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운동으로는 안 일어나.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으로 일으키는 것이라고!

집단은 어차피 집단이라고. 부르주아도 프롤레타리아도 집단이 되면 모두 똑같아.

권력을 탐하고 그것을 못 지켜서 안달이지!

개인 단위로 생각할 주 아는 사람만이 참된 행복과 자유를 손에 넣는 거얏!"

 

"모모코, 국가 교육이라는 건 애초에 잘모소디었어. 미국을 좀 봐라. 세계 곳곳엣 전쟁을 벌여 죄 없는 민중을 죽이고, 그러면서도 자기들만이 정의라고 하고 있잖아. 그거야말로 국가적인 사상 교육의 결과야. 일본은 그런 미국의 앞잡이 격이라고."

 

"그 섬은 어느 누구의 통치도 받지 않아. 자급자족으로 살아가고, 전쟁도 없고, 모두가 자유야. 아니, 국가 같은게 아니라니까. 그냥 커뮤니티야. 사람들의 모임, 어느 나라의 영토에도 속자히 않으려고 지도에 실리는 것도 거부한 거야. (중략) 호자 살더라도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들면 정치경제가 발생해.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걸 생각하지 않으면 정치가도 자본가도 필요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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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행동으로) 말을 하고 있었구나. 내가 내 사랑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뿐.'
(이수-한효주-의 나레이션, 1:35:00)

'날마다 같은 모습으로 날마다 다른 나'
(이수의 나레이션, 1:4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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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하는데... 안락한 자리만을 바라지. 그런 자리를 차지하고 나면 마음은,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말지." - 아르튀르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 철>  9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의 [착란 1]에 나온 시구를 빌려 와 이렇게 적었다.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어디 사랑만이 그러하겠는가. 랭보의 시 역시 시의 재발명이었고, 오늘날 하염없이 스러져 가는 세월 속에서도 놀라운 자태를 뽐내는 동서고금의 미술 작품 역시 재발명된 회화, 조각들이다. 영화 또한 재발명되어야 한다. 재발명된 것들이 모여 있을 때 비로소 '삶의 재발명'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 루이스 부뉴엘의 <비리디아나>, 피에르 파솔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는 모두 (우리의 삶을 둘러싼) 기존의 영역을 재발명한 영화들이다. 이들 감독의 재발명 방법은 매우 강력하다. 그들은 사랑에 대해, 종교에 대해, 사디즘과 카니발리즘에 대해, 폭력과 도덕에 대해 극단적인 지점까지 밀고 나갔다. 저 영화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구토하게 하고, 혐오감에 빠지게 하며, 심지어 영화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 우리는 이러한 재발명을 꿈꾼다.  10


여기서 다워진 영화들은 기존 영화가 지닌 통념과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새롭게 구현된 재발명은 우리들 스스로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은 무엇인지, 사랑은 무엇인자, 성은 무엇인지, 폭력은 무엇인지, 종교는 무엇인지, 나와 너는 누구인지를 질문하게 한다. 새로운 예술은 항상 재발명의 방식을 통해 재질문하고, 재사유하게 한다.

이 책이 단순히 '교양'이나 '입문' 수준에서 읽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이 책이 삶을 재발명하고, 섹스를 재발명하고, 사유를 재발명하게 하는 '본격적인 재발명 도구'가 되기를 원했다.  11


오늘날 우리는 재발명된 영화와 점점 더 만나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 까닭은 영화가 더 이상 재발며으이 영역이 아닌, 산업 시스템에 사로잡혀 기성품 복제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발명이 아니라 통속적 반복을 되풀이하고 있다. 진정으로 재발명된 영화는, 쾌적한 극장의 안락한 의자에 앉아 달콤한 시간을 누리고 싶어 하는 관객의 기대감을 배신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배신(영화의 대중 배신)은 위험천만한 일로 여겨지고 있으며, 사람들 또한 안온한 극장이 제공하는 향락을 즐기다가 더욱 안전한 집으로 귀가하기를 선택한다. 강렬함을 잃은 영화는 금세 잊힌다. 물론, 영화는 아무것도 구원하지 못한다. 다만 하나의 충격파로서 우리를 흔들어 깨울 것이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길을 내다볼 수 있는 작은 틈을 보여 주리라. 그럴 때 영화는 친구가 된다.  12





전체적으로 그런 기운이 느껴지는 섹스 - <감각의 제국> 1976 일본, 프랑스 108분, 오시마 나기사


<감각의 제국>은 1976년에 만든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작품입니다. .. '감각'이라는 말은 작지만 큰 울림을 지녔어요.  21


동시대를 대표하는 괴물은 '좀비'예요. 좀비의 가장 큰 특징은 감각이 없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고통을 느끼고 있나요. 혹은 어떤 무감각에 빠져 있나요.  22


<감각의 제국>은 1936년도에 실제 일본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었어요.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던 치정 사건을 재현하면서도(내부를 들여다보면서도), 바깥의 시스템(국제 합작)을 통해 주제 의식에 다가선 셈이니까요.  27


많은 이들이 사랑은 금기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랑의 형태에 대해서만큼은 엄격한 잣대를 갖고 있어요. 불륜이 대표적인 사례죠. 

그런데 사랑과 불륜 중 어떤 것이 더 큰 범주에 속합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사랑이 더 큰 범주에 속할 겁니다. 상위 범주에 해당하는 사랑은 금기가 아닌데, 그 하위 개념인 불륜이 금기에 속한다는 건 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요.  29


현실을 들여다보면 사랑에 대한 금기가 참으로 많아요. 불륜도 그렇고,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커플로 잏상한 눈으로 바라봐요. 동성애에 대한 갑론을박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금기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금기들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대단히 협소한 것'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습니다. 금기를 넘어서지 않을 때에만 우리는 사랑을 '사랑'이라고 여기게 되는 겁니다. ..

인간의 자유를 품은 사랑은 '모든 것을 무릅쓰고' 실천하는 행위예요. 이 영화가 위험하고도 지독한 사랑을 다루는 건 협소한 통념을 까발리기 위함이에요.  30


<감각의 제국>이 누군가에겐 '불편한 사랑 이야기'라는 점이 중요한 겁니다. 이들의 강렬한 러브 스토리는 통념에 의해 마비된 감각을 흔들어 깨우니까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사다는 기치의 성기를 자릅니다. 흔히 상대를 파괴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겁니다. 그런데 기치는 기꺼이 그 순간을 용인합니다. ..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까지 상대를 용인할 수 있을까요. .. 저로서는 감히 못 할 일이기에, 이들의 사랑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게 바로 <감각의 제국>의 출발점입니다. 타인의 사랑을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  31


나의 알몸은 상대에 대한 솔집함과 사랑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반면, 전적으로 타인인 누군가의 알몸은 정상적인 것을 벗어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타인이 '옷'으로서 드러나기를 바라죠.

왜 그럴까요. 이것은 인간 사회가 지닌 인식의 문제와도 깊이 연관돼 있어요. 옷은 타인의 경제력, 신분, 직업, 성별 등을 나타내는 기호입니다. 벌거벗은 몸은 '존재 그 자체'로 다가오기에, 우리는 그 타인이 누구인지 분별할 수 없어요. 그게 불편한 겁니다.  32


'벌거벗음'은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삼아요. 일종의 평등주의적 태도죠. 어쩌면 '복면 시위'도 이와 같은 맥락이겠죠.  32-33


그들의 나체는 불편한 게 아니라 오히려 불쌍한 것일 수도 있어요. 벗은 몸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니까요. 항상 그 벗은 몸으로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거죠.  34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말했던 유명한 '무인도 농담'이 있어요. 한 농부가 무인도에 아름다운 슈퍼 모델과 단둘이 갇혔어요. 상황이 좀 그렇다 보니, 결국 두 사람은 성관계를 갖게 됐죠. 그 후 슈퍼 모델이 농부에게 좋았느냐고 물어봐요. 그러자 농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좋았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 부탁을 하나 들어줄 수 있느냐.'라고 대꾸하죠. 그는 슈퍼 모델에게, 얼굴에 수염을 그리고 밀짚모자를 쓴 채 곁에 와 달라고 부탁해요. 슈퍼 모델은 그 청을 들어줍니다. 그녀는 약속한 대로 남장을 하고 농부의 곁에 와 앉죠. 그러자 농부가 슈퍼 모델을 툭 치며 말을 걸죠. '어이, 친구! 방금 내가 멀 했는지 알아? 그 유명한 슈퍼 모델과 잤다고!'

기치와 사다. 이들 두 사람도 그래요. 끊임없이 자신들의 결합을 과시하고 싶어 해요. .. 페이스북에 '아무개와 연애 중'이라고 자신의 '상태'를 공개하는 것도 같은 심리예요...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상태를 노출합니다. 자신들의 관계가 은밀하기를 원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노출되기를 원하는 거죠.

사다와 기치를 변태라고 욕하지 마세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자신을 노출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노출한 신체를 누군가가 봐 주기를 강렬히 희망합니다.  34-35


<감각의 제국>에 등장하는 사다와 기치의 벗은 몸에 대해 부끄러움이나 불편함을 느끼셨다면, 그건 분명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응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그 누구보다도 정열적으로 사랑했던 사람들. 우리도 이만큼 나아가 볼 수 있을까, 사랑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밀고 가 볼 수 있을까? 부끄럽게도 그러지 못할 겁니다. 수치심은 아주 끈질기게 인간의 판단과 사유의 발목을 붙잡고 있으니까요.  37


조르주 바타유가 쓴 <에로티즘>을 참고 문헌.


왜 인간은 이토록 섹스를 하고, 일체감을 얻으려고 할까요. 바타유는 동물과 인간의 섹스를 구분합니다. 동물의 섹스는 후손을 남기기 위한 생산성을 무엇보다도 중시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섹스는 생산에 관심이 없어요. 우리들 모두 '자손을 꼭 남기고 말겠어!'라고 생각하며 섹스를 하지 않잖아요. 오히려 섹스를 통해 쾌락을 추구하죠. 바타유에 따르면 인간은 에로티즘을 통해 쾌락을 추구하는 유일무이한 동물이에요.  40-41


인간은 쾌락을 위해 죽음 직전에까지 이르는 격한 에로티즘을 추구하기도 해요. .. 단지 벗는 행위뿐 아니라 성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금기가 존재하고,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제도화하죠. 에로티즘이 야기하는 '쾌락의 혼돈'을 억누르기 위함이에요. 동시에 미묘한 건, '에로티즘은 금기가 없으면 추구될 수 없다.'라는 바타유이 말입니다. 금기를 위반하는 것만큼 짜릿한 쾌락이 없거든요. 그래서 에로티즘과 금기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붙어 있습니다.  41


에로티즘의 관점에서 보자면 <감각의 제국>은 두 사람 사이의 쾌락을 극단적으로 밀고가는 영화예요. 그들을 둘러싼 금기가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이들은 더 강한 쾌락에 중독될 수밖에 없죠.  42


아무리 사랑이라도, 그 본모습을 정면으로 응시하기는 힘들죠.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는 쓰고 맛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포장하면 이보다 더 달콤할 수 없죠.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사랑은 금기인가?'라는 질문을 드렸죠. 사랑이 금기가 아니라고 여기는 건 우리가 '포장된 사랑'을 주로 봐왔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 주듯, 날것 그대로의 사랑을 마주하면 사실 역겨워요.  43


종교의 금기가 공동체의 금기를 깨는 영화보다 더 자극적인것은 섹스라는 금기를 다루는 영화라고 할 수 있어요. .. 섹스는 여전히 거부감과 결합된 묘한 흥분을 줄 것입니다.  49


들뢰즈처럼 '개념의 창조'를 해보자면 이 영화는 '섹시힐리즘', 즉 '섹스'와 '니힐리즘'을 합친 새로운 개념으로 읽을 수 있어요. 사실 아주 쉽죠. 소유욕의 화신인 사다와 인생이 허무한 남자 기치의 이이기예요.  50


사다의 상황은 빤해요. 그녀는 어린 나이에 남편과 헤어졌고요. 건강하죠. 나이도 분명 20대 초반일 것 같아요. 사다는 갈 데까지 가려고 하고, 소유하고 독점하려고 하죠. .. 사다는 알아요. 이 남자의 허무를 채울 수 없다는 걸요. 그래허 계속 섹스를 원하죠.  .. 진짜 슬픈 건 기치가 사정하고 난 다음이에요. 더 큰 허무가 그를 덮치고 말겠죠. ..

단도직입적으로 섹스가 허무일 수도 있다는 걸 말하고 있어요. 이 영화의 지침은 거기에 있어요. 섹스로 허무를 달랠 수 있지만, 없애지는 못해요.  51


첫 경험을 하고 나면 누구나 섹스에 대해 품고 있던 큰 판타지가 깨져요. 그래도 그 허무를 채우려고 섹스를 계속 이어 가죠. 인간의 섹스는 그래요. 동물의 발정기와 다르기 때문에 매번 더 몰입하죠. 그 순간적인 충만감을 느끼려고요.  52-53


사실 우리가 금기라고 하는 건 말초적인 것들이에요. 어찌 보면 유치하죠.  53


제가 정의를 잘하지 않았나요? '섹시힐리즘', 섹스+니힐리즘이에요. 허무한 남자를 사랑하는, 허무를 잡으려고 했던 한 여자의 이약. 마지막에 사다는 이 남자를 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닫죠. 딱 한 번뿐인 사랑, 목을 조르고 성기를 자르기 직전의 그 마지막 사랑이 그들의 유일한 섹스였을지도 몰라요.  54


결국 중요한 것은 섹시힐리즘에 대한 통찰이 아닐까 해요. 우리는 때때로 허무주의를 달래기 위해 섹스에 몰입합니다. .. 섹시힐리즘은 섹스가 가진 강도와 충만감으로 자신이 느끼는 허무를 채우려는 정신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을 듯해요. 허무는 일종의 무기력입니다. ..

치명적인 섹시힐리즘은 자신의 허무를 오직 섹스로만 채우려고 할 때 작동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행동이든 자꾸 반복하게 되면, 매너리즘에 젖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더 새로운 섹스, 더 기묘한 섹스, 심지어 엽기적이기까지 한 변태적 섹스가 나타나게 되는 거죠. 이럴때 섹스는 이제 그 자체의 즐거움을 잃고, 일종의 절대적인 수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마침내 섹스마저도 허무주의의 먹이가 되는 거죠.  55


어쩌면 사랑은 기꺼이 더러워지는 것, 타자와 섞이는 일인지도 몰라요. 타액을 섞고, 피부를 어루만져야 정신적으로도 더 많은 걸 공유할 수 있어요. 텔레파시같이 정신적으로, 아무런 접촉도 없이 교감할 수 있는 건 실상 없어요. .. 

롤랑 바르트도 서로의 대화가 애무라고 했죠.  58


한 사람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모습, 이미 그 자체로 에로틱한 사건'이라고요! ..

섹스를 말초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대화는 더 섹시한 성기일 수 있어요. 더 육감적인 향기일 수도 있고요. .. 플라토닉러브? 웃기지 마세요. 플라토닉에 집중하지 말고, 러브에 집중해요. 자신감 없는 사람들이 하는 게 플라토닉러브예요. ..

사랑과 불륜이 구별되는 지점은 어디일까요. 사랑이라 생각하면 밀어붙이고, 불륜이라고 느껴지면 관계를 포기할 준비를 하는 건 아닐까요. 수차례 말씀드렸다시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륜은 매우 흔한 테마일뿐 아니라 거의 모든 인류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관계 유형 중 하나예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죄악은 아닌 거죠.  59-60


본인의 마음속 울림이 더 중요하잖아요. 제가 하라고 한들, 하지 말라고 한들 뭐가 대수겠어요?

불륜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세요. 이 단어는 '아니 불(不)' 에 '무리 륜(倫)'자로 이뤄져 있어요. 사랑의 핵심에는 늘 불륜성이 도사리고 있어요. .. 불륜이라는 건 무리에서 떠나는 행위입니다. 그 땜ㄴ에 우리가 불륜을 저주하는 건 고착화된 욕망이에요. 기존의 틀을 유지하겠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죠.  60


사랑의 핵심은 기성의 해체와 새로운 것을 향한 전망이죠. 그걸 감당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 문제예요. 예전 관계에 너무 많이 의존해 있으면 해체하지 못해요. 그건 아무나 하는게 아니에요.  61


즉각적인 혐오에 따라 판단하지 말고, 무엇이든 숙고해 봐야 해요.  63


회자정리(會者定離 모을회 사람자 정할정 떠날리). 만난 것들은 반드시 이별해요.  66


음란한 사람일수록 섹스를 지나치게 신성시해요. 차라리 매춘부들이 가장 플라토닉한 사랑을 하지요.  69



제 주변엔 안타까운 여자 선배들이 많아요 페미니즘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돌연 어떤 남자랑 한 번 자고 나더니 결혼해 버리고 말았어요. 그게 성숙한 걸까요? 유치한 사람일수록 자기 수준을 모르면서 성숙한 줄 알아요.  72





비정상적 영혼의 정상화를 위한 폭력 - <시계태엽 오렌지> 1971 영국 137분, 스탠리 큐브릭


"사람에게 자유 의지가 없다면, 그는 이미 사림이 아니지." - 등장인물 신부의 대사  87


1971년에 선보인 <시계태엽 오렌지>는 앤서니 버지스의 원작 소설을 영화로 옮긴 작품이죠.  91


큐브릭은 '미래3부작'을 선보입니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인류가 달에 가기 1년 전에 만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그리고 <시계태엽 오렌지>가 그것입니다.  92


폭력은 단순히 폭력으로만 끝나지 않죠. 결국 섹스와도 연결이 되고, 정치와도 연결돼요.  96


금기는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하는 명령이에요.  97


루드비코 프로그램은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마음속에 그러한 욕망을 품기만 해도 고통받도록 만들어 버린 거예요. 즉, 루드비코 프로그램은 '욕망'을 처벌합니다.  98


이 영화가 논란을 일으킨 건 '우리는 모두 선이 긍정적이고 아름답다고 배웠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야. 인간은 악이든 선이든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가져야 해. 그것이 인간이야!'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에요. 약물을 주사하든 거세를 하든 따져 보아야 할 것은 자유 의지를 박탈당한 인간이 과연 인간인가, 하는 거예요.  98-99


무엇을 금기하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선뜻 선택할 수 없을 때 바로 금기가 되는 거예요. 선택 할 수 없는 것, 그게 다 금기예요 고를 수 있는 게 단 한 가지뿐이라, 선택이 배제된 것 말이죠. 그래서 이 영화의 주제가 금기인 거예요. 인간은 금기조차도 금기가 아닌 듯 선택할 수 있다는 게 이 영화가 보여 주는 핵심적 주제거든요.  99


인간이 가진 가장 일반적인 특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망하는 게 가장 쉽거든요. 그 순간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선한 자가 되는 겁니다. 니체는 이걸 '노예 감정'이라고 말했어요.

'주인'은 원망하지 않아요. 주인은 문제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원망하기보다 해결하고 타계할 길을 궁구하죠. ..

우리에게 자유로운 선택이 얼마나 허용됐는지를 살펴보면, 우리 안의 금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어요. .. 알렉스가 악마였던 이유는(영화 전반부에 나오듯) 그가 욕망을 '행했기' 때문이에요. 우리 역시 다양한 욕망을 갖고 있어요. 다만 그걸 다 표출하지 않을 뿐이죠. 꿈은 자유롭게 꿀 수 있지만, 모든 꿈을 행하지는 않잖아요. 현실에서는 어느 정도 금기가 작동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오직 금기만 남는다거나 강력한 금기에 붙들리면 문제가 돼요. 자유를 빼앗기게 되니까요.  100


금기의 문제. 첫째,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을 때 금기가 우리 내부에서 작동하기 시작해요. 둘재, 모든 것을 원망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노예'가 되고 말죠. 도덕은 태곳적부터 정해진게 아니에요. 단지 그것이 쌓이고 두터워져 금기가 되는 거예요. 한데 보통 대중매체는 이런 금기를 건드리지 않아요. 불편하니까요. 

예술은 금기를 건드리면서 인간의 자유를 드러내는 영역이에요. ..

사유는 쾌락이 아니라 불쾌함의 여지, 즉 '부정성'을 통해 찾아옵니다. 부정성은 왜 이 영화가 불편한지 묻게 하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 합니다. .. 그것은 금기에 순종하는 게 아니라 금기를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드러나는 부정성입니다.  104


타인에 대해 너무 쉽게 정죄하지 말고, 함부로 판단하지 맙시다.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벌어지는 만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이야기했습니다. 윤리적, 도덕적 잣대는 대개 약자들이 맹싢는 거예요. '나는 순수하다.'라고 믿는 거죠. 가난한 자는 순수해요. 힘이 없어 큰 죄를 저지를 수 없거든요.  106


선은 영원한 선이고 악은 영원한 악이라고 보는 시선이 있어요. 그런데 니체는 <선악의 저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나에게 선(good)과 악(evil)은 없다. 단지 좋은 것(good)과 나쁜 것(bad)만 있다."라고요. 나한테 어떤지가 중요해요. 독을 써서 죽는 사람이 있고 치료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근원적인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한다면 선생님, 아버지, 체제, 사회가 주장하는 선악일 뿐이죠. 따라서 우리에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걸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끊임없이 뭐가 맞는지 물어보죠. 그러다가는 평생 남의 명령만 받다가 죽는 거예요.  106-107


우리 모두 '폭력'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어요. 그런데 그 뉘앙스는 다 다르죠. 명확히 규정해야 해요. '오십보백보 모두 다 폭력이다.'라고 말하면 잘못된 거예요. 권력자가 사용하는 전형적인 물타기 수법이에요. 폭력이 나쁘다는 교육을 받다 보니, 정당방위마저 폭력이라고 생각해요. 균형 감각이 필요합니다. 물론 최소한의 폭력에도 균형 감각은 꼭 필요하죠.  108


정신분석학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딱 한 가지예요. 외적인 지배가 모든 개인에게 금기나 금지를 내면화시킨다는 것! 그 내면화가 완성되는 순간, 한 생명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새로 태어나게 되는 거죠. '나는 고유한 나'라고 생각하는 건 헛소리예요.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들 모두 전부 비슷하게 살고 있잖아요. 누가 누군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요.  113


학창 시절만 봐도 '성적 일등'과 '주먹질 일등'이 학교의 권력을 양분해요. 그들은 서로이 영역을 나눠 갖고 침범하지도, 치고받지도 않아요. 상대의 권력을 인정하는 거죠. 흥미롭지 않나요? 경쟁을 강요해서 일등을 상찬하는 사회 구조에서는 일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걸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 말이에요. 주먹 일등, 게임 일등, 저항 일등, 공부 일등, 섹스 일등 ... 일등만이 모든 인정과 존경을 독점하는 사회! 아렉스는 바로 이런 사회가 길러 낸 괴물, 아니 이런 사회가 낳은 적장자라고 할 수 있지요.  115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느 우리 시대에 대한 비판이 될 수도 있어요. 정치권력에는 개기지 못하니 성적 쾌락에만 몰입하는 시대잖아요. 본디 '코미디'란 금기 체계를 건드려서 희열을 주는 거예요. 광대들은 그 옛날에도, 지엄한 왕에게조차 마음대로 시비를 걸 수 있었어요. 그게 광대(피에로)의 역할이었죠. 결국 코미디는 정치와 성(性), 이 모든 것을 건드려야 재미있어져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적 비판을 제대로 할 수 없어요. 그러니 <SNL>등 온갖 개그 프로그램에 오직 '섹스 코미디'만 오르내리는 겁니다. 알렉스의 경우, <베토벤 교향곡 9번>을 통해 정치적 검열을 당한 거죠. 이제 그는 쫄아서 아무것도 못 할 거예요. 따라서 그에게 남은 건 <싱잉 인 더 레인>의 세계뿐이죠. 미국적 자본주의의 세계, 뮤지컬의 세계 말이에요. 어쩌면 스탠리 큐브릭은 이러한 부분들을 건드리고자 했던 것일 수도 있어요. 어쨌든 알렉스는 정치적 영역에서 거의 '거세'를 당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그는 섹스를 꿈꿀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치유됐다.'라고 선언하죠. 정말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도 이렇게 탄생한 것이구나.'하고 깨달았어요.  121


세뇌는 곧 마비입니다. 자기 스스로 어떤 대상에 다가갈 수 없게, 욕망할 수 없게 하는 거예요. 각종 매체를 통해 획일화된 문화가 대량으로 살포되면서 우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 잊게 돼요.  127


폭력에 무감각해지는 것은 그것에 반복적으로 노출됐기 때문이 아닙니다. 상처 난 데를 또 다치면 아프지, 무감각해지지는 않잖아요. 단지 매체의 힘으로 무감각해질 뿐입니다. 현실의 폭력과 매체가 다루는 폭력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물론 현실의 폭력에 대해서도 무각각해질 수는 있어요. 그러나 이때의 무감각은, 매체를 통해 습득한 무감각과는 완연히 다릅니다.  128


검열의 가장 기본적인 단계가 '타인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해요. 그래서 남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자신의 솔직한 모습, 진솔한 욕망을 방출하거나 표현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129


선택을 할 때는 두 갖를 고려해야 해요. 하나,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방향.

둘, 내 삶을 지금처럼 그대로 유지하는 방향. .. 어떤것을 선택하려면 그 선택의 단점을 모두 감당할 것, 그리고 버린 선택의 장점을 전부 포기할 것! 이 정도는 각오해야 해요.  131





배신하지 않는 동물의 왕국을 꿈꾸는 정치 - <살로, 소돔의 120일> 1975 이탈리아 114분,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파솔리니 감독의 논문 <시의 영화>는 오늘날에도 영화 이론을 연구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문헌으로 통해요.  153


금기라는 주제를 다룰 때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사드 후작이죠.  154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라 할 수 있는 걸 인용해 보겠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쾌락을 느낄 수 있는 건 단순히 육체적 쾌락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떤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들의 말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야말로 성욕, 식욕을 능가하는, 즉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보여 주죠.  160-161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 앎의 의지>에서 권력의 문제를 흥미롭게 성찰합니다. 군주의 주권적 힘을 '생살여탈권'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왕이나 군주가 타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 인간이 타인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면, 그런 권력은 분명 신적인 쾌락을 줄 겁니다. 파시스트들은 이러한 상황에 흥분합니다. 그래서 파시스트가 행하는 권력과 폭력의 강도는 점점 더 세질 수밖에 없어요. 마치 무언가에 중독된 것처럼 말이죠. 맞아요.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에, 그것이 주는 쾌락에 중독되어 가는 거예요.

자본주의도 비슷하죠. 돈이 곧 권력이 되는 시대인 겁니다. 돈이면 못 할게 없다는, 즉 갑질의 야망을 품게 돼요. 타인에 대한 배려는 사라지고,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지죠. 파시즘이 인종주의로 모든 사유를 차단했듯, 자본주의는 돈을 통해 모든 생각을 단순화합니다. "돈 주면 될 것 아니야!" 파시즘과 자본주의는 모두 '한 가지'로 세상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재편하는, 권력의 놀라운 횡포를 보여 줍니다.  162


파시스트들은 소년과 소녀들을 사물로 취급합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가 아름다은 엉덩이를 선별하는 장면입니다. 인간을 상품으로 보는 거이죠. 이러한 시선은 파싯트만 지닌 게 아니에요. 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는 부분이죠.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사물화해요. 그런 면에서 파시즘과 자본주의는 서로 연결됩니다. 인간을 사물처럼 대하는 파시즘은, 생며을 돈으로 환산하는 자본주의와 등가를 이루죠.  165


<살로, 소돔의 120일>은 파시즘의 행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예요. 그런데 이걸 정면으로 보지 못한다면 진짜 세상에 대해선 아예 편히 눈감아 버리게 되지 않을까요.  171


'리베르탱(libertin)'이라는 말입니다. 이걸 검색해 보면 '자유연애주의자'라고 나올겁니다.  174 


우리는 열심히 사랑해야 저항할 수 있어요. 남자가 손을 의연히 들어 올리는 장면, 그게 파솔리니가 말하려고 했던 것의 전부라고 봐요. 파시즘에 저항하지 않으면 우리는 강간당하고 똥을 먹게 되고, 누군가를 고발해 가며 죽여야 해요.  178


온몸으로 체험해 본 우여곡절이 없으니, 남의 이야기만 앵무새처럼 읊조리는 거예요.  186


'절차적 민주주의'라는게 있죠? 이 절차들이 우리를 죽여요. 가령 우리가 시위를 한다고 해 봐요. 헌법에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있으니, 당당하게 해도 될 것 같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도로 교통법'을 더 우선시하죠. 씨발, 이게 뭐야? 그래서 불만을 제기했더니, 옳다구나 하면서 소송을 걸어 보래요. 지금 시위하기도 바쁜데, 대법원까지 가야겠어요? 절차를 복잡 미묘하게 만드는 게, 바로 부르주아 사회의 특징이에요. 

소송이 발생하면 대기업이나 자본가들은 당장 변호사를 사죠. 하지만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변호사를 만날 수조차 없어요. 그러니 소송 과정에서 우리는, 약자들은 진이 빠질 수밖에요. 대기업은 변호사에게 소송을 맡기고 다른 일을 하는데, 우리는 생업을 제쳐 두고 재판에 몰입해야 해요. 설령 소송에서 이기도라도 우리는 망한 거죠. 그중 제일 치사한 게 파업했다고 업무 방해죄로 고소하는 놈들이죠. 정말 법대로 끝까지 가면 결국 노동자가 이길 테지만, 법정에서 소송을 이어 가는 수년 동안 그 사람은 뭘 먹고살겠어요? 어느 광고 문구처럼 '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하는 거죠.  187-188


이탈리아 철학자 중에 그람시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람시가 가장 문제시했던 게 바로 '투표를 통해' 무솔리니를 뽑았다는 사실이었어요. 뻔히 전쟁을 일으킬 미친놈을, 무려 선거로 뽑은 거예요! 우리로 따지면 이명박이나 박근혜를 왜 대통령으로 뽑았느냐, 하는 수준의 문제랄까요. 누가 봐도 정리 해고를 하고 임금 피크제를 시행할 사람들인데도 찍잖아요. 그가 또 지적한 게 있었는데, 이탈리아 대중이 크로체라는 작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었어요. 우리나라에 맞게 말하자면, 왜 사람들이 이문열과 신경숙을 그리도 좋아하는지, 의문을 품었던 거죠. 그러니까 좀 진보적이고 삶에 진짜 도움이 되는 쓰디쓴 이야기는 싫어하고, 보수적이고 대중적이기만 한 글을 좋아하느냐는 거였어요.  193-194


사실 우리가 보는 많은 영화들, 그중에서도 '수직적 관계'를 강조하는 영화들은 몽땅 파시즘적이에요. 남편이 부인을 때리고, 아버지가 자식의 결혼에 반대하는 것도 일종의 파시즘이에요. 파시즘이 아닌 건 '수평적 관계'예요. 가령 파시즘의 허구성을 다룬 게 있다면, 바로 홍상수의 영화예요. 가부장적 권력을 휘두르려는 남자 주인공들이 정말 보잘것없이 그려지잖아요.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정치를 다루지 않더라도 제대로 된 감독들은 다 그런 걸 만든다고요. ..

예술과 인문학의 궁극적 귀결은 자유와 사랑이에요. ..

홍상수 감독은 누가 보든 안 보든, 생활 속의 파시즘을 고발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아요. 반면 이문열과 신경숙의 문학은 비난을 피할 수 없죠. 이문열에게는 뿌리 깊은 영웅주의가 있고, 신경숙에게는 남성에게 복종하며 정신 승리만 해 대는 태도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이야기만 읽으려고 해요. 자신의 얘기, 나를 위로해 주는 이야기만 듣고 싶은 거예요. 비정규직이 많다. 취업이 불안하다. 통탄하면서 오히려 그런 책을 읽죠. 가슴을 후벼 파는 작품은 외면하고요. 결국 똥을 던질 수밖에!  194-195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길 바라는 종교 - <비리디아나> 1961 스페인 90분, 루이스 부뉴엘


그가 극도로 혐오한 것은 종교적 도그마, 맹신주의, 교회의 위선과 억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4


제가 가장 흥미롭게 본 건 '줄넘기'예요. 

첫 번째 장면에서 하녀의 딸이 혼자 줄넘기를 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장면에서는, 비리디아나가 소녀와 함께 줄넘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줄넘기는 숙부가 자살할 때 목을 매는 도구로 쓰입니다. 숙부의 집으로 돌아온 비리디아나가 줄넘기를 목격하고, 곧장 장면이 바뀌더니 다시 줄넘기를 넘는 소녀가 나옵니다. 그때 영기 관리를 돕는 남자 하인이 나타나 소녀를 나무라지요. "왜 죽은 사람이 쓴 줄넘기를 가지고 노느냐."라며 말이죠. 그러자 소녀는 "그건 제 것이니까요."라고 당돌하게 대꾸합니다. 결국 소녀는 아랑곳없이 줄넘기를 넘죠. ..

영화 후반부에 갑작스럽게 줄넘기가 다시 등장합니다. 비리디아나는 숙부의 유산을 가지고, 마을 걸인들과 부랑자들을 모아 일종의 생활 공동체를 만듭니다. 그들 중 한 명이 부엌에 있던 줄넘기를 가져다가 자신의 허리끈으로 사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후 이 줄넘기(혹은 허리끈)는 비리디아나가 부랑자들에게 추행을 당하는 장면에서 또다시 등장합니다. 비리디아나가 완력을 쓰는 부랑자들에게 저항하며 붙드는 것이 바로 그 줄넘기인 겁니다.  221-222


한 사회가 경직되고 금기를 강하게 통제할수록 '이건 꼭 이 방법으로만 써야 한다.'라고 규정을 내려 버립니다. 법의 적용도 마찬가지죠. 사회가 강퍅해지루록 원칙만 강조해 댑니다. 여하튼 사물에는, 근본적으로 맥락이 없어요.  223


줄넘기는 단순한 놀이 기구였어요. 그런데 숙부가 그걸로 목을 매단뒤부터, 줄넘기는 죽음과 관련된 하나의 터부가 됩니다. 이제 줄넘기는 죽음을 암시하는 불길한 대상이 된 겁니다. 하지만 소녀로서는 황당했을 겁니다. 줄넘기는 분명 자신의 소유물이었으니까요. 그러니 무엇이 문제냐며 반문하는 거죠. 이 저항은 뭔가 불쾌하고 미묘한 

느낌을 주는 장면입니다. 이런 느낌은, 영화 후반부에 줄넘기가 부랑자의 허리띠로 전용(轉用 구를전 쓸용)되면서 더 큰 불쾌감으로 증폭됩니다.

줄넘기가 소녀의 손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저 잠깐의 놀이 기구였겠죠. 자살의 도구도, 성폭력의 도구도 아니에요. 그저 하나의 줄일 뿐인데 우리는 이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상한 용도로 사용하지요. 이건 부뉴엘이 사물을 통해 우리의 통념을 흔드는 방식입니다. '줄넘기는 놀이 도구에 불과해.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당신이 장면 장면마다 얼마나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보라고. 당신은 줄넘기를 제대로 가지고 놀 줄도 모르잖아. 줄넘기는 한 사람의 자살 도구이면서, 성적 뉘앙스를 지닌 폭력의 흉기이기도 해. 그게 사물의 본성이야. 사물은 사용하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애초에 부여된 본성은 아무것도 없어.  223-224


부뉴엘은 사물에 대한 의미 부여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소녀와 같은 아이가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흔히 사물에 대한 집착을 페티시라고 합니다. 이 말에는 물건을 신격화하는 미신, 중독적인 욕망까지 아우르는 꽤 광범위한 의미가 들어 있어요. 흔히 페티시즘을 변태 성욕쯤으로 여기는데요. 가령 여성의 팬티에만 유독 집착하는 남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의 욕망을 가리켜 페티시즘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사실 페티시즘은 사물에 집착하는 모든 욕망을 가리켜요. 

비리디아나는 예수의 가시 면류관, 십자가, 칼 같은 것들에 집차과죠. 종교적 집착, 성물(聖物 성스러울성 만물물)에 대한 집착도 페티시즘이에요. 

페티시즘은 단순히 변태 성욕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 돈을 숭배한다면, 돈에 페티시가 있는 거죠.  ..

페티시는 특정 사물에 집착함으로써 발생하는 다양한 우상화 작업이에요. 

부뉴엘은 이러한 페티시즘이야말로 현대인의 본질이라는 점을 보여준 거죠. 동시에 이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덧없고 무의미한 일인지를 보여 주기도 합니다. 

숙부가 지닌 여자 다리에 대한 집착도 당연히 페티시즘이지요. 페티시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결국 자기만의 우상을 품고 있는 겁니다. .. 줄넘기하는 소녀를 달아야 해요. 사물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저 사물일 뿐이에요.  224-225


비리디아나가 집을 비운 사이에 부랑자들이 만찬을 벌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기념사진을 찍는다며 포즈를 취했을 때 나타난 화면 구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과 똑같습니다. ..

인간은 원본을 훼손시키는 걸 참지 못하죠. 그런데 패러디를 활용하는 예술의 가장 놀라운 점은 원본을 '모독'하면서 전혀 새로운 흥미와 가치를 유발한다는 데 있습니다. 

초현실주의가 기치로 내걸었던 것 중 하나가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수많은 예술적, 미적 영역을 훼손하고 모독하는 것이었어요. 모독이 왜 중요하냐고요? 모독은 우리를 원본주의나 절대주의로부터 자유럽게 해 주거든요. 그래서 대통령을 희화한 작품이 많은 곳일수록 민주적 사회인 겁니다.  225-226


일단 어떤 대상을 비판하려면 거기에 매혹돼야 해요. 대뜸 보자마자 생리적으로 '저건 무조건 싫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대상을 제대로 비판할 수 있을까요? 어떤 대상에 흠뻑 빠져 본 사람만이 안팎을 넘나들며 잘 비판할 수 있어요. .. 최악의 비평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호불호만 던지는 거예요.  228


우리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무조건 착하다.'라는 테제에 빠지기 쉬워요. 부자가 나쁘다는 통념처럼, 가난하고 힘없으면 무조건 착하다는 생각 또한 통념이라는 사실을 부뉴엘은 건드리고 있는 거예요. ..

성직자든 누구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위선적인 모습을 가진다는 겁니다.

약자나 소수자는 (약하고 소수이기 때문에) 선할 수밖에 없다는 진영 논리가 생기기도 해요. 그런데 이러한 논리가 더 위험할 수 있죠. 그들을 위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비좁은 테두리 안에 가두는 일이니까요.  231


라캉은 '여자는 히스테리 환자고 남자는 강박증 환자다.'라고 말했어요. 히스테리라는 단어의 어원은 '자궁'이에요. 엄마 말을 잘 듣던 아이가 갑자기 짜증을 내는 거 있죠. 그런 게 바로 히스테리입니다. 히스테리에 걸리는 사람의 특징은 타인의 욕망만 중시하고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는 데에 있어요. 참고 참다가 갑자기 자신의 욕망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바로 이럴 때를 가리켜 '히스테리를 부린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히스테리가 유독 여자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이라고 굳게 믿다가 갑자기 자신의 진짜 욕망을 발견하는 거예요. 

반면 남자는 강박증이에요. 자기 욕망만 중요하다고 여기죠. 가족끼리 산에 가 보면 정확히 알 수 있죠. 오히려 딸들이 항상 산을 잘 올라요. 가족들한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 남자들은 등산을 하다가 힘들면 중간에 퍼져요. 그러고는 아버지한테 이러겠죠. '아우 씨발, 존나 힘들잖아!' 그러면 가족들이 달래요. 그렇게 법석을 놓아도 남자는 쫓겨나지 않아요. 그게 다 가부장제 때문이에요. 그래서 여자들은 집안일을 도우며 부모의 욕망을 잘 맞춰요. 하지만 아들은 안 그래요.  241


비리디아나의 운명도 행복할 것 같지 않아요. 언제쯤 그녀는 자각하게 될까요? 남자와 자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을, 힘 있는 남자로부터 안전을 확보하려는 자신의 욕망을... 그래서 비리디나아는 숙부가 가장 원하는 모습에 계속  맞춰 주려고 하고, 호르헤가 바라는 모습에 결국 자신을 맞추고 마는 히스테릭한 면모를 보이는 겁니다. 그래요. 우리 모두는 성별에 관계없이 비리디아나인지도 모릅니다. 모 두가 히스테리 증상을 가지고 있는 거지요.  243-244


결혼을 왜 해요? 결혼은 '부르주아 제도'예요. 상대의 '성기'에 대한 독점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거예요. 차라리 연애만 하든가, 쿨하게 헤어지든 해야죠. 나중에 이혼하더라도 위자료를 받으면 괜찮다고요? 여러분의 10년, 20년 세월을 1억, 2억에 팔래요? 그런데 대부분 팔아 버리고 말죠. 지금까지 자신의 성기를 사용해 온 사용료를 모두 받아 내는 겁니다. '애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서요. 이게 마지막 자존심인데도 품위를 지키긴 힘들죠. 오만 가지 얘기를 다 하죠. 돈 몇 푼으로 뭘 하려고 그래요? 순간적으로 보면 돈을 받는 게 좋긴 해요. 그게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딜레마입니다. ..

독실한 종교인이라면 결혼하지 마세요. 그냥 하나님과 순수한 사랑이나 나누세요. 아가페를 하며 살아요. 모든 신은 강한 남성성을 가져요. 내 남자 친구는 늘 바쁘다 하고, 다른 사람한테 눈도 돌려요. 사람이니까. 그러니 인간한테는 아무리 기도를 해도, 내게 완전히 오지 않죠. 그런데 신은 기도만 하면 내 옆에 있어 줘요.  246


순수가 유지되리라는 생각을 하지 마세요! 순수는 순간적인 것일 뿐이에요. 그게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지나치게 깨끗함만 추구하려다 보니, 아예 자기 영역에 아무도 안 들이는 사람조차 있어요. 오직 자기만의 만족을 위해 순수를 지향하는 건 미친 짓이에요. 환대를 위해 순수를 추구해야 맞죠. '집을 깨끗하게 청소해서 친구가 편하게 지내도록 해야지.'라고 생각해야지, '집이 깨끗이 청소되었으니, 너는 함부로 어지럽히면 안 돼!'라고 하는게 말이 되나요? 누군가가 오면 처오를 해야지 나 혼자 깨끗하게 있으려고 노상 쓸고 닦는다면 미친 거 아닌가요?  248


나를 위한 청소만 하지 말고, 타인을 위해 청소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그때부터 종교가 탄생하는 거예요. 나만을 위한 총소, 나만을 위한 순수, 그것이 바로 종교의 감각이니까요...

또 아이가 새로운 마음으로 집 안을 어지럽히길 바라며 청소를 하는 부모가 돼야 해요. 아이한테 집에 오자마자 '발 씻어! 손 씻어!'하면 그 애가 집에 오고 싶겠어요? 괴로울 뿐이죠. 타인을 위한 순수가, 결국 사랑이 아닐까 싶어요. 사랑엔 분명 순수의 요소가 들어가지만, 사랑 자체가 순수인건 아닌 셈이지요. ..

단순하게 정리해 보자면, 사랑이 싹트는 과정은 '더러워지는 것'이에요. 만지고 더듬고, 키스하고 침을 섞는 과정인 거죠. .. 감염되고 섞여야 해요. .. 표백된 사랑을 순수하고 보면 안 돼요.  248-249


인간은 적당히 위선적이고 적절히 위악한 게 맞아요. 관념이 앞서면 힘들죠. 관념이 생긴다는 건, 사실 인간은 선하지만 않다는 걸 반증하는 거예요.  250


필요한 건 솔직해지는 거예요. 위선적이라는 말 자체가 솔직하지 않다는 뜻이죠. 어떤 질문에 답하기 어려울 땐 어렵다고 말하면 돼요. 솔직한 게 제일 좋아요. 위선적으로 살지 않으려면 '나는 못 생겼다.' '엄청 무식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시인하면 돼요. 순간순간 닥쳐오는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더 나아가 그대로 행동할 수 있다면 정말 괜찮은 사람인 거죠. 어쨌든 완벽하게 위선적이지 않은 사람이 되긴 정말 어려워요.  250-251


남한테 욕을 들어도 되고 인정을 안 받아도 되면 위선적이지 않게 돼요. 타인의 인정, 점수, 평가에 민감할수록 약자이고, 미성숙한 겁니다. '누가 감히 날 평가해?' 라는 생각을 품고 있다면, 여러분은 완전한 자아를 가진 거예요. 불교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해탈이라고 하죠. .. 국가와 체제가 우리를 조련하는 방법이 무엇인 줄 아세요? 상과 벌입니다. 칭찬받고 싶어하고 욕먹는 걸 싫어한다는 점을 이용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그렇게 배워 왔잖아요. 부모, 국가가 원하는 것만 죽어라 하고 살잖아요. 미셸 푸코라면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타인의 칭찬에 기뻐하지 말고 남의 욕에 화내지 말라고요. 그럼 정말 완벽한 거죠. 이게 말처럼 쉽진 않지만요.

칭찬과 비판, 이 모든 것에 너무 큰 의미를 두면 안 돼요. 나보다 힘이 센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위선이에요.  251


좌우지간 욕먹었다고 상처받지 말아요. 전부 잊어야 해요. 무슨 말을 들었든 거기에 휘둘리면 안 돼요.  252





마치 그곳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낯선 곳을 찾아 들어가야 한다. 여행이 주는 달콤함은 우리 내면을 지배하던 신이 사라진 그 자리에 살냄새가 나는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260




OUTRO - 시험해 보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착한 사람은 남의 말을 그대로 듣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가리켜 착하고 선량하다고 말한다. 결국 착한 사람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의지에 따라 혹은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규칙을 잘 따르는 사람, 혹은 부모든 선생이든 경찰이든 타인이 금지하는 걸 어기지 않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착한 사람이다. 부당한 조건인데도 계약서만 믿고 묵묵히 일하는 사람, 어른들의 몰상식한 대우에도 참고 따르는 고등학생, 갑작스러운 멀미와 현기증이 찾아왔는데도 노약자 지정석에 앉지 못하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여고생, 후미진 곳에서 오줌을 누라고 해도 화장실이 없다며 고추를 잡고 서 있는 어린아이... 정말 착한 사람들이다. 

사실 착한 사람은 길들여진 사람일 뿐이다. 외부에서 강제한 규칙, 혹은 금기가 아예 한 살마의 내면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이제 외부에서 누군가가 완력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내면에 자리를 잡은 규칙이 착한 사람의 행동을 착하게끔 강제하게 된 것이다. 겉으로 보면 외부의 직접적인 강제가 없기에, 착한 사람은 스스로 양심껏 행동하고 있다고 믿기 쉽다. ..결국 착한 사람은 남이 하라는 것만을 하고,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인생을 주체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누구도 그렇다고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다. '자발적 복종' 상태의 핵심은, 바로 '복종'에 있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처음 자신에게 규칙을 강요했던 부모님, 선생님, 혹은 국가 기구가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착한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각인된 초자아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하며 살 것이다. 다니엘 디포가 쓴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 등장하는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갇히고 나서도 영국에서 통용되던 여러 격식들을 자발적으로 수행했던 것처럼 말이다.  267-268


타인들이 나쁘다고 했을 때에만, 우리의 행동은 타자의 이익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행동이 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 평가에 따라 행동하게 될 테다. 자신의 삶에 진짜 좋은 건지 나쁜 것인지, 혹은 자신에게 유쾌한지 불쾌한 일인지를 알려면, 우리는 어떤 규칙이나 금기에 연연하지 말고 직접 도전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 우리는 더 당당하게 외쳐야 하지 않을까. '시험해 보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268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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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과 동일시 되기 전에는 배척하려는 마음이 있다. 꼭 그런것은 아니겠지만 자신과 틀린것에 특히 배척하려는 의지를 무의식적으로 가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익숙하지 않기에 때론 너무 어색하기에 일단 한걸음 물러서게 된다. 그것이 물리적이든 심적이든 말이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는 사람은 자신의 스타일과 대조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가지지 않는것에 대한 호기심이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게 한다. 

앞서 말한 두 가지의 경우가 혼재하는 경우도 있다. 



영화<타인의 취향>에서 인물들의 애정도가 그렇게 그려지고 있다. 생각보다 애정을 쉽게 형성하기도, 참 어렵게 형성하기도, 결국 형성되지 않기도 한다. 

정진홍씨는 자신을 위해 산티아고 길을 걷고 쓴 책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에서 사랑은 평등하지 않다고 표현한다. '본래 사랑은 평등하지 않다. 꼭 균형이 맞지도 않다. 왠지 기우뚱한 것처럼 보이기 일쑤인 것이 사랑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도 밑질 것 없어 보이는 사이는 사랑이 아니다. 그건 자칙 거래다. 둘 사이가 어느 쪽으론가 기울어야 사랑이다. 기우는 쪽으로 사랑은 흐른다.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사랑하는 쪽에서 사랑받는 쪽으로, 한쪽에서 또다른 한쪽으로 그렇게 기울며 흐르는 게 사랑이다. 하지만 항상 한쪽으로만 기울지 않는다. 살다보면 기우는 방향이 정반대로 바뀌기도 한다. 마치 바람이 이리저리 불듯이 말이다! 그러면서 '기우뚱한 균형'을 잡아가는 것! 그것이 사랑 아닐까 싶다.'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평등하지 않다. 기울어짐 점점 균형점에 이르다가 때때로 시소처럼 이쪽으로 저쪽으로 기울어져 가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지속되어 갈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논리적이지 않다. 감성적이고 감정적이다. 그렇기에 이해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문화론>에서는 '참된 합리성이란 것은 대상의 보이는 면 뿐아니라 보이지 않는 면도, 드러난 것뿐만 아니라 숨겨진 것도 포용하고자 할때 마련된다. 이것이 변증법의 의미다'라고 한다.

변증법적으로 볼때 애정관계는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 된다. 사람과의 애정은 보이는것 보이지 않는것을 아우를 수 있어야 지속적인 관계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는 상대의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보이지 않는것에 더 빠져들고, 그 이후 실망으로 이루어진다. 그 속에서 드러난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을 모두 포용할 때 지속적인 애정은 이어질것이다.


다시 <타인의 취향>으로 돌아가 보면, 주인공 카스텔라(장-피에르 바크리)는 영어과외선생으로 왔었던 클라라(안느 알바로)의 연극하는 모습을 보며 클라라에게 반해 결국은 부인인 안젤리크(크리스티안 밀레)를 떠나게 된다. 

영화에서 카스텔라는 늘 부인의 기호를 존중하는 듯했으나 결국은 그것이 싫다고 화를 내게 된다. 안젤리크는 자신을 배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누가 잘못이었나를 떠나 두 사람은 부부로서 서로의 생각과 감정에 대한 솔직한 소통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었을 것이다. 

다시말해 애정의 시작은 다름과 차이의 호기심일 수 있으나 지속은 솔직한 소통을 통해 드러나지 않은 것 마저도 드러내 서로가 교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것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지 않을까...

시작과 유지는 그 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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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디 같은 사람과 살아간다면 너무 좋겠다'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주연이지만 영화의 절반도 되기전에 죽는다.

'루디도 참 행복하게 죽는구나' 영화를 다보고나서 들었던 생각이다.

이 영화는 위의 두 가지 외에도 현대인들이 꼭 생각해야할 꺼리들을 담아내고 있다.

영화는 애절함을, 뭉클함을, 행복감을 들게도 하였고, 비통함을, 안타까움을 들게도 하였다.

앞의 감정들은 루디와 부인 트루디를 보면서 들게되고, 뒤의 감정은 자녀들을 보면서 들었다.


세 자녀들은 살아가는데 바쁘다. 시간의 여유가 아니라 부모에게 시간을 줄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부모에 대한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에 그리고 편한 것에 더 익숙한 나머지 부모에게 시간을 투자하기위해 자신의 시간을 비워내지 못한다. 돌아가신 후에도..

그들의 대화는 부끄러워지게하여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마음은 가지고 있으나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 모습이 나를 비추는건 아닌가해서..

자녀들은 부모의 방문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첫째아들은 싫어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회사생활을 하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가 어렵다. 부모에게 자신의 시간을 쓰는 것이 투자라고 하는게 맞을까.. 부모는 그리 오래 자식들과 함께할 수 없다. 그렇기에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시간이라면 투자라 할 수 있을것이고 투자해야만 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딸은 동성애자로 나오는데 그 역시 부모에게 시간을 할애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애인이 부모에게 더 잘하는모습이다. 뭔지 모를 부모에게 불만을 가진것처럼 보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반나절쯔음 부모님과 함께 있다가 언성을 높이게 된다.

지극히 일반적이라 할 수도 있을만한 일이긴 한데, 그 모습이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막내 아들 칼은 일본에서 생활한다. 엄마가 좋아하는 일본, 동경하는 일본 하지만 일본을 보기전에 엄마는 세상에 없다. 아버지만 그것도 엄마의 흔적을 함께하여 대신온 아버지만 일본을 방문한다. 루디는 아내의 원을 대신 이루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고 그녀와 함께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하지만 아들의 눈에는 그것이 아니라 이상한 행동을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뿐이다.

아버지가 아침식사로 엄마표 롤을 만들어 주었을때, 엄마의 생각으로 자리에서 울기도 하지만 아버지와의 거리감은 전혀 좁혀지지 않는다. 함께 술을 마시고는 결국은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말을 뱉는다. 직장때문에 가족을 버린 아버지로 생각한다.

퇴근해서 아버지가 계시지 않을 줄 알고 집에서 누나와 통화를 하면서 '아버지가 이상하다. 엄마 옷을 들고 뭐하는지 모르겠다. 혼자 종일 다닌다.'

결국 아버지의 장례식에 모였을때와 엄마의 장례식에서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전혀 연결되는 내용은 아니지만 김애란의 <두근 두근 내인생>에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데인 것처럼...' 맞아. '늙음'에 데인 것처럼 놀랐다고 했어요.

"저는 잘 이해가 안돼요."

"뭐가?"

"나이 든 사람 피부에 탄력이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잖아요."

"그렇지."

"머리가 세는 것도, 이가 빠지고, 눈이 나빠지고, 주름이 느는것도,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잖아요."

"그래."

"그런데 그렇게 좋아했다면서, 그 짧은 접촉 한번에, 마치 늙음이 자기에게 옮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정색하고 돌아설 정도면, 그 여자가 상상한 늙음이란 대체 어떤 거였을까요?"  134-135

책의 내용은 노교수와 젊은 제자의 사이에서 잠시 스친 촉감때문에 일어난 사건의 표현이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그런마음을 가진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행동은 책의 내용에서의 행동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내 경우에서 말이다


소통이란건 마음이 서로에게 닿아야 한다. 소통은 생각이 아니라 생각의 행동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자녀들이 아버지와의 소통자체가 없다. 생각부터 없어보인다. 부모에게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것처럼 소통을 위한 시간을 먼저 만들어 가야 하는것이 아닐까.

대체로 우리는 있을때는 잘 모르다가 없어야 소중함을 느끼게 되듯이, 부모의 존재유무는 매우 큰 자리를 차지한다. 

부모에대해 자신의 마음은 그리고 자신의 행동은 어떠한지 생각해 보게 되는 영화이다.


트루디는 정년을 1년쯤 남겨둔 남편의 암선고를 받게되고, 사실을 숨긴채 남편 루디와 여행을 떠난다. 저녀들이 있는 곳으로 그리고 보고 싶은 바다가 있는 곳으로.. 그리고 트루디는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그녀는 원하던 일본을 가지는 못하였지만, 베를린에서 부토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그림자의 춤 부토. 그녀는 마지막에 부토를 떠올리며 자신이 분장하였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잠결에 숨을 거둔다.

트루디가 남편 루디를 바라보는 눈빛과 표정을 각인하였다. 그 온화하며 잔잔하지만 깊은 사랑을 간직한 표정. 손주의 방에서 침대와 바닥에서 따로 잠을 청하지만 서로 손을 잡으며 짓는 표정은 삶에서 사랑에 의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평온함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두에서 언급한 생각이 든 지점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였지만 그런 마음보다 더 큰 애정을 간진한 사람의 사랑.

남편을 떠나보내야하는 무너지는 가슴에도 애정은 더 커짐이 표정에 담겨있다.

인스턴트 식품에 묻혀 인스턴트 사랑의 시대에 더욱 염원하게 되는 장면이 아닐까. 


트루디를 급작스럽게 떠나보낸 루디는 상실감을 그러면서 그제서야 떠난 부인의 모든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부인이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되고 그녀를 위한 여행을 한다. 막내가 살고 있는 일본으로. 

서먹한 아들의 비수를 찌르는 행동과 말고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을만큼 오직 아내 트루디만 생각한다. 

그녀의 옷가지들을 들고 여행하고 낮시간 다닐때는 코트 속에 부인의 옷을 입고 함께 여행한다. 

한적한 공원에서 부토춤은 추는 유(아야 이리즈키)를 알게되고 그제서야 부토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녀를 통해 아내와 더 교감할 수 있게 되고, 유를 통해 심신의 안정을 조금씩 찾아가게 된다. 결국 함께 후지산으로 향한다. 아내가 보고싶어하는 후지산으로.

그는 후지산이 선명하게 보이는 날 새벽 조용히 부토 화장을 하고 후지산 근처 후지산을 띄운 호수앞에서 부토 춤을 춘다. 영화는 부토 춤을 추는 루디에게 어느새 트루디와 함께 추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루디는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루디는 행복하지 않았을까. 

잊지못하는 상실감을 부인의 마음을 알게되면서 그녀와 공감하며 죽게되는 루디. 나는 행복한 죽음이라 생각하게 된다.






아래는 영화에서 트루디역을 맡은 하넬로레 엘스너의 인터뷰이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찾다가 보았는데 그녀의 설명이 다시금 영화를 생각나게 하여 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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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속에 이야기, 그 속에 다시 이야기가 있는 영화이다.(액자식구성이라고도 하더라.)

1944년 전쟁의 끝에 첫눈에 반한 젊은 군인과 여인은 사랑을 하게 되고 전쟁후 귀국했던 군인은 여인에게로 다시 돌아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에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생활한다.  아이가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죽게 되면서 부부는 상처를 서로 안아주지 못해 별거하게 된다. 그 사이 남자는 무언가에 끌려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 

이후 부인을 찾아가 자신의 글을 건네고 돌아오라하고, 부인은 글을 읽고 감동하여 돌아오지만, 돌아오는 기차에 원고를 두고 내린다. 뒤늦게 원고를 잃어버린걸 알게 된 두 사람은 결국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현대로와서 작가를 꿈꾸는 로리(브래들리 쿠퍼)는 도라(조 샐다나)와의 프랑스로의 신혼 여행에서 골동품점에 들러 가죽가방을 구입한후 돌아온다. 로리 역시 작가가 꿈이며 책을써 출판사들에 돌려도 계속 퇴짜를 맞는 중에 생계를 위해 출판사에서 일을 한다. 출근준비를 하던중 가방에서 우연히 원고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모두 읽고 종일 그 글을 생각한다. 결국 새벽에도 잠이 깨 원고를 철자 하나 틀리지 않게 타이핑 한다. 우연히 도라는 그 들을 읽고 감동하여 출판을 권유하게 되고 결국 로리는 출간하게 되고, 올해의 문학상을 받게 된다.

그러던 중 원고의 원래 저자인 올드맨(제레미 아이언스, 1940년대 젊은 군인)이 방문하여 이야기는 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 내용을 쓰면 왠지 안될것 같아서..ㅎ)





결국 이 내용 전체는 클레이(데니스 퀘이드)의 책 내용이다.

이러한 이야기속에 이야기 또 그속에 이야기를 가진 영화이다. 참고로 영화의 진행순서와는 상관없이 내용을 적은 것이다.


로리는 올드맨을 만난후 자책감에 부인 도라에게 말하고 편집장에게도 밝힌다. 올드맨은 밝히지 말라고 한다. 도라도, 편집장도 밝히지 말것을 종용한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답이야 달라질 질문이지만, 어떻게 하는것이 좋을까?


영화의 내용중에 몇 개의 대사로 생각해 보려한다.

우선 로리가 결혼전 도라와의 동거중에 온전히 글 쓰는데 집중하느라 생활이 어려워지자 아버지를 찾아가 도와줄것을 요구하는 장면에서 아버지는 잔소리를 늘어놓은 후 결국은 도와준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남자란 건 아무리 버틸 수 없는 고통이 있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그것의 한계까지 버텨낼 수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로리가 올드맨에게 찾아가 자신의 생각은 사실을 밝히는 것이라 했을 때 올드맨은 그럴 필요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선택을 해야 하지. 그리고 그걸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곳을 벗어난 로리는 벤치에 앉아서 독백으로 "우리 모두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어려운 부분이다."


영화의 후반에 클레이는 다니엘(올리비아 와일드)에게 "어떤 면에서는 당신은 삶과 픽션에서 선택을 해야해."라 한다.


로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클레이는 어떤 결말을 선택해야 할까?


세 작가의 이야기, 사랑이야기지만 영화를 보면서 선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충분히 우리 삶에서 일어날 수 있을 부류이기에 인생은 하나의 연극이라 부르기도 한다.

자신의 배역과 성격을 선택하여 연기하는 것이란다.

그만큼 선택이란 것의 연속이기에 선택에서 올바른것보다는 편한 선택이 더 유혹적이기에.. 

영화에서 라면 로리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맞을까

답이 없는 질문이기도, 너무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으면 우린 편한 선택을 해버리기 쉽기에, 편한 선택이 무조건 틀린건 아니지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마음에 늘 무거운 돌덩이를 올려놓는 결정을 할 수 있기에, 때론 맹목적을 따라만 가기에.. 


나는 아직 답이 없다. 나였어도 출판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 올드맨을 만나고 그가 밝히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밝히지 않을지 모르겠다. 올드맨이 밝히라고 한다면, 어떨게든 막으려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지점에서 어떤 악행이 추가될지 모른다. 

그래서 고민해봐야 했다. 

나는 답이 언능 떠올리기 힘들어 시간을 두면서 계속 고민할 것같다.

고민하는 중에 그러한 일이 발생되더라도 좀더 바른 결정을 하기 위한 기회를 가질 수 있을거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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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은 왜 일어나는가.. 연쇄살인범에 대해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일반적인 감정이 없다는 점이라고 한다.

흔히 우리는 사이코패스라 부르기도 한다.

그들에겐 감정 능력이 매우 부족하거나 전혀 없다고 한다. 다시말해 고통스러움이나 잔인함같은 느낌을 가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태어날때 부터이든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건 즉, 선천적인 사이코패스와 후천적 사이코 패스가 존재한다고 한다.

<연쇄 살인범의 고백>을 읽으며 덩달아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본다.



우선책은 법의학자인 저자가 쓴 범죄심리 시리즈 세 권 중에 두번째 책이다. 제목에서처럼 엽기적이고 경악스러운 살인 사건에 대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다른 두 권은 아직 접하지 아니하였다. 

사건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통해 사건을 흥미롭게 풀어놓기에 읽어나가는데 편하다. 다만 내용 자체가 무거운 부분들이라는 점은 뒤로하고 말이다. 해결이 된 사건도 있고, 해결되지 않고 증거불충분으로 의혹만 남긴채 끝나버린 이야기도 들어 있다.

이 책이 처음 서점에 진열되었을때 부터 눈에 띄었다.(당연히 서점에서 눈에 잘띄는 곳에 책을 두었겠지만) 다만 쉽게 손이 가질않아서 호기심만 가진채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얼마전우연하게 수중에 책이 들어왔다. 봐야할 책들이 앞서 있기에 앞부분만 훑어봐야지하는 생각으로 펼쳤으나 결국은 모두 읽어버렸다.

앞 부분에서는 뱀파이어의 존재에 관한 내용에 대해 과학적인 설명으로 오해될 수 있는 점들을 풀어준고 있다. 연쇄강간 살인범들, 완전 범죄를 끈질기게 밝혀낸 이야기들, 당시 시대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던 사기사건에 대한 내용들까지 무겁기도 하고 소설같기도한 내용들이 들어있다.


핵심은 시리즈 첫권의 제목처럼, 흔적을 완전하게 숨기기는 어렵다는 내용이다.

물론 내용전개는 추적되어가는 과정에 대해서 서술되어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앞 부분이었다. 뱀파이어로 보일수도 있는 오해에 대한 과학적인 해설이다. 여러 매체들을 통해 뱀파이어 내용들은 점해보았으나 과거 뱀파이어 사건으로 시체의 무덤을 파헤쳐 처리하던 일들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는데, 내용을 통해 알게되고 이해되기도 하였다. 최근에 본 영화<트와일라잇-브레이킹던>까지 생각되었다.(사실 이 영화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주위에서 여러사람들이 보자고 해서 이왕 볼거라면 처음부터 보겠다는 생각에 시리즈 전체를 보고 마지막편을 극장에서 보았다.)

물론 책과 영화가 겹치지는 않는다. 단순히 떠올랐다는 것이다...ㅎ



서두로 돌아가, 연쇄 살인범 이라고 모두 사이코패스는 아니라 한다. 대체로 사이코패스가 많긴하지만.

선천적 사이코패스와 후천적 사이코패스 중에 더 위험한 것은 후천적 사이코패스라 한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 최민식씨(경철 역)가 맡은 역할이 선천적 사이코패스이고, 이병헌씨(수현 역)가 맡은 역할이 후천적 사이코패스다.

영화에서는 두 사람의 대결구도가 전개된다. 대사중에도 경철은 '니가 이긴것 같지, 아니야 내가 이긴거야'라는 말을 하는데, 결국 두 사람 모두 사회에 가정에 그리고 자신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준다. 누가 이기고 지느냐의 문제는 아닌것같다.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누구나 극중의 이병헌처럼 후천적 사이코패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정상적인 평범한 사람도 제복을 입히고 사람을 물화시키는 과정이 진행되면 쉽게 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굉장한 예는 유명한 '스탠포드 감옥실험'이다.

1971년에 실험을 진행했던  담당교수 필립 짐 바르도는 14일간의 실험을 6일만에 중단하고 폐쇄시켰다. 실험은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 지원자들을 무작위로 뽑아 아무런 정보없이 무작위로 교도관과 수감자로 나누어 실험을 진행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며칠도 되지않아 자신이 정말 교도관이고 수감자라 착각하고,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여 결국 충돌이 일어나고 실험은 중단되었다.

내용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2002년에 개봉한 독일영화 <엑스페리먼트>와 2010년에 개봉한 미국영화 <엑스페리먼트>이다. 동일내용을 담은 다른 영화이며, 두 영화는 '스탠포드 감옥실험'을 영화화 한것이다.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아부그라이브 포로 수용소에서 발생한 포로 학대 사건은 매우 유명하다.

포로의 입을 열기 이해 자행된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학대(중동인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것은 가장 극심한 고문이라고 한다. 특히 남자가 여성앞에 옷을 강제로 벗어야 하거나, 속옥을 머리에 쓰는등의 것들.., 포로 수용소의 미군들은 평번한 군인들이고 학비를 벌기위해 자원한 젊은 대학생들도 있었다.)는 짐 바르도 교수로 하여금 '스탠포드 감옥실험'을 다시 떠올리게하여 <루시퍼 이펙트>라는 책을 출간하게 하였다.


실험에 대한 기록과 분석,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의 만행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한다. 교수는 결국 누구나 악행을 저지를 수 있기에 루시퍼 이펙트를 경계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연쇄 살인범의 고백>은 연쇄 살인범들의 고백보다는, 조사과정을 통해 드는 의문들을 해소해 나가는 조사 과정에서 발생된 내용들에 범인들의 실토가 어우러져 진행된다.

책은 법의학자의 관점에서 늘 사건에 대한 호기심어린 의문과 질문으로 시작되어 현장 조사를하며 풀어나가고 다시 질문하는 방식을 통해 숨기려는 자에 대한 생각을 읽게하고 결국은 허점을 찾아내게 된다. 그리고 허점에 대한 증거을 찾아낸다.


이러한 내용에서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이 앞선 내용들이다.

짐 바르도 교수의 지적 즉, 휩쓸려 악행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일어나는 일이나 현상 등에 대해 우리는 늘 질문하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학교에서 교복을 입는다. 경찰이나 군인은 제복을, 회사는 때때로 유니폼을, 의사들은 가운을, 법관들은 법복을 입는다.

이것은 당연히 연대감과 일체감을 주어 소속감과 책임감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다.

입는다고 사이코패스되는건 절대 아니다. 다만 그런 일체감속에서는 종종 진행되는 것이 잘못이든 아니든 생각하지 않고 따라가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후천적 사이코패스를 만들기 위해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일이 일체담을 주는 의상이라는 점이다. 유니폼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유니폼은 인간을 물화시키기에 좋은 전제라고 한다.


세계2차대전후 전범 재판에서 유명한 사람이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히틀러의 명령에 생각없이 따른 사람으로 유명하며,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전범이다. 그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을 통해 우리에게 생각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나쁘다.

다시말해 우리는 선하지만, 악하기도 한 존재이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인데 선택하는 사람은 생각지 않는 지점에서 발생될때 문제가 되기에, 우리는 미리 생각을 통해 질문하고 자문하고 생가함으로 불시에 발생되는 그 시점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 

책을 통해 다시금 떠올리고 생각들을 정리해 볼 수 있었다. 나 스스로 그러한 선택의 시점에서 안전지대에 놓여 있지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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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외로운 존재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롭고 혼자 있어도 외롭다. 그래서 사람들은 게임, 무협지, 만화, 드라마, 페이스북에 빠지거나 심지어 마약을 찾기도 하는 것 같다. '철학'은 외로운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유수현)  6


새로운 해석은 언제나 처음에는 이단이 된다.  9


고전을 읽는 것은 늘 어렵다. 기존의 시각을 도그마처럼 따르면, 오히려 쉬워진다. 고전은 어렵게 읽어야 한다. 또 인문 고전 독법에는 따로 왕도가 없다. 늘 새로운 해석을 찾아 읽는 게 최선이다.  10


보원이덕(報怨以德) - 원한을 갚되 은혜로 하라.

<노자> 63장 입니다. 거기보면 "위무위(爲無爲)" 즉 무위를 행하고, "사무사(事無事)", 즉 일삼음이 없음을 일삼아라. 그리고 "보원이덕(報怨以德)", 원한을 갚되 은혜로 하라. 이렇게 나옵니다.  24


공자가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은혜를 갚겠는가?" 먼저 당신이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는 무엇으로 어떻게 갚겠는가? 당연히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는 은혜를 갚는 것이 맞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원수를 은혜로 갚는다면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는 무엇으로 갚느냐는 거죠. 공자의 답은 이렇습니다. "곧음"으로 원한을 갚고 은혜로 은혜를 갚아야 한다." 아주 단순한 말이지만, 이런 방식이라면 제가 충분히 따라서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아요.  25


<한시외전(韓詩外傳)>이란 책에는 공자의 제자 수제자 세 사람이 등장. "당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이 있고 당신에게 잘 대해 주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당신들은 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대하겠느냐?" 하니까.

자로(子路, 기원전 543~480년경-말보다주먹, 반란에 연루되 갓끈을 다시묶고 앉은채로 죽어감)는 "남이 나를 잘 대해 주면 나도 잘 대해 줄 것이고, 남이 나를 잘 대해 주지 않으면 나도 잘 대해 주지 않을 것이다."  26


자공(子貢, 기원전 520~456년경-현실수완이 뛰어나 공자학단의 재정 문제 실질해결자)은 "남이 나를 잘 대해 주면 나도 잘 대해 줄 것이고, 남이 나를 잘 대해 주지 앟으면 나는 그와 함께 상황에 따라서 잘해 줄 만하면 잘해 주고 잘해 줄 만하지 못하면 나도 잘해 주지 못한다."

안회(顔回, 기원전 521년경~?)는 "남이 나를 잘 대해 주면 나도 잘 대해 줄 것이고, 남이 나를 잘 대해 주지 않아도 나는 잘 대해 줄 것이다."

이 말은 일단 해석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 말은,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살겠느냐를 묻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논어> 의 어떤 구절이 나온다로 할 때에, 그 말의 객관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의미를 당신은 어떤 삶의 원리로 받아들여서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겠는가를 포함한 물음들입니다.  27


공자는 이 세 사람의 대답을 듣고서 어떻게 말했을까요?

"자로의 주장은 야만인들의 주장이다. 자공의 말은 친구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말이고, 안회의 말은 가족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말이다."

이 가운데 객관적인 해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동일한 두 눈이 분명이 힜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그 일들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눈의 깊이가 다를 뿐이죠. 


보원이덕, 원한을 갚되 은혜로 하라. 공자의 말씀은, 측별히 그렇게 하는 거는 불가능하다. 쉽지 않으니, 직(直곧을직), 다시말해 내 마음이 원하는 바대로 가라. 그런 뜻입니다. 즉 정직하다는 말은 '자기의 마음이 명령'하는 대로 , '자기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서 행하라는 뜻입니다.  29


'보원이덕' 이말에 대해서 하상공은 이렇게 처방을 제시합니다. "재앙이 생겨나기 전에 미리 싹수부터 끊어 놓는다." 이 말은 조금 더 쉽게 풀면 이런 뜻입니다. "평소, 천하에 두루 행할 만한 도를 닦고 백성들을 위해서 선을 행하라. 그러나 너에게 반역하는자, 황제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일을 행하였거나 행하려는 자. 그런 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천하의 안녕을 위해서 재앙이 생겨나기 전에 미리 끊어버려라."  34-35


유학자 왕필은 보원이덕에 관해 "작은 원한의 경우에는 보복하고 말 것이 없다. 그러나 큰 원한의 경우에는 천하 모든 사람들이 죽이고 싶어하므로 모두 똑같이 생각하는바, 그것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덕이다."

작은 원한이라고 하는 것은 '사적'인 원한이라고 할 수 있어요.  36


작은 원한(小怨)의 경우 사적인 것이므로, 공적인 일을 처리할 때 개입시킬 여지가 없는 거다. 그런 거 하지 말라는 겁니다.  37


왕필의 해석은... 철저하게 유가의 정신이지 '노자'의 사상에서 나올 수 있는 논리가 아닙니다.  38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고전 속에 원하는 진리가 있어서 그것을 우리가 해석하거나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가치, 그 가치를 고전에 새겨 넣는 작업, 그것이 바로 고전을 읽는 방법일 것 같습니다.  46



루소의 자유개념이 칸트의 자유 개념으로 발전하고 더 나아가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자유 개념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52


니체는 "우리의 살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술작품을 만드는 태도로 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죠. 이게 바로 푸코가 말한 실존의 미학이고, 이게 루소가 몸소 보여준 자유의 정신을 이해하기 위한 첫 출발점입니다.  63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유와 반대가 되는 단어, 즉 '지배'와의 대조부터 출발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델1은 '지배를 간섭으로 해석할 것인가?'에 관해서입니다. 이때, 자유는 '선택'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지상)주의 모델입니다. 모델2는 '지배를 강제로 해석할 것인가?'입니다. 이때, 자유는 '자율'이 되죠. 자유는 도덕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을 하게 되어 자율적인 인간드링 서로의 인권을 존중하는 모델입니다. 모델3은 '지배를 예속으로 해석할 것인가?'입니다. 이때, 자유는 '해방'이 될 것입니다. 이 모델은 자유가 단순히 개인적인 추상적 차원이 아니라 좋은 사회를 통해 실현될 가치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65


자유주의라는 단어. '리버테어리언(libertarian)'같은 단어들은 '진보적'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는 단어였어요. 지금은 자유지상주의자로 알고 있는데요. 원래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최초로 썼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자유라는 단어의 원초적이 ㄴ의미는 바로 무정부주의죠. 모든 지배를 거부하는 것이비니다. 지배 없는 삶, 이게 무정부주의자들의 꿈입니다. 자유주의의 두 가지 의미도 이로부터 출발합니다.

첫 번째, 조지 부시 미국 전 대통령과 MB를 대표로 하는 주유주의가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그 주제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애덤스므스류 혹은 신자유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개인을 '이기적'이라고 합니다.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는 심지어 유전자까지도 이기적(selfish gene)이라고 했지요. 개인의 '이기심'이 사회를 구성해 나가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들은 협력이나 이타심마저도 어떻게 이기심으로 환원해서 설명할지를 많이 고민합니다. 또, 게임이론을 가지고 정교하게 수리적으로 분석해서 겉보기에는 이타적이고 협조적인 행위들이 어떻게 이기심으로부터 출발하는지를 보여주려고 무지 애를 씁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시장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로 등장한 겁니다. 이게 극단적인 보수적 자유주의죠. 

그런데, 자유주의를 도덕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루소를 이어받은 칸트와 롤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개인을 이기적 존재나 욕망의 존재가 아니라, 선의지가 있는 '도덕적 개인'으로 봅니다.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한데, 도덕적 개인이라고 해서 남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도 인간이기 때문에 나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그의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그런 태도입니다. 이게 자유주의의 도덕화이고, 이것이 오늘날 복지자유주의 곧 복지국가의 모델이 됩니다.

자. '이기적 개인'을 근대 용어로 말하면, 바로 부르주아지입니다. 부르주아지는 오늘날 (사적인) 시민계급이라고 얘기하는데 현대의 자본가로 발전하게 됩니다. 여기서 잘 구분하셔야 할 것은, 부르주아지를 의미하는 '사적인 시민'과 루소가 말하는 '공적인 시민' 입니다.  65-67



'인륜'은 독일어에서는 원래 'Sitte'에서 유래하는데, 관습이나 습관을 뜻합니다.

법을 안 지키면 처벌을 받지만, 관습을 안 지킨다고 해서 감옥에 가거나 하진 않아요. 그냥 비난을 받을 뿐이죠. 어쨌든 공동체는 각기 그 나름대로 관습이 있고, 그 속에서 사는 나는 나도 모르게 그 관습이 몸에 배어서 따라가게 되지요.  122


상호의존... 내가 상대방의 인질이 되면, 자기중심적, 이기적 태도를 바꾸는 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북한도 남한의 인질이 되어야 하지요. '상호 인질'이 되는 것이지요.  133


우리말로 '성(性)'이라고 번역되는 말은 섹스(sex), 젠더(gender), 섹슈얼리티(sexuality), 이렇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섹스와 젠더, 많이 들어보셨죠? 섹스는 생물학적인 성입니다. 젠더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길러진 성이죠. 그래서, '여성답다' , '여성스럽다' , '여자가 재수 없게...' 할 때의 성이 젠더이고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저 여자(sex)는 남자(gender)같애"나 "저 남자는 여자 같애."라고 말할 때, 앞의 여자(혹은 남자)는 섹스, 즉 생물학적 성이죠. 젠더는, '여자 같아' , '여성성' , 

여자로 길러짐' , '여자로 길러짐', 이런 얘기고요. 역시 "저 여자는 남자 같애"라고 할 때에, 뒤에 나오는 남자의 의미는 젠더로 사용된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섹스나 젠더 이외에 섹슈얼리티(성을 사회적으로 논의하기 위해서 대두. 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의 필요성. 성적 욕망이나 정서, 판타지, 성적 매력, 성 정체성 등을 의미하고, 신체적 영역을 넘어서 정서, 심리, 무의식 차우너의 심층적 의미구조들로 성의 범위를 확대시킨다.)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한국어로 성(性), 성성(性性)이라고 번역하는 이 말에 담겨 있는 의미는 굉장히 커요. 우리가 성관계라고 하는 것을 섹스가 아니라 섹슈얼리티라는 새로운 용어로 부르기로 한 이유가 있어요. 해부학적인 성, 생물학적인 성을 일컫는 개념인 섹스를 성관계의 의미로 사용하게 되면 성기 삽입이라는 점에만 초점을 두어서 이야기하게 되죠. 그래서 성행위, 성관계 등을 사회적인 문제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적인 문제로만 남겨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섹슈얼리티라는 개념을 창출하게 된 데에는 성적 욕망이나, 성적인 정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환상, 성적 매력, 성 정체성, 의미 등등, 이런 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굉장히 큰 의미로 사용해야 된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성기 삽입 차원의 성관계에만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고, 어떤 친밀한 행위들, 어떤 친밀한 정서까지도 우리는 포괄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차원이죠.  143-144


차별이 '다르기 때문에...'라면, 차이는 '다르지만...'을 전제한다.  150


평등, 공평함이란 단지 동일한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특수성, 차이, 경험, 맥락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화장실과 남자화장실이 ㄸ고같이 세 개여서, 차별이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개별적인 특성, 경험, 다양성 등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차이가 아닌 차별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151


음양의 특성... 음양에 대한 초기의 생각은 주나라 때 생겨났는데요. 이 때에는 햇볕의 있고 없음에 따른 단순한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었습니다.

춘추 시대의 음양 개념의 특징은 음양이 독립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춘추 시대에는 음(陰), 양(陽), 풍(風), 우(雨), 회(晦), 명(明) 등의 여섯 가지 기 개념으로 셜명되었습니다. 풍은 바람이고요, 우는 비, 회는 어두움, 명은 밝음입니다. 하지만 이 여섯개의 기운 중에 풍, 우, 회, 명은 음양의 개념으로 포섭이 되었습니다. 풍은 바람이니까 건조함이죠? 건조함은 어디에 배속될까요? 양이겠지요. 비는 음에, 어두움은 음에, 밝음은 양에 배속이 되겠지요?

이렇게 되니 음양 두 기만으로도 다른 네 개의 기를 설명할 수 있으므로 음양을 제외한 네 개의 기는 점차 사라지고 음양 두 기만 남게 되었습니다.  154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이 과연 명쾌하게 설명 가능할까요? 오히려 애매함, 모호함을 통해서 더 잘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요?  165


<계몽의 변증법>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왜 인간은 진정 인간적 상태로 진입하지 못하고 새로운 야만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177

이에 대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계몽의 방향을 잘못 설정했다는 것입니다. 걔몽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 얘기하겠지만, 동일성 사유에 기초한 계몽을 부정하는 것이고, 자기 유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자기의 체계에 꿰맞추는 자기 유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지요. 타자를 부정하는 자기 유지는 역설적으로 자기 유지에 실패할 운명에 처한다는 거죠. 체계의 틀을 맞추느라 놓쳐버린 자신의 본능, 감성, 개성, 인간성 등을 잃게 된다는 거예요.  179



시푸 : 사부님, 아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대사부 : 시푸, 그냥 소식이 있을 뿐일세, 좋고 나쁜 것이란 없어.

....

대사부 : 이 나무를 보게, 내가 원하지 않아도 복숭아씨는 복숭아 나무가 돼.

시푸 : 하지만 복숭아로는 타이렁을 물리칠 수는 없어요.

대사부 : 가능할지도 몰라, 자네가 포를 이끌어주고 믿어만 준다면.

시푸 : 도와주세요, 사부님.

대사부 : 아니야, 그냥 믿는 수밖에. 약속해줘, 시푸. 그 아이를 믿겠다고...     <쿵푸팬더> 중에서  249


(시푸가 용의 전사로 포를 받아들이고 훈련시키기 시작하면서)

시푸 : 쿵푸는 수련할 때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필요한데 너는 꽝이야. 그런데 그건 내 잘못이었어. 너를 5인방과 같은 방법으로 가르치려고 했으니까.                        <쿵푸팬더>중에서  258


적어도 자신의 옳음이 다른 사람에게도 옳음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했죠.  259


수영을 시작할 때 물에 뜨기 어려운 것처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거나 관계를 맺기 어려운 것은 그 이전의 익숙함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몸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인 것이죠. 여기서 필요한 것은 과거의 경험이나 지식이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266


(용의 전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의기소침해 있는 포에게)

대사부 : 국수냐 쿵푸냐? 너는 과거와 미래에 대해 너무 집착하고 있구나. 이런 말이 있어. 어제는 역사고 내일은 아무도 모르지, 그러나 오늘은 선물이지. 그 선물을 소중하게 다루렴.    <쿵푸팬더> 중에서  267


나의 경험과 생각의 한계를 인식하고, 나를 둘러싼 것들을 하나씩 비워나가는 과정을 통하여 세상 속의 내가 아닌 진정한 나에 이르게 되고, 이를 통해 나는 세상의 길, 세상의 결을 따라 '노닐 듯'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나도 타인에게, 타인도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으며,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소요유(逍遙遊 거닐소 멀요 놀유)' 입니다.  270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의 생각과 가치를 비판하고 그것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자유롭고자 하는 장자의 철학.  271


Kritik'(비판)과 'Krisis'(위기)의 어원이 똑같더군요. 'Krise'에서 나온 말이랍니다.

철학과 철학함은 차이가 있습니다. 사상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철학이며 그 사상의 힘을 현실의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사고하는 것은 철학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77


마키아벨리즘이 일반적으로 이해되듯이 기만과 위선을 의미한다면, 마키아벨리는 마키아벨리주의자기 아니었습니다.

"책의 운명은 그 독자들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웃지 않고, 슬퍼하지도 저주하지도 않고, 오직 이해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오직 그를 '이해하기'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281


그는 '현실 정치학'을 만들어낸 최초의 사람이라고 평가받는데요.

마키아벨리는 현실주의 정치사상을 주장하지요. 즉 <군주론>은 정치적 현실에 대한 기술의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저작은 사실판단이지 도적, 윤리가 개입하는 가치판단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봅니다.  286


당시 이탈리아는 다섯 개 국가로 분열돼 있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고민했던 것, 그가 꿈꾸었던 것은 국가의 통일이었죠. 그래서 책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이 군대예요. 마키아벨리가 제일 싫어하는 군대는 외국 군대입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인민의 군대를 주장합니다.  287


마키아벨리는 소위 중세적 위계질서를 깨려고 합니다.  288



'던바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회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원 수는 150여명이며, 강도 높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핵심 친구 관계는 12명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죠.  319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자신의 생명이 말하는 욕망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자기 밖의 것들에 눈을 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왜 내 삶은 공허하지' , '왜 나는 열심히 사는데 안 되지'라고 자꾸만 자신을 닦달합니다.  322


'네가 트루먼을 아느냐? 뭐가 옳은지 안다고 생각하나? 나는 트루먼에게 특별한 삶(normal life)을 살 기회를 줬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역겨운(sick) 곳이야. 시헤이븐(seahaven)은 천국이지. 트루먼은 언제나 떠날 수 있지만 그러려고 하지 않았어. 마음만 먹으면 진실을 알 수 있는데, 시도하지도 않았지. 자네가 괴로운 건 트루먼이 그런 세상에 익숙하기 때문이야.'  <트루먼 쇼> 중에서  363


진실을 향해 나간다는 것은 대단히 큰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366


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는 나라는 세금이 높다고 하지요. 수입의 50% 이상을 세금으로 낸다고 하잖아요. '네가 번 돈은 다 네 것이 아니다. 반 이상 내놔'하면서 이런저런 정책을 펼치는데 쓰겠죠. 개인의 수입을 사회로 완원시키는 것인데, 이런 것도 사회주의입니다. 사실 내 것이 온전히 내 것인 것은 아닙니다. 내가 수입을 많이 올려 부자가 되었다고 했을 때, 그건 내가 누군가와 관계를 맺었지 때문이고,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혔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금을 많이 내게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데 있습니다. 그리고 걷은 세금이 투명하고도 적절하게 잘 쓰이고 있다고 믿으면 세금 저항이 크지 않겠죠. 믿지 못하겠으면 어떻게든 세금을 안 내려고 할 거고요.  386


저는 얼마 전에 한 학술 발표회에서 우리나라를 아류제국주의 국가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제국주의 국가의 대외 정책에 합류하면서 또 그들의 요구를 잘 들어주면서, 현실에 안주하는 피지배 계급을 양산하는 거죠.  388


강자는 현실에 안주하려 하고 약자는 현실을 변화시키려 합니다. 따라서 미래는 약자에게 있습니다. 위로가 되나요?  403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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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이페이이야기>, 국내 개봉명은 <타이페이 카페스토리>에는 몇 가지 질문이 나온다.

그 중에 '만약 선책이 가능하다면, 세계여행카드, 공부의카드?'라는 질문이 나온다.

이 영화는 주인공 두얼의 오랜 꿈이었던 카페 개업으로 시작한다. 두얼과 전혀 다른 스타일의 여동생 창얼은 언니를 도와 카페에서 일을 하는데, 창얼은 손님이 별로 없자 개업식에서 친구들이 주었던 도움안되는 잡동사니 선물을 물물교환을 제안하고, 그것이 알려지며 타이페이 명소로 자리를 잡게 되기도 한다.

스튜어디어스의 폰 액세서리를 두얼이 갖고 싶어하자 창얼은 자신의 이야기와 액세서리를 교환하기로 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어릴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엄마는 두 장의 카드를 작성하여 하나의 카드에는 '세계여행'을 다른 한 장의 카드에는 '공부'를 적고서는 자매에게 한 장씩을 뽑게 한다. 

동생 창얼은 '세계여행'카드를, 언니 두얼은 '공부'카드를 뽑게 되고 두얼은 열심히 공부하는 인생을 충실하게 살았고, 창얼은 그때부터 오랫동안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며 세상을 보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화면은 위에서 표현한 질문을 한다.


(원래는 질문하는 사진을 캡쳐하려 했는데 갑자기 데스크탑의 하드가 날아가버려 영화까지 사라졌다...더 가슴아픈건 최근7년간의 여행에 사진들이 모두 날아갔다...다행이 3년정도는 다른곳에 두어서 찾긴했지만 나머지 4년의 사진들이 모두 ㅠ.ㅠ)


그러면서 인터뷰 화면을 통해 여러 사람들의 답변이 나온다. 공부를 택한 사람, 여행을 택하겠다는 사람들의 영상이 나오고 다시 영화로 돌아온다.


선택을 위한 질문이란 것은, 우리 삶에 있어 끊임없이 나오는 것이다.

그럴때마다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 걸까?

선택의 기로에서 자기만의 기준을 이용하여 결정하게 되는 것일까?

좀더 근본적인 해결을 주는 선택을 학게 될까?

해리포터에서 덤블도어 교장은 '우리는 옳은 것을 선택하기 보다는 편한것을 선택한다'라고 한 표현처럼 우리는 그 시점에서 편해보이는 선택을 하고 있을까?


물론 상황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선책들을 돌아보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점에 비중을 두고 싶다.


세계여행의 카드와 공부의 카드에서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더 많이 하게 될까?

나는 당연히 전자를 훨씬 많이 선택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유는 우선 내가 여행을 좋아하기에 많은 이들이 그럴것이라는 생각에서이기도 하다. 너무 성급한 일반화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근데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당연히 공부가 싫어서라도 여행카드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에 더해 여행은 누구나 동경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탈을 위해서라도 여행을 원하게 된다. 그런데 세계 여행이라는데 싫어할 이유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또한 많은 수의 사람들은 여행을 동경하지만 떠날 용기가 부족하기에 이런 질문이 오면 염원에 대한 두려움에서라도 세계여행을 선택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나는 세계 여행 카드가 더 많은 선택을 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야기하고 있는 그 질문을 이렇게도 해석해 보고 싶다.

세계여행? => 능동적인 공부

공부?  =>  수동적인 공부

표현만 보더라도 어떤 의미인지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무조건적 의미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미리 말해준다. 

이전의 글(배움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하는가?) 에서 언급한 것처럼 매우 수동적인 배움을 한다는 관점에서 바라본 수동적 공부를 말하는 것이다.

공부를 선택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능동적으로,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공부를 할 것이겠지만, 꽤나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기에 표현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는 것이다. 오해마시길..


사실 관광이 아닌, 여기서 말하는 관광은 패키지 여행 상품같은 부류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정해진 일정에 따라 시간 정해놓고 구경하며 사진찍고, 기념품 남기고 대절된 차량에 몸을 싣고 이동하는 짜맞추어진 여행말이다.

이러한 관광은 내가 말하고 싶은 수동적인 부류이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관광이 아닌 여행이다.


여행이라는 것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에서 즉 무에서, 하나하나 정해나가는 것 즉 유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말한다.

조사도 필요하고 어느 정도의 계획도 필요하다. 어느 정도의 계획이란 표현은 계획이 있더라도 변수의 영향으로 수정, 보완이 수시로 일어난다는 의미도 있다. 이것은 부딪힘 즉, 경험이라는 산물이다. 경험은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편견과 고정관념에 유연성을 부여해 주게 된다.

몰개인화(deindividuation) 즉 군중속에서 일어나는 개인 정체성이 상실되어가는 현대에는 더욱더 필요한 경험이 되어 줄것이다.


또한 여행은 과거를 만나게 하고, 현재를 가늠하며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기도 한다.

여행을 통해 과거와 만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큰 마력을 가진다. 인간은 대부분 인간의 기원을 궁금해 하기에 종교도 발전해 온 것처럼 말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극중 애드리아나는(피카소 그림의 모델이자 연인이기도함. 실제 피카소의 연인 중에 이 이름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음) 주인공 길 펜더와의 만남에서 '나에게 과거는 큰 마력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 우연히 길과 더 이전 시대의 과거로 떠나게 되고, 그 시대를 보며 계속 과거의 시대에 머물러 있을것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내가 경험하지 못할 미래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전해들을 수 있는 내용만으로 이루어진 과거에 대한 동경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과거에만 사로 잡혀 있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여행은 과거에만 묻혀 잇도록 하지 않는다. 과거와의 조우를 통해 현실을 더 현명하게 바라보게 해준다. 영화에서 길은 애드리아나가 과거에 남아 있으려 할때 이렇게 대답하고는 다시금 자신의 시대로 돌아간다.

'여기에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되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속의 황금시대를. 현재란 그런거에요. 늘 불만스럽죠. 삶이 원래 그러니까.'



극중 길은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약혼녀의 부모가 파리로 출장차 방문할때 같이 따라왔다. 그는 파리에 머물고 싶어한다. 시나리오 작가로 인지도가 있지만 그는 소설을 쓰고 싶어하고, 영감을 주는 파리에 살고 싶어하기도 한다.(물론 파리는 과거도 아니며, 여행이지만 소설의 영감을 주는 곳이기에 살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연히 시간 여행을 통해 파리의 옛 풍경 속을 여행하게 된 것이다. 그는 여행자로서의 경험을 통해 현실을 제대로 보는 눈이 길러진 것이라 보인다.


여행은 공부다. 그것도 능동적인 공부. 찾아서 할 수 있는 공부. 자신의 현재 위치가 어디이든 여행은 이런 점들에서 일반적인 수동적인 공부에 비하면 좀 더 바람직하며 능동적인 공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리에 앉아서 하는 공부를 폄하하고자 함은 아니다.


이런 능동적인 공부는 즐거움과 기대, 흥분, 짜릿함, 순수함, 감동들까지도 느끼게 한다.

처음 내용으로 돌아가 보면 <타이페이이야기>에서 '당신의 맘속에 가장 큰 가치는 뭔가요?'라는 질문이 있다.

이번에도 인터부 영상이 나오는데 가족, 행복, 평화, 즐거움, 순수함.. 이라는 답들이 나온다.

여기에도 답이 있다고 보았다. 여행이라는 녀석은 위의 답들에 매우 부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행을 통해 가족을? 물론 물리적인 가족을 꾸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은 가까운 사람들, 특히 가족에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일반적으로 추상적인 행복에 대해 생각도 하게되고 새로운 느낌을 가지게도 해준다.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세상에도 자신 안에서도  절실함을 알게 해준다. 더 많은 설명을 할 필요도 없이 누구나 공감할 것이라 생각한다. 


글의 제목보다는 여행 예찬론이 되어가는 느낌이 들긴하지만. '선택'이란 기로는 우리에게 생각 아니 고심을 준다. 그 한가지의 예시 질문을 통해 생각하는 짧은 시간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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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고 익숙한 모든 것으로부터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을 때 그게 집이든 감정의 응어리든, 외면의 것이든 내면의 것이든, 진리를 찾아 여행을 떠났을 때,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깨달음의 과정으로 여기고 마주치는 모든이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다면 무엇보다도 인정하기 힘든 자신의 모습을 용서할 준비가 되었다면 진리는 당신에게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2.05.55)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무엇일까? 
진리는 이전 문맥을 통해 해석해 보아야 한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 대한 용기 
깨달음의 과정으로의 배움 
인정하여 자신을 용서하는것 

우선 익숙한 것에서의 결별하려는 용기는, 그만큼 힘들다는 표현이다. 익숙한것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엄청난 두려움이 따른다. 그렇기에 사람은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안주하는 것만큼 편한 생활은 없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익숙한 것은 그것만이 진리라는 착각을 주게 되어 인간의 정신을 고정시킨다. 그러니 그만큼 안락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움에 대한 극한의 반대 입장으로 진실한 눈으로 보는것을 방해하게 된다. 
깨달음의 과정으로의 배움이란것은, 새로운 아니 이미 존재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것들을 통해서 옳은 것이 절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또 다른 표현이 있을 수 있다는 다양성의 받아들임과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경험의 접목은 새로운 해석의 장을 마련해 줄 수 있게 된다. 첫번째 내용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의 과정을 달리 볼 수 있는 눈을 전제로 하기에 새로움의 자극은 깨달음 즉, 조금더 진리에 다가가게 해주는 도구로서의 역할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인정하여 자신을 용서하는것. 갖혀있으면 있을수록 자신을 바라보지 못할 확률이 높으며 바라보더라도 비뚤어진 사고로 바라보고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강박적인 해석을 뒤따르게 할 수 있기에 자신의 문제로 귀결시킬 수 있다. 물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벽을치고 타인을 모두 틀리다고 자신의 마음을 닫아버리는 경우도 발생될 수 있다. 인정한다는 것은 잘못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도 있지만, 다양성의 공존에 의해 모두 옳을 수도 모두 그를수도 없다는 점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 즉 심적 상태의 넓고 깊은 평온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인가? 
다양한 것에 대한 경험과 그로 인해 알고 깨닫게 되는 것들에 의한 평온함의 깊이있어짐과 넓어짐이라 표현하게 될 수 있을까.. 

영화에서 표현한 '진리'를 그렇게 해석하고 싶다. 
왜냐하면 여행은 새로움에 대한 놀라움과 그것들과의 소통으로 인한 인정과 올바른 비판적 수용 그리고 그러한 것들로 인한 새로운 해석과 앎.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의 부드러워짐과 인간적 불완전성에 대한 올바른 견해와 견해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진리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유일하며, 이슬람, 힌두 관점에서도 비슷하고, 불교, 유교적 관점에서 깨달음에 의한 성장이기도하다. 이러한 것들로 볼때 이러한 종교적 진리 또한 어느정도 이상의 해석의 문제를 안고 있다. 
다시말해 유일신에 의한 진리적 유일성이 아니라면, 깨달음의 과정이 중요하다. 더해서 유일한 진리에 대해 알기 위해서도 우리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현재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적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음으로 인해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서양의 산업발달에 의한 정상적 상태로 바라보면 기독교는 분석하고 판단하여 꿰둟어보는 통찰력을 길러서 그것으로 성장, 발전시켜 나가는 것. 종교에 대한 해석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시절이 지나가며 이제는 그에대한 부작용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그것이 중용이 필요하고, 마음 정신적 수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것이다. 그들이 동양적 사상에 심취하고 있다고 하여 그들이 서양 사상을 배척하려는 것이 아니다. 유지하면서 조금보태는 것이다. 즉 보완시키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 여행은 종교적으로 해석한 진리에 대한 의미도 포함할 수 있는 '진리'의 영역을 설명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개풀뜯어먹는 소리가 아니라, 여행은 다양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문화와 전통과 사상을 접하고 체험하게 해준다. 그렇기에 그러한 경험은 통찰력에 가까운 해석력과 수용능력을 배양하여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고대의 여행도, 지금의 여행도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여행이라면 이정도 되는 것이 아닐까.. 관광이 아닌 여행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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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타가 내게 물었다. 

"나도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물어보십시오."

"내가 당신을 집으로 데려왔던 날 저녁, 당신은 내게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동전을 던졌어요. 왜 그랬죠?"

"당신에게 진실을 말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으니까요, 나는 뭔가를 결정할 때마다 그 동전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앞면이 나오면 당신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뒷면이 나오면 그 자리에서 작별 인사를 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앞면이 나왔지요."

"그럼 뒷면이 나왔다면 내게 당신 얘기를 하지 않았겠군요?"

"어차피 뒷면은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당신은 그 정도로 운을 믿나요?"
"동전이 운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이 동전을 보십시오."

그리고 나는 주머니에서 일 루피짜리 동전을 꺼내 스미타에게 건네줬다.

스미타는 동전을 받아들고 살짝 위로 튕겻다가 다시 한번 튕겼다. 

"아니.... 양쪽 모두 앞면이군요!"

"그렇습니다. 그게 내 행운의 동전입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말했듯이 운은 그 동전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나는 스미타에게 동전을 받아 하늘 높이 던졌다. 동전이 위로, 위로 올라가 푸른 하늘에서 반짝거렸다. 그리고 바다에 떨어져 깊이, 깊이 가라앉았다.

"왜 행운의 동전을 던져버렸나요?"

"이젠 더이상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행운은 내면에서 오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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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l iswell' 세 얼간이 하면 떠오르는 표현이다. 
영화를 보면 이 표현이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본것은 2009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한국에서도 개봉을 하고 다시 보게 되었다.
얼마전 <(영상소설) 세얼간이>를 보았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그대로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 책을 보면서 영화를 다시금 떠올리고 책을 읽은 후에 바로 영화를 다시 보았다.
영화는 매우 재밌다. 유쾌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영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지금 인도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영화로 만들었구나하는 생각인데, 보다보면 지금의 한국사람들에게 더욱 필요한 내용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왜 이런 표현을 쓰는지는 영화를 보면 누구나 공감하게 될 것이다.
특히나 영화에서 중점을 둔것으로 '공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또한 '친구'의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한다.
그 외에도 몇 가지가 있었다.

원작 소설인 이 책은 표지에는 영화의 포스터가 나와 있지만 실제로 영화의 내용과는 다소 떨어져 있다.
영화를 보고난 후에 소설을 접한 나로서는 처음 책을 덥었을 때 영화보다는 밍숭밍숭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내용을 정리해보면서 영화보다 현실적이고 영화만큼 생각할 거리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화에서와 원작에서 공통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몇 가지 중에 두 가지가 위에서 언급한 '공부'와 '친구'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의 표현중에 '친구는 여자의 젖이다'란 표현이 나오는데, 책에서는 동일한 표현은 없지만 '친구'란 어떠한 존재이며, 자신이 진정한 친구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영화에서보다 친구들은 더욱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함을 가진 존재들로 나오는데 더 현실적인 면이 강하다. 
그렇기에 개인적인 느낌으로 친구에 대한 생각을 재 정의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친구이기에 친구라서 친구이다. 진정한 친구란 정말 어떠해야 할까...
선을 그어 표현한다는것이 무의미하다. 하지만 선을 그어보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우리들은 선을 그어 보려는 범주를 생각해 보려는 시도부터 필요하다. 
'나는 진정한 친구 인가?' 자문해 보는 시간이 었다.
이들이 함께 어이없는 일들을 꾸미거나 함께 할 때도 이들은 친구이기에 모든 것을 함께 하면서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영화에서는 이들은 얼간이라 보기 힘드는 캐릭터이다. 하지만 원작소설에서는 정말 이들은 얼간이 들이 맞다.
이들은 상식적이지 않은 얼간이 짓들을 함께 해나가면서 친구들의 우정과, 성장을 함께 해나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공부를 위한 공부인가, 자신이 원한는 것을 위한 공부인가?'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하며 끌려 가고 있다.
온갖 자기계발서들이 주장하는 것 주의 하나이다.
맞는 말인지 알면서 우리는 시간을 내어 생각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음을 꼬집어 주는 내용들을 통해 반성의 시간과 다시금 고민해 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다.
'우리의 세 주인공들은 고등학생 시절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수재들이다. 하지만 누구나 우러러보는 인도 최고의 대학, 입학만 하면 미래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바로 그곳에서 이들은 행복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 점수였다. 그 사람이 어떤 가치관과 인성을 갖고 있는지, 그으 ㅣ꿈은 무엇이고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이미 논외가 되었다. 인도 공과대학(IIT)의 학생들은 단 하나의 목표, 좋은 점수를 받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많은 돈을 벌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에 현재으 삶을 기꺼이 희생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정말 행복할까? 나는 이러한 질문을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져보고 싶다. 당신은 정말 행복하십니까?' (옮긴이의 말중에서 334)
우리는 자본주의 나라에서 신자유주의 중심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끝없이 노력하고 배우고 돈을 벌어야만 하는 삶을 살아간다.
과연 그것은 무엇때문일까? 그래야 나이들어서 고생하지 않는다. 늙어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아야만 한다.
누구나 한치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서 돈만이 살길이라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과연 이러한 사실들의 근원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기득권의 세뇌에 의해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위해 조금만의 노력을 해보면 알 수 있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신경제와 약간의 철학과 산업사회 이후의 역사흐름을 알게되면 그러한 사실을 간파해 낼 수 있다. 이렇게 표현해도 여러 분야의 내용이라 지래짐작으로 겁을 낼 지도 모르겠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알수 있는 내용들이란 사실이다.
누군가 신문은 '사실은 있지만 진실은 없다'고 하였다. 우리는 사실만 알고 진실을 알지 못하는 생활을 꼬집고 있는 책을 통해 즐거운 시간과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여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열망으로 벌써 영화를 본 횟 수가 8번을 넘어 간다..



'이 겁쟁이 같으니라고, 적어도 시도는 해봐야지, 끝내고 나면 분명 엄청나게 기분 좋을 거라고,'  39

'IIT가 배출한 위대한 공학자 혹은 과학자가 몇 명이나 되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수많은 최고 경영자나 기업가들이 IIT 출신이잖아.'
'내 말은 IIT가 인도 최고의 대학으로 치부된다는 거야. 10억 인구가 사는 이 나라의 최고 공과대학으로 말이야. 그런데 IIT가 뭐 특별히 발명해 낸 거라도 있어? 아니면 인도에 기술적으로, 기여한 거라도 있느냔 말이야.'  47

'질문은 딱 하나야. 넌 인생에서 뭘 원해? 2분 줄 테니까 생각해 봐.'
인생에 대해선 정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121

'IIT의 시스템은 4년간 생쥐들이 경주를 벌이는 것처럼 머리 쓰는 일도 없이 학생들이 치열한 경쟁에 돌입하게 합니다.'  124

라이언은 그의 윤활유 연구 제안서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라이언이 무너가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걸 보니 기분이 좀 우울했다. 녀석은 일주일에 3일 가량을 컴퓨터 센터나 도서관에서 밤을 보냈다. 게다가 낮 동안에는 유체역학 실험실에서 윤활유를 이것저것 섞어 보며 지냈고, 그런 다음 그것들을 자기 스쿠터로 시함해 봤다. 나는 라이언에게 상반신을 홀딱 벗은 장면이 여섯 번도 더 나오는 영화가 프리야 극장에서 상영중이라고 말해 주었지만, 녀석은 멍하니 날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다시 새 칵테일 제조법으로 녀석을 꾀어 보앗지만 이 자식은 하룻밤에 그저 커피 여섯 잔을 연속으로 들이켜기만 했을 뿐이다.  149

얘들은 모두 벽과 벽돌에 단단히 둘러싸여 있어. 그래서 정말 자신이 누구인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고 있지. 난 걔들한테 이렇게 말하고 싶어.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데에만 몰두하지 말고, 그 전에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고 정리하라고 말이야.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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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위'라는 표현에 호기심이 생겼다. 
글을 쓰는데 전방위적으로 쓸 수 있다는것은 그만큼 많이 알고 더 많이 조사하고 공부할 때나 가능할 텐데, 저자는 얼마나 다방면에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표지의 날개에 제일먼저 눈이 간다.(개인적으로 보통은 목차를 먼저 본다.)
대중문화 평론, 영화 평론, 만화 평론, 신문잡지사 기자, 칼럼연재.. 상상마당 '전방위 글쓰기' 강의..등
다방면에서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듯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 강의를 하는 사람이니 혹 내용이 관념적이지는 않을까?
딱딱하게 원론적인 내용을 나열한건 아닐까?
강의를 하고 있으니 생색을 내기 위한 교재로써의 출판을 한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내용을 읽으면서 그런 의구심들은 사라져 갔다.
우리가 글을 쓰는 써야 하는 이유들 부터 시작하여 글쓰기의 기본기에 충실할 것 또한 기본적으로 일반인들이 글을 쓰는데 있어서 어떻게 배열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들을 예시로써 설명으로써 전개해 나갔다. 
뒤로 갈수록 압축해서 써내려가면서 밑줄그을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물론 좋은 의미로써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의미로써도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든 글을 쓰게 되어 있고, 써나가고 있다.
예전에는 특정 사람들만이 글을 게시하였으나 지금은 매체의 발전으로 누구나 쉽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의 질은 높아지기는 커녕, 더 낮아진 듯한 느낌을 받는것은 왜 일까?
저자도 언급한 기본적인 글쓰기를 모르기 때문이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볼 수 있다. 
글이란 것은 주관적이지 않을수 없지만, 좀더 객관적으로 좀더 정의롭게 좀더 올바르게 쓴다면 그 글은 호소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왕 글을 쓴다면 좀더 확고한 내용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것이 좋지 않을까...!!
(ㅎ 물론 이 블로그도 소통이라는 면에서는 멀지만... 그렇다고 소통을 배제한 것은 아니다.)

내용에서 다치바나 다카시에 대한 내용들이 여러번 언급되는 게 그의 놀라운 글쓰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책을 몇 권을 읽어보았긴 하지만.. 매우 다방면의 글을 쓴 사람이었다.
그가 새로운 분야의 글을 쓸 때, 관련 자료들의 방대한 양을 섭렵하고 정리하여 준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글을 쓰는 모습에 본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우리가 보이는 것을 넘어서 이면의 본질을 꿰뚫기 위해서 해야하는 노력은 분명 필요할 것이다.


글쓰기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다.  12
글쓰기를 통해서 모든 이가 창작자인 동시에 주체적인 소비자, 대중이 되는 창조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13

우리가 글을 쓰는 몇 가지 이유
 - 글쓰기는 소통이다. 
 - 글쓰기는 세계의 재창조이다.
 - 글쓰기는 노동이다. 

글쓰기의 필수 교양 세 가지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본이다.
첫째, 철학적 사고는 글쓰기의 토대다.
이 세상에서 보편적이고 타당한 진리란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35
     경험적 사고 -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서 보편적인 진리를 깨닫는 과정.
     연역적 사고 - 보편적인 진리를 탐구하면서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것도 문제지만, 숲의 전체적인 모양만 보고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는 것 역시 잘못이다. 일반적인 사고의 소유자라면 경험과 논리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철학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도 결국은 자기 나름의 보편타당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37
즉 자신의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하여 철학 공부를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필요한 것은, 일상생활에서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38
철학을 공부하고 자신의 세계관을 만드는것이 필요한 이유는 각각의 개인이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행동과 글 자체가 바뀌기 때문이다.  39

둘째, 경제를 알아야 리얼한 글쓰기가 가능하다.
현실을 똑바로 보기 위해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것이 바로 철학과 경제학이었다. 
작가들은 세상이 요동치는 현장에서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물적 구조를 이루는 경제를 보는 눈도 있어야 한다.  42
모든 것에는 경제가 개입되어 있다.  43
기본적인 경제학 지식을 쌓아 두고, 평소 경제 뉴스를 귀담아듣거나 신문의 국제정치면을 꼼꼼하게 읽는 것 정도로 충분하다.  44

셋째,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덤은 글쓰기의 자양분이다.
역사는 언제나 현재에 의해 재해석되기 마련이다. E. H. 카가 말한 것처럼 역사는 현재와의 대화다. 즉 현재의 관점이나 시대정신에 따라 과거의 역사가 재해석되거나 새로벡 조명된다.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현재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과거를 통해서 현재가 만들어진 것이고, 과거의 일들은 현재와 미래에 계속해서 반복된다.  45
현재를 아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역사를 통해서 현재를 반추하는 것이다.
자기 나름의 시각을 갖고 역사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이해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46
중요한 것은 자신의 관점에 따라 역사를 해석하더라도, 사실 그 자체를 존중하는 것이다.  47

창조적 글쓰기의 원동력, 나만의 세계관
첫째, 내가 바라보는 세계가 곧 나다.
글쓰기는 남의 생각이나 행동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행동에 따라 창조되는 것이다. 나의 세계관, 나의 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글이 나올 수 없다.  51
인간은 필연적을 환경의 산물이고 주변에서 영향을 받는다. 즉 이 세계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어디에도 없다. 무엇인가를 배우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세계관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만의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된다. 내가 바라보는 세계가 있어야만, 또 그것이 절실해야만 나의 글쓰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57

둘째, 모든 것은 변한다. 세계관도 변한다.
자신의 세계관을 확립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한 번 완성한 세계관을 바꾸지 않고 일생을 살아가는 것은 대개 미련한 사람이 할 짓이다. 
정말로 인생관이 확 바뀔 정도로 거대한 경험을 하지 않는 이상, 성인이 된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방식이 완전히 바뀌는 일이란 많지 않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58
세계관이 변화하는 것은 결코 창피하거나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 바뀐 세상을 분석하고 자신의 찰학을 정립하는 것은,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62

셋째, 나의 세계를 표현하는 글쓰기
 - 일기 쓰기
일기의 역할은 매일같이 반복되는 하루에서 나에게 의미있는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 그리고 나의 하루 행동에서 되짚어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떠올리는 것.  64
 - 목적이 분명한 편지 쓰기
일기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라면 편지는 '타인에게 나를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66
일기를 제외한 모든 글은 대상이 누구이고 그들에게 무엇을 알리거나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쓰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일기가 글쓰기의 기본을 다져 준다면, 편지는 글쓰기의 모든 것을 알려 준다고 할 수 있다.  67

아는 만큼 쓴다, 풍요로운 글씨를 위한 다독(
多讀)첫째, 다치바나 다카시에게 배우는 독서 훈련
다치바나 다카시의 어떤 책을 읽든, 그 안에서 엄청난 양의 정보는 물론이고 그것들을 통해서 사회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혜안을 발견할 수 있다. 
다카시는 어떤 분야에 대한 취재나 대담을 요청받았을 때 그 분야에 관한 책을 적어도 열 권 이상은 읽는다고, 그리고 책을 써야 한다면 대형 책꽂이 한 개 반의 부피와 맞먹는 양의 책을 읽는다고. 그렇게 해서 읽은 책과 나오는 책의 비율을 따진다면 약 100 대 1 정도라고 한다.  69
1인 미디어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주관에 따라 세계를 해석하여 전달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주장만 있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뒷받침할 수많은 정보가 있어야만 한다. 올바른 입장만으로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법에서 배워야 할것은 엄청난 정보량이다. 어떤 분야에 대해 관심이 생긴다면 그 분야에 대해 파고들어야 한다. 시작은 언제나 독서다.  71

둘째, 글쓰기는 독서에서 시작된다.
책을 읽는 주된 이유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다. 
독서는 좋아하는 작가를 따라 글쓰기를 배우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73
교양만 갖고 모든 것을 이해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되도록 많이 읽고 즐기는 것이 필요하다.  76

생각이 담긴 글쓰기
첫째, 문장은 육하원칙의 기본부터 시작하라.
글을 잘 쓰고 싶다면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다.  98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기사를 쓰는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보통 사람들이 쓴 글을 보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육하원칙이다.
머릿속의 이야기를 옮기는 데만 급급하여, 자신의 글이 독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는 별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99

둘째, 모든 것은 인상에서 시작한다.
내면의 분석 없이 단지 표피만을 놓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 
인상이란 것은 무엇일까? 나는 내가 본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할 때,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나 느낌을 먼저 말한다.  102
인상비편은 아니지만 '인상'이 중요한 이유는, 어떤 작품이나 대상, 사건을 접했을 때 가장 큰 울림을 던져 주기 때문이다.
인상을 받는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자신이 받은 인상에서 출발해 다양한 것을 채워 가는 과정이 바로 글쓰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103

셋째, 인상적인 무엇인가를 발견하면 글을 쓰기 위한 테마와 아이디어가 나온다.

넷째, 인상을 논리적으로 풀어낸다. 


비평이란 사실 별것 아니다. 어떤 작품, 어떤 대상의 속성을 따지고 가리는 것이 바로 비평인 것이다.  113

글을 쓰는 사람은 세상의 변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글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깨달을 수 있다.  125

문학 작품을 분석할 때 가장 쉽게 쓰이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다. 
내용은 이야기와 주제이고, 형식을 플롯이나 문제로 볼 수있다.  131

영화 비평을 잘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영화를 들여다보는 자신만의 눈이다.
약간의 통찰력과 지식만 있다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읽어 내려면 작품 내면을 파고 들어야 한다.  146

대중문화는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다. 그에 대한 글을 쓰려면 사람들이 어떤 대중문화에 매혹되는지, 어떤 대중문화가 그들을 사로잡는지 살펴봐야 하낟. 그것이 곧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가장 노골적인 무의식일 수 있다. 어쨌거나 문화상품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그 의미를 분석해야 한다.  161

TV에는 저속한 개그 프로와 버라이어티 쇼도 있지만 동시에 다양한 다큐멘터리와 토론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편견만 없애면 개그와 버라이어티 쇼에서도 얼마든지 요긴한 내용을 배울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일방적인 배척이 아니라 적절한 분석을 통해 그 의미를 읽어 내는 일이다.  162

에세이는 누구나 쓸 수 있는 가장 쉬운 글인 동시에 가장 위험한 글이기도 하다. 흔히 에세이를 작가의 영혼이 그대로 내비치는 글이라고 한다. 아무리 포장하고 감추려고 애를 써도 에세이에는 모든 것이 내비친다. 안이 텅 빈 사람이 쓴 에세이는 공허해 질 수밖에 없다. '내'가 흔들리면 에세이도 흔들린다. 그러니 에세이는 가장 신중하게 써야 할 글이다.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나'를 반성하는 마음가짐으로 써야 할 글이다.
에세이는 쉬운 글이기도 하다. 그냥 진솔하게 쓰기만 하면 안에 있는 것들이 투영된다. 차분하게, 정직하게 글을 쓴 사람에게 에세이는 출발점이자 끝이 되는 글이다.  203


지속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단지 자리에 앉아서 글을 쓰는 것만이 아니라 제대로 글을 쓰기 위해서는 평소에 많은 것을 경험하고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것에는 동인이 필요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든가, 장기적인 목적으로 글쓰기를 지향한다든가 등의 목적 말이다. 혹은 단지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다든가, 뭔가 상업적인 목적이 있다든가 등의 부정적인 욕망일지라도 상관없다. 글을 쓰기 위해 투자해야 할 에너지와 시간 등을 생각한다면, 어떤 식으로건 동인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저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동인을 찾는 것이다.
가볍게 동인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즐거운 취미생활이나 오락도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211
중요한 것은 쓰는 일을 취미로 삼는 일이다. 글쓰기가 취미로 정착되기만 한다면 그 다음은 느긋하게 생각해도 된다.
누구나 시작은 비슷하지만, 꾸준하게 글을 쓴다는 것은 의외로 쉬운 일이 아니다. 
글을 쓰겠다고 생각했다면, 글로 세상에 무엇을 알리거나 소통하겠다고 생각했다면 일관성이 필요하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읽고 그리고 꾸준하게 쓰는 것, 그것이야말로 글쓰기의 정도다.  212




일상에서 철학을 다듬어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것을 회의(懷疑)하는 것이다. 일본의 작가 기리노 나쓰오가 대학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회의하라'였다고 한다. 세상의 일반적인 상식을 의심해 보고, 공식적으로 발표된 모든 것을 뒤집어 보고, 두 눈에 보이는 것의이면을 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남이 보여 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뒤집어 보고 파고들어 집적 확인해 보는 것. 그것이 세상의 본질을 보는 유일한 방법이다.  41

비슷한 관련서를 몇 권씩 읽으면서 하나의 주장에만 빠지지 말고,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을 무리해서 읽지 말고, 메모를 하고 싶다면 일단 다 읽은 다음에 시도하고, 주석과 색인도 주의 깊게 읽고, 책을 읽으면서 그 정보와 논리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라.  77

가장 쉬운 방법은 내 기억에 강하게 남은 무엇인가에 대해, 쓰는 것이다. 왜 기억에 남게 되었는지 그 이유만 찾아가도 한 편의 글이 나온다. 제일 좋은 방법은 메모다. 뭔가가 떠오를 때마다 메모하는 것이다.  101

중요한 것은 새롭게 발굴하는 일 이상으로 기존의 것들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일이다. 
남들이 아직 이야기하지 않은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이디어이고, 그것이 바로 좋은 글의 요건이다.  109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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