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 허만과 나는『여론의 조작 Manufacturing Consent』이라는 언론 관계 책자를 공저했는데, 이 책에서 "프로파간다 모델Propaganda Model"이라는 자명한 이치를 설명했습니다. 이 모델을 적용해보면, 언론 기관은 그들의 이익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업으로서 오랫동안 존속하지 못할 거니까. 그래서 프로파간다 모델이 언론의 형태를 분석하는 유익한 도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뭐 그리 심오한 도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론의 조작』에서 우리는 두 개의 모델(① 언론이 마땅히 기능해야 하는 방식, ② 언론이 실제로 기능하는 방식)을 대비시켰습니다. ①의 모델은 전통적인 것입니다. 이것은『뉴욕 타임스』가 최근에 자사 발행의 『북 리뷰』에서 "정부를 견제하는 제퍼슨식 언론의 역할"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국민들의 알 권리를 보호하고, 정치 과정에서 일반 대중이 의미 있는 통제를 가하도록 돕기 위하여, 까다롭고, 고집 세고, 어디에서나 출현하는 언론, 그리하여 당국의 권력자들을 괴롭히는 그런 언론이 바로 ①의 모델입니다. 바로 이것이 미국 내의 표준적인 언론 모델이고 언론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은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②의 모델은 언론이 실제 행동하는 방식으로서, 국내의 경제를 장악하고 나아가 정부까지 상당 부분 통제하고 있는 특혜 그룹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아젠다를 보호하고 확충하는 세계관을 대변하는 언론입니다. ②의 모델에 따르면, 언론은 기사를 선정하는 방식, 관심사를 분배하는 방식, 문제의 틀을 정하는 방식, 정보를 여과하는 방식, 분석기사를 집중하는 방식, 그 밖의 다양한 테크닉을 통하여 그들의 사회적 목적에 봉사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언론이 어느 때든 국가 정책에 일방적으로 동의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부 권력의 장악은 우리 사회 내의 다양한 엘리트 그룹들 내에서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제계의 어떤 부분이 어떤 특정 기간에 정부를 장악했다는 사실은,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정치 스펙트럼의 한 부분이 그런 힘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엘리트들끼리도 전략적 의견 불일치가 때때로 생겨날 수 있습니다. "프로파간다 모델"은 이렇게 예측합니다. 언론에는 정치 스펙트럼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가 반영된다. 따라서 언론에 의해서 포섭되지 않는 정치 스펙트럼은 없다.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고요? 물론 이것은 거대하면서도 복잡한 주제입니다. 우선 네 개의 기본적 관찰 사항을 얘기하고 그 다음에 좀더 자세히 들어가 보기로 합시다. 첫 번째 사항은 프로파간다 모델이 엘리트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사실 서방의 엘리트 민주 사상가들 사이에는 그런 전통이 강하게 이어져 왔습니다. 이 사상가들은 언론과 지식인 계급이 프로파간다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른바 "대중의 정신the public mind"을 통제함으로써 일반 대중을 주변화해야 한다고 보았던 겁니다. 이 사상은 300년 동안 영미 민주사상의 핵심 주제였고 현재까지도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사상의 근원을 소급해 보면 서구의 최초 민중민주 혁명이었던 1640년대의 영국 내전(1642~1648년 동안 영국의 정권 장악을 놓고 왕당파와 의회파가 벌인 무력 충돌)까지 올라갑니다.

 

당시의 영국 내전에는 두 파의 엘리트가 참여했습니다. 한 파는 의회의 편을 든 지주 계층과 신흥 상인 계층이었고, 다른 한 파는 전통적인 엘리트 그룹인 왕당파였습니다. 이 두 파는 엘리트 갈등의 맥락에서 발달한 대중들의 움직임을 우려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모든 권위-주종 관계, 국가 당국자의 권위 등-에 도전하는 민중운동이 생겨났던 겁니다. 그 당시 인쇄기가 막 발명되었기 때문에 과격한 책들이 많이 출판되었습니다. 영국 내전의 양쪽 엘리트들은 일반 대중이 갑자기 통제 불능의 상태로 빠져드는 것을 굉장히 우려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반 대중은 너무 호기심이 많고 너무 거만하여 민간 통치에 승복하려는 겸손한 마음이 조금도 없다." 이처럼 왕당파와 의회파는 일반 민중을 힘으로 찍어누르는 능력을 상실해갔고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취한 첫 번째 조치는 힘으로 찍어누르는 능력을 다시 도입하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당분간 철권통치하는 절대국가가 들어섰습니다. 그런 다음에 왕정이 다시 도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왕정은 모든 것을 회복시키지는 못했고 정권을 완전 장악하지도 못했습니다. 민중 운동이 치열하게 투쟁했던 목표들이 상당수 영국의 정치적 민주주의에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이후 민중운동은 기존의 권력을 어느 정도 해체하는 데 성공해 왔습니다. 그러자 서방의 엘리트들 사이에는 이런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무력으로 국민을 통제할 힘이 점점 사라져간다면, 대안으로 국민의 생각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나가야 하겠다. 이러한 인식은 미국으로 건너와서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20세기에 들어와 미국 사상에는 이런 주요한 흐름이 형성되었습니다. 그것은 정치학자, 언론인, 홍보 전문가 등 권력가 밀착된 사람들의 주요 사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 사상은 국가가 힘으로 국민을 강제할 능력이 없으니까, 엘리트가 앞장서서 공공의 마음을 통제하는 효과적인 프로파간다를 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미국 언론계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의 생각입니다. 그는 일반 대중을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무리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리프먼은 이 대중들 사이에 "합의의 조성manufacture of consent"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말했는데 더 쉽게 말하자면 여론조작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무력으로 안 되니까 계산된 "합의의 조성"으로 통제를 계속해나가자는 것이었지요.

 

1920년대 당시 홍보산업의 주요 교범은 아예 제목이『프로파간다』였습니다(그 당시 사람들은 좀더 정직했었지요). 이 교범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대중의 습관과 의견을 의식적이고도 조직적으로 조종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민주 체제의 핵심 특징이다. 그 책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지만 대강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이어 교범은 이렇게 말합니다. "소수 지식인들intelligent minorities"의 임무는 대중의 습관과 의견을 이런 식으로 조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으뜸 원칙인 겁니다. 다시 말해 힘으로 사람들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면 세뇌indoctrination가 가장 좋은 방식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프로파간다 모델의 첫 번째 사항입니다. 이것은 엘리트들의 지적 전통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아온 사상입니다.

 

두 번째 사항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프로파간다 모델은 일종의 사전 개연성prior plausibility을 갖고 있습니다. 언론의 구조를 살펴보면 대기업 언론사들은 미국 사회처럼 기업이 지배하는 사회의 프로파간다 기능에 복무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사항은 일반 대중이 프로파간다 모델의 기본 특징에 동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것과는 다르게, 여론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일반 대중들은 언론이 권력에 너무 순종적이고 복종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론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이미지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것이지만 아무튼 일반 대중은 언론을 그렇게 보고 있는 겁니다.

 

(중략)

 

자, 다시 세 가지 초기 관찰 사항으로 돌아갑시다. 네 번째 관찰 사항은 프로파간다 모델의 경험적 타당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사태의 핵심이지요. 프로파간다 모델이 기술하는 사항은 정확한가? 다시 말해 언론은 "전통적 제퍼슨 식 역할(민중의 등불)"을 수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프로파간다 모델"을 착실히 이행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흡족하게 대답하기 위해서는 조사를 많이 해야 하고 관련 자료를 광범위하게 섭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주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 방법의 윤곽만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여론의 조작』에서 프로파간다 모델을 검사한 첫 번째 방식은 그 모델을 가장 엄격한 테스트에 회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반대파들에게 그들이 검사받을 대상을 직접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비판가들이 언제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자기 주장에 유리한 사례만을 뽑았군." 그래서 반대파들에게 검사 대상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스펙트럼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언론의 반정부적 자세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사례들, 그들이 그들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뽑아낸 사례들-가령 베트남 전쟁, 워터게이트, 기타 등등-을 검사 대상으로 삼아서 그들이 프로파간다 모델을 따르는지 아닌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맨 먼저 이런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우리는 반대파에게 검사 대상을 선택하도록 시켰고 그래서 우리가 엉뚱한 사례를 집어들어 우리의 주장을 증명하려 한다는 시비를 사전에 차단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검사한 결과, 여전히 프로파간다 모델이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행한 또 다른 조사 방식은 언론에 실린 의견들의 범위를 문서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류 언론에서 표현 가능한 생각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살펴보려는 거였지요. 우리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면밀히 살폈습니다. 우리는 서로 유사하여 짝을 이루는 듯한 사례를 언론이 어떻게 다루는지 조사했습니다. 물론 역사는 조사연구자들 좋으라고 통제 가능한 실험 사항들을 일부러 제공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서로 비슷해 보이는 역사적 사건들이 많습니다. 언론이 그 두 사건을 어떻게 다루는지 비교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우리는 적성국가들이 저지르는 잔학행위와 비슷한 규모로 미국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언론이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적성국과 우방국의 선거 결과나 자유의 문제를 어떻게 보도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 밖에도 우리가 조사한 토픽들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우리는 생각해낼 수 있는 여러 방법론적 관점들로부터 많은 사례들을 연구했습니다. 우리의 연구는 프로파간다 모델을 확인해주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주장을 확인해주는 다른 사람들의 책자나 논문들도 수천 건에 달합니다. 그래서 나는 프로파간다 모델이 사회과학에서 가장 잘 입증된 명제의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알기로 이 명제에 반대하는 의논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류 문화는 이런 사실("언론은 프로파간다 모델을 따른다")에 대하여 오불관언("나하고는 관계없음")의 자세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가 사회과학 분야에서 아주 확실하게 정립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류 문화는 그들과 무관한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자연과학 수준에서 증명해도 주류 기관들은 여전히 배척할 겁니다. 왜 이렇게 배척하는가 하면 프로파간다 모델이 옳은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모델은 아무리 잘 증명되어도 엘리트 문화 내에서는 이해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말이지요, 이 모델이 밝혀내는 바가 아주 효율적이고 유익한 이데올로기적 제도를 뒤흔들기 때문이지요. 그런 제도에 역기능을 하니까 배제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촘스키, 세상의 물음데 답하다 1」中 프로파간다 모델의 시험 50-57p, -

*1989년 4월 15-16일, 메사추세츠 주 로우에서 열린 주말 공개 토론회를 바탕으로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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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간다의 힘에 대해서 

행인과 일월산(이하 존칭 생략), 두분의 대화를 오늘 비로소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저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는 대화입니다. 특히 일월산에게 구체적 해법에 대해서 추궁하는 것은 '일월산이 제대로 임자 만났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디 두분이서 서로 내용을 채워가는 좋은 대화를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행인의 마지막 글 [프로파간다가 세상을 변혁하나?]를 읽고 문득 드리고 싶은 말이 두가지 정도가 있어서 글을 씁니다. 그 두가지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식권력, 2) 구체성의 정체...이런 두가지입니다. 

1) 지식권력 없이는 변혁은 불가능하다
먼저 행인의 질문 [프로파간다가 세상을 변혁하나?]에 대해서 저는 아주 명확한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프로파간다와 그렇지 못한 프로파간다가 있다"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프로파간다>...이것은 모든 정치투쟁의 필수요소입니다. 저는 이것을 군사력과 맞먹는 또는 더한층 질기고 지속적인 권력으로 규정합니다. 저는 이것을 <지식권력>이라고 부릅니다. 토마스쿤의 패러다임이나 맑시즘 계열의 이데올로기 또는 주체화 양식 또는 담론권력 등등, 뭐라고 불러도 저에겐 동일한 하나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들입니다(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은 원래 물질과학에 대한 것이지만 저는 그것을 계급담론의 인식투쟁에도 적용가능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프로파간다>입니다. 그것은 기본의 지배이데올로기가 훈육시키고 세뇌시킨 <주체화의 양식>을 거부하게 하고, 새로운 또다른 대안적인 주체화로 시민들을 이끌어 들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것이 바로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패러다임이다'라는 프로파간다>가 등장했따는 사실 자체가 어딘가 기존 주체화양식이 자기모순에 봉착했음을 보여줍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기존 지식권력의 주체화양식의 모순을 헤집고 들어간다는 게 맞겠습니다. 예를 들면, 상식-원칙-합리를 표방한 '진보개혁 신주류'가 <국익, 국가이성, 민족평화, 국민통합>이라는 명분으로 <전쟁반대 파병찬성>같은 자가당착을 저지른다거나, 평화와 휴머니즘 교육으로 철저하게 강조해 왔던 그간의 미국교육계가 이번 자국 정부의 전쟁광기와 학살로 곤욕스러워 하는 것이라든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평등을 떠들던 구 사회주의 사회가 실제로는 퇴화된 국가노예제가 되어버리는 것 등이 그런 예입니다. 

이처럼 한 사회의 기본적인 생활관계가 질곡을 드러내면, 지배적인 지식권력의 주체화양식의 자기모순과 균열을 치고 들어가면서 새로운 대안을 내세우는 가지각색의 지식권력'들'이 출현합니다. 그리고 현실세계에서 정치세력들의 군웅할거처럼 지식권력들 역시 자신들의 부족적 진리와 진영 멘탈리티를 '선험화하고 보편화하려는' 투쟁에 돌입합니다. 지식권력이 되고자 하는 이런 다양한 시도들 가운데 오직 극소수만이 유능하고 실력있으며 세력있는 부족원들을 규합해 냅니다. 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그러한 대안적인 지식권력들이었습니다. 지식권력으로의 정립을 위한 여러가지 선전선동 및 의식화과정 자체가 새로운 주체화양식의 작동이지만, 그 실내용은 그리 고상한 것이 아닙니다.

지배적 지식권력에 세뇌되고 훈육된 대부분의 노예들-쁘띠들의 지적 수준은 대단히 빈약합니다. 왜냐면 부르조아는 결코 이들이 피착취 대상물질에 적당히 머물 정도로만 교육시키지, 진짜 부르조아 지식권력의 핵심인 반동적 유물론-이기적 실용주의를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부르조아들은 이들 쁘띠들을 <바른생활>하는 도덕적 관념론자들로 사육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더욱 도움이 되는 것을 정확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권력투쟁들은 태반이 이미지-상징조작의 심리전에 심혈을 기울이게 됩니다. 쁘띠들은 정확하게 리얼리티를 보지 못하며, 이미지-상징으로 조작된 <사연들의 세계> 속에서 흥청망청대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행인이 잘 이해했으면 합니다. 프로파간다의 대상층의 특징 말입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인식심리 상의 특징을 지닙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이미 쓴 글들 '불공정'이란 키워드로 내용검색바랍니다)

1) 인식할당을 불공정하게 합니다
2) 좌파상식에 대한 전이해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3) 잇슈들의 신분차별에 젖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프로파간다>가 되려면 지배적 지식권력의 주체화 양식 하에서 철저하게 쁘띠들의 골수에 새겨진 이 3가지 인식심리를 돌파해야 합니다. 어떻게?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두번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2) 구체성의 정체
행인이 일월산에게 집요하게 요구하는 '구체적 해법'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구체적 해법의 난점이 나타납니다. 말 그대로 구체적 해법이기 위해서는 전문성이 반드시 갖추어져야 합니다. 여기서의 전문성은 교수나 자격증 소지자가 아니라, <해당 문제의 해결을 마련키 위해 철두철미하게 전념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한 인간이 모든 분야에 전문적일 수 없다>는 난점과 충돌합니다. 왜 이게 <프로파간다>에 큰 장애가 되느냐하면 이렇습니다.

<구체적 해법을 제시못하면 주디질 고마해라>가 행인의 주장이라면 그것은 <전문적이지 않다면 해법을 제시할 수 없다>가 됩니다. 구체적 해법이 전문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해당 문제의 전문성을 갖춘 자들만이 주디질할 수 있고, 나머지는 걍~ 관련 사연들이나 읊조려라고 한다면, 이것 속에는 <거대서사는 무용하다>,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프로파간다는 무용하다>라는 이론적 허무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저는 이미 아나키와 오늘 이야기를 나눈 바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이론적 허무주의에 대해서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나무에 대한 집중과 함께 숲을 보는 통찰력 또한 필요합니다. 길을 가는 자들이 지도나 나침반없이 어떻게 여행을 하겠습니까? <전문성에 대한 강조>가 <거대서사에 대한 일방적 부정>으로 이어진다면 이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불필요한 적대관계가 빚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그간 상대적으로 빈약한 구체적 해법의 절대부족이라는 작금의 문제를 무시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구체적 해법>이 할 수 없는 역할, 즉 전략적 지도map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반적 추상적 거대서사> 역시 지식권력 형성에 중요합니다. 특히 지식권력은 쁘띠들 가운데서 선진적인 의식층들의 이탈로부터 형성됩니다. 이들 선진적인 의식층들의 특징은 <새로운 통찰과 안목의 요청>입니다. 이것이 이미지-상징조작에 세뇌된 대부분의 하수 쁘띠들과 다른 선진적인 의식층들의 특징입니다.

게다가 띠리한 이들 하수 쁘띠들은 <구체적 해법> 그자체에도 별반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면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인식할당의 불공정, 좌파상식 전이해 결여, 잇슈의 신분차별>에 푹 젖어서 살기 때문에 백날 설득해 보았자 이해를 못합니다. 헛수고 입니다. 오히려 이들 쁘띠 하수들에게 유효한 지식권력 프로파간다 방식은 행인이 말한 <구체적 해법의 실천 사업-제도화>입니다. 이 미묘한 차이가 이해됩니까? <구체적 해법의 프로파간다>는 무용지물이며, 오로지 <구체적 해법의 사업-제도화>만이 하수 쁘띠들에게 먹힌다는 점입니다.

즉, 인터넷 상에서의 담론교환행위 자체가 일정 이상의 쁘띠 선진층들 이상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구체적 해법>의 토론과 축적이 사실상 넷 좌파의 지식권력에 별반 관심도 관련도 없는 하수 쁘띠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것이라는 묘한 어긋남이 있습니다. 지들을 위해 애를 쓰는 자들에게 정작 일반 쁘띠 하수들은 무관심하게 대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배적 지식권력의 주체화에 세뇌된 쁘띠들의 오늘 현실입니다. 이렇습니다. <구체적 해법의 축적>은 대단히 소중합니다. 저는 그렇기에 <불온이스크라>가 일상에 숨겨진 정치의 발견이자, 초국적 금융자본 단계의 노동계급형성을 위한 새로운 거대서사의 제조창이자 그것이 다성적이고 다양한 미시적 구체적인 해법들의 집적소이길 기대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관계의 정치>를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좌파적 모든 대안의 철학은 <관계가 건강해지면 (그 관계의 총체인) 개인도 건강해진다>이지 그 반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자칫 <구체적 해법과 전문성 강조>가 근시안적인 축소로 인해서 누락시키기 쉬운 <관계의 정치>를 <일반적 추상적 거대서사>가 튼실하게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이해 되시지요? 자본주의는 고립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고립조차도) 관계의 그물망입니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 그러므로 자칫 <구체적 해법>은 자기가 다루는 분야의 사안에만 집중한 나머지, 해당 사안이 전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같은 관계의 걉과 폭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좌파의 정치가 <관계의 정치>라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구체적 해법>과 <관계의 전략적 통찰>, 이 양자가 둘 다 소중합니다. 특히나 변모된 초국적 금융자본의 공세 속에서 <새로운> 패러다임과 전략들 그리고 해법들의 조속한 성장과 축적이 절실합니다. 두분 사이의 좋은 대화를 기대합니다.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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