 조금이라도 아픔이 줄어들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나를 깊이 반성하게 한다..
이정도의 고통이 분명 지금의 우리에게는 오지 않을 확률이 크다. 
그렇다고 남의 일이 아니다. 이들의 아픔은 분명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비슷한 아픔으로..!!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이 황폐되면 될 수록 우리에게는 새로운 고통들을 주게 된다. 책 내용처럼 그렇다고 우리가 이들이 먹고 살기위해 또는 기업이 자기이 득을 위해 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의견을 세워줄 때 이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해제 - 기아에 관한 어느 국제 전문가의 비망록(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
기아와 관련된 일을 현장에서 자신의 천명으로 알고 활동하는 사람에게 소속이 어디인가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는가?
그리 많지 않은 어린이 기아 관련 저술 중에서 내가 아는 한 이 책은 가장 고급의 정보를 담고 있고, 몇 가지 점에서는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전문성을 확보한 책이다.  9
책은 현재 기아의 현장에서 어떤 사람들이 부당하게 이득을 보고 있고, 그런 이득들이 어떻게 재생산되며 더욱더 많은 어린이들을 굶주림으로 내몰고 있는가를 상세하게 알려준다.  10
기아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나라는 거의 초보적 수준이다.  10
이 책은 전체적으로 지글러가 어린이 무덤에 바치는 참회록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생산할 수 있는 곡물 잠재량 만으로도 전세계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고, 프랑스의 곡물생산으로 유럽 전체가 먹고 살 수 있는 전세계적 식량과잉의 시대에 수많은 어린이 무덤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과연 제 정신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16
'승자독식' , '교육노동' ... '워싱턴 합의'가 그 근본원인이다.  17

한국어판 서문 -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유엔식량농업기구(FAO : Food and Agricultule Oganization)는 2006년 10월 로마에서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2005년 기아로 인한 희생자 수를 집계했다. 2005년 기준으로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1명씩 굷어 죽어가고 있으며, 비타민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이 3분에 1명 꼴이다. 그리고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 5,000만 명이 심각한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 기아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2000년 이후 1,200만 명이나 증가한 것이다. 
아프리카에서는 현재 전인구의 36%가 굶주림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다. 북한의 상황도 절망적이다.  18
'지구의 허파' 아마존은 현재 국제시장에서 가장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는 콩 경작자에 계속 자리를 내주고 있으며, 그에 따라 지구 기후의 파국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20
2006년 유럽 연합 국가들... 보조금으로... 과잉생산.. 아주싼 가격으로 남반구에 수출... 아프리카 각국...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생산된 채소와 과일을 동질의 아프리카 농산물의 절반이나 3분의 1 가격에 살수 있다.... 아프리카 농가에서는 온 가족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 하루 열다섯 시간씩 악착같이 일하고 있다. 그런데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저생계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아프리카 53개국 중 37개국이 거의 순수한 농업국가다.  21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희망은 서서히 변화하는 공공의식에 있다.  
풍요가 넘쳐나는 행성에서 날마다 10만 명이 기아나 영양실조로 인한 질병으로 죽어간다.  22
변화된 의식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고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를 원한다. 기아로 인한 떼죽음은 참으로 끔찍한 반인도적 범죄이다.  23

동남아시아에서는 인구의 18%가 굶주림에 허덕이고, 아프리카에서는 인구의 35%,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약 14%가 굶주리고 있지.  
숫자로 따지면 아시아에 기아인구가 더 많단다.  33

문제의 핵심은 사회구조에 있단다. 식량 자체는 풍부하게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어. 그런 식으로 식량이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매년 수백만의 인구가 굶어죽고 있는거야.  37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죽는다는 자연도태설. 이 개념에는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주의가 담겨 있어.  41
1798년 영국국교회 성직자였던 토머스 맬서스는 인구 법칙에 관한 논문을 발표.
맬서스는 세계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여 25년마다 두 배가 되지만, 식량의 증가는 산술서열을 따르므로, 가난한 가정은 자발적으로 산아제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보조나 지원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했어. 맬서스는 질병과 배고픔은 가슴아픈 일이기는 해도 이 사회에 필수적인 기능을 한다고 주장했단다. 지구상의 인구를 자연적인 수단이라는 얘기였지.
책은 출판되자마나 유럽의 지배층에서 널리 읽혔고, 산업화 초기의 국민경제학자들과 기업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단다. 맬서스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어. ... 맬서스 이론은 근본적으로 틀렸지만, 심리적 기능을 충족시키거든.  41-42

'경제적 기아'와 '구조적 기아'
'경제적 기아'는 '돌발적이고 급격한 일과성의 경제적 위기로 발생하는 기아.'
난민캠프 병원... 한 아버지가 주름이 깊게 파인 걱정스런 얼굴로 병원 앞에 서 있었어. 발치에는 아들이 누워 있었지. 열두 살 아니면 열다섯 살? 아이의 사지는 정말이지 거미다리처럼 너무도 가늘었어. 그 아이를 보면서 너는 떠올렸지. 현지의 유일한 의사인 타마르트 망게샤가 그 아이를 보고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어. 너무 늦어서 어떤 도움도 소용이 없었던 거야. 그 아이는 곧 죽음을 맞게 될 상태였지. 아버지는 전신을 떨었어. 눈물이 하염없이 뺨 위로 흘러내렸어. 아버지는 한 마디 말도 못한 채 의사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어. 의사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지. 아이는 더는 생명을 구할 수 없는 상태였어. 결국 그 아버지는 허리를 굽히더니 가만히 아들을 안고는 가버렸어.  53
에티오피아는 연간 1인당 국민소득이 128달러로 현재 지구상의 최빈국에 속해.  54

'구조적 기아'는 장기간에 걸쳐 식량공급이 지체되는 경우.'  
'구조적 기아'는 선진국에는 없거나 이미 오래전에 퇴치된 전염병이나 질병이 창궐하는 것으로도 드러난단다. 예를 들어 크와시오르코르(쇠약증)나 기생충감염증 같은 것도 그런거야. 크와시오르코르는 사람의 신체를 서서히 손상시키는 질병으로 주로 어린아이들에게 찾아오는데, 이 벼에 걸리면 성장이 멈추게 되지. 처음에는 머리카락이 붉어지다가 나중에는 점차 빠지면서 배도 불러오고, 이가 흔들리다가 빠지게 되고. 이런 식으로 서서히 죽어가게 된단다.  60-61

시카고 곡물거래소... 사실 거래는 몇 안되는 거물급 곡물상의 손에서 결정돼. 그들은 몇 사람 안 되지만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 '화이트칼라 강도들'이라고 부르기도..  74
투기꾼들... 가격은 단 한 가지 원칙에 복종해. 바로 이윤극대화라는 원칙이지.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매주 수백만 달러를 더 벌어들이는 것이지. 배고픈 자들의 고통? 맙소사. 그들을 위해서는 유엔이 있고 국제적십자가 있잖아 하는 식이란다.
중요한 것은 첫째는 수확량이고, 둘째는 시카고 거래소의 투기꾼들이 유엔이나 세계식량계획, 여러 인도적 지원단체, 그리고 만성적인 기아에 시달리는 나라에 제시하는 곡물가격이야.  75-76

유럽연합은 자국의 농민드을 살려야 하고, 그 때문에 농산물가격을 높게 유지해야 해. 배고픈 사람들을 돕는 것은 FAO나 WFP의 과제일 따름이지.  80

구호단체는 극단적인 조건에서 활동하고, 갖가지 모순들과 싸워야 해. 그러나 어떤 대가도 한 아이의 생명에 비할 수는 없어. 단 한 명의 아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그 모든 손해를 보상받게 되는 것이지.  93

대개는 국가적인 폭력이 자행되는 나라에서 배고픔을 무기로 삼는단다.  94

다국적 기업들도 그런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  99

굷주림을 국가 테러의 무기로 사용한다.  103

사막화로 인한 환경난민  107

지금 전세계는 '농촌사회의 종언과 지구 규모의 도시화'라는 혁명 와중에 있단다.  125
세계 총인구의 증가율은 1.6퍼센트인 데 비해 도시인구의 증가율은 4.7%에 달하지. 
도시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는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어. 농지의 피폐화나 사막화. 그리고 각국의 농산물수출 확대정책도 주된 원인이라고 볼 수 있어. 또한 농업의 집중화. 기계화, 공업화가 강력하게 추진되면서 농업 생산이 확대되는 한편, 인력이 불필요해진 농촌에서 농밀들이 방출되어 대도시로 흘러 들었던 거야.  126

식민 정책으로 단일화 집중재배 시스템은 나라의 성장을 저해  131

비극은 끝없이 반복되고 있어.
시간이 지나면서 희생자들은 점차 망각의 제물이 되고, 문제 자체의 존재마저 잊혀버리지. 그리고 깊은 고독 속에서 죽어가게 돼. 처음에는 강했던 국제적인 연대감도 시들해지고.
기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국이 자급자족 경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하는 것 외에는 진정한 출구가 없다고 아빠는 생각해.  152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못하게 된 살인적인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엎어야 해.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윤리를 벗어난 시장원리주의 경제(신자유주의),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이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어.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바로세우고, 자립적인 경제를 가꾸려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거야.  153


에필로그
모든 생물체는 살기 위해 먹어야만 하므로, 먹을 것은 언제 어디서든 필요한 것이었다.  155

신 자유주의의 큰 문제는, 그런 주장이 자세히 검토되지도 않은 채 세계에 침투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이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인가, 무엇이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인가를 따지지 않은 채, 그러 '경제 합리성'이라는 구호만이 난무하고 있다.  164

우리는 기아에 의한 생명파괴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1) 인도적 자원의 효율화
2) 원조보다는 개혁이 먼저
모든 혁명의 목표는 희생자를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자로, 역사의식을 가진 주체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3) 인프라 정비    164-168

소수가 누리는 자유와 복지의 대가로 다수가 절망하고 배고픈 세계는 존속할 희망과 의미가 없는 폭력적이고 불합리한 세계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와 정의를 누리고 배고픔을 달랠 수 있기 전에는 지상에 진정한 평화와 자유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서로 책임져 주지 않는 한 인간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정의에 대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  171

후기
세계 무역의 규모는 지난 해 6조 달러를 넘어섰다. 그중 3분의 1이 각각 다국적기업들 내부에서 이루어진 무역이었다.
세계 무역의 또 다른 3분의 1은 다국적기업 상호간에 행해졌다. 그리고 3분의 1, 그러니까 2조 달러 정도만이 전통적인 무역 거래에 해당되었다.  173

심각한 만성적 영양실조, 부족한 물, 전염병은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세 재앙의 기사들이다. 네 번째 재앙의 기사는 바로 전쟁.  174

소리 없이 매일 많은 사람을 죽이는 기아에 대한 범 세계적 투쟁이 어려운 것은 또한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국제통화 기금의 무차별적인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다.  180

유엔의 특별 기구들, 개발프로그램, 기금, 위원회, 금융 기관들은 매일 매일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5대륙으로 자기 모슨을 알고 활동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전염병과 싸우고, 유엔식량농업기구와 세계식량계획과 유니세프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생명을 되살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유엔개발기구는 저개발 국가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는 극단적인 자유주의와 국가 및 공동체에 적대적인 민영화와 규제 철폐 정책으로 제3세계 나라들의 가뜩이나 약한 구조를 황폐화시키고 있다.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는 이런 모순을 제거하기에는 너무 우유부단하고 유약하다.
기아와의 투쟁은 이런 대립을 끝낼 수 있는가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182-183


부록으로 
남반구에서는 기아 희생자들의 피라미드가 쌓이고 있는 반면에, 북반구에서는 다국적 금융자본과 그과두제가 부를 쌓아가고 있다.
지은이는 이런 끔찍한 기아에 대한 범세계적 투쟁이 어려운 것은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국제통화기금 등의 무차별적인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신자유주의를 말한다 - 주경복 (건국대 교수)

1995년에 WTO가 공식출범하고, 김영삼 정부에서 '세계화'를 선언하며 신보수주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면서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 논쟁이 본격화하였다. 교육계에서는 1995년 5월 31일 교육개혁안이 발표된 뒤로 그런 소용돌이가 첨예하게 분출하였다. 정부가 '시장', '경쟁', '구조조정', '수요자 중심' 등의 개념을 이용하며 펼치는 개혁 논리 속에 신자유주의 요소들이 깊이 스며있었기 때문이다. 정책입안자들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좋은 모형들을 도입하는 것뿐이지 신자유주의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원래 미국이나 영국의 정책들 속에 이미 신자유주의 논리가 많이 스며있었기 때문에 의도와 상관없이 신자유주의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사회 각 분야에서 끝없는 토론과 논쟁이 이어졌기 때문에 오늘날 웬만큼 사회참여 활동을 수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신자유주의 개념은 상식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큰 주저 없이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해 오고 있다. 나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틈틈이 신자유주의에 관한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그 용어법이나 개념의 엇갈린 해석과 오해가 생기는 일을 겪으며 난감할 때가 있었다. 나 스스로는 큰 오류 없이 이해하며 사용하고 있다고 믿지만 혹시는 잘못된 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생겼다. 세계화나 신자유주의에 관한 독서도 꽤 하고 내 나름대로 관점을 정리해 오기는 했지만 너무 안일했거나 타성에 젖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경직된 관념을 지니게 된 것은 아닌지 반추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친 김에 내가 이해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한번 정리하여 객관화하면서 주위의 검증도 받아 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신자유주의 개념에 아직 익숙하지 않거나 관점의 차이 때문에 다소의 오해가 생길 수 있는 네티즌들과도 공유할 것은 공유하고 서로 확인하여 보완할 것은 보완하며 합리적인 소통을 이루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너무 이론적인 문제나 세부적인 이야기를 깊이 하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으므로 상식적인 선에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총체적으로 볼 때, 신자유주의는 매우 복잡한 흐름 속에서 진화하였기 때문에 간단하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지만 편의상 일정한 무리를 감수하면서라도 큰 줄기만 잡아 단순화시켜 서술해 본다.

원래 '자유'라는 말은 그 정확한 시원을 추적하기 힘들만큼 오래된 것이다. 그 만큼 자유라는 개념은 인류의 삶에 일찍부터 깊이 녹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로서 '자유주의'라고 할 때는 보편적 자유를 애호하거나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특수한 의미의 개념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상식 속에 자라잡은 '자유주의'는 대개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고전적 자본주의와 연관하여 이해되고 있다. 정부의 통제를 최대한 줄이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질서를 염두에 둔 개념이다. 말하자면, 자본 활동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어서 일반 대중이나 모든 개인의 보편적인 자유와는 꽤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벤담(Jeremy Bentham)이나 밀(John Stuart Mill) 등 다소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들이 부를 골고루 분배하고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등 자유의 공공적 관리를 통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창함으로써 대중의 자유까지 보호하며 포괄하려는 공공적 자유주의도 나타났으나 역시 고전적 자유주의 흐름에서는 스미스 식의 방임적 자유주의가 대세를 이루었다. 인류 역사 속에서 언제나 영주, 왕, 국가 등의 지배와 관리 속에서 구속받으며 활동하던 인간들에게 '간섭 없는' 자유라는 개념은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특히,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책무 없이 마음껏 부를 축적하며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 더 없이 반가운 이야기였다.

산업혁명 이후 경제활동이 매우 활발해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방임적 '자유주의' 논리는 처음에 상당한 호응을 받았다. 자유주의는 시대를 가로지르는 지배담론이자 하나의 도그마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방임적 자유의 폐해가 노출되기 시작하면서 그런 자유주의는 도전을 받기 시작하였다. 자유를 빙자한 자본의 횡포와 독점이 발생하고 빈부격차가 커져서 서민의 구매력이 감소하여 경기가 침체하는 등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결국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와 역할에 회의를 느끼며 방임적 자유보다 정부의 적극적 관리와 개입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런 흐름에서 자유주의는 여러 가지 형태로 수정되는 길을 걸었다.

1912년에 미국 대통령 후보로 나선 윌슨은 무분별한 '부당' 경쟁을 통해 경제의 독점 현상이 나타나고 부작용이 만연하는 것을 억제하여 새로운 방식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새로운 자유(New Freedom)' 정책을 제시하며 당선되었다. 1930년대 세계 경제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루즈벨트 대통령이 추진한 '뉴딜 정책'도 '새로운 자유' 정책의 흐름으로 꼽힌다. 이 때 이야기되는 ‘새로운 자유 정책(New Freedom Policy)’을 가끔 '신자유주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오늘날 세계화 담론과 결부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는 사뭇 다른 것이다. 앞에서 말하는 '새로운 자유' 정책은 정부가 나서서 경제문제를 챙기는 것이고, 뒤에서 말하는 '신자유주의'는 정부는 가급적 나서지 말고 민간 자본들이 알아서 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자를 후자와 구별하기 위해 '새로운 자유주의(New Liberalism)'라 부르고 후자를 요즘 부르는 용어 그대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고 부르면 좋을 듯 하다.

1920년대 무렵 독일의 오이켄(Walter Eucken)을 비롯한 프라이부르크학파에서는 경제질서의 완전한 자유를 이루려면 경쟁질서가 공정해야 하는데 자유를 방임해서는 그것을 실현할 수 없으므로 생산, 소비, 직업선택 등에 대해서는 자유경쟁을 가급적 보장하되 시장형태 등을 포함한 사회질서의 관리는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질서자유주의(Ordo Liberalismus)’를 제시한 바 있는데, 이것도 고전적 자유주의에 대한 수정이라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흐름의 하나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 역시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와는 구별된다. 그냥 넓은 의미의 '새로운 자유주의' 흐름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현실 정치에서나 경제학 이론가들 사이에서나 아담 스미스가 제시한 자유주의 경제 모형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이론들이 여러 각도로 모색되는 가운데 대표적 대안 이론으로 부상한 것이 바로 케인즈의 수정주의 이론이다. 자본가의 자유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도 국가가 나서서 관리하고, 빈부격차가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복지정책을 도입하고, 경기가 침체되면 공공투자를 늘려 유효수요를 증대시키는 등 자유의 공공성을 지향하였다. 국가가 개입하여 자본의 방임적 자유를 통제하는 '개량'의 흐름이 다시 주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런 흐름도 고전적 자유주의를 수정한 것이므로 편의에 따라서는 '신자유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겠으나 대개 '케인즈주의', '수정자본주의' 또는 '개량(자본)주의'라고는 불러도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는 명칭은 케인즈의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논리로 등장한 흐름에 붙여지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정부가 자본의 흐름에 개입하며 경제활동을 간섭하는 것이 경제적 '효율'을 떨어트린다는 부정적 시각에서 다시 제약 없는 자유를 주장하는 이론이 생겨났는데, 그 내용이 고전적 자유주의 와 꼭 같은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케인즈주의와는 더욱 같지 않기 때문에 이론가들 스스로나 주위에서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흐름은 J.바이너, H.D.사이몬스, F.A.하이에크, F.H.나이트, M.프리드먼, G.J.스티글러 등 이른바 시카고 학파의 경제이론가들이 주도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하이예크나 프리드먼 같은 인물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이들은 생산 ·가격 · 고용 등 경제 수준을 결정하는 요인으로서 통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물가조절, 자원배분 등을 비롯한 대개의 경제 운영은 시장기능을 통해 수행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정부의 개입보다는 민간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중시하였다. 이런 이론과 주장 또는 그 논리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신자유주의' 담론의 뿌리인 것이다.

이런 시카고학파의 신자유주의 논리들이 일찍이 1950년대부터 경제학의 이론으로서 전문가들의 주목은 받았지만 세간의 관심과 호응을 일으키며 현실 정책에 그대로 즉시 반영되지는 않았다. 세계 국가들의 정책에 반영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이고, 보다 더 적극적으로 확산된 것은 1980년대부터이다. 70년대 초반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경제정책에 신자유주의 요소를 도입하여 '닉소노믹스(Nixonomics)'를 낳았지만 시도의 차원에 머물렀고, 그나마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에 휘말려 중도 사임하는 등으로 일관된 시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뒤 1979년 영국에서 집권한 대처 수상이 매우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여 '대처리즘'을 탄생시키고, 1980년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한 레이건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 도입하여 '레이거노믹스'를 탄생시키면서 드디어 신자유주의가 '스타'처럼 국제사회의 인기 있는 담론과 정책으로 부상하였다. 각종 규제를 풀어 자본의 이동을 자유롭게 해주고 자본주의 판단에 따라 쉽게 구조조정을 가하며 자유롭게 기업활동을 할 수 있게 하여 침체되었던 경기를 많이 활성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것은 곧 신자유주의가 매우 유효하다는 심증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신자유주의가 각광을 받게 된 사전 배경에는 1970년대에 세계 국가들이 겪은 석유파동, 스태그플레이션, 실업난 등 경제의 전반적 악조건이 작용하였다. 무엇이든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위기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경제 위기의 원인을 케인즈주의 경제정책 탓으로 돌리면서 그 대안으로서 신자유주의를 제창하여 급부상한 것이다. 위기상황에서 유효한 역할을 못하는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진데다가 여러 가지 규제들 때문에 경제가 활성화되지 않는다는 불만이 늘어났다. 그래서 규제를 최대한 풀며 정부의 역할을 가급적 축소시키고 시장기능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이다. '규제 완화', '세금축소', '공기업민영화', '노동 시장 유연화', '복지정책축소' 등 신자유주의 조치들은 자본가들의 환영과 지지를 받았다.

이렇게 세상의 주목과 사랑을 받으며 유행처럼 확산된 신자유주의는 그 주창자와 순수한 이론가들마저 놀랄 만큼 자가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은 일종의 신화를 낳아 가고 있다. 놀라운 마력을 가진 어떤 주문처럼 그것을 외치고 표현하면 무엇이든 해결점이 나올 것 같은 환상을 자아내는 경향도 보인다. 그렇게 범람하는 흐름에는 시대적 상승 요인이 맞물린 또 다른 배경이 있다. 바로 '세계화'의 물결이 합세한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성취의 욕망이 있고, 인류는 태초부터 집단팽창의 욕망을 지녀왔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국가들은 제국주의 야망을 불태웠고, 현대에 와서도 강대국들은 끊임없이 국제적 헤게모니를 확대하고 싶어 한다. 경제통상 분야에서는 자국의 이익추구에 유리한 무역의 확대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20세기 들어서 탄생한 GATT는 바로 그런 배경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GATT는 여러 가지 한계들 때문에 강대국들이 기대하는 만큼의 개방수준을 달성하기 힘들었다. 그런 교훈을 바탕으로 GATT 체제를 대폭 보완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세계무역기구(WTO)’이다. 세계의 모든 국가들을 일정한 절차로 개방해 나가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IMF, IBRD, OECD, ASEM, APEC, FTA 등도 WTO와 함께 세계화 기제를 구성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을 전후하여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용어와 개념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런 세계화의 흐름에 이론적 무기로 작동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국가의 관리로 존재하는 모든 국경들을 허물고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하여 오직 시장기능만이 모든 경제활동과 삶을 밑받침하게 한다는 논리가 성립하게 된 것이다.

이런 세계적 신자유주의를 배경에서 지원하고 움직이며 가장 많이 혜택을 누리는 것은 초국적 자본이다. 각 국가에서 무한에 가까운 자유를 지향할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하나의 시장으로 삼아 언제 어디서든 돈벌이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되어 가는 것이다.


한국은 1990년대 중반부터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세례를 받으며 흐름에 동참하여 무척 빠른 속도로 적응해 나갔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주도 국가인 미국이나 영국보다 분위기에서는 더 신자유주의적이고 더 세계화를 쫓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영삼 정부가 다분히 의식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한 뒤로, 김대중 정부가 IMF정국 타개를 위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 흐름을 이어받았고, 노무현 정부도 처음에는 적지 않은 망설임을 보였으나 점차 신자유주의 요소가 짙은 정책으로 흘러왔다.

이 세상에 절대선과 절대악은 별로 없다. 대부분 장점과 단점을 함께 지니고 있는데 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본질을 규정하냐에 따라 긍정되거나 부정된다. 신자유주의도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가 지니는 장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많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세 가지만 꼽아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본 활동의 제약을 최소화함으로써 자유롭게 시장 원리에 따라 이윤을 추구함으로써 투여한 자본을 통해 거둘 수 있는 성과를 극대화 할 수 있다. 부의 창출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둘째, 시장의 적자생존 원리에 따라 모든 경제주체가 긴장하며 최선을 다해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함으로써 기능적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한 눈 팔지 못하고 자신이 지닌 능력을 취대한 발휘하게 하여 능률을 높인다는 것이다.

셋째, '욕망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성취욕을 자극하여 일의 성과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적 본능이나 이기심을 자극하여 더 많이 이루고자 하는 에너지를 생성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단점도 매우 많다. 세 가지 정도만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유’의 전제가 잘못되어 그 개념과 현실을 왜곡한다는 것이다. 모든 간섭을 없애고 자유를 줄 테니 알아서 마음껏 하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가진 사람과 없는 사람의 할 수 있는 조건이 다른데 알아서 하라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쪽은 무장을 단단히 하고 나서는데 다른 쪽은 맨 손으로 알아서 싸우라거나 헤비급 선수와 라이트급 선수를 구분 없이 섞어 놓고 알아서 싸우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괴롭힘이자 억압이 되어 버린다 (공정거래위원회 같은 기능을 통해 경쟁의 공정성을 관리한다고 하지만 그 때의 관리는 경쟁 활동의 공정성을 관리하는 것이지 경쟁의 전제조건을 관리하지는 않는다). 그런 뜻에서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자유는 개인과 국가의 편차나 특수한 조건을 무시하며 인권, 생존권, 주권 등을 초월하려는 개념이어서 진정한 의미의 인간적 또는 사회적 자유가 아니라는 개념적 비판을 받게 된다.

둘째, 지나친 경쟁주의로 치달으며 약육강식의 냉혹한 질서가 자리 잡아서 다수의 약자들이 소외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시장으로 내몰며 자유롭게 벌어먹으라고 하므로 경쟁이 치열해 질 수 밖에 없는데 경쟁의 조건이 처음부터 불공평하니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낳으며 양극화의 심화를 초래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또는 세계화를 20:80의 질서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20%의 혜택 받는 사람들을 위해 80%의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희생시킨다는 이야기다. 결국, 신자유주의는 자본가들의 자유를 위한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셋째, 자본의 욕망이 끝없이 확대되어 불필요한 영역들까지 시장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인간의 모든 삶에서 물질만능주의를 부추긴다는 점이다. 시장논리가 만병통치약처럼 통하다보니 문화, 교육, 예술 등 고유한 가치를 지니는 영역들도 시장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며 정책으로 옮기기 때문에 삶의 체계를 건조하게 만들며 인류문화를 황폐화시킨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가진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한편 없는 사람에게는 거부감을 갖게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내막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서민이나 그들 편에서 애쓰는 진보적 활동가들 중에서도 화려한 자본의 담론에 이끌려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시장'과 '경쟁'의 논리를 새로운 희망처럼 추종하는 경향도 있다.

신자유주의는 그 개념과 논리상 자본의 자유와 기득권을 지키거나 확대하고자 하는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여서 사회적 자유와 평등한 세상을 추구하는 진보주의자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데, 정부 정책이나 기업운영 등이 신자유주의를 채택하는 일이 원체 많다보니 그것을 비판하는 일도 너무 많아지고 일상화하다보니 때로는 ‘비판을 위한 비판’ 또는 ‘개혁을 반대하기 위한 비판’으로 오해 받는 경우가 생긴다. 원래 불평등과 소외의 모순이 존재하는 현실을 변혁하려는 목표가 강한 것은 진보주의 쪽인데 자본의 기득권을 강화하는 잘못된 개혁 방향을 비판하다보니 얼핏 보기에는 보수주의가 오히려 더 개혁적으로 느껴지고 진보주의가 더 수구적으로 느껴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결국 정책을 주도하는 주체가 어떤 흐름에 서서 개혁을 추진하느냐에 따라 양상이 달라진다. 요즘 보-혁 전도의 아이러니가 자주 나타나는 것은 정부의 정책들이 대개 진보성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말하자면 서민을 위한 정책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고 오히려 가진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정책이 더 많이 표출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사족을 달자면, 대안 없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기만 하는 것은 결국 경쟁을 피하며 보신주의에 빠지거나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기 쉽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진보적 활동가들이 깊이 고민하며 노력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부조리하게 조장되는 경쟁의 모순을 뛰어넘어 창조적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자는 더 본질적인 목표가 있다. 그러나 그 목표가 구체적인 담론과 기획물로서 제시되지 못하기 때문에 비판의 충정이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가끔은 일단 다가오는 변화에 대한 거부감을 '비판'이라는 형식으로 표출하는 경우도 없지 않으며, 또한 그런 경우가 아니고 진정한 비판일지라도 이제는 모순을 파헤치거나 혁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진보적 대안을 제시하며 새로운 변혁을 이루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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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경험한 인문 고전 독서와 저자가 조사한 인문고전에 관한 방대한 자료들을 토대로 하나의 인문고전 독서방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인문고전 독서를 통해 가지는 지적 수준의 힘은 인문고전 독서에 목을 맨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를 통해 드러나있다.
철학자들이야 당연히 그렇다 치고 경제인 교육인 학자 군인 일반인들이 인문고전을 통해 리더가 될 수 있었던 점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교육 현실이 언제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인상적으로 적고 있다.
우리가 경험한 교육현실 그리고 지금 학생들이 되풀이하고 있는 교육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서술하면서 지금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또한 금융, 경제, 기업인들 중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인문고전을 탐독하는 사람들이라는것, 음악, 미술계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은 인문고전을 읽어왔다는 사실은 우리에 절실하게 인문고전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한다.
지금의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은 철학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본질을 이해하고 거인의 어깨위에 있기 위해서는 인문고전이 체계적으로 우리 내면에 스며들어 동화될 때 새로운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 인문고전 독서 방법에 관한 7가지가 나온다.
이것은 다만 읽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보다는 정말 왜 필요한지에 대해 자각하고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어 내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나온 한국사회에서 선비들이 하던 공부이다. 그것이 세계를 만들어낸 위인들이 하던 공부이다.



인문고전 독서는 두뇌에 특별한 기쁨을 가져다준다. 물론 처음에는 고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고 어렵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이해하지 못해 진도가 일주일 또는 한 달씩 늦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어느 지점을 넘기면 고통은 기쁨으로 변한다.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온 천재들이 쓴 문장 뒤에 숨은 이치를 깨닫는 순간 두뇌는 지적 쾌감의 정점을 경험하고, 그 맛에 중독된다. 그리고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뻔한 꿈밖에 꿀 줄 모르고 평범한 생각밖에 할 줄 모르던 두뇌가 인문고전 저자들처럼 혁명적으로 꿈꾸고 천재적으로 사고하는 두뇌로 바뀌기 시작한다.  20
세상에는 두 종류의 책이 있다. 고전(古典)과 비고전(非古典). 고전은 짧게는 100~200년 이상, 길게는 1,000~2,000년 이상 살아남은 책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천재들의 저작이다.
생각해보라. 만일 앞으로 10년 동안 노벨상 수상자들에게 매일 두 시간 이상 개인지도를 받는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22

미국 '그레이트 북스 재단'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인문고전 독서 프로그램 및 독서 토론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28
세인트 존스 대학은 4년 내내 인문고전 100권을 읽고 토론하고 에세이를 쓰는 게 교육과정의 전부다. 
조지 와이드 대학의 주 교육과정은 멘토와 함께 인문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다. 
예일 대학은 '디렉티드 스터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교수가 강의를 하고 두번은 학생들끼리 세미나를 하는 프로그램.  30
어느 날 갑자기 우리나라 대학가에서 인문고전 독서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인문고전을 원서로 일그라는 숙제를 내주던 교수도, 신입생에게 플라톤과 공자를 권하던 선배도, 뭐가 뭔지 모르면서도 죽어라 인문고전을 읽던 학생도 다 사라져 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 베스트셀러를 읽으라는 숙제를 내주는 교수, 신입생에게 재테크 서적을 권하는 선배, 무협판타지 소설을 애독하는 학생들이 들어섰다.  33
두뇌의 수준은 그가 읽는 책의 수준과 같다고 할 수 있다.  35

스파르타는 왜 강한 육체만 추구한 국가로 알려졌던 걸까? 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 그들이 뛰어난 이유가 상세히 밝혀지면 모든 사람이 지혜를 갖추려 애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9

일제는 프러시아 즉 독일에서 시작된,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학교제도를 그대로 수입해서 당시 식민통치하에 있던 우리나라에 이식했다. 일제를 패망시킨 미국은 영국의 공립학교 교육제도를 기반으로 한 자국의 공립학교 교육제도를 우리나라에 도입했다. 쉽게 말해서 당신이 받은 학교 교육과 지금 우리나라 십대들이 받고 있는 학교 교육은 직업 군인과 공장 노동자를 생산하는게 목적이었던 교육 시스템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혹시라도 이 말을 인정하기 어렵다면 다음 사실을 한 번 생각해보라.
  - 군대의 상관은 부하들에게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고 부하들은 그 명령을 기계처럼 수행한다.
  - 공장의 장은 휘하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작업지시를 내리고 노동자들은 그 지시를 기계처럼 수행한다.
  - 우리나라 교사는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고 학생들은 그 지식을 기계처럼 암기한다.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생들은 초중고 합쳐서 무려 12녀이나 교육을 받고도 지적이고 창의력 넘치는 인재가 되기는 커녕 좀 심하게 말하면 바보가 되어 사회에 나온다. 대학에 입학해서 다시 4년을 배우고 대학원까지 졸업해도 마찬가지다. 당당히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지식인이 되기는 커녕 제 앞길 하나도 헤쳐나가지 못하는 무능력한 존재로 전락하기 일쑤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왜 우리나라 학생들은 배우면 배울수록 무능력한 사람이 되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나라의 공교육이 시키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바보를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 시스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65-66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문고전 저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실시한 교육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가 깊은 대화를 통해 지혜와 진리를 터득하고 발견해가는 교육이다.  67

아무리 많은 지식을 축적한다 한들 백과사전은 될 수 있을지언정 천재는 될 수 없다. 천재는 지혜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71
인문고전을 읽고서 변화하기를 바란다면.. 전쟁을 치러야 한다. 다름 아닌 자기 자신과 말이다. 
과거의 자신을 죽이는 처절한 자기 투쟁이 뒤따르지 않는 인문고전 독서는 지식의 축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지식은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삶의 근본적인 변화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지혜가 있을 때 생겨난다.  77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투자자들의 삶을 조사해보면 1) 독서광이다., 2) 최고 수준의 인문고전 독서가다. 라는 공통점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134

베스트셀러는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책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이 베스트셀러 또한 감동과 지식은 줄 수 있으되 지혜는 줄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137
그렇다면 인문고전을 열심히 읽기만 하면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아니다. 지혜는 책 속에 있지 않다. 지혜는 인간의 내면에 존재 한다.
치열한 철학고전 독서를 통해 두뇌 속에 '철학하는 세포'를 만든 뒤, 본질을 꿰뚫는 사람.  138

돈 없고, 능력 없고, 배경 없는 사람일수록 인문고전을 치열하게 읽어야 한다.  185

인문고전 앞에서 나 자신을 내려놓고 눈과 귀와 마음을 오직 천재들의 목소리에 맞추자, 즉 인문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천재의 두뇌에 직접 접속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이를 실천하자 돌덩이 같던 두뇌가 정말로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194
나는 인문고전을 읽으면서 내가 '바보'라는 사실을 알았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일 수 있다. 책을 많이 읽는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것이니 말이다. 나 역시 그런 함정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독파하는 인문고전이 늘어나면서 저절로 사라졌다.  195
인문고전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두 가지 있다. 간절함과 사랑이다. 
인문고전을 읽을 때 글자만 읽어서는 안 된다. 그 내용만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단면적인 책 읽기에 불과하다. 그 단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입체적인 독서로 넘어가야 한다. 진정한 독서는 인문고전 저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문장 뒤에 숨어 있는 천재의 정신을 만나는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이해해야 한다. 깨달음이 있는 책 읽기를 해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그런 독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온 마음을 다해 발버둥 치다보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천재의 정신에 근접한 독서는 할 수 있다. 
사랑이 간절함보다 훨씬 중요하다. 사랑은 곧 인문고전 독서의 목적과 관계된다. "나는 왜 인문고전을 읽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천재가 되기 위해서, 창조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서, 업무능력을 높이기 위해서, 회사를 잘 경영하기 위해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 등등. 그렇다면 왜 천재가 되어야 하고, 왜 창조적인 사고를 해야 하고, 왜 업무능력을 높여야 하고, 왜 회사를 잘 경영해야 하고, 왜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유일무이한 답은 '사랑'이어야 한다.
내 경우를 예로들면, 인문고전을 읽다가 좌절감을 느낄 때마다 인문고전을 읽는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 자주 묵상했다.  199-200

가슴으로 하는 독서의 세계  204

해설서는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시기는 인문고전 독서를 시작하고 최소 3년, 최고 10년이 흐른 뒤가 적당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207
철학고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필사했고, 문학고전은 가슴에 와닿는 부분만 필사했다. 역사고전은 한 권도 필사하지 않았다. 철학고전 중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따로 출력해서 주머니나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꺼내 소리내어 읽었다. 이해가 될 때까지 그렇게 했다. 물론 내 수준의 이해였지만 말이다.  210


리딩으로 리드하라 1. 온 마음으로 사랑하라.
세종대왕의 인문고전 독서법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치열함으로 요약된다. 그의 독서법은 백독백습(百讀百習) 즉 100번 읽고 100번 필사하는 것이었다.  237
세종은 무엇보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최고가 되지 못하면 백성들에게 최고의 정치를 베풀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최고가 되지 못하면 신하들을 제대로 이끌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그래서 세종은 먼저 자신을, 다음으로 신하들을 그토록 뜨거운 독서의 장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238
세종은 당시 사대부들을 비판하면서 "오늘날 선비들은 말로만 경학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치를 궁극하게 밝히고 마음을 바르게 한 선비가 있다는 것은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다. 너희 선비들은 매일 경학을 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왜 진짜 선비가 없는 것이냐!" 라고 했다.  239
내가 생각하는 인문고전 독서법의 핵심은 천재들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리딩으로 리드하라 2. 맹수처럼 덤벼들어라.
진짜공부(인문고전 독서).
'읽었다' 라기보다는 '먹어치웠다'.  243

리딩으로 리드하라 3.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인식하라.

리딩으로 리드하라 4. 위편삼절(韋編三絶), 책이 닳도록 읽고 또 읽어라.

리딩으로 리드하라 5. 연애편지를 쓰듯 필사하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표시를 하거나 밑줄을 그으면서 책 한 권을 다 읽은 뒤 옮겨 적는 것, 중요한 부분을 발견하는 즉시 옮겨 적는 것 그리고 초서(抄書)[초록(抄錄)이라고도 한다] 세 가지가 있다.
초서란 인문고전에서 중요한 부분을 뽑아서 옮겨 적은 뒤 이를 주제별로 분류, 편집해서 책으로 만드는 것인데, 조선의 천재들이 취한 기본적인 인문고전 독서법이었다.  253
진정한 필사는 종이 위에 베껴 쓰는 것이 아니라 영혼 속에 새겨넣는 것이리라.  255
암송은 천재들이 즐겨 사용한 독서법이다.  256

리딩으로 리드하라 6. 통(通)할 때까지 사색하라.
낮은 수준의 인문고전 독서에는 사색이 없다. 오히려 사색을 억압하고 소멸하려고 한다.  260
서애 류성룡은 "다섯 수레의 책을 술술 암송하면서도 그 의미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가. 사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양의 천재들은 하나같이 진정한 인문고전 독서는 사색에 있고, 사색이 빠진 인문고전 독서는 헛것이요 가짜라고 강조했다.  261
프랜시스 베이컨은 "독서는 오로지 사색하고 연구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사색을 기록하는 방법은 
  1) 책을 읽다가 떠오르는 생각을 따로 준비한 종이나 노트에 즉시 적는다.
  2) 책을 읽다가 떠오르는 생각을 책의 여백에 즉시 적는다.
  3) 책 한 장(章) 또는 책 전체를 읽고 사색한 뒤 그것을 독후감식으로 적는다. 
이 세 가지가 대표적이다.  270

리딩으로 리드하라 7.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라.
인간의 뇌는 무엇인가를 읽고 쓰고 암송할 때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다. 읽고 쓰고 암송하는 뇌의 사진을 그렇지 않은 뇌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전자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신피질의 활동이 급격하게 증가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인간이 깊은 사색에 잠길 때 뇌에서는 전혀 다른 뇌파가 나온다. 아인슈타인이 사고실험에 몰두하고 있을 때, 동양 최고 수준의 바둑 명인이 바둑을 두고 있을 때, 전설적인 명상가가 깊은 명상에 빠져들었을 때 나오는 바로 그 뇌파가 나온다. 인문고전을 읽고 필사하고 암송하고 사색할 때만 그러는 게 아니다. 베스트셀러는 물론이고 신문 사설을 읽고 필사하고 암송하고 사색할 때도 뇌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특별한 뇌파가 나온다. 그런데 인문고전을 읽고 사색하느 수준을 넘어서 인문고전의 저자와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어 그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두루 깨닫는 경지에 도달하면 그 사람의 뇌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뇌의 모든 신경세포와 신경회로가 일순 눈부신 빛에 감싸여 전혀 다른 형태로 재탄생하고 재배열되지 않을까? 그리하여 그 사람의 두뇌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고를 하는 위인의 뇌로 기적처럼 변화하는 게 아닐까?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를 연구하면서 그런 생각을 종종하곤 했다.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는 그 정도로 신비롭고 경이로운 면이 있다.  279-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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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중에 하나는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노소를 막론하고 알고 있는 사실이다. 
누구는 믿고 안믿고를 나누는 것조차 필요없는 사실임을 알고 있다.

우리는 관계라는 것을 통해 희노애락을 경험하는데.. 때로는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말이나 행동을 할 수 있다.
이것또한 우리가 불완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즐거움이 아닌 고통이나 상처가 한 사람의 마음을 성장하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구나 하나 이상의 열등감을 가지며 살아간다.
그것이 별일 아닌것이 되어 버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평생에 걸쳐 움츠러들게도 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러한 움츠러드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지 말하고 있다.
저자는 책에서 자존감(self-worth)은 자기가치감(self-worth)과 자신감(self-confidence)을 합쳐야 나온다고 한다.
자기를 존귀하게 여길 수 있는 자세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봄으로 우리는 무의식중에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을 찾고 그것들을 어루 만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자가치유 도서들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점들을 묶어 보다 보면 ... 자신이 한결 여유롭고 모든것을 그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해 준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나만 그런것인지 아니면 내가 여러가지 중에 하나만을 이제 알게 된건지는 모르겠으나.. 이것 하나로 한결 편안한 자신을 만나게 된다.
매우 기분 좋은 일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쉽게 변하랴...!!! 화날때 화나고 상처도 받게 된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오래 가지도 않고 훨씬 덜 느낀다는 사실이다. 이것으로도 참 좋다... 한 광고에서 여배우가 앉아서 국물을 마시고는 흐뭇하게 미소짓는 그런 느낌이랄까...


열등감은 지독하다.
열등감은 매우 주관적이며 심지어 독선적이다.
열등감은 관점(view point)의 문제다.  19
다른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정신분석 용어로 '자아 동질적(ego syntonic)'이 되었다고 하는데, 어떤 상황에 부딪치면 거의 자동적으로 열등감에 빠진다.  21

자존감(self-worth)은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다. 사람들은 두 가지 면에서 자신을 평가한다.
첫째, 자기가치감(self-worth).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 '나는 남에게 호감을 주는 사람이고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다.'라고 평가할 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43
둘째, 자신감(self-confidence). '나는 유능한 사람이다.' , '내게 맡겨진 일을 잘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44
긍정적 경험을 반복하면 자신감이 회복된다.  48

눈에 대한 열등감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눈만 보인다. 눈이 큰가 작은가가 모든 평가의 기준이 된다.  67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 특성이지만, 외모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은 유별나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 '남들에게 내가 휸하게 보이지 않을까?'하고 걱정한다.
남의 거울에 비친 나를 나로 착각하지 말자. 세상에는 다양한 거울들이 있다. 깨진 거울도 있고, 찌그러진 거울도 있다. 더러워진 거울도 있다. 이런 거울들은 내 모습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없다. 거울은 자기 식대로 나를 보여 준다. 그래서 우리 모습을 지나치게 찌그러지고 더러워진 모습으로 보여 줄 수도 있다. 이 모습을 그대로 내 모습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자존감을 유지할 수 없다.  70

내가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현실을 인정하십시오."이다. 현실을 부정하고 회피할 때 노이로제도 생기고 정신 질환도 생기기 때문이다.  85
자신에 대한 부정적 관점은 대부분 유년기에 만들어진다. 유년기의 어느 날부터 부정적 관점이라는 마음의 색안경을 쓰고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93
선천적 조건 때문에 생긴 열등감이 모든 열등감의 60%를 넘는다.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조건 때문에 열등감을 느낀다면 답답한 일이다. 이런 선천적 조건에 대한 열등감을 해결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밖에는 없다. 현실 인정이 치료의 시작이다.  94
자신을 알고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도 인정하며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예컨대 '내가 남들보다 더 잘날 필요는 없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내 나름대로 살 뿐이다.' 이렇게 마음먹으면 된다.  96

사실 전능한 사람은 없다. 경재에서 늘 이길 수도 없다. 살다보면 지는 게임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건강한 직장인은 나름대로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그 부족한 부분을 노력으로 채우며 산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존감을 유지하며 산다. 그것이 건강한 인생이다.  110
가난하다는 것은 불편할 뿐인데 수치심과 열등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  111
남이 가진 재산이나 탤런트를 부러워하고 좌절감을 느끼는 것이 열등감이다. 반면에 자기 탤런트를 개발하고 키우는 것이 효과적인 열등감 극복법이다.  117
내 손 안에 있는 탤런트는 무엇인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이루어야할 목표가 있는 사람은 명품이나 비싼 커피숍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는다. 목표를 이룰 방법을 찾고 준비를 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이것에 몰두하는 것도 열등감 극복의 좋은 방법이다.
자기 성취의 경험은 강한 치유의 효과를 보인다.  118

인간은 두 개의 현실이 있다. 하나는 실제적 현실(actual reality)이다. 객과적 현실이다.
다른 하나는 심리적 현실(psychic reality)이다. 마음이 만들어 낸 주관적 현실이다.  121

일기를 쓰기를 권한다. 먼저 그날 하루 열등감을 느낀 사건을 적는다. 다음에는 그때 떠오른 생각과 느낀 감정을 자세히 적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생각에 대한 합리적 비판을 적고, 수정된 합리적 행동을 적는다. 
예)
① 사건 : 오늘 과일 가게에 갔다. 과일을 고르고 있는데 젊은 점원이 큰소리로 나를 책망했다. 
② 감정과 떠오른 생각 : 몹시 불쾌했다. 그리고 점원이 내가 고졸인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대졸로 보였다면 젊은 사람이 감히 손님에게 저렇게 불손할 수 없을 거다.'라고 생각을 했다.
③ 합리적 비판과 수정 행동 : 그러나 점원이 내 학벌을 알리가 없다. 내 생각일 뿐이다. 나의 오해다. 점원에게 "손님에게 그렇게 소리 지르지 말아요. 나는 과일 안 주물럿다는데 그런 손님들이 많은가 봐요?"라고 말해 줄 걸 그랬다. 다음에는 그렇게 말해 주어야지.
이것을 '인지 행동 치료'라고 한다. 
매일 꾸준히 반복하면 열등감에 의해 왜곡된 사고가 합리적으로 변한다. 극복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치유가 일어나게 돼 있다.  129

관점을 바꾸는 것..  131

대부분의 정신 질환은 자존감의 붕괴라는 심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132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의 심리를 분석해 보면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때까지 나는 행복할 수 없다.고 믿고 있다.  153
"이제 그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그냥 싫어하게 놔두자.
그의 감정은 그에게 맡기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부족하지만 사랑하며 살자.  154

가혹한 초자아는 언제 형성되는가?
초자아는 유년기에 형성된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데, 부모의 태도가 아이의 내면에 내재화되면 초자아가 된다. 
너무 엄한 부모, 너무 처벌적인 부모가 가혹한 초자아를 만든다. 아이다운 잘못에 대해서 지나친 벌을 주는 부모의 자식들이 가혹한 초자아를 갖는다. 아이가 도달할 수 없는 너무 높은 이상을 요구하는 것도 문제의 초자아를 만든다.
말과 행동이 다른 부모도 아이를 혼란스럽게 한다. 
부모가 너무 나약하고 부드러워도 초자아는 비정상적이 된다.  195

성격이 강벅적인 사람은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청결이다. 
주도권이 필요하다 주도권을 갖고 있어야 집요하게 요구하고 또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정리정돈이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셋째, 시간 엄수이다.
시간을 칼같이 지킨다.
강박 성격자는 어떻게 해서라도 주도권을 쥐려고 한다. 주도권을 빼앗겻다고 생각되면 엄청난 분노가 터져 나온다. 자기는 항상 옳고 신중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196-200

히스테리 성격은 인기가 자존감을 유지시켜 준다.
'나는 매력적이야. 사람들은 나의 매력에 빠졌어.' 이것이 확인될 때 자존감을 느낀다.  203

열등감이 왜 생기냐?  한마디로 자신에 대한 관점이 부정적이기 때문에 생긴다.  218
'나의 열등감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내 열등감을 지배하는 마음속의 아이는 어떤 아이인가?'
자기 성찰을 통해서 이 아이를 만나 볼 필요가 있다. 부정적 관점을 발견하고 현실적인 관점으로 바꾸면 그만큼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용기도 필요하다.  219

무조건적 수용(unconditional acceptance)의 경험이 필요하다. 이것은 말 그대로 '조건 없이,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는 경험'이다.  220
한 인간으로서 자기 가치를 인정받는 경험을 하면 유년기에 잘못 형성된 자기 인식이 변한다. 이런 경험은 치유적 경험이다.  222
낮은 자존감이 대물림된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자신감이 없는 부모는 자녀를 자신감 없는 아이로 기른다.  225

미국의 정신분석가 하인즈 코허트는 '건강한 자기애(healthy narcissism)'가 정신 건강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했다.
건강한 자기애는 남의 인격도 존중하는 자기애이다. '내 인생이 소중하듯이 당신의 인생도 소중한 인생입니다.'
코허트 박사는 갓난아이 때 건강한 자기애가 생긴다고 했다.  228

엄마는 아이의 거울이다.  229
높은 자존감을 갖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태도가 아주 중요하다.  231

자존감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자기에 대한 신뢰에서 온다.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극복해 본 경험에서 온다.  235
위험을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가 없다.
위험과 문제에 직면하고 괴로워하면서 아이는 성장한다. 
코허트 박사 같은 정신분석가들은 "좋은 부모를 만난 아이들은 자존감이 높다."고 말한다.  237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랑스럽게 느낄 때가 있다. 그 자랑스러운 감정을 자세히 보면 '아버지(혹은 어머니)가 나를 인정해 주실 거야.' ,'칭찬해 주실거야.' 하는 기대가 들어 있다.
내 배우자가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했거나 좋은 선생님을 만나지 못해 낮은 자존감으로 고통 받고 있다면 내가 그의 지지자가 되어 주자.  238
용서..
작은 사람은 강하고 큰 상대방을 용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용서하려고 마음먹는 순간 비굴한 마음, 패배감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용서하려면 스스로 당당해져야 한다.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용서해야 하는데 자존감이 낮으면 용서하기가 어렵다.  241
열등감, 그 책임은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있다.  244

인간의 정신 기능에는 자기 위로 기능(self soothing capacity)이 있다. 정신분석가 코허트 박사는 이 기능이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했다.  247
위로 기능이 강한 사람들은 인생의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절망하지 않는다. 우울한 감정도 비교적 빨리 회복된다. 잠시 슬픔에 빠지지만 오뚝이 처럼 금방 일어나는 사람들은 자기 위로 기능이 강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려울 때마다 부모의 따뜻한 위로를 충분히 받은 사람들이다. 강한 자기 위로 기능을 가진 사람은 남도 잘 위로한다. 
문제는 자기 비난(self criticism)기능이다. 우울증의 원인이 자기 비난이다.  250
자기 위로 기능을 활용하자.
'괜찮아. 잘 될 거야. 이보다 더 어려울 때도 넌 잘해 왔잖아. 걱정 마. 잘 될 거야.'
마음의 힘은 이런 위로를 통해서 공급된다. 이 힘으로 우리는 인생의 어려움을 관통할 수 있다.  자존감이 무너지는 것을 막아 줄 수 있다.  253

"공사 중,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공사 책임자 백."  255
인간은 누구나 '공사 중'이다.
우리가 하던 일은 미완성인 채로 남겨질 것이지만 그것이 인생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매일매일 일상을 살 뿐이다.  256
완벽주의의 허상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자존감을 유지할 수 없다.  258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왔어.'
이렇게 자신에게 말해 줘야 한다.  260

제임스라는 심리학자는 자존감의 공식을, 자존감 = 성공(success) / 욕심(need)
즉 분모인 욕심을 줄이거나 분자인 성공을 증가시키면 자존감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261-262

'스타처럼 예쁠 필요는 없어. 그래도 나는 나야. 내게는 내가 실현해야 할 내 가치가 따로 있어.'  263
'나도 할 수 있었구나. 그런데 왜 못한다고만 생각했지?'  264

위니코트 박사는 영국의 정신분석가다. 그는 '가짜 자기(false self)' 와 '진짜 자기(trus self)'라는 학설을 발표했다.
'가짜 자기'는 자기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자기이다. 아이가 만들어 낸 자기이다. '진짜 자기'로서는 부모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만들어 낸 자기이다.'  268

에필로그
어느 날부터 우리는 남과 나를 비교하고 조건을 가지고 자신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 얼굴이 예쁜 아이와 미운 아이, 부잣집 아이와 가난한 집 아이. 그러면서 자존감은 점점 무너지고 우리는 작아지고 말았다. 그러나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 각자는 조건에 관계없이 한 인간으로서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278
열등감에 쪼들리며 우울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자존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 것인가?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자기의 몫이다. 오늘 조용한 시간에 자신에게 이렇게 사과해 보자.
'그동안 내가 너를 너무 구박했지? 미안해.'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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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미국과 일본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단어가 '위안'과 '위로'였다.
혼자만의 생각으로 미국과 일본에서도 그런 느낌이 많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걸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가 사소하게 생각하는 생각이나 감정이나 행동에 대한 단어들을 지적해 준다.
하지만 그러한 사소하게 여기는 것들이 우리의 삶을 옥죄거나 현재가 아닌 과거와 미래에 얽매여 있게 만드는 것을 인식하게 도와 준다.
읽는이로 하여금 단어 하나하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여 주관성에서 객관적으로 변할 수 있게, 쫓김에서 여유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위안과 위로를 주는 듯하다.

한 번밖에 없는 행복한 삶을 마음 졸이며 살기보다는 지금을 충실하게 바라보는 시간들이 더 많아진다면 우리는 진정 여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생에 중에 앞선 40-50년을 경쟁속에서만 살아가고 있다. 
그런 훈련과 반복된 삶 속에서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이 진정 무엇일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물론 책의 원제와 국내 제목은 다르다. 
굳이 이렇게 책 제목을 써야만 했을까... 행복을 찾기 위한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잘못된 곳에서 찾다보면 쓸데없이 목숨거는것 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라... 이렇게 억지로 끼워맞춘다면 제목이 말이 되기도 할것이다..
혹여나 해서 출판사에서는 부제로 지금 당장 버리면 행복해지는 사소한 것들이라고 달았을 것이다.
국내에서 '행복'에 관한 많은 책들이 있다. 특히나 인문학을 강조하면서 '행복'에 관한 책들이 더 많이 출판되고 있다.
하버드 교수들의 시리즈라 불릴만큼 많이도 번역되고 있는 책들 중에도 행복과 관련한 책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그에 걸쳐 책을 눈에 띄게 하게 하기 위함이었을까...이 책도 행복이다. 그런데 튀게도 그것에 목숨걸지 말란다.
누가봐도 행복에 관한 비뚤어진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나온 책처럼 보인다... 
약간은 겹쳐지는 내용이 들기는 해도... 이 책도 행복해 지기 위해 우리가 필요한 것들에 대해 다룬다는 것이다.
결국 책이 제목보다 부제가 더 제목이다...



행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때로는 험난한 길을 걷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목숨을 걸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 '나는 이미 충분히 행복하다'는 사실은 잊고 지낸다.  6
한 번밖에 없는 행복한 삶을 마음 졸이며 산다면 그 얼마나 안타까운가?  7
우리의 지혜가 깊어질수록 고통에 대처하는 능력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능력도 커진다.  9


1부 지금 당장 버리면 행복해지는 사소한 생각
불행 - 행복은 내 마음속에 있다. 나는 불행하다는 마음을 버려라.
행복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닐 필요는 없다. 행복은 이미 우리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19
항상 행복하지(는) 않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행복하지 않을 때 행복한 척하지 않는다. 과장해서 떠들지 않는다.  20
느낌을 삶에서 더욱 자주 경험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다.
문제가 없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평화를 그 순간으로 가져오기 위한 방법이다.
두 번째, 마음속에 있는 골치 아픈 생각을 인식하는 능력이다.
자신의 생각에 지배당하는 대신 관찰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21-22

재난 - 갑자기 닥쳐온 재난도 행복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 재난에 굴복하려는 마음을 버려라.
비극의 9.11사태.
"그날 납치된 비행기에서 전화를 건 사람들 중에 자신의 주식 중개인에게 전화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아세요?"  24
죽음이 갑작스럽게 찾아왔을 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사랑이다.  25
크리스토퍼 몰리는 이렇게 말한다. "5분 후 죽게 될 거라는 경고와 함께 그 5분 동안 가장 중요한 말을 하라고 한다면, 모든 전화기들은 사랑한다는 말로 넘쳐갈 것이다."  25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과정을 즐기는 일을 우리는 왜 그렇게 자주 잊어버릴까? 왜 그처럼 모든 것을 빨리 해치우는 일에만 열중하는 걸까? 왜 그렇게 미친 듯이 서두르고, 끝난 다음에는 슬퍼하는 것일까?  27
재난을 통해 배우는 또 다른 교훈은 친절과 관용의 중요성이다. 큰일은 깨달음을 주기 위해 있다.  28

고통 - 나의 무지함을 알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내 마음속의 고통을 버려라.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30
마음의 평화를 향한 첫 단계는 단지 어떤 해답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모르는 것에 저항하지 않고 포용하는 것이다. 모르고 있다는 사실과 빨리 화해할수록, 그리고 모르는 것을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빨리 평화를 얻을 수 있다.  32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미지의 세계가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익숙한 세계보다 위험할지라도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현재 몸담고 잇는 안전지대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의지가 삶을 자유럽게 한다.  35

슬픔 - 그대 마음껏 슬퍼해도 괜찮다. 그리고 그 슬픔을 버려라.
우리는 슬픔을 몹시 억제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36
슬픔에 대해 마음을 열고, 슬픔을 알고 익숙해지며, 슬픔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때, 슬픔을 안겨주는 원인과 과정에 대해 더욱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슬픔을 겪게 된다.  37
슬픔과 싸우거나 도망치는 대신 천천히 일관되게 알아감으로써 슬픔과 친구가 되고 슬픔을 활용할 수 있는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다.  38
슬픔은 삭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심하게 곪고 자라서 더 크고 아픈 장해물이 된다. 도망치거나 방향을 돌린다고 해서 슬퍼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슬픔의 정도는 각양각색이다. 하나의 슬픔이 크다고 해서 다른 슬픔이 없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39
지금 큰 고통을 느끼고 있다면 마음껏 슬퍼하는 것이 중요하다.  40
마음껏 슬퍼하는 행동을 통해 삶을 더욱 충만하게 사는 기술을 배우게 된다.
슬픔 속에서도 편안하다고 느낄 때 새롭고 건강한 방법으로 매일의 고통과 좌절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41

의심 - 가장 고통스런 생각도 처음에는 작게 시작한다. 상대를 의심하는 마음을 버려라.
어떤 생각과 느낌을 초기 담계에 알아차리는 능력을 기르는 것은 영적인 감각을 만들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매우 유용하다.  46
마음을 평정시키고 나서부터 나는 더 정직해지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47
수십 가지 의심들.. 그 의심들은 서로를 정당화한다. 그 모든 의심들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라. 의심의 본질을 약간 달게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의심이 나를 궁지에 몰아넣기 전에, 초기 단계를 스스로 인식하고 다스리는 훈련을 하라.
조용한 곳에 차분히 앉아 내 머릿속에 있는 의심을 점검하기만 하면 된다. 의심들이 제멋대로 자라고 발전하도록 내버려두기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다스려라.  48

두려움 - 두려움이 밖으로 드러날 때 기회의 순간은 온다. 그대를 사로잡는 두려움을 버려라.
삶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가정 쉬운 대처 방법 중 하나는 억제하거나 외면하는 것이다.  49
두려운 생각은 과거에 대한 후회, 실패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슬픔, 상실에서 오는 실망 등에서 출발한다.  50
두려움이 밖으로 드러날 때 그 실체에 주목하라.  51
딴전을 피우는 식으로 두려움을 회피하거나 두려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해서는 안 된다. 똑바로 두려움 앞에 서야 한다.
사랑과 친절로 두려움과 대화를 나누어라. 두려움은 당신을 해치지도 않으며 그의 적이 될 필요도 없다.  52
평온한 마음으로 진실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두려움에 대처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두려움, 분노, 절망을 혐오할 것이 아니라 연민으로 대할 때 우리는 내면의 치유 능력을 회복하게 된다.
사랑으로 다루는 용기를 가져라.  57

중구난방 - 부정적 생각이 나를 해칠 수는 없다. 제멋대로의 생각을 버려라.
어떤 남자는 나에게 "듣는 기술을 5%씩 향상시킬 때마다 결혼생활이 무려 50%씩 향상된다."고 말했다. 
그 남자의 말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당신은 세상을 냉소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60
나는 나와 갈등을 겪고 있는 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고 화가 치밀었다. 그러한 어느 순간 나는 내 생각이 그쪽으로 향하려고 할 때마다 아주 분명한 선택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나는 계속 그쪽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들어가지 마시오' 팻말을 들고 뒤로 물러서야 할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만약 내가 앞으로 나아가기로 선택했다면 내 삶은 우울과 분노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그 생각을 뿌리칠수록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나 역시 인간이기에 그 생각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울 수는 없었다. 달라진 것은 그것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64

불완전함 - 생각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우울하게 만드는 불완전함을 버려라.
생각의 힘.
생각을 떨쳐버리면 문제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생각에 초점을 맞추면 문제를 계속 살아 있게 한다.  66
지금 자신의 왼쪽 무릎을 의식하고 있는가? 그 무릎이 아프지 않는 한 아마 의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왼쪽 무릎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생각도 이와 똑같다. 의식하지 않는다고 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72

파괴 - 명상의 힘으로 실제보다 더 많이 깨닫는다. 혼돈으로 이끄는 파괴적인 마음을 버려라.

상처 - 천천히 어루만져 상처를 치유한다. 마음의 상처를 버려라.

아픔 - 덜 집착할수록 더 밝은 미래가 온다. 과거의 아픔을 버려라.
과거에만(그것도 가장 부정적인 부분만 골라서) 너무 많은 관심을 쏟고, 현재 이 순간에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결과가 긍정적일 수 없다. 
큰 일이 눈 앞에 닥쳤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해낼 자신이 없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다 과거라는 성가신 짐까지 짊어지면 그 일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85
기억을 현실과 구분하라.
아직 오지도 않은 상황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보다는 과거의 아픔 때문에 움츠러드는 경향도 있다. 예를들어 면접에서 실수한 적이 있는 사람은 "난 그 일에 적임자가 아니야"라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소극성을 합리화한다.  88
과거를 보다 가볍게 여김으로써 현재의 순간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이미 과거가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라.
단지 생각에 불과한 '기억'과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을 항상 구별하라.
과거의 아픔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그것에 덜 집착할수록 행복에 가까이 갈 수 있다.  89

스트레스 -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신호이다. 마음의 스트레스를 버려라.
스트레스는 일어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다. 생각은 어떤 것이 스트레스성이고, 어떤 것이 아닌지를 알려준다.  91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비결은 자신이 분노하고 실망하는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96

외면 -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버려라.
가장 좋은 기억을 떠올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도왔거나, 친절과 인내심에 관한 평범한 행동들을 얘기한다.(동정심)  101
동정심에는 남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고 비판하지 않는 것도 포함 된다. 비판적이고 비평적인 생각을 가라앉히면,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의 기운을 북돋워준다.  102
일상적인 동정심의 가장 두드러진 형태 중 하나가 인내심이다.  102
학습지진아를 가르쳐본 적이 있는가? 그저 참는 것이 약이다.  103
동정심 안에는 원래부터 내적인 보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주는 것은 그 자체가 보상이다.  103


2부 지금 당장 버리면 행복해지는 사소한 감정
화 - 순간의 기분을 다스려야 큰일을 할 수 있다. 느닷없이 치밀어 오르는 화를 버려라.
<웹스터 칼리지 사전>에는 '기분'을 '특정 시간 그 사람의 감정 상태나 태도'라고 정의한다.
'특정시간'이란 단어가 중요하다. 이 말은 기분이 끊임없이 변하고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110
모든 사람들에게 기분에 대해 약간의 여유를 줘야 한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침울해하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만 보아라. 그런 상황은 금방 지나간다. 우울한 기분을 추측하거나 확대하기보다 그대로 내버려두라. 그들의 부정적인 말을 개읹거으로 해석하지 마라. 소리치거나 무뚝뚝하게 대꾸하더라도 내버려두라. 기분이 우울하면 그대로 받아들이라.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이유를 지나치게 분석하지 마라. 폭풍우가 지나가듯 우울한 기분도 항상 사라진다.  114
기분이란 것은 참 재미있다. 우리가 느끼는 기분은 수천 가지이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점은, 그런 기분들 대부분이 그저 일시적이라는 사실이다. 기분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간다. 나쁜 기분이 들때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대부분은 금방 사라진다. 기분의 영향력을 삶 속에 배려하면 지혜와 인내심이 다양하게 향상된다.  115

불안 - 초연한 마음으로 나이 들어감을 즐긴다. 늙음에 대한 불안을 버려라.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어린 시절에는 빨리 어른이 되기 위해 정신없이 달리고, 나이가 들면 젊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노인이 되면 '한 살이라도 더 젊었으면'하는 한탄을 한다. 변함없는 진실은 어떠 나이에있든 그 나이에 대해 불만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117
가끔 현재의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시야를 약간 넓혀야 할 필요가 있다. 
붙잡아야 할 것과 버려야 할것 사이에서 건강함 균형을 취하는 태도도 매우 중요하다.  119
자신의 나이를 생각할 때마다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의미를 부여하고, 그 생각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그런 생각들을 하지 않으면 걱정할 근심거리도 없게 된다. 단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나이가 지금 몇 살이건 삶을 즐길 수 있다. 늙는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하며 떨쳐버리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몸의 나이가 아니라 마음의 나이이다.  122

분노 - 우리는 완벽하지 않다. 그대를 뒤처지게 하는 분노를 버려라. 
자신의 분노와 좌절을 정당화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먼저 변해야 해."
무의식중에 우리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판단할 때 완전히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더욱 평화로운 세상을 원한다면 자신이 먼저 평화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며, 윤리적인 세상을 원한다면 내가 먼저 진정으로 윤리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서로 사랑하고,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특히 중단하기 어려운 악순환에 처해 있더라도 그 고리를 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평화로워지고 현명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사람들에게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124
용서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다. 나 자신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125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증오는 증오를 통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사랑을 통해서 사라진다. 이는 불변의 법칙이다."  126
마음속의 분노를 완전히 쫓아내기란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용서하는 일이 중요하다.  127

질병 - 육체적 고통은 삶의 길을 긍정적으로 안내해준다. 삶을 힘들게 하는 질병의 고통을 버려라. 

궁핍 - 지금 가난할지라도 내면의 지혜로 극복한다. 여유롭지 못해도 궁핍한 마음은 버려라.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든, 오늘 직면한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것이든, 해결책은 항상 존재한다. 자신을 믿어라.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된다.  138

비난 - 너그러운 마음으로 상대의 처지를 헤아린다.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비난을 버려라.

비효율 - 리듬에 따라 움직이면 낭비를 없앨 수 있다. 듯한 바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비효울을 버려라.
효율적인 삶을 위해서는 깨끗하고 평정한 마음을 갖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147
효율성은 과학이 아닌 삶의 기술이다.  150

무시 -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무시하는 태도를 버려라.  
어떤 일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일은 그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152
자녀들에게 설교를 하기보다는 그들의 말을 듣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 훨씬 더 참된 부모 노릇을 할 수 있다. 실천은 쉽지 않지만 그 결과는 대단히 뛰어나다.
듣는 일과 참는 일은 동시에 필요하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흡수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인내심을 갖도록 스스로를 단련하라.  156
듣는 것은 귀만 가지고 하는 일이 아니다. 통찰력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다. 그 열쇠는 가능한 한 침묵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157
당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무시하지 않고 귀를 기울인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밝아진다.  158

은퇴 - 제2의 삶을 시작하는 출발점을 여긴다. 세상에서 잊히는 것 같은 은퇴의 감정을 버려라. 
인생에서 가장 큰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는 '최상의 삶을 살고 싶으면 그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삶을 유쾌하고 즐겁게 살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모험을 할 수 있게 하고, 대담한 도전을 추구할 수 있도록 이끈다. 사실 우리는 잃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언제나 도전을 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한다.
나는 은퇴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한다.  159
이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투적인 관념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충분히 즐기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160
미래를 계획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멋진 계획이다. 설령 지금 아무것도 지닌 게 없어도 미래를 계획하려는 노력으 해야 한다. 그러나 계획이 삶을 대신하진 않는다.  161
아이들에겐 삶 자체가 항상 흥미진진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들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다른 일들과 비교하지 않기 때문이다.  162
지금 하는 일이 이전에 했던 일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 그 사람은 실망스럽고 따분한 은퇴 후의 삶을 살게 된다. 이와 반대로 하루하루가 특별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 그 사람의 세계는 읽어주길 기다리는 한 권의 책이 된다.  163

이혼 - 이혼은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새출발을 위해 이혼의 쓰라림을 버려라.
이혼은 갈등하는 감정과 이해관계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발견해야 하는 문제다. 이혼을 진행 중이거나 이미 끝낸 사람들은 사랑과 증오, 질투, 원한, 절망, 두려움, 노여움, 복수의 감정을 한꺼번에 느낀다고 말한다.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며 혼란스러운 일임이 분명하다.  166
이혼의 아픔을 극복하도록 이끄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행복에 대한 감각'을 발달시키는 능력이다. 즉 친구들이나 지원단체, 법률상담, 이전 배우자의 협력, 좋은 책, 치료사 등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건강한 마음 상태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167
자신에게 충분한 시간과 여유를 주고 연민을 가져라. 이혼은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171

단절 - 몸과 마음은 하나, 육체를 통해 마음을 다스린다. 마음의 평화와 몸의 건강을 단절하는 것들을 버려라.
나는 늘 시무룩하고 우울한 사람들을 만나면 가장 먼저 운동을 권한다. 아무 생각이나 목적 없이 그냥 운동을 하라고 권한다. 
운동은 우리에게 우울한 기분을 떨쳐보리고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적은 시간의 운동으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175

집착 - 집착에서 벗어나면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다. 증오와 슬픔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평화로운 삶'과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해서는 용서를 실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타인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도 용서를 해야 한다.  178
용서를 '사랑하는 사람의 따스한 포옹'이라고 표현. 용서는 증오와 슬픔, 복수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것은 또 부정적인 에너지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다.  179
용서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나 자신을 위한 최선이기 때문이다.  182
우리는 누구나 고통을 겪는다. 노력하고 애쓰고 바라는 만큼 달라질 수 잇지만 고통을 온전히 피할 길은 없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실망시킬 때도 있고, 내가 타인에게 고통을 줄 때도 있다. 이것을 알면 우리 모두는 같은 인간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 역시 인간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 깨달음을 얻으면 용서하기가 더 쉬워진다.  183
용서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의식적으로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모든 사람들이 완벽한 인간이 아닌 것을 용서하는 일이다.
세 번째 단계는 세상이 완벽하지 않은 것을 용서하는 일이다.  184-185
성경에는 '용서하라, 그러면 용서받을 것이다.'라고 나와 있다. 이것은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세상이 더 아름다워진다.'는 뜻이다.  185


3부 지금 당장 버리면 행복해지는 사소한 행동
망성임 - 1년 후에도 이것이 중요할까? 중요하지 않은 것은 버려라.
지금으로 부터 1년 뒤를 생각할 때..  190
1년이란 기준을 적용하는 이유는 모든 상황에 반사적으로 대응할것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보도록 하기 위함이다.
다음 두 가지를 자문하라.
첫째, 이것은 내가 해야 하는 일인가?
둘째, 이것은 내가 원하는 일인가?
적어도 한 가지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하지 않으면 '노'라는 대답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192-193

걱정 - 미리 준비하면 마음속의 걱정을 떨쳐낼 수 있다. 쓸데없이 걱정을 버려라.
사람들은 준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네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① 준비는 하지만 걱정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사람
② 준비하려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걱정만 하는 사람
③ 별로 준비하지도 않고 걱정도 하지 않는 사람
④ 철저히 준비하고 걱정하지 않는 사람  196-197
준비하는 것은 자기방어와 타인 구호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198
준비가 가장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준비가 되지 않았을 경우라도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두려움을 몰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걱정이 삶의 질을 방해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199
걱정을 물리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도망치거나 과민반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걱정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다. 
걱정을 향해 이렇게 말하라.
"난 지금 널 보고 있어. 하지만 난 네게 큰 의미를 두지 않아, 그리고 그 어떤 걱정도 없어. 왜냐하면 난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지. 나는 네가 나타날 때마다 재빨리 물리치겠어."  200

두통거리 - 차분한 마음이 최선의 해결책이다. 골치 아픈 문제들을 버려라.
우리는 마음의 순수한 평정을 지향함으로써 자신을 올바르게 이끌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것은 어떤 문제의 해답을 반드시 안다는 뜻이 아니라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임을 확신한다는 뜻이다.
해결책을 가지는 것은 하나의 출발점이 되지만 현명한 지혜 럾이는 샐수로 이끌거나 심지어 더한 좌절과 혼란으로 밀어넣을 수 있다.  203
어둠 속에서 자신을 믿는 것과 비슷하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며 자신을 속이는 일이 아니다. 속이는 일은 나쁜 행동이며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보다는 본능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내면의 힘을 따라야 하며, 하음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내면의 목소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에도 실망하거나 주저앉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곧 나아갈 길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207

위선 - 거짓된 마음을 몰아내 참된 관계를 갖는다. 거짓의 탈을 쓴 위선을 버려라.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치유력이 되는 방법은 많다. 일단 스스로 치유력이 되겠다는 의지를 가졌고 그 중요성도 알았다면, 그렇게 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이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들이 더욱 쉽게 다가올 수 있으며 남의 말을 더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209
자신이 치유력이 될 때 높은 직관력을 갖게 되며 언제 필요한지를 즉시 감지할 수 있다. 결코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요청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부드럽게 내민다. 다른 사람의 삶에 치유력이 된다는 것은 자신은 완전히 물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고압적이거나 위선적이지 않다. 치유의 목적은 도움을 주는 것이다. 다만 상대방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거나 공간을 주는 것이 최상의 방법임을 깨달아야 한다.  211

실패 - 싶래는 우리를 성공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 그대를 좌절시키는 실패를 버려라.
삶에서 실패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212
시패를 두려워하는 것은 시작하는 것과 시작하지 않는 것의 차이일 수 있지만 승리와 패배의 차이가 된다. 
실패는 실망으로 교묘하게 변장한 픽션에 불과하다는 사살을 아는 것은 진짜 멋진 깨달음이다. 
우선 두려움이 줄어들고 새로운 일에 더욱 자주 도전하게 된다. 모험을 시도하고, 더욱 대담해지고, 낯선 것에 부딪치고, 새로움을 개척하고, 보다 재미있는 삶을 살게 된다. 가장 중요한 점은 더 큰 자신감과 지혜를 가지고 역경에 대응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실패를 픽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실패는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상상 속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213
우리는 객관적인 인식을 하기가 아렵다. 한 발짝 물러서서 다른 사람을 관찰할 때는 아주 또렷하게 보이지만 자신을 제대로 보기는 어렵다.
실패 여부는 전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인식에 달려 있다.  214
실패가 주는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일까? 실패는 사니의 생각에 의해 만들어지고 강화되는 일종의 환영(幻影)이다. 삶은 우리의 생각대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자신을 실패자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실패자가 아니니까!  219

허둥거림 - 바쁜 마음의 짐을 내려놓지 않으면 더 엉망이 된다.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허둥거림을 버려라.
내 마음이 자유롭고 맑을 때는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할 수 있으며 기대가 충족되지 않아도 원만하게 처리할 수 있다. 나아가 중요한 일이 터졌을 때 즉각 분명하고도 제대로 대처할 수 있다.  225
바쁜 마음을 평온하고 고요하게 만드는 열쇠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는 일은 잠그는것이 아니다. 마음은 여전히 활동한다. 마음이 텅 비어도 현명하고 지적이고 질서 있는 생각이 이어진다.  226

불신 - 스스로를 믿는 행동이 마음에 위안을 안겨준다. 세상을 부정하게 만드는 불신을 버려라.

저항 - 파도에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면 이길 수 있다. 꼭 이겨야겠다는 고집스런 저항을 버려라.
이 세상에서 '안전하다'고 느끼기 위한 가장 종요한 행동은 아이러니 하게도 '포기'이다. 하지만 이는 패배주의적 의미에서의 포기가 아니라 실제로 가진 것보다 더 많은 통제력을 가졌다고 착각한 데서 나오는 몸부림을 포기하라는 뜻이다.  236
우리는 돈이나 권력, 외모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많은 부분을 자기 손 안에 두려고 한다. 바로 이 통제력을 움켜쥐려는 시도야 말로 우리가 겪는 불안과 고통의 뿌리인 것이다.  238
희망을 갖지 말라는 뜻이 아니며 자기 자신을 포기하라는 뜻도 아니다.  239

상실감 - 귀를 기울이면 잃어버린 것들을 찾을 수 있다. 모든 일을 좌절시키는 상실감을 버려라.
고통스런 생각과 느낌이 일어나면 ...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타협이 아니다. 고통 속으로 빠져드는 것도 아니고 어떤 형태으 거부도 아니다. 단지 연민을 가지고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생각들이 떠오르면 밀어내지도, 증오하지도, 도망치지도 않는다. 그저 그 생각을 있는 그대로 본다. "그래,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지. 지금 난 그 사람이 그리운 거야." 이러한 생각을 비난하거나, 바꾸거나, 축소하지도 않느다.  245
상실감의 치유는 부러진 뼈가 낫는 것과 똑같은 과정을 거친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 이 사실을 아는 것은 크나큰 위안이 된다. 가급적 혼자 있지 마라. 필요한 위안과 도움을 구하라. 지금은 용감하거나 강인해야 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드에게 마음을 열고 손을 내밀어 친절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다.  246

갈등 - 나와 너의 공통점을 인정하면 갈등이 사라진다.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 갈등을 버려라.
"신을 웃기고 싶다면, 말다툼하는 연인드에게도 공통점이 있다고 말하면 된다." 정말 신이 웃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 말은 확실히 나를 웃겼고 갈드오가 공통점에 대해 생각힐 기회를 주었다.  247

부정 - 잡았다 놓아주는 행동으로 부정을 극복한다. 믿음을 파괴하는 부정적 행동을 버려라.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드는 이유는 그렇게 길들여졌기 대문이며, 다른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252
놓아주기는 말 그대로 놓아주는 것이다. 부정적이고, 화나고, 비판적이고, 짜증스러운 생각들을 인식한 후에는 그대로 흘려보낸다.
단지 어떤 생각이 눈덩이처럼 커지기 전에 놓아준다는 개념에만 익숙해지면 되는 것이다.  253

조급증 - 속도를 조금 늦추어 행복을 찾는다. 일을 망치는 조급증을 버려라.
"1백만 분의 1초는 어느 정도의 시간인가?"
정답은 빨간 불이 파란 불로 바뀌는 순간부터 뒤에 서 있는 자동차가 경적을 울릴 때까지의 시간이다. 우리는 그만큼 조급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얘기다.  256
속도와 효율성이 정말 행복과 관계가 있을까?  257
인내심과 삶의 질은 연결되어 있고 매우 중요하다.  258
인내는 우선시하고 연습하지 않으면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흥분하고 짜증내는 데 소비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259
인내심을 키우는 비결은 작은 것에서 시작하되, 오늘 당장 시작하는 것이다.  260

적대감 - 그는 오늘밤 죽을 수도 있다.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적대감을 버려라.
오그 만디노(Og Mandino, 미국의 저술가 겸 언론인)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오늘밤 죽어가는 사람을 대하듯 하라. 그에게 당신이 가진 모든 친절과 배려를 베풀고 그를 이해하라. 그 행위에 대한 어떤 보상도 바라지 마라. 삶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261
주어진 시련을 저주로만 보지 않고, 성장과 관조의 기회로 삼는 것이 만족한 삶을 누리는 열쇠이다.  263

비관주의 - 선택은 그대의 마음에 달려 있다. 불행을 불러오는 비관주의를 버려라.
낙관주의의 희망적인 측면 중 하나는 그것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깨달을수록 더욱 낙관적이 된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낙관주의자로 변하는 특별하고 합당한 이유는 없었다.  270
변화를 이루기 위한 세 개의 열쇠
첫째, 내가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라.(인지)
둘째, 생각의 주체는 자신임을 명심하라.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나라면, 그런 생각에 도전할 수 있는 사람도 역시 나 자신이다.
셋째, 자신에 대해 관대해져라.  271-272
이 세상엔 아름다운 것이 추한 것보다 더 많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감사해야 할 것, 희망적인 것도 많다. 당신이 아름다움과 축복을 보기로 결심했다면,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지만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낙관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만큼은 낙관한다.  273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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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은 과한 유교적 관념으로 인해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다 못해 자신의 감정을 의식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정신분석은 과학적 토대의 분석인 서양의 철학에서 시작된다.
분명 위는 정신분석, 자기분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지만 우리의 도덕관념의 장점으로 인해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아도 스스로의 분석이 가능할 것이며, 그에 더 해 유교적인 인내와 절제 부드러움등은 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30년만의 휴식>에 이어 좀더 세밀하게 우리의 환경에서 더 부족한 친밀함에 대한 내용을 통해 우리가 자라온 환경을 통해 좀더 주위 사람들과 친밀해 지기 위해서 필요한것들과 친밀함을 막고 있는 요소들, 그리고 친밀과는 관련없는데 우리는 친밀하게 느끼는 것을 통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돌아보게 한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는 착각을 통해 친밀함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왜곡된 친밀함은 결국은 문제를 안고 있을 수 있다.
그것을 구분하고 진정 자신을 돌아보아 균형을 바로 잡아 나갈 수 있었으면 한다.
또한 그렇게 할때 진정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친근한 사람이 되어 마음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마음은 마음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나는 40대 초반에 영국 런던에서 정신분석을 받았다.  16
정통 정신분석을 제대로 받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50대 중반에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다시 분석을 시작했고 350여 시간의 정통정신 분석을 받았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모든 갈등을 초연하게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순간순간 내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스스로 분석하여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쓸데없는 감정의 낭비가 적어였다.  17

정신분석은 보통 초기, 중기, 종결기로 나뉜다. 
초기 단계에서는 분석가와 피분석자의 면담을 통해 분석이 적당한지 아닌지 판단하게 되고 적당하다고 판단이 되면 합의하에 분석계약을 맺게 된다. 그리고 카우치에 누워 떠오르거나 생각나는 것을 얘기하는 자유연상기법을 분석이 시작된다. 초기 과정에서는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드러내야 하는 것에 대한 피분석자의 저항이 심하다. 그래서 분석을 그만둘 수 있는 온갖 이유를 찾는데, 때로는 증세가 호전돼 다 나았다고 하는 경우까지 생긴다.  27
악수는 하지 않는다. 신체접촉은 분석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분석을 받고 싶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말씀해 주실까요?"
"자신에 대해서 말씀해 주실까요?"
"혹시 어떤 어려움이 있으신가요?"
라고 말문을 연다.
힘든 침묵이 흐를 때는 "말씀하기가 쉽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라고 도와주기도 한다.  31
분석가의 역할은 이해하는 것이지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분석가의 자리는 항상 피분석자와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은 중간지점(analytic neutrality)에 있다.  35
프로이트 박사는 "분석가는 치료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늘 저항을 만난다"고 말했다. 자기 마음을 남 앞에서 말하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38
정신분석을 받기에 적당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우선 자기 마음을 잘 읽고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정신분석에서는 '마은 중심적인(psychological mindedness) 사람'이라 한다.
"그때 나는 이런 감정을 느꼈어요. 그리고 이러이러한 생각이 떠올랐어요."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어떤 사건 속에서 느낀 자기 감정과 마음을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이다.  41
분석은 최소한 2년 이상 걸리는 긴 항해이다.
분석은 보통 한 번에 45분간, 일 주일에 4일을 만난다.  42
정신분석에 적당한 사람들은 분석에 대한 동기가 강해야 한다.  43
분석계약(analytic contract)은 일주일에 4회 하는것, 1회에 45분하고 '늦게 도착하더라도 마치는 시간은 일정하다'는 것 등이다. 
몰인정해 보이지만 이 계약을 준수하는 것이 분석에느 아주 중요하다.  45
카우치를 사용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퇴생을 조장하기 위해서이다. 카우치에 눕게 되면 퇴행이 일어난다. '퇴행(regression)'이란 현재 나이에서 후퇴해서 더 어려지는 것을 말한다. 어른든은 자기를 꾸미고 합리화하는 자기 위장을 잘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위장이 별로 없다.  58

그녀는 아무래도 너무 힘들어서 분석을 중단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당신을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분석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교육이 되어 버린다.  71
자신의 비의식(무의식) 탐구를멈추고나의 가르침을 수동적으로 따르려고 할 것이다. 비의식 탐구가 두려울 때 흔히 도피하는 방법이 이것이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를 '지식화(intellectualization)' 라고 한다.
지식의 습득만으로는 정신적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당신의 문제는 이것입니다"라고 정의해 주면 끝나게 된다.  72
"선생님 말씀이 옳아요. 그게 내 문제였어요. 선생님은 역시 대가이십니다."
그러나 문제를 아는 것과 마음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는 것은 다르다. 변화를 위해서는 당시 감정의 경험과 비의식의 생생한 체험이 필요하다. 
"그때 어떤 기분이셨습니까?"  73
'어떤 감정, 어떤 충동이나 혹은 판타지가 떠올랐느냐'가 나의 관심이었다. 이것이 분석의 핵심이다.
반복해서 "그런 감정을 느끼신 이유가 있을 텐데요."라고 말했다.  74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조종행동. 의도된 조작행위는 비의식 탐구를 혼란에 빠트린다.
분석에서 내가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자연스러움(autonomy)과 일관성(consistency)이다. 
상황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는다.  77
분석가의 '중립성(neutrality)' 
분석가도 인간이기 때문에 판단하고 싶고 적극적으로 개입도 하고 싶어질 때가 많다. 그러나 중립성이 파괴되면 (violation of neutrality) 분석은 끝장난다.  79
변화
이상화 전이 - 동일시(identification), 비의식은 일부만 같아도 전체가 동일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전이(transference), 분석가를 자기 마음속의 인물로 착각하는 현상.
조셉 산들러 교수는 전이를 '특별한 착각(speccific illusion)' 이라고 했다. 전이가 일어나야 분석에 성공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전이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은 분석이 안 된다.  81-86
프로이트 박사는 "모든 노이로제의 핵심에 에디푸스 콜플렉스가 있다."고 했다. 물론 인간이 유한해서 완벽한 부모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에디푸스 콜플렉스가 완벽하게 해결된 사람은 거의 없다.  115
어떤 이유로든 에디푸스 콤플렉스가 적절히 해결되지 못하면 성장 후에 성 정체성 발달이 안 되어 이성관계가 어려워진다.  116
'분명히 원인이 있다. 원인을 찾아보자.' ...자기분석  117
프로이트 박사에 의하면, 여자 아이들의 에디푸스 콤플렉스는 세 가지 방향으로 나간다. 
첫째는 성(sexuality) 자체를 포기하고 무성(無性)의 인생을 산다.
둘째는 남성성(masculinity)에 매달려 남성다워지려고 한다.
셋째는 가장 건강한 해결책인데, 자가의 여성 성기를 인정하고 어머니의 여성성을 받아들여서 정상적인 여성이 되는 것이다.  121
"그런 기분을 언젠가 다른 곳에서 느껴 본 일은 없을까요?"  125 
에디푸스 콤플렉스는 특별한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우리 일상에 스며들어 있어서 주의를 기울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갈등이다. 원초경은 자녀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준다. 자식을 가진 부모가 조심해 줘야 할 부분이다.  129

분석시간에 분석가는 굉장한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뜨거운 애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감정은 마치 배에 불어닥치는 태풍처럼 덮쳐 왔다가 물러간다. 이때 분석가는 무게 중심을 잡고 배가 감정의 파도에 침몰하는 것을 막아 준다. 태풍을 통과하면서 피분석자는 자신의 비의식(무의식)을 이해한다(self awareness). 비의식의 현실이 맑은 날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선명하게 이해되면서 피분석자는 비의식의 속박으로 부터 해방된다. 심리적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자유롭고 편해진다. 자신만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도 편해진다.  154


친밀함을 가로막는 마음의 장애물
친밀함은 3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첫째 서로 통하는 느낌(connect)이 있어야 한다. 
둘째 서로 살피고 도와주어야(care) 한다. 호감이 있어야 그렇게 할 수 있다.
셋째 나눔(share)이다.  160
성격차이가 부부 문제의 가장 많은 원인이라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친밀함의 문제이다.  161
성적 친밀함(sexual intimacy)도 심리적으로 친밀한 사이에서 가능하다. 이것이 동물의 성과 인간의 성이 다른 점이다.  162
누구나 친밀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누구나 친밀함에 대해서 배울 필요가 있다.  163
친밀함이란 서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주고받을 때 일어난다. 친밀함이란 남을 아는 것이고 나를 남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서로 인정해 주는 관계이다. 

1. 불완전한 주체성
미국의 정신분석가 에릭 에릭슨(Erick Erickson)은 주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사람은 친밀한 인간관꼐를 맺을 수 없다고 했다.
'나'가 확실해야 '너'가 확실해지고 '나와 너'가 확실해야 두 사람 사이에 인간관계가 이루어지고 친밀한 관계도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165
주체성이 확립된 사람은 굳이 자기 확인이 필요 없다. 혼자 있어도 스스로 자기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체성이란 무엇인가?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변해도 자신은 변하지 않는 동일한 존재라는 자기 인식이다.  167
청소년기에 잘 걸리는 정신 장애가 주체성 장애이다.  169
소위 '범생이' 들과는 친해질 수가 없었다. 점수 기계들, 위선자들 같았다. 음지에 사는 그들은 진실했다. 말투는 무식하고 거칠었지만 인정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그들과는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습기 차고 냄새나는 지하실 골방에 살면서도 친밀함의 맛은 정말 좋았다.  171
그러나 장래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아닌데...'하는 회의가 자꾸 일어났다.... 
이것은 일시적인 친밀함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었을 때 인간은 어른이 된다. 그리고 다른 어른과 성숙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172
내가 나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다. 자기 정체성으로 사는 것이다. 남의 입맛에 자기를 맞추려 하지 말고 자기 입맛으로 사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의 정체성이 확실한 사람들은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잘 안다.  177

2. 죽도록 힘든 열등감
사람이 한 번 열등감에 빠지면, 그 부분에서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기가 힘들어진다. 열등감은 비교에서 나온다.  178
예뻐지기 위해서 기계적으로 얼굴만 고치면 인생도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성형수술을 받는다. 열등감도 극복될 것이라고 믿는다.
열등감은 그 뿌리가 훨씬 깊다.
눈에 대한 열등감이 있다면 '언제부터 눈에 대한 열등감을 느꼈는가?' '그 눈은 누구 눈을 닮았는가? 그 눈에 대한 나의 감정은 어떤 것인가?' '수술 후 나의 모습은 어떤 것이 될까?'라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84
외모만 아름다운 것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배어나는 모습이 더 아름다운것...  186
열등감은 자신을 어린애처럼 왜곡된 시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생긴다.  189
스스로 떳떳한 사람은 남이 무시하는 태도로 나와도 그 앞에서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사물에 대해서 생각하는 대로 느낀다.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다. 자신을 못난이로 생각하면 열등감을 느끼게 되어 있다.    190
완벽주의는 열등감의 또 다른 모습이다.  190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좀 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사는 것이 좋다. 세상에는 '숨는 사람'과 '찾아 나서는 사람'이 있다. 열등감이 심한 사람들은 자꾸 숨는다.  193
19세기의 심리학자인 제임스 박사의 '자아 존중감 공식'은 흥미롭다.
자아 존중감 = 성공(success) / 욕심(need)
자아 존중감은 욕심을 줄여야 높아진다는 공식이다.  194
슈나이더의 인상적인 시 
....
그대는 
그대만이 이룩할 수 있는 
독특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태어났습니다.
....  195

3. 본인까지 망가뜨리는 시기심
시기심은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미모, 뛰어난 능력을 볼 때 억울하고 화가 나는 심리를 말한다.  196
"시기심은 독사와 같다"라는 말도 있다.  197
시기심은 인격이 미숙하고 나이가 아주 어릴 때 나타나는 감정이다. 인격이 성숙해지면서 감사할 줄 알게 된다.
친구의 슬픔뿐만 아니라 친구의 기쁨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다면 성숙한 사람이다.  200
시험 보는 날 "나는 공부 하나도 안 했어. 큰일 났어."라고 호들갑을 떠는 친구들이 있다면, 시기심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노래방에서 "나는 노래 못해요." 라고 빼는 사람도 있다. 예쁜 명품 옷을 입고 나타났을 때 주변에서 "와, 예쁘다. 그거 명품이지요?"  라고 칭찬하면 "아녜요. 이거 세일할 때 아주 싼 값에 산 거예요."라고 옷의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행동은 자존감이 낮을 때도 나타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다른 사람의 시기심을 유발하지 않으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시기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기 때문인 것이다.  203
시기심의 치료제는 감사(gratitude)하는 마음이다. 정신분석가 멜라니 클라인은 시기심을 타고난 본능이라고 했다.
시기심의 뒤에는 열등감이 숨어 있다.  208

4. 벌을 받아야 편안해지는 죄책감
지나친 죄책감 - '처벌적 초자아(punitive superego)'  214
프로이트 박사는 인간의 성격이라는 건물을 유지하는 세 개의 기둥에 대해서 말했다. 이드(id)와 자아(ego)와 초자아(superego)가 바로 그것이다.
이 중에서 죄책감을 일으키는 부분은 초자아이다.
초자아는 4, 5세 경부터 발달하기 시작한다.  215
우리가 양심적으로 사는 것은 초자아 덕분이다. 우리가 착한 일을 했을 때 마음에서 "잘했어!"라고 뿌듯한 보람을 느끼는 것은 초자아의 칭찬이다. 사회생활을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 초자아는 꼭 필요하다. 
초자아가 미약한 사람은 수치심도 못 느끼고 양심의 가책도 없다.
반면에 너무 가혹하거나 처벌적인 초자아를 가진 사람은 죄의식과 수치심, 열등감에 사로잡혀 산다.
가혹한 초자아는 강박증도 일으킨다.  216
가혹한 초자아를 가진 사람은 '도덕적 자학자(moral masochist)'가 된다.  218
자학자는 불행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불행해야 죄에 대한 처벌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사람은 상대에게 과도한 증오심을 느끼면 일단 죄책감을 느끼고, 다음에는 이 죄책감 때문에 마음에서 증오심을 제거할 수 있다.  219
자학적 성격의 사람들은 그 감정의 흐름이 아주 모순적이다. 자기를 멸시하게 만들어 놓고 막상 상대방이 자기를 멸시하면 화를 내고 괴로워한다. "나는 매력 없는 사람이에요. 키도 작고 뚱뚱하고 눈도 작아서 흉해요." 그래 놓고는 막상 상대가 그것을 인정하는 눈치면 화가 나고 비참한 기분에 빠진다. '이렇게 무시당하고 사는 내가 정말 싫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무시하는 상대가 밉다. '자기는 얼마나 잘났기에 나를 무시하는 거야.' 그리고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사람 만나기가 두렵다. 화나고 비참한 기분을 다시 느끼게 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반복한 자학자는 사람을 만나면 자기도 모르게 '이 사람도 나를 무시할 거야'라는 예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방과 안전거리를 둔다. 가까워지면 아픈 경험을 한다고 예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접근해 오거나 친해지면 불안해진다. 사무적인 거리나 멀리 떨어져서 인사나 하는 정도의 거리가 안전거리이다.  220-221
자학적 성격을 가진 남성들에게는 발기부전이 많다. 그의 가혹한 초자아가 쾌락을 허용하기 않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자학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비난과 멸시의 고통을 즐긴다는 것이다.  223


가짜 친밀함의 유혹
술마시는 사람들
뇌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구피질(archipallium)과 신피질(neopallium)이다. 구피질은 동물적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다. 호흡, 혈압, 식욕 중추가 여기에 있다. 특히 감정의 중추가 여기에 있다. 분노, 쾌감의 중추가 여기에 있다. 
신피질은 생각과 판단을 주관하는 곳이다. 도덕적 판단이나 자기조절이 신피질의 기능이다. 
인간의 신피질은 원숭이나 다른 동물에 비해서 월등히 두껍다. 인간은 평소에 욕구나 감정을 억제하며 산다. 수줍고 조용한 사람들은 신피질의 억제 기능이 강한 사람이라 하겠다. 술은 신피질의 억제작용을 방해해 버린다.  230
술마시는 사람들 중에는 친밀함에 목마른 이들이 많다. 이러다가 알코올 중독에 빠진다. 밤마다 술 마시고 늦게 귀가하는 남편들 중에는 친밀함에 갈증난 사람들이 많다. 술자리의 친밀함은 그들에게 접근하기 쉬운 떨쳐 버리기 힘든 유혹이다. 맑은 정신으로 친밀함을 나누며 살 수 있는 사람이 건강하다.  233

일에 빠지는 사람들(workaholism)
술이 없으면 안절부절 못하는 알코올 중독처럼 일이 없으면 안절부절못한다.  235
일 중독자들은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일에 쫓겨서 친밀감을 나눌 시간을 갖지 못한다. 
사실 사람들은 일 없이 만나야 친밀함이 느껴진다.  236
의지가 있으면 고쳐진다. 취미를 가지거나 충분히 게을러 보는 것이다.  241

성에 탐닉하는 사람들
미국의 심리학자 칸스 박사에 의하면 성 중독증 환자들은 사랑받지 못하고 외롭게 자란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드르이 비의식은 보살펴줌(nurturing)과 섹스를 혼동하고 있다. 
모성적인 보살핌에 굶주려서 모험을 계속할 뿐이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47
성 중독자는 여성의 육체를 어머니의 살결로 착각한다. 여성의 품에서 어머니를 느낀다.  252
아주 어린 아이들은 달콤한 초콜릿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 만나면 주저하지 않고 초콜릿을 낚아챈다. 초콜릿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큰 아이는 초콜릿을 가진 아이가 보인다. 그래서 행동을 자제한다. 성 중독자는 초콜릿만 보는 어린 아이와 같다. 그래서 육체 뒤에 서 잇는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볼 수 없다. 여성을 성 욕구의 대상으로 보는 대신에 한 인간으로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253

인터넷 로맨스
친근함에 목마른 사람들은 인터넷 로맨스에 빠질 위험이 높다.  264

외톨이, 자기 성 속의 왕자
학생들 중 약 4%가 외톨이라고 한다. 외톨이들은 고독하다. 외톨이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열등감이 심해서이다.
또 다른 이유는 우월감이다. 일종의 공주병이다.
외톨이 중에는 이미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경우도 있다.  272
핵가족은 아이가 하나나 둘이다. 어울려 살면서 양보하고 나누는 연습이 안 된 아이들이다.  273
도시화되고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골목친구, 동네친구가 사라졌다. 왕따를 당하고 폭행을 당해도 같이 싸워 줄 단짝이 없다.
인터넷은 고립된 생활을 조장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외톨이를 만드는 환경이다.  274
우선 적극적으로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  
친구를 가지면 삶의 질이 높아진다. 정신질환도 예방할 수 있다.  275


친밀한 관계의 시작, 엄마
인간은 최초의 친밀함을 엄마에게서 느낀다. 이 친밀함은 인격 성장의 토양이고 영양분이다.  278
아이들은 생후 7, 8개월이 되면 낯을 가린다. 엄마를 알아본다.
아이들은 엄마의 젖 냄새나 음성, 손길이나 젖의 촉감을 통해서 엄마를 알아본다. 아이는 엄마가 곁에 있으면 안심한다. 
아이는 엄마 때문에 행복하다.  280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의 저자 노경선 박사는 "원만한 대인관계를 가지려면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재미있고 좋았던 기억이 있어야 한다. 즉 최초의 다른 사람인 엄마가 반갑고 좋았던 기억이 있어야 한다. 엄마가 내 고통을 해결해 주었던 기억, 엄마에게 위로받고 행복했던 기억이 비의식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과 만날 때도 재미있고 좋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다. 남에게 편한 마음을 갖고 의지할 수도 있고 남의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다."고 했다.  282
너무 깔끔한 엄마는 아이의 탐구욕구와 자주 충돌을 일으킨다.
적어도 아아기 자기 방 하나쯤은 마음대로 어질러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엄마가 통제하면 아이의 탐구행위는 점차로 위축되고 만다. 아이는 조용하고 말 잘 듣는 아이로 변한다. 엄마가 자기의 탐구행위를 싫어한다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엄마의 사랑을 잃지 않을 수 있는지 아이는 배운다.  285
"엄마, 이건 뭐야?"
세상을 알아가는 즐거움이다. 공부란 호기심의 충족이다.  286
놀이는 탐구행위이다. 애들은 놀면서 성장한다. 놀이터는 인간관계의 훈련소이다. 사회성을 기르는 장소이다.  287
친밀함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은 유년기에 어머니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사람들이다. 특히 세 살 이전이 중요하다. 이 시절에 부모와 애착관계가 잘 형성되었더 ㄴ아이들은 성장 후에 사람을 좋아하고 이웃들과 친근한 대인관계를 잘 맺는다. 친밀함의 뒤에는 어머니의 숨결이 숨어 있다.  288

친밀한 관계를 맺는 좋은 방법
엄마가 가장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치료자가 될 수 있는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  300
친밀함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편해져야 남도 편하다. 나를 고치는 것이 남을 고치는 것보다 더 쉽다.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내 문제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302
강하고 못진 부분만을 보여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대인관계의 곤란을 시작시킨다.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우아한 가면 뒤에 초조한 자신이 있다. 사람과 친밀해 지려면 자신에게 정직할 필요가 있다.  304
"내가 본래 좀 이래요." 이럴 때 비로소 긴장 없는 친근한 관계가 시작된다.  305
인간적인 약점을 감안하더라도 당신은 적어도 한 인간으로서 지구상에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닌가.
불완전한 상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307
자기 긍정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308

친밀함은 시간을 함께 보낼 때 형성된다. "사랑은 시간을 내주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다.  308
사람들은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에게 친밀함을 느낀다.  
의사소통론에서 나오느 이야기인데 인간은 대화를 나눌 때 3가지 불안을 느낀다고 한다.
첫째는 비난에 대한 불안이다. '이 사람이 내 말솜씨가 형편없다고 비난하지나 않을까?'
둘째는 이해에 대한 불안이다. '내 말은 이해하고 있나?'
셋째는 지루함에 대한 불안이다. '내 말이 이 사람을 지루하게 만들고 있는것은 아닌가?'  309-310
경청하는 태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고개 끄덕이기(headnodding)'이다.  310
대화의 기법 중에 '소리내기(vocalization)'가 있다. "음, 음 흐음.." "아, 아하" 소리로 반응하는 것이다.  311
상대가 충분히 말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소리를 내며 경청하도록 노력하자. 친밀한 관계가 형성된다.  311
대인관계의 아픔을 피하지 말자.
사랑의 아픔을 견디는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 아프지 않고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이 인간관계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날 때는 좀 아플 각오를 하자.  312


에필로그 - 친밀함의 세계로 가는 문
내면세계의 아픔을 가지고 내게 오는 사람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모두 외롭고 춥다는 것이었다.
친밀함의 장애 대부분은 윤년기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314
친밀한 관계를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누구든 치료자를 만나야 된다. 친구도 좋고 배우자도 좋고 정신과 의사도 좋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내 가치를 인정해주는 자기 대상'을 만나서 친밀함을 나누는 경험을 해야 한다. 한 번만 제대로 이 경험을 하고 나면 친밀함의 세계로 가는 문이 열린다.  316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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