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느가 하는 문제느 ㄴ매우 거리가 멀다. 그렇기에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만 논하고, 실제 인간이 사는 양상을 직시하지 않는 자는 현재 가진 것을 보전하는 것은 고사하고, 모든 것을 상실하여 파멸로 향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든지 선(善 착할선)을 행하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자는 나쁜 인간들 속에서도 파멸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몸을 보전하고자 하는 군주(지도자)는 나쁜 자가 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더욱이 그것을 필요에 따라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기술도 터득해야 한다. - 군주론  27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신의에 어긋나는 행위도 해야 하는 경우가 있고, 자비심을 버려야 할 때도 있다. 인간성을 한쪽에 밀쳐놓고, 깊은 신앙심도 부득이 잊어야 하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그러므로 군주에게는 운명의 풍향과 사태의 변화에 따라 그에 적합한 대응 방법이 요구되는 것이다. - 군주론  34


구대 로마인은 분쟁에 대처할 때 현명한 군주라면 누구나 해야 할 행동을 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눈앞의 분쟁 해결에만 도움이 되는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장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대책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로마인은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 그것이 아직도 싹에 지나지 않을 때 따버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장래에 일어날 수 있는 분쟁도 싹일 때 잘라버리면 대책이 용이해진다. 치료도 효력을 보려면 '늦기 전에'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군주론  43


새 질서를 확립하려는 자가 자기 힘으로 하려는가, 아니면 남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는가로 나뉠 수밖에 없다

남의 도움을 기대하는 경우는 실행 과정에서 반드시 장해가 생겨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된다.

반대로 자기 힘으로 하려는 자는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타고 넘어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무장한 예언자는 승리할 수 있고, 준비 없는 자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군주론  45


교묘한 사용법이라는 것은 자기의 처지를 지키기 위해 한 번은 사용하되 그후에는 그것을 깨끗이 그만두고,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돌리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서툰 사용법이란 처음에는 잔혹함을 조금씩 드러내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만두기는 커녕 차츰 더 잔혹의 정도를 불려나가는 방법이다. 

전자는 성공하고, 후자는 파멸을 피할 수 없다. - 군주론  50


군주는 '짜다'는 평판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악덕'은 자기 금고를 바닥내는 일이없고, 그렇다고 약탈자가 되지도 않으며, 또한 통치를 계속해나가는 데 필요한 '악덕'이기 때문이다. - 군주론  56


그러나 만일 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카이사르가 대범했기 때문에 제국을 획득할 수 있지 않았느냐고. 또 그뿐 아니라 대범함으로써 성공한 사람이 많지 않느냐고.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이미 획득한 자인가, 아니면 획득하고 있는 자인가에 따라 차이가 생기는 것이라고,

이에 획득한 자의 경우, 대범하면 해를 부른다. 

그러나 획득하고 있는 중이라면 대범하다고 생각하게 할 필요가 있다. 카이사르의 경우는 제국을 획득하고 있었던 중에 속한다. 그러나 그도 그후에 계속 살아 있었고, 획득한 후에도 그전과 다름없이 계속 대범했다면 제국을 파괴했을 것이 틀림없다. - 군주론  57


잔혹하더라도 서툴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 군주론  58


증오는 국민의 소유물에 손을 댔을 때 생기는 것이므로, 그것을 하지 않으면 피하기는 쉽다. 동서고금에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 물건과 명예만 빼앗기지 않으면 의외로 불만 없이 살아가는 법이다. 

경멸은 군주가 변덕스럽고 경박하며 여성적이고 소심하며 결단력이 없을 때 국민의 마음속에 싹튼다...

군주 된 자는 자기가 하는 일이 위대하고 용감하며, 진지하고 확고한 의지에 입각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군주론  62


군주는, 새로 군주가 된 자는 특히 그 지위를 획득할 때 적으로 보이던 자가 원래 자기 편이었던 자보다 유용할 때가 많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적으로 간주되던 자들은 그런 평판을 지우고 싶은 생각으로 군주를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원래 한 편으로 여겨지던 자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유용한 점으로 말한다면, 왕왕 전부터 한 편이었던 자보다 지난날 적이었던 자가 더 유익한 경우가 적지 않다. - 군주론  64


인간의 두뇌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외워두면 좋다. 

첫째 두뇌는 자기 힘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

둘째 두뇌는 남이 이해한 것을 감별할 수 있는 것.

셋째 것은 자기 힘으로 이해도 못하고, 남이 이해한 것을 감별도 못하는 것.

첫째 두뇌가 가장 좋고, 둘째 것이 그 뒤에 오며, 제3의 것은 '뇌'를 무능의 '능(能 능할능)'자로 바꾸어놓아도 무방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첫재 두뇌의 수가 제일 적은 것이 현실이므로, 측근을 잘 고르느냐의 여부는 사람 위에 서는 자로서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 군주론  71-72


군주된 자는 언제나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바랄 때여야 하고, 조언자가 바랄 때에 해서는 안 된다. ..

동시에 군주는 도량이 큰 질문자여야 하며, 남의 의견에 참을성 있게 귀를 기울여주는 인물이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조언자들이 마음속에 있는 의견을 다 털어놓지 않으면, 불쾌한 태도를 보일 필요도 있다...

총명한 군주이기에 조언자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 군주론  75


군주된 자가 위대한 일을 하고 싶으면, 사람을 농락하는 수법, 곧 권모술수를 배울 필요가 있다. 그런 수법을 습득해야 할 필요성은 군주국뿐만 아니라 공화국의 경우에 더욱 커진다. - 정략론  84


고대 로마의 공화제에서는 다른 공화국에 비해 자국의 공로자에 대해 보답하는 것을 잊지 않는 평이었지만, 군의 지휘관이 실책을 했을 경우에도 특히 온정어린 처우를 해주었다.

지휘관이 저지른 죄가 고의에 의한 거이라도 인간적으로 다루어서 처벌했고 무지에 의한 것일 때도 처벌은 고사하고 상까지 주었다.

로마인들은 이 같은 방법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일군의 지휘관쯤 되면 임무에 전념하 수 있는 정신 상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어렵기 이를 데 없는 군 지휘의 사업을 맡은 자가 그 밖의 잡다한 걱정으로 마음이 편치 않아서야 아무리 유능한 지휘관이라도 빛나는 전과를 올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앋. - 정략론  92


지도자 없는 군중은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나 다름없다. - 정략론  96


사려 깊은 무장은 부하 장병들을 부득불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몰아넣는다. 

동시에 적에 대해서는 부득불 싸워야 하는 상태에 될 수 있는 대로 몰아넣지 않는 계책을 강구한다.

옛 장군들은 인간의 의욕이라는 것이 필요에 쫓겨야 비로소 충분히 발휘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폐쇄할 수 있는 통로도 적을 위해 일부러 열어놓기도 하고, 아군의 퇴로가 될 만한 길을 폐쇄시키곤 했다. - 정략론  102


뛰어난 지휘관이라면 다음과 같은 것을 실행해야 한다. 

첫째, 적이 상상도 못할 새로운 작전을 생각해낼 것.

둘째, 적장이 생각해낼 법한 작전을 간파하고, 그것이 무위로 끝나도록 대비할 것. - 정략론  103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은 자는 그것이 큰 사업일수록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와 자기가 그 속에서 일해야하는 상황을 숙지하여 스스로를 그것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시대와 상황에 합치시키기를 게을리하거나 타고난 성격 탓으로 아무리 해도 그런 일에 서툰 사람은 평생을 불행 속에 보내야 하며 완수하고자 한 일도 이룩하지 못하고 끝나게 마련이다.

이와는 반대로, 상황을 철저히 알고 시대의 흐름을 탈 수 있는 사람은 바라는 일도 달성할 수 있다. - 정략론  109


시대의 흐름을 깨닫고 그에 맞게 탈피할 능력을 가진 인물이 극히 드문 것도 사실이다. 그 까닭은 다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사람은 타고난 성격에 어긋나는 일을 좀처럼하지 못한다는 것. 

둘째는, 그때까지의 방법으로 내내 잘해온 사람에게 지금부터는 그것과 다른 방법이 적합하다고 납득시킨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

그리하여 시대는 자꾸만 변하는데, 인간의 방식은 여전하다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 정략론  112


군주는 민중이 무슨 과오를 범하더라도 불평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민중이 저지른 과오는 통치자 쪽의 태만에서 나온 것이거나 아니면 통치자가 저지른 것을 그들이 답습한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리비우스는 말하고 있다.

"대중은 언제나 정치하는 자를 모방한다."

로렌초 데 메디치도 같은 의견이었던 모양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군주가 하는 일을 대중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시선은 언제나 통치자를 향하기 때문이다." - 정략론  122


종교나 국가를 오래 유지하고 싶으면, 몇 번이고 본래 모습으로 복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개혁이 요구되는 것인데, 자연스럽게 제도가 개혁되면 가장 이상적이다.

또한 어떤 계기로 개혁의 필요에 눈을 떠서 그것에 손을 대는 경우도 그것은 오래 간다. 다시 말해 분명한 것은 아무런 손도 쓰지 않고 방치해두는 나라는 단명으로 끝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개혁의 필요성은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인데,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익한 까닭은 어떤 형태든 공동체인 이상 초창기에는 반드시 무언가 우수한 점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장점이 있었기에 오늘의 융성을 이룰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세월은 당초에 있었던 장점도 마멸시켜버리게 마련이다. 마멸되는 대로 방치해두면 마지막에는 죽음에 이른다. - 정략론  135


고대에는 어째서 질서가 유지되었고, 현대 (16세기)에는 어째서 무질서가 지배하는가.

그 이유를 해명하라면 이 또한 간단하다. 모든 것은, 옛날에는 자유인이었던 것이 지금은 노예생활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자유로이 살 수 있는 나라에서는 사회 전체가 번영을 누린다는 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진실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결혼을 피하는 경향도 없었고, 재산이 감소될 우려 없이 자손을 늘릴 수 있어서 인구가 불어났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고, 재능만 있으면 지도자계급에 속할 수도 있다고 믿었기에 자식이 태어나는 것을 기뻐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식들의 양육에도 힘을 쏟을 수 있었다. 이런 나라에서는 모든 분야에서 부(富 부자주)의 증대가 계속된다. 사람들이 부를 늘리면 늘릴수록 그것을 향유하는 기쁨도 늘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자유경쟁의 원리가 지배한다. 사적인 이익과 공적인 이익이 모두 지극히 자연스러운 형태로 추구된다. 결과는 양쪽의 번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 정략론  139


중상이 활개를 치는 것은 고발이라는 형식이 별로 사용되지 않는 경우이거나, 아니면 그 공동체 안에 고발을 받아들일 체제가 마련되지 않은 경우이다.

그러므로 시민에게 아무 두려움 없이 고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 동시에 중상하는 자는 엄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 정략론  143-144


민중은 선정(善政 착할선 정사정)만 베풀어주면 특별히 자유 같은 것을 바라거나 구하지도 않는다. - 정략론  145


로마의 예가 말해주듯 청빈이 부유보다 훨씬 더 공동체의 이익이 되는 것의 예를 들자면 한이 없을 정도이다. 청빈을 존중하는 기풍이 국가와 도시와 모든 인간 공동체에 영예를 준 데 반해, 부를 추구한 폭주는 그것들의 쇠퇴를 도왔을 뿐이다. - 정략론  150


시민 사이에 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공화재가 성립될 수 없고, 평등이 존재하는 나라에서는 군주제가 성립될 수 없다. - 피렌체공화국의 앞날에 대한 메디치가의 질문에 대하여  152


욕망이 이름을 만드는 것이지, 이름이 욕망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 정략론  154


자유로운 투표로 주어진 권력이라도 공화제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 보장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권력의 적용 범위를 명확히 하고 그것을 항상 관리할 수 있는 제도를 정비해둘 것.

둘째, 권력은 반드시 일정 기간에 한해서 주어질 것. - 정략론  158-159


민중의 찬동을 얻는 데는 어떤 방법이 쉽고 어떤 방법이 어려운지 여기서 생각해보고 싶다. 쉬운 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이다. 

곧 그들에게 이렇게 하면 '덕'을 보고, 저렇게 하면 손해를 본다고 구체적으로 설득하느 것이다.

또는 이렇게 하면 용감해보이지만, 다른 방법으로는 겁쟁이이고 비열해 보일 것이라고 일러주는 것이다.

설령 배후에 어떤 곤란이 기다리고 있건, 또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건 간에 표면상으로 훌륭해 보이는 일이면 민중을 설득하기란 어렵지 않다. 

반대로 아무리 유익한 정책이라도 표면상 손해를 볼것 같다든지 겉보기에 신통하지 않을 때는 민중의 찬동을 얻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 정략론  167


민중은 무리를 지으면 대담한 행동으로 나오고 개인일 때는 겁쟁이가 된다. - 정략론  169


민중만큼 경박하고 일관성이 없는 존재도 드물다는 것은 리비우스의 평가인데, 다른 많은 역사가들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정말이지 역사상 그들의 행동을 보면, 민중은 누군가를 사형시켜놓고는 바로 후회하며 눈물을 흘리는 경우와 줄곧 만나게 된다.

이에 대해 리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가 죽고 그가 가져다 준 위협이 사라지자마자 민중은 회한에 잠겨 눈물을 흘리며 그를 그리워했다."

또 히에론의 조카 히에로니무스가 죽은 뒤 시라쿠사에서 일어난 사건에 언급하여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다.

"비굴한 노예가 아니면 오만한 주인, 이것이 민중의 본질이다." - 정략론  172


약체 국가는 언젠 우유부단하다. 그리고 결단을 꾸물거리면, 이 또한 언제나 해롭다. 이에 대해서는 내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결단력 없는 살마들이 아무리 진지하게 협의해봐야 거기서 나오는 결론은 언제나 모호하므로, 그 결론은 언제나 별로 소용이 없다. 

그리고 우유부단 못지않게 장시간의 토의 끝에 나오는 너무 늦은 결론 역시 해롭기는 마찬가지이다. - 정략론  179


약체의 공화국에 나타나는 가장 나쁜 경향은 무슨 일에나 우유부단하다는 것이다...

우유부단한 공화국은 밖에서 압력이라도 받지 않는 한 좋은 방책을 수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라가 약하다는 데에 조금이라도 불안을 느끼면 그것을 결행할 기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 정략론  180


어려운 시대에는 참된 역량을 갖춘 인물이 활약하지만, 태평스런 세상에서는 풍족한 재물을 가진 자나 문벌의 뒷받침을 받는 자가 제세상을 누리게 된다. 출중한 큰 인물은 국가가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시대에는 냉대를 받기 일쑤이다. 왜냐하면 그의 역량이면 당연히 주어져야 할 지위와 명성을 사람들의 시기심이 빼앗아버리기 때문이다. - 정략론  186


출중한 인물은 운이 좋거나 나쁘거나 항상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운명이 변전해도 그들은 의연한 정신을 지속하므로 남의 눈에는 운명도 그들에게는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

교육이 올바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에는 운에 끌려다니기 쉬운 성격이 된다. 반대로 그것이 올바로 이루어져 있으면 역경에도 동하지 않는 인간이 된다.

왜냐하면 교육은 인간 사회를 알도록 가르쳐주는 것이므로, 그 변전이 얼마나 심한가를 이해할 수 있게되고, 교육 여하에 관계없이 동하지 않는 성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정략론  206-207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준비에 전념할 필요가 있다.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준비를 시작해서는 이미 늦다. 행운이 미소짓기 전에 준비를 갖추어놓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만 게을리하지 않고 해두면, 좋은 기회가 찾아오자마자 즉각 움켜잡을 수 있다. 좋은 기회는 당장 붙잡지 않으면 달아나게 마련이다. - 전략론  209


인간이란 어려움이 조금이라도 예상되는 사업에는 언제나 반대한다. - 군주론  243


어떤 인물을 평가할 때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은 그가 어떤 사람들과 사귀고 있는지 보는 것이다. 

친하게 사귀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되기 때문이다. - 정략론  252


정말로 서글픈 현실이지만, 인간은 권력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이 서툴기만 하여 그것으로 점점 더 남이 참기 어려운 존재가 된다. - 피렌체사  256


중간 정도의 승리로 만족하는 자는 언제나 승자로 있게 될 것이다. 

반대로 압승하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자는 흔히 함정에 빠지게 된다. - 피렌체사  257


누구나 되도록이면 쉽게 일을 처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같은 일이라도 쉽게 실현할 수 있는 사람과 무척 고생을 하지 않으면 실현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도 사실이다.

그 원인은 미리 되어 있는 준비를, 찾아온 기회에 투입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판별하는 판단력에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나 전력투구를 한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이때 판단력의 좋고 나쁨이 그 사람의 인생이 순조롭게 나아가는냐, 아니면 매우 고생에 찬 것이 되느냐의 갈림길이 된다고 생각한다. - 전략론  260


군 지휘관으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상상력이라고 대답하겠다. 

하기야 이 자질의 중요성은 군 지휘관에만 한한 것이 아니다. 어떤 직업이나 상상력 없이 그 길에서 대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전략론  261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에서 말한, "무엇을 한 후에 후회하는 편이,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한마디 말일세. - 편지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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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Programme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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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이란건 결국 제도권에서 만들어낸 것이고 그것이 이 사회에서 말하는 사회성일 뿐. 
실제 삶에서의 영향력은 미미한 것이다. 성취라는 개념을 보더라도 성취해야만 하는 것이 된다. 학업은 성취해야 하는게 아니라 익숙해져야 하는게 아닌가. 그 익숙함속에서 발전과 넘어섬이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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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답을 찾기가 어렵지만 확실한 건 교육이 투기꾼들에게 잔디깔린 훌륭한 놀이터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가정(假定 거짓가 정할정)들은 한눈에 들어오고 많은 이론을 끌어들여 그것을 증명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상당 부분이 오류라는 사실이다.  13

교육에 대해 토론할 때는 아이들이 수천 년, 아니 수십만 년에 걸쳐서 어떻게 발달했는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15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새로운 관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잠에서 깨어 나라느 외침과도 같다. 진정으로 아이들을 후원하고 싶다면 발달의 뿌리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새롭고 세련된 이론에따라 아이들을 그때그때 다르게 키우고 최신 유행 이론으로 시험해 왔다. 한마디로 아이들을 실험용 토끼로 만든 셈이다.  16-17

부모들의 대표적인 걱정거리
사실 그 무엇도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걱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 가운데 대부분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았다. 또 우리 부모는 그들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았다. 그리고 부모의 부모 또한 그들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았다. 그 밖의 걱정들은 개롭게 우리에게 날아온 것이다. 부모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다음의 4대 걱정거리가 그것이다.
1. 버릇이 잘못 들지 모른다는 걱정
아이의 요구를 다 들어주면 나중에 아이의 인생이 망가질 수도 있다. 특히 아이들을 너무 자주 안아 주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부모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아이가 부모와 함께 자고 큰소리로 울 때마다 안아 주고 오랫동안 젖을 물리면 "버릇이 잘못 들 수 있다."
2. 말 안 듣는 아이가 될지 모른다는 걱정 
아이들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려고 하는가? 아이들에게 일찍부터 한계를 정해 주지 않으면 틀림없이 그들은 기싸움에 승리하여 무서운 '독재자'가 될 것이다.
3. 완벽한 부모가 되지 못한다는 걱정
아이들의 발달은 균형을 맞추어 가는 과정이다. 부모가 모든 것에 완벽을 기하면 아이의 발달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실수를 저지르면 어떻게 될까? 발달 과정에 문제가 생기고 아이는 평생 피해를 입을 것이다.
4. 자녀를 제대로 후원하지 못한다는 걱정
아이들이 훌륭하게 발달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자극과 후워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아이들은 잠재력을 펼칠 수 있다.
이 모든 걱정거리가 새로운 교육 이론의 원료가 된다. 부모들의 이런 걱정거리가 교육 시장의 투기꾼들에게 신선한 양식을 제공한다. 모든 걱정거리가 화려한 공중누각 같은 공허한 이론의 건툭 자재로 사용된다.
이 걱정거리들은 하나같이 아이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생긴 것들이다. 이 걱정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아이들의 역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수천 년에 이르는 세월을 넘어 존재의 명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수천 년에 이르는 세월을 넘어 존재의 명맥을 이어 왔다. 그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자기에게 닥친 여러 가지 도전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을 찾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장점들을 키워 왔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문제투성이와 약점덩어리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랬다면 어떻게 지난날의 어려운 조건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앞으로는 이 걱정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으면 한다. 아이에 대한 걱정들이 실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을 인정했으면 한다.  22-23

언제부터인가 아이의 버릇 문제가 이야기되면서 부모들은 아이를 잘못 키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빠지곤 한다. 바로 프로이트가 엄마의 과도한 애정이 아이의 성격 성숙을 가속화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 이후부터다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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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반응해주면 습관이 된다는 것도, 반응해 줘야 된다는 것도, 모두다 심리학적 접근으로 설명한다. 어떤것이 옳은것인지를 떠나서 아이가 울음을 우는것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는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아이는 울음으로 밖에 자기 의사를 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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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울음에 반응이 없어 상처받은 아이가 무조건 잘못되는것도 아니고 반응이 있어 상처 받지 않은 아이가 무조건 잘 되는것도 아니다. 어린시절 뿐 아니라 생애 전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상처는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상처가 문제가 아니라, 늘 상세하고 자세한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나눌 수 있고 그것을 인정받고 나아가 해소의 과정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잘되고 못되고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태교때는 태교만, 육아때는 육아만, 초등때는 초등만 중요한것처럼 떠드는 것은 의미없다. 다시마랳 부분최적화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말이다. 전체를 조망해서 나아가는 전체최적화가 더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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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는 생후 두 번째 되는 해, 부모와 좋은 신뢰 관계를 유지하는 기간에 고집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1~2년에 걸쳐 본격적으로 고집을 부린다.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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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고집시기는 어쩌면 당연히 받아주어야 하는 과정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내 아이만 그런것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그런다는 것을 자연적인 흐름의 과정이라 볼 수 있다면 말이다. 어쩌면 애착관계가 강한 아이는 이 고집과정이 없거나 있더라도 대화로 풀어가면서 쉽게 지나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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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거부는 자신의 이해관계 다시 말하면 발달에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한 혁명이다.  36

왜 우리는 고집스럽게 아이들의 행동 방식을 '권력의 문제'로만 해석하려는 걸까?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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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성장 과정으로 받아들인다면 훨씬 편하게 대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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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좋은' 정도로만...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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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적인 표현이 부모에게 더 근심을 안겨준다. 그렇다고 명확한 답도, 표현도 없다. 그러니 추상적일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차피 기준도, 답도 없는것인데 전문가라는 집단은 자기 공부 자랑하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발표해서 더 어렵게 끌어가는 것이다. 그들의 연구 조사가 때론 유익하기도 하지만 때론 전혀 도움이 안되기도 하기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는 결론.
판단은 부모가. 결국 부모의 판단력의 기준이 중요할 뿐 이들의 연구 발표는 나중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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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매일매일 내리는 결정은 가느다란 비단실과 같다. 그리고 아이들의 행복과 고통은 그것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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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시간에 잠자고, 일어나고, 특정한 시간에 먹어야 하고, ...
인간이 시간속에 살아가진 하짐나 시간이란 개념이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기에 우리가 자연적인 현상을 시간에 끼워 맞추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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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뒷머리는 원래 남작하지 않은 곡선 모양이다. 그것은 인류 역사에서 아기들을 항상 눕히지 않고 안거나 업고 다녔기 때문이다.  49

왜 우리는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는 것을 정상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왜 아기를 안거나 업고 다닐 때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하면서 새로 나온 유모차의 플라스틱 부풉에서 배출되는 수백 종의 화학 성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걸까? 
왜 우리는 다이옥신에 오염된 달걀에는 민감하면서 아기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플라스틱 물건에 대해서는 무감할까?  50

독립이 인간의 발달에서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
인간에게 독립은 "고속도로에서 멋대로 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능숙하게 교류하는 능력에 근거를 둔다. 독립의 본질은 관계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만들어 가는 데 있다.  61

나이가 다양하게 섞인 집단의 아이들이 오히려 서로를 격려하면서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다양하게 섞인 집단의 아이들이 놀이를 할 때 인내력과 창의력을 더욱 발휘한다.  79

손위 형제 자매와 친구들이 많을수록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이해하는 것이 쉬워진다.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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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관계에서 어떤 관계든 상처를 받게 된다. 어른들과의 관계에서도 또래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받은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이다. 즉 아이가 받을 수 있는 상처가 어떤것이든 그것에 얽매이지 않을 정도의 성숙함이 있다면 또는 그것을 기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아래내용(p98)에서 내가 하는 생각이 들어 있다. 즉 회복력이다. 그 힘을 기르려면 가족의 애착과 형제관계 그리고 가족은 아니지만 친밀함을 유히자는 주위 관계가 필요하다. 그런 후에 또래 아이들과의 조직이 필요하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래 집단에 앞서 형성해야할 회복능력이, 이후의 더큰 회복력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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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지탱할 수 있도록 자신을 보호하는 힘을 '회복력'이라고 정의한다. 회복력은 위기를 견디는 능력이나 내면의 힘을 의미한다. 심리학자들은 발달의 면역 체계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에서 회복력을 강화하는 외부의 영향력을 발견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형제자매, 풍부한 사회적 관계의 그물, 가족 바깥에 있지만 친밀한 애착 관계에 있는 사람, 예를 들어 할머니, 이모나 고모, 또는 어른들이 바로 그런 영향력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있다. 아이 집단에서 사회적 능력을 확보할 수 있는 아이는 어른이 되면 더 큰 회복력을 갖는다.  98

아이들을 사회적으로는 허약한 최고 점수 득점자로 망가뜨리지 않고, 그럼에도 아이들이 화면 앞에 앉아서 또는 장시간 이완 상태에 빠져 타락하지 않도록 해 주는 교육 방법은 없는 걸까? 부모가 헬리콥터처럼 아이의 주변을 뱅뱅 돌면서 일일이 간섭하고 조종하는 데 중점을 두지 않고, 그렇다고 "아이들을 놀게 내버려 두라"는 주장에도 머물지 않으면서, 그들을 후원하는 방법은 없을까?
그 방법을 찾으려면 우리는 다시 아이들의 역사와 마주하게 된다.  124

아이들이 성장하는 환경은 매우 다양하지만 적절한 발달을 위한 토대는 항상 동일하다.
첫째는 확실한 애착이다.
둘째는 다른 아이들이다.
셋째는 공동체의 지원이다.  
넷째는 자유다.
다섯째는 균형 잡힌 세계다.  127-128

꽃잎을 자꾸만지면 아름다운 꽃이 피지 않는다.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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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 교육이 좋기만 한 걸까?
적기 교육은 무슨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분명 어린 나이에 많은것을 교육시키면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3세에는 이것, 5세에는 이것을 가르친다는 것도 웃기지 않는가. 특정 전문가들이 조기 교육의 장점을 설명하듯이 특정 전문가들이 적기 교육을 강조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특정한 연령대에 특정한 교육이라는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을까?
위의 전문가 집단들의 서로 다른 가설에 의한 실험 결과일 뿐이다.
이 책은 진화의 관점을 강조하며 설명한다. 이처럼 진화의 관점이든, 창조의 관점이든,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교육이라는 개념이 시스템화 되지 않았어도 잘 자랐고, 성인이 되고, 자기 인생을 살아갔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 술 담배를 교육시키는 것은 당연히 좋지 않다. 몸의 체계 형성도 되기 전에 파괴만 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모라면 당연히 그럴것이란 점이다.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교육이라는건 그 자체가 의미가 없지 않을까. 아이를 아이가 아닌 하나의 개체로 인정한다면 시킬것도, 시키지 않을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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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완벽하고 더 효율적인 것을 추구하지 말고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과감하게 실행해야 한다. 그리고 아이에 대한 후원도 이와 같은 뿌리에 근거를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141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도대체 학교의 사명은 무엇일까? 학교는 누구를 위해 존재할까? 
학교는 아이들을 위해 존재한다. 아이들의 발달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 아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잠재력을 발견하고 펼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주의하기 바란다. 모든 아이들의 발달을 도와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학교는 그렇게 하고 있는 걸까?
대답을 하자니 망설여진다. 그렇다고도 또 그렇지 않다고도 대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는 아이들을 지원하면서도 포기한다. 훌륭한 학교도 있고 낙제점인 학교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학교가 교사들의 열과 성이 부족하거나 제안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학교의 교육 계획과 교과 과정의 변화보다 더 빨리 변화하는 사회에 딜레마가 있다.  146

병원은 어린 생명을 다루는 지식은 의학을 전공해야만 얻을 수 있고 전문가를 통해서만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산모들이 아기에 대한 책임을 병원에 떠넘기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171

성인들도 '결합 속의 자율'을 중요하게 여긴다.  188

실제로 세계화 이후 독일에서 자녀가 있는 성인들의 실질 소득은 계속 하락했다. 적어도 중하층 가정에서 자녀는 빈곤의 위험을 의미한다. 실제로 성인들은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것이냐, 아니면 자녀를 가질 것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190

"정치가 꼭 깨달아야 할 사실이 있다. 육아가 기쁘면 더 많은 아이들이 태어난다." 이는 유럽 발달소아과학계의 원로 레모 라르고(Remo Largo)의 말이다.  191

좀 더 솔직해지자.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것은 '밑바닥 사람들의' 사회적 문제만은 아니다. 기득권층에게 통합 정신이 부족한 것이 문제다. 한 계층 전체가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문제다.  193

결정하는 사람은 엄마다.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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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오늘날 아이 양육에서 결정자가 엄마일까? 부모일까?
아니다. 양육의 돌보미가 부모이고, 결정자는 기업과 사회이다. 기업은 전문가 집단 또는 전문가 개인을 이용해 아니 앞세워 협박 아닌 협박을 한다. 
이것을 해야 아이의 정서가 발달하고 창의성이 생기고, 사회성이 생기고, 리더십이 생기고, 독립적일 수 있고, 재밌어 하고, 행복해 한다고...
행복마저 손쉽게 살 수 있다는 세뇌를 시켜 결정자의 역할을 한다.
부모는 다만 내 아이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마냥 전문가의 말이 신실한듯 따라간다.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전문가를 통해 조종하고 있는 결정자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 잘 알지 못하고 미래도 모르니 좀더 많이 아는 사람의 말을 진리라 생각하면서.. 
부모의 기준은, 전문가를 등에 업은 기업과 그것을 용인하고 있는 사회의 기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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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교육은 기존의 지식, 다른 사람들에게 물려받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 그 이상이 돼야 한다. 아이들이 부모가 할 수 있는 것만을 배웠다면 인류는 아마도 불을 다루지 못했을지 모른다. 인터넷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  213

호모 사피엔스에게 교육이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행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 가는 것도 교육이다. 자기 학습, 자기 교육이 그런 것이다...
인생의 지식은 밑에서 위로 오르기도 한다.  214

아이들은 학습을 위해서 단순한 전략을 구사한다. 그들은 관찰하고 행동한다. 그들에겐 롤 모델이 필요하다. 
그들은 무턱대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가중치를 두고' 관찰한다.  215

사람이 처방전에 따라 살거나 결혼 생활을 영위할 수 없듯이 교육도 처방전을 따라할 수 없다.  218

아이들에게는 집단의 경험이 필요하다.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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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대가족제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집단의 경험이 이루어졌다. 또래들의 집단 어른들과의 집단, 모계집단, 부계집단등 대가족 아래서 다양한 집단 경험을 가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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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확실한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으므로, 헛것인지 실체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헛것들은 실체의 옷을 입고 모든 실체들은 헛것의 옷을 입고 있는 모양이었다.  44


나는 못대가리 하나 걸질 것 없는 텅 빈 바다와 목 잘린 시체가 썩어가는 연안을 생각했다. 나는 먼 섬들에서 오르던 적의 봉화를 생각했고, 불타버린 한산 통제영을 생각했다. 물러설 자리 없는 자의 편안함이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사지(死地)에서는 본래 살길이 없었다. 그러자 몸의 깊은 곳이 자꾸 뜨거워져 갔다. 성욕 같기도 하고, 배고픔 같기도 한 것이 자꾸만 내 속에서 끓어 올랐다.  58


임금은 수군이 외롭고 의지할 데 없으니 해전을 포기하고 장졸을 인솔해서 육지로 올라가 도원수부의 육군과 합치라는 것이었다. 나를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 지 며칠 후에 임금은 또 그런 유시를 내려보냈다. 임금은 적이 두려웠고, 그 적과 맞서는 수군 통제사가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그것이 임금의 싸움이었다.  82


....이제 수군을 폐하시면, 전하의 적들은 서해를 따라 충청 해안을 거쳐서 한강으로 들어가 전하에게로 갈 것이므로, 신은 멀리서 이것을 염려하는 바입니다. 수군이 비록 외롭다 하나 이제 신에게 오히려 전선 열두 척이 있사온즉.... 

그리고 나는 한 줄을 더 써서 글을 마쳤다.

.... 신의 몸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에는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83


오늘밤 전 함대는 발진하아.

장졸들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나는 다시 말했다.

"사지에서는 살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아마도 살길이다. 살 길과 죽을 길이 다르지 않다. 너희는 마땅히 알라."

전율이 장졸들의 얼어붙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전율에 나는 안도했다. 그날 밤 나는 전선 12척과 군사를 우수영으로 옮겼다. 그리고 전선의 고물에 백성들의 어선 30척을 밧줄로 매달아 함께 옮겼다. 새벽에 군관들을 풀어서 우수영 주변과 갯가의 백성들을 산 위로 소개시켰다. 해남 쪽에서 넘어온 피난민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늙은이와 부녀자들이었다. 백성들을 쓰러져 뒹굴며 울부짖었다. 이부자리를 등에 멘 백성들은 개와 닭은 끌고 통곡하면서 산 위로 올랐다. 수영 마당 안까지 백성들이 몰려왔다.

"나으리, 이제 또 산 위로 가라 하시니, 짐승이 아니고서야 어찌 산 위에서 살 수 있겠소이까? 차라리 저희들을 다 죽여주시오. 나라의 칼을 찬 장수가 어찌 이러실 수가 있소. 나라의 칼로 백성을 지키지 못할진대 나라의 칼로 다 죽여주시오."

늙은 농부는 울면서 그렇게 말햇다. 내 마음속에 몇 방울의 눈물이 고여왔다. 나는 겨우 말했다. 거짓말이 되더라도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칼 찬 자의 죄가 실로 크다. 내 이번 싸움에서 기필코 이길 것이니 그때 너희들은 마을로 돌아오라."  86


"아무런 방책이 없다. 일자진뿐이다. 열두 척으로는 다른 진법이 없다."  88

"밝은 날 명량에서 일자진으로 적을 맞겠다."

"적의 선두를 부수면서, 물살이 바뀌기를 기다려라. 지휘 체계가 무너지면 적은 삼백 척이 아니라, 다만 삼백 개의 한 척일 뿐이다. 이제 돌아가 쉬어라."  89


적은 십렬종대의 이동 대열로 다가왔다. 

적의 배들은 갑판 위 누각에 울긋불긋한 칠을 했고, 이물과 고물에 금박을 입혔다. 철렁거리며 다가오는 적의 이물에서 대낮의 햇빛은 번쩍거렸다. 적의 대열은 찬란했다. 알 수 없는 적의의 신들이 살고 있는 무수한 신전(神殿)들이 몰려오는것 같았다.  96

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깃발들의 함성으로 다가왔다. 그 깃발 위 허공으로 적의 살기는 무지개처럼 펼쳐졌다. 바람의 흐름이 끊어질 때마다 우수영 쪽 산꼭대기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울부짖는 피난민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몸이 불에 타틀어가는 자들의 울음처럼, 그 울음은 맹렬했고 다급했다.

정오무렵

적의 제1열과 제2열이 합쳐지면서, 양쪽으로 날개를 벌리기 시작했다. 

물은 적의 편이었다. 적은 휩쓸듯이 달려들었다. 감당할 수 없는 적의 힘이 내 몸에 느껴졌다. 나는 뼈마디가 으스러지듯이 아팠다.  97


일자진 뒤쪽으로 임하도 쪽 바다는 갑자기 넓어진다. 거기서, 다시 넓어지는 적의 날개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물러설 자리는 넓었지만, 물러서서 살 자리는 없었다. 적의 선두의 날개가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98

북서 밀물은 기세를 죽이기 시작햇다. 양쪽 연안으로 밀려났던 와류들이 가운데로 다시 몰리면서 물결은 낮아졌다. 이물 쪽 기둥에 몸을 묶은 적병들이 이쪽을 향해 조총을 겨누고 있었다. 또 한 번의 역류를 앞둔 바다는 문득 호수처럼 고요해졌다. 그 적막속에 바다는 다시 밀물에서 썰물로 뒤바뀌는 존망의 격랑을 예비하고 있었다. 이제 밀어붙일 것이었다.

"닦아라. 적의 제일열을 부수라."

쇠나팔이 길게 울렸다. 대장선에서 화살이 나르고 화포가 터졌다. 적들이 함성을 질렀다. 적이 날개가 점점 좁혀졌다. 총탄이 무더기로 쏟아져왔다.

"더욱 닦아라."

함대는 따라오지 않았다. 중군장 김응함과 거제 현령 안위는 두마장 정도 뒤로 물러서서 다만 고요한 바다에 떠 있었다. 노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베어야 했으나 배를 돌릴 수 없었다. 적의 날개는 연안 쪽에서 빠르게 좁혀들고 있었다. 초요기(招搖旗)를 세웠다. 김응함이 겨우 다가왔다. 김응함이 내 배로 건너왔다. 김응함의 배 좌현에서 적탄에 맞은 사부 2명이 물 속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김응함의 목게 칼을 들이댔다.

"응함아, 여기는 사지다. 내 칼에 죽느니 나아가서 적의 칼에 죽어라."  99


제 배로 건너간 김응함은 격군을 질타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안위가 다가왔다. 대장선으로 건너와서 안위는 갑판에 꿇어앉았다. 나는 말했다.

"안위야. 너를 죽여서 길을 열겠다. 네가 군법에 죽겠느냐? 물러서면 살 듯싶으냐?"

안위가 몸을 떨었다. 안위는 제 배로 건너갔다. 안위의 배가 앞으로 나아갔다.  100


군량은 명량에서 깨어진 적선에 올라가 빼앗은 쌍이었다. 모두가 적들에게 빼앗긴 연안 백생들의 쌀이었다. 내가 적을 죽이면 적은 백성을 죽였고 적이 나를 죽인다면 백성들은 더욱 죽어나갈 것이었는데, 그 백성들의 쌀을 뺏고 빼앗아 적과내가 나누어 먹고 있었다. 나의 적은 백성의 적이었고, 나는 적의 적이었는데, 백성들의 곡식을 나와 나의 적이 먹고 있었다.  108

장졸들을 모아놓고 무기를 점검했다. 썩은 창자루를 갈아 끼우고 쇠갈고리의 낡은 줄을 바꾸도록 했다. 명량에서 돌아온 배들은 이음새가 어긋났고, 틈새에 벌레가 먹었다. 노 구멍이 문드러진 배들도 있었다. 배들을 묶어놓고 선실안에서 연기를 피워 벌레를 잡았다. 벌어진 틈새에 나무 심을 넣었다. 개먹은 노 구멍 둘레에 쇠를 박았고 이 빠진 노 끝에 구리 버선을 씌웠다. 저녁때 백성들이 버린 밭에 월동 무씨 다섯 되를 뿌렸다.  108-109


나는 개별적인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온 바다를 송장이 뒤덮어도, 그 많은 죽음들이 개별적인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나는 여가자 죽으면 어디가 먼저 썩을 것인지를 생각했다. 나는 그 썩음에 손댈 수 없을 것 같았다. 죽은 자는 나의 편도 아니고 적도 아니었다. 모든 죽은 자는 모든 산 자의 적인 듯도 싶었다. 내 몸은 여진의 죽은 몸 앞에 작게 움츠러들었다.

나는 죽은 여진에게 울음 같은 성욕을 느꼈다. 세상은 칼로써 막아낼 수 없고 칼로써 헤쳐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칼이 닿지 않고 화살이 미치지 못하는 저쪽에서, 세상은 뒤채이며 무너져갔고, 죽어서 돌아서는 자들 앞에서 칼은 속수무책이었다. 목숨을 벨 수는 있지만 죽음을 벨 수는 없었다.  114


죽을 때, 적들은 다들 각자 죽었을 것이다. 적선이 깨어지고 불타서 기울 때 물로 뛰어든 적병들이 모두 적의 깃발 아래에서 익명의 죽음을 죽었다. 하더라도, 죽어서 물 위에 뜬 그들의 죽음은 저마다의 죽음처럼 보였다. 적어도, 널빤지에 매달려서 덤벼들다가 내 부하들의 창검과 화살을 받는 순간부터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들의 살아 있는 몸의 고통과 무서움은 각자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각자의 몫들은 똑같은 고통과 똑같은 무서움이엇다 하더라도, 서로 소통될 수 없는 저마다의 몫이었을 것이다. 저마다의 끝은 적막했고, 적막한 끝들이 끝나서 쓰레기로 바다를 덮었다. 그 소통되지 않는 고통과 무서움의 운명 위에서, 혹시라도 칼을 버리고 적과 화해할 수도 있을 테지만 죽음은 끝내 소통되지 않는 각자의 몫이었고 나는 여전히 적의 적이었으며 이 쓰레기의 바다 위에서 나는 칼을 차고 있어야 했다. 죽이되, 죽음을 벨 수 있는 칼이 나에게는 없엇다. 나의 연안은 이승의 바다였다.  123-124


면사첩을 받던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나는 '면사' 두 글자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죄를 사면해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죽이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면사첩 위 시렁에서 내 환도 두 자루는 나를 베는 임금의 칼처럼 보였다.

내가 임김의 칼에 죽으면 적은 임금에게도 갈 것이었고 내가 적의 칼에 죽어도 적은 임금에게도 갈 것이었다. 적의 칼과 임금의 칼 사이에서 바다는 아득히 넓었고 나는 몸 둘 곳 없었다.  129 


배는 살아 있는 생선과 같다. 전선과 어선이 같고, 판옥선(板屋船)과 협선(浹船)이 매한가지다. 생선의 몸이 물을 읽듯이 배는 물을 읽고, 물을 받아내면서 나아간다. 여울을 거스를 때 생선이 때때로 몸통 전체를 뒤틀며 물에 저항하듯이, 배도 몸통 전체를 뒤틀며 파도와 파도 사이를 빠져나간다. 물에 맞서는 배의 저항은 물에 순응하기 위한 저항이다. 배는 생선과 같다. 배가 물을 거스르지만, 배는 물에 오래 맞설 수 없고, 물을 끝끝내 거절하지 못한다. 명량의 역류를 거슬러 나아갈 때도, 배를 띄워주는 것은 물이었고 배를 나아가게 하는 것도 물이엇다. 생선의 지느러미가 물살의 힘과 각도를 감지하듯이 노를 잡은 격군들의 팔이 물살의 힘과 속도와 방향을 감지한다. 장수의 몸이 격군의 몸을 느끼고, 노 잡은 격군의 몸이 물을 느껴서, 배를 사람의 몸의 일부로써 역류를 헤치고 나아간다. 배는 생선과도 같고 사람의 몸과도 같다. 물 속을 긁어서 밀쳐내야 나아갈 수 있지만, 물이 밀어주어야만 물을 따라 나아갈 수 있다. 싸움은 세상과 맞서는 몸의 일이다. 몸이 물에 포개져야만 나아가고 물러서고 돌아서고 펼치고 오므릴 수가 있고, 몸이 칼에 포개져야만 베고 찌를 수가 있다. 배와 몸과 칼과 생선이 다르지 않다.  143


임진년의 싸움은 힘겨웠고 정유년의 싸움은 다급했다. 모든 싸움에 대한 기억은 늘 막연하고 몽롱했다. 싸움은 싸움마다 개별적인 것이어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할 때마다 그 싸움이 나에게는 모두 첫 번째 싸움이었다. 지금 명량 쌍무에 대한 기억도 꿈속처럼 흐릿하다. 닥쳐올 싸움은 지나간 모든 싸움과 전혀 다른 낯선 싸움이었다. 싸움은 싸울수록 경험되지 않았고, 지나간 모든 싸움은 닥쳐올 모든 싸움 앞에서 무효였다.  155


"너희가 백성으로서 어찌 싸우는 수군을 따라나서느냐?"

노인이 반울음으로 대답했다.

"나으리, 이제 우수영을 버리시면 적은 곧 들이닥치리다. 백성이 수군을 따라가지 않으면 적을 따라가리이까? 수군 또한 백성의 자식이 아니고 무엇이오? 애 아들놈 조카놈들도 임진년 싸움에서 다 죽었소."

노인의 울음이 아긍로 바뀌어갔다. 통곡하는 어선과 뗏목들이 대장선 둘레를 에워쌌다. 대장선에 부딪힌 어선들이 뒤집힐 듯 출렁거렸다.  162-163

나를 죽이면 나를 살릴 수 없기 때문에 임금은 나를 풀어준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를 살려준 것은 결국은 적이었다. 살아서, 나는 다시 나를 살려준 적 앞으로 나아갔다. 세상은 뒤엉켜 있었다. 그 뒤엉킴은 말을 걸어볼 수 없이 무내용했다.  181




내 작품을 말하다.

나는 세상의 모멸과 치욕을 살아 있는 몸으로 감당해내면서, 이 알 수 없는 무의미와 끝까지 싸우는 한 사내의 운명에 관하여 말하고 싶었다. 희망을 말하지 않고, 희망을 세우지 않고, 가짜 희망에 기대지 않고, 희망 없는 세계를 희망 없이 돌파하는 그 사내의 슬픔과 고난 속에서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희망의 싹이 돋아나기를 나는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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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전략
카테고리 인문 > 독서/글쓰기
지은이 정희모 (들녘,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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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이란 단어는 전쟁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단어이다.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술과 전략을 잘 사용하여 성과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글을 쓰는 것에도 전략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생각이 오늘에는 더욱 맞아 떨어지는 듯하다.
이제는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이다. 전문적인 글이든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이든 .. 혼자만 보았던 일기 마저도 공유를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공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오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도 매우 많아졋으며, 이것이 수입의 한 수단으로 자리 잡기도 하었다.
그러기에 글쓰기에도 전략이 충분히 붙여야 하리라 생각된다.
저자는 누구나 하듯이 많이 읽고 많이 써봐야 한다는 서두를 시작으로 좀더 좋은 글이 되기 위해 필요한 사항들과 그것들의 적절한 사용과 배치로 더 좋은 글이 완성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더많은 생각과 틀에서 벗어난 사고력, 비판정신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의 말미에는 책을 쓸때 참고하자는 생각을 들게 하였다..물론 누구에게나 맞는 것은 아니겠지만...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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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어떻게 70일간, 세계 일주를 공짜로 가게 되었나?'이다.
이 책은 여러가지로 흥미로웠다.
우선 공짜로 가는 세계여행이었고, 전략을 세운것이고, 아직 대학생때였으며 가장 놀란것은 저자가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대학생때 이미 블로거로 하루 접속 수가 47만건이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바로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라고 하듯이 그녀는 정말 행동하는 솔선수범을 통해 젊은 시대에게 호소하였다.
 
이 책의 1부는 저자가 여행을 계획하고 전략을 세워서 실제 스폰서를 모으는 전체의 과정을 다루고 있고, 2부는 여행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2부는 여느 기행서들과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1부의 과정에서 감동받을 정도였다.
한 곳에 집중하는, 몰입하는 그 모습에 놀라웠고,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공짜로 세계여행을 갔다는것 자체가 대단한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그 과정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생각을 자극하는 매우 흥미로운 즐거움이 있었다.

 
낯선 곳에서 이색 문화를 즐기고, 처음 보는 음식을 먹으며, 인생의 굽이마다 외모와 사고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층 성장할 수 있었다.  20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보았다. 그때 퍼뜩 떠오른 세 가지.
세계 일주를 하고 싶다.
무언가 엉뚱한 짓을 해보고 싶다.
블로그를 이용한 기획을 해보고 싶다.  21
이왕 블로그에 미칠 바에야 '전문가'라는 소리는 들어야 폼이 나지 않을까? 
이 세 가지 목표를 합쳐서 '세계 일주를 하며 온갖 엉뚱한 시도를 해보는 블로그'를 선보일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한 적 없는 블로그의 등장에 모든 사람이 '우와!'하고 감탄하는 모습을 보고야 말리라.  23

이러한 생각에 하나하나 여행을 하면서 접목시키는 제품들을 생각하며, 그 필요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정리하며 계획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여행에 도움이 되면서 무리없이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리를 해보고 그 부분들에 대한 ppt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였다.
또한 기업들에 어필하기 위해 자신의 블로그에 대한 접속자 수를 늘이는 방안까지 고려하여 디테일한 내용들을 정리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그녀는 여러가지 인맥들과 새로운 인맥들을 통해 점점 스폰서 기업들을 늘려나가면서 그들과의 소중한 인연을 맺고, 그 와중에 미국에 심리학 학회를 다녀오기도 한다.
정말 바쁜 일상을 지내면서 열정으로 그 모든 것을 만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어느 계발서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물론 그녀를 보고 선택된 사람이라고 결론내리면 아무런 말이 필요없겠지만...
특별할 것 없는 보통 사람인 그녀의 모습들은 분명 우리에게 행동하는 시작은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한 바쁜 와중에도 하루 4시간 이상씩 세계 일주 블로그들을 찾아보면서 코스를 검토하기도 하고, 여행 기간에 꼭 하고 싶은 일 목록을 적는 작업도 잊지 않았다.



여행은 다니는 것에서 시작하는것이 아니라, 여행을 준비하는 그 과정에서 부터시작된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참 즐겁다. 또 설렌다.
 
여행은 정말 잘 계획해간다고 그대로 되지 않는다. 
아니 그대로 된다는게 이상한 것이다.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변수들이 많이 발생되는 것이 여행이고, 그로인해 더 즐거운 추억들이 생겨나게 되며 그러한 과정들을 통해 우리는 성장하게 된다.
그렇다고 계획을 하지 않는다면 그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 고생을 하는 움직임이 될 수 있다.

여행은 새로운 만남과 공감, 그리고 자아성장을 시켜주는 매우 큰 스승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자주 다니려 하는 편이라 그런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여행 예찬론자이다..
여행은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최소 50%이상의 영향을 주었다.
시야가 넓어지고 깊어진다는 표현이 어울릴까... 여행은 나에게 그런 존재의 스승이다.

여행은 치료이다. 자신의 내면에 대한 치료와 위안을 안겨준다.
여행은 친구다. 여행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여행은.... 여행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
사람마다의 정의가 틀릴지도 모르지만...
여행은 다녀본 사람에게 어쩌면 심장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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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허만과 나는『여론의 조작 Manufacturing Consent』이라는 언론 관계 책자를 공저했는데, 이 책에서 "프로파간다 모델Propaganda Model"이라는 자명한 이치를 설명했습니다. 이 모델을 적용해보면, 언론 기관은 그들의 이익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업으로서 오랫동안 존속하지 못할 거니까. 그래서 프로파간다 모델이 언론의 형태를 분석하는 유익한 도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뭐 그리 심오한 도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론의 조작』에서 우리는 두 개의 모델(① 언론이 마땅히 기능해야 하는 방식, ② 언론이 실제로 기능하는 방식)을 대비시켰습니다. ①의 모델은 전통적인 것입니다. 이것은『뉴욕 타임스』가 최근에 자사 발행의 『북 리뷰』에서 "정부를 견제하는 제퍼슨식 언론의 역할"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국민들의 알 권리를 보호하고, 정치 과정에서 일반 대중이 의미 있는 통제를 가하도록 돕기 위하여, 까다롭고, 고집 세고, 어디에서나 출현하는 언론, 그리하여 당국의 권력자들을 괴롭히는 그런 언론이 바로 ①의 모델입니다. 바로 이것이 미국 내의 표준적인 언론 모델이고 언론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은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②의 모델은 언론이 실제 행동하는 방식으로서, 국내의 경제를 장악하고 나아가 정부까지 상당 부분 통제하고 있는 특혜 그룹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아젠다를 보호하고 확충하는 세계관을 대변하는 언론입니다. ②의 모델에 따르면, 언론은 기사를 선정하는 방식, 관심사를 분배하는 방식, 문제의 틀을 정하는 방식, 정보를 여과하는 방식, 분석기사를 집중하는 방식, 그 밖의 다양한 테크닉을 통하여 그들의 사회적 목적에 봉사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언론이 어느 때든 국가 정책에 일방적으로 동의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부 권력의 장악은 우리 사회 내의 다양한 엘리트 그룹들 내에서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제계의 어떤 부분이 어떤 특정 기간에 정부를 장악했다는 사실은,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정치 스펙트럼의 한 부분이 그런 힘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엘리트들끼리도 전략적 의견 불일치가 때때로 생겨날 수 있습니다. "프로파간다 모델"은 이렇게 예측합니다. 언론에는 정치 스펙트럼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가 반영된다. 따라서 언론에 의해서 포섭되지 않는 정치 스펙트럼은 없다.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고요? 물론 이것은 거대하면서도 복잡한 주제입니다. 우선 네 개의 기본적 관찰 사항을 얘기하고 그 다음에 좀더 자세히 들어가 보기로 합시다. 첫 번째 사항은 프로파간다 모델이 엘리트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사실 서방의 엘리트 민주 사상가들 사이에는 그런 전통이 강하게 이어져 왔습니다. 이 사상가들은 언론과 지식인 계급이 프로파간다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른바 "대중의 정신the public mind"을 통제함으로써 일반 대중을 주변화해야 한다고 보았던 겁니다. 이 사상은 300년 동안 영미 민주사상의 핵심 주제였고 현재까지도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사상의 근원을 소급해 보면 서구의 최초 민중민주 혁명이었던 1640년대의 영국 내전(1642~1648년 동안 영국의 정권 장악을 놓고 왕당파와 의회파가 벌인 무력 충돌)까지 올라갑니다.

 

당시의 영국 내전에는 두 파의 엘리트가 참여했습니다. 한 파는 의회의 편을 든 지주 계층과 신흥 상인 계층이었고, 다른 한 파는 전통적인 엘리트 그룹인 왕당파였습니다. 이 두 파는 엘리트 갈등의 맥락에서 발달한 대중들의 움직임을 우려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모든 권위-주종 관계, 국가 당국자의 권위 등-에 도전하는 민중운동이 생겨났던 겁니다. 그 당시 인쇄기가 막 발명되었기 때문에 과격한 책들이 많이 출판되었습니다. 영국 내전의 양쪽 엘리트들은 일반 대중이 갑자기 통제 불능의 상태로 빠져드는 것을 굉장히 우려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반 대중은 너무 호기심이 많고 너무 거만하여 민간 통치에 승복하려는 겸손한 마음이 조금도 없다." 이처럼 왕당파와 의회파는 일반 민중을 힘으로 찍어누르는 능력을 상실해갔고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취한 첫 번째 조치는 힘으로 찍어누르는 능력을 다시 도입하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당분간 철권통치하는 절대국가가 들어섰습니다. 그런 다음에 왕정이 다시 도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왕정은 모든 것을 회복시키지는 못했고 정권을 완전 장악하지도 못했습니다. 민중 운동이 치열하게 투쟁했던 목표들이 상당수 영국의 정치적 민주주의에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이후 민중운동은 기존의 권력을 어느 정도 해체하는 데 성공해 왔습니다. 그러자 서방의 엘리트들 사이에는 이런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무력으로 국민을 통제할 힘이 점점 사라져간다면, 대안으로 국민의 생각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나가야 하겠다. 이러한 인식은 미국으로 건너와서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20세기에 들어와 미국 사상에는 이런 주요한 흐름이 형성되었습니다. 그것은 정치학자, 언론인, 홍보 전문가 등 권력가 밀착된 사람들의 주요 사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 사상은 국가가 힘으로 국민을 강제할 능력이 없으니까, 엘리트가 앞장서서 공공의 마음을 통제하는 효과적인 프로파간다를 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미국 언론계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의 생각입니다. 그는 일반 대중을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무리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리프먼은 이 대중들 사이에 "합의의 조성manufacture of consent"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말했는데 더 쉽게 말하자면 여론조작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무력으로 안 되니까 계산된 "합의의 조성"으로 통제를 계속해나가자는 것이었지요.

 

1920년대 당시 홍보산업의 주요 교범은 아예 제목이『프로파간다』였습니다(그 당시 사람들은 좀더 정직했었지요). 이 교범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대중의 습관과 의견을 의식적이고도 조직적으로 조종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민주 체제의 핵심 특징이다. 그 책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지만 대강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이어 교범은 이렇게 말합니다. "소수 지식인들intelligent minorities"의 임무는 대중의 습관과 의견을 이런 식으로 조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으뜸 원칙인 겁니다. 다시 말해 힘으로 사람들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면 세뇌indoctrination가 가장 좋은 방식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프로파간다 모델의 첫 번째 사항입니다. 이것은 엘리트들의 지적 전통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아온 사상입니다.

 

두 번째 사항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프로파간다 모델은 일종의 사전 개연성prior plausibility을 갖고 있습니다. 언론의 구조를 살펴보면 대기업 언론사들은 미국 사회처럼 기업이 지배하는 사회의 프로파간다 기능에 복무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사항은 일반 대중이 프로파간다 모델의 기본 특징에 동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것과는 다르게, 여론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일반 대중들은 언론이 권력에 너무 순종적이고 복종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론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이미지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것이지만 아무튼 일반 대중은 언론을 그렇게 보고 있는 겁니다.

 

(중략)

 

자, 다시 세 가지 초기 관찰 사항으로 돌아갑시다. 네 번째 관찰 사항은 프로파간다 모델의 경험적 타당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사태의 핵심이지요. 프로파간다 모델이 기술하는 사항은 정확한가? 다시 말해 언론은 "전통적 제퍼슨 식 역할(민중의 등불)"을 수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프로파간다 모델"을 착실히 이행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흡족하게 대답하기 위해서는 조사를 많이 해야 하고 관련 자료를 광범위하게 섭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주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 방법의 윤곽만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여론의 조작』에서 프로파간다 모델을 검사한 첫 번째 방식은 그 모델을 가장 엄격한 테스트에 회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반대파들에게 그들이 검사받을 대상을 직접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비판가들이 언제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자기 주장에 유리한 사례만을 뽑았군." 그래서 반대파들에게 검사 대상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스펙트럼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언론의 반정부적 자세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사례들, 그들이 그들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뽑아낸 사례들-가령 베트남 전쟁, 워터게이트, 기타 등등-을 검사 대상으로 삼아서 그들이 프로파간다 모델을 따르는지 아닌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맨 먼저 이런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우리는 반대파에게 검사 대상을 선택하도록 시켰고 그래서 우리가 엉뚱한 사례를 집어들어 우리의 주장을 증명하려 한다는 시비를 사전에 차단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검사한 결과, 여전히 프로파간다 모델이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행한 또 다른 조사 방식은 언론에 실린 의견들의 범위를 문서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류 언론에서 표현 가능한 생각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살펴보려는 거였지요. 우리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면밀히 살폈습니다. 우리는 서로 유사하여 짝을 이루는 듯한 사례를 언론이 어떻게 다루는지 조사했습니다. 물론 역사는 조사연구자들 좋으라고 통제 가능한 실험 사항들을 일부러 제공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서로 비슷해 보이는 역사적 사건들이 많습니다. 언론이 그 두 사건을 어떻게 다루는지 비교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우리는 적성국가들이 저지르는 잔학행위와 비슷한 규모로 미국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언론이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적성국과 우방국의 선거 결과나 자유의 문제를 어떻게 보도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 밖에도 우리가 조사한 토픽들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우리는 생각해낼 수 있는 여러 방법론적 관점들로부터 많은 사례들을 연구했습니다. 우리의 연구는 프로파간다 모델을 확인해주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주장을 확인해주는 다른 사람들의 책자나 논문들도 수천 건에 달합니다. 그래서 나는 프로파간다 모델이 사회과학에서 가장 잘 입증된 명제의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알기로 이 명제에 반대하는 의논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류 문화는 이런 사실("언론은 프로파간다 모델을 따른다")에 대하여 오불관언("나하고는 관계없음")의 자세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가 사회과학 분야에서 아주 확실하게 정립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류 문화는 그들과 무관한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자연과학 수준에서 증명해도 주류 기관들은 여전히 배척할 겁니다. 왜 이렇게 배척하는가 하면 프로파간다 모델이 옳은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모델은 아무리 잘 증명되어도 엘리트 문화 내에서는 이해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말이지요, 이 모델이 밝혀내는 바가 아주 효율적이고 유익한 이데올로기적 제도를 뒤흔들기 때문이지요. 그런 제도에 역기능을 하니까 배제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촘스키, 세상의 물음데 답하다 1」中 프로파간다 모델의 시험 50-57p, -

*1989년 4월 15-16일, 메사추세츠 주 로우에서 열린 주말 공개 토론회를 바탕으로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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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간다의 힘에 대해서 

행인과 일월산(이하 존칭 생략), 두분의 대화를 오늘 비로소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저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는 대화입니다. 특히 일월산에게 구체적 해법에 대해서 추궁하는 것은 '일월산이 제대로 임자 만났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디 두분이서 서로 내용을 채워가는 좋은 대화를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행인의 마지막 글 [프로파간다가 세상을 변혁하나?]를 읽고 문득 드리고 싶은 말이 두가지 정도가 있어서 글을 씁니다. 그 두가지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식권력, 2) 구체성의 정체...이런 두가지입니다. 

1) 지식권력 없이는 변혁은 불가능하다
먼저 행인의 질문 [프로파간다가 세상을 변혁하나?]에 대해서 저는 아주 명확한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프로파간다와 그렇지 못한 프로파간다가 있다"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프로파간다>...이것은 모든 정치투쟁의 필수요소입니다. 저는 이것을 군사력과 맞먹는 또는 더한층 질기고 지속적인 권력으로 규정합니다. 저는 이것을 <지식권력>이라고 부릅니다. 토마스쿤의 패러다임이나 맑시즘 계열의 이데올로기 또는 주체화 양식 또는 담론권력 등등, 뭐라고 불러도 저에겐 동일한 하나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들입니다(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은 원래 물질과학에 대한 것이지만 저는 그것을 계급담론의 인식투쟁에도 적용가능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프로파간다>입니다. 그것은 기본의 지배이데올로기가 훈육시키고 세뇌시킨 <주체화의 양식>을 거부하게 하고, 새로운 또다른 대안적인 주체화로 시민들을 이끌어 들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것이 바로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패러다임이다'라는 프로파간다>가 등장했따는 사실 자체가 어딘가 기존 주체화양식이 자기모순에 봉착했음을 보여줍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기존 지식권력의 주체화양식의 모순을 헤집고 들어간다는 게 맞겠습니다. 예를 들면, 상식-원칙-합리를 표방한 '진보개혁 신주류'가 <국익, 국가이성, 민족평화, 국민통합>이라는 명분으로 <전쟁반대 파병찬성>같은 자가당착을 저지른다거나, 평화와 휴머니즘 교육으로 철저하게 강조해 왔던 그간의 미국교육계가 이번 자국 정부의 전쟁광기와 학살로 곤욕스러워 하는 것이라든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평등을 떠들던 구 사회주의 사회가 실제로는 퇴화된 국가노예제가 되어버리는 것 등이 그런 예입니다. 

이처럼 한 사회의 기본적인 생활관계가 질곡을 드러내면, 지배적인 지식권력의 주체화양식의 자기모순과 균열을 치고 들어가면서 새로운 대안을 내세우는 가지각색의 지식권력'들'이 출현합니다. 그리고 현실세계에서 정치세력들의 군웅할거처럼 지식권력들 역시 자신들의 부족적 진리와 진영 멘탈리티를 '선험화하고 보편화하려는' 투쟁에 돌입합니다. 지식권력이 되고자 하는 이런 다양한 시도들 가운데 오직 극소수만이 유능하고 실력있으며 세력있는 부족원들을 규합해 냅니다. 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그러한 대안적인 지식권력들이었습니다. 지식권력으로의 정립을 위한 여러가지 선전선동 및 의식화과정 자체가 새로운 주체화양식의 작동이지만, 그 실내용은 그리 고상한 것이 아닙니다.

지배적 지식권력에 세뇌되고 훈육된 대부분의 노예들-쁘띠들의 지적 수준은 대단히 빈약합니다. 왜냐면 부르조아는 결코 이들이 피착취 대상물질에 적당히 머물 정도로만 교육시키지, 진짜 부르조아 지식권력의 핵심인 반동적 유물론-이기적 실용주의를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부르조아들은 이들 쁘띠들을 <바른생활>하는 도덕적 관념론자들로 사육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더욱 도움이 되는 것을 정확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권력투쟁들은 태반이 이미지-상징조작의 심리전에 심혈을 기울이게 됩니다. 쁘띠들은 정확하게 리얼리티를 보지 못하며, 이미지-상징으로 조작된 <사연들의 세계> 속에서 흥청망청대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행인이 잘 이해했으면 합니다. 프로파간다의 대상층의 특징 말입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인식심리 상의 특징을 지닙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이미 쓴 글들 '불공정'이란 키워드로 내용검색바랍니다)

1) 인식할당을 불공정하게 합니다
2) 좌파상식에 대한 전이해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3) 잇슈들의 신분차별에 젖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프로파간다>가 되려면 지배적 지식권력의 주체화 양식 하에서 철저하게 쁘띠들의 골수에 새겨진 이 3가지 인식심리를 돌파해야 합니다. 어떻게?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두번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2) 구체성의 정체
행인이 일월산에게 집요하게 요구하는 '구체적 해법'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구체적 해법의 난점이 나타납니다. 말 그대로 구체적 해법이기 위해서는 전문성이 반드시 갖추어져야 합니다. 여기서의 전문성은 교수나 자격증 소지자가 아니라, <해당 문제의 해결을 마련키 위해 철두철미하게 전념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한 인간이 모든 분야에 전문적일 수 없다>는 난점과 충돌합니다. 왜 이게 <프로파간다>에 큰 장애가 되느냐하면 이렇습니다.

<구체적 해법을 제시못하면 주디질 고마해라>가 행인의 주장이라면 그것은 <전문적이지 않다면 해법을 제시할 수 없다>가 됩니다. 구체적 해법이 전문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해당 문제의 전문성을 갖춘 자들만이 주디질할 수 있고, 나머지는 걍~ 관련 사연들이나 읊조려라고 한다면, 이것 속에는 <거대서사는 무용하다>,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프로파간다는 무용하다>라는 이론적 허무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저는 이미 아나키와 오늘 이야기를 나눈 바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이론적 허무주의에 대해서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나무에 대한 집중과 함께 숲을 보는 통찰력 또한 필요합니다. 길을 가는 자들이 지도나 나침반없이 어떻게 여행을 하겠습니까? <전문성에 대한 강조>가 <거대서사에 대한 일방적 부정>으로 이어진다면 이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불필요한 적대관계가 빚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그간 상대적으로 빈약한 구체적 해법의 절대부족이라는 작금의 문제를 무시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구체적 해법>이 할 수 없는 역할, 즉 전략적 지도map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반적 추상적 거대서사> 역시 지식권력 형성에 중요합니다. 특히 지식권력은 쁘띠들 가운데서 선진적인 의식층들의 이탈로부터 형성됩니다. 이들 선진적인 의식층들의 특징은 <새로운 통찰과 안목의 요청>입니다. 이것이 이미지-상징조작에 세뇌된 대부분의 하수 쁘띠들과 다른 선진적인 의식층들의 특징입니다.

게다가 띠리한 이들 하수 쁘띠들은 <구체적 해법> 그자체에도 별반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면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인식할당의 불공정, 좌파상식 전이해 결여, 잇슈의 신분차별>에 푹 젖어서 살기 때문에 백날 설득해 보았자 이해를 못합니다. 헛수고 입니다. 오히려 이들 쁘띠 하수들에게 유효한 지식권력 프로파간다 방식은 행인이 말한 <구체적 해법의 실천 사업-제도화>입니다. 이 미묘한 차이가 이해됩니까? <구체적 해법의 프로파간다>는 무용지물이며, 오로지 <구체적 해법의 사업-제도화>만이 하수 쁘띠들에게 먹힌다는 점입니다.

즉, 인터넷 상에서의 담론교환행위 자체가 일정 이상의 쁘띠 선진층들 이상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구체적 해법>의 토론과 축적이 사실상 넷 좌파의 지식권력에 별반 관심도 관련도 없는 하수 쁘띠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것이라는 묘한 어긋남이 있습니다. 지들을 위해 애를 쓰는 자들에게 정작 일반 쁘띠 하수들은 무관심하게 대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배적 지식권력의 주체화에 세뇌된 쁘띠들의 오늘 현실입니다. 이렇습니다. <구체적 해법의 축적>은 대단히 소중합니다. 저는 그렇기에 <불온이스크라>가 일상에 숨겨진 정치의 발견이자, 초국적 금융자본 단계의 노동계급형성을 위한 새로운 거대서사의 제조창이자 그것이 다성적이고 다양한 미시적 구체적인 해법들의 집적소이길 기대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관계의 정치>를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좌파적 모든 대안의 철학은 <관계가 건강해지면 (그 관계의 총체인) 개인도 건강해진다>이지 그 반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자칫 <구체적 해법과 전문성 강조>가 근시안적인 축소로 인해서 누락시키기 쉬운 <관계의 정치>를 <일반적 추상적 거대서사>가 튼실하게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이해 되시지요? 자본주의는 고립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고립조차도) 관계의 그물망입니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 그러므로 자칫 <구체적 해법>은 자기가 다루는 분야의 사안에만 집중한 나머지, 해당 사안이 전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같은 관계의 걉과 폭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좌파의 정치가 <관계의 정치>라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구체적 해법>과 <관계의 전략적 통찰>, 이 양자가 둘 다 소중합니다. 특히나 변모된 초국적 금융자본의 공세 속에서 <새로운> 패러다임과 전략들 그리고 해법들의 조속한 성장과 축적이 절실합니다. 두분 사이의 좋은 대화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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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러명의 모험가들을 알고 있다. 콜롬보스나, 제임스 쿡, 암 스트롱, 마르코 폴로...
그러나 저자는 생소한 이름이긴 하지만 남극 탐험사에 관한 거론에서는 절대 빠지지 않는, 어니스트 섀클턴 경(Sir, Ernest Shackleton)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는 무려 3차례에 걸쳐 남극을 탐험했다. 1901년에 로버트 스콧대령 휘하에서, 1907년 독자적으로 탐험대를 이끌고, 1914년에 세번째 남극 탐험을 떠났다.
우리는 세 번째 남극 탐험을 고려할 것이다. 무려 635일간의 사투가 진정 어떤 의미를 주는지에 대해서..

1913년 섀클턴은 "대단히 위험한 탐험에 동참할 사람을 구함. 급여는 쥐꼬리만함. 혹독한 추위와 암흑과 같은 세계에서 여러 달을 보내야 함. 탐험 기간 동안 위험은 끊임없이 계속될것이며, 무사히 귀환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음. 그러나 성공할 경우 명예와 만인의 사랑과 인정을 받게 될 것임."이란 문구의 탐험대 모집 광고를 냈고, 3명의 여자를 포함한 5000여 명의 지원자 중에 각계각층의 28명 탐험대원으로 출발 하였다. 선원의 비율이 많긴 하였지만, 생물학, 지질학, 물리학, 생화학드을 전공하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강사들, 어부,의사, 사진사, 조각가등 언뜻 오합지졸처럼 보이는 이들이 남극에서 극적으로 630여일을 버텨내었다.


예상 경로는 사우스조지아 섬을 출발, 웨들 해를 거쳐 남극 대륙에 상륙한 후 2400킬로미터를 걸어서 이동한 다음, 남극점을 거쳐 반대편 해안인 로스해로 빠져 나오는 것이다. 예정대로면 하루에 최소한 24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했다. 

이들은 2년 넘게 걸려 버려져 있던 폴라이스 호를 인수하여 '인듀어런스(Endurance)라 부르고, 1914년 8월 1일에 출정의 돛을 올렸다. 불행하게도 출항일과 거의 동시에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총동원령이 내렸지만, 해군성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 경이 계속 항해를 하게 해 주었다.
2달 간의 항해 끝에 11월 5일, 남극 탐험의 전초 기지인 사우스조지아 섬의 그리트비켄 포경 기지에 도착했다. 다시 한 달 후인 1914년 12월 5일에 출발하여 1915년 1월 전에 웨들 해를 건너 남극 대륙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부빙들과 마주쳐 1915년 1월 18일 부빙속에 꼼짝없이 갇히게 되었다. 2월 24일 결국은 풀려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갇힌 채 겨울을 나기로 결심한다.
드디어 5월초, 해가 마지막으로 수평선 위로 떠오랐다가 천천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극의 밤이 시작되어 79일간 암흑의 시간을 이겨 내야만했다. 사람은 해를 보지 못하면 우울증에 걸리는데,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만났기에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다.

8월 1일 드디어 부빙이 갈라졌지만, 더 큰 위기가 온다. 배를 둘러싸고 있던 부빙들이 배를 들이박기 시작한 것이다. 10월 27일 드디어 배를 포기하고 탈출하게 된다.
이들은 폴렛 섬을 향해 행군을 하기로 결심한다. 북서쪽으로 약 557킬로미터 떨어진 그곳에 1902년 스웨덴 탐험대가 만든 오두막과 비상 물품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짐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10월 30일 드디어 행군을 시작한다. 하지만 하루에 1킬로미터도 전진하지 못했다. 얼음위를 걷기에 보트를 들고 가야했지 때문이다.
결국 11월 1일 걸음을 멈춘 섀클턴은 일명 '오션 캠프(Ocean Camp)'를 치고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그곳에서 버티자고 제안한다. 이들은 이제 살아남는것이 문제였다. 오직 음식으로만 체온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고래 기름까지도 먹을 태세였다.
부징 군집은 하루 3킬로미터로 전전히 이동하엿지만 그들은 부빙위에서 북쪽으로 130킬로미터를 이동하였다. 
12월 23일 더 이상안되겠다는 판단하에 이동을 개시했지만 2킬로미터의 전진에 그쳤다. 결국 다시금 행군을 멈추고 '페이션스 캠프(Patience Camp)'를 쳤다. 1916년 4월 9일 그들은 인듀어런스 호의 목재를 이용해 선체를 보강한 3척의 보트, 제임스 커드호, 더들리 더커 호, 스탠콤 윌스 호를 바라에 띄웠다. 교대로 노를 저어가면서 힘겨운 여정을 이어가는 동안 섀클턴은 거의 잠을 자지 못하였다. 언제 어디서 부빙이나 빙산이 덮칠지 몰랐기 때문이다.
1916년 4월 15일 드디어 뭍에 발을 내려 놓았다. 출항을 시작한 날로 497일 만의 일이었다.
비록 폭 30미터 길이 15미터에 불과한 엘리펀트 섬의 귀퉁이였음에도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쓰러지고  쉬려고만 하였으나 섀클턴은 안주하면 죽는다고 생각하여 1916년 4월 24일 5명의 대원만을 대리고 바다에 배를 띄웠다. 그는 사우스조지아 섬에 닿을 확률이 거의 희박한 것을 알았지만 모험을 시작하였다.
기다리는 이들도 언제 올지모를 사람들을 기다리며 체념할 수도 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들을 언급하며 구조선이 오리라는 기대를 결코 놓지 않았다.

1916년 5월 10일 섀클턴과 5명의 대원들은 기어코 기적적으로 사우스조지아 섬에 도착하였다.
부서지기 직전의 보트로 섬 맞은편의 포경 기지까지 돌아가는 것은 무리였다. 대원들은 고개를 저엇던 해발 3000미터가 넘는 산을 넘자고 섀클턴은 말하였다. 
뜻을 같이 하기로 한 대원 2명과 산을 올랐다. 방전될 대로 방전된 상태에서 산을 오랐고 그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미끄럼 타듯 산을 내려갔다. 
 
드디어 5월 20일 3명은 스트롬니스 포경 기지에 도착하였다.

다음 날인 5월 21일 나머지 3명의 대원이 먼저 구조되고, 3일째 되는날 나머지 대원을 구조할 배가 떠났지만 불과 60여 킬로미터 앞두고 부빙 군을 만나 회항하고 말앗다. 
아직 세계대전 중이라 더 큰 배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4개월이 지난 8월 25일, 칠레 정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얼음 없는 바다에서만 항해하라는 조건을 달고 옐코 호를 내주었다. 
1916년 8월 30일 마침내 엘리펀트 섬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섬에서는 기적처럼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쌍안경을 든 섀클턴은 서둘러 대원들의 숫자를 세어 보았다.
정확히 22명, 한 사람도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아 있었다. 
얼마나 눈시울이 뜨거워 졌겠는가.. 이글을 치고 있는 나도 가슴이 뭉클해지는데...

비록 남극 횡단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그보다 값진 것을 얻었다. 다름 아닌 27명의 생명.
그들은 1914년 8월 1일 영국을 떠난지 760여 일만에, 1914년 12월 5일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출발한지 635일 만에 문명 세계로 쉬환할 수 있었다.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절망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환은 결국 위대함은 절망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라는 진리를 전 세계에 공표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어떻게 모두 돌아 올 수 있었을까? 섀클턴의 어떤 리더십이 발휘된 것일까?
첫째, 대원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주인으로 느끼게 하였다. 
'당신들이 바로 탐험의 주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그들이 스스로 운면의 주인이 되었다.
둘째, 그는 불필요한 것은 가차 없이 버렸다.
배가 난파된 후 비상식량이 저장되어 있는 폴렛 검까지 약 557킬로미터를 행군할 계획이었고, 살아남기 위해 짐을 최소화했다. 생존을 위한 희망만 빼고 쓸데없는 것은 모두 버렸다.
셋째, 그는 오기를 부리지 않았다.
폴렛 섬까지의 행군은 무리라는 사실이 얼마 안가 드러나자 즉시 행군 계획을 중단했다. 그는 포기해야 할 것을 빨리 포기할 줄 알았으며, 자신의 자존심보다는 27명의 생명을 존중했다.
넷째, 그는 어떠한 위기상황에서도 미래를 준비했다.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엿보았다. 결국 그들을 살린 것은 절망적인 위기 속에서도 끊임없이 손질했던 3척의 보트였다.
다섯째, 그는 최종 목표를 잊지 않았다.
497일만에 흔들리지 않는 엘리펀트 섬 해안에 닿았을때, 안주하고 싶은 유혹이 충분히 들 만했다. 하지만 거기는 그들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결국 섀클턴은 대원들에게 이섬에 안착하는 것이 목표가 아님을 확실히 주지시켰다.
여섯째, 그는 과감하게 도전했다.
사우스조지아 섬에 가기위해 탈 수 있는 보트는 1척이었고, 항해마저도 해류와 바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배를 다시 얼음 바다 위에 띄웠다. 삶의 기회는 과감히 도전하는 자에게 미소를 짓는 법이다.
일곱째, 그는 끝까지 책임졌다.
기적처럼 사우스조지아 섬의 서쪽 해안에 닿았고, 다시금 선의 산 정상을 넘어 동쪽의 포경 기지에 닿았다. 그렇게 생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섀클턴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엘리펀트 섬으로 되돌아갔다. 어쩌면 영영 돌아 올 수 없을지 모르는 그 악몽 같은 바닷길을다시 거슬러간 것이다.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서.결국 남은 22명의 대원 모두를 살려냈다. 인간이란 책임지는 만큼 존재한다. 

섀클턴과 27명의 대원은 애초 계획인 남극 횡단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실패는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 그 어떤 성공보다도 위대한 것을 이워냈기 때문이다.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를 펼쳐 보임으로써 도전와 모험의 위대함을 일깨워 주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21년 9월 17일, 섀클턴은 또 다시 남극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남극 대륙에 다시 발을 딛기 직전에 삶을 마감했다. 시신은 사우스조지아 섬에 묻혔다. 하지만 그의 도전과 모험을 향한 열망은 지금도 살아 남아 현실에 안주하려는 우리를 깨우고 있다. 그는 지금도 말하고 있다. 
"모험하라.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모험하라."




부끄럽다.. 이글을 읽을때도 그랬고.. 이글을 다시 올리면서도 그랬다.
악조건이 아님에도 더 이상 악조건은 없을거라 합리화하면서 진행을 멈추었던 것들이 생각난다.
솔직히 그것들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지만, 그러면서 다시금 그런 시간이 되면 그러하지 않고 어떠한 것이 와도 부딪힐수 있을 거라는 생각만하였지. 
스스로 만들어 내고 부딪히고 헤쳐나가려 뛰어들지 않고 안주하고 있는 모습에 나 자신이 부끄럽다.

글을 읽으때는 막연한 생각이 들고 가슴도 뭉클해서 여러가지 생각들을 못했는데, 글을 올리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진정한 모험가 섀클턴이 나에게 말하고 있는듯하다.
도전하라. 무엇이든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도전하라. 그리고 역경에 부딪히라. 또한 동료를 생각하면서 오기를 부리지 말라. 현실을 직시하고 제대로 파악해서 빠른 판단으로 역경을 역경대로만 받지, 그것을 부풀리지 말라.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목표를 잊지말라.

모험.. 모험.. 
언제부턴가 쉬운것들만 찾고 계산만 해보고 있는 나 자신에게 일침을 준다.
예전 첫 배낭여행을 마치고 다시금 떠나는 두번째 여행은 나에게 잊지못할 감동과 추억을 주었다. 특히 그 여행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힘든일들을 주었고, 그렇지만 즐거움을 배가 시켜 주었다.
부딪혔다. 고생을 자처했다. 그렇지만 그것들에서 제대로 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다른 문화를 가진 그들의 진정한 모습들을 관찰할 수 있었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도 있었다. 

도전하고 모험하는 그 순간 패배를 이겨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사진을 몇 장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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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공하기 위한 00가지 전략(지혜)' 따위의 글을 읽거나 스크랩하길 즐긴다.

그런 글을 읽으면 금세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좋은 '조언'이 실제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 주지는 못한다.

돌아서면 자신의 실제 삶과 상관없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지식 그 자체가 행동을 변화시키고 삶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지식이 곧 성공을 만드는 마스터 키도 아니다.

 

서점에 가 보면 또 수많은 성공을 다룬 서적들이 쏟아져 나온다.

큰 꿈을 키워야 성공한다는 주장도 있고, 인맥이나 미소 혹은 칭찬의 말 등을 활용해야 성공한다는 내용도 있으며, 믿으면 된다거나 긍정적으로 살면 모두 이루어진다.  아이디어가 좋거나 상대의 감성을 울려야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책들도 있다.

저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고개를 끄덕이게도 한다.

그러나 그런 성공가이드가 사람들의 실제 삶에 크게 도움이 될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어느새 새 책을 찾는 중독증만 심해간다.

 

성공을 가이드 하는 지식은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며, 특히 성공이란게 따지고 보면 어떤 한 특정 요소로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성공 명언들을 살펴보자.

[성공명언]

1. 꿈을 꾸는 사람은 성공할 것이다.

2. 자신의 끼를 발견하는 사람은 성공할 것이다.

3. 아이디어 하나만 있으면 성공할 것이다.

4. 인맥이 풍부한 사람은 성공할 것이다.

5. 추진력이 뛰어난 사람은 성공할 것이다.

6. 이미지를 잘 가꾸는 사람은 성공할 것이다.

7. 열정이 있으면 성공할 것이다.

 

어떤가?  누구나 이런 말에 동조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말들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조금 바꾸어 다시 읽어보자.

 

[실패명언]

1. 무조건 꿈만 꾸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한다.

2. 자신의 끼만 믿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한다.

3. 머리 속에서 아이디어만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한다.

4. 인맥만 활용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한다.

5.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만 하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한다.

6. 이미지만 포장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한다.

7. 열정만 믿고 아무 전략 없이 준비되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성공을 위한 조언은 이렇게 동전의 양면처럼 성공명언도 되고 실패명언도 된다. 

우리는 성공요소라고 주장하는 것들에 반(反)하여 그속에서 진정한 성공의 길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수 많은 성공서들이나 성공 자들의 조언은 '성공명언'에 대해서만 집중 부각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의 공감을 쉽게 이끌어 낸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면이기도 한 '실패명언'에 대해서는 결코 말해 주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일반인은 성공명언에 매달려 실천해도 현실에서 목표를 이뤄내기 힘들어진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라. 성공하는 이보다 실패하는 이들이 더 많은 이유가 뭘까?

나는 사람들이 바로 '~만 있으면 성공할 것이다'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성공을 부르는 최고의 전략인 "감칠맛 전략 꿈 끼 꾀 꼴 깡 꼴 꾼"도 자칫 잘못 이해하면 실패명언이 된다.

 

 

 

[실패유형]

 
〔꿈〕만 꾸는 유형

자신의 조건과 상황,자본,노동력,전문성 등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무조건 거창한 꿈을 꾸다 실패하는 사업가.

 
〔끼〕(재능)만 믿는 유형

타고난 재능 하나만 믿고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지 않다가

 금세 대중에게 외면 받는 스타.

 
〔꾀〕(이번 아이디어는 대박)만을 외치는 유형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늘 내지만 한 번도 실행해 보지 않는

 입으로만 벤처 준비생.

 
〔끈〕(인맥)만 믿는 유형

 네트워크의 풍부한 인맥을 형성해 놓고도

 전혀 실제 자신의 목표에 적용할 줄 모르는 이들.

 
〔깡〕만 믿는 유형

 아무런 전략도 준비도 없이

 무조건 깡다구만 있으면 된다는 운동선수.

 
〔꼴〕(겉포장)만 중요시하는 유형

 알맹이 없이 겉으로만 멋지게 이미지 포장을 해놓고

 왜 내 것은 예쁜데 안 팔리느냐는 쇼핑몰 상품판매자.

 
〔꾼〕이지만 진정한 프로는 아닌 유형

    올바른 비전도 없이, 긍정적인 목표도 없이

    세상에 도움 되지 않는 수많은 꾼들.

 

원대한 꿈만으로, 넘치는 끼만으로 반짝 떠오른 아이디어 하나만으로풍부한 인맥이나 깡다구 하나만으로 성공에 이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사실 처음엔 그럴 듯해 보인다.

 

하지만 한 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 성공비결은 여러 성공요소 중 그저 한 가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성공요소 중 자신에게 없는 요소는 무엇인지, 내게 부족한 것이 어떤 것인지 끊임없이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채우고 만회해 나가야 한다.
그게 진짜 실제로 우리 자신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이다.

 

1단계 [꿈]

비전이자 목표. 자신이 진정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찾아내고 목표를 분명히 정하는 것이 바로 꿈이다.

 

感2단계 [끼]

타고난 능력. 이것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주무기를 뜻한다. 어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만의 차별화된 끼를 발견해내고 시대의 트렌드를 잘 읽어야 한다.

 

3단계 [꾀]

기획력. 무엇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를 구상하여 성공으로 가는  설계도를 그리는 작업이다.

 

4단계 [끈]

과거엔 끈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의미의 이나 연줄을 뜻했다. 하지만 이제는 인간관계, 폭넓은 사회성, 네트워크십 등을 가리킨다바로 신 인맥을 뜻하는 공존지수다.

 

5단계 [깡]

실행력 또는 추진력이 깡이다. 구상에 머물지 않고 몸으로 부딪쳐 실제에 적용시켜보는 단계다 이 단계에서는 배짱과 오기가 요구된다.

 

6단계 [꼴]

모양이나 생김새를 뜻한다. 친밀한 얼굴, 개성 있는 이미지, 멋지고 세련된 제품 디자인, 시대의 흐름을 이끄는 감각. 꼴은 이 모든 것을 의미한다.

 

7단계 [꾼]

전문가 정신을 의미한다자 신의 장점을 파악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로 무장해 자신을 성장시켜 나가다 보면 어느 새 전문가가 돼 있을 것이다.

 


진짜 성공을 만드는 법칙은 어느 하나의 힘이나 지식이 아니라
바로 꿈->->->->->->꾼 이란 성공을 이루는 7가지 요소를 단계별로 갖추어나갈 때 만들어진다는 사실을결코 잊지 말라.
'~
'있으면 된다는실패법칙 7가지의 믿음을 깨뜨려라.

 
그것이 바로 성공법칙 7가지인 ' 감칠맛전략  꿈 끼 꾀 끈 깡 꼴 꾼 ' 의 가장 중요한 핵심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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