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스탄과 이졸데는 가장 오래된 사랑이야기인 만큼 수많은 시인과 작곡가들이 여기서 영감을 얻어 명작을 써냈다. 그 가운데 이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심오한 면모들을 아주 단순한 구성 속에 놀랍도록 선명하게 부각시킨 작품이 바그너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이다. 이 극의 2막에서 연인들의 밀회와 희열은 음악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랑의 이중창으로 표현되는데, 희열의 절정에서 트리스탄은 느닷없이 이렇게 외친다. “사랑의 밤이여,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잊게 해다오.” 왜 이 남자는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쾌락의 절정을 맞는 순간에 살아있다는 것을 잊고 싶어 하는가? 마치 더할 나위 없는 쾌락은 바로 죽음 자체라는 듯 트리스탄은 생명을 망각 속에 빠뜨리고 싶어 한다. 트리스탄이여, 그대는 마치 타나토스(죽음)가 긴 줄에 메달아 인생의 무대 위에서 연인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는 바보인형, 에로스(사랑) 같구나!



이 악극의 마지막 대사들은 더욱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졸데가 최후에 부르는 [사랑의 죽음 Liebestod]의 마지막 두 행은 이렇게 끝난다. “무의식 속에서/ 더할 나위 없는 쾌락이여!(unbewußt/ höchste Lust!)” 이졸데는 ‘죽음’과 ‘무의식’과 ‘쾌락’이라는 세 가지 개념을 연결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이졸데는 무의식의 정체는 죽음이며, 죽음에 도달하는 일은 쾌락을 얻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바그너 말고도 이루 열거할 수 없는 많은 작가들이 죽음에 대한 동경을 표현해 왔다. 그 가운데 특이한 것을 하나 소개하자면 프랑스 작가 쥴리앙 그라크의 경우인데, 그는 가장 큰 단위의 집단 가운데 하나인 국가 자체가 죽음정확히는 해체을 동경하는 사태조차 그리고 있다. 그라크의 소설 [시르트의 바닷가]에서, 가상의 한 국가는 마치 국가의 운명 안에 내재한 법칙을 충실히 따르기라도 하는 듯 소멸을 향해 달려간다. “국가는 형태가 해체될 뿐이지. 그것은 풀어지는 묶음과도 같아. 묶였던 것이 풀어지고 너무 명확한 형태가 불분명함 속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하는 때가 오기 마련이야.”


도대체 죽음 안에 맛보고 싶은 어떤 달콤한 것이 있는 것일까? 죽음은 무의식 속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어떤 법칙 같은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 보고 싶은 문제다.

1865년 독일 뮌헨 궁정극장에서 초연된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프로이트는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 가운데 하나인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지적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신비스러운 자기학대적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에게도 있지 않은가? 당신이 뭔가 기억하기조차 싫은 실수를 했다고 치자. 만일 당신 마음이 늘 즐거운 것을 추구하기만 한다면 당신은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고 행복을 주는 새로운 사건이나 기억에만 집착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와 반대로 당신은 당신이 저지른 가장 고통스러운 실수를 계속 머릿속에서 반복한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렇게 많이 잘못한 것은 아닐 거야’,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일이지 뭐’ 등등. 이렇게 수많은 방식으로 실수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반복한다. 어린 아이들이 하는 놀이의 경우도 그렇다. 수술이나 주사 맞기 같은 충격적이고도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아이는 그것을 잊기는커녕 당장 병원 놀이 속에서 반복한다. 마치 잘못된 인생을 어떻게든 바로잡아 보려는 것처럼, 지나간 인생을 끊임없이 반추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가 가정한 쾌락원칙 : 인간에게
는 ‘쾌’를 구하고 ‘불쾌’를 피하려는 선천적인 경향이 있다.


왜 우리는 쾌락을 쫓기보다 고통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일을 반복할까? ‘고통’을 가리켜, 스트레스, 감당하기 어려운 에너지, 너무 극심한 충격이라고 일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고통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까닭은 바로 마음 안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이 과대한 에너지의 양을 어떻게든 줄이기 위해서가 아닐까?


가령 미국에서 있었던 911 같은 사건을 보자. 끔찍한 고통의 자리를 외면하지 않고 카메라는 계속 현장으로 되돌아오고, 시청자들은 괴로워하면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런데 화면에 비추어지는 것은 가장 비참한 죽음의 현장 그 자체라기보다는 인명을 구조하는 소방수들의 희생적인 행동, 죽은 이에 대한 유가족들의 사랑 같은 것들이다. 요컨대 눈을 뜨고 바라보기 어려운 비극은 칭찬할 만하고 수용할 만한 가치의 옷을 한 겹 입고서 계속 우리 눈 앞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이것이 알려주는 것은, 우리가 과대한 에너지가 넘실대는 고통의 현장으로 되돌아오는 까닭은 그 에너지를 낮추기 위함이며, 낮추는 방법은 그 강력한 에너지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형태의 표상으로 둔갑시키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바로 여기서 우리의 전체 정신무의식이 대부분을 차지하는의 껍질과도 같은 의식의 역할을 발견한다. 껍질의 역할은 무엇인가? 내부를 보호하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너무 강력한 자극이 들어오면 정신이 손상되지 않도록 자극의 강도를 낮추는 역할을 하는 것이 보호자로서의 껍질, 즉 의식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 정신이 이렇게 자극적인 에너지가 없는 상태를 희구한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정신은 ‘자극이 전혀 없는 무기물의 상태’ 같은 것을 고향처럼 동경한다는 뜻이 아닌가? 즉 어떤 긴장도 없는 죽음의 상태가 정신이 가장 원하는 바가 아닌가? 죽음을 향한 정신의 이 충동(타나토스)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자극을 더욱 더 비자극적인 표상으로 반복해서 바꾸는 역할을 하는 것이 의식의 과제인 것이다.

 

 


 

 

우리가 몰두하는 사랑(에로스)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사랑의 행위는 높은 강도의 자극과 긴장으로 가득 찬 쾌락이지만, 이는 실은 모든 자극이 사라진 죽음의 상태를 맛보는 일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프로이트는 말한다. “쾌락원칙은, 정신 기관을 자극에서 완전히 해방시키고 그 속에 있는 자극의 양을 일정한 수준이나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을 주요 업무로 하는 기능에 봉사해서 작동하는 어떤 경향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기능이 모든 살아있는 물질의 가장 보편적인 노력, 즉 무생물계의 정지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과 관련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인 성행위가 고도로 강화된 흥분의 순간적 소멸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경험한 바 있다.”

 

사랑의 행위에서 일어나는 에너지의 강화와 집중 또는 그냥 간단히 말해 극도의 흥분은 결국 흥분이 소멸된 죽음의 상태를 맛보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죽음을 향한 충동과 떼어 생각할 수 있는 사랑의 쾌락은 없으며, 사랑의 배후에는 늘 모든 긴장과 집중된 에너지의 소멸을 갈망하는 죽음에의 충동이 사랑을 작동시키는 모터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이제 우리는 왜 트리스탄이 사랑의 쾌락의 절정에서 죽음을 원했는지 알 것 같다. 또한 이졸데가 연결해놓은 세 가지 개념, ‘죽음’과 ‘무의식’과 ‘쾌락’의 의미심장한 고리 역시 알 것 같다. 정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무의식은 자신에게 침투해 들어오는 불쾌한 에너지의 긴장을 무화(無化)하려는 죽음에의 충동을 지니고 있다. 쾌락이란 극도로 강화된 흥분의 소멸을 통해 이 죽음 한 조각을 맛보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에너지로 가득 찬 사랑을 하고 늘 활력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 삶의 배후에는 놀랍게도 끊임없이 무(無)로 되돌아가려는 자, 바로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어떤 한 구체적인 인생의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삶을 떠받치고 있는 원리로서 ‘익명의 죽음’이다. 이 익명적 죽음에 실려 때로 추락하기 위해 높이까지 사랑의 에너지를 쌓아 올리거나, 때로 집중된 에너지를 낮추기 위해 고안된 것에 불과한 표상을 마치 그 자체 진리이기나 한 듯 바라보는 그런 인생들이 흘러간다. 죽음은 이렇게, 신나게 뽐내며 행진하는 삶을 커튼 뒤에서 몰래 엿보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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